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뱀굴
레드팽 아카데미의 새 학기가 시작되고.
일레나는 며칠 동안 기분이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내렸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일레나'."
의붓오빠, 일랜 키스폰.
그의 입에서 무려 10년 만에 일레나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그게 대수냐고 묻겠지만. 그들도 가축과 벌레 취급을 당해왔다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흡..."
일랜이 있는 보건실을 나선 일레나.
그녀는 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으려고 입을 가렸다.
구름 위로 솟아오르는 이 고양감은, 그녀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멈칫.
순간, 일레나는 복도에서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다.
마침 그녀 근처에 있는 창문은 뒤쪽 모퉁이를 비추고 있었고.
거기에는 웬 남학생이 고개만 살짝 내밀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틀림없다.
오늘 아침 일랜을 공격한 남학생.
만약 그 남학생과 자신이 함께 있는 걸 일랜이 알게 된다면?
'오라버니는 무척 실망할 거예요. 그리고는 두 번 다시 내 이름 따위는 불러주지 않겠죠. 그건 결국 내 잘못이고, 난 다시 쓸모없는 계집이 되겠죠?'
그렇게 생각하자, 한껏 들떠있는 기분은 바닥으로 내리쳤다.
일레나는 황급히 그곳을 벗어나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모든 걸 망쳐서...!'
그리고 얼마 후부터, 일랜은 그녀와 집에 가기를 거부했다.
아카데미 승차장에서 기다리던 일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라버니. 그럼 집에는 어떻게...?"
"너 따위한테 일일이 보고까지 해야 해?"
홀로 전용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일레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확실해요. 오라버니는 내가 그 남학생이랑 한패라고 생각하는 거겠죠. 이제는 날 믿지 않는 거라고요...!'
턱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손톱을 적신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던지 손가락에서는 피가 새어 나왔다.
'왜... 왜 나는 항상 이런 식일까요? 세상은 왜 나를... 이럴 바에는, 차라리...'
그로부터 며칠 후.
뻐억!
일레나는 보게 되었다.
일랜이 보건 담당 교관을 날려버리는걸.
"오라버니, 어째서 교관님을...?!"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교관을 혼내줬을 뿐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일랜을 보며, 일레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주제 파악. 그건 일랜이 입버릇처럼 하던 단어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키른 교관까지 날려버릴 줄은 몰랐다.
"그러는 넌 여기 어쩐 일이야?"
"아, 할아버지 전언이 있으셔서요."
대답하던 일레나는 금방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가 말한 할아버지는 키스폰 가주.
일레나를 입양한 남자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구매한 것이지만.'
일레나는 부모를 기억하지 못했다.
세상을 인지할 때쯤 혈룡 길드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고.
어느 날 길드에 찾아온 키스폰 가주가, 길드 간부에게 돈주머니를 건네고 데려왔다.
'그때부터였어요. 뱀굴에 들어가게 된 건....'
키스폰 가문은 백사를 숭배한다.
어린 일레나는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뱀이 득실한 굴에 갇혀야 했다.
정신이 피폐해지고 온몸에 독이 퍼져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나날이었지만.
'오라버니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답니다.'
지금과 달리, 당시 일랜은 의붓동생을 챙겨주었다.
일랜 역시 일찍 부모를 잃은 탓이리라.
하지만 그 시간도 길진 않았다.
'내가, 나 같은 게 눈을 뜨는 바람에...'
솜털도 가시기 전 일레나는 마력 개방에 성공했다.
일랜도 그런 그녀를 축하했고 자신도 그러기를 원했다.
하지만 암만 시간이 지나도 일랜은 마력을 개방하지 못했고.
점차 태도가 냉랭해지더니, 성격과 행동이 폭력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키스폰 가주가, 아니 그 영감이 뭐라고 했는데?"
암흑 같은 회상을 깨고, 일랜이 묻는다.
현실로 돌아온 일레나는 머뭇거렸다.
"오늘 오라버니랑 같이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어요."
지금껏 일랜은 일레나와 동행을 거부해왔다.
그렇다고 키스폰 가주의 '명령'을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
결국, 두 사람은 함께 아카데미 승차장에서 전용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랑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건...'
어릴 때는 같이 다른 마을로 마차를 타러 나가기도 했었는데.
옛날을 떠올리던 일레나는 문득 잠자코 있는 일랜이 신기했다.
표정은 늘 그랬듯 좋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동생을 거부하진 않았다.
'혹시, 오라버니가 다시 돌아온 건 아닐까요?'
어렸을 때 일랜은 상냥했다.
일레나가 변죽이 돼서 돌아오면, 눈물을 터뜨렸고.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키스폰 가주를 막아서다 얻어맞기도 했다.
-일레나! 정신 차려, 일레나! 눈 뜨란 말이야, 당장...!
-왜 일레나를 못살게 구는 거야, 할아범! 일레나는 내 동생이라면서, 대체 왜?!
일랜은 그녀를 지켜줄 때마다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리고 최근, 그는 다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사실 일랜은 변한 게 아닌 건지도 모른다. 일레나가 오해하고 있었을 뿐.
만약 얼마 전, 일랜이 청마반 학생을 때린 게 그녀를 위해서였다면?
보건실을 찾아온 일레나의 이름을 부른 것도 걱정돼서였다면?
"오라버니?"
숨이 가빠진다.
일레나는 곁에 앉은 일랜에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데, 혹시 불편하신 거라도..."
말끝을 흐리는 일레나의 심장이 빨라졌다.
만약 그가, 함께 마차에 있는 것이 괜찮다고 대답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물론 그건 지나친 상상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꾸만 치솟는 기대심에, 일레나는 일랜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몰라서 물어?"
간절히 기다리는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랜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툭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너 같은 녀석이 나와 나란히 앉아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냐. 어처구니가 없군."
잠깐이었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던 빗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일레나는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뭔가가 툭 끊어지는 걸 느꼈다.
"아!"
그랬다.
이 모든 건 결국 그녀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업보.
키스폰 가문이 사들인 도구인 주제에, 일랜의 행복을 강탈했다.
그걸 망각하고 잠시나마, 분에 넘치게 받았던 사랑을 주제넘게 기대했다.
이히히히힝!
세워진 마차에서 일레나는 용서를 구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지금까지 마차를 함께 타 본 게 너무 오래돼서..."
일랜의 입에서 직접 들은 말인 만큼, 확실히 깨달았다.
그녀 따위는 일랜과 같은 마차에 있을 자격조차 없다는 걸.
그렇게 판단했다. 날아든 번갯불이 세상의 천연색을 앗기까진.
꽈과앙!
일레나는, 자기 손목을 쥔 일랜의 감촉을 느꼈다.
"너, 죽고 싶구나?"
정말 심장이 멎을 듯하다.
"내 허락도 없이, 감히 내 마차에서 내리겠다고?"
"전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오라버니가 불쾌하실까 봐..."
"불쾌? 하하하! 너 같은 게 함부로 내 기분을 이해하겠다고? 웃기지 마라, 일레나!"
마차로 다시 끌려온 일레나의 눈이 커진다.
'또 내 이름을 불렀어요. 게다가 그 말은, 불쾌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불쾌하지 않다는 건, 결국 함께 있어도 좋다는 뜻.
왜 몰랐을까. 지금까지 일랜은 변한 게 아니라 자신이 멋대로 착각한 거란 걸.
"두 번 다시는 네 멋대로 판단하지 마라. 내 ■락 ■■는 ■■ ■■ 마. 알겠어?"
그가 뭐라고 더 말하긴 했지만, 일레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말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판단'하지 말 것. 일랜의 호의와 걱정을 적의와 격정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네, 오라버니."
다시 마차가 출발하고 일레나는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젖은 그녀의 입꼬리가 위험하게 반짝였다.
* * *
쏴아아아아아아!
빗소리가 내 가슴을 후벼 판다.
난 한참을 텍스트박스만 쳐다보고 있었다.
- 특성 : 조증(new!)
호감도를 쌓고 새롭게 알게 된 일레나의 특성.
그걸 확인한 난 양손으로 입을 감쌌다.
'조증? 조증이라니. 뭔데, 이 X 같은 특성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조증을 과하게 기분 좋은 질환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일종의 흥분 상태를 의미했다.
그것도 아주 과한 흥분.
'조증 환자들은 기복이 극심하지. 흥분이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만큼, 분노나 우울감도 극심해져.'
한때 난 멘탈 클리닉을 한동안 다니기도 했었다.
편집자 일도 스트레스가 상당한 편이었으니.
그때 주워들은 담당 의사 말이 떠오른다.
'조증이 심각해지면, 통제 불능상태에 돌입한댔지. 자기가 한 행동을 아예 기억 못 할 수도 있다고...'
처음 난 일레나의 비공개 특성이 '흑화'일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발현이자 결과물일 뿐.
흑화를 촉발한 진짜 설정은 따로 있었다.
'원작에서도 일레나는 주인공이 죽을 뻔하자, 모든 리미트를 깨고 의붓오빠를 살해했지. 그건 단순히 주인공에 대한 우정이나 사랑 때문만이 아니었던 건가...'
일레나는 주인공과 함께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흥분 상태를 겪었을 터.
그 끝에 주인공이 파멸 직전에 이르고, 감정 기복은 극에 치달았다.
며칠 몇 시간이나 이어진 흥분 상태는 극심한 분노에 도달했고.
그 결과, 자신이 통제 불능상태에 빠져 일랜을 죽였을 것이다.
'단순한 흑화가 아니었어. 아니, 다르게 보면 이미 흑화한 거나 마찬가지 아냐?'
일레나의 호감도를 쌓고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사실.
그건 그녀가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었다는 것.
문득, 난 같은 공간에 있는 일레나의 뒷모습이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E급. 저 녀석은 D급으로, 나보다 한 등급이나 강하다. 하지만...'
그녀의 스위치가 눌리면 원래 등급 이상으로 힘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오퍼 블러드로 폭주한 나머지, 데스 웜을 쓰러뜨린 것처럼.
'일레나를 자극해서는 안 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난 미간을 찡그렸다. 프리즈너 이 개자식, 말의 앞뒤가 다르잖아.
만에 하나, 그의 의도대로 일레나의 호감도를 팍팍 깎아버렸다면?
난 뭘 제대로 진행하기도 전에 사망 엔딩을 맞았을 것이다.
'역시 그 자식 말은 제대로 믿을 수가 없어.'
음험한 녀석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 자식도 지뢰다.
어떻게든 빨리 처리한 뒤 작가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1권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간다.'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내가 머릿속으로 계획을 수립하는 동안.
덜커덩!
마차가 멈추고 마부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키스폰 저택에 도착했습니다, 자제분들."
그 말은 즉, 마침내 만날 시간이라는 뜻이다.
키스폰 가주라는 괴물을.
11화. 내 할아버지가 만악의 근원?!
키스폰 저택은 거주 구역이 밀집된 영지 남부에 자리 잡고 있다.
일개 영주의 성이라기에는 조금 큰 서양식 건물에 가까운 편.
흰색 담벼락은 칠이 벗겨져 뱀 허물을 연상케 했고.
정원 중앙에 마련된 연못은 먹물처럼 까맣다.
'아직도 적응이 안 되네.'
난 일레나와 함께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곳에 묵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영 정이 안 간다.
방과 후 걸어오는 건 마차 승차감이 좋지 않은 것도 있지만.
키스폰 저택에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뭐랄까. 마치 집이 아니라 누군가의 영역에 침범하는 기분이라서.'
밤비는 그쳤지만.
발에 질척이는 흙탕물이 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마침 현관에 도착한 일레나는, 열쇠를 문에 꽂고 능숙하게 돌렸다.
차카닥!
아마 잘 모르는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명색이 영주이면서 호위병력 하나 두지 않다니.
하지만 사실, 원작에서 키스폰 영지는 치안 자체가 좋은 편이고.
키스폰 가주도 빌런에 속한 인물이다 보니, 이곳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다.
'그나마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 뱀굴 정도였지.'
키스폰 저택 지하에 만들어진 지옥.
그곳에서 많은 인물들이 끔찍한 일을 겪었다.
"오라버니."
문을 연 일레나가 나를 슬쩍 돌아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서재에 계세요."
자기 인생 대부분을 지옥에서 보낸 일레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저택에 돌아온 그녀의 눈빛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장서."
사실, 이 세계에 빙의한 이후 난 한 번도 키스폰 가주를 본 적이 없다.
키스폰 가주야 워낙 신출귀몰한 편인 데다, 바깥 일도 많다고 한다.
나야 덕분에 집에 와서도 덜 신경 쓰고 잠을 청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글렀군.'
작중 이름은 하벨 키스폰.
원작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의 메인 빌런 중 하나.
주로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음계와 모략을 발휘하며, 300년을 넘게 산 괴물이다.
'명줄도 엄청 길어서, 그 어떤 전투씬에서도 웃음만 남기고 도망치는 빌런.'
다시 말해 이 세계관의 최강자 중 하나이자 만악의 근원, 절대 죽지 않는 악역.
차라리 활동하는데 여러 제약이 있는 일랜이 아니라, 하벨 키스폰으로 빙의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3층에 도착했다.
저벅!
듬성듬성 벽에 달린 횃불이 겨우 어둠을 물리는 복도.
일레나는 한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었다.
-들어오거라.
매끄러운 음성이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노인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미성.
달칵!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서재가 나타났다.
책장들은 겨우 실루엣만 보이는 정도였고.
다행히 책상 위에 놓인 등잔불이 그 앞에 선 남성을 밝히고 있었다.
'저자가, 하벨 키스폰?'
허리까지 자라난 은발은 불빛을 받아 반쯤 노랗게 물든 상태였고.
깃펜을 쥔 손가락은 여성의 것처럼 희고 가느다랗다.
그는 서류에 뭔가를 사인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 모두, 고생 많았다. 저녁은 먹었느냐?"
하벨은 눈을 감고 있었다,
실눈이 아니라, 말 그대로 눈꺼풀을 닫은 상태.
거기다 피부는 새하얗고, 턱선은 미려 그 자체였다.
'아.'
사실 소설 하나가 완결하고 3년 정도 지나면, 슬슬 원문이 가물해진다.
하루 최소 2, 30화를 보는 만큼, 이름 기억하는 것조차 다행인 지경.
그러니 원작에서 캐릭터 인물 묘사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건, 작가는 클리셰를 고수하는 타입이란 것.
'하, 하필이면 미형 실눈캐야?'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소설이나 만화에서 센 캐릭터로 분류되는 족속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일명 '실눈캐'. 즉,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부류다.
그런데 하벨은 실눈이 아니라 아예 눈을 감고 있었고.
심지어 잘생겼다. 아니, 아름다웠다.
나조차 여자라고 착각할 만큼.
그리고 그 말은,
'저 내면에 똬리 튼 추악함과 잔혹성 또한 진짜라는 것.'
하벨 키스폰은 매우 영악하고 심계가 깊은 인물이다.
여기서 내가 조금이라도 버벅댔다가는, 바로 수상함을 눈치챌 터.
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짜증 난 투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참나! 바쁜 사람 불쑥 불러서는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야? 내 선물은 어디 있어, 할아범?"
원작에서 일랜은 하벨의 유일한 혈육이다.
다만, 키스폰 가문에 대해 깊이 모를 만큼 무지한 망나니.
무지한 손자는 하벨이라는 존재가 가진 의미를 모를 만큼, 천진난만하게 기념품을 요구할 수 있다.
"말버릇하고는."
하벨의 고운 미간에 살짝 주름이 진다.
"일랜. 며칠 만에 할애비를 만났는데,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런 거냐?"
그의 반응은 그저 단순한 짜증에 불과했지만.
나에게는 그 한마디마저 천둥처럼 느껴져 손발이 떨릴 판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코멘트였습니다!
내 등이 축축해질 때쯤, 다행히 일레나가 나를 변호했다.
"할아버지. 오라버니는 좀 피곤한 상태라서요. 혹시 저녁 식사가 필요하신 거라면 제가..."
"되었다. 내가 저녁이나 먹자고 너희를 부를 만큼 한가하지는 않으니까."
하벨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감고 있는데 눈웃음을 지을 수 있나?
하지만 눈꺼풀 아래에서 뭔가 뒤룩 움직였다.
"일레나. 내가 없는 사이에, 수련은 게을리하지 않았느냐?"
순간, 서재의 온도가 확 내려가는 기분이다.
조증의 특성을 갖춘 일레나조차 흠칫했다.
곧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고.
침묵을 읽은 하벨은 웃었다.
"후후, 그럴 줄 알았다. 뱀굴에 있는 녀석들이, 독을 빼지 못해 아주 안달이더구나."
일레나의 수련.
그건 저 아래에 있는 뱀들에게 물리고 독을 주입 당하는 것이다.
온기 하나 없는 뱀 몸뚱이는 그녀의 여린 몸을 칭칭 감을 테고.
쉭쉭 대는 소리가 귀를 통해 머릿속을 가득 채울 것이다.
'이런 게, 수련이라니.'
암만 소설이라지만 가혹하다.
애초에 조증을 앓게 된 것도 이 때문이겠지.
"...죄송해요."
"괜찮다. 앞으로는 방식을 바꿀 테니."
"네?"
"얼마 후, 레드팽 아카데미에서 던전 견학이 진행될 거다. 내 영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지. 뭐, 이 몸이 직접 물색한 신생던전이니 당연한 건가."
아카데미 일정을 꿰고 있다니.
역시나 레드팽 아카데미의 후원자답다.
'하지만 그거랑 일레나의 수련이 무슨 상관이지?'
