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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1otro

서(序)

ㅡ화르륵!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의 열기과 빛만이, 대신전과도 같은 널따란 공간에 자리한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저 불꽃이 놓여 있던 덕분에, 용사 파티는 어둠 속에서도 검을 휘두를 수 있었고, 마법을 발할 수 있었으며, 신의 이름 아래 축복과 가호를 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

인간이 제아무리 발버둥친다한들, 절대자(絶對者)를 어찌할 순 없는 법이었다.

올려다보면 고개가 아플 정도로 높게 지어진 계단 위의 석좌, 그곳에는 지루하다는 듯한 얼굴을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이 세상의 빛을 죄다 삼킬 듯한 칠흑 같은 머리칼과 작열하는 불꽃처럼 붉디붉은 진홍색 눈.

세간은 저 존재를 가리켜 마왕(魔王)이라 불렀다.

덜그럭, 시야가 흔들렸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눈을 옆으로 굴렸다. 얼굴을 뒤덮는 핏물에 의해 시야가 붉었다.

은빛의 머리칼이 인상적인 여인이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정확히 무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저렇게까지 울어주는구나, 라는 감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의 육신은 반절이 사라져 있었다.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는 걸 보니 아마 저 마왕의 손에······ 아니 손짓에 짓이겨진 것일 테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기라도 한 것처럼, 회복 마법을 사용하려는 듯 보이는 그녀였다. 투명하고 밝은 빛이 여인의 손 아래에 모여 들기도 잠시. 곧 흩어지는 마력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싸움은, 이야기의 종장(終場)이라는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빌어먹을 놈과의 일전이 말도 안되는 난이도를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개같군, 이렇게까지 어려운 게임은 아니었는데. 이만한······ 이 정도나 되는 파티로도 놈에겐 안 된다는 말인가?'

검성은 제 파티원들을 바라보았다.

장정 두셋은 한 몸에 합쳐 놓은 듯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던, 강철같은 육신의 야만전사는 그 두툼한 대흉근 아래가 뻥 뚫려 있었다.

'복부'라고 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저 정도면 살아나는 건 무리겠지.

한낱 야만인에서 마지막에는 용병왕으로 불렸던 그의 커다란 도끼도, 검성으로 불렸던 사내의 검도.

마왕에겐 통하지 않았다.

단순히 검이나 도끼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쩌면 날붙이 자체를 허용치 않는 어떤 권능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 어떤 방법을 통해도 죽음을 피하기는 어려울 게 뻔한 거한의 앞.

모든 생명을 자애롭게 굽어 살피는 성녀가 그 죽음을 용인할 수 없다는 듯, 무릎을 꿇고 앉아 신성술과 회복의 기도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새하얀 수녀복은 피가 튀고 살이 튀어 더러워져 있었으나 그녀의 얼굴에 깃든 신실함만은 이전 그대로였다.

다만, 여인의 입가에선 주륵주륵 핏줄기가 흘러 나왔다.

죽음이 확정된 육신을 재구성한다는 건, 제아무리 그녀가 성녀라한들 쉬운 일이 아닐 터.

더군다나 저 마왕놈이 권능과도 같은 것을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마(魔)라는 것과 대척점에 자리할 게 뻔한 교단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는 건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렇기에 제 생명을 저리 바쳐가며 파티원을, 아니 우리를 살리려는 것이겠지만······

"···카온, 리, 카온···. 흐윽··· 미, 미안해··· 내가, 내가 더 마법을 잘 다뤘다면··· 그, 그랬다면 이런 일은······"

눈알을 굴리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먹먹하던 흐느낌에 불과하던 것이 이제는 또렷한 음성이 되어 귓가에 전해졌다. 마지막 불꽃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울고 있는 그녀에게 말해주어야 했다. 아니라고. 네 잘못이 아니라 내가 부족했을 뿐이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네가 마법을 알려줄 때 나도 더 진득하게 매달려 볼 걸 그랬다고.

또 다시 먹먹한 흐느낌으로 바뀌었을 때, 여인은 중얼거리며 마력을 집중했다.

······깜빡.

아주 잠시 의식이 끊어졌다 도로 돌아왔다.

