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조연의 반란
아라크네 던전이 무너졌을 당시.
난 넙죽 엎드리고 있는 덩케르크에게 지시했다.
-첫 번째, 디바 챈달을 레드팽 아카데미로 안전하게 데려다줘.
-무, 물론입니다! 맹세컨대 이년, 아니 디바 챈달을 내 목숨처럼 여기고 옮기겠습니다!
이년?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자, 덩케르크는 허겁지겁 화제를 돌렸다.
-맹세하건대 이것도 인연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귀신거미 알을 줄게. 가위 독을 해독하는 효과가 있다니까, 이걸 먹여.
-네, 맡겨만 주십시오! 그렇다면 나리, 혹시... 두 번째 지시도 있습니까?
있고말고.
두 번째는 물론이거니와,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앞으로도 쭉 있을 예정이다.
'이렇게 쓸만한 엑스트라를 얻었는데. 이런 기회를 그냥 방생할 수는 없지.'
나도 힘에 부쳤는지 모른다.
던전에서 한바탕 난리친 건 둘째 치고.
혼자서 이 광대한 세계를 수정하는 건, 생각보다 제약이 큰 게 사실.
그전까지는 프리즈너와 바카이 여신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서포트의 범주였을 뿐이다.
'제약을 완화시킬 수 있는 내 분신이 필요해. 한때 나도 원고가 너무 밀려 들어와서, 외주 교정자를 구했던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덩케르크는 여러 의미에서 적합한 외주 업자였다.
일단 메인 캐릭터가 아닌 만큼 원작에 큰 영향을 미칠 리도 없으며.
부리는 부하들도 제법 있어서 정보를 수집할 때도 유용할 것 같았고.
거기다 키스폰 가문을 두려워하여 딴생각을 품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전에 하나만 묻자.
확인할 것이 있었다.
-이번 일을 꾸민 게, 아타르 타이언이라고 했는데...
-그렇습니다! 저희는 그저 놈이 주는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키스폰 나리를 공격했던 건, 사실...!
-그만. 그런 것들은 나도 다 알고 있어.
-아, 알고 계셨던 겁니까? 어쩐지...!
그야 모를 리가 없잖아. 이미 이 녀석들은 키스폰 저택을 공격했었고.
덕분에 나도 하벨을 통해서, 우리 가문을 노리고 있는 '정의의 세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
실제로 원작 속 타이언 가문에서 올곧기로 유명한, 생도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차기 가주로도 물망에 올랐다고 하는, 그 실력자 이름이 아마...
-그래, 아타르였군.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이제 확실해졌어. 그러니까 아타르 타이언이라는 녀석은, 따지면 루인과 같은 선한 부류의 캐릭터라는 거지. 그래서 악하디 악한 키스폰을 무너뜨려 선을 구현하고 싶었을 테고...
-예? 나리,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 혼잣말이니까 넌 신경 꺼.
-죄, 죄송합니다!
어쨌든 빤하게 그림이 그려진다.
이런 설정을 정황만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건 역시.
내가 전생에서도 제법 유능한 편집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보다 일찍 실력을 쌓았더라면, 이 세계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소설이 되었을 텐데.'
작가님.
지금은 이곳의 여신으로 불리는 당신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1차 악역으로 이곳에 빙의한 이상, 소임을 다할 테니.
-덩케르크라고 했던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착 가라앉는다.
-넌 네가 연기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
-예? 그게 무슨...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 남을 속일 순간이 필요하지. 지금이 그때라면, 넌 할 수 있겠어?
덩케르의 눈빛이 흔들린다.
반은 두려움, 나머지 반은 절박함으로.
하지만 그는, 곧 결심한 듯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여기 있는 덩케르크, 지금 이 시점으로 키스폰 가문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미 목숨을 빚진 이상, 나리께서 신을 속이라면 신도 속이겠습니다!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하겠습니다!
처적!
주변에 있던 덩케르크의 부하들도, 그를 따라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비장해? 난 그냥 묻기만 했을 뿐이잖아.
'...조연이라서 단순한 건가. 나야 그렇게 나와준다면야 좋지만, 그래도 낯간지럽다고.'
당혹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난 표정을 숨기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잘 들어라. 난 이곳에서, 아타르 타이언이 보낸 너희한테 '패배'했다.
-?!
상황을 조작했다.
1차 악역 따위가, 선한 세력에 승리했다는 사실을 뒤집는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디바 챈달. 나의 심복이었던 그녀가 목숨 걸고 지켜주지 않았다면, 난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덩케르크와 그들 패거리는 의아한 듯 움찔거렸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잠자코 있었다.
-몸은 물론이거니와, 자존심에도 타격을 입은 일랜 키스폰은. 내일, 아타르를 찾아갈 작정이다. 감히 타이언 가문 따위가 키스폰을 공격했다고 말이야.
-...!
그야말로 치졸한 악역, 일랜 키스폰에게 가장 어울리는 그림이다.
패배를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도리어 승리자를 찾아가 허세를 부리는 모습.
그거야말로 독자들한테 묘한 쾌감을 안겨다 주면서도, 다음 내용에 대한 기대심을 부여하는 장치였다.
-과연... 이해했습니다.
덩케르크가 크게 뜬 눈으로 내 지시를 복기했다.
-나리께서는 패배하신 겁니다. 우리는 디바 챈달 때문에 나리 일행을 놓친 거고요.
-아주 완벽해.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디바 챈달이 깨어나면, 이 계획을 알려야겠군요.
-...아니! 녀석한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마. 심지어 우릴 공격했던 게 아타르 타이언이라는 사실도. 왜 공격받은 건지도.
나 때문에 자기가 위험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디바는 그 무시무시한 도끼로 나를 찍어버릴 테니까.
내가 거듭 당부하자 덩케르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알겠습니다! 키스폰 나리!
그렇게 우리만의 은밀한 협업이 시작되었다.
나한테 충성을 맹세한 덩케르크는 디바를 챙겨 떠났고.
그가 붙여준 부하 덕분에 무사히 키스폰 저택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 * *
그날 해가 떠오를 무렵.
'모든 게 잘 풀리고 있는걸?'
난 덩케르크 부하가 말을 태워준 덕분에 아카데미에 도착.
키른 교관에게 귀신거미 알이 든 가방을 건넸고.
아타르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이봐."
"누구... 히익! 이, 일랜 키스폰?!"
다짜고짜 지나가던 학생을 붙잡고 묻는다.
그는 귀신이라도 보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어, 어떻게 지금 여길?! 휴강 상태라고 들었는데...!"
"잔말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아타르는 지금 어디 있지?"
"...아타르?"
"아타르 타이언. 몰라?"
"아! 총학생회장님이라면, 지금쯤 휴게동의 흑호방에 있을 텐데..."
총학생회장?
아타르 타이언이 총학생회장이었어?
하긴, 유능한 녀석이니 그런 직책을 달고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
'흑호... 그것 역시 원작 설정에서 벗어나지 않았어.'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흑호반.
따라서 아카데미 총학생회장이 흑호반 소속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이. 여기에 아타르가 있나?"
흑호방 앞에는 해당 소속의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내가 접근하자 화들짝 놀랐다.
"너, 넌...?!"
"일랜 키스폰!"
"설마, '중요한 손님'이라는 게...?"
...뭐라는 거야?
헛소리만 늘어놓던 녀석들은, 이내 길을 비켜주었고.
난 심호흡을 한 뒤 흑호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X발!"
방에 들어가자마자, 거친 욕설이 들려온다.
그곳에는 웬 한 남학생 하나가 무서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이 녀석이 아타르 타이언?'
다소 신경질적인 눈매에, 지성을 상징하는 안경.
아타르는 책상 앞에 앉은 채 고뇌하고 있었던 듯했다.
'잠깐만. 나 혹시 타이밍을 잘못 고른 거 아냐?'
상대는 총학생회장이다.
학업뿐만 아니라, 학생회 업무까지 쳐내야 하는 중책.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면, 나라도 짜증나겠지.
'까딱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만에 하나, 아타르가 내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리스크가 있었다.
"미안. 네가 여기 있다고 해서 왔는데. 바쁘면 다음에 올까?"
...솔직히 방금 그 표정도 무섭긴 했으니까.
난 내가 들어왔던 문을 노려보며 속으로 불평했다.
이 망할 것들아. 이런 상황이었으면 나한테 언질이라도 주던가!
"아아, 누군가 했더니. 키스폰 가문의 일랜입니까?"
그때 아타르가 몸을 일으키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게 소파를 가리켰다.
"지나가다 몇 번 보기만 했지, 제대로 마주하긴 처음이군요. 괜찮습니다, 앉으시죠."
생각보다 매너 있게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솔직히 놀랐다.
상대는 키스폰 가문을 적대하고 있는 타이언 가문의 아타르.
덩케르크 패거리를 시켜 나를 공격할 때는 언제고, 오히려 상냥하게 나를 대한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는 건가? 멋진데. 그래서 더 무서울 정도야.'
이런 캐릭터라면 떠오르는 부류가 있긴 하다.
이상하리만큼 원리원칙을 따르며 아카데미 운영에 진심인 녀석들.
유독 까탈스러운 성격이라 주변 사람들도 혀를 내두르지만.
올곧은 가치관이 강점이라 학생들의 지지가 높은 편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총학생회장은 주인공의 올곧음을 검증하는 캐릭터였지. 원작에서도 종종 루인과 밥을 먹으면서 대화 나누는 장면들이 있었던 것 같아.'
다만 대개 이런 캐릭터들은 일상에피소드의 단역으로 소모되며.
내가 빙의한 일랜처럼, 1차 악역을 증오하는 모습이 연출되고는 한다.
다시 말해, 원작의 전개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조연 캐릭터에 불과한 셈.
'하지만 조금 의외였지. 원작에서는 총학생회장이 일랜을 공격하는 얘기 따위 나오지 않았으니까.'
원래 소설이란 주인공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마련.
따라서 주인공의 앵글 바깥에서 발생한 일. 즉, 일랜 키스폰 같은 1차 악역과, 총학생회장이라는 단역이 부딪치는 내용은 다뤄지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이상한 일이군요."
나와 마주 앉은 총학생회장, 아타르가 눈을 반만 뜨며 날 주시했다.
"그쪽 성적을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휴강 때 통학할 만큼, 아카데미에 애착이 있어 보이진 않던데...?"
X나 카리스마 있어.
녀석의 눈동자는 상대를 꿰뚫어 보는 힘이 있었다.
심지어 시종일관 나를 상대로, 경어를 사용하는 여유까지.
까딱하면 오히려 내가 녀석의 페이스에 말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아타르 타이언."
난 간신히 녀석의 이름을 부르는 데 성공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알면서도 그딴 여유를 부리는 건가?"
좋아, 해냈다!
이제 녀석이 '이유?'라든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같은 대답을 한다면.
그때 바로 이 코앞에 있는 테이블을 때리면서 역정을 내는 거다.
'내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줄 아냐고 화를 낸 다음, 퇴장하는 거지. 그럼 오늘 일정은 여기서 마무리. 완벽해!'
머릿속으로 계획을 마무리한 난 조용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는 상대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흐음..."
어서 말해. 뭘 뜸 들이고 있어?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타르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줄은 몰랐지만... 뭐, 좋습니다. 응해드리죠. 일랜 키스폰."
"...!"
주먹을 쳐들려던 난 전혀 뜻밖의 반응에 당황해버렸다.
본론? 무슨 본론? 뭘 응한다는 거야. 그런 건 내 계산에 없었다고!
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던 손을 은근슬쩍 펴서,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본론?"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저는 당신을 공격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하, 무슨 말인가 했더니.
고작 한다는 소리가 변명이었어?
"저 역시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그 깡패 놈들이 뭘, 어떻게 설쳤는지는 몰라도. 애초에 전 디바 챈달, 그 여자가 타깃이었을 뿐이고요. 설마 거기에 당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알겠다.
이 녀석은 발뺌하고 있는 거다.
나 때문에 사지로 휘말린 디바를, 오히려 타깃이라고 거짓말하면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타이언 가문이, 키스폰을 적대해서 얻을 게 뭐가 있을까요?"
어느새 아타르는 테이블 아래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 들고 있었다.
아니, 잠깐만. 무려 총학생회장이라는 작자가 이 신성한 학원에서 음주를?
그,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러면 네 캐릭터가 깨지는 거라고...?!
내 뒤집히는 속을 알 리 없는 아타르는.
쪼르르르르르!
아예 유리잔까지 꺼내 술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 몫을 건네며 말했다.
"뭐, 차라리 잘 됐습니다. 마침 나도 한 번쯤 만나서 얘기해야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이제는 가문 대 가문으로서...?"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촤화악!
내가 끼얹은 술에, 얼굴과 옷이 엉망이 됐으니까.
아타르는 그 자리에서 표정이 굳었고.
"타이언 따위가."
진작 몸을 일으킨 난, 미리 준비했던 대사를 냉큼 뱉었다.
"나랑 상대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나 보지? 하아! 루인 그놈이나, 여기 있는 이놈이나. 날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는 건 똑같군, 그래."
긴장한 탓일까.
힘 빠진 내 손에서 유리잔이 미끄러진다.
황급히 그걸 잡으려 했지만, 되려 그걸 툭 쳐내고 말았다.
콰창!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나버린 유리잔.
사방에 우수수 파편이 튀는 가운데, 난 크게 뜬 눈으로 아타르의 눈치를 봤다.
'X 됐다! 꽤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는데? 지금 와서 실수라고 할 수도 없고...?!'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자리를 빠져나가는 게 상책.
난 빙글 몸을 돌려 힘겹게 출구로 나아갔다.
퍽!
이런, 바깥에 사람이 있었나 보다.
내가 문을 급하게 열자, 거기 부딪힌 학생들은 주춤거렸고.
"미안, 사람이 있는 줄 몰랐는데."
난 그곳을 떠나면서도, 아타르가 신경 쓰여 당부했다.
"들어가 봐. 내 용무는 끝났으니까."
그렇게 복도를 성큼성큼 걸으며 자위했다.
'그래.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이지! 거기다 루인까지 언급했으니, 아타르도 주인공을 서포트하지 않을까?'
주인공한테는 동료가 필요한 법이고, 그런 점에서 아타르 같은 조연은 딱이지.
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만한 성과도 없는 것 같은데?
난 흡족한 얼굴로 아카데미를 빠져나갔다.
31화. 공포의 회담
일랜이 흑호방을 방문할 당시.
"총학생회장님, 오늘따라 유독 저기압인 것 같지 않아?"
아타르 때문에 쫓겨난 학생들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런 모습은 처음 봐. 깜짝 놀랐다고."
"난 예전에 몇 번 본 적 있어. 총학생회장님의 친형님이 찾아오셨을 때였지."
"응? 친형님이라면 혹시... 타이언 가문의 차기 가주? 왕립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는 걸 들은 것 같은데. 아마도 이름이, 이슈타르였던가?"
이슈타르 타이언.
그는 타이언 가문의 장남이자 차기 가주다.
또한, 입학 허들이 그렇게 높다는, 왕립 아카데미 입학했다고 알려져 있다.
"말도 마."
학생 중 하나가 예전 일을 떠올리며 넌더리냈다.
"다들 알겠지만 타이언 가문은 꽤 엄격한 편이라고. 그중에서 총학생회장님의 친형님인 이슈타르는, 말하자면 회장님의 역린 같은 거랄까."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아타르라고 하지만.
그는 정작 자신의 친형 앞에서는 기를 못 폈다.
장남에 차기 가주, 거기다 왕립 아카데미까지 입학한 이슈타르는, 그야말로 아타르에게 넘지 못할 벽이나 마찬가지.
"간혹 이슈타르가 몸소 레드팽 아카데미에 방문할 때가 있었는데. 그 사람만 다녀갔다 하면, 총학생회장님 기분이 내내 저기압이었거든."
"그럴 만도 하네. 나 같으면 형이라고 해도, 엄청 밉겠는걸."
"그럼 혹시, 총학생회장님이 말한 중요한 손님이란 게...?"
"어이."
그때, 누군가가 그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에 아타르가 있나?"
흑호반 소속 중에서 그의 이름을 가볍게 부를 만한 사람은 흔치 않다.
있다고 해도 흑호반 외부의 인물 정도. 그렇기에 그곳에 있던 학생들은, 웬 분수도 모르는 놈인가 싶어 돌아보다가.
"너, 넌...?!"
은발의 남성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일랜 키스폰!"
"설마, '중요한 손님'이라는 게...?"
이슈타르가 아니라, 일랜 키스폰이란 말인가?
하지만 왜? 흑호반 학생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카데미의 망나니를 총학생회장이 볼 이유가 대체 뭘까?
'이, 일단 비켜주자고!'
학생들은 냉큼 자리를 비켰고.
일랜은 당당하게 그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 * *
아타르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일랜 키스폰이 흑호방을 찾아온 것.
"네가 여기 있다고 해서 왔는데. 바쁘면 다음에 올까?"
방에 들어온 일랜은 자기가 들어온 문을 차갑게 응시 중이었다.
여차하면 바깥에 있는 녀석들을 언제라도 처치할 수 있다는 듯이.
'이 녀석, 거절하면 다른 놈들을 인질로 삼을 심산인가?'
보통내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아타르는 최대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아아, 누군가 했더니. 키스폰 가문의 일랜입니까?"
상대를 자리로 안내하면서도 아타르는 최대한 머리를 굴린다.
일랜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생각했다.
'디바 챈달이 살아남았고. 바로 일랜이 날 찾은 거라면 설마... 덩케르크 놈들이 역으로 당한 건가?!'
덩케르크를 사주한 건 아타르, 본인.
그리고 일랜 키스폰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덩케르크를 제압해 배후가 누구인지 캐낸 거겠지.
그 생각에 미치자 아타르는 당장이라도 덩케르크를 불러, 목을 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멍청한 새끼! 그렇다고 입을 함부로 놀려?! 이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다...!'
하지만 당장은, 눈앞의 이 하얀 뱀을 상대해야 했다.
타이언 가주조차 결코 부딪치지 말라고 당부했던 키스폰의 악마를.
'일단은 잡아뗀다. 그리고 이번 일이 철저히 오해에서 비롯된 걸로 몰고 가야 해!'
방향이 잡히자, 아타르는 소파에 앉으면서 시치미를 뚝 뗐다.
"이상한 일이군요. 그쪽 성적을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휴강 때 통학할 만큼, 아카데미에 애착이 있어 보이진 않던데..."
"아타르 타이언."
순간, 아타르는 움찔하고 말았다.
이곳 학생들 중에서 그의 이름을 막 부르는 이가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일랜의 눈은 마치 아타르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알면서도 그딴 여유를 부리는 건가?"
빌어먹을.
생각보다 녹록치 않은 상대다.
'그냥 망나니가 아니었던 건가? 최근 악마를 불러냈다는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었다고?'
