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지하 세계는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민도현은 요즘 그런 공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왜냐하면 최근에 푹 빠진 게임 때문이다.
제목은 <지하 세계의 다크 엘프 군주>.
일반적인 판타지와는 다른, 땅 밑의 거대한 세계에서 펼쳐지는 게임이었다.
그 때문에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게임 속 표현을 빌리자면, 그곳은 신들이 지상에서 온갖 거지 같은 것들을 빗자루로 싹싹 쓸어서 처넣은 쓰레기통 같다나?
쉽게 말해 세상천지 가장 위험하고 안 좋은 건 지하 세계에 몰려 있단 소리였다.
땅 밑에선 아무리 강자라고 해도 한 걸음, 한 걸음이 생의 마지막이 될 수 있을 정도였다.
공기는 무겁고 답답하며, 유황의 메케한 냄새, 용암 강의 뜨거움, 피부를 좀먹어 오는 버섯 포자까지… 단순히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세계다.
오죽하면 지하의 환경 자체가 살인자란 말까지 나왔다.
이런 설정은 일반적인 판타지 게임에 불감증에 걸려버린 민도현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어려울수록 도전 정신을 자극한단 말이야.'
다만 필요 이상으로 열광했던 건지도 모른다.
새로 나온 DLC를 설치하던 순간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며, 민도현은 게임 속 세계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
민도현의 감각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후각이었다.
갑자기 코로 질척하고 역겨운 피 냄새가 파고들었다. 민도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무슨?'
하지만 고민하고 있을 틈 따윈 없었다.
후각 다음으로 청각이 회복됐기 때문이다. 귀를 통해서 삽시간에 수많은 정보가 어지러이 쏟아져 들어왔다.
"죽여라! 크아아아!"
"안 돼! 밀어내!"
악의와 고통이 가득한 비명이었다.
그 외에도 뼈가 분질러지는 소리, 방패가 깨지는 소리, 화살이 갑옷에 튕겨 나는 소리 등으로 사방이 어지러웠다.
민도현은 자신이 전쟁터 한가운데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바로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베니엘 도련님! 정신 차리십시오!"
베니엘이라 하면 민도현이 즐겨하던 <지하 세계의 다크 엘프 군주>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였다.
'뭐? 베니엘이라고?'
갑자기 나온 그 이름에 당황하던 때 마지막으로 시야가 회복됐다.
민도현은 바닥에 쓰러진 채 고개만 들어 앞을 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앞에는 방패를 세워 적을 막고 있는 병사들이 있었다.
민도현은 놀라서 눈이 커졌다.
'다크 엘프잖아!'
시커멓고 뾰족뾰족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틀림없이 게임에서 보던 다크 엘프였다.
그때 앞쪽에서 덩치 큰 야만 오크 하나가 돌격해 와 병사들의 방패 벽에 부딪쳤다.
쿠와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다크 엘프들이 무너질 듯 출렁였다.
"크으윽!"
"버텨! 버텨라!"
바닥에서 분진이 자욱하게 일어나 쓰러져 있던 민도현의 얼굴을 뒤덮었다.
"케엑! 켁!"
입안이 온통 쓴 모래 맛으로 가득했다. 또한 눈이 따가워서 제대로 앞으로 보기도 힘들었다.
민도현은 지금 펼쳐지는 모든 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란 생각이 들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이 생생한 감각은 현실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이 미개한 야만족 새끼들이!"
민도현, 그러니까 쓰러진 베니엘의 입에서 거친 일갈이 터져 나왔다.
특이한 건 민도현은 현재 자신의 몸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건 뭐랄까? 베니엘이란 존재에 빙의만 한 것 같은 상황.
그의 시야 등 여러 감각을 공유하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마치 눈앞에 1인칭 액션 게임의 컷씬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베니엘은 그 순간 벌떡 일어났다.
"빌어먹을 새끼가!"
고성을 지른 그는 검을 들더니, 부하들의 방패 틈 사이로 찔러넣었다.
푸욱!
그 일격에 앞에서 날뛰던 덩치 큰 오크가 목이 꿰뚫렸다.
피슈유유유!
놈은 목의 동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막으려 애를 쓰다가 앞으로 엎어졌다.
"베니엘 님!"
"괜찮으십니까!"
방패를 든 부하들은 어떻게든 베니엘을 보호하려 애를 썼다. 실제로 그는 무리한 전투를 하다 머리에 둔기를 얻어맞고 잠시 기절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베니엘은 적반하장이었다.
"이 쓰레기 같은 것들! 자기 일도 제대로 못 해서 날 바닥에 뒹굴게 해!"
베니엘은 여태 자신을 지켜준 부하들의 뺨을 휘갈겼다.
짜악!
빙의된 채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민도현조차 어안이 벙벙할 폭거였다.
'맞아. 원래 이런 새끼긴 했지.'
베니엘은 나이트쉐이드 남작가의 아들로 포악한 성격의 귀족이었다.
주변에서 평하길 검에는 귀신 같은 재능을 타고났지만 나머지 모든 게 단점이란 소리를 듣는 자였다.
성격이 불같이 급하며 차기 군주로서의 기량도 없다.
자신보다 약한 자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등 그 성정이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또한 은혜는 금방 잊고, 악의는 끝까지 기억하는 속 좁은 놈이기도 하다.
베니엘은 부하들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외쳤다.
"모두 돌격한다! 오크 족장의 모가지를 따는 건 이 몸이 될 테니!"
그 선언에 부하들은 놀라서 말려왔다.
"안 됩니다! 남작님께서 족장과의 교전을 금지하셨습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오크 족장은 남작님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강자입니다!"
충성스러운 의견이었으나 그건 도리어 베니엘의 성미만 자극했다. 가뜩이나 열등감 덩어리인 베니엘에게 있어 자신을 무시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뭐? 이 버러지 새끼들아! 네놈들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가문의 부속품 주제에 주인인 내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냐!"
도를 넘는 폭언이었다.
설령 가문의 주인인 남작이라고 해도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진 않는다.
그래서인지 부하들의 얼굴에 적대감과 분노가 어렸다.
하지만 베니엘은 그걸 보고도 비릿하게 조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네놈들이 눈깔을 그렇게 뜨면 어쩔 건데? 너희 모두 날 지키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나? 따라오라고!"
베니엘은 앞쪽의 방패를 밀치더니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병사들은 당황해서 뒤따랐다.
"젠장!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지켜야 한다! 설령 저런 놈이라고 해도!"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민도현은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초반 이벤트구나.'
게임 초반에 베니엘의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이트쉐이드 남작령으로 야만 오크 부족이 쳐들어온다.
이에 영지의 병력이 총동원되고, 남작의 아들인 베니엘도 최전선에 나서게 된다.
지금 그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크아아압!"
베니엘은 기합성을 내지르며 오크들을 베어 넘겼다.
그에게 빙의해 지켜보니 확실히 베니엘은 칼 솜씨는 타고났다. 잔인할 정도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적의 뼈와 살을 헤집으며 전진하고 있었다.
"비켜! 이 쓰레기 같은 것들!"
베니엘의 눈에는 오로지 오크 족장만 보이고 있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 지금도 계속 죽어 나가고 있는 다크 엘프 병사들 따윈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심지어 충직한 호위대장까지 큰 부상을 입고 쓰러질 정도였다.
"앞을 뚫어! 저기까지 나아간다!"
오크 족장은 베니엘을 발견하더니 비웃음을 지었다. 어디 올 테면 와보라는 태도였다.
베니엘은 격분했고 더욱 치열하게 전진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민도현은 경악했다.
'안 돼! 이건 죽는 루트야! 이 멍청아!'
게임의 스토리나 이벤트라면 줄줄 꿰고 있는 게 민도현이다. 그렇기에 초반 이벤트에서 베니엘로 오크 족장에게 덤벼들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걸 잘 알았다.
이건 게임 내 시스템을 플레이어에게 알려주기 위한 장치기도 했다.
게임을 할 때 베니엘로 오크 족장에게 다가가면 놈의 머리 위에 검은 해골이 뜬다.
현격한 레벨 차이로 대적 불가능한 적이란 표시다. 무시하고 덤벼들면 확정적으로 죽는다. 그 뒤 <자신의 레벨에 맞는 적을 상대하세요.>란 시스템 메시지가 뜬다.
일종의 튜토리얼 같은 장치였다.
저 오크 족장과 싸우려면 누구든 강자로 인정할 만한 '마스터'의 경지에는 올라야 한다.
하지만 베니엘은 검술 실력은 아직 거기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민도현은 어떻게든 베니엘을 말리려 했다.
'멈춰! 넌 못 이긴다고!'
하지만 빙의만 한 그의 목소리는 베니엘에게 들리지도 않았다. 민도현은 그야말로 숨통이 조여왔다.
빙의 상태에서 베니엘이 살해당하면 자신도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같이 죽는 건가?'
민도현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해골은 없다.'
역시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라 그런지 오크 족장의 머리 위에는 검은 해골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에 민도현은 작은 희망을 품어봤다.
'어쩌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게임에서야 플레이어에게 레벨에 안 맞는 적과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기 위해 무조건 죽는다지만, 여긴 다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 같은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족장! 네놈의 목을 가져가겠다!"
마침내 베니엘이 수많은 피와 희생의 대가로 오크 족장에게 가 닿았다.
전신에 화상이 가득한 오크 족장은 크게 웃으며 자신의 전투 망치를 휘둘러댔다.
"애송이! 어디 한번 해 보거라!"
베니엘은 망설임 없이 덤벼들었다.
이에 오크 족장이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방어만 하며 계속 물러나고 있었다.
카앙! 캉! 캉!
베니엘의 검이 오크 족장의 갑옷을 때릴 때마다 불꽃이 요란하다. 뱀처럼 교활한 그의 검은 이따금씩 갑옷의 틈새를 파고들었고 그때마다 피가 잔뜩 튀었다.
이 모습에 지켜보던 자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도련님! 우와아아―!"
"이기는 건가!"
민도현도 흥분했다. 어쩌면 기적적인 승리가 일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민도현은 간담이 절로 서늘해졌다.
수세에 몰려 베니엘의 검을 막던 오크 족장의 눈빛이 놀랍도록 차분했기 때문이다. 저건 절대로 궁지에 몰린 자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이건 못 이긴다! 정신 차려! 이 빡대가리야!'
민도현은 본능적으로 다시 외쳤지만 베니엘에겐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공격에 고양된 그는 신들린 듯 칼을 휘두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강자를 상대하긴 처음이었기에 그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공세는 거기까지였다.
결국 베니엘은 상대를 끝장내지 못한 채 숨을 헐떡거리는 상황에 빠졌다.
"다 했나? 애송아. 크흐흐!"
오크 족장은 기다렸다는 듯 웃어댔다. 그리고 베니엘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익! 이놈―! 놔라!"
베니엘은 악을 썼지만 엄청난 힘의 차이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크 족장은 비웃음을 흘렸다.
"전투에 열기에 휩싸인 젊은이는 가엾기 짝이 없지. 들고 있던 칼의 날이 다 나가는 것도 모르다니 말이야. 크르릉!"
어느새 베니엘의 명검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가 뭐라 악다구니를 쓰며 대답하려던 순간 오크 족장이 발길질을 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베니엘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때를 맞춰 오크 족장은 전투 망치로 마치 야구 배트로 스윙하는 것처럼 호쾌하게 휘둘렀다.
카아아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베니엘이 그대로 날아갔다.
그의 갑옷은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파편을 뿌렸다. 그리고 마치 대형 트럭에라도 치인 것처럼 수십 미터를 허공으로 포물선으로 그렸다.
'커어억!'
통증이 그대로 전달된 민도현은 모든 사고가 정지하는 기분이 됐다.
베니엘은 신체는 곧 땅바닥에 떨어서는 한참을 굴러갔고, 근처의 시체 더미에 걸려서야 멈췄다.
그의 눈과 귀,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즉사였다.
실제로 베니엘은 미동도 없었다.
민도현은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한 가지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베니엘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확정된 것이다.
'아니, 잠깐!'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같이 죽는 건가? 아니면, 이 육체를 내가 차지하게 되는 건가?'
만약 자신이 베니엘이 된다면 어떨지 잠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분명 이 망나니 같은 놈을 지하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로 바꿀 수 있겠지.'
이건 결코 망상이 아니었다.
지금껏 <지하 세계의 다크 엘프 군주>를 해왔던 경력이면 충분히 해내고도 남으니까.
민도현은 베니엘 같은 쓰레기 귀족조차 완벽하게 육성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걸 위해 우선....'
하지만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으니까.
'역시 같이 죽는 건가?'
하지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 속으로 침전하는 사고 속에서 다크 엘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맙소사! 아직 숨이 붙어 계신다! 살아 있다고!"
"뭐라고? 서둘러 후방으로 이송해! 어서!"
병사들이 쓰러져 있는 베니엘을 벌떼처럼 둘러쌌다.
***
'검은 별'이라 불리는 나르다리온 나이트쉐이드.
베니엘의 친부이자, 남작령의 주인인 사내다.
스걱―!
막 그의 일검에 기세등등하던 오크 족장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쿠우웅!
남작은 무심하게 그 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확실히 오크 족장은 강자였다.
하지만 혈혈단신으로 칼솜씨에 의지에 자신의 가문을 세운 검은 별 나르다리온에겐 당할 수 없었다.
그는 지하의 전설적인 검객 가운데 하나였으니까.
족장의 죽음은 전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날뛰던 야만 오크들이 기세가 완전히 꺾여서 지리멸렬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작은 자기 할 일을 끝냈다는 듯 여유롭게 애검을 천으로 닦았다.
그런 그의 뒤에 한 인물이 다가왔다.
가문의 후계자이자 베니엘의 의붓누나인 아리아나였다.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하며, 보석처럼 아름다운 그녀는 베니엘과 다르게 완벽한 군주감으로 평가받는 인재였다.
영지민에게 드높은 존경도 받고 있다.
그렇기에 베니엘은 늘 누나인 아리아나를 향해 감출 수 없는 열등감에 빠져 있었다.
오크 족장을 향한 무모한 돌격도 그런 감정에 기반하고 있었다.
"남작님."
"말하라."
"숨이 아직 붙어 있습니다."
앞뒤 자르고 한 말에 남작은 다소 놀랐다는 듯 검을 닦던 손을 멈췄다.
"음? 분명히 죽음에 이를 일격이었는데?"
"…지금 후방으로 이송됐습니다."
"허허, 운 하나는 타고난 놈이군."
남작은 아들의 생사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심히 답했다. 이에 아리아나가 물었다.
"벌하실 겁니까?"
말에 감정은 묻어나지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묻는 기색은 느껴졌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군령을 어겼으니 징계해야 맞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용맹만큼은 대단했습니다."
아리아나는 드물게 자기 동생을 칭찬했다.
"확실히 악귀 같긴 했지."
하지만 남작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명을 어기고 멋대로 날뛰는 개차반 같은 성격은 어쩔 수 없더군. 역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겠다."
남작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어떻게 할지 정했다. 놈이 깨어나면 데리고 오도록."
2화
가문 밖으로 (1)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민도현은 자신의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는 걸 느꼈다. 마치 몽롱한 꿈에서 깨어나는 것만 같다.
'으....'
깊은 늪에 빠져 있던 의식이 정말 힘겹게, 힘겹게 현실 세계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조금씩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자 민도현은 바로 의문을 품었다.
'끝이 아니었단 말인가?'
분명 베니엘의 죽음과 같이 빙의했던 자신도 끝장날 거라 여겼는데….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민도현은 자신이 베니엘의 육체를 온전히 차지한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가 베니엘이 된 것이다.
***
민도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깨어났다. 그리고 비명을 터뜨렸다.
"끄으으윽! 크아악!"
전신이 바스러지는 듯한 격통이 덮쳐왔기 때문이다.
한동안 누워서 꼼짝도 못 하고 숨을 헐떡이는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등 뒤가 땀으로 흠뻑 젖어 들어갔다.
'맞다. 심한 부상을 당했지….'
전투 후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가슴팍을 보니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얼마 뒤 통증이 다소 진정되자 민도현은 어렵사리 상체를 일으켜서는 주변을 둘러봤다.
방은 누가 봐도 훌륭했는데 벽면은 무광 흑요석 타일이 붙어 있었다. 귀족의 방에만 쓰는 비싼 재료였다.
침대는 시커먼 돌을 깎아 만든 물건으로 위에는 고급스러운 벨벳이 깔려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이 모든 게 익숙했다. 게임에서 보던 그대로다.
민도현은 근처에서 거울을 발견하고는 들여다봤다.
