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ㅡ화르륵!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의 열기과 빛만이, 대신전과도 같은 널따란 공간에 자리한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저 불꽃이 놓여 있던 덕분에, 용사 파티는 어둠 속에서도 검을 휘두를 수 있었고, 마법을 발할 수 있었으며, 신의 이름 아래 축복과 가호를 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
인간이 제아무리 발버둥친다한들, 절대자(絶對者)를 어찌할 순 없는 법이었다.
올려다보면 고개가 아플 정도로 높게 지어진 계단 위의 석좌, 그곳에는 지루하다는 듯한 얼굴을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이 세상의 빛을 죄다 삼킬 듯한 칠흑 같은 머리칼과 작열하는 불꽃처럼 붉디붉은 진홍색 눈.
세간은 저 존재를 가리켜 마왕(魔王)이라 불렀다.
덜그럭, 시야가 흔들렸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눈을 옆으로 굴렸다. 얼굴을 뒤덮는 핏물에 의해 시야가 붉었다.
은빛의 머리칼이 인상적인 여인이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정확히 무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저렇게까지 울어주는구나, 라는 감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의 육신은 반절이 사라져 있었다.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는 걸 보니 아마 저 마왕의 손에······ 아니 손짓에 짓이겨진 것일 테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기라도 한 것처럼, 회복 마법을 사용하려는 듯 보이는 그녀였다. 투명하고 밝은 빛이 여인의 손 아래에 모여 들기도 잠시. 곧 흩어지는 마력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싸움은, 이야기의 종장(終場)이라는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빌어먹을 놈과의 일전이 말도 안되는 난이도를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개같군, 이렇게까지 어려운 게임은 아니었는데. 이만한······ 이 정도나 되는 파티로도 놈에겐 안 된다는 말인가?'
검성은 제 파티원들을 바라보았다.
장정 두셋은 한 몸에 합쳐 놓은 듯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던, 강철같은 육신의 야만전사는 그 두툼한 대흉근 아래가 뻥 뚫려 있었다.
'복부'라고 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저 정도면 살아나는 건 무리겠지.
한낱 야만인에서 마지막에는 용병왕으로 불렸던 그의 커다란 도끼도, 검성으로 불렸던 사내의 검도.
마왕에겐 통하지 않았다.
단순히 검이나 도끼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쩌면 날붙이 자체를 허용치 않는 어떤 권능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 어떤 방법을 통해도 죽음을 피하기는 어려울 게 뻔한 거한의 앞.
모든 생명을 자애롭게 굽어 살피는 성녀가 그 죽음을 용인할 수 없다는 듯, 무릎을 꿇고 앉아 신성술과 회복의 기도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새하얀 수녀복은 피가 튀고 살이 튀어 더러워져 있었으나 그녀의 얼굴에 깃든 신실함만은 이전 그대로였다.
다만, 여인의 입가에선 주륵주륵 핏줄기가 흘러 나왔다.
죽음이 확정된 육신을 재구성한다는 건, 제아무리 그녀가 성녀라한들 쉬운 일이 아닐 터.
더군다나 저 마왕놈이 권능과도 같은 것을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마(魔)라는 것과 대척점에 자리할 게 뻔한 교단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는 건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렇기에 제 생명을 저리 바쳐가며 파티원을, 아니 우리를 살리려는 것이겠지만······
"···카온, 리, 카온···. 흐윽··· 미, 미안해··· 내가, 내가 더 마법을 잘 다뤘다면··· 그, 그랬다면 이런 일은······"
눈알을 굴리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먹먹하던 흐느낌에 불과하던 것이 이제는 또렷한 음성이 되어 귓가에 전해졌다. 마지막 불꽃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울고 있는 그녀에게 말해주어야 했다. 아니라고. 네 잘못이 아니라 내가 부족했을 뿐이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네가 마법을 알려줄 때 나도 더 진득하게 매달려 볼 걸 그랬다고.
또 다시 먹먹한 흐느낌으로 바뀌었을 때, 여인은 중얼거리며 마력을 집중했다.
······깜빡.
아주 잠시 의식이 끊어졌다 도로 돌아왔다.
어느새 멋대로 떨어진 고개가, 누구보다도 빠른 발을 자랑하던 여 도적의 모습을 두 눈에 강제로 비춰주고 있었다.
두 발목이 잘려 나갔음에도 엷게 열린 거대한 철문을 향해 천천히 기어가고 있는 그녀였다.
평상시의 그녀였다면 정말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저길 몇 번이라도 오갔을 것을, 자랑이던 두 발을 잃었다는 게 저토록 치명적이었다.
마왕의 신전과도 같은 이곳에서부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다는 듯, 혹은 원군을 불러오겠다는 듯 두 팔로 땅을 기는 여인의 아래. 피로 이어진 길이 그려지고 있었다.
작게 누군가 웃음소리를 뇌까리는 듯 했다.
놈인가?
줄곧 지루하다는 듯 굴고 있던 얼굴 아래, 초승달처럼 휘어진 입꼬리가 걸려 있었다. 스륵, 놈이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쿠웅.
문이 닫혔다.
질척이며 땅을 기는 소리와 누군가의 흐느낌, 쌕쌕거리거나 헐떡이는 숨소리 정도만이 아주 나즈막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화르륵 타오르던 불꽃조차도 언제 그랬냐는 듯 후욱 꺼졌다. 온전하고 완연한 어둠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1화 이 몸, 또 또 강림.
ㅡ똑똑.
고급 목재를 썼는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마저 기품이 느껴졌다.
새하얀 순백의 문은 굳건하게 닫힌 채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갈한 차림새의 메이드 시델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문을 두드렸다.
"······."
여전히.
방 안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삼 일째.
유서 깊은 마법 명문가 크라프슈타인가의 도련님, 리히트 크라프슈타인이 방에 틀어박힌 시간이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물론 완전히 식음을 전폐하고서 틀어박힌 수준은 아니었지만, 다 큰 사내가 엉엉 울고 술과 담배에 취해 있던 건 영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시델은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 하나씩 접어 보였다.
언제는 도시의 창관을 들렀다, 그곳의 제일 미녀라는 이를 돈으로 사려다 거절당해서 한 번.
또 언제는 몇 세대 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가문의 영애에게 추근덕거리다가, 아카데미의 뭇 학생들에게 몰매를 맞아서 한 번.
아참, 생각해보면 마법 수업 도중 남들 다 하는 평범한 기초 마법조차 제대로 발현하지 못해······
벌컥, 하고서 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열렸다. 장신의 사내가 코앞에 자리하자 여인의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기침해 계시다면 말씀해주셨다면 좋았을 겁니다."
시델은 조금 전까지 제가 품고 있던 무례한 생각을 모두 거둬냈다.
- 네게 힘든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아비 된 자로서 하는 부탁이라고 하기에도 우습지. 하나, 부탁할 이가 너밖에 없군. 어미의 정을 주라곤 하지 않겠다. 그저 놈이 엇나가지 않도록 강하게 훈육해······ 아니. 되었다. 그저 허튼 곳에서 목숨을 잃는 일만은 없도록 네가 지켜봐다오.
줄곧 근엄함을 유지하고 있는 가주로서의 음성이 아닌, 한 명의 아비로서 보이는 음성··· 오래 들었던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여인은 그저 얌전하고 조신하며 유능한 한 명의 메이드가 되어, 눈을 지그시 감고서 고개를 숙였다.
추측컨대, 지금 리히트 크라프슈타인의 얼굴은 말이 아닐 터.
