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멍하니 그를 응시하던 메브와 필립이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그들이 마차에서 말을 분리하려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샬롯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다가오던 기수들이 언덕 중턱에서 도열 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겠나?"
마력이 실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다란 미늘창을 움켜쥔 뱀파이어 기사의 목소리였다. 하수인 기병들이 죽 늘어서는 가운데, 그는 언덕 꼭대기 바로 아래에 홀로 서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궐련을 끼운 이안이, 연기를 뿜으며 대답했다.
"셔피로 백작?"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백작의 귀에는 충분히 들어간 모양이었다. 낮은 웃음이 번졌다.
"기다리고 있었다. 용살자."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는데."
백작이 투구를 벗었다. 아들인 워렌과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붉은 눈으로 이안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내가 직접 여제께 간청하였다. 군단의 첨단에서, 가장 먼저 용살자를 맞이하게 해 달라고. 명예롭게 복수할 기회를 달라고."
"그 새끼가 기사 흉내를 누구한테 배웠나 했더니…."
코웃음 친 이안이 다시 궐련을 입에 물었다. 마차 쪽의 소란이 잦아드는 것을 느낀 그가, 고삐를 집어 들며 미소 지었다.
"그런 얘긴, 네 아들에게 가서 해라. 곧 다시 만나게 해줄 테니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삐를 후려쳤다. 말이 발작하듯 내달렸다. 백작이 이를 갈며 투구를 눌러쓰는 가운데,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하수인 기병들이 일제히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말의 숨소리에 공포가 서렸지만, 이안은 오히려 고삐를 더 후려쳐 속도를 높였다. 이런 것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솨아아-
투구 아래, 이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들었다. 전신에 바람이 맺히고 말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전열의 기병들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놈들은 손에 든 장창을 내뻗은 채 망설임 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저들의 창날이 먼저 그에게 닿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쒸하악-!
이안은 허리를 꺾어 말머리를 옆으로 돌리면서, 양손으로 움켜쥔 대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말이 휘청대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바람 칼날이 검신을 타고 뿜어져 나가고, 붉은 신성력이 섞인 궤적이 창날보다 먼저 기병들을 휩쓸었다.
콰지지직-!
궤적은 말과 기수를 가리지 않고 걸리는 모든 걸 찢어발겼다.
잘려나간 말의 머리와 사슬 갑옷째로 찢긴 기수들의 상반신이 검은 피를 흩뿌리며 치솟았다.
몸이 토막 나고도 죽지 않은 기수들의 얼굴에 경악과 고통이 뒤엉켰다.
이안은 이미 놈들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가랑이로 안장을 꽉 붙잡은 채, 내뻗었던 팔을 치켜들어 이번에는 사선으로 내리쳤다.
콰드드득-!
남아 있던 바람 칼날이 붉은 신성을 머금고 남김없이 뿜어져 나갔다. 허물어지는 기병들을 뛰어넘던 하수인들이 허공에서 그대로 찢겨 나갔다.
"저, 저런 미친…?"
"아아악-!"
썩은 피와 토막 난 살점. 욕설과 비명이 사방에 가득해졌다. 달려드는 기병들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단 두 번의 참격이 만들어냈다기엔 너무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물러나는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카가가각!
또 한 번의 붉은 궤적이 그 옆의 기수들을 휩쓸었다.
아무리 투쟁의 축복을 받았다곤 해도, 군단장의 대검을 보통 장검처럼 섬세하게 다루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기교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찢어발길 생각으로 휘두르기만 하면 충분했다.
물론 그건 이안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였다.
푸화악-
아슬아슬하게 휘청대던 말이 끝내 고꾸라졌다.
미안하다.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안장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고꾸라지던 말이 땅에 처박히고, 그의 몸이 둔중한 포물선을 그리며 솟구쳤다.
달려들던 하수인 기병들이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대검을 치켜들면서, 이안은 저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홀로 선 백작의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투구 사이로 일렁이는 안광에서 당황이 전해졌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결국 인간이며, 용살자의 명성에는 여러모로 과장이 섞여 있으리라 여겼을 테니까.
놈에게 보란 듯 웃어 보인 이안이, 다시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기병들이 창을 치켜들어 그를 겨누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냉정을 잃지 않은 그의 이성은, 저 한복판으로 떨어지는 건 무모할 수도 있다고 속삭였다. 하지만 심장에 가득한 열기는, 당장 달려들라는 듯 더 거세게 타올랐다.
대검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오오오오오-!"
열기를 토해내듯 포효한 이안이, 대검을 내리치며 떨어져 내렸다.
***
"아니… 저런 말도 안 되는…."
허공을 가른 붉은 궤적을 바라보며, 필립이 멍하니 중얼댔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사람 키만 한 대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러 대는 것도. 저렇게 높이 솟구친 것도. 적들 한복판에 대검을 내리찍으며 떨어져 내린 것까지.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정신 차려라. 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야."
뒤에서 이어진 샬롯의 핀잔에, 필립이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그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적들이 가까웠다.
"준비하십시오!"
소리치며 필립이 고삐를 고쳐 쥐었다. 승객을 둘이나 태운 탓에 말이 숨을 헐떡였지만, 이안의 뒤를 따라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수인 기병들은 그들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죄다 이안에게 완전히 관심을 빼앗긴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붉은 신성력을 전신에 두른 채 대검을 휘둘러대는 그의 존재감은 독보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마 본인도 그걸 의도하고 있으리라.
덕분에 일행은 별다른 방해 없이 적들의 후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나리!"
검을 고쳐 쥔 필립이 소리쳤다. 샬롯이 말의 등 위로 비스듬하게 일어섰다. 언덕길인 데다 전력으로 질주하는 중임에도, 그녀는 하반신의 움직임만으로 안정적으로 균형을 잡았다. 그녀가 양손에 쥔 검을 어깨 옆으로 드리울 찰나.
솨아아-
필립이 내뻗은 검이 빛났다. 뒤이어 내달리는 말의 앞으로 눈부신 황금빛 장막이 피어올랐다.
장막이 그대로 하수인 기병 하나와 맞부딪쳤다.
"아아악-"
말과 함께 불이 붙듯 타들어 간 기수가 비명을 터뜨렸다. 그마저도 필립의 말이 부딪치면서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샬롯이 말 등을 박차고 가볍게 뛰어오른 건 그 직후였다. 가속이 더해진 검은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콰직!
샬롯이 기수의 양쪽 어깨에 검을 내리찍으며 착지했다. 꿰뚫린 기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축 늘어졌다.
그대로 검을 뽑은 그녀가 묘기를 부리듯 뛰어오르는 사이. 필립도 신성력이 맺힌 검을 찔러 넣으며 따라붙었다.
뒤를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서걱-!
기다란 양손 검을 쥔 메브가 기수들의 목을 날려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수들은 머리가 잘려도 죽지 않았지만, 적어도 전투력을 상실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퍼석! 콰직-!
그들이 순식간에 기병들의 후미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안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놈들이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시발…!"
"흩어져서 포위해! 흩어져!"
몇몇은 달려들고 몇몇은 좌우로 흩어져 간격을 벌렸다. 메브와 필립은 굳이 멀어지는 것들을 따라가지 않고, 길을 여는 데에만 주력했다.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안을 따라잡는 데에 있었다.
물론, 그게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리! 보입니다!"
날아드는 창을 방패로 쳐 내거나 피하며 기병들을 찔러 죽이던 필립이 이윽고 소리쳤다.
기병들에 가려져 있던 붉은 궤적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본 메브의 입에서 탄식이 번졌다.
"어느새 저기까지…?"
이안은 벌써 언덕 중턱을 지나치고 있었다. 일직선으로 멈추지 않고 달렸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속도였다.
게다가 어떻게 한 건지, 기병들이 탄 것과 같은 죽은 말을 타고 있었다. 신성력이 말을 조금씩 태우고 있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수인 기병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되어서도 악착같이 그의 앞을 막으려 했다.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그들은 이안이 휘두르는 대검을 단 한 번도 견뎌내지 못했다.
곧 신성력을 버티지 못한 말이 허물어지고, 대검을 치켜든 이안이 미련 없이 몸을 날렸다.
콰지직-!
앞을 가로막던 기병 하나가 말과 함께 반으로 찢겨 나갔다.
대검 날을 땅에 찍으며 착지한 이안이, 전신에 검은 피를 뒤집어썼다.
"루 솔라 맙소사…."
필립이 중얼댔다.
이야기로나 들었던 북부의 초인이 저기에 있었다. 지금 대검을 뽑아 들며 일어서는 저 이안은, 그가 알던 이안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안이 검을 옆으로 늘어뜨리며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와 셔피로 백작 사이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쒸엑-
파공음이 귀를 파고든 건 그때였다. 눈을 치켜뜬 필립이 방패를 들려는 찰나.
콰직!
불현듯 솟구친 검은 궤적이 기수의 머리통에 검을 내리찍었다. 샬롯이었다. 곧바로 왼손의 은검으로 놈의 목을 날려 버린 그녀가 내뱉었다.
"한눈팔지 말라고 했을 텐데."
기수의 몸을 집어 던진 그녀가 안장에 앉았다. 죽은 말은 반항하지 않고 내달렸다. 안장에 앉은 이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보는 모양이었다.
"가자! 필립!"
메브의 외침이 이어졌다. 전신에 검은 피를 뒤집어쓴 그녀가 양손검을 고쳐 쥐며 앞서 나갔다.
앞을 가로막는 기병들이 속속들이 쓰러졌다. 하수인에 불과한 것들은,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용살자-!"
마력이 실린 쩌렁쩌렁한 일갈이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전신에 두른 새카만 연기를 흩날리며 셔피로 백작이 돌진하고 있었다.
그를 향해 마주 달려가는 붉은 궤적은, 물론 이안이었다. 맨몸으로 돌진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질주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백작이 미늘창을 내뻗었다. 이안은 피하지 않고 대검을 올려쳤다. 거대한 붉은 궤적이 대기를 찢었다.
궤적은 날아드는 창과 그 너머의 말까지 동시에 휩쓸고 지나갔다.
목 어름부터 마갑 채로 잘려나간 말이 허물어지고, 백작이 함께 나뒹굴었다.
바닥을 구르며 속도를 줄인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백작의 분노에 찬 포효가 뒤를 이었다.
"이 노오오오옴!"
동시에 새카만 연기가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 나갔다.
하수인 기병들의 눈과 입에서도 검은 연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탄 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교전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틈틈이 이안을 눈에 담던 필립이, 뒤늦게 탄식을 흘렸다.
"크… 르륵…!"
거리를 유지하며 빈틈을 노리던 기병들이 숨소리를 흘리며 일제히 그들을 돌아보았으니까.
"대열을 지켜라, 필립!"
차분하게 외친 메브가 검을 치켜들었다. 하수인 기병들이 짐승 같은 울부짖음을 토해내며 달려들기 시작한 가운데.
"빨리 끝내주십시오, 나리…!"
필립의 검이 신성력을 머금고 빛나기 시작했다.
***
"용서하지… 않겠다…!"
검을 뽑아 든 백작이 내뱉었다.
그는 새카만 안개에 완전히 뒤덮여, 그림자로 만들어진 괴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부자가 하는 짓이 똑같네.
생각하며, 이안은 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늘어뜨린 대검이 밭을 갈듯 땅을 뒤엎으며 흙먼지를 흩뿌렸다.
"내 모든 힘을…!"
내뱉은 백작이 연달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초승달 같은 검은 궤적이 연달아 이안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안은 역장이나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왼손을 뻗어 검 자루를 반대 방향으로 움켜쥐고는, 그대로 팔을 비스듬하게 치켜들어 넓적한 검 면으로 몸을 가렸다.
하반신까지 전부 가릴 수는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솔직히 지금은, 저걸 맨몸으로 맞아도 죽지 않을 것 같았다. 방어구들은 넝마가 되겠지만.
콰드드득- 콰득-!
검은 궤적이 대검 위를 후려치며 지나갔다. 검면을 받친 오른팔을 타고 묵직한 압박이 전해졌다. 견딜만한 충격이었다.
궤적은 그를 지나치며 흩어졌고, 이안의 돌진은 멈추지 않았다.
이래서 대검에 방어력이 붙은 건가.
생각하며, 이안이 얼굴을 가렸던 팔을 비스듬하게 내렸다. 백작의 새카만 전신이 드러났다.
검격을 고스란히 막아내며 돌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는 손길이 다급했다.
그보다 이안이 대검을 내뻗는 게 더 빨랐다.
콰지지직-!
사선으로 올려친 붉은 궤적이 백작의 새카만 몸을 비스듬하게 가르며 지나갔다.
투쟁의 축복이 더해진 괴력, 거대한 검날과 신성력을 머금은 바람 칼날은, 백작의 마력은 물론 그 너머의 판금 갑옷까지 찢어발겼다.
퍼석-
백작을 감싼 연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백작의 상반신이 땅에 처박혔다.
카가각, 이안은 대검 날을 땅에 내리찍으며 속도를 줄였다. 여력이 엄청난 탓에, 그는 땅에 기다란 흔적을 남기고서야 멈춰 섰다.
전부터 느꼈지만, 이만한 힘을 세밀하게 통제하는 건 쉽지 않았다.
"제… 기랄…!"
널브러진 백작이 신음했다. 그는 옆구리부터 오른쪽 가슴까지가 잘려나간 채로도 살아있었다. 오른팔도 어깨 아래까지 밖에 남지 않았다.
백작이 발악하듯 연기를 뿜었지만, 육체를 재생할 수는 없었다.
바람 칼날에 실린 신성력의 잔재가 잘린 단면을 태우고 있었다.
저걸 떨쳐낸 뒤에야 본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물론 이안은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대검을 어깨에 걸친 그가 백작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언덕 중턱의 소란이 비로소 귓가를 스쳤다. 일행이 미친 듯 날뛰는 하수인 기병들을 베어 넘기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충분히 빠른 속도였다. 다만 그가 더 빨랐을 뿐.
"용서할 수 없다… 네 이놈, 용서할…."
실성한 듯 중얼대던 백작이 굳어진 건 그때였다.
"컥, 커헉…!?"
백작이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그의 입에서 피 화살이 치솟았다.
뒤로 치켜든 백작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아, 안 돼-"
푸화악, 놈의 눈코입과 잘린 단면에서 피 보라가 솟구쳤다. 그리고는 곧 찐득한 덩어리로 뭉치더니, 언덕 너머로 화살 같이 날아갔다.
"...?"
고개를 돌린 이안이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핏덩이가 날아간 건 정확하게 소용돌이의 눈이 위치한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진혈이었으리라.
"잃기 전에 회수한 건가…."
거참 알뜰하네.
아마도 이 안에서만 가능한 짓거리일 터였다. 아니라면 심판자들이 죽을 때 그가 진혈을 불태우게 놔두지 않았을 테니까.
"아, 아아…."
축 늘어진 백작이 신음했다. 그의 얼굴에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안은 그걸 지켜보지 않았다.
콰직!
대검이 백작의 머리통을 으깼다. 놈의 떨림이 멎었다.
퍼석, 퍼서석-
언덕 아래에서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하수인 기병들이 재가 되어 허물어지고, 죽은 말들도 썩은 고깃덩어리로 되돌아갔다.
경험치가 오른 것까지 확인한 이안이, 언덕 꼭대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각- 다각-
뒤에서 일행이 다가왔다. 말을 지킨 건 메브 뿐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끝을 냈구나, 이안."
이안이 언덕 꼭대기에 올라설 때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언덕 너머의 광경을 눈에 담은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꾸했다.
"끝이라니. 이제 시작인데."
온갖 것들이 뒤섞인 새카만 물결이 언덕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루 솔라 맙소사…."
뒤늦게 그 광경을 눈에 담은 필립이 탄식하는 가운데.
"다들 잘 따라오시오."
대검을 늘어뜨린 이안이 성큼 앞장섰다.
"지금부턴, 멈출 수 없으니까."
#158화
어느덧 먹구름의 소용돌이가 빠르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잿빛과 먹빛이 어지럽게 뒤엉켜, 침침한 땅 위에 더 짙은 음영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공기는 텁텁했다. 온갖 누린내가 뒤섞인 악취가 코를 찔렀다.
끝없이 밀려드는 어둠의 하수인들이 풍기는 냄새였다. 선봉대는 그저 환영 인사에 불과했다는 듯, 온갖 것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여 내달렸다.
늑대. 고블린과 동굴 트롤. 곰. 계곡 거미. 짐승과 마물을 누더기처럼 이어붙인 키메라.
도끼나 창 따위를 든 하수인과 한때는 인간이었을 게 분명한, 온갖 끔찍한 형태의 구울 실험체들. 그 위로 까마귀와 거대 박쥐 같은 날짐승들까지 날개를 펄럭댔다.
공통점은 하나였다. 이안을 비롯한 일행을 죽이겠다는 일념만으로 가득하다는 것.
'종합 선물 세트인가, 시발…?'
마족이 한 나라를 집어삼키면 어떻게 되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수인. 은밀하고 음험한 취미 생활의 결과물. 주민 실종의 책임을 물을 눈속임용 사역마.
숫자를 보아하니, 여왕은 구울 실험체와 키메라로 구성된 군단을 만들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저것들은 게임의 글루미르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넘쳐나는 인간과 마물 시신을 재활용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으리라.
