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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1화.

[오전 7시 30분]

지잉~

휴대폰의 진동 소리가 울렸다.

어김없이 떠 있는 메신저의 1이란 숫자.

- 오빠, 저 10분 정도 늦을 듯요.

'이런, 시발.'

이젠 미안하단 소리도 안 하네.

톡을 보낸 인간은 민시윤이었다.

내 뒷 타임 근무자.

결론부터 말해 오전 파트인 이 인간은 단 한 번도 제 시각에 출근한 적이 없는 위인이었다.

아무리 빨라야 10분 지각.

평균적으론 30분 이상 늦으니 말 다 했지.

그나마 꼬박꼬박 추가 근무 수당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점점 나아질 거야'라던 사장님의 회유가 없었더라면.

나는 진즉에 이 편돌이 짓을 때려치웠을 거다.

'그년이 사장 조카든 뭐든 내 알 바도 아니고.'

이젠 정말이지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래도 초반엔 가식일지언정 미안한 기색이라도 내비치더니만, 이젠 아예 대놓고 지각을 당연하다는 듯 '통보'해버리는 년이었다.

며칠 전엔 참다못해 좋게 좋게 돌려 말했더니만, 한다는 말이….

"오빠도 돈 더 받아서 좋은 거 아녜요?"

…였다.

시발, 그렇게 좋은 거면 네가 30분 더 일찍 출근해서 돈 더 받지, 왜?

"후우-."

심호흡 몇 번으로 간신히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차피 오늘까지만 할 거니까.

"큰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나가자."

* * *

[8시 30분]

지잉~.

- 오빠. 앞으로 5분 정도 더 늦을 거 같아요. 앞에 공사하나 봐. 차가 밀리네.

머릿속에서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5분이 아니라 벌써 30분이나 더 지났잖아!"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쌍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어 줄 참이었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걸어주시기….

하지만 끝내 그년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일부러 안 받는 거겠지.

"…해 보잔 거지, 시발X이"

"헉."

막 계산대에 샌드위치를 올려놓던 정장 차림의 여자 손님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아, 죄송합니다. 손님한테 한 말이 아니라…."

"아, 네에-."

삑-.

"2,300원입니다."

"수, 수고하세요."

계산을 마친 손님이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집어 들더니만 도망치듯 가게 밖으로 뛰쳐 나갔다.

아마도 사장님 또는 본사에 클레임을 넣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보다 먼저 내가 연락할 참이지만.'

곧바로 연락처 목록에서 '사장님'을 터치했다.

신호가 몇 번 가더니 바로 통화가 연결되었다.

- 와? 시윤이 금마 또 늦는다 카나?

사장은 이미 내 전화의 목적을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 니한텐 번번이 미안타. 그라도 어쩌겠나? 원래 그런 아인데. 고마 네가 좀 참아주래이.

그리고 이번에도 날 달랠 수 있으리라 자만하는 듯했고.

"문 잠그고…."

- 엉?

"저 퇴근합니다. 아니, 퇴사합니다."

- 마! 갑자기 그게 뭔 소리고?

"열쇠는 화단 밑에 넣어둘 테니 사장님이 직접 나오시든지, 걔한테 연락해서 말씀하시든지 알아서 하세요."

- 야! 영수야! 야! 끊지 마라. 야야!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렸다.

벗어 재낀 유니폼을 창고에 던져놓고, 소지품 가방을 들고 나왔다.

이제 나가서 문만 잠그면….

쿵-!

"…뭐지?"

갑자기 지축이 뒤흔들렸다.

선반에 가지런히 진열된 물품들이 난장으로 흐트러질 정도의 진동이었다.

"지, 지진인가?"

얼핏 TV에서 봤던 대피 요령이 떠올랐다.

일본과 달리 콘크리트 건물이 대부분인 우리나라는 책상 밑에 숨기보다 차라리 개활지로 나가는 게 더 안전하다고.

잠시 숨 고르기를 한 나는 이내 유리문을 향해 뛰었다.

하지만 채 몇 발짝도 못 가.

콰콰쾅-!

천지가 뒤집어졌다.

내 몸이 땅에서 튕겨져 올랐다.

기억이 나는 건 허공을 부유하던 그 순간까지였다.

나는 곧 정신을 잃었다.

* * *

타당, 타당, 타당~

'아, 개 시끄러워!'

타당~!

"…좀!"

귀 따가운 소음에 눈을 떴다.

"...."

엉망진창이 된 가게 안을 잠시간 멀거니 쳐다보던 나는 비로소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그래, 잠자다 일어난 게 아니라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었지.'

나는 편의점 한쪽 구석에 처박힌 채였다.

조심스레 일어나 몸 상태부터 살폈다.

약간 두통이 느껴지긴 했지만, 다행히 외상이나 부러진 곳은 없었다.

그나저나, 대체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지?

소음의 근원지는 창고 쪽.

그리로 발길을 옮긴 나는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비상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였구나.'

작년 어느 땐가.

갑작스러운 정전 사태로 일대 상가들이 큰 피해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많은 가게에서 비상용 발전기를 들였다고 했다.

우리 편의점도 그중 하나였고.

그땐 내가 근무하기도 전의 일이니 그런가 보다 하며 흘려듣고 넘겼지.

아무튼 겁나 시끄럽긴 해도, 제대로 작동하는 걸 보면 사장이 본전 뽑았다며 참 좋아할 듯도 하다.

아무튼 발전기 덕분으로 가게 안은 환했다.

냉장, 냉동고며 여타 전기 설비도 정상 작동 중이었다.

하지만 이 밝음이 내겐 되레 어색하게 느껴졌다.

유리문 밖.

우리 가게를 제외한 주변 일대 모든 곳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는 탓이었다.

'대체 어째서?'

다른 가게 임시 발전기는 작동을 안 하는 건가?

슬며시 문을 밀고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

세상은 어둡고도 고요했다.

우리 가게의 발전기 소리가 아니라면, 심지어 그 어떤 사소한 잡소리마저 들리질 않았다.

마치 익숙한 동네를 무채색의 그림으로 옮겨놓은 듯한 어색한 느낌.

"저기요!"

나는 그 고요한 어둠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누구 없어요? …이봐요!"

대답은 끝내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 주변에 나 이외의 사람이 전혀 없다는 뜻이리라.

"시발,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대지진으로 나라가 폭삭 망하기라도 한 건가?

다 죽고 나 혼자만 살아남은 거야?

그렇다고 하기엔 눈앞에 보이는 건물들이 너무도 멀쩡했다.

당장 여기 편의점만 봐도, 어지럽혀진 물건들 이외엔 이렇다 할 파손 흔적이 없다.

'…어두워진 것만 빼고.'

나는 일단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창고 어딘가에 손전등이 있던 게 생각나서다.

"찾았다."

손전등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우선 바로 길 건너 맞은편에 있는 아이스크림 전문점부터 살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유리문을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코끝이 아릴 정도로 달달한 냄새가 진동을 해댔다.

전기가 끊겨 아이스크림이 죄다 녹아버린 모양.

"계세요? 누구 없어요?"

역시나 사람은 없었다.

그 옆 빵집도.

그 옆 햄버거집도.

그 옆도.

그렇게 얼마나 빈 가게를 돌아다닌 걸까.

나는 문득 시간이 궁금해졌다.

[14시 30분]

"…6시간."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리기까지 흐른 시간이었다.

"오후 두 시면… 대낮이잫아."

무심결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지상보다 더 새카맸다.

해는커녕, 달, 별, 구름 등등 그 어떠한 '물체'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 그 자체였다.

결코 납득할 수 없는 낯선 환경.

깨어날 때부터 지끈거리던 머리가 더 아파 오는 느낌이었다.

신경성 두통인 걸까.

나는 수색을 포기하고 다시 편의점으로 되돌아왔다.

"…배고프다."

그러고 보니 새벽 근무 때 폐기 김밥 한 줄 먹은 게 다였다.

끼니는 바닥에 떨어진 컵라면 한 개와 도시락 하나로 대충 때웠다.

속이 좀 든든해지니 그제야 다소 정신적인 여유도 생겼다.

"그래서… 이제 어떡한다?"

전화가 먹통인 건 진즉에 확인했다.

바깥은 여전히 조용한 게, 당장 어떤 극적인 변화가 생길 것 같지도 않다.

'세상이 망해버린 건가?'

그럼 난 어떻게 해야하지?

"...."

아무리 짱구를 굴려 봤자 할 일이 떠오르질 않았다.

일단 이 난장판이 된 가게 안을 정리, 정돈하는 일 말고는.

"에휴, 편돌이가 뭐 다 그렇지."

다 그런 건 아니겠다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몇 달 하다 보면 없던 강박증이 생겨난다.

오와 열.

과자를.

라면을.

기타 등등 매대 위의 물건들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줄 맞춰 놓았을 때의 그 쾌감이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냥 그렇다고.'

아주 낯선 환경에서 불안해진 난, 가장 익숙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 * *

[16시 50분]

가게 안을 말끔히 치우는 데 꼬박 몇 시간이 걸렸다.

두통이 좀 더 심해진 듯도 했지만 그보단 만족감이 더 컸다.

'그래, 이거지.'

내게 내리는 포상의 의미로 마른오징어와 맥주 한 캔을 깠다.

평소라면, 근무 시간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짓이었겠지만.

'이제 무슨 상관이람.'

시발 세상이 망한 건지 뭔지도 모를 이 판국에.

"크으-. 시원하다."

한 캔 더.

* * *

고백할 게 있다.

사실 난 알쓰다.

고작 맥주 두 캔에 끔뻑끔뻑 눈이 감기는 이유였다.

한숨 자고….

* * *

덜그럭-.

"...."

덜그럭, 덜그럭-.

"...!"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여전히 시끄럽긴 해도 익숙한 발전기 소음과는 전혀 다른, 그 어떤 낯선 소리 때문이었다.

방향은 문 쪽.

카운터의 간이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즉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발.'

경솔한 새끼.

문가를 확인하자마자.

그 소음의 정체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내 스스로를 욕하고 원망하고 저주했다.

'조심성이라고는 1도 없는 성인 ADHD 환자 새끼!'

유리문 바깥엔 손님이 와 있었다.

문제는 그 손님이,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라는 거지.

'시발, 웬 해골바가지가….'

비유나 은유 따위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진짜 해골이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눈알도 없는 게, 내 쪽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놈의 신체, 아니 뼈다귀는 한 시도 가만있질 않았다.

마치 연체 동물마냥 쉼 없이 흐느적거렸다.

그렇게 뼈끼리 부딪치고 긁히는 소리에 내가 깼던 거고.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나는 순간 어이없는 희망 회로까지 돌려보았다.

'혹시… 이 모든 게 꿈?'

"으윽-."

응, 아냐.

허벅지를 꼬집었더니만 아주 아팠다.

그래도 최소한 무서워서가 아니라 아파서 눈물이 핑 도는 거라고, 변명 거리는 생겨서 좋았다.

그리고 통증 덕분인지 공포로 얼어붙었던 몸이 이제야 말을 듣기 시작했고.

이제 어쩐다.

카운터 아래로 숨을까?

아니면 창고로 대피할까?

해골 새끼는 여전히 날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도 문이 잠긴 덕분에 들어오지 못하는….'

잠깐.

내가 문을… 잠갔던가?

딸랑, 딸랑~

"…시발, 내가 그럼 그렇지."

저승사자의 행차를 알리듯.

문에 달린 풍경 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차츰차츰 문이 열리고 있었다.

잠시나마 통제력을 회복했던 내 몸뚱이는 또다시 병신같이 굳어져 버렸다.

그제야 공포영화 속 주인공들이 위급한 상황에 비명만 질렀던 이유를 깨달았다.

덜그럭- 덜그럭.

기어코 문을 완전히 밀어젖힌 해골바가지가 카운터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초속 5cm의 속도로.

시발. 올 거면 빨리 오든가.

아예 오질 말든가.

덜그- 럭.

마침내 카운터 앞에 다다른 해골바가지가 잠시간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놈과의 거리는 불과 30cm 남짓.

'…좋아.'

침착하게 판단하자.

기습적으로 어퍼컷을 올려 쳐 저 대가리를 날려버리는 거야.

움직여라.

움직여.

시발 좀 움직이라고!

덜그럭-.

움직였다!

내 주먹이 아니라 해골바가지의 앙상한 팔이.

놈이 내게로 손을 뻗었다.

"...?"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다시 보니 손가락으로 내 뒤의 뭔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지?'

내 뒤에 있는 거라곤, 담배 진열장뿐인데.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이어졌다.

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워, 원하는 게 뭐야?"

덜그럭-.

해골의 삿대질.

역시나 그 끝은 담배를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다, 담배… 드려요?"

까딱까딱.

해골이 고개를 끄덕였다.

'…씨발.'

난 이 해골이 내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2화.

스윽-.

그렇게 던힐 한 갑을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고 밀었다.

달그적, 달그적.

그런데 놈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이거 설마….

"이거 아녜요? …다른 담배?"

달그락, 달그락.

고개를 끄덕인다.

'시발.'

담배도 종류 따져가며 피우는 해골이라니.

나는 하나 하나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말보로?"

달그적, 달그적

"카멜?"

달그적, 달그적

"디스 플러스?"

달그적, 달그적

"아, 왜요? 뭐! 뭘 달라는 건데? 말을 해요, 손님!"

순간 빡이 쳐 나도 모르게 버럭하고 말았다.

'…앗!'

"...."

'해코지당하면 어쩌지?'

결론부터 말해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해골은 단지 다른 손가락으로 자신의 텅 빈 목을 가리키며 턱뼈만 벙끗거렸을 뿐.

말을 못 하니 이해해달라는 제스처로 보였다.

'...그런 거였나.'

이러면 내가 겁나 미안해지잖아.

심기일전한 나는, 이번엔 아예 담배를 종류별로 다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두었다.

해골더러 그중에 하나를 직접 고르라는 의미였다.

"원하시는 걸 집으세요."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말귀를 알아먹은 해골이 담배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게, 한 제품이 아닌 여러 회사 제품을 다양하게 골라 집어 드는 게 아닌가.

"...?"

심지어 개중엔 아까 내가 권했던 말보루며 디스 플러스까지 섞여 있었다.

'대체 선택 기준이 뭐야?

