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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 12

#127화

'나도 같은 생각이야.'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언덕을 달려 올라갔다.

감각이 허물을 벗은 것처럼 예민했다.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졌고, 자신이 해낼 수 있는 한계치가 명확하게 그려졌다.

북부의 수많은 전투. 특히 벨리움 요새에서의 목숨 건 사투 이후로, 이안은 자신의 전투 수행 능력이 한 단계 더 진일보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능력치 자체는 버프를 몇 겹으로 둘렀던 그때가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이건 수치상으로 표현되지 않는 종류의 성장이었다.

'갈수록 몸 쓰는 것만 능숙해지는군.'

쓴웃음을 삼키며, 이안은 안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충돌한 순간 어딘가가 부러지거나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무모한 움직임.

꽈직-!

하지만 어깨로 강도를 들이받는 이안에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순간 주저하거나 겁을 먹는 게 더 큰 부상으로 돌아오는 법이었다. 게다가 그는 몸에 걸친 방어구들이 충격을 어느 정도 분산시켜 주며, 자신의 몸이 이 정도의 충격에도 버틸 수 있게 됐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딘가 부러진다면, 그러는 대로 육체의 회복 능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를 확인할 기회가 되리라.

물론 그와 부딪힌 상대는 그렇지 못했다.

"커… 헉…!"

바닥에 처박힌 강도가 피를 토했다. 나무 바닥이 부서지면서 몸이 반쯤 박힌 듯한 형태였다. 이안은 놈의 몸을 짓누른 채로 검을 들었다.

푸욱, 검이 놈의 가슴을 두부처럼 가르며 박혔다. 고통에 헐떡이던 도적의 숨이 이내 끊어졌다.

좀 더 고통스럽게 죽였어야 했나.

생각하며 일어선 이안의 눈매가, 이내 슬쩍 가늘어졌다.

언덕 반대편의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약탈당한 짐 마차는 한 대가 아니었다. 언덕길을 따라 이어진 몇 대의 마차. 피를 흘리며 널브러진 시신들과 한쪽 길가에 엎드려 처분만 기다리는 자들.

그리고 동료의 부름에도 미적대던 강도들은, 이안이 등장하자 그제야 고삐를 바짝 당기거나 말에 올라타고 있었다.

"시발…! 저 새끼 뭐야!"

"기사, 기사인가…?"

"설마, 소문으로만 듣던…."

숨이 끊어진 아이의 시신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안의 귓가로, 놈들의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이안은 비로소 놈들을 돌아보았다.

남은 여덟 놈은 앞선 셋과 달리 무작정 달려들지 않았다.

짐 마차 위에 피범벅이 된 채 우두커니 선 그를, 긴장과 두려움 섞인 눈으로 바라보며 쑥덕댈 뿐.

그 사이에는 비교적 여유로운 놈도 하나 있었다.

"어디서 오신 기사님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역시나, 놈이 차분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믿는 구석이 있는 여유로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놈이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것들은 징집을 거부한 것으로도 모자라,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던 죄인들입니다. 귀환 명령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저희에게 칼을 들이밀기까지 했죠. 해서, 즉결 처분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 그래. 하지만 너희는 정규군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이안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러면서 손바닥으로 얼굴에 튄 피를 슥 닦았는데, 닦이긴커녕 번져서 오히려 더 섬뜩해졌다.

하지만 대화가 통한다고 여긴 듯, 남자가 미소 지었다.

"저희는 용병입니다. 이 땅의 정당한 주인이신 벨라드 백작께 고용되었고, 지금은 엘린더 경의 지휘를 받고 있습니다."

"엘린더 경이라…."

이안이 입가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용병들이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남자가 말했다.

"원하신다면 직접 확인하셔도 무방합니다. 여기서 하루 정도면 도착할 거리에 머물고 계시니까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군.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네가 이놈들의 대장이냐?"

"그렇습니다만."

"너희들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너희가 나와 내 부하를 보자마자 쇠뇌를 쏘고 칼을 들이밀었다는 사실이 전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대장의 미소가 굳어졌다.

칼을 들이민 것들은 죽음으로 책임을 진 게 아니냐는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당연한 결과고, 자신에게 무례를 저지른 대가는 따로 계산하란 말이었으니까.

전형적인 기사식 논리였다.

'위로금이라도 내놓으란 거겠지, 하찮고 쓰레기 같은 새끼.'

생각하면서도, 그는 애써 다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럼 저희와 함께 가시죠. 엘린더 경께서 직접 합당한 사과와 위로를 전하실 겁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들의 본거지에 발을 들인 순간, 저 기사 놈은 죽은 목숨이었다. 엘린더 경이 저자를 용서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대답은, 이번에도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런 건 필요 없어. 난 그냥 부하 관리를 못한 놈이 책임지길 원할 뿐이다."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네 목을 내놔라. 그럼 엘린더 경에게도 오늘 발생한 사고의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지."

"...."

대장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그제야 이 미친 기사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을 뿐임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와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캐내고 싶었을 뿐일지도 몰랐다.

눈빛이 서늘해진 것도 잠시.

그는 부하들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고 인상을 구겼다.

"뭘 그렇게 봐? 이 병신들아! 듣고도 몰라? 저건 그냥 우리랑 싸우겠다는 거잖아!"

챙, 그가 검을 뽑아 들며 덧붙였다.

"무기 들어! 어차피 빈손으로 돌아가도 너흰 다 죽은 목숨-"

퍼억-!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머리가 옆으로 튕겨 나갔다. 광대뼈 아래에 단검이 박힌 놈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움찔댔다.

용병들이 숨을 들이켰다.

"미친… 대장…?!"

"또 나에게 무기를 들이미는군."

어느새 짐 마차 옆, 강도의 말에 훌쩍 올라탄 이안이 말 머리를 그들 쪽으로 돌리며 내뱉었다.

언덕 꼭대기로 올라오는 마차의 발굽 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은 용병들을 응시한 것도 잠시.

이안은 예고 없이 고삐를 후려쳐, 그대로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이, 이런, 시발-!"

"어차피 하나야! 죽여!"

그제야 용병들이 허둥지둥 쇠뇌를 들었다.

"쏴!"

일제히 발사된 볼트들이 달려오는 이안을 향해 쏟아졌다.

푸확, 돌개바람이 휘몰아친 건 그 직후였다.

"방금 그건 뭔-"

그들의 의문은 끝을 맺지 못했다.

검을 옆으로 내뻗은 미친 기사가, 어느새 그들의 코앞으로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흐, 흩어져! 포위해!"

용병들이 다급하게 고삐를 후려치는 사이, 이안과 가장 가까운 놈이 말 머리를 돌리며 원형 방패를 들었다.

콰앙-!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직 닿을 거리도 아니건만. 이안의 검이 호선을 그린 순간 뻗어 나온 바람이 그대로 방패를 부숴 버린 것이다. 안장 위에서 휘청대는 놈의 머리 옆으로, 기다란 검날이 드리웠다.

콰직-!

놈의 머리가 그대로 날아갔다. 이안이 지나가고 나서야 잘린 단면에서 피가 솟구쳤다.

납죽 엎드려 있던 자유민들 사이에 억눌린 비명이 터졌다. 그들이 엉금엉금 소란의 반대편으로 기어가는 사이, 흩어진 용병들이 저마다 무기를 뽑으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안은 놈들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다음 놈을 향해 달려가면서, 고삐를 놔 버린 왼손으로 투척용 단검을 뽑아 들었다.

퍼억! 키히이잉-!

"으억?!"

단검은 사람이 아닌 말에 날아가 박혔다. 깜짝 놀란 말이 몸을 치켜들었다가 나뒹굴고, 타고 있던 놈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그사이 안장 위로 올라선 이안이, 가까워진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와악?!"

콰직-!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용병이 비명을 지르며 검을 내뻗었다. 몸을 비틀어 어깨로 놈의 검을 그냥 맞아 준 이안이,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용병의 검은 그의 견갑을 부수지 못했다. 오히려 미끄러지던 검날이 부러졌다. 하지만 이안의 검은 용병의 어깻죽지에 깊이 박혔다.

"커… 커헉…."

검을 뽑던 이안은, 용병의 몸을 밀어 버리는 대신 슬쩍 몸을 숙였다.

퍽, 용병의 등에 볼트 한 발이 박혔다. 하여간 의리 넘치는 새끼들.

생각과 동시에 투척용 단검을 뽑아 든 이안이, 축 늘어진 시신을 옆으로 밀어 버리며 내던졌다.

"컥…!"

가슴 한복판에 단검이 박힌 놈이 말에서 떨어졌다. 이안은 피범벅인 안장에 앉아, 곧바로 다음 놈에게로 달려갔다.

"시발…! 뭐 저런…!"

"분명해… 분명히 그자야. 붉은 기사라고…!"

남은 용병들의 얼굴에 공포가 가득 찼다. 동료들이 순식간에 죄다 죽어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피범벅인 저 미친 기사에겐 그들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것도, 하물며 투구조차 쓰지 않았건만.

콰직-!

그사이 하나가 더 죽었다. 썰려 나간 동료의 몸에서 피가 치솟는 것을 본 두 놈이, 문득 눈을 치켜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남은 건 둘뿐이었다.

다각다각-

이안이 말 머리를 선회하고 있었다. 두 용병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삐를 후려쳤다. 일단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

"사, 살았다…!"

이안이 동료 쪽으로 말머리를 트는 것을 확인한 용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느새 무기조차 집어 던진 상태였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서 도망치면, 아무리 괴물 같은 기사라도 따라오지 못하리라.

하지만 그는, 저 미친 기사가 사실은 기사가 아니라는 사실까진 알지 못했다.

콰아아-

뒤에서 빠르게 가까워지는 열기.

"...?!"

고개를 돌린 용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네다섯 개의 불덩어리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다.

퍼버벙-!

그의 주위로 폭발이 이어졌다. 폭발 하나에 휩쓸린 말이 그대로 균형을 잃고 고꾸라졌다. 그는 달리던 속도 그대로 안장에서 튕겨 나갔다. 거꾸로 뒤집힌 세상 너머, 검 끝을 자신 쪽으로 내민 기사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검신을 타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법…?'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거꾸로 땅에 처박힌 그의 목이 부러졌다.

콰직!

도망치던 마지막 용병의 머리가 쩍 갈라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놈이 탄 말이 멈추지 않고 달렸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고삐를 당겼다. 시체를 태운 말이 멀어지는 가운데, 말 머리를 돌린 그가 약탈당하던 한복판으로 다가갔다.

"...."

"사, 살려… 살려 주…."

낙마하면서 다리가 부러진 듯 바닥을 기어가던 용병이, 발소리를 듣고 웅얼댔다. 이안은 대답도 하지 않고 다가가, 놈의 등판에 검을 내리찍었다.

"후…."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들었다.

검을 회수하지는 않은 채였다.

싸움이 끝난 건 아니었으니까. 가장 강한 한 놈이 남아 있었다.

"이안! 뒤!"

저 멀리서 샬롯의 외침이 울려 퍼진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은 태연하게 몸을 돌리며, 손을 펼쳐 거기 멈춰 있으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꾸물대며 일어서는 덩어리가 보였다. 변이 중인 용병 대장이었다.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아직도 변이가 다 안 끝나다니… 허접한 놈이군.'

이안은 용병들을 처리하는 동안 이미, 놈에게서 번지는 오염된 마력을 느꼈다. 일단 놔둔 건, 느껴지는 양이 그리 많지 않아서였다.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저놈은 타락자의 제대로 된 하수인이 아니라, 그 하수인의 끄나풀 정도에 불과한 놈이니까.

거기다 전투에 접어든 이안의 시간은, 실제보다 더 길고 세밀하게 흘렀다.

'여유로운 태도 하며, 엘린더라는 이름이 나올 때부터 혹시나 했는데. 어쨌든 역시는 역시군….'

생각하며, 그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용병 대장이 비칠대며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 단검이 박힌 그대로 기괴하게 뒤틀린 얼굴. 갑옷은 부풀어 오르는 근육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고, 대신 보랏빛 핏줄이 울룩불룩 돋아난 비대칭의 근육이 훤히 드러났다.

게임 속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던 놈들이었다.

보스는 물론 네임드도 아니, 그저 정예 마물 정도로 분류되는 놈들.

심지어 변이되는 속도도 느려서, 그때도 변이 중에 두들겨 패서 피를 다 빼놓곤 했었다.

'지금은 그냥 죽일거지만.'

이미 완성된 춤추는 불꽃이 그의 주위로 이글거렸다. 한 줌의 혼돈력까지 더했으니, 저 되다만 타락자에게는 더 치명적일 터였다.

콰과과광-

연달아 뿜어져 나간 불꽃이, 거의 변이를 끝내가던 용병 대장에게 부딪혀 폭발했다. 피부 표면이 터져 나가면서 선홍색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에엑-!"

놈이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불꽃의 뒤를 따라 내달린 이안이 솟구쳤다.

콰드드득-

그가 내리친 검이 뒤틀린 머리를 반으로 가르고 목 아래에서 멈췄다.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이놈을 양단할 생각 따윈 없었으니까.

붉은 마력이 일렁이는 눈으로, 이안이 읊조렸다.

"확실히, 더 빨라지긴 했네."

콰아아-!

치솟아 오른 불길이, 그대로 용병 대장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일점 폭발. 불길 사이로 발을 밀어 넣어 놈을 박찬 이안이 멀찌감치 착지했다.

"기-아아아악-"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 용병 대장이 타들어 갔다.

이안은 놈이 더는 꿈틀대지 않고, 경험치가 개미 눈물만큼 오르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그는 품에서 천을 꺼내 검날에 눌어붙은 피와 기름을 닦았다.

그런 그를 마부석에 앉아 지켜보던 샬롯이, 이윽고 내뱉었다.

"방금 그건, 흑마법의 산물 같던데…."

고작 강도 중에 그런 존재가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한 말투.

순간 의아해한 이안은, 그녀가 타락자나 변이된 것들을 접한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떠올렸다.

아마 그를 만나기 전에도 그랬으리라. 그처럼 찾아다니는 게 아닌 이상, 타락자들의 본모습을 볼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별 것 아닌 놈이었다. 진짜 타락자나 놈들의 하수인은, 이것보다 훨씬 강하지."

덤덤하게 대꾸한 이안이 검을 회수했다. 저만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생존자들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친 자들이 움찔대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나리…."

그 사이의 노인 하나가 내뱉었다.

그뿐이었다. 다들 감사보다 두려움이 더 큰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허탕인가…?'

게임에선 이런 상황에 퀘스트를 줬었는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딱히 실망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변방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을 일들이었다. 또 기회가 있으리라.

"잠시… 잠시만요…! 나리! 나리…!"

"...?"

마차에 타려던 이안이 멈칫했다.

언덕길을 구르듯 달려 내려오는 여자가 보였다. 처음 나타난 짐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있던 그녀였다.

기절했다 정신을 차린 모양.

"감사… 감사드립니다, 나리…!"

헐떡대며 주저앉은 그녀가 말했다. 얻어 맞아 엉망이 된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툭 내뱉었다.

"감사 인사는 됐소."

"나리가 바로… 소문의 그분이시죠?"

여자가 덧붙였다. 이안이 대답 없이 바라보자, 그녀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역시…! 뵌 순간 알았습니다…! 나리께서 바로 그 붉은 기사… 복수의 대행자 이시라는 걸요…!"

"...?"

#128화

고개를 갸웃하던 이안이 이내 실소를 삼켰다.

또 이 소리네. 전혀 안 닮았는데.

'피범벅이라 그런가….'

어쨌든, 딱히 기분 나쁜 오해는 아니었다.

뒤에서 가르릉 대는 숨소리가 이어졌다. 슬쩍 보니, 샬롯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 길고 오글거리는 소개를 시작할 태세여서, 이안은 눈짓과 함께 슬쩍 손바닥을 들었다.

샬롯이 혀를 날름대는 사이, 여인이 무릎을 꿇으며 덧붙였다.

"억울한 자들의 복수를 도와주신다 들었습니다. 부디 제 죽은 남편과 이웃들의 복수를 해주세요…!"

그녀를 내려다 본 이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사람을 잘못 봤소."

"네…?"

"나는 복수의 대행자가 아니오."

"하, 하지만… 분명히…."

눈을 치켜 뜬 여인이 더듬댔다.

믿고 싶지 않은 눈치. 이안은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가족과 지인들을 눈앞에서 잃고, 본인도 죽다 살아났으니까.

"나는 용병이오. 복수의 대행자처럼 고결한 이유로 싸우지 않지. 저것들을 다 죽인 건, 날붙이를 들고 덤벼서고."

"...."

"그러니 원한다면 의뢰를 하시오. 부탁이 아니라."

이안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지자, 여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제야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모양.

주춤대며 다가온 노인이 그런 여인의 뒤에 멈춰선 건 그 직후였다.

감사 인사를 건넸던 그 노인이었다.

"일어나게. 감사를 표하고 보답부터 해도 모자랄 판에… 이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읊조리면서도 딱하다는 듯 한숨 쉰 그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나리."

"용서할 것도 없소."

"그럼 부디,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허리를 숙이며 말한 노인이 몸을 돌렸다. 그가 길 한쪽의 짐마차로 걸음을 옮기며, 여전히 얼어 있는 주민들을 돌아보았다.

"뭣들 하는가. 은인을 그냥 보낼 참이야?"

"...!"

주민들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를 뒤적이는 노인을 바라보던 이안이, 비로소 헛웃음을 짓고는 내뱉었다.

"보답 같은 건 필요 없소.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지."

난 또 퀘스트라도 주려나 했네.

곧장 마차에 올라 탄 이안이 샬롯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고삐를 쥐었다.

주저앉아 있던 여인이 마차로 달라붙은 건 그때였다.

"나리.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이안이 바라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조금 전의 말씀은, 의뢰라면 받아주시겠다는 뜻이셨습니까?"

"고민은 해 보겠단 거였소."

"그, 그렇다면…."

품을 뒤적인 그녀가, 피딱지와 흙먼지가 엉겨 붙은 꼬질꼬질한 양손을 내밀었다.

은화 몇 개가 그 위에 반짝였다.

"제 전 재산입니다, 나리. 부족하시다면 제가 나리의 하녀가 되어서라도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 기사의 탈을 쓴 괴물을… 죽여 주세요."

이안의 눈앞에 비로소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라 드린의 도적 기사.

기대를 버렸더니 뜨는군.

생각하며 내용을 응시하던 이안의 눈매가, 이내 꿈틀댔다.

'시간제한…? 전에도 이랬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해야 할 퀘스트였다.

보상에 능력치 포인트가 하나 있었으니까.

"대금이 너무 적다면… 이것도 받아 주십시오, 나리. 이 또한 부족하긴 마찬가지입니다만…."

이안의 표정을 오해한 듯, 어느새 여인의 곁에 선 노인이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그 주위로 다른 주민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나리, 제 돈도 받아 주십시오."

"제 것도요.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만…."

"부디, 나리…."

난리 났네.

퀘스트 창을 닫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자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 있소?"

"제, 제가 알고 있습니다만…."

남자 하나가 손을 들었다.

이안이 샬롯 쪽을 턱짓했다.

"설명하시오."

"...! 예."

순간 눈을 치켜떴던 남자가 몸을 돌렸다. 다시 여인을 돌아본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에 얹어져 있던 동전을 집어 들었다.

"의뢰는 성립되었소."

"감사… 감사합니다, 나리…!"

여인이 기도하듯 양손을 맞잡으며 내뱉었다. 노인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안도와 흥분이 번졌다. 또 한번 소란이 번지려는 찰나, 이안이 내뱉었다.

"이제 물러들 나시오. 쓸데없이 힘 뺄 시간에, 가서 물건들이나 챙기는 게 좋을 거요."

