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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20-30

20화.

"왜 싸이킥이 되고 싶은 건데?"

"그냥…. 멋있잖아. 돈 잘 버는 게 부럽기도 하고."

아아.

사실 내가 생각해도 우문에 현답이었다.

대 미궁 시대에 그 누구라고 각성자로 거듭나는 꿈을 꿔 보지 않았으랴.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도 백이면 백 다 이와 비슷한 대답을 늘어놓을 거다.

'그렇다곤 해도.'

그 당연한 답변을 내뱉은 사람치고 최혜성의 표정만큼은 좋지 않았다.

"...."

초점 잃은 눈빛으로 맨 허공을 그윽히 응시하는 게,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굳이 더 캐물으려 들진 않았다.

언젠가 자연스레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

* * *

"이게 뭐야?"

충전기에 물려 둔 휴대폰을 손에 쥔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재중 전화 : 245통]

그 모두가 민 사장님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

아까 처음에 걸려 왔을 때는 너무 피곤한 탓에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연결이 안 되면 알아서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지 싶었지.

"무슨 스토커도 아니고…."

사실 편돌이 시절에 그에게 딱히 악감정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흔한 알바와 사장 관계였으니.'

하지만 미궁에 갇혔다가 겨우 돌아온 지금에 이르러선 민 사장에 대한 인식 또한 사뭇 달라져 있었다.

솔직히 민시윤의 불량한 근태 이유엔 그 삼촌인 민 사장님의 지분도 상당했었으니까.

그가 사장으로서 중심만 확실히 잡아줬어도, 민시윤이 그처럼 밥 먹듯 대놓고 지각을 일삼진 못했을 거란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 지극정성이면 마냥 무시할 수가 없는 게 인지상정인지라.

고민 끝에 나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이 되지 않아….

하지만 이번엔 그쪽에서 전화를 받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밤이 꽤 깊기도 했다.

뭐, 궁하면 알아서 또 전화하겠지.

나는 스마트 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어제 못다한 정보 수집을 재개했다.

가장 먼저 살펴본 건 미라클 길드에 관해서였다.

"와우-."

검색으로 알게 된 미라클 길드의 위상은 솔직히 기대 그 이상이었다.

대한민국 최대 최고의 길드임은 물론이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대단한 명망을 자랑하는 단체였다.

그런 길드를 이끄는 수장이 다이렉트로 내게 스카웃을 제안했다니.

뒤늦은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오빠. 등 가려워?"

"아니? 왜?"

"하도 소파에다 비비적거리니까. 긁어 줄까?"

"아냐. 그런 거 아니니까, 얼른 들어가서 자."

"…응. 그래도 정 가려우면 얘기해?"

"그런 거 아니라니까."

졸린 눈의 최혜성을 방으로 들여보내 놓고서 정보 수집을 계속해나갔다.

그러던 중, 어떤 기사 제목의 자극적인 워딩에 눈길이 사로잡혔다.

<미궁 출현 2주년 기획 기사 시리즈>

1. 최고 12%에 불과한 싸이킥 특별 세율. 이대로 괜찮나?

「마침내 대한민국에도 연 소득 3억 불 클럽에 가입한 싸이킥이 나타났다. 화제의 주인공은 얼마 전 미궁에서 획득한 아이템을 처분하고 일시불로 2억 5천만 달러, 우리 돈 약 3,334억이라는 거액을 취득한 싸이킥 한호준.

한데 정작 그가 국가에 납부한 세금은 400억 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대다수 국민들을 허탈케 만들고 있다.

.

.

.」

'와- 개쩔어.'

대체 얼마나 대단한 아이템이길래 2억 5천만 달러나 한다는 거지?

나는 계속해서 주의 깊게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불현듯 어느 한 대목에 이르러 더는 시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

.

잘 알려진 것처럼 한호준이 획득한 레드 크리스탈은 경매를 거치지 않고 익명의 사우디 부호 싸이킥에게 직접 판매되었다.

[사진]

.

.

.」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돌멩이 하나가 사진에 실려 있었다.

잘 못 봤나 싶어 몇 번이고 눈을 비벼 봤지만 아무리 봐도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듯했다.

크라노스의 똥이자, 편의점에서 현금 대용으로 손님들이 건네던 그 마돌이었다.

"아니…!"

마돌은 생기는 족족 카운터 금고에 보관해오고 있었다.

그게 돈이 되는 줄 알았다면 싹 챙겨 나오는 거였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 온몸의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보았지만 역시나 나오는 건 먼지뿐이었다.

이제 남은 거라고는 아공간 주머니뿐.

하지만 솔직히 기대는 썩 크지 않았다.

사입 물건을 담는 용도로 가져온 거라, 출발하기 전에 한 번 안의 내용물을 싹 비웠으니까.

그런데 웬걸?

소환 주문을 외우니 발치 앞으로 뭐가 툭 하고 떨어지더라.

"...!"

붉은 빛깔을 영롱하게 머금은 빨간 마돌 한 개였다.

"만세!"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걸 집어 사진 속 레드 크리스탈과 대조해보았다.

역시나 형태며 빛깔까지 그렇게 똑 닮을 수가 없었다.

벅차오르는 기쁨에 심지어는 자러 들어간 최혜성을 다시 깨워 두 손을 맞잡은 채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픈 심정이었다.

물론 실행에 옮기진 않았지만.

한데 이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주체를 못 하겠는 궁금증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대체 이 돌을 어디다 쓰는 건데?

뭐 때문에 그렇게 비싼 건데?

그 답 또한 기사 후반부에 모두 실려 있었다.

.

.

크리스탈은 각성자가 복용할 경우, 복용자의 기본 능력치 중 하나를 랜덤하게 영구적으로 상향시키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먹는다고? 개똥을?"

웩-.

기사 속 주인공은 획득한 개똥을 사우디 왕자에게 팔았다고 했다.

더 찾아보니 실제로 너튜브에 '레드 크리스탈 먹방'이라는 영상이 올라와 있더라.

해당 영상은 게시 이틀 만에 무려 5억 조회수를 넘어서고 있었다.

여태껏 단 5번밖에 출토된 적이 없다던 레드 크리스탈.

거기다 실물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대중에게 공개된 건 이번이 최초란다.

소유주가 과시를 곧 미덕으로 아는 사우디 왕가의 혈통이었기에 성사될 수 있었던 이벤트였다고.

총 한 시간 분량의 마돌 먹방은 500석 규모의 대관 극장에서 촬영되었다.

관객 모두는 세계 각국에서 엄선하여 초청된 명사들.

실제로 영상 중간중간 화면에 얼굴을 비춘 관객들 중엔 세상 물정에 그리 밝지 않은 내가 봐도 모르는 얼굴이 없을 정도니 말 다 했지.

마이크론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

자타공인 현존하는 팝의 황제 브루노마소.

미국 부동산 재벌이자 이젠 거물 정치인인 도날드 드럼덕 등등.

추가 정보를 검색해 보니 비록 영상엔 잘 비치지 않았지만, 한국 인사 중에서도 사성전자의 재 드래곤, K팝 그룹 BTSN 멤버 등등이 저 관객석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고.

그 와중에 초청 명단 중 K팝 걸그룹이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했다.

나는 이담에 꼭 아이븐, 뉴진세 등등을 초청해야지.

짝-!

짝짝!

한 대로는 부족해서 뺨 몇 번을 더 갈기고 나서야 망상이 좀 사그라들었다.

돈과 권력을 쥐어주면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다더니.

내 자신에게 실망스러운 순간이었다.

제아무리 걸그룹이 좋기로서니, 자발적으로 개똥을 먹을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먹긴 뭘 먹어. 팔아야지."

인터넷엔 크리스탈의 처분 방법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뤄 놓은 게시물들이 많았다.

대충 훑어보니 싸이킥 전용 경매 어플이 있는데, 거기에 등록하면 된다더라.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막상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받아 실행하고 보니 회원 가입 조건이 되질 않는 거다.

단 한 줄의 필수 기입란 때문이었다.

[싸이킥 라이센스 번호 : ]

나는 무등록자, 그러니까 그 유나 님이 말하던 '로머'라서 당연히 그런 번호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이 마돌을 현금화하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그쪽 관리청을 한번은 내 발로 방문해야 한단 소리였다.

다소 맥 빠지는 상황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현실을 받아들였다.

라이센스 등록 며칠 늦는다고 갖고 있는 마돌이 어찌 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아울러 마돌의 값어치를 알게 된 내게는 이제 편의점에 되돌아가야 할 확실한 동기가 생겼다.

금고에 있는 마돌 몇 개만 더 갖고 나와도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갑부로 거듭날 수가 있는 것이다.

"…한 번에 다 풀면 똥값되니까, 시세 봐 가면서 한두 개씩 처분해야지."

무려 3천 300억짜리 돌멩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는 예전처럼 불경스럽게 바지 주머니 따위에 찔러넣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땅히 안전한 보관 장소는 떠오르질 않았다.

궁리 끝에 하는 수 없이 나는 마돌을 도로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물론 그 직전에 사진도 한 방 남겼다.

인터넷엔 간혹 로또며 즉석 복권 등의 실물 사진과 함께 당첨 자랑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솔직히 볼 때마다 너무나 부러웠지.

그래서 나도 그런 인증 글 한번 올려 볼까 한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하남자스러운 행동이긴 했지만 어차피 익명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떠랴.

평소 유머 게시물로 밤샘 근무의 지루함을 달래왔던 나라서, 웬만큼 유명하다 싶은 커뮤니티 사이트는 이미 죄다 가입이 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순간 화력이 높다고 알려진 한 커뮤티니를 골라 사진과 함께 마돌 인증글을 업로드했다.

「제목 : 미궁에서 레드 크리스탈 겟.

[사진]

며칠 전에 미궁 돌아다니다가 빨간 돌 하나 주웠다. 첨엔 뭐에 쓰는지 몰라서 걍 갖고만 있었는데 알고 보니 레드 크리스탈인지 뭔지 그거 같더라? 나 인생 역전한 거 맞지?」

"오옷!"

예상대로 곧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에 비례해 댓글 수도 실시간으로 엄청나게 달리고 있었다.

와-. 대박 부럽다!

ㅊㅋㅊㅋㅊㅋㅊㅋㅊㅋㅊㅋㅊㅋ

싸붕이 어느 지역 미궁에서 활동함?

당첨 인증글은 치킨 10마리 쏘는 거 국룰인 거 알지?

나 1억만 나 1억만 나 1억만 나 1억만 나 1억만 나 1억만 ….

·

·

·

…까지가 내가 상상하는 댓글의 대략적인 내용들이었다.

여느 당첨 인증글처럼 축하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막상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 사칭글 지겹지도 않냐?

┗ 싸이킥이 이 시간에 여기서 머함? 미궁 들어가 있을 시간 아님?

┗ 네다음보석사탕

┗ 이 새끼는 공지도 안 보나봄? 싸이킥 사칭 글 올리면 영구 밴인데

열이면 열 죄다 부정적인 댓글들뿐이었다.

심지어는 내 글이 기폭제가 되어 댓글 창에 무수한 이미테이션 인증 러쉬까지 이어졌다.

┗ 옛다. 나도 레크 인증.

┗ 전 어제 집 앞에서 3개 주은 거 인증합니다.

┗ 이번에 결혼하는 개붕이 결혼반지 레드 크리스탈 한쌍 맞췄다. 예쁘지?

┗ 치킨 먹다 돌 씹혀서 뭔가 했더니 레드 크리스탈이었음. 치킨집에 항의 전화하니까 그냥 나 가지라네.

┗ 걍 씹어 먹지. 일반인이 그거 먹으면 ㄱㅊ 커진다 함.

┗ ㅇㄱㄹㅇ?

"…도라이들."

솔직히 열받아서 잠깐은 반박 글을 다시 작성할까 싶기도 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백날 사진만 더 찍어 올려봤자 해명은커녕 가짜라고 놀림만 더 받을 거 같아서 관뒀다.

'근데 이거, 왜 삭제도 안 되는데?'

[관리자에 의해 접근이 제한된 게시글입니다.]

"...."

결국 내 게시글은 수백 개의 조롱 댓글이 달린 채 그대로 게시판에 박제되었다.

"아오, 진짜!"

작성자인 나를 비롯한 그 누구도 더는 새로 댓글을 달거나 내용을 수정할 순 없었다.

하지만 글 자체는 그대로 남겨진 바람에 조회수만 꾸준히 올라가는 것이었다.

"...."

[탈퇴하시겠습니까?]

예스.

21화.

대한민국 각성자 관리청.

정보수집 요원들이 야근 중이던 호실에서 돌연 소란이 일었다.

다섯 명의 심야 조원 모두가 개인 업무를 멈추고는 회의실에 모여 격렬한 토론을 벌였지만.

그러고도 결론이 나질 않아서는 끝내 퇴근한 팀장에 이어 부장까지 다시 호출시키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새벽 2시.

눈곱조차 떼지 못한 채 헐레벌떡 사무실로 되돌아온 김명식 정보부 부장은 그 퀭한 눈으로 한참이나 제 손에 들린 보고서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미에 적힌, 보면서도 믿겨지지 않는 글귀를 말이다.

[메타데이터 분석 결과 해당 사진은 게시글이 작성되기 5분 32초 전 촬영된 것으로, 기록된 데이터 및 픽셀 정보 그 어디에도 합성이나 조작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덧붙여 피사체의 형태와 빛반사 굴절률 등 12개 평가 항목에 의거, AI가 판단한 사진 속 레드 크리스탈이 진품일 확률은 98.45%입니다.]

소위 말하는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딥 페이크 영상 및 사진이 범람하는 요즘이었다.

AI로 생성된 위변조 작들은 사실상 육안으로 판별이 불가능할 만큼 정교함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도 결국 같은 AI 기술을 적극 활용한 감별 시스템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각성자 관리청에서도 그간 그렇게 진짜와 가짜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걸러내 왔었다.

하루에도 수천 건씩 올라오는 크리스탈 관련 인증 게시물들.

그중 99.9999…%는 당연히 합성 내지 AI로 생성한 가짜였다.

한데 그처럼 가혹한 심판관을 자처하던 AI 감별 시스템이, 느닷없이 게시된 사진 하나를 진품으로 판별해버린 것이다.

처음엔 모두가 감별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뉴얼에 따른 교차 검증 단계를 밟아나갈수록, 해당 레드 크리스탈이 진품일 가능성은 되레 높아져만 갔다.

결국 이 오밤중에 분석 요원들이 자신들의 상관을 호출할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지금 보고서를 손에 쥔 김명식 부장 역시 수하들이 했던 고민과 다를 바 없는 생각에 잠겨 있었고.

'눌러? 말어? 눌러? 말어?'

그의 다른 한 손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화면엔 이미 윤태호 국장의 연락처까지 띄워 놓은 상태였다.

통화 버튼만 누른다면 바로 신호음이 갈 것이다.

그럼에도 그 위 엄지는 못내 허공에서 방황만 해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는 탓이었다.

'시발….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지난 2년 동안 미궁에서 발견된 레드 크리스탈은 고작 다섯 개뿐이었다.

그중 마지막 물건을 한호준이란 싸이킥이 획득한 게 불과 직전 회차였더랬다.

한데 그로부터 채 열흘도 안 지나서 또 다른 레드 크리스탈을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나다니.

그것도 싸이킥들 전부가 미궁에 들어가 있을 이 시간대에 말이다.

그렇다고 합성도 위조품도 아니라는 AI의 분석을 마냥 묵살할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에라, 모르겠다.'

김명식 부장은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통화가 연결되자, 그가 휴대폰에 대고 떠듬떠듬 용건을 이야기했다.