젊은 다크 엘프가 그곳에 있었다.
인간으로 치면 16세 정도의,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고 있는 나이대였다.
연갈색 피부에 은발,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이다. 하지만 인상은 다소 교활해 보였다.
'역시 베니엘 맞네.'
정말로 이제 자신은 베니엘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게 흔히 말하는 게임 빙의인 건가?'
곧장 생각나는 게 있어 외쳐보았다.
"상태창."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비슷한 시도를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역시 상태창이나 시스템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 현실 세계인 모양이다.
'젠장….'
상태창이 없다는 사실에 민도현은 벌써 후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대책이 없는 건 아니다.
<지하 세계의 다크 엘프 군주>에 푹 빠졌던 만큼, 게임 속의 스토리나 비밀을 꿰고 있으니까.
'그걸 활용하면 금방 유리한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 당황스럽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문제는 다크 엘프의 삶이란 게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
이놈들은 지하 세계에 적응한 엘프종 가운데 하나로, 하나 같이 성격이 뒤틀리고 가학적인 놈들이기 때문이다.
땅 밑의 어둠 속으로 몰려다니다 만만한 놈들만 발견하면 칼을 뽑아서 혀로 핥아대는데 민도현이 알던 판타지의 예쁜 엘프와는 백만 광년쯤 차이가 있었다.
심보가 배배 꼬이지 않은 놈들이 없어서 가족끼리도 권력을 위해 뒤통수를 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즉, 다크 엘프로 태어나면 지하 세계의 위험천만한 환경뿐 아니라 집안에서 누가 자기 배를 찌를지 항시 경계해야 하는 삶이 펼쳐진다는 소리였다.
이런 놈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 이상의 정신력이 필요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한데 뭔가 충분히 숙고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한 여성 다크 엘프가 안으로 들어왔다.
민도현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여성은 베니엘 쪽으로 걸어오며 차가운 말투로 내뱉었다.
"지겹군. 네 그런 눈동자."
"...."
"차라리 그때 죽지 그랬나? 만약 그랬으면 우리 둘 다 편했을 것을."
만나자마자 폭언을 퍼붓는 이는 바로 베니엘의 의붓누나이자,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후계자인 아리아나였다.
베니엘은 아리아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좋지 않다는 걸 넘어서 최악이다.
베니엘의 입장에선 친자식도 아닌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고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기에 그랬다.
그야말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 사례의 전형.
심지어 가문이나 영지에서도 둘의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아리아나는 훌륭한 군주가 될 거라고 칭송받았으나, 반면 베니엘은 포악하고 기량이 부족하단 평이었다.
이러니 베니엘은 아리아나를 끝없이 증오했다. 동시에 좀처럼 따라갈 수 없는 그녀의 능력에 심한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하여 아리아나를 보는 베니엘의 눈동자는 죽일 듯 쏘아보는 게 기본값이었다.
사실 베니엘이 된 민도현은 게임 속에서 보던 아리아나를 실견하게 되어 크게 감탄하고 있던 중이었지만 말이다.
'와, 분위기가 장난 아니네!'
아리아나는 광대한 지하 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존재다. 그렇기에 그녀가 뿜어내는 오라는 어찌 설명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눈을 떼지 못했던 건데, 하필 이 베니엘 놈의 눈깔은 평소대로 아리아나를 죽일 듯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
민도현의 감정과 다르게 육체의 오랜 버릇이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에 아리아나가 넌더리를 냈던 것이다.
민도현은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했는데 다행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크으윽!"
진정되던 통증이 갑자기 도진 것이다. 직접 망치를 얻어맞았던 흉부가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았다.
그는 가슴팍을 부여잡은 채 제대로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에서 쌔액쌔액 거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났다.
이에 아리아나는 무심한 눈빛으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노란 약체가 담겨 있는 수정병이었다.
"약 기운이 떨어졌나 보군. 마셔라."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민도현은 허겁지겁 병을 열고 약물을 마셨다. 그러자 잠시 뒤 통증이 잦아들었다.
'강력한 진통제의 일종인가?'
식은땀을 잔뜩 흘린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아리아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런 꼴을 내려다봤다.
민도현은 일단 감사를 표했다.
"고맙군. 살았다."
그러자 아리아나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뭐라?"
설마 개망나니 같은 의붓동생이 감사를 표할 줄은 몰랐기에 늘 침착한 아리아나도 허를 찔리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독설을 내뱉었다.
"평소답지 않을 걸 보니 다 고쳐지지 않은 건가? 아니면, 오크 놈의 망치에 내가 모르는 효과가 있는 모양이야. 착해지는 효과 말이야."
분명 착해지긴 하겠지. 죽어서 착해지는 게 문제였지만. 따지고 보면 이미 떠난 진짜 베니엘도 그런 식으로 선량해지긴 했다.
아무튼, 민도현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좀 더 베니엘답게 행동할 필요가 있겠군.'
도움을 받으면 고맙다고 하는 게 민도현에겐 당연했다.
하지만 진짜 베니엘이었다면 의붓누나에게 결코 감사를 표하지 않을 터. 오히려 왜 빨리 안 내놨냐고 욕을 지껄였겠지.
물론 그런 것마저 따라해서 안 그래도 최악인 의붓누나와의 관계를 더 악화시킬 필요는 없다.
다만 자연스러운 행동은 필요해 보였다.
아무래도 빠른 적응을 위해 민도현이란 정체성을 뒤로 미뤄둘 필요가 있었다.
민도현은 앞으로 철저히 베니엘답게 사고하기로 다짐했다.
"조잘조잘 아까부터 시끄럽군."
민도현은 적당한 수준에서 상대를 자극하지 않고, 평소 베니엘이 할 법한 말을 내뱉었다. 그 뒤에 눈치를 봤는데 다행히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보일 듯 말 듯 올라갔던 아리아나의 눈썹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착각하지 말도록. 네놈 따위에게 감사를 받으려 약을 준 게 아니니까."
"그럼…?"
"남작님께서 찾으신다. 네가 깨어나면 곧장 데려오라 하셨다. 약을 줬으니 움직일 수 있겠지?"
남작이란 말에 베니엘은 몸은 본능적인 거부 반응을 보였다.
움찔!
어느 정도냐면 아버지인 남작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뭐랄까, 총기보관함 키를 잃어버렸는데 중대장이 지금 급하게 찾는다는 소리를 들을 때랑 비슷했다.
즉, 결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소리다.
천둥벌거숭이인 베니엘에게도 아버지인 나르다리온 남작은 공포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르다리온 남작은 냉혈하고 매사 계산적인 인물로, 자신의 친자인 베니엘도 자기 눈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계자에서 내쳐버린 버린 자다.
동시에 모계 사회가 당연한 다크 엘프의 세계에서 스스로 떨쳐 일어나 남성 가주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베니엘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했다.
민도현은 가슴 한켠이 절로 써늘해지는 기분에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싶었다.
"몸 상태가 아직 좀…."
하지만 아리아나는 가차 없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품에서 피가 묻은 갈고리를 꺼내 든 것이다. 그건 동화책에서 후크 선장이 쓰던 것보다 열 배는 흉악해 보였다.
"딱 한 번만 경고하마. 가주의 발언은 절대적이고, 넌 거절할 수 없다. 설령 피똥을 싸더라도 지금 같이 가야 한다."
"...."
"안 그러면 이 갈고리에 네 주둥이를 꿰어서 끌고 갈 것이다. 어쩌겠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뺨이 꿰뚫린 채 낚시꾼에 잡힌 붕어처럼 끌려가긴 싫었으니까.
"…안 가겠다는 건 아니다."
***
남작의 집무실로 가자 이미 가문의 중진들이 모여 있었다.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남성 다크 엘프들은 대체로 그들의 뒤에 시립하듯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다크 엘프 특유의 모계 사회의 전통이 묻어나는 모습이다.
비록 '나이트 쉐이드'가 신생 가문이고, 가주 역시 사내인지라 일반적인 다크 엘프 집안과 다르다고 해도 여자들의 입김이 센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가장 유력한 인사들은 남작의 여동생인 베니엘의 고모들이었다.
"왔네? 우리 돌대가리. 깔깔."
막내 고모가 가장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그녀의 이름은 리리나.
베니엘과 같은 옅은 갈색 피부를 가졌지만, 특이하게도 희귀한 금발이었다(다크 엘프는 보통 회색이나 백발, 은발이다).
지팡이를 든 것만 마법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분명 성년임에도 겉모습은 중학생 정도의 소녀로 보였다. 그렇다고 저 귀여운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실제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존재니까.
그녀는 적을 고문하고, 갖가지 생체실험을 즐기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였다.
마법사가 된 것도 원하는 실험을 해보기 위해서라고.
그 때문인지 평소에도 틈만 나면 베니엘을 들들 볶으며 이상한 약을 먹이려 하는 존재였다.
실제로 강해진다는 사탕발림에 속아 약을 먹은 베니엘은 몇 차례 죽을 위기를 넘겨야 했다. 당연히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 수밖에.
이어서 둘째 고모가 눈웃음과 함께 인사를 해왔다.
"어머, 왔니? 사랑하는 내 조카."
둘째 고모의 이름은 아니엘.
겉모습만 보면 마치 자애의 상징과도 같아 보였다.
다크 엘프 주제에 무슨 성녀를 떠오르게 하는 부드러운 인상과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다크 엘프답지 않은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알비노 다크 엘프라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머리칼을 가졌다. 그래서 그 모습이 가히 고귀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니엘은 언제나 베니엘에게 친절했다.
"힘내."
작게 입 모양으로 응원까지 해줬다.
하지만 베니엘의 몸은 민도현의 통제를 벗어나 다시 한번 멋대로 반응했다. 전신에 닭살이 돋은 것이다.
저렇게 다정해 보여도 사실 아니엘이 지하 세계에서 알아주는 암살자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자른 머리를 수집한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머리 수집가 아니엘'이라 불린다.
아니엘은 막내 고모 못지않은 정신병자였다.
그 외에도 큰고모를 비롯해 여기 모인 중진들의 면면은 하나 같이 화려했다.
과연 제국에서도 그 기행으로 이름 높은 나이트쉐이드 가문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런 개성조차 눈길 하나로 묻어버리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인물이 상석에 앉아 있었으니….
바로 검은 별 나르다리온 남작이었다.
그는 아무리 미치광이 집단이라고 해도 단단히 결속할 수 있는 위엄을 갖고 있었다.
첫 대면에 민도현은 입이 멍하니 벌어질 정도였다.
남작은 왕처럼 거만하게 앉아 자신의 아들에게 물었다.
"구제 불능인 네놈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사실 남작은 아들을 향한 처분을 결정한 상태. 하지만 저 매사 변명만 앞서는 개차반이 뭐라 대꾸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이에 민도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런 상황에서 어버버 거리면 고인물이란 소리가 아깝다.'
이미 남작의 성격은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예상하지 못하는 대답을 내놓고, 이번 일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을 터.
'좋아. 선수를 쳐야겠군.'
이런 위기도 그에겐 활용할 수 있는 기회에 불과했다.
3화
가문 밖으로 (2)
민도현은 자신만만해 하긴 했지만 사실 지금 상황은 게임에서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게, 오크 족장에게 돌격하면 바로 게임 오버가 되기 때문.
당연히 그 뒤로 뭐가 없었다.
여기서 일반적인 게이머라면 자신의 지식에 없는 상황에 당황하게 될 터.
솔직히 위기라면 위기다.
하지만 민도현은 이런 위기 속에서도 유리한 부분을 찾아낼 줄 아는 자였다.
그렇기에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건 게임이란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맘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거잖아.'
<지하 세계의 다크 엘프 군주>는 꽤나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긴 해도, 어쩔 수 없이 선형적인 부분이 존재했다.
가령 A 이벤트를 클리어하지 않으면, 중요한 B 이벤트를 진행할 수 없는 식이다.
순서대로 하라 그거다.
멀쩡한 길인데 특정 이벤트를 완료하기 전에는 갈 수 없는 곳도 곳곳에 있었다. 열쇠가 없다거나, 경비병이 비켜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현실이라면 그런 '게임적 허용'에 따른 불합리함은 겪지 않아도 된다.
'자잘한 건 건너뛰고 중요한 쪽으로 바로 갈 수 있어.'
선형적인 궤도를 벗어나서 큰 소득 위주로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민도현은 그게 아주 맘에 들었다.
벌써부터 빠른 성장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였으니까. 기민한 게이머인 그는 이미 어떤 식으로 강해질지 순식간에 정한 상태였다.
'기왕이면 최강자가 되는 게 좋지.'
비록 그 길이 위험하긴 해도, 성공만 한다면 광대한 지하 세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분명 지하를 다스리는 마족 황제보다도 강해질 수 있다.'
솔직히 자신이 왜 이 세계에 왔는지는 모른다. 그렇기에 일단 생존하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위험천만한 지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가장 필요한 건 힘이었다.
***
남작 나르다리온은 자신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아들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을 멍하니 벌린 게 평소의 아들다웠다.
하지만 좀 이상했다.
'묘하게 침착하군?'
아들은 자신을 두려워했다. 하물며 군령을 어겨 벌을 받는 자리가 아닌가?
지금쯤 파들파들 떨어야 맞는데 좀 놀란 표정을 제외하곤 큰 동요가 없었다.
아들은 제 딴에는 자존심 때문인지 감정을 감추려 했지만, 긴 귀가 작게 떨려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한데 지금은 달랐다.
떨긴커녕 은근슬쩍 주변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뭐지? 저런 눈빛을 어디서 봤는데?'
고민하던 남작은 흔히 얼마 전에 처리한 자칭 정보 수집상이자, 타칭 첩자인 놈들의 눈이 떠올렸다.
맞다. 저건 주변의 정보를 수집하려 기민하게 눈알을 굴리는 게 틀림없다.
'호오?'
본래 자기 자신 외에는 관심도 없고 안하무인인 아들놈이다.
주변의 상황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데 왜 저리는 건지 호기심이 치밀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저 망종이 무슨 변명을 할지 좀 기대됐다.
'뭐, 처분은 이미 정해놨지만….'
남작은 아들을 더는 후계자의 재목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망나니기 때문만은 아니다.
칼 귀신이란 소문과 다르게 베니엘의 검재는 반쪽짜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가문의 누구도 몰랐지만, 검으로 일가를 이룬 남작만은 그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저놈의 마나 하트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검객을 이루는 것에는 두 개의 요소가 있다.
하나는 검재(劍才).
다른 하나는 마나 하트다.
베니엘은 전자에는 가공할 재능을 타고났다. 검을 다루는 실력만큼은 남작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베니엘의 심장에 자리한 마나 하트는 한계가 명확했다. 남작은 그걸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놈은 절대 마스터가 될 수 없어. 이미 성장의 끝자락이야.'
다른 재능이 받쳐줬다면 모르겠지만 아들놈은 검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보이는 것과 다르게 반푼이다?
더 키울 이유가 없었다.
그 때문에 후계자 자리에서 내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남작이 베니엘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다. 그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었고, 아들을 거기에 써먹을 작정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친자식이기도 하고....'
이후에는 정리해도 그만이리라.
아무튼, 그때까진 저런 성질머리라도 데리고 있어야 했다.
문제는 아들놈은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강해서 남작의 계획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그래서 일단 영지 구석의 한직으로 보내 자기 주제를 알게 해줄 생각이었다.
남작은 그 뒤로도 지속해서 아들을 압박해, 마침내 마음이 꺾여 굴복하게 만들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귀찮긴 해도 어쩔 수 없다.'
사실 모종의 계획이 아니더라도 저 망나니를 남작 맘대로 내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가문 내에 아직 저 멍청한 아들놈을 지지해주는 이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니엘 녀석이 이상하게 놈을 싸고돈단 말이야.'
아니엘은 남작의 두 번째 여동생으로, 머리 수집가라 불리며 그를 위해 여러 인사를 처리해준 유능한 인재다.
지하 세계에선 암살도 중요한 정치적 수단 가운데 하나였기에 그녀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군령을 어긴 상황이니 한직으로 보내는 건 생각보다 관대한 처사다. 그러니 아니엘도 불만을 제기하긴 어렵겠지.'
하지만 한 번 미끄러져 내려가면 두 번은 더 쉬운 법이다.
그는 아들을 집요하게 괴롭힐 생각에 들떴다.
오늘 놈이 무슨 변명을 지껄이든지 정해진 대로 될 거라고 남작은 확신했다.
망나니 아들이 입을 열기 전까진 말이다.
***
"광산으로 가겠습니다."
아들의 대답에 남작은 손에 턱을 괴며 물었다.
"노예 감독관을 하겠다고?"
