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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30-40

제30화.

딸랑~

문에 붙인 종소리가 울리며 누군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오세…."

으레 손님이겠거니 하고 인사를 건네던 최혜성의 말끝이 흐려졌다.

상대가 다름 아닌 박정수인 탓이었다.

그가 건들건들 카운터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여어- 최혜성이, 잘 지냈어? 얼굴 좋아 보이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요?"

"어떻게 알긴? 내 돈 떼먹고 튄 년이 일하는 곳쯤 내가 못 찾아낼 줄 알았냐?"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떼먹은 돈 없어요. 원금에 이자까지 더해도 훨씬 더 많이 갚았으니, 더는 남은 변제 의무가 없다고요."

"나도 계에-속 말하지만, 그건 네 빡대가리 계산법이고요. 네년이 싸인한 계약서대로 하면 원금은커녕 지금 이 순간에도 이자가 계속 불어나고 있답니다. 산수도 못 하는 이 모자란 년아."

"그거 다 불법 고리 사채잖아요. 저는 더 할 말 없으니 앞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신고할 겁니다."

"신고? 푸하하- 그래, 뭐 해 봐. 난 뭐 벌금 좀 내고 말지. 그 전에 네년 사진부터 쫙 돌리고."

"...."

박정수가 최혜성의 면전에 자신의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낯부끄러운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최혜성의 얼굴이 파리하게 탈색되었다.

기껏 마음을 독하게 먹고는, 저 파렴치한에게 지지 않으려 애썼다지만 이젠 그도 한계인 듯했다.

숨이 가빠질뿐더러 입술까지 파르르 떨리는 게,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억 속 그대로의 장면이 재현되던 건 여기까지였다.

"이 멍충아."

"...?"

"...?"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가 박정수를 뒤돌게끔 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늘씬한 체형에 절로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고혹적인 미녀였다.

다만, 박정수는 그 미모에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멍충아. 불법 대부업은 5년 이하의 징역이래."

"뭐?"

"불법 추심은 3년 이하의 징역."

"뭐, 뭐 하는 년이야, 이거?!"

박정수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그가 이처럼 인상 정도만 써도 십중팔구는 움츠러들기 마련.

그러나 여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불법 촬영은 7년, 공갈 협박은 3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사진 진짜로 뿌리면 개인정보법 위반으로 5년 추가."

"...."

"5년에… 3, 7, 3, 5. 이거 다 더하면…. 얼마니?"

여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박정수가 아닌, 그 어깨 너머 최혜성에서 건넨 질문이었다.

"이, 이십삼 년이요."

최혜성이 엉겁결에 대답하자, 여자의 시선이 다시 박정수에게로 옮겨졌다.

"들었지? 23년이래."

"지랄하네. 야 이 돌대가리 년아! 하물며 사람을 죽여도 우발적 사고라고 우기면 기껏 최대 형량이 15년이야. 협박을 하려거든 뭘 알고나 지껄여."

"감옥 간다는 건 부정을 안 하네?"

"시발, 그깟 거 한 번 다녀온다고 문제될 거 있나? 대신, 이건 알아 둬. 난 출소하면 날 감방 집어넣은 연놈들 절대로 가만 안 둔다는 거."

박정수가 짐짓 목소리를 내리깔며 엄포를 놓았다.

그 도중엔 고개를 돌려 최혜성을 힐끗 쳐다보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창백해졌던 최혜성의 안색이 한층 더 파리해졌다.

여자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오는 이유였다.

"하아- 어렵다, 어려워. 아니, 다른 쉬운 방법도 많은데 그 멍충이는 왜 하필 고른다고 고른 게 '용기'였담?"

사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박정수는 실체가 없는 환영이었다.

단지 최혜성의 무의식에 자리해 있는 사념체가 이 꿈속 세상에 투영된 것뿐.

고로 용기를 고양시키는 원리는 간단했다.

이 사념체를 극복해내기만 하면 될 일.

그러나 지금 저 꼴을 보건대, 결코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사념체가 드센 것도 드센 건데….'

더 큰 문제는 몽주夢主의 나약함이었다.

고작 으름장 몇 마디에 저리 겁을 먹다니.

'물러터져도 너무 물러터졌잖아.'

타인의 몽계에 개입하게 되면, 그 대상의 지식 일체를 마음껏 갖다 쓸 수가 있다.

방금 사념체를 압박할 요량으로, 자신에겐 영 낯선 인간의 법조문을 들먹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참 보기 드물게 깨끗한 인간일세.'

최혜성의 내재된 지식만 이용해선 이 악인을 처단할 그 어떠한 방법도 강구할 수가 없었다.

기껏 한다고 한 게 형량 따위나 운운하는 정도였으니.

'어쩜 만나도 꼭 비슷한 것들끼리 만났다니?'

본래는 꿈의 주인 스스로가 트라우마를 극복하게끔 보조해 주는 정도의 역할로 끝내야 함이 마땅했다.

그러나 숙련된 서큐버스의 관점에서 단언컨대, 그런 식의 진행으론 단번에 성공적인 시술(?)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의미한 변화를 보려거든 최소 10회 이상은 최혜성의 꿈속에 출장을 나와야 할 견적이란 소리다.

그 최저 시급조차 되질 않는 짓을, 아리아는 당연히 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을 떼자니 실망감에 젖은 채 복귀할 공깃돌 친구의 면상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거기다 또 사념체는 주제 파악은 물론, 분위기 파악까지 못 한 채 깐죽대기나 하는 상황이었으니.

"그니까 알아 처먹었으면 이만 꺼지라고. 너 같이 얼굴 반반한 년은 잡아다 팔아버리면 아무도 모르니까."

"좋아."

"...?"

사념체의 도발은 결국 결정적인 트리거가 되어 주었다.

아리아가 손해 볼 결심을 하는데 말이다.

"이거 계산해 줘요."

박정수를 무시하고 지나친 아리아가 계산대 위에 야구 배트 한 자루를 올려놓았다.

"소, 손님. 이건 저희 물건이 아닌 것 같…?"

"일단 그냥 찍어 봐요."

최혜성이 마지못해 바코드를 찍었다.

그러자 결제 화면에 도통 의미 모를 글자로 구성된 문장 한 줄이 표기되었다.

[스킬 : 드림 워커]

- 서큐버스 본체가 직접 대상의 꿈에 현신합니다.

- 서큐버스 본체의 모든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

.

- 마력 소모값 : 850

아리아는 카드 대신 자기 손을 카드 결제기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화면에 결제 완료 문구가 뜨는 걸 보자마자, 그 즉시 다른 손으로 손잡이를 움켜쥔 야구방망이를 뒤편으로 휘돌렸다.

퍼억-!

"커헉!"

수박통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박정수의 몸이 쓰러졌다.

가격당한 관자놀이 부근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의외로 박정수는 정신이 멀쩡한 채 고통에만 신음할 따름이었다.

꿈속 세상인데다, 사념체인 까닭이었다.

그 위로 또다시 야구 배트가 날아드는 것은 물론이었다.

퍽! 퍽! 퍽퍽-!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오!!"

그처럼 일방적인 폭행은 한참이나 더 계속되었다.

견디다 못 한 박정수라는 사념체가 마침내 홀연히 연기처럼 증발되어 버릴 때까지.

* * *

결국 킥라니를 잡는 덴 실패했다.

도중에 어디 골목으로 샜는지 영 보이지가 않더라.

그러더니 정작 창수 형님이 뒤늦게 모르쇠로 돌변한 게 넌센스이긴 했다만.

"실은 지름길로 돌아온 거였어. 그놈을 잡으려던 게 아니라."

"지름길인데 왜 미터기는 더 나왔죠?"

"아무튼 다 왔다. 그럼 잘 들어가고, 종종 또 불러 줘."

"네, 형님. 감사합니다. 운전 조심하세요."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최혜성부터 확인했다.

여전히 잠이 든 상태였는데, 그 안색이 좀 묘했다.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였음에도, 마냥 싫다거나 겁에 질린 듯한 느낌은 또 아니었으니까.

노파심에 한 번 더 스킬 설명을 정독해 보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부작용이라든지 후유증은 쓰여 있지 않았다.

최혜성을 흔들어 깨울까 하다가 결국 그냥 냅둔 이유였다.

'근데, 뭐지?'

이 귀에 몹시 익은 잠꼬대 멘트는….

"우웅…. 멍충멍충아아…."

"…에이, 아니겠지?"

아닐 거야.

* * *

사실 관리청을 다녀오기로 결심하기까진 나름 큰 용기를 필요로 했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적진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처지니까.

게다가 이제는 보급을 목적으로 이쪽 세상에 침투(?)까지 해 있는 와중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둘러댈 이야기를 열심히 짰었건만.

예상과 달리 관리청에선 내게 궁금한 것도, 요구한 것도 없었다.

히든 클래스니 어쩌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더니만 그저 퍼주기만 퍼주고는 돌려보내 주더라.

덕분에 거짓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돼서 내심 기쁘긴 했지만.

그럼에도 못내 불편한 감정이 명치 언저리에 묵직하게 얹혀 있음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의 내 처지가 꼭 세작, 스파이, 간첩 뭐 그런 꼴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물을 때려잡는 데 혈안이 된 싸이킥 관리청에게 융통한 자금으로 보급품을 구매해서 다시 마물의 배를 불려줘야 한다니.

'으음, 내 상황을 다른 예로 들자면….'

일제 강점기였다면 우리나라에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재료를 사고 일본에서 장사를 하는….

"와, 잠깐만! 이거…."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뿐더러, 입에선 절로 욕설까지 튀어나올 뻔했다.

내 한목숨 건사하자고 나란 녀석, 천하의 매국노보다 더 패악한 짓을 자행하고 있었구나.

조상 대대로 착실하게 나라를 팔아먹던 혈통이 아닌 다음에야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음, 사실 출신부터가 천애고아라 비록 들춰 볼 족보조차 없긴 했지만.

아무튼 지금 이건 그저 일개 나라가 아니라 아예 전 인류 자체에 대한 배신행위였다.

스케일부터가 남다른, 역대급 매국노가 되게 생긴 거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초개와 같이 저 창밖으로 몸을 던져버려야 하나.

아니면 가진 돈이나 원 없이 펑펑 써재끼며, 보급관이 내 목을 따러 오기만을 기다리든지.

물론 나는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잔머리를 굴린 끝에 나름 삶의 희망 내지는 이대로 살아가도 될 명분을 생각해냈다.

'답은 이중 첩자다.'

순진무구한 편돌이로 가장해 고객들의 정보 내지는 약점을 빼내, 인류에게 전달한다는 원대한 계획!

나아가 향후 보급품에 첨가한 미량의 독으로 고객들을 서서히 중독시켜 전력을 약화시킨다는 기발한 계획이라도!

"나, 어쩌면 천재일지도…?"

"오빠, 배고파?"

"아니? 왜?"

"헛소리가 분명한 말을 들은 거 같아서…."

소파 쿠션을 냅다 집어던졌다.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서는 제 품에 꼭 끌어안은 채로, 최혜성이 말을 이었다.

"근데 나, 진짜 신기한 꿈 꿨다?"

"무슨 꿈?"

"꿈에서 어떤 예쁜 언니가, 오빠 보면 '감사해라. 멍충아.'라고 꼭 좀 전해 달라는 거야."

"...?"

뭐지, 이 쌩뚱맞은 상황에서의 퍽 익숙한 대사는?

"혹시 그 언니, 어떻게 생겼니?"

"음… 잘 모르겠어. 막상 그분 모습이며 또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생각이 안 나네."

"그럼 어쩔 수 없고. 그보다, 지금 기분은 좀 어때?"

"기분? 그냥… 푹 잤다 정도?"

'흐음.'

이래서는 스킬이 제대로 성공했는지 아닌지 판가름할 수가 없다.

잠깐은 박정수를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그 반응을 살필까도 생각했었지만, 썩 좋은 방법은 아닌 듯해서 이내 생각을 접었다.

그냥 시간을 두고 지켜 보다 보면 느껴지는 점이 있겠지.

"참. 오빠. 나 할 말이 있는데…."

"어, 너도? 나도."

"오빠는 무슨 얘긴데?"

"세입자 먼저."

"피-. 알았어. 있잖아…."

제31화.

최혜성은 뭔가 기분이 묘했다.

한숨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너무 상쾌했던 것이다.

단지 푹 잤다는 정도만으론 설명이 부족할 정도였다.

더 신기한 건 아까 마트에서의 기억이었다.

언뜻 박정수와 마주쳤던 그 일이 생각났다만, 이상하리만치 심적 동요는 없었다.

슬픔이나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 감정이 전혀 들질 않았다.

오히려 그때 좀 더 제대로 맞상대하질 못했다는 생각에 분하기만 할 따름이었지.

그처럼 최혜성의 내면은 전에 없던 용기로 팽배해 있었다.

지금, 구영수에게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게 된 배경도 그 영향 때문이겠다.

"나… 이만 이 집에서 나갈까 하고."

본래는 말없이 야반도주라도 감행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새로 장착한 담대함은, 문제 앞에서 일단 회피하고 보는 평소의 기질마저 바꿔놓았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제대로 인사는 건네고 떠나는 게 은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테니까.

물론 평소 구영수의 성품을 감안했을 때, 자신의 의사가 쉽게 관철되지 않으리란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정이 많은 그는 분명 자신을 잡으려 들 테고, 그러므로 대화는 퍽 지지부진해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최혜성은 자신의 뜻이 꺾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저 입에서, 그 어떤 다정다감한 회유책이 흘러나온다고 하더라도 일절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 버티고 또 버티다 보면, 끝내는 그도 지쳐서 두 손을 들고 말겠지.

'이게 맞아. 더는 내 지저분한 일에 오빠를 끌어들일 수 없으니….'

"2억 줄게."

"…에?"

"3억."

"...."

"너무 적어? 그럼 5억!"

"오, 오빠."

* * *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단지 액수가 부족해서일 뿐이다.

누가 지은 말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시대를 관통하는 명언이 아닐 수가 없었다.

굳건하다 못해 모종의 결연함까지 느껴지던 최혜성의 눈빛은, 5억이란 금액에 마침내 하릴없이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중이었으니까.

"물론 공짜로 준단 말은 아니고. 최혜성, 너란 사람한테 투자를 하겠다는 이야기야."

"투자라니?"

"우리, 일 하나 같이 하자."

누차 언급했다시피 최혜성의 요리 수준은, 비단 평범한 가정주부로 썩히기엔 너무도 아까운 실력이었다.

그래서 돈도 남아돌겠다, 대뇌 망상으로나 그려 보던 요식업 사업을 해볼 생각이었다.

물론 편의점 드나들기도 바쁜 마당에 내가 주체적으로 뭘 하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최혜성은 요리 연구소 소장 겸 대표 이사로 앉혀 놓고.

전문 경영인은 따로 또 구하든가 해야지.

그처럼 내가 구상한 계획을 대충 풀어놓으니, 묵묵히 경청하던 최혜성으로부터 불현듯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근데, 오빠는…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되는 거잖아."

"응?"

"요식업 이런 거 안 차려도 싸이킥이니까, 그쪽에서 충분히 더 수입이 날 텐데. 굳이 사업을 하려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면…."

"꼭 너 때문만은 아니고."

"그럼…."

"물론 네가 자립하길 바라는 마음도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보다 내 진짜 목적은 따로 있으니까 괜한 부담은 안 가져도 돼."

내 최종 목표는 PB상품의 개발이었다.

우리 공장에서 찍어낸 간편식을 마굴 편의점 매대에 밀어 넣겠다는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최혜성에겐 미안한 짓이겠지만, 분위기 봐서 계획한 대로 납품 음식에다 미량의 독도 좀 섞고 말이다.

"그 진짜 목적이 뭔데?"

"있어. 장엄하고 숭고한, 어쩌면 독립운동보다 더 위대한…."