"늦은 시각에 죄송합니다. 김 부장입니다. 예, 그, 저, 다름이 아니라, 좀 미친 소리로 들리실 수도 있는데요. 뭐냐면…."

* * *

"미친 새낀가?"

윤태호 국장은 통화를 끝내기가 무섭게 들고 있던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협탁 위로 던져 놓고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닌 밤중에 레드 크리스탈의 출현이라니.

"이 새끼, 술 끊었다더니 순 뻥이었네"

김명식 부장은 원래 맨정신에도 혀 꼬부라지는 소리가 전매특허인 위인이었다.

그래서 통화만으로 취중 허언이라고 단정 짓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말이 되는 소릴 해야 믿는 시늉이라도 하지."

현재 대한민국 싸이킥 모두는 미궁에 입장해 있는 상태였다.

부상 등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발생한 결원 6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한데 다시 누워 잠을 청하려던 윤태호 국장의 눈이 돌연 번쩍 뜨였다.

'아니…. 6명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7명이지.'

오윤아의 요청으로 어제 풀어준 로머.

구영수의 존재가 뒤늦게 생각나 버렸다.

윤태호 국장은 그제야 휴대폰으로 메일함에 접속했다.

김명식 부장이 보냈다던 보고서 파일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려가던 윤태호 국장의 시선은 이윽고 한 곳에 멈춰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IP 추적 결과 작성자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마들로 XX길 21, XXX]

'설마….'

윤태호 국장이 곧 메모장 어플을 열었다.

화면에 어제 자신의 손으로 직접 기입한 주소 한 줄이 표시되었다.

[도봉구 마들로 XX길 21, XXX]

두 주소가 데칼코마니마냥 정확히 일치함이 확인되자 윤태호 국장의 몸은 용수철마냥 침대에서 튕겨져올랐다.

"이런, 시발 미친!"

물론 아직 이 상황 자체가 전적으로 믿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처럼 어리숙하게 생긴 로머 따위가 레드 크리스탈 진본을 소유하고 있다는 걸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탓이었다.

그럼에도 두 소재지가 일치하는 이상 더는 무턱대고 방관할 수도 없는 노릇.

환복은커녕 잠옷 차림 그대로 키만 챙겨 차에 올라탄 윤태호 국장은 평소 40분 걸리던 출퇴근 길을 단 10분 만에 주파해 관리청에 도착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어리둥절해하는 근무자들을 모조리 회의실로 소집해 30여분간 열띤 토론을 거쳤다.

그리하여 내려진 최종 결론이란.

"…진짜 진품 맞나 보네."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윤태호 국장은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채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었다.

당연히 실내 금연이라 범칙금 부과 대상이었지만 분위기상 누구 하나 이를 지적하는 자는 없었다.

생긴 것관 다르게 의외로 비흡연자인 김명식 부장은 연신 손부채로 연기를 흐트러트리다 더는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아니, 국장님!"

"그래, 그렇게 해."

"예? 뭐를…."

"원본 게시글 삭제시키고 펌글까지 모조리 추적해서 다 지우겠단 이야기 아녔어?"

"…그, 그렇죠. 그렇게 해야죠. 암요."

불과 며칠 전까지 여론의 집중포화를 고스란히 두드려 맞던 관리청이었다.

레드 크리스탈이 사우디로 넘어간 일을 두고.

정작 판매자인 한호준은 가만히 놔둔 채, 국가 기관이라 만만한 관리청에만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언론사들은 그밖에 온갖 사소한 흠결까지 죄다 트집 잡아서는 관리청을 그야말로 오체분시해버렸다.

그나마 시간이 좀 지난 데다 새로운 미궁 출입 회차가 돌아온 덕분으로 이제야 좀 여론이 잠잠해지는 듯한 분위기였다.

한데 그렇듯 관리청의 사기를 초토화시켰던 불쏘시개가 버젓이 다시 나타나다니.

'아… 내 수명!'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건강 검진에서 혈압이 높으니 담배도 끊고 스트레스도 받지 말라고 했건만.

'대체 뭐 하는 새끼지?'

윤태호 국장은 구영수의 어리벙벙한 얼굴을 떠올렸다.

'15렙이라며? 그딴 쪼랩이 어떻게 레드 크리스탈을 갖고 있는 거냐고.'

마음 같아선 당장 잡아다가 조사든 취조든 뭐든 다 저지르고팠다.

그러나 그놈의 갑급 요청 때문에 손발이 다 묶여버렸다.

'확 그냥 저지르고 나중에 가서 빌어?'

자고로 허락을 구하는 것보다 용서를 비는 게 더 쉽다고 했다.

일단 구영수는 딴짓 못 하게 관리청에 잡아다 놓고, 나중에 가서 오윤아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 보는 거다.

그러나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그려 본 134,241개의 미래 그 어느 장면에서도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겠군요'라며 고개를 주억이는 결말은 없었다.

그나마 가장 희망적인 엔딩조차 저 1층 로비 기둥에 자신이 묶여서는 등에 채찍질 네다섯 대를 맞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었으니.

'시발, 대체 누가 상관이고 누가 따까리인 건지. 참….'

오윤아의 요구를 위계로 눌러 묵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역시나 그녀가 싸이킥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막말로 지금 당장 공무직을 때려치고 민간 신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관리청으로서는 그녀를 잡을만한 명분이 없었다.

집행관의 한 해 수입이 민간 싸이킥 평균의 1/5에도 미치질 못하니 말이다.

명예고 권력이고 나발이고, 제아무리 온갖 미사어구로 포장한다 한들 결국 공무원은 공무원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5급 공무원의 자리에 남아 오늘도 묵묵히 채찍을 휘둘러 주는 그녀가 윤태호 국장은 기특하면서도 조금은 얄미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윤태호 국장은 고심 끝에 구영수의 거처 주변으로 감시 인원 다수를 배치했다.

드론을 띄우거나 위성 추적 지원 요청까지 고려해보긴 했지만, 곧 그 생각은 접었다.

괜히 일을 크게 벌렸다가 자칫 해외 첩보 기관에서 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윤태호 국장은 심지어 당분간은 청장실에도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박평식 그 양반은 주둥이가 깃털이라….'

보고를 올리더라도 오윤아가 돌아온 뒤에라야 올릴 참이었다.

모든 전말이 밝혀져야 제대로 된 대응책도 마련이 될 테니.

* * *

오윤아는 집행관으로서의 소임조차 등한시한 채 만 이틀이란 시간을 수색에만 투자했다.

홀연히 증발된 구영수의 행방을 알아내고자 말이다.

사실 신원미상의 발자취가 출구 앞에서 끊겼다는 사실을 진즉에 찾아내긴 했지만.

그럼에도 사방팔방 미궁 전역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닌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나는 그렇다 쳐. 근데 권인하의 이목까지 속이고 미궁을 빠져나갔다고? 그게 말이 돼?'

물론 구영수가 특별한 존재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15레벨임에도 그처럼 장궁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신기를 몸소 증명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한들 이건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권인하의 레벨은 53.

구영수보다 무려 38레벨이 더 높다.

그 정도면 히든 클래스가 아니라 히든 할애비가 와도 극복이 불가능한 차이다.

그 어떤 개념과 논조를 대입해도 구영수가 자신의 능력으로 권인하의 감각을 교란시키고는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불가능하단 소리다.

그래서 한동안은 차라리 키드냅kidnapp에 더 무게가 실리기도 했었다.

본래 키드냅의 사전적 의미는 '납치'이다.

하지만 미궁에선 매우 드물게 발생하는 원인불명의 순간이동 현상을 일컫는 용어였다.

키드냅의 가장 명확한 특징이라고 한다면 아무런 목격자도 남기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말 그대로 부지불식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실종자는 미궁 내 다양한 장소에서 발견되곤 했다.

그런 미연의 사태에 대비해 싸이킥 각자는 의무적으로 신호탄을 소지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머인 구영수가 그런 구조요청 장비를 갖추고 있을 리 없었으니.

오윤아는 발에 땀이 나도록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럼에도 구영수는 끝내 어떤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윤아가 결국 다시 출구 앞에서 끊긴 신원미상의 발자취 앞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이쯤 되면 구영수가 제 발로 미궁 밖으로 나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고작 15레벨에 불과한 로머가 두 명의 고레벨 싸이킥을 면전에서 기만하고서 말이다.

"그 인간, 대체 진짜 정체가 뭐지?"

22화.

문득 최혜성이 물었다.

"혹시 오빠도 편돌, 아니 편의점에서 일해?"

"어떻게 알았지?"

"저기, 건조대."

"아…."

아침 댓바람부터 세탁기를 돌렸다.

빨랫감중엔 편의점에서 챙겨 나온 조끼도 있었다.

베란다 건조대에 널어놓은 그걸 본 모양이었다.

최혜성의 말이 이어졌다.

"GU 유니폼이던데."

"응."

"난 CS야."

"응."

"나도 GU로 옮길까?"

"왜?"

"아니, 그냥…."

"솔직히 도시락은 GU보다 CS지. 그러니 그냥 거기 다녀."

"응, 그럴게."

아침 식사 메뉴는 소고기 '맛' 뭇국에 밑반찬 몇 가지였다.

굳이 유사 요리임을 강조한 이유는 표현 그대로 맛만 같을 뿐, 고기라 할만한 건더기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포기하지 않고 테트라포드마냥 적층 구조로 쌓여 있는 무 조각들을 숟가락으로 헤집어대자, 최혜성의 멋쩍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 미안. 소고기 살 돈은 없어서…. 오늘은 봐줘. 월급 타면 다시 제대로 만들어 줄게."

"아냐. 소고기는 없지만 소고기 두 배 뭇국이라 해도 믿어질 정도로 맛있어. 국물도 엄청 진하고."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고."

빈말이 아니라 대체 무슨 비기로 이런 기적을 행했는지 다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제아무리 소고기 다시다 등의 조미료 범벅으로 조리를 한들 그 맛의 한계는 명확하거늘.

보면 볼수록 탐나는 인재가 아닐 수 없었다.

최혜성 너는 일단 킵.

레드 크리스탈을 현금화하는 날 곧바로 스카웃할 테니 당분간만 편순이로 남아 기다리고 있으렴.

"그러니까 다른 데 가지 마렴."

"응?"

"도시락은 CS가 최고라고. GU, 세번일레번 다 필요 없고 거기 딱 박혀 있으라고."

"으응."

식사를 마친 뒤엔 컴퓨터 앞에 앉았다.

퀘스트 상세 페이지에 표기된 발주품 목록을 엑셀로 옮기기 위함이었다.

목록엔 제품명만 기입 되어 있을 뿐, 정확한 가격을 산정하기 위해선 번거롭더라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30분가량 작업을 마치고 나니 발주품 구입에 필요한 경비가 정확히 산출되었다.

12,533,600원.

소매가로 한 계산이니 이는 편의점의 실제 2주 치 매출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니 하루에 백만 원어치도 못 팔았네."

입지가 입지이니만큼 미궁이란 변수가 발발하기 직전까진 못해도 일 매출 150~170은 찍던 매장이었다.

민 사장님이 봤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나자빠질 판매 저조가 아닐까 싶다.

참. 그나저나 그 양반은 왜 다시 연락이 없는 거지?

분명 내가 전화 건 부재중 기록을 확인했을 텐데?

* * *

민호영의 집요한 통화 시도가 멈춘 건 민시윤의 일침 때문이었다.

"뭐야? 삼촌 아직도 집에 안 갔어?"

"영수 인마. 와 이리 전화를 안 받노?"

"삼촌 바보야? 미궁에 있는 애가 어떻게 전화를 받아?"

"…맞나?"

"맞아. 맞으니까 좀 우리 집에서 나가라고."

형네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민호영은 그 길로 난민촌에 복귀했다.

한데 한숨 늘어지게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휴대폰 화면에 구영수의 부재중 전화가 표시되어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시간을 확인했더니만 어젯밤 11시 경이었다.

조카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전화를 걸었더라면 어쩌면 통화가 연결되었을지도 몰랐다는 이야기였다.

짜증이 솟구쳤지만 화풀이보단 구영수와의 연락이 먼저였다.

민호연은 곧바로 통화 버튼부터 눌렀다.

하지만 신호음이 다 가도록 전화는 받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통화를 시도했다.

50통.

100통.

150통.

"바다라. 바드라. 니 바들 때까지 내 즐대 포기 안 한데이!"

* * *

"뭐야, 이건?"

서류철을 훑어보던 윤태호 국장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혹시 모를 레드 크리스탈의 정보 유출을 방지코자 관리청에선 구영수의 휴대폰 및 메일 등 연락 수단 일체를 통제 및 차단하고 있었다.

물론 당사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극비 공작이었다.

한데 그 와중에 구영수에게 집요하게 연락을 시도하는 회선 하나가 주의를 끌었다.

"182통? 무슨 인간 스팸 전화도 아니고…."

신원 조회 결과 민호영이란 46세 남자였다.

2년 전 구영수가 근무하던 편의점 사장이었다고.

하지만 단지 그런 관계성만으로 이 집요함을 설명하기엔 근거가 빈약해도 너무 빈약해 보였다.

통화 내역을 더 뽑아보니 어제도 250통 넘게 전화를 건 모양.

막말로 사채를 쓰고 튀었어도 차라리 직접 찾아가면 찾아갔지, 이 정도로 지독하게 전화를 걸진 않았겠다 싶었다.

"설마 이 자, 레드 크리스탈의 존재를 눈치채고 그러는 건가?"

"서로 통화한 내역이 없는 걸 보면 그렇진 않은 거 같습니다."

"구영수가 인터넷에 업로드한 게시글을 봤을 수도 있잖아?"

"그것도 민호영의 인터넷 접속 기록을 확인해 본 결과 전혀 접점이 없었습니다."

"그럼, 대체 뭐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듯한 가설이 성립되질 않았다.

"일단은 계속 주시하다가 특이사항이 생기면 바로 보고해."

"알겠습니다."

"주구장창 전화만 해대는 거 보면 주거지를 모르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만에 하나 민호영이 찾아갈 낌새가 보이거든 서로 절대 못 만나게 하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 * *

"뭐가 이렇게 청렴해?"

은행 어플로 내 계좌를 들여다본 나는 기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86만 원.

분명 2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2천만 원 가까이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러고 보니 2주가 아니라 2년이랬지."

2년이면 얼추 계산이 맞는 듯도 했다.

월세며 관리비며 공과금이며 보험 등등 별별 낼 돈이 다 여기서 빠져나갔을 테니까.

아무튼 잔고를 확인한 나는 심란해졌다.

퀘스트 수행 때문에라도 장을 봐야 하는데, 이 돈으론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심지어는 자산 10억 달성 전까진 카드 사용 금지라는 철칙마저 깨고 신용카드 발급까지 알아봤다.

하지만 발급은 되는데 한도가 300만 원까지밖에 안 나온대서 마음을 접었다.

'어디 급전 좀 땡길 데 없나?'

나는 인터넷으로 각종 대출 상품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돌만 처분하면 빚은 한 방에 해결 가능한 거라 심적 부담이 적긴 했지만….

"와-. 이자 살벌하네."

나 같은 편돌이 따위에게 무담보 신용대출을 진행해 줄 1금융권 사는 없었다.

그래서 캐피탈 쪽으로 알아봤더니만 최저 이율이 12.5%부터가 시작이었다.

아무리 금방 갚을 거라지만 그 엄청난 고리 대출 앞에선 선뜻 진행 버튼에 손이 가질 않았다.

넉넉잡고 2천만 원을 빌린다고 치면 한 달만에 갚는다 쳐도 이자로 무려 20만 원이나 떼야 한단 소리다.

