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채권추심위원회 (1)
쏜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마신의 교단 성녀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런, 생각보다 배움이 짧은 분이셨나요? 성녀가 뭔지부터 설명해 드려야 할까요?"
쏜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게 아닙니다. 왜 신들이 없는 세계에 성녀가 나타난 건지 의아할 뿐이지요. 당신은 여기 어울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가요?"
성녀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녀는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음에도 대단히 아름다웠다.
녹인 금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는 듯한 머리칼은 샴페인 골드빛이었고, 피부는 볼에 사랑스러운 홍조가 핀 우유색이다.
마치 그녀의 모습 자체가 태양빛을 머금은 듯 생명력으로 넘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빛을 의인화한 것 같단 생각마저 들었다.
쏜은 곧 상대가 어떤 종족인지 알아 봤다.
"당신…? 하이 엘프군요?"
하이 엘프라고 하면 지상에 사는 엘프 씨족 중 가장 존귀한 이들이다. 지하로 치면 버섯 인간 중 황금 포자 일족 같은 거다.
이들이 존귀한 이유는 여러 엘프 별종 중 신의 축복을 받은 사제 계급인 까닭이다. 지구로 치면 인도의 브라만 카스트랑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 알아보시네요. 기뻐라."
하이 엘프 성녀의 분홍색 입술이 다시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쏜은 소름이 돋을 뿐이었다. 그리고 의문에 사로잡혔다.
"지상의 고귀한 씨족이 이미 죽은 지하 세계 신의 성녀라고요…? 이 무슨 지독한 농담입니까?"
"세상사란 기기묘묘함으로 가득 차 있지요. 그러니 저 같은 존재도 있을 법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대체 왜 온 거지요?"
그 물음에 성녀는 명확히 답했다.
"간단한 일이에요. 당신들을 제거하러 왔답니다."
"뭐라...?"
섀도우 위자드 전체가 술렁거렸다. 하지만 거칠게 반발하기엔 상대의 수나 기세가 대단했다. 그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리더인 쏜을 쳐다봤다.
"대체 왜? 이해할 수가 없군요."
쏜이 미간을 좁히며 서서히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성녀는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해할 필요는 없으세요."
"당신들의 교단에 대해 익히 들었습니다. 근자에 제국민을 현혹하고 있다지요? 하지만 우리 조직과 별 관련이 없을 텐데요?"
관련이 제대로 있다. 베니엘이 마신의 교단의 사도이기 때문이다. 교단에선 일전에 베니엘이 했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존귀한 성녀가 직접 나설 줄은 베니엘도 몰랐겠지만.
물론 이런 내용을 설명해줄 이유는 없었다.
"안타깝지만 대화는 여기까지랍니다."
성녀는 단호하게 끊고는 호종하는 이들에게 명했다.
"모두 구축하세요."
그 말과 함께 검은 사제와 검은 기사들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흔한 기합성도 없고 움직임도 기괴한 게, 흡사 유령 집단처럼 보였다.
즉각 섀도우 위자드는 대응했다. 하지만 그들은 금세 새된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 강해!"
"교단의 힘이 이 정도라고?"
"처음부터 힘을 아끼지 말고 투사해!"
마신의 교단이라 하면 신이 죽고 껍질만 남은 이들이 분명할 터인데, 어찌 알아주는 마법사 집단인 자신들이 밀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문제는 성녀는 아직 나서지도 않은 상태라는 것.
잠시 뒤, 조용히 전장을 지켜보던 성녀가 두 손을 모으며 걸어 나오자 그야말로 파란이 일었다.
그녀의 머리 뒤로 사악한 기운의 진홍빛 후광이 생겨나더니 주변의 마력이 빠르게 진공 상태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 쏜이 7레벨 마법을 사용했을 때 주변에 일시적인 마력 진공을 만들던 것과 비슷했지만, 그 규모와 힘은 차원이 달랐다.
쏜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건…? 9레벨...?"
성녀의 힘은 마학에 속한 게 아니다. 그러니 마법 주문의 레벨로 따질 수는 없는 것.
하지만 분명한 건 언젠가 스승인 벡스가 시연할 때 딱 한 번 봤던 9레벨 주문과 유사한 힘을 낸다는 것이었다.
아니, 어떤 점에 있어선 일반적인 9레벨 주문보다 무겁고 강해 보였다.
일순간 섀도우 위자드가 쓰던 마법이 일거에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사라져 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쏜이 제일 놀란 건 그게 아니었다. 저 이질적인 기운을 언젠가 자신이 체험한 적 있다는 걸 깨닫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분명하다. 틀림없었다. 지금 성녀가 쓰는 저 힘은 그 베니엘이란 악당이 쓰던 것과 똑같은 기운이었다.
하지만 쏜은 더는 추론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전멸이 코앞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리더로서 결단을 내렸다.
"모두 후퇴하세요! 전력을 빠져나가는 겁니다!"
설마 쏜이 이렇게 쉽게 후퇴를 결정할지 몰랐던 섀도우 위자드는 술렁거렸다. 적이 대단하다곤 하지만 쏜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거나 말거나 쏜은 단호했다.
"이대로 휘말리면 전멸입니다! 제가 시간을 벌고 막겠습니다! 어서요!"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직원들은 전력으로 그곳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호숫가로 나룻배를 황급히 밀었고, 마법사들은 비행 마법을 발동했다.
"쏜 님!"
토니아는 이번에도 곤경에 처한 쏜을 보고 소리쳤다. 그러자 쏜이 답했다.
"저는 스승님이 구해주실 겁니다! 부관은 방해만 되니 물러나세요!"
토니아는 무력감과 함께 의문을 느꼈다.
'설마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리 봐도 절망적이다. 그녀 역시 능력 있는 마법사고, 지금 성녀가 일으키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토니아는 쏜을 다시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만약 쏜 님이 살아남게 된다면....'
토니아는 이 문제를 파헤쳐 보기로 다짐했다. 그걸 위해 쉽게 죽을 수 없는 법. 그녀는 즉각 마법을 발동하며 후퇴했고, 다른 마법사들도 그녀를 따랐다.
얼마 뒤.
섬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쿠아아아아앙!
거대한 십자가형 빛기둥이 위로 치솟았고, 모든 걸 태워버리는 듯한 열기가 일대를 휘감았다.
화르르르르!
그 여파가 사라지기까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주변은 다시 고요해졌다.
일대가 불바다인 탓에, 유기물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타닥타닥.
쏜은 그 불길 속에서 반 이상 타버린 몸으로 숨을 허덕였다. 금방이라도 죽을 듯한 모습이다. 이미 폐와 혀가 다 타서 말조차 못 하는 상태.
그런 그를 향해 성녀가 다소곳하게 걸어와 말했다.
"왜 성녀가 나타났냐고 물으셨지요?"
"...그으. 그윽."
성대가 망가진 탓에 괴이한 소음만이 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다가올 미래를 열기 위해 왔답니다. 위대한 초월자의 귀환을 위해서 말이에요."
그 말과 함께 성녀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팟―!
빛과 함께 충격파가 일었고 쏜의 이마가 관통됐더니 그는 풀썩 쓰러졌다. 성녀는 더는 쏜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호수 저편, 아직 나타나지 않은 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 사도시여. 고귀하신 분. 어서 뵙고 싶네요."
***
지저의 야생지대는 늘 밤이 계속되는 것 같은 광경이다. 도심지야 낮에는 조명이 환하게 켜지고, 밤에는 꺼지는 식이지만, 자연의 변화는 크지 않다. 그렇기에 에본플로우의 깊은 물은 언제나 시커멓게만 보였다.
한데 그때.
빛이 작렬했다.
번쩍!
마치 지상에서 해가 뜬다는 신기한 광경을 표현할 때처럼, 주변이 환해졌다. 평소에는 너무 높아서 어둠에 가려져 있던 수 킬로미터 위쪽의 동굴 천장까지 빛이 닿을 정도였다.
선창에 나와 있던 베니엘은 자세를 낮추며 소리쳤다.
"충격에 대비해!"
갑작스러운 빛에 얼이 빠져 있던 선원과 원정대원들은 베니엘의 지시에 즉각 따랐다. 마스터조차 납작 엎드리는 상황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대강 15초 정도 뒤, 폭음이 뒤따랐다.
쿠아아아앙―!
저 멀리서 엄청난 무언가가 터진 게 틀림없었다.
충격파 역시 거의 비슷한 속도로 도착해서 주변에 크게 파도가 일어나며 배가 흔들렸다. 이렇게 큰 배도 요동칠 정도니 주변에 작은 배는 단번에 전복돼 난리가 벌어졌다.
"끄아아아악!"
"살려줘!"
구조를 해주고 싶어도 배가 뒤집힌 순간 호수에 있던 포식자들이 무슨 배고픈 붕어 떼처럼 달려들어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와 함께 폭발에서 불 불은 돌덩이들이 마치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쓔우우웅! 슝! 슈우웅!
평화롭던 호수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됐다.
한참 뒤에야 그 모든 여파가 사라졌는데, 주변에는 부서진 작은 배들의 파편과 찢어진 시체 조각과 떠다니는 쓰레기로 가득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얼굴에 황망함만이 가득했다.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선장이 반쯤 넋이 나가서 묻자 베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나라고 알겠나? 엄청난 주문이 발동한 모양이야. 정신 차려라. 서둘러 정박해야겠다."
"윽, 알겠습니다."
***
다행히 더 큰 일 없이 일행은 드란실 공작령의 수도인 드라카니아에 도착했다.
항구는 이미 폭발에 대한 얘기로 떠들썩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나라고 알겠나! 우리 조타수가 놀라서 호수에 떨어졌는데 그 뒤로 못 찾았어!"
"에이, 그 정도면 다행이니. 행크네 배는 아예 소식이 끊겼다고!"
도시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하지만 저것도 금방 잦아들 것이다. 지하에서 이런 사건은 언제나 벌어지는 법이니까.
옆에서 걷던 지상인 올리비에가 물어왔다.
"드라카니아로 온 걸 보니,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원정대를 조직해서 마그라스를 잡으러 가실 겁니까?"
아무래도 그리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비슷하지만 달라. 게다가 원정대장에 제격인 드란실 공자가 지금 부재중이기도 하고."
원정대가 성공적으로 조직될 수 있었던 건 황금에 대한 탐욕과 드라카니아의 차기 주인이 될 드란실 공자의 참가 때문이다.
한데 지금 그 공자는 제도로 떠난 상태. 그는 권력에 정점에 있는 인물이라 여러 유력자들과 만남을 갖고 있었다. 황제가 약해지고 제국이 붕괴하려는 조짐에 대해 권력의 상층부에선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이었다.
"이런, 아깝군요. 그 공자는 돈이 많아서 좋았는데 말입니다."
"아니, 내 입장에선 오히려 잘 됐지. 드란실 공자가 있어 봐야 아리아나와의 만남은 언제냐고 귀찮게 굴 테니까."
"그렇다면 방책이 뭔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꾸려오신 인원으로 드래곤을 상대하긴 무리 같은데…."
올리비에의 곁에서 걷던 사냥개 로나가 동의하듯 컹! 하고 짓는다. 처음 보는 개의 모습에 지저인들의 시선이 쏠려왔다.
"그렇긴 하지. 사실 지난번 같은 원정대는 아니지만 마그라스를 잡으러 갈 사람을 모으러 온 건 맞아."
올리비에는 의구심을 표했다.
"쉽사리 모이려 할까요? 드래곤을 잡는 위험한 임무에?"
"걱정마. 마그라스라면 원한을 불태우는 자들이 이 도시에 여럿 있으니까."
"그게 누굽니까?"
"마그라스에게 수년간 거금을 뜯긴 채권자들."
"아! 빚쟁이들!"
다만 그 빚쟁이를 한곳에 모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채권자가 누군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들 그 드래곤의 교묘한 혓바닥에 속아서 막대한 돈을 빌려줬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자의 수단을 동원해 마그라스에게 빚 독촉을 하고 있었는데, 좀처럼 먹히질 않았다.
"마그라스 같은 거물은 채권단을 꾸려서 단합된 힘으로 추심에 들어가야지. 그런 압도적인 물리력 덩어리 앞에서 제각기 쪼아봐야 얼마나 먹히겠나? 물론 드래곤에게 스트레스를 주긴 충분하겠지만."
"그건 그렇군요."
"그래서 내가 이들을 한곳에 모아 채권추심위원회를 만들려고 하는 거야."
드래곤 사냥을 꼭 전문적인 드래곤 사냥꾼들만이 하는 게 아니란 소리였다.
베니엘이 생각하기에 분노한 채권자는 능히 드래곤의 머리를 자르고도 남았다. 돈이란 그 정도로 강력한 동기니까.
문제는 그 빚쟁이들이 누구냐는 것.
게임에서 자세히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나왔다 하더라도 베니엘이 그걸 일일이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
결국, 하나하나 찾아내야 했다.
올리비에는 상식적인 선에서 방법을 떠올렸다.
"지방 판사의 인장을 받은 공고문을 붙이는 건 어떨까요?"
베니엘은 바로 비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그걸 누가 보기나 하겠냐? 설령 봐도 무시할 거다."
애초에 인터넷에 공지를 올리는 것도 아니고 공고문이라고 해도 모르고 지나가는 게 부지기수일 거다. 게다가 속은 게 부끄러워 나서지 않는데 그딴 종이 쪼가리로 보고 모일 리가 없다.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에 베니엘이 방법이 있다고 했다.
"빚쟁이들이 화를 참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게 만들어야지. 동시에 빚을 받아낼 희망도 보여주고."
올리비에는 납득해선 끄덕였다.
"아, 생각해 보니 베니엘 님은 남을 화나게 만드는 게 특기였죠."
101화
채권추심위원회 (2)
납득을 하면서도 궁금한 건 역시 궁금한 모양이다.
"어떤 방법을 쓰실 겁니까?"
베니엘은 요즘 이 순박한 지상인 젊은이가 왜 이리 질문이 많아졌는지 잘 알고 있다.
사람 착하기만 하던 올리비에는 베니엘의 곁에서 점점 지저의 음험한 정치와 모략에 매력을 느끼며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 지상의 르텔 백작가로 돌아가면 써먹겠다는 듯 연신 궁금한 걸 물어보는 것이었다.
베니엘 역시 후일 그가 백작가를 계승하면 지상과의 교역에 유리할 터라, 제자를 가르치는 심정으로 모략에 대해 전수해주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찾아가는 게 그것 때문이야."
베니엘은 올리비에만 대동한 채 드라카니아의 번잡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 도시는 안개가 자주 껴서 사방이 훤히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곳곳에 드래곤의 발을 형상화한 철제 마법 조명이 설치돼 있었다.
번화한 도시답게 사방은 화려했다. 그러나 베니엘이 가는 방향은 쓰레기가 수북한 뒷골목. 대로와 다르게 그곳에는 헐벗고 말라비틀어진 아이들이 자주 보였다.
골목의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는 불한당과 건달도 여럿 보였으나 베니엘의 충실한 무장과 올리비에의 덩치를 보더니 감히 나설 생각을 못 했다.
"어디 귀한 도련님인가 보군?"
"저 옆에 인간족 호위 좀 봐. 분명 검투로 이름을 떨친 전사일 거다."
"저 팔뚝이랑 어깨는 정말 대단하군.... 허허."
올리비에는 이전에 지하 신전에 오크들과 전투를 할 때 온몸에 뼈 칼을 맞았다. 그 때문에 잘생긴 얼굴을 빼고 몸 여기저기 흉터로 가득했고, 이건 그를 역전의 용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건달들은 올리비에와 눈을 마주치자 급하게 고개를 숙이고 딴짓을 하기 일쑤였다.
베니엘은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올리비에 이 녀석, 하여간 겉모습만큼은 탁월하군.'
베니엘은 근처를 둘러보다 게임에서 본 적이 있는 파란 간판이 걸린 작은 건물을 찾아냈다.
[버섯머리 광대단]
이곳은 주로 거리에서 익살스러운 연극을 하며 돈을 버는 재주꾼들의 사무실이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판자 건물의 상태를 보니 썩 돈을 잘 보는 극단 같지는 않았다.
"이런 곳에 베니엘 님 같은 귀한 분을 상대할 자가 있는 겁니까?"
베니엘은 끄덕였다.
"여기 천재 작가와 가수가 있지. 뭐랄까, 아직 뜨기 전의 슈퍼스타 같은 거야."
"천재 작가와 가수라고요?"
"그래. 이번 일에 꼭 필요한 이들이다. 그게 아니라도 나중에 거물이 될 녀석들이니 안면을 터두면 좋지."
올리비에는 그런 걸 어떻게 아는지 의아했지만 묻진 않았다. 베니엘은 항상 그랬으니까.
"일단 들어가자고."
광대단의 사무실 안은 허름했다. 값싼 대신 비릿한 냄새가 나는 생선 기름 램프가 유일한 빛이었고, 사방엔 오래된 곰팡이가 가득했다.
벽면에는 즉흥적으로 생각난 대사를 끄적인 낙서와 조잡한 삽화가 그려진 포스터 따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주변이 온통 쓰레기장이다. 연극에 썼던 것 같은 도구와 옷가지들이 반쯤 부서진 가면과 함께 쌓여 작은 언덕을 이뤘다.
그런 혼돈 속에서 희미한 빛에 의지한 채 누가 오는지도 모르며 집중해 극본을 써 내려가는 한 지하 노움이 보였다.