주민들이 움찔,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을 건조한 눈빛으로 돌아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

주민들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한순간에 현실로 내팽개쳐진 듯한 얼굴들.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의뢰가 완수된 것도, 살아서 국경을 넘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운 좋게 한 번의 위기를 넘겼을 뿐이었다. 그 운이 두 번 반복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요해진 와중, 설명을 끝낸 남자가 뒤로 물러났다.

시선을 거둔 이안이 물었다.

"다 들었나?"

"그래. 충분히."

"그럼 출발해."

샬롯이 지체하지 않고 고삐를 후려쳤다. 이번에는 아무도 막지 않았다.

마차가 난장판이 된 언덕을 지나쳐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주민들은,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방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막막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어느덧 밤이었다.

이안은 육포를 씹으며, 먹구름 자욱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째 노을이 지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하늘은 어느 순간 어두워졌다가, 이윽고 다시 밝아졌다.

'이렇게 보니 침식의 전조가 노골적이긴 하네.'

타락자들이 딱 좋아할 환경이었다. 마물과 마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머지않아 더더욱 그렇게 될 터였다. 아마도 변방 지역 전체가.

개인이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늘 그렇듯 눈앞의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

이안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좀 더 늦게까지 이동하도록 하지."

"알았다."

묵묵히 앉아 있던 샬롯이 대답했다. 제대로 정신 차리고 있는 거 맞아? 눈매를 슬쩍 가늘게 뜨며 이안이 덧붙였다.

"길을 잃지 않게 신경 써라. 가뜩이나 좀 돌아가게 됐는데, 시간을 더 낭비하고 싶진 않아."

"걱정 마라. 놈의 소굴이 어디인지, 알 것 같으니까."

"알 것 같다고?"

"여긴 제국과 가까우니까. 상단에서 일할 때 몇 번 오간 적 있다. 통나무 집에 목책까지, 야인 마을을 방불케 하는 곳이었지. 지금도 그런 모습인진 알 수 없지만."

"훌륭하군…."

슬쩍 미소 지은 이안이 덧붙였다.

"네 예상엔, 언제쯤 도착할 것 같냐?"

"아마 오후쯤. 적어도 밤이 되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다."

내일 오후라. 아슬아슬 한데.

이안은 퀘스트의 제한 시간을 떠올리며 턱을 긁적였다. 정확한 수치가 표시되는 건 게임에서도 흔치 않던 일이지만. 어쨌든, 늦으면 어떤 이유에서든 실패로 끝나게 되리라.

"그럼 조금 더 서둘러야겠군."

"알았다.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던 샬롯이, 슬쩍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 엘린더라는 기사가, 아까 그 괴물을 만들어낸 거냐?"

"아마도. 그게 타락자가 하수인을 늘리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다. 힘을 주겠다고 유혹하고, 그걸 족쇄 삼아 복종시키지. 아까 본 그런 놈들이, 가장 말단 하수인이야."

"그래… 그렇다면… 그런 놈들은 내게 맡겨 줄 수 있겠나? 좋은 수련 상대가 될 것 같은데."

그녀의 목에 걸린 가죽 안대를 슬쩍 바라본 이안이,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하지만, 이번엔 안 돼."

"…안 된다고?"

샬롯이 되물었다. 반발하는 게 아니라 눈치를 살피는 듯한 말투였다.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마차를 지켜야 하니까."

"마차… 그래…."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한 샬롯이, 앞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나는 이번 일에도 별 쓸모가 없는 모양이군…. 알겠다. 그렇게 하지."

뭐라는 거야, 얘가 또.

콧방귀를 뀐 이안이 내뱉었다.

"역할을 분담하려는 것뿐이야. 무장 강도가 우글대는 소굴에 굳이 정면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이안은 게임의 기억을 떠올렸다.

완만한 산기슭에 위치한 도적 기사의 본거지는, 사실상 목조 요새나 성곽에 가까웠었다.

마을을 멋대로 개조하고 증축해서, 무장 세력의 거점으로 만든 것이다. 말이 도적 기사지, 사실상 신흥 군벌에 가까웠다. 주위 마을을 약탈해 물자를 수급하고, 징집이란 명목으로 주민들을 납치해 부려먹는.

'그런 식으로 세력을 불려서 영주를 몰아낼 생각이거나… 모시는 놈의 세력에 합류하려는 거겠지.'

정확한 속사정 따윈 알 바 아니었다. 게임에서 거대한 산채였으니, 현실이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리란 사실이 중요할 뿐.

굳이 경험치도 주지 않을 놈들이 득시글대는 곳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건, 비효율적인 짓이었다.

평소라면 대충 불을 질렀겠지만.

이번에 그랬다간 노예로 부려지는 이들이 여럿 타죽을 터였다.

"그러니까 조용히 들어가서, 그 기사 놈의 목부터 딸 거다. 잔챙이들은 덤비는 놈들만 죽일 거야. 대가리가 사라지면 끄나풀 놈들 빼곤 싸우는 척만 하다 튀겠지. 그것들은 굳이 쫓지 않을 거다. 그러니 마차만 두고 갈 수는 없어."

이안이 팔 받침대를 툭툭 쳤다.

"도망쳐 나온 놈들이 이걸 발견하면 그냥 지나칠 리 없으니까. 하지만 네가 지키고 있으면, 몇 놈이 오든 빼앗길 일은 없겠지."

"그런 거군…. 알았다. 그게 내 역할이라면."

"그리고 앞으로 그런 헛소리는 하지 마라."

"...."

샬롯이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축 처진 어깨와 힘없이 늘어진 짤뚱한 꼬리.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쓸모없는 건 사실이다, 이안. 날붙이만으로 죽일 수 없는 족속들을 상대로는 특히."

"...."

얘기가 왜 거기로 튀어.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굳이 말을 끊지 않았다.

샬롯이 먼저 속내를 드러낸 건, 여정이 다시 시작된 이래 처음이었으니까. 게다가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놈들을 죽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대로면 결국, 루 사드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될 테니까."

"그런 힘을 손에 넣을 방법이 있다는 듯한 말투로군."

"…그래. 네가 용납할 리는 없겠지만. 나 역시 유혹을 느끼고 있을 뿐, 옳지 않은 선택이란 걸 알고 있다."

"...."

이안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개종을 고민하는 거군."

바로 눈치챌 줄은 몰랐다는 듯, 샬롯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곧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아마 너는 타락이라 칭하겠지. 틀린 말은 아니다. 고귀하던 태초의 야성은, 공허의 혼돈에 물들었으니까."

예전에도 그녀가 언급한 적 있던 이야기였다. 인간의 신들에 의해 공허의 변방에 유폐된 수인의 신.

턱을 긁적인 이안이 내뱉었다.

"네가 그를 섬긴다고 곧바로 힘을 내려 주진 않을 것 같은데."

"아마 내려 주실 것이다. 크룩시카께선 후손을 아끼시니까."

"후손?"

"그래. 우린 모두 그분의 후손이지. 찬란한 여신을 비롯한 다른 신들이 우리에게 신성을 내리지 않으시는 건 그래서야. 하지만 태초의 야성께선, 자신을 버렸던 자손이라도 기꺼이 품어 주시겠지."

"부작용도 함께 주실 테고."

"…물론이다. 그분의 뜻과는 관계없이, 공허의 힘에 취해 타락한 전사들을 여럿 보았지. 몇몇은 끝내 마족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그래서 과거엔 은밀하게 태초의 야성을 섬기는 전사들을 멸시했었다. 이기적이고 나약한 것들이라 여겼지. 하지만…."

샬롯이 낮게 가르릉댔다.

"이제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되는군.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더 강한 힘을 손에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그녀가, 고해성사하듯 말을 이었다.

"대륙의 어둠과 맞서는 네게,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너라면 내 갈등을-"

"잘 고민해 보고 결정해라."

"깔끔하게… 뭐라고?"

샬롯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안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잘 고민해 보고 결정하라고."

"…진심이냐?"

"나는 네가 충분히 네 몫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네가 갈증을 느낀다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지. 내가 막는다고 사라지지도 않을 테고."

이안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샬롯이, 이윽고 탄식하듯 내뱉었다.

"진심이구나, 이안."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

"네가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이자 북부의 대전사이며… 교단의 성자인 백금룡의 대행자니까…?"

"그게 그들을 섬긴다는 뜻은 아니지. 난 그 누구도 섬기지 않아."

"...! …그래, 하긴. 이안, 너는 마법사이기도 했지."

눈을 치켜떴던 샬롯이 이윽고 뒤늦게 깨달은 듯 중얼댔다.

마법사이기도 한 건 뭐야. 그게 본업인데.

이안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에게 이 세계의 신들은 이용할 대상에 불과했다. 한때 데이터 쪼가리였던 것들을 섬길 생각은, 여전히 추호도 없었다.

그저, 필요하다면 어떤 힘이라도 이용할 뿐이었다.

혼돈의 파편을 품었듯이.

"나는 네가 누굴 섬기고 어떤 힘을 다루든 상관없다. 네가 자신을 잘 통제하기만 한다면. 나한테 중요한 건 그것뿐이야."

덤덤하게 내뱉은 이안이, 샬롯의 주황색 눈을 마주 보았다.

"네가 광기에 물든 마수가 된다면,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죽일 거라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돼."

"...."

샬롯의 눈빛이 일렁였다. 갈등과 안도가 뒤섞인듯한 묘한 눈빛.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 더 고민해 보겠다.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리건, 알려주지."

"그러던가."

육포를 입에 문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샬롯이 덧붙였다.

"하나만 더 묻겠다."

"또 뭐."

"아직도 내가, 전사보다 암살자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그걸 아직도 담아두고 있었냐.

피식 웃은 이안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

관도 좌우로 숲이 울창해졌다.

마차가 완만한 비탈길을 올랐다.

'그래도 늦진 않았네.'

이안은 벗어두거나 느슨하게 풀어 뒀던 장비들을 하나씩 제대로 착용하기 시작했다.

제한 시간이 끝나기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여유롭진 않지만, 그렇다고 촉박하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슬슬 마차를 세울 곳을 찾아 보겠다."

샬롯이 내뱉었다.

이안은 대충 고개만 끄덕이며, 강철 장화의 종아리 부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했다.

곧 마차가 길 한쪽의 공터로 빠졌다. 이파리 하나 없이 길쭉하게 솟은 잿빛 나무들 저 너머, 분간하기 어렵게 빼꼼 튀어나온 망루가 언뜻 보였다.

곧 마차가 멈췄다.

"분명 도망쳐 나오는 놈들이 있을 거다. 말을 잘 지켜."

"그러겠다."

이안의 말에 대꾸한 샬롯이, 전투 도끼를 벗어 놓고 훌쩍 뛰어내렸다. 고정용 줄을 든 그녀가 근처의 나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많이 몰려 와도 단 한 놈도…."

산기슭을 타고 불어온 스산한 바람에, 그녀가 말을 멈췄다.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피 냄새다. 이안."

"...?"

견갑을 조절하던 이안이 멈칫했다. 숨을 들이켰지만, 그는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줄을 툭 떨군 샬롯이 몸을 돌렸다.

"저 위쪽 같은데. 확인하겠다."

그녀가 훌쩍 몸을 날렸다.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서둘러 손을 움직였다.

'느낌이 쌔한데.'

곧 마차에서 내린 그가 산길을 달려 올라갔다. 저 위에서 샬롯이 손을 들었다.

"여기다, 이안."

그녀가 맡은 피 냄새의 근원지가 가까워졌다. 당연하게도 시체였다. 다만 하나가 아니었다. 전에 그들과 싸웠던 것과 비슷한 복장의 남자 넷이, 내장을 쏟아내거나 머리가 쪼개진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타임 어택인가 했더니….

"선객이 있었군."

#129화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놈들이다. 아직 벌레도 꼬이지 않았어."

"보아하니 칼도 좀 쓰는 놈이고."

혀를 찬 이안이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그놈을 빼앗길 순 없지. 계획 변경이다. 마차 잘 묶어 놓고 따라와."

"...?! 알았다!"

달려 올라가는 이안의 뒷모습을 눈을 치켜뜨며 바라본 샬롯이, 곧바로 마차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사이에도 이안은 쉬지 않고 내달렸다.

'…어쨌든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아예 늦진 않았을 것 같은데.'

곧 거대한 산채의 전경이 드러났다.

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목책이 성벽처럼 펼쳐지고, 망루도 규칙적으로 솟아 있었다. 그 너머, 완만한 산기슭을 따라 이어진 목조 건물들의 지붕이 보였다.

거주 시설까지 완비된, 훌륭한 목조 요새였다.

망루가 텅 비어 있다는 것만 빼면.

그래도 아예 늦진 않았으리란 예상은, 다행히 현실이 되었다.

저 멀리, 아직도 소음이 번지고 있었으니까.

'누군진 몰라도….'

이안은 반쯤 열린 정문 너머로 발을 들였다. 피 냄새와 구린내가 코를 찔렀다.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들.

'자신감이 대단한 놈들이군. 정면 돌파라니.'

죽음의 행렬은 통나무 집 사이의 굽이진 길을 따라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안은 선객들의 배포에 내심 감탄하며 걸음을 옮겼다.

앞선 시체들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보통 실력자들이 아니었다.

여러 번 찔린 흔적이 있는 비교적 멀쩡한 시체도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목이 잘리거나 내장을 철철 흘리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가로나 세로, 대각선을 가리지 않고 쪼개지거나 아예 토막 난 시신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리고 대부분 단칼에 그렇게 된 게 분명했다.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한 것 같았다. 수수깡처럼 부러진 검과 빗나가 박힌 볼트가 곳곳에 보였다.

"살육이 펼쳐졌었군…."

뒤이어 마을로 들어선 샬롯이 감탄한 얼굴로 읊조렸다.

"그렇다고 다 죽인 건 아니야."

이안은 건물 사이의 길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내뱉었다.

그 뒤를 따르며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건물 내부의 숨죽인 기척들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나치는 거의 모든 건물 안에 생존자들이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달려드는 놈들만 죽이면서 올라간 거군."

"그래. …인간 타락자 할 것 없이 전부."

은은하게 번지는 소음의 근원지로 올라가면서, 이안은 널브러진 시체들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도적 기사를 빼앗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안 되면 힘으로라도 빼앗을 생각이니, 먼저 온 놈들의 실력을 확실히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푸확-!

"...!"

이안의 눈이 커진 건, 오르막길을 반 이상 올랐을 때쯤이었다.

저 멀리, 욕설과 고함이 번지는 2층짜리 목조 건물의 창에서 붉은 섬광이 번쩍였기 때문이었다.

놀람은 아주 잠깐이었다.

"하… 그래. 누군가 했더니."

그의 입가에 이내 미소가 스쳤다.

선객의 정체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오히려 왜 보자마자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변방에 이만한 칼 솜씨와 무모함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을 리 없건만.

"아는 자들인가?"

뒤따르던 샬롯이 물었다. 멈추지 않고 걸으면서,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잘 아는 정도가 아니-"

말을 멈춘 그가 앞을 바라보았다.

콰장창 하는 굉음과 함께, 목조 건물 2층의 벽면을 뚫고 누군가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바닥을 구르며 착지한 건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였다. 투구만은 걸치지 않은 채였다. 벌떡 일어난 그가 자신이 부순 벽면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다들 당장 저 미친 새끼를 막아! 그렇게 겁먹은 표정으로 보지 말고, 이 병신들아! 그래…! 내가 네놈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지!"

소리치는 그의 전신에 보랏빛 마력이 휘몰아쳤다. 기다란 대검을 뽑아 든 그가, 검을 벽면의 구멍을 향해 내뻗었다. 날을 타고 오염된 마력이 번져 나갔다. 건물 내부에서 크고 작은 비명이 잠깐 울리더니, 뒤이어 가래가 끓는 듯한 숨소리로 바뀌었다.

"넌 절대로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거다, 이 개자식아-!"

"호오…."

걸음을 멈춘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이, 비로소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만나자마자 2페이즈인 거군…."

중얼대는 그를, 옆에 선 샬롯이 돌아보았다.

"그건 또 무슨 뜻이지?"

"저놈이 우리 목표물이란 얘기지."

북부 전사의 검을 검집에 되돌리며, 이안이 옆을 턱짓했다.

"저놈은 내 거다. 넌 정문으로 도망쳐 나오는 놈들을 맡아. 대신 이 강도들이랑 싸우는 자들은 절대 건드리지 마라.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는 특히."

"염려 마라. 죽이지 않을 테니까."

내뱉은 샬롯이 훌쩍 몸을 날렸다.

담장을 박차고 가볍게 지붕에 착지한 그녀가 멀어졌다.

네가 죽을까 봐 한 말인데.

생각하며, 이안은 부러진 단죄의 검을 아공간에서 꺼내 들었다.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느긋한 발걸음이었다.

저 도적 기사는 부하들을 희생시켜 도망치려는 게 분명했다. 저긴 건물 끝 쪽이니, 달려서 도망치거나 정문으로 돌아갈 게 아니라면 자신 쪽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 마구간을 지나쳤으니까.

'본진이 털리고 있는 것 치고 제한 시간이 넉넉하다 싶더라니. 저놈이 도망쳐 나가는 시간까지 포함이었던 거네.'

하긴. 도적 기사는 게임에서도 불리하면 도망 다니던 놈이었다. 재생력이 아주 뛰어나서, 궁지에 몰리면 부하들을 불러 모으고 도망쳐 체력을 회복하곤 했었다.

'그런데, 상태 창이 어떻게 이걸 미리 알고 제한 시간을 둔 거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의문이 뒤를 이었다.

예지력이라도 있는 걸까? 그보단 차라리 이 상황이 게임에서도 똑같이 존재했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때도 제한 시간이 지나서,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친 서브 퀘스트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그럼 이번에는 운 좋게 타이밍을 딱 맞춘 것이리라.

'이미 서브 퀘스트를 몇 개쯤 놓쳤으리란 뜻도 되겠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도적 기사가 그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보라색 광망이 아른거리는 눈으로 이안을 응시한 그가, 이윽고 물었다.

"넌 또 뭐냐?"

"널 죽일 사람."

"그 부러진 칼로?"

"널 죽이는 건 이거면 충분할 것 같은데."

이안의 태연한 대답에, 도적 기사의 얼굴이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이 미친 새끼들이… 날 아주 우습게 보는군. 오냐. 죽여 주마, 이 고블린 똥 같은 새끼야!"

고오오- 그의 전신에서 오염된 마력이 휘몰아쳤다. 뿌득대는 섬뜩한 소리가 갑옷 아래에서 이어졌다.

이안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이 엄청난 속도로 혈관을 내달리고, 바람 칼날이 순식간에 완성됐다.

여유를 부리긴 했지만, 전투를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변이 중인 도적 기사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 이안이 훌쩍 솟구쳤다. 머리 위로 부러진 단죄의 검을 치켜드는 가운데, 지붕에 가려져 있던 광경이 얼핏 드러났다.

"괴, 괴물-! 살려 줘…!"

문을 박차고 나오는 두 놈.

끔찍한 몰골로 변이된 하수인들을 보고 혼비백산해 도망친 것이리라. 여기까지 나온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셈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괴물은 안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콰직-!

옆 건물의 지붕 위에서 뛰어내린 샬롯이 한 놈의 머리를 쪼갰다. 옆의 놈은 눈을 치켜뜬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암살자가 딱이라니까.'

"이 버러지야! 어딜 보는 거냐?"

도적 기사의 외침이 뒤를 이었다. 놈의 변이는 말단 하수인들처럼 끔찍하고 요란하지 않았다. 갑옷이 버틸 수 있을 정도만큼만 덩치가 커졌고, 얼굴 전체에 보라색 핏줄이 돋아났을 뿐이었다.

온통 검보랏빛으로 변한 눈동자가, 가까워지는 이안을 똑바로 노려 보았다.

