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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0-20

10화.

서류철을 넘기던 윤태호 국장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이번 웨이브 철수 때 중상자가 4명이나 발생했다는 보고 내용 때문이었다.

사고 당시의 정황이 기재되어 있긴 했지만, 윤태호 국장은 추가 설명을 듣고자 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닌 밤 중에 소새끼한테 받혀? 그것도 넷 씩이나?"

사달의 원흉은 미노타우르스라는 몬스터였다.

소의 형상을 한 마물인데, 생긴 것 답게 괴력으로 악명이 자자한 놈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미노타우르스의 어그로 범위가 매우 좁다는 사실이겠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막말로 3~4미터 근처까지 접근해도 소 닭 보듯 하는 녀석들이다.

그러니 이 사고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하지만 보고서를 올린 오윤아는 단 한 마디로 상사를 납득시켰다.

"가이드 위반이요."

"...?"

"빨간 옷 입었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해댔는데도 말입니다."

"미친놈들."

'특수한 경우'가 바로 이것이었다.

적색 물체가 출현할 경우, 미노타우르스의 어그로 범위는 100미터 이상까지 치솟는다.

"대놓고 입은 건 아니고 속옷이 살짝 삐져나왔던 모양인데, 재수 없게 소 눈깔에 거슬렸던가 봐요. 하필이면 측면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들이받아서 뭐 손쓸 새도 없었나 보더라고요."

"네 놈 다 빨간 속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 명 만요. 나머지 셋은 돌진 경로에 있다가 죄 없이 받힌 거고요."

"쯧."

윤태호 국장이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얼마 전 발생한 사망 사고로 가뜩이나 뒤숭숭한 시국에 또다시 부상자 소식이라니.

그것도 황당무계한 이유로 말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일벌백계로 기강을 다잡을 필요성이 느껴졌다.

생각을 정리한 윤태호 국장이 입을 열었다.

"그놈들 다 두 달 간 입장 금지시켜. 물론 치료 기간은 제외야."

"알겠습니다."

"그밖에 또 다른 사고는 없지?"

"있었습니다."

"또 뭐?"

"철수 과정에서 싸이킥 한 명이 제 채찍을 낚아 채서는 몬스터 밭에다 던져 버렸습니다."

"뭐? 어떤 미친 새끼가 그 비싼 걸…."

"김경민이요."

"…여보세요?"

윤태호 국장이 대뜸 휴대폰을 귀에다 갖다 댔다.

그러더니 통화를 하는 시늉을 하며 그대로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최소한 벨 울리는 척이라도 했다면 그나마 덜 초라해 보이련만.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오윤아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스마트 폰으로 알아보던 공무원 대출 조건을 다시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프로펠러처럼 꼬리를 휘돌리더니만, 크라노스는 정말 핼기처럼 날기도 잘 날아올랐다.

믿을 수 없게도 소머리에 받힌 결과였다.

'뭐야, 저 소 새끼….'

광우병 소라도 되는 건가?

예상치도 못한 돌발 상황에 잠시 잊고 살았던, 두려움이란 감정이 다시금 솟구쳤다.

놈과 나의 거리는 얼핏 10미터가 넘었지만, 저 우람한 대퇴근을 보면 도망쳐 봤자 수 초도 안 지나 따라잡힐 게 분명해 보였다.

'아….'

기어이 놈이 길 건너의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푸르르 콧김을 내뿜는 본새가, 당장이라도 돌진할 기세다.

나는 그냥 지그시 눈을 감아버렸다.

더는 운명에 저항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거다.

결코 쫄아서 그런 거 아니다.

부디 다음 생엔 결혼, 아니 연애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뽀뽀는 해 볼 수 있기를….

- 쿵쿵쿵쿵쿵쿵!

곧 지축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납게 땅을 박차는 그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신이 내 목전에 다다른 듯했다.

"...."

하지만 나는 멀쩡했다.

놈이 나를 그냥 스쳐 지나간 덕분이었다.

이후로도 비슷한 패턴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소 새끼가 지금 날 갖고 놀고 있구나!'

울컥하는 마음에 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갈때 가더라도 노잣돈으로 소부랄 한짝 정도는 떼어 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솟구치던 적의는 잠시 잠깐뿐이었다.

눈 앞에서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신의 빨간 망토를 두 손에 든 채 펄럭이는 듀라한과, 그 망토를 향해 돌진을 거듭하는 미노타우르스.

"…진짜 돌겠네."

* * *

띵-.

전자레인지에 봉지 팝콘을 튀겨 밖으로 나왔다.

좀 전에 와서 자리를 잡고 앉은 골초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나도 자리를 잡았다.

"팝콘 드실래요?"

덜그럭-.

"음료는요?"

덜그럭-.

왠지 혼자 먹는 게 미안해서 혹시나 하고 물어봤는데, 역시나 해골들은 먹을 거엔 아예 관심이 없는 듯했다.

저들이 왜 뼈만 남고 삐쩍 곯았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님 말고.'

아무튼 나는 그들과 함께 팔자에도 없던 투우 경기를 흥미롭게 관람했다.

듀리안과 미노타우르스의 대결은 30분이 넘도록 끝나질 않았다.

그럼에도 어찌나 박진감이 넘치든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해골 아저씨들조차 담배에 불붙일 때 빼고는 거의 한눈을 팔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참고로 어디론가 날아갔었던 크라노스도 무사 복귀한 상태였다.

아까 해골들 올 적에 목줄 잡혀서는 얌전히 따라 오더라.

쿠웅-!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투우 경기는 결국 듀라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미노타우르스의 육중한 거구가 굉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져 버린 것이다.

사실 그 이전부터 어느 정도 결말을 예상하긴 했었다.

상태창을 보니 미친 소의 체력은 빠르게 줄어드는 반면, 듀라한의 체력 수치엔 거의 변동이 없더라.

미노타우르스의 레벨은 35로 표기되어 있었다.

생겨먹기론 이 동네 1짱처럼 우락부락한 주제에, 듀라한에 비하면 쪼렙 오브 쪼렙이었던 거다.

'역시 레벨이 깡패인 건 고금 불변의 진리군.'

경기를 끝낸 듀라한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당연히 해골들이 자리를 비켜주거나, 최소한 기립이라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 외로 듀라한에 대한 해골들의 태도는 무심함 그 자체였다.

듀라한마저 이런 상황엔 익숙하다는 듯 별 개의치 않는 눈치였고.

굳이 양쪽의 분위기에 정의를 내리자면, 서로 소 닭 보듯 한달까?

"이보게. 혹, 저번에 그 젖은 헝겁 좀 더 살 수 있겠는가?"

듀라한이 원하는 건 물티슈였다.

눈치가 아무래도 갑옷에 때 빼고 광 내는데 취미가 들린 듯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원하는 물티슈는 재고가 바닥난 상태.

궁리 끝에 나는 대안으로 먼지털이개를 권해봤다.

정전기을 일으켜 먼지를 흡착하는 방식이라 성능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물건이 아닐 수가 없다.

기대한 것처럼 듀라한은 크게 놀라며 물티슈때만큼이나 매우 흡족한 반응을 내보였다.

"아니! 이것은 대체 무엇의 털로 만들었길래 이리도 먼지가 잘 털린단 말인가?"

폴리에스터요.

* * *

- 깨갱!

크라노스가 또 하늘 높이 솟구쳤다.

하지만 이번엔 듀라한의 발길질에 까인 거다.

해골들의 라이터 노릇을 하던 중, 그만 듀라한이 한쪽에 세워 둔 먼지털이개를 홀라당 태워먹은 죄였다.

"하-. 이 귀하디 귀한 것을 어찌…."

듀라한은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튼.

"자, 받으시게."

갑자기 이 동네에 불경기라도 들이닥친 걸까?

듀라한도 해골들처럼 마돌에 여유가 없긴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물건값 조로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를 끌러 내게 건넸다.

딱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의 가죽 주머니였다.

흔히 중세 판타지 만화에서 볼 법한 그런 모양 말이다.

근데 이거 설마, 뭐 아공간 주머니 그런 건 아니겠지?

"아공간 주머니일세."

구태의연한 창의력 보소.

듀라한은 눈앞에서 직접 성능 시연까지 해 보였다.

주머니의 주둥이를 쫙 벌리더니만, 주변의 의자고 간이 테이블이고 파라솔이고 해골들이고 닥치는 대로 다 집어넣었다.

"와-."

생각보다 엄청 많이 들어가네?

달그락- 달그락-.

"저기, 안에서 꺼내 달라는데요?"

"직접 해 보시게."

듀라한이 혀 꼬부라지는 발음 몇 마디를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 집어 넣은 물건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붸뤳-쵸라스!"

그의 가르침대로 주문을 외자 정말 해골 4인방이 다시 눈앞에 뿅 하고 나타났다.

난데 없이 봉변을 당한 피해자들 치곤 퍽 태연한 모습들이었다.

뭉개뭉개 연기가 나는 걸 보니 그새를 못 참고 안에서 한 대 태우셨나 보다.

실내 흡연이 불법이긴 하다만 굳이 이를 고지하려 들진 않았다.

'뭐, 저 뼈다귀들을 다시 주머니에 넣을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테이블 등을 마저 원상복구 시킨 나는 곧장 가게로 들어가 새 먼지털이개를 가지고 나왔다.

이어 그것을 듀라한에게 건넸다.

"받으세요."

"허-. 이 귀한 게 더 남아 있었군! 한데 물건 값은…."

크게 기뻐하면서도 조심스런 반응을 내비치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공짜로 드리는 거에요."

"차, 참 말인가? 허나 그렇게 된면 그대가 너무 손해를 보는 건 아닌 지…."

"괜찮습니다. 크게 밑지는 건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밑지기는커녕 내가 백배 천배는 더 이득이 아닐까 싶다.

중국산 먼지털이개 두 개와 맞바꾼 요술 주머니라니.

진실이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엔 구매자에게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폭리가 아닐 수 없겠다.

"어, 잠시만요. 그거 다시 좀 줘 보실래요?"

"여기 있네. 왜 그러는가?"

"뭐가 좀 묻어서요."

나는 얼른 손잡이에 붙은 메이드 인 차이나 스티커를 뗀 뒤 그것을 듀라한에게 되돌려 주었다.

'증거 인멸 완료.'

* * *

정신을 차린 소가 매장엘 방문했다.

잠깐은 또 미쳐 날뛰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했었는데, 다행히 놈은 얌전할 뿐만 아니라 예의도 발랐다.

"아까는 미안했구만유."

"아뇨, 뭐…. 괜찮습니다."

전 안 다쳤거든요.

"지가 빨갱이만 보면 헤까닥 눈이 돌아버리는 정신병이 있구만유."

"...."

"빨갱이만 보면 화가 나지 뭐유."

여기서 나는 잠시 잠깐 혼란에 빠졌다.

생긴 건 분명 괴물이 틀림없는데 말을, 그것도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진성 우파 한우라니.

"정확히 말하자면 '움직이는 빨간 물체'에 반응하는 거라네. 그러니 앞으로 그대도 유념하시게나."

"아…."

아직 안 가고 옆에 서 있던 듀라한의 부연을 듣고서야 나는 좀 전의 상황들이 이해가 됐다.

지난번에 크라노스가 받힌 이유도 목줄, 그러니까 채찍의 손잡이가 빨간색이어서 그랬을 공산이 크다.

그러하기에 나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카운터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은 빨간색 편의점 조끼 때문이었다.

하다 못 해 그냥 빨간색도 아니고 무려 유광에다 형광 기능까지 첨가된 눈뽕 빨간색이다.

아까 바깥을 돌아다녔을 때 이걸 걸치고 있었더라면, 듀라한이 망토를 펄럭이고 지랄이고 나부터 받혔겠지.

"혹시 다른 색엔 발작, 아니 흥분 안 하시나요?"

"빨갱이만 그렇구만유."

우파 한우는 과자, 라면, 안주 등등 이것저것 가리질 않고 먹거리들을 잔뜩 사 갔다.

계산해 보니 물품 가액이 근 10만 원에 달했다.

바닥 난 체력을 회복하려면 이 정도는 먹어줘야 한단다.

덕분에 발주 게이지도 제법 올릴 수 있었다.

나는 겸사로 유니폼 조끼도 새로 한 벌 주문했다.

직전까지 촌스럽다고 극혐하던 형광 노란색으로 골랐다.

기존에 쓰던 건 때마침 가게 주변을 서성이던 크라노스에게 던져 줬다.

물론 태워 버리라는 의도에서다.

한데 내 뜻을 오해한 녀석은 그걸 그대로 몸에 두른 채 사라져 버렸다.

저러다 또 받히면 어쩌려고.

'…뭐, 알아서 하겠지.'

11화.

마침내 발주 게이지가 99%를 돌파했다.

괴물들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한 지 2주째가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기존의 단골들 말고도 신규 손님이 좀 더 늘었다.

껌딱지를 닮은 슬라임.

정말 트롤하게 생겨 먹은 트롤 등.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손님은 조금 전 방문한 고블린 한 무리였다.

들어오자마자 대뜸 술이며 담배를 골라 카운터에 올리길래 아무 생각 없이 계산해 줬더니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밖이 시끌벅적해진 것이다.

뭔가 싶어 밖을 내다봤더니, 고블린들이 단체로 해골 아저씨들에게 처맞고 있었다.

그 모습을 벙쪄서 보고 있었는데, 때마침 가게를 찾은 아리아가 그러더라.

이 동네에서 190살 미만은 음주, 흡연이 금지라고.

한 마디로 저 고블린들이 미성년자란 소리였다.

어쩐지 키가 내 허리춤에도 안 오는 게 단순한 종특인가 하고 말았는데, 정말 어린이라서 그랬던 모양이다.

아무튼 미성년자에게 술 담배를 팔았으니, 나로서는 보통 긴장이 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근심하는 나를 두고 아리아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처벌? 네가 처벌을 왜 받니? 잘못한 건 쟤네들인데."

"예? 아니, 그래도…. 이 동네는 미성년자 보호법, 촉법 소년 뭐 그런 개념이 없나요?"

"그게 뭔데?"

나는 인간 사회, 정확히는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미성년'이란 개념에 대해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치외법권에 속한 아이들로 인해 어떠한 폐단이 발생하는 지도.

그에 아리아의 인상은 시시각각으로 구겨져 갔다.

말미에 이르러선 뭐 씹은 표정을 하고서 되묻는 그녀였다.

"아니. 벌은 잘못한 놈한테 줘야지. 왜 어리다고 봐주고, 나이가 많다고 피해를 봐?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얘기니?"

"그러게요."

등짝에 날개가 달린 존재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묘하고 씁쓸했다.

외형이 괴물인 저들조차 명확히 아는 상식을, 어째서 인간 사회에선 이 악물고 외면하는 걸까.

미성년자 보호고 뭐고 다 좋다만, 그 과정에서 최소한 선량한 피해자는 나오지 않아야 할 게 아니냐는 말이다.

"네가 살던 동네는 생각보다 무서운 곳이었구나."

그래도 방패로 미성년자 뚝배기를 내려찍지는 않는답니다.

"아무튼 저 아저씨들 좀 말려 봐요. 저러다 애들 잡겠네."

누차 말했지만 내 눈엔 상태창이란 홀로그램이 보였다.

고블린들의 체력은 너나 할 것 없이 한 자리 대에 접어들어 있었다.

친절하게도 빨간색으로 깜빡거리는 시각 효과까지 제공되는 중이다.

그럼에도 아리아는 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놔둬. 죽이면 골치 아파지는 거 아니까, 지들이 알아서 잘할 거야."

혹시 죽여서는 살을 다 발라낸 다음 해골 동료로 만들려는 속셈이라면요?

결론부터 말해 내 망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아리아의 말마따나 해골들에겐 다 복안이 있더라.

* * *

"엉?"

한바탕 푸닥거리가 끝난 후였다.

가게로 들어 온 해골 궁수가 대뜸 바카스 다섯 병을 사 들고 나갔다.