동시에 이것들을 남김없이 동원한 여제의 의지도 느껴졌다. 어떻게든 그를 막아내고 싶은 것이다. 적어도 온전한 상태로 저택에 발을 들이지는 못하게 하려는 게 분명했다.
'죽일 수 있다면 더 좋겠고.'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을 이어 가면서도, 이안은 놈들의 한복판으로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카가가가-
때때로 불똥을 튀기며 땅에 끌리던 대검이 이윽고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맹렬한 기세로 뿜어져 나갔다.
콰드드드드득-
불그스름한 반월이 앞에 걸린 모든 걸 찢어발겼다. 실험체. 늑대. 계곡 거미와 하수인. 심지어 운 나쁘게 휘말린 까마귀까지.
모든 게 저마다의 형태로 토막 나 체액을 흩뿌렸다. 하지만 전체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부분이었다.
잘려나간 조각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뒤따르던 것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리라.
이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휘아악-
그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대검의 회전력에 몸을 맡겼다. 몸이 한 바퀴 돌고, 바로 다음 순간 한 발을 다시 앞으로 힘차게 내디디며 대검을 사선으로 내리쳤다.
허물어지는 토막들 너머, 그를 향해 몸을 날리던 것들이 붉은 사선에 휩쓸려 찢겨나갔다.
그대로 자루를 쥔 오른손을 놔 버린 이안은, 대검의 여력을 왼팔만으로 감당해 버텨 냈다.
그러면서 전면으로 드러난 오른팔을 어깨에 바짝 붙이며 이를 악물었다.
콰장창-!
떨어지던 토막과 그 뒤에 달려들던 하수인이, 돌진하는 황소에 치인 것처럼 튕겨 나갔다.
온갖 것들의 체액이 이안의 전신을 뒤덮었다.
시발. 욕지거리를 토해내며, 이안은 다시 바람 칼날을 시전했다. 동시에 그의 왼팔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어느새 신장이 2미터에 육박하는 동굴 트롤 한 마리가 코앞에 있었다. 그 옆으로는 창을 내미는 하수인이. 반대편으론 뒤집힌 채 팔다리로 기어 다니는 구울 실험체가 기어 왔다. 놈의 복부에는 머리가 없는 다른 인간의 상반신이 불쑥 솟아 있었는데, 양팔의 팔꿈치 아래에는 계곡 거미의 앞발로 보이는 기다란 가시 발톱이 돋아 있었다.
토 나오게도 생겼네, 진짜…!
콰지지지직-!
울분을 토해내듯 휘두른 대검이 놈들을 차례로 찢어발겼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저항이 거셌지만, 이안은 끝까지 팔을 휘둘렀다.
더 가까이 근접한 만큼 더 많은 것들이 휩쓸렸다. 이안은 조각난 것들을 그대로 몸으로 들이받으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캬아아-"
그 틈을 노리고 아가리를 쩍 벌린 거대한 박쥐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놈의 비명이 귀를 울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일순간 의식을 잃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안에겐 그저 짜증만 불러일으키는 소음이었다.
놈의 몸통으로 이안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닿은 순간 뻥 터져 나가는 감촉이 아주 엿 같았다.
물론, 그 사실에 불평이나 늘어놓을 때는 아니었다.
'시발.'
그저 욕설 한 번으로 털어내며 계속 검을 휘두를 뿐. 한순간도 쉬어선 안 됐다. 그의 돌파력이 사라지는 순간, 역으로 저 물결에 휩쓸리게 될 터였다.
아무리 초인에 가까운 상태라 해도, 결국 그는 개인이었다.
모든 방향에서 밀려오는 것들을 전부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몰라도 일행은 버틸 수 없을 테고, 그들을 구하려면 마법도 잔뜩 사용해야 할 터였다.
그러니 지금처럼 뒤는 일행에게 맡긴 채 오로지 앞으로. 저 멀리 보이는 달빛의 기둥을 목표 삼아 일직선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선택지는 싸움이 시작된 순간부터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각개 격파나 지형적 요충지를 찾아 수비하는 길을 택한 순간, 여제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는 거였다.
여긴 그녀의 권역이니, 그녀에게 선택권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투쟁의 축복도 받고 있었다.
카르하, 그 인간 백정의 신은 전략적 후퇴는 겁쟁이나 하는 짓이라 여길 게 분명했다.
그래서 축복을 거둬들이기라도 한다면, 상황이 더 개같이 돌아가게 될 터였다.
카르하는 역경과 고난에 맞서는 걸 좋아했고, 그게 무모해 보일수록 더 좋아했다. 끝내 자신의 대전사가 그걸 극복하지 못할지라도.
전신의 신성력이 점점 더 붉고 뜨겁게 이글대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이안에겐 그게 카르하의 웃음소리처럼 느껴졌다.
'하늘이 저 지랄인데, 뭐가 제대로 보이긴 하냐? 이 무식한 백정 새끼야?'
역겨움과 분노. 불쾌함. 그 모든 것들을 연료 삼아 쉴새 없이 베고 후려치기를 반복하는 와중에도, 머릿속 한구석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의 이성은 끝내 신성력이 만들어 낸 흥분과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았다. 아마도 높은 정신력 수치 덕분일 터였다.
고도의 집중력과 육감이 뒤엉켜 만들어낸 일종의 각성 상태 속에서, 그의 이성은 주변의 모든 정보들을 인지하고 관조했다.
일행은 그의 뒤를 열댓 걸음 남짓한 간격을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메브는 홀로 한쪽 측면을 감당하며 이안이 포위당하지 않게 도왔다.
필립은 반대편에서 거의 발악하듯 움직이고 있었다. 엄살 부릴 여유조차 없는 듯 그저 비명 같은 기합성만 연달아 내질렀다.
샬롯은 그런 둘의 사이를 오가며 어느 한쪽이 무너지지 않도록 도왔다. 물론 필립을 돕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그 와중에도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심판자를 마주치는 걸 대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일행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볼 때, 심판자들은 이것들 사이에 섞여 있지 않았다.
카가각-
이것들 사이에 숨어 있는 건 흡혈 귀족들뿐이었다.
그림자나 머리칼로 전신을 감싼 채 멀찍이 날아다니거나, 하수인들의 뒤에서 기회만 엿보는 겁쟁이들.
그중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며 기습적으로 선보인 그림자 가시를, 이안은 몸을 살짝 젖히는 것만으로 피해 냈다.
새카맣고 뾰족한 가시가 그의 투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로 양팔에 힘을 준 이안이, 놈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손을 내뻗었던 뱀파이어의 몸이 발끝에서부터 안개로 변하기 시작했다.
콰지지지직-
검날이 마물에 이어 안개로 변한 그의 허리춤을 휩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바람 칼날에 섞인 신성력이 안개를 조금 불태웠을 뿐이었다. 어느새 어깨 위만 남은 놈이 웃음 지었다.
"하하, 소용 없-"
내뱉던 놈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코앞으로 이안의 쇠주먹이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을 휘두른 반동을 추진력 삼아 불쑥 앞으로 몸을 날린 결과였다.
빠각-!
이안의 주먹이 놈의 얼굴 한복판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주먹에 맺힌 신성력이 함몰된 안면을 태우고, 연기가 되었던 전신이 삽시에 본모습을 되찾았다.
주먹을 마저 뻗어 놈을 마물들 한복판으로 날려버린 이안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대검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솨아아-
날 등을 타고 이어진 고대어에 삽시에 푸른 빛이 맺혔다. 이안은 비틀었던 허리를 다시 반대로 힘차게 휘돌리며 검을 내뻗었다.
마물들과 얼굴이 함몰된 흡혈 귀족을 휩쓸고 지나간 궤적이, 곧이어 푸르게 빛났다. 그리고는 그대로 얼어붙어 수많은 파편으로 돌변했다.
콰과과과과-
부채꼴을 그리며 방사된 파편이 전면을 휩쓸었다. 그 잔재가 가라앉기도 전에, 고깃덩어리가 된 흡혈 귀족의 전신에서 피보라가 치솟았다. 그리고는 빨려들듯 쏜살같이 미로 저택 쪽으로 멀어졌다.
퍼석-
이안은 숨이 멎은 놈의 머리통을 짓밟고 지나쳤다. 뒤이어 창이나 도끼를 치켜든 직속 하수인 몇의 얼굴에 공포가 서리더니 퍼퍼벅, 재가 되어 터져 나갔다.
물론 전체에 비하면 한없이 일부에 불과했고, 이안은 놈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보다, 방금의 일격으로 드러난 공간에 파고드는 것에 집중했다.
'생각보다 더 센데…?'
마력 소모도 조금 더 많긴 했지만. 어쨌거나 바람 칼날만 쓸 때보다 더 범위가 넓은 공격이었다.
하긴. 군단장의 대검에 붙은 건 무려 3레벨의 냉기 칼날이었다.
물론 그가 보기엔 어이없는 옵션이었다.
게임에서 이 대검을 사용하는 직업은 기사나 야만 전사였을 테고, 그들은 마력을 다루지 못했으니까.
심지어 이건 마석이 아니라 사용자의 마력을 소모해 사용해야 하는 스킬이었다. 그러니 본래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으리라.
게임에는 이런 식으로 유저를 엿먹이는 듯한 아이템이 수없이 많았다. 치명타와 공격 속도를 올려 주는 보옥이라든가, 참격 스킬이 붙은 지팡이 같은.
아마 제작자도 이걸 사용하는 마법사가 있으리란 생각까진 하지 못했을 터였다.
콰드드드득-!
그 마법사인 이안은, 대검을 멈추지 않고 휘둘렀다. 죽음의 행진이 이어졌다.
마물과 짐승이 뒤섞인 키메라. 인간 둘이나 셋을 역겨운 모습으로 재조립한 구울 실험체들. 그것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귀엽게 느껴질 정도인 마물과 하수인들이 쉴 새 없이 썰려 나갔다.
그 사이사이, 흡혈 귀족들도 본격적으로 끼어들기 시작했다.
놈들은 공포에 질린 채 이안을 사신처럼 바라보면서도, 저마다 가진 재주를 발작적으로 선보이며 달려들었다.
위에서. 측면에서. 때로는 자포자기한 듯 정면에서도. 이안은 놈들의 그런 행동에 작은 의문을 느끼면서도, 한 번도 당하지 않고 썰고 찢었다.
신성력에 타고 남은 진혈은 매번 놈들의 몸을 빠져나가 멀어졌다. 그때마다 직속 하수인들도 재가 되어 흩날렸다.
각성을 넘어 반쯤은 무아지경에 접어들던 그의 의식을 일깨운 건, 퀘스트 완료 창이었다.
여제의 종복들 서브 퀘스트가 어느새 완료된 것이다.
벌써 흡혈 귀족을 과반수나 죽였다는 의미였다.
"...!"
그리고 비로소, 그는 달빛의 기둥이 생각보다 가까워졌음을 깨달았다.
소용돌이의 눈 사이로 드러난 거대한 초승달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아래의 미로 저택도.
기묘한 위화감이 이어졌다.
저택의 담벼락은 착실하게 가까워진 데 반해, 저 멀리 불쑥 솟은 저택은 아직도 꽤 멀었다.
게다가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식물들도 나무처럼 솟아 있었다. 담장 뒤에 또 담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의식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감각이 어긋나는 것을 느낀 이안이, 비로소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또 공간을 가지고 노는 거네.'
정확히 어떤 광경이 펼쳐져 있을지는, 저 안에 발을 들인 후에나 알 수 있으리라.
"...!"
거기까지 생각하던 이안이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육감의 경고.
어느새 실체화한 흡혈 귀족 하나가, 칼날 같은 손톱을 내뻗으며 메브의 측면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이안을 노려서는 답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게 분명했다. 사실,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저택에 잠시 의식을 빼앗기지만 않았다면 미리 눈치챘으련만.
이를 악문 이안이 마력을 끌어올린 찰나였다.
솨아아-
삽시에 피어오른 황금빛 장막이 메브를 감쌌다. 카가각, 장막을 할퀸 손톱이 타들어 갔다. 솟구친 검은 형체가 그 뒤로 다가들었다. 역수로 쥔 은검을 치켜든 샬롯이었다.
콰직-
은검이 흡혈 귀족의 어깨를 꿰뚫고 몸통 깊이 박혔다. 뒤이어 메브의 검이 떨어져 내리는 흡혈 귀족의 목을 날려 버렸다.
모든 게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연달아 일어났다.
"계속 가십시오, 나리! 뒤는 걱정하지 마시고요!"
필립의 외침을 귀에 담으며, 이안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옅은 헛웃음이 스쳤다.
너무 많은 걸 혼자 감당하려 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서였다. 서로를 지키는 것 정도는 손쉽게 해낼 실력자들이건만.
슈화아아-
끌어올린 마력은 고스란히 대검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코앞까지 가까워진 하수인들을 향해, 신성력과 냉기가 뒤섞인 대검이 뿜어져 나갔다.
콰과과과-
이안은 더는 뒤를 의식하지 않않았다. 터질 것 같은 심장과 지끈대는 관자놀이, 귓가를 스치는 이명과 저릿저릿한 손아귀 따위도 전부 무시했다.
그저 눈앞의 모든 것들에게 평등한 죽음을 선사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러던 한순간.
"...!"
시야가 탁 트였다.
더는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저 멀리. 달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드넓은 담벼락이, 온전한 본모습을 드러냈다.
#159화
그 한복판, 장식된 철창살로 이루어진 고풍스러운 대문까지 확인한 이안이 살짝 방향을 틀며 소리쳤다.
"다들 앞만 보고 뛰어!"
막 포위망을 벗어난 일행도 오로지 달리는 데에만 온 힘을 다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로 아직도 괴물 군단이 바글바글했다. 이제는 일행이 쫓기는 형국이었다.
'아무리 카르하가 망나니 새끼라도, 여기서 계속 뛰는 걸로 지랄하진 않겠지.'
악몽 같은 광경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이어 가며, 이안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푸른 빛이 아른거렸다.
쩌저적-
필립의 바로 뒤에 새하얀 얼음의 장벽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빙하 방벽. 오래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최소한의 범위에 최소한의 마력만을 사용했다.
퍼버버벅-
선두의 마물들이 방벽에 처박히고, 곧 뒤따르는 것들에게 짓눌려 터져 나갔다. 방벽에 부딪힌 것들이 저들끼리 뒤엉켜 허물어졌다.
빙하 방벽은 그 잠깐의 혼란만을 야기하고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가장 달리기가 느린 필립조차 괴물 군단과 거리를 벌렸다.
"대문? 저 대문으로 뛰는 겁니까?!"
필립이 소리쳤다. 이안은 대답 대신 앞장서 달렸다. 대문 너머의 풍경이 비로소 또렷해졌다.
길이 짧게 이어진 공터 이후로는 곧바로 정원이 시작되고 있었다.
빽빽하게 뒤엉킨 덩굴들이 장벽처럼 솟은 형상이었다. 한눈에 봐도 평범한 덩굴은 아니었다.
어쨌건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일단 저기 발을 들이면, 포위될 걱정은 없이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멈춰어어어억-!"
"안 돼! 거기 서어어!"
뒤에서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메아리치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뒤를 돌아보니, 눈에 핏발이 선 뱀파이어들이 손을 내뻗으며 날아들고 있었다. 끝내 이안이나 일행을 공격하지 않던 것들이었다.
아마도 괴물들을 끝없이 분쇄하는 이안의 모습에 차마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 맹렬한 속도로 날아드는 놈들의 얼굴에는 절박함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아, 그래. 우릴 막아내지 못하면 큰 문제가 생기는 거군.
생각하며, 이안이 연달아 왼손을 털었다. 그때마다 바람 칼날을 머금은 투척용 단검이 뻗어나가 뱀파이어들에게 틀어박혔다. 세 개 다 명중이었다.
퍼엉-
마지막 한 놈에겐 화염구가 날아들어 폭발했다. 물론 이런 걸로 놈들을 죽일 순 없겠지만, 적어도 떨어뜨리는 데에는 충분했다.
이안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대문이 멀지 않았다. 불현듯, 뭔가 마법이 걸려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부술 수 있길 바랄 뿐. 이안은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양손으로 고쳐 쥐었다. 그리고는 힘껏 땅을 박찼다. 땅이 움푹 파이면서, 그의 몸이 굳게 닫힌 대문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대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콰지지직-!
걱정이 무색하게, 대문을 구성한 철창살들은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뒤이어 벌어지는 대문을 온몸으로 부딪혀 열어젖히면서, 이안은 저택으로 들어섰다.
촤아아악-
그는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며 멈췄다. 달빛이 그의 전신을 내리쬤다. 갑자기 밝아져서, 조금 눈이 부실 정도였다.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은 대검을 움켜쥐며 벌떡 일어섰다.
뒤따라 들어선 일행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일행은 그들을 거슬러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뒤따라 밀려들 것들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다시 대검을 휘두르는 상황은 이어지지 않았다.
"...!"
괴물들이 멈춰 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들은 입구와 담장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멈췄다. 놈들의 물결이 좌우로 주르륵 이어졌다.
"아, 안 돼. 나는, 아, 아아악-!"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
그 너머로 절규와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좌우로 늘어서는 괴물들의 머리 위. 누가 끌어당긴 것처럼 양팔을 활짝 펼친 채 떠 있는 뱀파이어들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놈들의 전신에서 피보라가 붉은 안개처럼 자욱하게 번졌다. 뒤이어 그대로 여러 개의 작은 덩어리로 뭉친 진혈들이, 이안의 머리 위를 가로지르며 화살같이 뿜어져 나갔다.