일레나도 나랑 같은 의문을 느꼈는지 의아해했다.
"할아버지. 죄송하지만, 제 수련과 던전 견학이 무슨 관계가...?"
"신생던전이니만큼 위험할 일은 없을 거다. 몬스터라고는 '귀신거미'가 전부이긴 하지만, 놈들은 야행성이라 낮에 나올 일도 없으니까."
하벨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레나. 너는 거기서 귀신거미의 알을 20개만 채집해오면 된다."
"알을 채집하라고요? 하지만 그건..."
"교관들은 제지 안 할 거다. 내 심부름이라고 하면 되니까. 그걸 가져오면 당분간 네가 뱀굴에 갈 필요도 없어지지."
그 말에 일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난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속셈이지?'
이 상황에서 심부름이라니.
알만 좀 챙겨오면, 뱀굴에도 안 보낸다고?
이런 대화는 원작에서도 나오지 않아,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참! 일랜을 오래 기다리게 했군."
내가 기다리느라 짜증이 난다고 생각했는지, 하벨은 일레나에게 손짓했다.
"너한테 얘기할 건 이게 전부다. 그만 가보거라."
"네, 할아버지. 그럼...."
일레나는 살짝 들뜬 표정으로 인사하더니, 나만 남기고 서재를 나가버렸다.
달칵!
잠깐만.
그럼 내가 이 세계관 최강자 중 하나인 빌런이랑 단둘이라는 거잖아?
바짝 긴장하고 있는 그때, 하벨이 입을 뗐다.
"일랜, 오퍼 블러드를 사용한 소감은 어땠느냐?"
하마터면 칼을 뽑을 뻔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하벨이 감고 있던 눈을 뜨기 전까지는.
스륵!
그에게는 흰자위가 없었다.
온통 안구는 까맣고 그 가운데 빨간 눈동자가 자리를 잡았다.
그 중앙을 가로지른 하얀 동공은, 마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처럼 보인다.
'저게, 하벨 키스폰의 백사안...?!'
그건 마치 내 머릿속을 꿰뚫는 것만 같았다.
소름이 돋는 안광에 난 최대한 딴청을 피우며 그의 눈을 피했다.
"응? 오퍼 블러드?"
"할애비한테 너무 하는구나."
그때, 하벨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했다.
"기껏 키워놓은 내 사역마들을 도륙할 줄이야. 대체 넌 뭐가 문제인 거냐, 일랜?"
"...예? 아니, 어?"
"너 때문에 온실에 있는 송장벌레는 모두 빼내야 했다. 아깝게 된 노릇이지."
잠깐만, 송장벌레?
말을 되씹던 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호, 혹시 송장벌레가 당신 거였어? 당신의 사역마라고?"
"지금 와서 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사역마의 눈을 통해, 네가 날뛰는 걸 똑똑히 봤으니까."
하벨은 자기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설마 네가 오퍼 블러드를 쓰고도 멀쩡한 건 의외였지. 거기 있던 교관이 도운 거냐?"
이제야 난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 온실에 돌아다니던 송장벌레는, 사실 하벨이 키우던 사역마.
즉, 키스폰 가주가 기르고 부리는 몬스터였던 샘이다.
'교관을 묻는 걸 보면,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는 듯한데....'
어쨌든 다행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뒤져서, 최대한 연기력을 발휘하기로 했다.
"죽을 뻔했다고!"
내가 소리치자 하벨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의 백사안이 아직도 섬뜩했지만, 난 개의치 않고 열을 냈다.
"할아범이 그랬잖아? 이 백사검에 피를 바치라고! 그 이후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천하의 일랜 키스폰이 빈혈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난...!"
"그만, 그만. 너무 시끄러워서 두통이 생기는 것 같구나."
하벨은 손을 들며 눈을 감았다.
"하아."
그가 뱉은 한숨은 '이 한심한 녀석을 어찌해야 하나.'로 해석된다.
다행히, 하벨은 아직 내 정체를 의심하지 않는 모양.
기세를 몰아 단 일분일초라도 빨리 여길 나가자.
"흥, 난 또 무슨 소리인가 했네. 할 얘기 끝난 거면 난 가볼게!"
"내가 왜 너를 일레나랑 같이 불렀다고 생각하느냐?"
몸을 돌리려던 내가 멈칫했다.
하벨은 몸을 일으키더니 내 주변을 천천히 거닐며 말했다.
"유난 떨지 마라, 일랜. 네가 오퍼 블러드를 사용했다고 해서, 마력 개방까지 해낸 건 아니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네 꿍꿍이를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새 학기부터 다른 놈한테 맞고 한다는 게, 기껏해야 폭주해서 실력을 과시하는 것이라니."
아닙니다. 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 근성 하나는 높이 사주마. 그게 복수심이든, 피해의식이든 간에 죽음의 공포를 견뎌냈다는 거니까. 받아라."
하벨은 불쑥, 나한테 두루마리 하나를 건넸다.
그걸 받아 펼치자 기하학적으로 생긴 문양이 나타났다.
"이건...?"
"스크롤이다. 그걸 던전 출입구에서 찢으면, '도어맨(Doorman)' 마법이 발동되어 던전 안팎을 차단하게 되지."
아, 선물 뭐 그런 건가?
사실 이걸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뜻밖의 횡재다.
'어쩌면, 이 노친네. 생각보다 자기 손자한테는 따뜻한 괴물일지도?'
그렇게 생각한 난 최대한 기쁜 내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고마워, 할아..."
"일랜. 네가 할 일은, 이걸로 일레나를 던전에 가두는 거다."
...따뜻하기는 개뿔.
12화. 악마와의 재회
다음 날, 아침.
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등교에 나섰다.
"오늘도 키스폰 도련님은 안 타시는 겁니까?"
늘 그렇듯 아카데미 전용 마차를 이끌고 마부가 데리러 왔지만.
굳이 일레나와 덜컹대는 마차를 탈 이유가 이번에는 없었기에, 난 혼자 아침의 거리를 걸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할아범? 일레나를 가두라니.
아직은 냉랭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어제 하벨과 나누었던 대화를 복기한다.
-녀석한테 귀신거미인가, 거미귀신인가 하는 놈의 알을 심부름시킨 거 아니었어?
-귀신거미는 독액을 먹이한테 주입하는 습성이 있지. 뭐, 너도 알다시피 일레나는 키스폰 가문의 비기로, 어지간한 맹독은 견뎌낼 수 있다.
애초에 하벨은 일레나의 '수련'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수련장을 '뱀굴'에서 '던전'으로 옮겼을 뿐.
난 그의 계획을 눈치채고 속으로 혀를 찼다.
-아아, 그러니까. 이 도어맨 스크롤을 이용해서 일레나를 던전에 가두라는 거지? 귀신거미는 야행성이고, 일레나한테 독액을 주입시킬 거니까?
-호오? 그래도 아카데미물을 제법 먹은 티가 나는구나, 일랜.
-하지만 이해가 안 가. 그럴 바에는 할아범이 귀신거미를 잡아 오면 되잖아? 독액을 추출해서 일레나한테 주입하는 방법도 있을 테고.
-방금 내가 했던 말을 취소하지. 헛물만 가득 찬 어리석은 나의 손자여.
묘하게 기분이 나빴지만, 난 하벨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귀신거미는 몹시 예민한 몬스터다. 자기 영역이 아니면, 제대로 된 독액을 생성해낼 수 없지. 특히 녀석의 '가위독'은 공기와 닿는 즉시 그 위력을 잃어버린다. 네 말을 따라 추출해도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일랜.
가위독.
소설에서 본 기억이 있다.
'일단 가위독이 몸에 들어오면, 타깃은 움직일 수 없을뿐더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환영에 시달린다고 하지. 맞아, 귀신거미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도, 이런 특성 때문이었어.'
몸이 마비되는 것도 끔찍한데, 무서운 환영에도 시달려야 한다니.
돌이켜보면 내가 이 작품을 담당했을 때도 이해할 수 없었던 설정.
당시 작가님이 꼭 이 설정을 넣어야 한다고 해서, 마지못해 수긍하긴 했지만....
-어떠냐, 일랜. 이건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하벨은, 음침하게 웃었고.
어쩐지 소름이 돋은 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회피했다.
-선물? 이게 어딜 봐서 선물이라는 거야. 귀찮기만 한데.
-쯧쯧, 주어진 기회를 보고도 가치를 알지 못하다니.
-무슨 소리야, 그건 또? 알아듣게 말해, 할아범.
-어차피 너도, 너를 때린 녀석에게 복수할 생각이 아니었느냐?
나를 때린 녀석이라면, 이 세계의 주인공이자 청마반 소속인 루인을 말한다.
뱀의 송곳니처럼 구부러진 하벨의 손톱이 나를 겨냥했다.
-'우연히, 한 명'쯤은 더 들어가도 문제는 없겠지.
-....
-이건 너에게 주는 이 몸의 배려다. 일랜. 이번 일을 통해, 키스폰의 일원으로서 설욕하도록.
그리고 현재.
난 걸음을 멈추고는 키스폰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슬쩍 돌아봤다.
"떠올랐다."
이 이야기의 핵심 줄기들.
하벨과 나눈 대화 덕분에 그 연결고리들이 명확하게 기억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에서 주인공 루인은 던전 견학을 가게 되고. 일레나의 알 채집 심부름을 돕게 되지. 하지만 그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던전을 나갈 수 없었고, 결국, 귀신거미와 맞닥뜨리는 위기에 빠진다...'
아카데미의 견학, 도와야 할 대상인 여학생 일레나.
누군가에 의해 봉쇄된 던전과 귀신거미라는 위협.
그들을 위기에 빠뜨린 게, 일랜이라는 것 등.
'원작에서는, 일랜이 마치 주인공 루인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일을 벌인 거라고 나왔었는데.'
신입 편집자였던 난, 당시 내용을 그대로 진행시켰다.
작품이 망하고 나서야 뭐가 문제인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처음에는 그저 빌런한테 당하기만 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고난만 가득했던 건 별개의 이야기. 진짜 포인트는 주인공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야.'
지금의 난 빌런이다.
그리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스윽!
도어맨 스크롤을 꺼내든 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건 단순한 마법 스크롤이 아니라, 주인공을 죽일 수도 있는 열쇠.
만약 이걸 받고도 내가 우물쭈물하거나, 사용하지 않는다면. 프리즈너는 그동안 내게 품었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고 나를 조지려 들겠지.
'프리즈너를 속이는 것도 한계가 있어.'
프리즈너가 원하는 건 주인공의 죽음.
내가 원하는 건 작가와의 재회.
이제 결단을 내릴 때다.
'프리즈너. 네 계획처럼 주인공이 죽을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아니, 오히려 이번 고난을 통해서 루인을 각성시키겠어.'
사실 프리즈너랑 갈라서게 되는 건 좀 불안하긴 하지만.
나도 믿고 있는 구석은 있었다.
'처음엔 상태창까지 주길래, 대단한 그가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는 줄 알았지만.'
직접 움직이지 않고 나를 시키는 등 번거로운 짓을 하고 있다.
그렇게 잘난 양반이 그런 수고를 감수하는 이유는 하나.
놈은 날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다.
그렇다면...
꽈직!
스크롤 쥔 손에 힘을 주며 난 두 눈을 들었다.
'이번에 끝장을 보자, 프리즈너.'
* * *
제이슨은 먼 친척의 도움을 받아, 레드팽 아카데미 혈룡반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 뛰어난 재능이나 실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인간관계는 잘 쌓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어, 저기 똥쟁이 지나간다."
"아, 저 녀석이 제이슨이야? 바지 입은 채로 지렸다는?"
"말도 마. 화장실에서 일랜 키스폰 흉을 보다가, 하필이면 딱 걸렸다는 거 아냐. 오죽 팼으면 괄약근이 풀렸다고..."
복도에 있던 학생들이 지나가는 제이슨을 보며 수군거렸다.
모두가 자신에 대해 떠드는 것 같아 제이슨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아카데미 인생은 끝났어.'
남학생들 사이에서 일랜 키스폰의 악명이 괜히 퍼진 게 아니었다.
일랜은 단순히 자기 얘기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혈룡 길드의 꿈나무를 화장실과 함께 매장시켜버렸다.
'설마 우리 얘기를 엿들으려고, 화장실에서 잠복하고 있었을 줄 누가 알겠냐고?!'
일랜 키스폰 당사자는 결코 그런 계획을 만든 적이 없었지만.
반쯤 멘탈이 박살 난 제이슨은 일랜의 이름만 들어도 절로 오한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어. 지금도 엄마는, 내 학비 때문에 농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카데미를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신분 상승의 몇 안 되는 채널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을 나가는 건 어리석은 짓.
마검사 양성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혈룡 길드에 입단하는 것이야말로 꿈이었던 제이슨은, 결심했다.
'만나야 해. 하지만 만나고 싶지 않다.'
일랜 키스폰.
아카데미 망나니로 소문난 그를, 제이슨은 만나러 가는 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사반 학생들이 공강 시간에 휴식을 취하는 백사방으로 가야 했다.
"뭐야, 너. 길 막지 말고 비켜."
"미, 미안합니다!"
백사방에 가까워질수록, 분위기 살벌한 학생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들 대부분은 백사반 소속으로서, 키스폰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의 자제였다.
저벅!
테두리가 하얀 뱀으로 양각된 장식의 문이 등장하자, 제이슨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백사방...'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 안에 일랜 키스폰이 있다고 생각하자, 위경련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노크해야 하나? 다른 반은 그런 거 없이 그냥 드나드는데, 여긴 어떤지 모르겠어!'
시작부터 난관이다.
잔뜩 긴장한 제이슨이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었다.
똑똑!
잠시 후.
안에서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 문이 열렸다.
"응? 누구?"
다행히도, 그를 맞이한 건 그나마 평범한 인상의 남학생이었다.
제이슨은 부르튼 입술을 적실 틈도 없이 얼른 말을 꺼냈다.
"호, 혹시! 안에 일랜 키스폰 님 계십니까?"
"키스폰 도련님을 무슨 이유로?"
백사반 학생들 대부분은 그를 도련님이라고 칭한다.
그야 그럴 게, 이 아카데미는 키스폰 영지에 있으며, 이들의 부모 또한 영지민 소속이거나 키스폰 가주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만약 일랜 키스폰이 차기 영주가 된다면, 여기 있는 애들은 라인 제대로 타는 거네? 부럽다!'
그 생각에 미친 제이슨이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자, 백사반 학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해야 할 것 아냐?"
"힉?! 죄, 죄송합니다! 실은, 일전에 제가 일랜… 아니, 도련님한테 잘못을 저질러서, 사과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아? 네가 똥 싼 채로 기절한... 조때슨이었나?"
"제이슨입니다!"
대답하던 제이슨은 어쩐지 자괴감이 들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백사반 학생은 그런 그를 보며 픽 웃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어이. 지려슨. 도련님이 부르신다."
"제 이름은... 아, 아닙니다."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제이슨은 마침내 백사방에 입장했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백사방은 4, 50명 정도가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학생들은 간이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거나, 자신이 보유한 무기를 정비하는 등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쪽으로."
백사반 학생을 따라 제이슨이 향한 곳은 안쪽에 자리 잡은 서재.
그곳에는 가죽으로 된 소파에 앉은 남학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눈에 확 띄는 은발을 보고 제이슨은 알아차렸다.
'이, 일랜 키스폰...! 뭘 읽고 있는 거지?'
일랜은 웬 서류철 같은 걸 살피는 중이었다.
마제이슨을 안내한 학생은 그런 일랜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러자 일랜이 반응하더니 뒤를 돌아본다.
"음?"
"...!"
불그스름한 눈동자와 마주한 제이슨.
그는 공손하게 양손을 앞에 모았다.
"이, 일전에는 실례했습니다. 일랜, 아니 키스폰 도련님...!"
"...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제이슨! 제이슨 토레입니다!"
"제이슨... 제이슨?"
역시 제이슨이라는 존재는, 일랜 키스폰에게 잡초 중 하나에 불과했던 걸까.
아니면 일랜의 피로 젖은 살생부에 기록하기 위해서 되뇌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제이슨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름이 익숙하다 싶었더니."
순간, 일랜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혈룡반의 제이슨. 네가 왜 왔는지 알 것 같군."
그야 당연하지. 당신 옆에 있는 학생이 내가 사과하러 왔다고 귀띔해줬잖아.
...라고 생각한 제이슨이었지만, 대신 고개만 더 조아릴 뿐이었다.
"키, 키스폰 도련님 말대로 입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도련님 없는 자리에서 도련님 얘기를 하는 일 따위, 결코 없을 거고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내가 전지적 작가라도 되지 않는 이상, 네가 어디서 내 얘기를 할지, 어떻게 알겠어?"
"살려주십시오, 도련님!"
급기야 제이슨은 그 자리에 엎드리며 일랜에게 빌었다.
제이슨의 머리 위로 일랜의 비웃음이 들리는 듯하다.
"어이. 이러면 내가 너를 죽이기라도 하는 것 같잖아."
"저는 지금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아무도 저랑 말을 걸려고도 하지 않는다고요. 으흐흑...!"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비로소 기회가 왔다.
제이슨은 젖은 눈을 들며 일랜에게 애원했다.
"저를, 거두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바닥까지 추락한 아카데미 인생.
그걸 다시 끌어올릴 수 있는 건, 신의 기적이 필요하다.
하지만 신의 기적조차 없다면 남은 건 하나, '악마'와의 거래.
'일랜 키스폰이 나를 거둔다면, 누가 나를 무시하진 못할 거야. 하지만, 만약 그가 나를 내친다면...'
