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거세
거목들이 높이 솟아오른 숲 한가운데.
척 보아도 건강미가 물씬 풍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물의 가죽에 식물 줄기 따위를 엮어 몸에 덧대 입었는데, 외피로 사용하는 털들은 하나같이 강인함을 자랑하는 육식 동물이었다.
돌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나무 지푸라기 등을 엮어 지붕으로 삼은 듯한 집이 몇 채, 대충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집들이 또 여럿.
이곳은 야만인들이 사는 '타이바르' 마을이었다.
"오드, 오드는 어디에 있나!"
아무렇게나 길게 늘어뜨린 머리에 우락부락한 덩치. 덥수룩한 수염을 지닌 사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생전 처음 그를 만나는 이가 앞에 있었다면 그 목소리만 듣고서도 실금을 지릴 듯한 기개가 어려 있었다.
"그··· 족장, 숏소오드는 지금 수, 수련 중이다."
사내의 외침에 사냥감을 해체중이던 다른 이가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피칠갑이 된 손으로 얼굴을 긁어대니 이 또한 괴기스러운 광경이었다.
"뭐라! 또!"
"진정 일족을 생각한다면··· 어, 뭐라고 했더라?"
"나를 방해하지 마라."
"나를 방해하지 마라."
합이라도 맞춘 듯이 두 사내가 동시에 답했다.
"오오···! 맞다, 역시 족장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그 말이었다!"
불끈, 주먹을 쥐며 답한 이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손에 들려져 있던 내장이 터져 나가며 누런 이에 더욱 싯누런 액체가 튀었다.
그는 곧 미묘한 인상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오드 이 자식··· 아비의 말을 뭘로 아는 게냐!"
제 앞의 사내가 부패 직전의 내장을 날것으로 섭취했음에도 이를 개의치 않은 족장이었다.
그는 사람 몸통만 한 커다란 양날의 도끼를 들고서 성큼성큼 걸었다.
아들을 만나러 가는 모습치고는 다소 과격하기 그지없었다.
***
일족의 전사들이 잘 찾지 않는 외진 장소.
주변으로는 잔잔한 잔디 따위 밖에 있지 않아, 그 흔한 초식동물조차도 발길을 꺼리는 곳이었다.
당연히, 초식동물이 없다 보니 육식동물 또한 있을 리 만무했다. 즉,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야만인들이 올 리 없는 공간이었다.
- 부웅, 부웅!
그곳에서는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소년이, 두꺼운 나무 몽둥이를 들고서 눈을 감고 있었다.
양손으로 쥔 단단한 몽둥이를 천천히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다가, 눈을 번쩍 뜨며 일시에 내리쳤다.
다시 한번.
부웅!
"후우우···."
벌써 몇 번을 반복한 것인지 그의 온몸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분명 땀으로 축축하기에 불쾌하게 보여야 할 육체는, 오히려 완성된 음식의 끝을 장식하는 소스라도 되는 양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꽉 들어찬 근육, 단순히 부피만 큰 것이 아니라 속까지 알알이 들어찬 육체를 지닌 소년이었다.
통칭 '오드'.
풀네임인 '숏소오드'가 싫다며 제멋대로 바꾼 이름이었다.
"오늘치······ 다 했다."
최소 하루 일천 번.
이 개떡 같은 세계에서 살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 스스로 정한 룰이었다.
"이것도 하다 보니까 느네. 노력은 배신 안 한다고 하더니만. 장하다, 박거세!"
저쪽 세계에서의 이름은 박거세(巨勢).
시조를 존경해, 그분처럼 커다란 권세를 누리라며 아버지가 붙여주신 이름이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한국 땅에서는 누려보지 못한 권세······ 그러니까,
"오드···! 또 여기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
저 족장의 아들내미로 태어나는 권세를 누릴 수 있게 됐다.
개떡 같지. 음.
"아버지! 쓸데없는 짓이 아니다. 일족의 미래. 대비해야 한다."
"일족의 미래는 그렇게 몽둥이를 휘두른다고 대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릇, 전사란 사냥에 나가 커다란 야수와 맞서 싸우고 당당히 놈의 육체와 혼을 쟁취해내야 하는 법이다."
'베어칸'은 역시 족장의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단지 사냥이라는 단순무식한 행위를 육체와 혼을 쟁취하니 마니 하는 말을 덧붙이고 있었으니.
'오오··· 역시 족장이다! 어려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라든지, '숏쇼오드의 영민한 머리는 모두 족장의 덕인가!?' 라는 말들이 야만인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들려왔다.
아니, 그거 다 내가 해준 말이잖아.
사냥을 나가지 않으려는 게으른 놈들 훈계할 방법 알려 달라며.
"······."
"-라고 오드 네가 알려줬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슬쩍 꼬리를 내리는 사내였다.
이렇게 둘만 있을 때는 금방 숙이고 들어온다는 점이, 그의 뻔뻔함을 용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성좌, '9일간 나무에 매달린 자'가 전사는 조금 뻔뻔해도 된다고 합니다.]
'조금' 뻔뻔하지 않으니 문제지.
아니, 그보다 이 작자들은 왜 이리 전사에 대해서만 관대해?
"크흠, 흠. 오드, 전에 네가 말해준 것 말이다만."
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린 베어칸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족장의 체면이 있지. 제 아들에게 일족의 여러 문제를 조언받는다는 것은, 전사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문제였으나···
'이 놈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원로들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고 문제를 척척 풀어내곤 했지.'
- 아니, 고기를 왜 다 처먹는 거냐! 소금에 절여서 보관하면 겨울을 날 수 있다! 소금이··· 없다고? 그럼 불을 피울 때 연기를 쐬게 해라!
- 초식동물을 죄다 잡지 마라! 새끼는 놓아주고 놈들이 똥을 싸지른 곳을 살펴야 한다! 그곳들을 중심으로 열매가, 숲이 생겨날 거다!
- 상처가 났을 때는 고이지 않은 물을 찾아서 환부를 씻어라! 그렇게만 해도 족히 한 달은 더 살 수 있을 거다.
일족이 오래도록 고민한 문제들에 별다른 고민도 없이 해결책을 제시하던 게 제 아들 아니었던가.
고작 체면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것은, 족장으로서의 권위보다 소중했다.
아니. 어쩌면 그로 인해 제 권위를 지킬 수 있으니 '오드'가 이리 단독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전에 말해준 거라면······. 어, 뭐가 있었죠?"
오드 역시, 주변에 인기척이 없자 조금 편해진 말투로 답했다.
어차피 그와 자신의 사이에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유대감이 있었다.
마치, 일생일대의 품번을 공유하는 친우와 같달까.
"일족의 활동 반경을 넓혀야 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아아, 네. 확실히 그랬죠."
"그래. 마침 영주의 사자가 마을에 다녀갔었다. 곧 전쟁이 있을지 모르니 힘을 빌려 달라 하더군."
타이바르 마을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마을이었다.
하나 그것만으로 일족의 영위가 보장받는 것은 아니어서, 간간이 외부의 용병 의뢰를 받거나 길드의 퀘스트를 수주하는 등의 활동으로 마을 살림에 보태곤 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놈들은 우리에게 군량미를 넉넉히 나눠주겠다고 했다. 겨울이 찾아오기까지 배를 곯을 일을 없을 거라 자신하더구나."
[성좌, '9일간 나무에 매달린 자'가 오직 전쟁!을 외칩니다.]
[성좌, '외팔의 대표자'가 전쟁은 이긴 이가 곧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되는 일이라며, 은근슬쩍 당신의 의중을 떠봅니다.]
아, 저 미친 전쟁광들. 진짜.
물론 어지간한 경우의 전쟁이었다면 용병으로서의 참여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을 터.
이 세계의 야만족들은 으레 그렇듯 강인한 힘과 체력을 가지고 있어, 혈혈단신으로 적을 무찌르는 이들이라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근데 그것도 적당한 놈들을 상대로 할 때지.'
한 때 야생의 들판을 호령했던 녀석들이 날카로운 발톱과 치명적인 송곳니 하나 가지지 못한 인간에게 참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도구의 사용과 전략의 유무.
인간은 전략과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저보다 힘이 강한 존재들을 하나씩 물리쳐 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생태계의 정점에 이르지 않았던가.
같은 인간의 범주에서 보아도 이는 비슷하게 반복될 가능성이 얼마든 있었다.