"오빠, 배고파?"

"응. 벌써 8시다. 밥 먹자."

"어. 금방 차려 줄게."

우리는 식사를 하며 못 다한 이야기를 마저 나눴다.

당연한 소리겠다만, 최혜성은 물론이고 나 또한 사업 경험이 없었다.

그러한 연유로 머리를 맞댄 끝에 우리는 너무 서두르지 않기로 뜻을 모았다.

일단 최혜성이 3개월의 말미를 요구하길래 그러라고 했지.

실제 간편식 공장에도 일을 나가보는 등, 할 수 있는 한 경험과 지식을 쌓고 싶단다.

기특한 녀석.

그러고 보면 몽마 스킬이 성공을 하긴 한 듯도 싶었다.

당초 우려와는 달리,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식의 자신 없어 하는 반응은 일절 보이질 않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도 말해줘야지.

"참. 그리고, 아까 마트에서 그 남자 말이야."

"어? 아, 으응."

"더 이상 신경 안 써도 돼."

"뭐?"

"아까 너 자는 동안 그 인간 만나서 다 잘 해결했어."

"설마…. 돈 줬어?"

"아니? 절대 아니지."

"그럼 어떻게…."

"그냥. 실은 저- 관공서 쪽에 콧방귀 좀 뀐다는 아는 양반이 있어서. 그분 도움 받아서 뒷말 안 나오게 마무리 지었으니까, 괜히 나한테 피해 준다 어쩐다 하면서 가출한단 소리 하지 말라고."

"오빠…."

듣자 하니 최혜성은 이미 원금에 더한 이자까지 법정 한도를 초과해 지불한 상태였다고.

그러니 더는 박정수에게 돈을 줄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이 문제 또한 관리청에서 대신 군소리 안 나게 처리해 준다고 했으니까 믿어봐야지.

그나저나 생각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박정수의 현재 상태가 퍽 궁금하긴 하다.

공포를 걸기만 걸었다 뿐이지, 깜빡하고 그 사후 결과까진 확인을 안 하고 돌아와 버린 거다.

나는 내친김에 유나 님께 DM을 날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답신이 왔다.

-유나님, 바쁘실까요?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박정수 씨 근황이 궁금해서요.

-그렇지 않아도 그 건으로 지금 경찰서에 와 있어요.

갑자기 경찰서는 왜?

-설명드리자면 좀 길어질 거 같아서, 혹시 잠시 통화 괜찮으실까요?

-네, 네. 지금 바로 됩니다.

대답을 하자마자 곧장 벨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어진 유나 님과의 통화에서 나는 뜻밖의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영수 님이 귀가하신 뒤로도 계속 횡설수설하던 박정수 씨가, 급기야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 범죄를 자백했어요.

"살인을 자백했다고요?"

-네. 그것도 단 건이 아니라 총 3명이나 살해했더라고요. 그 때문에 지금 여기 경찰서가 뒤집어지고 난리도 아니네요.

그 인간, 상상 이상으로 쓰레기였네….

"근데, 갑자기 왜요? 무슨 심경의 변화로 자백을 했대요?"

-그걸 저에게 물으시면….

"...?"

-영수 님이 그 이유를 모르시면 세상 누가 알까 싶습니다만.

'설마.'

레알 내가 건 그 증폭된 공포가 그 원인이라고?

"그, 횡설수설했다던 내용이 어떻던가요?"

-자신에게 살해당한 원혼들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겁에 질린 낯빛으로 계속 그 피해자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고 웃고 소리 지르는 등 별 쌩쇼를 다 하다가 마지막엔 자기 입으로 경찰을 불러달라고 했답니다. 자수하지 않으면 그들이 자길 데려간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하면서요.

"아아…."

정황을 들어보니 스킬이 먹혀도 제대로 먹힌 듯했다.

공포(1)

마력은 고작 1밖에 들지 않는 주제에, 그야말로 갓성비 스킬이 아닐 수가 없다.

[몽마]

서큐버스의 고유 스킬.

앞으론 아리아가 손등으로 공깃돌 좀 건드리는 거 봐도 그냥 모른 척 하고 넘어가야지.

-그래서 박정수에 대해선 이제 더 이상 골치 안 썩어도 될 듯해요. 로펌 쪽에 아는 분이 계셔서 아까 슬쩍 여쭤봤더니, 제아무리 자백이라고는 해도 죄질이 최악이라 박정수가 살아서는 출소하기 힘들 거라고 하네요.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박정수에 의해 피해를 입은 분들의 이야기는 안타까울 따름이었지만.

"아무튼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가뜩이나 공무로 바쁘실 텐데…."

- 아닙니다. 이 정도 갖고 뭘요. 바라는 게 있으시면 DM이든 전화든 언제든 연락만 주세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하네요."

- 참. 그리고…. 이제 더는 없는 거겠죠?

"뭐가요?"

- 저희를 놀라게 할만한 영수 님의 또 다른 면모 말이에요. 아직 드러내지 않으신 능력이라든지….

"없습니다."

대답하기 직전 입에 침 몇 번을 바르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죄다 고객들 스킬을 빌려다 쓰는 거라, 어차피 내 능력도 아니었으니까.

* * *

입궁 나흘째.

광화문 일대에선 공성전이 한창이었다.

다들 성채 수복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돌진하는 이 판국에, 후방에서 그들 동료를 바라보는 권인하의 눈동자는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여느 때처럼 진두지휘를 하기는커녕, 누가 봐도 딴생각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전장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한 수장의 태업은, 무릇 길드원들의 사기에도 동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사실 지금 이 미궁 내에서 권인하보다 더 심적 혼란으로 괴로운 사람도 또 없을 것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내 이목을 기만하는 잠행술이 존재한다고…? 이 천하의 권인하 앞에서?'

그의 심마는 다름 아닌 구영수였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던 자신의 면전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린 그 활쟁이 말이다.

'대체 정체가 뭐냐?'

지난달을 기준으로 UN 산하 세계 각성자 협의회에 등재된 대한민국 국적의 싸이킥은 총 6,326명.

그중 레벨 50의 벽을 넘어선 이는 현재까지 25명에 불과했으니.

권인하는 머릿속에서 그들 고레벨 싸이킥을 대상으로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더랬다.

구영수가 있던 그 자리에 인물만 바꿔 보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누구를 데려다 놓는다 한들, 그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이 대한민국 내에선 권인하의 감각을 대놓고 속일 수 있을 만한 인물은 없다는 이야기였다.

한데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신출내기 싸이킥에게 그러한 통념이 보기 좋게 박살 나버렸다.

'그렇다고 그자의 레벨이 최소한 내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잖아.'

각성자의 레벨 공개가 의무는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 정보를 오픈하지 않고서 미궁에서 활동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일단 길드 가입 자체가 안 될뿐더러, 하다못해 현장에서조차 자격 검증이 안 된 싸이킥을 끼워 줄 파티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 만에 하나 구영수가 추측처럼 고레벨 싸이킥이었다면, 이 좁은 땅덩어리에 소문이 퍼져도 진즉에 퍼졌을 거란 소리였다.

"아오, 씨! 진짜 궁금해 미치겠네."

하물며 자존심 다 버리고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려 해도, 당장은 그럴 수조차 없었다.

정황상 구영수는 이미 미궁을 빠져나간 듯했으니까.

'오윤아, 그 여자는 공무원이란 사람이 만사 다 제끼고 그자를 뒤쫓아 나간 것 같은데….'

한 길드를 이끄는 자로써, 권인하는 그러한 일탈을 감행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유독 더 그녀가 얄밉게 느껴지는 이유였다.

'아무튼 나가기만 해 봐라. 국민신문고의 매운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줄 테니.'

* * *

"국장님. 혹시 면봉 있으세요?"

"국장실이 무슨 다잇소냐? 없어."

그렇게 대꾸는 퉁명스럽게 해 놓고, 곧 서랍에서 꺼낸 면봉 한 묶음을 던져 주는 윤태호 국장이었다.

오윤아는 소파에 앉은 채 그 면봉으로 정성스레 귀를 후벼팠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윤태호 국장이 일침을 날렸다.

"그러게 마음을 곱게 쓰랬지. 평소에 얼마나 시비를 털고 다니고, 얼마나 사람들이 욕을 해 대길래 틈만 나면 그렇게 귀를 파대냐, 파대기는?"

"어우, 시원해. 역시 국장님 면봉이 최고네요. 제가 죽은소에서 산 건 영 못 쓰겠더만."

"그치? 영 다르지?"

"네. 확실히요."

"그거 온라인에서 비싸게 주고 산 거야. 그러니 아껴 써. 야! 또 뽑지 마. 한 개로 두 번 파라고!"

물론 상관이 말린다고 그 말을 들을 오윤아가 아니었으니.

그녀는 보란 듯이 양손에 쥔 면봉으로 양쪽 귓구멍을 동시에 휘돌리는 퍼포먼스까지 자행해 보였다.

그에 언뜻 윤태호 국장의 엉덩이가 들썩이는 듯도 했으나.

"참! 레드 크리스탈 말인데요."

"…엉?"

"저희한테 위탁 판매 의뢰가 들어왔어요."

"레드 크리스탈을? 위탁? 누가?"

"누구긴 누구겠어요. 구영수 님이지."

"...!"

엉거주춤한 자세였던 윤태호 국장이 두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아예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승천하다 못해 귀에 걸린 입꼬리는 되레 그로테스크한 인상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그 흉측한 얼굴이 보기 싫었던 오윤아가 한 움큼 집어 든 면봉을 추가로 귓구멍에 냅다 꼽았다지만 별 효력은 없었다.

"진짜지?"

윤태호 국장은 그렇게 인간 하회탈로 분한 채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32화.

"어디 가?"

"면접 보러."

"면접? 어디?"

"간편식 공장."

"아아."

사업 얘기를 꺼낸 지 채 하루도 안 지났다.

그런데도 벌써 움직이기 시작하는 최혜성이었다.

누구와는 다르게 대단한 행동력이 아닐 수 없다.

"다녀올게."

"그래, 가서 이모님들하고 싸우지 말고."

"피-."

모처럼 혼자가 된 나는 식탁 위에 레드 크리스탈을 올려놓고서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었다.

촬영 전 안경 천으로 반짝반짝 광이 나도록 닦았음은 물론이었다.

그렇게 찍은 수십 장의 사진 중 고르고 고른 다섯 장의 사진을 첨부해 판매 글 하나를 작성했다.

각성자 경매 어플에 말이다.

「제목 : 레드 크리스탈 팝니다(정품)」

「내용 : 얼마 전 미궁에서 주운 레드 크리스탈 판매합니다. 네고 문의는 차단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경매 참여 허용 기간은 20일.

경매 시작 금액은 5천만 달러로 책정해두었다.

원래는 1억 달러로 스타트를 끊으려 했지만, 어플에서 설정해 놓은 최대 가격이 5천만 달러밖에 되지 않더라.

한데 등록을 마친 지 채 5분도 되질 않아 뜻밖의 알람이 수신되었다.

메시지를 열어 보니 눈을 의심케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수의 신고로 인해 회원님이 등록하신 게시글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거기다 연타로 들어오는 마무리 일격까지.

[허위, 과장 매물 등록으로 인한 약관 위반이 확인되어 회원님의 계정이 정지되었습니다. 이의 제기 및 기타 문의 사항은 고객센터로 연락하시면 친절히 응대해 드리겠습니다.]

"...."

나는 즉시 안내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문의가 폭주 어쩌구 하면서 10여 분이 넘도록 연결이 되지 않았다.

차선으로 1:1 문의 게시판을 이용해 볼까 했지만, 그것도 그냥 곧 관뒀다.

"내가 아쉽나? 지들이 아쉽지."

아닌 게 아니라, 솔직히 13%에 달하는 수수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막말로 이 레드 크리스탈이 직전의 경우처럼 2.5억 달러에 팔린다고 한다면 그 수수료만으로 3천만 달러 이상을 떼어야 한단 소리다.

한호중인지 뭔지 하는 싸이킥이 왜 이걸 경매에 올리질 않고 사우디 부호에게 당근으론 넘겼는지 알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겠다.

"그렇다면 나도 직거래다."

하지만 막상 결심을 실행에 옮기자니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인맥이 문제였다.

어디 거래처를 뚫으려 해도 아는 싸이킥이 없다는 거다.

유나 님을 제외하면 말이다.

//

-안녕하세요. 혹시 바쁘신가요?

-아뇨. 전혀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 다른 게 아니라… 뭘 좀 팔고 싶은데 마땅한 루트가 없어서요.

-어떤 거요?

-레드 크리스탈이요.

//

그런데 초초하게시리, 이후 한동안 답신이 오질 않았다.

설마, 유나 님마저 날 못 믿고는 차단한 걸까.

그런 합리적 의심으로 괴로워하며 머리를 쥐어뜯은 채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던 와중이었다.

한참만에야 울리는 알람에 다급히 휴대폰 화면을 확인해 보니 기다리던 유나 님의 메시지가 당도해 있었다.

//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구매처를 좀 알아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시 생각하신 가격대가 있으실까요?

//

얼마를 부르지?

//

-제가 영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유나 님께 판매를 일임하고 싶은데….

-저한테요? 위탁을 맡기고 싶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네. 대신 판매대금의 10, 아니 12%를 수수료로 드릴게요.

//

* * *

구영수는 문자 그대로 의문의 사내였다.

관리청은 여전히 그에게 궁금한 점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아니, 사실 알아낸 게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원래는 그가 관리청을 방문했을 때 요목조목 캐물을 생각이었다만.

오윤아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심문 절차는 폐기되었다.

혹여 그의 심기를 건드릴 짓 따윈 하지 말자는 논리였다.

당장은 퍼주기만 하는 식으로 환심을 사는 게 우선이라면서.

그래야 다른 나라에 히든 클래스 싸이킥을 빼앗기는 불상사가 없을 거라며 말이다.

그 때문에 윤태호 국장이 아무런 상의도 없이 급발진해서는 블랙 카드까지 발급해 버리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만.

어쨌거나 그날 미팅 현장에서 레드 크리스탈의 '레'자도 입에 답질 않았던 것도 그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한데 웬걸?

구영수를 집으로 돌려보낸 지 채 하루 만에 본인 스스로 레드 크리스탈의 소유자임을 자인하는 메시지를 보내오다니.

심지어는 아예 관리청에 판매를 위탁하고 싶다고까지 말하고 있었다.

오윤아, 아니 관리청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앓던 이가 단번에 절로 빠지는 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로써 최소한 국부의 해외 유출은 막을 수가 있게 되었으니까.

나아가 구영수와의 관계성도 한층 더 끈끈하게 다질 수 있는 건 덤이었다.

'다만 문제는 판매 가격인데….'

윤태호 국장과 나누던 대화에서도 여러 차례 드러났듯, 오윤아는 진심으로 구영수가 손해 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레드 크리스탈의 판매 대상을 국내 한정으로 좁힐 경우,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의 손해 감수는 불가피할 터.

'이 문젤 어떻게 해결한담?'

기껏 고심해봤자 사실 별 방법이 없었다.

그저 솔직히 털어놓고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는.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고….'

* * *

유나 님에게 뜻밖의 역제안을 받았다.

위탁 판매를 응낙하는 조건으로 그 판매 대상을 국내 싸이킥으로 한정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들어보니 나름대로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과장 좀 보태면, 유나 님의 직장인 관리청이 공중분해 당할 수도 있단다.

레드 크리스탈이 또다시 해외로 팔려나가게 된다면 말이다.

이미 얼마 전 한호준의 사례로 언론이며 정치권으로부터 융단 폭격을 당했었다고.

유나 님은 그러면서,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최대한 비싼 값을 받아주겠노라 공언했다.

심지어는 내가 제시했던 수수료조차 일체 마다하면서 말이다.

//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전혀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영수 님께서 그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저희는 무조건 수용하고 따를게요.