해골은 내가 꺼내 보여 준 담배 중, 다섯 갑을 골라 자신의 앞으로 빼놨다.

그렇게 한곳에 모아놓고 보니, 나는 그제야 무엇을 고르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저거였어?'

하나 같이 자신과 같은 해골 사진이 붙어있는 담뱃갑들이었다.

결국 자기 얼굴이 박힌 담배를 원했던 거다.

'취향 참….'

삑-.

타다닥.

숙련된 편돌이의 손놀림으로 담배 바코드를 찍은 내가 해골에게 말했다.

"22,500원입니다. 손님."

달그덕.

'어머나, 시발.'

이놈의 직업병 좀 보소.

조금 전까지 생사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걱정하던 새끼가 물건값 계산해 달라 하고 자빠졌네.

나는 해골 손님의 심기가 더 불편해지기 전에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그, 그냥 가셔도 됩니다."

해골은 뜻밖에 그냥 떠나지 않았다.

내 말을 듣는 대신, 자기 골반 쪽의 뼈 안쪽을 더듬거리더니만 뭔가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

붉은색의 반투명한 알갱이 3알.

크기는 새끼손톱만 했고, 원형에 가까운 모양이었지만 가공을 거친 듯 표면에 자잘한 각이 져 있어 쉽게 굴러다니거나 하진 않았다.

해골은 이것으로 값을 치르려는 듯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구슬 세 개 받았습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으신가요?"

달그락.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달그락.

해골은 새벽녘 술에 꼴아, 새빨간 얼굴로 편의점에 들어와 개지랄 주정을 부리던 문신 돼지보다 훨씬 더 껄끄러운 손놈이었다.

그러니 수지타산이고 나발이고, 빨리 내보내는 게 상책이었다.

'구슬이 뭔지 알 게 뭐냐, 빨리 가라!'

그렇게 해골이 주섬주섬 계산한 담배들을 챙겨 들었다.

"...?"

그런데 돌아설 때 보니, 5번 갈비뼈와 6번 갈비뼈 사이로 보이는 담배 개수가 5갑이 아닌 6갑이었다.

'…실수인가?'

달그락, 달그락.

저 새끼.

은근슬쩍 골반 뼈로 가리는 거 보니 고의 맞네.

* * *

철컥-.

바깥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문을 잠갔다.

놀랍게도 해골 손놈은 아직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가게 앞 파라솔 테이블.

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무언의 노가리를 까는 중이었다.

어디선가 하나둘씩 모여든 다른 해골바가지들과 함께.

'어디서 나타난 거냐고!'

담배를 여러 갑 산 이유도 그 때문이었던 거지.

테이블에 둘러앉은 해골은 모두 네 놈이었다.

놈들의 생김새는 매우 비슷했다.

혹 한날한시에 죽은 네 쌍둥이가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녀석들을 쉽게 구별할 수가 있었다.

활.

도끼.

창.

검.

놈들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무기들 때문이었다.

참고로 내게 담배를 사 간 놈이 바로 저 검을 쓰는 해골이다.

하지만 정작 아까 계산할 땐 분명 빈손이었다.

알고 보니 편의점에 들어서기 전, 문가에 있는 우산꽂이에다 검을 꽂아놓고 들어왔던 것이다.

'나름 예의를 아는 해골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한 놈도 벅찬 마당에 네 놈씩이나 몰려드니 나로서도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놈들이 무언의 노가리를 까는 동안 슬그머니 문을 잠가버린 거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마음을 놓은 건 아니었다.

카운터로 되돌아온 나는 유리창 너머로 바깥 동태를 가만히 주시했다.

당장 놈들이 소란을 피울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자기들끼리 달그락대는 거 이외엔 딱히 다른 곳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놈들의 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지는 걸까?'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제각각 담배 한 대씩을 물고만 있는 녀석들.

"…라이터가 없나 본데."

담배를 태우지 못하는 건 아마도 불이 없어서일 가능성이 크다.

말인즉슨.

조만간 저들 중 한 놈이 라이터를 사러 다시 들어올 수도 있다는 소리지.

그런데 만약 문이 잠겨 있다면?

"하…. 이거 내가 악수를 둔 건가."

금단 증세를 겪는 흡연자의 폭력성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나도 담배를 끊어 봐서 잘 알거든.

"이러다 저 무기들로 문 다 깨부수는 거 아냐?"

이제라도 자물쇠를 다시 돌려놔야 하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만 깊어지던 중이었다.

"…엉?"

갑작스레 자극적이고 구수한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분명, 담배를 태우는 냄새였다.

깜짝 놀란 마음에 고개를 번쩍 들어서는 얼른 창 너머를 확인했다.

"뭐야?"

놀랍게도 해골 한 놈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대체 불이 어디서 난 거지?'

의문이 짙어가던 중, 문득 못 보던 생명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웬 검정 똥개 한 마리가 해골들 곁을 맴돌고 있었다.

입가엔 이글거리는 화염을 패시브로 머금은 채 말이다.

화르륵-.

놈이 갑자기 불을 뿜었다.

해골 한 놈의 대가리가 그대로 화염에 휩싸였다.

수 초간 지속된 화염 방사에 놈의 두개골이 시커멓게 그을렸다.

하지만 정작 불타고 있는 당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담배를 뻐끔대며 만족해하는 기색이다.

'아니, 돌아다니는 라이터였어?'

남은 해골 놈들도 흡사한 방식으로 불을 붙였다.

고로 즐거운 그들만의 끽연 타임이 시작되었다.

'거참, 신기하네.'

해골들에겐 폐부라 할만 한 기관이 없었다.

그저 속이 텅 빈 갈비뼈만이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녀석들은 용케 담배를 빨고 연기를 내뱉길 반복했다.

흡입된 담배 연기가 흉곽 안에서 몇 초간 머물다가 다시 입과 코와 눈과 귓구멍으로 배출되는 식이었다.

기괴하면서도 해학스러운 그림.

처음 놈을 봤을 땐 몸이 절로 얼어붙을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이상하게 묘한 친근감마저 들려 한다.

생긴 거 답지 않게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태도 때문인 건가.

물론 담배 한 갑을 꼬불친 걸 잊진 않았다.

그래도 일단 값을 치르고 물건을 사 갔다는 게 얼마나 기특한 일이냐는 거지.

막말로 저 흉기는커녕, 그냥 맨 뼈주먹으로 윽박질렀어도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었을걸.

뻐끔-. 뻐끔-.

그나저나 이 해골 아저씨들.

가만보니 담배 참 맛있게도 피네.

테이블 위로 연기로 만들어진 도너츠가 날아다녔다.

입술도 없는 주제에 무슨 수로 저게 되는 거지?

'오, 지저스.'

물레방아도 해?

다들 살아생전에 어지간히도 끽연을 즐겼던 모양이다.

선보이는 스킬들 하나하나가 결코 예사롭지가 않다.

다만 그들이 마냥 감탄스러운 모습만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에헤이-."

개중에 한 놈이 자꾸만 바닥 아무 데나 찍찍 침 뱉는 시늉을 해대고 있었다.

혀는 고사하고 침샘조차 없는 주제에 말이다.

'그런데도 뭐가 계속 튀어나오는 거지?'

다시 보니 그건 옥수수알이었다.

본인 이빨 말이다.

그렇게 바닥에 떨어진 이빨은 또 어슬렁어슬렁 흑구가 다가와 오독오독 씹어먹곤 했다.

혼란하다, 혼란해.

* * *

바깥 구경을 하던 중에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골 손님들이 떠나고 보이질 않았다.

나는 일단 문을 딴 뒤 빗자루와 쓰레 받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여유 시간에 가게 주변을 정리정돈하는 건 알바생의 덕목.

"어우-. 많이도 폈네."

테이블 위엔 빈 담배 다섯 갑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두당 한 갑을 넘게 피웠다는 소리다.

"아저씨들. 완전 개골초였네."

그들은 혹시, 그 때문에 폐병으로 죽어 해골이 된 건 아닐까?

"…아님 말고."

아무튼 청소를 위해 나온 나는 다시금 그들의 젠틀한 매너에 적이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테이블 위엔 무려 '재떨이'가 있었다.

따로 제공해 준 적도 없는데 말이다.

"아니, 이걸 어디서 났지?"

일단 재떨이에 수북한 꽁초를 쓰레받이에 쏟아넣고 다시 유심히 살펴 보니….

"미친, 이거 뼈네?"

그것도 골반뼈.

불현듯 머릿속에 가상의 한 장면이 그려졌다.

가위바위보.

또는 묵찌빠.

진 놈 한쪽 골반뼈를 떼다가 재떨이 대용으로 쓰는 모습이.

"존나, 찐친들인가 보다."

가만.

그럼 이 재떨이, 아니 골반뼈의 주인은 어떻게 집에 간 거지?

친구들이 부축이라도 해 준 건가.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이내 골반뼈를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물이… 나오려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싱크대 수전 손잡이를 당겨보았다.

그러자 우려가 무색하리만치 콸콸 물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퐁퐁질까지 해 가며 골반뼈를 깨끗이 세척했다.

그리고 다시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두었다.

평생 장애골로 지낼 게 아니라면, 언제고 다시 찾으러 오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화륵~. 화륵~.

"앗, 시발, 깜짝야!"

불똥개, 넌 왜 아직 여기 있는 건데?

이유를 모르게 발목 쪽이 후끈거려서 시선을 내려 보니, 놈이 내 지척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더라.

무슨 솜사탕마냥 나풀거리는 화염을 입에 머금은 채 말이다.

놈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저 주둥이를 벌린다면, 나는 순식간에 통구이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딱히 두려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사정없이 프로펠러질을 해대는 꼬리.

초롱초롱한 눈망울.

누가 봐도 적의라고는 1도 없는, 애정을 갈구하는 똥개 본연의 모습이 아닐 수가 없다.

문제는 돌발적인 변수가 통제 가능하냐는 거지.

- 와르….

"아냐! 짖지 마! 그건 아냐."

제 딴엔 반갑다며 주둥이를 벌리려는 걸,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놈을 말렸다.

-끼잉?

다행히 말귀를 알아먹은 건지, 최악의 참사를 막긴 했다만.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불똥개의 관심을 돌릴 대책 말이다.

"…혹시?"

나는 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가 애완동물 간식 코너로 향했다.

그리곤 평소 가장 잘 팔리는 애완견 사료를 들고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이거 먹고 떨어져'를 시전할 참이었다.

부디 녀석의 취향에 맞아야 할 텐데.

'아, 근데 밥그릇이 없네.'

원래는 대충 폐플라스틱 용기에다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굳이 수고스럽게 재활용 쓰레기통을 뒤질 필요가 없더라.

여기 테이블 위에 훌륭한 밥그릇이 있는걸.

나는 그 즉시 골반뼈에다 사료를 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에 다가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불똥개가, 이내 사료를 낼름낼름 흡입하기 시작했다.

'오- 잘 먹네.'

다행이다.

그렇게 한 시름을 놓았다고 여길 때.

절그럭, 뚝그럭.

어디선가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해골 한 놈이 우리 가게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녀석과 개밥그릇을 번갈아 쳐다보던 나는 이내 가게 안으로 들어가 가만히 문을 잠갔다.

3화.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든다는 속담이 있지.

해골은 그 속담을 등한시한 대가로 불세례를 얻어맞았다.

개밥그릇, 아니 자기 골반뼈를 무턱대고 가져가려다 화염방사를 당한 거다.

하지만 그렇게 되자 해골은 오히려 자기 화살통을 뒤적이더니만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불만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끽연 타임이 생각나는 걸까?

어쨌거나 양측의 갈등은 그런대로 잘 봉합이 된 듯 보였다.

불똥개가 사료를 다 먹도록 해골이 줄담배를 피우며 기다려주었다는 이야기다.

제 볼일이 끝난 녀석들은 곧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다시 혼자 남게 된 나는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머릿속의 여태 해결되지 않은 의문들을 차례로 떠올려 보았다.

여긴 대체 어디인 걸까.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저 괴물들의 정체는 뭘까?

놈들은 왜 날 해코지하지 않지 않는 걸까?

'그리고… 전기.'

편의점 안 전기는 왜 여태껏 끊기질 않는 거지?

의식의 흐름에 따라 나는 창고로 발길을 옮겼다.

발전기는 여전히 힘차고 시끄럽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의문인 건, 저것이 작동을 시작한 지가 못해도 최소 9시간은 넘었다는 거지.

전에 사장님께 얼핏 듣기로, 발전기는 최대 4~5시간밖에 가용하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스펙보다 두 배는 더 넘는 시간 동안 멈추질 않는 걸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료 탱크를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기름이 없잖아!"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기름은 한참 전에 바닥이 난 듯했다.

그런데도 발전기는 멈추질 않았고.

그럼에도 전기는 계속 공급되는 중이었다.

'아니, 그럼 이거 설마?'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결단을 내렸다.

딸각.

내 손가락이 발전기 작동 스위치를 off로 내렸다.

그 즉시 가게 안 모든 전력 기구가 작동을 멈춰야 마땅할 상황이었다. 전등이 나가는 건 당연지사였고.

"...."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가게 안이 어두워지기는커녕, 심지어는 전자레인지 대기모드조차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나는 이쯤에서 또 다시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은 내가 죽었고.

여기는 내 기억, 그러니까 상상 속의 공간일 뿐이며.

내 두뇌만이 그 어떤 기계 장치에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

'미친.'

진짜 그런 거라면 기분 겁나 더러운데.

나는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

시험 삼아 목청껏 소리쳤다.

"거기 누구 없어요?"

....

"다 보고 있는 거 아니까, 대답하라고!!"

....

응, 내가 미친놈.

민망한 생각에 잠시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했으나 금세 괜찮아졌다.

어차피 나 말고 아무도 없는데, 아무렴 어때?

"키득키득"

"...?"

나 혼자뿐이란 생각은 착각일 뿐이었다.

비웃는 듯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봤더니만, 창고 문가에 웬 누님 한 분이 서 계셨다.

"...."

굴곡진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딱 달라붙는 가죽 바지.

가슴 앞 골이 다 훤하도록 깊게 패인 블라우스.

화려하고 옹골찬 이목구비.

퇴폐미 넘치는 눈빛.

슬며시 미소 지을 때 드러나는 송곳니.

