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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 17

#177화

이안은 희미하게 번지기 시작하는 소음을 귀에 담으며, 바닥에 놓인 사슬 갑옷을 집어 들었다.

'흡혈 일족과 관련된 마족인가? 아니면 원탁?'

어느 쪽이건 자신의 실력은 물론이고 흔적을 남기지 않을 자신도 있는 놈, 혹은 놈들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성을, 심지어 정문을 부수며 침입할 생각 따윈 하지 못할 테니까.

사슬 갑옷 위에 판금 흉갑을 걸치는 이안의 뇌리로, 자연스러운 가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정말 그를 노리는 거라면, 본래는 도시 밖에서 그를 기다릴 계획이었으리라.

하지만 성문이 활짝 열려 있고, 병력이 앞다퉈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었겠지. 도시로 들어와 남은 병력이 거의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엔, 정문으로 쳐들어가도 되리란 자신감까지 얻었을 테고.

미로 저택 앞에 펼쳐진 광경도 다 봤을 테니,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안이 요양 중이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테니까.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끝장을 내려는 심산이겠지.

'날 죽이고 도시를 빠져나갈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면, 목격자를 전부 죽일 자신이?'

물론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또 다른 세력일 수도 있었다. 선수를 쳐서 글루미르로 쳐들어온 옆 영지의 특공대라든가.

물론 그렇다 해도 딱히 달라질 건 없을 터였다.

물론 그는 내전 따위에 개입할 생각 같은 건 없었지만. 이런 짓을 벌인 놈들이 그런 뜻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 엥…?"

뒤늦게 밖의 소란을 듣고 일어난 필립이, 바쁘게 준비 중인 일행을 멍하니 눈에 담았다.

곧 잠이 달아난 얼굴이 된 그가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야습?! 야습입니까?"

"넌 계속 잠이나 자라. 어차피 그 상태로는 싸울 수도 없으니까."

이안이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판금 갑옷을 능숙하게 걸쳐 입던 메브가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너도 빠졌으면 좋겠다만. 무엇이 침입했건, 우리 셋이서 싸워도 충분할 거야."

"그럴 순 없소."

퀘스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안이 팔목 보호대를 마저 고정하는 사이, 필립이 왼팔을 고정한 붕대를 풀며 내뱉었다.

"저도 그럴 순 없습니다. 다들 싸우러 가시는데 저만 어떻게-"

"그럼 너는 테사와 함께 성의 사람들을 통솔해. 괜히 얼쩡거리다가 피 보는 일 없게."

이안이 덧붙인 말에, 벌써 방어구를 거의 다 착용한 테사이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나? 나까지? 나는 왜?"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한쪽 눈이 파랗게 멍들고 입술 끝이 터진 테사이아의 얼굴 대신, 닫힌 문으로 향했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리! 나리…! 도와주십시오…!"

문 두드리는 소리와 숨넘어가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무기도 들지 않은 병사 하나가 거의 구르듯 들어서며 소리쳤다.

"정문을 부수고 웬-!"

그의 목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이미 준비에 한창인 일행을 눈에 담은 덕분이었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루 솔라여…."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댄 병사가 주저앉았다. 장갑을 낀 이안이 각반을 확인하며 내뱉었다.

"상황이나 설명해 봐. 침입자에 대해서도."

"단 한 명입니다. 새카만 흑마를 이끌고 온, 정체를 알 수 없는 흑기사!"

"흑기사…?"

메브가 되물었다. 병사가 목이 떨어질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는 비명을 듣고서야 깨어났습니다. 저를 비롯한 병사들이 달려나갔을 때는, 이미 정문이 박살 난 상태였습니다. 그 두꺼운 문을 어떻게 부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부서진 대문 한복판에 그 흑기사가 서 있었습니다. 문을 지키던 초병들은, 이미 다 죽은 상태였고요."

"그래서?"

"그자는 몰려나오는 병사들을 마주 보면서도 태연하더군요. 그리고는 쇳가루를 삼킨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말한 병사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돌아갔다.

"용살자는 어디에 있냐고요. 다들 굳어 버린 와중에, 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역시, 날 찾아온 놈이군.

단검 집이 달린 가죽 띠를 어깨에 묶으며, 이안이 일어섰다.

"그거면 충분해. 알려 줘서 고맙군."

메브와 샬롯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 그가 걸음을 옮겼다. 엉거주춤 장비를 착용하던 필립이 다급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나리! 정말 두고 가실 거면, 이거라도 끼고 가십시오!"

그가 손에 든 것을 이안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은 이안이, 손아귀에서 빛나는 황금 반지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성 다미엘의 반지. 내부에 가득한 신성력이 전해졌다.

"아마도 나리라면, 그 성물의 힘을 끌어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이안은 그럴 수 있었다. 성물답게, 반지에는 신성 스킬이 두 가지나 붙어 있었다. 빛의 축복과 빛의 방벽.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는 설명을 읽어 볼 필요도 없었다.

곧바로 왼손의 장갑을 벗으면서, 이안은 주저앉은 앳된 얼굴의 병사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여기 남는 둘을 도와라. 성에 남은 이들을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켜."

"네, 넷…!"

"이안, 그냥 나도 따라가면 안 돼?"

"필립은 아직 싸울 상태가 아니야. 그러니까 여차하면, 네가 사람들을 지켜야 돼."

"아, 내가 호위였어? 난 또-"

테사이아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곧바로 방을 나섰다.

전투 도끼를 움켜쥔 샬롯과 투구를 손에 든 메브가 뒤따라 복도로 나왔다.

복도와 계단. 다시 이어진 복도를 지나 또 다른 계단으로 들어선 이안의 눈에, 비로소 정문으로 통하는 연회장의 전경이 펼쳐졌다.

"루 솔라여… 시발…!"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연회장은 이미 피바다였다. 토막 난 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하고, 살아남은 열 명 남짓한 병사들은 멀찍이 물러난 채 간신히 창만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시선은 연회장 한복판에 고정되어 있었다.

방금 죽은 게 분명한, 사선으로 토막 난 시신 사이.

"...."

기다란 검을 늘어뜨린 흑기사가 우두커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제로 보이는 육중하고 정교한 판금 갑옷이, 병사들의 피를 머금고 불그스름한 광택을 흘렸다.

양쪽에 비스듬한 뿔이 돋은 투구. 그 아래의 안면 가리개는 위아래가 앞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와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파충류의 머리 같아 보이기도 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흑검이 불길한 예기를 머금고 번뜩였다.

푸르르…

흑기사의 뒤에서 숨소리가 이어졌다. 연회장 입구를 가로막듯 선 흑마가 내뿜은 콧김이었다. 머리와 목, 몸통을 대부분 가린 두꺼운 마갑 아래로, 근육질의 몸과 불그스름한 안광이 일렁였다.

그래, 정말 혼자서 다 죽일 수 있겠군.

흑기사의 시선이,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한 일행 쪽으로 돌아온 건 바로 그때였다.

"누가 용살자지?"

앞선 병사의 말대로, 쇳가루를 잔뜩 마신 것 같은 까끌까끌한 목소리가 번졌다. 목소리에 은은한 마력이 묻어 나왔다.

식은땀을 흘리던 병사들의 고개가 일제히 계단 쪽으로 돌아왔다.

"요, 용살자…! 용살자께서 오셨다…!"

"살았다…. 이제 우린 살았어…!"

병사들의 탄성이 번지는 가운데, 흑기사의 시선이 비로소 이안에게서 멈췄다.

"네놈이로군. 백금룡의 대행자…."

그 양반 이름은 왜 튀어나오지.

생각하며, 이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뭐하는 새끼냐?"

흑기사는 대답 대신 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며 검날을 투구 앞까지 치켜들었다.

솨아아-

놈의 전신에서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신성력처럼 느껴지는 힘. 하지만 그게 사실은 그렇게 보일만큼 밀도 높은 마력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안의 미간이, 비로소 굳어졌다.

'용의 마력…?'

"오늘이 너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용살자. 내가 너의 목을 베고, 주의 유일한 대전사로 거듭날 것이니…!"

검붉은 아지랑이가 검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이안의 눈앞에 비로소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역천의 세 번째 사도.

이안의 뇌리로, 대륙에 남은 두 마리 용 중 하나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참칭하는 자, 라크마흐. 놈이 자신의 대행자를 보낸 게 분명했다. 이유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지금, 백금룡의 대행자였으니까.

정작 이안이 주목한 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세 번째라니. 하나가 전부가 아니었어…?'

이안은 의문을 제대로 끝마치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콰과과-

그가 선 계단을 향해 검붉은 충격파가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흑기사가 그대로 검을 크게 내리친 순간 터져 나온 충격파였다.

샬롯과 메브가 거의 동시에 계단 아래로 몸을 날리고, 부서진 돌계단의 잔해가 튀어 올랐다.

그 사이로 몸을 휘돌리는 이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드는 가운데.

"다들 물러나!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대피해라!"

바닥을 구르며 착지한 메브가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거의 동시에 착지한 샬롯이 방향을 틀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고대 장인의 전투 도끼를 머리 위로 힘껏 치켜든 채였다.

"잔챙이들은… 빠져라!"

소리친 흑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대답 대신 한차례 포효한 샬롯이 도끼를 내리쳤다.

쩌엉-!

두꺼운 도끼날과 기다란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샬롯은 물론 흑기사도 밀려나지 않았다. 충돌한 둘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추고, 충격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터져 나왔다.

휩쓸려 튕겨 나가면서, 샬롯이 소리쳤다.

"평범한 검이 아니다, 이안!"

"나도 봐서 알아."

충격파를 거슬러 달려가며 이안이 내뱉었다.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그의 검이, 검붉은 검을 늘어뜨리는 흑기사를 향해 뻗어나갔다.

빛의 축복과 바람 칼날이 더해진 황금빛 궤적을, 흑기사는 피하지 않았다.

카가가각-

이안이 휘두른 검이 놈이 치켜든 왼팔에 막혔다. 요란한 불티와 번쩍임이 남았을 뿐, 이안의 검은 그의 갑주를 가르지 못했다. 오히려 이안의 검에 작은 균열이 번졌다.

뿔 투구 아래의 안광이 일렁였다.

"기대 이하로군. 부상이 심한 모양이지?"

"딱 널 죽일 만큼만 별로지."

아닌 척하면서 나불대는 새꺄.

속으로만 덧붙이며, 이안은 준비하고 있던 진공 폭발을 사용했다.

쩌엉-

"...!"

소리 없는 폭발에 흑기사의 팔뚝과 몸이 일순간 꺾이더니, 그대로 튕겨 나갔다.

카가가가-

허공에서 자세를 다잡은 흑기사가 바닥의 판석을 깨뜨리며 멈춰섰다. 놈이 왼팔을 탁탁 털며 다시 일어섰다.

'뭐 이렇게까지 단단하지…?'

이안의 미간이 좁아질 찰나, 놈이 쥐고 있던 검을 고쳐 쥐었다.

용의 날개처럼 생긴 십자 막이에서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검신으로 번졌다. 놈이 이안을 향해 다시금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쒸에에엑-

자루 대신 검날 끝부분을 움켜 쥔 메브가, 섬전처럼 달려들며 팔을 내리쳤다. 거꾸로 뻗어 나온 십자 막이와 뾰족한 무게추가 철퇴처럼 떨어지며 흑기사의 투구를 노렸다.

콰지직-!

흑기사는 검을 치켜들어 막았다. 그는 메브의 투구를 향해 왼 주먹을 뻗으려 했다.

그보다 검은 궤적이 그 옆으로 다가오는 게 더 빨랐다. 도끼자루를 몸 앞에 바싹 붙인 샬롯이었다.

콰지직-!