아들 혹은 오래된 동생과 비슷할지언정, 모시는 이의 추잡스러운 모습을 못본 체 하고 눈과 귀, 입을 닫는 건 시녀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또 하나.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알았으니까 그만 좀 깨워! 알아서 일어난다고! 그··· 그 망할 놈들이랑 같이 수업을 들어야 하는 내 심정을 네가 알기나 해?! 고작해야 메이드 따위가······!' 와 같은 모멸적인 말을 피할 수 있었다.
유능한 메이드인 시델은 슬쩍 제 오감 중 하나를 건드려, 자연스레 청각의 기능을 반쯤 꺼두었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신이 직접 미형으로 빚어둔 것 같은 사내가, 뭇 여인들이 홀라당 넘어갈 법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듣기에 꽤나 좋은 일이지만.
그 또한 침대 위 하룻밤 장난 같은 달콤한 말을 속삭일 때에나 가능한 일.
너댓 살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듯 말하는 건 누구라도 얼굴을 찌푸릴 만한······
그러나 정작 사내는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 있었다.
'빌어먹을 마왕 놈. 설마하니 「물리 면역」이라도 가지고 있던 건가?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돼. 갑자기 그 미친 난이도는 뭔데? 마왕 새끼, 그렇게까지 힘든 보스는 아니었다고.'
'내가 어떻게 검성 자리까지 올라 갔는······ 아니, 애초에 그게 가장 효율적이고 정석적인 공략 루트라고!'
'후우, 화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어찌 되었건 일단 돌아온 것 같으니 다시 시작하면 될 일. 검이 안된다면 다른 것을 시도하면 될 뿐이다. 답이 없던 건 처음 검을 쥐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니.'
흡사 존귀한 왕족이 일국의 중요한 책무를 앞두고서 고심하는 것처럼, 그의 미간은 깊게 파여 있었다.
"도련님?"
여인이 말을 걸자 그제야 천천히, 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돌아오는 시선이었다. 그의 얼굴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숨이 멎을 만큼 황홀한 찰나였다.
"······네가 시델인가?"
이건 또 무슨 질 나쁜 장난일까.
시델은 고개를 들었다.
감정을 숨긴 실눈의 뒤에서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루는 이목구비에, 태양의 은혜를 가득 머금은 듯한 백금발 머리칼은 정리되지 않아 부스스했음에도 잘 빚어놓은 조각상 같았다.
그뿐이랴.
일견 잘못 보았을 때는 여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다란 속눈썹은, 그야말로 이 사내의 미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너무 눈부신 빛을 가리기 위함일까. 그늘이 조금 드리운 듯한 어두운색의 금안(金眼)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
지금의 모습만 보아서는, 저 방에서 삼 일을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한 게 맞나?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동시에.
과거에 그토록 많은 혼담이 오간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맞는 것 같은데."
한 차례 고개를 갸웃거린 사내가 가늘게 뜬 금안으로 여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시델은 내색 하나 하지 않은 채,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그런 컨셉을 하기로 하신 겁니까?"
"컨셉이라···"
"에리아 아가씨께 사정없이 차이셨다 들었습니다. 금번의 식음 전폐는, 이전과는 비할 바 없는 충격 때문이겠지요."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전의 기억을 되짚어 보는 듯 했다.
분명 헤집어선 곤란한 기억이요. 가슴이 저려올 만한 일이건만, 그걸 말하는 여인이나 듣고 있는 당사자나 얼굴색의 변화는 없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여인은 한 번 더 박차를 가했다.
"듣자 하니 에르튼 가에서 혼약을 파기하겠다 합니다. 소꿉친구, 아니 어릴 때부터 미래가 예정되어 있던 도련님께는 상심이 크시겠습니다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넓고 여인은 많습니다. 크라프슈타인의 이름을 대면, 어디 변방의 철없는 아가씨가 짐을 싸들고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아카데미의 재학생이기 망정이지, 완전히 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면 더욱 큰 망신살이 될 게 뻔했다.
때문에, 이번의 일은 어떤 의미로는 차라리 먼저 맞아서 다행인 '매'였다.
물론 아직 변변찮은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리히트가, 여인의 마음을 알기까지는 한참이나 걸릴 일이지마는 그 역시 사내로서 겪어야 할 일.
크라프슈타인가의 유능한 메이드이자, 가주가 직접 제 망나니 아들에게 붙여준 자로서 시델은 맡은 바 소임에 충실했다.
울음을 터뜨릴까? 아니면 또다시 방에 틀어박힐까? 가문의 식량고에 있는 고급술을 내어 오라 할까?
아니. 어쩌면 이대로 아카데미에 찾아가 영애를 붙잡고 악다구니를 쓸지도 모르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예?"
"에르튼 가··· 아니. 에리아라고 했나. 그래, 그녀와의 혼약이 파기 되었다고. 알겠다. 그다음으로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있나?"
"···도련님이 방에서 나오게 되면, 곧장 자신을 찾아오라 가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실은 그마저도 오늘이 마지막 기한이었습니다."
"잘됐군."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는 여인이었다. 시델은 눈을 찌푸리며 리히트를 올려다 보았다.
삼일 정도 음식을 먹지 않은 탓인지 조금 초췌해진 외모는, 외려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도록··· 어두운 금안이 여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뭐하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능 메이드였다.
"가주님께 안내하지 않고."
"······오늘은 참으로 이상하십니다, 도련님. 음, 알겠습니다. 저는 제 역할에 충실하면 될 뿐이지요. 도련님께서 도로 방에 틀어박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뿐이었습니다. 그럼."
말을 마친 여인은 빙글 몸을 돌렸다.
어찌나 혹독한 교육을 받은 것인지, 시녀임에도 불구하고 동작 하나하나에 기품과 격식이 어려 있었다.
옷자락조차 나풀거리지 않아 먼지와 티끌이 솟아오르는 일조차 없었다.
'이노를 떠올리게 하는군.'
앞서 걸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인 리히트였다.
대륙 3대 시프이자, 용사 파티의 일원 이노 그로지안.
그녀는 바로 곁에서 걷고 있음에도 발걸음 소리는커녕 기척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은신과 암살 및 각종 함정의 해제 등.
그녀 덕에 마왕과의 최종 결전을 앞두고 힘을 꽤나 아낄 수 있었다. 여행 도중의 자잘한 도움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운 얼굴들, 체감상 며칠 전까지 함께한 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뭐하십니까? 따라오시지 않고. 역시 지금이라도 술을 내어드리면 되겠습니까? 가주님께는, 도련님이 이별과 상실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섯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춘 시델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몸을 돌렸다.
이쪽을 도우려는 건지, 먹이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차인 놈에게 술을 사준다······ 아니 잔을 채워준다하는 걸 보면 본성이 나쁜 이는 아닐 것이다.
"이별 한두 번에 쓰러질 정도로 나약한 사내는 아닐 것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건 또."
성큼성큼 걸어 여인의 옆에 발맞추어 선 리히트였다.
오늘따라 유독 자주 찌푸려지는 시델의 눈초리였다. 여인은 옆으로 비뚜름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과거의 나는 잊어 달라는 의미다."
"저는 도련님이 엉망으로 만드신 도련님의 방을 치워야 합니다. 뱀이 허물을 벗듯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치워야 하고, 토사물을 씻어내야 합니다. 이부자리 역시 가지런히 만들어야겠지요. 그렇게 갖은 애를 써도 내일이면 또 금세 원상복구 되겠지요."
무표정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신들린 랩이었다.
저쪽 세상이었다면 소울리스좌니 어쩌니 하는 식으로 이름을 떨치지 않았을까. 일개 메이드라고 하기에는 과할 정도로 수려한 용모이기도 하니 말이다.
"도련님, 저는 도련님의 과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겐 도련님의 오늘이 어제고 도련님의 내일이 오늘입니다."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스스로 저지르지 않은 일에 사과를 하는 것은 어렵다. 애당초 사과하면 없던 잘못도 있는 잘못이 되는 세상을 겪지 않던가.