"겁대가리 없는 놈! 그대로 똥구멍까지 꿰어 주마!"

소리치며, 놈이 손에 든 검을 치켜들었다. 날이 기다란 대검을 한 손 검처럼 내뻗고 있었다.

"이래야 네가 안 튈 것 같아서."

내뱉으며, 이안은 단죄의 일격을 사용했다.

솨아아아-

십자막이를 타고 푸른 빛이 번졌다. 날이 멀쩡하던 과거와 달리, 신성력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부러진 날의 단면 위로 치솟았다.

"뭣…?!"

도적 기사가 눈을 부릅떴다. 놈이 내뻗었던 팔을 황급히 당기는 가운데, 이안이 검을 내리쳤다.

푸른 궤적이 거칠게 대기를 갈랐다.

카드드득-!

앞을 막아선 대검 날을 불길처럼 넘실대며 지나친 신성력이, 도적 기사의 몸을 세로로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놈의 발치에 착지한 이안이, 가랑이 사이를 굴러 지나치고는 멈춰 섰다.

푸-확-!

한 박자 늦게 피가 치솟았다. 쩍, 좌우로 갈라진 놈의 머리와 상반신이 지저분하게 벌어졌다.

'위력 자체는 부러지기 전보다 더 세진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빛이 잦아드는 검을 고쳐 쥐었다.

꿈틀꿈틀, 놈의 잘린 단면이 부풀면서 이어 붙고 있었다. 신성력에 타들어 가면서도 재생을 멈추지 않았다.

"그… 그극…."

바퀴벌레 같은 놈.

이안은 놈의 등을 향해 남은 신성력을 모조리 뿜어내고는 단죄의 검을 아공간으로 되돌렸다. 그리고는 북부 전사의 검을 뽑아 들며 다시 한번 솟구쳤다.

쉬학-!

바람 칼날을 머금은 검이 횡으로 그어졌다. 카가각, 쇠를 긁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목덜미가 깊이 패였다.

"그… 아, 윽…."

안 잘릴 줄이야. 혀를 찬 이안이, 그대로 놈의 등을 힘차게 박찼다. 도적 기사가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바닥을 구르며 착지한 이안이 다시 놈에게로 달려갔다.

안 잘리면 잘릴 때까지 잘라 주면 그만이었다.

콰직! 콰직!

이안은 재생 중인 놈의 목을 도끼질하듯 내리쳤다. 꾸물대며 끝까지 버티던 머리가 끝내 떨어져 나갔다. 이안은 데구르르 굴러가는 놈의 머리에 비로소 화염구를 한 발 쏘아 보냈다.

그 와중에도 다시 이어 붙으려 꾸물꾸물 번지던 살점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갔다.

부들부들 떨리던 놈의 몸이 이윽고 축 늘어졌다.

퀘스트 완료 창이 뒤를 이었다.

창을 닫아 버리며, 이안은 익은 고깃덩어리가 된 머리와 축 늘어진 몸통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도적 기사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벌레 같은 최후였다.

'어쨌든, 결과적으론 노른자만 쏙 빼먹었네.'

생각하며, 이안은 검을 회수했다.

옆의 벽면에 기댄 그가, 소란이 이어지고 있는 목조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선 괴성과 비명,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빛이 순간순간 번쩍였다.

굳이 도우러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기만 해도 충분하리라.

뻐억-!

얼마 지나지 않아 가죽 북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도적 기사가 부쉈던 벽면에서 시커먼 덩어리 하나가 튕겨 나왔다.

"그… 으윽…!"

근육이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변이된 하수인이었다. 바닥을 한 바퀴 굴러 멈춰선 놈의 움푹 파인 가슴팍이, 뼈 소리와 함께 다시 부풀어 올랐다.

부서진 벽면 너머로 낮게 깔린 붉은 신성력이 번진 건 그 직후였다.

곧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가 그 너머로 튀어나왔다.

피처럼 붉은 궤적이, 쓰러진 타락자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직!

검이 놈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비대한 몸을 짓밟으며 착지한 붉은 기사가, 그대로 자루를 놓고는 주먹을 들었다.

콰직! 콰직!

신성이 맺힌 강철 주먹이 하수인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주먹질은 놈의 머리가 곤죽이 되고서야 비로소 멈췄다. 거친 숨을 내쉬며 일어선 붉은 기사가 가슴팍에 박힌 검을 뽑아 들었다.

검에 묻은 피를 휙 털어내며 몸을 돌린 다음 순간.

"...!"

그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전에 봤던 카르하의 성상처럼, 신성을 머금은 기사의 조각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얼어붙은 시선을 마주한 이안이 비로소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때였다.

"으, 으악-?!"

뻥 뚫린 벽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벽면 끝에 간신히 멈춰선 갈색 머리의 청년이, 검과 방패를 볼썽사납게 펄럭이고 있었다.

뛰어내리려고 달려왔다가 마지막 순간에 겨우 멈춰선 모양이었다.

이윽고 간신히 균형을 다잡은 그가, 검을 회수하며 쪼그려 앉았다.

하반신부터 건물 밖으로 내밀면서, 그가 주절댔다.

"아니, 여기서 어떻게 그렇게 뛰어내리신 겁니까? 읏… 어라…? 나리,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밑에서 저 좀 받아 주세요…!"

낑낑대며 벽면에 매달린 종자가 이윽고 소리쳤다. 그가 여전히 굳어 있는 기사를 돌아보았다.

"나리? 안 들리십니까? 그렇게 서 계시지만 마시고…. …그런데 뭘 그렇게 멍하니 보십니까?"

종자가 비로소 기사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의심하듯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 이윽고 종자, 필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이안 나리…?!"

#130화

"그래. 나다, 필립."

"나리가 왜… 여기 계십니까?"

필립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여전하네, 새끼.

"왜긴."

피식한 이안이, 옆에 널브러진 시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의뢰 때문이지."

"...!"

필립이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그제야 그의 뒤에서 탄식이 번졌다.

"루 솔라 맙소사…."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전신 판금 갑옷에 일렁이던 붉은 신성력이 잦아들고 있었다. 기사가 손을 들었다. 철컥, 새 부리 모양의 안면 가리개가 위로 올라갔다.

붉은 머리칼. 한쪽 턱을 얕게 가로지르는 흉터와 흰 피부. 놀람이 가득 맺힌 녹색 눈동자가 차례로 드러났다. 메브의 입술이 달싹였다.

"정말 너였구나, 이안…."

"헛것이라도 보는 줄 아셨소?"

놀리듯 미소 지은 이안이, 이내 덧붙였다.

"오랜만이오, 경. 반갑소."

"...!"

비로소 퍼뜩 눈을 깜빡인 메브가, 입가에 헛웃음을 머금었다.

"인사조차 잊었었군…. 나도 반갑구나, 이안. 이렇게 무사한 모습을 보니 기쁘기 그지없다."

"나도 그렇소."

"도적 기사를 죽여 달라는 의뢰를 받은 것이냐?"

"그렇소. 경이 한발 빠르셨지만."

메브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가 검을 허리춤으로 되돌리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 여기긴 했다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구나. 여신께서 인도하신 모양이야."

…그보단 퀘스트의 인도 같은데.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벽에 매달려 있던 필립이 다급하게 소리친 건 그때였다.

"마,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저 좀 잡아 주십시오…! 손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이-"

다음 순간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필립이 쥐고 있던 판자가 부서졌다.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 필립은 뜻밖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땅에 착지했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던 그가, 이내 머쓱하게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보기만큼 높진 않았군요. 죄송합니다, 계속 말씀 나누십시오…."

산통 깨는 데는 여전히 일가견이 있는 놈이군.

이안이 코웃음을 치는 가운데, 메브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안도 느긋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마주 다가갔다.

얼핏 봤을 때는 몰랐던, 그녀의 달라진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몸에 걸친 갑옷의 형태도, 허리에 찬 검도 달랐다. 분위기도 묘하게 변했다. 차분하고 날카롭지만, 그게 위태롭게 느껴지진 않았다.

무엇보다 크게 달라진 건 눈이었다. 그때는 삶의 의욕을 잃은 듯 초연하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올곧게 빛나고 있었다. 이안을 다시 만난 기쁨과 놀람 와중에도,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이들 특유의 완고함이 묻어났다.

'방랑이 제법 적성에 맞는 모양인데….'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경은 어쩌다 여기에 오셨소?"

"플린트 자작이란 자가 있었다. 지하에 사람들을 가둬두고 역겨운 실험을 벌이던 타락자였지. 놈을 처단하고 실험에 이용당하던 이들을 구출했다. 그중에 의뢰인이 있었다. 쇠약해져서, 숨만 겨우 붙어 있던 자였지."

이안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메브가 말을 이었다. 이제 그들 사이의 거리는 스무 걸음도 되지 않았다.

"처음엔 이곳으로 끌려 와 노예처럼 부려졌었다더군. 그러다 병에 걸리자 자작에게 보내진 거야. 그는 내게 복수를 부탁했다. 그리고 곧 숨을 거뒀지."

"의뢰가 아니라 유언이었군…."

"내겐 같은 의미다. 덕분에 이렇게 너를 다시 만나기도 했고."

이안이 피식 웃으며 멈춰 섰다.

메브는 두어 걸음을 더 다가오고는 비로소 멈췄다. 이안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그녀가 덧붙였다.

"다시 만나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건만. 막상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니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그저 반갑기만 해."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난 경에 대한 소문을 종종 들었소. 북부에서."

"북부에까지 나리의 명성이 퍼졌습니까…?"

어느새 뒤따라 온 필립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안의 시선에, 그는 불현듯 반걸음 물러나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다시 뵙습니다, 나리. 아까는 경황이 없어 인사가 늦었군요."

이안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굴과 몸 곳곳에 튄 피. 체구는 한층 단단해졌고, 얼굴에도 처음 보는 흉터가 여럿이었다.

"못 본 사이에, 꽤 쓸 만해졌군."

이안의 말에, 필립이 고개를 들어 빙긋 웃음 지었다.

"나리가 보시기에도 그렇습니까?"

다소 어리숙해 보이는 해맑은 미소만큼은 여전했다.

"필립은 제 몫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 이안. 아직 서임을 받지 못했을 뿐, 기사나 다름 없지."

메브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필립이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전 아직 멀었습니다. 계속 나리를 모시려면, 더 정진해야죠."

얼씨구, 겸양까지. 이안이 코웃음을 치는 가운데, 메브가 다시 그를 마주 보았다.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늘 궁금했다. 어디서든 잘 지내고 있으리라 여기긴 했다만, 한동안 전혀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까. 해서 제국 어딘가에 있으리라 여겼거늘. 계속 북부에 머물렀던 것이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소."

"북부에 큰 사건이 있었다는 소문은, 얼마 전에 들었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망자 군단의 침공이 있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 과정에서 북부의 대전사와 용살자가 나타났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필립이 슬며시 덧붙였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뭐, 반 정도는 사실이지."

"허어…. 역시, 나리는 진상을 확실히 알고 계신 거군요. 마음 같아선 당장 여쭙고 싶습니다만…."

필립이 슬쩍 시선을 돌리자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 매듭 지어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잠시 기다려 줄 수 있겠느냐, 이안?"

그녀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필립이 긴장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 될 거 없지. 그러겠소."

"…다행이군요. 의뢰가 끝났으니 바로 떠나실까 조마조마했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린 필립이 이안과 메브를 번갈아 돌아보며 덧붙였다.

"남은 일을 끝마치고 나면, 두 분께서 마음 편히 회포를 푸실 수 있도록 제가- 으악?!"

그가 말하다 말고 뒤로 펄쩍 뛰어올랐다.

이안의 등 뒤로 새카만 덩어리가 기척도 없이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필립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마족! 마족입니다, 나리! 뒤를 조심하십시오!"

메브도 언제 웃었냐는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검을 뽑았다.

그들을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샬롯이 일어섰다.

"도망쳐 나온 놈들은 다 처리했다, 이안. 저 안에 남은 하수인이 있는지도 전부 확인했고."

"수고했다."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은 검을 뽑아 든 둘을 바라보았다.

"무기들 내리시오. 내 일행이니까."

"일행… 이시라고요…?"

필립이 미간을 찌푸린 채 샬롯을 아래위로 훑었다. 그의 입술이 이내 다시 달싹였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말하는 짐-"

"거기까지. 혀 잘리고 싶지 않으면 입 닥쳐라. 검도 집어넣고."

말을 자른 이안이, 짧게 혀를 차고는 메브를 돌아보았다.

"이쪽은 샬롯이오. 마족이 아니라 수인이고."

"…그렇군."

순순히 검을 회수하며, 메브가 고개를 까딱였다.

이안은 턱 끝을 살짝 치켜드는 샬롯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쪽은-"

크흠, 하는 필립의 헛기침이 여지없이 뒤를 이었다. 이안이 인상을 찌푸리는 가운데, 검을 회수한 필립이 성큼 한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그건 제 역할입니다. 나리."

"...."

쓸데없이 충실한 새끼. 입맛을 다시면서도,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어쨌건 메브의 종자는 이 녀석이었다.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오해가 있었군요."

샬롯의 주황색 눈을 빤히 올려다보며 말한 필립이, 이윽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은 루 솔라의 신도이며 티르 엔의 사도. 아겔 란의 수호자. 전장의 붉은 기사. 정당한 복수의 대행자이자 약자들의 구원자. 메브 리우렐 경입니다."

"리우렐…?"

읊조리는 샬롯의 눈에 묘한 이채가 서렸다.

"그리고 저는 경을 모시는 종자, 필립입니다."

여러 감정이 스치는 눈으로 메브를 응시하던 샬롯이, 이윽고 필립을 돌아보았다.

"샬롯이다. 이안을 모시고 있지."

"그러시군요…."

둘의 시선이 묘하게 얽혔다.

기 싸움을 하고 난리야.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무슨 용무가 남으셨소?"

"아직 저 안에 타락자들의 잔당이 남아 있다. 그놈들을 전부 처단하고, 붙잡힌 백성들도 풀어줘야 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기다려 주겠느냐?"

"그렇군. 그럼, 빨리 끝냅시다."

이안이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필립이 반색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도와주실 겁니까?"

"경 덕분에 일을 편하게 끝냈으니까. 나도 마무리 정도는 도와드려야지."

"네가 도와준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

싱긋 미소 지은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필립이 재빨리 덧붙였다.

"그럼 저희는 반대쪽으로 돌겠습니다. 두 분은 이 길로 내려가시죠."

샬롯을 돌아보며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럼 정문에서 다시 봅시다."

***

잔당 색출은 빠르게 이뤄졌다. 이안과 샬롯은 숨어 있던 놈들을 놓치지 않고 찾아냈다.

몇몇 놈들은 노예로 부리던 자유민들을 인질로 잡고 버티기도 했지만, 이안은 주저하지 않고 이마에 단검을 심어 주었다.

요새에서 노예처럼 부려지던 자들은 수십 명에 달했다. 아이와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들도 있었다. 이안은 그들을 전부 이끌고 정문으로 향했다.

곧 메브와 필립도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상황을 정리하는 건 필립의 몫이었다.

"이제 여러분들은 자유입니다! 이곳에 남아도 좋고, 식량과 무기를 챙겨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나 나리는 이곳에 머무는 걸 추천하고 싶군요."

연설하듯 말하는 그의 언행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것 같았다.

메브는 그의 뒤에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는데, 이 역시도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야인들을 구하거나 의뢰를 해결하던 네 모습이 떠오르는군. 방식은 저쪽이 좀 더 요란하지만."

군중 뒤편의 담벼락에 기대선 샬롯이 읊조렸다. 이안이 짧게 코웃음 쳤다.

"나랑은 비교할 게 아니지. 본질부터가 다르니까."

"본질…?"

"난 보수를 받아야 움직이지만, 저들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아."

"흠… 나도 네가 보수 때문에 그 모든 일들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만."

"잘못 생각했군. 전부 보상 때문에 한 일들이니까."

정확히는 퀘스트 보상과 경험치 때문이지만.

샬롯이 어깨를 으쓱이는 가운데에도, 필립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외부는 혼란스럽습니다. 차라리 고향 사람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주하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여긴 외부로부터 지키기도 좋고 근처에 개울도 흐르는 데다, 개간할 땅도 있으니까요."

"저… 나리."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던 자유민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미소 지은 필립이 말하라는 듯 턱짓했다.

"이곳의 두목이 모시던 귀족이 있습니다. 종종 그에게 사람들을 보내곤 했었죠. 만약 그자가 이곳의 소식을 알게 된다면, 저희는 전부 죽은 목숨일 텐데요…."

필립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런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플린트 자작은 이미 죽었습니다. 바로…."

그가 뒤에 선 메브를 돌아보았다.

"붉은 기사, 메브 리우렐 경의 검에 의해서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안심하고 남으셔도 됩니다."

"...!"

비로소 좌중들의 눈이 커졌다.

감사의 인사와 환호성이 뒤를 이었다. 붉은 기사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필립이 자신을 향한 환호인 양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는 고결하나 언행은 경박한 놈이군."

샬롯이 중얼댔다. 이안이 웃음을 흘리는 가운데, 필립이 들은 것처럼 그들 쪽을 가리켰다.

"악명 높은 도적 기사의 목을 벤 건 저 두 분입니다. 알아 두십시오, 이안 호프 경과 그의 수인 종자, 샬롯!"

그들을 향해서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여간 저 새끼는…. 이안이 혀를 차는 사이, 순간 눈을 치켜떴던 샬롯이 인상을 구기며 뇌까렸다.

"종자…? 종자라고…?"

"혀를 자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만. 참아라. 애초에, 혀가 없으면 글로 써서라도 떠들 놈이야."

이윽고 입맛을 다신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가서 마차나 가져와.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갈 거니까."

"…알았다. 그러지."

종자라니… 하고 중얼대며 샬롯이 휙 몸을 날렸다. 그 와중에도 물 만난 고기처럼 좌중들을 지휘한 필립이 이윽고 손을 맞부딪혔다.

"해산! 시체들 처리는 여러분들께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창고를 열어 자유의 날을 기념하십시오!"

함성과 함께 사람들이 흩어졌다. 뒤이어 몇몇과 조용히 대화를 나눈 필립이, 비로소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안을 향해 다가왔다.

이안이 피식댔다.

"아주 신나 보이더군."

"좋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이들에겐 다시 시작할 계기가 필요하니까요. 희망과 용기를 아주 조금 나눠줄 뿐이죠. 게다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거…?"

"왜 이러십니까. 잘 아시는 분이."

웃으며 슥 주위를 살핀 필립이,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는 속삭였다.

"그 도적 기사란 놈의 집을, 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부정한 물건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

"...!"

이안의 한쪽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그와 눈이 마주친 필립이 씨익 웃었다. 군중들에게 연설하던 성기사의 종자가 아니라, 숙달된 용병의 음험한 미소였다.

"이미 그놈의 집이 어딘지 알아 뒀습니다. 곧 주민들이 거기로 술과 음식을 가져다줄 겁니다. 가시죠. 이렇게 나리가 계시니, 옛 생각이 나는군요."

싱글댄 필립이 재빨리 앞서 나아갔다.

…이렇게까지 능숙해질 줄이야.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안의 곁으로, 메브가 다가섰다.

안면 가리개 너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졌다.

"면목이 없군. 다 내 부덕의 소치다. 차마 말릴 수가 없구나. 필립이 저리 애써주는 덕분에 굶고 다니지는 않는 것이니…."

"...."

이안은 작게 한숨 쉬는 메브를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그녀는 필립을 저렇게 만든 원흉이 그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입맛을 다신 이안이, 이윽고 시선을 돌리며 내뱉었다.

"성기사도 먹어야 살 것 아니오. 티르 엔께서도 타락자의 주머니를 터는 것 정돈, 이해해 주실 거요."

"그러실까…?"