'여태 담배 말고 다른 거엔 시선조차 주지 않던 양반들이 갑자기?'

의문은 곧 풀렸다.

해골들은 그 바카스를 자신들이 아닌 고블린들에게 먹였다.

정확히는 널브러져 있는 녀석들의 주둥이에 한 병씩 꽂아 넣은 거다.

한데 그 직후.

"...!"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현상이 벌어졌다.

고블린들의 체력 수치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바카스 한 병이 다 비워질 때쯤, 녀석들의 체력은 만땅이 되어 있었다.

정신을 차리며 벌떡 일어난 것은 물론이다.

"바카스가… 포션이었어?"

신기한 마음에 나도 바카스 한 병을 챙겨서는 밖으로 나왔다.

이어 도로를 따라 전력으로 질주했다.

"허억, 허억-."

숨이 제대로 안 쉬어질 때까지 뛰고서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500이었던 체력이 단숨에 250까지 줄어 있었다.

'하지만 이 바카스만 있다면?'

꿀꺽, 꿀꺽.

"…시발!"

바카스가 내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아무래도 회복 작용은 괴물들 전용이 아닐까 싶다.

터덜터덜 돌아오는데 갓길에 널브러져 있는 크라노스가 보였다.

내 조끼를 입은 채로 먼지투성인 걸 보니, 오늘도 미노타우르스한테 받혀도 어지간히 받힌 모양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크라노스의 주둥이에 몇 방울 남지도 않은 바카스를 탈탈 털어 넣어 보았다.

그러자 금세 발딱 일어나서는 꼬리를 흔들어 대는 녀석이었다.

바닥났던 체력도 1/3 가까이 회복되었고 말이다.

"...."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괴물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 다 오다니.

* * *

연수원 수료식을 마친 민시윤은 비로소 싸이킥 경매 어플에 접속할 수 있었다.

싸이킥 라이센스가 부여된 사람에게만 접속 권한이 주어지는 애플리케이션이었다.

때마침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한 지 며칠 안 된 시점이라, 어플 화면은 온갖 상품들로 넘쳐났다.

미궁에서 전체적인 철수가 이뤄지다 보니 그간에 노획된 아이템들이 한꺼번에 올라온 것이다.

물론 아직 미궁 활동을 시작하지 못한 민시윤에겐 그 대부분이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장비는 고사하고, 제아무리 싼 소모품조차 기본 시작 가격이 수백만 원에 달했으니까.

그래도 민시윤의 집안에선 딸을 미궁으로 보내는데 최소한의 보험이라도 들어주고 싶어 했다.

그게 민시윤이 지금 '포션' 카테고리를 기웃거리는 이유였다.

"...."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 구매할 만한 물품이 없었다.

포션마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가격이 비쌌던 것이다.

"시발, 뭐가 이렇게 비싸?"

민시윤이 사려 했던 건 회복 포션.

한데 경매 시작가가 한 병에 무려 5천만 원이었다.

즉시 구매가는 그 몇 배인 3억 3천만 원에 달했고.

집에서 마련해 준 돈은 6천만 원뿐이었다.

평균 낙찰가가 2억도 넘는 걸 보면 입찰해 봤자 시간만 낭비될 게 뻔하다.

민시윤은 신경질적으로 어플을 껐다.

그런데 휴대폰 화면이 바뀌며 수신 표시가 떴다.

<꼰머>

삼촌, 민호영이었다.

가뜩이나 편치 않던 민시윤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이후로 부재중 전화가 8통이 넘도록 민시윤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받아 봤자 매번 똑같은 소리만 해 댈 테니까.

"시발, 지는 들어가지도 못하면서 그깟 가게가 뭐가 중요하다고."

민호영이 바라는 건 편의점의 안부였다.

미궁에 먹힌 편의점들이 잘 있는지 살펴 보고 오란 소리를 틈만 나면 해대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의 가게를 봐주던 중에 실종된 사람에 대해선 여태 궁금해하는 걸 못 봤다.

"진짜 보면 볼수록 지독한 인간이야."

물론 그 실종 사건에 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건 민시윤 본인이었다.

민시윤이 지각만 하지 않았더라도 운명이 뒤바뀌었을 거란 소리다.

그럼에도 민시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죄의식 자체가 없었다.

솔직히 이제는 그 전 타임 알바생의 이름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조만간 봐서 아예 연을 끊든가 해야지."

삼촌의 집요한 성격을 감안 했을 때, 단순한 말로는 그를 떨쳐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당근책으로 적당한 수준의 위로금까지 건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럴 형편이 못 된다만.

'뭐, 이제 난 싸이킥이니까.'

미궁을 한두 번만 다녀와도 최소 2, 3억은 만지게 될 테니,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데 딱히 어려울 건 없을 듯했다.

그가 분에 넘치는 과욕만 부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띠리리링~.

"아 씨. 꼰머 진짜 존나 집요하…."

또다시 울리기 시작한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들던 민시윤은, 그러나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얼굴이 펴졌다.

[미라클 길드]

마침내 오매불망 기다리던 곳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짧은 통화를 마친 민시윤은 이내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 * *

"얏호!"

드디어 발주 게이지가 만땅을 찍었다.

대뜸 떠오른 팝업창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금일 자정을 기해 보급 시작]

시계를 확인해 보니 대략 6시간 정도 남았다.

나는 별수 없이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여태까지 별 의식조차 없던 시간관념이 한없이 더디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의 심정이 이러하려나.

물론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막말로 이런 환경이라면, 트럭은커녕 우파 한우가 끄는 달구지에 보급품을 싣고 와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테니까.

때마침 미노타우르스가 가게에 들렀다.

나는 바코드를 찍으며 슬쩍 녀석을 떠 봤다.

"혹시 리어카 좀 끄세요?"

"리어카가 뭐에유?"

"수레요."

"수레는 모르겠고, 썰매는 끌어 봤슈."

…루돌프세요?

결국 미노타우르스에게선 아무것도 알아내질 못했다.

이후로 들리는 손님마다 한두 마디씩 떠 봤는데 다들 보급 시스템과 관련해선 1도 모르는 눈치더라.

"거참, 시간 더럽게 안 가네."

10시가 넘어가니 그나마 뜸하던 손님들마저 아예 발길이 뚝 끊겨버렸다.

그러고 보면 이 동네는 밤 장사나 새벽 장사는 거의 안 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들 일찍들 주무시는 건지, 아니면 다른 데서 야간 파트 타임을 뛰는 건지 아침 7시까진 코빼기도 손님 구경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지루함에 몸을 배배 꼬던 중.

"…엉?"

문득 내 시야 구석에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사람 모양의 아이콘이 은은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던 거다.

뭔가 싶어 아이콘을 집중했더니 곧 상태창이 열렸다.

여기까진 전에도 겪었던 현상이라 신기할 게 없었다만.

<인간>

[레벨 : 15 ]

[이름 : 구영수]

[직업 : 편의점 직원]

[칭호 : - ]

[공격력 : 55]

[방어력 : 55]

[체력 : 495/500]

[마력 : 100/100]

———

[힘 : 15]

[민첩 : 15]

[지구력 : 15]

[지능 : 15]

[친화력 : 30]

.

.

.

뜻밖에도 레벨이 올라 있었다.

그것도 무려 5씩이나.

"내가 뭐… 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정황상 단번에 레벨이 오른 것 같진 않고.

아리아의 말마따나 편돌이 본분에 충실하다 보니 야금야금 경험치가 쌓인 게 아닐까?

상태창의 변화는 그뿐만이 아닌 듯했다.

레벨이 올라서 그런지 전체적인 스탯도 소폭 상승한 기분이다.

'아님 말고.'

근데 상태창 말미에 생각지도 못한 문구가 깜빡이고 있었다.

[이제 스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스킬 : 고객 모방]

- 단골 고객의 고유 스킬 중 한 가지를 빌려 올 수 있습니다.

- 1일 1회 제한

- 고객과의 레벨 차가 20 이하일 때만 가능

[스킬 : 고객 소환]

- 단골 고객 1명을 무작위 소환합니다.

- 1일 1회 3시간 제한

- 피소환 고객과의 레벨 차이에 따라 확률이 조정됩니다.

- 피소환 고객과의 레벨 차이에 따라 소환인의 능력치에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스킬 : 고객 유치]

- 일정 확률로 적대적 대상을 템퍼링(매수)할 수 있습니다.

- 성공 확률은 대상과의 레벨 차이에 반비례합니다.

"…이게 뭐야?"

가뜩이나 직업이 편돌이로 낙인찍힌 것도 짜치는데, 기껏 생긴 스킬들마저 편돌이 그 자체라니.

거기다 나열된 스킬 전부를 다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현재 습득 가능한 스킬 1/3]

이유는 모르겠지만 야박하게도 셋 중에 하나만 고르란다.

나는 신중하게 몇 번이고 스킬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그러다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근데 장사하는데 이게 다 뭔 쓸모가 있는 거지?"

12화.

민시윤은 연수원에서의 태도가 자신의 합격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진실은 전혀 달랐지만.

"얘는 왜 뽑았어? 누가 봐도 성적 미달인데."

"그게…. 힐러 지망생이랍니다."

"아아."

소위 말하는 '히든 클래스'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각성자들은 20레벨에 직업 칸이 개방된다.

개중에 가장 선망되는 분야는 마법 계열이었고.

가장 흔한 직업은 물리 계열이었으며.

가장 기피되는 직업이 바로 치유 계열이었으니.

참고로 이번 연수원 기수 중에서 힐러를 지망한 각성자는 민시윤이 유일했다.

중위권의 성적에도 그녀가 미라클 길드에 뽑힐 수 있었던 이유였다.

"눈치가 좋은 거야? 운이 좋은 거야?"

"연수원 평가와 면접 점수를 종합해 보면, 후자인 듯합니다."

"어우-. 머리 나쁜 힐러 데리고 다니면 피곤한데."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워낙 기피 직종이다 보니…."

"흠…."

뜸을 들이던 것도 잠시.

권인하는 결국 결재 서류에 사인했다.

"한번 잘 키워 봐."

"예! 마스터."

부하 직원이 물러가자 그의 시선이 소파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아침 댓바람부터 제집인 양, 주인보다 먼저 와서는 죽치고 앉아 있던 김경민에게로 말이다.

미라클 길드의 수장 권인하.

대한민국 싸이킥 삼제 중 한 명인 김경민.

두 사람은 사실 미궁의 출현 이전부터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흔히 말하는 X알 친구라 해도 무방할 터.

"너 또 사고 쳤더라?"

"...?"

"채찍. 마녀가 휘두르던 거 잡아채서 던져버렸다며?"

"아…."

김경민의 반응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맞은 편에 앉은 권인하가 줄담배를 태워 댈 수밖에 없는 이유겠다.

"그 여자 성격상, 너한텐 지랄 못 해도 분명 우리 애들 쥐 잡듯이 잡아댈 텐데."

오윤아의 공식 직함은 '집행관'이다.

그리고 미궁 안에서 집행관은 사실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였다.

제아무리 천하의 미라클 길드라 한들, 대한민국 미궁에서 활동하는 이상 정부 측 인사와 척을 져 좋을 게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겠다.

"그 채찍이 100억짜리라더라. 그러니 넌 30억만 내. 70억은 길드 예산에서 특활비로 처리해 줄 테니까."

"나, 돈 없는데?"

"지랄."

천하의 김경민이 고작 30억이 없다니.

지나가는 개가 다 웃을 소리다.

그러나 이어지는 김경민의 말이 권인하의 입을 다물게끔 해버렸다.

"레드 크리스탈 사야 해."

"...."

얼마 전 대한민국 최초로 드랍된 레드 크리스탈이 2억 달러에 판매되었다.

평소 레벨업에 목매던 김경민에겐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더욱이 레드 크리스탈의 출몰지로 알려진 어린이 박물관은 무기한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얼마 모았는데?"

"천백억."

"나 백억 만."

지잉, 지잉-.

어디서 휴대폰이 울리나 했더니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김경민의 쌍검이 공명하는 소리였다.

권인하는 짐짓 모른 채하며 말을 돌렸다.

"알았으니까. 채찍은 그냥 길드에서 변상하는 거로 할게. 대신 연말 보너스는 없다?"

김경민이 대답 대신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테이블 위로 던져놓았다.

스킬북이었다.

<마력 운용 III>

제목을 확인한 권인하의 두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자신이 그토록 구하려 애쓰던 스킬 북이 아니던가!

"이, 이 귀한 걸 어디서…."

"오다 주웠어."

"...!"

"연말 보너스는?"

"당연히 드려야지요!"

권인하가 스킬 북을 손에 쥔 채 덩실덩실 춤을 춰댔다.

친구의 흉한 꼴을 차마 두고 볼 수 없던 김경민은 자리를 옮겨 창 너머 풍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창밖, 건물 중정 마당에선 각종 물자를 나르고 쌓느라 분주한 모습들이었다.

내일 단행될 제 26차 미궁 입장에 맞춰 보급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한 달 가까이 나오지를 못하니 그만큼 가져가야 할 것도 많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김경민은, 이번만큼은 단순히 날수만 채우다 나올 생각이 없었다.

정부에서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진 바로 그 곳.

어린이 박물관에 남몰래 잠입할 생각인 것이다.

오로지 레드 크리스탈을 목적으로, 그 어떤 위험조차 감수할 작정이었다.

* * *

나는 결국 스킬을 고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조언을 들은 다음에 결정을 내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근데 누구한테 물어 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손님들 수준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냥 아무나 먼저 만나는 고객한테 물어 보자.

딸랑~

때마침 문가에서 반가운 풍경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 시간에 웬 손님이지 했더니만 고블린이었다.

"디플 두 갑, 말보루 레드 세 갑이요."

"꺼져."

"흐엥!"

어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내가 꿀밤을 먹일 것처럼 주먹을 들어 보이자 고블린은 두 팔을 번쩍 든 채 호다닥 줄행랑을 쳐 버렸다.

꼴에 몬스터랍시고 해코지하면 어쩌나 싶어 살짝 쫄았었는데, 먹혀서 다행이다.

그런데 녀석은 완전히 떠난 게 아니었다.

무심결에 창 밖을 내다 보니, 고블린 작당 다섯 마리가 파라솔 테이블을 점거하고 있더라.

키도 짜리몽땅해서는 바닥에 발도 닿지 않는 것들이 말이야.

'…귀엽네.'

그렇다고 담배는 안 될 말이고.

'사탕이라도 좀 쥐어 줄까?'

녀석들에게 줄 간식 몇 개를 주섬주섬 싸 들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나와 보니 정작 고블린들은 보이질 않고, 그 자리에 전혀 못 보던 손님이 앉아 있었다.

일단 해골은 해골인데, 생김새가 해골 패거리들보단 훨씬 더 길쭉할 뿐더러 덩치도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거기다 전신에 두른 로브 하며, 어깨에 걸쳐 놓은 기다란 낫 한 자루까지.

누가 봐도 '나 사신이요'라는 포스를 풀풀 풍기는 몬스터다.

"보급관이다."

"…예?"

"발주, 보급."

"아…."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덧 자정이었다.

'약속된 시간에 정확히 방문했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정작 주변에 있어야 할 게 없었다.

"트럭은요?"

"그게 뭐지?"

"보급품이 실린, 뭐 수레 같은 거요."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예?"

"뭐."

"…아닙니다."

사신, 아니 보급관이 곧 몸을 일으켰다.

키가 2미터도 넘어 보인다.

"이제, 가라."

"어딜요?"

부웅-!

보급관은 대답 대신 나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이렇게 목이 따이고 마는 건가 하고 찔끔 놀란 것도 잠시.

"...!"

보급관의 낫이 노린 건 내 목이 아닌 내 앞의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허공이 베이면서 정체 모를 틈이 생겼다는 거다.

딱 사람 한 명 드나들 만한 사이즈였다.

'설마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건가?'

의문에 대한 답은 홀로그램 창에 뜬 물음표 표시로 갈음되었다.