까딱하면 제이슨의 영혼이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바지에 그걸 지린 것도 모자라, 일랜한테 비굴하게 구걸했다는 소문이 퍼질 테니.
또한 제이슨이 아는 일랜 키스폰이라면, 일랜은 그걸 충분히 즐기고도 남을 인물이다.
"똘마니일."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부터 넌, 똘마니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찾는 데 애먹고 있었는데,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찾아와서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면 직접 사냥을 나섰을 거라는 의미인가.
'응?'
때마침 일랜이 들고 있는 서류철이 제이슨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학생들의 이름들이 줄줄이 나열되어있었다.
'사, 살생부? 진짜 살생부가 존재할 줄이야!'
아마 일랜 키스폰은 다음 먹잇감을 찾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제이슨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상상도 못 할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스윽.
그때, 일랜의 손이 제이슨의 정수리에 닿았다.
미처 피할 틈도 없었던 제이슨은 심장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두근! 두근! 두근!
제이슨이 눈만 크게 뜬 채 얼어 붙어있는 가운데.
일랜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열람."
말 안 들으면 머리를 열어버리겠단 뜻인가!
13화. 다시 한번 제게 기회를
"키스폰 도련님!"
"오셨습니까?"
"마침 공강 시간인가 보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카데미 백사반의 학생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
백사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곳에 있던 학생들이 나를 아는 체한다.
'괜히 말을 섞어봤자 예상치 변수만 늘어날 수 있어.'
그렇게 판단한 난 적당히 고개만 주억거린 뒤, 비어있는 자리로 향했다. 그러자 백사반 학생들이 움찔하더니, 자기들끼리 속삭이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유독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데?"
"혹시 또 어디 가서 누굴 조지고 온 게 아닐까? 얼마 전에도 누가 얻어맞고 피똥을 쌌다는..."
"쉿! 괜히 거슬리는 말이 저 사람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까딱하면 그 피똥이 우리한테도 튈 수 있다고."
심기 안 불편하거든?
그리고 이 쾌적한 공간에서 왜 비위생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건데.
아니, 애초에 속삭이려면 나한테 안 들리게 얘기하는 게 맞지 않나?
털썩!
소파에 궁둥이를 붙인 난, 미리 챙겨온 서류철을 펼쳐 들었다.
<레드팽 아카데미 신체검사 기록명단>
키른 교관은 보건담당 교관인 주제에, 수시로 보건실을 비운다.
난 그 틈을 타 그의 보건실에서 이 명단을 슬쩍 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고.
덕분에, 지난해 레드팽 아카데미에서 신체검사를 받은 학생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작년 기록이긴 하지만. 이걸로 전교생의 이름과 신체 특징을 확인할 수 있지.'
말하자면 빅데이터.
특히 웹소설로 이 세계관을 먼저 접한 나로서는, 인물 이름과 외형을 대조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였다.
'이것도 키른 교관 말을 빌리자면 치료 행위의 일종이니까.'
내가 이 세계에서 가장 뜯어고치고 싶었던 1권 메인 에피소드 중 하나.
<1권 메인 에피소드>
1. 루인을 언짢게 생각한 일랜은 똘마니들을 보내 루인을 괴롭히고 공격하기 시작. (루인의 고통 구간 : 10화 분량)
"하, 10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는데.
몇몇 학생들이 화들짝 놀라더니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다.
"바, 방금 들었지?"
"욕까지 하는 걸 보면, 분명 터지고 말 거야."
대체 뭘 들은 건데.
욕한 적 없다고.
'뭐, 이런 고구마식 전개라면 욕이 나올 법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PTSD가 발발할 것 같은 고구마 지옥이다.
당시에는 작가님이 죽어도 이 내용을 고집해서 고칠 수 없었기에 나까지 고통받았지만.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 세계에 실제로 빙의하게 된 지금 난, 나름 고무되어있었다.
'고통은 줄이고... 각성은 당긴다.'
난 명단을 넘기며 두 번째 메인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1권 메인 에피소드>
2. 괴롭힘을 참다못한 루인이 청마검술을 각성해서 수하들을 쓰러뜨림.
수많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각성제는 위기.
그리고 그 위기를 형상화한 것이 빌런이다.
즉 주인공의 각성제가 곧 빌런인 법.
난 그 각성제를 찾고 있었다.
'원작에서 일랜이 보냈다는 수하들. 그 똘마니들을 찾아야 한다.'
웹소설은 주인공 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이 아니고서야, 빌런의 수하들에게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똘마니들은 주인공을 성장시키고, 독자에게 쾌감을 주는 장치.
다시 말해, 쓰고 버릴 일회용 주사기처럼 소모품에 불과했으니까.
따라서 일랜이 수하들과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소속이나 특징.'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일랜의 똘마니들은 둘이었다.
하나는 혈룡반 소속으로, 원작에서는 실제 '혈룡반 똘마니'라고만 언급된다.
다른 하나는 소속 불명이며, 대신 덩치가 커서 '덩치 똘마니'라고 표현되었다.
'혈룡반 소속을 찾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렇다면 비교적 신체가 큰 덩치를 찾아야 해.'
계획은 모두 세워두었다.
우선 일랜의 수하 중 덩치라는 녀석을 찾는다.
그리고 그 덩치를 시켜 루인을 공격하게 만든다.
'여기서 포인트는 루인이 다쳐서 피를 흘리게 하는 것.'
루인이 흘린 피는 청마검에 닿아, 그를 각성시킬 테고.
이후 각성한 루인을 일레나와 함께 던전에 가둔다면?
그는 귀신거미를 쓰러뜨리고 성장할 뿐만 아니라.
일레나를 위기에서 구해내 인정받을 것이다.
"후후..."
그야말로 완벽한 플랜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난 열심히 명단을 뒤적거렸다.
[피검사자]
- 이름 : 디바 챈달
- 소속 : 흑호반 (2년 차)
- 근육 : 매우 좋음
- 시력 : 매우 좋음
- 회복 : 빠른 편
- 수족 : 있음
- 탈모 : 있음
- ...
"...?"
뭐지?
왜 몸무게나 키가 없는 거지?
그리고 팔다리 멀쩡한 거랑 탈모는 신체검사와 무슨 상관인 건데?!
"X발."
시작부터 계획이 어긋났다.
몇 장을 넘겨도 몸무게와 키가 명시된 이름은 없었다.
이런 데이터로는, 한 트럭을 갖다 줘도 덩치라는 똘마니를 찾는 게 불가능한 상황.
"저기, 키스폰 도련님?"
그때, 백사반 학생 하나가 다가와 나를 부른다.
가뜩이나 짜증이 났던 터라,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왜."
"죄, 죄송합니다!"
그는 크게 당혹스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시간을 방해하려던 건 아니고, 웬 녀석이 도련님을 찾아서..."
"나를? 누구길래."
이 아카데미에서 나를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셋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과대망상 특성을 갖고 있는 루인. 신념고착의 키른 교관.
그리고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를 조증, 일레나.
'어느 쪽이든 좋지 않아. 특히 지금처럼 계획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표정을 본 학생은 다시 당황했다.
"그, 그게...! 이름이 뭐라더라. 조때슨? 아니, 지려슨이었나?! 맞아, 지려슨일 겁니다!"
뭔데, 그 기괴한 이름은.
어쨌든 우려했던 인물들은 아니었다.
당장 급한 건, 이 명단으로 어떻게든 똘마니를 찾아야 한다는 것.
"마음대로 해."
"네, 그럼 부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명단을 살핀다.
'침착하자.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다시 보니, 검사항목 중 근육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근육이 좋다는 건 덩치도 크다는 말 아닐까? 아니, 오히려 물렁살이어야 덩치도 크려나?
"도련님?"
너무 집중하고 있었나 보다.
아까 방문객을 알렸던 학생이 거듭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분부대로 녀석을 대령했습니다. 지려슨..."
그러니까 그게 진짜 이름이냐고!
그제야 난 방문객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다소 혈색이 창백한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일전에는 실례했습니다. 일랜, 아니 키스폰 도련님...!"
낯이 익다. 구면인가?
"...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제이슨! 제이슨 토레입니다!"
거봐! 지려슨도, 조때슨도 아니잖아?!
만약 그딴 게 이름이었다면 이 세계관은 생각 이상으로 뒤틀린 것이다.
"제이슨..."
그런데 이름도 생각보다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워낙 흔한 영어 이름이라 그럴지도...
이름을 거듭 되뇌던 내 눈에, 방문객 옷깃에 달린 휘장이 눈에 띄었다.
'붉은 용이 그려진 휘장. 그렇다는 건, 일레나가 있는 혈룡반이라는 건데.'
불쑥 나를 찾아온 방문객.
얼마 전이라고 해봤자 나한테 실례라고 할 만한 행동을 한 주요인물은 없었다.
거기다 혈룡반 소속이라는 건....
'설마, 혈룡반 똘마니?'
일랜의 수하 중 하나.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환해지는 기분이다.
"이름이 익숙하다 싶었더니."
아마 녀석은 원작 속 일랜을 원래 알고 있었거나.
이미 일랜을 따르던 똘마니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혈룡반의 제이슨. 네가 왜 왔는지 알 것 같군."
지금 녀석은 아직 일랜인 나의 똘마니가 되기 전.
또는 이미 내 똘마니인 상태 둘 중 하나다.
"키, 키스폰 도련님 말대로 입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도련님 없는 자리에서 도련님 얘기를 하는 일 따위, 결코 없을 거고요!"
입조심?
아, 혹시 내가 빙의하기 전에 일랜이 심부름 따위를 시킨 건가?
그 심부름이 고상한 내용은 아니었을 테니, 입단속 같은 걸 지시한 모양이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나는 한껏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내가 전지적 작가라도 되지 않는 이상, 네가 어디서 내 얘기를 할지, 어떻게 알겠어?"
"살려주십시오, 도련님!"
지려슨, 아니 제이슨이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리는 걸 보며 난 확신했다.
녀석은 이미 일랜의 수하인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나보고 살려달라는 거겠지.
"어이. 이러면 내가 너를 죽이기라도 하려는 것 같잖아."
마침내 악역의 똘마니를 찾은 난 기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너를 조질 수 있는 건 오직 주인공 루인뿐이야.
"저는 지금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아무도 저랑 말을 걸려고도 하지 않는다고요. 으흐흑...!"
그렇겠지.
일랜의 눈 밖에 났다면, 다른 사람들도 굳이 그를 가까이하지 않으려 할 테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저를, 거두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난 스페어로 볼링핀을 넘어뜨린 느낌이었다.
이거야말로 악역과 그의 수하가 나누는 클리셰 중 하나.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나야말로 뭐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썩어빠진 원작을 고칠 수 있다면.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해결되는 것 아닌가?'
제이슨의 뒤통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문득 강박증이 도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난, 다른 놈의 손을 빌려서 주인공 루인의 뒤통수를 칠 계획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내 말은 무엇이든 듣겠다는 놈이 나타나다니. 타이밍이 지나치게 좋은 거 아닌가?
'냉정해지자. 스노우볼이 항상 문제만 되는 건 아니니까.'
아무래도 계속 엉망진창이 된 느낌이라 나한테도 피해망상이 생긴 건지도.
사실 제이슨은, 나의 극악무도(하다고 평가받은) 행동 때문에 내 앞으로 달려와 넙죽 엎드리고 있다.
'즉, 이건 내가 한 일의 결과물이라는 뜻.'
그렇기에 나는 기꺼이 이 기회를 붙잡겠다.
"똘마니일."
이 세계를 고칠 수 있는 도구를 손에 넣을 것이다.
"지금부터 넌, 똘마니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찾는 데 애먹고 있었는데,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스펙을 확인하는 게 먼저겠지.
그렇게 생각한, 난 소눈을 뜨고 있는 제이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설정 열람."
촤락!
[인물 열람]
- 이름 : 제이슨 토레 (F급)
- 소속 : 레드팽 아카데미 혈룡반
- 특성 : 광장공포증, 추락의 공포, 효자
- 목표 : 나도 라인 한번 제대로 타서, 우리 집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는 거다!
제이슨의 특성을 확인하던 난 눈을 게슴츠레 떴다.
'광장공포증?'
단어만 보면 좁은 공간을 두려워하는 폐소공포증의 반대어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광장공포증은 오히려 폐소공포증과 같은 계열.
자신이 어떤 공간에서 도움 받을 수 없을 때를 두려워한다.
'하다 하다 이젠 별의별... 무슨 메디컬 웹소설이냐고.'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모든 인물들은 하나 같이 결핍을 안기 마련.
로맨스 소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결점 없는 남주는 거의 본 적 없었으니까.
"흐흡...!"
그때, 갑자기 제이슨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얼굴이 창백해진다.
'광장공포증의 일환인가?'
증세가 그렇게 심해 보이지는 않지만.
겨우 얻은 악역 똘마니인 만큼 신경 쓸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곳에는 지켜보는 시선들도 있어 조심해야 하는 상황.
'그나저나, 이런 설정은 없었던 것 같은데. 뭐, 이런 녀석이라도 간단한 심부름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악역 일랜 키스폰으로서 수하에게 내리는 첫 지시의 난이도는 낮다.
주인공 루인 아스달의 청마검으로, 루인 아스달을 상처 입혀라.
데미지가 꼭 치명적일 필요는 없으며, 작은 생채기라도 좋다.
그 정도라도 청마검은 반응할 테니까.
"좋아. 기회를 주지. 단, 실패해서는 안 될 거야."
난 스스로 감탄했다.
이 어찌나 악역다운 대사란 말인가.
똘마니일, 제이슨 역시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저, 정말이십니까?! 정말 키스폰 도련님이 저를...!"
"일어나라, 똘마니일."
"감사합… 읏!"
제이슨은 다리가 저린 건지, 힘이 빠진 건지 휘청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긋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여긴 좀 갑갑한데. 잠깐 바람 좀 쐬면서 얘기할까?"
마침내 막이 올랐다.
1차 악역, 일랜 키스폰의 데뷔 무대가.
14화. 네가 거기서 왜 나와?
청마반의 루인 아스달.
그는 최근 온갖 소문을 듣게 되었다.
"교관한테 대들었다나 봐."
"송장벌레까지 불러서 애들을 겁줬대."
"그런 걸 즐긴다더군. 자해도 서슴지 않고."
"그것뿐이게? 얼마 전엔 혈룡반 학생 하나를 쥐 잡듯이 팼다고..."
놀랍게도 이 모든 악행을 저지른 인물은 오직 한 명.
아카데미 최대 망나니로 불리는 일랜 키스폰이었다.
'대체 넌, 뭐가 문제인 거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각.
청소 당번이었던 루인은, 수업을 마치고 나서는 학생들을 힐끔 쳐다봤다.
몇몇은 같은 청마반이라 루인에게 아는 체를 했다. 그러자 다른 학생이 수군거린다.
"쟤 맞지? 청마반의 루인!"
"아, 개강 첫날에 망나니 뚜껑을 열었다던...!"
아카데미는 인재양성기관인 동시에, 치열한 사회의 축소판이다.
이곳에서의 소문은 곧 여론이며, 여론은 곧 그 사람의 평판으로 이어진다.
으레 평판이 그렇듯, 일랜 키스폰에게 대적한 루인은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으로 나뉘었다.
"루인, 너 나랑 같은 수업 듣는 거 있지? 다음 조별 과제할 때 같이 하는 게 어때?"
"뭐야, 너. 밀대 들고 입구 앞에 서 있으면 거슬리잖아. 아직 사람 나오는 거 안 보여?"
지지세력은 상대적으로 비기득권 가문 비중이 높은 혈룡반과 청마반.
반대세력은 귀족이나 권세가 출신 자제들이 많은 흑호반과 백사반.
공교롭게도 루인과 일랜은 두 대립각의 가운데 마주해있었다.
"어, 저기 지려슨이다."
하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아웃사이드는 있는 법.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학생들은 맞은편 복도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비웃었다.
"아아, 저 녀석이 바지에 지렸다는 그...?"
"감히 키스폰 도련님한테 개겼다가 혼쭐이 났었지."
"지금은 일랜의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면서? 그러게, 제이슨 녀석은 왜 감당도 못 할 일을...."
제이슨.
그는 조소와 분노, 동정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루인도 의아해하며 제이슨이라는 남학생을 바라봤다.
'노예라고?'
하필 제이슨은 커다란 물통 두 개를 낑낑대며 들고 오는 중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그 역시 루인을 발견하고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 너도 청소 당번이니?"
"어, 어어. 난 강의실을 담당하게 됐어."
"그래? 난 복도를 맡았는데. 아, 내 이름은 제이슨이야. 잘 부탁해."
물통을 힘겹게 내려놓은 제이슨이 손을 내민다.
루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의 손을 맞잡았다.
"루인 아스달. 나야말로 잘 부탁해."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런 두 사람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셀럽과 아웃사이더가 함께 하는 진귀한 풍경.
하지만 루인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혈마반이라면, 혹시... 일레나를 알아?"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물어보긴 했지만.
강의실 입구만 걸레질하는 루인은 누가 봐도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제이슨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알지. 같은 반인데."
"걔는 좀 괜찮아?"
"응? 뭐가?"
제이슨의 질문에 루인의 걸레질 속도가 빨라졌다.
"아, 아니! 실은 신경 쓰이는 일이 좀 있어서…!"
"으음, 워낙 평소에 조용한 성격이라. 잘 모르겠는데."
"...그래? 하하, 그렇구나. 뭐, 별일 아니니까 개의치 마."