웬일인지 아들이 원하는 대답을 내놨다. 저놈도 드디어 눈치란 게 생긴 걸까?
'적당한 한직이니 나쁘지 않군. 자숙하란 핑계로 몇 년 거기에 박아두면 되겠....'
한데 이어진 아들의 대답에 남작의 상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감독관이 아니라 노동교화형을 받겠습니다."
"뭐라…?"
그 말에 남작은 손에서 턱을 떼고 허리를 세웠다.
노동교화형이라 하면 간단하다. 그냥 노예들과 똑같이 광산에서 일하겠다는 것. 그 형벌은 보통 가문에 속한 다크 엘프가 중죄를 범했을 때 내려진다.
자긍심 높은 다크 엘프에게 노예들과 함께 구르라는 건 상당한 모욕이었으니까.
위험하고, 힘든 건 덤이다.
"네놈 제정신이냐?"
남작은 어이가 없었다. 아들이 조금 똑똑해진 거 같았는데 그게 아니라 아예 정신줄을 놓은 모양.
하지만 베니엘의 태도는 확고했다.
"군령을 어겼으니 본래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일입니다. 노동교화로 대신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흐음...."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작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포악할 뿐 아니라 사치스럽기까지 한 아들이 노예 광산에 자청해서 들어가겠다고?
민도현은 남작이 미심쩍어할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핑계도 준비했다.
"대신, 가주님. 제가 광산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다면 한 가지 요청을 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무리한 부탁은 아닐 겁니다."
기왕 가서 개고생하는 거 민도현은 자신을 무시하는 남작에게서 이익을 뜯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건 태도는 남작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이놈 봐라? 매사 벌벌 떨던 놈이 거래를 하려 한다고?'
뭣보다 저 망종 놈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고난을 자처했다는 사실이 남작에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네놈이 감당할 수는 있고? 절대로 특별 취급해 줄 수 없다. 다른 이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가주님."
남작은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노예 광산은 온갖 위험으로 가득하다. 낙반 사고가 빈번하며 갱도는 하루가 멀다 하고 무너진다. 게다가 환경도 열악해서 노예는 매일 죽어 나갔다.
애초에 다크 엘프는 노예를 소모품 취급했다. 부족하면 또 잡으러 가면 그만이다.
귀하게 자란 놈이 그런 곳을 겪어 본다면 생각이 많이 바뀔 터.
비굴해져서 아비 앞에서 굽실거린다면 이후 계획에 써먹기 좋을 것 같았다.
사실 민도현이 굳이 노예 광산으로 가겠다고 한 건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남작과 친족들의 시선을 피해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노예 광산에는 그가 원하는 게 있었다.
본래 게임 속에선 게임 중후반에 가야 가능한 것이지만 여기선 그딴 건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바로 간다.'
민도현이 원하는 건 폐광 가장 깊은 곳에 있다. 그곳은 목숨을 내놓는 노예나 들어갈 만한 곳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고생스럽게 노동 교화형 말고, 광산 감독관으로 갈까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영주의 아들이라고 감독관으로 가도 현장에서 노예들에게 채찍 휘두르는 일을 하진 않는다.
그냥 사무실 한구석에서 없는 사람 취급받으며 멍하니 있어야 할 게 틀림없었다. 아마 옆에는 감시를 겸한 시종도 붙을 테고.
'그런 자리면 내가 원하는 걸 찾긴 힘들지.'
민도현이 원하는 걸 위해선 목숨을 걸고 무너진 광산의 틈바구니로 기어들어 가야 했으니까.
그래서 개고생할 걸 각오하고 오욕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너 따위 놈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귀하게 자라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네놈은 노예의 처지가 무엇인지 모른다."
남작은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노예 생활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가문을 하나 세우기까지 온갖 파란만장했던 일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하게 자란 망나니 아들놈이 되지도 않는 도전을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베니엘의 태도는 확고해 보였다.
"물론입니다. 감당하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남작님이 시키는 대로 뭐든 하겠습니다."
그 대답은 남작을 만족시켰다.
"좋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남작은 베니엘이 노동교화형을 착실히 끝내면 앞서 언급한 요청을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이 모든 일은 지켜보던 가문의 구성원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저들끼리 소곤댔다.
"저 망나니가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고?"
"군령을 어기면 보통 사형이니 말도 안 되는 처벌은 아닌데 말이죠…."
"하지만 저 개망종이 그걸? 말이 안 되는데?"
그때 베니엘에게 이상하게 집착하는 둘째 고모 아니엘이 반발하고 나섰다.
"오라버니, 유일한 직계를 어찌 광산에서 노역하게 하나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남작은 간단히 무마했다.
"본인이 하겠다고 하지 않느냐? 더 말할 것 없다."
이후 아니엘은 베니엘을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평소 그녀의 말이라면 잘 듣던 조카가 이번에는 도무지 듣질 않던 것이다.
결국 아니엘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이틀 뒤.
드디어 베니엘이 노예 광산으로 떠나는 날이 왔다.
한데 그의 앞을 막아선 이가 있었으니 놀랍게도 사이가 험악한 의붓누나였다. 그녀는 바로 주변의 병사들을 물렸다.
"잠시 얘기를 하고 싶다. 자리를 비켜다오."
"알겠습니다. 아가씨."
곧 둘만이 남게 됐다. 그러자 아리아나는 다짜고짜 베니엘을 비난했다.
"어리석고 한심한 결정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가주께 그런 청원을 한 거지?"
베니엘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은 마치 찌를 듯 날카로웠다.
원래 매사 저런 눈빛이긴 하지만 민도현은 그녀의 감정 변화를 알아챘다.
'화가 났군. 그것도 많이.'
그것은 절제된 분노라 보통 주변에선 알아차리지 못하는 종류였다. 아마 본래 베니엘이라면 죽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게임을 하며 오래간 아리아나를 지켜본 민도현은 잘 알았다.
화가 난 그녀가 평소보다 더욱 차갑고 또박또박 말을 한다는 걸.
아리아나의 비난은 이어졌다.
"부디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좀 하길 바란다. 오크 족장에게 무모한 돌진을 하고 배운 게 정녕 없나? 그런 충동이 무슨 결과를 초래하는지 말이다."
성큼성큼 다가온 아리아나는 검지로 베니엘의 이마를 찌를 듯 내밀었다.
"아니면, 그 충동성이야말로 네 작은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가?"
말이 많아지는 것도 화난 아리아나의 특징이다.
여기서 본래 베니엘이었다면 격노해서 소리를 질러댔을 것이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천하고 근본도 없는 계집년이 자신을 훈계하냐며 말이다.
하지만 민도현은 저 날카로운 말들에 섞인 작은 감정을 느꼈다.
놀랍게도 아리아나는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둘은 최악의 관계다.
게다가 아리아나는 어릴 때부터 베니엘에게 무수한 상처를 받고 이제는 마음의 문을 거의 닫아 버린 상태임을 생각해 볼 때 저건 놀라운 반응이었다.
민도현은 지금껏 베니엘이 해온 행동을 떠올리자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진짜 쓰레기 같은 녀석….'
지금 베니엘과 아리아나의 관계는 너무나 꼬여서 당장은 개선할 여지조차 없다.
하지만 민도현은 잘 알았다.
아리아나는 불세출의 영웅이 될 자질을 갖고 있기에, 그녀와 적대하면 모든 게 최악으로 흘러갈 것이란 걸.
놀랍게도 베니엘이 잘하는 게 있긴 했다.
자신의 미래를 망칠 최강의 대적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아리아나를 베니엘의 인생을 송두리째 불태울 화염이 될 터.
'그건 막아야지.'
회복은 어렵다지만 악화는 안 되게 관리해야 하는 관계다.
한데 그때, 아리아나가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이 됐다. 그와 함께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안타까움이란 감정이 마치 아침 이슬처럼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민도현은 무언가를 직감했다.
'아니, 이거 설마 절연 이벤트 아닌가?'
게임을 기준으로 보면, 베리엘과 아리아나의 관계는 시작부터 위태위태하다.
이후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서 조금 봉합이 되거나 파탄 나거나로 나뉜다.
파탄 루트로 가면 아리아나는 베니엘과 완전히 선을 긋고 다크 엘프다운 남매 관계로 돌아선다.
다크 엘프답다는 건 간단하다.
말살해야 할 경쟁자 정도로만 여기게 된다는 것.
민도현은 당황했다.
'아니, 벌써?'
원래 절연 이벤트는 조금 더 뒤에 발생한다. 하지만 원래 그가 알던 스토리는 약간씩 달라지고 있는 상태.
애초에 오크 족장에게 돌격했다가 살아나는 경우가 없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절연 이벤트도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런…!'
하지만 당황도 잠시 민도현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생각해 보면 스토리가 일부분 달라지긴 했어도 아직은 그 변화가 크진 않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면 절연 이벤트에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터.
아니, 오히려 예정보다 빨리 관계를 진정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 온 뒤에 땅 굳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나도 이제 더는 너 따위...!"
이어진 아리아나의 말에 민도현은 이게 절연 이벤트라는 걸 확신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걸 칼로 끊어내려는 듯 드물게 인상을 찌푸린 아리아나를 보며 민도현… 아니, 이제는 베니엘이 된 그가 앞으로 나섰다.
"주둥이 좀 닥쳐봐. 아리아나."
4화
가문 밖으로 (3)
갑작스러운 폭언에 아리아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설마 이 순간에도 저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실망감과 분노가 아리아나의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확실히 베니엘의 거친 언사는 효과가 있긴 했다.
아리아나는 드물게 감정에 휘말려 절연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잊어버리기까지 했으니까.
"너는…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오래간 갈고 닦은 아리아나의 침착함이 흔들리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은 그녀의 무표정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곧 일부가 바스러져 내렸다. 그리고 그 너머로 아리아나의 생생한 감정이 엿보였다.
그건 원망과 분노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감정이 화산처럼 폭발하기 직전에 아리아나는 모든 걸 다시 한번 억눌렀다.
요란하게 밖으로 쏟아져 나갈 것 같던 마그마가 역류했고, 대신 그녀의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리아나는 그렇게 간신히 격정을 수습한 채로 물었다.
"너는 대체 왜 그러는 거지? 왜 그렇게까지… 날...."
많은 게 담긴 말이었다.
아마 아리아나에겐 더 묻고 싶은 말이 있었을 테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마음에 솔직할 수 없었던지가 거기까지 입에 담는 게 한계였다.
남매의 과거를 모르는 자들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터다.
하지만 민도현은 과거 아리아나가 무슨 일을 겪은지 알았기에 마음이 시큰거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가족인 척 행동할 수도 없지.'
이미 뒤틀어질 대로 뒤틀어진 사이다.
여기서 누나 미안해, 같은 소리를 했다가는 경멸과 혐오만 뒤따를 터.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말라는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리아나를 다시 누나라고 부를 수 있게 되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전에는 다른 방법으로 다가가야 했다.
다행히 민도현은 이 절연 이벤트를 대처할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발끈해서 쓰고 있던 가면이 일부 벗겨진 순간부터 아리아나는 이미 그의 통제하에 들어온 셈이었다.
그렇기에 민도현은 눈앞에서 단단히 화가 나 있는 그녀를 보고도 여유로웠다.
"화난 건 알겠는데 진정 좀 하지? 보기 영 꼴사납군. 아버지께서 보시면 실망하실걸?"
"너…!"
"솔직히 무슨 말을 하려 한 건지 알겠다. 이렇게 뻔히 보일 줄이야."
이번에는 민도현이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늘 당당하던 아리아나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다만 스스로 그걸 인식하지 못한 채 미미하게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그건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나 알아볼 미세한 변화였지만, 민도현에겐 보였다. 그는 자신이 이 얼음 같은 여자의 감정을 흔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어느새 얼굴을 가까이 한 민도현… 아니, 이제는 베니엘이 된 그가 물었다.
"사실 나란 존재는 네게 있어 절연할 가치조차 없는 것 아닌가?"
아리아나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놀랐다는 신호다.
설마 자신이 절연이란 말을 꺼낼 줄 알았던 건가. 이렇게 눈치 빠른 녀석이었나 싶었다.
동시에 자존심이 상했다. 얕잡아 보던 동생에게 마음을 훤히 읽힌 기분은 완벽한 아리아나를 분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래서 바로 끄덕였다.
"그 말대로다. 너 따위는 절연할 가치조차 없지.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보군?"
그렇게 민도현은 아주 간단하게, 아리아나의 자존심을 이용해 절연 이벤트를 막아버렸다.
절연이란 말을 꺼내면 동생에게 이미 수를 읽혔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으니까.
아리아나는 어쩐지 수치스러웠다.
상대의 말대로 절연이니 뭐니 할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아리아나는 앞으로 그냥 베니엘을 무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었다.
아리아나는 내심 그걸 눈치챘지만 어떻게 설명하기 힘든 작은 미련 한 조각이 그 사실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절연을 막아낸 민도현은 아리아나를 일단 구슬리기로 했다.
'다크 엘프답게 실리적인 부분에 호소해야겠지.'
이미 파탄 난 남매니, 가족이니 하는 얘기는 안 먹힌다. 그렇다면 아리아나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자신이 쓸모 있다는 걸 각인시켜야 했다.
정이 아닌 실리로 말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얘기가 있다. 아리아나."
"너 따위와 중요한 얘기를 할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군."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나와 손을 잡고 싶어질걸?"
"정신이 나간 건가?"
"아니, 잡아야 할 거다. 큰고모의 음모로부터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선."
큰고모 '우시드라'는 나이트쉐이드 남작가의 서열 2위로, 과거 남작이 본가에서 도망쳤을 때부터 따라 나왔던 개국공신 같은 존재였다.
베니엘의 친모가 사망한 뒤에는 남작가의 안주인 노릇까지 대행하고 있어 그 권위는 아주 막강했다.
독선적인 나르다리온 남작도 여동생 우시드라의 말이라면 일단 귀를 기울일 정도였다.
"큰고모께서? 대체 왜? 그럴 이유가 없다."
물론 가족 간에도 칼을 겨누는 게 이 종족에겐 낯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큰고모는 가문에 오래간 충성한 인물이었기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베니엘과 자신을 노리는 건 남작의 뜻에 반하는 일이니까.
"내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애초에 이번 야만 오크와의 전쟁 역시 큰고모의 간계로 발생한 일이니까."
"뭐라고?"
"너는 모르겠지만 괜히 야만 오크가 영지의 동쪽 경계인 용암 강을 넘어온 게 아니라고."
실제로 큰고모는 야만 오크의 여러 부족장들과 비밀리에 연통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먹을 게 부족하던 야만 오크족은 남작령에 위치한 풍요로운 버섯나무 농장을 탐내왔다.
이에 큰고모 우시드라가 수작을 부려 그들이 결국 용암 강을 건너게 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큰고모께선 이미 가문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갖고 계신다. 그런 무리한 짓을 할 이유는...."
"만약 지금에 만족 못 하고 다 갖고 싶다면?"
민도현은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강조했다.
"언제나 다 갖고 싶다는 감정이 문제를 일으키지.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우리 종족 특유의 재앙 같은 감정 말이야."
그는 완전히 몰입해서 정말 다크 엘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있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네 이야기는 믿을 수 없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야만 오크와의 전쟁은 시작에 불과해. 큰고모는 이런저런 일을 한 번에 준비 중이지."
그중의 하나가 바로 버섯나무 농장을 관리하는 동굴 고블린들을 움직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야만 오크 부족들이 호시탐탐 영지를 노리고 있을 때, 안에서 고블린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겠어?"
"흐음...."
"큰고모의 뜻은 확고해. 오라비인 남작을 밀어내고 자신이 모든 걸 갖고자 하지. 그 과정에서 자식인 우리 둘 다 숙청될 건 뻔해. 이제 우리끼리 아웅다웅하지 말고 손을 잡아야 할 이유를 알겠나?"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날 설득하려면 증거를 가져와. 그게 아니라면 네 모든 말은 망상에 불과해."
민도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 정보를 던져줬다. 아리아나의 마음속에 의심암귀가 피어오르게 하기 충분한 내용이었다.
"이 정도면 스스로 조사해 볼 수 있겠지?"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하다."
"밥을 차려줬으면 됐지, 숟가락으로 떠먹여 줘야 하나? 하나둘 확인해 보면 내 말이 얼마나 맞는지 알 수 있을 거다."
"...."
이쯤되자 아리아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녀의 동생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글쎄?"
그 모습에 아리아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녀가 알던 베니엘은 망나니에 성급하고 생각이란 게 없던 존재에 불과하다.
