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화. 프롤로그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우리 레드팽 아카데미는 유펠리아 왕국 1등 교육기관이자 마검사 양성소로서,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대륙 8군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명문 아카데미 학생들답게, 자부심을 가지고..."
레드팽 아카데미 총장은 대강당에 모인 학생들을 향해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 째.
'왕국 1등', '대륙 8군', '명문 아카데미'와 '자부심'을 50번 언급했다.
저 무한 반복되는 연설을 듣다 보면, 대사 한 톨 틀리지 않고 똑같이 따라할 수 있을 만큼 진부하고 고통스럽다.
"에, 그 사례로 말할 것 같으면..."
'아, X발. 아직도 더 남았어?'
'차라리 날 죽여줘.'
몇몇 학생들은 온몸을 비비 꼬며 속삭이다가 근처 교관에게 눈총을 받았다.
그때.
벌컥!
대강당 문이 열리면서 총장의 연설이 끊겼다.
교관들은 흠칫했고 학생들도 영문을 몰라 뒤돌아본다.
그곳에는 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녀가 서 있었다. 눈썰미 좋은 이들은 남학생의 외모를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저 은발과 뺨에 새겨진 뱀의 각인... 설마 키스폰?!'
키스폰 가문.
과거 북부에서 내려온 이주자들로 구성된 혈족으로, 영생의 상징인 백사(白蛇)를 숭배한다.
그러한 이미지 때문인지 한때 왕국에서는 그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영생의 비밀을 추구하는 자들.'
키스폰 가주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300년 넘은 나이로 추정되는 괴물로 볼린다.
또한 가문에만 전해져오는 비술로 힘 있는 자들의 음허한 의뢰를 수행했고.
현재는 키스폰 영지까지 일궈내어 누구도 무시 못 하는 가문이 되었다.
'자식들은 모두 죽었지만.'
키스폰 가주의 자식들은 하나 같이 불행한 사고로 사망했는데.
그 끝에 남은 것이 바로 저기 서 있는 일랜 키스폰.
가문의 각인을 이어받은 마지막 후손이었다.
"흠."
시선을 한몸에 받은 일랜.
그는 피식 웃더니 곁에 있던 여학생에게 쳐다도 보지 않고 말했다.
"일레나. 뭘 멍청하게 기다리고 있어? 가자."
"네? 아, 네! 오라버니!"
일레나라고 불린 여성은 일랜과 달리 머리칼이 분홍빛이다.
키스폰 가주가 양녀로 들인 소녀로, 따지면 일랜과 이복동생.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빠와 대조적으로 잔뜩 주눅 든 모습이다.
'어, 어쩌죠. 학기 초부터 지각하다니. 오라버니 식사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교관 중 하나가 보다 못해 그들을 훈계하려고 했다.
하지만 동료 교관이 그를 제지하더니 총장을 눈으로 가리킨다.
총장은 새 학기 조회 연설에 지각한 일랜을 오히려 활짝 웃으며 맞고 있었다.
"마침! 지난해 우리 아카데미에서 최고 성적을 거둔 우수생들이 들어오고 있군요? 백사반의 일랜 키스폰과 혈룡반의 일레나 키스폰! 다들 큰 박수로 맞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카데미는 후원처에 따라 네 개의 반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름만 들어도 어느 가문이 후원했는지 알 법한 백사반.
용병들로 구성된 혈룡길드의 뜻을 기리는 혈룡반.
주로 귀족 자제들이 모이는 흑호반.
그리고 일반인 위주의 청마반.
짝짝짝!
아카데미를 후원하고 있는 키스폰 가문에 잘 보이기 위해 총장이 박수를 친다.
학생들도 긴 열설에 대한 짜증과 차별 대우의 모멸감을, 거친 박수갈채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참나! 잘났네, 잘났어. 학연, 지연보다 좋은 게 돈지랄연이라더니."
키스폰 자제들이 당당하게 들어서자, 지켜보던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그나저나 일랜 키스폰은 백사반인데, 여동생은 왜 혈룡반이래?"
"소문 못 들었어? 일레나 키스폰은 키스폰 가주가 혈룡길드에서 데려온 양녀잖아."
"크큭! 말이 좋아, 양녀지. 사실은 가주가 후손을 '생산'하고 싶어서 돈 주고 사 온 창..."
웃던 학생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짜악!
생각지도 못하게 날아온 따귀.
고개가 홱 돌아간 학생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가해자를 찾았다.
가해자는 다름 아닌, 마침 그 앞을 지나치고 있던 일랜 키스폰. 학생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일랜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이쿠, 실수! 벌레를 잡는다는 게, 손이 빗나갔네."
"이, 이봐?! 그걸 변명이라고...!"
"오호라, 이건 뭐지?"
일랜은 학생 제복에 달린 휘장을 신기한 듯이 들여다봤다.
"새파란 말이네? 그렇다는 건 아무 잡종들이나 설쳐대는 '청마반'이라는 건데. 그런 잡종 중 하나 따위가, 나 같은 '권세가' 출신과 말을 섞는다는 건가?"
"잡종이라니! 일랜 키스폰! 암만 네가 키스폰 가문의 자제라고 하더라도...?!"
"돈 주고 너희 가족이 사는 땅을 뺏어버릴 수 있지."
발끈하던 학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면 일랜은 서늘하게 뜬 눈으로 학생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돈지랄연. 우리 괴물 같은 할아범이 모아온 돈이라면, 그깟 땅 따위. 겨우 몸을 비집고 뉠 수 있는 네놈의 집 같은 거 우습게 뺏을 수 있거든?"
일랜의 동공이 뱀처럼 세로로 찢어졌다. 키스폰 혈통의 유전적 특징인 세로 동공.
보기만 해도 섬뜩하지만, 그것보다 소름 돋는 건 일랜의 협박이었다.
지위도, 돈도 없는 청마반의 학생은 하얗게 질린 채 말을 더듬는다.
"저, 저기! 혹시 내가 한 말이 과했다면 정식으로 사과할게. 나, 나는 그저 우스갯소리로..."
그때, 누군가 일랜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키스폰의 양녀, 일레나.
일랜은 신경질적으로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교관님들이 오고 계세요, 오라버니."
"...칫! 여긴 방역도 안 하고 뭘 하는 거야? 날벌레가 이렇게 많아서, 원."
일랜은 손을 홰홰 내저으며 그곳을 벗어났다.
그의 등 뒤로, 울먹이는 청마반 학생을 달래는 일레나의 조곤조곤한 음성이 들린다.
그들과 거리가 벌어지자마자 일랜의 눈빛이, 마치 딴사람이 된 것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 * *
뚜벅, 뚜벅!
내가 걸음을 디딜 때마다 강당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엑스트라를 때린 감각이 아직도 손을 통해 전해져왔다.
'거의 완벽했어. 내가 생각했던 일랜이라면 이렇게 가야 했다고.'
사실 난 편집자였다.
바로 이곳 세계를 다룬 판타지소설의 담당 PD.
완결 나고 몇 년 지난 소설에 빙의했다. 빙의한 인물은 그냥 엑스트라 캐릭터도 아닌....
'일랜 키스폰.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악역. 그리고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점은 여기서 다섯, 넷, 셋...'
속으로 카운트하는 끝에.
"어이, 일랜 키스폰."
낮게 갈무리 된 음성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정확히는 멈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둘...'
걸음을 멈춘 내가 고개를 돌리자, 큼직한 주먹이 시야를 채웠다.
'하나.'
뻐억!
점멸하는 시야, 코를 불태우는 듯한 통증. 흩뿌려지는 핏물 너머로 화난 표정의 남학생 얼굴이 보인다.
내게 주먹을 휘두른 그의 이름은 루인.
판타지소설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의 주인공이다.
작품 속 주인공, 루인에게 얻어맞은 내 몸이 넘어가면서 시야가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였어. 이 시점에서 주인공이 빌런한테 한 방 먹여줘야, 속이 시원하지.'
원작은 그러지 못했다. 당시 작품은 주인공이 도리어 악역한테 당하는 이야기가 많았으니까.
난 내가 담당해서 피드백하며 편집하던 수십 종의 작품.
그중에서 제일 망해버린 작품에 빙의했다.
꽈당!
'아오, 아파. 어쩌다가 내 신세가 이렇게 됐냐.'
내 이름은 천승제.
대차게 망해버린 이 소설의 담당자였다.
1화. 악역에 빙의함
2023년 겨울, 종로 어느 포차.
한 출판사에서 서로 연을 맺었던 편집자들이 다시 만났다.
"형! 약속 시간이 언제인데 이제 와요?"
"새끼, 못 본 새 좀 컸다? 야. 추우니까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
안주가 적당히 비워질 때쯤.
"참! '천승제'라고 했던가."
"예?"
"아니 네 밑에 있는 애 말이야. 그 녀석은 좀 어때? 네가 사수잖아."
일 년 전쯤 퇴직한 선배가 가볍게 소주잔을 들며 묻는다.
그 말에 아직 재직 중이던 후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천승제. 그 녀석은 좀 대충 살아야 해요."
"응? 그게 갑자기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뭔가 좀 이상한 애라니까요. 이런 애는 편집자 중에서… 아니, 월급 받고 사는 놈 중에서 이런 녀석이 있긴 할까 싶은, 그런 녀석이라고 해야 하나."
"아하, 열심히 하는 해야?"
알겠다는 듯이 선배가 묻자, 후배는 옅게 웃는다.
"열심히 하냐고요? 미친 듯이 열심히 하죠. 오히려 그래서 문제라고 해야 하나."
"뭔데. 실력이 없어? 아니면 인성이 갔어?"
"싸가지도 좀 밥 말아 먹긴 했는데... 이 바닥 아시잖아요. 실력만 있음 뭐든 문제없다고."
"그럼 감이 없는 놈이구나."
"어휴. 그런 거라면 아무런 문제 없었겠죠...."
"아이씨, 그럼 대체 뭔데?"
감칠맛 나는 설명에 선배가 답답하다는 듯이 상체를 기울인다.
후배는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걔가 손대면 뭔가 이상해져요. 열심히 하면 할수록 뭔가 망가진다고 해야 하나."
선배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손만 대면 박살이 난다?
그런데 그런 녀석을 가만히 두고 본다?
그가 다녔던 회사는, 그런 폭탄을 오냐오냐할 정도로 그렇게 온정이 넘치는 곳이 아니었다.
"야, 그럼 뜯어말려야 할 거 아냐? 어쩌다 그 회사가 그런 놈까지 받들어 모셨다고...!"
"왜 안 말리냐고요? 아니 하... 이게 미치겠는데."
후배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북북 긁었다.
"이상하게... 결과적으로는 잘돼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아니, 평가는 나락 갔는데 매출은 잘 나온다고요! 독자들이 괴작이라면서 묘하게 중독된대요. 단체로 약빤 거 아니냐고. 하드한 시리어스로 나왔는데, 대체 왜 이게 X발 웃기다며, 개그물로 유명해지냐고?!"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가게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선배는 술에 거나하게 취한 후배 대신 사과를 하고서, 겨우 그를 자리에 앉혔다.
"야. 진정해, 인마! 급발진해서 깜짝 놀랐잖아."
"후우, 죄송합니다."
후배는 술을 한 번 들이켰다.
선배가 안타깝다는 듯 그의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른다.
채워지는 그 술은 과연 진정제일까, 불에 붓는 기름일까.
"형. 근데 더 웃긴 건 뭔지 아세요?""뭔데, 또?"
"정작 본인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모른다는 거예요."
후배의 얼굴이 혼란으로 일그러졌다.
"진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외면하는 건지…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처먹어요!"
후배가 또다시 술을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그러니까 개같이 열심히 하고. 또 뒤틀리고... 독자한테 욕은 처먹고, 작가는 오열하고! 그런데도 묘하게 결과적으로는 흑자이긴 하니까. 사장님도 고민 끝에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는 거죠."
"허, 황당하네."
"그러니까 우리도 미치겠다니까요. 뭐, 어떻게 컨트롤 할 수가 없어."
얘길 듣던 선배도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던 후배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박았다.
"모르겠어요. 이제 그 자식도 5년 차인데 알아서 하겠지."
비슷한 시각.
5년 차인데 알아서 할 천승제는 달을 보고 있었다.
* * *
퇴근길.
걸으며 달을 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면 내가 회사에 들어온 지 5년이 된다.
장르 소설 편집자로 일한 지 꼭 5년이 된 것이다.
"...."
괜히 복잡한 생각이 들어 품에서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제일북스]
[대리 천승제]
오래도 다녔다.
첫날부터 내가 담당했던 소설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맡은 작품만 해도 이제 30개가 넘으려나.'
말아먹은 작품도 있었고, 내 예상보다 잘된 작품들도 있었다.
열과 성을 다해서 담당한 작품들. 그중에서 눈에 밟히는 작품이 있었다.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
"...."
나는 작가들과 상당히 많이 부딪쳤다.
회의 과정에서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통화하다 대놓고 욕설이 오가기도 했다.
'유일하게 이 사람만은, 내 말을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이었지.'
[괜찮으신가요, 편집자님? 다음으로 진행해도 될까요?]
[보내주신 피드백이 정말 좋았어요! 최대한 빠르게 수정해서 가져올게요!]
내가 담당했던 글들은 대부분 흑자를 넘겼다.
나를 욕하고, 나와 영원히 같이 하지 않겠다고 한 작가도 모두 흑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흑자를 넘기지 못했다.
[편집자님.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정말 재밌게 썼어요. 다만, 더 글을 쓸 순 없을 것 같아요.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서....]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다시 뵈었으면 좋겠어요!]
수많은 욕설에 담담해진 나라도 눈물을 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좀 더 작가를 잡아보았지만, 가혹한 현실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이미 결과에 덤덤해져 있을 나인데, 이 작품 하나만큼은 미련이 짙게 남았다.
'이게 잘됐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갑갑함에 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 입에 물었다.
머릿속에는 그 작품의 내용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겨져 있었다.
'악역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지.'
당시의 나는 미숙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악역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고, 주인공만 지나치게 고통만 받았다.
때문에 독자들은 떨어져 나갔으며, 덕분에 카타르시스를 적절히 주기란 불가능했다.
'소설 주인공처럼 회귀를 할 수 있다면... 아니, 그딴 일이 있을 리가 없지.'
피식 웃으며 불을 붙이려던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
금연하겠다고 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담배를 피우려고 하다니.
아무래도 5년 차를 앞두고 있자니 감상적으로 되어버린 것 같았다.
'시간도 늦었으니 집에나 빨리 가자. 내일 출근하면 할 일이 태산...'
횡단보도를 지나려는 그때, 갑자기 닥쳐오는 불빛.
"어?"
빠아아아앙!
이곳은 블랙 아이스로 뒤덮인 도로 한복판이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아보지만.
육중한 트럭은 관성의 법칙을 우직하게 지켜내고 있었다.
끼이이이이!
콰황!
시야가 크게 뒤집혔다.
세상이 나를 위아래로 두들겨 패고 이빨을 깨부쉈다.
그게 현실에서 있었던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그리고 현재.
난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로 빙의함> 작품의 악역으로 빙의했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건가? 아니면 사고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져서,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건 지독한 악몽이다.
"여기서 잠자코 보건담당 교관을 기다리게, 키스폰. 또 난동 부릴 생각 말고."
무뚝뚝한 표정의 교관이 내게 당부하더니 문을 닫고 사라졌다.
난 문 너머로 들리게끔 소리쳤다.
"날 때린 그 자식! 징계 안 하면 절대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알겠어요?!"
복도에서 들려오는 교관의 발소리가 멀어져서야 난 눈에서 힘을 뺐다.
시큰한 코를 손등으로 훔치자,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피가 묻어난다.
"후우."
이곳은 아카데미에 마련된 보건실
강당에서 '주인공'한테 물리적으로 얻어맞은 난 보건 담당 교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날 때린 주인공한테 헛발질하고 발광하다가 다른 이들 손에 끌려온 거지만.
'또라이 악역다운 퇴장이었다. 이 정도면 이 녀석이 했던 행동과 다르지 않겠지.'
혹시 몰라서 남들이 알고 있는 일랜의 행동을 하긴 했다.
그러나 막연히 그런 짓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싶어 불안감에 차오른다.
스윽.
고개 돌리자, 약품뿐만 아니라 책들로 빼곡하게 차 있는 서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중에는 닳고 닳아서 양장 커버가 떨어져 나간 것도 있었다.
"하아, 도대체 난 어떻게 된 거지…?"
기억을 더듬는다.
이곳에 오기 전, 난 트럭에 치였다.
블랙 아이스 가득한 도로 한복판에 서 있었으니, 사고를 당할 수밖에.
일반인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장르소설의 편집자.
'그건 분명 이세계 트럭이었어.'
수많은 서브컬처에서 주인공은 하필 트럭에 치여 이세계로 넘어간다.
그래서 마치 일종의 밈처럼 그 장치를 이세계 트럭이라고 부르고는 했다.
백번 양보해서 그것이 우연한 교통사고라고 치자.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이라고 설명할 텐가?
'사후세계?'
사후세계치고는 너무나도 내가 아는 세상과 맞아떨어졌다.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의 세계관.
작품에서 등장하는 악역 일랜 키스폰.
이 모든 건 내게 익숙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건 누구지? 설마...'
벌떡 일어나 조심스럽게 물었다.
"...작가님?"
어정쩡하게 대답을 기다렸지만 당연하게도 회신은 없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불러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
머쓱해진 난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날 싫어했던 건가?"
보통 이런 빙의물에서는 그런 도입부가 상당히 많다.
소설 속 주인공이 특정 게임이나 글에 대해서 욕하고.
욕을 확인한 콘텐츠 제작자가 '그럼 네가 한번 해봐!' 하는.
그런 전형적인 상황이긴 했지만, 희한하게도 내 상황은 조금 달랐다.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가 희대의 망작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작가와 반목할 정도로 관계가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그 작가는 내 아쉬운 손가락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내 착각이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순간.
