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20-30

20화. 빌런의 두 번째 부하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 원작 설정에 따른 유펠리아 건국 381년.

레드팽 아카데미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 정도가 지난 4월 9일이다.

남들은 휴교령이랍시고 낮잠을 처자고 휴식을 만끽할 오늘이지만.

"어라? 너, 혹시 설마 여기 오려고 등교한 거야?"

백금발의 아르바이트생은, 레드팽 공방에 찾아온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듣자 하니 너 통학한다면서. 칼은 내일 찾으러 와도 될 텐데."

"시끄럽고. 맡겨놨던 내 백사검이나 가져와."

"어머, 무서워라! 알았으니 잠깐 기다려."

훤칠한 키의 공방 조수는 한쪽 눈을 찡긋 해보이더니, 내 앞에서 사라졌다.

그제서야 난 참고 있던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정리해보자.

오늘은 4월 9일. 그로부터 삼 일째인 4월 12일에는 던전 견학이 예정되어있다.

원작에서 주인공 루인 역시 던전 견학을 가게 되고.

일레나의 심부름을 돕게 된다.

그 심부름이라 하면.

-일레나. 너는 거기서 귀신거미의 알을 20개만 채집해오면 된다.

바로 가주, 하벨 키스폰의 지시였다.

일레나는 기뻤을 것이다. 그것만 수행하면, 끔찍한 뱀굴에 안 들어가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사실 키스폰 가주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일랜. 네가 할 일은, 이걸로 일레나를 던전에 가두는 거다.

던전 출입구를 봉쇄할 수 있는 도어맨 마법 스크롤로 그녀를 가두고.

일레나가 귀신거미에게 독액을 주입 당하길 바란 것이다.

덤으로 루인한테 설욕하라는 살벌한 조언도 함께.

'오히려 난, 덕분에 아주 완벽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지.'

원작에서는 주인공 루인이 일레나랑 던전에 갇힌 채 고통만 받을 뿐, 독자들이 원하는 사이다가 없었다.

따라서 난 이 기회에, 각성시킨 루인으로 일레나를 구하는 방향으로 수정할 계획이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작가님은 더더욱 날 신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아스달 군은 끔찍한 악몽에 빠져 있는 거야.

루인은 슬립워킹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상 상태에 걸려버렸고.

일레나를 구하기는커녕, 무슨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처럼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위기에 빠졌다.

루인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일랜 키스폰 군. 자네가 구해야 할 약재는, 바로 '귀신거미의 알'일세.

던전 견학이 시작되기 전에, 내가 미리 던전에 가서 귀신거미 알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키른 교관이 약을 제조해서 루인을 깨우고 던전 견학에 참여시킬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나 혼자 던전에 가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겠냐는 거지.

'졸지에 악역인 내가, 주인공 때문에 목숨까지 걸게 될 줄은...'

난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키른 교관이 준 나이트 윙을 만지작거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가 내게 준 아이템이 유용하다는 것.

어둠 속에 몸을 숨길 수 있다면, 희망이 없지도 않다.

하지만 과연 이것만으로 괜찮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백금발에 대조되는 초콜릿 피부. 그 사이로 자리 잡은 황갈색 눈동자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

너무 놀라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내 코앞으로 공방 조수가 불쑥 얼굴을 들이민 탓에, 난 그대로 굳어버렸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덧니를 드러내며 웃더니.

"많이 기다렸지?"

슬쩍 뒤로 몸을 빼내며 말했다.

"선배들이 다들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마무리 작업에 시간이 좀 걸렸거든."

"선배? 그러고 보니..."

일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를 기억한다.

철법혈이 흐르는 이곳은 제련 보너스가 제공되는 특수 필드.

처음 올 때만 해도 이곳에는 푸른 불 일족의 드워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조용하다 싶었더니, 지금은 안 보이네? 다들 어디 간 거지?'

내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공방 조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말도 마. 어떤 모난 돌에 대가리 찍힌 놈이, 강의동 복도를 죄다 박살 냈다 나봐."

그 모난 돌에 대가리 찍힌 놈이 나다.

사실 두 명 더 있긴 하지만.

"그런데 소문을 듣자 하니, 어떤 은발 머리 남학생이 불러온 '악마'가 습격한 거라던데... 그게 사실이야? '일랜 키스폰'."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공방 조수가 내게 백사검을 건넨다.

난 눈에 이채를 띠며 그녀를 쳐다봤다.

'뭐야, 이 녀석. 처음부터 다 알고 날 떠보는 거였나?'

물론 일부는 내가 지어낸 소문이긴 하지만.

말을 질질 끄는 모양새가 어쩐지 께름칙하다.

탁!

백사검을 낚아챈 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러고 보니 내 소개가 늦었네."

공방 조수가 땀에 젖은 자신의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긴다.

불빛을 받은 황갈색 눈동자는 야생의 포식자 것처럼 사납게 빛났다.

"내 이름은 디바. 레드팽 아카데미 흑호반 소속이자, 챈달 가문의 독녀야."

"디바, 챈달...?"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인데.

잠시 이름을 곱씹던 난 눈을 크게 떴다.

'신체검사 기록명단!'

보건실의 기록명단에서 그 이름을 본 적이 있다.

[피검사자]

- 이름 : 디바 챈달

- 소속 : 흑호반 (2년 차)

- 근육 : 매우 좋음

- 시력 : 매우 좋음

- 회복 : 빠른 편...

그때는 원작에서 '덩치 똘마니'로 언급되는 일랜의 수하를 찾으려고 한 것이지만.

하나 같이 죄다 쓸모없는 정보였기에, 사실상 소득 없이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뭐야. 그 표정을 보니, 역시 날 알고 있었던 눈치네?"

일랜의 수하 후보였던 디바 챈달이, 바로 내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모자라 멋대로 자기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맞아. 챈달은 오래전, 왕가의 눈에 벗어나는 바람에 낙인찍힌 몰락 가문이지. 하지만 당시 키스폰 가주님이 나서준 바람에, 멸족은 면했고. 보다시피 지금은 이 공방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중이야. 그래도 명색이 귀족인데, 웃기지?"

이건 내가 모르는 이야기다.

아니, 정확히는 원작에서 언급되지 않은 내용.

하지만 그녀가 소설의 '덩치 똘마니'일 거라는 믿음이 서기 시작했다.

'몰락 가문의 귀족. 이거야말로 악역의 수하가 되기 위한 완벽한 서사잖아...!'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린다.

디바는 그런 나를 보고 멈칫하더니,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만약 네가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 그러면 내가 도움을 줄 테니."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던 것도 잠시.

호박이 덩굴째, 아니 흑호랑이가 통째로 들어왔다.

그것도 내가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든든한 조력자가!

'가만! 일이 이렇게 순순히 풀린다고?'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는 번번이 나한테 뒤통수를 갈겼다.

특히 돼먹지도 않은 캐릭터들의 특성들로 골머리를 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난.

턱!

그녀의 턱을 붙잡고 내 쪽으로 돌렸다.

동시에.

'인물 열람!'

촤락!

[설정 열람 : 인물]

- 이름 : 디바 챈달 (C급)

- 소속 : 레드팽 아카데미 흑호반

- 특성 : 강화, 수리, 제련, 흑호쌍부, 철혈정치

- 목표 : 철과 피로써 다시 한번 가문의 영광을!

- 호감 : 1

▶ 디바는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정상적일 수가?!'

완벽하다.

다른 녀석들은 하나 같이 정신질환과 관련된 특성인 것에 비하면.

심지어 키른 교관과 동일한 강함 등급은 C급인 데다, 목표도 악역 수하로서 납득할 내용이었다.

'그런데 원하는 게 있다고? 그게 뭘까.'

난 호감도에 적힌 설명을 유심히 살폈다.

"다시 한번, 가문의 영광을...?"

이것이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무심코 중얼거리던 난 순간 디바와 눈이 마주쳤다.

'아차! 너무 몰입한 나머지, 너무 시간을 끌었잖아?!'

그녀의 턱까지 붙잡고 나한테 시선을 고정시킨 이상, 뭐라도 둘러대야 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탁!

그녀가 먼저 내 손을 뿌리친다.

뭐라고 설명할 겨를도 없이.

"미, 미안!"

이미 디바는 황급히 이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나도 보수 공사에 가봐야 해서!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고, 일랜 키스폰!"

* * *

'바로 같이! 던전에 가자고 했어야 했는데!'

밀려드는 졸음을 참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난 공방에서 디바를 바로 회유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괜찮아. 4월 12일까지는 아직 삼 일이나 남았잖아. 오늘은 체력이 부치기도 했고.'

루인과 일레나를 위한 던전 견학의 무대.

그 완벽한 피날레를 위해, 난 미리 던전에 다녀올 작정이었다.

물론 키른 교관한테서 나이트 윙이라는 은신용 망토 아이템을 얻기는 했지만.

그것 하나만 믿고 나 혼자 던전에 다녀오기에는, 그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디바라는 새로운 부하가 있다면...?'

조금이나마 안전하게 귀신거미 알을 채집하고.

그걸로 약을 제조한 다음 루인을 깨운다.

그런 뒤 루인이 일레나를 구하면 완벽!

문제는 디바의 호감도 설명이다.

▶ 디바는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보입니다.

'역시나, 대가 없이 도울 생각은 없었어. 조건을 내걸 생각이었겠지. 그게 뭘까?'

제이슨처럼 라인 한번 잘 타서 효도 노릇 하려는 걸까?

아냐. 몰락 가문이라고 했으니 역시 가문의 부흥...

사하아!

문득,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들자 키스폰 저택의 칠 벗겨진 담벼락이 펼쳐져 있었다.

날씨 영향인지 자욱한 안개가 깔려있었고. 그 위로 떨어진 노을빛이 핏빛을 띤다.

'아,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응?'

핏빛 안개 가운데 누군가 서 있었다.

은발이 허리까지 내려온 그는 뒷짐을 진 채,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일랜. 할애비를 꽤 오래 기다리게 하는구나."

순간, 졸음이 싹 달아났다.

저택 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하벨 키스폰.

원작의 메인 빌런 중 한 명이자, 300년 묵은 키스폰 가문의 괴물이다.

"하, 할아범?! 아니 여긴 어쩐 일로 나와 있어...?"

오늘따라 마주치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데!

마음 같아서는 아늑한 침대가 있는 내 방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스르륵!

눈꺼풀이 올라가며 드러난 하벨의 백사안.

까만 안구 위로 자리 잡은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옭아맸다.

"못하는 말이 없구나. 손자가 싸놓은 똥을 수습하고 온 할애비한테 말이다."

이곳에 당도하면서 위화감을 느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하벨의 눈을 마주하자마자 전신이 딱딱하게 굳는 기분.

'죽는다!'

그 단어 하나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이미 이 세계는 하벨 키스폰이라는 대악마 손아귀에 놓인 듯했다.

철크럭!

내 손은 이미 백사검의 칼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몸이 떨려 견딜 수가 없다.

'오퍼 블러드 주문이 뭐더라?!'

절대 사용하지 말자고 생각했던 금기의 폭주.

하지만 공포에 질린 나머지, 그 간단한 주문조차 잊어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수습... 이라고...?"

태연한 척 대화를 이어나는 것뿐이다.

하벨은 그런 나를 보더니, 돌연 발걸음을 뗐다.

"총장실의 호출이 있었다. 간밤에 습격이 있었고, 그 사안으로 '비상대책심의위원회'를 연다고 말이지."

우웅!

그가 움직이자, 세계가 일그러지는 듯하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하벨의 은발이 살아있는 것처럼 넘실거렸다.

진짜 악귀를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점차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난 등골이 오싹해졌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 이 몸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느냐? 혈룡창을 이용해 레드 워리어를 깨우고, 그걸로 레드팽을 들쑤시다니."

바로 지척에 이른 하벨.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내 목을 붙잡았다.

턱!

그건 인간의 체온이 아니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기가 내 숨을 죈다.

살아야 한다는 의지 때문일까. 접촉에 따른 반사행동이었을까.

키릭!

백사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걸 본 하벨의 눈에 새빨간 귀기(鬼氣)가 일렁인다.

"오크 목의 엘릭서라고 생각했건만. 일랜, 너란 놈은..."

그래, 인물 열람!

그거라면 하벨의 약점을 캐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바로 행동에 옮겼다.

'인물 열람!'

사상 최초로, 하벨 키스폰의 정보가 눈앞에 펼쳐졌다.

촤락!

21화. 새끼 뱀과 흑사자 새끼

난 지금까지 인물 열람으로 수많은 위기를 타개했다.

루인이 엇나가려는 이유들을 알 수 있었고.

터질 뻔한 일레나의 흑화를 방지했으며.

제이슨이 2차 악역이 된 걸 파악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살아남을 유일한 기회!'

독니를 드러낸 하벨 키스폰.

그를 마주한 난 뱀 앞의 생쥐 꼴이다.

따라서 실낱같은 희망으로 인물 열람을 사용했다.

'인물 열람!'

그렇게 펼쳐진 하벨의 정보는.

촤락!

[설정 열람 : 인물]

- 이름 : 하벨 키스폰 (S급)

- 직책 : 키스폰 영주

- 특성 : 흉계, 죽음의 사역, 블러드 필드, 백사검술

- 목표 : 영생불멸

무려 S급.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었지만.

막상 현실을 마주하니 더 절망적인 수치였다.

'심지어 특성들도 전형적인 빌런의 것들. 목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영원히 살겠다는 목표는 많은 빌런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설정이니까.

틈은커녕, 오히려 악역다운 정보에 무기력감이 밀려든다.

'내가 이 세계를 너무 만만하게 본 건가...?'

이건 소설이 아닌 진짜 현실이자 실존 세계.

따라서 지금 마주한 하벨 키스폰 역시, 실재하는 악(惡) 그 자체였다.

그런 만큼, 제아무리 손자래도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숨통을 끊겠지.

그 생각에 미치자, 백사검을 쥐고 있던 내 손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럼 결국 난 여기서...

"적어도 뱀 꼬리 흉내는 낼 줄 아는 모양이구나."

놀랍게도 그때, 하벨이 손을 거뒀다.

띠링!

- 호감 : 0→3

▶ 하벨은 당신에게서 키스폰의 면모를 발견했습니다!

"케앨록, 켈록?!"

바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막혀있던 숨통이 갑자기 트여서이기도 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하벨의 호감도에 사레가 들렸다.

'뭐야, 이건? 호감도가 올라갔다고?!'

내가 정신을 수습하는 사이, 하벨은 더욱 놀라운 말을 내던졌다.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설마 타인을 이용해서 눈엣가시를 제거하려 들 줄이야. 물론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젠 제법 머리 굴릴 줄도 알지 않느냐, 일랜."

눈엣가시라면, 루인을 말하는 건가?

물론 난 그 녀석을 해치울 생각 따위 눈곱만치도 없었지만.

이미 하벨은 내 의도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만악의 근원다운 사고방식으로.

"키른 교관을 미리 회유한 건 칭찬해주마. 그가 '비대위'에서도 너를 옹호했고, 덕분에 내 입김으로 사태를 마무리 짓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뭐야.

키른 교관이 날 옹호했다고?

그리고 저 300년 묵은 괴물은, 그걸 내 계략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찌 됐든 살았다!'

간신히 죽을 고비에서 벗어난 상황.

난 숨을 고른 후에 용기를 내서 소리쳤다.

"미, 미쳤어? 갑자기 사람 목을 조르고 난리야!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잖아?!"

"어리석은 나의 손자여. 눈에 보이는 것만 진짜 위협이 아니거늘..."

영문 모를 말을 한 하벨이 천천히 눈을 감는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아라."

백사안이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된 난, 의아해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붉은빛 안개로 자욱한 키스폰 저택의 앞.

하지만 그 안에 시커먼 게 있었다.

그걸 자세히 관찰하던 난...

"?!"

놀랍게도 그곳에는 사람 같은 게 쓰러져 있었다.

아니, 사람이 맞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너를 해하러 온 놈들이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날 해하다니...?!"

"그 난리를 피우고도 아무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더냐."

희한한 일이다.

미스트라도 맞은 것처럼, 얼굴이 축축한 느낌.

기분이 이상해서 뺨을 훔치자, 손등에서 벌건 게 묻어나왔다.

'피...?!'

자, 잠깐만! 이거 그냥 안개가 아니었던 거야?!

혈무(血霧). 이 안개는 노을빛을 받은 것이 아니라, 원래 핏빛이었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줄행랑을 칠 뻔했지만.

"일랜. 레드팽의 자제들 뒤에는, 온갖 가문과 세력이 버티고 있다."

하벨의 음성이 내 정신을 붙잡았다.