일개 양아치로 치부했던 일랜에게서 범상치 않은 공기가 뿜어져 나온다.
천하의 아타르조차 그 기세에 눌려 잠시 뜸을 들였다.
'잡아떼는 작전은 물 건너갔군. 이렇게 된 이상, 두 번째 계획으로 넘어간다!'
일랜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아타르는, 최대한 거리를 벌리기 위해 상체를 뒤로 뺐다.
이러한 제스처는 타이언 가문에서 배운 정치 기술 중 하나.
상황을 이성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는 여유가 있음을 어필하는 행위였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줄은 몰랐지만... 뭐, 좋습니다. 응해드리죠, 일랜 키스폰."
어릴 때부터 정치와 외교를 배웠던 아타르였던 만큼.
이렇게 나온다면 암만 일랜이라고 하더라도, 분위기는 다시 아타르한테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본론?"
그때.
일랜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더니, 반만 뜬 눈으로 아타르를 쳐다본다.
그걸 본 아타르가 눈을 의심했다.
'저, 저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팔을 쳐드는 건, 오히려 상대를 유인하는 행위.
하지만 사실은, 머리를 살짝 들면서 내려다보는 것으로 우위가 본인에게 있다는 걸 강조하는 제스처다.
'말도 안 되는! 어떻게 근본 없는 키스폰 가문의 자제 따위가, 저런 고급기술을...?!'
예상 이상으로 일랜은 강자일 지도 모른다.
덩케르크 패거리를 쓰러뜨린 것도 모자라, 정치에도 일가견이 있다니.
'아버지께선 그래서 키스폰 가문을 조심하라고 했던 건가!'
만약 그가 일랜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타이언 가주에게 알려진다면.
아마 아타르는 아버지의 인정은커녕, 평생 형의 그림자에 묻혀 살게 될지도 몰랐다.
'웃기지 마! 난 오히려 이걸 기회로 삼을 테다!'
반대로 아타르가 키스폰 자제인 일랜과 긴밀히 지낸다면 어떨까?
마침 일랜 역시 키스폰의 장남인 만큼, 전망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키스폰 가문과 관계를 두둑이 쌓는다면, 제아무리 타이언 가주라고 하더라도 아타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판단이 든다.
"저 역시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에 부푼 아타르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 깡패 놈들이 뭘, 어떻게 설쳤는지는 몰라도. 애초에 전 디바 챈달, 그 여자가 타깃이었을 뿐이고요. 설마 거기에 당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훗날 역사는 이 자리를, 타이언과 키스폰 후계자들의 최초 회담으로 기록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이 그려지자, 술이 빠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름지기 술만큼 상대의 경계를 허무는 도구도 없으니까.
쪼르르르르르!
아타르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가며, 마침내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뭐, 차라리 잘 됐습니다. 마침 나도 한 번쯤 만나서 얘기해야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이제는 가문 대 가문으로서..."
허심탄회하게 얘기 나누고, 이 아카데미를 어떻게 장악할지 미래를 함께 그려보자.
...라고 말하려고 했다.
일랜이 아타르 얼굴에 술을 끼얹기까지는.
촤하악!
'?'
아타르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얼굴과 가슴이 축축해지는 만큼, 머릿속도 하얗게 변해간다.
'뭐지? 술을 끼얹는다는 건 적대행위 또는 도발이잖아. 하지만 일랜 키스폰이 나한테 도발을? 왜?'
이런저런 생각이 뒤엉켜 사고가 멈춘 느낌이다.
그리고 들려오는 일랜의 음성.
"타이언 따위가."
...뭐?
지금 일랜이, 아타르의 가문을 '따위'로 지칭한 건가?
아타르는 그야말로 혼란을 넘어서 충격을 받았지만, 일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랑 상대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나 보지?"
순간, 일랜에게서 누군가의 모습들이 오버랩되었다.
-아타르 너 따위가!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키스폰의 가주.
-안타깝구나, 아우야. 이런 잡종 아카데미에서 뭘 해보겠다는 건지....
키스폰의 장남.
항상 위에서 아타르를 내려다보던 그들과, 눈앞의 일랜이 겹쳐 보였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루인 그놈이나, 여기 있는 이놈이나. 날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똑같군, 그래."
일랜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어떤 녀석을, 아타르와 함께 싸잡아 깎아내렸다.
콰창!
일랜이 내던진 유리잔이 박살 났다.
이토록 야만적이고 과격한 폭력성이라니!
항변하려던 아타르는, 일랜과 눈이 마주쳤고.
'허억...!'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일랜의 붉은 눈동자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비로소 아타르는 키스폰 가주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키스폰은 진짜 악마다! 한낱 양아치 따위가 아니라, 길들일 수 없는 백사 그 자체...! 난 대체 어쩌다 이런 녀석을 건드렸단 말인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일랜은, 아타르가 자기보다 약자라는 걸 알아챈 듯.
휘익!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 * *
-콰창!
문밖에서 안의 대화를 엿듣던 학생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게 무슨 소리야? 싸움이라도 난 건가?!"
"젠장! 하필이면 상대가 일랜 키스폰이라니...!"
총학생회장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그들은, 황급히 칼자루를 부여잡으려 했다.
퍽!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별안간 문으로 학생들을 밀친 일랜이 모습을 드러낸 탓.
"미안. 사람이 있는 줄 몰랐는데."
공격하려던 걸 눈치챈 건가?!
일랜은 바짝 긴장한 흑호반들을 보면서도 여유 있게 말했다.
"들어가 봐. 내 용무는 끝났으니까."
용무?
일랜이 멀어지는 걸 확인한 학생들은, 황급히 흑호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초, 총학생회장님...?! 대체 이건...!"
실내는 엉망이었다.
깨진 유리 파편이 사방에 굴러다녔고.
총학생회장 아타르는 얼굴과 옷이 붉게 젖어있었다.
'피?!'
다행히도 피가 아니라 술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문제인 셈.
학생 중 하나가 허겁지겁 손수건을 꺼냈다.
"아까 그놈 짓입니까?! 감히 총학생회장님을..."
"...루인."
"예?"
"루인이 누구입니까?"
아타르가 초점 없는 눈으로 묻자,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그중 하나가 생각났다는 듯 소리친다.
"아, 루인 아스달! 청마반에 그런 녀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청마반? 아카데미의 배려로 들어오게 된 일반 자제들의 학급 말입니까?"
"네! 아마 제가 기억하기로, 그 녀석이 일랜 키스폰한테 개기다가 황천 갈 뻔했다고..."
사건의 내용은 아타르도 알고 있다.
일랜이 악마를 소환해서 기어오르는 녀석들을 공격했다는 이야기.
그로 인해 건물이 파손되는 등 온갖 업무로 돌아와 아타르를 괴롭혔었다.
'내가, 청마반 따위랑 똑같다고? 나, 아타르 타이언이?'
타악!
아타르는 자기 얼굴을 닦아주던 학생의 손길을 쳐냈다.
"그놈에 대해 알아보세요."
"예? 그놈이라고 하시면..."
"루이 아스달. 출생부터 평판까지 전부! 당장!"
그가 소리치자, 학생들은 헛숨을 삼키고 후다닥 자리를 빠져나갔다.
혼자가 돼서야, 아타르의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자기 얼굴을 부여잡았다.
"웃기지 말라고 해. 나, 나는! 나는, 아타르 타이언이라고...! 그런 피식자 따위가 아니라!"
졸지에 위상이 추락해버린 아타르는 보여주기로 했다.
아타르 또한 일랜과 마찬가지로, 먹이사슬의 상위 개체이자 포식자임을.
'기다려라, 일랜 키스폰. 내가 놈을 어떻게 먹어치우는지를 보여줄 테니...!'
* * *
거대한 잔을 형상화한 듯한 그곳의 이름은 여신궁(女神宮).
여신 바카이가 존재를 유지하는 마지막 요람이자, 세계를 기록하는 등대이기도 하다.
바카이는 최근 존재력을 최소화하는 방편으로, 자신의 형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여신궁이라는 초월세계 역시 이름에 걸맞게 주거시설이나 회랑, 심지어는 정원까지 형태를 갖췄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신님."
여신궁에 거주하는 여신의 권속.
일명 님프들이 정원에 서 있는 바카이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그들은 바카이의 것처럼 뿔은 없었지만, 하나 같이 금발에 황금색 눈동자를 갖췄다.
"저 역시 반갑습니다, 자매님들. 여긴 어쩐 일로?"
바카이가 묻자, 님프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술잔을 바친다.
"제국에 세워진 신전에서, 신도들이 여신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어요. 이건 그걸 모은 존재력 중 일부입니다. 여신님, 부디."
"기꺼이 잔을 받겠습니다. 여러분은 제국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관찰과 기록에 보다 힘써주세요. 특히 용사님이 계신 유펠리아 왕국은 더욱."
"알겠습니다, 여신님."
님프들은 뒤로 걸으며 정원에서 물러났다.
그들이 사라지자, 바카이는 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연못을 건드렸다.
-그래, 아타르였군.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이제 확실해졌어.
마침 혼잣말하는 일랜이 수면에 비쳤다.
바카이는 시선을 거기에 고정한 채, 찬찬히 술을 들이켰다.
-그러니까 아타르 타이언이라는 녀석은, 따지면 루인과 같은 선한 부류의 캐릭터라는 거지.
"프흐으읍?!"
기껏 모은 존재력이 허공에 비산했다.
얼굴이 엉망이 된 바카이는 황망한 눈으로 일랜을 쳐다봤다.
'서, 선한 부류라니? 용사님! 아타르는 악인입니다! 설마 그의 형인 이슈타르와 착각하신 걸까요?!'
타이언 가문의 아타르와 이슈타르는 엄밀히 다른 인물이다.
아타르는 친형 이슈타르와 비교당하면서 인성이 삐뚤어지는 캐릭터.
반대로 이슈타르는 그런 동생에게 실망하던 중, 우연히 루인을 알게 되며.
결과적으로 루인과 가까워지면서, 올바름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선인(善人)에 해당했다.
첨벙!
바카이의 손에서 떨어진 잔이 연못에 빠졌다.
'스스로 악인을 자처하는 것도 모자라, 이번엔 사람까지 착각하시다니!'
그녀가 선택한 용사는 이토록 인지 능력이 떨어졌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용사는 여신의 선택을 받고 소환된 자.
따라서 바카이가 모르는 힘이 작용한 게 분명하다.
설령 아니어도,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
'후, 제가 잠시 경거망동했군요. 사람이란 모름지기, 상대가 누구인지 착각할 수 있는 존재이거늘.'
바카이는 살풋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아직 저도 멀었습니다. 이런 여신이라도, 용사님이라면 이해해주실...?"
-바쁘면 다음에 올까?
그때 연못의 화면이 바뀌더니, 두 남자가 나타났다.
한 명은 막 방에 들어서고 있는 여신의 일랜.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아아, 누군가 했더니. 키스폰 가문의 일랜입니까? 앉으시죠.
방문한 일랜에게 자리를 권하는 아타르였다.
그걸 본 바카이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착각에서 끝난 게 아니라고요?!"
용사 일랜은 아타르가 선인이라고 오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아타르를 찾아 나선 것.
엎친 데 덮친 격 아타르는 그런 일랜에게 술까지 따라주며 회유하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마침 나도 한 번쯤 만나서 얘기해야겠다 싶었는데.
악인이 용사를 포섭하는 광경에, 바카이는 자기 입을 가렸다.
그렇지 않으면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으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용사를 이세계에 불러들였을 때?
하지만 일랜은 프리즈너까지 쓰러뜨려 정의를 구현했다.
그렇다면 혹시 용사는 사실, 악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아니, 그렇게 보기에는 그가 여지껏 구한 사람들의 수도 적잖았다.
'혼란스럽군요. 그것보다 더 절망스러운 건, 이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다 끝났다.
이대로 용사가 악인의 동료가 된다면, 그녀의 세계는 다시 멸망의 수순을...
-촤화악!
바카이의 눈이 커졌다.
연못에 비친 일랜이 아타르에게 술을 끼얹으며 말했다.
-타이언 따위가. 나랑 상대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나 보지?
일랜이 사라지고, 아타르는 그곳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바카이가 눈을 껌뻑였다.
"...네?"
용사는 악인과 가까워지려고 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아타르를 응징하고 분노시켰다.
어째서일까. 일랜의 행보는 갈수록 삐뚤어져만 가는데.
상황은 오히려 보란 듯이 바람직하게만 흘러가고 있었다.
"후, 후후! 이래 봬도 저는 질서를 관장하는 여신 바카이."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그런데도 저는 모르겠답니다."
여신은 한동안 연못 앞을 떠나지 않았다.
32화. 악역의 시험
따으앙!
따앙!
무너진 아라크네 던전.
그곳에 진입한 레드팽 공방 드워프들은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불빛 한 줌 없는 동굴에서 암벽만 부수던 드워프 하나가 신경질을 냈다.
"빌어먹을! 대체 왜 우리가 이딴 짓을 해야 하는 거냐고?!"
레드팽 아카데미 던전 견학 예정 당일.
선발대로 파견되었던 교관은 던전이 붕괴된 걸 확인했고.
부리나케 공방에 복원 작업을 요청하고 견학 예정일을 다른 날로 조정했다.
"왜긴 왜겠나."
다른 드워프가 성난 동료를 쳐다도 보지 않고 대답했다.
"총장실에서 제멋대로 우릴 부려먹기 때문이지. 던전 견학은 상반기 커리큘럼에 필수사항이라면서 말이야."
"카악! 그딴 거 내가 알 바냐고?! 가뜩이나 공방 일도 쳐 밀려있는데, 무슨 놈의 얼어 죽을 견학...!"
"안타깝지만 용역계약에 포함된 내용일세. 교육 사업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시설에는 외부현장도..."
"그건 나도 알아! 안다고!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줘도 안 처먹을 곳을 고집하느냔 말이야?!"
"애초에 키스폰 영지와 인접한 신생 던전은 여기뿐인 데다, 다른 곳은 견학하기에, 위험...."
드워프는 설명을 마저 잇지 못했다.
퍼억!
성난 드워프가 휘두른 곡괭이 자루에 상대가 풀썩 쓰러졌다.
"이 새끼, 뭐야? 아까부터 하는 말마다 토 달고 지랄이야."
"야 이, 미친 드워프야!"
그걸 본 작업 책임자가 버럭 소리 질렀다.
"가뜩이나 인력도 부족해 죽겠는데 동료를 쳐?! 그 녀석 깨어나기 전까진, 네가 그놈 몫까지 일해야 할 줄 알아!"
성난 드워프는 기절시킨 동료를 허겁지겁 깨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혀를 끌끌 차던 책임자는 이내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마력이 깃든 거미줄이 여기저기 지탱하고 있어서, 붕괴가 심하진 않은 편...'
그때, 저 앞에 있던 작업자 중 하나가 그를 불렀다.
"까만 수염! 어서 여기로 와 봐!"
"망할 것들이. 현장에서는 방장이라고 하라니깐...."
공방의 리더이기도 한 까만 수염은 투덜대며 걸음을 옮겼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던전이란 불순한 마혈이 응집되면서 발생된 결과물로서..."
레드팽 아카데미는 몇 개 단위로 팀을 구성해 순차적으로 던전 견학을 진행했다.
교관들의 인솔에 따르던 학생들은, 인공조명이 달린 던전 내부를 가로지르며 수군거렸다.
"장난하냐? 이딴 게 던전이라고?"
"수도에 있다는 유원지도 이것보다 긴장감 넘치겠다."
"무슨 던전이 이렇게 깔끔하냐? 쥐 새끼도 들어오다가 놀라서 도망가겠는 걸."
물론, 그들도 이곳에 오기 전 소식을 들었다.
며칠 전 누군가 아라크네 던전의 마석을 파괴했다는 걸.
사실 전리품을 노리는 모험가나, 사명감 높은 기사가 던전을 공략하는 건 흔한 일이다.
오히려 신생 던전이라고 하지만, 몬스터들이 활개 치는 곳에 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건. 교관들 입장에서도 적잖은 부담이었다.
'다행이야.'
인솔 교관이 학생들을 이끌면서도 내심 안도했다.
'암만 마검사 양성을 위한 필수코스라지만. 귀족 자제들까지 섞여 있는 아카데미 생도들을, 막 굴렸다가 탈 나면 골치 아파지지.'
과거에도 어느 명문가 자제의 얼굴에, 슬라임이 뛰어드는 사건이 있었다.
그나마 F급 위험판정을 받은 몬스터였기에 안면이 녹아내리는 사고는 피했지만.
하필이면 그 체액이 눈에 튀어 영구적인 시력 손상을 입게 되었고. 그 바람에 해당 가문에서 아카데미를 상대로 상당액의 배상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우리의 부주의도 잘못이지만. 애초에 이런 던전에 애들을 집어넣는 것부터 다시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대체 그 키스폰 영주라는 작자는 무슨 생각인지....'
던전 견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
아카데미 후원자 중 한 명인 하벨 키스폰은, 이번 견학 예정지를 이곳으로 골랐다.
일명 아라크네 던전. 이곳의 몬스터들은 무려 D급 판정을 받은 돌거미부터 시작해서, C급 판정을 받은 귀신거미까지. 하나 같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다.
'만약 이 던전이 활성화된 상태였다면, 오늘 잠은 다 잤겠지. 누가 이 던전을 공략했는지는 몰라도, 깊이 감사해야겠군.'
* * *
"일랜 키스폰입니다."
뱀굴에도 봄은 오는가.
꽃내음이 만연한 키스폰 저택 정원.
그곳에서 한 남자가 기계적인 어조로 읊조렸다.
"마차가 사고 난 지점과 아라크네 던전의 위치도 몹시 근접합니다. 아마 분명, 일랜 키스폰은 적들의 공격을 피해 던전으로 들어갔다가, 던전 하트를 파괴했을 겁니다."
놀랍게도 그는 일전에 일랜 일행을 던전까지 데려다줬던 마부였다.
일랜과 디바의 예상을 깨고, 그는 살아있었다.
후두둑.
머리가 반쯤 함몰되고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입에서 구더기가 떨어지긴 했지만.
마부는 키스폰 저택으로 돌아와서 누군가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바로.
"그 모자란 손주 녀석이, 던전 하트를 파괴했다?"
하벨 키스폰.
이 세계관에서 만악의 근원으로 통하는 인물이자, 키스폰의 가주였다.
그는 정원에 핀 장미꽃을 무심하게 들여다보면서, 지나가듯 혼잣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 손자가 주제넘은 짓을 한 게군."
"예, 가주님. 제가 알기로 가주님께서는 일랜 키스폰에게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감히 그 지시를 어기는 것도 모자라, '계획'에 필요한 귀신거미들을..."
"그게 아니다, 고르디오."
고르디오.
마부를 그렇게 부른 하벨이 정원 가위를 들었다.
