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기특한 선물 (2)
***
대회의는 베니엘의 참석 여부와 상관 없이 이미 진행 중이었다.
"만약 치안관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안건은 무효다. 이후 다시 논의하지 않겠다."
남작의 선언에 우시드라는 희망을 갖게 됐다.
'조르카의 솜씨면 틀림없이 성공했을 터. 이거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리겠구나.'
그 건방진 조카 놈은 단순히 부하를 잃은 걸 넘어 대회의를 요청해 놓고 제시간에 도착도 못 하게 되는 것이다. 우시드라로선 최고의 결과라 하겠다.
'뭔가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나타나지 못한 건 큰 문제지. 징계가 뒤따를 거다.'
그 보기 싫은 망나니 녀석이 다시 밀려날 걸 생각하니 우시드라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수석비서관은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군?"
남작이 넌지시 묻는 말에 그제야 우시드라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엄중한 회의를 앞두고 어찌."
오늘 대회의는 평소와 달랐다. 가문에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검객들도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베니엘의 요청이었다.
검객들은 모두 서열 10위 안의 강자들이었는데 오늘 헛걸음을 하는 게 되면 이후 베니엘의 아주 고깝게 보게 될 터다.
어린놈이 자기들보고 맘대로 오라, 가라 한다고 말이다. 가주도 자신들을 존중하는데 불러 놓고 코빼기도 안 보인다고 불쾌해할 터.
우시드라는 일이 틀림없이 그렇게 굴러가리라 확신했다.
한데 그때 남작이 손짓으로 가병을 부르더니 뭔가 지시를 내렸다. 그 모습에 우시드라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도착한 건가?'
우시드라는 하이 마스터인 자신의 오라비가 마력을 퍼뜨려 도시 전체를 감지할 수 있음을 알았다. 하면 분명 베니엘이 닉스포트에 당도했다는 소리다.
아닌 게 아니라, 주변에 관록 있는 검객들이 감탄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도시 하나를 스캔해 버리는 남작의 실력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우시드라는 대번에 불쾌해졌다.
'질기구나. 거머리처럼 질겨.'
기어코 돌아오다니 완전히 찰거머리가 따로 없었다. 동시에 그녀는 조르카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일을 대체 어떻게 처리한 건가! 이 한심한 작자 같으니라고.'
물론 그렇다고 해도 상황이 나쁜 건 아니다. 간신히 도시로 돌아왔다고 해도 이미 망나니 놈은 부하를 다 잃어버리고, 본인도 엉망이 돼 있을 터.
그런 패배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비리를 고발한다고 해도 남작은 제대로 들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증거가 중요한 게 아니다. 누가 암투에서 이겼냐가 더 중요한 거다.
물론 비리에 대한 증거나 증인이 가벼운 문제는 아니다. 하나 그건 상대를 찍어내기 위한 명분이고, 더 중요한 건 암투에서 누가 이겼고 가문 내 힘의 방향이 어디로 기울었냐다.
가주는 그걸 보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부하를 다 잃어버린 망나니 놈은 더는 힘을 쓰지 못하겠지.'
어쩌면 놈이 새로 얻은 직책인 에본플로우 순찰관 자리와 그융크 노예들도 빼앗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망나니 놈도 괘씸한 둘째 남편인 엘렉카에와 작당해 뭔가를 터뜨릴 테니, 우시드라도 피해를 보긴 할 거다.
하지만 누가 봐도 암투에서 우시드라 이긴 상황이니 가주는 그녀에게 주의나 견책 정도의 가벼운 처벌만 하고 그칠 터였다.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가병의 외침이 우시드라의 상념을 깼다. 그리고 망나니 베니엘이 나타났다.
대회의에 참석한 자들은 베니엘을 보자마자 가볍게 탄성을 터뜨렸다.
"허…!"
"저건…!"
그야말로 격전의 흔적이 베니엘의 온몸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검은 철로 만든 베니엘의 귀중한 갑옷은 여기저기 찢기고 베어져 넝마 같았고, 몸 여기저기 피와 그을음, 먼지로 엉망이었다.
그 모습에 회의석에서 얌전히 앉아 있던 의붓누나 아리아나의 표정에 보일 듯 말 듯한 불만이 어렸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열진 않았습니다.
베니엘은 온몸이 성치 않아 보였으나 그 태도만큼은 당당했다.
"남작님, 명하신 순찰 업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야만 오크 무리와 격전이 있었기에 다소 늦었습니다. 이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남작은 괜찮다는 듯 끄덕였다.
"순찰간 성과가 있었다면 책잡을 것 없는 일이다. 전투의 결과를 보고 하라."
"네, 야만 오크 스물하나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또한 적의 우두머리를 처리했는데, 마스터급에 준하는 놈이었습니다."
그 말에 주변에서 감탄이 터졌다.
"마스터급을?"
"대단하군! 큰 성과입니다. 이건."
"허허, 도련님의 무위가 나날이 출중해지는군요."
"더군다나 포로까지?"
모두 남작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는 지금 흡족해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노골적으로 베니엘을 칭찬했다.
"후계자의 무력이 이리 출중하니 영지의 앞날이 걱정 없겠습니다. 가주님."
"역시 도련님께서도 가주님의 검술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합니다."
다만 우시드라는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뭐, 뭐라고? 도리어 공을 세우고 왔다니?'
조르카를 보냈으니 부하를 다 잃었을 거다. 한데 어떻게 야만 오크를 토벌까지 하고 온 것인가? 게다가 아무리 봐도 베니엘의 표정은 불행은 겪은 자의 것이 아니었다.
우시드라가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남작이 그녀가 묻고 싶어 할 만한 질문을 꺼냈다.
"부하들의 피해는 어떤가?"
"사망자가 셋 있긴 합니다만, 그 외에는 무사합니다."
"나쁘지 않군. 드랄두와 쿠르신은 무사한가?"
그 두 검객은 당연히 가주인 남작도 신경 쓰는 인재였다.
한데 어째서인지 베니엘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을 망설이는 것이었다.
"저… 그것이…."
남작은 미간을 좁혔다.
"설마 그 정도 되는 검객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더냐? 만약 그렇다면 네 공도 퇴색될 수밖에 없겠구나."
대회의장 모두의 시선이 베니엘에게 쏠렸다.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 것인가?
한데 대답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쿠르신은 부상을 입었지만 무사합니다. 다만 마스터 드랄두가 사망했습니다."
주변에서 탄식이 터졌다.
"이런! 세상에!"
"아니, 어떻게?"
"오크 우두머리가 그리 강했던 건가!"
오크 우두머리를 잡긴 했으나 이쪽도 마스터급 검객을 잃었다. 이건 결코 공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크 엘프의 수는 야만 오크보다 훨씬 적기 때문이다. 일 대 일의 교전비가 나오면 이쪽의 손해다.
남작은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냈다.
"훌륭한 인재를 갈아 넣어서 무공을 세우면 그걸 공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너 역시 마스터에 오른 자로서 드랄두가 죽는 걸 두고 보고만 있었단 것인가?"
목소리에 슬슬 노여움이 서리는 게 곧 불호령이 떨어질 기세다.
한데 베니엘의 표정은 침착했다.
"사실 오크를 토벌할 때만 해도 저희 쪽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후에 벌어진 생각지도 못한 습격 때문에 드랄두가 죽고 말았습니다."
"뭐라?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이제 대회의장의 모두는 베니엘의 얘기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다들 다크 엘프 특유의 긴 귀를 쫑긋거리는 게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다. 정적인 우시드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파악하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드랄두가 죽었다니 조르카가 일을 한 것 같긴 한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쿠르신은 살아 있다고?'
그런데 그때, 베니엘이 생각지도 못한 행동으로 대회의장에 모인 자들을 일거에 기함하게 만들었다.
"이걸 봐주십시오."
베니엘이 마법 지퍼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회의장 바닥에 내던졌다.
철푸덕!
그것은 죽은 자의 몸뚱이였다.
그걸 본 자들은 눈이 찢어질 듯 커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이건…!"
"커억...!"
앞서 드랄두가 죽었다고 해서 놀란 건 지금에 비하면 놀라는 축에도 못 들 정도였다.
그 여유만만한 남작조자 눈썹이 올라가고 드물게 눈이 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몸은 바로 하프 타르나이이자 가문의 검객 서열 5위인 강자 조르카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덩치에 붉은 피부, 온몸 가득한 상처, 팔뚝과 몸 일부를 덮고 있는 뱀과 같은 비늘, 그리고 뭣보다 가장 강력한 증거는 조르카의 애검인 '회오리바람'까지.
머리를 잃은 강자의 몸체가 처량하게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이게!"
"아니, 이… 커어어…!"
"이자는 분명 타르나이인!"
다들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못 이어갈 정도였다.
특히 그중 제일은 우시드라였다.
항시 표정 관리에 신경 쓰는 그녀지만 지금만큼은 그 눈이 찢어질 듯 커진 데다가 두 귀가 하늘로 바짝 치솟아 있었다.
'조르카가 죽었다고?'
그녀는 도저히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 강한 조르카가 왜 머리를 잃은 몸뚱이만 남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남작이 정신을 차린 듯 차갑게 물었다.
"왜 조르카의 시체를 꺼낸 것이냐? 네놈과 이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소상히 답해라."
베니엘은 공손하게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살짝 허리를 숙였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다만 이 자리에 함께 격전을 벌였던 쿠르신을 부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말이지요."
"허한다."
이에 베니엘이 뒤쪽에 손짓을 했고, 대기하고 있던 가병이 어딘가로 뛰어갔다. 곧 호위대장 쿠르신이 나타났다. 옆에는 우시드라의 둘째 남편인 엘렉카에도 대동하고 있었다.
우시드라는 잠시 엘렉카에를 죽일 듯 쳐다봤으니 지금은 저 하찮은 작자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쿠르신이 아직 살아 있는지 의문이었다.
쿠르신도 베니엘 못지않게 엉망이긴 했으나 그 차분한 태도는 여전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남작은 심각한 얼굴로 끄덕였다.
"수고 많았다. 쿠르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보고하라."
쿠르신은 모두 앞에서 폭탄 발언을 했다.
"가문의 식객으로 머물고 있던 조르카가 도련님을 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직 요새 사령관인 드랄두가 사망했고, 호위병인 오사키아와 발키무도 사망했습니다."
간단한 보고였으나 내용 자체는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가문의 식객이 후계자를 습격해서 인명을 여럿 살생했단 얘기였으니까.
당연히 파란이 일어났다.
"말도 안 됩니다! 이런 무도한 일이!"
"후계자를 습격하다니요. 대체 무슨 이유로!"
"명명백백하게 진상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대회의에 참석한 이의 반응은 여럿으로 갈렸다.
전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흥분해서 소리치는 자도 있었고, 대강 돌아가는 꼴을 아는지라 우시드라를 힐끔 보는 이도 있었다.
아무래도 우시드라가 패배한 것 같았다. 조르카가 그녀의 사람임은 분명했으니까.
물론 그런 사실을 알아도 입 밖에 내는 어리석은 자는 없었다. 그저 이 사건에 대해 저마다 규탄하며 목소리를 높일 뿐이다.
하나 여기 모인 이들 중 가장 훌륭한 연기자는 바로 남작이었다.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그는 심각한 표정을 유지하며, 생각지도 못한 참혹한 소식에 깊은 우려에 잠긴 가주 역을 연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은 이 모든 가문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사건이 그의 통제 하에 벌어지는 광대놀음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남작은 속으로 입이 찢어져라 자신의 여동생을 비웃었다.
'가여운 녀석! 새로운 별이 뜨자 네가 힘겹게 만든 왕국이 모조리 무너지고 있구나.'
한데 그런 그조차도 베니엘의 승리에는 흥미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조르카를 이긴 거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드랄두 정도만 잃고 승리하다니?'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하나 분명한 건 조르카는 죽어서 몸뚱이만 남았고 베니엘과 그의 측근인 호위대장 쿠르신은 살아 있지 않나?
'이번에 생각보다 크게 베니엘 쪽으로 힘이 기울겠군.'
그와 별개로, 남작은 이 모든 상황이 참으로 재밌어 죽을 것만 같았다.
반면 안색이 어둡게 변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평소와 다르게 대회의에 참석한 검객들이었다. 그들은 비로소 왜 망나니 놈이 자신들의 참석까지 요구했는지 짐작하게 됐다.
'좋지 않은 흐름이야….'
'설마? 저 망나니 놈, 자기가 조르카를 쓰러뜨릴 것까지 생각하고 우릴 부른 건가?'
'같은 식객으로서 입장이 난처하게 됐어.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최대한 우시드라와 끈이 없다는 걸 피력해야겠군. 자칫하단 나까지 빨려들어 간다.'
자세한 사정은 미지수였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검객들에게 이 자리는 몹시 불편하게 변했고, 우시드라와의 끈은 어떻게든 부정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베니엘이 노리는 건 바로 이점이었다.
91화
기특한 선물 (3)
그때 남작은 손을 들어 혼란스러운 회의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베니엘에게 물었다.
"쿠르신의 말이 모두 사실인가?"
"네, 맞습니다. 조르카가 제 목숨을 노리고 덤벼들었습니다. 의도적인 공격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베니엘은 조르카가 우시드라의 사주를 받아서 자신을 공격했다고 섣부른 주장을 하진 않았다.
우시드라 정도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데다가, 뭣보다 결정적인 증거도 없었고 말이다.
"흐음…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가벼운 일이 아니구나."
사실 남작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아주 기꺼웠다. 조르카 사건 때문에 대회의에 불려온 검객들의 표정이 좌불안석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남작은 저들이 도움이 되기에 가문의 식객으로 머물게 하고 있었으나, 최근 여러 가지로 거슬리는 와중이었다. 왜냐하면 검객 중 상당수가 우시드라에게 포섭된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압박할 수 있으면 좋은 일이다.'
아마 베니엘이 뭔가 준비한 게 틀림없었다. 애초에 대회의에서 가문의 손님인 저들의 참석을 요청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남작은 망나니 아들놈에게 이전과 다른 확연한 기대감을 갖게 됐다.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만 실망시키진 말거라. 네 행동에 따라 이번 일의 보상을 정할 테니.'
그가 보기에 지금까지 대회의의 흐름은 베니엘이 가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마무리가 중요한 법. 어떻게 화룡점정 하냐에 따라 가주인 그의 결정이 달라지리라.
'결국 우시드라 녀석을 어디까지 징치할지는 네 손에 달린 거란 말이다. 아들아.'
남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베니엘에게 물었다.
"하면 네게 이번 일의 처리에 대해 의견을 묻고 싶구나. 내가 그걸 귀담아들을 것이다."
단순한 얘기였지만 거기 담긴 무게는 컸다. 가주가 직접 귀담아듣겠다고 했으니까.
"가주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짧은 식견이지만 하문하셨으니 답해보겠습니다."
"그 태도가 기껍다. 말하거라."
베니엘은 공손한 태도로 간언했다.
"본디 한 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확실한 예방책을 마련하는 게 중요합니다. 마침 여기 명망 있는 검객분들도 참석하셨으니 일을 논의하기 좋습니다."
이제 회의의 타겟이 노골적으로 손님인 검객들에게로 향했다. 당연히 반발이 일어났다. 사실 그들은 이미 미묘한 이 흐름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던 차였다.
"말투가 이상하구려? 후계자. 그대의 의견은 존중하오만, 이건 어디까지나 조르카 개인의 문제.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오."
대표로 입을 연 이는 검객 서열 6위의 '코다'였다.
코다는 자신의 팔이 네 개인 인간으로 딱히 다완족(多腕族) 같은 건 아니다. 그저 지하에서 만연하는 생체 실험의 여파 때문에 팔이 늘어나 버린 인간에 불과했다.
물론 그 덕을 톡톡히 봤는데, 제도의 검투사 노예였던 그는 결국 연이은 승리로 자유를 얻었던 것이다.
네 자루의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그 솜씨가 일품인 자로 완연한 마스터 중급의 강자였다.
별칭은 '네 팔 도살자'.
늘 속을 알 수 없는 서열 4위 검객 '아순다'가 입을 다물고 있는 지금, 나머지 검객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있는 자였다.
"가문의 손님분들을 책하겠다는 게 결코 아닙니다. 그저 함께, 이와 같은 문제가 다시 벌어지지 않게 논의하자는 것이지요."
"흐음... 그게 그거로 들리오만?"
베니엘은 그럴 리 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아닙니다. 오해하고 계시군요. 저는 여러분께 어떠한 제약도 걸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가문에 식객으로 들어왔을 때 했던 약속들을 다시금 확실히 상기시켜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식객이 집안에 들어올 때 몇 가지 약속을 한다.
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가문의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경하겠다.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
-가문의 구성원에게 정중하게 대하겠다.
등등이다.
당연히 무슨 강제력이 있는 건 아니고, 오래간 내려온 레퍼런스를 그냥 반복하는 것에 불과했다.
네 팔 도살자 코다는 베니엘의 말에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는 그 약속을 저버린 적도 없고, 앞으로도 저버릴 생각도 없소이다. 이미 말했지만 조르카 개인의 일탈과 범죄 행위를 가지고 논의를 확대하고자 하는 건 옳지 못하오."