흑기사가 고개를 돌릴 찰나, 그녀가 그대로 놈에게 충돌했다. 쇠끼리 맞부딪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흑기사의 몸이 옆으로 밀려났다.

샬롯이 놈의 투구 앞으로 오른손을 뻗은 건 거의 동시였다.

안면 가리개를 덮은 새카만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쩌엉!

흑기사가 그대로 판석 위에 처박혔다.

뒤이어 놈의 몸 위에 올라타듯 달려든 샬롯의 오른손이, 다시 도끼자루를 움켜쥐었다.

콰직! 빠각! 콰지직!

샬롯이 난도질하듯 흑기사의 투구와 흉갑을 내리쳤다. 인간을 한참 초월한 속도와 힘. 흑기사의 안면 가리개와 흉갑, 목 가리개가 조금씩 우그러들었다.

투구 사이에 번지는 검붉은 안광이 타오른 건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꺼져라-!"

쩌어엉!

터져 나온 검붉은 충격파가 샬롯을 휩쓸고 날려 버렸다. 주춤주춤 계단과 통로 쪽으로 흩어지던 병사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볼과 손등이 찢겨 나간 샬롯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중제비를 도는 사이.

충격파에서도 튕겨 나가지 않은 메브가 다시 일어서는 흑기사를 향해 다시금 돌진했다.

쒸아악-!

거꾸로 쥔 양손 검이 망치를 휘두르듯 흑기사의 투구를 향해 떨어졌다.

우지직-!

마지막 순간 흑기사가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덕분에 투구 한복판을 맞는 건 피했지만, 십자막이가 놈의 목덜미와 견갑 사이에 박혀들 듯 떨어졌다.

일어서던 흑기사의 한쪽 무릎이 다시 꺾였다.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솨아아아-

"...!"

놈의 전신에 맺힌 아지랑이가 타올랐다. 흑기사가 늘어뜨린 검이 사선으로 솟구쳤다.

카가가가각-

메브가 왼팔에 고정한 버클러를 치켜들며 물러섰다. 검붉은 궤적은 버클러 표면을 찢어발기고, 그 너머의 갑옷에도 깊은 흠집을 냈다.

"신성한 결투를 방해하지 마라! 하찮은 것들아!"

흑기사가 포효하고, 간신히 균형을 다잡은 메브가 검을 고쳐 쥐는 사이.

"물러나시오."

이안이 그녀의 곁을 지나치며 내뱉었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검에서 눈부신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메브와 샬롯이 싸우는 사이에 주문을 완성한 것이다.

검을 사선으로 치켜든 채로 일어선 흑기사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누구 맘대로 결투냐?"

그의 검은 이미 뻗어 나가고 있었다. 흑기사도 치켜든 검을 내리쳤다.

이안은 피하지 않았다. 저 검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이 거리에서의 번개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콰릉-!

검과 검이 맞닿기도 전에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도 그랬다. 일순간 터져 나온 전격이 흑기사를 관통했다.

솨아아아-

흑기사의 뒤를 빛의 장벽이 감싸 안았다. 흑기사의 갑옷을 타고 거미줄 같은 뇌전 자락이 터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파치치치치칫-!

황금빛까지 더한 눈부신 점멸이 이어졌다. 단 한 가닥도 밖으로 새지 않았다. 신성력의 장막에 부딪히자 굴절되어 흑기사에게로 도로 되돌아갔다.

"...!"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고개를 한계까지 뒤로 꺾은 채로 그저 온몸을 바들댔다.

파칫, 파치칫….

곧 점멸이 가라앉았다.

흩어지는 뇌전 줄기 사이로, 흑기사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놈의 안면 가리개 틈에서 새카만 연기가 몇 가닥 피어났다. 전신에 아른거리던 아지랑이도 꺼질 듯 잦아들었다.

하지만 아직 퀘스트 완료 창은 뜨지 않았다. 이안은 연쇄 번개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검을 던져 버리고는, 아공간에서 새 검을 꺼내 들었다.

투구 틈을 찔러야겠군. 그가 생각할 찰나였다.

키히이잉-!

울부짖은 흑마가 그대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마갑 사이로 흘러내리기 시작한 검은 안개가 거대한 궤적을 만들어냈다.

"...!"

마침 그 경로에 걸쳐 있던 샬롯은, 눈을 치켜뜨는 와중에도 전투 도끼를 횡으로 휘둘렀다.

두꺼운 전투 도끼가 돌진하는 말의 측면을 할퀴었다.

카가가가각-

마갑 표면에서 불똥이 튀고, 그 사이의 가죽도 길게 찢어졌다.

하지만 흑마의 돌진을 멈추지는 못했다. 도끼 날에 베인 상처에서는 피 대신 검은 안개가 뭉실뭉실 솟아나고 있었다.

그대로 샬롯을 지나친 놈이, 고개를 숙인 채 이안에게로 밀려들었다. 전신에 두른 안개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저건 또 뭔.

인상을 찌푸린 이안이 결국 뒤로 몸을 날렸다. 간발의 차로 스쳐지나간 흑마가 그대로 궤적을 틀어 흑기사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놈의 발자국마다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푸스스-

아지랑이는 삽시에 검은 안개로 화해 흑기사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어느새 흑마 역시 안개가 뭉친 듯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전신에 두른 마갑은 그 와중에도 말의 형태를 유지했다.

푸후우-

흑기사의 앞을 가로막은 유령마가 검은 연기가 섞인 콧김을 뿜어냈다.

바닥을 구른 이안이 고개를 들어, 놈의 적의 가득한 붉은 안광을 마주보았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씁쓸하게 말려 올라갔다.

"부러운 새끼로군…."

저런 게 있다면, 말이 죽을 걱정은 없을 테니까.

#178화

콰아아-

흑기사를 집어삼킨 안개에서 검붉은 충격파가 터져 나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팔로 얼굴을 가린 이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르륵 밀려났다. 샬롯과 메브도 마찬가지였다.

"힉, 히이익-!"

"으허억…!"

아직 연회장을 빠져나가지 못한 병사들이 나뒹구는 가운데.

안개 사이로, 무릎을 꿇고 웅크린 흑기사의 모습이 설핏 드러났다.

꾸득, 꾸드드득-

본래도 2미터에 육박하던 놈의 덩치가 더 커지고 있었다. 갑옷 사이사이의 이음매가 점점 벌어졌다. 하지만 그의 갑옷은 그럼에도 분해되거나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듯, 몇 겹으로 두텁게 덧댄 부분들이 펼쳐지면서 새로운 이음매와 관절 부위를 만들어 냈다.

놈의 갑옷이 유독 두꺼운 건, 저런 장치들이 숨겨져 있어서였던 모양이었다.

'하다 하다 이젠 변신 갑옷이 다 나오네….'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충격파의 압력 속에서, 이안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놈을 노려보았다.

아마도 이게 전부가 아닐 터였다. 그가 혼돈력을 끌어올리는 사이, 쿵, 흑기사의 한쪽 판금 장화가 바닥을 디뎠다.

상체를 여전히 앞으로 숙인 채, 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크르르르…."

저주파가 섞여 두 겹으로 들리는 숨소리가 나지막이 번졌다.

이안은 전에 이것과 비슷한 숨소리를 이미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타후므리트와 아르케아스에게서.

쿠우우-

검은 안개에 담긴 마력이 일순간 흑기사의 전신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흑기사가 구부리고 있던 상반신을 활짝 치켜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흑기사가 응축된 마력을 발산하며 울부짖었다. 성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함성.

"...!"

"컥… 커허…."

간신히 일어서던 병사들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다들 눈동자에 맥이 탁 풀리고, 몇몇은 거품을 물며 혼절했다. 자세를 다잡던 샬롯도 눈을 치켜뜨며 주저앉았고, 메브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결을 토해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금 흑기사가 내지르는 함성은 용의 포효였으니까.

물론, 이안이 보기엔 여러모로 손색이 있었다. 저게 진짜 용의 포효였다면 지금쯤 성이 무너져내리고 그를 제외한 모두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을 테니까.

심지어 이안은 무릎조차 꿇지 않았다.

'…완벽하게 저항하진 못했지만.'

물론 곧바로 싸울 수 있는 상태까지는 아니었다. 팔다리가 저릿저릿하고 숨이 가빴다. 대기를 울리는 떨림에 밀려나지 않고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마력을 일깨우면서, 이안은 포효하는 흑기사를 눈에 담았다.

게임 속 3 챕터의 네임드, 역천의 첫 번째 사도가 뇌리를 스쳤다. 그때의 놈도 체력이 3분의 1 정도로 떨어지자, 저렇게 용과 인간의 혼혈 같은 모습으로 변신했었다.

더 강해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패턴을 익히기 전까지 게임 오버 화면을 몇 번쯤 봤었다.

그때는 놈이 라크마흐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도인 줄 알았건만.

보아하니 몇이 더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투쟁의 축복을 내려줄 법도… 아니지.'

용이랑 싸울 때 준 축복을 용인 따위에 내릴 리가.

이안은 고개를 드는 미련을 단숨에 털어냈다. 축복은 어디까지나 빌려온 힘일 뿐, 본래 그의 능력이 아니었다. 의존하려 들다간 명줄만 재촉할 뿐이리라.

이안의 눈빛이 고요해질 찰나, 흑기사의 포효가 마침내 잦아들었다. 그르렁대는 듯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보아라. 이것이 은총 받은 자의 참된 모습이니…."

흑기사의 하반신에 뭉쳐 있던 검은 안개가 동심원을 그리며 낮게 깔렸다. 샬롯의 연타로 한쪽이 움푹 구겨진 안면 가리개가 쩍 벌어지면서, 그 사이로 붉은 안광을 머금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이안을 응시했다.

놈의 눈빛에, 강대한 힘을 손에 넣은 자들 특유의 여유와 오만이 묻어나왔다.

"본모습을 드러내라, 백금룡의 대행자여. 거짓된 신들이 두려워 나약한 거죽 속에-"

"난 이게 본모습인데."

"-자신을 가둬 두. …뭣이?"

흑기사가 멈칫했다. 잿빛 마력이 아른거리는 눈으로, 이안이 덧붙였다.

"거기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있냐? 아침까지 그 모습으로 있으면, 거짓된 신들이 거짓된 천벌을 내릴 것 같은데."

뇌전이 줄기줄기 모여드는 이안의 검을 슬쩍 응시한 흑기사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를 따라 전해지는 마력의 울림에 이안의 눈매가 슬쩍 꿈틀댔다. 미친놈인가, 뭐가 웃기지.

"과연, 그 용의 대행자로군. 스스로 거짓된 자들의 발을 핥은 백금룡만큼이나 어리석고 편협해. 아직도 느껴지지 않느냐? 그 기만과 거짓으로 얼룩진 것들의 영향력이 약해진 것이?"

카드득, 자신의 힘을 음미하듯 왼 주먹을 그러쥔 흑기사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인간의 신이란 것들은 전능한 척 신도들의 눈을 가리지만, 실제로는 순리에 따라 본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세상을 가까스로 틀어막고 있을 뿐인 머저리들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마저도 더는 제대로 할 수 없게 됐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내뱉은 흑기사가 이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미 세상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잊히거나 멸망한 존재들과 용이 군림하던, 태초의 시대로. 용살자, 네놈도 거기에 한 몫 하지 않았느냐…?"

놈의 안광이 슬며시 휘어졌다.

"며칠 전부터, 나는 낮에도 주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듣자 하니 그날이 네가 마족으로부터 루 사드를 구원한 날이라더군. 정말 네놈은 이 작은 왕국을 구원한 것이 맞느냐? 거짓된 신들이 만들어 낸 균형을 무너뜨릴 마지막 화살을 쏘아 올린 것이 아니라?"