//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더 부담되는데요.

//

-좋습니다. 말씀대로 진행해 주세요.

-저, 정말요?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대신 수수료는 판매대금의 10%로 하시죠.

-아뇨, 아뇨! 수수료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렇게까지 양보해 주셨는데 저희도 염치가 있죠.

-에이. 그렇게 따지면 저도 세금을 안 내는데 최소한의 성의는 보이는 게 맞죠.

//

얼마간의 실랑이 끝에 결국 내 뜻이 관철됨으로 대화는 매듭지어졌다.

계약서는 다음 날 만나서 쓰기로 했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내 머릿속엔 절로 떠오르는 속담 하나가 있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편의점 금고엔 아직 빨간 마돌이 100개도 넘게 남아 있었다.

거기다 이번 보급 퀘스트를 완료하게 되면 보상으로 100개의 마돌을 추가로 받게 된다.

내가 오랜 고민 없이 유나 님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였다.

부자가 되니 마음 씀씀이도 절로 대협처럼 넓어진 거지.

"아 참. 얼마나 남았더라?"

나는 내친김에 퀘스트 마감 타이머를 체크해보았다.

[01:18:35:32]

[01:18:35:31]

[01:18:35:29]

.

.

.

원래는 기한이 7일인 퀘스트였다.

별 한 것도 없는데, 밖으로 나온 지 벌써 5일이나 지나버렸다.

무슨 군대 휴가 나온 것도 아니고.

뭐 이리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건지, 참….

//

-형님. 혹시 지금 시간 되십니까?

-엉? 왜?

-마트 좀 다녀와야 할 거 같아서요.

-아. 오늘은 좀 힘들 거 같은데. 결기념일이라.

-앗. 그럼 할 수 없죠. 암튼 축하드립니다!

-뭘, ㅎㅎ. 미안하네. 잘 다녀오고.

//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탓으로 더는 보급품 쇼핑을 미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수 형님을 섭외하려 했더니만 실패다.

하는 수없이 일단 집 밖으로 나온 나는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검은색 밴 차량으로 다가가 똑똑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뭔가 부산스러운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엊그제 나를 따라다니다가 급기야는 일가족으로 분해 메소드 연기까지 보여주었던, 바로 그 미행자들 말이다.

"안녕하세요."

"…예에. 아, 안녕하세요."

"그, 뭐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 무슨 부탁을…."

"어차피 저 따라다니실 거 아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차 좀 얻어타면 안 될까 해서요."

"저, 저희 차를요?"

"네. 보니까 자리도 많이 남는 거 같은데, 어려울까요?"

"자, 잠시만요."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아저씨가 다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짧게 통화를 마친 그는 왠지 모르게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타시죠."

"감사합니다."

* * *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게 조직의 생리다.

구영수를 감시하라는 청장의 명을, 윤태호 국장은 마냥 묵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STF 1팀을 다시 내보내긴 했다.

단, 이번엔 그 어떠한 명령도 하달하질 않았다.

그저 주차장에 짱박힌 채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당부 외엔 말이다.

한 마디로 청장의 명은 따르되, 눈 가리고 아웅 하겠다는 윤태호 국장의 잔머리였다.

괜히 또 구영수에게 발각되어서 서로 민망한 상황을 만드느니, 차라리 이편이 최선이라는 판단이었지만….

"어, 웬일이야?"

-걸렸습니다.

"뭐라고? 특근비 삥땅 친 거, 그거? 마누라한테?"

-그게 아니라, 지금 저희 앞에… 토끼가 있습니다.

"…아니, 시발! 왜 또 걸려!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랬잖아!"

토끼는 감시 타깃인 구영수를 지칭하는 암어.

그에 윤태호 국장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휴대폰 너머로 다급히 해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희는 진짜 명령하신 대로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토끼가 어떻게 알았는지 제 발로 저희를 찾아온 겁니다.

"…확실해?"

-제 말에 거짓이 있다면 바로 사표를 쓰겠습니다.

"으음."

-그리고 토끼가 부탁한 게 있는데….

이야기를 마저 다 들은 윤태호 국장은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을 감시하던 차량을 택시마냥 쓰겠다는 거잖아?'

어이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만, 그 덕분에 참담했던 심정은 되레 한결 편해졌다.

적어도 구영수가 작금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진 않는 듯하니 말이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무조건 태워 줘야지."

-알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구영수가 바라는 거 있으면 뭐든 다 들어줘."

-전부 다, 말입니까?

"그래, 전부 다! 설령 그거, 자네들 차 경유차에 휘발유 넣고 싶다고 해도 그러자고 해."

-저, 정말입니까?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만큼 심기 거스르지 말고 잘 모시라고! 끊어!"

-옛!

그렇게 상황을 일단락시키긴 했다만, 윤태호 국장의 뜨악한 마음은 영 나아지질 않던 중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감시를 붙인 걸 걸려버렸다.

향후 구영수가 이 일을 문제로 삼을 경우, 관리청으로선 그 어떤 변명의 여지조차 없어져 버린 거다.

한데 그리 골치가 아프게 된 상황에서, 오윤아가 또다시 전혀 예상치도 못한 호외를 갖고 국장실을 찾아왔다.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레드 크리스탈의 위탁 판매건에 대한 내용이었다.

"국장님! 구영수 님이 맡긴 레드 크리스탈 위탁 판매건이요!"

"뭐, 뭐야? 설마 마음 바뀌었대?"

"아뇨, 심지어 저희 요청대로 국내에서 판매하겠대요!"

"얼쑤~!"

감정을 지닌 인간이라면 절로 어깨춤이 춰져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비록 이를 지켜보는 아랫사람의 표정은 못내 썩어갈지라도.

33화.

"반갑습니다. 구영수입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강철호입니다, 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임도철입니다."

"최용석입니다."

"진아람이에요."

달리는 차 안에서 그들과 통성명을 나눴다.

영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가 싫어서 내가 먼저 손을 내민 거다.

씹히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걱정한 거 치곤 잘 받아주더라.

"아무튼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부득이하게 폐를 끼치게 된 점에 대해 유감스럽기만 할 따름입니다."

"공무직이라 어쩔 수 없다는 거 압니다. 이해해요."

그처럼 몇 마디를 주고 받으니 딱딱하기만 하던 분위기도 한층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팀장이라 소개한 아저씨의 입에선 곧 뜻밖의 질문이 흘러나왔다.

"저…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어제는 그렇다 쳐도, 오늘은 또 어떻게 저희 존재를 알아차리신 겁니까?"

"음,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요.'

진짜로 내가 어떻게 이 사람들을 느끼는 건지 모르겠다.

굳이 설명하자면 나를 의식하는 저들의 존재감이, 마치 숨 쉬듯 절로 느껴졌달까.

그렇다고 대충 둘러대자니, 상상력이 고자라 딱히 떠오르는 변명거리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정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냥 여러분들의 존재가 내 감각에 자연스레 포착됐습니다."

"...!"

한데 그 솔직함은 뜻밖의 파급력을 일으켰다.

그들 모두가, 언뜻 과장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놀라거나 당황해하는 반응을 보인 거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정말 느낌만으로 우릴 포착했단 겁니까? 아무런 감지 스킬조차 사용하지 않고?"

"그으…렇습니다만."

사실 바로 직전까진 이 능력을 그리 특별하다 생각하지 못한 나였다.

경험이 없다 보니 그냥 다른 싸이킥들도 다 이만한 감지력 정도는 있는 줄 알았던 거지.

한데 이들의 반응과, 이어지는 설명을 들어보니 내가 단단히 착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어제오늘, 영수 님께 발각당하기 직전까지 저희가 수행했던 그 모든 미행 또는 감시 작전에서, 이토록 완벽한 실패를 경험했던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어떠한 인물을 작전 대상을 삼아 왔었는지를 줄줄이 읊어댔다.

물론 그런다고 내가 알 만한 이름이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저들의 나름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그 하나하나가 퍽 대단한 위인들이라는 것만큼은 잘 알겠다.

"과연, 국장님 말씀대로 당신은 전서…."

"쉿!"

뭐야, 왜 말을 하다 끊어? 사람 궁금하게.

"혹시 국장님이 제 뒷담화하셨나요?"

"예? 아, 아닙니다. 아무튼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수행에 빈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혹시 미진한 부분이 발견된다면 기탄없이 지적 부탁드립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순식간에 미행원이 내 수행원으로 둔갑해버렸다.

나를 향한 눈빛들이 반짝거리는 걸 보면, 최소한 억지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공언이라는 것쯤은 알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부담스럽기만 한 나였다.

나 같은 편돌이가 뭐라고 이런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느냐는 거지.

그래서 얼른 입을 열었다.

"혹시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들이신가요?"

"…예?"

* * *

외부 일정으로 막 집무실을 나서려던 박평식 청장이었다.

한데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윤태호 국장에 의해 그만 발목이 붙들리고 말았다.

그가 가져온 소식이 워낙 충격적인 탓이었다.

"뭐? 위탁 판매 의뢰가 들어 왔어? 레드 크리스탈을? 대체 누가?"

"구영수입니다!"

"구영수라면…."

"그 블랙카드를 준 히든 클래스 싸이킥 말입니다."

"허…."

박평식 청장은 이어지는 윤태호 국장의 설명을 묵묵히 경청했다.

그리고 말미에 이르러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근데 왜 보고서로는 작성하지 않았나?"

"…예?"

"그리 설명할 게 많은데 어째서 문서화해서 올리질 않았느냔 말이지."

"그, 그게 저도 방금 보고받은 사안인지라…. 곧 정리해서 오늘 중으로 올리겠습니다."

"꼭, 반드시."

"옙!"

윤태호 국장의 글솜씨에 비해 그 언변은 확실히 듣는 맛이 덜했다.

박평식 청장이 굳이 문서화를 요구한 속내였다.

"아무튼 그래서, 레드 크리스탈은 그럼 누구에게 어떻게 판매할 참인가?"

"일단은 비밀 경매 방식이 최선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래도 공개 입찰을 하게 되면 이래저래 날파리들이 꼬여도 심히 꼬일 거라…."

"음, 그건 그렇지."

판매 대상은 국내에서 활동하는, 대한민국 국적의 싸이킥을 한정으로 한다.

기타 99만여 명의 전 세계 싸이킥들에겐 그 기회조차 주어지질 않는다는 거다.

제아무리 파는 놈 마음이라지만, 그러한 정보가 새어나갈 경우 그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되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이야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중국 등, 국제 무대에서의 체급 깡패 국가들이 갖은 방법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압박해올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 이번 사안은 최대한 비밀스럽고 신속하게 해치워야만 한다.

문제는 미궁에 들어가 있는 예비 구매자들의 출궁 예상일이 아직도 한참이나 더 남았다는 거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나갔다.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비서가 급기야 안달복달을 하든 말든.

"청장님. 정용화 의원님과의 저녁 약속은 어떻게 할까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그럼, 의원님 측엔 뭐라고 전언을…."

"가다 뒈졌다고 해."

"예?"

"그냥 대충 둘러대라고."

"아, 알겠습니다."

박평식 청장의 머릿속엔 외부 일정 따윈 이미 삭제된 지 오래였다.

* * *

"국장님께선 적극 협조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렇다는 말씀은…."

"저희는 무조건 구영수 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오늘 마트에서 구매해야 할 물품 가액이 1,200만 원 정도였다.

나 혼자 카트를 끌고 다닌다면 마감 때까지 쇼핑을 끝마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내가 저들의 수행(이라 쓰고 쇼핑 보조라 읽는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나도 양심이 있는지라 공짜로 부릴 생각은 없고, 일당만큼은 확실하고 후하게 쳐줄 생각이었다.

다만 저들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혹여 김영란법에 접촉되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는데, 별문제가 없을 거라 하니 다행이었다.

나는 마트 입장에 앞서 그들에게 구매 목록을 공평하게 분배했다.

메모지가 없을뿐더러 수기로 일일이 옮기는 것도 고역이라, 그냥 단톡방을 만들어 그들을 초대했지.

자신들의 할당량을 확인한 그들의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이, 이걸 한 번에 다 사신다고요?"

"사는 건 사는 건데 가져가는 건 어떻게…."

"저희 밴이 넓긴 해도 이게 다 실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여자라서 일부러 가벼운 거 위주로 골라주신 거라면 괜찮으니 다시 배정해 주세요."

"가져가는 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마시고 구매만 해 주세요. 그리고 아람 님 의견은 차후 반영할 테니 오늘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자, 그럼 출발하시죠!"

"출발!"

그들은 신속하게 산개했다.

누가 특수부대원 아니랄까 봐, 카트를 밀며 흩어지는 그 뒷모습에서조차 모종의 절도와 씩씩함이 다 느껴질 정도였다.

* * *

그들 STF 대원들과의 만남은 나로 하여금, 싸이킥에 관한 식견을 좀 더 넓히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나에겐 당연했던 미행 또는 감시 눈치채기와 같은 능력이, 실은 각성자들 중에서도 전혀 평범하지 않은 패시브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거다.

쇼핑을 마친 뒤 주차장에 다다른 이 시점에서 내가 뭉그적대는 것도 사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장 본 물건들을 담으려면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야 하는데,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이 아이템을 쓰기가 영 꺼림칙했다.

직전까진 그저 막연하게, 다른 싸이킥들도 다 이런 주머니 하나쯤은 다들 차고 다니는 줄 알았지.

근데 이 역시 내 착각인 듯했다.

틈틈이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봤지만, 아공간 주머니와 관련한 내용은 끝내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까.

그나마 비스무리하게 요술 가방 또는 매직 백이라 부르는 아이템이 있긴 했지만, 그마저 이 아공간 주머니와는 성능이나 기능적인 측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매직 백은 자기 부피의 최대 5배 정도 용량밖에 수납이 안 될뿐더러, 수납 물품의 상태 보존에도 취약하단다.

그에 반해 아공간 주머니의 내부는 시간이 흐르질 않는다.

영원히 처음 상태 그대로의 보관이 가능하단 소리다.

그 덕분으로 쇼핑 카트에도 거리낌없이 샌드위치, 빵, 우유 등과 같은 신선 식품을 담을 수 있었던 거지.

거기다 비교를 불허하는 수납 용량은, 더 말해 봐야 입만 아플 뿐.

"저…. 일단 싣는 데까지 실어볼까요?"

"읭?"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가 타고 온 밴 차량이 눈앞에 세워져 있었다.

잠깐 상념에 잠긴 그 틈에 대원 중 한 명이 차를 빼 온 모양.

그래도 그 오지랖이 영 쓸모없지만은 않았다.

덩치 큰 밴차량 덕분에 최소한 주변 어그로는 끌리지 않을 듯했으니까.

"자, 자. 어여 싣자고."

"아니. 잠깐 기다려주세요."

여기서 더 뜸을 들였다간 정말 차에 물건을 실을 기세의 그들이라, 나는 서둘러 허리춤에 달린 아공간 주머니를 빼 들며 말했다.

"차에 말고, 여기다 담아주세요."

"…예? 어디요?"

"이 주머니요."

"아니. 그 손바닥만 한 거에 무슨…. 헉!"

찌푸린 얼굴로 되묻던 팀장 아저씨가 곧 두 눈을 부릅뜬 채 헛바람을 들이켰다.

나머지 대원들의 반응도 엇비슷했고.

내가 주머니의 주둥이를 순식간에 사람 한 명 들어갈 크기만큼 벌린 까닭이었다.

물론 그보다 더 충격적인 장면은 이제부터 시작이겠지만.

"자, 자. 어서 담으세요. 아니, 그냥 막 던지세요. 시간 없습니다."

나는 솔선수범으로, 카트에 담아 온 물건들을 아공간 주머니 속으로 마구 던져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너나 할 거 없이 일은 안 하고 경악성을 흘리기에만 바쁜 그들이었으니.

"아, 아니. 이 무슨…."