"손님분들이 불쾌할 방법은 아닐 겁니다."
"흐음… 뭔가 제안이 있는 것이오? 미리 말해두지만, 마법 계약서는 서로 간의 신의를 약하게 할 뿐이라 하겠소."
마법이 걸린 계약서에 서명해 계약을 강제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하나 그런 수단은 코다 같은 강자들에겐 무의미하다. 계약서의 페널티를 감수하고서 그냥 깨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뭐 드래곤도 아니고 진명에 걸고 맹세할 수도 없는 노릇.
세인들은 검객이니 자기 검에 맹세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그딴 건 전혀 소용없었다.
검의 맹세란 그저 검객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낸 헛소문에 불과하다.
당장 하이 마스터인 가주만 해도 거짓말에 능숙한 연기자가 아닌가?
하니 코다는 베니엘이 뭐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말의 뉘앙스를 보니 식객이 한 약속을 무언가 강제할 만한 수단을 원하는 거 같긴 한데 말이다.
"딱 좋은 방법이 있어서 제안 드리는 겁니다. 그전에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저 가문에 들어올 때 했던 약속을 이행해 주길 바랄 뿐입니다. 그 이상의 제약은 없을 것입니다."
"크흠…."
"이것을 보증할 방법이 있다면 거절하시겠습니까?"
"...."
뭔가 찜찜하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게다가 식객이란 주인에게 신의를 지킬 필요가 있다.
식객 노릇을 하다가 약속을 어기고 평판이 깎여 나가면 이후 이쪽 사회에서 내쫓기게 된다. 즉, 제국의 상류층인 귀족가에 빌붙을 수 없게 된다는 소리다.
게다가 슬쩍 보니 남작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코다는 끄덕였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어찌 거절하겠소? 내 다시 말하지만 가문에 들어올 때 했던 약속은 신의로 지킬 것이오."
이에 다른 검객들도 끄덕였다. 오직 서열 4위의 기묘한 검객 아순다만이 뭔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뭔가 눈치를 챈 듯 눈웃음을 지은 채 베니엘을 보고 있다.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긴 했지만 그 깊은 주홍색 눈에는 흥미가 가득 어려 있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하면 이것을 거절하시지 않겠지요?"
베니엘은 마법 지퍼를 열어 귀중한 보물 세 개를 꺼내놨다.
바로 퀴아에게 부탁해 정보부의 연줄을 써서 어렵게 구해온 카르멘의 오브였다. 멜론만한 크기에 영롱한 빛이 안에서 휘몰아치는 비범한 물건이 나타나자 회의장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다만 코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무엇이오…?"
코다만이 아니었다. 카르멘의 오브가 뭔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이가 여럿이다.
하나 몇몇만은 이게 뭔지 알아보고는 눈을 치켜떴다. 그중에는 우시드라도 있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놀라워하는 그녀에게 코다가 물어왔다.
"무엇인데 그러시오? 수석비서관."
일단 코다는 우시드라의 사람인지라 재빠르게 그녀의 의견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시드라는 카르멘의 오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이건 카르멘의 오브라 불리는 것입니다. 제도에서나 어렵게 구할 수 있는 것인데… 어찌 여기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코다는 답답하다는 다시 물었다.
"이게 대체 뭔데 그러시오? 수석비서관."
"…한 가지 약속을 강제하게 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아주 강력한 계약 마법을 걸 수 있습니다."
"뭐, 뭐라고? 그런 물건이 있소이까?"
마스터인 그는 무언가 강제로 약속을 지키게 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노예 마법은 걸리지 않았고, 마법 계약서는 억지로 파기해 버릴 힘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다시 물었다.
"마스터에겐 소용없을 터인데…?"
우시드라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스터조차 이 오브의 힘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허허! 아니, 어찌 그런 흉참한 물건이! 믿기 어렵구려."
"제도의 대마법사들이 특별한 비법으로 만든 것이기에 가능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우시드라는 심각한 얼굴로 베니엘에게 물었다.
"이것은 아무나 구할 수 없는 귀물이다. 한데 네가 어찌 갖고 있는 것이냐? 이점에 대해 명확히 답을 해야 한다."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의혹이었다. 우시드라는 베니엘이 미심쩍은 대답을 하면 그 점을 물고 늘어질 작정이었다.
한데 베니엘은 어쩐지 뺀질뺀질하게 웃으며 답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귀물을 구하는 방법은 중대한 비밀입니다. 수석비서관님을 존중하나 그런 사안을 답할 이유는 없습니다. 가주께서 물어보시는 거라면 또 모를까요."
"너어…!"
순간 우시드라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평소 늘 자제심을 유지하는 그녀지만 어째 요즘 베니엘만 보면 감정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자신의 오라비에게 일러바치듯 고했다.
"카르멘의 오브를 입수한 경로를 반드시 파악해야 가문에 해가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가주님."
남작은 잠시 생각하더니 끄덕였다.
"그 의견이 옳다. 말해 보도록. 다만, 보안이 요구되는 부분이 있다면 나중에 내게 따로 말해도 괜찮다."
이에 베니엘은 우시드라에게 뻣뻣했던 태도를 귀신같이 바꿔서 남작에게 싹싹하게 굴었다.
"가주께서 명하니 어찌 제가 거절하겠습니까? 당연히 고해 올려야지요."
베니엘은 이런 추궁이 있을 줄 알고 미리 핑계를 만들어뒀다.
"얼마 전 저와 친분이 있는 드란실 공자에게 부탁해 사들였습니다. 많은 돈을 써야 했지만 지난 원정간 번 돈이 있어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드란실 공자는 병석에 누운 공작의 뒤를 이어 서부 군벌의 대표에 올라설 인물이다. 그런 자이니 제국의 중앙에도 끈이 많기로 유명했다.
남작은 끄덕였다.
"확실히. 그 공자라면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
그러면서 남작은 베니엘이 왜 오브를 구했는지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우시드라가 제기했던 문제를 그대로 일단락시키고는 물었다.
"대강 짐작이 가긴 한다면 그것으로 무얼 하고자 하는 것이냐?"
"과연 영명하십니다. 가주님께서 짐작하는 바입니다. 이 카르멘의 오브를 쓰면 식객들이 나이트쉐이드 가문에 대해 좀 더 확실한 약속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듣던 우시드라가 즉각 반발했다.
"이런 강압적인 수단을 쓰는 게 알려지면 앞으로 가문으로 유능한 인재들이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가주님. 식객에겐 신의의 도리가 있다지만 가신은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요하면 이는 좋지 못한 평판을 만듭니다."
듣던 검객들 역시 동의하며 우려를 표했다.
"가주시여. 우리는 가문에 들어올 때 입에 담은 약조를 소중히 여기고 있소이다."
"맞습니다. 이런 수단을 쓰는 건 당혹스럽습니다. 굳이 이러실 필요까지는…."
"저 역시 수석비서관의 얘기에 동의합니다. 굳이 원하시면 쓰겠습니다만, 다른 이들이 어찌 생각할지 걱정이군요."
말은 번드르르 하나 결국 하기 싫단 소리였다. 자칫하면 정말 남작에게 반항도 못 하게 되니까.
이런 반론에 남작은 베니엘은 바라봤다.
어쩌겠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베니엘은 바로 나섰다.
"저 역시 카르멘의 오브로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저는 앞서 말했듯 손님분들께 제약을 가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코다가 턱을 쓰다듬으며 의문을 표했다.
"하면 대체 어쩌겠단 말인가?"
베니엘은 간단하다는 듯 답했다.
"그저 여러분이 마땅한 도리와 신의로 카르멘의 오브를 써 나이트쉐이드의 혈족을 적대하지 않겠다고 약속만 해주시면 됩니다. 이것은 식객으로서 당연한 이치입니다. 설마 이 역시 거절하실 겁니까?"
언뜻 듣기에 꽤 온건한 요구 같았다. 일단 식객이니 맞는 말이기도 했고. 손님이 집안사람을 해치면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코다는 그 정도는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그런 수준이라면야."
곁에 있던 다른 검객들도 동조했다.
"…손님의 도리를 지켜야겠지요."
"그 정도로 저희를 향한 불필요한 의심이 사라진다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뭐 다들 그 정도야 해주겠다는 태도였다.
하나 이들과 다르게 우시드라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이런!'
저 당연해 보이는 약속이 그녀의 중요한 계획을 완전히 망쳐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들 생각을 못 하고 있으나, 나이트쉐이드 혈족에는 당연한 얘기지만 나르다리온 남작도 포함이다.
즉, 카르멘의 오브를 써 베니엘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훗날 공들여 포섭한 검객들을 동원해 남작을 습격하려는 계획 자체가 끝장나 버리게 되는 것이다.
비록 버섯 농장의 반란 실패 이후 계획은 뒤로 미뤄졌지만 폐기된 건 아니다.
때가 되면 음모는 다시 발동할 거고, 그때 가문 내에서 힘을 기른 검객들과 복수를 원하는 오크 족장들까지 합류해 한 번에 검은 별 나르다리온 남작을 칠 계획이었다.
아무리 남작이 하이 마스터라고 해도 그렇게 많은 마스터들이 덤비면 쓰러지게 돼 있는 법이다.
한데 그게 완전히 엉클어지게 생겼다.
'안 돼. 검객들을 동원하지 못하면 오라비를 쓰러뜨릴 현실적인 방법이 없다.'
특히 제일 중요한 건, 속을 알 수 없는 눈웃음을 짓고 있는 서열 4위 검객 아순다였다. 우시드라가 보기에 그녀는 회색분자로 철저히 힘의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였다.
우시드라의 계획에 문제가 없다면 아순다는 남작이란 거물을 잡기 위해 검을 뽑겠지만, 이렇게 일이 틀어지면 도리어 남작 편에 설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우시드라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남작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두 손을 깍지 낀 채 얼굴을 가리고 아래를 보고 있었기에 다들 남작이 무슨 표정을 짓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이곳에서 그 성취가 가장 빼어난 자 중 하나인 서열 3위 검객 독안룡 카바세호만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남작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카바세호는 속으로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일이지? 분노하신 건가?'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남작은 이 모든 게 너무 재밌어서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가린 채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입이 길게 찢어진 채 마치 광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절로 씰룩거리는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아아! 가여운 우시드라! 네 계획이 모두 망가졌구나! 반란을 일으키고 날 향해 검객들의 칼날을 들이미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을 텐데! 크흐흐흐흐핫! 어쩌면 이리 가련한!'
망나니 아들놈이 예상도 못 할 정도로 재밌고, 훌륭한 선물을 가져온 셈이다.
'베니엘, 내 아들아. 우리 가문의 피 어떤 부분이 널 그렇게 만든 것이냐? 크흐흐.'
남작은 크게 흡족하고 기뻐하며 아들에게 커다란 포상을 내리겠다고 다짐했다.
92화
기특한 선물 (4)
이런 남작의 속을 알지도 못한 채 우시드라는 마지막 발버둥에 나섰다.
"가주님. 이런 강제력을 발휘하는 건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길 겁니다."
"이미 우리 가문의 손님분들께서도 양해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과한 우려는 삼가도록."
생각보다 남작의 태도가 단호하자 우시드라는 다른 방향으로 설득해 보려 했다.
"그렇지만, 신의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을 이런 값진 물건을 낭비하는 건 옳지 못합니다. 카르멘의 오브는 다시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귀물입니다. 차라리 다른 곳에 쓰는 게 훨씬 더 유용할 것입니다."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남작은 이번에도 거절했다.
"물건의 사용은 주인의 의견을 따를 뿐이다. 수석비서관은 더 말할 것 없다."
"윽...."
우시드라의 행태는 마치 이미 그물에 잡혀 배 위로 올라온 물고기가 날뛰는 것과 비슷했다.
가망이 없다는 소리다.
남작은 더는 반론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결론을 내렸다.
"치안관의 의견대로 카르멘의 오브를 사용하겠다. 약속의 조건은 그저 나이트쉐이드의 혈족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
거기까지 말한 남작은 대회의에 참가한 검객들을 쳐다봤다.
"이 정도면 우리 가문의 명예로운 손님들께서도 납득할 거라 생각하오만?"
코다를 비롯한 검객들은 뭔가 찜찜하고 불편한 얼굴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가주님."
"저희는 본디 가문의 혈족과 재산을 지키는 데 일조할 따름이지요."
"이 오브로 불필요한 오해가 사라진다니 오히려 기꺼운 일입니다."
카르멘의 오브를 사용하기로 한 검객은 서열 4위 아순다, 6위 코다, 그리고 8위인 '나심'이란 자였다.
서열 9위 검객은 오브가 세 개인지라 열외였는데, 그 때문인지 그의 표정은 아주 오묘했다. 힘이 부족해 끼지도 못했다는 사실에 좋아해야 할지, 분통해야 할지 헷갈리는 얼굴이었다.
"모두 바로 부탁하겠소."
남작의 요구에 서열 4위 아순다, 6위 코다, 8위 나심이 카르멘의 오브를 사용해 맹세했다.
오브에서 빛이 번쩍였고, 대마법사들이 만든 특별한 마법이 발동됐다. 그리고 오브에서 흘러나온 빛이 각각의 검객들에게 깃들었다. 이후 카르멘의 오브는 탁하고 빛을 잃은 그냥 평범한 수정 덩어리에 불과하게 됐다.
"...큭."
우시드라는 이 모습을 비통한 얼굴로 바라봤다. 생각지도 못한 물건 때문에 그녀의 계획이 박살 난 것이다.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듯했다.
'그간 검객들을 포섭하느라 들인 공이 얼마인데....'
하지만 이젠 집안싸움이 벌어졌을 때 혈족을 베기 위한 칼로 쓸 수 없게 됐다. 그녀로선 드물게도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 베니엘을 쏘아보았다.
하나 큰고모를 두려워하던 오리지널과 다르게 베니엘은 보란 듯 고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더 눈을 마주했다가는 혈압이 올라 어떻게 될 듯했기에 결국 우시드라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문제는 우시드라의 울화통이 터질 일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라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돌아가는 사정을 헤아리고 있는 남작은 지금 기분이 몹시 좋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치안관의 행보가 훌륭하다. 영지의 분쟁지대를 성실히 순찰했을 뿐만 아니라 야만 오크까지 인질로 잡아 왔다. 또한 간악한 조르카의 행동으로 가문과 식객 사이에 골이 생길 뻔했으나 이 역시 지혜로운 처신으로 봉합했다. 하니, 가주된 자로서 이를 포상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베니엘이 상찬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게 어디까지냐가 관건이었기에 회의 참석자들은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포상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치안관 베니엘을 즉시 영지의 치안대장에 임명한다. 기존 치안대장은 조르카의 행동을 미리 막지 못한 점을 문책해 경질하겠다."
듣고 있던 우시드라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
기존의 치안대장은 그녀가 박아 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치안대를 점점 장악해 가는 베니엘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기도 했다. 한데 그 자리를 베니엘이 차지하고 말았으니, 이제 치안대는 온전히 망나니에게 넘어가게 생겼다.
놀라기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아나를 보필하는 독안룡 카바세호는 근심하는 얼굴이 됐다.
'저 망나니… 아니, 이제 도련님이라 칭해드려야겠지. 저분의 광폭 행보가 끝이 없군. 이대로라면 아가씨의 입지가 위험한 터인데….'
카바세호는 나이트쉐이드에 모든 걸 바친 충신이다. 그런 그가 보기에 아리아나야 말로 가문의 미래를 책임질 재목이었다.
최근 베니엘이 두각을 나타내곤 있으나 그간 벌인 패악질이 워낙 심해서 카바세호는 아직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상태. 그래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외에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베니엘의 모습에 어디에 선을 대야 하는지 머릿속이 부산한 것이다.
"부족한 제가 과중한 책무를 맡겨주시니, 뼈가 닳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가주님."
베니엘은 기꺼이 그 직위를 받아들였다. 이걸로 그가 구상했던 가문의 힘을 셋으로 나눠 균형을 유지하는 계책이 실현된 것이다.
'드디어 나도 이 집안의 한 축이 됐군. 오늘부터 아무도 날 우습게 볼 수 없을 거다.'
치안대장의 위치에서 여러 병력을 통솔하게 될 테니 말이다.
"네 뜻이 가상하다. 잘 해낼 거라고 믿고 있겠다."
한데 포상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어진 선언이 대회의장을 술렁이게 했다.
"이제 베니엘은 후계자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마땅히 누릴 것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이클립스 녹턴의 전반부를 전수하겠다."
이클립스 녹턴의 가주의 분신과도 같은 검법. 그걸 전수하겠다는 건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하겠단 소리였다.
이제는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주의 눈밖에 났던 망나니 자식 놈의 처지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이제 베니엘은 의붓누나 아리아나와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이제 누가 진짜 이 가문을 물려받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반면 베니엘은 다른 이유에서 쾌재를 불렀다.
'이걸로 네더 블레이드를 더욱 완전히 익힐 수 있겠군!'
네더 블레이드는 이클립스 녹턴의 카운터 검법. 그렇기에 이클립스 녹턴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으나 아무래도 직접 익히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클립스 녹턴을 제대로 배우고 카운터인 네더 블레이드까지 숙달한다면, 언젠가 있을 남작과의 싸움에서 확실히 우위에 설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적을 알고 나를 아는 셈이군. 아주 좋아.'