"그중에는 키스폰을 적대하는 이들도 있지. 정의랍시고 설치는 놈들이 태반이지만, 대놓고 키스폰을 공격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새끼 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혈무는 출렁이고 있었다. 흘렀다.

착각일까. 그 흐름은 하벨에게 향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 새끼 뱀이, 악마를 소환한 악이라고 소문이 났다. 사냥꾼들에게는 그만큼 뱀 사냥에 좋은 명분이자 그만한 핑곗거리도 없지."

기억났다.

하벨의 특성 중 하나인 블러드 필드(Blood field).

적의 시야를 가리고 적을 융해시키며 마력까지 흡수하는 기술이다.

'그럼 이 녀석들이, 키스폰 가문을 적대하는 놈들이라고?'

마침내 그림이 그려졌다.

레드팽 아카데미의 후원자이자 키스폰 영지의 하벨.

키스폰의 추락만 엿보고 있던 자들은 마침 소식을 접한다.

'일랜 키스폰이 악마를 소환해서 아카데미를 공격했다!'

아카데미에는 그들과 연결되어있거나, 또는 자식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좋은 명분은 없다. 키스폰 저택 주변에서 새끼를 사냥한다.

새끼 없는 키스폰 가문은 후계마저 사라지므로, 그들에게는 기회였을 것이다.

추릅!

하벨의 혀가 날름거렸을 때쯤, 핏빛 안개는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그 아래서 서서히 녹고 있었을 시체 역시 보이지 않았다.

만약 하벨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건 나였겠지.

'지워져?'

그 순간, 디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키스폰 가주님이 나서준 바람에, 멸족은 면했고. 보다시피 지금은 이 공방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중이야. 그래도 명색이 귀족인데, 웃기지?"

"당분간 몸을 낮추는 게 좋을 거다."

때마침 하벨은 저택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니 던전 견학이 있을 때까지, 등교는 삼가거라. 아카데미에는 내가 말해둘 테니."

"...잠깐만, 할아범!"

"또 토를 달 셈이냐. 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다."

"그게 아냐. 묻고 싶은 게 있어. 챈달 가문에 대해서 알아?"

하벨이 멈칫했다.

어쩌면 그의 대답이, 디바 챈달을 회유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챈달... 한 때 그곳 가주가, 왕국의 재상으로 있었지."

"듣자 하니 왕가에 낙인이 찍혔다던데. 그 이유는?"

"정치는 단순하다. 쓸모가 다하면 버려지기 마련."

"하나만 더. 할아범은 왜 버려진 챈달을 도왔지?"

그제서야 하벨이 슬쩍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만악의 근원이 그리는 미소를.

"쓸모가 있었으니까."

* * *

-왕국에는 철이 필요했단다.

어릴 때부터 디바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정치와 경제를 가르쳤다.

-마군과의 전쟁으로 그 수요는 말할 것도 없었지. 그 공급을 늘리려면?

-자원을 확보해야 해요. 광물이 풍부한 겨울산맥처럼요!

-그래, 하지만 북부를 오가기에는 제한이 있었지.

그녀 아버지, 레오 챈달은 흑사자 길드를 이끄는 무역업자였다.

또한 드워프 일족을 대상으로 '철의 거래'를 성사시킨 유능한 귀족이었고.

덕분에 왕국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재상으로 둘 만큼 정치 분야에서도 인정받았다.

-길드장님! 이래도 보고만 계실 겁니까?!

-왕이 아니라 순 날강도가 따로 없지 않습니까!

-광산의 절반을 나라에 헐값으로 매각하라뇨?! 이건 누가 봐도 불공정한 처사입니다!

정치는 변덕 가득한 노인의 심술과 같다.

왕국은 광산을 독점하는 챈달 가문을 경계했고.

급기야 말도 안 되는 독소협약으로 흑사자 길드의 반발을 샀다.

-내가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왕가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네.

레오 챈달이 결단을 내렸다.

결단은 흑사자 길드를 움직였고.

그의 군대가 일어나자 왕국은 그들을 진압하려 했다.

-아버지! 안 가면 안 돼요?! 진압군의 수장이 스카일 장군이라면서요!

스카일 윈드라이더.

왕국에서도 손꼽는 소드 마스터이자, 청마검술의 고수로 알려진 장군이다.

-걱정 마렴. 그는 뜻이 곧은 인물이라 대화가 통할 거다. 설령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흑사자 길드는 패배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하지만...!

-걱정 말래도. 설령 무슨 일이 있더라도, 키스폰 가주가 우릴 지지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안 그런가, 하벨?

레오 곁에는 은발의 남성이 서 있었다.

하벨 키스폰. 북부에서 온 이민자들의 수장이다.

소문에 의하면 영생을 추구하는 음침한 자라고 알려져 있다.

-아아, 당신이 디바 챈달이군요.

하지만 어린 디바 눈에는 천사처럼 보였다.

왕가와 챈달 가문을 중재하겠다고 나선 하벨은, 레오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저, 정말인가요? 귀하께서 우리 아버지를 지켜주실 건가요?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제가 있는 이상, 챈달 가문은 무사할 테니.

하벨의 활약인 것일까.

놀랍게도 스카일이 이끄는 군대는 회군하였고.

덕분에 레오를 위시한 흑사자 길드의 군대도 무사 복귀하는 듯했다.

-...아버지? 아버지! 눈 좀 떠봐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눈 뜨지 못했다.

-키스폰 가주님! 아버지가 왜 이런 거죠? 당신이 지켜준다며!

-죄송합니다, 아가씨. 설마 왕가에서 계략을 꾸몄을 줄은.

하벨 말에 따르면, 왕가에서 은밀히 함정을 판 것이라고 했다.

물러나는 척, 뒤에서 술수를 부려 레오를 암살하고.

흑사자 길드에 내분을 일으켰다고 한다.

-키스폰 가주님.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죠? 아버지도 안 계시고, 흑사자 길드도 해산되었는데...

심지어 왕국은 챈달에 가주가 없다는 이유로, 가문의 광산권을 강제위임 받은 상황.

때문에 챈달 가문은 빠르게 몰락하기 시작했고, 어린 디바는 홀로 남았다.

-오명은 벗었으나 세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벨이 조언했다.

몸을 낮추고 발톱을 숨기라고.

마침 레오가 그녀에게 어느 아카데미 공방을 위임했으니, 거기서 지내라고.

-아버지는요?!

어린 디바는 그 차디찬 조언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버지의 복수는요?! 적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나 혼자 한가롭게 철이나 두드리라고요? 키스폰 가주는 나를 도와 적을 무찔러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가씨. 이런 말씀은 송구하나, 실은 저도 수시로 위협을 받고 있답니다.

-예? 키스폰 가주도 위협을? 설마, 아버지를 죽인 그놈들이...! 그렇다면 더욱 맞서 싸워야죠!

-이 몸이야 살 만큼 살아서 미련이 없지만, 제게는 아가씨 나이 정도 되는 피붙이가 있지요. 섣불리 나섰다가는, 오히려 제 손자한테 변이 생길까 두렵군요....

-키스폰 가주님의... 손자...?

-예. 그러니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약조해주시겠습니까?

디바는 보았다.

속내를 알 수 없던 하벨이 처음으로 미소 짓는 걸.

-그때는 제 손자를 지켜주겠다고요. 그렇다면 자연히 아가씨도 복수의 꿈을 이루실 겁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고.

디바는 레드팽 아카데미 공방에서 철을 두들겼다.

마구 날뛰는 분노를 망치로 두들기고 식히길 반복하던 어느 날.

뚜걱!

구둣발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남성.

디바는 흠칫했다. 은발을 보고 처음엔 하벨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일개 가문의 가주가 제복을 입고 공방을 찾아올 이유가 없다.

'설마. 이 녀석이 키스폰 가주님이 말했던...?!'

하벨의 손자, 일랜 키스폰.

디바와 같은 2학년이긴 했지만, 직접 대면한 건 처음이었다.

-반짝거리게 해놔. 칼날에 실오라기 하나조차 비칠 수 있는 만큼.

22화. 미끼 VS 몸빵

과연, 하벨과는 달랐다.

일랜의 와인색 눈동자는 오만함으로 번들거렸고.

치켜든 턱은 상대가 누구라도 해도 자기 아래라고 여기는 듯했다.

스르르응!

심지어 일랜이 건넨 건 백사검.

틀림없었다. 그건 키스폰 가문의 상징인 동시에.

-겨울산맥에서나 겨우 채굴된다는 북부의 강철...

아버지가 이야기했던 전설의 광물이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벨이 말했던 기회가 찾아온 게 아닐까?

하지만 디바는 미심쩍었다. 일랜이 아카데미 망나니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과연, 저런 녀석 따위로 적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설령 적들을 찾는다고 해도, 일랜이 방해만 안 되면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 소문을 듣기 전까지는.

-일랜 키스폰이 악마를 불러내 아카데미를 공격했다!

소문으로만 치부하기에는 강의동 건물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조사를 다녀온 공방의 드워프들까지 혀를 내둘렀다.

-다들 그 균열 봤지? 일개 인간이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어.

-빌어먹을. 아직도 철 냄새랑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것 같군!

-어이, 디바! 우리는 도구 챙겨서 지원 나갈 테니, 너는 여기 지키라고!

철과 피.

그 단어를 듣고 디바의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다시 나타났다.

백사검을 받으러 왔다는 일랜.

'혹시 날 모르는 것 아냐?'

디바가 자신을 소개하자, 일랜은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거다.

하긴, 하벨이 그에게 챈달 가문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뭐야. 그 표정을 보니, 역시 날 알고 있었던 눈치네?

어쩐지 부아가 난다.

그들은 적들로부터 노려지는 상황.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일랜은 태평할 수 있는 걸까?

씨익.

순간, 디바는 흠칫했다.

오히려 일랜은 웃고 있었다.

신세 푸념하는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어쩌면 이곳에 철부지는 일랜이 아니라, 디바 자신인 것이 아닐까.

-어,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만약 네가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 그러면 내가 도움을 줄 테니.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디바는 최대한 상대를 회유했다.

수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공급을 만들어야 하는 법.

이렇게 나오면 일랜도 스스로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

턱!

그때, 부드러운 손길이 디바의 턱을 붙잡았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그녀가 아무것도 못 하는 사이.

-다시 한번, 가문의 영광을...

일랜의 입에서, 디바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일랜은 도움을 청하기는커녕.

오히려 디바를 위한 공급을 만들어주었다.

'마, 말도 안 돼! 고작해야 나랑 또래밖에 안 되는 녀석이, 어떻게 이런 노련함을...?!'

그리고 현재.

"으아아아!"

상념에 잠겨있던 디바는 공방에서 얼굴을 부여잡았다.

다른 드워프들이 그녀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녀는 신음만 낼 뿐이었다.

'바보같이! 그때 당황해서 도망치고 말았어! 녀석은 날 얼마나 우습게 생각할까?'

백사반의 일랜.

역시나 키스폰 가주의 손자다웠다.

'아마 지금까지 여길 찾아온 건 일종의 시험이었겠지. 나, 디바 챈달과 손잡아도 좋을지에 대한. 마치 내가 녀석을 두고 계산했던 것처럼.'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건 디바 자신.

나이가 비슷하다고 해서 일랜을 깔보았던 스스로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

'어쩌지? 이젠 녀석이 날 방해꾼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혼자서 적들을 찾아 쓰러뜨리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거라고!'

혹시 몰라 백사방을 슬쩍 염탐해보았지만.

일랜은 아카데미에 나오지 않았다는 답변만 들었을 뿐.

성과도 없이 공방으로 돌아온 디바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벨이 옳았어. 몸을 낮추고, 발톱을 숨겼어야 했는데...'

이미 일랜은 그녀보다 몇 걸음 더 나아가는 중이었다. 키스폰 가문에 걸리적거리는 적을 하나하나, 사냥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디바는 이 우중충한 공방에 처박혀, 궁상만 떠는 게 너무나도 비교가 되었다.

'다시 한번. 다시 한번만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아니, 지금 와서 그런 게 소용 있을까.'

드워프들마저 떠나고 불이 꺼진 공방.

기운이 다 빠진 디바가 혼자 쭈그려 앉아있는 그때.

끼이이익!

누군가 공방을 찾았다.

디바는 손님을 돌려보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지만 오늘 영업시간은 끝났습니다아!"

"나도 원래 오늘 근신이거든?"

디바의 눈이 커진다.

문이 열리면서 생겨난 빛의 사각형.

그 가운데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일랜이었다.

"네가 말했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디바의 시야를 가득 채운 일랜이 말했다.

"그게 바로 지금이다. 무기가 있다면 들고 날 따라와."

"따라오라니? 설마 그 말은..."

"그래. 네가 원하는 걸 주지. 그러니 이제 일어나, 디바 챈달."

멍하니 일랜을 바라보던 디바.

그녀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기회를 주겠다는 건가! 나 같은 철부지한테도...?'

주도권은 빼앗겼지만, 현실은 현실.

그리고 그것에 불평할 생각은 더 이상 없다.

스윽!

디바가 몸을 일으킨다.

이제, 발톱을 드러낼 시간이다.

* * *

4월 10일, 던전 견학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

온종일 잠에 빠져 있던 난 해가 저물 때쯤 눈을 떴다.

'오늘, 던전에 가서 귀신거미 알을 채집해온다.'

던전까지 가는 경로는 물론.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계획은 모두 세워 놨다.

마침 하벨도 저택을 비운 듯했고, 일레나도 없는 상황.

'내게 필요한 건, 던전에 동행할 강력한 동료. 아니, 똘마니 이!'

바로 디바 챈달이다.

그녀를 찾으러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공방에서 보내고 있었으니까.

'뭐야, 불이 다 꺼져있네.'

여느 때와 달리, 공방은 텅 빈 것도 모자라 캄캄했다.

그녀가 드워프들과 퇴근한 건 아닐까, 걱정하려던 찰나.

"미안하지만 오늘 영업시간은 끝났습니다아!"

다행히도 챈달은 공방 구석에 처박혀있었다.

'오늘 일이 좀 고되었나 보네.'

난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나도 원래 오늘 근신이거든? 네가 말했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그런데 사람이 이야기하는 데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았다.

- 호감 : 1

▶ 디바는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보입니다.

도움을 주는 대신, 본인도 대가를 얻겠다는 것.

안타깝게도 난 그녀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른다.

그러니 일단 약속부터 하는 수밖에 없다.

"네가 원하는 걸 주지. 그러니 이제 일어나, 디바 챈달."

디바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하여간 이 각박한 세상.

백지수표를 준 건 아닐까 걱정되는 그때.

띠링!

- 호감 : 1→7

▶ 디바는 당신이 유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뭐?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에 난 어리둥절했다.

고작 원하는 걸 주겠다고 했을 뿐인데, 이런 평가라니.

설마 이 녀석,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나한테 큰 걸 원하는 거 아냐?

'하여간, 속물 같으니! 지난번에 내 칼 들고 설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잠시 후.

디바는 평소의 작업복 대신, 아카데미 제복을 걸치고 나왔다.

여느 학생들의 차림새와 큰 차이점은 없었지만.

눈에 띄는 건 엑스자로 등에 멘 두 자루 도끼.

'저게, 녀석의 무기...?"

흑호반은 다른 곳과 달리, 각양각색의 전투기술과 무기를 사용한다.

그건 반을 구성하고 있는 귀족 자제들의 가풍이 제각각인 탓.

청마반이나 백사반처럼 검을 사용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제이슨이 있는 혈룡반처럼 창술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다.

'게다가 원작에서 흑호반 학생들은, 전면에서 싸우는 포지션이 아닌. 지휘나 전략. 또는 정치에 무게를 두고 교육받으니까.'

오히려 검 따위는 과시용으로 쓰는 녀석들도 제법 있는 편.

또는 거치적거리는 걸 싫어해서 트렌치 나이프와 같은, 소형 무기만 구비하는 경우들도 많다.

'그런 걸 감안해도 이 녀석 무기는...'

어중간하다.

귀족 자제들이 좋아할 만큼 멋진 형태도 아닐뿐더러.

가볍게 휴대해서 들고 다니기에는 무게도 제법 있을 듯해, 실용성도 떨어진다.

'특성에서 본 흑호쌍부가, 혹시 저걸 말하는 거였나?'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디바는 내 시선을 의식한 듯 조금 당황해서 말했다.

"이, 이상해? 나도 수업 시간 외에는 제복을 잘 안 입으니까..."

옷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냐?!

...라고 말하는 대신.

"그 무기는?"

"아! 이건 우리 아버지가 사용하던 흑호쌍부야. 굉장하지?!"

내가 흑호쌍부를 구경하기 쉽도록, 몸까지 돌리며 웃는 디바.