비로소 루인은 강의실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러자 무심하게 창문을 닦던 제이슨의 눈빛이 달라졌다.
* * *
-루, 루인을 공격하란 말입니까?
얼마 전, 제이슨은 일랜의 수하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일랜은 첫 시험이자 지시를 내렸다.
-왜. 뭐든 하겠다면서? 아니면 같은 아카데미 소속이라서 해치기 싫다는 거냐?
-아, 아닙니다! 저도 도련님과 루인, 그놈에 대한 이야기는 얼추 알고 있습니다!
분명 망설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이미 한번 추락한 제이슨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기에 일랜 키스폰이라는 악마의 노예가 되기로 했고, 시키는 건 뭐든 해야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제가 뭘 어떻게 해야...?
-간단해. 녀석이 방심한 틈을 타서 칼을 뺏은 뒤, 그걸로 놈을 상처 입혀.
-예? 무기라면 저도 친척한테 받은 혈룡창이 있습니다만....
-너 창술사였어?
뜻밖이라는 듯이 묻는 일랜.
제이슨은 괜히 으쓱해져서 떠들어댔다.
-헤헤! 어릴 때 종종 삼촌이 지도를 해주셨거든요. 조기교육 같은 거랄까. 우리 부모님도 다들 저보고 신동이라고...
-...아무튼, 놈의 무기로 놈을 해치는 거다. 상처가 크든 작든 상관없어.
-걱정 마십시오, 도련님! 녀석을 반드시 조져버리겠습니다. 반드시 숨통을 끊어내서...!
-왜 그렇게 진심인 건데?!
-예?
어리둥절해 하는 제이슨 앞에서, 일랜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후우! 녀석이 죽는 일은 절대 있어서 안 된다.
-네? 어째서…
-아잇… 진짜. 그래. 죽으면 끝나잖아...? 고통이.
-그, 그런 거였습니까! 과연, 키스폰 도련님. 전 그런 깊은 생각도 모르고...
-그런데 너, 사람은 죽여본 적 있어?
-에이, 그럴 리가요. 부모님 생신 때, 닭 모가지 비틀었다가 악몽만 잔뜩 꿨습니다. 헤헤!
-....
* * *
그리고 현재.
제이슨은 자기가 들고 있던 붉은색 밀대 자루를 꽉 쥐었다.
'역시 일랜 키스폰, 대체 그 사람은...?!'
소문은 결코 부풀려진 게 아니었다.
죽으면 고통이 끝나니, 적을 죽이지 말라는 탈인간적 사고.
거기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루인의 칼은 아버지의 유산이었다.
'루인의 가족이 남긴 유일한 추억을 악몽으로 만들 심산이야!'
일랜은 살아있는 진짜 악마였다.
그리고 그런 악마의 노예로 전락한 제이슨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만약 이 모습을 부모님이 본다면, 뭐라고 생각하실까?
『제이슨! 네가 순해 빠지기만 할 줄 알았더니. 키스폰 영주님의 후계자 눈에 들 줄도 아는구나!』
지금도 그의 어머니는 키스폰 영지에서 농노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뭐, 별거 아녜요. 어머니 덕분에 좋은 학연을 얻었을 뿐인걸요?'
『네가 우리 집의 자랑이다. 키스폰 도련님이 영주 자리에 오르면 넌 호위기사가 되는 거니?』
'저도 고민이에요. 원래는 혈룡길드에 입단하려고 했는데, 키스폰 도련님도 워낙 절 좋아하셔서. 어쨌든 어머니도 앞으로 편하게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
『제이슨! 네가,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낫다! 내가 네 삼촌 소개만 믿고 아버지를 만났다가, 이 신세가 됐지 뭐니. 일단 혈룡길드에는 보수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고...』
히죽.
제이슨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그때.
"제이슨?"
어느새 청소를 마친 루인이 복도 밖으로 나와 있었다.
화들짝 놀란 제이슨은 황급히 밀대를 뒤로 감추었다.
"어어어! 벌써 청소 끝났어?"
"이 강의실은 다른 곳보다는 작은 편이라서. 혹시 덜 끝난 거라면 내가 도와줄게."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루인은 자신의 밀대를 물동이에 넣고 적셨다.
그리고는 아직 덜 닦인 복도바닥을 따라 걸레질을 시작한다.
처푸덕, 처퍽!
루인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런 그를 살피며, 제이슨은 자신의 걸레를 밟아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밀대 자루를 당겼다.
뚜둑!
숨겨져 있던 창날이 모습을 드러낸다.
말 그대로 붉은색이 깃든 날붙이, 혈룡창이었다.
'이걸 실내에서 휘두르는 건 연무장 말고는 처음인데.'
제이슨이 눈을 든다.
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루인은, 등을 보인 채 멀어지고 있었다.
스윽.
제이슨의 자세가 낮아졌다.
웃음기를 지운 그의 눈동자에 먹잇감이 비친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어.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야.'
걸음을 뗐다.
뒤로 눕힌 창대를 팔뚝에 붙인 채 앞으로 향한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시야 속 루인이 점점 확대되어 갔다.
탓탓탓타!
뜀박질 소리에 루인은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곧 루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푸화악!
쏘아진 혈룡창은 그대로 루인 허벅지를 뚫고 지나갔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루인이 나자빠진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창대를 붙잡아보지만, 차마 뽑을 엄두가 안 났다.
"제, 제이슨?! 어째서...?"
"너한테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제이슨은 루인의 몸을 밟아 고정시킨 다음.
촤하악!
창대를 뽑았다.
튄 피가 제이슨의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진정해. 약이랑 붕대는 챙겨왔으니까 이따 치료해줄게. 일단 네 칼부터... 칼부터?"
쓰러진 루인을 살피던 제이슨.
그의 얼굴이 점차 굳어갔다.
"칼.... 칼이 없잖아?"
"끄흐윽... 뭐, 뭐?"
"네 칼 말이야! 네 칼 어디 있냐고?!"
무섭게 얼굴이 일그러진다. 마치 과거 왕국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드래곤처럼.
허벅지가 관통된 루인조차 그 기세에 일시적으로 정신 줄을 잡았다.
"청마검? 그건 왜..."
"청마검이고 나발이고 어디에 있냐니깐!"
"그, 그건... 얼마 전에 공방에 맡겼어! 어차피 수업도 끝났고, 청소할 때는 걸리적거리니까..."
뭐?
수업이 끝나?
청소할 때는 걸리적거린다고?
"아, 안 되는데. 네 칼, 필요한데. 있어야 하는데...!"
"크윽! 대체 이러는 이유가 대체...?!"
고통을 억누르던 루인은 흠칫했다.
'설마?'
학생들이 떠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제이슨을 가리켜 일랜의 노예가 되었다고 했다.
그저 일랜이 제이슨을 괴롭히는 거라고 루인은 생각했지만.
"너, 호, 혹시... 일랜이 시켜서...!"
"어떡하지? 공방 가서 가져와야 하나?"
제이슨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 하지만 공방에 맡긴 물건은 본인이 직접 수령해야 하는데? "
"이봐! 너 내 말 듣고 있...?! 크윽...!"
"내가 갔다가는 절대 안 줄 거야. 그럼 얘가 가져와야 하나? 아닌데. 얘는 다쳤는데. 오히려 추궁 당할지도 몰라! 그럼 도련님한테도 귀찮은 일이 생기게 될 게 뻔하잖아. 그럼 실망하시겠지?"
시간이 없다.
하지만 방법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제이슨이 혼란에 빠지는 사이, 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헉, 허억..."
루인은 의식이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그가 힘겹게 손을 뻗자, 비로소 제이슨의 시선이 루인을 향한다.
"너 때문이야."
제이슨의 눈은 흥건히 젖어있었다.
"너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어. 애당초 너만 아니었어도 난...!"
촉촉한 것이 루인의 손등에 떨어졌다.
그리고 루인은 생각했다.
'또 나 때문인가?'
평소였다면 거기에 추론을 끊임없이 이어갔겠지만.
툭.
의식 잃은 루인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대화상대조차 사라진 지금, 제이슨은 심장이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붉게 변한 아카데미 복도.
아무도 없는 실내.
사라진 희망.
"허, 헉, 흡...?!"
숨이 쉬어지지 않아 제이슨은 헐떡였다.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변했고,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쁘지직!
놀랍게도 이마 양쪽에서 뿔이 솟아났다.
창백하던 피부는 벌건 핏줄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갔고.
"게허어어어...!"
튀어나온 송곳니 사이로 짐승의 것 같은 소리가.
다시 창을 집어 드는 손가락에서는 반달 모양의 손톱이 자라나 있었다.
"그오오오오오오오!"
제이슨이 포효하자, 등가죽이 찢어지면서 피에 젖은 날개가 튀어나왔다.
마치 갓 태어난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제이슨.
그의 발아래, 쓰러진 루인이 포착되었다.
휘후웅!
허공에서 크게 회전한 혈룡창이 아래를 향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살생해야 한다는 듯이.
까아앙!
불꽃이 튄다.
하지만 혈룡창은 먹잇감 대신 애꿎은 바닥만 때렸고.
제이슨은 공격이 빗나간 게, 끼어든 칼 때문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륵...?"
제정신이었다면 그게 그토록 찾던 청마검이란 걸 알아차렸겠지만.
현재 그는 갑자기 개입한 은발 남성을 보고도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프리즈너...."
제이슨을 막아선 건 일랜이었다.
땀에 젖은 그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피어올랐다.
"후욱,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친다 이거지?"
일랜의 기억상으로 제이슨 토레는 절대 이런 녀석이 아니었다.
그런데 놈이 갑자기 이 꼬라지가 됐다는 건, 설정이 바뀌었다는 뜻.
'그래. 내가 기억하기로 이 모습은 분명...!'
1차 악역 일랜 키스폰이 떨어져 나간 다음, 등장하는 빌런.
2차 악역, '추락의 공포'와 외형이 일치한다.
제이슨의 특성에도 그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
1차 악역 일랜 키스폰.
2차 악역 추락의 공포, 제이슨.
각 권을 대표하는 빌런들이 1권에서 만나고 말았다.
15화. 역전 승부
사건 발생 전.
-거래는 깨지지 않았다. 부디 우리 관계가 파탄 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일랜 키스폰.
키스폰 저택으로 향하던 일랜에게, 프리즈너는 경고를 날렸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끝까지 일랜을 감시했고.
덕분에 하벨 키스폰과 일랜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일랜, 오퍼 블러드를 사용한 소감은 어땠느냐?
-응? 오퍼 블러드?
-지금 와서 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사역마의 눈을 통해, 네가 날뛰는 걸 똑똑히 봤으니까. 설마, 네가 오퍼 블러드를 쓰고도 멀쩡한 건 의외였지.
그리고 뜻밖에 알게 된 사실.
-거기 있던 교관이 도운 거냐?
하벨이 말한 교관이라면 분명 키른 교관을 말하는 것일 테다.
'교관이 신입을 도왔다고?'
전에도 프리즈너는 일랜에게 키른 교관에 대해 추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조연인 데다 그리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온 프리즈너가 손을 움직였다.
'열람.'
촤락!
- 호감 : 3→5
▶ 키른은 당신이 선해지고 싶어 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키른이 일랜에게 품은 생각.
그건 프리즈너가 작은 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뭐야, 이건?! 일랜이 선해지고 싶어한다고? 뭘 했길래, 엑스트라가 이딴 인식을 갖게 된 거야?!'
기가 찰 노릇.
표면적으로는 신입이 선을 넘지 않았다고 여겼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리스크가 수면 아래에 똬리 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거야, 그놈은?!'
프리즈너는 자기 머리를 움켜쥐었다.
분명 잘한다고 믿었건만, 자신이 속고 있는 기분.
아니, 어쩌면 놈에 대해 과소평가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제거해야 하나?'
신입을 죽일 계기는 숱하게 있었다.
키른 교관 때도, 일레나의 호감을 높였을 때도.
다만, 주인공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 정도쯤은 괜찮다고 여겼을 뿐이다.
'아니, 이놈은 병균이다! 모든 걸 망가뜨리는 암세포, 그 자체라고!'
이미 신입 때문에 작품이 수정되는 건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이 세계 또한 조금씩 뒤틀리는 상황.
까딱하면 프리즈너의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둘 다 없애는 수밖에.'
프리즈너가 두루마리를 펼쳤다.
촤락!
두루마리에는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 이야기가 나열돼있었다.
정확히는 1권부터 4권까지는 네 개 세력에 대한 내용을 프리즈너가 정리한 것이다.
'각 권에 등장하는 악역은 이 네 개 세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까.'
1권은 아카데미에 영지를 제공한 키스폰 가문과 그 추종 권세가들을 대표하는 백사.
2권은 아카데미를 통해 후계를 양성하고 지원하는 용병 길드, 혈룡.
3권은 아카데미의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흑호.
4권은 아카데미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청마.
'이 집단들의 어두운 면을 상징화한 것이 빌런. 신입 놈이 빙의한 1차 악역 일랜 역시, 사회적 인정을 욕망하는 백사를 형상화한 거지.'
그만큼 소설의 빌런들은 이야기 전개에 필수적인 존재들이지만.
프리즈너에게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이걸 꺼낸 이유는 하나.
'2권의 악역이 되려면, 역시 혈룡과 관련된 인물이어야겠지. 일랜과 접촉한 놈들 중에서 그런 녀석이...'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던 프리즈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있다!'
최근 일랜이 마주한 엑스트라 캐릭터.
그리고 혈룡반 소속인 자.
촤락!
[인물 열람]
- 이름 : 제이슨 토레 (F급)
- 소속 : 레드팽 아카데미 혈룡반
- 특성 : 광장공포증, 효자
- 목표 : 나도 라인 한번 제대로 타서, 우리 집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는 거다!
깃펜을 꺼낸 프리즈너가 두루마리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사가각!
혹여나 그 신입이 봐도 그냥 지나칠 수 있도록, 특성들 사이에 악역 설정을 추가한다.
- 특성 : 광장공포증, 추락의 공포, 효자
힘을 소모하고 있는 탓일까.
프리즈너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지는 그때.
흐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주변에서 반투명한 실루엣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프리즈너는, 옅게 웃었다.
"누군가 했더니. 다들 옛날 생각나나 보지?"
저 그림자들은 한때 이세계에 빙의됐던 선대 악역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프리즈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살해당해, 지금은 망자가 되었다.
"실은 나도 마음이 급해져서 말이야. 주인공 죽일 기회가 눈앞이라고."
프리즈너는 웃고 있었지만, 깃펜 든 손에는 핏줄이 바짝 섰다.
만약 이번에도 주인공을 죽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그전에 일랜이 살아남는다면?
암세포가 자신을 덮치진 않을까?
'아니, 내 설계는 완벽해. 이제 놈에게 남은 건 절망뿐이다!'
이를 까드득 갈며, 프리즈너가 눈을 돌렸다. 일랜을 모니터링한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일랜은 제이슨과 접촉하고 있었고.
'저 새끼, 또 어디 가는 거야?'
어디론가 움직이는 일랜을 보며, 프리즈너는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만 좀 싸돌아다녀!'
* * *
얼마 전 송장벌레와 데스 웜 전투가 있었던 탓에, 백사검을 손질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향한 곳은 레드팽 아카데미 무기공방.
'모든 것에 완벽을 기해야 하니까. 작가님도 이걸 보면 좋아하시겠지?'
제이슨에게도 지시를 내린 직후라 흡족해진 난,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쇼, 무기 공방입니다!"
공방에 들어서자 키 큰 여성이 나를 맞이했다.
구릿빛 피부와 백금발이 대조를 이룬 것이 인상적인 그녀는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수리? 제작? 아니면 강화?"
"어, 그쪽은...?"
"아, 난 여기 아르바이트생. 저 아저씨들의 조수이기도 하지."
백금발은 엄지로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대강당 규모의 공방에는 근육질의 드워프들이 철을 두드리고 있었다.
따앙! 땅!
치이이익!
푸쉬히이!
망치가 쇠를 때릴 때마다 불꽃이 튀고.
하얗게 달아오른 날붙이는 물에 들어가면서 희뿌연 연기를 일으킨다.
한쪽에서는 어깨가 떡 벌어진 드워프들이 지지대를 붙잡고 발을 굴러 풀무질을 해댔다.
'여기가, 레드팽 무기 공방!'
이곳 공방은 특별하다.
소드맨 특성을 개화시켜주는 철마혈과 위자드 특성을 키워주는 법마혈.
그 교차점인 철법혈 위에 지워진 레드팽 아카데미에서는 철을 제련하는 것에도 영향을 받는다.
'철법혈이라는 특수필드가, 제련 보너스를 제공하니까.'
예컨대 칼을 강화한다고 했을 때, 순수한 철마혈은 내구력에 영향을 미친다.
법마혈이라면 마법적 효과를 부여하는 등 옵션 추가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법혈은 내구력과 옵션 추가 모두 영향을 주는 셈.
'아, 그래서 드워프들이 환장하는 필드가 되었지? 철법혈에 세워진 공방은 그들에게 영구 버프를 제공하는 천국이나 다름없으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이곳을 탐냈던 건 푸른 불 일족.
신비의 힘이 깃든 강철, 즉 신철을 두드리는 것이 비원인 그 드워프들은 레드팽을 찾았고.
레드팽 아카데미 역시 마검을 다룰 공방 전문가들이 필요했기에 두 그룹은 용역계약을 원만히 체결했다.
"수리까지는 아니고."
레드팽 공방을 둘러보는 척하며, 난 들고 있던 백사검을 공방 조수에게 내밀었다.