펼쳐 보니 아니나 다를까.

<퀘스트 : 재고 사입>

[탑 외부에서 발주된 물품을 구매하고 돌아와 편의점에 채워 넣으십시오.]

[보상 : 스킬 북(종류 미상)]

[보상 : 레드 크리스탈 100개]

[보상 : 호칭(이세계의 보부상)]

보급관이 만들어 준 틈은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확실했다.

내가 살던 인간 세상으로 말이다.

"...."

그런데 한편으론 뭔가 허술해도 너무 허술하단 의심이 들기도 했다.

퀘스트고 나발이고, 막말로 내가 이대로 나가서 안 돌아와 버리면 그만 아닌가?

나는 슬쩍 보급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놈은 마치 내 속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듯이 허공에 대고 낫을 그어 보이며 말했다.

"알지?"

"뭐, 뭘요?"

"알면서."

"...."

시발.

* * *

싸이킥이라면 누구나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든 원하면 미궁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저 홀로그램 창을 연 다음 미궁 입장 항목을 활성화시키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미궁의 유일무이한 출입구인 서쪽 문 앞 분위기는 평소 한가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이곳 경복궁역 일대가 붐비는 때라고는 달에 딱 한 번, 몬스터 웨이브로 모두가 쫓겨나올 때뿐이었다.

이번에도 제26차 미궁 입장을 맞아 민간 길드들이 각각의 지정된 장소에서 동시 입장을 하기로 관리청에 신고가 된 상황.

다만 오윤아만큼은 예외였다.

매 입장때마다 그녀 홀로 경복궁역까지 와서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다는 거다.

반드시 원리 원칙을 따라야만 하는 공무직의 어쩔 수 없는 비애였다.

"어휴-. 이놈의 꼰머 문화는 좀 안 바뀌나?"

남들처럼 집에서 입장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관리청 사무실에서만 입장할 수 있었어도 30분은 더 잘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잔뜩 찌푸려져 있던 오윤아의 표정은 곧 반전을 맞이했다.

멀찍이서 전화를 받고 돌아온, 윤태호 국장의 전언 덕분이었다.

"물어주겠다네?"

"뭘요?"

"네 채찍."

"누가요?"

"미라클."

"아싸! 근데, 김경민이 아니라요?"

"누구면 어때? 김경민이 미라클이고 미라클이 김경민이지."

"사과는요?"

"유감이래."

"그게 끝?"

"그게 끝."

"기분 잡치네요."

"그래서 안 받을 거야? 100억인데?"

"받아야죠."

오윤아는 미간에 골이 파인 채로 입만 활짝 웃었다.

"근데, 저 미친놈은 뭐야?"

"누구요?"

"저기, 네 뒤에."

윤태호 국장이 오윤아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오윤아가 뒤를 돌아봤다.

"...."

약 100미터 거리, 미궁의 입구 앞에 웬 신원미상의 남자 한 명이 포착되었다.

그런데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미친놈처럼 박장대소하는 모습이 참으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너 아는 사람이야?"

"그럴 리가요."

"하긴, 너 친구 없지?"

"국장님도 관리청 은따잖아요."

"난 그래도 결혼은 했다?"

"그래서 행복하세요?"

"이봐요! 거기, 누구야? 여기 출입 금진 거 몰라?"

윤태호 국장이 삿대질까지 해 가며 남자에게 서둘러 다가가기 시작했다.

* * *

모 영화처럼 빗줄기가 퍼붓진 않았다.

땅이 질척이지도, 내 몸이 오물에 젖은 채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릎을 꿇고서.

하늘을 올려다본 채로.

영화 속 주인공마냥 실성한 듯 웃어 재꼈다.

'자유다, 자유!'

도심 한복판의 밤공기가 상쾌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매연 섞인 이 텁텁한 냄새가 오히려 반가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내가 비로소 사람 사는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증거일 테니까.

"와하하하, 와하하하하하!"

나는 한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얼마든지 더 웃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만의 자유를 만끽하는 건 잠시 잠깐뿐이었다.

뜻밖에 나타난 훼방꾼 때문이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냐니까!"

한 쌍의 남녀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머머리 중년남과 전혀 다른 그림체의 미녀 한 명.

"얼른 대답 안 해? 혼나고 싶어?"

머머리 남자의 언성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럼에도 나는 선뜻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편돌인데요.'

그렇다고 내가 평소 내 직업에 딱히 자격지심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만.

왠지 지금 상황에서 내뱉기엔 기분이 좀 그랬다.

어쩌면 생면부지임에도 다짜고짜 윽박지르고 보는 저 아저씨의 태도 때문에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사람이 말을 시키는데 뭐라도 대꾸는 해야겠다 싶어, 막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다가오던 머머리 아저씨가 순간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 옆의 여자가 툭툭 어깨를 건드리며 건넨 말 한마디 때문인 듯했다.

신기한 건 거리가 30미터도 넘어 보이는데, 그 여자의 외마디 목소리가 내게도 또렷하게 들렸다는 거다.

"…저 사람. 각성잔데요?"

13화.

"저 사람, 각성잔데요?"

"진짜? 확실해?"

"상태창 보니까 맞아요. 근데 왜 이렇게 쪼렙이래?"

"몇인데?"

"15레벨이요."

오윤아의 대답에 윤태호 국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5레벨이면 5레벨이고, 20레벨이면 20레벨이지. 15레벨은 또 뭐야?"

보통 연수원 수료생의 레벨이 5정도다.

이후 미궁을 한 번 다녀오면 대부분 20레벨 초중반까지 레벨 업을 하게 된다.

"뭔가 수상한데?"

"잠시 계셔보세요. 제가 살펴보고 올게요."

비록 15레벨이긴 해도 각성자는 각성자.

행여 상대가 불순한 마음을 먹고 있다면, 일반인인 윤태호 국장으로선 감당해 낼 도리가 없다.

오윤아는 한 번의 도약으로 단숨에 남자 앞에 떨어져 내렸다.

이어 잠시 말을 섞는가 싶더니 곧 다시 돌아와 윤태호 국장에게 보고했다.

"아무래도 로머roamer 같은데요."

"로머? 방랑자라고?"

"네. 일단 소속 길드도 없을뿐더러, 결정적으로 싸이킥 라이센스 자체가 없더라고요."

"허…."

각성자 특별법에 따라 각성자는 누구든 당국에 각성 사실을 신고할 의무가 있었다.

그럼에도 고의로 자신이 각성자라는 걸 은폐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로머'란 그와 같은 위법적 존재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당연히 로머는 발견 즉시 체포 및 연행이 기본 대응 지침이었고.

하지만 지금은 여건상 그럴 수가 없었다.

오윤아가 이제 곧 미궁에 입장해야 하는 탓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있지?"

"늦어도 5분 안엔 입장해야 돼요."

"하…. 씨. 그럼 어쩌지?"

"그냥 국장님이 차에 태워 가시죠?"

"미쳤어?"

"제가 기절시키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다 도중에 깨기라도 하면?"

"안 깨게 힘 조절 잘해 보겠습니다."

그럼에도 윤태호 국장은 오윤아가 영 미덥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네가 날 순직시키려는 음모가 아닐까 싶다."

"어머. 눈치도 빠르셔라. 역시 국장 감투를 괜히 따신 게 아녔어."

"됐고. 그냥 네가 미궁에 데리고 들어가."

"예?"

오윤아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윤태호 국장의 뜻은 확고했다.

"여기로 대응팀 보낼 테니까, 한 반나절만 붙들고 있다가 내보내라고."

"아하-."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오윤아가 고개를 주억이며 대꾸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왜?"

"들어가면 몬스터 대가리 깨기도 바쁜데 그 와중에 로머까지 챙길 정신이 어디 있겠어요?"

"아냐. 할 수 있어."

"어째서죠?"

"넌 공무원이니까."

"거, 퇴직 마렵게 자꾸 그러시기에요?"

"백억짜리 채찍은 누가 보상받아다 줬더라?"

"쳇. 알았어요."

오윤아가 툴툴거리며 다시 남자에게로 도약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윤태호 국장은 곧바로 싸이킥 대응팀을 호출했다.

* * *

말했듯이 내가 청력이 원래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먼 거리에서도 남의 대화를 들을 정도로 좋은 편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저들이 속닥이는 대화 일체가 또렷하게 다 들렸다.

"...."

일단 맥락을 봤을 때 상황은 내게 그리 호의적으로 흘러가진 않는 듯했다.

로머니, 무등록자니 하더니만 급기야 기절까지 운운해댄다.

아무리 편돌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고.

내가 고작 여자 한 명 못 이길까 봐?

[이름 : 오윤아]

[레벨 : 45]

.

.

.

어, 못 이겨.

'미친, 무슨 레벨이 45야?'

그 여자의 상태창을 확인한 나는 온순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레벨 차이가 깡패임은 이미 저 마굴 안에서 간접 경험을 통해 충분히 숙지한 바였다.

'개기지 말자.'

하지만 이런 내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 미궁에 데리고 들어가.

"저게 뭔…?"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다.

그런데 여자가 몬스터 운운하는 걸 보니,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궁 = 내가 방금 전까지 있었던 그곳.

'시발.'

내가 어떻게 거길 빠져나왔는데 또 들어가?

곧 여자가 다시 내게로 날아왔다.

나는 막 착지하는 그녀에게 내 뜻을 분명히 밝혔다.

"싫어요."

"…뭘요?"

"미궁인지, 마궁인지, 거긴 절대로 안 들어갈 겁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여자가 곧 손날을 세워 보였다.

"역시 기절이 편하다니까."

"…미궁은 어떻게 들어가면 되죠? 저 문을 통과하면 되는 건가요?"

여자는 내 손목을 잡아채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입장."

"...?"

다음 순간.

약간의 멀미 증세와 함께 눈 앞의 풍경이 삽시간에 변했다.

쿠오오오오-!

"쳐라!"

콰아아아!

"막아!"

사방 도처에서 사생결단이 벌어지고 있었다.

해골.

슬라임.

우파 청년.

고블린 등등.

우리 가게 단골들을 학살하는 인간들의 무자비함이란….

"거기, 뒤통수 조심해요!"

싸움 구경을 하던 중 나도 모르게 훈수를 두고 말았다.

막 도리깨와 같은 무기에 머리통이 날아갈 뻔한 해골 병사에게 경고성을 날린 거다.

내 경고 덕분에 해골은 한 턴을 무사히 넘긴 듯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나와 해골 그리고 해골과 싸움 중이던 남자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저 인간 새끼는 뭐지?'

'저 트롤 새끼는 뭐지?'

그들의 눈총에 머쓱해진 나는 얼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예 자리까지 피하고 싶었다만, 그건 강제 파티 중인 여자 때문에 불가능했다.

"3보 이상 떨어지면 기절시킬 거예요."

"그건 허리춤이라도 잡아야 할 거 같은데요."

"…10보."

"네."

사실 나 역시도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내게로 향하는 단골손님, 아니 마물들의 적의를 그녀가 대부분 커버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난전 중인 몬스터들은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는 듯했다.

그리고 생긴 게 비슷비슷해서 그렇지, 실상은 우리 가게 단골들인지도 확실치가 않았다.

일단 그 머릿수부터가 감히 헤아릴 수 없으리만치 많았으니까.

그 대부분은 그저 닮은꼴 마물이란 소리겠다.

일단 무턱대고 날 공격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날 알아봤다면 결코 이런 식의 살기 어린 공격은 하지 않았을 거다.

물론 개중엔 예외도 있겠지만.

"너 이 새끼. 그 고블린이지?"

"후에엥!"

어디선가 익숙한 담배 쩔은 냄새가 나길래, 뭔가 싶어 돌아보니 고블린 한 마리가 단도를 꼬나 쥐고 암습하려 들고 있었다.

바로 멱살잡이를 해서 추궁하니 차마 부정은 못 하고 울먹이는 녀석이었다.

나는 엉덩이 맴매 몇 대를 때려준 뒤 녀석을 풀어주었다.

그랬더니 내 의도를 곡해한 오윤아가 내게 말했다.

"님. 우선 바닥에 떨어진 스킬북 암거나 주워서 익혀요."

"네?"

"방금도 제대로 배운 공격 스킬 없어서 놓친 거 아냐?"

"아, 뭐…. 근데 스킬은 어떻게 익히는데요?"

"스킬북 주워 봐요. 그럼 절로 알게 될 테니."

갑작스레 몰려드는 마물들 탓에 오윤아가 다시금 바빠졌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주변 바닥에 널려 있는, 마치 두꺼운 양장본 사전을 닮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오윤아의 말마따나 눈앞에 홀로그램 메시지가 떴다.

[스킬 북(3단 베기)를 획득하셨습니다.]

[스킬(3단 베기)를 익히시겠습니까?]

"…익힘."

[스킬(3단 베기)를 익힐 수 없습니다.]

[스킬을 배우려면 검을 장착해야 합니다.]

'뭐가 이렇게 까다로워?'

다행히 주변 바닥엔 다양한 종류의 주인 모를 칼들이 널려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든 채로 다시 스킬 배우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

[스킬(3단 베기)를 배울 수 없습니다.]

[히든 클래스는 일반 스킬 학습이 제한됩니다.]

'히든 클래스는 또 뭐야?'

감춰진 직업 뭐 그런 건가?

내가 부끄러워?

"그러고 보니…."

나는 내가 아직 선택 안 한 스킬이 있음을 새삼 기억해냈다.

[스킬 : 고객 모방]

[스킬 : 고객 소환]

[스킬 : 고객 유치]

"이러려고 스킬이 있는 거였구나."

나는 고민 끝에 고객 모방을 선택했다.

사실 마음이 더 가는 건 고객 소환이었다만.

가뜩이나 몬스터들이 바글거리는 판국에, 까딱 잘못 했다간 피아 식별 안 돼서 우리 편인 인간들에게 맞아 죽겠다 싶었다.

[스킬(고객 모방)을 배우시겠습니까?]

"예스."

[스킬(고객 모방)을 체화했습니다.]

[이제부터 단골 고객의 고유 스킬 중 한 가지를 빌려 올 수 있습니다.]

곧 눈앞에 손님들의 스킬 목록이 좌르륵 펼쳐졌다.

"오!"

고객 소환은 랜덤이더니, 이건 내가 직접 선택할 수 있나 보네?

막 목록을 훑어보는데 어디선가 예의 그 익숙한 말보루 레드의 향이 느껴졌다.

"꺼져!"

"후에엥!"

달려드는 고블린 한 마리를 엉덩이 맴매로 응징하고 놓아준 다음, 마저 목록을 살펴보았다.

가장 끌리는 건 아무래도 듀라한의 스킬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는 붉은색으로 표기되어 고를 수가 없었다.

레벨 차이에 따른 페널티 때문인 모양이다.

'근데, 이건 뭐야?'

[스킬 : 수급탄首級彈]

- 자신의 머리통을 투척하여 낙하지점으로부터 반경 20미터 범위에 피해를 입힙니다.

- 타이머 설정에 의한 폭파 지연이 가능합니다. (최대 30초)

'그 듀라한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게 생체 폭탄이었어?'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항목들로 주의를 돌렸다.

내심 장부와 실제 재고 수량 맞춰 볼 때처럼 가급적 꼼꼼하게 하나하나 살펴 보고 싶었지만.

"님. 스킬은 배우셨어요?"

"아직요."

"저기, 아무리 쪼랩이라지만 너무 날먹하시려는 거 아녜요?"

당면한 현실이 그럴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눈에 확 띄는 스킬 하나를 선택한 다음 곧바로 근처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장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오윤아의 지적질이 이어졌다.

"님. 활 말고 검이요."

"네?"

"님 같은 쪼렙은 활 못 쓴다고요. 전직 전엔 활 관련 스킬북이 없어요."

"아하-."

나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활 통까지 마저 챙겨 들었다.

[스킬 : 명사수]

- 화살로 대상을 명중시킵니다. 명중률은 거리 조건에 영향을 받습니다.