어깨 너머로 봉긋 솟은 날개깃.

탐스러운 둔부 뒤로 살랑이는 뾰족한 꼬리.

"…그럼 그렇지."

잠시 잠깐이나마 흥분 모드에 진입 중이던 내 성적 욕망은 삽시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 또한 괴물이로다.

그 해골 바가지며 불똥개와 마찬가지로.

"시발?"

…어라?

"너 지금, 손님한테 욕한 거니?"

'뭐지?'

얘는 말을 할 줄 아네?

그렇다면야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아닙니다. 오해에요. 혼잣말이었거든요."

"진짜? 네 말을 어떻게 믿어?"

"CS스토어 홈페이지 접속하셔서 전국 근태 우수 사원 검색해 보시면 3분기 연속 고객만족도 1등 먹은 수유점 '구영수'라고 나오는데, 그게 바로 접니다."

물론 뻥이다.

어차피 인터넷 안 되는 거 다 확인한 마당에, 위기를 넘기려면 뭔 짓을 못 하겠어.

"그런 제가 어떻게 감히 손님께 욕을 할 수 있겠습니까?"

"흐음-."

날 서 있던 눈빛이 퍽 무뎌지긴 했다만, 노출증 누님은 여전히 턱을 매만지며 나를 못미더운 기색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래서 딴생각 못 하도록 얼른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보다, 뭐 찾으시는 게 있으실까요?"

"아니? 딱히 뭐 필요한 건 없고…."

그럼 왜 왔는데, 이 괴물아.

"그냥, 여기 신기한 가게 하나가 오픈했다고 소문이 돌아서 한번 와 본 거야."

입 싼 해골 바가지들 같으니라고.

아니, 근데 그놈들은 말을 못 하잖아?

"잠깐 구경 좀 해도 되지?"

"당연하죠. 마음껏 살피다 가세요."

다행히 노출증 누님의 관심사가 가게 자체로 바뀌었다.

나도 슬그머니 카운터로 복귀했고.

"오홍~."

"...."

"오?"

"...."

"아항~."

그녀는 자신의 말처럼 정말 매대 사이를 돌아다니며 신기한 눈으로 물건들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가급적 신경쓰려하지 않으려 했지만, 꼴에 남자라고 자꾸만 볼록 거울에 살색이 어른거릴 때마다 눈을 힐긋하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구경만 한다던 사람, 괴물 아니 아무튼 손님이 한 뭉탱이를 품에 안고서 카운터로 다가왔다.

"이거 다 계산해 줄래?"

컵라면 3개

맥스봉 2개

칙쵹 2갑

바나나우유 1개

카스 1캔

등등.

나는 숙련된 편돌이의 손놀림으로 빠르게 바코드를 찍어 내려갔다.

삑삑삑삑-.

"23,460원입니다."

"…어?"

"…예?"

"얼마라고?"

"23,460원이요."

요즘 편의점들은 손님이 구매 목록을 볼 수 있게끔 결제 화면이 양방향으로 되어 있는 곳이 많다.

우리 편의점도 마찬가지였고.

"여기 화면 보이시죠? 맞게 계산했습니다."

"그게 아니라, 단위가 달라서 말이야."

노출 누님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또 그 알갱이였다.

"아까 스켈레톤 애들도 이거로 계산하지 않았어?"

"그러긴 했습니다만…."

"뭐 사고 몇 개 냈는데?"

"담배 다섯, 아니 여섯 갑에 세 개요."

"담배 여섯 갑이 얼만데?"

"22,500원… 아니 27,000원이죠."

누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가격이 얼추 비슷하네. 그럼 나도 마돌 3개 내고 이거 다 가져간다?"

"네. 뭐…."

마음대로 하세요들.

"봉투 필요하신가요?"

"응."

"봉투는 20원입니다."

"그게 얼만데?"

"…그냥 드릴게요."

환산이고 나발이고.

참! 그나저나….

"손님.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갑자기 나이는 왜?"

"미성년자에겐 주류 판매가 안 되거든요."

그녀가 고른 품목 중에 맥주 한 캔이 껴 있었다. 그래서 묻는 거다.

"글쎄. 내가 몇 살이었다? 340살이던가, 350살이던가."

"...."

"왜? 이 나이로는 못 사?"

"아닙니다…."

'…할머니.'

더는 군소리 않고 맥주까지 마저 봉투에 담아 건넸다.

"안녕히 가세요."

"고마워. 또 올게~."

'응, 내가 싫어.'

가게 밖으로 나선 그녀의 등 뒤로 활짝 날개가 펼쳐졌다.

생긴 게 꼭 박쥐 날개 같다.

그녀는 이내 정말로 펄럭펄럭 날아가 버렸다.

이젠 뭐, 저 정도는 놀랍지도 않다.

* * *

[23:55]

박쥐 노출 누님 이후로 더는 손님이 없었다.

여기는 어디고, 내가 어째서 이런 곳에 오게 됐는지 생각하느라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졌다.

나는 카운터 위에, 그 손님이 마돌이라 부르던, 알갱이 여섯 알을 올려둔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대체 이걸 어디에 써먹는담?

그래도 그 괴수 손님들이 화폐처럼 사용하는 걸 보면 분명 어디 쓰임새가 있긴 할 텐데 말이다.

"…내일은 좀 더 돌아다녀 봐야겠다."

나는 아직 편의점을 기준으로 반경 500미터 밖으로 벗어 나본 적이 없었다.

주변 가게 정도만 수색하다가 관두고 말았지.

하지만 좀 더 탐색 영역을 넓힌다면 분명 뭐가 나와도 나올 듯했다.

당장 저 괴물 손님들만 봐도 다들 집이 있고 거처가 있을 게 아닌가?

"겪어 보니 다들 나한텐 딱히 적개심도 없는 것 같고…."

물론 그렇다고 긴장이 안 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여기 편의점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무리 냉장고가 멀쩡하다지만…."

식품에는 버젓이 유통기한이 존재한다.

결국 언젠가는 상해서 먹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 거다.

그러니 마냥 눈앞의 식량에만 의존해 답보 상태를 고수한다는 건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가장 풍족한 때가 가장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절호의 시점인 것이다.

아무튼.

"내일을 위해서라도 이만 좀 자 볼까나."

마돌은 그대로 카운터 위에 올려두었다.

문도 잠갔겠다.

도둑맞을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누가 훔쳐 간다고 해도 딱히 상관없을 듯하지만.

창고에서 빈 박스 몇 개를 갖고 나와 바닥에 대충 깔았다.

본래 편의점은 24시간 영업이 원칙이긴 하다만, 누가 뭐랄 거야? 여기 나 말고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데.

딸깍-.

나는 숙면을 위해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근데 왜 불이 안 꺼지는 건데?

"…맞다. 이거 전기 아니었지"

* * *

올해 마흔여섯의 민호영은 사업에 재기가 밝은 자였다.

그는 남들이 뜯어말리던 편의점 점포를 3개씩이나 운영하면서도 월 1,500에서 2,000만 원에 달하는 안정적인 수익을 거두어 왔었다.

한데 그랬던 그가 어느 날,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고 말았다.

반년 전.

서울 한복판에 난데없이 '솟아난' 정체불명의 건물 때문이었다.

사실 건물이라고 부르기도 뭐했다.

높이가 500미터, 직경은 무려 1.2킬로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구조물이었으니까.

한데 그것의 출현 위치가 하필이면 서울 종로구였다.

동서로 경복궁역부터 안국역까지.

남북으론 교보문고서부터 어린이 박물관까지의 범위가 사라져 버렸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힌 건 주지의 사실이었고.

하지만 난리가 난 건 비단 한반도뿐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 각 대륙별로 총 120개의 비슷한 구조체들이 출현하였으니.

훗날 사람들은 이를 두고 미궁謎宮, 또는 UT(Unidentified Tower)라고 명명하였다.

한데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처럼 광범위한 지대가 미궁에 잠식당했음에도, 정작 그로 인한 사상자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해당 영역에 존재하고 있던 생명체 전부는 미궁의 등장과 동시에 그 바깥으로 강제 이동을 당했다.

그것도 터럭 한 올 다치지 않은 멀쩡한 상태로 말이다.

다만 목숨을 건진 대신 그들 모두는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그런 피해자가 대한민국만 해도 수십만 명에 이르렀으니.

미궁이 출현한 지 반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들 난민에 대한 해결책은 뚜렷하게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난민 중 대다수는 일단 친인척 내지, 지인에게 의탁하며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태였으나.

그조차 여의찮은 형편의 난민도 무려 1만여 명에 달했다.

정부는 경기도 북부 외곽에 임시 수용소를 급조해 난민들을 그곳에서 지내게 했다.

수용소 인원의 절대 다수는 마땅히 의탁할 곳 하나 없는 노인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개중엔 민호영처럼 비교적 젊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개시발 족 같은 인생."

민호영의 편의점 모두는 바로 그 미궁의 영역 안에 위치하여 있었다.

그가 시쳇말로 개털이 된 이유였다.

4화.

물론 민호영도 얼마 전까진 수억 원에 달하는 유동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었다.

하지만 세 번째 편의점을 인수하느라 그 자산 대부분을 처분한 게 화근이었다.

워낙 고금리 시대라, 더는 예전처럼 은행 대출로 인수 자금의 대부분을 충당키가 부담스러워 내린 결정이었거늘.

그러한 선택이 결국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게 될 악수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민호영은 심지어 평소 일가친척과도 거의 왕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결국 아무런 사적인 도움도 받질 못하고 수용소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내가 그게 어떻게 모은 돈으로 낸 점포들인데…. 포기 못 해. 절대 포기 안 하지."

놀랍게도 미궁은 입장이 가능했다.

다만 그러자면 '자격'을 갖추어야만 했다.

여기서 말하는 자격이란 '각성'을 의미했다.

미궁의 출현과 동시에 특수한 능력을 갖게 된 선택받은 자들.

세상은 그들을 일컬어 '초인' 혹은 싸이킥psychic이라 불렀다.

싸이킥들은 미궁을 드나들며 내부의 정보를 바깥 세상에 전하기 시작했다.

그 소식 중엔 난민들에게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낭보도 있었으니.

'분명 건물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있다고 했겠다?'

미궁 안 1층 환경은 놀랍게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단지 생명체들만이 튕겨져 나갔다 할 뿐, 도로며 건물 등 모든 시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전언이었다.

난민들에겐 언젠가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기에 충분한 소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나 자체적으로 출입을 제한시키는 미궁의 시스템.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마물들이었다.

또는 몬스터라 부르는 괴물들 말이다.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싸이킥들뿐이었다.

설령 미궁이 만인에게 개방된다 한들, 아무런 능력조차 없는 일반인은 입장과 동시에 마물들의 희생양이 될 게 뻔했다.

그러하기에 난민들은 하루빨리 싸이킥들이 미궁 공략을 완수해 자신들의 옛 터전을 마물들로부터 해방시켜주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반년이 넘도록 싸이킥들이 거둔 성과라고는 겨우 광화문역 일대만을 탈환한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그조차 간혹 불특정하게 발생 되는 대규모 웨이브 땐 다시 입구까지 밀려버리기 일쑤였지만.

그처럼 장기간 답보 상태가 거듭되는 상황에서 민호영은 매일 같이,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 자신을 초인으로 간택해 달라고 말이다.

각성자는 최근까지도 꾸준히 발생되는 추세였다.

비록 그 수가 미궁 출현 초반의 대규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에 수십에서 수백 명씩 초인으로 각성이 되곤 했다.

한데 특이한 건, 전국적으로 놓고 봤을 때 유독 한 지역만이 각성자 발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사실이었다.

시쳇말로 각성 명당자리라고도 불리는 그 장소가 바로 이곳, 난민 수용소였다.

그 때문에 일각에선 멀쩡한 거처가 있음에도 어떻게든 수용소에 전입하고자 갖은 수를 써 대는 웃지 못할 풍경까지 종종 연출되곤 했다.

싸이킥이 될 수만 있다면, 고소득자가 되는 건 따 놓은 당상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민호영에겐 고소득이고 나발이고, 자신의 점포 모두를 되찾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였지만.

"천지신명이시여. 알라시여, 부처시여, 하나님이시여. 부디 이 가련한 영혼을 굽어 살피시어 저를 싸이킥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민호영은 오늘도 텐트 한 편에 냉수를 떠 놓고서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소원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그 옆에다 조카 민시윤까지 데려다 놓고서.

"마! 후딱 안 비나?"

"아, 삼촌이나 해. 옆에 서 있는 것만 해도 개쪽팔리단말야."

"이 가스나가. 부정타게시리. 마! 하기 시름 지금이라도 걍 처 나가삐라. 안 말린다."

민시윤은 본래 수용소에 머물지 않았었다.

노원 쪽에 떡 하니 부모님 집이 있을뿐더러, 미궁 때문에 딱히 피해를 입은 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건 다 삼촌인 민호영 덕분이었다.

수용소에서 싸이킥의 출현 빈도가 높다는 소문이 퍼지자, 뒤늦게 삼촌의 세대원으로 등록한 뒤 합류한 것이다.

이 위장 전입을 성사시키고자 민시윤의 부모는 이미 적지 않은 돈을 곳곳에 뿌려 둔 상태였다.

심지어는 사이가 썩 좋지 않은 민호영에게도, 자신들의 딸이 싸이킥이 된다는 가정하에 상당한 사례금을 약속해 두었다.

그리고 민호영 입장에서도 조카가 싸이킥이 되어 나쁠 건 없었다.

물론 최선은 그 자신이 각성자가 되는 거겠지만, 민시윤이 싸이킥이 된다면 조카를 통해 자기 점포를 되찾을 방안을 궁리해 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생판 남보다야 혈연 사이가 일을 맡기기엔 더 나을 테니까.

한데 문제는 수용소 생활을 시작한 민시윤의 태도였다.

대체 무얼 상상하고 들어온 건지, 그녀의 입에선 하루도 불평불만이 그칠 날이 없었다.

거기다 민호영의 성격까지 썩 좋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편인지라.

요즘 두 사람은 걸핏하면 사사건건 부딪치기 일쑤였다.

그래도 민시윤에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킬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나마 나쁘지 않은 사이의 숙질 관계였거늘.