서걱서걱.
그의 이름은 스크리블턴.
훗날 지하 세계에서 셰익스피어와 비슷한 영광을 차지하는 작가다. 하지만 그것도 나중 얘기고 아직은 이런 슬럼가 극단에서 삼류 극본이나 만지작거리는 지망생에 불과했다.
스크리블턴은 위로 잔뜩 뻗친 하얀 머리칼에 암석 같은 짙은 피부를 한 지하 노움족이었다. 짜리몽땅한 다리 때문에 의자 아래로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작가 특유의 고뇌로 가득 찬 얼굴로 잉크 범벅인 손을 열심히 놀려대는 중이다.
"젠장! 젠장! 젠장…! 재능충 새끼들 죽어! 이 스크리블턴 님에게도 너희들과 같은 재능이 있었다면! 으윽!"
그는 경쟁자인 다른 작가들을 향한 질시와 분노를 하염없이 내뱉으며, 오로지 글로 자신의 야망을 이루겠다는 뜨거운 열망에 사로잡혀 펜을 놀리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한 말라깽이 다크 엘프가 나타나 일행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 녀석은 글을 쓸 때는 말을 걸어도 듣질 못합니다. 어이쿠, 잠깐 지나겠습니다."
그는 양손 가득 쓰레기 같은 옷가지와 소품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몸을 게처럼 옆으로 해 베니엘과 올리비에 사이를 재주 좋게 빠져나가더니 노움 근처에 그걸 요란하게 내려놓았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지만 노움은 손을 휘저을 뿐 쳐다보지도 않는다. 결국 다크 엘프가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이봐, 스크리블턴! 손님이 왔다고!"
"아아악!"
갑작스러운 고통에 그제야 스크리블턴이 다크 엘프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격노해서는 짧은 다리로 의자에서 뛰어내려, 상대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이런 무례한 새끼! 이 버릇 없는 귀쟁이 새끼가! 이 어르신이 작업할 때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어!"
성난 황소 같은 그 모습에도 말라깽이 다크 엘프는 여유로웠다. 실제로 투우사처럼 노움의 돌격을 피해내며, 마치 연극을 하는 듯한 과장된 몸짓으로 베니엘 일행에게 인사를 해왔다.
"이 무례한 친구를 대신해 제가 인사드리지요. 저는 극단의 가수 바엘리온이라 합니다."
그는 훗날 제국에서 제일가는 가수가 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여기 이 작은 황소 같은 친구는 삼류 작가 스크리블턴이고요."
"삼류라니! 이 독버섯 같은 새끼가! 삼류는 네가 삼류지! 네놈 목소리는 여자 꼬실 때밖에 쓸모가 없잖아!"
바엘리온은 다시 돌격해 오는 친구의 이마를 긴 손으로 밀어내며 베니엘에게 설명했다.
"원래 나쁜 친구는 아닙니다. 글을 쓸 때는 좀 민감해지는 게 문제죠. 삼류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 말입니다. 이런 고약한 성질머리로 자신이 사실 재능있는 괴짜인 척하고 싶어 하거든요. 하핫!"
그와 함께 바엘리온은 손을 떼버리며 옆으로 피했다. 그러자 앞으로 이마를 밀던 노움은 비명과 함께 그대로 쓰레기 더미에 처박혔다.
"아악!"
베니엘은 이 일련의 모습에 대해 짧게 평했다.
"이 모든 꼬락서니가 즉흥극이라면 제법 괜찮군. 내가 사람을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야."
바엘리온은 반색했다.
"혹시 일감을 주시려는 겁니까? 귀족 나으리? 만약 그렇다면 저 바엘리온, 앞으로 나리를 은인으로 섬기겠습니다. 저희 극단은 가까운 시일 내에 이 보잘것없는 둥지에서 쫓겨날 예정이거든요. 사정이 많이 안 좋다는 거죠."
일감이란 말에 성질만 내던 지하 노움 스크리블턴도 입을 다물고 베니엘을 쳐다본다. 그의 얼굴에 어찌 설명하기 힘든 열망이 가득해 보였다.
베니엘은 흡족했다.
"이거 둘 다 의지가 충만하구만. 그렇다면 못 맡길 것도 없지. 거리에서 한편의 희극을 공연하고 싶네."
스크리블턴은 다소 불만을 표했다.
"희극 같이 가벼운 건 제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좀 더 진중하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비극이.... 으읍!"
하지만 그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바엘리온이 근처에 있던 걸레 같은 천으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명했다.
"저건 흔히 말하는 작가적 자존심이란 것이지요. 하지만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하찮은 결의는 반짝이는 동전 앞에서 사르르 녹아버리거든요. 제가 보증하지요. 하하하. 돈만 주신다면 희극이든 비극이든 뭐든 가능합니다요."
듣고 있던 스크리블턴이 걸레를 뱉어내며 소리쳤다.
"그건 합리성이란 것이다! 타협이 아니라!"
"아, 그러시겠지. 내 좋은 친구여."
"너 같은 친구 놈은 없어! 다크 엘프랑 친구 먹는 노움이 어딨어?"
"허허, 우리 우정을 부정하지는 말게. 나는 언제나 자네를 사랑한다네. 내 성질 나쁘고 짧은 친구."
내버려 두면 저 만담이 끝나질 않을 것 같았다. 베니엘은 검지를 들어 올려 둘은 입 다물게 만들었다. 이 귀족 특유의 건방진 손짓은 확실히 평민들을 주눅 들게 하는 점이 있었다.
"어떤 희극을 원하는지 설명해주지."
베니엘이 원하는 연극은 이랬다. 어느 날 사기꾼 드래곤 마그라스가 드르카니아에 나타나 온갖 입 발린 소리로 귀족과 부자를 사기 쳐서 자금을 빌린다는 내용이었다.
뻔한 사기였지만 탐욕에 눈이 먼 귀족과 부자들은 거기에 홀랑 넘어가고 마그라스는 유유히 그 돈을 갖고 떠난다는 소리.
이후 채권자들이 돈을 달라고 독촉하지만 마그라스는 콧방귀도 끼지 않고 연일 귀족과 부자를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채권자들의 어리석음을 최대한 부각해야 한다. 마침 평민들은 귀족과 부자를 아니꼽게 여기지. 그들의 가려운 점을 살살 긁어주는 식으로 전개하면 인기를 끌 수 있을 거다."
생각보다 그럴싸한 얘기에 스크리블턴은 집중했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습니다. 나리."
"좋아. 이후 마그라스는 기막힌 행보로 사기를 치고 도시를 떠나 자신의 둥지에 숨는 거로 끝난다. 중요한 건 채권자들을 연극 내내 실컷 조롱해줘야 한다는 거다."
옆에서 듣던 바엘리온이 물었다.
"설마 마그라스라는 게 그 유명한 물돼지 마그라스를 말합니까?"
"그래."
"헉! 설마 이거 실화 기반입니까?"
"어느 정도는 말이지. 하지만 연극이 대개 그렇듯 과장이 더해져야 재밌겠지. 조미료처럼 말이야. 관객의 흥미를 최대한 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일단 기획 자체는 둘의 흥미를 끌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며 나쁘지 않겠다는 듯 끄덕였다.
"주민들 반응을 꽤 끌어낼 수 있겠지?"
"그래, 풍자극은 언제나 잘 먹혀. 다만 높으신 분들이 분노하지 않을까 걱정이군."
"나는 우리 처지가 더 걱정이라네. 내 친구, 오늘 먹을 저녁은 충분한가?"
마침 기다렸다는 듯 노움의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바엘리온은 미소를 지으며 베니엘에게 말했다.
"저희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윗분들에게 꽤나 미움을 살 것 같은데 수고비는 얼마나 가능할지... 헤헤."
그리 말은 하면서도 바엘리온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극단에 일감을 맡기는 귀족이 가끔 있었으나 대단히 인색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술과 연극이 뭔지 몰랐다. 그저 조상이나 집안의 허구적인 업적을 더욱 부풀려 찬양하길 바라는 이들이었다.
'아마 이자는 마그라스를 이용해 상대 가문을 욕보이고 싶은 모양이지.'
한데 생각지도 못한 금액이 튀어나왔다.
"일천 두크를 주지. 어떤가?"
"허어업!"
바엘리온은 스스로 우아하며, 가난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남자라 자부했지만 지금만큼은 기함하고 말았다.
"저, 정말이십니까?"
거리의 하찮은 연극단에 일감을 맡기는 조건으론 대단한 금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옆에서 한껏 무게 잡고 있던 노움 작가님께서 동공이 지진이 난 듯 떨리고 있었다.
"일천… 일천… 일천…!"
그는 계속 손가락으로 셈을 하며 그게 얼마나 대단한 금액인지 헤아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한데 베니엘은 여기에 폭탄을 한 번 더 던졌다.
"일을 빠르게 처리해주면 일천 두크를 더 주지."
"커헙!"
"헉! 도합 이천이라니!"
2천 두크라 하면 한국 돈으로 치면 1억 정도 된다.
건물세가 밀리고 당장 먹을거리도 걱정해야 하는 이들에겐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버섯머리 광대단에는 이 둘만 있는 게 아니다. 딸린 입이 많았고 그들 모두 근심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건만 해결하면 한동안 모두 안락하리라.
결국 스크리블턴은 크게 소리쳤다.
"받겠습니다! 받겠습니다! 나으리! 그 돈이면 이 천재 작가님께서 드디어 통속적인 극본이 아니라 작가주의로 가득한 천재 극본을 쓸 여유가 생길 터!"
옆에서 듣던 바엘리온은 그 작가주의적 천재 극본이 일생 동안 나오지 않으리란 점을 알고는 고개를 저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스크리블턴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에 재능이 있을 뿐이었으니까. 철학적 고뇌와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 같은 것에는 영 잼병인 친구였다.
"받아준다면 좋지."
베니엘은 끄덕였다. 흥분한 스크리블턴보단 그래도 일말이나마 이성을 잡고 있던 바엘리온이 물었다.
"빠르게라면 얼마나 말입니까?"
베니엘이 요구하는 조건은 이랬다.
"완전히 새로 쓴 극본으로 보름 안에 거리에서 공연할 수 있게 하라."
당연히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리입니다! 나리!"
"나리께서 이 바닥의 일 처리를 잘 모르시나 본데…."
베니엘은 금전으로 그 항의를 제압했다.
"안 되겠군. 관객들의 반응이 좋으면 일천 두크를 보너스로 추가 지급하려 했는데. 못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듣던 천재 작가와 가수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총합이 3천 두크다. 그들은 현기증마저 느꼈다.
"하, 하겠습니다! 나리!"
"보름이 문제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잠은 죽어서 자면 될 거 같습니다요! 하핫!"
그렇게 거래는 성립했다.
사실 가난한 극단에 연극 한 편 맡기는 것 치고는 비싼 편이긴 했으나 베니엘에겐 껌값이었다.
게다가 이들이 장차 엄청나게 유명해질 건 알고 있기에 하는 투자에 가까웠다.
이 두 명은 보기보다 상당한 의리파라 이번 거래를 결코 잊지 않고 보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중에 돌려받을 걸 생각하면 삼만 두크라도 주고 싶지만…, 그러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거절하겠지.'
바로 계약서가 체결됐다.
102화
채권추심위원회 (3)
***
보름 뒤.
드라카니아의 광장에서 버섯머리 광대단이 나타나 연극 준비에 들어갔다. 이건 평소보다 주목을 끌었는데, 그들이 가져온 커다란 드래곤 모형 때문이었다.
딱 봐도 돈을 꽤 들인 잘 만든 물건으로, 안에 사람이 몇 들어가 실감 나게 움직이도록 조작하는 형태였다.
"와, 저게 뭐야?"
"드래곤이 나오는 연극을 하려는 건가?"
"상당히 근사한데? 한데 저 드래곤 말이야. 어딘가 익숙하지 않냐…?"
이러니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이런 길거리 연극은 푼돈 정도만 던져주면 얼마든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조차 안 하는 이도 많았지만.
"여! 언제 시작하는 거야!"
"그래, 기다리잖아! 빨리, 빨리 하라고."
대개 그렇지만, 돈도 안 내는 놈들이 목소리가 제일 컸다.
다행히 준비는 금방 끝났고, 곧 연극의 사회자가 나섰다. 그는 극의 중간, 중간 끼어들어 설명하는 자로, 마치 무성 영화의 변사(辯士)와 비슷한 역할이었다.
"자, 모두 주목하시라! 여기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놀라운 이야기를 우리 재능 넘치는 버섯머리 광대단에서 피로하고자 하니 드라카니아의 젊은이, 늙은이, 애, 어른, 남자, 여자를 가리지 마시고 관람하시라!"
어느새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 사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와아아아아!"
"재밌겠는데!"
최근 경기가 안 좋은 데다가 제국 전체가 뒤숭숭해진 탓에 이런 길거리 연극은 오랜만이었던 까닭이다.
바쁘게 짐을 나르던 일꾼들조차 잠시 걸음을 멈추고 까치발을 든 채 기웃거릴 정도였다.
"뭐야? 뭔데 그래?"
"연극이래요! 잠깐만 보다 가요!"
"이거 시간 내에 끝내야 하는데…."
"아, 제발요!"
일 때문에 망설이는 자들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있으니 주목도만큼은 확실했다.
그때 사회자의 맛깔나는 진행과 함께 연극이 시작됐다.
"자! 보시라. 이 포악하고 욕심 많은 드래곤을! 이 자는 스스로 신사라 칭하나 우리는 그가 어찌 불리는지 알고 있노라. 여기 물돼지가 등장!"
그와 함께 커다란 드래곤 모형이 앞으로 나왔다. 안에 무려 세 명이 들어가 조작하는 탓에 높이만 2.3미터였다.
사람들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입 벌어지는 것 좀 봐!"
"물돼지구나! 아핫! 저 드래곤은 물돼지였어!"
"물돼지가 누구예요?"
"아, 요즘 얼라들은 모르나?"
그때 드래곤의 안쪽에 있는 극단의 배우가 대사를 내뱉었다.
"이 위대한 몸은 호수의 신사 마그라스!"
당연히 야유가 터졌다.
"우우우우우―!"
"신사는 개뿔! 자칭 신사!"
"뭔 놈의 신사가 그렇게 강도질을 많이 해!"
이에 즉석해서 드래곤이 엉덩이를 관객 쪽으로 내밀더니 방귀를 뀌었다.
뿌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얀 가루가 뿌려졌고 주변에서 폭소가 터졌다.
"방귀쟁이! 이 더러운 드래곤이!"
"아악! 하하하핫!"
사람들은 아주 즐거워했다. 이런 즉흥적인 소통 역시 거리에서 하는 연극의 매력이었다.
"시끄럽다! 미물들아! 이 마그라스 님께서 도시의 금화를 받아갈 것이다!"
그때 장면이 바뀌고 세 인물이 나타났다. 그들은 깃털 모자를 쓴 자, 배가 나온 자, 금화 주머니를 든 자 등이었는데 각기 귀족, 상인, 고리대금 업자를 상징했다.
당연히 야유가 터졌다.
"우우우!"
"염병할 놈들!"
하지만 그들은 그딴 건 상관도 없다는 듯 도발적인 표정으로 귀를 후미며 나오더니 저마다 대사를 내뱉었다.
"어디 돈 되는 사업 없나?"
귀족 역할은 다크 엘프 바엘리온이 맞고 있었다. 그는 가수지만 유능한 배우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종합예술인, 나쁘게 말하면 인력 부족으로 그냥 아무거나 다한다는 소리였다.
"개돼지들의 돈을 빨아먹는 게 저희 일이죠!"
"맞습니다. 나리."
상인과 고리대금업자의 대답에 귀족은 고개를 저었다. 바엘리온은 표정 연기가 특히 뛰어났는데 누가 봐도 아주 밉살스러웠다.
"아니야. 개돼지들 돈으론 만족하지 못해! 뭔가 재산을 획기적으로 늘릴 방법이 필요하단 말일세!"
그런 뉘앙스의 대사가 계속 이어졌다. 평민의 분노를 지피는 내용에 더불어 돈을 더 갖고 싶다는 그들의 탐욕을 부각하는 내용이었다.
이때 드래곤 마그라스가 등장했다.
"나의 선량한 친구들. 그대들의 염원은 이뤄질 것이다!"
갑작스러운 드래곤의 출현에 셋은 주춤했으나 그것도 잠시.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관심을 표했다.
"호수의 잘 알려진 신사시여. 무슨 신통한 방법이 있단 말이오?"
마그라스가 제시한 건 사기로는 유서 깊고 근본 넘치는 보물선 인양 작업이었다.
"근자에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보물선을 발견했지. 이것은 과거 제국은행의 금괴를 옮기던 배이야! 이걸 인양할 수만 있다면 억만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투자하라! 성공에!"
마그라스의 혓바닥은 교묘했다. 그 인양 작업은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으며 자금을 지원한다면 성공 보상금만 아니라, 매월 투자금의 이자 20%를 지급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실제로 마그라스는 보물 몇 개를 가져와 내밀었다. 그건 텅 빈 그의 둥지에서 긁어온 몇 개 안 남은 재산이었다.
"이건 보물선에 있는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한 줌! 어떻게 하겠나?"