"너도 알다시피 일랜은 불구다. 귀신거미는커녕, 돌거미도 못 잡는 놈이지. 헌데 마력 개방도 못 하는 녀석이, 굳이 던전으로 피신했다? 그거야말로 역량을 넘어선 게 아니더냐."
"일랜 키스폰은 백사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오퍼 블러드를 사용한 게 아닐지..."
"그럴 거라면 도망치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외적들을 상대로 사용했겠지. 그래도 키스폰의 혈통답게, 알량한 자존심은 있는 편이니."
하벨이 장미 줄기를 싹둑 자른다. 그러자 잘린 단면에서 불그스름한 액체가 맺히더니 뚝뚝 떨어졌다.
마부 고르디오.
그의 한쪽 안구는 터지고 없었지만, 남은 다른 하나는 그 핏방울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고.
하벨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 시선을 읽었다.
"고르디오, 배가 고픈 게냐?"
"이 숙주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습니다."
"재촉하지 마라. 그러잖아도 새로 머물 집을 줄 생각이었으니."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가주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특히 일레나는..."
원래 계획대로라면, 일레나는 던전에 갇힌 채 귀신거미에게 잡혀 가위독에 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던전 하트가 파괴된 이상, 가위독을 제공할 귀신거미를 당장 구할 방법은 없다.
고르디오가 그 점을 지적하자, 하벨은 떨어진 장미꽃을 주워들며 말했다.
"보류한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르디오, 넌 내가 왜 굳이 일랜을 시켰다고 생각하느냐? 일레나를 던전에 가두려고 했다면, 너한테 명령하거나. 내가 직접 움직이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줄기에서 떨어진 장미는 신기하게도 꽃잎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마치 채우고 있던 빨간 물감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고르디오도 그 광경을 보다가 멈칫했다.
"시험이었습니까? 일랜 키스폰이 '적합한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한..."
"1퍼센트의 가능성을 열어둔 테스트였지. 워낙 희박한 확률이라 타깃을 일레나로 잡은 것이지만. 정말 네 말대로, 일랜에게서 어떤 변화가 있는 거라면...."
이제 장미는 하얗다 못해 먼지가 되어 날리고 있었다.
결국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자, 하벨은 주먹을 말아 쥐었고.
"당분간은 지켜보기로 할까? 우리 못난 손자가 어디까지 올라올지."
돌아서는 하벨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빛났다.
* * *
띠링!
- 호감 : 3→5
▶ 하벨은 당신에게서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아, 이 노친네는 왜 또 지X이지?"
키스폰 영지의 허름한 펍.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서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덩치 큰 사내가 움찔하며 내 눈치를 살핀다.
"예? 왜 그러십니까, 나리?"
덩케르크.
한때는 아타르 타이언의 수족이었던 사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호, 혹시 이 덩케르크가 무슨 실수라도...?"
그나마 한낮이라 손님이 별로 없었기에 망정.
누가 이 산적같이 생긴 놈이 내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아무것도 아냐. 그것보다 아타르 쪽 반응은?"
덩케르크는 공식적으로 아타르의 의뢰를 수행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일랜의 명령을 받는 이중 첩자이기도 했다.
"먼저 나리께서 분부하신 대로 했습니다. 디바 챈달 때문에 나리 일행을 놓쳤다고, 아타르한테 거짓 보고했죠. 그랬더니..."
"그랬더니?"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했죠. 평소라면 화를 낼 녀석인데..."
덩케르크의 보고를 받던 난 턱을 매만졌다.
'반응이 없다?'
난 덩케르크에게 거짓 보고를 시켰었다.
악역인 일랜 키스폰이, 정의의 아타르가 보낸 덩케르크한테 패배.
간신히 목숨만 부지해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제대로 한 거 맞아? 혹시, 거짓인 게 들통난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요! 저는 나리가 시킨 대로 혼신의 연기를 했습니다! '일랜, X새끼'하며 욕까지 섞어서...!"
흥분하며 얘기하던 덩케르크는 곧 테이블에 머리를 쿵 박았다.
"방금 그건 못 들은 것으로 해주십시오! 제발 목숨만은...!"
"됐어.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니까."
아타르는 내가 보기에 지극히 원리원칙주의자, 그것도 이성적인 캐릭터였다.
그런 인물이 부하가 임무를 실패했다고 해서 화를 내는 건 맞지 않다.
또한 일랜 키스폰을 몰아붙였으니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닌 셈.
'아마 녀석은 다음 기회를 노리겠지.'
그렇게 판단한 내가 덩케르크에게 물었다.
"그래서,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어?"
"...있었습니다! 저한테 누군가를 지켜보라는 임무를 내리더군요."
"혹시 그 누군가가, 루인 아스달인가?"
"아니?! 그, 그걸 어떻게 나리께서?!"
덩케르크는 입을 쩍 벌리며 날 쳐다보았다.
그야 당연하지. 아타르한테 내가 일부러 루인을 언급했으니까.
'내가 루인을 해칠까 봐 걱정하는 건가? 역시, 아타르는 선한 녀석이었어.'
어쨌든 내가 의도한 대로 되고 있다.
그 생각에 흡족해진 난 웃음을 터뜨렸고.
덩케르크는 더더욱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십니다! 대체 키스폰 나리께서는 어디까지 내다보고 계시는 건지..."
이래봬도 난 편집자였다.
제일북스에서 촉망받는 인재였으나.
그런 나 역시, 과거에 바로잡지 못한 작품이 있었다.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 내가 만지는 것마다 대박이 나는 마이더스의 손이 되었을 때 담당했더라면. 이렇게 망해버리진 않았을 텐데...'
지금 와서 후회한들 뭐하리.
중요한 건 바로 현재다.
짤그랑!
내가 테이블 위에 돈주머니를 올려놓자, 덩케르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리! 이건...?"
"내 시험을 통과한 보상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시험을 통과한 만큼, 정식으로 일을 맡겨볼까 하는데. 성공만 한다면 이것에 두 배를 주지."
"뭐든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나리?"
덩케르크는 두 배라는 말에 입이 헤벌쭉해졌고.
난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일레나 키스폰. 내 여동생을 납치하는 일이야."
덩케르크의 입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33화. 전체 연령이라고!
「악마한테 잡아먹히느니, 악마의 종이 되는 것이 낫다.」
-381년 4월, By 덩케르크
언젠가 부의 정점에 올라 살아남았을 때, 덩케르크가 본인의 자서전에 남길 어록이었다.
아카데미 중퇴자 머리에서 나온 것치고는 꽤 멋진 문구라고 생각할 때쯤.
"제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나리?"
"일레나 키스폰. 내 여동생을 납치하는 일이야."
덩케르크는 자신이 얼마나 오만한 일개 인간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내, 내가 잘못 들었나? 자기 여동생을 납치해달라고?!'
혹시나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지만, 상대는 일랜 키스폰.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하나로 무고한 학생들을 공격한 냉혈한이며.
오러 유저임에도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을 만큼 교활한 책략가다.
그렇기 때문에 덩케르크는 살기 위해서라도, 일랜 키스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심지어 보수도 두둑하게 챙겨준 탓에,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가족을 납치해달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냔 말이야?'
인륜 따위는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처박은 일랜 키스폰.
덩케르크에게 지시한 그는, 벌써부터 재밌어죽겠다는 듯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레나를 납치한 후에는 루인한테 그 사실을 알리는 거지."
"루인? 루인이라면 혹시, 아타르가 감시하라고 했던 그 인물 말입니까?"
"맞아. 기왕이면 루인 뿐만 아니라 아타르한테 알리는 것도 방법일 것 같네."
일레나, 루인, 아타르.
셋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뭔가 납득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덩케르크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나리, 일레나를 납치해달라고 하셨는데...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유? 흐음, 이유라..."
설마 이유도 없이 그런 악랄한 지시를 했단 말인가?!
덩케르크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랜 키스폰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뭐, 그야. 난 거기서 죽을 생각이니까."
"...예?"
"여동생한테 살해당하는 것이 이번 생의 목표 중 하나거든. 생각만 해도 너무 설레는데."
괜히 질문했다.
이 악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있다간, 머리가 뒤죽박죽될 것 같은 느낌.
덩케르크는 앞으로 일랜 키스폰에게 분에 넘치는 질문 따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조금의 여유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겨우 적정선에서 대화를 마무리한 덩케르크는 목이 탔다.
그가 펍의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맥주 두 잔!"
* * *
두어 달 만인가?
내가 이렇게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킨 적은.
'크으!'
뒤늦게 떠올린 사실이지만.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에서는 14세를 성년으로 구분한다.
레드팽 아카데미 입학 가능 나이도 14세부터라는 걸 감안한다면, 아타르가 내게 와인을 권한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캐릭터의 문제였지. 총학생회장씩이나 돼서, 나 같은 망나니랑 술을 먹게 할 순 없잖아.'
내가 순식간에 맥주 한 잔을 다 비우자, 맞은편에 있던 덩케르크는 눈치껏 종업원을 불렀다.
"이봐, 여기 한 잔 더! 어이? 젠장, 어디로 간 거야?"
낮이라 펍의 손님이 한산해서 그런지, 종업원은 그새 보이지 않았다.
덩케르크는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하고는 종업원을 찾아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난 메모장을 꺼내,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 1권 주요 에피소드를 점검했다.
<1권 메인 에피소드>
1. 루인을 언짢게 생각한 일랜은 똘마니들을 보내 루인을 괴롭히고 공격하기 시작.
'똘마니 1호, 제이슨이 이 역할을 제대로 해줬지. 프리즈너 때문에 하마터면 말아먹을 뻔했지만...'
2. 괴롭힘을 참다못한 루인이 청마검술을 각성해서 수하들을 쓰러뜨림.
'어쨌든 각성을 당기는 데는 성공했다. 비록 무의식 각성이긴 했지만, 레드 워리어로 변신한 제이슨까지 쓰러뜨렸으니...'
3. 화가 난 일랜은 일레나를 볼모 삼아 루인을 압박.
'덩케르크가 일레나를 납치하고, 그 사실을 루인한테 알린다. 각성한 루인은 덩케르크 패거리를 상대로도 잘 싸우겠지. 하지만 내가 일레나를 인질로 협박한다면, 금방 위기를 맞을 거야.'
완벽하다.
원래는 아라크네 던전을 무대로 삼을까 싶었지만 물 건너갔고.
대신, 덩케르크가 일레나를 납치해주기로 했으니, 이것도 거의 해결 된 상황.
'그럼 이제 남은 건...'
4. 흑화한 일레나가 일랜을 살해.
"역시 이게 관건이려나."
난 복잡해진 기분으로 맥주잔 테두리를 핥았다.
일랜 키스폰은 1차 악역이며, 1권의 마지막 시점에서 퇴장한다.
원작에서는 위험에 빠진 루인을 보고 흑화해서 일랜을 살해하는 전개.
그리고 그건 내가 이곳에 빙의했을 때부터 바라고 바라던 1차 악역의 결말이었다.
'어디까지나 내 죽음을 위장하는 거지만. 그래도 어쩐지 씁쓸한걸.'
그 사건을 기점으로 나, 일랜 키스폰의 활동은 종료된다.
그 뒤부터는 철저히 나를 숨기고, 수면 아래에서 루인을 주인공으로 성장시킬 것이다.
'하지만 뭘까. 이 졸업을 앞둔 사춘기 소년 같은 마음은?'
그새 아카데미에 정이라도 든 걸까.
그래, 아마도 그건 고독한 길이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작품을 위해서라면.
이 세계의 뒷면에서, 나 혼자 이겨내는 수밖... 응?
[최근 '설정 열람'한 캐릭터 중 업데이트된 항목이 있습니다.]
시야 한구석에서 메시지가 깜빡이고 있었다.
하벨, 그 괴물은 호감도 올라간 걸 봤는데. 누가 또 업데이트 된 거지?
"확인."
촤락!
[인물 열람]
- 이름 : 일레나 키스폰 (D급)
- 소속 : 레드팽 아카데미 혈룡반
- 특성 : 인내심, 가사노동, 의기소침, 조증
- 목표 :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 싶어요.
'뭐야, 일레나였나? 딱히 변한 건 없는 것 같은...'
- 호감 : 5→9
▶ 일레나는 당신을 동경합니다! 당신만 생각하면 마음이 들떠서 안정되질 않는군요?!
"하핫, 나리!"
때마침 덩케르크가, 맥주 네 잔을 한 아름 안고 다시 돌아왔다.
"이거 보이십니까? 손님을 기다리게 한다고 좀 세게 말했더니, 서비스라면서 이걸 주던데요! 오늘 첫 보수 받은 기념으로 이건 제가 한턱... 나리?"
대체 왜지.
왜 이 망할 일레나는 자꾸 호감도가 올라가는 걸까?
그것도 무려 4포인트씩이나 올라 내가 열람한 인물들 중에서 1위를 차지한 상태.
이유를 찾으려고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암만 생각해봐도 도저히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한 잔 줘."
답답해진 난, 덩케르크가 가져온 맥주잔을 탁 낚아챘다.
차가운 술이라도 때려 붓지 않으면, 속에서 불이 날 것 같다.
덩케르크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조심스럽게 앉아 뒤따라서 술을 들이켠다.
울꺽! 울꺽...!
터헝!
단숨에 두 번째 잔을 비워버린 난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냥, 없애버려야 하나?"
"프훡!"
덩케르크의 눈코입에서 물이 튀어 나왔다.
술을 마시다 사레가 들린 모양이다.
칠칠찮기는.
"죄, 죄송합니다! 이봐, 종업원! 여기 수건 좀... 빌어먹을! 여기 종업원은 무슨 숨바꼭질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찾을 때마다 없는 거야?!"
결국, 덩케르크는 다시 종업원을 찾으러 몸을 일으켰다.
펍 안에도 보이지 않자 밖에 있다고 생각했는지 출구로 향한다.
'쯧, 저런 녀석이 내 똘마니 3호라니.'
그건 그렇고 나도 짧은 시간에 술을 너무 마셨나 보다.
덩케르크가 오는 것도 기다릴 겸, 난 변소를 찾아 몸을 일으켰다.
드르륵!
이세계에 빙의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곳 화장실은 죄다 재래식이라는 점.
그나마 설비가 갖춰져 있으면 다행이고. 대부분은 뒷문 길바닥이나 수풀 따위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삐거억!
화장실을 찾아 뒷문을 열고 나서자 찌르는 듯 냄새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다양한 미장센으로 덧칠된 담벼락이 이곳 화장실인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볼일을 보려던 찰나.
"다들 똑바로 이해했겠지?"
먼저 명당을 차지한 남정네들이 한껏 무게를 잡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그 뱀 새끼를 제거하고, 상품을 확보하는 거다."
"하지만 단장님. 지난번에 보냈던 녀석들조차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늙은 뱀이 그 시간에 돌아올 줄 몰랐으니까. 원래 예정에 없었던 일이었다고."
시원하게 볼일을 보려던 난 멈칫했다.
뱀 새끼? 늙은 뱀? 뭔가 귀에 익은 단어인데.
슬쩍 옆을 곁눈질하자, 단장이라고 불린 사내는 바지춤을 추스르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확실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오늘부터 며칠간 하벨이 저택을 비울 예정이라더군."
하벨!
그 단어를 듣자마자 내 아랫도리가 움츠러들었다.
이 녀석들, 얼마 전에 저택을 습격했던 그놈들인가?
'아냐. 그건 덩케르크 패거리였잖아. 키스폰 가문은 워낙 적이 많으니, 다른 조직일지도.'
어쨌든 뱀 새끼라는 건 결국 나를 의미하는 거겠지.
상품이 뭘 얘기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늙은 뱀은 하벨을 가리키는 게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이 정체 모를 사내들은 키스폰 가주가 자리 비운 사이, 나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X발, 엿 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
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사이 그들은 볼일을 마무리하며 얘길 나눈다.
"단장님. 지난번에도 확실하다고 해놓고, 애들 절반이 시체도 못 찾았지 않습니까?"
"답답한 놈! 얼마 전에 인근 던전의 던전 하트가 파괴됐다는 소식은 들었냐?"
"어, 이름이... 아라크네 던전이더랬죠. 그건 왜...?"
"왕국의 모든 영주는 영내 던전에 대해서 왕실에 보고할 의무가 있다. 그건 키스폰 영주도 예외는 아니지."
"아하! 그러니까 하벨은 아라크네 던전의 생멸을 보고하러 간 거로군요? 왕국 수도에 말이죠! 캬, 그럼 일이 더 쉬워지겠는데요?"
잠깐만. 하벨이 자릴 비웠다고?
어떻게 이 녀석들이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건데?!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놈들은 시시덕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래, 일단 빨리 지나가기나 해라. 그냥 가!'
다행히도 놈들은, 담벼락에 고개를 처박듯 서 있는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더 신나는 주제가 생긴 건지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댔다.
"하핫! 제아무리 뱀 새끼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식은 죽 먹기 아닙니까?"
"이제야 알겠냐? 아무튼, 그리 알고. 다른 놈들한테도 그대로 전달해둬. 미리 저택에 잠입했다가 작업을 시작한다고."
"옛써어! 그나저나 단장님. 일랜 키스폰, 그놈은 죽인다 치고. 일레나, 그 계집은 생포하라고 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도 되겠습니까? 으흐흐!"
"하여간 이 색마 같은 놈. 뭐, 나도 들은 건 생포하라는 것밖에 없으니...."
말을 덧붙이는 단장의 목소리가 살짝 고조되었다.
"자식들아,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야. 일단 그 창녀는 내가 먼저 먹... 응?"
그는 누군가 자기 어깨를 턱 붙잡자 의아해하며 뒤돌아봤다.
그리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뻐어어억!
날아온 주먹을 미처 피하지 못한 단장이, 똥물에 처박힌다.
촤퐈돡!
다른 사내들은 기겁했다.
"다, 단장님?!"
"뭐야, 저 새끼! 아까 펍에 있던 그놈 아냐? 너, 미쳤어?!"
그중 하나가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이 나를 쏘아봤다.
"낮술 처먹고 주정 부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 고...?"
그는 말끝을 흐리며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아차! 아까 내가 움직이면서 후드가 벗겨져, 얼굴이 훤히 드러나 버렸다!
'아, 나도 모르게....'
난 영혼이 증발한 느낌으로, 내 손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방금 저 단장이 한 말 때문에, 하마터면 이 소설의 관람 등급이 올라갈 뻔했으니까...!'
이 소설은 전체 연령가였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편집자였던 천승제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오직 전체 연령이어야만 한다. 관람 등급이 낮아야만, 더 많은 독자들이 볼 수 있을 테니까.
'19금 판정 받아서 조회수 박살나게 둘 순 없다!'
"어어! 저, 저 은발...?"
"뺨에 있는 뱀의 각인! 똑같아! 우리가 찾고 있던 일랜 키스폰의 인상착의랑 똑같다고!"
관람 등급도 등급이지만, 상황이 지랄 맞게 꼬여버렸다.