"그렇소. …아마도."

그의 걸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빨라졌다.

#131화

"뭔가 나오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머진 제게 맡기시고, 두 분은 쉬십시오."

내뱉은 필립이 매의 눈으로 집 안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돈은 최소한만 챙기거라, 필립. 나머지는 백성들에게 나눠 주도록 해."

한쪽의 테이블에 앉으며, 메브가 씁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필립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염려 마십시오, 하고 대충 대답했다. 입가에 도적 같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였다.

'천직을 찾았군.'

고개를 저으며, 이안은 옆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포도주였다. 주석 잔 두 개를 테이블에 놓은 그가 술을 따랐다.

"목이 말랐는데. 고맙구나."

안면 가리개를 올린 메브가 잔을 들었다. 긴장이 탁 풀린 듯, 눈빛과 손짓에 피로가 묻어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육중한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치고 신성력까지 휘둘러대는 인간 전차라도, 이만한 산채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사실 그녀에게도 무모한 선택이었으리라. 그럼에도 강행한 건, 타락자를 상대로 몰래 숨어들거나 뒤를 노리는 식의 전략을 택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터였다.

'아무리 복수의 사도라도… 적당히란 게 없으시군.'

하긴. 적당히는 그녀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건너편에 앉아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킨 이안이,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보고할 게 남아 있었군."

"보고…?"

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다 마신 메브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은 그녀의 잔을 다시 채워 주면서 미소 지었다.

"이미 아시겠지만, 의뢰는 완수되었소. 루시는 무사히 화로의 사원에 들어갔소. 환대를 받으면서."

메브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잔에 찰랑대는 술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었다. 한 달 반쯤 지났을 때 확신했지. 너희들의 뒤를 따라간 추적자들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여러모로 난처하셨겠소."

"그렇지는 않았다. 네 덕분에 나는 피해자가 되었으니까. 오히려 폐하께선 나를 끝까지 곁에 두려 하셨지."

"들은 바로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왕국을 떠나신 것 같던데."

메브는 부정하지 않았다. 가라앉은 눈으로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켠 그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나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니까. 총사령관의 자리 같은 건 더더욱. 대신 다른 의문에 몰두하고 있었지."

"다른 의문?"

"그래. 버논이 레지스에 의해 타락했듯, 레지스를 어둠에 물들인 배후가 있지 않을까 하는."

할 법한 생각이군. 속으로 중얼대며, 이안은 술을 입에 가져갔다.

타락자의 손에 거의 모든 가족을 잃은 그녀였다. 또 다른 원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리라.

"그래서, 조사를 해 보셨소?"

"그래. 그리고 아주 작은 단서를 찾았었지. 하지만 그걸 조사하려면 메네르로 떠나야 했다. 해서 한동안 망설였어."

메브의 시선이, 수색에 열중하고 있는 필립 쪽으로 향했다.

"내 등을 떠밀어 준 건 필립이었다. 내가 한 건 그저, 못 이긴 척 따라나선 것뿐이야."

"흐음…."

저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필립을 바라보았다. 그는 벌써 돈주머니를 두 개나 찾아 침상 위에 던져 놓고, 서랍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을 느낀 듯, 그가 입을 열었다.

"폐하는 갈수록 이성을 잃고 계셨습니다.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셨죠. 전 나리가 왕국을 떠나면, 폐하께서도 전쟁을 포기하시리라 여겼습니다. 병사들을 이끌 구심점이 사라지는 거니까요."

단검을 침상 위에 던진 그가 짧게 한숨 쉬었다.

"하지만 폐하는 끝내 전쟁을 일으키시더군요. 그것도 직접 전군을 지휘하시면서. 그야말로 정신 나간 짓거…. 아닙니다. 제가 말이 심했군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가, 다시 방의 반대편 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메브가 씁쓸한 얼굴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하긴, 그녀가 지금 아겔 란의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일부라도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낀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괜히 물어봤네. 분위기 잡치게.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그럼 루시의 근황은 전혀 모르시겠군."

"...!"

메브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이것도 좀 된 소식이긴 하오만. 루시가 서신을 보냈었소. 내게 남긴 건 아니고, 누군가를 통해서 전달받았지."

이안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루시가 끝내 자신의 재능을 개화했음을. 이름도 바꿨고, 대사제의 후계자로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는 사실도 빠뜨리지 않고 전했다.

물론 미구엘의 소식도 짧게 덧붙였다.

"사제라고 하셨습니까…? 그 미구엘이, 사제요?"

침상 아래에 숨겨져 있던 궤짝을 찾아낸 필립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사실이다. 자격도 충분하지. 그놈은 실제로 자신을 희생해서 루시를 지키려고 했었으니까."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해야겠구나. 은혜도 갚고. 미구엘 사제님이 계속 곁을 지켜 주신다니… 안심이 되는군."

"사제님이라니…."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같은 생각을 한 듯, 이안과 필립이 거의 동시에 헛웃음을 흘렸다.

메브의 미소에 다시 온기가 서렸다. 가슴에 맺혀 있던 걱정 하나가 말끔히 씻겨 내려간 얼굴이었다.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이대로 북부로 올라가셔도 되겠소. 생각보다 멀지 않은 거리니까."

"…나중에. 루시는 늘 그곳에 있을 테니."

대답한 메브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벌써 두 잔이 말끔하게 비워졌다.

못 본 사이 술고래가 다 되셨군.

이안이 세 번째 잔을 따라 주는 사이, 필립의 탄성이 이어졌다.

"이것 좀 보십시오, 나리."

이안과 메브의 고개가 돌아갔다. 궤짝에서 꺼낸 장검을 든 필립이, 날을 검집에서 반쯤 뽑으며 미소 지었다.

"쓸만해 보이는 검입니다. 한 번 쥐어 보시겠습니까?"

쓴웃음을 지은 메브가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네가 쓰거라, 필립."

"그러시다면…."

사양하지 않고 챙기려던 필립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이안이 손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립과 눈이 마주친 그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가져와 봐."

"…예."

검날을 힘없이 밀어 넣으며, 필립이 다가왔다. 자루를 쥔 이안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정보 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적의 장검. 고급 등급이었다. 일반 장검보다야 쓸 만했지만, 그가 사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너 해라. 나한테도 전리품의 배분권이 있다는 거 잊지 말고."

"예, 염려 마십시오. 제가 설마 나리를 속이겠습니까."

필립이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미소 지으며 몸을 돌렸다.

조만간 눈탱이도 치려 들겠는데.

코웃음 치는 이안을, 메브가 다시 마주 보았다.

"지금은 의뢰의 보수를 지불하는 게 순서 같구나, 이안. 언제 받아 갈 생각이냐?"

오히려 기다리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아직도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아직은 아니오. 때가 되면 받겠소."

"그때도 우리가 함께하고 있을지는 모를 일 아니겠느냐?"

"걱정 마시오. 내가 어떻게든 경을 찾아낼 거니까."

"흐음… 그래, 너라면 뭔가 방법이…."

그때, 문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밖은 거의 정리가 끝났다."

내뱉으며 들어온 건 샬롯이었다. 그녀를 눈에 담은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설핏 말려 올라갔다.

"왜 이렇게 늦나 했더니."

그녀의 한 손에는 여러 냄비가 담긴 쟁반이, 다른 한 손에는 커다란 술병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한 발로 능숙하게 문을 닫은 샬롯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종자가 음식을 가져다 달라 했다더군. 무슨 술이 좋겠냐 묻기에, 직접 창고로 가서 들고 왔다. 온갖 술이 다 있더군. 그중에서 냄새가 가장 괜찮은 술이야."

술병을 옆에 내려놓은 샬롯이, 냄비를 테이블 위에 깔았다. 온갖 것들을 넣고 끓인 스튜와 딱딱한 빵. 놀랍게도 구운 고기도 있었다.

"훌륭한 종자를 두셨군요, 나리."

필립의 말에 샬롯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분을 삭이듯 낮게 가르릉댄 그녀가, 의자를 가지러 휙 몸을 돌렸다.

…이것들 조만간 한 판 붙겠는데.

이안의 시선을 받은 필립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얼굴로 덧붙였다.

"전 마저 끝내고 먹겠습니다. 먼저들 드십시오."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샬롯의 주석 잔을 챙기는 가운데, 메브가 비로소 투구를 벗었다.

붉은 머리칼이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본 이안이, 앞에 놓인 음식을 턱짓했다.

"우선, 먹읍시다."

샬롯이 사이에 앉고, 이안이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식사가 이어졌다. 서로 초면인 이들이 섞여 있었지만, 거리낌 없이 음식이 줄어들었다.

다들 몹시 굶주려 있었다. 이안만 해도 반나절만의 식사였다.

"왜 자꾸 그렇게 보지?"

어느 정도 배가 찬 듯, 비로소 메브가 입을 열었다. 샬롯을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포도주로 입을 헹구면서, 샬롯이 턱짓했다.

"그 갑옷, 천칭 상단의 물건이군."

"…어떻게 알았지?"

"내가 거기서 일했었으니까. 고급품에는 구석에 상단의 인장이 찍혀 있지.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보통 비싼 물건이 아니었을 텐데…."

"그래. 가문의 땅과 교환했다."

"그 저택을 파셨소?"

이안이 되물었다. 메브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있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었겠느냐. 네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산을 모두 처분했다. 그리고 한동안 레지스의 저택에 머물렀었지."

겸사겸사 조사도 하면서 말이지.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마침내 필립이 테이블 옆으로 다가왔다.

"찾은 물건은 전부 침상 위에 뒀습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시다면 알아서들 챙겨 가십시오. 저처럼."

녀석이 허리춤의 새 검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잔에 술을 가득 채운 샬롯이 벌떡 일어섰다. 잠시 필립을 가만히 내려다본 그녀가 몸을 돌려 창가로 향했다.

왜 노려보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 필립이 그 자리에 앉았다.

빵을 집으면서, 녀석이 말했다.

"아쉽게도 불온한 물건이나 기록물 같은 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상대로 별로 아는 게 없는 놈이었던 것 같군요. 더 찾아본들, 뭔가 새로운 단서가 있을 것 같진 않아요."

"단서?"

이안이 의자 뒤에 기대앉으며 물었다.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눈빛을 마주 본 이안의 입가에, 이윽고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그냥 타락자의 주머니나 털려고 여길 뒤지던 게 아니었군."

"당연하죠. 설마 제가 돈에 눈이 멀어 이랬겠습니까?"

뻔뻔하게 말하며, 필립이 빵을 입에 가져갔다. 대신 내뱉은 건 메브였다.

"네게 배웠다더구나, 이안. 타락자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거나 자신의 정체를 은연중에라도 드러내고 싶어 해서, 어떤 식으로든 단서를 남긴다고 말이야."

필립이 어깨를 까딱였다.

새끼, 배운 건 정말 잘 써먹네.

피식댄 이안이 물었다.

"그럼, 여기서 단서가 끊긴 거냐?"

"그건 아닙니다. 여긴 일종의… 예상치 못한 경로였거든요. 타락자의 하수인이 뭔가 대단한 정보를 쥐고 있으리란 기대는, 처음부터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알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단 건가. 어쨌든, 뭔가 더 있긴 한 모양이었다. 필립이 말을 이었다.

"메네르의 타락자를 처단하고 알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제국의 누군가를 만나고 난 후로 어둠에 발을 들이게 되었더군요. 하지만 그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이름은 물론이고 호칭조차 모호하게 기록해 뒀더군요."

"대신 다른 타락자의 존재를 알게 됐지."

메브가 말을 받았다. 그렇게 둘의 목소리가 번갈아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시작됐지만, 그들은 계속 여정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메브가 유명세를 떨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타락자가 존재하는 지역에는 필연적으로 끔찍한 실험과 음모, 폭정과 약탈이 도사리고 있었으니까.

"…진짜 타락자라 할 만한 자들은 저마다 연락을 주고받는 제국인이 하나씩은 있더군요. 놀랍게도 다 다른 자들 같았죠. 물론…."

"정체를 밝혀낼 수는 없었겠고."

이안이 놀랍지도 않다는 듯 말을 받았다.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덧붙였다.

"그랬습니다. 얼마 전까지는요."

메브가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플린트 자작은 과거, 제국에서 잠시 머물렀더군. 제국의 서부인 테센에서. 그곳의 한 사제와 각별한 친분이 있어 보였다. 지금까지 서신을 주고받을 정도로."

"그자가 연락책이군."

"그래. 겉보기엔 찬란한 여신을 섬기라는 내용 같지만, 앞선 타락자들의 서신과 비슷한 문구가 섞여 있었지. 빛을 위한 어둠이라든가, 새로운 질서 같은."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그건 아주 잠깐이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한 필립이 덧붙였다.

"주르도 사제라는 자였습니다. 드디어 처음으로 누군가의 배후를 정확하게 특정해 낸 거죠."

"자작은 제국에 유학하던 시절, 그자가 써 준 기도문을 일기장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알 수 없었겠지."

"필체가 정확히 일치하더군요."

둘을 번갈아 바라본 이안의 입가에, 비로소 옅은 미소가 스쳤다.

거의 탐정이 다 되셨군.

필립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직 전체적인 그림조차 전혀 가늠할 수 없습니다만, 나리. 뭔가 거대한 음모가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전쟁조차 누군가의 의도대로 일어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

이안의 시선에, 그가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물론 억측일 뿐입니다. 확신할 만큼 많은 타락자를 처단한 것도 아니고, 여전히 암약 중인 자들이 훨씬 많겠죠. 저도 제가 망상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만…. 잠시 말이 옆길로 샜군요."

낮게 헛기침한 필립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메브가 미간을 좁혔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알고 있다만. 그러지 말거라, 필립."

"하지만 나리… 나리께서도 이번 만남이 여신의 안배라고 느끼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

메브가 짧은 침음을 흘렸다. 다시 이안을 돌아본 필립이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벨 론데를 거쳐 제국령으로 넘어갈 계획입니다, 나리. 국경 지역의 경계가 삼엄하다 하나, 빈틈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안이 술잔을 들며 되물었다.

필립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테센으로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물론… 부탁이 아니라 의뢰입니다."

"...!"

창가에서 심드렁하게 술을 홀짝이던 샬롯이, 인상을 찌푸리며 홱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시던 술을 마저 마신 이안이 입을 열었다.

"영양가 있는 얘기였다. 제안도 매력적이고."

그는 미안한 표정의 메브와 긴장한 눈빛의 필립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덧붙였다.

"하지만 당장 제국으로 갈 순 없을 것 같군."

"...!"

"먼저 끝내야 할 일이 있어."

#132화

눈을 치켜떴던 필립이, 이내 짧은 탄성을 흘렸다.

"남은 의뢰가 있으신 거군요."

"그래."

"오래 걸리시는 일입니까?"

"글쎄. 그것까진 잘 모르겠군."

"무슨 의뢰를 받으셨기에…. 그, 추궁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요."

필립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메브도 술잔을 내려놓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제안을 거절한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샬롯이 눈을 가늘게 뜨며 술을 홀짝이는 가운데, 한쪽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내뱉었다.

"우린 뱀파이어들을 죽이러 가고 있다."

"배, 뱀파이어요…? 마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루 사드에 놈들의 본거지가 있어."

이안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듣는 이들의 반응은 그렇지 못했다. 필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메브도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입을 뻐끔댄 필립이 외쳤다.

"제국 옆에 붙은, 그 루 사드요?"

"목소리가 아주 크고 좋군. 제국에서도 들리겠어."

"…죄송합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하, 하지만 그럴 만하지 않습니까. 루 사드는 그런 괴물들이 숨어 살 만한 곳이 아니니까요."

"숨어 사는 정도가 아니야. 놈들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 어쩌면 왕국 자체가 그것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을지도 몰라."

"허어…."

필립이 탄식하는 가운데, 술을 한 모금 마신 메브가 덧붙였다.

"그런 것들을 상대하러 가면서, 둘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냐?"

"경도 둘이서 이 산채에 쳐들어가셨잖소."

"...."

눈을 깜빡인 메브가, 그 둘이 어떻게 같냐는 듯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사이 침을 꼴깍 삼킨 필립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안 나리를 도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리?"

"흐음…."

메브가 침음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필립이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마족이라면 분명 타락자들과도 연관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제국의 타락자들과 이어진 또 다른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변방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데에 협조해 왔으리란 건 생각할 필요도 없겠고요. 지금의 전쟁을 가장 기뻐하고 있을 자들이 그들 아니겠습니까."

"…그래.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다만, 이안의 허락을 구하는 게 순서이겠지."

메브가 선선히 대답했다. 필립이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이안 나리께서 거절하실 이유가 있으시겠습니까? 우리가 합류한다면 그 마족들을 상대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텐데요. 안 그러십니까, 나리? …나리?"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필립이 비로소 이안을 돌아보았다.

"글쎄…."

턱을 긁적이던 이안이 중얼댔다.

이런 반응이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한 듯, 필립이 눈을 치켜떴다.

"아니, 이걸 고민하신다고요? 저는 그렇다 쳐도, 우리 나리께서 도움이 되지 않으실 리가 없잖습니까!"

"그래. 그건 당연하지."

"달리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는 거구나."

대답하는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메브가 말했다.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켠 메브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더는 묻지 않으마."

"아니, 나리…?"

필립이 멍하니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아끼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냥 이렇게 수긍하시면-"

"추궁이라도 하란 말이냐, 필립? 전우이자 은인인, 이안을?"

"그건… 옳은 말씀이십니다만… 아니…. 예… 옳으신 말씀이지요…"

필립이 더듬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술잔을 쥔 손이 초조하게 까딱였다.

'자기들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잘하네. 여전히.'

술을 마시며 피식댄 이안이, 이윽고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경의 동의를 먼저 받아야 할 사안이 있소. 미리 아셔야 할 부분도 있고."

필립이 홱 고개를 돌렸다. 안심한 듯 다시 창가에 느슨하게 기대던 샬롯도 미간을 좁혔다. 메브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자주 하던 말을 인용해야겠구나. 우선 들어 본 뒤에 답하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말했다.

"얼마 전까지, 내 일행은 둘이 아니라 셋이었소. 의뢰인이 동행하고 있었지."

그는 잠시 메브를 마주 보고는 덧붙였다.

"다만 그 의뢰인은, 인간이 아니었소."

"이안…?!"

샬롯이 탄식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다 말할 거냐는 듯한 눈빛. 필립의 시선이 어리둥절하게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

"인간이 아니라면… 저분 같은 이종족 이었단 말씀이십니까?"

"그 이상이었지."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너도 본 적 있다. 아겔 란에서, 나랑 같이."

"그게 무슨…. …설마?"

고개를 갸웃하던 필립의 눈이 이내 커졌다.

"그 흡혈 귀쟁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상자에서 꺼내줬던, 그 괴물이요?"

"그래. 이름은 테사이아고, 마족이었지."

"...."

샬롯이 낮게 그르렁대며 눈을 감는 가운데, 필립은 물론 메브의 입도 멍하니 벌어졌다.

전혀 상상치 못한 이야기인 게 당연했다. 그들이 아는 이안은, 어둠의 족속이라면 일단 날붙이부터 들이미는 성격이었으니까.

"사, 사악한 주문에 홀리기라도 하셨던 겁니까…?"

이윽고 필립이 더듬대며 물었다. 체념의 한숨을 내쉬던 샬롯이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에게 그런 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야 그렇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나리께서 그런 부정한 족속과-"

"흡혈 일족은 다른 종족을 납치해 뱀파이어로 만들고, 모종의 실험을 벌이는 것 같더군. 그 녀석은 거기서 도망친 실험체였다."

말을 자른 이안이, 빈 잔에 샬롯이 가져온 술을 따랐다. 정체 모를 과실주였다.

