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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60-70

60화

2차 원정대 (3)

***

"모든 게 잿더미로군요...."

폐허 도시에 머무는 섀도우 위자드의 책임자 셀바리스 쏜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높은 언덕에서 폐허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눈에 띄는 거라고는 광범위한 파괴의 흔적밖에 없었다.

곳곳에 폭발의 분화구가 파여 있었고, 아직도 사방에서 불길과 연기가 끊이질 않았다. 또한 시체와 온갖 오물이 타는 냄새가 도시 전체에 악취를 뿌리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어진 격전에서 조직에 소속된 많은 마법사가 죽었다.

그야말로 총력전이었다. 폐허 도시에 자리 잡은 세력들은 격전 중 동맹과 배신을 계속 반복했다. 모든 게 너무 혼란스러워 어떠한 동맹이라도 하루를 넘기지 못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 출혈에도 불구하고 결국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다는 것. 남은 건 굴러다니는 시쳇더미와 반토막 난 전력이었다.

"이런 결과를 예상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죠…."

쏜의 말투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그의 활발하고 강인한 정신도 상당히 무뎌진 상태였다.

늘 엄격하고 단정했던 차림새도 지금만큼은 흐트러졌고, 지난 전투의 여파로 몸 상태도 엉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 빌어먹을 놈…!"

쏜은 이를 으득 갈았다. 어쩐지 그 뻔질뻔질한 다크 엘프의 얼굴이 눈앞에서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놈의 이름은 분명 사므엘이라 했다.

대체 왜 지난 일주일간 놈을 잊고 있었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쏜은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오늘 아침에서야 다크 엘프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는 곧장 사므엘을 찾아보려 했다.

일단 일꾼 골렘의 위치를 따라갔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걸 발견했다.

바에는 흘린 보물이 간간이 보였고, 무언가 무거운 물건을 애써 옮긴 흔적이 가득했던 것이다.

즉, 그 사므엘과 일당들은 처음부터 보물이 목적이었던 게 틀림없다.

흔적을 따라가자 호숫가에서 배를 타고 떠난 정황까지 보였다.

"이이…! 이런...!"

쏜은 모멸감마저 느꼈다. 그 다크 엘프 놈에게 완전히 이용당했기 때문이다.

지팡이를 하나 빼낸 거로 각 세력의 분쟁에 불을 붙이더니 그 틈에 혼자 보물을 챙겨서 튀어버리다니….

진실을 알게 되자 늘 여유만만했던 쏜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반드시… 반드시 복수해 드리지요."

지하 어디에 있던지 찾아내서 이번 일의 대가를 치르게 할 작정이었다.

다만 지금은 이런 활화산 같은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었다.

현재까지 벌어진 엄청난 손해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걸 뒤집을 만한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쏜이 아직 정신을 추스르고 버티는 이유였다.

"여기 계셨군요. 쏜 님."

그때 쏜의 부관인 토니아가 나타났다. 창백한 얼굴, 문신과 피어싱으로 개성있던 이 여성 마법사도 지금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 엉망이었다. 피어싱 몇 개는 어디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얼굴에 피딱지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그녀는 평소 같은 비아냥대신 바로 보고를 시작했다.

"새로 발견한 구역에 마법사와 용병들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다만, 워낙 가용한 인원이 적고… 다들 지친지라."

쏜은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지요. 하지만 이건 천운이니 놓쳐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계속 이어진 고통에도 불구하고 섀도우 위자드에겐 한 가지 행운이 따랐다.

지난 전투에서 큰 폭발이 있었는데, 그 결과 도시의 시가지 일부가 날아가며 땅밑에서 새로운 구역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건 지금껏 전혀 알지 못하던 지역이었다. 쏜은 그곳을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섀도우 위자드가 찾아 헤매던 장소라는 걸 깨달았다.

칙칙하게 바랜 노란색 벽돌로 쌓아 올린 유적의 모습이 스승에게 미리 들은 모습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더 좋은 건 다른 세력이 이 새로운 구역의 발견에 대해 아직 모른다는 점이었다.

만약 여기서 목표를 찾기만 한다면 앞서 입은 손해 따윈 벌충하고도 남았다.

그야말로 전화위복의 상황이다.

결과만 좋다면 많은 인명 손실에도 불구하고 섀도우 위자드의 수장인 벡스에게 치하를 받고도 남을 터.

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도, 여기 바글거리는 비천한 것들도, 다 지긋지긋하군요. 전투가 소강상태일 동안 빨리 아카드의 지도를 발굴해서 떠나야겠어요. 일단 적들과 협상을 하는 척하며 시간을 끄세요."

"알겠습니다. 쏜 님."

물론 언젠가 자기 앞길을 방해했던 적들에게 심대한 보복을 할 생각이었다. 그 고약한 다크 엘프도 마찬가지고.

사실 얼마 전, 마그라스에게 평화를 대가로 다크 엘프 사므엘에 대한 신원을 물었다.

한데 그 멍청하고 노망난 드래곤은 전혀 아는 게 없었다. 심지어 가명인 게 확실한 사므엘이란 이름조차 몰랐다.

쏜은 그렇게까지 일 처리가 허술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후우...."

긴 한숨이 나왔다. 이 도시에 엮여 있는 존재들은 모든 게 잘못돼 있었다.

그러던 그때, 갑자기 조직의 용병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와서는 외쳤다.

"쏜 님! 쏜 님!"

"무슨 일이신가요?"

"호수 쪽에 함선이 나타났습니다! 큰 배가 무려 다섯 척이나 됩니다!"

"뭐라고요?"

쏜이 있는 곳은 언덕이긴 하지만 건물에 가려 호수가 잘 안 보였다. 쏜은 근처에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있는 건물 위로 부유 마법을 써서 올라갔다. 그리고 호수를 바라보고는 눈을 치켜떴다.

"저건…!"

정말도 배 다섯 척이 유유히 도시로 향해 오고 있었다.

쏜은 품에서 망원경을 꺼냈다.

사람들은 마법사면 뭐든 마법으로 해결하는 줄 알지만, 쓸만한 기물이 있을 때는 마법과 마력을 아끼는 게 보통이었다.

심지어 쏜의 망원경은 드워프 장인이 많든 고배율의 물건. 어지간한 마법보다 훨씬 나았다.

그 때문에 쏜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디서 저 많은…!"

다섯 척의 배에는 중무장한 병사들이 바글바글 타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깃발을 내세운 귀족들도 여럿 보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쏜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보고 자체가 늦었던 듯 벌써 가장 선두에 있던 배는 호숫가에 닿았고, 뭔가 해볼 틈도 없이 병사들이 우르르 상륙하기 시작했다.

쏟은 곧 망원경으로 그 무리 가운데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

저 뺀들뺀들한 얼굴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뒤통수 거하게 때리고 달아난 사므엘이란 다크 엘프가 저기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군대를 이끌고 다시 나타났다. 얼마나 많이 데리고 왔는지 여기 있는 세력을 다 합친 것보다 세 배는 많은 듯했다.

다시 보니 귀족 가문의 깃발만 수십여 개다. 그중에는 쏜이 알아볼 만한 문장도 많았다.

"드, 드란실…!"

서부의 패자 드란실 공작가의 깃발이 보였다. 그 외에도 드란실 공작가를 따르는 기수 가문들의 깃발과 그들의 사병이 잔뜩 보였다.

결국 쏜은 참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건 재앙이야!"

***

베니엘은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병사들을 보며 옆에 있는 드란실 공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시에 늙은 드래곤이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공자. 한때 악몽으로 통했던 놈입니다."

드란실 공자는 이 원정의 최고지휘관인 주제에 가장 선봉에 서서 돌격할 듯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강한 건 알지만 이 친구가 꼬라박아서 죽거나 다치면 베니엘은 심히 곤란했기에 그를 말렸다.

하지만 드란실 공자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 탐욕 때문에 드래곤이 아니라 물돼지라 불린 놈 아닌가? 본 공자도 알고 있다."

드란실 공자도 에본플로우의 거주민답게 자칭 호수의 신사인 그 드래곤을 물돼지로 기억하고 있었다.

"크흐하하핫! 잘 됐군! 아주 잘 됐어! 이번 기회에 물돼지 놈을 잡아야겠구나. 고맙군! 이 친구야. 자네가 내게 최고의 사냥감을 제공해 준 거야!"

아무래도 드란실 공자는 이번 원정이 무슨 사냥 대회라도 되는 듯 들떠 있었다. 그는 벌써 자신의 섬뜩하게 휘어진 거대한 칼을 꺼내 들고는 웃어댔다.

"마침 드래곤 슬레이어란 명예가 필요하던 차였다!"

드래곤킨이란 것들은 자신의 본류인 드래곤에게 큰 열등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진짜 드래곤을 죽여서 극복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여겼다.

당연히 이런 기회를 드란실 공자 같은 다혈질이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드래곤은 이 몸이 요리해 보겠다. 나머지는 자네에게 맡기지! 베니엘!"

드란실 공자는 베니엘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선상에서 홰치며 날아올랐다. 그의 드래곤킨 근위대 역시 주인을 따랐다.

공중에서 드란실 공자의 호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찾아라! 사냥의 시간이다! 크하하하!"

"네! 공자!"

베니엘은 그 모습에 혀를 찼다.

'내 저 새끼, 저럴 줄 알았다.'

애초에 베니엘은 그가 총대장답게 진중하게 모두를 지휘할 거라고 기대도 안 했다.

사실 저 무식한 드래곤킨은 선봉장처럼 날뛰어주는 게 이쪽을 돕는 길이긴 했다.

다행히 드란실 공자는 금방 목표를 찾아냈다. 도시가 수선스러워지자 땅 밑에서 쉬고 있던 드래곤 마그라스가 기어올라온 것이다.

드란실 공자는 마그라스를 보고는 크게 기뻐했다.

"반갑구나! 본류여! 네놈을 베고 지저에 이 몸의 무훈을 떨치겠다!"

이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마그누스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소리쳤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지도 모를 이 열등종이! 말세로다! 이젠 저런 열등한 새끼들까지 파닥거리며 날아다니다니!"

분노한 드래곤이 근처에 있던 거대한 바위를 입을 물어 날아오는 무리에게 집어 던졌다.

부우우우웅!

드란실 공자는 기막힌 비행으로 그걸 피해냈다. 하지만 뒤에 따르던 근위대 몇은 직격당했다.

카앙! 캉!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들의 갑옷과 비늘이 허공에 반짝이며 뿌려졌다. 반짝이는 비늘 근위대란 이름에 걸맞은 최후였다.

하나 드란실 공자는 근위대가 죽거나 말거나 공격을 명령했다.

"쳐라! 처음으로 놈의 비늘 틈을 가르고 피를 뽑아낸 자에겐 금괴를 내릴 테니!"

이 발언에 마그누스는 분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감히 드래곤킨 따위가 트루 드래곤인 자신에게 덤비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몸을 베겠다고? 웃기는군! 너희 따위는 실험에 의해 태어난 모조품! 감히 우리 일족에 속한다고 생각한 것이냐! 어림없는 소리! 네놈들은 우리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비늘 한 조각만도 못한 버러지다!"

하지만 그런 비난에도 드란실 공자의 투쟁심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마그라스의 이빨을 피해 미끄러지듯 비행하며 그의 몸체를 검으로 길게 베며 지나갔다.

츠파아아앗!

칼날이 드래곤의 비늘을 가르자 마치 부싯돌을 긁은 것처럼 어두운 허공에 선명한 불꽃이 길게 튀겼다. 그리고 그 공격은 마지막 순간 마그누스의 허술한 비늘을 일부 잘라냈다.

스걱!

허공으로 드래곤의 검은 피가 뿌려졌다. 그걸 흠뻑 뒤집어쓴 드란실 공자는 폭소했다.

"본류여! 네놈들의 그 꺾이지 않는 오만은 정말 박살 낼 맛이 나는군! 크하하하!"

당연히 마그라스는 분노했고, 격전이 이어졌다.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엄청난 전투였다.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베니엘은 원정대를 향해 손을 들었다.

'때론 복잡한 명령보다 그냥 어택땅이 제일 나은 법.'

과연 그가 내린 명령은 간단하고도 효율적인 것이었다.

"적이 보물을 가지고 있다! 모조리 죽여라! 보물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쟁취하는 자의 것이다!"

그냥 보이는 건 다 쓸어버리라는, 이 이해하기 쉬운 명령은 모두의 뜨거운 호응을 끌어냈다.

"우워어어어! 가자아아!"

"돌격 앞으로!"

"뒤처지지 마라! 금은 우리 가문의 것이다!"

호숫가에 상륙한 자들은 떼를 지어 도시로 돌격해 들어갔다.

상황은 누가 봐도 유리했다.

이쪽의 수가 훨씬 많은 데다가 도시의 세력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아무리 정예해도 지금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걸 어떻게?"

"모르겠습니다! 명령을!"

"아아악! 물러난다!"

경계병들이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부실한 방어진지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원래 이런 외부의 침략 앞에선 도시의 세력들은 힘을 합쳐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임시 동맹은 지금껏 잘 작동해 왔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생결단으로 싸운 터라 더는 상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서로를 향한 감정도 극히 사나웠고.

당연히 합동해서 외부의 세력에 대항한다는 생각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적의 공격에 지리멸렬하기 시작했다.

"막아라! 이 일대를 넘겨선 안 돼!"

"세상에! 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다들 어디서 저렇게!"

이에 용병과 그들을 이끄는 하급 귀족들은 신이 났다.

"저 잡것들이 겁을 집어먹었다! 밀어 붙여라!"

"놈들의 장비만 빼앗아도 크게 벌겠어!"

솔직히 원정대도 엉망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싸움은 기세.

이쪽도 개판이고 저쪽도 개판이라면 사기가 오르고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기기 마련이다.

원정대는 공격 중에 온갖 병크를 터뜨리면서도 꾸준히 도시의 세력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보물은 어디냐! 대답해라!"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미친놈들이!"

"너희가 찾은 걸 내놔라! 크하하핫!"

"막아! 막으라고!"

다만 워낙 군기란 게 없는 잡동사니 그룹이다 보니 하나로 뭉치기보단 도시 여기저기로 제멋대로 흩어지는 경향이 강했다.

베니엘은 이대로 안 된다고 생각에 외쳤다.

"마법사다!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가장 부유하다!"

그게 사실인지는 베니엘 본인도 잘 몰랐다. 다만 그가 섀도우 위자드가 노리는 아카드의 지도를 빼앗아야 했기에, 용병들 중 상당수를 그쪽으로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 노림수는 잘 먹혔다.

큰돈을 번 베니엘의 말이었기에 다들 혹했던 것이다.

"마법사다! 마법사를 노리라고 한다!"

"좋아! 그쪽으로 가자. 저 두꺼비들은 무시해!"

실제로 곧 성과가 있었다.

몰려간 원정대가 섀도우 위자드의 근거지 하나에서 상당한 보물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간 섀도우 위자드는 도시를 발굴하며 많은 재화를 발견했고, 착실하게 한쪽 구석에 쌓아뒀던 것이다.

이걸 본 원정대는 눈이 돌아갔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이 도시에는 부가 있다!"

"이 고마운 녀석들! 우리를 위해 땅 밑에서 저걸 꺼내놓다니!"

원정대의 하급 귀족과 용병들은 상대의 성의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걷잡을 수 없는 탐욕과 욕망에 사로잡혔고, 점점 더 많은 인원이 다른 세력을 무시하고 섀도우 위자드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 상황에 도굴꾼 무리와 그융크족은 안도했으나, 섀도우 위자드의 쏜은 미칠 것만 같았다.

"아니, 다른 놈들도 있는데 우리만 때리는 겁니까! 대체 왜 우리만!"

61화

2차 원정대 (4)

하지만 조직의 책임자로서 계속 머리만 쥐어뜯고 있을 수는 없는 법.

"막아서세요! 몰려오는 놈들을 어떻게든 막아서란 말입니다! 그 사이 유물을 담당하는 쪽은 발굴을!"

방어에 나선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들이 특유의 그림자 언데드를 잔뜩 소환했다. 그와 함께 조직의 하층부를 이루는 용병 전사를 소집해서는 몰려오는 원정대에 맞섰다.

"물러나지 마!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된다!"

섀도우 위자드는 악을 썼지만 원정대는 숫자를 믿고 자신만만했다.

"크흐흐, 놈들이 발작하는 걸 보니 뭔가 근사한 게 있나 보다! 어서 쓸어버려라!"

원정대를 이끄는 하급 귀족들이 신이 나 외쳤다. 이미 그들은 자신의 하류 인생을 벗어나 대박을 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여기서 한탕 못 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야 해!"

"아니, 옛날보다 더 나쁠 거다. 같이 놀던 놈들이 성공한 걸 지켜봐야 할 테니까!"

동기가 충만한 탓인지 평소라면 몸을 사렸을 하급 귀족들도, 옆에서 동료들이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에 펑펑 터져나가는 와중에도 돌격했다. 그야말로 금이 모두에게 용기란 마법을 걸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 쏜은 점점 초조해졌다.

"발굴을 서둘러야 합니다! 어서요!"

쏜은 바쁘게 움직였다. 몰려오는 원정대를 향해 마법을 날리고 틈나는 대로 발굴 상황도 체크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보답받았다.

와르르르! 콰앙!

유적의 한쪽 벽면이 무너지고 마침내 그들이 찾던 방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굴되던 때처럼 길고 긴 시간 봉해져 있던 지역이 드러난 것이다.

"세상에…!"

"여기가 분명하다! 고대 전승과 합치해!"

"쏜 님! 여길!"

안쪽에는 많은 고대의 물건과 보물이 쌓여 있었다. 확실히 이곳은 누군가의 무덤이었다.

이곳에 잠든 주인이 사용했던 거로 보이는 무구와 전차, 각종 그릇뿐만이 아니라, 금화와 보석까지 온갖 게 가지런히 정리돼 있던 것이다. 심지어 도자기 그릇에는 이제는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갖가지 음식을 담아놨던 듯하다.