「그 개자식이 뭐라고 그렇게 전전긍긍하는 거냐.」
까무러칠 뻔했다.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두리번거리자, 상대는 비웃듯 말을 이었다.
「어딜 보는 거야. 이쪽이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아주 가까웠다.
난 거울에 비친 일랜 키스폰을 발견했고.
그가 나와는 다르게, 입꼬리를 당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설마... 방금 말을 한 게...?"
「그렇게 놀라지 말라고. 이세계 악역으로 빙의까지 한 주제에.」
거울 속 일랜 키스폰은 책상에 털썩 걸쳐 앉았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본론만 말하지. 나도 너처럼 이곳에 갇힌 '수감자'다. 편하게 프리즈너라고 불러.」
"프리즈너... 거울에 갇혔다는 이야기는 아닐 테고."
「그럼. 이 세계를 말하는 거지. 그리고 난 죽었다.」
내 눈이 커지자, 망자(亡者)를 자칭한 수감자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또한 죽을 거다. 작가, 그자에 의해서.」
"뭐?"「눈치챘을 텐데? 이 빌어먹을 세상에 너를 처박은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
인과를 따져보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의 작가.
내가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 한 명 말고는 없었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마음 같아서는 저 프리즈너고 나발이고 다 던져버리고 혼자 있고 싶다.
'하지만 굳이 이런 타이밍에 등장한 건,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
애써 당혹을 감춘 난 고개를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업무미팅을 해보았다.
거기서 배운 것은 언제나 내 감정을 보이면 불리하다는 것.
그렇기에 최대한 평정심을 가장하고 상대 말을 경청한다.
「거래다.」
프리즈너가 말했다.
「네가 죽지 않도록 도와주지.」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눈앞에 반투명한 텍스트 박스가 떠올랐다.
[접촉한 캐릭터가 감지되어 설정 열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해당 캐릭터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이건…."
「'설정 열람'.」
촤락!
새로운 텍스트 박스가 펼쳐졌다.
[설정 열람 : 인물]
- 이름 : 일랜 키스폰 (E급)
- 소속 : 레드팽 아카데미 백사반
- 특성 : 지네의 딜레마, 인물 열람
- 목표 : 아카데미에 있는 열등 종자의 뿌리를 뽑아라!
"...상태창!"
「네겐 익숙한 형태지? 보다시피 나는 이런 걸 네게 줄 수 있다.」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보상이었다.
아무리 편집자라고 하지만, 벌써 이 작품은 완결된 지 년 단위가 넘었다.
디테일한 부분은 가물가물해지는 상황이기에, 정확한 정보는 상당히 위력적이었다.
그리고 강력한 보상인 만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조건은?"
「단순해. 이곳에서 철저한 악역이 되는 거다. 아까 하는 꼴을 보니 나쁘지 않더군. 아주 마음에 들었어. 보통 놈들은 그냥 제멋대로 하다 초반에 뒈지더라고. 그러니 넌 그대로만 하면 된다. 악역을 해내는 것만이 네가 살아날 길이니까.」
이곳에 온 내내 신경 쓰이던 것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덕분에 난 오래 생각하지 않고 반문할 수 있었다.
"내가 악역을 연기하는 게 도대체 왜 내가 사는 길이지?"
「복잡하게 이유 따위 설명할 생각 없다. 네가 뒈지면 다음에 올 놈한테 걸면 그만이야.」
"...도저히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데."
「그럼 거부할 건가?」
거울 속에 비친 일랜 의 모습이 일렁이고 있다.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다는 태도에 저절로 몸이 반응했다.
"...!"
그러자 프리즈너가 피식 웃으며 선심을 쓴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하난 말해주지. 내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 그놈에게 복수하는 거다.」
"복수...."
「내 복수를 위해서는 네가 죽으면 안 돼. 그게 내가 너를 돕는 이유다.」
모종의 이유로 악역을 하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서 나를 살려놓으려고 한다, 라.
'역시 납득이 되지 않는군. 신뢰하기가 힘들어.'
머릿속이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저 자식이 도대체 뭐라는 건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에 작가 또한 적이라는 소리도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짜증과 분노로 일관하던 다른 작가들과 다르게, 그 작가는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으니까.
[보내주신 피드백이 정말 좋았어요! 최대한 빠르게 수정해서 가져올게요!]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다시 뵈었으면 좋겠어요!]
개미 하나 죽일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착한 사람.
그 사람이 누군가를 세계에 가둬버리고 죽여 버리려 하고 있다고?
백번 양보해서 앞뒤가 다른 사이코패스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를 차로 치어서 세계로 빙의시킨다?
신이나 다를 바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원한으로 사무쳤다면 그때 하지 않았을까?
굳이 왜? 지금 와서?
뭔가 많이 앞뒤가 맞지 않은 상황에 가까웠다.
'뭔가 있다. 일단 놈의 장단을 맞춰보자. 상태창이 좋은 기회라는 건 사실이니까.'
「대갈빡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신중한 놈이군. 후배님은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으신가 본데?」
"그럴 리가."
악역을 연기한다.
그것도 주인공에게 칼침 맞고 죽는 것이 운명인 역할을.
보통 이런 짓을 기꺼이 하는 인간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것 같았다.
'어차피 돌아가려면 작가의 협조는 반드시 필요하다.'
프리즈너는 나를 죽지 않게 해준다고 했다.
하지만 나를 돌려보내 준다는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즉, 둘 중 하나.
저 녀석이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 보내줄 수 능력이 없거나. 그럴 생각 자체가 없다는 것.
결과적으로 내가 돌아갈 방법은 프리즈너가 아니라, 작가를 찾아 도움을 구하는 것이 유일하다.
'작가님을 어떻게든 불러내야만 해. 무슨 상황인진 모르겠지만, 작가님이 나를 여기 데려왔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나를 지켜보고 있을 확률이 높아.'
왜 저런 작자가 먼저 나를 찾아오고, 정작 작가님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 모종의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작가님의 등장이 절실했다.
기다리면 작가님은 나한테 올 것인가?
그건 장담할 수가 없다. 프리즈너 말대로라면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행동을 취해야 했다.
'작가님은 언제나 피드백을 원했어. 만약 소설 전개가 좀 더 나아지는 게 보인다면, 나를 알아보고 나한테 접촉할지도 몰라.'
명확해졌다. 작가님이 내게 오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게끔 하려면, 나 역시 작가님한테 뭔가를 해줘야 한다.
당신이 그리던 이상적인 내용. 내가 그때 해주지 못했던 피드백을 해준다면 어떨까.
'밑져야 본전이다. 어차피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마침 프리즈너라는 녀석도 내 등을 밀어주는 상황.
녀석의 의도는 수상하기 그지없지만, 우선은 이것이 최선이다.
「호오, 그 말인즉슨...?」
"거래, 받아들이지. 대신 날 제대로 도와야 할 거야."
「크큭! 걱정은 붙들러 메라고. 이래봬도 너보다 한참 전에 온 선배님이니까 말이야. 그럼 거래는 성립이다.」
거울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는 나와 소통하는 데 모종의 시간 제약이 있는 듯했다.
프리즈너가 검지를 눈썹에 붙였다가 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잊지 말라고, 파트너. 네가 악역의 가면을 벗는 순간, 거래는 결렬이니까.」
결정했다.
어떻게든 훌륭하게 악역을 연기한다.
그리고 어떤 내용이 가장 이상적인지, 작가님한테 보여주겠다.
'그러기 위해 지금부터 난.'
철저히 아카데미 속 빌런, 일랜 키스폰이 되어야 한다.
* * *
"하하하! 멍청한 녀석."
거울의 안.
자칭 '프리즈너'라고 부르던 자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딴 궤변에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가다니."
악역에서 벗어나면 죽는다.
그건 당연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녀석도 지적했지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프리즈너는 훌륭하게 상대를 속여 넘겼다.
역시 이곳에 들어오는 놈들은 하나같이 능력이라면 껌벅 죽는다.
프리즈너의 의도를 의심까지는 하지만, 결코 자신의 계획을 망치진 못했다.
보상을 앞에 두면, 그것에 눈이 멀어 다른 곳을 바라볼 수가 없다.
인간은 결국 욕망을 넘어서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자, 여신. 네가 이번에 부른 놈도 내 말에 속아 넘어갔다."
프리즈너는 하늘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후배에게 했던 얘기 전부가 거짓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프리즈너는 진심으로 작가, 아니 '여신'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여신?"
당연하지만 여전히 하늘은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끔찍할 정도로 공허한 반응.
언제나 그것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지만.
프리즈너는 그 침묵이 정말 오랜만에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프리즈너.
그는 자신이 누구와 거래를 한 것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도리어 박살 내어버리는 남자.
시간과 정성을 쏟을수록 의도와는 멀어지는 남자.
작가들이 이르길,
파멸의 손가락.
사상 최악의 편집자.
제일북스의 천승제라는 것을.
2화. 여동생이 착각함
"하아..."
입술에 붙어있던 분홍빛 머리칼이 한숨에 흔들린다.
미리 준비해둔 도시락 가방을 보물처럼 품에 안은 일레나 키스폰.
그녀는 복도 모퉁이에 잠시 숨어 보건실이 있는 방향을 훔쳐보았다.
'오라버니가 저기 있다고 했었죠?'
일레나의 이복형제, 일랜 키스폰.
그는 오늘 새 학기 조회에 늦은 것도 모자라, 애꿎은 청마반 학생을 붙잡고 시비를 걸었다.
물론 그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일랜은 평소 다른 사람들을 자기 아래로 깔보는 성향이 있는 데다, 본인이 가진 재력과 위치를 충분히 발휘할 만큼 영악했으니까.
문제는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
대강당에 들어가던 일레나 또한 남들이 그녀에 대해 험담하는 걸 들었다.
-크큭! 말이 좋아, 양녀지. 사실은 가주가 후손을 '생산'하고 싶어서 돈 주고 사 온...
처음부터 키스폰 혈통이 아니었던 그녀는, 매번 남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지난 학기 초, 그녀 오빠와 같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긴 했지만.
일랜과 달리, 일레나는 백사반이 아닌 혈룡반에 배정됐다.
그렇기에 더욱 기가 죽고 자존감이 바닥을 쳤지만.
-짜악!
-어이쿠, 실수! 벌레를 잡는다는 게, 손이 빗나갔네.
그때 나선 것이 바로 일랜 키스폰.
그녀와 같은 성 씨를 쓰는 의붓오빠였다.
'10년 만이었어요.'
도시락 바구니를 안은 일레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오라버니가, 나 때문에 화를 내는 건. 하지만 역시 착각이겠죠?'
일레나도 안다.
일랜이 나선 건 어디까지나....
'벌레라고 여긴 이들이 주제넘었다고 생각했겠죠. 나 때문이 아니라.'
쓴웃음을 지은 일레나가 마침내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향한다. 그녀와 달리 사람한테도 칼을 서슴없이 휘두를 수 있는, 아카데미 최악의 망나니가 있는 보건실로.
똑똑!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자는 걸까요?'
아카데미를 제집처럼 편하게 생각하는 일랜이라면 가능하다.
그렇게 여긴 일레나가 문을 열자.
'아!'
하얀색 커튼과 약품, 그리고 책장으로 진열된 진료실.
그 가운데 앉아있는 은발의 남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키스폰의 마지막 적통, 일랜.
사가각!
그는 자리를 비운 보건 담당의 책상 앞에 있었다.
단순히 앉기만 한 게 아니라, 뭔가를 열심히 종이에 끄적이고 있었다.
얼마나 몰두해있었는지 일레나가 들어온 것도 눈치 못한 모양. 하지만 그녀 역시 그런 일랜의 모습이 신기해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멈칫.
뒤늦게 기척을 느낀 것일까.
깃펜 쥔 일랜의 손이 멈췄다.
"여긴 어쩐 일이지?"
여느 때처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묻는 의붓형제.
그제야 일레나도 자신이 온 목적을 떠올리고 황급히 바구니를 내밀었다.
"앗! 죄, 죄송해요! 곧 점심시간인데 아직도 여기 있다고 해서 먹을 걸 조금 챙겼..."
파악!
일랜의 손이 바구니를 거칠게 후려쳤다.
힘없이 날아간 바구니가 벽에 부딪히고, 들어있던 빵과 과일 따위가 우수수 널브러졌다.
"오, 오라버니?!"
"누가 이딴 거 챙겨오래. 날 동정하는 거냐? 너 따위가?"
그제야 일랜이 고개를 든다. 루비를 닮은 눈동자 위로 당황한 일레나의 얼굴이 비친다.
"동정이라뇨! 저, 저는 그저 끼니를 거를까 봐서..."
변명하는 일레나는 내심 실망했다.
역시나 이 남자는, 결코 의붓동생을 위해 나선 게 아니었다.
일부러 신경 써서 챙겨온 도시락을 아무렇지도 않게 팽개치는 작자니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여기다 면상을 들이밀다니. 당장 꺼져!"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일랜.
일레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나뒹구는 음식들을 주워 담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아니, 꿇으려고 했다.
턱!
메마른 손가락이 그녀 어깨를 붙잡았다.
놀란 일레나가 고개를 들자, 일랜의 뒤틀린 입가가 보인다.
"오, 오라버니?"
"이젠 내 말을 대놓고 무시하는군?"
"그게 아니라, 여기 떨어진 것들을 챙기려고..."
"그딴 거 내가 알 바 아니니까.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일레나."
가녀리게 떨던 일레나는 흠칫했다.
그녀가 쳐다보자, 일랜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뒤돌아섰다.
'방금, 내 이름을 부른 건가요? 오라버니가 내 이름을?'
동그랗게 뜬 일레나의 시선이 일랜을 향한다.
10년.
그 긴 시간 동안 일레나는 일랜에게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
기껏해야 계집, 멍청한 년, 쓸모도 없는 종자 따위로 불렸을 뿐.
"...알겠습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오라버니."
그녀를 등진 일랜은 미처 보지 못했다.
보건실을 나서는 일레나의 입가에 미소가 붙어있던걸.
달칵!
문이 닫히고서야 일랜의 고개가 움직였다.
* * *
[설정 열람 : 인물]
- 이름 : 일레나 키스폰 (D급)
- 소속 : 레드팽 아카데미 혈룡반
- 특성 : 인내심, 가사노동, 의기소침, ■■
- 목표 :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 싶어요.
'역시, 접촉한 인물만 통하는 거였어.'
방금 난, 일레나에게 설정 열람을 테스트했다.
처음에는 설정 열람이 통하지 않았다. 접촉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몸을 만진 후, 다시 특성을 사용하자 정보가 나타났다.
'보기만 해도 정보를 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덕분에 하나는 확실해졌어.'
난 다른 캐릭터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정보는 곧 나의 무기이자 이점.
하지만 그게 만능은 아닌 건지, 일부 내용은 '■'로 가려져 있었다.
'가려진 특성은 흑화, 뭐 이런 것일 가능성이 있겠지. 그리고 목표는... 지키고 싶어요, 일까?'
그 반대라면 조금 무서울 것 같은데.
어쨌든 인물 열람은, 이 세계를 누비는 동안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
일단 일레나의 기척이 더 느껴지지 않자, 나도 비로소 한숨을 내뱉었다.
"어쨌든 이것도 할 짓이 못 되는군. 배다른 여동생을 구박하는 악역이라니."
사실 당황했다.
허구한 날 오빠한테 학대받는 일레나가, 설마 보건실을 찾아올 줄은 몰랐으니까.
'원작과 방향이 달라져서인가?'
원작에서 일랜 키스폰은 새 학기를 맞아, 대강당에 있던 모두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
지나가다가 애꿎은 학생 하나한테 시비를 걸다가, 주인공과 처음 조우한다.
주인공은 그런 일랜을 응징하려 하지만 도리어 얻어터지기만 하고.
그런 주인공을 비웃으며 일랜은 멀쩡하게 퇴장하는 수순.
'원래 보건실로 실려 가는 건 일랜이 아닌 주인공이었지.'
원작과 방향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나는 내가 한 행동이 옳다고 믿고 있다.
내가 의도한 덕분에 주인공은 일랜을 응징하는 데 성공했고.
프리즈너를 통해 설정 열람의 특성을 획득했으니까.
"응?"
때마침 근처에 엎질러진 도시락 바구니가 시야에 들어왔다.
난 출입구를 슬쩍 살펴본 다음 재빨리 음식들을 담아 책상으로 가져왔다.
'치즈를 얹은 구운 빵과 밀봉된 우유. 거기에 갓 따온 사과까지...'
이세계에 빙의하고 마주한 첫 음식.
그걸 보자 어쩐지 서글픔과 고마움이 치밀었다.
"미안해, 일레나. 내가 이러는 건 너한테 별다른 감정이 있어서가 아냐."
어차피 사과해도 그녀는 모를 것이다.
아니, 믿어주지도 않겠지.
그래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애초에 일레나는, 흑화해서 일랜을 죽여 버릴 캐릭터니까.'
일랜이라는 악역에게 비참한 끝을 주기 위한 장치였다.
당시 이 작품의 작가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 너무나도 긴 시련과 갈등을 안배했다.
나는 작가의 뜻을 존중해서, 이 부분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여긴 반드시 손을 대야만 했었다.
'1권 마지막에 일랜은 죽고, 흑화한 일레나의 서늘한 미소로 장식됐지.'
물론, 내가 진짜로 죽어버리겠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진짜로 죽어버리면 프리즈너처럼 될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프리즈너의 속셈을 파고든다.
그러는 김에 작가한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만드는 거지.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하나.
'죽음을 위장한다.'
이 세계의 인물들이 내가 죽었다고 여기는 것이 곧 빌런의 죽음.
그 뒤에는 몰래 주인공의 뒤를 밟으며 상황을 최대한 편집해나갈 계획이다.
'1권 마지막에 내가 죽는 것. 처절하고 비참하게 죽어서 흑화한 일레나를 부각시키고, 다음 권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을 최대로 끌어내자.'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악역을 연기한다.
그렇다면 프리즈너가 명시한 계약에도 훌륭히 들어맞는 것이다.