이제는 그때의 사소했던 섭섭한 감정들마저도 서로를 공격하고 헐뜯는 수단으로 이용될 지경이었다.

"가스나. 맨 처 늦고 재고도 못 마추고 산수도 그르지같이 몬할 때부터 내 그 싹수 누런 걸 알아봤거든."

"아, 편의점 때 얘기는 왜 자꾸 꺼내는데? 그리고 그땐 일 잘했다며? 왜 그때랑 지금이랑 말이 다른데?"

"이 가스나야. 그때야 일할 사람이 없으니 울며 겨자 먹는 맹키로 살살 달래가며 널 썼던 거지."

"와-. 시발, 이래서 울 엄빠가 삼촌더러 졸 가식적인 사람이라고 한 거였구나."

"뭐? 시바알? 이년이 어데 으른한테 쌍욕을 해쌌노?"

민호영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민시윤은 오히려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요? 때리시게? 쳐 봐요. 쳐 봐."

"하-. 이 미친년이 도라삤나? 안 되겠다. 니, 나가라. 내 더는 니랑 같이 몬 있는다. 처 나가라고!"

"누가 할 소리! 나도 더는 못 참아. 나가라 안 해도 내 발로 나갈 생각이었거든?"

민시윤이 씩씩대며 텐트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민호영은 기껏 떠다 놓은 냉수 그릇을 발로 차는 등, 괜한 화풀이를 해대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이 소란은 진즉부터 이웃 텐트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주의 깊게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이런 식의 다툼이 한두 번이 아닌 탓이었다.

저러다 또 말겠지 하고 말이다.

민시윤은 텐트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막상 실제로 짐을 싸진 않았다.

이곳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수시로 투자금을 들먹이며 어르고 달래는 부모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시발. 싸이킥인지 뭔지. 되기만 해 봐라."

민시윤이 울분을 삼키며 잠을 청할 때였다.

갑자기 바깥공기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잠시 후 고함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외침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 아자!

- 나이스! 됐어! 으하하!!

- 각성했다. 내가 싸이킥이 됐다고!!

"…뭐?"

깜짝 놀란 민시윤이 곧장 텐트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방향을 보니 3구역 쪽인 듯했다.

"아니, 시발. 그럼 나는?"

각성자들에겐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었다.

마치 가상현실 고글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에 그 어떤 창이 보인다는 것이다.

민시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

하지만 역시나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앞에서 자신을 한심한 눈초리로 응시 중인 삼촌 민호영 말고는.

"또 허탕이냐?"

"…그러는 삼촌은요?"

"됐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엉?"

"아니, 안 되면 안 된 거지 왜 저한테 짜증인 건데요?"

"너뿐만이 아니고 그냥 다 좆같아서 그런다."

'나 참. 진짜 별꼴이야. 개 재수없어.'

아무리 아빠의 동생이라지만, 이제는 볼 때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뺨이라도 몇 대 날리면 속이 좀 풀리겠네.'

물론 끝내 실행엔 옮기지 못할 속내일 뿐이었다.

패륜인 건 그렇다 쳐도, 원체 체급 차이가 너무 심했다.

'괜히 선빵 쳤다가 저 솥뚜껑만 한 주먹으로 한 대 맞으면 틀림없이 난 뒤질 거야.'

대체 저 인간의 주먹질은 얼마나 셀까?

민시윤이 그런 의문을 품던 순간이었다.

<인간> Lv.1

"…어?"

[나이 : 46세]

"어어?"

[등급 : 등외]

"서, 설마…."

[체력 : 25/30]

[지력 : 28/30]

[공격력 : 23/100]

[방어력 : 11/100]

[지구력 : 06/100]

.

.

.

"꺅!!"

눈앞 허공에서, 삼촌에 대한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떠올랐다.

그에 민시윤이 환희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영문을 모르는 민호영은 그런 조카를 바라보며 쯧쯧 혀만 찰 뿐이었고.

* * *

"아아."

두통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카운터에 엎어져 내내 자다 일어났는데도 그러네.

'그나저나, 이 해골 양반은 또 언제 왔다 갔대?'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마돌 3개가 보였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얼추 담배 다섯 갑 정도가 빈 듯했다.

"...?"

아니, 여섯 갑인가?

"으차차차-."

기지개를 켜며 상체를 일으켰다.

창문 너머로, 간이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끽연을 즐기는 해골 아저씨들이 보였다.

"무슨 노가다라도 뛰고 오나?"

오늘로 4일째였다.

이 정체 모를 공간에서 괴이한 손님들을 상대로 편돌이 노릇을 한 시간 말이다.

저 해골 손님들은 매일 비슷한 시각에 이곳을 방문하곤 했다.

계산도 첫날엔 칼잡이가.

둘째 날엔 활잡이가.

어제는 창잡이가 돌아가면서 담배를 사 가더라.

자느라 못 봤지만, 오늘은 아마도 도끼잡이가 왔을 것 같다.

뻐끔- 뻐끔-.

…거참 맛있게도 피네.

그들은 매번 구매한 담배 전부를 다 피울 때까지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거기다 각기 나름의 자세를 잡고서 진중한 기색으로 한 모금 한 모금 연기를 음미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딱히 표현하긴 어렵지만 그들 나름의 애환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고단한 일과를 끝낸 뒤, 삶의 유일한 낙인 흡연을 진중한 태도로 즐기는 듯하다.

그러다 문득 저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저 정도의 고단한 애환이라면….

"…택배 상하차?"

나도 안다.

이 동네에 그딴 일감이 존재할 리 없다는 거.

그럼에도 그 정도 헬 난이도의 직업군이 아니라면, 결코 풍겨 나올 수 없는 포스이기에 한 번 지껄여 본 거지.

"아이고, 두야."

잠시 소강상태였던 두통이 재개되었다.

이상하리만치 눈이 빠질 듯 아프다.

두통이 끊이질 않으니 요즘 들어, 끊었던 담배 생각이 점점 더 간절해진다.

누가 그랬지.

담배는 끊는 게 아니라 평생 참는 거라고.

나는 그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벌써 금연 3년 차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참기 힘든 게 금연이다.

참고로 마약이나 음주, 흡연 등 그 어떤 중독으로부터 벗어 나려할 땐 본인의 의지나 약물의 도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바로 생활 환경이란다.

왜 미국에서도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귀국한 참전 용사들 중 무려 90% 이상이 더는 헤로인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런 맥락에서 나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거지.

당장 내일조차 예측할 수 없는 인생 막장극을 겪고 있는 데다, 곁에는 저토록 흡연에 진심일 뿐더러 조예까지 깊은 담배 동호회 친구들까지 존재하니 말이다.

'…그냥 한 대 빨아?'

나는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해골들 틈바구니에 껴서 앉아 있었다.

'라이터를 안 가져왔네?'

"저, 불 좀…."

나름 내적 친밀감에 힘입어 나는 해골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그랬더니 여태 있는 듯 없는 듯 테이블 밑에 엎드려 있던 불똥개가 기지개를 켜더니만 슬며시 내 쪽을 올려다보는 게 아닌가!

"아니. 너 말고. 넌 안 돼."

네가 불 붙여 주면 난 타 죽어.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가게로 들어가 라이터를 챙겨서 나왔다.

이제는 좀 더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껴서 앉았지만, 내게 뭐라 하거나 나를 신경 쓰는 해골은 아무도 없었다.

찰칵-.

쓰읍-.

후아-.

"그래. 이거지!"

지난 3년간의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듯.

한 방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스켈레톤> Lv. 25

[직업 : 병사]

[체력 : ∞ ]

[공격력 : 56/100]

.

.

"...?"

근데 원래 오랜만에 담배 피면 막 헛것도 보이고 그러나?

5화.

휙!

<스켈레톤> Lv.25

.

.

.

휙-!

<스켈레톤> Lv.23

.

.

.

휙휙!

<스켈레톤> Lv.21

.

.

.

어느 쪽을 보든 마찬가지였다.

해골이 시야에 잡히는 족족, 각각의 신상명세가 시각 정보로 변환되어서는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와, 씨. 개쩔어.'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면으로 치자면 우측 상단.

뭔 이상한 사람 아이콘이 있길래 곁눈질을 했더니만.

<인간> Lv.5

[이름 : 구영수]

[직업 : 편의점 직원]

[나이 : 25세]

[등급 : 해당 없음]

[체력 : 500]

[지력 : 200]

[공격력 : 50]

[방어력 : 50]

[지구력 : 50]

.

.

.

'이거 지금, 내 정보 맞지?'

누가 봐도 이게 게임의 상태창 비슷한 것이란 건 진작 깨달았다.

어차피 비정상적인 상황에 있는데, 이런 것에 더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시발. 이거 뭔데?"

당장 저 근육 제로의 비실비실한 해골 손님들만 해도 평균 레벨이 20이 넘는다.

그런데 어째서 저들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내가 5레벨밖에 안 되냐고!

하지만 정작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문구는 따로 있었다.

[직업 : 편의점 직원]

엄중하고도 엄밀히 말하건대.

나는 편의점 직원이 아니다.

'언제든 때려칠 수 있는 아르바이트생이지!'

실제로 며칠 전 진짜 그만두려 하기도 했었고.

"그러니 빠른 정정 바랍니다."

…나 지금 누구한테 얘기하냐.

갑갑한 마음에 담배 한 대를 더 물었다.

찰칵-.

불을 붙이자 대뜸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칼잡이 해골이 내게 덜그럭덜그럭, 엄지척을 해보였다.

해골 세계에선 골초일수록 대접을 받나?

'하긴, 폐병으로 빨리 뒤지면 그만큼 충원도 빠를 테니.'

…아님 말고.

"근데 이거, 대체 어떻게 끄는 거지?"

보이는 화면 어디에도 창을 끄는 '오프' 버튼은 없었다.

시험 삼아 오프, 종료 등 별 시덥잖은 단어들도 외쳐봤지만, 창이 꺼지질 않는다.

그 와중에 문득 발치가 후끈거렸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사료가 마려웠는지 불똥개가 내 발목에다 화염 머금은 주둥이를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켈베로스> Lv.35

[이름 : 크라노스]

[속성 : 화염계]

[공격력 : 23,341]

…뭐?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켈베로스> Lv.35

[이름 : 크라노스]

[속성 : 화염계]

[공격력 : 23,341]

"…이거 고장난 거 아냐?"

시발.

고작 똥개 새끼인 줄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 중에 젤 큰형님이셨네.

"사, 사료…. 드릴깝쇼?"

"…멍?"

* * *

알바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무려 단가 8만 원짜리 개밥그릇 한 개가 사입된 적이 있었다.

뭐 말로는 304 스텐리스 어쩌고 하는데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사람 밥그릇은 물론 그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냄비조차도 그거보다 안 비싼데.

금띠를 두른 것도 아니면서 그 가격을 받아 처먹으려는 게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라.

그게 또 팔릴 거라 기대하는 사장님의 정신 상태도 의문이었고.

결론적으로 내 예상은 찰떡같이 들어 맞았더랬다.

알바를 때려친다고 통지했던 그 마지막 날 아침까지, 그 양푼 개밥그릇은 먼지만 소복이 쌓인 채 그대로 진열되어 있었더랬지.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이딴 사치품도 다 쓸모가 생기게 될 줄.

"정성껏 차렸습니다. 모쪼록 입에 맞으시길."

- 왈!

불똥개. 아니 크라노스 님은 다행히 새로 바뀐 밥그릇에 별다른 거부감을 표하지 않으셨다.

어쩌면 평소보다 좀 더 부은 사료의 양과, 그 사이 사이에 남몰래 껴 넣은 육포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레벨이 무려 35다.

어쩐지 가끔 저 불똥, 아니 크라노스 님이 지들 정강이뼈를 물고 빨고 해도 해골들이 찍소리조차 못하더라니.

아무튼 화견이시여.

그간의 무례를 용서하소서.

* * *

사료를 깨끗이 비운 크라노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식후 산책이라도 가신 걸까?

궁금증에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시선을 돌리던 중, 불현듯 이유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엄습해 들었다.

'…뭐지? 왜 이렇게 어색한 느낌이 드는 거지?'

크라노스가 사라진 걸 빼면.

편의점 앞 풍경은 종전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해골들은 여전히 줄담배를 피는 중이었고.

바닥에 놓인 개밥그릇도….

'…그대로가 아니잖아!'

눈 깜짝할 새 밥그릇이 바꿔치기 당해있었다.

'…뼈그릇.'

모양새로 보아 두개골 중 그 어느 한 부분이다.

나는 딱히 사라진 그릇을 찾아 탐문에 들어갈 것도 없었다.

도끼잡이 해골의 대가리 일부가 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으니까.

"이리 내요."

덜그적-.

"쓰읍!"

잠시 실랑이가 벌어지긴 했지만 결국 개밥그릇을 돌려받는 데는 성공했다.

옆자리 해골이 별안간 자신의 검으로 놈의 목을 치더니만, 테이블 위로 떨어진 대가리를 통째로 나한테 건네준 것이다.

덜그럭-.

"고, 고마워요."

내가 양푼을 회수해 가자, 목이 떨어진 해골은 자기가 직접 두 손으로 머리를 잡고는 금세 셀프 조립을 마쳤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마저 담배를 피운다.

'진작 줄 것이지.'

나는 회수한 개밥그릇을 문가 옆에 비치해 두었다.

나중에 시간 내서 개집도 하나 만들어 줘야지.

근데 이제 보니 바닥에 이상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라색 반짝이는 조약돌들.

"저거…."

마돌이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다.

"심 봤…."

무심결에 소리치려던 걸 급히 입을 다물었다.

테이블 근처에 떨어진 거라, 어쩌면 해골 아저씨들이 흘린 걸 수도 있다.

몰래 주워서는 '님들 이거 흘리셨어요'라며 감동 코드 좀 심어줘야지.

그래 봤자 즙 짤 눈물샘도 없는 양반이긴 하다만.

"…음?"

소리소문없이 마돌들을 주워 담던 중,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 해골들이 흘린 거라면, 어째서 마돌들이 의자 근처가 아닌 사방팔방으로 퍼져서 떨어져 있던 걸까?

"어라? 이거 봐라?"

나는 곧 새로운 가설을 지지해 줄, 아주 강력한 단서 하나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마돌 십수 개가 한꺼번에 뭉텅이로 출토된 지점.