마치 사후 세계에 대비라도 하려던 것 같은 모양새다.

하지만 쏜을 비롯한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들에게 그딴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 모든 재화는 아카드의 지도란 조직의 중대한 목표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무덤의 주인이 잠든 관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치 철문을 연상시키는 봉인을 발견했다.

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기군요!"

하지만 입구는 엄정한 마법으로 봉인돼 있었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쏜은 초조함을 억누르며 봉인 마법을 전문으로 하는 마법사들에게 물었다.

여기서 쏜이 가장 강력한 마법사인 건 사실이나, 마법의 분야는 방대해서 각자 전문 영역이 있는 법이다.

발굴을 주관하는 마법사들은 봉인이나 함정, 고대 지식의 전문가였기에 쏜 역시 자문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쉽진 않겠지만 모두가 달려들면 한 시간 안에는...."

이에 쏜은 냉막하게 쏘아붙였다.

"아니, 지금 상황에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지껄일 셈입니까?"

"…송구합니다."

"삼십 분 안에 해내세요. 이건 명령입니다. 그 사이 어떻게든 제가 막고 있을 테니까."

그것은 거절할 수 있는 요구가 아니었다. 봉인 앞의 마법사들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쏜은 홀로 밖으로 나섰다.

어떻게든 적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유적 밖으로 나가자마자 한탄했다.

"정말 개같이 몰려오는군요. 후후후…."

심지어 적들의 수는 아까보다 더 늘어나 있었다. 그야말로 사방이 아비규환이다.

쏜은 이런 와중에 눈부시게 활약하는 한 인물을 발견했다.

바로 베니엘이었다.

그는 새하얀 펜테즈멀 블레이드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은 섀도우 위자드의 용병과 마법사들에게 사납게 옮겨붙었다.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올랐다.

"안 돼! 끄아아아악!"

"제발 꺼줘! 어떻게든 해보라고!"

베니엘에게 당한 자들은 비명을 질러댔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다들 금세 바닥에 쓰러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쏜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크윽…!"

하지만 쏜은 애써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마법사란 이성으로 싸우는 존재다. 감정을 일으켜 의지라는 하찮은 힘을 쓰는 검객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길게 한숨을 내쉴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쏜의 얼굴은 냉정하고 차분해졌다.

그는 마법 지팡이로 베니엘을 겨냥하며 중얼거렸다.

"당신만은 용서할 수 없겠군요."

***

한창 검을 휘두르던 베니엘은 순간 머리가 찌르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직감이 경고해 온 것이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며 도깨비불로 타오르는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카아앙!

동시에 요란한 충돌음이 나며 베니엘은 뒤로 사정없이 튕겨 나갔다.

마치 볼링공처럼 날아간 그는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볼링핀처럼 쓰러뜨린 뒤, 근처의 폐건물 벽면에 부딪히고서야 멈췄다.

"크아악!"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 베니엘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옆구리의 격통 때문에 잠시 숨이 안 쉬어지기까지 했다.

그는 잠시 뒤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무언가 곧장 날아왔다.'

충돌의 순간 마력의 스파크가 눈부실 정도로 터진 걸 보면 아무래도 마법이 확실했다.

베니엘은 근처에 뒹굴고 있는 프로스트바이트를 다시 주워서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후우… 후우…."

베니엘은 한번 다운되고는 어떻게든 일어나려 애를 쓰는 권투 선수처럼 비틀거리는 허벅지에 힘을 줬다. 현기증에 머리가 핑 돌아 다시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는 버텨냈다. 지금은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때 머리 위쪽에서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인사치레였습니다만 당신에겐 힘겨웠던 모양이군요."

고개를 들어보니 허공에서 쏜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는 두 팔을 벌린 채 한껏 오만한 표정이었다.

쏜의 등 뒤엔 그림자로 만든 망토가 휘날렸고, 마법 지팡이는 그의 근처에서 둥둥 떠 있었다. 또한 마법적인 문신으로 가득한 쏜의 손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베니엘은 그런 쏜을 보며 압도적이란 감상을 받았다. 그야말로 온갖 마법과 마법 물품으로 떡칠이 된 살아 있는 마법적 요새였다.

본래라면 여기서 좌절감을 느꼈을 터다.

하지만 베니엘의 빼어난 관찰력은 쏜이 이전과 다르다는 점을 순식간에 잡아냈다.

'로브에 구멍이 몇 개 있군.'

쏜의 검은 로브는 단순히 천 쪼가리가 아니다. 강력한 마법이 걸린 방호구였다. 한데 칼이 뚫고 들어간 듯한 구멍이 몇 개 보인다. 지난번에는 없던 것이다.

'짐작 가는 바가 있다. 암살자 길드겠군.'

섀도우 위자드와 반목 중인 도굴꾼 무리에는 암살자 길드가 속해 있다. 그중에는 저런 강력한 마법사에게 일격을 날릴 만한 거물도 있었다.

아마 저 상처의 대가로 목숨을 잃었을 테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전에 있던 마법 물품 몇 개가 보이지 않는다.'

가령 팔찌나 귀걸이, 그리고 쏜의 주위를 작은 별처럼 회전하고 있던 이온 스톤 같은 것들 말이다.

어쩌면 도굴꾼 무리에 속한 솜씨 좋은 도적이 전투 중 훔쳐 간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용 한도에 제한이 있어서 지난 전투에서 소모돼 버린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게임으로 치면 피통이 줄어들고, 공격이나 방어 옵션 몇 개가 사라진 상황이었다.

'확실히 전보단 해볼 만해.'

게다가 베니엘에겐 쏜을 쓰러뜨릴 노림수가 하나 있었다. 애초에 그게 없었다면 2차 원정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 내가 원하는 상황으로 몰고 가기만 하면 저런 강적이라도 반드시…!'

쏜은 이런 베니엘의 심리를 금세 읽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의 눈동자에서 어리석은 희망이 깃드는 게 보이는군요. 다크 엘프. 후후후."

어느새 쏜은 지면으로 내려왔다. 다만 중력에서 벗어난 듯 발끝이 땅에 닿지 않고 10센티미터 정도 부유해 있었다.

쏜이 먼저 물어왔다.

"당신 이름부터 알고 싶군요. 그 사므엘이란 가명 대신 말이지요."

어차피 정체가 들키는 건 시간 문제라 베니엘은 솔직히 답했다.

"베니엘이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베니엘."

쏜은 살짝 눈썹을 치켜떴다.

"이런, 검은 별의 자식이었군요?"

"그래. 좀 잘난 아버지를 뒀지."

"확실히…. 가문으로 돌아가 아비 품에 숨으면 건드리기 어렵겠군요. 그렇다면 여기서 확실히 끝내드리겠습니다."

쏜은 오른손으로 옆으로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지팡이가 빨려와서는 그의 손에 잡혔다.

그와 동시에 전투가 시작됐다.

"잘라라!"

쏜의 외침과 함께 그림자로 만든, 마치 단두대의 칼날 같은 것이 지면을 타고 엄청난 속도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총 세 개였다.

베니엘은 즉각 이를 악물고 첫 번째 그림자 칼날을 쳐서 박살 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는 다크 엘프 특유의 몸놀림으로 피해냈다.

베니엘을 스쳐 지나간 그림자 칼날은 뒤쪽에 있던 폐건물에 직격했다.

그와 함께 건물이 기울더니 베니엘이 있던 자리로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콰아아아앙!

자욱하게 먼지가 일며 베니엘의 모습이 사라지자 쏜은 피식 웃었다.

"이런, 설마 깔려 죽은 겁니까?"

하지만 쏜은 방심하지 않았다. 과연 대답 대신 그의 근처의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쏜은 즉각 냉기 저항 마법을 자신에게 부여했고, 그와 함께 일대에 얼음 폭풍이 몰아쳤다.

쎄에에에엥―!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얼음의 폭풍. 덩치 큰 트롤이라도 얼려 죽일 만한 매서운 냉기와 화살처럼 몸에 박히는 얼음 파편은 덤이었다.

베니엘의 마법검 프로스트바이트가 일으킨 힘으로, 쏜은 몸을 파고드는 냉기에 경악했다.

'냉기 저항을 발동했음에도 이 정도라고!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마법검을 갖고 있는 겁니까!'

베니엘의 마법검 프로스트바이트는 5등급으로 분명 대단한 물건이긴 하지만 이런 위력을 발휘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이건 베니엘의 심장에 자리 잡은 마신의 마력 때문. 쏜은 이런 사정을 몰랐기에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귀찮군요. 6등급? 아니, 7등급 마법검인가요? 남작의 자식 사랑이 지나치군요. 저 정도 마법검을 쥐여 주다니!'

하지만 베니엘이 진정 노리는 건 얼음 폭풍이 아니라 바로 이어질 검격의 순간이었다.

쏜은 시야를 가리는 얼음 폭풍 속에서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사나운 안광을 발견했다.

'이런!'

쏜은 낭패감을 느꼈지만 즉각 방어 마법을 발동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베니엘의 검이 쏜의 몸통에 작렬했다.

카아앙!

방어 마법 때문에 의복이 아니라 무슨 두툼한 갑주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일대를 집어삼키던 얼음 폭풍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베고 지나간 베니엘과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쏜이 거리를 벌린 채 서로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크윽…!"

쏜은 낮게 신음했다. 그의 상반신은 도깨비불이 일으킨 화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쏜은 가볍게 손을 휘저어 그 지독하고 끈적하게 달라붙은 검객의 불길을 꺼버렸다. 다른 이들이 제대로 불도 못 끄고 타죽은 것과 천지차이였다.

"이런… 귀찮게 하시는군요. 후후."

쏜은 여유를 가장했지만 안색이 창백해졌다. 분명 베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타격이 없었던 건 아니다.

쏜은 로브 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손바닥에 끈적이는 피가 잔뜩 묻어났다.

지난 전투에서 입었던 상처가 방금 공격으로 벌어진 것이다.

생각보다 통증이 심했다.

'아무래도 오래 끌수록 좋을 게 없을 듯하군요.'

원래라면 쏜은 특유의 가학적인 성품과 되갚아줄 원한 때문에 베니엘을 한동안 갖고 놀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없었다.

만반의 상태가 아닌 데다가 베니엘 말고도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용병도 막아야 했으니까.

쏜을 몸을 돌려 베니엘에게 향해 웃어 보였다.

"역시 당신은 훌륭합니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베니엘."

베니엘은 과장된 인사로 답했다.

"그거 영광이군. 섀도우 위자드의 위대한 쏜 님에게 인정받다니."

"후후, 여유는 거기까지일 겁니다. 좋습니다. 당신을 인정하지요. 그렇기에 저도 특별한 주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쏜의 기세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딱 봐도 비장의 수를 꺼내놓으려는 게 틀림없었다.

하면 틈을 줘서는 안 될 일.

베니엘은 즉각 그에게 달려들었다.

62화

2차 원정대 (5)

하지만 주문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베니엘은 앞에서 부는 엄청난 바람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수준 높은 주문은 외우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고 그 사이 무방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당연히 마법사들은 그 틈을 대비할 방책을 세웠다.

지금 베니엘을 밀어낸 바람 역시 그런 종류였다.

이런 방식을 '전투 주문'이라 하는데, 무방비하게 하염없이 긴 주문을 외우는 것과는 결이 다른 마학이었다.

"그림자의 흥업이여, 빛의 패망이여, 모든 것을 삼키는 어둠의 진리여...."

심지어 주문이 완성돼 갈수록, 그림자가 일어나 그 대상 베니엘을 옥죄기까지 했다.

흡사 어마어마한 크기의 뱀이 휘감아 조르는 느낌에 베니엘은 이를 악물었다.

"으윽!"

그야말로 온몸의 뼈가 바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다크 엘프 특유의 '흑철'로 만든 품질 좋은 갑옷을 입고 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바로 구겨졌을지도 모른다.

'의지를 일으켜야 한다.'

쏜의 마법을 막으려면 의지를 써야 한다. 마침 적당한 게 있었다.

바로 상대의 마력을 막는 데 특화된 오만의 화염이다.

문제는 조여오는 고통으로 정신이 없는 데다가, 팔조차 들 수 없어 상징물인 가문의 문장을 꺼낼 수도 없다는 것.

상황이 이러니 이전의 베니엘이라면 실패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베니엘은 이번 원정의 출발 전에 나르다리온 남작에게서 결의의 단계에 대해 배웠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공간이다.'

남작의 해설에 의하면 결의의 단계란 결국 자기 의지를 방해받지 않고 관철할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베니엘은 제국의 수많은 검객 중에서도 정점에 설 만한 천재였고, 그 정도 단서만으로도 자기가 무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먼저 모든 감각을 차단해 자신만의 성역을 구축한다.'

이건 일종의 강력한 심리적 장벽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베니엘은 이걸 매우 쉽게 했다.

본인의 천재성뿐만 아니라, 오리지널이 남기고 간 고집덩어리의 비뚤어진 감정 덕분이었다.

'됐다…!'

심리적 방벽이 세워지자 삽시간에 외부의 감각이 차단됐다.

더는 고통도 없고, 그림자 바람의 기괴한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베니엘은 위험천만한 순간에 자신을 격리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베니엘은 본래의 의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바로 오만함의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화염의 방패를 만들어 내는 것.

이 의지의 기예는 일전에 요새 사령관 드랄두를 상대로 창작한 것이었다.

베니엘은 자신이 구축한 고요함의 공간 속에서 이것을 빠르게 완성했다. 새빨간 화염이 베니엘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와 함께 그는 다시 수많은 감각이 휘몰아치는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화르르르륵!

맹렬한 불길이 그를 휘감고 짓눌렀던 그림자를 불태워버렸다.

이 모습에 막 주문을 완성해 발동하려 하던 쏜은 눈을 부릅떴다.

"그 무슨…!"

설마 베니엘이 자신의 견제를 극복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을 터.

이미 주문은 완성됐으니, 결국 상대는 무릎 꿇을 것이다.

쏜은 적에게 파멸을 선고했다.

"옭아매라. 으스스한 손아귀여!"

주문의 완성과 함께 마치 악마의 것을 닮은 시커멓고 거대한 그림자 손아귀가 여러 개 생겨나 베니엘을 압착하기 시작했다.

그 손들에 붙들린 베니엘은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쏜은 승리를 자신했다. 이 공격은 거인이라도 뭉친 고깃덩어리로 만들기 충분한 위력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광경에 쏜은 경악했다.

베니엘을 둘러싼 화염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더니 급기야 그림자 손아귀 불타버렸던 것이다.

"!"

손은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 순간 이미 베니엘은 쏘아진 화살처럼 쇄도해 오고 있었다.

주문을 발동할 틈도 없었지만, 쏜의 마법 지팡이가 바로 방어 체계를 작동했다. 이 대단한 마법 지팡이는 일정범위 안에 주인에게 해를 끼치려는 자가 오면 즉각 파괴 광선을 난사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번쩍!

빛이 작렬하더니 방금 전까지 베니엘이 밟고 있던 대지를 터뜨렸다.

찰나의 순간 그걸 피해낸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마법 지팡이의 방어 체계는 아직 뚫리지 않았다.

곧 2차, 3차 파괴 광선이 작렬했다.

번쩍! 번쩍!

그러나 베니엘은 연달아 신묘한 몸짓으로 그걸 회피했다.

단순히 달리는 걸로 그치지 않고 뛰어올라 대지가 부서지며 허공으로 떠오른 돌덩이를 밟고는 움직였다.

더는 베니엘의 이동은 평면적이지 않았다. 허공에 잔뜩 떠오른 돌덩이를 밟고 입체적으로 기동하고 있었다.

그 덕에 베니엘은 이어진 2차, 3차 광선을 피하고는 기어코 쏜에게 칼을 휘두르는 데 성공했다.

카아아아앙!

이번에도 방어 마법 때문에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지만, 무언가 이전과는 달랐다. 공격이 극렬한 저항을 뚫고 마침내 피해를 준 게 틀림없었다.

"크아악!"

쏜은 입에서 피를 쏟으며 뒤로 밀려났다. 어깨에 깃들어 있는 그림자 망토가 길쭉하게 늘어나 마치 지지대처럼 그를 받쳐줬기에 쓰러지진 않았다. 하나 그 피해가 막심했다.

멈춰선 쏜은 연이어 피를 계속 토해냈다.

"그악! 그그으윽!"

쏜은 도저히 현재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이건 불가능한 일!'

방법 쏜이 발동한 건 무려 5레벨 주문이다.

쏜이 아는 바에 의하면 검객이 5레벨 주문을 의지로 막아내려면 적어도 마스터 중위권은 되어야 한다.

한데 아무리 봐도 저 다크 엘프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베니엘은 중위권은커녕, 미숙한 마스터로 보였다. 아니, 몇몇 부분에서 마스터가 맞기나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놈은 싸움 자체는 진짜 빼어났다. 그 부분에 대해서 쏜은 인정했다.

하지만….

'마스터란 외부에서 마력을 끌어오는 것. 하지만 저 다크 엘프는….'

쏜이 보기에 베니엘은 아까부터 계속 몸 안의 마나 하트의 마력만을 쓰고 있었다.

도대체 심장에 깃든 힘으로 지금껏 한 짓거리를 감당할 수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저건 분명 마스터의 기예가 아니었다.

"대체…!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쏜을 피를 토하며 외쳤다.

그가 괜히 5레벨 주문을 고른 게 아니다.

상대는 잘 쳐줘도 마스터 하위권. 그 정도 실력이면 4레벨 주문을 간신히 막을 뿐이었다.

하면 지금 같은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됐다.

베니엘은 그런 쏜을 보고 히죽 웃었다.

"왜? 이해할 수가 없나?"

사실 여유가 없긴 베니엘도 마찬가지였다. 막아내긴 했지만 몸에 과부하가 걸렸던 것이다. 그래도 당장은 참아야 했다. 노리고 있는 결정적인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좋습니다. 좋아요."

쏜은 입가의 피를 닦고는 눈빛을 바꿨다.

