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히어로
두 대의 열차의 속도가 빠르게 줄어들다가, 객실로 작은 충격이 전해졌다.
"으악?"
"꺅?"
충격은 작았다. 열차가 완전히 정차했다.
"사, 살았다!"
"섰어! 섰다고!"
열차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열차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으아아! 진짜 살았다!"
열차 앞쪽으로 가서 상황을 확인하는 사람도 있었다.
열차 두 대가 서로 머리를 댄 상태로 정차했다. 부딪힌 부분이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아, 아슬아슬했다."
"우리 정말 저승 문턱까지 다녀왔구나."
***
서울 통제센터에서도 환성이 들렸다.
"열차 세웠습니다!"
"피해 없습니다!"
"살았다!"
상황실장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제2 센터는 어떻게 됐어?"
"지금 경찰특공대가 가고 있습니다!"
***
엔지니어가 열차를 원격으로 세웠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에 휴대폰으로 물었다.
"휴우. 상황이 어떻게 됐습니까?"
서울 센터 직원의 환성에 가까운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들렸다.
- 당신이 다 살렸습니다!
"아니, 내가 아니라…."
그가 현장을 보았다. 테러리스트 둘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밖에도 셋이 더 있었다.
신성재가 나타나 그들을 처리하지 않았으면 열차는 세울 수 없었다.
엔지니어가 말했다.
"내가 아니라, 히어로가…."
- 예? 아! 곧 경찰특공대가 진입할 겁니다!
엔지니어는 깜짝 놀랐다.
"예? 그냥 들어오면 안 됩니다! 여기 지금 부비트랩이 쫙 깔려있습니다!"
- 부비트랩이 거기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이 지뢰 같은 걸 깔아놨습니다! 여긴 지금 아무도 못 들어…. 아니, 그분은 들어 오셨는데…. 여하튼 그냥 들어오면 큰일 납니다! 다 터진단 말입니다!"
- 폭발물 처리반이 도착할 때까지 특공대는 기다리라고 하겠습니다!
***
은가은은 차에 혼자 앉아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뉴스 채널 중에 현재 사태에 관한 속보가 나오는 곳이 있었다.
신성재가 차 문을 열었다.
"야. 내려."
"오빠 지금 내 운전 실력 못 믿어?"
"믿겠냐?"
"하긴. 나도 그래. 여기까지 몰고 오는 게 쉽진 않더라. 더 연습해야겠어."
"내 차로?"
"응! 난 차가 없잖아."
은가은이 조수석으로 옮겼다. 신성재가 운전석에 앉은 후에 출발했다.
"스마트폰 이제 켜도 돼?"
"대전에 가서 켜."
라디오에서는 뉴스 속보가 계속 나왔다.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게 많았지만, 새로운 소식도 수시로 추가됐다.
은가은이 라디오를 들으며 말했다.
"밖에서 발견된 경비원들은 모두 목숨은 건졌대."
"알아. 확인하고 나왔어."
"열차 기관사들도 죽진 않았대. 근데 정신을 못 차린대."
"센터 안쪽에서 보니까 그놈들이 마취 주사를 썼더라. 열차끼리 충돌하면 어차피 죽을 테니까 기관사한테도 그렇게 했겠지."
"마취 주사는 구하기 어렵지 않나?"
"기관단총도 입수한 놈들인데 그 정도가 어렵겠냐?"
"하긴. 아. 근데 저 센터 안쪽은 어때? 뉴스에서는 폭발물 때문에 안으로 못 들어간다던데."
"인질이 다섯 명 있는데, 다 살았어. 네 명은 마취약으로 기절. 한 명이 기차를 세웠지."
"다행이다. 그럼 나쁜 놈들은?"
제2 센터 공사현장에 침입한 빌런은 다섯이다.
"운 좋은 놈은 살겠지."
신성재는 CCTV가 없는 도로를 이용해 오송을 벗어났다.
은가은이 물었다.
"어디에 CCTV가 없는지 마법으로 알아볼 수 있어?"
"저쪽 세계에, 누군가에게 감시당한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마법사가 있었어. 그래서 자신을 보는 시선을 찾아내는 마법을 만들었지. '부끄럼쟁이 요정'이라는 마법이야."
"와. 마법사도 그런 게 걸리는구나."
"알고 보니 피해망상이 아니었어. 실제로 감시하던 놈들을 찾았거든."
"어머! 그래서?"
"마법사를 노리다 들켰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자기를 감시하던 기관 건물에 불벼락을 떨어뜨렸다더라."
"와…. 화끈하다."
은가은은 마법을 배우려는 시도는 했었다. 옆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양쪽 세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조금은 안다.
"근데 오빠. 우리가 찾아야 하는 건 CCTV인데? 사람이 아니잖아."
"'이글 아이'에 '부끄럼쟁이 요정'을 조합하면, 우리가 가는 길에 있는 CCTV는 싹 다 찾아낼 수 있다. 차량용 블랙박스까지 전부다."
"오! 좋네! 마법 대단해!"
"이중 마법이라 마나 소모량이 좀 많지만, 좋긴 하지."
***
제2 센터 공사현장의 경비원 세 명은 병원으로 이송됐다.
신성재보다 먼저 도착했다가 총탄을 뒤집어쓴 경찰 두 명도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현장에 도착한 형사들이 구멍이 숭숭 난 차를 보며 말했다.
"차가 아주 벌집이야."
"진짜 죽을 뻔했네."
"유리를 뚫고 들어온 총탄에 팔을 맞았는데, 위험한 부상은 아니라더라."
"머리나 가슴에 맞았으면 죽었죠."
"아니면…. 총을 쏜 놈이 확인 사살하러 왔으면 꼼짝없이 당했겠지."
그놈은 확인 사살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신성재가 그놈부터 잡았다.
폭발물 처리반이 현장에 설치된 부비트랩을 모두 제거했다. 그런 후에 경찰특공대가 내부에 진입했다.
엔지니어는 긴장한 얼굴로 서 있다가,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손을 내밀었다.
"아. 이쪽으로 오…."
총구가 반사적으로 엔지니어를 향했다. 그가 깜짝 놀라 두 손을 위로 번쩍 들었다.
"나, 난 아닙니다! 난 여기 직원입니다!"
팀장이 수신호를 했다.
"총구 내려. 아군이다."
대원들은 범인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한 놈은 목에 칼을 맞았다.
"죽었습니다."
두목은 총을 몇 발 맞았다.
"여긴 아직 살아있습니다!"
엔지니어가 얼른 말했다.
"그놈이 두목입니다! 아주 나쁜 새끼입니다!"
"구급팀 불러! 이 새끼 살려서 누가 시켰는지 알아내야 해!"
다른 직원들은 기절한 상태라 들것에 실려 나갔다. 엔지니어만 경찰특공대와 함께 두 발로 걸어서 밖으로 나왔다.
현장에 온 철도공사 직원과 공무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 박수를 쳤다. 엔지니어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어? 고, 고맙습니다."
엔지니어가 센터 밖으로 나오자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철도공사에서 현장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기자들이 다가오는 걸 다 막진 못했다.
제일 가까이 접근한 기자가 질문했다.
"열차 충돌을 막으신 분 맞으시죠?"
"예? 제가요?"
"아닙니까?"
"열차의 비상 정지 장치는 제가 원격으로 작동했습니다만…."
"훌륭하십니다! 선생님은 이천 명을 살린 영웅이십니다!"
"제가 살린 게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히어로가 있었습니다."
"히어로라니요?"
"무장 괴한들을 무찌르고 저에게 기차를 세우라고 하신 분이 계십니다."
기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누굽니까!"
"저도 궁금합니다. 아. 이거 지금 방송 나갑니까?"
"생중계입니다!"
엔지니어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그러면 이 말은 꼭 하고 싶습니다.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인터넷에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멀리서 스마트폰으로 현장을 찍은 동영상이었다.
영상을 찍은 사람은 오송 지역 주민으로 사건 당시에 근처 산에 있었다. 그는 총소리가 들린 후에 상황을 깨닫고 멀리서 영상을 찍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영상을 확대해도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차피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일 리가 없었다.
그 영상이 인터넷에 쫙 퍼졌다. 방송사에서도 가져다 썼다.
영상은 신성재가 담장을 뛰어넘을 때부터 시작됐다.
사람들의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 저 높이의 담을 저렇게 가볍게 넘는 게 가능한가?
- 올림픽 육상 선출 정도면 가능하겠죠.
- 육상이라니요. 저 사람은 백 프로 격투기 쪽이죠.
쓰러뜨린 빌런의 단검을 뽑아 다른 놈에게 던지는 모습은 담장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놈이 신성재를 총으로 쏘려다 칼에 맞는 모습은 찍혔다.
신성재는 단검을 던질 때 바람 마법을 썼다. 이렇게 멀리서 찍은 영상으로는 마법에 의한 궤도 보정을 구분할 수 없다.
- 단검 던지는 실력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 급소에 정확히 꽂혔습니다. 무술을 수련한 사람이 확실합니다.
- 뻔한 이야기를 하시네. 당연히 태권도든 쿵후든 무술 고수니까 저렇게 싸울 수 있겠죠.
- 특수부대 출신 아닐까요?
- 나도 여기에 한 표. 현역이나 제대한 사람 중에 있을 듯.
***
은가은이 스마트폰을 켜 댓글을 보며 말했다.
"오빠가 특수부대 출신이라는데?"
"평범한 예비역 병장이야. 특수부대는 구경도 못 했다."
"근데 왜 그렇게 잘 싸워?"
"평행세계의 기억을 받을 때, 전투 경험도 기억으로 넘어왔거든."
평행세계의 마법사 신성재는 수많은 전투를 치른 베테랑이다. 그가 쌓은 전투 경험도 지식으로 넘어왔다.
그 지식이 신성재의 몸에 익은 건 아니지만,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
"내가 싸움을 안 해서 그렇지, 전투 지식 하나는 베테랑이야."
"그런 걸 방구석…."
"같은 말이면 차라리 힘숨찐이라고 해라."
"그럼 오빠는 합쳐서 방구석 찐…."
"합치지 마라."
***
뉴스 채널에서 전문가들을 급히 초빙해 이번 사건을 분석했다. 다들 앞다투어 의견을 냈다.
"본청의 통신망을 끊고, 먼저 열차 한 대만 통제를 벗어나게 했습니다. 아주 계획적입니다."
"예비 시설의 신형 장비에 제어권을 넘기게 상황을 세팅한 거죠."
"그런 후에 열차 두 대가 충돌하는 상황을 만든 겁니다."
"우리가 상황을 파악했을 땐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뭘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도 부족한 시간이죠."
"범인들의 계획이 실패했기에 망정이지,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습니다."
사회자가 물었다.
"범인들을 제압하고 이번 참사를 막은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글쎄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공개적으로 나타날까요?"
"그건 본인만 알겠죠."
커뮤니티 게시판에도 그 이야기가 올라왔다. 댓글들이 붙었다.
- 안 나타날 거라고 봅니다.
- 왜요?
- 빌런 다섯 중에 셋이 죽었습니다. 운 나쁘면 감방에 갈 수도 있어요.
- 설마 그러겠습니까? 참사를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건데.
- 그건 우리 생각이고요.
- 스타가 되고 싶으면 나타날 수도 있죠. 처벌이야 뭐 사면을 받는다든지, 집행유예라든지, 방법이야 있을 테니까.
- 그건 우리 생각이라니까요.
- 결정은 본인이 하는 건데, 저라면 안 나타날 겁니다.
***
기차 충돌 장면이 찍힌 영상도 있었다. 기차 기관실의 CCTV에 찍힌 영상을 보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참사를 막았는지 알 수 있었다.
승객이 찍은 영상도 있었다. 두 대의 열차가 접촉사고 수준으로 닿아 있는 상태를 가까이에서 찍은 영상이었다. 그건 곧바로 인터넷에 올라왔다.
- 와아. 쿵이 아니라 콩 하고 부딪혔나 보다.
- 브레이크 당기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어휴….
- 진짜 아슬아슬했다.
***
제2 센터 공사현장의 CCTV는 저장장치가 파괴된 상태였다. 그래서 남은 데이터가 전혀 없었다.
현장을 조사한 사람들이 말했다.
"범인들은 이곳에 침입하자마자 CCTV부터 날렸습니다. 자기들의 모습을 숨기려고 한 거겠죠."
"그럼 나중에 범인들을 잡은 사람의 모습도 없습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그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CCTV가 먹통이 된 상태였으니까요."
***
신성재와 은가은은 대전 빵집에 들러 망고시루케이크와 명란빵, 팥빙수를 샀다.
은가은이 아쉬워했다.
"케이크도 두 개 사고 싶었는데!"
"차 댈 곳이 없었잖아."
그래서 신성재는 차에 있고 은가은만 들어가 케이크를 하나만 샀다.
빵집에는 빵을 먹을 빈자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차를 몰고 갑천 공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계단형 벤치가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망고시루와 명란빵, 팥빙수를 먹었다.
두 사람의 옆쪽 계단형 벤치에 앉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속보를 보며 이야기했다.
"와. 대전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은 곳에서 열차가 충돌할 뻔했어."
"테러리스트들이 습격한 곳도 오송이래."
"그런데 그놈들을 잡은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
"그거야 아무도 모르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바람처럼 사라졌으니까."