'무기를 더 센 걸로 바꾸는 게 어때?'와 같은 제안을 했다가는, 저걸로 내 목을 칠 기세다.

"...좋아. 준비됐으면 출발하자고."

* * *

하벨은 아카데미 견학 예정지를 신생 던전이라고 불렀지만.

원작에서 그곳은 '아라크네 던전'으로 언급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기억을 반추하며 저택 서재를 뒤져서 알게 된 정보는, 그곳이 키스폰 영지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그곳으로 가느냐 하는 거였지.'

레드팽 아카데미가 영지 동쪽에 있다는 걸 고려하면, 그야말로 최극단.

아카데미에서 영지로 진입하는 건 차치하더라도. 아라크네 던전이 있는 곳까지 가기에는 체력이 부친다.

"단순 계산만 해도 떨어진 거리가 20여 킬로미터야."

아카데미를 빠져나가는 동안, 디바도 그 사실을 지적했다.

"낮에 걸어가도 최소 다섯 시간은 걸리지. 하물며 지금처럼 야간이라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이봐! 내 말 듣고 있어, 일랜?!"

"그런 거라면 진작 해결했으니까 걱정 마."

"...뭐?"

우리가 향한 곳은 아카데미 마차 승강장.

그곳에 다다르던 디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그곳에는 키스폰 가문의 휘장이 달린 전용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 우릴 발견하고 밖에 나와 있던 마부가 내게 고개를 숙인다.

"오셨습니까, 키스폰 도련님."

"나 때문에 괜히 고생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내가 주먹을 앞으로 내밀자, 마부는 더 허리를 숙이며 양손을 내밀었다.

쩔그렁!

돈주머니를 받은 마부가 허리도 펴지 않고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오히려 도련님의 사전답사를 돕게 되어 영광입지요."

일레나 때문에 기피했던 키스폰 전용 마차.

비록 그 마부와 마차가 아카데미의 재산이기는 하나.

지금처럼 키스폰 가문의 이름과 돈 몇 푼이라면, 사적으로 이용이 가능했다.

"과연."

마차에 함께 오른 디바는, 지나가는 밤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던전 견학을 위해 미리 다녀온다는 핑계를 댄 건가."

"그래야 혹시 이야기가 새어나가도 명분을 세울 수 있으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마차가 아니라, 직접 말을 몰지 그랬어? 그럼 일이 한결 더 수월했을 텐데."

내가 말을 몰아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

심지어 그 유명하다는 제주도 승마체험장도 가본 일이 없다.

물론,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구구절절 늘어놓을 만큼, 난 바보가 아니다.

"어쩔 수 없었거든. 이렇게 해서라도 브리핑할 시간을 확보해야 했으니까."

대충 던진 변명이었지만, 디바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미,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내 의견 따위는 무시해도 좋아...!"

무섭게 왜 이래?

얘 특성 중에 이상한 건 보이지 않았는데.

내가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놈들을 쳐부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적들은 그 던전에 있다는 건가?"

적?

아, 귀신거미들을 말하는 건가.

생각해보니 목적지만 이야기하고 데려온 상태다.

"그런 셈이지. 사실 몇 놈이나 나타날지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다.

마침 나한테는 키른 교관이 준 나이트 윙도 있으니.

하지만 혹시 몰라, 디바한테는 경호를 부탁할 참이었다.

"만약 일이 생기면, 그때 네가 나섰으면 좋겠어. 디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유인책? 네 녀석 그렇게까지...?! 좋아, 나한테 맡겨둬!"

웬 유인책?

가만 이 녀석, 몸빵까지 할 각오가 돼 있다는 건가?!

아까 마부한테 돈 주는 거 보더니, 의욕이 확 생긴 모양이네!

'말이 통하잖아, 디바. 어디 한번 잘해보자고!'

모처럼 뜻이 맞는 녀석을 마주하자 나 또한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마차로 이동하기를 한 시간.

드르륵!

마부석과 이어진 창문이 열리더니, 마부가 우리에게 물었다.

"사전답사 일행이 우리만 있었던 게 아니었나 보군요?"

"?"

우리는 뒤편이 보이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고.

두구구구구구!

그곳에는 횃불을 든 자들이 말을 달려, 우릴 쫓아오는 중이었다.

23화. 악의 먹이사슬

삐이이이이-

텔레비전 송출 종료음과 같은 이명.

그 가운데 온갖 소음들이 아주 작은 볼륨으로 들려온다.

화르르르르르르!

박살 난 마차가 불에 타는 소리.

이히히이이잉!

두구닥!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성난 말들의 발굽 소리.

그리고 누군지 모를 남자들의 고함.

"샅샅이 뒤져!"

"멀리는 못 갔을 거다!"

뿌연 시야와 함께, 누군가가 날 흔드는 게 느껴졌다.

"...랜! 일랜?! 일어나, 얼른!"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온다.

입사 회식 때 느낀 숙취와 맞먹는 두통.

간신히 눈을 뜨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성의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디... 바? 이게 어떻게 된...?"

"쉿! 소리를 낮춰. 아직 근방에 놈들이 있으니까."

디바는 나를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면서도 난 잠시 혼란을 느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난 마차를 타고, 던전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필사적으로 기억을 끄집어내자, 단편적인 퍼즐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전답사 일행이 우리만 있었던 게 아니었나 보군요?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줄지어 따라오던 횃불들.

웬 정체 모를 괴한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아, 기억났다! 우린 공격 받은 거였어!'

가장 선두로 달려온 놈이 우리한테 횃불을 던졌었다.

그 바람에 마차는 불에 타기 시작했고.

마차를 끌던 말은 기겁해서 날뛰다가.

-콰광!

급기야 마차는 비탈길에 굴러 떨어졌고.

그 후, 난 정신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와, 이렇게 필름이 끊긴다고? 얼마나 충격을 심하게 받았으면... 이거 설마 피야?!'

무심코 얼굴을 만지던 난, 손에서 묻어난 액체를 보고 소리 지를 뻔했다.

주변이 어둡기는 했지만, 이 끈적하면서도 비릿한 건 피가 분명하다.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단해, 일랜."

옆에서 디바가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설마 적들이 제발로 찾아올 줄이야. 이것도 역시 네 계산대로인 거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녀를 보고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난.

곧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이 녀석도 머릴 다친 건가? 그래. 그래서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제기랄!'

아마 우릴 쫓아온 놈들은, 어제 하벨이 해치웠던 녀석들과 같은 부류일 것이다.

애초에 디바를 데려온 건 던전에서 경호를 맡기려는 의도였는데.

괜히 나 때문에 덩달아 피해를 입은 것 같아 죄스럽다.

'미안해, 디바. 이번 일만 잘 끝나면, 보수는 넉넉하게...?'

그 순간, 내가 돈으로 매수했던 남자가 생각났다.

"마부는? 마부 아저씨는 어떻게 됐지?!"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야산이다 보니 시야가 제한적이고. 어쩌면 더 아래로 추락했는지 몰라. 그나마 우린 마차 안에 있어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그 사람은..."

말끝을 흐리는 디바도 표정이 좋지 않다.

나 역시 이제 막 정신을 차렸던 터라, 그녀의 말이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이게 현실이다. 하벨 때도 그걸 느꼈잖아.'

까딱하면 진짜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

마부의 일은 일단 접어두자. 지금은 위기를 타개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서, 여긴 어디지?"

난 잔뜩 긴장한 채 수풀 무성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낭패다. 사실 마차를 탄 이유 중 하나는, 아직 내가 이곳 지리를 모른 탓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정체도 모를 괴한들 때문에...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일랜."

그때, 디바가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어딘가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기 있잖아. 네가 말했던 목적지."

"...뭐?"

고개를 돌리자, 좁은 공터와 비탈면이 눈에 띈다.

거기에는 최소 3미터는 될 법한 동굴이 입을 떡 하니 벌리고 있었다.

'설마, 저게 아라크네 던전 입구?!'

일이 어그러진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린 지름길을 통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뜻밖의 횡재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 난, 밝은 표정으로 입을 떼려 했다.

"찾았다!"

내가 말한 게 아니다.

때마침 괴한들이 우릴 발견하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일단 이동하자!"

"이해했어!"

디바는 나와 나란히 뛰어가며 빠르게 말을 뱉어냈다.

"개방된 곳에서는 적들한테 포위될 수 있으니, 일부러 유리한 장소를 선택한다는 거지?!"

아하, 그런 거였어?

...아니, 그런 게 아니잖아!

우리 목표는 귀신거미 알 채집이라고, 채집!

'물론, 저 정체 모를 놈들한테 당할 생각도 없지만...!'

던전 입구에 다다를 때쯤, 디바는 다급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빨라! 이러다 금방 따라잡히겠어!"

그녀 말대로, 괴한들은 매우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 같이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쓴 그들은 온갖 날붙이를 든 채, 우리를 보며 웃었다.

"독 안에 든 쥐새끼들!"

"알아서 죽을 자리를 고르는구나!"

"덕분에 수고를 덜게 됐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덩치 형님?"

개중에는 유독 덩치가 산만 한 놈이 있었다.

그는 가장 후방에 있는 주제에, 남들보다 크게 웃어젖혔다.

"으하핫! 보스한테 보여줘야 하니까, '녀석'의 머리만 챙기고 몸은 여기다 묻어버려!"

뭔데, 그 섬뜩한 대사는?!

누가 봐도 빌런 따까리 같은 말투잖아!

'잠깐만. 덩치라고...?'

순간,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기에는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다.

스르르응!

우리가 던전 입구로 들어옴과 동시에, 선두에 있던 괴한이 검을 뽑아 들었다.

나와 디바가 함께 대적한다면 승산은 있겠으나.

'문제는 다른 녀석들...!'

놈을 상대했다가는 다른 괴한들이 가세할 것이다.

그렇다고 다친 몸으로 계속 도주하다가는, 등에 칼 맞기 십상.

"일랜! 이젠 어떻게 해야...?!"

먼저 던전에 진입한 디바는, 내가 품에서 뭔가 꺼내는 걸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건...?"

-스크롤이다.

하벨한테서 받은 마법 스크롤.

-그걸 던전 출입구에서 찢으면, '도어맨(Doorman)' 마법이 발동되어 던전 안팎을 차단하게 되지.

그가 나한테 이걸 준 건, 일레나를 던전에 가두라는 의도였다.

하지만 나중에 하벨은 나에게 다른 걸 경고하기도 했다.

-일랜. 레드팽의 자제들 뒤에는, 온갖 가문과 세력이 버티고 있다. 그중에는 키스폰을 적대하는 이들도 있지.

아마 이놈들이 바로 그놈들일 것이다.

따라서 당장 살길이 급했던 난, 역으로 적들의 진입을 차단할 심산이었다.

'아마 결계 마법 같은 거겠지. 그런데 나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죽어랏!"

지척에 다다른 괴한의 칼부림을 보며.

있는 힘껏 스크롤을 잡아 쨌다.

쫘아아아아악!

순간, 희뿌연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휘화하악!

돌풍은 얽히고 뭉쳐 눈 깜짝할 새에 회색 거인을 만들어냈는데.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앞뒤 모두 얼굴이 달린, 기괴한 크리처였다.

'뭐야, 이게.'

석고상처럼 생긴 도어맨(?)을 보며, 난 당황했다.

'분명 출입구를 차단하는 마법이랬는데! 웬 돌덩이가 나타나서...?'

우리 쪽을 향한 도어맨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하지만 괴한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오자, 고개가 180도로 돌아갔다.

끼리릭!

우리한테는 웃는 얼굴이, 적에게는 분노하는 얼굴이 비쳤고.

도어맨은 맨주먹으로 괴한의 머리를 후려쳤다.

퐝!

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출입구 사방에 체액이 흩뿌려진다.

뒤따라 오던 적들은 졸지에 그걸 흠뻑 뒤집어썼다.

"어...?"

그대로 굳어버린 채, 눈을 굴리던 괴한 하나.

그는 입을 달싹거리더니 도어맨 뒤에 있는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노, 놈이다?! 일랜 키스폰! 놈이 악마를 불러냈다!"

...아닌데.

난 그저 결계 비슷한 걸 상상하고 스크롤을 사용했을 뿐이다.

저렇게 기괴하게 생긴 골렘이 나타나서 사람 머리 터뜨릴 줄 몰랐다고!

"세, 세상에...! 일랜, 이건...?"

디바도 상당히 놀란 모양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만 뻥긋거리던 그녀는,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띠링!

- 호감 : 7→10

▶ 디바는 당신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왜죠.

왜 존경하는 건데.

그딴 걸로 호감도 올라가지 말라고.

"뭣들 하고 있어?!"

그때, 괴한들의 리더로 보이는 덩치가 저 뒤에서 소리쳤다.

"그래봐야 돌덩이일 뿐이라고! 그딴 걸로 겁들 먹을 셈이냐?!"

"...형님? 그런데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덩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 그야 이건 돌발 상황이잖아! '그분'한테 보고하러 간다, 보고!"

"형님?!"

몸을 홱 돌린 그가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괴한들은 물론이거니와, 나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하들 버리고 혼자만 튀다니. 뭐, 저런 비열한 놈이 다 있지?'

* * *

"헉, 허억!"

덩치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었다.

그가 향한 곳은 불이 다 꺼진 레드팽 아카데미.

곧 까만 호랑이가 장식된 문이 나타났다.

'아, X 됐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땀에 흠뻑 젖은 덩치가 잠시 얼굴을 부여잡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주변을 살핀 후, 문을 똑똑 노크했다.

"크흠, 접니다! 덩케르크!"

-...들어와요.

꿀꺽!

침을 삼킨 덩치, 아니 덩케르크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러자 널찍한 공간과 함께, 화분들이 곳곳에 배치된 실내가 드러났다.

'흑호방. 이 시간에 오는 건 처음인데...'

흑호반 학생들의 쉼터, 흑호방.

시간이 늦은 지금 그곳에 있는 사람은 남자 한 명뿐이었다.

기온이 떨어진 시각, 털 달린 망토를 걸친 그는 촛불에 의지하며, 책상 위 서류들을 하나씩 넘기는 중이었다.

팔락!

책장을 넘기는 그의 안경이 촛불 빛을 받아 반짝인다.

남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예? 아, 그게..."

"하긴. 그러라고 우리 아버지가 동네 깡패들을 돈 주고 산 거니까."

"저기, 도련님. 실은..."

"도련님이라."

그가 눈을 홉 뜨며 고개를 든다.

"일개 양아치 주제에. 감히 레드팽의 총학생회장을, 도련님?"

"죄, 죄송합니다?! 아타르 총학생회장님!"

레드팽 총학생회장, 아타르.

그는 자기보다 머리 서너 개는 더 큰 덩케르크가 쩔쩔매는 걸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풉?!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젓는다.

"농담 좀 친 걸 가지고 뭘 그렇게 놀라요? 그저 장난 좀 친 거니까 너무 쫄지 말라고요. 덩케르크 씨."

"아? 자, 장난이었습니까?"

덩케르크도 억지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 아타르를 욕했다.

'미친 새끼. 마음 같아서는 그냥 콱...!'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타르는 서류를 놓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미안해요. 가뜩이나 일이 밀려 들어와서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거든요. 비대위 회의록 작성에, 강의동 보수진행 현황 체크. 거기다 키스폰에서 보내온 휴강신청서 검토까지..."

"키, 키스폰...? 도련님, 아니 총학생회장님! 사실 전해드릴게..."

"농담이라니까 그러네! 그냥 편하게 불러요. 아무튼, 저도 불평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이것도 아버지께서 하시는 업무에 비하면 새 발의..."

자꾸 말을 잘라먹는 아타르를 보며, 덩케르크는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나도 말 좀 하자, X새끼야!'

그렇게 구구절절 자기 할 얘기만 늘어놓던 아타르는, 문득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덩케르크를 쳐다봤다.

"참! 그러고 보니 그 암캐는 어떻게 됐습니까? 약속대로 '디바 챈달'의 수급을 가져왔겠지요?"

사실 덩케르크에게 공격을 지시한 건 아타르였다.

지시 내용은 디바 챈달의 수급을 가져오는 것.

비로소 덩케르크도 입을 뗐다.

"도련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응? 보고라니, 어떤...?"

"요청하신 대로 디바 챈달, 그년의 목을 가져오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같이 있던 놈이 일랜 키스폰이었지 뭡니까?"

"잠깐..."

"아시겠지만 소문에 따르면 일랜이란 놈은, 악마까지 소환하는 무시무시한..."

"잠깐만. 잠깐만이라고 내가 했잖아, 이 X발 놈아!"

덩케르크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고.