"당신을 쉽게 봐선 안 되겠군요. 여력을 남기지 않는다는 각오로 상대해 드리지요."

"그것참 반가운 소리로군. 아직 뭔가 더 할 수 있는 건가? 쏜?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한데?"

"후후, 당신도 거울을 좀 보셔야 할 것 같군요. 베니엘. 시체 같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섀도우 위자드의 특별함을 선보일 테니."

섀도우 위자드는 지저를 두렵게 하는 마법사 집단인데, 이들의 특기에는 '연계 주문'이란 게 있다.

원리는 간단하다.

먼저 발동했던 주문을 바탕으로 더 강력한 후속 주문이 들어간다는 것.

무슨 소리인가 하면, 이전에 외웠던 주문에 다음 주문을 위한 토대가 이미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 번째, 세 번째 이어지는 주문은 더 빨리, 더 강하게 발동한다.

이 때문에 첫 번째 주문이 복잡해져 발동이 좀 어렵지만, 성공만 하면 두 번째, 세 번째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문제는 말이야 쉽지 실제로 이걸 행하는 건 몹시 어려웠고, 섀도우 위자드 내에서도 연계 주문에 숙달한 자는 귀했다.

쏜은 이 연계 주문의 숙련자이다. 젊은 나이에도 이처럼 재능을 보였기에 수장인 벡스의 수제자로 불렸던 것이다.

"어디 그 알량한 의지로 얼마나 버티는지 지켜보겠습니다. 받아보시지요!"

쏘는 이번에는 6레벨 주문을 발동했다. 고레벨 주문이라 발동에 적잖은 시간이 걸려야 정상이나 연계 주문의 위력으로 가공한 속도로 완성했다.

이미 이전의 5레벨 주문을 외울 때 거진 준비해 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림자여! 부식시키라! 우리의 적을 괴사하게 하라!"

쏜의 명령에 베니엘의 불길에 타버렸던 그림자의 재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 공격은 이전의 그림자 손아귀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드래곤 마그라스라도 대책 없이 직격당하면 중상을 피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베니엘은 이번에도 의지로 일으킨 불꽃으로 이 부식의 힘을 태워버렸다.

화르르르륵!

6레벨 주문이 너무 허망하게 소멸해 버렸다.

"뭣!"

쏜은 그 모습에 턱이 빠질 듯 놀랐다. 늘 차분함과 침착함을 미덕으로 숭상하는 그였지만, 지금은 정말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이 된 것이다.

"대체! 대체! 당신은 뭡니까!"

쏜은 눈앞에서 펼쳐진 불가사의에 전신에 소름이 돋고 공포마저 느꼈다.

방금 건 6레벨 주문이었다.

6레벨 주문이라 하면 '대마법'으로 분류되는 7레벨 주문의 바로 전단계이다.

저걸 의지로 막아내려면 마스터 중에서도 상위권의 힘이 필요했다. 쉬운 예를 들자면,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전사장인 독안룡 카바세호의 경지였다.

베니엘의 의붓누나 아리아나의 후원자인 카바세호는 가문의 검객 서열 3위에 해당하는 강자다.

그 정도는 되어야 쏜의 6레벨 주문을 의지로 막아내는 게 가능한 것이다.

쏜이 미친 사람처럼 부르르 떨며 눈앞의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뭡니까! 뭡니까! 대체 당신은 뭡니까!"

쏜은 충혈된 눈으로 외쳤다. 급기야 손이 덜덜 떨려서 들고 있던 지팡이마저 놓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베니엘은 쉽사리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6레벨 주문을 막아내긴 했지만 그 역시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마신의 마력 때문에 엄청난 일을 했지만 또 심장에 균열이 갔군. 흐....'

드랄두 이후 두 번째다.

베니엘은 겉으론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솔직히 먼저 달려들 힘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대신 전투를 자신의 설계로 이끌어 가기 위해 허세를 부렸다.

"어디 더 해봐. 재밌는데. 크큭."

베니엘의 도발에 쏜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손을 떨면서 마법 지팡이를 다시 불러들였다.

"조, 조, 좋습니다…. 후후하핫!"

쏜은 미지의 공포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면서도 애써 웃어댔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끝장을 내야 해! 끝장을 내야 해! 안 그러면 내가 죽어! 내가 죽어! 내가 죽어!'

다행히 연계 주문은 총 3단계다.

아직 최후의 주문이 남아 있었다.

'이것만은 피해가 커서 쓰지 않으려 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마지막은 7레벨 주문이기 때문이다. 연계 주문의 특성상 점점 주문의 단계가 올라갔다.

하지만 쏜은 아직 대마법사가 아니었기에 7레벨 주문을 정상적으로 발동하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꼼수가 있기 마련.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는 자신의 생명을 20년을 바쳐 1년에 한 번 7레벨 주문을 시전 가능했다.

"흐흐… 흐흐흣! 흐흐!"

쏜은 광기 어린 얼굴로 웃어댔다.

"날 이렇게나 밀어붙이다니… 당신에게 경의…, 경의를 표하지요. 그래서 이 특별한 주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7레벨 주문의 이름은 '공허 폭발'.

삼단 연계인 [그림자 손아귀]-[그림자 부식]-[공허 폭발]의 단계의 정점을 찍는 기술이다.

쏜은 이 위력에 자신이 있었다.

삼 단계를 모두 적중시키면 설령 마그라스 같은 드래곤이라도 쓰러뜨릴 만했던 것이다.

그는 악을 쓰며 외쳤다.

"부디 영광으로 삼고 저승으로 가십시오!"

그 외침과 함께 주변의 공간이 출렁이며, 어마어마한 마력의 격류가 일어났다.

대마법인 7레벨 주문이 발동하자 주변에 있던 모든 마력을 잡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우우우웅!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니엘은 마침내 자신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점이 왔음을 깨달았다.

'드디어. 제일 중요한 순간이다.'

바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때가 말이다.

63화

2차 원정대 (6)

***

눈앞에서 거대한 주문이 발동하는 모습에 베니엘은 전율했다.

마력에 민감한 탓에 그 흐름이 생생하게 느껴졌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거인은 이 일대의 마력을 탐욕스럽게 빨아먹기 시작했다.

그우우우웅!

사방의 마력이 대주문을 향해 빨려 들어갔고 일종의 마력 진공 상태가 만들어졌다.

그 때문에 근처 다른 마법사들의 마법이 모조리 실패했다.

"끌어올 마력이 없어!"

"저게 모든 걸 잡아먹고 있다!"

심지어 마법 물품들조차 일시적으로 기능을 잃어버렸다.

베니엘의 마법검 프로스트바이트도 마치 당장이라도 꺼질 듯한 전구처럼 그 서늘한 빛을 깜빡, 깜빡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5등급 마법검이다 보니 7레벨 주문의 여파에 기능 고장이 일어난 것이다.

우르르르르!

일대의 대지가 떨리고 그 여파로 주변의 폐건물들의 약한 부분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서로 엉켜 싸움질을 벌이던 자들이 비명을 터뜨렸다.

"피해라!"

"이쪽으로 무너진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원정대의 용감한 궁수 몇이 쏜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들이 쏜 화살은 소용돌이치는 검은 그림자의 중심에 있는 그에게 작은 해도 끼치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원정대의 사기는 대번에 꺾였다. 대주문을 목도하고 공포에 질려버린 것이다.

"도, 도망쳐!"

"휘말리면 전멸이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도 곧 들리지 않게 됐다. 쏜을 중심으로 일어난 파동 때문에 소리가 왜곡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사방에는 웅웅거리는 소음만이 가득했다.

원정대는 여태 날뛰던 게 무색하게 꼬리를 만 개마냥 덜덜 떨며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잠자던 거인이 깨어나는 것 같은 압도적인 기운에 바로 전의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도망치다 넘어지는 자.

무기를 놓치고 손을 덜덜 떠는 자.

공황 증세로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자.

사방이 난리였다.

대주문은 그 발동만으로 모두를 패배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이 무리에서 단 한 명만이 지금 이런 상황에도 침착하게 눈을 빛내며 쏜의 주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베니엘이었다.

그는 쏜의 대주문이 주변 환경에서 폭력적으로 마력을 끌어당기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그가 아까부터 계속 기다리던 때였으니까.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중요한 단서가 눈앞에 있다.'

마스터는 더는 마나 하트에 저장된 마력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주변의 환경에서 마력을 가져올 수 있다.

이 방법은 서로 분야가 다르긴 해도 대주문과 상통하는 점이 있었다.

'크게 보면 원리는 같다.'

따지고 보면 검객들 역시 스스로 학자라 칭하지 않던가?

이는 단순히 그런트에 머무는 게 아니라 학자이자 검객으로서 마력을 궁구하겠단 소리였다.

하면 당연히 마법사를 보고도 배울 수 있는 게 있을 터.

지금 쏜은 요새 사령관 드랄두 같이 어설픈 자를 바라봐선 결코 얻을 수 없는 배움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베니엘은 대주문을 보며 연신 찬탄을 터뜨렸다.

'알겠다! 대강 감을 잡았어! 단순히 억지로 인력을 발휘해서 잡아당기는 게 아니다.'

중요한 단서가 손에 잡혔다.

겉보기에 쏜은 강한 인력(引力)을 발휘해 주변의 마력을 억지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쏜은 주변의 마력이 자연스럽게 대주문의 중심부로 들어오게 유도하고 있었다.

'마력이란 보이지 않는 유체처럼 흐르는구나!'

베니엘은 이 관찰에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됐다. 어떻게 그 마력의 유체를 유도하는지 기술적인 요점을 잡아냈던 것.

'일정한 수준 이상의 마력을 뭉치면, 주변의 마력이 자연스럽게 그 극점으로 흘러들어온다.'

즉,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일 일종의 코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베니엘은 왜 고레벨 주문의 시전이 어려운지 알게 됐다.

주문의 레벨이 오를수록 더 많은 마력을 필요하게 되고, 그만큼 강력한 코어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사고한 베니엘은 한 가지 천재적인 발상을 떠올렸다.

'아니, 그럼… 주문 시전자의 코어보다 더 강력한 코어를 만들면 상대의 마력을 빨아들이고 이를 방해할 수 있지 않을까?'

놀랍게도 베니엘은 스스로 마법사들의 고급 기예인 '마법 방해'와 흡사한 원리를 떠올렸다.

마학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지만 오로지 그 재능에 의지해 본능적으로 알아낸 것이다.

하지만 훌륭한 발상이 대개 그렇듯, 어떻게 그걸 현실에 구현하냐는 문제에 좌절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베니엘은 그 보통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존재였다.

'마신의 마력을 이용하면 가능할 것 같은데?'

마법이자 마력의 주인인 마신. 한때 그 완벽함 때문에 '무결자'라 불렸던 존재. 그 신의 남긴 힘은 압도적일 정도로 순수하고 농축된 마력이었다.

아무리 쏜이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그가 다루는 마력이 마신의 것에 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짧은 순간 엄청난 사고 가속으로 이 모든 걸 정리한 베니엘은 한 가지 명확한 결론에 도달했다.

'빼앗는다. 쏜의 마력을 내가 다 빼앗아 버리는 거다!'

그간 어떻게 마력을 끌어당길지가 고심이었다. 한데 눈앞에 분야는 다르지만 수준 높은 교관이 있었다.

베니엘은 그냥 따라하기만 하면 됐다.

'마법사가 주문을 완성할 코어를 만든다면 검객은 마나 하트가 있다. 이걸 쓰면 돼.'

베니엘은 마나 하트에 깃든 마신의 마력을 이용해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다만 처음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대주문의 발동으로 주변의 마력이 공허하게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상한 행동에 쏜은 주문을 외는 걸 멈추고 물었다.

"무슨 짓거리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베니엘은 대답 대신 열심히 쏜의 방법대로 사방의 마력을 자기 심장으로 당겼다.

처음에 그건 부질없는 노력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가자 쏜이 대주문의 발동을 위해 모았던 마력이 코어에서 흘러나와 베니엘에게 흐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마력이란 결국 더 짙고 순수한 곳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쏜은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지금 무슨 사술을…!"

하지만 베니엘은 대답도 하지 않고 집중했다. 그럴수록 쏜이 모은 마력은 물통에 구멍이 난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쏜은 대경실색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는 황급히 인력을 발휘해 빠져나가는 마력을 붙들려 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 인공적인 인력으로 마력을 통제하는 건 효율이 나빴지만 지금 그딴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물통에 구멍이 나서 물이 줄줄 새는데 손으로 그걸 퍼올린다고 얼마나 복구되겠는가?

지금 쏜의 상황이 딱 그랬다.

'이대로라면 출력이 부족해서 대주문이 실패하게 됩니다!'

주문이 실패하면 그 반동으로 큰 피해를 입을 터.

쏜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보단 그냥 남은 마력을 이용해서라도 불완전하게나마 7레벨 주문을 발동하기로 했다.

'원래라면 위력이 부족할 테지만, 연계 마법의 도움을 받는다면…!'

대체 무슨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눈앞의 저 다크 엘프를 어떻게든 끝장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하면 이 모든 미지의 공포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그는 몸에 과부하가 걸리고 큰 후유증이 남을 것을 감수하고는 기어코 대주문을 완성해냈다.

"공허여! 폭발하라!"

불완전하게나마 공허 폭발이 발동했다.

삽시간에 시커먼 구체가 베니엘을 집어삼켜 버렸다.

이제 이 안에서 가공할 위력의 폭발이 일어나게 된다. 이 주문이 대단한 게 무차별적인 피해 대신 구체 안의 특정한 대상만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구체 안에서만 터지기 때문에 폭발력의 낭비도 없다. 실제로 폭발 마법이 작렬할 때 운 좋게 튕겨 나가거나 폭발력의 방향을 빗겨나가 경상에 그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하지만 이 공허 폭발의 구체 안에선 어림도 없는 얘기. 기존 폭발 마법의 단점을 대부분 개선했으니, 실로 7레벨에 어울리는 뛰어난 주문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출력이 부족한 상태로 시전돼 구체가 작고 위력도 약해져 있었지만 다크 엘프 하나 지워버리긴 충분했다.

콰아아앙! 콰가가강!

쾅! 쿠아앙!

곧 베니엘을 집어삼킨 구체 안에서 맹렬한 폭발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

베니엘이 쏜의 물음에 전혀 답하지 않고, 공허 폭발의 구체가 자신을 집어삼킬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경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대단한 일이 그의 심장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쏜에게서 훔쳐 온 외부 마력과 베니엘의 심장 안에 깃든 마신의 마력이 만나서 기묘한 반응이 일어났다.

'힘이 부풀어 오른다. 터질 듯 폭증하고 있어!'

마치 그것은 콜라에 멘토스를 떨어뜨렸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베니엘은 식겁했다.

'자칫하다가는 터져 죽는다!'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강렬할 줄은 몰랐다. 게임과 현실의 간극이 그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당장 이 힘을 처리하지 못하면 베니엘의 모험은 여기서 끝이 날 터였다.

한데 마침 쏜이 도와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출력이 부족함에도 억지로 공허 폭발을 시전했다.

그 때문인지 검은 구체가 자신을 둘러싸기 직전, 베니엘은 쏜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쏜 이 새끼, 진짜!'

베니엘은 쏜의 몸을 다 바친 헌신에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그리고 그 순간 구체 안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쾅! 쾅!

쿠아아아앙!

베니엘은 거기 맞춰 의지, '오만의 불꽃'을 일으켰다.

화르르르륵!

이제는 정말 의지라는 명칭에 어울리게 그의 뜻만으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 힘은 베니엘을 덮치는 가공한 폭발력에 맞서 격렬하게 타올랐다. 빠른 에너지 소모가 일어났고, 그 덕에 몸 안에서 폭증하는 힘을 안정적으로 소모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이미 균열이 일어났던 마나 하트였다.

그 불안, 불안한 상태에서 막대한 마력이 폭발하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마나 하트가 박살 나 버렸다.

카아앙!

어쩐지 귀에서 커다란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베니엘은 숨이 턱 막혔다.

원래라면 이 순간으로 그는 검객으로서 끝장이라 볼 수 있었다. 아니,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목숨마저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하지만 베니엘에겐 이 문제를 빠져나갈 구석이 있었다.

바로 마스터 승급이다.

이제 의지도 다룰 수 있고, 외부에서 마력을 끌어오는 법도 익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명명백백한 마스터의 경지다. 그리고 이 경지에 이르렀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바로 마나 하트의 변화다.

검객의 마나 하트는 경지가 오를 때마다 더욱 강하고 효율적으로 발전한다.

특히 마스터의 경지에서 그 변화가 극적이다. 이전과는 규격 자체가 달라지기에 그랬다.

베니엘은 공허의 구체 속에서 박살 났던 자신의 마나 하트가 승급과 함께 재구성되는 걸 느꼈다.

우우우우웅!

그 형태와 구조가 이전보다 훨씬 발전한 모습으로, 안에는 여전히 마신의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깨지기 전보다 훨씬 더 훌륭한 형태였다. 이건 그야말로 마스터의 증명과도 같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극히 짧은 순간에 다 이뤄졌다.

***

"해치웠나...?"

쏜은 듣기에 따라 매우 불안한 대사를 내뱉었다. 그도 문뜩 그걸 느꼈는지 엉망이 된 몸을 추스르며 덧붙였다.

"저 정도면 누구라도 살아날 수 없겠지요. 후후…. 걱정이 과했군요."

잠시나마 바닥에 쓰러졌던 그의 몸이 다시 허공에 떠올랐다.

전신이 먼지와 피로 엉망이었다. 설마 고작 저 정도 놈에게 이 정도 굴욕을 당하다니.

쏜은 모멸감을 느꼈지만 자신을 애써 다잡았다.

"이런 꼴을 겪는 건 오늘까지입니다."

아마 여기서 마무리됐다면, 아주 훌륭한 악의 빌런 성장기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아직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공허 폭발의 구체가 반으로 갈라진 것이다.

"뭣!"

