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3층 높이의 대저택은 담장도 없이 우뚝 솟아 있었다.
본래는 정원에 둘러싸인 모습이었겠지만. 지금은 제법 거리가 떨어진 녹지에 홀로 지어진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모든 창문과 대문이 활짝 열려 있기까지 했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이. 그 주위를 붉은 꽃잎들이 자욱하게 흩날리며 떠다녔다.
나풀대는 꽃잎들이 저택의 열린 창문으로 자연스럽게 들락거렸다.
수천 마리의 나비 떼에 둘러싸인 괴물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긋지긋하네 정말.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게임에서의 기억이 절로 겹쳐졌다.
그때의 저택 지하에는 부지만큼의 지하 공간이 있었다.
여러 타락자나 마족이 그렇듯. 뱀파이어 들도 신의 시선이 닿지 않은 지하에 본거지를 지어 둔 것이다.
연구실과 고문실. 또 다른 지하 동굴로 통하는 비밀 통로. 그리고 여제의 알현실 같은 것들이 위치한, 일종의 간이 지하 궁전.
지금은 그때와 달리 본래의 여제가 그곳에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로.
"...."
활짝 열린 대문 앞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때였다.
제국식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노인이었다.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여제의 반려.
…반려?
이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갈 찰나.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이안 경."
노인, 니그리안테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가 정중하면서도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심하십시오. 나는 어디까지나 귀하의 길잡이로 이곳에 있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여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말을 이어 가는 동안, 이안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그러다 끝내는 달리는 형상이 되었다.
그가 허리춤에서 검까지 뽑아 들자, 비로소 백작이 미소 지었다.
"싸울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미 많은 힘을 소진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힘을 아끼시고-"
"그럼 목만 내밀고 있어라. 깔끔하게 처리해 줄 테니."
이안이 달리며 내뱉었다. 백작의 미소가 짙어졌다.
"제 안내 없이는, 여제께서 계신 곳을 찾기 어려우실 겁니다."
"글쎄. 지하에 있는 거 아닌가?"
"...!"
바로 정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백작의 눈이 설핏 커졌다.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달려왔다. 이윽고 백작이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뻗었다.
"어쩔 수 없군요."
주위에 나풀대던 꽃잎들이 쏜살같이 그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사이에 저마다 하나씩의 핏방울로 변한 채였다. 백작이 손을 털었다. 삐죽대던 핏방울들이 산탄총처럼 뿜어져 나갔다. 다른 점이라면 총구가 아니라 넓은 면적을 점령하고 밀려든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건 거의 크레모아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푸확-!
동시에 치솟은 돌풍이 날아드는 핏방울을 흩어버렸다. 전부 튕겨 나간 건 아니었지만, 나머지는 검과 팔뚝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맨몸으로 견뎌냈다.
"역시, 어림도 없군요."
하지만 백작은 놀란 표정도 짓지 않았다. 이안의 속도를 조금 늦춘 것만으로도 충분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그의 전신이 거뭇한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새카만 연기 덩어리가 된 그가 쏜살같이 저택 안으로 멀어졌다.
그가 지나친 경로에 나울대던 꽃잎들이 작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휘몰아쳤다.
'모기 새끼들은 튀는 걸 너무 좋아한다니까.'
유전자에 새겨져 있나.
혀를 차면서도, 이안 역시 저택으로 들어섰다.
백작의 뒤를 쫓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가 지나친 궤적을 따라 꽃잎들이 빠르게 회전하며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텅 빈 복조를 지나친 이안은 곧바로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다음 복도로 들어섰을 때, 검은 안개로 변한 백작은 이미 저 멀리의 코너를 돌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휘몰아치는 꽃잎 사이로 이안도 질주했다.
밀려나기 전에 그의 몸에 부딪힌 꽃잎들이 핏방울이 되어 끈적하게 터져 나갔다.
피비린내가 가시질 않네, 진짜.
생각하던 이안의 눈빛이 이내 묘해졌다.
백작이 그저 단순히 도망만 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서였다.
'길잡이라더니.'
게임에서 저택의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는 3층, 여제의 집무실 뒤에 위치해 있었다.
그때보다 저택이 훨씬 커진 지금도, 그런 기본적인 요소까지 달라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역시나. 길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 백작의 흔적은 3층까지 이어졌다.
계단을 올라 또 다른 복도로 들어선 이안은, 흔적을 뒤따르며 커다란 창밖을 바라보았다.
온통 붉은 녹지와 붉게 변색되고 있는 미로 정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느새 완전히 붉어진 초승달의 모습만큼은 선명하게 눈에 각인 됐다. 밤하늘의 테두리를 따라 번지는 먹구름의 소용돌이도 태풍처럼 빠르고 거셌다.
두족류의 눈알 같아 보일 정도였다. 저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철컥. 쿠구구구구-
그때, 저 멀리서 기관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휘몰아치는 꽃잎을 따라 복도 끝의 열린 방 안으로 들어선 이안은, 이내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장식과 가구로 가득한 집무실 너머.
벽면이 통째로 돌아가면서 숨겨진 원형 계단의 입구가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백작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아마 지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더럽게 친절하네.'
나풀대는 꽃잎을 손으로 튕겨 터뜨리며, 이안은 계단을 내려갔다.
사방이 벽으로 가득해졌지만, 계단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꽃잎들이 은은한 붉은빛을 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원을 그리며 이어진 계단을 멈추지 않고 내려갔다.
"...."
한참 이어지던 계단은 갑작스럽게 끝났다. 동시에 계단 주위를 막고 있던 벽도 사라지고, 널찍한 지하 공간이 드러났다.
널찍하고 길게 이어진 통로 좌우로, 벽에 박힌 마석이 뿜어내는 빛이 은은하게 번졌다. 높다란 천장 인근에는 붉게 일렁이는 꽃잎들이 수없이 떠다녔다.
뭐, 밝아서 좋네.
이안은 넓고 길게 이어진 통로를 나아갔다. 좌우로 이어진 밀실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저 앞의 커다란 대문 앞에 백작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달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제 저놈이 도망쳐 봐야, 갈 곳은 여제의 알현실뿐이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백작이 주름진 미소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이곳이 귀하의 종착지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다음 순간, 그가 그대로 손을 들어 자신의 목 앞을 그었다.
푸확, 잘린 목 단면에서 피가 튀었다. 그 사이로 번진 진혈이 대문의 틈 사이로 빨려들어 사라지고, 백작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자결이라니.
이어진 퀘스트 완료 창을 닫아 버리며,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혹여라도 그에게 진혈을 잃기 전에 그냥 죽음을 택해버린 모양이었다. 여제에게 반드시 자신의 진혈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마족 충신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정말 여제를 사랑하기라도 했던 건가.'
생각하며, 이안은 재가 되어 바스러지는 백작의 시신을 밟고 지나쳤다. 그리고는 양손을 뻗어 천장까지 이어진 대문을 힘차게 밀었다.
쿠구구구-
그의 기억보다 더 큰 여제의 알현실이 드러났다.
'하여간 두더지 같은 것들.'
이안은 심드렁하게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알현실의 천장에도 꽃잎들이 가득했다.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붉은빛을 흘리며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그 아래로, 의자 대신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원통이 솟아 있었다.
황금 잔이나 화로처럼 보이기도 했다. 표면에 루비를 중심으로 한 보석이 호화롭게 박혀 있었고, 빽빽하게 새겨진 고대어 주문 회로가 은은한 붉은 빛을 흘렸다.
게임에서도 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황금 욕조. 저게 흡혈 일족의 권좌이자 성물이었고, 그때는 지금과 달리 테사이아가 가장자리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다.
물론 저렇게 마력을 머금고 있지도, 피가 가득 차 있지도 않았다.
번지는 피 냄새에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옆으로 손을 뻗은 이안이 아공간에서 군단장의 대검을 꺼내는 사이.
솨아아-
황금 욕조에 넘칠 듯 고여 있던 핏물 표면에 파장이 일었다.
넘친 핏물이 욕조 표면을 붉게 물들이며 흘러내리고, 그 안에서 황금색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솟아올랐다.
장인이 공들여 빚은 듯한 이목구비. 피처럼 붉은 눈동자. 어깨 아래까지 이어진 금발과 흰 피부.
방금까지 피로 가득한 욕조에 들어가 있었음에도, 그녀의 머리칼과 피부는 기름을 바른 것처럼 산뜻한 윤기가 흘렀다.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진혈의 주인.
"...."
이안은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곧바로 달려들지 않은 건, 욕조에 응집된 엄청난 양의 마력 때문이었다. 이미 완성된 주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주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게임의 황금 욕조는 그저 배경에 불과했으니까.
확실한 건, 무시하고 달려들었다간 그 대가를 치르게 되리란 사실 뿐이었다.
주문을 확인하거나, 응집된 마력이 흩어지길 기다리는 게 순서였다.
'스킵도 못하게 만들어 두다니.'
짧게 혀를 차는 사이, 여제가 욕조 가장자리에 올라섰다.
이안은 그제야 그녀의 키가 아주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인족만큼은 아니었지만, 2미터가 훌쩍 넘어 보였다.
아마 항상 이런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뱀파이어들의 진혈을 전부 흡수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육체로 재구성된 거겠지.
촤아아아-
그녀가 밖으로 나왔음에도, 욕조의 수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꽃잎들이 그 안으로 떨어지면서 더 늘어나서, 핏물이 계속 흘러넘쳤다.
욕조를 중심으로 뭉근한 붉은빛이 번졌다.
여제가 발을 뻗었다. 순식간에 모여든 꽃잎이 하나의 핏덩이로 변해 그녀의 발을 받쳤다.
그 위에 올라선 여제가 미소 지었다.
"이렇게 직접 마주 보는 건 처음이군요. 반가워요, 이안 경.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장으로 만들어진 머리로 들었을 때와는 달리, 아주 듣기 좋은 우아한 목소리였다.
이안은 쌍둥이의 눈을 마주 보았을 때처럼, 그녀를 중심으로 시야가 일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여제가 의도한 것은 아닐 터였다. 단지 지금 그녀가 품은 마력이 너무 강대한 나머지,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주문적인 힘을 지니게 되었을 뿐.
혼돈력을 끌어올리며, 이안이 내뱉었다.
"그래. 아주 철저하게도 준비하고 기다리셨더군."
"그게 당신이 바란 것 아니었나요? 덕분에…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명분이 생겼으니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여제의 눈매가 우아한 호선을 그렸다.
"당신이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주는 것뿐이에요. 원하는 건 모두 얻지 않았나요? 기어코 그 가여운 아이도 살려냈고. 여기서 멈춘다면, 나는 조용히 루 사드를 떠날 거예요. 당신은, 당신의 여정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겠죠. 나는 아직도 당신이 싫지 않거든요."
일말의 긴장감이나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오히려 후련하고, 조금은 설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안은 지금 그녀의 말이 전부 진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제는 정말 이 땅을 떠나고 싶은 것이다.
"걱정 마라. 충분히 싫어지게 만들어 줄 테니까."
"안타깝군요. 우리가 끝까지 싸운다면, 이득을 보는 건 전혀 다른 자들일 텐데요. 나와 일족의 자리를 노리는 것들. 우리를 이용하려는 자들. 당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들…. 하지만 당신이 마음을 바꾼다면, 아니, 그걸 넘어 내 손을 잡아준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거예요. 어때요?"
여제가 길고 흰 손을 슬며시 앞으로 내밀며 미소 지었다. 이안의 시선을 순간 요동치게 하기엔 충분했다.
"마침, 나는 방금 다시 혼자가 된 참인데."
끌어올린 혼돈력을 신성력에 섞어 넣으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널 위해 자결한 남편이 들으면 서운해 하겠군."
"물론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도 알고 있었어요. 언젠간 이렇게 되리란 걸."
"거절하지. 위대한 사랑 따위엔 관심 없거든. 그보단…."
"...?"
"네가 줄 경험치에 관심이 있지."
내뱉은 이안이 달리기 시작했다. 욕조에 응집되어 있던 마력이 사그라든 것과 거의 동시였다.
대검을 늘어뜨린 채 질주하는 그를 바라보며, 여제가 옅게 미소 지었다.
"아쉽군요. 아니,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모르겠어요. 강제적인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죠."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동시에 욕조에서 흘러나와 흥건하게 번지던 핏물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피는 순식간에 하나하나가 화살만 한 크기의 가시로 변해 뿜어져 나갔다.
이안의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력이 타올랐다. 대검을 몸 앞에 비스듬하게 치켜든 그가 넓적한 검면 뒤에 몸을 숙였다.
카가가가가-
피의 가시가 폭풍처럼 그 위를 두드렸다. 하지만 이안의 돌진을 멈추지는 못했다.
여제가 다시 한번 손을 까딱였다.
검면에 부딪쳐 흩어졌던 핏방울들이 다시 가시가 되어 뭉쳤다.
동시에 그녀의 발아래에서 솟구친 거대한 그림자 칼날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칼날과 가시에 포위당한 형상.
슈확-!
이안이 뛰어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전신에 맺혀 있던 바람이 그를 힘껏 떠밀었다. 삽시에 천장 가까이 솟구친 이안이 단숨에 여제를 향해 밀려들었다. 오른손으로 으스러질 듯 움켜쥔 대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쏜살같이 여제의 앞으로 날아든 꽃잎들이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뭉치더니 이내 딱딱해졌다.
얼음 결정 같은 형태였다.
콰지지직!
이안의 대검이 그 한복판을 후려쳤다. 방패 전체에 균열이 번졌지만, 어쨌거나 깨지지는 않았다. 응축된 마력이 만들어 낸 반발력이 이안을 허공에 멈춰서게 했다.
하지만 붉은 마력이 휘몰아치는 이안의 눈동자에는 전혀 실망한 기색이 없었다.
솨아아-
솟구쳐 쇄도하는 그 잠깐의 사이에, 이미 주문이 완성되었으니까.
방패 너머, 여제의 여유로운 얼굴을 응시한 이안이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허공을 움켜쥔 것처럼 오므린 손 한복판, 맹렬하게 회전하는 정수가 빛났다.
여제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 다음 순간.
콰아아아아아-
용의 숨결처럼 터져 나온 불길이 그대로 피의 방패를 불태우고, 여제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눈부신 섬광과 열기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이안은 허공에서 뒤로 튕겨 나가면서도 끝까지 불길을 여제에게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열기에 타들어 간 꽃잎과 핏물이 붉은 수증기로 변해 자욱해졌다.
푸스스-
이윽고 불길이 잦아들었다. 허공을 돌아 떨어져 내리면서도, 이안은 새카만 덩어리만 남은 여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철퍽-
그가 피로 흥건한 바닥에 착지한 순간, 그녀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붉은 수증기가 허공에 맹렬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슈화아아아-
거대한 붉은 보호막 속에서, 여제의 전신이 순식간에 재생성되기 시작했다. 붉은 속살을 훤히 드러낸 채로, 여제가 미소 지었다.
"역시 대단하군요, 이안. 꼭 한번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는데. 기대 이상이에요."
그래,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여제가 덧붙였다.
"원하는 만큼 계속해 보세요. 당신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몇 번이고 죽어줄 테니까."
#167화
그녀의 말투는 아주 차분했다.
실제로도 몇 번이고 되살아날 수 있는 게 분명했다. 적어도 이 안에서는.
이 일대의 꽃잎과 피가, 전부 그녀의 생명력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거의 무한 체력이라 이거지.
"네가 진짜 죽어야 풀릴 것 같은데."
주위의 모든 변화를 인식하려 애쓰면서도, 이안은 태연하게 내뱉었다.
아무리 게임일 때와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고 해도, 여제가 2챕터의 보스 중 하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되살아날 수 없을 때까지 죽이고 또 죽여야 하는 식의 공략이 나오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이었다.
그러니 분명 다른 명확한 약점이 있으리라. 자신의 권역 아래라 해도 감출 수 없는.
'사실 그럴 만한 건 아무리 봐도 하나밖에 없긴 하지만….'
너무 대놓고 존재하니 오히려 의구심이 들었다.
그가 지금 주변의 변화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는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딱히 다른 특이점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사방에 가득한 오염된 마력 때문에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었지만….
"그럼, 서로 최선을 다해 봐요."
그때, 어느새 본모습으로 돌아온 여제가 손을 까딱였다. 자욱하던 안개가 삽시에 가라앉고, 그녀의 주위로 수많은 피의 칼날이 피어올라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안은 옆으로 돌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칼날들의 궤적은 그가 앞으로 달려가리라 예상한 듯 앞으로 넓게 쏟아지고 있었다.
촤아아아아-
따라붙은 칼날의 소나기가 이안의 뒤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그사이 여제가 손가락을 튕겼다. 흥건한 핏물들이 형태를 갖추며 솟아올랐다. 박쥐, 곰, 늑대 따위의 형태를 가진 피의 사역마들.
'반 불사인 걸 빼면, 게임의 테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칼날비가 잦아들자 이안은 비로소 여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시에 사역마들이 밀려들었다. 이안이 기다렸다는 듯 대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궤적에 휩쓸린 사역마들이 핏덩이로 돌아가며 터져 나갔다. 핏물을 뒤집어쓰며 대검을 휘둘러 대는 시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최선을 다하는 남자의 모습은 얼마나 매력적인지…."
어느새 다시 만들어진 피의 칼날들이 여제의 목소리와 함께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죽여 달라더니, 염병을 하네.
이안은 다시 방향을 틀었다.
이번에는 요리조리 몸을 피하는 대신, 대검으로 몸을 가리며 마력 역장을 만들어냈다.
카가가각-
그의 뒤를 따라 붉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몇몇은 검면에 막혀 흩어지고, 몇몇은 끝내 역장에 부딪혔다. 이안의 전신에 푸른 빛이 번쩍였다. 이내 역장이 부서지고, 그 사이로 붉은 마력을 머금은 이안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놀랍군요. 그렇게 격렬하게 움직이는 중에도 주문이 깨지지 않다니. 그 비법은, 나중에 꼭 배우도록 할게요."
날아드는 그림자 칼날까지 피해 내며,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거의 잡은 물고기 취급이었다.
하긴. 지금 여제는 그를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마 사지를 잘라내는 정도로 끝낼 생각일 터였다. 그리고 강제로 뱀파이어로 만들려는 것이리라. 자신의 반려로 삼기 위해서.
굳이 바로잡을 필요는 없는 착각이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으니까.
대검을 얼굴 앞에 더 단단히 치켜들면서, 이안은 늘어뜨리고 있던 왼손을 활짝 펼쳤다.
콰르르르-
그가 지나치는 궤적을 따라 넘실대는 불의 물결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화염 해일.
넘실대는 불의 파도는 피의 가시는 물론, 바닥에 고인 핏물들까지 태워 버리며 사방으로 번졌다.
불길을 전부 토해내고 나자, 이안은 화염 해일이 멋대로 날뛰게 풀어버렸다. 삽시에 사방이 넘실대는 불길과 연기로 자욱해졌다.
여제가 장내를 뒤덮은 불길을 내려다 보며 미소 지었다.
"이것도 놀랍군요. 이런 상위 마법을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펼친 거죠? 알려 줘요."
쉬학, 불길 사이에서 이안이 솟구쳤다. 전신에 검붉은 연기를 두른 채, 그가 내뱉었다.
"못 할 거다."
용의 피를 마셔서 이렇게 된 거니까.
속으로만 덧붙이며, 이안이 양손으로 준 대검을 내리쳤다.
콰지지직-
거대한 궤적이 여제의 전신을 휩쓸었다. 어깻죽지부터 사선으로 쪼개진 여제가 땅에 떨어진 건, 이안이 이미 그녀를 지나쳐 착지한 뒤였다.
"...!"
그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 이안을 찾던 여제의 눈이 커졌다.
이안이 이미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넘실대는 불길의 물결 너머, 홀로 솟아 있는 황금 욕조를 향해서.
"이안…! 멈춰요!"
