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빙의
<헤드헌터스>
현상금 사냥꾼이 되어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탈옥한 죄수들을 잡아들이는 게임.
나는 이 게임이 좋았다.
뛰어난 전투 묘사, 광활한 세계관, 이질적이지만 아름다운 맵 디자인, 망해 가는 세계 특유의 감성.
거기에 방대한 볼륨에 높은 자유도, 더럽게 하드코어한 난이도까지.
게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심각할 정도로 내 취향이었다.
때문에 대학 시절부터 취준 시기를 거쳐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까지.
나는 이 게임을 죽어라 들이팠다.
6년의 시간.
나는 게임 속 모든 클래스들을 한 번 이상씩 플레이 해 보고, 히든 퀘스트까지 클리어하며 스토리를 파악하고, 공식 홈페이지에 수록된 설정집까지 깡그리 독파했다.
한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이 정도로 이 게임을 씹고 뜯고 맛본 유저는 아마도 나뿐이었다.
관련 커뮤니티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다 죽었고, 공략글을 올리는 유저도 나 말고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온라인 게임이었다면 진작 서비스 종료를 하고도 남았을 상황.
하지만 이건 싱글 게임이라 어찌어찌 지금도 살아남기는 했다.
사실 이 저조한 인기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빌어먹을 게임은 엔딩 파트를 빼놓고 출시됐기 때문이다.
게임 플레이 초반부터 최종 보스에 대한 복선을 대놓고 뿌려 놓고선, 최종 보스는 작중에 나오지도 않는다.
대충 중간급 보스와 대결하고, 그대로 끝.
똥을 싸던 중 변기가 사라진 것 같은 이 어이없는 전개에 수많은 게이머가 이 게임을 던졌다.
물론 나도 이 사실을 알곤 쌍욕을 하며 패드를 집어 던졌었다.
내 취향의 게임이 이것밖에 없어서 다시 집어 들긴 했지만.
자기 취향인 음식이 세상에 하나뿐이라면 곰팡이가 좀 폈어도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도 그랬다.
퇴근하고, 씻고, 맥주 한 캔 까서 물고 <헤드헌터스>를 켰다.
그리고 그대로 맥주를 뿜었다.
"DLC 출시?!"
이 미친놈들이 6년 만에 DLC를 출시한 것이었다.
그것도 엔딩 파트를.
"이걸 왜 이제 내는데!!"
유저들 다 떨어져 나가고 이제 와서 내 봤자 대체 무슨 소용인 건데!!
하고 외치면서도 내 손은 DLC 구매 버튼으로 커서를 옮기고 있었다.
세상엔 욕하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게 존재했다.
6년을 들이팠는데, 그래도 엔딩은 보는 것이 도리 아니겠나.
그렇게 나는 DLC 구매 페이지로 들어갔다.
<헤드헌터스 DLC: 흑신 강림>
흑신(黑神).
작중에서 언급만 되고 나오지는 않았던, 이 게임의 최종 보스.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자 일단 진정하자, 진정… 내 카드가 어디 있더라."
한데 막상 보니 체크카드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구매 페이지에 큼지막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게임에 미친 당신만을 위한 특별 할인가!>
<65,000크레딧 → 0크레딧>
공짜.
게임사 놈들이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는지, DLC를 무료로 내놓았던 것이다.
"오예."
이제 진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구매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후욱!
갑작스러운 섬광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매캐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어 왔다.
동시에 미세한 먼지가 뺨에 들러붙는 것도 느껴졌다.
"으으...."
그렇게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내 방이 아니라 어느 엉뚱한 장소에 던져져 있음을 깨달았다.
"뭐야 여긴."
일단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좁디좁은 방이었다.
물론 내가 살던 원룸도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그보다 더 심했다.
거기다 침대, 변기, 세면대가 칸막이도 없이 한데 주르륵 붙어 있었다.
실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가구 배치.
거기다 발밑은 차가운 돌바닥이었고, 벽과 천장에는 두꺼운 철판이 덧대어져 있었다.
내가 알기로 이런 반인륜적인 인테리어를 채택하고 있는 건축물은 딱 하나였다.
감옥.
"내가 왜?!"
평생 범죄 따위는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 흔한 과태료 한 번 내본 적 없었고.
그런 모범 시민인 내가 갑자기 감옥이라고?