"뭐야? 왜 계속 들어가?"

"와-. 이런 개쩌는 아이템은 정말 처음 봅니다."

"진짜 신기하다. 영수 님, 저 이따 한번 들어가 봐도 돼요?"

나는 그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물건 담기에만 열중했다.

그러자 그들도 뒤늦게 눈치껏 열과 성을 다해 장 봐온 것들을 주머니에 던져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합심한 덕분에 끌고 온 카트 8개가 순식간에 비워졌다.

나는 다시 주둥이를 조인 아공간 주머니를 허리춤에 찼다.

그러자 그 즉시 팀장 아저씨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아, 안 무겁습니까?"

"네. 전혀요."

"정말 허리힘이 대단하십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공간 주머니의 무게는 어지간한 힙백보다 가볍다.

보관 물품의 중량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덕분이겠다.

하지만 나는 결국 진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 선망 어린 눈빛들이 썩 싫지만은 않아서.

34화.

STF 1팀 대원들을 태운 밴 차량이 올림픽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구영수와 헤어진 뒤, 본청으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어찌 된 영문으로 차내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다.

그 면면들엔 복잡한 심정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우리, 지금 이게 맞긴 한 겁니까?"

오랜 침묵을 깨트린 건 임도철 대원이었다.

질의로 시작된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전설이고 수행이고 다 좋다 이겁니다. 근데,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하물며 마트 쇼핑 도우미까지 자처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도철이 말에 동의합니다. 솔직히 카트 끌고 다니는 내내 자괴감만 들더라고요. 내가 이러려고 그 혹독한 훈련과 선발 과정을 거쳐 STF에 들어온 게 아닌데 하고 말입니다."

듣던 중 최용석까지 동조하고 나섰다.

두 사람의 시선은 이내 진아람에게로 향했다.

너도 어서 할 말이 있음 해 보라는 무언의 압박.

그에 진아람이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난 솔직히… 참신해서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는데…."

"뭣…."

"근데 선배들도 솔직히 좀, 너무 언행 불일치한 거 아녜요? 아까 보니까 두 사람, 무슨 킥보드마냥 한 발로 신나게 카트 밀면서 잘만 돌아다니던데."

"아니, 그건 단지 맡은 바 임무를 신속히 마무리하기 위한 가속도 증가 행위…."

"아하. 그래서 둘이 카트 경주하다가 보안 직원에게 걸려서는 그 욕을 잡수셨구나?"

"...."

연이은 팩트 폭격에 강철호와 임도철은 결국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러자 여태 잠자코만 있던 강철호 팀장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세상에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건 단지 액수가 부족해서라는 격언이 있지."

"...?"

"너희들. 아까 그분이 하사하신 금일봉을 열어보긴 했냔 말이지."

"...!"

그러고 보니 헤어지기 직전 구영수가 모두에게 나눠 준 봉투가 있었다.

다들 고생했다며, 약소하지만 얼마 안 되는 수고비를 넣었다고.

일단 받아서 안주머니에 갈무리해 놓긴 했는데, 그놈의 자존심 탓으로 아직까지 그 액수를 확인하지 않고 있던 그들이었다.

강철호 팀장만 빼놓고.

서둘러 봉투를 꺼내 주둥이를 벌려 본 모두는 일순 너나 할 거 없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헙."

"허억!"

"어머!"

봉투 안에 은은히 미소 짓고 있는 신사임당 다발들이 보였다.

끽해 봤자 만 원권 정도로 짐작했었거늘.

모두는 남다른 동체 시력으로 얼른 장수를 체크해 보았다.

도합 40장.

무려 200만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으니.

평탄한 대로를 달리는 중이었음에도 그들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심히 요동치고 있었다.

'고작 쇼핑 두 시간에 내 한 달 치 본봉이….'

'아아, 대인이시여.'

'신상 백. 신상 백!'

모두는 그저 붕어처럼 입만 끔뻑거릴 따름이었다.

뜻밖의 감격에 오히려 마땅한 표현이 잘 떠오르질 않는 탓이었다.

강철호 팀장은 그런 그들을 둘러보던 끝에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자, 이제 누가 불만을 이야기할 거지?"

"...."

"말만 해. 아직도 우리 팀인 게 부끄럽거든, 복귀하는 그 즉시 다른 부서 다른 팀으로 옮겨줄 테니까."

피드백은 즉각적이었다.

"아니, 팀장님. 면접 당시 여기 1팀에 뼈를 묻겠다던 제 각오와 다짐을 잊으신 겁니까?"

"1팀을 나가느니 차라리 STF 옷을 벗겠습니다."

"저도 여기서 정년퇴직하려고요. 나중에 승진해도 안 나갈 거예요. 우리 1팀 소중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으쌰으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강철호 팀장은 그런 팀원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박봉에다 열악한 처우를 그저 자부심 하나로 견디어오던 자신들이었거늘.

이처럼 제대로이다 못해 과분할 정도의 가치로 평가해준 건 실로 구영수가 최초였다.

그러니 절로 감읍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다들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오늘 내가 소고기 쏜다!"

"와아아-!"

사실 강철호이 받은 금일봉의 액수는 다른 팀원들의 두 배였다.

그가 시원하게 내지를 수 있는 이유였다.

* * *

띠링.

띠링띠링띠링~!

난데 없이 휴대폰 알림음이 폭주했다.

화면을 켜 보니 아까 쇼핑 리스트 뿌리느라 만들어뒀던 단톡방 알림이었다.

//

감격한 부지: 오늘 정말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황홀한 프로토: 손 보탤 일이 생기시면 주저 말고 불러 주십시오. 365일 24시간 언제든 바로 출동하겠습니다.

묻어가는 준식이: 저도저도요! >_<

//

다들 익명의 닉네임으로 표기되어 있는 탓에 누가 누군지 구별이 되질 않는다.

그래도 모두 만족해하는 눈치라 내심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돈 쓴 보람이 있단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나는 집에서 퀘스트 창에 떠 있는 발주품 목록과 마트 구매 영수증을 대조해 보는 중이었다.

혹시 모를 누락 품목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거다.

천문학적인 보상도 보상이다만, 그보다는 목숨이 달린 퀘스트라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면전에서 허공을 그어 대던 보급관의 낫이 좀 서슬 퍼렜어야 말이지.

"빠진 거 없이 잘 샀네."

재검에 삼검을 해 봐도 양쪽의 품목 리스트는 딱 맞아떨어졌다.

누가 고급 인력 아니랄까 봐, 새삼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는 STF 대원들이었다.

가능하다면 편의점에 데려가 알바로 쓰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다.

물론 맨정신으로 그 마물 소굴까지 따라오려 들 사람은 없겠다만은.

"시급을 두 배로 쳐 줘도 안 하겠지?"

"난 할래, 내가 할게. 무슨 일인데?"

"응?"

혼잣말을 했을 뿐인데, 맞장구를 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 최혜성이었다.

"뭐야? 너 언제 돌아왔어?"

"십 분 전쯤. 내가 다녀왔다고 인사까지 했는데, 정말 몰랐어?"

십 분 전이면 한창 빡 집중해서 영수증 체크하고 있을 때긴 하다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집 안에 누가 들어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건 좀처럼 납득이 되질 않는 이야기였다.

내가 무슨 위인전에나 나올법한 초월적 집중력의 소유자도 아닌데 말이다.

"혹시 나뭇잎 부락원(닌자 마을 사람)이세요?"

"뭐래?"

"그나저나 면접은 잘 봤고?"

"응. 다음 주부터 출근하기로 했어."

"급여는?"

"최저 시급이지, 뭐."

애초에 경험 쌓기가 목적인 취업이었다.

최혜성은, 얼마를 더 받고 말고는 딱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장래를 위해 당장의 손익에 연연해하지 않는 그 모습이 퍽 기특하기만 하다.

'녀석, 다 컸네. 돈 보다는 경험을….'

"그래서 그 시급 두 배나 하는 일이 뭔데? 당장 그만두고 그거 내가 할게. 나 시켜 줘요."

"…일단 내 감동부터 물어내자."

"에?"

나는 시급 두 배를 지불하는 대신, 최혜성에게 카드 한 장을 쥐어줬다.

원래는 귀차니즘에 그냥 내 계좌와 연동되어 있는 블랙 카드 자체를 맡길까도 했었다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뉴얼을 뒤져 보니 역시나 타인에게 블랙 카드를 양도 또는 대여하는 건 불법이라고 명시되어 있더라.

그래서 아까 돌아오는 길에 잠시 은행에 들러 체크 카드 한 장을 따로 발급받았다.

지금 최혜성에게 건넨 저 카드 말이다.

"약속했던 투자금 중 1차로 1억 넣었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그거로 사고 쓰라고."

"오, 오빠. 그치만…."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진 알겠는데, 단지 시설이나 물건 설비 등등에 돈 쓰는 것만 투자는 아니라고. 사람도 엄연히 재무 회계상 인건비로 산정되는 회사의 자원이거든. 그러니 석 달 뒤고 나발이고, 일단 네가 앞으로 창업할 회사에 내 투자를 유치하기로 수락한 이상, 이 돈은 네가 받아써도 마땅한 투자금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니, 전혀 못 알아듣겠어."

"...."

아니, 이보다 더 쉬운 설명이 어딨다고….

"그치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거 같아."

"뭘?"

"내가 이 신세 다 갚으려거든, 평생토록 오빠 옆에서 진짜 진짜 잘해야겠구나 하고."

퍽 감동적인 멘트이긴 하군.

나는 그냥 피식 웃어넘기고 말았다.

나름 주먹까지 쥐여 보이는 다짐이었다고는 했지만, 그 모습이 내 눈엔 치기 어린아이의 선언과 하나 다를 바 없게끔 느껴졌다.

'이 담에 커서 삼촌한테 시집갈꼬야!'

뭐, 그런 류의 허언과 대체 뭐가 다르냐는 거지.

저 미모에.

저 성품에.

잘도 주변 사람들이 최혜성을 일에만 미친 여자로 가만 놔두겠냔 말이다.

최혜성도 언젠간 복잡하고도 많은 인간관계를 겪고, 또 연애라는 걸 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나도 전처럼 이 아이를 마냥 '일해라 요리 노예야' 식으로 부려 먹지만은 못하겠지.

그러니 애초에 마음을 비우고 있는 편이 차라리 낫지 싶었다.

당장은 감상에 취한 최혜성이 제아무리 그 어떤 감언이설로 나를 감동시키려 한다 해도 말이다.

"아무튼. 나 없는 동안 생활비도 그 카드로 해결하고."

"어? 왜 없어? 오빠, 어디 가?"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아직 얘기를 안 했구나.

"응. 내일 출발하는데, 어느 정도 길게는 집을 비울 거야."

"길게 말이야? 어디 가는데?"

"그… 돈 벌러."

잠깐은 내가 처한 상황 그대로를 이실직고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네가 믿겠니? 탑 안에 있는 편의점에 일하러 간다고 하면.'

그것도 반강제로 복귀해야 한단 현실까지 밝히려니 괜히 내 마음이 짜치는 거다.

그래서 대충 둘러대고 말았다.

돈 벌러 간다는 게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으니까.

그에 최혜성은 역시나 궁금한 게 잔뜩인 눈치였다.

그럼에도 끔뻑이기만 하던 입을 끝내는 다물고야 마는 최혜성이었으니.

실로 대단한 자제력이 아닐 수가 없었다.

궁금한 거 잘 못 참는 나 같았으면 벌써 상대방 멱살을 쥐어 틀었어도 틀었을 텐데.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 와. 위험한 건 아니지?"

"어, 엉."

위험한 곳은 맞는데, 위험하진 않아.

* * *

다음 날 점심 무렵.

편의점 복귀를 앞두고 나는 시내 모처의 카페에 들렀다.

유나 님과 잡힌 약속 때문이었다.

"어, 일찍 오셨네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뇨. 저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잠시 인사 치례를 주고받은 뒤.

시간 끌 거 없이 나는 곧장 테이블 위에 레드 크리스탈을 올려놓았다.

"여기. 말씀드린 물건이요."

"이, 이게 레드 크리스탈…."

마돌에 고정된 유나 님의 시선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경탄으로 일렁이는 눈빛으로 짐작건대, 그녀로서도 레드 크리스탈의 실물은 처음 보는 모양.

"제, 제가 이걸 좀 만져 봐도 될까요?"

"되고 말고요. 그러시라고 꺼내 올려둔 건데요."

이윽고 유나 님의 떨리는 손이 마돌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그 직전에 니트릴 장갑을 착용하는 성의까지 보이는 그녀였으니.

그 정성 어린 태도는 나에겐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에겐 그처럼 소중한 물건을, 아무런 포장도 없이 고작 바지 주머니에 넣고 가져왔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꺼내놓기 전에 안경 천으로 한 번 더 닦기나 닦아 둘 걸.

그래도 내 미흡한 준비성에 대해 유나 님이 딱히 신경을 쓴다거나 실망한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이면 반대였지.

"정말 진품이 맞네요."

"딱 보면 척 아시는군요."

"모를 수가 없잖아요. 싸이킥이라면."

"...?"

내 뚱한 반응을 뒤늦게 감지한 유나 님이 되물었다.

"크리스탈과 접촉하면, 짜릿함이랄까? 그 특유의 전율이 느껴지니까요."

…몰루?

"…설마, 영수 님은 그런 느낌을 전혀 못 느끼신 건가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짜릿하긴커녕 솔직히 만질 때마다 찝찝하기만 찝찝하다뿐이었다.

'그건….'

…엄연히 그 어떤 생명체의 배설물이었으니까.

35화.

그러고 보면 동글동글한 생김새마저 은근히 염소 똥과 닮았다.

염소가 피똥을 싸면 저런 모양이려나.

"그러니까 유나 님만큼은 드시지 마세요."

"네? 그게 무슨…."

"아,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아무튼 이로써 내가 보통의 싸이킥과 다른 점 또 하나가 밝혀졌다.

-몬스터의 배설물에 반응 안 함.

"제가 좀 둔감한가 봐요. 저한텐 영 느껴지는 게 없네요."

"그렇다고 하기엔, 자신을 암중 감시하던 STF팀을 두 번이나 포착하신 영수 님이 아니시던가요?"

"글쎄요, 사람 기척은 귀신같이 느껴도 똥은 좀 다른 얘기인지라…."

"네? 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마터면 말실수를 할 뻔했다.

비록 유나 님의 크리스탈 섭취 경험 유무는 알 길이 없다만.

그래도 여태껏 자신의 동료들이 개똥을 보약으로 알고 먹어왔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충격을 받고 말 테니.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지금도 생생히 느껴집니다."

"뭐가요?"

"서른다섯, 맞죠?"

"...."

순간 유나 님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방금 내가 읊은 숫자가, 우리 주변 암암리에 포진해 있는 그녀의 동료 인원과 정확히 일치해서일 것이다.

"너무하세요."

"...예?"

"제가 노안인 건 인정한다지만, 그래도 서른다섯으로 보인다는 건 좀…."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여자 나이를 열 살이나 올려 친 후레자식이 되어버렸다.

얼른 해명을 하고자 입을 떼려는데 유나 님이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선수를 쳤다.

"농담이에요, 농담. 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이나 했네요. 당황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유나 님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미남미녀와 살면 부부 싸움을 하다가도 상대방 얼굴 보고 화가 절로 풀린다고 했다.

그 말이 한 푼의 과장이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실 그 잡채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영수 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은근히 타격감이 좋으시네요. 놀리는 맛이 찰져요."

"…그, 그런가요?"

확, 마 그냥 고백 공격으로 혼내줄까?

"그치만 이 역시 자중하겠습니다. 잠시 무례했던 점,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 주신다면 제가 그 은혜 잊지 않고 이 레드 크리스탈, 한번 정말 열심히 잘 팔아보겠습니다."

"...."