그럼 작가님도 나라는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해서 접촉해올지도 모르지.
결과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는 동시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셈.
'나는 완벽한 악역이 될 거야.'
난 일레나가 챙겨준 구운 빵을 한 입 베어 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부터 아주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 * *
프리즈너는 천승제, 아니 일랜의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일랜처럼 제안을 수락하긴 했지만, 정작 행동을 다르게 한 놈들도 많았다.
그렇기에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서 감시했는데, 이번엔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과연. 이전 녀석들이랑은 확실히 다른걸."
다른 놈들은 하등 쓸데없는 이유로 일레나에게 악역답지 않은 행동을 보였다.
심성의 괴리라든지, 필요성의 문제라든지. 또는 그냥 양심에 찔려서 그렇다든지 등.
하지만 이번 신입은 아주 훌륭하게 악역을 수행했다.
교본으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매끄러운 악역의 모습. 기대한 바로부터 120%의 결과물 그 자체였다.
담당 편집자라더니, 오히려 극단에 있었던 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연기 또한 뛰어났다.
"이대로만 가면 되겠군. 아주 바람직해."
프리즈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라면 여신도 발등에 불이 떨어질 게 분명하다.
"지금처럼 오만하게 침묵할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지. 후후..."
띠링!
웃고 있던 프리즈너 눈앞에 창이 하나 떠올랐다.
그건 일랜에게 보여주었던 그것과 동일한 상태창.
사실 프리즈너는 자신에게 떠오른 상태창을 그에게 공유해준 것에 불과했다.
[최근 '설장 열람'한 캐릭터 중 업데이트된 항목이 있습니다.]
[갱신된 내용을 열람하려면 '확인'을 말해주세요.]
업데이트와 갱신이라.
일랜이 최근 열람한 캐릭터라면 둘뿐이다.
당사자, 일랜 키스폰. 그리고 일레나 키스폰.
'일랜의 행동에 따른 영향이겠지.'
프리즈너는 미소를 띠며 상태창을 조작했다.
"확인."
촤락!
[인물 열람]
- 이름 : 일레나 키스폰 (D급)
- 소속 : 레드팽 아카데미 혈룡반
- 특성 : 인내심, 가사노동, 의기소침, ■■
- 목표 :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 싶어요.
여기까지는 방금 봤던 내용과 동일하다.
문제는 '목표' 아래의 신규 추가된 항목.
- 호감 : ...
"호감도라. 당연히. 마이너스가 됐겠...."
- 호감 : 1→3
▶ 일레나는 일랜에게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
프리즈너는 눈을 찌푸리고 그 문구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뭐지? 왜 숫자가 정수로 되어 있지? 분명히 앞에 마이너스가 있어야 하는데.
아니 대체 이 무슨 개소리야. 일레나가 일랜한테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을 했다니?
"????"
일랜은 완벽하게 악역의 행동을 했다.
자신이 봐도 억지인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긴 일레나가 이런 호감을 느끼는 거지?
"...어째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프리즈너의 눈동자가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3화. 주인공이 폐륜임
루인 아스달.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그는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 작품 세계의 주인공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오늘, 새 학기 첫 점심시간.
그는 식당에서 청마반 친구들의 거친 헤드록에 시달려야만 했다.
"루인! 우리 용감한 전사가 여기 계셨구만?!"
"보기 좋게 그 재수 밥맛 자식을 날려버린 소감이 어때?"
그들이 말한 재수 밥맛 자식이란, 일랜 키스폰.
이곳 레드팽 아카데미에서 입지를 공고히 다진 인물이다. 그는 밥 먹듯이 일반인들로만 모인 청마반을 무시하고 괴롭혔기에, 청마반 소속이라면 누구나 치를 떨고는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아침, 일랜은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뒤늦게 나타난 것도 모자라.
근처에 있던 청마반 학생의 따귀를 갈기는 얼토당토않은 짓을 저질렀다.
그 와중에 루인이 일랜에게 주먹을 날려 응징했고.
덕분에 청마반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으윽, 그만 좀 해...!"
루인은 숨 막힌다는 표정으로 친구의 헤드록을 빠져나왔다.
그가 식판을 들고 일어나자 학생들이 의아해한다.
"뭐야, 밥 먹다가 어디 가?"
"알았어. 장난 그만 칠 테니 그냥 앉아서 먹으라고, 루인. 루인?"
그들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루인은 식당을 벗어났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오자, 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받았다.
'찝찝해.'
그는 떠올렸다.
강당에서 일랜의 면상을 가격하던 순간을.
'내가 나섰던 건, 순간적으로 친구한테 모욕하던 걸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간 건데...'
문제는, 상대가 일랜 키스폰이라는 점.
일랜이 누구인가.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아카데미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고.
그것도 모자라 아카데미 내 성적도 뛰어나서 교관들에게도 곧잘 칭찬을 받았다.
심지어 싸움 실력도 나쁘지 않다는 평가. 그것이 진짜 전투력 때문인지, 뒷배경에 따른 힘인지는 모호하지만. 일단 눈치가 좋고 기교 역시 뛰어나 호락호락하게 당할 위인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한테 맞았다고?'
루인은 자신의 손을 들여다봤다.
'내가 불렀을 때, 녀석이 과연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러고 보니.
루인이 이름을 부르자마자 일랜의 걸음이 멈췄던 게 생각났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우겠지. 어쩌면 방심한 건지도 몰라. 감히 누가 자기를 때릴 줄은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오히려 그편이 훨씬 설득력 있었다.
실제로 일랜 키스폰을 몰래 헐뜯는 자들 사이에서는, 그를 오만과 자만의 아이콘이라고 불렀으니.
루인이 찝찝한 기분을 털어 내버리려는 그때.
-여기다 면상을 들이밀다니. 당장 꺼져!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짝 날 선 목소리.
움찔하며 소리 난 쪽을 살피자, 복도 한쪽에 마련된 보건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목소리는, 일랜 키스폰?'
그리고 잠시 후.
벌컥!
보건실 문이 열리더니, 분홍빛 머리칼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인의 동공이 커진다.
'저 여자애는...?'
일랜의 여동생, 일레나 키스폰.
정황상, 그녀는 다친 오빠를 살피기 위해 보건실을 들른 모양이다.
거리가 좀 있기는 했지만 루인은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
'우, 우는 건가?'
루인은 당황했다.
머릿속에서는 보건실에서 있었을 상황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내가 맞고 있는 걸 빤히 지켜보고만 있어? 일레나, 네깟년은 키스폰 가문의 수치다!'
'죽을 죄를 지었어요! 그러니 오라버니, 다시 한번 저에게 기회를 주시면 제가...!'
'기회는 지나갔다. 대신 벌을 주어야겠어. 넌 일주일 동안 지하실에 갇힐 줄 알아라. 너도 알다시피 그곳은 쥐새끼 가득한 밀실이지. 너처럼 주제도 모르는 계집한텐 딱 어울리는 공간이고.'
'지, 지하실? 오라버니! 그것만은 제발...!'
루인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끔찍해! 저렇게 가녀린 여자애를 지하실에 가두다니!'
가정에 가정을 거듭한 결과물이었지만, 루인은 그걸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어마어마한 자책감이 그의 머릿속에 휘몰아치고 있었던 탓.
'그래, 이건 내 탓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강당에서 일랜을 공격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루인은 일랜을 때렸고, 그 탓에 불똥이 튄 일레나는 일주일 동안 빛 한 줌 없는 지하실에서 지내게 된다.
"저, 저기...!"
끔찍한 상상에 사로잡힌 루인은, 사과라도 하기 위해 일레나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일레나는 그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더니,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다.
'나 때문이야. 내가 나서지만 않았어도...!'
죄책감에 짓눌린 루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턱!
허리춤의 칼자루를 쥔 루인.
그의 시선이 보건실을 향했다.
* * *
일레나를 보건실에서 보낸 후, 난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 어쩌면 나, 연기에 재능이 있을지도?'
처음은 아무래도 불안하긴 했지만, 매우 성공적인 퍼포먼스를 보였다.
이대로라면 프리즈너를 당장 만족시키는 건 물론, 작가님 또한 내 앞에 나타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천승제.」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던가.
「...아니, 일랜 키스폰.」
보건실 거울 속에서 프리즈너가 나타났다.
그걸 본 난 의기양양한 얼굴로 어깨를 폈다.
그가 다시 찾아온 건, 아마 나를 칭찬하기 위해서일 테니.
"어때, 프리즈너! 내가 생각보다 잘하긴 했지?"
「....」
프리즈너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오히려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나를 쏘아본다.
그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도 조금 기가 눌렸다.
"왜 그래. 뭔가, 문제라도... 있나?"
「...일레나의 호감도를 확인해봐라.」
"일레나의 호감도?"
그러고 보니 아까 뭔가 알림 같은 것이 뜬 것 같긴 했는데.
"상태창."
촤락!
[인물 열람]
- 이름 : 일레나 키스폰 (D급)
- 소속 : 레드팽 아카데미 혈룡반
- 특성 : 인내심, 가사노동, 의기소침, ■■
- 목표 :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 싶어요.
- 호감 : 1→3
▶ 일레나는 당신에게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어...."
투둑!
내 손에 있던 빵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눈을 비비고 다시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호기심? 아하, 호승심의 오타인가! 아니, 그것도 앞뒤가 안 맞아. 일레나가 일랜한테 느껴야 할 감정은 호승심이 아니라 적개심이어야...'
잠시 후.
"대, 대체 왜...? 이게 왜 오른 거지?"
금방까지 산뜻했던 느낌들이 모조리 증발해버렸다.
그리고 아까 자취를 감추었던 불안감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슬쩍 옆을 바라보자, 프리즈너가 짜게 식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 아하! 하, 하하! 사실 이거, 그렇게 큰 문제는 아냐!"
나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머릿속이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상황을 되짚어 보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봐, 프리즈너.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일레나 호감도 따위, 얼마든지 낮출 수 있다고. 초반에 살짝 오른 것 정도야, 전개에도 큰 영향을 못 미친다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프리즈너한테 철저한 악역이 되겠다고 거래한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황.
저 자식이 수틀려서 거래를 뒤엎어 버리거나, 나한테 해코지할지도 모른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이건 내 목숨이 달려있는 중대한 문제.
「...후, 좋다.」
내 말이 통한 것인지, 프리즈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적어도 네가 일부러 수작을 부린 것 같지는 않군. 알았다. 이 상황에 네 악의가 없었다는 걸 참작해주지.」
내가 무슨 수작을 부려.
네가 원하는 대로 악역처럼 움직였잖아!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리즈너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하지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것을 명심해!」
경고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그의 모습은, 거울에서 사라져버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휴."
살벌한 세상에 들어와 버렸군.
제대로 했는데도 이런 꼬락서니라니.
머리가 복잡해진 난, 프리즈너가 했던 것처럼 이마를 짚었다.
'일레나 호감도가 왜 올랐을까?'
일레나라는 캐릭터가 무슨 느낌인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사고방식까지는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런 만큼, 프리즈너가 준 상태창은 더욱 절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변수가 또 발생했을 때, 내가 제대로 대처할 수 없을 테니.
'후우, 프리즈너 녀석. 역시 날 감시하고 있었나.'
그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눈여겨보고 있었다.
내가 정말 뭔가 수작을 부린다면, 바로 제재가 들어오겠지.
'근데 저 자식, 상당히 당혹스러운 눈치였는데. 왜지?'
보통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뭘 잘못했는지 호통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언반구 설명도 없이 경고만 했을 뿐이다.
'저 자식, 의외로 이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거 아냐?'
프리즈너는 믿을 수가 없는 녀석이다.
그렇다면 저 녀석을 체크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좋아. 다음은 확실하게 해주지."
난 프리즈너가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했다.
일레나의 변수는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프리즈너한테 얘기했듯 아주 망쳐버린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난 편집자라고.'
살짝 어렴풋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 세계는 내가 담당했던 작품 그 자체.
언제 어떤 사건이 펼쳐질지는 기억하고 있다.
방금 같은 상황을 방지하려면 그 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해.
'내가 빙의한 시점은 1권 초입부. 주인공 루인이 처음으로 일랜 키스폰이라는 악역을 만나게 되는 새 학기 3월이기도 하지.'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
그건 주인공이 초반에 겪는 위기와 갈등, 그리고 결핍 구간이 지나치게 길다는 거다.
실제로 원작에서는, 주인공 루인이 강당에서 일랜을 응징하려다가 되려 호되게 두들겨 맞고 비웃음 당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어. 내가 반격하지 않았으니까.'
그 생각에 미치자 비로소 마음이 진정된다.
난 책상에 올려둔 메모장을 들여다봤다.
<1권 메인 에피소드>
1. 루인을 언짢게 생각한 일랜은 똘마니들을 보내 루인을 괴롭히고 공격하기 시작. (루인의 고통 구간 : 10화 분량)
2. 괴롭힘을 참다못한 루인이 청마검술을 각성해서 수하들을 쓰러뜨림.
3. 화가 난 일랜은 일레나를 볼모 삼아 루인을 압박.
4. 흑화한 일레나가 일랜을 살해.
"후우...."
나도 모르게 푹푹 튀어나오는 한숨.
지금 생각해도, 상업성이라고는 볼 수 없는 전개다.
일단 이 메인 에피소드는 1권을 구성하는 핵심 사건.
그리고, 루인이 일랜 때문에 고통 받는 시간은 1권의 절반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독자가 이입해야 할 아바타가 주인공인데. 그 많은 구간을 고구마로 전개해버렸었지. 나도 참 많이 부족했군."
다시 씁쓸함이 일려고 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는다.
아니. 오히려 앞으로 내가 벌일 일들을 생각하니 살짝 고무되었다.
'일단 일랜의 똘마니들을 주인공한테 보내야겠지. 위기는 주인공의 성장 동력이자, 각성 포인트니까. 대신 고구마를 줄이고, 루인이 각성하는 시점을 앞당기려면...'
메모장을 끄적이며 계획에 몰두하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이 자식 각성을 어떻게 앞당기지?'
일반적인 편집자 상황이라면 간단한 문제다.
작가한테 이런 상황을 조성하라고 피드백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지금 난 피드백 해야 할 작품 속 등장인물로 빙의한 처지.
즉, 내가 직접 루인의 행동을 조종해서 전개를 수정해야 한다는 거다.
'아씨, 어떡하지? 주인공이 빨리 각성해야 한다고 작가님한테 연락할 방법도 없는데.'
수단이 떠오르지 않는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
벌컥!
갑자기 문이 열렸다.
보건 담당 교관인가 싶어 고개 들던 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이 왜?'
보건실을 방문한 건 다름 아닌 루인.
그의 까만 머리칼은 푸른빛이 감돌았고, 그 아래 자리한 눈동자는 맑은 하늘색으로 결연함이 엿보였다.
허리에 찬 칼자루를 쥔 손에는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뭔데. 쟤는 왜 또 온 건데. 강당 친구 일이라면 나 때리고 끝난 거 아니었어?'
고민만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지금도 프리즈너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일단 상황에 집중하자.'
난 최대한 거만한 표정으로 책상 위에 발을 올렸다.
"이런, 날벌레가 들어왔군."
"역시나 너였구나? 일랜 키스폰...!"
"그게 내 이름이지. 이 아카데미에서 일랜 키스폰을 모르는 놈은 없을 테고."
"나는 루인 아스달이다. 낮에 네가 모욕한 내 친구와 똑같은 청마반 소속이지."
"그래 봐야 내 눈엔 똑같은 청마반 잡종들일 뿐이야. 그래서... 이 몸한테 사죄라도 하려고 오셨나?"
입가의 미소를 싹 지운다.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루인을 노려봤다.
"보다시피 난 기분이 매우 안 좋거든? 무릎 꿇고 기어 올 거 아니면,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잡종."
그야말로 완벽한 연기.
이 정도라면 제아무리 프리즈너라고 해도 아무 말 못 하겠지?
'이 자식 호감도만큼은 절대로 올려선 안 돼.'
왜 녀석이 나를 찾아 보건실에 들어온 건지 모르겠지만.
루인은 주인공인 만큼, 작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일레나와 차원이 다르다.
일레나야 어떻게든 커버할 수 있어도, 루인까지 변수가 발생한다면 방법이 없는 상황.
'하지만 보라고.'
내가 봐도 정말이지 거만하고 불쾌한 도발.
암만 성인군자라고 해도 이런 상황이라면 칼부터 뽑아들 거다.
하물며 상대는 주인공 루인. 자기 친구가 따귀 맞은 것에 분기탱천한 녀석이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내가 적반하장으로 사과를 요구한다면. 쥐고 있던 저 검을 안 뽑을 수가 없겠지. 자, 와라! 루인!'
스스로도 만족해서 내심 미소를 짓는 그때.
털썩!
루인의 무릎이 땅에 부딪히면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뭐가 부딪혔다고?
스슥!
스스스스!
무릎을 꿇은 채 바퀴벌레처럼 기어오는 루인.
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자, 몸이 딱딱하게 굳는 기분. 그저 가까스로 입술만 뗐다.
"...네, 네 녀석. 지금 뭐하는 거지?"
"무릎 꿇고 기어오라며. 이렇게 하면 나를 용서해주는 거야?"
이 미친놈아! 시킨다고 진짜 무릎 꿇고 사죄하는 주인공이 세상에 어디 있어?!
난 애써 당혹감을 감춘 채 루인을 노려봤다.
"후, 후후! 웃기는군. 그럴 거면 칼자루는 왜 쥐고 있는 거지? 나를 '방심'시켜놓고 '기습'하려는 계획이라면, 잡종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치고 나쁘지 않군."
기습해라, 제발.
지금이라도 칼 뽑아서 나한테 휘두르라고!
그런 내 생각이 먹혔는지 루인은 뭔가를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이런 방법으로는 안 먹힐 줄 알았어.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럼 그렇지!
방금까지의 그 액션은 정말 나를 방심시키려고 했던 의도였나 보다.
난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칼을 피할 준비를 했다.
뚝!