"커허…."
뱀파이어들이 단말마와 함께 추락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괴물 군단 사이에서 놈들의 하수인들도 퍽퍽 부서지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끄오오오오-"
"끼야아아아아-"
남아 있던 마물과 마수, 키메라와 실험체들도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선 전부 체액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검고 붉고 때로는 녹색이나 푸른 빛을 띠는 체액이 담장 주위를 뒤덮고, 곧 그대로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
이안은 불현듯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깊은 곳에서 핏줄이 꿈틀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저택의 부지가 놈들의 체액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것은 바짝 말라붙은 시체 더미뿐이었다.
기묘한 적막이 내려앉는 가운데, 그 광경을 멍하니 응시하던 필립이 이윽고 입술을 달싹였다.
"끄, 끝난 겁니까…?"
"아마도 그런…. ...?!"
숨을 내쉬며 대답하던 이안이 불현듯 눈을 치켜떴다. 왼쪽 어깨에서 타는 듯한 열기와 고통이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깨와 등어름에 새겨진 카르하의 전투 문신에, 엄청나게 밀도 높은 신성력이 밀려들고 있었다.
심지어 평소처럼 전신으로 번지는 게 아니라, 그대로 문신에 고이면서 응축되고 있었다.
용암이 팔뚝을 뒤덮는 것 같았다.
이건 또 뭐야, 시발?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비명을 참아냈다. 하지만 대검을 떨어뜨리고 몸이 굽어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전신에 불그스름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 이안?! 무슨 일이냐! 이안?"
주저앉아 헐떡대던 샬롯이 경악한 듯 튀어 올랐다.
거의 동시에 달려가려던 메브가 멈칫했다.
"으윽…? 읏, 으악…?"
"필립…? ...!"
필립이 검을 떨어뜨리며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억눌린 신음과 쫙 펼친 채 덜덜 떨리는 오른손. 중지에서 달아오른 듯한 주황빛이 번지고 있었다. 선명한 신성력.
안면 가리개를 치켜올리던 메브도, 이내 뭔가를 느낀 듯 흉갑에 손을 얹었다. 뒤이어 그녀 역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가 창백한 안색으로 입술을 달싹이며 기도문을 중얼대기 시작한 가운데.
"괜찮으냐? 이안! 대답해!"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달려간 샬롯이 소리쳤다.
그녀가 내뻗은 손이 닿기 전에, 이안이 한쪽 팔을 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괜찮아… 건드리지 마라…."
지금은 깃털만 스쳐도 아플 것 같으니까.
속으로만 덧붙인 이안이 멈췄던 숨을 헐떡였다. 고통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얼굴에 맺힌 식은땀이 체액과 뒤섞여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여전히 어깨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통은 잦아들었지만 열기는 여전히 낙인처럼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부로 응축된 신성력이 선명했다.
심지어 범위가 더 넓어져서, 팔뚝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전투 문신이 더 넓게 새겨진 것이리라.
'자꾸 남의 몸에 멋대로….'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이 이상 현상의 이유를 곧바로 깨달았다.
여기서부터는 신의 시선이 거의 닿지 않는 영역인 게 틀림없었다.
더는 대전사를 지켜보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한 카르하가, 단숨에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력을 들이부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번에는 무식한 새끼라고 욕할 수 없었다.
문신에 가득 응축된 신성력이 그의 일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력이나 혼돈의 파편을 처음 다룰 수 있게 됐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그래, 통제권도 넘겨줬다 이거지.
희소식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사용할 수 있는 신성력의 한계치도 생긴 셈이었으니까.
'이거라도 준 게 어디야.'
생각하며, 이안은 그대로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샬롯도 비로소 안심한 듯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그녀가 혀를 내밀며 헐떡대는 사이.
"감사합니다…. 찬란한 여신이시여…."
땀에 젖은 목소리로 내뱉은 필립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이안은 그제야 자신에게만 일어난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루 솔라도. 메브의 반응을 보아하니 심지어 티르 엔까지 신성을 내리는 모양이었다.
"...!"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이 재빨리 팔을 뻗어, 아공간에서 부러진 단죄의 검을 꺼냈다. 검집 사이로 기다렸다는 듯 푸르스름한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큰일 날 뻔했네.
안도의 한숨을 삼킨 이안이 검집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그의 시선이 비로소 담벼락 안쪽의 전경을 훑었다. 공터의 전면을 가로막고 있는 건, 덩굴들이 뒤엉켜 만들어 낸 장벽이었다.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덩굴들 표면에는 손가락 길이의 가시들이 삐죽삐죽 돋아 있었고, 이안의 키보다도 더 높게 솟은 채였다. 어찌나 빽빽한지 그 너머가 보이지도 않았다.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꾸득, 꾸득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쉬지 않고 번졌다.
넝쿨 장벽은 좌우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담벼락 아래로도 다소 낮은 넝쿨들이 이어져 있었는데, 좌우로 갈라진 갈림길의 입구나 다름없었다.
'이게 미로 저택의 참모습이군….'
쓴웃음을 짓는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메브 쪽으로 돌아왔다.
필립보다 먼저 기도를 끝낸 그녀가 차근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경도 신성력을 받으셨소?"
"그래… 성흔이 충만해졌다. 아마도, 여기서부턴 완성된 마경인 듯싶어."
"그럼, 이제 신성력을 휘두를 수 있으시겠군."
뜻밖에도 메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대로는 그저 성흔에 가득 차 있을 뿐이야. 복수를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아."
"이런…."
좋다 말았네.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혹시나 부상당한 곳이 없나 얼굴 이곳저곳을 만져 보았지만, 너덜너덜해진 투구와 끈적한 체액의 역겨운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긁힌 상처가 있다 한들, 이미 아물어 버렸으리라.
이안이 투구를 벗어 버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의 체액을 훑는 사이.
그를 바라보던 메브가 입을 열었다.
"그야말로 카르하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았다, 이안."
"…동감입니다."
필립이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기도 중인 것 같더니, 귀는 활짝 열어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 평생 이런 엄청난 무위는 처음 보았습니다. 이야기로만 듣던 것과는 전혀 다르더군요. 정말이지 초인적이라고밖에는-"
"지금 할 말들은 아닌 것 같군."
혀를 차며 말을 자른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우린 이제야 여제의 안마당에 발을 들였을 뿐이야."
"…아."
머쓱하게 헛기침한 메브와 낯이 굳어진 필립이 그제야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 식물들은 대체 뭐랍니까…? 설마, 예전의 그 육식 나무들 같은 부류는 아니겠죠?"
꺼림칙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면서 필립이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모르신다고요…? 아, 하긴. 나리라고 이렇게 변이된 식물까지 다 아실 수는 없겠군요. 언제나 답을 알고 계시니 종종 잊습니다."
이안은 대답 대신 입맛만 다셨다.
애석하게도, 지금 그가 모르는 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겪은 거의 모든 상황이 게임에선 겪어 본 적 없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은 게임에서도 먹구름이 자욱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소용돌이치진 않았다.
온갖 괴물들이 뒤섞인 하수인 군단도 마주친 적 없었다. 그때의 놈들은 루 사드 전역에서 저마다의 우두머리에게 지배되며 흩어져 있었다.
글루미르 인근에서 본 것이라곤 그 역겹게 생긴 구울 실험체들과 키메라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아까처럼 체계적인 통제를 받으며 움직이지 않았었다.
아마 테사이아가 지금의 여제를 죽였기 때문이리라.
눈앞의 이 미로 정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이렇게 넓지도 않았고, 식물들도 전부 말라 죽어 있었다. 그 사이로 구울 실험체들만이 배회하는, 말 그대로 저택으로 들어서기 위한 길목에 불과했었다.
'내가 다른 짓을 하면서… 이런 걸 전부 다 놓쳤던 건가?'
너무 많이 놓친 거 아닌가.
어쨌건, 지금 좌우로 펼쳐진 갈림길은 그야말로 본격적인 던전의 입구처럼 보였다.
"나도 믿기 힘들다만."
일행보다 먼저 정원을 훑고 있던 샬롯이 입을 열었다.
"이것들, 장미 넝쿨 같은데."
"장… 미라고요?"
필립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샬롯을 돌아보았다. 이내 그녀가 응시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변이되었다곤 해도 장미가 이렇게 끔찍해질 리가… 있군요. 루 솔라 맙소사."
필립이 탄식했다. 저만치의 넝쿨 끝에 핀 장미를 비로소 확인했기 때문이다. 피처럼 붉은, 일반적인 장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장미였다.
심지어 한 송이가 전부가 아니었다. 저택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건만. 넝쿨 위에 어느새 듬성듬성 피어 있었고, 심지어 이 순간에도 봉오리가 피어오르는 것까지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솟아오르고 있는 봉오리는 꽃이라기보다는 괴생명체를 머금은 양막처럼 느껴졌다.
곧 툭, 하고 물방울 터지는 소리와 함께 봉오리 하나가 벌어졌다. 꽃잎 사이로 흘러내린 액체가 넝쿨을 타고 검붉게 흘러내렸다. 아무리 봐도 피 같았다.
"아까 그것들의 체액을 흡수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인가…."
메브가 탄식했다. 필립도 오만상을 찌푸린 채 침을 뱉었다. 향기가 없는 꽃인 게 다행이었다. 적어도 평범한 장미 같은 향기로운 냄새가 나지는 않을 테니까.
"다들 이쪽으로 비켜 보시오."
이안이 대검을 주워들며 내뱉은 건 그때였다.
아직 전신에 남은 신성력 덕분에, 문신의 신성력을 끌어다 쓸 필요는 없었다.
메브와 필립이 재빨리 샬롯의 옆으로 달려오는 가운데, 양손으로 고쳐 쥔 대검을 얼굴 옆으로 치켜들며, 이안이 덧붙였다.
"어쨌든 식물이니, 벨 수도 있겠지."
쿠웅- 쒸에엑-!
동시에 힘껏 몸을 날린 이안이, 옆으로 비스듬하게 뻗은 대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바람 칼날을 머금은 붉은 궤적이 넝쿨 장벽의 한복판을 갈랐다.
#160화
쿠드드드득-
처음의 맹렬한 기세와 달리, 대검 날에 점점 무게가 실렸다. 잘려 나가 밀려나는 넝쿨들이 기울어졌다.
이를 악문 이안은 허리와 팔에 온 힘을 집중해, 일련의 과정을 끝까지 마무리했다.
대검 날이 반대편으로 길게 빠져나왔다.
"...."
이안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반발력이 예상보다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검이 약했거나 중간에 망설였다면 다 베어 내지 못할 뻔했다.
뭐가 이렇게 질기지. 생각하는 사이, 기울어지던 넝쿨 장벽이 단면에서 붉은 진액을 흩뿌리며 뒤로 완전히 넘어갔다.
앞에 선 이안의 얼굴에도 붉은 진액이 튀었다.
그의 가슴 아래로 긴 직선을 그리며 남은 하단부에도 피처럼 붉은 진액이 솟구쳤다.
정말 피였다. 온갖 것들의 피냄새가 뒤섞인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시발…."
얼굴의 피를 닦아낸 이안이 대검 날을 땅에 박았다.
그의 짜증스러운 시선이 장벽의 두께를 가늠했다. 단면은 겉보기보다 훨씬 두껍고 촘촘하게 얽혀 있었다.
비로소 그토록 잘라내기 힘들었던 게 이해가 됐다. 오히려 중간에 날이 걸리지 않은 게 용했다.
'게임에선 파괴 불가능한 벽이었겠지. 그걸 억지로 잘라내려 했으니.'
피가 튀는 장벽 건너편으로 또다시 넝쿨 장벽이 보였다.
다른 통로였다. 이런 식의 미로가 여러 겹으로 이어져 있으리라. 이안의 시선이 저 멀리, 끄트머리만 간신히 보이는 저택의 지붕으로 향한 그때였다.
꾸득, 꾸드득- 꾸득-
잘려나간 단면의 출혈이 잦아들더니, 새로운 줄기들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거뭇한 줄기들은 본래보다 더 어지럽게 뒤엉키며 밀려 올라갔다.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도 더 자라나는 넝쿨 장벽을 올려다본 이안이, 비로소 짧게 입맛을 다셨다.
"이래선 한도 끝도 없겠군."
마법을 사용하거나 계속 썰어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마법에도 내성이 있을 터였다. 물론 이것들이 영원히 다시 자라날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 그의 마력과 신성력, 체력이 바닥나는 속도가 더 빠를 터였다. 같은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시발, 정말 던전이네.
"아무래도 그냥 뚫린 길로 나아가는 게 좋겠구나. 잘라낸 벽을 넘다가 중간에 저렇게 다시 자라기라도 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진 않아."
메브가 덧붙였다. 이안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검을 들어 아공간에 넣었다.
이 미로 정원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무기였다. 휘둘러 대다가 넝쿨 장벽에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어쩌면 회수하지도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일어서서 좌우의 통로를 번갈아 돌아본 필립이 읊조렸다.
"어느 쪽이 옳은 길일까요. 아니, 애초에 옳은 길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건지도 의문입니다."
"어쨌든 저택 가까이까진 갈 수 있겠지."
이안은 덤덤하게 내뱉으며 일행에게로 돌아왔다. 손에는 아공간에서 꺼낸 가죽 수통을 든 채였다. 샬롯이 들고 있던 부러진 단죄의 검을 내밀며 덧붙였다.
"내가 볼 땐 어느 쪽으로 가건 달라질 건 없을 것 같다. 양쪽 모두에 우릴 기다리는 것들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 아마도… 심판자들까지."
메브에게 수통을 건넨 이안이, 단죄의 검을 받아들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에 담긴 신성력이 느껴졌다. 검집 덕분에 흘러나오고 있지는 않았지만, 뽑아 든 순간부터 마구 흩뿌려댈 게 분명했다.
그가 단죄의 검을 아공간에 넣는 사이, 물을 마시고는 수통을 필립에게 건넨 메브가 말을 이었다.
"들은 대로라면, 심판자란 것들은 아까 그 흡혈귀들보다 훨씬 더 강하겠지."
"물론이다. 같은 뱀파이어들을 징벌하거나 통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니까. 저 밖에서부터 내내 대비하고 있었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더군."
샬롯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놈들은 처음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이안을 비롯한 일행들도 자주색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안에서 보니 소용돌이의 눈이 훨씬 더 커다랗게 보였다.
이안은 그 먹구름의 경계선을 찬찬히 훑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자주색 밤하늘과 그 한복판의 커다란 초승달을 응시하고 있었다.
확대해 놓은 것처럼 커다란 달이었다.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지금은 하단 절반 정도가 붉게 물들어 있기까지 했다. 보고 있으면 피가 식는 듯한 서늘함이 전해졌다.
샬롯이 낮게 덧붙였다.
"아마도 이 안에서 싸우는 게 가장 강할 테니까."
"초승달…!"
물을 마시던 필립이 탄성을 흘리고는 덧붙였다.
"그때 제가 드린 말씀을 기억하고 계셨군요. 역시, 뱀파이어들이 초승달을 가장 좋아한다는 건 그냥 속설이 아니었던 겁니다."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떨떠름하게 혀를 날름댔다. 그녀에게 수통을 건넨 필립이 가라앉은 눈으로 초승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건 진짜 달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 밤하늘도요. 진짜라면 찬란한 여신께서 한 번에 이만한 신성을 내리시지는 못하셨을 것 같거든요. 아마도 실제로는 대낮일 것 같습니다만."
"마경이 처음도 아니면서, 아직도 그런 걸 신기해하냐?"
피식댄 이안이, 필립에게 아공간에서 꺼낸 새 검을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든 필립이 감사하다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검은 어느새 이가 다 나간 상태였다.
"…망했군요. 적어도 몇 년은 쓸 생각이었는데."
방패의 상태까지 확인한 필립이 우울한 얼굴로 읊조렸다. 그의 철제 원형 방패는 표면과 가장자리 곳곳이 구겨지고, 일부는 조금씩 찢겨나가기까지 한 상태였다.
괴물 군단 사이에서 악전고투를 벌인 결과였다.
물론 방패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애지중지하던 때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비루해졌다.
필립이 입맛을 다시며 검을 교체하는 사이.
"휴식은 충분히 취한 것 같으니 출발합시다. 이제부턴 다들 긴장을 유지해.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수통을 받아 목을 축인 이안이, 좌측으로 펼쳐진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장검을 뽑아 들고, 신성력은 문신 안으로 갈무리한 채였다.
샬롯과 메브가 각각 송곳니 검과 요정의 세검을 뽑아 들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 왜 이쪽으로 가시는 겁니까? 왼쪽은 불길한 방향이잖습니까."
재빨리 따라붙은 필립이 속삭였다.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네 주둥이가 더 불길해. 헛소리하지 말고 주위나 잘 살펴라."
"옙…."
일행 모두가 장미 넝쿨이 좌우로 펼쳐진 통로로 접어들었다. 뒤에서 뿌득대는 소리가 울려 퍼진 건, 고작 몇 걸음을 더 나아갔을 때였다.
"...!"
뒤를 돌아본 필립의 눈이 커졌다.