비로소 아타르는 안경을 벗더니, 그걸 손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으음, 일랜 키스폰이라...."

다시 안경을 쓰는 아타르.

중얼거리는 그의 두 눈에 의문이 한가득 퍼졌다.

"근데, 그 망나니가 여기서 왜 튀어나온 거지?"

24화. 부하가 바뀜!?

레드팽 아카데미 흑호반 소속, 아타르.

그는 유펠리아 수도권 출신의 귀족자제였다.

-알겠느냐, 아타르.

그의 아버지는 말했다.

-레드팽 아카데미 공방은 철법혈이라는 특수한 필드에 지어져서. 그곳을 거친 무구들은 하나 같이 특별하다. 만약 그 공방을, 우리 타이언 가문에 귀속시킬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가문도 우릴 무시하지 못할 게다.

상당수 귀족이 그러하듯, 아타르가 태어난 타이언 가문은 앨리트 계층에 해당되었다.

특히 강철 생산에 필요한 광물이 채굴되는 광산을 보유한 가문이었으며.

타이언 가주는 이를 바탕으로 정계에 입지를 다지고자 고군분투했다.

-이해했습니다, 아버지.

아타르도 그런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여전히 우리 가문을 무시하는 이들이 있지만, 너무 개의치 마세요. 그런데 그런 공방 하나로, 시선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암만 특수 필드에 지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그 공방에 있는 드워프들이라면, 철법혈에서 나온 물건을 우리가 직접 제작해서 이득을 볼 수 있게 된다. 그것도 월등히 높은 값어치로.

-그, 그렇군요! 그런 유용한 곳을 레드팽 총장이 썩히고 있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아카데미 소유이면서 활용 못할 줄은...

-어리석은! 이러니 네가 형을 못 따라가는 거다! 레드팽 아카데미가 왜 공방을 그냥 두고 있는지, 모르는 거냐?

아버지는 언제나 엄했다.

-레드팽 공방은 소유자가 따로 있다. 과거, 흑사자 길드를 이끈 챈달 가문이지.

-채, 챈달? 드워프와 '철의 거래'를 성사시킨 레오 챈달을 말하는 겁니까?! 하지만 제가 알기로 그 가문은 거의 몰락했다고...

-그 가문의 마지막 혈족이 그 공방에 있다. 그걸로 어떻게든 재기할 심산이겠지. 그렇게 되면 우린 눈 뜨고 손만 빨게 될 게다.

-챈달의 씨를 말리라는 거군요? 소유자가 없으면, 아카데미는 그 공방을 입찰로 붙일 테고. 자연히 우리한테 넘어올 테니!

아타르가 할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공방의 소유자를 제거해서, 공방이 입찰에 부쳐지도록 할 것.

또 하나는 아카데미에서 정보선점에 유리한 위치가 되어, 타이언 가문을 도울 것.

'이건 기회야!'

매번 형한테 비교만 당했던 아타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레드팽 아카데미 총학생회장 자리에 올랐고.

회장으로서의 업무들을 처리하면서, 공방과 관련된 정보들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참, 아타르. 네가 명심할 것이 있다.

-예? 제가 명심할 거라면...?

-키스폰. 아카데미에 영지를 제공한 그 가문은 결코 건드리지 마라. 가주는 물론이거니와, 그 구성원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찌...?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온 줄 아느냐? 바로 지금의 키스폰 영주 덕분이다. 그가 움직여준 덕분에, 챈달 가문이 갖고 있던 광산 일부를 헐값에 매입할 수 있었지.

타이언 가주는 그 이상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게 아니더라도, 뱀굴에서 뱀 새끼를 건드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 그러니 넌, 네가 할 일만 몰두하면 된다. 알겠느냐?

-예! 저만 믿으세요, 아버지!

실제로 아타르가 일랜과 직접적으로 부딪칠 일은 없었다.

양지에서 교관 및 학생들과 교류하며, 총학생회에 매진하는 아타르와 달리.

키스폰의 자제인 일랜은 망나니짓만 일삼으며 학생들을 괴롭히고 사고만 쳤다.

'뭐야. 그냥 한낱 양아치였나? 키스폰 가문도 별것 아니었군. 칫! 아버지 말씀만 아니었다면...'

최근에도 일랜은 아카데미 습격 사건과 연루되어 비대위가 열렸고.

관련 문서를 정리하느라 아타르는 짜증과 피로가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키스폰이라는 배경이 간판은 아니었는지.

아카데미는 그 일을 쉽게 넘어가는 듯했고.

'오늘은 마침내 아버지의 명을 정식으로 수행하는 날. 아버지가 붙여주신 놈들이 일만 제대로 처리해준다면, 난 정식으로 타이언 가문의 일원이 되는 거다!'

평소와는 달리, 들뜬 마음으로 흑호방에서 잔업을 처리했다.

그리고 얼마 후.

"도련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마침내 우두머리 수하, 덩케르크가 아타르를 찾아왔다.

계획대로라면 그의 손에 디바의 머리가 든 자루가 쥐어져 있어야 했다.

하지만.

"요청하신 대로 디바 챈달, 그년의 목을 가져오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같이 있던 놈이 일랜 키스폰이었지 뭡니까?"

떠들어대는 덩케르크를 보며 아타르는 귀를 의심했다.

일랜 키스폰? 왜 갑자기 여기서 그놈이 튀어나오는 거지?

아타르가 지시를 내린 건 디바를 제거하라는 것이었지, 일랜과는 무관했다.

-아타르. 네가 명심할 것이 있다. 키스폰. 아카데미에 영지를 제공한 그 가문은 결코 건드리지 마라. 가주는 물론이거니와, 그 구성원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타르의 아버지, 타이언 가주는 엄격한 편이다.

그렇기에 단 한 번의 실수나 틈도 허락되지 않는다.

물론, 저 멍청한 깡패가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아시겠지만 소문에 따르면 일랜이란 놈은, 악마까지 소환하는 무시무시한..."

"잠깐만. 잠깐만이라고 내가 했잖아, 이 X발 놈아!"

아타르는 눈이 뒤집혀서 소릴 질렀다.

만약 이게 아버지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죠. 덩케르크 씨?"

"예! 도련님!"

"둘 다 처리하세요."

"알겠습니... 예?"

덩케르크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서 들려온 말은 도리어 그를 당황시키고 말았다.

"애초에 목적은 디바, 그 계집이었지만. 뭐, 이 기회에 눈엣가시 같았던 일랜 그놈을 처리하는 것도 괜찮겠죠."

"하, 하지만 도련님! 아까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일랜 키스폰이 악마를 소환하는 바람에, 제 부하 한 놈도 당했단 말입니다?!"

"아아, 저런! 그런 일이 있었나요? 그래서..."

아타르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덩케르크를 쳐다봤다.

"일 안 할 거야?"

"...예?"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덩케르크 씨. 이대로 걔네들을 살려두면, 엿 되는 건 당신이야. 일랜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키스폰 가주 귀에라도 들어가면, 그땐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고."

"그, 그게 무슨!?"

한 놈이 죽건, 열 놈이 죽건 아타르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든 디바를 제거해서 아버지의 특명을 수행하고.

일랜은 흔적도 없이 매장시켜 증거를 인멸한다.

'물론, 발견되더라도 그 책임은 이놈한테 떠넘기면 되겠지.'

아타르는 서랍을 열더니, 그 안에 있던 돈주머니를 꺼냈다.

난감해하던 덩케르크도 그걸 보니 눈빛이 확 변한다.

"그건...?"

"조의금이랄까요. 워낙 당황스러운 일이라 저도 잠시 이성을 잃었습니다만. 이걸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아타르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참고로 조의금이 충분히 있긴 한데. 역시 희생은 피해야 할까요?"

"...흐, 흐흐흐?! 무슨 말씀을!"

돈주머니를 열어보는 덩케르크.

황금빛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희생이 커야 얻는 것도 큰 법이죠! 맡겨주십시오, 도련님! 헤헤!"

* * *

아라크네 던전은 원래 평범한 동굴이었다.

그러나 여느 던전이 그렇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형은 마혈에 반응했고.

그곳에 있던 생물들도 변이를 일으키기 시작하더니, 지금의 던전으로 변모했다.

'그래서 그런가. 생각보다 많이 어둡진 않네.'

난 테마파크에 입장한 사람처럼 던전 내부를 구경 중이었다.

울퉁불퉁한 내벽은 은은한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 위로 빛의 알갱이들이 흘러 다니곤 했다.

"일랜! 내 말 듣고 있어?!"

디바의 부름이 내 감상을 깬다.

내가 걸음을 멈추지 않자, 그녀는 빠르게 따라붙으며 내게 질문을 쏟아냈다.

"밖에 있는 저 녀석들! 왜 그냥 버리고 가는 건데? 네가 불러낸 악마로, 다 죽일 참 아니었어?!"

디바가 말한 악마란, 내가 마법 스크롤로 불러낸 도어맨이다.

도어맨은 던전 출입구를 중심으로 일정 반경 벗어나지 못했고, 말 그대로 접근하는 이들만 공격하는 듯했다.

'던전 안팎을 차단한다는 게 이런 뜻이었다니.'

다행히도 적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내가 소환해낸 악마라고 여기고 있을 뿐.

차마 다가가지도 못하고 던전 밖에서만 맴돌았다.

하지만 도어맨의 효과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모르는 일. 그래서 난 최대한 서둘러 던전 깊숙이 진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왜 다 안 죽이냐고 난리 치고 있으니. 오히려 목숨을 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안 드나?'

가만!

혹시 이 녀석. 놈들이 우릴 공격해서 화가 나 있는 건가?

실제로 디바는 도어맨이 괴한 하나를 쓰러뜨리자, 자신도 도끼를 들고 뛰쳐나가려고 했었다.

'내가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디바 역시 도어맨한테 당했겠지. 도어맨은 말 그대로 접근하는 상대를 타깃으로 여기는 것 같았으니까.'

어떨까.

사실 그 괴한들이 나를 노리고 온 적들이라고 설명한다면?

자기가 죽을 뻔한 게 사실 나 때문인 걸 안다면, 우리의 관계는 파탄 날지도 모른다.

'환장하겠네. 밖에는 나를 노리는 놈들이 쫙 깔려있고. 심지어 내 옆에는 도끼 못 휘둘러서 환장한 디바까지...'

최악의 경우, 그녀의 도끼가 나한테 날아들 수도 있다.

섬뜩해진 난 입을 꾹 다문 채 걸었다. 괜히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가는, 던전에서 사망 엔딩을 맞을 수 있는 상황.

'나만 입 조심하면 돼. 그럼 디바가 무슨 수로 진실을 알겠어?'

겨우 마음을 다스리는 그때.

돌연 디바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제야 알겠어."

아, 알았다니? 뭘?!

나 역시 굳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일랜, 네가 공방까지 날 찾아온 이유. 그리고 적들을 충분히 쓰러뜨릴 여력이 있음에도 내버려 둔 것. 굳이 이 고생을 해가며, 아라크네 던전까지 날 데리고 온 이유 말이야."

마, 말도 안 돼.

설마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나라는 걸 눈치챈 건가?

나 때문에 본인이 이런 상황에 처했다는 걸 알아챘다고?!

하지만 어떻게? 아니, 그것보다 이거 지금 위험한 상황 맞지?!

꽈악!

고개 숙인 그녀는 손에 든 흑호쌍부를 힘주어 잡았다.

그걸 본 난 머리털이 쭈뼛 섰다.

'X 됐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화를 풀어주는 것.

충분히 사과하고 설득한다면 나를 용서해줄지도 모른다.

"그래. 모두 알아버렸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판단한 내가 입을 뗐다.

"하지만 잘 들어, 디바. 난..."

깨르라아악!

순간,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흠칫하며 고개를 들자, 천장에 매달린 괴생물체가 보였다.

'몬스터?!'

사람 허리만큼 오는 크기의 괴물이다.

털로 뒤덮인 몸체는 종유석 같은 게 우둘투둘하게 자라나 있었고.

무려 여덟 개씩이나 되는 다리에는 송곳들이 자라나 있어, 보기만 해도 위협적이다.

'저건 설마, 돌거미...?'

돌거미.

주로 암석지대나 으슥한 동굴에 서식하는 놈들로, 돌처럼 단단한 외피를 지녔다.

때문에 가슴과 배 사이 마디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 상대하는 데 애를 먹을 수 있는 몬스터였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나타날 줄이야! 그것도 바로 내 위에...?!'

이미 돌거미는 천장을 박차고 있었다.

놈의 흉측하게 생긴 아가리가 내 시야를 가득 채우는 그때.

스콰아아아아앙!

시커먼 도끼가 돌거미를 후려쳤다.

급소를 공격한 것도, 그렇다고 오러 같은 걸 내뿜은 것도 아니다.

오직 순수한 힘이 돌거미를 강타했고. 그 위력에 돌거미는 레고블록처럼 박살나서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후두두두두!

어...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그래, 일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

마치 파리채로 파리 잡듯 몬스터 하나를 일격에 해치워버린 디바.

그녀는 방금 휘둘렀던 도끼로 곧장 날 가리켰다.

"내가 성장하길 바라는 거지?"

살벌한 기세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난 귀를 의심하며 디바를 쳐다봤다.

"...내가, 너한테 어쨌다고?"

"더 강해져서 직접 싸우라고 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이 던전에 데려올 이유가 없잖아. 젠장,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뭘 깨달았다는 건지는 몰라도, 이번만큼은 내버려 두자.'

기습한 돌거미를 한 방에 보낸 녀석이다.

어설프게 사실을 바로잡았다가는, 진짜 X 될 것 같은 위험한 예감이 든다.

깨라라라라라라라악!

소리를 들은 것일까.

곧 통로 저편에서 다른 돌거미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는 게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그래. 어차피 디바는 원작에서도 덩치라는 부하로 나온 설정이잖아. 그렇다면 나도 걸맞은 카리스마를 보여줄 필요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난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었다.

"자, 그럼. 내가 칼 뽑을 필요도 없겠지? 디바 챈달."

"...!"

동그랗게 뜬 디바의 눈이 날 향한다.

내가 태연하게 시선을 받아치자.

휭, 턱!

두 자루의 도끼, 흑호쌍부가 그녀 손안에서 빙글 돌다가 멈춘다.

"물론."

디바 챈달.

한 마리의 흑사자가 야생으로 뛰어들었다.

25화. 효과는 굉장했다!

아라크네 던전을 방문하기 전.

난 키스폰 저택에 있는 서재를 뒤져 얼추 정보를 입수했다.

던전의 위치나 출몰하는 몬스터, 던전 내부의 지리 등. 레드팽 학생들의 견학 예정지인 만큼, 하벨도 미리 조사를 해서 아카데미에 전달한 것이 분명했다.

'출몰하는 몬스터라고 해봐야 돌거미가 대부분이었지.'

D급 몬스터에 해당하는 돌거미는 단단한 외골격이 특징.

사냥감을 만나면 점프까지 할 줄 아는 끔찍한 놈들인 데다, 아카데미 온실에서 마주한 송장벌레보다도 강한 축에 속한다.

'뭣보다 가장 무서운 건, 놈들의 턱이 돌도 부술 만큼 힘이 세다는 것.'

무시무시한 치악력과 송곳 달린 다리.

그런 놈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놈들을 혼자 상대한다는 건 미친 짓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카데미에서도 단체 견학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일 테고.

'그래서 나도 덩치 똘마니를 찾아 데려온 거지만...'

난 천천히 눈을 들어 전방을 바라봤다.

'그 효과는 굉장했다?!'

그곳에는 디바가 단신으로 돌거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파곽! 쾅!

프작! 프거엉!

망치질로 단련된 그녀의 팔근육은, 묵직한 흑호쌍부를 부채처럼 휘둘렀다. 흡사 호랑이의 앞발처럼, 디바는 도끼가 제 손인 양 돌거미들을 두들겨 패 아작 내는 중이었다.

'...무서워. 저게 C급의 위력인가?'

사실 힘에 부치면 나도 나서서 거들까 싶었지만.

괜히 잘못 끼어들었다가 엇나간 도끼에 내 정수리가 깨질 것 같았다.

'게다가 돌거미를 상대했다간, 모처럼 손질한 백사검의 날이 상해버리잖아.'

난 지난번 공방에 맡겼던 백사검을 들여다봤다.

그러고 보니, 최근 난 캐릭터 말고도 도구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도구 열람!'

촤락!

[설정 열람 : 도구]

- 이름 : 백사검(A급 / 비활성화)

- 종류 : 검

- 설명 :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키스폰 가문의 마검. 마력 개방 시 검이 활성화되면서 사용자의 마력과 신체 능력을 향상시킨다. 또한, 비활성화 상태이더라도, 오퍼 블러드를 가동시키면 피를 매개로 한 광화(狂化)를 통해 전투력을 대폭 높일 수 있다. (단, 오퍼 블러드 사용 시, 마력 회로 폭주로 인해 영구적인 내상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주의!)