내가 누군지 알게 된 남자들은 호들갑을 떨며 단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단장님! 저 녀석입니다! 하핫, 이게 웬 떡입니까? 우리가 찾기도 전에 제발로..."
"지금 웃음이 나와?! 놔 봐, 이 새끼야!"
신경질적으로 부하 손을 뿌리친 오물 범벅의 단장.
그는 헛구역질을 몇 번 하더니, 죽일 듯한 눈으로 나를 가리켰다.
"저, 저 새끼, 잡아! 곱게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이쪽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보며, 난 양 주먹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가 다수란 걸 깨닫고 허리춤의 칼자루를 움켜쥔다.
칼을 뽑기 전에 어떻게 싸울지 고민하던 난 깨달았다.
'아, 나 검술 배워본 적이 없는데?'
천승제로 살아온 지난 이십여 년 간의 전생에서도.
검술은커녕 한 번의 쌈박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여기에서는 마나 차징할 것도 없는데.
...그럼 이제 어떡하지?
34화. 누가 내 인질을 훔쳤나
꽈당탕!
눈앞이 불똥이 튀면서 내 몸은 땅바닥에 처박혔다. 코가 시큰거리고, 꼬리뼈는 비명을 지른다.
"뭐야. 이렇게 약해 빠진 놈이라고?"
인적도 드문 협소한 골목.
나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온 사내들은 쓰러진 나를 보며 비웃었다.
"참나! 키스폰이라길래 잔뜩 경계했는데. 이거, 뭐. 간에 기별도 안 가겠는걸?"
"하긴. 키스폰 가문이야 사실상 하벨 빼면 허물이나 마찬가지잖아."
"이봐, 애송이. 허리에 찬 그 칼은 폼이냐? 그거라도 뽑아봐."
그중 하나는 발끝으로 나를 툭툭 건드리기까지 한다.
이들에게 난 제발로 굴러들어온 사냥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또한 나 역시 일랜 키스폰에 빙의한 편집자였을 뿐, 일방적인 구타에 맥을 못 추렸다.
'내가 이렇게 약했었나?'
강함 등급은 E급.
아카데미에서는 나를 건드릴 자가 없었다.
정확히는, 굳이 키스폰 가문과 적대할 생도들이 없었던 거지.
'그래도 난 C급 위험 판정을 받은 보스급 몬스터를 쓰러뜨렸는데. 것도 두 번씩이나.'
첫 번째는 아카데미 온실에 나타난 데스 웜.
하지만 그건 내 실력이 아니라, 오퍼 블러드라는 광화 버프에 기댔을 뿐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귀신거미는 어땠을까?
마찬가지로 마나 차징을 활용했다. 던전 하트의 정수를 흡수하지 않았더라면, 난 귀신거미들한테 진작 먹혔을 것이다.
'키스폰 가문과 백사검을 빼면, 난 최약체에 불과했던 걸까.'
마력 개방도 하지 못하는 일랜 키스폰의 처지에 몰입된 탓일까.
내 입가에 쓴웃음이 걸리는 순간.
"웃어?"
단장이라는 사내가 내 멱살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에게서 썩은 오물 냄새가 풍긴다.
정신이 어질어질한 탓일까, 그의 주먹이 날아드는 장면이 슬로 모션처럼 느껴졌다.
후웅!
확실히, 내가 빙의한 캐릭터는 원작에서 등장하는 빌런들 중 최약체가 맞다.
1차 악역만큼 가볍게 소모되는 캐릭터는 없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일랜 키스폰에게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마력 개방도 못 해서 날뛰다 살해당하는 운명이다.
하지만.
'인물 열람!'
캐릭터에 빙의하게 되면서 부여받은 고유 특성.
내가 그걸 가동한 것과 동시에 주먹이 복부에 꽂혔다.
뻐억!
숨을 쉴 수가 없다.
단장이 내지른 주먹이 복부에 꽂힌 탓.
그 바람에 내가 마신 술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웨액!"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속을 게워내자, 다른 사내들은 기다렸다는 듯 나를 짓밟기 시작했다.
"이 더러운 새끼가!"
"그러게, 조용히 짱 박혀있을 것이지!"
"멍청한 거냐? 가만히 있었으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나서서...!"
여기저기 발길질이 날아드는 와중에도.
시야가 거칠게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난 이를 악문 채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열람한 단장의 정보를.
촤락!
[설정 열람 : 인물]
- 이름 : 카자 프레소 (C급)
- 소속 : 프레소 용병단 (단장)
놀랍게도 상대는 C급. 키른 교관이나 디바와 맞먹는 강함 수치였다.
거기다 용병단을 이끄는 리더. 그렇다면 다른 놈들도 C급이거나, 그 아래일 가능성이 높다.
- 특성 : 품행장애
'품행장애?'
쉽게 말해서 사고를 많이 치는 병이다.
학창시절에 내 주머니를 털어간 녀석들이 저걸 자랑이라고 떠든 적이 있었다.
'품행장애와 연결시켜 본다면, 카자 프레소라는 놈도 그걸 명분 삼아 분란을 일으키는 양아치가 분명해. 그렇다면 남은 건...'
- 목표 : 혈룡 길드가 프레소 용병단을 인수하는 그날까지!
혈룡 길드?
갑자기 이게 왜 튀어나오는 거지?
혈룡은 레드팽 아카데미의 후원 기관 중 하나이자 주요 세력이다.
그런데 카자 프레소의 목표는, 혈룡 길드가 자신의 용병단을 인수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혈룡 길드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어쨌든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상황을 타개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대로라면 일레나한테 살해당하기 전에, 엉뚱한 비극을 맞을 판.
"그만."
그때, 발길질이 멈췄다.
난 겨우 숨을 토해냈고, 부하들도 단장을 돌아봤다.
카자 프레소. 그는 나를 가리키더니 자기 목 긋는 시늉을 했다.
"그쯤하고 죽여버려."
"단장님, 벌써 끝내시려는 겁니까?"
"나도 아쉽다만, 우리한테는 할 일이 또 있잖냐."
"참! 그러고 보니 일레나 키스폰? 그 계집이 남아있었군요."
사내들 중 하나가 허리에 찬 검을 뽑더니, 징그럽게 웃었다.
"그럼 이놈은 제가 후딱 처리하겠습니다. 그래야 그년을 ■■■■■...!"
"하하하하하!"
음담패설과 놈들의 웃음소리가 내 사고를 정지시켰다.
방금 저 새끼가 뭐라고 한 거지? 아니, 무슨 짓을 한 거지.
고작 조연 따위에 불과한 놈이, 이 작품의 수위를 멋대로 올린 건가?
까드득!
이를 간 내가 무릎에 힘을 주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적들은 가소롭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호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더니. 참! 뱀이나 지렁이나 거기서 거긴가?"
그냥 오퍼 블러드를 써버릴까.
하지만 역시 위험부담이 크다.
의식이 끊기는 건 물론이거니와.
키른 교관 말에 따르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게다가 여긴 마을 한복판. 까딱하면 다른 주민들까지 휘말릴지도 몰라.'
은신 기능이 있는 나이트 윙도, 대낮에는 먹히지 않는다.
그나마 남은 방법이라면 백사검을 활성화하는 것이지만.
그러려면 마나 차징에 필요한 마석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검술에 문외한인 내가...
'가만! 검술이라고?'
아라크네 던전에서 내가 사용했던 백사검술.
직접 칼을 휘둘렀던 만큼, 얼추 동작은 기억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아마..."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거냐?!"
마침내 칼을 든 놈이 내게 덤벼들었다.
나 역시 칼자루를 잽싸게 붙잡았다.
앞발을 내딛으며.
'백사검술 제일식...'
터헝!
내 칼자루가 놈의 검신을 비껴친다.
뜻밖에도 공격이 튕겨나자 상대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사행출검.'
진작 뽑혀 나온 백사검은 후진을 끊고, 튕기듯 앞으로 쏘아졌다.
퐈확!
섬뜩한 감각이 칼을 타고 뇌리로 전해져온다.
목이 꿰뚫린 칼잡이는 물 밖에 나온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커, 커헉! 커하...!"
사행출검.
그건 이리저리 방향을 트는 뱀의 움직임을 담는 검초였다.
얼핏 보면 직선으로 가지 않으니 매우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적의 시선을 교란시키고, 방어하며, 심지어는 허점을 파고드는 효과가 있었다.
"이 X새끼가, 진짜 해보자는 거냐?!"
다른 놈들도 저마다 칼을 빼 들며 뛰어들었다.
그들 모습 위로 아라크네 던전에서 싸웠던 귀신거미가 떠올랐다.
'비슷해. 아니, 오히려...'
난 목이 꿰뚫린 칼잡이를 발로 걷어차 냈다. 그 바람에 달려들던 한 놈이 거기 부딪혀 나자빠진다.
'동선이 일차원적이야. 눈으로 좇기는 힘들지만.'
칼 하나가 위협적으로 날아든다.
귀신거미들은 이것보다 훨씬 빨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스펙이 올라가진 않았으니.
'예측한다. 예측할 수 없으면, 도박이라도 하는 수밖에!'
나 역시 백사검을 내질렀다. 뒤늦게 전진한 칼날이 상대의 것과 맞닿는다.
키가가악!
공격을 감행하던 사내의 두 눈이 커졌다.
자신이 내지른 검은 더 나아가기는커녕.
마치 묶인 것처럼 방향이 꺾여버렸다.
"뭐, 뭐?! 이게 무슨...! 끄아아악?!"
뱀처럼 검을 옭아매며 들어온 백사검.
그건 사내의 손목을 꿰뚫고 팔뚝까지 찢어버렸다.
촤하아아악!
그사이, 아까 자빠졌던 놈도 덤벼들려다가 멈칫했다.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두들겨 맞기만 하던 약골이 왜...?"
솔직히 나도 놀라던 참이다.
진짜 이게 된다고? 그냥 흉내만 냈을 뿐인데?!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두 놈을 해치우긴 했지만, 남은 적들이 더 많으니까.
'응?'
그때, 골목 끝에서 이쪽을 지켜보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름 숨는다고 숨었겠지만, 그 산만 한 덩치는 감추기 힘들다.
'덩케르크?'
구세주다!
희망을 본 내가 그를 소리쳐 부르려는 순간.
뻐어억!
둔탁한 충격이 뒤통수를 휩쓸었다.
전신에 힘이 풀린 내 시야에 땅바닥이 확대된다.
꽈당!
점점 의식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X발, 깜짝 놀랐네. 일부러 우리 방심을 노렸던 건가?"
단장과 적들의 대화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다들 뭐하고 있어? 당장 이놈 포박해!"
"예?! 단장님, 아까는 이 녀석을 처리한다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일랜을 인질로 삼자고."
"과, 과연! 그렇게 한다면 일레나 그 계집을 포획하는 게 더 쉬워지겠군요?!"
"크큭, 그것뿐이겠냐? 이걸 빌미로 더 재미있는 일들을 할 수 있단 말이다. 예를 들면..."
...아.
안 되는데.
인질 잡아서 계략 짜는 건 내 역할이라고!
그런 내 생각과는 무관하게, 내 몸은 축 늘어져 버렸다.
* * *
몇 분 전.
"나리? 나리!"
결국 종업원을 못 찾고 돌아온 덩케르크는, 자리에 일랜까지 보이지 않는 걸 알아챘다.
'뭐야. 변소라도 간 건가. 하여간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구만!'
이미 악마한테 영혼을 판 덩케르크였지만.
자꾸만 술자리 맥이 끊기는 건 살짝 짜증이 났다.
하지만 변소에도 일랜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덩케르크는 펍을 떠나야 했다.
"암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가면 간다고 귀띔이라도 해주든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그 악마한테 실수라도 한 건 아닐까?
기분이 찝찝해진 덩케르크는 일랜과의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그런데 나리, 일레나를 납치해달라고 하셨는데...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유? 흐음, 이유라...
'설마, 내가 토를 달아서?'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상대는 아카데미의 힘을 숨긴 대악마.
그런 순수한 악의 지시에, 덩케르크는 의문을 드러냈고.
그런 질문에 일랜 키스폰은 다소 의아해하며 대답을 대충 둘러댔다.
'바보 같은! 애초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었어.'
사람한테 왜 숨 쉬냐고 묻는 이는 없다.
악마에게도 왜 악행을 저지르는 거냐고 묻는 건 어리석은 짓.
따라서 일랜 키스폰은, 자신을 따르기로 한 덩케르크 자체를 의심하는 건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거라면, 나를 버리려는 게 아닐까?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식은땀이 흐른다.
덩케르크가 아는 일랜 키스폰이라면, 얼마든지 덩케르크를 버리고 대체제를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체제가 덩케르크보다 뛰어나다는 게 증명된다면, 덩케르크를 가차 없이 제거해버릴지도 모른다.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낮술이 과했나.'
마음이 복잡해진 덩케르크는 기분 전환할 상대가 필요했다.
행인을 두들겨 패고 갈취하면,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나름 기대심에 부푼 덩케르크가, 자주 찾는 뒷골목으로 들어서는 그때.
'어?'
그곳에는 이미 '주인'이 있었다.
멀리서 봐도 은발이 눈에 띄는 일랜 키스폰.
그는 정체 모를 사내들과 홀로 대치하고 있었다.
'저 새끼들은 뭐지? 딱 봐도 분위기가 범상찮은데...!'
그러고 보니.
일랜 키스폰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 적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한때 덩케르크를 고용했던 아타르처럼, 저들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복식이나 무구도 제법 좋은 편이군. 우리 애들보다. 아니, 어쩌면 나보다 강할지도? 가만, 그럼 나리가 위험한 거 아닌가?!'
위험하다는 건, 일랜 키스폰이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건, 덩케르크를 괴롭히던 악마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그 생각에 미친 덩케르크는 설레는 마음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심 구원자들을 응원하는 그때.
탓!
때마침 구원자 하나가 악마에게 덤벼들었다.
덩케르크의 예상대로, 구원자는 몹시 민첩했고.
그가 칼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일랜은 검도 못 뽑고 있었다.
'돼, 됐ㄷ...!'
일랜의 목이 날아갈 거라고, 확신하는 그때.
투퐉!
덩케르크는 눈을 의심했다.
구원자의 칼이 튕겨 나간 것과 동시에.
어느새 뽑힌 일랜의 검이 구원자 목에 꽂혀있었다.
'뭐, 뭐?! 어떻게 된 거야, 그 움직임은?!'
놀랍게도 일랜은, 방어와 반격.
그 어려운 두 가지 동작을 한순간에 해버렸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마치 뱀의 가공할 스피드와 맞먹었고.
'가만! 저거 뭔가 눈에 익은데...?'
한때 아카데미에 재학했던 덩케르크는, 백사반에서 잠깐 배웠던 검술을 기억해냈다.
'그래! 내 기억이 맞다면 백사검술 제일식, 사행출검이야! 상당히 기초적인 초식이었던 것 같은데...?!'
비로소 덩케르크는 자기가 얼마나 헛된 망상을 했는지 알아챘다.
'...잊고 있었어. 저 악마가 얼마나 강한지.'
일랜 키스폰은 오러 유저다.
아라크네 던전에서도 그 무시무시한 귀신거미들을 무 썰 듯했고.
그 압도적인 강함 때문에, 덩케르크는 감히 대적할 생각조차 못 했다.
'그런데 왜지? 저런 놈들이라면 금방 해치울 수 있을 텐데. 나리는 왜 오러도 발현하지 않는 거지? 그것도 모자라, 기초 검식 하나로만 상대하다니.'
의아해하던 덩케르크는 곧 입을 쩍 벌렸다.
'설마! 그러면 너무 싱겁게 끝나니까? 그래서 일부러 실력을 감추고, 적들을 농락할 셈인가?!'
일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일랜 키스폰은 아타르에게 자신의 강함을 숨겼다.
그래야 아타르가 방심할 테니까. 희망이 클수록 절망도 커지는 법.
"이 X새끼가, 진짜 해보자는 거냐?!"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적들이 일랜에게 덤벼든다.
그걸 본 덩케르크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바, 바보들아! 멈춰...! 네놈들 앞에 있는 저 사람은...?!'
레드팽 아카데미의 대악마.
일랜 키스폰이 칼을 휘두른다. 마치 공격을 예상하기라도 하듯.
카가가악!
상대의 검을 능숙하게 묶는 것도 모자라.
거추장스럽다는 듯 적의 팔 가죽을 그대로 뜯어버렸다.
"끄아아악?!"
끔찍한 비명을 듣고 공포에 질린 덩케르크는,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달아날 수 없었다. 그저 지켜봐야만 한다.
그리고 의문을 품었다. 대체 일랜 키스폰은 왜 이러는 건지.
또 저 사내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
하필이면 그때, 덩케르크는 일랜과 눈이 마주쳤다.
덩케르크를 발견한 일랜은 미묘한 미소를 짓더니.
처푸덕!
보란 듯이 다른 남자에게 공격받고 쓰러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러 유저인 일랜이 이토록 쉽게 쓰러진 이유를.
하지만 잠깐이나마 악마의 진면목을 보았던 덩케르크는, 이 모든 것이 일랜의 그림이라는 걸 눈치챘다.
'대체품? 저자들은 나의 대체품인 거야!'
덩케르크가 과거 그랬던 것처럼.
저들 역시 일랜의 손아귀에 놓일 운명일 테다.
"일랜을 인질로 삼자고."
"그렇게 한다면 일레나, 그 계집을 포획하는 게 더 쉬워지겠군요?!"
그들의 대화로 확실해졌다.
일레나를 사로잡는 건 일랜의 지시.
그리고 저들도 덩케르크와 똑같은 과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저놈들은 나보다 더 좋은 상황이야. 나리를 미끼로 삼았잖아?!'
익숙하게 일랜을 포박해서 데려가는 남자들을 보며.
덩케르크는 밥그릇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을 느꼈다.
쓸모가 없어진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도.
'악마의 시험인가.'
악마는 덩케르크와 대체품팀(?)에게 똑같은 과제를 내렸다.
과연 누가 먼저 일레나를 그에게 갖다 바칠 것인가.
성공한 자에게는 연명할 기회가 주어질 테고.
실패한 자에게는 끔찍한 파멸이 내려질 것.
'우, 웃기지 마! 난 덩케르크야! 끝까지 살아남아서 부유하게 살 거라고!'
하지만 이미 상대 팀이 먼저 움직인 상황.
일레나가 그들에게 납치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렇다고 덩케르크가 움직이기에는 여러모로 불리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생각을 정리한 덩케르크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레드팽 아카데미 기숙사. 덩케르크는 지나가던 생도를 붙잡고 물었다.
"이봐! 여기, 루인 아스달이라는 놈 있나?"
"어어..."
덩케르크의 기세에 놀란 생도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저, 저는 왜 찾으시는 거죠?"
"...어?"
35화. 외주는 똑똑했다!
덩케르크는 생각했다.