그들이 들어선 통로 입구를 가로지르며 넝쿨들이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런? 아니…?"
순식간에 뒤엉키며 통로를 막는 넝쿨을 바라보며 필립이 더듬댔다.
나머지 셋은 서로를 한차례 일별하며 어깨를 까딱이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깜빡인 필립이 후다닥 따라붙었다.
"입구가 사라졌는데, 다들 너무 태연하시군요."
"달라질 게 없으니까. 어차피 우린, 입구가 아니라 출구를 찾으러 들어온 거잖아?"
샬롯의 태연한 대꾸에 필립이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간격 유지에 신경을 써야겠군."
메브의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런 게 가능하다면, 자칫하다 일행이 나뉘게 될 수도 있겠어."
"옳은 말씀이십니다. 여기서 고립되면 결말이 좋을 것 같진 않네요."
일행은 둘씩 나란히 선 채,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나아갔다.
통로는 그들 넷이 충분히 나란히 걸을 만큼 넓었지만, 다들 넝쿨 장벽 가까이로는 굳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장벽에서는 뿌득대는 소리가 속삭이듯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표면에 돋은 가시들도 심상치 않을 정도로 날카로웠고, 때때로 장벽 위에 핀 붉은 장미도 요사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꽃잎을 타고 때때로 핏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그나마 육식 나무처럼 스스로 움직여 습격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피를 먹고 자라는 변이된 식물이 아니던가. 어떤 예상 못한 괴상한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이건…."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필립이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살폈다.
넝쿨 장벽이 사방을 감싼, 네모 반듯한 공터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일행 모두가 어느 정도 뛰어다닐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정원 속의 또 다른 정원.
"전장이군."
샬롯이 읊조린 말에, 필립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황색 눈동자를 묘하게 번뜩이면서, 그녀가 덧붙였다.
"전장을 만들어 둔 거야."
"허…."
필립이 그제야 탄식하는 가운데,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저택으로 향하며 지나친 말라비틀어진 미로 정원에도, 이런 공터가 있었다. 다만 지금보다는 작았고, 구울 실험체들이 그를 반겨 주었었다. 물론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놈들은 전부 정원의 양분이 되었으니까.
이안의 시선이 이어진 통로를 훑었다. 갈림길이었다. 정면과 우측.
이안은 별다른 고민 없이 우측 길로 접어들었다.
"망설임이 없으시군요…. 길을 찾는 요령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새끼, 궁금한 것도 많네.
이안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필립을 돌아보았다.
필립이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최악의 상황에선 일행이 나뉠지도 모르잖습니까. 나리만 아는 요령이 있으시다면, 다들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뜻밖에도 합리적인 이유였다. 하긴, 이놈도 이제 짬이 있는데.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길은 나도 몰라. 대충 세 가지 정도만 고려하면서 움직이는 거지."
"세 가지요…?"
이안이 검을 들어 슬쩍 하늘을 가리켰다.
"밤하늘의 경계선. 정원은 아마 이 밤하늘의 범위만큼 펼쳐져 있을 테니까."
"...!"
필립은 물론 일행 모두가 새삼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필립이 더듬댔다.
"새, 생각보다 훨씬 넓겠군요."
"저택은 아마 정중앙이나 그 근처에 있을 거다. 그러니까 그걸로 방향을 참고하는 거야. 그보단 우리 위치를 대충이라도 가늠할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하지만. 그리고 두 번째는…."
이안이 검을 옆으로 뻗어, 넝쿨 장벽을 긁으며 지나갔다.
"이렇게 한쪽 벽면을 기준 삼아 나아가는 거다. 이런 미로에서 길을 찾으려고 하는 건 의미가 없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계속 마음에 정해둔 벽면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에 도달하게 되겠군. 막다른 길이라 해도 벽은 이어져 있으니까.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어."
메브가 덧붙였다. 감탄한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이안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만 으쓱였다.
애초에 그가 생각해 낸 방법도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쯤 읽은 책에서 본 내용에 불과했다.
'그걸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밤하늘. 벽면. 하고 필립이 읊조리는 사이에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직각으로 꺾인 코너를 돌고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그… 세 번째는요? 세 번째는 뭡니까?"
점점 안달이 나는 눈빛이 되던 필립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샬롯과 메브도 슬쩍 이안을 곁눈질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겠어. 적이지. 이건 말하지 않아도 알 줄 알았는데."
말을 멈춘 그의 시선이, 통로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또 다른 공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메브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턱을 긁적이던 필립이 말했다.
"적이 왜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됩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부분에는 아둔해서요."
"적이 굳이 막다른 길을 막고 기다리지는 않을 거 아냐. 물론 무작정 우리를 따라오는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확률적으로 옳은 길일 가능성이 더 높겠지."
"아하…!"
필립이 탄성을 흘리는 가운데, 이안이 새로운 공터로 들어섰다. 걸음을 옮기던 그가, 공터 중앙쯤에서 멈춰서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길을 제대로 찾은 것 같군."
"...?!"
고개를 갸웃하던 필립이 이내 눈을 치켜떴다. 등 뒤에서 서늘한 느낌이 번졌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보며 안면 가리개를 내리는 메브의 곁에 재빨리 다가선 그가, 검과 방패를 치켜들며 몸을 돌렸다.
스스슷-
그들이 지나친 통로 옆. 높다란 장미 넝쿨 위에 그림자 하나가 솟고 있었다. 뒤이어 그 사이로 두건을 눌러쓴 중년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소 피곤하고 신경질적인 인상에 곱슬 거리는 흑발.
어깨에 두른 검은 망토 아래로, 지팡이를 짚은 손이 드러났다.
새카만 흑단목 지팡이를 장벽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짚고 있었다.
다소 우울해 보이는 눈으로 서로 간격을 확보하는 일행을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제기랄… 제발 이쪽으로 먼저 오지 않기를 빌었거늘…. 저 괴물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게 내가 될 줄이야…."
"...?"
놈을 응시하던 필립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저 뱀파이어가 칭하는 괴물은 이안을 뜻하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말투나 표정만 보더라도, 전혀 그와 싸우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품위를 지키십시오, 네이든 경. 적을 앞에 두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셔서야 되겠습니까?"
"...!"
뒤에서 이어진 차분한 목소리에, 필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하나가 아니었다고?'
그의 고개가 득달같이 뒤로 돌아갔다. 장벽 위를 응시하는 이안과 샬롯의 뒷모습. 그리고 장벽 위에 우두커니 선 또다른 뱀파이어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161화
단정하게 빗어넘긴 흑발.
제국 양식의 검은 정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얼굴에 기품 있는 미소를 머금은 미남자였다.
"뒷놈은 주문 쟁이 같다, 이안."
"흡혈귀는 다 주문 쟁이야."
"그건 안다만. 주문을 주로 쓸 것 같은데."
마른침을 삼키는 필립의 귓가로, 샬롯과 이안의 대화가 파고들었다. 둘 다 덤덤한 말투였다.
이안이 일단 지켜 보자는 듯 어깨를 까딱이는 사이, 정복 뱀파이어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미로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용살자 이안 경, 그리고 일행 여러분. 저는 저택의 집사장인 알프윈입니다. 여제의 지엄하신 명을 받들어 귀빈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너흰 귀빈을 내려다보며 맞이하나 보지?"
일행들이 저마다 자세를 다잡는 가운데, 이안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은 알프윈이 대답했다.
"양해해 주십시오. 경께서 대화보다 행동을 우선하는 분이란 걸 이미 알고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처음 인사드리게 되어 영광이군요."
"다른 방향으로 갔다면 다른 놈들이 환영해 줬겠군."
"물론입니다. 귀빈들께서 어디로 가실지는, 저희도 알 수 없었으니까요. 애석하게도 경 덕분에, 남은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감사 인사는 사양하지."
이안의 도발에도 알프윈의 미소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염려 마십시오. 이제 여러분들께서 들어오셨으니, 곧 다들 만나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그중엔 반가운 얼굴도 있을 테고요."
샬롯이 낮게 으르렁댔다. 곧바로 쌍둥이를 떠올린 것이리라.
"저놈은 내게 맡겨다오, 이안. 부디."
그녀가 내뱉는 가운데, 알프윈이 한 손을 가슴 앞에 올리며 덧붙였다.
"그 전에, 지루하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푸스스, 가슴에 얹은 손에서 검은 안개가 번졌다. 이안을 내려다보는 알프윈의 미소가 짙어졌다.
"물론 저희만으로 경을 막을 수 없으리란 건 알고 있습니다만…."
안개 사이로 새카만 검의 형태가 드러났다. 날 한복판이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튀어나온 기형 검이었다. 커다란 갈고리나 원형 낫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굴 옆으로 검날을 드리운 알프윈이 말을 맺었다.
"다른 일행 분들은, 아닐지도 모르지요."
"자신감 넘치는 놈이군. 말도 많고."
분위기가 흉흉하게 가라앉는 가운데, 이안이 고저 없는 말투로 내뱉었다. 어느새 그의 전신에 붉은 신성력이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어디, 해 봐."
내뱉음과 동시에, 이안이 예고 없이 왼손을 털었다. 빛살처럼 날아드는 투척용 단검을 단박에 쳐낸 알트윈이 미소 지었다.
"기꺼이."
슈확,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알프윈이 새카만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채 쇄도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건만,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샬롯이 이안의 앞을 가로막으며 튀어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카가각-!
초승달 검과 송곳니 검이 맞부딪쳤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는 사이.
"내려와라! 이 겁쟁아!"
필립이 아직도 넝쿨 장벽 위에 선 네이든을 검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네이든이 신경질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너 같으면 가겠느냐, 애송아? 난 이 위에서 절대 내려가지 않을 것이니, 어디 끌어내려 보거라."
그가 흑단목 지팡이를 슬쩍 까딱였다. 발치에 피어 있던 커다란 장미가 툭 떨어지더니 빙글빙글 돌며 그의 옆으로 날아들었다.
회전하는 꽃잎이 순식간에 올올이 해체되더니, 그대로 새빨간 핏덩이로 화했다. 네이든의 미소가 짙어졌다.
"할 수 있다면 말이지."
파파팟-!
동시에 핏덩이에서 붉은 가시가 쏟아져 나왔다. 필립이 화들짝 오른팔을 내뻗었다.
삽시에 피어오른 황금빛 장막이 그는 물론 옆의 메브까지 감싸며 커다랗게 번졌다. 평소보다 훨씬 크고 선명한 신성력.
장막에 닿은 피의 가시들이 타들어 가는 사이.
쩌엉-!
순식간에 몇 합을 교환하고, 힘으로 초승달 검을 떨쳐낸 샬롯이 알프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목을 틀어쥐려는 듯, 손톱이 튀어나온 손아귀를 앞으로 내뻗은 채였다.
샬롯의 힘에 놀란 듯 눈썹을 치켜 올린 것도 잠시. 알프윈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쒸엑-
"...!"
놈의 그림자 아래에서 구불구불한 단검 날이 솟구쳐 올랐다. 새하얀 피부의 여인이 단검을 내뻗으며 놈의 그림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샬롯의 눈이 커질 찰나.
퍼억-!
미간에 투척용 단검이 박힌 여인의 고개가 뒤로 튕겨 나갔다. 뒤따라 달려든 이안이 그대로 검을 휘둘러 여인의 목을 날려 버렸다. 반사적으로 뻗었던 팔을 거둬들인 샬롯이, 오른팔을 힘껏 휘둘렀다.
콰지직-!
송곳니 검이, 이번에는 진짜 놀란 게 분명한 알프윈의 가슴팍을 길게 찢어발기며 지나갔다.
알프윈이 검붉은 피를 흩뿌리며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의 등이 넝쿨 장벽에 부딪혔다. 장벽에 솟은 가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털썩-
반으로 잘린 여인의 머리가 뒤이어 땅에 떨어졌다. 아래턱이 없어서인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미간에 단검이 박힌 채, 피눈물 맺힌 눈만 깜빡댈 뿐.
퍼석, 이안이 그 머리를 밟아 으깨버리는 사이, 뒤에서 필립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안 나리! 어쩌죠? 저놈은 정말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이안은 대답 대신 메브를 돌아보았다. 안면 가리개 너머의 시선을 느낀 그가 옆쪽으로 고개를 까딱이는 그때.
"감이 대단하시군요, 이안 경.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알프윈이 내뱉었다. 말하는 사이에 쩍 갈라져 있던 가슴팍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심지어 걸치고 있던 옷까지 되돌아왔다.
그게 더 신기한데. 생각하며, 이안이 대답했다.
"잘."
물론 감으로 알아챈 건 아니었다.
이안은 처음부터 놈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것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연달아 떠오른 퀘스트 창 덕분이었다.
피의 마술사. 그리고 집사와 시녀들.
보이는 건 집사뿐이니, 시녀들은 어딘가 숨어 있으리라 짐작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짙은 그림자를 본 순간, 그녀들이 저 안에 있으리라 확신하게 되었고.
"기습은 의미가 없겠군요."
다시 땅에 내려선 알프윈이 팔을 펼쳤다. 그의 그림자가 넓어지더니, 그 아래에서 시녀복을 걸친 여인들이 우수수 솟아올랐다. 하나같이 구불구불한 단검을 움켜쥔 채였다.
그녀들은 자세를 다잡음과 동시에 이안과 샬롯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빈자리를 또 다른 시녀들이 채웠다.
뭐 이렇게 많이 나와?
생각할 찰나, 샬롯이 이안의 앞으로 나섰다. 철컹대는 소리와 함께 메브도 달려왔다.
"여긴 우리가 처리하겠다, 이안."
그녀가 이안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덧붙였다.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시녀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방패를 치켜든 채 언제든 신성력을 펼칠 태세인 필립의 뒷모습이 가까워졌다.
"너도 가라. 둘을 보조해."
"예. 감사합니다, 나리."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물러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장벽 위의 네이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끼아아아-"
"꺄아아아악-!"
시녀들이 듣기 싫은 비명을 내지르며 싸우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이안을 내려다보는 네이든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좁아졌다.
"제기랄…. 네 일행이 저것들을 다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냐?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주문쟁이는 주문쟁이끼리 놀아야지."
이안이 불그스름한 마력이 맺힌 눈으로 내뱉었다. 주위의 소란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실제로는 뒤의 기척을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지만, 네이든이 거기까지 알 도리는 없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보면 기절하겠군. 마검사라니. 대체 너 같은 괴물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너 같은 괴물은, 말이 되고?"
화르륵, 동시에 이안의 주위로 연달아 피어오른 불덩이들이 네이든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네이든이 망토를 휘저었다. 동시에 그의 옆에 둥둥 떠 있던 핏덩이가 방울 같은 막이 되어 그의 주위를 뒤덮었다.
퍼버버벙-
거대한 핏방울에 부딪힌 화염구가 연달아 폭발했다. 붉은 수증기가 자욱해졌다. 화염구는 단 하나도 핏방울을 뚫어 내지 못했다.
"헉-"
하지만 망토를 내리는 네이든의 얼굴에는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쒸엑-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뛰어오른 이안이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약력이 어찌나 좋은지, 거의 장벽 위에 닿을 정도였다.
"제기랄-!"
네이든이 다급하게 망토를 펄럭였다. 이안이 몸쪽으로 당겼던 팔을 힘차게 휘두른 건 거의 동시였다.
쉬학-!
네이든의 몸이 누가 끈으로 당긴 것처럼 옆으로 미끄러졌다.
콰지직, 이안이 휘두른 검이 빈 허공을 가르고 장벽 윗부분에 틀어박혔다. 검날에 찢겨나간 넝쿨 단면에서 새빨간 핏물이 솟구쳤다.
"제기랄! 벽이 낮아! 너무 낮다고! 듣고 있냐, 이 멍청한 놈아?!"
네이든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력까지 섞인 외침. 장벽에서 꾸득, 꾸드득 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번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넝쿨 장벽이 더 높아지고 있었다.
뾰족한 가시들을 발로 차 부러뜨리고는 그 사이로 발을 내디딘 이안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원을 통제하는 놈도 있나?'
우드득, 동시에 장벽에 박혀 있던 칼날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말려 들어갔다.
미련 없이 놔 버린 이안이, 저만치의 네이든을 향해 도약했다.
휘아아악-
휘몰아친 바람이 그의 몸을 허공에서 한 번 더 떠밀었다. 장벽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도약하며 치켜든 손이 아공간을 훑고, 이내 새로운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이든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미친 괴물 놈…! 정말 카르하가 따로 없구나…!"
그가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파라락, 망토가 펄럭이면서, 그의 몸이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질렀다.
이안은 허공에서 고개만 돌려 놈의 움직임을 좇으며 혀를 찼다.
진짜 모기 같은 새끼네.
콰직!
그 와중에 장벽에 검을 내리쳐 박은 이안이, 한결 더 능숙하게 가시들을 후려치고 발로 차 공간을 확보하고는 자세를 다잡았다.
검 자루에 의지한 채 매달린 형태였다. 평소라면 꽤 힘이 들었을 자세였지만, 투쟁의 축복을 활성화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지어 신성력을 최소한으로만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능력치 상승 폭이 아까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어지간한 야만 전사보다 힘이 강할 터였다.
"씁…."
건너편으로 날아가는 네이든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난전이 펼쳐진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끼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사방에서 밀려드는 시녀들은, 더이상 인간 같은 형상이 아니었다. 온통 새빨갛게 충혈된 눈과 깨진 유리 조각처럼 돋아난 이빨.