바로 옆자리에서 신성재와 은가은이 케이크를 경쟁적으로 먹었다.
은가은이 숟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말했다.
"팥빙수도 맛있다!"
"내 거 노리지 말라고!"
팥빙수는 두 개를 샀는데도 은가은이 벌써 하나를 해치우고 다른 하나까지 손댔다. 케이크도 은가은이 더 많이 먹었다.
"맛있다고!"
"네 것만 먹으라고!"
"나는 더 먹을 수 있다!"
"돼지야!"
"반사!"
11. 불상
한국에서 열차 테러가 발생했다.
파국이 오기 전에 기적적으로 막긴 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경찰, 검찰, 국정원은 물론이고 정부 관계부처 여러 곳이 참여한 합동수사본부가 급히 만들어졌다.
합수부 회의실에서 경찰이 수사 상황을 발표했다.
"오송 제2 센터 공사현장에서 범인 두 명을 생포했습니다. 다만, 둘 다 중상이라 지금은 조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합동수사본부장이 물었다.
"기관사를 기절시키고 열차를 무인으로 출발시킨 놈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상행선과 하행선 열차를 폭주시킨 빌런들도 잡아야 한다.
"추적 중입니다."
"놓쳤군요."
"죄송합니다."
"전력차단시설에 부비트랩을 설치한 놈은요?"
"찾는 중입니다만…."
"후우. 답답하군요."
국정원에서 온 요원도 보고했다.
"대부분의 테러는 자기 짓이라고 주장하는 단체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려고 테러를 저지르는 거니까요. 그런데 이번엔 나서는 놈이 없습니다."
"북한은요?"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습니다."
"가능성이라…. 그러니까 모른다는 겁니까?"
"외국의 과거 사례에 의심 가는 것이 있습니다."
요원이 화면에 자료를 띄웠다.
"이 사건은 2년 전 미국에서 시도된 테러입니다. 미 국토안보부가 테러 직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범인들을 사살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터지기 전에 진압했습니다."
그가 다른 화면도 띄웠다.
"1년 전 일본에서 발생한 테러입니다. 이때는 초기 대응에 실패, 여객선이 항구를 들이받았습니다. 사망 37명, 부상자는 200명 이상이며, 범인들은 도주했습니다."
요원이 두 사건과 이번 KTX 사건을 같은 화면에 띄웠다.
"이 세 사건에 유사점이 보여, 연관성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 수사당국에 자료 협조도 요청했습니다."
다른 정부 부처에서 나온 사람이 물었다.
"일본의 그 여객선 사건이 의심스러우면, 3년 전에 태평양에서 여객선이 해적에게 공격당한 사건도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 국민들도 탔던 그 배 말입니다."
"맞아요. 그때 무인도에 조난됐다가 한 달 만에 구조된 사람들도 있었지요."
국정원 요원이 말했다.
"해적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납니다. 이번 조사에 그것까지 포함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둘 다 여객선인데…."
"유사점이 보이는 사건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통수단을 이용한 테러, 그중에서 미국과 일본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본부장이 답답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 조사에서 뭔가 나오면 좋겠군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송 현장에서 이번 테러를 저지한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국정원 요원이 경찰 간부를 돌아보았다. 국내 사건은 경찰이 수사한다.
경찰 간부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도 조사 중입니다만…. 현장에 단서가 없어서…."
"구출된 철도공사 직원도 모른답니까?"
"얼굴은 마스크로 가리고 모자까지 눌러 썼답니다."
본부장이 짜증을 냈다.
"우린 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까? 기자들에게 나 혼자 물어뜯기란 겁니까?"
"죄송…."
"다른 분들도 저랑 같이 언론 브리핑을 하시죠."
"예?"
"욕은 같이 먹어야지요."
국정원 요원이 얼른 말했다.
"저는 신분 노출은 불법이라서 브리핑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땐 부럽네요."
다른 참석자들이 말했다.
"그 사람이 스스로 나타나 주면 좋을 텐데요."
"오송 현장에서 범인 다섯 중에 셋이 죽었습니다.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까지 나서지 않은 걸 보면…."
본부장이 말했다.
"안 나타나겠지요. 복잡한 문제에 엮이기 싫을 테니까요."
***
합동수사본부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욕도 많이 먹었다.
경찰은 재발 방지 대책을 여럿 내놓았다.
그런 대책 중 하나가, 각 경찰서 형사팀 사이의 정보 교류를 지원하는 광역 특수팀을 새로 만드는 것이다.
도서윤 형사가 그 소식을 들었다.
"새로 생기는 광역 특별수사지원팀에 나도 들어가고 싶다."
선배 형사가 말했다.
"거기서 아무나 받겠어? 실적이든 전문성이든 뭔가 있어야 받아주겠지."
그녀는 골동품상 도종호 사장의 딸이다.
"제가 골동품 쪽을 좀 아는데 그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그걸로는 좀 약한데? 전국 단위의 대규모 골동품 밀매 조직이라도 잡으면 모를까."
***
도서윤이 도종호를 찾아가 물었다. 도종호가 도로 물었다.
"밀매 조직을 아느냐고?"
"응!"
"알겠냐? 나 양심적으로 장사하는 사람이다."
"쳇. 아빠가 흑막이었어야 하는데."
"흑막의 딸이 형사 일을 계속할 수 있겠냐?"
"앗! 그렇구나!"
"너 경찰 시험은 어떻게 합격했냐?"
***
두 달이 지났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송스 갤러리의 관장 송예솔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그 갤러리는 고대 유물부터 현대 조각품까지 다양한 예술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곳이다. 갤러리는 제법 큰 건물 전체를 단독으로 사용했다.
송예솔은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대형 갤러리를 잘 운영할 만큼 유능했다.
다만, 실력만으로 그 나이에 송스 갤러리의 관장이 된 건 아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송스 그룹의 회장 송충기다.
그녀가 고운 눈썹을 찌푸렸다.
"할아버지가 맡기신 유물인데…."
그녀의 앞에는 다섯 조각으로 쪼개진 돌 불상이 놓여 있었다. 불상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송예솔이 두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였다.
"누가 이런 거죠?"
갤러리의 실무자인 최민구 과장이 설명했다.
"제가 CCTV를 다 확인했습니다. 깨지기 전에 누가 만진 적은 없습니다. 다만…."
송예솔이 고개는 불상으로 향한 채 눈만 위로 치켜떴다.
"다만?"
"이 불상이 발굴된 곳이 이미 폐허가 된 절터이고,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이 찾아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손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상태가 나빴을 수도 있…."
송예솔이 차가운 목소리로 최민구의 말을 끊었다.
"불상 내부에 균열이 있었는데 발견하지 못했다가, 하필 우리 갤러리에 전시하면서 깨졌다는 건가요?"
"현재까지는… 그렇게 추정됩니다."
송예솔은 송스 갤러리 외에도 공연장인 송스 아트홀과 연예 기획사인 송스 엔터까지 맡고 있다. 송스 엔터는 규모는 작지만 신경 쓸 것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평소에는 갤러리에 상주하지 않았다. 갤러리의 업무는 큰 건만 그녀가 직접 처리하고 실무는 담당자에게 맡겨뒀다.
송예솔이 불상 앞에서 허리를 폈다.
"최 과장님. 그걸 왜, 불상이 파손된 후에야 알게 된 거죠? 검수팀은 뭐 한 건가요?"
"죄송합니다."
"책임 문제는 나중에 따지고, 일단은 급한 불부터 끄죠."
그녀가 다섯 조각이 난 불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시회가 열흘 남았어요. 그 안에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나요?"
열흘 후에 이 불상이 포함된 전시회가 시작된다.
최민구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가 복원하는 건 무리입니다."
"외부 전문가 중에는요?"
"연락을 돌리는 중입니다."
"누가 최고인가요?"
지금 이곳에는 최민구 외에도 갤러리 직원이 몇 명 더 있다. 그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신성재라고, 어떤 유물이든 복원 가능한 전문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최고라고 들었습니다."
송예솔이 지시했다.
"거기 맡기세요. 긴급으로. 이건 회장님께서 손수 매입하신 거예요. 전시회 전까지 반드시 완벽하게 복원해야 해요."
최민구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관장님. 신성재는 복원할 물건을 가려 받는 거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비용 상관하지 말고 맡겨요."
***
이튿날 송예솔이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인상을 썼다.
"신성재 쪽에서 거절했다고요? 우리 불상을 보지도 않고요?"
최민구 과장이 보고했다.
"예. 사진과 함께 제가 직접 의뢰를 넣었습니다만…."
"복원 비용은 얼마가 되든 상관없다고 했는데도?"
"단칼에 거절하는 바람에 비용 협상은 시작도 못 해봤습니다."
그녀가 혀를 찼다.
"쯧. 비싸게 구는 사람이네요."
이 불상은 그녀의 할아버지인 송충기 회장이 직접 매입한 것이다. 전시가 끝나면 송충기가 가져가 본가에 둘 예정이다.
그 전에 완벽한 상태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런다고 없던 일이 되진 않지만, 그래야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
송예솔이 지시했다.
"신성재와 약속 잡으세요. 내가 직접 만나볼게요."
"그게, 약속 잡기도 쉽지 않은…."
"최 과장님. 그럼 되는 게 뭔가요?"
"죄송합니다."
송예솔이 짜증을 냈다.
"과장님 선에서 안 되면 우리 갤러리의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약속 잡아요! 당장!"
***
신성재가 골동품상 도종호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송스 갤러리 관장을 만나줄 수 있냐고요?"
- 성재 씨. 미안해. 나도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을 받은 거라서, 그냥 말이라도 해보는 거야.
도종호는 신성재에게 물건을 소개해주긴 해도 누굴 만나달라는 부탁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음…. 송스 갤러리의 의뢰를 거절했더니, 거기서 도 사장님을 많이 귀찮게 하나 보군요."
- 하, 하하. 난 말은 전했으니까, 아니다 싶으면 다시 거절해도 돼.
"놔두면 계속 귀찮게 할 거 같으니까, 제가 만나보겠습니다."
도종호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 그래? 고마워! 덕분에 내가 체면이 살았어!
"적당한 카페에서 보자고 하세요."
- 성재 씨. 내가 답례로 소개팅 자리 마련해줄까?
"따님 이야기죠?"
- 어! 걔가 공무원이라니까?
"그러다 집에서 쫓겨나십니다. 괜찮습니다."
***
도종호가 도서윤에게 물었다.
"너 소개팅 할래?"
도서윤 형사가 가게에 들렀다가 물었다.
"왜? 누가 나 소개해 달래?"
"골동품 복원 실력이 진짜 국내 최고인 사람인데…."
"혹시 저번에 수사 단서 복원해준 사람?"
"어. 그 사람. 네가 한번 만나보면…."
도서윤이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 나 바빠. 특지팀에 들어가야 해."
"특지팀?"
"광역 특별수사지원팀. KTX 테러 때문에 본청에 새로 생긴 부서인데, 지금 사람 모으고 있거든. 요즘 거기서 손발 맞춰보고 있어."
도종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나 성재 씨나 다 왜 서로 관심이 없…."
"잠깐. 아빠? 그게 무슨 소리야? 저쪽에서 나 소개해달라는 게 아니었어?"
"양쪽을 이제부터 잘 설득해서 연결…."
"됐어. 안 해. 나 좋다는 놈 많아."
"말만 그렇게 하지 데려온 적은 없으니까 믿을 수가 있나."
도서윤이 발끈했다.
"많았는데 내가 다 차서 없는 거야!"
"형사도 사기를 치는구나."
***
신성재는 마포구 망원동에 산다. 송스 갤러리도 마포구에 있다. 그래서 약속 장소는 마포구에 있는 카페로 정했다.
송예솔이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그 카페에 도착했다.
일부러 먼저 온 건 아니다. 일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떠서 먼저 도착했다.
카페 바로 옆에 유료 주차장이 있었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며 불평했다.
"약속을 조금 당길걸."
송스 갤러리가 갑인 상황이라면 시간을 당겨달라고 요구할 텐데, 지금은 그녀가 아쉬운 쪽이다.
"갤러리가 아니라 외부에서 보자고? 기 싸움에 밀리지 않겠다는 거겠지."
그녀가 머리카락을 휙 넘겼다.
"기 싸움. 그거 내가 잘하는 건데."
그녀가 카페 입구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주차장에 차가 한 대 들어왔다.
그런데 그 차가 평범하지 않았다.
"어머. 저 차가 국내에 있었어?"
스포츠카는 도로에 흔하다. 지금 그녀가 타고 온 차도 독일산 스포츠카다.
그런데 지금 들어오는 차는 달랐다. 독일산이긴 하지만, 저건 절대로 도로에서 흔하게 볼 수 없다.
그녀가 가만히 서서 주차장에 들어오는 차의 외관을 확인했다. 독특한 디자인의 커다란 헤드라이트와 차를 타고 흐르는 부드러운 유선형 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오래된 도자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야. 이상하네."
그녀는 저게 어떤 차인지 아주 잘 안다. 그래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84년 한정판의 상태가 저렇게 좋을 수 있나?"
생산량이 많은 차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저 차는 1984년에 딱 100대만 생산됐다. 험하게 타다가 파손된 차도 많았다.