여기까지는 얼추 내가 아는 내용이다.

백사검의 도구 등급이 S급이 아니라 A급인 것은, 여러 이유로 추측된다.

일단 내가 빙의한 캐릭터가 1차 악역인 만큼, 지나치게 좋은 아이템이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

두 번째로, 오퍼 블레이드가 지닌 '영구 내상'이 치명적인 디메리트로 작용해서, 백사검의 등급이 다운그레이드된 게 그 이유.

'그렇다고 해도 1차 악역한테는 과분한 검이지. 괜히 키스폰 가주가, 오크 목에 엘릭서라는 말을 한 게 아니니... 응?'

그때, 그 아래 특이한 것이 눈에 띄었다.

- 옵션 1. 마나 차징

레드팽 공방의 수리 효과로 인해 추가된 기능.

죽은 지 얼마 안 된 몬스터의 시체, 또는 마석 등을 통해 일부 정수를 흡수할 수 있다.

흡수된 정수는 마나로 누적되며, 충전이 완료되면 검이 지닌 본연의 힘을 발현시키게 된다.

*오퍼 블러드와 별개의 효과.

▶ 충전 : 0%

'뭐야, 이게. 마나 차징...?'

공방에 백사검을 맡겼더니, 생각지도 못한 옵션이 생겼다.

의아해진 난 백사검을 뽑아든다.

스르르응!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다시 한번 설명을 살펴보자, '죽은 지 얼마 안 된 몬스터의 시체'라는 내용이 눈에 띈다.

'그런 거라면... 어라?'

마침 내 앞에 죽은 돌거미가 떨어져 있었다. 깨진 밤톨처럼 양분된 시체.

문제는 그 시체에서 반딧불처럼 파란 불빛이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

'아까까지만 해도 저런 건 보이지 않았는데. 혹시...?'

거기에 백사검을 갖다 대는 순간.

놀랍게도 파란 불빛이 자석처럼 빨려와 백사검에 맺혔다.

띠링!

['돌거미'의 정수를 흡수하였습니다.]

▶ 충전 : 1%

'오오! 된다, 돼!'

백사검에 추가된 기능과 더불어, 뭔가를 획득했다는 성취감이 날 기쁘게 했다.

고작 1%라는 수치가 조금 아쉬운 느낌이 있었지만.

- 옵션 1. 마나 차징

흡수된 마나는 검에 누적되며, 충전이 완료되면 검이 지닌 본연의 힘을 발현시키게 된다.

'그 말은 즉, 오퍼 블러드 없이도 백사검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뜻!'

나 자신마저 피해 입을 수 있는 금기의 영역, 오퍼 블러드.

만약 오퍼 블러드 없이도 백사검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큰 쾌거다.

'게다가...'

고개를 돌리자, 디바가 날뛴 흔적이 보인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 동화처럼, 던전 통로에는 죽은 돌거미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덕분에 돌거미의 정수들 역시, 먼저 자길 먹어달라고 앞다투어 빛내는 것처럼 보인다.

띠링!

['돌거미'의 정수를 흡수하였습니다.]

띠링! 띠링! 띠링!

['돌거미'의 정수를 흡수하였습니다.]

['돌거미'의 정수를 흡수하였…]

['돌거미'의 정수...]

'하하핫! 신난다.'

이런 기분이 언제였더라.

편집자 시절, 내가 컨택했던 작품들이 속속 계약되었을 때.

그리고 그 작품의 원고 메일들이 줄기차게 날아올 때, 이런 고양감을 느끼곤 했다.

띠링!

['돌거미'의 정수를 흡수하였습니다.]

▶ 충전 : 14%

마침내 열네 번째 돌거미 정수를 흡수하고 났을 때쯤에서야.

난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응? 디바 이 녀석, 어디로 간 거지? 아직 백 퍼센트 채우려면 한참 남았는데!'

하여간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

그녀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난, 땅에 떨어진 뭔가를 발견했다.

거무튀튀한 날붙이에, 달려가는 호랑이가 장식된 도낏자루. 그건 디바가 사용하던 흑호쌍부 중 하나였다.

낄르르르르르르르르!

전신의 털이 곤두선다.

마치 웃는 소리 같기도 하고, 차 시동이 헛 걸리는 소음 같기도 하다. 도저히 이 세상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은 그 울음의 진원지는.

낄르낄르르르르...!

디바가 향하던 통로 저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굵직한 거미줄이 통로 여기저기에 뿌려져 있다.

'넓어진 통로. 전깃줄처럼 여기저기 퍼져 있는 거대한 거미줄. 만약 내가 아는 것이 맞다면, 이 앞은...'

귀신거미들의 본진이자 놈들이 알을 낳는 둥지.

즉, 아라크네 던전의 보스룸이다.

"설마 디바 이 녀석, 귀신거미한테 끌려간 거야? 젠장, 경고했었어야 했는데...!"

돌거미도 골치 아픈 놈들이지만, 귀신거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귀신거미는 데스 웜과 마찬가지로 C급 위험판정을 받은 몬스터.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함께 둥지를 지킨다.

'심지어 가위독을 사용해서 먹이한테 끔찍한 환영을 보게 하지. 어쩌면 디바도 이미...?'

내 불찰이다.

그깟 정수 하나 때문에 힘 좋은 부하를 잃게 되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절망하고 있는 건 사치다. 아직 디바의 생사가 확인 된 건 아닐뿐더러, 저곳에는 나에게 필요한 귀신거미 알이 쌓여있으니까.

'좋아. 여기서부터는 내 계획대로 움직인다.'

난 품에서 망토를 꺼내 어깨에 둘렀다.

퍼얼럭!

['나이트 윙'을 사용합니다.]

[야간 은신 효과가 발동합니다!]

[남은 시간 : 1시간 10분 59초]

키른 교관이 내게 선물한 '나이트 윙'.

그건 이곳처럼 밝지 않은 곳에서 몸을 숨겨주는 은신효과가 있다.

'근데 이거 제대로 작동되는 거 맞나? 확인해볼 수도 없고...'

거울 같은 거라도 없나 싶어 두리번거리는 그때.

"...덩치 형님, 정말 대단합니다!"

갑자기 웬 인기척과 함께 사내들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설마 그 '악마'를 물리치실 줄이야! 우린 형님이 도망간 줄로 알았다고요!"

"이런 멍청이들! 이 덩케르크가 그렇게 겁쟁이일 줄 알았더냐?"

"그런데 어떻게 한 겁니까? 저희야 시키는 대로 하긴 했지만..."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설명해줘도 너희 돌대가리로는 이해 못할 거다."

"크으, 역시 아카데미를 다니셨던 분답군요! 이렇게 명석하신 분이, 어쩌다..."

곧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놀랍게도 우릴 공격했던 그 괴한들이었다!

기겁한 내가 숨을 곳을 찾아봤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그사이 선두를 맡고 있던 덩치 큰 사내가.

"그런데 이 쥐새끼 같은 놈들! 대체 어디까지 기어들어 간 거야?"

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 * *

두어 시간 전.

-얼굴이 앞뒤로 달린 악마라고요?

덩케르크의 보고를 받던 아타르가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이미 '조의금'까지 챙긴 덩케르크는 눈치를 보면서도, 난감하다는 듯이 설명했다.

-그렇습니다! 딱 우리가 녀석들을 해치울 타이밍이었는데. 갑자기 일랜, 그놈이 그 회색 거인을 불러냈지 뭡니까? 그것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놈들을...!

-그 괴물을 불러낸 장소가, 혹시 던전 입구였습니까?

-예? 어, 어떻게 도련님이 그걸...?

덩케르크가 의아해하자, 아타르는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했더니. 그건 도어맨이라는 겁니다.

-도어... 맨? 뭡니까, 그게?

-일종의 소환마법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 스크롤이죠. 한때 던전화 된 광산의 소유주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도구입니다. 마법에 지식이 없는 소유주라고 하더라도, 언제든 외적을 차단할 수 있게끔 말이죠.

-그, 그런 거였습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어떻게 도련님께서는 그런 것까지 잘 알고 계십니까?

그야 과거, 타이언 가문에서도 도어맨 스크롤을 자주 사용했었으니까.

아타르는 굳이 그런 설명 따위를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덩케르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한때 유행했던 도구라면,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겁니까? 왜죠?

-도어맨 스크롤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까요.

-치명적인 단점?

-도어맨의 가동 원리는 간단합니다. 던전 출입구에서 스크롤을 찢으면, 던전 하트에서 발생되는 잉여 마력을 끌어와 형체를 구성하죠. 이게 가능한 이유는, 던전 안팎에서 발생하는 마력차 때문인데...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는 아타르를 보며, 덩케르크는 눈을 껌뻑였다.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네.'

아타르도 그런 덩케르크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자신의 미간을 짚었다.

-하아, 대화상대가 누구인지 잠시 망각했군요. 신성한 아카데미에서 학우들 금품이나 갈취하다가 퇴출당한 빈민가 출신이, 이런 얘길 알아들을 리 없죠.

-...죄송합니다. 어쨌든 도어맨을 파훼할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뭐. 가동 원리가 단단한 만큼, 파훼법도 간단합니다.

아타르가 검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끌어내세요. 마력을 공급받지 못하게.

다시 아라크네 던전으로 향한 덩케르크는, 부하들을 시켜 도어맨에게 돌을 던지도록 지시했다.

부하들은 의문을 가지면서도 지속적으로 도어맨에게 돌을 던졌고.

지속적인 공격을 받은 도어맨이 조금씩 출입구를 벗어난 끝에.

-쿠웅!

그 자리에서 쓰러지더니, 퍼석퍼석한 먼지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현재.

"그런데 이 쥐새끼 같은 놈들! 대체 어디까지 기어들어 간 거야?"

한몸에 부하들의 존경을 받은 덩케르크는, 한껏 의기양양해져서 던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리 가도 일랜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퍽!

무언가가 덩케르크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그는 흠칫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응?"

"왜 그러십니까, 형님?"

"...뭐지. 분명 뭔가 부딪친 것 같았는데."

"여긴 우리들밖에 없는데요?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아라크네 던전 내부는 다소 어둡긴 했지만.

시야가 다소 제한될 뿐, 내벽에서 흐르는 자연광으로 사물식별은 가능했다.

그렇기에 덩케르크 패거리가 있는 통로에, 다른 사람이나 또는 몬스터가 없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분 탓인가.'

찜찜한 기분을 느끼는 그때.

"형님! 여기 이런 게 떨어져 있습니다!"

부하 하나가 땅에 있던 도끼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걸 본 덩케르크의 눈이 반짝였다.

"그년의 것이다! 보나 마나 이걸 챙길 겨를도 없이, 안으로 줄행랑을 친 거겠지."

"그, 그런데 형님. 여긴 던전이잖습니까? 오는 길에도 몬스터들 시체가 쫙 깔려있는 걸 봤는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바보들! 이깟 거미 새끼들이 뭐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공방에 처박혀있던 대장장이랑, 온실 속 망나니도 잡는 몬스터라고!"

도망자 단둘이서도 능히 해치우는 몬스터를.

덩케르크를 비롯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못 당할 리는 없었다.

실제로 이중에는 돌거미를 사냥해본 이들도 제법 섞여 있었다.

"하, 하긴! 생각해보니 형님은 악마까지 물리치셨는데. 괜한 걱정을 했군요."

"크흠흠! 잡담은 이쯤하고 다들 서둘러! 먹잇감이 바로 코앞이다!"

"알겠습니다!"

덩케르크 패거리가 우르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스르륵.

덩케르크와 부딪쳤던 일랜이 그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이 두른 나이트 윙을 만지작거리며 놀라워했다.

'나를 전혀 보지 못한 건가? 이거 효과 한번 끝내주잖아!'

덩케르크 패거리가 도어맨을 돌파한 건 뜻밖의 일이었지만.

오히려 이 상황을 유리하게 끌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일랜이 입꼬리를 당겼다.

"이거, 어쩌면 수고를 덜겠는걸?"

26화. 아라크네의 심장

덩케르크에게는 꿈이 있었다.

최대한 많은 돈을 끌어모아 떵떵거리며 사는 것.

그렇기 위해, 이미 떵떵거리며 사는 있는 놈들 주머니를 털며 살았다.

'그야 난 힘이 있으니까! 약육강식이 이 세상 논리라고 하잖아?'

특히 레드팽 아카데미에는 있는 집 자식들이 많았다. 그야말로 황금 텃밭.

그렇기에 청마반 소속이었던 덩케르크는 새해 학기 초부터 사냥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백사반의 일랜 키스폰과 혈룡반의 일레나 키스폰! 다들 큰 박수로 맞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올해 첫 사냥감 후보가 대강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바로 키스폰 가문의 일랜과, 일레나. 심지어 그들은 총장의 편애를 받기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덩케르크는 그들이 아니꼬웠다.

-참나! 잘났네, 잘났어. 학연, 지연보다 좋은 게 돈지랄연이라더니.

덩케르크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키스폰의 자제를 헐뜯었다.

그 대상이 여학생이라면 그것만큼 뜯는 맛도 좋은 게 없다.

-소문 못 들었어? 일레나 키스폰은 키스폰 가주가 혈룡길드에서 데려온 양녀잖아.

-크큭! 말이 좋아, 양녀지. 사실은 가주가 후손을 '생산'하고 싶어서 돈 주고 사 온 창...

덩케르크가 신나서 떠들어대는 그때.

짜악!

어릴 적, 아버지한테 학대당한 이후 처음이었다.

다른 누군가한테 따귀를 맞는 경험은.

-어이쿠, 실수! 벌레를 잡는다는 게, 손이 빗나갔네.

일랜 키스폰.

그는 황당해하는 덩케르크를 상대로 위협적인 협박을 날렸다.

-그래, 돈지랄연. 우리 괴물 같은 할아범이 모아온 돈이라면, 그깟 땅 따위. 겨우 몸을 비집고 뉠 수 있는 네놈의 집 같은 거 우습게 뺏을 수 있거든?

비로소 깨달았다.

있는 집 자식 중에서도 키스폰 가문은 차원이 다르다는 걸.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되려 잡아먹히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놈 밑에 들어가는 게 나으려나? 콩고물이 떨어질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생각하려던 찰나.

뻐억!

다른 청마반 학생이 날린 주먹에, 일랜은 맥없이 나자빠졌고.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나는 일랜을 보고 실망한 덩케르크는, 다른 물주를 찾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물주를 찾기란 쉽지 않았고, 결국 다시 약자들의 주머니를 털던 끝에 퇴학 처분을 당해버렸다.

'X발, 개 같은 인생!'

술독에 빠져 비명횡사한 아버지처럼.

그 역시 술을 진탕 마시고 골목길에서 패싸움을 벌이던 어느 날.

-덩치에 걸맞게 힘깨나 쓰는군. 어떤가? 내 아들 밑에서 일해보는 건?

마침 그곳을 지나치던 타이언 가주가 은밀히 제안을 해왔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덩케르크는 아타르의 개가 되었다.

-좋습니다.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돈뿐만 아니라, 복학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죠.

-저, 정말입니까?! 뭐든 시켜만 주십쇼! 제가 할 일이라는 게 뭡니까?

-간단해요. 한 몰락가문을 소리소문없이 치워주면 됩니다.

디바 챈달.

그녀만 해치운다면 덩케르크는 복학한다.

뿐만 아니라, 부하들의 목숨값으로 돈까지 두둑이 챙길 수 있다.

'히힛! 이 덩케르크 님의 인생도 다시 시작이다!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나면, 난 돈방석에 앉는 거라고!'

복학하면 보다 조직적으로 학생들을 갈취할 생각이다.

총학생회장이라는 뒷배경까지 있으니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인생 제2막. 바야흐로 황금 텃밭이 다시 펼쳐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

그리고 현재.

덩케르크는 멍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먹잇감을 찾아 달려온 아라크네 던전 보스룸.

그 널찍한 괴물들의 둥지에는, 부하들의 비명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그들을 공격한 건 예상했던 대로 거미 몬스터.

다만, 돌거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몸집이 비대했다.

상체는 여성의 모습을 띠고 있었으나, 입은 귀까지 찢어져 있었고.

하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거미의 육중한 다리들이 제각각으로 놀았다.

낄르르르르르르르!

귀신거미.

놈들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입으로 거미줄을 토해냈고.

거기 맞은 부하들은 순식간에 제압당하거나, 끌려가기 일쑤였다.

"덩치 형님! 어떻게 좀 해봐요?!"