그가 손에 힘을 주자, 쥐고 있던 칼자루와 허리를 잇던 끈이 끊어졌다.
루인은 두 손으로 칼을 받치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주신 청마검이야. 받아줘!"
그가 소리치며 고개를 푹 숙인다.
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아버지 유품을 왜 나한테 주는데, 이 패륜아 자식아.
4화. 악역이 너무 잘생김
루인 아스달.
원작에서 그의 아버지는 사실 따로 있었다.
일종의 반란군 출신인 스카일 윈드라이더가 진짜 친부.
스카일 윈드라이더는 자기 부하들이 승산 없는 전쟁에서 희생되는 걸 원치 않았고.
때문에 왕명을 거역하고 군대를 해산. 자신은 정체를 숨긴 채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루인.'
행복이 채 무르익기도 전.
왕국은 반역자를 찾아 제거하기 위해 '독사'라는 인물을 고용한다.
그 독사는 축적한 지식과 뛰어난 탐색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스카일과 그의 아내를 찾아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그 독사가 바로 오늘날의 키스폰 가주. 온갖 음습하고 어두운 비밀의뢰를 수행해서, 높은 곳에 도달한 괴물.'
키스폰 가주는 윈드라이더 부부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 내외한테 자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게 주인공, 루인.'
위기를 감지한 스카일은, 진작 자기 아들 루인을 옛 부하 아스달에게 보냈고.
옛 상관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던 아스달은, 상관의 아들을 친자식처럼 기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설정 이야기를 주절주절 꺼내고 있냐고?
'내가 알고 있는 얘길 질러? 아니 지르면 안 되나? 아냐. 이거라도 내뱉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만큼 나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기껏 악역 연기하고 왔더니, 주인공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바퀴벌레마냥 다가오는 코즈믹 호러 같은 상황.
그야말로 내 정신은 산산이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특히 이 상황에 내 목숨이 걸려 있다는 것이 더더욱 악질적이었다.
『사실 우리 괴물 할아범이 네 친부를 죽였어. 죽은 네 아버지? 그 사람은 너랑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야. 네 친아버지의 쫄다구였다니까? 청마검도 사실 네 친부가 가지고 있던 거라고. 그런데도 그걸 네 원수의 혈육한테 바치고 싶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루인은 어떻게 반응할까.
처음에는 바로 부정하겠지. 하지만 점차 화가 치밀 것이고, 바치려던 검을 뽑아 내 목을 벨 것이다. 여기서 그대로 끔찍이 살해당해버리면, 게임은 끝이다.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여기서 죽는다고?'
죽어서 끝나면 다행이다.
하지만 아까 만난 프리즈너를 보면, 죽어서도 이 세계에 갇힐 가능성이 높다.
"...하아."
내가 짧게 탄식하자, 루인은 의아해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안 돼.'
절대로 그딴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래. 아직 모든 게 어긋난 건 아니잖아.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살아날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왠지 모를 오기와 함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 대책 없는 새끼."
난 몸을 일으켜 책상을 돌아 루인 앞에 섰다.
'설정 열람.'
촤락!
일레나 때도 그랬던 것처럼.
루인과 나 사이에 반투명한 창이 펼쳐졌다.
[인물 열람]
- 이름 : 루인 아스달 (F급)
- 소속 : 레드팽 아카데미 청마반
- 특성 : 과대망상, 희생정신, 정의감, 체력단련, 유니콘 블러드
- 목표 : 죽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세상을 수호하는 용사가 되자!
루인의 강함 척도는 F급.
E급인 나보다도 아래 단계인 최약체다.
하지만 특성 '유니콘 블러드'에서 볼 수 있듯.
언젠가 루인이 다쳐서 흘린 피가 청마검에 닿으면, 그는 청마검술을 각성하게 된다.
'각성 따윈 지금 문제가 아니야. 호감도가 문제지.'
일레나가 그랬듯, 호감을 확인하면 상대가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 알 수 있으니까.
만약 이놈조차 나한테 어쭙잖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히 골치가 아픈 상황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순간은 나, 일랜 키스폰이 '악역'으로서 진가를 발휘할 기회가 될 수 있다.
- 호감 : -1
▶ 루인은 당신을 불편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우...!"
머리를 젖히고 안도의 한숨을 토해낸다.
다행이다. 정말 감사하게도 루인, 이 녀석은 나를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
그렇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 나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 그것만 알 수 있다면... 응?
'저 녀석, 뭘 보는 거지?'
내가 잠시 시선을 돌린 틈을 타, 루인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듯한 그의 눈빛이 닿은 곳은....
'빵?'
아까 일레나가 가져온 도시락 구성품이다.
방금 난, 빵을 몇 입 먹다가 일레나의 돌발행동에 그걸 바닥에 떨어뜨렸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일레나가 나가고 얼마 안 돼서 루인이 들어왔잖아?'
퍼즐들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보건실을 나선 일레나. 아마 루인은 그녀를 봤거나, 그녀가 이곳에 들린 걸 추측했을 것이다.
<1권 메인 에피소드>
3. 화가 난 일랜은 일레나를 볼모 삼아 루인을 압박.
원작에서 일랜이 일레나를 볼모로 삼았던 이유.
그건 루인과 일레나가 선후배로서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루인은 키스폰 가문에서 시달리는 일레나를 동정했고, 일레나는 오빠와 달리 다정하게 챙겨주는 루인을 동경하게 된다.
'그런 거였나. 지금 이 녀석이 나한테 용서를 구하는 진짜 이유는...'
일레나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때문에 그녀가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상처 주는 일랜 키스폰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존심을 굽힌다.
'그렇다고 해도 왜 이딴 식으로 나오는 거지?'
자존심은 굽힌다고 해도 어째서 무릎까지 꿇는 것인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상황에 설정 열람을 보고 고민한 결과.
'...제기랄, 과대망상 특성!'
절로 표정이 확 구겨졌다.
예상이 가는 건 결국 이것밖에 없었다.
이 녀석이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결과, 지금처럼 심각하게 구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과도한 행동은 설명할 수 없다.
"일랜 키스폰...?"
내가 표정을 구긴 채 입을 다물고 있자, 의아해진 루인이 고개를 쳐든다.
방금 난 도래했던 난관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아직 눈앞에 닥친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이 기회에 이 애매한 비호감도를 확정시킨다.'
이 빌어먹을 과대망상 특성이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러니까 과대망상을 하더라도, 도저히 무릎을 꿇고 기어 다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이 기회에 내 비호감도를 확실하게 박아 넣는다.
"멍청한 놈. 너무 멍청해서, 보는 내가 화가 날 지경이야."
난 책상 위에 있던 바구니를 뒤집어 내용물을 바닥에 와르르 쏟아냈다.
그리고는 그걸 발로 팍팍 짓밟기 시작했다.
"네놈의 시커먼 속을 내가 모를 줄 알고? 아마 일레나, 그 바보 같은 계집한테 홀린 거겠지!"
"뭐? 그, 그건 오해야! 나는 단지...?!"
루인의 당황한 얼굴을 보아하니, 정곡을 찔린 모양이다.
물론, 정말 일레나한테 이성적인 감정을 가진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가 일레나를 위해 행동했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좋아, 잡종. 용서해주지."
"...정말? 용서해준다고, 일랜 키스폰?"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는 루인에게, 나는 싸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대신, 여기 있는 음식 쓰레기를 먹어치워라."
"?!"
"왜? 너희 잡종들은 아카데미 밖에서 구경도 못 할 귀한 음식이잖아. 나름대로 화해의 의미에서, 내 여동생이 준비한 걸 선물하는 건데."
내가 크게 뜬 눈으로 루인을 쳐다봤다.
"설마, 일레나가 준비한 음식이 더럽게 느껴진다는 건가?"
"그런 뜻은 아냐! 하지만 이건...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걸 먹는다는 건...!"
"아하! 결국 다 가식이고 거짓이었군. 그렇다면 결렬이다, 잡종. 나도 슬슬 가봐야 해서 말이야."
쯧 소리를 내며 말을 덧붙인다.
"하층민 입맛에도 맞지 않은 도시락을 나한테 바치다니. 오늘 밤에는 키스폰 가문의 장남으로서 '그 계집'을 단단히 '교육'해야겠어."
순간, 루인은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짓밟힌 바나나를 움켜쥐었다.
그가 정말로 음식 쓰레기를 입으로 가져가려고 하는 그때.
뻐억!
나의 사커킥이 루인의 턱을 갈겼다.
그 바람에 그는 그대로 뒤를 구르다가 벽에 부딪쳤다.
콰당탕, 쿵!
"뭐야, 진짜 먹으려고 했어?"
난 신기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하여간 잡종들은 상식을 초월하는 동물이라니까. 이런 녀석들이랑 한 아카데미에 있는 게 수치스럽군."
띠링!
텍스트박스가 떠올랐다.
- 호감 : -1→-3
▶ 루인은 당신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거부합니다!
성공했다!
마침내 주인공이 악역한테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악역 일랜 키스폰으로서, 편집자 천승제로서도 희열이 밀려든다.
"뭐. 화해의 선물을 받아주었으니, 나도 용서해주어야겠지?"
"일랜 키스폰! 대체 너란 놈은...?!"
"참! 자리는 피해드릴게."
난 그를 지나치며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남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뷔페를 즐기라고. 하하하하하!"
이 세계에 빙의하고 나서 깨달은 또 하나의 사실.
역시 난 악역 연기를 하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다.
* * *
한 편, 프리즈너는 난생처음 민트초코를 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으음...!"
그가 보아도 신입 연기는 완벽했다.
그럼에도 일레나 호감도가 되레 올라가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고.
그렇기에 프리즈너는 직후에 찾아온 루인과 일랜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건 또 문제가 없단 말이지."
우려한 게 무색하게도, 루인의 호감도는 완벽하게 마이너스로 치달았다.
프리즈너가 기대한 것처럼 악역의 액션과 그에 따른 결과가 딱 맞아떨어진 것.
역시 일레나 때 문제가 발생한 건 단순한 기우였던 건지도 모른다.
"뭐, 주인공을 성장시키겠다면서 이상한 꼴값만 안 떨면 되는 거지."
일랜이 얘기했던 대로 조금의 변수 정도는 문제가 없다.
최종적으로는 '이 이야기를 파멸시키는 것'에 가까워지기만 하면 상관없으니까.
이러한 맥락에서 일레나와 같은 조연 호감도 따위는, 사실 크리티컬한 문제가 아니었다.
"좋아."
신입도 경각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
이런 시점에서 프리즈너가 채찍을 거듭 사용하는 건 되레 역효과가 날 수 있다.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일랜이 과하게 집착하는 걸 원하지도 않는다.
"괜히 망설이다가 계획이 틀어지는 게 문제지, 방향성은 문제없어 보이니까."
판단을 끝낸 프리즈너가 일랜에게서 시선을 뗐다.
진도가 나간 만큼, 프리즈너 또한 계획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 * *
시선을 돌려버린 탓에.
프리즈너는 이 장면을 미처 보지 못했다.
일랜 키스폰이 떠난 보건실.
그곳에서 루인은 홀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약한 거구나."
짓밟은 일레나를 위해.
루인은 아버지 유품인 청마검까지 바칠 각오였다.
하지만 상대는 일랜 키스폰. 그는 예상을 깨고, 오히려 자기 여동생이 애써 챙겨준 빵을 짓밟기까지 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그럼에도 루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키스폰 가문의 세력이 너무 강한 탓이다.
"그렇다면 난..."
주먹의 떨림이 멈춘다.
몸을 일으키는 루인. 입을 떼는 그의 두 눈에 퍼런 안광이 일었다.
"강해져야 해. 아니, 강해지는 수밖에 없어...!"
원작의 루인에게도 향상심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스위치가 눌리는 건 나중의 일.
비록 천승제, 아니 일랜 키스폰이 노린 건 아니었지만.
"기다려라, 일랜 키스폰. 언젠가는 반드시, 네 과오를 바로 잡겠어!"
일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
주인공이 '각성'의 단초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5화. 교관이 멋대로 기대함
"후아!"
보건실을 나선 직후, 난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여전히 머리 아프네.'
일단 루인을 어떻게든 하긴 했다.
프리즈너가 경고한 호감도 역시, 루인에게선 나타나지 않은 상황.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위기를 모면한 것일 뿐. '주인공 각성 앞당기기' 숙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짝!
스킨로션을 바르듯 내 양 뺨에 손바닥을 붙인다.
'조급해하지 말자. 처음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난 편집자다.
아무리 많은 원고 메일이 밀려온다고 해도.
결국, 차례대로 처리해나가면 끝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내 편집자적인 지론.
'우선은 악역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그걸로 프리즈너한테서 뭐라도 하나 더 뜯어내는 거야.'
그렇게 결의를 다진 난 발걸음을 뗐다.
오후 수업이 예정돼있었던 탓.
"그나저나..."
문득 한 가지가 신경 쓰여 보건실을 힐끔 돌아본다.
"이 보건 담당 교관은 어디 처박혀있길래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지?"
* * *
대륙에 아카데미가 만들어진 근본적인 이유는 인재양성.
과거, 마군(魔軍)과 몬스터의 침략은 비일비재했고.
이에 맞서 인간병기로 불리는 용사들이 맞섰지만.
잦은 전쟁과 전투는 용사를 빠르게 소모시켰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바로 아카데미 설립.
전설의 사용사(四勇士) 후계를 양성하고.
백업을 강화하기 위한 인류의 조처였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대륙에서 최초로 공인 된 아카데미는 네 개에 불과했습니다."
계단식 강의실.
그 단상에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백발 남성이, 강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포지션이 늘어남에 따라, 오늘날에는..."
그의 이름은 키른 하이츠.
보건 담당 교관이자 역사학을 가르치는 사내다.
'보건실에 왜 안 오나 했더니...'
난 다른 학생들에 섞여 앉은 채로, 키른 교관을 바라봤다.
'역사 수업 준비 때문이었나? 하긴, 그런 세세한 내용까지 원작에서도 나오지 않으니까.'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 중심으로 서술된다.
필요에 따라서 장면 전환을 이용해 다른 인물을 포커싱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상황은, 내가 담당했던 원작에서도 언급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래도 이상한걸. 원작에서 주인공 루인은, 보건 담당 교관한테 치료를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역시나 이것도 내 행동 때문에 이야기가 변한 걸까?'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지금쯤 루인은 나, 일랜 키스폰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며 수업을 들으러 갔을 터.
그는 이후부터는 며칠 동안 수업을 들으며, 튜토리얼 같은 과정을 밟게 된다.
작중 세계관을 설명하고 주인공 목표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랄까.
'약 일주일 정도. 녀석이 나랑 굵직하게 마주칠 일은 거의 없어.'
만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그를 벌레 보는 표정으로 쳐다보거나.
부탁이라는 명목으로 쓸데없는 허드렛일을 시키거나.
또는 대놓고 무시하며 비웃는 것이 전부일 테다.
'그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은...'
보건실에서 가져온 메모를 들여다보는 그때.
"저기, 일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웬 여학생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침착하게 메모를 덮으며 차갑게 응수했다.
"무슨 용건이지?"
"세상에, 정말 다쳤구나. 어쩜 좋아."
"...뭐?"
"일랜, 이건 평소 가지고 다니던 연고야. 상처 부위에 발라줄래?"
그들 중 한 명이 작은 주머니를 내게 건넸다.
그걸 받아든 내가 어리둥절해 하는데, 그들이 나를 상대로 멋대로 떠들어댔다.
"저렇게 고운 얼굴을 때리다니. 청마반에 그런 무서운 학생이 있을 줄 몰랐어."
"왜 응수하지 않은 거야? 일랜이라면 대결을 피하지 않았을 텐데!"
"혹시 그 남자애가 다칠까 봐, 참은 거야? 역시, 마음도 넓구나!"
표정이 굳는다.
뭐야, 이 녀석들.
설마 지금 내 앞에서 루인을 비난하면서 나를 옹호하는 건가?
'...잊고 있었다.'
아, 일랜 키스폰....
누가 쓰레기 같은 빌런 캐릭터 아니랄까 봐.
원작의 일랜 키스폰은 하급반의 남학생들을 벌레 취급했던 반면.
여학생들에게는 돈을 뿌려서 곁으로 모이게 만드는 것으로 그려지고는 했다.
거기에 일랜 외모 자체도 나쁘지 않았던 터라, 여학생 사이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었던 편.
지금 내 앞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이 무리도 그중 하나일 테지.
'설명해야 해. 설명해야 한다. 나, 일랜 키스폰이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
어쩌면 이것 또한 내가 악역으로 활약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그렇게 생각한 난 최대한 비열한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입을 뗐다.
"후, 어리석은 놈들. 이번 사건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랜 키스폰!"
보건실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내 귀를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리자, 키른 교관이 나를 매섭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수업에서 잡담은 금지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경고했을 텐데...!"
"키른 교관님!"
엎친 데 덮친 격.
이름도 모를 엑스트라들이 한 명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일랜을 불러서...!"
"저를 벌하세요! 일랜을 위해서라면!"
"일랜은 피해자라고요! 그러니까…"
"어어…."
그만해, 이 미친 X들아.
그렇게 한들 이제 난 돈 뿌릴 생각 없다고!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나를 열심히 비호했고.
다른 학생들마저 수군거리며 나와 키른 교관을 번갈아 보았다.
'좋지 않다. 악역한테 이건 과분한 관심이자 호의야. 그렇다면...'
드르륵!
일부러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거, 듣자 듣자 하니 못 봐주겠군."
난 반만 뜬 눈으로 여학생들을 쳐다봤다.
"뭐? 나를 위해서? 웃기지 마라. 난 일랜 키스폰이야. 이깟 도움 따위 필요 없다고!"
호의로 받은 연고 주머니를 냅다 던졌다. 그러자 하필 그곳에 있던 남학생이 맞고 켁 소리를 냈지만 난 애써 무시했다.
놀란 여학생들에게서 시선을 뗀 후, 키른 교관에게 고개를 돌린다.