***
대회의가 끝나고 결국 우시드라는 좌천됐다. 왜냐하면 이어진 엘렉카에의 폭로 때문이다.
둘째 남편인 그녀는 우시드라의 비위를 일부 알고 있었고, 거리에서 아내가 보낸 가병에게 끌려갈 뻔한 이후 줄곧 칼을 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폭로는 거침이 없었다.
비록 조르카 건의 임펙트가 커서 좀 묻히는 감이 없지 않았으나 엘렉카에의 증언은 가주를 움직이기 충분했다.
이미 우시드라는 암투에서 패한 상태. 거기에 비리라는 명분까지 더해지자 가주는 결단을 내렸다.
우시드라는 그날로 수석비서관 자리에서 물러났고, 영지 변경지대의 한직으로 발령받았다.
완벽한 좌천이었다.
권력 구도에 민감한 자들은 드디어 가주가 비대해졌던 자신의 여동생의 권력에 칼을 대기 시작했다는 반응이었다.
"우시드라 님도 이제 끝인가?"
"새로 줄을 타야 할지도 모르겠소만…."
"섣부르군. 그분이 이대로 끝날 거 같소? 수면 아래서 또 무언가를 준비하겠지. 야심가는 결국 돌아오는 법이오. 이럴 때 가볍게 편을 갈아타는 모습을 보이면 화를 입을 거요."
"흐음… 그 말도 맞는 말이지만."
나이트쉐이드의 가솔들은 이 문제로 저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는데, 망나니라 불렸던 베니엘에겐 이제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단 사실이었다.
"뭐… 우시드라 님도 우시드라 님이지만 우리가 도련님께 성의를 좀 보이는 게 도리에 맞지 않겠소?"
"크흠…! 그거야 그렇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지만...."
"얼른 선물을 준비해서 자리를 마련해 보자고."
그날 이후로 가문의 많은 이들의 시선이 베니엘을 쫓게 됐다. 이제 그 망나니의 행보는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결과를 낸 대회의지만 베니엘이 얻은 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감옥에 갇혀 있는 서열 7위 뱀파이어 검객 발토리스의 기계 언데드화이다.
베니엘은 남작이 이번 결과에 만족해 인심이 후해 보였기에 대회의가 파할 때쯤 간언했다.
"리리나 고모의 작품에 결함이 없진 않으나 극히 유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에 사망한 드랄두 역시 바로 부활할 예정입니다."
"부활이 가능한 것이냐? 언데드라 해도 파괴되면 그만인 것을?"
"네, 리리나 고모의 기계 언데드는 마치 리치처럼 라이프 베슬을 갖고 있습니다. 하니, 몇 번이고 부활할 수 있는 데다가 더없이 충직하지요. 지하에서 그 이상의 장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한 아직 미비한 부분들 역시 차차 개선될 터이고요."
"흐음... 솔깃한 얘기로구나."
비록 검객의 능력을 다 살리지 못한다지만, 충성스러운 데다가 부활한다는 점에 남작에게 높은 점수를 땄다.
결국 남작은 서열 7위 발토리스의 기계 언데드화를 승인했다.
리리나가 들으면 기뻐 날뛸 만한 소식이었다.
반면 어떻게든 후일 발토리스를 꺼내서 우군으로 쓰고 싶어했던 우시드라에겐 사형 선고 같은 얘기였다.
***
다음 날 베니엘은 리리나를 찾아갔다. 그가 이번에 기계 언데드 건을 진행 시킨 건 리리나가 예쁜 구석이 있어서는 아니다.
'솔직히 기회만 되면 내 심장을 꺼내려는 막내 고모는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다니까.'
뭔가 좀 뒤틀리긴 했어도 모성애와 같은 따뜻함으로 베니엘을 품어주는 둘째 고모와 다르게 막내 고모는 위험천만한 존재다.
하지만 처신하기에 따라 그 강력한 대마법사가 유용한 아군이 될 수 있으니 가급적 친하게 지내는 게 좋았다.
'내 가슴팍을 가를 메스가 닿지 않는 정도로만 말이지.'
사실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고모, 저 왔습니다!"
베니엘은 미리 그녀의 거미 요정에게 부탁해 기별을 넣은 상태. 그리고 가주가 발토리스의 기계 언데드화를 허락했다는 걸 전했다.
안 그랬다가는 지금 한창 오크 우두머리를 만지던 중에 방해받아 길길이 날뛸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베니엘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도 마법부터 날아올 확률이 높았다.
철컥!
베니엘의 외침에 마치 은행 금고문을 연상케하는 리리나의 연구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죽음의 악취와 냉기, 기름 냄새가 확 풍겨왔다.
베니엘을 뒤에 있던 호위병들은 질겁한 기색이다.
"윽!"
"여기가…?"
하지만 베니엘은 안에 가득한 살점과 금속 조각들이 만드는 끔찍함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기에 애써 태연한 척 들어갔다.
"모두 입 다물도록."
연구실 중앙에는 거대한 해부대는 이리저리 해체된 오크 우두머리의 시체가 보였다. 그 가여운 녀석은 리리나의 취향에 맞는 끔찍한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었다.
리리나는 그 해부대 앞에서 연구실의 가장 환한 조명에 둘러싸여 우뚝 서 있었다.
삶과 죽음을 농락하는 이 집도의는 마치 귀신 같은 모습이라 호위병들은 공포로 몸이 딱딱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그때 리리나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피에 절은 금발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얼음장 같이 차갑던 리리나의 표정이 환해진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미소를 지으며 베니엘에게 달려왔다.
"베니엘! 이 귀여운 내 돌대가리!"
리리나는 바닥에 고인 응고한 피와 미끄러운 지방을 요리조리 피하며 달려와서는 그대로 베니엘에 품에 뛰어들어 안겼다.
와락!
향기 대신 포름알데하이드 용액 같은 냄새가 확 풍겨왔다.
리리나는 베니엘의 목에 매달려 그에게 뽀뽀를 마구 퍼부어댔다.
"쪽! 쪼옥―! 이 사랑스러운 놈! 네가 발토리스의 허락을 받아줬단 거지! 일부러 날 생각해서 해준 거야? 아이, 참! 이렇게 귀여운 녀석이 다 있담!"
염원하던 일을 해결해준 덕에 현재 리리나의 호감도는 최고치를 찍고 있는 상황.
변덕스러운 그녀의 성격상 얼마 안 가긴 하겠지만, 이때만큼은 더 없이 넉넉하게 후한 존재로 탈바꿈한다..
베니엘은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애초에 굳이 남작에게 건의해 기계 언데드 건을 처리한 건 리리나의 도움을 필요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리나 고모, 드랄두가 죽었습니다. 부활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지!"
"더불어 저 녀석도 기계 언데드화를 하고 싶습니다."
베니엘은 뒤에 호위병들이 가져온 발키무의 관짝을 가리켰다.
"이번에 절 위해 싸우다 죽은 녀석입니다. 새로운 삶을 이어나가게 하고 싶습니다."
리리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물론! 물론! 다 공짜로 해줄게!"
원래라면 많은 자금이 필요한 일이었으나 한없이 관대해진 그녀는 조카에게 금화 한 개도 받고 싶지 않았다.
베니엘은 이 날먹에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기계 언데드는 많은 자금이 든다. 그걸 공짜로 할 수 있으니 최고군.'
물론 이런 점 때문에 굳이 남작에게 간언했던 게 아니다. 자금을 아끼면 좋지만, 그는 부유했으니까.
사실 이번 건을 진행 시킨 건 우시드라를 향한 견제와 더불어, 따로 리리나에게 부탁이 있어서였다.
"안 그래도 새로운 원정을 준비하느라 돈 나갈 곳이 많아 걱정이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고모."
그 말에 웃는 낯으로 베니엘의 손을 안쪽으로 잡아끌고 있던 리리나가 피 얼룩이 잔뜩 묻은 귀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새로운 원정?"
93화
체인 마스터 (1)
베니엘은 자연스럽게 달라붙어 있는 리리나를 떼어내며 끄덕였다.
"네, 지난 폐허 도시의 원정 때 물돼지 놈이 도망쳤습니다. 내버려 두면 후환이 될 테니 이번에 아예 끝장을 보려고 합니다."
"뭐! 물돼지라고!"
물돼지라 하면, 부끄러움을 모르고 스스로 '호수의 신사'라 칭하는 수룡 마그라스를 말한다. 누가 생각해도 그 탐욕스러움 때문에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한 강도 놈에겐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었다.
마그라스는 드란실 공작과 그의 반짝거리는 친위대를 맞아 격전을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했다. 그리고는 호수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당시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게, 노인네가 체면도 잊고 추하게 내뺐다고. 문제는 드래곤의 원한은 깊고 무거운지라 베니엘 입장에선 반드시 처리해야 할 존재였다.
'뭐, 그걸 떠나서 잡으면 잭팟인 게 더 크지.'
호수의 드래곤 마그라스는 빈털터리긴 하다. 오죽하면 빚 독촉에 시달리며 해초로 연명하겠는가? 악성 채무자 중의 악성 채무자였다.
하지만 드래곤은 몸뚱이 자체가 돈덩어리다. 통제만 가능하다면 다방면으로 부려 먹을 수 있고, 그게 안 되면 해체해서 신체 여기저기를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지구에서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수염에 기름, 고기, 뼈까지 온갖 걸 활용하는 것처럼 이 세계의 드래곤도 마찬가지다.
아니, 고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가치와 활용도를 갖고 있으니 존재 자체가 로또라고 할 수 있었다.
"네, 그 물돼지 맞습니다. 고모, 혹시 놈의 시체를 가져오면 기계 언데드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마그라스를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충성스러운 기계 언데드로 만드는 것이다.
한데 리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 내 입장에서도 어떻게든 다뤄보고 싶은 존재지만… 아직 어림없어. 아무리 이빨 빠진 존재라도 상대는 드래곤이라고?"
예상하던 대답이었기에 베니엘은 실망하지 않았다.
'아직은 무리군. 뭐, 언젠가는 가능하겠지만 말이야.'
베니엘은 리리나가 기계 언데드 기술을 계속 발전시키도록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그녀의 기술은 뒤로 갈수록 엄청난 도움이니 되니 말이다.
물론 리리나와 우호 관계를 위해서 지속적인 호감도 작업은 필수였지만.
"아직 기술이 완성되지 않아서 그렇겠지요. 저는 언젠가 고모가 그런 물돼지조차 간단하게 기계 언데드화 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다분히 입에 발린 소리였으나 최근 자기 기술에 몇 번이고 좌절은 겪은 리리나에게 듣기 좋았다. 그녀의 얼굴은 대번에 환해졌고, 눈빛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물론입니다."
"역시! 너만은 날 알아주는구나!"
특유의 기행 때문에 가문 내에서 고립된 그녀는 자기편을 들어주는 이를 만나자 아주 반색했다.
"그래, 뭘 부탁하려고? 말만 해봐! 이 리리나 님이 처리해 줄 테니!"
리리나는 드물게 인자한 마음으로 가슴을 펴고는 턱을 살짝 치켰다.
"이걸 봐주십시오."
베니엘은 마법 지퍼에서 탁하게 반짝이는 검은 덩어리를 꺼냈다. 리리나는 그게 뭔지 대번에 알아챘다.
"드래곤의 비늘이구나!"
"역시 리리나 고모. 맞습니다. 마그라스의 비늘입니다."
이것은 과거 마그라스가 베니엘을 자신의 전권대사로 삼았을 때 내려준 상징이다. 지금은 부여됐던 마법은 흩어져 버렸으나, 드래곤의 비늘이란 것 자체로도 값진 물건이었다.
"뭘 원하는지 알겠네! 그 물돼지 놈을 추적할 장치를 만들어 달라는 거지? 내가 맞지?"
"역시 척하면 착이시군요. 놈이 대강 어디에 은신해 있는지는 짐작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위치를 찾는 데는 고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베니엘은 게임 지식 덕에 마그라스는 은신처를 안다. 하지만 에본플로우 호수는 넓은 곳이라 가서도 한참을 수색 작업에만 매달려야 할 테니 리리나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다.
리리나는 진지한 얼굴로 기왓장만큼이나 큰 비늘을 양손으로 쥔 채 바라보더니 곧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해. 이 비늘이랑 똑같은 비늘이 있는 곳을 찾는 방식이면 되겠지. 탐지 거리가 관건인데 제법 길게 뺄 수 있을 거야."
"다행이군요. 완성에는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일주일 정도? 왜? 급해? 그러면 더 빨리 해보고."
더 빨리 해주겠다니. 지금 리리나는 평소의 까칠함을 생각해 보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상냥했다. 베니엘은 이게 일시적인 것임을 앎에도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아닙니다. 어차피 원정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요."
"아, 그렇구나. 알겠어. 이걸로 용건은 끝이지?"
끝이긴 했다. 한데 베니엘은 그리 물어오는 리리나의 물음에 묘한 불길함을 느껴 자기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한데 어느새 리리나의 손이 그를 단단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 작고 고운 손을 생각보다 아귀힘이 강했다.
"어딜 가려고? 호호호. 이제 일 얘기는 그만두고 우리 둘이서 오붓한 시간 보내지 않을래? 응?"
"네에…?"
오붓한 시간이라 하니 저 앞의 해부대 밖에 안 보인다. 리리나는 뒤에 있던 베니엘의 호위병들에게 꺼지라는 듯 손짓을 했다.
이에 베니엘은 다급하게 가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호위병들의 결정은 빨랐다.
"급한 일이 생겨서…!"
"크흠! 가족 간의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지요."
"환담을 나누십시오."
관을 내려놓은 그들은 더 볼 일도 없다는 듯 그대로 내빼버렸다. 베니엘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저 새끼들이!'
조르카 앞에서도 나서기에 충성심이 상당하다 여겼는지 이렇게 쉽게 자신을 버릴 줄이야.
그렇게 둘만 남게 되자 리리나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희희덕거렸다.
"아아~ 얼마나 이런 시간을 기다렸는지! 드디어 너랑 이런 순간이! 하악!"
이윽고 리리나는 해부대 위에 오크 우두머리의 시체를 그냥 마법으로 밀어 떨어뜨려 버렸다.
철푸덕!
그리고는 양손을 마주 잡고, 천장의 음산한 조명을 두 눈동자에 가득 담은 채 기뻐했다.
"오늘 여기 위에서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거야! 아? 좀 지저분하지? 널 위해 깨끗하게 정리해줄게. 잠깐만 기다려!"
리리나는 염동력 마법으로 청소도구를 움직여 해부대의 피 얼룩을 대강 지우고는, 그 위에 천을 깔고 와인 잔, 촛불 등을 올려놨다.
베니엘은 소름이 돋았다. 왜 저런 걸 해부대 위에 올리는지 이해불가였기 때문이다.
대강 정리를 끝낸 리리나는 뒤를 돌아보더니 어쩐지 고혹적인(하지만 어설픈)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여기서 네가 날 가지고 하고 싶은 건 모두 해도 돼. 널 위해 내 전부를 줄게."
베니엘은 그 제안에 잔혹한 등가교환이 있음을 바로 알아챘다.
"대신 고모도 마찬가지겠죠?"
"응! 그렇지!"
이미 리리나는 메스를 얼른 쥐고 싶어서 근질근질한지 손가락을 잔뜩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혀를 낼름낼름 거렸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때린다.
"아! 새로운 도구! 그래, 이 귀한 일에는 더욱 날카로운 도구를 꺼내와야겠어. 잠시만 기다려줄래? 호호홋!"
리리나가 안쪽에 쌓인 짐짝을 뒤지기 시작할 때 베니엘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은밀히 행동에 들어갔다.
'이대로라면… 하루 뒤에는 나도 기계 언데드가 될지 모른다.'
베니엘은 품에서 나이트쉐이드 혈족이 영지 안에서 연락할 수 있는 마법 스크롤을 꺼내서, 그 위에 다급하게 손가락으로 써 내려갔다.
[아니엘, 살려줘. 리리나의 연구실.]
짧은 메시지였다. 그리고 일부러 반말로 썼다. 아니엘은 베니엘이 다급해지거나 화가 났을 때 자신에게 반말을 하고 이름을 부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잠시 뒤.
리리나가 환하게 웃으며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이제껏 본 적도 없는 날카로운 메스와 수술 도구가 잔뜩 쥐어져 있었다.
"어때? 너무너무 이쁘지? 하아악! 하악!"
이미 리리나는 눈동자가 맛이 간 상태.
그녀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군침을 흘리더니 결국 자기 욕망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자! 심장을 보자! 심장! 얼른 일루와잇―!"
그야말로 절체절명.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구원자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타났다.
콰아아아앙!
폭발음과 함께 연구실의 두꺼운 철문이 박살 났다. 그리고 자욱한 연기 속에서 새하얀 다크 엘프가 나타났다.
둘째 고모 아니엘이었다.
"이 잡년아, 지금 뭐 하는 걸까? 내 거에게?"
그 목소리에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분노가 절절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
잠시 전.