그렇기에 리히트는 택했다.
두 걸음을 더 내디뎠다.
구박을 받는 것보다, 먼저 시델을 지나쳐 걷는 걸 택한 것이다. 저벅저벅, 그렇게 다섯 걸음쯤 걸었을까.
"······."
사내는 뒤를 돌아보았다.
"시델이라고 했지. 이제와 생각하니, 종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주인은 없는 듯하다. 그렇게 하면 세상의 손가락질과 지탄받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일 터. 나는 그것이 못내 가슴 아파 견딜 수 없다. 그러니······"
"휴, 잠자코 따라오기나 하십쇼 도련님. 제발 술 좀 그만드시고."
고개를 내저은 여인은 뚜벅뚜벅 걸어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뭔가 이렇게 틱틱거리면서도 끝에 가서는 챙겨준다는 점 역시도, 한 여인과 닮았다.
이것 참, 인생 3회차는 여러모로 2회차를 떠올리게 했다.
2화 아······빠?
모바일과 PC 모두 연동이 되는 게임 <힐델라나>.
수십 가지나 되는 직업군과 각기 다른 전직 루트가 있는 데다, 자유로운 진영 선택과 플레이어 있어 높은 자유도 등.
한낱 모바일 게임치고는 꽤나 완성도가 높은 게임이 힐델라나였다.
하지만 엄청난 자유도를 보장한다는 건, 반대로 신규 유저가 적응해야 할 게 많다는 말.
다시 말해, 불친절한 게임 힐델라나는 즐길 거리가 꽤 많은 RPG임에도 불구하고- 고이고 고인 사람들만 하는 올해의 똥겜 목록에 종종 들어가곤 하는 녀석이었다.
리히트······ 아니 '전신혁'은 수준 높은 똥겜 소믈리에로서, 녀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잠에서 깬 직후나 잠에 들기 직전에도,
하다 못해 똥을 쌀 때도.
그 게임에 몰두했다. 아니, 미쳐있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온갖 직업과 전직 루트를 하나하나 맛보는 걸로도 모자라, 그 곳에 존재하는 컨텐츠들을 찾아서 즐기고, 또 관련 커뮤니티에 공유하는 재미로 살았으니까.
어차피 현실의 인싸와는 거리가 먼 삶.
골방에서 즐기기에는 그만한 취미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되었을까. 커뮤니티에서 네임드 유저가 되어있을 무렵.
[이렇게나 제 세상을 사랑해주실 줄이야. 당신께는 특별히 이곳을 더욱 진하게 음미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웬 듣도 보도 못한 소리가 들린 게 그때쯤이었고 그로부터 '리카온'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하필, 재능이라곤 일절 없는······ 아니지. [불굴] 스탯에 모든 걸 다 때려 박은 재미용 캐릭터.
거기에 빙의되어 버렸다.
몰빵한 스탯이 불굴이어서 그랬을까? 어디 귀한 집 자제도 아니고, 기사왕의 아들도 아니었으며, 마탑의 제자도 아니었고.
- 하하, 사냥꾼 아들? 실화냐.
겨울에 사냥감을 못잡으면 그대로 죽기 딱 좋은 직업. 안정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집의 아들로 빙의 전생했다.
왜 빙의 전생인가 하면, 이 망할 놈의 여신이라는 작자가 아기 때부터 빙의를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지랄맞은 빙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전신혁님께서는 힐델라나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의 직업군을 해보셨으니, 약하디약한 곳에서 차근차근 올라가 보시는 건 어떨지요? 분명 재미있으실 거라 장담합니다-' 와 같은 나사 빠진 소리를 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여하튼, 이미 세상에 떨어졌고 어찌할 방도도 없으니 차근차근 이 세상에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돌아갈 방법은 최종 컨텐츠를 클리어하면 된다기에, 직감적으로 마왕을 이겨 먹으면 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중하급 실력의 일개 사냥꾼 아들로 태어나, 용병단에 들어가 실력을 기르고, 떠돌이 용병이 되어 이름값을 높인 다음에는 파티를 꾸렸다.
훗날 그 파티의 이름은 용사파티가 되어 있었다.
망할 놈들. 강한 놈들이 천지에 수두룩한데, 그 어떤 놈도 마왕의 토벌에는 관심이 없었다. 입으로만 떠들어 댈 뿐.
이에 관해선, 파티의 책사 역할이자 마탑의 총아로 불렸던 '은빛섬광(銀閃) 마르실 올라비아'가 답을 내려주었다.
-마족은 인간의 단합력과 그 압도적인 군세를 두려워한다······라고 여기고 있을 걸? 정말 안일하기 그지없어. 저 인간의 피와 살을 탐하는 놈들이, 대체 뭣 때문에 숨을 죽이고 있다고 여기는 거야? 죄다, 자국의 병력이 손해 보는 건 싫은 거야.
남들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이야기를 시원스레 갈겨 버린다는 점이, 그녀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였다.
또 하나.
그녀의 뇌전(雷電) 마법은 가히 한 지형에 영향을 줄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무지막지한 도움을 받기도 했다.
밀려드는 마족의 군세를 한 번 확 지져 놓으면, 이후에는 당시 2회차였던 전신혁······ 즉, 검성(劍星) 리카온이 군단장급의 마족이나 전투력이 뛰어난 단일 개체들을 상대하는 식이었다.
마왕, 그 빌어먹을 놈이 난이도를 대폭 상향 조치당한 걸 진즉 알았더라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지는 않았을ㅡ
"역시, 가주님을 뵈려니 겁이 나시는 겁니까?"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상념을 지우고서 돌아보니, 시델은 감은 듯한 눈 사이를 미미하게 찌푸려 가만히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과연.
그녀의 옆을 보니, 으리으리한 크기에 금색으로 포인트를 준 새하얀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게 이 몸뚱이. 그러니까 크라프슈타인가의 전체 테마인 듯했다.
"그럴 리가 있나. 가주님이 무서워 봐야 마왕보다 무서우려고."
"보기라도 하셨는지요? 누가 보면 리히트 도련님께서 용사 파티의 일원이 되어 마왕과 겨뤄본 줄 알겠습니다."
"혹시 모를 일이지."
"예에, 도련님. 그럼 부디 가주님과의 면담이라는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시길, 아니 이왕이면 무훈까지 세워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이 유능하지만 불운한 메이드는 도련님께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전장으로 출정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녀는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정확히 2초가 지난 후에 쌩하니 몸을 돌려 멀어졌다.
재미있는 사람이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문 앞에 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안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다.
"이제야 일어난 것이냐. 속히 얼굴을 보이도록 해라."
쿠르르르릉···!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누구 한 명 손대지 않았음에도 거대한 문이 열리고 있었다.
하긴, 이놈. 마법 명문가의 자식이라고 했던가?
***
좌우로 넓게 탁 트인 공간.
흡사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두툼한 대리석 기둥이 천장까지 높이 솟아 올라 있는 곳.
중앙에는 붉은 색의 융단에 금실이 수놓아져 있었고 그를 따라 쭈욱 시선을 움직이면, 높다란 계단이 자리했다.
그 꼭대기에는 마치 고대의 황제라도 앉을 것 같은 커다란 석좌(石坐)가 놓여 있었으니.
크라프슈타인가의 가주, 아게로 크라프슈타인은 특유의 푸르름과 금광이 뒤섞인 눈으로 이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7위계에 속한다 했었지, 아마.'
아직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들려오는 이야기들로 볼 때. 처음 리카온으로 태어났을 때와 그리 오랜 시간 차이가 나지 않는 듯 했다.
어쩌면 거의 엇비슷한 나이일지도 모르겠다.