한데 자신도 모르는 비밀을 저렇게 늘어놓다니?
만약 저 음모가 사실이라면 저걸 캐내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까 싶었다.
아리아나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녀석, 설마 망나니인 척하며 지내왔던 건가?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비약이다. 저 얘기가 사실인지 아직 모르고.'
하지만 이미 아리아나는 베니엘의 얘기가 상당히 그럴 듯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물었다.
"너… 내가 알던 베니엘이 맞는 건가?"
그 물음에 민도현은 한 가지를 결심했다.
이 세계에서 적응을 위해 이제는 민도현이란 정체성을 뒤로 밀어두고 완벽한 베니엘이 되기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베니엘이다."
***
아리아나는 떠났다.
민도현은 그녀가 큰고모의 뒤를 잘 팔 거라 여겼다.
왜냐하면 아리아나는 자신을 거둬준 남작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천애고아인 자신을 주워다가 지금껏 키워준 데다가 후계자로 삼았다.
만약 남작이 아니었다면 아리아나는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니 베니엘에겐 증오스러운 부친이라고 해도 그녀에겐 은인이었다.
'아리아나가 남작과 관계된 일을 무시할 리가 없지.'
아마 그녀는 음모를 캐내며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다. 그리고 큰고모에게 대항하기 위해 베니엘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게 뻔하다.
'내가 갖고 있는 정보에 관심을 가질 거야. 뭔가 더 알아내고 싶어하겠지.'
그러니 관계가 엉망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다크 엘프에겐 이런 격언이 있다.
<실리를 위해서라면, 잘라버리고 싶은 손이라도 잡을 수 있다.>
아리아나 역시 그런 기조에 충실한 다크 엘프였다.
동생이 아무리 미워도 승리를 위해선 외면하지 않을 터.
'다행히 시간은 많아.'
큰고모인 우시드라의 음모는 완벽하지만 느리게 작용하는 독과 같다.
게다가 다크 엘프는 시간관념이 인간과 다르다.
인간이 당장 몇 달 뒤의 음모에 골몰한다면, 수명이 긴 다크 엘프는 짧게는 수 년, 길게는 수십 년을 바라보고 음모를 짠다.
그래서 베니엘이 안심하고 광산으로 떠날 수 있었다.
당장은 별일 없을 테니까.
그 사이 베니엘은 필요한 걸 할 작정이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겠다.'
검객의 경지는 일반적으로 총 여섯 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 스콜라.
2단계 스콜라 어댑트.
3단계 프로보스트.
4단계 마스터.
5단계 하이 마스터.
6단계 그랜드 마스터.
현재 베니엘은 마스터에 못 미치는 3단계 프로보스트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대단히 강하긴 했다.
프로보스트는 몸 안에 영구적인 마나 하트를 형성해서 언제든 마력을 뽑아낼 수 있는 경지였다.
그 외에도 반경 수십 미터 이내의 마력을 감지하고 경우에 따라 거기에 간섭까지 가능했다.
어딜 가도 실력자로 대접받을 수 있는 수준이지만, 지난 오크 족장과의 전투에서 알 수 있듯 충분하진 않았다.
'적어도 마스터는 돼야 안전하지.'
현재 베니엘이 마스터로 나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내 심장은 약하다. 선천적인 문제야.'
이미 죽은 본래 베니엘은 모르는 문제다. 그는 자신감이 넘쳤고, 스스로 한도 끝도 없이 강해질 거라 믿곤 했으니까.
하지만 민도현, 지금의 베니엘은 게임 지식 덕에 이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마스터로 향하려면 가장 먼저 해결할 문제였다.
하지만 근심할 건 없었다.
노예 광산에 최선의 해결책이 있으니까.
***
나이트쉐이드 가문이 관리하는 노예 광산은 은광이다.
지상의 상식으론 어떻게 남작 따위가 은광을 가질 수 있냐고 하겠지만, 이곳은 지하 세계라 달랐다.
땅속이다 보니 풍부한 은 광맥에 접근하기 쉬웠고, 그만큼 은도 흔한 편이었기에 그랬다.
은광은 가문에서 나온 다크 엘프 관리관이 책임졌는데 실상 별로 하는 일은 없었다.
실제로 그 밑에 있는 여러 감독관들이 실세였고, 그중에서 제1감독관이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현제 제1감독관은 '코보코보 퀵포우'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터널 랫이었다.
터널 랫은 지하 세계에 적응한 쥐 인간 종족으로 쉽게 말하자면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쥐새끼였다.
아무튼, 퀵포우는 비천한 태생에 덩치도 작은 터널 랫에 불과했지만 특유의 교활함과 근면함, 업무 수완에 힘입어 제1감독관 자리까지 꿰찬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이런 승리가 계속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언젠가 나는 이딴 노예만이 아니라 거물들에게도 명령하는 날이 올 것이다. 찍찍!"
퀵포우는 틈날 때마다 자신에게 목표를 되뇌는 성공에 미친 쥐새끼였다.
"이 광산은 시작에 불과해. 나는 더 큰 계획이 있다고. 모두를 짓밟고 정상에 오르리라! 찌지직!"
사실 더럽고 위험한 광산 생활은 퀵포우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더욱 존귀해질 자였으니까.
그래도 하나 좋은 게 있으니 노예들에게 마구 채찍을 휘두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찰싹!
"너희는 더 이상 전사가 아니다! 노예지! 이 비천한 것들아!"
퀵포우의 채찍질에 덩치 큰 야만 오크들이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최근에 야만 오크 노예들이 대량으로 들어와서 퀵포우(Quickpaw)의 앞발은 그 이름대로 쉴 새 없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밖에서 만난다면 야만 오크들은 퀵포우 따윈 단번에 허리를 접어버릴 정도로 강한 전사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딴 건 아무 소용없었다.
야만 오크는 패배자였고 퀵포우는 집요하고 잔인한 감독관이었으니까.
"곡괭이를 그딴 속도로 밖에 못 휘두르나? 네놈 몸에 붙은 건 근육이 아니라 그냥 비곗덩이인가 보구나! 찌이이익!"
"너희는 나 없이는 한 시간도 제대로 일하지 못하는구나! 쓸모없는 것들!"
"네놈들의 무능함은 정말 놀라울 정도군! 그 빡대가리로는 돌이랑 빵도 구분하지 못할 테니 오늘 식사는 없다!"
언제나처럼 퀵포우는 열정적으로 노예들을 관리했다.
수도 없는 채찍질에 노예들의 등줄기가 피로 번들번들하게 물들었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오늘도 근면하고 보람찬 하루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한데 그때 갑자기 은광의 관리관이 그를 호출했다.
퀵포우는 불안해졌다.
'뭐지? 얼마 전에 빼돌린 은괴가 들킨 건가?'
하도 켕기는 구석이 많은 인물이라 벌써 불안해졌다. 그래도 무시할 수 없기에 서둘러 달려가서 관리관에게 굽실거렸다.
"왔나?"
관리관은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된 늙은 다크 엘프였다. 늘 졸음이 가시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끔 퀵포우에게 명령을 내릴 때를 제외하곤 늘 병든 닭처럼 골골댔다.
일단 퀵포우는 언제나처럼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광산을 경영하시느라 불철주야 고생이 많으십니다(네놈이 매일 같이 그렇게 처잘 수록 광산은 더 잘 굴러갈 거다). 찍찍!"
쥐의 뇌는 참으로 신비해서 한 번에 두 개의 감정과 문장을 연산했다. 하지만 그는 신중하고 교양있는 사내였기에 예의 바른 말만 입으로 내뱉었다.
관리관은 그런 아첨에 익숙한 듯 관리관은 고개를 주억이더니 불쑥 내뱉었다.
"가문의 도련님께서 이곳에 오실 거다. 잘 처신하도록."
"네? 도련님이라 하면… 그…?"
퀵포우는 '그 개차반'이라고 물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맞다. 베니엘 도련님 말이다. 노동교화형이라는군."
거기까지만 말한 감독관은 귀찮다는 듯 손짓을 했다.
꺼지란 소리였다. 노인은 어서 다시 꿈나라로 가고 싶어 했다.
'아니, 대체?'
너무나 적은 정보에 퀵포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남작의 아들이 노동교화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어떤 농담의 일종인가? 영 고약한 게… 다크 엘프가 할 법한 거긴 한데….'
퀵포우는 물러나면서 영민한 머리를 최대로 굴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빠른 두뇌 회전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평범한 일상의 따뜻함이 가득한 그의 광산 라이프에 다시 없을 위기와 혼란이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한데 그 혼란은 퀵포우가 생각하는 이상이었다.
몇 시간 뒤, 퀵포우는 가문의 거물 세 명이 거의 동시에 보내온 밀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베니엘의 큰고모 우시드라.
-베니엘의 둘째 고모 아니엘.
-베니엘의 의붓누나 아리아나.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핵심인 그들 셋이 지금껏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던 노예 감독관에게 저마다의 명령을 전달해 왔다.
심지어 그들은 서로 다른 요구를 하고 있었다. 퀵포우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씨발… 잘못하면 며칠 뒤에는 나도 오크 새끼들이랑 나란히 광산에 들어가겠는 걸? 케헤헤!"
나락이 눈앞에서 보이고 있었다.
어떤 터널 랫 시인이 말했다. 인생이란 흙먼지와 독가스로 가득 찬 터널과도 같다고.
퀵포우는 지금만큼은 그 시구에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위대하신 나이트쉐이드 남작의 아들인 베니엘이 광산에 도착했다.
5화
은광의 망나니 (1)
베니엘은 가문의 은광에 도착했다.
은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냄새였는데, 일단 지독한 시체 썩은 내가 그의 코를 찔렀다.
악취의 원인은 금방 보였다. 광산 입구 근처에 움푹 파인 구덩이가 있었고, 그 안에는 죽은 노예들의 시체가 가득했던 것이다.
소모품으로 사용돼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노예들이 구덩이 안에 제멋대로 뒤틀린 채 쌓여 있었다.
윙. 위이잉―.
수많은 파리떼가 날개 소리를 내며 날아다녔다. 그 위로는 동굴에 붙어 있는 발광 버섯들이 귀신처럼 음산한 빛을 내뿜었다.
버섯들은 시체를 양분 삼아 크고 훌륭하게 자라 있었다.
'실제로 보니 말도 못 하게 끔찍하네.'
광산의 시체 구덩이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보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베니엘은 절로 가슴팍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겉으론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로 걸어갔다. 주변이 시체에서 흘러나온 진물로 온통 진창이었음에도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시체 구덩이를 통과하자 이번에는 분진의 메케한 냄새가 그를 맞았다.
수없이 돌을 깎고 먼지가 일어난 탓에 이 일대는 미세한 분진이 항시 가득 차 있었다.
숨 쉴 때마다 목이 껄끄럽고 쓴맛이 났다.
그다음은 노예들의 지독한 체취였다. 조금도 씻지 못하고 노역을 하는 탓에 그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상상을 초월했다.
거기에 더해 용광로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연기와 은을 분해하기 위해 쏟아붓는 화학 물질의 메케한 냄새까지 더해져, 이곳은 악취로 이뤄진 지옥과도 같은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계가 따로 없군."
광산의 노예들은 넋이 나간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감독관들은 쉴 새 없이 그들을 윽박지르고 채찍질을 해댔다.
"빠르게 움직여! 이 등신들아! 남작께선 은을 원하신다! 그리고 난 속도를 원하고!"
짜아악!
저들 중에는 용암 강 너머의 야만 오크 같은 전쟁 포로도 있지만,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잡혀 온 자도 많았다.
죄가 있다면 그저 탐욕스러운 다크 엘프 노예 사냥꾼의 눈에 띄었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노예들은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은광으로 굴러들어왔다.
이 광산은 힘없고, 건드려도 문제가 없는 자라면 누구든 집어삼키는 장소였다.
베니엘은 씁쓸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던 중 감독관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오셨습니까! 찌이익!"
감독관은 키가 작고 비열하게 생긴 쥐 인간이었다. 베니엘은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퀵포우군.'
왜냐하면 상대가 그냥 지나가는 평범한 감독관 캐릭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서 나중에는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중진이 되는 나름대로 네임드 캐릭터다.
겉보기엔 추레한 쥐새끼지만, 상당히 수완이 좋은 자였다.
다만 그건 게임 속 지식 덕에 아는 거고 실제로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저는 감독관 퀵포우입니다. 도련님,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퀵포우는 베니엘과는 초면이었으나 그를 호위하는 다크 엘프 병사들만 봐도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비단 의복과 저 오만한 눈동자만 봐도 남작의 자식놈이 틀림없었다.
"반갑군. 감독관."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퀵포우는 선선히 인사를 해주는 그의 태도에 내심 놀랐다.
'소문과 좀 다르잖아?'
듣기론 베니엘은 오만방자해서 하급자의 인사 따위는 무시해 버리기 일쑤라고 했으니까.
저런 태도를 보니 퀵포우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 노동교화형을 받으러 온 건가?'
퀵포우는 베니엘이 광산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눈에 띈 노예 놈을 두들겨 패며 지낼 거라고 여겼다.
이 도련님은 주사가 심하기로 유명했으니까.
그래서 이미 필요한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퀵포우는 광산의 숙소 중 제일 괜찮은 축에 속하는 자기 방을 깨끗이 치워서 베니엘에게 내줄 요량이었다.
더불어 방에는 술을 꽉꽉 채워놨으며, 베니엘이 흥이 오르면 주먹질을 하기 적당한 노예들도 비치해뒀다.
특별히 타격감이 좋고 오래 때릴 수 있는 녀석들이었다.
한데 정말로 순순히 노동교화형을 받으려는 걸까?
'곤란하다. 만약 그랬다가는 일이 꼬이는데….'
왜냐하면 퀵포우가 어제 받은 베니엘의 큰고모 우시드라의 밀서 때문이다.
우시드라는 베니엘이 노동교화형을 받는 대신 평소처럼 지극히 망나니답게 생활하길 바라고 있었다.
주변에서 역시 그럼 그렇지, 란 평가를 받도록 말이다.
망나니가 갱생하는 건 큰고모 우시드라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물론 음모에 익숙하고 좀처럼 꼬투리를 잡히는 일이 없는 우시드라는 밀서에 노골적으로 그렇게 쓰지 않았다.
그저 큰고모로서 조카가 상할까 걱정되니 충분히 잘 보살펴주라는 내용만 적혀 있었다. 또한 가문의 적자가 노동교화형을 받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우려도 덧붙인 채로 말이다.
퀵포우는 눈치가 빠른 자였기에 그 정도 내용만으로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우시드라 어르신이면 충분히 잡을 만한 끈이지. 나도 언제까지 광산에 박혀 있을 순 없으니까!'
그래서 서둘러 베니엘이 망나니답게 지낼 환경을 조성해 둔 것이다.
한데 뭔가 정말로 노동교화형을 받으려는 것 같지 않은가?
퀵포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감독관으로서 도련님께서 광산에서 하시고자 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입니다. 제가 어찌 모셔야 할까요? 찍찍…."
퀵포우가 물어보는 바는 간단했다. 진짜 노동교화형 받으려는 거냐는 거였다.
이에 대해 베니엘은 단언했다.
"군령은 어긴 죄로 왔으니 특별한 대접을 바라지 않는다. 다른 이들과 같이 일하겠다."
퀵포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노동교화를? 이 자식 어디 가서 독버섯이라도 잘못 먹은 건가?'
하지만 퀵포우는 노련한 사내. 이를 대비한 플랜 B가 있었다. 설령 지금은 저리 말한다고 해도 저 망나니의 결심이 며칠 못 갈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없는 놈 같으니라고. 아직 안 겪어봐서 광산 일이 얼마나 고된지 모르는 거다.'
물론 귀하신 도련님이니 광산의 노예랑 똑같은 수준의 작업에 투입되진 않는다. 그래도 고생스럽긴 마찬가지. 땅밑의 좁은 갱도에서 며칠만 시달려도 금방 생각이 바뀔 게 뻔했다.
'가능한 수준에서 좀 굴려야겠군.'
퀵포우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도련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원하시는 바가 있으시면 언제든 이 퀵포우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찍찍!"
***
베니엘은 정말로 은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며칠 만에 빠르게 너덜너덜해졌다.
그 좁고 위험한 갱도 안에서 중노동을 하다 보면, 아무리 귀공자라도 금세 거지꼴을 면치 못하는 게 당연했다.
노예들의 하루는 빠르게 시작됐다.
이른 새벽이면 감독관들이 그들의 보잘것없는 움집 앞에 서서 귀가 따가울 정도로 종을 두들겨댔기 때문이다.
깡! 깡깡! 깡!