누가 싸이킥들을 관리감독하는 집행관 아니랄까 봐, 눈치가 백단인 듯한 그녀였다.

내가 급발진하기 전에 예의를 차리며 선을 그어버리니 말이다.

"아무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실망 안 시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네. 말씀하세요."

오늘 이 자리를 만든 데에는 마돌의 처분 외에도 또 다른 부차적 목적이 있었다.

"저, 한 2, 3주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될 거 같습니다."

"2, 3주나요? 어디 가시는데요?"

"미궁이요."

"...?!"

* * *

이번 구영수와의 회동엔 무려 중대 규모의 STF 대원들이 따라붙었다.

전날 임무 수행으로 비번인 1팀을 제외하면 사실상 대대 전원이 투입된 것이다.

사실 그들과의 동행을 영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오윤아였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윗선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에게 하달된 명목상의 임무는 요인 경호.

관건은 이미 두 번이나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구영수가, 이러한 관리청의 조치를 과연 순수한 의도로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STF를 출동은 시키되, 회동 장소인 카페로부터 반경 500미터 이내의 접근을 불허한 것이었고.

심지어는 망원 렌즈나 카메라 등, 그 어떠한 관찰 장비조차 허락하질 않았다.

자신들의 임무가, 그저 행여 모를 외부의 변수로부터 회동 장소를 엄호하는 것임을 거듭 주지시켰음은 물론이었고.

그런데도.

그럼에도.

기어이 그들의 존재 전체를 눈치채고야 만 구영수였으니.

오윤아의 전신이 별수 없게 소름으로 뒤덮인 이유였다.

'미친…. 대체 이 무슨 듣도 보도 못한 능력인 건데!'

침착해 보려 애써 봤지만 도저히 쉽지가 않았다.

무리수로 나이 드립이나 지껄이다 자칫 분위기를 망칠 뻔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그의 성품이 경직되거나 권위적이지 않음이 참으로 다행스럽게만 여겨질 따름이었다.

그래도 한 고비를 넘긴 뒤로는 나름 분위기를 잘 수습해나가고 있다며 자평하던 중이었거늘.

"미궁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어, 언제요?"

"이따 출발하려고요."

"오늘요? 그치만 다른 싸이킥들이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서, 설마! 설마 혼자 입장하신다는 말씀은 아닌 거죠?"

"...."

구영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이 곧 긍정임을, 오윤아는 모르지 않았다.

충격?

경악?

아니, 그 어떠한 단어로도 지금의 감정을 표현하기엔 부족함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이 미친놈, 지금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미궁에 홀로 입장하겠다는 선언.

그것은 자살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현존하는 그 어떤 싸이킥조차, 그 안에서 노도처럼 밀려드는 마물들을 상대로 30분 이상을 버틸 수 있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히든 클래스고 나발이고.

이건 그냥 미친 소리이고 미친 짓일 뿐.

이 상황에서 오윤아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라곤 단 하나뿐이었다.

그저 이 무모하고 무지한 사내를, 사력을 다해 말리는 수밖에.

"집행관에게는 무릇 싸이킥들의 안위를 살펴야 할 책무가 있어요."

"...?"

"그러므로 저 오윤아는 집행관으로써 싸이킥 구영수 님께, 방금 언급하신 그 무모한 계획에 대한 철회를 강력하게 권고드립니다."

"...."

"그럼에도 만약 제 청을 거절하시겠다면…."

* * *

사실 그냥 입 닥치고 다녀오려던 생각도 있긴 했었다.

문제는 그렇게 해 버리면, 나중에 돌아와서 내 실종에 대한 소명을 늘어놓아야만 하는 귀찮은 일이 생긴다.

그래서 다는 말고, 적당히 오픈한 뒤 다녀오려던 거였지.

혼자 미궁에 들어갈 거라고만 말이다.

물론 지금처럼 유나 님 혹은 관리청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기어이 계획한 바를 강행한 건,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바로 저들이 내게 준 무소불위의 권력, 블랙카드 말이다.

쉽게 말해 관리청에겐 내 결정이나 행동을 강제할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그들 스스로가 제 무덤을 판 격이겠다만, 이제 와선 뭐 어쩔 티비다.

실제로도 유나 님은 강경한 어조에 반해 전혀 그렇지 못한 내용으로 나를 설득하려 들고 있었다.

기껏 고른다고 고른, 센 표현이 '강권' 정도밖에 되질 않았으니.

한데 그 뒤로 이어진, 전혀 예상치도 못한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나는 그만 정신이 멍해졌다.

"제 청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저도 영수 님과 동행하겠습니다."

나니?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집행관으로서 영수 님이 사지로 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같이 죽자는 식은 좀…."

"그러니 우리, 같이 살아요."

"...!"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찐따같이 두근대는 심장이라니.

아무튼 그렇게까지 내 안위를 걱정해주는 건 참으로 고맙다만, 그렇다고 여기서 뜻을 접을 거였으면 애초에 말도 꺼내지 않았을 나다.

"그… 유나 님."

"저 좀 살려주세요."

"아니, 진정하시고. 일단 제 얘기부터 좀 들어보셔요."

"네에-."

겨우 그녀를 침묵시키고는 열심히 입을 털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가려는 그곳이 얼마나 안전지대인지를 어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다만 사실 전부를 다 밝힐 수는 없었기에, 대충 우연히 발견한 나만의 안전지대가 있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물론 설득은 쉽지 않았다만.

"가령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나는 공격이 되는데 몹은 나를 치지 못하는, 그런 버그 자리인 셈인 거죠."

"듣고도 못 믿겠네요. 정말 그런 세이프 포인트가 존재했다면, 여태 그 많은 싸이킥들이 발견해내지 못했을 리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잖아요. 저만 알고 꿀 빠는 자리라고."

본래 버그는 발견된다고 당장 소문나는 게 아니다.

개인 또는 극소수의 꿀빨러들이 사익을 취할 대로 취한 다음에야 영양가 없는 정보를 대중에게 퍼트리는 식인 거지.

"유나 님은 예전에 온라인 게임 안 해보셨어요?"

"해 봤죠. 와오 1년, 아이옹 3~4년 정도."

"그럼 제가 무슨 말 하는지도 잘 아시겠네요."

"그야 그렇지만…."

한참을 말없이 커피잔만 매만지던 유나 님이 이윽고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럼 확인시켜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 두 눈으로 봐야만 믿을 수 있을 거 같아요."

"...."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였지만.

"어! 허락하신 거예요?"

"예? 그게 무슨…."

"방금 고개를 끄덕이셨잖아요. 지금도 봐봐!"

"아, 아니. 이건…."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절로 주억이는 턱주가리라니.

통제력을 벗어난 신체 기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잘 생각해.'

'초절정 미녀와의 단독 미궁 유람을 떠날 수 있는 기회야.'

'넌 세금 더 내라.'

머릿속에서마저 또 다른 내가 그처럼 육갑을 떨어대는 중이었다.

대체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미친놈들이 내 안에 세 들어 살고 있었던 거지?

'그냥 예비 신혼여행 간다 생각해서 눈 딱 감고.'

'재밌네, 진행 시켜.'

닥쳐, 이 병X새끼야!

다행히 내 일갈 한 방에 그 시끄럽던 내면의 목소리들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 다중이 놈들이 또다시 봉기를 일으킬 구실을 주지 않고자, 나는 단호한 어조로 유나 님께 통보했다.

"죄송합니다만, 뭐라 말씀하셔도 이번 건만큼은 양보해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

어느 때보다 결연한 내 눈빛을 확인한 유나 님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영수 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어쩔 수 없죠."

나의 승리였다.

하지만 누군가를 이겨 먹고도 전혀 기쁘지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실망으로 어깨를 축 늘어트린 그 모습이 절로 측은지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녀를 달래려 입을 열었다.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 앞으로도 미궁에서 획득하는 아이템이 생긴다면, 모두가 이득을 보는 방향으로 관리청이나 유나 님께 가장 먼저 상의드릴게요. 이번 레드 크리스탈처럼요."

나는 응당 유나 님이 기뻐하며 고개를 주억일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그녀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아니요. 굳이 저희를 더 신경 써주시는 등의 친절은 그만 베풀어 주셔도 괜찮아요. 다만, 단지 저희가 바라는 건, 그저 영수 님께서 본인 스스로의 안위에만 좀 더 신경을 써 주신다면, 저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해할 겁니다."

"...."

그녀의 당부는 이타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서로 안지 며칠이나 됐다고, 왜 다들 나한테 이렇게까지 친절한 건지.

"…역시 우리는 가상 현실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건가."

"네? 뭐라 말씀하셨어요?"

"아뇨. 아무것도. 그냥 혼잣말이었습니다."

어쨌든 감격이란 선물을 받은 나로서도 마냥 입을 씻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당장, 그녀에게 뭐라도 베풀고 싶어졌다.

때마침 적절한 답례품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유나 님 주 무기가 채찍이었지?'

내 아공간 주머니 안에도 뜬금없는 채찍 한 자루가 있었다.

해골 고객님이 마돌 대신 내게 준, 바로 그 장물 말이다.

그쪽 분야에 문외한인 내 안목으로도 꽤 고급져 보이던 물건.

유나 님도 받으시면 그 퀄리티에 분명 만족하실 거다.

다만 곧바로 그것을 그냥 건네자니, 문득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네."

사실 화장실은 핑계였고, 본 목적은 채찍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채찍 군데 군데 개털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크라노스를 데리고 동네 마실 겸 산책을 다닐 때마다 목줄 대용으로 사용했던 탓이었다.

'이대로 주기엔 좀 그런데.'

다행히 건물의 바로 위층엔 다잇소가 입점해 있었다.

나는 얼른 다잇소로 올라가 돌돌이와 쇼핑백 하나를 구매했다.

이어 개털을 꼼꼼하게 제거한 채찍을 쇼핑백에 담아서는 다시 자리로 되돌아왔다.

* * *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죠?"

뭔가 줄 게 있다더니,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던 그의 손에는 웬 쇼핑백 하나가 들려있었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만, 내용물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지퍼를 열려 하자 구영수가 극구 만류한 탓이었다.

"지금 말고! 이따 가시면서 열어 보세요."

"뭔데 그러세요? 더 궁금해지게."

"진짜 별거 아니라서 그래요. 민망해서."

"…알았어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오윤아는 이내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심지어는 회동이 끝나고도 며칠이나 그 가방의 존재는 까맣게 잊었다.

끝내 혼자 미궁으로 향한 구영수를 말리지 못했다는.

집행관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극심한 자책감에 시달리던 탓이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았다면, 결코 그 아까운 나날을 궁상으로 허비하진 않았겠다만.

36화.

표면적으로 구영수와의 회동은 성공적이었다.

판매 방식에 따른 협상 과정에서 별다른 잡음이 발생하지 않았을뿐더러.

심지어는 레드 크리스탈의 실물마저 양도받아 본청으로 가져왔으니.

이 성과의 주인공인 오윤아에 대해선 아무리 치하에 치하를 거듭한들 전혀 아깝지가 않은 상황이었다.

적어도 구영수가 단독으로 미궁에 입장했다는 후속 보고를 듣기 직전까진 말이다.

'그래도 내가 너무 갈궜나? 쩝.'

그로 인해 오윤아의 처지가 영웅에서 역적으로 돌변한 건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모처럼 장난기가 걷힌 윤태호 국장은 그 자리에서 오윤아의 면전에 대고 갖은 독설이란 독설은 다 퍼부었더랬다.

당시엔 정말이지 눈이 뒤집힌 상태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윤아조차도 본인의 실책을 인정해서인지, 그 모진 질책들을 순순히 받았을 따름이었었고.

히든 클래스란 그처럼 어화둥둥 10대 독자 모시듯 조심스럽고도 소중히 다뤄야만 하는 존재였다.

일전에 오윤이가 직접 언급한 비화만 봐도 그 중요도에 대한 증명은 끝난 상태였다.

남아돌다 못해 썩어나갈 정도로 숱한 엘리트 싸이킥 보유국인 미국에서조차 무려 20억 불이라는 천문학적 액수로 모셔가려는 존재가 바로 히든 클래스였으니 말이다.

그러한 연유로 윤태호 국장은 아직까지도 윗선에 구영수의 단독 입궁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직전처럼 그저 감봉 몇 개월로 끝나고 말 사안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었다.

지금으로선 그저 구영수가 스스로 공언한 것처럼 안전지대에서 꿀 빨다가 무사히 귀환하길 기다리는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윤태호 국장이 전전긍긍해 하는 이유는 또 다른 이유였다.

여태껏 자신의 안위가 그 까닭이었다면, 갈수록 회한의 감정이 더 커져 가는 것이었다.

'갈굼 당한 걸 빌미로 그 녀석이 사표 던져 버리면…. 그야말로 진짜 나가린데.'

오윤아는 관리청에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원이다.

막말로 자신에게 보장된, 그 천문학적인 물질적 이익의 대부분을 포기하면서까지 공무직을 수행 중인 그녀가 아니던가.

아닌 게 아니라 윤태호 국장은 실제로도 늘 오윤아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부하 직원이라지만 그 바른 됨됨이와 지고한 성품을 높이 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비록 두 사람 모두 낯간지러운 상황은 죽기보다 못 견뎌 하는 성격 탓에 표면적으론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긴 했지만서도.

'지금이라도 사과할까?'

걸림돌이 되는 건 스스로도 인정해 마지않는 꼰대 기질이었다.

제아무리 화해하고픈 마음이 굴뚝같다고 한들, 차마 부하에게 먼저 손을 내밀 용기가 나질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내가 윗사람인데….'

여느 때 같았다면 먼저 왔어도 진즉에 찾아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능청스럽게 깐죽거렸을 그녀였건만.

'진짜 삐져도 제대로 삐진 모양이네.'

윤태호 국장은 그처럼 자신이 퍼부었던 언사 중 어느 부분이 유독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끊임없는 복기만을 반복했다.

겉으로는 모니터 화면에 띄워놓은 너튜브에 이런저런 영상을 아무런 의미 없이 건성건성 클릭해 보면서 말이다.

한데 그 와중에 문득 그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드는 썸네일이 하나 보였다.

[그거 아세요? 사과에도 타이밍이 있다는 거.]

"…뭐야, 이거?"

너튜브의 모회사인 구골이 암암리에 사용자의 패턴을 학습해서 광고나 추천 알고리즘에 반영한단 건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육성으로 내뱉지도 않은 고민거리를 주제로 한 영상이 추천 목록에 뜨다니.

"시벌, AI 존나 무섭네."

윤태호 국장은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으면서도 한편으론 그 영상을 클릭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상의 길이는 약 5분가량.

사실 별 내용은 없었다.

사과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이 핑계 저 핑계로 사과를 미루는 건 하남자나 하는 짓이라고.

영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박차고 나선 윤태호 국장이 복도를 내달린 이유였다.

한데 막상 목적지인 오윤아의 방에 도착한 그는 다소 허탈감을 느꼈다.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다르게 씩씩하기만 한 그녀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휙-. 휙휙-!

부웅~. 붕.

찰싹. 찰싹.

오윤아는 채찍을 휘두르고 있던 와중이었다.

한데 신기하게도, 그것이 허공에 남기는 검붉은 잔상이 퍽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얼마 전 임시로 구매했다던 채찍은 분명 연노랑색 잔상을 띄었었거늘.

'뭐지? 그새 기분 전환 삼아 하나 더 지른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자신의 눈에도 영 낯설지 않은 그 모습이 의아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심지어는 바람에 실려 후각을 찌르는 큼큼한 냄새마저 그 어떤 기억을 떠오르게끔 했는데….

"…엥!?"

그로 인해 윤태호 국장의 두 눈은 별수 없이 화등잔만 하게 커져 버렸다.

비로소 오윤아의 손에 들린 채찍의 정체를 파악한 까닭이었다.

"야, 스톱! 멈춰 봐!"