최종전에서 실패한 검성을, 배려랍시고 이번에는 응애 때부터가 아닌 청년의 시점부터 빙의 시켜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동조율 6%···]
힐끔 머리맡에 떠오른 메시지를 살폈다.
이 몸의 필수적인 기억은, 동조율이 3%인 시점에서 대강 떠올릴 수 있었다. 여하튼 이 몸의 기억과 리카온 때의 기억이 뒤섞인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저 보기만 해도 등골이 섬찟한 이가, 대륙의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비견되는 7위계의 마법사이며 동시에 빛과 열 마법의 종주(宗主)인 <덴하르트> 마탑의 마탑주와 호형호제 하는 인물이라는 걸.
"아비를 봤는데 인사 한 번 하지 않는 걸 보니 내, 너를 잘못 키워도 단단히 잘못 키웠구나. 제아무리 주변에서 망나니라고 하는 너일지언정, 부모 자식 간에 기본 예의마저 내던질 줄이야."
팔걸이에 턱을 괸 사내는, 흡사 길가의 돌멩이나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무미건조한 음성을 흘렸다.
이 집의 사람들은 저런 일관성 있는 톤이 기본 매너인가?
용병 시절, 아니 여러 귀족 내지는 국왕을 알현하며 익힌 예법에 따라 고개를 숙여 보였다.
"크라프슈타인가의 태양이신, 아게로 크라프슈타인 가주님을 뵙습니다."
잠깐의 정적.
"꼭 처음 만난 이라도 되는 양 구는군. 아비의 농에, 진정 부모 자식의 연을 끊겠다 이 말이더냐?"
반사적으로 헛숨을 들이킬 뻔했으나 애써 참아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있음에도 확연히 보이는, 묘한 이채를 띤 눈이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소자, 칭찬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나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것뿐입니다. 아버지."
사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독주를 몇 병이나 병째 들이켰다고 하더니. 용케도 아비는 알아보는구나."
그러고 보니 이 몸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 주변에는 지독한 술 냄새와 연초 냄새가 진동을 했었다.
척 보아도 비싸보이는, 일반적인 사람의 한 달 봉급은 우습게 넘어갈 병들이 아까운 잔여물을 흘리며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와중에 벌써 귀에 들어갔단 말이군. 시델, 그녀와의 대화가.'
충격과 공포, 그리고 체념과 적응의 삼 일을 보냈다한들. 아직은 리히트 크라프슈타인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그 때문에 시델이라는 메이드를 대함에 있어 어색함이 있었을 터.
놀라운 건, 그걸 이 문을 열기도 전부터 파악하고 있는 저 가주라는 사내였다.
'······여러모로 방심해선 곤란하겠어.'
실실 웃어 보이며 답했다.
"하하, 설마하니 그렇게 단박에 차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독하고 쓰린 술과 함께 모두 털어 넘겼으니,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될 겁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석좌 위에 앉아있는 사내의 입이 비틀렸다.
"허면 내일부터는 다시 아카데미에 나간다는 말이렸다?"
"······바로 말입니까?"
"왜, 오늘 밤. 창관에라도 갈 생각이더냐? 그 꺾이지 않는 꽃향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서 눈물이라도 흘려 볼 생각이라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그 쓸모없는 양물을ㅡ"
···화륵, 하고서 사내의 손에 불길이 타올랐다. 그건 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요했다. 그저 일렁임에 불과할 정도였다.
타닥- 나풀거린 티끌 한 올은 아게로의 불길에 닿음과 동시에 문자 그대로 소멸했다.
가열. 발화. 연쇄라는 단계를 훅 건너뛰어 최종적인 결과만을 도출해낸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아카데미에 가고 싶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습니다. 배움이란 늘 즐겁고 새로운 것 아니겠습니까?"
시골 청년 리카온은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사냥꾼의 아들에다, 이름없는 용병단의 말단으로 시작했는데 오죽하겠는가.
배움은 원래부터 갈구하던 것이었다.
마침 마법 명문가의 자식에다, 아카데미도 번듯한 아카데미일 테니 기대 만발이었다. 와, 하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 걸 잃을까 두려워한 결과는 아니다. 정말로.
3화 뭐 때문이겠어. 술 때문이지.
리히트를 가주에게로 안내한 시델은, 맡은 바 본분을 다하기 위해 그의 침소 앞에 당도했다.
수도 없이 마주했으며, 몇 번이고 반복된 정리를 해도 다음날이면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게 그가 모시는 사내의 방이었다.
물론 귀족 중에는 바깥 예법에만 신경을 쓰지, 자신이 머무는 공간에는 일절 신경도 쓰지 않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줬다.
이 시대의 귀족들이란, 특히나 명문가의 사람들이란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 저 망나니놈······ 아니 리히트가 제가 잔 이부자리 하나 정리하지 않고 방을 돼지우리로 만드는 건 당연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후우··· 하루이틀입니까?"
여인은 저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했다.
평소에도 엉망진창이었던 침소인데, 며칠 전 어릴 때부터 혼약이 오고가던 에르튼 가의 영애에게 완전히 거절당한 참이니 오죽하랴.
아마 이 문을 열면, 눈을 씻고 싶은 끔찍한 광경과 코를 틀어막고 싶은 악취가 풍겨올 것이다.
할 수 있다.
이까짓 일쯤은, 변소에 숨어 훤히 드러난 서혜부를 노리고 또 때로는 골아떨어진 악덕 영주의 멱을 따던 때에 비하면 할만했다.
ㅡ끼익.
주인이 자리하고 있을 때야 노크를 하고 충분히 기다려주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실눈에 가깝던 눈초리가 일순 커졌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깔끔했다.
술병? 있긴 했다. 저기,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 일렬로 나란히 세워서.
아마 남아 있는 술이 있다 해도 금방 증발해서 냄새마저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창문까지 빼꼼 열려 있으니 더더욱.
이부자리? 무슨 용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잘 개어져 있었다. 아니, 돌돌 말은 건가? 배낭에라도 넣으려고?
잠옷은, 허어. 이건 더 가관이었다. 마치 귀한 옷 한 번 입어보지 않은 것처럼, 옷걸이에 조심스럽게 걸려 있었다.
"······."
자신이 해도,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 깔끔하게 정리된 광경에 시델은 할 말을 잃었다.
물론 그녀가 했다면 지금과 같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을' 상태와는 다르게 정리를 했겠지만, 그 점은 차치하고 생각하더라도 지나치게 깔끔했다.
뚜벅뚜벅 걸어간 여인은 창가에 있던 병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솟구치는 열병 21년산]
자신의 봉급보다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서민 기준으로는 한 달을 꼬박 일한 급료보다도 비싼 술이자 그 도수만 해도 자그마치 60도에 달하는 독주였다.
물론 이 또한 창관 제일의 미녀인 앙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주머니를 턴 것이요. 필시 그러고도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한, 덤터기의 산 증거물쯤 되겠지만······
'독주는 역시 독(毒)이라 이건가?'
그 망나니 도련님이 하루아침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건, 이 독주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왜, 죽었다 깨어나면 사람이 바뀐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별의 아픔······ 아니 0고백 1차임의 아픔이 켜켜이 쌓여, 홧김에 들이킨 독주가 리히트의 성정을 변화시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잠깐 반짝하고 마는 일시적인 변화일 수도 있지만
진작 음식에 독 좀 흘려볼 걸 그랬나? 유능하고 충직한 메이드 시델은 감은 듯한 눈을 한 번 찌푸리곤 술병을 수거했다.
어쩌면 이 술 역시도 외상으로 달아두었을지 모를 일.