물론 3천억짜리 돌멩이를 갖고 있는 마당에 그깟 20만 원이 대수냐 이 찌질한 자식아 라는 내적 꾸짖음에 자존심이 좀 긁히기도 했지만.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깥에 나가면 꼭 연락을 달라던 유나 님.

싸이킥인 그녀라면 2천만 원 정도 빌려주는 건 일도 아닐 거다.

"...."

하지만 막상 DM을 보내려니 손가락이 떨어지질 않았다.

솔직히 초면에 냅다 돈부터 빌려달라니.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한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띵~.

"엥?"

순간 울린 은행 앱 알람에 두 눈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

난데없이 2천만, 아니 다시 보니 2억이란 돈이 입금된 것이다.

놀랍게도 보낸 사람에 표기된 이름은 '오윤아'였다.

* * *

"구영수가 대출을 알아보고 있다고?"

"예."

"얼마나?"

"2천만 원 정도인 것 같습니다."

윤태호 국장은 순간 콧방귀를 뀌었다.

싸이킥 신분치고는 퍽 겸손한 금액이어서였다.

더군다나 구영수는 레드 크리스탈의 소유주이기도 하지 않던가.

"그래서, 대출은 받았고?"

"아니요. 기껏 알아볼 만큼 알아보다가 지금은 오윤아 집행관 인별그램을 구경 중입니다."

"갑자기?"

"네. 아무래도 이자 부담 때문에 대출은 포기한 듯한 눈치였습니다."

"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윤태호 국장의 입에서 곧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보내 줘, 2천 만원."

"예?"

"아니, 그냥 깔끔하게 2억 쏴. 구영수 계좌로."

"...."

그 얘기를 들은 부하 요원은 순간 당황했다.

송금 자체야 어려울 게 없다만, 문제는 그 이후일 테니까.

"지금 돈을 보내면, 그쪽에서 저희가 사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누가 우리 명의로 보내래?"

"그럼…."

"오윤아 이름으로 보내."

"예?"

"의심 안 받게 DM으로 적당히 그럴싸한 내용으로 메시지도 하나 보내고."

"예, 옛!"

* * *

-영수 씨. 부담 갖지 말고 쓰세요.

이후 유나 님의 계정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나는 곧 답장을 보냈다.

-너, 보이스피싱범이지?

-아, 아니어요.

-말투가 보이스피싱 맞네.

-내, 내가 뭘 어쨌다고?

-누가 반말하래.

이후로 답신은 없었다.

분명 정곡을 찔린 놈이 잠수를 탄 거다.

내가 놈이 사칭인 걸 알아차린 결정적인 단서는 호칭에 있었다.

유나 님은 나를 영수 '씨'라고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영수 '님'이라고만 했었지.

거기다 알려주지도 않은 내 계좌번호를 그녀가 알고 있을리 없다는 사실도 의심을 보태는 요인이었다.

단언컨대 이 돈, 분명 건들면 X되는 돈이 틀림없다.

좋다고 썼다간 쇠고랑차기 십상이란 소리다.

나는 계좌가 묶이는 걸 막기 위해 서둘러 경찰에 신고 전화를 넣으려 했다.

한데 그에 앞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보이스피싱범인가?'

피싱범이면 한바탕 훈계나 해줄까 하고 받았더니 웬걸?

- 영수 님. 저 오윤아에요.

'어라?'

- 제가 보낸 돈 맞으니, 마음 놓고 쓰셔도 됩니다.

아무리 들어도 틀림없는 유나 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있다.

요즘엔 AI로 그럴싸한 음성 모방까지 가능하다는 걸.

그래서 확인차 질문을 하나 던졌다.

"정말 유나 님이 맞으시다면 저와 대화했던 내용을 맞춰 주세요."

- 뭘요?

"저희 신혼집은 어느 동네에 얻기로 했죠?"

- …혹시 미치셨어요?

유나 님 맞네.

* * *

오윤아는 고민 끝에 출궁을 결심했다.

구영수라는 싸이킥은 한 회차 수입 일체를 포기할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다만 이틀이란 시간을 허비했기에 약간의 불안감은 있었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오윤아는 미궁 밖으로 나오자마자 곧장 관리청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그곳에서 오윤아는 뜻밖의 상황와 마주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라."

"이런 십…."

그새를 못 참고 자신의 인별그램 계정으로 사고를 치고만 동료들이었다.

윗놈 아랫놈 할 거 없이 합심하여 오윤아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이유였다.

"우릴 죽이든 살리든 일단 네가 이거 수습부터 좀 하자. 우리가 사찰한 거 걸리면 감당 안 될 거 너도 알잖아?"

"후우-. 일단 알겠습니다."

윤태호 국장의 설득에 오윤아는 곧장 구영수에게 연락을 취했다.

DM을 다시 보낼까 했지만, 역효과만 날 거 같아 아예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통화가 연결되었고, 그렇게 상황은 잘 봉합되는 줄로 알았지만….

"혹시 미치셨어요?"

"...!"

전혀 예상치도 못한 오윤아의 돌발 발언에 장내는 경악에 휩싸여버렸다.

23화.

사실 오윤아는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비록 당혹스러움에 순간 막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이런 신선한 드립은 또 처음이네.'

스물일곱 평생, 자신에게 이처럼 직진으로 들이받은 사내는 거의 없었다.

다들 쩔쩔매며 받드는 척, 간만 보기 바빴더랬지.

물론 개중에 수컷 냄새 물씬 풍기는 알파메일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남자는 또 오윤아 본인이 꺼려하다 못해 극혐하는 부류였다.

제 잘난 걸 너무 잘 아는 사내의, 과잉된 자신감이 싫다는 이야기였다.

소위 말하는 마초남 특유의 허세가 오그라든다고 해야 할까.

반면 짧은 시간이나마 지켜본 바 구영수에겐 그런 부정적 의미의 '남성다움'은 관찰되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초면이나 다를 바 없는 사이에 대뜸 신혼집을 운운하다니.

'순 또라이 자식이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윤아는 구영수의 그런 면이 마음에 들었다.

이 독특한 정신세계가,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구영수를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너 이 자식. 반드시 내 동료가 되어라!'

그러자면 일단 앞선 실언에 대한 수습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잡념이 퍽 길긴 했지만, 미쳤냐고 쏘아붙인 뒤로 실제 흐른 시간은 1~2초에 불과했을 따름.

아직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는 충분하단 생각이었다.

아울러 정작 상대방은 욕을 먹고도 별 개의치 않는 눈치였고.

-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도 사칭범이 많아서 진짜 유나 님이 맞나 확인해 보려던 건데 마땅히 떠오르는 질문이 없었어서요.

"아뇨, 뭐. 이해해요. 저도 막말한 거 사과드릴게요."

2~3분 정도 더 대화를 나눈 이후 오윤아는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는 대뜸 주변 동료들부터 모두 내보냈다.

"니들은 다 나가 있어."

"예? 예옛!"

"그, 그래."

"어디 가요? 국장님은 남으시고요."

"어? …어."

곧 방 안에 윤태호 국장과 오윤아 둘만이 남겨졌다.

그리고 오름갈굼이 시작되려는 찰나.

"미안하다. 우리, 아니 내가 잠시 과욕에 눈이 멀어서는 판단력이 영 흐려졌었나 봐."

윤태호 국장의 자진 납세가 시작되었다.

"그놈의 레드 크리스탈이 뭐라고, 참…."

"…예? 레드 크리스탈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반응을 보니 너도 몰랐던 모양이네. 난 또 갑급 요청까지 했길래 넌 알고 있는 줄 알았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무슨 말이긴. 구영수 그자한테 레드 크리스탈이 있다는 소리지."

"예에?"

오윤아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어지는 윤태호 국장의 이야기에 입까지 절로 벌어졌음은 물론이었다.

"미친…. 와-. 시ㅂ. 미친!"

"그나저나, 그럼 이제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 레드 크리스탈이 이유가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뭐 때문에 갑급 요청까지 하면서 구영수를 지켜보기만 하란 거였지?"

"그건…."

오윤아가 곧바로 전말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이번엔 윤태호 국장의 표정이 좀 전의 그녀와 흡사해졌다.

"허…. 히든 클래스라고? 그 어리벙벙하게 생겨서는 키만 큰 놈이?"

"에이. 키만 큰 건 아니죠. 누구하고 다르게 비율도 꽤 좋던데."

"너 지금 나 6등신이라고 까는 거냐?"

오윤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쩜오."

"야!"

"아무튼 이제 아시겠죠? 제가 왜 갑급 요청까지 드렸는지."

알다마다.

잠시나마 풀어져 보였던 윤태호 국장의 얼굴이 다시금 진지해졌다.

"그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 근데 아무리 히든 클래스여도 그렇지. 15렙 쩌리가 레드 크리스탈을 갖고 있다는 게 납득이 되는 얘기냐고."

"그건 저도 의문이긴 마찬가지예요."

"조만간 한번 보기로 했지?"

"네. 이틀 뒤 오후에요."

"그럼, 그때 한번 슬쩍 떠 봐."

오윤아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턱대고 돈 보낸 것도 겨우 둘러댄 마당에 더 의심 받을 짓을 하라고요?"

"말했지만 인터넷에 먼저 올린 건 자기 자신이라고. 너도 그 게시글 봤다고 해."

"국장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좀 신중하게…."

"알았다. 알았어. 쩝. 그놈의 욕심이 뭔지, 자꾸 방정을 떨게 되네."

윤태호 국장이 입맛을 다시며 한발 물러서자, 오윤아도 더는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다른 무엇도 아닌 레드 크리스탈이 걸린 문제이니만큼 그의 조급함도 마냥 이해 못 할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곧 오윤아가 물었다.

"국장님은 그분이 레드 크리스탈을 어떻게 했으면 하시는데요?"

"뭐. 가장 베스트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우리 관리청에 넘겨주는 거지. 물론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일이겠고."

"합리적인 가격 얼마요?"

"한 500억쯤이면…. 으으."

대답을 하다 말고 윤태호 국장이 일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갑작스레 오한이 든 탓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오윤아가 뱁새 눈을 하고서 자신과 근처 기둥을 번갈아 흘겨보는 중이었다.

허리춤에 찬 채찍 손잡이를 슬쩍 쥔 채 말이다.

윤태호 국장이 다급히 발언을 정정했다.

"역시 그건 너무 도둑놈 심보겠지?"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암튼 그럼 뭐, 소유자 본인이 직접 복용을 하거나, 처분을 하더라도 국내 싸이킥에게 처분하게끔 유도해 봐야지. 어찌 됐든 한호준 때처럼 또다시 해외 매각이 이슈화됐다간, 그땐 정말 이 관리청이 어떻게 될지 몰라."

"관리청은 존속되겠죠. 국장님 목이 날아가서 글치."

"말하는 싹퉁머리 하고는."

윤태호 국장이 오윤아에게 진심 어린 펀치를 날렸다.

가벼운 움직임으로 그 주먹을 피한 오윤아는 내친김에 아예 미끄러지듯 문까지 이르러 방을 나가버렸다.

윤태호 국장이 그 뒤에 대고 소리쳤다.

"아무튼 너만 믿는다!"

* * *

유명한 재벌인 일론 머스캣이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가 말하길,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이 가짜, 즉 시뮬레이션 세상일 확률이 99.99999%라는 거다.

관측이라는 행위의 유무에 따라 파동과 입자로 상태가 나뉘는 이중 슬릇 실험은, 게임에서 컴퓨터가 그래픽을 표현하는 방식과 놀랍도록 그 원리가 유사하단다.

하물며 이제는 미궁이니 몬스터니 각성자니 하면서, 몬스터가 판을 치고 게임마냥 상태창까지 볼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으니.

이 정도면 말 다 한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했지.'

₩ 2,000,860,000

'제발 개연성 좀….'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일 온라인으로 송금이 가능한 최대 허용 금액은 5억 원이다.

실제로 모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인터넷 뱅킹으로 한방에 50억 정도의 돈을 이체하는 장면이 너튜브에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댓글 창이 시끌벅적했던 걸 기억한다.

작가 노릇하기 참 쉽다는 둥.

재미는 못 챙기더라도 개연성은 챙겨야 하는 거 아니냐는 둥.

모자란 작가보다 대본을 그대로 찍고 내보낸 방송국 놈들이 더 나쁘다는 둥.

별별 조롱 댓글들이 다 달렸더랬지.

그런데 나한테 20억이 들어와?

"…역시 이 세상은 가짜였구나."

"오와-. 20억이다."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최혜성이었다.

"뭐야? 너 출근 안 했어?"

"응. 오빠한테 말 안 했나? 오늘까지 쉬기로 한 거."

세상에 이틀씩이나 근무를 빼 주는 편의점이 존재한다고?

"마음대로 봐서 미안. 보려고 본 건 아닌데, 대답이 없어서…."

몇 번을 불러도 내가 반응을 안 했다고 한다.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만 노려보고 있길래, 왜 그러나 싶어 다가와 슬쩍 확인한 거라고.

"멋대로 봐서 정말 미안."

"아냐. 괜찮아. 됐어. 그만 사과해. 귀에서 피 나겠다."

"근데 여기 보낸 사람에 오윤아라는 분. 혹시 싸이킥인 거야?"

어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법인도 아닌데 한 번에 20억이나 되는 큰돈을 한 번에 보냈길래."

"그럼, 싸이킥은 5억 이상도 보낼 수 있다는 거야?"

"응, 이거 예전에 방송 나온 거잖아. 보니까 각성자 특별법인가 뭔가 해서 싸이킥들은 금융 혜택도 뭐가 많나 봐."

이런 식으로 개연성을 땜빵한다고?

"최혜성 너, 솔직히 말해. 끄나풀이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실 이 세상은 가짜고, 우린 다 NPC 아니냐… 라는 드립을 치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심증은 확실하나 물증이 없으니 어쩌겠어, 그냥 넘어가야지.

나는 하는 수 없이 말을 돌렸다.

"오늘 쉬면서 뭐 할 거야? 약속 있어?"

"할 거 없고 약속도 없어."

"친구는? 안 만나?"

"친구도 없어."

뻥치시네.

누가 핵인싸인 거 모를 줄 알고?

"보육원은?"

"지지난 주에 다녀왔지."

"어쨌든 그래서 오늘 시간이 빈다는 거지?"

"응. 텅텅 비어."

"그럼, 나랑 일 하나만 같이 하자."

"좋아."

"뭔지 묻지도 않고 무작정 좋대?"

최혜성은 휴대폰 화면 속 내 계좌 잔고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

갑자기 졸부가 된 내 재력에 편승하겠다는 노골적인 제스처였다.

뭐, 최소한 가식적이진 않아서 좋네.

* * *

"구영수가 동거녀와 함께 외출했습니다."

푸확-!

막 냉면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켜던 윤태호 국장이 입에 있던 걸 그대로 내뿜었다.

그 파편이 고스란히 맞은 편 자리의 제육 덮밥 위로 떨어졌다.

오윤아의 표정이 그대로 구겨졌다.

"에이씨, 더러워. 반이나 남았는데"

그대로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는 오윤아였다.

머쓱한 표정을 짓던 윤태호 국장은 이내 애먼 부하 요원에게 역정을 냈다.

"아, 그러게 왜 지금 보고를 올려? 올리기는! 식사 중인거 안 보여?"

"아, 아니. 국장님께서 언제든 특이 사항이 발생하면 지체 없이 보고하라고 하셔서…."

"떽! 그래서 지금 잘했다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뭐, 아무튼! 동거녀라니? 구영수에게 애인이 있었어?"