"왜요?"

"너 그거, 전에 쓰던 그 채찍 아냐?"

"맞아요."

오윤아가 순순히 고개를 주억인 탓으로 윤태호 국장의 눈은 오히려 더 부릅떠졌다.

"맞아? 어떻게 맞아? 잃어버렸다면서? 미궁 어딘가에 투척하고 나왔다면서?"

"그것도 맞아요."

"근데? 그럼 지금 네 손에 들린 그건 뭔데?"

"그러니까요."

"맞을래?"

"누가요?"

"…아니, 크흠. 큼, 그냥 말로 하자."

윤태호 국장이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이어 오윤아의 입에서 듣고도 못 믿을 기상천외한 사연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엥? 아니, 이런 시발!"

구영수를 만나고 돌아온 당일 저녁이었다.

정확히는 국장실에서 대판 깨진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직후였고.

뒤늦게 쇼핑백을 열어 본 오윤아의 입에선 절로 익숙지 않은 육두문자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 결코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물건이 들어있던 까닭이었다.

처음엔 환각이라 여겼다.

대머리 상관의 인신공격에 너무 마상을 입은 나머지, 그 스트레스에 그만 헛것이 보이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실제였다.

손으로 만져졌고, 꺼내서 들려지기까지 했으니.

분명 자신이 미궁에서 분실했던 바로 그 애병기였다.

"대체 이게…. 하…. 미친…. 와-. 후우-."

응당 기뻐해야 마땅할 상황이었다만.

오윤아는 그러지 못했다.

온몸을 뒤덮은 소름과 난생 처음 겪는 과호흡이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었다.

놀람?

충격?

경악?

그 어떤 단어로도 지금의 심정은 결코 온전히 표현해낼 수 없음이 문제였다.

"대체…. 진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 거니?"

미궁은 약 30분을 주기로 리셋된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일단 그 안에서 두고 나온 것은 결단코 두 번 다시 되찾을 수가 없다.

그것이 마땅한 상식이었다.

적어도 이 쇼핑백을 개봉하기 직전까진 말이다.

* * *

"혹시 오늘이 만우절이냐?"

"이제 11월로 접어듭니다만?"

"근데 왜지?"

"뭐가요?"

"왜 그런 되먹지도 않은 구라를 치고 있는 거냐고."

윤태호 국장은 오윤아의 간증 일체를 부정했다.

바로 눈앞에 그 증거인 채찍이 빤히 존재함에도 말이다.

"구라라뇨? 이거 안 보이세요? 이거, 이거."

"애초에 잃어버렸다는 것 자체가 뻥일 수도 있는 거지."

"예에?"

"여태 숨겨뒀다가, 이제 꺼내 온 걸 수도 있지."

"...."

감당 못 할 충격은 종종 완강한 현실 부정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마치 큰 병을 선고받은 환자가 그러하듯 말이다.

윤태호는 각성자 관리청의 고위 간부였다.

싸이킥을 논외로 치면, 그보다 미궁에 더 해박한 인물은 없단 소리였다.

그러니 더더욱 이 같은 상황에 극렬한 부정적 반응이 나타날 수밖에.

오윤아는 그런 그를 답답해하거나 타박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이미 한 차례 겪은 바 있던 현상인 까닭이었다.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게끔 하는데 필요한 유일한 처방이란 그저 기다림뿐이었다.

오윤아 본인이 그러했듯이.

* * *

최혜성에게 문자 한 통이 왔었다.

-오빠. 언제 출발해?

-바로 지금

-앗! 좀만 있다 가면 안 돼? 나 한 시간 정도면 집에 도착할 거 같은데.

-응, 안 돼

-칫. 알았어. 조심히 잘 다녀 와.

사실 복귀 마감 시한까진 아직 네다섯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최혜성이 귀가한단 소리에 오히려 더 떠날 차비를 서둘렀다.

그래도 며칠 같이 지냈다고, 그새 정이 든 탓이었다.

괜히 먼 길 떠난다며 애틋한 석별의 장면만 연출해봤자, 가서 더 보고 싶기만 할 테니까.

막말로 얼굴이 썩다 못해 뼈만 남은 해골 고객님들을 상대해야 할 처지라.

괜히 유나 님이나 최혜성 같은 미녀 때문에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에서 편의점에 복귀하는 건 그다지 좋은 판단이 아닌 듯했다.

그나마 집에서 몇 시간 뒹굴대는 동안 겨우 뇌이징을 마쳐놨는데, 그 노력을 수포로 돌릴 수는 없는 거지.

"그나저나,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싸이킥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미궁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미궁 입장일 때의 이야기고.

"…에라, 모르겠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나는 무작정 부딪쳐보기로 했다.

들어갔다가 이건 아니다 싶음 바로 나와야지, 뭐.

눈앞에 상태창을 띄우니 미궁 입장 버튼이 보였다.

그곳에 의식을 집중하자 곧바로 주변 환경이 확 변하는 게 느껴졌다.

"...."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미궁 안으로 들어온 거다.

일단 입장에 성공한 나는 부리나케 근처의 지형지물을 찾아 엄폐했다.

혹시 모를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다행히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주변에 이렇다 할 위험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

음산하되 적막감만 흐르는 다크 월드.

내게는 퍽 익숙한 분위기의 바로 그 동네였다.

언제 쫄았냐는 듯 흙 묻은 옷을 툴툴 털고 일어선 나는 곧 당당한 모습으로 대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치 독립투사라도 된 듯한 비장한 심정으로 말이다.

비록 지난 세월 무시 못 할 정이 쌓인 것도 엄연한 사실이긴 하다만.

결국 난 인간이고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내 고객이 아닌, 궁극적으론 물리쳐야 할 적들인 것이었다.

아무쪼록 이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전까진, 그 무시무시한 마물들에게 내 속셈이 걸리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때마침 저 맞은편에서 흉포하기 짝이 없는 마물 한 마리가 빠른 속도로 내게 접근하고 있었다.

- 왈! 왈왈!

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 녀석은, 프로펠러마냥 꼬리를 휘둘러대고도 모자라 아예 내 앞에 이르러 배를 뒤집어 까고 드러눕는다.

흥!

그런다고 내가 넘어갈 줄 아나 보지?

"어서 와. 멍충아."

"아, 깜짝아. 기척 좀 내고 다녀요."

"내 맘이거든. 근데, 그건 뭐야? 크라노스한테 지금 주고 있는 거."

"천하장사요."

"천하장사가 뭔데?"

37화.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범죄심리학 용어가 있다.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되어서는 오히려 범죄자의 편에 서는 비상식적인 현상을 뜻하는 단어란다.

갑자기 남들 다 아는 용어를 써가며 유식한 척을 하느냐고?

그건 지금 내가 그와 유사한 상황을 겪는 듯해서다.

"너, 밖에서 어디 수련만 하다 왔니? 갑자기 공기 왜케 실력이 늘었지?"

"누님 연세가 많으셔서 그새 깜빡하셨나 본데, 저 원래부터 잘했거든요?"

"암튼 이래선 승부가 안 나겠다. 8단으로 올리자."

"않이, 지금도 빡세 죽겠는데…."

언제부턴가 다섯 알의 공깃돌만으론 시시해진 우리였다.

그래서 계속 돌의 개수를 늘려나가고 있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여덟 알은 좀 심하지 않나?

"촤핫-!"

"멍충아! 그걸 다 잡으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내가 이긴 거지."

"쳇."

결국 이 승부는 되레 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아리아의 고집이 자충수가 되어버린 거다.

그녀는 패배의 대가로 빨간 마돌 10개를 잃었다.

그리고 우리 주변, 파라솔 테이블을 둘러서 있던 구경꾼들 사이에서도 바지런히 마돌이 오가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누가 악의 집단 아니랄까 봐, 천성이 도박과 내기에 환장하는 마물 고객들이었다.

하물며 이 동네에선 미성년자 취급받는, 쪼끄만 고블린 녀석들조차 저들끼리 담배를 판돈으로 내기를 하고 자빠졌으니 말 다 했지.

'근데 이 자식들.'

대체 저 담배는 어디서 난 거지?

여기 말고 어디 다른 가게라도 뚫은 건가?

"흥!"

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패배자 박쥐는 한차례 콧방귀만 끼고는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아까 같이 걸어오며 이것저것 살 게 많다고 신나게 떠들어대더니만, 이번 패배로 긁혀도 제대로 긁힌 모양이다.

뭐, 걍 놔두면 알아서 금세 풀리는 어르신이니 별 신경은 쓰이지 않는다만.

"승리를 축하하네. 참으로 멋진 승부였어."

"예에, 감사합니다."

"하면 이제 가게 문을 여시는 건가?"

"네, 바로 오픈할게요."

내가 잠긴 문을 따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불을 밝히자, 뒤이어 고객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매장 안.

일반적인 편돌이의 관점으론 극혐 그 자체인 광경이 아닐 수 없겠지만.

여전히 짙은 호기심과 경탄 어린 기색으로 이세계의 물건들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너튜브 국뽕 채널 영상을 보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이건 해외 반응 같은 흔하고 시시한 콘텐츠가 아니다.

무려 마계의 반응이다!

[대한민국 편의점 라면을 먹고 환장하는 몬스터들]

[자연산 F컵 박쥐 누님. 편의점 '이것'보고 경악을 금치 못해]

[이제 더는 '물티슈' 없인 못 살게 된 머가리 없는 마계 기사]

[비자만 나온다면 마계가 아닌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는 몬스터들]

"크으-!"

최소 조회수 100만은 보장하는 자극적인 썸네일 제목들이 머릿속에 줄줄 떠올랐다.

지금으로선 영상 촬영이 불가능한 미궁 내 환경이 그저 아쉽기만 할 따름이….

"...?"

잠깐.

이거 불가능한 거 맞아?

나는 그 즉시 호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을 빼 들었다.

"...!"

역시나 일반 미궁과는 다르게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인터넷만 안 된다 뿐이지, 앱 작동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거다.

혹시나 싶어서 앨범에 들어가 봤더니 일전에 몇 장 찍어 놨던 아리아의 사진까지 멀쩡히 저장되어 있었다.

"…대박 사건!"

에이, 그래도 설마 동영상 녹화까지 되겠어?

되면 설정붕괴지, 안 그래?

"...되잖아-!"

"되긴 뭐가 돼, 멍충아?"

"저, 꿈이 하나 더 늘었어요."

"꿈? 무슨 꿈?"

"1년 안에 너튜브 구독자, 미스터 베스트 넘어볼까 하고요."

늘 그렇듯 귀신마냥 홀연히 나타난 아리아에게 그처럼 아무말 대잔치를 지껄였더랬다.

물론 그녀의 이해 따윈 눈곱만치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네가 아무리 멍충하더라도, 1년 안에 구독자 2.5억 명을 넘는다는 건 좀 많이 멍충한 목표가 아닐까?

…어라?

"…지금 제 말을 알아들으신 거예요?"

"웅."

"어떻게요?"

"어떻게라니? 걔가 말 안 해?"

"걔가 누군데요?"

"됐어, 멍충아. 모르면 말아."

내가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암튼, 그렇게 찍으면 하나도 안 이쁘잖아. 이리 내 봐."

내 휴대폰을 빼앗듯 가져간 아리아는 이내 허공을 날아다니며 다각도로 편의점 내부의 장면을 영상에 담기 시작했다.

셀프 드론 카메라를 자처하는 서큐버스라니.

"이쯤 찍었음 됐다. 자- 여기!"

"고마워요."

"참. 그리고 날아다니면서 보니까 고블린 쟤들 구석에서 사탕 훔치더라? 주머니에 슬쩍 넣는 거 찍었으니까, 이따 카운터로 오면 족쳐."

"네에."

완전 CCTV가 따로 없자너.

"누님. 혹시 저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실 생각은 없으시죠?"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멍충아?"

네.

"그건 아닌데, 싫음 말고요."

"싫진 않아. 근데 하고 싶어도 못 해."

"왜요?"

"칙령 땜에."

"칙령이요? 왕이 내린 명령, 뭐 그런 거?"

"멍충한 줄만 알았는데 잘 아네."

이 마굴을 다스리는 자라고 한다면 아마도 마왕을 말하는 거겠지.

물론 전에도 아리아가 마왕을 두고 꼰머 운운하는 걸 듣긴 했었다만.

'흐음.'

나는 새삼 그가 궁금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이곳에서 장사를 하게 된 이유를.

왠지 누구보다 그 원인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만 같은 이 동네의 지배자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선뜻 입이 떨어지진 않았다.

마왕에 대해선 질문을 불허하는 듯한 아리아의 경직된 분위기가 영 꺼림칙한 탓이었다.

"언제까지 보고 있을 거니?"

"뭘요?"

"내 가슴골."

"그게 아니라 그냥 눈을 깔고 있었던 것뿐인데요."

"그 시선에 우연히 내 가슴이 있었던 거고?"

"빙고! …퉷!"

옳다구나 하고 맞장구를 치는데 별안간 입에서 뭔가가 뱉어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빨간 마돌이었다.

아무래도 아리아의 소행인 듯했다.

예전엔 또 내 광증이 도진 건가 했겠지만, 이젠 안 속지.

나는 바로 응징에 나섰다.

"퉷! 아, 뭐얏! 퉷-! 퉤퉷-!"

그녀의 스킬을 복제해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준 거다.

아리아가 크라노스의 혈변을 수박씨마냥 연속으로 뱉어내는 이유겠다.

"그, 퉤! 그마안-! 퉷퉷! 내가, 퉷. 잘퉷, 못퉷, 했퉷퉷, 어퉷!"

물량 공세에서 밀린 아리아가 결국 먼저 백기를 들었다.

'후후.'

득의양양하게 카운터 주변으로 침 범벅이 된 마돌을 쓸어 담고 있는 나에게 그녀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네. 너. '몽마'도 그렇고, 어떻게 내 스킬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게 된 거야?"

사실 물어본다고 해서 무조건 대답해줄 이유는 없었지만.

엄연히 자기 기술을 가져다 쓰는데, 마냥 씹자니 또 그도 못 할 짓인 것 같았다.

"제가 알려주면 누님도 제 한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그래, 한 가지는 알려줄게. 뭔데?"

"좀전에누님이말씀하신마왕은어떤존재죠또그분이혹시제가여기서장사를하는데깊이관여를하신건가요또누님을비롯한님들이지구를침공한목적은뭔가요또다른인간은해치면서저한텐호의적인이유가뭔가요그리고혹시남자친구는있나요? …헉헉."

"…뒤질래?"

"...."

혹여 속사포처럼 쉼 없이 지껄여대면 하나의 질문으로 쳐 주진 않을까 하고 꼼수를 부려봤다만.

돌아오는 반응이 영 좋질 않은 탓으로 나는 욕심을 덜어내고 다시 질문을 건넸다.

"그분 성격은 어때요?"

"누구?"

"마왕… 님이요."

"그을쎄?"

아리아는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아무래도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엔 영 복잡다단한 성격의 인물인 듯하다.

장고 끝에 그녀가 내놓은 답변도 실제로 그러했고.

"그때그때, 상황마다 다른 거 같아."

"다중이...?"

"응? 뭐라 했어?"

"아뇨. 혼잣말이었어요."

입만 벙끗했을 뿐인데 그걸 또 알아채는 아리아였다.

하마터면 신성, 아니 마왕모독죄로 끌려갈 뻔했잖아.

아무튼 그 마왕이란 작자는, 이 세계관과는 영 어울리질 않는 인물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성격이 단순하지 않고 매우 입체적이란 거다.

"근데 그게 왜 궁금한데?"

"궁금한 게 당연하죠. 피고용인으로서 고용주의 됨됨이가 어떤지."

"어머, 마왕님이 멍충이의 고용주야?"

"그럼 아니에요?"

"에?"

"...?"

내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건 당연했다.

그게 개연성이 맞는 전개였으니까.