직접 산 것보다도 많은 수량으로 바가지가 씌여 '우에엥, 시델.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앙쥬, 그녀가 내게 바가지를 씌울 리 없잖아! 하지만, 하지만 이 돈은······!' 라며 치맛단을 붙잡고 늘어질지도 모르는 법이다.
물론 리히트가 그렇게 울며 매달리는 일은, 그의 나이가 한참이나 더 어렸을 때 이후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휴······ 도련님, 도련님은 참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분입니다. 제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사람 구실을 하고 사셨겠습니까?"
아차 싶었는지 여인은 제 입을 살며시 가렸다.
사람 구실을 한 적이 없는데 사람 구실이라니. 너무 충격적인 광경을 마주한 탓에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것 같다.
주인 없는 침소를 빠져나가는 메이드였다.
***
'아카데미라······.'
리히트는 마차에 몸을 실은 채 지난날을 회상했다.
2회차, 그러니까 검성 리카온 시절에는 아카데미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유수의 아카데미들.
그곳에서 교육 과정을 훌륭히 수료한 이들 중에는 소위 말하는 천재라고 하는 작자들이 여럿 있었다.
당장 은섬(銀閃) 마르실만 해도 출신 아카데미를 초스피드로 수료했다고 했다.
월반에 월반을 거듭한 끝에, 남들은 수년 이상을 다니고도 졸업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 시간을 그녀는 그 반의 반의 반 만에 돌파했다나?
-그때, <미칼레> 마탑에서 장학금을 약속했었거든. 그곳에서만 배울 수 있는 마법들도 여럿 있었고. 그래서 그냥 졸업해버렸지 뭐. 사실 아카데미 수준이야 거기서 거기잖아?
ㅡ라고 하는 천재들 특유의 재수 없는, 아니 이해할 수 없는 명대사를 날려주기도 했다.
지금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으려나? 어디에 있든 건강하게만 있어주면 좋을 것이다. 가급적 그녀와는 다시 파티를 맺고 싶으니까.
'물론 정확히 과거로 돌아왔으며, 사람과 사건들 모두 롤백 됐다는 전제 요건이 성립되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개똥같은 불합리한 세상에 있음을 잊지 않는 리히트였다.
- 도련님.
그때, 창문 옆에 붙어있던 붉은 색의 조그만 광석이 빛을 발했다. 통신구··· 아니 통신석인 듯했다.
아마 마부석쪽과 연결된 장치일 터.
"말해."
-저희가 가는 방향에 에르튼 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있습니다만.
사내의 목소리에는 미미한 우려와 초조함이 뒤섞여 있었다.
'알겠어? 에리아가 타고 있는 마차가 보이면 무조건 따라붙어! 바로 옆에서 창만 내려도 이야기가 되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아니, 티 안 나게 붙으란 말이야! 멍청한 놈, 또 한 번 제대로 못하면 네놈은 마부 자리조차 잃을 줄 알아라!'
머릿속에서 강제로 재생되는 지난날의 기억이었다.
어쩜 이리도 찌질할까······ 순식간에 낯이 뜨거워졌다. 크흠, 헛기침을 한 후에 건조하게 답했다.
"그렇군, 그럼 속도를 높이도록 하지."
-아······
난처함이 어린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말뜻을 오해했나 본데.
"속도를 높여서 에르튼을 추월하도록."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명문 중의 명문인 우리 크라프슈타인이 에르튼보다 뒤에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하지. 아니, 아버지께 간언해 제발 우리 스스로의 위치와 수준을 명확히 하자 말씀드리겠네."
-아, 아, 아··· 아닙니다! 도련님! 잠시, 마차가 흔들릴 수 있으니 미리 사죄를 구하겠습니다!
통신이 끊어지는 소리의 직후, 다급하게 말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두드리는 그의 몸짓이 느껴졌다.
리히트는 그제야 안심하고서 시트에 몸을 푸욱 기대었다.
흔들리긴 뭘. 편안하기만 하구만.
과연 명문가의 마차인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확실히. 돈이 좋긴 좋아.
리히트는 3회차의 막대한 부와 재력에 감탄하며 잠시 눈을 붙였다.
***
따스한 봄에 피어난 꽃과 같이, 포근한 노란빛과 황금빛 사이의 색이 덧칠된 마차였다.
색의 좌우에는 하얀 색으로 물감을 찍듯 포인트를 주었으니 어느 가문과는 그 색이 정반대로 배합이 된 듯 했다.
꽃봉오리의 사이를 뚫고 기다랗게 솟아있는 레이피어 문양이 인상적인 가문, 에르튼의 마차 안이었다.
가문의 색 만큼이나 화사하고 따스한 긴 금발을 자랑하는 여인 에리아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얼마 전, 사람들이 다 보는 가운데서 리히트가 '또 한 번' 구애했다.
말이 좋아 구애이지, 그건 실상 치근덕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여기저기 용모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학생들 모두에게 제 아이를 낳아줄 것을 요구하는 그가 아니던가.
그것뿐이면 차라리 다행일 터.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로 그는 여기저기에서 거절당했다.
호색한 중의 호색한이요. 가문에서도 내놓은 자식 취급받는다는 소문이 있는 망나니인데 오죽하랴.
개중 최악은 도시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창관에 드나든다는 소문이었다. 몇 번이고 들려오는 걸 보면 필시 사실이리라.
잡티 하나 없이 고운 얼굴에 시름이 깃들었다.
-아가씨, 그 놈팽······ 아니 크라프슈타인입니다. 따라붙고 있는데 어찌 할까요?
드래곤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정말이지, 명문가의 귀족이라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하자가 많은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죠······ 늘 하던 대로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하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얼마 전의 매몰찬 거절 역시, 자신이 아닌 제 절친이 해주지 않았던가.
마차는 자연스레 속도를 늦췄다. 저쪽에서 저리 빨리 다가오고 있다는데, 이쪽도 전력으로 말을 몰면 그건 너무도 가혹한 일일 것이다.
-어, 어어······?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창문으로 무언가 쌩하니 지나갔다. 적지 않은 진동으로 보아 그 속력이 대단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가씨. 저, 저놈. 아니 리히트 님은······ 가, 가셨는데요?
당황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당황한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왜요? 호, 혹시 절 못봤다거나······"
-그렇지만, 누가 에르튼 가의 문양을 몰라볼 수 있겠습니까 아가씨. 특히나 저 놈팽이는 하루이틀 난리를 친 것도 아닌데.
"···그··· 그렇···죠. 네에······"
그럼 대체 왜?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들을 지나쳐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4화 전에 알던 나 아님. 진짜 아님.
-작은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통신석 너머로 조금 들뜬 듯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라면 왜 에르튼의 마차에 자연스럽게 따라붙지 못했느냐고, 네 마차 모는 솜씨는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느냐고 별의별 욕을 먹었을 터.
그에 비해 오늘은 별다른 말조차 걸어오지 않았으니, 그로서는 지금의 시간이 꿈만 같았던 탓이리라.
"수고했다."
짧은 말을 내뱉자, 재깍 달려온 그가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휴대용이기라도 한 것인지, 짧은 층계로 이루어진 발판을 딛고 내려서자 으리으리한 자태의 '성'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위비아스 아카데미.
대륙 5대 아카데미 중 하나이자, 온갖 종류의 수업을 뛰어난 교육진들이 열정적으로 가르치기로 정평이 난 곳.
이 세상 최고의 아카데미가 어느 곳이냐 하는 물음에는 저마다 답을 달리할 수 있지만, 가장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곳을 꼽으라 하면 열에 여덟은 위비아스 아카데미를 꼽는다 했다.
'명문은 명문이구만.'
실상, 이곳은 아카데미 등록금만 해도 어지간한 평민이 평생 버는 돈과 맞먹을 만큼의 액수를 자랑했다.