"그냥 반짝거리게 해놔. 칼날에 실오라기 하나조차 비칠 수 있는 만큼."
누가 봐도 1차 악역 일랜 키스폰다운 거만함이었다.
따라서 상대 역시 화를 내거나 당황하는 것이 정상.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바로 움츠러들 것이 분명하...
턱!
스르르응!
순식간에 내 손에서 백사검이 사라졌다.
말 끝나기도 전에 칼을 가져간 조수는 검을 반쯤 뽑더니.
"세상에! 세상에나!"
순간, 공방에 있던 드워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오히려 내심 당황한 난 그녀에게 짜증을 냈다.
"뭐하는 거야?"
"이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겨울산맥에서나 겨우 채굴된다는 북부의 강철... 뭐 하는 거예요?!"
조수가 나와 똑같은 대사를 던진 건, 웬 드워프가 다가와 백사검을 낚아챈 탓이다.
수염 곳곳이 까맣게 그을린 드워프는 백사검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오오...! 만년한철이다!"
"뭐? 만년한철이라고?"
"어디? 어디?!"
드워프들은 하나 같이 하던 작업을 멈추더니 이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때문에 나처럼 공방을 방문한 학생들은 담당 드워프가 사라지자, 황당한 기색.
고객이 붙잡거나 말거나 이쪽으로 달려온 푸른 불 일족은, 백사검을 보고 입을 벌렸다.
"트, 틀림없어! 만년한철이 맞아!"
"오오오! 이걸 본 게 몇 년 만이지?"
"이봐, 까만 수염. 그 의뢰 나한테 맡기면 안 될까?"
조수에게서 칼을 낚아챈 드워프 이름이 까만 수염인 듯하다.
까만 수염은 그렇지 않아도 소눈 같던 눈을 더 댕그랗게 떴다.
"어림없는 소리! 애초에 이건 내가 먼저 잡은 거야. 모두 꺼져버려!"
"선배님이야말로 꺼져버려요!"
백사검은 다시 조수의 손으로 넘어갔다.
"애초에 이건 내가 먼저 받았거든요? 그렇지, 친구?"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조수 계집이! 너는 위아래도 없어?!"
"선배님이 내 고충을 알아요?! 키 차이 때문에 내 목이 거북목이 됐다고요!"
그게 고충이야? 거북목이 된 게?
아니 그것보다 왜 지들이 내 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건데.
하지만 괜히 나섰다가는, 쓸데없는 에피소드가 하나 더 추가될 것 같다.
내가 불안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는 그때.
"이봐, 친구. 반짝반짝 손질해달라고? 나한테 맡겨만 줘. 아, 이거 이름이랑 기숙사 동호수 작성해주면 배달서비스는 무료로 해줄게."
뒤에서 까만 수염이 노려보건 말건, 조수는 제 할 일을 했다.
그녀가 내민 서류에는 이름이나 기숙사 주소를 명기해야 하는 항목이 들어가 있었다.
"기숙사라니."
비로소 포커스가 나한테 돌아온 상황.
난 재빨리 피식 웃으며 서류를 휙 던졌다.
"그런 거지 굴에서 이 몸이 살 것으로 보이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 기숙사 입주자가 아니구나? 그럼 배달서비스는 안 되고, 직접 수령해야 해! 내일 수업 마치고 찾으러 와! 히힛!"
부탁인데 내 얘기 좀 끝까지 들어주면 안 될까?
이번에도 그녀는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백사검을 품에 안고 자리를 벗어났다.
"이 망할 조수 새끼가 어디 가?!"
까만 수염 드워프 역시 그런 그녀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너 이따 청마검 배달하러 가야 하잖아! 청마관 기숙사에 이거 갖다 놓으라고!"
몸을 돌리려던 난 멈칫했다.
그리고는 까만 수염을 돌아봤다.
씩씩거리고 있는 그의 손에 들린 칼 한 자루가 눈에 띈다.
-이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주신 청마검이야. 받아줘!
푸른색 청마를 형상화한 칼자루.
그건 틀림없이 일전에 루인이 내게 바치려 했던 청마검이었다.
'아니, 잠깐만. 저게 왜 여기에?'
청마검은 루인을 각성시킬 도구 중 하나.
그리고 현재, 제이슨은 루인에게 향한 상황이다.
루인의 청마검으로 루인을 상처 입히라는 내 지시에 따라.
'루인한테 청마검이 없다면, 내가 세운 주인공 각성 계획도 쓸모가 없잖아?!'
그나마 다행이라면, 바로 눈앞에 청마검이 있다는 것.
난 최대한 순발력을 발휘해서 까만 수염에게 말을 걸었다.
"그 배달, 내가 하지."
"...뭐?"
까만 수염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갑자기 왜 네가 나서냐는 눈빛.
난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애초에 그 칼은 내게 상납하려고 하던 것이다. 못 믿겠다면 그 칼의 주인에게 물어봐도 좋아."
"이 칼을 탐내는 건 아니고? 미안하지만, 배달 사고가 나는 건 사양..."
"말했을 텐데. 난 배달을 해주겠다는 거다. 애초에 그 물건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 수령을 유보한 것이지만. 댁들을 보니 내가 받아서 전달하는 게 빠를 것 같은데."
"말귀를 못 알아듣네! 굳이 배달을 하겠다는 이유가 뭐냐고?!"
당신도 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잖아.
내심 억울한 기분이 들어, 까만 수염을 노려봤다.
"마침 내 칼도 이 공방에 맡겼으니, 그사이 청마검을 써야겠거든. 하지만 그전에 칼의 주인, 루인 아스달을 직접 만나 그동안 내가 쓰겠다고 할 참이야. 그게 싫다면 이 공방에 내 칼을 맡기는 건 취소할 생각..."
"자, 여기!"
까만 수염은 바로 태도를 바꾸어, 공손히 내게 청마검을 건넸다.
"칼과 주인의 이름까지 아는 걸 보면 가까운 사이인가 보지? 허허허!"
청마검을 받은 난 그 즉시 루인과 제이슨을 찾아 나섰다.
제이슨을 청소 당번으로 투입시킨 것 역시 나였기에, 목적지를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헉, 헉!
문제는 망할 놈의 체력.
평상시의 일랜 키스폰은 스태미나가 폐급이라도 되는 건지, 단순하게 뛰었을 뿐인데도 숨이 찬다.
'이번 일이 끝나면 육체를 강화해야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청소구역에 다다르는 그때.
"그오오오오오오오!"
나는 보게 되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루인.
그 앞에서 포효하며 변이를 일으키는 제이슨.
촤하악!
제이슨의 등에서 날개가 튀어나오는 걸 본 난, 불길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빌런들과, 내가 보았던 제이슨의 특성.
[인물 열람]
- 이름 : 제이슨 토레 (F급)
- 특성 : 광장공포증, 추락의 공포, 효자
'추락의 공포...!'
맙소사! 그건 사람 성향을 말하는 특성 따위가 아니라, 악역의 특성이었어!
그리고 현재, 제이슨에게는 2권 악역의 특성이 부여된 상황.
엎친 데 덮친 격, 놈의 앞에는 주인공이 쓰러져 있었다.
'X발!'
숨 고를 틈도 없이, 난 뛰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시야와 함께, 심장이 요동친다.
휘후웅!
붉은 혈룡창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들이닥친다.
그것이 루인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 이 이야기는 끝장이다!
'웃기지 마라! 내가 그걸 보고만 있을 것 같아?!'
스르르응!
칼집이 벗겨지면서 청마검이 울었다.
마치 제 주인이 위험한 걸 알기라도 하듯.
칼집을 내동댕이친 난 있는 힘껏 칼을 휘둘렀다.
까아아앙!
묵직한 충격과 함께 손이 아려온다.
내가 휘두른 청마검은 불꽃을 만들어냈고.
제이슨의 혈룡창은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가 바닥을 때렸다.
"그륵...?"
제이슨은 갑자기 개입한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충류처럼 샛노랗게 변해버린 그의 눈동자를 보며.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난 알 것 같았다.
"프리즈너...!"
분노는 일단 접어두자.
당장은 이 상황에 대한 분석이 먼저다.
'추락의 공포. 그건 혈룡 길드의 어둠을 형상화한 빌런이었던 것 같은데.'
혈룡 길드는 레드 드래곤의 피를 담은 혈룡창을 사용한다.
사용자가 혈룡창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것의 피를 묻히는 것.
활성화 된 혈룡창은 사용자를 '레드 워리어'로 변이시켜, 전투력을 높여준다.
'문제는... 그래, 이성의 마비였어.'
레드 드래곤은 포악한 생물이다.
그런 개체의 힘을 담은 혈룡창을 사용하려면, 정신을 수양하는 등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직 정신이 성숙한 성인만 혈룡창이 주어지며, 그들조차 레드 워리어를 유지하는 시간에도 리미트를 부여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성이 날아가 버리니까.'
원작 2권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레드팽 아카데미에서 매년 시행하는 무도 대회.
혈룡 길드 채용부서도 참석하는 장이었다.
'조기 입단을 목표로 하는 혈룡반에게는, 꿈의 무대였지.'
그건 빌런 네임, 추락의 공포 역시 마찬가지.
그는 무도 대회에서 우승하여 혈룡 길드에 조기 입단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우승은커녕, 하필이면 예선에서 루인을 만나 탈락하고 만다.
'애초에 추락의 공포는. 각성한 주인공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부여하기 위해 투입된, 성장측정 장치였으니.'
제대로 기량조차 보이지 못한 추락의 공포.
그는 허술하게 보관된 혈룡 길드의 우승 상품을 훔친다.
그것이 바로 혈룡창이며, 추락의 공포는 레드 워리어로 변신.
마침내 2권 악역으로 각성하여 이성을 잃고 날뛰면서 주인공을 공격한다.
'그에겐 이름도 제대로 부여되지 않았지. 어차피 죽을 빌런이었는 데다, 죽어서도 레드 워리어 모습으로 퇴장 당했으니.'
주인공은 그를 살해하려는 게 아니었다.
또한 추락의 공포 역시, 마지막에 이성이 돌아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주인공의 손에서 끝내 힘이 빠져, 추락의 공포는 까마득한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다.
'주인공의 선함을 강조하려는 뻔한 클리셰. 하지만 그만큼, 추락의 공포는 주인공의 내면을 성장시키는 중요한 악역 중 하나였어. 그런데...'
바뀌었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제이슨! 제이슨 토레입니다!
이름 없는 빌런에게 이름이 주어졌고.
-예? 무기라면 저도 친척한테 받은 혈룡창이 있습니다만....
무도 대회 상품으로 등장했어야 할 무기는 이미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 말은 즉.
'설정이 바뀌었다.'
나는 편집자였다.
그리고 이 원작의 내용이 하나씩 기억나는 상황.
내가 모르는 것으로 설정이 바뀌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다.
"내가 아무리 거지같다고 해도... 설정을 바꿔?!"
이런 걸 할 수 있는 건 오직 프리즈너, 그놈밖에 없다.
"캬오오!"
뒤늦은 분노에 잠식될 겨를도 없이.
뻐어억!
제이슨의 거대한 발이 나를 걷어찼다.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몸이 붕 떴다.
콰당탕탕!
몇 미터를 날아갔다가 땅을 마구 구른 난 바로 신물을 토했다.
구르면서 칼에 베인 건지, 어깨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린다.
하지만 난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바라던 바야."
눈을 들며 말한다.
"이 싸움이 곧 너와 나의, 첫 정면 대결이라는 거겠지?"
프리즈너는 추락의 공포.
편집자는 일랜 키스폰이라는 탈을 쓰고 전장에 섰다.
"카아아아아아아아!"
추락의 공포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든다.
그와 동시에 난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
꽈항!
바닥을 뚫고 들어간 섀도우 암이 추락의 공포 아래에서 솟구쳤다.
쫙 벌어진 갈고리가 추락의 공포를 붙잡고 그대로 천장에 처박았다.
꽈과앙!
후두둑 떨어지는 돌 먼지들을 보며.
"일 대 일. 이걸로 동점."
난 주먹을 힘껏 뒤로 당겼다. 그러자 섀도우 암이 빠르게 수축하면서, 추락의 공포를 땅에 내리꽂았다.
꽈아아아아아앙!
흔들리는 지면 위에서 몸을 일으킨 난, 입가를 훔쳤다.
"이제, 이 대 일."
역전 승부는 지금부터다.
16화. 내 칼은 각성한 주인공이거든
웹소설이나 게임에 빙의한 소설 속 주인공들을 보면서 한 번씩 의문이 들었다.
'이놈들은 싸우는 게 무섭지 않은 건가?'
현실 세계에서 칼부림할 일은 드물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상황은 더욱 드물다.
하지만 빙의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잘만 싸운다.
'그것도 현실에서는 보기도 힘든 괴물들을 상대로.'
물론, 그것을 해소할 장치들은 존재한다.
빙의한 캐릭터의 기억이나 습관 등에 동화되었다거나.
게임 스킬을 사용하듯이 살벌한 기술들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다거나.
'그리고 나의 경우는...'
일랜의 기억 따위는 소설에서 본 게 전부.
거기다 하필 1차 악역이라 강함 정도도 E급에 불과하다.
스킬이라고는 인물 열람이라는 비전투 계열의 특성이 유일.
따라서 내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면 무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섀도우 암. 키른 교관한테 받은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츠르르, 탁!
섀도우 암이 수축하면서 갈고리가 다시 내 손목에 들러붙었다.
방금 난 거리가 떨어져 있는 적을 두 번 연달아 공격하는 데 성공하던 참이다.
"그륵..."
2차 악역, 추락의 공포가 되어버린 제이슨.
땅바닥에 처박혀있던 그는, 아니 그것은 땅을 짚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추스르는 그를 보자니, 눈이 절로 가늘게 변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방어였을 뿐. 유효타를 먹이려면 더 강한 게 필요해.'
백사검은 공방에 있어서, 지난번 온실 전투 때처럼 오퍼 블러드를 사용하는 건 불가능.
게다가 근처에는 루인이 있다. 가능하더라도 리스크가 큰 만큼 옵션에서 제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내 얼굴이 청마검의 칼날에 비친다.
청마검은 주인공 전용 무기.
따라서 내게 옵션은 없다.
'무기가 물건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지.'
청마검 너머로, 쓰러져 있는 루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청마검을 챙겨온 이유.'
그건 주인공 루인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가 각성한다면, 2차 악역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내가 기억하는 각성한 주인공이라면,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푸스스!
때마침 제이슨이 몸을 일으킨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먼지를 털어낸 추락의 공포.
그것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포효가 쏟아져 나왔다.
"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놈이 땅을 박찼다.
날개를 펼친 제이슨은 한 번의 도약으로 나와 거리를 좁혔다.
휘웅!
스까앙!
가까스로 청마검을 세워 공격을 막았지만.
크게 회전한 창은 나의 어깨를 거세게 후려쳤다.
뻐어어억!
"...!"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꽈장차앙!
힘에 밀린 내 몸이 창문에 부딪힌다.
부서진 유리 파편이 살갗을 파고들었고, 충격 여파에 청마검까지 놓치고 말았다.
'아파!'
이마라도 찢어진 건지, 시야가 붉게 변한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건 나를 노려보고 있는 제이슨.
빈손은 나를 향해, 남은 손으로는 혈룡창을 뒤로 당기고 있었다.
'지금!'
내가 섀도우 암을 조작하는 순간.
꽈하아아아앙!
굉음과 동시에 제이슨의 모습이 사라졌다.
놈은 순식간에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고.
꽝!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륵...?!"
내 앞에는 검푸른 머리의 검사가 서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땅에 쓰러져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던 루인.
어두워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손에 쥔 청마검이 월광에 반짝였다.
"내가 설마, 목숨 같은 칼을 그냥 놓쳤을 거라고 생각해?"
난 씩 웃으며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철크럭!
팔에 장착된 섀도우 암은, 루인의 청마검 칼자루와 연결된 상태.
사실 난, 칼을 놓치는 척하며 섀도우 암을 이용해 청마검을 루인에게 날렸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덕분에, 청마검은 루인의 손을 살짝 베고 정확히 손에 쥐어졌다.
"프리즈너, 네놈의 칼이 폭주한 2차 악역이라면..."
난 루인 어깨에 손을 얹으며 설정 열람을 가동했다.
"내 칼은, 각성한 주인공이거든."
촤락!
[인물 열람]
- 이름 : 루인 아스달 (F급> A급)
- 소속 : 레드팽 아카데미 청마반
- 특성 : 과대망상, 희생정신, 정의감, 체력단련, 유니콘 블러드, 청마검술(각성), 무의식(한시적)
- 목표 : 죽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세상을 수호하는 용사가 되자!
예상대로다.
주인공 루인의 강함이 대폭 상승한 건 물론.
마침내 그의 아이덴디티라고 할 수 있는 청마검술을 익혔다.
새로 생겨난 특성들 가운데, '무의식'을 본 난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나.'
많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힘을 각성하지만.
그것이 의식의 각성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무의식 상태에 빠진 상태에서 싸우게 되고.
적을 압도적으로 쓰러뜨리고 나서는 기절하는 등의 클리셰를 맞는다. 그리고 지금의 루인 역시...
"나 때문이야..."
우는 듯이 말하며 어깨를 떨었다.
무의식중에 그는 자책하고 있었다.
"으으, 나 때문에... 나만 아니었어도오!"
루인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커지는 순간.
큐왕!
청마검이 번쩍이면서 밝은 빛이 칼에서 솟아올랐다.
틀림없다. 그건 소트 익스퍼트만 사용할 수 있다는 오러.