막말로 이 세계의 지배자 외에 대체 그 어떤 존재가 이와 같은 각본을 꾸며낼 수 있느냐는 거지.

한데 눈치로 보아 아리아는 이곳 마굴 편의점의 개장 히스토리에 관해 정말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서큐버스>

[레벨 : 13]

[이름 : 아리아]

아무래도 아리아도 쪼렙인 탓에 고오급 정보에는 접근이 제한적이라 그런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누님. 누님은 왜 레벨이 그대로세요?"

"왜긴 왜야. 땡땡이를 많이 쳐서 레벨이 안 오르는 거지. 그것도 몰라, 멍충아?"

"...."

참고로 현재 내 레벨이 15.

눈앞에서 깐족대는 박쥐 처자를 앞질렀단 말이다.

나름 슬쩍 주먹을 말아쥐어 보는 이유였다.

"근데, 멍충아. 너 이름이 왜 그래?"

"제 이름이 어때서요?"

"나인제로워터가 뭐야?"

<인간>

[레벨 : 15]

[이름 : 나인제로워터]

상태창의 이름은 변경이 가능하다.

일전에 유나 님이 알려준 정보였다.

"기분전환 겸 바꿔봤어요. 어때요, 멋지죠?"

"내가 몇백 년을 살면서 별별 종種의 꿈속에 다 들어가 봤었거든? 그만큼 수많은 이종 문명 지식을 체험해왔었고. 그래서 나름 난 마인 치고 개방적 사고관을 지닌 서큐버스라고 자부했었는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구리다고. 네 작명 센스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어."

"...."

솔직히 칭찬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아리아의 성격상 어느 정도는 놀림까지 각오했더랬다.

근데 이런 식의 진지한 팩트 폭행은 너무 무자비한 거 아닌가.

"누님, 생각보다 잔인한 면이 있으시네요?"

"긁?"

"...."

대체 저런 건 어디서 보고 배운 걸까?

'그렇게 별로인가?'

무지성으로 올린 게시글에도 악플 하나 달리면 밤잠을 설치는 게 인간 보통의 반응이거늘.

공들인 작명이 이처럼 대놓고 긁혔는데 어찌 가만히 넘어갈 수 있으랴.

나는 주저없이 상태창을 열었다.

변경한 이름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기 위함이었다.

한데 뜻밖의 변수가 발생했다.

"이게…. 왜 안 되지?"

"뭐가?"

"이름 수정이 안 되는데요?"

"몰랐니? 그거 쿨타임 있어."

"…예?"

정말 아리아의 말대로였다.

다시 상태창을 뜯어 보니 이름 칸 옆에 희미하게 타이머가 돌고 있더라.

[89:22:55:54]

[89:22:55:53]

[89:22:55:52]

.

.

.

'시발.'

* * *

"국장님. 제 욕하셨죠?"

"아니? 왜, 또 귀 가려워 죽겠어?"

"네. 안 그러다 갑자기 근질근질하네요."

"너도 모르는 새 또 어디서 원한진 게 있나 보지."

"…그런가?"

윤태호 국장이 눈치껏 면봉 한 뭉텅이를 던져주었다.

오윤아가 극락에 이른 표정으로 귀를 파고 있는 와중, 윤태호 국장은 각 부처에서 올린 기획안을 마저 살펴보았다.

안건은 레드 크리스탈의 처분.

이어 최종 검토를 막 끝낸 그가 입을 열었다.

"난 벙개 장터가 가장 나을 거 같은데. 오 집행관 생각은 어때?"

"어. 그거 전략3팀 기획안이죠?"

"맞아, 잘 아네?"

"저도 여기 올라오기 직전에 제 방에서 잠깐 훑어봤는데, 그게 가장 눈에 띄더라고요."

"그럼, 이거 다듬어서 청장님께 올리자고."

"네, 그러세요."

"그러세요, 라니?"

"아…. 혹시 지금 저한테 지시하신 거예요? 최종 보고서 만들라고?"

"아니, 지시까진 아니고. …어려울까?"

며칠 전의 갈굼에 대하여 오윤아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는 듯했다.

되찾은 애병기로 인해 기분이 다소 풀렸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당분간은 그 품에 사직서를 넣고 출근한다던 그녀였다.

윤태호 국장이 눈치를 보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한데 그처럼 경고 아닌 경고를 날렸던 오윤아가, 돌연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곧장 상관의 책상을 향해 다가갔다.

한 손을 품에 넣은 채로 말이다.

"아, 아냐! 안 돼, 오지 마! 그냥 내가 할게. 내가 한다고! 그거 내지마아아-!"

손사래까지 쳐 대며 질겁하던 윤태호 국장은 결국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한데 곧 그 귓가로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들었다.

"여기, 방금 말씀하신 거요."

"…엉?"

"딱 봐도 전략3팀 기획안 마음에 들어 하실 거 같아서 미리 작성하고 뽑아놨습니다."

"아…."

오윤아가 내민 건 사표가 아닌 최종 보고서였다.

'녀석….'

윤태호 국장은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물론 그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혹시 울어요?"

휙! 휙휙휙!

38화.

나는 만나는 족족 손님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다.

미궁에서의 편돌이 생활 첫 주기 땐 목표가 생존에 맞춰져 있던 만큼 무지성으로 본업에만 충실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에 여유도 생겼겠다, 차근차근 정보를 수집해나갈 요량이었다.

이 미궁이란 곳에 대한 전반적인 인포메이션을 말이다.

그렇게 빼돌린 내부 정보를 인류에게 갖다 팔, 아니 갖다준다면, 이 낯선 종족과의 해방 전쟁에도 분명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지금 나란 놈의 어깨엔, 인류 전체의 운명이 짊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유독 어깨가 뻐근하고 무겁게만 느껴지는 것은.

'이게 바로 막중한 책임감의 무게란 걸까.'

나는 무심결에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한데 이거 왜 이렇게 촉감이 철벅하고 미끄덩하냐.

"뀨-!"

"...?"

내 손아귀에 잡힌 뭔가가 주르륵 미끄러지더니만 카운터 위로 흘러내렸다.

"뀨?"

"아니…."

그것은 다름 아닌 슬라임이었다.

이 미친 껌딱지가 대체 언제부터 내 어깨에 올라타 있었던 거지?

나는 즉시 응징에 나섰다.

마침 근처에 플라스틱 바구니가 보이길래 그것을 가져와 슬라임을 담고는 마구 주물럭거렸다.

그때마다 녀석은 살려달라며 비명을 내질렀고.

"뀨, 뀨! 뀻! 뀩! 뀨우우우-."

"어이구. 아주 기냥 좋아 죽네유."

"엉? 이게 좋아하는 거라고요?"

"여 봐봐유. 자지러지다 못해 물이 줄줄 흐르잖아유."

이봐요, 우파 청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들도 보는데 그런 표현은 좀….

하지만 저 순박한 숫소를 위해 굳이 변론을 좀 하자면, 이 녀석이 그 어떠한 불순한 의도를 갖고 지껄인 말은 아닐 것이었다.

실제로도 슬라임으로 인해 바구니에서 넘쳐흐른 액체가 카운터는 물론 바닥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나는 얼른 창고에서 손걸레를 가져 와 그 일대 주변을 닦기 시작했다.

한데 뭐지?

갑작스레 뒤통수를 찌르는 이 살기는….

푸륵-. 푸르륵-.

걸레로 바닥을 훔치던 중 고개를 들어 보니 미노타우르스가 거친 콧김을 뿜어대고 있었다.

정확히 내 쪽을 노려본 채로 말이다.

급기야 놈은 마치 각성 직후의 틱 걸린 좀비마냥 고개를 다각도로 꺾어가며 떠듬떠듬 말했다.

"뻐-. 췩. 취췩. 뻐얼건색. 취이익-. 뻘건색이네유우…?"

"예?"

앗, 아아….

이제 보니 급한 대로 손에 쥔 걸레가 빨갱이였다.

저 숫소가 흥분하는 게 당연하단 소리다.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순전한 내 실수인지라.

나는 닥치고 걸레를 열린 문밖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때마침 근처를 배회하던 크라노스가 그 걸레를 냉큼 물더니 내달리기 시작했고.

쾅쾅쾅쾅-!

미노타우르스는 지축이 울릴 정도의 폭주로 그 뒤를 쫓아 사라졌다.

"후우우-."

극도의 긴장 상태를 경험한 탓인지 어깨가 뻐근하긴 개뿔.

철썩-!

그새를 못 참고 내 어깨를 점거한 슬라임 자식을 바닥에 패대기친 나는 녀석도 아예 가게 밖으로 걷어차 쫓아냈다.

문을 닫아 놔도 잠깐만 방심하면 그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녀석인지라.

이따 영업 끝나면 문틈에 방풍지를 붙이든가 해야지.

"자네, 괜찮나?"

"아, 예. 뭐…. 다친 덴 없습니다."

듀라한이 카운터로 다가오며 물었다.

물티슈를 한 아름 들고서.

투구도 평소처럼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게 아니라, 그 물티슈 더미에 파묻혀 있는 채였다.

아무튼 이놈이나 저놈이나, 여긴 정말 정상적이라 할만한 존재가 하나도 없네.

"자네, 정상이 아니군."

"저요?"

"그 손 말일세."

내 손이 왜?

"아는지 모르겠으나, 슬라임의 체액은 맹독 중의 맹독이라네. 우리와 같은 마인들 사이에서도 그에 면역을 가진 이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극소수이니 말이야."

아니, 그걸 왜 이제 말해주는….

"한데 자네에게는 아무런 중독 증상도 발견되질 않고 있군."

"중독되면 증상이 어떤데요?"

"부패되네."

"썩는다고요?"

물티슈 사이에 파묻혀 있던 듀라한의 투구가 약간 꼼지락거렸다.

긍정의 의미로 나름 고개를 끄덕인 거다.

나는 노파심에 얼른 두 손을 요목조목 꼼꼼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끝내 그 아무런 불길한 조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마치 비싼 피부 보습 기능의 영양 크림을 바른 것마냥 피부가 더 반들반들해진 것처럼 느껴지는 건 단순한 기분 탓이려나.

"혹,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는 겐가? 아니면 이 점포에서 그런 방독 제품을 판매하는 건 아닌지…."

"아뇨. 딱히 뭘 한 것도 없고, 그런 기능성 제품도 판매하고 있진 않습니다."

"그러한가."

이유를 모르게 그는 상당히 아쉬워하는 듯한 눈치였다.

"근데 기사님은 그런 방독이나 해독제같은 건 필요 없지 않으세요? 어차피 같은 편인데…."

"그건 또 그렇지가 않네."

"왜죠?"

"우리가 직면한 전장은, 그대들이 그 무엇을 상상하든 그보다 광활하고 치열하며 위험하니까."

저기요, 손님.

좀 알아듣기 쉽게 말씀해 주실래요?

"아무튼 보면 볼수록 다재다능한 그대가 본인은 참으로 부럽구만."

이 양반, 말 돌리네.

"어쩌면 그래서 그 목석같던 아리아가 그대에게 빠지게 된 걸 지도…."

"...."

처음과 달리 제법 레벨이 오른 나다.

그래서 문밖으로 잽싸게 걸레를 던졌고, 몬스터인 슬라임도 차 버린 거다.

'확 그냥 저 투구도 갖다 차버려?'

<듀라한>

[레벨 : 135]

"…그건 우리 소중한 고객님의 오해이십니다. 제 소견으로 누님, 아니 아리아 님도 쑥스러워서 그렇지 실은 어느 정도 고객님께 마음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 그게 참말인가?"

나는 분노조절잘해자다.

"참말이고 말고요. 그러니 포기하지 마세요. 제가 늘 묵묵히 응원하겠습니다!"

"고맙네."

히터를 튼 것도 아닌데, 가게 안으로 자못 훈훈한 공기가 맴돌았다.

아닌 게 아니라 듀라한은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물건값을 지불하며 거스름 마돌조차 받으려 하질 않는 걸 보면 말이다.

"그건 넣어두게. 팁일세."

"저, 그럼. 팁 대신에,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나는 내 사명을 잊지 않았다.

이 기회를 살려 질문을 건넨 것도 그래서였고.

"무얼 알고 싶은 겐가?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기탄없이 말해줄 터이니 얼마든지 물어보시게."

듀라한의 레벨은 135였다.

단지 나를 비교 대상으로 삼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엄청난 고레벨이란 소리였다.

그러니 틀림없이(쪼렙인 누구와는 다르게) 격에 걸맞는 고급 정보도 많이 알고 있을 터였다.

달리 말하자면 아리아 때완 다르게 질문의 수준도 달라져야 한단 거겠다.

좀 더 심층적이고도 핵심적인 그런 질문 말이다.

그렇다고 상대를 마냥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짧지만 치열한 고민 끝에 나는 이윽고 고르고 고른 질문 하나를 던졌다.

"저희 세상에 이 미궁이 뿌리를 내린 목적이 뭡니까?"

사실 좀 더 직설적인 표현도 있긴 했다.

대체 우리 지구를 침략한 이유가 뭐냐고 말이다.

하지만 차마 쫄려서 못 하겠더라.

솔직히 지금 이 정도의 뉘앙스만으로도 내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설마 건방지다고 대뜸 검을 뽑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한데 그런 내 우려가 무색하리만치 듀라한이 내비친 반응은 정말 의외였다.

무게를 잡거나 그 어떤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긴커녕, 주저 없이 답변을 내놓았다는 말이다.

"상생… 이려나?"

"…예?"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네. 그 이상의 발설은 칙령으로 엄금하고 있는 터라…."

"네에."

분명 상생이라고 했다.

'내가 아는 그 상생 맞나?'

서로 같이 잘살자는, 뭐 그런 뜻의 단어 말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내 머리만 더욱 복잡해졌다는 거겠다.

그 무구에 인간의 혈흔과 체액, 머리카락 등등을 덕지덕지 묻히고 다니는 주제에 상생을 운운하다니.

레알 언행불일치의 화신이 아닐 수가 없겠다.

"표정이 불퉁한 걸 보니, 내 대답이 영 성에 안 찼던 모양이구만."

"아닙니다."

"아니긴, 뭘. 흠-. 그렇게 정 궁금하거든, 나 말고 다른 이에게도 물어보시게나."

이미 다 물어봤거든요.

"이를테면, 보급관이라든가."

"...?"

"그래, 그 인사라면 나보다 더 많은 걸 그대에게 이야기해 줄 수도 있겠군."

"...."

내가 별 반응을 하지 않자 그의 말이 이어졌다.

"원한다면 내 보급관에게 기별을 넣어두도록 하겠네."

"아뇨, 괜찮습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알아서 할게요."

사실 나는 발주 퀘스트를 완료하고도 아직 보급관을 만나지 않은 상태였다.

굳이 서두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까닭이었다.

당장 밖으로 나갈 것도 아닌데, 보상이야 천천히 수령하면 될 일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 사신 코스튬이 내겐 좀 많이 비호감이었다.

결코 그 서슬 퍼런 낫질이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럼 또 들르겠네."

"살펴가십쇼."

듀라한과의 대화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보급관이 제 발로 이곳을 찾아온 것이었다.

매대를 정리하고 있는데, 뭔가 으스스한 느낌이 들어 돌아봤더니만 카운터 앞에 선 채로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더라.

나는 그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주절댔다.

"아니, 공사다망하신 분께서 이 누추한 편의점엔 어쩐 일로…."

"네가 날 보자고 했다던데."

"누, 누가 그런 유언비어를…."

"듀라한."

"...."

나는 머릿속에 정보를 하나 추가했다.

머가리 없는 기사 특 : 오지랖이 오지고 입이 쌈.

"제가 보급관님을 찾아뵌다고 말씀드린 걸, 아무래도 그분이 오해를 하신 듯합니다."

"그렇군."

보급관의 반응은 그 한마디가 다였다.