돌거미 정도나 예상했던 덩케르크 패거리는 당황하면서도 놈들과 전투를 벌였다.

당혹스럽기는 덩케르크도 마찬가지였다.

'아타르, 이 개새끼가! 이런 얘긴 없었잖아?! 귀신거미는 해봐야 한 놈이라며?!'

그 역시 귀신거미가 있는 줄은 알았다. 덩케르크를 사주한 아타르가 정보를 알려줬으니까.

하지만 예상을 깨고 놈들은 얼핏 봐도 그 수가 대여섯 마리를 넘는다.

한둘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 수는 덩케르크 패거리에게 무리였다.

"처, 철수! 철수한다!"

"예? 우리 사냥감들은 어쩌고요?!"

"빌어먹을 자식아! 그 새끼들이 알아서 사지에 들어왔는데, 살아있겠냐?!"

덩케르크의 말에, 부하 하나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형님! 저길 보십시오!"

바빠죽겠는데 자꾸 부하들이 태클을 걸자 짜증이 치민다.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던 덩케르크의 눈이 커졌다.

'어?'

여기저기 얽히고설켜 있는 거미줄.

철사처럼 퍼져 있는 그 그물망은 천장과 이어져 있었고.

딱 봐도 사람인 듯한 형체들이 고치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게 보였다.

문제는 그중 하나가 그들이 찾던 먹잇감 중 하나, 디바 챈달이라는 점.

그녀는 다른 고치들과는 달리, 반쯤만 포박 된 상태였다. 거미줄에 매달려 있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지상에서 1미터도 채 안 떨어져 있잖아? 혹시 우리가 나타난 바람에, 녀석을 옮기다가 만 건가?'

디바는 눈을 감은 채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하긴 했지만, 숨이 붙어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X발? 왜 살아있고 지랄인 건데!"

"그럼 이제 어떻게 합니까, 형님?"

"어떡하긴 뭘 어떡해?!"

덩케르크가 역정을 내며 검을 휘둘렀다.

텅!

날아들던 거미줄을 튕겨낸 덩케르크.

그는 악을 쓰고 소리 질렀다.

"당장 저년 목을 베어와! 일단 눈에 띈 이상, 머리라도 가져간다!"

"지, 진심입니까? 그럼 일랜 키스폰은...?"

"썅! 어떤 놈이 자꾸 내 말에 토를 다는 거야?!"

사실 먹잇감들이 여기서 귀신거미들한테 당했다고 보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디바를 발견하자 덩케르크는 욕심이 생겼다.

'아타르 그놈은 수급에 집착했지. 그렇다면 이걸로 흥정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일랜 키스폰이야 귀신거미들이 먹어치웠다고 보고하면 그만.

애초에 우선순위에 있었던 디바의 수급을 가져가면, 더 큰 돈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뭣들하고 있어?!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으면, 당장 저년 머릴 가져와!"

* * *

나는 난장판이 돼버린 보스룸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악을 쓰며 전투를 벌이는 괴한들.

입에서 거미줄을 토해내는 귀신거미들.

그리고...

'뭐야. 아직 살아 있었네?'

길쭉한 거미줄에 묶인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디바.

간혹 그녀가 움찔거리는 걸 보니, 살아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 귀신거미 알은 어디에...?'

희한한 일이다.

이 널찍한 공간을 아무리 둘러봐도.

알은커녕, 새알 비슷한 물체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산란기가 아닌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알이 없다는 건... 어라?'

무심코 고개를 들던 내 시야에 천장이 들어왔다.

거대한 모빌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인간 고치들.

그것들이 분포가 집중된 곳에는 종유석 같은 덩어리가 자라나 있었다.

그걸 자세히 관찰해보니, 주먹만 한 구슬들이 빼곡하게 들러 붙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거다!'

귀신거미 알.

딱 봐도 수백 개는 되어 보인다.

문제는 지상과도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어떻게 그걸 챙겨가느냐 하는 건데.

"하아, 진짜. 산 넘어 산이네."

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벨, 그 영감탱이는 일레나한테 저런 걸 채집하라고 했단 말이지? 고약한 노인네 같으니. 암만 다른 의도가 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심부름을 시켰어야... 어?"

문득 눈에 띄는 내 손목의 토시.

거기에 달린 갈고리들을 보자, 정신이 번쩍 뜨였다.

"섀도우 암! 이게 있었잖아?! 이거라면 천장에 갈고리를 박아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핫, 열람!"

촤락!

[설정 열람 : 도구]

- 이름 : 섀도우 암(C급)

- 종류 : 암기

- 설명 : 데스 웜의 힘줄로 제작된 아이템. 땅에 주먹을 꽂으면, 타깃의 밑에서 갈고리가 튀어나와 공격할 수 있다. 특정 지형지물을 겨냥하면 수축과 팽창을 이용해 사용자를 이동시키는 것 또한 가능하다.

- 횟수 : 2번 (횟수 소진 시 효과 소멸)

올라가던 내 입꼬리가 그대로 경직되었다.

'두 번...? 스무 번도, 열두 번도 아닌 두 번이라고?'

...지난번 추락하는 공포와 전투를 치르면서, 섀도우 암을 남발하기는 했었지.

아니 그래도 하필 이런 상황에서 고작 두 번이라니, 너무 하잖아?!

도구 열람으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더 난감해질 뻔했다.

"까짓거. 한 방에 성공시키지, 뭐."

이래봬도 섀도우 암을 다룬 데에는 나름 자신 있었다.

한때 폭주 상태에 빠진 루인 손에 청마검을 쥐여 주기도 했으니까.

'가라! 섀도우 암!'

기세 좋게 주먹을 쥔 순간.

촤확!

세 개의 갈고리가 펼쳐지며 천장으로 쏘아졌다.

그리고는 매달려 있던 고치에 콱 박히더니, 그대로 수축하기 시작했다.

후두둑!

순간, 힘을 이기지 못한 거미줄이 끊어지더니.

인간 고치가 그대로 끌려와 땅에 처박힌다.

푸항!

갈고리가 박힌 거미줄 덩어리 사이로 붉은 살점과 체액이 나온다.

추락의 여파로 고치 안에 있던 사람의 얼굴이 삐져나왔다.

"끄으으으..."

얼마나 갇혀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초췌한 몰골.

가위 독 때문인지, 떨어진 충격 탓인지 고통스러운 표정이다.

'...죄송합니다.'

이제 섀도우 암을 사용할 기회가 한 번뿐.

이번에는 기필코...?!

쿵!

순간 내 주변에 드리워진 그림자.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자, 웬 여성의 얼굴이 보인다.

치렁치렁한 보랏빛 머리칼에 여과 없이 드러난 상체의 굴곡.

낄르르르르르르르르!

귀신거미의 입이 귀까지 찢어지면서, 날카로운 송곳니들이 나타났다.

"뭐, 뭐야. 내가 보이는 건가?!"

바로 코앞에 마주하고서야, 녀석의 눈이 한 쌍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머리칼에 가려진 이마 위로 두 쌍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키하아아아아아아!"

놈이 거미줄을 토해낸 것과 동시에 내 몸이 휙 떠오른다.

간발의 차이로 쏘아진 섀도우 암이 나를 끌어올렸다.

촤하아아악!

녀석의 토사물은 애꿎은 땅만 때렸고.

타깃을 놓친 귀신거미가 화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십 년 감수했네! 저 녀석, 야간 은신에 대한 면역 스킬이라도 있는 건가?'

명색이 이 던전의 보스급인 데다가.

하필이면 동굴에 서식하는 거미류 몬스터인 만큼, 불가능하지도 않겠지.

나 역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면서도, 갈고리가 어디에 박혀있는지 확인했다.

'!'

놀랍게도, 위기의 순간에 쏘아낸 갈고리는 천장.

그것도 거미 알이 밀집되어 있는 기둥에 박혀있었다!

"좋았어! 이제 알만 챙기면...!"

낄르르르르르르르르!

내 환호성은 섬뜩한 포효에 파묻혔다.

나를 놓쳤던 보라색 거미가 미친 듯이 울어댔고.

그게 일종의 신호라도 되는 건지, 다른 녀석들까지 행동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낄르르르르!

낄르, 낄르르르르!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내가 기둥에 도착하자마자, 귀신거미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벽을 타거나, 거미줄을 달리거나. 또는 내 주변에 거미줄을 쏘아 오를 준비를 한다.

'...아니, 왜 나한테만 지랄인 건데?!'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매달린 기둥에는, 놈들이 애지중지하는 알들이 붙어있거든.

이렇게까지 된 이상, 나이트 윙을 계속 사용할 필요도 없어진다. 섀도우 암과 같은 소모품이니까.

"엇?!"

내가 망토를 거두자, 아래에 있던 괴한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 일랜! 일랜 키스폰이다!"

"뭐?! 진짜네! 저 녀석, 어느 틈에 저길...?!"

"설마! 저놈은 악마의 날개라도 사용하는 건가!"

그놈의 악마 타령은.

단단히 나사 빠진 그들을 보며 허탈하게 웃는 그때.

띠링!

[마석 '아라크네의 심장'을 감지하였습니다.]

[마석 '아라크네의 심장'의 정수 흡수를 시작합니다.]

▶ 충전 : 15%

▶ 충전 : 18%

▶ 충전 : 24%

▶ 충전 : 33%...

무서우리만큼 빠르게 올라가는 숫자들.

난 크게 뜬 눈으로 내가 붙잡은 기둥을 쳐다봤다.

"이거... 던전 하트였어?"

27화. 키스폰의 악귀가 힘을 숨김

마혈.

그건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의 핵심 설정 중 하나다.

원작에서 마혈은 일종의 혈관처럼 세계 곳곳에 흐르고 있고. 그 성질에 따라 철(鐵), 풍(風), 법(法), 성(聖) 등의 종류로 나뉘게 된다.

'레드팽 아카데미 역시 철마혈과 법마혈의 교차점인, 철법혈 위에 지어졌다는 설정이었지.'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성질이 명확한 마혈의 구분이고.

상당수 마혈은 정제되지 않거나, 또는 아무런 성질도 없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그런 마혈이 순환하지 못하고 특정 지점에서 고여버리는 때가 있는데. 그것이 심화되면 지형지물을 변이시키며, 마석이라는 결정체를 구성하게 된다.

'그 마석이 엄청나게 커지면, 이런 던전 하트가 되기도 하는 거고.'

난 아라크네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던전 하트를 쳐다봤다.

던전 하트는 거대한 마석이자, 던전을 구성하는 핵심 원동력.

그만큼 상당한 마나가 축적되어 있었는지, 거미알이 따닥따닥 붙어있었는데도 밝은 빛을 뿜어냈다.

사하아아아아아!

아라크네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푸른 빛 입자들은, 허리에 찬 백사검으로 모여드는 중이었다.

검집에서 칼을 뽑지도 않았는데 마나 차징이 전개됐다는 건.

그 정도로 던전 하트의 힘이 굉장하다는 방증일 테지.

'참!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냐. 일단 알 채집부터...'

난 미리 챙겨온 가방을 꺼내서 부리나케 귀신거미 알을 뜯어 담기 시작했다.

키른 교관이 약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양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부족한 것보다는 많은 편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낄르르르르르르르!

하지만 시간이 내게 허락하지 않는다.

때마침 귀신거미 하나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접근하는 게 보였다.

"갈 땐 가더라도 하나만 더 담자!"

가방이 제법 두둑해졌을 때쯤, 난 다시 지상으로 도망치기 위해 섀도우 암을 팽창시키려 했다.

파사삭!

그때, 손목에 달린 토시가 분해되면서.

던전 하트와 나를 잇던 매개체가 사라져버렸다.

'어라?'

아라크네의 심장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그 순간이 느리게 느껴진다.

어떻게든 추락하지 않으려고 던전 하트를 향해 뻗은 내 손.

지척까지 달려와 내게 다리를 휘두르는 귀신거미.

그리고 떠오르는 메시지.

띠링!

▶ 충전 : 100%

[마나 차징이 완료되었습니다!]

[백사검이 활성화됩니다!]

그건 본능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칼을 뽑은 건.

스르르으응!

모습을 드러낸 길쭉한 검날.

백사검은 격동하고 있었다. 하얀빛이 검에서 솟아난다.

'오러?'

키른 교관 말로는 붉은빛이라고 했는데.

광화했을 때와는 다른 백색 오러가 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낄르르르르르르!

귀신거미의 송곳 달린 다리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나 역시 허공에서 몸을 비튼다. 밝게 빛나는 백사검을 그대로 휘둘렀다.

스- 컹!

귀신거미가 포효한다. 다리의 잘린 단면에서 체액이 뿜어져 나왔다.

핏방울은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내 눈앞을 스쳤다.

'시간이 느려진 건가? 아냐, 이건...'

감각이 예민해졌다.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게 보였고.

몸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져서, 떠다니는 깃털도 밟아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촤아아아아악!

다른 귀신거미가 쏘아낸 거미줄.

난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피한 다음 발을 디뎠다.

팽창하는 거미줄 위를 밟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놈을 향해 돌진한다.

낄르르르르르?!

아직 거미줄을 다 토해내지도 못한 귀신거미가 눈을 크게 뜬다.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는 나를 보고 황급히 거미줄을 끊으려 했지만.

[백사검술 제일식(白蛇劍術 第一式)]

난 이미 머릿속에 떠오르는 검궤를 따라.

[사행출검(蛇行出劍)]

검을 내질렀다.

푸화아악!

* * *

몇 분 전.

"어? 녀석들이 갑자기 물러가는데요?!"

덩케르크 패거리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들을 포위하던 귀신거미들이, 일순간 공격을 멈췄고.

뿐만 아니라 부리나케 사방으로 퍼지더니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저 녀석들. 설마 우리한테 겁이라도 먹은 건가?"

"이것도 덩치형님이 하신 겁니까?"

영문을 몰랐던 부하들이 덩케르크를 쳐다본다.

최대한 구석에서 도망만 치던 덩케르크는, 돌연 집중되는 시선에 어깨를 쫙 폈다.

"어, 어?! 그, 그야 당연하지!"

"과연! 역시 형님이십니다! 악마를 물리친 것도 모자라, 이젠 귀신거미까지...!"

부하들이 감탄하며 그를 치켜세웠지만.

정작 이유를 모르는 건 덩케르크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잘 됐어! 이 틈에 디바 챈달의 수급을...?'

그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그때.

"이, 일랜! 일랜 키스폰이다!"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부하들은 하나 같이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뭔가 싶어서 그들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올리던 덩케르크는 눈을 의심했다.

'뭐야. 어떻게 놈이 저기에 있는 거지?!'

지상에서는 한참 떨어져 있는 던전 천장.

누가 봐도 던전 하트로 보이는 기둥에 일랜이 매달려 있었다.

마치 귀신거미들을 상대로 몸부림치는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뭐?! 진짜네! 저 녀석, 어느 틈에 저길...?!"

"설마! 저놈은 악마의 날개라도 사용하는 건가!"

악마의 날개라고?

그 말에 덩케르크는 섬뜩해졌다.

아카데미에서 퇴출당한 덩케르크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이미 일랜 키스폰의 악명은 자자하다.

'자길 거역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카데미를 공격한 미치광이! 심지어 악마까지 소환할 정도로 사악한 키스폰의 태생...!'

그런 악당이 지금은 덩케르크 패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싸늘한 미소와 함께.

'저 녀석,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혹시 간계라도 꾸미고 있는 건가?!'

돌이켜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애초에 덩케르크의 타깃인 디바 챈달과는 무슨 연유로 동행하고 있으며.

그들이 쫓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영지 외곽에 자리한 던전까지 찾아왔다.

'가만! 이거 설마 함정인가?'

순간 천장에 달린 던전 하트가 눈에 들어온다.

방금까지도 환한 빛을 뿜고 있던 마석이, 현저하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던전을 구동하는 핵심 장치인 던전 하트가 힘을 잃으면, 던전은 무너지기 마련.

"미, 미친?!"

덩케르크가 기겁하자, 부하들은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봤다.

"...형님? 갑자기 또 왜 그러십니까?"

"바보들아!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야?! 어물쩍거리고 있다간, 여기서 생매장 당하게 생겼다고!"

그렇다.

일랜 키스폰은 이들을 던전과 함께 매장시킬 계획이었다.

디바 챈달을 미끼삼아 던전 깊숙이 유도한 다음, 이곳을 무너뜨릴 작정.

"이익!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혀, 형님?!"

덩케르크는 멍청하게 서 있는 부하들을 지나쳐, 디바에게 달려갔다.

그녀를 매달고 있는 거미줄을 손수 끊고 어깨에 걸쳐 멘다.