200m : 90%

100m : 95%

50m : 99%

"거참! 안 된다니까?"

돼!

피융~!

"...?"

시험 삼아 활 한 대를 시위에 걸고서 날려보았다.

일련의 과정과 동작이 내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로 자연스럽기만 했다.

물론 반쯤 넋이 나간 듯한 오윤아의 표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어떻게…. 활을 쏴요? 15레벨이?"

"그러게요."

* * *

활은 궁사로 전직한 싸이킥만이 다룰 수 있음이 상식이다.

저 남자의 레벨이 아직 15임을 감안하면, 정말 턱도 없는 일이 벌어 지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잘 쏴?'

궁사로 막 전직했다고 해서 활 솜씨가 갑자기 좋아질 리는 만무하다.

전직은 그저 해당 직업과 관련한 주무기를 다룰 '자격'이 주어졌다는 의미일 뿐.

한데 지금 저 남자의 활은 쏘는 족족 백발백중의 신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잠깐 구경하는 사이에 벌써 20마리는 쓰러트린 듯하다.

"시발, 이건 사기야."

"그…. 지금 저한테 욕하신 겁니까?"

"아뇨. 혼잣말이었어요."

"근데 왜 존댓말을 하세요. 헷갈리게."

오윤아는 짐짓 남자의 항의를 무시하며 새삼 상대의 상태창 확인에 들어갔다.

[이름 : 구영수]

[레벨 : 15]

[직업 : - ]

[칭호 : -]

.

.

.

'분명 쪼렙은 맞는데….'

오윤아가 무단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이름과 레벨 정도뿐이었다.

그밖에 내용은 본인의 동의가 있어야지만 열람이 가능하다.

그렇다곤 하나, 이 구영수라는 남자의 레벨이 워낙 낮다 보니 여태껏 다른 숨겨진 정보에는 눈길이 가질 않는 게 당연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설마 이 남자. 히든 클래스라도 되는 거야?'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의 상황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보통의 경우와 다르게 히든 클래스는 각성과 동시에 직업을 부여받을 뿐더러, 그 숙련도마저 일반적인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는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대한민국 최초이자, 전 세계 최초의 궁사 히든 클래스?'

그저 어리버리한 로머 따위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전 세계에서 48명뿐인 히든 클래스 중 한 명이었다니.

"심, 심 봤다!"

"예?"

"아뇨. 전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쏘셔요."

"화살이 없어요."

그 말에 오윤아는 열심히 주변에 떨어진 화살통을 주워 나르기 시작했다.

14화.

대한민국 양궁은 자타공인 세계 최고다.

내가 마굴에 떨어지기 직전, 중계방송이 한창이었던 올림픽에서도 어김없이 메달이란 메달은 다 싹쓸이했으니.

참고로 양궁에서 발사대와 과녁까지의 거리는 70미터.

실제로 그 자리에 서 보면 과녁이 손톱만 하게 보인단다.

그런데도 쏘는 족족 10점을 맞혀대는 선수들의 초인적인 능력이 마냥 신기했었는데….

피융~.

푹-.

"크아악!"

지금 내가, 그런 선수들 뺨 치는 장면을 연출해 내고 있는 중이었다.

평생 장난감 활조차 잡아본 적 없던 활찔이가, 고작 스킬 하나 배웠다고 갑자기 신궁으로 변신한 거다.

[스킬 : 명사수]

- 겨냥하는 대상의 약점이 노출됩니다.

- 명중률은 거리 조건에 영향을 받습니다.

200m : 90%

100m : 95%

50m : 99%

'이거 진짜 개사기네?'

[명사수]는 해골 궁수의 스킬 목록 중 하나였다.

솔직히 고를 땐 별생각이 없었는데, 쓰면 쓸수록 너무 날먹하는 거 같아 모종의 죄책감마저 들 지경이다.

그렇다고 저쪽 진영의 널리고 널린 해골 궁수들이 다 활을 잘쏘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었다.

활질로 어그로가 끌리는 바람에, 나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의 빈도가 눈에 띄게 늘어났지만, 그 대부분은 딱히 위협적이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확도가 형편없었다.

간혹 위험하다 싶은 눈먼 화살조차 파티원 여자가 알아서 막아주니 문제 될 게 없었다.

'거기다 시의적절하게 활 통까지 리필을 해 주고.'

덕분에 나는 신나게 활 질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어찌나 과몰입을 했는지 나중엔 팔이 다 뻐근해져서는 올려지질 않았다.

'근데, 이거 왜 경험치가 안 오르는 거지?'

* * *

대한민국에 등록되어 있는 싸이킥의 수는 6,326명에 달한다.

별다른 사연이 없는 한, 그 모두는 한날한시에 함께 미궁에 입장한다.

상태창을 열고 미궁에 들어가겠노라 뜻을 세우면, 곧장 출구 앞, 경복궁역 일대로 소환된다.

소환 장소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몬스터들이 바글거리고 있다.

매번 입장과 동시에 난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몬스터를 몰아내고 베이스캠프를 차릴만한 부지를 확보하기까진, 대략 1시간가량이 소요된다.

그래도 삼일 밤낮을 싸워야 했던 미궁 초창기 시절을 떠올리자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겠다.

싸이킥들중 마법사나 사냥꾼처럼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직업은 지형지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주변 건물 옥상을 점거해서는, 높은 곳에서 몬스터 떼를 향해 마법 등과 같은 광역 공격을 퍼부어대는 것이었다.

물론 몬스터 중에서도 장거리 공격이나 비행이 가능한 놈들은 존재했다.

따라서 옥상 투입조엔 항상 방어와 근접 전투가 가능한 호위조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김경민도 그러한 임무를 맡고서 6번 출구 앞 빌딩 꼭대기에 올라와 있긴 했다.

화르륵-.

김경민은 자신의 눈앞에서 통구이가 된 와이번 한 마리가 추락했는데도 눈길 한번을 주지 않고 있었다.

사실상 태업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 때문에 속 터지는 건 공수 양면을 다 신경 써야만 하는 권인하였고.

"야 이 자식아! 일 해, 일! 내가 이러려고 너 데리고 올라온 줄 아냐고!"

"…어."

"이익-."

빠드득 이를 갈던 권인하가 대뜸 불덩이 하나를 날려 보냈다.

김경민의 귓볼을 스친 불덩이는 10여 미터를 더 날아가 돌진하던 자이언트 비를 직격했다.

'와우. 내 이성, 내 자제력 칭찬해!'

마음 같아선 왕벌이 아니라 저 머리통을 불덩이로 날려버리고픈 심정이었다.

권인하는 애써 이성을 다잡으며 다시금 마법 대신 잔소리를 날렸다.

"네가 아무것도 안 하니까 내가 저 아래 후방 지원을 제대로 못 하겠잖아!"

"네가 안 도와줘도 자기들끼리 잘하는데?"

김경민의 대답은 빈말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갑자기 기계처럼 활을 쏴대는 궁수 한 명이 김경민의 눈에 띄었다.

실은 김경민을 태업하게 만든 이유도 그 무시 못 할 활약상 때문이었다.

화살을 날리는 족족, 크리티컬로 몬스터를 쓰리 트리는 장면이 아무리 봐도 질리기는커녕 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이다.

'대체 누구지? 전혀 못 보던 얼굴인데?'

뉴페이스의 등장은 김경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 정도 실력을 갖춘 싸이킥이 그간에 명성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35…. 아니 어쩌면 40도 넘겠는데?'

당장은 거리가 먼 탓에 상태창 열람이 어려웠다.

상대하는 적들 또한 숫자만 많았지 그다지 높은 레벨들이 아닌 탓에, 화살의 정확한 위력을 가늠해 볼 순 없었다.

그럼에도 김경민은, 활시위를 당길 때의 노련한 동작과 그 정확도만으로 저 남자가 최소한 40레벨은 넘으리라고 짐작했다.

실은 그조차 보수적으로 점수를 매긴 것이지만.

'대충 봐도 삼도보다 잘 쏘잖아.'

허삼도는 42레벨의 사냥꾼으로서, 주 무기가 장궁이었다.

그의 활 실력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김경민이 기억하기로 허삼도의 활조차 저 정도로 정교하진 못했다.

여태 날린 화살 중, 단 한 발도 크리티컬이 아닌 경우가 없었으니….

"뭐야? 저거, 활 쏘는 애. 삼도야?"

부지불식간에 구경꾼이 한 명 더 늘었다.

대체 뭐 때문에 그리 한눈을 파나 싶어 정황을 살피던 권인하가 뒤늦게 이 진기명기의 관람에 합류한 것이다.

제 할 일은 다른 싸이킥들한테 미뤄 둔 채 말이다.

"삼도가 아니네? 와 씨-. 근데 뭐 저렇게 쩔어?"

"삼도보다 잘 쏴."

"…그러네. 다섯, 여섯, 일곱…. 미친. 계속 크리티컬이야?"

권인하의 눈빛은 어느새 탐욕으로 일렁였다.

인재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성격 탓이었다.

"쟤 어디 소속이야? 너 아는 사람이야? 야, 다리 좀 놔 봐. 최고 대우해 준다 그래."

"나도 모르는 사람이고, 영입은 꿈 깨는 게 좋을 듯."

"왜? 어째서?"

김경민은 손가락을 쭉 내뻗어 궁사의 주변을 가리킴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그제야 권인하의 시야에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오윤아의 존재가 잡혔다.

그 인상이 팍 찌푸려진 이유였다.

"아…. 하필 왜 공무원인 건데!"

별종.

공무직 싸이킥, 집행관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그러했다.

민간 소속 대비 연평균 수입이 1/10정도에 불과함에도 끝내 공무원을 자처하는 그들의 의식 구조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물질적 혜택만으로는 그 별종들의 마음을 살 수 없음이 사실상의 정설로 굳어진 현재였다.

막말로 지금 눈앞에서 미친년마냥 채찍을 휘돌려대는 저 오윤아만 해도 한때는 온갖 길드에서 군침을 흘릴 정도로 대단한 재능의 기린아였었다.

장담컨대 그 괴랄한 관리청 분위기에만 물들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뛰어나고 우아한 고레벨 싸이킥으로 성장했으리라.

그러하기에 권인하의 안타까움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저 활쟁이가 공무직에 뜻을 두고 있거나 이미 공무원 명찰을 달았다고 한다면, 사실상 영입의 기회는 없다고 봐야 할 터.

'저러다 저 자식도 나중에 막, 뭐 새총 쏘고 돌팔매질하고 그러는 거 아냐?'

오윤아가 딱 그런 케이스였다.

대한민국에서 으뜸가는 봉술 마스터였거늘.

집행관이 된 후로 난데없이 주무기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더라.

자신의 직업엔 채찍이 더 어울린다나 뭐라나.

* * *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베이스캠프 부지 확보에 성공했다.

싸이킥들은 조를 나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몬스터 사체를 치우거나 드랍된 아이템을 수거하는 조.

건물에 초소를 꾸리고 길목마다 방책을 세우는 조.

막사와 텐트를 치는 조 등등.

하지만 모두가 분주한 와중에 오윤아만큼은 그들과 멀리 동떨어져 캠프 외곽으로 겉도는 중이었다.

정체불명의 사내를 곁에 낀 채로 말이다.

고작 15레벨에 불과함에도 활을,

그것도 미친 듯이 잘 쏘는 싸이킥이라니.

상태창을 통해 그의 이름이 '구영수'라는 건 알았지만, 오윤아는 그 밖에도 그에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호기심의 해결보다 선행해야 할 조치가 있었다.

그러고자 구영수를 인적 드문 외곽으로 데리고 나온 것이었고.

* * *

몬스터 무리가 퇴각하는 낌새가 보이자.

여자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이것저것 묻지도 않은 요령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예? 상태창 정보를 가릴 수도 있어요?"

"네. 이름을 제외하면 모두 비공개 상태로 설정할 수가 있어요. 한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여자의 말대로 각 항목들 말미엔 자물쇠 모양의 아이콘이 붙어있었다.

레벨 칸만 빼고.

레벨칸은 열려있는 자물쇠 표시였다.

"이거, 열림 표시는 공개되어 있다는 거죠?"

"네. 잠그시면 바로 비공개로 전환될 거에요."

"잠궜어요."

"네. 안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쪼렙이라 좀 쪽팔렸었는데…."

"뭘요. 그리고 상태창의 이름은 비공개로 할 순 없지만 변경은 가능해요."

"엇. 진짜요?"

"네. 지금 영수님께서 보시는 제 이름도 본명이 아니랍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45레벨이 워낙 충격적이라 그 이외의 것들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었다.

그래서 각 잡고 다시 보니 이제야 상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름 : 유나]

[레벨 : 45]

[직업 : all weapon master]

[칭호 : 조련의 여왕]

.

.

.

'우와-.'

다시 보시 레벨도 레벨이었지만 직업마저 간지 폭발이었다.

'올 웨폰 마스터.'

직역하면 모든 무기를 다룰 줄 안단 소리다.

'그에 반해 호칭은 좀….'

솔직히 구렸다.

어쩐지 내내 채찍만 주구장창 휘둘러 대더라니.

근데 이 여자의 상태창을 훑어보던 중 나는 문득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왜지?'

그녀의 상태창도 나처럼 잠긴 자물쇠 천지였다.

이름을 제외하면 죄다 비공개 상태라는 뜻이겠다.

그런데 어째서 내 눈엔 그녀의 정보가 죄다 낱낱이 보이는 걸까?

혹시 자물쇠 잠글 때 삑사리라도 난 걸까?

그것도 모르고 여태 다녔던 건 아닐까?

그렇다고 막상 알려주자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행여 상대가 민망해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결국 내가 망설이는 사이 타이밍은 지나가 버렸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질문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수님은 언제 각성하셨어요?"

"상태창을 보는 게 각성이라면, 얼마 안 됐습니다."

"왜 라이센스 등록은 안 하신 거죠?"

"어디 좀 갇혀 있어서 할 기회가 없었어요."

"...?"

조금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던 그녀가 다시 물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정확한 직업을 여쭤봐도 될까요?"

"편…. 아니, 백수입니다."

"아 그런 뜻이구나…."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어오는 그녀.

"앞으로의 계획이 따로 있으신지요?"

"일단 쇼핑부터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네? 쇼핑이요? 무슨…."

거듭 밝히지만 내 직업이 부끄러운 건 아니다.

그래도 발주 품목 사러 나온 거라고 이실직고하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그래도 상대는 직업이 간지철철의 올 웨폰 마스터인데.

그런 사람 앞에 대고 어떻게 편돌이라고 고백을 하느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시간도 벌 겸, 오히려 역공에 나섰다.

"너무 저만 대답하는 거 같은데…. 저도 몇 가지 좀 여쭤봐도 될까요?"

"네? 아, 네. 얼마든지요."

내가 알고 싶은 건 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로 변하게 된 인과관계였다.

체감상 이 안에 갇혀 있었던 시간이 2주 정도 되는 듯했으니, 그 사이 바깥세상에서 일어난 일들이 궁금했다.

그런데 막상 그녀의 대답은 내 예상보다 훨씬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내용 또한 듣고도 믿지 못할 이야기들뿐이었으니….

"잠깐.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어느… 부분이요?"

"미궁인지 마궁인지가 서울 한복판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요?"

"2년 좀 넘었다고요."

"…2주가 아니라요?"

"네, 2년."

"...."

15화.

내가 편의점에서 괴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 기간은 2주 정도에 불과했다.

분명 매일 휴대폰으로 날짜를 체크 했으니 확실하다.

그런데 저 여자는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지 2주가 아니라 2년이 지났단다.

갑갑한 마음에 나는 휴대폰을 빼 들었다.

"...?"

하지만 이유를 모르게 화면이 켜지질 않았다.

전원 버튼을 눌러 봐도 부팅이 되지도 않는다.

"지금 뭐 하세요?"

"뭐 하긴요. 휴대폰 키잖아요."

"미궁 안에선 전자 기기 사용 불가에요. 설마 모르셨어요?"