쏜은 놀라서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살면서 7레벨 주문이 반으로 쪼개지는 건 처음 봤기 때문이다.

저런 게 가능하려면 하이 마스터인 검은 별 나르다리온 남작이 직접 와야 할 테니까.

하지만 저건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 속에서 악몽이 걸어 나왔다.

자신과 비슷하게 창백한 얼굴에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눈빛만은 별처럼 타오르는 다크 엘프였다.

"어떻게…?"

쏜은 불가사의에 사로잡혀 더는 싸울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요?"

쏜은 멍하니 다시 물었다.

분명 위력이 약해지긴 했지만 공허 폭발은 맹렬하게 터졌다. 아무도 그 안에서 버틸 순 없다. 설령 살아남는다고 해도 지금 자신보다 심한 꼴이 되어야 맞을 것이다.

한데 저 다크 엘프는 어떤가?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무언가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듯한 모양새였다.

쏜은 저런 모습을 이미 몇 차례나 본 적이 있었다. 비록 검객은 아니지만 조직의 다른 마법사들이 새로운 레벨의 주문을 뚫어냈을 때 저런 얼굴을 하곤 했다.

"아아, 알겠군요. 저건… 긍지군요."

그 순간 빛이 번쩍이며 검기가 작렬했다.

베니엘이 반월형의 에너지를 검으로 쏘아낸 것이다.

이전에 그가 검기를 사용할 수 없어, 억지로 도깨비불을 뭉치고 뭉쳐 몇 미터 앞으로 뿌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예였다.

그건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왔고, 쏜의 오른쪽 상반신을 잘라버렸다.

"아…!"

쏜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대신 멍하니, 허공으로 날아가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와 팔, 마법 지팡이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이 땅바닥에 뒹구는 광경을 보지 못했다.

어느새 빛살처럼 빠르게 쇄도해 온 베니엘이 이어서 그의 목을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스걱!

쏜의 머리가 잘린 절단면에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64화

2차 원정대 (7)

쏜의 머리가 허공에서 짧은 포물선을 그리더니 바닥에 먼지를 일으키며 뒹굴었다.

이 전투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다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분명 대주문이 성공해서 저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망나니를 끝장냈던 게 틀림없었다.

눈치 빠른 자들은 이미 도망치려고 몸을 돌린 상태. 한데 그 시커먼 구체가 빛살과 함께 갈라지더니 멀쩡한 베니엘이 튀어나왔다.

이후 검기를 날리고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가, 저 마법사 우두머리의 목을 친 것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용이었다.

"이게 대체...!"

"과연… 검은 별의 아들이란 건가…?"

"당신도 검의 길을 걷는데 따라 할 수 있겠소?"

"아니… 아니오. 백 년이 지나도 무리...."

이 초월적 무용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다들 감을 못 잡고 있을 때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쏜 님―!"

쏜의 부관 토니아였다.

그녀는 늘 쏜에게 틱틱거리긴 했으나 속으론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런 쏜이 머리가 잘려 바닥에 뒹굴자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

"네놈! 이 다크 엘프 새끼! 절대 가만 안 둬!"

토니아가 날뛰려 하자 다른 마법사들이 서둘러 그녀를 말렸다.

"토니아 님! 진정하십시오!"

"이미 대세가 기울었습니다. 물러나야 합니다!"

그들이 보기에 쏜의 죽음으로 이 싸움은 패배했다. 적은 몇 배나 많았다. 쏜의 대주문이 성공했다면 상황이 반전됐겠지만, 이제는 다 틀린 상태.

"놔! 놓으라고! 미쳤어? 이대로 꼬리를 말고 튀자고?"

토니아는 격노하며 자신을 붙잡은 손으로부터 한쪽 어깨를 빼내고는 베니엘에게 파괴 마법을 날렸다.

그것은 창백한 빛깔의 얼음 창이었다. 공기를 얼리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완성되더니 베니엘을 향해 극속으로 쏘아졌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카아앙!

베니엘은 의지를 일으키지도 않고 프로스트바이트로 그걸 쳐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토니아를 무시하고는 근처에 구르고 있는 쏜의 머리를 잡아서는 들어 올렸다.

"적의 수괴가 쓰러졌습니다! 모두 공격하십시오!"

그 말에 억눌려 있던 원정대가 환호성을 터뜨리며 폭발했다.

"와아아아아! 이긴다!"

"적의 대장이 죽었어! 가자!"

다시 원정대의 기세가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반면 섀도우 위자드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특히 조직의 하층부를 구성하는 용병 전사들은 사기가 급락해서는 무기를 던지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들은 더욱 토니아를 잡아끌었다.

이미 작전은 실패했다.

책임자인 쏜이 죽은 마당에 이인자인 토니아까지 잃어버리면 복귀해도 중징계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미 징계는 확정이라면 토니아라도 구해서 벌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상책이었다.

"토니아 님을 챙겨라! 어서"

"놓으라고! 놈들을 공격해!"

"죄송합니다. 토니아 님!"

"이놈들 하극상이라도 하겠...!"

안타깝게도 토니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마법사 몇이 그녀의 머리에 대고 기절 주문을 사용한 까닭이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한 번에 여러 개의 기절 마법에 당한 토니아는 버티지 못했다. 토니아가 축 늘어지자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들이 그녀를 데리고 몸을 돌렸다.

이 모습에 원정대는 사기가 충천했다.

"놈들이 달아난다! 쫓아라!"

"등 뒤에 화살을 쏴! 어서!"

하지만 그들의 추격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섀도우 위자드가 발굴하던 곳에 쌓여 있던 보물 무더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니, 저게 뭐야! 지린다!"

"우아아아아!"

"진짜 보물이다! 대박이야! 진짜로!"

용병들은 더는 도망자들을 쫓는 대신 유적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안에는 아직 몇몇 마법사가 남아 있었지만 원정대의 칼날에 순식간에 쓰러졌다.

베니엘 역시 모두를 따라갔다.

'분명 저기에 아카드의 지도가!'

유적은 누군가의 무덤이었는데 삽시간에 원정대로 바글바글 찼다.

다들 눈이 돌아가서는 여기저기 쌓여있는 재보에 손을 뻗고 있었다. 베니엘은 고개를 둘러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 봉인!'

딱 봐도 가장 귀중한 게 저기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몇몇 원정대가 문을 살펴보고 있었다.

'빼앗길 순 없지. 이쪽이 고생은 다 했는데.'

베니엘은 즉각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안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의 머리를 밟고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잠깐! 이 안에 든 건 나의 것이다."

삽시간에 철문 앞에 내려선 베니엘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갑자기 베니엘이 가로막자 철문을 살펴보는 인원들이 당혹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 그러시다면야...."

"저희는 좀 살펴보려고."

다들 방금 베니엘이 그 강력한 마법사의 목을 날리는 건 본 탓에 감히 뭐라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딱 봐도 저기 안에 중요한 게 있는 듯해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뿐.

베니엘은 아무래도 이 부분을 확실히 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심장의 마력에서 강력한 기운을 일으켰다. 파동처럼 그 기운이 일대를 훑고 지나가자 떠들썩하던 모두가 움찔하며 멈췄다. 항거하기 힘든 강자의 위압감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베니엘은 이때를 노리고 외쳤다.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보물은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이 말에 환호성이 터졌다.

"우와아아아아! 승리다!"

"승리! 이겼다."

베니엘은 여기서 선을 딱 그었다.

"모든 보물은 여러분이 나눠 가지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용기와 헌신에 대한 대가입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이 봉인 안에 있는 것은, 적의 수장을 꺾은 권리로 제가 갖겠습니다. 만약 이것에 이의가 있는 자가 있다면 지금 바로 나와주십시오."

베니엘은 도깨비불을 일으켰다. 그러자 앞에서 알짱대던 몇몇 놈들이 대경실색해서는 물러났다.

"엇뜨뜨!"

"저는, 저는 아닙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이의가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베니엘은 무덤 안의 다른 보물에 대해선 알아서 나누라고 하지 않았던가?

눈앞에 쌓여 있는 진귀한 물건만 해도 팔자를 바꾸긴 충분한 것이었다. 눈치 빠른 몇몇은 바로 결론을 내렸다.

'괜히 저 망나니의 심기를 거슬려선 좋을 게 없지.'

'저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물건은 화를 부른다. 여기 있는 거로도 충분해.'

결론을 내린 그들은 바로 외쳤다.

"물론입니다! 저 파르나 가문의 둘째 아삼은 당신의 말을 인정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은 건치 용병대의 대장인 이 라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위기를 타고 이런저런 단체의 수장이나 하급 귀족들이 연이어 동의를 표했다. 몇몇은 괜히 늦게 얘기했다 악명 높은 망나니에게 찍힐까 염려하고 있었다.

결국 모두가 베니엘의 요구를 인정했다.

더군다나 그는 정말로 섀도우 위자드의 그 괴물 같은 마법사를 꺾었다. 안에 뭐가 있던 가질 자격은 충분했다.

상황이 정리되자 베니엘은 가볍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자, 이제 승리를 누립시다."

다들 무덤이 무너질 듯한 환호로 답했다.

"와아아아아!"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철문에 관심을 갖는 자들은 아무도 없어졌다. 더군다나 무덤 안에 보물이 많다지만 하나라도 더 확보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여기저기서 윽박지르는 소리와 다툼이 일어났다. 좀 더 지나면 칼부림이 날지도 몰랐지만 베니엘은 신경 쓰지 않았다.

뒤에 있는 보물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봉인이 아직 남아 있는 철문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마력을 퍼뜨려 그 구조를 파악하려 했다.

"다행이군!"

다행히 봉인은 거의 해체돼 있었다.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들이 노력했던 모양이다.

'이거라면 쉽겠네.'

봉인은 거의 풀린 상태라 세련된 기술 따윈 필요 없었다. 베니엘은 도깨비불을 최대로 일으켜서 철문의 틈새에 쑤셔 박았다.

파직! 화르르륵!

그와 함께 부여된 마법이 붕괴하며 마력의 스파크가 화려하게 튀었고, 결국 봉인이 풀렸다.

그우웅.

베니엘은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는 버섯 인간 덕에 각성한 염동력을 이용해 등 뒤의 철문을 닫았다. 아직 전투에 활용할 정도는 안 되지만 이런 식으로 유용하게 쓸 수는 있었다.

'안에 뭐가 많지는 않군. 하지만… 하나하나 가치가 남다른 것 같은데.'

방 안에는 백금 동전이 가득 담긴 상자가 세 개, 보석이 든 가죽 포대, 스크롤 형태의 지도, 그리고 정체불명의 메달이 있었다.

베니엘은 메달을 보며 눈을 좁혔다.

'이게 무슨 아이템이지? 딱 봐도 범상치가 않아 보인다. 이거야말로 대박의 향기가 아닌가.'

게임으로 치면 전설템 느낌이 확 밀려왔다. 심지어 이건 베니엘의 지식에도 없던 물건이라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절로 기분이 들뜬다.

'안에 내재된 힘이 남다르다. 하지만 용도를 모르겠군.'

아무래도 감정을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다만 보퉁 물건이 아닌 듯하니 어지간한 마법사로는 어림도 없을 터.

'분명 막내 고모라면 가능할 텐데….'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막내 고모 리리나라면 분명 제대로 감정해 주리라. 다만 문제가 있었다.

'절대로 빼앗아 간다. 이건.'

막내 고모는 조카의 물건은 자기 물건이라는 이상한 사고의 소유자였으니까. 베니엘은 아무래도 좀 더 믿을 만하고 실력 있는 마법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일단 킵하자고.'

이젠 퀵포우가 사 온 마법 지퍼가 있다. 베니엘은 메달을 마법 지퍼 안에 던져 넣었다.

'보자, 다음은.'

다음은 백금화가 가득 찬 상자 세 개였다. 묵직한 상자로 대충 백금의 순수한 값어치만으로도 5만 두크는 될 듯했다. 하지만 이건 고대의 동전이니 수집가에게 판다면 더 비싸게 받을 수 있을 터였다.

'나중에 수도에서 처분하자.'

일단은 본 사람도 없으니 비자금으로 챙겨 넣기로 했다. 왜냐하면 원정에서 복귀하면 가주에게 수확의 일정 부분을 상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건 다크 엘프 가문의 당연한 법도였다. 그러니 소문이 나지 않은 자금을 따로 빼놓는 게 중요했다.

이전에 공개적으로 정리한 30만 두크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건 입 씻고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아무튼, 챙기고.'

다음은 보석이 든 가죽 포대였다.

가죽 포대를 열어보니 평범한 보석이 아니었다. 안에는 신비로운 에너지를 뿜어내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뾰족한 보석 세 개가 있었던 것이다.

베니엘은 그게 뭔지 바로 알아봤다.

'영혼석이군! 그것도 최상급!'

베니엘은 그걸 얼른 마법 지퍼에 넣었다.

왜냐하면 영혼석은 금지된 마법 물품이기 때문이다. 본디 이 영혼석이란 것의 용도는 한 사람의 영혼을 거기 담아, 육체를 옮겨타는 용도로 쓰였다.

영혼석만 이식하면 좀비의 몸에 있다가 드래곤킨의 몸으로 들어가고, 또 타천사의 몸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활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천 년 전에 제국에서 유행하던 방법인데, 현재는 완전히 금지된 비기였다.

그렇기에 이 영혼석도 금지 품목이다.

'즉, 엄청나게 돈이 된다는 거지.'

늙어가는 몸을 대신해 새로운 육체를 얻고자 비밀스럽게 영혼석을 찾는 이 중에는 제국의 유력자도 여럿이다. 돈을 넘어 새로운 이벤트 발생의 조건이기도 했고.

'대단한 물건을 손에 넣었군.'

마지막 물건은 분명 가장 중요한 아카드의 지도였다.

'이건가. 이걸 그렇게 섀도우 위자드가 노렸단 말이지.'

지도에선 딱히 나쁜 마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베니엘은 지도를 살펴보기 위해 스크롤을 펼쳤다.

그리고 그 순간, 빛이 작렬하며 그의 의식을 어디론가 날려버렸다.

***

"음...?"

베니엘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는 곧 자신이 난생 처음 보는 장소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뭐야? 분명 지도를 펼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무언가 신비로운 마법에 휘말린 듯했다.

주변은 시커먼 석재를 쌓아 만든 낡은 건물이었다. 기둥에 올려져 있는 장식물이나 벽면의 그림을 볼 때 신전이 틀림없었다.

"흐음…."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던 그때, 얼굴에 붕대를 감고 하얀 두건을 뒤집어쓴 무리 몇이 횃불을 들고 나타났다.

마치 나병 환자처럼 보였고, 몸에선 썩은 내가 났다.

베니엘은 그들에게 냉랭하게 물었다.

"너희는 누구냐?"

한데 그들은 벙어리라도 되는 것처럼 답하지 않았다.

대신 허리를 굽힌 채 한쪽을 팔로 가리켰다. 태도 자체는 몹시 공손하게 느껴졌다.

"저쪽으로 가자고?"

그들은 끄덕였다.

"좋다. 안내해라."

수상쩍긴 하지만 여기서 나가려면 일단 부딪혀 볼 수밖에. 베니엘은 다크 엘프다운 거만한 걸음걸이로 따라갔다.

얼마간 복도를 걸었을까?

그들은 거대한 예배당에 도착했다.

한때 무척이나 화려한 장소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장식물은 넘어지고 기물은 박살 나 땅을 구르고 있었다. 오래전에 멸망한 장소란 느낌이었다.

하지만 베니엘은 그런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배당 뒤에 서 있는 거대한 검은 신상에 정신이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전에 은광의 지하에서 봤던 작은 신전에 안치돼 있던 신상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베니엘은 저 신이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무결자…!"

지금은 죽고 사라진 위대한 마신.

무결자의 신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놀라움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 신상 아래 의자가 있었는데, 마치 신을 섬기는 사제 중 가장 높은 이를 위해 마련된 장소 같았다.

그리고 그 의자에 베니엘도 익히 아는 자가 앉아 있었다.

졸린 듯한 인상의 늙은 다크 엘프.

베니엘은 그를 보며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관리관?"

그렇다.

일전에 베니엘이 노동교화를 받던 은광의 관리관이 거기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다시 뵙게 되는군요. 도련님."

65화

2차 원정대 (8)

물론 베니엘은 저 은광 관리관이 특별한 인물이란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걸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저자와 마주하는 건 몇 년 뒤라고 여겼는데….'

베니엘의 판단에는 이유가 있다.

몇 년 뒤면 마신의 교단이 본격적으로 난을 일으키는데 이게 제국이 무너지는 시발점이 된다.

그들이 들고일어난 기치는 명확하다.

이 세계가 고통스러운 건 신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니, 제국을 무너뜨리고 신들이 돌아오게 한다면 지저 전체가 복되리란 주장이었다.

오래간 억압된 하층민들은 구원을 말하는 그들의 꾀임에 열광했고, 제국 전체가 전란의 불바다로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요컨대, 종교적 성격을 띤 민란이라 할 수 있었다.

한데 벌써 마주했으니 이것은 아카드의 지도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베니엘은 일단 이 미지의 지도가 마신의 교단과 관련이 있다는 걸 확신했다.

'역시 위험을 감수하고 2차 원정대를 꾸린 게 정답이었어.'

하물며 지금 상황은 게임에서 본 적도 없던 이벤트. 무슨 일이 벌어질지 베니엘은 긴장과 기대에 사로잡혔다.

"놀랍군. 관리관. 여기서 마주할 줄은 몰랐는데…."

"인생이란 신비로움으로 가득하지요. 특히 어둠으로 가득 찬 지하 세계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그리 말하며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짓는데, 워낙 실눈이라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모를 지경이다.

"흐음… 여긴 어디지? 납치된 건가?"

"아닙니다. 제가 무례하게 도련님을 납치할 리가 없지요. 정중한 초대라고 해주십시오."

"별다른 차이는 없는 것 같은데…. 쓰읍…."