탐욕스러운 귀족, 상인, 고리대금업자는 곧 마그라스의 혓바닥에 홀랑 넘어가 돈을 바쳤다.
"여기 있습니다!"
"부디 그 성공을 우리에게도!"
"마그라스 님만 믿습니다!"
돈 때문에 뻔히 보이는 사기에 넘어가는 모습이 관객들에겐 아주 어리석게 보였다. 당연히 비웃음이 뒤따랐다.
"황금 때문에 아무것도 못 보는 모양이구나!"
"저딴 게 귀족이라고! 쯧!"
"다 똑같은 놈들이야. 한심하기 이루 말할 수 없군!"
어느새 연극은 마지막으로 향했다.
사실 보물선 인양은 사기였고 마그라스는 막대한 돈을 챙겨서 잠적하는 전개였다. 투자에 대한 채권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드래곤이 보이지도 않으니 아무 소용없었다.
귀족과 상인, 고리대금업자는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어댔다.
"망했다! 망했다고!"
"우리가 그 간사한 놈의 혓바닥에 당했어!"
"끄아아아악!"
어찌 보면 뻔하고, 또 유치한 전개기도 했다. 하지만 관객은 아주 흡족한 모양이다. 특히 돈과 특권을 가진 자들이 한 방 먹는 게 시원한 모양이다.
"잘했다! 마그라스 잘했어!"
"멍청한 놈들! 크하하핫! 저리 욕심이 많으니 당하지!"
"근데 저 귀족이랑 상인, 고리대금업자가 누구지?"
"가공의 인물 아닌가?"
"아니, 전개를 보니 실화를 기반으로 한 것 같은데…?"
그날 거리의 연극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원체 이야기 자체가 클리셰 덩어리라 잘 먹힐 법한 데다가, 평민들의 대리만족 역시 확실히 챙기고 있었다.
거기에 천재 작가 스크리블턴의 필력이 더해지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평생 처음 맛보는 이 열렬한 반응에 스크리블턴은 입이 헤, 벌어졌다.
"알겠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이런 거였어! 대중의 환호! 이것이 날 숨 쉬게 한다!"
돈을 쓸어 담는 위대한 상업 작가의 탄생이었다.
다크 엘프 가수 바엘리온은 역시 퍽이나 감격한 상태. 뭐랄까, 동전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관람비를 주다니! 이것만 챙겨도 밥걱정은 없겠어!"
뒤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베니엘은 휘하의 용병들, 속칭 노가다 크루에게 명령했다.
"이제부터 내가 알려준 대로 소문을 퍼뜨려."
그건 술 처먹고 헛소리를 하는 일이라, 노가다 크루가 세상 누구보다 잘하는 것이었다.
***
연극은 성공했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진행됐다. 요즘 드라카니아의 주민 중 이 연극에 대해 얘기 한 번 안 하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한데 이 연극에 관한 내용 중 가장 뜨거운 화제가 있었다.
"대체 물돼지 같은 놈에게 당한 자가 누구요?"
"음? 그냥 풍자 아니오?"
"아니라더군. 내가 어제 술집에서 들었는데 실화 기반이라고 했소이다."
"정말?"
"이 친구 말이 맞아. 나도 들었지. 벌써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있어."
설왕설래가 오갔는데 드라카니아에서 돈이 많은 이들의 이름이 모조리 나왔다. 호사가들은 연신 떠들어댔고, 거기에 더해 멍청한 채권자들을 맞추는 내기까지 이어졌다.
"아무래도 트렐리소 자작가 같은데? 몇 해 전에 크게 한 번 가세가 휘청인 적 있지 않소?"
"내가 보기엔 아슈칸도르 상인 가문이오. 원래 크게 세를 불려 에본플로우 곳곳에 상관을 짓는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갑자기 취소됐지. 다 사기를 당해서 그런 거 아니오?"
"이 사람의 의견은 고리대금업자 카트나가 아닐까 싶소. 내 은밀히 들었소만 몇 해 전부터 드래곤 사냥꾼들을 모집하더군. 왜 고리대금업자가 드래곤 사냥꾼을 찾나 싶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리오!"
연일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가자, 이런 상황 자체가 불편한 자들이 여럿 나왔다.
진짜 채권자인 트렐리소 자작 같은 이였다. 드래곤킨인 그는 드란실 공작가를 따르는 전통적인 기수 가문의 주인이었다.
"이런 비루한 천것들이 감히 우리 가문에 대해 멋대로 떠든다고! 이놈들을 당장! 크르르르!"
드래곤 인간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물들어서 풀릴 줄 몰랐다. 요즘 그는 매일 열불이 터져 쓰러질 것만 같으니 어쩔 수 없었다.
가뜩이나 물돼지에게 떼먹힌 돈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 게 몇 년이다. 하나 나의 불행은 남의 행복이라고, 이 사실을 잘 감춰왔다. 알려져 봐야 동정은커녕 비웃음만 당할 테니까.
한데 어느 날 이상한 연극이 유행하더니 사람들이 트렐리소 가문에 대해 연일 쑥덕댄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자작이 천치 같은 놈이라 드래곤에게 속았다느니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정말 뾰족한 비늘이 돋은 목덜미를 잡고 쓰러졌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크워어! 가서 그 흉참한 연극을 하는 무리를 잡아 와라! 내 직접 엄하게 단속해 도시의 풍속을 교화할 것이야!"
이대로 뒀다가는 가문의 수치가 사방에 퍼질 터. 요즘 은근히 당한 게 맞냐고 물어오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결국 트렐리소 자작은 진화에 나선 것이다. 이런 짓을 했다가는 트렐리소 가문이 정말 맞다는 소문이 번질 우려가 있었으나 더는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이 녀석들! 얼굴이나 한번 보자! 크릉!"
한데 어째서인지 보낸 사병들이 소식이 없는 것이다.
"뭐지? 그깟 놀이패 나부랭이들 잡아 오는데 왜 이리 걸려?"
그리고 얼마 뒤, 보냈던 녀석들이 돌아오긴 했다. 퉁퉁 부은 얼굴에 팔다리가 부러져서는 말이다.
"네놈들 꼬락서니가 그게 뭐냐!"
"저, 이걸... 전해드리랍니다...."
목발을 짚은 사병 하나가 힘겹게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트렐리소 자작은 편지를 열어보고는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내용은 이랬다.
[배우들에게 애꿎은 화풀이 하지 말고, 진짜로 채권을 회수하고 싶으시면 절 찾아오십시오. 마그라스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베니엘.]
내용도 충격적이었으나 베니엘이란 이름이 제일 눈길을 끌었다.
'나이트쉐이드의 베니엘이라 하면 분명 그!'
바로 그 악랄한 물돼지 놈들 패퇴시키고 폐허 도시에서 커다란 명예를 얻은 자가 아닌가? 게다가 검은 별 나르다리온의 아들이기도 하고.
'벌써 검술로 이름이 높은 마스터라고 했지.'
트렐리소 자작의 반응만 봐도, 베니엘이란 이름은 예전에 망나니던 시절과는 무게감 자체가 달려져 있었다. 트렐리소 자작은 베니엘이란 이름이 보증하는 이 편지의 내용에 사로잡혔다.
"빚을 받을 수 있다고…?"
물론 미심쩍긴 하다. 함정이나 속임수일 수도 있어 고민이 깊어졌다. 하지만 그 유혹이 너무 달콤했기에 결국 그는 베니엘을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빚쟁이가 하나 더 있었지. 같이 가보자고 해야겠군.'
***
베니엘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모았다. 견디다 못한 채권자들이 연극단에 압력을 가할 때마다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채권자들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연락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올리비에의 보고에 베니엘은 거만한 표정을 끄덕였다.
"당연한 수순이지."
"그런데 일부는 여전히 버티고 있습니다. 괜찮을까요?"
"내버려둬. 어차피 이번 원정에 참가할 사람은 많아."
"네? 더 있습니까?"
"그래, 도시에 광풍이 불고 있으니,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휘말리는 부류도 생기기 마련이지."
베니엘이 얘기하는 자는 바로 고리대금업자 카트나 가문 같은 경우였다. 그들은 딱히 트렐리소 자작 같이 채무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상황이 괴이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황당한 일이! 저 무리는 왜 우리 집 앞에서 시위하는 건가!"
거의 백여 명의 사람들이 연일 집 앞에서 소리를 질러대자 가주인 '가른 카트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인정하라! 인정하라!"
"채권을 인정하라!"
옆에 시립한 집사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답했다.
"주인님께서도 근자에 도시에서 유행하는 연극에 대해 아실 것입니다."
"알아! 안다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사람들은 주인님께서 마그라스에게 돈을 떼인 자 중 하나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실 아니었다. 물론 그 간악한 드래곤에게 보물선 탐사 제안을 받은 적은 있지만,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넘어가지 않았다. 나중에 업계의 다른 녀석들이 피눈물을 흘릴 때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나는 아니란 말이다!"
항변하는 카트나에게 집사가 설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많은 사람이 채권자 명단을 맞추는 내기를 했는데, 가장 유력한 게 카트나 가문입니다. 아무래도 대부업을 가업으로 하다 보니…."
"뭐라고!"
"아무튼, 카트나 가문에 돈을 건 자들이 많다는 소리지요. 한데 주인님께서 아니라 선언하셨으니 그 치들은 돈을 몽땅 잃게 생겼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고리대금업자 카트나는 황당함에 입을 쩍 벌렸다.
"그래서 내가 마그라스에게 당한 피해자여만 한다는 건가?"
"네, 맞습니다. 안 그러면 자기들이 지니까요. 저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래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다시 밖이 시끄러워졌다.
"인정하라! 채권자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
"와아아아아! 문을 열어라!"
이러다가는 정문을 부수고 시위대가 저택 안으로 난입할 기세였다.
결국, 얼마 뒤 가른 카트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맞소! 내가 빚을 졌소!"
억울함이 절절이 묻어나는 말에 시위대는 환호했다.
"와아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승리했다!"
대체 뭘 이긴 건지 카트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을 보고 온 올리비에는 소름이 돋아 물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예견하신 겁니까?"
"당연하지. 애초에 시위대를 후원한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올리비에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한 수 제대로 배웠습니다."
도시 전체가 이런 광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 결과, 돈을 받아낼 수 있다는 희망에 불타는 채권자, 이번 추심이 뭔가 큰 건수라 여기는 자, 아니면 드래곤과 싸웠다는 명성을 얻고 싶은 자, 아직 물돼지에게 남은 재산이 있을 기대하는 자 등이 베니엘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들 모두를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본 추심위원회는 모두를 환영합니다. 설령 채권자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이건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니까요."
103화
채권추심위원회 (4)
***
베니엘은 드라카니아 부두의 한 창고를 임대해서 마치 모델 하우스 꾸미듯 급하게 안을 단장했다. 그리고 그럴싸한 간판을 붙였다.
[마그라스 채권추심위원회]
일단 겉보기에는 꽤 그럴싸했다. 베니엘은 만족해서 끄덕였다.
"좋아. 뭐든 그럴 듯하게 보여야 일이 되는 법."
오늘 위원회의 첫 번째 회의가 열리는 날이다. 난장판이 예상되는 바였으나 베니엘은 여유만만했다.
오히려 옆에서 부관 역할을 하는 올리비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저들도 이쪽에서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만든 건 알고 있을 테고요. 격한 반발이 예상되니 회의가 파행으로 치닫지 않겠습니까?"
하나 베니엘은 여유만만이었다.
"알아. 하지만 잘될 거야. 왜냐하면 나는 이런 일에 익숙한 데다가, 좋아하거든."
"아, 예...."
올리비에는 벌써부터 신이 난 듯 생글거리는 베니엘을 보며 괜한 걱정을 했다 싶었다. 딱 봐도 분탕질을 치고 싶어 들뜬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다크 엘프라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이 사람 천성이 이런 건가?'
이후 몇 시간 뒤 회의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러자 사전에 참가를 신청한 많은 인물이 넓은 창고 안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종족도 직업도 신분도 다양했다.
마치 맥주홀처럼 잔뜩 깔린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인 그들은 저마다 떠드느라 바빴다.
"이게 다 무슨 난리인가 싶소!"
"흥! 젊은 놈의 영웅 놀음에 순순히 응해줄까 보냐!"
"지난 원정에서 재미를 보고 또 비슷한 일을 계획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가 따를 까닭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전 빚을 지지 않았습니다!"
"크흠…! 물론 본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일이 돌아가는 게 궁금해서 와봤을 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는 이들은 대부분 채권자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기대감을 완전히 감추진 못했다.
"그래도 그 유명한 베니엘 아닙니까? 정말 마그라스를 상대로 돈을 받아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크흠… 아니, 망나니 놈이 언제부터 '그 유명한 베니엘'이 됐소?"
"원래 젊은이는 사흘만 있어도 달라지는 법입니다. 애써 부정해봐야 그가 에본플로우에서 명성을 떨치는 영웅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건 날카로운 지적이었고, 불만종자들 가운데 가장 입김이 센 편인 트렐리소 자작은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크르르! 일단 두고 볼 일이오! 내 제대로 따져보고 허술한 구석이 있으면 그 젊은이가 이번에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한 건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지!"
그때 올리비에가 나타나더니 우렁차게 외쳤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이신 베니엘 님이십니다!"
그와 함께 왁자지껄한 소리가 멈추고 연단 쪽으로 일제히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난 원정의 영웅이 여유롭게 걸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부가 참지 못하고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아아아아! 베니엘 님!"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지난 폐허 도시의 원정에서 제대로 한몫을 챙긴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번 일의 당사자도 아닌데 뭐가 떨어지는 게 없을까 싶어 끼어든 것.
베니엘은 웃는 낯으로 그들과 눈을 마주치며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연단에 섰다.
"모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모인 명예로운 신사분들께 이 나이트쉐이드의 베니엘이 인사드립니다."
일단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베니엘은 이제 명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줄곧 입이 근질거리는 걸 참고 있던 자들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먼저 드래곤킨인 트렐리소 자작이 노여움을 감추지 않고 외쳤다.
"용감한 젊은이여! 오늘 우리를 부른 것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오. 내 솔직히 말하자면, 그대가 벌인 일은 참으로 모욕적이었소만!"
베니엘은 일단 바로 사과했다.
"그 점에 대해선 송구하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조치였음을 밝힙니다. 마그라스 같은 막무가내의 악성 채무자를 상대하기 위해선 선량한 채권자들의 힘을 결집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땠습니까? 서로가 피해를 감추느라 손을 잡지 못하고 수년을 무의미하게 보냈을 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대꾸가 어려웠다. 대신 트렐리소 자작은 불편한 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크르르!"
"일전에 마그라스를 만나보니 오히려 채권자들을 비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멍청이들에게 갚을 돈은 없다나?"
자작은 발끈했다.
"여기까지 불러들여 우리를 망신 주려는 것인가! 나이트쉐이드의 베니엘!"
"진정하시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베니엘은 자작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청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한 가지만은 확언하지요. 결코 여러분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왔던, 무언가 기대하시는 바가 있었을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것을 채워드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때 아슈칸도르 상인 가문의 수장이 나섰다. 그 역시 채권자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상회의 정보력을 총동원하고 있지만 폐허 도시의 격전 이후 마그라스의 행방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베니엘이 단언했다.
"걱정 마십시오. 말했듯 저는 마그라스의 은신처가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다."
창고 안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정말인가? 어떻게?"
"역시 뭔가 알아낸 게 있으니 이렇게 판을 크게 벌였겠지."
"여기 있는 자들이 다 몰려가 마그라스를 붙잡으면 볼만하겠군."
고리대금업자 카트나가 물었다.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사실 그는 엉뚱하게 휘말려 여기까지 왔으니 이미 이 일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정말로 베니엘이 마그라스의 은신처를 안다면 한번 투자해 볼 만한 일이 아닐까?
"물론 전 알고 있지만 중대한 비밀인 만큼, 추심위원회와 함께하기로 결정한 분들께만 알려드릴 생각입니다."
트렐리소 자작이 의문을 제기했다.
"일단은 알겠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을 시작한 동기가 수상하구려. 그대는 자신의 공명심 때문에 우리를 사지로 끌어들이려는 게 아니오? 크르르르!"
베니엘은 태연히 답했다.
"전혀 아닙니다. 저는 오로지 마그라스 같은 고약한 자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채권자분들이 안타까워 나서게 된 것입니다."
"하! 어수룩한 아이도 안 믿을 소리!"
"하면 어떻게 하면 믿겠습니까?"
그 물음에 트렐리소 자작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충분한 성의를 보이면 되겠지! 그대가 이번 일에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는 수작이 아니라면 말이오!"
베니엘은 왜 자작이 저리 뻗대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기선제압 겸 베니엘에게 필요한 양보를 얻어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채권추심위원회를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싶은 모양이군.'
그렇다고 해서 베니엘이 위원장 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채권추심은 영영 시작되지 못하고 이곳에서 수년간 답 없는 회의만 진행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각양각색의 무리를 마그라스 앞에 투척하려면 강한 지도력이 필요한 법이다. 일전에 베니엘이 폐허 도시 원정대장 자리를 드란실 공자에게 양보한 건, 그가 실제로 강력한 리더기도 하고 베니엘의 말을 잘 들어줘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베니엘은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저 역시 그런 우려를 잠식시키고 여러분께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하면 어쩌겠소!"
"여기서 모인 신사분들께 제 검에 대고 맹세를 하겠습니다."