나르다리온 남작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바로 천방지축인 둘째 여동생에게 한껏 시달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오라버니! 어째서 제가 수석비서관이 될 수 없다는 거죠? 납득할 수 없어요!"
아니엘이 우시드라의 좌천으로 공석이 된 수석비서관 자리를 자기가 맡겠다고 찾아왔던 것이다.
평소에 머리를 잘라 수집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던 그녀가 갑자기 영지에서 제일 중요한 직책을 맡겠다고 하자 남작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 일은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네겐 과분하다. 물러가도록."
하지만 그렇게 말 잘 듣는 여동생이었으면 남작이 아니엘의 출현에 식겁했을 리도 없다.
"아니, 왜 안 되는데요? 저도 오라버니의 여동생이잖아요!"
"혈연이 중요한 게 아니다. 능력을 봐야…."
"능력이라면 저처럼 똑똑한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요!"
"물론 똑똑한 건 인정한다. 하지만 너는 뭔가 이상한 쪽으로만 머리가 굴러가지 않더냐. 이건 좀 더 상식적인...."
"아, 저도 할 수 있다고요!"
이거 순, 애새끼가 떼쓰는 격이다.
남작은 갑자기 지난 악몽이 떠올랐다. 바로 베니엘이 은광으로 노동교화형을 받으러 간 때다.
당시 아니엘은 어처구니없게도 한 달도 채 안 되어서는 베니엘을 데려와야 한다고 남작을 들들 볶아댔다.
당연히 일언지하에 거절했는데 찰거머리도 이런 찰거머리가 없었다. 집무실은 물론이고, 침실, 나중엔 화장실까지 쫓아와 소변을 보는데 천장에서 머리만 내밀고 졸라대기까지 했다.
남작은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였다.
당연히 화를 냈다. 또한 하이 마스터의 위엄을 보였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저 가족인 게 웬수였다.
결국 한 달 내내 시달린 남작은 굴복했고, 베니엘은 예정보다 훨씬 빨리 불러들였던 것이다.
한데 이번에도 그때와 똑같은 흐름이 예견됐다. 그래서 더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사람 머리 자르는 거 외에는 관심 없던 내가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그놈 때문이겠지?"
"맞아요!"
"...부인하지도 않는구나. 너는 부끄러움이라곤 모르는 것이냐?"
"고모가 조카를 사랑하는데 무슨 부끄러움이요?"
"...됐다. 말을 해도 알아먹질 못하니 무슨 소용이겠나. 아무튼, 불가하다. 네년이 수석비서관을 맞으면 분명 베니엘에게 이로운 일만 할 게 뻔하다."
아니엘은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맞아요!"
"...."
남작은 심한 두통을 느꼈다. 하지만 아니엘은 물러남이라곤 없었다.
"설마 오라버니. 굴러들어온 돌덩이에 불과한 아리아나와 우리 집 귀한 보배인 베니엘이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건 아니겠지요?"
"너는 이전부터 아리아나를 싫어하는군."
"당연하잖아요! 어디 근본도 없는 녀석이 가문을 이어받으려고! 이 집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베니엘이 물려받아야 해요! 어차피 우리 가문은 특이해서 대모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는 베니엘을 위해 모든 걸 다할 거랍니다!"
"아니엘! 근본도 없다니 말이 심하구나! 누가 뭐래도 아리아나 역시 내 자식이다!"
아니엘은 코웃음을 쳤다.
"하! 정말 자식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의문이네요? 그렇다면 묻지요. 대체 왜 오늘까지 그 녀석의 혈통을 숨기고 있는 거죠? 오라버니 본인은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아니엘!"
"제가 오라버니를 모를까요? 주워온 데는 뭔가에 목적이 있겠죠. 설마 오라버니 같이 박정한 분이 진짜 자식으로 생각한다고요?"
"아니엘, 거기까지 하도록. 설마 기어코 칼을 맞대고 가문의 서열에 대해 다시금 논해보고 싶은 것이냐!"
남작은 여기서 아니엘이 칼을 뽑을 거라고 여겼다. 저년의 성질머리면 그러고도 남았으니까. 하면 차라리 이 기회에 실력의 격차를 보여줘서 한동안 말을 잘 듣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해 보니 기강을 잡은 지 좀 됐어.'
영락없이 싸움이 벌어질 분위기였다. 한데 그때, 아니엘이 갑자기 흠칫해서는 허리춤에서 스크롤을 꺼내 펼쳐본다. 그리고는 표정이 일변하더니 남작은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버렸다.
쾅―!
어찌나 빠르게 사라지던지 마치 슬링을 던질 때처럼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얼마 뒤, 성의 지하 쪽에서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쿠아아아아앙!
남작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성 전체를 감시하고 있는 그의 감각 덕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또, 또! 지랄이군!"
참으로 이놈의 집구석, 편할 날이 없었다.
94화
체인 마스터 (2)
남작은 자신의 마력을 동원해 성 전체에 들리는 울리는 소리로 외쳤다.
[제발 성 밖에 나가서 싸우란 말이다! 한 번만 더 성을 파괴한다면 너희 둘 다 반드시 쫓아내겠다!]
그가 과민반응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작은 아직도 아래쪽에서 이어지는 진동을 느끼며 울적한 기분으로 술을 찾았다.
과거 작위를 얻고 성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될 무렵, 이곳이 반파된 사고가 벌어졌다.
당시 리리나의 연구실은 남작의 거처와 비교적 가까이 있었다. 남작은 그때만 해도 그 사실이 얼마나 큰 문제가 될 줄 몰랐다.
하지만 어느 날 밤, 갑작스러운 폭발과 함께 잠자던 남작은 잠옷 바람으로 허공을 날아가게 됐을 때 비로소 크게 후회하게 됐다.
이후 성의 복구에만 은광의 3년 치 수익이 들어갔다.
막 새로 입주한 성을 크게 보수하고 내심 흐뭇해하던 남작은 그 사건으로 크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건 덤.
이후 리리나 연구실은 남작의 거처와 최대한 먼 곳으로 옮겨졌다.
'막내가 대마법사만 아니었어도. 젠장!'
대마법사는 귀하다. 아무리 나이트쉐이드 가문이 일반적인 남작가가 아니라 해도 대마법사가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그야말로 다방면에서 활약할 수 있는 존재니 남작은 결국 성 폭발 사건에도 불구하고 리리나를 쫓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다시 한번 성이 무너진다면 절대 둘을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 오라비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할 거다!]
남작의 기운에 평소에 다른 사나움이 묻어나는 걸 느끼자마자 한창 싸우고 있던 아니엘과 리리나는 성 밖으로 튀어 나갔다. 물론 그 와중에도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콰앙! 파직! 쾅!
소음과 함께 두 개의 끔찍한 기운이 성에서 멀어져 가자 남작은 그제야 의자에 몸을 묻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 내 명에 못 죽겠구나.'
말썽꾸러기 여동생 셋은 비천한 신분까지 떨어졌던 남작이 귀족의 반열에 오르는 데 커다란 공을 세운 녀석들이지만, 스트레스의 근원이기도 했다.
남작은 요즘 자신이 자랑하는 광택 나는 검은 머리칼이 뭉텅이씩 빠지는 현실에 절망감마저 느꼈다. 하이 마스터라고 해도 탈모에는 대책이 없었으니까.
"후우… 일단 진정하자."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며 남작은 섬세한 손길로 두피 마사지에 들어갔다. 어쩐지 요즘 갈수록 이마가 넓어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리라.
그러다 곧 탁자에 쌓여 있는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갑자기 의젓한 첫째 동생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늘 호시탐탐 내 자리를 노릴지언정 일만큼은 똑바로 하는 건실한 아이였는데….'
좌천돼 고생할 걸 생각하니 벌써 가엾다. 남작은 인편으로 꿀물이라도 좀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남작은 아니엘이 없는 틈을 타서 빠르게 업무를 처리했다.
'이건 이 녀석이게… 이건 이 친구가 적당하겠군. 그래, 이건 이쪽으로… 음, 적절하게 나누자.'
남작은 수석비서관 우시드라의 업무를 부하들에게 나눠서 할당했다. 이참에 아예 수석비서관이란 직책을 없애버려 권력의 집중을 막고, 저 막돼먹은 아니엘이 그 자리를 노리는 걸 차단해야만 했다.
'앞으로 나도 이전보다 업무를 꽤 맡아야겠군. 어쩔 수 없지.'
그간 사실 첫째만 믿고 너무 일을 등한시했다. 한 사람의 영주로서 지금은 신경을 써야 할 때였다.
'점점 제국의 혼란이 커지고 있으니 말이다.'
황가는 흔들리고 있었다. 이미 발 빠른 자들은 다음 시대를 대비해 움직이는 중이다. 지방에선 여러 군벌이 일어나며 조정으로 올라가는 공납이 상당 부분 끊긴 데다가, 각지에서 민란이 성행했다.
심지어 최근 마신의 교단이란 사이비 집단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고 혹세무민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인지라 남작은 근처에 따로 빼둔 서찰에 계속 시선이 갔다.
"흐음...."
그 서찰은 드란실 공작가에서 온 것이다.
내용은 드란실 가문과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결혼 동맹에 관한 내용.
장차 서부 군벌이자 이 일대의 패자가 될 드란실 공자가 남작의 의붓딸인 아리아나를 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남작은 고심했다.
'정치적으로 아주 달콤한 제안이지. 드란실 공작가의 후광을 입을 수 있다면 누가 우리 가문을 가볍게 여기겠나?'
하지만 아리아나는 그의 계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녀를 내어준다면 이전부터 궁리하던 일을 포기해야 한다는 소리.
'어찌해야 할지 쉬이 판단이 서지 않는군. 일단 좀 더 고민해봐야겠다.'
남작은 문제를 보류하기로 했다.
그러던 그때 창문 너머로 불꽃놀이처럼 환하게 무언가 터졌다.
퍼어어어엉!
아니엘과 리리나가 부딪치며 만들어낸 폭발이었다.
저 멀리 닉스포트의 주민들이 환호하며 그걸 올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
베니엘은 '물돼지 사냥'이라 명명한 두 번째 원정의 준비에 들어갔다.
이번 목표는 마그라스를 죽이든 살리든 어떻게든 완벽히 처리하는 것. 후환을 제거하고 마그라스의 몸뚱이로 한밑천 잡을 생각이었다.
마침 우시드라도 좌천됐으니 바깥으로 나갈 여유도 충분했다.
이 같은 이유로 원정을 천명하자 베니엘의 재정을 관리하고 있던 퀵포우가 덜덜 떨었다.
"찌익? 원정 비용이 상당할 겁니다. 가뜩이나 그융크 병영 때문에 상당한 지출이 발생하고 있는 중인데...."
퀵포우는 재정담당답게 일단 돈 나가는 건수에는 반대부터 하고 나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 그래, 맞아. 돈을 아낄수록 좋지. 그리고 내 돈 보다 남의 돈을 쓰면 더욱 좋다."
"찌익? 뭔가 생각이 있으시군요?"
"그래. 안 그래도 요즘 날 보자는 녀석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맞습니다. 가문에서 한자리하는 자들 여럿이 주인님을 뵙고 싶어합니다. 이번 영전을 축하하고 싶다는군요."
쉽게 말해 뇌물 좀 바치고 싶다는 것이다.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싹수가 있는 작자들이군. 퀵포우, 그들을 차례로 불러들여라."
"찌익? 물론 적잖은 뇌물이 들어오긴 하겠지만… 원정간 사용할 막대한 금전을 충당하긴 무리일 겁니다."
원정에 들어가는 비용은 많다. 배를 빌리고, 각종 물자에, 수십여 명의 인원들의 인건비까지 계산하면 현기증이 일 만큼 비용이 소모되는 것이다.
하지만 베니엘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걱정할 것 없대도. 부르기나 해."
***
나이트쉐이드 남작령의 '동굴 수송관'과 '석영 채집관'은 초조한 기색으로 준비한 선물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바로 최근 치안대장으로 영전한 베니엘에게 축하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그…, 뭘 준비했소?"
"그대는?"
둘은 남은 시간에 각자 준비해 온 선물을 살펴봤다.
각각 '흑석향'이라는 진귀한 석재로 만든 향료와 '금빛 현사'라 불리는 귀중한 거미줄이었다.
금전적 가치는 1~2천 두크 정도. 축하 선물로는 값진 것이라 이들이 꽤 성의를 보이려 함을 알 수 있었다. 하나 퀵포우의 말대로 원정 비용을 생각해 보면 택도 없는 액수였다.
"괜찮은 걸 준비했구려."
"그 정도면 도련님도 만족할 거요."
둘은 서로 잘했다며 칭찬했다. 이들은 남작의 6촌, 7촌으로 친족이라 하기엔 애매하게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그래도 친족은 친족인지라 나이트쉐이드 가문에 찾아와 이처럼 한 자리씩 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선 떠오르는 권력에 선을 잘 대어둬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 베니엘을 찾아온 것이다.
둘은 서로 무슨 얘기를 할지 의논했고, 이번 방문이 잘 마무리될 거라 여겼다.
"도련님이 예전처럼 패악질만 부리지 않는다고 하오."
"맞습니다. 상식선의 인물이 됐다는 평을 들었지요. 이제 어른이 된 건지도 모릅니다."
"다행스러운 말이오. 후후."
"앗, 먼저 들어갔던 자들이 나옵니다!"
그때 베니엘의 방에서 '균류 관리관'과 '흑요석 서기관'의 직책을 가진 이들이 나왔다.
한데 그들은 다 죽어가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놀라 기다리던 둘이 물었다.
"대,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괜찮습니까? 안색이 안 좋습니다."
한데 밖으로 나온 둘은 대답도 없이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라져갔다. 당연히 남은 둘은 불안감이 엄습할 수밖에.
"대, 대체?"
"글쎄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아가기엔...."
사실 뭔가 적당한 핑계만 있다면 여기서 내빼고 싶었다. 한데 그걸 예상이나 한 듯 퀵포우가 나타나더니 둘을 불렀다.
"찍! 다음 들어오십시오!"
몰려드는 불안감에 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힘겨운 발걸음으로 안으로 향했다.
방 안의 커다란 책상에 베니엘이 앉아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권했다.
"찾아와줘서 반갑군. 앉지."
한데 태도는 서글서글하고 고압적인 기색이라곤 없었다. 심지어 베니엘은 웃는 낯으로 농담까지 해왔다.
잔뜩 긴장하고 왔던 그들은 의아해하면서 속으로 다행스럽게 여겼다.
'뭐야?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데?'
'앞에 놈들이 뭔가 실수라도 한 모양인가?'
예상외로 면담은 아주 화기애애했다. 둘이 선물을 전달했을 때 베니엘은 기쁘게 받아줬다.
"어이쿠, 뭐 이런 걸 다 준비했나. 내 잘 받도록 하지."
이어서 베니엘은 둘이 맞은 바 일을 잘하고 있어 영지가 편안한 거라 칭찬까지 해왔다. 당연히 그들의 입을 헤벌쭉 벌어졌다.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저 미력하나마 영지를 위해 힘을 보탤 뿐입니다."
그들은 이대로라면 오면서 생각했던 가벼운 청탁도 가능할 거라 여겼다.
'오길 잘했군. 이거 잘하면 남는 장사를 하겠는데?'
'아무래도 앞서 방문했던 자들은 시원찮은 선물을 가져왔던 모양이다. 쯧! 멍청하긴. 아낄 걸 아껴야지.'
한데 그런 기대가 배신당하기까진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베니엘은 웃는 낯으로 그들에게 무언가 장부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것 좀 봐주겠나? 내 두 사람에게 물을 게 있어서 말이야."
"네? 무엇입니까?"
별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든 둘은 곧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 이건!"
"흡!"
거기에는 자신들이 가문의 은광에서 받은 뇌물 내역과 그걸 전달한 감독관까지 아주 상세하게 정리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자료라면 누가 봐도 확실한 증거를 잡은 게 틀림없었고, 둘의 눈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 도련님…?"
"이, 이건 저희와 분명 관계가 없는…."
둘이 변명을 하거나 말거나 베니엘은 느긋한 자세로 잔에 차를 따를 뿐이었다. 마치 계속 지껄여 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역시 이들의 비리를 큰고모 건과 같이 안 터뜨리길 잘했군.'
베니엘은 퀵포우가 가져온 비위 건을 이런 식으로 따로 만나 협상하는 게 낫겠단 판단을 내렸다.
뭣보다 광산 비리 건은 자칫하다가는 베니엘 본인도 딸려 들어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역시 퀵포우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아니라 가주께서 판단하시겠지. 이 자료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실지 참으로 궁금하단 말이야."
베니엘의 말에 둘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리고 더 부인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는 빠르게 백기를 들었다.
"도, 도련님!"
"대체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런 태도에 베니엘은 만족했다.
"자네들은 그래도 앞서 나간 두 사람보단 똑똑하군. 그 친구들은 말이야. 끝까지 잡아떼다가 더 많은 걸 잃었지."
이에 둘은 서둘러 물었다.
"저희가 도련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말씀만 하십시오.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그 대답에 베니엘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근처에 서 있던 퀵포우에게 손가락을 튕겼다.