"저 차가 어떻게 국내에 돌아다니지?"
100대 중에 상태 좋은 차가 몇 대쯤 남아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국내에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저 차의 상태는 좋아도 너무 좋았다.
"마치 공장에서 막 뽑은 것처럼 보이는데…. 다른 차도 아니고 저 차가 그럴 리가 없잖아."
40년이 지나 차량 도장이 상한 건 외부 페인트를 다시 칠하면 말끔해진다. 전문가에게 맡기면 적어도 겉모습은 새것처럼 만들어준다.
다만, 그 방법으로 저 고유의 색까지 맞추는 건 어렵다.
"어디서 복원했는데 저렇게 완벽하게…."
차가 다가오면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 부드러웠다.
"엔진까지 새 차 같아."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갖고 싶다."
차가 주차장에 자리를 잡고 문이 열리더니 신성재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머. 차 주인까지 내 스타일이네?'
12. 기운
송스 갤러리 송예솔 관장이 구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그 차로 걸어갔다.
그녀는 차도 궁금하고 사람도 궁금했다. 그래서 신성재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관리가 잘 된 84년 한정판이 국내에 있었네요?"
신성재가 그녀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외국에도 이렇게 좋은 건 없죠."
"차 주인이세요?"
"그렇죠?"
"차 관리 잘하셨네요. 처음부터 이 상태는 아니었을 텐데."
"처음에는 고철이었죠."
송예솔이 손뼉을 쳤다.
"역시! 저도 작년에 이 모델을 사려고 했는데, 일이 꼬였거든요. 이렇게 고칠 수 있으면 그 차를 다시 인수해도 되겠어요. 폐차만 안 했다면 아직 안 팔렸을 테니까."
팔렸다.
그녀가 포기한 차를 신성재가 샀다. 그게 지금 이 차다.
송예솔이 물었다.
"어디에 맡겨서 복원하신 거예요?"
"한 땀 한 땀 직접 했습니다."
송예솔이 손뼉을 연달아 치며 좋아했다.
"진짜요? 실력이 대단하네요."
그녀는 신성재의 얼굴을 모른다. 오늘 약속은 비서를 시켜서 잡았다.
그녀가 물었다.
"혹시 엔진룸도 볼 수 있어요?"
신성재가 엔진룸을 열어주었다. 그녀가 내부를 보며 다시 감탄했다.
"부품이 다 새것 같아요. 어떻게 잔금 하나 없…."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만요. 이 부품들이 새것일 수가 있나? 이 한정판은 성능은 좋지만 내구성이 나쁜 게 약점인데…. 40년 전에 만든 차인데…."
"한 땀 한 땀 직접 복원했다니까요."
"아니, 이게 말이 되나? 100대밖에 안 만들어서 어떤 부품은 아예 없을 텐데? 호환되는 대체품들을 찾았나? 아니면 직접 깎았나?"
"나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나."
그녀가 엔진룸을 살피며 웅얼대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눈에 갈망이 보였다.
"저기요. 이 차 나한테 팔아요. 얼마예요? 얼마면 되겠어요?"
신성재가 피식 웃었다.
"송예솔 관장님은 돈으로 다 해결하려고 하는군요."
그녀가 멈칫했다.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요?"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관장님 사진이 나오던데요."
"그렇긴 하지만…. 왜 나를 검색한 거죠?"
신성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만나자면서요. 어떻게 생긴 분인지는 알아야 카페에서 찾기 쉬우니까."
그녀는 상대가 누군지 깨닫고 당황했다.
"설마 신성재 씨?"
"맞습니다만?"
그녀가 두 손끝을 입술에 대며 말했다.
"어머! 이렇게 젊으신 줄 몰랐어요."
그녀는 신성재가 업계 최고의 유물 복원 전문가라고 들었다.
'유물 복원 전문가가 이 차도 직접 복원했다고?'
그녀가 엔진룸을 돌아보았다.
"실내 내장재는 주문 제작해서 만든다 쳐도 엔진룸 내부 부품은 어떻게…."
이 차의 하체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것 같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죠?"
"잘?"
크로노스의 마법을 쓰면 가능하다.
"실력이… 정말 좋으시네요?"
신성재는 이 차를 전선 하나, 나사 하나까지 마법으로 복원했다. 덕분에 복원 마법 숙련도가 많이 올라갔다.
송예솔은 신성재의 실력에 감탄했다. 물론 이것만으로 신성재의 유물 복원 능력을 알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든 지 몇십 년 된 자동차와 몇백 년 된 유물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복원해야 하는 불상의 재질은 쇠가 아니라 돌이다.
그래도 신뢰가 더 가긴 했다.
"우리 직원이 신성재 씨를 추천한 이유가 있군요."
"물론 난 거절했고요."
"하지만 여기 나오셨잖아요."
"계속 거절하면 도종호 사장님을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아서."
송예솔의 시선이 차 쪽으로 슬쩍 움직였다.
그녀는 기 싸움을 하러 왔는데, 방금 차를 보고 감탄할 때 도도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녀가 얼른 설득 방향을 선회했다.
"이번에 깨진 불상은 우리 할아버지께서 아끼시는 유물이에요. 그래서 마음이 급했어요."
일단 가족을 판 후에 제안했다.
"복원 가능성이라도 좀 봐주세요. 자문 비용은 드릴게요."
송스 갤러리는 골동품 업계의 인맥을 움직여 도종호 사장에게 신성재와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도종호가 귀찮은 일을 겪지 않으려면 마무리는 해야 한다.
"음….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구경이나 합시다. 송스 갤러리로 가면 됩니까?"
"네. 맞아요."
신성재의 집과 송스 갤러리, 그리고 이 카페 모두 마포구에 있다. 거리는 가까웠다.
신성재가 차에 타며 말했다.
"갤러리에서 뵙죠."
그녀가 얼른 부탁했다.
"저도 옆에 타고 가도 되나요?"
그녀는 이 차의 상태를 더 느껴보고 싶었다.
'성능까지 복원했을까? 너무 궁금해.'
"차 안 가져왔습니까?"
"나중에 가지러 오면 돼요."
***
두 사람은 신성재의 차를 타고 송스 갤러리로 이동했다.
카페에서 갤러리로 가는 동안 송예솔은 차의 컨디션을 몸으로 느꼈다.
'진짜 새 차 같아.'
그녀는 오래된 차에 대해 잘 아는 편이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송충기 회장은 옛날 차에 관심이 많았다. 명품으로 불렸던 차도 여러 대 보유하고 있다.
송예솔도 할아버지 덕분에 그런 차를 많이 타보았다.
그녀는 지금 타고 있는 이 차를 사려고 했던 적이 있다.
'할아버지한테 자랑하려고 했는데.'
그때는 차 상태가 폐차장으로 직행해야 할 정도인 걸 확인하고 매입을 거부했다.
'그 차와는 다르게….'
같은 차다.
'상태가 진짜 좋아.'
송충기 회장의 올드카들도 관리가 잘 된 편이지만, 지금 이 차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실내에서 만져볼 수 있는 부품들을 확인했다.
'최신 부품으로 교체한 게 아니야. 옛날에 생산된 원래 부품이 그대로 사용됐어.'
부품 하나하나에 옛날 차 특유의 감성이 묻어 있었다. 그러면서 어디 하나 삐걱거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차량의 시트나 문 손잡이 같은 내장재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확인했다. 닳은 곳이 하나도 없었다.
닳기는커녕 최근에 시트의 비닐을 뜯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상태로 좋았다.
그녀가 차의 계기판을 슬쩍 보았다. 주행거리가 보였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20만km? 새 차 같은 컨디션인데 저 거리가 어떻게 가능하지?'
그녀는 신성재가 유물 복원 전문가라는 건 안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물었다.
"자동차는 분야가 완전히 다른데, 이렇게 통째로 복원하는 게 가능해요?"
"되던데요."
"겉모습은 그렇다 치고, 성능까지 그대로 복원했다고요?"
"네."
"어떻게요?"
"그냥, 내가 좀 잘합니다."
***
깨진 불상은 송스 갤러리 내부의 통제구역에 보관되어 있었다. 송예솔이 신성재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신성재가 불상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쯧. 박살이 났네."
돌 불상은 다섯 조각으로 쪼개져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겁니까?"
송예솔이 설명했다.
"인수할 때 이미 불상 내부에 미세한 금이 있었나 봐요. 그걸 검수팀이 못 알아본 거죠."
"검수팀은 송스 갤러리 직원입니까?"
"아니요. 외주를 줬어요. 그래서 거래처를 바꾸려고요."
"거 실수할 수도 있지. 어떻게 실수 한 번에 바꾸시나."
"네? 아. 신성재 씨가 완벽하게 복원해주시면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송예솔이 진지하게 물었다.
"복원은 어디까지 가능하겠어요?"
신성재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감쪽같이?"
"겉으론 드러나지 않은 미세한 균열이 내부에 더 있을 수도 있어요. 복원해서 할아버지께 돌려드렸는데 또 깨지면 진짜 감당 안 돼요."
"그건 일단 만져보고 판단합시다."
단순히 만져보기만 해서는 내부 균열 상태를 알아낼 수 없다. 분석 마법이나 복원 마법을 송예솔의 앞에서 쓸 생각도 없다.
그런데도 일부러 불상을 만지려고 했다.
'고객 앞에서는 퍼포먼스가 중요하니까.'
마법으로 유물을 복원한다는 걸 모르게 하려면, 그럴듯한 퍼포먼스를 좀 보여줘야 한다.
송예솔이 제지했다.
"잠시만요."
그녀가 하얀색 장갑을 가져와 넘겨주었다.
"우리가 전시품을 만질 때 쓰는 장갑이에요."
신성재가 주머니에서 지갑 크기의 얇고 작은 상자를 꺼내 열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장갑의 손등에는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난 내 장갑이 있어서."
"역시 전문가는 다르네요. 개인 장갑도 따로 쓰고. 처음 보는 디자인인데, 주문 제작인가요?"
"직접 만든 겁니다."
신성재가 장갑을 꼈다. 그런 후에 장갑에 새겨놓은 마법진에 마나를 조금 집어넣었다.
장갑에 인첸트된 보호 마법이 작동했다.
이제 이 장갑으로 유물을 만지면 표면이 오염되거나 손상될 위험이 줄어든다. 날카로운 부분을 만져도 손을 찔리거나 베이지 않는다.
송예솔도 하얀 장갑을 낀 후에 불상을 보호하는 유리 상자를 열었다.
신성재가 불상 조각 중에서 제일 큰 몸통에 손끝을 댔다.
'이제 그럴듯한 퍼포먼스를…. 음?'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불상에서 특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차가움이나 뜨거움, 전기의 찌릿함 같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기계로는 계측 불가능한 기운?'
그나마 비슷한 걸 찾자면 마나가 있었다.
'마나…는 아닌데?'
마나는 신성재가 아주 잘 아는 힘이다. 지금도 그의 몸에는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불상에서 느낀 이 기운은 마나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가 불상의 머리 쪽에도 손을 대었다. 그쪽 조각에서도 기운이 느껴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기운이었다.
'우리 지구의 물건에 이런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평행세계라면 이건 흔한 일이다. 거기는 마나가 깃든 돌멩이도 있다. 그런 돌을 동력원으로 하는 마법 공학 장치도 많았다.
그런데 여기는 현대 지구다.
'우리 세계에는 마나가 깃든 물건이 없어.'
그는 마법사가 된 후로 몇 년 동안 그런 물건을 찾으려고 애썼다. 전문 업체를 통해 다양한 광석을 수집해 시험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마나가 깃든 돌은 없었다.
그런데 이 불상에서 마나는 아니지만 비슷하면서도 특이한 힘이 깃든 것을 찾아냈다.
'이건 연구할 가치가 있다.'
마나와 비슷한 기운이라면, 마나를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가능한지는 연구해봐야 안다.
신성재는 이번 의뢰는 상황 봐서 받거나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러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 의뢰는 무조건 받자.'
신성재가 불상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뗀 후에 유리 상자를 도로 덮게 했다.
그런 후에 선언했다.
"이 불상은 제가 복원하겠습니다."
송예솔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어머. 고마워요. 역시 귀한 유물을 보니까 의욕이 생기시나 봐요."
"그…렇죠."
"비용은 얼마나 생각하세요?"
마나와 비슷한 이 기운을 연구하기 위해서라면 불상은 공짜로도 복원해줄 수 있다. 필요하다면 신성재가 돈을 낼 용의도 있다.
하지만 조건이 그렇게 좋아지면 송예솔의 의심을 산다. 복원비는 제대로 받아야 한다.
"유물의 가치과 복원의 어려움에 따라 가격은 달라지는데, 이 불상 정도면…. 1억?"
송예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비싸네요."
"불상의 복원 비용에 제한은 없다더니?"
송예솔이 그렇게 말하긴 했다. 그렇지만 1억 원이나 부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신성재는 비용을 말하기 전에 복원하겠다는 선언을 먼저 했다.
그녀가 예쁘게 웃으며 협상을 시도했다.
"유물을 복원할 때마다 매번 그런 비용을 지불하면 우리 갤러리는 파산해요."
씨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말해도 안 깎아줍니다."
13. 다리
신성재가 장담했다.
"대신에 깨진 적이 없는 것처럼 감쪽같이 복원하겠습니다."