"그럴 리가요. 납치였다면 훨씬 유감스러운 형태로 마주했을 겁니다. 아무래도 저희 교단의 율법은 꽤 엄하거든요. 자, 그것보다 앉으시죠."

관리관은 근처의 석재의자와 탁자를 가리켰다. 베니엘은 손으로 대충 먼지를 쓸어내고는 엉덩이를 붙였다.

"질문에 대답이나 하지?"

"알겠습니다. 이곳은 일종의 환몽의 세계입니다. 꿈의 공간이라 이해하시면 편합니다. 현재 도련님은 의식만이 이쪽으로 날아온 것이지요."

"내가 잠들었다는 건가?"

"네, 짧은 수면입니다. 하시는 일에는 지장이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돌아가도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았을 겁니다. 불과 몇 초 정도?"

한창 보물을 챙기고 있었으니 그건 다행이라 하겠다.

베니엘은 눈앞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네 정체는 뭐지? 왜 날 부른 거고?"

다만 워낙 비밀스러운 인물이라 게임에서 얻은 정보도 제한적이다. 그래서 이 대화로 새로운 무언가를 밝혀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저는 마신 무결자를 섬기는 교단의 주교입니다."

"교단이라… 그런 존재는 오래전 이미 사멸한 줄 알았는데."

"맞습니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요. 특히 종교적 열정이란 그렇게 간단히 끊을 수 없답니다."

베니엘이 잠자코 듣고 있자 관리관은 설명을 이어갔다.

"또한 저는 도련님께서 흡수한 에메랄드 샤드가 봉안된 작은 신전의 책임자기도 했습니다."

"음… 괜히 그 은광에 있던 게 아니었군?"

"네, 신전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지요."

"남작님께서도 아시나?"

관리관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십니다. 그분도 혈통에 근거한 자격을 갖고 계시나 그 자질이 부족했습니다. 샤드를 손에 넣으려고 했으면 도련님께서 본 그 신전의 뼈 무더기 중 하나가 됐을 겁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하하하."

그 때문에 관리관은 남작과 접촉하지 않았다고. 남작은 그를 충직하고 늙은 가신 정도로만 알고 있다고 했다.

"뭐, 실제로 저는 나이트쉐이드 가문에 충성을 다해왔으니까요."

"퀵포우가 열심히 횡령할 동안 꾸벅꾸벅 조는 걸로?"

"하하, 그리 말씀하시니 할 말이 없군요. 하지만 어딜 가나 바구니에서 곡물이 새기 마련입니다."

"변명을 좋아하는 성격이었군. 미처 몰랐는데 말이야."

비난 어린 말에도 관리관은 느긋한 태도였다.

"신랄한 말씀이 남작님과 판박이시군요. 아무튼, 위대한 그분의 힘을 성공적으로 얻으신 걸 감축드립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그때 돌아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베니엘은 묵묵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온몸이 찢어질 것 같은 격통을 느꼈으니까. 삐끗했으면 그때 몸이 터져 죽었을 것이다.

"현재 도련님께선 흡수한 힘을 훌륭히 사용하고 계시는군요. 그 자질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스스로의 천형을 극복하고 마스터의 경지까지 오르다니, 이 늙은이는 정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더군요."

"아부는 됐다."

"솔직한 감상이니까요. 지금까지는 부족한 심장에 그분의 힘을 담느라 자주 금이 가고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이젠 마스터의 튼튼한 마나 하트를 얻었으니 근심할 게 없습니다."

"고맙군. 한데 바라는 게 뭐지? 나는 땅에 떨어진 힘도 아니고, 엄연히 책임자가 있는 힘을 얻었다. 그걸 내버려뒀다는 건 필시 꿍꿍이가 있다는 소리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이건 그 가치를 따지기 어려운 신의 힘이 아닌가.

"맞습니다. 영명하시군요. 저희가 도련님께 바라는 바는 명확합니다."

"말해라."

"도련님께선 앞으로 다시 오실 그분의 사도가 되어주십시오. 그리고 그 힘을 교단의 대업을 위해 휘둘러 주십시오."

관리관의 말투에 어떤 광신적인 열의가 깃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니엘은 그 제안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전혀 그럴 생각은 없다. 나는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한다. 교단이니 종교니 하는 건 몰라."

관리관은 그런 대답에 실망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렇게 답하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귀가 뾰족한 종족은 이기심을 미덕으로 여기니 말입니다. 또 이제 신이란… 낯선 존재겠지요."

"맞다.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신을 위해 봉사해야 하지? 심지어 마신 무결자는 이미 죽은 신이 아닌가?"

베니엘도 지하 세계의 신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마신 무결자는 위대한 존재였지만 결국 태양신과의 싸움에서 패해 사라졌다.

"죽었지만 그분께선 돌아오실 겁니다!"

죽었다는 말이 심기를 건드렸던 걸까? 관리관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마신의 귀환과 그 대의에 대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련님! 이 현세의 끝없는 고통과 악덕이 왜 생기는 거겠습니까? 바로 필멸자들이 이곳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조곤조곤하던 그의 말투가 급변했다. 그는 작금의 현실이 개탄스럽다는 듯 이를 악물고 있었다. 심지어 애써 분노를 참는 듯 가늘고 뼈만 남은 손가락을 꽉 쥐고는 파르르 떨어댔다.

"필멸자의 솜씨로 만든 나라와 체계라는 건 결국 모래로 지은 성처럼 허술하고 무너지기 쉬운 것입니다! 설령 제국을 다스리는 게, 상위 종족이라 여겨지는 타르나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들은 결코! 이 고통과 실패의 끝없는 순환을 끊어낼 수 없단 말입니다."

베니엘은 그의 대의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답은 간단합니다! 필멸자의 아둔함을 비웃을 수 있는 초월자가 강림해서 통치하면 될 일! 아아! 그것은 황금시대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결코 신화 속에만 머무는 환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관리관은 생각만 해도 기쁜지 입매가 비틀어지더니 괴이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끄흐흐흐! 흐흐흣!"

설득이 계속될수록 그의 몸짓에서 절제가 사라졌다. 점점 더 열정적으로, 감정적으로 변해서 허공의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신들이 돌아오게 된다면! 지저 전체가 복될 것입니다! 이는 결코 반론 따윈 존재하지 않는 진실입니다."

그는 그 뒤로 한참 떠들어댔다. 그건 마치 백마 탄 초인에 대해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일장 연설이 끝났을 때 관리관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 듯 팔을 내리고 의자의 등받이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베니엘은 그의 열정적인 연설에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했다.

"결국 신의 통치에 복종하라는 건가?"

"복종이 아닙니다! 자주성에 대한 포기도 아닙니다! 그저 구원의 길을 걷자는 말이지요."

베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개소리는 거기까지 듣기로 하지. 나는 지금의 세계에도 만족한다. 그리고 이 힘은 이미 나의 것이다. 불만이라면 와서 빼앗아 보도록."

이런 도발적 언사에도 관리관은 노여워하지 않았다.

"호방하시군요. 동시에 교만하시기도 하고요."

"많이 듣는 말이지."

"하지만 도련님께선 결국 우리 교단을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제국은 무너질 것이고 지저는 혼란으로 가득 찰 테니까요."

그 이야기는 흘려들을 수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마신의 교단은 강력한 전력이 되긴 한다.

"도련님의 가문도 몰락할지 모릅니다. 남작이 아무리 강해도 개인이지요. 그때가 되면 우리 교단 만한 힘은 없을 겁니다. 교단의 손을 잡으십시오."

"...."

"단순히 의무만 부여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교단은 모든 걸 바쳐 도련님을 지원할 겁니다. 당신은 존귀한 사도로서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복락을 거머쥘 수 있습니다."

베니엘은 일단 잠자코 듣고 있었다. 관리관은 그걸 긍정으로 해석한 듯 더욱 열을 올렸다.

"보십시오. 교단의 부를!"

그 말과 함께 관리관이 손가락을 튕기자 예배당 일대에 엄청난 금은보화가 쏟아졌다.

"결코 이것만이 아닙니다. 교단의 신성한 전사들을 개인의 야욕에 가져다 쓰십시오!"

그 말과 함께 예배당으로 잘 무장한 교단의 성전사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곧 성전사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베니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사도를 위해 이 목숨을!"

"교단의 영광을 위해 분부를 수행하겠습니다!"

이어서 관리관이 소리쳤다.

"아름다운 교인이 있다면 원하는 대로 첩으로 삼고 품으십시오!"

그 말과 함께 퇴폐적이고 야릇한 복장을 한 온갖 종족의 미녀들이 나타나 베니엘을 둘러쌌다.

미녀들은 달콤한 목소리와 웃음으로 베니엘에게 매달려 교태를 부려댔다.

"사도님, 원하시는 건 뭐든지 말씀하세요."

"저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세요."

이 모든 게 실제와 다름없는 정교한 환상이었지만, 실제로 베니엘에게 내어줄 수 있는 것들이기도 했다.

"우리 교단은 지금 수면 아래 있지만 도련님의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고 강력합니다. 사도라 하면 교단의 가장 지고한 존재. 모두가 전심으로 당신을 섬길 겁니다. 이 끓어오르는 진심을 믿어주십시오!"

이에 주변에 만들어진 환상 속의 인물들이 한목소리로 베니엘에게 외쳤다.

"저희의 진심을 믿어주십시오!"

혹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저리 편리하기만 한 이야기가 있을 리가 없다.

'특히 지저에선 말이지.'

지저에선 선의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가치. 당연한 얘기지만 마신의 교단에서도 저런 조건을 제시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대계를 위해서 베니엘은 반드시 필요한 부품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용할 생각으로 가득하다는 거다.

물론 베니엘이라고 상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진 않았다.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저 열정적인 연설을 들으며 교단 놈들을 어떻게 써먹을까 구상하고 있었으니까.

'일단 난이 일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곧장 제안을 받을 필요는 없지.'

여태 뻗댄 게 괜한 이유가 아니다. 덜컥 좋다고 손을 잡으면 저쪽에선 쉬운 놈으로 생각하게 될 게 뻔했다.

베니엘은 아직 여유가 있는 걸 이용해 계속 거절하면서 몸값을 올릴 속셈이었다.

'어차피 놈들은 마신의 힘을 가진 나를 포기 못 한다. 계속 매달릴 거고, 더 큰 조건을 제시하겠지.'

베니엘은 관리관의 제안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거절했다.

"부와 명예는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하겠다. 원하는 여성이 있다면 권력으로 침실로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당당히 연인이 되길 청할 것이다."

"...."

"그러니 네 제안은 내게 아무 쓸모도 없다."

이 거절에 관리관의 얼굴에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금방 감정을 추슬러서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주변에 가득 찼던 환상이 사라졌다.

"후후후… 정말 대단하시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희는 도련님을 적대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힘을 억지로 빼앗지도 않을 겁니다. 도리어 기대할 뿐입니다."

베니엘은 저자가 말한 '빼앗지 않는다'가 사실 '빼앗지 못한다'임을 잘 알고 있었다.

"끈질기군."

"도련님께선 달라지실 겁니다. 점점 더 마신의 힘을 얻게 되면 그분의 아름다움과 정의가 뭔지 알게 되실 테니까요. 강해지고 싶으시잖습니까? 하면, 그렇게 하십시오. 지저에 있는 그분의 파편인 에메랄드 샤드를 더 취하십시오."

이어서 관리관은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아카드의 지도는 에메랄드 샤드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얘기에는 베니엘도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반쯤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인가!"

대박인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아카드의 지도가 지닌 가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현재 베니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황금이나 권력도 아니오, 바로 마신의 마력이었으니까.

"네, 맞습니다. 지도는 여러 개이며 모두 각각의 샤드를 표시하고 있지요."

"그랬군."

"도련님께선 이번에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셨습니다. 섀도우 위자드 같은 천하디천한 자들의 손에 지도가 넘어가지 않게 하셨으니까요."

베니엘은 대화 중 섀도우 위자드가 화제로 나오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잠깐? 교단 놈들, 써먹을 수 있겠는데?'

66화

2차 원정대 (9)

앞으로 섀도우 위자드가 베니엘의 행보에 문제가 될 건 확실했다.

하면 마신의 교단을 써서 견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베니엘은 관리관에게 요구했다.

"확실히 그건 훌륭한 업적이었지."

"물론입니다. 도련님."

"하지만 내가 섀도우 위자드의 보복을 걱정해야 하게 된 건 사실이다. 너희가 진정 날 위한다면 놈들을 제거해 주길 바란다."

갑작스러운 요구에 관리관은 멈칫했다.

섀도우 위자드라 하면 지하 세계를 주름잡는 악의 조직. 마신의 교단이라 해도 쉽지 않은 상대였으니, 섬멸하려면 교단의 피해가 만만치 않을 터.

본격적으로 세를 불려 봉기하기까진 아직 힘을 모으는 게 더 중요했다. 이런 이유로 관리관은 난색을 보였다.

"놈들이 사납다고 하나 남작의 품 안에 계신다면 도련님께선 안전하실 겁니다. 물론 저희 쪽에서 추가적인 경호를 제공할 수 있으니...."

하지만 마신의 교단의 사정이야 베니엘에겐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믿어달라고 하지 않았나? 하면 먼저 신의를 보여라."

"...."

"사도라고 들었다. 하면 교단의 귀한 존재일 터. 한데도 그 사도를 향한 위협조차 처리하지 못하겠다는 거냐?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대를 주교가 아니라 계속 은광의 관리관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겠군."

이 지적에 관리관은 내심 당혹했다.

'이런, 경험이 부족하고 공명심 넘치는 젊은이라 구슬리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 여겼거늘.'

분명 교단의 지원은 후계 구도로 열을 올리고 있는 이 젊은 다크 엘프가 홀라당 넘어갈 만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칼같이 거절하더니, 쉽지 않은 요구까지 해서 이쪽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베니엘의 말은 정론이라 어찌 대꾸하기도 어려웠다. 사도란 교단의 귀한 이. 교리에 따르면 그 위협을 최우선으로 제거함이 옮았다.

관리관은 사과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도련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관리관은 결정을 내렸다. 섀도우 위자드를 파괴하는 건 교단의 힘이라면 분명 가능하다.

'그 때문에 대계가 좀 미뤄질 수는 있겠지만 어쩔 수 없지요.'

역시 사도란 교단에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씨앗'이었으니 말이다.

관리관은 베니엘의 요구를 수용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께서 부여하신 이 과업으로 저희의 진심과 실력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이에 베니엘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고맙군."

이것으로 자신을 이용하려는 마신의 교단과 지난 일로 원한을 품은 섀도우 위자드의 싸움을 붙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 둘이 실컷 치고받도록.'

베니엘은 강 건너 불구경을 하며 실리나 챙길 생각이었다.

아무튼, 이제부터 마신의 교단이 섀도우 위자드를 열심히 때릴 테니 보복을 크게 걱정할 필요 없으리라.

물론 당하는 섀도우 위자드 입장에선 날벼락일 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비밀 결사가 나타나 공격을 해댈 테니 이게 뭔가 싶을 거다.

베니엘은 당황해서 허둥댈 마법사 놈들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게 무척 아쉬웠다.

'마신의 교단 대 섀도우 위자드면 지하에서도 꿀잼으로 뽑힐 매치긴 하지.'

그때 관리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가 끝나가고 있었다.

"일단 도련님의 뜻을 알았으니 재촉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모든 게 그분의 순리대로 될 거라 믿습니다."

베니엘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아카드의 지도를 활성화 해두겠습니다. 섀도우 위자드라면 지도의 보안을 뚫는 데 수십 년을 낭비했어야 했겠지만, 도련님께선 바로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자, 그럼 이만."

그와 함께 베니엘은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음...."

다행히 관리관의 말대로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철문 밖에서 떠들썩한 소음이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병장기를 뽑은 자도 있는 듯 악다구니와 비명도 터졌다.

"안 물러나! 여긴 우리 꺼다."

"지랄! 이 칼 앞에서도 계속 지껄여 보시지!"

베니엘은 그딴 사소한 일에는 신경을 끄고 활성화된 하는 아카드의 지도를 살펴봤다.

그리고는 눈을 치켜떴다.

"아! 제도인가!"

지도는 제국의 수도, 제국의 심장부에 에메랄드 샤드가 있다고 나타내고 있었다. 베니엘의 가슴 속에서 힘에 대한 욕망이 들끓었다. 하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무리지.'

가문 내부의 일이 우선인 데다가 제도(帝都)에는 온갖 괴물이 우글우글하기 때문이다.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섰지만 거기 있는 절대자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에 불과했다.

뭣보다 지저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 가운데 하나인 마족(타르나이)이 득실거렸으니까.

당장 황제만 해도 타르나이였다.

함부로 제도에 접근했다가는 마신의 힘을 알아챈 그 노괴에게 걸려 장난감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반드시 황제의 시야로부터 안전할 방책이 필요했다.

'황제… 제국에서 제일 위험한 존재지.'

일단 강해진 뒤에 도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기는 게임이 아닌 현실이다.

한 번 죽으면, 모든 게 끝이었다.

아니, 황제에게 붙잡히면 죽는 게 차라리 행복할 정도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전투는 끝이 났다.

섀도우 위자드는 걸레짝이 돼 패퇴했고, 드래곤 마그라스 역시 중상을 입고 도망쳤다.

역시 늙고 이빨이 빠졌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라고 할까?

드란실 공자와 근위대의 총공격을 받고도 용케 목숨을 부지해 내빼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드란실 공자는 이를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그 빌어먹을 물돼지를 놓치다니! 크으으윽!"

그가 화를 참지 못하고 방방 뛰며 주변의 건물을 박살 내기에 아무도 다가가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베니엘이 드란실 공자를 달랬다.

"그래도 그놈이 기겁하며 달아나게 만들었으니 공자의 무명이 에본플로우 전체를 쩌렁쩌렁 울릴 것입니다."

"그래도 아쉽다! 아쉽단 말일세!"

"하하하,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겁니다."

불같은 성정이지만 베니엘에게만 무른 드란실 공자는 결국 화를 풀었다.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알겠네."