예리한 척 하긴.

싱긋, 입꼬리만 말아 올린 이안이 내뱉었다.

"그건 어떻게 해도 일어날 일이었어. 이 세상에는 너 같은 것들이 지겹게도 많으니까. 그런 의미로, 말도 지겹게 많아줘서 고맙군."

이안의 자세가 느슨해졌다.

"덕분에 그 짝퉁 포효의 여파가 전부 사라졌거든."

"…짝퉁? 그게 무슨 뜻이지?"

"가짜인 건 너도 마찬가지란 얘기지. 도롱뇽아."

다음 순간 이안이 몸을 날렸다. 어느새 그의 검은 뇌전이 가득 뭉쳐 빛나고 있었다.

코웃음 친 흑기사가 이제는 다소 짧게 느껴지는 흑검을 비스듬하게 늘어뜨리는 사이.

크히잉-!

놈의 곁에 우뚝 서있던 유령마가 이안을 향해 마주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검에 맺힌 마법을 뽑아내려는 모양. 하지만 이안은 검을 내뻗지 않았다.

타타탓-

유령마의 측면으로 쏜살같이 달려드는 검은 궤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샬롯. 무력화 상태를 완전히 떨쳐낸 듯, 그녀는 도끼날을 앞세운 채 포탄처럼 몸을 날리고 있었다.

콰장창-!

짐승처럼 울부짖은 그녀가 유령마의 마갑과 충돌했다. 샬롯과 뒤엉킨 유령마가 새카만 궤적을 남기며 옆으로 나뒹굴었다.

그 너머로 드러난 흑기사를 향해, 이안이 검을 내뻗었다. 놈이 왼팔을 앞으로 치켜든 건 거의 동시였다.

콰릉-!

이어진 굵직한 뇌전은, 이번에는 흑기사를 관통하지 못했다. 대신 파도처럼 솟구친 검은 안개가 뇌전을 집어삼켰다.

역시 두 번은 안 통하네.

생각할 찰나, 흑기사가 치켜들었던 왼팔을 앞으로 떨쳤다.

콰아아-!

뇌전을 머금은 파도가 밀려들었다. 눈을 치켜뜬 이안이 휩쓸리는 가운데.

"이안…!"

소리친 메브가 자세를 낮춘 채 흑기사를 향해 돌진했다. 어느새 똑바로 든 검을 투구 옆으로 바싹 치켜든 채였다.

"붉은 기사라 불린다지? 그 만용만큼은 칭찬해 주마."

콰아아-

밀려드는 파도를 돌파한 그녀를 맞이한 건, 치켜든 흑검을 힘껏 내리치는 흑기사의 모습이었다. 검붉은 궤적이 그녀의 새 부리 투구를 쪼갤 듯 떨어졌다. 메브가 다급하게 검을 치켜들었다.

쩌어엉-!

흑검에 실린 힘이 메브를 그대로 내리눌렀다. 그녀의 양손 검에 균열이 일고, 메브의 한쪽 무릎이 끝내 땅에 닿았다. 바닥의 판석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었다.

"상으로, 아까 네가 하려던 걸 그대로 돌려주도록 하지…."

읊조리는 흑기사의 팔에 힘이 실렸다. 흑검이 메브의 검을 쪼개 버리고, 그 너머의 투구로 떨어져 내릴 찰나.

솨아아-

피어오른 황금빛 장막이 메브를 가로막았다. 흑검이 불티를 튀기는 가운데.

"가서 샬롯을 도우시오. 병사들도 대피시키고."

뒤에서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의 전신에 맺힌 푸른 역장이 사그라들고, 검을 고쳐 쥔 이안이 덧붙였다.

"그동안, 대행자들끼리 놀고 있을 테니."

"…네가 원한다면."

읊조린 메브가 부러진 검을 던져 버리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가 샬롯과 사투를 벌이는 유령마를 향해 달려가는 사이.

"이제 제대로 할 마음이 들었나?"

그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흑기사가 내뱉었다.

이안이 내뱉었다.

"난 계속 제대로 하고 있었어."

"그럴 리가. 고작 그 정도로 용이라는 절대자를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흑기사가 펄쩍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본 실력을 드러내도록 만들어 주마!"

이게 본 실력이라니까.

내심 혀를 찬 이안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린 흑기사가 흑검을 내리찍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콰앙-!

이미 잔뜩 금이 가 있던 바닥의 판석들이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솟구쳤다.

투쟁의 축복을 받은 내 모습이 저런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재빨리 자세를 다잡아 놈에게로 달려들었다.

어쨌건 도망 다니며 싸울 수는 없었다. 그럼 전장이 넓어질 테고, 저 미친놈은 성을 무너뜨려서라도 그를 죽이려들 터였다. 다른 이들이 죽는 건 상관 없었지만, 그 사이에 일행도 포함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덩치가 커진 만큼, 놈의 움직임은 다소 둔해 보였다. 근접전으로 끌고 가면서 약점을 노리는 편이 나으리라.

'그러려면 일단은….'

쒸아악-

이안은 코앞까지 가까워진 흑기사의 갑옷을 눈에 담았다. 치켜든 그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부러진 단죄의 검이 들려 있었다. 기다란 십자 막이를 타고 푸른 신성력이 타올랐다.

콰과과과과-

톱날처럼 솟구친 신성력의 칼날이 흑기사의 목덜미와 흉갑을 사선으로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아까 메브와 샬롯의 연합 공격으로 균열이 일고 우그러졌던 부분들이 찢겨 나가고, 목덜미와 옆구리를 감싼 이음매가 터져 나갔다.

'역시.'

이안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갑옷의 겹쳐져 있던 부분들이 펼쳐지면서, 그만큼 방어력이 낮아지고 이음매도 취약해졌으리란 추측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마 게임에서도 갑옷을 벗겨 약점을 드러내는 게 공략 순서였으리라. 정확한 공략법을 알지 못하는 만큼, 드러난 단서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콰아아아-

푸른 궤적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뿜어져 나온 왼 팔뚝에, 이안이 다급하게 몸을 젖혔다. 그의 몸을 으깨 버릴 듯 휘둘러진 쇠장갑의 끝부분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가슴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뒤따른 마력의 파장만으로도 그의 흉갑을 찢어버리기엔 충분했다.

새로 산 건데, 시발. 숨이 턱 막히는 압력을 느끼면서도, 이안을 아직 신성력이 남은 단죄의 검을 올려졌다.

카드드득-

훤히 드러난 흑기사의 팔뚝을 푸른 신성력이 할퀴었다. 팔을 자르지는 못했지만, 팔꿈치 안쪽의 이음새 부분을 찢기에는 충분했다.

흑기사가 어느새 머리 위로 치켜든 흑검을 사선으로 내리친 건 거의 동시였다.

빛의 장막이 이안을 감쌌다.

콰치치칫-!

흑검과 맞부딪친 빛의 장막이 눈부시게 번쩍였다. 장막을 후려친 검날에서도 검붉은 마력의 불티가 튀어 올랐다.

이안이 보기에도 확실히 저 검붉은 검은 보통 검이 아니었다. 흑기사의 힘을 견뎌내는 건 물론이고, 신성력의 장막까지 천천히 갈라내고 있지 않은가. 하긴. 애초에 평범한 검이 용의 마력을 견딜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어쨌건, 한 대라도 제대로 맞으면 죽겠네.'

가뜩이나 치솟았던 집중력이, 극한의 위기감과 맞물려 한계까지 돋아났다. 신경이 몸 바깥까지 곤두서는 듯한 느낌.

아공간에서 제국제 장검을 꺼내든 이안이, 장막 너머로 보이는 흑기사의 어깻죽지를 향해 검을 내뻗었다.

검붉은 비늘이 우둘투둘하게 돋아난 피부 위로 빛의 축복과 바람 칼날을 머금은 칼날이 틀어박혔다.

쿠드드득-

손아귀로 전해지는 반발력이 상당했다. 갑옷이 없더라도 저항력이 상당히 높은 게 분명했다. 이안은 새로 돋아난 어금니를 다시 으스러뜨릴 기세로 악물었다.

동시에 잿빛으로 물들던 그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콰직-

칼날과 어깻죽지에서 소리 없는 폭발이 일었다. 진공 폭발.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어깨가 통째로 날아가는 식의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검날을 중심으로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리면서 가죽과 살점이 터져 나갔을 뿐이었다. 붉은 속살과 금이 간 쇄골 뼈가 얼핏 드러났다.

하지만 흑기사는 비명은커녕 움찔대지조차 않았다.

"...!"

그저 안면 가리개 사이의 붉은 안광이 일순간 가늘어진 게 전부였다.

동시에 이안의 시선에, 옆으로 활짝 열리듯 펼쳐졌던 놈의 왼팔이 살짝 구부러지는 게 보였다. 다음 순간 저 주먹이 만들어 낼 궤적이 이미 현실이 된 것처럼 그려졌다.

쒸에에엑- 콰아앙!

비스듬하게 떨어진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뒤이은 마력의 충격파가 판석과 병사들의 시체 조각까지 모조리 터뜨리며 폭발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이안은 흑기사의 반대쪽 측면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주먹을 내리치면서 뒤로 젖혀진 흑기사의 오른팔, 살짝 구부러진 팔꿈치 안쪽으로 향했다.

'될까?'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검날이 놈의 팔꿈치 안쪽을 정확하게 갈랐다. 놈의 팔뚝 보호대의 이음매가 끊어졌다.

진공 폭발을 사용할 때부터 휘청대던 검날도 거의 동시에 부러졌다. 이게 마지막 제국제 장검이었다. 이번에 새로 구매한 칼들은 이것보다 내구도가 훨씬 떨어졌다.

부러진 검을 미련 없이 떨어뜨린 이안은, 대신 고대의 운철 단검을 뽑아 들었다.

날 길이가 다소 짧지만, 이 거리에선 치명적인 단점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운철 단검은 내구도가 기형적으로 높았고, 장비 파괴 옵션까지 붙어 있었다.

흑기사의 급소를 드러나게 하는 데에는 이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슬슬, 흑기사의 전투 방식이 눈에 익고 있었다.

"제법이다만."

물론, 이안만 그런 건 아니었다.

"정말 고작 그런 잔재주만으로 나를 이길 수 있다 믿는 것이냐?"

흑기사의 안광이 일순간 번뜩이며, 이안에게는 상대적으로 느리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놈의 전신에서는 이미 검붉은 마력이 타오르고 있었다.

살짝 구부러져 있던 놈의 오른팔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흑검에서 분출되는 마력이 이안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건 못 피하겠는데…?'

#179화

솨아아-

마력 역장과 빛의 장막이 동시에 피어올라 이안을 감쌌다. 하지만 흑기사가 내리친 검은 그 위가 아니라 옆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꽈아앙!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충격파와 함께, 휩쓸린 이안이 함께 튕겨 올랐다. 아무리 이중으로 보호받고 있다 해도, 발아래에서 이어진 폭발력까지 상쇄할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천장이 가까워졌다. 이안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마력 역장에 뒤덮인 그의 등이 천장에 틀어박히듯 부딪혔다.

거미줄 같은 균열. 엄청난 압력. 그 와중에도 연회장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연회장 한쪽을 새카만 마력의 궤적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대기를 찢으며 뻗어 나간 궤적 끝, 유령마가 단상의 상석을 박살내고 벽면에 충돌하는 중이었다. 놈에게서 번진 검붉은 마력이 벽면에 안개처럼 넘실댔다.

샬롯은 그 궤적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듯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한쪽 어깨와 팔의 갑옷이 찢겨나가고 그 사이로 피가 터졌다.