그만큼의 돈을 학생으로부터 받고, 또 황실을 비롯해 이곳저곳에서 막대한 후원을 받는다.
그러니 강사를 비롯해 교육의 질이 높을 수밖에.
물론, 완전히 돈벌레와 같은 곳은 아닌 것이 '실력있고 재능있는 이들은 장학생으로-'와 같은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 곳이다.
어떤 의미로 보자면, 등록금이라고 하는 것은 '이만큼의 돈을 낼 능력이 있느냐? 최소한 그 정도의 열과 성의. 혹은 타고난 자질과 뒷배경을 증명해 보아라.'라고 하는 일차적 관문.
그 이면에는 설령 돈이 부족하다 할지언정, 그 모든 걸 뛰어넘는 재능을 보이면 우리는 학생으로 삼아주겠다······
'그러니, 우리 아카데미 출신으로서 대륙에 이름을 떨치도록-.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거겠지. 망할 금수저에 재능충 놈들.'
리히트는 지난날 입학하지 못한 설움을 주머니 사정과 타고난 배경으로 퉁치며 씁쓸함을 달랬다.
아카데미의 입구에는 크라프슈타인 가의 마차 말고도 여러 마차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마치 저쪽 세계의 고급 백화점 입구처럼 한 대가 들어오고 사람이 내리면, 또 한 대가 들어와 사람이 내리는 식의 반복이었다.
이는 그 어떤 명문가의 자제여도, 아카데미의 문을 지나는 순간 학칙과 내부 규율로만 평가하겠다는 그들의 무언의 메시지였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에르튼인지 에로탄인지 하는 마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 따라붙을 시간이 안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황급히 성 내로 들어섰다. 묘하게 뒤에 있는 마차의 속도가 빨라진 듯했다.
***
스스로의 기억이 아닌, 누군가의 기억이 현실에 덧씌워지는 감각은 썩 유쾌한 게 아니었다.
분명 보아온 익숙한 광경인데도 낯설었고, 처음 보는 것인데도 익숙했다.
높게 솟아오른 첨탑. 벽돌을 촘촘하게 쌓아올린 석조식 건물. 의미를 알 수 없는 동물과 천사가 뛰어노는 듯한 조각상과 그 아래의 분수대 등.
진흙에 발이 푹푹 빠져 가며 했던 용병 생활과, 이곳 위비아스 아카데미는 한 대륙 위에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풍경이 판이하게 달랐다.
하긴, 애당초 <힐델라나>가 똥겜인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 불명확한 컨셉성에 있었다.
중세라면 아예 확실히 중세를 할 것이고, 근현대라면 아예 확실히 근현대를 할 것이지.
당최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힐델라나>는 각기 직업군과 진영을 선택하는 것에 따라, 캐릭터가 겪을 생활 전반이 달라졌다.
어디에서는 감자와 옥수수를 개밥처럼 섞어 만든 스튜가 주식이요. 또 어딘가에서는 고급 와인과 치즈, 리조또와 같은 것이 캐릭터가 하는 식사이자, HP 회복의 수단이 되어 주었다.
그나마 이건 검성 리카온 때보다는 나은 것이려나?
사냥꾼의 아들로서 있을 때는 식사가 다 고만고만했다.
[노루 고기의 뒷다리 X2]
-식용으로 키운 것이 아니기에 잡내가 심하게 난다. 자칫 익히지 않고 먹었다간 높은 확률로 상태이상 '배탈'에 걸릴 수 있으니 주의.
아마, 핸드폰으로 보고 있었다면 이와 같은 메시지가 뜨지 않았을까.
힐끔 고개를 돌리니, 아카데미의 재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개중 여학생 몇 명은 손에 자그마한 사탕 같은 것을 들고선 입에 물고 있었다.
누군 그 나이대에 퍽퍽하기 짝이 없는 돌멩이······ 아니 건빵이나 씹고 있었는데-. 리히트는 잠시 이를 악물었다가 곧 고개를 내저었다.
상당히 불친절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두 번째? 세번째? 기회를 얻은 셈이 아니던가. 이번에야말로 마왕놈의 뚝배기를 깨고서 집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더욱이.
이전에는 없던 재능마저 잠들어 있지 않나. 무려 '그' 크라프슈타인의 혈육이라니. 슬쩍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상태창.'
반투명한 푸른 홀로그램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리히트 크라프슈타인」
: 상태 ㅡ 회로 불통(不通), 주독(酒毒)
: 특성 ㅡ 둔재, 망나니, 호색한, 회귀자(現)
: 히든 특성 ㅡ 불굴, 검성, 용사(前)
: 스킬 ㅡ 권위, 예법, 빛 마법(封), 열 마법(封)
: 히든 스킬 ㅡ 용병 검술, 리카온류(流) 검식, 웨폰 마스터리, 기민한 움직임, 손재주, 요리, 야영
<중략>
.
.
.
[···동조율 7%···]
'나쁘지 않군.'
두 번째 감상이었다.
이 몸으로 깨어난 이후, 삼일 동안 파악한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에 비해 동조율이 조금 올라갔다는 정도?
아마 리히트가 나고 자라며 만났던 이들, 혹은 이 몸뚱이로 했던 일을 반복해서 조우하고 직접 행하게 될수록 동조율이 올라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선 그건 차후에 생각하기로 했다.
'흐음······ 역시나 2회차에 익혔던 것들은 히든으로 분류되나.'
검성이었던 것은 리카온이지, 리히트가 아니다. 그 몸으로 살아온 '경험'들이 하늘로 솟아버리거나 땅으로 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육신에 깃들어 있지는 않았다.
깃들어 있는 것은 육신이 아닌 혼에 담긴 '격'.
다시 이전과 같은 수련을 하면 할수록, 히든에 속했던 것들이 점차 해금이 되며 손발처럼 자유로이 다룰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스킬'로서 사용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우습게도 이 <힐델라나>는 스킬을 얻는 루트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특정 퀘스트를 수행하거나 스킬북의 구입 내지는 전직을 하면서 자연스레 얻는 경우.
다른 하나는 반복된 행동과 조건하에 생성되는 경우.
결과적으로는 같은 값을 재현해낼지언정, 후자의 방법으로 얻을 때는 여러 '제한'들이 줄어 있었다.
가령, 쿨타임이 대폭 줄어든다든지. 데미지 계산이 곱절로 된다든지 등.
그 왜,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대중 게임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저 키보드 자판에 있는 키를 눌러서 공격을 할 때와, 그걸 커맨드로서 사용할 때는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결국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서면, 그 미묘한 차이가 커다란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내곤 했다.
<힐델라나>는 똥겜이면서도 그런 건 또 기가 막히게 잘 가져다 썼다.
ㅡ스윽.
리히트는 천천히 제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가만히 몸을 관조하니 「회로 불통(不通)」이 무얼 의미하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애당초 눈으로 보여주기도 했지만.
ㅡ「회로 불통(不通)」ㅡ
: 신체 내부의 혈맥과 마나 회로 등이 막혀 있는 상태.
마나서클 또는 단전을 생성하는 난이도가 극악에 이르게 되어, 마법사는 마나를 다루기 어렵고, 기사와 무인은 오러나 기를 다루기 어렵다.
ㅡ
어째서 리히트가 마법 명문가의 자식이면서도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어째서 망나니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배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 세상에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다하면, 리히트 크라프슈타인의 경우에는 하늘이 벌한 재능이나 다름없었다.
마냥 벌은 또 아닌가?
리카온 시절에 만난 용병왕 칼렌바흐가 이르길,
- 크하하학, 날 때부터 이렇게 덩치가 컸냐고? 그럴 리가! 이봐, 검성. 나는 말이야. 일족 중 가장 허약하고 말라비틀어진 놈이었다. 그때는 이 몸뚱이가 저주를 받은 줄로만 알았지.