비무장한 상태의 일반인이라면 일족의 전사들이 한 명당 족히 열 명쯤은 얼마든 뒤엎어 버릴 수 있을 터.
하지만 그게 무장을 한 일반 병사라면?
정규 훈련을 받은 기사생도라면?
영주 측근의 근위대라면?
그저 혈기와 힘만으로 어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뭐··· 물론 그 정도 수준의 기사가 이런 변두리 마을 근처에 있지는 않겠지만.
말이 좋아 전쟁이지, 실상은 그저 누가 더 많은 머릿수로 임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같은 값이라면 덩치가 더욱 커다란 놈들이 있을 때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 터.
아마 마을을 찾아온 영주의 사자 또한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음······."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아니나 다를까.
최고의 멘토가 은근슬쩍 제 의견을 표했다.
[성좌, '몸통 잃은 상담가'는 난색을 표하며 당신의 전쟁 참가를 우려합니다. 아직은 힘을 기를 때라며 첨언합니다.]
허공을 힐긋거리다 베어칸을 바라보는 오드였다.
"거절하세요."
"이유는?"
"아버지도 알다시피 놈들은 야만인을 개돼지병신똥멍청······ 아, 제가 그렇게 본다는 게 아니구요. 여하튼, 놈들은 우리를 정말 목 위로는 장식만 달고 다니는 놈들로 여긴다 이 말입니다."
삽시간에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베어칸이었다.
"아마 녀석들이 준다고 하는 군량미도 쥐가 파먹은 하급 중에서도 개똥하급품일 가능성이 높아요. '영주님, 아마 그 야만족 새끼들은 이것만 줘도 무릎을 꿇으며 영주님의 은혜를 칭송할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말했을걸요?"
무언가를 그러모아 쥐는 듯, 양손을 머리 높이까지 올린 채 몸소 시범을 보이는 오드였다.
베어칸은 제 아들의 머리통에 전사의 손망치를 내려찍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일족의 전사들은 싸우기를 좋아하니 선봉에 서려 할 테고, 그 영주의 사자라는 놈들도 이걸 알고 있을 테죠. 저쪽은 가만히 앉아서 제 전력을 온존하고 우리는 그깟 쥐 파먹은 군량미에 목숨 내어놓고. 그럼 누구 손해? 우리만 손해. 오케이?"
"무슨 말인지야 알겠다만. 놈들도 순순히 돌아가려 하지는 않을 텐데? 금번에 영주의 사자를 맡게 된 여인. 그녀의 출세욕이 대단하다 들었다만."
"대충 목소리 높이면서 둘 중 어느 진영에도 힘을 보태지 않겠다로 밀고 나가면 될 거예요. 그 말만 들어도 안심하고 돌아갈 테니까. 막말로 뭐, 그 자리에서 칼을 뽑겠어요. 뭘 하겠어요."
"음, 알겠다. 언제나처럼 네 말을 따르도록 하마."
미간을 좁힌 베어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렇듯, 원로들이나 일족의 중진들과 상의하기 전에 제 아들과 먼저 이야기를 하는 그였다.
실상 제 아들과도 상의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의견을 주입받는 쪽에 가까웠지만.
"그러고 보니 '레이야'가 널 찾더구나. 아마, 지난번의 승부에서 패한 것을 마음에 담아둔 것 같다. 한 번쯤 져주는 게 어떠냐."
"······아버지! 전사는 여자라고 봐주지 않는 법이다!"
"미친놈. 알았다. 나는 이만 가보마.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라. 소문에 불과하긴 하지만, 이 주변에서는 변이종이 간혹 보인다고 하니까."
베어칸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예엡."
다소 장난스러운 답이 들려왔다.
곧 제 할 일을 하겠다는 양, 둔탁한 무언가를 휘두르는 소리가 그의 귀갓길을 배웅해주고 있었다.
'···두 시간은 더 넘어야 돌아오겠군.'
아무리 생각해도 일족의 아이답지 않다는 생각에 고개를 내젓는 족장이었다.
2화. 강제징용 반대
아침이 밝아오면 눈을 뜬다.
배가 고프면 사냥을 나간다.
사냥에 성공하면 밥을 먹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배를 쫄쫄 굶게 된다.
힘이 세고 사냥을 잘하는 전사는, 응당 많은 암컷··· 아니, 여인들의 호감을 살 수밖에 없다.
그와 함께하면 배를 곯을 일은 없을 것이거니와 앞으로의 여생 또한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지극히 단순한 구조 속의 하루들.
이렇게 단조로운 하루만 반복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었다.
저쪽 세상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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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옥 씨 댁 되십니까? 안에 계시죠?
복잡한 세상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은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다.
부친은 제 얼굴을 뻔히 아는 사람들임에도, 자신은 그 사람이 아닌 그의 동생이라는 얄팍한 거짓을 취했더랬다.
일견 볼 때 복잡한 줄 알았던 수 싸움의 결과는 실로 명쾌했다.
「압류표
부산지방법원 집행관
이 압류물을 처분하거나 이 표시를 파손하는 자는 형법 제140조에 의거 5년 이하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 때 이해할 수 있었다.
커다란 권세를 누리라는 뜻은, 제 영역과 제 식구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라는(······) 아니, 아들놈이라도 그렇게 되어 달라는 염원이었다는 것을.
그런 말이 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또한 자식은 부모가 살아온 길을 다시 한번 걷는 존재라고.
- 박거세 님, 채권자 및 당사의 여러 차례의 변제촉구에도 불구하고 귀하의 채무금이 변제되지 않고 있어···
빚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한 소년이, 학생이 되고, 청년이 되고, 어엿한 한 사람의 직장인이 될 때까지.
담배?
사치다.
술?
잠깐 기쁠 순 있겠으나 그것이 오늘의 먹을 것과 다음 달의 월세를 내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웹소설은?
'이게 술이고, 치킨이고, 섹스지.'
요즈음의 웹소설 플랫폼들은 이벤트가 상당히 잘 되어 있다.
무료로 25화는 기본에 간혹 50화, 인기작들은 100화 무료 이벤트도 심심찮게 열어줬다.
뼈 빠지게 일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생활.
그러한 것을 이어가는 박거세에게도 한 줄기 희망이 되어 줬다는 말이다.
정말 가끔 큰 마음을 내어 마시는 대용량 캔맥주.
그것에 웃긴 웹소설 하나.
그것이 기쁨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적도 확실히 있긴 했었다.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된다는 걸 너무 일찍 깨달아 버렸다고 할까.
'소시민적인 삶이라도 살아보고 싶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걱정 안 해도 되는.'
매일 밤 했던 생각이었다.
"그래··· 매일 하긴 했는데."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오드는 골이 징징 울려오는 듯했다.
슬며시 눈을 떠 제 앞을 바라보았다.
중세에서는 심심치 않게 보는 금발이지만 개중에서도 머릿결이 좋은 이들은 흔치 않았다.
머릿결이 좋다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에 속했다.
하나는 환경을 씹어 먹는 강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거나 다른 하나는 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환경에 있다는 반증.
눈앞에 있는 금발의 여기사는 아마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리라.
"벌써 두 번째 방문이군요. 음, 지난번에는 뵙지 못한 분들도 계시니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본인은 까를레앙 남작님의 사자, '미첼' 입니다."
여인의 절제된 동작에 반응하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까를레앙?"
"들어봤다! 영주라고 했다!"
"매 끼니를 고기를 먹는 자!"
"오오오···!"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주변을 둘러싸는 상황.
이러한 상황에 겁먹지 않을 여인은 없었으나, 명색이 여기사였다.
그러지 않아도 여자에 대한 취급이 짐승보다 조금 나은 시대 아니던가.
그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아, 명예직인 '기사'에 봉해지려면 일신의 무력도 무력이거니와···.
"그렇습니다. 당신들에게 후한 보상을 내려줄 수 있는 분이시죠."
담대함 또한 기본으로 갖추어야 했다.
고개만을 까딱, 옆으로 돌려 자신을 향해 수군··· 아니, 수군거린다기에는 목소리가 컸다. 여하튼, 자신을 향해 웅성대는 이들을 향해 답을 내어준 여인이었다.
미첼은 샐쭉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 육체만큼이나 머리통도 근육으로 꽉꽉 들어찼을 게 뻔한 놈들이, 여기 타이바르 마을의 사람들이다.