그가 모시는 악마의 지시를.
-제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나리?
-일레나 키스폰. 내 여동생을 납치하는 일이야.
의문이었다.
어째서 그 악마는 자기 동생을 납치하라고 지시한 걸까?
게다가 덩케르크가 알기로, 키스폰 남매는 함께 거주하는 상황.
오히려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일레나를 납치할 수 있을 텐데, 굳이 덩케르크를 시켰다. 그렇다는 건 즉.
'혹시, 진짜 목적은 일레나가 아니었던 건가?'
자신이 대체 될 상황에 놓인 덩케르크는,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덩케르크 역시 나름 음지에서 온갖 나쁜 일들을 저지른 경험이 있었고.
왜 사람이 사람을 납치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개 그것은 금품 갈취나 정보 획득, 또는 쾌락 등.
인질이 보유한 특정 가치를 강탈하는 게 목적이다.
'하지만 나리 또한 키스폰의 차기 가주. 그러니 일레나에게서 강탈할 이득은 없어. 그렇다면 남은 건... 미끼?'
인질 자체가 아닌, 다른 대상을 불러들이기 위한 함정.
즉, 인질을 미끼로 쓰는 용도였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일레나를 미끼로 써서 유인할 대상은.
-일레나를 납치한 후에는 루인한테 그 사실을 알리는 거지.
-루인? 루인이라면 혹시, 아타르가 감시하라고 했던 그 인물 말입니까?
-맞아. 기왕이면 루인뿐만 아니라 아타르한테 알리는 것도 방법일 것 같네.
'맙소사.'
덩케르크의 눈이 커졌다.
'애초에 목적은, 루인이라는 놈과 아타르였나?!'
덩케르크가 조사한 바로, 루인은 한 때 일랜에게 찍혀 피습당한 인물.
또한 아타르 역시 최근, 일랜의 심기를 건드린 불운의 총학생회장이었다.
즉 일랜은, 그들을 뱀굴에 데려와 협박하기 위해, 일레나를 미끼로 쓸 작정이었고.
뿐만 아니라 여동생마저 속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납치되는 대범한 상황을 연출했다.
'이, 이것이 악마의 계략...!'
덩케르크는 소름이 돋았다.
일랜이 납치된 건 모두를 속이기 위한 밑그림.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한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다만, 일랜은 이미 다른 놈들과 함께 저택으로 향한 상황.
거기다 일레나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지금쯤 그곳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
일랜이 진짜 원하는 타깃들을 키스폰 저택으로 보내는 것.
그렇게 판단한 덩케르크는, 청마관으로 이동해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고 물었다.
"이봐! 여기, 루인 아스달이라는 놈 있나?"
"어어... 저, 저는 왜 찾으시는 거죠?"
"...어?"
덩케르크는 생도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뭐야. 네가 루인 아스달이라고? 진짜냐?"
루인 아스달.
일랜의 첫 번째 타깃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만.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
"...혹시 일레나 키스폰을 알고 있나?"
"이, 일레나? 그 애한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얌전하던 루인이 별안간 덩케르크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친다.
덩케르크는 기가 찼다.
'뭐야, 이 미친놈은? 이름 하나 말했을 뿐인데, 왜 눈깔이 돌아가?!'
일랜이 일레나를 인질로 삼고자 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한 덩케르크가 애써 입을 뗐다.
"실은 그 여자애가 위험하다. 납치됐거든."
"나, 납치라니? 어디로 말입니까?!"
"자기 집에."
자기 집에 자기가 납치당했다니.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덩케르크를 미친놈 취급했을 것이다.
무심코 말하던 덩케르크 역시, 아차 싶은 생각으로 신음을 흘렸다.
'젠장! 이런 등신 같은 말만 듣고, 격분할 멍청이가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다고...?'
"그럴 줄 알았어."
여기 있었다.
심지어 루인은 비틀거리며 자기 머리를 움켜잡기까지 했다.
"나 때문이야. 괜히 나를 구하려고 귀신거미 알을 같은 걸 구해 와서...!"
"어? 저기, 이봐...?"
"바로 잡는 수밖에 없어. 아니, 이 기회에 결판을 내주겠다!"
덩케르크가 어찌할 겨를도 없이, 루인은 바로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혼자 남은 덩케르크는 눈을 껌뻑였다.
'뭐야, 저 병신은.'
어쨌든 첫 번째 타깃은 해결된 듯하다.
덩케르크는 곧장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루인 아스달이, 키스폰 저택으로 갔다는 말입니까?"
흑호방.
아타르는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되묻자, 덩케르크는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결판을 내겠느니, 어쩌니 하면서요."
"재미있군요. 아직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오히려 사지로 뛰어드는 꼴이라니."
일전에 아타르는 흑호반 학생과 덩케르크에게 루인의 감시를 맡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덩케르크가 가장 실용적인 정보를 보고하던 참이었다.
루인이 일랜을 공격하기 위해 키스폰 저택으로 향했다는.
"수고했습니다, 덩케르크."
비로소 아타르가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일전의 잘못은 이걸로 갈음하는 셈 치죠."
"가, 감사합니다. 총학생회장님."
"감사는 무슨. 오히려 고생이 많은 건 그쪽이지 않습니까? '이중 첩자' 씨."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흑호반 십여 명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덩케르크가 칼을 뽑기도 전에 온갖 날붙이가 그의 목을 겨누었다.
"젠장, 알고 있었나?!"
"그야 당연하죠. 그런 허술한 연기로 내 눈을 속이려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타르가 안경을 손끝으로 올렸다.
"안타깝군요. 마음 같아서는 육신을 찢어발기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길 테니..."
"계획...?"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난 일랜 키스폰과 척질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하나."
아타르의 손짓에, 흑호반 생도들이 무기를 거두었다.
덩케르크가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반대라니? 설마 나리와 손이라도 잡겠다는 건가."
"호오. 뱀의 꼬리가 되더니 제법 머리도 쓸 만해 졌군요."
아타르는 다가와 덩케르크의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괜히 뱀 꼬리 잘라서 대의를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지난 감정은 잊고 잘해봅시다, 덩케르크 씨? 타이언 가문과 키스폰 가문의 우호를 위해서."
덩케르크는 혼란에 빠졌다.
이놈은 또 왜 일랜 키스폰과 우호를 다진다는 거지?
그런 덩케르크를 알 리 없는 아타르는.
"다들 들었습니까? 청마반의 정신 나간 생도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살생을 저지르려 합니다."
다른 흑호반 학생들에게 열변을 토했다.
"암만 키스폰 가문의 소문이 좋지 않다고 하나, 그건 근거 없는 소문일 뿐. 사적인 복수는 총학생회장으로서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오오, 역시 총학생회장님...!"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청마 따위가 감히!"
특권 의식이 충만한 흑호반.
그들은 아타르의 선동에 감화되었다.
애초에 청마반과 같은 강의실에 있는 것도 못 견디는 이들도 있었다.
"키스폰이 우리에게 배움의 터전을 제공해주었다면..."
아타르가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우리는 그런 키스폰을 친구로서 마땅히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키스폰과, 동료를 위하여!"
"키스폰과, 동료를 위하여!"
"우오오오오오오오!"
아타르를 선두로, 기득권층의 자제들이 우르르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것으로 두 번째 타깃까지 해결한 덩케르크는.
털썩!
소파에 앉아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무섭구나. 악마의 현혹이라는 건...."
그는 확신했다.
저들이 일랜 키스폰에게 현혹당했다는 걸.
그렇지 않고서야 아타르와 흑호반이 발 벗고 나설 리 없었다.
'어쨌든 이걸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몹시 피로해진 덩케르크가 잠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저기."
누군가의 속삭임에, 덩케르크는 힘겹게 눈을 떴다.
고개를 들자 분홍빛 머리칼의 소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총학생회장님 안 계시는 걸까요?"
"...빌어먹을. 넌 또 뭐야? 겨우 잠 좀 자나 했더니."
"앗, 죄송해요! 견학 레포트 제출하려고 왔는데, 총학생회장님이 안 보이셔서..."
분홍 머리 손에는 서류가 들려있었다.
짜증이 난 덩케르크는 그걸 탁 낚아채고 쏘아붙였다.
"내가 전달할 테니까 당장 꺼져!"
"죄, 죄송해요! 그럼...."
거듭 사과한 그녀가 흑호방을 떠났고.
덩케르크는 레포트를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팔락!
비로소 조용히 잠을 청하려던 그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눈을 떴다.
'잘못 본 거겠지?'
덩케르크가 서류를 집어, 방금 본 소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제출자 : 일레나 키스폰]
쿠당탕!
헐레벌떡 밖으로 나간 덩케르크가 소리쳤다.
"야야, 잠깐만?!"
* * *
간만이다.
이렇게 푹신푹신한 이불은.
적당히 시원하고 보들보들한 감촉.
난 기분 좋은 한숨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또 낯선 천장이네?'
고풍스러운 벽지와 조그마한 황금빛 샹들리에.
그걸 보며 여긴 어디일까 하고 잠들기 전을 복기해본다.
'그래, 난 소설 속 이세계에 떨어져 1차 악역으로 빙의했었지. 1권의 주요 에피소드들을 수정했고. 남은 건 일레나를 납치했다가 그녀한테 살해...'
쿠당탕!
침대에 떨어진 난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넘어졌다.
땅을 짚은 채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나 납치당했었잖아?!"
용병단을 이끄는 카자 프레소.
놈이 뒤통수를 갈기는 바람에 앓다가 기절했다.
그렇다면 여긴 놈들의 본거지? 그런데 생각보다 깔끔하네.
'무기! 내 무기는?!'
아래를 내려다보던 난 당황했다.
무기는커녕, 하얀 원피스 한 장만 입혀져 있었다.
그들이 왜 이런 옷 따위를 입혔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지던 찰나.
끼익.
문이 열리고 웬 금발 머리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역시 일어나셨군요?"
"누, 누구세요?"
"저는 바카이 여신님을 모시는 권속입니다."
"바카이라면... 작가님?"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움직이실 수 있을까요?"
난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그녀를 따라나섰다.
아득한 천장과 거대한 기둥들. 그 사이로 파란 하늘과 푸른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여긴...?"
"여신궁입니다. 초월세계죠."
스스로를 여신의 권속이라고 칭한 그녀가 살포시 미소 짓는다.
"천승제 님께서는 잠시 의식을 잃으셨고. 그로 인해 여신궁과 잠시 패스(Path)가 생성된 것입니다."
"제 이름을 어떻게...?"
거듭 질문하려던 난 냇물에 미친 내 얼굴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거기엔 일랜 키스폰이 아닌, 대한민국 청년 천승제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내 얼굴. 그렇다면 여긴 인간세계와 유리된 세상이라는 건가?'
난 금발의 안내자를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안내자처럼 황금빛 머리칼이 치렁치렁한 여성이 엎드려 앉아있었다.
차이점이라면 안내자보다 의복이 화려하다는 점과, 머리에는 염소의 뿔 같은 게 달려있다는 것.
'이분이... 작가님?'
지상에서는 루인의 몸을 빌려 현현했었기에.
실제로 여신 바카이를 보는 건 처음이다.
'...자는 건가?'
그녀는 우리가 왔는데도 기척을 못 느꼈는지 미동이 없었다.
난 테이블에는 빈 잔들이 굴러다니고 있다는 걸 발견했고.
안내자도 그런 내 눈빛을 읽더니 미리 설명해주었다.
"정제되지 않은 존재력 흡수 부작용입니다."
"정제되지 않은... 뭐라고요?"
"존재력. 존재력이란 세계의 신도들이 기도하면서 발생한 힘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것인 만큼, 이곳 여신궁에서는 그걸 정제한 정제주를 여신님께 드리고 있는데..."
안내자가 짧게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최근 여신님께서는 정제되지 않은 존재력까지 손에 대기 시작했죠. 그 이름도 부정 가득한 부정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일념이실 테지만, 아무래도 부작용이 있다 보니...."
숙취 같은 건가?
게다가 아까는 날 기다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다행히도 안내자는 바카이 곁으로 다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여신님? 천승제 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난 보았다.
순간 바카이의 어깨가 들썩거리는걸.
그녀는 팔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대답했다.
"둘이 이야기... 딸꾹! 할 테니, 딸꾹! 물러가세요...."
아니, 취한 거 맞잖아?!
내가 뭐라고 할 겨를도 없이, 안내자는 자리를 떠났고.
난 불안함 반 어색함 반의 기분으로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작가님?"
그제야 바카이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입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채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아."
바카이의 황금빛 눈동자에 초점이 생겼다.
곧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 자리에서 내 멱살을 붙잡았다.
"너, 딸꾹! 너...?!"
"자, 작가님?!"
"어떻게 할 거야! 용사 너, 때문에... 딸꾹?!"
36화. 여신이 캐붕하면 벌어지는 일
횡설수설하는 바카이의 입에서 포도향이 난다.
돌발상황에 당황한 난 반사적으로 그녀를 밀쳐냈다.
아차! 무게 중심을 잃은 바카이가 그대로 나자빠진다.
콰당탕!
펄러억!
"아악!"
바카이가 취한 와중에 옷을 바로 했다.
그리고는 살짝 촉촉해진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너, 봤지?!"
"...아뇨."
"봤잖아악!"
떼쓰는 바카이를 보며 난 눈을 껌뻑였다.
캐릭터 붕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닐까.
하지만 난 이해한다. 담당 작가님들 중 상당수가 심적인 부담을 안고 있다.
작품이 풀리지 않아서라거나 돈이 안 벌려서. 또는 악플에 상처를 받았다거나, 담당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이 경우는 아마도 후자. 아까 내 멱살을 잡은 것도 그것 때문이겠지.'
그렇게 판단한 난 바카이에게 다가갔다.
"말씀하세요, 작가님."
"...뭘!"
"불만이 있다면 불만을 말씀하시고. 힘든 게 있다면 힘든 걸 이야기하세요."
작가와 담당자의 호흡은, 작품의 컨디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 같은 담당자가 작가와 직접 만나 소통하는 것도 그 이유.
물론 오프라인 미팅을 꺼리는 작가도 많기에, 눈치껏 자리를 제안해야 했다.
"후우, 진작 이렇게 모셨어야 했는데."
아직 주저앉아 있는 바카이에게 손을 내민다.
"제가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 어? 나한테 화내지 않아?"
"화는 무슨. 오히려 제가 못 챙겨서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바카이는 당황하면서도 내 부축을 받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곧 귀가 빨개지더니, 뒤늦게 자기 얼굴을 감싸며 우는 소리를 냈다.
"이게 뭐야! 이럴 생각 없었는데애!"
"괜찮습니다. 그래도 딸꾹질은 멈췄네요."
"...그러네?! 오아아, 딸꾹질 멈췄다! 신나!"
유아 퇴행? 조증?
그녀 몰래 '열람'을 중얼거려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에 내가 입맛을 다시는 사이, 바카이는 나를 검지로 척 가리켰다.
"사실 이 정도 부작용이라면 괜찮아! 덕분에 용사, 너를! 만나는 데 성공했으니까! 히힛?!"
어라.
설마 날 만나려고 하다가 이렇게 된 거야?
그제야 난 약간의 감동과 함께,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작가님은 날 이렇게 만나고 싶어 했구나. 난 그런 것도 모르고...!'
바카이가 맨정신이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이렇게 자리하는 것 자체도 그녀에게는 큰 도전이었을 테다.
그렇게 판단한 나 역시 더 정중한 태도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작가님. 그런데 아까부터 저를 용사라고 하시는데. 왜 그런 호칭으로..."
"쉬잇! 질문은 내가 할 거야!"
질끈 눈을 감은 채 이리저리 고개를 흔드는 바카이.
상대가 취한 만큼, 나 역시 과도한 질문은 삼가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한테 궁금한 게 있으실까요?"
"응! 있어! 나 어엄청 궁금해!"
"뭐든 대답해드리겠습니다!"
"푸흐흐, 진짜...?"
그제야 그녀는 배시시 웃는다.
그리고는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 세상을 구하고 싶은 건 맞아?"
"네? 그게 무슨..."
"대애답!"
뜬금없는 질문이네.
세상이라면, 작품을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이 세계는 몇 번이나 멸망을 반복했었다.
여신 바카이는 그걸 복구했고 빙의자를 소환해 수정하려 애썼지만.
'실패를 거듭했지. 프리즈너 같은 이기적인 빙의자들 때문에... 가만! 설마 작가님은 나를, 의심하는 건가?'
담당자의 교체.
전생에서도 그런 케이스는 흔했다.
편집자의 퇴사나, 이직 등 회사의 사정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정작 작가님 본인은 기껏 호흡을 맞춘 상황. 그런데 담당자가 교체되면 지치는 걸 떠나 또 불신할 것이다.
'아아,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나란 녀석은 아직 멀었던 건가?'
그녀가 묻고 싶은 건 바로 이것.
자신과 작품을 끝까지 케어해줄 수 있을 것인지였다.
비로소 모든 퍼즐을 맞춘 난 덥썩 바카이의 양손을 붙잡았다.
"무, 무슨...?!"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저를 믿어주세요, 작가님."
꿈틀대던 바카이가 멈칫했다.
"...뭐?"
"저도 이해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작가님을 실망시켰겠죠."
그녀는 얼마나 많은 담당자를 떠나보내야 했을까.
심지어 그중에는 천승제 신입 편집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담당자였던 난 작품 속 악역조차 제대로 살리지 못했었다.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아니,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요."
"뭐, 뭐가 다른데...?"
"이런 말 제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난 머쓱한 기분으로, 하지만 자신 있게 말했다.
"작가님과 떨어져 있던 수년의 시간. 그사이 저는 망해가는 것들을 수없이 살려보았습니다."
아득한 순위권 아래, 소위 말하는 심해에 있는 작품들.
난 그중 상당수를 뜯어고쳐 매출을 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작가님들과 마찰이 있었지만.
지금도 난 그 경험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현재 내가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를 너무 빨리 만났다는 것. 내가 너무 미숙했을 때 작품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 심지어 작중 초반의 악역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
감정을 삼키느라 내가 잠시 말이 없자, 바카이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봤다.
"저기...?"
"...이곳에 오기 전, 몇 번이고 갈망했습니다. 한 번만 나에게 기회가 주어지기를. 그리고 놀랍게도 소원이 이루어진 겁니다."
이세계 트럭에 치여서.
"그러니 저는 제가 맡은 역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래. 난 악역을 강요 받고 있는 거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작품을.
"작가님이 만든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길이니까요. 그러니 한 번만, 저를 믿어주시겠습니까?"
바카이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손."
"손? 아, 이런! 죄송합니다!"
내가 황급히 손을 거둔 뒤에도, 그녀는 자기 발끝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반색하게 했다.
"좋아, 믿을게."
"정말입니까?!"
좋았어! 작가님이 의심을 거뒀다!
어쩌면 나중에 두 번째 작품도 계약해주시지 않을까?