베니엘은 나중에 달아난 드래곤 마그라스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 영락한 드래곤을 잡아서 굴복시키지만 하면 분명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어디에 숨어 있을지 짐작이 된단 말이지. 크흐흐.'

아무튼, 이렇게 도시에서의 싸움은 끝났다. 나머지 세력인 도굴꾼 무리는 판세를 보더니 진작 도망가 버렸다.

어찌나 바쁘게 도망갔던지 발굴했던 재물의 태반을 챙기지 못했을 정도.

이렇게 이번 원정에서 보물을 얻은 자가 많았고, 아주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우하하하! 팔자 폈다!"

"돌아가면 뭘 해야 하지? 가게를 낼까?"

"병신아! 전에는 침만 꼴깍꼴깍 삼키는 마법검을 사서 더 큰 건에 도전해야지. 여기서 끝내려고? 은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역시 그렇지?"

저마다 꿈에 부푼 이야기가 오갔다.

이에 반해 죽을상이 돼 땅만 보며 묵묵히 걷는 무리도 있었으니 바로 노예로 붙잡힌 그융크족이었다.

드래곤 마그라스가 떠나자 다시 지배가 풀렸는데, 영도자인 주술사들도 없고 사방팔방이 전장이라 그들은 우왕좌왕했다.

이를 놓칠 원정대가 아니었고, 이 값나가는 노예를 닥치는 대로 붙잡았던 것이다.

놈들을 줄줄이 엮어서 끌고 가는 자들의 얼굴이 훤히 펴 있었다.

"모두 비싸게 팔 수 있겠어!"

"그럼! 힘도 센 놈들인 데다가 물속에서도 일할 수 있으니 수요가 많지."

수륙양용인 그융크족은 다재다능하다. 배 밑창에 붙은 민물 따개비를 제거하는 일부터, 무리를 주고 상륙용 해병대처럼 운용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융크족을 이용해 남몰래 호숫가의 도시나 촌락을 약탈하는 일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미 놈들은 노예용 구속구를 목에 차고 있었다.

원정대에 참가한 이들 중 노예상도 여럿이라 처음부터 준비해 왔던 모양이다. 노예란 게 지하에선 주요한 돈벌이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베니엘은 끌려가는 그융크들을 보며 결정했다.

'저놈들을 사야겠군.'

여기서 구하면 도매가다. 노예 시장에 내놓을 때보다 훨씬 싼 값에 살 수 있다. 게다가 그융크를 잡은 자들도 바로 처분하고 돈으로 받고 싶어 할 터.

"이봐. 놈들을 사고 싶다."

베니엘이 의사를 밝히자 과연 그들은 반색했다.

"오! 물론입니다! 명예로운 분께 넘길 수 있다면 저희는 아주 만족스러울 겁니다."

"전사들로 사고 싶다. 쉰 마리 정도면 좋겠군."

호수가 면한 닉스포트의 특성상 그융크족은 매우 요긴할 터.

그게 아니더라도 베니엘은 그융크족을 써먹을 모종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

'사실 백 마리 이상 사고 싶지만 말이야.'

하나 그 정도로 데려갔다가는 남작의 의심을 살 수 있다. 큰고모 우시드라 역시 잔뜩 경계할 테고.

그걸 고려해 적당한 수준으로 매입해야 했는데, 사실 쉰 마리도 많다. 그러니 복귀해서 주둥이를 잘 털어 남작을 납득시켜야 했다.

'호숫가에 적당한 병영을 짓고 살게 해줘야겠군.'

베니엘은 새로 부하들을 얻을 생각에 신이 났다. 그는 퀵포우로 하여금 노예상들과 협상하게 했다. 역시나 셈이 빠른 녀석답게 현란한 주둥이로 가격을 후려쳤고, 싸게 매입할 수 있었다.

"총 1만 5천 두크로 결정했습니다요. 주인님. 찍찍!"

"꿀매로군!"

노예 시장에서 그융크족 전사 쉰 마리를 사려면 5~6만 두크는 줘야 했을 테니 거저먹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베니엘은 즉석으로 노예상들에게 수표를 써서 인장을 찍어줬다. 이것만 있으면 은행에 가서 금으로 바꿀 수 있다. 발달된 마법 덕에 제국의 은행 시스템은 이처럼 편리했다.

"좋은 거래 고맙군."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흐흐흐."

베니엘은 노예를 넘겨받던 중 무언가를 발견했다. 노예상 중 하나가 매우 특별한 화초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건 아마라 꽃이 아닌가?"

'아마라 꽃'은 귀하기로도 지하에서 손에 꼽는 것이다. 망령처럼 창백한 꽃잎과 그 꽃잎이 둘러싼 황금빛 찬란한 수술이 특징이었다.

스스로 빛나는 이 꽃은 대단히 귀할 뿐만 아니라 주술이나 마법에서도 중하게 쓰이는 재료였다.

베니엘은 이 꽃을 보자마자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음....'

어쩐지 갑자기 떠오른 그 차갑고 미려한 얼굴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도 넘기게."

"아,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이걸 알아보시는군요. 한데 이게 값이 꽤 나가는데…."

노예상은 폐허의 외딴 구역에 홀로 고고하게 자라고 있는 이 꽃을 발견했다며, 이게 얼마나 거대한 운이 따른 건지 입을 털어댔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진귀한 꽃은 드넓은 제국에서도 한 해 동안 불과 몇 송이밖에 발견되지 않으니까.

베니엘 역시 도시에 이런 게 있을 줄은 짐작도 못 했다.

"됐고, 1만 두크면 되겠나?"

그융크족의 매입가에 2/3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꽃의 가치를 알기에 베니엘은 바로 수표부터 내밀었다.

노예상의 얼굴이 헤벌쭉 벌어졌다. 놈에겐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귀한 재료가 되어줄 겁니다."

그렇게 일을 다 처리하고 나자 베니엘은 휘하의 인원들을 끌어모아 도시를 떠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원정대의 일부는 아직 만족을 못 한 듯 이 황량한 도시를 아직 더 뒤집겠다고 남았고, 나머지는 복귀를 서둘렀다.

도시의 곳곳이 임시로 차려진 캠프의 불빛으로 요란했다. 원정대는 불가에 모여 술을 나누고 떠들썩하게 웃고 있었다.

다들 한껏 고양된 상태.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드란실 공자가 다시 베니엘을 찾아왔다.

"벌써 헤어지게 됐군."

"공자, 같이 복귀하시지요?"

도시에 남겠다고 한 자들 중에는 드란실 공자도 있었다.

"아닐세. 아마 물돼지 놈이 놓고 간 재물 때문에 슬그머니 돌아올 거 같아. 함정을 파고 기다리려고."

그는 아직 놓친 사냥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베니엘은 조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올 텐데 말이지. 그 사냥감은 이쪽이 잡아주마.'

나중에 마그라스가 베니엘에게 붙잡힌 꼴을 보면 드란실 공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볼만한 터였다.

"알겠습니다. 공자께 행운이 가득하길 빌겠습니다."

"고맙군. 근데 말일세...."

슬쩍 운을 떼는 걸 보니 진짜 용건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조만간 자네 누나와 약속을 좀 잡아주지 않겠나? 괜찮으면 자네 이름으로 나이트쉐이드령에 이 몸을 초대해줬으면 한다만."

드란실 공자가 베니엘에게 잘해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같은 망나니라 유유상종인 것도 있지만 결정적인 건 지하절색이라 할 수 있는 베니엘의 의붓누나 아리아나 때문.

이 드래곤 인간은 완전히 아리아나에게 반한 상태였다. 베니엘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역퍼리(逆Furry)라는 게 존재할 수 있다면 이런 걸까? 대체 드래곤 대가리가 왜 다크 엘프를 좋아한단 말인가!'

아무튼, 드란실 공자는 베니엘을 미래의 처남이라 여기고 호의를 베푸는 것이었다.

드란실 공자는 포악하고 잔인해 다른 이를 벌레처럼 짓밟곤 하지만, 자기 사람이라 여기면 또 잘해주는 희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망나니라 불리는 게 이상하지 않은 쓰레기인데, 이런 점 때문에 사실 괜찮은 자가 아니냐는 의견도 일부 존재했다.

다만, 그가 자신의 팔로 품는 인원이 협소하고, 나머지에겐 피도 눈물도 없기 때문에 공작가의 근심인 점은 변하지 않았다.

뭐랄까, 차기 공작이 되기엔 그의 품이 너무 좁다고 할까?

베니엘은 일단 그 요청을 승낙하기로 했다. 오리지널이 이런저런 핑계로 드란실 공자의 요구를 차일피일 미룬 걸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제 베니엘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의붓누나인 아리아나의 호감도를 올릴지.

아니면, 장래에 공작가를 물려받을 드란실 공자의 호감도를 올릴지.

현재 드란실 공자는 아리아나의 골칫거리다.

아리아나는 전혀 마음이 없는 데 질리지도 않고 구혼을 해오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할까?

이런 상황이니 베니엘이 놈을 떼어 내는 데 도움을 주면 그녀의 호감도가 크게 오른다.

대신 드란실 공자의 분노를 사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제대로 충돌할 수밖에 없으니까.

반면 드란실 공자가 아리아나와 정략결혼으로 맺어지도록 협력하는 길도 있다.

여기에 성공하면 드란실 공자의 큰 호의를 사고, 아주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

대신 아리아나는 영영 안녕이란 게 문제. 호감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인연의 끝이라고 보면 된다. 자신이 원치 않는 결혼을 하는 데 베니엘이 협력했다는 걸 알게 되면 말도 못 하게 원망하기 때문이다.

'과연 누구의 후의를 얻으면 좋을까?'

각자 선택에는 장단점이 있었다.

드란실 공자가 제안한 초대 이벤트는 그걸 결정할 수 있는 길이었고.

'어떤 결정을 하든 이 드래곤 대가리가 우리 영지에 와야 하는 건 변함이 없지.'

하면 일단은 제안을 수락하고 숙고해 봐도 괜찮을 터.

"알겠습니다. 공자께서 그 물돼지 사냥이 끝나시면 제가 좋은 날을 잡아 초청장을 보내겠습니다."

"이런! 고맙군. 크허허헛!"

드란실 공자는 껄껄 웃으며 좋아했다. 그 탓에 긴 주둥이로 난 송곳 같은 이빨들이 한가득 보였다.

하지만 그는 곧 정색하며 베니엘의 팔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그 말이 참이어야 할 걸세. 나는 허언이나 예의상 지껄이고 약속을 안 지키는 놈들을 아주 싫어하거든. 팔다리를 자른 뒤에 호수에 내던지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쉽게 말해 밥 한번 먹자 하고 연락 안 하는 놈들을 증오하는 성격이란 거다.

어느새 드라실 공자의 날카로운 발톱의 베니엘의 팔을 덮은 갑옷을 파고들며 끼기긱, 거리는 거슬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마 이 괴물 같은 작자는 앞발의 악력을 더하는 것만으로도 베니엘의 갑옷을 뚫어버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베니엘은 태연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저도 그런 녀석들을 싫어합니다."

이에 드란실 공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풀고는 베니엘의 등을 세차게 두들겨줬다.

"역시 자네야. 크흐하하핫!"

드란실 공자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번에 베니엘의 무용을 음유시인들이 노래하게 만들겠다고 했다.

베니엘은 겸손을 보였다.

"어디 제 작은 과업이 공자만 하겠습니까? 호수에 악몽이라 불렸던 마그라스는 격퇴했으니 말입니다."

"크하하하! 틀린 말은 아니지. 아, 그러면 음유시인에게 돈을 줘서 우리 둘의 노래가 호수 전역에 울려 퍼지게 하자고!"

67화

황금팔의 검객 (1)

섀도우 위자드의 수장 벡스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실험실에서 모종의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실험실 안에는 역겨운 고름과 썩은 살점의 악취, 그리고 포름알데하이드를 떠올리게 하는 용액의 냄새가 가득했지만 벡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주변으로는 커다란 유리 배양관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안에는 정체불명의 노란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 유리 배양관 안에는 벡스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끔찍한 창조물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젊은 하프 엘프 남성으로, 하나 같이 그 생김새가 똑같았다. 마치 정교하게 제작된 복제 인간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마 이 광경을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들이 봤다면 기함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리 배양관 안에 있는 자의 얼굴은 조직의 모두가 아는 얼굴이었으니까.

바로 벡스의 수제자이자 섀도우 위자드의 미래로 불리는 셀바리스 쏜이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그 쏜이 유리 배양관마다 하나씩 들어 있었고, 멍하니 생기 없는 표정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생기가 없는 그 모습은 마치 살덩이로 만든 인형 같다고 할까?

현재 벡스는 그 인형 중 하나를 붙잡고 작업 중이었다.

벡스가 마법 지팡이를 두드리자 유리 배양관에 연결돼 있던 생체 재질의 기괴한 튜브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유리 배양관의 구멍을 통해 안에 가득 차 있던 노란 용액이 쏟아져 나왔다.

"일어나라. 쏜."

벡스의 말에 유리 배양관의 입구가 열리며 안에 있던 쏜이 멍하니 일어난다.

그는 배양관의 바닥에 침전해 있던 젤라틴 같은 응고물에서 애써 팔다리를 떼어 내며 좀비처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으으... 으으우...."

쏜은 사람의 말을 할 줄 모르는 듯 짐승처럼 신음했다.

하지만 벡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제국에서 금지된 영혼석이었다.

영롱하고 뾰족한 보석.

그 안에는 벡스가 창조한 인공 영혼이 들어가 있었다.

"자, 깃들어라."

벡스는 영혼석을 쏜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이마가 자연스럽게 갈라지며 영혼석을 받아들이더니, 곧 다시 닫혔다.

"으으…. 으윽! 음?"

쏜의 입에서 지금까지의 신음과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멍한 눈가에는 다시 빛이 돌아왔다.

그는 혼란스러운 듯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벡스를 발견했다.

"스승이시여!"

벡스는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쏜, 다시 보게 되어 반갑구나."

쏜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얼굴이었다.

"으윽…! 저도 마찬가지…. 한데 제가 어떻게 살아 있지요? 분명… 마지막에 천지사방이 제멋대로… 흔들리고. 그 다크 엘프 놈이...! 으으윽!"

쏜은 베니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벡스는 그런 제자를 위로하듯 쓰다듬었다.

그러자 검은 의복이 생겨나 알몸이던 쏜의 몸 위로 늘어졌다.

"진정하거라."

그와 함께 벡스는 쏜의 새로운 개체에 인공적인 기억을 부여했다. 벡스의 손끝에서 빛이 일더니 그것이 실타래처럼 풀려서는 쏜의 영혼석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너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단다. 하지만 내가 그 순간 전송 마법으로 여기까지 데려와 살려냈지. 하니, 걱정할 것 없다."

사실 지하의 환경상 벡스 같은 대마법사라도 그런 장거리 전송 주문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쏜은 스승의 말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뭣보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자신의 몸이 순간 이동했던 새로운 기억이 덧씌워졌기 때문이다.

"아아! 그랬군요! 스승님! 이 불초한 제자를 그렇게까지…!"

쏜은 감격한 듯 무릎을 꿇고는 벡스의 발등에 키스했다.

한데 기이하게도 쏜은 이 실험실에 있는 다른 쏜들의 육체를 인식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벽면에 붙어 있는 생명체 쏜의 설계도나 유전자 분석 코드 같은 표시도 알아보지 못했다.

또한 그 옆에 또 다른 쏜이 수술대 위에서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해체돼 있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그의 눈은 오로지 벡스를 향해 충성으로 빛났다.

"스승님, 그 다크 엘프에게 복수해야겠습니다."

벡스는 미소와 함께 끄덕였다.

"그러려무나."

"간악한 놈이었어요! 놈이 일을 망쳤습니다!"

"그래, 복수하거라. 내가 도와줄 테니."

벡스는 다정하게 쏜의 손을 잡고는 실험실 밖으로 이끌었다.

***

소문이란 건 아주 빠른 법이다.

베니엘이 나이트쉐이드로 복귀하기도 전부터 이미 그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가 쫙 퍼져 나갔다.

특히 이건 남작성의 가병들에게 큰 화제였다.

"야야, 들었냐? 이번에 도련님이 대박 친 거? 떼돈 벌었다는데?"

"뭐? 그 망나니가?"

"진짜야. 이미 저자에 소문이 가득해."

다들 베니엘이 드란실 공작령의 수도인 드라카니아의 은행에서 엄청난 거금을 쏟아냈다고 떠들어댔다.

더군다나 그걸로 그치지 않고, 드란실 공자까지 낀 추가적인 원정대를 조직해 다시 폐허 도시를 헤집었다고.

"도시에 그 호수의 악몽이라는 마그라스까지 있었다는 거야."

"아, 그 물돼지?"

"맞아. 그놈이랑 섀도우 위자드란 마법사, 그융크족에 도굴꾼까지 난장판이었다는군."

"그래서?"

"도련님이 조직한 원정대랑 대차게 한판 붙었다는군."

"아니, 그거 거의 전쟁 아니냐?"

당연한 얘기지만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와중에 과장되기 마련이다. 얼마 뒤에는 베니엘이 드래곤 마그누스를 직접 격퇴했다는 말까지 돌았다.

가병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근데 요즘 도련님 정말 다른 거 같지 않냐? 검은 요새에서의 일도 그렇고."

"확실히… 예전 망나니와는 좀 다르지. 솔직히 지난번에 자기를 떠난 호위병 놈들에게 사과하는 거 보고 놀랐다니까?"

이 말에 주변에 있던 자들이 끄덕였다. 원래라면 모욕을 당했다고 당장 베어 죽였어야 정상이니까. 설마 망나니 놈이 먼저 머리를 숙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때 애들 당황하는 거 봤잖아?"

"솔직히 난 연기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요즘 하는 거 보니까 진짜 달라진 거 같기도 하고...."

이에 근처에 있던 다른 가병이 끼어들었다.