그곳은 다름 아닌 개밥그릇이 놓여 있던 장소 부근이었다.

"설마 이거…. 크라노스 님께서?"

생각을 거듭하면 할수록 그럴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동안 공짜 사료를 축내는 떠돌이 개 취급을 해댔는데, 알고 보니 이 편의점에서 가장 큰 손이셨던 거다.

여태 바닥에서 주운 마돌만 무려 45개에 달했으니 말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확인 작업에 나섰다.

촤르륵-.

"…이 돌, 혹시 아저씨들 겁니까?"

테이블 위에 수집한 마돌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만약 그들이 고개를 주억인다면, 나는 미련없이 놈들의 지문부터 채취해 대조해 볼 참이었다.

'아참. 지문이 나올 리가 없지.'

덜그적-. 덜그적-.

다행히 그들 해골 모두는 두개골을 내저으며 자신들이 청백리한 존재임을 입증했다.

'제법 양심적인데.'

그래서 '기분이다'하고 담배 한 갑씩을 쐈다.

덕분에 해골들의 귀가 시간은 평소보다 좀 더 늦을 듯싶었다. 공짜로 얻은 담배까지 서슴없이 뜯는 걸 보면 말이다.

해골 세계엔 비축이랄지, 저축의 개념이 아예 없는 건가?

'뭐, 내 알 바 아니다만.'

* * *

카운터 위로 그간에 받은 마돌들을 수북이 쌓아두었다.

대략 50~60개쯤 되는 듯했다.

이 마돌로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얘 또 혼잣말하네?"

아, 깜짝이야.

<서큐버스> Lv. 13

[이름 : 아리야]

노출 누님께서 돌아오셨다.

나흘 만에 재방문이었다.

"손님. 들어오실 때 기척 좀 내주시면 안 될까요?"

"아, 미안. 잠입 은신이 직업병이라…. 노력은 해 볼게."

그리고 가급적 옷도 좀 덜 선정적인 거로다가….

'말을 말자.'

"구경 좀 해도 되지?"

"되고 말지요."

눈앞에 첫날과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한동안 매대 주변을 돌아다니던 서큐버스, 아리아가 이윽고 카운터 앞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가슴골이 훤히 다 보였다.

품에 들고 온 물건이 하나도 없단 이야기다.

곧 아리아의 입에서 그 이유가 흘러나왔다.

"새로 들어온 먹거리는 없어?"

"...."

이 할머니가 지금 뭐라는 거지?

정신적 데미지 탓에 잠시 사고 회로가 멈춰 있던 나는 잠시 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보급 트럭이 안 오는데 어떻게 물건을 채워요."

"보급 트럭이 뭔데?"

"여기 가게에서 파는 상품 가져다 주는 트럭이요."

"트럭이 뭔데?"

"...."

말을 말아야지.

"아무튼 물건은 여기 있는 게 다니까, 아껴 사 드세요."

"후웅-. 아쉽네. 그 꾸덕꾸덕하고 거뭇거뭇한 면 요리 참 맛있던데."

그때 아리아가 사 간 물건 목록이 떠올랐다.

아마도 짜파게티 컵라면을 말하는 거겠지.

실제로 매대엔 그 물건 자리가 비어있기도 했다.

다시 채우자면 보급을 받아야 하고, 보급을 받으려면 발주를 넣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응? 뭐가?"

"아뇨. 잠시만요."

나는 시험 삼아 카운터 pc의 단품 발주 버튼을 눌러보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전기도 계속 공급되는 마당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 거다.

<상품 검색>

[짜파게티 컵라면(小)]

일단 시험 삼아 수량 5를 입력한 뒤 확인 버튼을 눌렀다.

곧 '성공적으로 발주되었습니다'란 메시지가 떴다.

물론 이게 끝은 아니었다.

실제 물건이 배달되어야 진짜 발주가 성공한 거지.

"일단 발주 넣었거든요? 내일 한번 다시 와 보실래요?"

"발주가 뭔데?"

"…필요한 걸 주문하는 거요."

"주문이 뭔데?"

이거 일부러 열받게 하려는 거 같은데?

"암튼 짜파게티 말고도 맛있는 거 많아요. 천천히 골라 보세요."

"우웅. 사실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모르겠거든."

"그럼 제가 몇 개 추천드려도 될까요?"

"그럼 나야 고맙지."

카운터를 나와 바구니를 들고 매대로 향했다.

아리아가 내 뒤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근데 붙어도 너무 붙는다.

"저…. 손님."

"웅? 왜?"

"닿습니다만?"

"뭐가 닿아?"

"…아닙니다."

나는 프로 편돌이다.

물건 추천에만 집중하자.

"작년 한 해 가장 많이 팔린 제품 탑텐 위주로 골라드릴게요. 그럼 후회 없으실 거에요."

"탑텐이 뭔데?"

"...."

육개장 사발면을 짚는데 손이 부들부들거렸다.

* * *

"62,380원입니다."

나는 결코 과잉 소비를 유도하지 않았다.

그저 맛있는 걸 골라주다 보니 자연스레 구매 금액이 높아졌을 뿐이다.

"믿어주세요."

"웅? 뭘 믿어?"

됐고!

아리아는 예의 그 마돌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엔 6개였다.

"마돌 여섯 개 받았…."

어라?

그러고 보니….

나는 계산 중에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우쳤다.

아리아, 그녀가 여기서 나와 말이 통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 말이다.

나는 내친김에 질문을 던졌다.

"손님.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뭔뎁?"

"손님이 지불하신 이 마돌이란 돌이요. 어디에 쓰는 건가 해서요."

돌연 아리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곧 반문했다.

"마돌을 사용할 줄 모른다고?"

"그렇… 습니다만?"

"너, 멍청이였구나?"

"...."

6화.

강북구 싸이킥 연수원.

정문을 통과한 관광버스 한 대가 정차했다.

곧 버스에서 사람들이 하차했다.

총인원은 32명.

제17차 각성일 때 싸이킥으로 거듭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앞으로 6주간 기초 연수 과정을 거칠 예정이었다.

사실 미궁 출현 초반엔 이러한 과정 자체가 없었다.

그때는 미궁 내부에 대한 정보에 대해 모두가 무지한 상태였던지라.

소위 말하는 닥치고 돌격식으로 공략을 감행하면서 상당한 인적, 물적 출혈을 감수했었더랬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체계가 확립된 관계로, 뒤늦게 각성한 싸이킥들은 반드시 이와 같은 사전 교육과 훈련을 이수해야만 미궁 출입이 가능해졌다.

정책적으로 허가증이 없는 자는 제 아무리 각성자라 한들 그 내부는커녕 입구조차 얼씬거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싸이킥이라는 소중한 인력이 무분별하게 소모되는 걸 최대한 막고자 하는 당국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비단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 역시 싸이킥들에 관한 정책은 크게 다르지 않은 시류였으니.

당장 각성 능력을 뽐내고 싶어 하는 교육생 대부분은 내심 불만을 가졌음에도 대놓고 티를 내진 못했다.

미궁 공략을 주관하는 정부 기관에 자칫 밉보였다가는 교육 기간이 늘어나거나, 최악의 경우 라이센스 발급이 무기한 연기될 수도 있으니까.

이들 교육생 중에는 민시윤도 끼어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각성 당시의 짜릿한 기분을 잊을 수가 없었다.

'특히 그 재수탱이 삼촌 민호영의 허둥지둥거리던 모습이란.'

물론 민호영은 부모와의 계약을 들먹이며 민시윤더러 자신의 뜻을 따를 것을 뒤늦게 종용했다.

민시윤도 기분이 더럽긴 했지만 딱히 어른들의 약속을 깰 생각은 없었다. 당분간은 말이다.

'아직은 지원이 필요한 시기야. 그러니 조금만 더 참자.'

교육을 성공적으로 수료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거부가 되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 시점부터가 신참 싸이킥들에겐 진정한 고난의 시작일 수도 있었다.

사전 교육의 효과로 점차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신규 싸이킥 중의 약 10퍼센트가 고작 한 달을 넘기질 못한 채 미궁에서 명을 달리한다고.

예의 그렇듯 첫째 날 첫 시간은 시청각 교육이었다.

교육생들이 강당에 자리를 잡고 앉자 곧 영사기가 돌아가며 스크린에 미궁에 대한, 여태껏 밝혀진 정보들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내용 대부분은 이미 일반 미디어로도 충분히 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때문에 교육생 대부분은 곧 흥미를 잃고 엎드려 자거나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민시윤은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결코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번 연수원 강사진 중, 비전 레기온 소속 싸이킥이 포함되어 있다는 정보를 부모로부터 들은 까닭이었다.

대한민국 제일의 싸이킥 연합체인 비전 레기온 말이다.

'잠시도 방심하면 안 돼.'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교육생들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를 일.

민시윤은 다시금 자세를 꽂꽂이 바로잡았다. 외부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느라 정작 강의 내용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질 않고 있었지만.

[미궁에서 획득 가능한 정수는 보시는 것처럼 모두 세 종류입니다. 각기 색상에 따라 화이트 크리스탈, 옐로우 크리스탈 그리고 레드 크리스탈로 구분짓는데요. 이 정수를 싸이킥이 복용하게 되면 랜덤하게 능력치 하나를 영구적으로 올려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그 대단한 효능만큼이나 드랍률은 극악이지만요. 성능은 레드, 옐로우, 화이트 순이고요. 현재까지 밝혀진 드랍 확률은 화이트가 0.01%. 옐로우가 0.001%, 레드가 0.0001%이라고 하는군요. 그러니 만약 몬스터를 처치하고 난 뒤 바닥에 뭔가 색깔 있는 돌이 반짝인다? 그럼 해당 싸이킥이나 파티원들은 로또를 맞은 거나 진배없는 겁니다. 가장 낮은 등급의 옐로우 크리스탈만 해도 최근 경매 가격이 무려 150억에 낙찰….]

* * *

촤르르륵-.

탁! 탁탁!

촤르륵-.

탁탁탁!

뭘 하고 있는 소리느냐고?

멍청이 편돌이와 과다 노출 손님의 숨 막히는 공깃돌 대결이다.

사실 소싯적에 공깃돌 좀 던져 본 나였다.

소꿉친구들은 물론, 이웃 마을 옆 마을 심지어는 마을버스를 타고 다니며 노선상의 거의 모든 공깃돌쟁이들을 도장 깨기하고 다니던 나였으니까.

하지만 바야흐로 오늘에 이르러서야.

나는 마침내 진정한 평생의 호적수를 만나고야 말았다.

"알바, 너. 돌 좀 던진다?"

"손님이야말로 손놀림이 보통이 아닌데요?"

예의상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아리아는 정말로 공깃돌의 초고수였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내가 쥔 공깃돌, 아니 마돌을 바닥에 내려놓는 것으로 패배를 인정하며 나는 물었다.

"근데 이 동네는 어째서 8단까지 있는 거죠? 원래 5단까지가 국룰 아니었나요?"

"국룰이 뭔뎁?"

"...."

말을 말자.

아무튼 진 건 진 거고.

"그럼, 이제 멍청이란 말은 취소해 주세요."

"왜? 멍청아."

나는 그녀에게 마돌 쓰임새를 물었었다.

그리고 멍청이란 소릴 들었지.

그런데 그녀가 가르쳐 준 마돌 사용 방법이란 게 바로 이거였다.

여태까지 우리가 하던 공기놀이 말이다.

"공기놀이 따윈…. 손님 오기 전에도 저 혼자 실컷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랬어?"

"예!"

"근데 왜 물어봤어? 멍청이."

'시발.'

<서큐버스> Lv. 13

새삼 아리아의 레벨을 확인한 나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래서 쪼랩이 서러운 거구나.

렙 차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사자후를 터트렸을 텐데.

"저기, 손님."

"왜, 멍충아."

"뭐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

잠시 눈만 끔뻑이며 날 응시하던 아리아가 뒤늦게 대답했다.

"멍청 멍청이가 되고 싶은 거라면, 좋아."

"레벨은 어떻게 올리죠?"

"멍충 멍총아. 그것도 몰라?"

'또 공기놀이로 올리지 이딴 소리하면 렙차고 나발이고 멱살잡이를…'

…할 멱살이 없다.

멱살도 뭐 잡을 게 있을 때 잡는 거지, 이건 뭐 온통 살색투성이라….

"레벨은 말이지."

꿀꺽-.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 돼."

하….

이 당연한 말을 들으려고 그 욕을 처먹은 게 아닌데.

"그나마 공깃돌 던지기는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그런 거로 어떻게 레벨을 올려. 멍충아."

그래.

맘대로 불러라.

"그 자기 일이란 게,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거죠?"

"자기 일이 뭐긴? 자기가 하는 일이지."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넌 직업이 뭔데?"

"백수…."

아니, 잠깐!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우측 상단 사람 모양 아이콘을 째렸다.

<인간> Lv.5

[이름 : 구영수]

[직업 : 편의점 직원]

[등급 : -]

'…아니, 미친.'

설마 자기 일이란 게.

편의점 일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맞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 몰랐니? 서큐버스는 상대방 생각을 읽을 수가 있는뎁."

"예. 제가 좀 멍청해서요."

잠깐, 그럼 여태까지 속으로 쌍욕한 거 다 알고 있었나?

"웅. 알다마다."

"…죄송합니다."

누가 그랬지.

사과에는 타이밍이 있고 그 타이밍은 빠를수록 좋다고.

나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카운터에다 고개를 처박았다.

그러자 손님의 자비롭고 자애로운 목소리가 귓등을 타고 흘러들었다.

"괜찮아. 누구 접대하는 게 어디 보통 쉬운 일이니? 대놓고 그런 것도 아닌데 속으로 욕 한두 번쯤 박을 수도 있지. 나도 가끔은 마왕 새끼, 시발새끼 하고 욕하는데. 뭘…."

나는 감격에 겨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등에 달린 박쥐 날개피가 새삼 천사의 깃처럼 느껴지는 건 내 글썽이는 눈물 탓일까?

"근데요, 손님. 이 동네엔 마왕도 살아요?"

"그것도 몰랐니? 멍충 멍충 멍충아."

시발, 진짜 박쥐 같은 년이….

* * *

간만에 작동을 해서 그런가?