그리고 그의 힘은 1차 악역인 나, 일랜 키스폰에게 쥐어졌다.
"그륵, 크...!"
제이슨이 벽에서 몸을 빼내었다.
후두둑 소리가 나며 파편들이 떨어지고.
놈은 자신을 후려친 루인을 확인하고 이를 드러냈다.
'바로 덤비진 않는군.'
레드 워리어는 짐승에 가까운 전사.
본능적으로 힘의 격차를 느끼고 경계하는 듯하다.
'네가 오지 않는다면...'
난 섀도우 암이 착용 된 주먹을 당겼다.
섀도우 암은 땅을 뚫고 튀어나오는 기능만 있는 게 아니다.
영화 속 히어로나 특수요원의 갈고리 총처럼 허공에 쏘아질 수 있다.
"이쪽이 가지!"
내가 주먹을 뿌리자, 루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섀도우 암에 이끌린 그는, 자기 행동도 자각하지 못하고 칼을 휘둘렀다.
스꽈아아아아앙!
푸른빛이 작렬하며 폭발이 일어났다.
청마검술의 특징은 압도적인 스피드에 따른 파괴력.
하지만 정확도가 떨어진 탓인지, 제이슨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럴 때는 위!'
고개를 퍼뜩 들자, 천장까지 날아오른 제이슨이 보인다.
놈은 거꾸로 쥔 혈룡창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그와아아아아아아아!"
빠르게 내리꽂히는 붉은 빛.
위험하다!
여기서 주인공이 살해당하면 모든 게 끝장!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섀도우 암을 크게 휘둘렀다.
후우웅!
내 동작에 따라 루인도 청마검을 올려쳤다.
하지만 무의식의 한계와 제이슨의 예리함으로 방어가 어긋난다.
콰하지익!
혈룡창은 루인의 어깨를 관통했다.
몸을 움직인 덕분에 급소는 피했지만....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루인은 눈이 뒤집혀서 비명을 질렀다.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제이슨은 다시 거리를 벌렸다.
'좋지 않아. 루인이 무의식에서 깨어나면, 내 통제에서 벗어나 버려.'
생각한다.
어째서 스펙이 훨씬 높은 루인이 밀리는가?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의 루인은 마차를 끄는 말처럼 내 조정을 받기 때문.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전투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없는 탓에, 데미지가 쌓인다.
'한 방을 노려야 해. 하지만 어떻게?'
이미 제이슨도 루인의 반응이 더딘 걸 눈치챈 모양.
허공에서 움직이며 틈을 노리고 있다.
순간,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친다.
'그거다!'
판단과 동시에, 난 계단 쪽으로 뛰었다.
섀도우 암을 당기자 루인도 거기에 이끌려 따라오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아!"
...좀비를 데리고 다니는 기분이네.
탓탓타!
우리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제이슨 역시 추격해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희한하게도 그가 보이지 않는다.
'포기할 리가 없어. 놈은 어떻게든 우리를 사냥하려 들 거야.'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던 난, 옥상 문을 발견하고 그대로 들이받았다.
꽈항!
건물 옥상에 올라오자 펼쳐진 밤 세계.
보조조명처럼 켜진 별들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고.
퍼더억, 퍼덕!
달을 등진 제이슨이 우리를 내려다보는 게 시야에 잡혔다.
아무래도 놈은, 협소한 공간에서 움직이는 대신.
창밖으로 나가 기다리는 걸 선택한 모양이다.
쿠당!
그때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루인이 쓰러져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잠 따위 집에 가서 자라고!"
내가 부축하려 하자, 루인이 거칠게 칼을 휘둘렀다.
서늘한 오러가 코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 새끼가.'
루인은 울고 있었다.
심적, 육체적 고통에 몸부림친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져버려엇!"
"그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거기 응답하듯 밤하늘에서도 제이슨의 포효가 들려왔다.
주인공과 악역이 아주 쌍으로 지랄이다.
하지만 짜증만 내고 있을 순 없었다.
화화르으으윽!
제이슨 쪽이 밝아져서 돌아보자, 불타오르는 혈룡창이 보인다.
'저건, 스피어 브레스(Spear Breath)?'
레드 워리어의 전용기술이자 추락의 공포가 사용하는 필살기.
공격 범위는 좁지만, 당하면 불길에 휩싸여 데미지가 계속 발생한다.
'하지만 스킬 시전 시간이 걸리는 편이지.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
내가 이곳에 올라온 이유.
그건 루인의 청마검술 때문이다.
청마검술은 스피드가 관건인 만큼, 이동 거리가 많아질수록 파괴력과 범위 또한 증가한다.
'비행 스킬이 있는 제이슨으로서는 당연히 야외가 유리하다고 판단했겠지만.'
난 밤하늘에서 창을 높이 쳐든 제이슨과, 어린 애처럼 질질 짜대고 있는 루인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제이슨 쪽으로 뻗고.
섀도우 암이 감긴 주먹은 뒤로 당겼다.
"높이 날아오를수록, 크게 다치는 법!"
악역다운 대사를 날리며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섀도우 암이 크게 팽창하며 루인의 발이 붕 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루인은 알까.
그가 허공을 밟고 달리는 중이란 걸.
푸른빛이 사선을 그리며 밤하늘을 가로지른다.
때마침 필살기를 준비하던 제이슨도, 불길을 일으키며 하강했다.
키이이이이잉!
화르르르르르!
지상과 천상의 빛이 공중에서 맞닿는 순간.
...!
세계가 점멸했다.
질주하던 청마가 뿔을 들이받았고.
기세 좋게 내리꽂힌 혈룡은 마구 상대를 할퀴었다.
그 끝에.
꽈앙!
굉음과 함께 푸른빛이 붉은빛을 물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우주를 내달리며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꽈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불꽃놀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거다.
수시로 점멸하는 밤하늘을, 나도 멍하니 올려다본다.
'빛나고 있어. 주인공이.'
꽈아아아아앙!
화려한 축제는 빛이 땅에 꽂히면서 막을 내렸다.
거대한 균열과 함께 비산하는 파편들.
검을 땅에 꽂은 채 굳어버린 루인.
빛을 잃고 쓰러진 제이슨.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자, 희미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미묘하게 내 외형과 비슷한 실루엣. 그렇다면 저건...!
"프리즈너...?!"
「이, 이건 불가능해. 추락의 공포를 상대로 이긴다니? 대체 네놈 정체는 뭐란 말이냐?!」
워낙 희미한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머리를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구르는 건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뭐, 네가 상대를 잘못 만난 것뿐이야. 사실 나, 이래봬도 직장에서는 꽤 인정받는 편집자였..."
「닥쳐! 너 따위가 편집자라면, 왜 만지는 것마다 망가지는 건데?!」
"으휴, 그만 좀 인정하면 물러나면 어디 덧나? 암만 분해도…"
「카아아아악! 설정 열람!」
촤락!
익숙한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설정 열람 : 인물]
- 이름 : 일랜 키스폰 (E급)
- 특성 : 지네의 딜레마, 인물 열람
난 눈을 껌뻑였다.
"이게 왜?"
「특성을 봐라, 신입! 지네의 딜레마가 뭔지 설명해보라고!」
"글쎄. 이 작품이 완결된 지도 오래돼서. 그런 상세한 것까지는..."
「애초에 이건 일랜 키스폰의 특성에 없었던 거였어! 그렇다는 건, 바로 네놈이 이 캐릭터에 빙의하면서 생겼다는 거지. 이게 문제란 거다!」
착각일까?
분을 토해내는 프리즈너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너...?"
「...설정을 바꾸는 것에는, 그만큼 책임도 뒤따르는 법■지. 그러니 이젠 네■ 부탁■는 수밖■.」
희미해지는 것뿐만 아니다.
그의 목소리마저 흐름이 끊기고 있었다.
털썩!
하반신이 완전히 사라진 프리즈너가, 내게 기어오기 시작했다.
「부탁이다! 지금 당장 저■ 주■공을 죽■라! 제발!」
그는 사라지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죽은 뒤에도 망자로 내게 영향을 끼치던 그가.
마치 딜리트 키에 쫓기듯 삭제되면서까지 내게 애원하고 오열한다.
「■■■■■■■■■■!」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프리즈너는 더 이상 내 시야에 사라지고 없었다.
'이게 이 세계에서의, 진정한 죽음...'
그가 소멸한 건, 무리하게 원작 설정을 바꾸려 해서일지도 모른다.
괜히 오싹해진 난 주변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작가님, 저까지 죽이실 생각은 아니죠?"
물론,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
"그럴 리가요, 피디님."
...어?!
17화. 여신 미팅
레드팽 아카데미 건물 옥상.
전투의 열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그곳에서 난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분명 피디님이라고 했어.
이 원작에서 그런 직업이 존재할 리는 만무하잖아.
그렇다면 혹시 작가님이 나한테 말을 건 거야? 아니면 그냥 헛걸 들은 건가?
"이쪽입니다."
환청이 아니다!
이건 명백한 여자의 음성.
내 고개는 소리가 난 쪽으로 홱 돌아갔고.
이쪽으로 접근하는 상대를 확인하고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루, 루인?!"
추락의 공포를 쓰러뜨린 루인.
기절한 줄로만 알았던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저놈 눈이 뒤집혀있는데?
"루인! 방금 피디님이라고 말한 게 너야?"
"당신을 부른 건 사실입니다만. 우선 인사가 먼저겠네요."
흰자위만 드러난 루인은 우뚝 멈춰서더니,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갑습니다, 피디님. 저는 이 세상을 관장하고 있는, 바카이입니다."
기괴하게도, 사춘기는 훌쩍 지났을 그의 입에서는 고운 여성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대의 이름을 복기해보려 했다.
"바카이... 그 이름, 왠지 귀에 익은데."
"네. 피디님께서 이름이 어렵다고 이야기한, 이 세계의 여신이죠."
여신!
그 직관적인 단어를 듣고서야 난 원작 설정을 떠올렸다.
'원작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에는 여러 신들이 등장했지.'
대부분의 신들은 대부분 백사나 청마, 흑호 또는 혈룡과 같은 자연신이었다.
하지만 이건 작중 배경이 유펠리아 왕국이라 그런 것이고.
바깥의 제국에서는 자연신이 아닌, 인격신이 숭상되었다.
'그중 하나가 여신 바카이!'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저기 여신님."
'당신이 여신인지, 귀신인지 알게 뭐냐?'고 묻는 대신, 난 아까 들은 말을 되짚었다.
"아까부터 자꾸 피디라고 부르시는데. 저를 어떻게 아시는 거죠?"
"우리 신들은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주로 누군가의 꿈을 통해 암시를 주거나, 또는 아바타(Avatar)라는 화신으로 잠시 현현할 뿐이죠."
"아하. 지금 루인한테 빙의한 것도 그것 때문이군요! 그런데 그게 저를 아시는 거랑 무슨 상관이..."
"신이 아바타로 현현할 수 있는 건 이 세계에 한정된 건 아니랍니다. 피디님의 세상에도 아바타로 활동한 적이 있죠."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박하이'라는 이름으로."
내 눈은 절로 휘둥그레졌다.
박하이. 그건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의 작가님 필명이다.
난 입을 쩍 벌리며 소리쳤다.
"박하이 작가님?! 작가님이 여신이었다고?!"
그러고 보니 어감도 비슷하잖아? 박하이, 바카이... 하, 이런 빠가야로! 왜 이걸 이제 알았을까?
"정확히는 잠시 그녀 몸을 빌린 것뿐이지만. 예, 저는 박하이로 피디님을 뵈었습니다. 그리고 보다시피 그때 피디님이 본 소설은..."
바로 이 세계의 이야기다.
여신은 작가 박하이에게 이 세상을 꿈으로 보여주거나.
또는 빙의하여 나와 소통하기도 했다고 하는 것이 설명이었다.
'세상에! 작가님이 여신이었을 줄이야.'
비록 잠깐 몸을 빌렸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를 쓰고, 나와 작품에 대해 소통한 건 그녀임이 분명했다.
놀라움도 잠시, 난 반가운 마음에 습관적으로 내 품을 뒤적거렸다.
"반갑습니다, 작가님! 작품 완결하고 3년이 지나서 겨우 첫 미팅이네요! 일단 제 명함부터...! 아, 지금 없구나."
"피디님, 나눌 이야기가 많은 건 사실이나. 아쉽게도 제가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제가 피디님 앞에 나타난 이유는..."
"...아! 그거죠? 저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시려는 거죠?!"
확신에 찬 내가 그녀의 두 손을 붙잡았다.
'믿고 있었다고!'
역시나 내 생각이 옳았다.
분명 작가님은 내 활약을 보고 만족한 게 틀림없다.
만족하고 인정한 나머지, 나를 원래 세계로 복귀시켜주려는 것이다.
'하핫, 멍청한 프리즈너 녀석! 잘 있어라, 나는 떠난다!'
그렇게 쾌재를 부르는 순간.
"죄송합니다, 피디님."
갑자기 그녀가 내 얼굴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시간 관계상, 이 방법밖에 없는 점 이해해주세요."
"?!"
피로 축축한 그녀 입술이 내 입술 부딪쳤다.
가만, 그런데 여신이 빙의한 몸은 루인...
"으브읍?!"
내가 몸부림치며 그녀를 떼어내려는 때.
화아아아악!
눈앞이 새하얘졌다.
* * *
신기한 경험이다.
새로운 정보들이, 웬 장면들과 함께 내 머릿속에 녹아들고 있었다.
'웹소설 <아카데미 먼치킨 수재가 되었다>. 그건 사실, 실존하는 세계의 기록 중 일부...'
촤락!
시야를 가득 채운 건 어느 책의 한 삽화.
그건 처음 보는 지도와, 그걸 날개로 감싼 여성의 모습이었다.
'여신 바카이는 그 세계를 관찰하고 유지하는 질서의 신. 하지만 이곳 신들은 직접적으로 세상에 관여하지 못해. 그건 여신도 마찬가지...'
촤락!
잠든 사람, 약에 취한 주술사, 사제복을 입은 성직자의 삽화.
그 삽화에는 하나같이 여신이 등장하고 있었다.
-용사가 되어 세상을 구해주세요.
'어떤 세상에서는 진부한 그 한 마디는, 이 세계에서 신탁. 선택받은 자들은 여신의 명에 따라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데 성공했구나. 소설에 등장하는 용사들처럼.'
촤락!
세 번째 삽화에는 불에 타는 짐승들이 그려져 있었다.
독니가 부러진 백사, 다리가 잘려나간 청마, 가죽이 벗겨진 흑호와, 머리가 뜯긴 혈룡.
그것들은 자연신의 몰락을 의미했다. 바카이와 같은 인격신들의 인지도가 높아진 탓.
촤락!
하지만 그다음 삽화에서 불타고 있는 건, 인간의 외형을 한 인격신들이었다.
힘이 강대해진 인류는 더 이상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신의 시대는 몰락하고, 인간의 시대가 펼쳐지는 건가.'
촤라라라라라락!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면서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번영하는 도시와, 사라지는 숲이 보인다.
'이건, 원작에서 나오지 않은 내용인데. 그렇다면 원작보다 더 미래의...?'
화르르윽!
그 순간, 삽화를 담았던 책이 불타기 시작했다.
내가 깜짝 놀라기도 전에 하얀 손이 구석에서 등장했다.
-나는 바카이. 세계를 관찰하는 질서의 여신.
여신 바카이의 손길이 닿자, 불길이 사그라진다. 불탔던 책은 복구되고, 책은 역순으로 넘겨지다가 완전히 턱 하고 닫혔다.
-이 세계의 종말은 필연. 필연을 피하기 위해서는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녀의 절박함을 담은 이야기는, 마침내 차원 너머 또 다른 세계에 뿌려지기 시작했다.
그 형태는 다양하다. 때로는 사람들의 꿈이나 영감을 통해서.
또는 잠시 누군가에게 깃들어 콘텐츠로 제작되었다.
그렇게 접촉한 자들은 이세계 트럭에 올랐다.
-낯선 천장이군.
-상태창!
소위 말하는 이세계 빙의자들.
여신은 그들이 세계를 구원하리라 보았지만.
정작 빙의자들은 세상의 파멸을 막는 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자기 잇속을 챙기거나, 군림하거나, 휴양하기 바빴고.
심지어 신의 권한에 도전하는 자들도 생겨났다. 여신이 나눠진 힘을 이용해.
'아. 혹시 프리즈너도 그런 부류였던 건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 퍼즐이...'
화르르윽!
다시 책이 불탄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다시 등장하는 여신의 손은, 흉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쩌니 울컥하는 기분이 든다. 그녀는 몇 번이나 이 짓을 반복하고 있었던 걸까?
'작가님... 아니, 여신님은 찾고 있었던 거구나. 당신만큼 그 세계를 사랑해줄 사람을. 파멸을 막아줄, 빙의자를.'
나도 모르게 마음을 졸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꺼진 모니터처럼 암전된 세계.
이제 더 이상 그녀 이야기에 반응하는 이들은 없었다.
복구와 수정, 그리고 폐기를 반복하며 넝마로 변해버린 이야기.
그건 결코 매력적이지 않았으며, 숨 막힐 만큼 고요한 침묵만 느껴졌다.
'악플보다 무플이 무서운 법이지...'
내심 씁쓸해하는 그때.
띠링!
캄캄하기만 하던 시야에 희미한 창이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제일북스 천승제PD입니다.]
'어? 저건, 내가 작가님한테 보냈던 컨택 메일...!'
띠링! 띠링!