하지만 다른 병사들에 비하면 아주 얕은 부상이었다. 운 나쁘게 경로에 휩쓸린 그들은, 트럭에 치인 것처럼 만신창이가 된 채로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 중이었으니까.

메브의 품에 안긴 병사도 그중 하나로 보였다.

그녀는 검을 들지 않은 상태였다. 샬롯에게 유령마를 맡긴 채, 먼저 전투 불능 상태가 된 병사들을 옮기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연회장 구석의 통로에 대충 널브러진 병사들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녀가 뭔가 말한 듯, 병사의 입술이 간신히 달싹이고 있었다.

이안의 인지력은 그 입술이 만들어 내는 불완전한 단어들을 단숨에 읽어냈다.

부디, 부탁드리겠.

메브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무엇을 부탁한다는 건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숨이 끊어지는 병사를 품에 안은 메브의 뒷모습이, 직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머금기 시작했으니까.

"...!"

추락을 시작한 이안의 시선이 바로 아래로 돌아간 건 그때였다.

불길한 직감. 역시나, 어느새 흑기사가 뛰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그를 공중에서 썰어 버리려는 모양이었다.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공중에서는 땅에서 그랬듯이 도망 다닐 수 없을 테니까.

물론, 보편적인 경우라면 그랬으리라.

푸확-!

하위 회색 마법인 돌풍을 생각과 거의 동시에 완성한 이안이, 왼팔을 옆으로 후려치듯 내뻗었다.

한 줌의 혼돈력을 머금고 증폭된 바람이 그의 몸을 옆으로 날려 버렸다.

콰직-! 퍼억!

이안은 기둥 하나를 등으로 부수고는 그 건너편의 벽면에 처박혔다. 미간을 찡그린 그가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아까 연회장 계단으로 들어서기 전에 지나쳤던, 바로 그 복도였다.

콰아아-

기둥이 부서지면서 튀어 오른 흙먼지 사이로, 솟구치는 흑기사의 모습이 뒤를 이었다.

검을 위로 내뻗은 자세를 취하면서도, 놈의 투구가 이안이 널브러진 복도 쪽으로 득달같이 돌아왔다.

놈이 왼팔을 위로 뻗어 자세를 다잡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공중에서 체공하는 찰나의 순간.

내뻗은 검을 양손으로 움켜쥔 놈의 전신에서 검붉은 마력이 타올랐다.

콰과과과과-

놈이 복도로 밀려들었다. 검붉은 궤적이 복도 천장을 두부처럼 가르면서 쏟아져 내렸다.

"...!"

솨아아-

단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이안의 주위로, 신성력의 장막과 푸른 마력 역장이 발작하듯 피어올랐다.

콰지지지직-

검붉은 궤적이 천장에 이어 복도 벽면, 그리고 그 아래 피어난 신성력의 장막과 일렁이는 푸른 역장까지 차례로 찢어발겼다.

흑검은 빛의 축복이 아른거리는 단검 날 한복판에 맞닿고서야 간신히 멈췄다.

안면 가리개 사이, 흑기사의 안광이 웃음 짓듯 일렁였다.

"그래… 이제 확실히 알겠군…."

놈은 단숨에 검을 더 내리찍어서 상황을 끝내지 않았다. 그저 쏟아지는 돌 부스러기와 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너머를 응시하며, 손아귀의 감촉을 음미하듯 천천히 내리눌렀다.

"그 잔재주가 정말 네놈의 전력이었구나…. 거짓된 신들에게 굴복한 위정자가 아끼는 이유가 있었군. 쥐새끼 같은 부분이 닮아서였어."

쿠구구국-

흑검의 검날 중앙을 가로막은 단검 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흑기사가 그르렁대듯 속삭였다.

"아주 느린 죽음을 선사해 주마. 네 죽음이 고통스러울수록, 내가 영광된 대전사로 거듭나게 될 의식도 훌륭하게…?"

그의 목소리 끝이 순간 올라갔다. 점점 내려가던 단검이 어느 순간 우뚝 멈췄기 때문이다. 흑기사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지만, 단검을 내리누를 수 없었다.

푸스스, 그 아래에서 언제부터인가 번지기 시작한 붉은 빛이 사람의 실루엣을 그려냈다.

"…막 상태창을 열었었는데.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간을 찌푸린 듯 흑기사의 안광이 가늘어졌다.

"그게 무슨…."

"거짓된 어쩌고 타령 좀 더 해 줬으면 좋겠군."

흑검을 오히려 조금씩 밀어내면서, 이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신성력과 마력이 뒤엉켜 아른거리는 기묘한 눈으로 흑기사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덕분에, 그 거짓된 양반들이 좀 빡친 모양이거든."

"...!"

흑기사의 안광이 다시 커질 찰나, 붉은 신성력이 타올랐다.

쩌엉-

검을 쥔 흑기사의 팔이 뒤로 확 밀려났다. 운철 단검을 앞으로 떠밀듯 휘둘러 떨쳐낸 이안이, 그대로 놈의 품으로 뛰어올랐다.

오른팔을 휘둘렀던 원심력을 고스란히 왼 주먹에 실어 내뻗는 채였다.

흙먼지를 가르며 뻗어 나가는 그의 주먹에 황금빛 신성력이 서렸다.

빠아악-!

이안의 황금빛 주먹이 흑기사의 투구 옆면을 후려쳤다. 놈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가고, 거대한 몸이 통로 쪽으로 붕 떠올라 튕겨 나갔다. 주먹 끝에서 터져 나온 황금빛 잔재가 검붉은 마력을 불태우며 번쩍였다.

"...!?"

투구 옆면에 주먹 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가운데, 흑기사의 안광이 순간 휘청였다. 고통보다는 당혹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곧 안광이 다시 타오르면서, 놈이 날아가는 와중에도 몸을 비틀었다.

바닥을 한바퀴 구르며 착지하고는 뒤따라 내달리는 이안의 모습이 놈의 시야에 선명해졌다.

쿠와악-!

흑기사가 그대로 마저 몸을 비틀어 이안을 향해 흑검을 내리쳤다.

예상한 듯 자세를 낮춘 이안의 위로, 빛의 장막이 비스듬하게 피어 올랐다.

카가가각, 흑검이 장막 표면을 깎듯이 할퀴며 미끄러졌다. 불똥이 눈부시게 튀는 가운데, 그 사이를 뚫고 도약한 이안이 또 한 번 힘껏 왼 주먹을 휘둘렀다.

쩌엉-!

그의 황금빛 주먹은 뿔 투구 옆면에 새겨진 자국보다 조금 더 위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결과가 다르지는 않았다. 신성력이 마력을 불태우고, 흑기사의 안광이 이번에는 선명한 고통을 머금고 흔들렸다. 안면 가리개와 투구를 이어 주는 이음새가 덜컹댈 찰나.

쩌엉-!

아직 투구에 박혀 있던 주먹에서 소리 없는 폭발이 터져 나왔다. 진공 폭발. 동시에 흑기사가 머리부터 복도 벽면에 처박혔다.

콰장창창- 와르르-

흑기사가 벽돌들을 부수며 튕겨 나가고, 복도 벽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이안은 내뻗었던 주먹을 짧게 털며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진공 폭발은 본래 맨손으로 사용하면 손이 함께 망가질 각오를 해야 하는 마법이었지만. 카르하의 신성력에 빛의 축복까지 덧씌워진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돌벽을 후려친 것처럼 얼얼할 따름.

'의존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확실히 더럽게 편하긴 하네.'

역시, 기사나 야만 전사를 했어야 됐다니까.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땅을 박찼다.

와르르르-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로 흑기사가 벌떡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의 붉은 안광이 분노와 모멸감을 머금고 이리저리 일렁였다.

곧 놈의 시선이 달려드는 이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용살자-!"

왜, 새꺄. 속으로만 대답하며 이안은 운철 단검을 고쳐 쥐었다. 흑기사가 검붉은 마력이 불길처럼 타오르는 흑검을 휘두른 건 거의 동시였다.

콰지지지직-

궤적에 걸린 기둥들이 모조리 갈려 나갔다. 이러다 성이 무너져도 상관없다는 듯 거리낌 없는 움직임이었다. 이안은 물러나는 대신 더 빨리 질주했고, 바람 칼날이 만들어 낸 돌풍도 그를 힘껏 떠밀었다.

콰과과과-

흑검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비로소 힘껏 뛰어오르면서, 이안이 오른손을 내뻗었다. 운철 단검이 쩍 벌어진 흑기사의 투구 틈을 노리고 뻗어나갔다. 흑기사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려 버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카가각-

신성력이 맺힌 단검 날이 투구 옆면을 톱으로 썰어 낸 것 같은 흔적을 만들며 찢어발겼다. 마침내 단검 날이 안면 가리개와 투구를 고정해 주는 이음매까지 닿은 순간, 이안은 준비하고 있던 진공 폭발을 다시 한번 사용했다.

쩌엉-!

흑기사의 고개가 뒤로 튕겨 나가듯 젖혀졌다. 동시에 위로 젖히게 만들어져 있던 안면 가리개가 너덜너덜하게 날아갔다.

놈이 튕겨나가던 고개를 힘으로 다시 내리 눌렀다. 분노가 일렁이는 눈동자가 이안을 마주보았다.

"...!"

놈이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깨달은 이안이, 황급히 팔을 회수하며 빛의 장막을 펼쳤다. 이미 흑기사의 왼 주먹이 그의 측면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쩌엉-!

간신히 생성된 빛의 장막이 커다란 주먹을 가로막고, 깨질 것처럼 출렁였다.

"오오오오오-!"

흑기사가 기합성을 토해내며 끝까지 주먹을 휘둘렀다. 결국 떠밀린 이안이 콰장창, 반쯤 무너진 기둥을 온몸으로 부수며 튕겨 나갔다.

시야가 한순간 확 트이고 허공을 천천히 선회하며 체공하는 가운데.

'또 며칠 앓아 눕겠군.'

이안은 문득 생각했다.

고통이 큰 건 아니었다. 그저 온몸이 조금 욱신거렸다. 하지만 투쟁의 축복이 끝나고 나면, 분명 알지도 못했던 부분들이 아프기 시작하리라. 하긴. 크게 상관은 없는 부분이었다. 이미 축복을 받기 전부터 비슷한 상태였으니까.

앞으로를 생각하면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흑기사가 말했듯, 균형이 무너지고 균열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니까.

'…아무래도, 스킬을 더 찍을 때가 된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무너진 기둥 사이를 뚫고 튀어나오는 흑기사를 눈에 담았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 이안과 흑기사의 시선이 교차하는 그때.

푸-확!

옆에서 붉은 섬광이 번쩍였다.

이안은 물론 흑기사의 고개도 본능적으로 옆으로 돌아갔다.

난장판이 된 연회장의 전경. 그 한구석, 어느새 전신에 피처럼 끈적이는 신성력을 두른 메브가 요정의 세검을 힘껏 내뻗고 있었다.

그 끝에서 뿜어져 나간 붉은 신성력은, 유령마의 머리를 꿰뚫고 그 뒤쪽의 마갑을 안에서부터 찢어발기며 뚫고 나갔다.

'…저쪽이 더 빨리 끝나겠는데.'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게임에서는 분명, 저 유령마와 흑기사가 한 조를 이루어 덤벼들었을 터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전투였으리라는 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뛰어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다른 여러 보스전이 그렇듯, 선택에 따라 추가적인 보상이 생길 수도 있었고.

어쩌면 저 유령마가 바로 그 추가적인 보상인지도 몰랐다.

'흑기사를 저놈보다 먼저 죽이는 게 획득 조건이라면…?'

죽지 않는 탈것. 아주 달콤한 유혹이긴 했다. 하지만 반드시 손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추측이 사실인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일행에게 기다리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게다가 저 유령마는 지나치게 눈에 띄었고, 동시에 저주받은 존재가 분명하기까지 했다.