야만인들은 그 신체능력에 있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발군의 재능을 지니고 있어, 한 명만 있어도 크나큰 전력이 된다.
개중에서도 특별하다고 하는 이들이 타이바르 마을 아니던가.
까를레앙 남작령에 있으면서도 조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니지 않은 채 자치구를 형성할 권리를 부여받은 이들.
과한 압력을 행사할 시에는, 죽음도 불사한 채 하나하나가 광인이 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이 마을에 존재하는 이들이었다.
'물론 그 역시······ 과거의 일에 불과하지만 말이죠.'
여인은 실리를 좇는 인물이었다.
다소 허무맹랑한 과거의 전설보다는 지금 당장 눈앞의 현실이 더 중요했다.
다른 영지와의 전쟁 분위기가 넘실거리는 지금. 이 마을에서의 전력 차출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급한 행위라는 것이다.
그 때 미첼의 앞으로 다른 전사보다 몸뚱아리 반 정도는 더 붙어 있는 듯한··· 흡사 곰과 같은 이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베어칸이다."
"그 때의 족장이군요. 어떻게···. 생각은 해보셨는지? 당연히 대답은 정해져 있겠죠?"
야망이 넘실거리는 눈동자가 가로로 휘어졌다.
"그렇다. 우리는 너희들의 제안을 거절하겠다."
"네, 그러실······. 뭐, 뭐라구요? 방금 뭐라고 했죠?"
"거절하겠다고 했다."
"무슨··· 왜, 왜요? 군량미를 나눠 주겠다니까요? 당신들은 사냥을 해서 먹을 것을 비축하잖아요! 아, 혹시 먹는 방법을 모르시나요? 그렇다면 알려 드리겠어요! 영지의 요리사를 초청해, 음식 만드는 법을-"
"거어어절한다아아아!"
미첼은 제 귀를 의심했다.
분명 수일 전까지만 해도 거의 다 넘어왔다는 분위기였다.
일족의 회의를 거쳐 보아야 한다는 둥 말을 하기는 했지만···.
'아니. 꼬맹이 놈들을 홀려 확인한 정보다. 이곳의 총책임자는 저 족장, 하나뿐이야. 이제 와서 결정이 번복될 만한 일은···'
그 때, 머릿속을 스치는 한 목소리.
- 타이바르 마을은 족장을 꾀려 해선 안 되네. 그보다는 그의 아들인 숏소오드를 설득해야 할 걸세.
남작령에서 가장 오래 일한 집사가 제게 그리 말해주지 않았던가.
나이를 먹어 실권에서 밀려난 지 오래된 인물이었다.
미첼은 빠르게 눈알을 굴렸다.
저 멀리, 야만인치고는 꽤 여러 무기를 허리춤에 차고 있는 인물이 외진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거, 거기. 자··· 잠시만요!"
"뭡니··· 아니. 뭐냐!"
"당신, 혹시··· 당신이 숏소오드입니까?"
"······아니다."
"야만인들은 타고난 힘을 과신하기에 따로 수련을 하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무기의 종류는 한둘이 아니군요. 이러는 인물은 오직 한 명, 숏소오드밖에는 없죠. 내 말이 틀렸나요?"
"오드다."
한평생 무도를 수련한 이가 연격을 펼쳐내는 듯,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추궁.
그 끝에 돌아오는 것은 짧은 한마디였다.
여인의 고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모로 꺾일 무렵.
"내 이름, 오드다."
"아··· 알겠습니다. 오드 씨. 아무튼, 그럼 당신에게 물어야겠군요. 어째서 갑자기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단 겁니까!"
일족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족장을 무시하고서 뛰어간 여인이었다.
제아무리 영주의 사자요, 식량 따위를 들고 왔다고 한들······ 그러한 행위를 좌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전사들은 참을성이 좋지 못했다.
"영자사자 나리, 족장을 무시하는 거냐!
"족장을 무시한다는 것. 우리를 무시한다는 것."
"가만두지 않는다···!"
무서운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전사들이었다.
"영주의 사자요."
미첼은 제게로 향하는 땅울림을 힐긋 보지도 않고서 품에서 육포를 꺼내 던졌다.
"오오오, 말린 육포!"
"내놓아라! 내게 준 것이다!"
효과는(은) 뛰어났다!
주먹보다 강한 것은 펜이요.
펜보다 강한 것은 육포일지니.
중세의 머저리들에게 있어, 치악력을 시험하는 말린 육포는 그 무엇보다도 발군의 효과를 자랑하고 있었다.
"어째서 참여하지 않느냐고?"
글쎄, 그에 대한 답은 수도 없이 많다.
첫째로 타이바르 마을은 남작령의 인근에 있기는 하나, 과거에 자치성을 인정받은 구역으로서 이곳의 전사들은 병역의 의무가 없다.
둘째로 까를레앙 남작은 다른 귀족들에 비해 개인 사병을 예로 들든, 정통성을 예로 들든 그 힘이 현저히 떨어지는 바.
굳이 그를 위해 움직여야 할 필요가 없다. 고작해야 쥐 파먹은 식량 좀 얻겠답시고.
마지막 셋째로는···.
[성좌, '9일간 나무에 매달린 자'가 당신의 입을 바라봅니다. 어쭙잖은 말은 용서치 않을 거라 으름장을 놓습니다.]
"나는 아직 열두 살이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엔 너무 어린 나이지!"
"······."
팔을 교차로 엮고 있는 소년이었다.
터질 듯한 전완근과 울룩불룩한 대흉근이 미첼의 시야에 들어왔다.
[성좌, '몸통 잃은 상담가'가 눈을 질끈 감습니다.]
[성좌, '천의 얼굴'이 웃겨 죽겠다는 듯 배를 감싸쥐고서 바닥을 구릅니다.]
"저기··· 그 얼굴···. 아니, 그 몸이. 저··· 저기."
여인은 혼란스러웠다.
열둘이라고 한다면 그래보아야 성인까지 몇 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고사하고 생각해보아도···.
'저 몸이, 저 우악스러운 육체가······. 소, 소년이라고?'
일신의 무력이 일반 병사 너댓은 우습게 넘겨 버릴 수 있다 하는 야만인들이다.
그런 야만인들 중에서도 무려 '개인 수련'까지 하는 특이한 바바리안.
그것이, 눈 앞의 사내··· 아니. 소년. 여하튼 숏소오드 아니던가.
보기 좋게 탄 구릿빛 신체하며 균형잡힌 육체가···
여인은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그러다 돌연 제 뺨을 짝- 소리나게 한 번 쳐올렸다.
"아니아니아니! 열둘이면 충분히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나이입니다! 소년 병사는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만!"
"그렇군."
"네!"
"너는 내게."
문득, 바라보니 숏소오드는 이름과는 다르게 키가 제법 컸다.
여인들 중에서도 제법 신장이 있는 자신이 고개를 올려다 보아야 할 만큼.
애당초 그의 가슴께가 시선의 수평선상에 있지 않던가.
가까이 걸음을 옮긴 그의 부담스러운 포인트가 제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적의 검날을 맨몸으로 받는 방패라 되라 이건가. 여인이여. 우리 바바리안들이 고기를 좋아한다 하여, 고기 방패라 되라······. 이 말인가아아아!"
우레와 같은 소리였다.
[성좌, '천둥과 벼락의 전사'가 환호합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흡사 천둥과 닮았다 감탄합니다!]
"히, 히끅."
곧 여인의 발치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 올랐다.
'어······. 이게 아닌데?'
[성좌, '천의 얼굴'이 당신의 장난끼에 놀라워 합니다. 자신조차 여인의 실금을 지리게 하는 장난은 치지 않는다 단언합니다.]
아니, 미친 놈들아. 가만히 좀 있어봐. 그런 거 아니야.
- 스릉, 스릉.
미첼과 함께 왔던 영지의 병사들이 검을 빼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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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으르렁 으르렁 으르렁대
순식간에 험악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바바리안의 외침은 인간이 할 수 없는 '드래곤 피어'가 아니던가.
때로는 전사의 함성으로 아군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때로는 그 무시무시한 기세로 적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기합과 고함 사이의 그 무엇.
피식자들을 얼어붙게 하는 드래곤 피어의 근본 원리는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하나, 그들이 소리의 파동에 실어 보내는 마나가 피식자의 근육 움직임을 통제한다는 것은 은근히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은 뛰어난 바바리안 정도가 유일했다.