윤태호 국장의 물음에 보고를 올리던 요원이 기다렸다는 듯 동거녀의 신상을 읊었다.

"이름 최혜성. 나이 20세. 작년까지 은혜 보육원에서 지내다가 성년이 된 뒤로 독립. 그 후로 쭉 구영수의 집에서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은혜 보육원이라면…."

"네. 구영수와 같은 보육원 출신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관계가 뭐냐고? 사귀는 거야, 뭐야?"

"그 부분은 아직 확실치가 않아서 좀 더 조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두 사람이 외출한 이 틈에 집에 도청기를 설치할까요?"

"아니. 뭐 그럴 거까진 없고."

윤태호 국장이 손짓으로 보고서를 넘겨받았다.

최혜성의 증명사진을 확인한 그는 곧 표정이 굳어졌다.

'겁나 예쁘잖아?'

오윤아 덕분에 나름 면역이 생긴 덕분에 평소 어지간한 미녀 정도는 눈썹조차 까딱하지 않던 윤태호 국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로 최혜성의 미모는 발군이었다.

'이러면 나가린데?'

사실 윤태호 국장은 내심 오윤아의 미인계를 기대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 싸이킥의 시대라고 하지만, 외모는 아직도 엄청난 매력 요소였다.

연예인 뺨치도록 어여쁜 그녀라면 구영수같은 어리바리한 사내 따위는 쉽게 포섭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물론 능력이 아닌 외모를 잣대로 삼는 짓을 지극히 혐오하는 오윤아인지라, 그녀에겐 끝내 털어놓지 못할 본심이었지만.

아무튼 두 사람의 미모는 함부로 우열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였다.

굳이 차별점을 꼽자면 오윤아가 성숙한 매력이 도드라지는 데 반해, 최혜성은 풋풋하고 귀여운 쪽이라고 해야 할까.

그 때문에 윤태호 국장은 그 어떤 의문이 생겼다.

'그런 불우한 환경에서 이런 외모라면, 주변에서 영 가만두질 않았을 거 같은데.'

그렇게 종이를 몇 장 더 들춰 보던 윤태호 국장의 입에선 곧 침음이 흘러나왔다.

24화.

사실 최혜성에겐 천만 원도 넘는 빚이 있었다.

본래 빌린 원금은 500만 원이었지만.

높은 이자 때문에 갚아야 할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렸다.

사채에 손을 댄 건 보육원 동생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서였다.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목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가해자는 무보험 운전자라 보상을 기대키 힘든 형편이었고.

물론 보육원에서 노골적으로 도움을 요구한 건 아니었다.

다만, 형제와도 같은 아이의 어려움을 마냥 모른척할 만큼 최혜성은 독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남의 돈을 빌리고 말았다.

사실 돈을 빌리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일종의 취업 사기에 당한 것이었을 뿐.

- 고수익 단기 아르바이트

그 문구의 공고를 보고서 지원해 합격했다.

하지만 서빙이라고 했던 일은 알고 봤더니 술집 바에서 손님을 직접 응대하는 일이었고.

유니폼이라고 받아 갈아입은 옷은 야시꾸리한 이상한 옷이었다.

최혜성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즉시 그만두었다.

결국 그 일은 하지 않은 셈이었지만, 일은 그렇게 끝이 나지 않았다.

어두운 조명에서, 오픈이라며 바쁘다고 재촉에 못 이겨 서둘러 사인했던 근로계약서.

그건 대출계약서였다.

속아서 계약이 잘못된 점을 따지고 무효를 주장했지만….

'박 실장'이라는 남자가 보낸 몇 장의 사진.

아주 잠깐 그 '유니폼'을 입고 나왔던 찰나의 순간을 촬영해서 보내왔던 것이다.

박 실장은 마치 술집에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사진을, 최혜성의 주변인 모두에게 뿌리겠다며 협박했다.

최혜성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그곳에 사진을 뿌리며 방해할 것이라고도.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는 연락처 일체가 박 실장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최혜성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한 일 년 허리띠를 바짝 졸라맨다면 편의점 월급으로 마냥 못 갚을 액수는 아니었다는 점도 심리적으로 크게 작용했다.

결국엔 박 실장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매달 상환금으로만 편의점 월급의 80%가량이 들어갔다.

그로 인해 실제 손에 쥐는 돈은 매달 36만 원뿐.

식대와 생활비로 쓰기에도 빠듯한 액수였다.

월급을 받으면 허름한 고시원이라도 얻어 나가겠다던 원래 계획도 어그러졌음은 물론.

결국 구영수 집의 무단 투숙이 그처럼 길어질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그런데 최혜성은 이번 달 초에 내야 했던 상환분을 아직 내지 않은 상태였다.

이유는 하나.

이미 넉 달이나 갚아나가고 있었음에도, 예상과 달리 원금은 줄지 않았던 것이다.

도리어 빚은 원금의 배가 넘도록 늘어나 있었다.

박 실장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계산법으로 억지를 부렸다.

그때 최혜성의 상환 의지는 완전히 꺾여 버렸다.

그간에 갖다 바친 돈만 640만 원에 달했는데, 줄기는커녕 늘고 있었다니.

이후 최혜성은 박 실장의 연락을 무시했을뿐더러 그 번호까지 차단했다.

그리고는 모처럼 넉넉해진 주머니로 생애 첫 사치까지 부려보았다.

집 안을 평소 좋아하던 색으로 꾸며보기도 하고.

끼니도 더는 폐기 음식으로 때우지 않고, 멀쩡한 식재료를 사다가 제대로 된 요리를 해 먹기 시작했다.

박 실장이 사진을 유포하든 말든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자신은 어차피 고아로 자라왔던 것을.

그로 인해 몇 안 되는 지인들을 전부 잃는다 해도, 딱히 달라질 건 없을 거라며.

하지만 역시나 박 실장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진을 유포하는 대신 최혜성의 근무 시간에 편의점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당장 돈을 내놓지 않는다면 난장판을 피우리란 협박에 최혜성은 그만 굴복하고 말았다.

자신 때문에 죄 없는 고용주에게 피해가 가는 걸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ATM기에서 잔고의 전부를 뽑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최혜성은 편의점도 그만두었다.

그렇게 된 지가 불과 이틀 전의 일.

구영수에겐 차마 털어놓지 못한 진실이었다.

괜한 걱정을 끼치기가 싫었을뿐더러 실은 그만큼 친하다고 볼 사이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그에게 느끼는 고마움이 남다른 걸지도 몰랐다.

보육원 시절의 구영수를 떠올리자면.

좀처럼 남에게 곁을 내주지 않던 그의 무심함을 감안한다면.

분명 그 자리에서 쫓겨났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던 상황이었거늘.

몇 년 만에 다시 보게 된 구영수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일단 전에 비할 수 없으리만치 말수가 많아졌을뿐더러, 성격 자체가 퍽 가볍고 장난스러워진 느낌이었다.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자면 그야말로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가 아닐 수 없겠다.

그렇다고 한들, 최혜성은 사실 이제 정든 그 집을 떠날 생각이었다.

알려주지도 않은 편의점까지 찾아낸 박 실장이었다.

다음 상환일에 다시 연락이 닿지 않으면, 이번엔 이 집까지 찾아올 게 뻔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구영수에게 민폐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이 먼저 거처를 옮기는 게 맞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그 모르게 이미 개인 짐도 방 안에 다 싸 둔 상태였다.

이리저리 알아보니, 정부 지원으로 자신처럼 오갈 곳 없는 청년들을 일정 기간 받아주는 임시 거처가 있었다.

당분간은 그곳에 머물며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볼 참이었다.

물론 아까 20억이란 돈을 목격한 그 순간엔 잠깐이나마 눈이 돌아가긴 했었지만.

'내가 무슨 염치로 도움을 더 바라겠어.'

최혜성은 그렇게 욕심을 쳐냈고, 미련을 접었다.

그럼에도 외출 제의에 선뜻 응한 건, 돈이 탐나서가 아니었다.

은혜를 입은 처지이니, 떠나기 전 뭐라도 그에게 도움이 되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최혜성이 구영수를 따라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대형마트였다.

그 입구에서 최혜성은 빼곡한 글씨로 가득한 메모지를 건네받았다.

그건 다름 아닌 구매 리스트였다.

"이제부터 조를 나눠 쇼핑을 시작할 거야. 뭐가 많이 적혀 있긴 하지만 네가 카트에 담을 건 가벼운 거 위주로 정했으니까 너무 부담 갖진 말고."

"이, 이걸 다 살 거라고? 오늘 한 번에?"

"응. 자, 그럼 흩어지자."

"자, 잠깐. 근데 오빠 이거, 아무리 봐도 카트 하나에 다 안 들어갈 거 같아."

"일단 카트 하나 다 차면 나한테 톡해. 전화하거나."

"어 근데…. 오빠 번호를 모르는걸."

"아 참, 그렇지."

* * *

"앗 따거!"

나는 움찔하며 소리쳤다.

불현듯 내게로 집중되는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번호를 찍은 최혜성의 휴대폰을 다시 본인에게 되돌려주던 그 순간이었다.

"왜? 어디 벌레라도 물렸어?"

"어, 아냐. 아무것도. 암튼 그럼 이따 보자."

"응."

최혜성과 대화하는 중에도 내 주변으로 형성된 복잡한 감정의 기류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허탈.

분노.

시기.

질투.

경악.

등등의 적의 어린 눈빛들.

너 따위가 어떻게 그토록 어여쁜 여자 사람에게 번호를 따일 수 있느냐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자 침묵의 꾸짖음이겠다.

그러나 단언컨대, 나를 향한 그 적개심은 순전히 오해에서 비롯된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막말로 최혜성 같은 핵인싸녀가 나같이 흔해 빠진 외모의 남자를 이성으로 생각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지.

'어쨌든, 뭐.'

비록 오해로 빚어진 헤프닝에 불과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최혜성 덕분에 살아생전 처음으로 질투의 대상도 되어 봤으니 말이다.

그리고 딱히 해명은 필요 없을 듯해 보였다.

"...."

어느새 내 주변엔 아무도 남아있질 않았으니까.

이내 제 갈 길을 간 사람도 더러 있긴 했지만, 개중에 대다수는 아닌 척 은근히 최혜성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추종자들의 남녀 성비가 그렇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질 않다는 점이었다.

남자들의 이상형일 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워너비이기도한 존재임을 몸소 증명 중인 최혜성 되시겠다.

아무튼 피리 부는 소년 뺨치는 일행을 둔 덕분으로 나는 퍽 한적한 환경에서 카트를 끌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120만 원도 아니고 1,200만 원어치나 되는 발주 물량을 구비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듯싶다.

'그런데 대체 저 사람들은 뭐지?'

최혜성 말고 날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네 명의 사람들 말이다.

사실 그들의 기척을 처음 느낀 건 마트에 들어서기도 전부터였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었는데, 최혜성 덕분으로 잡신호가 사라지니 이젠 확연히 알겠더라.

'혹시, 관리청인지 뭔지에서 보낸 사람들인가?'

* * *

싸이킥의 능력은 미궁을 벗어나는 순간 1/10 수준으로 급감한다.

그렇다곤 해도 일반인에 비할 수 없으리만치 초인적인 존재인 건 마찬가지.

- 각성자 대응팀.

약칭 'STF'가 정예 중의 정예 요원으로 꾸려질 수밖에 없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UDT, UDU, 수색대, 특공여단 등등.

전군에서 선별한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을 더욱 혹독한 훈련으로 담금질해 인간 병기로 재탄생시킨 부대가 바로 STF인 것이다.

이번 구영수의 동향 감시엔 그런 STF내에서도 가장 고과가 뛰어난 요원 넷이 투입된 상태였다.

20대 회사원.

여고생.

배불뚝이 아저씨.

동네 백수.

그들은 동네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군상들로 분장하여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표적이 대형마트로 이동한 탓에 그들 역시 카트를 하나씩 끌며 쇼핑 중인 척 연기를 하는 중이었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모두는 표적에게 의심을 살 만한 그 어떠한 짓도 하질 않았다.

심지어는 마트에 들어선 뒤로 그쪽으론 눈길조차 제대로 준 적이 없을 정도였다.

대신 그들에겐 고성능 소형 카메라가 있었다.

가방에 달린 키링 등의 각종 액세서리로 위장한 카메라 렌즈 모두가 표적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 중이었다.

영상은 실시간으로 관리청 관제실 벽면에 달린 대형 스크린에 4분할 되어 송출되고 있었다.

개인의 사생활을 이렇게까지 침해해도 되나 싶은 장면이었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관리청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막말로 한호준 때처럼 갑자기 레드 크리스탈을 해외로 팔아치우기라도 한다면, 그 전보다 더한 비난의 화살이 관리청으로 쏟아질 테니까.

그 때문에 송출되는 영상은 4개에 불과했음에도 모니터링 요원은 그 배가 넘는 10명이나 배치되어있는 상황이었거늘.

"…걸린 거 같은데?"

"걸렸네요."

"그치? 내가 제대로 봤지?"

"네. 확실해요."

관제실 뒤편 간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수군대는 이들은 윤태호 국장과 오윤아였다.

약 10분 전쯤 불쑥 행차해서는 자리를 잡고 앉아 잡담이나 나누는 듯하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모니터링 요원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영상 속 특이점을 잡아낸 건 오히려 그 두 사람이었으니.

윤태호 국장은 그 즉시 송출 화면을 멈추게 한 다음 재생되던 영상의 타임라인을 1분 전쯤으로 되돌렸다.

그러자 정말로 어느 한 찰나의 찰나에, 구영수의 시선이 정확히 요원들의 방향을 흘끗 훑고 지나가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그에 상관의 명령에 따르면서도 미심쩍어하던 요원들 모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윤태호 국장이라고 그 심정이 다를 바는 아니었지만.

"여태 수행한 서른두 번의 작전에서 단 한 번도 각성자 놈들에게 들킨 적이 없던 애들인데, 거참…."

심지어 저들의 주요 표적 중 상당수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고레벨의 싸이킥들이었다.

한데 그런 괴물들조차 아예 인지하지 못했던 미행 사실이 최초로 들통나고야 만 것이다.

그것도 고작 15레벨 로머에게 말이다.

"오 집행관. 뭐라 말 좀 해 봐. 지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그래서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히든 클래스라고."

"아니. 히든은 히든인데 활쟁이 히든이라며? 그거랑 지금 이거랑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그러게요."

까도 까도 뭐가 더 깔게 계속 나오는 양파 같은 사내.

영상 속 구영수를 바라보는 오윤아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한층 더 짙어졌다.

25화.

편돌이는 눈치가 빨라야 한다.

아니, 정정한다.

편돌이 짓을 하다 보면 눈치가 빨라진다.

나 같은 숙련돌은, 심지어 손님이 문을 밀고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이미 상대의 성격과 기질을 9할쯤은 파악해낼 수 있다.

세상 온갖 진상이란 진상은 다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발달한 육감이겠다.

그래서일까.

각성자가 된 이후로 이상하리만치 감각이 더 날카로워진 느낌이었다.

몬스터들과 어울려 지낼 땐 단지 그 특수한 환경이 날 예민하게 만든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감각 자체가 업그레이드된 것 같았다.

별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미행꾼들을 발견해내니 말이다.

'이거 완전 각성자가 아니라 갓성자잖아.'

아무튼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그래서 이제 어쩐다?'

꼬리가 달린 걸 뻔히 아는데 그냥 두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영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단 말이다.

짧은 고심 끝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인별그램 팔로워 수 5천만에 빛나는 핵인싸 그녀에게 DM을 보냈다.

그러자 잠시 후, 정말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기척 일체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완전히 마트를 빠져나간 건 아니었지만.