퀵포우는 기다렸다는 듯 설명에 들어갔다.
"두 분 주목해 주십시오. 저희 주인님께서 최근 한 가지 멋진 원정을 계획 중이신지라 그 비용을 충당하고자 하십니다."
즉석해서 사업설명회가 열렸다. 일반적인 사업설명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참가가 '강제'라는 점이었지만.
둘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으로 억지로 사업설명회를 들었고, 곧 자신의 재산의 상당 부분을 이 유망한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서명해야 했다.
둘의 확약을 받은 베니엘은 만족해선 끄덕였다.
"좋아. 한동안 영지의 동굴 수송관과 석영 채집관이 바뀔 일은 없겠군. 자네들도 알다시피 그 자리가 알짜배기라 말이야. 내게 청탁이 꽤 들어오거든? 하지만 모두 물리칠 거라고 약속하지."
이에 그들은 억지로 감격을 표한 뒤, 넋 나간 표정으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가보니 밖에는 새로 선물을 들고 온 자들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와 탐욕이 느껴졌다.
"어떻게 됐소?"
"잘 됐소이까?"
기다렸다는 듯 물어오는 그들을 보며 동굴 수송관과 석영 채집관은 다 죽은 얼굴로 혀를 차더니, 좀비처럼 복도를 걸어서 사라졌다.
그와 함께 어쩐지 발랄하기까지 한 퀵포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95화
체인 마스터 (3)
***
가문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베니엘은 원정비 상당 부분을 갈취… 아니, 투자받을 수 있게 됐다.
물론 정상적인 투자와 달리 투자자가 수익은커녕 원금도 제대로 돌려받기 어렵다는 게 특이했지만 말이다. 하나 그딴 건 비밀스러운 장부 앞에선 사소한 문제였다.
다만, 이번 일에 임하는 투자자들의 자세가 워낙 적극적인지라 당장 운용할 수 있는 자금 정도가 아니라 굵직한 자산을 팔겠다고 했으니 준비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어차피 원정까지 처리할 일도 여러 개니 상관없겠지.'
베니엘은 이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하나 사람은 간사한 법.
이렇게 많은 자금을 날로 먹자, 그는 정직하게 땀을 흘려 돈을 버는 게 싫어졌다. 그래서인지 베니엘은 괜히 군침을 삼키며 주변을 기웃거렸다.
'뭔가 건수가 없나?'
이럴 때마다 남작성의 가신들은 이 탐욕스러운 시선에 질겁하며 여기저기 분분히 흩어지기 바빴다. 베니엘은 아쉬워서 입맛만 다셨다.
"쩝...."
아무래도 가신들에게 더 뜯어내는 건 도의상 맞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돈 나올 구석을 찾아봐야 하는데, 어째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근사한 사업이 생각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말이다.
'결국 어딘가 쥐어짤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마치 희대의 탐관오리 같은 생각으로 무장한 그는 일단 치안대의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새로 치안대장이 됐으니 인수인계를 받을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연락이 왔다.
"장례가 오늘 진행됩니다."
호위병이자 베니엘의 전령인 네그라크가 와서 알려왔다. 이에 베니엘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상납받은 누런 금화를 시시덕거리며 비밀 장부에 기록하던 모습과는 극명한 차이였다.
"알겠다. 바로 가지."
왜냐하면, 이 장례식은 그를 지키다 죽은 호위병 오사키아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베니엘은 검은 예복을 입고 벨벳 망토를 둘렀다. 그리고 나이트쉐이드의 혈족을 상징하는 백금 브로치를 달았다.
부하의 장례식에 최고로 격식을 갖추려는 것이다.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지하에선 언데드화를 막는 것 때문에 장례가 상당히 중대 사안이다. 그래서 자기 마을의 전통에 따라 적당히 하는 지상인과 다르게, 꽤나 체계가 잡혀 있다.
일단 장례식장이 현대의 지구처럼 완비돼 있다.
심지어 고인의 신분이나 재산에 따라 몇 단계로 회장의 등급이 나뉘어 있기까지 했다.
오사키아의 장례는 '검은 철 예배당'이라 불리는 시설에서 진행된다. 주로 하급 귀족이나 관리, 군대의 초급 간부, 마을 유지 등이 장례를 치르는 곳이었다.
원래라면 오사키아의 신분으론 무리겠지만, 베니엘이 남작의 허락을 받아 그를 십인대장으로 추증했기에 가능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보니 과연 나름대로 신분이 있는 자들을 위한 곳답게 엄정하고 잘 만들어진 장소였다.
벽면에 거대한 마노가 빛나는 빈 동굴에 검은 철 예배당이 있었다. 천장에는 마노로부터 은은한 마법적인 빛이 고인의 관이 놓여 있는 제단으로 쏟아져 내렸다.
관의 주변에는 발광 이끼가 마치 지상의 꽃처럼 장식돼 있었다. 또한 가면을 쓴 채 죽은 전사를 위해 안식의 송가를 부르는 자들도 여럿 동원됐다.
이런 호화로운 장례를 위해 많은 비용이 드는 법이지만, 베니엘은 기꺼이 감당했다.
참석자들은 많았다. 같은 가병 부터 자경대 소속 용병까지 다양하다. 딱히 오사키아와 인연이 없어도 베니엘이 참석한다는 사실에 찾아온 치안관도 여럿이었다. 새로운 대장에게 눈도장을 찍어두려는 것이다.
일부 치안관은 참석하지 않았는데 아직 남아 있는 우시드라의 끄나풀들이라 그랬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호위대장 쿠르신이 먼저 맞아줬다. 이후 그의 소개를 받아 오사키아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도련님. 이리 찾아주시니 저희 모두가 감격했습니다."
모계 사회인 다크 엘프답게 평민 집안이라 해도 오사키아의 어미가 가장 앞에서 베니엘에게 인사를 해왔다.
"당연한 일이다. 훌륭한 전사를 떠나보내게 되어 마음이 아프군. 그는 자신의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부족한 자식을 키운 어미로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 말할 것 없다. 앞으로 너희 집안의 아이들이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신경 쓸 것이다."
베니엘의 약속에 오사키아의 어미는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이 됐다. 아마 그녀는 사내놈 하나 희생시켜 집안의 다른 자식들의 길이 열렸으니 남는 장사라 생각할 터였다. 베니엘 역시 다크 엘프의 그런 생리를 잘 알았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는 관 앞에 섰다.
광택이 나는 고급스러운 오석(烏石)으로 만든 관 안에 죽은 오사키아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격전의 흔적은 수습돼 잘 염을 해둔 모습이다. 평소 소박한 편이었던 그의 무구를 그대로 입고 있는 모습이다.
다만 그 위에 나이트쉐이드 가문을 상징하는 벨벳 현장(懸章)을 두르고, 그의 공적을 기리는 반짝이는 훈장 몇 개를 단 상태였다.
훈장 중에는 검은 별 나르다리온 남작이 직접 하사한 것도 있었다. 후계자의 목숨을 구한 공을 인정한 것이다. 일개 가병치고는 아주 큰 대접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베니엘은 씁쓸해졌다.
'그래도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게다가 지하에는 신이 없기 때문에 죽은 자의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지저인들은 저 깊고 어두운 땅 밑의 암석 속에서 영원히 잠든다고 믿을 뿐이다.
베니엘은 그저 오사키아의 명복을 비는 수밖에 없었다.
"편히 쉬길. 훌륭한 전사여."
솔직히 그의 용기는 대단했다. 베니엘은 자신이 스콜라급에 불과하다면 마스터 상급을 상대로 대적할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의 성격이면 내빼지 않았을까?
"그대는 그 부분에 있어서 나보다 대단했다."
인사를 마친 베니엘은 관에서 물러났다.
관의 주변에서는 화로에서 푸른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지하 세계 특유의 허브를 태우는 향기가 가득했다. 상당히 몽환적인 냄새였다.
이후 사람들이 차례로 오사키아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베니엘은 한쪽으로 물러나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한데 그때 네그라크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다가왔다. 흉터가 가득한 그의 이마는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전에 제가 말씀드린 오사키아의 여동생 기억하십니까?"
"음… 좀 별난 녀석이라 했지?"
"맞습니다. 오사키아가 가장 아끼던 가족이기도 하죠."
그 말에 베니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한데 그 녀석은 어디 있지? 못 본 것 같은데. 자기 오라비의 장례인데 오지도 않는 건가? 사실이라면 괘씸한데."
"아, 그게… 사정이 생겼습니다."
"뭔 놈의 사정인데 가족 장례식도 못 오나?"
한데 대답이 가관이었다.
"저 그게…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갔습니다."
"뭐? 뭐라고?"
베니엘은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었다.
"들으신 바가 맞습니다. 전에 제가 별난 녀석이라고 한 게 그 이유 때문입니다."
"도벽이 있다는 건가?"
"네,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아 훌륭한 병사가 될 만한데 무언가를 훔쳐내는 일을 최대의 기쁨으로 여기는 녀석입니다. 장차 대도 마자드처럼 되겠다고 하더라고요."
마자드라 하면 폐허 도시에서 베니엘에게 대박을 안겨줬던 전설적인 노움 대도다.
"흐음… 거물이 될 싹이거나 답 없는 멍청이겠군."
"맞습니다요."
"네가 보기엔 어떤가?"
"양쪽의 자질을 다 갖고 있어서 묘한 녀석이라 한 겁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멍청이가 맞는 듯합니다. 체인마스터 파주크의 물건을 훔쳤거든요."
"체인마스터라 하면 블랙 체인의 그놈?"
"맞습니다."
'블랙 체인'이라 하면 닉스포트에서 가장 큰 폭력 조직이다. 도시의 주요 산업인 노예 매매와 관련된 이권에 개입해 있는 단체다.
그 블랙 체인의 우두머리가 바로 체인마스터 파주크인 것이다.
베니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체인마스터라 하면 상당한 거물이지 않나. 역시 멍청이 쪽에 더 가까운 건가?"
"그래도 물건을 훔쳐서 무사히 빠져나오긴 했답니다. 밀통했던 자가 배신하는 바람에 붙잡히긴 했지만요."
"흠, 솜씨 하나는 확실한 모양이군?"
베니엘은 흥미가 돋았다. 가뜩이나 인재 부족에 시달리는 그다. 남의 집에 들어가 귀중한 걸 슬쩍 빼오는 재주가 있는 녀석이라면 요긴하게 쓸 수 있을 터.
'그게 아니라 오사키아의 부탁도 있고 말이지.'
분명 가족을 부탁한다고 했다. 특히 아꼈다는 게 여동생이니 모른 척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동기는 따로 있었다.
'이거 돈 냄새가 난다!'
놈들은 많은 돈이 되는 노예 매매에 관여하는 조직. 분명히 곳간이 풍성할 터.
'더군다나 파주크라 하면 큰고모가 뒤를 봐주던 불량배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우시드라의 라인이었단 파주크를 정리하고 도시의 기강을 일신할 필요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치안대장에 어울리는 직무라 하겠다.
물론 그 과정에서 베니엘이 새로 구성될 조직에게 상납을 받고, 뒷배로 올라서게 되는 건 덤이다.
원래 이 세계에서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은 모호한 편. 치안대장이 공무를 집행하면서 부득이하게 놈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그런 수를 쓴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나?
'우시드라는 이미 좌천됐고 말이야.'
결국 그 끈질긴 여자는 돌아오긴 하겠지만 한동안 한직에 머물며 분을 삭여야 할 것이다. 그 사이 베니엘은 그녀가 구축해뒀던 여러 가지를 먹어치울 셈이었다.
'오사키아의 여동생이 잡혀간 것 때문에 블랙 체인 놈들에게 관여할 명분도 확실하군.'
속으로 셈을 끝낸 베니엘은 결정을 내렸다.
"장례절차가 끝나면 병사를 움직이겠다. 치안대를 최대한 동원해 블랙 체인을 치겠다."
"…정말이십니까?"
설마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나설 줄은 몰랐던 건지 니그라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베니엘이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협상해서 오사키아의 여동생을 돌려받는 선으로 처리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 놈들을 완전히 박살 내자고."
***
"내가 언젠가 네년이 이렇게 사고 칠 줄 알았다. 에이, 좆같은 년. 카악 퉤!"
애꾸눈의 다크 엘프 건달이 욕설을 하며 침을 퉤 뱉는다. 그러면서 그의 눈빛을 위쪽을 바라보며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네년이 두목의 물건을 훔치는 바람에 우리 조직이 발칵 뒤집힌 거 몰라? 하여간, 전부터 손놀림이 나쁘더니!"
그가 바라보는 쪽에는 다크 엘프 여성이 사슬로 팔이 묶인 채 매달려 있었다.
정확히는 소녀에서 여인으로 넘어가는 나이대의 미녀였다.
다만 모든 종족이 공감할 만한 절대미를 지닌 아리아나와 다르게, 그녀는 다크 엘프 특유의 종족적 특성이 잘 드러난 미색을 소유하고 있었다.
길고 날카로운 눈매에 살짝 각진 턱 등, 전체적으로 예리한 인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성숙해져 가는 몸의 굴곡도 묘하게 도드라지고 있었기에, 여기 있는 악당들이 인간족이었다면 다들 음욕에 찬 시선을 지으며 "고년 참 맛깔나겠네." 같은 천박한 소리를 할 만했다.
하지만 블랙 체인의 조직원은 태반이 다크 엘프. 이 작자들은 성욕이 영 약한지라 그런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을 비상소집 시키는 등 생고생을 시킨 저 괘씸한 도적놈을 처절히 응징하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포로의 처분은 조직의 우두머리인 체인마스터가 결정하는 법. 그전에 아직 멋대로 굴 수는 없어 욕망을 억누른 채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임에도 포로로 잡힌 다크 엘프는 주눅 든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나라고 뭐 진짜 성공할 줄 알았나? 설마 터는 게 이렇게 간단할 줄이야! 너희 새끼들 보안이 그렇게 허술한 걸 왜 내 탓을 하는 거야?"
듣던 애꾸눈은 기가 막혔다.
"이거, 이거 뻔뻔한 것 좀 보게! 두목님께 말해서 네년 두 손목을 잘라버리고 멀리 팔아버리겠다! 그래야 다신 이런 짓을 못 하지!"
그렇게 으르렁거리던 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체인 마스터가 나타났다.
그의 등장에 평조직원인 체인맨들이 일제히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마스터!"
96화
체인 마스터 (4)
체인마스터의 이름은 '파주크'.
배불뚝이에 비대한 덩치를 가진 다크 엘프로, 그의 동족이 대체로 야리야리한 체형임을 고려해 볼 때 드문 타입이었다.
"오냐, 이 새끼들아!"
목소리는 우렁차서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만 같다.
복장은 화려했는데 우아함이라곤 전혀 없고 천박하기만 했다. 진홍색 튜닉은 뱃살 때문에 터질 듯 부풀어 있었고, 뚱뚱한 하반신에 딱 달라붙은 쫄바지는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그의 차림새 중 가장 시선을 끄는 건 허리춤에 있는 다섯 가닥의 검은 사슬이었다.
이 조직은 허리춤에 사슬의 숫자로 상하관계를 구분하는데 다섯 가닥은 파주크가 유일했다. 아마 그건 새로운 두목이 나타나기 전까진 변하지 않을 일이었다.
파주크는 두툼한 반지가 가득한 살찐 손가락으로 포로를 가리켰다.
"역시 저년이었냐? 내 칼을 훔쳐 간 게?"
애꾸눈 건달이 얼른 와서 아부하듯 대답했다.
"네, 다행히 제때 잘 잡아서 저리 매달아 뒀습니다."
"고얀 것 같으니라고!"
파주크는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애꾸눈이 잽싸게 채찍을 내밀었다.
파주크는 채찍을 펼치며 팡팡! 소리가 나게 당기더니 곧 휘둘러댔다.
짜악!
"주라, 네년 도둑질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조직에 받아주려 했더니! 감히 내 물건을 훔쳐! 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 년 같으니라고!"
짝! 짜악!
포로이자 죽은 오사키아의 여동생인 그녀의 이름은 '주라'. 주라는 채찍에 얻어맞아 비명을 지르면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은혜는 개뿔! 한번 들어오면 죽을 때까지 나갈 수 없는 조직에 붙잡혀 노예처럼 사는 게 은혜라고? 차라리 자발적으로 노예로 팔리는 게 낫겠네! 그럼 몸값이라도 받을 수 있지!"
"건방진 년! 너 같이 근본 없는 잡것이 이런 근사한 조직에 소속되기만 해도 큰 은혜인 것을! 하여간 요즘 젊은 새끼들은 보수가 어떠니 떠들어대는 꼴이라곤! 우리 때는 그냥 일했어! 그러다 보면 결국 돈 나올 구석이 생기는 거고!"
분노한 파주크는 채찍을 더욱 휘둘러댔다. 곧 주라의 옷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 하지만 주라에겐 다행스럽게도, 몇 번 채찍을 휘두른 파주크는 비대한 몸으로 움직이느라 금방 지쳐 채찍을 내던져 버렸다.
"에이, 시팔! 하여간 꼴 보기 싫은 년! 그냥 고분고분하게 말 들으면 서로 좋잖아! 하여간 저딴 반골은 본을 보여야 해!"