뭐, 간혹 수많은 무훈을 세운 기사들 중에도 비슷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표본의 수가 너무 적었다.
"저··· 저 바바리안 놈이 기사님을 위협했다···!"
"전쟁을 치르자는 뜻인가! 고얀 놈들 같으니."
"저, 전사의 외침이로군. 처음 듣는데···."
미첼을 호위하듯 따라왔던 병사들은 검이나 창 따위를 빼 들긴 했으나 쉽사리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곳을 중심으로 방진을 형성했을 뿐이다.
[성좌, '피리 부는 사나이'가 자신도 뿔피리를 불겠다며 콧김을 뿜습니다.]
아니. 당신이 불면 큰일 나지.
뭣 하러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 세계의 멸망을 막아주세요.
12년 전, 정확히 그 형상을 알아볼 수 없던 빛무리. 묘하게 곡선을 띠고 있던 빛무리는 그렇게 말하며 이 거친 세상에 박거세를 내던졌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재고의 떨이를 하듯, [번역]과 [성장]을 끼워 넣어주면서.
'이런 것도 치트랍시고.'
줘도 안 가질 법한 스킬 두 가지는 다행히 '우가우가'에 가깝던 말을 사람의 언어로 번역해주었다.
성장은··· 보시다시피 열두 살이 맞긴 한지 의심스러운 몸뚱아리를 만들어 주었고.
[성좌, '9일간 나무에 매달린 자'가 전사는 몸통이 커야 한다 말합니다. 전쟁을 하기 위한 기본이라며 거듭 당신에게 조언합니다.]
우악스러운 몸을 수상할 정도로 좋아하는 양반들이다.
그쪽 동네는 죄다 그런 놈들밖에 없긴 하더라마는.
픽, 한숨을 내쉰 오드는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입을 열었다.
"여인을 데리고 돌아가라. 무의미한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면!"
"뭐, 뭣이! 이 야만인 놈이 우리를 죄다 죽일 셈이냐!"
"내 말을 뭘로 들은 거냐. 돌아가라고 했다."
집채만 한 범 혹은 곰을 마주했다고 하자.
혹여 그 야수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 녀석들이 '살려줄 테니까 그냥 지나가. 지금 돌아가면 안 먹을게. 왠지 먹기 귀찮네. 배도 덜 꺼졌고.'라는 말을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오호라! 돌아가는 척하면 등 뒤에 대고 그 몽둥이를 휘두를 셈이구나. 하, 야만인 주제에 제법 얄팍한 수도 쓸 줄 아는군···!"
당연히 믿지 않는다.
이미 한껏 경계심을 끌어 올린 상황인 만큼 더더욱.
"······말이 통하지 않는군. 여자를 일으켜 세워라. 그나마 거기, 여자가 말이 조금 더 통한다."
"이 파렴치한 야만인 놈! 실금을 지린 기사님을 일으켜 세우란 말이냐! 네놈이 겁박해 다리에 힘이 풀리셨는데!? 이 더러운 놈! 개만도 못한 놈!"
"무슨 소리냐.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게 더욱 더러운 일 아닌가."
[성좌, '몸통 잃은 상담가'가 중세의 위생 관념을 얕보지 말라 조언합니다.]
아. 그런가.
하긴, 뒤처리를 짚이나 이끼(······) 꽤 신경을 많이 쓴다면 양털이나 스펀지를 감은 막대 따위로 대신하는 놈들이다.
물론 귀족쯤 된다면 부드러운 천을 쓰기도 하겠지만···.
"하하하! 성의 놈들은 멍청하구나! 강물에 몸을 씻지 않는다면 네놈들은 저주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돌연 '저주'를 입에 올린 것은 일족의 전사 중 한 명이었다.
현 세계의 사정상, 저주나 흑마법 등이 가지는 인식은 최악 중의 최악.
신을 믿고 마법을 믿는 놈들이, 유독 흑마법만 관련됐다 하면 소름끼쳐 하는 모습이 자그마한 유머였다.
물론 저 전사는 지극히 단순하게도 저쪽에서 욕을 갖다 박으니, 그에 응수한 것뿐이겠지만 그 효과는 꽤 탁월했다.
"저, 저주···?"
"그렇다! 하루 종일 온 몸이 가렵게 되어 긁어도 긁어도 이를 멈출 수 없는 역병신의 저주이지!"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크크크. 멍청한 놈들이구나, 우리들 또한 아는 일을 남작령에 사는 놈들이 모르다니."
전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오드가 수 해 전부터 귀가 닳도록 일족에게 설파해 온 내용이다.
또한 그 무시무시한 결과를 직접 눈으로 보기도 했다.
실상 자신은 두어 달에 한 번씩 씻는 정도이긴 했으나··· 지금 그것이 무어 중요하리.
"하루 종일 온몸에 벌레가 기는 듯한 고통을 맛보도록 해라! 감히, 우리 타이바르족을 우습게 본 대가다! 하하하하!"
숫제 악당··· 아니, 흑마법사가 따로 없는 광경이었다.
병사들의 얼굴에 삽시간에 공포감이 물들고 있었다.
이 흐름은 좋지 않았다.
"자, 그럼 이제 네놈들을, 악! 왜··· 왜 때리나, 숏소오드!"
"오드라니까."
"오드! 혹시 알려주면 안 되는 비밀이었던 것이냐!"
"······그렇다. 일족의 비밀을 그렇게 쉽게 떠벌려도 된다는 말을 나는 한 적이 없다!"
"미, 미안하다···. 그렇지만 놈들이 먼저······."
사내는 억울하다는 듯 제 뒤통수를 붙잡은 채 눈물을 찔끔 흘렸다.
어지간해서는 고통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타이바르족이다.
바바리안들 중에서도 강한 신체를 지닌 것이 자신들 아니던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드의 가벼운 손놀림들은 일반적인 전사와 달랐다.
살을 통과해 뼈를 직접 울리는 듯한 공격··· 아니, 승부들이었다.
고작 열두 살의 나이에 일족의 실질적 최고 전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몇 년 전부터는 혼자서 수련을 하는 듯해, 매타작 신세를 겨우 면한 사내들이 아니던가.
물론 레이야처럼 쉬이 포기하지 않는 여인도 있긴 했지만.
"오드, 그쯤 해둬라."
"아버······. 아니. 족장."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나누는 게 좋겠군. 전쟁 준비로 인해 손을 빌려달라고 했던 것은 네놈들이다. 설마하니, 이런 하찮은 일로 우리와 척을 지려는 건 아니라고 믿겠다."
쿵, 쿵, 발소리를 내며 진영과 진영 사이를 가로지른 베어칸이었다.
아무래도 대외적으로는 그의 액면가가 그 값을 톡톡히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슬쩍 곁눈질로 이쪽을 바라본 베어칸은 눈을 깜빡였다.
[성좌, '천의 얼굴'이 토악질을 합니다. 대체 저따위 윙크는 누가 가르쳐준 것이냐 따집니다.]
어··· 미안합니다. 어릴 때 한 일입니다. 어릴 때.
베어칸은 그 행위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대충 짐작하기로 '무언가 끝내주는 일을 행한 후에 내보이는 사내의 면모'쯤으로 받아들인 것이리라.
오드는 어린 시절 벌였던 낯부끄러운 행위로 인한 업보를 맛보는 중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염병할.'
난데없이 다른 세상에 납치된 것도 억울한데 세상까지 구하라고 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치지 않고서 제정신을 유지할 만한 놈은 없으리라고 장담한다.
혹시라도 그런 놈이 있으면 손에 장을······.
아니. 있으면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말리라.
"히··· 히익!"
자칭 열두 살이라고 하는 소년의 눈은 형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살기'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것일까.
자신들이 보좌해야 할 여인의 자세를 본받아 무언가를 지려 버릴 듯한 하급 병사들이었다.
***
"이 일은 결코··· 결코 좌시하지 않겠습··· 않겠습니다!"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돌아가는 미첼의 얼굴은 가히 굴욕적이었다.
한때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덮었지 않던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닦으라며 건네준 토끼 거죽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얼굴로 한참 바라보다, 얼굴을 닦은 여인이었다.
'음··· 저거, 어떤 새끼가 또 엉덩이 부분으로 잘라내 놨지. 진짜 잡히면 족쳐놔야겠는데.'
[성좌, '9일간 나무에 매달린 자'가 당신의 광기에 감탄합니다.]