* * *

최혜성은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이었다.

평일 오전의 대형마트 치곤 지나치게 붐비는 주변 상황 때문이었다.

그 기현상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최혜성이었다.

물론 평소와 달리 마스크는커녕 야구 모자마저 챙겨 나오지 못한 자신의 민모습이 다소 신경 쓰이고는 있었지만.

'급하게 따라 나온다고 로션만 대충 발랐는데, 좀 민망하네. 이렇게 사람 많을 줄 알았으면 최소한 파우더라도 챙겨 나오는 건데.'

그래서 최혜성은 더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얼른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완수하고 구영수와 합류할 생각으로 물건 탐색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애씀은 곧 허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레 귓속으로 파고드는 걸걸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여어-. 이게 누구야?"

"...!"

순간 최혜성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단번에 정체를 알 수밖에 없는 음성이었다.

박 실장, 아니 박정수 실장.

바로 그자였다.

"야, 혜성아. 일하는 가게도 이틀이나 무단결근하고 해서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서 널 다 보게 된다?"

카랑카랑한 음색에 들으라는 듯한 커다란 성량.

박정수의 목소리는 주변의 이목을 일거에 집중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최혜성을 향한 그들의 눈빛 대부분은 종전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그것도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눈빛으로.

건달로 밖에는 안 보이는 남자가, 굳이 '일하는 가게'라는 워딩을 골라 쓴 탓이었다.

박정수는 그렇게 교활한 언변으로 주변의 시선을 이용해 최혜성을 압박했다.

그럼에도 정작 당사자는 그런 외부의 시선 따위에 전혀 관심조차 없었지만.

'어떻게 알고 여길 또….'

최혜성을 동요케 하는 건 오직 내적인 자괴감뿐이었다.

저 몰염치한 남자가, 함께 온 구영수에게 그 어떤 무례와 피해를 끼칠지 몰라 두려웠다.

"아니. 반갑다고 인사는 못 해 줄망정, 못 볼 거라도 본마냥 뭐 그리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어?"

"...."

최혜성은 뭐라도 대꾸를 하고 싶었다.

"혜성아. 너 설마, 내 돈 떼먹고 튀려던 건 아니지?"

하지만 아무리 목을 쥐어 짜내려 해도 말을 듣질 않았다.

"야, 최혜성이. 어른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하다 못 해 고개라도 좀 끄덕이든가."

턱은 물론 주변 근육 전체가 경직되다 못해 경련을 일으키는 통에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 이 경우 없는 년 좀 보소. 굽신대면서 내 돈 빌려갈 땐 언제고, 이젠 아예 쌩까시겠다?! 아주 시발. 이래서 채무자가 상전이란 소리가 나오는 거지. 역시 고아라서 가정 교육이 덜 된 건가? 응? 그런 거야? 아 대답 좀 해보라고오오!"

그라데이션마냥 점진적으로 커지던 박정수의 목소리는 급기야 호통으로 끝을 맺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되바라진 고함의 충격과 억울함으로 인해 최혜성은 신체 일부의 통제력을 되찾았다.

곧 분노가 실린 손찌검이 박정수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물론 산전수전 다 겪은 박정수에겐 너무도 쉽게 예상이 되던 상황.

그는 슬쩍 반 보가량 걸음을 뒤로 물리며 손쉽게 사정권에서 벗어나는 듯 보였다.

'크큭. 허술한 년….'

철썩-!

"...?"

모두의 예상과 달리 박정수는 정타로 뺨을 맞았다.

그 소리가 어찌나 찰지게 울려 퍼졌는지, 맞은 사람은 물론 때린 최혜성조차 그 타격감에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을 정도였다.

뜻밖의 손찌검이 성공한 데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런 시발, 어떤 새끼야!"

박정수는, 자신을 때린 최혜성은 그대로 놔둔 채 뒤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쳤다.

자신의 등 뒤에서 운신을 방해한 누군가를 향한 분노였다.

무언가에 막혀서 물러서질 못해 뺨을 맞게 된 것이다.

한데 이윽고 완전히 돌아선 박정수는, 화를 내긴커녕 오히려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빠, 이제 그만 좀 해!"

"...?"

"형, 가족 생각해서라도 정신 좀 차려요!"

"...??"

"삼촌, 제발 병원부터 가자!"

"...???"

* * *

말했듯이 내 감각은 한껏 예민해져 있는 상태다.

그래서 실은, 최혜성을 따르는 무리 중에 유독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남자를 감지할 수 있었다.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 사이의.

10년 내로 가발을 맞추거나 최소 두피 문신을 시술받을 가망이 높아 보이는.

커다란 들창코가 인상적인 남자의 존재를 말이다.

그럼에도 그 남자를 가만 내버려 뒀던 건, 그를 억압하거나 구속할 그 어떠한 명분도 내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막말로 대뜸 불러 세워서는 '당신 인상이 더럽고 느낌이 안 좋으니 얼른 꺼지쇼'라고 말한다면 세상 사람 그 누가 내 편을 들어주겠냐는 거지.

거기다 솔직히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이 감지력을 백 퍼센트 신뢰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잡음이 걸러지는 덕분으로 미행의 존재감이 더 또렷해진 데다가, 결정적으로 오윤아에게 메시지를 보낸 직후 그들이 물러가는 걸 보고는 비로소 확신이 생겼던 거지.

그래서 더는 망설일 거 없이 그 최혜성 스토커를 잡으러 출발시켰다.

내가 직접 움직인 게 아니라, 날 미행하던 스토커들을 그쪽으로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오윤아에게 부탁해서 말이다.

이걸 사자성어로 뭐라 하더라?

* * *

- 유나 님

- 네?

- 님들 미행 들킴

- 죄, 죄송합니다.

- 변명 않고 빠른 인정하셔서 이번엔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민망해라. 감사해요.

-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 네! 뭐든 말씀만 하셔요!

.

.

.

- 에?

"이이제이以夷制夷라…. 제법이네. 그런 머리도 굴릴 줄 알고."

오윤아에게서 휴대폰을 넘겨받아 DM 내용을 확인한 윤태호 국장의 첫 마디였다.

"그렇다는 건 우리 요원들이 오랑캐란 말씀이신 건가요?"

"시끄러. 말이 그렇다는 거지. 간만에 문자 좀 읊었기로서니 쓸데없는 거로 트집을 잡아, 잡기는."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뭘 어떻게 해? 애초에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기는 한가?"

좋은 인상을 심어줘도 모자랄 판국에 초장부터 미행 질이나 하다 걸려버렸으니.

윤태호 국장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현장 요원들에게 연결된 마이크를 켰다.

"현장 철수. 타깃 변경. 작전 변경. 내용은 메시지로 하달, 이상."

윤태호 국장은 이어 부하를 시켜 자신이 생각해 낸 시나리오를 그들에게 문자로 전송시켰다.

그러자 옆에서 상관이 구술하는 내용을 듣고 있던 오윤아가 넌지시 말했다.

"괜찮으시겠어요? 관리청에서 민간인을 정신병자로 몰아 구금했다는 게 나중에라도 밝혀지는 날엔…."

"그깟 구더기 무섭다고 벌벌 떨면 장 못 담그지. 그딴 거 발각되든 말든 1도 신경 안 쓰이는데, 진짜 무섭고 족같은 게 뭔 줄 알아?"

"…잘못도 없는데 욕 처먹는 거?"

"빙고! 내가 진짜… 저번에 한호준 건으로 내 사생활까지 부관참시했던 기래기 새끼들 이름 다 살생부에 적어놨거든? 갈 때 가더라도 퇴임 전에 그 새끼들 반드시 미궁에 다 처넣고 나갈 거야."

"각성자도 아닌 국장님이 무슨 수로요?"

"가능해. 임 집행관이 돕기만 한다면."

"퉤!"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오냐오냐하니까!"

* * *

박정수는 조현병 환자로 몰려 마트 밖으로 끌려 나갔다.

대체 무슨 미친 소리냐며 난동을 피우려 했지만, 메소드 연기에 심취한 요원들의 완력을 당해낼 순 없었다.

그렇게 소란이 일단락되고 나니, 일대엔 영 불편하고 어색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소동을 구경하며 최혜성을 오해했던 자들의 머쓱한 감정들이 자아낸 분위기였다.

정작 당사자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터럭만큼도 신경 쓰지 않고 있음에도 말이다.

거기다 최혜성이 주의를 분산시키지 못할 이유는 얼마든지 더 있었다.

갑작스레 머리 위를 덮어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

최혜성은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조금 놀랐던 건 전혀 갑작스러웠음에도 놀라거나 떨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왠지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지.

"최혜성, 집에 가자."

"어? 미, 미안. 난 이거 다 담으려면 아직 한참 더 남았는데…."

"나도 거의 못 골랐어."

"그럼, 왜…?"

"그냥 갑자기 피곤해서."

"피곤해서?"

"응. 피곤해서."

"…알았어."

최혜성은 채 반도 담지 못한 자신의 카트를 밀며 구영수를 졸졸 뒤따랐다.

'분명 오빠도 봤을 텐데. 내가 창피당하는 걸.'

예상치도 못한 천운으로 상황이 수습된 것까진 좋았다만.

구영수에게 그 수치스러운 모습을 들켰다는 생각이 드니 별수 없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하기에 못 본 척하는 그의 무심한 배려가 유독 더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고.

그 상황에서 호들갑스러운 참견을 당했다면 얼마 남지도 않은 자존감마저 너덜너덜해졌을 것이다.

오히려 이렇듯 내색않고 곁을 지켜주는 게 심리적 안정감을 회복하는 데엔 훨씬 도움이 됐다.

그렇게 가만히 뒤따르는 중에 최혜성은 자꾸만 그의 뒷모습에 눈길이 갔다.

그 너른 등판에, 또 그만큼 너른 품에 기대어 있으면 얼마나 든든하고 편할까 하는 그림을 잠시나마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하였지만.

이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고개를 흔들어 망상을 떨쳐내는 최혜성이었다.

'지금 내 주제에 무슨….'

* * *

편돌이는 눈치가 빨라야 한다.

때로는 어설픈 조언이나 충고 따위보다 차라리 닥치고 있는 편이 더 위로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바로 지금이니!

다행히 예상은 적중한 듯했다.

가만히 놔두니 역시나 알아서 진정되는 최혜성이더라.

그가 무슨 이유로 최혜성에게 접근했는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치웠으니 된 거다.

"...?"

그런데 막 계산대를 빠져 나오는데 윤아 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아까 요원들에게 끌려 나간 박정수란 남자가 어떤 인간이고, 그가 왜 최혜성을 괴롭히는지 들을 수가 있었다.

역시 갓무원인가.

"…근데 개인 사찰은 불법 아닌가요?"

- 어머. 국장님. 전화 받아보세요. 여기 구영수 님이 하실 말씀 있으시대요.

"...?"

- 예, 전화 바꿨습니다. 크흠. 큼. 에, 저…. 그…. 해서 어떻게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뭘요?"

- 그 박정수라는 쓰레기 말입니다.

아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혹시 미궁으로 분리수거 가능한가요?"

- 오오! 물론입니다. 그 정도야 되고 말…!

- 안 돼요! 국장님.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핸드폰 이리 내요!

- 씁. 거 가만 있어 봐. 어허! 야, 오 집행관! 이거 하극상이야!

26화.

마트를 나서는데 야외 주차장 쪽이 시끌벅적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니 웬 구급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어떻게든 차에 태워지지 않으려 발악 중인 남자, 박정수가 보였다.

제법 덩치가 있는 편이었지만, 자고로 쪽수엔 장사가 없는 법.

거세게 저항했지만 박정수는 끝내 구급차에 실렸다.

그리고 차가 출발하기 전, 우연히 그들 요원 중 한 명과 내 눈이 마주쳤다.

"...."

나는 엄지를 척 들어 보였지만, 그는 어쩐지 애써 못 본 척 눈을 깔았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가?'

* * *

구급차 내부엔 한동안 무거운 적막감만 맴돌았다.

간이 침상에 눕힌 타깃은 수면제를 주입 당해 의식이 없는 상태.

그 주변 양쪽으로 둘씩 나눠 앉은 요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좀처럼 입을 열질 못했다.

"...."

나름 드높았던 자부심이, 첫 작전 실패로 크게 꺾인 탓이었다.

거기다 각성자도 아닌 민간인 따위나 압송하려 팔자에도 없던 상황극까지 펼치다니.

'대체 어떻게 발각된 거야?'

팀장은 여전히 이 현실이 좀처럼 납득되질 않았다.

바로 직전에 투입되었던 작전에서도 무려 2박 3일간이나 천하의 한호준을 들키지 않고 따라다녔던 자신들이 아니었던가.

'차라리 어떤 실수라도 했다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을 건데.'

전해 듣기로 타깃은 동시다발적으로 자신들 네 명이 위치한 방향을 포착해냈단다.

말인즉슨, 그는 오로지 본연의 능력으로만 감시자들을 알아차렸다는 거다.

그간 내로라하는 싸이킥들조차 눈뜬장님으로 만들어버리던 천하의 STF 1팀 대원들을 상대로 말이다.

그 때문에 작전 실패를 알리는 관제실의 무전은 얼마간 인지부조화를 불러일으켰다.

어쩔 수 없이 명령에는 따르는 중이었지만, 그 내면에선 끊임없이 당면한 현실을 받아들이질 못했다.

혹여 자신들이 실패한 게 아니라, 관제실에서 오판을 내린 건 아닐까하며.

그러나 그 일말의 가능성마저 깨끗이 사라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원 타깃이었던 구영수가, 마트를 나서며 자신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까.

'제기랄.'

그것은 분명 어떤 의미가 담긴 제스처였다.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돌렸지만, 그 의미는 분명했다.

실패자들인 자신을 향한 조롱이.

팀장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직업에 회의감이 들었다.

'아… 죽고 싶다. 이거 쪽팔려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지?'

당연한 소리겠지만, 지금 이 구급차의 행선지는 병원이 아닌 관리청사였다.

차에서 내리게 되는 순간, 좋든 싫든 본청 사람들과 마주쳐야 한단 것이었다.

'지금쯤이면 소문이 쫙 다 퍼져서 모르는 인간이 없을 텐데.'

그러한 염려가 비단 팀장만의 몫은 아닌 듯했다.

나머지 팀원들 역시 시시각각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가기만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팀장은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당장은 그들을 위로할 어떠한 말도 떠오르질 않는 탓이었다.

한데 그러던 중, 불현듯 차량 내부에 달린 스피커에서 모두에게 위로가 되는 뜻밖의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 치칙. 아, 아. 나 국장이다. 다름이 아니라 작전 수행하느라 고생 많았고, 행여 미행 걸린 거 때문에 쪽팔리거나 울상 죽을상 하고 있다면 그럴 필요 없다. 어쩌면 오늘 너희들이 따라다닌 타깃은…. 어쩌면, 음…. 아마도 머지않은 미래에….

어쩐지 영문을 모르게 자꾸만 말을 질질 끄는 윤태호 국장.

말꼬리를 흐리던 그가 던진 마지막 몇 마디에, 모두는 기함하고 말았다.

심지어는 너무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애꿎은 박정수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퍽, 퍽!

한차례 격랑과도 같은 충격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엔 그 어떤 염세적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처럼 텅 비워진 내면에, 영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자부심이 다시금 몽글몽글 피어오르기 시작했음은 물론이었고.

* * *

"으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박정수가 눈을 떴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던 박정수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어후-. 시발, 꿈이었네."

개꿈도 그런 개꿈이 또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웬 미친 연놈들이 가족이랍시고 나타나서는, 오히려 자신을 미친 인간 취급을 하는 것이었다.