"그건 이 시시한 수업도 마찬가지지만."
"키스폰 군! 지금 뭐라고 했나?"
"이젠 귀도 안 들리시나 본데."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제가 그쪽으로 가서 똑똑히 말씀드리죠. 키른 하이츠 교관님."
...죽진 않겠지?
* * *
역사 수업 전.
키른 하이츠는 호출을 받고 총장실에 불려갔다.
"예? 일랜 키스폰이 폭행을 당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원, 참."
머리 벗어진 총장이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걱정입니다, 교관님. 그렇지 않아도 키스폰 가문과 중요한 거래를 해야 하는 시점에, 이런 불미스러운..."
"그래서, 상대 학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크게 다쳤습니까?!"
키른 교관은 안다.
일랜 키스폰이 얼마나 미친놈인가를.
'그놈 눈에 났다가 여기저기 부러져서 보건실을 찾아온 애들도 허다했지.'
키른 교관한테도 일랜은 골칫거리.
수업 시간만 되면 여학생들과 낄낄거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매번 주의를 내렸지만, 일랜 키스폰은 귓등으로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예? 상대 학생은 멀쩡합니다, 교관님."
"멀쩡하다뇨. 제가 아는 키스폰 군은 보복하고도 남을 녀석입니다."
"아하, 키른 교관님은 오전에 자리를 비우셔서 모르셨겠군요? 허허허!"
총장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키스폰 군은 다른 교관님들 부축을 받고 얌전히 보건실로 갔습니다."
"얌전히... 보건실에? 혹시 상대 학생이 대귀족 자제라도 됐던 겁니까?"
"아뇨. 그저 청마반 학생이었을 뿐입니다. 이름이 뭐라더라... 아무튼 키른 교관님도 잘 좀 신경 써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총장실을 나선 키른 교관은 외눈 안경을 고쳐 썼다.
'이상한 일이군. 청마반이라면, 일랜 키스폰이 사람 취급도 안 할 일반인 그룹인데. 혹시 새 학기라서 마음을 고쳐먹은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상대는 그 음흉한 키스폰 가주의 마지막 후손.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는, 철없는 벌거숭이에 불과하다.
'총장님도 너무하시는군. 키스폰 가주 눈치만 보느라, 제대로 된 교육에는 관심도 없으시니.'
키른 교관은 보건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기회에, 일랜 키스폰이 고통을 통해서 반성하기를 바랄 뿐.
"제 잘못이에요! 제가 일랜을 불러서...!"
문제는 키른 교관의 역사 수업 때였다.
평소처럼 그가 일랜의 수업 태도에 지적하는데, 여학생들이 그를 위해 나섰다.
"저를 벌하세요! 일랜을 위해서라면!"
'지긋지긋하군.'
아니나 다를까 여학생들이 그를 비호하는 상황.
키스폰 가문의 금력은 이 작은 학급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거기에 일랜 키스폰은 뒤에서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 비웃고 있기만 할 터.
결국 키른 교관 자신은 또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결국 이만 갈고 말겠지.
"일랜은 피해자라고요! 그러니까…"
피해자.
지금까지 그걸 양산해온 건 일랜 키스폰이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그건 일랜 추종자 무리의 어리석은 변명에 불과했지만.
"웃기지 마라. 난 일랜 키스폰이야. 이깟 도움 따위 필요 없다고!"
일랜의 짜증 섞인 외침에 키른 교관은 귀를 의심했다.
'뭐?'
지금까지 일랜 키스폰은 남들 뒤에 숨는 전략을 곧잘 펼치고는 했다.
그만큼 자신이 가진 걸 백분 활용할 줄 알 만큼 간악했으니까.
평소라면 여학생들 말이 맞다며 나 몰라라 했을 인간이.
'혹시, 자기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건가?'
그럴 리 없다. 그건 지나친 기우다.
지금도 일랜 키스폰이 키른의 수업을 비하하며 도발하고 있지 않은가.
"이젠 귀도 안 들리시나 본데. 제가 그쪽으로 가서 똑똑히 말씀드리죠. 키른 하이츠 교관님."
그래도 뭔가 변하기는 했다.
평소의 일랜 키스폰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나서는 것조차 하지 않았겠지.
실제로 동료를 감싸는 것이었다면, 저렇게 본인을 도발하려고 들 필요도 없었다.
다만, 키른 교관에게 중요한 것은 '일랜 키스폰의 무언가가 변화했다는 사실' 그 자체.
비록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오랫동안 일랜을 봐온 키른 교관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관철해온 교육이 통한 첫 사례인지도 모른다!'
건강한 역사는 병든 현재를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 키른 교관의 교육관.
키른 교관은, 점점 가까워지는 일랜을 홍조 띤 얼굴로 지켜보았다.
6화. 교관이 멋대로 기대함 (2)
저벅!
단상까지 내려온 난 키른 교관을 더 가까이 볼 수 있었다.
하얗게 센 백발을 깔끔하게 외길로 묶어 넘긴 키른 교관.
원작에서 그는 원리원칙주의자이자, 투철한 교육자였다.
'화가 많이 났나 보네.'
냉철함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키른 교관임에도.
그는 살짝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분노한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키스폰 군. 내 수업이 시시하다고 말한 것에 대한 이유를 듣고 싶군."
애들이 주인공을 헐뜯고 악역을 감싸니까요.
내가 여기서 깽판 쳐야 내 악명도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걸 곧이곧대로 이야기해봤자 나한테 별반 도움 되지 않는다.
"기가 차서. 교육자가 제자한테 답을 구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장 내가 할 일은, 키른 교관에게 '참교육'을 당하는 것.
그렇게 해서 일랜 키스폰에게 발생할 수 있는 호의를, 주인공 루인한테 돌리는 것이다.
"키스폰 군. 때로는 내담자가... 아니."
키른 교관이 말했다.
"학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에 큰 힘이 된다네."
"내 생각?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솔직히 말해서 수준이 안 맞아요."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이 헛숨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내 명백한 비아냥에 키른 교관도 눈을 크게 떴다.
"수준이 안 맞다?"
"보세요. 여기 있는 우리가 누구입니까? 나름 도시에서 촉망 받는 인재들이라고요. 그런 앨리트들한테 고리타분한 옛날얘기만 해서 뭐하겠다는 겁니까?"
"내 수업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네는, 해결책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건가?"
"인생은 실전입니다, 실전. 이런 시시한 수업이 아니라."
자, 이쯤이면 됐겠지.
일랜 키스폰이 할 법한 내용으로 상대를 도발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거듭 모욕당한 교관의 호된 가르침이겠지.
"실전이라...."
노력이 통한 것인지, 키른 교관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하얀 장갑을 벗더니 맨손으로 내 턱을 붙잡았다.
"그런 거였군. 그래서 그렇게 행동한 거였나. 이제 이해가 가."
아마 키른 교관은, 내가 어처구니없는 생각으로 헛소리한다는 걸 재확인했을 거다.
내 턱을 붙잡은 건, 남은 손으로 정확히 뺨을 후려갈기기 위해 고정한 것이겠지.
문득, 나는 키른 교관에 대한 정보가 궁금해졌다.
'설정 열람.'
촤락!
[인물 열람]
- 이름 : 키른 하이츠 (C급)
- 소속 : 레드팽 아카데미 (주) 보건 (부) 역사
- 특성 : 신념고착, 힐(Heal), 어쌔신(Assassin)
- 목표 : 건강한 역사는 병든 현재를 치료할 수 있는 법.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나, 키른 하이츠의 평생 숙원이라네.
역시 아카데미 교관.
지금까지 열람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높은 C급이다.
주 업무는 보건, 부 업무는 역사교육이라는 것까지 나와 있다.
'응?'
그때 눈에 띄는 건 키른 교관의 특성.
앞의 두 개는 교육자나 보건 담당이라서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치자.
'왜 키른 교관이 어쌔신의 특성을 갖고 있는 거지?'
이곳 세계관에는 공격 수단이나 방식에 따라 다양한 클래스가 존재한다.
날붙이를 사용하는 소드맨. 원거리 공격에 특화 된 아처.
다양한 마법을 구사하는 위자드. 신의 신성한 권능을 부리는 프리스트.
육체를 극한까지 단련하여 싸우는 파이터. 여러 동물과 몬스터를 조련하는 테이머 등.
'그리고 은신과 위장, 암살에 능한 어쌔신....'
내심 당황했다.
상대는 나보다 두 단계는 높은 경지의 캐릭터.
비록 작중 비중이 그리 높지 않은 조연급이지만.
'아니, 무슨 보건 담당이 어쌔신 특성을 갖고 있냐고?!'
문득, 프리즈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또한 죽을 거다.
'혹시...?'
그는 이 세계의 위험성을 경고했었고.
당시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소설 속 세계에서 얌전히만 지낸다면, 죽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거였나?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게?!'
'내가 모르는 것들이' 나를 죽일 수도 있다.
일개 보건 교사가 사실은 어쌔신. 심지어 나를 싫어하고 있다.
'여느 때 같았다면 키스폰 가문의 힘으로 찍어 누르겠지만. 이 인간은 어쌔신이잖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나를 해칠 수 있다고!'
막연한 생각은 공포의 이빨로 변했고.
가차 없이 내 몸을 물어 뒤흔들기 시작했다.
나를 들여다보는 키른 교관의 눈동자가 섬찟하다.
금방이라도 내 턱을 붙잡고 목뼈를 부러뜨릴 것만 같다.
'지,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하나? 까딱하다간 정말 황천길로...'
내 입술이 달싹이려는 그때.
"커흠흠!"
돌연 키른 교관이 손을 거두고는 헛기침을 했다.
"알겠네.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군. 내 수업방식을 바꿔보도록 하지."
네?
난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저 노인네는 엉뚱한 방향을 노려보며 얼굴을 붉히는 거지?
띠링!
텍스트박스가 떠올랐다.
- 호감 : -1→3
▶ 키른은 당신에 대해 기대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잠시만요.
왜 기대하는 거죠? 왜 때문에?
* * *
키른 교관은 교육 장소를 강의실에서 온실로 옮겼다.
"앞서 수업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아카데미는 용사 후계양성을 위해 세워진 기관입니다."
거대한 유리로 이루어진 돔.
나와 다른 학생들은 약간 후덥지근한 공기를 느끼며, 그의 설명을 들었다.
"그런 만큼, 아카데미는 그 설립목적에 맞게 각기 다른 마혈 위에 지어졌지요."
마혈(魔血).
그건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에 등장하는 특수 필드다.
마혈은 특성을 개화시켜주거나, 관련된 능력의 성장을 돕는 역할을 하는데.
예를 들어 '철마혈'은 소드맨의 특성을, '법마혈'은 위자드의 특성을 키워주는 식.
'때문에 소드맨을 양성하는 기관은 철마혈 위에 세워지고. 위자드를 배출하려는 아카데미는 법마혈 위에 지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
그리고 레드팽 아카데미는....
"철법혈(鐵法血)."
키른이 말했다.
"철마혈과 법마혈의 교차점이자 우리 아카데미가 있는 마혈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마검사'라는 새로운 클래스를 메인으로 삼아 양성하고 배출할 수 있었죠."
물론, 마검사 아카데미라고 해서 마검사를 목표로만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특정 클래스에 유리한 환경인만큼, 마검사에 맞춰진 커리큘럼이 구성된 곳.
그것이 바로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의 설정 중 하나이자 세계관이기도 했다.
"저, 교관님?"
아까 그 이름 모를 엑스트라 여학생 중 하나가 손을 든다.
"왜 굳이 저희가 다 알고 있는 설명을 하는 건가요? 그리고 여기 온 이유는요?"
옳거니!
그래도 아주 골빈 엑스트라는 아니었구나.
마침 나 역시 궁금했지만, 키른 교관이 신경 쓰여 차마 나서지 못했다.
"첫 번째."
키른 교관이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혈이라는 건 사람의 혈관과도 같아서, 불순물이 있으면 기운이 탁해지거나. 또는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이곳에는..."
"꺄악?!"
그때, 방금 질문했던 여학생이 비명을 지른다.
무심코 그쪽을 쳐다보던 나도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저건...?'
온실 안에 가득한 나무들.
그 뒤로 1미터는 됨직한 딱정벌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제는 머리 부분에 해당되는 곳에 사람의 얼굴이 달려있다는 것.
'송장벌레!'
마혈에 찌든 벌레가 사람시체를 먹고 변이한 몬스터다!
소설에서도 기괴하게 느껴졌는데, 실제로 보니 등골이 쭈뼛 섰다.
"보다시피 마혈을 좀 먹는 몬스터들이 출현하고는 합니다. 오후에 제가 방역을 했는데도 아직 몇 놈이 남아있는 모양이군요."
"그, 그럼 혹시 두 번째 이유가...?"
"여러분이 예상하는 것이 맞습니다. 지금부터 우리 아카데미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 이 해충들을 퇴치해주십시오. 한 놈을 해치울 때마다 가점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잇던 키른 교관이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는 왠지 촉촉해진 눈으로 말을 덧붙였다.
"인생은 실전이니까요. 그렇지요, 키스폰 군?"
...X발.
황당해진 난 주변을 돌아봤다.
너희들도 좀 뭐라고 해봐. 이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암만 조연이라고 해도, 나름 머리가 달린 녀석들이니 부당한 미션에는 교관에게 항의할 거다.
"...."
"...."
'?'
왜들 입 꾹 다물고 있는 건데.
그 눈빛은 마치, '네가 한 말이니 네가 책임지세요.'라고 하는 것 같잖아.
아니 그딴 식으로 쳐다볼 거면 차라리 직접 나한테 얘기를...
'아, 나 키스폰이었지.'
놈들은 차마 나한테 대놓고 말하지 못한다.
대신 그저 눈으로 내게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단결하고 있었다.
공포영화에서 볼 법한 분위기에 주춤하며, 혹시 몰라 내 허리춤 칼자루에 손을 가져간다.
'?!'
순간 손에 느껴지는 두툼한 가죽의 감촉.
'가만. 이거 어쩌면...?'
아까 봤던 키른의 정보가 생각났다.
신념고착, 어쌔신, 힐, 기대심 등.
그 키워드들을 조합한 끝에.
퍼억!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남학생을 걷어찬다.
무방비로 서 있던 녀석은 형편없이 나자빠졌고.
주변에 있던 학생들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이, 일랜 키스폰?!"
"비켜, 이 열등생들아."
낮게 깔린 내 목소리가 온실에 퍼졌다.
"지금부터 똑똑히 보여주지. 이 몸과 너희의 까마득한 차이를."
해보자.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제대로 키른 교관의 눈 밖에 나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일레나에 이어, 주인공 루인까지 변수가 있었던 상황.
그런데 키른 교관이라는 변화구까지 날아온다면,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미래를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려면 저 빌어먹을 송장벌레들을 '성공적으로 해치우는 행위' 따위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실패해서도 안 되겠지.'
만약 실망한 키른 교관이 이대로 나를 방치해버린다면?
난 칼 몇 번 휘두르기도 전에 송장벌레한테 살해당하겠지.
'송장벌레를 성공적으로 해치워서도 안 된다. 하지만 실패해서 송장벌레한테 꼴사납게 당해서도 안 돼.'
즉, 내겐 절묘한 실패가 필요하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극악의 난이도 상황.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편집자 천승제였고, 지금은 일랜 키스폰. 그러니 방법은 존재한다.'
때마침 송장벌레들이 우리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털과 가시가 달린 다리는 기민하게 움직였고.
썩은 사람 얼굴은 부릅뜬 눈으로 포효했다.
"께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그훡! 그후흐어억!"
"케힉! 케히힉!"
지금까지 느꼈던 그 어떤 영화 크리처보다도 소름 끼치는 놈들이다.
난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걸 억누르며.
칼을 뽑았다.
스르르르응!
간담 서늘한 쇳소리가 오히려 내 이성을 붙잡는다.
난 아령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하얀 뱀 대가리로 양각이 된 칼자루. 대칭형 칼날은 베고 찌르기에 모두 적합하게 생겼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어.'
이 칼의 이름은 백사검(白蛇劍).
원작에서 일랜 키스폰이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가지게 된 가문의 무기다.
-할아범, 이거 나 주는 거야?!
원작에서 백사검을 받고 들뜬 일랜한테, 키스폰 가주는 말했다.
-좋아할 것 없다, 일랜. 너처럼 뒤떨어진 놈한텐 오크 목의 엘릭서나 마찬가지니까.
-말이 심하잖아, 오크 목의 엘릭서라니! 그게 손자한테 할 소리야?
-백사검이 진가를 발하려면 사용자가 '마력 개방'을 해야 하는 법.
마력 개방.
그건 원작 세계관에서 마검을 사용하는 일종의 오픈 스위치와 같았다.
하지만 일랜은 그 기초적인 것조차 할 수 없는 열등 인자였고.
키스폰 가주는 그런 손자를 하자 있는 가축처럼 대했다.
-일랜. 마력 개방도 못 해서 아티팩트에만 의존하는 네 녀석에게는 아까운 물건이지.
-그,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 할아범이 할 수 있다면 나도 언젠가...
-아서라. 내가 너한테 백사검을 주는 이유는 오직 하나.
뻣뻣하게 굳어있는 일랜.
그런 그에게, 키스폰 가주가 귓가에 속삭인다.
-네 피를 바쳐라, 일랜. 백사한테 양분이라도 되라는 말이다.
-할아범? 대체 그게 무슨 뜻이야? 내 피를 왜...
-자, 이렇게 칼자루를 잡고. 이렇게 기도해라.
"깨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끔찍한 괴성이 내 회상을 깼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보이는 건, 지척까지 다가온 송장벌레.
나는 망설임 없이 백사검 칼날에, 내 손을 베어냈다.
스핏!
컥, 뒤지게 아프네!
하지만 여기서 송장벌레의 이빨에 씹히는 것보단 백 배 낫다.
그리고 저 끔찍한 놈들과 드잡이질하는 것보다는 천 배 낫다!