낮에 탈 수도 없을뿐더러, 신성력을 두른 채로 타면 내내 괴로워할 게 분명했다.

투쟁의 축복을 받을 때마다 그의 피를 빨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잠들어 버리는 늪지의 원한처럼.

하지만 미련을 버린 건 이안 뿐인 모양이었다.

"로- 사아아아아-!"

흑기사가 쩌렁쩌렁한 고함을 토해냈다.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이안은 화들짝 놈을 돌아보았다.

안면 가리개가 날아가면서, 놈의 얼굴은 턱 위부터 고스란이 드러나 있었다.

검붉은 비늘이 한가득 돋은 피부.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지 않은 머리에는, 대신 만들어지다 만 것 같은 뿔 대여섯개가 가장자리를 따라 삐죽삐죽 돋아 있었다. 샛노란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붉은 눈은, 앞발을 치켜들며 울부짖는 유령마에 못박힌 듯 고정된 채였다.

이안의 입술 끝이 슬쩍 말려 올라갔다.

그대로 공격이 이어지면 영락없이 밑에 깔린 채로 추락할 판이었는데. 덕분에 주문을 완성할 틈이 생겼으니까.

"둘이 사귀냐?"

"...?!"

내뱉은 말에, 흑기사의 고개가 비로소 득달같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손을 내뻗고 있었다. 어느새 등 뒤까지 가까워진 바닥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자세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푸화악-!

혼돈력을 머금고 증폭된 휘몰아치는 방벽이, 그는 물론이고 흑기사까지 휩쓸어 날려 버렸으니까.

메브에게 발길질을 하려던 유령마와 다른 두 일행까지 터져 나온 돌풍에 휩쓸려 나뒹구는 가운데.

카드드득-

공중에서 자세를 다잡은 이안이, 연회장의 한쪽 벽면에 평지처럼 발을 디디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다소 둔중하게 치솟는 흑기사에게 고정된 채였다. 덩치 덕분인지, 놈은 돌진력이 상쇄되며 떠올랐을 뿐 이안처럼 튕겨 나가지는 않았다.

콰지지직-

발이 벽면을 부수며 파고들었다. 이안은 오른팔을 아공간 너머로 뻗었다. 운철 단검을 놔버린 그의 손아귀에, 이제는 꽤 익숙해진 굵직한 자루가 잡혔다.

끝이 살짝 휘어진, 넓적하고 기다란 검신을 가진 외날 대검이 벽면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막 휘두르기엔 좀 좁은데.

생각과 달리, 이안은 힘껏 벽면을 박찼다.

콰르르르-

균열이 일던 벽면이 그의 도약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뒤따라 번진 균열이 연회장 천장까지 이어지고, 천장을 구성한 돌들도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를 가르며,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이안이 쇄도했다.

"...?!"

허공을 돌던 흑기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오오오오오-!"

대기를 울리는 기합성과 함께, 노랗고 붉은 신성력이 뒤섞인 거대한 궤적이 밀려들고 있었으니까.

#180화

"미친…?!"

욕지거리를 토해내는 와중에도, 흑기사가 반사적으로 흑검을 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전신에 검붉은 마력이 솟구칠 찰나, 대검이 그 위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 콰앙-!

대검에 짓눌린 채 추락한 흑기사가, 엉망이 된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검과 검이 맞부딪쳐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굉음. 흑기사를 중심으로 바닥의 깨진 판석과 흙더미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거미줄 같은 균열이 연회장 바닥 전체로 번졌다. 흑검의 검면과 자루를 쥔 양팔이 다 구부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완력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단지 버텨 낸 것뿐이었다. 전신을 뒤덮은 충격을 전부 떨쳐내는 건 불가능했다.

"흡…!"

대검을 내리친 자세로 착지한 이안이, 땅에 발이 닿기가 무섭게 대검을 다시 치켜들었다. 태산처럼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진 흑기사가 간신히 참았던 숨을 토할 찰나.

쒸아아악-!

대검이 커다란 호선을 그리며 다시금 떨어져 내렸다. 흑기사가 황급히 다시 양팔에 힘을 불어넣었다.

또 한 번의 폭음. 그리고 방금보다 더 강한 힘이 실린 대검이 흑검 위를 후려쳤다.

흑기사의 몸이 바닥에 더 깊이 박혀 들고, 내뻗은 팔의 팔꿈치가 절로 굽어졌다.

솨아아- 대검 날을 따라 새겨진 고대어에 푸른 빛이 새겨지는 가운데, 이안이 다시 대검을 치켜들었다.

"…아니-"

또?!

흑기사가 뒷말을 내뱉기도 전에, 뒤로 젖혀졌던 대검이 다시 한번 거대한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새하얀 냉기의 궤적까지 더해진 채였다.

천장의 벽돌들이 줄지어 떨어져 내리고 있었지만, 대검을 내리치는 이안은 피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미 그가 미로 저택의 지하에서 이보다 더한 붕괴를 경험했음을 알 리 없는 흑기사의 눈에, 처음으로 놀람과 당황을 넘어선 생경한 감정이 서렸다.

공포.

콰아아아-

그 와중에도 대검이 만들어 낸 거대한 궤적은 어느새 흑기사의 코앞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흑기사가 품고 있던 용의 마력을 일제히 뿜어내면서 팔을 들었다.

비명을 지르듯 징징 울리던 흑검에 마력이 폭포수처럼 치솟았다.

대검이 그 위를 후려친 건 거의 동시였다.

쩌어엉-!

전신을 울리는 충격파와 함께, 용의 마력과 신성력이 뒤엉켜 만들어 낸 빛의 폭발이 일었다. 그 위로 한 박자 늦게 수많은 냉기의 칼날이 쏟아졌다.

콰과과과과-

연회장의 바닥이 흑기사와 이안을 중심으로 움푹 꺼졌다. 동시에 팔에 가해지는 압력을 더는 견디지 못한 흑기사의 장갑과 팔목 보호대가 터져 나갔다. 빛의 폭발을 뚫고 들어온 냉기의 칼날들이 흑기사의 전신에 난도질한 듯한 선과 흠집을 그려 댔다.

하지만 흑기사는 끝내 버텨 냈다.

충격파와 압력, 그리고 쏟아지는 냉기 칼날의 포격이 잦아들었다.

흑기사가 거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온 대검 날을 간신히 응시한 다음 순간.

"...."

이를 악문 이안이 다시 휙, 대검을 치켜들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그게 다시 대검을 내리찍기 위해서라는 걸 깨달은 흑기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정말 이놈은 자신이 쪼개질 때까지 대검을 내리치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성이 무너지게 되더라도.

퍽.

떨어진 돌덩이가 이안의 머리를 후려치고 튕겨 나갔지만,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어쩌면 용도 이렇게 죽였을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흑기사의 내면에, 문득 불같은 분노가 치밀었다.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심까지 더해진,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분노였다.

밀도 높은 마력이 만들어 낸 전신의 아지랑이가, 그에 감응하듯 끓어 올랐다.

"꺼져라-! 이 미친 자식아!"

콰아아아아-!

포효와 동시에 끓어오르던 마력이 폭발했다. 대검을 치켜든 이안이 눈을 치켜뜬 채로 휩쓸려 튕겨 나가고, 흑기사가 박혀 있던 바닥의 돌과 흙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쉬아아악-!

하지만 이안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지는 못한 게 분명했다.

생성과 동시에 갈기갈기 찢겨나간 푸른 역장이 사그라드는 가운데.

부릅뜬 흑기사의 눈에, 대검을 무게추 삼아 자세를 다잡는 이안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대검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카가가가각-

대검 날이 기다란 호선을 만들어 내며 속도를 줄였다.

이안의 발이 땅에 닿았다.

다시 대검을 뽑아드는 그의 모습은 어느덧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흔적도 남지 않은 흉갑. 한 쪽만 남은 견갑과 팔목 보호대. 너덜거리는 각반. 받쳐 입은 사슬 갑옷은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떨어져 나가서 누더기가 따로 없었다.

그 아래의 누비옷은 터진 사슬 조각들이 박혀 붉게 물들었고, 먼지에 뒤덮인 얼굴 한쪽에는 머리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끈적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무표정하기 그지 없는 얼굴.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력은 고요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광택 없이 우묵한 눈에는 오로지 하나의 의지만이 담겨 있었다.

너를 죽이겠다는.

"미친 자식…. 이제 보니 누더기의 사도였구나…. 네놈이야말로 저 신들이 얼마나 모순적이며 얄팍한 것들인지를 증명하는 산증인이군."

비틀대며 일어선 흑기사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양팔에 힘을 주며 씹어 뱉었다.

"자신들이 그토록 불경하게 여기는 마법사에게 앞다퉈 힘을 내리다니 말이야….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그만큼이나 싫다는 것이겠지. 교단도 알고 있느냐? 자신들이 섬기는 신과 성자가 음흉한 주문쟁이를 대행자로 삼았음을? 북부인들은 아느냐? 자신들의 대전사가-"

"시도는 좋았어."

이안이 말을 잘랐다. 다음 순간 쿠확,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대검을 늘어뜨린 그의 신형이 삽시에 커졌다. 일직선으로 흑기사를 향해 달려들며, 이안이 툭 덧붙였다.

"하지만 난 주절대면서 시간 끄는 취미는 없거든."

"이런 명예도 모르는-!"

말과 동시에 이어진 파공음에, 흑기사가 다급하게 움켜쥔 흑검을 옆으로 치켜들었다.

반격이 아니라 철저하게 방어를 위한 자세. 그의 전투 의지가 이전과 같지 않음을 무의식중에 증명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카가가가가각-

횡으로 긴 호선을 그리며 뿜어져 나온 대검이 흑검의 날 위를 미끄러졌다. 흑기사의 몸이 옆으로 죽 밀려나는 가운데, 맞부딪친 검날에서 불티가 폭죽처럼 튀어 올랐다.

이를 악물던 흑기사의 눈에, 이안의 눈동자가 보였다. 잿빛.

설마, 또?

퍼엉-!

추측을 현실로 만들듯, 기다란 대검 날에서 소리 없는 폭발이 터졌다. 일순간 빨아들였다가 밀어내는 엄청난 압력이 흑기사의 몸을 연회장 벽면으로 날려 버렸다.

끝내 놓치고만 흑검이 핑그르르 돌며 날아오르는 가운데, 벽면에 처박힌 흑기사를 놓치지 않고 노려보던 이안이 재차 몸을 날렸다.

어느새 내뻗었던 대검을 머리 위까지 치켜들면서.

키히이이이-!

유령마가 귀곡성 같은 울부짖음과 마력의 폭발을 토해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주인이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것을 깨달은 듯 모든 마력을 토해내고는, 폭주하듯이 이안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그렇다 해도, 뒤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궤적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푸확-!

뒤에서 기다란 선을 그리며 날아든 붉은 궤적이, 마갑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간 유령마의 몸을 그대로 썰고 지나쳤다.

잘려나간 유령마의 몸이 안개 덩어리처럼 터져 나갔다. 그러면서도 밀려드는 속도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신성력을 떨쳐낸 뒤에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듯, 타들어 가는 안개 사이로 말 머리의 형상이 아른거리며 피어올랐다.

바닥에 그림자처럼 깔린 채 질주하던 샬롯이 솟구친 건 바로 그때였다. 그녀가 올려 친 도끼날 끝에, 말의 두개골로 보이는 새카만 뼈가 걸렸다.

푸확-! 말의 흉상을 만들어내던 검은 안개가 증발하듯 흩어졌다.

"멈추지 마라! 이안!"