그녀의 입에서 피가래 끓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물론 이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미간을 좁힌 그녀의 전신이 핏물로 화해 흘러 내렸다. 내달리던 이안이 대검을 치켜들며 뛰어 오른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솨아아아-
욕조 표면에 새겨진 고대 주문 회로가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핏물이 콸콸 흘러넘치고, 삽시에 피어오른 피의 장막이 욕조 주위를 뒤덮었다. 장막 표면이 불길하게 출렁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그 내부에서 응집되는 마력을 느낀 이안이, 치켜들었던 대검을 등뒤로 늘어뜨리며 몸을 비틀었다. 넓적한 검면이 완전히 그의 몸을 가릴 찰나.
쩌엉!
그대로 폭발한 장막이 붉은 충격파를 토해냈다. 대검을 부러뜨리지는 못했지만, 이안을 날려 버리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콰장창창-
튕겨 나간 이안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충격파는 흩어지던 불길까지 단숨에 꺼뜨렸다. 이미 휘몰아치고 있던 피 안개 속에서 목소리가 번졌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허락할 수 없는 건 있답니다. 이건 일족이 탄생한 태초의 요람이자, 강대한 힘을 품은 유물이거든요."
자세를 다잡은 이안이, 장내로 미친 듯이 밀려들고 있는 꽃잎들을 올려다보며 피식댔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지."
"무의미하게 힘을 낭비하지 말란 거죠. 당신의 힘으로는 욕조에 닿을 수 없을 테니까. 그냥 내게 힘을 쓰도록 해요. 당신의 상대는, 나잖아요?"
"나랑 함께하고 싶다더니. 가장 하면 안 되는 짓을 하는군."
"그게 뭐죠?"
"거짓말. 모든 관계는, 신뢰를 잃으면 그걸로 끝인 거야."
내뱉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이안이, 떨어진 대검을 주워 들었다. 눈꺼풀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여제가 덧붙였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요."
"그 육체, 진짜 네가 아니잖아?"
"...!"
여제가 굳어진 사이, 숨을 한차례 크게 들이쉰 이안이 다시 욕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여제를 향해서이기도 했다.
재생을 끝마친 여제가 놀람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내뱉었다.
"정말 당신은 날 여러 번 놀라게 하는 군요. 어떻게 거기까지 알아낸 거죠?"
동시에 마력이 응집되는 것을 느낀 이안이, 대검을 치켜들며 내뱉었다.
"잘."
피의 가시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그림자 칼날이 파도치듯 밀려들었다. 몸을 젖혀 피하면서, 이안은 황금 욕조를 눈에 담았다.
아무리 봐도 약점이 분명한 욕조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게 이상하다 여겼는데.
답은 늘 그렇듯 간단명료했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제의 본체는 저 안에, 진혈과 함께 담겨 있으니까.
공중에 떠 있는 저 여제는 분신에 불과했다.
그리고 욕조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형태를 유지할 수는 없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런 지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솨아아-
날아드는 칼날 비 뒤로 사역마들이 솟아올랐다. 저것들도 이안에게 단서가 되어 줬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건, 여제의 육체가 썰려 나간 뒤에도 욕조에 새겨진 주문 회로가 작동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활성화되면 계속 유지되는 종류의 주문이라면 모를까. 저런 부류의 주문 회로는 사용자의 제어 없이는 작동하지 않았다.
촤아아아악-
군단장의 대검이 만들어 낸 궤적을 따라 피의 사역마들이 물방울처럼 터져 나갔다. 엇박자로 달려드는 것들은 휘두르는 주먹에 터져 나가거나, 또 그대로 어깨로 부딪혀 터뜨려 버리기도 했다.
전신이 피범벅이 됐지만, 이안은 더이상 신경도 쓰지 않았다.
쉬아아악- 콰콰콰-
그림자 칼날은 피하고, 그림자 파동은 대검을 땅에 찍어 뛰어 넘었다. 그러면서 서리 방패를 시전해 뒤따라 날아드는 피의 가시들을 막아내고, 대검을 검면 방향으로 휘둘러서 터뜨려 버리기도 했다.
모든 과정이 빠르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여제는 거의 모든 뱀파이어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이안은 바로 그 뱀파이어들을 전부 죽인 장본인이었으니까.
물론 위력 자체는 여제 쪽이 월등했지만, 기본적인 특징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긁히거나 찔린 상처들이 생겨나는 것까진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이안은 자신의 회복력을 믿었다. 그렇게 쉴 새 없는 전진을 이어가던 한순간.
"정말이지, 어쩔 수 없게 만드는군요."
머리 위에서 불쑥 번진 목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마력이 대기를 가르며 쏟아졌다. 날아든 여제가 손톱처럼 기다랗게 드리운 그림자 칼날을 내리치고 있었다.
"바로 그거야."
기다렸다는 듯 뛰어오른 이안이 여제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피어난 마력 역장이 그의 상반신을 감싸고 있었다.
"...!"
즉각적인 반응에 놀란 듯 여제의 분신이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이안이 대검을 힘차게 올려치며 덧붙였다.
"어쩔 수 없게 하려던 거거든."
카드드득-!
역장을 깨뜨린 그림자 손톱이 이안의 어깨를 할퀴고, 바람 칼날이 맺힌 대검이 여제의 가슴팍을 가로로 찢어버린 건 거의 동시였다.
그대로 자루를 쥔 왼손을 놔버린 이안이 주먹을 쥐었다.
찢겨나가 기울어지는 분신의 얼굴로, 신성력이 맺힌 쇠주먹이 틀어박혔다.
꽈직-!
주먹이 분신의 한쪽 얼굴을 두부처럼 으깨며 날려버렸다. 그대로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린 이안이 착지와 동시에 다시 달려나갔다.
그림자 손톱에 긁힌 어깨와 팔뚝에서 피가 흘렀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였다.
퍼버벙-
허물어지는 피의 사역마들을 그대로 뚫고 지나가면서, 이안은 아공간에서 정수를 꺼냈다. 동시에 끌어올린 마력을 오른손에 든 대검으로 밀어 넣었다.
솨아아아-
욕조 표면의 주문 회로에 마력이 번지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은 이미 팔과 허리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전신의 붉은 신성력이 한순간 타오르고, 대검 검면에 새겨진 고대어에서 푸른 마력이 번뜩였다.
"흡…!"
이를 악문 이안이, 있는 힘껏 대검을 내던졌다.
콰아아아-
회전하는 대검이 새하얀 궤적을 허공에 새기며 욕조를 향해 뻗어 나갔다. 욕조 주위로 피의 장막이 피어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쩌어엉-!
대검이 장막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며 틀어박혔다. 동시에 검신에 남아있던 마력이 일제히 분출됐다.
콰과과-
막대한 냉기가 장막 표면을 뒤덮었다. 뒤이어 궤적에서 만들어진 냉기 칼날들이 그 위로 쏟아졌다.
장막이 출렁이며 충격을 흡수했다.
다시 욕조를 향해 내달리던 이안이 주문을 완성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안은 어느새 머지않은 욕조를 올려다보며, 샛노랗게 달아오른 정수를 내밀었다.
쿠- 화아아아-!
불기둥이 눈이 멀 것 같은 섬광과 함께 치솟았다.
혼돈력과 정수로 증폭된 일점 폭발. 마법을 시전한 이안 조차 순간적으로 뒤로 밀려나는 가운데, 알현실 천장까지 솟구친 불길이 사방으로 넘실대며 번졌다.
천장에 나풀대던 꽃잎들이 타들어가고, 동굴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뒤흔들렸다.
폭발의 중심에 위치한 피의 장막도 무사하지 못했다. 끓듯이 타들어 가며 매캐한 연기를 끝도 없이 토해냈다. 그 내부의 욕조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장막이 완전히 깨지거나 녹아내리지 않은 건 그 덕분이리라.
욕조 표면의 주문 회로가 발작하듯 점멸하며 끝없이 마력을 토해냈다.
쉬하악-
그 앞으로, 어느새 자세를 다잡은 이안이 쇄도했다. 시선은 잦아드는 불길 사이의 욕조에 흔들림 없이 고정된 채였다.
'이 정도면 증발이 아니라도 익어서 굳어지긴 해야 하지 않나? 하여간 마법이란.'
어쨌건, 아까처럼 충격파를 토해낼 여력이 없는 건 확실했다.
거기까지 확인한 이안이, 정수를 집어 넣으며 꺼내든 부러진 단죄의 검을 검집에서 힘차게 뽑아냈다.
들쑥날쑥한 푸른 신성력이 치솟고, 이내 새파란 궤적이 되어 부글대는 장막으로 뻗어 나갔다.
카가가각-
장막이 갈라졌다. 불길이 넘실대며 잘린 단면을 태우는 가운데.
"멈춰요! 이안-!"
그 와중에도 재생을 시작한 여제의 분신이 소리쳤다.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신성력이 가득 맺힌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는, 그대로 단죄의 일격을 사용했다.
콰과과과-
폭주하듯 난폭하게 뻗어 나간 푸른 궤적이, 붉은 마력이 번쩍이는 욕조의 표면을 휩쓸었다.
검이 부러진 이후로 좀처럼 느낀 적 없던 저항감에 이를 악물면서도, 이안은 검을 끝까지 내리쳤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착지한 다음 순간.
"안돼…."
내뱉던 분신의 목소리가 바람 빠지듯 사라지더니, 욕조 표면에 장식된 보석들이 차례로 순식간에 터져 나갔다.
욕조에도 균열이 번졌다. 표면의 주문 회로가 단말마 같은 붉은 빛을 토해내고, 다음 순간 깨져 나가면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이안이 아직 신성력이 남은 단죄의 검을 검집에 회수하는 사이.
쿠구구구구-
동굴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안이 번쩍 고개를 치켜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쩍, 쩌저적-
"...!"
미친, 시발.
동굴 천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반파된 욕조에서 솟구치는 피 분수의 양에도 변함이 없었다.
단죄의 검을 아공간에 던져 넣은 이안이, 바닥에 떨어진 대검을 낚아채듯 집어 들며 몸을 날렸다.
뒤이어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168화
쿠웅-! 콰광!
조각난 바위가 흙먼지를 흩뿌리며 떨어졌다. 한발 앞서 피한 이안은, 대검을 던지듯 아공간에 쑤셔 넣으며 내달렸다.
등골이 쉬지 않고 오싹댔다. 육감이 보내는 경고였다.
'이 정도 깊이면 죽는 것보다 깔리고도 사는 게 더 최악이겠지.'
생각하는 와중에도 급하게 멈춰선 이안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르르- 뒤이어 부서진 돌덩이들이 그 위로 떨어져 내렸다.
무너지는 건 천장만이 아니었다. 바닥의 판석이 쩍쩍 갈라져 깨지고, 알현실 전체가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계속 이어지는 지진에도 굴하지 않고, 이안은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대문을 향해 내달렸다.
위급한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은 점점 더 맑아지고 있었다.
높은 정신력 수치는 늘 이런 순간에야 진면목을 드러냈다.
그의 두 특성인 집중력과 육감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한계치까지 발휘되며 어우러지고 있었고, 덕분에 시야에 닿지 않는 곳조차 보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와르르르-
쏟아지는 돌무더기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이안이 방향을 틀며 내달렸다. 인지 능력이 고도로 가속화되어 길게 느껴질 뿐, 실제로는 채 십 초도 지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붕괴는 급속도로 가속화되고 있었다.
알현실을 벗어나 무사히 계단까지 들어설 수 있을지는 전혀 확신할 수 없었다.
무너지는 게 천장이 전부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위에는 미로 저택이 있었다. 곧 뒤따라 저택도 붕괴하리라.
무엇보다 육감이 일단 여기를 나가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이안은 자신의 감을 믿었다. 무려 특성씩이나 부여된 능력이 아닌가.
'그런데….'
왜 퀘스트 완료창이 안 뜨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의문이 뇌리를 스친 건 그때였다.
이안의 무의식은 그 와중에도 단숨에 답을 도출해냈다.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았으니까.
'2 페이즈가 있단 건가.'
너무하네, 정말.
바닥을 구르면서도, 이안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이, 그저 다음 페이즈로 넘어갈 때 발생하는 이벤트 컷 씬에 불과하리란 의미였기 때문이다.
또 컷 씬 따위에 목숨이 위험해질 줄이야.
우르르르-
하지만 어느새 더는 피하거나 도망칠 틈도 없었다. 크고 작은 바위와 돌덩이들이 산사태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가 지나친 알현실 중심부에선 어느새 저택까지 무너져 내렸다.
이안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불길처럼 이글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콰앙-!
이안은 앞을 가로막는 돌덩이를 주먹으로 힘껏 후려쳐 부숴 버리고는 그사이를 뚫고 내달렸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히고 깨부술 뿐이었다. 크지 않은 돌덩이들은 팔로 머리를 가린 채 몸으로 부딪쳐 견뎌냈다.
'정말 오늘 겪은 상황이 전부 게임에서도 있던 게 맞나?'
제아무리 고인물이라도 이 시기에 이걸 다 해내진 못했을 것 같은데.
당장 결론을 내려야 할 만큼 중요한 의문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쿠구궁-
떨어진 돌무더기가 통로 앞까지 가로막기 시작했으니까. 활짝 열려 있던 대문은 언제 떨어져 나간 것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양팔로 머리를 가린 이안이 돌진했다.
떨어지는 돌무더기 사이를 끝내 쓰러지지 않고 내달린 그가, 한순간 이를 악물며 몸을 날렸다.
콰과과과-
온몸으로 돌 더미를 뚫어낸 이안이 이윽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비로소 통로였다.
"...!"
다시 일어나 내달리려던 이안이 이내 멈칫했다. 길게 이어진 통로 저 너머, 계단이 이미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는 육감의 경고가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안은 통로 주변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마석의 불빛이 전부 꺼지고 지진이 쉴새 없이 이어지고 있을 뿐, 통로는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
붕괴한 건 위로 이어지는 계단, 그리고 알현실뿐이었다.
하긴, 그것만 해도 이 지하 궁전의 절반이 넘는 공간이었다.
'보스전 안 끝난 거 맞네.'
생각과 달리, 극한까지 치달았던 위기감과 집중력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두통과 현기증이 기다렸다는 듯 뒤를 이었다.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한계가 머지않았다는 경고 신호.
하지만 아직은 쉴 때가 아니었다.
"후…."
피와 흙먼지로 범벅인 주먹을 꾹 움켜쥐면서, 이안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알현실은 쏟아지는 잔해와 흙먼지로 내부를 제대로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진동과 굉음이 쉼 없이 이어졌다.
천장은 이미 다 무너졌다. 지금 쏟아지고 있는 건 미로 저택의 잔해들이었다.
푸스스….
이윽고 기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안의 숨소리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잦아드는 흙먼지 사이로 불그스름한 달빛이 내리쬐었다.
온갖 파편으로 뒤덮인 장내가 드러났다.
입구부터 완만한 오르막을 그리며, 잔해의 언덕이 만들어져 있었다.
천장의 뻥 뚫린 구멍으로 달빛이 흘러들고, 어느새 모여든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이걸 운치 있다고 해야 할지.'
실없는 생각도 잠시,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장내에 오염된 마력이 엄청난 속도로 고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로 흐릿한 정신파가 번지더니, 단숨에 볼륨을 높인 것처럼 뇌리를 가득 채웠다.
분노와 슬픔. 갈망과 비관. 체념과 증오. 온갖 상반된 감정들이 저마다 뒤엉켜 날뛰었다. 시야가 붉게 출렁였다. 이안의 저항력조차 뚫을 정도이니, 평범한 사람은 단숨에 동화되어 미쳐버렸을 터였다.
혹시 일행에게도 이 정신파가 닿았을까? 아니기를 바랐다. 메브나 테사이아는 몰라도, 필립과 샬롯은 정신을 잃고 발광할 터였다.
어쨌든, 이안의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고 긴장감이 되살아났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소음이 오히려 두통과 현기증, 몸의 떨림을 전부 날려 버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혼돈력의 한기가 선명해졌다. 동시에 피부 표면은 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문신을 타고 번진 신성력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남은 양이 얼마나 되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솨아아아-
달빛이 붉게 일렁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동시에 언덕을 구성하는 잔해 사이사이에서 선홍색 핏물이 역류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이안은 물리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거대하게 뭉치는 핏방울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지름이 3미터는 될 듯했고, 땅 위로 살짝 부유한 채 은은하게 출렁댔다.
내부에서 엄청난 밀도로 응축된 마력이 느껴졌다.
저 거대한 덩어리가 전부 진혈이었다.
그 내부에 흐릿한 실루엣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까지 확인한 순간, 이안은 구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예 진혈 속에 녹아들어 있었던 거였나.'
언덕으로 들어서면서, 이안은 구체의 실루엣을 다시 눈에 담았다.
뇌와 신경계, 혈관과 뼈가 빠른 속도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근섬유가 올올이 피어나 그 위를 덮었다.
사방에 어지럽게 메아리치던 정신파는 이제 저 안에서부터 웅웅 번져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극도로 불안정한 파장이었다. 진혈 구체 표면에도 불 규칙적인 파장이 꿈틀대며 번졌다.
여제가 욕조 속에 녹아들었던 건, 그게 진혈을 안정적으로 통제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뱀파이어들은 품은 진혈이 많을수록 강해지지만, 동시에 그만큼 이성이 흐려지고 충동적으로 변했다.
게임 속 진혈의 여제, 테사이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건 저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여제의 본체도 예외는 아닐 터였다. 엄청난 양의 진혈을 품게 되는 만큼 극도로 강하고, 동시에 불안정하리라.
이안이 달리기 시작한 건 그래서였다. 저대로 여제가 온전히 눈을 뜨면, 반드시 죽게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반대로, 지금은 무방비 상태겠지.'
게임에서도 종종 있던 패턴이었다.
봉인에서 풀려나거나 본모습을 되찾거나 강림 의식이 무사히 끝나면, 아예 클리어할 수 없게 설계된 보스들.
그 전에 죽이는 게 최선이지만. 최소한 빈사 상태로 만들어 놓거나, 과정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게는 해야 했다.
솨아아아-
왼손의 정수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빛을 머금었다.
주문이 완성됨과 동시에 한 번 더 마력이 빠져나가고, 한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안은 이를 악물며 언덕 위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쿠- 콰아아아-!
진혈 덩어리를 중심으로 눈부신 불기둥이 솟구쳤다. 폭발은 천장에 뚫린 구멍 위까지 치솟으면서 내리쬐던 달빛을 밀어냈다.
최대한의 증폭을 더한 일점 폭발.
퍼석, 정수가 부서져 흩날렸다.
폭발에 휩쓸린 잔해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안은 굴러떨어지는 파편들을 뛰어넘으면서, 불기둥 한복판의 진혈 덩어리를 눈에 담았다.
효과가 있는 건 분명했다. 진혈이 부글부글 타들어 가며 매캐한 연기가 불길에 뒤섞였다.
그만큼 구체의 크기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달렸다. 불기둥의 연기가 온몸을 익히는 것 같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진혈 덩어리는 아직도 거대했다.
태아처럼 웅크린 내부의 실루엣도 여전히 아른거렸고, 이 순간에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안의 전신에 맺힌 바람결에 불길이 뒤섞여 일렁였다.
이안은 언덕 아래, 툭 튀어나온 지붕의 잔해를 짓밟으며 도약했다.
쿠우- 콰르르르-
짓눌린 잔해가 무너져 내렸다.
몇 미터나 솟구친 이안이 양손으로 움켜쥔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표면에 푸른 빛이 맺힌 대검이 새하얀 궤적을 흩뿌렸다.
동시에 이안의 주위로 아른거리던 불길까지 검신을 타고 솟구쳤다.
콰치지지지지-
타들어 가는 진혈 덩어리의 표면에 온갖 마법을 머금은 대검이 떨어져 내렸다.
단숨에 갈라버릴 수 있으리란 예상과 달리, 검날은 구체 표면에 커다란 파장을 만들며 박혔을 뿐이었다. 아주 단단한 물풍선을 내려친 듯한 느낌.