아닌데.

우리 편의점은 전기 잘만 들어오던데?

반문하려던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급 정신적 피로감이 엄습해 든 탓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랬지.'

여기서 입씨름을 하느니, 차라리 나가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여기 어떻게 나가요?"

"…나가시려고요?"

"네."

"지금 나가시면 바로 체포, 구금, 취조당하실 텐데요."

"제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받죠, 뭐. 금방 풀려날 테니."

"그… 러지 말고, 그냥 당분간 저하고 여기 계시는 건 어떠실까요? 나갈 때 제가 같이 나가서, 영수님께 불편 안 끼치게끔 잘 조치할게요."

일전에 말했지만 이 '유나'라는 여자는 예쁘다.

독보적인 청순가련미가, 채찍질 말고 연예인을 했어도 대성했을 것 같은 외모다.

그런 미인이 동거, 아니 동행, 아무튼 같이 있자고 손을 내미는데 세상 혹하지 않을 남자가 또 어디 있을까.

"여기 있다!"

"…네? 남으시겠다고요?"

"아뇨. 죄송합니다. 혼잣말이었어요."

그냥 이 미궁이란 곳 특유의 스산한 분위기와 퀘퀘한 냄새가 싫었다.

어서 나가서 매연과 미세먼지가 충만한 바깥공기를 실컷 들이키고 싶을 뿐.

"나갈래요."

"아…. 네에."

노골적으로 실망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는 여자의 모습에 내심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내가 만약 이제라도 마음을 돌린다면, 우린 점차 사이가 가까워져서는 마침내 연인 사이로 발전한 다음 일사천리로 결혼까지 하게 되고 신혼여행은 어디가 좋을까 아이는 둘이 낫겠….

'정신 차려, 미친놈아!'

저런 연예인급 외모의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놈과 가까워지려 들겠냐는 말이다.

"저기,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세요."

"이게 뭐죠?"

여자가 대뜸 쪽지를 건넸다.

받아서 펼쳐 보니 무슨 골뱅이를 포함한 메일 주소 비스무리한 게 적혀 있었다.

"제 인별그램이에요. 디엠 주시면 확인하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바깥에서 한번 뵈어요."

"아…."

요즘 인싸들은 번호 말고 인별그램 아이디를 교환한다더니, 역시….

"그리고 그 아래, 제가 간단히 메모 몇 줄 했어요. 바깥에 계신 분께 그거 보여주시면 간단히 신원 확인 정도만 하고 그냥 보내주실 거예요."

"오-. 감사합니다."

갑자기 나한테 왜 잘해주는 건진 모르겠다만, 아무튼 기적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나, 노후 계획 다시 짜봐도 되는 걸까?

* * *

들어올 때와는 달리 미궁은 출구를 통해서만 빠져나갈 수가 있단다.

유나 님은 날 출구까지 에스코트 해주고 싶어했다.

다만 먼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서 30분가량 기다려야 한단다.

나는 흔쾌히 다녀오라며 그녀를 보내주었다.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신기하게도 조급한 마음이 사라진 덕분이었다.

아울러 이곳, 베이스캠프에 대한 호기심도 생겨서 여기저기를 둘러 보고 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 모두는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하며 분주한 모습들이었다.

누구 하나 요령 피우지 않고 열심인 와중에, 나 혼자 유유자적하게 그사이를 걸어 다니니 뭔가 뻘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개중에 몇은 내게 '저 새낀 뭐지?'라는 눈빛을 쏘아 보내기도 했다.

해서 가급적이면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었다.

"어?"

"...?"

"야! 너, 그…. 맞지?"

그런데 갑작스레 나를 향해 소리치는 웬 여자가 있었다.

그 때문에 주변의 이목이 내게로 확 쏠린 건 당연한 현상이었고.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대꾸하고 얼른 자리를 피하려 했다.

아닌 게 아니라, 23년 평생 여자친구는커녕 여자사람친구조차 없던 나였다.

그러니 십중팔구, 아니 십중십은 저 여자가 사람을 착각한 게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 아니 그년의 외침에 나는 걸음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맞잖아! 편의점. 내 뒤 타임!"

"...?!"

갑자기 내 시계가 2주 전으로 되감아졌다.

비로소 저 목소리의 주인이 떠올랐다는 이야기다.

'와-. 나도 등신 상등신이네.'

다른 누구도 아닌 저 목소리를 못 알아듣다니.

* * *

민시윤은 본래 텐트를 치는 조에 들고 싶었다.

하다못해 본부 막사 작업에라도 지원해보려 했지만.

결론부터 말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소위 말해 짬이 안 되는 신참의 할 일은 무조건 정해져 있었다.

몬스터의 사체 처리였다.

"우웩-."

이곳저곳 주변에선 심심치 않게 구토 소리가 울려퍼지곤 했다.

제아무리 각성자라고는 하나, 전투 경험이 일천한 초보 싸이킥들에게 몬스터의 사체로 가득한 현장에서 비위가 멀쩡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

민시윤이라고 다를 리는 없었다.

"우욱-."

민시윤은 시도 때도 없이 속을 게워냈다.

나중엔 이게 사체를 치우는 건지, 자기 토사물을 치우는 건지 모를 만큼 그 정도가 심했다.

시각적 충격이야 보다 보니 그럭저럭 적응이 됐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건 난생 처음 맡아보는 고약하고 비릿한 누린내였다.

사체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확 풍기는 냄새 때문에 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니 어쩔 방도가 없었다.

눈과 입으로 쏟아내며 작업에 매진하는 수밖에는.

한데 이 와중에 눈에 거슬리는 인간이 한 명 있었다.

다들 그 개고생을 하는데, 웬 놈 하나가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걸으며 구경만 다니는 것이다.

'부럽다!'

처음엔 높으신 양반인가 보다 하고 신경을 끄려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민시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갑작스레 벌떡 일어서서는 놈을 가리키며 소리를 친 이유였다.

"맞잖아! 편의점, 내 뒤 타임!"

물론 이름 따윈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 보기만 해도 짜증나던, 너드 남자의 표본이던 외모는 똑똑히 기억났다.

"실종됐다더니, 여기서 보네?"

상대도 마침내 기억이 난 걸까?

남자가 마침내 멈춰 세운 걸음을 이쪽으로 돌려 다가오기 시작했다.

민시윤은 그저 반가움과 호기심 외엔 어떠한 마음도 없었다.

별안간 눈앞이 번쩍하기 전까진 말이다.

철썩-!

"악!"

졸지에 손찌검을 당한 민시윤이 비틀거리다 못해 주저앉았다.

몬스터의 체액과 자신의 토사물이 뒤범벅인 그 위로 말이다.

"...?"

아픔과 당혹감은 잠시 잠깐뿐.

서둘러 다시 몸을 일으킨 민시윤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분노와 수치심 때문이었다.

"시발, 미쳤어?! 갑자기 왜 때리고 지랄인데!"

* * *

프로 레슬링에는 자이언트 스윙이란 기술이 있다.

상대방의 두 다리를 잡고 빙빙 돌리다가 던져버리는 기술이다.

나는 두 다리 대신 저년의 양갈래머리를 잡고 빙빙 돌리다가 몬스터 밭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를 반가운 기색으로 바라보는 그 모습이 더 역겨울 따름이었다.

'이 X년.'

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구나.

저 여자는 일말의 죄책감조차 없구나.

그래서 냅다 뺨을 후려갈겼다.

물론 제 딴엔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평소처럼 교대 시간이 늦었을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2주간 미궁 안에 갇혀 있어야 했던 나에겐 분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그것도 2주가 아니라, 알고 보니 2년이었다고!

"시발. 미쳤어? 갑자기 왜 때리고 지랄인데!"

근데 쟤 이름이 뭐였더라?

민, 뭐시기였는데?

아무튼 민 뭐시기의 발작적인 반응은 예상 그대로라 딱히 놀랍지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막상 대꾸를 하려니 내가 말문이 막힌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잘들어봐네가교대시간에지각을하는바람에너대신에내가미궁에갇혀서는괴물들을상대로이주아니이년동안편돌이짓을하다가이제야겨우빠져나왔는데그것도완전히나온게아니라발주제품사서다시들어가야한단다.'

라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읊기에는 장소도 분위기도 적합지가 않다는 생각이 든 거다.

그래서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잠시 잠깐 머뭇거렸는데.

우웅-.

"...?"

그새를 못 참고 민 뭐시기의 불끈 쥔 두 주먹에 아이보리색 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 주먹으로 곧 나를 치리란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뻔한 사실.

'내가 멍청했네.'

민 뭐시기를 이곳에서 마주쳤다는 건, 이 여자도 싸이킥인지 뭔지라는 소리다.

적개심에 눈이 먼 나머지, 그만 그 사실을 간과해버리고 말았다.

거기다 아까 유나 님께 들은 이야기도 뒤늦게 생각났다.

미궁과 각성자가 생긴 지 2년이 넘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고로 저 민머시기가 나보다 고레벨일 확률은 99.9999%….

[이름 : 시윤]

[레벨 : 5]

…가 아니네?

몇 번을 다시 봐도 민 머시기의 레벨은 5에 불과했다.

나보다 무려 10레벨이 낮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의문과는 별개로 내 몸은 자동으로 의기양양해졌다.

이 바닥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10레벨 차이면 한두 대 맞는다고 최소한 죽진 않을 게 확실했으니까.

그렇다면 나이스지.

반격하면 적당히 흘리거나 맞아주고 뺨이나 한 대 더 후려갈겨야지.

하지만 내가 바라던 장면은 끝내 그려지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참견쟁이 때문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웬 남자가 다가와서는 다짜고짜 호통을 내질렀다.

나 말고, 민 뭐시기에게.

* * *

치유계 능력이라고 해서 공격 수단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당장 지금처럼 오러를 두르기만 해도 일반 주먹질보단 훨씬 강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그러나 민시윤은 곧 후회감에 사로잡혔다.

지나치게 여유로운 상대의 기색을 읽은 탓이었다.

'아차, 레벨부터 확인했어야 했는데….'

민시윤은 뒤늦게 상대의 상태창 열람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름이 '구영수'라는 사실 외엔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 봐도 상대가 자신보다 고레벨이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유추 가능한 사실이었다.

'연수원 내내 본 적이 없으니…. 최소한 나보단 선배란 소리잖아.'

전의가 완벽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한껏 달아올랐던 얼굴도 핏기가 가셨다.

그렇다고 이제 와 주먹을 풀자니 그건 또 그대로 창피해서 못 할 짓이었다.

'어쩌지?'

그처럼 머릿속은 분주했어도, 사실 실제로는 채 몇 초도 흐르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민시윤이 스스로 신세를 망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

민시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호통을 내지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가 누군지 익히 아는 까닭이었다.

"마, 마스터."

주변의 그 누구라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가 바로 미라클 길드를 이끄는 자.

권인하였으니까.

"민시윤 씨. 그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싸이킥 간에 능력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율령을 잊었습니까? 분명 연수원에서 가장 강조하던 준칙 가운데 하나였을 텐데요?"

"하, 하지만 마스터. 저쪽에서 먼저 제 뺨을 때렸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능력을 사용했습니까?"

"그, 그건…."

"설령 이능력에 의한 공격을 당했다고 해도, 방어 목적이 아닌 이상 이능력으로 맞받아치는 건 불법입니다. 몰랐습니까?"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본래 조직에는 다 나름의 절차가 있다.

권인하와 같은 거물이 일개 신입 싸이킥의 잘잘못을 따지고 있는 이 장면 자체가 지극히 보기 드문 구경거리라는 소리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러한 사건을 포착했더라도 그 아래 수하를 시켜 상황을 정리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권인하는 끝끝내 친히 끝을 볼 작정인 듯했다.

민시윤으로서는 정말 재수 옴 붙은 날이 될지라도.

"나는 미라클 수장으로써, 현 시각 부로 길드원 민시윤를 미궁에서 추방합니다. 나머지 처분은 이후 간부들과 논의해서 통지할 테니, 나가서 근신하며 기다리세요."

"마, 마스터.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마스터어!"

울며불며 사정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소란을 피운 탓으로 주변의 길드원들에게 더 빨리 끌려 나갔을 뿐.

그러거나 말거나, 권인하의 관심은 그녀에게서 거둬들인 지 오래였다.

"저희 길드원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어디 불편한 덴 없으십니까?"

권인하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구영수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16화.

눈앞에서 민시연이 쫓겨나는 장면은 그야말로 꿀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통쾌한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권인하라는 남자의 태도 때문이었다.

자기 길드원에겐 그처럼 엄격하면서, 어째서 나한테 그렇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응시하느냔 말이지.

민시연이 끌려 나가자 권인하는 몇 번의 손짓으로 구경꾼들마저 주변에서 물리쳤다.

모두가 제 할 일을 찾아 자리로 복귀하자, 권인하가 다시 내게 말을 붙였다.

"과거 두 분 사이에 어떤 악연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래도 현재는 저희 소속이니만큼 민시윤 길드원에게 아직 풀지 못한 앙금이 남아 계시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뭐 그러실 거까지야…."

"아울러 영수 님께 각성 능력으로 반격하려던 과오에 대해선 명백한 책임을 물을 예정이니 심려치 마세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하네요."

나는 그 찰나에 내 일생을 되돌아보았다.

무난한 학창 시절.

무난한 대학 입학.

무난한 육군 병장 만기 제대.

무난한 복학 대기 편의점 아르바이트.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평범했던 일상 중에 이처럼 황송한 대접을 받았던 기억은 없었다.

'길드를 이끄는 수장이란 자가 대체 나한테 왜 이토록 부담스러울 정도로 저자세인 거지?'

그에 대한 의문은 생각보다 빨리 풀렸다.

"그나저나 활을 참 잘 다루시더군요."

갑자기?

"실은 아까 전황을 살피던 중 우연히 영수 님의 활약상을 발견하곤 쭉 지켜봤었거든요."

"아아…."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레벨을 좀 여쭤봐도 될까요?"

아무래도 이 남자가 이끄는 길드엔 활쟁이가 부족한 듯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이토록 싹싹하게 구는 거겠지.

날 영입하려고 말이다.

신상 정보까지 묻는 걸 보면 그 심증은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니 입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네. 15렙이랍니다!'

쪼렙인 걸 내 스스로 이실직고하자니 차마 용기가 나질 않는 거다.

이건 마치….

'코로나 유행이 끝나고 사람들 앞에서 마스크를 처음 벗을 때의 그런 기분이랄까.'

내 스스론 잘못한 게 하나 없는데, 자기네들끼리 기대하고 착각하다 또 제멋대로 실망하고 상처 주던 그 대혼돈의 시기를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하하. 표정이 영 불편하신 걸 보니 아무래도 이거 제가 실례를 범한 듯합니다. 굳이 말씀 안 하셔도 괜찮으니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내가 못내 머뭇거리자 권인하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참. 그럼 집행관하고는 어떤 사이이신지요?"

"집행관이요? 누구…."

"아, 그. 아까 함께 싸우시던 오윤아 집행관 말입니다."

"아…."

유나 님의 본명이 오윤아였구나.

그녀와 내가 무슨 사이냐고?

내 망상 속에선 신혼여행뿐만 아니라 1남 1녀에 손주까지 보긴 했다만….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헛. 정말입니까?"

"네. 오늘 첨 뵌 분이에요."

"하하하하-!"

권인하가 대뜸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엔 웃음꽃까지 만개했다.

잠시 후 그로부터 의미심장한 질문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렇다는 건, 영수 님은 오윤아 집행관과 같은 공무원은 아니란 말씀이신 거죠?"

"네."

"다른 기관이나 길드에 소속되어 계시지도 않고요?"

"네. 일단은요."

"그럼 됐습니다."

"뭐가요?"

"들어오시죠. 저희 '미라클' 길드에!"

가입을 권유할 때 권인하는 유독 미라클이란 단어에 힘을 주는 뉘앙스였다.

그만큼 자신의 길드에 자부심이 대단하단 방증이겠다만.