'여기서 살아나가더라도, 놈은 끝까지 우릴 쫓아오겠지. 그렇다면 이 년을 인질로 삼는 수밖에!'

일랜 키스폰과 디바 챈달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같이 다니는 걸 보면 그녀가 일랜에게 어떤 소용이 있는 게 확실하다.

그렇게 판단한 덩케르크가 몸을 돌리는 순간.

처퍼더덕!

시커먼 것들이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는 물론, 주변에 있던 부하들 역시 화들짝 놀랐다.

"히익!"

"귀, 귀신거미?!"

"하지만 이건, 뒈진 것 같은데! 그런데 누가...?"

덩케르크 패거리의 시선은 자연히 다시 위를 향했다.

그리고는 입을 쩍 벌렸다.

"뭐...?"

그곳에는 일랜이 있었다.

정확히는 귀신거미를 가르는 악마가 있었다.

양분되는 괴물의 사체 사이로, 일랜의 안광이 서늘하게 빛난다.

촤하아아아아아악!

몬스터들은 여기저기서 덤벼들고 있었다. 몸집에 맞지 않게, 이름 그대로 귀신같이 민첩한 몸놀림.

낄르르르르르!

일랜은 놈들 사이를 누볐다.

방사형으로 퍼진 거미줄을 아무렇지 않게 달리며.

우우우우웅!

빛나는 검을 뒤로 당긴다.

하지만 무려 넷씩이나 되는 귀신거미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좋아! 놈들까지 해치우기엔 늦었어!'

지켜보던 덩케르크가 애써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하핫! 암만 천하의 일랜 키스폰이라고 해도, 저 정도의 수는...?!'

콰과과광!

포성에 가까운 굉음에 부하들은 귀를 막고 움츠렸다.

하지만 덩케르크는 볼 수 있었다. 던전 내벽 곳곳이 박살 나는걸.

마치 공성추로 때린 듯한 그 균열은, 귀신거미의 숫자와 동일한 4개였다.

그리고.

퐈화화화화화화확!

뒤늦게 놈들 몸에서 체액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피 분수는 귀신거미 뒤에 있던 균열을 그대로 적셨고.

깨끗하게 잘려나간 괴물들의 파편이 힘없이 허공을 부유했다.

'이, 이럴 수가! 그 짧은 시간에 네 번의 검격이라니? 심지어 그 충격파가 뒤쪽 벽을 부술 정도라고?!'

덩케르크는 악몽을 꾸는 기분이다.

여러 토막으로 분리된 채 사방에 떨어지는 시체들.

덩케르크 패거리가 단 한 놈한테도 쩔쩔맸던 보스급 괴물들이 모두 죽음을 맞았다.

저벅!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덩케르크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부하들도 그의 뒤를 보고 얼굴이 파랗게 질린 걸 보면, 누가 뒤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레드팽 아카데미의 대악마, 일랜 키스폰...!'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무려 대악마 급으로 승격된 일랜 키스폰이, 덩케르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귀신거미들을 도륙한 검을 손에 쥔 채.

우우우웅!

아래로 비스듬히 늘어뜨린 검에서는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고.

그걸 본 덩케르크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오, 오러? 일랜 키스폰이 오러 유저였다고?! 그럴 리가! 그런 건 금시초문이라고...!'

오러는 소드맨 클래스 중에서도 최소 소드 익스퍼트 급 이상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검기.

그렇다는 건 눈앞의 일랜 키스폰이 단순히 가문의 배경만 믿고 설치는 부류가 아니라는 뜻.

다시 말해 이 간악한 악당은 지금까지 자기 힘을 숨기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아."

때마침 일랜도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서늘하게 빛나던 오러가 희미해지다가 사라진다.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의미인가?!'

등이 축축해진 덩케르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렸다.

함께 이 광경을 지켜보던 부하들 역시 무기를 세워보지만, 떨림은 감추지 못했다.

달달달달!

이렇게 된 이상, 덩케르크는 디바 챈달을 바로 협상에 써먹기로 했다.

"이, 일랜 키스폰! 이 녀석을 살리고 싶겠지?! 살리고 싶다면 우리를 보내다오!"

"...뭐?"

일랜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미묘한 반응이 덩케르크를 더 환장하게 만들었다.

'사실 이년의 목숨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건가? 아니면 우릴 보내줄 생각이 없다는 뜻인가?!'

그때.

구구궁!

갑자기 주변이 흔들리면서 내벽 일부가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부하들이 아연실색하는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더, 던전이?!"

"무너진다! 던전 하트가 힘을 잃는 바람에, 던전이 붕괴되기 시작했어?!"

이대로라면 협상이고 뭐고 다 같이 여기서 깔려죽을 판.

덩케르크는 잇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카악, 모르겠다! 애초에 아타르, 그놈을 따르는 게 아니었는데!"

"혀, 형님?!"

디바를 걸친 그가 전력으로 도망치자, 부하들도 얼른 뒤따라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헉, 헉, 헉!

올 때는 그리 힘들지 않았는데.

나갈 때는 왜 이리도 숨이 가쁜 것일까.

그건 체력이 떨어져서도, 데리고 있는 디바가 무거워서도 아니었다.

'사, 살려줘! 누가 나 좀 살려달라고!'

던전은 무너지고, 끔찍한 악마가 그들을 노리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지만, 덩케르크는 달려야만 했다.

'그나저나 일랜 키스폰, 그놈은 우리보다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거 아닌가? 악마의 날개도 달린 놈이니, 여차하면 우릴 앞질러 날아가서, 미리 퇴로를 막을 수도 있을 텐데.'

정신없이 질주하던 덩케르크가 의아해하며 뒤를 살폈다.

그러자 손만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에서, 일래 키스폰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쫓아오는 게 보였다.

"흐, 흐아아아악?!"

하마터면 혼절할 뻔했지만 다행히도 다리는 움직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덩케르크가 전력 질주했다.

'유린이다! 놈은 우리를 유린하고 있는 거야!'

보다 손쉽게 덩케르크 패거리를 학살할 수 있음에도.

일랜 키스폰은 굳이 그들을 뒤쫓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게 더 재미있으니까. 공포에 서서히 먹혀가는 인간들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놈이니까.

'새, 생각 이상이야! 놈은 내가 아는 그 어떤 놈들보다 더 교활한 악귀, 그 자체다!'

물론 일랜이 알면 환장할 이야기였다.

28화. 목숨만은 제발?!

탓!

귀신거미들을 쓰러뜨린 직후.

난 거미줄을 타고 안전하게 땅에 착지할 수 있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맹세컨대 난 전생에서 칼은커녕, 주먹다짐 한 번 해보지 않은 모범생이다.

그런데도 전투를 치르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검을 어떻게 다루고.

어떤 방식으로 몸을 움직여야 할지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게, 백사검의 진정한 힘?'

백사검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마력 개방이 필수다.

하지만 내가 빙의한 일랜 키스폰은 마력 개방을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원작에서도 오퍼 블러드라는 광화 주문을 통해 강제로 힘을 끌어냈고.

무리하게 그 상태를 유지하는 바람에 몸이 망가지는 건 물론, 의붓여동생한테 살해당하는 끔찍한 비극을 맞게 된다.

'하지만 이거라면, 내가 사망하는 걸 위장하는 것과 별개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가령...'

저기 내 앞에 모여 있는 괴한들과 싸워야 한다는 상황 말이지!

더군다나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 덩케르크라는 녀석은 기절한 디바를 데리고 있었다.

'아마 나를 보다 효과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인질로 삼은 거겠지. 미안하다, 디바야...'

나 때문에 인질로 전락해버린 그녀한테 미안한 건 둘째 치더라도.

여기서 일랜 키스폰의 똘마니 2호가 사라지거나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내가 세운 계획에 차질이 생길뿐더러, 원작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저놈 너무 무섭게 생겼잖아. 나보다 강한 거 아냐?'

덩케르크는 딱 봐도 우람한 몸집에, 눈까지 크게 뜨고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어디서 저런 녀석이 나타난 건지는 몰라도, 분위기만 본다면 만만찮은 상대일 것 같다.

'괘, 괜찮아! 나한텐 백사검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해볼 만...!'

띠링!

▶ 충전 : 0%

[백사검이 비활성화됩니다!]

피시시식….

"아."

X 됐다.

하필이면 이럴 때 마나가 바닥났다고?!

난 깊은 절망감을 느끼며, 백사검을 보고 애원했다.

'아니, 제발! 방금까지만 해도 팔팔하게 오러 곧추세우더니, 지금 와서 이러는 건 반칙이잖아?!'

오무룩!

내 호소가 무색하게도, 백사검의 오러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그 영향 탓인지 활기가 넘쳤던 내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일랜 키스폰!"

하마터면 '예?!'하고 대답할 뻔한 걸 간신히 삼킨다.

고개를 들자 덩케르크는 예상대로, 나한테 협박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을 살리고 싶겠지?! 살리고 싶다면 우리를 보내다오!"

"...뭐?"

잘못 들었나?

'살리고 싶으면 무기 버리고 투항해라.'를 잘못 얘기한 건가?

잠시 그의 말을 곱씹던 난, 뒤늦게서야 덩케르크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 목적지가 빠진 거였어! 놈들은 자기들을 키스폰 저택으로 들여보내 달라는 거야!'

일전에도 이런 놈들이 키스폰 저택을 습격했었다.

아마도 나, 또는 하벨을 노리고 암습을 강한 것이겠지.

하지만 눈치 빠른 하벨은 적들이 침입하기도 전에 그들을 쓸어버렸다.

'젠장! 이거 골치 아프게 됐는데.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서 하벨까지 처치할 계획이란 거잖아?'

녀석들이 하벨한테 상대가 될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디바를 구하기도 전에 내가 죽게 생겼다.

'이렇게 된 이상, 그걸 사용하는 수밖에.'

내가 나이트 윙을 몸에 두르려는 그때.

구구궁!

웬 지진이 일어나더니, 던전 잔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물론, 협박하던 적들도 혼란에 빠진 듯하다.

"무너진다! 던전 하트가 힘을 잃는 바람에, 던전이 붕괴되기 시작했어?!"

아?

그거 혹시 나 때문인가?

그냥 정수만 흡수할 생각이었는데, 아라크네의 심장이 힘을 잃었다고?!

'더 X됐다!'

던전은 무너지고, 앞에는 적들이 포진해있다.

그야말로 1번 사망, 2번도 사망이라는 최악의 상황!

이젠 나이트 윙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오퍼블러드를 사용해야 할지도...?!

"카악, 모르겠다!"

돌연, 덩케르크가 뒤돌아서더니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아타르, 그놈을 따르는 게 아니었는데!"

아타르? 그게 누군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변수가 발생한 건 분명하다.

그 변수를 만든 게 아타르라면, 아타르 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타닷!

나 역시 그 자리를 벗어나 뛰었다.

덩케르크 패거리와 거리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나 혼자 죽을까 봐 덜컥 겁이 난다.

'가, 같이 가...!'

죽을힘을 다해 달리자, 기척을 느꼈는지 덩케르크가 나를 힐끔 돌아본다.

"흐, 흐아아아아악?!"

왜? 또 뭔데?!

아직 남아있는 귀신거미가 쫓아오나 싶어, 난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균열이 갈 대로 간 천장이 폭삭 주저앉는 게 시야를 채웠다.

콰과광!

"히익?!"

나보다 큰 바위가 바로 등 뒤를 스쳤다.

덩케르크조차 겁을 먹을 만큼, 던전 붕괴는 재앙 그 자체.

심지어 그게 트리거가 됐는지 놈은 더 속도를 내더니, 더 빠르게 달려 나갔다.

'뭐야, 저 녀석?! 지금까지 저런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

만약 던전 붕괴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덩케르크와 정면 대결을 벌였더라면.

아마 난 미처 녀석의 기량도 파악하지 못하고,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

쿠구구구구구!

물론,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

난 여기저기 떨어지는 잔해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뛰었고.

던전 입구가 사정없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몸을 힘껏 내던졌다.

꽈과아아아앙!

대지를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매캐한 돌 먼지가 사방을 뒤덮는다.

'사, 살았다...?'

폐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뇌리를 뒤흔들었지만.

다행히도 붕괴하는 던전에서 목숨을 건지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열심히 채집해온 귀신거미 알이 든 가방도 무사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똘마니 2호 디바 챈달과, 그녀를 데리고 있는 덩케르크 패거리.

다행인지 불행인지, 먼지구름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게 걷히면, 놈들이 곧장 공격해오겠지.

'정면 승부는 피해야 해.'

그렇게 판단한 내가 나이트 윙을 둘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지금이라면, 디바를 은밀히 구출할 수 있을지도...!

"...형님!"

서서히 걷혀가는 먼지구름 사이로, 놈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덩치 형님, 괜찮으십니까?!"

"켈록, 켈록! 빌어먹을, 십 년 감수했네! 다들 어디에 있어?!"

"여깁니다, 형님! 보이십니까?!"

마침내 시야가 트이면서, 덩케르크 패거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저마다 숨을 고르고 있었고. 서로를 찾는 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제법 수가 줄었잖아. 해봐야 예닐곱?'

한눈에 봐도 놈들 숫자는 절반 이상 줄어들어 있었다.

덩케르크도 그걸 알아챈 듯 황급히 소리쳤다.

"멍청한 놈들아! 당장 내 주변으로 모여!"

제기랄, 이 녀석. 똑똑하잖아?

놈은 남은 부하들을 재빨리 모아 서로 등을 맞대게 했다.

"형님...? 일랜 키스폰은 안 보이는데. 아마 던전에 깔려 죽은 게..."

"그렇게 당하고도 몰라?! 절대 죽지 않았다! 분명 우릴 지켜보고 있을 거야!"

놀라우리만큼 상황을 꿰뚫어 본 덩케르크.

그는 데리고 있던 디바를 땅에 눕히더니 칼을 뽑았다.

스르르응!

제기랄, 역시 인질로 삼을 작정이야?!

나이트 윙을 두른 덕분에 놈들은 나를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저렇게 사방을 경계하며 모여 있는 탓에, 디바를 함부로 빼돌리기도 힘들다.

휘익!

갑자기 덩케르크가 칼을 던졌다. 그건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고.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난 기겁하며 그걸 피해냈다.

'뭐, 뭐야?! 저 녀석도 내가 보이는 거야?!'

그게 신호였는지.

휘휘휙!

다른 놈들까지 날붙이를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일으키며 날아드는 흉기들!

난 스프레이에 쫓기는 파리처럼 그걸 피해 폴짝폴짝 뛰었다.

'썅! 나이트 윙도 통하지 않는다고?!'

이렇게 된다면 답이 없다.

디바를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내 목숨이 위태로워진 상황.

'디바한테는 미안하지만, 차라리 다음을 기약하자. 지금은 내 한 몸부터 간수하는 수밖에....'

내가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나려는 순간.

털썩!

뭔가 풀밭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흠칫하며 고개를 돌리던 난 눈을 의심해야 했다.

"저, 저희는 그저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놀랍게도 덩케르크는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새, 다른 녀석들까지 뒤따라 무릎을 꿇고 있는 상황.

이 자식들 왜 이러는 거지? 공격하다 말고 갑자기 웬 엉뚱한 소리를...?

'가만!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는 건가?'

난 주변을 둘러봤다.

따지면 새벽을 넘은 시각.

그것도 야산에 자리 잡은 던전 앞 공터는 캄캄했다.

그사이에도, 덩케르크는 내가 보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아타르! 아타르 타이언! 그 망할 놈이 모두 시킨 거란 말입니다!"

아타르?

그건 또 누구야.

던전에서도 놈이 그 이름을 얘기한 것 같긴 한데.

내가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덩케르크는 덜덜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이미 한번 경고를 받았는데도, 그걸 망각하고 감히 키스폰한테 덤비다니...!"

경고. 키스폰.

그 두 단어를 조합하던 난 눈을 크게 떴다.

일전에 웬 침입자들이 키스폰 저택을 습격한 일이 있었다.

-너를 해하러 온 놈들이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날 해하다니...?!

하벨은 그 침입자들을 가차 없이 쓸어버렸고.

-일랜. 레드팽의 자제들 뒤에는, 온갖 가문과 세력이 버티고 있다. 그중에는 키스폰을 적대하는 이들도 있지. 정의랍시고 설치는 놈들이 태반이지만,

키스폰을 적대하는 '정의의 세력'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즉, 덩케르크가 말하는 아타르 타이언은 거기에 해당되는 것이고.

그 타이언 가문이 이들을 고용해서 키스폰을 공격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는 건, 경고를 했다는 사람이 혹시...'