"아니 근데 잠깐만."
이 감옥의 인테리어, 어딘가 묘하게 익숙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긴 게임 속에 나왔던 감옥이었으니까.
"…여기 무간이잖아?"
세계 최악의 흉악범들만 수감되는 최상위 등급 교도소, <무간>.
백 년에 이르는 역사, 거대한 규모로 인해 상당한 수의 수감자를 보유한 곳.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나 설마… 게임 속으로 들어온 거야?"
아무래도 게임 속 캐릭터에 빙의된 상황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지금 이보다 더 적합한 설명은 없었다.
"아니 근데 빙의되려면 내가 플레이하던 현상금 사냥꾼한테 빙의돼야지, 왜 죄수한테 빙의가 된 건데...!"
<헤드헌터스>에는 다양한 클래스들이 존재한다.
마법사, 총사, 검사, 기계술사, 궁사, 변신술사, 격투가 등등.
하지만 어느 클래스를 택하든 직업은 '현상금 사냥꾼(헤드헌터)'으로 고정이었다.
<헤드헌터스>의 핵심은 탈옥한 죄수를 잡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죄수가 되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왜...!"
오렌지색 죄수복,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두꺼운 수갑과 족쇄.
나는 어딜 봐도 명백한 죄수였다.
입에서 씨발 소리가 튀어나오려 했지만 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침착해.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하자."
나는 무간에 수감된 거의 모든 죄수들의 프로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의 출신, 성격, 능력 등을 모두.
그렇다면 내가 지금 빙의되어 있는 죄수가 누군지를 파악한다면, 이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내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가장 빠르고 간단한 방법.
나는 세면대의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나의 현 모습을 확인했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
앙상하게 마른 얼굴, 20대 초중반 정도의 외모.
그리고 섬뜩한 안광을 흘리는 짙고 검은 눈동자.
이 얼굴을 본 순간 입에선 저절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뭔데."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모르는 인물에 빙의해 버려서?
아니, 오히려 알고 있는 인물이어서 문제였다.
"흑신...?"
플레이어들에게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이 게임의 최종 보스, 흑신.
나는 그에게 빙의했다.
"…어쩌지."
머리가 다시 띵해졌다.
흑신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는 거라곤 컷 신으로 한 번 본 얼굴.
그리고 세계의 뒤편에서 암약하며 세를 키웠다는 두루뭉술한 정보뿐.
흑신이 어떤 능력과 배경을 지녔는지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이 게임, 난이도가 하드코어 하긴 해도 어떻게든 타개할 구멍은 확실히 존재하던 게임이었다.
당연히 지금 상황도 그럴 것이고.
'흑신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그러니 지금 습득 가능한 정보들만 가지고 타개책을 찾아야 해.'
일단 이곳은 확실히 무간.
그리고...
"아니 잠깐만."
상당히 중요한 정보를 도외시하고 있었다.
"흑신 이 새끼, 여기 왜 갇혀 있어?"
그리고 또 하나.
"무간이 왜 멀쩡하지?"
무간은 게임 도입부부터 폐허가 되어 등장한다.
무간에 갇혀 있던 죄수들이 일제히 탈옥을 시도한 사건인 '대탈옥'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게임 속 세계관을 개판으로 만든 주범이자, 주인공이 현상금 사냥을 나서게 만든 대사건, 대탈옥.
이 사건으로 인해 무간의 죄수들은 전부 지구 곳곳으로 흩어지고, 무간은 폐쇄되어 버린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최장기 복역수인 흑신도 탈출해 버리고 말이다.
그러니까 무간이 이렇게 멀쩡하다는 건....
'지금은 게임의 극초반, 도입부 시점이다.'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게임의 후반부가 아니라 게임의 초반부라는 것.
이건 내가 아는 정보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시점이라는 의미였다.
한마디로 사실상 회귀한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계획을 세우자.'
현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반드시 대탈옥은 일어난다.
무간은 무너질 것이고, 이곳을 빠져나가게 될 것은 기정사실.
그러니 나가서 뭘 어떻게 할지에 대해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랬어야 했는데...
콰앙!
맹렬한 폭발음과 함께 수감실 문짝이 뜯겨 날아갔다.
벽면도 함께 뜯겨 허물어졌고.
동시에 바깥의 자욱한 연기가 수감실 안으로 확 밀려들어 왔다.