그 말에 몇몇 자들이 아는 척했다.
"검의 맹세!"
"절대 어길 수 없는 것이라 들었는데!"
"마스터가 하는 맹세!"
물론 그건 몇몇 음유시인들이 퍼뜨린 헛소리다. 마스터가 검에 대고 하는 맹세는 아무 효력도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세간에선 드래곤이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와 비슷한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그걸 어기면 더는 검을 휘두를 수 없게 된다나?
'누군지 모르지만 그런 편리한 설정을 붙여준 시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군.'
다행히 그 설정은 아직 뽀록나지 않았으니 열심히 써주는 수밖에.
"대체 뭘 맹세하려는 거지?"
"글쎄. 저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준은 돼야 할 텐데…?"
참석자들의 기대 속에서 베니엘은 공언했다.
"저는 오로지 선의와 명예를 위해 이 자리에 나섰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제 검에 대고 맹세합니다. 이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베니엘은 이번 원정의 성공 이후 어떠한 보수와 이득도 챙기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오로지 제국 귀족의 명예로서 신민에게 피해를 입히는 악성 채무자를 척결하기 위해 나선 것임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이건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는 오로지 제국법의 집행을 위해 무일푼으로 봉사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니까.
"아니! 정말이시오?"
원하는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비협조적으로 나서던 트렐리소 자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아예 보상을 안 받겠다고 할 줄이야. 여러 가지를 물고 늘어져 위원회를 쥐고 흔들려고 했는데 저건 예상도 못 했다.
베니엘은 다시금 약속했다.
"물론입니다. 모두 앞에서 맹세했는데 제가 나중에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위원장 자리는 제게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일은 전문적인 실력의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미 마그라스와 전투를 벌여봤고, 놈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점에 대해선 동의했다. 마그라스를 상대할 전문가를 뽑는다면 베니엘 이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드란실 공자도 있지만 이런 일에 관심을 가져줄 리 만무한 데다가, 제도로 가 있으니 예외다.
"저는 동의합니다!"
그때 어떤 귀족이 외쳤고, 다른 이들은 박수와 함께 그 결정을 지지했다.
"와아아아아!"
트렐리소 자작은 이런 상황에서 더는 베니엘의 행보에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같이 손뼉을 쳐주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보수를 다 포기해? 크릉? 젊은 놈이 실속 없는 공명심에 정신이 나갔군.'
하면 철저히 이용해 먹을 뿐이다. 제놈이 알아서 위원장 자리를 맡아 생고생을 하겠다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다.
'뭐, 좋다. 빚만 받아낼 수 있다면야….'
대부분의 채권자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참석자들의 환호성에 취한 듯한 모습의 베니엘을 어리석다 여기며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이렇게 모였다. 단합된 힘이라면 아무리 상대가 드래곤이라도 빚을 받아낼 만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진 않을 것이다.
'나쁘지 않아.'
'해볼 만해.'
'어쩌면 원금 이상을 챙길 수 있을지도!'
곧 여러 가문의 귀족들이 일어나서 베니엘을 위원장으로 추대한다 외쳤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들에게 베니엘은 자신감 넘치는 대답을 돌려줬다.
"오늘 우리의 결의는 제국의 법을 수호하고 악성 채무자를 심판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용기 있는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와아아아아아!"
사방이 시끌벅적했다.
다만, 유일하게 한 사람. 냉정하고 미심쩍은 눈으로 베니엘을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지상인 올리비에였다.
오로지 그만이 베니엘의 말에 담겨 있는 교묘한 함정에 대해 알아챘던 것이다.
'분명 성공하면 어떠한 보수와 이득도 챙기지 않겠다고 했지?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올리비에는 상념을 이어갔다.
'추심위원회의 실패가 베니엘 님의 실패일까? 물론 위원장인 만큼 자유롭진 못하겠지만, 뭐든 빠져나갈 구석이 있는 법이다.'
이런 사고를 할 수 있었던 건 올리비에게 최근 계속 베니엘의 책략에 대해 봐왔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회의장에서 열광하는 당사자들과 다르게 그는 객관적인 제3자적 시각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컸다.
원래 바둑 같은 것도 본인이 할 때는 안 보이는 부분이 훈수 둘 때는 보이는 법이니까.
아무튼, 그날 베니엘을 위원장으로 추대한 것 외에도 중요한 합의가 하나 더 이뤄졌다.
채권 추심을 위한 집행은 한 달 뒤에 개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시간.
호수의 외딴섬에 숨어 있는 마그라스는 자신을 향한 이런 음모가 진행 중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에잇! 씨팔! 이놈의 해초는 언제까지 처먹어야 하는 거냐!"
104화
그림자 군도 (1)
한 달 뒤.
마침내 마그라스 채권추심위원회가 위대한 원정길에 나섰다.
총 다섯 곳의 명문가를 주축으로, 그 외에 군소 가문과 모험에 끼길 원해 합류한 자들까지 총원은 무려 500명이 넘었다. 이동을 위해 배만 총 열 척이 동원될 정도였다.
드라카니아의 주민들은 항구로 몰려나와 이 장관을 지켜보며 환호했다.
"와아아아아!"
"정말 물돼지를 잡으러 가는군!"
"우리는 전설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몰라!"
밖에서 환호하는 동안, 원정대의 기함인 '레비아탄'호에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레비아탄호는 베니엘이 타고 온 배보다 두 배 이상 큰 함선으로, 원정대에서 가장 지체 높은 귀족들이 준비한 것이다.
아무래도 귀하신 몸들이다 보니 일반적인 배로는 마음이 안 놓였던 모양. 베니엘이야 자기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알아서 하게 내버려뒀다.
베니엘은 이번에 보상을 받지 않기로 했단 점을 이용해, 열 척의 배와 이런 대인원이 동원되는 원정에서 작은 비용조차 지불하지 않았다.
위원장인지라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베니엘은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이들을 써먹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크흐흐.'
베니엘은 마치 탐욕스러운 양반이 자기 논의 노비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회의에 참석한 자들을 바라봤다.
내부가 호화롭게 꾸며진 회의실 안에는 각 가문과 단체를 대표해 십여 명의 인원이 참가해 있었으나, 그중 가장 중요한 이는 셋이었다.
-트렐리소 자작.
-아슈칸도르 상인 가문의 가주.
-고리대금업자 카트나.
이들 중 트렐리소 자작이 베니엘에게 물어왔다.
"정말 그곳에 있소이까? 물돼지가?"
이미 베니엘은 참가자들에게 도주한 마그라스가 어디 있는지 밝혔다.
위치는 바로 '그림자 군도(群島)'란 장소. 군도라 하면, 크고 작은 섬들이 무리 지어서 몰려 있는 장소를 말한다.
그림자 군도는 온갖 형태의 다양한 섬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거대한 에본플로우에서 상당히 외딴 지역에 속했다.
"맞습니다. 트렐리소 자작님."
베니엘은 재차 확인해줬다. 드래곤킨인 자작은 자신의 턱을 따라 돋아난 가시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군도는 지극히 복잡하니 설령 물돼지가 거기 있다는 걸 알아도 어찌 찾는단 말이오?"
다른 이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베니엘은 여전히 자신만만한 태도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안내인이 있으니까요."
"오, 그렇소? 누가 안내인이오? 위원장의 일행 중에 있는 것이오?"
"아닙니다. 지금 향하는 곳에서 합류할 예정입니다."
현재 함대가 바로 그림자 군도로 향하는 게 아니라, 중간에 어딘가 들를 예정이다.
그 장소는 바로 에본플로우의 명물인 '떠다니는 시장'이다.
떠다니는 시장은 호수 위를 움직이는 작은 도시라고 보면 된다. 처음에는 물건을 파는 뗏목들을 연결한 작은 상점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점점 뭉치고 커져서는 결국 소도시만큼이나 커져 버렸다는 것.
에본플로우호를 따라 이동하며 물자와 노예를 파는 떠다니는 시장은 매우 요긴했다. 왜냐하면 닉스포트나 드라카니아 같은 큰 도시가 아니면 상설 시장이 없는 곳이 많았으니까. 대개 소도시는 이 떠다니는 시장에 의존하곤 했다.
"이미 논의한 것처럼 그곳에서 물자를 추가로 보급할 예정입니다. 그때 안내인 역시 합류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이번 원정에 저와 저희 가문의 명예 역시 걸려 있습니다. 허술하게 처리하지 않겠습니다. 자작님께선 근심을 내려놓으시지요."
"흐음… 위원장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매사 딴죽을 거는 편인 트렐리소 자작도 베니엘의 확언에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추심위원회의 분위기도 괜찮은 편인데 괜히 더 꼬장을 부려봐야 얻을 것도 없었다.
"곧 시장에 도착할 것입니다. 군도에서 탐색이 하루 이틀 만에 끝나지는 않을 테니 물자를 충분히 구매해 주십시오."
베니엘의 말에 회의에 참석한 추심위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함대는 하루하고 반나절을 꼬박 항해한 뒤에 떠다니는 시장과 마주쳤다. 그것은 뭐랄까, 호수 위에 떠다니는 거대한 쓰레기 섬 같은 모양새였다.
섬으로 여겨질 만큼 드넓은 부유물 위에 수많은 판잣집과 천막이 가득했다.
떠다니는 시장은 단 하나의 덩어리는 아니었다. 여러 개의 큰 덩어리가 뭉쳐져 있는 형태로 각 구역은 수많은 나무판, 다리, 밧줄 같은 것으로 연결돼 있었다.
각 구역간의 물길은 마치 베네치아의 수로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곳에서 짐과 사람을 운반 중인 보트도 잔뜩 보였다.
베니엘은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복잡하고, 모든 게 바글바글할 줄이야.'
배를 타고 방문한 자들은 채권추심위원회만이 아니었다. 여러 척의 배들이 떠다니는 시장 근처에 정박해 있었고, 그 사이를 바지선이 부지런히 오가며 물자와 인력을 옮기고 있었다.
"우리도 이동한다."
어차피 보급은 알아서들 할 거다. 베니엘은 직접 데려온 인원들만 챙겼다.
"보급은 반나절 이상 걸릴 거다. 그 사이 시장에서 알아서 일 보고 오도록. 늦는 놈은 경을 칠 테니 알아서 해라."
"알겠습니다! 제가 잘 통솔하지요!"
노가다 크루의 작업반장 행크가 가슴팍을 두들기며 답했다. 베니엘은 지상인 올리비에를 노가다 크루와 같이 보냈다.
"녀석들이랑 같이 가서 견문을 좀 넓히고 와."
"베니엘 님은요?"
"나는 주라와 갈 곳이 있어."
주라는 얼마 전에 합류한 오사키아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더니 검지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저, 저용?"
"어, 그래. 너."
주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영 미심쩍은 표정이다. 그 유명한 망나니 놈과 단둘이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녀는 다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미녀랑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건 알겠지만, 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뭔 헛소리냐."
베니엘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주라의 긴 귀를 잡고는 끌고 갔다.
"아악! 아파요! 농담이에요. 농담!"
"넌 밥값 좀 해야겠다."
베니엘은 주라와 둘이서 움직였다. 회의에서 말했던 안내인을 찾기 위해서다. 사실 주라가 없어도 가능은 하지만, 도둑인 그녀가 있으면 훨씬 편해진다.
"어디로 가시는데요?"
"일단 따라와. 걷다가 기둥에서 특이한 거 발견하면 말해주고."
"특이한 거요?"
"보면 알아."
시장 안은 복잡한 인파만큼이나 온갖 냄새로 가득했다. 독버섯을 가공한 톡 쏘는 향료 냄새, 고소한 생선 구운 냄새, 바닥에 널어서 말리고 있는 해초의 비릿한 냄새까지, 그 모든 게 한 번에 코로 파고들어 머리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주라는 걷는 내내 즐거워했다. 그녀는 베니엘에게 자기 손을 펼쳐 보였다.
"짜잔!"
어느 틈에 소매치기를 한 건지, 주머니와 지갑 몇 개가 손에 들려 있었다. 베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도둑놈 버릇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군."
"제 본분에 충실한 거랍니다."
복잡한 시장 지대를 지나자 좀 더 차분한 구역이 나왔다. 그곳에 있는 건물들은 좀 더 번듯했고, 주변의 시설 역시 제법 정비된 기색이 엿보였다.
"그만 훔치고 말한 거나 찾아봐."
베니엘은 또 행인의 지갑을 털려고 군침을 다시는 주라의 귀를 잡아 끌었다. 그녀는 서부 다크 엘프보다 귀가 긴 동부의 다크 엘프인지라 귀를 잡는 맛이 있었다.
"만약 아무것도 못 찾는다면 발목에 돌을 묶어서 호수에 내던지겠다."
"헙…!"
아직 망나니의 악명에 익숙한 주라는 그제야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곧 한 건물의 벽면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이걸 보세요. 암호문이에요."
그것은 에본플로우에 있는 수많은 도적 길드에서 쓰는 공용 암호문이었다. 당연히 주라도 그걸 잘 알았다.
"읽어봐."
"음… 오늘 저녁에 도적 길드 연합에서 주최하는 경매가 있다는데요? 허가받은 길드원만 출입 가능하다고 하네요. 동행이 가능한 숫자는 길드원의 등급에 따라 다르다고 하고요."
"넌?"
그 물음에 주라는 다소 겸연쩍은 표정으로 답했다.
"저는 슬링커 등급이지요. 동행인은 딱 한 명만 가능이네요. 헤헤...."
도둑 길드의 계급은 총 일곱 단계인데 '슬링커(Slinker)'라 하면 밑에서 두 번째다. 가장 밑바닥인 견습에서 막 벗어난 초보 도둑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의외로 베니엘은 보잘것없는 놈이라고 타박하지 않았다. 도리어 한마디 덧붙인다.
"뭐든 처음에는 낮은 자리에서 시작하는 거다. 슬링커라고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어. 나도 검을 잡고는 스콜라 하급부터 시작했으니까."
예상 밖의 격려에 주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자기가 듣던 망나니에 대한 흉악한 소문이 과연 맞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뭘 멍하니 있어? 경매장으로 안내하지 않고."
퍽!
베니엘이 멍 때리는 주라를 보다 못해 걷어찼기 때문이다.
"아, 죄송합니다!"
그래도 꼴에 도둑이라고 주라는 처음 오는 장소에서도 군데군데 보이는 암호문을 보고 잘 찾아갔다. 때로는 도둑으로 보이는 자들에게 말을 걸어 길을 묻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주라는 닉스포트의 도둑 길드 '골드 코인'에서 정식으로 면허를 받은 녀석이기 때문이다. 그 골드 코인 길드는 에본플로우의 도적 길드 연합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주라 역시 경매장에 들어가는 게 가능했다.
"언제 정식 도둑이 된 거지? 네 오라비도 몰랐던 모양인데."
"몇 해 안 됐어요. 헤헤."
"길드 일은 안 해도 되나?"
"그게 길드마다 다 다르긴 한데, 저희 쪽은 정기적으로 상납하고 가끔 있는 길드 행사에만 참가하면 나머진 자유거든요."
"골드 코인은 꽤 느슨한 조직인가 보군?"
"네, 그렇지요. 조직원이 되자마자 합숙에 들어가는 빡센 곳도 있긴 한데, 저희는 널널한 편이라. 뭐, 제가 도련님 밑에 들어온 걸 알고는 더 풀어주더라고요."
주라는 최하급 조직원 주제에 길드 행사에서 열외를 인정받았다. 자칫했다가 망나니를 거슬러 화를 당할까 염려한 길드장의 조치였다. 얼마 전에 베니엘이 블랙 체인을 개박살 낸 뒤부터 닉스포트의 범죄 조직들은 납작 엎드리고 있는 상태였다.
"아! 여기네요!"
주라는 곳 지하로 이어지는 한 건물의 입구를 가리켰다. 앞에는 후드를 뒤집어 쓰고, 무장한 몇몇이 지키고 있었다.
베니엘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그린 듯한 도적놈 소굴이군."
"그, 그럼… 들어갈까요?"
"그래."
주라는 다소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바로 제지당했다.
"정지. 자격이 있는가?"
"물론이야."
주라는 애써 주눅 든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하며 무언가를 꺼냈다. 골드 코인에서 발급받은 도적 면허였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은근슬쩍 금화를 몇 개 같이 건넸다.
지위가 낮다 보니 매끄러운 일 처리를 위해서 다소간의 상납이 필요했던 것이다. 과연 문지기의 엄한 태도는 대번에 풀어져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틀림없군. 그런데 옆에 귀족분은 동행인인가? 너는 한 명까지 가능하다."
"맞아. 동행이시지."
"음...."
잠시 베니엘을 살펴보던 문지기의 눈을 부릅떴다.
'저, 저자는…!'
다크 엘프치고 큰 키, 교활한 인상이지만 매우 잘생긴 얼굴, 허리춤에 냉기를 뿜어내는 훌륭한 마법검까지. 분명 소문의 인물이 틀림없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벨벳 망토를 고정시키고 있는 브로치였다. 저건 나이트쉐이드의 상징이었다.
"나리,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실례하겠습니다!"
문지기는 급격히 태도가 공손해지더니 자기 부사수에게 뭐라, 뭐라 말하고는 안으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도적 길드의 간부 하나가 튀어나왔다.
"귀하신 분께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연합 길드의 간부 하르자크라고 합니다! 나이트쉐이트의 명망 높은 검객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모습에 옆에 서 있던 주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망나니가 제법 유명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라고?'