'일랜은 1권의 최약체 빌런. 마력 개방도 할 수 없는 마검사 지망생이었기에, 늘 그게 콤플렉스였지. 사람들한테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도 그 영향이 컸어.'
키스폰 가주는 그에게 백사검을 주었다.
마력 개방을 하지 못하는 사용자에게는 평범한 칼에 불과했지만.
과거 북부에서 백사를 숭배하던 자들의 기도문을 외면, 피를 먹고 활성화된다.
"나는, 당신의 노예...."
편집하면서 보았던 일랜의 기억, 덕분에 기도문은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난 백사검을 활성하기 위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는 영생을, 쫓는 자..."
백사검이 활성화되면 어떻게 되냐고?
사용자를 싸움에 미친 놈으로 광화(狂化)시킨다.
원작에서도 일랜은 이것 덕분에 악역다운 전투력을 끌어올렸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 그 힘을 컨트롤 하지 못하다가 패배한 결말을 맞았다.
다시 말해, 성공하지도 못했지만, 그렇다고 모양 빠진 패배를 한 것도 아닌 결과.
그게 바로 지금 내가, 이 속 간지러운 주문을 외며 백사검을 활성화시키려는 이유였다.
"불멸하는 백사여, 강철과 독을 두른 왕이시여...!"
원작에서 일랜 키스폰이 백사검을 활성화하는 시점은 1권 후반.
그는 일레나를 인질로 붙잡고, 그녀를 구하러 온 주인공 루인과 싸우며 이렇게 외친다.
"나의 육신에 임하여 나에게 임하소서! 오퍼 블러드(Offer blood)!"
칼자루의 뱀 대가리가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아가리를 벌려 내 손목을 콱 깨무는 순간.
'어?'
내 의식은 그곳에서 뚝 끊겼다.
7화. 교관이 멋대로 기대함 (3)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를 반긴 건, 낯선 천장이었다.
...라는 이세계물의 상투적인 문장을 생각하며, 난 눈을 껌뻑였다.
"키스폰 군, 정신이 드나?"
고개를 돌리자, 키른 교관이 맞은편 병상에 걸터앉아 있는 게 보였다.
'뭐지? 내가 정신을 잃었었나?'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활성화된 백사검이 내 손목을 무는 장면.
그 효과로 광화가 발생한다는 건, 소설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내 의식까지 통째로 날아가 버릴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일이 잘 풀렸다는 방증…'
난 몸을 일으키려다가 눈앞이 핑 도는 걸 느끼고 움찔했다.
"누워있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니까."
"여긴..."
보건실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할 기력도 없었다.
그저 손목과 발목의 통증을 느끼며 인상을 쓴다.
손목이야 백사검한테 물렸다고 쳐도.
발목은 어쩌다 다친 거지?
'폭음하고 다음 날, 필름이 끊긴 기분이네.'
키른 교관은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건실이지. 자네는 내 환자니까 말이야."
노을이 지나 보다.
병상 커튼이 은은한 주황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눈만 데굴데굴 움직이던 난 키른 교관의 말을 듣고 의아해했다.
'내 환자?'
키른 교관은 외눈 안경을 빼더니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솔직히 이것도 흥미롭군. 설마 천하의 일랜 키스폰을 치료하게 될 줄은 몰랐어. 독에 중독시켜 버리는 상상은 해봤지만. 후후후!"
저기요?
그렇게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면서 훈훈한 미소는 왜 띠는 건데.
문득, 키른 교관의 특성 중 하나가 어쌔신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설마 이 인간, 날 해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 가능성은 있다.
강의실에서부터 난 그를 모욕했고.
그런 나를 굳이 보건실로 데려온 거라면, 의도가 있을 것이다.
-너 또한 죽을 거다. 작가, 그자에 의해서.
난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죽을 것이라는 프리즈너의 경고가 다시 떠오른다.
그래서 더 불안해졌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으니.
'여기까지인가? 난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뭔가 방법이...!'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자, 키른 교관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네는 고슴도치 같은 자로군. 겉은 까칠하지만 내면은 따뜻하지. 하마터면 나도 속아 넘어갈 뻔했어."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사실 자네한테 선입견이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군. 사과를 받아주게. 설마, 친구들을 위해서 상처 입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다니."
아니, 그건 그 새끼들이 나를 몰아붙여서....
"얼마 전 청마반 학생과 충돌이 있었다지? 자네가 맞기만 했다는 얘길 들을 때만 해도, 난 자네한테 꿍꿍이가 있었던 건 아닌가 생각했네."
그건 정답. 나는 꿍꿍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걸 키른 교관이 알아차렸다고?
말도 안 되는! 일개 캐릭터 주제에 내 의도를 어떻게...?!
"그래, 내 판단이 틀린 것이었어."
...네?
"자네는 그저 힘을 올바르게 쓰고 싶어졌을 뿐이야. 그래서 나한테 틀에 벗어난 실전 교육을 요청했고, 그곳에서 자네는 증명해 보이려고 했지."
뭐라는 거야, 미친놈아.
"일랜 키스폰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정화되었는지를. 나, 키른 하이츠의 교육이 얼마나 가치 있었는지를 말이야!"
"...."
이제는 다른 의미에서 그가 무서워졌다.
말을 잇는 키른 교관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으니까.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른 교관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훔치며 말했다.
"자네가 내 교육관을 증명했다네. 병든 마음이 치료되자, 내면은 물론 외적 성취까지 이루어냈지!"
"어, 음. 뭐...."
얼떨떨한 기분으로 일단 고개만 끄덕였다.
비로소 난, 지금 죽음의 위기를 모면했다는 걸 알아챘다.
키른 교관은 나를 해치기는커녕, 되려 나를 칭찬하고 있었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일단 여길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야.'
조금만 더 있다가는 이 신념고착증 환자가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모르니까.
자세한 경위를 알아보는 건 이곳을 빠져나간 후다.
그렇게 판단한 내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키스폰 군?!"
흥분한 키른 교관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X됐다.'
난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의 손목을 붙잡아 어깨에서 떼어내려고 했다.
"이봐요, 키른 교관님. 거, 나는...!"
X발, 무슨 보건 담당 교관 힘이 이렇게 센 거지?
손을 떼어내기는커녕, 꿈쩍도 안 한다.
'빌어먹을! 명색이 C급 캐릭터였지...!'
키른 교관은 음울해진 내 표정과, 내 손을 번갈아 보더니.
턱.
남은 손을 내 손 위에 포개며, 다 안다는 미소를 짓는다.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일개 학생인 자네가, 어떻게 데스 웜을 처치할 수 있었겠나? 후후!"
멋대로 생각하지 마! 그리고 이제 와서 인자한 척 내 손 붙잡고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아득바득 용쓰던 난 그대로 멈칫했다.
...그런데, 잠깐만.
내가 뭘 해치웠다고?
* * *
몇 시간 전.
역사학 수강생들을 온실로 데려온 키른 교관은, 학생들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역시.'
방금까지만 해도 일랜을 비호하던 그들.
그들은 송장벌레라는 위협을 마주하고 돌변했다.
키른 교관이 내준 과제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침묵으로 일관을 위험에 떠밀었다.
'역시, 다 허울뿐이었나.'
키른 교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담겼다.
결국, 학생들은 일랜을 진정한 친구나 동료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일랜이 두려워서 눈치를 보았거나, 그의 배경을 보고 아부해왔을 뿐.
'그건 일랜 키스폰도 마찬가지겠지.'
키른 교관은 떠올렸다.
강의실에서 일랜이, 남들 뒤에 숨지 않고 앞으로 나서던 걸.
하지만 그건 그를 위하는 척하는 조연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또 하나의 위선.
'결국, 일랜 키스폰 역시 위선의 가면을 벗고 이곳에서 도망치겠지.'
키른 교관이 이들을 이곳에 데려온 이유 중 하나.
그건 일랜과 그를 위시한 추종자들의 민낯을 보고 싶어서였다.
내심 그의 교육이 통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기대는 접었다.
송장벌레 같은 끔찍한 몬스터를 마주한 상태에서, 일랜 키스폰이 혼자 나서서 싸울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수렴...
"비켜, 이 열등생들아."
순간, 키른 교관은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돌리자, 길을 튼 학생들 사이로 걸어 나오는 일랜이 보인다.
"지금부터 똑똑히 보여주지. 이 몸과 너희의 까마득한 차이를."
키른 교관의 눈이 커졌다.
'이 많은 몬스터들을 보고도 계속 허세를 떨 셈인가? 도대체 왜...'
곳곳에서 터지는 비명. 몰려드는 송장벌레들.
이 모든 무대의 중심에서 일랜은 검을 뽑고 있었다.
스르르르응!
키른 교관은 보았다.
일랜이 다소 기쁜 기색으로 검을 들여다보는걸.
'마치, 오히려 이 상황을 반기는 듯한 표정. 왜지? 어째서냐, 키스폰.'
바로 지척까지 송장벌레가 다가오자, 일랜은 스스로 자기 손바닥을 칼로 벴다.
얕았지만 멀리서도 피가 주륵 흘러나오는 게,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지켜보던 몇몇 학생들도 그걸 발견하고 기겁했다.
"뭐, 뭐야. 왜 자기 손을...?"
"설마! 싸우기 전부터 피를 보고 싶었다는 건가?"
"미친! 암만 일랜 키스폰이라고 해도, 저건 너무 사이코패스 같잖아!"
그중 일부는 키른 교관에게 호소했다.
"교관님! 저희를 여기서 보내주세요. 예?!"
"애초에 우리는 얌전히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싶었다고요!"
"저 녀석 혼자서 몬스터들을 해치울 리도 없습니다. 이건 시간 낭비…"
그 순간.
스커커허어엉!
낯선 파열음이 들려온다.
흠칫하며 고개를 돌리던 학생들은 물론.
아차 하며 뒤늦게 확인하던 키른 교관조차 절로 입이 벌어졌다.
'...뭐?'
시간이 정지한 듯한 풍경.
그곳에는 일랜이 검을 휘두른 동작으로 서 있었다.
문제는 그를 에워싸며 사방에서 덤벼든 송장벌레들.
놈들은 마치 조각 난 퍼즐처럼 분해되어 부유하고 있었다.
촤하아아아아악!
깨끗하게 잘린 단면 사이로 몬스터의 체액이 쏟아져 나온다.
시곗바늘이 다시 움직이면서 놈들 사체가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처퍽!
처퍼덕!
그 광경을 본 키른의 동공이 커졌다.
키른 교관 눈동자에 비친 일랜은 체액을 뒤집어쓴 채, 하얀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키스폰 군?"
일랜이 고개를 든다.
이쪽에서 그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오싹!
그 안에 서린 강렬한 귀기가 키른 교관의 목덜미를 훑었다.
그리고 키른 교관은 깨달았다. 어느새 자기 손이, 품속 대거의 칼자루를 붙잡고 있다는 걸.
'방금 그건 대체...?'
키른 교관이 흠칫 놀라는 그때.
타다다다다다다닥!
남은 송장벌레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움직이면서 나는 소리.
키른 교관은 놈들이 일랜이나 학생들에게 달려드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놈들이, 도망을 친다?'
동족이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걸 봐서였을까.
약삭빠른 송장벌레들은 황급히 대가리를 돌려 수풀로 향하고 있었다.
일랜도 그런 녀석들의 행동을 감지한 듯.
탓!
도주하는 송장벌레를 쫓아 땅을 박찼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놀라 멍하게 서 있던 키른 교관.
그는 일랜의 신형이 수풀 너머로 사라지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위험해! 저 방향은 분명...!'
키른 교관도 재빨리 일랜을 뒤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일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진다.
'송장벌레는 위기를 느끼면 둥지로 향하는 습성이 있지. 그리고 그 둥지에 있는 건, 무려 C급 위험판정을 받은 거대 몬스터...!'
송장벌레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송장벌레들이 둥지로 향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곳에 있는 존재가 키른 교관이 생각하는 '그놈'이라면?
'이러다 일랜 키스폰은 사망한다!'
평소였다면 그의 죽음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치료 불가능한 병원균 하나가 줄어들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키스폰 군은, 도망치거나 숨지 않았어. 오히려 홀로 위험에 맞서 싸웠지…!'
그건 키른 교관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건, 그의 교육방식이 옳았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
마음이 병든 악인을 치료했다는 소중한 결과물이, 지금 막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구구구구구구궁!
갑작스러운 진동에 키른 교관은 멈칫했다.
나뭇가지가 떨어지고 땅의 모래가 흔들린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키른 교관이 이를 악문 채 수풀을 헤치고 나아간다.
푸스스스!
새로운 공터가 코앞에 펼쳐졌다.
때마침 그곳에는 송장벌레를 도륙하는 일랜이 보였다.
츄화악!
스커엉!
검을 휘두를 때마다 송장벌레가 양분된다.
'빨라.'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허공을 가르는 칼날. 게다가 그 검격에는 법칙성이 존재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이 아닌, 명백한 '검술'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타격점과 거리를 최소화한 검격? 일랜 키스폰이 언제 저런 실력을...?!'
도저히 가문만 믿고 나대는 반 푼이라고 볼 수가 없는 솜씨.
잠시였지만, 키른 교관은 일랜이 보여준 수준 높은 검술에 잠시 멍해졌다.
그러던 중 일랜의 지척에 나 있는 땅굴을 발견하고 눈이 커진다.
'둥지?!'
비로소 위기감을 느낀 키른 교관이 도망치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묵직한 굉음에 묻히고 말았다.
꽈과앙!
지반이 부서지고 땅굴 밖으로 높이 솟아오른 물체.
그걸 본 키른 교관은 안색을 굳혔다.
'낭패다!'
그건 송장벌레의 '유충'이었다.
시뻘건 몸통은 7, 8미터는 되어 보였고.
대가리에는 칼을 연상케 하는 송곳니가 원형으로 자라나 있었다.
"데스 웜...!"
데스 웜(Death worm).
그건 송장벌레 유충을 다르게 일컫는 말이다.
마혈에 찌든 벌레는 사람시체를 먹고 송장벌레로 변이한다.
송장벌레도 알을 낳고 유충을 부화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데스 웜.
처음에는 작은 크기였다가, 몬스터든 사람이든 잡아먹으며 무섭게 성장한다.
'이 온실 던전의 보스급 몬스터다. 생도 수준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랬다. 어떤 관점에서 여긴 평범한 온실이 아니다.
그야말로 던전.
마혈이라는 방사능이 모여 온갖 돌연변이 괴물들을 꾀어낸 지옥이다.
"궈워워워워워워워워워!"
"이런…!"
키른 교관이 구하러 가기에는 늦었다.
데스 웜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일랜에게 들이닥치고 있었다.
꽈항!
몸 던져 땅을 데굴데굴 구른 일랜이 고개를 돌린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가 있던 자리는 박살이 나 있었다.
"프허억!"
전투의 여파 때문이었을까.
별안간, 일랜은 시뻘건 핏물을 토해냈다.
"키스폰 군?!"
키른 교관이 그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송장벌레들이 앞길을 막는 바람에, 품속 대거를 꺼내야 했다.
'한시가 급한데...!'
꾸역꾸역 몰려드는 송장벌레들.
키른 교관은 최대한 빨리 녀석들을 처치하면서도, 눈으로는 일랜을 좇았다.
데스 웜의 공격을 피할 때 발목을 다친 것일까. 일랜은 절뚝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도망치게, 키스폰 군! 어서!"
경고가 무색하게도, 키른 교관을 등진 일랜은 어느 지점에서 똑바로 섰다.
그사이 데스 웜 땅을 뚫고 사라진 상황.
하지만 키른 교관은 직감했다.
'늦었다. 이미 놈은 포지셔닝의 사전 단계까지…!'
포지셔닝(Positioning).
그건 데스 웜의 기술 중 하나다. 사냥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공격속도와 파괴력을 높이기 위한 준비 동작.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크흐으..."
일랜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상태에서 검을 고쳐 세웠다.
그걸 본 키른 교관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무모해! 상대는 송장벌레 따위가 아니라...!"
"그으으으으으으으으!"
흡사 짐승과도 같은 그로울링.
동시에 일랜의 검에서 붉은 입자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흙먼지라고 생각했지만, 점차 강해지는 빛에 키른 교관은 경악했다.
"오, 오러?!"
오러.
소드맨 클래스 가운데 고도로 숙련된 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아카데미 학생들 중에서도 최소 소드 익스퍼트에 도달한 이들만 발현할 수 있다.
큐화하앙!
붉은 오러는 검을 온전히 휘감았다.
동시에 돌풍이 불면서 일랜의 머리칼이 마구 날리기 시작한다.
'말도 안 되는! 저 정도 검기라면 소드 익스퍼트에서도 중급, 아니 상급에 해당하는 힘인데...!'
이미 키른 교관은 몰려든 송장벌레를 모두 격퇴한 상황.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홀린 듯 보고만 있을 뿐이다.
꽈과앙!
그때, 데스 웜이 땅을 뚫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눈앞의 먹잇감을 발견하고 뱀처럼 대가리를 들이박는다.
"궈워워워워워워워워워워워워!"
송곳니로 빽빽한 동굴이 일랜을 덮치려는 순간.
퐈홧!
빨간 십자가가 점멸했다.
동시에 데스 웜의 대가리부터 몸통까지 한 차례 경련이 일더니.
푸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미친 듯한 피 분수가 데스 웜의 표피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검상이 벌어지면서 아가리가 크게 쪼개지고 몸통이 갈라진다.
데스 웜은 바나나 껍질처럼 분해되어 일랜을 스치고 땅에 처박혔다.
쿠구구구궁!
후두두두두!
혈우(血雨)가 내린다.
일랜은 폭풍을 만난 장미처럼 위태롭게 휘청였다.
그 바람에 쥐고 있던 검이 아무렇게나 나가떨어졌고.
철퍼덕!
그가 갓 마련한 천연소파에 얼굴을 처박았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키른 교관도 그대로 무릎을 털썩 꿇는다.
아직도 일랜의 뒷모습이 선명하다.
'키스폰 군이 쥐고 있었던 건 역시...'