하지만 어쨌거나 검날은 튕겨 나가지 않았다. 이안은 턱이 부서질 것처럼 이를 악물며 양팔을 내리눌렀다.
투쟁의 축복이 타오르면서 한계에 다다른 그의 사지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치이이이이-
대검 날이 달궈진 인두처럼 진혈 덩어리를 녹이며 파고들었다.
현저하게 작아진 구체 속, 웅크린 여제의 본체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이안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은 채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여제의 본체는 분신보다도 더 컸다.
심지어 등에는 기다란 날갯죽지까지 좌우로 돋아 있었다.
다만 아직도 완벽하게 생성을 끝내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제 막 피부가 덮이기 시작했을 뿐, 온전한 육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우드득-
마침내 검날이 그녀의 한쪽 날갯죽지에 닿았다. 엄청난 저항감에도 이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꽈지직, 마침내 대검이 그녀의 한쪽 날개를 완전히 으스러뜨리고, 그 아래의 등판까지 닿았다.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가 움푹 파이기 시작한 그때.
슈화악-
진혈이 여제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단숨에 스며들었다.
검날이 우뚝 멈춰 버린 다음 순간, 여제의 몸속에 응축되어 있던 마력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
대검이 튕겨 나가고, 그걸 쥔 이안까지 트럭에 치인 것처럼 날아갔다.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이안은 충격파에 휩쓸려 일제히 터져나가는 꽃잎들을 눈에 담았다.
솨아아-
피의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잔해 아래에서도 자욱한 피 안개가 치솟았다.
이안이 놔 버린 대검이 잔해의 언덕 중턱에 떨어져 박히는 가운데.
"키아아아아아-!"
언덕 한복판에서, 여제가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포효했다.
콰지지직-
이안은 팔로 얼굴을 가리며 알현실 벽면에 처박혔다. 벽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졌다.
왼팔과 갈비뼈에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지만, 이안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이안은 여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아아아-!"
짐승처럼 네 발로 땅을 짚은 채 울부짖는 그녀의 모습은, 빈말로라도 아름답다고 할 수 없었다.
핏줄이 비칠 만큼 얇고 번들거리는 피부.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얼굴은 코와 입술은 물론 머리카락조차 없었다.
새빨간 눈알과 뻥 뚫린 콧구멍, 훤히 드러난 뾰족한 이빨들.
으스러진 한쪽 날갯죽지와 갈비뼈 사이에서는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흐으으…."
이윽고 포효를 끝낸 여제가 숨을 들이켜며 몸을 웅크렸다.
쏟아져 내리던 핏물이 그녀의 주위로 쏜살같이 모여들었다.
일부는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고, 일부는 주위에 남아 저마다의 형태를 이뤘다.
머리 위로 피의 왕관이 돋아났다. 날갯죽지를 따라 흘러내린 핏물이 날개의 형상을 이뤘고, 한쪽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날갯짓도 없이 날아올랐다.
사실상 날개에 매달려 끌려 올라가는 듯한 형상이었다.
쿠우웅-
이안이 아래로 뛰어내려 착지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는 으스러진 어금니 조각을 피와 함께 뱉으며 일어섰다.
온몸이 만신창이였지만, 여제를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여전히 새카맣게 가라앉은 채였다.
날개에 매달려 축 늘어져 있던 여제의 고개가 삐걱, 그를 향해 돌아갔다.
멋대로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던 붉은 동공이 우뚝 멈추더니, 뒤이어 광망을 토해냈다.
거대한 피의 날개와 왕관, 전신에 아른거리던 피 안개가 일제히 타올랐다.
"이아아아아안-!"
여제가 양팔을 활짝 펼치며 울부짖었다.
터져 나온 정신파가 이안을 휩쓸었다. 그조차 완전히 저항할 수는 없는 파장이었다. 게임에서의 테사이아가 절로 뇌리를 스쳤다. 그때의 그녀도 무작위 상태 이상을 유발하는 정신파를 발산했었다. 매혹, 착란, 공포, 광란, 마비 등등.
이번 경우에는 광란 상태인 모양이었다.
언제나 가슴 속에 품고 살던 억울함과 분노, 증오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투쟁의 축복이 그의 감정에 응답하듯 타올랐다. 파편이 폭주하듯 혼돈력을 쏟아냈다.
여제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오오오오오-!"
보랏빛 눈으로 포효한 이안이 그녀를 향해 마주 내달렸다.
#169화
상태 이상에서 비롯된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안의 돌진은 최선의 선택이 됐다.
솨아아아-
뒤로 물러났다면 여제의 주위로 피어올라 일제히 흩뿌려진 피의 가시들과, 그녀의 양손에 드리운 칼날 손톱의 연계 공격을 피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여제가 코앞까지 가까워지고 나서야, 이안은 자신이 칼조차 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콰지직-!
대신 주먹이 있었으니까.
이안이 내뻗은 오른 주먹이 여제의 한쪽 안면을 후려쳤다.
쇠 장갑이 우그러지면서 손가락을 조였지만,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주먹이 틀어박힌 커다란 머리통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얇은 피부 아래, 한쪽 광대뼈가 깊이 함몰되고, 그 위의 눈알이 불쑥 튀어나오고 있었다.
카가가가각-
거의 동시에 여제가 휘두른 양팔이 그의 뒤를 지나쳤다. 이미 피의 가시들이 틀어박힌 벽면 위로, 열 가닥의 할퀸 흔적이 덧새겨졌다.
이안이 오른손을 회수하면서 왼 주먹을 휘두른 건 거의 동시였다.
아까 왼팔에 금이 갔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뇌리를 스쳤지만 상관 없었다.
꽈드드득-
왼 주먹이 여제의 반대편 얼굴을 깊이 함몰시키며 틀어박혔다. 동시에 팔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지만, 이안은 이미 거의 본능적으로 주문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진공 폭발.
콰직-
소리 없는 폭발과 함께, 얼굴 한쪽이 움푹 함몰된 여제가 튕겨 나갔다. 이안도 그대로 옆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벌떡 일어난 그의 시선이 문득 왼팔로 내려갔다. 팔뚝을 뚫고 부러져 뒤틀린 뼈끝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테사이아에게 피를 먹이느라 팔목 보호대도 벗어 던졌던 탓에, 끔찍한 상태가 더 적나라했다.
"하…."
이안은 짧게 헛웃음을 흘리며, 오른손으로 뼈를 대충 밀어 넣었다. 나머지는 그의 회복력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태초의 생명력은, 심각한 부상일수록 그 효과가 커지니까.
동시에 그는 가슴 속에 들끓던 분노와 증오가 잦아들고 있음을 느꼈다. 어긋나 있던 본능과 이성이 빠르게 제자리를 되찾았다.
조금의 아쉬움이 뒤를 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리 나쁘지 않은 상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높은 정신력과 저항력 덕분에 아예 이성을 잃은 정도는 아니지 않았던가.
정신이 맑아지면서. 멀지 않은 곳에 박혀 있는 군단장의 대검이 눈에 들어왔다. 이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내달렸다.
우득, 우드득-
그때 바닥을 나뒹굴던 여제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반쯤 날아갔던 그녀의 머리가 이리저리 부풀면서 제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이안이 몸을 날려 대검 자루를 움켜쥔 건 그때였다. 잔해더미가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며 검날을 놓아준 그때.
"키… 아아아-!"
그를 돌아보는 여제의 안광이 다시금 타올랐다. 그녀의 주위로 수많은 피의 칼날이 피어올랐다.
역시, 본능적으로 원거리 전투를 유도해야겠다 결론 내린 게 분명했다.
아마 육체가 온전히 완성되었다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그렇지 못한 지금은 방어력이 치명적일 정도로 낮았다.
'그러니까 나는, 더더욱 근접전으로 가야지.'
이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들고, 여제가 칼날을 일제히 분사하면서 날개를 펼쳤다.
푸- 화악-!
내달리던 이안의 주위로 거센 돌개바람이 터져 나왔다. 솟구치던 여제의 몸이 순간 흔들릴 정도였다.
혼돈력을 가득 머금은 휘몰아치는 방벽. 지금은 혼돈력을 섬세하게 컨트롤할 수 없어서, 그저 모든 마법에 최대치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개바람은 칼날 비의 궤적을 일제히 흩어 버리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이안까지 함께 휩쓸어 날려버렸다.
정확히 여왕이 솟구치는 방향이었다.
대검을 무게추 삼아 빙글빙글 돌면서, 이안은 곧바로 다음 주문을 준비했다.
화르르르-
주위로 수십 개의 춤추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안은 그대로 불덩이를 날려 보내면서 대검을 치켜들어 균형을 다잡았다. 그가 뻗어나가는 속도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사실상 불덩이들의 뒤를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여제가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쉬하아아악-
주위에 아른거리던 피 안개가 삽시에 피의 장벽을 만들어 냈다.
콰과과과광-
그 위로 불덩이들이 연달아 터져 나갔다. 뒤이어 이안이 대검을 내리치며 장벽을 산산조각 냈다.
대검을 내민 채 쇄도하는 이안을 향해 여제가 손을 내뻗었다. 이안의 전신에 푸른 역장이 피어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콰지지직-
여제의 손아귀가 역장을 움켜쥐었다. 잠시 눈부시게 점멸한 역장이 손아귀에서 으스러졌다. 이안이 다시 한번 휘몰아치는 방벽을 사용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푸확-!
터져 나온 돌풍이 여제가 균형을 잃고 휘청이게 하고, 다시 한번 이안을 위로 날려 버렸다.
이안은 빙글빙글 돌며 솟구치는 와중에도 바람 칼날을 시전했다.
이윽고 허공에서 자세를 다잡은 그가, 검날에 맺힌 바람을 흩뿌리며 여제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간신히 잃었던 균형을 되찾은 여제가 다급하게 팔을 치켜들었다.
콰지지직-!
대검이 여제의 팔뚝에 깊숙이 박혔다. 바람 칼날을 추진력으로 사용한 데다 한 손으로 내리친 탓에, 팔뚝을 잘라 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콰직-!
이어 검날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진공 폭발이 여제의 팔뚝을 터뜨려 버렸으니까.
"끼아아아악-!"
여제가 비명을 토해내며 추락했다. 날개가 하나여서 다행이었다. 둘 다 무사했다면, 아까는 물론 이런 순간에도 균형을 잃지 않고 날아올랐을 터였다.
뒤따라 떨어지면서, 이안은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는 여제를 눈에 담았다.
'할 수 있을까…?'
없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대검 날을 아래로 드리운 이안이, 덜덜 떨리는 왼손으로도 자루를 함께 움켜쥐었다.
쿠웅- 콰르르르-
여제가 폐허 한복판에 등부터 떨어졌다. 충격으로 무너진 잔해들이 허물어지는 가운데, 여제가 잘린 왼팔을 치켜들며 허우적댔다.
눈에 띄게 숫자가 줄어든 꽃잎들이 삽시에 핏방울로 화해 모여들었다.
피의 칼날이 완성되는 것보다, 이안이 그녀의 복부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게 더 빨랐다.
콰지지직-!
새파란 마력이 맺힌 검신이 여제의 복부를 꿰뚫듯 박혔다. 서리 칼날이 그녀의 몸속을 찢어발기며 터져 나왔다. 반쯤 얼어붙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안은 냉기 칼날을 사용한 직후, 적색 하위 마법까지 연달아 시전했다.
콰아아아-
혼돈력을 머금은 화염 방사가 넓적한 검면을 타고 뿜어져 나왔다. 냉기 칼날이 찢어발긴 몸속을, 이번에는 불길이 휩쓸고 지나갔다.
허리가 휠 정도로 고개를 뒤로 젖힌 여제의 눈에서 새빨간 광망이 타올랐다.
"캬- 아아아아악!"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포효. 동시에 여제의 전신에서 정신파가 섞인 마력 폭발이 터져 나왔다.
"...!"
이안은 대검 자루를 거의 매달리듯 움켜쥐며 몸을 움츠렸다.
거대한 해일에 정면으로 충돌한 것 같은 충격. 전신의 상처에서 피가 터지고,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몸이 굳으면서 숨이 턱 막혔다. 이게 무슨 상태 이상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공포.
뱀 앞의 개구리처럼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이안은 끝내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충격파에 휩쓸려 날아가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여제의 위에 있었다.
이안이 비로소 쥐고 있던 자루를 놓아버린 그때.
쉬아아악-
충격파에 휩쓸려 터져 나간 꽃잎들이 일제히 가시로 화했다.
여제는 자신의 몸이 꿰뚫리는 것조차 상관없다는 듯, 가시를 일제히 자신의 복부로 흩뿌렸다.
이안은 아직 공포를 떨치지 못한 상태에서도, 기어코 서리 방패를 시전하며 오른팔을 들었다.
마력 역장도 거의 동시에 피어 올랐다.
카드드드득-
서리 방패는 상반신을 노리는 가시를 전부 막아냈다.
하지만 비스듬하게 하반신으로 날아드는 몇 개의 가시들은 역장이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발악하듯 번쩍이던 마력 역장이 이내 부서졌다.
콰직-
끝내 이안의 왼쪽 허벅지에 가시 하나가 틀어박혔다. 가시는 그의 허벅지를 꿰뚫은 순간 그대로 녹아내렸다.
출혈은 피할 수 없게 됐지만.
'시발, 왼쪽 수난 시대네.'
덕분에 적어도 공포 상태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굳어 있던 근육과 감각들이 삽시에 되돌아왔다.
쒸에엑-!
그때 여제가 기습적으로 오른팔을 휘둘렀다.
이안이 한쪽 다리만으로 펄쩍 뛰어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카가가가-
아슬아슬하게 발아래를 스치고 지나가는 손아귀와 날카로운 손톱의 궤적이 선명했다. 이안은 손아귀를 타고 휘몰아치는 마력의 결까지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몸이 넝마가 될수록 정신은 더 또렷해지는 듯한 기묘한 느낌.
역시, 집중력 끌어올리는 데에는 위기만 한 게 없는 건가.
생각하며, 이안은 아공간에서 부러진 단죄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는 몸을 비틀어 빙글 도는 것만으로 검집을 날려버렸다.
솨아아아-
푸른 신성력이 맺힌 부러진 검날이 드러났다. 단죄의 일격을 사용하고도 아직 남은 신성력이 톱날처럼 들쭉날쭉하게 솟구쳤다.
그 사이로 이안이 뿜어낸 혼돈력이 섞였다.
신성의 칼날이 삽시에 보랏빛으로 물들며 기세를 되찾았다. 전에도 써먹은 적 있는 수법이었다.
이안은 그대로 마저 허리를 휘돌리면서, 아래에 드리운 여제의 팔뚝을 향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가각-
보랏빛 궤적이 여제의 오른 팔뚝을 할퀴고 지나갔다.
길이에 비해 얇은 팔뚝이 톱날에 썰리는 것처럼 잘려나갔다. 혼돈력과 신성력이 뒤엉킨 잔재가 잘린 단면을 태웠다.
"키-아아아악-!"
여제의 놀란 듯한 비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콰직-
이안이 여제의 가슴 위로 갈비뼈를 부러뜨릴 듯 착지했다.
왼쪽 다리로 저릿한 느낌이 번졌다. 흘러내리던 피가 종아리를 끈적하게 적셨다.
신성력 조차 쓰지 않은 채, 이안은 검 자루를 역수로 돌려 쥐었다.
동시에 혼돈력이 다시 한번 검날에 뒤섞였다. 망설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이안이 여제의 갈비뼈 위로 보랏빛 칼날을 내리쳤다.
콰과과과과-
칼날이 여제의 가슴을 가르며 박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쇠를 뚫는 듯한 반발력, 여제의 전신이 발작하듯 들썩였다.
슈화아악-
동시에 그녀의 날개에 맺힌 피와 머리 위의 왕관이 무수한 칼날로 화하며 솟구쳤다.
검신을 내리찍는 이안의 눈동자가 푸르게 일렁였다.
서리 방패. 그 뒤로 푸른 역장이 피어났다.
콰드드드드-
칼날들이 넓게 번진 방패 위로 쏟아지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좁은 범위인 터라 서리 방패로도 전부 막아낼 수 있었다. 다만, 칼날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쩍, 쩌적-
방패 전체에 새하얀 균열이 번졌다. 이안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검을 찔러 넣는 데에만 집중했다.
이미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여기서 피한다면 여제는 대검에 꿰뚫린 몸을 찢어서라도 다시 날아오를 테고, 주위의 피를 흡수해 재생을 시작할 터였다.
그때는 이안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의 왼팔과 왼 다리는 격렬한 움직임을 이어갈 수 있을 상태가 아니었다. 아무리 회복력이 좋아졌다고 해도, 불과 몇 분 만에 이런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문신에 남은 신성력도 한줌에 불과했다.
마력도, 혼돈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지금 끝을 봐야 했다.
저 칼날들이 끝내 그의 몸을 찢어발길지라도.
콰지직-
그때 서리 방패가 깨졌다.
남은 칼날들이 뒤에 일렁이는 마력 역장으로 쏟아졌다.
콰과과과-
이안은 너덜너덜한 왼손까지 검의 무게추 위에 얹어 내리눌렀다. 부러진 검날이 여제의 갈비뼈를 가르며 점점 더 깊이 박혔다.
콰장창-
역장이 터진 것과 단죄의 검이 끝까지 박힌 건 거의 동시였다.
여제의 가슴 속에서 뭔가 퍽 터지는 느낌이 이어졌다. 발작하듯 버둥대던 여제의 몸이 굳어졌다.
철퍽-
피의 칼날들이 핏덩이로 허물어지면서 이안의 전신을 뒤덮었다.
이안은 꿈쩍도 하지 않고 손아귀의 감촉에 집중했다.
여제의 몸에 힘이 풀리고 있었다.
"아아…."
그녀의 입에서 탄식 섞인 숨결이 번졌다. 본능에 완전히 지배당하던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녀 본연의 목소리.
잘린 양팔과 입, 그리고 몸 아래에서 뭉근한 피가 번졌다.
여제의 몸이 축 늘어졌다.
진혈의 여제는 죽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주위로 번지던 진혈이 맹렬하게 끌어 오른 건, 이안이 미간을 좁힌 찰나였다.
푸화악!
진혈이 품고 있던 마력을 토해내며 솟구쳤다.
이안이 검을 뽑으려 했다.
쩌적,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여제의 갈비뼈가 피부를 뚫고 벌어졌다.
파리지옥처럼 이안을 둘러싼 갈비뼈 사이로 새빨간 마력이 휘몰아쳤다.
"...!"
마력에 사로잡힌 이안이 눈을 치켜떴다. 흐릿하게 아른거리던 카르하의 신성력이 일렁였지만, 진혈이 토해내는 마력을 전부 불태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신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느낌이 이어졌다.
이런, 시발?
이안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전신의 모든 상처에서 피가 빠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안은 온 정신을 집중해 피에 섞인 마력과 혼돈력을 다시 끌어당기려 노력했다.
하지만 피를 빨아들이는 진혈의 힘이 조금 더 강했다.
전신의 피가 조금씩, 그러나 계속해서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 새끼들은 자폭이 패시브인가?'
이를 악물면서도, 이안은 피를 다시 되돌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릇을 잃은 이상, 진혈이 오래 버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지금도 주위로 솟구친 진혈은 계속해서 연기처럼 증발해 사라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때까지 시간을 끌 수는 없으리란 사실이었다. 끌기는커녕 그전에 과다 출혈로 죽게 되리라.
아무리 애써도 피가 빠져나가는 속도를 조금 늦추는 게 전부였다.
전신에서 가느다란 촉수처럼 번지는 그의 피 줄기들이 어느새 육안으로도 보였다.
'시발….'
이안은 탄식을 삼키며 상태창을 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의 의식이 스킬창으로 향하고, 이윽고 공용 스킬인 태초의 내성에서 멈출 찰나였다.