어느새 멋대로 떨어진 고개가, 누구보다도 빠른 발을 자랑하던 여 도적의 모습을 두 눈에 강제로 비춰주고 있었다.

두 발목이 잘려 나갔음에도 엷게 열린 거대한 철문을 향해 천천히 기어가고 있는 그녀였다.

평상시의 그녀였다면 정말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저길 몇 번이라도 오갔을 것을, 자랑이던 두 발을 잃었다는 게 저토록 치명적이었다.

마왕의 신전과도 같은 이곳에서부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다는 듯, 혹은 원군을 불러오겠다는 듯 두 팔로 땅을 기는 여인의 아래. 피로 이어진 길이 그려지고 있었다.

작게 누군가 웃음소리를 뇌까리는 듯 했다.

놈인가?

줄곧 지루하다는 듯 굴고 있던 얼굴 아래, 초승달처럼 휘어진 입꼬리가 걸려 있었다. 스륵, 놈이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쿠웅.

문이 닫혔다.

질척이며 땅을 기는 소리와 누군가의 흐느낌, 쌕쌕거리거나 헐떡이는 숨소리 정도만이 아주 나즈막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화르륵 타오르던 불꽃조차도 언제 그랬냐는 듯 후욱 꺼졌다. 온전하고 완연한 어둠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1화 이 몸, 또 또 강림.

ㅡ똑똑.

고급 목재를 썼는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마저 기품이 느껴졌다.

새하얀 순백의 문은 굳건하게 닫힌 채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갈한 차림새의 메이드 시델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문을 두드렸다.

"······."

여전히.

방 안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삼 일째.

유서 깊은 마법 명문가 크라프슈타인가의 도련님, 리히트 크라프슈타인이 방에 틀어박힌 시간이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물론 완전히 식음을 전폐하고서 틀어박힌 수준은 아니었지만, 다 큰 사내가 엉엉 울고 술과 담배에 취해 있던 건 영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시델은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 하나씩 접어 보였다.

언제는 도시의 창관을 들렀다, 그곳의 제일 미녀라는 이를 돈으로 사려다 거절당해서 한 번.

또 언제는 몇 세대 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가문의 영애에게 추근덕거리다가, 아카데미의 뭇 학생들에게 몰매를 맞아서 한 번.

아참, 생각해보면 마법 수업 도중 남들 다 하는 평범한 기초 마법조차 제대로 발현하지 못해······

벌컥, 하고서 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열렸다. 장신의 사내가 코앞에 자리하자 여인의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기침해 계시다면 말씀해주셨다면 좋았을 겁니다."

시델은 조금 전까지 제가 품고 있던 무례한 생각을 모두 거둬냈다.

- 네게 힘든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아비 된 자로서 하는 부탁이라고 하기에도 우습지. 하나, 부탁할 이가 너밖에 없군. 어미의 정을 주라곤 하지 않겠다. 그저 놈이 엇나가지 않도록 강하게 훈육해······ 아니. 되었다. 그저 허튼 곳에서 목숨을 잃는 일만은 없도록 네가 지켜봐다오.

줄곧 근엄함을 유지하고 있는 가주로서의 음성이 아닌, 한 명의 아비로서 보이는 음성··· 오래 들었던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여인은 그저 얌전하고 조신하며 유능한 한 명의 메이드가 되어, 눈을 지그시 감고서 고개를 숙였다.

추측컨대, 지금 리히트 크라프슈타인의 얼굴은 말이 아닐 터.

아들 혹은 오래된 동생과 비슷할지언정, 모시는 이의 추잡스러운 모습을 못본 체 하고 눈과 귀, 입을 닫는 건 시녀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또 하나.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알았으니까 그만 좀 깨워! 알아서 일어난다고! 그··· 그 망할 놈들이랑 같이 수업을 들어야 하는 내 심정을 네가 알기나 해?! 고작해야 메이드 따위가······!' 와 같은 모멸적인 말을 피할 수 있었다.

유능한 메이드인 시델은 슬쩍 제 오감 중 하나를 건드려, 자연스레 청각의 기능을 반쯤 꺼두었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신이 직접 미형으로 빚어둔 것 같은 사내가, 뭇 여인들이 홀라당 넘어갈 법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듣기에 꽤나 좋은 일이지만.