나는 이번에도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천성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성격인지라.'

최소한 미라클 길드가 어떤 곳인지 정도는 스스로 알아본 뒤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당장은 인터넷은커녕 휴대폰도 켜지질 않는 탓에 검색이 안 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생각 좀 해 보고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아! 무,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시죠."

권인하는 당황한 티가 역력해 보였다.

설마 나 같은 무명소졸에게 까일 줄은 미처 예상을 못 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쩌는 길드일지도?'

그러고 보니 조금 전의 광경이 새삼 떠올랐다.

불구경만큼이나 끊기 힘들다는 싸움 구경을 손짓 몇 번만으로 와해시켰던 모습.

그만큼 권인하란 인물의 위상이 대단하단 소리겠지.

팔랑팔랑~

아니, 이놈의 귀때기 자식이 또….

상대는 아무것도 하질 않았는데 결국 내 스스로 설득을 당해서는 마음이 혹하기 시작했다.

그냥 지금이라도, 얼굴에 철판 깔고 가입한다고 해 버릴까?

무려 길드장이 먼저 권유한 가입인데, 설마 나중에 가서 쪼렙이라고 쫓아내기야 하겠어?

다행히 이 내적 갈등은 얼마 못 가 뜻밖의 외부 요인으로 인해 사그라들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잠시 볼 일이 있다며 사라졌던 유나 님이 되돌아온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스스슥- 하고 형체를 드러낸 그녀는 냉기를 풀풀 풍기며 권인하에게 따지듯 말하기 시작했다.

"무슨 용무로 제 파티원을 붙들고 계신지 물었습니다."

"붙들고 있다뇨? 우린 그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을 뿐입니다."

"어떠한 강압도 없었단 말씀이신 거죠?"

"그렇다니까."

"그럼 저흰 이만 가볼게요."

"뭣…."

유나 님은 단지 말에 그치지 않고 내 소매를 잡아끌기까지 했다.

하지만 권인하도 가만두고 보지만은 않았으니.

대뜸 우리의 사이를 가로막더니 그가 말했다.

"영수 님께 듣자 하니 두 분, 서로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고 합디다만?"

"그게 뭐가 중요하죠?"

* * *

구영수가 무소속이란 사실은 이미 본인을 통해 확인을 끝마친 사실이다.

그러니 한 길드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전도유망한 인재에게 영입 제안을 건네는 건 당연한 일.

그 어떠한 부분에도 위법한 사실이 없는데 대체 뭐가 문제느냐.

권인하는 이렇게 나름대로 논리정연한 주장을 펼치며 가급적 대화로 상황을 풀어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당최 말귀가 통하질 않는 오윤아라는 사실이었다.

"스카웃은 저희가 먼저 했는걸요?"

"아직 공식적으로 계약을 맺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국가에서 먼저 침 바른 걸 스틸 하겠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침을 바르다뇨? 스틸이라뇨? 영수 님이 무슨 미궁에 출몰하는 몬스텁니까?"

"아무튼 이 시간부로 영수 님에 대한 접근은 집행관의 권한으로 불허하겠습니다."

"...."

권인하는 내심 당혹스러웠다.

상대의 반발이 예상치를 훌쩍 넘어설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었다.

오윤아가 자신의 직함까지 걸며 으름장을 놓는데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실 여느 때 같았다면 이 정도로 갈등이 치닫기도 전에 눈치껏 양보하거나 자리를 피했겠지만….

"...."

하필이면 장소가 좋질 못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미라클 길드의 위상을 감안해서라도 권인하는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정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대신, 채찍 보상 건은 당사자인 김경민 사이킥과 직접 다시 협상하셔야 할 겁니다."

"아니. 이미 끝난 이야기는 왜…."

"누가 끝났답니까? 보상안에 대한 중론만 모아졌다뿐, 저는 아직 그에 대한 재가를 내린 기억이 없습니다만."

"...."

10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닌지라.

오윤아는 이제 아까처럼 마냥 억지를 부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한발 물러서자니 관리청의 공무원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거대 민간 길드의 자본력은 엄연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관리청은 엄연한 국가 기관이었다.

싸이킥에 관한 예산 집행과 처우에 명백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단 이야기였다.

히든 클래스고 나발이고.

제아무리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 중요성을 역설해봤자, 철밥통 높으신 양반들은 귓등으로 흘려듣고 말 것이다.

자신부터가 공무원이었기에, 그러한 조직의 생리를 너무나도 잘 아는 오윤아였다.

'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

궁지에 몰린 나머지 초조함이 극에 달하던 그때.

불현듯 머릿속에 시의적절한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원래 구영수는 미궁을 빠져나갈 참이었다.

자신은 그런 그를 에스코트해 줄 예정이었고.

그러니 정해진 계획대로만 하면 그만이었다.

단지 구영수를 내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동반으로 출궁을 하려는 속셈이었다.

제아무리 구영수가 탐난다 한들, 권인하가 미치지 않은 이상 미궁 바깥까지 따라 나오진 않을 테니까.

'명분이 나한테 있는데 왜 여태 쓸데없는 고민을 했담?'

얼추 생각이 정리된 오윤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권인하를 향해 말했다.

"사실 구영수 님은 모종의 이유로 지금 출궁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이 소모적인 논쟁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상황이고요. 그러니 일단 영수 님이 원하시는 대로 출궁부터 시켜 드리고 나서 마저 말씀을 나누시는 게 어떨까요?"

"지금 나가신다고요? 이제 들어온 지 반나절도 안 됐는데?"

"네. 뭐, 사정이 있으시다네요. 그렇죠, 영수… 님? 어라?"

오윤아가 당황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얼마 전까지 곁에 서 있던, 심지어는 자신이 옷소매를 붙들고 있기까지 했던 구영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호, 혹시 여기 영수님 어디로 가셨는지 보셨어요?"

"아, 아뇨. 저도 눈치 못 챘습니다."

놀라기는 권인하라고 다르지가 않았다.

명색이 대한민국 탑 랭커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 두 명이, 눈앞에서 사람 하나 사라진 걸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뭐에 홀린 듯 반쯤 넋 나간 표정으로 주변 일대를 빠짐없이 살피고 다녔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구영수의 존재는 끝내 발견하질 못했다.

* * *

두 사람의 말싸움을 보다 지쳐 대놓고 딴짓을 하던 중이었다.

'…응?'

무지성으로 습득 가능한 스킬 목록을 훑어보는데, 문득 스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스킬 : 암행暗行]

- 존재감을 지웁니다.

- 어떠한 감각에도 포착되지 않습니다.

- 암행 중에는 다른 스킬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 유효 대상 레벨 : +50

- 지속 시간 : 90초

- 재시전 시간 : 30초

- 소모 마력 : 초당 2

.

.

.

'암행'은 서큐버스 아리아의 스킬이었다.

어쩐지 올 때 갈 때 귀신마냥 기척 하나 없더니만, 이 스킬 덕분이 아닐까 싶었다.

'이건 마력 소모가 있네?'

명사수 스킬 같은 경우 딱히 소모값이 없었다.

한데 암행은 초당 2마력씩 빠진단다.

지금 내 최대 마력으론 90초가 아니라 50초밖에 유지할 수 없단 소리겠다.

'근데 그럼, 소모한 마력은 뭘로 다시 채우지?'

궁금한 게 생겼지만, 물어볼 만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열차게 자존심 대결을 펼치는 중이라 껴들 틈이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일단 저지르고 본 거다.

암행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자 곧 스킬명이 밝은 빛으로 활성화되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 : 암행暗行을 빌려옵니다.]

[스킬 : 명사수名射手가 비활성화됩니다.]

[스킬 : 명사수名射手의 차용이 다음 표기 시간까지 제한됩니다. 24시간/24시간]

스킬을 바꾸자마자 기존 스킬에 24시간이라는 딜레이가 적용되었다.

몰랐던 사실인데 앞으로 선택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듯하다.

아무튼 암행을 발동시켰다고 해서 딱히 시각 등 오감에 그 어떤 유의미한 변화가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막말로 상태창에서 마력이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음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스킬이 발동 중이라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밋밋한 소감 대비, 곧 체감하게 된 효과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와.'

시험 삼아 여태 붙들려 있던 소매를 다소 거칠게 뿌리쳤음에도, 유나 님은 전혀 반응하질 않았으니까.

17화.

여담이지만 크라노스가 똥 대신 마돌을 싸지른단 사실이 밝혀진 이후로.

이유도 모르게 정신을 차려보면 내 입엔 종종 마돌이 물려있곤 했었다.

그때마다 스트레스에 의한 정신착란 증세인가 싶어, 누구에게 하소연은 못 하고 혼자 그렇게 속앓이를 했었건만.

'이제 보니 내가 미친놈이 아니라 미친년이 따로 있었네.'

돌아가기만 해.

죽었어. 박쥐 같은 년….

암행의 효과는 그 정도로 기대 이상이었다.

소매를 뿌리쳤을 뿐만 아니라, 오윤아와 권인하 그들로부터 거리를 벌려도 누구 하나 신경조차 쓰질 않더라.

남은 시간 40초.

마력이 줄어든다고 해서 딱히 내 몸에 뭔가 축나는 느낌이 드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저 숫자가 0으로 떨어지기 전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나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전철역 쪽이었다.

방향을 그리 잡은 건, 그쪽에 누가 봐도 출입구스러운 모양의 대형 문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돌아다니다 우연히 출구 근처까지 온 덕분도 있겠다만, 백번을 양보해도 처음 있던 곳으로부터 배웅이 필요할 만큼 먼 거리는 아닌 듯했다.

막말로 손 한번 뻗어 방향만 가리키면 될 걸 대체 왜 굳이 기다려 달라고 한 건지, 참….

남은 시간 18초.

드디어 문 앞에 다다랐는데, 불현듯 뭔가 눈에 거슬렸다.

[당기시오]

"...."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운 느낌의 문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싼마이 굴림체 스티커가 문손잡이 옆에 붙어 있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우리 가게에서 파는 제품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아리아의 쇼핑 리스트 중에 저 스티커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도 같다.

평소 먹거리 외에도 인간 세상의 물건이 신기하다며 이것저것 잡동사니를 사 가던 그녀였다.

그런가 보다 하고 신경 끄고 말았었는데, 이런 데서 스티커 놀이를 하고 다닐 줄은 몰랐네.

어쨌든 지시어와 상관없이 나는 한국인답게 곧바로 문을 밀어젖혔다.

그러자 약간의 어지러움과 함께 눈앞의 풍경이 확 변했다.

"...!"

미궁에 들어가기 직전의 바깥 풍경 그대로였다.

차이가 있다면 주변에 못 보던 사람들이 북적인단 점이랄까.

군인인지 경찰인지 모를, TV에서나 보던 특공대 차림의 사람들이 얼추 30명은 되어 보였다.

'유나 님이 말하던 그쪽 사람들이겠지?'

그들은 총부리를 겨눈 채 입구, 그러니까 내 쪽을 주시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럼에도 정작 나에 대해선 누구 하나 주의를 기울이질 않는 눈치였다.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암행 스킬이 여전히 발동 중이더라.

'원래 미궁이든 탑이든, 어쨌든 던전에서 나오면 능력을 못 쓰는 거 아니었나?'

야간 근무 때 심심풀이로 읽던 웹소설이나 웹툰을 보면 보통 그런 식의 설정으로 페널티를 주던데 말이지.

어쨌거나 내겐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마력이 바닥나기까지 남은 시간 약 8초.

나는 부리나케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킬이 풀리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미궁의 담벼락과 지하철 입구 그 사이로 숨는 데 성공했다.

나름 나를 배려한답시고 쪽지까지 써 준 유나 님껜 다소 미안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인정에 끌려 내 인생을 담보 잡힐 순 없는 노릇이었다.

'유나 님을 못 믿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 속한 조직을 믿지 못하는 거지.'

아까 얼핏 들으니 그녀는 국가 기관 소속인 듯했다.

상명하복이 절대적인 공무원 신분이란 거다.

막말로 윗선에서 유나 님의 의사를 뭉개버린다 한들, 그녀로선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저들에게 쪽지를 보여주면 나를 순순히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딱히 신뢰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래서 결국 숨기를 택한 거고.

물론 국가 기관을 상대로 무한정 도망 다닐 수 없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일단은 내 스스로 이 급변한 세상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내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부터 알아볼 참이었다.

그렇게 정보 비대칭이 해소된 다음에야 비로소 내 발로 저들을 찾아갈 것이다.

"...."

나는 그들의 주의가 느슨해지기만을 기다렸다.

틈을 봐서 반대쪽 골목으로 뛸 계획이었다.

한데 갑자기 등 뒤에서 의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졸졸졸-.

"...?"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만, 누군가 미궁의 담벼락에 노상방뇨를 하고 있었다.

달빛에 번들거리는 민머리가 유독 돋보이는 남자였다.

아까 유나 님과 함께 있던 그 중년 남자가 틀림없다.

"어우, 시원하다."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떤 남자는 이내 바지춤을 올리며 몸을 돌렸다.

마음 같아선 진즉에 숨고 싶었지만 그럴 공간이 없었다.

한두 걸음만 뒤로 물러서도 바로 포위대에게 발각되고 말 테니까.

결국 그와 나는 서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움찔 놀라는 반응이 역시나 날 잡으러 온 건 아닌 듯했다.

그저 볼일을 해결하려다 우연이 겹친 것뿐.

나는 그가 뭐라 입을 떼기 전에 선수를 쳤다.

"거 공무원이 아무 데나 쉬 싸고 그래도 되는 겁니까?"

"...?"

"국민신문고에 민원 넣을 겁니다."

"...!"

티 나게 당혹하는 걸 보니 협박이 통한 듯하다.

"그러니 날 이대로 보내 줘요."

* * *

32명의 팀원들을 데리고 지원을 나와 있던 최무식 팀장은 갑작스런 통보에 적이 당황하고 말았다.

소피를 보고 돌아온 윤태호 국장이 대뜸 이상한 소릴 내뱉은 탓이었다.

"다들 철수해."

"…예?"

"못 들었어? 이만 돌아가자고."

"하지만 국장님. 로머가 아직 안 나왔…."

"최 팀장."

"예, 옛!"

"명령이야. 내가 꼭 그 이유까지 설명해야 해?"

"아, 아닙니다. 다들 철수한다!"

최무식 팀장을 위시한 대응팀이 일사불란하게 현장을 정리한 뒤 차에 올라탔다.

윤태호 국장은 그 이전에 끌고 왔던 차에 올라타 앞서 자리를 떠났다.

운전대를 잡은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갑급 요청이라니, 이 무슨….'

헛소리나 일삼던 로머가 대뜸 건넨 쪽지 한 장이 있었다.

오윤아가 준 쪽지라기에 그조차 망언인 줄 알았더니만 웬걸?

쪽지엔 정말 관리청 특수 관료들만이 해독할 수 있는 암호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것도 작성자가 사안의 결과에 대해 무조건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의 갑급 암호로 말이다.

<최대한 로머의 편의를 봐줄 것>

그밖에 다른 부가 설명은 없었다.

'이 자식, 일부러 날 궁금해 미치게 하려고 이러는 게 틀림없어.'

평소 부하의 모난 성품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리란 게 윤태호 국장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짓궂은 의도를 떠나, 능력 하나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요원이었기에 윤태호 국장은 별 군소리 없이 오윤아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구영수라는 자가 원하는 대로 그를 순순히 놔 준 것이다.

결코 민원 따위가 무서워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아무튼, 이 자식. 나오기만 해 봐라. 납득할 만한 경위가 아니라면 이번엔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가!'

* * *

마물이 날뛰는 세상이 도래했어도 국민신문고는 건재한 듯했다.

이런 시스템이 없는 외국 대부분의 나라에선 공무원의 갑질과 횡포가 장난 아니라던데.

'역시 우리나라, 좋은 나라.'