성인 장정보다 머리가 두어 개는 더 큰 크기에 흡사 거북이를 연상시키는 등의 사내였다.
거대한 나무조차 일격에 쪼개어 버릴 것 같은 큼지막한 도끼를 등에 멘 그는 화롯불에 장작을 집어넣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대로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 여겼다. 하여, 일족의 금지에 발을 들였지. 그곳은 마경(魔境)과 연결된 곳의 초입이었어. 나는 그곳에서 웬 고블린 주술사 놈을 만났다. 사람의 말을 할 줄 알던 놈은 이것도 인연이라며 내 몸 여기저기에 커다란 장침을 찔러 넣었어. 운이 좋으면 살 수도 있을 거라면서 말이야.
그는 당시가 떠오르는지 그 큰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침이 살가죽을 뚫고 앞면에서 뒷면으로 나왔다나 어쨌다나?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 다시 재조립되는 것 같았지. 그 이후, 나는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 지금과 같은 힘을 손에 넣었단 건 아니야. 그때부터는 이전까지와 달리, 수련을 해도 확실히 돌아오는 게 생기기 시작했을 뿐이니까.
그 괴상한 고블린이 당최 뭘 하던 놈인지는 원정이 끝날 때까지도 알 수 없었다.
칼렌바흐는 '그냥 하도 인간을 죽이다 보니 정신이 나가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라며 그에 관한 이야기를 일축했다.
하긴, 약한 시절의 이야기를 떠들어 보아야 무엇이 그리 재미있겠는가.
여하튼······
'실패하면 둔재 쓰레기, 성공하면 천재 마법사다.'
모름지기 모든 일이란 바라보기 나름이고 이용하기 나름이었다. 3회차는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 보아야 할 터였다.
"허, 또 무슨 되먹지도 않은 말을 하려고 그러고 있나. 우리 크라프슈타인의 발정난 똥개 씨?"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일찍이 기억 속에 있는 두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쪽은 고개를 숙인 채로 이쪽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는 금발머리의 여인이었고, 다른 한 쪽은 주황빛 머리칼의 말괄량이 같은 여인이었다.
"본가에서 개는 따로 키우지 않는다만. 아, 사냥용 개라면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녀석들은 그렇게 폄하해도 좋을 동물이 아니다. 짐승이긴 하나, 엄연히 쓸모있는 짐승이지."
주황빛 머리칼의 여인 셀레아 티로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조금도 모르겠거든? 나는, 네가 또 애먼 여학생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걸 말한 거야. 왜, 어디 음유시인에게 가슴 절절한 이야기라도 돈 주고 샀나봐?"
이죽이는 여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
조금 전, 육체의 내부를 살필 때 그 앞을 지나가던 여학생 두 명이 이쪽을 바라보며 주춤거리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침과 동시에 한 명은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꿀꺽 침을 삼키곤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재빨리 달아났다.
그제야, 가슴께에 올리고 있던 손이 느껴졌다.
스르륵···
다시 고개를 돌리니 이번에는 에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저··· 리히트 씨는······ 저, 정말···. 아, 아무에게나 사랑을 속삭이시는 건···가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직 숙취가 남아있는 것일까. 지끈거리며 머리가 아파왔다.
5화 시초의 피
"그럴 리가."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외치려는 생각은 없다.
이곳 위비아스 아카데미야, 학창 시절의 추억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쌓을지 몰라도 다른 곳에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이 있다.
검성이던 시절, 아니 용병단의 말단으로 구를 때에는 이 지랄맞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에 주안점을 맞췄었다.
연애? 사랑?
눈 먼 칼에 맞아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물론, 그렇다고 한낱 싸구려 창관에서 쌈짓돈 몇 장에 교태를 부리는 가벼운 사랑을 속삭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대한민국의 신체 건장한 남성일 시절에는, 남들 다 하는 연애 한번 해보고 싶은 사소한 소망도 있었지 않나.
마치 영혼에 아로새겨진 듯한 가치관은, 몇 번을 다시 태어나고 죽는다 해도 그리 쉬이 바뀔 무언가는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게 가장 맞을지도 모르겠군.'
전신혁. 리카온. 그리고 이번의 리히트 크라프슈타인.
세 번의 삶 중,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여유'로운 것은 이번의 3회차였다. 망나니면 어떻고, 마법적 소양이 부족하면 어떤가. 금수저인데.
팍팍하기만 했던 지난 여정에 비해, 어쩌면 이번 삶에선 적당히 주변과 교류하면서 또 실력도 쌓는 그런 요령 좋은 인생을······
"저, 저, 싸가지 없는 놈. 사람 말을 아주 그냥 귓등으로도 안듣네."
"세··· 셀레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심한 말은 하, 하지 말아요."
아차, 아무래도 상념에 너무 젖어 들었던 듯했다.
적당히 답을 해주면 될 것이라 여기고 곧바로 발걸음을 돌린 게 문제였다. 연신 뒤에서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꼬리표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심한 말이 안 나오게 생겼어? 저놈의 행실 문제가 어디 하루이틀 일이냐고. 혼담이 결렬되는 듯하니 곧바로 또 저렇게 망나니짓을 하려 드는데!"
셀레아의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머릿속을 뒤적거리니 그녀와 에리아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절친하게 지냈던 사이라는 게 떠올랐다.
상황을 보면 절친이라고 하기보다는, 일종의 보호자 행세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 왜, 어릴 적 교실을 살펴보면 꼭 예쁜 애 옆에 그보다는 조금 못한 애가 철통 수비를 하는 광경을 많이 볼 수 있지 않던가.
'어쩌면 이 특성의 영향일지도 모르고.'
힐끔 눈을 굴려, 스탯창에 떠 있던 하나를 주의 깊게 바라보자 홀로그램 창이 변화했다.
ㅡ「망나니」ㅡ
: 과거, 제국을 호령했던 폭군 내지는 대륙 정벌자들이 가지고 있던 특성.
심적으로 먼 거리에 있는 관계일수록, 특성 보유자의 언행을 고깝게 여기게 되며, 신뢰를 얻기 어렵다.
특성 보유자에게 호감이 생길시, 작은 행동에도 큰 감동을 받기 쉽다.
ㅡ
쉽게 생각해서, 이쪽은 무슨 말과 행동을 해도 금쪽이처럼 내비치기 십상이라는 말이었다.
이쪽 세상에 처음 떨어졌을 때 이와 같은 특성을 받았다면, 금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은 3회차였다.
애당초 셀레아와 같은 경우를 제하고 생각해도 그렇다.
사람은 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마련이다.
인류를 대신해, 고명하고 밥그릇을 지키기에 바쁜 이들을 대신해 마왕을 물리치겠다 뜻을 품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돌아가고 싶다'라고 하는 개인적 욕망도 적지 않았으나, 일단 대의명분은 그러했다.
적어도 스스로 돌이켜볼 때, 검성 시절에 결코 적지 않은 생명을 구해냈다 단언할 수 있었다.
호흡 한 번에 들판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던 머리 셋 달린 마수, 날개 폭풍으로 사람들이 피땀 흘려 지어놓은 집을 부수는 걸 취미로 삼던 와이번, 물자를 가득 실은 범선과 상선만 보면 정신을 못차리고 심해로 끌고 가려던 거대 크라켄 등.
그 마물들과는 파티의 진로에 겹쳐 마주치기도 했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에 일부러 길을 크게 우회해 놈들을 치러 가기도 했다.
높게 쳐든 검성의 검이 흡사 벼락이 내리꽂히듯 크라켄의 미간을 꿰뚫었을 때, 뒤이어 바다 전체를 울리는 듯 은섬 마르실의 뇌격이 몰아쳤다.