급기야는 그들에 의해 강제로 구급차에 태워지기까지 했다.

분명 꿈이었음에도 생시마냥 선명하게 떠오르는 당시의 순간들….

"으으으-."

박정수는 진저리를 치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땀 범벅으로 후줄근한 몸부터 얼른 씻을 참이었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서던 박정수는 이내 그 자리에서 멈칫 굳어져 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이해할 수 없는 광경 때문이었다.

"...?"

코끝을 찌르는 알싸하고 구수한 냄새.

가스레인지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정겨운 뚝배기.

그리고 아일랜드 식탁 위로 보이는 정갈한 한상 차림까지.

'뭐, 뭐야?! 시발, 아직도 꿈속인 거야?'

박정수는 마흔 살이 넘도록 독신이었다.

가족은커녕 평소 왕래하는 친척도 없었다.

이처럼 누군가 밥을 차려 줄 사람 자체가 주변에 있을 리 만무하단 것이다.

고로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윽!"

그러나 막상 꼬집어 비튼 허벅지 살은, 악 소리가 나도록 아프기만 했다.

꿈치고는 너무나도 생생한 고통.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박정수는 의문을 잠시 접어둔 채 식탁으로 다가갔다.

숙주나물, 진미채, 소시지 부침 등등.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반찬들이었다.

거기다 평소 없어서 못 먹던 찰밥에 청국장까지.

군침이 돌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상황이었다.

의문이고 나발이고….

'에라 모르겠다.'

솟구치는 식욕에 이성의 끈을 놓은 박정수가 허겁지겁 식사에 돌입했다.

'와- 겁나 맛있네.'

입에 넣고 씹는 족족, 그 무엇 하나 도파민이 폭발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으니.

그야말로 생애 최고의 식사가 아닐 수 없었다.

뜻밖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기 직전까진, 그랬다.

"우리 오빠. 잘 먹네."

"...?"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걸. 10년도 넘게 밥 한 번을 못 차려줘서 내가 얼마나 서운했는지 알기나 해?"

"...!"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싱그러운 음색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박정수의 안색은 되레 혹한을 맞은 듯 파리하게 굳어졌다.

살아생전엔 결코 들을 수도, 들려서도 안 될 음성인 까닭이었다.

'이 목소리는….'

자신이 손수 암매장한 옛 연인이었으니까.

굳이 고개를 많이 돌릴 필요도 없었다.

어느샌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였다.

깍지 낀 두 손 위에 턱을 괸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였다.

얼굴 대부분이 썩어 문드러진 모습을 하고서.

"...!"

박정수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갑작스러운 극심한 충격 탓으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져 버렸다.

도망치기는커녕 비명조차 내지를 수가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황급히 눈만 겨우 내리깔긴 했지만….

"...?!"

직전까지 맛있게 먹던 음식들은 다 어디 가고, 접시 위엔 흉측한 벌레들만 꿈틀대고 있었다.

거의 다 비운 밥그릇엔 쌀알 대신 구더기가.

국그릇엔 청국장이 아닌 똥물이 담겨져 있었다.

"으, 으아아악!"

박정수는 그제야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떴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던 박정수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어후… 시발, 그럼 그렇지. 꿈이었구나."

개꿈도 그런 개꿈이 또 없….

"오빠, 왜 그래? 괜찮아?"

"으, 으아아아악!"

* * *

STF 1팀이 본청에 도착했다.

중정을 가로지르는 그들에게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예상대로 작전 실패 소문이 쫙 퍼진 모양이었지만.

정작 1팀은 전혀 뜻밖의 얼굴들이었다.

주눅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다 못해 기세등등한 모습들.

그 괴이한 태도는 대다수로 하여금 설왕설래를 불러일으켰다.

관리청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서도 어찌 그리 떳떳하고 뻔뻔할 수가 있단 말인가.

건물 최상층부에선 그들을 그처럼 철면피로 만들어 준 남자가, 창가에 선 채로 자신의 작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복잡 미묘해 보이는 눈빛으로.

"…내가 너무 오버 쌌나?"

"그런 면이 없잖아 있긴 했죠."

"잠을 못 자서 그래, 잠을. 수면이 부족하니 사람이 너무 감성적이 되어버리잖어."

작전 실패로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있을 부하들에게 일장 격려사를 건넨 행동까진 국장으로서 흠잡을 데 없던 처사였었다.

하지만 말이 길어지던 와중에서 그만 이불 킥을 차고도 남을, 낯간지러운 멘트를 날려버리고 만 게 문제였다.

"줴군들은, 어쩌면 전설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목격자로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른돠아아."

"야!! 내가 언제 그렇게 느글거리는 톤으로 말했어?!"

"그러니 줴군들이여…! 그 명예롭고 마땅한 실패를 기꺼이 순응하도록."

"어우, 저걸 콱 그냥!"

한달음에 소파로 다가간 윤태호 국장이 오윤아를 향해 몇 차례 주먹을 날렸다.

그 한 방 한 방이 진심 펀치였지만, 결코 맞아 줄 리가 없는 그녀였다.

결국 윤태호는 쉐도우복싱만 하다가 제풀에 지쳐 헉헉거렸다.

그러자 오윤아가 진지한 기색으로 질문을 건넸다.

"그나저나 어쩌실 거예요?"

"헉, 헉. 뭘 어째?"

"의무실에 모셔다 놓은 쓰레기요."

"아-. 박… 뭐였더라?"

"박정수요."

"어, 그래. 박장수."

"장수든 정수든 그래서 어쩌실 거냐고요."

"어쩌긴, 너도 아까 들었잖아?"

태연하게 되묻는 윤태호 국장과 전혀 그렇지 못한 반응의 오윤아.

"설마 진짜 유기하시게요? 미궁에다?"

"너. 미궁이 출현하고 난 뒤로 전 세계적으로 매년 실종 사건이 얼마나 더 늘었는지 아냐?"

"모릅니다."

"맞춰봐."

"한… 30%?"

"땡. 230%다. 2.3배나 더 늘었대."

"와-. 진짜요?"

"그도 작년 치 통계고, 올해는 9월인데 벌써 전년 기록을 추월했단다."

미궁은 30분 간격으로 내부 환경이 리셋된다.

막말로 누군가 나쁜 의도로 그곳에 사람을 두고 빠져나오면, 그 실종자를 영원히 찾을 방도가 없다는 의미였다.

물론 거의 모든 싸이킥들이 국가 기관의 관리 감독을 받는 환경에서 어떻게 그러한 반인류적 범죄 행위가 자행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법도 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해 각성자는 비단 싸이킥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의로 각성 사실을 감추거나 라이센스 발급을 받지 않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로머였다.

세계 각국은 그 로머들의 규모를 전체 각성자의 약 8~10% 정도로 추측하고 있었다.

숫자로 따지면 대략 2만여 명에 달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인 것이다.

물론 그들 전부를 악인 내지는 범죄자로 취급해선 안 될 말이겠지만.

그들 중에 그처럼 미궁의 출입 자격을 악용하는 자들이 존재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관리청에 블랙리스트로 등재된 로머 중 가장 흔한 범죄 혐의가 다름 아닌 인신매매였으니까.

"아니, 전 아무리 생각해도 걔네 뇌 구조를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요. 막말로 미궁 한 타임을 뛰어도 최소 10억은 떨어지는데, 그깟 돈 몇천에 의뢰를 받아서는 그런 끔찍한 짓들을 왜 저지르는 건지, 참."

"자신의 손으로 인명을 재단할 수 있음에서 오는 쾌락을 즐기는 거지. 그도 아니라면 그냥 미친놈 사이코패스거나."

"그러니까 국장님은 그런 미친놈 사이코패스가 되지 마시라고요."

오윤아의 일침에도 윤태호 국장은 그저 쓴웃음만 흘릴 따름이었다.

박정수.

전과 8범.

게다가 놈이 저지른 범죄 중에 성폭력이 4회였다.

그런 암적인 존재가 버젓이 이 사회에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 사실에, 윤태호 국장은 씁쓸하다 못해 역겨움까지 느낄 지경이었다.

아내와 두 딸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정말 할 수만 있다면 각성자를 고용해 놈을 이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마음만 먹는다면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로머 한둘쯤 수배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후우-."

괴물과 싸우는 자,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 유명한 니체의 격언을 떠올리며, 못내 미련을 털어 낸 윤태호 국장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검경에 협조 요청해서 털만한 거 다 털고, 깨어나면 그쪽으로 이관해."

"근데 그렇게 잡아넣어 봤자 얼마 안 살고 나올 텐데. 나중에 가서 복수한다 어쩐다 날뛰면 어떡해요?"

"지금 날 걱정해 주는 거야?"

"아뇨. 국장님 말고, 혜성 양이요."

윤태호 국장의 미간에 짙은 골이 파였다.

"아니! 그렇게 걱정이 되면 내가 미궁에 처넣는다 어쩐다 할 때 말리지나 말든가? 왜 또 딴지인 건데? 어? 어?!"

"쩝. 할 말 없네요. 죄송함다."

막상 상관의 명에 따르지나 오윤아도 찝찝하긴 마찬가지였다.

정말 그런 쓰레기에게 더 정당하고 제대로 된 벌을 줄 방법이란 없는 걸까?

그러한 정의 구현의 방법을 고뇌하는 탓으로 서로 간에 정적만이 감돌고 있을 때.

삐이-.

갑작스레 인터폰이 울리더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소식이 두 사람을 벌떡 일으켰다.

[국장님. 누가 국장님을 꼭 좀 뵙고 싶다는데요. '구영수'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

27화.

집에 도착해서도 최혜성은 여전히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듯한 눈치였다.

본인은 애써 덤덤한 척 굴고 있었지만, 연기인 게 티가 날 정도로.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는 길에 청심환이라도 하나 사 먹일걸 그랬나.

"오빠, 어디 가게?"

"잠깐 앞에 좀. 금방 올 거야."

지금이라도 약국에 다녀오려 운동화를 구겨 신던 참이었다.

문을 나서려는데 불현듯 전에 봤던 고객 스킬 중 하나가 떠올랐다.

'몽… 뭐시기 였는데?'

즉시 눈앞에 고객들의 스킬 목록을 띄우고, 주르륵 훑어보기 시작했다.

곧 찾고자 하던 스킬이 눈에 들어왔다.

-

[스킬 : 몽마夢魔]

- 대상을 잠들게 합니다.

- 꿈을 조작해 대상의 특정 감정을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 스킬 성공률은 대상의 레벨과 스텟에 영향을 받습니다.

- 72시간 내로 같은 대상에게 중복 발동할 수 없습니다.

- 유효 대상 레벨 : +5

- 소모 마력 : 건별 상이

- 감정 목록(소모 마력)

불안(10), 우울(8), 분노(8), 성욕(5), …. 희망(250), 기쁨(240), 용서(80), 용기(92)….

-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몽마는 서큐버스 아리아의 스킬 중 하나였다.

이 스킬이 갑자기 떠오른 건, 몽마가 최혜성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증폭 가능한 감정 리스트엔 의외로 희망, 용서, 용기와 같은 긍정적인 성격의 감정들까지 존재했으니까.

'몬스터가 사용하는 스킬이라기엔 영 결이 맞질 않는 성격이 아닐 수 없겠다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방금 언급된 감정 증폭은 여타 다른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에 비해 말도 안 되는 마력 소모 값을 요구로 하고 있었다.

불안(10), 우울(8)….

희망(250), 기쁨(240)….

마력 소모 값에 이렇게 극단적인 차이를 둔 걸 보면, 후자 쪽은 그냥 구색 맞추기용으로 구비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 내 수준에서 희망이나 기쁨 같은 감정 증폭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상태창에 표기된 내 마력은 풀차징 된 상태인데도 꼴랑 100에 불과했으니까.

결국 당장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용기(92) 또는 용서(80)뿐.

그 둘 중에 내 시선은 자꾸만 용서 쪽으로 쏠렸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태생이 흙수저 아니랄까 봐, 본능적으로 좀 더 저렴한 쪽에 끌리는 것일 뿐.

"…그래도 이건 아니지."

유나 님을 통해 들은 박정수란 자는 인간 말종이었다.

타인을 기만하고 약점을 잡아 제 잇속을 챙기는 부류.

"용서는 무슨."

피해자인 최혜성에게 그런 쓰레기를 용서하라 종용한다는 건 상식과 양심에 반하는 몹쓸 짓이다.

아무튼 결심이 선 나는 곧장 신발을 벗어 던지고 최혜성의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혜성아, 잠깐 시간 돼?"

"응. 왜?"

곧 방문이 빼꼼 열렸다.

한데 막상 최혜성의 얼굴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스킬 사용법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탓이었다.

한국인 종특.

설명서 제대로 안 봄.

"…지금부터 당신은 잠이 옵니다."

"나 안 졸린데?"

"…눈이 감깁니다."

"갑자기?"

"…낮잠 자면 500원."

"...?"

그 어떤 멘트에도 최혜성은 결코 유의미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 아무 말 대잔치가 마냥 쓸모없던 건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을 번 덕분에 홀로그램 창을 띄워서 컨닝을 완수할 수 있었으니까.

"그대, 몽계로의 외유를 허하노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맥이 살짝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력이 빠져나가는 징후였다.

다행히 직전까지 말똥키만 하던 최혜성의 눈도 스르륵 감기는 모습이었다.

이 중 2병스러운 멘트에도 별 반응 없이 날 쳐다보기만 했다면, 쪽팔려서 한동안 집에 못 들어왔을 거다.

"...."

최혜성은 선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나는 위태롭게 기우뚱대는 그 몸을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이번엔 실수하지 않으려 설명서를 다시 한번 꼼꼼히 정독했다.

흥미롭게도 감정 증폭 방법엔 수동 모드와 오토 모드가 존재했다.

수동 모드에선 내 정신체가 직접 대상의 꿈속으로 들어가 그 세계를 내 임의로 조작할 수가 있었다.

마치 영화 감독처럼 주어진 주제에 걸맞은 상황을 연출해나가는 식인 듯했다.

반면 오토 모드는 문자 그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서 다 해주는 식이었고.

수동 모드의 방식이 퍽 흥미롭긴 했지만, 대상이 꿈을 꾸는 시간 동안 시전자 역시 그에 메여있어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내가 별 고민 없이 오토 모드를 선택한 이유겠다.

감정 증폭 방법은 간단했다.

수인을 맺은 두 손을 대상의 이마 위에 두고 주문을 외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 쉬운 짓을 못 해서 머뭇대고 있는 나였다.

[그대 몽상에 ( )의 늪을 파종하노니, 부재한 한계를 거름 삼아 생육하고 번성하여 본연으로 정주하여라.]

'하… 진짜 어떤 새리가 이런….'

주문이랍시고 만들어 놓은 대사들이, 어째서 죄다 중 2병 말기스럽냐고.

뭔가 그럴싸하게 보이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다 갖다 붙인 모양인데.

작문 센스가 없으면 차라리 어디 마케팅 업체에 외주를 주든가 할 것이지, 거참….

아무튼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문 채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드 믕상에 으츨 시머…."

[주의 : 부정확한 발음은 스킬이 취소되거나 성공률을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알았다고!"

* * *

"후우-."

감정 증폭 시술을 겨우 마치고선 거실로 나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놈의 발음을 가지고 어찌나 딴지를 걸든지, 무려 8번이나 다시 주문을 왼 끝에 간신히 스킬이 발동되더라.

부디 잠에서 깨어나면 보다 강인한 아이로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그나저나, 그래서 이제 어쩐다?"