물론 자신을 윤태호 국장이라 소개한 그 남자는, 자신이 날 그냥 보내주는 이유가 오로지 그 쪽지 덕분임을 수차례 강조하긴 했었다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민원 드립 없이 일이 이렇게 수월히 풀릴 수 있었을까?

아님 말고.

어쨌든 그 자리에서 순순히 풀려나는 대가로 연락처와 주소 등의 인적 사항 정도는 제공해야 했다.

뭐, 어지간하면 그쪽에서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지켜봐야지.

골목 몇 개를 지나니 대로변이 나타났다.

때마침 빈 택시 한 대가 보이길래 냉큼 잡아탔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기사님."

"어디로 모실까요?"

"창동역 1번 출구 가주세요."

"창동역이요-."

택시 기사님은 차를 출발시키기가 무섭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늦게까지 일하고 이제 퇴근하나 봐요?"

몇 번 겪어보면 알겠지만, 택시 기사님들 중엔 은근히 수다스러운 분들이 많다.

잘못 걸리는 날엔 내리는 그 순간까지 쉬지도 못하고 기사님의, 덕담을 빙자한, 인생 참견과 훈수를 들어주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분들껜 죄송한 이야기겠지만, 보통은 차에 오르자마자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곤 해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내내 괴물 소굴에서 진짜 괴물과 괴물 못지않은 인간들 틈에 섞여 있었다 보니, 평범한 사람인 기사님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

그래서 나는 기꺼이 그분의 말벗이 되어드렸다.

하하호호 웃으며 같이 수다를 떨었지.

그랬더니 내가 퍽 마음에 드셨는지, 내릴 때쯤엔 어느새 의형제임을 주장하셨다.

물론 외견상으론 아버님이나 어르신으로 불러드리는 게 맞겠지만, 본인께서 부득불 의형제를 고집하시는데 어쩌겠어, 따라야지.

'물론 진짜 형님이라고 부를 생각은 없지만.'

"좋은 동생 생긴 기념으로 오늘 택시비는 안 받을게."

"아이고, 형님! 감사합니다."

금융 치료 앞에 장사 없다.

황송함에 내리자마자 폴더인사를 올리는 나에게 형님은 명함 한 장을 남기고는 쿨하게 떠나셨다.

언제든 콜택시가 필요하면 부르라면서 말이다.

참고로 형님의 성함은 김창수.

누가 택시 기사 아니랄까 봐 창수 형님은 세상 물정에 몹시 밝았다.

덕분에 나는 그 분과의 대화에서 적지 않은 알짜배기 정보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역 근처 PC방에 들러 두어 시간 정도 검색한 내용까지 취합하니, 비로소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세계 각국에 출현한 미궁.

그곳을 자유로이 출입하며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각성자들.

각성자, 싸이킥은 상태창을 볼 수 있는 자들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당연히 그 범주에 나 또한 포함된다는 소리겠다.

너튜브엔 최초 각성 때 눈물겨워 하거나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영상들이 상당수 업로드되어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솔직히 1도 기쁘지가 않았다.

[이름 : 구영수]

[레벨 : 15]

[직업 : 편의점 직원]

.

.

.

"시발, 왜 나만 편돌이인 건데?"

너튜브엔 다양한 직업군의 싸이킥들이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영상을 굉장히 많이 찾아볼 수가 있었다.

다만 미궁 내부가 아니라, 바깥에선 그 위력의 1/10정도 밖에 발휘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보는 이의 입이 떡 벌어지리만치 화려함은 충분했다.

'그에 비해서 나는?'

편돌이인 내겐 이렇다 할 자랑할만한 게 떠오르질 않았다.

막말로 직업 정신을 발휘해 편의점 매대 상품 오와 열을 각 잡고 맞춰놓는다 한들 누가 그걸 알아주거나 부러워하겠느냔 말이다.

그딴 영상 올려 봤자 조회수 100도 안 나올 게 뻔하지.

'물론 내게도 고객 모방이란 스킬이 있긴 하다만.'

그 이름에서도 드러나 있듯 그건 엄밀히 말해 진짜 내 것이라 할 수 없는, 빌려 쓰기에 지나지 않는 요령일 뿐이었다.

막말로 고객 모방으로 조회수 달달하게 뽑아 봤자, 언젠간 분명 표절 시비에 휘말릴 게 뻔할… 리가 없겠구나?

"지들이 미궁에서 어떻게 나올 거야?"

고객 모방 스킬 목록들의 원주인은 죄다 미궁에서만 존재했다.

그러니 내가 그걸 베껴 올리든 뭔 지랄을 하든 태클을 걸 수가 없다는 거다.

갑자기 뻘 소리긴 하다만, 80년대 문화개방 이전 양심 없는 국내 음반 제작자들 일부가 일본 음악을 그렇게 표절해다가 떼돈을 벌었다던 비화가 문득 떠올랐다.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도 원작자에겐 저작권료 한 푼을 안 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정도로 몰염치한 인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들어갈 때 최소한 손님들에게 줄 선물 정도는 사서 가야지."

…그런데 잠깐.

나 왜, 자꾸 그 마굴에 돌아갈 생각을 하는 거지?

설마 그깟 사신의 협박 때문에?

바깥에 나오지도 못하면서 제깟 게 어쩔 건데?

"응?"

불현듯 시야 우측 상단에 전에는 없던 타이머 하나가 떠 있는 게 보였다.

[06:20:38:41]

[06:20:38:40]

[06:20:38:39]

.

.

.

18화.

<퀘스트 : 재고 사입>

[탑 외부에서 발주된 물품을 구매하고 돌아와 편의점에 채워 넣으십시오.]

[보상 : 스킬 북(종류 미상)]

[보상 : 레드 크리스탈 100개]

[보상 : 호칭(이세계의 보부상)]

[제한 시간 : 06:20:36:32]

미궁을 떠나기 전 발동된 퀘스트엔 제한 시간이 있었다.

대충 흘러간 시간을 계산해 보니 7일짜리 미션인 듯했다.

그밖에 퀘스트 실패에 따른 페널티나 불이익은 딱히 안내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자연스레 허공에 대고 낫을 그어대던 보급관의 퍼포먼스가 재생되고 있었다.

'설마 탈주 편돌이 한 놈 추노하려고 낫쟁이가 친히 미궁 밖으로 납시기야 하겠어?'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다양한 키워드를 검색 엔진에 넣어 보았다.

[몬스터 미궁 밖 난동]

[몬스터가 싸이킥 추노]

.

.

.

다행히 과거로부터 유사 사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일단은 한시름을 덜었다.

완전히 찜찜한 기분이 해소된 건 아니지만, 나머지 고민은 미래의 나에게 미루고 일단 좀 쉬고 싶었다.

새벽 4시.

편의점 야간 근무를 설 적에도 가장 졸음이 쏟아지던 타이밍이 바로 이맘때였으니.

PC방을 빠져나온 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역사 인근에 자리한 20층짜리 청년보금자리어쩌구임대주택.

그중 1204호실이 내가 살던 집이었다.

비록 2년간 집을 비웠다지만 큰 걱정 없었다.

애초에 10년 장기 임대라 그간에 별문제는 없었을 테니.

월세며 공과금도 죄다 자동이체 해두었으니, 알아서 빠져나갔겠지.

다만 기간이 기간이니만큼 먼지가 엄청 쌓이다 못해 찐득하게 눌어붙었을 가능성이 높다.

겨우 생환한 마당에 허무히 폐병으로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으니 최소한 청소기는 돌리고 자야 할 듯싶다.

"...?"

하지만 막상 도착한 집안의 전경은 내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비밀번호를 누른 뒤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케케묵은 먼지 냄새는커녕 가장 먼저 향긋한 섬유유연제 향기부터 코를 찌르더라.

이어서 전등을 켰더니만 더 충격적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

핑크색 커튼.

핑크색 소파.

핑크색 러그.

등등.

집 안이 온통 핑크색 천지였다.

심지어는 현관 앞에 놓인 추정 발 사이즈 235의 낯선 운동화마저 핑크색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차 호수를 확인했지만 여긴 내가 살던 집이 확실했다.

내가 쓰던 비밀번호로 문이 열린 것부터가 그 증거였고.

말인즉슨 누군가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내 집에서 무단 투숙 중이란 이야기겠지.

침실 문이 곱게 닫혀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저 안에서 팔자 좋게 자고 있겠지?

나는 직접 퇴거를 시도하는 대신 112에 전화를 걸어 경찰을 불렀다.

정황상 상대가 여자인 듯한데, 괜한 시비로 구설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넌 벌 좀 받자.'

그렇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채 5분도 지나질 않아 도착했다.

내심 역시 K-경찰 킹왕짱을 외치고 있는데, 그들은 대뜸 내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선생님을 무단주거침입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뭣…?"

그때 누군가 방문을 열고 모습을 보였다.

퍽 귀여운 용모의 단발머리 여자애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보다 앞서 그 녀석이 적반하장으로 먼저 신고를 했더라.

웬 미친놈이 문을 따고 집에 들어왔다고 말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 경찰은 그냥 돌아갔다.

물론 내게 채운 수갑도 풀어줬다.

이유는 지하 주차장까지 경찰들을 배웅하며 굽신거리는 저 녀석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겠다.

"정말 죄송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온 줄 알고 신고했어요. 죄송합니다. 바쁘신데, 정말 죄송합니다."

녀석의 말대로 우린 구면이었다.

심지어는 서로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최혜성.'

사실 나는 보육원 출신이다.

그리고 앞의 이 녀석도 마찬가지고.

나이는 열여덟 살로, 서너 달에 한 번씩 김치며 밑반찬을 가져다줬던 아이다.

오지랖 넓은 원장 수녀님의 심부름으로 말이다.

하지만 썩 친하다고 볼 사이는 아니었다.

보육원 시절부터 원체 자발적 아웃사이더였던 나와는 달리, 최혜성은 늘 모두에게 사랑받고 인기 많던 녀석이었으니까.

아무튼 최혜성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내게 사과를 건네왔다.

"저, 정말 미안."

"됐고.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이나 해 봐."

"그게…. 독립했는데, 갈 데가 없어서…."

"독립? 열여덟 살이 무슨 독립?"

"…오빠. 나, 스무 살인데."

앗, 아아.

그러고 보니 2주가 아니라 2년이 흘렀지.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법적으로 성년이 되면 무조건 보육원을 떠나야 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최혜성도 그렇게 새 출발을 하게 된 거겠다.

이 비정한 사회에서, 출발부터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채 말이다.

"보이스피싱을 당했어. 그래서 보증금으로 쓸 돈도 모두 날렸고…."

성년이 된 보육원생이 독립하게 되면 지자체에서 몇백만 원의 지원금이 나온다.

그걸 홀라당 린자오밍에게 송금하고는 빈털터리가 되었단다.

그나마 일시불 지원금 이외에 별도로 다달이 지급되는 30만 원이라도 있었기에 얼마간은 찜질방 등을 전전하며 버틸 수 있었다고.

'그러다 내 집이 떠오른 거군.'

불현듯 내 집이 떠올라서,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들렀다가 아예 눌러앉은 지가 반년이 넘어간다고 했다.

그렇게 그간의 사정을 다 털어놓은 최혜성은 돌연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을 덧붙였다.

"정말 미안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내가 무조건 잘못했어. 집안 손댄 건 지금 바로 원래대로 돌려놓을게. 짐도 바로 싸서 나갈게. 정말 미안해, 오빠."

"...."

최혜성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탓에 그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무릎 위로 가지런히 올려놓은 두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거 하며.

그 손등 위로 뚝뚝 떨어지는 닭똥같은 눈물방울을 보고 있노라면, 그 진심을 어느 정도는 헤아릴 수가 있었다.

솔직히 지금 이 태도가 가식이고 연기라면 오히려 나로서는 땡큐지.

미모도 출중하겠다, 당장 연예기획사 차려서 배우로 데뷔시켜서는 국내외 영화제 상이란 상은 다 휩쓸고 다니는… 뭐라는 거야, 정신 차려!

아무튼, 적어도 시덥잖은 변명 따위를 늘어놓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렸다.

거기다 같은 보육원 출신이라는 비슷한 처지 탓인지, 매몰차게 굴 마음도 들지 않았고.

'보육원 나왔을 때의 막막함은 내가 잘 알지.'

나는 잠시간 집 안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핑크 커튼이 애바이긴 해도, 그밖에 청결 상태라든가 전체적인 집 컨디션은 오히려 내가 최혜성에게 절을 해도 해야 할 정도로 깨끗하고 훌륭했다.

이 녀석이 아니었으면 덕지덕지 묵은 때 밀고 닦느라 땀 좀 빼도 뺐을 것을.

좋아. 합격!

생각을 정리한 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갈 곳은 있어?"

"…응."

응, 거짓말하지 마.

"됐고, 월 10만원."

"…어?"

"너도 봐서 알겠지만 내가 뭐 딱히 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방도 두 개니까 관리비 정도만 부담하고 남는 방은 너 쓰라고."

"오, 오빠."

깜짝 놀랐는지 녀석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어이구, 저 눈탱이 밤탱이 된 거 좀 봐라.

근데도 그 미모 어디 안 가는 거 보면 얘도 좀 사기캐인듯하다.

솔직히 이제는 화가 나기보단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막말로 이런 뜻밖의 피난처조차 없었더라면 그 험한 길바닥에서 여태 무사히 버틸 수 있었겠냔 거지.

아무튼 팔자에도 없는 동거로 이래저래 신경 쓸 게 생기는 바람에 시작되는 바람에 이거 당장은 편히 쉬지도 못하게 생겼다.

당장 방 배정부터 의견 충돌이 생겼으니 말이다.

"큰 방은 네가 계속 써."

"어? 아, 아냐. 내가 작은 방 쓸게. 그게 맞아."

"맞기는 뭐가 맞아? 나 원래 혼자 살 때도 작은 방에서 잤으니까 그런 줄 알아."

"그럼, 왜 침대는 큰 방에 있…."

"그나저나, 너 요리는 할 줄 아냐?"

"으, 응. 잘은 못 하지만…."

"라면 정도는 끓일 수 있지?"

"응.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럼 큰 방 쓰는 대신 앞으로 요리는 네가 담당하는 거로."

"…고마워. 실망 안 시키도록 열심히 해 볼게."

핑크핑크한 커튼이며 러그 등도 치우지 않기로 했다.

처음엔 좀 그랬는데, 보다 보니 나름 아기자기하니 나쁘지 않더라.

다만 조악한 품질만큼은 영 마음에 들질 않았다.

제깟 형편에 사치를 부려봤자 테모나 알라같은 중국 사이트에서 쇼핑을 한 탓이리라.

틈틈이 기회 봐서 같은 핑크색이되 좀 쓸만한 것들로 하나씩 갈든가 해야지.

시간은 어느덧 7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 당장 눈을 붙이기는 영 글렀다 싶어서, 우리는 내친김에 아침을 먹기로 했다.

최혜성이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나는 큰 방에 있던 내 짐들을 작은 방으로 옮겨다 놨다.

침구류나 침대 등도 쇼핑 앱에서 대충 골라 주문을 마쳤다.

"오빠. 다 됐어."

"어, 나간다."

최혜성의 부름에 밖으로 나간 나는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볼 법한 비주얼의 파스타가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해명해. 돈 없다며 이런 비싼 음식이라니!"

"에? 아, 아냐. 이거, 원가만 따지면 한 접시에 3천 원도 안 할 걸?"

"진짜?"

"응. 파스타가 알고 보면 원가가 얼마 안 하거든."

일단 그런가 보다 하고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맛있었다.

거짓말쟁이 녀석.

요리 못 한다며?

"…어때? 입에 좀 맞아?"

"먹을만 해."

"다행이다."

내 박한 시식평에도 진심으로 기뻐하며 뒤늦게 포크를 드는 녀석.

참고로 최혜성이 올해 성년이 됐다고 하니, 나와는 네 살 터울이겠다.

그 때문에 보육원에서 지낼 적엔 이 녀석과 개인적으로 엮일 기회 자체가 없었더랬다.