두근-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림이 번졌다. 막 태초의 내성을 하나 올리고, 다시 하나를 더 올리려던 이안이 멈칫했다.
혼돈의 파편이었다.
또 하나의 심장처럼 두근댄 파편이, 곧 이안을 거들듯 혼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상황을 바꾸기엔 충분한 변화였다.
이안은 상태창을 닫아 버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빨려 나가던 피 줄기들이 다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냥 안 죽고 버티면 알아서 해결되는 이벤트였던 건가.'
이안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스킬 포인트를 단 하나만 사용하고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는 태초의 내성을 최고 레벨까지 올리고, 비전 스킬인 주문의 흐름도. 그걸로도 부족하면 남은 능력치 포인트를 전부 정신력에 투자할 생각이었었다.
그렇게 된 후에 지금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면, 말 그대로 피눈물이 흘렀으리라.
"...?!"
잡념이 단숨에 날아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어느새 피가 전부 몸속으로 되돌아왔건만, 파편의 맥동이 여전히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편은 이제 거꾸로 진혈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멈춰보려 했지만, 파편은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갈비뼈 사이로 촉수처럼 끌려 들어온 선홍색 진혈 가닥이, 이윽고 이안의 찢겨나간 왼팔에 닿았다.
솨아아아-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진혈이 이안의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삽시에 시끄러워졌다. 온갖 종류의 감정들이 어지럽게 메아리치고,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그 한복판으로 선택 퀘스트 창이 불쑥 떠올랐다.
진혈의 주인.
'타락자 전용 퀘스트인가.'
선택권이 없다면 모를까, 오래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안은 퀘스트를 거절했다.
동시에 혼돈의 파편이 기다렸다는 듯 진혈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시야가 확 뒤집히면서 모든 감각이 사라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아니, 거절했잖아…?'
#170화
당황은 잠깐이었다.
암전되었던 시야가 밝아졌다.
아른거리는 횃불의 불빛. 제단 위에 놓인 멀쩡한 모습의 황금 욕조가 보였다. 좌우에 놓인 계단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욕조 가장자리에 서고는, 손에 든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그으며 욕조에 뛰어들었다. 철퍽대는 소리.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한 자들은, 뒤에 선 이들이 달려들어 목을 긋고는 욕조에 던져 넣었다.
황금 욕조는 그들의 피와 육체를 끝없이 받아들였다.
서둘러야 한다는 속삭임, 그리고 저 멀리서 번지는 소란이 귀를 스쳤다. 처음 듣는 언어였지만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 그래. 이건 진혈의 기억이군.
이안은 비로소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내적인 웃음일 뿐이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누군지 모를 존재의 의식에 들러붙은 채,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지식들이 흘러들어오는 걸 가만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이들이 먼 과거, 대륙 동부에 존재했던 왕국의 왕족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곧 제국군에게 목숨을 잃게 될 처지라는 것도.
악마를 숭배하는 이교도들이라는 이유였다. 이안이 보기엔 억울할 것 없는 일이었다. 피를 제물로 바치며 섬겨야 하는 신은 악마 취급을 받는 게 당연했으니까.
물론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네 안에 왕가의 피가 흐르는 한 왕조는 멸망한 것이 아니며, 네가 신혈의 정수를 품은 한 주께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인즉. 살아남거라, 공주. 내 딸아. 그리하여 다시 너만의 혈족을 일궈내고, 왕국을 재건하거라. 그것이 너의 사명이니."
비장한 얼굴로 내뱉은 중년인이, 마지막으로 욕조에 피를 쏟으며 죽었다. 이안이 관조 중인 여자아이가 마지막으로 일어섰다. 그녀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굳게 닫힌 문 너머 소란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계단을 오른 그녀가 욕조 옆에 섰다. 그리고는 다른 이들과 달리, 피와 시체로 가득한 욕조 속으로 뛰어들었다.
끈적한 온기가 전신을 덮었다.
다음 순간, 공포에 질린 제국 병사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죽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살육. 오로지 그들이 흘린 피의 온기만이 끈적하게 남아,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다음 순간부터 그의 눈앞으로, 몇 배속으로 빨리 감기 한 것 같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의 감정과 생각들이 선명하게 뇌리를 파고들었다.
생존을 향한 갈망. 그리고 고독. 마침내 첫 가족을 만들어 낸 순간의 기쁨. 그리고 전쟁 속에서 느낀 흥분. 다른 마족들을 향한 혐오와 그것들을 배신하던 순간의 갈등.
헛된 꿈과 욕망은 공허한 기쁨과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낳을 뿐이었다. 과거를 향한 그리움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이용하기만 하는 자들에 대한 증오는 단 한 순간도 작아지지 않고 몸집을 불렸다.
그리고 끝내는, 모든 것들이 무너지기를 바라게 됐다.
망국의 공주는 어느덧 악마가 되어 버렸다.
그 모든 순간은 현재로 이어졌다.
간신히 일궈낸 나라를 무너뜨리는 건, 이제 전혀 아쉽지 않았다. 단지 그런 척할 뿐.
일족을 제 손으로 죽이는 것도, 더는 전혀 슬프지 않았다.
확실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물론 두려웠지만, 동시에 헛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저자와 함께라면, 어쩌면, 이번에는.
다음 순간, 만신창이가 된 채로 대검을 치켜드는,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떤가요. 타인의 눈으로 본 자신의 모습은."
옆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옆을 돌아보고는, 자신이 고개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소녀가 앉아 있었다. 금발에 붉은 눈. 그리고 낯선 복식의 의복을 걸친. 이안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건 내 본모습이 아니야."
소녀, 여제가 미소 지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여러 모습이 있다는 건가요? 현학적인 말을 즐기시는 줄은 몰랐는데. 의외군요."
"즐기지 않아. 이건 정말 내 본모습이 아니라는 의미다."
"...?"
여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안이 덧붙였다.
"나는 다른 세상에서 왔거든."
"다른… 세상이요?"
여제의 눈이 커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하지만 이안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이 세계는 거기서, 누군가가 놀이를 위해 만들어 낸 세상일 뿐이었지. 나는 놀이를 즐기다가 여기로 끌려온 것뿐이야.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이 세상이, 유희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뜻인가요?"
"그래.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면 이 세계를 만든 이는… 아주 쓰레기 같은 인간이겠군요. 모든 것들이 고통받게 만들어 두고, 그걸 보면서 웃음 짓는."
여제는 더 깊이 캐묻는 대신, 그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자주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그가 방금 본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환영 역시, 누군가의 영혼이 완전히 망가져 타락하는 과정을 담고 있지 않았던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주억거리던 꼬마 여제가, 이윽고 납득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진혈이 당신의 영혼을 물들일 수 없었던 거군요. 신성과 혼돈을 한 몸에 품은 것도. 여러 마법을 익힌 것조차, 당신의 영혼이 이 세계의 법칙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거예요."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정말이지… 놀랍군요. 그럼 이 세계는요? 이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있나요?"
"조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면서도, 이안은 묘하게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들이었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내 손으로 죽인 마족에게, 그것도 그 마족의 주마등 속에서 하게 되리라곤 상상해 본 적도 없었지만.
"당신과 싸우지 말 걸 그랬어요. 그냥 그 불쌍한 아이를 당신에게 주고, 당신과 친구가 되었다면. 그럼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처럼 시간에 쫓기는 일 없이."
"테사를 줬어도 나는 너희를 죽이러 갔을 거다. 넌 똑같이 내 손에 죽었을 거고, 이런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을 거야. 애초에 너는…."
여제의 붉은 눈을 잠시 응시한 이안이 이내 덧붙였다.
"내가 아니라도 테사에게 죽을 운명이었거든."
"운명이라…. 그래요.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사건은, 운명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겠죠. 내가 끝내 왕국을 재건할 수 없는 운명이듯이. 그렇다니… 차라리 다행이네요."
여제가 빙긋 미소 지었다.
"내가 하게 될 이 선택도,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뜻일 테니까."
"무슨 선택?"
이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여제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이안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저택의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다만 모든 게 흑백이었다. 소용돌이치는 먹구름도. 밤하늘도. 거대한 초승달까지.
"나는 이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균열을 남길 거거든요. 검은 벽이 그랬듯이."
이어진 여제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생김새도 그랬다. 황금 욕조에서 걸어 나오던 분신과 똑같았다.
이안의 시선을 가만히 마주 본 그녀가 이윽고 빙긋 미소 지었다.
"말릴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내가 말리면, 하지 않을 거냐?"
"물론 아니죠. 이젠 나도 돌이킬 수 없거든요. 사실, 반쯤은 충동적이었어요. 우릴 실컷 이용해 먹은 주제에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외면한 작자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도, 복수하고 싶었거든요."
"그게 널 이용하던 자들이 바라는 일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
"있죠. 물론. 그게 조금은 분하기도 했는데."
여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당신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이젠 오히려 즐겁네요. 자신들이 전부 옳다고 주장하는 그 역겨운 신들과 사제들도, 나처럼 꼭두각시에 불과하단 걸 알게 됐잖아요."
이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멀지 않아 일어나게 될 일이었다. 그저 그 필연적인 순간이 조금 더 앞당겨질 뿐이리라.
"그래서, 유언을 남기려고 날 끌어들인 거냐?"
"사실은 한 번 더 당신을 설득하고 싶었어요."
고개를 저은 여제가 말을 이었다.
"내 유지를 이어받아 달라고. 당신이라면 어쩌면,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거절하면 협박이라도 할 생각이었죠. 이 세계는 이미 충분히 많이 부서져서, 균열이 조금만 더 늘어나도 치명적일 테니까. 그런데 보아하니…."
여제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후련해 보이기도, 모든 걸 포기한 것 같기도 한 묘한 미소였다.
"당신은 이미 다 알면서도 거부한 거였네요. 그러니,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어요. 그냥 대화나 나눌 생각이에요. 나는 늘, 당신과 좀 더 오래 대화해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 소원이라면, 이미 이룬 것 같은데."
"조금만 더요.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그래, 뭐. 더 할 말이 있나?"
"당신은 우리를 멸족시킨 존재로 영원히 기억될 거예요, 이안. 다른 마족들이 당신을 알아볼 것이고, 우리를 이용하던 자들도 당신을 주목하겠죠."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다 사이좋게 네 곁으로 보내줄 테니까."
"그래 주면 좋겠네요. 우리를 이용해 먹던 자들은, 특히."
마족도 죽기 직전엔 솔직해지는 거군.
피식한 이안이 물었다.
"그것들에 대해서나 말해 봐. 원탁 의회, 어디서 만날 수 있지?"
"아쉽게도… 나도 몰라요. 사실, 당신보다 더 아는 것 같지도 않고. 난 그자들의 정확한 이름조차, 당신을 통해 알게 됐거든요. 저길 봐요, 이안. 곧 시작될 거예요."
여제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안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그자를 사제님이라고 불렀어요. 루 솔라의 광신도죠. 아주 강한 신성을 부리는. 그러니 보통 사제는 아닐 거예요. 그리고."
목소리가 늘어졌다. 이안은 다시 옆을 돌아보았다.
여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쩌적,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은 다시 흑백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초승달 한복판을 가르며, 공간에 거대한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기다란 손가락 같은 무언가가 슬며시 삐져나왔다. 다음 순간 초승달이 녹아내리면서 그 손가락을 가렸다.
"...!"
이안은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하늘의 색이 되돌아와 있었다.
붉은 초승달이 물감이 번지듯 흩어지면서 밤하늘을 녹이고 있었다.
쿠릉, 쿠르릉- 흐르기 시작한 먹구름 사이에서 천둥이 번쩍였다.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창이 이어졌다.
비로소 이안은 자신이 현실로 되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가득하던 진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남지 않았다. 혼돈의 파편도 거의 텅 빈 채로 침묵했다.
그저 그가 누운 잿더미만이, 방금 그가 겪은 일들이 백일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줄 뿐이었다.
와르르르르-
사방에서 굉음이 번지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알현실뿐만 아니라 모든 지하 공간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붕괴가 이상하게 가까웠다. 이제 보니, 잔해로 뒤덮인 알현실의 넓이는 아까의 반도 되지 않았다. 깊이도 마찬가지였다.
"결계가 무너졌다 이거지…."
늘어나고 휘어졌던 공간이 본모습으로 되돌아간 게 분명했다.
중얼거린 이안이 상반신을 일으키려다 휘청댔다. 지독한 현기증과 두통. 그리고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통증이 전신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이안은 그제야 자신의 몸 상태가 생각보다 더 나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식이 멋대로 다시 꺼지려 했다.
하지만 아직은 기절할 때가 아니었다.
이안은 잿더미 한복판, 묘비처럼 박혀 있는 군단장의 대검에 기대서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어 아공간에서 목함을 꺼낸 그가, 간신히 궐련을 입에 물었다.
떨리는 손아귀에서 작은 불똥이 튀었다. 이안은 몸에 남은 마력이 한 줌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지독한 마력 탈진에 시달리게 되리라.
화륵-
작은 불꽃 하나가 피어났다. 궐련 끝에 불을 붙인 이안이, 대검의 검면에 고개를 기대며 연기를 들이마셨다.
몸속을 가득 채웠던 약초 냄새가 입 밖으로 번졌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던 시야가 조금은 밝아졌다. 연기를 내뿜으면서, 이안은 아까 문득 떠올렸던 생각의 결론을 비로소 내렸다.
여기서 겪은 모든 상황이, 전부 게임에도 있었던 건 아니리라고.
적어도 이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을 터였다. 게임에선 없었던 여러 상황이 더해져 만들어진 나비효과이리라.
"하아…."
한 모금의 연기를 더 토해낸 이안이,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잿더미에 파묻힌 발목이 삐걱대고, 어지러움이 밀려들었다.
왼쪽 허벅지의 출혈은 이미 멎었지만, 여전히 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기어코 일어섰다.
"후…."
오른팔을 뻗은 이안이 대검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지금은 땅에서 뽑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간신히 검날을 기울여 아공간에 넣은 그는, 몸을 돌려 잿더미 사이에서 부러진 단죄의 검을 찾아냈다. 검집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절뚝대며 걸음을 옮겨 검집까지 간신히 주워 아공간에 넣은 그가, 비로소 궐련의 연기를 들이마시며 시선을 돌렸다.
미로 저택은 전부 무너져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 잔해들이 모여서, 그나마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 법한 비탈길이 몇 개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 이 몸으로 올라갈 길은 아닌 것 같은데….
궐련의 연기를 토해낸 이안이, 이윽고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이안…!"
비탈길 저 너머에서, 익숙한 실루엣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료들이었다.
"나, 나리! 무사하시군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필립이 소리치는 가운데, 메브가 다급하게 안면 가리개를 올렸다. 그녀는 조바심 가득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면서도, 필립이 비탈길을 내려올 수 있게 부축하려 주춤댔다.
필립은 부목과 붕대로 왼팔을 고정한 채였다.
메브의 보조를 받으며 비탈길로 접어드는 발걸음이 엉거주춤했다.
저러다 한 번은 자빠질 것 같은데.
생각하던 이안은, 그들을 앞질러 달려오는 둘을 눈에 담았다.
잔해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달리는 샬롯.
그리고 그녀를 앞질러 질주하는 건, 설표 가죽 망토를 걸친 테사이아였다.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붉지 않았다.
예전보다 훨씬 더 짙은 녹색. 머리칼은 은발이 아니라 백발에 훨씬 더 가까워졌다.
외형적 변화는 그 정도가 전부인 것 같았다. 피부 아래 꿈틀대던 뿌리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양팔을 흔들며 다가오는 테사이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안은, 미간을 좁히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아공간에서 간신히 딸려 나온 봉인함이 땅에 떨어지고, 그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충분히 가까워졌음에도 테사이아가 달려오는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양팔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이안이 연기를 토하며 내뱉었다.
"보다시피, 부상자다."
"알아! 딱 봐도 엄청 심각해 보여!"
소리친 테사이아가 그대로 몸을 날렸다. 지금의 이안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돌진이었다. 물론, 버틸 수도 없었다.
이안이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의 뒤통수에 손을 받쳐 머리는 부딪히지 않게 한 테사이아가, 그를 품에 안은 채로 고맙다고 소리를 질러 댔다.
부상자라니까….
온몸을 뒤덮는 고통에 눈을 감으면서도, 이안이 내뱉었다.
"옷부터 꺼내 입어라. 망토만 걸치고 있지 말고."
"역시, 내 옷 챙기는 건 이안 뿐이야. 알았어."
테사이아가 군말 없이 일어섰다.
그녀의 뒤통수로,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테사."
"응?"
"네 의뢰는 완수됐다."
"...!"
눈을 치켜뜬 테사이아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눈을 깜빡인 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 한번 고맙다고 소리치며 이안을 끌어안았다.
이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미 정신을 잃은 뒤였으니까.
#171화
심연이 속삭였다.
귀를 기울인 순간, 속삭임은 삽시에 뇌리를 가득 채우는 괴성으로 변했다. 이미 잊힌 언어. 세상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의 사념.
"...!"
이안은 번쩍 눈을 떴다.
머릿속의 괴성이 씻은 듯 사라졌다. 먹구름 넘실대는 밤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은은한 불빛과 온기,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나지막이 이어졌다.
등에 울퉁불퉁한 것들이 배겼다. 아직 무너진 미로 저택의 잔해 위였다.
'그래… 죽진 않았군.'
손가락과 발가락이 움직이는 것까지 확인한 그는, 이윽고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목 아래까지 덮여 있던 모포와 설표 가죽 망토가 흘러내렸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현기증. 모든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특정할 수 없는 전방위적인 통증이 이어졌다.
여러 명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다음 날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벌써 깨셨습니까…? 조심하십시오, 도와 드리겠습니다."
허둥지둥 달려온 건 필립이었다. 멀쩡한 팔로 엉거주춤 이안을 부축하며, 그가 덧붙였다.
"좀 더 주무시지 그러십니까. 정말 상태가 말이 아니셨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래 보이고요."
"이 반지는, 그래서 끼워 둔 거냐?"
이안이 왼손을 들며 덧붙였다. 너덜너덜해졌던 그의 왼손은, 어느새 다시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손 곳곳에 흉터가 남아 있고 살짝 구부리기만 해도 아팠지만.
어쨌든, 중지에는 필립의 성물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성 다미엘의 반지. 필립이 머리를 긁적였다.
"성물이니까요. 나리께서 회복하시는 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이건 좀 감동인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반지를 빼며 내뱉었다.
"이만하면 충분해. 이제 네가 껴라. 난 이게 없어도 회복이 빠르지만, 넌 아닐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어라, 그러고 보니 정말 왼팔이 상당히 멀쩡해지셨군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내가 얼마나 잤지?"
말을 자른 이안이 필립의 손에 반지를 쥐여 주었다. 필립이 한 손으로 어설프게 반지를 끼우며 대답했다.
"반나절쯤 주무셨을 겁니다. 저도 일어난 지 몇 시간 안 됐습니다. 우리 나리께서 첫 번째 불침번을 서셨거든요."
오래도 잤군. 그냥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이안은 야영지를 눈에 담았다.
저택의 목조 잔재를 모아 피운 모닥불.
메브는 모포조차 덮지 않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봉인함에는 모포가 딱 하나 들어 있었다. 그걸 이안에게 덮어 준 것이리라.
그 옆에 웅크린 샬롯도 쌕쌕대는 숨소리만 흘렸다. 테사이아의 녹색 눈에 모닥불의 불빛이 맺혀 아른거렸다.
"…언제부터 깨 있었냐?"
"방금 전부터."
"으헉?!"
테사의 대답에 필립이 숨을 들이켜며 펄쩍 뛰었다. 재빨리 입을 다문 그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습니까…."
"너무 신선한 반응이라 오히려 놀랍네. 뱀파이어들과 맞서 싸운 기사가 이런 걸로 놀라다니."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전 아직 서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필립이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대답했다. 킥킥댄 테사이아가 몸을 일으켰다. 위아래 모두 이안의 옷을 걸친 채였다.