왜냐하면 지금 튀어나온 연합 길드의 간부는 도적 길드의 7단계 계급 중 5단계인 '이그제큐터'였기 때문이다. 겨우 2단계인 자신은 쳐다도 볼 수 없는 고위직이다.
에본플로우에 있는 도적 길드 중에서 그 세가 제법 크기로 유명한 골드 코인 길드의 길드장이 5단계였으니, 주라 입장에선 길드장급의 인사가 나와서는 도련님에게 굽실거리는 꼴을 본 것이다.
주라는 갑자기 충성심이 치솟았다. 자기가 잡은 동아줄 성능이 확실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주인의 위세를 빌려 턱을 치켜세우고는 아까까지만 해도 다소 비굴한 자세로 대했던 문지기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문지기는 황당해하면서도 빠른 판단을 내렸다. 다소 미안한 얼굴로 얼른 아까 받은 금화를 얼른 돌려준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주라는 손을 거두질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문지기만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두 배."
"!"
문지기는 경악했다.
'이런 날도둑놈 같은!'
하나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눈앞에 하찮은 도둑놈은 간부께서도 허겁지겁 튀어나올 정도의 귀인을 모시고 있었으니까.
나중에 입구에서 돈을 뜯겼다는 불평이라도 했다가는 자기 목이 남아나질 않을 터였다.
"아, 알겠네…. 큭!"
105화
그림자 군도 (2)
***
베니엘은 경매에 나름대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여기 온 건 안내인을 찾는 게 주요 목적이긴 하지만 경매 자체도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내 운을 시험해 볼까?'
떠다니는 시장의 경매장 물품은 무작위로 등장한다. 그렇기에 게임을 할 때는 세이브, 로드를 반복해서 원하는 물품이 나올 때까지 하기도 했었다.
'여기서만 얻을 수 있는 특수템도 있고 말이지.'
마침 돈도 많고, 뭐라도 건질 수 있으면 개이득이었다.
베니엘과 주라, 연합 길드의 간부는 지하로 통하는 긴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앞서가며 안내하던 간부가 싹싹한 태도로 아첨해왔다.
"명망 높은 나이트쉐이드의 후계자분을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과찬이군. 스스로 과분한 명성을 얻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겸손하시기까지! 하지만 섀도우 위자드의 쏜을 물리친 그 업적, 모두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참, 섀도우 위자드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들으셨습니까?"
"무슨 이야기?"
"최근에 섀도우 위자드가 미지의 집단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베니엘은 집히는 게 있었다.
"더 말해보도록."
"놈들이 마법 등대가 있는 무인도에서 떼죽음을 당했다는군요. 그리고 9레벨 마법으로 추정되는 대폭발도 있었고요."
뒤에 있던 주라가 끼어들었다.
"치안대장님, 그때 폭발이 그거 아닐까요?"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합 길드의 간부는 바로 관심을 보였다.
"목격하신 겁니까?"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 폭음이 꽤나 늦게 도착했으니까. 그럼에도 근처에 배들이 뒤집어지고 난리가 났어."
"아! 분명 그 사건이 맞는 것 같습니다. 혹시 섬에 상륙해서 살펴보신 겁니까?"
"아니. 그런 싸움에 괜히 끼어들어 봐야 화만 당하는 법아야."
"맞는 말씀입니다."
"섀도우 위자드를 공격했다는 집단, 짐작 가는 곳은 없나?"
"오리무중이지요. 유령 같은 자들입니다. 이렇다 할 흔적도 안 남겼으니까요. 흐음..., 그 유명한 섀도우 위자드를 건드린 거 보면 보통 집단이 아닌 듯합니다."
베니엘은 그들이 마신의 교단임을 짐작했다. 아무래도 이전에 부탁한 대로 섀도우 위자드를 견제하는 일을 잘 해주고 있는 모양이다.
'위험천만한 녀석들이지만 역시 이용 가치가 있다니까. 그나저나 섀도우 위자드 녀석들… 설마 날 습격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가능성이 충분한 얘기다. 영지를 나오자마자 이런 사건이 터졌으니 말이다.
'역시 마신의 교단과 얘기를 해두길 잘했어. 그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면 한동안 이쪽은 신경도 못 쓰겠군.'
베니엘은 귀찮은 일은 마신의 교단에 맡기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 왔습니다."
간부는 눈앞에 단단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앞에는 녹색 불길이 조명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마법으로 살아 움직이는 갑옷 병사들이 앞을 지켰다. 그들은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일행이 지나가게 비켜섰다.
철그덕. 철걱.
경매장 안은 기대 이상으로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떠다니는 섬의 위쪽에서 지하로 꽤 내려왔으니, 현재 위치는 호수의 수면 아래다. 그래서 경매장의 넓은 창문을 통해서 저 어두컴컴한 물밑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와아…!"
동행인 주라가 감탄사를 터뜨린다. 시커먼 물속에서 발광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자라면 홀릴 만한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어디론가로 움직이는 호수의 인어족 역시 보였다.
내부의 좌석 배치는 원형 극장과 비슷했는데 그 가운데 경매의 사회를 맡은 자가 서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곧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참석자들은 딱히 신분을 감추기 위한 가면 같은 걸 쓰고 있진 않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있던 참가자들은 베니엘 쪽을 보며 소곤거린다.
"간부가 직접 수행하고 있군요. 누구죠? 저 다크 엘프. 호호, 생긴 게 너무 제 취향이군요."
전신을 치렁치렁한 장신구를 두른 남성 타르나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베니엘을 바라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크 엘프 마법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적당히 좀 하시죠. 남색가 양반. 함부로 들이댔다가는 당신의 보잘 것 없는 물건이 잘려나갈 테니까. 진짜 몰라서 묻나요? 나이트쉐이드의 베니엘이잖아."
"아, 들어봤소, 그 망나니? 요즘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했지요."
"연합 길드에서도 신경 쓸 정도인가 보네요. 듣자니 대단한 부자라고 해요."
"호호, 이거 볼수록 군침이 도는 자로구만."
그들만이 아니었다. 베니엘은 대번에 주목을 끌었고 참석자들은 저마다 쑥덕댔다. 아마 여기가 사교를 위한 자리였다면 대번에 몰려들 것 같은 인기였다.
하지만 일단은 경매가 우선이었기에 다들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다. 베니엘과 주라도 괜찮은 자리를 배정받았다.
이미 연합 길드의 일꾼들이 케이지에 든 괴이한 생물부터 온갖 마법 물품까지 중앙으로 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자가 나서 시작을 알렸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경매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망 높은 참석자 분들의 시간이 금과 같음을 알기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와 함께 다양한 물품들이 경매에 출품됐다.
밴시의 나침반, 강철 골렘의 팔과 각종 부품, 호수 서펜트의 독과 송곳니, 죽은 신부의 유령 베일 등등.
모두 강력하고 위험한 물건들이었다. 다만 베니엘은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별로 쓸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리리나 고모가 있으면 열광했겠군. 저 호수 서펜트의 송곳니 같은 것도 기계 언데드의 무기로 장착하겠다고 하겠지.'
아무래도 오늘은 별로 운이 따르지 않는 듯했다. 좀 기다리다가 안내인이나 픽업해서 돌아가야겠다 싶었는데, 베니엘의 관심을 끄는 게 나타났다.
"이것은 헤르즐락 나낙의 뇌를 응축해 만든 사이오닉 증폭의 구슬입니다!"
베니엘은 대번에 사이오닉 증폭의 구슬에 시선이 갔다.
'오, 괜찮은데?'
왜냐하면 그는 황금 포자 일족에게 도움을 받아 사이오닉 능력을 각성했다. 하지만 그 수준이 낮아 제대로 활용을 못 하고 있었다.
한데 저 사이오닉 증폭의 구슬을 가진다면 그 능력이 대폭 올라가 다방면으로 써먹을 여지가 생길 터.
사회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이오닉을 각성한 자가 갖고 있기만 하면 무려 3레벨 사이오닉 능력까지 사용 가능하게 해주는 물건입니다!"
현재 베니엘의 사이오닉 능력은 레벨로 치자면 0레벨, 입문자에 불과하다. 1레벨도 안 되는 수준인 것이다.
한데 대번에 3레벨로 점프하게 해준다니 탐이 날 수밖에.
"물론! 숙련된 사이오닉 능력자라면 무용하겠으나 입문자에게 이 정도로 가치 있는 물건은 없을 것입니다! 일천 두크부터 시작합니다."
저게 가치 있는 이유는 단순히 3레벨 사이오닉 능력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까지 성장하는 길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3레벨이 어떤 능력이고 어떤 힘을 가졌는지 미리 체감해 보는 것보다 빠른 성장을 보장하는 건 없었다.
베니엘은 바로 입찰했다.
"이천."
"네, 감사합니다. 없으십니까?"
곧 다른 이가 끼어들어 가격이 더 올라갔다. 하지만 저건 베니엘에게 몹시 요긴할지언정 그리 인기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경매 참가자 중에 사이오닉 3레벨의 힘이 아쉬운 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니엘은 곧 쉽게 낙찰받을 수 있었다.
"사천입니다! 더 없으십니까? 카운트 하겠습니다. 셋, 둘, 하나. 낙찰!"
베니엘은 4천 두크에 사이오닉 증폭 구슬을 얻을 수 있었다.
'좋은 걸 건졌군.'
아마 이 물건이 필요한 경쟁자가 있었다면 훨씬 비싼 가격까지 올라갔을 거다. 운이 좋았다고 하겠다.
아무튼, 뭐라도 요긴한 걸 하나 건지자 베니엘은 기분이 좋았다.
'온 보람이 있어. 이대로 기다리다가 안내인 관련 일처리만 하면 되겠군.'
한데 곧이어 베니엘을 깜짝 놀라게 하는 물건이 등장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것이다.
"이번 물건은 한때 명망 높았던 검객! 주르도의 갑옷입니다!"
베니엘은 눈이 커졌다.
'뭐라고! 주르도?'
주르도라고 하면 베니엘의 마음의 스승으로, S등급 검법인 네더 블레이드의 창시자이다. 한데 그의 갑옷이 갑자기 경매에 나타난 것이었다.
'주르도의 갑옷은 남작과의 결전에서 파괴됐을 텐데? 검은 노획된 거로 알고.'
한데 곧 사회자의 설명에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갑옷은 주르도가 파라브샤드 가문에서 전사장을 할 때 대모에게 선물받은 것이라 합니다!"
'파라브샤드'라 하면 남작이 탈주했던 본가를 말한다.
파라브샤드는 제국 내의 다크 엘프 가문 중 최고의 명가 중 하나였다. 심지어 파라브샤드의 대모는 제국의 백작 작위까지 갖고 있었다. 신흥 가문인 나이트쉐이드와는 근본부터 다른 집안이었다.
'알겠다. 저건 주르도가 탈주하기 전, 전사장 시절에 대모에게 받은 갑옷이군. 남작과의 결전 때 입던 것과는 다르다.'
베니엘이 아는 게임 스토리에 의하면 파라브샤드의 대모는 주르도를 마음에 들어해 선물을 주고 침실로 유혹하려 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검과 라이벌인 남작밖에 없는 주르도는 거절한다. 심지어 나중에 황제의 중재에 반발해 가문을 탈주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모가 격노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이 물건은 정식으로 파라브샤드 가문에서 매각한 것입니다. 이후 개인 소장가가 가지고 있다가 이번에 경매에 내놓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대모는 주르도가 탈주한 이후 선물했던 갑옷이 꼴도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명품이군.'
베니엘은 혹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그의 갑옷도 나쁘진 않으나 저것과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니엘의 갑옷은 다크 엘프 특유의 검은 철로 만든 1등급 마법 갑옷이다. 문제는 지난 격전들로 여기저기 보수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갑옷은 소모품이다. 슬슬 새로운 갑옷이 필요하긴 했는데 말이야.'
한데 마침 주르도의 갑옷이 나타났다. 베니엘은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한때 주르도가 착용했던 물건이면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자는 그 갑옷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일단 갑옷의 광택을 보면 아시겠지만 보라 철로 만들어진 명품입니다."
'보라 철'이라 하면 보통 많이 쓰는 검은 철보다 한 단계 위의 금속이다. 검은 철에 '카르코듐'이란 특수한 물질을 섞어 만든 합금이다.
문제는 그 카르코듐이 더럽게 비싼지라, 보라 철은 쉽게 볼 수 없었다.
대신 그 성능만큼은 확실했다. 보라 철로 만든 갑옷은 중석궁의 볼트도 어렵지 않게 튕겨낼 정도였으니까(착용자가 입을 내부의 충격과는 별개로). 거기에 더해 은은한 보라색 광택이 더해져 아주 고급스러웠다.
"거기에 더해 이 갑옷은 3등급 마법 물품입니다. 강력한 방호력에 더해 기본적인 원소 저항력이 붙어 있습니다!"
좋은 물건이 뜨자 여기저기서 입찰했다. 하지만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올라가진 않았다.
쉽게 보기 힘든 보라 철로 만든 명품 갑옷이긴 하나 결국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주르도란 위명 역시 예전에 그런 날리는 검객이 있었지, 라는 느낌.
그 이름이 특별한 건 주르도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베니엘뿐이었다. 게다가 여기 참석자들은 마법사가 주류였기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다.
결국 주르도의 갑옷은 베니엘이 3만 두크에 낙찰 받을 수 있었다. 물론 3만 두크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별다른 출혈 없이 쉽게 낙찰 받은 셈이었다.
'어째 오늘 계속 운이 좋군.'
얼마 뒤, 중간 휴식 시간이 왔다. 휴식이라지만 사실 중간 정산을 위한 것으로 베니엘은 수표를 발급해서 주라에게 갑옷과 구슬을 받아오게 했다.
"잠시만요."
주라가 곧 일 처리를 끝내고 묵직한 상자와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작은 상자에는 사이오닉 증폭 구슬이 들어 있었다. 중요한 물건이었으나 일단 베니엘은 갑옷에 온통 관심이 간 까닭에 그걸 마법 지퍼에 바로 넣어서 치워버렸다.
"바로 볼까."
베니엘은 커다란 상자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세련되고 정교한 갑옷 파츠들을 살펴봤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뭐지? 갑옷 파츠마다 안쪽에 뭔가 써 있는데?'
106화
그림자 군도 (3)
그것은 뭐랄까, 검객 특유의 허세나 멋이 잔뜩 묻어나는 통속적인 문장들이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나를 함부로 뽑지 마라. 뽑았다면 오직 승리하라.
-강철은 날카롭다. 하지만 나의 의지는 더 날카롭다.
-칼날 앞에 법은 침묵한다.
뭔가 이런 문장들로, 이게 관점에 따라 멋지지만 또 어떻게 보면 중2병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의 평가야 어떻든 검객들에겐 이런 레퍼런스들이 꽤나 인기를 끌었고, 그럴싸한 문장이 있으면 검신이나 방어구에 새겨넣곤 하는 것이었다.
주르도의 갑옷은 보이지 않는 안쪽에 문장이 있는 게 특이했지만, 일단 그런 검객 특유의 중2병 적인 감성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베니엘은 네더 블레이드 검법서를 봤기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거 네더 블레이드를 집필한 사람과 같은 글씨체인데?'
주르도는 까막눈이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부탁해 글을 쓰게 했는데, 갑옷의 글씨는 네더 블레이드 검법서와 글씨체가 같았다.
흥미를 끄는 것만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갑옷 여기저기에 쓰인 문장들은 무언가 규칙성이 있었던 것이다.
'뭐랄까? 알 듯 말 듯… 희한하네…?'
겉보기엔 그냥 멋 부린 문장의 연속이지만 해독하기에 따라서 새로운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마 네더 블레이드에 실리지 않은 요결의 일부인가? 아니면, 어딘가 특정한 위치?'
아무래도 바로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 네더 블레이드 검법서와 대조해 가며 유추에 들어가야 할 듯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주르도가 남겼으니 범상치 않은 것이겠지.'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일단 느껴지는 게, 검법의 요결보다는 어느 곳의 방위를 표시하는 것만 같았다.
베니엘은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이 문제를 풀어보기로 작정했다.
아무튼,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얻은 셈이다.
"경매를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휴식이 끝나고 경매가 재개됐다. 경매가 막바지에 이름에 따라 이전보다 더 비싸고 강력한 물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니엘이 원하는 건 따로 있었기에 돈 낭비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안내인과 연결될 수 있는 물건이 나타났다.
"이번 출품은 크라켄 피리입니다! 이 마법 피리를 이용하면 에본플로우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강력한 발광 크라켄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에본플로우는 바다로 여겨질 만큼 거대한지라 그 깊이도 대단하다. 그리고 심연과도 같은 아래에는 '발광 크라켄'이란 거대 괴수가 존재했다.
가시가 잔뜩 달린 괴이한 촉수를 가진 그 괴물은 에본플로우와 어울리는 칠흑빛 거체다. 다만 흥분한 경우나 의사소통을 위해 몸에서 빛을 내는 거로 유명했다.
크라켄은 감정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는데, 흥분과 분노를 상징하는 주황색을 보게 된다면 그냥 파멸이라 여기면 됐다.