"붙잡혀서 다시 잡혀가던 걸, 너랑 내가 구했던 거야. 어쨌든, 그 녀석은 그 후로도 계속 쫓기고 있었다. 그리고 궁지에 몰리자, 내게 도움을 요청했지."

"그래서 나리는 그걸… 받아들이셨고요."

"그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마족의 의뢰를…."

"미끼로 쓴 거구나."

메브가 툭 끼어들었다. 잔에 술을 따르며, 그녀가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곁에 두면 다른 마족들이 제 발로 찾아오리라 여긴 거야. 그렇지?"

"정확하시군."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던 샬롯이, 이안의 대답에 홱 그를 돌아보았다.

술을 한 모금 마신 메브가 이안의 눈을 빤히 마주 보았다. 타락자와 마물을 일말의 자비 없이 베어 넘기는, 완고한 기사의 눈.

"그래서, 그 마족은 지금 어디에 있지?"

"빼앗겼소. 뱀파이어들에게. 아마 지금쯤 루 사드 어딘가에 있겠지."

"…이제야 말씀을 아끼신 이유를 알겠군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뇌까린 필립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저와 나리가 동행하면, 그 흡혈 귀쟁이까지 죽일 걸 염려하신 거예요. 이안 나리께선, 그 마족을 죽이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그 녀석은 다른 뱀파이어와는 다르다."

샬롯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필립을 가만히 응시한 그녀가, 메브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사람의 피를 마시지 않아. 그래서 약해 빠졌지.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친 적도 없다. 그저 갈증에 시달릴 뿐, 자신이 마족이라는 자각조차 없지. 오히려 그들을 증오해."

"그렇다 해도 마족이란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죠."

필립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내 목숨을 여러 번 구한 동료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지."

씹어 뱉는 샬롯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한 기세. 필립도 언제 실실댔냐는 듯, 건조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받은 의뢰는 흡혈 일족을 전부 죽여달란 거였소."

이안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둘의 긴장을 깨뜨렸다.

"그러니 난 의뢰를 우선할 거요. 테사이아의 생사는, 그다음 문제지.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귀하가 동행하셔도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겠지."

"뭐라고…? 이안, 진심이냐…?"

샬롯이 충격받은 듯 돌아보는 가운데, 이안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녀석이 끝내 살아남아 무사히 내 앞에 설지도 모를 일이오. 그땐 상황이 좀 달라지겠지. 경과 달리 나는, 샬롯의 말도 아예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게다가…."

잠시 말을 멈춘 이안이 술로 입술을 축였다. 메브의 가라앉은 녹색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테사이아는 내 의뢰인이자, 동시에 하인이기도 하지. 그 녀석의 생사여탈권은 내게 있다는 뜻이오."

잔을 내려놓은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때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건, 개입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으시겠소? 만약 내 결정이, 그 녀석을 살리는 것이라 하더라도?"

"...."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서로를 향한 시선만이 교차했다.

둘의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언제 굳었었냐는 듯 초조한 얼굴이 된 필립이 눈알을 굴렸다.

이윽고, 메브가 입을 열었다.

"너는 항상, 네 뜻을 관철하기 위해 나와 대립하는 걸 망설이지 않는구나, 이안. 최악의 가정이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이번엔 망설였소만."

이안의 말에, 메브의 입꼬리가 설핏 말려 올라갔다.

"그래서 고민했던 것이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대답했다.

"하지만 경이라면 결국, 내 뜻을 존중해 주실 것 같더군."

"하… 그래. 여전히 말로는 못 당하겠구나."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읊조린 메브가, 술잔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재고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족의 하수인이라 여기고 목을 베었겠지. 하지만 네게 검을 겨눌 수는 없구나. 오히려 이럴 이유가 있으리란 생각부터 들어. 거기다 방금 그런 말까지 듣고 나니, 달리 방도가 없구나."

그녀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한쪽 눈을 감을 수밖에. 이만하면 답이 되었느냐?"

이안이 슬쩍 미소 지었다.

"되었소."

메브가 술잔을 들며 덧붙였다.

"네 종자의 말처럼 정말 어두운 본성과 싸워 이긴 마족이 존재할 수 있는지, 나 역시 궁금하구나. 직접 확인하고 싶어. 그러니, 함께 가자꾸나."

"…그 부분은 사실 나도 아직 확신하진 못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이안은 마주 술잔을 들어, 그녀의 잔 앞으로 내밀었다.

"그럽시다."

미소 지은 메브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이안도 잔에 담긴 술을 남김 없이 들이켰다. 그런 둘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필립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두 분 나리께서 다시 동행하신다는 말씀이신 거지요?"

"그래. 루 사드까지만, 일단은."

잔을 내려놓으며 이안이 말했다. 메브도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 쉰 필립이, 이내 웃음 지었다.

"다행입니다. 방금 알았는데, 마족을 죽이니 살리니 하는 건 저에게 별로 큰 문제가 아니더군요. 그보단 두 분의 사이가 틀어지는 게 더 겁이 났어요."

"네 걱정이나 해라. 이제 뱀파이어 소굴로 함께 들어가는 거니까."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말씀 드렸겠습니까? 어차피 이미 충분히 목숨이 간당간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나리."

넉살 좋게 덧붙인 필립이, 이내 턱을 긁적였다.

"그보다… 계획을 전부 새로 짜야겠군요. 사실, 벨 론데에서도 거쳐가야 할 곳이 한 군데 있거든요."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

"물론이죠. 어차피 당장 생각할 부분은 아닙니다. 다시 함께하게 됐는데, 지금은 자축부터 해야죠."

필립이 빈 술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한 가운데, 이안의 시선이 창가의 샬롯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조금 어리둥절해 보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의자 들고 와라. 앉아."

"그래요, 어서 오십시오. 함께 다니게 됐으니, 이제 그냥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 샬롯."

필립이 언제 날을 세웠냐는 듯 덧붙였다. 눈을 깜빡인 샬롯이, 선선히 의자를 들고 다가왔다. 그녀가 빈 자리를 채우자, 필립이 재빨리 그녀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건배사 한 번 하시죠. 두 분 나리."

필립이 싱글댔다. 잔을 든 메브가 미소 지었다.

"함께하게 되어 좋구나. 이안. 그리고, 샬롯. 잘 해 보자."

그녀의 시선을 받은 샬롯이 슬쩍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모였다.

이안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이것까지 마시고 잡시다. 내일 일찍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참 너 다운 건배사로군."

웃음 지은 메브가 잔을 내밀었다. 네 개의 술잔이 테이블 중앙에서 맞부딪쳤다.

"그런데 나리, 북부의 상황은 언제쯤… 하하. 하긴, 오늘만 날이 아니지요. 예."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냄비와 빈 술잔만이 남았다. 등잔의 불빛이 잦아들고, 코 고는 소리와 숨소리만이 장내를 채웠다.

다음 날. 넷으로 늘어난 일행은, 모두가 아직 잠든 이른 아침에 조용히 산채를 떠났다.

도적 기사의 방에서 찾은 돈주머니들은 고스란히 테이블 위에 남겨둔 채였다.

#133화

내리막길이 조금씩 완만해졌다.

산 반대편이었다.

이안과 샬롯은 아직 피로가 덜 풀린 메브와 필립에게 마차를 양보하고, 대신 말에 탄 채 뒤를 따랐다.

산채의 마구에 있던 말들 중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두 마리였다.

메브와 필립은 산채로 쳐들어가기 전에 본래 타던 말들을 그냥 풀어 줬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말을 갈아탄 게 처음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든, 달라진 건 일행의 구성만이 아니었다.

"제가 고민을 좀 해 봤는데 말입니다, 나리."

이안이 마차 옆으로 다가서자, 마부석에 앉은 필립이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

그가 일행의 새 길잡이였다.

샬롯은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오히려 홀가분한 얼굴로 그에게 그 역할을 양보했다.

"이동 경로를 조금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필립이 들고 있던 널찍한 종이를 이안에게도 보이게 펼쳐 들며 덧붙였다.

꼬깃꼬깃하게 접힌 자국이 역력한 종이는, 변방 지역의 지도였다.

정확도에는 상당한 오차가 있어 보였지만, 어쨌건 국경은 물론 성과 마을, 산과 강 같은 지형이 상당히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안은 그 위에 이어진 검은 선과 크고 작은 글자들을 눈에 담았다.

그들의 이동 경로. 그 과정에서 겪은 사건과 얻은 정보의 요약들.

'열심히도 살았군.'

이안의 뇌리로 어젯밤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이안은 필립의 음모론을 그저 망상이라 치부하지 않았다.

타락자들의 각기 다른 비밀스러운 인맥들. 그 사이에서 모호하게나마 연관성을 찾아낸 직관을, 오히려 훌륭하다 여겼다.

이안이 보기에도 많은 음모의 배후에 원탁 의회가 개입되어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르케아스를 통해 들은, 그들의 방식 그대로였으니까.

'식상한 새끼들 같으니라고….'

어쨌거나 만약 정말 그렇다면, 메브와 필립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어둠의 가장자리에 발을 들인 셈이었다.

메브는 그저 자신이 겪은 비극의 근본적 원흉을 알아내고 싶을 뿐이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물러나지 않고 중심부를 향해 나아가게 되리라.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정확히 모르는 건, 사실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나리? 듣고 계십니까?"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떻게 바꾼다고?"

필립이 손가락을 지도의 한쪽에 얹어 현재 위치를 표시했다.

"일단 저희는 적당히 나아가다가, 관도가 없는 길로 빠질 겁니다. 이런 식으로요."

필립이 손가락을 아래로 움직였다.

"그래서?"

"어, 왜 빠지는 안 물으십니까?"

"별로 안 궁금하니까."

"아하… 그래도 굳이 말씀을 드리자면, 라 드린 남부는 분위기가 특히나 흉흉하다고 합니다. 볼튼이 벨 론데에게 넘어가서, 사실상 국경지대나 다름이 없거든요. 특히 이 근처는 얼마 전에 큰 전투가 있었다고 하는데-"

"안 궁금하다니까. 넘어가라."

필립이 당황한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짧게 헛기침한 그가 말을 이었다.

"루 사드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이렇게 남서쪽으로 계속 내려가는 거겠죠. 나리께서 가시던 경로도 이 방향이고요. 하지만 분명 중간중간 검문이나 강도를 여럿 마주치게 될 겁니다. 개중에는 우리 나리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도 있을지도 모르고요. 아시다시피, 저희가 사고를 좀 치고 다녔거든요."

씩 미소 지은 필립이, 이안의 건조한 눈빛을 보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거기다 루 사드 왕국은, 국경의 통행을 특히 철저하게 단속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북부 국경지대에 거의 전 병력을 배치했다더군요."

"드디어 영양가 있는 얘기로군. 이유도 알고 있나?"

"원정에 한차례 실패한 뒤론, 빗장을 걸어 잠갔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도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게요."

"흐음…."

그게 대외적인 이유란 말이지.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했다. 적당한 명분이 생겼으니, 내부를 외부와 완전히 차단한 채 그의 방문을 대비하고 있으리라.

'게임과 비슷한 상태라면 아마….'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지는 사이,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벨 론데에서 잠깐 제국을 경유해 이동하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이안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제국을?"

"예. 이런 식으로요. 제국 국경 쪽에는 병력이 전혀 없을 테니까요."

필립이 손가락을 벨 론데 남동쪽 국경을 넘어, 제국 땅을 지나쳐 루 사드의 동부로 움직였다.

"대신 거기엔 반대로, 제국의 국경 수비대가 순찰을 돌고 있을 텐데."

마차 반대편, 말 안장에 앉은 샬롯이 물었다. 이안의 시선에 그녀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변방 왕국들이야 제국 국경 근처에는 병력을 배치하지 않겠지. 하지만 제국은 아니다. 도적 떼나 도망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더 철저하게 감시하지. 신원 확인부터 한다면 별문제 없겠지만-"

"아주 훌륭한 질문입니다, 샬롯."

필립이 말을 자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대답할 맛이 나는 질문이 들어왔다는 눈빛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샬롯이 혀를 날름대며 입맛을 다셨다.

필립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제국이라도 모든 국경 지역을 지킬 수는 없죠. 소위 개구멍이라 불리는, 몰래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샛길들이 존재합니다."

"개구멍…?"

성기사의 종자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생각하며, 이안은 슬쩍 메브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안의 시선을 느낀 듯 머쓱하게 시선을 돌린 메브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전에 벨 론데를 지나다 피난민 몇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제국 국경을 넘나들던 암거래상이었어. 보답이라며 알려 줬지. 본래는 그 길을 통해… 제국 국경을 넘어갈 계획이었다…."

아, 그래. 애초에 공범이셨군.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하긴. 복수의 기사로 거듭나면서, 단죄의 기사이던 시절의 제약이 대부분 사라진 그녀였다.

대신 다른 극단적인 제약이 생기긴 했지만, 어쨌거나 언행의 자유로움만큼은 과거와 비할 바 아닐 터였다.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나리."

미소 지으며 말한 필립이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 길을 통해 우회하면, 며칠이 더 걸리겠지만 안전하게 루 사드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겁니다. 중간에 겪을 귀찮고 위험한 상황들을 생각하면, 이쪽이 더 빠를지도 모르죠. 게다가 그 뱀파이어들도, 나리가 동부를 통해 들어오리란 생각까진 하지 못할 테고요."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상을 벗어나는 건, 사실 아무래도 좋은 부분이었다. 뱀파이어들이 뭘 준비했건, 정면으로 하나하나 깨부수며 전진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벨 론데에서 들를 곳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냐?"

"예. 그 일정은 제가 알아서 조율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최대한 예상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대답하는 필립의 말투는 아주 여상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놀랍게도 믿음직스러웠다.

…역시 인간은 구를수록 성장하는 건가. 생각하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 시켜. 이제 길은 네가 알아서 해라. 굳이 보고가 하고 싶다면 경에게만 하고."

"예, 알겠습니다."

대답하며 지도를 접은 필립이, 은근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긴 여정이 될 겁니다, 나리."

"그렇겠지."

"여정의 지루함을 달래는 데에는 대화만 한 게 없지 않겠습니까?"

이안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또 시작이군.

"그래서?"

"북부의 이야기를 해 주시죠. 고대 거인 왕국의 망령 군단이 북부를 뒤덮었다는 게, 정말입니까?"

"말했을 텐데. 사실이라고."

"그리고요?"

"끝인데."

"...."

"뭐, 불만 있냐?"

"그럴리가요."

그제야 이안이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은 듯, 짧게 입맛을 다신 필립이 시선을 돌렸다.

놀랍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포기도 빨라졌군.

이안은 내심 피식댔다. 사실 북부에서 겪은 일을 딱히 비밀로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야기를 꺼낸 순간 이어질 온갖 종류의 질문과 낯간지러운 감탄, 칭송이 귀찮을 뿐이었다.

필립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간 건 그 직후였다.

"…왜 그렇게 보지?"

샬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필립이 입을 열었다.

"신기해서 말입니다. 이안 나리는 여간해선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주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꽤 오래 함께하신 것 같은데. 능력이 출중하신 모양이죠."

"뭘 원하는지는 알겠다만. 아첨하지 마라."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어쩌다 이안 나리와 동행하게 되신 건지요."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다만."

"놀라운 공통점이 있군요. 저도 이안 나리와의 첫 만남이 그리 좋지는 않았었거든요."

그래, 전략을 바꾼 거군.

이안은 낮게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건 필립의 이번 전략은 제법 잘 먹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샬롯이 슬쩍 혀를 날름대며 이안의 눈치를 살폈으니까.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 한 번씩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어떠십니까? 처음부터요. 어차피, 가는 동안 달리 할 일도 없잖아요?"

"흐음…."

샬롯이 낮은 숨소리를 흘렸다.

심드렁하게 육포를 찢어 입에 문 이안이 말의 속도를 늦췄다.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그녀가, 마부석 옆으로 나란히 다가갔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역시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이안 나리의 이야기를 듣게 된 건 우연이었습니다. 하루 머물기 위해 들른 작은 마을에서-"

기어코 시작하는군.

이안은 필립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입맛을 다셨다.

어쨌건 그를 계속 귀찮게 하는 것보단 저게 나았다.

"마차에 타겠느냐, 이안?"

옆에서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이 돌아보자, 그녀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나는 충분히 쉬었다만."

"하루씩 탑시다. 오늘은 경이 쭉 타고 가시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이안은 그게 필립의 이야기 때문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이쪽은 또 이쪽대로 추억 여행 중이시군….

고삐를 고쳐 쥔 이안이, 마차와 슬며시 거리를 벌렸다.

어느덧 라 드린 남부의 황량한 들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여정은 관도를 벗어난 뒤로도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썩은 낙엽을 밟으며 앙상한 잔가지와 맥없는 풀숲을 헤치고, 이끼가 낀 개울과 굽이진 계곡을 일상적으로 가로질렀다.

문명화된 지역을 조금만 벗어나도 볼 수 있는, 변방의 흔한 풍경들.

이정표로 삼은 산봉우리들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건 여정만이 아니었다.

"뱀파이어를 태울 정도의 화염 물결이라니…. 궁금하군요. 이안 나리께서 그렇게까지 대단한 마법을 부리시는 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때는 나도 직접 보진 못했다. 말했듯이, 그 모기 놈의 술수에 넘어가 정신을 잃었었으니까. 내가 직접 본 건, 한참 후의 일이야."

필립과 샬롯이 주고받는 일대기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둘은 뜻밖에도 꽤 대화가 잘 통했다.

필립이 잘 받아 주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어쨌든 샬롯도 자신이 모르던 이안의 이야기를 듣는 걸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한 번씩 필립의 대련 상대가 되어 주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눈을 가리고 싸웠다.

처음에는 자존심 상해하던 필립은, 그럼에도 샬롯을 제압할 수 없다는 걸 알고부터는 군말 없이 대련에 임했다.

강하면서도 유연한 그녀의 움직임은, 필립은 물론이고 메브에게도 신선한 교범이 되어 주었다.

"한참 후라면, 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장 할 얘긴 아니지. 이제 네 차례다."

"…이런 단호한 부분은 참 이안 나리와 닮으셨군요. 두 분이 왜 함께 다니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입맛을 다시던 필립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나리, 제가 어디까지 했었죠?"

"목 없는 기사와 싸운 이야기까지 했다, 필립."

메브가 대답했다. 차분한 말투와 달리, 필립과 마찬가지로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였다.

그녀는 대화에 좀처럼 끼는 일이 없다는 부분에선 이안과 같았지만.

그와 달리 둘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들었다. 특히 샬롯의 이야기는 숨을 죽인 채 경청했다.

먼저 묻지 않았을 뿐, 이안이 어떤 여정을 이어갔는지 내심 궁금해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군요. 그렇게, 미구엘이 우리와 함께-"

…정말 끝까지 계속할 심산이군.

안장에 앉아 육포를 우물대던 이안이 결국 한숨을 삼켰다.

안개가 깔린 음산한 숲을 심드렁하게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핏줄처럼 뻗은 나뭇가지들 너머, 한 무리의 새떼가 물결치듯 상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위로 자욱하게 뒤덮인 먹구름은, 오늘도 미동 없이 고요했다.

방향은 물론 시간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낮과 밤의 구별이 점점 더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 인근만 그런 건가. 아니면….'

변방의 중심부에 다다를수록 더 심해지는 걸까.

아래에서 찰박대는 물소리가 이어졌다. 제법 넓은 하천이었다. 중심부의 수심도 말의 무릎 정도까진 올 것 같았다.

어쩐지 안개가 짙더라니.

"여길 지나면 곧 산길로 접어들 겁니다. 우린 골짜기 사이로 지나칠 거고요. 여기선 안개 때문에 잘 안 보이지만요."

잠시 마차를 모는데 집중하던 필립이 이윽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안의 미간이, 문득 좁아졌다.

"...."

그의 시선이 하천 건너편, 안개가 한층 더 자욱해진 숲으로 향했다.