그 또한 침대 위 하룻밤 장난 같은 달콤한 말을 속삭일 때에나 가능한 일.

너댓 살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듯 말하는 건 누구라도 얼굴을 찌푸릴 만한······

그러나 정작 사내는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 있었다.

'빌어먹을 마왕 놈. 설마하니 「물리 면역」이라도 가지고 있던 건가?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돼. 갑자기 그 미친 난이도는 뭔데? 마왕 새끼, 그렇게까지 힘든 보스는 아니었다고.'

'내가 어떻게 검성 자리까지 올라 갔는······ 아니, 애초에 그게 가장 효율적이고 정석적인 공략 루트라고!'

'후우, 화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어찌 되었건 일단 돌아온 것 같으니 다시 시작하면 될 일. 검이 안된다면 다른 것을 시도하면 될 뿐이다. 답이 없던 건 처음 검을 쥐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니.'

흡사 존귀한 왕족이 일국의 중요한 책무를 앞두고서 고심하는 것처럼, 그의 미간은 깊게 파여 있었다.

"도련님?"

여인이 말을 걸자 그제야 천천히, 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돌아오는 시선이었다. 그의 얼굴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숨이 멎을 만큼 황홀한 찰나였다.

"······네가 시델인가?"

이건 또 무슨 질 나쁜 장난일까.

시델은 고개를 들었다.

감정을 숨긴 실눈의 뒤에서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루는 이목구비에, 태양의 은혜를 가득 머금은 듯한 백금발 머리칼은 정리되지 않아 부스스했음에도 잘 빚어놓은 조각상 같았다.

그뿐이랴.

일견 잘못 보았을 때는 여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다란 속눈썹은, 그야말로 이 사내의 미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너무 눈부신 빛을 가리기 위함일까. 그늘이 조금 드리운 듯한 어두운색의 금안(金眼)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

지금의 모습만 보아서는, 저 방에서 삼 일을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한 게 맞나?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동시에.

과거에 그토록 많은 혼담이 오간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맞는 것 같은데."

한 차례 고개를 갸웃거린 사내가 가늘게 뜬 금안으로 여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시델은 내색 하나 하지 않은 채,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그런 컨셉을 하기로 하신 겁니까?"

"컨셉이라···"

"에리아 아가씨께 사정없이 차이셨다 들었습니다. 금번의 식음 전폐는, 이전과는 비할 바 없는 충격 때문이겠지요."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전의 기억을 되짚어 보는 듯 했다.

분명 헤집어선 곤란한 기억이요. 가슴이 저려올 만한 일이건만, 그걸 말하는 여인이나 듣고 있는 당사자나 얼굴색의 변화는 없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여인은 한 번 더 박차를 가했다.

"듣자 하니 에르튼 가에서 혼약을 파기하겠다 합니다. 소꿉친구, 아니 어릴 때부터 미래가 예정되어 있던 도련님께는 상심이 크시겠습니다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넓고 여인은 많습니다. 크라프슈타인의 이름을 대면, 어디 변방의 철없는 아가씨가 짐을 싸들고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아카데미의 재학생이기 망정이지, 완전히 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면 더욱 큰 망신살이 될 게 뻔했다.

때문에, 이번의 일은 어떤 의미로는 차라리 먼저 맞아서 다행인 '매'였다.

물론 아직 변변찮은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리히트가, 여인의 마음을 알기까지는 한참이나 걸릴 일이지마는 그 역시 사내로서 겪어야 할 일.

크라프슈타인가의 유능한 메이드이자, 가주가 직접 제 망나니 아들에게 붙여준 자로서 시델은 맡은 바 소임에 충실했다.

울음을 터뜨릴까? 아니면 또다시 방에 틀어박힐까? 가문의 식량고에 있는 고급술을 내어 오라 할까?

아니. 어쩌면 이대로 아카데미에 찾아가 영애를 붙잡고 악다구니를 쓸지도 모르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예?"

"에르튼 가··· 아니. 에리아라고 했나. 그래, 그녀와의 혼약이 파기 되었다고. 알겠다. 그다음으로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있나?"