온수기 손잡이가 좀 뻑뻑하다.

이따 나사 풀고 기름칠 좀 해 놔야지.

꿀럭-. 꿀럭-.

육개장 사발면에 더운물이 받아지고 있었다.

"손님. 혹시 좀 짜게 드세요?"

"응. 난 짭쪼롬한 게 좋아."

경계선에 약간 못 미치는 높이까지 물을 받은 후 뚜껑을 덮었다.

나무젓가락을 약간 떼서는 벌어진 주둥이에 물렸다.

그 과정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리아의 입에서 처음으로 칭찬이라 할만 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와앙. 너 보기보다 멍충하지 않구나!?"

우리의 대화 수준에서 이 정도는 극찬인 거다.

…그렇다고 하고 넘어가자.

"그나저나, 모르면 좀 물어보시질 않고."

"우웅. 진짜 그럴 걸 그랬어."

먼저 컵라면을 세 컵이나 사 갔던 그녀였다.

한데 그걸 전부 익히지 않고 취식했단다.

뜨거운 물 붓는 걸 몰랐다나 뭐라나.

'하긴.'

아리아에겐 영 생소한 음식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

근데, 그러면 짜파게티 맛있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그건 양념 가루가 영 텁텁해서 그냥 내 멋대로 레시피를 만들어서 먹었거든."

"어떤 레시피였는데요?"

"면에 양념 가루 뿌린 걸 핏물에 담군 뒤 불려서 먹었어."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멍충아. 이젠 귀도 잘 안 들려?"

"무, 무슨 피요?"

대답에 앞서 아리아가 씩 하고 웃어보였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고혹적인 미소였다.

곧 그 입에서 끔찍한 고백이 흘러나왔다.

"사람, 인간의 피."

'헉.'

부들거리는 손으로 급히 나무젓가락 한 개를 반으로 쪼개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서는 그녀에게 내밀어 보였다.

"그건 무슨 새로운 놀이니?"

"이, 있어요. 뻘짓이라고."

십자가가 안 듣는다니….

그럼 의성 마늘햄은 어떨까?

몰래 사발면에 몰래 까 넣어볼까?

"풉-."

아….

비웃음 당했다.

"농담이야, 농담. 사람 피는 무슨…. 염소 피였어."

"그 소리가 더 설득력 없게 들리는 건 왜일까요?"

"그나저나 이건 언제 먹어?"

아리아가 육개장을 가리켰고, 나는 초시계를 확인했다.

'2분 15초.'

모름지기 육개장 사발면은 약간 덜 익혀야 제맛이지.

"지금 드시면 됩니다."

"앗, 그래!"

아리아가 젓가락을 포크처럼 손에 쥔 채 면발을 몇 번 휘휘 저었다.

곧 면발을 한 입 베어 문 그녀의 두 눈이 12볼트 전구마냥 커졌다.

"와-. 맛있어! 진짜 진짜 맛있어!"

역시 부동의 베스트 셀러답다.

인종, 아니 종족마저 가리지 않고 모두의 입맛을 사로잡는 게 바로 육개장 사발면이지.

…어디서 광고 안 들어오려나?

"이것도 드셔 보세요. 사발면하고 궁합이 찰떡이거든요."

나는 송갓집 볶음김치도 하나 까서 그 앞에 올려두었다. 아리아는 그 맛을 보기도 전에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색이 빨간 게, 맛있어 보여."

"...."

뇸뇸.

"와-. 미쳤다. 이거 왜 이렇게 달콤새콤해? 완전 맛나!"

후후

이게 바로 K-볶음김치라는 것이다.

맛이 어떠냐.

"맛은 있는데, 반말은 좀 그래. 멍충아."

"…마음속 생각일 뿐입니다만."

혹시 이 동네도 대한민국 못지않은 유교 탈레반 국가인가?

아무튼 육개장 한 사발과 볶음김치 한 봉지가 게눈감추듯 사라져버렸다.

아리아는 나오지도 않은 배를 두드리며 흡족함을 감추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맛도 있구나. 진짜 너 아니었음 어쩔…. 추천해 줘서 정말 고마워."

맨입으로요?

"물론 맨입은 아니지. 원하는 게 뭐야?"

"제 속내를 읽지 않는 거요."

"진짜 그게 소원이야?"

'예, 제발요.'

"좋아. 어려운 거 아니니까, 들어줄게."

'언제부터?'

"지금부터."

"…읽으셨는데요?"

"이젠 아냐."

"그 말을 어떻게 믿죠?"

"흠…. 글쎄."

좋은 수가 떠올랐다.

'나잇값도 못 하는 거지 같은 박쥐 년.'

아리아가 곧바로 내 멱살을 쥐어틀었다.

"…죄송합니다."

7화.

연수원 4주차.

식당이 여느 때보다 퍽 시끄러웠다.

"혹시 아침에 뉴스 보셨어요?"

"아니? 왜? 무슨 일 있어?"

"종로 미궁에서 레드 크리스탈이 드랍됐다나 봐요."

"헐? 진짜? 대박. 우리나라에서 레드 크리스탈 드랍된 건 최초 아냐?"

"그러니까요. 뉴스에서 하는 말이, 전 세계를 놓고 봐도 다섯 번째인가 그렇대요."

"와-. 미쳤다. 저번에 기사 보니까 옐로우 크리스탈 경매로 나온 게 56억인가에 팔렸다던데. 그럼 대체 레드는 얼마라는 소리야?"

"이번에 나온 거 빼고, 여태까지 드랍된 4개 중에서 실제로 판매가 된 건 하나뿐이었는데, 얼마에 팔렸다고 했더라? 1억인가, 1억 5천만인가…."

"뭐? 왜 그거 밖에 안 해?"

"1억 원 아니고, 1억 달러요."

"아…."

1억 달러면 요즘 환율로 1천 300백억 정도다.

대화에 참여 중인 교육생 대부분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저 한쪽 구석에서 홀로 식사 중인 민시윤만 빼고.

'한심한 인간들.'

미궁의 출입구는 서쪽 한 방향뿐이었다.

옛 지형으로 따지자면 종로구청 입구 사거리 부근이다.

초보 싸이킥들의 활동 반경은 그 입구로부터 그리 넓지가 못했다.

당장 광화문역만 넘어가도 상대하기 버거운 몬스터들이 출몰할뿐더러, 북쪽으로 가면 갈수록 온갖 기상천외한 함정 기관들이 도처에 널려있는 탓이었다.

한데 크리스탈이 드랍되는 지역은 그보다 훨씬 더 위쪽인 경복궁 담장 너머부터라고 알려져 있었다.

특히 지금 언론에서 언급되고 있는 레드 크리스탈의 경우엔 미궁의 북쪽 끝자락이라고 할 수 있는 어린이 박물관에서 획득한 거라 밝혀진 상태였다.

현실이 그러하니 이들 교육생에게 있어 크리스탈이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의 존재일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다들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서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으니, 그 모습이 어찌 한심해 보이지 않으랴.

'일확천금만 노리지 말고, 당면한 현실을 좀 보라고들.'

민시윤은 심지어 식사 자리에서조차 꼿꼿한 자세를 철저하게 유지했다.

역시나 비전 레기온에서 파견 나온 강사가 그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분명 수업 성적뿐만이 아니라 평소의 행실과 태도까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연수원은 강사로 임용된 싸이킥들의 출신에 대해 전혀 정보를 공개하고 있질 않았다.

민시윤이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조신한 태도로 식사를 마친 민시윤은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미리 챙겨 온 활명수 한 병을 까서 한 번에 들이켰다.

워낙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보니 없던 소화불량까지 생겨버린 것이다.

그래도 민시윤은 괜찮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이는데…. 내 정성을 몰라볼 리가 없지.'

민시윤이 화장실을 나와 휴게실로 들어섰다.

그곳에 모인 교육생들도 레드 크리스탈을 화두로 재탕 삼탕을 이어가고 있었다.

민시윤은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며 내심 그들을 비웃었다.

그러다 휴게실에 강사 두 명이 들어오는 걸 보고는 그 즉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 * *

우리 편의점 뒤편엔 작은 마당이 있다.

포장이 안 된 흙바닥이라, 땅을 파기에 딱 제격이다.

-딱!

"아싸!"

우리는 그곳에 구멍 하나를 파 놓고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따닥!

"오 마이 갓."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나와 해골 아저씨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딱!

"아니, 님들 왜 이렇게 잘해요?"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구슬이란 마돌이었고.

"하…. 이 아저씨들. 진짜 초짜 맞아?"

달그락-.

활잡이 해골이 내게 앙상한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판돈으로 걸었던 마돌 다섯 개를 그 위에 올려주었다.

'아무래도 수상해. 뭔가 냄새가 나는데?'

분명 초장엔 내가 따고 있었다.

그래서 한땐 마돌이 거진 70개까지 늘어났었지.

근데 판돈을 올리자마자 귀신같이 따는 판보다 잃는 판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따닥-!

'시발, 저거 봐!'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돌을 던지는 해골들의 손엔 힘아리가 전혀 없었다.

비실비실 날아가다 도중에 뚝뚝 떨어지는 마돌들을 보고는, 잘하면 오늘 저 손님들 무기까지 저당 잡을 수 있겠다 싶었지.

근데 지금은 완전 딴판이었다.

한 해골은 구속이 미쳤고.

또 다른 해골은 제구력이 미쳤다.

나머지 해골들도 각기 실력들이 수준급이었고.

'…저 새끼들, 어쩌면 생전에 랜디 존슨이나 그렉 매덕스가 아니었을까? '

생각해 보니 둘 다 아직 살아있으니 아니겠군.

따닥!

"그마안! 그만해. 이러다 다 꼴아아!"

'엇'하는 사이에 갖고 있는 마돌이 50개로 줄었다.

그나마 초반에 좀 따 놔서 이 정도인 거지.

이 추세로 가다간 오링 확정이다.

그래서 결국 백기를 들었다.

"제가 재야의 구슬까기 고수분들을 몰라뵈고는 잠시 망둥어마냥 까불었습니다. 오늘 크게 배웠으니 부디 아량을 베푸시어 이만들 하시지요."

달그락-.

서큐버스 아리아는 말을 할 줄 아는 반면 말귀가 어둡고.

해골 아저씨들은 말을 못 하는 반면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신기한 재주를 지녔다.

혹시 그래서 누가 더 좋냐고 묻는다면 살짝 고민이 될 듯도 싶다.

쉴 새 없이 흡연하는 친구들과 폭력적이고 헐벗은 누님 중에 누굴 골라야 할까.

덜그럭-.

"…예?"

불현듯 해골 하나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돌아보니 다들 손에 담배 한 갑씩을 쥐고 있었다.

'역시 배우신 분들.'

운동으로 땀 빼고 난 뒤의 흡연은 국룰이지.

우리는 테이블로 이동해 끽연 타임을 가졌다.

오늘은 검잡이 해골의 후두골이 재떨이로 테이블에 올라왔다.

왜 매번 부위가 달라지는지는 그들만이 알 일이다. 물어봐 봤자 대답도 못 할 테니.

투둑-.

줄담배를 이어가던 중에 도끼잡이 해골이 불현듯 테이블 위 내 앞으로 뭔가를 내던졌다.

모두 여섯 알.

모양은 틀림없는 마돌인데 정작 색상이 처음 보는 노랑색이었다.

"이게 뭐죠?"

덜그럭, 덜그럭-.

해골의 제스처를 대충 해석해 보니 다음과 같았다.

-넣어 둬, 개평이다.

옳게 해석한 건진 모르겠으나, 내가 그것들을 품에 집어넣는 시늉을 해도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대충 맞는 모양이다.

근데 이 마돌은 어째서 색깔이 노란 걸까?

나는 합리적인 추론에 의거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노란 마돌이 빨간 마돌보다 저렴하다!'

노름판에서 딴 돈보다 개평을 더 많이 뿌린다는 건 영 이치에 맞질 않는 짓이다.

설령 부처님 앞이라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간 그 뭔 개소리냐며 핀잔이나 들을 거다.

'내가 잃은 빨간 마돌이 총 12개.'

그 중 검잡이 해골이 따 간 마돌이 6개다.

그러고 노란 마돌 6개를 줬으니, 그 가치는 잘 쳐줘 봐야 1/10 정도일 것이다.

"후후-."

나는 내심 내 명석한 추리력에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노름질을 통한 배움이긴 했지만, 그래도 내 스스로 이 동네의 화폐 가치에 대해 깨우쳤다는 게 여간 자랑스러운 게 아니다.

"이건 뒀다 거스름돈으로 써야지."

나는 노란 마돌을 유니폼 호주머니에 잘 갈무리해 넣었다.

그나저나 공기놀이에 이어 이젠 구슬치기까지 저들의 상대가 안 되니 걱정이 크다.

아무래도 피지컬적인 요소가 가미된 놀이로는 영 이기기가 힘들 듯하다.

그래서 드는 생각인데, 다음엔 홀짝을 하자고 해 볼까?

* * *

한호준은 본래부터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싸이킥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레드 크리스탈을 획득하고 나서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제일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 각성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전 세계 미디어들은 벌써부터 레드 크리스탈의 시세를 매기느라 난리법석들이었다.

최소 2억 달러.

주류 언론들에서 나온 지배적인 예측 가격이었다.

그것도 경매 시작 가격이 말이다.

이는 먼저 낙찰된 매물보다 무려 5천만 달러나 더 뛴 가격.

호가 상승의 원인으론 아무래도 직전 낙찰자의 후일담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레드 크리스탈을 복용한 후 불과 두 달 만에, 30레벨에 불과하던 자가 무려 전 세계 최초로 60레벨을 달성했던 것이다.

그러니 자본력이 넘쳐나는 싸이킥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

어제 막 미궁을 빠져나온 한호준에게도 이미 비선을 통해, 수도 없이 구매 제의가 쇄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중엔 절로 눈이 번쩍 뜨일만한 제시도 있었다.

'2억 5천 달러라….'

오늘 아침에 걸려 온 전화에서, 중동 왕족 출신의 싸이킥이 제시한 금액이었다.

심지어 그는 경매를 통하지 않고 직거래를 약속한다면, 예약금 명목으로 지금 당장이라도 1억 달러를 송금해 줄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앞으로 평생 발에 땀이 나도록 미궁을 뛰어다닌다 한들, 내가 그 정도 돈을 모을 수는 있으려나?'