마검(魔劍) 중 하나이자, 키스폰 가문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백사검.
사용자의 피를 대가로, 일시적으로 강력한 파괴력을 담보해주는 물건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송장벌레와 맞붙기 전에 피를 흘렸던 모습이. 그 위력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키른 교관은 몰랐지만, 사실 일랜은 키른 교관이 백사검에 대해 알아차리기를 원했다.
그래야 송장벌레들을 해치우더라도 그게 일랜의 능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니까.
실제로 키른 교관은 일랜의 의도대로 사용한 검이 백사검임을 확인했고.
일랜의 힘이 아닌 백사검의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일랜조차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는데.
"찾았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외눈 안경을 빼낸 키른 교관.
그는 기적을 목도한 성직자처럼, 감격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토록 내가 갈구했던, 숙원을 풀어줄 진정한 열쇠...! 그게 설마, 이렇게 가까이 숨어있었을 줄이야."
어째서 일랜 키스톤은 그 상황에서 앞으로 나섰는가.
피라는 대가까지 지불하고서 백사검을 일깨워 송장벌레. 그리고 데스 웜까지 부숴버렸는가.
-고귀한 피는 가장 먼저 흘러야만 한다.
역사학을 맡으며, 언제나 키론이 강조했던 말.
고귀한 자들은 존중받은 만큼 그만한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맥락에서 일랜은 말투가 험할지언정, 행동만큼은 그 고언을 따라 움직인 셈.
'말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는 법.'
비로소 키른 교관은 일랜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굳이 교관을 도발하여 실전을 요청하고.
송장벌레에 겁을 집어먹은 생도들을 뒤로 빼내고.
마검에 대가까지 바쳐서 앞으로 나와, '행동'으로 일랜의 생각을 증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쉽겠는가.
사람은 한순간에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여전히 거칠고 안하무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키론은 알아차렸다.
일랜이 쓴 가면은 위선이 아니라.
악해질 수 있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한 붕대였다는 걸.
'그런 줄도 모르고 난... 그래, 자네의 붕대는 닳았겠군.'
양팔로 일랜을 안아 든 키른 교관.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걱정 말게. 지금부터 자네는 내 환자니까. 약속하지. 나, 키른 하이츠의 이름을 걸고 자네를 '치료'해주겠네."
건강한 역사는 병든 현재를 치료한다.
키른 교관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첫 순간이었다.
물론 그것은, 일랜 키스폰이 원하는 것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는 생각이었다.
8화. 뜻밖의 빌런 짓
며칠 후.
"그 얘기 들었어?"
"넌 맨날 대명사로 묻더라. 무슨 얘기인지부터 말해, 그 얘기충 새끼야!"
레드팽 아카데미는 최근에 벌어진 '온실 사건'에 대해 떠들썩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내 친구한테 들었는데. 아, 글쎄. 얼마 전 역사 수업 들은 녀석들이, 끔찍한 일을 겪었다나봐."
"아, 그거 나도 들었어! 키른, 그 노망난 노인네가 송장벌레 퇴치 실습을 시켰다며?"
"소, 송장벌레라고? 그 징그러운 인면충(人面蟲) 몬스터들을 왜 학생들한테...?!"
"웬 미친놈이 키른 교관한테 대들었대. 수업이 쓰레기라고."
그런 적 없다.
그랬다가는 사망한다.
키른이 수틀리면, 나 하나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닐 테니.
"세상에! 암만 수업이 재미없어도 그렇지, 어떤 겁대가리 상실한 녀석이...?"
"누구긴 누구겠어. 개강 첫날부터 요란하게 등장한 일랜 키스폰이지."
"더 소름 돋는 건 뭔 줄 알아? 일랜, 그 녀석. 다 계획한 거였어."
"계획하다니? 뭘 얻을 게 있어서 그런 걸 계획한다는 거야?!"
"아는 사람은 알잖아. 그놈 취미가 사람 괴롭히기라는 거."
내 취미는 스케줄 짜기, 집안 정리하기, 요리하기다.
모든 걸 내 통제 하에 두고 계량화할 수 있거든.
물론, 인생은 생각대로 흘러가기 어려운 법.
"그 녀석은, 일부러 송장벌레를 불러들여서 애들이 무서워하는 걸 즐긴 거야."
"미, 미친! 그러다가 자기까지 다치거나 잡아먹힐 수 있는데도?! 대체 왜 그런 짓을...!"
"그야 재미있어서겠지. 심지어 자해까지 하면서 자기 피를 마시고는, 이렇게 얘기했대. '지금부터 똑똑히 보여주지. 이 몸과 너희의 새카만 창자를.'"
"창자를 왜?!"
내 말이?!
그리고 '이 몸과 너희의 까마득한 차이'겠지! 문맥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냐고.
게다가 애초에 난 창자고 뭐고. 그런 건 보고 싶지도, 보여주고 싶지도 않거든!
그렇잖아도 오물 냄새 때문에 미칠 지경인 상황.
며칠 전부터 신경성 위염 증상을 앓고 있던 난, 오늘도 수강 일정이 끝나는 대로 변소를 찾았다.
하지만 웬 녀석들이 화장실에 들어와 10여 분째 떠드는 중.
심지어 하필이면 내가 빙의한 일랜 키스폰이 토픽이라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차, 창자 얘기하지 마, 인마. 그렇잖아도 나, 배 아파죽겠는데!"
응? 아까부터 한 명이 왜 말을 더듬나 싶었더니.
나 말고도 속 불편한 녀석이 또 있었나 보다.
"새끼, 아까 매점 오지게 들락거리더라니. 들어가서 싸면 되잖아."
"그,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다른 데는, 읏! 다 꽉 차서, 남은 곳이 저기 한 칸밖에 없다고! 그런데 아까부터 사람이, 큿...?!"
밖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신음을 듣고, 난 표정을 굳혔다.
'X발.'
여긴 푸세식 화장실이다.
잘 쳐줘도 전근대를 모티브로 한 세계관인 만큼, 이곳 변소는 칸마다 게이지가 쌓일 경우 자동영업 정지 되는 특성을 지녔다.
다시 말해, 밖에서 본능과 투쟁 중인 저 녀석의 목적지는 내가 숨어있는 이 변소칸이라는 것.
쿵쿵!
투사가 변소 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이, 이 새끼야! 거기에 애인이라도 숨겨놨냐? 그만 쳐 나와! 그렇지 않으면...?!"
쾅!
냅다 칸막이 문을 발로 차자, 밖에서 쿠당! 하고 누가 자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화장실에 모여있던 녀석들이 파랗게 질렸다.
"너, 넌...?!"
"일랜 키스폰! 왜 하필 거기서 나오는 거지?!"
"설마! 일부러 우리 얘길 엿들으려고! 이것도 처음부터 다 계획했던 건가?!"
미친놈아, 넌 X싸는 것도 다 계획표 짜냐?!
내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응?'
바로 내 앞에, 방금 문에 부딪혀 엉덩방아를 찧은 녀석이 시야에 들어온다.
툭.
놈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물론, 다른 녀석들도 의아해하며 녀석을 내려다봤다.
그것도 잠시.
"썅! 이건 또 무슨 냄새야?!"
"설마 이 새끼! 지금 이 상태로 싼 거야?"
싼 자는 말이 없다.
그저 바지에서만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뿐.
친구들은 그래도 영 의리가 없지 않았는지, 녀석의 어깨를 붙잡거나 뺨을 때렸다.
"정신 차려, 제이슨! 제이슨?!"
"틀렸어. 이미 눈은 완전히 죽어 있잖아."
"바지를 입은 채 땅바닥과 완전히 밀착해서 지리다니. 이렇게 잔인할 수가..."
"여, 역시나! 이것까지 전부 계산하고 있었던 건가, 일랜 키스폰은...?!"
아니, 그러니까 아니라고.
하지만 여기서 해명해봐야 이빨도 안 먹힐 테지.
이미 놈들은 보고야 말았다. 일랜 키스폰의 뒷담화를 하면, 어떠한 말로를 맞는지.
지금도 녀석들은 하나 같이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거나, 축 늘어진 친구를 붙잡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이미 엎질러진, 아니 싸질러진 건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난 소리 나게 코웃음을 치며 그들을 지나쳤다.
그리고 화장실을 완전히 나서기 전.
"네놈들,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돌아보지도 않고 그들에게 경고성 멘트를 날렸다.
"그렇지 않으면, 거기 있는 놈과 똑같은 꼴을 당할 거니까."
제이슨이라고 했었나?
미안하다, 제이슨.
난 마음속 깊이 그를 애도하며, 자리를 떠났다.
* * *
"복통에 설사, 거기다 현기증이라..."
아카데미 보건실.
그곳에서 내 이야기를 듣던 키른 교관은 예상했다는 듯이 말했다.
"일랜 키스폰 군. 그건 쉽게 말해서 빈혈일세."
"...빈혈, 이라고요? 신경성 위궤양이 아니라?"
"뭐, 자네처럼 있는 집에서 호의호식하는 가문의 자제에게는, 낯설게 들리겠지. 쉽게 말해서 피가 좀 빠졌다고 보면 되네."
아니, 그건 나도 아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빈혈이라니. 지난번 전투의 여파 때문인가? 싸우다가 다쳐서?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키른 교관은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단순한 출혈이라면 그런 증상이 나타날 수 없지."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은 누구나 마나를 지니고 있네. 마법사나 마검사와 같은 이들은, 그걸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마력 개방'이라는 기술을 사용하지."
"그래서요?"
"문제는 자네가 장비한 그 마검일세. 내가 알기로 '백사검'은, 마력 개방을 할 필요도 없이 사용자의 마나를 강제로 뽑아낸다네. 그리고 마나는, 체내의 피를 매개로 하기 마련이지."
"백사검을 사용하는 바람에, 빈혈 증세가 찾아왔다는 말입니까?"
"후! 그렇게 단단한 이야기라면 좋겠군. 일단 차부터 들게."
키른 교관은 약재를 달인 듯한 차를 내게 건넸다.
혹시나 그 안에 독이 든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설정 열람.'
촤락!
- 호감 : 3→5
▶ 키른은 당신이 선해지고 싶어 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알긴 뭘 알아, 이 독이 든 성배 같은 양반아...'
며칠 전.
키른 교관은 내가 백사검을 이용해서 데스 웜을 처치했다는 걸 눈치챘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신념고착'이라는 특성을 지녔고.
때문에 나를, 그의 교육철학을 증명할 황금알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가 나에 대한 걸 함구하고 있다는 것.'
환자의 비밀은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 사명이라나, 뭐라나.
어쨌든 키른 교관은 진심으로 나를 진료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진짜 호재는 따로 있었는데.
'프리즈너가 안 나타났어.'
따지면 키른 교관은 일레나와 비슷한 케이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 양반은 지금 내게 호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프리즈너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
'몰라 X발. 한눈팔거나, 간섭 안 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겠지.'
당장은 그걸 고려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은 현재에 집중할 때.
내가 키른 교관을 빤히 쳐다보자, 그는 헛기침하며 눈을 피했다.
"커흠! 다, 단순한 빈혈이 아닐세. 자네는 죽을 수도 있었어."
하마터면 마시던 찻물을 뿜을 뻔했다.
죽을 수도 있었다고?
아니, 그리고 왜 내 눈을 피하는 건데?!
난 황당함 반 놀람 반의 심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했잖나. 마나는 피를 매개로 한다고. 그리고 자넨, 마력 개방도 없이 백사검을 사용했지. 그 행위는 마치, 태어나지 않은 새끼 노새를 어미에게서 강제로 꺼내는 것과 같다네."
처음에는 사실 바로 와 닿지 않은 비유였지만, 키른 교관은 차근차근 내게 설명했다.
쉽게 말해 새끼 노새는 마나의 힘. 어미는 사용자다.
마력 개방이 출산이라면, 백사검 사용은 강제추출.
"강압적인 추출은 사용자와 마나, 모두를 죽음으로 끌고 가지. 그 과정에서 자네가 의식을 잃고 폭주했던 것도 그 때문일세."
처음에는 빈혈이라길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키른 교관의 설명을 들을수록 난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해졌다.
'죽을 수도 있었다니?'
물론, 백사검으로 폭주해서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건 내 계획이었다.
부작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쳤다고 칼날에 내 손을 그었을까.
다만 텍스트로 읽는 것과 현실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는 점이 있었을 뿐.
'남용했다가는 큰일 나겠어. 역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순 없다는 건가....'
쉽게 말해 만병통치약 같은 게 아니란 거지.
내가 담당했던 작가는 나름, 설정을 따지는 사람이었으니까.
오퍼 블러드를 계속 쓸 수 있었다면, 지금의 이런 상황도 오지 않았을 터.
'의식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것도 좋은 건 아냐.'
힐끔힐끔 나를 곁눈질하는 키른 교관이 눈에 띈다.
가뜩이나 상황이 이상해지는 덕분에, 원치도 않은 그의 호감도가 계속 쌓이는 상황.
따라서 '정말' 어쩔 수 없을 때가 아니라면, 오퍼 블러드를 사용해선 안 된다.
정말로 내 계획이 완전히 박살 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신중해지자, 일랜 키스폰. 가능하다면 최대한, 오퍼 블러드의 사용을 억제한 상태에서 나아가야 해.'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키른 교관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미리 준비했다는 듯 적당한 크기의 상자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받게나. 키스폰 군."
"...뭡니까?"
"며칠 전, 자네는 역사 수업을 듣던 학생들을 구했지. 거기에는 백사반, 청마반 할 것 없이 다양한 구성원들이 포함되어있었고."
무게는 그렇게 나가지 않는다.
난 뭔가 또 튀어나오지 않을까, 최대한 경계하면서 상자를 열었다.
"그렇게 나서서 생각을 행동에 옮긴 건 대단한 용기였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건, 오만하지 않으려는 의지. 남들 몰래 선행을 하려고 한 것에, 난 대단히 감동했네. 이건, 내가 자네에게 주는 일종의 작은 상장일세."
달카닥!
뚜껑을 열자 모습을 드러낸 건 불그죽죽한 토시였다.
전반적으로 주름이 자글자글해서 살짝 거부감이 들 법도 하지만.
손목에 달린 갈고리 세 개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원작 속 아이템 하나를 떠올렸다.
"섀도우 암(Shadow Arm)?"
"호오, 이 물건에 대해 알고 있었나?"
알다마다.
이건 어쌔신 클래스가 사용하는 아이템 중 하나.
땅에 주먹을 꽂으면 갈고리가 타깃의 밑에서 튀어나와 공격하는 암기였다.
하지만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만큼, 몇 번 사용하다 보면 망가지는 소모성 아이템이기도 하다.
'그래! 그나마 이게 있다면, 내 계획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내가 눈을 반짝이자, 키른 교관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키스폰 가문의 가주도 암기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다고 하니, 자네가 알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닌가."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섀도우 암의 주재료는 데스 웜일세. 자네가 며칠 전에 해치운 C급 몬스터. 전리품은 당연히 공을 세운 자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순간, 난 처음으로 키른 교관이 젊고 이쁜 백발의 엘프처럼 보였다.
그게 불과 0.5초에 해당하는 시간이기는 했지만.
'이 세계에 와서 나한테 도움이 된 사람은, 이 자가 처음이다.'
프리즈너는 제외한다.
그는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자였으니까.
게다가 작가를 찾아내려는 내 목적도 의도와 점점 멀어지는 상황.
특히 백사검으로 큰 위기를 겪은 나로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키른 교관은 어쌔신 특성 보유자. 내가 은밀히 행동할 수 있는 기술들을 여러 개 알고 있겠지.'
오해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나를 신뢰하고 있고. 교관이니 가르치는 것에 인색하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이 비뚤어진 신념고착 환자의 신뢰를 쌓는 게 낫지 않나?'
내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이 교관의 적의를 사는 걸 목적으로 두었다.
그리고 현재,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
이곳에서 나는, '나 혼자'라는 것에 대한 한계를 처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흐음."
난 반만 뜬 눈으로 키른 교관을 쳐다봤다.
'어차피 이 양반이 나한테 호의를 가지고 있어도, 크게 문제없을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터를 돌려본다.
메인 플롯에서 키른 교관이 내게 호의를 가졌을 때를 상정하여.
온갖 경우의 수가 떠오르긴 하지만, 다행히 문제는 없다.
모두 내가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고, 키른 교관 또한 주인공과 큰 접점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세계관의 커다란 줄기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는 뜻.
문제가 있었다면 프리즈너가 어떻게든 나한테 간섭하려 했겠지.
'거기다 키른. 이 인간의 호의를 사면, 이득이 크긴 해.'
그의 호감도를 높여, 그가 가진 기술의 정수를 차례대로 습득한다면?
그래. 내가 이 세계에서 생존하여 탈출할 확률은 상대적으로 높아질 게 분명하다.
그 생각에 미친 천천히 토시를 장착했다. 팔꿈치까지 착 감기는 게 생각보다 착용감이 나쁘지 않다.
"키른 교관님."
"응? 키스폰 군, 자네 지금 뭘..."
의아해하는 키른 교관 앞에서, 난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땅을 짚으며 그를 회유할 수 있는 회심의 대사를 날렸다.
"지금부터 당신을, 진정한 저의 스승으로..."
그때.
벌컥!
보건실 문이 열리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랜 오라버니! 여기 계시나요?!"
이 목소린, 일레나?
순간 머릿속에 몇 가지 상상이 떠오른다.
키른에게 넙죽 머리를 조아리는 아카데미 망나니, 일랜 키스폰.
그리고 그 광경을 발견한 여동생이자 메인 캐릭터, 일레나 키스폰.
-어머! 역시 오라버니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오라버니!
그리고 대충 호감도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오를 것이다.
'아, 안 돼!'
당황한 내가 주먹을 꽉 움켜쥔 순간.
오른팔의 토시에 달린 갈고리가 순식간에 땅을 뚫고 들어가더니.
뻐억!