그때 그녀가 이르길,
-리카온. 사람들을 돕는 것도 좋지만 이제 슬슬 적당히 하는 게 어때? 지난 번에 케르베로스를 잡았을 때만 해도 봐. 네 선의에 고마워하긴커녕, 화염 내성 장비를 못 팔게 됐다며 상인 조합에서 항의했었잖아.
미칼레 마탑의 총아였던 마르실은 인간의 추악한 면을 못 견뎌 할 때가 많았다.
애당초 그녀가 용사 파티의 일원으로 자원했던 건, 마족 놈들이 마법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 으스대는 꼴이 보기 싫다는 농담 섞인 이유도 없잖아 있었으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놈들이 하는 건, 저보다 타고난 능력이 부족한 인간을 상대로 쾌락 살인을 저지르는 것뿐이면서 인간을 같잖게 여기는 게 눈꼴시렵다나?
그런 것치고는 기초적인 회복 마법도 익혔던 그녀였지만, 그 점에 대해선 캐묻지 않았다. 누구나 개인적인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
여하튼, 완전히 이타적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욕을 들어먹기 쉬운 시대요. 세상이었다.
이 「망나니」라고 하는 특성은 오히려 이쪽을 말과 행동의 제약에서 풀려날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녀석이리라.
리히트는 아직도 자신을 따라오며 쏘아대는 여인을 돌아보았다.
"셀레아, 어떤 생각을 하건 그건 네 자유와 권리다. 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생각을 자유로이 품을 권리가 있지."
귀족 중의 귀족. 크라프슈타인의 차남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평민이 말했다면 불경죄에 해당하겠으나 귀족이 저 스스로 내뱉는 말이기에 이를 욕하거나 단죄할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귀족인 에르튼가의 영애 에리아는, 그저 눈을 꿈뻑거리며 그의 말을 홀린 듯이 듣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너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해주듯, 너 또한 나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해주었으면 좋겠군."
우뚝 멈춰선 사내였다.
태양빛이 부서져 내리는 가운데, 태양만큼이나 찬란한 백금발의 머리칼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떡 벌어진 어깨는 당최 저게 어딜 봐서 마법 명문가의 자식이란 말인가? 와 같은 소리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가늘게 뜬 짙은 금안이 담담히 셀레아를 직시하고 있었다.
여인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곤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궈······ 권리?"
"마법 수업을 들을 권리."
미묘하게 입꼬리를 끌어오리며 답하는 사내의 말에, 두 여인은 어안이 벙벙해져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애당초 대답은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 리히트는 일말의 미련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뭐··· 뭔데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조금 전까지 앙칼지게 쏘아붙이던 여인은 넋이 나간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기세에 압도되었다는 사실에 얼굴을 찌푸릴 법도 하건만, 마치 가문의 오래된 집사장에게 혼쭐이 났을 때처럼 뻐끔뻐끔 입을 열었다 닫기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나마 툴툴거린 것은 그녀 나름의 소심한 반항이었으리라.
힘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을 털어낸 셀레아였다.
으레 그렇듯, 여자아이들은 혼자보다는 둘이. 둘보단 셋이 하나의 의견으로 통합될 때······ 그러니까 공동의 적을 만들 때 화합이 도모됐다.
"에리아, 저놈 역시 머리가 맛이 간 게 분명해. 그렇지않고선 저렇게 물 흐르듯 말할 리가 없잖아?"
제 친구가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 셀레아는 손바닥을 펼쳐 답을 막고선 미간을 찌푸리며 고심했다.
떠오르지 않는 답을 떠올리는 듯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답을 쥐어짰다.
"아니. 아니야. 으으음, 혹시 이번에는 성실한 학생 컨셉을 잡은 게 아닐까? 그 왜, 저 녀석 하몬을 질투했었잖아. 성적도 좋은데 얼굴까지 잘생겨 인기가 많다고. 겉거죽과 돈만으로는 안 되니까 이번에는 연기를 곁들인 것일지도 몰라."
저도 모르게 그의 외모를 높게 쳐주고 있음은 모르는 여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의 친구는 그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에리아, 에리아?"
"으응? 으으응······."
또 하나의 귀족 중의 귀족.
에르튼가의 영애 에리아는, 그저 제게는 조금의 관심도 없다는 양 멀찍이 앞서 사라지는 사내의 등을 오래도록 바라볼 뿐이었다.
***
배움이라는 것은 늘 즐거웠다.
아니, 정정하겠다. 늘 즐겁지는 않았다. 사냥 기술을 배우거나, 그 솜씨를 정교하게 높여가는 과정을 분명 즐거웠다.
하지만 용병단의 막내로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
이를테면 똥간의 똥물을 퍼낸다던가, 장비를 자급자족하는 방법이라며 블랙 보어의 거죽으로 무두질을 할 때라던가, 보급용 무기에 기름 손질을 하는 것 등.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닌, 그저 '노동'으로서의 배움은 그다지 즐거운 기억은 아니었다.
물론 그 덕분으로.
스킬 「손재주」를 얻을 수 있었고- 사실 이 녀석이, 생활 전반 뿐 아니라 '손에 쥘 수 있는' 무기를 사용하는 데에도 뛰어난 보정 효과를 준다는 점을 알았을 땐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몸을 굴리지 않고서도 배울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성장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걸 선호하는 게 정상이지.'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던 용병시절이었다.
도로록 눈을 굴리니, 단상 앞에 선 외안경의 사내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수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마법의 기초를 뗄 때에는, 태양의 힘을 육체로 받는 것과 달의 힘을 받는 것, 혹은 자연에 퍼져 있는 마나를 흡수하는 것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가장 흔히 차용하는 방법이죠."
교수의 수업에 학생 한 명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교수님, 세 번째 방법을 가장 많이 차용하는 건 압니다만 앞의 두 가지를 사용하는 건 어떤 경우인가요? 아니,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어요?"
척 보아도 학구열이 대단한 학생이었다. 어쩌면 그저,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를 동경하는 어린애의 심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질문에 사내는 빙긋 웃었다. 어쩐지 한 순간 시선이 마주친 듯 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사실 시초에는 오직 두 부류의 마법사밖에 없었습니다. 태양의 힘을 빌어오는 이를 마법사, 달의 힘을 빌어오는 이를 마녀라 불렀지요. 이 세상에 오직 둘밖에 없는 거대한 물질이자 이 땅의 바깥에서 늘 우리 곁을 맴도는 두 개의 별. 그들과 혼이 연결된 이들은 강력한 마법을 발휘했습니다."
사내는 손을 펼쳐 보였다.
그 위로 마력이 모여들더니,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의 구와 시린 냉기를 흘리는 얼음의 구가 각기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대립했습니다. 어쩌면 성격적으로 맞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요. 후후."
잠시 역사 강의가 이어졌다.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대립한 이유라던가, 점차 많은 마법사와 마녀가 죽어나감에도 살아남는 이들은 더욱 강력한 힘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든가, 마족과 인간은 마나의 근간 자체가 다르다던가 하는 이야기들.
슬슬 그의 이야기를 따라잡지 못해 아이들이 흐리멍덩한 눈을 할 무렵, 그는 자연스레 화두를 돌렸다.
"ㅡ그 결과, 이 대륙 위. 진정한 시초 마법사의 피는 오직 한 곳에만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크라프슈타인 가문이죠."
나긋한 어조와는 달리 한순간 얼어붙는 분위기였다.
졸던 아이들까지 주변의 분위기에 흠칫 놀라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곧,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해 쏟아졌다.
어쩐지, 빛과 열 마법이 봉인 상태로 있더라.
정작 시선을 받고 있는 당사자 리히트는 교수의 강의내용만을 곱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