송스 갤러리 송예솔 관장이 물었다.
"그러다 다시 쪼개지면요?"
"세 배 보상? 물론 다른 사건으로 파손된 건 내 책임은 아니고."
"음…."
그녀가 고민했다.
'복원 비용으로 1억을 태워?'
비싸다.
하지만 안 맡길 수도 없다. 갤러리가 불상을 맡았을 때 파손됐으니 갤러리가 해결해야 한다.
이 불상은 송충기 회장의 것이다. 완벽하게 복원해야 변명의 여지라도 있다.
거기에 신성재는 복원한 부분이 떨어지면 3억 원으로 보상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송예솔이 조건을 걸었다.
"여기서 작업할 수 있죠?"
"난 내 작업실에서만 일합니다."
"아니, 1억이나 받으면서 겨우 그런 조건 하나 못 들어줘요?"
"싫으면 손 뗄 테니까 알아서 하시고요."
지금 아쉬운 건 송예솔이다.
"그러면 일하는 거 구경해도 돼요?"
"당연히 안 됩니다만?"
상대가 1억 원이 아니라 100억 원을 준다 해도 참관은 허락할 수 없다. 이 불상을 연구하지 못하게 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마법을 쓰는 모습을 외부인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그래도 되는 건 무인도에서 같이 살아남은 은가은뿐이다.
송예솔은 갈등했다.
'실력은 최고라고 들었어. 그리고, 난 시간이 없어.'
전시회 준비 기간까지 고려하면 앞으로 일주일 안에 복원 작업이 끝나야 한다. 송충기 회장에게 조각 난 불상을 보여줄 수는 없다.
그녀가 물었다.
"혹시 일주일 안에 가능해요?"
신성재가 씩 웃었다.
"물론입니다."
"못 하면?"
"세 배 보상."
"알았어요. 복원 비용 1억. 그 조건 받아들일게요."
"그럼 이 불상과 관련된 자료, 전부 다 넘겨주시죠."
"네? 자료는 왜요?"
특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를 찾으려면, 먼저 이 불상의 정체부터 알아야 한다.
신성재가 둘러댔다.
"유물의 유래를 알아야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으니까?"
***
신성재가 집으로 돌아가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곳에 작업 공간이 꾸며져 있었다.
파손된 돌 불상은 신성재의 준비가 끝나면 갤러리에서 직접 배송하기로 했다.
대신에 불상에 관한 자료를 받아왔다.
갤러리가 준비한 자료에는 발굴 당시의 상황과 사진 등이 첨부되어 있었다. 갤러리에서 역사학자를 통해 알아낸 발굴 지역의 과거 정보도 들어 있었다.
"오래전에 폐허가 된 절에서 발굴한 불상. 조선 초기에 세워져서 200년 전에 폐허가 됐으면 유적지급이네."
송스 갤러리는 그 절과 돌 불상의 정보를 꽤 자세히 조사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사람들이 피난을 갔던 곳이라…."
자료를 보고 있는데 은가은이 집으로 놀러 왔다. 그녀가 지하실로 내려오며 물었다.
"오빠. 오늘은 일하는 날인가 봐?"
"넌 학생이 이 시간에 왜 여기 오냐?"
"나 대학생이잖아. 시간 많아. 고딩 때랑은 다르지."
"너 지금 수업 있을 텐데?"
"뭐래. 엄빠도 나 대학 가면 신경 안 쓴다고 했거든? 왜 오빠가 그래?"
"난 네 과외선생이었으니까? 이러려고 널 가르쳐서 대학 보냈나 싶다."
은가은이 말을 슬쩍 돌렸다.
"나 나중에 대학원이나 일반 회사에 가는 게 아니라, 다른 진로를 생각 중이야."
"백수가 꿈이구나."
"백수인 오빠를 보고 꿈을 키웠지!"
"난 사짜다만? 마법사."
평소라면 받아칠 은가은이 머뭇거렸다. 신성재가 물었다.
"너 좀 수상한데? 왜? 뭔데?"
"그게…. 나 가수가 되고 싶어."
신성재가 눈을 껌뻑였다.
"응? 뭐가 된다고?"
"가! 수!"
신성재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넌 과학자도 되고 싶었고,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가, 마법사도 되겠다고 했지. 그러더니 이젠 가수냐?"
"과학자는 성적이 안 나오는데 어쩌라고! 운동선수는 메달 딸 실력은 안 되니까 접은 거고, 마법사는!"
"마법사는?"
"오빠가 만들어줘야지!"
"지구에는 마나가 없어서 다른 사람이 마법사가 되는 건 불가능해. 마법은 나만 되는 거라니까?"
"거봐! 가수가 그래도 마법사보다는 쉽잖아!"
"왜 논리가 그렇게 비약이 되냐?"
"마법사는 안 돼도, 가수는 잘하면 될 수 있다니까?"
신성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 허황된 꿈을 아저씨랑 아줌마도 아시냐?"
"엄빠는 당연히 모르시지."
"두 분이 나한테 쓰신 과외비가 얼마인데! 내가 널 어떻게 가르쳐서 대학에 보냈는데!"
신성재가 무인도에서 처음 개방한 마법은 전투 계열이 대부분이라 돈이 되지 않았다.
대신에 과외비가 들어왔다.
그는 은가은이 고등학생일 때 과외를 맡아 과외비를 넉넉하게 받았다. 그 과외비에는 은가은을 무인도에서 한 달이나 보호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금액이 적진 않아서, 취직하거나 다른 알바를 하지 않아도 기본 생활비에 최소한의 마법 연구비 정도는 나왔다.
은가은이 땡깡을 부렸다.
"아! 몰라! 가수 되고 싶어! 난 이미 결정했어. 반대 금지!"
신성재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노래 실력은 되시고?"
"그거야 당연히…."
"네 실력은 무인도에서부터 내가 잘 아는데?"
"그건 내가 노래를 전문적으로 안 배워서 그래. 이제부터 보컬 학원에서 배우려고. 그러니까…."
은가은이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옵빠…."
신성재가 단호하게 말했다.
"꺼져."
은가은이 버럭 했다.
"아, 왜! 말도 안 꺼냈는데!"
"어디서 학원비를 날로 먹으려고."
보컬 학원에 다니려면 돈이 필요하다.
신성재는 오늘 1억 원짜리 복원 의뢰를 제안받았다.
"누가 학원비 그냥 달래? 알바 할 거야!"
"해."
"근데 여기서 하려고."
"응?"
은가은이 배시시 웃었다.
"나 이제 뭐 하면 돼?"
"여긴 네가 할 일이…. 아니지. 너 할 일 있다."
마침 시킬 일이 있긴 했다.
신성재가 송스 갤러리에서 받아온 자료를 넘겨주었다.
"이 불상이나 이 절에 대한 자료를 다 찾아. 역사적 사실은 물론이고 설화나 그 지역에 전해지는 이야기까지 싹 다."
은가은이 얼른 손바닥을 비볐다.
"아이고, 나리. 소녀가 그런 거 잘하는 건 어떻게 아시고. 직접 검색도 하고, 관련 기관에 문의도 넣고, 역사 게시판 같은 곳에 누가 뭐 아는 거 있는지 질문도 올리고. 그러면 되지?"
신성재가 은가은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 왜 이걸 잘하냐?"
"아이돌 파다가?"
"나한테서 뜯어간 용돈이 그렇게 쓰였구나?"
"선행투자라고 생각해."
"깡통 차겠구나."
"아니다! 이 악마야!"
"난 토요일에 현장 답사 갈 거니까, 그때까지 다 조사해놔라."
은가은이 얼른 손을 들었다.
"나도! 나도 놀러 가고 싶어!"
"난 일하러 가는 거다?"
"그게 그거 아냐?"
"당연히 아니지."
***
신성재가 충청북도의 산속에 도착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고, 조금 더 멀리 가면 소도시도 있었다.
은가은이 스마트폰에 담아온 문서를 보며 설명했다.
"임진왜란이랑 병자호란 때는 여기가 깊은 산이었대. 적의 주요 이동 경로에서 꽤 멀어서 피난민들이 많이 들어왔대."
은가은은 기어이 여기까지 따라왔다. 신성재가 푸념했다.
"이러라고 널 대학에 보낸 게 아닌데."
"대학은 내가 공부해서 갔거든?"
"그 공부를 시킨 게 나다."
"어쨌든 오늘은 토요일이잖아. 괜찮아. 놀아도 돼. 아니지. 이거 지금 일하는 거지. 알바비 나오니까."
그녀는 알바비를 받아서 보컬 학원에 등록할 계획이다.
신성재가 이제는 절터만 남아 있는 곳을 조사했다. 이곳에서 그 돌로 만든 불상이 발굴됐다.
그가 절터를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불상을 캐낸 곳이 여기인가."
그녀가 자료를 넘겨 현장 사진을 확인했다.
"맞아. 이 절에 영험한 불상이 있다는 전설이 있어. 그게 이번에 발굴된 그 불상일 확률이 높대. 물론 증거는 없지만."
그 전설 때문에 송스 그룹의 송충기 회장이 그 불상을 사들였다.
신성재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땅에 손을 대었다.
"그 손상된 불상이 그 영험한 불상 맞아."
이 절터 자체는 특별한 게 없다.
그런데 불상이 발굴된 이 장소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 불상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기운이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흔적인가…."
신성재가 그 기운의 흔적을 추적하며 말했다.
"사람들이 이쯤에서 절을 했을 거야. 두 손바닥을 붙이고 했던, 머리만 숙였던, 그냥 서서 말했던, 진심을 담아서 기원했겠지."
"왜적을 물리쳐달라고?"
"살려달라고."
"아…."
지금 이 땅에 그때의 잔상이 남아 있다. 신성재가 바닥 몇 곳을 가리켰다.
"여기, 여기, 여기에서 주로 기원했어."
그가 말한 장소들의 중심에서 그 불상이 발굴됐다.
신성재의 손에는 흙이 살짝 묻어 있었다. 그 흙을 손가락으로 문질러보았다.
흙에도 미약한 기운이 남아 있긴 하지만, 너무 약해서 이것만으로는 인첸트 마법을 쓸 수 없다. 흙을 마법 재료로 이용할 수도 없다.
'이 땅 전체를 대상으로 마법진을 설치하는 건 가능하겠어. 그전에 연구가 좀 필요하지만.'
이 땅이 그의 소유도 아닌데 여기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신성재가 생각을 정리했다.
"불상이라는 것만으로 조건이 충족된다면, 전국 모든 절의 불상이 다 특별해야 해."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전에도 골동품 불상을 몇 번 복원했지만, 그때는 이번처럼 특별한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전쟁통에 피난 온 사람들. 수많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기원은 무척 간절했겠지. 그 기원이 하나로 모였겠지."
하루 이틀 모인 것도 아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등, 여러 번의 전란을 겪을 때마다 이곳에 피난민이 모였다.
"그 불상은, 그 많은 사람의 기원을 오랜 세월에 걸쳐 받았겠지."
이제 확실해졌다.
"그래서 그 불상이 특별했던 거야."
그 불상에서 특이한 기운이 느껴진 이유를 알아냈다.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신성재가 절터를 벗어났다.
"가자."
은가은이 따라가며 물었다.
"조사 끝났어?"
"그래. 여기서 확인할 건 다 했다."
"내 알바비는?"
"집에 가서 줄게."
그녀가 시계를 보았다. 아직 한낮이다. 게다가 콘크리트 세상인 대도시를 벗어나 자연 속으로 들어왔다.
"그럼 밥 먹고 가자!"
"넌 여기 밥 먹으러 왔냐?"
"밥도 먹으러 왔지! 그럼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게?"
무인도에서 굶어가며 지낸 한 달은 은가은만 먹깨비로 만든 게 아니다. 신성재도 먹는 걸 좋아한다.
"여기 좋은 데 있냐?"
은가은이 즉시 맛집 리스트를 펼쳤다.
"골라! 한식, 중식, 양식, 고기, 해산물. 종류별로 다 있고, 진짜 맛집인지도 조사해서 쫙 정리했어!"
"넌 저 절과 불상을 조사하랬더니…."
"이 지역을 조사하다 보니까 덤으로 나온 맛집 정보라고!"
"알바비를 제대로 받고 싶으면 맛있어야 할 거다."
은가은은 자신 있었다.
"아싸아! 그럼 1번 맛집이랑 2번 맛집 두 개만 먹고 올라가자!"
"요리가 두 개가 아니라 맛집이 둘이구나."
"그래서 싫어?"
"맛있으면 좋지."
***
첫 번째 집은 국수와 녹두전을 파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밥을 먹고 나온 후에 은가은이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맛있었다."
"좋은 선택이었어."
그녀가 조수석에서 요구했다.
"이제 다음 식당에 가자!"
"이번엔 뭐냐?"
"생선구이!"
"충청북도는 바다가 없다?"
"그런데도 맛집이래! 얼마나 맛있으면 바다가 없는데 생선구이가 맛집이야?"
"듣고 보니 맛이 궁금하네!"
두 사람이 다음 마을로 이동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다리가 있었다. 시골의 좁은 강 양쪽 땅을 연결하는 100m 길이의 콘크리트 다리였다.
은가은이 말했다.
"오늘 개통했나 보다. 옆에서 사람들이 기념행사한다."