쓰러지듯 잠들어 전날 노동의 피로가 채 풀리지도 않았지만 노예들은 악을 쓰고 일어나야 했다.
"근면! 성실! 부지런함! 너희 쓰레기들이 평생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미덕을 주입해 주마! 이 채찍의 영험함으로!"
감독관들도 새벽부터 짜증 나긴 마찬가지였기에 노예들에게 화를 버럭버럭 냈다.
물론 베니엘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는 정신 나간 감독관은 없었지만, 그도 노동교화형을 받기로 한 이상 같이 일어나야 했다.
이후 인원 점검과 함께 간단한 식사가 제공된다. 그리고 감독관이 "입갱! 입갱!"이라 외치면 수백 명이 줄줄이 작업장으로 향했다.
은광으로 들어가려면 150미터가 넘는 수직 갱도를 내려가야 한다.
이미 땅 밑에 있는 광산인데, 왜 또 땅 밑으로 내려가냐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근처에 있는 은맥은 모두 고갈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은맥을 찾아 점점 아래로 향해야 했다.
삐그덕, 삐그덕.
권양기의 케이블로 연결된 거대한 나무 승강기가 위태롭게 흔들리며 지저(地底)로 향했다.
끼기긱. 끼기긱.
수십여 명의 노예와 광차까지 태운 나무 승강기는 당장이라도 케이블이 끊어져 심연 아래로 추락할 것처럼 위태로웠다.
베니엘은 처음 승강기에 올랐을 때, 게임에선 느낄 수 없었던 현실적인 공포에 가슴팍이 바짝 조여왔다.
이 승강기는 지하 드워프들이 만들었다곤 하지만, 현대인의 기억을 가진 그가 보기엔 조잡하기 짝이 없어 언제든 대참사를 일으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노예들은 이 모든 게 익숙한 듯 퀭한 눈으로 미동도 없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냥 승강기가 추락해서 다 끝나길 바라는 건지도 몰랐다.
오직 최근에 들어온 야만 오크 노예들만이 베니엘을 보며 자기들끼리 작게 쑥덕거리는 정도가 다였다.
"저놈이…?"
"그래. 크르릉."
어쩐지 베니엘을 보는 눈빛이 사납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승한 감독관의 일갈에 조용해졌다.
"여물어! 주둥이 닫으라고!"
야만 오크같이 덩치 크고 강한 놈들은 단순히 채찍만으로 길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놈들은 모두 목에 전기 고문 장치를 달고 있었다.
감독관이 들고 있는 마법봉을 휘두르면 목에서 격통을 일으키는 전류가 발생하는 장치였다.
그래서 감독관이 마법봉을 앞으로 내밀며 으르렁대자, 그 거친 야만 오크들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닫는 것이었다.
쿠우우웅!
얼마 뒤 나무 승강기가 바닥에 닿았다. 그러자 그들 앞에는 개미굴처럼 복잡한 갱도가 사방에 펼쳐졌다.
베니엘은 그 모습에 감탄과 탄식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게임과는 비교가 안 되게 복잡해!'
실제 은광의 규모는 그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동시에 게임에서 많은 부분이 플레이어의 편의를 위해 축약됐다는 걸 알게 됐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갱도는 게임에서 보던 것과 비교 불가로 복잡했고, 이래서야 그가 원하는 보물을 찾을 수나 있을지 걱정이었다.
'일단은 지형을 익히기 위해 노력해야지.'
가능한 여기저기 살펴보며 게임 속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갱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구경 다니는 것도 이상하니 일단은 일을 하면서 살펴야 했다.
당연히 은광에서의 작업은 쉽지 않았다. 암석질의 땅을 파고 들어가느라 갱도는 좁고 낮았다. 어떤 곳에선 몸을 옆으로 한 채 게처럼 걸어야 했고, 또 어떤 곳은 허리를 숙인 채 반쯤 기듯 지나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곡괭이질을 하고 파낸 암석 덩어리들을 마대 자루에 넣어 나르는 일은 온몸이 비명 지르게 하기 충분했다.
"크윽! 젠장…!"
베니엘의 의복과 피부는 갱도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암석에 여기저기 긁혔고, 떨어진 돌에 어깨를 얻어맞기도 했다.
심지어 갱도는 후덥지근하게 덥고 습했다. 금방 신발 안은 미끌미끌해져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이런 상황에의 노동 탓에 땀이 비 오듯 했으나 충분한 물을 공급받지 못해 서서히 어지럼증까지 오고 있었다.
감독관들은 그를 딱히 괴롭히지는 않았다. 또한 베니엘에겐 다른 노예처럼 할당량 같은 것도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뭔가 더 챙겨주거나 편의를 봐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베니엘은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일했다.
지금 가문을 비롯해 광산의 많은 이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련님께서 갑자기 노예 생활을 하게 됐으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아무래도 좀 더 자유롭게 행동하려면 그들이 흥미를 잃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그냥 일하다 보면 그의 행동이나 존재 모두가 광산의 일상 속에 결국 녹아들게 될 것이다.
도련님이 뭔가 특이한 짓을 하지 않나 기대하던 무리도 서서히 관심을 끄게 될 터.
'그때까지 최대한 갱도의 구조를 파악하며 준비를 해야겠군.'
***
베니엘을 제일 열정적으로 염탐하고 관찰한 이는 누가 뭐래도 퀵포우였다.
그는 줄곧 플랜 B를 발동할 시기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퀵포우의 계획은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거친 맹수를 길들이는 이치와 비슷했다.
지하에서 맹수를 길들일 때 쓰는 방법은 간단하다. 붙잡아서 좁은 토굴에 가둬두고 방치하는데, 녀석이 죽을 지경이 돼서야 꺼내서 물이나 먹이를 줘 호의를 사는 것이다.
이런 짓을 반복하면 아무리 사나운 녀석이라고 해도 결국 물과 먹이 앞에 굴복해 버리고 말았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도련님도 그 처지가 비슷했다.
벌써 일주일 넘게 노역으로 고생 중이다. 원래라면 그래도 귀한 몸이니 감독관들이 이것저것 챙겨줬겠지만, 퀵포우의 엄명으로 그들은 베니엘을 모른 척했다.
'크크크, 지금쯤이면 완전히 녹초가 돼 있겠지. 원래 주당으로 유명한 녀석이 술을 보면 눈이 돌아갈 게 분명하다.'
퀵포우는 자기 방법이 먹힐 거라 확신했다.
망나니나 맹수나 결국 짐승이란 점에선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
"끄응...."
베니엘은 그에게 할당된 움집에서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전신이 근육통이었다. 이럴 땐 정말 파스가 절실했다.
'화끈하고 시원한 파스가 이렇게 그리울 줄이야….'
꼬르륵.
주린 배도 문제였다.
'뭔가 대책이 필요해. 이대론 안 되겠는데….'
갱도가 너무 복잡해서 게임을 하던 것처럼 쉽게 그가 원하는 걸 찾을 수가 없었다. 찾게 된다고 해도 한세월이 걸릴 것 같았다.
그렇게 베니엘이 고민을 하던 그때 누군가 조용히 움집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서 보니 은광을 지키는 리자드맨 병사였다.
"도련님, 제1감독관님께서 찾으십니다."
"왜?"
"그것까진 저도 잘…. 꼭 모시고 오라는 전갈입니다요."
"뭐, 알겠어."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 보니 하루 일과에 쩌들었던 노예들은 다들 기절하듯 자고 있는 상태. 그나마 베니엘처럼 움집을 가진 이들은 운이 좋은 자들이다.
반수 이상은 그냥 땅바닥에 거적을 깔고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자, 이쪽으로."
할버드를 든 도마뱀 병사를 따라 도착한 곳은 제1감독관의 거처. 안으로 들어가자 퀵포우가 웃는 낯으로 맞아줬다.
"도련님! 어서 오십시오!"
그는 노예 광산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베니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팬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고 있는 동굴 달팽이 꼬치부터 바위 벌레 구이, 종유석 게코 도마뱀 스튜, 곰팡이 치즈까지....
심지어 베니엘이 사족을 못 쓰는 '파이어 딥브루'란 이름의 다크 엘프의 독주까지 잔뜩 있었다.
대충 상황을 예상하고 온 베니엘이지만 음식과 술을 보자마자 군침이 줄줄 흘렀다.
고생한 데다가 원래 베니엘의 육체가 술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던 탓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의 정신은 차갑게 상황을 파악했다.
'슬슬 이런 수작질을 부릴 줄 알았다.'
오히려 이건 기회였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탐사에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던 차였으니까.
'제1감독관이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군.'
물론 그런 속마음과 다르게 베니엘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으니 퀵포우는 아주 흐뭇해졌다.
'그래, 네놈이 그러면 그렇지.'
하지만 퀵포우의 필살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다크 엘프라 하면 하나 같이 호색한 정욕의 노예들. 먹고 나면 싸고 싶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 네놈은 이미 내 손아귀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다.'
그는 털이 숭숭하고 뾰족한 발톱이 붙은 앞발로 박수를 치며 밖에다 명령했다.
"여봐라, 얼마 전에 새로 잡은 포로를 데려오도록!"
그 말에 베니엘이 물었다.
"새로 잡은 포로라 하면 야만 오크 말인가?"
그 물음에 퀵포우는 음흉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닙니다. 도련님. 저희 광산에서도 특별히 관리하는 부류가 있지요. 비싼 값에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랄까요? 도련님께 꼭 한번 보여드리고 싶군요. 찍찍찍―!"
"대체 누군데 그러나?"
퀵포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지상인을 하나 붙잡았습니다."
6화
은광의 망나니 (2)
***
지상인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지상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지하 세계의 학자들이 쓰는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는 '표면 인류'라는 말이 있다.
학자들은 지상인이 지표면의 풍부한 빛과 지하에 비해 훨씬 변화 무쌍한 기후에 적응한 종이라고 설명했다.
그 표면 인류에는 엘프, 드워프, 노움 등 여러 종족이 있지만 가장 번성한 건 인간종이다.
지하에서 가장 열등종으로 분류되는 인간이 지상에선 큰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상의 모든 대륙으로 뻗어 나갔음에도 그 탐욕과 호기심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그래서인지 지상의 인간들은 수십 년 전부터 지하 세계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들의 탐사는 아직까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인명피해만 이어졌다고 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족 특유의 집요함은 포기를 몰랐다.
지하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희귀한 광물과 자원이 엄청난 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하 세계에도 자칭 모험가인 지상의 불한당들이 이따금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지하의 종족들은 대개 지상인을 싫어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보물을 탐내고 기회만 되면 몰려다니며 마을을 약탈하곤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충돌이 벌어졌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대응도 거기서 별다를 건 없었다.
지상인을 발견하면 척살한다는 기조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포로가 생기면 여지없이 은광으로 직행이었다.
***
보통 지상인들과 부딪히는 건 남작 휘하의 노예 사냥꾼이다.
한데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퀵포우가 직접 잡았다. 우연찮게 은광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지상인 몇을 발견하고는 옳다구나 하고 습격했던 것.
지하까지 내려오는 지상인들의 실력은 제법 매섭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지하의 방식에 아직 적응을 못 하고 있었다.
퀵포우의 병사들이 터지면 독성을 뿜어내는 버섯 포자탄을 던지고, 이후 광산에서 기르는 거대 거미로 거미줄을 쏘아내자 놈들은 간단히 제압됐다.
지상인은 장비가 충실하고 칼을 잘 썼지만 땅 밑의 방식에 대응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총 다섯이 붙잡혔는데 그중 셋은 그 자리에서 배고픈 거대 거미의 먹이로 쓰였다.
나머지 둘 중 하나는 전투 중의 상처로 끙끙대다 몇 시간 뒤에 사망했고, 남은 건 하나였다.
하지만 남은 하나가 외형이 특히 아름다웠기에 퀵포우는 흡족했다.
'이거 노예 상인에게 비싸게 팔 수 있겠군?'
지상인은 이색적이고 희귀한 존재다. 외모가 빼어나다면 특이한 취향을 가진 자들이 기꺼이 큰돈을 지불할 터.
퀵포우는 갑자기 얻게 된 이 공돈에 기분이 좋아졌다.
당연히 위에 보고할 생각 따윈 없었다. 남작은 야만 오크와 전쟁으로 바빴고, 은광의 관리관은 잠자는 거 외에는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래서 퀵포우는 수고한 부하들에게 대충 얼마간 찔러준 포로를 지금까지 잘 감춰두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노동도 안 시켰다. 팔아서 금을 마련할 작정인지라 포로의 빼어난 외모가 상하면 안 됐으니까.
한데 갑자기 망나니 도련님이 나타났다.
퀵포우는 확보한 포로를 금으로 바꾸는 것보단 눈앞의 망나니를 홀리는 용도로 쓰는 게 낫겠단 판단이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적재적소라는 것이다. 찍찍.'
그는 자신이 매우 훌륭한 카드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
부하들이 가둬둔 지상을 데리러 간 사이에 퀵포우는 자신의 포로가 얼마나 빼어난지 설명에 들어갔다.
"제가 지상만 아니라 지하에 사는 인간종도 많이 봤습니다만, 그 정도로 미색이 뛰어난 개체는 없었습니다. 찍찍."
저런 소리를 듣자 베니엘도 좀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서 미모가 빼어나다는 건 히로인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모르는 히로인인가?'
게임과는 달리 매우 이른 시점에 광산에 왔다. 전혀 새로운 인물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히로인은 단순히 연인 같은 게 아니야. 매우 강력한 동료지.'
물론 게임마다 다른지라, 어떤 게임에선 히로인이 그냥 고향에서 기다리는 평범한 마을 소녀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히로인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존재다.
단순히 연애하고 싶다는 문제가 아니라, 지하같이 험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히로인 캐릭터와 인연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첫 번째 동료를 여기서 만날지도 모르겠어.'
역시 광산행은 대박이었다!
모든 게 계획 이상의 성과로 이어질 것 같았다.
"오, 그래?"
베니엘이 반색하는 모습이자 퀵포우는 더욱 열정적으로 설명에 들어갔다.
"네, 사실 저희 터널 랫이 다크 엘프 나리들과는 미적 감각이 다른 걸 아실 겁니다. 그럼에도 감탄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습지요."
터널 랫들이 보기에 다크 엘프나 인간들은 아름답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털이 없고 맨질맨질한 피부를 가진 게 이상해 보였기 때문.
좀 쉽게 설명하자면, 인간이 털이 없는 고양이종인 '스핑크스 고양이'를 볼 때랑 비슷한 감각이었다.
스핑크스 고양이는 쭈글쭈글한 피부에 털이 없는데, 이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털이 보송보송한 고양이를 더 귀엽다고 생각한다.
터널 랫도 비슷한 경우다.
숱이 많고 윤기 나는 털을 가진 생물은 아름답지만 다크 엘프나 인간처럼 맨들맨들한 것들은 영 보기 싫은 것이다.
하지만 퀵포우는 그런 감각에도 불구하고 포획한 지상인이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 지상인은 완벽한 대칭과 비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적 감각마저 초월해 감탄을 터뜨리게 만들더군요. 찍찍."
"야, 그 정도야?"
"네, 도련님. 또한 탄탄하고 균형 잡힌 체격과 풍만한 흉부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였지요."
"푸, 풍만해…?"
이 정도 얘기까지 듣자 베니엘은 괜히 설레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아름답다니 이건 틀림없이 히로인이네.'
듣자니 <지하 세계의 다크 엘프 군주>에는 히든 히로인이 몇 있다고 했다. 아직 게이머들은 그걸 다 찾지 못한 상태.
'여기서 내가 그걸 발견하는 건가?'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노예나 포로의 처지에 빠진 히로인을 구해주고 동료로 삼는 건 클리셰 그 자체다.
히든 히로인이란 확신이 점점 피어올랐다. 이러니 베니엘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체면이 있는지라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하지만 퀵포우의 발달된 감각은 베니엘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챈 후다.
'후후, 모든 게 순조롭군.'
쾌락에 굶주린 망나니에게 술과 정욕을 풀 노예는 분명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일 터.
이후에 이 도련님은 자신에게 끌려올 수밖에 없다.
먼저 가문에서 내뱉은 말이 있으니 이런 일탈에 대해 남작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자신에게 부탁을 해야 한다.
또한 앞으로 계속 음식이나 술 등의 편의를 위해서도 퀵포우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감독관님 데려왔습니다."
그때 지상인이 도착했다.
그 존재는 하얀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인간이었다.
팔에는 쇠사슬을 묶여 있고, 상의는 완전히 탈의한 상태로 자신의 굴곡진 몸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은 퀵포우가 말한 것처럼 완벽한 대칭과 비율을 자랑했다.