"대신 조건이 있어."
"아, 조건... 그거라면 충분히 논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두신 게 있을까요?"
아마 신작의 계약비율이라거나, 계약금 정도를 말하는 거겠지.
뭐, 회사에 잘만 얘기한다면 어느 정도는 내 선에서 해결 가능할 듯하다.
하아, 지금 계약서만 나한테 있었어도, 바로 이 자리에서 도장 찍고 신작 계약했을 텐데.
"내 조건은 이거야."
자기 가슴을 짚는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했다.
"오직 나랑만 해야 해! 다른 녀석들은 안 돼!"
"...네?"
"그, 그야 당연하잖아! 신뢰를 위해서라면? 설마 나 말고 한눈팔겠다는 거야?!"
아.
이건 생각 못 했다.
그러니까 작가님은, 내가 오직 본인의 작품만 담당하길 원하는 거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냐. 대부분의 작가님은 본인 작품에 케어가 집중되기를 원하니까. 하지만...'
회사 정책이라는 게 있는 거다.
난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그건 당장 어렵습니다."
"왜, 왜?! 어째서...!"
"저는 저만의 것이 아니니까요."
회사의 것이지.
하지만 여기서 끝난다면, 내 영업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대신 이건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작가님과 제가 이곳을 제대로 바꿀 수만 있다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겠죠."
"...진짜?!"
네, 그야 초대박이 터졌을 때 얘기지만.
미안하게도 바카이는 어린애처럼 해맑게 웃었다.
"응응, 알겠어! 그럼... 대신, 이거 하난 들어줄 수 있을까?"
"아, 다른 원하시는 게 또 있을까요?"
"별건 아니고. 동료를 만들어 봐."
동료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내가 의아해하자, 그녀는 턱을 괸 채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세상은 혼자 바꿀 수 없어. 특히 인간은 뜻을 함께 하는 친구가 필요한 법이지."
"뜻을 함께 하는 친구..."
"뭐, 물론 나름 애쓰고 있다는 건 나도 봐서 알지만. 명심해. 위기를 함께 겪는 자만이, 진짜 동료가 될 수 있는 거야."
순간, 묵직한 충격이 뒤통수를 강타하는 듯했다.
'주인공의 동료! 작가님은 그걸 원하시는 건가?!'
돌이켜보면 원작에서 주인공은 1권 내내 고통만 받았지.
그를 서포트할 수 있는, 이렇다 할 조연 캐릭터가 없었다.
가령 일레나의 경우 인질로 잡혔다가 구출되는 퀘스트에 불과했고.
이번에 내가 만난 총학생회장 아타르라는 녀석 역시 내 기억에서 가물가물할 만큼, 비중이 적었다.
'나도 놓치고 있던 걸, 작가님이 캐치하실 줄이야!'
그러니까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주인공 루인을 빛내줄 동료가 필요하다는 뜻!
뒤늦게 그 의미를 이해한 난 뭉클한 심정으로 바카이를 쳐다봤다.
그래, 이거지. 이게 바로 작품 회의라는 거였어!
"이해했습니다, 작가님. 내 기필코, 훌륭한 조력자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정말이야? 약속!"
"약속!"
그녀와 새끼손가락을 걸던 난 흠칫했다.
놀랍게도 내 손가락이 반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어, 어어...?"
"히잉, 슬슬 효과가 다 됐나 봐."
"효과가 다 됐다뇨? 혹시, 그 부정주인가 뭔가 하는...?"
"응, 맞아! 한참 떠들었더니 부작용도 조금씩 가시는 것 같은데?!"
술이 깨는 것과 비슷한 원리인가?
그렇게 되면, 난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는 거고?
가만! 그럼 난 인질로 잡힌 것에서 다시 시작하는 건데?!
"자, 잠깐만요! 저 이대로 돌아가면...?!"
"알아, 알아! 나도 안다고오... 우리 용사가, 위험에 처했다는 거, 푸흐으!"
바카이는 졸음을 이겨내려는 사람처럼,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 위로 내 모습이 비친다.
"하지만 용사야. 눈 크게 뜨고 봐. 네가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말이야."
바카이의 눈에 비친 건 이제 천승제가 아닌, 일랜 키스폰이었다.
띠링!
['여신의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새로운 특성, '공간 열람'을 획득하였습니다!]
[특성 '공간 열람'은 공간의 설정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떠오르는 메시지와 함께, 시야가 빛으로 잠겼다.
* * *
일랜이 떠나고 한참 뒤.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자고 있던 바카이는 고개를 들었다.
'아?'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조용히 자기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부정주의 부작용이 이렇게나 클 줄이야.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후유증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끔찍한 건, 자신이 용사에게 추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
'왜, 왜 하필 저는 기록을 관장하는 여신인 걸까요?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다니!'
일반적인 경우라면 여신 바카이는 신도들의 비원을 정화한 에너지.
즉, '정제주'를 통해 조금씩 힘을 회복하여 용사를 서포트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정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부정주'에 손을 데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하나.
'용사님. 당신을 만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답니다.'
전생에는 천승제라는 이름으로, 여신의 세계를 사랑했던 사내.
바카이는 그를 믿고 용사로 소환하여 세상을 파멸로부터 막아주길 바랐지만.
일랜 키스폰으로 빙의한 용사는 캐릭터에 잡아먹히기라도 한 건지,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차라리 거기서 그쳤다면 바카이도 이렇게 혼란스럽지 않았을 테지만. 악행이라는 수식어와 상반되게도, 결과는 옳은 방향으로 나타났다.
'알고 싶었습니다. 제 선택이 혹시나 틀리지는 않았을지.'
바카이는 부정주를 통해 일시적으로 존재력을 회복한 다음.
때마침 용사가 의식을 잃은 틈을 타 이곳 여신궁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시험했다.
'용사님이 진심으로 이 세계를 구하고 싶은지를.'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이런 말 제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작가님과 떨어져 있던 수년의 시간. 그사이 저는 망해가는 것들을 수없이 살려보았습니다.
'설마 용사님이, 다른 세계까지 구한 경험이 있었을 줄이야.'
이미 용사는 이곳에 오기 전, 또 다른 우주들까지 구해냈던 것.
그 정도라면 지칠 법도 한데, 심지어 용사의 결의는 굳건한 상태였다.
-저는 제가 맡은 역할을 다할 생각입니다. 작가님이 만든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길이니까요.
용사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그것만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길.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바카이의 심금을 울렸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감히 용사님의 진심을 의심하다니...'
하지만 덕분에 용사의 진심과 생각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또한 왜 그토록 바카이가 혼란을 느껴왔는지도.
"용사님께서는, 저보다 더 먼 미래를 보고 계시는 걸까요? 저조차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하나.
용사는 바카이의 신도가 되길 거부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세계에는 그녀와 같은 신들이 여럿 존재하며.
그들 역시 흥망을 거듭하며 각자의 세력을 구축하고, 심지어 반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카이는, 혹여나 용사가 엄한 신의 눈에 띄어 잘못된 길을 갈까 염려했던 것. 그래서 바카이도 그가 동료를 구해서 용사 파티라도 결성하길 바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토속신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일까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토속신의 상당수는 사라졌고.
백사를 비롯한 몇몇 신들만 그 명맥을 간신히 이어오고 있었다.
바카이는 용사가 빙의한 가문이, 백사를 숭배하고 있기에 마음에 걸렸지만.
-저는 저만의 것이 아니니까요.
용사는 스스로 희생의 길을 골랐다고 이야기한 만큼.
그가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바른길로 가리라 믿기로 했다.
-저를 믿어주세요.
순간,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용사의 눈빛이 떠오른다.
그가 잡았던 손에서 아직도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두근!
낯선 감각에 헛숨을 삼킨 바카이.
그녀는 귀밑머리를 넘기며 시선을 돌렸다.
'아직 부작용이 다 해소되지 않았나 봅니다. 부정주란 무서운 것이군요.'
* * *
의식을 찾자마자 내가 느낀 건 지독한 통증.
당장 뒤통수가 욱신거리고 코가 시큰거렸으며, 입안에선 부서진 치아가 느껴졌다.
"...쿨럭!"
기침부터 토하며 난 힘겹게 눈을 떴다.
'돌아온 건가. 그런데 여긴...?'
면포라도 뒤집어쓴 듯 시야가 조금 갑갑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초록빛이 은은하게 발광하는 벽돌.
사방을 둘러싼 그것은 그건 아름답기보다 음산함을 조성하고 있었고.
심지어 환기도 잘 안 되는 건지, 묘하게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윽, 뭐야. 이 냄새는? 키스폰 저택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끌고 온 건가?'
몸을 움직이려던 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내 몸이 의자에 밧줄로 칭칭 묶여있다는 점.
아마 날 데리고 온 카자 프레소의 짓이겠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츼이이이이이이입!
몸이 번들거리는 뱀들이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요사스럽게 혀를 날름거리며 꿈틀대는 그 물결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끄아아아아아아악?!"
X발, 깜짝이야!
방금 그건 내가 지른 비명이 아니다.
바로 뒤에서 누군가의 당황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 여긴?! 설마 일레나가 감금당하던 그 지하실인가!"
어라.
어디서 듣던 목소리인데. 역시 좀 울리긴 했지만.
심지어 들썩거리는 움직임이 바로 뒤에서 느껴졌다.
혹시 이 사람도 나랑 반대 방향으로 함께 묶인 건가?
"으윽, 하지만 이건 쥐가 아니라 뱀이잖아? 맙소사! 나 때문에 그 애는 이런 곳에서 고통 받고 있었던 거라고?!"
"...너 설마, 루인?"
"흐허악?! 누, 누구야! 누군데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까무러칠 듯 놀라는 반응에, 난 뒷골이 당기는 걸 느꼈다.
아, 돌겠네. 진짜 루인이라고? 이 새끼는 왜 또 잡혀 와서 이러고 있는 건데?!
그때.
끼이이익!
한참 높이 있는 곳에서 철문이 열리더니, 빛을 등진 실루엣이 나타났다.
"여어. 다들 잘 주무셨나?"
얼굴 곳곳에 흉터가 진 남자가 우리를 보며 씩 웃는다.
C급 용병단장, 카자 프레소.
우리를 납치한 그놈이었다.
37화. 계획이 다 있었구나?!
원작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는 당연하게도 주인공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렇다 보니 키스폰 저택에 대해서 상세한 언급은 없는 편이다.
다만, 예외 케이스가 있는데 그게 바로 키스폰 저택의 지하.
일명 '뱀굴'로 불리는 그곳에 난 갇혀있는 듯했다.
그것도 멍청한 주인공 루인과 함께.
"너, 넌 뭐야?!"
귀청 떨어지겠네.
내 뒤에서 루인이 소리 지르자, 우리를 내려다보던 카자 프레소가 웃었다.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프레소 용병단의 단장, 카자 프레소다."
"프레소 용병단? 용병단이 어째서 이런 짓을..."
중얼거리던 루인은 흠칫했다.
"설마! '그놈'이 사주한 건가? 일레나를 납치하라고?!"
뭐야, 이 녀석.
그놈이란 건 누굴 말하는 거지? 뭘 알고 떠드는 건가.
"호오?"
카자 프레소 역시 의외라는 표정으로 루인 쪽을 쳐다봤다.
"네 녀석은 뭔가를 아는 눈치군."
...아닐걸.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카자 프레소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래서 그렇게 득달같이 여기로 달려온 건가."
"너희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본인들 걱정부터 하시지."
카자 프레소의 시선이 이번엔 나를 향한다.
"여긴 키스폰 저택의 지하 감옥이다. 보다시피 이쁜 친구들이 사방에 깔려있어서, 어설프게 움직였다간 바로 물릴 거야. 뭐, 한 명이 추가된 건 나도 의외였지만. 혼자 죽는 것보단 덜 쓸쓸하지 않겠어?"
말하자면 탈출 시도 따위는 하지 말고 여기에 가만히 있으란 뜻이다.
'카자 프레소. 생각보다 철두철미한 놈인데.'
시야를 제한하기 위해 면포를 뒤집어씌운 것도 모자라.
우리를 의자에 포박하고 독사 가득한 지하 뱀굴에 가두었다.
'...아닌가. 기왕 시야를 가릴 거면 좀 제대로 된 걸 쓸 것이지.'
놈들이 우리한테 뒤집어씌운 면포는 꽤 낡아빠진 것이었다.
갑갑한 건 확실했지만 구멍이 숭숭 뚫려서 사물을 구분하는 건 어느 정도 가능했다.
덕분에 뱀들이 아직 우리를 신경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꾸물대는 것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배가 부른 건지도 모르지.
"예상하고 있겠지만, 얼마 후면 우리도 볼일이 끝난다."
카자 프레소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내게 물었다.
"그전에 하나 묻지. 키스폰 가주는 누굴 차기 가주로 세울 계획이지?"
"뭐? 그, 그야 일랜 키스폰이겠지! 당연한 거잖아!"
루인의 어리둥절한 대답.
아니, 나한테 질문한 거잖아.
카자 프레소 역시 비릿한 미소로 반응했다.
"크큭! 그거야 대외적인 명분이지. 마력 개방조차 하지 못하는 놈을, 하벨처럼 교활한 자가 후계로 둘 리 없잖아? 그러니까 뱀을 대신할 수 있는 용을 훔친 거겠지."
뱀을 대신할 수 있는 용?
그건 일레나를 얘기하는 건가?
문득 카자 프레소의 설정이 떠올랐다.
- 목표 : 혈룡 길드가 프레소 용병단을 인수하는 그날까지!
'그러고 보니 일레나는 입양아 설정이었지. 하벨이 혈룡 길드에 돈을 주고 데려왔다는 내용을 본 것 같은데....'
가만!
그렇다면 이 녀석들은 일레나를 혈룡 길드에 되팔 생각인가?
어쩌면 프레소 용병단을 고용한 게, 다름 아닌 혈룡 길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 왜 지금 와서 일레나를 데려가려는 거지?'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카자 프레소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하지만 뜻밖이야. 일랜 키스폰이 힘을 숨기고 있을 줄 몰랐거든. 그렇다는 건 키스폰 가주가 계획을 바꿨다는 건데. 어이, 내 추측이 맞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이건 생각보다 비싸게 팔 수 있는 정보라고. 키스폰 가주가, 자기 뒤 이을 녀석으로 일랜 키스폰을 점 찍은 게 맞나? 대답만 해준다면 목숨은 살려드릴게."
"그건 이미 얘기했잖아! 그리고 그런 걸 왜 나한테...?!"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넌 좀 닥치지 그래? 난 네 뒤에 있는 녀석한테 질문한 거니까."
"어... 어?"
루인의 당황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어우, 내 속이 다 시원하네.
난 그제야 입을 뗐다.
"알고 싶어? 키스폰 가주가 누굴 차기 가주로 세울 건지?"
"오, 그래도 살고는 싶은 모양이군. 그래, 대답해봐."
"나도 묻고 싶은 게 있어. 내 질문에 대답하면 나도 얘기해주지."
"하핫, 웃기는 놈이군! 우리한테 잡힌 주제에 나를 상대로 거래할 생각인가?"
"어차피 살릴 마음도 없잖아. 어차피 내가 죽을 텐데, 정보 교환한다고 해서 네가 손해 볼 것도 없을 테고."
카자 프레소는 뜨끔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그냥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더니. 소문도 믿을 게 못 되는군. 좋아, 거래를 수락하지. 그래서 네가 궁금한 건?"
"너희를 사주한 사람은 일레나를 원하는 것 같은데. 왜지?"
"뭐야. 고작 한다는 질문이 그런 거였나.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뭐지, 저 반응은?
내가 의아해하자 카자 프레소는 피식 웃었다.
"뭐, 그런 거라면 대답 못 해줄 것도 없지. 일레나 키스폰을, 원래는 혈룡 길드가 데리고 있었던 건 알고 있나?"
"물론."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지는군. 그 상품, 그러니까 일레나 키스폰은 애초에 인간이 아냐."
"그게 무슨...?"
인간이 아니라니.
그건 원작의 담당자였던 나조차 처음 안 사실이다.
애초에 일레나는 주인공 루인의 트로피에 불과한 캐릭터.
그녀는 주인공이 클리어해야 할 퀘스트 목표이자 인질이며, 위기 때나 흑화하는 히로인일 뿐이었다.
'그게 원작에서의 설정 전부였어. 일레나가 인간이 아니라는 언급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모르는 게 또 있는 건가?'
약간의 혼란이 찾아오는 그때.
카자 프레소가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일레나는 용아병(龍牙兵)이다."
"...뭐?"
"말 그대로 용의 이빨을 재료로 만들어진 개체. 연금술로 만들어진 인간형 생명체라는 거지. 아, 호문쿨루스라고 설명하는 게 이해가 더 빠르려나?"
자, 잠깐만! 일레나가 용아병이었다고?!
원작에서 용아병은, 그 형태가 다양하나 공통적인 설정 두 가지가 있었다.
드래곤의 이빨로 만들어진 만큼 수명이 짧아, 암만 오래 살아도 20년을 넘기지 못하다는 점.
다만, 강력한 마력과 육체를 지녔기에, 보통은 드래곤의 권속으로서 외적으로부터 레어를 지키는 경우가 많다는 설정이다.
"녀석은 과거, 혈룡 길드가 레드 드래곤의 레어에서 획득한 전리품 중 하나였지."
카자 프레소가 말했다.
"하벨 키스폰도 그 사실을 알고 용아병을 구매했다고 들었는데. 정작 네 녀석한테는 얘기해주지 않았나 보군? 크큭!"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
어차피 일랜 키스폰은 마력 개방도 못 하는 불구.
또한 일레나가 자신을 대체할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을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일레나가 그런 용아병이었을 줄은!'
놀라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원작에서 일레나를 인질로 잡은 일랜이 루인을 죽이려 할 때.
암만 흑화했다고 하지만, 그녀가 오퍼 블러드까지 사용한 일랜을 뛰어넘는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일레나가 드래곤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는 용아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작가님은 이런 것까지 다 설계하고 계셨던 건가?'
새삼 작가님에게 감탄했다.
원작에서도 이런 걸 독자에게 알려줬다면 좋았을 텐데.
존경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사이, 이번엔 카자 프레소가 내게 질문했다.
"이젠 내 질문에 네가 대답할 차례다. 키스폰 가주는 누굴 자기 후계로 삼을 계획이지?"
"그전에 하나 더! 너희를 고용한 건 혈룡 길드야? 그것까지만 알려주면 나도...!"
휘콱!
날아든 대거가 바로 내 귀 옆에 꽂혔다.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칼은 의자 등받이가 아닌, 내 눈을 관통했겠지.
그대로 얼어붙은 난, 그 대거를 던진 게 카자 프레소라는 걸 알아챘다.
'이, 이 먼 거리에서 칼을 던졌다고? 정말이지, 정교한 솜씨야! 조금만 빗나갔다면 난...?!'