'읍...!'
아까부터 문 틈새로 슬슬 스며들어 오던 매캐한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타는 냄새.
그리고 아까부터 뺨에 들러붙던 먼지들은 미세한 잿가루였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수감실 바깥을 볼 수 있었다.
무간의 내부는, 불타고 있었다.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벽들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런."
대탈옥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벌어진 것이었다.
"흐음...."
수감실의 문짝은 날아갔다.
죄수들은 깡그리 다 도망갔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수감자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탈출.
나는 본능적으로 문밖으로 발을 내디디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벅, 저벅, 저벅!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들.
일군의 사람들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수는 두 명.'
무심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 뒤 나는 깜짝 놀랐다.
어지럽게 들려오는 발소리만 듣고도 인원수를 파악해 냈으니까.
게임 바깥의 나에겐 이런 능력이 없었다.
'이 몸이 지닌 능력인가?'
흑신 이 녀석, 일단 감각이 심히 예리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바로 다음 순간.
진짜로 두 명의 사내가 수감실 앞에 나타났다.
"...!"
그 둘을 본 순간.
나는 그대로 멈춰 버렸다.
정확힌 그중 한 명을 보고 멈춰 버린 것이었지만.
'랑슬로?! 이놈이 왜 여기 와 있어?!'
랑슬로 파웰.
세계 연방군 수석 검술 교관이자, 검성의 칭호를 가진 자.
현시점에 이놈을 칼로 이길 만한 인간은 이 지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랑슬로는 이미 칼을 뽑아 든 상태.
칼날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나의 본능이 말했다.
'덤비면 죽는다.'
물론 내가 빙의한 흑신의 몸이라면 어찌어찌 상대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도박이었다.
아직 흑신의 능력이 뭔지도 파악이 제대로 안 됐고, 무엇보다 손목에 채워진 수갑이 문제였다.
이능 봉인용 수갑, 모델 XT-10.
이걸 찬 상태에선 마법과 초능력이 모두 봉인되고, 신체 능력에도 디버프가 걸린다.
거기다 오랜 수감 생활로 인해 육체 자체의 컨디션도 영 좋지 않은 상황.
이런 상태에서 흑신이라는 네임 밸류만 믿고 덤비기엔, 상대가 지나치게 안 좋았다.
그래서 나는 택했다.
일단은 부동자세로 서 있기로.
내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랑슬로 측이 오히려 당황했다.
"…탈출 안 해?"
"하면 벨 생각 아닌가?"
"그건… 맞지."
정론으로 답하자 그가 한 번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리만 솔라리스, 이명 흑신, 맞지?"
"그렇다만."
리만 솔라리스.
이게 흑신의 본명이었군.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가 안 가는군. 이런 상황인데 가만히 있겠다고? 그 흑신이?"
"형님, 그냥 이 새끼도 베어 버리죠."
랑슬로 뒤에 서 있던 놈이 그렇게 말하며 나를 노려봤다.
나는 이 녀석의 정보도 알고 있었다.
이름은 카일.
랑슬로의 친한 동생이자 제자.
그리고 성격은 다혈질.
눈앞에 악인이 있으면 그냥 베어 버리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난 카일의 칼에 베일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무슨 권한으로 나를 베겠다는 거지?"
"뭐?!"
"탈옥수는 발견 즉시 처형해도 된다는 법 조항이 있긴 하지. 하지만 나는 원칙상 탈옥수가 아니야. 수감실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거든. 너에겐 나를 벨 권한이 없어."
애써 위엄 서린 표정과 목소리를 연기하며 논리로 카일을 밀어붙였다.
물론 알고 있었다.
저놈이 논리에 막힐 성격이 아니라는 걸.
"새끼가 어딜 입을 나불대...?"
그렇게 말하며 카일은 나를 향해 칼을 들이밀었다.
그 순간.
"칼 내려, 카일."
랑슬로가 카일을 가로막았다.
내 생각대로였다.
내가 논리로 설득하려 든 대상은 처음부터 카일이 아니라 랑슬로였으니까.
다혈질인 카일과 달리 랑슬로는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
랑슬로는 나의 논리에 동의했고, 그래서 카일을 가로막았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랑슬로가 물었다.
"그래서 왜 탈옥을 하지 않은 거지?"
"그 전에,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묻고 싶은데."