일부러 한 거 아니라니까.
"크흠, 결국 도움을 청할 곳은 우리밖에 없는 놈들이 큰 소리는."
베어칸은 꽁무니 빠지게 돌아서는 이들을 흘겨보다 제 옆에 침을 탁, 뱉었다.
역시. 이런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 족장이다.
조금 전에 보인 모습은 베어칸치고는 과하게 정중했다.
"아들아, 어떠냐. 네가 일러준 대로 해봤는데."
"쉿. 아직 일족이 보고 있다. 아버지."
"크하하. 너조차 이것은 모르는구나. 녀석들은 지금 병사들을 쫓아냈다는 사실에 취해, 우리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있다. 저 봐라, 벌써부터 술을 꺼내······ 이 놈들아! 대낮부터 무슨 술이냐!"
"족장, 족장도 같이 마시자! 남작령의 놈들을 쫓아낸 기념 아닌가!"
"이 미친놈들이······."
베어칸은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더니 고함을 내질렀다.
"이 몸이 선언을 해야 축제인 것이다아아! 이 베어칸과 아들, 오드가 놈들을 물리쳤다!"
"우오오오! 오드, 오드, 오드!"
"베어칸! 베어칸! 베어칸!"
아무래도 아직 갈 길이 한참 먼 듯했다.
어쩌면 세계의 멸망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멍청한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 세계의 안전을 반증하는 꼴이었다.
고개를 내저은 오드는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수련 장소인 마을 외곽으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음···?"
묘한 빛 한줄기가 외곽 너머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4화 중세의 개 조련사
오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외곽을 향해 내달렸다.
달리면서 보건대, 작은 소동물들이 저와는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도 자신이 수련하는 곳 주변으로는 동물의 수가 현저히 적었다.
그렇기에 일족의 전사들 또한 사냥감이 없다며 발길을 끊었지 않던가.
"그렇다는 말은··· 보다 더 먼 곳에서부터 도망쳐 오고 있다는 말인데."
슬쩍 눈을 좁혀 멀리 시선을 던졌다.
빛줄기가 내리꽂히던 장소가 머지않았다.
[성좌, '9일간 나무에 매달린 자'가 광기의 냄새를 맡습니다. 당신에게 충돌을 대비하라 전합니다.]
그러잖아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여신인지 조물주인지 모를 초월적 존재가 이르지 않았던가.
세계의 멸망을 막아달라고.
"어쩐지 잠잠하다 했지···!"
꾸우욱-.
애당초 오드가 쥐고 있는 나무 몽둥이는 평범한 몽둥이가 아니었다.
성좌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던져주는 가호를 부여받은 몽둥이.
당최 누구의 눈치를 보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몇 개의 가호를 덧댄 몽둥이는 그 내구도가 어지간한 강철검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덕분에 부서져라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어도 우악스러운 악력을 견뎌내 주고 있었다.
-타닷! 콰아아앙!
땅을 박차며 부웅 날아오른 오드였다.
흡사 공중부양 마법을 하는 듯했으나, 이후에 터져 나오는 굉음과 함께하는 착지는 마법이 아니라 '물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멸망각 떴냐!"
멸망이라는 것에 사람의 형상이 있다면 냅다 몸을 돌려 버릴 것 같은 귀기 어린 모습.
두 눈에 시퍼런 살기를 풀풀 흘리는 바바리안이었다.
그런 오드의 앞에 있는 것은···
"레이야? 네가 왜 여기에 있나!"
자칭 오드의 호적수, 타이바르족 최강 호소인으로 골치 아픈 소꿉친구. '레이야'였다.
바바리안치고는 조금 작고 호리한 체형에 타고난 색소가 옅어, 복색만 아니라면 그저 근질이 좋은 여인이 아닐까 싶은 인물이자···
"레이야? 네가 왜 여기에 있나!"
자칭 오드의 호적수, 타이바르족 최강 호소인으로 골치 아픈 소꿉친구. '레이야'였다.
바바리안치고는 조금 작고 호리한 체형에 타고난 색소가 옅어, 복색만 아니라면 그저 근질이 좋은 여인이 아닐까 싶은 인물이자···
- 강한 전사의 상징은 햇빛에 그을린 피부라고 들었다··· 나는 어찌하여 피부가 하얀 것인가! 하늘이 원망스럽도다!
강함에 목을 매는 바바리안이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아마조네스인가?
[성좌, '몸통 잃은 상담가'가 아마조네스치고는 가슴이 둘이라며 당신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거야 그렇긴 하지만.
"오··· 오드냐. 네 녀석, 영주의 사자를 만나러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물리치고 왔다."
"물리쳤다고······?"
"그래, 그보다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나. 이곳은 전사들이 찾지 않는 곳인··· 음?"
이제 보니 레이야의 옷 여기저기는 찢어져 있었고 긁힌 듯한 찰과상이 여럿 보였다.
미미하게 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단순히 '오드···! 네 녀석의 수련 비밀을 파헤치러 왔다!' 같은 것을 기대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맛이 가다 못해 자해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면 정말 손 쓸 도리가 없을 터.
슬쩍 눈을 좁혀 이리저리 눈을 굴리자···.
"크르르···."
그럼 그렇지.
[성좌, '외팔의 대표자'가 결투를 벌이는 것이냐며 주먹을 불끈 쥡니다. 당신의 호쾌한 몽둥이질을 기대하며 바라봅니다.]
수풀에 몸을 가리고 있던 집채만 한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회까닥 돌아버린 것이라든가, 입가에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것이라든가, 발톱에 핏기가 어려 있다는 점 같은 것은 지극히 평범했다.
아무렴. 짐승 새끼인데.
"으으···. 이런 곳에서 변이종을 만날 줄이야. 비통하고 원통하다! 오드, 넌 여태 이런 녀석들과 싸워왔던 거냐?!"
단언컨대 처음 만난 놈이다.
정수리 부분과 꼬리에 각각 기다란 촉수가 달린 괴물 따위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디 심해에 사는 초롱 아귀도 아니고.
"···시끄럽다. 어서 일어서라, 레이야. 단순한 마수도 아니고 변이종이다. 놈의 강함은 예측불허다."
"지금 나보고 도망치란 말이냐?"
소녀는 눈을 부릅뜬 채 제 라이벌을 노려보았다.
흉악할 정도로 부풀어진 가슴 근육과 팔 근육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변이종을 마주해 쩌적, 갈라진 대퇴를 보라.
자그마한 틈이 보이면 냅다 저 몽둥이를 후려 변이종의 머리를 깨버릴 게 분명했다.
- 작은 승부에 일희일비하지 말아라, 레이야. 진정한 전사는 스스로를 뛰어넘어야 하는 법이다. 우선 흥분하지 않는 법부터 배우도록.
어릴 때부터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이였다.
자신과 같은 나이임에도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수련의 양과 질이 달랐다.
그 때문일까.
또래의 전사들에 비해 족히 두 배는 더 큰 몸이었다. 응당, 육체의 힘 또한 고강했다.
- 아아, 이것 말인가. 푸우-시업이라는 것이다. 넓은 가슴과 좁은 가슴. 아랫가슴과 윗가슴을 모두 단련할 수 있지.
당최 어디에서 배워온 것인지 듣도 보도 못한 수련법까지 홀로 깨우쳐 행하지 않았던가.
"도망은··· 칠 수 없다! 고작해야 떨거지급의 변이종 하나! 못 당해낼 성싶으냐!"
"아니. 비켜다오. 놈은 나를 찾아온 손······!"
"크릉!"
정확히 목을 노리고서 날아든 놈의 벌어진 아가리였다.
몸을 뒤틀어 이를 피해냈다.
-콰직, 콰지직! 우지끈!
장정 한 사람이 양팔을 벌려도 다 안지 못할 둘레의 나무.
그것은 속 빈 강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나도 손쉽게 구겨졌으며, 또한 부러졌다.
[성좌, '천둥과 벼락의 전사'가 벼락 맞은 나무 같다며 웃습니다. 자신도 저와 같은 모습을 만들 수 있다 당신에게 알립니다.]
"···예절 없는 손님이로군."
예로부터 말 안 듣는 개는 후드려 패야만 말을 듣는다고 했다.
물론 저쪽에서의 박거세는 동물을 사랑하는 애견인이었다.
집 앞 마트에 떨이 상품을 사러 가는 길, 오며 가며 마주치는 자그마한 강아지들을 그렇게나 사랑스럽게 바라보지 않았던가.