체인마스터 파주크는 주라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옆에 시립해 있던 애꾸눈에게 물었다.
"이봐, 저년 저거, 어디 끈이 있는 건 아니지? 오라비란 놈이 가병이란 거 같던데?"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체인마스터. 그 망나니 놈 밑에 있다더군요."
그 말에 파주크는 파안대소했다.
"크하하핫! 아, 그럼 아무 문제 없겠군. 그 망나니 놈이 자기 따까리 가족 문제까지 신경 쓰겠냐고. 안 그래?"
"맞습니다. 심지어 오라비란 놈이 이번에 뒤졌답니다."
"뭐? 더 좋네! 그러면 아예 신경도 안 쓸 테니!"
듣고 있던 주라가 욕설을 하고 난리였지만 그들은 웃어댈 뿐이었다.
이들은 망나니 베니엘이 최근 이런저런 성과로 유명해지고 있는 건 안다. 하나 그것과 별개로 그 악독한 성질머리가 개과천선한 것처럼 달라졌을 리가 없다고 여겼다.
베니엘은 자기 호위병을 쓰레기 취급하는 거로 유명했다. 이미 뒤진 호위병에게 여동생이 있는지 알지도 못할 터였다.
"그것보다 걱정이군. 후우…."
한창 웃던 파주크는 무릎이 아프다는 듯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러자 애꾸눈이 재빨리 손짓했고, 대기하던 부하들이 특수 제작한 철제 의자를 부리나케 가져왔다. 뚱뚱한 파주크의 무게도 능히 견딜 수 있는 물건이었다.
털썩.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은 파주크는 부하 하나가 공손하게 내밀어준 담배를 입에 물고는 근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시드라 님이 일시적으로 밀려난 탓에 지금 우리 조직을 뒤에서 받쳐주실 분이 없다고. 후우…. 오늘따라 담배가 쓰구만."
사실 닉스포트에는 폭력 조직이 몇 개나 더 있다. 인구수 대비 조직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 이 도시의 산업 자체가 불법과 합법 사이에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즉, 폭력 조직에 대한 수요가 넘쳐났고 여러 조직이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러니 각 조직은 각자 공을 들여 나이트쉐이드의 혈족을 뒷배로 뒀다.
남작이 구질구질하게 이런 일을 직접 하지 않는 탓에 가장 강력한 뒷배라 하면 역시 우시드라였는데 이번에 좌천돼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닉스 포트 제일의 조직이라 할 수 있는 블랙 체인의 처지가 붕 떠버렸다.
"쯧! 돌아가는 꼴을 보니 우시드라 님의 복귀가 금방이진 않을 것 같단 말이야. 이런 틈에 경쟁 조직 놈들이 우리 나와바리를 잠식해 온다면 곤란한 일이 많을 거다."
걱정되긴 다들 마찬가지인 듯 조직원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간 우시드라를 믿고 타조직에 부린 패악질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를 노리고 보복이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에 애꾸눈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차라리 망나니 손이라도 빌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요즘 망나니 놈의 기세가 동굴 천장을 찌른답니다."
하지만 파주크는 버럭 소리쳤다.
"멍청한! 그걸 대책이라고 내놓는 거냐! 이 외눈박이 새끼."
"하지만…."
"하지만은 뭔 놈의 하지만! 우시드라 님이 그 개자식을 존나게 싫어하는 걸 알고도 그런 말이 나와?"
"음...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간부란 놈이! 쯧! 늦든 빠르든 우시드라 님은 결국 돌아오실 거다. 그때 우리가 망나니와 하하호호, 하고 있으면 참으로 좋아하시겠군! 뭣보다 그 망나니 놈은 믿을 수 없어. 득보다 실이 훨씬 클 거다. 이전에 망한 네 손가락 조직 일은 잊은 거냐?"
과거 오리지널 베니엘이 후계자이던 시절 그에게 선을 대려던 조직이 있었다. '네 손가락'이란 곳이었는데 그들은 빠르게 후회하게 된다.
망나니 놈의 과도한 요구와 패악질이 얼마나 심한지 뒷배를 만들려다 조직의 기둥뿌리가 뽑힐 지경까지 갔던 것이다.
급기야 망나니 놈이 가병까지 끌고 와서 상납이 시원찮다고 매일 협박을 해대자, 결국 조직의 두목은 못 견디고 다른 도시도 도주해 버렸다. 그와 함께 제법 견실한 중견 조직이었던 네 손가락은 산산조각 났다.
"아무튼! 그런 놈이야! 그러니 그놈 얘기는 꺼내지도 마! 뭔가 다른 방책을 생각해 보란 말이다!"
한데 그때 조직원 하나가 밖에서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두목! 두목! 망나니 놈이! 그 망나니 놈이!"
이를 듣은 파주쿠는 성질이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망나니 놈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한 지 몇 초나 지났다고 지랄이야! 어! 이 시불장 새끼들, 오랜만에 기강 한번 잡아? 두목 말이 말 같지 않지?"
"그, 그게 아닙니다! 망나니가, 망나니가 찾아왔습니다!"
"뭐? 뭐라고? 망나니가 직접?"
"네에!"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던 파주크는 곧 알겠다는 듯 음흉한 눈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 자기 고모의 빈자리를 차지하러 왔구나! 욕심이 아주 드글드글하군! 크흐흐흐.'
하면 분명히 이용해 먹을 수 있을 터였다.
'일단 협조하는 척하다가 나중에 우시드라 님이 돌아오면 뒤통수를 쳐야겠네!'
파주크의 영민한 머리는 그날까지의 명확한 로드맵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노련함을 이용해서 용맹하고 사나울 뿐 아직 어수룩할 젊은 도련님을 철저히 이용할 자신이 있었다.
"놈에게 우리 조직이 필요했던 거야. 하긴 정상적인 판단을 할 머리만 있어도 그런 결론에 도달하겠지!"
하지만 그런 그의 꿈은 이어진 외침에 몇 초만에 박살 나고 말았다.
"체인마스터! 그게 아닙니다!"
파주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깟 놈이 뭘 안다고 끼어들어! 엥?"
"아니, 그게 아니라 망나니 놈이 지금 치안대 소속 병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 조직을 공격 중이란 말입니다!"
"뭐라고!"
화들짝 놀란 파주크는 비대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벌떡 일어났다.
와당탕!
그의 몸을 받치고 있던 철제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대체 왜? 지금 뭐라고? 공격이라고!"
황당하기는 주변에 있던 조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틀림없습니다! 지금 입구에서 간신히 막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마스터!"
파주크는 도저히 이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망나니가 돌았나? 갑자기 이게 무슨 무도한 짓이란 말인가?
하나 그는 한 조직의 수장이 될 담력을 가진 자. 놀라서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애꾸눈에서 손짓했다.
"가서 빨리 상황 파악하고 와!"
"알겠습니다!"
애꾸눈은 바람같이 위쪽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뒤에 사색이 된 얼굴로 나타났다.
"정말 공격받고 있습니다! 철문을 부수려고 하는 게, 마치 공성전이라도 벌이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보고를 들은 파주크는 기함했다.
"이런 미친! 놈이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게 있으니까 이런 또라이짓을 하는 거 아냐!"
"저들 말로는 납치된 피해자를 구하러 치안대가 출동한 거라고 합니다."
"나, 납치? 우리가? 누구를?"
그 물음에 애꾸눈을 매달려 있던 주라를 가리켰다.
"오사키아의 여동생을 구하러 왔다고 하며 마구잡이로 밖에 있던 조직원들을 두들겨 패는 중입니다!"
파주크는 즉각 외쳤다.
"바로 돌려보내겠다고 해! 이런 미친! 놈이 신경 쓰지 않을 거라며!"
"그,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자기 호위병 가족 때문에 온 건지."
그 말에는 잡혀 있는 주라도 동감한 듯 눈이 동그래져서 황당한 표정이다. 망나니 놈이 왜 자길 구하러 온단 말인가?
파주크는 어쩌면 그게 단순한 명분에 불과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서 가서 전해!"
"네엣! 알겠습니다!"
애꾸눈은 다시 잽싸게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에 절망적인 표정으로 돌아왔다.
"저쪽에서 조건을 걸고 있습니다!"
"뭐라고?"
"단순히 오사키아의 여동생을 내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럼 대체 뭘 원하는데! 이런, 시팔!"
"저 여자 외에도 조직에 붙들린 선량한 피해자가 여럿 있다는 제보가 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치안대장의 권리로 명령하니 블랙 체인은 전원 무장해제하고 모든 문을 열고 대기하랍니다!"
주변에서 고성이 터졌다.
"말도 안 돼!"
"그랬다가는 모두 죽은 목숨이다!"
"조직은 끝이라고!"
체인마스터인 파주크 역시 공감하는 바였다.
상대는 그 악랄한 망나니. 그런 자 앞에서 무장해제하고 항복한다? 완전히 자기 운명을 악당에게 맡기는 꼴이었다. 줄줄이 교수대에 매달리고 노예로 팔려갈 거다.
파주크는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다 털어먹겠다는 거냐! 안 돼! 절대 그건 불가다! 설령 우시드라 님이 온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다."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일단 막아! 전력으로 막으란 말이다! 그 틈에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겠다! 하수도까진 쉽게 뚫리진 않을 거 아냐!"
맞는 말이었다. 블랙 체인의 본거지는 요새화돼 있었으니까.
본부 건물 자체는 도시에 있지만, 중요한 구역은 아래쪽 하수도 지대에 자리 잡은 상태. 위쪽은 사실 간판만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하수도 구역까지의 길은 마치 던전 같았고, 곳곳이 방어를 위한 시설로 가득했다.
아무리 망나니가 대단한 검객이고 부하들이 사기충천하다고 해도 그 장애물을 쉽게 뚫고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다. 대규모 함정이 수많은 희생을 키울 테니까.
"알겠습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모르겠습니다만,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본부 건물의 철문도 뚫리지 않았습니다. 붙잡힌 체인맨들은 밖에 있던 녀석들뿐입니다."
"좋아!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다! 애꾸눈, 넌 가서 방어전을 지휘해!"
"알겠습니다!"
애꾸눈을 보낸 파주크는 한탄했다.
"세상에!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있나! 아무리 우리가 암흑가 조직이라지만 이렇게 대놓고 공격해? 세상에는 저마다 맞은 역할이 있어서 서로 간에 존중할 필요가 있거늘!"
파주크는 망나니의 과격함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자신이 외적도 아니고, 엄연히 영지민이거늘 이런 폭력사태를 일으키다니! 지금까지 낸 세금이 아까워 토실토실한 볼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우시드라 님! 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마치 빛과 같았던 우시드라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한탄만 하고 있을 순 없는 법. 빠르게 머리를 굴린 그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이럴 때는 다른 권력자에게 줄을 대는 수밖에!"
우시드라가 사라진 지금, 유일하게 망나니에게 대항할 만한 힘을 가진 존재가 하나 있었다.
바로 망나니와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한 의붓누나 아리아나였다.
마침내 파주크는 결단을 내렸다.
"하수도의 비밀 통로를 통해 특사를 파견하겠다! 오늘부터 전격적으로 우시드라를 버리고 아리아나 님의 품에 의탁하겠다고 해! 어서!"
파주크는 방금 전까지 우시드라를 떠올린 주제에 몇 초만에 라인을 갈아타기로 결정한 것이다.
97화
체인 마스터 (5)
***
닉스포트 아래에 펼쳐진 복잡한 하수도 지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자들은 범죄 조직뿐이었다.
왜냐하면 하수도는 밀수와 시체 처리, 불법 약물 제조 등 남의 이목을 피해 돈 되는 일을 하기 딱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수도는 도시 곳곳으로 연결됐는데 그중에는 당연히 남작성도 있었다. 블랙 체인에서 파견한 특사는 그 통로를 통해 발에 불이 나도록 달려서 성에 도착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아가씨와의 접견을 주선해 주십시오!"
특사는 평소 많은 뇌물을 먹인 남작성의 한 인물을 설득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받아먹은 게 많음에도 난색을 표했다.
"아니, 그 귀하신 분을 너희 같은 천것이 왜 만나려는 것이냐?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고 꺼져라."
"워낙 사정이 다급해서 그럽니다! 지금 본부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음? 무슨 소리지? 다른 조직에서 친 건가? 블랙 체인이 그리 만만한 조직이 아닐 터인데?"
의문을 표하던 남작성의 인물은 곧 황당한 소리를 전해 들었다.
"베니엘 도련님께서 치안대를 이끌고 와 문을 박살 내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모두 끌려가 교수대에 매달리게 생겼습니다!"
"아니, 뭐라고!"
"저희가 망하면 상납은 누가 합니까? 제발 자리를 주선해 주십시오!"
특사는 노련한 자였기에 단순히 부탁하는 거로 그치지 않았다. 공손한 협박이 이어졌다.
"본부의 비밀 금고에는 그간의 상납금을 기록한 장부가 여러 개 있습니다. 도련님이 그걸 얻게 된다면 서로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이놈…!"
남작성의 인물은 이를 갈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모든 인맥과 능력을 동원해 간신히 아리아나와의 짧은 접견을 허락받았다.
"길게 만나진 못할 거다. 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 그리고 내 분명히 경고하건만 절대 아가씨의 심기를 거슬리는 발언을 하지 말도록."
"네, 네! 이를 말입니까!"
특사는 겨우겨우 아리아나와 만나게 됐다. 그녀는 성의 후원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짧은 휴식을 즐기고 있던 것이다.
아리아나를 대면하면 어떤 말을 할지 열심히 준비해 온 특사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외모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맙소사… 신들이 이곳을 떠났다는 얘기는 거짓이로구나. 저기 여신이 앉아 있으니.'
아마 옆에서 만남을 주선한 이가 신경질적으로 팔을 밀지 않았다면 특사는 그 아름다움에 홀린 채 언제까지나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특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만남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존귀한 혈통에 인사드립니다."
그는 얼른 아리아나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곧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짧게 용건만 말하도록."
참으로 얼음처럼 냉랭한 태도였다.
소문에 의하면 아리아나는 그 성적이 지극히 차갑다고 하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실 그녀가 베니엘에게만 보여주는 감정적인 모습은 다른 이들은 거의 알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이전에 그녀가 버섯 농장에서 베니엘과 욕을 하며 다투던 모습에 다들 기겁한 건 그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아리아나는 불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고결한 성품을 가졌기에 범죄자 따위와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 그녀 역시 도시의 생리와 세상의 이치를 안다. 이들도 제 역할이 있기에 완전히 무시할 순 없어 짧은 시간을 낸 것이다.
뭣보다 지금 곁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는 독안룡 카바세호가 몹시 좋은 기회니 만나보라고 청했던 게 컸다.
"알겠습니다. 현재 저희 지부를 치안대장 베니엘님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불필요한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이대로라면 저희가 다 죽게 생겼으니 부디 넓으신 아량을 중재해 주신다면 이 비천한 자들이 그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 간곡한 읍소에도 불구하고 아리아나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치안대장이 치안을 관리하는 게 무슨 문제란 것이냐? 본인은 이해하기 어렵군. 네놈들에게 죄가 있다면 달게 받거라."
그 단호한 말투가 과연 소문대로였다. 특사는 탄식했다.
'저리 아름답게 생겨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얘기가 사실이구나! 이건 숫제 그냥 다 죽으란 소리잖나!'
옆에서 듣고 있던 독안룡 카바세호가 결국 나섰다.
"동굴 속에서도, 땅 밑에도 그림자는 지는 법입니다. 모두 남작님의 영민이니 아가씨께서도 보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런 범죄자 무리도 말인가?"
"그게 현실입니다. 특히 가문의 사업이 노예 매매인 이상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은 형해화 됐다지만, 그런 일은 제국법상 엄연히 불법입니다. 그러니 일 처리에 있어서 천박한 무리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여럿입니다."
그 말에 아리아나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종으로 부리는 거다. 그대는 말을 똑바로 하도록."
독안룡 카바세호는 바로 사과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아가씨."
그렇지만 간언을 멈추지 않았다.
"현재 도련님의 기세가 너무나 강성합니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모든 걸 집어삼키려 하고 있지요. 저들마저 장악한다면 이후의 후계자 경쟁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
아리아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다소곳이 앉아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자신이 나서면 이번 일의 방향이 다르게 흘러가리라.
우시드라가 남긴 걸 나눠 먹고는 베니엘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그 녀석이 하고 싶은 대로 둬야겠어.'
왜냐하면 갚지 못한 빚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 서열 7위 검객인 뱀파이어 발토리스와의 싸움에서 아리아나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때 자기 팔이 베이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를 감싸준 게 베니엘이다.
그 보답을 하고 싶었다.
"나는 관여하지 않는다. 물러가도록."
특사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화들짝 놀라 자신이 가져온 최대의 조건을 제시했다.
"저희 조직이 온전히 아가씨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상납금 역시 우시드라 님에게 바치던 것의 두 배를 약조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가차 없었다.
"더 듣지 않겠다. 이 자를 치워라."
"아, 아가씨! 제발!"