가타부타 사족을 달기는커녕, 그대로 떠나려는 듯 문가로 몸을 돌리기까지 했다.

나는 다급히 그런 그를 붙들었다.

"저, 근데. 혹시 퀘스트 보상은…."

"완료하였는가?"

다행히 그가 관심을 보였다.

"네. 보다시피 발주 제품 빠짐없이 구해서 귀환했습니다."

"검수를 청하는가?"

굳이?

"네, 뭐. 원하신다면…."

"검수를 마쳐야 보상이 지급된다."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답을 마치기가 무섭게 보급관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매대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뭘 하려나 싶어 슬쩍 훔쳐보니, 보급관이 진짜 진열된 물품들을 일일이 세어 보고 있었다.

뭐지? 이 아날로그 감성 돋는, 언발란스한 퀘스트 마무리 작업은….

그나마 보급관이라는 타이틀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빠릿빠릿한 일처리 속도만큼은 정말이지 모든 편돌이들의 귀감으로 삼아도 될 만큼 발군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얼추 봐도 최소한 내 작업 속도의 배는 더 빠르겠더라.

역시 고인물은 고인물인 모양.

"다수 품목에서 개수가 퍽 미달된다."

"그건 복귀하자마자 판매를 시작해서 그런 겁니다. 포스기에 찍힌 판매 수량과 대조해 보시면 확인 가능합니다."

"증명하라."

"옙."

그의 지시에 따라 모니터 화면에 지난 며칠간 판매된 제품의 종류와 수량을 띄웠다.

그러자 몇 초간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보급관이 이내 소매에서 꺼낸 주머니 한 자루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약속한 적마돌 100개다."

"오-. 감사합니다!"

보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보급관은 소매에서 추가로 가늘고 얇으며 기다란 작대기 하나를 꺼냈다.

명찰이라 하기엔 다소 길고, 명패라 하기엔 다소 짧은 작대기 말이다.

"가슴에 품어라."

작대기의 한 면엔 글귀 한 줄이 새겨져 있었다.

보고도 이해 못 할 문자였는지라, 일단 시키는 대로 작대기를 명치 어림에 갖다 댔더니만.

"오오-."

갑작스레 상태창이 저절로 나타났다.

<인간>

[이름 : 구영수]

[레벨 : 15]

[직업 : 편의점 직원]

[칭호 : 이세계의 보부상]

그간에 비어있던 칭호 칸이 채워져 있었다.

작대기에 새겨진 낯선 문자가 자동 번역되어 반영된 것이다.

'근데 이런 첨단 기술이 있으면서, 대체 왜 검수는 수작업으로 하는 거지?'

아무튼 호칭이 생성됨과 동시에 작대기는 빛을 발하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내 몸에 흡수되는 듯한 특수효과를 보이며 말이다.

직후 내 시선은 절로 보급관의 소매 쪽으로 쏠렸다.

아직 남은 보상 하나가 있는 까닭이었다.

나는 곧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39화.

보급관이 마지막으로 소매에서 꺼낸 물건은 한 권의 책자.

바로 약속된 세 가지 보상 중 마지막 물건인 스킬북이었다.

한데 그 생김새가 내가 알던 것들과는 좀 많이 달랐다.

일전에 필드에 널려 있던 스킬북들은 뭔가 싼 티 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급관이 카운터 올려놓은 저 스킬북은 얼핏 봐도 엄청 고급스러운 표지의 양장본이었다.

거기다 벽돌마냥 두껍기까지 하니, 그 자체에서 풍기는 위엄과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굳이 비유를 들어 양쪽을 비교하자면, 일반판 낱권과 소장판 합본의 차이를 보는 거 같달까.

스킬북에 잠시 한 눈이 팔려있던 나는 뒤늦게 보급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용법이나 물어볼 참이었다.

"...?"

한데 막상 그는 보이질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매장 안을 다 살폈다만 역시나 마찬가지.

그 잠깐을 못 참고 떠난 모양이었다.

'근데, 도어벨도 안 울렸는데 어떻게 문을 통과한 거지?'

나는 엄습해 든 오싹함을 애써 무시하며 얼른 스킬북으로 다시 주의를 돌렸다.

스킬북의 겉면엔 고풍스러운 문양 외에 아무런 글귀도 적혀 있질 않았다.

하지만 그에 손을 갖다 대자 곧바로 눈앞에 안내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북(종류 미상)을 획득하셨습니다.]

[스킬북(종류 미상)을 익히시겠습니까?]

"뭐야, 이거?"

'종류 미상'이란 문구가 본래 퀘스트 보상 목록에도 표기되어 있긴 했었다.

나는 그걸 일종의 가챠 시스템쯤으로 이해했었고.

쉽게 말해 그 많고 많은 스킬 중에 랜덤으로 뽑힌 스킬북 한 권을 받는 거라고 여긴 거지.

그런데 내가 영 오해를 했던 모양이었다.

"종류 미상이란 게, 그 자체가 스킬명인 거였어?"

일전에 내가 필드에서 스킬북을 주웠을 당시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웠다.

'[스킬북(3단 베기)를 획득하셨습니다.]'

보통 이렇게 괄호 안엔 해당 스킬북으로 익힐 수 있는 스킬의 이름이 들어간다.

고로 이 스킬북의 명칭은 말 그대로 '종류 미상'인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짱구를 굴려본들, 그 이름만으론 스킬의 쓰임새를 도무지 유추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따로 설명이 적혀 있나 싶어 책장을 후루룩 넘겨봤지만, 뭔 지렁이같은 글씨와 기하학적 도형들로만 도배되어있는 통에 전혀 알아볼 수가 없을 따름이었다.

"결국 몸소 부딪쳐 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건가."

[스킬북(종류 미상)을 익히시겠습니까?]

궁금증을 풀자면 응당 예스라고 외쳐야 했다.

그럼에도 내 망설임은 하염없이 길어졌으니.

이유는 단순했다.

"이거 왠지, 나중에 나가서 분명 후회할 거 같은데 말이지."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봐도 이 '종류 미상'이란 스킬이 편돌이 노릇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 내가 익히는 것보단 차라리 갖고 나가서 파는 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갈등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일단 생김새 자체만 하더라도 엄청 비싸게 팔릴 것만 같은데 말이지.

"비싸게…?"

그러나 물욕은 잠시의 고민 끝에 의외로 금세 잦아들었다.

문득 시야에 들어온, 카운터 위 또 다른 퀘스트 보상품 덕분이었다.

레드 크리스탈이 100개나 들어 있는 주머니 말이다.

막말로 저것만 다 내다 팔아도 내 이름이 전 세계 부호 순위 꼭대기에 등극하는 건 그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러니 갑자기 물욕이 짜게 식은 거다.

"아니면 그냥 유나 님이나 줄…."

[이름 : 나인제로워터] [87:15:34:42]

그녀는 이름을 바꿀 수 있다고만 알려줬다 뿐이지, 90일이란 쿨 타임이 존재한단 사실은 고지하지 않았더랬다.

그 덕에 매일 같이 박쥐녀에게 놀림이나 당하며 지내는 요즘이었다.

물론 따지고 보면 내 작명 센스가 구데기인 게 원인이긴 하겠지만….

어쩌겠어. 내 천성이 그리 쪼잔한걸.

[스킬북(종류 미상)을 익히시겠습니까?]

"배움! 익힘! 습득!"

그렇게 마음이 정리된 나는 스킬을 익히기 위해 분연히 소리쳤다.

한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메시지창이 나를 당혹게 했다.

[스킬(종류 미상)을 배웁니다.]

[히든 클래스는 일반 스킬 학습이 제한됩니다.]

[스킬(종류 미상)의 학습을 실패했습니다.]

"어라?"

기시감을 일으키는 상황이었다.

얼마 전 필드에서 주워 든 스킬북을 익히려 했을 때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했었으니까.

"역시. 그냥 팔아서 살림에 보태란 하늘의 계시인 건가?"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긴 해도 딱히 아쉬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 아니 당사책?은 그렇지가 못 한 듯했다.

[스킬(종류 미상)의 학습을 재시도합니다.]

[히든 클래스는 일반 스킬 학습이 제한됩니다.]

[스킬(종류 미상)의 학습을 실패했습니다.]

"…뭐지?"

이윽고 눈앞에 다시 뜬 메시지창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스킬(종류 미상)의 학습을 재시도합니다.]

[히든 클래스는 일반 스킬 학습이 제한됩니다.]

[스킬(종류 미상)의 학습을 실패했습니다.]

[스킬(종류 미상)의 학습을 재시도합니다.]

[히든 클래스는 일반 스킬 학습이 제한됩니다.]

[스킬(종류 미상)의 학습을 실패했습니다.]

.

.

.

스킬과 직업의 난데없는 힘겨루기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정작 나는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그 때문에 괜히 애꿎은 시야만 갈수록 더러워져 갔다.

급기야는 빽빽한 메시지들 탓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아무나 이겨라, 이기는 편 우리 편!"

나는 그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그처럼 양상은 호각지세였다.

결코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을 분위기다.

전자레인지에 돌린 봉지 팝콘과 음료수를 가져와서는, 내가 아예 관람 모드로 자리를 잡고 앉은 이유였다.

* * *

"거기, 34번 교육생."

"...."

"34번 교육생!"

"…예, 예?"

뒤늦게 자신이 지적당했음을 알아차린 민시영이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런 그녀에게 강사의 경고성 질책이 날아들었다.

"34번 교육생은 지금 본인이 어떤 이유로 이 자리에 나와 있는지 잊었습니까?"

"아, 아닙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집중을 못 하고 딴 생각을 해요?"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잠깐이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대답해 보세요. 방금 제가 언급한 '시드니 참사'의 원인이 뭐라고 했었죠?"

"그게…."

민시영이 집에서 근신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일찍 출궁한 길드원 중 한 명이, 길드 마스터의 전언을 갖고 그녀를 찾아왔었더랬다.

각성자 소양 교육 이수 40시간.

그리고 구영수에 대한 즉각적이고 진정성 어린 사과.

민시영에게 내려진 처분이 그러했다.

미라클 길드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거든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지시였다.

민시영은 구영수가 출궁했음을 여전히 모르고 있던 상태였다.

하여 각성자 소양 교육부터 이수할 목적으로 길드 소속 회관에 나와있던 참이었다.

한데 민시영은 첫날부터 전혀 교육에 집중하질 못하고 있었다.

비단 그 내용이 따분하거나 지루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여전히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교육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정작 일방적인 폭행을 당한 건 자신인데, 어째서 오히려 자신이 그 자식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질 않는 것이었다.

그 억울함이 오죽 심했으면, 차라리 방송이며 언론사에 이 부조리한 거대 길드의 갑질 사건을 제보해버릴까 싶은 충동심이 다 들었을까.

그러나 민시윤은 결국 냉엄한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대한민국에서 미라클 길드와 척을 지고는 제대로 된 싸이킥 활동을 이어 나갈 수 없음을 익히 잘 아는 까닭이었다.

이 소양 교육을 성실히, 그리고 높은 점수로 이수해야만 할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한데 집중은커녕 멍을 때리고만 있다가, 초장부터 그만 강사에게 제대로 찍혀버렸다.

강의를 제대로 듣질 않았으니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리도 만무했고.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후우-. 그럼 다시 설명할 테니 교육생은 끝날 때까지 선 채로 들어요."

"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시드니 소재 미궁에서 뜻밖의 참극이 발생했었다.

한 싸이킥이 난데없이 동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사건이었다.

희생자는 총 32명.

목숨을 잃은 자들 대부분은 살인자의 동료들이었다.

참사 직전까진 생사고락을 함께해 왔던, 서로 끈끈하기 그지없던 사이였던 것이다.

폭주하던 살인귀도 결국 진압 도중 현장의 다른 싸이킥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 바람에 자칫 이 참극의 배경이 오리무중에 빠질 뻔도 했으나.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다 몇 달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난 그 동료에 의해 그 충격적인 진실이 세상에 밝혀졌더랬다.

-에고 북.

멀쩡하던 한 명의 싸이킥을 그처럼 살인귀로 둔갑시킨 원흉은 놀랍게도 한 권의 스킬북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스킬북과 달리, 그 자체로 자아를 지닌 아이템이었다.

그 때문에 멋모르고 해당 스킬북으로 스킬을 익힐 경우, 싸이킥의 정신이 그 스킬북의 자의식에 오염되는 것이었다.

강사의 설명이 이어지는 한편으로 스크린엔 고풍스러운 느낌의 양장본 한 권이 떠 있었다.

생존자가 최대한 기억을 쥐어 짜내 구술한 정보를 바탕으로 생김새를 구현해 낸, 그 문제의 스킬북이었다.

훗날 사람들에 의해 명명된 이름이 바로 '에고 북'이었고.

이 에고 북이 교육 자료로 등장한 건 다름이 아니었다.

"다들 보면 알겠지만, 저 에고 북은 여느 스킬북과 그 생김새부터가 남달라요. 마치 화려한 색으로 치장한 독버섯처럼, 저 에고 북도 고급스럽고 값비싸 보이는 외형으로 싸이킥을 현혹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저런 류의 색다른 스킬북을 발견한다면 주저 말고 그 즉시 상관에게 보고하거나 집행관에게 알려야 합니다. 괜히 딴 마음을 품거나 혼자 어떻게 해 보겠다고 어설프게 굴었다간 제2, 제3의 시드니 참사가 재현되고 말 테니까요."

* * *

"얘, 얘! 일어나 봐."

아리아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경.

영업 시간은 아니었다만, 평소에도 이렇듯 두서없이 종종 놀러오던 그녀라 딱히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그보다는 내가 여태 베고 잤던 스킬북 표지에 묻은 적나라한 침 자국이 더 신경쓰일 따름이었지.

"오셨어요."

"응. 그보다, 멍충아. 이거 뭐야?"

"아, 침 자국 이거 원래부터 있던 거예요. 제가 그런 게 아니라."

"그 말이 아니고, 멍충아. 이 '저주의 서'를 대체 어디서 났냔 말이지."

엉?

"이 책이, 저주 뭐시기라고요?"

"그래, 저주의 서."

"왜 저주죠?"

"저주당하니까?"

이 신발 사신 새끼가!

나는 다급히 몸 상태부터 살폈다.

다행스럽게 딱히 아프거나 괴이해진 부분은 없는 듯하다.

아리아에게 다시 물었다.

"저주에 걸리면 증상이 어떤데요?"

"너처럼 돼."

"예?"

"멍충해져."

"...."

"농담이고, 실은 나도 잘은 몰라. 너희 세계식으로 표현하자면 워낙 케바케라서."

'케이스 바이 케이스?'

이어진 아리아의 설명에 따르면, 이 저주의 서엔 저마다의 소울이 담겨 있단다.

달리 말하자면 일종의 자아가 있단 거다.

경우에 따라 증상이 천차만별인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해당 소울의 성격이 얼마나 지랄 맞느냐에 따라 이 책을 습득한 자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거지.

"하…."

듣고 보니 아까의 장면이 머릿속에 절로 재현되었다.

시야를 온통 뒤덮을 정도로 집요하게 스킬 학습을 관철하던 놈의 집요함이 떠올랐단 말이다.

이 와중에 불길한 건, 지금은 눈앞이 클린 그 자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깜빡 잠이 든 그 사이에, 그 팽팽했던 승부가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났다는 방증이겠다.

'어, 어떻게 됐지?'

아, 떨려.

"누님."

"웅?"

"저 대신 제 상태창 좀 열어주심 안 될까요?"

"왜?"

"도저히 용기가 안 나서요."

"뭐야, 바코드건이라도 인첸트하고 있었어? 날렸을까 봐?"

"그거 강화해서 얻다 쓰게요?"

"그러게?"

"...?"

"아님 네가 떨릴 일이 뭐가 있는데?"

됐다, 그냥 내가 확인하고 말지.

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