옷 입으라고 말한 게 꿈이 아니었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필립과 테사이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빛의 의미를 깨달은 필립이 재빨리 말했다.
"아, 미로에서 통성명 겸 인사는 다 나눴습니다. 저와는 구면이기도 하잖아요?"
"내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와 있더라구. 멀리서 큰 소리가 울리고. 이안이 싸우는 소리라고 하더라. 그래서 대충 인사하고 바로 뛰었지, 뭐. 얘 팔이 이래서, 어쩔 수 없이 빙빙 돌다가 늦었지만."
테사이아가 말을 받았다.
필립이 건넨 가죽 수통을 받으며 이안이 대답했다.
"그래도 거기서 용케 잘 빠져나왔네."
필립이 어깨를 으쓱였다.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갑자기 미로가 출렁이는 느낌이 들더니, 다음 순간에 반쯤 무너진 저택이 바로 앞에 솟아 있었거든요. 곧 그마저도 무너졌고요. 덕분에 저희가 그렇게 헤매던 미로가 본래는 그리 크지도 않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마경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걸 눈앞에서 본 겁니다."
결국 자력으로 나오진 못했었단 거군. 물을 마시며 대충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여기 계속 있었던 건, 나 때문이고?"
"예. 상태가 워낙 좋지 않으셨으니까요. 아시다시피, 이런 소굴은 주인이 사라지면 오히려 가장 안전한 곳이 되기도 하니까…."
여긴 경우가 조금 다를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수통을 내려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결과적으론 잘 한 선택이군. 덕분에, 소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소득이라니요…? 어, 나리. 그 몸으로 벌써 움직이시면…."
이안이 힘겹게 일어서자, 필립이 당황한 듯 허우적댔다.
"넌 쉬고 있어, 주근깨."
내뱉으며 이안을 부축한 건 테사이아였다.
"이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난 알 것 같으니까."
"...?"
눈을 끔뻑이는 필립을 남겨둔 채, 이안과 테사이아가 걸음을 옮겼다.
이안과 보폭을 맞추면서, 그녀가 속삭였다.
"나랑 같은 걸 느낀 거지?"
"아마도."
덤덤하게 대답하며, 이안은 눈을 뜨기 직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공허의 속삭임. 이곳 어딘가에 불경한 물건이 파묻혀 있는 게 분명했다.
감각이 온전하지 못한 와중에도, 어딘가에서 번져 나오는 서늘한 마력이 느껴졌다. 일행 중에서는 테사이아만 느낀 모양이었다.
"감각이 전보다 더 좋아진 모양이군."
절뚝절뚝 걸음을 옮기면서 이안이 말했다. 테사이아가 녹색 눈을 빛내며 미소 지었다.
"그 이상이야. 아예 새로운 감각이 생긴 것 같아. 야옹이 말로는, 내가 원로 귀쟁이가 된 거라던데. 맞아?"
"그래. 그렇게 됐지."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원로 퀘스트의 보상이 뇌리를 스쳤다. 약간의 경험치와 스킬 포인트 하나. 사실상 씨앗을 그냥 먹었을 때와 다른 건 경험치뿐이었다. 아니, 가장 중요한 하나가 더 달랐다. 테사이아.
"너는 아마 가장 젊은 원로일 거다. 어쩌면, 마지막 원로일지도 모르고."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대단해 보이네. 어쨌든, 좋아. 모든 게 새로운 느낌이야. 마력도 느껴지고. 이젠 피를 마시고 싶다는 충동도 없어. 갈증이 없다는 게 어떤 느낌인 건지도 몰랐는데. 내 생각보다 더 좋은 거였어."
이안을 돌아보며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이내 덧붙였다.
"고마워, 이안. 이 은혜는, 앞으로 계속 갚을게."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장난스러웠지만, 전보다 훨씬 온화했다.
어쩌면 이건 원로 요정으로 재탄생해서 생겨난 분위기가 아니라, 본래 타고난 기품인지도 몰랐다. 마족이 되어 가려져 있었을 뿐.
"아직도 과거가 전혀 기억나지 않냐?"
"응. 생명수의 씨앗도 기억까지 돌려주진 못하나 봐. 상관없지, 뭐. 이젠 요정들에게 배척당할 일도 없잖아? 심지어 난 원로고."
"다른 요정을 만나도, 기억이 없다는 건 드러내지 마라. 귀쟁이들은 동족의 뒤통수도 치는 것들이야."
"알아 둘게. 사실 상관은 없어. 귀쟁이들이 개수작을 부려도, 네가 바로 눈치채고 알려 줄 거잖아?"
하여간, 대책 없긴.
피식댄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잔해 더미의 가장자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긴… 집무실 쪽이군."
비탈길 사이로 설핏 드러난 원형 계단의 흔적을 눈에 담으며, 이안이 중얼댔다. 테사이아가 눈을 끔뻑였다.
"집무실?"
"여제의 방이란 얘기야."
"아하… 흐음… 잠깐만…."
폐허를 돌아보는 테사이아의 눈빛이 은은한 빛을 머금고 일렁였다.
마력이었다. 그녀의 눈가로 핏줄이 슬며시 돋아났다. 생명수의 뿌리일 터였다. 그녀의 신경계와 핏줄 속에 자리를 잡았으니까.
"저 안에서 마력이 느껴져. 이안, 너도 느껴져?"
"조금은. 선명하진 않아. 몸 상태가 이래서, 감각이 둔하군."
"그럼, 내가 찾아다 줄까?"
테사이아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흠…."
"왜 그렇게 봐? 설마, 못 믿겠다는 건 아니지?"
"맞는데."
"믿어 봐. 내가 보여줄 테니까."
단호하게 말한 테사이아가 이안을 한구석에 앉혔다.
평평한 잔해 위였다.
"이안은 쉬면서 구경만 해."
테사이아가 날듯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찰랑댔다. 더는 전처럼 머리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는 없게 된 모양이었다.
하긴. 그건 뱀파이어의 특기였다.
"으읍…."
쿠드득-
곧 테사이아가 이를 악물며 돌덩이 하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아 보였다. 안간힘을 쓰고서야 겨우 옆으로 치워냈다.
'괜찮나, 저거.'
원로 요정이 되었다고 해서 힘까지 더 강해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힘이 어지간히 세더라도 저 잔해들을 맨손으로 치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어쨌든 여전히 자신만만해 보여서, 이안은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 몸 상태로는 별 도움도 되지 못할 터였다. 아직은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개고생을 한 보람은… 있지만.'
이안은 상태창을 열었다. 경험치만 해도 엄청나게 오른 전투였다.
레벨 업을 한 건 아니었지만, 머지 않아 다시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타후므리트를 죽였을 때와 필적하는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최단기간 레벨 업 기록을 또 한 번 경신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거기다 능력치 포인트 여러 개에, 스킬 포인트도 세 개나 더 생겼다.
태초의 내성에 사용한 포인트를 제외해도 두 개가 더 늘어난 셈.
뿐만 아니라 상태창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다양한 속성 저항력도 추가적으로 늘어났다.
게임에서처럼 테사이아만 상대했다면 끝내 얻지 못했을 귀중한 보상들.
이어 눈을 감고 내면의 혼돈의 파편까지 확인한 이안의 눈매가, 이내 꿈틀댔다.
'이건…?'
파편의 크기는 이번에도 조금 커진 상태였다. 그보다 이안을 놀라게 한 건, 파편에서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전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진혈에서 느껴지던 것과 비슷한 느낌.
'설마, 진혈의 능력을 일부 흡수한 건가…?'
그런 게 가능해? 하긴. 생각해 보면 타락자나 악마의 마력을 흡수한 적은 있어도, 마족의 근원을 흡수한 건 처음 생긴 일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이안은 가만히 정신을 집중했다. 심상 속 파편의 주위로 붉은빛이 아른거리더니 옅은 맥동이 번졌다.
역시나, 파편이 그의 피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의 의지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조금씩. 뒤이어 내부에 담긴 혼돈력이 아주 조금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역시. 내 피를 혼돈력으로 치환하는 거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이안의 입가에 옅은 헛웃음이 번졌다. 전환 효율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어쨌건 다급한 순간에는 쓸모가 있을 터였다.
체력이 회복되는 속도가 마력보다 빠르니까. 혼돈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파편을 다시 가득 채우려면 보름은 족히 걸리리라. 하지만 이제 틈틈이 조금씩 피를 먹인다면, 훨씬 줄일 수 있을 터였다.
'내 피를 먹는 거면… 진혈의 부작용이 나한테 영향을 끼치진 않겠네.'
이윽고 결론 내린 이안이 피를 먹이는 것을 멈췄다. 다행히 파편은 그의 피를 더 탐하지 않고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문득 진혈의 주인 퀘스트를 수락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뱀파이어가 되었을 것은 확실했다. 추가적인 능력치와 스킬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터였다. 그라면 뱀파이어들보다 더 살뜰하게 그 능력들을 활용했으리라.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여러 제약이 생기는 건 물론이고, 더는 신성력과 관련된 스킬들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테니까.
'또 모르지. 카르하라면 오히려 재미있어 하면서 신성을 내려 줬을지도.'
그럼 투쟁의 축복이 활성화될 때마다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껴야 했으리라. 그러다 끝내는 죽었겠고.
그런 의미에선, 파편이 진혈의 능력을 일부 흡수한 지금이 훨씬 나은 결과인 셈이었다.
결코 의도한 것도, 원한 결과도 아니긴 했지만.
"찾았다…!"
이안이 입맛을 다시는 사이, 잔해 사이에서 테사이아의 탄성이 번져 나왔다.
그녀는 어느새 잔해 틈으로 기어 들어가서, 모습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너무 빠른데.
내심 놀란 이안은, 이내 그럴만한 이유를 깨달았다.
여제의 집무실은 3층이었다. 그러니 무너진 잔해 속에서도 비교적 위에 있었으리라.
"봐! 할 수 있댔지?"
꾸물대며 기어 나온 테사이아가 정사각형의 목함을 머리 위로 들어 보이고는 달려왔다.
이안이 느낀 바로 그 마력이 선명해졌다.
오염된 마력이 아니라는 게 뜻밖인 부분이었다.
앞으로 다가온 테사이아가, 상자를 이안의 허벅지에 내려놓았다.
"열어도 줄까?"
"아니. 충분해. 고생했다."
"응. 조금 하긴 했지. 생각보다 힘들었다구."
"그럼 이제 물러나 있어. 여기 쳐다보지 말고."
"...?"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냉큼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확인한 이안이, 비로소 반쯤 부서진 자물쇠가 걸린 상자를 눈에 담았다.
표면에 정교한 주문 회로가 몇 겹으로 새겨져 있었다. 무슨 주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마석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안에 담긴 물건이 동력원인 모양이었다.
안에 뭐가 들었을지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공허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긴 했지만, 악마의 반열에 오른 마족의 수장이 고이 보관할 만한 물건은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역시…."
자물쇠를 걷어내고 뚜껑을 살짝 연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틈으로 공허의 마력이 번져 나왔기 때문이다. 혼돈력에 가까울 정도로 순수한 마력.
이제 보니 이 상자도 보물이었다.
이만한 공허의 마력을 평범한 마력으로 바꿔 내보내는 장치라니. 보통 물건일 리 없었다.
잡념은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깨끗이 사라졌다.
붉은색의 푹신한 받침대 위에, 뼈로 만들어진 괴상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어린아이의 두개골 같았지만, 눈구멍이 옆으로 두 개 더 뚫려 있었다. 그 아래로 이어 붙은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짐승의 뼈였다.
"그건… 뭐야?"
테사이아가 바짝 곤두선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심상치 않은 파장을 느낀 것이리라.
탁, 상자를 닫으며 이안이 대답했다.
"암흑 성물. 심연의 유산. 공허의 우상….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타락한 자들의 보물."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 나왔다. 잠깐 본 것만으로도 시야가 일그러지고 목에서 피 맛이 났다.
각인 작업은 몸을 조금 더 회복한 뒤에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이 암흑 성물에 담긴 여제의 각인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보관함을 아공간에 밀어 넣은 이안이 힘겹게 일어섰다. 재빨리 달려와 부축한 테사이아가 속삭였다.
"더 뒤져 볼까, 이안? 뭔가 더 나올 것 같은데."
"내일. 더 하면, 다들 깰 거다."
지금은 나도 너무 피곤하고.
뒷말을 삼키며,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모닥불로 다가가면서 테사이아가 중얼댔다.
"내일 야옹이랑 같이 뒤져 볼게. 쟨 단순해서, 힘쓰는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이안이 대충 고개만 끄덕이는 사이.
"뭘… 찾아오신 겁니까?"
모닥불 옆의 필립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대신 대답한 건 테사이아였다.
"암흑 성물."
"네에? 또 그런 위험한 걸 손에 넣으셨다고요? 이번엔 뭡니까?"
나도 아직 정확히 몰라, 인마.
이안은 대충 손사래만 치고는 다시 모포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침 일찍 여길 떠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이 쏟아져서 버틸 수가 없었다.
이안은 눈을 감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더는 그 어떤 방해도 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꿈조차 끼어들지 않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심연이었다.
***
이안은 코를 간질이는 고소한 냄새와 함께 눈을 떴다.
여전히 하늘에 가득한, 그러나 그나마 밝은 회색으로 일렁이는 먹구름이 선명해졌다.
적어도 이른 아침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저만치에서 번지는 돌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이안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두통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기운이 없긴 했지만, 몸도 제법 움직일 만했다.
"깨어났구나, 이안. 새벽에 잠시 일어났었다는 얘기는 들었다. 몸은, 좀 괜찮으냐?"
곁으로 다가온 메브가 수통을 내밀며 말했다. 이안은 수통을 받아 입에 가져갔다. 제법 시원한 새 물이었다. 그가 자는 사이에 주변을 뒤져 수원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물 몇 모금을 마신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별 일 없었소?"
"다행히도. 저 둘 빼곤."
메브가 곁에 앉으며 이안의 뒤쪽을 턱짓했다. 진귀한 구경을 한다는 듯한 눈빛. 실제로도 그랬다.
수인과 원로 요정이, 경쟁하듯 잔해를 파헤치며 노략질을 하고 있었으니까.
#172화
돌덩이를 집어 던지는 샬롯과 잔해 사이에 상반신을 파묻은 테사이아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이안은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저걸 정말 하고 있다니.
심지어 수확도 있어 보였다.
"와! 또 금화! 말했지? 이것들, 부자라니까?"
그것도 제법 많이.
주머니를 들고 기어 나온 테사이아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샬롯을 돌아보았다.
"별거 아니라고 큰소리치더니. 잘 좀 해 봐, 야옹아. 계속 돌만 집어 던진다고 뭐가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 앗, 이안! 일어났어?"
걸음을 옮겨 전리품이 쌓여 있는 평평한 돌 근처로 다가가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이안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테사이아가 보란 듯 돈주머니를 전리품 사이에 떨어뜨리는 사이.
"깨어났구나, 이안."
낮게 그르렁대며 입맛을 다시던 샬롯도 홱 이안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
대답한 이안이, 자신 쪽으로 다가오려는 샬롯을 향해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살만 하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해."
"…그래도 될까?"
멈칫한 샬롯이 되물었다. 눈에 은은한 승부욕이 맺혀 있는 걸 보니, 저 전리품을 누가 더 많이 발굴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잘 됐지. 장비도 죄다 박살 나고 주머니도 홀쭉해졌는데. 엄선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열심히들 해 봐."
"그렇게 말한 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샬롯이 몸을 돌렸다. 테사이아는 이미 네발로 기어 다니며 잔해 사이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아주 잘들 노는군.
피식댄 이안이 시선을 거뒀다.
말과 마차가 없으니 찾은 걸 전부 들고 갈 순 없겠지만, 어쨌든 가계에 꽤 보탬이 될 터였다.
운이 정말 좋다면 값진 보물이라도 하나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고.
고소한 냄새가 가까워진 건 그때였다.
"샬롯이 저렇게 즐거워하는 건 처음 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테사이아가 하자는 건 다 하더군요. 둘이 확실히, 보통 사이가 아닌 모양이에요."
필립이 스튜가 담긴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가장자리가 깨진 걸 보니, 여기서 파낸 물건을 대충 씻어 온 모양이었다.
"둘의 목숨이 하나였으니까. 보통 사이는 아니지."
접시를 받아들며 대답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아쉽게 됐소. 기대한 바가 있으셨을 텐데. 저 녀석은 더는 마족이 아니거든."
그가 접시를 들어 스튜를 입에 가져갔다. 뜨끈한 온기가 식도를 타고 흘러들면서, 잊고 있던 허기가 밀려들었다. 육포와 알 수 없는 보존 식량들을 넣고 끓인 꿀꿀이 죽이었지만, 천상의 맛이 따로 없었다.
하긴 생각해 보니 꼬박 하루 이상을 먹은 게 없었다. 심지어 부상 중이 아니던가.
"잘된 일이니 전혀 아쉽지 않아. 오히려 새로운 기적을 본 느낌이다. 누군가 타락하는 것은 보았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처음이니."
선선히 대답하며, 메브가 이안의 접시에 수저를 얹어 줬다.
이것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다들 현지 조달 전문가가 다 됐군.
이안은 내심 웃고는 수저를 쥐었다. 정신없이 먹는 그를 바라보던 메브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만. 실제로 보니 정말 놀라운 회복력이구나. 고작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멀쩡해지다니. 적어도 며칠은 요양해야 하고, 회복까지 한 달 이상은 필요할 줄 알았다."
"겨우 움직이기만 하는 수준이오. 아직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 이안이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회복이 극도로 빠른 건 딱 지금 수준까지일 터였다.
컨디션이 온전해지려면 적어도 일주일에서 열흘은 더 필요하리라.
물론 전투가 끝난 직후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그것도 충분히 초인적인 회복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건 접시가 다 비워져 갈 때쯤이었다.
"경은 괜찮으시오?"
"보다시피. 부끄럽구나. 다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건만, 나만 멀쩡하다니."
"잘 됐지, 부상자들의 안전을 책임질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잖소."
"그래, 그건 내 당연한 의무다."
이안을 마주 본 메브가 다짐받듯 말을 이었다.
"당분간은 내가 선두에 설 거야. 너는 절대 무리하지 말고 회복에만 전념하도록 해."
안 그래도 그럴 거다.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접시에 남은 걸 한입에 털어 넣었다.
필립이 스튜를 한 국자 더 퍼서 다가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어쨌건, 결과적으로 루 사드는 구원 받은 셈입니다. 마족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니까요. 글루미르 시나 다른 영지의 상황이 좋을 것 같진 않습니다만…. 어쨌든, 생존자들은 전보다 훨씬 안전하게 삶을 이어갈 수 있겠죠."
"글쎄…."
잠시 침음한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슬쩍 미간을 좁혔던 필립이, 이내 그의 의중을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영주들이 다 죽었으니 혼란이 시작될 거란 말씀이시군요. 전쟁 중이기도 하고요. 염려 마십시오. 정말 모든 귀족이 죽은 건 아닐 테니, 적법한 대체자가 있을 겁니다. 마침 국경도 봉쇄 중이라, 다른 왕국까지 소식이 바로 들어가지도 않을 테고요. 혹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더라도…."
오른손의 반지를 내려다본 그가 덧붙였다.
"교단의 조사단이 그리 늦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변방에 무심해도, 이만한 괴현상까지 방치하지는 않겠지요. 어쩌면 정화대를 파견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곳의 사정을 알게 되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개입할 테고요. 물론 기부금을 왕창 뜯어내긴 하겠습니다만…."
"…그래, 뭐. 그럴지도 모르지. 다른 더 큰 문제들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야."
심드렁하게 대꾸한 이안이 식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메브와 필립의 표정은 대번에 심각해졌다.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던 메브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더 큰 문제가… 생길 거란 말이냐?"
"당장 할 얘긴 아닌 것 같소."