단검을 쥔 손에도 칼날 같은 손톱이 번뜩이고 머리카락은 살아있는 것처럼 펄럭댔다.
하지만 그 한복판에서 날뛰는 샬롯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어느새 은검까지 뽑아 든 그녀는 한시도 쉬지 않고 짐승처럼 날뛰어댔다. 칼날뿐 아니라 어깨나 팔꿈치, 무릎으로 후려치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겨난 빈틈은 삽시에 피어오르는 황금빛 장막이 막아줬다. 방패를 바짝 치켜든 필립은 가장자리에서 방어에 주력하며 샬롯과 메브를 보조하고 있었다.
채채챙-!
그리고 지금 알프윈을 상대하는 건 메브였다. 그녀는 오목한 부분과 볼록한 부분을 어지럽게 오가는 초승달 검의 변칙적인 궤도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받아 내거나 흘리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요정의 세검을 가볍게 휘둘러 시녀의 머리를 찌르거나 목을 날려 버렸다.
손잡이로 후려치기도 했는데, 은장식이 되어 있어 뱀파이어들에겐 충분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푸욱-!
한순간, 그녀의 세검이 알프윈의 한쪽 어깨를 찔렀다. 알프윈은 두로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검날에 더 깊숙이 몸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놈의 그림자에서 구불구불한 단검과 그걸 쥔 가느다란 팔이 솟아올랐다.
푸스슷-
알프윈의 초승달 검에 그림자 같은 안개가 맺히고, 어느새 어깨 위까지 모습을 드러낸 시녀가 기척 없이 메브의 갑옷 틈을 노릴 찰나였다.
콰직-!
어느새 달려든 이안의 검이 시녀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눈을 치켜뜨는 알프윈에게로 달려들었다.
"주문 쟁이 같은 짓만 하는군."
내뱉음과 동시에 뻗어 나간 쇠주먹이 알프윈의 한쪽 얼굴을 그대로 후려쳤다.
빠각-
아름답던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며 튕겨 나갔다. 주먹에 실린 힘이 어찌나 강한지, 어깨에 박힌 칼날이 살을 찢고 나와버릴 정도였다. 바닥을 나뒹구는 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안이 내뱉었다.
"방심하지 마시오."
메브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가 다시 내달렸다. 지나치는 과정에서 마주친 시녀들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콰직! 서걱-
시녀들 몇이 발악하듯 달려들었지만 이안의 돌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그의 검이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미련 없이 던져버린 이안은 주먹으로 시녀들을 후려치며 지나쳤다.
"캬오오오-!"
샬롯이 포효하며 이안의 뒤를 막았다. 시녀들이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어지럽게 몰려들었다.
'더럽게 정신없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의 시선은 저만치의 장벽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제는 고개를 끝까지 꺾어야 꼭대기가 보였다.
어느새 또 하나의 혈옥을 만들어낸 네이든.
"...!"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눈을 부릅뜨더니 삽시에 주문을 완성했다. 혈옥에서 피의 가시가 소나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안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쿠웅- 쒸아악-!
땅이 움푹 파이면서 그의 몸이 솟구쳤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 푸른 역장이 피어올랐다.
콰지지직-!
쏟아진 피의 가시들이 그 위를 두들겼다. 그를 지나친 게 더 많았지만, 그마저도 때마침 피어오른 신성력의 장막에 막혀 증발했다.
그런데도 네이든의 입가에는 오히려 옅은 미소가 맺혔다.
이안이 그리는 포물선이 그에게 닿을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다음 주문을 준비하면서 그가 씹어 뱉었다.
"헛 힘 쓸 시간에, 가서 저것들이나-"
잠시 빛이 번쩍이더니 그의 몸이 앞으로 새우처럼 굽어졌다.
자루가 은으로 장식된 비수가, 어느새 그의 복부에 깊이 틀어박혀 있었다. 요정의 비수.
"어, 어억…?"
네이든이 신음을 토하며 눈을 치켜떴다. 정점을 지나쳐 장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이안의 모습이 그의 눈에 가득 맺혔다. 옆으로 내뻗은 손에 홀연히 나타나는, 무식하게 큰 대검도.
그제야 네이든은 이안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이 위에 닿을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투척한 단검이 절대 빗나가지 않을 만큼만 가까워지면 충분했던 것이다.
솨아아-
검신을 타고 불그스름한 빛이 번지기 시작한 순간, 네이든의 눈에 여유가 사라졌다. 그가 다급하게 복부에 박힌 비수를 움켜쥐었다.
치이익, 자루에 장식된 은이 그의 손아귀를 붉게 태웠다. 네이든이 이를 악물며 손아귀에 힘을 준 순간.
"내려와, 새꺄."
내뱉은 이안이, 가까워지는 장벽을 향해 온 몸을 비틀며 대검을 내리쳤다.
#162화
뿜어져 나간 바람 칼날이 이안의 속도를 순간적으로 줄였다. 뒤따라 틀어박힌 대검이 장벽을 비스듬하게 가르며 뻗어 나갔다.
이안은 신성력을 끌어올리면서 온 힘을 다해 몸을 휘돌렸다. 온몸의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윽고 검날이 장벽 밖으로 빠져나왔다.
쿠웅-
이안이 등부터 장벽에 처박혔다.
장벽에 빼곡하게 돋은 가시들이 갑옷 위를 두들겼다. 일부는 허리나 팔의 사슬 고리 사이로 파고들어 박혔다.
이안은 미간만 찌푸릴 뿐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회복력을 믿기 때문이었다. 가시를 뽑을 필요 조차 없으리라. 혹여 상태 이상 같은 걸 유발하더라도, 충분히 극복할 자신도 있었다.
우르르르-
충돌의 여파로, 잘려나간 넝쿨들이 그의 앞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뒤엉킨 채 잘려나간 뱀 무더기 같았다. 네이든도 그 사이로 함께 떨어졌다.
철퍽-
피를 흩뿌리는 넝쿨 더미 사이로, 추락한 네이든이 나뒹굴었다. 넝쿨의 가시가 그의 전신에 박혔다. 그는 간신히 뽑아든 요정의 비수를 그제야 땅에 떨어뜨렸다. 단검을 쥐었던 손아귀가 익다 못해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신음조차 토해내지 못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핏물 사이.
쿠웅-
대검을 쥔 이안이 착지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거리였다. 네이든을 내려다본 이안이, 대검을 치켜들며 내뱉었다.
"반갑군."
"제, 제기랄-!"
네이든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옆에 떨어진 흑단목 지팡이를 쥐려 했다.
쒸엑- 콰직-
하지만 자비 없이 떨어진 대검이 그대로 그의 몸을 쪼개 버렸다.
넓적한 검날을 사이에 두고 쩍 갈라진 네이든의 몸에서 한 박자 늦게 피가 치솟았다.
양손으로 자루를 움켜쥔 이안의 눈동자에 불길 같은 마력이 휘몰아칠 찰나.
푸확-!
네이든의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그 사이에서 분리되어 나온 진혈이 장벽 너머로 빨려들듯 멀어졌다. 나머지 피가 힘을 잃고 쏟아졌다. 가뜩이나 진액 덕분에 붉어졌던 이안의 전신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화르륵-
이안의 주위로 불덩이들이 피어올랐다.
뒷북 오지네, 시발.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 창을 닫으며, 이안은 땅을 바라보았다.
피를 흘리며 널브러진 장미 넝쿨들. 토막 난 채 비쩍 말라붙은 네이든의 몸은, 끝에서부터 재가 되어 바스러지고 있었다.
땅은 이 와중에도 쏟아진 핏물을 흔적도 없이 빨아들였다. 이안은 그 사이에서 요정의 비수와 흑단목 지팡이를 주워들었다.
대검과 지팡이를 차례로 아공간에 쑤셔 넣은 그가, 비로소 시선을 돌렸다.
"끼아아아-!"
"캬아아!"
콰직! 쩌억-!
시녀들과 일행의 전투는 아직도 한창이었다. 일행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면서 착실히 적들을 줄여나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녀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몇몇 시녀들이 이안을 향해서도 구불구불한 단검을 뻗으며 달려왔다.
새 검을 꺼내든 이안이 손을 털었다. 그의 주위에 일렁이던 불꽃들이, 기다렸다는 듯 뿜어져 나갔다.
펑- 퍼버벙-
달려들던 시녀들은 물론, 이리저리 날뛰는 무리 한복판에도 폭발이 이어졌다. 불길에 휩싸인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
메브와 접전을 벌이던 알프윈이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의 빈자리는 시녀들이 채웠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내뱉었다.
"네이든 경이 벌써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차분한 말투와 달리, 그의 표정에는 아까보다 여유가 없었다.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는 헝클어졌고, 얼굴에도 끈적한 핏물이 맺혔다.
물론 이안만큼 엉망은 아니었다.
혈인이나 다름없는 몰골로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내뱉었다.
"다음은 너다."
"보아하니 정말 그렇겠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알프윈이, 불현듯 몸을 돌려 내달렸다. 그가 쏜살같이 통로에 가까워졌다.
"...?!"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가운데, 아직 수십 명은 남아 있던 시녀들도 일제히 통로로 달려갔다.
일행과 뒤엉킨 몇 명만이 죽음을 각오한 듯 더 표독스럽게 덤벼들었다.
아니, 진짜 튀는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대응에 당황하면서도, 이안 역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통로에 들어선 알프윈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우글우글 도망치는 시녀들의 뒷모습만이 선명할 뿐.
이안이 소리쳤다.
"다들 따라와!"
샬롯과 눈빛을 교환한 걸 마지막으로, 이안도 통로에 접어들었다.
바람 칼날이 전신을 감싸고, 시녀 무리가 가까워지던 것도 잠시.
"키야아아!"
"죽어엇-!"
불현듯 무리 최후미의 시녀 둘이 몸을 돌리더니 이안을 향해 마주 달려왔다.
단검을 이안을 향해 내던지고는, 손톱이 돋은 양팔을 내뻗은 채였다.
단검을 쳐내며 미간을 찌푸린 이안은, 이내 속도를 줄이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궤적을 따라 뿜어져 나간 바람 칼날이 시녀 하나의 허리를 양단하고 다른 하나의 어깨까지 썰어 버렸다.
하지만 시녀들은 그 정도로는 죽지 않았다. 몸이 잘려나가는 와중에도, 기어코 이안을 붙잡으려 내뻗은 손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결국 땅에 발을 찍어 멈춰 서며, 이안이 주먹을 내뻗었다.
꽈직!
신성력과 가속도가 더해진 주먹이 상반신만 남은 시녀의 머리를 말 그대로 으깨 버렸다. 한쪽 안면이 움푹 들어간 시녀가 옆의 장벽에 처박혔다.
하나 남은 팔을 내뻗던 시녀의 정수리로는 검날이 틀어박혔다.
'논개 작전인가…?'
여기서도 그렇게 부르진 않겠지만, 어쨌든 효과는 있었다. 좁아졌던 시녀들과의 간격이 다시 저만치까지 벌어졌다. 이안은 혀를 차면서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일행의 발소리와 숨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샬롯을 필두로 다들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어차피 통로는 하나뿐이니, 저들이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이안은 시녀들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내달렸다.
'내 뒤를 따라오던 것들도 이런 기분이었나…?'
묘한 감흥이 뒤를 이었다.
쫓기는 상황은 많이 겪었지만, 이렇게 적들의 뒤를 따라가는 건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저것들은 그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네이든도 그를 사신 취급하지 않았던가.
물론, 저것들이 지금 도망치는 건, 그저 그가 두려워서만은 아닐 터였다.
'함정이 있거나, 다른 놈들과 합류할 생각이겠지.'
어렵지 않게 유추하면서도, 이안은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저것들이 아니라도 마주치게 될 함정이고, 마주치게 될 적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그를 막지 못하면 죽게 되는 건 저것들도 마찬가지 같지 않던가.
저런 식으로 내내 도망만 다닌다면, 지금까지 그랬듯 진혈이 뽑혀 죽게 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이, 문득 짧게 혀를 찼다.
진혈을 회수한다는 건, 여제가 그만큼 점점 더 강해진다는 의미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진혈을 많이 품은 부작용이 없진 않겠지만, 그게 당장 그에게 의미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부조리한 상황이었다.
그를 지치게 하는 전투가, 반대로 상대를 강하게 만들고 있다니.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저 한 줌이라도 더 많은 진혈을, 회수할 수 없도록 태워버려야 겠다고 생각할 뿐.
"키아아-!"
"캬아아악!"
그 와중에도 시녀들은 계속해서 둘씩 짝을 지어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안은 그때마다 평등한 죽음을 선사하고, 다시 조금 더 거리가 벌어진 시녀들의 뒤를 쫓았다.
어느새 좌우의 넝쿨 장벽은 본래의 높이로 되돌아와 있었다. 처음 싸웠던 공터 인근의 장벽들만 급속도로 자랐던 모양이었다.
시녀들의 뒷모습은 코너를 돌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놓치지 않았다.
이안은 어쩌면 알프윈은 이미 저기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의 시선을 끌기 위한 미끼에 불과할지도.
"...!"
이안의 미간이 좁아진 건, 그렇게 세 번째 코너를 돈 직후였다.
저 멀리, 이미 다음 코너에 들어선 시녀들이 우르르 멀어지는 가운데.
꾸득- 뿌드득-
방금까지 장벽이던 정면에서 넝쿨이 밀려나며 새로운 통로가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녀들이 지나친 길은 장벽에서 밀려 나온 넝쿨들이 다시 막아버리는 중이었다.
길이 바뀐 것보다 더 이안의 시선을 잡아 끄는 건, 새로 나타난 통로 저 끝에 우두커니 선 남자였다.
얼굴에 나무판자를 대충 엮은 가면을 쓰고, 핏물이 잔뜩 배인 앞치마를 두른 거한. 손에는 커다란 정원용 가위를 들고 있었는데, 날도 녹이 슨 것처럼 붉었다.
'공포 영화 살인마가 따로 없네.'
생각한 순간, 눈앞에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미로 저택의 정원사.
입가에 헛웃음을 머금은 것도 잠시, 이안은 더 속도를 높였다.
어차피 길은 이미 바뀌었으니, 저놈이라도 반드시 죽여야 했다.
보아하니 정원사는 미궁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 같았으니까.
저놈을 놓쳐서 계속 길이 달라진다면, 말 그대로 영원히 미로를 배회하게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전에 다른 대책을 찾아내겠지만, 그보다 여기서 저놈을 죽여버리는 게 훨씬 손쉽고 확실한 해결책이었다.
"우오오-!"
정원사가 가위를 철컥대며 포효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의 전신에서 불그스름한 마력이 번져 넝쿨 장벽으로 스며들었다.
촤악- 촤아악-!
지나친 코너 너머에서부터 회초리를 휘두르는 듯한 소리가 번졌다.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본 필립이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나리! 더 빨리 뛰십시오! 다들 더 빨리 뛰세요! 으아아!"
저 너머의 장벽 윗부분이 파도치듯 크게 출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넝쿨이 차례로 구부러져 땅을 후려치고 올라갔다. 이대로면 삽시에 그들이 지나치는 통로까지 밀려들 터였다.
"...!"
차례로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일행이 젖먹던 힘을 다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원사가 아니라 조련사 아닌가?
생각하며 다시 앞을 바라본 이안의 미간이, 이내 더 일그러졌다.
어느새 정원사가, 양손에 밑동을 자른 넝쿨을 몇 가닥씩 꼬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신으로 마력이 일렁였다. 그가 잘린 넝쿨의 단면을 맞붙였다. 하나로 이어진 넝쿨이 뱀처럼 스르륵 움직여 그의 뒤로 기어갔다. 곧 몸을 숙인 정원사가 한 손으로는 땅에 박아 둔 정원 가위를, 다른 한 손으로는 넝쿨의 끄트머리를 움켜쥐었다.
다시 허리를 편 그가 넝쿨을 쥔 오른팔을 힘껏 휘둘렀다.
촤아악-!
배배 꼬인 줄기가 통로 바닥에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채찍이 따로 없었다. 단면을 이어 붙인 만큼, 엄청나게 길어진 가시 채찍이었다.
"으하하하하-!"
연달아 앞뒤로 채찍을 휘둘러 대면서, 정원사가 가래가 끓는 듯한 대소를 터뜨렸다.
미친 새끼가 따로 없네, 진짜.
이안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덩치만 봐도 보통 괴력을 가진 놈이 아닐 터였다. 축복을 받는 그나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필립이라면 버틸 수도 있겠지만. 투구조차 쓰지 않은 샬롯은 물론 전신 갑옷을 걸친 메브도 저기 휩쓸리면 무사하리라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순간에도 쓰러졌다 올라가는 넝쿨 장벽의 물결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필립의 외침이 이어졌다.
"나, 나리! 뒤! 뒤에!"
또 뭔데, 시발.
이안은 마력이 몰아치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장벽의 물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가 다시 나타나는 통로 저 너머. 어느새 알프윈과 시녀들이 서 있었다.
정원사의 도움으로 작게 한 바퀴를 돌아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화르르륵-
이를 가는 이안의 주위로 춤추는 불꽃이 연달아 피어올랐다. 혼돈력을 머금어서 평소보다 훨씬 더 많아진 채였다. 이안은 지체하지 않고 정원사를 향해 일제히 불꽃을 내뻗었다.