[작가님, 확실히 작품 세계는 디테일한 설정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이런 점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낄 수 있을 듯한데요!]
[사건을 여기에 안배한다면 어떨지요? 그렇다면 이후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고...]
빛을 뿜어내는 메시지창은 점차 수를 불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캄캄했던 세계는 환해지고 있었다.
눈이 부시다 못해 따뜻해질 만큼.
[정말 죄송합니다, 작가님! 제가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작가님 작품이 조금 더...]
'아, 저건 작품이 망했을 때 내가 보낸...'
몇 년 전의 일이 새록새록 떠올라 감회가 새로워지는 순간.
[작가님! 다시 한번 저랑 써보시지 않겠어요? 두 번째는 제가 반드시...!]
빠아아아아아앙!
트럭 클랙슨 소리와 함께, 헤드라이트 불빛이 시야를 뒤덮었다.
* * *
난 눈을 떴다.
내 앞에는 루인의 모습을 한 여신 바카이.
그녀가 막 내게서 입술을 거두고 있었다.
"피디님. 피디님은 저에게 마지막 희망..."
"아, X발! 남자랑...!"
치솟는 역함에 난 내 입을 거칠게 문질러댔다.
그녀가 빙의한 건 루인, 바로 사내새끼였으니까.
여신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뗐다.
"...지금에서야 피디님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건, 프리즈너가 소멸하면서. 그에게 주었던 힘의 일부를 되찾은 덕분이랍니다. 하지만 아직, 피디님을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죠."
청천벼락 같은 말에 난 그대로 굳어버렸다.
"예? 그, 그럼 저는...?"
"걱정 마세요, 피디님.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나머지 힘을 다시 수복할 수 있다면, 피디님을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애초에 저를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으면 됐잖아요! 그랬다면 난...!"
참고 있던 울분이 터졌다.
메일 한 통 잘못 보냈다가 이 사달이 난 거라니!
털썩!
그때, 여신이 무릎을 꿇고 땅을 짚었다.
너무나 빠른 그녀의 태세전환에 난 당황했다.
"아, 아니! 그렇게 저자세로 나온다고 해도..."
"이렇게 현현하는 것도 지금의 제게는 버, 버겁군요. 곧 있으면 저와 아바타, 타, 타와의 연결이 끊어질 것입니다, 다, 다."
여신이 고개를 든다. 그러자 그녀의 한쪽 눈이, 고장 난 슬롯머신처럼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X 됐다. 제대로 렉이 걸리고 있었다.
난 여신이 세상에서 튕기기 전에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어떻게 하면 집에 돌아갈 수 있...?!"
퍽!
눈앞에 별똥이 튀면서, 코가 화끈거린다. 무슨 영문인지 여신이 내 얼굴에 머리를 들이받은 것.
황당해서 살펴보니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 게 시야에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몸도 축 늘어진 상태.
'기절? 자, 잠깐만! 설마 이렇게 가버린다고?!'
즉,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여신이 떠나버린 루인의 몸뚱이일 뿐.
작가님은 탈출 방법도 알려주지 않고 이곳을 떠나버렸다.
허탈감이 밀물처럼 쏟아지려는 순간.
'가만! 혹시 작가님은 내가 계속해서 악역을 수행해주시길 바라는 건가?'
쓰러져 있는 루인이 시야에 들어온다.
'힘이 부족하다는 건 사실, 혼자서 작품을 수정할 자신이 없었던 건 아닐까?'
그 생각에 미치자 조금씩 아귀가 맞는 기분.
내가 이곳 세계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정작 작가님은 날 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작가님 본인이 하지 못했던 작품 수정을 나 천승제가 해내고야 말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등장하자니 부끄럽고, 도움은 필요하고.
"걱정 마세요, 작가님! 처음이 어렵지, 앞으로도 계속 성장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나 천승제, 아니 일랜 키스폰이 작가님의 등불이 되어드리죠!"
그렇게 길을 밝히고 작가님을 성장시키다 보면, 결국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 보내주시겠지.
작가님도 솔직하게 말하면 될 텐데. 하긴, 작가님들 중에는 내향적인 분들이 많았으니까.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자 비로소 앞으로 할 일이 정해졌다.
"자, 그럼 이 녀석부터 요리해볼까?"
난 쓰러져 있는 루인을 보며 손을 비볐다.
* * *
캄캄한 우주.
그곳에 홀연히 빛나고 있는 황금빛 물체가 있었다.
마치 포도주잔을 연상케 하는 그것은 성배를 보는 듯하였으며.
실제로 그 안에 채워진 내용물은 술의 그것처럼 붉디붉은 액체로 찰랑이고 있었다.
첨벙!
붉은 수면에서 누군가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가슴까지 내려온 젖은 머리칼은 황금빛으로 번들거렸고.
머리칼 사이로 염소의 것을 닮은 두 개의 뿔이 자라나 있었다.
스르륵!
눈꺼풀이 열리고 태양을 닮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눈을 뜨자, 눈앞에 홀로그램 같은 영상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천승제. 지금은 일랜으로 빙의한 사내가 서 있었다.
'일랜 키스폰. 이제 당신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영상에 손을 가져가는 그녀의 이름은 바카이. 질서의 여신이자, 이 세계의 기록자다.
진작 대부분의 힘을 소모한 그녀는 이 초월세계에서 겨우 존재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최근 '프리즈너'가 소멸하면서 일부 힘을 되찾았고.
덕분에 일랜과 접촉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녀가 일랜을 만난 이유는 하나.
'당신이라면 제가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능히 해낼 것입니다. 용사님.'
바카이가 아는 일랜은, 전생에서도 그녀의 세계에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용사'로 선택해 이곳에 데려왔고.
예상대로 성취를 이뤘다.
'대화의 흐름이 끊긴 건 아쉽지만. 의도는 충분히 전달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그때.
영상 너머로 보이는 일랜의 외침이 들려왔다.
-걱정 마세요, 작가님! 처음이 어렵지, 앞으로도 계속 성장하실 수 있습니다.
성장?
바카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회복을 돕겠다는 뜻인가?
-이제 나 천승제, 아니 일랜 키스폰이 작가님의 등불이 되어드리죠!
기분 탓일까.
영상 속 용사가 그녀의 뜻을 곡해했을 듯한 느낌이 든다.
'아니, 저는 용사님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 세계에 구원을...'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세계를 다시 관찰하는 여신 바카이.
마침 동이 트고 레드팽 아카데미에는 아침이 찾아온다.
그리고 들려오기 시작하는 세계 주민들의 목소리.
-소름! 누가 키스폰의 장남 아니랄까 봐! 정말 일랜이 악마를 소환했다고?!
-그런데 이 레드팽 교관들은 왜 저런 놈을 가만히 두고 있는 거야?
'용사님…?'
기대했던 것과 완전 반대의 여론이다.
어리둥절해진 여신 바카이는, 황급히 일랜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이 기회에 알리고 싶을 뿐입니다. 나, 일랜 키스폰이 어떤 놈인가를! 나를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여신 바카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요, 용사님! 지금 뭐하는...?!'
18화. 완벽했다
퍼벙! 펑!
이른 새벽.
키른 교관은 캄캄한 보건실 창가에 서서, 불꽃놀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도 낭만은 남아있는가.'
과거, 그는 어쌔신으로 활약했다.
사냥감이 정해지면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타깃을 제거했고.
모종의 계기로 어쌔신 활동을 접고, 아카데미 보건담당 교관으로 전직했다.
'메스로 병든 오늘 사회를 치료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들었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 철학을 설파하는 것...'
사실 얼마까지만 해도 반쯤 그 목표를 포기하고 있었다.
적어도 일랜 키스폰이라는 환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변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친구야말로 내 숙원을 풀어줄 열쇠. 하지만 과연, 키스폰의 핏줄이 선해질 수 있을 것인가?'
키스폰 가문.
이곳 영지에서도 막강한 영향을 펼치고 있는 권세가.
더군다나 키스폰 가주는 음모와 계략에 능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자의 밑에서 자란 일랜이 악에 병들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어쌔신 시절, 이 세계의 어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키른 교관이었기에. 그는 새벽에도 고심이 깊었다.
"생각이 너무 길었군. 나도 나이가 들긴 들었..."
쓰게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리려는 그때.
콰창!
키른 교관은 겨우 피해냈다.
창문을 뚫고 날아온 갈고리를.
콱!
그것이 뒤편 벽에 박히는 걸 본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기, 기습?!'
누구인가?
과거 그가 암살한 자들의 복수인가?!
하지만 키른 교관의 정체를 아는 자는 없을 터.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키른 교관이 품속에 손을 넣으려는 순간.
꽈장차앙!
창문이 아예 박살이 나면서 시커먼 것들이 방안에 굴러 떨어졌다.
반격하려던 키른 교관은, 곧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키스폰 군?"
놀랍게도 보건실에 들이닥친 건 일랜 키스폰.
그는 섀도우 암을 이용해서 이곳에 날아든 것이었다.
심지어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 잃은 남학생들을 데리고서.
"허억, 헉..."
얼굴에 유리 파편이 박힌 일랜 키스폰.
그는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데려온 이들을 가리켰다.
"키른, 교관님. 이들을, 구해주십시오."
일랜이 데려온 건 둘이었다.
하나는 전신에 화상을 입어 피부가 뒤집어진 루인.
다른 하나는 관절이 기괴하게 뒤틀려 퉁퉁 부은 제이슨.
어느 쪽이든 둘 다 피투성이라, 얼굴을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였고. 이 정도 중상자는 키른 교관마저 보건 담당으로 부임 후 거의 처음 보는 사례였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설명은 나중에! 치료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냅다 버럭 소리부터 지르는 일랜 키스폰.
다른 때라면 키른 교관은 웃으며 고문을 했을 것이다.
치료고 나발이고 의문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었을 테니까.
'아.'
키른 교관은 보고야 말았다.
피와 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숨을 헐떡이는 일랜을.
그건 화장품을 처바른 그 어떤 귀족보다도 고귀하게 빛나고 있었다.
훗.
키른 교관이 미소를 지으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오늘 일찍 자기엔 글렀군."
* * *
그날 아침.
"야야, 오늘 휴교래!"
"그걸 강의실에서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레드팽 아카데미는 갑자기 휴교령을 내렸다.
그나마 기숙사에 있던 생도들은 연락받고 다시 침대에 눕는 스릴을 즐겼지만.
아카데미와 거리가 먼 곳에서 통학하던 이들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들어 봐! 오늘 왜 휴교령을 내린 건지 알아?"
"여기 통지문에 쓰여 있네. 강의동 노후로 인한 파손에 따른 긴급보수공사 진행."
강의실에 있던 학생 중 하나가 종이를 들어 보였다. 오는 길에 떨어져 있던 아카데미 통지문을 주운 것이다.
그러자 아까부터 호들갑을 떨던 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짜식들, 그걸 믿냐. 나 방금 보건실 다녀오다 들었는데 말이야. 사실 어제, 괴물이 여길 습격했대."
"...뭐? 괴물?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진짜래도! 그럼 어떤 인간이 이 복도를 저 지경으로 박살 낼 수 있겠어?!"
그들은 강의실 출입구 너머로 보이는 복도를 쳐다봤다.
여길 오면서도 여기저기 부서진 천장과 바닥을 보면, 단순 노후로 인한 게 아니란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게 무슨 괴물이길래 여길 이 난장으로 만든 거래?"
"음, 뿔에 날개까지 달린 흉측한 놈이라던데? 놈이 이곳 강의동 옥상에서 날아다니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잖냐!"
"이 새끼는 꼭 지가 본 것처럼 얘기하네. 그런 무시무시한 놈이, 무슨 볼일이 있어서 이런 시시한 곳에 쳐들어왔다는 거야?"
"하, 너희들 놀라지 마라. 그 현장에는 괴물만 있었던 게 아니라..."
학생은 낮게 깐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녀석이 있었대. 백사반의 일랜 키스폰."
어디까지나 소문이다.
괴물과 함께 포착됐다는 은발의 남학생.
하지만 그 외형이라면 자연히 일랜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레드팽에는 그가 괴물, 아니 악마를 소환해냈다는 살이 붙기 시작했다.
"소름! 누가 키스폰의 장남 아니랄까 봐! 정말 일랜이 악마를 소환했다고?!"
"그렇다니까! 실제로 그 괴물한테 공격받고 보건실에 실려 온 녀석도 있던데? 혈룡반 같던데, 이름이 뭐였더라. 지려슨이었나..."
"아, 나 걔 알아! 제이슨이라는 놈인데, 그날 청소 당번이었던 걸로 기억해!"
"세상에! 진짜 일랜이 악마를 불러서 사람을 공격했단 말이야?! 왜지?!"
실제 피해자까지 확보되자 소문에 신빙성이 더해졌고.
"왜긴 왜야."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고개를 돌렸다.
"주제도 모르는 잡종들을 방역하려면, 이 정도 불길은 필요하지 않겠어?"
강의실에 모습을 드러낸 건, 얼굴 여기저기 상처가 난 남학생이었다.
하지만 뺨에 새겨진 문신이 붉은 생채기와 뒤섞여 검붉은 불길을 연상시켰고.
그 끝에 자리 잡은 새빨간 눈동자는 마치, 강의실을 통째로 불태워버릴 만큼 강렬했다.
"히익! 이, 일랜 키스폰...?!"
그를 알아본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황급히 손사래 치며 내뱉은 이야기를 주워 담으려 했다.
"바, 방금 우리가 하던 얘긴 신경 쓰지 마! 그러니까 이건..."
"X발."
허둥대던 학생들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인상을 구긴 일랜이, 자신의 한쪽 어깨를 부여잡으며 중얼거린다.
"루, 인, 아, 스, 달... 그 청마반 잡종 놈 반항이 그렇게나 드셀 줄이야. 자기 친구를 위해 목숨 바칠 각오로 덤벼드는 바람에 이 몸이 패, 배, 하, 다, 니..."
기분 탓일까.
그의 혼잣말에서 유독 두 가지 단어에 힘이 들어간 느낌.
학생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때, 일랜은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뭐. 루인 아스달, 그 녀석도 큰 부상을 입었으니 아주 이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키킥!"
마침내 일랜이 그곳을 떠났다.
그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학생들은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프하! 갑자기 저 녀석이 나타날 줄이야!"
"말도 마. 지난번엔 화장실에서 튀어나오더라니까. 이거,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미친놈들아,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잖아! 방금 우리가 제대로 들은 거지?!"
뒤늦게 그들은 상황을 파악했다.
"맙소사! 진짜 일랜이 악마를 불러낸 거라고? 그런데 이 레드팽 교관들은 왜 저런 놈을 가만히 두고 있는 거야? 이게 사실이라면 퇴학감이잖아?!"
"아서라. 이 아카데미가 누구 영지에 세워졌는데? 총장도 키스폰 영주한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꼬리치잖아. 거기다 저놈이 발뺌하면 방법도 없다니까?"
그야말로 돈지랄연.
학생들은 복도 쪽을 힐끔거리며 최대한 낮은 데시벨로 욕을 뱉어냈다.
그러다가 문득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그런데 아까 일랜이 뭐라고 했더라. 루인 아스달? 워낙 목소리가 작아서 뒤 내용이 잘 안 들렸는데..."
"아, 루인. 걔 얼마 전에 일랜한테 대든 녀석이잖아. 이번에 또 덤볐다는 것 같던데?"
"그건 나도 들었어! 그리고 마지막에 일랜이 했던 말은, 루인이... 루인이 자기한테 덤벼서..."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을 덧붙였다.
"...일랜이 패배했다?"
* * *
'이번에도 완벽했다!'
강의실을 나선 난 소리 없이 쾌재를 불렀다.
아마 지금쯤 녀석들의 머릿속에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일랜과 싸워 승리한 주인공 루인'의 그림으로 가득 찼겠지.
'후, 밤새 뛰어다닌 보람이 있는 걸?'
작가님.
아니, 여신 바카이와 헤어진 뒤에 내가 한 일.
그건 주인공 루인과, 2차 빌런 제이슨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루인은 말할 것도 없고, 똘마니 일이 된 제이슨이 죽어버리면 계획에 여러모로 차질이 생겨버리니까.
'다행히도 녀석은 숨이 붙어있었지.'
그건 기적이었다. 높은 상공에서 떨어졌는데도 죽지 않았다는 건.
하지만 루인과 제이슨 모두, 위험한 상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난 그들을 껴안고, 섀도우 암을 이용해 보건실로 쳐들어갔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찾아간 그곳에는, 불행 중 다행히도 키른 교관이 있었다.
-설명해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당시, 키른 교관은 시체에 가까운 두 환자들을 눕히며 내게 물었다.
난 챙겨온 물건을 그의 앞에 들어 보였고.
역시나 키른 교관은 빠르게 눈치챘다.
-혈룡창? 어떻게 그게 자네 손에... 설마?!
-그렇습니다. 혈룡반의 제이슨은, 이것 때문에 폭주한 것입니다.
과거, 키른 교관은 키스폰 가문의 백사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보건 담당인 데다 어쌔신인 전적이 있으니, 당연한 거겠지.
-...알 만하군. 레드 워리어로 변한 이 친구가, 자네와 루인 아스달 군을 해친 건가.
-예. 하지만 교관님. 제이슨이 우리를 공격했단 사실은 알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마터면 자네가, 아니 자네들이 명을 달리할 수 있었네! 게다가 이건 레드팽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이야. 나는 교관으로서 상부에 보고할 의무가...!
-제이슨은,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
-저는 루인한테 앙심을 품고 있었고. 그래서 제이슨을 시켜 루인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알고 있었던 건가? 제이슨이란 학생이, 레드 워리어로 변할 거란 걸?