이들은 보통 호수 바닥의 열수 분출구에 자리 잡고 있다가 이따금 위로 올라와 배를 습격하곤 했다. 호수의 영주들은 안전한 통행을 위해 발광 크라켄을 완전히 토벌하고 싶었지만, 현재 문명 수준으로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여 호수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은 그들을 그저 재수가 없으면 마주치는 자연재해로 여기곤 했다.
아무튼, 그런 크라켄을 불러낼 수 있는 마법 피리니 큰 가치를 지닐 수밖에.
"일만 두크부터 시작합니다!"
가격은 금방 올라갔다.
"일만 오천!"
"이만!"
"이만 오천!"
베니엘 역시 입찰에 끼어들었다. 다만 이번에도 비상식적으로 과열되는 일은 없었다.
피리가 강력하긴 해도 불러낸 크라켄을 통제할 수 없는 데다가, 일회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실제로 십여 년 전에 '쿤겐'이란 해적이 경쟁 해적단을 파괴하기 위해 발광 크라켄을 피리로 불러냈다. 한데 크라켄이 말을 듣지 않고 근처에 있던 소도시를 박살 냈고, 결국 쿤겐은 호수에 면한 모든 도시의 공적으로 지정됐다. 그리고 위세 등등하던 쿤겐 해적단은 얼마 뒤에 소멸했다.
"아무래도 리스크가 너무 크단 말이지."
"이 몸은 저런 위험한 물건에 손댈 생각은 없소이다."
"음… 슬슬 가성비가 안 맞는군."
다만, 크라켄은 몸에 엄청난 보물을 품고 있다고 하니 그 괴수를 쓰러뜨릴 능력만 있다면 호수 외곽에서 불러내 싸우는 것도 괜찮았다.
베니엘이 계속 입찰에 나서자 사람들은 크라켄 토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설마 지켜야 할 게 많은 귀족이 사달을 일으킬 리는 없고… 역시 토벌하려는 건가?"
"쉽지 않을 텐데?"
"그 마그라스도 패퇴시켰다지 않소? 저 도련님이란 가능할지도 모르오이다."
"허, 만약 그렇다면 대단하겠군. 크라켄의 몸속에 엄청난 보물이 있다고 하던데…."
베니엘 외에 끝까지 입찰에 나서고 있는 자가 하나 있었다.
바로 신경질적인 인상의 늙은 타르나이였다.
"사만이다! 더는 없겠지!"
그는 수염을 잡아 뜯을 듯 당기며 베니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4만 두크가 그가 지불할 수 있는 최대치였기 때문이다.
늙은 타르나이 마법사는 오늘 저 크라켄 피리만 노리고 멀리서 와서 참석한 건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다크 엘프 하나가 끼어들어 일이 요상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베니엘은 늙은 타르나이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손을 들었다.
"오만."
그 선언에 늙은 타르나이는 고개를 든 채 눈을 질끈 감고, 양손을 파르르 떨었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결국 염원하던 발광 크라켄 피리가 물 건너간 것이다.
"네놈…!"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협박할 수도 없는 노릇. 아무리 그가 타르나이라곤 하나 별다른 지위도 없는 은거기인에 불과했다. 반면 상대는 제국의 귀족이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노려보는 게 전부였다.
"큭! 젠장!"
결국 늙은 타르나이 마법사는 경매장을 박차고 나갔고, 베니엘이 발광 크라켄의 피리를 낙찰받게 됐다.
***
경매가 끝나자 사교를 위해 베니엘에게 몰려오는 자들이 여럿이었다.
하지만 베니엘은 물자 보급 후 떠날 예정이란 핑계로 그들을 물리쳤다.
"후일 기회가 되면 소중한 인연 맺길 바랍니다. 하면 저는 이만."
밖으로 나오자 내부가 생각보다 후끈했던 듯, 호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아주 시원했다.
"아니, 그런데 치안대장님. 크라켄 피리 같이 위험한 물건은 왜 사신 거예요? 안내인을 찾으러 간 거 아니었어요?"
말없이 걷던 베니엘은 저 앞을 가리키며 답했다.
"저기 있잖나. 안내인."
저 앞쪽 골목의 으쓱한 곳에서 누군가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경매에 실패했던 늙은 타르나이 마법사다. 그는 불퉁한 얼굴로 골목에서 걸어 나오더니 베니엘 앞에 섰다.
"이봐, 다크 엘프 청년. 나랑 얘기 좀 하자고."
과연 지배종인 타르나이라 그런지 귀족을 상대로도 하대가 자연스럽다. 물론 베니엘이 남작 위를 가졌다면야 저렇게는 못 하겠으나 일단은 도련님에 불과하니까.
"아까 경매에서 뵌 어르신이 아닙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베니엘은 공손하게 대꾸했다. 뜻밖에 예의 바른 모습에 늙은 타르나이는 의외라는 표정이 됐다.
"다크 엘프 놈들이 하나 같이 싸가지가 없기로 유명한데 자네는 좀 다르구만. 크흠!"
하지만 그는 곧 절박하게 매달렸다.
"이보게. 이봐. 그 피리 좀 양보해 주게나. 내가 꼭 필요해서 그래! 타르나이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나. 만약 들어준다면 홍복(洪福)이 함께할 걸세."
이건 완곡한 협박이기도 했다. 들어주지 않는다면 타르나이의 분노가 뒤따를 것이란 소리였으니까.
하나 베니엘은 개의치 않았다.
"어르신의 말씀을 들어드리고 싶으나 저 역시 피리를 요긴하게 쓸 곳이 있어서 낙찰받았습니다. 송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베니엘이 그대로 지나치려 하자 늙은 타르나이가 다급히 지팡이를 내밀어 앞을 막았다.
"아니, 이 사람이! 너무 급하지 않나. 좀 더 얘기를 하고 타협점을 찾아보자고. 에끼!"
"흠… 그럼 일단 말씀이나 들어보지요. 왜 피리가 필요하신 겁니까? 타당한 이유가 있으시다면 고려해 보지 못할 것도 없지요."
이유를 묻자 늙은 타르나이는 아주 곤란한 표정이 됐다.
사실 그가 발광 크라켄 피리를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비밀 실험실 근처에 자리 잡은 고약한 이웃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웃은 도망친 물돼지 마그라스다.
강한 적이기 때문에 늙은 타르나이의 솜씨로 격퇴도 불가능했고, 결국 고민 끝에 발광 크라켄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
분명 그 거대 괴수면 늙은 드래곤을 쫓아낼 수 있을 게 틀림없었다.
문제는 이런 사정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늙은 타르나이는 신음을 흘렸다.
"끄응... 그게 말일세."
사실 그 역시 범죄를 저지르고 그림자 군도에 숨어든 도망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국에서 엄금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영혼석 실험을 이어가고 있는지라 실험실 위치가 드러나서도 곤란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늙은 타르나이는 외부에 도움도 못 청하고 혼자 해결하려고 끙끙대다 크라켄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는 이런 설명 대신에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내가 지불할 수 있는 사만 두크에, 앞으로 자네 부탁을 뭐든 들어주는 건 어떤가?"
"부탁 말입니까?"
"그래, 그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닐세. 나는 무려 6레벨 주문 사용자니까. 이런 강력한 마법사를 원하는 데 쓸 수 있다면 그 값어치는 헤아리기 힘드네."
돈이 없으니 일단 몸으로 때우겠단 소리였다. 그리고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6레벨 주문 사용자면 대마법사 바로 아래 단계. 지하에서도 그 정도면 어딜 가서 방귀 좀 뀌는 상당한 실력자였다.
하나 막내 고모가 대마법사인 베니엘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어르신의 제안은 기쁩니다만,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 제 질문에는 대답이 없으시잖습니까?"
"크흠…!"
늙은 타르나이는 신음하며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회색 머리칼을 잡아 뜯었다.
결국 그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나는 그림자 군도에서 살고 있네. 거기 주민이라면 짐작하겠지만 외부의 시선을 피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지."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는 법이지요. 그림자 군도에 거주하신다고 해도 선입견을 품거나 하진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맹세하게! 자네는 검객이니 검에 대고 맹세해. 내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그럼 사정을 알려주고, 내가 제안한 거래가 충분히 가치 있는 거란 걸 알게 될 테니까!"
베니엘은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검객이 하는 검의 맹세에 대한 낭만적인 헛소문을 퍼뜨린 음유 시인 덕에 이번에도 알차게 써먹을 수 있었다.
베니엘은 수락했다. 그는 폼을 한껏 잡고는 맹세의 말을 입에 담았다.
"제가 맹세를 저버린다면 다시는 검을 휘두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 의지의 연장이자 영혼인 검에 대고 하는 맹세입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결국 늙은 타르나이는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말일세. 근자에 내 실험실 근처에 아주 고약한 이웃이 눌러앉았단 말일세. 그래서 그놈을 어떻게든 쫓아내기 위해 그 피리가 꼭 필요하단 말이야."
그러자 베니엘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설마 그 이웃이 물돼지 마그라스입니까?"
늙은 타르나이는 펄쩍 뛰듯 놀랐다.
"아, 아니! 그걸 어떻게 알고 있나?"
"사실은 말입니다. 어르신께선 군도에 계시느라 몰랐겠지만, 이번에 그놈의 물돼지를 잡기 위한 원정대가 결성됐습니다. 이쪽으로 와보시죠."
베니엘은 늙은 타르나이를 떠다니는 시장의 외곽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선 장엄하게 정박해 있는 채권추심위원회의 함대가 보였다.
"저들이 다 마그라스를 찾는 이들입니다."
"뭐, 뭐라고!"
하지만 늙은 타르나이는 반색하기보단 역정을 냈다.
"안 돼! 안 된다! 내 실험실 근처를 저런 불한당들이 헤집고 다니게 할 순 없어! 애초에 내가 외부에 알리지도 못하고 혼자 전전긍긍한 게 뭐 때문인데!"
"그렇습니까?"
"저 정도 인원이 그림자 군도를 뒤집으면 내 실험실도 무사하지 못할 게야. 이런! 마그라스보다 더 큰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다니."
그러자 베니엘은 빙그레 웃으며 제안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면 더더욱 원정대에 협력해야지 않겠습니까? 저 많은 인원이 우연히 어르신의 연구실을 발견해 약탈에 나서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뭬야?"
"절 믿어주십시오. 저 열 척의 배에 탑승한 대인원을 통솔하는 게 바로 이 베니엘이니까요."
늙은 타르나이는 똑똑한 마법사였고 바로 말귀를 알아먹었다.
"어차피 원정대가 몰려오는 건 피할 수 없으니, 자네와 손을 잡고 이용하라 그건가?"
베니엘은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르신께선 마그라스도 내쫓고 실험실도 지키실 수 있을 겁니다."
107화
그림자 군도 (4)
***
"이분이 안내인이신가?"
추심위원회는 베니엘과 함께 나타난 늙은 타르나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베니엘은 그를 추심위원회에 소개했다.
"네, 이분은 마가트 님이라 합니다. 그림자 군도의 지형에 대해 박식하신 데다가 마그라스를 능히 추적할 마법 능력 역시 갖고 계십니다."
딱 봐도 강력한 마법사인 데다가, 지배종인 타르나이였기 때문에 마가트는 위원들의 존중을 사기 충분했다.
"이렇게 합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제국법을 집행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어르신께 달렸습니다."
마그라스를 찾아줄 거란 말에 다들 기대에 찬 얼굴이 됐다. 사실 도망쳐서 꼭꼭 숨은 드래곤을 어떻게 찾나 궁금했지만, 상대는 마법의 종사라 불리는 타르나이가 아닌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싶었다.
"반겨줘서 고맙군. 내 최선을 다하겠소이다. 에흠!"
간만에 이런 공경을 받은 늙은 타르나이 '마가트'는 금세 콧대가 높아졌다.
하지만 인사가 끝나고 베니엘과 단둘이 회의에 들어가자 앓는 소리부터 해댔다.
"저 치들은 내가 그 드래곤을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는 줄 알고 있네! 하나 내겐 그런 재주는 없어!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마가트는 이웃에 위치한 마그라스의 은신처 정도만 알고 있었다. 요즘 그 드래곤이 무슨 고약한 짓을 하는지 호수의 깊은 밑바닥을 훑고 돌아다니는데 그럴 때면 자신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근심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 역시 대책 없이 나선 것은 아니니."
그 말과 함께 베니엘은 마법 지퍼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흑요석을 떠올리게 하는 마그라스의 검은 비늘이었다.
"이건! 음...?"
늙은 타르나이 마가트는 대번에 비늘에 관심을 드러냈다. 드래곤의 비늘이란 점 때문이 아니라 거기 걸린 마법 때문이었다.
"이, 이건…! 추적 마법이 걸려 있는데 이건 정말 놀라운 솜씨로군! 마그라스 같은 드래곤은 기본적인 마법 저항력을 타고난 탓에 추적 마법의 대상으로 삼기 몹시 어려워. 한데 이 비늘에 마법에 건 자는 어렵지 않게 해낸 모양이야. 대체 누군가…. 누구야? 이 마법을 주인은?"
같은 마법사라 그런가. 마가트는 비늘에 걸린 마법에 크게 감탄한 기색이었다. 베니엘은 작게나마 막내 고모에게 존경심이 피어올랐다.
'마법의 종사인 타르나이도 감탄하게 하다니, 역시 인성이 쓰레기일지언정 재능 하나는 걸출하구나.'
이 비늘은 원정대 출발 전에 리리나에게 부탁해서 만든 마그라스 추적 장치다. 다만 가까운 거리에서만 탐지가 가능한 탓에, 드넓고 복잡한 그림자 군도에서 사용이 제한된다. 그래서 마가트를 따로 포섭한 거다.
"제 막내 고모인 리리나가 만들었습니다."
"아! 리리나라. 들어본 것 같군. 다크 엘프 중에 최연소로 대마법사에 오른 기재가 아닌가!"
"그렇습니까?"
베니엘은 막내 고모에게 워낙 관심이 없어서 그런 얘기까진 몰랐다.
"그럼! 그녀는 자네 집안의 홍복 그 자체일세. 그런 강력한 마법사가 가문을 수호한다는 것 자체가 다시 없을 행운이지."
"으음… 그렇군요."
베니엘은 미묘한 표정으로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리리나는 큰 도움이 되지만 베니엘의 가슴팍을 가르려는 소원을 포기하진 않을 테니까. 베니엘이 리리나보다 훨씬 강해져서 어떻게 건드릴 수도 없는 지경이 오지 않는 이상 그 집착은 사라지지 않을 게 뻔했다.
"좋네! 이 비늘이 있으면 그 고약한 이웃 놈을 금세 찾아낼 수 있겠어. 좋아. 자네와 손을 잡길 잘했군. 부디 빠르게 그놈을 잡아가 주게. 내 실험실에는 작은 문제도 일으키지 말고!"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르신."
***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베니엘은 마가트를 섭외하길 참 잘했다고 여기게 됐다.
'직접 와본 그림자 군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하군.'
원래 여러 섬이 빼곡하게 모여 있는 군도는 복잡한 지형을 자랑한다. 지구에서도 이런 군도에 해적들이 은신처를 만들곤 했으니까.
한데 지하 세계의 군도는 그 복잡함이 차원이 달랐다.
왜냐하면 일단은 사방이 탁 트인 지상과 달리, 지하에는 동굴의 벽면으로 막혀 있는 지역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섬에서 다른 섬으로 가려면 미로와 같은 동굴 지대의 물길을 통과해야 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러니 안내인은 필수였다. 거기에 더해 현지인만 아는 위험천만한 섬도 많았다.
"저 알록달록한 섬에는 절대 상륙하지 말게. 가까이 가보면 온통 끔찍한 진균투성이야. 상륙하자마자 몸이 썩어들어갈걸?"
"아, 그거 위험하군요."
마가트는 곧 또 다른 섬을 가리켰다. 멀리서 봐도 다 타버린 재 같은 회색 섬이었다.
"함대가 저쪽 섬에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 저기서 수백 년 전에 엄청난 전투가 있었고, 강력한 저주가 내렸지. 저 땅 밑에는 언데드 군대가 숨어 있어서 어리석은 상륙자들을 덮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네. 수십 년마다 한 번씩은 희생자들이 나오지. 문제는 그런 식으로 저 섬의 언데드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단 점이야."
"허… 그런 끔찍한."
아마 마가트가 없었다면 마그라스를 만나기 전에 원정대가 반파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항해가 계속 이어졌고 이틀 뒤에 마가트가 긴장감이 느껴지는 어투로 말했다.
"거의 다 왔네. 이 동굴 수로를 지나면 나타나는 공동이 목적지야."
마치 도로처럼 만들어진 넓은 동굴을 한참 지나자, 넓은 공동이 하나 나타났다.
"여길세. 여기는 그림자 군도 중에서도 '산란 기둥'이란 구역이지. 이 공동의 폭은 대충 오 킬로미터 정도야. 안에 있는 크고 작은 섬은 수십 개고."
과연 게임에서 알던 지형과 똑같았다. 복잡한 군도 지대를 지나 여기까지 오는 게 문제였으나 도착했으니 일은 반쯤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베니엘은 이 산란 기둥이란 구역의 특징을 잘 알았으니까.
"여기는 동굴 천장이 낮군요."
에본플로우에서 가장 광활한 지역은 천장의 높이만 해도 수 킬로미터다. 그래서 지하 세계지만 어두컴컴한 것 외에는 제법 지상과 비슷했다.