퍼버버버벙-
떨어져 내리는 가시 채찍에 휘말린 불꽃이 반 가까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정원사는 물론 정원사 주위의 장벽까지 쏟아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정원사가 채찍질을 멈추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화력이었다.
이안이 안도의 한숨을 삼키는 사이.
"그워어어어-"
불길에 휩싸인 정원사가 울부짖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고통스러운 듯한, 겁에 질린 것 같은 비명이었다. 물론 전혀 애처롭지는 않았다.
다음 순간 놈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마력이, 불길 대신 검붉은 연기에 휩싸여 있던 주위의 장벽을 물결처럼 출렁이게 했다.
촤아아아아-
뒤에서 이어지는 파도의 속도가 더 빨라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환장하겠네, 진짜.
이안이 다음 대책을 강구할 찰나.
"안 되겠습니다! 다들 엎드리십쇼! 절 믿으시고요!"
필립이 오른팔을 내뻗으며 소리쳤다. 그의 검에서 눈부시게 피어오르는 황금빛을 확인한 이안이, 그대로 속도를 죽이며 몸을 날렸다.
"다들 바닥에 붙으세요!"
샬롯과 메브까지 몸을 날리는 걸 확인한 필립이, 마지막으로 검을 내뻗으며 몸을 날렸다.
동시에 그의 검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그대로 황금빛 장막이 되어 일행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얼마나 신성력을 아끼지 않았는지, 이안을 지나쳐 저 앞까지 뻗어나갈 정도였다.
촤아아악-
그리고 장벽의 물결이 그 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일행은 그저, 등에 뜨거운 무언가가 닿았다가 떨어지는 느낌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눈부신 장막에 닿은 순간, 가시와 넝쿨이 재가 되어 타들어 간 덕분이었다.
가시 파도가 일행을 지나쳤다.
신성 장막이 흩어지면서 만들어진 반딧불 같은 빛무리가, 넝쿨 장벽에서 떨어져 나온 가시와 뒤엉켜 나부끼는 가운데.
"하…."
짧은 한숨을 내쉰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잦아드는 장벽의 파도 너머, 열기에 휩싸여 울부짖는 정원사에게 여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뒤따라 샬롯과 메브도 일어서는 가운데.
"것 보십시오!"
의기양양한 얼굴로 튕겨 오르듯 일어선 필립이 소리쳤다.
"제가 저만 믿으라고 말씀드렸- 으헉!?"
말하다 말고 화들짝 몸을 돌린 필립이 반사적으로 왼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보다 날아든 검은 궤적이 더 빨랐다.
콰직, 짧은 소리와 함께 필립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일행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멈칫하던 필립이 허물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필립-!"
#163화
달려 나간 메브가 쓰러지는 그의 몸을 받아들었다.
그제야 필립의 왼쪽 어깻죽지에 튀어나온 단검 자루를 눈에 담은 이안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
흐릿해지는 검은 궤적 너머. 손을 내뻗은 알프윈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시녀들이 쓰던 단검을 던진 것이리라.
이안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가라앉는 그때.
"으오오오-"
뒤에서 정원사의 겁에 질린 비명과 꾸득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멈칫한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연기에 휩싸인 채 허우적대며 몸을 돌리는 정원사. 그리고 다시 스멀스멀 모여드는 넝쿨들.
다시 본래의 장벽으로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리 멀지 않아서, 지금이라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달려가는 대신, 짧게 입맛만 다시며 검을 고쳐 쥐었다. 그가 다시 알프윈 쪽을 돌아보려는 찰나.
솨아아-
피어오른 황금빛 장막이 넝쿨 사이를 가로막았다. 신성력에 닿은 장미 넝쿨들이 타들어 가고,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십시오, 나리. 놓치면 안 될 놈입니다…."
미간을 좁힌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메브의 품에 안겨 옆으로 옮겨지는 그는, 안색이 창백한 와중에도 오른손을 내뻗고 있었다.
어깻죽지의 단검은 뽑지도 않은 채였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 무슨.
"헛소리 말고-"
"괜찮다, 이안. 가거라."
말을 자른 건 필립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메브였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달려오기 시작한 시녀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전신에는 검붉은 신성력이 끈적하게 번지고 있었다.
세검을 고쳐 쥐며, 그녀가 덧붙였다.
"저것들은 내게 맡겨다오. 단 하나도 살려 두지 않을 테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
샬롯이 이안을 바라보는 가운데, 필립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서요, 나리. 성물의 힘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비로소 혀를 찬 이안이 몸을 돌렸다.
"버티시오. 둘 다."
내뱉은 그가, 신성력에 타들어 가면서도 꾸역꾸역 밀려드는 넝쿨 사이로 몸을 날렸다.
필립에게 고개를 끄덕인 샬롯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퍼석-!
둘이 지나치기가 무섭게 장막이 흩어졌다. 재가 된 넝쿨들을 밀어내며, 순식간에 벽이 메꿔졌다.
장벽 너머에서 시녀들의 비명이 메아리치고, 뒤이어 붉은 섬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벽 하나 사이라기엔 멀게 느껴지는 소리였지만,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감각의 왜곡은 어차피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허우적대며 도망치는 정원사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단 한순간도 저놈을 시야에서 벗어나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언제든 미로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놈이었으니까.
만약 그렇게 놓친다면, 두고 온 동료들에게 면목이 없으리라.
"으어어어어-"
우스꽝스럽고 둔해 보이는 자세로 달리고 있음에도, 정원사는 상당히 빨랐다.
하지만 투쟁의 축복을 활성화한 이안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워어어억-!"
점점 가까워지는 이안을 돌아보며 겁에 질린 듯 울부짖던 정원사가, 곧 널찍한 공터로 들어섰다.
놈이 손의 가위를 다급하게 철컹댔다. 통로 좌우의 넝쿨들이 스멀스멀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땅을 박찼다. 좁아지는 입구를 여유롭게 통과한 그가, 곧 공터를 가로지르고 있는 정원사를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다.
혼돈력으로 증폭되고 신성력까지 실린 바람 칼날이, 놈의 두꺼운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끄어어억!"
두 다리가 허벅지 아래로 잘려 나간 정원사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뒤따라 몸을 날린 샬롯이 아슬아슬하게 공터로 들어서는 가운데, 이안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가 정원사의 머리를 노려보며 검을 치켜들 찰나.
쒸에엑-
"...!"
불현듯 새카만 궤적이 날아들었다. 몸을 비튼 이안이 검을 떨쳤다.
검은 궤적이 잘려나가고, 거의 동시에 증발해 사라졌다.
정원사를 지나친 이안이 바닥을 구르며 착지하는 사이.
"이걸 자르다니? 역시 대단하군, 으히힛…!"
장벽 위에서 거슬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골격이 얇고 길쭉한, 거무튀튀한 가죽으로 만든 딱 달라붙는 옷을 걸친 남자였다. 가죽 두 장을 기워 만든, 코 위까지 가리는 가면까지 뒤집어쓴 채였다.
이안을 방해한 건, 그의 손에 들린 채찍이었다. 손잡이 아래로는 그림자로 만들어진 것처럼 새카맣게 아른거렸다.
"...."
이안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고문 기술자라는 이름으로 떠오른 퀘스트 창조차 바로 닫아 버린 채, 그가 다시 정원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으, 으어어-"
잘린 다리를 주워든 채 주춤주춤 기어가던 정원사가 몸을 움츠리는 가운데.
슈확-
새카만 보호막이 원을 그리며 놈을 감쌌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표면을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보호막은 깨지지 않았다. 부러진 건 오히려 그의 검이었다.
방해가 왜 이렇게 많아, 시발.
비로소 이안이 짜증스럽게 부러진 검을 내던지는 사이.
"저 머저리를 우리 손으로 구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역시 용살자는 무섭네. 그렇지, 언니?"
뒤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번졌다.
"...!"
샬롯의 눈이 커졌다. 전신의 털과 갈기가 삽시에 곤두서는 듯 했다.
아공간에서 새 검을 꺼내 들면서, 이안은 장벽 위에 나란히 선 백금발의 두 뱀파이어를 눈에 담았다.
너희가 그 쌍둥이냐는 질문은 할 필요도 없었다.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이 생겼으니까. 또 다른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그림자 자매.
이안은 창을 닫음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촤아악-!
그림자 채찍이 그가 서 있던 주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어느새 장벽 위를 내달린 고문 기술자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듣던 대로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이군…! 네 그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지는 걸 꼭 보고 싶어, 용살자!"
진짜 전형적으로 미친 것들이네.
이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보호막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당연하게도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정원사가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모양.
그냥 부서질 때까지 부숴 봐?
"...!"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쌍둥이 중 하나가 장막 위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첫째였다.
그녀의 붉은 눈을 마주 본 순간, 이안은 시야가 그 눈을 중심으로 왜곡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붉은 눈동자 안쪽이 기묘한 파형을 그리며 일렁였다.
눈을 마주 본 순간 홀린다더니.
하지만 이안의 의식을 완전히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안은 혼돈력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 어긋났던 감각을 단숨에 되돌렸다.
시야가 명료해짐과 동시에, 이안이 왼팔을 털었다.
퍼억-!
미간에 단검이 박힌 자매의 고개가 뒤로 튕겨 나갔다. 다음 순간 그녀가 휙, 장막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시 자신의 자매의 곁에 솟아올랐다.
미간에 박힌 단검을 뽑으면서, 그녀가 읊조렸다.
"역시 안 통하네. 그래도 이렇게 쉽게 떨쳐낼 줄은 몰랐는데. 너랑은 딴판이야, 안 그래 야옹아?"
동시에 고개를 돌린 자매의 얼굴에 이내 비웃음이 번졌다.
어느새 안대로 단단히 눈을 가린 샬롯이, 송곳니 검과 은검을 동시에 뽑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갈기가 고요한 살기를 머금고 일렁이는 가운데, 둘째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대책이라고 가지고 온 거야? 그 몰골로 싸울 수나 있겠어?"
샬롯이 대답 대신 몸을 날렸다.
"아, 그래. 싸울 수 있구나?"
"이번엔 또 얼마나 재롱을 부릴지 기대되네."
낭랑한 말투와 달리 가라앉은 눈빛이 된 자매가 물러나는 가운데.
"아하하! 드디어 내게도 관심을 보이는구나!"
다시 한번 채찍을 휘둘렀던 고문 기술자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이안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놈은 그러면서도 채찍을 쥔 팔을 다시 한번 크게 털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궤적을 바꾼 채찍이 기다랗게 늘어나며 이안의 측면을 노렸다.
이안의 주위로 마력 역장이 피어올랐다.
콰지직-
채찍은 역장에 막히고도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표면을 기어올라 반대편까지 넘어갔다. 가늘어진 채찍이 기어코 이안에게 도달했다.
이안이 그 궤적 앞으로 왼팔을 내뻗은 건 거의 동시였다.
촤르륵-
채찍이 기다렸다는 듯 이안의 팔을 휘감았다. 동시에 그 안에 담긴 마력이 이안의 전신으로 퍼졌다.
파슥, 마력 역장이 깨지는 가운데 고문 기술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잡았다…! 이제 너는 내가 만든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채찍을 끌어당기던 고문 기술자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분명 그의 마력은 이안에게 극한의 고통을 전해 주고 있건만.
이안은 비명은커녕 여전히 표정조차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휘두르는 대로 끌려오지도 않았다.
카가각-
뒤꿈치를 땅에 찍으며 멈춰선 이안이, 채찍이 감긴 왼손으로 한 번 더 채찍 한복판을 콱 움켜쥐고는 힘껏 끌어당겼다.
으스러질 듯 자루를 쥐고 있던 고문 기술자의 몸이 휙, 그에게로 딸려 들어갔다.
마력을 밀어 넣는 동안의 채찍은 본래처럼 마구 늘어날 수 없었다.
"너, 고통을-?"
놀란 목소리로 내뱉던 고문 기술자의 눈동자에, 붉은 신성력이 가득 맺혔다.
서걱-!
눈동자 한복판에 닿은 검날이, 놈의 머리를 가로로 가르고 지나갔다. 그대로 왼팔을 뻗은 이안이 놈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땅에 내리찍었다. 눈동자가 붉게 물들고, 손아귀에 화염구가 피어올랐다.
콰앙!
손아귀에서 폭발한 화염구는 고문 기술자의 가슴을 말 그대로 뻥 뚫어 버렸다. 신성력을 머금은 이안의 손은 손가락 하나조차 날아가지 않았다.
이안이 비로소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느껴. 참았을 뿐이지."
지독한 고통이었다. 그 때문에 불필요한 신성력을 낭비했다. 하지만 무작정 손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이번엔 진혈을 완전히 태워 버렸으니까.
가슴이 터지고 머리 절반이 날아간 고문 기술자가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퍼석, 그때까지 왼팔에 감겨있던 그림자 채찍이 자루만 남긴채 사라졌다.
왼팔을 툭툭 털며 일어선 이안은, 저 반대편의 장벽 위에서 날뛰고 있는 샬롯을 눈에 담았다.
콰직-! 서걱-!
좌우로 흩어진 자매가 서로의 그림자를 번갈아 오가며 도망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샬롯은 개의치 않고 집요하게 따라붙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그 과정에서 온몸에 넝쿨의 가시가 박히고, 자매들이 날리는 그림자 칼날에 살가죽이 찢어지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다.
"캬오오-!"
오히려 그럴수록 더 크게 울부짖으며 날뛰었다.
이안은 그녀를 도우러 달려가는 대신, 그저 시선을 돌렸다.
그날의 일을 수없이 곱씹으며 복수를 꿈꾸던 그녀였다. 그러니 자신의 손으로 매듭지을 기회는 줄 생각이었다. 그게 성공으로 끝나건 실패로 끝나건 간에.
'뭐, 죽게 놔두진 않겠지만.'
적어도 그게 당장은 아니겠지.
생각하며, 이안은 균열이 번지는 보호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에서 정원사가 날뛰고 있었다.
쩍, 쩌적- 쩌엉-!
곧 보호막을 깨뜨리며, 가위를 치켜든 정원사가 솟아올랐다.
놈이 멀쩡해진 몸으로 울부짖었다.
"으오오오-"
주위의 장벽이 파도치듯 꿈틀대는 가운데.
쒸에엑-!
붉은 궤적이 놈의 한복판으로 날아들었다.
가면 아래, 정원사의 눈이 커졌다.
"으워어억!"
놈이 발작적으로 가위를 내뻗었다.
***
콰지지직-
살덩이가 찢겨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생이 샬롯의 공격을 피하는 것을 확인하던 첫째가, 눈을 치켜뜨며 옆을 돌아보았다.
"...!"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쪽 어깨가 통째로 잘려나간 정원사의 모습이었다. 이안은 놈을 지나쳐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으워어어어억-!"
정원사가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냈다. 마구잡이로 뿜어낸 마력이 주위의 넝쿨들을 놈의 주위로 끌어당겼다. 이안은 촉수처럼 뻗어오는 가시넝쿨을 이리저리 몸을 날려 피했다.
"조용히 있을 것이지. 모자란 녀석…."
혀를 찬 첫째가 장미 꽃잎을 입에 넣으며 마력을 끌어올린 찰나였다.
쉬학-
머리 위로 문득 바람이 불었다. 고개를 든 첫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나부끼는 새카만 갈기. 그리고 말려 올라간 채 번뜩이는 뾰족한 송곳니였다.
어느새?
내심 경악한 첫째는 그림자 가시를 내뻗으며, 동시에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건 샬롯이 예상한 그대로의 움직임이었다.
푸욱-!
바닥에 깔리듯 밀려들던 송곳니 검이, 그림자 속으로 떨어지던 첫째의 가슴팍을 낚아채듯 꿰뚫고 치솟았다.
"아윽…?!"
첫째의 눈이 커졌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고통.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은검이 아니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양손을 움켜쥐었다. 멈칫했던 두 가닥 그림자 가시가 곧바로 다시 뻗어 나가 샬롯의 양쪽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는 밀어내듯 점점 더 깊이 박혔다.
하지만 샬롯은 물러나지 않았다.
콰직-!
그녀가 그대로 첫째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목덜미가 통째로 으깨질 정도의 엄청난 치악력이었다,
"언니-!"
뒤에서 자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첫째는 오지 말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치이익-
샬롯의 은검이 아주 천천히, 그녀의 복부를 가르며 파고들고 있었으니까. 살을 태우며 비스듬하게 밀려든 검날이, 이윽고 터질 것처럼 뛰는 그녀의 심장에 닿았다.
"...!"
고개를 쳐든 첫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푸스스, 샬롯의 옆구리를 꿰뚫었던 그림자 가시가 사그라들었다.
첫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샬롯이, 비로소 목덜미를 물고 있던 입을 뗐다. 뱀파이어의 피와 살이 입안에 가득했다. 평생 잊지 못할 복수의 맛.
"안 돼애애애-!"
찢어지는 비명이 이어졌다.
첫째를 검에 매단 채, 샬롯이 몸을 돌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감각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했다.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기척과 그녀를 향해 밀려드는 수많은 그림자 가시들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
샬롯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팔을 휘둘러, 재가 되기 시작한 첫째를 밀려드는 그림자 가시 쪽으로 내던졌다.