이안이 수저를 놓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묘하게 조용해진 샬롯과 테사이아 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이미 진작부터 뭔가를 느낀 듯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이안 쪽도 힐끔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둘에게 고개를 슬쩍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지금은 손님들을 맞을 준비부터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우리가 주인은 아니지만."
"...!"
그제야 메브와 필립도 폐허의 비탈길 위로 시선을 돌렸다.
메브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고, 샬롯과 테사이아도 서로 간격을 좁히며 일행의 앞을 가로막듯 서는 가운데.
저벅- 저벅-
비로소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아주 조심스럽고 주춤대는 기척들이었다.
곧 같은 종류의 창과 방패, 방어구로 무장한 일련의 병사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제기랄, 정말 있다니…."
"고기 끓이는 냄새가 착각이 아니었군…. 루 솔라시여…."
다만, 그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폐허 한복판의 일행에게 제대로 무기를 겨눌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서로를 돌아보며 수근댔다.
"보아하니 글루미르 시의 주민들은 무사한 모양이군."
마법 같은 걸로 재워 두기라도 했었나 보지.
이안이 심드렁하게 읊조리는 가운데, 필립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런데 왜들 저렇게 겁을 집어먹었답니까? 역시, 이 폐허 때문일까요?"
"진심으로 묻는 거냐? 저택 밖의 시체들을 봤겠지. 정원에도 여럿 널브러져 있을 테고."
"…아. 그랬겠군요. 너무 당연한 것들이라 의식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필립이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지금 저 밖은 지금 말 그대로 지옥도나 다름없을 터였다.
그 광경을 보고서도 여기까지 들어온 저 병사들의 배포가 오히려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하긴. 저택이 사라졌으니 안 와 볼 수는 없었겠지만.'
어쨌건, 이안이 염려한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적어도 저들은 대화는 통할 것 같아 보였으니까.
물론, 귀찮아 지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러기 전에 뜨고 싶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상황을 잘 이용해 볼 수밖에.
이안이 내심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전부 모여든 병사들이 움푹 함몰된 폐허의 가장자리에 늘어섰다.
그들 사이로 말 탄 기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흔쯤 되어 보이는, 루 사드의 문장이 새겨진 서코트를 걸친 기사였다.
병사들의 지휘관일 터였다.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긴장이 가득한 얼굴임에도, 그는 자신의 의무를 잊지 않았다.
"나는 니그리안테 백작을 섬기는 글루미르의 기사, 오스릭이오! 그대들의 정체를 밝히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를 낱낱이 고하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소…!"
그가 용기를 쥐어 짠듯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눈에 힘을 주고 있긴 했지만, 초조함과 떨림이 묻어나오는 것까진 감추지 못한 채였다. 아마 내심, 부디 그들이 협조해 주길 바라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본 광경을 만들어 낸 장본인들이 이안 일행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으니까.
물론 이안은 그들과 굳이 싸울 생각이 없었다. 경험치조차 없는, 무의미한 살육이 될 테니까.
게다가 해결책도 간단했다.
'썩 내키는 방식은 아니지만….'
오스릭을 바라보던 이안의 시선이, 이내 아래로 내려갔다.
역시나, 샬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나서도 되겠냐는 듯한 눈빛.
거기다 메브와 필립도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이안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긴장감이 없구만.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말했다.
"짧고 간결하게."
샬롯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턱을 살짝 치켜든 그녀가, 이윽고 그르렁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춰라. 여기 계신 이분은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이자 타오르는 여신의 불씨의 운반자, 거인 왕국 최후의 징벌자이며 북부의 진정한 대전사-"
"...?!"
오스릭을 비롯한 병사들의 눈이 점점 커졌다. 샬롯은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심장을 찌른 용살자이자, 백금룡의 공식적이며 유일한 대행자. 이제는 왕국을 암중에서 지배하던 흡혈 일족을 처단하고 루 사드를 구원하기까지 하신, 북부의 초인, 이안 호프 경이시다!"
짧게 하라니까….
적막이 내려앉는 가운데, 이안이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오스릭과 병사들은 말 그대로 멍한 얼굴들이었다.
놀랍지도 않았다. 저 장황한 칭호들을 한 번에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그게 더 놀랄 일이었다.
이윽고 오스릭이 입을 달싹였다.
"흡혈… 일족이라니… 그게 무슨… 루 사드가, 마족의 지배를 받고 있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아, 역시 그게 제일 충격인 건가.
생각할 찰나, 필립이 슬쩍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저도 거들어도 되겠습니까?"
"...."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친걸음이니, 다른 주접이 더해진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으리라.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선 필립이 소리쳤다.
"방금 이안 경의 종자가 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이는 루 솔라의 신도이자 티르 엔의 사도. 약자들의 구원자이며 정당한 복수의 대행자인 붉은 기사, 메브 리우렐 경의 이름으로 보증합니다!"
"복수의…? 귀공이… 그, 붉은 기사란 말씀이시오?"
"저는 경의 종자인 필립입니다."
깍듯하게 대답한 필립이, 옆의 메브를 향해 손을 받쳐 들었다.
가뜩이나 벌어져 있던 오스릭의 입이, 메브의 녹색 눈을 마주한 순간 더 크게 벌어졌다.
그 명성이 자자한 붉은 기사가 여인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 메브가 입을 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붉은 기사, 메브 리우렐이오. 그리고 지금은, 북부의 초인인 이안 호프 경을 섬기고 있지."
"...?"
이안이 돌아보았음에도, 메브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이안 경께서는 뱀파이어들이 루 사드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고, 그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셨소. 그리고 끝내 그 저주받은 족속들을 전부 격퇴하고 루 사드를 구원하셨지. 이는 찬란한 여신과 엄정한 여신께서 지켜보셨으며, 투쟁의 신께서도 가호한 성전이었음이니."
병사들을 한차례 돌아본 메브가 덧붙였다.
"모두 무기를 거두고 합당한 예를 갖추시오. 무지로 저지른 무례에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나, 알고도 행하지 않음은 신성 모독이요, 또한 마족을 섬겼음을 자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
이안의 한쪽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입을 연 것도 드문 일인데, 거기다 한술 더 뜨기까지 한다고…?
#173화
메브의 날 선 눈빛을 응시하던 이안은, 곧 다른 일행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들 웃음기 없이 진지했다.
심지어 테사이아조차 무표정했는데, 백발이 일렁이듯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대로 달려들 기세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손에 쥔 창과 방패를 덜덜 떨던 병사들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 아무래도 전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대장. 밖의 그 광경을 보셨잖습니까…!"
"맞습니다. 근래에는 하늘도 불길하기 짝이 없었고, 흉흉한 소문도 한둘이 아니었잖습니까. 우리만 해도, 죄다 기절했다 깨어났고요."
"이러다 우리 모두 한통속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습니다…! 교단의 정화자라도 찾아온다면, 다 죽은 목숨이라고요…!"
병사들의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오스릭의 멍한 눈에 조금씩 빛이 돌아왔다.
이윽고 마른 침을 삼킨 그가, 이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이안 경…? 제가 이렇게 불러도 되겠습니까?"
"괜찮소."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일행들에게도 의사를 표현한 것이었다. 다들 진정하라고.
오스릭의 말이 이어졌다.
"백작 각하께서 정말… 마족이셨던 겁니까?"
"그렇소. 그리고 여기가 그들의 본거지였지. 그런 의미에서, 나도 묻고 싶군."
오스릭의 눈을 마주 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아무리 장벽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영주가 도시 밖에 따로 저택을 지어 사는 걸 정말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소?"
"...! 무, 물론입니다! 제국의 명문가는 그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왕국은 제국과 인접한 데다 각별하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제국의 방식을 따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
화들짝 이어가던 말을 문뜩 멈춘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탄식했다.
"맙소사… 루 솔라여…."
자신의 말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구차한 변명 같다 여긴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가 손에 든 검을 툭 땅에 떨어뜨리며 말에서 내렸다.
병사들도 기다렸다는 듯 손에 든 걸 전부 떨어뜨리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뒤이어 그들 사이에 한쪽 무릎을 꿇은 오스릭이 소리쳤다.
"찬란한 여신께 맹세코, 저희를 비롯한 글루미르의 주민들은 전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희의 목숨으로 진실을 증명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
명예를 지키고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선 죽을 수도 있단 건가.
이안은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기사 아니랄까 봐, 병사들의 입장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병사는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안은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에 입을 열었다.
"흡혈 일족과 그들의 하수인은, 우리의 손에 남김없이 죽었소."
"...!"
"하지만 물론, 아직 왕국에는 놈들의 끄나풀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교단에서도 그리 여길지도 모르고."
화색이 돌던 오스릭과 병사들의 얼굴이 다시금 얼어붙었다.
이안의 태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들이 무고하다는 건 알고 있소. 그러니 일어들 나시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한 오스릭이 벌떡 일어서며 덧붙였다.
"왕국에 놈들의 끄나풀이 남아 있다면 남김없이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색출할-"
"그건 알아서들 하시오, 그보다…."
이안이 오스릭을 마주 보았다.
"마차와 말을 좀 팔아주지 않겠소? 보다시피 다들 다치기도 했고, 아직 갈 길이 멀어서."
"물론입니다… 만. 저, 그와 관련해서 작은 제안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안?"
"저 혼자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엄중한 사안인지라…."
이안의 시선에 마른 침을 삼킨 오스릭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귀빈들께서 도시를 방문해 직접 증언해 주신다면, 진실을 밝히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차후 교단에 저희의 무고함을 증명할 때도 그렇겠지요. 또한 경을 비롯한 귀빈들께 왕국을 대신해 감사와-"
"알겠소."
말을 자른 이안이 덧붙였다.
"머무는 동안 안락한 숙소와 훌륭한 식사를 제공해 준다면야."
"당연히 그리할 것입니다! 그럼,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바로 돌아가 소식을 전하고, 마차를 이끌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러시오. 보다시피 일행이 많으니 큰 마차로 부탁하겠소. 짐을 싣고 갈 짐 마차도 있으면 좋겠고."
"그리하겠습니다. 다들 이곳에서 귀빈들을 호위하며 대기하라."
오스릭이 주춤대며 일어서는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성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루 사드의 구원자들이시니."
"예, 옛…!"
"예!"
병사들이 꼿꼿이 서며 소리치는 가운데, 이안에게 고개를 숙인 오스릭이 곧바로 말에 올라탔다. 말머리를 돌린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떨어뜨린 검조차 다시 주워들지 않은 채였다.
무기를 집어 든 병사들이 일행을 등지고 서는 가운데.
"역시 나리십니다."
필립의 느긋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가 용병의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덕분에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회복과 재정비 시간을 가질 수 있겠군요. 말과 마차도 얻어낼 수 있겠고요."
"난 팔아 달라고 한 것 같다만."
"에이. 저들이 설마, 나리께 돈을 받겠습니까?"
"...."
이놈, 정말 귀족들을 상대론 날강도가 다 됐네.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이안의 귓가로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들이 원하는 조사와 증언은 내가 대행하겠다, 이안. 네가 허락한다면."
"그렇게 하시오."
선선히 대답한 이안이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덧붙였다.
"협박 솜씨가 좋으신 줄은 몰랐소. 덕분에 일이 쉬워졌군."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협박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
이안의 시선에, 메브가 담담한 얼굴로 덧붙였다.
"나는 빈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
"그럼…. 아니오, 그러시군."
뭔가 되물으려던 이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뻔했기 때문이다. 백금룡은 교단의 성자이니 그의 뜻을 대리하는 이안 역시 성자이며, 이안에게 반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 맞다 하겠지.
'성기사가 성자를 섬기는 건 당연한 일이라 하겠고.'
여차하면 정말 피를 볼뻔 했군.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돌린 이안은, 이내 샬롯과 눈을 마주쳤다.
한쪽에 쌓여 있는 전리품들을 기다렸다는 듯 턱짓한 그녀가, 뒤이어 등을 돌리고 늘어선 병사들 쪽으로도 고개를 까딱였다.
'부려먹잔 거지?'
청출어람이라더니. 다들 정말 대단하군.
피식댄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곳니가 보이게 미소지은 샬롯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나다 싶은 놈들은 내려와라. 그리고 여기 쌓인 물건들을 위로 옮겨. 이것들은 이안 경께서 정당한 소유권을 지닌 전리품이자, 증거물들이다."
저건 또 내 말투 같은데.
허둥지둥 몸을 돌리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이안이 턱을 긁적이는 사이.
"나머지도 다 내려 와."
테사이아가 낭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위에 선 병사들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요정 특유의 고고한 얼굴을 유지한 채 덧붙였다.
"아직 아래에 묻혀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다들 파는 걸 돕도록 해."
"...."
"왜, 싫어?"
"아, 아닙니다…!"
폐허를 꺼림칙하게 바라보던 병사들도 비로소 잔해의 비탈길을 내려왔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테사이아가 이게 되네, 하고 입술만 달싹여 말했다.
적응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입맛을 다신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맨입으로 부려먹지 말고, 작업이 끝나면 적당히들 챙겨 줘라. 성과가 좋은 사람한테는 더 많이 주고."
병사들의 눈에 의욕을 불어넣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필립의 탄성이 뒤를 이었다.
"채찍뿐 아니라 당근도 적절하게 활용해야 하는 거군요. 역시 나리십니다. 또 하나 배웠네요."
넌 그만 좀 배워도 될 것 같다만.
코웃음 친 이안이, 내려놓았던 접시를 집어 들었다.
"스튜나 한 국자 더 퍼 와라."
***
오스릭 경은 크고 단단해 보이는 이두 마차와 짐 마차, 약간의 호위병과 또 다른 기사까지 동행한 채 돌아왔다.
마차는 제국에서 수입한, 본래 백작 내외가 사용하던 물건이랬다.
빈말이 아닌지, 내부는 마부석에 앉은 샬롯을 제외한 나머지 넷이 충분히 타고도 남을 만큼 넓었다.
"출발하겠습니다."
마차는 병사들의 호위 아래 저택을 나섰다.
병사들의 호위 아래, 마차가 저택을 떠났다.
미로 정원의 장미 넝쿨들은 전부 까맣게 말라 죽은 후였다. 필립의 말대로 규모도 훨씬 작아진 데다, 정문으로 일직선으로 통하는 길까지 열려 있었다.
"...."
하지만 저택 너머에 펼쳐진 광경까지 달라진 건 아니었다.
비쩍 말라붙어 본래 형태를 가늠하기 어려운 수많은 시체들. 이미 썩기 시작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날벌레들이 날아다녔다.
모든 시체가 미라처럼 피를 빼앗긴 건 아니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일행을 가로막았던 것들은, 썰리고 토막난 형태 그대로 썩어가고 있었다.
이안은 마차의 창문을 통해, 저 멀리까지 이어진 시체들의 길을 새삼스럽게 눈에 담았다.
오스릭을 비롯한 병사들이, 그들을 발견한 순간부터 벌벌 떨어 댄 이유를 확실히 이해하고도 남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저 괴물들의 우두머리나 저것들을 모조리 죽인 장본인이나, 그들에겐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으리라.
다른 일행들도 마차 밖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감상에 빠져 있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쾌적하네, 이안."
테사이아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이 그녀 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니까 의자에 앉아도 될 것 같다만."
"여기가 편한걸. 익숙해서 그런가. 그러니까 다들 조심해 줘. 날 밟지 않게."
한복판의 바닥에 살짝 다리까지 굽힌 채로 누운 테사이아가 메브와 필립을 돌아보았다.
필립이 어이없다는 듯 뇌까렸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건가 했더니. 항상 이렇게 다니셨던 거군요."
마주 앉은 메브의 시선을 받은 이안이 입맛을 다셨다. 오해받기 딱 좋은 구도였기 때문이다.
"강제로 이런 건 아니오. 저가 좋아서 저러는 거지."
메브가 흐릿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피곤했겠구나 싶었을 뿐이야. 네가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거늘. 보아하니, 어디서든 눈에 띌 수밖에 없었겠어."
"알아주니 고맙소."
이 녀석들이 주위의 이목을 다 잡아끌어 준 덕에 오히려 편했던 부분도, 아예 없진 않았지만.
"받아들이도록 해, 빨강 머리."
테사이아가 느긋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나랑 야옹이는, 어딜 가든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금방 익숙해질 거야."
"넌 이제 마족이 아니다, 테사."
가라앉은 눈으로 테사이아를 내려다본 이안이 덧붙였다.
"귀쟁이 중에서도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원로 요정이지. 그러니 예의범절이라는 걸 배워 두는 게 좋을 거다."
"…그래야 할까?"
움찔댄 테사이아가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메브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문명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은 익혀 두도록 해. 여기 메브 리우렐 경이, 아주 좋은 선생님이 되어줄 거다."
"그래, 알았어. 이안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의자에 앉는 게, 그 시작점이 되겠군."
벌떡 일어선 테사이아가 이안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메브의 시선이 다시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괜찮겠느냐? 내가 아는 예법은 변방의 것이며, 그마저도 기사의 것인데."
"뭐든 지금보단 나을 테니 걱정 마시오. 애초에, 우리 중에 그런 걸 가르칠 사람은 경밖에 없잖소."
"흐음… 그렇다면…."
"루시라고 생각하시오. 아니, 루시보다 어리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군. 들어서 알겠지만, 겉모습과 달리 아는 게 별로 없거든."
"잘 부탁해, 스승님."
테사이아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메브의 눈빛이 묘하게 엄격해지는 사이, 필립이 넌지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떤 의미에선 제 사제가 생긴 셈이군요."
"꿈 깨, 주근깨. 내가 널 귀여워해 주는 거라면 모를까. 처음엔 내 눈도 못 마주친 주제에."
"그건 테사가…."
"내가, 뭐?"
"…아닙니다. 없던 일로 하죠."
"왜 말을 하다 말아? 귀는 또 왜 빨개지고. 뭔데?"
이 녀석 하나만 늘어났는데, 몇 배는 더 시끄러워진 기분이군.
둘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던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다시 마차의 창 밖으로 향했다.
어느새 글루미르시였다.
글루미르는 겉보기만큼이나 크고, 그나마 잘 정돈된 도시였다.
거리를 오가던 시민들이 걸음을 멈추고 마차를 바라보았다.
다소 생기 없이 퀭한 얼굴들을 바라보며, 이안은 문득 주마등 속의 여제를 떠올렸다.
'아무런 애정도 없다더니….'
본인은 스스로가 영토와 백성에 대한 애착을 잃었다 여겼지만, 정말 그런 건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정말 그랬다면 이들도 모두 죽여 저택의 양분으로 삼았을 테니까.
마법으로 도시 전체를 잠들게 하는 건, 이 암흑 시대의 마족 치고는 너무 미지근한 방식이었다.
물론 가만히 두었다면 다들 잠든채로 죽음을 맞이했겠지만….
'정작 부하들은 아예 인간성을 잃은 것들이 태반이었는데. 아이러니하군.'
문득 혼돈의 파편이 흐릿한 울림을 토해냈다. 가슴에 손을 얹은 이안의 눈썹이 슬쩍 말려 올라갔다.
어쩌면 진혈을 빨아들인 파편에, 여제의 사념이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제가 처음은 아닌데. 설마 죄다 조금씩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도시를 가로지른 마차가, 이윽고 내성 앞에서 멈췄다.
첨탑뿐 아니라 몇몇 벽면을 곡선으로 지은 데다, 지붕까지 얹어 대저택처럼 보이기도 하는 제국 양식의 성이었다.
활짝 열린 대문 앞에는 기사와 사제를 비롯한 성의 관리와 하인들이 전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가 멈춘 순간부터 살짝 고개를 숙인 그들의 얼굴에 저마다의 긴장이 묻어났다.
대부분은 자칫하며 이 자리에서 마족의 끄나풀로 몰려 목이 날아가리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 사이에는 정말 뱀파이어의 끄나풀이 섞여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이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투구를 눌러 쓴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내리며 말했다.