조직의 명운을 짊어진 특사는 가병들에게 끌려가면서 애타게 외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아리아나는 그들을 선택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
베니엘 역시 얼마 뒤에 이 소식을 듣게 됐다.
"뭐? 누나가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찌익!"
이미 성 여기저기 연줄과 첩보원을 심어둔 퀵포우가 앞발을 비비며 와서 소식을 전했다.
베니엘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좋다! 이제 꺼릴 게 없다! 당장 진입해서 블랙 체인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
사실 블랙 체인의 본부를 제대로 점거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입구의 철문이야 베니엘의 솜씨면 두부처럼 갈라버릴 수 있으니까.
일단은 소란을 피우며 이번 일에 대한 유력자들의 반응을 살피려 한 것이다.
그렇게 간을 보니 남작은 침묵했다. 그는 베니엘이 조직을 먹어치우려는 걸 알고도 묵인했다. 아마 원래부터 전달받던 상납금에만 차질이 없으면 그러려니 할 것이다.
남작 외에 문제가 될 인물이 바로 아리아나인데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제 베니엘을 막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비켜라! 문을 자르겠다!"
베니엘의 펜테즈멀 블레이드가 작렬하자 블랙 체인의 본부를 막고 있던 거대한 철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안에서 안간힘을 쓰던 체인맨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치안대는 고성과 함께 돌격했다.
"우아아아아! 반항하는 놈들은 모두 죽여라!"
"무기 버려! 이 범죄자 새끼들아!"
"치안대다! 대가리 박아!"
확실히 싸움은 기세다. 밀고 밀리던 상황에서 한쪽이 무너지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악랄하던 체인맨들은 겁에 질려 이리 튀고, 저리 튀고 도망가느라 바빴다.
한데 베니엘은 진입 작전을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쿠르신에게 일 처리를 맡겼다.
"나는 따로 가볼 곳이 있어서 그러니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충직한 쿠르신은 어딜 가는지 묻지도 않고 끄덕였다. 베니엘은 슬그머니 빠져나와 어디론가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몹시 가벼웠다.
'아리아나. 이 귀여운 녀석.'
이번 결정으로 베니엘은 아리아나가 자신의 기대보다 훨씬 호감도가 높다는 걸 알게 됐다.
보통의 경우 그를 경쟁자로 여기기 때문에 어떻게든 끼어들어 방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호감도가 낮으면 아리아나와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다.
한데 모른 척하고는 베니엘이 맘대로 날뛰게 해준다?
'생각보다 훨씬 우호적인 모양이군.'
아무래도 조만간 아리아나를 만나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멀리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없던 건 아니다.
한데 어째서인지 아리아나가 전과 다르게 쭈뼛거리면서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사라져 버리곤 했던 것이다. 베니엘은 반갑게 손부터 흔들었지만 무시당했고, 대화의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아무래도 다음에는 아예 도망가지 못하게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 마주해야겠다 싶었다.
'기왕이면 사람 없는 둘만의 장소가 좋겠지?'
아무래도 가문의 앞날에 관한 밀담을 나누려면 그럴 필요가 있으니까. 물론 이런 결정을 아리아나는 좀 다르게 받아들일 터였다.
***
체인마스터 파주크는 아리아나의 거절에 좌절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버려져야 한단 말이냐! 그간 이 빌어먹을 영지를 위해 세운 공이 얼마인데!"
곧이어 본부의 대문이 뚫렸다는 소리에 파주크는 기겁했다. 그 악랄한 망나니가 금세 여기까지 밀고 내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로는 부하들을 의식해 굳건한 태도만을 보였다.
"안심하라! 이 하수도는 안전하다! 나는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치는 파주크의 말에 체인맨들이 포효로 답했다.
"지키자! 우리의 터전!"
"생업이 달려 있다!"
"물러나지 마라! 마스터가 곁에 있다!"
그 모습에 파주크는 역시나 이용하기 쉬운 놈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는 내뺄 생각만이 가득했다.
'아쉽지만 블랙 체인은 여기까지인 모양이군.'
그래도 그간 챙겨둔 돈이 상당히 많다. 파주크가 마련한 비자금만 해도 무려 11만 두크에 이를 정도로 거금. 그 정도면 새로운 도시로 가서 무언가 해보기 충분했다.
파주크는 눈치를 보며 비대한 몸을 꼬물꼬물 움직였다. 부하들이 방어 준비에 부산한 사이 슬쩍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어서 움직여라! 일치단결만이 살길이다!"
그렇게 외친 그는 결국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는 귀중품을 열심히 챙기기 시작했다.
와르르르!
금고가 쓰러지고 수금해둔 금화나 보석이 바닥에 쏟아졌지만 파주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제일 중요한 건 제국은행의 예금 증서였다.
감춰둔 그걸 찾아서 마법 지퍼에 집어넣은 파주크는 집무실의 비밀 문을 가동시켰다.
드르르륵!
육중한 책상이 밀려나고 아래로 향하는 통로가 나타났다.
전대 체인마스터들이 긴급한 탈출을 위해 예비해둔 시설이다.
물론 그 어떤 체인마스터도 조직이 풍전등화일 때 혼자 내빼진 않았으나 파주크는 남다른 생존 본능을 갖고 있었다.
"미안하다! 모두 욕봐라!"
그 말만 남긴 파주크는 책상 아래 비밀 통로로 뚱뚱한 몸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자 다시 책상이 원래 위치로 이동해 흔적을 가려줬다.
"헉! 허억! 헉!"
파주크는 뚱뚱했기 때문에 비밀 통로의 계단을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빴다. 하지만 그는 마음이 조급했기에 헐떡이며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계단이 끝나고 하수도와 연결된 탈출로에 도착했다. 이대로 빠져나가면 닉스포트 밖으로 향할 수 있다. 그제야 파주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후우…! 이런, 시불장! 사는 게 힘들구만."
한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 혼잣말에 대답이 들려왔다.
"힘들면 죽어야지. 응?"
놀란 파주크가 펄쩍 뛰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크악! 누, 누구!"
그곳에는 익히 아는 인물이 있었다. 혼자 휘파람을 불면서 손톱을 손질하고 있는 다크 엘프, 바로 베니엘이었다.
"왜 이제 왔나? 늦었잖나. 체인마스터. 혼자 애타게 기다렸는데 말이야. 크흐흐."
파주크는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베니엘은 검을 뽑아 들며 답했다.
"다 아는 수가 있지."
무언가 번쩍였고, 그게 파주크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98화
물돼지 원정 (1)
***
하루만에 닉스포트 제일의 범죄 조직인 블랙 체인이 풍비박산이 났다.
체인맨들은 줄줄이 엮여서 끌려나왔고, 조직의 재산은 압류됐다. 베니엘은 간부진과 반항적인 자들 위주로 즉결 처분에 들어갔다.
"중앙 광장에 교수대를 여러 개 설치해. 다 매달 테니까."
"알겠습니다!"
치안대는 완전히 신이 난 상태. 베니엘이 블랙 체인을 털어 얻은 물자와 재산의 일부를 시원하게 뿌렸기 때문이다.
'어차피 난 파주크의 예금 증서로 한탕했으니 괜찮다.'
더 좋은 건 그가 11만 두크나 날름 먹어치운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 모든 사태를 주시하고 있을 남작도 모른다.
그가 비록 도시 전체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자라지만, 베니엘이 파주크를 쫓아가 벤 것만 알지 그가 체인마스터의 마법 지퍼를 슬쩍 챙긴 것까지 파악하진 못하는 것이다. 마력에 의한 감지 능력에는 디테일적인 부분에서 한계가 명확했다.
"그건 따로 관리해! 남작님께 갈 공물이다!"
베니엘은 획득한 물자 중 특별히 값진 건 상납용으로 따로 챙겼다. 남작이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먹여야 이번 일은 탈이 없을 터. 더불어 매달 올라가는 용돈도 차질 없을 거란 점을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널 부른 거다. 실라."
베니엘의 경고 설명에, 졸첸에서 조직을 운영하다 갑자기 끌려온 실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됐다.
"아니, 갑자기 블랙 체인을 맡으라니요?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왜? 못 하겠어? 못 하면 다른 녀석한테 주고."
"아니, 못 하겠다는 건 아닌데 갑자기 너무하잖아요!"
베니엘은 그녀가 제국 정보부에서 이것보다 훨씬 거대한 조직을 능수능란하게 운용한 걸 알고 있다.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 앓는 소리를 하는 거다.
"대신 충분히 투자해 줄 테니까 걱정 마."
투자란 말에 튀어나왔던 실라의 입이 좀 들어갔다. 사실 이건 그녀에게 도약을 위한 중요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실라는 생각했다.
'자금만 충분하다면 해볼 만해. 인재는… 제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황녀님의 사람들을 불러들여야겠어.'
베니엘은 실라에게 5만 두크의 거금을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조직을 재구축하고 정기적인 상납을 받기 위해서다. 나름대로 건설적인 투자라 하겠다. 귀찮게 직접 관리하는 것보다 실라를 통해서 이득만 뽑아내는 게 낫단 판단이었다.
"조직원 중에 써먹을 수 있는 녀석의 명단을 알려줘. 벌금을 물리고 방면하는 식으로 해줄 테니."
"벌금이요? 낼 돈이 있을까요?"
"그걸 투자금을 빌려줘서 처리하란 말이야. 그렇게 빚을 지게 만든 뒤에 조직원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어."
실라는 그 악랄한 사고에 기가 막혀했다.
"하아! 그런 식으로 투자금을 바로 회수한다고요?"
베니엘은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일이 원래 다 그렇게 돌아가는 법이지. 너도 채무자가 잔뜩 생기니까 좋잖아?"
"아, 예....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렇게 베니엘은 실라를 내세워 닉스포트의 최대 범죄 조직을 꿀꺽 집어 삼켜버렸다.
좌천된 우시드라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피눈물을 흘릴 만한 얘기였다.
***
베니엘은 일 처리가 끝난 후 바로 오사키아의 여동생을 만나봤다.
"네가 주라인가?"
"안녕하세요. 도련님."
생각보다 예의 바르게 인사해 오는 그녀는 베니엘이 보기에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베니엘 같은 서부 다크 엘프와 다른 외형을 가진 동부의 다크 엘프였기 때문이다.
서부 다크 엘프는 베니엘처럼 갈색 피부를 하고 있다.
반면 동부의 다크 엘프는 회색, 회청색, 옅은 푸른색의 피부다. 또한 귀가 좀 더 긴 게 특징이다.
오사키아의 여동생인 주라는 그런 동부의 다크 엘프였다. 피부는 옅은 회청색에 귀는 확실히 더 길었다. 그리고 눈은 보라색으로 마치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생김새가 다르군?"
"네, 전 입양됐거든요."
사실 말이 입양이지 집안에서 반쯤 노비로 쓰려고 데려온 것이라 했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꽤나 많았다.
당연히 어릴 때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에 형제들에게 심한 차별을 당했다고. 특히 주라는 미모가 빼어났기에 자매들의 텃세가 심했단다.
"그런 저를 지켜주고 품어준 게 오사키아 오빠예요."
"과묵하기만 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마음이 따뜻한 친구였군."
"원래 오빠 성격이 그래요."
"이번 일로 상심이 크겠군. 아무래도 날 원망하겠지?"
베니엘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오리지널이었다면 절대로 품지 않을 감정이었다.
한데 의외로 주라는 감정이 나쁘지 않은 듯했다.
"어느 정도는 그렇죠. 하지만 도련님 생각보다는 아닐걸요?"
"그래?"
"오빠가 마지막에 도련님 칭찬을 많이 했어요. 게다가 명예롭게 죽었으니 전사로서 홍복이죠."
"아, 그런가...."
"게다가 장례도 호화롭게 치르게 도와주시고 직접 오셨다면서요? 정말 소문대로 개과천선하고 달라진 모양이네요?"
베니엘이 뭔가 먹먹한 기분에 답하지 못하자 주라가 작게 혼잣말을 했다.
"정말인가 보네. 오빠가 헛소리 하는 줄 알았는데."
곧 그녀가 물어왔다.
"오빠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도련님이 보시기에…."
주라는 평가를 바라고 있었다. 아마 좋은 평가를 받고 오빠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여기고 싶은 듯했다.
의연한 겉모습과 다르게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기색이 물씬 풍겨왔다. 베니엘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 친교라고 할 게 별로 없긴 하지….'
술자리 한 번 가진 게 전부다. 순찰 간에 잠깐 대화를 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친해지기도 전에 가버렸다.
그래도 베니엘은 한 가지는 확실히 평가할 수 있었다.
"그는 나보다 큰 용기를 가진 전사였다."
"아...!"
생각지도 못한 답인 듯 주라는 눈이 커져서 입을 살짝 벌렸다.
이건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도망치는 걸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게 베니엘이다. 죽으면 끝이라 믿는 터라 수가 틀리면 달아나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오사키아는 물러나지 않고 싸웠다. 그걸 생각하며 베니엘은 다시 말했다.
"그래, 나보다 용맹한 전사였다. 앞으로 내가 두려움에 빠질 때가 오면… 그가 보여줬던 용기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과 용기는 베니엘에게 일종의 화두로 남았으니까. 그런 터무니없는 강적을 상대로 어떻게 물러나지 않는 건지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만약 그 부분에 대해 알 수 있다면 다음 단계로 가는 길이 열릴 것만 같았다.
진심이 담긴 그 말에 주라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에 살짝 물기가 어려 있었다. 지금 베니엘의 말이 가식이나 의례적인 칭찬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참 그렇게 있던 주라가 입을 열었다.
"제 소중한 오빠에 대해…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도련님."
다크 엘프치고는 참으로 드문 우애라 할 수 있었다.
주라는 마법 지퍼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잘 만들어진 마법검이었다.
"이건... 체인마스터의 금고에서 훔친 마법검이에요."
"그걸 가지려고 사달은 일으켰던 건가?"
"죄송해요. 오빠의 관에 꼭 넣어주고 싶었거든요."
듣자니 오사키아는 늘 소박한 무구만 갖고 있었다고 한다. 벌이가 애매한 데다가 가족이 많아서 지출이 컸단다. 그래도 전사인지라 좋은 칼을 갖고 싶어했다고.
"오빠는 아니라고 했지만 저는 보면 알 수 있었어요."
"그런가?"
"이 검의 이름은 게일 커터랍니다. 3등급 마법검이지요. 이번에 절 구해주시고, 오빠를 잘 대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도련님께 드리고 싶어요."
주라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잘 만들어진 마법검을 내밀었다. 베니엘은 책상에서 일어나 말없이 마법검을 받았다.
"고맙군."
"아… 감사합니다. 선뜻 받아주셔서."
물론 베니엘은 이게 필요해서 받은 건 아니다. 3등급 마법검도 충분히 좋은 물건이나 그에겐 5등급 마법검 프로스트바이트가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받은 건 이유가 있었다.
"가병보다 마자드처럼 되고 싶다고 했나?"
그 말에 주라는 당혹해서 눈이 커져서는 뭔가 민망한 표정이 됐다.
"그걸 어디서? 아! 네그라크 오라버니가 얘기했나 보죠? 아하하… 부끄럽군요. 사실 가병은 별로 취향이 아니에요."
"그래?"
"답답해 보여요. 전 세계를 모험하고 싶거든요."
그 말에 베니엘은 제안했다.
"날 따라오지 않겠나? 모험을 하게 해주지. 지난 원정에서 마자드의 보물을 찾은 게 바로 나다."
베니엘에겐 전문적인 도둑이 하나 필요했다.
홉고블린 삼 형제는 본인들이 자랑하는 것에 비해 그 솜씨가 투박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전사이며 병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무언가를 가져나올 때 꼭 불을 질러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들이었다.
깔끔하고 조용한 일 처리와는 거리가 한참 먼 것이다.
'이것도 인연이겠지. 솜씨가 기대에 못 미치면 다른 일을 주면 그만이고.'
주라는 베니엘의 제안에 당혹해 하면서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저, 정말인가요? 도련님이 큰돈을 번 이유가 사실 대도 마자드의 보물을 찾은 거라고요?"
"그래, 맞다. 정확히는 마자드의 보물 창고 중 하나를 찾았을 뿐이야. 세상에는 그 양반이 남긴 보물 창고가 더 있어."
"세상에…! 그런 꿈 같은!"
"간단한 일은 아니야. 위험한 함정을 돌파하고 오래된 유적을 탐사해야 하니까. 같이 하겠나?"
주라는 들뜬 소녀처럼 방방 뛰어댔다.
"바라마지 않는 일이에요! 하지만 저 같은 도둑년을 정말로 데려가 주실 건가요?"
아무래도 자기 직업이 상당히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래서 베니엘은 지구에서 배워온 논리로 그 양심의 가책을 조금 덜어주기로 했다.
"도둑질이라 생각할 것 없다. 그저 잠시 물건의 위치를 이동시키는 것뿐이야."
"네...?"
이 기괴한 논리에 주라는 놀라고 경악했다. 그리고 깨달았다는 듯 감탄을 터뜨렸다.
"맙소사! 오빠가 도련님을 가리켜 닉스포트… 아니, 제국 서부에서 제일가는 철면피라 했는데 이제 알 것 같네요."