난 덩케르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긴 덩굴로 뒤덮인 어둠뿐이었지만, 그곳에 누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하벨 키스폰?! 하지만 어떻게? 아니, 어째서...!'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아는 하벨 키스폰은 혈육에 대한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물.

최근 나에 대한 호감도가 쥐꼬리만큼 오르긴 했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나를 구하러 왔을 리는 만무하다.

-할아범은 왜 챈달을 도왔지?

-쓸모가 있었으니까.

덩케르크가 사로잡은 디바 챈달.

그녀를 떠올리자 모든 퍼즐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디바였구나! 하벨은 디바 챈달 때문에 여길 찾아온 거야!'

역시나 하벨 키스폰.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어디 있든 귀신같이 알고 찾아올 만큼 대단한 악역이다.

'그럼 견학이나 일레나의 심부름은 어떻게 되는 거지?'

던전은 무너졌고, 그러니 일레나를 그곳에 가두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벨이 나섰다는 건, 그만큼 디바가 중요하다는 뜻.

덩케르크도 그걸 알았는지 그녀를 가리키며 호소했다.

"이 녀석은 멀쩡합니다! 그러니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예?!"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나이트 윙으로 숨을 필요가 없어졌다.

퍼얼럭!

망토를 걷으며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덩케르크도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히, 히익...?!"

역시 하벨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일까.

덩케르크는 겁에 질린 눈으로 쳐다만 볼뿐, 공격할 의지는 없어 보였다.

"살려만 주십시오! 시,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하벨한테는 호소가 안 먹힌다고 생각한 걸까.

덩케르크는 땅에 머리를 처박으며 나한테 애원했다.

그사이 난, 아까 덩케르크가 응시한 방향을 곁눈질했다.

하벨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침묵할 뿐, 나서지 않고 있다.

'여기서부턴 나한테 맡긴다는 뜻인가? 하긴, '만악의 근원'씩이나 되는 존재가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

거기까지 판단이 미치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좋아. 살려주지."

"...저, 정말입니까?!"

"물론. 하지만, 조건이 있어."

"무엇이든! 무엇이든 하명만 하십시오, 나리!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덩케르크는 엉금엉금 기어오더니, 내 다리를 붙잡고 소리쳤다.

안 그래도 체력이 떨어진 탓에,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넘어질 뻔했다.

'이 새끼, 힘도 좋네! 덩칫값 하는 건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난.

최대한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뗐다.

"자, 지금부터 너희가 할 일은..."

29화. 파멸의 도미노

던전 견학 하루 전인, 4월 11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키스폰 저택으로 돌아온 난, 가방을 힘겹게 내려놓았다.

쿵!

가방에서 들려온 묵직한 소리는 다시 한번 내게 안도감을 안긴다.

어쨌든 루인한테 필요한 귀신거미 알도 최대한 챙겼으니까.

난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휴대용 메모장을 꺼내 살폈다.

'키스폰 저택의 서재에서 입수한 정보들이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쉽지 않았겠지.'

여기에는 내가 입수한 정보들을 정리해놨다.

던전 위치라거나, 몬스터들의 위험판정 등급 등.

암만 생각해봐도 나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 혼자 던전 갔으면 위험할 뻔했어. 하아! 루인, 그 자식 하나 구하려고 이렇게 뛰어다니게 될 줄이야.'

난 들고 있던 메모장을 책상 위에 팽개친 뒤.

그대로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눈 붙이자.'

* * *

쿵!

일레나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오라버니?'

그의 의붓오빠, 일랜은 오늘까지 휴강 신청을 해둔 상태.

따라서 요 며칠 동안 일레나는 그를 깨우러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옆방에서 문 여닫는 소리가 들려와, 일레나는 의아해졌다.

저벅!

복도로 나오자 여전히 닫혀있는 일랜의 방.

하지만 가만히 문에 귀를 갖다 대자.

부스럭!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어딜 다녀오기라도 한 걸까요? 할아버지께서 알면 노하실 텐데...'

공식적으로 일랜은 휴강을 신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가 아카데미에서 사고를 친 바람에, 하벨이 근신 처분을 내렸다고 일레나는 알고 있다.

"오라버니?"

근래 일랜이 뭘 하며 쏘다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걱정이 된 일레나는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저예요. 잠깐 들어갈게요."

끼이이-

문을 열자 어슴푸레한 방안이 드러난다.

커튼을 적신 새벽빛은 방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고.

아무렇게나 내던진 신발과 흙먼지가 방바닥을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이게 대체...?'

일레나는 조금 놀라며 침대 쪽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일랜이 침상에 쓰러져 있었다.

심지어 외투 여기저기가 찢어진 데다, 얼굴에도 자잘한 생채기가 잡혀있었다.

"오라버니? 이게 무슨...!"

화들짝 놀라며 다가서려던 일레나.

그 순간, 가방 하나가 그녀 발에 부딪혀 툭 쓰러졌다.

데구르르!

'?'

일레나는 그걸 주워들고 살폈다.

눈 뭉치를 닮은 외형에 매끈한 단면.

겉에는 거미줄 같은 게 묻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그녀가 얼마 전 책에서 보았던 것과 일치했다.

"귀신거미... 알...?"

하벨이 일레나에게 채집하라고 지시한 귀신거미 알.

놀랍게도 그게 일랜의 방에서 발견되었다.

'어떻게 된 거죠? 왜 오라버니가 이걸... 응?'

때마침 일랜의 책상 위에 펼쳐진 책과 서류가 시야에 들어온다.

다가가 살피던 일레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장소, 아라크네 던전. 거리, 키스폰 영지 서쪽 방향 약 십여 킬로미터...」

그건 일랜이 정리해놓은 메모였다.

「출현 몬스터는 돌거미(D급), 귀신거미(C급). 귀신거미는 보스급 몬스터」

「보스룸으로 추정되는 장소. 귀신거미 알이 있을 것으로 예상」

「낮에는 보스룸 입구가 거미줄로 막혀있는 것으로 파악」

「귀신거미가 왕래하는 시간에 보스룸 진입???」

던전 맵 끝에는 보스룸이 그려져 있었고.

중요하다는 의미로, 별 여러 개가 강조표시 되어 있었다.

'귀신거미 알이, 보스룸에 있었다고요?

그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아니, 알았다고 하더라도 낮에는 보스룸 진입 불가.

따라서 던전 견학을 떠났다고 한들, 알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오라버니가 서재에 들락거린 걸 본 것 같은데. 하지만 어째서...?'

메모를 넘기던 일레나는 멈칫했다.

거기에는 일랜의 것으로 보이는 코멘트가 달려있었다.

「방법을 찾아 미리 다녀오기. 거사는 4월 10일」

「녀석을 구하려면 귀신거미 알이 필요」

「혼자서 던전에 가는 건 매우 위험」

4월 10일이라면 바로 어제다.

그렇다는 건, 일랜은 전날 아라크네 던전으로 간 것이고.

오늘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키스폰 저택으로 복귀했다는 뜻이 된다.

'구한다는 게, 설마...'

일랜을 돌아보는 일레나의 눈이 커졌다.

'나를, 오라버니가?'

일랜은 미리 던전을 다녀온 것이다.

일레나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도록.

귀신거미 알을 그녀 대신 챙기고자 했다.

일레나 혼자 움직이면 다칠 수 있으니까. 자신이 위험을 무릅썼다.

"아아…."

일레나는 그 메모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품에 끌어안았다.

띠링!

깊이 잠든 일랜은 미처 보지 못했다.

메모장 잉크가 번지면서 떠오른 불길한 메시지를.

* * *

짹짹!

보건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병상의 루인을 비췄다.

그의 눈꺼풀이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킨다.

"으음..."

간신히 눈을 뜨자.

백발을 깔끔하게 벗어 넘긴 교관이 시야에 잡혔다.

"...키른, 교관님?"

"아스달 군. 정신이 드는가?"

"몸에 힘이 없어요. 그런데 여긴...?"

"보건실일세. 며칠 동안 누워있기만 했으니, 힘이 없을 만도 하지."

키른 교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게. 날 찾아온 학생이 있어서 말이야."

그가 자리를 떠났다.

곧 진료실에서 키른 교관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미안하네. 근래 입원한 학생들이 많아져서 말이야.

-괜찮아요, 교관님.

그를 찾아온 건 여학생인 듯했다.

그런데 어쩐지 그 음성이 루인에게는 귀에 익었다.

-괜찮을까요? 혹시 못 깨어나는 건 아닐지....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내가 판단하기로는, 그저 지친 것 같으니까.

-다행이에요. 전 병이라도 난 게 아닌가 해서. 면담 감사해요, 교과님!

-별말씀을. 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게, 키스폰 양.

키스폰 양?

그 말을 들은 루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때마침 키른 교관이 돌아오고 있었고, 루인은 힘겹게 입을 뗐다.

"교관님, 아까 그 학생. 혹시 일레나...?"

"응? 아, 얘기가 들렸나 보군."

키른 교관은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대신, 루인의 상태를 살폈다.

"놀라울 정도의 회복력이군. 화상 입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야."

"예? 화상을 입었다니. 아니, 것보다 제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죠?"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가 보군.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루인은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일련의 사건을 겪은 듯한데. 꿈에서 본 장면처럼 희미하기만 했다.

"자네는 며칠 전, 강의동에서 습격을 받았네."

"예? 습격이라면..."

"누군가는 괴물이라고 하고. 악마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지. 저기 입원한 친구도, 자네와 같은 피해자라네."

키른 교관의 시선을 따라, 다른 병상을 살피던 루인은 흠칫했다.

거기에는 팔다리가 부목으로 고정된 남학생이 잠들어 있었다.

얼굴이 좀 붓기는 했지만, 루인은 한눈에 상대를 알아봤다.

"저 녀석은...?"

"...기억하는 건가?"

머리가 지끈거린다.

신음을 흘리는 루인의 머릿속에, 몇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내 이름은 제이슨이야. 잘 부탁해.

혈룡반의 제이슨! 그는 루인과 함께 강의동 청소를 담당했었다.

소문에 따르면, 일랜한테 낙인이 찍혀 노예처럼 사는 듯했다.

-푸화악!

또한 제이슨은 무방비 상태의 루인을 공격했다.

-제, 제이슨?! 어째서...?

-너한테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너, 호, 혹시... 일랜이 시켜서...!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루인이 이를 까드득 갈자, 키른 교관의 눈빛이 깊어졌다.

"떠올랐나 보군."

"악마나 괴물 따위가 아닙니다. 진짜 가해자는 일랜 키스폰이라고요!"

"일랜 키스폰?"

"네! 그 자식이…!"

"뭐, 실상은 나도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겠네만. 어쨌든 자네는 죽을 고비를 넘겼네."

키른 교관은 루인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오히려 각성했지."

"네?"

그가 건넨 건 청마검, 루인의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었다.

그리고 루인은 듣게 되었다. 그가 각성의 부작용으로 슬립 워킹에 빠져 있었다는 걸.

"만약, 그 친구가 귀신거미 알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자네는 더 오래 무의식을 헤매고 있었겠지."

"그 친구라면...?"

"이런. 말이 헛나왔군."

키른 교관이 흠칫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방금 그건 못 들은 척해주게. 원체 자기 선행을 숨기고 싶어하는 학생이라서. 후후!"

그렇게 말한 그는, 제이슨의 상태를 봐야 한다며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루인은 알 것 같았다. 누가 키른 교관에게 약재를 갖다 줬는지.

-괜찮을까요? 혹시 못 깨어나는 건 아닐지....

"일레나..."

루인이 청마검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못 깨어날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건가? 자기 오빠가 나한테 저지른 짓을 알고, 괜히 죄책감 같은걸..."

"무슨 망상증 환자처럼 혼자 중얼거리고 있어?"

"깜짝이야!"

회복실에는 루인과 제이슨 말고도 다른 한 명이 더 있었다.

화들짝 놀란 루인은 고개를 돌리자, 마찬가지로 병상에 앉아있는 여성이 보인다.

"너는...?"

"아, 디바 챈달이야. 지난번에 그 칼, 우리 공방에 맡겼었지?"

공방의 디바 챈달.

백금발과 구릿빛 피부가 대조를 이루는 활달한 여학생이었다.

어디가 안 좋아서 이 회복실에 있는 건지는 몰랐으나.

일련의 정황들을 통해 루인은 금세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저 녀석이 나한테 청마검을 갖다 줬던 모양이야. 그러다가 사건에 휘말린 거고...'

또 나 때문인가.

루인은 쓰게 웃었고.

디바는 그런 루인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또 혼자 웃고 있네. 정말 머리가 이상해져 버린 건가?'

* * *

사실, 머리가 이상해질 뻔한 건 디바도 마찬가지.

그녀는 아라크네 던전을 돌파하던 중 가위독에 당했고.

아버지, 레오 챈달이 죽는 악몽을 수십 번이나 반복해서 꿨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뭐, 뭐야, 너희들?!

그녀는 놀랍게도 덩케르크한테 업혀있었다.

덩케르크와 그의 부하들은 말을 달리는 중이었다.

-지, 진정하십쇼! 밧줄로 나랑 묶어두긴 했지만, 그렇게 발악하면 같이 낙마합니다!

-이 자식들! 나를 어디로 끌고 갈 셈이지?! 일랜은? 일랜 키스폰은 어떻게 했어?!

-키스폰 나리는 이미 댁으로 안전하게 모셨습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귀신거미 알은 그 자체만으로 가위독을 해독하는 효능이 있었다.

덩케르크 말에 따르면, 일랜은 그걸 디바에게 먹이고 떠났다고 한다.

-웃기지 마! 그걸 내가 믿을 것 같아?!

-사실입니다! 우린 키스폰 나리 지시를 받은 것뿐이라고요.

-...그런데 아까부터 왜 그 녀석을 나리라고 부르는 거지?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디바가 미심쩍은 듯이 묻자, 덩케르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다시 대답이 들려올 때쯤, 디바는 느꼈다.

덩케르크에게서 전해져오는 떨림을.

-악마한테 잡아먹힐 바에는, 악마의 종이 되는 게 나으니까.

-...?

그리고 현재.

디바는 복도를 나서다가, 그녀가 나온 보건실을 돌아봤다.

'결국,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건가.'

상황은 얼추 알 것 같았다.

일랜은 단신으로 적들을 무릎 꿇렸다.

뿐만 아니라, 가위독에 당한 디바를 위해 귀신거미까지 처치했다.

'키스폰 가주가 그랬었지. 몸을 낮추고, 발톱을 숨기라고. 일랜은 그걸 누구보다 잘 해내고 있었던 모양이야.'

일랜은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기량과 힘을.

그러다 막상 적들이 머리를 들자, 거리낌 없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건 효과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덩케르크 같은 놈들이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그런 잔챙이들이 아냐. 뒤에서 놈들을 조종한 배후지.'

안타깝게도 덩케르크는 그 배후가 누구인지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일랜의 명을 따른다고 했으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 건.

그만큼 상대가 만만찮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일단은 나도 더더욱 철저히 감춰야 해. 일랜 키스폰처럼!'

때마침 맞은편에는, 한 무리의 흑호반 학생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흑호반이었던 디바는, 동급생을 알아보고 밝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역시 아침부터 바빠 보이네, 아타르?"

레드팽 아카데미 총학생회장, 아타르 타이언.

그는 보건실 앞에 있던 그녀를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디바 챈달?"

* * *

벌컥!

문이 거칠게 열리자, 흑호방에 있던 학생들이 의아해하며 돌아본다.

하지만 곧 상대가 아타르인 걸 알고 미소를 지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총학생회장님! 좋은 아침..."

"다들 나가세요."

"예?"

"나가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손님이 올 예정이니,"

빠른 걸음으로 자리에 앉은 아타르.

그는 아직도 머뭇거리는 학생들이 있자, 책상을 쾅 내리쳤다.

"당장 나가라고! 내 말 안 들려?!"

"히익! 죄, 죄송합니다!"

기겁한 학생들은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고.

비로소 혼자가 된 아타르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그년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거야.'

이미 그는 덩케르크에게 도어맨을 파훼할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기분 좋게 아카데미에 도착했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인사하는 디바를 보고 당황했다.

'계획이 실패했나? 그렇다기엔, 디바 챈달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는데. 이게 대체...'

혼란에 빠져 있는 그때.

끼익!

누군가 흑호방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짜증이 한껏 치민 아타르가 홱 고개를 쳐든다.

"X발! 중요한 손님 온다고 내가 말했...?!"

아타르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건, 아직 아카데미에 와서도.

오더라도, 아타르가 절대 마주치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

"아, 미안."

일랜 키스폰.

그가 슬쩍 복도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네가 여기 있다고 해서 왔는데. 바쁘면 다음에 올까?"

30화. 조연의 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