"먼저 내리겠다, 이안. 아무도 네 곁에는 접근하지 못하게 할 거야."
"여기서부터 나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더 위엄있어 보일 테니까요. 방으로 모실 테니, 편하게 따라오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인 필립이, 먼저 마차에서 내리고는 절도있는 움직임으로 마차 문을 잡았다.
테사이아가 이안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이안. 걸음이 너무 빠르면 말하고."
"…그 정도로 중환자는 아니야."
이런 과잉보호를 받게 되는 날이 다 오다니.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마차에서 내렸다.
대기 중이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영주를 맞이하기라도 하듯이.
#174화
"다들 회의실에 모이도록 조치해 두었습니다. 준비가 끝나면 나오십시오. 복도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일행을 안내한 오스릭이 깍듯하게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뒤이어, 메브와 필립이 문 앞에 섰다.
"식사하시면서 편히 쉬고 계십시오.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호위병을 문 앞에 세워 둘 테니, 염려 말고 쉬어라. 이안."
여전히 안면 가리개를 내린 채 말한 메브가, 필립과 함께 방을 나섰다.
이안은 방 한 가운데에 놓인 대형 식탁 앞에 대충 걸터 앉았다.
앉은 건 그뿐이었다. 샬롯과 테사이아는 여전히 앞에 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킬 일이 있다면 맡겨만 달라는 듯이.
…다들 정말 내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게 할 셈인 거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이곳 관리들에게 전리품을 정리해. 물물 교환도 괜찮고. 그 후엔 나가서 여정에 필요한 물자를 구비해라. 뭘 준비해야 할 지는, 알고 있겠지?"
샬롯이 곧바로 대답했다.
"말과 마차. 식량. 장비. 옷도 몇 벌 더 사야겠군. 따로 더 원하는 것이 있나?"
"마석을 구할 수 있다면, 소형으로 세공된 것도 몇 개 구해 와. 판별은 테사에게 맡기고."
"그러지. 빨리 끝내고 돌아오겠다. 그리고 염려 마라. 관리들에겐 가격을 후려치더라도, 주민들에겐 그러지 않을 테니."
"누가 뭐래? 다 등쳐먹고 와도 상관 없어."
씩 웃은 샬롯이 몸을 돌렸다.
왜 농담인 줄 아는 거지.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샬롯의 뒤로 냉큼 따라붙은 테사이아가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 이안."
샬롯이 나지막이 으르렁댔다.
"놀러 가는 거 아니니까, 표정 관리 잘 해라. 귀쟁아."
"너나 잘해, 짐승아. 난 그냥 무표정하게 서 있기만 할 거니까."
투닥댄 둘이 언제 그랬냐는 듯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하인들이 음식을 대령하기 시작했다.
식탁 가득 다양한 음식이 놓였다. 대부분 육류였고, 포도주가 담긴 술병도 대령됐다.
이안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한 채, 하인 하나가 물었다.
"더 필요하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술만 더 가져다주면 좋겠는데."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하인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악당이라도 된 기분이군.
소리 없이 코웃음을 치면서도, 이안은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은 상당히 훌륭했다.
겉모습만 제국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온갖 향신료와 양념을 아끼지 않았다. 포도주도 물을 거의 타지 않은 듯 맛과 향이 진했다. 아마도 가장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내온 것이리라.
'뱀파이어들이 이걸 먹진 않았을 테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더 신경을 쓰며 산 건가.'
하긴. 내성의 크기만 봐도 딸린 식구가 한둘이 아닐 터였다. 귀족과 관리들도 여럿 있었으리라. 그중에 몇이나 지금까지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안은 고기를 우물대며 널찍한 방을 눈에 담았다.
사용한 흔적도 없는 커다란 침대.
바닥에 깔린 곰과 사슴 가죽. 벽면마다 아른거리는 등잔불. 하나뿐인 커다란 창 옆에는 기다란 커튼까지 드리운 채였다.
식탁이 놓인 이곳은 일종의 응접실이었으리라.
잘 뒤져 보면 이 방의 주인이 마족이었다는 증거가 여럿 나오겠지만, 어쨌건 상당히 크고 화려한 공간이었다.
'크고 화려…?'
문득 곱씹은 이안이, 쥐고 있던 닭 날개를 접시에 툭 떨어뜨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봐야 음산하고 칙칙한. 현대인의 눈에는 감옥 같아 보이는 방에 불과하건만.
일행들에게 둘러싸인 덕에 잠시 잊고 지냈던 회의감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느새 자신이, 이 암흑 시대의 현지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적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무의미했다.
이 세계의 존재들에게 정을 주지 않으리라던 다짐도, 무색해진 지 오래였다.
머리로는 몇 번이나 테사이아가 죽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막상 그게 현실이 되자 오로지 살릴 생각만 했던 것처럼.
필립이 부상당하자 꼭지가 돌아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처럼.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무렇지 않게 떠넘긴 것조차, 사실은 그들을 그만큼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이제는 본래의 세상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저 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시발….'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현대인으로서의 그가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이 개 같은 세계를 벗어날 것이며 그때가 되면 이 세계의 인연들과도 작별할 것이란 생각 역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부서져 가는 세계에서 아득바득 목숨 건 사투를 이어나가는 게 아니라, 카드 명세서와 월세에 한숨 쉬며 월급날만 기다리던 삶이 여전히 더 그립고 소중했다.
적어도 아직은.
'하지만 만약 언젠가… 아니.'
다쳐서 그런가, 별 의미도 없는 생각을 다 하는군.
코웃음을 친 이안이 잔에 담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이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도, 지켜보기만 하면 죽게 되리란 사실에도 변함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그는 점점 더 심한 망캐가 되어가는 중이기까지 했다.
무엇이 더 소중한지 따위의 배부른 고민은,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남아 이 세계의 결말까지 보고 난 뒤에 다시 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애초에 그 빌어먹을 놈의 결말이란 걸 보고 나서도,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조차 없지만….'
지금은 그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 나갈 길을 생각하고 곱씹는 게 우선이었다.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 이제는 마냥 먼 얘기라고만 할 수는 없었으니까.
문득, 앞에 놓인 음식들이 투박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포도주 역시 향보다 시큼털털한 맛이 먼저 느껴졌다.
하지만 이안은 묵묵히 음식을 씹어 삼키고 술병을 기울였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나가는 게 최선일지를 생각하면서.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 오오."
그를 현실로 되돌린 건, 문을 열고 들어온 필립이었다.
처음엔 식탁에 놓인 음식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그는, 뒤이어 이안이 먹고 남긴 뼈 무더기에 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렇게 많이 드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제 스튜가 입에 맞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먹어야 빨리 회복하지."
심드렁하게 대답한 이안이 고기를 마저 입에 넣었다.
투구와 장갑을 벗은 메브와 필립이 식탁에 앉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은 잘 해결되었다."
운을 뗀 메브가 식은 빵을 집어 들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신분은 물론이고, 뱀파이어들에 대해서도 다들 순순히 납득하더군. 저 밖의 물증들뿐만 아니라, 다들 저마다 한 구석씩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랬겠지. 믿고 싶지 않았을 뿐."
"이제 더 우리를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겁니다, 나리. 다들 앞으로 할 일이 많아 보였거든요."
필립이 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덧붙였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일로 생긴 공백을 차지할 생각들이겠군."
"바로 그렇습니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제 귀에도 들리더군요."
왼팔을 고정한 붕대를 풀면서, 필립이 짧게 혀를 찼다. 미간을 슬쩍 찌푸린 건 어깨의 통증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국왕도 뱀파이어의 하수인이리라 추정하더군요. 왕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할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혹, 뱀파이어들 사이에 왕으로 보이는 자가 있었습니까?"
"글쎄. 있었어도 죽었겠지."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딱히 짐작이 가지는 않았다. 있었다 해도 별 볼 일 없는 뱀파이어였으리라. 허수아비 왕에게 많은 진혈을 하사할 리 없었다.
"그야 그렇겠군요. 어쨌든, 다들 내심 그러길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다 전선의 병력부터 먼저 손에 넣을 궁리를 하더군요. 그 후에 어쩌려는 건지는 뻔합니다. 병력과 사제를 앞세워 왕궁으로 향하고, 왕가를 조사한 뒤에 다음 왕을 옹립하겠죠. 저들은 왕국의 새로운 권력자가 되겠고요."
경멸스럽다는 듯 말한 필립이 포도주로 입을 축이고는 내뱉었다.
"우리가 며칠 내로 떠날 거라 말하고 나니, 다들 얼굴에 혈색이 돌더군요. 그리고는 더는 캐묻지도 않고, 편하게 머물다 가라고만 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 나리의 서명뿐이었던 거죠."
"뭐, 그럴 만하지. 우리가 나서서 권력 놀음이라도 하려 들면, 밥그릇을 빼앗길 테니까."
이안의 태연한 말에, 필립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한심하고 허탈할 따름입니다. 정말 목숨 걸고 싸운 건-"
"그런 말 말거라, 필립. 우리는 외지인일 뿐이니. 게다가 저들이 야심에 불타는 만큼, 나라의 혼란은 빠르게 가라앉을 거다. 나쁘게만 생각할 거 없어."
메브가 나지막이 말을 잘랐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도, 썩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비로소 술만 홀짝이기 시작한 이안이 덧붙인 건 그 직후였다.
"어차피 저들이 뭘 하건 큰 의미가 있지는 않을 거다. 사실, 루 사드는 전혀 구원받지 못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씹던 걸 멈춘 필립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아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었지요. 루 사드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기리라 보시는 겁니까?"
"루 사드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야. 변방 왕국들, 어쩌면 제국 변경까지도 영향을 받게 되겠지."
"제국까지도?"
메브가 가라앉은 눈으로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말했다.
"여제는 죽기 전에 저주를 풀었소. 세상에 또 하나의 균열을 새길 거라더군."
"...."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지."
메브와 필립의 입이 일순간 벌어졌다. 이윽고 필립이, 입에서 침이 튀는 것조차 신경 쓰지 못한 채 되물었다.
"이 일대에, 침식이 시작되기라도 할 거란 말씀이십니까?"
"정확히는 나도 몰라. 어쨌건,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 거다."
"마경이 더 많이, 더 빠르게 형성되거나…. 어쩌면 이 일대가 전부 흉지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군. 최악의 경우엔…."
읊조리듯 내뱉은 메브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균열을 뚫고 저 너머의 것들이 넘어오게 될지도 모르고."
"저 너머라면… 공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이 세상 너머에는 공허만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
"…그럼요?"
"세상의 틈새에서만 살아가는 괴물들도 있지. 나도 정확한 실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만. 공허에서 넘어오는 것들이 존재하듯, 틈을 뚫고 숨어드는 것들이 있을지도 몰라."
알아서들 잘 말하는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와 메브를 번갈아 바라보던 필립이 탄식했다.
"그럼 당장 전쟁부터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단 한 명의 백성이라도 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너도 이미 알 텐데."
술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메브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말을 이었다.
"전쟁을 멈추거나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식의 생각은 할 필요도 없어. 그건 영주들을 모조리 죽여도 불가능할 테니까."
"그야… 그렇겠습니다만…."
"전쟁이 계속되는 한 언젠가는 여제가 아니라도 일어나게 될 일이었다. 우리는,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면 돼."
"이런 혼돈과 비극을 바라는 자들. 바라는 걸 넘어 조장한 자들을 찾아내 단죄하는 걸 말하는 것이겠군."
메브가 빵을 접시 위에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필립이 무거운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그렇다면 결국, 본래대로-"
문이 벌컬 열린 건 그때였다.
"다녀왔어, 얘들- 어머. 다들 표정이 왜 그래?"
팔을 흔들며 성큼성큼 들어온 테사이아가 이내 눈을 깜빡였다.
필립이 입맛을 다시는 가운데, 테사이아를 지나친 샬롯이 빈자리에 앉으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다녀왔다, 이안."
"일은?"
"어느 정도는 정리됐다. 마차는 오늘 우리가 탔던 걸 받기로 했다. 그리고 말을 한 마리 더 샀다. 식량과 술도 준비해 준다더군. 내일 이후로는 언제든 떠날 수 있을 거야."
"훌륭하군."
"마석을 판매하는 상인은 없었지만, 대신 성의 창고에 소형 마석이 몇 개 있다더군. 두 개 정도 뜯어냈다. 돈을 아낀 만큼 장비를 더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 추가로 구매하러 갈 생각이야. 다들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말해라."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그저 그랬어. 난 정말 한마디도 못 했다고. 야옹이가 으르렁대면서 협박하는 소리만 줄창- 어머."
투덜대며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은 테사이아가, 이윽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거 맛있다. 이래서 다들 고기를 먹는 거였구나? 이안의 피 만큼은 아니지만. 굉장하네."
이어 그녀가 손으로 고기 한 덩어리를 더 집어 입에 가득 욱여넣었다. 입가에 양념이 잔뜩 묻은 건 덤이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메브가 식기 쓰는 법을 가르쳐야겠다고 중얼거리는 가운데, 풀썩 웃음 지은 필립이 덧붙였다.
"의외로군요. 요정은 고기를 즐기지 않는 줄 알았는데요. 술이라면 모를까."
"그래? 난 원래 피를 마셔서 그런가. 너무 맛있는데? 물론 이 술도 맛있고. 이게 포도주구나. 전에 마셨을 땐 구정물 같았는데."
"천천히 먹어라, 귀쟁아. 입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샬롯이 핀잔을 주면서도 테사이아의 잔에 포도주를 채워 주었다. 입가에 기름과 양념을 묻힌 테사이아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던 필립이 물었다.
"마족이었을 때의 피 맛과 지금 느끼는 고기 맛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비슷하게 느껴지나요? …아,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악의는 없었습니다."
샬롯의 시선을 받은 필립이 재빨리 덧붙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씹던 고기를 꿀떡 삼킨 테사이아가 말했다.
"맛있다는 건 비슷한데, 그 외엔 전혀 달라. 이쪽이 조금 더 다채롭네. 음, 어쨌든 난 좀 덜 익은 게 입에 맞는 것 같아. 촉촉해."
이것도 뱀파이어였던 영향인가?
이안은 게임의 요정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의 요정들도 고기를 아예 먹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다지 즐기지는 않았고, 대부분 빵이나 열매 따위를 더 좋아했다.
필립의 말대로 술을 가장 좋아하긴 했지만.
손바닥으로 입가에 묻은 것들을 훔친 테사이아가, 이윽고 눈을 빛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 야옹이 말로는 제국으로 간다던데. 맞아?"
다시 식사를 이어가던 메브와 필립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루 사드 남쪽 국경을 넘어서, 제국의 서부로 향할 거다."
"서부? 서부 어디?"
"말하면 아냐? 제국에 가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샬롯이 핀잔을 주는 가운데, 잠시 말을 멈춘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술을 마시며 샬롯과 테사이아를 번갈아 바라본 그가, 이윽고 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너희들은, 거기 도착하기 전에 떠나도록 해."
"...?!"
#175화
샬롯과 테사이아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메브와 필립도 하던 걸 멈추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떠나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이안?"
뒤이어 테사이아가 되물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다. 제국에 들어서고 나면, 떠나도록 해."
"왜…? 이제야 겨우 다시-읍."
테사이아의 입을 수인의 커다란 손이 막았다. 테사이아가 눈동자만 굴리는 가운데, 샬롯이 말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말을 하진 않겠지. 뭐냐? 다른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거야?"
"뭐… 이유야 여럿 있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테사이아를 바라보았다.
"네 의뢰는 끝났다, 테사. 더는 아무것도 네 목숨을 노리지 않아. 그러니 당장은, 굳이 계속 같이 다닐 필요도 없지."
"보수! 의뢰 보수를 받아야지!"
샬롯의 손을 억지로 밀어낸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그게 순서잖아. 의뢰에는 합당한 보수가 뒤따라야 하는 법이라며."
"보수를 받지 않겠단 말은 아니다만."
"엥…? 그럼?"
테사이아가 멍하니 되물었다. 이안이 술잔을 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이제 원로 요정이다, 테사. 하지만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게 된 건지는 아무도 모르지. 심지어 너 자신도. 게다가 무기를 다룰 줄도 모르고, 뱀파이어의 권능도 잃었지. 그러니 지금의 넌, 그저 더 빠르고 감이 좋은 요정일 뿐이야."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야?"
"어떤 의미에선. 당장은."
내뱉은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테사이아가 충격받은 얼굴로 굳어진 가운데, 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너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테사. 하지만 그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지. 같은 귀쟁이들이라면 모를까."
"...!"
"그래서 떠나라는 거다. 제국 남부로 가. 그래서 요정들을 만나라. 듣자 하니 거기엔 어린 생명수도 몇 그루 있다더군. 거기서 네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네 능력을 일깨워.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원로 요정이 돼라."
"…기억도 되찾고?"
테사이아가 조금은 달라진 눈빛으로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그러고도 달라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것도 노력해 보던가."
"달라지다니?"
"모든 기억이 돌아온 네가, 지금의 너와 같은 존재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전형적인 귀쟁이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거군. 하긴, 그럴 수도 있겠어."
중얼댄 샬롯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이 녀석이 이 모양인 건, 기억이 없어서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기억이 없는 지금의 내가 더 좋단 거지?"
해 본 적 없는 생각이라는 듯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되물었다.
이안과 샬롯은 그저 어깨만 까딱였다.
테사이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너희들은… 정말이지…."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충격이나 서운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다른 여러 종류의 감정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전부 헤아릴 순 없었지만, 이안이 보기엔 하나같이 낯간지러운 종류의 것들이었다.
"알았어. 기억은 굳이 찾으려고 애쓰지 않을게. 애초에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닐 거야. 그게 아니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을 리가 있겠어? 그래도… 어쨌든… 고마워, 얘들아. 그렇게 말해줘서."
…못 들어 주겠군.
슬쩍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내뱉었다.
"날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되니까. 그러니 가능하다면 요정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아. 쉽진 않겠지만,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을 거다. 기억이 없다 해도, 넌 엄연한 원로니까."
"알았어. 해 볼게."
"다시 말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다. 귀쟁이는 못 믿을 족속들이니까."
"어려워도 상관없어."
단호하게 내뱉은 테사이아가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해낼게. 이안. 그래서 쓸모 있는 귀쟁이가 되어서 돌아올게."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지 않아도 돼. 오히려 거기 쭉 눌러앉아 있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나뿐만 아니라 샬롯에게도."
"…야옹이는, 왜?"
테사이아의 고개가 기울어지는 가운데, 샬롯이 눈이 번쩍 뜨인 듯한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주황색 눈을 마주 보면서, 이안이 말을 이었다.
"전에 들은 말이 있어. 이대로면 머지않아, 요정들이 교단을 앞세워 수인들을 멸망시킬 거다. 전부 죽이지는 않더라도, 노예로 만들어 부리게 될지도 모르지."
"...!"
테사이아가 눈을 치켜뜨며 샬롯을 돌아보았다. 메브와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런 얘길 왜 안 했어?"
샬롯이 테사이아의 시선을 슬며시 피하며 내뱉었다.
"확실하지 않으니까. 그저, 귀쟁이 한 놈이 한 말일 뿐이야."
"그때 그놈을 말하는 거군. 핀드렐 아이나스."
눈을 가늘게 뜬 메브가 말했다.
샬롯이 낮게 가르릉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기분이 되살아 난 모양이었다.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말했다.
"샬롯은 너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이번엔 네가 저 녀석을 도와."
"...."
테사이아의 눈동자가 짙은 녹색으로 가라앉았다. 샬롯이 무표정하게 입을 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 녀석의 도움까진 받지 않아도 된다, 이안. 내가 이 녀석을 구하려고 한 건, 내 목숨을 여러 번 구한 빚을 갚기 위해서였을 뿐이야."
"네 종족이 걸린 일이야. 자존심이나 철칙 따윈 넣어 둬라."
딱 잘라 말한 이안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이번 일이 끝난 뒤에 다시 말하기로 한 얘기가 있었지. 그걸 지금 하겠다."