"크르··· 크와아악! 크응!"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콱 깨물어 죽이고 싶은 모습이다.
이쪽이 아니라, 저쪽에서 바라보는 눈빛이 그랬다.
뚝- 뚝- 떨어지는 타액이 지면을 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끝을 스치는 매캐한 냄새는 단순히 놈의 구취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꾸드득-.
이쪽에서의 오드는 짐승을 때려잡아야만 하는 바바리안이다.
몸에 걸치고 있는 가죽 외피가 땅에서 솟아났겠는가, 하늘에서 떨어졌겠는가.
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전통적인 생존법이다아아아!"
우레와 같은 고함을 터뜨린 오드였다.
목소리에 실린 힘이 어마어마했다.
지성이라는 게 있는지 의문스러운 변이종마저 순간적으로 동작을 주춤할 정도로.
부웅!
놈이 주춤한 틈을 타, 있는 힘껏 몽둥이를 휘둘렀다.
1초를 수 조각으로 갈라놓은 듯한 시간 사이에 행한 공격.
단순한 스윙에 불과할지 모르나 최소한 하루 일천 번 이상 반복한 동작이 아니던가.
효과는 뛰어났으니.
쩌엉-!
"크륵!? 카악, 칵!"
죽빵, 아니. 아래턱을 정통으로 맞아 버린 녀석은 위턱과 아래턱의 강제 재배열을 당해버렸다.
자유분방하게 동과 서로 생이별을 한 아가리였다.
너덜거리는 아래턱은 타액 받침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성좌, '천의 얼굴'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오드···!"
"알고 있다!"
콰가각!
일순 휘청거린 듯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미끼.
아니, 실상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긴 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변이종'이라고 하는 종의 다름이.
당최 어디에서 흘러 왔는지 그 출신이 의심되는 이계(異界)의 존재가.
세계의 멸망을 막으러 대신 내려오게 된 조물주의 사자나 다름없는 오드의 공격을 버텨내게 만들었다.
단순히 공격을 버틴 걸로도 모자라, 턱을 내어주고 오드의 목숨을 취하려 하지 않았던가.
사선으로 휘둘러진 발톱은 나무와 수풀로도 모자라 지면까지 베어냈다.
당장 밭을 일구어도 될 정도로 깊은 수렁이었다.
타닷.
쓰러질 듯 발톱의 바깥쪽으로 몸을 굴린 오드였다.
전신에 흙먼지가 묻고 돌부리에 긁혀 피부가 까졌다.
'동작이 너무 크잖냐!'
육상 선수라도 되는 것처럼 몸을 웅크린 사내는, 일시에 다리를 쭉 뻗었다.
지면이 깊게 패이며 발치에 작은 흙구덩이가 생겨났다.
파악-.
흙더미를 뒤로 차올리며 포탄처럼 쏘아져 나간 오드의 머리 위로 변이종의 얼굴이 쇄도했다.
발톱 못지않게 날카로운 송곳니가 시야 안으로 선명하게 들어왔다.
오드는 오히려 더욱 몸을 숙였다. 아니, 어쩌면 그대로 지면을 향해 고꾸라지는 중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코끝이 땅에 쓸릴 만큼 몸을 숙였다.
머리칼을 스치고서 놈의 윗이빨이 지나갔다.
꾸국···.
엄지발가락 끝으로 가공할 만큼의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아랫배와 등 뒤 허리가 뻐근할 정도로 당겨왔다.
오드의 전신은 고탄력의 활대를 휘어 놓은 듯했다.
한계까지 휘어진 활대에 걸릴 듯 말 듯했던 활시위였다.
'한 방··· 한 방에······!'
상체를 뒤틀며 어깨를 몸쪽으로 욱여넣었다.
자연스레 오른팔이 따라오며 몽둥이의 뒤로 작은 돌풍을 일으켰다.
깊은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듯 커다란 동작이었다.
-콰아아아앙!
반월을 그리는 호쾌한 스윙이 괴수의 턱 아래를 정확히 가격했다.
동시에 사방으로 비산하며 터져 나가는 머리통이었다.
후두둑, 후두두둑.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게 쏘아 올려졌던 변이종의 살점들이 비가 되어 다시금 내려오고 있었다.
그 빗속에 개 훈련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여름이었다.
5화 괴식 전문가
-쿠우웅!
몸뚱아리만 남은 변이종은 앞발을 몇 번 들었다 놨다 반복하더니 이내 기우뚱하며 쓰러졌다.
"오··· 오드. 그 힘은 대체······."
제아무리 타이바르족의 바바리안들이 규격 외의 강함을 가지고 있다곤 하나, 이는 일반적인 병사들 혹은 모험가들 기준이다.
같은 바바리안들이 보는 눈이 있지 않겠는가.
오드의 강함은 수련 하나로만 설명하기에는 기이했다.
[성좌, '천의 얼굴'이 당신의 입을 바라봅니다. 뭐라 둘러댈 것인지를 기대하며 미소를 머금습니다.]
"······배가 고프다!"
"뭐, 뭐라고···?"
"힘을 다 써버렸다!"
"자, 잠깐. 오드!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
오드는 뚜벅뚜벅 걸어가 나무 옆에 나동그라진 오소리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
등판에 깊은 손톱자국이 남아 있는 걸로 보아 변이종이 나타날 당시, 제 보금자리인 굴에서 대피하지 못한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격렬한 전투 상황에 노출되었으니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격이리라.
부우욱-.
"오드···?"
소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오드는 짐승의 다리 한 짝을 들어 그 상태로 찢어 냈다.
갓 잡은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함이 느껴진······다기보다는, 핏물이 뚝뚝 흐르는 날고기였다.
값이 비싸 육회를 접할 일이 없던 박거세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사내는 숏소오드.
'단백질이다. 이건 단백질. 귀중한··· 영양···분.'
오드는 눈을 감고 입에 '고기'를 밀어 넣었다.
몇 차례 우적우적 씹고 있으니 제대로 벗겨내지 않은 가죽과 털이 입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짐승도 울고 갈 치악력은 날고기를 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바바리안이라고 하여 무조건 짐승을 날것 그대로 회 쳐 먹고 포장···아니, 가죽마저 벗기지 않고서 먹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도축의 과정은 거치기 마련이니.
간혹 나이 많은 일족의 원로들은 '쯧, 우리 때는 불에 구울 필요 없이 그대로 먹는 것이 낭만이었거늘···' 같은 개소리들을 해대곤 했다.
슬쩍 눈을 좁혀 옆을 바라보자 어안이 벙벙한 레이야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성좌, '9일간 나무에 매달린 자'가 당신의 광기에 감탄합니다. 그 정도 광기면 다른 이들도 납득할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쪽이 감탄하면 안 되지.
꼴랑 지능 스탯 좀 얻자고 애꾸까지 되신 분이.
[성좌, '9일간 나무에 매달린 자'가 눈살을 찌푸립니다. 생각보다 샘물의 맛이 나쁘지 않았다며 당신의 날고기 시식과는 다르다 선을 긋습니다.]
그거나 이거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저쪽은 지능 스탯을 올렸고 이쪽은 지능이 낮아 보여야 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을 뿐.
꿀꺽, 하고 텁텁한 것을 삼켜내자 옆에서 미미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레이야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입술 끝을 파르르 떨면서 슬그머니 옆에 있는 변이종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설마 저걸 먹지는 않겠지.'
바바리안들의 흔한 전승 중 한 가지.
사냥을 통해 목숨을 취한 먹잇감을 먹을 때에 그 혼과 힘이 전사에게 계승된다.
제가 잡은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바바리안들에게 있어, 단순히 몸을 불리고 근육을 키우기 위함이 아니라 그 신념을 지키는 행위인 것이다.
- 불에 고기를 굽는다는 것은 오히려 전사들의 신께 그 혼을 나누어 바친다는 의미다! 철과 불의 신 '아그니'께서 우리 전사들을 좋아한다는 건 네놈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십여 년도 더 전에 타이바르족의 식습관을 바꾸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다.
정확하게는 구운 고기를 먹고 싶어서.
아직 신선도가 보장된 오소리를 들고서 소리쳤다.
"나는 돌아가겠다! 괜히 이곳에 어슬렁거리다 뒈지지 말아라, 레이야!"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거다······."
"간다!"