마치 살아 있는 조각상 같다고 할까?
하지만 반짝이는 눈 안에 담긴 생명력은 그 존재가 생명체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확실히 인간은 최고의 미(美)를 갖고 있었다.
인간의 아름다움에 공감하지 못하는 터널 랫조차 찬사를 날릴 정도로.
베니엘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세상에...!"
무언가 많은 감정이 담긴 탄식이었다.
어딘가 얼이 빠진 것 같은 그 모습에 퀵포우는 킥킥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찍찍, 역시 발정난 종족 같으니라고. 지상인을 데려오자마자 몸이 달아오르나 보지? 이거 술자리가 금방 끝나겠구만.'
심지어 베니엘은 흥분했는지 얼굴이 온통 붉어지고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흥분이 극에 달한 순간 베니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퀵포우는 조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다크 엘프! 참으로 난잡하군. 절제심이라곤 없이 바로 교미에 들어가려는 건가? 자리를 비켜줘야겠군. 아니, 저 변태 종족이라면 보여주는 게 취향인가?'
하지만 베니엘은 지상인에게 가지 않고 퀵포우에게로 향했다.
눈이 벌게져 있었고 어딘지 상태가 이상했다.
퀵포우는 잠시 당황스러웠다.
"찌익? 찍?"
하지만 그다음 순간 그는 정수리가 깨지는 듯한 격통과 함께 눈앞에서 별이 반짝이는 걸 느꼈다. 그리고 분노에 가득 찬 일갈이 그의 귀청을 찢어버렸다.
"이런! 씨발! 남자잖아―!"
수컷이라고 저건!
베니엘은 도무지 분이 안 풀리는 듯 쓰러진 퀵포우를 마구 걷어차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이 새끼야!"
***
사실 퀵포우의 설명 중 틀린 건 없었다.
그는 완벽한 대칭과 비율을 가진 존재였다.
또한 풍만한 흉부도 정확한 표현이었다.
기대하던 가슴이 아니라 사내놈의 잘 발달된 대흉근이란 게 문제였을 뿐.
굴곡진 몸이란 것도 맞았다. 근육의 울퉁불퉁함이 만들어내는 곡선들이었을 뿐이지만.
확실히 지상인은 빼어난 미남자였다.
곧은 코와 도톰한 입술, 날카롭고 정렬된 분위기와 웨이브진 밤색 머리칼.
마치 다비드 조각상이 떠오르는 사내였다.
그렇기에 처음 지상인을 봤을 때 보였던 베니엘의 들뜬 반응은 성적인 흥분이 아닌, 기대가 배신당한 분노였다.
사실 퀵포우에게 억울한 면이 없진 않았다. 그는 터널 랫답게 인간종의 남녀 구분을 잘 못 했다.
쥐의 시각으론 남자나 여자가 둘 다 못나 보이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데 포획한 지상인은 유난히 외모가 빼어났기에 틀림없이 여성이라 여겼던 거다.
아니, 사실 여성이 아니라도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베니엘에게 얻어터지면서 퀵포우는 항변했다.
"도, 도련님. 남자든 여자든 맛만 좋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찌익―!"
확실히 어떤 관점에서 보면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철저한 이성애자인 베니엘 자극할 뿐이었다.
"감히 네놈이 날 기만해!"
히로인 등장인 줄 알고 설렜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러워졌던 베니엘은 더욱 발길질을 해댔다.
퍽! 퍽퍽!
소란이 일자 밖에 있는 병사들이 들어왔는데, 베니엘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보곤 식겁해서 도로 나가버렸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망나니가 망나니하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병사들 중 일부는 이 기회에 퀵포우가 맞아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퀵포우가 광산에서 착복한 재산 중 일부를 어디 숨겨놨는지 알기 때문이다.
"아이구! 도련님! 제발 자비를!"
곡소리가 났지만 베니엘은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닥쳐라! 온화한 나도 화가 났다!"
옆에서 지상인이 어쩔 바를 모르고 지켜보는 가운데 분노의 매타작이 이어졌다. 그렇게 먼지 나게 맞던 중 퀵포우의 품에서 뭔가 하얀 게 툭 떨어졌다.
"어?"
보니까 그건 편지였다. 뭣보다 눈길을 끄는 건 '검정 그늘 꽃'이라 불리는 꽃 모양이 찍힌 인장이었다.
그건 큰고모 우시드라의 상징이기도 했다.
향이 좋지만 치명적인 독을 품은 꽃이다.
베니엘은 편지를 주웠다.
"도, 도련님! 찌이익!"
퀵포우가 황급히 막으려 했지만 일격에 나가떨어졌다.
퍼억!
베니엘은 편지를 펴보고는 이제야 전말을 알게 됐다.
"아하. 무슨 수작질이 있긴 할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보니 우리 잘나신 큰고모님의 부탁이었군?"
퀵포우는 황급히 변명했다.
"아, 아닙니다! 편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어디까지나 도련님을 걱정하는 내용으로…!"
"이게 날 개호구로 아나? 네 눈앞에 있는 자는 다크 엘프다. 다크 엘프식 화술에 누구보다 익숙하단 말이다."
확실히 큰고모의 편지는 교묘했다. 하지만 다크 엘프라면 누구든 그 행간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다.
베니엘은 퀵포우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래, 이 정도로 큰고모에게 따지진 못하겠지. 하지만 너 같은 감독관 하나 때려죽이고 갱도에 파묻어 버리긴 충분할 거다. 아마 편지를 보면 남작님도 이해하실걸?"
"찌이이익! 사, 살려주십시오!"
"시끄럽다!"
다시 구타가 이어졌다.
한데 놀라운 일이 또 벌어졌다. 퀵포우의 품에서 편지가 하나 더 떨어진 것이다.
툭.
이번 편지는 '우유 버섯'의 인장이 그려져 있었다.
둘째 고모 아니엘의 상징이었다.
베니엘은 눈이 커졌다.
"너 무슨 보물 고블린이야? 칠 때마다 뭐가 나오네?"
"그, 그것이…!"
베니엘은 이번에는 둘째 고모 아니엘의 편지를 살펴봤다. 그리고는 경악했다.
"세상에…!"
편지에는 그가 몰랐다면 큰일 날 뻔한 섬뜩한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자 베니엘도 상황 파악이 끝났다.
그는 더 때리기도 귀찮다는 듯 손바닥을 내밀었다.
"편지 더 있지? 내놔."
돌아가는 꼴을 보니 퀵포우는 자신이 완전 잘못 걸렸다는 걸 슬슬 깨닫기 시작했다.
7화
은광의 망나니 (3)
***
세 번째 편지가 발견됐다.
베니엘의 의붓누나인 아리아나의 것이었다.
이후 뭐가 더 있나 퀵포우를 철저히 털어 보았지만 밀서는 세 개가 다였다.
베니엘은 일단 옆에서 멀뚱하게 서 있던 지상인을 감옥으로 돌려보내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탁자에는 세 개의 편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베니엘은 절로 한탄이 나왔다.
"허허…!"
이런, 징글징글하고 질척질척한 다크 엘프들 같으니라고!
새삼 이런 녀석들을 가족으로 두고 살아가야 하는 다크 엘프의 삶에 동정심이 생길 정도였다.
베니엘은 잠시 생각하다가 근처에서 발가벗겨진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쥐새끼에게 물었다.
"지금 정해라. 넷 중 누구로 할지."
앞뒤 잘라먹은 말이지만 이해하긴 어렵지 않았다.
이제 퀵포우는 선택을 해야 한다.
망나니 베니엘.
그의 큰고모 우시드라.
둘째 고모 아니엘.
의붓누나 아리아나.
넷 중 누구의 편을 들지 말이다.
"저… 그게...."
퀵포우는 난처한 표정이 됐다. 그런 쥐새끼를 보며 베니엘이 딱 끊어 말했다.
"대가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아, 아닙니다! 사실 누구의 편도 들고 싶지 않습니다. 저같이 미천한 놈이야 그냥 쥐 죽은 듯 사는 게 분수에 맞는지라...."
퀵포우의 말에 베니엘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쥐 죽은 듯 지내면서 지금처럼 여러 가지로 해 먹고 살겠다? 분명히 말해두지. 네놈의 안락한 시절은 이미 끝났다. 그리고 그렇게 누구 편도 들고 싶지 않았으면 이딴 수작을 부리지 말았어야지."
베니엘은 차려진 음식과 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이미 앞으로 발을 내디딘 거야. 퀵포우. 돌아가는 길은 없어."
"...."
"지금 네놈이 유일하게 살길은 누구 하나를 선택하고, 뽑기 운이 좋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퀵포우는 베니엘이 맞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젠장… 일이 왜 이렇게 됐지?'
분명 상대는 나이트쉐이드 가의 망나니라 불리는 베니엘이었을 텐데 말이다.
망나니 베니엘이라 하면 충동적이고, 생각이 짧은 거로 유명했다. 검술 실력 외에는 모든 게 결격이라는 젊은이였다.
그렇기에 향락으로 구슬려 자기 뜻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어째서?
아무래도 그가 줄곧 들어왔던 베니엘의 악명은 상당 부분 왜곡된 게 틀림없었다.
그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역시 다크 엘프구나. 경쟁자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게 기본이라니.'
분명 베니엘과 후계 구도를 다퉜던 의붓누나 아리아나나 그녀를 따르는 무리의 짓일 확률이 높았다.
졸지에 선량한 피해자가 된 퀵포우는 피눈물이 흐르는 심경이었다.
'속았다. 내가 간악한 귀쟁이들에게 속았어. 끄흐윽.'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퀵포우를 베니엘이 발로 툭 쳤다.
"자, 어쩔 거야? 퀵포우."
베니엘의 물음에 퀵포우는 숨통이 조여 들어왔다. 만약 그가 인간처럼 땀샘이 있었다면 식은땀을 줄줄 흘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신 그의 눈동자는 좌우로 불안하게 흔들렸다. 긴장한 쥐 인간들이 으레 그렇듯 굴이나 숨을 곳을 본능적으로 찾는 것이다.
하지만 퀵포우는 본능을 애써 억누르고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소문과 다르다고 해도 망나니에게 미래는 없다.'
직접 대면해 보니 베니엘의 자질은 뛰어나 보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미 그는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고 있다.
자발적으로 왔다지만 노예 광산에 노동교화형을 받는 것만 해도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당장 눈앞의 매질이었다. 만약 여기서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 일단 따르겠다고 하고 상황을 봐서 다른 쪽으로 갈아타야겠군.'
퀵포우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외쳤다.
"받아만 주신다면 도련님을 위해 부지런한 쥐처럼 일하겠습니다(일단 네놈이 완전히 나가리 될 때까지 장단을 맞춰주마). 찍찍!"
그렇게 고한 퀵포우는 온갖 성의를 다해 아첨을 이어갔다.
하지만 베니엘은 거기 속지 않았다.
게임 속 지식 덕분에 퀵포우란 인물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놈의 꿍꿍이 역시 쉽게 짐작했다.
'상황을 봐서 언제든 큰고모나 의붓누나에게 붙으려 하겠지.'
고약하고 믿을 수 없는 녀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겐 이런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고맙군. 퀵포우."
"과분한 말씀이십니다(금방 속아 넘어가는군. 멍청한 새끼). 찍찍."
"그런데 말이야. 퀵포우. 나는 항상 무슨 일이든지 동기가 중요하다 생각한단 말이야."
"네? 동기요…?"
되묻는 퀵포우는 어쩐지 심한 불길함을 느꼈다.
"그래, 네가 날 계속 섬길 수밖에 없는 동기."
"저… 무슨 말씀이신지? 찌이익…. 소인이 아둔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퀵포우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건 어렵지 않다.
그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처형되거나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중진이 되는데, 그 이벤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퀵포우에 대한 많은 비밀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노예 광산의 실세인 그는 켕기는 구석이 많은 비리 덩어리였다.
"퀵포우. 사실 네놈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봤다. 수완이 아주 좋은 녀석이더군."
"가, 감사합니다."
"참, 그간 광산에서 여러 가지 짓을 해줬어? 작게는 노예들에게 배급되는 식량을 팔아먹는 일부터, 크게는 채광한 은괴를 빼돌리는 것까지 말이야."
퀵포우는 긴 꼬리를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 모르신다? 하긴, 그간 해먹은 게 하도 많아서 다 기억이 안 나나 보지?"
"아닙니다. 도련님!"
"멀쩡한 노예를 사망 처리해서 개인적으로 거래하는 노예상에게 팔아먹고, 광산 노예와 경비병을 사적인 일에 동원하고, 각종 보고서 위조까지. 하하하, 다 나열하기도 힘이 드네. 재주도 좋아?"
실제로 퀵포우는 능력자였다. 말단에서 제1감독관까지 오른 업무 능력에 더불어 광산에서 알차게 해먹은 부정부패까지. 이 모든 건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하… 무슨 말씀이신지? 오해입니다! 도련님!"
퀵포우는 서둘러 부인했다. 들켰다가는 바로 목이 날아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죄목이기 때문이다.
아니, 가문으로 끌려가서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지도 몰랐다.
가령 미치광이 마법사라 불리는 베니엘의 막내 고모 리리나의 생체 실험 재료 같은 꼴 말이다.
"오? 그렇게 나오시겠다?"
퀵포우에겐 안타깝게도, 베니엘은 어렵지 않게 그의 비리를 증명할 수 있었다.
베니엘은 편지를 회수한 뒤에 탁자를 걷어찼다.
와장창!
탁자가 넘어지며 음식이 사방으로 쏟아진다.
이건 단순히 성질을 부리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베니엘은 탁자 아래에 있던 더럽고 너덜너덜한 카펫을 치웠다. 그리고 집의 나무 바닥 여기저기를 두드렸다. 그러던 중 한 곳만 소리가 달렸다.
"여기군?"
베니엘은 주먹으로 바닥을 박살 냈다.
쾅!
무너진 바닥 밑으로 작은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는 가죽 두루마리가 하나 보였다.
"이게 뭘까? 뭐라고 생각하나? 퀵포우."
두루마리를 들고 흔드는 베니엘을 보며 퀵포우는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두루마리는 그의 전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12만 두크(제국의 화폐 단위)의 예금 증서였다.
12만 두크는 은광의 반년 치 수익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제1감독관이 된 지난 9년간 퀵포우가 얼마나 알차고 부지런히 착복했는지 알 만했다.
"어, 어떻게 그걸…? 찌익?"
당연히 거기 있을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찾아내는 베니엘의 모습에 퀵포우는 주둥이의 긴 수염이 공포로 덜덜 떨렸다.
사실 베니엘은 게임 지식 덕에 아는 거였지만, 퀵포우 입장에선 그간 자신이 저지른 부정이 모두 감시받고 있었다는 착각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다 알고 있었단 말인가! 하면 지난 9년간 나는 언제든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소리잖아!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탄식보다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퀵포우는 바닥을 기며 베니엘에게 애걸복걸했다.
"도련님! 살려만 주신다면 노예 마법이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부디! 제발 이 미천한 놈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찌이이익!"
노예 마법이라면 주인을 배신할 수 없게 만드는 완전한 굴종의 주문이다.
한데 이름과 다르게 광산의 노예들에겐 부여하지 않는다. 마법에 드는 비용보다 노예의 가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 손익이 안 맞는 것이다.
하지만 퀵포우 같은 녀석이라면 노예 마법을 걸어놓고 부리는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베니엘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재밌군. 게임 중반에나 볼 수 있는 이벤트가 바로 코앞에서 진행되다니.'
게임 중반에 플레이어는 퀵포우를 죽일지 살릴지 정할 수 있다. 비리 때문에 쳐내게 되면 가문의 규율 점수가 크게 오른다.
반면 용서하면 유능한 인재인 그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베니엘이 할 선택은 명확했다.
게임처럼 가문의 상황에 대한 점수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있더라도 나이트쉐이드 가문은 남작의 것이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당장 써먹을 부하인 퀵포우를 포섭하는 게 최선이었다.
"좋다. 노예 마법이라니 구미가 당기는군. 그 조건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지. 크크큭."
물론 12만 두크의 막대한 금액이 든 예금 증서는 베니엘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
그는 9년간 퀵포우의 피와 땀과 노력이 들어간 재산을 날름 먹어치운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재산이 자신을 늘 괄시하는 남작의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달게 느껴졌다.
"너는 정말 충성스러운 쥐다. 퀵포우."
***
퀵포우는 완전히 베니엘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노예 마법까지 각인했기 때문이다.
마법은 베니엘이 직접 썼다.