내가 지금 지닌 무기는 정보와 말발뿐.
때문에 대화의 주도권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다른 교도소로 이감할 거다. 네놈의 형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씨발.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당장 살기는 했는데, 이대로 가다간 다시 감방에 처박힐 상황.
그럴 수는 없었다.
'생각해라...!'
머릿속의 모든 정보들을 그러모으고, 검토하고, 조합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니, 이감할 수고를 치를 필요는 없다."
"뭐?"
"거래를 제안하지."
결정했다.
랑슬로 이 녀석을, 설득하기로.
2화 악은 악으로
거래를 하자.
라고 내가 랑슬로에게 말을 뱉은 그 순간.
"거래? 범죄자 새끼가 감히 무슨 거래를 말해?!"
오히려 카일이 발끈하며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정확힌 무서워도 필사적으로 티를 내지 않은 것에 가까웠지만.
지금의 나는 흑신, 리만 솔라리스.
무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수감된 자이며, 가장 오랜 기간 수감되어 있었던 최악의 범죄자이자, 이 게임의 대미를 장식할 예정된 최종 보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위엄과 위압감이 있었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했다.
지금 가진 무기가 그것뿐이었으니까.
나는 카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거래의 제시가 무슨 문제지? 세계연합 형법의 특별법 4조에 사법 거래를 허용하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는 것도 모르나?"
사법 거래.
범죄자와 법관 사이에 이루어지는 거래.
범죄자는 혐의 입증이나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건네고, 그 대가로 법관은 형량을 줄여 주거나 다른 법적인 이득을 취하게 해 주는 양상을 보인다.
지금 내가 카일과 랑슬로에게 제시하는 '거래'가 바로 이 사법 거래였다.
'설정들을 외워 두길 잘했지.'
<헤드헌터스>의 공식 홈페이지 설정집에는 세계 연방법의 내용이 올라와 있었다.
물론 모든 조항은 아니고, 게임 내 사건들과 관련된 것들 위주로.
사법 거래 관련 항목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그 조항들을 거의 다 외우고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법 조항까지 들이밀며 논리적으로 나오자, 랑슬로가 반응을 보였다.
"…사법 거래라. 그래, 제시 자체는 합당하다."
"형님!"
"카일, 나는 유사시 사법권을 행사하는 게 가능해. 저자의 말은 정론이다."
오케이, 원했던 반응이 온다.
고맙다 랑슬로, 이 원칙주의자야.
"…하지만 리만, 너의 제안이 나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그렇게 말하는 랑슬로의 눈에 문득 시퍼런 살기가 스쳤다.
나는 아주 조용히 침을 삼켰다.
랑슬로 파웰, 이 녀석은 극도의 원칙주의자였지만 동시에 범죄자를 상당히 혐오하는 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가 범죄자를 혐오하는 수준은 카일 이상이었다.
카일처럼 막 드러내지만 않을 뿐이었지.
만약 내가 수감실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나갔으면, 단번에 나를 토막 치고도 남았을 자라는 의미였다.
때문에 그는 게임 속에서 단 한 번도 사법 거래를 성사시켜 준 적이 없었다.
단지 법으로 존재하기에 제안 자체만을 허락만 할 뿐.
그렇기에 내가 랑슬로를 상대로 사법 거래라는 카드를 꺼낸 것은 확률 낮은 도박이었다.
그럼에도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 카드 외에는 방법이 아예 없었으니까.
나는 말했다.
"…들어 보면 구미가 당길 거다."
"말해 보도록."
"탈옥한 죄수들을 잡는 데에 협력하지."
"더 들을 것도 없군. 이감할 준비나...."
"그 탈옥수 놈들은 전 지구로 퍼졌어. 연방군과 국가별 치안 병력만 가지고 절대 그놈들 단시간 내에 못 잡는다. 하지만 난 그 시간을 확 줄여 줄 수 있지."
"그렇다고 널 풀어 달라고? 이 감옥에서 제일 위험한 죄수인 너를?"
"내가 왜 위험하지?"
"뭐?"
랑슬로는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너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는 건가?"
모르긴 했다.
흑신 이 새끼가 대체 무슨 짓을 하다가 무간에 처박힌 건지에 대한 정보가 게임 속엔 전혀 없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밀어붙였다.
"내가 저질렀던 죄와 지금 나의 위험성은 별개의 문제 아닌가?"