다음 순간 그녀가 몸을 날렸다.
검을 고쳐 쥐는 수인의 입에서,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포효가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
콰지지직-!
나무 가면 한복판으로 떨어진 검이, 정원사의 목 아래까지를 세로로 가르며 멈춰 섰다.
"으… 어어억…."
나지막한 신음을 토하는 정원사의 머리가 좌우로 쩍 갈라졌다.
마찬가지로 토막 난 나무 가면이 벗겨졌다. 그 아래로 묘하게 어린 아이 같은 느낌이 드는 기괴한 얼굴이 드러났다. 피가래 끓는 소리를 토해내는 놈의 얼굴에는 순수한 고통과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잿빛으로 일렁이던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퍼억-!
진공 폭발이 정원사의 머리와 가슴팍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작은 살점으로 변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안은 그 사이로 드러난 속살에 더 깊이 검을 내리누르며 화염구를 만들어 냈다.
퍼엉-!
비대한 가슴팍이 폭발과 함께 터져 나갔다. 견디지 못한 검날이 또다시 산산이 조각났다.
이안은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정원사의 몸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파스슥-
정원사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동시에 사방에 출렁이며 뻗어 나오던 넝쿨들이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반도 남지 않은 검을 휙 던져버리면서, 이안은 다음 검을 꺼냈다.
어느새 아공간에 남은 장검은 세 자루밖에는 되지 않았다.
가죽 띠에 남은 단검도 요정의 비수 뿐이었다.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 창을 확인하면서, 이안은 아공간에 다시 손을 넣었다.
그가 마지막 남은 두 자루 투척용 단검을 꺼내 가죽 띠에 끼워 넣는 사이.
"...!"
눈앞으로 또 다른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집사와 시녀들.
메브가 알프윈을 죽였다는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보단 퀘스트 완료창이 떴다는 사실 자체가 이안을 놀라게 했다.
'퀘스트를 받기만 하면, 꼭 내가 죽이지 않아도 상관없는 건가…?'
어쩌면 그가 메브를 동료로 인정하고 있기에 가능한 상황인지도 몰랐다.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끼아아아악-!"
저만치의 장벽 위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린 이안의 눈에 보인 것은 몇 개의 그림자 가시에 찔린 샬롯. 그리고 그녀의 은검에 꿰뚫려 비명을 지르는 마지막 쌍둥이였다.
비명은 곧 잦아들었다.
샬롯을 꿰뚫었던 그림자 가시들이 부스스,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이안의 눈앞으로 다시 한번 퀘스트 완료창이 떠올랐다.
샬롯이 털썩 주저앉은 건 그 직후였다.
"----!"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전신이 그야말로 만신창이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야성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정말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내심 생각하던 이안은, 다음 순간 득달같이 몸을 날렸다.
포효를 끝낸 샬롯의 몸이 기울어지더니, 그대로 장벽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양손의 검은 놓치지 않은 채였다.
촤아악-!
그녀를 받아든 이안이 장벽에 등을 부딪치며 멈춰 섰다.
여전히 안대를 뒤집어쓴 샬롯이 붉게 물든 송곳니를 드러냈다.
후련해 보이는 미소였다.
"성공했다… 이안."
"그래. 봤다."
대충 대답하면서, 이안은 그녀의 상태부터 살폈다.
몸 곳곳에 가시가 잔뜩 박혀 있었다. 넝마가 된 부츠 아래로 드러난 맨발과 다리, 팔뚝에는 특히 더 많았다. 거기다 몸 곳곳에 긁히고 찔린 상처도 여럿이었다.
아무리 생명력이 뛰어난 수인이라도 단시간에 회복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마경 한복판에서는 특히.
이안은 곧바로 문신의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력과 혼돈력을 능수능란하게 다뤄 온 입장에선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건?"
움찔 어깨를 떤 것도 잠시, 샬롯이 이내 내뱉었다.
"힘을 아껴라, 이안. 나는 잠깐 쉬기만 하면 돼."
"입 다물어. 널 여기 두고 갈 건데, 그냥 버려둘 수는 없거든?"
"그런 거라면…."
샬롯에게 흘러든 카르하의 신성력은 곧바로 흩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뭉근하게 고였다가 이윽고 전신으로 번졌다.
어쩌면 자신만의 투쟁을 완수한 전사를 알아본 걸지도 몰랐다.
샬롯의 표정이 조금씩 편해질 찰나.
"이런… 한 발 늦어 버렸군…."
반대편 통로 쪽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번졌다. 번쩍 고개를 치켜드는 샬롯의 머리를 다시 꾹 내리누르면서, 이안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에 담았다.
지금까지의 뱀파이어들과 달리, 비쩍 마르고 볼품없게 생긴 중년 남자였다. 머리털은 물론, 눈썹이나 수염도 없어서 한층 더 기괴한 인상이었다.
게다가 발 아래 드리운 그림자가 이상할 정도로 거대했다.
"뭐… 상관 없겠지…."
의욕 없이 중얼댄 그가 팔을 들었다. 그림자에서 거대한 형체가 솟아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여러 개의 인간 몸통을 커다란 덩어리로 이어붙인 몸체에, 수많은 팔다리가 제멋대로 돋은 거대한 실험체였다.
"...!"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 글자들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거대한 실험체의 몸체 위, 홀로 불쑥 솟아 있는 상반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창백한 은발. 비쩍 마른 어깨. 그리고 낯익은 이목구비.
이안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춘 그때, 붉은 안광이 번졌다.
"드디어 왔구나… 계속 기다렸어."
이어진 목소리에, 누워있던 샬롯의 고개가 다시 번쩍 위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이안도 막지 않았다.
"그럼 이제…."
굳어진 이안과 더듬대는 손길로 안대를 쥐는 샬롯을 번갈아 바라 본 테사이아가, 우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나 좀 살려줘, 얘들아."
#164화
안대를 벗고 거대한 괴물을 눈에 담던 샬롯의 주황색 눈동자가, 이내 멍하니 풀어졌다.
괴물의 몸통에 허리 아래와 양팔이 박힌 형상인 테사이아를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테사…."
샬롯이 탄식하는 가운데, 맥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제께서 보낸 선물이오, 용살자…."
이안의 눈빛이 우묵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이 테사이아를 지나쳐 뱀파이어에게로 향했다.
제작자. 새로 받은 퀘스트의 이름이기도 했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전하라 하셨소. 그리고 이건… 내가 준비한 선물이오."
제작자가 여전히 내뻗고 있던 팔을 들썩였다. 길고 깡마른, 손톱이 보기 싫게 자란 창백한 손이 악기를 연주하듯 꿈틀댔다.
철퍽- 터억-
그의 그림자에서 또 다른 괴물들이 우글우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동물과 마물을 멋대로 접붙인 키메라. 그리고 밖에서 본 것보다 더 커다란 구울 실험체들이 연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쉬고 있어라."
내뱉은 이안이 일어섰다. 테사이아를 멍하니 마주 보던 샬롯이 화들짝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
이안은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키메라와 실험체들이 순식간에 통로 앞과 공터를 가득 채우며 늘어섰다. 놈들은 곧바로 달려들지 않고 이안을 노려보기만 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이안."
테사이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목 아래로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도와줘, 이안-"
"여길 지나가려면 내 작품들을 전부 죽여야 할 것이오…."
제작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작고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그러니 이왕이면… 그냥 죽어 주셨으면 좋겠군…. 귀하는 아주… 값진 재료가 될 것 같거든…."
"…그렇다는군."
검을 검집에 되돌린 이안이 오른팔을 옆으로 내뻗으며 말했다. 그 옆으로 거대한 대검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테사이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그가 덧붙였다.
"미안하게 됐다. 테사."
"왜, 왜 사과를 하는 거야, 이안?"
무표정한 얼굴과 덤덤한 목소리와 달리, 이안의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력은 타오르듯 이글대고 있었다.
테사이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사이, 거뭇한 마력이 키메라와 실험체들 사이로 번져 나갔다.
고막을 긁는 듯한 숨소리가 번졌다.
이안이 한 발 먼저 몸을 날렸다.
대검이 거대한 붉은 궤적을 그리며 뿜어져 나갔다.
콰지지지직-!
휩쓸린 키메라와 구울 실험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검은 마력을 머금은 괴물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거대한 실험체의 일부가 된 테사이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몸통에 달린 수많은 팔다리가 난폭하게 움직이는 것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충격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나, 나도 죽이겠단 거야, 이안? 아니지? 날 구해주려는 거지?"
콰드드득-!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멈추지 않고 대검을 휘둘렀다. 곰의 몸통에 박쥐의 날개, 계곡 거미의 머리를 가진 키메라가 독액을 뿜던 그대로 찢겨 나갔다. 그 너머, 인간 넷을 이어 붙여 만든 실험체도 반으로 토막 났다.
이안은 놈들의 토막을 어깨로 후려치고, 뒤따라 밀려드는 놈들은 주먹으로 찍어 버리면서 다시 대검을 내뻗었다.
오로지 죽음만을 만들어 내는 궤적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은 테사이아의 눈에서, 왈칵 피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야…! 나라고, 이안! 이건 내 의지가 아니야. 내가 원해서 움직이는 게-"
콰직-!
이안과 그녀 사이를 가로막던 실험체 하나가 대검에 휩쓸려 터져 나갔다. 붉은 피보라가 치솟았다.
"안 돼! 이안! 잠깐만…!"
어느새 뒤따라온 샬롯이 소리쳤다. 양손에 이가 나간 송곳니 검과 반 토막이 난 은검을 든 채였다 신성력을 머금고 아물던 상처들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왔다.
"저건 테사다, 이안…! 저딴 몰골이 되었어도 테사야! 구할 방법이 있을 거다. 그러니 제발-"
내뱉던 샬롯이 멈칫댔다. 이안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휘두르던 대검을 끝까지 내뻗으면서, 그가 내뱉었다.
"빠져 있어. 너까지 죽을 수도 있으니까."
"...!"
샬롯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부러질 듯 이를 악문 그녀의 눈동자에 분노가 차올랐다.
그녀가 주위에 가득한 괴물들을 돌아보았다. 흉포한 야수의 눈은 곧, 놈들의 뒤편으로 설핏 드러나는 제작자의 위치를 찾아냈다.
"----!"
샬롯이 울부짖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속에 고여 있던 신성력이 일제히 표면으로 드러나 붉게 타올랐다.
갈기를 불길처럼 휘날리며, 샬롯이 몸을 날렸다.
꽈드득-!
그 사이에도 이안은 테사이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군단장의 대검이 붉은 궤적을 그릴 때마다 한 줄씩의 공간이 썰려 나갔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테사이아의 눈에는 피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안이 정말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배신감보다 더 큰 감정은 공포였다.
콰직-
그리고 마침내, 대검을 내뻗은 이안이 그녀의 앞에 도달했다.
테사이아가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살려 줘, 이안…."
말과 달리 그녀의 거대한 몸체는 이안을 짓이겨 버리려는 듯 달려들고 있었다. 팔다리가 제멋대로 돋은 거대한 몸통 한복판이 세로로 쩍 갈라지고, 트롤의 송곳니가 가득 박힌 거대한 아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은 물러나지 않고, 양손으로 고쳐 쥔 대검을 올려 쳤다.
콰지지직-!
붉은 궤적이 아가리를 가로로 길게 훑고 지나갔다. 십자 형태로 변한 아가리 주위에서 붉은 피와 내장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악-!"
테사이아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점처럼 수축된 그녀의 동공이 뒤흔들렸다.
"아파…! 이안…! 아파아아아!"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몸통은 이안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한복판으로 화염구를 쏘아 올린 이안이 물러났다.
쩌엉-!
땅을 내리찍은 테사이아의 몸통 속에서 작은 폭발이 일었다. 피눈물을 철철 흘리는 그녀가, 바로 앞에 선 이안을 내려다보며 되뇌었다.
"살려 줘, 이안. 살고 싶어, 나… 나, 살고 싶어…."
"미안하다."
이안이 씹어 뱉었다. 테사이아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그가 늘어뜨린 대검을 치켜들었다.
"네 복수는 반드시 해 주마."
콰지지직-!
그의 좌우로 달려들던 두 마리의 키메라가 하나의 궤적에 토막 났다. 그대로 몸을 휘돌린 이안이, 테사이아를 향해 뛰어올랐다.
"싫어어어어-!"
테사이아가 절규했다. 동시에 마력을 머금고 회복하던 그녀의 몸체가 펄쩍대며 뛰어올랐다.
콰지지직-!
덕분에 이안의 대검은 몸통에 달린 팔과 다리 몇 개를 잘라내고, 그 옆에 선 실험체들을 대신 휩쓸고 지나갔다.
"...."
미간을 찌푸린 이안의 눈동자가, 멀어지는 테사이아의 뒤를 쫓았다.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 건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서걱! 콰직! 콰직!
전신에 불길 같은 신성력을 머금은 채 돌진하는 샬롯.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선 제작자.
"빠져 있으라니까…."
혀를 차며 읊조린 이안이 대검을 고쳐 쥐었다. 곧이어 휘몰아치기 시작한 붉은 궤적이 주위를 휩쓸었다.
***
"훌륭한 재료가 또 있었군…."
제작자의 목소리에 응답하듯, 샬롯은 짧은 포효를 터뜨렸다.
신성력을 머금은 갈기가 타오르듯 일렁였다. 그녀의 양손이 쉴 새 없이 궤적을 만들어 냈다. 괴물들을 일방적으로 썰어 대고 있음에도, 그녀의 움직임에는 여유가 없었다.
전신으로 번지는 신성력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힘이 다하기 전에 제작자를 죽이지 못한다면, 더는 싸울 수 없게 되리라.
"물러나! 멍청아!"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눈을 치켜뜬 샬롯이 뒤로 펄쩍 물러났다.
콰앙! 테사이아의 거대한 몸통이 그 아래 서 있던 키메라를 짓이기며 떨어져 내렸다.
몸통 곳곳에 돋아난 팔과 다리가 샬롯을 낚아채려는 듯 뻗어 나왔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염려 마라 짐승아… 그 후엔 네 친구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테니…."
중얼댄 제작자가 검은 마력을 흩뿌리며 물러났다.
피가 철철 흐르던 테사이아의 몸체가 봉합되기 시작했다.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멍청한 짐승아! 그러다 죽어! 죽는다고!"
"…네 걱정이나 해라, 귀쟁아."
이를 악문 채 내뱉은 샬롯이, 양손의 검을 으스러질 듯 고쳐 쥐었다.
"지금 이대로면, 너도 죽어."
"그러니까 도망가!"
말과 달리, 테사이아의 육체는 샬롯에게로 달려들었다. 수많은 팔과 다리가 그녀를 향해 뻗어나갔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린 샬롯이 몸을 돌렸다.
그녀가 주위의 다른 실험체들을 후려치고 썰며 달려나갔다.
그 뒤로 따라붙으면서 테사이아가 외쳤다.
"도망쳐. 싸우지 말고 도망치라고! 그리고 다시 나를 구하러 와…! 이것들에게 죽거나 붙잡히면, 너도 나랑 똑같은 일을 겪게 될 거야!"
"닥쳐!"
포효한 샬롯이 더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늑대의 머리와 트롤의 머리가 연달아 돋은, 계곡 거미의 몸통을 가진 키메라가 눅진한 체액을 흩뿌리며 난도질당했다. 샬롯은 곧바로 다음 실험체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같은 행동의 반복.
테사이아는 비로소, 그녀가 모든 실험체와 키메라를 죽이기로 마음을 바꿨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직 자신만을 제외하고.
아마도 나머지를 다 죽인 후에 그녀를 구해 낼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리라.
"샬롯…."
다시 한번 피눈물을 쏟은 테사이아가 중얼댔다.
저 앞에서 새파란 폭발이 휘몰아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쿠콰콰콰콰-
대검의 궤적에 뒤이어 휘몰아친 냉기 칼날이, 칼날의 폭풍처럼 앞의 모든 것들을 고깃덩어리로 만들고 있었다.
그 잔재가 흩어지기도 전에, 붉은 궤적이 뻗어나갔다.
콰직-!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넓적한 궤적에 휩쓸린 건, 깡마르고 창백한 피부를 가진 중년 뱀파이어였다.
"잡았다, 씹새야."
상반신만 남은 놈을 넓적한 검신 위에 얹은 채, 이안이 씹어 뱉었다.
제작자의 핏기 없는 얼굴에 무기력한 미소가 번졌다.
"아쉽군… 언젠간 나 자신도 재료로 쓰고 싶었…."
콰앙-!
검신을 타고 피어오른 불길이, 제작자를 수많은 파편으로 만들며 폭발했다.
"끼아아아아악-!"
"크르르륵…!"
남은 키메라와 실험체들이 폭주하듯 날뛰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테사이아의 육체도 마찬가지였다. 제작자가 죽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끔찍한 육체를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콰지직-! 콰직!
이안이 다시 붉은 궤적과 죽음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테사이아의 육체도 그를 향해 달려갔다.
"안 돼! 이 멍청한 귀쟁아!"
실험체 하나와 뒤엉켜 있던 샬롯이 소리쳤다.
어느새 그녀의 신성력은 거의 다 사그라들고 있었다.
테사이아가 울 듯한 얼굴로 중얼댔다.
"나도 어쩔 수 없어…. 없다구…."
콰지직-!