식당은 그 다리를 건너야 나온다.
신성재가 차를 몰고 다리를 지나가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음? 느낌이 쎄한데?"
"갑자기?"
신성재가 다리를 지나간 후에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가 차에서 내려 다리를 보았다.
은가은이 옆에서 물었다.
"왜? 다리 귀신이라도 나와?"
"귀신은 아닌데…."
신성재가 다리 중간을 보며 마법을 사용했다.
[이글 아이]
무인도에서 썼던 이글 아이는 정찰기처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마법이다. 지금 사용한 건 그 마법의 다른 버전으로 아래에서 위를 본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 마법을 사용하면 대상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자세히 볼 수 있다.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틈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신성재가 다리 끝 난간에 손을 댄 상태로 혀를 찼다.
"쯧. 쎄하더라니. 부실공사다."
"응?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건축 공학 전공도 아닌데?"
"나한테는 마법 공학이 있잖아."
"이 다리가 얼마나 안 좋은데?"
신성재가 단언했다.
"무너져."
14. 마법사의 방식
평행세계와 현대 지구의 문명 수준은 비슷하다. 저쪽 세계도 건물을 지을 때는 철근 콘크리트를 쓴다.
하지만 건물을 짓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저쪽 세계는 대형 콘크리트 건축물을 지을 때 마법 공학을 사용한다.
신성재가 다리 난간에 손가락 끝을 대고 간단한 마법진을 그렸다. 손끝에서 1회용 마법진이 완성됐다.
그 마법진에서 마나 파동이 발생해 다리 전체로 퍼져나갔다.
"건축 공학이 건축물 설계를 잘한다면, 마법 공학은 콘크리트 구조물의 약점을 잘 찾아."
이미 이글 아이로 의심 가는 부분을 보고 있다. 거기에 마나 파동을 더해 취약점을 찾아냈다.
제대로 검증해도 결론은 같았다.
"이 다리는 무너져."
신성재가 차로 돌아가 운전석에 앉았다. 은가은도 얼른 조수석에 탔다.
신성재가 차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더니 방금 지나온 다리를 도로 넘어갔다.
은가은이 옆에서 물었다.
"앗! 이 다리는 무너진다면서 왜 도로 지나가는데?"
"지금 당장은 아니야."
"그럼 언제 무너져?"
"길어야 한 달 안에. 어쩌면 며칠 후에."
신성재가 다리 반대편으로 건너간 후에 차를 옆으로 돌려세웠다.
오늘은 다리 개통 기념행사를 하는 날이다. 그래서 지역 주민은 물론이고 군청 군수와 건설사 직원 등이 다리 옆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신성재의 차가 다리를 차단했다.
"저 차 뭐야?"
"다리를 아예 막았는데?"
신성재가 차에서 내린 후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 다리는 조만간 무너질 겁니다. 너무 부실하게 지었습니다. 당장 다리 전체를 폐쇄하고 정밀 진단부터 해야 합니다."
다리를 만든 건설사의 이사가 부실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화를 벌컥 냈다.
"너 뭐야! 누가 보냈어! 어디서 그따위 망발이야!"
군수가 이사에게 물었다.
"김 이사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군수님.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돈이나 뜯으려고 기웃거리는 거지새끼인가 봅니다."
"기자인가? 그것부터 확인하고 해결해요."
김 이사는 그 말에 멈칫하다가 신성재에게 물었다.
"당신 혹시 기자요?"
"복원 전문가입니다만?"
기자가 아니라는 말에 김 이사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복원? 그거랑 다리랑 무슨 상관인데! 기자도 아니면서 뭐하는 짓이야!"
"사물의 구조를 분석하는 전문가라서, 이 다리 상태가 눈에 들어오더라고. 이정도면 거의 순살 다리인데? 치킨도 아니고 뭘 이따위로 만들었어?"
"뭐, 뭐? 치킨?"
"자재를 너무 많이 빼먹었잖아. 거기다 구조적 결함도 심각해. 그러니까 저 다리는 저 형태를 못 버텨."
그가 다리 중간을 가리켰다.
"저기부터 무너질 거다. 그것도 폭삭."
김 이사의 얼굴이 걸레처럼 일그러졌다.
"얻다 대고 누명이야! 다들 뭐해? 저거 빨리 치워!"
건설사 직원들이 신성재 쪽으로 움직였다.
군수에게 줄을 대고 싶은 같은 정당 바람잡이 당원이 주민들 사이에서 소리를 질렀다.
"거 왜 우리 마을 다리를 가지고 무너지네 마네 하는 거야!"
건설사에서 막걸리깨나 얻어먹은 지역 주민도 화를 냈다.
"이게 어떻게 지은 다리인데 그따위 부정 타는 소리를 하냔 말이다!"
신성재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아니네."
"오빠. 그냥 갈까?"
"이 다리는 조만간 무너져. 높은 확률로 차가 지나갈 때 무너지겠지. 그럼 그 차에 탄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죽을 테고."
"그럼 어떻게 해?"
"마법사의 방식으로 해야지."
신성재가 대화를 포기하고 운전석에 앉았다. 은가은도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신성재가 차를 몰고 콘크리트 다리를 다시 건너갔다.
김 이사가 그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저렇게 도망칠 새끼가 어디 감히."
군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김 이사. 설마 다리가 무너질 정도로 빼먹은 건 아니겠지요?"
"당연히 아닙니다. 저 새끼는 돈이나 뜯으려고 그냥 찔러본 겁니다. 저런 새끼는 무시하십시오."
김 이사는 이 다리를 지으면서 이것저것 꽤 많이 빼먹긴 했다. 군수에게 1억 원쯤 찔러주고도 많이 남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다리가 무너질 정도로 빼먹진 않았다.
그런데 이 다리는 김 이사의 회사가 직접 지은 게 아니다. 실제로 공사한 건 하청 업체다.
그 업체도 김 이사처럼 조금 빼먹었다. 거기다 현장 책임자도 또 조금 빼먹었다.
김 이사만 빼먹을 때는 다리가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너도나도 한 입씩 빼먹다 보니 예상보다 더 부실해졌다. 그렇게 완공한 다리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신성재가 다리 중간을 건너면서 손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그러면서 아래쪽을 향해 마법을 사용했다.
[스톤 브레이커]
골렘과 싸우거나 공사현장에서 쓰는 이 마법은 위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지금 사용한 정도로는 기껏해야 조금 큰 돌 하나 깨는 위력만 나온다.
멀쩡한 철근 콘크리트 다리를 이 마법으로 부수려면, 다리 위에 커다란 마법진이라도 그려야 한다.
그런데 이 다리는 멀쩡하지 않았다. 제일 취약한 곳은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신성재가 바로 그 취약점에 스톤 브레이커 마법을 썼다.
다리의 붕괴가 가속됐다.
신성재의 차는 다리를 건넌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군수가 개통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두 팔을 옆으로 벌리며 선언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이 다리는 안전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100m짜리 콘크리트 다리가 중간부터 붕괴했다.
"어?"
다리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신성재의 마법으로 조금 일찍 깨졌다. 그곳을 시작으로 다른 부분들도 연달아 터져나갔다.
다리의 중심이 제일 먼저 아래로 꺼졌다. 커다란 상판이 수수깡처럼 꺾이며 강 위로 떨어졌다.
일단 하나가 부서지니까, 다른 상판이나 기둥들도 버티지 못하고 그 뒤를 따라 무너졌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100m짜리 다리가 중심부터 바깥쪽으로 폭발하듯이 부서졌다. 굉음이 사람들의 귀를 때리고, 강에서 물보라가 치솟았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 다리가 무너진다아!"
"아니, 저게 왜 무너져!"
"새삥 다리잖아!"
"자, 잠깐. 우리 오늘 행사, 저 다리 위에서 하는 거도 있었지?"
"뒷부분은 저기서 하기로 했지. 기념사진도 찍고…."
"저 위에서 사진 찍는 도중에 다리가 무너졌으면…."
"허어억!"
***
신성재와 은가은은 다리 근처의 맛집은 포기했다.
은가은이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동을 먹으며 툴툴댔다.
"생선구이 먹고 싶었는데."
"연남동 가서 먹자."
"앗!"
그녀가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아까 그 다리 무너졌대!"
사진 속 군수는 두 팔을 양쪽으로 쫙 벌리고 있었다. 그 뒤로 다리가 화려하게 부서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누가 스마트폰으로 찍었대."
그녀가 댓글도 확인했다.
- 군수 자세 죽이네. 이건 인생 사진이다.
- 무너진 게 자기네 다리만 아니라면 말이지.
- 저 다리의 무너진 부분을 확인하면 철근이 너무 부족해 보인다더라.
- 순살 다리인가?
- 시멘트도 부실하게 굳었대.
- 철근도 없고 시멘트도 엉망인데 다리가 어떻게 서 있지?
- 그래서 무너졌습니다.
신성재가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조금 일찍 무너뜨린 거지."
다른 댓글도 있었다.
- 그런데 다리를 보고 붕괴 위험을 눈치챘다던, 지나가던 전문가는 누구일까요?
- 모르죠. 그 사람 사진은 아무도 안 찍었으니까요.
***
광역 특별수사지원팀은 관할을 따지지 않고 사건 정보를 얻는다. 부서가 만들어진 계기가 KTX 테러이기 때문에, 다리가 갑자기 붕괴한 사건 같은 경우는 수사 정보가 즉시 제공된다.
특지팀은 신설된 곳이라 팀원을 계속 모으는 중이다.
도서윤은 특지팀에 임시로 들어온 상태였다. 여기서 손발이 잘 맞는다는 걸 보여줘야 정식 팀원이 될 수 있다.
그녀가 다리 붕괴 사건의 자료를 분석한 후에 보고했다.
"테러는 아닙니다."
팀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딱 봐도 건축 비리잖아."
"사망자가 없으니까, 이번에도 그냥 실무자 몇 명 가볍게 처벌받고 끝나겠죠."
팀장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번엔 안 그럴걸?"
"물론 무너진 다리는 건설사가 다시 지어야겠지만요."
"그 지역에는 지난번 군수 선거에서 간발의 차이로 떨어진 경쟁자가 있어. 그 사람이 앞장서서 지금 군수 날리려고 뛰어다닌다더라."
"잘하면 보궐로 당선되겠네요."
"그렇지. 그쪽 지역은 벌써 경쟁자 쪽에 줄 대려고 시끄럽대."
다른 형사가 옆에서 물었다.
"팀장님. 현장에 나타나서 경고했다던, 지나가던 복원 전문가는 누구일까요?"
"사진이 없으니 모르지."
"차의 뒷모습이 멀리서 흐릿하게 찍히긴 했는데요."
"우리가 신경 쓸 건 아니잖아. 그 사람이 다리를 무너뜨린 것도 아닌데."
***
신성재가 송스 갤러리를 방문했다.
송예솔은 오늘은 갤러리로 출근하는 날이 아닌데도 일부러 나와서 신성재를 기다렸다.
그녀가 물었다.
"복원 준비가 다 됐다면서요?"
"조사는 충분히 했으니까요."
송예솔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자기 턱에 대며 말했다.
"불상을 완벽하게 복원해주면, 제가 개인적으로 무척 고마워할 거예요."
"안 고마워해도 되니까 입금만 제대로 하세요."
"전문가가 완벽하게 복원됐다고 확인해주면 즉시 전액 입금할게요. 복원에 부족함이 있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만요."
신성재의 옆에서 은가은이 쫑알댔다.
"당연히 완벽할 텐데 그걸 못 믿네. 오빠. 복원 결과가 완벽하면 추가금 달라 그래."
송예솔의 시선이 옆으로 조금 움직였다. 그녀가 늘씬한 다리를 슬쩍 들어 꼬아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옆에는 누구?"
"조수인데요?"
"조수가 어리네요?"
"다 컸거든요?"
"고등학생?"
"대학생이거든요?"
"삐약?"
"아니, 지금 이 아…."
더 험한 말이 나오기 전에 신성재가 끼어들었다.
"복원할 불상이나 주시죠. 아니면 배송해주던가."
송예솔이 꼬았던 다리를 풀며 대답했다.
"우리 갤러리 차량으로 즉시 배송할게요. 불상이 더 깨지면 진짜 감당이 안 돼서."
"그럼 그러시죠."
"그런데…."
송예솔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물었다.
"그 다리가 무너질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거기 있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송예솔이 스마트폰으로 차 사진을 보여주었다.
지역 주민이 그 지역 군수의 연설을 휴대폰으로 찍을 때, 저 멀리 지나가는 차의 뒷모습이 작고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내가 신성재 씨 차에 관심 많은 거 알잖아요. 멀어서 확실하진 않아도 그 차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그 차는 제가 알기론 국내에 한 대뿐이죠. 그리고 이 다리가 있는 지역은 불상을 발굴한 곳 근처고요."
송예솔이 슬쩍 웃었다.
"그럼 지나가던 복원 전문가가 누구인지는 뻔하잖아요? 그 다리가 무너진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신성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복원을 잘하려면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야 잘 부서지는지도 알아야 하니까요."
"네? 건드려요?"
"그 다리를 만든 사람들이 뭘 빼먹었는지 눈치챘다는 말입니다."
***
집으로 가는 길에, 은가은이 차의 옆자리에 앉아서 쫑알댔다.