최혜성의 심리 케어와는 별개로, 아직 해결 못 한 근본적인 문제가 남았다.

어떤 식으로 박정수와의 악연을 정리하느냐 하는 문제 말이다.

가장 깔끔한 방식은 역시나 미궁 어디 한구석에다 놈을 던져놓고 나오는 거겠지만.

그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리스크가 컸다.

가뜩이나 미행이 붙을 정도로 국가 기관에서 주목하고 있는 처지인데, 그런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간 곧바로 발각되어 쇠고랑을 차고 말 거다.

그렇다고 마냥 법의 심판에만 맡겨 두자니, 솔직히 썩 기대가 되질 않았다.

이미 전과 8범인 인간쓰레기였다.

그에 오물 몇 사발 들이붓는다고 대체 뭐가 달라지겠냔 거다.

생각할수록 빡침이 깊어지던 차.

"아무래도 안 되겠다."

결국 그 분연함이 나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택시를 불러서는 남산으로 향하게끔 만들었다.

목적지는 관리청이었다.

그 쓰레기 자식을 데려간 곳 말이다.

* * *

박정수가 마침내 깨어났다.

그가 잠들어 있던 시간은 고작 3시간 정도.

한데 얼굴은 직전에 비해 10년은 더 폭삭 늙어 보였다.

파리한 안색과 퀭한 눈빛.

거기다 수시로 소스라치며 내뱉는, 의미 모를 횡설수설까지.

- 내, 내가 잘못 했어. 경아야. 오, 오지마. 으아악!

아무래도 섬망 증세를 겪는 듯했다.

박정수가 깨어났음에도, 그를 아직 풀어주지 못하고 있는 이유였다.

CCTV를 통해 대형 TV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윤태호 국장으로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활쟁이라며?"

"활쟁이 맞다니까요."

"그럼, 지금 저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활쟁이 겸 주술사?"

"미친놈인가?"

"그쵸, 구영수 능력이 좀 미쳤긴 했죠?"

"아니. 너 말이야,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소리냐고."

"...."

지금으로부터 30분 전쯤.

구영수가 의무실에 들렀었다.

놈의 면상을 보고싶단 이유에서였다.

박정수에게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윤태호 국장은 이를 수락했었다.

그리고 구영수도 약속을 지켰다.

그가 의무실에 머문 시간은 불과 1분 남짓.

한데 그 직후부터 박정수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마치 악몽을 꾸기라도 하는 듯 수시로 몸을 들썩이며 괴로워하더니만.

얼마 뒤 깨어나서는 저렇게 사람이 확 바뀌어버린 것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봐도 구영수의 소행이 틀림없는 상황.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의문만 더욱 짙어졌을 따름이었다.

활을 다루는 자가 어찌 저주술까지 섭렵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많고 많은 각성자 중에서 겸직의 사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만.

그조차 비슷한 범주 내에서의 변칙적인 겸업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하물며 올 마스터 웨폰인 오윤아조차 '물리 계열 한정'이라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하거늘.

"그렇게 궁금하시면 직접 물어보시죠?"

"아니? 네가 물어봐."

"아뇨? 국장님께 양보할게요."

"아니? 이건 명령인데?"

"아뇨? 때려칠 건데요?"

"혹시 너 티발 씨니?"

"우리 국장님, 젊게 사시네. 그런 유행어는 또 언제 배우셨담?"

구영수는 현재 측정실에 가 있었다.

싸이킥 라이센스를 발급받고자 정식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엔 시큰둥해다가, 세금 감면 등의 라이센스 획득 시 받게 되는 각종 혜택을 알려주었더니 싱거울 정도로 냅다 미끼를 물더라.

전대미문의 능력과 전혀 그렇지 못한 가벼운 성격.

구영수는 그처럼 속단하여 함부로 그 어떤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존재였다.

'그 정도 능력이면 하다못해 어깨에 힘 좀 들어갈 법도 한데….'

그 사람의 본성을 알려거든 돈과 권력을 쥐여줘 보란 말이 있다.

본연의 능력이나 그런 건 다 차치하더라도, 구영수는 무려 레드 크리스탈의 소유자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거드름을 피우고도 남을 이유가 된다는 거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구영수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어떤 과시도 없었음은 물론이었고, 하물며 꾸며낸 겸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윤태호 국장은 사실 그래서 더 구영수를 대하기가 껄끄러워졌다.

좀처럼 보기 드문 유형의 인간이었고, 그만큼 속내를 파악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갑자기요?"

"구영수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악인이 아닌 건 확실해 보이니까."

잠시 눈만 끔뻑거리던 오윤아가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아직 속단하긴 일러요. 제가 볼 땐 그를 언제든 흑화시킬 위험 인자가 도사리고 있거든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위험 인자라니? 그게 뭔데?"

"있어요. 어떻게든 레드 크리스탈의 가격을 후려치려는 그런 사람이."

휙! 휙휙휙!

바람을 가르며 예고 없이 진심 펀치가 연타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최근 복싱장을 다닌다는 소문이 돌더니만, 그래서일까 제법 자세가 나오는 윤태호 국장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각성자의 털끝 한 올도 건들지 못하지만.

"그만 하세요. 사람들이 나잇값 못한다고 흉봐요."

"흥! 보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오윤아가 대답 대신 윤태호 국장의 등 뒤를 가만히 가리켰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열린 문밖에서, 비서와 함께 구영수가 이쪽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있네."

28화.

택시를 타고 관리청으로 향하던 중에 나는 아차 싶었다.

최혜성을 케어하느라 내 마력이 바닥난 걸 간과해버린 거다.

이래서는 박정수에게 몽마 스킬을 시전할 수가 없을 텐데….

"…엉?"

-

체력 : 495/500

마력 : 45/100

-

그런데 상태창을 펼쳐 보니 나도 모르는 새 마력이 절반 가까이 차올라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보고 있는 와중에도 +1, +1씩 오르는 게 실시간으로 확인될 정도였다.

뭐야, 이 미친 회복력은…?

"아우님. 표정이 왜 그래?"

내 얼빠진 얼굴을 봤는지 창수 형님이 불쑥 내게 말을 걸었다.

일전에 의형제를 맺었다던 택시 기사님이다.

카X오 택시를 부르려던 걸, 명함 받은 게 생각나서 연락을 드렸더니 흔쾌히 와 주시더라.

"혹시 가스 불 안 끄고 나왔어? 아님 보일러? 다시 돌아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빨라도 너무 빨라서요."

"뭐가, 자동차 속도가?"

"아뇨, 제 기력의 회복 속도가요."

"...."

차내에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대답이 너무 두루뭉술했나 싶어 다시 입을 떼려던 차.

"…이 형님은 하루 네 번."

"...네?"

"아우님만 할 땐 하루 일곱 번도 가능했었지."

"...."

무슨 뜻인진 굳이 되묻진 않았다.

그 능글맞은 눈빛과 자부심 가득한 미소만으로도 충분히 그 의미를 짐작하고도 남았으니까.

무엇보다 직접 듣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일곱 번이 아니라 여덟 번이었나?"

"…무슨 각성자세요?"

만약 그렇다면 이 형님의 상태창 내용은 뭘까.

이름 : 김창수

직업 : 딸잡…

"아무튼 동생은 몇 번 가능이길래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건데?"

"…그런 게 아니라."

괜한 오해를 받는 게 싫어서 내가 각성자란 사실을 알려줬다.

솔직히 숨길까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숨길 이유가 없다.

뭐, 이로 인해 나를 대하는 창수 형님의 태도가 달라진다면,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받아들일 참이었다.

싸이킥이 워낙 고연봉자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

때문에 방송이나 인터넷 등에서 각성 후 인간관계가 파탄났다는 싸이킥들의 기구한 사연을 쉽게 찾아볼 수가 있었다.

그처럼 일확천금 앞에선 지연, 혈연마저 갈라서는 판국인데, 과연 창수 형님은 어떤 반응을 내비치실까.

"어쩐지. 그 새벽에 미궁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타는 게 영 수상쩍다 했더니만…."

창수 형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축하해! 아우님. 제대로 팔자 폈네, 우리 딸래미마냥."

"예, 감사합…."

응?

창수 형님께 따님이 있다는 소리를 듣긴 했었다.

대시 보드 위에 놓인 가족 사진도 있었으니까.

분명히 형수님 유전자를 몰빵으로 물려받은 게 분명한, 어여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따님이 사진 속에 있었던 것이다.

"따님도 싸이킥이세요?"

"응. 각성했지. 올 초에."

"근데 왜… 아닙니다."

"딸이 각성잔데 왜 여전히 택시나 몰고 다니냐고 묻고 싶은 거지?"

"아뇨,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일을 안 하셔도 되지 않나 해서요."

내가 솔직히 대답하자 창수 형님의 말이 이어졌다.

"이 일이 내 천직이기도 하고…. 또 뭐, 솔직히 말하면 쪽팔리잖아. 아직 창창한 이 나이에 자식 덕 볼 생각이나 하고 산다는 게."

"음."

이름 : 김창수

직업 : 상남자.

얼른 내 마음 속 가상의 상태창을 수정했다.

직전까지 편견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던 나를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는 순간이었다.

"죄송해요."

"뜬금없이 뭐가 죄송해?"

"실은 좀 의심하고 있었어요. 형님이, 제가 아니라 제 돈에 더 욕심을 내시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요."

창수 형님은 전혀 불쾌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피식 웃음을 흘리며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뭐, 어떻게 보면 내가 유별나서 그렇지. 주변이든, 태우는 손님들이든 얘기 들어보면 십중팔구는 아우님 말처럼 다들 난리도 아니더라고. 어떻게든 각성한 사람한테 빌붙으려고 별별 일이 다 생긴다더라. 참나…."

"유별난 게 아니라, 형님이 대단하신 거죠. 솔직히 주변 가까운 사람 중에 한 해 100억도 넘게 버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눈 안 뒤집힐 인간이 얼마나 있겠어요?"

"뭐, 그렇게 말해주면 나야 고맙고."

그러고 보면 내 주변에도 그처럼 청백리와도 같은 최혜성이 있었다.

20억이 찍힌 계좌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을 안 하더라.

물론 나를 따라나서는 구실로 계좌 드립을 치긴 했었다만.

대충 슥 훑어만 봐도 백 퍼센트의 확률로 미(성년)자를 걸러내곤 했던, 닳고 닳은 편돌이가 나다.

단언컨대, 최혜성은 내 돈에 대해서 그 어떠한 욕심도 내지 않았다.

20억이란 액수 자체엔 다소 놀랐을지언정, 그 돈에 대한 어떠한 감정의 동요가 전혀 없었다는 거다.

그러므로 나는 의구심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물질만능주의 대한민국에서, 돈 욕심 없는 사람을 연거푸 지인으로 두게 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역시 일론 머스캣의 말은 틀리지 않았어."

"일론 머스캣? 그게 누군데?"

"테슬람 사장이요. 전기차 회사."

"아아, 들어봤다. 근데 그 사람이 뭐라 했는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가상 현실일 확률이 99.999999…%래요."

"뭐?"

"쉽게 말해 형님이나 저나 죄다 가상의 NPC라는 거죠."

창수 형님은, 처음엔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냐는 듯한 기색이셨다.

하지만 시뮬레이션 이론을 뒷받침하는 주요 실험과 현상 그리고 내로라하는 석학들의 논증까지 차근차근 설명해드리자 조금 달라졌다.

"…진짜 그렇게나 밝혀진 증거들이 많다고?"

"그렇다니까요. 나중에 쉬실 때 너튜브에서 한번 찾아보세요."

이후로 창수 형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심각해진 얼굴만 보더라도 내 이야기에 어느 정도는 혹하신 듯한 눈치다.

그러다 갑자기 벌컥 소리를 질러댔다.

"내 머리숱 돌려 내, 플레이어 놈아!!"

"...?"

* * *

그날 미궁 앞에서 헤어지기 전, 국장에게서 받은 명함 한 장이 있었다.

언제든 관리청 로비 데스크에 그 명함을 내보이며 면담을 신청하면, 번거로운 절차 없이 자신을 만날 수 있으리란 이야기도 곁들여서 말이다.

내가 무턱대고 관리청사에 쳐들어갈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그리고 국장이 장담한 대로, 나는 곧장 최상층으로 직행하는 승강기에 오를 수 있었다.

국장실엔 방 주인뿐만 아니라 유나 님도 선객으로 자리해 있었다.

예상대로 그들은 나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길 원했지만.

내 용건부터 처리하고 싶었던 나는 양해를 구했고 그들은 흔쾌히 내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다시 조우하게 된 박정수는 팔자 좋게 잠들어 있었다.

남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한 주제에 말이다.

집을 나서기 전, 그리고 택시 안에서도.

검색을 통해 파악한 지난 2년간의 세상은, 미궁이 출현했단 사실만 빼면 그리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범죄자에겐 너무도 관대한 이 사회.

고로 그저 물렁물렁한 법의 심판에만 이 자를 맡겨 두기엔 도무지 성이 차질 않았다.

전과 8범.

윤태호 국장이 내게 슬쩍 귀띔해 준 박정수의 실체였다.

아무리 감방을 드나든다 한들, 갱생의 가망이 없다는 소리겠지.

고요히 잠든 그를 앞에 두고서, 내가 망설임 없이 스킬 창을 다시 펼친 이유였다.

-

[스킬 : 몽마夢魔]

- 대상을 잠들게 합니다.

- 꿈을 조작해 대상의 특정 감정을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 스킬 성공률은 대상의 레벨과 스텟에 영향을 받습니다.

- 72시간 내로 같은 대상에게 중복 발동할 수 없습니다.

- 유효 대상 레벨 : +5

- 소모 마력 : 건별 상이

- 감정 목록(소모 마력)

불안(10), 우울(8), 분노(8), 성욕(5), …. 희망(250), 기쁨(240), 용서(80), 용기(92)….

-

놈에게 가장 마땅한 감정적 형벌은 무엇일까.

목록을 훑어보던 중, 퍽 마음에 드는 단어 하나가 눈에 띄었다.

'공포라….'

* * *

박정수에게서 볼일을 마치고 다시 찾은 국장실.

소파에 앉아 커피잔을 홀짝이던 중, 윤태호 국장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고오급진 함 한 갑을 건네왔다.

"이게 뭔가요?"

"일단 열어보시죠."

그의 권유대로 뚜껑을 열자.

웬 시커먼 색상의 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와- 간지."

꺼내 든 카드는 무광에다 까매도 너무 까매서 주변 공간과의 이질감마저 들 정도였다.

마치 네모난 블랙홀 같은 느낌이랄까.

"빛 흡수율이 99.9998%인 도료를 입힌 블랙 카드입니다."

"아…. 그 반타블랙인가 하는 페인트 말씀하시는 거죠?"

"그보다 더 진보된 도료이긴 하지만, 원리가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이걸 왜 저한테…."

"싸이킥 라이센스 카드입니다."

엥?

"제가 인터넷에서 본 거하곤 많이 다른데요?"

"설명드리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싸이킥 라이센스도 등급이 나뉩니다."

'라이센스에도 급이 있었어?'

금시초문인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레벨과는 별개로 개개인의 잠재력이나 특장점, 또는 업적에 따라 발급되는 라이센스에도 급이 다릅니다. 단계는 C부터 S까지인데, 전 세계 싸이킥의 약 97% 정도가 라이센스 C 소유자입니다."

오오. 그렇다는 건?

"그렇다면… 제가 그 나머지 3%에 든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닙니다."

"...."

이 양반이 쓸데없이 기대하게 만들고 있어.

"3%가 아니라 0.1%입니다."

"…예?"