-아뇨. 하지만 어쨌든 제 잘못인 건 변함이 없습니다. 게다가...
난 얼굴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부은 제이슨을 쳐다봤다.
[인물 열람]
- 이름 : 제이슨 토레 (F급)
- 목표 : 나도 라인 한번 제대로 타서, 우리 집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는 거다!
-이 녀석은 착한 놈입니다. 그저 집에 효도 한번 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걸 제가 이용했을 뿐이죠. 그런데도 내가 아니라 녀석이 퇴학당한다면, 그건 교관님의 교육관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제가 틀렸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이 친구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기라도 하겠단 말인가?
-그럴 리가요. 오히려 저는 이 기회에 알리고 싶을 뿐입니다. 나, 일랜 키스폰이 어떤 놈인가를! 나를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키른 교관에게 좋은 놈으로 비칠 것이냐, 나쁜 놈으로 비칠 것이냐.
난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니 기억하십시오, 교관님. 이번에 제이슨이라는 레드 워리어는 없는 겁니다. 오직 내가 불러낸 괴물이, 이들을 공격했을 뿐.
그게 오늘 새벽에 키른 교관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진작, 했어야 할 일이었어. 교관한테 사랑받는 망나니 빌런이라니. 그런 건 있을 수 없다고.'
사실, 키른 교관이 내 의도대로 움직여줄까 의문이었지만.
방금 만난 학생들을 보니, 내 악명에 대한 소문을 아주 잘 부풀려주고 있었다.
난 거기에 '루인은 나를 이긴 착한 놈'이라는, 주인공의 명성에 필요한 조미료를 뿌린 셈.
'하지만 설마 휴교령까지 내릴 줄이야. 아카데미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키스폰 가주의 후손인 내가 퇴학당할 일은 없다.
그렇기에 키른 교관에게도 사실을 까발린 것.
다만, 분위기를 읽을 필요는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또 키른 교관한테 확인해봐야 하나?'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던전 견학 예정일이 바로 코앞이다. 정확한 일정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 무대에 필요한 루인과 제이슨의 상태도 확인해볼 겸, 난 보건실을 찾아 문을 열었다.
벌컥!
마침 그곳에는 키른 교관이 진료실에 앉아있었다. 나 못지않게 피곤한 몰골로.
아마 밤새 루인과 제이슨을 치료하느라 진땀을 뺀 것이겠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그는 나를 보더니 멈칫했다.
'자, 어떠냐. 내가 뻔뻔하게 다시 나타났다. 새벽에 쳐들어와서 당신을 괴롭힌 망나니 생도가!'
심지어 나를 자신의 소중한 어떤 것으로 생각했던 만큼, 그는 배신감도 클 터.
난 한껏 기대심에 부푼 마음을 숨긴 채, 건들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습니까? 내가 데려온 그 새끼들 상태는?"
"아, 누군가 했더니..."
외눈 안경을 고쳐 쓰던 키른 교관이 미소 짓는다.
"키스폰 군이었군."
띠링!
- 호감 : 5→7
▶ 키른은 필요하다면 당신을 언제든 도와줄 생각입니다!
"...대체 당신 사고회로는 어떻게 생겨 먹은 거지?"
"응? 멀어서 잘 안 들리는데. 방금 뭐라고 한 겐가?"
내가 뭐라고 하든 당신은 신경 안 쓸 거잖아!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억누르며.
난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들' 상태는 어떻습니까?"
19화. 보상이 두 배!
나는 키른 교관을 따라, 환자들이 입원해있는 회복실로 이동했다.
저벅!
먼저 첫 번째 병상.
그곳에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제이슨이 누워있었다.
뿐만 아니다. 팔다리는 부목을 덧대어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살아남은 게 기적이네."
곁에서 키른 교관이 설명했다.
"전신 골절에 탈구. 과다출혈과 거기에 따른 쇼크까지... 조금만 늦어도 이 친구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거야."
"그럼 언제쯤 움직일 수 있습니까?"
던전에 데려가려면 하루라도 빨리 이 녀석이 회복해야 한다.
하지만 내 질문이 섣불렀던 것일까.
"자네 마음은 알겠다만. 현재 토레 군에게는 상당량의 마취제와 안정제를 투여한 상태일세."
제이슨의 성을 언급하며, 키른 교관은 자기 눈두덩을 문질렀다.
"후우, 몸의 부상도 부상이지만... 레드 워리어로 변신하면서 정신적으로 적잖은 타격을 입었을 걸세. 설마 백사검에 이어서, 혈룡창의 참상까지 보게 될 줄이야."
"어, 조금 있으면 던전 견학이 있다고 하던데..."
"그건 내일 통지 예정이었는데 그걸 자네가 어떻게...? 하긴. 키스폰 가문의 정보력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한 건가. 그래, 자네가 알고 있는 대로야. 아카데미에서는 삼 일 후 던전견학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지."
자, 잠깐만. 삼일 후?
당황한 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제이슨은...?!"
"정신 차리는 데 최소 보름은 걸릴 걸세. 하지만 걱정 말게나. 토레 군은 회복 후에 대체 과제를 내줄 참이니까."
내 뒤집히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른 교관은 훈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내가 지금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고!
그럼 던전에 제이슨을 못 데려간다는 거잖아?!
'아니. 어쩌면 이건 내 판단 미스. 너무 낙관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어.'
난 미이라처럼 변해버린 제이슨을 다시 관찰했다.
'키른 교관 말대로야. 설마 그 전투에서 살아남을 줄은 몰랐지.'
전날, 제이슨은 레드 워리어로 변신.
무의식 상태로 각성한 루인과 싸우다가 밤하늘에서 추락했다.
사망했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놀랍게도 제이슨은 숨이 붙어있었다.
'원작에서는 절벽에 떨어지는 바람에, 구할 방법도. 시간도 없었지. 차이점이라면 그것 하나.'
어쨌든 2차 악역, 추락의 공포는 살아남았고.
그가 눈을 뜬다면, 1차 악역인 일랜 키스폰의 수하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다만, 제이슨은 크게 다친 상태. 당장은 회복이 우선이니 던전에 데려가는 건 불가능하다.
'다른 똘마니를 찾아봐야 하나?'
일랜 키스폰이 데리고 다니는 수하는 둘.
하나는 여기 있는 혈룡반 똘마니 제이슨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속 불명으로 알려진 '덩치 똘마니'.
하지만 불과 삼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놈을 찾기란 쉽지 않겠지.
'어쩔 수 없지. 원작이랑 좀 달라지긴 했지만, 나 혼자 움직이는 수밖에.'
이번 계획에 필수인원은 셋이다.
미끼이자 희생양이 되어줄 일레나.
그녀를 던전에 가두고 위기에 빠뜨릴 나, 일랜.
그런 나를 쓰러뜨리고 일레나를 구해야 할 주인공, 루인.
"알겠습니다. 그럼 루인 상태는...?"
쿠당탕!
그때, 다른 쪽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른 교관은 소리만 듣고 뭔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또 시작이군. 키스폰 군, 따라오게!"
또 시작이라니. 그게 무슨?
난 그를 따라 다른 병상으로 이동했고.
마침 바닥에 떨어져 몸부림치고 있는 루인을 발견했다.
"카악! 네, 네, 네가! 사람이야?!"
뭐야, 멀쩡하네.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는 큰 외상없이 몇 군데 붕대만 감고 있다.
물론, 붕대가 고름으로 변색되어 있긴 했지만. 제이슨에 비하면 생채기 수준이다.
'그런데 이 녀석, 죽은 눈인데?'
초점 없는 루인의 눈동자를 발견한 순간.
"뭘하고 있나, 키스폰 군! 아스달 군의 다리를 잡게!"
"...예?"
"아스달 군은 정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가 아냐! 슬립워킹(Sleepworking)에 빠져 있는 거지!"
키른 교관은 루인이 휘두르는 두 팔을 힘주어 붙잡고 있었다.
슬립워킹? 익숙한 듯 아닌 듯한 단어가 왠지 불길하다.
나 역시 키른 교관을 따라 루인의 다리를 잡았다.
'인물 열람!'
촤락!
[인물 열람]
- 이름 : 루인 아스달 (F급)
- 특성 : 과대망상, 희생정신, 정의감, 체력단련, 유니콘 블러드, 청마검술, 무의식(한시적)
특성들을 훑던 중 난 눈을 의심했다.
청마검술이야 간밤의 전투로 각성했다고 쳐도.
왜 아직까지도 녀석이 무의식 상태에 빠져있는 거지?
"설마 슬립워킹이라는 게...?"
"쉽게 말해서 몽유병일세. 자네가 오기 전까지 계속 발작을 일으키더군! 이런 경우엔 진정제도 잘 듣지 않으니."
키른 교관은 나와 함께 루인을 다시 병상으로 옮겼고.
풀려있던 천으로 루인의 손목과 발목을 차례로 묶어 고정시키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루인은, 간질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들썩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서! 어떻게 이런 짓으을! 카아아아악!"
놈이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마치 영화 엑소시스트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아니, 정확히는 추락의 공포와 싸우던 상태에 가깝다.
그때는 자괴감의 양상을 띠고 있다면, 지금은 분노의 표출. 그리고 그 대상은 아마...
띠링!
- 호감 : -3→-5
▶ 루인은 당신을 아카데미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규정지었습니다!
'역시 나였나.'
다른 때라면 떨어진 호감도에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루인은 정신병 환자처럼 병상에 묶인 짐승이 되었다.
그러던 중, 루인의 병상 근처에 세워진 청마검이 눈에 띈다. 현재 제이슨의 혈룡창과 더불어, 루인의 청마검 역시 키른 교관이 보관 중이다.
"자네도 예상은 하고 있겠지만..."
비로소 키른 교관은 루인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청마검술을 깨우치면서 발생하는 부작용일세. 자네가 백사검을 활성화했을 때랑 같은 이치랄까."
"그렇다기에는 저랑 차이점이 있잖습니까. 적어도 나는 전투가 끝나고 멀쩡하게 깨어났는데..."
"그야 자네가 사용한 오퍼 블러드는, 피를 대가로 취했으니까. 아스달 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키른 교관은 나를 이끌고 다시 진료실로 이동했다.
장소를 옮기자 루인의 짐승 같은 포효가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쪼르르!
찻잔이 차오른다.
키른 교관은 복잡한 심경으로 앉아있는 내게 차를 건네며 말했다.
"내가 아는 바로, 청마검술은 정순한 마나를 형상화시키지. 그런 만큼 사용자의 덕목과 인성, 특히 정의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알고 있네."
"그게 저 녀석 발작... 아니, 슬립워킹이랑 무슨 관계입니까?"
"정의감이란 것도 결국 신념에 귀결되지. 실제로 많은 청마반 학생들이, 그 신념에 대치되는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검의 이치를 깨우쳤네. 이번 던전 견학의 목적 중 하나도 그 일환이지만..."
호로록!
차 한 모금을 마신 키른 교관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오히려, 옳은 것만 추구하는 청마검 수련생들에게 트라우마로 작용할 수 있지. 오퍼 블러드가 피를 필요로 한다면, 청마검술은 혼을 요구한다랄까."
"혼? 영혼할 때 그 '혼'을 말하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비유일세. 어쨌든 지금 아스달 군은 끔찍한 악몽에 빠져 있는 거야. 자력으로 이겨내기 전까지는 저 상태가 계속되겠지."
"그게 언제쯤일까요? 녀석이 깨는 시점이..."
"글쎄. 저렇게 심한 증세는 나도 처음 봐서. 하지만 과거, 스카일 장군이라는 사람이, 한 달 동안 깨지 못했다는 일화가..."
"한 달?!"
내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쿠당탕 쓰러졌다.
키른 교관은 자빠진 의자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거 새로 구매한 진료 의자인데."
"아니, 하루도 아니고 한 달이라니?! 그럼 저 녀석이 던전에 어떻게 갑니까?!"
"토레 군의 경우와 다르지 않네. 아마 아스달 군 역시 대체 과제를 받게 되겠지."
뭐? 그건 안돼!
제이슨은 빠져도 좋다고 치자.
하지만 이번 계획의 핵심인물이자 주인공인 루인이 사라진다면, 일레나를 구할 주인공이 없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
'빌어먹을!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 지금까지는 순탄했잖아?!'
루인은 레드 워리어를 쓰러뜨리는 성취가 있었고.
1차 악역인 나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겼다는 소문까지 퍼질 예정이다.
이렇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순풍을 타고 있는데, 이런 변수가 생길 줄이야.
"때려서라도 깨우는 수밖에!"
내가 루인한테 달려가려고 하는 그때.
"키스폰 군."
"교관님! 나, 지금 충분히 열 받았거든요? 할 얘기가 있거든 다음에 합시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닐세."
"또 무슨 궤변을 늘어놓으려는...!"
"아스달 군이 걸린 슬립워킹 말일세. 해결할 방법이 딱 하나 있기는 한데..."
"새로 구매한 의자라고 하셨죠."
난 의자를 바로 세우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배상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새벽에 자네가 보건실 창문을 박살 냈..."
"같이 청구해주시면 되겠네요! 그런데 있기는 합니까? 삼일 안에 루인을 깨울 방법이?!"
"이래 봬도 명색이 보건 담당 교관인데. 처방전 정도야 만들 수는 있지. 문제는 약을 제조하기 위한 재료가 필요한데. 알다시피 저 환자들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도 없게 됐어."
뭐야, 밀당하는 것도 아니고.
슬슬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
'가만! 이거 혹시 퀘스트...?'
어떤 이야기에서든, 주인공은 시련을 통과해 보상을 획득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사례 중 하나가 게임 속 퀘스트.
요즘 소설 역시 이러한 요소들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키른 교관의 약재 구하기 퀘스트. 그걸 내가 클리어하면, 루인을 깨울 수 있다는 것 아닐까?'
내 골몰하는 표정을 본 키른 교관은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역시. 지금 자네의 표정을 보고, 비로소 난 확신할 수 있었네."
그만 확신해.
"뭘 확신하는지 묻고 싶은 거겠지?"
알고 싶지 않은데요.
"그건 자네의 '남몰래 선행하고 싶은 마음'일세. 키스폰 군은 친구들을 구했는데도, 오히려 악인처럼 굴었어. 그건 오만해지고 싶지 않은 자네의 마음이겠지. 심지어 자네는, 조금이라도 빨리 친구를 치료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있고."
아니,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고?
대체 이 신념고착증 환자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황당하다 못해 감탄하며 그를 쳐다보자, 키른 교관은 뭔가를 내게 내밀었다.
"받게."
그가 건넨 건 새카만 망토였다.
내가 의아해하며 받아들자, 키른 교관이 말했다.
"내가 소싯적에 사용했던 물건이지.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일 때, 유용할 걸세. 자네라면 그걸 악용하지 않을 거라고 믿네."
그 순간.
띠링!
[사물이 감지되었습니다.]
[새로운 특성, '도구 열람'을 획득하였습니다!]
[특성 '도구 열람'은 사물의 설정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어? 어어?!
한꺼번에 두 가지 보상을 획득했다.
하나는 키른 교관이 건넨 알 수 없는 망토 아이템.
다른 하나는, 인물 열람과 같이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특성이었다.
'새로운 특성? 프리즈너가 없는 지금, 이걸 지금 내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이세계의 여신, 바카이 작가님!
그녀가 분명했다.
'오, 작가님. 시련 끝에는 보상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걸 이제 납득하신 걸까요?!'
어쩌면 일부 힘이 회복되고 조건이 충족된 덕분일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인물 열람에 이어 도구 열람의 특성이라니!
이건 분명한 메리트였다.
'도구 열람.'
촤락!
[설정 열람 : 도구]
- 이름 : 나이트 윙(B급)
- 종류 : 망토
- 설명 : 야간 또는 어두운 공간에서 사용자의 모습을 감춰주는 '야간 은신'효과가 있다. (낮 또는 밝은 공간에서는 사용 불가, 관련 면역 스킬을 가진 타깃에게는 무효)
- 시간 : 1시간 11분 (시간 소진 시 효과 소멸)
'야간 은신?!'
기억난다.
원작에서 이 망토는 주로 어쌔신 클래스가 사용하는 아이템 중 하나.
모습을 감추게 하는 장치로서, 주로 은신 스킬을 아직 배우지 못한 암살자들이 애용하고는 했다.
'사용시간이 정해져 있는 걸 보면, 섀도우 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모품인가.'
아쉽긴 하지만 잠깐이라도 모습을 감출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적어도 주인공을 몰래 서포트하거나, 미행할 수 있을 테니까.
'당장 섀도우 암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 전에 확인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이런 것까지 주는 걸 보면, 내가 구할 약재가 평범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
"그래서, 제가 구해야 할 약재가 대체 뭡니까?"
"그게 참 아이러니지. 삼일만 참으면 자연히 그걸 얻을 기회가 찾아올 텐데. 자네에게 그건 무의미해 보이고..."
그야 당연히 안 되지.
그때는 던전 견학이 시작되는데, 루인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그나저나 삼일만 참으면 기회가 찾아온다? 대체 무슨 약재길래...'
순간, 얼마 전에 키스폰 가주가 이야기했던 어떤 것이 무심코 떠올랐고.
내가 에이, 설마 하며 웃어넘기려는 그때.
"일랜 키스폰 군. 자네가 구해야 할 약재는, 바로 '귀신거미의 알'일세."
키른 교관은 그걸 사실로 내뱉었다.
20화. 빌런의 두 번째 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