그가 가져온 짐 중에 노예 마법의 주문 스크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에선 노예 사업이야말로 근본 중의 근본이었기에, 구성원들은 노예 마법 스크롤 같은 건 기본적으로 들고 다녔다.
이제 코보코보 퀵포우는 완전히 목줄을 차게 됐다.
베니엘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유능한 노예가 생긴 데다가 12만 두크까지 벌었다. 역시 광산행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돈을 어떻게 쓸까?'
행복한 고민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었다.
바로 퀵포우에게 온 편지 세 장에 대한 대책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명령을 내렸다.
"퀵포우."
"네, 주인님."
"큰고모를 상대로는 일단 시간을 끌어라. 열심히 시도하고 있고 성과도 어느 정도 보인다는 식으로 보고해. 그렇게 계속 시간만 최대한 끌겠다."
큰고모 우시드라가 자기 간계가 먹히는 중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퀵포우가 실패했다는 걸 알게 되면 다른 수작질을 벌이려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둘째 고모인데… 하..., 이거 참!"
베니엘은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둘째 고모 아니엘의 편지는 두 가지 용건을 담고 있었다.
첫 번째는 조카가 광산에서 일하면서 몸에 이상이 생기면 각오하란 내용이었다.
역시 조카를 향해 끝없는 집착을 보이는 아니엘다웠다.
두 번째는 광산의 관리관에게 대해 이것저것 묻는 내용이었다.
늙은 관리관이 평소처럼 잠만 자는지, 그가 계속 자기 일을 잘 처리하는지에 관해서였다.
베니엘은 거기서 바로 둘째 고모의 의도를 파악했다.
'자기가 직접 광산 관리관으로 오려고 하는군! 끔찍하게도!'
조카 사랑이 넘치다 못해 지나친 아니엘이 기어코 광산까지 쫓아올 생각인 듯했다.
베니엘은 그 생글생글 웃는 정신병자가 자기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걸 생각하니 절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는 단호하게 명했다.
"둘째 고모에겐 현재 관리관이 회춘해서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전해라. 만약 둘째 고모가 광산으로 오는 불상사가 발생하면 네놈부터 가만두지 않겠다."
"아, 알겠습니다!"
세 번째 편지는 의붓누나 아리아나의 것.
내용은 간단했다.
베니엘의 동향을 정기적으로 보고하라는 것. 여기에 대해 베니엘은 크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감시나 견제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리아나는 더는 베니엘을 후계 구도의 경쟁자로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동향을 파악하라는 건 동생 놈이 혹여나 무슨 사고를 칠까 걱정해서가 틀림없었다. 이에 대해 묻는다면 본인은 부정할 테지만 말이다.
여기에 대해 베니엘은 간단히 명령했다.
"별다른 사고 치지 않고 얌전히 지낸다고 적당히 보내."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럼 가보도록."
"네엣, 찌이익―!"
퀵포우는 망나니가 또 무슨 짓을 시킬까 두려워 서둘러 사라졌다.
그렇게 문제를 해결한 베니엘은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는 다시 보물에 집중해야겠군.'
이번에는 혼자 탐색하지 않을 생각이다.
얼마 전에 본 그 지상인을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다. 같이 다니며 지상에 관한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지상인이 데리고 있는 '개' 때문이었다.
개는 지하에선 살지 않지만 현대인인 그에겐 익숙한 동물이다. 그리고 개의 후각이면 분명 보물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운이 좋군.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겠어.'
8화
무결자의 신전 (1)
퀵포우가 지상인을 제압했을 때 '개'라는 짐승도 같이 잡았다고 한다.
녀석의 표현에 의하면, 시끄럽게 컹컹 짖으며 사납게 무는 고약한 짐승이라 했으니 개가 확실했다.
퀵포우는 현재 개를 일단 살려뒀단다. 도축해 버릴까 하다가 지상인이 개를 유난히 아끼는 것 같기에 그랬다고.
물론 동정심 때문은 절대 아니다.
그 지상인은 외모가 빼어난 상품인지라, 채찍질 없이도 고분고분 말을 듣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상품에 기스가 생기면 값이 팍팍 떨어지는 건 어디나 비슷했다. 그래서 퀵포우는 개를 빌미로 지상인을 협박했다는 것.
베니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악랄한 놈 같으니라고.'
물론 지하 세계에서 악랄하다는 건 여러 가지로 칭찬이나 마찬가지였다.
뭐랄까? 그것은 숙달됐다는 의미며,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지하에는 악랄한 손이 성공을 거머쥔다는 속담까지 있었다.
베니엘 역시 이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퀵포우를 써먹기로 한 것이다. 그는 퀵포우의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지상인을 데리고 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도련님!"
눈을 좌우로 굴리며, 눈치를 보는 데 누구보다 뛰어난 리저드맨 병사들은 즉각 복종했다.
이제 그들에게 퀵포우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누가 뭐래도 베니엘이 그들의 직속 상관이었다. 이 망나니 도련님보다 더 무서운 놈이 광산으로 오기 전까진 말이다.
잠시 뒤, 지상인이 왔다.
아까 전 난장판 때문인지 여전히 두려운 기색이 역력하다.
"앉지."
베니엘은 근처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지상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말투와 태도를 미뤄보아 귀족이 틀림없었다. 아마 그는 차분한 성격을 가졌을 것 같았으나 지금은 다급한 모습이었다.
"훌륭하신 지하의 신사분, 절 합당한 포로로 대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명 아버지께서 충분한 몸값을 내주실 겁니다! 그거보다 긴한 부탁이 있으니‥‥!"
한창 말하는 도중 베니엘이 손을 들었고 결국 그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베니엘은 그를 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자기 처지를 모르는군? 지상인."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는 명예로운 포로 따위가 아니다. 우리가 널 가둬두고 학대하지 않은 건 노예로 팔기 위함이야."
"!"
지상인 사내는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족가의 자제인 자신이 노예가 된다는 건 생각도 못 해본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혹한 기색이 가득한 지상인에게 베니엘은 사악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가여운 친구, 너는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할 거다. 지하에선 아름다움은 때때로 저주만도 못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너는 네 빼어난 외형 덕에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거다. 너같이 희귀한 장난감을 희롱하고 망가뜨리길 좋아하는 지하의 권력자의 손아귀에 들어가겠지."
베니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하게 속삭였다.
"너희는 지하에 무슨 종족들이 사는지 알지 못해. 다크 엘프나 지하 드워프처럼 인간과 비슷한 종족만 살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 아니지. 이곳에는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온갖 괴종족이 가득하다."
설명을 하던 베니엘은 식탁에 있는 동굴 거머리 요리를 포크로 찍어 내밀었다. 그것은 끈적끈적하고 괴이하게 생긴 생명체였다.
"어떤 종족은 이것처럼 차갑고 끈적거리는 촉수로 가득하지. 그들은 너 같은 신기한 노예를 자기 촉수로 휘감은 채 내키는 모든 걸 할 거다. 그때가 되면 네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어."
"히이익!"
귀족 사내는 어느새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됐다.
"아니면, 너같이 하얗고 깨끗한 피부에 복잡한 문신을 무수히 새기길 좋아하는 주인을 만날지도 모르지. 그 모든 작업은 지옥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이뤄질 것이다.
아, 작업이 끝나면 어떻게 되냐고? 간단해. 네 살가죽은 홀랑 벗겨져서 주인의 자랑스러운 수집품 목록에 들어가게 된다. 크흐흐흐."
지상인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어느새 일어난 베니엘은 그의 뒤에 서서는 귓가에 얼굴을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너는 비싸게 팔릴 거다. 가장 비뚤어지고 강력한 자들의 소유물이 되겠지. 그리고 너는 죽음만을 소망하게 될 것이다. 가여운 녀석아."
급기야 지상인은 절망감에 빠져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끄으윽! 아버님 말씀을‥ 크흐흑! 들었어야 하는데‥‥!"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게 어째 좀 심약한 스타일 같았다.
나이도 어려 보이고.
남성적이고 멋진 육체가 아까울 정도였다.
베니엘은 잠시 그가 절망감에 충분히 빠지길 기다렸다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네가 하기에 따라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구렁텅이로 떨어지기 직전에 내밀어진 손에 지상인은 반색했다.
"뭐, 뭐라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다시 생기를 찾은 그의 눈은 사슴처럼 크고 빛이 났다. 순진한 녀석 같으니라고, 베니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불어 네가 아까 하려던 긴한 부탁이란 것도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부디!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제 지상인은 완전히 매달리는 처지가 됐다. 베니엘은 그의 어깨를 인자하게 두드려줬다.
"안심하라고. 우리 다크 엘프는 이 지하에서도 지적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으로 이름 높으니 말이야. 후후."
***
이후 지상인은 베니엘에게 뭐든 술술 불기 시작했다.
그의 '올리비에'란 이름을 가졌고 21살이었다.
예상대로 귀족이었다. 아버지는 백작이고 자신은 네 번째 아들이라 했다.
"백작이면 고위 귀족이 아닌가? 귀한 집안의 아들이 왜 위험한 지하에서 얼쩡거린 거야?"
"백작가라도 사남쯤 되면 별거 없습니다. 장남이 모든 걸 물려받고 그 밑에 자식들은 성직자가 되거나 군인밖에 길이 없지요."
이대로 있다가 올리비에는 저 먼 동방에 있는 교회 기사단에 강제로 끌려갈 상황이었다고.
그건 죽어도 싫었던 올리비에는 자기 쓸모를 증명하고 가문에 공을 세우기 위해 지하 탐험에 나섰다는 거다.
"요즘 지상에선 지하 세계 개척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몇몇 모험가가 지하에서 엄청난 보물을 들고 귀환한 게 화제가 됐었거든요."
올리비에의 탐험대는 지하로 내려온 뒤 우연히 은맥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따라오다 보니 결국 여기에 닿았다는 것.
"운이 없었군. 우리 가문의 땅으로 오다니."
"저는 정말로 삿된 의도로 오지 않았습니다!"
올리비에는 황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베니엘은 코웃음을 쳤다.
"지상에서 온 귀찮은 날파리들은 다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그런 냉소적인 태도와 다르게 베니엘은 다른 지저인처럼 지상인을 무조건 처단할 생각은 없었다.
믿을 만한 지상인과 거래를 하면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특히나 지하의 여러 가문들이 지상인을 배척하는 지금 상황에선 더 그렇지. 지상과의 교역에 있어 선두에 설 수 있다고 할까?'
아직 지저인들은 지상과의 교류가 얼마나 큰 이득을 안겨주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미래를 아는 베니엘은 달랐다. 그리고 그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자기 눈앞의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사남이라곤 해도 백작가의 자제. 잘하면 이용할 수 있겠어.'
게다가 들어보니 그는 베니엘이 아는 가문 출신이었다.
'르텔'이란 가문으로, 이는 게임에서도 등장하는 지상인 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나의 명예는 나의 생명>이라는 꽤나 고지식하고 상투적인 가훈을 가진 가문인데 지상인 중에서도 드물게 믿을 만한 자들 중 하나였다.
원래 선조 대부터 기사 가문이었지만 현재는 상인 가문으로 변화 중인 집안이었다.
'마침 딱 좋군. 이건 협력할 수 있겠어.'
베니엘은 올리비에와 좋은 관계를 구축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아까 긴한 부탁이 있다고 했지?"
"네! 네에!"
올리비에는 아주 간절한 표정이었다.
"뭔데?"
"제 사냥개 '로나'를 돌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퀵포우에게 듣자니 전투 중 위험한 순간에도 자기 개만은 결사적으로 보호하려 했단다. 어지간히 개를 아끼는 모양. 하면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좋다. 대신 조건이 있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로나와 함께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지."
"정말이십니까!"
그제야 올리비에는 살았다는 표정이 됐다.
"그래, 나는 다크 엘프 귀족이다. 내 몸에 흐르는 푸른 피에 맹세코 약속을 어기지 않아."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완고한 그의 의붓누나 아리아나라면 분명 그럴 테지만, 베니엘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든 말을 바꾸는 걸로 유명한 망나니였다.
하지만 가엾게도 올리비에는 지상인인 탓에 일대에서 자자한 베니엘의 악명을 몰랐다. 그저 기대감에 가득 차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귀족의 명예를 아는 분이라 정말 다행입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젊은이의 선량하고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 베니엘은 이용해 먹기 쉬운 상대란 생각이 들었다.
"개의 후각이 필요해. 내가 지금 지하 갱도에서 찾고 있는 게 있다. 그걸 찾는 데 도와주면 반드시 지상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지."
돌려보내는 김에 지상과 연줄을 만드는 게 베니엘의 목적이었다.
지저인들은 모르지만 지상인들은 '화약'이라 불리는 강력한 물질을 개발한 상태다.
아직 지저인들은 그 화약의 위력에 무지했다. 설령 안다고 해도 지하 세계는 워낙 마법이 발달해서 화약 따윈 필요 없다고 여길 것이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화약은 마법에 비해 압도적으로 가성비가 좋았다. 마법 시약 재료보다 화약값이 훨씬 쌌으니까. 게다가 사용에 있어 마법처럼 어렵지도 않았고.
그냥 불을 붙여 폭발시키면 그만이니 아무나 다룰 수 있었다.
현재 지하에서 이런 화약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 미래를 아는 베니엘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빨리 화약을 사들일 수 있는 루트를 개척하고자 했다.
'설령 내가 가문에서 쫓겨난다고 해도 화약 장사를 하면 큰돈을 벌 수 있겠지. 돈은 곧 힘이다.'
앞으로 지하 제국은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화약 같은 전쟁 물품은 그야말로 떡상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베니엘이 관심을 갖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베니엘은 올리비에에게 너그러운 태도였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베니엘 님께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올리비에는 이 거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차피 거절해 봐야 노예로 팔려 가는 일밖에 없을 테니까.
***
다음날부터 베니엘은 올리비에를 종자처럼 데리고 갱도로 들어갔다.
"컹! 커엉!"
그의 사냥개인 로나도 함께했다.
로나는 긴 다리를 가진 대형견으로 딱 봐도 귀족 가문의 사냥개처럼 생겼다.
털은 얼룩소가 생각나는 무늬를 가졌고 이름처럼 암컷이었다.
하지만 그런 예쁘장한 외관과 다르게 대단히 성질이 사나운 개라 올리비에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베니엘 님. 뭘 찾으면 되는 겁니까?"
"아, 그게 말이야."
베니엘이 원하는, 마나 하트를 강화시킬 보물은 한 고대의 신전에 있다.
그 신전에 오래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장소다. 입구 역시 다 무너져서 접근이 불가능했고.
한데 사방으로 파고 내려간 은광의 갱도 중 하나가 땅 밑에 묻힌 그 신전 근처까지 뻗어나갔다.
베니엘은 그 갱도를 찾은 뒤 안으로 파고 들어가 어떻게든 고대의 신전으로 진입하려 하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야 어딜 파고 들어가면 되는지 아니 어렵지 않았는데, 현실 속의 갱도는 너무 복잡해서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후각이 발달된 개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왜냐하면 한 가지 중요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신전 구역에는 파란 진액 버섯이 엄청난 군락을 이루고 있었지.'
파란 진액 버섯은 지하에서 약재로 쓰는 요긴한 버섯이다. 그러다 보니 다들 눈에 띄는 대로 뽑아서 은근히 잘 안 보이는 녀석이다.
하지만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고대의 신전에는 그럴 일이 없기에 파란 진액 버섯이 무더기로 자라고 있었던 것.
그 버섯은 특유의 냄새가 있는지라 개의 후각을 이용하면 방향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베니엘은 퀵포우에게 얻어 온 파란 진액 버섯을 내밀며 부탁했다.
"여기 상처를 내면 진액이 흐르는데 특유의 신 냄새가 나지. 이 냄새가 나는 방향을 찾고 싶어."
"알겠습니다. 베니엘 님."
그날부터 베니엘, 올리비에, 사냥개 로나는 복잡한 갱도를 종횡무진했다.
다만 탐사는 탐사고, 노동교화를 받는 척은 해야 했기에 퀵포우의 도움을 받았다.
종일 광산 지역을 이리저리 탐사하다가 퇴광 시간이 되면 퀵포우가 미리 마련해 준 광물 덩이를 광차에 싣고는 밖으로 나가는 일상이었다.
매우 고단한 표정은 짓고 말이다.
그 때문에 광산의 대부분은 그가 일하는 줄 알았다. 몇몇은 의심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굳이 캐려는 사람도 없었다.
설령 일을 안 한다고 해도 어쩌겠나?
도련님인데.
그런 하루가 매일 반복됐고, 시간이 흐르자 주변의 관심은 점점 시들어갔다.