미소 짓고 있는 키른 교관의 턱을 그대로 가격했다. 그 바람에 솟구친 키른 교관의 머리는 낡은 천장을 부순 채 그대로 박혀버렸다.
쾅!
후두두둑!
잔재가 떨어지면서 보건실 안에 기묘한 정적이 일었다.
내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손을 펴자.
츠르르륵!
섀도우 암은 순식간에 수축해서 손목에 달라붙었다. 그 여파로 천장에 박힌 키른 교관의 다리가 더 발랄하게 흔들거렸다.
"...키른, 교관님이었던 거죠?"
일레나는 보건실에 새로 만들어진 인간 장식을 보며 겨우 입을 뗐다.
"오라버니, 어째서 교관님을...?"
너 때문이잖아!
...라고 차마 말할 수 없다.
일레나는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의 메인 캐릭터 중 하나.
그런 그녀에게 나랑 키른 교관의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가는, 또 평판이 올라갈지도 몰랐다.
'메인 캐릭터의 호감을 사는 건, 조연과 전혀 다른 문제야. 그것만큼은 피해야 해!'
난 아무렇지 않은 척, 내 옷을 툭툭 털며 말했다.
"흐, 흥!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교관을 혼내줬을 뿐이다."
일레나는 모르겠지. 내가 속으로 울부짖고 있는 걸.
눈물이 줄줄 흐를 것 같았지만, 초인적인 인내로 버텨냈다.
'에라이, X발. 내 인생이 그러면 그렇지.'
어떻게 그래도 뭔가 좀 되나 싶었더니만.
아무래도 키른 교관의 호의를 사는 것은 그른 모양이다.
일레나는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나와 키른 교관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하, 하지만. 저분은..."
"일전에 나를 부려먹은 교관 나부랭이지. 그러는 넌 여기 어쩐 일이야?"
고라니도 아니고 왜 또 내 앞을 끼어드는 거냐고!
마음 같아서는 섀도우 암으로 일레나까지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내게 말했다.
"아, 할아버지 전언이 있으셔서요."
"...할아버지?"
일레나가 말하는 할아버지가 누구일까, 잠시 생각하던 난.
'설마...?'
아무것도 모르는 손주 일랜한테 위험한 백사검을 주고.
주인공 루인의 친부모를 살해한, 키스폰 가문의 300년 묵은 괴물.
"키스폰 가주...!"
내가 눈을 홉뜨자, 일레나는 조금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네!"
"키스폰 가주가, 아니 그 영감이 뭐라고 했는데?"
"실은, 오늘 오라버니랑 같이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어요."
내 눈치를 보며,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수업 마치는 즉시."
9화. 숨겨왔던 나의
레드팽 아카데미는 키스폰 영지 동쪽 외곽에 세워졌다.
마치 국회의사당을 연상케 하는 건물.
일명 레드돔을 빠져나오면, 비로소 키스폰 영지의 거리가 펼쳐지는 것이다.
'문제는 레드돔을 둘러싼 아카데미 구역이 생각보다 넓다는 거지.'
굳이 따지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대학교 캠퍼스 일대 정도?
그렇기에 나와 일레나는 아카데미 전용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덜커덩, 덜컹!
승차감은 최악이다.
앉은 자리가 매번 엉덩이를 때렸다.
심지어 한 번씩은 천장에 정수리를 부딪쳐, 고통과 분노가 한꺼번에 머리를 지배했다.
"오라버니?"
내가 한껏 인상을 찡그리자, 일레나는 곁에서 눈치를 봤다.
"괜찮으세요?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데, 혹시 불편하신 거라도..."
쿠르릉!
바깥에서 천둥이 울려 퍼지자 그녀가 말을 멈췄다.
차창 밖에서는 한참 비가 쏟아지는 중이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 빌어먹을 세계에 빙의한 지도 벌써 며칠째.
난 이미 키스폰 영주의 저택과 아카데미를 몇 번 오갔다.
처음 마차를 타고 받은 충격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
그렇기에 길만 외워 두었다가, 다른 아카데미 생도들처럼 도보로 귀가했다.
'평소라면 당연히 걸어서 갔겠지만...'
하필 오늘은 일레나와 함께다.
그녀가 아는 일랜 키스폰은 그야말로 특권의식에 가득 찬 놈팡이.
따라서, 비용이 적잖게 드는 아카데미 전용 마차를 굳이 마다하고 걸을 이유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난 일랜 키스폰이기 때문에 걷는 것 따위는 보여서 안 된다.
"몰라서 물어?"
가뜩이나 짜증이 나 있던 난, 반쯤 진심으로 그녀를 쏘아붙였다.
"어떻게 너 같은 녀석이 나와 나란히 앉아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냐. 어처구니가 없군."
일랜 키스폰은 의붓동생에게 불친절을 넘어서, 학대에 가까운 언행을 보인다.
그렇기에 일부러 거친 말을 내뱉은 거지만.
'...조금 심했나?'
사실 마차를 타고 가서 편한 것도 있잖아.
마침 지금은 비도 오니까, 옷이 젖을 염려도 없다.
'그래도 이렇게 해두면 쓸데없이 나한테 말을 걸진 않겠지.'
메인 캐릭터가 어떤 행동을 하는 순간, 모든 걸 계산하고 움직여야 한다.
따라서 지금은 차라리 이런 식으로 입을 봉쇄해두는 편이, 내 입장에서 편하다.
"아!"
일레나는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황급히 마부석과 연결된 창문에 대고 소리쳤다.
"세워주세요!"
"...?"
뭐지.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을 텐데?
이히히히힝!
바깥에서 말 우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속도를 줄여나간다.
난 이게 뭐하는 건가 싶어서 눈만 굴리는데, 일레나가 마차 문손잡이를 잡았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어? 아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제가 어리석었어요."
문을 여는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지금까지 마차를 함께 타 본 게 너무 오래돼서... 잠시 잊고 있었어요. 저따위가 오라버니랑 같은 마차에 타다니."
"내가 물었잖아.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레드팽 아카데미를 막 빠져나온 지금, 이곳은 풀과 흙밖에 없는 황무지다.
그렇다고 택시처럼 지나가는 마차를 탈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불가.
전용마차는 안전의 이유로 아카데미 내에서만 탑승할 수 있다.
'교내 마차 승차장도, 아카데미 입구에서 한참 들어가야 도달할 수 있는데.'
지금부터 걸어서 돌아간다고 해도 최소 삼사십 여분은 걸릴 터.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내가 알고 있는 설정이 맞다면, 전용 마차는 한 가문에 하나씩만 배정된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게 바로 키스폰 가문의 자제에게 배정된 마차.
그녀가 다시 마차 승차장에 간다고 한들, 탈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즉, 일레나는 걸어갈 생각인 것이다.
"저기, 죄송하지만 할아버님한텐 조금 늦을 수 있다고 전해주시겠어요? 그럼...."
그녀가 막 바깥으로 몸을 기울이는 순간.
꽈과앙!
포성에 가까운 천둥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바깥에서는 놀란 말들을 달래는 마부의 외침이 들려온다.
그야말로 백색에 가까운 빛이 이 세상을 하얗게 채우는 사이.
"...오라버니?"
일레나의 눈이 커진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내가 붙잡고 있는 본인의 손목.
"어째서...?"
키스폰 가문의 구성원들 대부분은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중 정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주요 악역이자 키스폰 가주.
그런 그가 우리를 함께 호출했다면 이유가 있을 터.
그런데 여기서 나, 또는 일레나가 늦는다면?
'또 변수가 생기겠지. 그건 사양이다.'
문제는 지금 이 상황.
나는, 일레나가 비가 쏟아지는 마차 밖으로 나가려는 걸 붙잡았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내 두뇌는 빠르게 회전했다.
"너, 죽고 싶구나?"
난 미간을 찡그린 채 그녀를 노려봤다.
"내 허락도 없이, 감히 내 마차에서 내리겠다고?"
"네? 아뇨, 저, 전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오라버니가 불쾌하실까 봐..."
"불쾌? 하하하! 너 같은 게 함부로 내 기분을 이해하겠다고? 웃기지 마라, 일레나!"
잡고 있던 손목을 홱 당기자, 일레나는 헛숨을 삼키며 마차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 바람에 살짝 젖어있던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이 빗방울을 튕긴다.
"아...?"
"지금부터 똑똑히 잘 들어."
난, 등받이에 바짝 등을 붙이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경고했다.
"두 번 다시는 네 멋대로 판단하지 마라. 내 허락 없이는 숨도 쉬지 마. 알겠어?"
일레나의 가슴이 들썩인다.
설마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숨을 참는 건 아닐까 싶어 걱정했는데, 이건 다행이다.
"...네, 오라버니."
그녀의 들릴락 말락 한 대답을 듣고 난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완벽했다. 약간의 변수 때문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거야말로 일랜 키스폰의 완벽 재현!
프리즈너도 이건 인정해주겠지.
"어이! 출발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긴장이 풀린 난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가볍게 쳤다.
마부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띠링!
[최근 '설장 열람'한 캐릭터 중 업데이트된 항목이 있습니다.]
[갱신된 내용을 열람하려면 '확인'을 말해주세요.]
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일레나를 쳐다봤다.
아마 그녀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겠지. 그렇다면 나에 대한 호감도 떨어졌을 게 뻔해.'
그렇게 확신하며 업데이트 된 호감도를 열람한다.
촤락!
[인물 열람]
- 이름 : 일레나 키스폰 (D급)
- 호감 : 3→5
▶ 일레나는 당신에게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꽈르르릉!
우렛소리가 내 심장을 강타한다.
일레나가 보이는, 반투명한 텍스트박스.
그 안을 채운 글귀가 내 심장을 강타했다.
* * *
프리즈너는 알람을 맞춰놓고 있었다.
일랜 키스폰이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는 특정 행동들을 했을 때.
알람이 발동해서 프리즈너가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그런데.
"아니, 이게 무슨...?!"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거라고 했던 변화가 있었다.
"일레나 호감도가 왜 이렇게 올라갔어?!"
다급해진 프리즈너가 화면을 띄운다.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포착된 일랜의 행적들이, 동영상으로 빠르게 재생되었다.
화면 움직임에 맞춰 거칠게 흔들리던 프리즈너의 눈동자가 일그러진다.
"...이 새끼."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
이 자식은 역시 뭔가 문제가 있었다.
프리즈너는 이를 악물고 버튼을 눌렀다.
* * *
「내가 경고했을 텐데 신입.」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마차 창문에 비친 내 모습.
그걸 빌려 프리즈너가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위기로 보건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고 온 게 분명하다.
'아니, 이건 진짜 억울해!'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내 옆엔 일레나가 앉아있었고.
덕분에 최대한 필사적으로 눈짓, 손짓으로 내 감정을 전달해본다.
「네가 원해서 한 게 아니다?」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프리즈너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그렇다면 키른 교관에 대해선 뭐라고 설명할 거냐.」
순간, 천장에 박힌 채 다리를 흔들어대는 인간 장식이 떠오른다.
나한테 호감을 품은 키른 교관에게서 여러 이득과 가능성을 발견한 건 사실.
빗물 때문인지 식은땀 때문인지 등이 축축하게 젖었지만, 난 애써 가슴을 폈다. 그리고 프리즈너를 똑바로 쳐다본다.
'어디 추궁할 테면 해보라지. 난 너와의 계약을 어기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나는 결코 악역에서 벗어난 구석이 없었다.
중요한 건 내 의도 따위가 아니라, 보이는 액션이다.
실제로 그 변태 교관은 천장에 처박아두었으니, 문제도 없다.
「쯧.」
프리즈너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린다.
자기 딴에는 추궁을 하려고 했지만, 마뜩잖은 모양.
한고비를 넘어서나 싶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그때.
스윽!
놈이 내 쪽으로 몸을 크게 내밀었다.
「아직도 헷갈리는 것 같으니까, 명확하게 말해주지.」
"...?"
「악역의 역할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그냥 미움받는 거로 끝이라 생각해?」
악역의 역할?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떠오르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일레나 문제도 있었고, 내가 생각하는 대답이 프리즈너가 원하는 것과 다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악역의 역할은, 주인공을 죽이는 거다.」
동공이 확장되는 기분이다.
프리즈너의 말은 내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주인공을, 죽여?'
당장이라도 육성으로 그에게 되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곁의 일레나가 이상할 거야.
「이걸로 설명은 충분히 됐겠지만...」
프리즈너의 두 눈이 나를 향한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다. 무슨 뜻인지 너도 알고 있겠지?」
뱀처럼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이 내 시야를 뒤덮는다.
마치 바닥없는 절벽에 훅 떨어지는 기분.
내 손발에 땀이 차고 입안이 말랐다.
「뭐, 선을 넘지 않은 건 나도 인정해.」
다시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가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뜨자, 그의 모습이 점차 옅어지는 게 보였다.
「거래는 깨지지 않았다. 부디 우리 관계가 파탄 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일랜 키스폰.」
쏴아아아아!
다시 거세지는 빗소리.
차창에는 프리즈너 대신, 우중충한 바깥 풍경만 여실히 보였다.
"푸흡…!"
난 필사적으로 입을 가린 채, 터져 나오려는 숨을 막았다.
옆을 곁눈질하자, 아무것도 모른 채 앉아있는 일레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주인공을 죽이는, 도구?'
판타지소설에서 주인공이 사망하는 것은 금기다.
부활이나 회귀 능력이 설정으로 부여되어 있지 않은 이상.
주인공이 죽으면 독자들이 이탈하는 게 불 보듯 뻔한 일이니까.
'미친놈.... 이게 네 녀석이 복수하는 방식이었나?'
물론, 프리즈너와 나는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었다.
프리즈너는 작가에게 복수를, 그리고 나는 작가와의 재회를.
그 수단으로 내가 악역을 연기한다는 것을, 공통분모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나는 주인공을 진짜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주인공을 돋보이고 싶게 만들 뿐이지, 주인공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다고!'
내게 악역이란,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드는 조명.
프리즈너가 정의하는 악역은, 주인공을 지우는 명암이었다.
'덕분에 놈의 속내는 알았지만...'
프리즈너 말대로 일레나의 호감도를 올린다면, 그녀는 살인 도구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호감도가 올라가지 않도록 통제하자니, 자칫 프리즈너와 나의 거래는 결렬될 수도 있는 상황.
'아직은 프리즈너의 조력이 필요해. 하지만 어떻게 해야...?'
생각한다.
판단을 위해서는 그간의 경험을 복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장 최근의 사례를 돌이켜보자.'
루인은 과대망상이라는 특성을 지녔다.
놈이 지 혼자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바람에, 위기가 왔었다.
'그걸 놓쳤다면, 빌런한테 빌빌대기만 하는 주인공이 태어났을 거야.'
변수로 작용한 케이스는 키른 교관도 마찬가지.
신념 고착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특성 때문에, 나를 골로 보낼 뻔했다.
'지금은 쓸 만한 카드 중 하나가 되었지. 막판에 섀도우 암으로 날려 보내긴 했지만.'
...키른 교관은 천천히 생각하자.
중요한 건, 지금까지 난 두 번의 위기 모두를 기회로 뒤집어 승리했다는 사실.
그게 가능했던 건, 주인공 루인과 엑스트라 키른 교관의 정보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
생각을 갈무리하는 그때.
띠링!
[일레나의 호감도 5포인트 달성하여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당근을 주겠다는 건지 누가 봐도 리워드일 게 분명할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무런 미동 없이 해맑게 떠 있는 상태창이,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느낌이라 내 복장을 뒤집어놓았다.
'...이미 준 보상을 체크하는 건 문제 없겠지?'
호감도를 쌓으려고 하는 짓이 문제인 거잖아.
이미 있는 것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없지 않겠는가.
이것은 내 편집자 레이더에도 걸리지 않았다.
결코, 내가 일레나에 대한 정보가 절실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일레나의 비공개 정보 중 하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공개 정보 1. 특성]
- 특성 : 인내심, 가사노동, 의기소침, ■■
[비공개 정보 2. 목표]
- 목표 :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 싶어요.
'특성과 목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건가?'
'특성'은 이를테면 인물의 주요 설정을 의미한다.
'목표'는 말 그대로, 해당 캐릭터가 이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이유 그 자체.
'일레나의 목표는, 사실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아니, 정확히는 그럴 필요가 없었지.'
애초에 녀석은 주인공이 클리어해야 할 퀘스트 중 하나이자 인질에 불과했으니까.
빌런의 가문에 입양되고 도구로 사용되며 평생 학대에 시달려온 히로인.
그 끝에 주인공이 수세에 몰리고서야 흑화하는 캐릭터다.
그녀의 역할은 주인공 루인의 트로피에 불과.
따라서 목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어쩌면 일레나에게는, 내가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중요한 목표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호감도까지 올려야 확인할 수 있는 비공개 정보라는 사실이, 설득을 더 했다.
'특성이라면 뻔해. 향후 흑화하는 캐릭터인 만큼, 흑화라고 뜨겠지.'
거기까지 판단하고 '목표'를 선택하려던 난 멈칫했다.
만약, 일레나의 가려진 '특성'이 흑화가 아니라면?
루인이나 키른 때와 같은 정신질환이라면?
꿀꺽!
이건 나에게 중요한 선택이다.
한 번의 결정이, 리스크를 파훼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고.
또는 헛발질로 인해 밟은 지뢰가 되어 나를 공중 분해시킬지도 모른다.
'특성...'
과대망상의 루인.
-이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주신 청마검이야. 받아줘!
신념고착의 키른 교관.
-자네는 내 환자니까 말이야.
루인에게는 증오해야 할 일랜이 되었고.
키른 교관에게는 치료받아야 할 일랜이 되었다.
이 모든 건, 그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내가 대처한 결과.
'만약, 내가 일레나의 숨겨져 있던 특성을 확인한다면...'
난 그녀에게 어떤 일랜이 될까?
[일레나의 비공개 정보 중 하나를 선택하였습니다!]
[비공개 정보, '특성'을 열람합니다.]
촤락!
마침내 드러난 일레나의 특성.
그걸 보는 내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10화. 뱀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