"아주 여우 같은 아줌마야. 아니다. 여우도 과분해. 구렁이가 변신한 거야. 앞으로 카시라고 불러야지."
"사람이다만?"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누구나 다 알아."
"지금 누구 편인데!"
신성재가 은가은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너 안 내리냐?"
"조수 필요한 거 아냐?"
"복원 마법 쓸 땐 아니야. 옆에 있다가 파편에 맞으면 다친다."
"다쳐도 마법으로 고쳐주면 되잖아."
"파편에 맞을 때 많이 아프겠지?"
총에 맞아본 경험이 있는 은가은이 즉시 꼬리를 말았다.
"아…. 집에 가서 보컬 학원이나 알아봐야겠다."
"가은아. 기왕이면 최고의 학원을 골라."
은가은이 활짝 웃었다.
"오빠! 믿고 있었구나!"
"너희 하찮은 노래 실력을 믿지."
"최고의 보컬 학원을 고르라며?"
"그래야 망해도 학원 탓을 못 하지?"
"우이씨! 가!"
15. 수작
층간소음조차 막지 못하는 얇은 바닥이나 벽으로는 마법 실험의 반동을 차단하기 어렵다.
실험은 최소한 단독주택, 기왕이면 그 주택의 지하실에서 하는 게 좋다. 그러면 지하실 벽 너머에 있는 대량의 흙이 차단 장벽 역할을 한다.
송스 갤러리는 조각 난 불상을 신성재의 집으로 직접 배송했다. 불상은 잠금장치는 물론이고 충격완화장치까지 설치된 상자에 들어 있었다.
신성재가 지하실 공방 작업대에 다섯 개의 불상 조각을 올려놓았다.
"추가 손상은 없어 보이는데, 경계면에서 부스러기가 좀 떨어졌네."
그것 때문에 깨진 부분의 경계에 살짝 파인 곳이 보였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는 유물을 파손되기 전 상태로 되돌려 균열 같은 손상을 복구한다. 하지만 없어진 물질을 새로 만들어내진 못한다.
물질을 만들어내는 건 창조 마법의 영역이다.
"이 부분에는 부스러기를 잘 채워 넣고 복원하면 되겠지."
신성재가 다섯 개로 나뉜 불상을 잘 맞춘 후에 복원 마법을 사용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마나가 소모되면서 다섯 조각 사이의 균열이 천천히 융합됐다. 이 불상이 쪼개진 것 자체는 오래되지 않은 일이라서, 마나 소모량은 많지 않았다.
불상이 깨질 때 떨어져나온 아주 작은 부스러기들도 원래의 자리를 찾아갔다.
[크로노스의 눈]
이 보조마법으로 불상이 깨질 때의 모습을 확인해야 표면의 무늬를 지워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불상이 깨질 때의 모습이 마치 홀로그램처럼 그의 눈에 보였다.
"음? 이야기랑 다른데?"
송예솔이 했던 이야기와 지금 보는 모습이 많이 달랐다.
지금 그가 보는 잔상은 불상이 쪼개질 때가 아니다. 그때보다 하루 전에 일어난 일이다.
"송스 갤러리에서 아는 것보다 하루 전에 충격을 받았다?"
실제로 쪼개진 건 하루가 지난 후였지만, 이건 그 전에 이미 쪼개진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신성재는 복원 비용으로 1억 원을 받기로 했다. 거기다 이 불상에 담긴 특별한 힘도 개인적으로 연구할 계획이다.
"남의 회사 일에 굳이 개입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챙기는 게 많으니까 고객 서비스 정도는 해줘야겠다."
신성재가 다시 작업에 집중해 불상을 완전히 복원했다.
그는 작은 조각들을 잔상과 비교하며 제자리에 채워 넣었다.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작은 조각은 적당한 빈틈에 채워 넣었다.
신성재가 복원 작업을 마치고 나서 불상에 담긴 기운을 확인했다.
"마나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성질의 기운이 담겨 있는데…."
그 기운의 유래는 발굴 현장에 가서 확인했다.
"유물에 깃든 강력한 기원이 그 기운을 방출하는 코어 역할을 하나 본데?"
불상에 깃든 기운의 느낌이나 코어의 성격 모두 저쪽 세계의 마나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 그래서 그 특성과 차이점을 지금 당장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려웠다.
"며칠 연구하면 좀 더 알게 되겠지."
***
신성재는 사흘 동안 불상에 깃든 기원과 거기서 나오는 기운을 연구했다.
"마법진에 마나 대신에 이 기운을 넣어도 되겠는데? 그러려면 마법진을 좀 수정해야 하지만."
그것까지 실험하려면 이 돌 불상에 마법진을 새겨야 한다.
남의 물건에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다. 이건 의뢰받은 물건이니까 멀쩡한 상태로 돌려줘야 한다.
신성재가 송스 갤러리에 연락했다.
***
송예솔 관장은 깜짝 놀랐다.
"네? 벌써 복원이 끝났다고요?"
- 서둘려야 해서 저한테 맡기셨을 텐데요?
"그건 그렇지만, 불상을 맡기고 겨우 사흘 지났는데…."
"제가 원래 빠릅니다."
"그럼 완성도는요?"
신성재가 사진을 보냈다. 송예솔이 그 사진을 보고 감탄했다.
"사진만 보면 진짜 완벽하네요."
- 실제로도 완벽합니다.
"이걸 겨우 사흘 만에…."
실제로는 받은 당일 복원을 끝냈다.
사흘이나 지나서 연락한 이유는 연구 목적 외에도 있었다.
파손된 골동품을 받자마자 복원했다고 하면 의뢰인 쪽에서 값을 깎으려 들 수 있다.
이미 이 일을 하면서 그런 일을 몇 번 겪었다. 그런 식으로 깎으려 하는 사람의 의뢰는 다시는 받지 않았다.
그런 트러블을 피하려고, 이젠 작업이 끝나도 며칠 정도는 묵혔다가 의뢰인에게 알린다.
송예솔은 출장 중이라 바로 불상을 확인하진 못했다.
대신에 송스 갤러리의 차량을 즉시 보내 불상을 받아왔다. 복원 상태를 확인할 전문가에게 정밀 조사도 의뢰했다.
***
이튿날 송예솔이 숑스 갤러리 전시관에서 복원된 불상을 보며 감탄했다.
"대단해요. 파손됐던 흔적이 보이지 않아요."
옆에서 갤러리 직원인 최민구 과장이 말했다.
"관장님. 완벽한 복원이 조건이었는데, 흠집이 꽤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신성재가 설명했다.
"표면의 흠집들은 복원 전부터 있던 것들이라 손대지 않았습니다. 이 불상을 새것처럼 만들면 무슨 가치가 있나 싶기도 하고."
송예솔이 손뼉을 쳤다.
"그쵸! 그쵸!"
그녀는 단순히 불상의 겉모습만 보고 감탄하는 게 아니다. 이미 전문가에게 정밀 검사를 의뢰해 복원이 완벽하다는 보고서를 받았다.
'애당초 부서진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지.'
그녀는 이 불상이 다섯 개로 조각난 걸 확실히 보았다.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꽤 많이 받았다.
그런데 복원 결과가 너무 완벽해서, 전문가는 이 불상이 깨졌었다는 말을 쉽게 믿지 못했다.
'이정도면 할아버지도 납득하실 거야.'
기분이 좋아진 그녀가 신성재에게 제안했다.
"우리 전시관에는 손상된 유물이 더 있어요. 그것들도 복원을 맡아주세요."
옆에서 최민구 과장이 반대했다.
"관장님. 신성재 씨는 너무 비쌉니다. 그 유물들을 다 복원하려면 단가가 안 맞습니다."
"대량 의뢰니까 복원 단가는 조정해야죠."
송예솔이 미소를 지으며 제안했다.
"신성재 씨. 그 정도는 조정해주실 수 있죠?"
"아니요."
송예솔이 눈의 동그래졌다.
"네? 어머. 왜요? 당황스럽네요."
"너무 당연한 듯이 요구하셔서 저도 당황했습니다만?"
"비용 조정은 어렵다는 뜻인가요?"
"비용은 나만의 판단 기준이 있으니까 조정은 당연히 어려운 거고요."
"그럼 이유가 또 있나요?"
"난 내 마음에 드는 의뢰만 받습니다만?"
최민구 과장이 옆에서 경고했다.
"신성재 씨. 일을 그런 식으로 하면 이 업계에서 버틸 수 없습니다."
"음…. 이 불상 복원에 쓴 시간이 사흘인데."
불상을 받은 후에 돌려줄 때까지 걸린 시간이 사흘이다.
실제로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크로노스의 눈으로 과거를 보고 자잘한 조각을 어디에 끼워 넣을지 고민한 시간까지 다 합쳐도 그 정도였다.
지난 사흘은 복원 자체가 아니라 이 불상에 깃든 특별한 기운을 연구한 시간이다.
신성재가 말했다.
"3일 일하고 1억을 벌었는데도 버틸 걸 걱정해야 한다? 그래서 내 앞날을 걱정해주신 분은 연봉이?"
최민구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 나는 돈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신성재가 박수를 쳤다.
"자원봉사자셨군. 훌륭합니다."
"이…."
송예솔이 급히 말했다.
"최 과장님. 지금 무슨 짓이에요? 신성재 씨도 진정하세요."
신성재가 송예솔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침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새로운 의뢰 조건이라면 저랑 따로 이야기해요."
"그거 말고요."
"네?"
"이 불상이 깨질 때, 저절로 쪼개졌다고 했지요?"
"그렇죠."
"그거 확실한 겁니까?"
"네? 당연히 그렇죠?"
"아닐 텐데."
"네?"
"이렇게 완벽한 복원을 하려면, 이 불상이 왜 어떻게 부서졌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걸 분석하다가 알아냈는데…."
신성재가 불상을 가리켰다.
"이건 저절로 쪼개진 게 아닙니다."
송예솔은 당황했다.
"그게 무슨…."
"사람이 인위적인 힘을 가해서 쪼갰습니다."
신성재는 이 불상에 외부 충격이 가해지는 모습을 마법으로 보았다.
송예솔은 쉽게 믿지 않았다.
"CCTV를 확인해도 깨지기 전에 누가 만진 흔적은 없었어요. 일부러 쪼갠 흔적도 없었고요."
"외부에 흔적이 남지 않고 내부에만 잔금이 가게 충격을 아주 잘 줬더군요. 전문가의 솜씨였죠."
"네?"
"나중에 위치를 옮기는 정도의 충격만으로도 저절로 깨질 수 있게, 아주 잘했습니다."
"말도 안 돼요. 도대체 누가 왜 그러겠어요?"
"그러게요."
신성재가 최민구를 돌아보았다.
"왜 그랬습니까?"
최민구 과장이 얼굴이 더 벌게졌다. 그가 화를 벌컥 냈다.
"지금 잠깐 말싸움을 했다고 나한테 누명을 씌우는 겁니까?"
"누명 아니라는 거 알잖아."
"증거가 없을 텐데!"
"증거가 없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뭐, 뭐?"
"안 들킬 자신이 있었겠지."
최민구가 송예솔을 돌아보았다. 송예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생각했다.
'최 과장님은 유물 관리의 전문가니까, 불상에 잔금이 가게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갤러리에 외부 침입은 없었다고 보고한 사람이 최 과장님인데…."
신성재가 물었다.
"송 관장님. 이 불상에 일부러 쪼갠 흔적이 없다는 건, 직접 확인한 겁니까?"
"그 일은 전문가에게 맡겼어요."
"그 전문가는 누가 섭외한 겁니까?"
송예솔이 옆을 돌아보았다.
"당연히 최 과장님…."
신성재가 혀를 찼다.
"쯧쯧.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셨네."
당황한 최민구가 소리를 질렀다.
"관장님. 전 아닙니다! 지금 같이 일하는 저보다 처음 보는 저 사람을 더 믿으시는 겁니까? 증거도 없이?"
송예솔이 신성재에게 물었다.
"증거가 없는 건가요?"
신성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증거는 송 관장님이 찾으셔야죠."
"예?"
"이건 송스 갤러리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니까."
"아…."
증거는 없다. 근거는 신성재의 말밖에 없다.
심지어 최민구 과장과 시비가 붙은 상태에서 한 말이다.
송예솔이 말했다.
"최 과장님. 일단 사무실로 돌아가세요."
"관장님!"
"최 과장님을 의심하는 거 아니에요. 갤러리에 손님들이 계신데 괜히 소란스러워질까 봐 그래요. 오늘은 일찍 퇴근하셔도 되니까, 내일 차분하게 이야기해요."
최민구가 신성재를 노려보며 씩씩대다가 보관실에서 나갔다.
신성재가 물었다.
"의심을 안 하신다?"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
송예솔이 신성재의 말을 믿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가 복원해온 불상의 상태가 너무 완벽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실력자니까, 다른 전문가가 못 본 단서를 찾아냈을 수 있어.'
게다가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긴 했다.
'할아버지가 나한테 실망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은 사람.'
최민구 과장을 매수해서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이 떠올랐다. 심지어 그런 사람은 한 명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게 갤러리에서 오래 일한 최민구 과장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그녀는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신성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럼 알아서 하시고, 파손된 다른 유물이나 봅시다."