그를 돌아본 필립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조금 음산하긴 하지요. 그래도 여길 지나치면서 마물이나 도적 떼를 마주치는 게, 관도를 따라가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말이 국경지대지, 여긴 사실상 무법지대라고 들었으니까요. 여기 뭐가 있건, 한 번쯤 쓴맛을 보고 나면 더 덤벼들지 않겠죠."

"글쎄…."

이안이 읊조리는 사이, 하천을 건넌 마차가 숲으로 접어들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필립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비로소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강도나 마물을 신경 쓰고 계신 게 아니었군요."

#134화

안개 사이로 드러난 나무들의 형태가, 하천 건너편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곧게 뻗어야 할 줄기는 이리저리 휘고 굽어졌다. 앙상한 가지는 넓게 퍼져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빛을 완전히 가리려는 듯이.

"그것들도 신경 써야지. 이런 곳에 있는 놈들이, 평범할 리 없으니까."

나지막이 내뱉으며,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천 너머의 풍경이 이상하게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감각이 미세하게 교란되고 어긋나고 있었다.

사방에 자욱한 오염된 마력의 영향일 터였다. 보통 사람은 몇 분만 더 지나도, 이 안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리라.

"타락자라도 숨어 사는 걸까?"

옆에 벗어 뒀던 투구를 집어 들며, 메브가 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마법이나 주문 회로 같은 건 느껴지지 않소. 오염된 마력뿐이지."

"…그렇다면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든 것이겠군."

"아마도. 내가 볼 땐 이미 물든 정도를 넘어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샬롯을 일별한 이안이 말을 맺었다.

"…마경이 완성되기 직전 같은데."

"마… 마경이요…? 하지만 그러려면 이 일대가 광기에 완전히 침식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눈을 치켜뜬 필립이 더듬댔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게 아니고서야, 소문이 나기도 전에 마경이 만들어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요…."

"광기가 그만큼 빠르게 번진 모양이지. 잊었나 본데, 변방은 지금 전쟁 중이다."

덤덤하게 내뱉으며, 이안이 필립을 내려다보았다.

"사방이 죽음과 광기로 가득 차 있단 얘기지."

"그, 그런…."

꺄아아악-

멀리서 터져 나온 괴성에 필립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였다.

필립이 어깨를 들썩이는 가운데, 비명이 메아리치듯 멀리까지 번져나갔다. 신호를 주고받는 것처럼 이어지던 비명이 곧 뚝 끊어졌다.

불길한 적막.

"…이게 뭐건, 우릴 그냥 보내 주진 않겠군요."

"그렇겠지."

이안이 턱짓했다.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마차를 멈춰 세웠다. 이안이 말을 그 옆으로 바짝 붙였다.

"받으십시오."

필립이 재빨리 말을 고정할 끈을 던졌다. 반대쪽으로 다가온 샬롯도, 자신이 탄 말을 옆에 이어 붙였다.

엉성한 사두 마차 같은 형태가 순식간에 완성됐다. 말과 마차가 단단하게 이어진 것을 확인하며,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말을 지켜라. 전부 지키기 힘들다면, 최소한 둘이라도 지켜."

"가능하면 전부 지켜보겠다."

샬롯이 송곳니 검을 뽑아 들었다. 이 말들 위를 자유자재로 타 넘으며 싸울 수 있는 건, 이안 이외에는 그녀밖에 없었다.

"너도 샬롯을 도와 마차를 지켜라, 필립."

마차에서 내린 메브가 덧붙였다. 그녀는 투구를 고정하며, 안장에서 내리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망령의 비명이었나?"

"내가 듣기론 육성 같았소."

"다행이군."

비로소 안면 가리개를 내린 메브가, 몸을 돌려 마차 반대편으로 향했다.

이안은 그녀의 말에 담긴 속뜻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메브는 이제 복수의 대상이 아닌 것들에게는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칼을 잘 다루는 전투 기사에 불과했다.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적은 상대할 방법이 없으리라.

'그런 것들은 전부 내 차지겠군….'

생각하는 그때, 나무 바스락대는 소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걸 바람 소리라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산기슭을 타고 뭔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바람 소리는 아까 비명이 그랬듯,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안은 안개 너머로 일렁이기 시작한 불그스름한 안광들을 놓치지 않았다.

"탐색이라니…."

읊조리는 이안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아른거렸다. 샬롯을 돌아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예고 없이 달려 나갔다.

쉬하악-!

그의 신형이 쏜살같이 숲을 내달렸다. 고여 있던 안개가 그의 전신에 맺힌 바람에 밀려나 휘몰아치고, 안광 하나가 삽시에 가까워졌다.

"끼아악-?!"

놈이 당황한 듯 소리쳤다.

소녀 같은 목소리와 달리 아주 역겹게 생긴 마물이었다.

짙은 녹색의 피부. 단춧구멍 같은 눈꺼풀과 충혈된 붉은 눈. 진흙을 대충 뭉친 것 같은 코. 기포가 맺힌 길쭉한 입술 사이로는 깨진 유리 조각 같은 이빨이 돋아 있었다.

변방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고블린과 아주 흡사한 외모였다.

하지만 이놈의 신장은 놈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컸다. 짧은 다리에 비해 괴상할 정도로 발달한 상체와 기다란 팔까지.

게임에서 본 비슷한 몹을 떠올린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이놈들, 설마…?'

그 와중에도 그의 육체는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수행해 냈다.

콰직-!

발작적으로 팔을 치켜드는 놈의 목덜미에 검이 깊숙이 박혔다. 일반적인 고블린과 다른 검붉은 체액.

"끼… 아악-!"

놈이 피거품 맺힌 신음을 토하며 팔을 뻗었다. 이안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번쩍였다.

펑-

진공 폭발이 놈의 목덜미와 가슴 한쪽을 찢어발기며 소리 없이 터져 나왔다.

"그르륵- 그륵-!"

튕겨 나간 놈이 바닥을 구르며 가래 끓는 듯한 숨소리를 냈다. 이안은 쓰러져 바둥대는 놈에게 달려들어, 다시 검을 내리찍었다.

머리를 몇 차례 찍히고 나서야, 놈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고블린의 그것과 같은 역한 누린내. 붉은 체액과 질긴 생명력.

'이것들, 정말 혼혈 고블린인가…?'

아직 나올 때가 아닐 텐데?

다시 한번 같은 의문을 떠올리던 이안이, 불현듯 바닥을 굴렀다.

퍼엉-!

날아든 불덩이가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폭발했다. 맞았다 하더라도 좀 뜨거울 뿐, 타 죽지는 않았을 것 같은 화력이었다.

'마법을 쓰는 걸 보면 맞는 것도 같은데…. 마법은 또 왜 이렇게 엉성해?'

바닥을 구른 이안이, 저만치의 나무 아래에서 손을 내뻗고 있는 고블린을 눈에 담았다.

이번에는 머리가 거대한 놈이었다.

팔다리는 방금 죽인 놈보다 훨씬 짧았다. 그래도 일반적인 고블린보다 크긴 했지만, 머리 크기를 생각하면 균형이 맞지 않았다.

'생긴 건 왜 이렇게 제멋대로고.'

빠각-!

생각하며 달려간 이안이, 놈의 머리통을 걷어차 넘어뜨렸다. 당황한 듯 비명도 지르지 못한 놈의 몸 위로, 이안이 무릎을 내리찍었다.

"끼아아악-!"

놈이 비로소 아이 같은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그대로 머리통 한복판에 떨어진 검날에 비로소 조용해졌다. 이안은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뇌수와 체액이 터져 나올 때까지 몇 번 더 검을 내리찍었다.

끼아악-! 끼악-!

이제야 먼저 습격당했음을 깨달은 듯, 사방에서 비명이 번졌다.

'이 정도면 혼혈보다는 돌연변이에 가까운 거 아닌가.'

이안은 곧바로 다시 몸을 날렸다.

오른쪽 반신만 유독 거대하게 발달한 놈을 향해 달려가는 이안의 뇌리로, 게임에서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혼혈 고블린과 변종 코볼트는, 마경 천지가 된 3챕터의 변방 지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마물이었다.

흔하다고 해서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마경 안에선 특히.

놈들은 덩치에 걸맞게 호전적이고, 무리를 형성해서 움직였다. 몇몇 놈들은 마법을 다루기까지 했다.

한 놈을 건드리면 순식간에 수십 마리가 몰려들어서, 결국은 게임 오버 화면을 봐야 했다.

마경 어딘가에 존재하는 우두머리를 죽여 달라는 퀘스트는, 당연히 클리어하지 못했었다.

그때의 그는, 놈들을 마경 밖으로 유인해 잡는 게 고작이었다.

꽈앙-!

하지만 지금 이 혼혈 고블린들은 그때보다 훨씬 약했다. 그가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그랬다.

거기다 외형적으로도 엉망진창이었다.

혼혈 고블린이 내리친 주먹을 어렵지 않게 피한 이안은, 잠시 놈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오른쪽 반신만 비대하게 발달한 놈은, 균형이 잘 맞지 않는지 비척대며 주먹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주먹을 휘두르는 자세도 아주 엉성했다.

'아직 공허의 광기에 완전히 물들지 않아서 이런 건가…? 그럼, 여기가 이놈들의 시발점일지도.'

아직 마경도 완성되지 않은 시점이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은 비로소 검을 휘둘렀다. 엉거주춤 자세를 다잡던 혼혈 고블린의 옆얼굴로 검이 틀어박혔다.

펑-

이어진 진공 폭발이, 놈의 머리를 아래턱 일부만 남기고 완전히 날려 버렸다.

단면에서 체액을 토해내며 주저앉는 놈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안은 마차 쪽을 돌아보았다.

'…사람이 늘어나니까, 뒤가 든든하긴 하네.'

메브는 그와 마찬가지로 고블린들에게 돌격한 듯 보이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몇몇 놈들은 샬롯이 상대하고 있었다.

필립도 한 마리의 어깻죽지에 검을 찔러 넣고, 방패 옆면으로 머리를 마구 후려쳐 으깨는 중이었다.

당분간 마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광경.

타탓-

다시 내달리는 이안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그는 한 놈 한 놈 확실하게 죽이는 대신, 달리던 속도 그대로 힘껏 일격을 먹이고는 그대로 다시 달려 나갔다.

'어쨌거나 이것들은 고블린이니까….'

그의 시선은 주춤대며 마차로 다가가는, 아직 본연의 습성을 다 버리지 못한 혼혈 고블린들의 뒤편을 훑고 있었다.

'…지휘하는 놈이 있겠지.'

뒤틀린 숲을 내달리며 사방을 오가던 그의 시선이, 이윽고 산비탈로 이어진 나무 사이에서 멈췄다.

덩치가 커다란 고블린 여럿을 근처에 둔, 유독 균형 잡힌 외형을 가진 고블린을 마침내 발견한 것이다.

길고 우람한 팔다리. 흉측하지만 대칭이 맞는 얼굴. 결정적으로, 꽤 그럴듯한 검과 방패까지 들고 있었다.

'…족장은 아니군. 부족장인가.'

아쉽네,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이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부족장이 그를 돌아보았다.

놈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붉은 눈동자에 자주색이 번져나갔다.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뒤틀린 혼종의 제단.

'제단…?'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진 것과, 놈이 검을 그를 향해 내뻗은 건 거의 동시였다.

***

지금까지와는 다른 굵직한 포효화 함께, 안개가 물결칠 정도의 충격파가 숲 너머에서 터져 나왔다.

"...?!"

고블린 한 마리와 뒤엉켜 놈의 옆구리에 검을 찔러 넣던 필립이 눈을 치켜떴다. 고블린의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신음이 뚝 끊어졌다. 동시에 방패 위를 짓누르던 압력이 사라졌다.

필립은 충격파가 터져 나온 방향을 응시하는 고블린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놈의 붉은 눈 한복판에 자주색이 잉크처럼 번지고 있었다.

"끼아악-!"

곧이어 소리친 놈이 발작적으로 필립을 밀쳐냈다. 검날이 속을 헤집으며 빠져나가서, 놈의 옆구리에 체액이 철철 흘러내렸다.

타타탓-

하지만 놈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그대로 달려나갔다. 밀려난 필립이 자세를 다잡기도 전이었다.

"엥…?"

뒤늦게 고개를 기울인 필립이,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돌렸다. 안개를 헤치고 달려가는 고블린들의 모습이 유령처럼 아른거렸다.

"이안 나리께서… 뭔가 하셨군요."

붉은 체액을 뒤집어쓴 채 우두커니 선 샬롯에게 다가간 필립이 이윽고 내뱉었다. 샬롯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에 묻은 피를 탁 털어냈다.

필립은 마차 주위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눈에 담았다.

그가 세 마리 째의 고블린을 겨우 상대하는 동안, 샬롯은 그 두 배가 넘게 쓰러뜨렸다.

물론 필립이 주목한 건 놈들의 숫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피부색이나 면상은 고블린 같은데….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들어 변이된 걸까요."

"글쎄. 잘 모르겠군."

입에 들어간 체액을 탁 뱉으며, 샬롯이 덧붙였다.

"고블린 같은 냄새가 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피 맛은…."

"피 맛은, 뭐요?"

필립이 되물은 그때였다.

콰아아-!

안개를 뚫고 샛노란 불기둥이 일순간 솟구쳤다. 아까 충격파가 터져 나온 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고블린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진 것도 잠시.

"...?!"

뒤이어 번진 불길이 물결처럼 넘실댔다. 몇십 미터는 떨어진 거리임에도 열기가 전해졌다. 멍하니 바라보던 필립이 뒤늦게 탄식했다.

"정말이지… 대단하군요…."

이안이 펼친 마법이 분명했다.

이만한 재주가 있다면 굳이 용병으로 살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당연한 생각이 새삼스레 뒤를 이었다.

아무리 마력의 황혼기라도, 어디서든 한 자리 차지하고 눌러 앉는 건 일도 아니리라.

심지어 이안은 검까지 잘 다뤘다.

옛날 이야기에나 등장할 법한 마검사인 것이다.

바꿔 말하면, 두 분야에 모두 두각을 드러내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였다.

그걸 해내고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신, 변방의 산속에서 마물과 맞서는 삶을 택한 이안에 대한 경외심이 새삼 차올랐다.

"역시, 이안이 괴물들을 불러들일 방법을 찾은 거였군…."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필립이 비로소 뒤를 돌아 보았다. 전신이 붉게 물든 그녀가 마차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리,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그래. 내 피가 아니니 염려 말거라."

대답하며 안면 가리개를 올린 메브가, 불길이 잦아드는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고블린들의 비명은 어느새 전혀 들리지 않았다.

숲에 불이 옮겨 붙지도 않았다.

나무들은 그저 매캐한 연기만 자욱하게 뿜어댔다. 순식간에 다시 밀려들기 시작한 안개가, 연기와 뒤섞여 사방을 잿빛으로 물들였다.

필립이 중얼댔다.

"끝난… 걸까요."

"글쎄. 내가 아는 이안이라면 마물들의 소굴을 찾으러 갔을 것 같구나."

"그럼, 따라갈 준비를 하시죠."

필립이 메브와 샬롯을 돌아보았다.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함께 고개를 끄덕이려던 샬롯이 멈칫했다.

"…이안이 내게 마차를 맡겼다. 여긴 내가 지킬 테니, 둘이 가라."

"그래 준다면-"

"아주 훌륭한 책임감이다만."

메브의 말을 덤덤한 목소리가 잘랐다. 일행의 고개가 동시에 잿빛 안개 쪽으로 돌아갔다.

낮은 기침을 흘리며, 이안이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

#135화

재를 뒤집어쓴 몰골인 이안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인 필립이, 이윽고 내뱉었다.

"나리께서 웬일로 돌아오셨습니까…?"

"그럼 저 산길을 뛰어가리?"

"아,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내뱉자, 필립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가 마차 옆으로 다가가며 덧붙였다.

"마차를 끌고 올라가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말을 다 끌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시오?"

이안의 시선에,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지키기에 그게 더 좋겠지. 준비하거라, 필립."

"넵…!"

대답한 필립이 안장을 꺼내려 마차에 올라타는 사이.

이안은 비로소 숨을 고르며 샬롯이 건넨 가죽 수통을 받아들었다. 물을 마시는 그를 지켜보던 메브가 물었다.

"어떻게 놈들을 불러모은 것이냐?"

"이것들이 고블린이란 걸 알고 나선, 지휘하는 놈이 어딘가 있으리라 여겼소. 놈을 찾으니 죄다 불러모으더군."

"정말 고블린이 맞았구나. 설마 했건만…."

탄식한 메브가 미간을 찌푸리며 시체들을 돌아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마법을 펼치는 놈도 있었어. 아무리 변이되었다 한들, 고블린이 마법이라니…."

"그 정도로 놀라실 것도 없소. 우두머리는 공허의 힘까지 다루는 것 같았으니까."

"…혼돈을 말하는 것이냐?"

"내가 보기엔 그랬소. 아주 조금이었지만."

"그런 건 타락자나 공허의 괴물들이나 다룰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요."

안장을 꺼내고 말을 묶은 줄을 풀던 필립이 덧붙였다.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재를 털어내면서,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공허의 신이라도 섬기는 놈인 모양이지. 아니면 여기 어딘가에 공허의 균열이라도 생겼거나."

"마물이 신을 섬길 것 같진 않고… 정말 어딘가에 균열이 생긴 것인가…."

메브가 굳은 낯으로 읊조렸다. 거의 완성 직전인 마경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아겔 란에서 비슷한 일을 경험했던 그녀였다.

"어쩌면 균열이 생겨나면서 침식이 더 빨라진 건지도 모르겠군. 이대로 마경이 열리고 균열을 뚫고 무언가 넘어오기라도 한다면…."

이 일대는 공허의 괴물이 거니는 생지옥이 되리라. 놈들이 마경 밖으로 나올 수는 없겠지만, 반대로 마경이 조금씩 넓어질 수도 있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이안이 내뱉었다. 메브의 시선에, 그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 마경은 오늘로 닫힐 테니까."

"…그래. 옳은 말이군."

"어떻게 닫는다는 거지?"

불쑥 물은 건 샬롯이었다.

뭐 이런 질문을. 생각하며 미간을 설핏 좁혔던 이안은, 평소보다 맹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서야 입맛을 다셨다.

생각해 보니, 샬롯은 마경을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버림받은 땅에서 비슷한 일을 겪긴 했었지만. 거긴 온전한 마경이라기엔 여러모로 손색이 있었다.

아마 그를 만나기 전에도 마경에 발을 들일 일은 없었을 테고.

"광기에 물들어서든 타락자가 인공적으로 만들어 냈든. 모든 마경에는 근원이 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근원…?"

"그래. 법칙과 현상을 뒤트는 구심점이지. 그건 물건일 수도, 생명체일 수도 있어. 뭐든 될 수 있다. 나는 그걸 핵이라 부르지."

덤덤한 이안의 목소리와 달리, 샬롯은 연신 탄식을 흘렸다.

사실 이게 보편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대부분에게 공허나 마경, 타락자 따위는, 그저 막연한 두려움을 선사하는 이야기일 뿐이니까.

그 실체를 일부나마 아는 이들은 그걸 연구하거나, 직접 경험하고도 살아남은 극소수.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진 건, 그 중에서도 다시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안은 그 소수에 포함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게임으로도 마경을 여럿 경험했을 뿐 아니라, 공략 글을 통해 얻은 지식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현대인인 그에게는 꽤 뻔한 설정이었다.

"그 핵을 파괴하면 되는 거군."

"그래. 그런다고 침식당했던 흔적까지 완전히 사라지진 않지만, 아예 다른 세상에 되어 버리는 것보단 그게 낫겠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무책임한 어조로 덧붙였다.

"여긴 아직 완전한 마경이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침식의 흔적도 사라지게 될 거다. 아마도."