두개골을 도끼날에 건 채 솟구친 샬롯이 소리쳤다.

물론 이안은 이미 그러고 있었다.

그는 애초부터 멈출 생각이 없었다.

쒸아아아악-!

벽면에 처박힌 와중에도 도끼날에 걸린 검은 두개골을 뚫어질 듯 노려보던 흑기사가, 귀를 파고드는 파공음에 뒤늦게 팔을 치켜들었다.

카가가가가각-

천장과 벽면을 모조리 찢어발기며 밀려든 사선이, 그 한복판에 내밀어진 흑기사의 검붉은 팔뚝까지 갈라 버렸다.

대검이 만들어 낸 궤적은 흑기사의 팔을 지나쳐 가슴 한복판에서야 비로소 잠시 멈췄다.

대검을 양손으로 쥔 이안을 응시하는 흑기사의 눈빛에, 일순간 묘한 평온함이 내려앉았다.

"내 영혼은… 참된 주의 곁으로…."

콰지지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의 팔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대검 날이 흑기사의 상반신을 전부 잘라냈다.

잘려나간 흑기사의 상반신이 비스듬하게 떨어져 내렸다. 검은 피를 왈칵 왈칵 토해내던 하반신도 털썩,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하아- 하아-"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창을 응시하며, 비로소 이안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흥건하게 번진 핏물과 흑기사의 육신에서 검붉은 빛이 끓듯이 피어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푸화아아악-

흑기사의 육체가 번쩍이며 검붉은 아지랑이를 사방으로 토해냈다.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젖힌 이안이, 그 아지랑이가 만들어 내는 검붉은 장막을 올려다보았다.

장막 너머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인지한 것만으로도 심장을 옭죄는 듯한 존재감. 어렵지 않게 그 정체를 깨달은 이안이, 치미는 공포를 내색하지 않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서, 이 놈의 영혼은 네 곁으로 갔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뇌리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번졌을 뿐이었다. 놀랍게도 적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 순간, 마력의 아지랑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머릿속을 긁던 웃음소리와 존재감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치이이이….

숯덩어리처럼 새카맣게 변한 흑기사의 시신이 흐릿한 불티와 매캐한 연기를 토해냈다.

동시에 이안의 전신에서 아른거리던 붉은 신성력도 증발하듯 사라졌다.

남은 건 더 짙게 느껴지는 어둠과 귀가 먹먹한 적막 뿐.

철그렁-

군단장의 대검이 땅에 떨어졌다.

축복이 끝남과 동시에 새삼 느껴지기 시작한 무게감에, 이안이 그냥 나루를 놔버린 것이다.

비틀댄 이안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이러다 괴물들한테 죽기 전에 골병으로 먼저 죽겠는데….

흐릿하게 이어진 뭔가를 부수는 소리에, 이안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이 더 짙어졌다.

보지 않아도 샬롯이 유령마의 두개골을 박살내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 확인 사살 한번 철저하네.'

대충 하지. 혹시 모르는데.

속으로 덧붙이며, 이안은 엉망이 된 연회장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마력과 신성력이 만들어내던 빛이 사라져, 연회장은 흐릿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나마 아직 멀쩡한 벽면의 등잔 몇에 꺼질듯한 불이 맺혀 있긴 했지만, 을씨년스러움을 더할 뿐이었다.

폭탄이 터진 것처럼 뒤집히고 가라앉은 바닥에는 천장의 잔해들이 나뒹굴었다. 곳곳이 무너지고 균열이 간 벽면은 위태로웠고, 한쪽에 구멍이 뻥 뚫린 천장은 그 너머의 먹구름을 훤히 드러낸 채 쉬지 않고 흙먼지를 떨어뜨렸다.

이렇게 보니 성 전체가 무너지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아마도 위보다 옆으로 넓게 지어진 구조물인 덕분이리라.

"이안…!"

그리고 그 한복판, 잔해를 헤치며 달려오는 메브와 도낏자루를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는 샬롯의 모습이 보였다. 이안 못지않게 만신창이가 된 샬롯의 상반신이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번뜩이는 주황색 안광에는 묘한 만족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괜찮은 것이냐…? 움직일 수 있겠어?"

그의 앞에 멈춰 선 메브의 목소리에도 짙은 피로가 묻어나왔다. 안면 가리개를 올리자,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드러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유령마와의 전투도 쉽지는 않았을 테니까.

북부 혈통의 전마만큼이나 덩치가 큰 데다, 미친 듯이 마력을 토해내며 날뛰어대지 않았던가.

이들 둘이 그놈을 상대해 주지 않았다면, 전투가 훨씬 더 힘들어졌을 터였다.

"…괜찮진 않소만. 움직일 순 있소. 경도 앉으시오. 좀 쉽시다."

이안의 대답에, 메브가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만 번지는 가운데, 이안은 이제 연기도 토해내지 않는 흑기사의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놈의 전신 판금 갑옷은 이제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장화 정도가 멀쩡해 보였지만, 이안이 착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컸다.

너무 열심히 깨부쉈나.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신 찰나였다.

"끄, 끝인가…?"

"다들 무사하신… 맙소사…."

반쯤 무너진 통로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던 병사들 몇이, 이윽고 탄식을 흘리며 걸어 나왔다. 아까는 죄다 정신이 나가 있더니, 전투가 이어지는 사이에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굉음과 폭발이 이어졌으니 없던 정신도 돌아왔으리라.

"루 솔라여…."

"이런 처참한 꼴이라니…."

그들이 본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연회장의 전경을 눈에 담으며 연신 탄식을 흘리는 사이.

"...?"

이안의 시선이 문득 옆으로 돌아갔다. 피부가 따끔해지는 마력의 파장이 문득 느껴진 것이다.

주위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하지만 은밀한 악의가 깔린 마력의 파장.

그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린 이안의 입꼬리가, 이내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난장판이 된 연회장 한구석.

잔해 사이에 덩그러니 박혀 있는 흑검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도, 건질 게 없진 않군."

짧게 침음한 이안이 일어섰다.

#181화

"이안…?"

"쉬고 계시오."

고개를 갸웃하는 메브에게 덧붙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거꾸로 세운 도낏자루에 양팔을 얹은 샬롯과 멍하니 선 병사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가운데. 이안은 절뚝대면서도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잔해 사이에 박힌 흑검을 차근히 훑었다. 끝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무게추. 중앙이 살짝 튀어나온 기다란 자루. 용의 날개를 형상화한 듯한 십자 막이와 거뭇하고 매끈하게 이어진 검신.

그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검날에 서린 광택이 일렁였다.

어서 쥐란 거지?

내심 피식한 이안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루를 움켜쥐었다.

푸확-!

기다렸다는 듯 자루를 타고 검의 마력이 밀려들었다. 검을 쥔 이안의 주위로 검붉은 마력의 아지랑이가 휘몰아쳤다.

이안의 눈동자가 흰자까지 모두 검붉게 물들었다. 온갖 잔인한 환영과 비명, 그리고 살의와 증오를 머금은 감정들이 함께 쏟아졌다.

-죽여…. 모조리 죽여라… 저들에게 끝없는 공포를…

속삭임이 이안의 뇌리를 울렸다. 커졌다가 작아지고, 윽박지르듯 하다 다시 부드러워지는 사념이 메아리치듯 어지럽게 오갔다.

잘 단련된 기사라도 단숨에 타락시키고, 평범한 농노조차 피에 미친 살인귀로 만들어 버릴 강력한 사념.

"…그래, 확실히 마검이군."

하지만 이안은 조금 짜증스럽게 읊조릴 따름이었다.

사념은 그의 영혼을 조금도 물들이지 못했다. 그저 시끄럽고 거슬리는 환청과 환영일 뿐.

혼돈력을 살짝 끌어올린 것만으로도 이안의 눈동자가 본모습을 되찾았다.

솨아아-

반지에서 멋대로 번진 신성력도 이안의 전신을 감쌌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검을 향해 혼돈력을 밀어 넣었다.

-전부 죽여라. 죽….

뇌리를 시끄럽게 울리던 사념이 문득 잦아들었다. 키이잉, 검신이 밀려드는 혼돈력에 저항하듯 날카로운 울음을 토해냈다.

소용없는 저항이었다. 이안을 감싼 마력이 맥없이 흩어졌다. 그 사이로 검을 뽑아 든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놀란 듯 일어서는 메브와, 언제라도 달려올 자세를 잡던 샬롯이 동시에 멈칫대는 가운데.

치이잉-

이안이 혼돈력을 거둬들이자, 검신에서 짧고 섬뜩한 울림이 번졌다.

더는 환청과 환영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검의 내부 어딘가에 존재하는 의지를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기세가 다소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그를 향한 악의를 가득 머금은 채였다.

"…아무래도, 교육이 좀 필요하겠네."

읊조린 이안이, 허리춤의 빈 검집에 마검을 밀어 넣었다.

정보창도 확인하지 않은 채였다. 이미 손에 넣은 물건이니, 그딴 건 나중에 확인해도 충분했다.

검집이 상대적으로 짧은 탓에 검날 일부가 여전히 훤히 드러나 있었지만, 이안은 상관하지 않고 검집을 허리춤에서 떼어냈다.

뒤이어 검을 쥔 그의 손이 아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웅- 우웅-

마검이 울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대로 검을 놔버리고는 아공간 밖으로 손을 뺐다.

마검에서 번지던 불길한 존재감이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저 내부가 어떤 식인 건지는 나도 전혀 모르는데.'

딱히 답을 알고 싶지는 않은 의문을 떠올리며, 그가 저릿한 오른손을 툭툭 털 찰나.

"용살자께서… 마검을… 봉인하셨다…."

"루 솔라여…."

병사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탄성이 번져 나왔다. 이안은 그제야, 아직 자신을 감싼 신성력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신성력은 빛무리로 변해 천천히 흩어지면서, 그의 주위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병사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루 사드의 구원자시여… 감사합니다…."

"찬란한 여신과 위대한 백금룡께 영광 있으라…."

"루 솔라께 영광 있으라…."

진심이 가득 담긴 기도가 이어졌다. 슬쩍 보니, 어느새 메브와 샬롯까지 한쪽 무릎을 꿇고는 저마다의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또 왜 그래?

환장하겠네, 진짜…. 속으로 읊조리며 헛웃음을 짓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난장판이 된 계단 위쪽으로 향했다.

경쾌하고 빠른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반파된 복도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예상대로 백발의 요정이었다.

"잠잠하다 싶더라니, 역시나네…. 다 끝난 거 맞지, 이안?"

난장판이 된 장내를 돌아보며 중얼댄 테사이아가, 이윽고 이안을 향해 소리쳤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내뱉었다.

"생존자들은?"

"저 위에 다 모여있어. 아까 갑자기 귀 따가운 고함이 울리면서 죄다 나자빠졌었는데, 어쨌든 이젠 괜찮아. 내가 뺨을 치니까 다들 깨어나더라."

"…잘 됐군. 전부 성 밖으로 데리고 나와라. 성이 중간에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안전한 길로 안내하라고 하고."

"알았어! 그런데, 왜 다들 무릎을 꿇고 있는 거야?"

그건 나도 묻고 싶은 말이야.

대답 대신 입맛을 다신 이안이, 연회장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

문을 걸어 잠근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샌 글루미르의 주민들은, 다음 날 아침이 되고서야 성에서 일어난 소란의 전말을 알게 됐다.

흡혈 일족의 잔당으로 추정되는 마족이 쳐들어왔고, 루 사드의 구원자인 용살자가 그 마족의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주민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끔찍한 잔해만 남은 미로 저택에서의 사건과 달리, 이번에는 목격자도 여럿이었다.