샬롯의 눈이 순간 커졌다.
이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까지 네 역할을 충분히 해 줬다. 강제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걸 떠나서도 언제나 기대 이상의 능력을 보여 줬지. 내 목숨을 노렸던 빚은, 이미 한참 전에 다 갚았다."
"...."
"그러니 이 녀석과 함께 가라. 가는 동안 남부에 대해서도 알려 줘. 거긴 네가 가장 잘 아니까. 그리고 그 후엔, 네 일족을 구해."
잠시 말을 멈춘 이안이 샬롯과 테사이아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너희 둘은 종족 간의 원한을 극복하고 친구가 됐지. 서로를 여러 번 구했어. 이번에도 다를 건 없다. 서로가 서로의 목표를 이루는 데에 도움을 주면 돼. 물론, 그게 나한테도 도움이 될 거고."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달싹이던 샬롯이, 이윽고 간신히 내뱉었다.
"…내가 일족을 구하는 게, 네게도 도움이 될 일 같지는 않다만."
"그건 모를 일이지. 내가 남부에 가게 될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남부로 올 거야, 이안?"
테사이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듯이, 어쩌면."
"그래. 그래서 쭉 눌러앉아 있으라고 한 거구나…. 알았어. 그러면 거기서 기다릴게.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댄 테사이아가, 이윽고 묘한 미소를 지으며 샬롯을 돌아보았다.
"결국, 우린 또 한 몸인 거네. 샬롯."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징그러우니까."
이안과 테사이아의 시선을 피하며 내뱉은 샬롯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그녀가 입에 가져간 술잔을 아주 천천히 기울였다. 머릿속에 오가는 여러 생각과 감상들을 정리할 시간을 벌려는 듯이.
그들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필립이, 이윽고 이안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역시, 나리는 대단하십니다."
"그래. 그야말로… 고결하군."
메브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질색하듯 한쪽 얼굴을 찌푸린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날 위해서 하는 말들이오. 이 녀석들이 그러는 게 나한테 도움이 되니까. 그러니 쓸데없는 오해들 하지 마시오."
빈말이 아니었다.
제국 남부는, 게임에선 DLC에 포함된 추가 지역 중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이안에겐 미지의 영역이기도 했다.
그때의 그는 메인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생각뿐이어서, 진행에 필수적이지 않은 지역은 뒷전으로 미뤄 뒀었다.
사실, 거의 모든 DLC가 그랬다.
심지어 더 이상 스토리를 진행하지 못하게 됐을 때는, DLC 지역들로 넘어갈 방법도 사라진 상태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터였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남부에 발을 들이는 때가 오게 되리라.
그리고 그때 샬롯과 테사이아가 그곳에 있다면, 분명 그가 그 미지의 영역을 헤쳐나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어 줄 터였다.
'그게 게임에서도 있었던 상황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흡혈 여제와 싸우면서 확실해진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가 게임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을 만들어 내더라도,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난다는 것.
물론 전혀 예상치 못한 나비 효과가 더해질 위험성이 있긴 했지만. 게임의 흐름을 의식해 선택을 주저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수인족에 대해서 말했다는 귀쟁이는 누구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메브와 필립이 묘한 미소를 짓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불쑥 물었다.
이안은 선선히 아공간에 손을 넣어, 꽃 모양의 은 브로치를 꺼내 들었다.
"아이나스라더군. 꽤 이름 있는 가문 같았다. 이게 그놈들의 문장이고."
"흐음…. 아이나스. 그래. 기억해 둘게."
"이놈들이 우리 뒤를 추적해 올지도 몰라. 아마 나와 샬롯을 죽이려 들겠지. 그런 상황이 온다면-"
"죽여 버려. 누구든."
테사이아가 단호하게 뒷말을 가로챘다.
이안의 시선에, 그녀가 싱긋 입술을 말아 올렸다.
뱀파이어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미소였다.
"난 귀쟁이보다 너희가 더 중요해. 그것들은 동족에 불과하지만, 너희는 가족이니까. 인간들도 그렇잖아? 가족을 건드리는 것들은, 죽어도 싸."
짧게 웃음 지은 이안이 술잔을 들며 덧붙였다.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하는군."
"뭐 어때. 없는 얘기도 아닌데."
"다음부턴 그냥 속으로만 해."
"그냥 할래. 네 반응이 재밌거든."
"...."
"네 뜻은 잘 알았다. 이안."
샬롯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잔을 내려놓고 이안을 똑바로 마주 본 그녀가 덧붙였다.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군. 하지만, 제국에 들어서자마자 떠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없다고?"
"그래. 네가 그리 말해주었다 해도, 나는 아직 네게 빚이 남아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건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지."
샬롯이 시선을 돌려 메브와 필립을 바라보았다.
"너와 달리 이들에겐,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빚을 갚을 기회가 없을 수도 있어. 어쩌면, 남부를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메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홀짝댔고, 필립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기를 입에 가져갔다.
샬롯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까, 이들이 쫓는 타락자를 잡아 죽일 때까진 함께하게 해 다오, 이안. 그 후에는 네 명령대로 남부로 떠나겠다."
"…부탁."
이윽고 내뱉은 이안이, 잔을 쥐고는 덧붙였다.
"이번 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다."
"…그래, 부탁."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건 샬롯이, 잔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 앞으로 기다렸다는 듯 잔을 내민 건 필립이었다. 그가 샬롯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고맙습니다, 샬롯. 계속 함께해 주신다니 든든하군요."
"동감이다. 대가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너처럼 뛰어난 전사의 도움을 사양할 수는 없지."
메브도 잔을 들면서 덧붙였다.
일행의 행동을 지켜보던 테사이아도 냉큼 잔을 들었다.
"그럼 나도 너희한테 빚을 갚는 거로 할게. 어쨌거나, 내 의뢰에 목숨 걸고 나서 준 거니까."
"확실히, 당신은 다른 요정들과는 좀 다른 구석이 있군요. 테사."
필립이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곧 일행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안에게로 모였다.
"…다들 왜 이렇게 장단이 잘 맞는 건지 모르겠군."
이윽고 헛웃음을 지은 이안도 잔을 내밀었다. 서로의 잔을 부딪친 일행이 동시에 잔을 비웠다.
"말이 나온 김에, 아까 못 다 한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좋겠군요."
입가의 술을 소매로 닦으며, 필립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언제 떠나는 게 좋을까요? 나리."
잔에 새 술을 따른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장비를 전부 보급하려면 며칠이나 필요하지?"
#176화
샬롯이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얼마나 필요해질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지간한 건 하루면 구할 수 있을 거다. 병기고에 물건이 제법 있어 보이더군. 도시의 대장간에도. 관리를 적당히 구슬리면 구매할 수 있을 거야."
"최면이 딱인데, 이젠 쓸 수가 없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번 시도나 해 볼까?"
테사이아가 끼어들었다.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괜한 짓 하지 마라. 그냥 돈으로 사. 경, 내일 샬롯과 함께 장비를 구매해 주시오."
"그러지."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병을 받아 드는 사이, 필립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설마, 모레 바로 떠나려는 건 아니시겠죠? 나리께서 요양하시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요양은 무슨.
피식한 이안이 붕대를 칭칭 감아 팔을 고정해 둔 그의 어깨를 턱짓했다.
"나보단 네 걱정이나 해라. 그 상태론 칼도 못 휘둘러."
"전 거뜬합니다. 성물의 가호를 받고 있으니까요. 상처가 깊긴 했습니다만 덧나는 일 없이 아물고 있고, 후유증도 없을 겁니다."
"센 척만 늘어선…. 경은 어떻소?"
"나는 네 뜻에 따르겠다. 언제라도 상관 없다."
"준비는 우리 셋이 해도 충분하니까, 너희 둘은 휴식에만 전념하면 좋겠군."
메브에 이어 샬롯이 덧붙였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필립이 단호하게 내뱉었다.
"종자인 제가 굳은 일에 빠질 수는 없죠. 쉬시는 건 이안 나리만으로 충분합니다."
"글쎄…. 지금 네 꼴로 봐선 별 도움 안 될 것 같은데. 주근깨."
테사이아의 직설적인 말에, 이미 발그레하던 필립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곧 그가 힘을 쓰지 않고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흥정이나 협박 따위였다.
일행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저마다 다음 여정을 위해 준비해야 할 물품들에 대해 떠들어 댔다.
이안은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주먹만 쥐락펴락했다.
아직 몸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통증은 적었지만, 부러지고 금 간 뼈가 간신히 이어 붙은 정도일 터였다.
어쩌면 타락용에게 죽다 살아난 때보다 회복할 시간이 며칠은 더 필요할지도 몰랐다.
하긴. 이번에는 회복을 도와줄 용의 마력이 없었다.
'이것도 충분히 괴물 같은 회복력인데. 사람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군.'
피식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럼, 모레 아침에 떠나는 거로 하지."
필립이 홱 그를 돌아보았다.
"정말 그렇게 빨리요? 겨우 하루만 더 쉬시겠단 말씀이잖습니까!"
"혹시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이안. 부족에 남은 시간은 그리 촉박하지 않아."
샬롯이 뒤이어 덧붙였다. 고개를 저은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이동하면서 쉬면 돼. 대신 여기 머무는 동안엔 꼼짝도 하지 않을 거니까, 내가 나설 일 없게 확실히 준비해."
"…그래. 그러지."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브도 자기만 믿으라는 듯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러시다면야 어쩔 수 없죠, 하고 중얼댄 필립이 이내 일행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미소 지었다.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군요. 저와 우리 나리 둘이서만 타락자를 추적하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용을 죽인 북부의 초인에, 눈을 가리고도 뱀파이어를 죽일 만큼 뛰어난 수인 전사. 거기다 한때는 마족이었던 원로 요정까지 함께 해주시게 됐으니 말입니다. 이 여정의 끝에 얼마나 대단한 타락자가 기다리건, 아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듭니다."
술잔을 든 그가 취기 어린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래 봐야 개인에 불과할 자가, 흡혈 일족 전체만큼 강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메브와 샬롯, 테사이아가 동의하듯 술잔을 들었다. 이안이 중얼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 자리에 미구엘이 없어서 다행이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놈이 있었다면, 네가 하면 안 될 말만 줄줄이 골라서 읊는다고 난리를 쳤을 테니까.
속으로만 읊조린 이안이,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들었다.
"술이나 마셔라."
굳이 분위기를 망칠 말을 다 내뱉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잔에 담긴 포도주를 단숨에 전부 마신 테사이아가, 텅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은 건 바로 그때였다.
"그래서, 대체 제국 서부 어디로 가는 건데? 타락자는 또 뭐고."
"그러고 보니, 테사는 아직도 모르시겠군요. 흠… 어디서부터 말씀 드려야 할지."
"처음부터 전부."
"그럴까요? 좋습니다, 어차피 밤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너도 한 번씩 마음에 드는 소릴 하네, 주근깨."
웃음 지은 필립이 술을 들이켜고, 테사이아가 능숙하게 자신의 술잔을 채웠다. 메브와 샬롯도 연신 술을 홀짝이며, 시작된 필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술꾼들만 모였군.
이안은 소리 없이 웃음 지으며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왁자지껄한 대화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늦은 밤, 접시와 술병이 남김 없이 비워질 때까지.
***
예고대로, 이안은 방을 떠나는 일 없이 휴식에 전념했다.
아침부터 육류 위주의 식사를 배불리 하고, 그 외의 시간은 전부 침대에서 보냈다.
물론 일행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필립은 물론이고 테사이아까지 그랬다. 심지어 흥정에 꽤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무표정하게 빤히 응시하고 있으면, 다들 귀족에게 추궁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초조해한다는 것이다.
아마 원로 요정으로 거듭나면서, 특유의 이질적이고 고고한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진 덕분이리라.
"제가 얘기할 때는 콧방귀만 뀌던 상인들이 알아서 물건 값을 깎아줍니다. 이젠 슬슬 화가 날 지경이군요."
잠결에 이런 필립의 투덜대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칠 정도였다.
"샬롯도 이런 기분이셨습니까?"
"아니. 나는 그럴 때 손톱이나 이빨을 보여준다. 그러면 거기서 숫자가 조금 더 줄어들지."
"...."
"아무래도 넌 흥정에는 재주가 없는 것 같군, 필립."
"아니… 그런 걸 흥정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넌 말과 마차의 점검에만 신경 써. 힘쓰는 일도 하지 마라. 어깨의 상처가 터질지도 모르니까."
"…예."
때때로 방에 돌아오는 일행의 대화를 귀에 담으면서도, 이안은 잠에 취한 하루를 보냈다.
일행은 정말 단 한 번도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밤에도 바닥에 깔린 가죽 위에 저마다 흩어져 누워 잠을 청했고, 침대를 양보하려는 이안의 말은 아무도 듣지 않았다.
이안이 침대를 벗어나기 시작한 건 다음 날 오전 부터였다.
도시가 이른 아침부터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포도주가 담긴 술잔을 든 이안이 창가에 나른하게 기대 섰다.
일행이 머무는 방은 성의 가장 높은 층, 가장 깊은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내성의 정문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도시의 전경은 비스듬하게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안의 시선은 크고 작은 건물들 너머, 막 성문을 통과하는 일련의 무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도시를 빠져 나가는 건 오스릭 경이 지휘하는 병사들입니다. 국경의 펠미르로 가서, 성의 지휘권을 장악할 계획이라더군요.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요. 현 지휘관들은 흡혈 일족의 끄나풀이라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요."
어떻게 알았는지, 뒤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메브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그가, 이안에게 다가오며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새 영주인 벨란 자작은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진작 떠났습니다. 도노반 주교님을 대동하고 수도로 간다더군요. 거기서 왕가와 도시의 혼란을 잠재운다는 명목으로 실권을 잡을 생각이겠죠. 더불어 새 작위도 받고 말입니다."
걸음을 멈춘 그가 짧게 혀를 찼다.
"다들, 영지를 손에 넣을 생각에 눈이 벌개진 모양입니다."
"명분도 충분하고 시간 싸움이나 다름 없는 문제이니 서두르는 건 이해가 간다만…."
읊조리며 이안의 곁에 선 메브가, 하늘을 덮은 먹구름만큼이나 칙칙한 도시의 전경을 훑으며 덧붙였다.
"병력을 너무 많이 차출했다. 덕분에 글루미르는 지금 무방비나 다름 없어. 본래도 병력이 그리 많지는 않아 보였거늘…."
"그게 다 우리 덕분 아니겠습니까. 애초부터 전선에서 동떨어진 지역인데, 이젠 근방에 마물도 없으니까요. 이미 어제부터 성문을 활짝 열어두고 사람들을 받더군요. 이곳은 안전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겠죠."
"…어쨌든, 우리는 이제 안중에도 없단 거군."
심드렁하게 내뱉은 이안이 술을 홀짝였다. 필립이 어깨를 으쓱였다.
"떠날 준비까지 바쁘게 하고 있으니 더 그럴 겁니다. 사실, 우리가 여기 눌러 앉는다고 해도 막을 명분도 없고요. 엄연히 루 사드의 구원자들 아니겠습니까? 새 영주가 서둘러 떠난 건 그래서일지도 모릅니다."
필립이 묘한 눈빛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나리가 마음을 바꾸시기라도 하면, 글루미르를 내어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러길 바라는 말투로군."
"그럴리가요. 나리가 고작 이런 영지 하나를 다스릴 인물은 아니시죠. 나라 하나라면 모를까."
나라도 줘도 안 가지거든? 차라리 스킬 포인트 하나가 더 좋지.
짧게 실소한 이안이 무관심한 눈길로 도시를 훑으며 내뱉었다.
"떠날 준비는?"
"거의 다 끝났습니다. 우리가 도시에 들어올 때 탔던 제국제 마차를 타고 떠날 겁니다. 말도 세 마리 준비해서, 먹이를 든든하게 먹여주고 있고요. 옷과 식량도 충분히 구비해 뒀습니다. 보다시피, 급한 대로 새 장비도 구했고요."
필립이 멀쩡한 오른팔을 옆으로 펼쳐 보였다. 한쪽 견갑이나 팔목 보호대 따위가 전부 새로 산 물건이었다.
그 와중에도 방주 상단에서 구매한 물건 중 멀쩡한 것들은 짝이 안 맞아도 그대로 쓰고 있어서, 성기사의 종자 보다는 베테랑 용병 같아 보였다.
"그래. 알아서 잘 했겠지."
이안이 술을 홀짝이며 대답하는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묵직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각종 장비들을 품에 안은 샬롯과 테사이아였다.
식탁 위에 장비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많이도 샀군."
"다 네 거다, 이안."
이어진 샬롯의 말에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나 혼자 쓰기엔 많아 보이는데."
"쓸만해 보이는 건 다 들고 왔다. 물건 보는 안목은 네가 가장 좋으니까, 골라서 선택할 수 있게."
"걱정 마. 남은 건 가지고 가면 돈을 다시 돌려 받기로 했으니까. 물론 그건 야옹이가 할 거고."
테사이아가 물건들을 짝을 맞춰 늘어 놓으며 덧붙였다.
무슨 맞춤 서비스인가.
비로소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흡혈 일족과의 전투 이후로, 그는 사실상 장비를 전부 새로 맞춰야 했다.
"이거. 이거. 이거. 그리고-"
이안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툭툭 건드려 보고는 어렵지 않게 필요한 것들을 분류했다.
아쉽게도 대부분은 전에 쓰던 것보다 성능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좋은 장비라도 결국은 소모품이었다. 성물에 가까운 단죄의 검조차 반 토막이 나버리지 않았던가.
"좋아. 끝이네."
이안이 선택할 때마다 휙휙 장비들을 침대 옆에 옮겨 놓은 테사이아가, 손을 탁탁 털며 미소 지었다.
"남은 건 야옹이가 돌려주러 가고, 난 이제 뒷마당으로 나갈 거야. 빨강 머리가 검술을 알려 주기로 했거든."
"검술을…?"
이안은 새삼 테사이아를 눈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각종 가죽 방어구들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심지어 옆구리에는 그럴싸한 장검도 한 자루 끼워둔 채였다.
활동성을 중시한 복장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어엿한 요정 전사가 따로 없었다.
원로는 마법사인 것 같던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사라고 검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가 그렇듯이.
"염려 마라, 이안. 다치거나 사고가 생길 일은 없게 할 테니."
메브가 덧붙였다. 짧게 웃은 이안이 잔을 내려놓았다.
"날 두들겨 패던 때처럼만 하지 마시오. 저 녀석 성격에, 그러면 정말 죽자고 달려들지도 모르니까."
"그럼 그만큼 배움이 빨라지겠군."
그러시겠지.
이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침대로 향했다.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을 때 억지로라도 더 자둘 필요가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덜컹대는 마차나 말 안장 위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할 테고, 모닥불에 의지해 잠들고 이슬을 맞으며 깨어나는 생활이 반복될 테니까.
일행들이 조용히 방을 빠져 나가기 시작한 가운데. 맨 뒤에 선 필립이, 침대에 누운 이안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모든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나리는 맘 편히 쉬기만 하십시오. 우리는 내일, 무탈하게 글루미르를 떠나게 될 겁니다."
***
'…무탈은 개뿔.'
이안이 생각과 함께 눈을 뜬 건 늦은 새벽이었다.
어두운 천장을 응시하는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염된 마력의 파장이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순간에 갑자기 나타났고, 심지어 그리 멀지도 않았다.
신경이 곤두서는 가운데, 귓가로 아주 희미한 소리가 파고들었다.
두꺼운 판자를 부수는 듯한 소리. 이어진 짧은 비명.
…대문을 부수고 들어온 건가.
이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
"...."
이미 눈을 뜨고 있던 테사이아와 상반신을 일으킨 메브. 그리고 샬롯까지 연달아 일어나 서로를 한차례 돌아보았다.
철컥, 촤르륵-
그리고 곧,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마다의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대화는 한 마디도 필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