"그렇군…. 그럼 우린 그나마 운이 좋은 거군. 마경이 완전히 열린 상태였다면, 그만큼 닫기도 어려워졌을 테니까. 그렇지?"

탄식한 샬롯이 물었다. 역시, 배움이 빠른 녀석이군.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뱉었다.

"그래. 그래서 방치된 마경이 그렇게 많은 거다."

"…교단에서도 최선을 다하고는 있을 것이다. 다만 늘 손이 부족할 수밖에 없겠지. 실패는 곧 죽음이며, 성공하더라도 많은 희생이 불가피할 테니."

메브가 변호하듯 첨언했다. 당연한 말이기도 했다. 아무리 제국과 교단이라 하더라도, 출혈을 무한대로 감수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범위를 넓히지 않고 외부에 피해도 주지 않는, 그러면서도 몇 차례 정화에 실패한 마경은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샬롯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럼, 검은 벽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거겠군."

"이론상으로는. 실제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그 너머가 어떻게 됐는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으니."

"지금은 멀리 있는 검은 벽이 아니라, 이 마경을 해결하는 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필립이 말 두 마리를 이끌고 오며 말했다. 한 손의 고삐를 메브에게, 반대쪽 고삐를 이안에게 내밀며 그가 덧붙였다.

"이안 나리께서 우두머리를 죽이셨을 테니, 이제 놈들의 소굴에서 핵만 찾아내면 되겠군요."

"내가 죽인 건 부족장이야. 족장이 아니라."

이안이 안장 위로 훌쩍 올라타며 말했다. 필립의 미간이 구겨졌다.

"고블린 주제에 부족장까지 있다고요…?"

"그래. 족장의 직속 하수인인 거겠지. 타락자들과 똑같은 짓거릴 하는 거다."

덤덤하게 내뱉은 이안이, 말에 올라탄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런 놈들이 더 있을 수도 있소."

"몇 놈이든 상관없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잔챙이 놈들도 바글대고 있을 텐데요."

나머지 두 마리 말을 끌고 온 필립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다들 아시다시피, 고블린들은 번식력이 엄청난 놈들이잖습니까."

"그렇겠지."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족장을 죽이는 건, 그가 받은 퀘스트의 부가적인 목표였다. 주목표는 부락 어딘가에 위치한 제단을 파괴하는 거였다.

그가 일행에게 돌아온 건, 사실 그래서였다. 제단을 파괴하려면 부락의 거의 모든 혼혈 고블린과 싸워야 할 테니까. 백 단위의 고블린들을 상대해야 할 가능성도 차고 넘쳤다.

남은 마력과 혼돈력을 다 갈아 넣는다면 어떻게든 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든든한 동료들을 두고 그럴 필요는 없었다.

심지어 이들은 이안이 믿고 등을 맡길 수 있을 정도의 강자들이었다. 최약체인 필립조차도, 어디서든 빠질 실력은 아니었다.

'귀찮은 부분을 다 떠넘기기에도 좋겠고.'

생각하는 사이, 말에 올라타 필립을 돌아본 샬롯이 핀잔했다.

"겁나면 빠져라. 뒤에서 말 고삐나 잡고 있어."

필립이 눈을 부릅떴다.

"겁이라니요. 숫자에는 장사 없단 말도 있으니 조심하잔 얘기였을 뿐입니다. 겁은 무슨…."

"넌 어차피 말을 지키는 역할이다. 필립."

덧붙인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샬롯, 너도."

"나도…? 또?"

"저 녀석 혼자서 네 마리를 다 지킬 수 있을 것 같진 않거든. 난 걷기 싫고."

말문이 막힌 듯 샬롯이 쩍 입맛을 다셨다. 필립이 실실댔다.

"앞으로도 우리 둘이 쭉 한 조로 묶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샬롯. 이참에 호흡을 잘 맞춰 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말보단 네가 당하지 않게 하려고 날 붙이는 것 같다만…."

"그럴리가요. 방금도 제가 짐이 되진 않았잖습니까."

언제 웃었냐는 듯 정색하는 필립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덩그러니 남겨진 마차를 돌아보았다.

메브가 앞서 나아간 건 그때였다.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출발하고, 왜 아무 대답도 없냐며 따져 묻는 필립이 그 뒤를 따랐다.

"…갔다 오면 다 부서져 있을 것 같은데."

입맛을 다시며 중얼댄 이안도, 이윽고 안개 덮인 숲으로 말을 몰았다.

***

일행은 곧 이안이 전투를 벌인 지역을 지나쳤다. 일대가 온통 숯덩이처럼 변한 터라,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매캐한 탄내를 풍기는 시체들.

뒤틀린 나무들에서는, 불길이 완전히 잦아든 지금도 연기가 스멀스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살아남은 놈이 있군. 흔적이 저 위로 이어진다."

그 사이에서 발자국을 찾아낸 샬롯이 앞장서 말을 몰았다.

낮게 기침하면서도 연신 주위를 둘러보던 필립이 뒤를 따르며 내뱉었다.

"전보다 더 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나리. 제가 마법에는 문외한이긴 합니다만, 이만하면 고위 마법사라 불리셔도 손색이 없는 것 아닙니까?"

이안은 낮게 코웃음만 쳤다.

고위 마법사는 무슨.

여러 일들이 있었고 능력치도 높아진 건 사실이었지만.

본질적인 부분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스킬 트리는 엉망이고, 마법의 위력도 부족했다. 최대 마력량도 그대로였다. 게다가 마법을 더 빠르게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건, 마력을 소모하는 속도도 빨라졌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그는, 이 싸움으로 가진 마력을 삼 분의 일 가까이 소진했다. 회복하려면 종일 명상을 해야 할 양이었다.

'오래 싸우려면 고위 마법을 자제해야 하는 마법사라니….'

하긴. 생각해 보면, 게임의 마법사는 애초에 강한 화력으로 단시간에 전투를 끝내야 하는 직업이었다.

그의 전투가 길어질 때가 많은 건, 결국 그가 캐릭터를 잘못 키워서였다.

'돌고 돌아 내 탓이네. 시발….'

어느새 산 한복판으로 접어들었다. 주위는 새벽처럼 어슴푸레했다. 하늘을 가리듯 드리운 나뭇가지들이 일행을 음산하게 굽어살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것 같군."

샬롯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일행의 시선에 그녀가 덧붙였다.

"우릴 지켜보는 놈들이 있다. 저 위로 달려가는 놈들은 훨씬 더 많군."

"…어쩐지, 기분이 영 꺼림칙하다 싶었습니다."

필립이 혀를 찼다. 샬롯의 감각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눈을 가리고도 필립을 상대하는 그녀였다.

"모든 고블린들이 집결 중인 거군."

메브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몰려들었을 것들이오."

몇 분 지나지 않아 비탈길이 한층 완만해졌다. 안개 저 너머로 건물들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사람이 지은 건물 같은데요."

"고블린들이 점령한 거겠지."

내뱉은 이안이 훌쩍 말에서 내렸다.

"준비들 하시오."

그는 자신과 거의 동시에 내린 샬롯에게 고삐를 던져 줬다. 샬롯이 근처의 나무로 몸을 돌렸다.

"말들을 묶을 동안, 호위해 주십시오."

메브의 말을 건네 받은 필립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안면 가리개를 내린 메브가, 이안의 곁으로 다가 섰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을 수도 있겠구나."

"우두머리가 사라지면, 좀 더 상대하기 편하지 않겠소?"

"옳은 말이다만. 괜찮겠느냐? 아직 앞선 전투의 피로도 다 풀리지 않았을 텐데."

"아직은 괜찮소. 게다가 경이 내 뒤를 지켜주실 거잖소."

"그건 염려 말거라."

그때, 이안의 시선이 문득 돌아갔다. 부락으로 이어진 길목의 안개가, 낮게 깔리며 밀려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수십 마리의 혼혈 고블린들이 드러났다. 생김새는 여전히 가지각색이었지만, 분위기만큼은 훨씬 흉흉했다.

놈들의 후미, 유독 거대한 덩치의 고블린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 직후였다.

오르막길 중턱에 서 있긴 했지만, 그게 아니라도 다른 놈들보다 머리 두어 개는 더 커 보였다.

치렁치렁하게 걸친 사슬 방어구.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날이 넓적한 대검을 한 손으로 들었고, 고블린보다는 트롤이나 오거를 연상케 하는 얼굴 위로는 뼈를 엮어 만든 왕관까지 쓴 채였다.

새끼, 왕이라 이거지.

낮게 실소한 것과 달리, 이안의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안개는 더 밀려나지 않았지만, 신경이 곤두서면서 그 너머까지 우글대는 고블린들의 기척과 숨소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진짜 백 마리도 넘네….'

침식이 시작된 지 길어야 몇 달 밖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그야말로 징그러운 번식력이었다.

족장이 손에 든 대검을 겨누듯 내민 건 그때였다. 이안을 죽일 듯 노려보며, 족장이 뾰족한 이가 가득 돋은 이를 달싹였다.

"훌… 륭한… 씨앗…!"

"...?"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곁에 선 메브가 그의 생각과 똑같은 말을 읊조렸다.

"말을… 한다고…?"

이안이 알기론, 언데드를 제외하곤 말을 하는 마물은 마족 뿐이었다. 그건 결국, 저놈이 마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존재란 뜻이었다.

마족 고블린이라니.

"다 됐습니다, 나리…!"

뒤에서 필립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이안은 대답 대신 족장을 노려 보았다. 놈이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훌륭한- 씨- 앗-!"

"캬아아아아-!"

"키아아아-!"

동시에 고블린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높은 데시벨의 비명이 고막을 뚫고 머릿속을 후벼 팠다. 메브 조차 일순간 굳어지고, 감각이 예민한 샬롯은 미간을 찌푸린 채 비틀댈 정도였다.

다음 순간, 혼혈 고블린들이 밀려들었다.

#136화

일행은 아무도 당황하지 않았다.

메브는 검을 뽑아 들며 몸을 비스듬하게 곧추세웠고, 샬롯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도 전투 도끼를 빙빙 돌리며 자세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검을 뽑아 든 필립도 방패를 앞세우고 자세를 낮춘 채, 달려오는 혼혈 고블린들을 눈에 담았다. 그와 샬롯 사이, 나무 둥치에 묶인 말들만이 콧김을 뿜으며 두려움을 표출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안은 오히려 놈들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 키아악, 순식간에 가까워진 고블린 몇 마리가 거의 온몸을 내던지듯 그를 향해 팔을 내뻗으며 달려들었다.

푸화악-!

이안의 주위로 돌개바람이 휘몰아친 건 그 직후였다.

한 방울의 혼돈력을 더한 휘몰아치는 방벽. 하지만 몸을 날리던 놈들을 튕겨 내기엔 그거면 충분했다.

달려오다 엉겁결에 휘말린 몇 마리도 튕겨 나가, 뒤따르던 놈들과 부딪혀 뒤엉켰다.

콰직, 땅에 떨어진 놈의 머리 위로 이안의 검이 내리 찍혔다. 그대로 몸을 옆으로 돌리며 검을 뽑은 이안이, 일어서려는 옆 놈의 찌그러진 머리통을 다시 내리찍었다.

정수리에 검날이 박힌 놈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아무리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들어 변이된 놈들이라도, 머리가 깨지고도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검날을 뽑으며 다시 내달리려던 이안이 멈칫했다. 재빠른 몇 놈이 다시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건 기형적으로 긴 팔을 거미처럼 내뻗은 놈이었다.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왜 이래? 이 새끼들.'

그의 왼팔이 한순간 출렁였다.

손을 떠난 투척용 단검이 팔 긴 고블린의 얼굴 한복판에 박혔다.

고개만 뒤로 튕기듯 꺾인 놈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뒤따르던 다른 혼혈 고블린들이 바들대는 놈을 짓밟으며 내달렸다.

푸확, 어느새 완성된 휘몰아치는 방벽이 다가서는 놈들을 또다시 밀쳐냈다.

하지만 드러난 빈 공간으로 달려 나온 이안의 미간은 여전히 좁아진 채였다.

'왜 이렇게들 저돌적이지.'

아무리 소굴이 코앞이라 눈이 뒤집혔다지만.

이안의 뇌리로 아까 전, 모조리 태워 죽였던 고블린들의 움직임이 스쳐 지나갔다. 우두머리가 공격받는 와중에도, 몇 놈을 제외하곤 주위를 돌며 빈틈을 노렸었다.

하지만 지금 바닥을 나뒹구는 이놈들은 전혀 딴판이었다. 숫제 죽으려고 작정한 놈들처럼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족장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건가.

이유 따윈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적당히 밀쳐내고 길을 뚫어, 족장을 향해 달려가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냥 불 한 번 질러 버려?'

그래도 불나방처럼 달려들 것 같은데. 한 놈을 더 후려치며, 이안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놈들의 화염 저항력은 보기보다 높았다. 아까 전의 전투에서 의도한 것보다 마력을 많이 소모한 것도, 이것들이 쉽게 타죽지 않아서였다.

하위 마법들로 틈을 만들고 찔러 죽이는 게, 몸은 더 수고로워도 훨씬 가성비가 좋았다. 이젠 체력도 어지간한 기사 못지않은 수준이지 않은가.

게다가 족장은 말까지 하는 놈이었다. 혼돈력을 다룰 게 분명한 만큼, 무슨 개 같은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었다. 어지간하면 놈을 상대하기 위해 마력에 여유를 두는 편이 좋았다.

퍼엉-

어깨로 검날을 받으며 밀고 들어오려던 놈이, 진공 폭발에 어깻죽지가 통째로 터져 나갔다.

체액이 연기처럼 흩날리는 와중에, 이안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두 마리가 더 쪼개졌다. 마지막 한 마리의 목덜미를 가슴팍까지 썰어 버린 순간, 효과를 다한 바람 칼날이 잦아들었다.

이안이 축 늘어지는 놈을 발로 차 떨쳐내는 사이, 좌우에서 동시에 두 놈이 몸을 던졌다.

혀를 찬 이안은 휘몰아치는 방벽을 시전하면서 바닥을 굴렀다.

몸을 일으키는 찰나의 순간, 저 뒤편 일행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눈에 들어왔다.

메브는 고블린 하나가 던진 화염구를 그냥 맞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뒤, 한 놈을 도끼로 내리찍은 샬롯은 반대쪽 손으로 다른 한 놈의 목을 붙잡아 땅에 내리찍고 있었다.

필립도 방어를 굳건히 한 채 한 놈을 상대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검을 쥔 장갑 위로 은은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검날이 빛을 머금고 아른거렸다. 새끼, 유물이라도 하나 얻었나 보네.

어쨌건 그의 움직임에 여유가 있는 건, 비단 저 흐릿한 신성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저쪽의 혼혈 고블린들은 주위를 돌며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시발, 그럼 나한텐 왜 이러지.

'어그로가 죄다 나한테 끌린 건가.'

푸확, 휘몰아치는 방벽이 완성과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대로 일어나 달리려던 이안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 돌개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떡 벌어진 근육질에 거적때기 같은 가죽 갑옷을 걸친 놈이었다. 자주색이 일렁이는 눈동자. 부족장이었다.

'맨손으로 섞여 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바람 칼날을 머금은 북부 전사의 검이 부족장의 목덜미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실전을 거듭하며 수없이 반복해 온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부족장이 팔을 치켜들어 막은 건 거의 동시였다.

서걱-

바람 칼날이 굵은 팔뚝을 사선으로 가르며 흩어졌다. 검날은 그 너머의 목덜미에 박혀 쇄골 아래에서 멈췄다. 단숨에 심장까지 가르기엔 힘이 조금 모자랐다. 투쟁의 축복이 있었다면 양단을 내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정도 싸움은 그 양반 눈에 차지도 않겠지.'

팔에 더 힘을 주려는 순간, 놈이 피가래 섞인 고함을 지르며 팔을 뻗었다. 억센 손아귀는 이안의 목 대신 견갑을 움켜쥐었다.

놈은 칼날이 더 깊이 박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껴안으려 했다.

아무런 이득도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안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짧은 의문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퍼억! 혼혈 고블린 한 마리가 부족장의 등에 온 몸을 던져 부딪쳤다. 이안이 튕겨 나가듯 뒤로 넘어졌다. 부족장의 몸이 그의 위를 덮었다. 그 충격으로 검이 더 깊이 살을 찢으면서, 날을 타고 두근대는 박동이 번졌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자루를 비틀어 맥동을 끊어 버리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넘어진 충격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머리가 약간 띵 했다. 땅에 뒤통수를 박은 여파인 모양이었다.

볼 안쪽이 터진 듯 쇠 맛이 났다.

"키- 아악!"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숨이 끊어진 부족장의 등에 올라타 역겨운 숨결을 토해내는 혼혈 고블린이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번들댔다. 이안은 부족장의 시체를 밀어내고 검을 뽑으려 했다. 고블린이 팔다리를 들썩이며 그를 짓누른 건 그 직후였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이 새끼도 이러네. 인상을 찌푸리던 이안의 뇌리로, 말을 한다는 사실에 놀라 정작 귀담아듣진 않았던 내용이 떠올랐다.

훌륭한 씨앗.

'설마….'

떠올린 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하는 역겨운 가정이 뇌리를 스쳤다. 이안의 시선이 다시, 그를 짓누르는 혼혈 고블린의 면상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그를 향해 마법을 쓰는 놈도 없었다.

끼아악, 비명과 함께 두 마리의 혼혈 고블린이 더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활짝 펼친 채였다.

'이 개 토 나오는 새끼들이….'

미간을 구긴 이안의 눈동자에 마력이 휘몰아치려는 순간이었다.

허공에 핏방울을 흩뿌리며, 은빛 궤적이 뿜어져 나와 그를 지나쳤다. 기다란 검을 움켜쥔 전신 판금 갑옷. 메브였다.

콰앙-!

달려들던 한 놈을 어깨로 들이받아 날려 버린 그녀는, 곧바로 몸을 휘돌리며 검을 내리쳤다.

단죄의 검보다 조금 더 길고 두꺼운 검날이 새하얀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달려들던 다른 놈의 허리가 그대로 토막 났다.

메브는 체액을 흩뿌리는 놈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달려왔다.

그리고는 이안의 위에 올라탄 놈의 머리를 붙잡아 그대로 끌어당기며 패대기쳤다.

몸을 숙인 그녀가 왼 주먹으로 놈의 면상을 마구 내리찍었다.

분노가 느껴지는 주먹질이었다.

그녀가 고블린의 얼굴을 함몰시키는 동안, 이안은 비로소 위에 덮인 시체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숨을 고르는 그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한차례 휘몰아쳤다. 푸확, 메브에게 달려들던 놈들이 돌풍에 휩쓸려 바닥을 굴렀다. 메브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여전히 무모하게 싸우는구나, 이안."

거친 숨결. 놀라서 전력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입에 머금은 피를 탁 뱉은 이안이 대답했다.

"덕분에 마력을 아꼈소."

"…다쳤구나, 이안."

그를 돌아보고 멈칫한 메브가 이내 내뱉었다. 이안은 그제야 자신의 관자놀이 근처를 문질렀다. 피가 한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머금고 있던 피였다.

"별 것 아니오."

"아니."

메브의 목소리에 스산한 한기가 서렸다.

"네가 흘린 피의 대가는, 저것들의 피로 받아내겠다."

"...."

이안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푸스스, 그녀가 늘어뜨린 검 끝에서 피처럼 붉은빛이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작 이런 거로도 된다고…?'

심지어 머리의 상처는 이미 출혈이 멎은 상태였다.

분명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발동 조건이 있는 것이리라. 그게 뭐건, 지금 들을 얘기는 아니었다.

"뭐, 마음대로 하시오."