"어머. 맡아주시는 건가요?"
"맡을지 말지는 보고 정할 겁니다."
***
신성재는 갤러리에 보관된 파손된 유물 몇 개를 손으로 만져보며 조사했다.
그런데 파손된 유물 중에는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는 게 없었다.
'귀한 유물이라고 해서 다 특별한 기운이 있는 건 아니야. 역시 그 불상이 특별한 거겠지.'
그 불상으로 인첸트 마법까지 연구하고 싶었지만 그러진 않았다. 송스 갤러리에 넘겨줘야 하는 물건에 굳이 마법적 효과를 부여하고 싶진 않았다.
이 갤러리의 파손된 유물 중에는 특별한 기운이 담긴 것은 없었다.
'그런 유물은 귀할 테니까.'
신성재가 이전에 복원한 다른 골동품 중에도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 없었다. 그런 게 흔했다면 이미 예전에 발견했어야 한다.
"많이 귀하겠어."
"네?"
"여기에 귀한 물건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렇죠? 파손되지만 않았다면 가치가 상당했을 텐데."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신성재를 쳐다보았다.
"이 유물들을 이대로 두기 아쉽죠?"
"내 것도 아닌데 아쉬울 게 뭡니까?"
그녀의 눈빛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신성재의 관심은 이미 여기가 아니라 그런 물건을 찾아볼 만한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불상 복원비는 계좌로 입금하시죠. 난 갈 곳이 있어서."
송예솔이 제안했다.
"아. 그럼 같이 식사라도…."
신성재가 거절했다.
"지금 가야 하는 곳이라서."
***
신성재가 송스 갤러리를 떠났다.
송예솔은 그의 1984년식 스포츠카가 떠나는 모습을 보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그녀는 송스 그룹 감사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사무실 전화가 아니라 그룹 감사실 팀장의 휴대폰으로 직접 연락했다.
"박 팀장님. 부탁이 있어요. 네. 우리 갤러리 직원인데, 잘못된 제보일 수도 있어서요. 본인이 모르게 은밀하게 조사해 주세요."
그녀는 최민구 과장의 정보를 알려준 후에 휴대폰 통화를 종료했다.
"이쪽 문제는 기다리면 결과가 나올 텐데…."
그녀는 신성재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쉽지 않은 남자네?"
***
갤러리 밖으로 나온 최민구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성재 그 새끼, 내가 부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16. 골동품
신성재가 마포에 있는 송스 갤러리에서 종로로 이동했다.
"비슷한 기운을 가진 유물은 찾으면 또 있겠지. 그런 유물이 세상에 그 불상 하나뿐일 리는 없으니까."
불상이 발굴된 곳 주변의 흙에서도 그런 기운은 감지됐다. 다만, 그 흙이 품은 건 워낙 미약한 기운이라 활용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신성재는 인사동에 도착해 골동품점을 하나씩 방문했다.
그가 예전에 인사동에 처음 와서 깨진 골동품을 찾았을 때는, 상대해주는 사람이 도종호 사장밖에 없었다.
지금은 달랐다. 골동품을 취급하는 곳마다 신성재를 반겼다.
"내가 아는 사람이 집안 가보가 손상됐다더군요. 성재 씨가 복원해주면 참 좋을 텐데."
"여기서 원하는 걸 찾으면 그 의뢰를 받겠습니다."
"정말?"
"그런데 여기엔 없네요."
"아이고. 왜 없지?"
신성재는 골동품을 취급하는 가게 몇 곳에 들렀다. 가게에 전시된 것 중에는 그가 찾는 기운을 가진 유물이 없었다.
진짜 귀한 건 금고 속에 있는데 그건 쉽게 꺼내주지 않았다. 그중 일부를 확인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역시 없어.'
그가 오늘 인사동에서 확인한 것 중에는 특별한 기운을 품은 골동품은 없었다.
신성재가 마지막으로 도종호 사장의 골동품점에 들렀다.
도종호가 물었다.
"성재 씨가 찾는 게 그러니까, 오래된 물건인데 그냥 장식품이 아니라 상징성도 있고, 사람들이 많이 바라본 물건이다?"
"일단은 그런데, 아닐 수도 있어요."
그 불상에 기원이 담긴 이유는 안다.
하지만 다른 유물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모른다. 같은 방식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좀 광범위한 조건을 걸었다.
"뭘 찾는 건지 모르겠네. 다 둘러봐. 찾으면 싸게…. 아니다. 성재 씨는 송스 갤러리 의뢰로 돈 또 벌었겠네. 제값 주고 사."
"그동안 뭐 팔 때 깎아준 적 없잖아요. 처음에 부러진 비녀를 샀을 때부터 받을 건 다 받았으면서."
"이번엔 좀 깎아줄까 했지. 하하하."
도종호 사장의 가게에 있는 물건 중에도 감각에 걸리는 게 없었다.
"여기도 없네요."
"씁. 아쉽네. 찾는 게 있으면 이 기회에 비싸게 팔 수 있었는데."
"장사 안되세요?"
"요즘은 잘돼. 성재 씨 덕분에 손 큰 손님이 몇 명 생겼잖아."
신성재는 도종호가 소개한 유물을 가끔 복원했다.
그중에는 가문의 가보를 복원한 사람도 있고, 포기했던 고가의 유물을 되살린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도종호의 확실한 손님이 되었다.
"이제 우리 딸만 치우면 되는데…. 성재 씨도 알다시피 걔가 공무원이야."
"도 사장님 따님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원래 소개팅을 안 한다니까요."
***
신성재가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 소파에 반쯤 누운 은가은이 치킨을 뜯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너 뭐 하냐?"
"왔어?"
"넌 대학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낮술이냐?"
"우리 학교에 낮부터 이러는 애들 많아."
"네 주변에만 많은 거겠지."
신성재가 치킨 박스를 확인했다. 남은 건 딱 한 개였다.
"맛있냐?"
은가은이 마지막 조각을 내밀었다.
"오빠도 먹을래?"
"닭목이네?"
"이젠 닭목 안 먹어?"
"살은 좀 붙어 있는 부위를 줘야지?"
"와아. 우리 무인도에 있을 때는 벌레도 구워 먹었는데, 변했구나! 그때 닭목이 있었으면 푹 끓여서 먹었을 거야. 단 1그램도 놓치지 않으려고."
"가은아. 치킨 한 마리를 다 먹은 네가 할 말은 아니지? 혼자 많이 먹으니까 좋냐?"
"많이 먹고 튼튼해져야지!"
"아니야. 넌 이미 지나치게 튼튼해. 찐빵까지 겨우 한 걸음 남았어. 그만 먹어도 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체력은 기회가 있을 때 쌓아두라며."
"그건 무인도에서 했던 이야기고."
그때는 먹을 게 너무 없어서 체력 보존이 힘들었다. 소화할 수만 있다면 뭐든 먹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대한민국 사람은 칼로리 과잉 시대에 살고 있다.
은가은이 손가락을 턱에 살짝 대며 말했다.
"오빠. 나 가수 될 사람이야."
"너 지금 턱에 기름 묻었다."
치킨을 만지던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면 당연히 기름이 묻는다.
무인도에서 살 때는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금도 크게 신경 쓰진 않는다.
"괜찮아. 나중에 한 번에 닦으면 돼."
"외모가 아니라 실력파 가수가 되겠구나. 아. 넌 근데 실력이 없지."
은가은이 툴툴댔다.
"오빠. 살 빼는 마법은 없어?"
"먹는 걸 줄여."
"오빠는 줄일 수 있냐?"
"아니."
"거봐."
"신진대사를 높이는 마법은 있는데."
"그걸 쓰면 살이 빠져?"
"즉시 빠지진 않아. 그래도 장기적으로 보면 도움이 될 거다."
은가은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앗! 그런 좋은 게 있으면 나한테 걸어줬어야지!"
"너한테 걸어봤자 마법 효과가 일시적이라서 의미가 없어. 장기적으로 계속 써야 효과가 있다니까?"
은가은이 신성재의 몸을 훑어보고 다시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잠깐. 오빠도 나처럼 많이 먹는데 왜 상태가 다르지?"
"난 그 마법을 내 몸에 수시로 걸 수 있으니까?"
"췟. 그래서 혼자 날씬하구나."
신성재가 물었다.
"근데 넌 왜 여기 와서 혼자 술 먹냐?"
"노래 연습하러 왔지. 오빠네 집이 단독주택이라서 연습하기 좋잖아."
"보컬 학원은 등록했냐?"
은가은은 쪼개진 불상의 유래를 조사하고 알바비를 받았다. 그 알바비는 보컬 학원의 수강료로 썼다.
은가은이 자랑했다.
"당연하지! 거기서 나한테 재능 있대!"
"그래서 네가 헛바람이 들었구나?"
"진짜라니까?"
"손님한테 그렇게 말해야 계속 수강할 테니까 그랬겠지. 거기 영업 잘하네."
"왜 안 믿는데!"
"네 노래 실력을 아니까? 솔직히 말해보시지?"
"열심히 노력하면 가수 부럽지 않은 수준까지 갈 수 있다고 했다니까?"
신성재가 물었다.
"진짜 가수가 목표라고도 해봤어?"
"으응?"
"했구나. 그러니까 뭐라든? 그건 무리라고 안 해?"
"누, 눈동자가 좀 흔들리긴 했는데!"
"강사가 양심이 조금은 있네."
은가은이 닭목을 뜯으며 장담했다.
"내가 곧 결과를 보여줄게. 기다리고 있어."
"닭목 먹는다고 노래 잘하게 되는 거 아니다."
은가은이 살을 꼼꼼히 발라먹으며 물었다.
"근데 어디 갔다 온 거야?"
"송스 갤러리 가서 일 마무리 짓고, 인사동에 갔지."
"인사동은 왜?"
"그 불상 같은 특별한 유물이 또 있나 싶어서. 근데 없더라. 찾는 게 쉽진 않네."
치킨은 방금 먹은 닭목이 마지막이었다. 그것까지 먹어치운 은가은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제안했다.
"치킨은 다 먹었으니까, 을지로에 골뱅이 먹으러 가자."
"한 마리 다 먹었는데도 부족하냐?"
"당연하지.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역시 무인도가 너를 망쳤어."
"아니다! 이 악마야! 나 아직 안 망쳤다!"
"턱에 묻은 기름도 닦아."
***
송스 갤러리 과장 최민구가 송스 쇼핑의 송정석 상무를 만났다.
"상무님. 그 불상이 완전히 복원됐습니다."
송정석이 물었다.
"왜 며칠조차 시간을 못 끌었습니까?"
"송 관장이 직접 처리해서, 제가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복원 수준은요?"
"완벽…합니다."
"젠장. 괜히 시간만 낭비했군요."
최민구가 큰소리쳤다.
"다음에는 제가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다음이라…."
송정석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최 과장님. 상황파악을 하나도 못 하고 계시네?"
"네?"
"본사 감사실에서 과장님을 은밀히 내사한다더군요. 어떻게 된 겁니까?"
최민구는 당황했다.
"저, 저를 말입니까? 아니, 왜 본사에서…."
"송예솔이 의뢰했겠지요. 어떻게 된 거냐니까요?"
"그, 그게…. 송 관장이 오해를…."
송정석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최 과장님. 죽고 싶습니까?"
최민구가 넙죽 엎드렸다.
"불상을 복원한 놈이, 그걸 제가 깼다고 누명을 씌운 겁니다!"
"그건 최 과장님이 했잖습니까?"
"하지만 제가 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그놈이 최 과장님을 지목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저는 정말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신성재도 송 관장에게 증거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최민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무님 주변도 의심해 보셔야…."
"지금 감히 내 책임이라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송정석이 인상을 쓰며 생각했다.
'정말로 내 밑에 누군가가 나를 배신하고 송예솔 쪽으로 붙은 건가?'
송정석은 감사실에서 최민구를 내사한다는 정보만 겨우 입수했다. 구체적인 상황까지는 알지 못했다.
송정석이 지시했다.
"최 과장님. 신성재라는 놈이 뭘 아는지 알아야겠습니다."
"예? 저 혼자 어떻게…."
"김 사장을 소개해줄 테니까, 만나보세요."
김 사장은 폭행 청부조직의 두목이다.
"그럼 신성재는 언제…."
"오늘 밤 당장. 신성재가 뭘 아는지, 감사실보다 먼저, 내가 알아야 합니다."
***
신성재와 은가은은 을지로에서 골뱅이를 안주로 시켜놓고 맥주를 마셨다. 은가은은 사리까지 추가해서 야무지게 먹었다.
신성재가 골뱅이를 먹으며 말했다.
"송스 갤러리에서 맡겼던 불상이 연구하기 좋았는데, 그런 걸 또 찾기가 어렵다."
"노량진에 없다며."
"노량진이 아니라 인사동. 종로에 있는 거."
"아. 맞다. 어제 노량진에서 족발 먹어서 착각했다."
"다음 주에 인사동에 다시 가보려고. 새 물건이 들어오면 확인해보게."
그들의 앞쪽 골목으로 오래된 카메라를 가지고 지나가는 사람이 두 명 보였다.
은가은이 말했다.
"저거 필름 카메라인가? 골동품 같다."
"그러게. 오래된 건데…."
카메라를 만지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야.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되지, 이거 사서 뭐하게?"