물론 레드 크리스탈을 또 획득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호준은 그런 행운, 아니 천운이 또다시 자신에게 찾아올 거라 기대치 않았다.

'솔직히 이번 경우만 해도 거진 횡재수에 가까웠는걸.'

한호준은 파티원 셋과 어린이 박물관을 공략 중이었다.

어린이 박물관은 미궁의 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가 존재한다고 강력하게 의심되는 장소였다.

사실상 미궁 1층의 라스트 스테이지인 셈.

한호준 파티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 보는 괴물과 마주쳤었다.

제 머리를 옆구리에 낀 채로 무시무시한 살기를 발산하며 달려들던, 목 없는 기사.

상태창에 표기된 놈의 이름은 <듀라한>이었다.

그리고 그 듀라한의 손에 동료들 모두가 죽었다.

아니, 실은 한호준이 그들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압도적인 공포에 이성이 잠식되어버린 나머지, 자기 혼자 도망치면서 그 방문을 닫아버렸으니까.

- 아, 안 돼!

- 살려줘!

- 문을 열어. 어서 열란 마… 으아악!

죽어가며 내지르던 그들의 비명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연했다.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죄책감에 한호준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럼에도 괴로움이 가시질 않자, 하는 수 없이 주머니 속 레드 크리스탈을 꺼내 지그시 바라보았다.

들불처럼 일어난 탐욕이 그 가슴에서 곧 가책을 완전히 밀어냈다.

'…파는 게 최선이겠지?'

한호준의 현재 레벨이 53.

대한민국에선 세 번째로 높을뿐더러, 전 세계적으로도 100위권 내의 고레벨 싸이킥이었다.

'어차피 레벨업에 대한 욕심은 그다지 없으니….'

특히 이번 회차는 레벨 상승에 대한 갈망을 더욱 꺾어 놓는 계기로 작용했다.

'듀라한, 그 괴물 놈의 레벨이 무려 135였지. 설령 내가 이걸 먹는다고 해도 놈을 토벌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레드 크리스탈은 그 듀라한이 등장하기 직전 획득한 아이템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중앙 제단에 반짝이는 돌이 보이길래 냅다 집어 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로 인해 듀라한의 봉인이 풀렸을 가능성도 배제하진 못했다.

하지만 한호준은 이제 그 일에 관해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목격자들은 다 죽고, 자신만 살아남았으니까.

'고레벨 싸이킥인 내가 먹는다고, 먼저 낙찰자처럼 30레벨이 오른다는 보장도 없으니 말이지.'

고민을 끝낸 한호준은 이내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연락을 취했다.

* * *

해골 타짜들에게 잃은 마돌은 금방 복구되었다.

아침저녁으로 빠짐없이 방문해주시는 우리 편의점의 큰손, 불똥개 아니 크라노스 님 덕분이었다.

사료 한 사발만 퍼 주면 빨간 마돌을 막 8~10개씩 싸 놓곤 했으니까.

'…시발.'

알고 보니 마돌이 그 똥개 놈의 항문에서 나온 똥덩어리였다니.

서큐버스 아리아는, 그저 지불 방식에 차이가 있는 것뿐이라며, 질색팔색을 해대던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래 놓고 정작 자기는 두 번 다시 공기놀이 안 하려고 하더라.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싱크대에서 손도 겁나 씻다가 내게 걸렸다.

'근데 아까부터…. 영 신경 쓰이네.'

결국 참다못한 내가 아리아에게 물었다.

"손님. 혹시 일행 있으신가요?"

"엉? 아니? 난 늘 혼자 다니는데. 왜?"

나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길 건너 전봇대를 가리켰다.

"저 뒤에서 아까부터 누가 계속 여길 쳐다보는 듯해서요."

내 말에 그리로 시선을 옮긴 아리아가 곧 정색한 얼굴로 중얼댔다.

"아, 저 목 없는 새끼. 또 쫓아왔네."

"목 없는 새끼요?"

8화.

해골 아저씨들이 말을 못 하는 건,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현상일는지도 모른다.

발성에 반드시 필요한 성대 자체가 없으니 말이다.

근데 지금 내 눈 앞에, 그딴 개연성 따윈 개나 줘 버린 신규 손님이 나타나 버렸다.

"잘 지냈소?"

행색은 기사 차림인데, 쇄골뼈 위로 뭐가 없다.

원래 자리에 있어야 할 머리(투구)는 옆구리에 낀 채였다.

그런데도 말을 할 수 있다니.

"못 본 새, 더 아름다워지셨구려."

상태창에 표시 된 새 손님의 이름은 '듀라한'이었다.

근데 레벨이 무려 135였다.

첨엔 13.5를 잘못 본 게 아닌가 눈을 의심하기도 했지만 거듭 확인해 봐도 세 자리 숫자가 맞다.

그가 우리 편의점 문 앞을 막고 서서는 우리 단골 노출증 손님에게 그처럼 철 지난 맨트로 추파를 날리면서 영업을 방해 중이어도 내가 끝끝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이유겠다.

'쪼랩은 뭐, 알아서 기어야지.'

하지만 아리아는 나 같은 쫄보완 달랐다.

"이봐요. 100년쯤 까였으면 이제 그만 지칠 때도 되지 않아요?"

"그대의 아름다움이 영원하듯, 그대를 향한 나의 사모 또한 불멸하다오."

"하아-. 내가 백번 천번을 말하잖아요. 다른 건 다 봐 줄 수 있어도 머리 없는 남잔 못 봐준다니까?"

'그만!'

머머리에 대한 혐오를 멈춰!

'…그 말이 그 뜻이 아닌가?'

아무튼 이후로 몇 마디를 더 주고받나 싶던 상황이었다.

잠깐 한눈을 팔았는데 갑자기 뻥!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 앞을 보니 듀라한의 투구가 하늘 높이 솟구치고 있었다.

"...!"

정황상 아리아가 발로 냅다 차 버린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떠오른 투구는 포물선을 그리며 도로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듀라한의 몸통이 그 궤적을 쫓아 허둥지둥 길을 건너는 틈을 타, 아리아는 훨훨 날아가 버렸다.

사랑에 눈먼 자의 말로가 이렇듯 비참하다.

이래서 내가 여태껏 모쏠로 지내 온 거다.

'근데, 짝녀도 떠난 마당에 저 양반은 왜 다시 돌아오는 건데?'

지척에 다다른 듀라한의 신체 어딘가에서 곧 그 이유가 흘러나왔다.

"혹시 헝겁이나 천 같은 것도 판매하는가?"

"아…."

아닌 게 아니라 옆구리에 껴 있는 투구 겉면에 오염이 심했다.

떨어져 땅에 구르며 흙먼지 등이 잔뜩 묻은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가게로 들어가 물티슈를 통째로 가져다주었다.

"이거 쓰세요. 잘 닦일 겁니다."

"이게 무슨…."

신문물을 접하고 당혹해하던 것도 잠시.

사용법을 알려 주니 곧 좋아라하며 야외 테이블 위에 투구를 올려놓은 채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감탄사를 섞어주는 건 기본이었고.

"거참 편리하군."

"볼수록 신묘한 물건이로고."

이윽고 청소를 끝낸 듀라한이 테이블 위에 뭔가를 후두둑 내려놓았다.

"값은 이 정도로 충분하겠는가?"

"...?"

테이블 위로 빨간 마돌이 뭉텅이로 굴러다녔다.

어림짐작으로 세어 봐도 최소 20개가 넘는 듯했다.

'레벨만 높으면 뭐 하나.'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순박한 기사 양반 같으니라고.

그러니 나쁜 여자한테 홀려서는 머리통이나 까이고 다니지.

"이거 그렇게 안 비싸요. 마돌은 두 개만 가져가겠습니다."

"허-. 정녕 그거밖에 안 하는가? 믿기지 않는군."

실은 저도 잘 안 믿기긴 합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투구랑 말을 섞고 있다는 이 현실이.

"하면 혹, 이 젖은 헝겁을 좀 더 구매할 수 있겠는가?"

"물론이죠. 몇 개나 필요하신데요?"

"음…. 그냥 여기 올려진 마돌 값만큼 주시게."

부탁을 받고 정확히 셈을 해 보니 마돌이 모두 21개였다.

바로 들어가서 확인해 보니 다행히 재고가 10개로 딱 들어맞았다.

이 많은 걸 뭐에 다 쓰려는 지 궁금했는데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테이블 위로 가져다 놓은 물티슈를 뭉텅이로 뜯더니 건틀렛이며 자기 갑옷을 닦기 시작한 것이다.

지켜보던 내 눈가엔 못내 경련이 일었다.

환경 보호, 자원 절약 강요에 절여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반응이겠다.

테이블 위는 어느새 때가 탄 티슈로 수북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근데 어째 닦아 낸 티슈 색감이 죄다 검붉고 찐득하다.

…설마 저거, 내가 상상하는 그건 아니겠지?

"기대 이상으로 떡진 핏물도 잘 닦이는구만."

'시발, 맞네.'

그래도 사람 피는 아닐 거야.

"인간의 혈흔이 유독 안 닦여서 귀찮았었는데 말이지."

"...."

* * *

미궁 출현 이후.

반년이 넘도록 그 안에서 명을 달리한 싸이킥은 총 98명이었다.

이는 전체 싸이킥 대비 1천 명당 1명꼴에 불과한 수치였다.

항시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위험천만한 환경임을 감안하면 모순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마물들의 특이한 습성을 이해한다면 영 납득 못 할 현상도 아니었으니.

놈들에겐 '영역'이란 개념이 존재했다.

침입자에 대한 적대적 행위는 일정한 구역 내에서만 표출될 뿐.

그 경계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죽자살자 달려들다가도 거짓말처럼 물러나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 덕에 싸이킥들은 여태껏 나름의 안전한 방식으로 미궁을 공략해 나갈 수가 있었다.

막말로 공략에 실패하거나 위기에 처하게 되면 그냥 왔던 길로 후퇴해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한데 돌연 그 누구도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고 말았다.

서울 소재 미궁에서, 도주를 선택할 겨를조차 없이 싸이킥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동시에 셋씩이나.

대한민국 싸이킥 관리청이 발칵 뒤집힌 건 당연한 수순.

유일한 생존자인 한호준이 관리청에 제출한 진술서엔 당시의 참극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으니.

.

.

-레드 크리스탈이다!

김준호의 경악에 찬 외침이 방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습니다.

그에 동료들의 시선도 한곳으로 쏠렸습니다.

하지만 전 오히려 바깥을 살피느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김준호의 경솔한 소란이 자칫 보이지 않는 마물들의 주목을 끌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제가 어리석었었습니다.

차라리 다른 동료들처럼 저 또한 같은 곳을 바라보았더라면, 김준호가 레드 크리스탈을 향해 손을 뻗는 행위를 좀 더 일찍 발견하고 또 저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건들지 마!!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발작적으로 고함을 내질렀습니다.

하지만 탐욕에 눈이 먼 김준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아아….

곧 눈 앞에서 지옥도가 펼쳐졌습니다.

.

.

"이게 진술서야? 소설이야?"

테이블 위로 서류철을 내던지며 묻는 이는 박평식 청장이었다.

그에 고소를 머금은 채 대답하는 이는 윤태호 국장이었고.

"그것이…. 한호준이 각성 전 직업이 웹소설 작가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그 영향 때문인 거 같습니다."

"웹소설 작가? 뭐 썼는데? 유명한 작품이라도 있나?"

"제목을 몇 개 듣긴 했는데, 그다지 잘 팔리는 작가는 아니었던 듯했습니다."

"하긴, 여 싸질러 놓은 글만 봐도 뭐…."

박평식 청장은 이어 윤태호 국장에게 물었다.

"암튼 이 새끼. 지만 살아 돌아온 게 얼마나 캥겼으면 순 변명조로 적어 놨던데, 이거 믿을 만은 한 거야? 이대로 그냥 넘어가도 되겠어?"

"청장님도 아시겠지만 진술 이외엔 현실적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뭔가 구린 냄새가 나긴 나는데…. 이 새끼 혹시 레드 크리스탈에 눈이 멀어가지고선 나머지 동료들을 제물로 바쳤다거나 뭐 그런 쓰레기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서,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동고동락한 전우들을…."

"아까 뉴스 보니 경매 시작가가 2억 달러라고 하더라."

"...."

그 천문학적 액수를 들은 직후엔 윤태호 국장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봤자 결국 심증뿐인 의심인지라.

박평식 청장은 찜찜한 기분을 애써 억누른 채 화제를 넘겼다.

"그나저나 그 두리안인지 듀라한인지 하는 목 없는 마물 새끼는 이제 어쩌지?"

진술서에 따르면 놈이 3명의 싸이킥을 참수하는데 들인 수고는 단 두 번의 칼질뿐이었다고 한다.

한호준이의 말에 따르면 그 레벨이 무려 135였다.

현존하는 그 어떤 싸이킥조차 아직 100레벨에 도달한 이가 없거늘.

골치 아픈 표정의 윤태호 국장이 입을 열었다.

"현재로선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싸이킥들의 레벨이 그와 비슷한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진, 듀라한이 출몰하는 어린이 박물관은 당분간 금역으로 선포하고 싸이킥들에게 주의를 당부할 예정입니다."

"음…. 뭐, 하는 수 없지."

박평식 청장은 한호준이 진술서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 내려갔다.

- 희끄무레한 검광이 좌에서 우로, 또 우에서 좌로 두 번 번뜩였다. 그러자 내 앞 동료들의 수급이 허무히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불과 두 발짝 정도만 더 가까웠어도 나 역시 참수 신세를 면하지 못했으리라.

여기까지 읽은 박평식 청장이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글솜씨가 소설 쓸 깜냥은 아닌데….'

* * *

인류의 유구한 역사를 들여다보더라도, 문명과 문명의 충돌은 십중팔구 살육과 학살로 귀결되곤 했다.

인디언을 학살하고 건국된 미국.

점령지마다 결코 포로를 남기지 않았던 몽골.

아프리카인들을 짐승처럼 노예로 팔아넘겼던 유럽 등등.

같은 인간끼리도 이 지경 이 지랄이었거늘.