"···도련님이 방에서 나오게 되면, 곧장 자신을 찾아오라 가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실은 그마저도 오늘이 마지막 기한이었습니다."

"잘됐군."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는 여인이었다. 시델은 눈을 찌푸리며 리히트를 올려다 보았다.

삼일 정도 음식을 먹지 않은 탓인지 조금 초췌해진 외모는, 외려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도록··· 어두운 금안이 여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뭐하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능 메이드였다.

"가주님께 안내하지 않고."

"······오늘은 참으로 이상하십니다, 도련님. 음, 알겠습니다. 저는 제 역할에 충실하면 될 뿐이지요. 도련님께서 도로 방에 틀어박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뿐이었습니다. 그럼."

말을 마친 여인은 빙글 몸을 돌렸다.

어찌나 혹독한 교육을 받은 것인지, 시녀임에도 불구하고 동작 하나하나에 기품과 격식이 어려 있었다.

옷자락조차 나풀거리지 않아 먼지와 티끌이 솟아오르는 일조차 없었다.

'이노를 떠올리게 하는군.'

앞서 걸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인 리히트였다.

대륙 3대 시프이자, 용사 파티의 일원 이노 그로지안.

그녀는 바로 곁에서 걷고 있음에도 발걸음 소리는커녕 기척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은신과 암살 및 각종 함정의 해제 등.

그녀 덕에 마왕과의 최종 결전을 앞두고 힘을 꽤나 아낄 수 있었다. 여행 도중의 자잘한 도움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운 얼굴들, 체감상 며칠 전까지 함께한 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뭐하십니까? 따라오시지 않고. 역시 지금이라도 술을 내어드리면 되겠습니까? 가주님께는, 도련님이 이별과 상실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섯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춘 시델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몸을 돌렸다.

이쪽을 도우려는 건지, 먹이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차인 놈에게 술을 사준다······ 아니 잔을 채워준다하는 걸 보면 본성이 나쁜 이는 아닐 것이다.

"이별 한두 번에 쓰러질 정도로 나약한 사내는 아닐 것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건 또."

성큼성큼 걸어 여인의 옆에 발맞추어 선 리히트였다.

오늘따라 유독 자주 찌푸려지는 시델의 눈초리였다. 여인은 옆으로 비뚜름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과거의 나는 잊어 달라는 의미다."

"저는 도련님이 엉망으로 만드신 도련님의 방을 치워야 합니다. 뱀이 허물을 벗듯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치워야 하고, 토사물을 씻어내야 합니다. 이부자리 역시 가지런히 만들어야겠지요. 그렇게 갖은 애를 써도 내일이면 또 금세 원상복구 되겠지요."

무표정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신들린 랩이었다.

저쪽 세상이었다면 소울리스좌니 어쩌니 하는 식으로 이름을 떨치지 않았을까. 일개 메이드라고 하기에는 과할 정도로 수려한 용모이기도 하니 말이다.

"도련님, 저는 도련님의 과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겐 도련님의 오늘이 어제고 도련님의 내일이 오늘입니다."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스스로 저지르지 않은 일에 사과를 하는 것은 어렵다. 애당초 사과하면 없던 잘못도 있는 잘못이 되는 세상을 겪지 않던가.

그렇기에 리히트는 택했다.

두 걸음을 더 내디뎠다.

구박을 받는 것보다, 먼저 시델을 지나쳐 걷는 걸 택한 것이다. 저벅저벅, 그렇게 다섯 걸음쯤 걸었을까.

"······."

사내는 뒤를 돌아보았다.

"시델이라고 했지. 이제와 생각하니, 종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주인은 없는 듯하다. 그렇게 하면 세상의 손가락질과 지탄받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일 터. 나는 그것이 못내 가슴 아파 견딜 수 없다. 그러니······"

"휴, 잠자코 따라오기나 하십쇼 도련님. 제발 술 좀 그만드시고."

고개를 내저은 여인은 뚜벅뚜벅 걸어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뭔가 이렇게 틱틱거리면서도 끝에 가서는 챙겨준다는 점 역시도, 한 여인과 닮았다.

이것 참, 인생 3회차는 여러모로 2회차를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