"뎁의 말로는 불길 같은 신성을 온몸에 두르시고, 사람만큼 거대한 빛의 검을 휘두르며 날아다니셨다더군. 손길 한 번에 돌풍이 불고, 검을 휘두르면 천둥이 쳤대."

"찬란한 여신의 화신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기적이지."

"아무렴. 동행한 붉은 기사와 수인 종자에게도 병사들부터 구하라 명하시고 홀로 마족과 맞서셨다는데. 그토록 숭고한 분이 찬란한 여신의 일부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사람이 둘만 모여도, 저마다 들은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바빴다.

온갖 종류의 살이 붙어 대는 데에는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듣자 하니 엄정한 여신과 더 각별한 사이시라던데. 붉은 기사도 그분의 사도라지, 아마?"

"예끼, 이 사람아. 루 솔라께서 들으시네. 엄정한 여신은 찬란한 여신의 따님이시잖나! 그러니 붉은 기사가 그분을 섬기시는 거겠지."

"허어. 그렇겠군. 그럼 역시, 그분은 찬란한 여신의…."

"하, 한스가 부럽군. 그분께서 후광을 두른 채 저주받은 마검을 봉인하시는 모습을 직접 보다니 말이야. 진짜 기적이었다더군. 마법 따위가 아니라."

"부러울 게 뭐 있나. 그 자리에 있다 죽은 사람이 몇인데."

"하긴. 그나마도 그분들이 아니셨다면 살아남지 못했겠고."

평소라면 눈살을 찌푸리며 불경하다 호통쳤을 성의 관리들과 병사들도, 그들의 입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병사들은 더 열성적으로 용살자의 업적을 칭송했다.

대부분 용살자 일행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자들이었다.

성의 관리들과 영주 대리인은 용살자 일행을 도시에서 가장 좋은 저택에 모시고, 병사들과 시종들까지 붙여 보필했다.

내성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조사도, 그들이 저택을 방문해 진행했다.

용살자와 붉은 기사가 휴식을 취해야 했기 때문에, 조사는 붉은 기사의 종자와 용살자의 시종인 백발 요정이 대리했다.

물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모든 과정이 신속하게, 그리고 막힘없이 진행됐다.

"용살자께서 떠나지 않으시면 좋겠군. 그럼 그 누구도 감히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것 아닌가."

"위대하신 백금룡의 뜻을 대행하기 위해 떠나셔야 한다잖나."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지. 성심을 다하면, 성스러운 임무를 다하신 후에 돌아와 주실지도."

"말 나온 김에, 기도를 올리러 가지 않겠나?"

"또…? 그래. 좋지, 뭐. 가세."

***

"…환장하겠군."

창밖을 슬쩍 내려다본 이안이, 한숨을 삼키며 다시 몸을 돌렸다.

아직도 주민들이 저택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전에도 저러더니. 꼬박 하루를 자고 난 지금도 이 모양이었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느긋하게 식사를 이어가던 샬롯이 말했다. 그 건너편에 앉은 메브도 빵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은 이안이 식사를 끝내갈 때쯤에야 깨어났다. 주민들을 대피시키기가 무섭게 기절했던 이안과 달리, 둘은 귀족들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걸 확신한 뒤에야 잠에든 까닭이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이지. 교단이 너를 새로운 성인으로 추대한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이안."

그건 죽어야 되는 거 아닌가.

빈자리에 걸터 앉은 이안이 실소를 흘렸다.

"성인은 무슨…. 난 루 솔라를 섬기지도 않는다니까."

그가 앞에 놓인 술잔을 쥐는 사이, 메브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신앙은 그저 구실일 뿐이다. 언행이 고결하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지. 괜히 신들이 앞다퉈 네게 힘을 빌려주시겠느냐?"

"그건…."

내가 게임 캐릭터라 가능한 걸 텐데.

이안은 뒷말을 포도주와 함께 삼켰다. 그가 보기에 메브의 말은 반만 진실이었다.

적어도 루 솔라는 신도들의 믿음과 신앙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신이니까. 그녀가 그런 족속이라는 건, 게임의 맹신자들만 떠올려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금도 보지 않았느냐? 네 덕분에 백성들의 신앙심이 한층 더 깊어진 것을. 찬란한 여신께서 흡족해하실 일이지."

"저들은 그저 이 현실을 잠시 잊을 구실이 필요할 뿐이오."

"그게 신의 사도가 하는 일이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말을 말아야지.

샬롯이 메브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입맛을 다신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게 맞긴 하지.'

내 경우엔 즐기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거지만.

이안이 포도주를 마시는 사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한쪽 팔에 여전히 붕대를 감은 필립, 그리고 망토를 근사하게 두른 테사이아였다.

진중한 얼굴로 장내에 들어선 둘의 표정이, 문을 닫음과 동시에 확 달라졌다.

몸을 앞으로 축 기울인 필립이 중얼댔다.

"피곤해서 쓰러질 뻔했습니다…."

"내 말이. 용살자는 이안인데, 왜 우리한테 자꾸 손을 잡아 달라고 하는 거야?"

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투덜대던 테사이아가, 메브의 시선을 받고는 혀를 차며 일어섰다.

방구석의 의자를 끌고 온 필립이 식탁을 바라보며 앉았다.

"어쨌든, 다 끝났습니다. 더는 귀찮은 절차도 남아있지 않고, 전투 중에 파손된 세 분… 아니, 두 분 나리와 샬롯의 장비는 전부 새로 받기로 했습니다. 물론 공짜로요. 글루미르를 또다시 구해주신 보답이라더군요."

"잘 됐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브가 건넨 술잔을 곧바로 입에 가져간 필립이, 잔에 담긴 술을 전부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도시의 장인들이 전부 달려들어 수선 중입니다. 심지어 주민들도 돕고 있고요. 아시다시피 제가 여러분들의 치수를 전부 알고 있어서, 일이 더 편했습니다. 끝나는 족족 마차에 실어 주기로 했고요."

"언제쯤 끝나는데?"

"오늘 밤이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나리."

메브가 내민 술병 앞에 잔을 가져다 대면서, 필립이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성이 반쯤 무너졌는데, 오히려 백성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까는 마구간지기가 와서 고해성사하더군요. 사실 우리에게 내준 말이 가장 좋은 말이 아니었다고요. 용서하겠다고 했더니, 이미 가장 좋은 말로 바꿔 놨답니다."

"별의별 얘길 다 들었어. 북부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긴, 그때는 다들 이안이 죽을까 봐 걱정하느라 바쁘긴 했지. 나도 목말라, 야옹아."

"넌 손이 없냐?"

샬롯이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자신의 술잔을 내밀었다.

씩 웃으며 받아든 테사이아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이제 다 끝났어. 쉬기만 하면 돼."

"잘 됐군. 그럼 내일 해 뜨기 전에 출발하면 되겠어."

"그래. 해 뜨기 전까지 쭉-. 뭐라고? 내일?"

테사이아가 술잔을 입에 가져가다 말고 되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눈을 치켜떴다.

"말도 안 돼! 난 하나도 못 쉬었다고. 너희 셋이 코 골고 잘 동안, 여기 이 주근깨랑 밤낮 가릴 거 없이 돌아다니고 떠들어 댔단 말야."

"맞습니, 아니. 그것보다, 이번 전투로 몸이 다시 축나셨습니다. 세 분 모두요. 적어도 며칠은 더 쉬셔야-"

"그러다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이어진 필립의 말을, 이안이 잘랐다.

일행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덧붙였다.

"우릴 습격한 놈은, 흡혈 일족의 잔당이 아니었으니까."

"예…?"

필립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눈빛을 교환한 메브와 샬롯이 역시, 하고 중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설마, 나리는 알고 계셨습니까?"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제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거고요? 제가 받은 조사는 교단으로 보내질 겁니다. 그럼 저는 신 앞에 거짓을 고한 셈이-"

"무슨 상관이야, 넌 몰랐는데."

이안이 툭 끼어들었다.

필립이 입을 뻐끔댔다.

"그게 무슨…."

"넌 믿고 있는 대로 말 한 거니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

이안은 필립의 시선을 무시한 채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물론 사실은 너무 귀찮고 피곤해서 설명하지 않았던 거긴 하지만.

어차피 이런 말장난은 사제들도 곧잘 하는 짓거리였다.

"염려 말거라, 필립. 여신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것이야."

메브가 덤덤하게 타일렀다.

이윽고 체념하듯 눈을 질끈 감은 필립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그놈은 대체 뭐였던 겁니까?"

"그놈은 용의 대행자였다."

필립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용…? 용이라고요…?!"

#182화

"그래."

"…용의 대행자가 왜, 아니,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용이 나리를 노린답니까? 나리는 저 위대한 백금룡의 대행자인데요? 용을 죽인 것 때문에 원한이라도 사신 겁니까? 그럼 왜 그동안 아무런 말씀도-"

순간 입을 뻐끔댄 필립이, 이내 쏟아내듯 질문을 토해냈다.

숨 넘어가겠네, 새끼.

"나도 몰랐다. 날 쫓아오는 놈이 있다는 것도, 그놈이 용의 대행자라는 것도. 전부 마주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들이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알려줄 수 있겠느냐?"

한 손을 들어 필립의 말을 막은 메브가, 녹색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며 덧붙였다.

"네 말을 의심해서 묻는 건 아니야. 사실 나도 의문을 품고 있었다. 놈이 다루는 힘에서 신성력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해서, 나는 공허의 힘이리라 여겼지."

"그게 바로 용의 마력이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이안이 말을 이었다.

"나는 신성력과 혼돈력, 용의 마력을 모두 경험해 봐서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소. 게다가 그놈을 죽인 뒤에 나타난 기척도 분명 용이었지. 아마 경도 느끼셨을 텐데."

"그랬지. 공허의 존재이리라 여겼을 뿐…. 그래… 비단 공허의 괴물들만이 그런 존재감을 지닌 건 아니지. 용이라 해도 충분히…."

메브가 비로소 탄식을 흘렸다. 뭔가 말하려는 필립에게 다시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낸 샬롯이 덧붙였다.

"하지만 타락용은 이미 죽었을 텐데. 네가 죽인 용의 잔해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만."

"타후므리트는 죽은 게 맞아. 대행자를 보낸 건 다른 놈이다."

"어떤 놈인지, 짐작은 가?"

테사이아가 뒤이어 물었다.

그녀는 다른 일행들과 달리, 그저 흥미로울 뿐이라는 듯이 눈을 빛내며 술을 홀짝대고 있었다.

사실 이미 이름까지 알고 있었지만, 이안은 태연하게 어깨를 까딱였다.

"글쎄. 백금룡은 모든 용은 언젠가 필연적으로 광기에 물들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했었지. 타후므리트가 사랑에 눈이 멀었듯이."

술잔을 든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 흑기사 놈은 본인을 사도라 칭하고, 자신이 섬기는 용을 참된 신이라 여겼다. 그러니까 이놈은, 자신이 신이라는 과대망상에 빠진 놈이겠지."

"그렇게 정신 나간 용이 있다면, 어째서 아직까지…."

"…역천룡."

읊조리던 샬롯의 말을, 필립의 얼빠진 목소리가 잘랐다.

일행들의 시선을 받은 그가 미간을 좁히며 덧붙였다.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시겠죠? 다른 것도 아니고, 역천룡의 전설인데요. 신을 참칭하며 천상에 오르려 한, 희대의 악룡."

샬롯과 테사이아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빡였다.

물론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게임에서 라크마흐와 싸우기까지 했지만, 놈의 사연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사제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말해 주곤 하는 이야기다."

입을 연 건 메브였다.

"먼 과거, 대륙을 피로 물들이며 공포로 군림하던 악룡이 있었다. 그 힘이 어찌나 강대한지, 같은 용조차 그를 막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정도였다지. 그의 오만은 극에 달했고, 끝내 자신을 신이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종족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용들조차 그의 뜻을 따랐다더군."