하지만 산란 기둥 공동의 천장은 높은 곳이 150미터 정도. 낮은 곳은 수십 미터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정말로 위가 꽉 막힌, 지하의 호수 지대란 느낌이 팍팍 들었다.
아무튼, 이렇게 동굴 천장이 낮은 탓에 여러 섬에서 치솟은 바위 기둥이 천장까지 그대로 연결돼 있는 곳이 많았다.
"이 모습은 마치… 자연이 만든 거대한 신전에 들어온 것 같군요. 수많은 기둥이 줄지어 늘어선 신전 말입니다."
베니엘의 말에 마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표현이 적절하구만. 하지만 여긴 별로 신성한 장소는 아니지. 산란철이 되면 저 기둥에 고약한 수중 곤충들의 끈적한 알이 가득 달라붙거든. 그래서 이 지대가 산란 기둥이라 불리는 거야. 다양한 수서 곤충 종족의 산란장이란 거지."
이런 복잡한 장소에서도 눈에 띄는 큰 섬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비교적 생태가 풍요로워 보이는 섬이었고, 다른 하나는 죽은 버섯 나무가 빼곡한 황량한 섬이었다.
마가트는 그 황량한 섬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저곳에는 절대로! 절대로! 상륙하지 않아야 하네! 저 섬의 외형을 보면 알겠지만 강력한 마법적 작용 때문에 모든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무시무시한 장소라야. 자네들이 찾는 마그라스의 은신처가 있는 곳은 저기 옆에 있는 멀쩡한 섬이야."
그 설명에 베니엘은 끄덕였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저 황량한 섬이 어르신의 소유인가 보군요."
대번에 허를 찔린 마가트는 헛기침을 했다.
"...크흠! 나는 너무 눈치 빠른 아해는 싫더군."
베니엘은 킥킥 웃을 뿐이었다.
"걱정하진 마십시오. 함대는 저쪽으로 향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마가트란 이 늙은 타르나이와 딱히 적대할 생각은 없었다. 마가트가 자기 실험실에서 어떤 극악무도한 짓을 하든지 알 바도 아니었고.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때 갑판에서 같이 나와 있던 트렐리소 자작이 물어왔다. 베니엘은 마그라스의 거처가 있다는 섬을 가리켰다.
"일단 함대 일부를 저 섬에 상륙시켜야겠지요."
"그 뒤에는?"
"이후에는...."
하지만 베니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저 멀리서 엄청난 크기의 물보라가 일었기 때문이다.
쿠아아아앙!
어찌나 큰지 수중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것만 같은 모양새다. 그리고 그 물보라 사이로 시커멓고 긴 꼬리가 재빨리 사라지는 게 보였다. 갑판 위에 있던 자들은 그게 뭔지 즉각 알아봤다.
"마그라스다!"
"물돼지야! 물돼지가 틀림없어!"
"지금 도망가는 건가!"
모두가 본 것처럼 틀림없이 마그라스였다.
***
저녁 식사를 위해 몸소 해초를 뜯으러 나왔던 마그라스는 갑자기 나타난 함대를 보자마자 알아챘다.
'빚쟁이들이구나!'
쫓기는 채무자로 산 세월이 길다. 이제 그는 채권자만 보면 두드러기가 일어나며 알아서 몸이 경고를 해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놀란 마그라스는 두 시간 동안 열심히 채집한 해초 뭉치를 내던지고는 호수 깊은 곳으로 잠수했다. 급한 맘에 애써 마련한 저녁거리도 챙기지 못한 것이다.
'저런 악랄한 놈들 같으니라고! 빚쟁이는 지옥 끝까지 쫓아온다더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구나!'
긴 세월을 살아온 마그라스지만 오늘같이 기겁한 적은 많지 않았다.
'저놈들이 이제 함대까지 이끌고 왔으니 아주 본격적으로 나선 것일 터!'
그는 이게 평소의 빚 독촉과 차원이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놈들이 이 몸의 비늘과 가죽을 벗기고, 날 생선포처럼 말려서 팔아먹으려는 게 틀림없다!'
채권자들이 이제 그 모든 인내심이 다해서 드래곤의 가장 큰 재산인 몸뚱이 그 자체를 노리는 게 틀림없었다.
안타깝지만 마그라스는 십여 척의 함선을 당해낼 힘이 없었다. 만용을 부리다가는 포경선에 둘러싸인 고래처럼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리라.
'아니, 잠깐?'
물속 깊이 잠수하던 마그라스는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이 몸은 공동 안에 갇힌 것 아닌가?'
산란 기둥이라 불리는 이 공동은 출입구가 호수의 물이 흘러들어오는 동굴 수로 하나뿐이었다.
그만큼 에본플로우 외진 곳에 있는,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장소인 것이다.
문제는 출입구가 하나란 점 때문에 누군가 그곳을 막아버리면 달아날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게 숨어 있기 적당한 장소였다.
해초도 많았고, 곤충 인간들의 산란철이 오면 먹을 것도 더욱 풍부해질 터였다. 제일 좋은 건 여긴 곤충들 말고는 찾질 않는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그라스는 궁리 끝에, 호수 밑의 지형을 유심히 살피고는 공동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수중 동굴을 굴토 중이었던 것이다.
즉, 비상용 탈출로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늙은 타르나이 마가트가 이웃 드래곤이 물밑에서 수상쩍은 일을 하고 있다고 했던 게 바로 그것이다.
한데 작업이 완료되기 전에 허를 찔려서, 채권자들이 단체로 우르르 나타났고 말았다.
마그라스는 사색이 됐다.
'이 일을 어쩐담! 이 몸은 지금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됐다!'
***
난리가 난 건 추심위원회의 함대도 마찬가지였다.
여태 점잔을 빼고 있던 트렐리소 자작은 빚쟁이의 분노에 사로잡혀 노호성을 터뜨렸다.
"저, 저, 저! 양아치 같은 새끼! 돈을 떼먹고도 여태 잘만 살아 있었구나! 쳐 죽일 놈!"
아무래도 채무자가 건강한 듯한 모습에 눈깔이 뒤집힌 것 같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돈 빌려주고 마음고생으로 앓아누운 게 벌써 몇 년이 아닌가. 한데 저리 멀쩡해? 배알이 꼴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아슈칸도르 상인 가문의 가주가 기함했다.
"위원장! 위원장! 어서 쫓아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여기까지 와서 놈을 놓치겠습니다!"
다들 당장 쫓아가자고 난리였다. 하지만 베니엘은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이 있습니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발끈했다.
"위원장께선 받을 돈이 없어서 그리 여유로운 거 아니오!"
"당장 쫓자고요! 저놈이 물밑으로 영원히 사라지기 전에!"
"드래곤이 아니라 미꾸라지 같은 놈입니다! 이번에 숨으면 또 언제 다시 찾겠소이까!"
그러자 베니엘은 함대가 통과해온 동굴 수로 쪽을 가리켰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 공동의 출입구는 현재 저것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놈은 완전히 갇힌 것이지요. 우리가 상대의 의표를 제대로 찔렀습니다."
그 말에 흥분해 팔을 흔들어대던 추심위원회의 위원들이 얌전해졌다.
"그게 정말이오?"
베니엘은 끄덕였다.
"네, 이제부터 어떻게 저놈을 잡을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08화
그림자 군도 (5)
***
베니엘이 말하는 방법은 간단한 것이었다.
자신이 배 한 척과 함께 공동의 입구 부분을 지킬 테니, 그 사이 함대가 산란 기둥 일대를 뒤져 마그라스를 붙잡으란 것이었다.
"여러분께 이 나이트쉐이드의 베니엘이 약속드리겠습니다. 제 명예를 걸고, 절대로 마그라스가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놈은 지난 패배로 저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때 고리대금업자 카트나가 물어왔다.
"배로 공동의 입구를 지키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물돼지가 괜히 물돼지겠습니까? 물 밑으로 쑥 지나가 버리면 어쩌시려 합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비단 거미의 실로 만든 밧줄과 그물을 잔뜩 준비했잖습니까?"
비단 거미는 아주 양질의 실을 뽑아내는 거대 거미의 일종이다. 그걸로 만든 밧줄과 그물은 대단한 인장 강도를 자랑했다. 드래곤을 포박하기 딱 좋았기에 함선마다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배 아래로 그물을 몇 겹으로 칠 테니 마그라스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오! 그렇다면야…."
"뒤는 제게 맡기시고, 여러분께선 여러분의 일을 하십시오."
이런 제안에 예상 외로 많은 인물들이 반색했다.
"확실히! 위원장이 뒤를 지켜주겠다면 든든하겠구려."
"가장 중요한 곳을 맡아주신다니 감사하오이다."
왜냐하면 채권자들은 이번에 베니엘이 큰 공을 세우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어떠한 수익도 챙기지 않겠다고 공언했으나 앞으로 일이 어찌 풀릴지는 모를 일이다. 만약 베니엘이 결정적인 공을 세우면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일.
이 때문에 채권자들은 혹여나 자기 몫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어 우려했는데, 베니엘이 빠진다니 기꺼웠던 것이다.
'중요하긴 하지만 결정적인 공을 세우기는 어려운 자리지.'
'알아서 물러나겠다니 더없이 좋군.'
'마그라스를 붙잡고 지분을 어떻게 나눌지 논의할 때 배제할 수 있겠어.'
다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베니엘의 제안은 간단히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일부는 우려를 표했다.
"마그라스를 격퇴한 검객이 빠진다는 게 괜찮은 겁니까?"
물론 대부분은 근심할 것 없다고 했다.
특히 트렐리소 자작은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그는 피식 웃기까지 했다.
"저자의 명성이 대단하다지만 기껏해야 마스터 하급의 애송이가 아니겠소? 우연히 파도처럼 밀려온 운을 타고 그 이름을 사방에 떨친 것에 불과하오이다. 근심할 것 없소. 본인의 가문에서 고용한 마스터만 둘이오."
당연히 여러 유력 가문들은 강자들을 데려왔다. 그들의 수를 합치면 마그라스 따윈 아무것도 아닐 터. 게다가 베니엘이 함선 한 척과 빠진다고 해도 나머지 인원은 450여 명가량이나 됐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신중한 자들은 있었다.
"얼마나 강한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실전 경험. 드래곤과 싸워본 자만이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타당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런 의견은 주변에 팽배한 낙관적 전망 앞에서 간단히 묻혀버렸다.
"겁이 많으시구려. 그렇다면 귀하도 저자와 함께 후방에 남으시구려."
"맞소이다. 우리는 나설 테니. 승리는 앞으로 가는 자만이 쟁취할 수 있는 법!"
이미 저마다 함선에서 흥분한 귀족들이 일장 연설에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무도한 채무자를 정당한 권리로 집행하겠다! 충분한 이자와 함께 말이다!"
"우아아아아!"
"드래곤을 향해 그물과 밧줄을 던져라! 그 뒤에 발리스타를 일제히 발사하고 마스터급 검객을 보내 끝장을 보겠다! 이 사냥은 성공할 것이다!"
마그라스가 들으면 식겁할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채권자들은 마그라스에게 변제 능력이 몸뚱이밖에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니 일단 만나면 아주 회를 쳐버리겠다는 결연한 결의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었다.
"가자! 이것은 장대한 서사시의 한 장면이 될 것이다!"
"이 공동이 넓다고 하나 수 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하다! 결국, 놈은 도망치는 데 한계가 있을 터!"
"드래곤은 먼저 발견하는 자의 것이다!"
마치 금은보화를 들고 도망치는 보물 고블린을 쫓아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늙은 타르나이 마가트가 베니엘에게 물어왔다.
"자네가 갖고 있는 마그라스의 비늘은 안 건네주는 건가? 그 추적 장치가 있다면 드래곤을 훨씬 쉽게 토벌할 텐데."
타당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베니엘은 비늘에 대해 위원회에 알리지도 않았다.
"...."
베니엘이 말없이 알 듯 말 듯한 미소만 짓고 있자 마가트가 미간을 좁혔다.
"자네 뭔가 따로 생각이 있군?"
그제야 베니엘은 떠들썩하게 산란 기둥 안쪽으로 진입하는 함대를 보며 답했다.
"비늘을 줘서 마그라스를 찾으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몰려갈 것입니다."
"그렇지? 당연한 거 아닌가."
"하지만 위치를 알 수 없다면 저들은 조급한 마음에 마그라스를 찾기 위해서 산개할 것입니다. 이미 마그라스를 얕보고 있으니까요. 또 서로 가장 큰 공을 세우려고 혈안이 돼 있습니다. 이건 채권 회수와 관련된 부분이니까요."
"그래서?"
"하나 아무리 추심위원회의 전력이 막강해도 드래곤을 얕잡아 보는 건 큰 실수란 겁니다. 게다가 상대가 평범한 드래곤도 아니고요. 한때 에본플로우에서 전설적인 악당이 아니었습니까?"
마가트는 베니엘의 의도를 꿰뚫어 봤다.
"원정대의 성공이 꼭 자신의 성공은 아니라는 듯한 말투군."
"역시 영명하십니다."
그러자 마가트는 경고를 해왔다.
"일단 자네에게 기대를 걸고 있으니 입 다물고 있겠네. 하지만 그 결정이 내게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게야. 내가 위험을 감수하며 저들을 여기까지 안내한 건, 고약한 이웃이 하루빨리 사라지길 바라서라네."
베니엘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마그라스는 확실히 사라질 겁니다. 물론 그 와중에 추심위원회의 함대가 얼마나 박살 나든 마가트 님과는 별 상관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
"불을 최대한 밝혀라!"
"호수 밑바닥까지 훤히 비추도록 빛을 모아!"
"배 아래에 있는 조명을 가동하라!"
추심위원회의 함선 아홉 척은 물밑에 숨은 마그라스를 찾기 위해 일제히 불을 밝혔다. 그 모습이 마치 오징어잡이 어선들 같았다.
이 작전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물밑 깊은 곳까지 볼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숨을 쉬기 위해 올라와 코를 수면 위로 살짝 들이민 마그라스를 찾긴 충분했던 것이다.
"놈이 저기 있다!"
"전속! 전속으로 노를 저어라!"
하지만 추심위원회의 얼음도 녹일 뜨거운 열의와 별개로 그 추적이 쉽진 않았다.
마그라스는 드래곤이 아니라 미꾸라지라는 평에 걸맞게 요리조리 귀신같이 빠져나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놈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젠장!"
"저 기둥 뒤를 살펴봐!"
"알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그라스는 점점 궁지에 몰려갔다. 채권자들의 열정은 지칠 줄 모르는 데다가, 안타깝게도 마그라스에겐 아가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기적으로 호흡을 위해 수면 위로 올라와야 했기에 그때마다 함선들은 집요하게 달라붙어 왔다.
"저기다! 저기 물돼지가 다시 올라왔어!"
"찾았다! 서둘러! 발리스타 준비! 작살 장전부터 해!"
뭣보다 문제는 처음에는 허둥대던 함대가 어느 순간부터는 감을 잡았는지, 그럴듯한 포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던 것.
"배 밑으로 놈이 빠져나가게 두지 마라! 추를 단 그물을 길게 늘어뜨려! 놈을 점점 몰아가겠다!"
처음에는 다소 여유로운 기분으로 둔한 함대를 농락하던 마그라스는 상황이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는 걸 알게 됐다.
마그라스는 배 밑으로 넓게 펼쳐진 그물을 찢으려다가 그 질감에 깜짝 놀랐다.
'비단 거미의 거미줄로 만들었군! 이런 미친! 어쩐지 안 끊어지더라!'
이런 게 몸을 휘감으면 큰일이 난다. 자칫하다가는 호수의 드래곤이란 위명이 무색하게 수중에서 익사해 버릴 수도 있었다. 만약 익사한다면 그건 아마도 호수의 드래곤 일족 중에선 최초일 거고, 영원히 역사에 박제돼 조롱당할 만한 일이었다.
마그라스는 생각만 해도 질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악랄한 놈들! 아무리 채무자라지만 살게는 해줘야지! 이렇게 쫓아와서 못 살게 굴어! 이 세계에는 정녕 인정이라곤 없단 말인가!'
채권자들이 들으면 입에 거품을 물 만한 뻔뻔함이었다.
일단 마그라스는 전투에 임하는 가장 현명한 자세인 '작전상 후퇴'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간신히 조여오는 함대를 따돌리고 공동의 입구 부분으로 가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몸보다 더 큰 배가 떡하니 동굴 수로를 막고 있는 데다가 그 밑으로 그물이 몇 겹이나 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공동에 가둬두고 잡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크릉? 그런데 저 배 어딘가 낯이 익은데?'
마치 악어처럼 수면에 코와 눈만 내놓고 밖을 살피던 마그라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공동의 입구를 막고 있는 배의 정체를 기억해냈다.
'저건 틀림없다! 그 거짓말쟁이 아첨꾼 다크 엘프가 타고 있던 배가 아닌가!'
일전에 마그라스는 폐허 도시에서 웬 다크 엘프 놈의 사탕발림에 속아서 큰 곤욕을 치렀다. 이후 알고 보니 그놈은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베니엘이라 하더라.
마그라스는 즉각 복수를 다짐했지만 베니엘의 부친인 검은 별 나르다리온 남작이 무서워 찾아가진 못했다. 나중에 기회가 오면 반드시 드래곤의 원한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며 해초를 뜯어먹을 뿐이었다.