그때 칼을 투척한 카자 프레소가 입맛을 다셨다.
"쩝. 못 맞췄네."
실수한 거였냐?!
카자 프레소는 그런 날 보며 살벌하게 웃었다.
"꼼수 부리지 말고 내 질문에나 대답해. 그리고 네 말대로 어차피 죽을 마당이니까, 숨겨봤자 너한테 이득 될 건 없어. 명심하라고."
그가 원하는 건 키스폰 가문의 차기 가주.
그게 일랜인지 일레나인지 파악해서 그 정보를 팔 계획이다.
물론 난 알고 있다. 키스폰 가주가 일레나를 차기 가주로 삼을 생각이란 걸. 애초에 마력 불구에 망나니인 일랜은, 효용 가치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얘기했다가는, 내가 쓸모없어질 때 죽이려 들지도 몰라.'
지금 내가 살아있는 건, 저들이 일레나를 붙잡기 위해서 나를 인질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용병단이 일레나를 확보하면 나는 즉시 죽을 목숨이라는 것.
따라서 난 거짓 정보를 흘려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카자 프레소. 네 추측이 맞아."
내가 말했다.
"키스폰 가주는 최근 마음을 바꿨어."
"호오, 그 말은...?"
"키스폰 가문의 차기 가주는 일랜 키스폰이다. 따라서 정보만 팔 게 아니라면, 인질 협상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인질 협상에 필요하다면, 나를 죽이진 않겠지.
이것이야말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카자 프레소 역시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그 자리에서 짝짝 손뼉을 쳤다.
"과연!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단 말이지? 수상하다 싶었는데 역시 내 예상이 맞았..."
"단장님!"
그때.
출입구 바깥에서 또다른 용병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카자 프레소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설마 '상품'이 벌써 도착한 건가?"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웬 녀석들이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제복으로 보아 레드팽 아카데미의 생도들 같은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카데미 생도들이라고?
카자 프레소도 나와 똑같이 반응했다.
"레드팽? 아카데미에 있을 녀석들이 왜 여길..."
말을 잇던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카자 프레소의 미간이 확 찡그려졌다.
"치잇, 시간을 끌었구나?! 돌아오면 네놈의 손가락부터 하나씩 잘라주마!"
무시무시한 말을 던진 그가 철문을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쾅!
아니, 그거 내가 그런 거 아닌데? 손가락 자르면 안 되는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자코 있던 루인이 크게 반색했다.
"살았어! 친구들이 우리를 구하러 오나 봐!"
...너였냐? 아카데미 애들을 부른 게?!
가만. 녀석이 부를만한 친구라고 해도 별로 없을 텐데.
기껏해야 청마반. 그리고 얼마 전에 내가 다리를 놓아주었던...
'아타르? 설마 이 녀석, 여기 오기 전에 도움을 요청한 거야?'
불가능할 것도 없다.
최근 난 아타르한테 루인을 얘기했었으니까.
다만 그 짧은 사이에, 둘이 벌써 가까워진 것 같아 놀랐을 뿐.
'이 기특한 놈들. 언제 그새 서로 돕는 관계가 됐대?'
내가 중재자로서 역할을 잘 수행한 덕분인가?
그 생각에 미친 난 바카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위기를 함께 겪는 자만이, 진짜 동료가 될 수 있는 거야.
작가님 역시 주인공에게 동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만큼.
루인이 아타르를 부른 게 맞다면, 이만큼 기가 막힌 타이밍도 없었다.
'만약 루인이 아타르를 불렀다면, 그건 아타르가 진정한 조력자가 된다는 뜻!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이야!'
속으로 탄성을 내뱉은 그때.
"망할 일랜 키스폰!"
깜짝이야!
설마 루인이 내 정체를 알아차린 건가?!
녀석을 보려고 해도 몸이 묶여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그 자식! 설마 저런 흉악한 놈들까지 고용해서 자기 여동생을 납치할 줄이야. 놈이 혼자일 거라고 방심했던 나도 어리석었어, 젠장!"
다행히도 내가 일랜 키스폰이라는 걸 여전히 모르는 듯하다.
여전히 루인은 자신과 함께 갇힌 사람이 나라는 걸, 상상도 못 하는 모양.
"아,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지? 그나저나 넌 어쩌다 여기 붙잡혀 온 거야?"
마찬가지로 묶여있는 탓에, 이쪽을 확인할 수 없는 그가 내게 묻는다.
기뻐했다가 분노했다가 차분해졌다가, 무슨 다중인격자도 아니고.
그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루인이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아까 저놈이랑 하는 대화를 옆에서 들어보니까. 키스폰 가문에 대해서도 제법 잘 알고 있는 것 같던데. 그러고 보니 너, 아까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우리 아카데미 생도인가?"
질문은 하나만 해, 이 주인공 자식아.
마치 심문실에 들어온 듯한 기분에, 난 내심 긴장하고 말았다.
여기서 내가 일랜 키스폰이란 게 밝혀지면 곤란해. 까딱하면 이야기가 엉켜버릴 거야.
"내 이름은..."
난 천천히 입을 뗐다.
"'이랜'이다. 키스폰 가문을 잘 알고 있는 이유는, 내가 일랜의 사촌이기 때문이지."
사촌이라는 설정까지는 좋았는데.
일랜 다음엔 이랜이냐? 이름을 지어도 너무 대충 지었잖아!
"이랜이라고?"
되묻는 루인의 음성에서 어리둥절함이 묻어났다.
"우리 아카데미에서 그런 이름은 못 들어본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나를...?"
"널 알고 있는 건, 나 역시 레드팽에 재학 중이라서야.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난 본명이 아닌, 가명을 쓴다. 왜냐하면..."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덧붙였다.
"난 일랜 키스폰한테 원한이 있어. 그래서 일부러 정체를 숨기고, 녀석이 있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거지."
"...!"
속사포처럼 질문을 퍼부어대던 루인도 놀란 듯 헛숨을 삼켰다.
"그, 그런 거였구나! 그럼 여기에 잡혀온 것도 설마...?"
"그래. 안타깝게도 일랜, 그놈이 눈치챈 거다. 그래서 나도 여기에 붙잡혀온 거고."
어떻게 둘러대긴 했지만.
이런 어설픈 연기가 녀석한테 통할까?
난 잔뜩 긴장한 채 루인의 반응을 기다렸다.
"일랜 키스폰...! 자기 여동생도 모자라, 이젠 사촌까지 데려와 여길 가두다니?!"
띠링!
- 호감 : -5→-7
▶ 조심하십시오! 루인은 당신에 대해 살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통했어? 심지어 비호감도까지 올라갔다고?!'
한 번씩 느끼는 거지만, 역시 난 제법 연기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편집자 말고 배우나 도전해볼까.
물론, 언제까지고 이런 망상에 젖어있을 시간은 없었다.
'문제는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느냐 하는 건데.'
몸은 묶여있고 사방에는 독사가 득실하다.
한참 고민에 빠져있던 중 문득 바카이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용사님. 눈을 크게 뜨고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그러고 보니 나, 새로운 특성을 얻었었지?
그걸로 어쩌면...!
'공간 열람!'
촤락!
38화. 악당 주제에 인기가 너무 많다
[설정 열람 : 공간]
- 이름 : 뱀굴
- 위치 : 유펠리아 왕국 > 키스폰 영지 > 키스폰 저택 > 지하 1층
- 설명 :
>키스폰 령 남부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로, 200년 전 하벨 키스폰이 유펠리아에 정착하면서 건축되었다. 저택 지하 1층은 죄인 및 포로를 가두는 용도로 설계되었으나, 하벨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뱀굴'이라는 특수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뱀굴의 독사들은, 마혈에 서식하면서 변이된 백인사(百人蛇)로서, 사람 백 명을 잡아먹고 체내에 백인혈석이라는 마석이 만들어진 몬스터다. 하벨은 이 점을 이용해 백인사를 사역마로 부리며, 키스폰의 혈통에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뭐야, 이 끔찍한 놈들은.'
뱀굴에 대한 정보를 훑던 난 진저리를 쳤다.
'사람 백 명을 잡아먹었다고? 일레나는 이런 괴물들 사이에서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한 거지?'
엄밀히 말하면 이미 조증이라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그걸 차치하더라도 그녀가 정상인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질 만큼, 이곳은 지옥 그 자체였다.
'여기가 더 싫어졌다는 것 말고는, 그리 도움 될 만한 정보는 아닌 것 같은데...'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실망하려던 찰나.
「키히이스폰...」
서늘한 감각이 발끝부터 적시며, 소름 끼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뱀 하나가 내 발 언저리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뭐, 뭐야! 저리 안 가?!'
발로 차면 바로 물것 같아서 차마 움직이지도 못한다.
불행은 연달아 온다고 했던가.
"저, 저기 이랜?!"
루인의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이 녀석들, 우리한테 오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기분 탓 따위가 아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우리한텐 눈길 한번 안 주던 백인사들이.
지금은 밤바람에 흘러가는 강의 물결처럼,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키스폰...」
「키스폰인가...」
「키스폰이다. 냄새가 옅긴 하지만...」
기분 나쁘게 쉭쉭 대는 그 소리는, 점차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잠깐만. 이거 혹시 이 괴물들이 얘기하는 건가?
순간, 난 아까 봤던 문구를 떠올렸다.
-백인사를 사역마로 부리며, 키스폰의 혈통에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설마, 이게 그런 뜻이었어?!
무서운 것도 잠시, 난 조금씩 고양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까 이 백인사들은, 키스폰의 피가 흐르는 나한테 반응하고 있다는 거다!
'다시 말해, 내가 백인사를 사역마로 부릴 수도 있다는 뜻...?!'
내 생각을 방증하듯 백인사 중 한 놈이 나를 꼿꼿이 쳐다보고 있었다.
놈의 검붉은 눈동자. 그 위로 찢어진 세로 동공이 확대된다.
「키스폰... 오늘 가져온 과육은 평소의 것과 다른 것이군.」
과육?
녀석의 시선을 가늠하던 난 흠칫했다.
놈이 말하는 과육이란, 내 뒤에 있는 루인을 의미했다.
'평소의 것이라면, 설마 일레나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상상을 더 이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대신 난 녀석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작게 떠들었다.
"아니. 여기에 과육은 없어."
「그럼 어디에 있지? 점점 허기가 지는데.」
대박! 정말 대화가 통하잖아?!
놈은 찢어진 혀를 날름거리며 재촉했다.
「과육이 필요하다. 키스폰.」
"그런 거라면 걱정 마. 밖에 준비해뒀으니까."
「밖이라니. 너는 우리한테 이곳에서 벗어나는 걸 통제했잖나.」
하벨 키스폰은, 이놈들의 활동 영역을 뱀굴로 제한한 듯했다.
또한 백인사들은 나를 하벨 키스폰으로 인지하는 게 분명했다.
"나가는 걸 허락할게."
「진심인가? 제약을 거두겠다고?」
"물론. 그리고 오늘에 한해서야. 나가서 마음껏 먹으라고. 하지만 그전에..."
난 눈으로 나를 묶고 있는 밧줄을 가리켰다.
"이걸 풀어줘."
「기꺼이...」
놈은 놀라우리만큼 매끄러운 동작으로 내 다리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크고 묵직한 뱀이 미끌미끌한 몸을 이끌고 허벅지에 안착한다.
그 기묘한 느낌에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난 애써 삼켰다.
쩌억.
백인사가 아가리를 벌렸다.
길게 이어지던 침이 끊어지면서, 한 쌍의 독니가 드러났다.
'자, 잠깐만?! 지금 와서 날 물겠다고?!'
내가 몸을 꿈틀거렸지만, 놈은 자연스럽게 무게 중심을 잡았다.
오히려 녀석의 독니에서 샛노란 독이 맺히기 시작해, 나도 요동치는 걸 관둬야 했다.
툭.
독물 두어 방울이 밧줄에 닿는 순간.
치히이이이이이!
놀랍게도 밧줄이 녹아들며 희뿌연 연기를 뿜어냈다.
난 기겁하면서 재빨리 팔에 힘을 주었고.
이미 부식된 밧줄은 바로 뚝 끊어졌다.
'됐다!'
포박이 풀린 내가 몸을 일으키자, 뒤에 있던 루인은 화들짝 놀랐다.
"주, 줄이 끊어졌어?! 이랜! 이거 네가 한 거야?"
"뭐, 그렇지."
"대단해! 어떻게 한 건지 혹시 알 수 있을까? 아, 물론 억지로 알려줄 필요는 없고..."
그가 떠들거나 말거나, 나는 줄이 녹으면서 몸에 남은 열기에 놀라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즉사할 게 분명할 만큼 무시무시한 독의 위력.
일레나는 이런 독을 수시로 주입 당했을 텐데.
'용아병이라서 살아남은 건 둘째 치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감도 안 와.'
이 소설은 전체 연령이다.
따라서 히로인인 그녀가 뱀굴에서 어떤 일을 당하는지는 간접적으로만 묘사될 뿐.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페이지 아래에서는, 매일 같이 이 끔찍한 고문을 견디고 있었던 건가.'
뒤늦은 충격이 머릿속을 지배하기도 전.
루인은 어디론가 움직이는 백인사들을 가리켰다.
"어어! 이 녀석들, 밖으로 나가는 것 같은데?!"
"좋아. 우리도 나가자고."
"알았어! 그런데 이랜. 그건 언제까지 뒤집어쓰고 있을 거야?"
어느새 그는 강제로 씌워져 있던 면포를 벗어던진 상태.
내가 깜빡했다고 생각했는지, 루인이 내 면포까지 벗기려고 손을 뻗었다.
"안돼!"
"깜짝이야! 왜 그래, 이랜? 난 그저 도와주려고 한 건데."
루인은 당황하며 날 쳐다봤고.
난 쓰고 있던 면포를 더욱 아래로 당겼다.
"이봐, 루인 아스달. 내가 왜 이걸 쓰고 있다고 생각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야 놈들이 우리한테 겁주려고 그런 거지."
"그건 부차적인 거다. 사실 내 얼굴은 끔찍해서 보기만 해도 악몽에 시달릴 정도지. 왜냐하면 일랜 키스폰이 내 얼굴에 염산을 끼얹어, 화상을 입게 했거든."
물론 모두 만들어낸 이야기다.
솔직히 내가 봐도 급조한 티가 나는 변명이었지만.
"대체, 일랜 키스폰. 그 자식은..."
딱딱하게 변해버린 루인의 표정.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어떻게 살아왔길래, 이토록 악독할 수 있는 거지? 난 도저히 그 녀석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어...!"
이것으로 판명되었다.
우리의 주인공은 사람을 지나치게 잘 믿는다는 걸.
'뭐, 그게 주인공답다면 주인공다운 성향이지만. 어쨌든 정체를 숨겨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다행인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그때.
띠링!
- 호감 : -7→-9
▶ 경고! 루인은 당신의 목을 베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습니다!
평소였다면 잇따른 비호감 상승에 쾌재를 불렀겠지만.
'저게 주인공의 눈이라고?'
한때 난, 제주도에서 승마 체험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바로 내 앞에 있던 사람이 말발굽에 밟히는 사고가 있었는데.
그때 보았던 말의 커다란 눈은, 인간에 대한 지독한 혐오가 호수처럼 담겨있었다.
그래서 난 이세계에 빙의한 지금도 승마 배우기가 두렵다. 혐오에 깔려 살해당할까 봐.
'지금 루인의 눈빛이 그래. 이대로 내가 얼굴을 드러내면, 진짜 죽고 말 거야. 그러니 여기서는 어떻게든 내 정체를 숨겨야 한다.'
난 애써 태연한 척,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정해, 루인 아스달. 지금은 여기부터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니까."
"...아아, 미안! 예전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 녀석 생각만 해도, 한 번씩 이성을 잃어버리거든."
루인이 머쓱하게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네 말이 맞아, 이랜. 일단 여기부터 빠져나가자고!"
친목 다짐이나 하자고 녀석에게 악수를 청한 건 아니다.
전투가 벌어지기에 앞서, 녀석의 스펙부터 점검하는 게 우선이니까.
'열람.'
촤락!
[인물 열람]
- 이름 : 루인 아스달 (F급)
- 특성 : 과대망상, 희생정신, 정의감, 체력단련, 유니콘 블러드, 청마검술
...아니 이 자식.
청마검술까지 각성했으면서 강함 등급은 왜 안 오른 거지?
아니면 강함 등급을 올리기 위한 조건이 따로 있는 건가.
"왜,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내가 빤히 쳐다보자, 루인은 얼굴을 붉혔다.
붉히지 마. 피 보고 싶어지니까.
난 홱 손을 거두며 말했다.
"나가면 무기부터 찾자."
* * *
아타르의 계획은 단순했다.
일랜에게 원한을 지닌 루인을 산 채로 붙잡는 것.
물론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전투 중에는 사망 같은 사고가 얼마든지 일어나는 법.
따라서 아타르는 루인을 죽이든 살리든 일랜에게 끌고 가서 증명할 셈이다. 자신 또한 일랜과 대등한 포식자라는 걸.
'그런데...'
키스폰 저택에 들어선 아타르가 안경을 고쳐 올렸다.
'저 녀석들은 뭐지? 루인, 놈 혼자서 쳐들어간 게 아니었나?'
칠이 벗겨진 흰색 담벼락을 배경으로, 중앙에는 먹물처럼 까만 연못이 나 있는 정원.
연못 건너편 건물에서는 웬 남자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중 가장 선두에 선 용병단장, 카자 역시 아타르 일행을 발견했다.
카자는 몰려온 흑호반을 보며 칫 소리를 냈다.
'일랜 키스폰이 불러온 놈들인가? 혼자서 움직이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연못을 중심으로 프레소 용병단과 흑호반 생도들이 대치했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건 아타르였다.
"나는 레드팽 아카데미의 총학생회장, 타이언 가문의 아타르다!"
배운 귀족답게 본인의 소속과 이름을 밝힌다.
그러자 프레소 용병들은 자기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레드팽의 총학생회장이라고?"
"그런 앨리트가 어째서 일랜 같은 놈을...!"
"타이언이라면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가문이잖아."
"나도 들은 것 같아. 성장의 뒷배경에는 키스폰 가주의 입김이 있었다는 소문을...."
동요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용병단의 목적은 일랜을 제거하고 상품을 확보하는 것.
하지만 설마, 레드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생도가 일랜을 구하러 올 줄은 몰랐다.
'빌어먹을! 오라는 상품은 안 오고 하필이면, 타이언 가문의 자제가...?'
카자 또한 내심 당황하는 한편, 일랜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이걸로 확실해졌군. 키스폰 가주는 차기 가주로 일랜을 선택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무려 타이언 가문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지원을 나설 이유가 없다.
일레나, 그 용아병을 입양한 건 세간의 위협으로부터 차기 가주를 지키기 위한 눈속임.