"그게 어떻게 별개일 수가...."
"생각해 봐라. 내가 정말로 위험한 놈이었다면 지금 너희들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
랑슬로의 말문이 순간 막혔다.
나는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나보다 한참 약한 죄수들도 구속구를 부수고 탈출했다. 나도 그럴 수 있었지. 내게도 탈출의 기회가 있었고, 그럴 힘도 있었다. 하지만 난 여기서 얌전히 너희들을 기다렸지."
…솔직히 타이밍 놓쳐서 못 나간 거긴 했다만.
어쨌거나.
"내가 만약 너희들이 생각하는 만큼 위험한 놈이었다면, 너희는 내 얼굴을 보지도 못했을 거다. 난 벌써 어느 대도시 술집에서 헤이터스마크 한잔을 걸치고 있었겠지."
"원하는 게 뭐지?"
좋아.
드디어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이 됐다.
장족의 발전.
내 제안을 대놓고 씹으려던 녀석이, 어느새 내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이제 7부 능선이다.
목표한 곳까지 이르느냐, 굴러떨어지느냐.
터질 듯한 긴장을 애써 수습하며, 나는 다음 문장의 단어들을 세심하게 골랐다.
"나는 자유를 원한다. 합법적이고, 정당한 자유."
"자유라."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의아하군. 대체 뭐가 너를 이렇게 바꾼 거지?"
실제로 인격이 바뀌었거든.
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다른 말로 이야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곳 무간의 정식 명칭을 알고 있나?"
"그건 왜?"
"세계 연방 제0호 교정 기관. 그것이 이곳의 정식 명칭이다."
"그러니까 지금 갑자기 그 소리를 왜 하는...."
"이곳의 궁극적인 설립 취지는 처벌이 아니라 교정에 있다는 것을 다시 알려 주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너는 이곳에서 교정되고 교화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위험하지 않고?"
"뭘 어떤 증거를 더 보여 줘야 하지?"
도망칠 수 있는데 안 쳤다.
저항할 수 있는데 안 싸웠다.
난 이미 충분히 나의 교화됨을 보여 주었다.
"나는 너희의 법을 존중하여, 내가 숙일 수 있는 데까지 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이제 너희가 응답할 때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군."
"그렇다면...."
"하지만 안 돼."
"흐음? 어째서지?"
나는 일부로 노골적으로 언짢다는 낯빛을 내비쳤다.
하지만 랑슬로는 이 기 싸움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리만, 네가 교화되어 선으로 변심했다면 마찬가지로 악으로 도로 변심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겠지. 하나 우리로선 널 풀어놨을 때 그 변심을 통제할 수단이 전혀 없다. 그것이 널 풀어 줄 수 없는 이유다."
"...."
"미안하군. 쓸데없는 희망을 줘서."
사실 이렇게 나올 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랑슬로 파웰, 극한의 원칙주의자.
하지만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선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
나의 사법 거래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결정하는 것은 그였고, 때문에 어떤 판단을 내리든 그건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범죄자를, 나를, 혐오한다.
그렇기에 그가 나와의 사법 거래를 파투 내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한데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도, 나는 여기까지 이 대화를 끌고 왔다.
그 이유는 하나.
여기까지 시간을 끄는 데 성공한 이상, 내게 하나의 카드가 더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다.
대탈옥이 터진 직후, 무슨 일이 터지는지.
삐빅-
그 순간 랑슬로의 귀에 끼워진 인이어가 어떤 소식을 전달했다.
랑슬로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 버렸다.
'터졌구나.'
록포인트 발전소 자폭 테러 사건.
나는 내 예상이 적중했음을 직감했다.
네트워크에 연결할 수 없습니다.
네트워크 연결을 확인해주세요.
***
대탈옥 직후.
탈옥수 중 일부 광신도들이 미국 록포인트 발전소에 자폭 테러를 감행했다.
이 지구에서 손꼽히게 거대한 규모의 마석 발전소를.
이 사건으로 인해 도시 하나가 증발해 버리고, 4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랑슬로가 방금 인이어를 통해 전해 들은 급보도 그것이었다.
'사망자가 40만 명...?'
대탈옥의 여파가 벌써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규모로, 최악의 형태로.
대탈옥으로 탈출한 죄수들은 보통 죄수들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지구 최악의 범죄자들이었고, 그 악명에 걸맞은 힘을 지닌 놈들.