내가 두루두루 아이들에게 데면데면하게 굴던 탓도 있겠고.

이 아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이유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막말로 오가다 몇 번 봤을 뿐인 고향 후배를 식객으로 들인 기분이랄까.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어? 아냐."

"더 줄까?"

"더 있어?"

"응. 혹시 몰라 넉넉하게 만들었거든."

나는 기꺼이 파스타를 리필받았다.

어디 비싼 레스토랑을 가 본 건 아니지만, 솔직히 살면서 먹어 본 파스타, 아니 서양 면 요리를 통틀어 가장 맛있는 음식이 아닌가 한다.

"참. 그래서 일은 구했고?"

"응. 일단은 편의점 파트타임 나가는 중이야."

…하필?

편의점 일이 겉으론 쉬워 보여도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통과의례로 온갖 진상이란 진상은 다 겪어가며 경험치가 쌓이는 직업이란 소리다.

"일한 지 얼마나 됐는데?"

"음…. 이제 석 달쯤?"

"힘든 건 없고?"

"아직까진 할만해."

거짓말이다.

그때가 한창 멘붕 올 시기인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편돌이 선배로서 건네고픈, 당장 떠오르는 조언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간섭하면 꼰머스러울 거 같아 핵심만 간략히 말해주었다.

"그래도 명심해. 마냥 참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진상들 말이야. 네 선에서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거 같으면 굳이 직접 상대하지 말고 경찰을 부르든 사장을 부르든, 힘 있는 사람한테 도움을 요청하라고."

"응, 그럴게. 그럼 오빠는…?"

"나한텐 전화하지 말고."

실은 나도 나약한 편돌이란다.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오빠는 여태 어디서 뭐 하고 지낸 거냐고…. 물어봐도 돼?"

"안 돼."

"…응. 알았어. 안 물어볼게."

사실 딱히 말해줘도 상관은 없겠다만.

그럼에도 막상 입이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내 입으로 각성자라는 사실을 직접 밝히자니, 뭔가 자랑질을 하는 듯한 낯부끄러움 탓이었다.

언젠간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 일단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지이이잉~. 지이이잉~.

"오빠. 전화 오나 봐."

"내 폰이라고?"

"응. 내 건 아직 무음모드 안 풀었거든."

최혜성 말대로 나한테 온 전화가 맞았다.

소파에서 진동 중인 폰을 집어 드니, 화면에 뜬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었다.

[민 사장님]

19화.

이른 아침, 민호영은 모처럼 기분 좋게 눈을 떴다.

조카인 민시윤이 마침내 미궁에 들어간 덕분이었다.

이제 희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리면 될 터.

"고마 확 다 보물창고나 돼뿌면 좋겠네."

미궁 안의 건물 일체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어떠한 이유로든 부서지고 망가진다 한들, 초기화를 거친 후 재입장을 하게 되면 감쪽같이 멀쩡히 복구가 되어 있단다.

그래서 난민 대부분은 미궁 지대의 완전하고 영구한 해방을 바라마지않고 있었다만.

개중에 더러는 알게 모르게 현 상황이 지속되길 바라는 이들도 존재했으니.

그건 이익 공여제라는 관행 때문이었다.

이익 공여제란 문자 그대로 싸이킥들이 미궁 안에서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를 난민들에게 떼어주는 제도를 말한다.

본래 난민들이 소유한 부동산에서 취득한 이익이니만큼 그 일부분을 나누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

이는 사유 재산권을 중시하는 미국에서부터 최초로 시작되어 빠르게 전 세계로 퍼지게 된 관행이었다.

여기서 굳이 '관행'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현재까지 미국을 제외한 어떠한 국가에서도 그러한 제도가 법제화되진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도의적인 이유로 시행 중이긴 하되 법적 강제성은 없다는 소리였다.

대한민국 민간 싸이킥 길드 총회에서도 일찍이 조성한 기금으로 꾸준히 난민 단체를 지원해오고 있었다.

가구당 지원금은 대략 연간 4천5백만 원 선.

이는 대한민국 1인당 GDP에 육박하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러다 보니 비록 부동산은 미궁에 묶였을지언정, 경우에 따라선 오히려 예전보다 순수입이 증가된 난민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가 있었다.

물론 수억에서 수십억, 그 이상의 자산을 상실한 자들에겐 간에 기별도 가질 않는 액수겠지만.

하여 난민 중엔 좀 더 많은 이익 공여를 바라거나 주장하는 이들도 적질 않았으니.

가령 특정 지역에서 과소득이 발생할 경우, 해당 부동산의 소유주에게 그 이익의 상당을 배분하라는 골자였다.

얼핏 생떼에 가까운 논리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그러한 억지를 부리는 건 놀랍게도 비단 난민들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며칠 전 레드 크리스탈을 사우디 부호에게 2억 달러에 처분했다던 한호준.

그는 세금을 제하고도 추가로 1천만 달러를 서울시에 기부금 형태로 납부해야만 했다.

레드 크리스탈을 획득한 장소가 시립 어린이 박물관 건물이란 이유에서였다.

관공서가 그 지경인데, 집과 땅을 잃은 시민들이라고 더 하면 더 했지 가만히 있을 리가.

민호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매월 초마다 미궁에 다녀온 싸이킥을 매수해서, 그들의 공략 동선을 제공받아 왔다.

그리고 자신의 편의점 터에서 발생한 특정 이벤트로 누군가 이득을 취한 사실을 알게 될 경우, 해당 싸이킥에게 합의금을 제시하거나 때에 따라선 소송마저 불사하곤 했다.

여느 난민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실 여태껏 그 결과가 신통치는 않았다.

민사는 3심까지 갈 경우 최소 3년에서 재수 없으면 7, 8년까지 내다봐야 한다.

미궁이 출현한 지 꼴랑 2년밖에 되질 않았으니, 재판 대부분도 이제 겨우 1심이 진행중이란 소리겠다.

조카 민시영에 대한 기대가 큰 것도 실상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알려지기로, 미궁 안에선 매회 차마다 무작위 장소에 새로운 던전이 생성된다고 한다.

그리고 던전 공략에 성공하게 되면, 필드에서보다 훨씬 값진 보상이 뒤따른다고 했다.

편의점 자리에서도 여태 총 3번의 던전이 생성되었더랬다.

여태까진 그 사실을 돈 주고 산 정보로만 접했던 민호영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혈육이 싸이킥인데 뭐 하러 비용을 치르면서까지 사람을 쓰랴.

"우리 시영이 금마가 짬은 안 되라도, 삼촌 가게에 든젼이 생겨뿌면 거 안에서 목소리에 힘이 드실리지 않겠나?"

엄밀히 따졌을 때 그런 민호영의 논리는 궤변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막말로 그는 해당 부지 건물에 편의점을 낸 세입자일 뿐이지, 정작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건물주는 따로 존재했으니까.

물론 민호영은 그딴 논리적 허점 따위엔 하등 관심조차 없었다.

자고로 먼저 침 바른 놈이 임자라고 했던가.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건물주가 어떤 태도를 보이든, 그건 또 그때가서 생각하고 대처하면 그만일 뿐.

"흥~. 흥흥~"

민호영은 콧노래를 흥얼대며 냉장고에서 꺼낸 반찬 몇 가지로 식탁 위에 간단한 아침을 차렸다.

모처럼 난민촌을 나와 요 며칠, 형네 집에 머물고 있는 그였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보름이고 한 달이고 더 이곳에서 지내도 무방했다.

난민촌에서 연중 3/4 기간인 273일만 지내면 난민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형과 형수가 영 껄끄러워하는 눈치라, 오늘까지만 머물고 다시 난민촌에 복귀할 생각이었다.

물론 형편없는 형수의 요리 솜씨도 그 생각에 한몫을 거들긴 했다만.

"시영이 금마가 삐~쩍 곯은 게 다 이유가 있구마. 이 봐. 이 풀떼기 밍밍~ 한 기 봐."

민호영이 나물 반찬들을 지분거리며 투덜거리던 참이었다.

삑, 삑, 삑, 삑!

"...?"

갑자기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뭐고? 누꼬? 이 시간에 집에 들어올 사람이 없는데?'

형과 형수 부부는 출근한 지 한 시간도 넘었다.

지금 되돌아온다는 건 말이 되질 않는다.

한데 곧 정체가 밝혀진 방문자는 더 말도 안 되는 인물이었다.

"뭐, 뭐꼬!"

"앗시발깜짝이야!"

난데없는 조카의 등장에 민호영은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민시윤도 절로 욕설을 내뱉으리만치 놀라기란 마찬가지였으니.

"아, 뭐야? 삼촌이 여기 왜 있는데?"

"니, 니야말로 왜 여가 있는데? 니 미궁에 안 드갔나?"

"들어갔어. 갔었는데…."

갑자기 말끝을 흐리는 민시영이었다.

그러더니 영문을 모르게 돌연 울음까지 터트리는 게 아닌가.

"으아아앙."

"가시나야. 처 울지만 말고 얘길 해라. 얘길!"

정작 울고 싶은 건 민호영 자신이었다.

그는 조카를 어르고 달랜 끝에 가까스로 사연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여, 영수! 실종된 구영수 금마가 나타나따고?"

"그렇다니까? 그것도 싸이킥이 되어서는, 그 새끼 때문에 내가 미궁에서 쫓겨난 거라고!"

"하…."

민호영은 충격에서 좀처럼 헤어나질 못했다.

그에게 구영수는 어쩌다 한 번씩 떠오르곤 하던 흐릿한 옛 알바생 따위일 뿐이었다.

얼핏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만, 별 관심은 없었다.

막말로 마지막 통화 때 먼저 그만두겠다고 한 놈이었으니, 명확히 따지자면 이제 고용 관계조차 아니었다.

한데 그런 하찮은 편돌이 따위가 싸이킥이 되어 금의환향했다니.

'시바. 뭔 놈의 세상이 이래 불공평하노?'

그러나 불평 불만은 잠시 잠깐뿐.

민호영은 차라리 이 당혹스런 상황을 기회로 삼으리라 다짐했다.

'가만. 영수 그노마가 맹탕만키로 다루기 쉬운 성격이었지, 아마? 이거 잘하면 좌봉황 우청룡으로 맹글어서는, 전화위복으로 삼을 수도 있겠는데?'

좌청룡 민시윤

우백호 구영수

상상의 나래에서 그 두 명을 제멋대로 자신의 왼팔 오른팔로 삼는 그림을 그려 보는 민호영이었다.

마치 옛 편의점을 운영할 당시 알바생으로 부리듯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민호영은 얼른 방으로 들어가 충전 중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연락처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 구영수의 전화번호가 남아있었다.

민호영은 망설임 없이 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뒤따라 들어온 민시영이 방 안 꼬락서니를 훑어보고는 설마 내 방에서 잔 거냐며 지랄지랄을 해댔지만, 민호영은 전혀 개의치 않고 휴대폰 신호음에만 집중했다.

'받아라, 받아라~. 받아라, 마!'

* * *

식사 후 곧장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기분이었는데 시계를 확인해 보니 10시였다.

8시쯤 누웠으니 두 시간가량 잔 거다.

"오빠. 엄청 피곤했나 봐. 하루 온종일 한번을 안 깨더라?"

"어? 음…."

알고 보니 두 시간이 아니라 열두 시간이었다.

화장실을 가려 방을 나서는데 마침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최혜성이 진실을 알려주더라.

일단 정신만 차리게 대충 씻고는 핑크핑크한 소파를 등받이 삼아 앉고서 최혜성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다.

"넌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한국인이 되어서 어떻게 소파에 눕는 게 아니라 앉아 있을 수가 있니?"

"…뭐래."

"보는 내 눈이 불편하니까 일단 거기서 내려오렴."

최혜성은 군말 없이 내 의견을 따랐다.

거실의 러그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 모습을 보니 비로소 마음에 평안이 깃든다.

"편의점 알바한다며? 출근 안 했어?"

"응. 연락해서 사정 말씀드리고 오늘 하루 뺐어."

"왜? 무슨 사정?"

"집안정리며 대청소했지. 겸사겸사 오빠 식사도 좀 차려주려고 했는데, 그렇게까지 푹 잘 줄은 몰랐지."

"지금이라도 먹방 가능해."

"막 일어나서 입맛 없지 않아?"

"전혀."

사실 허기가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잠들기 직전 맛을 본 파스타가 떠올라 버렸다.

그 정도의 맛과 퀄리티라면, 배고픔은 더 이상 섭식의 기준이 아니게 된다.

한 마디로 맛있으면 장땡이란 거지.

최혜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주방 쪽으로 인도했다.

아일랜드 식탁 위 식탁보를 걷어내니 4첩 반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래도 초저녁쯤엔 일어날 줄 알고 차렸던 거란다.

메인 반찬은 놀랍게도 제육볶음이었다.

진즉에 식어버린 상태임에도 그 윤기 흐르는 붉은 빛깔이 그렇게 먹음직스럽게 보일 수가 없었다.

"데워 줄게."

"아냐. 괜찮아."

"그래도…."

사서 고생하려는 최혜성을 한사코 말리며 나는 곧장 식사를 시작했다.

해동이 필요없다 말한 건 새로 퍼 담은 따뜻한 밥 때문이었다.

크게 한술 뜬 밥 위로 고기 한 점을 올리니, 다소 굳은 듯 보였던 육질이 온기를 나눠 받아 금세 야들야들해지는 게 보였다.

그에 배어있던 양념이 녹진하게 흘러내려 밥알 사이사이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이는 광경을 잠시 두고 지켜보니, 입에 넣기도 전에 침샘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왜 그러고 가만히 있어?"

"잠시 눈 호강 중."

"...?"

"잘 먹을게."

"간이 맞으려나 모르겠네."

모르긴 뭘 몰라.

이토록 완벽한 제육 양념인 것을.

최혜성 이 자식.

그렇게 안 봤는데 순 가식덩어리네.

"처, 천천히 먹어."

"...."

"물도 좀 마시고."

"...."

"오빠. 며칠 굶었어?"

"...."

나는 본래 대식가와는 거리가 먼 부류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생애 최초로 한 끼에 밥 두 공기를 비우는 기염을 토해내고 있었다.

솔직히 최혜성과 좀 더 친근한 사이였더라면, 굳이 눈치 안 보고 밥 한 공기를 더 추가했을는지도 모르겠다.

배가 찢어질 듯 빵빵한데도 식욕이 계속 돌았다.

막말로 최혜성이 지금 당장 기사 식당을 낸다고 한다면, 이 정도 손맛이라면 장담컨대 1년 안에 전국 모든 기사 식당을 다 제치고 1티어 제육 맛집으로 자리매김할 거다.

결코 편의점 따위에서 편순이로 썩고 있을 인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식사가 끝나 갈 무렵, 나는 최혜성의 인생 계획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혜성아."

"응."

"넌 꿈이 뭐니?"

"…갑자기?"

"아무튼, 말해 봐."

아까 겜방에서 검색해 보니, 일단 싸이킥만 된다면 아무리 쭈구리 찐따라도 한 해 50~60억의 수입은 보장된단다.

비록 내 각성 직업이 편돌이인 게 마음에 걸리긴 한다만, 이런 나조차 앞으로의 기대 수익이 최소한 그 정도는 된다는 소리겠다.

따라서 나는, 최혜성이 바라기만 한다면 이 자식의 식당 창업에 적극 투자할 의향이 넘쳐났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정도 요리 실력이라면 단시일 내에 투자금 회수는 물론이요, 어쩌면 싸이킥뿐만이 아니라 요식업만으로도 평생 놀고 먹을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질문을 가장한 떡밥을 날린 거였다.

내 꿈은 요라사야, 라고 대답한다면 이어질 대사며 대화의 흐름까지 그 짧은 시간에 전부 다 생각해두었더랬다.

하지만 정작 최혜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내 예상을 철저하게 빗나갔다.

"내 꿈은…."

'그래. 네 꿈은 요리사~.'

"…싸이킥이 되는 거야."

"…엉?"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