이 망나니 도련님의 기행도 그저 광산의 일상이 되어간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굴착 도중에 갱도가 무너져 아무도 찾지 않는 폐광 지역에서 갑자기 사냥개 로나가 맹렬하게 짖기 시작했다.
"컹! 컹컹!"
탐사에 나선 이후 처음이었다.
화가 난 게 아니라 열심히 꼬리를 흔드는 걸 보니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올리비에는 폐광의 무너져 내린 광석 더미를 가리켰다.
"이 방향에 버섯 군락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베니엘 님!"
"좋아!"
베니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답도 없어 보이던 신전 탐사가 불과 한 달만에 성과를 낸 것이다.
모든 게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9화
무결자의 신전 (2)
***
노예 광산에서의 삶은 언제나 비슷하다.
깡! 까앙! 깡!
여기선 갱도를 때리는 곡괭이 소리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건, 단조로운 리듬이었다.
노예들이 그게 자신의 삶에서 듣는 마지막 소리라는 걸 깨달을 때면 남몰래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쉬곤 했다.
절망과 고통 탓에 대부분의 노예는 죽은 사람들처럼 걸어 다녔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
광산의 일과가 끝난 깊은 밤.
십여 명의 야만 오크들이 감시를 피해서 은밀한 장소에 모였다.
좀처럼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잡느라 축축하고 좁은 장소에서 덩치 큰 오크들이 서로 몸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뚝. 뚝뚝.
천장에선 질척거리는 동굴 슬라임의 악취 나는 체액이 머리 위에 떨어지고 있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에게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엿보였다.
"동포들이여, 잘 와주었다."
무리의 중심에 있는 이는 '본콜러 고럼'이란 오크였다. 허리가 굽은 늙은 오크지만 아무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고럼은 훌륭한 '뼈 마법사'이며, 지난 전쟁에서 패배해 노예로 전락한 야만 오크들의 정신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모두에게 선언했다.
"이제 고통과 굴욕의 시간을 끝낼 때가 됐다!"
그 선언에 모여 있는 오크들은 희열에 찬 표정이 됐다. 모두 소리 죽여 환호했다.
고럼은 샛노란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
"적들은 내게서 조상의 지팡이와 의식용 단검을 빼앗아 가고, 이런 추악한 구속구를 씌웠다."
그는 자신의 목에 있는 금속제 구속구를 가리켰다.
"어리석은 놈들은 그걸로 내 마법을 완전히 앗아갔다 여기고 있지. 하지만, 놈들은 뼈 마법의 심오함에 대해 알지 못한다. 나는 조상들의 지혜에 힘입어 일부나마 마법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고럼은 손바닥을 펴 모두에게 무언가를 보여줬다. 그건 얼마 전 광산에서 죽은 오크 전사의 손가락뼈들이었다.
살점을 거칠게 발라낸 탓에 하얀 뼈에 피 얼룩과 근육이 아직 붙어 있었다.
오크의 뼈 마법은 아무 뼈나 가능한 건 아니다. 위대한 동족의 뼈로만 발동한다.
광산의 감독관들은 그런 뼈 마법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죽은 오크의 시신을 부주의하게 처리했다. 고럼은 그걸 놓치지 않았고 제한적으로나마 뼈 마법에 접근할 수 있었다.
"보아라. 동포의 뼈에 깃든 원한과 분노로 이 억압을 끊어 내는걸!"
고럼의 선언과 함께 손가락뼈가 바스러지며 신비로운 빛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빛은 목에 걸린 구속구로 흡수되더니 스파크를 일으켰다.
파지직!
그와 함께 전기를 일으켜 착용자에게 고통을 주는 구속구가 힘을 잃었다.
더욱 훌륭한 것은 겉보기엔 별다른 차이가 없었기에 당장 감독관에게 들킬 일도 없을 듯했다.
"오오! 뼈를 부르는 자여!"
"위대한 고럼!"
지켜보던 야만 오크들은 일제히 감탄사를 터뜨렸다.
고럼은 그런 그들에게 선언했다.
"이 구속구를 풀고 우리는 다시 한번 투쟁할 수 있게 될 터!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이 광산에서 탈출하는 게 아니다."
"하면 무엇을 원하십니까? 마법사시여."
"우리에겐 달아나 훗날을 도모하는 것보다 적에게 큰 고통을 줄 방법이 있다. 모두 이 광산에 남작의 친자가 와 있는 걸 알 터!"
"그놈을 처리하자는 겁니까?"
"그렇다! 이것은 족장과 비명에 쓰러져간 동포들을 위한 복수가 될 것이다!"
고럼과 오크들은 베니엘이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이란 건 몰랐다. 남작의 아들이니 충분히 처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고, 자유 대신 복수를 선택하고자 한 것이다.
"하면 언제 결행합니까? 남작의 아들이 어째서 여기서 벌을 받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귀한 혈통이니 오래 있지는 않을 겁니다."
"타당한 의견이다. 구속구를 처리할 수 있게 됐으니 최대한 빠르게 결행하겠다!"
작전은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것이었다.
뼈 마법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갱도에서 붕괴 사고를 일으킨다. 이후 광산 안이 혼란으로 빠졌을 때 모여서 베니엘을 습격한다는 것이다.
모두 그 계획에 찬동했다.
오크에게 자유보다 귀중한 건 복수였기 때문이다.
"마침 놈은 인간 하나만 데리고 외딴 갱도에서 작업 중이다. 우리가 그쪽으로 한꺼번에 들이치면 도망도 못 가고 끝장날 터!"
***
"퉤에―!"
베니엘은 갱도로 향하며 침을 뱉었다.
입안 가득 모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모래가 더러운 음식물에 섞여 있었던 건지, 숨결을 타고 들어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광산에선 어디든 모래와 분진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단순히 침으로 뱉어낼 수 있는 정도면 괜찮다. 몇 년이고 이곳에 있던 자들은 하나 같이 폐병으로 고생 중이었다.
그들은 목구멍을 턱 막고 있는 텁텁한 무언가를 뱉어내려면 한참이나 그웨웩, 그웨엑 거리다 피가 섞인 가래를 뱉어내곤 하는 것이었다.
'보물을 찾자마자 광산을 떠나야겠군.'
베니엘은 여기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게 없단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진심으로 반성하고 노동교화형을 받으러 온 게 아니다. 그저 갱도와 연결된 신전 유적으로 갈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니까.
돌아가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베니엘이라고 하면 죽고 못 사는 둘째 고모 아니엘에게 연락하면 그만이다.
이후에는 가문에서 강한 발언권을 가진 둘째 고모가 남작을 들들 볶을 테고, 결국 베니엘을 다시 불러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역시 망나니가 그럼 그렇지, 몇 달도 못 참는구나, 라는 평가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콜록! 콜록!"
근처에 있던 지상인 올리비에가 기침을 해댔다.
다비드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이 멋진 미남자는 광산에서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컬이 진 고운 밤색 머리칼은 분진과 땀으로 완전히 떡져서 달라붙어 있었고, 석고처럼 하얀 피부는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올리비에가 처음부터 갈색 피부를 가졌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베니엘의 비호 덕에 잘 먹었고, 아직은 건강한 상태였다.
그는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덕인지 어느 때보다 밝은 목소리였다.
"베니엘 님, 이제 무너진 갱도를 거의 다 파냈습니다!"
"좋아."
사냥개 로나가 파란 진액 버섯의 냄새를 찾아낸 무너진 갱도에서 둘은 보름 넘게 노동 중이었다.
보안을 위해 아무도 접근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너진 갱도에서 일할 수 있는 건 둘뿐이었다.
석재와 흙가루를 퍼내고, 받침목을 다시 설치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10미터가량을 나아가는 데 보름이나 걸렸다. 숙련된 광부였다면 훨씬 빠르게 해냈겠지만 둘 다 광산의 일에는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올리비에가 괴력을 지닌 사나이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처럼 훌륭한 근육을 갖고 있었고 베니엘이 끙끙거리는 바위 조각을 거뜬히 들어내곤 했다.
만약 올리비에를 만나지 못했다면 베니엘은 이 작업을 거의 포기할 뻔할 정도였다.
얼마 뒤 그들은 갱도 끝에 도달했다. 베니엘은 막장의 벽면을 만져보며 혀를 찼다.
"쯧쯧! 이러니까 무너지지."
벽면은 매우 불안정해서 여기저기 균열이 가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 너머로 신 냄새가 풍겨 나왔다.
파란 진액 버섯이었다. 이 정도면 특별히 민감한 개 코가 아니라도 알아챌 정도였다.
"올리비에. 여길 판다. 안쪽에 공간이 있는 게 틀림없어."
베니엘은 입구에 받힐 버팀목의 길이를 가늠하며 말했다. 올리비에가 곡괭이를 들고 나섰다.
"알겠습니다."
작업은 반나절 간 이어졌고 기대보다 훨씬 빠르게 결과가 나타났다.
카앙! 와르르.
막장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베니엘 님!"
안쪽에선 파랗고 창백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파란 진액 버섯은 파란색으로 발광하는 버섯이었기에 베니엘은 제대로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확신했다.
"좋아.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구멍을 넓혀봐."
"한두 시간 뒤면 퇴광입니다. 계속하시려고요?"
"더 미룰 순 없어. 오늘 끝을 본다."
"음… 알겠습니다."
광산의 규칙 따윈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베니엘은 코앞에 온 성공에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여기 그 힘이!'
얼마 뒤 둘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만들어졌다. 더 기다릴 것 없이 베니엘과 올리비에는 안으로 향했다.
안쪽은 차갑게 빛나는 파란 빛으로 가득한 거대한 공동(空洞)이었다. 그리고 그 빈 공간 가운데에 도대체 언제 적에 지어진 건지 알 수 없는 오래된 신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전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정사각형에 가로세로 15미터 정도였고, 사방에 네 개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지만 세월 탓인지 모두 무너진 상태.
신전은 공동 가운데 솟아 있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했다.
"자, 가자."
베니엘이 앞장섰다.
구멍에서 나오자 비탈길이 가팔랐다. 둘은 내려오다 결국 미끄러졌는데, 사방에 가득한 버섯 때문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
"윽…! 냄새가."
온몸에 파란 진액이 끈적끈적하게 묻어서 레몬처럼 시큼한 냄새를 풍겨댔다.
길은 따로 없었고, 둘은 발에 밟히는 버섯 밭을 헤치고 나갔다.
뽀득, 뽀드득.
버섯이 밟힐 때마다 소리가 요란했다. 그렇게 백 미터쯤 나아가자 신전이 있는 언덕에 다다랐다.
다행히 돌계단부턴 버섯이 없었다.
"올라가자."
한데 그때였다. 갑자기 저 멀리서 폭음이 들려왔다.
쿠우우우웅―!
둘은 깜짝 놀라서 서로를 마주 봤다. 분명 광산의 갱도 어딘가에서 큰 폭발이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발 아래가 진동했다. 사방에 핀 파란 진액 버섯들이 일제히 흔들릴 정도의 힘이었다.
심지어 그걸로 그치지 않고 공동의 천장 지대에서 종유석이 떨어지기도 했다.
콰아앙! 쿠우웅!
종유석은 무슨 사람만 했기 때문에 둘은 식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 떨어질 때마다 돌이 사방으로 튀며 버섯 지대를 박살 내는 것이었다.
"와, 이거 위험한데…."
베니엘은 황망한 기색으로 초토화된 버섯 지대를 살펴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다행히 둘이 들어온 입구는 무사했다.
"어디서 뭐가 터진 건지 모르겠는데 우리 쪽은 괜찮은 모양이네."
"위험하니까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올리비에가 토끼같이 눈을 뜨고 물어왔다. 그는 대체 왜 이런 지하 세계까지 굴러온 건가 싶은 순둥이였다. 베니엘은 곧장 올리비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덩치는 산만 한 놈이 왜 이리 겁이 많아!"
"아악―!"
"시끄러! 따라와. 거의 다 왔다고."
"대체 저 신전 안에 뭐가 있는데 그러십니까?"
"...."
앞서가던 베니엘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고 경고했다.
"너는 알 것 없어. 무사히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겠지?"
그의 눈동자를 본 올리비에는 베니엘이 다크 엘프임을 절감했다. 지금껏 서글서글한 태도여서 깜빡하고 있었지만, 상대는 누구보다도 잔인한 족속인 것이다.
겁에 질린 올리비에는 서둘러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네! 네! 물론입니다!"
그 모습에 베니엘은 자신의 연기력에 만족했다. 이제 정말 다크 엘프로 살아도 될 것 같았다.
돌계단은 생각보다 높았다. 한참 올라간 뒤에야 둘은 신전에 도착했다.
신전은 지붕 쪽에는 장엄한 신의 조각이 장식돼 있었다. 그것은 아무런 힘도 깃들지 않은 석재 조각에 불과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하는 위엄을 갖고 있었다.
올리비에는 금방 주눅이 들어서 물어왔다.
"저 조각상은 대체 누구…?"
베니엘도 같이 조각상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한때 무결자라 불렸던 지하 세계의 위대한 마신 '■■■■'이다."
그 대답에 올리비에는 이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그리고는 급하게 숨을 곳을 찾는 듯 몸을 웅크렸다.
"그, 그것은 신의 이름이 아닙니까? 그렇게 막 불러도 됩니까!"
올리비에가 놀라는 게 당연했다. 필멸자가 신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해당 신의 주목을 끌게 된다.
항상 그런 것도 아니고, 누가 부르냐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신의 이름을 부르는 건 극히 위험했다.
게다가 선한 신도 아니고 마신이라지 않나? 올리비에는 당장이라도 땅 밑에 사는 마신이 나타날 것처럼 오들오들 떨어댔다.
하지만 베니엘은 킥킥 웃을 뿐이다.
"지하 세계는 지상과 다르다. 이곳은 신들의 눈길과 힘이 미치지 못해."
"뭐라고요?"
"농담이 아니야. 설령 여기선 신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아무 일도 없다고."
지하는 특이한 세계였다.
현재 이곳에는 어떠한 신도 기거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아니라 천상에 자리 잡은 신들의 힘도 미치지 못하는 기괴한 장소였다.
그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저인이 신의 힘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대신 이곳은 지상보다 훨씬 마력이 풍부했고, 각종 마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장소였다.
쉽게 말하면 성직자에겐 무덤이요, 마법사에겐 천국이란 소리다.
베니엘은 이런 점을 설명해줬다. 그리고 덧붙였다.
"게다가 저 신은…."
"아앗! 부디 그래도! 이름만은!"
"아놔, 겁 많은 놈 같으니라고. 그럼 그냥 무결자라고 부르지. 아무튼, 저 무결자는 이미 죽은 신이야. 그러니 더더욱 겁낼 것 없다고."
"아하…!"
그제야 올리비에의 표정이 좀 풀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어깨를 움츠린 채 부지런히 좌우를 살펴보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외형은 수사자처럼 근사한 자가 하는 행동은 겁 많은 초식 동물 같았다.
그렇게 둘이 신전의 녹화된 청동문에 도달했을 그때 다시 폭음이 들려왔다.
카아아앙!
이번에는 담대한 베니엘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폭음이 아까와 다르게 생생하게 근처에서 들려온 것이다. 땅을 타고 울려 온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터진 게 틀림없었다.
"뭐야!"
놀란 베니엘이 뒤를 돌아보자 그들이 진입했던 입구 부분에서 먼지가 잔뜩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먼지 속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터졌다! 입구가 넓어졌어!"
"안으로 들어가!"
그것은 지하 오크어였다. 그리고 먼지를 뚫고 십여 마리가 넘는 야만 오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저 멀리서 베니엘을 발견하자마자 소리쳤다.
"저기다! 놈이다! 크르릉!"
"바로 들어가라! 복수의 때가 왔다! 크워어어어!"
베니엘은 생각지도 못한 오크의 출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지어 많잖아!'
언뜻 봐도 십여 명 이상이었다.
물론 프로보스트급 검객이면 혼자 오크 열 마리쯤은 상대할 수 있다.
다만, 그건 무구와 장비를 충실히 갖췄을 때의 얘기다.
현재 베니엘은 광산 일을 하느라 헐렁하고 땀에 젖은 셔츠 한 장이 전부. 맨몸으로 저놈들을 막긴 무리였다.
심지어 아까 폭발에서 마력이 감지됐다. 분명 저들 중에 마법사까지 있을 터. 마법사가 끼면 상대하기는 배 이상 까다로워진다.
일단 최대한 전투를 피하고 신전에 있는 보물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서 문을 밀어!"
베니엘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10화
무결자의 신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