"그거 아냐? 망나니 놈이라면 치를 떨던 수문장 어르신 있잖아."

"아! 그 미노타우르 구른크? 요새로 좌천됐던…."

"맞아. 얼마 전부터 검은 요새의 정식 사령관이 됐지만. 아무튼, 구른크 님이 도련님을 그렇게 고평가한다더군."

"흠, 그게 가능한가? 원한 관계라면 이해할 만한데… 좌천된 게 망나니 때문이잖아."

"나도 그게 희한하더라."

상황이 이러자 권력 구도에 민감한 다크 엘프들은 어떤 일련의 흐름을 느꼈다.

"근데 말이야. 최근에 도련님 곁에 있는 놈들 다 잘 나가지 않냐?"

듣던 가병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끄덕였다.

"맞아. 아까 말한 구른크 어르신도 그렇지. 애초에 옥에 갇혀 있었는데 정식 사령관까지 됐으니."

"그것만이 아니다. 퀵포우라고 광산에서 노예 감독관이나 하던 쥐새끼 있거든? 요즘에 도련님 곁에 착 붙어서 보통 위세를 부리는 게 아니야. 저번에 출항 준비할 때 가병들도 몇 붙잡아 부려먹었다니까?"

"뭐? 쥐새끼 주제에? 그걸 가만뒀어?"

"가만 안 두면 어쩔 건데? 그 쥐새끼 두들겨 패면 망나니한테 무슨 꼴을 당하려고?"

지적을 당한 가병 하나는 대답이 궁해진 듯 머리를 긁적였다.

"크흠.... 하긴."

"쥐새끼만이 아냐. 그 홉고블린 삼 형제 알지? 걔들은 노예 감독관도 아니고 그냥 노예였다고. 한데 지금 어찌나 거들먹거리던지...! 허허!"

"심지어 이번에 도련님을 따라간 용병들까지 크게 한탕 했다잖아. 우리는 만져볼 수도 없는 돈을 말이야. 십 년을 여기서 일해도 어림없지!"

"크흐음...."

일동은 단체로 모여앉아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아니, 기회를 봐서 우리도 도련님 밑으로 가야 하나?"

"나쁘지 않은 걸. 요즘 도는 소문을 듣다 보니 그 홉고블린 삼 형제가 도련님이 나중에 영전하면 치안관 자리 하나씩 받는 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오더라."

"세상에! 그런 근본 없는 놈들이?"

"근본이고 뭐고 인생은 줄을 잘 타야 하는 거지."

이렇게 가병 전체가 베니엘의 소식으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이 영 불만스러운 자들도 있었다.

바로 베니엘의 옛 호위병들인 바니카말, 아드릴, 발키무, 네그라크, 오사키아였다.

그들은 오늘도 호위대장인 쿠르신의 문병을 온 상태.

호위병 중 분대장이었던 바니카말이 뚱하게 입을 열었다.

"소문이 사실일 리가 없습니다. 설령 그 망나니가 뭔가 했다고 해도 과장이겠지요. 세상에! 드래곤을 베었다고요? 지하가 무너지기 전에는 그런 일을 없을 겁니다."

이 말에 다른 호위병들이 동조했다.

"맞습니다. 요즘 좀 달라졌다고 해도 사람 근본이 어디 쉽게 변합니까?"

"지난번에 사과도 망나니답지 않게 머리 좀 쓴 거겠지요."

"소문이 사실이라면 곧 복귀한 테니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 아마 소문보다 보잘것없는 수확에 비웃음이나 안 사면 다행일 겁니다."

묵묵히 대화를 듣던 호위대장이 짧게 답했다.

"그래, 나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 말에 호위병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모두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 베니엘이 황금팔을 구하겠다고 원정을 떠난 걸.

솔직히 호위병들은 베니엘이 소문대로 돈을 버는 것에는 성공했을 수도 있다고 내심 생각했다. 애써 겉으로 부정하는 건 지난날의 앙금 때문일 뿐이다.

하지만 황금팔은 전설적인 보물. 아무리 그래도 그 망나니가 그걸 구해올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진 못했다.

호위대장 쿠르신은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그 눈빛은 절대 검을 포기한 기색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언젠가부터 계속 창문 너머로 연병장을 바라보곤 했다는 걸 다들 알았기에….

경애하는 호위대장의 모습에 그들은 차라리 자신들이 틀린 거라면 좋겠단 생각을 하게 됐다.

***

며칠 뒤 베니엘이 복귀했다.

소문 무성한 모험담의 주인공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닉스포트의 주민들은 만사 제쳐두고 항구로 달려갔다.

"뭐? 망나니가 돌아왔다고?"

"가보자! 보물을 잔뜩 싣고 왔을 거야!"

어쩌면 바닥에 흘린 동전 하나라도 주울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도 충분히 재밌는 구경거리리라.

한데 그들은 기대 이상의 것을 보게 됐다.

"우아아아! 저게 뭐야!"

"괴, 괴물인가! 으아앗!"

주민들이 놀란 이유는 간단하다. 서서히 들어오는 베니엘의 배 옆으로 쉰 마리의 그융크족 전사들이 단체로 헤엄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똘똘 뭉쳐서 헤엄쳤기에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고, 그 모습이 마치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보였다.

이러니 멀리서 보면 오해하기 충분했다.

"어엇! 드래곤을 잡아서 끌고 오는 거 아니냐?"

"으으으아! 소문이 사실이었나!"

하지만 얼마 뒤에 그들은 물보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놀라움이 가신 건 아니다.

"우와! 그융크들 아냐? 저렇게 한꺼번에!"

"도련님이 데려온 건가! 놈들 덩치 좀 봐!"

이렇게 많은 그융크가 나타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수면 위로 두꺼비를 닮은 큰 머리통이 드러날 때마다 구경꾼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이야! 입 크기 좀 보게!"

"자네도 단번에 삼켜버리겠구만!"

얼마 뒤 부두에 닿은 그융크족들이 물 위로 요란하게 뛰어오르자 사방에서 놀라서 비명이 터졌다.

"우아아아앗!"

"으앗! 뒤로 가! 어서!"

그융크족은 키가 2미터쯤 되는 근육질의 종족이다. 드래곤 마그라스 앞에서 별로 힘을 못 써서 그렇지, 다른 종족이 보기엔 무서운 놈들이었다.

실제로 힘도 강하고 싸움도 잘해서 지하에선 만만치 않은 종족으로 통했다.

그융크족 전사들이 구경꾼들을 노려보자 모두 황급히 시선을 피하느라 바쁠 정도였다.

"저게 다 도련님 부하인가?"

"그런 모양인데? 노예의 멍에를 하고 있구만!"

"괜찮은 거 맞나? 하나 같이 험상궂게 생겼는데? 이빨도 날카롭고."

마침 그때 배가 닿고 널빤지가 대어졌다. 그리고 베니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련님이다!"

"와아아아아! 도련님!"

최근 행보 때문일까? 망나니는 제법 인기가 좋아져 있었다. 주민들은 화제의 주인공의 등장에 환호성을 터뜨렸다.

베니엘은 이런 뜻밖의 환대에 얼떨떨하면서도 기뻐하며 손을 흔들었다.

'이거 명성작이 잘되고 있는 모양이군.'

서서히 망나니의 악명 사라지는 걸 체감한 탓에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근처에 있던 퀵포우를 손가락을 튕겨 불렀다.

"네, 주인님! 찌익!"

"부스러기처럼 챙겨둔 은화 있지? 적당히 주민들에게 뿌려줘."

이번에 하도 돈을 많이 벌어서 은화 따위는 그냥 잡동사니 담듯 포대에 대충 가져왔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항구에서 생선 좀 잔뜩 사서 그융크 애들 먹이고. 나는 남작님을 보러 갔다 올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미 남작성에 온 듯한 병사가 베니엘을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때 함성이 다시 크게 터졌다.

퀵포우와 용병들이 은화나 은제 기구 따위를 마구 뿌려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와아아아아!"

"도련님! 만세!"

베니엘은 그렇게 공중으로 반짝이며 뿌려지는 은화의 비 속에서 닉스포트의 항구에 발을 내디뎠다.

68화

황금팔의 검객 (2)

***

찾아온 가병의 말을 들어보니 흑요석 성탑 위에서 회의가 진행 중이라 했다.

매번 같은 장소였다.

아마 호수 멀리서 베니엘의 배가 보이자마자 남작이 회의를 소집한 듯했다.

베니엘이 흑요석 성탑 위에 도착해 보니, 남작을 중심으로 언제나와 비슷한 인선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베니엘은 보며 한마디씩 던져왔다.

"축하한다. 이번에 크게 명성을 떨쳤다고 들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우시드라였다. 차분한 말투와 다르게 눈가는 살짝 굳어 있는 게 그녀가 조카의 성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만했다. 하지만 베니엘은 예의 바르게 응대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큰고모 님."

이어서 의붓누나 아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다치지 않고 잘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언제나처럼 쿨한 태도였다.

이외에도 다른 인물들이 의례적인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뭐, 여기까진만 보면 평소와 다를 바 없었는데… 이번에는 좀 특이한, 거머리 같은 존재가 있었다.

아니, 그리 표현하기엔 그 미색이 지하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여성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아! 우리 조카! 장해라!"

바로 조카 사랑꾼, 둘째 고모 아니엘이 복귀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대로 육탄 돌격해 왔고, 가문의 인물들이 보거나 말거나 베니엘을 껴안고 볼을 부비느라 난리였다.

상석에서 지켜보던 남작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제 그도 둘째 여동생의 조카 사랑을 그러려니 하는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근처에 있던 아리아나는 언제나처럼 차가운 표정일 뿐이다.

"...."

하지만 아리아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독안룡 카바세호는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일렁이고 있는 격랑을 발견했다. 그래서 얼른 눈앞에서 벌어지는 촌극을 끊고 나섰다.

"크흠! 크흐흠!"

들으라는 듯 크게 헛기침을 했지만 아니엘의 애정 표현은 그칠 줄을 모른다. 결국 카바세호가 혀를 찼다.

"쯧쯧! 그쯤 하시지요. 그 마음은 알겠으나 조카가 이미 장성했으니 보기 민망합니다."

카바세호는 아니엘을 꽤 존중하고 있었다.

검객과 암살자인 탓에 서로 분야는 다르지만, 일가를 이룬 그녀의 솜씨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거기에 더해 미친년이라 성질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엘은 불만을 드러냈다.

"어머, 그래도 제겐 둘도 없는 조카예요!"

카바세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하지만 도련님께서 장가들 때 따라가실 것도 아니고 그쯤 하시지요."

점잖게 타이르는 말이었으나 정신 나간 여자에겐 무용했다. 아니, 오히려 똘끼 어린 새로운 발상으로 이어질 영감을 줬을 뿐이다.

아니엘은 살짝 눈이 커지더니 화사하게 웃었다.

"맞아요! 그것 좋은 생각이네요. 그러면 평생 같이 살 수 있겠어요!"

이 말에 카바세호는 질려버린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결국 보다 못한 남작이 나섰다.

"아니엘, 거기까지 해라. 회의 중이잖나. 끝나고 그 녀석이랑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이미 남작은 둘째 여동생을 포기했다. 솔직히 이제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을 정도.

그래, 맘에 안 드는 놈들 머리만 잘 잘라오면 그만이지… 뭘 더 바라겠냐는 게 남작의 속마음이었다.

"네, 남작님~."

그제야 서큐버스처럼 베니엘에게 달라붙어 있던 아니엘이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베니엘에게 손으로 키스를 날리고 윙크까지 했다.

베니엘은 나이 차가 별로 안 나는 둘째 고모의 주접에 썩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 제발 체통을 좀…!"

하지만 둘째 고모는 청개구리였다. 남작도 통제를 못 하는데 베니엘의 말을 듣기나 할까. 그녀는 깔깔 웃더니 베니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우리 약속한 거 잊지 마."

일전에 도마뱀 시장에 같이 가기로 한 건을 말했다. 베니엘은 작게 끄덕였다. 그 대답에 만족한 듯 아니엘은 남작에게 물러나겠다고 했다.

"남작님,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봐도 될까요?"

남작은 반색하며 끄덕였다.

하이 마스터인 그는 에본플로우 호수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경지였음에도, 어째서인지 둘째 동생만 보면 도리어 기가 빨리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얼른 가보도록."

애초에 둘째 동생은 회의를 안 좋아한다. 이번에는 회의 핑계로 베니엘을 보러 온 것뿐이었다.

"자, 그럼."

아니엘은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 모습에 가문의 검객 서열 3위인 독안룡 카바세호가 움찔했다. 마스터 상위급인 그도 저 신묘한 기예가 무슨 원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법인지, 뭔가 극한에 이른 체술인지…, 이 자리에서 남작을 빼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니엘이 사라지자 남작은 회의를 다시 주관했다.

"베니엘, 원정에 대해 보고하라."

"네, 남작님."

베니엘은 폐허 도시의 탐험에 대해 얘기했다.

한데 의외로 베니엘은 이야기꾼으로서의 재주가 있던 건지도 몰랐다. 그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했고, 가문의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드래곤 마그라스와의 만남을 설명할 때는 우시드라의 둘째 남편 엘릭카에는 자기 처지도 잊고 감탄을 터뜨렸다.

"대, 대단하군!"

물론 이 때문에 그는 자기 딸인 페샤디아의 눈총을 받아야 했고, 급격히 표정이 어두워졌다.

잠시 뒤, 이야기가 끝나자 남작은 베니엘을 치하했다.

"훌륭하구나. 모험의 성공도 좋지만 네가 마스터에 오른 것이 가장 큰 성과이다."

"남작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가문을 위해 뼈마디가 닳도록 노고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장한 이야기다."

베니엘은 그 자리에서 바로 남작에게 15만 두크의 예금 증서를 바쳤다.

"가문을 위해 써주십시오."

이번에 얻은 그의 수익의 반절 정도였는데, 이는 일반적인 다크 엘프 가문의 상리에 따른 것이었다.

사실 더 심한 곳도 많은지라 먹은 양의 절반을 토해내는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이 부분은 본인이 가주가 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몰래 빼돌린 것도 많으니 상관없지.'

베니엘은 보물 중 명품이라 칭할 만한 장신구와 보석은 따로 모아뒀다. 거기에 더해 봉인된 철문 안에서 얻은 고대의 백금화도 잔뜩이었다. 당연히 이건 상납할 생각이 없었다.

"훌륭하구나."

남작은 크게 기뻐했다. 15만 두크면 은광의 일 년 수익과 거의 비슷했으니까. 이러니 그도 지금만큼은 아주 넉넉한 기분이 됐다.

"네가 이렇게 가문에 도움이 됐으니, 혹여 원하는 바가 있다면 말해 보거라."

베니엘은 당연히 원하는 게 있었다. 15만 두크나 상납하는데 거기에 맞는 대가를 받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에 제가 그융크 노예들을 데려왔습니다. 모두 전사 계급인지라, 그 무리로 병영을 세우고 호수의 규율을 단속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에본플로우에는 수많은 밀수꾼과 해적이 존재한다(정확히 따지면 수적이겠지만 에본플로우가 워낙 바다 같이 넓은지라 다들 그냥 해적이라 부른다).

각지의 영주들은 이를 단속하고자 했으나 호수는 넓고 주민은 적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작은 관심을 드러냈다.

"호수를 말인가?"

"네, 남작님. 가문에 따로 호수를 전담하는 직책이 없으니 그간 범죄자들을 마땅히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제가 그융크 무리를 이끌고 그 혼란을 정리하겠습니다."

"흐음… 하면 이번에 아예 새로운 직위를 만들어 네게 겸하게 하면 좋겠구나. 병영은 어디에 세울 셈이더냐?"

"카파신 섬에 만들면 적절할 듯합니다."

'카파신 섬'은 닉스포트와 3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는 남작 소유의 무인도였다.

그곳이라면 가문의 간섭을 피해서 그융크의 세력을 구축하기 딱 좋았다. 베니엘은 현재는 그융크족이 쉰 마리지만, 무인도에서 몰래 그 수를 더욱 늘릴 속셈이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우시드라는 그런 위험성을 대번에 간파했다.

'저놈이 비밀리에 사병을 기르려고 하는군! 그게 아니라도, 훗날 망나니 놈을 치워야 할 때 눈치채고 섬으로 도망가면 붙잡기 힘들어진다.'

우시드라는 바로 베니엘의 제안을 반대하고 나섰다.

"남작님, 그융크는 본디 성품이 사납고 야만스러워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노예의 멍에를 씌웠다곤 하나 닉스포트와 먼 곳에 두면 다스리기 쉽지 않을 겁니다.

또한 베니엘은 치안관에 농장 관리관까지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호수의 중임까지 맡기면 힘에 부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남작은 고민스럽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그런가?"

이런 견제에도 베니엘은 여유만만했다.

'아주 대놓고 싫은 티를 팍팍 내시는군요. 큰고모.'

하지만 부질없는 발버둥에 불과했다. 베니엘은 이미 남작의 입맛에 맞는 제안을 준비해온 상태였으니까.

그는 바로 나서서 반박했다.

"남작님, 그융크의 천성이 그렇다곤 하나 닉스포트에만 박혀 있으면 밀수꾼이나 해적을 다스리기 어려워집니다. 전진기지를 만들고 배치해야 그 범죄자들이 두려워하고 꺼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옳다."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제가 과도한 직책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농장 관리관을 하고 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누나와 공동입니다. 사실 그 실력에 있어 제가 누나를 따를 수 없으니 거의 일을 맡기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호수의 규율을 단속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논조에 더해 베니엘은 남작을 흡족하게 할 결정적인 한 방을 제안했다.

"물론 이전에 없던 직책이니 그 시행에 있어 착오와 불필요한 낭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부분에서 남작님의 심려를 끼쳐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융크 병사 쉰 마리의 유지비는 전적으로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물론 이 노예병들은 남작님의 명이 있으면 무슨 임무이건 충실히 따를 겁니다."

그 제안은 남작을 흡족하게 했다.