한데 그놈이 기어코 또 한 무리를 떼거지로 이끌고 자신을 찾아왔던 것이다.
'크르르르릉! 대체! 대체 이 몸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다크 엘프!'
마그라스는 억울하고 분해서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심지어 자신은 베니엘에게 돈을 꾼 적도 없지 않은가?
분노한 마그라스는 당장이라도 전속으로 헤엄쳐 베니엘이 탄 배에 충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늙고 약해진 몸. 자신보다 크고 무거운 배와 충돌하면 다시 뼈 여기저기 금이 갈 게 뻔했기에 그저 분루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늙으니 별 서러운 일이 다 벌어지는구나!'
젊은 시절, 기력이 장사라 불릴 때는 몸통 박치기로 거함을 전복시킨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자신이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의아할 뿐이다.
'내가 그렇게 강하고 튼튼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구나.'
이제는 쪼그라든 늙은이일 뿐인데 말이다. 하나 그렇다고 이대로 굴복할 수는 없는 법. 마그라스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다.'
마그라스가 떠올린 건 강력한 물안개를 일으켜 수면 위의 시야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함대의 연계는 약화될 것이고, 어떻게든 각개격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주문을 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본래 드래곤 하면 마법이오, 마법 하면 드래곤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실력으로는 수 킬로미터 폭을 가진 공동 전체에 안개를 끼게 만드는 대주문이 쉬운 게 아니었다.
'마법 제단을 써야겠군.'
마그라스는 산란 기둥 공동에서 지내며 몇 가지 발견을 할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고대의 유적으로 보이는 마법 제단이다.
제단에는 다양한 사용법이 있는 거로 보였는데, 가장 확실한 건 공물을 바치고 주문을 시전하면 그 효과를 증폭할 수 있다는 것.
'거기서 안개 생성 주문을 쓰면 필요한 만큼 시야가 가려질 거다.'
문제는 마법 제단이 이 공동 안의 한 바위섬에 있다는 것. 뭍으로 올라가야 하니 들킬 위험이 컸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으면 더 위험하다.'
마그라스는 한번 자신의 시커먼 보호색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는 승냥이처럼 무리 지어 물 위에 떠다니는 함대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마법 제단이 있는 바위섬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바위섬에 올라, 최대한 몸을 낮추고는 뱀처럼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드래곤이 사냥꾼들을 피하느라 땅바닥을 납작 기고 있으니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하지만 사는 게 더 중요하다! 굴욕을 감내한 자만이 내일을 볼 수 있는 법이다.'
마그라스는 스스로 그리 다잡으며 나아가 마침내 마법 제단에 닿았다.
109화
그림자 군도 (6)
'아직 안 들켰다.'
하지만 돈을 받아내겠다는 일념으로 쉬지도 않고 날뛰는 채권자들이 자신을 찾아내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터였다.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일단 마그라스는 마법 제단의 상태를 살폈다.
거대한 흑요석 판을 올린 제단은 온통 녹색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인간류에겐 거대한 제단이지만 드래곤인 그에겐 작아서 조심히 다뤄야 할 것이었다.
그는 신중한 태도로, 앞발의 발톱을 써서 제단의 이끼를 긁어냈다.
스걱스걱.
거대한 드래곤이 납작 엎드려 작은 제단을 붙잡고 낑낑거리는 모습은 참으로 궁색했으나, 마그라스는 그런 걸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다행히 마법 제단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마그라스는 더 기다리지 않고 안개 생성 주문을 시전했다. 그는 다른 종족은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언을 읊조렸다.
"호수여, 하얀 숨결을 토하라. 그리고 날 찾는 자들의 눈을 멀게 해다오. 이것은 드래곤의 힘에 의한 명령이다."
그와 함께 주변의 호수의 잔잔한 표면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끓는 것처럼 공기 방울이 일어나더니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마그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되었구나!'
점점 주변이 자욱한 안개에 의해 가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마법 제단의 힘으로 인해 반경 수 킬로미터가 안개투성이가 될 터.
마그라스는 드디어 저 악마 같은 채권자들에게 반격할 때가 왔다고 크게 기뻐했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재앙이 그를 덮쳤다.
투캉! 투카앙!
짧은 소음과 함께 마그라스의 등 뒤에서 사나운 작살들이 날아왔던 것이다.
그것은 배에 설치된 거대한 발리스타에서 발사된 것이다. 작살의 크기는 사람보다도 더 컸고, 끝부분은 값비싼 검은 철을 써 관통력을 높인 종류였다.
그런 흉악한 물건이 한 번에 여러 발이 마그라스의 등에 꽂혔다.
카아아앙!
최초에 등판을 때린 작살은 요란하게 불꽃을 튀며 드래곤의 비늘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커헙!"
마그라스는 충격에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푸우욱!
날아온 작살이 늙어서 헐거워지고 틈이 벌어진 마그라스의 비늘 사이에 그대로 박혀버린 것.
"크워어어어!"
격통에 마그라스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작살은 계속 발사됐다. 대부분 튕겨나갔으나 또 다른 한 발이 마그라스의 등에 있는 발광 볏에 그대로 꽂혔다.
"크아아아! 이놈들이!"
어떻게 알고 이렇게 한번에 몰려든 건지 마그라스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분명 숨을 죽이고 움직여 놈들의 시선을 따돌렸는데!'
의문이 피어올랐으나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작살에는 줄이 연결돼 있었고, 배 쪽에서 그걸 당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권양기를 작동하라!"
각 배의 선장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줄과 연결된 마법의 권양기가 요란하게 돌아가며 드래곤을 잡아당겼다.
우우우웅!
강력한 마법 기계의 힘에 하마터면 마그라스는 속절없이 끌려갈 뻔했다.
"이놈들! 크아아아!"
마그라스는 이를 악물고 버텼으나 안타깝게도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젊은 시절이라면 오히려 배를 끌어당겼을지도 모르나, 그의 허리와 다리는 이미 힘을 잃은 지 오래.
늙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니 결국 당기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요란하게 넘어졌던 것.
"크아아아!"
마그라스는 끌려가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그는 마구잡이로 주변에 손을 뻗었다. 그러다 마법 제단을 붙잡게 됐다.
그 덕에 잠시 더 버틸 수 있었지만 그건 더 큰 문제로 이어졌다.
파지지직! 파직!
드래곤의 강한 악력 때문에 제단의 마법 문자들이 금이 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마력의 불꽃을 요란하게 튀며 깨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마법이!"
뜻하지 않게 마법 제단을 망가뜨린 마그라스는 비명을 질렀다. 그 때문에 성공적으로 발동하던 안개 주문은 예정보다 쪼그라들고 말았다.
계획대로라면 능히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산란 기둥 공동 전체를 안개로 덮을 수 있었겠으나. 지금은 겨우 수백 미터만 가릴 정도로 완료될 터.
게다가 마지막 순간, 제단이 땅에서 뽑혀 나와버렸고, 그 결과 마그라스는 형편없이 뒤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마그라스가 거친 바위섬 위를 있는 대로 긁으며 추하게 딸려 오자 지켜보던 함선에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아아아아! 잡았다!"
"저놈을 봐!"
이 모든 걸 지휘하고 있던 트렐리소 자작은 특별히 거금을 주고 강력한 힘을 가진 마법 권양기를 가져오길 잘했다 싶었다.
"이제 놈에게 밧줄을 던져라! 그리고 마스터들을 출격시켜!"
트렐리소 자작은 이대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한때 호수의 전설이었던 마그라스를 너무 얕본 것이었다.
마그라스는 뒤로 넘어져 끌려가는 자신의 처지에 격노했고, 순간 엄청난 힘을 짜내 등 뒤에 작살을 뽑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크워어어어!"
진노한 드래곤의 포효가 사방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등에서 시커먼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사방을 적셨다. 호수의 물이 검게 물들어 마치 석유라도 유출된 바다를 보는 것만 같았다.
마그라스는 드래곤 브레스를 토하기 위해 숨을 들이켰다. 본래 심각한 폐병 때문에 드래곤 브레스를 토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얼음 브레스를 뿜어냈다가는 내부에서 역류해 폐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마그라스는 화가 나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상태. 브레스의 역류를 감수하는 한이 있어도, 감히 자신에게 이런 굴욕을 준 채권자들에게 뭐라도 먹여주지 않으면 화병에 죽을 것만 같았다.
성난 드래곤의 가슴팍이 마치 군함조처럼 부풀어 오르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자들이 경악했다.
"뭐야! 늙어서 브레스를 못 토하는 거 아니었나!"
"허세다! 겁먹지 마라!"
"아니, 저 냉기는 진짜야! 이대론 다 죽어!"
마그라스는 정말로 드래곤 브레스를 토해냈다.
후우우우우!
물론 한때 호수를 꽁꽁 얼리곤 했다는 그의 전설적인 브레스는 전성기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하나 그와 가장 가까이 있던 트렐리스 자작의 배를 반쯤 얼어붙게 만들긴 충분했다.
거대한 함선의 반절 가까이가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또한 갑판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얼음 기둥이 돼 즉사했다. 실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하지만 마그라스는 공격은 끝이 아니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얼어붙은 함선의 선수 부분을 향해 박치기를 했다.
콰아아아앙!
천지가 울리는 충격음과 함께 함선의 선수 부분이 통째로 박살 나서는 떨어져 나갔다. 허공으로 얼음과 목재의 파편이 무수히 비산했다. 그리고 호수로 추락한 선수 부분이 장대한 물결을 일으켰다.
푸아아아앙!
채권자들은 잠시나마 전설적인 드래곤의 젊은 시절과 마주하고는 경악했다. 그리고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다.
"물러나! 물러나라고!"
"저 드래곤이 미쳤다! 크아아아!"
"다 죽을 거야!"
하지만 큰 피해를 입은 건 마그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공할 위력을 과시했지만 그의 늙은 몸은 방금 박치기로 뇌진탕 증세를 겪고 있었다. 등에서는 출혈이 심하고 브레스의 역류도 심상치 않았다. 폐의 일부가 얼어붙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쌔애액! 쌔애액!"
늙은 마그라스는 호흡 곤란 때문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더 전투를 벌이긴 무리다. 달아나야 한다!'
그는 재빨리 호수로 몸을 던졌다.
쿠아아아앙!
요란하게 물길이 치솟았고, 결국 이 미꾸라지 같은 드래곤은 다시 한번 몸을 감춰버렸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채권자들은 쫓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마그라스의 피로 검게 물든 호수의 물을 몸서리치며 바라볼 뿐이었다.
"이게 드래곤인가…!"
***
당연한 얘기지만 마그라스가 마법을 부리는 걸 눈치채고 재빨리 그 위치를 알려준 건 베니엘이었다. 그는 비늘로 마그라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가 뭔가 수작질을 하는 걸 알고 재빨리 연통을 넣은 것이었다.
"어느 한쪽이 이기면 곤란하지."
베니엘이 바라는 건 양쪽 다 너덜너덜해져서 최종적으로 자신이 어부지리를 거두는 것. 그래서 베니엘은 공동 안에서 벌어지는 이 전투를 계속 유심히 관찰하며 서로 계속 힘만 빼도록 다양한 노력을 물밑에서 벌였다.
그는 추심위원회가 밀리면 그들의 함대에 보급을 제공했고, 반대로 마그라스가 밀리면 그가 몸을 추스를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함대에 잘못된 위치를 제보하거나 하는 식으로 계속 개입했다.
옆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본 늙은 타르나이 마가트는 기가 막혀 했다.
"애초에 자네는 추심위원회의 승리 따윈 관심도 없었구만?"
"뭐, 그렇지요."
"그냥 마그라스라는 드래곤을 지치게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거야. 저 많은 자들이."
베니엘은 솔직히 인정했다.
"저 정도 드래곤을 붙잡으려면 본디 이런 거창한 도구가 필요한 법입니다."
마가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허허, 젊은 친구가 속셈이 아주 악랄하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래, 칭찬이야. 내 오래 살면서 보니 결국 큰일은 자네 같은 자가 하더군."
쫓고 쫓기는 전투는 그 뒤로 며칠간 이어졌다. 그 결과 공동 안의 호수 위는 수많은 쓰레기가 떠다니게 됐다.
부서진 배의 파편과 떠내려간 물자, 죽은 자의 시체까지 여기저기 부유물이 가득했다. 이미 가라앉은 배가 네 척이나 됐다.
결국, 추심위원회는 핵심들이 모인 회의에선 더는 사냥을 지속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무리오…. 후일을 기약하고 그냥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가장 강경하고 자신만만했던 트렐리소 자작은 창백한 얼굴로 그리 제안해왔다. 그는 이번 싸움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직접 대여한 배가 격침당해서 막대한 배상액을 물게 된 데다가, 고용했던 마스터급 검객 중 하나는 물에 빠진 뒤 실종 상태였다.
게다가 본인 역시 마그라스의 드래곤 브레스에 휘말려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 결과 호기로웠던 트렐리소 자작은 며칠 만에 겁쟁이로 전락해 버렸다. 그는 어서 모든 걸 그만두고 떠나고 싶은 듯했다.
이런 의견에 대해 아직 금전에 대한 아쉬움을 접지 못한 고리대금업자 카트나가 반대하고 나섰다.
"이대로 실패한다면 우리 모두 파산입니다. 채권 회수는커녕 이번 원정의 실패로 인한 손실액에 깔려서 죽을 거란 말입니다!"
이 말에 회의장의 모두는 어두운 얼굴이 됐다. 설마 다 늙은 드래곤 하나 잡는데 이 정도로 큰 손해를 볼 줄은 몰랐으니까.
물론 상대적으로 적은 손해를 본 자들도 있으나 이게 참혹한 실패란 점은 변함이 없었다.
옆에 있던 아슈칸도르 상인 가문의 가주가 불퉁한 말투로 되물었다.
"하면 어쩌자는 거요? 마그라스 놈을 잡을 수도 없는데."
이에 고리대금업자 카트나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위원장님께 도움을 청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위원장이라 하면 베니엘을 말한다. 그러자 다들 난감한 얼굴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혹여나 공을 세울까봐 입구나 지키게 했는데 이제 와서 손을 내밀기에는 영 체면이 안 섰기 때문.
"그것은…."
"크흠...!"
"아니, 으음…."
다들 난색을 표했다. 거기에 더해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아무리 위원장이라고 해도 어쩔 도리가 있겠소? 우리가 마스터가 부족해서 당한 것도 아니니."
"맞는 말이오."
"지난번에 마그라스를 격퇴했다고는 하나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소. 당시 드란실 공자와 그분의 강력한 근위대도 함께했다지 않소. 아무래도 위원장의 전공은 과장된 게 틀림없소이다."
"옳소!"
베니엘이 확실히 마그라스를 제압할 수야 있다면야 안면 몰수하고 태도를 바꾸지 못할 것도 없다. 이들 모두 정계와 상계에서 그런 일에 익숙한 자들이었으니까.
하나 그들이 보기엔 베니엘도 그냥 마스터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지난 며칠 동안 마그라스를 상대로 마스터들이 별 활약을 못 했으니 딱히 기대가 안 되는 것이다.
"뭍에서 싸움과 배를 타고 사냥감을 쫓는 건 다르오이다."
"이 사람도 동감합니다."
결국 그렇게 베니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논외가 됐다. 그러자 결국 고리대금업자 카트나가 책상을 두들기며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제 아무런 수단도 없는데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이대로 복귀합니까?"
다들 거기에 더해 입을 다물고 답하지 않았다. 이미 포기하고 돌아갈 생각이 가득한 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기가 안 꺾인 카트나 같은 자는 소수였다.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을 때, 회의가 열리는 기함으로 전령이 도착했다.
"위원장님께서 연통을 넣으셨습니다."
"오? 뭐라 하시나?"
갑작스러운 베니엘의 연락에 모두가 주목했다. 하지만 전령이 가져온 얘기는 모두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안타깝지만 이번 원정의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회의장에 곳곳에서 낮은 탄식이 터졌다.
"이런…!"
"흐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위원장님이라고 딱히 방법이 있을 리 없지요."
"크흠!"
딱 보니 어서 짐 싸서 돌아가자는 얘기를 하려고 전령을 보낸 모양이었다. 사실 이에 반색하는 자들도 여럿이었다. 겁먹고 지쳐서 어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트렐리소 자작 같은 부류였다. 울고 싶은 아이 뺨을 때려준 격이다.
"어렵지만 현명한 판단이오. 위원장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듯하고."
그 말에 반수 이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베니엘의 얘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위원장님께선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번 원정이 실패한 것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위원장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싶다고 말입니다."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임…?"
"아니, 뭘 그렇게까지야…."
"뭘 어쩌시려는 건가?"
자기들이 벌인 일이 있어서 베니엘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희생양으로 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런 짓은 생각도 안 했는데 상대가 먼저 책임을 운운하니 관심이 갈 수밖에.
한데 베니엘의 제안은 그들이 생각도 못 한 얘기였다.
"채권 회수에 실패해 상심하셨을 모두를 위해 위원장님께선 해당 채권을 '적절한 가격'에 매입해 여러분께 약간이나마 도움을 드릴 의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대부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하지만 일부 머리 굴림이 기민하고 셈에 밝은 자들은 곧장 베니엘의 속셈을 알아챘다.
그중에는 고리대금업자 카트나 같은 자도 있었다. 그는 입을 벌리고 소리 없이 경악했다.
'이런…! 당했다!'
1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