그런 놈들이 전 세계에 흩뿌려졌다.
그렇다면 놈들을 오랫동안 사회에 방치할수록,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시바삐 탈옥수들을 사살해야만 했다.
랑슬로는 리만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거래를… 받아들여야 하나?'
랑슬로의 사명은 세계 시민들의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것.
세계 연방군에 입대한 이후 이 사명을 잊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망설이는 매 초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결정을 해야 했다.
리만을 이감할지, 아니면 리만을 이용할지.
'악을 잡기 위해 악과 협력하는 것은 정당한가?'
윤리적으로는 옳지 못한 일임을 안다.
하지만 조금 전, 리만은 법의 원칙하에서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사법 거래.
여기에 응하기만 하면, 흑신이라는 무시무시한 전력을 휘하에 두고 부릴 수 있게 된다.
당연히 이 세계 단위의 혼란을 좀 더 빨리 수습할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역시 악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격렬한 갈등을 발생시켰다.
그런 랑슬로를 보며 리만은 생각했다.
'빨리 결정해. 그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죽어 나간다.'
리만은 랑슬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어 나가는 걸 손 놓고 지켜볼 사람이 아니었다.
법과 원칙의 테두리 안에만 있다면 그 어떤 수단이라도 채택할 터.
그리고 지금 랑슬로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은, 리만과 손잡고 탈옥수들을 잡아들이는 데에 착수하는 것이었다.
'이래서 내가 이 시점까지 대화를 질질 끌었지.'
사법 거래라는 미끼를 던졌다.
그리고 록포인트 발전소 자폭 테러가 발생할 때까지 대화를 끌어서, 그의 마음이 흔들리게 만들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랑슬로의 선택뿐.
영겁 같은 몇 초가 흘렀다.
그리고 랑슬로는, 선택했다.
슥-
랑슬로는 품속에서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리만은 그 종이가 뭔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맹약의 각서...!'
그것은 마법이 깃든 계약서.
그 계약서에 적힌 내용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만 한다.
만약 계약 내용을 어길 시, 어긴 자는 죽게 된다.
맹약의 각서를 본 카일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형님?! 그 귀한 걸… 아니 저 범죄자 놈의 거래를 받아들이려는 겁니까?!"
랑슬로는 대답 대신 감옥 탁자 위에 백지상태의 맹약의 각서를 펼쳤다.
그리고 리만을 향해 말했다.
"요구 조건을 말해."
"일단 내가 탈옥수를 잡을 때마다 놈들에게 걸린 현상금을 지불해. 나도 운신하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5%만 지급하겠다. 죄 없는 일반 현상금 사냥꾼과 너를 동등하게 취급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불평등한 처사일 테니."
"그건...!"
5%면 너무 후려치는 것 아니냐,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어떻게 성립시킨 협상인데, 이런 걸로 차질을 빚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돈이고 나발이고 여기서 나가서 자유를 얻는 게 지금은 가장 중요하기도 했고.
그리고 돈이 모자라면 다른 의뢰를 받아서 충당하면 될 문제였다.
리만은 말했다.
"…5%, 받아들이겠다."
"좋아."
"그리고 모든 탈옥수의 포획 혹은 사살이 확인된 순간, 나의 형을 사면시켜 줘."
"수용하겠다. 하지만 나도 조건을 걸지."
"어떤 조건?"
"실시간으로 내게 위치를 전송할 장치 혹은 마법을 착용할 것."
"동의. 하지만 사면 확정시 해제할 것도 명시하고."
"수용. 그리고 성실히 협조하지 않는다고 판단될 시, 너는 내 손에 죽는다."
"…오케이, 동의."
그 이외에 몇 가지 세부 사항을 조정한 뒤, 리만과 랑슬로는 각서에 지장을 찍었다.
치이이이...
인두로 지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리만과 랑슬로의 지문이 찍혔다.
이제 이 계약서가 불타 사라지더라도 계약 내용은 유지된다.
그리고 양측의 동의가 없으면 계약 내용의 수정이 불가능하고.
이것으로 거래는 성사되었다.
게임 역사상 단 한 번도 성사된 적 없던, 랑슬로와 범죄자 사이의 사법 거래가.
이 기념비적인 순간.
이걸 지켜보는 카일의 표정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