포도주로 입술을 축인 그녀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놈은 끝내 천상에 오를 준비까지 했지. 교단의 용사들이 떨쳐 일어선 건 그때였다. 그들은 황금의 용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는 그 청을 받아들여 함께할 용들을 모았지. 그리고 악룡이 의식을 거행하는 그날, 결사대와 악룡을 숭배하는 이들 간의 전투가 펼쳐졌다. 수많은 용과 교단의 용사들이 목숨을 잃었지."

메브의 목소리가 아련해졌다. 먼 과거, 이 이야기를 듣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듯.

"그리고 그들의 희생과 염원이 천상에 닿아, 악룡에게 신벌이 내렸다. 그리고 황금의 용이 그의 날개를 꺾어 추락시켰지. 그리고 교단의 용사들이 목숨 걸고 용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신을 참칭한 악룡은 죽었고, 그 이름은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졌지. 그리고…."

어깨를 으쓱인 그녀가, 묘한 눈빛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인간의 편에 선 용들은 교단의 성자가 되었다. 악룡의 날개를 꺾은 용이 바로, 그 위대한 백금룡이지. 교단은 신과 용의 가호를 모두 받게 되었으며, 모든 인간이 한마음으로 빛을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시대가 열렸다더군. 그러니 항상 찬란한 여신과 교단의 성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라는 게, 내게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사제님의 말씀이셨다."

"재미있는 이야기네."

재미는 개뿔. 뻔하기만 하구만.

테사이아의 말에 이안이 소리 없이 코웃음을 치는 사이.

"이제 보니, 그게 단순한 전설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메브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맺었다.

이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양이오."

"…제가 꺼낸 말이긴 합니다만."

필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생각할수록 믿기 어렵군요. 전설에 의하면 역천룡은 죽었습니다. 말 그대로 까마득한 과거의 존재이기도 하고요. 전쟁의 시대와 내전의 시대보다도 더 먼 옛날이요."

"글쎄. 내가 느낀 바로는 멀쩡히 살아 있던데."

"다른 용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백금룡은 용이 일으킨 문제에는 전력으로 개입할 권한이 있어 보였다. 다른 놈이 있다면 진작 처리했을 거야. 그의 시선을 피해 이런 짓을 꾸밀만한 용이 여럿일 것 같진 않다만."

"…그럼, 이안 나리께선 정말 그 고대의 악룡이 아직도 대륙 어딘가에 멀쩡하게 살아 있으리라 보신다는 거군요."

"일단은. 난 그딴 전설보다, 내가 직접 경험한 걸 더 믿어."

사실 이미 답을 알아서 죄다 끼워 맞춘 거긴 하지만.

"루 솔라여…."

비로소 탄식을 흘린 필립이, 술을 벌컥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런 엄청난 죄를 저지른 존재를, 왜 죽이지 않고 살려 뒀답니까?"

"죽음은 지나치게 자비로운 형벌이니까."

잔을 든 샬롯이 툭 내뱉었다. 필립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교단은 그 악룡이 산채로 고통받게 만든 거다. 가능한한 오래. 어쩌면, 영원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과거 우리 수인들이 섬기돈 신도,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처지가 되었으니까."

"아하…."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댄 필립이, 애꿎은 술잔만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 그리 확신하실만 하지요. 제가 무지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나 역시 찬란한 여신을 섬기니까."

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메브가 탄식하듯 읊조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토록 오랜 형벌을 받으면서도 야욕을 버리지 않았단 말인가…. 놀랍고도 두려운 일이군. 지금에 와선 어떤 괴물이 되어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버리지 않은 수준이 아니지. 그 와중에도 자신의 신도를 만들고, 힘을 내릴 수도 있는 상황까지 만들어 낸 거니까."

이안이 덧붙인 말에 순간 굳어졌던 필립과 메브가, 이내 탄식했다.

"그렇겠군요. 왜 나리를 노린 건지도 알겠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백금룡에게 원한이 깊을 테니, 대행자를 죽이는 방식으로 복수하려는 거겠죠."

"이유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

잔에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켠 이안이, 빈 잔을 툭 앞에 내려놓았다.

"그보단, 그놈의 대행자가 하나가 아니리란 사실이 더 중요하지."

"...!"

테사이아를 제외한 일행 모두의 눈이 커졌다. 샬롯이 그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런 놈들이 더 있단 거냐?"

"날 죽이고 유일한 대전사가 될 거라고 지껄였으니까. 비슷한 처지인 놈이 여럿인 거야. 그 도마뱀이 내 목에 보상이라도 건 모양이지."

"훌륭하군… 또 그런 엄청난 것들과 싸울 수 있다니."

미소 짓는 샬롯을 제정신이냐는 듯 바라본 필립이, 이내 탄식했다.

"그래서 여기 계속 머물면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하신 거군요."

"그래. 놈들은 내 위치를 아니까. 아마, 제국을 경유했을 때 알려졌겠지. 내 신분을 정확히 밝힌 건 그때가 처음이니까. 어쩌면, 이미 다른 놈이 오고 있을지도 몰라."

"시간상으로도 이상하지 않군요. 어쩐지, 우연이라기엔 너무 공교롭다 여기긴 했습니다만. …잠깐만요. 맙소사, 루 솔라여."

문득 깨달은 듯 탄식한 필립이, 이안과 메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럼 제국에는 타락자뿐만 아니라, 역천룡을 섬기는 이교도들까지 암약하고 있단 거군요!"

당연한 얘길 굉장히 놀랍다는 듯이 하네.

이안이 헛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어쩌면 다 한통속일지도 모르지."

"그러진 않을 것이다. 백금룡께서 엄연히 존재 하신데, 어찌…."

"그거야 모를 일이지. 남몰래 공허의 고대신을 섬기는 사제도 있는 판국에, 역천룡이 대수겠소?"

툭 내뱉은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물론, 백금룡을 다시 만나면 물어볼 생각이었다. 정말 몰랐는지, 아니면 늘 그렇듯 알면서도 방조 중인 것인지.

만약 후자라면 그걸 빌미로 주머니를 왕창 털어주리라.

"하지만…. 으음, 그래.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중얼거리는 메브의 눈빛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분노나 결의보다는 암담함에 가까웠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시련을 앞둔 것처럼.

"그러니까, 요약하면 웬 미친 늙은 용이 이안을 노리고 있으니까, 더 개판이 되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거지?"

술만 홀짝이던 테사이아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알았어. 납득할 만한 이유였으니까, 받아들일게. 이야기도 꽤 재미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은, 신분을 밝히는 것도 조심하는 게 좋겠군."

덧붙인 이안이 메브와 필립을 돌아보았다.

"우리 위치가 알려지면 그놈의 또 다른 하수인이 따라붙게 될 테니까. 평소라면 별 상관없지만, 이제 우리는 타락자들을 색출해야 하잖소."

"근처에서 소란이 일면 놈들의 귀에도 들어갈 테고, 늘 그랬듯 쥐새끼처럼 숨어 버리겠죠.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필립의 대답에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메브를 바라보았다.

"경도 마찬가지요. 경이 나를 돕고 있다는 것도, 이미 공공연히 알려지고 있을 테니까. 어쩌면 이미 타락자들의 귀에 들어갔을 수도 있소."

"…그래. 당분간은, 이름 없는 방랑 기사가 되어야겠구나."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샬롯이 묘하게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테사이아도 혀를 차고는 읊조렸다.

"아쉽게 됐네. 너희가 하는 걸 보면서, 다음번엔 나도 내 소개를 할 생각이었거든."

"…테사가요? 왜요?"

필립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종자가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해야지."

"주제를 모르는군. 네가 이안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샬롯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테사이아가 느긋하게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당연하지. 난 무려 원로 요정이라고. 요정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슬쩍 턱 끝을 치켜든 그녀가, 샬롯을 내려다보듯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존재가 함께한다는 걸 알리는 것만으로도, 이안에게 도움이 될 거야. 내 말이 틀려?"

"…제기랄."

그녀를 노려보던 샬롯이 나지막이 읊조리고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어이없다는 듯 웃음 지은 필립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신분을 감춰도 눈에 띄지 않는 건 어렵겠군요. 이 두 분이 계시니 말입니다. 뭔가 가짜 신분을…."

이안의 표정을 보고 잠시 말을 멈춘 필립이, 눈을 끔뻑이고는 덧붙였다.

"왜 테사를 그렇게 보십니까?"

"저 녀석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

"...?!"

샬롯이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테사이아도 설마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테사."

"응, 응…?"

아공간에서 꺼낸 은 브로치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이안이 덧붙였다.

"넌 이제부터 아이나스다."

"...?"

테사이아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안이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나와 경이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동안엔, 네가 일행의 얼굴이 돼라. 너는 아이나스 가문의 원로고, 우리는 네 호위가 되는 거야."

"그래도 괜찮을까…? 꽤 이름난 가문 같다며."

"이미 원한을 샀는데, 하나 더 얹어진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웬만해선, 놈들의 귀에 들어갈 일도 없겠고."

"그렇다면…."

멍하니 입을 벌리는 샬롯을 힐끔댄 테사이아의 얼굴에, 비로소 악동 같은 미소가 번졌다.

"할게. 되게 재미있을 것 같아."

"다른 사람들 앞에선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넌 원로니까. 아주 오만한 귀쟁이처럼 굴어야 돼."

"염려 말거라."

테사이아의 말투가 돌변했다.

말투만 변한 게 아니었다. 눈매는 서늘하게 가라앉고, 입꼬리는 끝만 살짝 올라갔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던 것보다도 훨씬 더 고고하고 오만해 보이는 미소.

비록 눈가에 멍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긴 했지만, 특유의 분위기를 헤치지는 못했다.

소리 없이 일어선 그녀가 천천히 몸을 기울여 손을 뻗었다. 테이블에 놓인 브로치를 집어 들며, 그녀가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기꺼이 그리해 줄 테니."

"훌륭하군."

이안의 대답에, 그녀의 미소가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렇지? 지금까지 본 것들을 좀 따라해 봤어."

"그건 절대 잃어버리지 마라. 만약 아이나스를 아는 누군가가 증명을 요구하면, 그걸 보여줘야 하니까."

"안 잃어버릴 자신은 없는데."

중얼댄 그녀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턱을 살짝 치켜들며 이안을 내려다본 그녀가, 브로치를 내밀며 느릿느릿 덧붙였다.

"그러니 이건 네가 잘 보관하거라, 이안."

"미치겠군…."

샬롯이 눈을 질끈 감는 가운데, 피식 웃은 이안이 브로치를 받아들었다.

곧 브로치를 아공간에 대충 던져 넣은 그가 덧붙였다.

#183화

"저 녀석을 중심으로 적당한 사연을 더해 봐라, 필립. 말을 지어내는 건 네가 잘하는 거니까."

"물론이죠. 염려 마십시오. 가장 어려운 부분이 해결되었으니, 나머지는 일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묘책이로군요. 검문을 피해 다닐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입니다."

싱글대며 대답한 필립이, 이윽고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이 되어서 한 번 더 여쭙는 겁니다. 두 분 나리와 샬롯 모두, 그 몸으로는 아주 힘든 여정이 되실 테니까요."

"나는 괜찮다, 필립."

"나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는 아주 가벼운 부상이야."

메브에 이어, 입맛을 다시던 샬롯도 대답했다. 이안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상태는 전혀 좋지 않았다. 지금은 거동만 간신히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눈을 감으면 바로 곯아떨어지리라. 본래라면 적어도 며칠은 더 요양이 필요했다.

"나리…?"

"…이동하면서 쉬면 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