'…난 어째서 저 괴물들에게 헛된 기대감을 품었던 걸까?'

생긴 것만 무섭지 실은 선한 족속들일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걸까?

단지 나한테만큼은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을, 현실 부정의 알량한 이유로 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테이블 주변엔 듀라한이 버리고 간 물티슈 쓰레기들로 수북했다.

그것들을 종량제 봉투에 주워 담는데, 자꾸만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더라.

찐득하고 검붉은 진액으로 얼룩진 물티슈에서 적나라하리만치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을 하던 탓이었다.

듀라한의 말대로.

그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고백한 것처럼.

'이건 정말 사람의 혈흔인 걸까.'

차라리 아리아의 말마따나 염소 따위를 잡아놓고 날 골리려고 던진 농담 따위였음 좋으련만.

"으악!"

개중엔 피딱지에 머리카락이 엉겨 붙은 물티슈도 있었다.

참다 참다 기어이 내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이유였다.

그건 누가 봐도 흑갈색의, 사람의 머리카락이 분명했다.

그 머리 없는 괴물을 비호할 일말의 명분조차 완전히 사라지던 순간이었다.

"시발. 내가 너무 순진했지."

완벽히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공포가, 첫날의 그 두려움이 다시금 스멀스멀 내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덜그럭-.

덜그럭-.

골목 어귀로부터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곧이어 모습을 보이는 단골, 아니 해골들도 더는 반갑지가 않았다.

검.

활.

창.

철퇴.

저들의 손에 들린 무기도 결국엔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대상은 나와 같은 인간일 테지.'

여기 혈흔으로 점철된 이 물티슈가 그 증거이듯 말이다.

물론 나를 대하는 그네들의 태도엔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태연히 다가와 덜그럭 수인사를 건네고는 야외 테이블 한 편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앉는다.

곧이어 가위바위보가 펼쳐졌다.

여느 때처럼 담배 내기를 하려는 모양이다.

오늘의 물주는 궁수였다.

어디서 싸우다 잃어버렸는지 손가락뼈들이 통째로 사라져 보이질 않더라.

하는 수 없이 보자기만 계속 내더니 끝내 당첨되고 만 거다.

다른 해골들도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해골들답다.

나는 미리 계산대로 돌아와 있었다.

곧 따라 들어온 궁수 해골이 담배를 고르고는 카운터 위에 뭔가를 올려놓았다.

응당 마돌이겠거니 하고 흘끗 시선을 가져가던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게 뭐야?"

9화.

미궁의 출입구는 상시 개방되어 있다.

대신 입장 때마다 그 내부 환경은 매번 리셋된다.

흡사 게임 속 인스턴트 던전처럼 말이다.

이러한 특성은 미궁 공략에 큰 골칫거리로 작용했다.

도중에 미궁을 이탈한 인원은 그 안의 본대와 재합류가 불가능하니 말이다.

싸이킥 길드 대부분의 공략 기조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실상 충원이 어려우니, 다들 전력 보존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도 무색하리만치, 미궁 내부에선 한 달에 꼭 한 번씩 전면 초기화가 이뤄지곤 했다.

쉽게 말해 입장 인원 모두가 미궁 밖으로 쫓겨나야만 한다는 소리였다.

원인은 달마다 발생하는 몬스터 웨이브 때문.

입장한 지 한 달 무렵이 되면 출몰하는 몬스터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는 것이다.

물론 싸이킥들도 회차가 거듭될수록 더욱 공고한 방어진을 쌓고는 있었으나.

결과적으론 쪽수에 장사 없다는 진리만을 새삼 깨닫고만 말 따름이었으니.

이번이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었다.

* * *

"모두 이쪽으로!"

오윤아는 대한민국에서 몇 안 되는 공무직 싸이킥이었다.

다툼 중재.

질서 확립.

안전 도모 등.

미궁 내에서 오윤아는 자신의 소임에 늘 최선을 다해왔다.

지금 퇴각 중인 싸이킥들 사이에서 교통정리에 여념이 없는 모습 또한 그 때문이었다.

현재 오윤아의 레벨은 38이었다.

대한민국 전체를 놓고 볼 땐 그리 높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싸이킥 대부분은 레벨 고하를 막론하고 오윤아의 언행을 대체로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국가를 뒷배로 둔 위인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음은 당연한 상식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그 자존심 센 싸이킥들이 마냥 고분고분한 것만은 또 아니었으니.

특히나 지금처럼 혼란스럽고 경황이 없는 와중에선 그러한 반골 기질이 더욱 빈번히 도드라지곤 했다.

미리 짜인 후퇴 순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대열을 망가트리는 놈들 말이다.

"야이 새끼야!"

오윤아는 그때마다 여리고 청순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걸쭉한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자신의 무기인 채찍을 사정없이 휘두르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위협은 꽤 효과적이었다.

그녀보다 레벨이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또 민망해서라도 금세 일탈 행위를 멈추곤 했으니 말이다.

한데 불행하게도 오윤아는 오늘 운이 없었다.

"거기 모지리 새끼야!"

영 눈에 거슬리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주저 없이 그리로 채찍을 휘두르던 오윤아는, 그러나 다음 순간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허억!"

손이 허전했다.

부지불식간 채찍을 놓친 결과였다.

채찍은, 오윤아가 휘두르던 때보다 곱절은 더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녀와는 정 반대편 쪽으로 말이다.

"...!"

타깃이었던 싸이킥이 오히려 채찍을 잡아채서는 그대로 던져버린 것이다.

38레벨의 오윤아가 그 어떤 대응조차 할 수 없으리만치 엄청난 빠르기로 말이다.

채찍은 곧 작은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보나마나 몬스터 떼가 우글거리는 지점에 떨어졌을 거라 찾으러 갈 수조차 없었다.

"...."

눈앞에서 시가 100억짜리 무기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오윤아의 눈빛에 뒤늦게 분노라는 감정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노기를 터트리지 못했다.

하필이면 그 만행의 당사자가 김경민인 탓이었다.

레벨 59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싸이킥 김경민 말이다.

김경민은 그 실력을 떠나 상징성 때문에라도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존재였다.

오윤아 역시 평소 김경민과는 가능한 엮이지 않으려 주의를 기울여 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잠깐의 경솔함으로 그간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시발, 누가 저 새낀 줄 알았냐고!'

김경민은 레벨만큼이나 성격 또한 독보적으로 지랄 맞기로 악명이 자자한 위인이었다.

무려 100억을 손해 봤음에도 오윤아가 심각한 내적 갈등에 휩싸일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따져? 말아? 따져? 말아?'

퇴각이 완료된 시점에서, 오윤아는 결국 용기를 내어 김경민을 찾아갔다.

"저어-.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

"아까, 채찍."

"…아."

"근데 그거, 비싼 거예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죄송한 건 죄송한 거고, 그쪽에서 변상을 좀…."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김경민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최상급 마석이라도 꺼내려는 걸까?

-ㅗ

"...?"

김경민이 주머니에서 꺼낸 중지를 본 오윤아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 * *

계산대 위에 웬 채찍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까 해골 아저씨가 마돌 대신 맡긴 물건이었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는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어쩌면 전리품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전장터에서 적을 물리치고 획득한, 그러니까 사람을 해치고 빼앗은 무기 말이다.

"어느 이름 모를 망자의 유품이란 소리네."

그런 생각이 드니 채찍은 손끝조차 대기가 싫어졌다.

때마침 아리아가 방문했길래 나는 그녀에게 청했다.

"이 채찍 좀 들어줄래요?"

"응?"

"그리고 다른 손엔 여기 이 양초도요."

가죽옷.

가터벨트.

채찍.

그리고 양초.

역시 나무랄 데 없는 코스튬이다.

매대 진열품 중 나비 가면이 없다는 게 아쉽긴 하다만.

"이거 언제까지 들고 있어야 해?"

찰칵-. 찰칵-.

"이제 됐어요."

기념으로 휴대폰에 사진 몇 장을 담고서 채찍 등을 돌려받았다.

사진을 보여 주니 아리아가 무척 신기해했다.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집에 거울 없어요?"

"멍충아."

"왜 또요?"

"몽마는 거울에 모습이 비치지 않는 거 모르니?"

몽마, 꿈속의 마물.

말인즉슨, 아리아는 지금 자신이 귀신이라는 걸 고백하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심령사진을 찍었네?"

내가 충격을 받든지, 말든지.

매대 사이 사이를 누비고 다니던 아리아가 곧 되돌아 와 물었다.

"짜파게티 언제 들어와?"

"그러게요."

말이 나온 김에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발주 창을 열어 보니 전에 입력한 물품 목록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보였다.

배송이 되질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겠다.

귓가로 아리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언제 온대?"

"글쎄요. 흠…."

나는 시험 삼아 다른 물품들도 검색해서 수량을 입력해 보았다.

<물티슈 20개>

나비 가면.

"이건 없구나."

어쨌거나 다른 물품을 추가 발주하던 중에 내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발주창 상단에, 전에 못 보던 게이지 바가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게이지는 짐작대로 발주 수량에 따라 줄어들거나 늘어났다.

나는 그로부터 하나의 가정을 도출해 냈다.

"이거 혹시, 게이지가 풀로 차야 배송이 시작되는 건가?"

생각할수록 그럴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막말로 여기가 어디 보통 지점이긴 한가?'

고작 컵라면 몇 개 물티슈 몇 개 납품하자고 괴물들이 활개 치는 소굴의 한가운데까지 와 주겠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닥치는 대로 발주를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 발주 게이지는 채 80%도 채우질 못했다.

재고가 충분한 물품의 경우 더는 수량 입력이 불가한 탓이었다.

'이거, 소비 촉진을 위해 길거리 판촉 행사라도 벌여야 하나?'

그러고 보니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어째서 이 동네엔 손님이 이렇게 적은 걸까?'

그래도 왕년엔 유동 인구 많기로 소문 난 편의점이었는데 말이다.

내친김에 아리아에게 궁금한 걸 물었다.

"손님. 혹시 친구 없어요?"

"응. 없어."

"친구 데려오시면 제가 서비스 좀 챙겨 드릴게요."

"없다고."

"왕따세요?"

"그게 뭔데?"

후….

말을 말자.

* * *

잠시 편의점 문을 닫고 외유에 나섰다.

오늘은 전보다 더 멀리까지 나가 볼 참이었다.

주변 환경이 정확히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기회가 된다면 신규 고객까지 유치해 볼 생각이었다.

마물 소굴에서 판촉 활동이라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은 판단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딴엔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하는 짓이다.

일단 이유는 몰라도, 이곳의 괴물들은 내게 아무런 적의를 갖고 있지 않다.

해골부터 아리아까지는 긴가민가했는데, 목 없는 기사마저 내게 호의적이었던 걸 보면 이 가정이 틀림없이 옳을 것이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나는 보험 삼아 불똥개 크로노스를 보디가드 삼아 데리고 나왔다.

이 동네 관습이 어찌 되는지는 모르겠다만

괜한 책잡히기 싫어서 나름 목줄까지 채웠다.

하네스 대용으로 사용한 건 채찍이었다.

솔직히 목에 걸 때 통구이가 되는 건 아닐까 살짝 긴장이 들기도 했었다.

다행히 화견께선 딱히 목줄을 싫어하진 않는 듯했다.

다만 사소한 애로 사항이 있다면, 크라노스의 변실금 때문에 좀처럼 탐색 진도가 안 나간다는 거지.

"또 지려?"

누가 불똥개 아니랄까 봐, 녀석은 보이는 전봇대마다 빨간 마돌을 싸질러대곤 했다.

그때마다 난 선진 시민답게 얼른 뒤처리를 담당했고.

혹시나 싶어서 배변 봉투랑 집게를 챙겨 왔는데, 올해 들어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만 싸-. 이러다 부자 되겠어."

- 왈!

* * *

걷고 걸어 인사동 거리를 지나려던 참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마침내 이 세상의 끝과 맞닥뜨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하고 매끈한 벽이 길목을 막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바로 인접한 건물에 들어가 봤지만 역시나 그 벽이 내부를 가로지른 채였다.

벽은 또한 끝을 모르게 솟아 있었다.

아무리 고개를 치들어 봤자 끝을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그 벽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 보았다.

벽은 원형의 형태로 종로 한복판을 둘러싸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실망스럽게도 통로라 할만한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하질 못했다.

'출입구조차 없는 거대한 감옥이라니.'

그래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던 터라 딱히 심적 데미지가 크진 않았다만.

정작 내 어깨를 축 처지게끔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출구도 없고, 손님도 없고…."

한참을 싸돌아 다녀도 괴물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구경하질 못했다.

판촉품으로 잔뜩 챙겨 온 사탕도 크라노스에게 한두 개씩 까 주다 보니 어느새 바닥이 나 버렸다.

"이러면 나가린데."

필요 발주량을 달성하면 보급 트럭이든 뭐든 오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떠나는 보급 차량에 묻혀서 이곳을 탈출할 생각이었다.

고객 유치에 나선 것도 그 원대한 계획을 앞당기려던 의도에서였고.

판매량을 더 늘려야 발주 게이지가 쑥쑥 오를 테니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앞서가던 크라노스에게 물었다.

"불개야. 넌 혹시 친구 없니?"

순간이지만 내 말에 귀를 쫑긋하는 걸 분명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런데도 녀석은 이 악물고 못 들은 척했다.

'하긴.'

변실금 걸린 개한테 뭘 기대하겠냐만은.

한데 편의점에 다다르자 갑자기 크라노스가 이상 반응을 보였다.

꼬리를 프로펠라마냥 휘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녀석은 곧 채찍을 매단 채로 혼자 뛰기 시작했다.

왜 저러나 싶어 그 뒤를 부지런히 뒤쫓아가 봤더니만.

"…소?"

전에 못 보던 괴물 하나가 편의점 입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대가리는 분명 뿔 달린 황소가 맞는데, 사람처럼 이족 보행을 하는 괴물 소였다.

상태창에 뜬 이름을 확인해 보니 '미노타우르스'.

'작명 센스 하고는.'

확 표절로 다 고소해 버릴라.

- 깨갱!

"…엉?"

잠시 잠깐 상태창에 한눈을 판 사이였다.

갑작스레 크라노스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뒤이어 허공으로 솟구치는 녀석의 실루엣이 보였다.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