"윽...!"
오사키아 이 거지 같은 새끼가. 자기는 좋은 말만 해줬는데, 여동생에게 그딴 소리를 하다니.
불평이 나올 뻔했으나 지금 한껏 품을 잡는 중이라 어쩔 수 없었다. 베니엘은 받은 마법검 게일 커터를 도로 내밀었다.
"오사키아의 동생 주라. 이 검을 내리겠다. 이제부터 내게 충성하겠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주라는 크게 기뻐하며 거의 베니엘에 안기듯 다가와 웃으며 검을 받았다.
"기꺼이요!"
하지만 이후 그녀는 베니엘의 꿀밤을 얻어 맞았다.
"이놈."
"아악!"
세게 때렸기 때문에 주라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니엘은 손을 내밀었다.
"방금 털어간 내 주머니부터 내놓도록. 아직은 좀 솜씨가 어설프군."
"헤헤… 어떻게 아셨대?"
주라는 다소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베니엘에게 합류했다.
***
남작은 약속을 지켰다. 베니엘을 자신의 수련장으로 부르더니 S등급 검법 이클립스 녹턴의 전반부를 알려준 것이다.
그는 검법의 전술적 원칙이 담긴 요결을 알려줬다.
"이것을 익히면 비록 검의 아버지의 법과 같진 않을지라도 다른 기예를 익힌 자들은 세 번이나 물러날 것이다. 이는 아무리 재주를 익힌 자가 도전해 오더라도 결국 성긴 기예를 가진 자는 이 검법의 긴밀함에 패할 수밖에 없단 말이다."
"그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남작님."
베니엘은 열심히 이클립스 녹턴을 익혔다. 비록 베니엘이 자신의 재주를 최대한 감추려 했으나 결국 낭중지추인 법이다. 그의 빛나는 재능은 가린다고 다 가려지는 게 아니었다.
"빼어나군!"
베니엘이 이클립스 녹턴을 익히는 걸 보던 남작은 감탄을 하면서도 끈적끈적한 질시가 가득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저 재능이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아들은 자신에게 한참 못 미쳤다.
"여기까지 하겠다. 다시 원정을 떠난다고 했더냐?"
"네, 남작님."
"부디 성공하길 바라마."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뒤 가문 내 검객 서열이 갱신됐다. 12위였던 베니엘은 이제 7위로 올라섰다.
99화
물돼지 원정 (2)
사실 베니엘의 실질적인 전투력은 더 강할 테지만, 일단은 7위에 만족해야 했다.
5위인 조르카를 이길 때 여럿이서 상대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젊어서 커리어가 부족하기도 했고. 그래서 기존 발토리스의 자리인 서열 7위를 받게 된 것이다.
베니엘은 포상으로 조르카의 마법검인 회오리바람을 받았다. 일전에 격전으로 일부 파손이 있었으나 현재는 완전히 수리된 상태였다.
이것은 강력한 투핸디드 소드로, 본래 가지고 있던 프로스트바이트와는 체급 자체가 다른 칼이었다.
싸움에는 이런 큰 연장이 필요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베니엘은 기뻐했다.
마침 이런 큰 칼을 써서 썰어버릴 짐승을 찾아갈 생각이기 때문이다.
***
원정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 중이었다.
베니엘의 요청에 이전에 폐허 도시로 그를 태워줬던 선장이 함선을 이끌고 다시 왔다.
"위험한 일인데 맡아줘서 고맙군. 선장."
"선비는 몇 배나 주시는데 해야지요. 놀면 뭐합니까?"
베니엘 휘하의 용병들도 준비에 들어갔다. 총 9명인 그들은 나름대로 인연이 긴 편이다. 최초에 버섯 농장부터 이후 폐허 도시, 용암강 너머의 오크 부락 공격까지 함께한 것이다.
나름대로 상당한 베테랑들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 원정에서 무기보다 작업 공구를 더 열심히 챙기고 있었다.
"이번에도 전투보단 작업이겠지?"
"뻔하지. 지난번 폐허 도시처럼 존나게 파겠지. 삽이나 넉넉하게 챙기자고."
"아이구, 우리가 이거 용병인지 작업꾼인지 모르겠구만."
"시끄러. 돈만 잘 벌면 그만이지."
이들은 이미 현실을 받아들인 상태. 언젠가부터 자기들끼리 일종의 노가다 크루를 만들어서 몰려다녔다.
어째 갈수록 전투보다는 야전 공병 역할을 떠맡는 듯한 모양새다.
실제로 '할크'라 불리는 자가 통솔했는데, 크루 내에서 작업반장 할크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는 탁월한 작업력을 갖고 있어 베니엘의 눈에도 띈 자였다. 역시 어디서든 공구리 치는 솜씨가 뛰어나면 지휘관을 흡족하게 하는 법인 듯했다.
"물자와 공구 준비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작업반장 할크의 보고에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인 후 호위대장 쿠르신을 보러 갔다. 그는 현재 매우 아쉬워하고 있었다.
"도련님, 아무래도 제가 도련님을 수행하는 게...."
왜냐하면 베니엘이 그를 제1치안관에 임명했기 때문이다. 제1치안관은 치안관 중 최선임으로 치안대장 부재시 치안대를 이끄는 자리였다.
베니엘은 치안대의 관리를 그에게 일임한 것이다.
"치안대를 통제하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다. 쿠르신. 특히 우시드라의 파벌을 잘 견제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사실 베니엘은 우시드라의 파벌을 다 숙청하고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남작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우시드라의 파벌을 남겨둬서 베니엘을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를 알아챈 베니엘은 일단 숙청은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기다리다 보면 결국 모두 쳐낼 수 있는 때가 올 테니 말이다.
"경호는 걱정 말라니까. 드랄두가 같이 갈 거니까."
기계 언데드 드랄두는 리리나가 공을 쏟더니 드디어 부활했다. 그는 베니엘 휘하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인지라 이번 임무에 대동할 생각이었다.
쿠르신 외에도 빠지는 자가 여럿이었다.
다크 엘프 호위병들은 모두 쿠르신을 보좌해 치안대 임무를 하게 했다.
거기에 더해 홉고블린 삼 형제를 제2치안관에 임명했다.
직책 하나를 셋이 맡았으니 일종의 삼두정치다. 원래 셋이서 하나인 놈들이니 당연한 조치였다. 그들은 이 승진에 기뻐했다.
"도련님! 케르륵! 앞으로 뼈마디가 닳도록 충성하겠습니다!"
"노예이자 강도였던 저희가 이리 번듯한 직책을! 케케켁!"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어딘가 불을 지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도련님이 부르면 자다가도 뛰쳐나올 테니! 케륵! 케르르!"
놈들은 퍽이나 감격한 듯했다. 그들은 제1치안관인 쿠르신을 보좌하며, 주로 고블린이나 오크, 버그베어 같은 대원들의 관리를 맡을 예정이었다.
그 외에 퀴아도 도시에 남게 됐다.
"아, 제발! 저 좀 데려가세요! 꺄악―! 도움!"
그녀는 자기 상관인 실라에게 붙잡혀서 블랙 체인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중이다. 제발 자기 좀 도망가게 해달라고 매달려 왔으나 베니엘은 냉정하게 실라에게 돌려주고 왔다.
그러다 보니 우시드라의 둘째 남편인 엘렉카에도 퀴아를 따라가게 됐다. 그는 현재 우시드라와 별거 상태였고 이참에 닉스포트의 암흑가에 뿌리를 내리려는 듯했다. 어차피 폭로 사건 이후 갈 곳도 없었으니까.
다음으로, 행보관 퀵포우는 그융크 병영 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남았다. 원래 전투에는 도움이 안 되는 내정용 인재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공정은 어찌되고 있나?"
"팔 할은 완료했습니다! 이제 곧입니다! 주인님. 찍찍!"
"좋아. 차질없이 계속 진행해."
이런 이유로 원정대는 기계 언데드 드랄두, 지상인인 올리비에와 그의 사냥개 로라. 대도가 되길 꿈꾸는 주라, 그리고 노가다 크루 아홉 명으로 구성됐다.
이 인원을 본 배의 선장은 솔직한 평을 내놨다.
"뭐… 그다지 드래곤을 잡으러 갈 일행으로 보이진 않는군요. 물론 도련님과 저 살벌해 보이는 언데드 검객은 다릅니다만."
기계 언데드 드랄두가 더 강해져서 복귀했다. 그는 더욱 철갑을 덧대 방어력이 업그레이드 됐는데, 그 위용이 대단했다. 드랄두만 지나가면 다들 옆으로 피해갈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한다."
베니엘은 부정하지 않았다. 기실 드랄두와 자신만 빼면 전투력이라고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짐승을 잡는 건 힘보다 지혜가 필요한 일이다. 계책은 있다."
"역시 도련님이시군요. 그리 말씀하시다니 알겠습니다."
의외로 선장은 선선히 끄덕였다. 원래라면 불신했으나 지난번 폐허 도시에서 베니엘의 농단을 생생히 본 탓이다.
선장은 분명 뭔가 생각이 있으니 저 정도 인원으로 마그라스를 잡겠다고 나서는 거라 여겼다. 자신은 배나 잘 운항하며 큰돈 벌면 그만이었다. 계약 조건에 따르면 배를 이용해 마그라스와 전투를 벌이는 내용도 없었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자 드디어 출항일이 됐다.
"모두 가자!"
베니엘의 외침에 일행이 줄줄이 승선했다.
항구에서 이 모습을 구경나온 주민들은 환호성을 터뜨려댔다.
"와아아아아! 도련님 만세!"
"원정의 성공을! 만세!"
솔직히 다들 저 도련님이 뭘 하러 가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번에도 뭔가 재밌고 떠들썩한 소식과 함께 돌아오리라 여기고 있었다.
배에 오른 베니엘이 손을 들어 보이자 환호성이 크게 터졌다.
"우어워어어! 도련님!"
"도련님! 만세! 도련님!"
어느새 그는 손가락질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 자가 돼 있었다.
"어디로 모실깝쇼? 그놈의 물돼지는 대체 어디 숨어 있는 겁니까?"
선장의 물음에 베니엘은 짧게 답했다.
"일단 드라카니아로 간다."
드라카니아라 하면 제국 서부에서 제일 번영한 도시이자, 드란실 공작령의 수도였다.
***
섀도우 위자드의 쏜은 지난 폐허 도시에서의 패배 이후 이를 갈고 있었다.
어떻게든 사무치는 원한을 갚을 복수의 때만을 기다려 왔다.
'내게 이런 패배를 안겨준 자는 그가 처음입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요.'
쏜은 당시 스승인 벡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본인은 모르지만 그는 쏜이란 실험체의 스물일곱 번째 개체에 불과했다. 즉, 27호기란 소리다.
물론 벡스의 통제가 있는 한 쏜이 그런 진실에 다가설 확률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날 이후 쏜은 조직의 인원을 써서 나이트쉐이드 남작령을 감시했다. 언젠가 베니엘이 남작령을 벗어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놈이 남작령 안에 있을 때 공격은 어렵겠지요.'
하려면 할 수야 있다. 그 뒤에 수습이 문제라서 그렇지.
범죄 조직인 섀도우 위자드가 남작령에서 맘대로 행패를 부린 사실이 들켰다가는, 그 하이 마스터인 괴물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된다.
가뜩이나 지난번 발굴 실패 이후 몸을 사리는 쏜인데, 하이 마스터를 적으로 하나 늘린다? 조직 내에서 지탄이 뒤따르고, 그의 입지는 좁아질 터였다.
'언젠가 스승님의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서 그런 실수가 있어선 안 될 일이지요.'
그래서 쏜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어차피 다크 엘프는 오래 살고, 그 역시 마법의 힘으로 세월을 반쯤 빗겨나간 존재였다.
기다리면 결국 때가 오는 법.
한데 그 기회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뭐하고요? 베니엘이 원정을 준비 중이라 했습니까? 후후후."
세작의 보고에 쏜은 대놓고 기뻐했다.
"드디어 때가 왔군요. 감히 우리 섀도우 위자드를 능멸한 작자에게 본때를 보여야겠어요."
들뜬 쏜을 보며 그의 부관인 토니아는 불안함을 느꼈다. 뭔가 이번 일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일단 말려봤다.
"좀 더 시기를 기다려 보심이 어떠세요? 놈은 지금 완전히 기세를 탔던데."
하지만 쏜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거절했다.
"허튼 소리 마시고, 습격할 준비나 하세요!"
이전보다 훨씬 차가운 태도에 토니아는 움찔했다. 그리고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리 봐도 맞긴 한데… 정말 내가 알던 그 쏜 님이 확실한 걸까?'
분명 그녀는 당시 쏜이 죽는 걸 지켜봤다. 물론 벡스의 마법이면 순간 이동도 가능하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그보다 큰 건 위화감이었다.
그녀는 늘 틱틱거리지만 쏜을 좋아했다. 그렇기에 남들이 모르는 부분까지 관찰할 수 있었다.
한데 지금의 쏜은 그녀가 알던 것과 묘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 같지도 않고… 왜 변한 거지?'
토니아는 혼란스러웠다.
사실 이런 문제는 벡스가 쏜이라는 실험체를 계속 업데이트하고, 매번 의사 결정에 관한 튜닝이 약간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각 실험체가 쌓은 새로운 경험을 바탕으로 벡스의 입맛에 맞는 가장 효율적인 수족을 만들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이전에 쏜은 다소 능글맞고, 여유가 있었다. 하나 지금의 쏜은 훨씬 단호하고 냉정한 성미였다.
"알겠습니다. 준비하지요."
결국 토니아의 쏜에게 조아렸다. 그리고 바로 베니엘을 습격하기 위한 무리가 꾸려졌다.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들과 그들이 부리는 용병 무리까지 해서 거의 백여 명이나 동원됐다. 베니엘의 일행에 비해 압도적인 전투력이었다.
여기에 더해 쏜은 주도면밀한 계획까지 세웠다. 전력이 훨씬 막강함에도 정면 승부 대신 함정을 파 그야말로 처절할 정도로 분쇄하기 위해서였다.
쏜은 에본플로우 호수의 지도를 펼치며 섬 하나를 가리켰다.
"놈이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행 방향을 보면 십중팔구 일단 드라카니아로 가려는 게 틀림없지요."
쏜을 따르는 간부진은 모두 동의했다. 누가 봐도 뻔한 루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법 등대가 있는 이 무인도가 중요합니다. 드라카니아로 가는 배는 모두 이 옆을 지나가니까요."
쏜의 계획은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것이었다.
무인도에 잠복하고 있다가 베니엘이 탄 배가 지나가면 고위 마법을 난사해 침몰시킨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배가 크다고 해도 쏜을 비롯해 수준 높은 마법사들이 여럿 모였기에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일차 공격 후에 그 간악한 놈이 그대로 죽으면 최선이지요. 하지만 살아남는다면 어떻게든 꾸역꾸역 헤엄쳐서 이 무인도로 올 것이에요. 아마 그때쯤 기진맥진한 상태겠지요. 후후후."
쏜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낮은 웃음을 흘렸다.
"체력은 중요하지요. 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다를 건 없답니다. 지쳐서 뭍으로 올라왔을 때 일거에 공격하면 그야말로 간단한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애초에 쏜은 베니엘보다 강하다. 게다가 이번에는 상처도 회복하고 장비도 보충했다.
질 수가 없는 싸움이다 싶었다.
하나 그걸로 부족해서 쏜은 완벽한 복수를 위해 무인도에 함정까지 설치할 작정이었다. 그야말로 실패할 여지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모두 움직입시다."
쏜의 말에 섀도우 위자드는 무인도로 이동해 주변을 점거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순조로웠다.
생각지도 못한 제3세력이 등장하기 전까진 말이다.
"어머, 안녕하세요?"
마치 세이렌처럼 아리따운 목소리의 고귀한 여성이 수십여 명의 검은 사제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특히 그녀의 주위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철통같이 둘러싸고 있었다.
딱 봐도 보통 무리가 아니었다.
쏜은 저 무리를 이끄는 미지의 여성을 보고 숨이 턱 막히는 느낌마저 받았다.
'뭐지요? 설마 이 느낌은… 겁을 먹은 건가요? 이 내가? 무리하면 7레벨 주문까지 사용 가능한 이 내가 말입니까…?'
하지만 이 감정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이미 쏜을 비롯해 섀도우 위자드의 일원들은 바싹 긴장한 상태.
그런 그들을 보며 미지의 여성이 자신의 찬란한 금발을 흩날리며 여유롭게 걸어왔다. 그녀는 얼굴의 반을 가리는 검은 철제 마스크를 썼는데. 아래로 보이는 분홍빛 입술은 줄곧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좋은 밤이죠? 아니, 낮인가요? 아무래도 전 지상 출신이라 그런지 잘 구분 못 하겠더라고요."
어쩌지 나긋한 어투로 말하는 그 목소리에 쏟은 심한 위협을 느꼈다. 그리고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더 다가오지 마시지요. 당신은…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위대한 마신 무결자를 섬기는 성녀랍니다."
신이 이 세계를 떠난 이후 그토록 낯선 단어는 처음이었다.
"성녀라고요…?"
100화
채권추심위원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