혼혈 고블린 몇 마리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짐승 같은 움직임으로 달려든 건 그 직후였다. 메브가 등을 돌리고 있으니 기회라 여긴 모양. 하지만 그들을 반긴 건, 그녀가 몸을 돌리며 만들어낸 붉은 궤적이었다.

콰직-!

달려들던 고블린 하나가 비스듬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연달아 세 번의 검격이 숨 쉴 틈 없이 이어지고, 그때마다 시체 토막이 두 개씩 늘어났다.

이윽고 호흡을 내쉰 메브가 옆으로 늘어뜨린 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었다. 검날이 붉게 물드는 가운데, 그녀가 내뱉었다.

"길을 열겠다."

붉은 검날이 횡으로 선을 그었다. 푸화악, 부채꼴로 방사된 신성력이 앞에 걸리는 모든 것을 가르며 뻗어나갔다.

피 보라가 자욱하게 솟구쳤다.

역시 신성력만한 게 없구만. 생각하며, 이안이 질주했다.

썰려 나가 허물어지는 놈들 너머로, 비로소 족장의 모습이 보였다.

놈은 대검을 어깨에 얹은 채 이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좀 있다, 이거지? 씹새야.'

이를 악문 이안이 온 힘을 다해 땅을 박찼다. 그리고는 잘린 팔을 내려다보며 울부짖는 혼혈 고블린의 머리를 짓밟으며 재차 도약했다.

파치칫-

그가 쥔 검신을 타고 새하얀 뇌전이 줄기줄기 모여들기 시작했다. 뒤이어 몰아친 바람이 그의 등을 더 힘껏 떠밀었다.

돌진을 시작하며 머릿속에 그렸던 장면이 비로소 재현되고 있었다.

뇌전이 모여드는 속도는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랐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이안이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

족장이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뒤이어 인상을 와락 구긴 놈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방어 자세를 취하지 않은 건, 이안이 치켜든 검이 심상치 않게 번쩍이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아주 현명한 대응이었다.

'내가 그럴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말이지.'

이안은 치켜들었던 팔을 힘껏 내려치며 검을 내던졌다.

새하얀 뇌전이 가득 맺힌 검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정확히 족장을 향해 날아갔다.

"...!"

검을 던질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듯, 족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동시에 놈이 대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검을 쳐냈다. 그건 반사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했다.

콰릉!

검과 검이 맞닿은 찰나.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온 눈부신 벼락이 족장을 관통했다.

뒤이어 뇌전이 거미줄처럼 번졌다.

"오- 아아아악-!"

눈부신 점멸. 대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굳어진 족장이 울부짖었다.

놈의 목소리는 다른 고블린들과 달리 굵었다. 변성기가 지난 것처럼.

촤아아악-

그사이 바닥을 구르며 착지한 이안이, 놈의 바로 앞까지 미끄러지고서야 멈춰 섰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거무튀튀한 마법봉이 들려 있었다. 사령술사의 지휘봉.

고개를 든 이안이, 붉게 이글대는 눈으로 족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내 씨앗이 탐나냐?"

그가 마법봉을 내뻗었다. 불기둥처럼 솟구친 샛노란 폭발이, 아직 뇌전을 다 떨쳐내지도 못한 족장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137화

퍼엉-!

날아들던 불덩이가 흐릿한 황금빛 막에 부딪혀 폭발했다. 필립이 검을 쥔 손을 앞으로 내뻗은 순간 만들어진 장막이었다.

"씁…."

뻗은 팔을 회수하는 필립의 입에서 혀 차는 소리가 번졌다. 검에 맺힌 빛이 옅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물에 깃든 신성을 거의 다 사용했단 의미였고, 그건 곧 머잖아 날아드는 불덩이를 방패로 막아야 하리란 뜻이었다.

검의 예리함이 떨어지리란 의미이기도 했다. 이 덩치 크고 역겹게 생겨 먹은 고블린들은 가죽도 두껍고 질겼다. 거기다 손톱과 이빨은 쇠만큼 단단하고 힘까지 셌다. 곧 비장의 한 수인 유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될 테니, 이제부턴 한층 신중해야 했다.

방패를 눈 아래까지 치켜드는 필립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키악-"

그때 뒤쪽에서 짧은 숨소리가 번졌다. 필립은 확인하기도 전에 바닥부터 굴렀다. 머리 위로 팔이 스쳐 지나갔다. 팔은 인간의 그것처럼 긴데 다리는 짧은 놈이었다.

허공을 가른 놈의 시선이, 건너편의 말들에게로 향했다.

묶인 말들은 금방이라도 앞발질을 할 것처럼 들썩이고 있었다. 그게 놈의 시선을 잡아끈 것이리라.

그리고 덕분에 생긴 잠깐의 틈을, 필립은 놓치지 않았다.

푸욱-

일어섬과 동시에 달려든 필립이 놈의 등 어름에 검을 찔러 넣었다. 흐릿한 신성이 맺힌 검날이 두꺼운 가죽을 종이처럼 가르며 깊숙이 박혔다. 끼아악-! 비명을 지르는 놈의 뒤통수로 원형 방패의 모서리가 날아들었다. 콰직, 고블린이 앞으로 쓰러졌다.

검을 놓지 않은 채 놈의 위로 올라탄 필립이, 방패를 쥔 왼 주먹에 더 힘을 주며 마구 내리쳤다. 혼혈 고블린의 단단한 뒤통수가 흐물흐물해지는 건 몇 초면 충분했다.

"키에엑-!"

하지만 숨을 고를 틈도 없었다. 필립이 눈을 치켜뜬 채 고개를 들었다. 검 자루를 놓은 그가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하지만 손바닥에서 흐릿한 빛의 파장이 한차례 번졌을 뿐, 장막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이런-"

필립이 다급하게 검을 쥐었다. 방패를 치켜들며 다가올 충격에도 대비한 참이었다. 하지만 고블린이 그에게 닿는 것보다, 커다란 도끼날이 놈의 팔을 훑고 지나가는 게 더 빨랐다.

콰직!

고블린의 두 팔이 단숨에 잘려 나갔다. 샬롯은 내리쳤던 도끼를 힘으로 중간에서 멈추고는, 그대로 팔을 비틀며 앞으로 후려쳤다. 고블린의 얼굴 한복판에 기다란 도끼날이 박혔다. 촤악, 다리를 끌며 멈춰 선 그녀가 고블린이 매달린 도끼를 들어 땅에 내리찍었다. 고블린의 머리가 가로로 양단됐다.

샬롯은 체액을 머금어 반짝이는 얼굴로 필립을 돌아보았다.

"드디어 내 본래 역할을 한 번 하는군."

일어서던 필립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니… 혼자서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만."

"그러시겠-"

샬롯이 피식한 그때, 일순간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콰앙! 온몸을 울리는 폭음이 번졌다. 내달리던 고블린들 조차 일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필립은 샬롯 너머, 샛노랗게 치솟아 오른 불기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콰르르- 곧 잦아든 불기둥이 주황색 혀를 날름대는 불길로 변했다.

"허…."

탄식하는 필립의 시야 한구석에 붉은 궤적이 아른거렸다. 이름 그대로 붉은 기사가 된 메브였다. 그녀는 폭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멈춰 선 고블린들을 착실히 하나씩 베어 넘기고 있었다.

'나리는 또 언제 맹세를-'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저 멀리서 이안이 일어서고 있었다. 불길 덕분에 그의 표정까지 분간할 수 있었다. 엄청난 마법을 펼쳤음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 오히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게 혼돈력을 생각 보다 많이 섞는 바람에 화력 조절에 실패해서라는 것까진, 필립이 알 도리가 없었다. 걸음을 옮긴 이안이 땅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타고 있는 불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

필립의 눈이 다시 한 번 커졌다.

불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선 실루엣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검을 움켜쥔 숯덩어리. 족장이 분명했다. 말까지 할 정도면 보통 놈이 아니었을 텐데, 저렇게 만들어 버리다니.

'그럼 나리께선 왜 다가가시지?'

불길 속으로 접어들던 이안이 우뚝 멈춘 건 그때였다. 인상을 구긴 것도 잠시, 그가 뒤로 몸을 날렸다. 새카맣게 탄 족장의 전신에 거미줄 같은 자주색 균열이 번진 건 거의 동시였다.

콰아아-

곧 족장의 전신에서 마력의 폭발이 터져 나왔다. 불길이 단숨에 꺼지고, 물러나던 이안도 거기 휩쓸려 더 멀리 튕겨나갔다.

"...!"

필립도 방패를 얼굴 앞까지 치켜 들며 몸을 낮췄다. 마력의 폭발이 비탈길을 넘어 그가 선 외곽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큭…!"

그는 곧 거대한 파도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쓸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끔찍한 환영이 뇌리를 스치고, 공포심이 치솟았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던 필립은 곧 으직, 본능적으로 볼 안쪽을 씹었다. 아찔한 고통과 함께 이성이 되돌아왔다. 마물이나 타락자들이 부리는 사술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아낸 나름의 방법이었다.

키히잉-!

귓가를 스치는 말들의 울부짖음. 퍼뜩 뒤를 돌아본 필립의 인상이 이내 구겨졌다.

말들이 거품을 물며 쓰러지고 있었다. 특히 도적 기사의 산채에서 가져온 두 놈은 눈까지 까뒤집고 널브러졌다. 북부 혈통으로 보이는 커다란 두 마리는 자리에 주저앉아 간신히 숨만 헐떡였다.

"젠장…!"

허둥지둥 달려간 필립이 주저 앉았다. 쓰러진 두 놈은 거품을 문 채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한 녀석의 몸에 오른손을 얹은 그가 정신을 집중했다. 손바닥에서 빛이 잠시 일렁였다. 그게 전부였다. 더는 작은 반짝임조차 번지지 않았다. 어쨌건 효과가 있었다. 한 마리의 경련이 멎고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더는 손쓸 도리가 없었지만.

"그-오오오오-!"

두 갈래로 갈라진 포효가 대기를 울린 건 그 직후였다. 발작적으로 뒤를 돌아본 필립이 숨을 멈췄다.

일렁이는 자주색 마력 장막 한복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피한 족장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울부짖고 있었다. 놈이라는 걸 알아본 건 마력 장막과 손에 든 대검 덕분이었다.

그 외의 모습은,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고블린일 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조차 없었다.

더 커진 덩치. 점액질을 머금고 반짝이는 붉은 피부. 등 양쪽을 뚫고 기다랗게 돋아난 날카로운 뼈 칼날. 목 주위를 볏처럼 뒤덮은 촉수들이 꿈틀댔다. 끝에는 하나같이 붉은 눈알이 박혀 있었다. 거기다 포효하는 놈의 이마 한복판에도, 눈꺼풀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커다란 눈이 하나 더 벌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그간 봐온 변이된 타락자들 특유의 불안정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저 자체로 온전한 존재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와 이질감을 동시에 자아내는.

"악마…?"

탄식하는 필립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아무리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들었다 한들, 고작 고블린이 굴레를 벗어난 존재로 거듭나다니.

"정신 차려라. 어딜 보는 거냐?"

샬롯의 그르렁대는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눈을 깜빡인 필립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선 샬롯을 돌아보았다.

"저긴 이안에게 맡겨라. 우리가 신경 쓸 건 저쪽이 아냐."

자세를 낮춘 채 그녀가 덧붙였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에는, 지금까지 보여주던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유를 깨달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뿌득- 뿌드득-

족장의 포효가 잦아들면서, 지금까지 거기 묻혀 들리지 않던 섬뜩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눈동자가 온통 자주색으로 물든 혼혈 고블린들. 그 사이에서 변이를 일으키는 몇몇 놈들의 몸에서 번지는 소리였다.

피부를 찢고 부풀어 오르는 근육과, 몸 곳곳에서 제멋대로 돋아나는 뼈 촉수들.

"…루 솔라 맙소사."

"버티거라, 필립! 내가 곧 그리 가겠다!"

탄식하는 필립의 귀로 메브의 외침이 파고들었다. 도끼를 고쳐 쥔 샬롯의 속삭임이 뒤를 이었다.

"걱정 마라. 내가 지켜줄 테니."

묘하게 비장한 말투였다. 속사정까진 알지 못했지만, 필립이 퍼뜩 정신을 차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가 검과 방패를 치켜들며 읊조렸다.

"서로를 지켜주는 거라니까요."

고블린들이 괴성과 함께 달려들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사방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잦아드는 역장 너머의 족장을 노려보았다. 방금 새로 받은 퀘스트의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혼종 초월자. 다시 태어난 놈의 모습을 보면 틀린 이름도 아니었다.

'출세했네. 고블린 주제에.'

족장은 대검을 늘어뜨린 채 이안을 가만히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눈빛에 자신감과 고양감, 여유가 느껴졌다.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힘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놈이 손에 쥔 대검을 이안 쪽으로 뻗었다. 송곳니가 빽빽하게 돋은 입이 달싹였다.

"새로운… 씨앗이… 되어라…."

그거, 아직도 포기 안 했냐?

한쪽 입꼬리만 말아 올린 이안이 중얼댔다.

"방금 태어난 주제에 무슨 자신감인지…."

검을 고쳐 쥐며, 그가 덧붙였다.

"필요하면 가져가 봐, 아가야."

"...!"

그의 말을 이해한 듯, 족장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미소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놈이 자주색 마력을 흩뿌리며 몸을 날렸다. 사그라들던 역장이 완전히 박살나고 콰과과, 놈의 대검이 자주색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콰앙-!

땅이 움푹 파이면서 흙먼지가 치솟았다. 이미 옆으로 몸을 날린 이안은, 자세를 다잡고는 놈의 품으로 쇄도했다. 족장이 고개를 돌리는 것보다 목덜미의 촉수들이 그를 돌아보는 게 더 빨랐다. 끝에 박힌 눈알들이 자주색으로 번쩍였다. 동시에 감각이 어긋났다. 시야가 어지럽게 뒤엉키고, 머릿속으로 온갖 끔찍한 환영이 스쳤다.

'호오.'

하지만 이안의 정신을 오염시킬 수는 없었다. 용의 포효마저 눈앞에서 견뎌낸 그였다. 공포 상태는커녕 평정심을 깨뜨리지도 못했다.

어긋났던 감각은 찰나의 감탄과 동시에 되돌아왔다. 북부 전사의 검이 놈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족장이 어깨를 치켜 들어 막았다.

콰직-!

검날은 붉은 비늘이 덮인 두꺼운 가죽을 찢으며 틀어박혔다.

홱, 비로소 놈이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돌렸다. 이안이 입꼬리만 슬쩍 말아 올렸다. 박힐 줄 몰랐겠지.

지금 북부 전사의 검에는 마력과 혼돈력이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혼돈력은 공허의 존재들에게 신성력만큼이나 효과적이었다.

물론, 검신이 견디지 못하고 웅웅 대고 있었다. 정보창을 확인하진 않았지만 내구도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고 있을 터였다. 그것까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 떻게?"

물으면서도, 족장은 땅에 박혀 있던 대검을 그대로 비스듬하게 올려쳤다. 이안은 놈의 몸에 힘이 들어간 걸 느낀 순간, 이미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콰과과-

자주색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이안이라도 저 궤적에 휩쓸린다면 갈기갈기 찢어질 터였다.

'휩쓸린다면 말이지….'

땅을 짚으며 멈춰 선 이안이 놈을 돌아보았다. 꽤 오래 싸웠건만, 그의 호흡에는 아직도 여유가 남아 있었다. 한계에 가까워지고서야 비로소, 체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실감이 났다.

게다가 체력 수치는 오로지 생명력이나 활력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었다. 전투에 돌입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났건만, 아직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후벼 파는 듯한 통증도 훨씬 덜했다. 예민하게 돋아난 감각도 여전히 명징했다.

마력을 상당히 소진했음에도, 육체가 그 여파를 감당하고 있었다.

'역시. 능력치에도 나름의 현실성이 부여된 거야.'

이안은 예전에 힘과 민첩성을 올렸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도 체력이 조금 더 좋아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모든 능력치가 다 조금씩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분명해졌다. 물론 해당 능력치를 찍는 것만큼 효과적이진 않겠지만.

타탓-

이안은 아직 대검을 회수하지도 못한 족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의 세 번째 눈이 번뜩였다. 마력이 파장이 물결쳤다. 자주색 역장이 치솟았다.

'변신 컷씬 용인줄 알았더니. 액티브 스킬이었어?'

이안은 그대로 역장을 후려쳤다. 생성되던 역장이 그대로 깨져나갔다. 족장이 대검을 다시 내려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안은 물러나는 대신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쒸에엑-! 궤적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뒤이은 풍압과 거기 담긴 마력이 그의 귀와 볼을 할퀴었다. 피가 터져 나오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이안은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콰지직-!

내뻗은 검이, 거의 끊어지기 직전이던 놈의 사슬 갑옷을 뚫고 옆구리 깊숙이 박혔다. 족장의 촉수들이 먼저 고통을 느낀 듯 꿈틀댔다.

이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번뜩였다. 퍼엉, 몸속에서 일어난 소리 없는 폭발과 함께, 족장의 거대한 몸이 튕겨 날아갔다. 터져 나간 놈의 옆구리에서 조각난 내장과 체액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콰장창-!

바닥을 구른 족장이 이내 일어섰다. 거미줄 같은 붉은 섬유질과 꿈틀대는 촉수가 놈의 옆구리를 이미 뒤덮고 있었다.

"넌… 뭐지…?"

읊조리는 놈의 표정은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어리둥절해 보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놈은 지금 종을 초월한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니까. 본래도 얕봤을 인간에게 이런 식으로 당하리란 상상은 한 적도 없을 터였다.

이안이 보기에도 이놈이 품은 힘은 엄청났다. 게임처럼 3챕터에 만났다면 적잖이 고생했을 상대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놈은 아직 새롭게 손에 넣은 힘과 육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놈의 움직임과 힘을 사용하는 방식은, 수많은 타락자와 마물, 마족을 상대해온 이안의 입장에선 여러모로 어설펐다. 지금도 그랬다.

'얼이나 탈 때냐? 어차피 그 정도론 안 죽으면서.'

주문을 완성한 이안이 손을 내뻗었다. 쩌저적, 벌집처럼 피어오른 얼음 감옥이 족장의 주위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족장이 이를 갈며 어깨에 돋은 칼날 같은 촉수를 휘둘렀다. 얼음 감옥은 맥없이 부서져 나갔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다시 얼어붙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그 몇 초는, 내뻗은 이안의 손아귀에 번개 돌풍이 모여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파치치칫-!

새파란 뇌전을 머금은 돌개바람이 얼음 감옥 위로 뻗어 나갔다.

"오- 오오오-!"

포효하며 족장이 몸을 일으켰다. 놈의 전신에서 타오른 마력이 이윽고 돌풍을 흩어 버렸다.

쉬학-!

하지만 그때 이안은 이미 놈의 코앞까지 달려들고 있었다.

이안이 검을 내뻗은 것과 족장의 세 번째 눈이 번쩍이며 역장을 피워 올린 건 거의 동시였다. 콰지직, 이안의 돌진이 역장을 깨뜨리며 멈췄다. 북부 전사의 검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함께 부서졌다. 하지만 자루를 놔 버리는 이안의 입가에는 오히려 옅은 조소가 스쳤다.

'이런 게 특히 어설프다니까.'

너무 뻔하게 대응하잖아.

그가 준비하고 있던 왼손을 힘껏 떨쳤다. 그의 손을 떠난 운철 단검이, 족장의 세 번째 눈 한복판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꽈직, 하는 도자기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오오오오오-!"

족장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바닥을 구르며 착지한 이안이, 다시 놈에게로 온 힘을 다해 솟구쳤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부러진 단죄의 검이 들려 있었다.

콰아아-

십자 막이를 타고 푸른 신성력이 불길처럼 솟구쳤다. 채찍처럼 휘어진 눈부신 푸른 궤적이, 족장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13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