격렬한 전투의 흔적을 숨기거나 정리할 생각 따윈 하지 않는 전사였다.
대충 생긴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바바리안이니까.
***
마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수풀의 사이사이, 작은 동물들이 눈치를 보다 도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흉흉한 기척은 사라진 반면, 자신들이 향하는 곳에는 인간들의 냄새가 가득하니 그럴 수밖에.
'그나저나······ 역시 그걸로는 안 되는구나.'
애당초 이 세계에 오게 된 연유. 아니,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이던가.
세계의 멸망.
그래, 세계의 멸망을 막는 일이었다.
변이종 놈들은 일반적인 마수와는 달리,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모호한 놈들이었다.
오히려 강점투성이였다.
일반적인 마수보다도 더욱 흉포하고 더욱 강대하며 더욱 질깃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일이 부지기수.
조금 전의 그 놈처럼 촉수 같은 것이 달려 있는 경우에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울프류' 마물과는 다르지 않은가.
대개 사람들이 인식하기로는, 돌연변이와 유사한 마수들을 변이종이라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눈이 두 개가 있어야 하는데 세 개가 있다거나,
대가리가 두 개 달려 '트윈 헤드 오우거'라 불러야 할 판에 세 개가 이어 붙어 흡사 아수라의 모습을 띠고 있다거나,
겹겹의 날개를 두르고 있는 괴조 따위 말이다.
[성좌, '천의 얼굴'이 근본이 없는 세계라며 혀를 찹니다.]
누구보다도 근본 없는 그쪽이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물론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이 세계에는 저들마다 믿고 따르는 신이 존재한다.
단순히 「창조신 박전능」처럼 퉁 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테면···.
불과 철의 신, 아그니.
물과 생명의 신, 아마린.
천둥과 벼락의 신, 토우.
초목과 바람의 신, 에르.
어둠과 죽음의 신, 스쟈.
등등.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얼추 떠올려 봐도 대여섯을 가뿐히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성이 있는 존재들은 저마다의 신을 믿고 따르며 그 가호를 받으려 애쓴다.
실제로 가호가 내려오느냐 묻는다면 글쎄.
플라시보 효과의 존재 유무조차 모르는 미개인들 아니던가.
'어제 기도를 올렸더니 오늘은 눈이 번쩍 떠졌어. 신께서 가호를 내리신 게 틀림없다···!' 같은 소리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는 이들이다.
그걸 보고 '오오··· 나도 몸이 찌뿌둥한데 아마린님께 귀의해볼까?'라는 소리로 받아치는 놈들이고.
[성좌, '천의 얼굴'이 그것 보라며 손가락질을 합니다. 콱 망해버려야 할 곳이라고 씹어뱉듯 말합니다.]
"그건 내가 돌아간 다음에 알아서들 해보시고."
여하튼 변이종 놈을 잡아도 별다른 상황이 펼쳐지지 않는 걸로 보아, 그놈들과 세상의 멸망은 그다지 유의미한 관계가 아닌 듯하다.
아니면 썰어내야 할 수량에 차이가 있다든지.
[성좌, '몸통 잃은 상담가'가 당신이 조금 변한 것 같다고 합니다. 이계의 존재를 물리칠 때를 반추해보라 권합니다.]
역시나.
지능과 지혜로는 따라잡을 자가 없는 성좌다.
'기묘한 감각이긴 했지.'
변이종의 머리를 쳐올린 후 놈이 쓰러진 직후.
일순 티끌만 한 빛의 입자가 흘러나왔었다.
마치 다 타고 남은 재와 같다고 할까.
그것의 일부는 피부를 통해 흘러들어왔고 나머지 일부는 어딘가를 향해 흐르듯 나부끼며 사라졌다.
쫓을까? 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지만 생각보다 금세 사라져 이내 그만두었다.
'눈'에만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어딘가로 이동한 것에 가까운 기분이 들었으니.
"흠, 뭐가 좀 바뀌었나? 으음···! 근육이 불룩해졌구나!"
불끈, 양쪽 팔에 힘을 번갈아 주며 흡사 웨이트 선수라도 된 듯이 포징을 취하는 오드였다.
혼기 가득 찬 일족의 여인들이 봤다면 입을 떡 벌릴 듯한 모습이었다.
[성좌, '몸통 잃은 상담가'가 할 말을 잃은 듯 당신을 바라봅니다. 신을 모독하려는 것이라면 멈추는 게 좋을 것이라며 중얼거립니다.]
[성좌, '외팔의 대표자'가 낄낄거리며 웃습니다. 저 놈은 몸통이 없어 당신을 질투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자신을 웃게 해준 대가로 결투의 가호를 내려주겠다 말합니다.]
[성좌, '9일간 나무에 매달린 자'가 콧방귀를 낍니다. 어디 외팔이가 제 앞에서 으스대냐 눈알을 부라립니다.]
[성좌, '천의 얼굴'이······]
"어후. 정신 사나워."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저 하늘의 별들을 무시한 소년은 마을에 들어섰다.
환경 오염이 없어 맨눈으로 보아도 반짝거리는 밤하늘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아래, 타이바르 마을은 중앙에 불을 피워둔 채 정말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실상 심심하면 하는 행위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소족장이다!"
"숏소오드! 남작의 사자를 물리친 영웅!"
"실금의 전사가 돌아왔다!"
벌써 고주망태가 된 이들이 하나둘 다가와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마지막 새끼는 얼굴을 기억했다.
'실금을 지리게 한'이라는 말을 앞에 붙여주어야겠다 다짐했다.
[성좌, '9일간 나무에 매달린 자'가 역시 당신은 광인(狂人)이 맞다며 보증해줍니다. 실로 자신의 화신에 걸맞은 이라며 제 가슴을 팡팡 쳐 보입니다.]
"오오오! 오드,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것이냐! 마침 네 자리를 마련해두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베어칸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도 주취로 불그스름해질 수 있구나 싶은 감상이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이래저래 헐벗은··· 아니, 전통적인 복장을 고수하고 있는 여전사들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 곳이었다.
눈이 맞은 전사 한 명과 묘한 시선을 주고받은 여인 한 명이었다.
근육이 다부진 사내가 엄지손가락을 뒤로 향했다.
- 움집 고?
정확히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대충 비슷한 의미이리라.
즉, 저 자리는 합법 만남의 장이요. 교류의 장이자 포상의 장이었다.
"왜 그러나! 얼른 가서 한 잔 들어라! 오늘의 네 활약은 모두가 알고 있음이니."
정조나 도덕 관념 따위는 개나 줘버린 미개한 새끼.
하지만 아들을 누구보다 존중해주는 새끼.
그것이 베어칸이라는 인물이었다.
아아, 하늘 같은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당신은 지능이 처참한 것이외까.
[소수의 성좌들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당신의 고간을 바라봅니다.]
이 미친 새끼들이.
-부스럭.
그때.
뒤쪽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베어칸이나 다른 전사들과는 다른 조심스러운 기척이었다.
6화 비범한 소년과 말 없는 소녀
타이바르 마을은 외지에 있는 만큼, 다른 이들이 방문할 일이 극히 적었다.
이번처럼 영주의 사자가 찾아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
외딴곳에 자리한 오지 마을.
그런데 상식이라는 것이 통하는지 의문인 근육질의 야만 종족.
한 번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기만 해도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몸이 떨리는 소개문이다.
그런 마을을 제 발로 찾아온 사람이었다.
"크하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이번에는 방랑객인가!"
사내는 떠돌이 용병이라도 되는 것인지 낡고 해진 무장을 하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피부에는 크고 작은 흉터들이 빼곡히 수놓아져 있었다.
멋모르는 이들은 대체 실력이 얼마나 형편 없으면 저만한 상처를 자랑이랍시고 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느냐 묻겠지만···.
'역전의 용병이로군.'
전투라는 것에 대해 자그마한 식견만 있어도 알 것이다.
저만한 상처들을 달고서도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그 스스로 제 강함을 증명해냈다는 반증이다.
전장이란 결국 살아서 생존하는 이가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곳이니.
[성좌, '9일간 나무에 매달린 자'가 자신 또한 버티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다 말합니다. 연이어 콧김을 내뿜습니다.]
"타이바르족은 강함에 대한 재능만 보인다면··· 외지인이라도 일족에 받아줄 수 있다 들었소."
미묘하게 끝이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흐음··· 어디에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군. 구시대의 유물 같은 말일진대."