이 정도 정보라면 귀족이나 키스폰의 적대세력에 상당히 비싼 돈을 받고 팔 수 있었다.
"하! 누군가 했더니, 타이언 가문의 도련님이셨군요?!"
카자가 일부러 큰 소리로 웃으며 소리쳤다.
"나는 프레소 용병단의 카자 프레소요! 업무상 밝힐 수는 없지만, 사실 우리 고용주는 정의를 실천하고자 우리를 보낸 것인데. 도련님도 협조해준다면 서로 손해 볼 게 없을 거요!"
당연하게도, 정의를 실천하고 말고는 카자가 알 바 아니다.
그는 오직 이번 의뢰를 수행해서 큰 보상을 얻고.
용병단을 혈룡 길드에 넣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정의?'
흑호반 생도들은 움찔하며 서로 눈치를 봤다.
총학생회장이 이끌어서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사실 일랜 키스폰이 아카데미에서 선한 이미지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히려 악의 축에 가까운 탓에, 막상 저런 얘길 들으니 양심이 찔렸다.
"초, 총학생회장님. 역시 저놈들은 일랜 키스폰을 잡으러 온 것 같습니다만."
"생각해 보면 키스폰 가문이 그리 좋은 이미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루인 하나를 막는 거라면 몰라도. 용병단이라면 우리가..."
그들은 그저 다수의 입장에서 루인 하나를 잡으러 왔을 뿐.
무려 용병단이나 되는 자들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직 생도에 불과한 그들이, 프로를 이기겠는가.
"나도 귀가 있으니 다들 닥쳐요."
"...!"
흑호들의 입을 다물게 한 아타르는 용병단을 노려봤다.
저들은 루인이 고용한 게 분명하다.
'일개 청마반 나부랭이가 돈이 어디 있어서, 저런 용병단을? 어쨌든 귀찮게 됐군.'
당장 그가 이끈 흑호반 측근들이 동요하고 있는 상황.
이럴 때일수록 타이언 가문다운 정치력이 필요할 때다.
"두 배!"
아타르가 두 손가락을 펼치며 용병단에 소리쳤다.
"그쪽 고용주가 얼마를 주었든, 두 배를 주겠다! 그러니 길을 트고, 무의미한 살상을 관두자!"
"두, 두 배...?!"
용병들은 술렁이며 카자를 쳐다봤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카자도 당황했다.
'저 또라이 새끼는 또 뭐야. 차라리 싸우든가! 돈지랄로 우리를 회유해보겠다고?'
다른 때라면 카자도 아타르의 제안을 고민해볼 법하다.
하지만 그는 키스폰의 차기 가주에 대한 고급 정보를 갖고 있는 상황.
따라서 상대가 두 배를 부른다고 한들, 그것보다 비싸게 팔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스르릉!
칼을 뽑은 카자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도련님. 진짜 세상은 그리 쉽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서요."
노련한 용병단장의 반응에, 흑호반 쪽은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총학생회장님! 이쯤에서 우리가 물러나는 게..."
"뭐, 이 새끼야?"
"예?"
아타르는 서늘하게 뜬 눈으로 생도를 쳐다봤다.
"뭐를 위하여 어쩌고 하면서 달려 나올 땐 언제고. 지금 와서 물러나자?"
"그, 그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니까..."
"아하, 상황이 다르단 말이지."
"예! 바로 그겁..."
스핏!
레이피어가 생도의 뺨을 스치면서 생채기가 났다.
생도들은 물론, 반대편에서 지켜보던 용병들조차 흠칫했고.
순식간에 레이피어를 뽑아 생도를 해친 아타르는, 다른 흑호반을 쳐다봤다.
"자, 이 정도면 또 상황이 달라진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지?"
미쳤어!
...라고 생도들은 하나 같이 생각했지만.
이들 대부분은 타이언 가문과도 밀접한 가문의 자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흑호반 중에서도 아타르의 측근이 되길 자처했었고.
언젠가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타이언 가문을 발판 삼아 더 높이 올라가는 게 꿈이었다.
'X발, 이렇게 뒈지나, 저렇게 뒈지나!'
공포와 광기에 휩싸인 생도들이 저마다 무기를 뽑아 들었다.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이래 봬도 검술과목에서 상위성적을 받은 몸!"
"저딴 허접한 용병 나부랭이들 따위, 모조리 씹어버리죠!"
그제야 뺨이 베인 생도도 허겁지겁 무기를 뽑았다.
"저, 저도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후우, 무리할 건 없습니다. 애초에 우리의 목표는 루인 아스달..."
아타르가 레이피어로 키스폰 저택을 가리켰다.
"놈의 목만 따오세요! 그걸 수행한 자는 차기 총학생회장으로서 유력해질 뿐만 아니라, 타이언 가문과의 우정을 쌓는 데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우, 우오오오오오오오오!"
괴성을 지르며 정원을 가로질러오는 흑호반 생도들.
그들을 보던 용병들이 아연실색했다.
"저, 저 새끼들! 단체로 미친 건가?"
"상대도 되지 않을 거면서 죽을 작정을 했군!"
"하지만 하나 같이 귀족 자제들입니다! 진짜 죽였다간, 문제가 심각하게 커질 텐데요?!"
용병단은 명성과 인맥, 돈으로 먹고 사는 족속이다.
그 물주에 해당하는 가문의 귀한 도련님들을 함부로 죽였다간.
제아무리 용병단이라고 해도 여기저기서 역풍을 맞고 끝장날 수도 있었다.
'하...'
혼란스러운 건 카자도 마찬가지.
적당히 겁만 줘서 보낼 계획이었는데, 아타르라는 놈 때문에 일이 꼬여버렸다.
'썅! 일랜 키스폰, 그놈 주변에는 죄다 미친놈들밖에 없는 건가?!'
이건 계산 밖이다.
암만 일랜이 키스폰의 차기 가주라고 하지만.
그래도 망나니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아카데미 생도들이 이 정도로 발 벗고 나설 줄 몰랐다.
'일랜... 보통 놈이 아니다. 어쩌면 녀석은, 이런 상황까지 계산하고 있었던 건지도?'
그 생각에 미친 카자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서 있는 정원이, 마치 축축한 던전의 풍경처럼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 이미 황금빛 미래를 봤던 카자는 칼을 검집에 처커덕 소리 나게 넣었다.
"X발, 뭣들하고 있어?!"
그가 검집에 넣은 검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외쳤다.
"뼈가 부러져도 좋으니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 가자!"
"으! 으아아아아아아아?!"
비명에 가까운 기합과 함께, 용병들도 뛰쳐나간다.
키스폰 가주가 없는 저택의 정원.
그날 밤의 달은 유독 밝았다.
39화. 주인공의 조력자가 악당임
한 때 루인은 청마검술 각성의 부작용으로 슬립 워킹에 빠져 있었다.
다행히도 누군가 그걸 치료할 수 있는 귀신거미 알을 구해왔고.
루인은 그게 일레나라는 걸 누구보다 확신하고 있었다.
'그 애는 괜히 죄책감 같은 걸 느끼는 거야. 잘못은 자기 오빠가 한 건데.'
루인은 일레나를 동정했다.
또한 그녀의 선한 마음에 감동하고 말았다.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이 은혜를 갚으리라.
그렇게 하루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던 어느 날, 웬 거구가 찾아왔다.
-일레나 키스폰을 알고 있나?
-이, 일레나? 그 애한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실은 그 여자애가 위험하다. 납치됐거든.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 남자부터 의심해야 마땅하지만.
루인은 모든 퍼즐들이 차례대로 맞춰지는 감각에 빠져들었다.
'결국, 일이 터진 거야.'
그림이 그려진다.
극악무도한 일랜 키스폰.
그는 우연한 기회에 발견한다.
일레나가 목숨 걸고 가져온 귀신거미 알을.
그리고 알아차린다. 그건 일랜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루인을 위한 것임을.
-이 멍청한 계집!
아마도 일랜 키스폰은 그렇게 역정 냈을 것이다.
-감히 루인 아스달 같은 놈을 신경 써? 지 오라비는 팽개치고, 그딴 잡종 같은 놈을?!
-죄, 죄송해요, 오라버니! 하지만 지하실만큼은 제발...!
-아니. 너는 이제 영원히 갇힐 줄 알아라. 아카데미? 웃기지 마! 평생 지하에서 썩을 줄 알라고!
-오라버니이이!
분명 일레나도 그렇게 절규했을 것이다.
잔혹한 일랜 키스폰의 손에 이끌려 지하에 처박혔을 게 분명했다.
그 생각에 미친 루인은 청마검을 챙겼다. 평생 살생 한 번 못해본 그였지만.
'하는 수밖에 없어. 이건 모두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그렇게 키스폰 저택으로 달려갔다.
폐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는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퍼억!
저택에 들어서기 무섭게, 누군가 뒤에서 그를 후려쳤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깨달았다.
이곳이 바로 일레나의 지옥이라는 걸.
심지어 그를 반긴 건 쥐가 아니라.
츼이이이이이이입!
보기만 해도 섬뜩한 뱀이었다.
-맙소사! 나 때문에 그 애는 이런 곳에서 고통 받고 있었던 거라고?!
일랜 키스폰은 잔인하게도, 루인을 일레나가 무서워하는 장소에 가둬버렸다.
그 현장을 직접 목도한 루인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렸다.
아마 이 또한 일랜 키스폰이 의도한 것일 테다.
루인이 이를 악물고 분노하려는 그때.
-너 설마, 루인?
그곳에는 또다른 남자가 루인처럼 잡혀 와있었다.
그리고 그의 정체는 놀랍게도.
-내 이름은 이랜이다.
일랜 키스폰의 사촌, 이랜!
그 역시 루인처럼 일랜 키스폰에게 원한을 품은 자였고.
그들을 가둔 카자와 대화하는 걸로 봤을 때, 키스폰 가문에 대해서도 잘 아는 듯했다.
'심지어 능력까지 있어!'
어느새 이랜은 그들을 포박한 줄까지 끊어내는 등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분노에 잠식된 루인에게 손까지 내밀었다.
-진정해, 루인 아스달. 지금은 여기부터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니까.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어른스러운 이랜.
망나니 일랜 키스폰과 사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이랜의 남다른 분위기에 감화된 루인은,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다행이야. 이런 곳에서 믿을 만한 녀석을 만나다니.'
그렇게 생각한 루인은 이랜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어쩐지 모르게 그런 예감이 느껴졌다.
이 사람과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 * *
나와 루인은 집안을 뒤진 끝에.
응접실 구석에 놓인 백사검과 청마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르르응!
내가 검을 뽑자, 루인은 흠칫하며 말했다.
"그, 그건 백사검? 일랜 키스폰이 사용하던 칼 아냐?!"
"...아무렴 어때."
쓸데없이 이런 건 눈썰미가 좋네. 조심해야겠어.
난 미심쩍은 투로 그에게 물었다.
"그것보다 너. 싸울 줄은 아는 거냐?"
루인의 강함 등급은 나보다 낮은 F급.
그렇게 고생해서 각성까지 시켜줬는데, 허무하기 짝이 이를 데 없었다.
츠킹!
엄지로 칼을 연 루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싸우는 수밖에 없어. 일레나를 구하려면...!"
뭐, 그러시겠지.
하지만 잘못 휘말려서 주인공이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특히 카자 프레소, 그놈은 꽤 위험해 보였어.'
S급의 하벨 키스폰을 제외하면.
C급의 카자 프레소는 내가 직접 대면한 인물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했다.
그와 동급인 디바 챈달조차 돌거미들을 무 썰 뜻 썰어버릴 만큼,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보였으니까.
'공방 일이나 하는 디바도 그 정도인데. 카자라는 놈의 역량은 어느 정도일지 감도 안 잡혀.'
역시 방법은 하나.
내가 루인을 전격적으로 서포트하는 수밖에 없다.
주머니를 뒤지자, 어둠 속에 몸을 숨겨주는 나이트 윙이 나왔다.
'다행히 이건 안 뺏겼네. 아마 용병단은 이 망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놔둔 거겠지.'
이걸로 계획은 세워졌다.
잠시 루인과 동행하는 척하다가.
루인이 한눈파는 틈을 타, 이걸 뒤집어쓰고.
그가 전투를 벌이면 나도 몸을 숨긴 채로 같이 싸우는 거지.
그렇다면 남들이 언뜻 보기에, 루인의 전력이 높다고 생각할 것이다.
'좋아, 완벽해! 그럼 이놈이랑 언제 찢어져야 하나?'
난 면포 안에서 루인을 힐끔 쳐다봤다.
루인은 키스폰 저택의 응접실 안을 구석구석 살피는 중이었다.
"굉장히 넓네! 일랜 키스폰 녀석, 돈 많다는 게 거짓이 아니었구나?"
지금 남의 집 신경 쓸 때냐?
일레나를 구해야 한다고 난리 칠 때는 언제고.
루인은 촛불에 의지한 채, 여기저기 손을 갖다 대며 짠한 미소로 중얼댔다.
"청소는 일레나가 하는 걸까? 어쩐지 소파 가죽이 부들부들하고 감촉이 좋아. 이야, 장식장에 있는 물건들도 가지런한걸. 오, 여기 창틀에는 먼지 한 톨 없는...?"
말을 잇던 루인이 멈칫했다.
창밖을 응시하는 그의 눈이 커진다.
"이, 이랜! 저기...?!"
뭘 보길래 저러나 싶어 나 역시 창가로 다가섰다.
그러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달밤의 정원, 그곳에서 뒤엉켜 싸우는 사내들이었다.
한쪽은 프레소 용병단. 그들은 하나 같이 검집을 몽둥이 삼아 거칠게 휘둘러댔고. 다른 한쪽은...
'아타르!'
나도 모르게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조금 거리가 멀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다들 뭐하는 겁니까?! 무시하고 그냥 달려요! 어서 저택으로 가라고, X발!
레이피어를 휘두르며 윽박지르는 사내의 음성은, 아타르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그와 함께 싸우는 제복의 생도들 역시 죄다 흑호반이었고.
그들은 럭비 선수처럼 용병의 방어망을 뚫으려 애쓰고 있었다.
'역시 루인을 도우려고 온 게 분명해! 하핫, 이 기특한 녀석들.'
난 흡족한 표정으로, 내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루인을 쳐다봤다.
이거야말로 주인공 루인과, 조력자 아타르라.
'이런 그림이라면 나야말로 땡큐지!'
마침 루인도 밝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이랜! 친구들이 왔어! 심지어 총학생회장까지!"
"나도 봤어. 아무래도 너를 도와주러 온 것 같...?"
"이 틈에 우리는 일레나를 찾자! 아마 여기 어딘가에 갇혀있을 거야."
"...뭐?"
내가 의아해하자, 루인은 내 팔을 홱 잡아끌었다.
"일랜 키스폰은 자기 여동생을 저택 어딘가에 가둬놨어! 어쩌면, 지금쯤 끔찍한 고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제기랄!"
"아니, 잠깐...?!"
"조심해야 해! 놈이 함정을 파뒀을지도 모르니까! 이쪽이야!"
루인 손에 이끌린 난 당황했다.
이 녀석, 일레나가 이미 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내가 용병단한테 들은 것이 맞다면, 그녀는 아직 귀가 전이다.
이대로 루인을 따라갈 경우, 일레나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오다가 잡혀버릴 수도 있다.
"정신 차려, 루인!"
내가 손을 홱 뿌리치자, 그제야 루인도 깜짝 놀라서 멈춰 섰다.
"...이랜?"
"이 저택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나 본데. 이런 식으로 하다간, 우리가 찾기도 전에 그 애는 봉변을 당할 거야."
"뭐, 뭐?! 그건 안 돼! 일레나는 죽어선 안 된다고!"
모자란 건지, 정말 착한 건지.
루인은 나를 붙잡고 흔들며 호소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일레나를 빨리 찾을 수 있을까?!"
"방법은 간단해. 너랑 내가 찢어져서 그 애를 찾는다. 어때?"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대단해, 이랜! 너란 녀석은..."
그가 잠시 울컥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별안간 자기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뚝 떼서 내게 건넸다.
"이랜. 이건 어머니 유품이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걸..."
그만 좀 해, 이 패륜아 새끼야!
...라고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하마터면 주인공이 사망 클리셰에 빠져 작품을 망칠 뻔했다.
"후우, 루인 아스달.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난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루인 양어깨를 붙잡았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물건을 준다는 건, 죽음을 앞당기는 짓이야."
"응? 난 그저 너한테 너무 고마워서, 다음에 만날 때 우리의 증표로..."
"재회의 약속 같은 건 더더욱 안 돼! 알겠어?! 알겠다면 당장 내 앞에서 고개를 끄덕여!"
기어코 고성을 내고 말았네.
하지만 다행히, 루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알겠어. 대신 너도 무사해야 해? 이랜!"
"너야말로."
그 대화를 끝으로 루인은 돌아섰다.
그가 허겁지겁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걸 보며.
"휘후우!"
난 숨을 들이켰다.
싸늘한 공기가 폐부를 깊숙이 찌른다.
"주인공은 히로인을 찾아 떠났고. 이제 남은 건 역시 난이도 조절인가?"
암만 생각해도 카자, 그놈이 신경 쓰인다.
가장 베스트는 루인도 함께 이 난전에 뛰어드는 것이지만.
"카자만 몰래 처치해두면, 나머지는 우리 주인공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난 나이트 윙을 몸에 둘렀다.
퍼얼럭!
['나이트 윙'을 사용합니다.]
[야간 은신 효과가 발동합니다!]
[남은 시간 : 17분 30초]
주어진 시간은 17분 남짓.
그 안에 이 에피소드의 난이도를 편집한다.
* * *
탓탓타!
저택 계단을 오르며, 루인은 뒤를 힐끔거렸다.
'일단 흩어져서 찾기로 했지만. 이랜은 괜찮은 걸까?'
일레나 이후로 누군가를 걱정하는 건 처음이다.
그야 그럴 게, 이번에 만난 이랜은 루인을 진심으로 돕는 게 느껴졌고.
그렇기에 루인도 이랜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증표를 건네려 했다.
-루인 아스달. 누군가에게 소중한 물건을 준다는 건, 죽음을 앞당기는 짓이야.
처음에는 증표를 거절하는 이랜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과거, 루인의 아버지 역시 그에게 청마검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이랜 또한 그런 아픈 경험을 루인 못지않게 겪었는지도 모른다.
-재회의 약속 같은 건 더더욱 안 돼! 알겠어?!
이랜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루인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랜이 말하고 싶었던 건, 약속 따위가 필요 없다는 뜻.
그건, 그들은 반드시 여기서 살아남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나, 친구가 생겨버린 걸까?'
어쩐지 뭉클한 기분에 루인은 얼굴을 붉혔다.
혼자가 아니란 생각에 자신감을 얻은 그가 복도를 쳐다봤다.
"일레나에게도 알려줘야 해! 그 애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걸!"
루인이 2층의 방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40화. 뱀의 만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