아무리 노예라곤 해도 그 정도 인력을 유지하는 비용은 만만치 않다. 식비부터 해서 장비값까지 상당한 지출이 있을 터.

하지만 베니엘에게 전부 맡겨버리면 실로 간편했다. 게다가 영지의 방위 등 쓸 일이 있을 때 요긴하게 동원할 수 있을 터.

영주들이 대개 그렇듯 남작도 날로 먹는 걸 좋아했다.

물론 그도 이번 일로 첫째 동생 우시드라가 압박을 받는 걸 모르지 않는다.

'녀석, 벌써부터 얼굴이 말이 아니군.'

나름대로 표정 관리를 잘하는 첫째 여동생이지만, 오래간 봐온 오라비의 눈에는 뻔히 다 보였다.

뭐, 그렇다고 동정심이 이는 건 아니었다.

'내 알 바는 아니지.'

현재 우시드라는 너무 과도한 힘을 갖고 있었다. 남작은 자신이 수련에 집중하느라 첫째 동생에게 지나치게 의존해 왔음을 모르지 않는다.

어느새 가문의 상당 부분이 우시드라에게 넘어간 상황. 남작은 슬슬 그 권력을 견제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기 위해선 베니엘이나 아리아나를 키워줄 필요가 있었다.

결국 남작은 아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좋구나. 뜻대로 하도록 하라."

우시드라가 다시 반대하고 나섰지만 남작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

"아.... 네, 알겠습니다."

우시드라는 입을 다물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남작은 가문의 절대자였으니까.

그때 베니엘과 우시드라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베니엘은 실실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누가 봐도 대놓고 도발이었다.

우시드라의 마주 웃어줬지만, 속으론 열불이 터졌다.

'저 빌어먹을 것이!'

하지만 가문의 회의 중에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법. 그녀는 애써 분노를 삼켜야만 했다.

이 모습을 모른 척 보고 있던 남작도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겉으론 한껏 근엄하게 선언했다.

"에본플로우 순찰관이라는 새로운 직위를 만들겠다. 이것을 베니엘에게 부여할 테니, 너는 앞으로 밀수꾼 단속과 해적 소탕은 네가 전담하도록 하거라."

베니엘은 즉각 감사를 표했다.

"최선을 다해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걸로 베니엘은 합법적으로 쉰 마리의 그융크 전사들을 보유하게 됐다. 거기에 더해 치안관이 최대 삼십여 명의 자경대를 꾸리니, 도합 팔십 가량의 병졸이 생긴 셈이다.

이 정도면 슬슬 가문 내에서도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닐 수 있게 됐다.

반면 이 결과에 우시드라는 아연실색해졌다. 베니엘이란 존재가 짧은 사이에 위험할 정도로 커져 버린 탓이다.

분명 얼마 전까지 은광에서 노역하던 한심한 신세였는데 말이다.

'큰일이군. 저 정도 병력을 보유하면 쉽게 도모하기 어려워질 텐데….'

심지어 무인도까지 얻어냈으니 만약 거사일에 베니엘이 그곳으로 도주해 농성에 들어가면 여간 골치 아파지는 게 아닐 터였다.

아무튼, 이제 베니엘은 치안관, 공동 농장 관리관, 에본플로우 순찰관을 겸직하게 됐다. 나름대로 후계자란 위치에 어울리는 감투를 하나씩 쓰기 시작한 것이다.

완전히 남작의 눈 밖에 났던 과거와 비교하면 괄목할 성장이었다.

베니엘은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큰고모 우시드라를 보며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 당혹하기는. 크크큭.'

69화

황금팔의 검객 (3)

***

회의가 파하고 모두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베니엘은 남작성의 복도를 걷다가 저 앞에 익숙한 뒤태를 발견했다.

바로 의붓누나인 아리아나였다.

베니엘은 즉각 쫓아갔다.

"어이! 아리아나."

베니엘의 부름에 아리아나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봤다.

"무슨 일이지?"

여전히 딱딱한 태도였다. 베니엘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사지에서 돌아왔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닌가?"

아리아나는 코웃음을 쳤다.

"흥! 어이가 없군. 축하라면 이미 해줬다. 그리고 좀 떨어지지? 우리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닐 텐데."

베니엘은 그 매정한 태도에 조금 입맛이 썼다.

'최근에 호감도가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한데 그때 아리아나가 생각지도 못한 소리를 했다.

"가서 그렇게 좋아하는 둘째 고모랑 놀도록. 날 귀찮게 하지 말고."

"음...?"

베니엘이 어리둥절해 하자 아리아는 더욱 조곤조곤 말해봤다.

"가서 둘째 고모의 품에 안겨서 재롱이나 부리란 말이다."

"뭐라고?"

"아주 품에 파고들어 젖이라도 빨 기세더군. 옆에서 보기 참으로 부끄러웠다."

그제야 베니엘은 알 수 있었다.

'뭐야? 화났잖아?'

겉으로 보기에 아리아나의 변화는 크지 않았으나 말이 빨라지고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거만 봐도 확실했다.

무언가 반응이 있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였다. 일단 베니엘은 그녀의 분노를 헤아려 보려 했다.

'음… 이거 중노 정도 되나?'

아리아나는 베니엘이 지구에서 봤던 옛날 시트콤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분노의 단계를 갖고 있었다.

1단계는 극소노.

2단계는 소노.

3단계는 중노.

4단계는 대노.

5단계는 극대노다.

이렇게 총 다섯 단계다. 화난 아리아나를 상대하려면 즉시 이걸 헤아리는 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단계에 따라 그 대처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단계 '극소노' 정도면 놔두면 알아서 풀어지는 수준이었다. 괜히 풀어주겠다고 깝죽거리다가는 분노가 다음 단계로 진행될 우려가 있었다. 그냥 재빨리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정답인 것이다.

2단계 '소노'는 적절한 말빨이 필요했다. 너의 분노를 이해한다. 이번에는 내가 실수한 것 같다는 식으로, 아리아나가 납득할 만한 대화가 필요했다.

물론 오리지널은 한 번도 그렇게 화를 풀어준 적이 없다. 그러니 여태 아리아나의 속이 썩어 문드러졌던 거다.

문제는 현재 상황으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3단계 '중노'이다.

'여기서부턴 쉽지 않단 말이야.'

본래라면 난처함에 땀이 삐질삐질 흘렀겠지만 지금의 베니엘은 달랐다.

왜냐하면 중노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는 뇌물이고, 베니엘은 그녀가 혹할 만한 걸 이미 준비했기 때문이다.

베니엘은 일단 변명부터 했다.

"너도 아니엘 고모가 어떤 성격인지 알잖아. 어쩔 수 없었다고."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내가 볼 때 너도 즐기고 있다."

그렇게 쏘아붙인 아리아나는 황급히 자신이 타박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덧붙였다.

"솔직히 네가 둘째 고모와 뭘 하든 내 알 바는 아니다. 다만, 같은 후계자로서 체면이 상할 짓을 하니 누나 된 도리로 훈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인지 배알이 꼴려 자기도 모르게 뾰족해졌다는 걸,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아리아나였다.

사실 그녀도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방금 입으로 내뱉은 변명이 참으로 그럴싸하다 여겨 혼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그렇지. 그렇고말고."

베니엘은 어이가 없었으나 따로 지적하지 않았다.

"즐기다니 무슨 소리야? 이렇게 회의가 끝나자마자 너부터 찾아왔는데."

예상치 못한 말이었던지 아리아나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간다.

"음? 나부터?"

"그래, 둘째 고모가 아니라 바로 너."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그래서인지 아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베니엘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다음 행동에 들어갔다. 마법 지퍼를 열더니 대뜸 무언가를 꺼낸 것이다.

"이거 받아."

그것은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는 아름다운 꽃이었다. 아리아나는 드물게 놀란 표정이 됐다.

"이건…?"

"아마라 꽃이야. 네가 더 잘 알겠지. 이번 원정에서 구해서 널 주려고 갖고 왔어."

뿌리째로 잘 수습된 데다가 이파리와 꽃이 싱싱한 게 바로 옮겨 심어도 될 듯했다.

화초 마니아인 아리아나는 이 진귀한 꽃을 홀린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리아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에겐 무기질의 차가운 덩어리보단, 수분을 머금은 이 상냥한 감촉의 꽃이 훨씬 더 가치 있었으니까.

"어, 어떻게…?"

도무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이 꽃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어서, 이루지 못한 갈망만으로 남아 있던 꽃이다. 그런데 꿈꾸던 게 바로 앞에 있다.

심지어 자신에게 준다고?

아리아나의 중노는 대노로 나아가려다가 스르르 사라지고 말았다. 화를 계속 내기에는 눈앞의 유혹이 너무나 강했다.

"우연히 구했어.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너 주려고 갖고 왔다."

"…지난번?"

"그거 말이야. 내가 네 원예 도구랑 비료를 맘대로 썼잖아."

베니엘이 버섯 인간을 살릴 때 이야기다.

"아…!"

"아무튼, 표정 보니까 맘에 든 모양이지. 자, 그럼 난 갈게."

용건을 마친 베니엘은 그대로 사라졌다.

반면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아리아나는 멍하니 꽃을 들고 복도에 혼자 서 있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릴 때 이후로 처음 저 망나니에게 선물을 받은 것이다.

"...."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을 순 없어서 아리아나는 꽃을 들고 뭔가에 홀린 듯한 걸음걸이로 자기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원에 꽃을 소중히 옮겨심으며 생각했다.

'잠깐, 아마라 꽃의 꽃말이 뭐였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던 아리아나는 답을 떠올리고는 모종삽을 든 손이 굳어버렸다.

"!"

순간 벼락이 정수를 때린 것만 같았다.

아마라 꽃의 꽃말은 '금지된 사랑'이었으니까.

아리아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된 거지? 아, 아니야. 꽃말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정작 건네준 베니엘은 아마라 꽃에 그런 꽃말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덕후란 존재가 대개 그렇듯, 자기 분야의 작은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기 마련.

아리아나는 그 위험한 꽃말을 도무지 무시할 수 없었고, 그렇게 깊은 오해의 스택을 쌓아 올렸다.

'역시 나를…?'

***

베니엘은 의도하지 않게 아리아나의 정신에 거대한 폭탄을 던진 셈이었다.

만약 정치적 의도가 있다면 대성공이라 하겠다. 경쟁자가 며칠은 행동 불능에 빠지게 할 만한 일격이었으니까.

하지만 베니엘은 순수하게 아리아나에게 친해지고 싶어서 일부러 꽃을 구해왔던 것이고, 스스로 좋은 일을 했다고 뿌듯할 뿐이었다.

'뇌물로 아리아나의 노여움을 해결했다. 다음부터는 아니엘 고모와 애정 행각에 주의할 필요가 있겠군.'

정확히는 내리사랑처럼 내려오는 그 일방적 주책 말이다.

아무튼, 지금은 그런 사소한 문제보다 앞으로 가문 내의 일에 집중할 때였다.

베니엘은 호위대장 쿠르신에게 황금팔을 건네주기 위해 병영으로 움직였다.

그때 그의 충실한 시종인 퀵포우가 찍찍거리며 다가왔다. 녀석의 털에선 비릿한 생선 냄새가 잔뜩 났다.

"주인님, 지시하신 대로 그융크 두꺼비들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잘했다."

둘은 이런저런 계획을 논의하며 나란히 걸었다. 그러다 퀵포우가 물어왔다.

"주인님, 다음 목표는 무엇입니까? 이 퀵포우. 너무나 기대가 돼 설레는 맘을 감출 수 없습니다."

기대가 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는 듯 쥐새끼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자기가 섬기는 주인이 점점 성공 가도를 걷고 있어서 놈은 나중에 한자리 얻을 꿈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노예 마법 때문에 배신할 수도 없는 주인인지라 퀵포우는 진정으로 베니엘이 잘 되길 바라고 있었다.

"다음 목표 말인가?"

"네, 주인님께선 중요한 버섯 농장의 관리인이 됐고, 폐허 도시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찍찌―익! 이러니 이 미천한 종은 앞으로 주인님께서 무슨 일을 벌이실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갈수록 아부가 심해. 이 쥐새끼야."

"충성심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찍찍."

베니엘은 퀵포우의 대답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혼자 생각에 잠겼다.

"다음 목표라. 좋은 질문이야…."

사실 장기적인 목표야 여러 개 있다.

-가주 자리를 이어받기.

-차후 붕괴될 제국의 혼란 속에서 살아남기.

-마신의 힘 모으기 등.

하나 이것들은 모두 이루기 어렵고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들.

당장 해결할 목표에 대해 고심해 보는 것도 중요했다. 본디 큰 계획이란 작은 계획들을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아가야 하는 것이니까.

잠시 말이 없던 베니엘은 곧 결론에 다다랐다.

"일단 치안대장 자리를 확보해야겠군. 어떻게든 말이야."

치안대장이라 하면 영지에 십여 명 있는, 베니엘 같은 치안관들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치안대장 말입니까?"

"그래, 현재 그융크까지 합치면 내 밑에 팔십여 명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집안싸움이 벌어질 걸 고려해 보면 많이 부족하지."

퀵포우는 자기 수염을 배배 꼬며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긴 나이트쉐이드 가문은 남작가 중에서도 꽤 큰 편이지요."

"그래, 그러니까 더 많은 병졸을 부릴 수 있는 힘 있는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영지의 직책 중에 병력을 움직이기 좋은 자리가 세 가지 있다.

<전사장>과 <요새 사령관>, 그리고 <치안대장>이었다.

첫 번째 전사장은 독안룡 카바세호가 맡고 있다. 그는 아리아나의 사람이다.

두 번째 요새 사령관들은 전통적으로 큰고모 우시드라의 영향력이 강하다. 이전 드랄두의 사례처럼 오래된 이권으로 엮여 있어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하니, 자연히 남은 건 치안대장.

더군다나 현재 베니엘은 치안관이니 그대로 테크를 올려 승진한다면 상당히 자연스러울 터.

"가문의 무력을 셋으로 확고하게 나눠놔야 내 살길이 열릴 거다. 가병을 통솔하는 아리아나의 세력, 요새 수비병을 통솔하는 큰고모의 세력, 그리고 치안대장 휘하의 자경대를 통솔하는 내 세력 말이야."

이것이 마치 솥의 세 다리처럼 맞물려 서로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삼국지로 치면 가히 융중대(隆中策)의 결의라 하겠다.

이 계획에 퀵포우는 감탄했다.

"참으로 훌륭하신 계책입니다! 이 퀵포우! 주인님의 앞길에 영광만이 보입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아부에 베니엘은 피식 웃었다.

"쉽진 않을 거다. 큰고모라면 이미 내 생각을 읽고 있을 테니까. 어떻게든 막으려 하겠지."

"하지만 주인님이라면 방법이 있겠지요?"

"물론이다. 계책은 있다."

이에 잠시나마 걱정스러운 표정이던 퀵포우가 앞발을 싹싹 비벼대며 간사하게 웃어댔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찍찌찍!"

"일단 치안대장이 되기 위해선 휘하에 인재를 잔뜩 모아야 한다. 일단 그 첫 번째가 호위대장 쿠르신이고."

쿠르신은 훗날 하이 마스터에 오를 잠재력을 가진 자. 베니엘이 괜히 황금팔 때문에 죽자고 구른 게 아니다.

함께 걷던 둘은 곧 병영에 도착했다. 그러자 단련을 하고 있던 가병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엇? 도련님!"

"도련님께서 웬일로?"

사뭇 이전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망니나가 왔다고 두려워하고 꺼리는 게 아니라, 다들 눈을 빛내며 반색하는 것이다.

'뭐지?'

베니엘은 속으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제 망나니는 걸어 다니는 재앙에서 출세와 성공을 위한 상징으로 변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베니엘이 부하를 학대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대신, 베니엘의 라인을 탔던 자들이 다 잘됐다는 말만 들려 온다.

상황이 이러니 다크 엘프들은 어떻게 하면 베니엘의 휘하로 들어갈까 군침을 흘리고 있었던 것.

몇몇 놈들은 지금껏 슬렁슬렁 훈련하던 게 무색하게, 맹렬한 기합성과 함께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크합! 받아라!"

"하아압!"

그 약삭빠른 어필에 근처에 있던 가병들의 눈이 커졌다.

'저런 치사한 놈!'

'질 수 없다!'

곧 자기들도 질세라 무기를 휘둘러댔다.

"오늘도 단련이다!"

"다크 엘프란 마땅히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우오어어어!"

갑자기 연병장 내에서 훈련의 열풍이 불어닥쳤다. 그러면서도 다들 힐끔힐끔 베니엘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베니엘은 곧 이게 어필 타임이란 걸 알아챘다. 대놓고 자기들도 좀 데려가 달라고 알랑방귀를 끼고 있었으니까.

"이거 진짜 내 평판이 바뀌긴 한 모양이군."

베니엘의 입꼬리가 거만하게 위로 치솟았다.

***

베니엘은 곧 호위대장 쿠르신의 숙소에 도착했다.

"들어가겠다. 베니엘이다."

안에 가보니 쿠르신만 아니라 이전에 베니엘을 따르던 부하들까지 모두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이었지만 마냥 적대적이기만 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복잡한 표정이었다. 베니엘은 그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같이 있었군. 반갑군. 바니카말, 아드릴, 발키무, 네그라크, 오사키아."

오리지날 베니엘이라면 부하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주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냥 야, 이 새끼, 쓰레기 정도로 칭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진짜 달라졌다는 걸 방 안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런 까닭에 다들 좀 더 태도가 누그러졌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원정간 수고하셨습니다."

심지어 선선히 인사를 받아주기까지 했다. 베니엘은 그들과 하나씩 눈을 마주쳐준 후 쿠르신에게 다가갔다.

"잘 지냈나? 호위대장."

"도련님…."

"기다리던 물건이 있을 텐데 쓸데없는 소리를 집어치우고 바로 보여주지."

베니엘은 마법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물건을 꺼내놨다.

그리고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이건…!"

70화

황금팔의 검객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