베어칸은 슬쩍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마치 '이 놈을 받아들이는 것이 도움이 되겠느냐?'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일족의 활동 반경을 넓힐 필요가 있다.
애당초 그렇게 말했던 건 이쪽이었으니 저렇게 물어보는 것 또한 당연했다.
실상 활동 반경을 넓히려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동시에 입지를 늘리기 위한 것.
- 세상의 멸망을 막아야 합니다.
초월적 존재가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의 멸망을 막아야 한다고.
언뜻 들었을 때는 냅다 들고 일어나서 마왕이네 용사네 하는 존재들이 어디 있는지를 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쓸지도 모르나···.
[성좌, '몸통 잃은 상담가'가 당신에게 그러한 권능은 허락되지 않았다 단언합니다.]
그렇게 단언할 정도면 좀 도와주든지.
[성좌, '몸통 잃은 상담가'가 그것은 제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라 말합니다. 심심한 위로를 당신에게 건넵니다.]
심심할 것도 참 많으시군.
여하튼 그동안 수련을 한 것 또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꾸준히 힘을 기르는 것의 일환이었다.
일족에게 기본적인 위생 관념이나 식생활의 지식을 전수해준 것은, 세상이 언제 어떤 식으로 급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개똥도 약에 쓰긴 쓴다 하니까.'
[성좌, '언덕 위의 하얀 꽃'이 개의 분변으로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 합니다. 자신의 가호가 없다면 그것은 인간을 병증을 더욱 심화시킨다 경고합니다.]
···미신 그 자체인 존재가 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성좌(聖座).
별의 주인.
초월적인 존재들이 제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든 저 하늘 위의 눈부신 옥좌.
저마다의 「신화」를 가지고서 '신격'을 지니게 된 존재들이 바로 성좌였다.
최초에는 인간으로 태어났을지 몰라도 숱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존재들은, 섭리를 뛰어넘는 존재의 선택을 받아 마침내 성좌에 이르게 된다.
개중에는 여기 이 양반들처럼 애초부터 저 고고한 땅 위에서 태어난 양반들이 부지기수였다.
[성좌, '피리부는 사나이'가 먼 과거와는 경계가 다르다 말합니다.]
경계? 그건 혹시 이 세계와 관련된···.
"······."
거짓말처럼 뚝 끊어진 별 주인들의 목소리였다.
하여튼, 이 놈의 양반들은 중요한 대목에서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오드."
"아버지, 그보다는 아직 듣지 못한 설명이 있지 않은가!"
"음, 듣고 보니 그렇군. 떠돌이여, 그대의 이름은?"
"······트레논. 따로 성 같은 것은 없으니 편하게 불러 주시오."
사내는 제 앞의 두 건장한 남성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추측하기로 일족의 우두머리는 흡사 곰을 닮은 사내가 분명하거늘.
어찌 된 일인지 실질적인 의사 결정은 그 옆의 쏙 빼닮은 이가 정하는 듯 보였다.
'아니, 완전히 닮지는 않았군. 무언가 묘하게···.'
마을에 외부인을 들이고 말고 하는 결정에 있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응당 마을에 한 명분 이상의 몫을 해내고 있는 이들뿐.
특히나 야만인들의 마을이라면 가장 생각하기 쉬운 것은 역시 전투력··· 즉, 강함이다.
얼굴에 털이 덥수룩한 이들이 백전노장이라면 눈앞의 총기 어린 바바리안은 명명백백히 그들보다는 경험이 일천할 터.
한데 묘하게도 그에게는 다른 바바리안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엿보이고 있었다.
"우리 바바리안은."
"음?"
"삼 초 이상 눈을 마주할 때 전투의 신호로 받아들인다! 방랑 용병이여! 전투라면 받아주겠다!"
팔짱을 낀 채 제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이는, 콱! 하고 힘을 주었고 그의 어깨죽지를 감싸고 있던 견갑이 근육의 부풀어짐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패액!
흡사 투척용 무기를 일부러 준비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순간적인 상황이었다.
미리 설치된 포탄인 양 쏘아져 나온 어깨의 무장은 그대로 제 옆의 소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시드···!"
다급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 나옴과 동시,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눈을 하고 있던 소녀는 미끄러지듯 제 왼쪽 어깨를 뒤로 틀었다.
슈왁!
오드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견갑이 정확히 해당 자리를 지나가서는 뒤쪽의 나무에 꽂혀들었다.
바르르 떨리고 있는 견갑의 끝부분을 볼 때 당최 얼마나 근육이 순간적으로 부푼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
용병과 소족장의 사이에 일순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서로를 향한 눈빛이 허공에서 잠시간 맞부딪혔다.
"오오오! 숏소오드. 또 가슴이 커진 게냐!"
"작은 전사, 가슴은 크다! 역시 소족장이다!"
"아쉽다···! 오드는 왜 사내인 것인가! 여전사들보······ 아악! 때리지 말아라!"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구제불능들은 긴장감이 감도는 와중에도 저질스러운 농담을 던져댔다.
개중 한 놈은 반쯤 풀려 느물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다 주변의 여 부족원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저들에게 두들겨 맞지 않았다면 조금 후에 이쪽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을테니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선, 차차 이야기를 듣겠다!"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견갑 띠였다.
어색한 침묵 후에 먼저 입을 열자, 곧바로 베어칸이 이를 뒤이어 주었다.
"하하! 우리 마을에 적의를 가지지 않은 채 오는 이들은 아주 오랜만이다! 특별히 환영해주겠다! 이 놈들아, 손님용 잔을 가져 오거라!"
"족장! 그걸 말인가!"
서로 눈빛을 주고 받은 젊은 부족원들 몇은 놀라워 입을 쩍 벌리면서도 '당장 하겠다!'라고 답하며 한 곳으로 뛰어갔다.
"······."
오드와 트레논이 한 번씩 서로의 기량을 재어 보듯 흘끔거릴 때에도 소녀, 시드는 꼼짝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잿가루가 바람에 나부끼며 옆으로 다가왔다.
사라락···.
불어오는 밤바람은 소녀를 지키고 싶었던 듯하다.
아직 열기를 가지고 있을 불씨마저 시드를 지나쳐 간 것을 보면.
***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실수를 한다.
실수하지 않는 삶?
그런 방법이 있다면 돈을 주고라도 사서 따라해보고 싶다.
'아니지, 완벽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방법이라고 해야 맞겠군. 그래야 적어도 사기는 당하지 않을 테니까.'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어디에선가 나타난 레이야가 궁시렁거리며 새로운 견갑을 채워주고 있었다.
이 무식하게 커다란 몸의 유일한 단점은 제 손으로 등을 긁기 어렵다는 것과 이렇게 견갑을 맬 때에도 조금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성좌, '외팔의 대표자'가 비슷한 이유로 무장조차 하지 않는 전사들이 많았다며 당신의 의견에 공감을 표합니다. 자신 역시, 목숨이 오가는 일격의 사투를 즐겼다 단언합니다.]
[성좌, '9일간 나무에 매달린 자'가 팔 한 짝 없는 놈이 무장은 무슨 무장이냐 비웃습니다. 남이 도와주지 않으면 애초에 견갑을 매지 못하는 게 아니냐 손가락질을 해댑니다.]
[성좌, '몸통 잃은 상담가'가 굳게 침묵합니다.]
"정말···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평범하게 힘을 줬을 뿐이다."
"하긴, 오드 네 가슴··· 흠. 네 육체는 일족 중에서도 궤를 달리 하니까."
"그렇다. 견갑의 크기가 작은 문제이지, 내 문제는 아니다."
"크기······."
봉긋하게 부풀고 있는 제 가슴팍을 내려다 보는 레이야였다.
그녀는 곧 자신과 제 앞의 소꿉친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 편 오드는 그런 레이야의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못한 듯, 어느새 베어칸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내와 그의 일행을 좁힌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공교롭구만. 음, 공교로워······.'
세상의 일에 우연은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촘촘하게 짜여진 필연뿐.
이것은 때에 따라 느슨하게 보일 순 있어도 그 실이 끊어지는 일만은 결코 없는 법이다.
소년은 새로이 등장한 소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면 무언가가 떠오르고 속이 들여다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오드. 오드? 오드···!"
꽈아아악-.
몸통을 사선으로 조여매는 구속감이 강해졌다.
분명 새로 착용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조금 전보다 더한 구속감이 느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