거대한 붉은 반월이 그녀의 앞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사이로, 피와 체액으로 범벅이 된 이안이 솟구쳤다. 무표정한 얼굴로 테사이아를 응시한 그가, 뒤이어 대검을 내리쳤다.
꽈드드득-!
그를 향해 내뻗은 팔과 함께, 테사이아의 거대한 몸통 한 귀퉁이가 잘려 나갔다.
테사이아가 울부짖었다. 착지한 이안이 곧바로 다시 뛰어올랐다.
콰직! 콰지직-! 콰직!
일방적인 난도질이 이어졌다. 이안은 테사이아의 비명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베고 또 후려치기를 반복했다.
거대한 몸통이 잘리고 찢겨 나가며 점점 더 작아졌다.
그러던 한순간.
터억-!
쇄도한 이안이 손을 뻗어, 테사이아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
테사이아는 더 이상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고통과 공포, 원망으로 얼룩진 혼탁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살아 움직이는 키메라나 실험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샬롯 역시 완전히 힘이 다한 듯 실험체의 시체 옆에 주저앉아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대검을 옆으로 툭 던진 이안이, 테사이아의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다.
그의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우득, 우드드득-
"...!"
고개를 치켜든 테사이아의 입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안이 그녀의 상반신을 끌어안고는 억지로 뜯어내고 있었다.
산채로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
꽈지직-!
마침내 그녀의 상반신이 완전히 뜯어져 나왔다. 피가 치솟고, 남은 몸통이 힘을 잃고 널브러졌다.
"아… 아아…."
이안의 품에 안긴 테사이아의 상태도 온전하지 못했다. 그녀의 몸은 허리 아래가 남아 있지 않았다. 양팔도 팔꿈치 아래로는 그저 피만 흘리는 채로 찢겨 나갔다.
이안이 축 늘어진 몸통 위에 그녀를 뉘었다.
"이, 이안…."
테사이아가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달싹였다.
우묵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이안이, 이윽고 읊조렸다.
"…그냥 이대로 죽게 두려는 건가."
그럴 순 없지. 테사이아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인 그가, 왼손의 장갑을 벗었다.
"...?"
팔목 보호대까지 힘으로 뜯어내는 이안을 바라보며 테사이아가 눈을 끔뻑였다. 뒤이어 그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사그라들었다. 이안이 테사이아의 앞으로 자신의 맨 팔뚝을 들이밀었다.
"마셔라. 테사."
"...!"
비로소 테사이아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사실, 더는 피를 빨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요정의 비수를 뽑아 든 이안이, 그대로 자신의 팔뚝 바깥쪽을 그었다.
붉게 흘러내린 핏물이 테사이아의 입술에 떨어졌다.
"삼켜."
홍채에 옅은 보랏빛이 서린 이안이 덧붙였다.
테사이아는 이미 그러고 있었다.
이안의 피가 입술을 적신 순간부터,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처럼 입을 뻐끔댔다.
곧 그녀의 입에 송곳니가 가득 튀어나왔다. 이안이 그 앞으로 팔뚝을 가져다 댔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팔뚝을 물었다.
"...."
꿀꺽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가느다란 목이 쉼 없이 꿈틀댔다.
비틀대며 일어선 샬롯이 다가오는 가운데, 테사이아의 몸이 수복되기 시작했다. 잘려나간 팔과 하반신에 뼈가 돋고 핏줄이 번졌다. 곧이어 근육과 속살, 피부가 빠른 속도로 본래의 형태를 되찾아 갔다.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진 건 그때쯤이었다. 그가 슬며시 테사이아의 머리를 후려칠 준비를 하는 사이.
"하, 하아… 하아…."
테사이아가 먼저 입을 뗐다.
입가가 피범벅이 된 채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그녀가 이안의 눈을 마주 보았다.
"네 피는 정말 엄청나게 맛있네, 이안. 내 평생 최고의 맛이야…."
"중간에 멈춘 걸 보면, 그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먹다가 죽을 수는 없잖아. 겨우 살았는데."
새로 돋아난 손을 쥐락펴락한 그녀가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다가오던 샬롯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나한테 안 죽어서 다행이네, 야옹아."
"…네가 다행이겠지."
샬롯의 대답에 킥킥댄 것도 잠시.
"...!"
불현듯 테사이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였다.
"테사?!"
소스라치게 놀란 샬롯이 달려오는 사이.
"이, 이안…? 이상해. 몸속에서, 몸속에서 뭔가…!"
붉게 물든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이안이 덤덤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역시. 이제 시작되는군."
"그게 무슨…? 아, 아아악…!"
테사이아가 억눌린 비명을 토해냈다. 몸이 솟구치듯 들썩이고 팔과 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꺾였다.
이안이 그녀의 팔다리를 하나씩 움켜쥐며 시선을 돌렸다.
"...!"
허둥지둥 살점 위로 올라서던 샬롯이 재빨리 달려왔다. 그녀가 테사이아의 반대쪽 팔과 다리를 꺾이지 않도록 붙잡는 그때.
"내 피, 내 피가…!"
테사이아가 간신히 내뱉었다.
온 힘을 다해 뭔가로부터 저항하는 것처럼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이안이 한쪽 무릎으로 그녀의 팔을 내리누르며 입을 열었다.
"여제가 네 진혈을 빼내려는 거다. 저항해도 소용없어."
요정의 비수를 다시 뽑아 든 그가 덧붙였다.
"넌 이제 죽을 거다, 테사."
#165화
"...?!"
테사이아는 물론 샬롯도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비수를 테사이아의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예리한 검날이 그녀의 가슴 한복판을 얕고 길게 갈랐다.
아슬아슬 이어지던 균형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그거면 충분했다.
푸확-!
테사이아가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해내고, 새로 생겨난 상처 사이로 피가 치솟았다.
"꺽… 꺼어어…."
몸을 지탱하듯 머리를 치켜든 테사이아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번졌다. 분리된 진혈이 하늘 너머로 쏜살같이 멀어졌다. 촤악, 쏟아지는 핏물과 함께 테사이아의 몸이 힘없이 널브러졌다.
"테사…!"
샬롯이 탄식했다. 그러면서도 대체 왜? 하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여전히 테사이아의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생기가 사라지고 있는 그녀의 눈을.
붉은 빛을 잃어가는 동공이 서서히 풀어졌다.
바로 죽지 않는 건, 아마도 혼돈력 덕분일 터였다. 이안은 그녀가 육체를 빨리 수복할 수 있도록, 피에 혼돈력을 섞어 넣었었으니까.
혼돈력은 마족 같은 타락한 존재들의 신성력이나 다름 없었다.
여제의 손길에서 잠시나마 저항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리라.
"손 놓지 마라."
테사이아의 얼굴을 감싸 쥐려던 샬롯이 화들짝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도 비로소 그녀를 마주 보았다. 놀랍게도, 수인 전사의 주황색 눈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이안은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리둥절하게 시선을 돌린 샬롯이 이내 눈을 치켜떴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거무튀튀한 덩어리가 들려 있었다.
"생명수의 씨앗…?"
샬롯이 설마, 하는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씨앗으로 향했다.
"...."
미간을 설핏 찌푸린 것도 잠시.
그가 그대로 테사이아의 명치 아래, 쩍 벌어진 상처 사이로 씨앗을 찔러 넣었다.
"...!"
샬롯이 숨을 들이켰다. 상처에 고인 테사이아의 피가 줄어들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씨앗이 그녀의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쩌적-
씨앗의 표면에 균열이 일었다. 벌어진 환부 사이로 가느다란 뿌리들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돋아난 뿌리들이 거미줄처럼 테사이아의 몸속으로 번져 나갔다.
미동도 없던 테사이아의 몸이 움찔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헉…!"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테사이아가 몸을 들썩였다. 발작이 다시 시작됐다. 비명은 없었다. 경련하며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완전히 위로 돌아간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녀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컥… 커억…."
테사이아의 입에서 왈칵 핏물이 역류했다. 우수수 떨어진 송곳니가 그사이에 뒤섞였다.
그녀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누른 샬롯이 재빨리 손을 뻗었다. 테사이아의 고개를 억지로 옆으로 돌린 그녀가 손가락을 입안에 넣었다. 핏물과 송곳니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테사이아가 자신의 피에 익사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잘했다."
내뱉은 이안이 다시 테사이아의 명치를 돌아보았다.
생명수의 씨앗에서는 싹이 돋아나지 않았다. 그럴 에너지조차 전부, 뿌리를 뻗는 데에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씨앗을 중심으로 피부 아래의 핏줄이 수많은 실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그녀의 몸속 깊은 곳까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으리라.
'정말 되는 건 다행인데…. 보기에 좋은 의식은 아니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마력 탐지를 활성화했다.
그는 처음부터 테사이아를 그냥 죽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손수 죽이려 한 건, 여제가 테사이아의 몸에서 진혈을 빼내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생명수의 씨앗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처음엔 죽이려 했고, 그런데도 여제가 진혈을 빼내지 않자 반대로 살리려 한 것이다.
물론 씨앗은 테사이아가 뱀파이어인 상태에서도 효과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몸속에서 진혈이 사라지진 않았을 테고, 그건 결국 여전히 여제가 그녀의 목숨줄을 쥐고 있으리란 의미였다.
그러니 진혈을 없애는 게 우선이었다. 굳이 비수로 가슴에 상처를 낸 것도 그래서였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니, 이왕이면 부가적인 피해 없이 빠르게 일어나고 끝나버리는 편이 더 나았다.
'…그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이안은 테사의 전신에서 반짝이는 마력의 흐름을 눈에 담았다.
씨앗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뿌리들이 만들어내는 흐름이었다.
가슴의 상처에 씨앗을 박아 넣은 건, 사실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이안은 씨앗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그걸 테사이아의 입에 넣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원로라는 이름의 퀘스트가 떠올랐고, 거기엔 요정의 가슴에 씨앗을 심으라고 쓰여 있었다.
이안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렇게 했다. 불친절하고 생략이 많을지언정, 어쨌건 퀘스트나 정보창이 그에게 거짓 정보를 알려 준 적은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솨아아-
이안은 뿌리들이 토해내는 마력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수없이 많은 가느다란 뿌리가 테사이아의 전신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몸속을 투시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가장 밝은 빛을 뿜는 건 자리를 잡고 성장을 멈춘 것들이었다.
이안의 눈에는 테사이아의 몸과 하나로 융합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심장을 감싼 뿌리들도 그랬다. 수십 가닥의 뿌리가 심장의 형태를 온전히 드러내며 일렁였다.
그러면서 규칙적인 박자로 번쩍이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 아래의 심장이 함께 두근거렸다.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고 있었다.
'…심장이 멈출 각오를 해야 한다더니.'
죽음은 재탄생을 위해 필연적으로 선행되는 과정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저 쇼크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안의 눈에 보이는 이 일련의 변화들은, 전혀 조심스럽지도 부드러워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테사이아가 의식을 잃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맨정신에 이 의식을 치렀다면 그야말로 죽음의 고통을 느꼈으리라.
'진혈을 빼앗기는 것도 충분히 고통스러웠겠지만.'
어쨌든, 연달아 끔찍한 고통을 받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툭, 경련하던 테사이아의 사지에 비로소 힘이 풀렸다.
까뒤집혀 바들대던 눈꺼풀이 닫히고, 창백한 입술 사이로 옅은 숨결이 번졌다.
그녀의 몸속에 반짝이는 마력들이 어느 정도의 균일도를 갖췄다.
이안은 여전히 쉴 새 없이 마력이 오가는 뿌리들을 눈에 담았다.
마치 새로운 신경계가 만들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든 과정이 끝난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처럼 급속도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뿐. 뿌리의 끝부분들은 여전히 조금씩 꿈틀대며 뻗어 나가고 있었다.
아마 테사이아의 전신, 모든 말단 부위까지 도달하고서야 끝이 나리라.
"잘… 된 건가?"
그런 사실들을 알 리 없는 샬롯은, 조용해진 테사이아가 불안한 듯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테사이아의 가슴 한복판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을 길게 가른 상처는 이미 아물었다. 쩍 반으로 갈라진 생명수의 씨앗만이 그녀의 명치에 툭 튀어나온 채였다.
이안이 손을 뻗어 씨앗을 쳐냈다.
퍼석-
씨앗이 힘없이 바스러졌다. 벼락에 맞은 듯한, 뿌리가 사방으로 번져 나가며 만들어 낸 불그스름한 흔적이 그녀의 피부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내뱉은 이안이 테사이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목덜미를 타고 턱까지 번진 뿌리들이 꿈틀대며 얼굴을 타고 오르는 게 보였다.
근거는 없었지만, 이안은 이 뿌리들이 뇌까지 이어지고 나서야 그녀가 눈을 뜨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의 테사이아는 아마도, 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을 터였다.
적어도 더이상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지는 않게 되리라.
"깨어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거다."
내뱉은 이안이, 안도한 듯 맥 풀린 얼굴이 된 샬롯을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네가 이 녀석을 지켜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겠어?"
지금 샬롯의 몰골은 빈말로도 좋아 보인다고 할 수 없었다.
너덜너덜해진 방어구와 곳곳에 피가 엉겨 붙은 털가죽. 박혀 있던 가시가 떨어져 나간 손발은 특히나 만신창이였다. 한쪽 귀 끝에도 찢겨나간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이안을 바라보는 주황색 눈동자에는 삽시에 빛이 되돌아왔다.
"물론이다. 겨우 살려냈는데, 다시 잃을 순 없어."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테사이아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비장했다.
목숨도 걸겠군.
'하긴, 이미 걸었지.'
피식한 이안이 일어섰다.
긴장이 조금 풀린 덕분인지 얕은 현기증이 일었다. 관절이 삐걱대고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고개를 턴 이안은, 아공간에서 설표 가죽 망토를 꺼내 테사이아의 몸에 덮어 주었다.
"혹시 경과 필립이 온다면, 함께 지키고."
뒤이어 내뱉은 그가, 테사이아가 누운 살덩이 위에서 툭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토막난 키메라와 실험체들로 난장판인 공터를 가로질렀다.
그 사이에서 너덜너덜해진 송곳니 검과 토막 난 은검을 집어 든 그가 샬롯의 근처로 대충 던졌다.
허공을 가로지른 두 자루 검이 살덩이에 박혔다.
"그들이 오면, 네 뒤를 따르게 하겠다. 귀쟁이를 지키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해."
샬롯이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아직 테사이아를 안아 들 엄두는 나지 않는지, 살점 위에 다시 걸터앉은 채였다.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나를 찾아낼 때쯤엔, 상황이 끝나 있을 거다. 거의 끝났거나."
군단장의 대검을 집어 들며 대답한 이안이, 대검을 아공간에 쑤셔 넣고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며 덧붙였다.
"혼자가 됐으니까. 이제부턴 최단 거리를 돌파할 거거든."
주머니에 담긴 건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마석이었다. 팔찌의 마석을 교체하며, 이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줏빛 밤하늘 한복판. 거대한 초승달은 어느새, 거의 끄트머리까지 붉어진 상태였다.
언젠가부터 정원이 더 붉어진 것 같다 느낀 건 착각이 아니었다.
달빛은 더 이상 창백하지 않았다.
변화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가장자리로 모여드는 소용돌이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었다.
솨아아-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이안을 훑고 지나갔다. 넝쿨 장벽들이 흔들렸다. 듬성듬성 피어 있던 거대한 장미에서 꽃잎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건조한 눈길로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몸을 돌렸다.
"그러니 잘 붙잡아 두고 있어라. 네가 운 건 비밀로 해 줄 테니까."
"...! 내, 내가 언제…."
발끈했던 샬롯이, 머쓱하게 이안의 시선을 피하며 혀를 날름댔다.
이안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말아올리고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
이안은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때때로 나타난 막다른 길은, 그냥 장벽을 타 넘어 통과했다.
혼자 움직이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더는 아무것도 길을 가로막지 않았따. 이안은 미로의 하수인들이 전부 사라졌으리라 내심 확신했다.
심증만 있는 건 아니었다.
솨아아-
불어오는 바람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장벽 곳곳에 핀 거대 장미들이 바람에 휩쓸려 흩날렸다. 수많은 꽃잎들이 허공을 붉게 물들이며 정원 너머로 날아갔다.
얼핏 보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저 꽃잎들이 피로 만들어진 것들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장벽을 넘을 때마다, 저택으로 모여드는 꽃잎의 물결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꽃이 다 떨어진 넝쿨 장벽들도 빠르게 생기를 잃고 있었다. 마름쇠처럼 뾰족하던 가시들은, 어느 순간 부터는 손만 대도 툭툭 부러져 떨어질 만큼 약해졌다.
미로 정원이 쓸모를 다한 게 분명했다.
날아가는 꽃잎들은 아마도, 이제 저택에 남은 것들과 여왕의 힘이 되어주리라.
'똥개도 제 집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지만. 지독하네, 진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이안은 오히려 더 속도를 높였다. 이미 내친 걸음이었다. 여기서 멈추거나 물러난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렇게 몇 개의 장벽을 타넘고 통로를 지나쳤을까.
"...!"
한순간 좌우를 가리던 장벽이 완전히 사라졌다. 시야가 탁 트이고, 불어온 바람이 이안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비로소 걸음을 늦추고 숨을 고르면서, 이안은 저 앞에 드러난 미로 저택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16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