"그 블랙 카드가, 라이센스 S에게만 발급되는 카드이니까요."

"아…?"

좋다 아니다의 선상이 아니었다.

'이거 영 부담스럽잖어.'

"외람된 질문이지만, 저 같은 쪼렙한테 이런 귀한 카드를 주셨다가 시말서라도 쓰시는 건 아닌지…."

"쪼렙이시라서 드리는 겁니다."

"…동정심이 그 이유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예?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하. 뭐, 아무튼 여기 오 집행관이 말하길, 활을 잘 다루신다고요."

"그냥 쏜다고 쐈는데 생각보다 잘 맞은 것뿐입니다."

겸양이 아닌 진심이었다.

내 능력이 아니라 고객의 스킬이 다 한 결과였으니까.

하지만 그걸 또 제멋대로 해석하는 모양이었다.

"오오! 무념무상의 경지로 활시위를 당기셨단 말씀이시군요! 역시 S등급이…."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아무튼 실력도 실력이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레벨에 활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 자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응당 블랙 카드를 드려야 마땅하지요."

솔직히 계속 듣고 있어도 영 무슨 소린지 알아먹지를 못하겠다.

여전히 미궁이며 싸이킥에 관한 내 제반 지식이 미약한 탓이겠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유나 님께 무언의 도움을 청한 거다.

곧 눈치 빠른 그녀의 입이 열렸다.

"지금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계신 거 같은데,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뭐를요?"

"영수 님은 전 세계에서 단 28명밖에 없다는 히든 클래스에요. 아니, 이제 영수 님까지 29명이 되겠네요."

"...?"

'전 편돌인데요?'

내가 여전히 의구심을 풀지 못하자 그녀가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15레벨인데도 활을 다룰 줄 안다는 게 그 명확한 증거에요. 20레벨 이하에서, 그러니까 1차 전직을 하지 않는 이상은 활을 그렇게 능숙히 쏠 수가 없어요. 일반적인 각성자의 영역을 훌쩍 벗어난 수준이었거든요."

"음…."

그때 윤태호 국장이 내게 소책자 한 권을 건넸다.

"그리고 이건 라이센스 S 소유자에 대한 각종 혜택을 작성해 둔 매뉴얼입니다. 지금은 대충만 훑어보시고, 자세한 건 귀가하셔서 살펴보세요."

B4용지만 한 사이즈에,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두께였다.

무심코 펼쳐 보니 그 안에 빼곡히 적힌 글자가 아주 깨알 같았다.

이쯤 되면 여기가 관리청인지, 캐시백을 해주는 카드사 영업장인지 의심이 드는 게 당연하겠다.

"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매뉴얼에도 나와 있지만, 블랙카드 소유자는 걸어 다니는 면세업장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예?"

"미궁 활동으로 발생 되는 수익에 대한 세율이 전액 면제된다는 이야깁니다."

나는 윤태호 국장님의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당장 계약하겠습니다!"

"…아니, 이건 계약 같은 게 아닌데요."

제29화.

구영수를 돌려보내고 난 뒤 늦은 오후.

윤태호 국장이 예고도 없이 오윤아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너, 나랑 어디 좀 가자."

"싫습니다."

"어디 가는 줄도 모르고 무조건 싫대?"

"모르긴 왜 모릅니까? 청장실 올라가는 거잖아요."

"어떻게 알았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만날 땐 꼭 명품 넥타이로 바꿔 메곤 했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아무튼 저 바쁘니까 혼자 다녀오세요."

"어허. 오 집행관, 정말 이러기야? 내가 꼭 위계로 부하를 다스려야겠어? 엉?"

윤태호 국장이 으름장을 놓자 오윤아의 눈매가 뱁새처럼 게슴츠레해졌다.

"사고는 국장님이 쳐 놓고 절 총알받이로 쓰려는 거 누가 모를 줄 아세요?"

"사고라니? 총알받이라니?"

"그러게 왜 결재도 안 올리고 블랙 카드를 발급해 줘요, 주기는!"

"너도 옆에서 바람 넣었잖아."

"제가 언제요?"

"꼭 잡아야 할 인재라며? 놓치면 퇴사한다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블랙 카드를 줘요?"

"아니! 그럼 줄 때 말리기나 할 것이지, 그땐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 발을 빼?"

"아니, 그럼 이미 준 걸 도로 뺏어요? 국장님 체신이 있지. 모냥 빠지게?"

오윤아의 말마따나 블랙 카드는 청장의 재가가 있어야만 발급이 가능하다.

한데 윤태호 국장이 독단으로 그 짓을 자행해버린 것이다.

물론 발급 대상이 히든 클래스라는, 마땅한 당위성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청장실로부터의 호출에 쫄리는 마음이 경감되는 건 아니었다.

"아, 좀! 도와주라, 윤아야! 엉? 우리 희정이 이번에 대학 들어가는 거 너도 알잖아."

"…쳇. 매번 이런 식이지. 알았어요."

* * *

윤태호 국장과 오윤아 집행관.

이 두 사람을 앞에 세워둔 채로 박평식 청장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들, 아니 윤태호 국장이 올린 A4용지 12장 분량의 긴 경위서를 꼼꼼하게 검토 중인 까닭이었다.

'흠….'

구영수라는 로머와의 예상치 못한 조우로부터, 바로 오늘 블랙 카드를 발급해 주기까지.

경위서엔 그 일련의 과정 전부가 담겨있었다.

그것도 퍽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내용으로.

사실 검토가 반복되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이었다.

트집 잡을 구실을 찾는 게 아니라, 단지 재미있어서 계속 읽고 있었다.

'이따 집에 가서 한 번 더 읽어야지.'

이 경위서를 작성한 윤태호 국장에게는 별거 아닌 내용을 별거로 느끼게끔 하는 의외의 글재주가 있었다.

막말로 전직 웹소설 작가라던, 일전에 한호준이 썼던 눈 썩는 경위서보단 차라리 이쪽이 백배 천배 더 흥미로웠다.

물론 그처럼 흡족한 경위서라고는 해도, 공사의 구분은 엄격해야 하는 법.

"다음 편은?"

"예?"

"…아니, 일단 징계위는 안 열 거야."

"가, 감사합니다."

"소문나서 좋을 거 하나 없는 사안이라 그런 거니 착각하지 마. 자네 예뻐서 그런 거 아니니까."

"무, 물론입니다."

검지로 책상 위를 까딱거리며 잠시 뜸을 들이던 박평식 청장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감봉 3개월 정도로 마무리 짓지. 사유는 근태로 해서."

"감사합니다."

내내 죽을상을 하고 있던 윤태호 국장의 얼굴이 그제야 신색을 회복했다.

각오했던 것 치곤 퍽 낮은 징계 수위 덕분이었다.

대신 이어지는 상관의 잔소리까진 기꺼이 감수해야만 했다.

"근데, 아무리 마음이 급했기로서니 꼭 블랙 카드여야만 했나? 히든 클래스고 나발이고 다 좋은데, 초장부터 너무 다 퍼주기만 하는 거 아니냔 말이지."

여태껏 대한민국에서 블랙 카드가 발급된 전례는 없었다.

한호준이니, 권인하니.

그 기라성 같은 싸이킥들조차 틈만 나면 블랙 카드에 대한 노골적인 욕심을 드러내곤 했음에도 눈썹 한 올 까닥하질 않던 관리청이었거늘.

"가뜩이나 가면 갈수록 기고만장해지고 있는 싸이킥들인데, 이거 소문 퍼지면 그 등쌀을 어떻게 감당할 거야? 자신 있어?"

상관의 물음에 윤태호 국장은 팔꿈치로 오윤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대답을 갈음했다.

이럴 때 써먹자고 데려온 실무자였으니까.

그에 입술을 삐죽이던 오윤아가 곧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일단은 블랙 카드 발급 사실을 최대한 덮어두거나, 아예 공표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긴 한데…."

"…한데?"

"솔직히 지들이 알아서 어쩔 건데요. 굳이 그 띨빵한 놈들 눈치는 안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허, 오 집행관! 청장님 앞인데 말 좀 가려서…!"

"아니. 난 괜찮으니 계속 말해 봐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뭡니까?"

비록 한참 낮은 직급이라 해도 오윤아는 싸이킥이었다.

박평식 청장이 그녀에게만큼은 하대를 삼가는 이유였다.

그렇게 오윤아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청장님도 산또쉬 사건 잘 아시죠?"

"잘 알다마다."

인도 싸이킥 중에 산또쉬라는 인물이 있었다.

약 1년 전쯤, 히든 클래스가 된 각성자였다.

한데 이 산또쉬가 자신의 각성 사실을 숨긴 채, 미국으로 넘어가려다 발각이 되는 바람에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세간에 알려지기로는 국적을 바꾸는 조건으로 5억 달러를 제안받았다고.

물론 미국 정부는 여전히 그 소문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었지만.

"그거, 미국 정부에서 약속한 돈이 5억 불이 아니라 실은 20억 불이었대요. 그것도 일시불로."

"...뭐?"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에 박평식 청장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도통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아니. 청장인 나도 모르는 정보를, 오 집행관이 어찌 그리 확신을 합니까?"

"프로노이아pronoia."

"아…."

불신으로 팽배했던 박평식 청장의 눈빛을 꺼트리는 데엔 그 외마디 단어 하나로 충분했다.

프로노이아란 전 세계적으로 암암리에 활동하는 싸이킥 정보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구성원 일체가 각성자로 이뤄진 집단이기에, 미궁과 싸이킥에 관련한 정보력에선 프로노이아에 대적할 경쟁자가 없었다.

바꿔 말해 프로노이아 발 정보라면 그 신뢰성이 보장된다는 소리이기도 하겠다.

또 그만큼 비싸기도 비쌌고.

"꽤 돈이 들었을 거 같은데…."

"제가 직접 구매한 건 아니고, 지인이 정보를 얻는 현장에 우연히 같이 있다가 알게 된 사실이에요."

"아아. 그렇군요."

"아무튼 천조국에서 그처럼 통 크게 전례를 만들어 주신 덕분에, 이번 블랙 카드 발급 건에도 그 누가 딴지를 걸 수 없는 당위성이 생긴 거라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제아무리 블랙 카드의 혜택이 엄청나다고는 하나, 미국에서 히든 클래스의 몸값으로 책정한 20억 달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니 설령 작금의 상황이 소문으로 퍼져나간다 한들, 그 누가 대놓고 아니꼬운 티를 낼 수 있으랴.

자신들의 값어치가 그 반에도 못 미치는 것을.

어쨌든 그러한 비화가 밝혀지자, 이제는 오히려 박평식 청장 쪽에서 더 안달복달하는 장면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면 이러다 우리도 그 양키 놈들한테 눈 뜨고 코 베이는 거 아냐?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블랙 카드를 두 장, 세 장은 더 발급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 청장님. 카드가 몇 장이라도 혜택이 중첩되는 건 아닙니다."

"그걸 누가 몰라서 그러나? 그만큼 다른 방법들도 더 강구해 보란 소리지! 구영수 그자가 20억, 아니 30억 40억 달러에도 안 흔들릴 만큼."

"예, 옙!"

"그리고 마땅한 방안이 나오기 전까진 감시도 좀 붙여 놔. 그사이에 어떤 수작질이 붙을지도 모르니."

"가, 감시요?"

"왜? 뭐 문제 있어?"

"아, 아닙니다."

"그, 우리 애들 중에 기깔나게 미행 잘하는 애들 있잖아. 걔들 붙이라고."

"아, 알겠습니다."

그 애들이 이미 시도했다가 대번에 발각되고 말았다는 사실은 끝내 고백하지 못한 채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태호 국장이었다.

* * *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냐는 옛 성현의 가르침이 마침내 현실화된 세상이 도래했다.

늘상 무시만 당하던 편돌이가 이토록 대접받는 세상이 오다니.

'편돌이라서 행복하구나.'

"여어-. 아우님."

"엇? 형님. 여태 안 가셨어요?"

"엉. 동생 기다리려고 일부러 손님 안 태우고 있었지."

…라곤 하시지만, 진실은 저조한 탑승 회전률 탓인 듯했다.

창수 형님의 택시가 대기줄 중간에 끼어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다고 눈치 없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려 들진 않았다.

"에이. 안 그려서도 되는데, 아무튼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얼른 타."

창수 형님은 나를 태우고서 다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아무래도 중간에서 손님을 낚아챘으니, 기존에 대기 중이던 기사님들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탓이겠다.

"용무는 잘 끝냈고?"

"네. 생각보다 결과가 좋네요."

"잘됐네."

그 이상의 질문은 삼가는 눈치의 창수 형님이었다.

그 배려 덕분에 나는 이동하는 동안 편하게 블랙 카드 매뉴얼을 대충이나마 훑어볼 수 있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내용은 역시나 앞서 들은 설명대로 면세 항목이었지만.

정작 나를 더 놀라게 만든 대목은 따로 있었다.

-

3-2. 면책특권

[블랙 카드 소유자는 연행, 소환, 기소 대상이 될 수 없다. 단, 국회 재적 2/3의 동의로 면책권은 무효화될 수 있다.]

-

"쩌, 쩐다!"

"…엉? 왜? 뭐가? 뭔데?"

"예? 아, 아무것도 아녜요. 으악, 형님! 앞에 봐요, 앞에!"

"어어?! …야이 킥라니 개쉑히야!"

하마터면 대각선에서 마주 오던 킥보드와 추돌할 뻔한 걸 간신히 피했다.

창수 형님의 부주의라기보단, 정밀 유도탄마냥 꼬라박으려던 상대측 과실이 100%인 상황이겠다.

그러므로 욕설을 내뱉는 창수 형님의 모습이 낯설긴 할지언정 어떤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대형 참사를 낼 뻔한 상대를 몇 마디 욕으로 용서하고 보내 준 그가 생불로 느껴질 정도랄까.

나 같았으면 쫓아가서 킥보드를 세우고는 아주 그냥 작살을 냈는….

"...."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을 이어 나가던 나는 일순 소름이 돋고 말았다.

돈과 권력을 쥐여주면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다더니.

면책특권을 갖게 된 걸 안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사람부터 팰 생각을 하느냔 말이다.

"이거 완전 독이 든 성배 아닐까."

"독? 무슨 독? 뭐 잘못 먹었어? 아파? 병원 갈까? 차 돌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니, 형님 앞에요!"

아무튼 나를 걱정하는 그의 태도가 퍽 기꺼웠다.

그래서 대강이나마 지금 내 심리 상태와, 그 촉발 원인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러자 묵묵히 경청하던 창수 형님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 뭐라더라? 너무 깔끔떨면 오히려 면역력이 떨어져서 병에 더 잘 걸리기 쉽다나? 암튼 나는 사람 몸처럼 마음도 다를 거 하나 없다고 생각하거든. 누굴 미워하고 패주고 싶고, 그런 감정들을 마냥 나쁜 거라며 억누르고 외면하려고만 들면, 그 쌓여가는 스트레스 때문에 결국 언젠가는 헤까닥 돌아버리고 말 테니까."

"...."

"그러니 내 말은, 그런 거로 자책하지 말라고. 게다가 면책특권도 있겠다, 오히려 아우님의 그런 생각은 지극히 정상이 아닐까 싶네."

"…형님."

"막말로 나한테 면책특권인지 뭔지 그거 있었으면 진즉에 몇 놈들은 잡아다 족쳤을걸?"

"...."

나는 묵묵히 그 말을 듣다가 넌지시 대답했다.

"혹시 그래서 지금 그 킥보드를 추격 중이신 건가요? 저더러 대신 패 달라고?"

"응. 거의 다 잡았어. 저기 보이네, 저 새끼."

"...."

제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