"있어 보이잖아."
"필름은 있고?"
"그건 인터넷에서 판다더라."
두 사람이 지나간 후에 신성재가 말했다.
"저걸 근처에서 샀나?"
"저쪽에서 오던데, 저쪽에 파는 곳이 있는 거 아닐까?"
"저쪽에는 황학동 풍물시장이 있는데…."
신성재가 접시를 보았다. 은가은은 이미 골뱅이무침을 다 먹고 젓가락만 빨고 있었다.
"다 먹었으면 가보자."
"거기도 먹을 거 파나?"
"가은아. 그러다 너 가아아은이 된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
신성재가 많이 먹어 볼록해진 은가은의 배를 슬쩍 보며 말했다.
"지금은 가아은이지."
"그럴 리가 없어!"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네?"
"닥쳐!"
두 사람은 동묘역 근처에 있는 풍물시장으로 걸어갔다.
신성재는 서울에 풍물시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곳에 중고품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신성재가 하는 일은 고가의 골동품을 복원해 파는 것이다. 이곳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게 많았다.
신성재가 실제로 이곳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시장 곳곳에 좌판을 펼쳐놓은 곳이 보였다. 오래된 물건을 파는 가게도 많았다. 이제는 쓰이지 않는 비디오 플레이어부터 각종 장신구, 국적불명의 골동품까지 수많은 물건이 쌓여 있었다.
은가은이 손뼉을 연달아 쳤다.
"어머. 서울 한복판에 이런 데가 있구나."
신성재가 그곳에 있는 물건들을 훑어보았다.
"그러게. 생각보다 훨씬 많다."
신성재가 매대에 쌓여 있는 오래된 물건들에 손을 가져갔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인사동의 골동품 전문점을 뒤져도 그가 원하는 특별한 물건은 찾지 못했다.
"여기에 오빠가 찾는 그런 게 있을까?"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가격은 싼데 대신에 물량이 많았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관광했다 생각…."
그렇게 이것저것 만져보다가 손이 멈칫했다.
"음?"
방금 만진 비녀에서 특별한 느낌이 감지됐다.
"어…."
송스 갤러리의 불상처럼 강력하진 않아도, 비슷한 느낌의 기운이 이 비녀에 깃들어 있었다.
"찾았다."
신성재가 찾던 유물은 인사동이 아니라 황학동 풍물시장 가판대 위에 있었다.
17. 코어
신성재가 비녀를 손으로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동안 골동품 복원 일을 하면서 안목이 좀 생겼다.
"조선 후기에 사용된 비녀인가?"
정확한 시기는 가늠할 수 없지만, 최소한 100년은 지났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얼마입니까?"
가게 주인이 비녀를 쓱 본 후에 대답했다.
"십만 원만 줘요."
신성재가 비녀를 다시 확인했다. 꽤 오래되긴 했는데, 여기저기 손상된 부분이 워낙 많았다. 중간에는 길게 파인 자국도 있었다.
그래서 이 비녀는 가게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 매대에 올려져 있었다.
비녀의 상태가 나빠서, 말만 잘하면 몇만 원은 깎을 수 있어 보였다.
"여기 있습니다."
그래도 부르는 대로 돈을 주었다.
은가은이 옆에서 물었다.
"뭐야? 비녀는 왜? 나 주게?"
"네가 이걸 어디 쓰게?"
은가은이 긴 머리를 옆으로 휙 넘기며 말했다.
"그치? 난 헤어핀이나 머리띠 같은 게 더 좋아. 그럼 이건 누구 주…. 앗! 뭐야! 어떤 년이야!"
"그게 왜 궁금하냐?"
은가은이 손가락으로 신성재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군지 몰라도 제정신인가 싶어서! 아니, 아무리 남자가 없어도 어떻게 오빠 따위를…."
"여기 일 끝나면 신당동에 떡볶이나 먹으러 갈까 했더니."
신당동은 황학동에서 가깝다.
"어쩌면 그런 여자가 있을 수도 있지! 눈이 삐었으면 그럴 수 있어! 그래서 누군데? 앗! 설마 송스 갤러리 송 관장이야?"
"송 관장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냐?"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다. 이건 연구용으로 산 거야."
"하긴 그 아줌마는 꼬리가 달려서 그렇지 눈은 정상이니까."
"가은아. 네가 사라. 떡볶이."
"앗! 이제 보니까 삔 건 내 눈이었네? 오빠 핸썸!"
"이미 늦었다. 디저트도 네가 사라."
***
최민구 과장은 송 상무가 소개한 사람을 만났다.
"나 김 사장이요."
김상구 사장은 청부조직인 상구파의 두목이다. 상구파는 청부업도 하고 용역도 하고, 돈만 주면 납치 폭행에 고문도 대행한다.
"오늘 밤에 내가 똘똘한 애들로 셋을 보내주지."
최민구가 인상을 찌푸렸다.
"겨우 셋?"
"골동품이나 만지는 고리타분한 놈 하나 처리하는 건 둘만 보내도 충분하지."
두목이 손가락을 비볐다.
"내가 송 상무 체면을 생각해서 애들을 넉넉하게 보내는 거니까, 당신은 돈이나 준비하라고."
***
신성재는 은가은이 사는 떡볶이에 디저트까지 먹고 나서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마법사의 공방은 지하실에 있다. 그가 지하실로 내려가 작업대 위에 비녀를 올려놓았다.
"일단 복원부터."
송스 갤러리의 불상은 마법으로 복원해도 기운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강해진 것도 아니지만, 복원한 후가 더 정갈해진 느낌이 들긴 했다.
표본이 그것 하나뿐이라면 데이터로 삼기엔 부족하다. 다른 것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해야 한다.
마침 지금 적당한 소재가 손에 들어왔다.
"이것도 그러려나."
비녀 표면에는 흠집과 손상이 많았다.
다행히 이 비녀의 재질은 은이다. 은으로 만든 유물은 소실된 부분을 보충하기 쉽다.
신성재가 벽에 있는 선반에서 작은 은 조각을 하나 꺼내서 가져왔다. 그건 100년쯤 전에 만들어진 다른 은 제품을 분해한 것이다.
이 지하 공방에는 그렇게 수리용 자재로 쓰는 골동품이 여럿 있다. 그중에 이 은 조각이 오늘 찾은 비녀와 재질이 제일 비슷했다.
신성재가 은 조각을 비녀와 함께 오른손에 올려놓았다.
예전에는 복원할 때 수리용 조각을 사용하려면 신경 써야 할 게 많았다. 그런데 이젠 마법 숙련도가 높아져 이런 수준의 복원은 손에 들고 있기만 해도 충분했다.
신성재가 복원 마법을 사용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마법의 힘이 비녀에 깃들었다.
비녀 표면의 파이거나 소실된 부분은 은 조각이 닿을 때마다 사라졌다. 은 조각의 구성 성분이 비녀의 소실된 부분을 채우는 방식으로 복원이 진행됐다.
손상된 부분이 복구되는 만큼 마나도 소모됐다.
복원 마법을 정밀하게 쓰려면 마나의 시간당 소모량은 줄이고 유지시간은 길게 해야 한다. 외부에서 의뢰받았거나 수리 후 판매할 예정인 골동품은 그렇게 한다.
팔 생각이 없다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은 조각이 손안에서 굴러다니며 비녀 표면의 흠집을 계속 지웠다.
[크로노스의 눈]
신성재는 잔상 확인 마법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보며 복원을 진행했다.
복원에 필요한 시간은 겨우 1분이었다. 순식간에 비녀의 흠집이 대부분 사라졌다.
새것과 완전히 똑같은 상태로 복원된 건 아니다. 흠집을 메운 부분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재질 차이를 구분할 수는 있다.
"비녀의 상태는 이쯤이 적당한데…."
어차피 다시 팔 물건이 아니라서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신성재는 복원 마법을 쓸 때 크로노스의 눈으로 이 비녀의 과거를 보았다.
"100년 전쯤에 아줌마가 싸울 때 썼구나."
그 여자의 뒤에는 겁에 질린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와 여자를 위협한 건 술에 취한 남자였다. 그 남자가 도적놈인지, 아니면 주정뱅이 남편인지는 잔상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이 비녀를 단검 대신에 휘두르며 남자와 싸웠다는 건 알았다.
"이겼네."
심지어 이겼다.
얻어맞으며 저항하다가, 독기가 서린 눈으로 이 비녀를 남자의 어깨에 찔렀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신성재가 비녀를 보았다. 제일 큰 흠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제 알았다. 그건 싸우다 생긴 손상이었다.
그래서 다른 건 다 지웠지만, 그 흠집만은 지우지 않고 남겨두었다.
"누가 쓰던 비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고급품은 아니다.
잔상에서 본 여자가 역사에 이름을 한 줄이라도 남긴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다.
대신에 원래 목적은 확인했다.
"역시 비녀에 깃든 기운은 변하지 않았어."
복원하기 전과 비교해 기운의 세기는 차이가 없었다. 대신에 비녀에 깃든 기운이 좀 더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다.
이 비녀는 송스 갤러리에 돌려준 불상과는 다르다. 여기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약하다.
그렇지만 이건 신성재의 소유다. 여기에는 어떤 마법 실험이든 할 수 있다.
신성재가 비녀에 마법 인첸트를 시도했다. 이건 송스 갤러리의 불상에는 하지 않았던 일이다.
"발광 마법이면 되겠지."
굳이 그 마법을 선택한 건, 간단하기 때문이다.
워낙 간단해서 쉽게 지우고 비녀에 다른 마법을 다시 새겨넣을 수도 있다. 마법이 간단하면 지울 때 깎여나가는 부분도 그만큼 적다.
[여행자의 반딧불]
그건 '반디의 불'과 비슷한 계열로, 주로 사물 고정형 마법진에 쓰는 마법이다.
저쪽 세계에서는 사물에 마법진을 새겨 마법을 발현하는 걸 인첸트라고 불렀다.
마법이 간단하면 인첸트도 쉽다. 신성재가 비녀에 손가락을 대고 손짓 몇 번으로 발광 마법을 인첸트했다.
비녀가 빛났다. 은은한 빛이었다.
"이게 되네."
마나를 부여하지 않았는데도 발광 마법이 발현됐다. 시간이 지나도 그 빛이 약해지지 않았다.
"마나와는 다른 에너지원인데도 한 번에 성공했어. 나 혹시 천재인가?"
이 비녀에 깃든 기운에 맞게 마법진을 손보긴 했다. 그렇지만 그 기운을 마나로 바꾼 건 아니다.
그런데도 마법진이 작동했다.
이 현상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유물을 마법 아이템이나 마법 공학의 코어로 쓸 수 있겠는데?"
마법 공학을 현대 지구에 적용하지 못하는 건, 동력으로 쓸 마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나를 대체할 동력원이 있다면 그 문제가 해결된다.
신성재가 비녀에서 일어난 마법 현상을 자세히 분석했다.
"효과가 완전히 일치하는 건 아니구나."
비녀에서 나오는 빛은 은은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여행자의 반딧불' 마법은 원래는 이런 느낌이 아니다.
"기운의 특성 차이인가?"
실험이 더 필요했다.
신성재가 이번에는 평범한 은비녀를 하나 꺼내 '여행자의 반딧불' 마법진을 새겼다.
유물인 비녀는 그렇게만 해도 빛이 났다.
그런데 평범한 비녀는 그것만으로는 변화가 없었다.
"이건 당연한 거고."
신성재가 평범한 비녀의 마법진에 마나를 조금 부여했다.
은비녀가 조금 밝지만 차가운 빛을 뿜었다.
반면에 유물인 비녀의 빛은 여전히 따뜻했다.
밝기는 은젓가락이 조금 더 강했다.
"밝기는 문제가 아니야. 마나 없이 작동한다는 게 중요하지."
유물에 마법진을 새기면 마나를 공급하지 않아도 마법이 발현된다는 걸 확인했다.
평범한 비녀의 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약간만 공급한 마나가 벌써 바닥이 나고 있었다.
이런 저광도 발광 마법은 마나를 넉넉하게 넣으면 몇 시간 정도 그 효과가 유지된다. 반면에 위력이 강한 마법을 쓰면 몇 분이나 몇 초 만에 마나를 모두 소모하기도 한다.
마나가 모두 소모되면 마법진은 기능을 잃는다.
신성재가 옆으로 보았다.
그런데 유물 비녀는 마나가 없는데도 자체 발광 중이다. 어두워지지도 않았다.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안다.
"비녀에 담긴 기원이 이 특별한 기운을 만들어내는 거겠지."
***
송스 갤러리의 최민구 과장이 대포차 운전석에서 말했다.
"저 앞에 담장 높은 집에 신성재가 산다. 갤러리 직원이 저기로 물건을 배송했으니까 주소는 확실해. 들어가서 그놈을 끌고 와."
상구파 조직원 세 명이 최민구를 따라왔다. 그중 한 놈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곱게 모셔와야 하는 건 아니겠지?"
"대답만 할 수 있으면 돼. 물어볼 게 많아."
"흐흐. 그것도 맡겨두라고. 그런 일은 우리가 전문가니까."
조직원 세 놈이 신성재의 집을 향해 건들거리며 걸어갔다.
최민구가 대포차 운전석에서 중얼거렸다.
"신성재. 끼지 말아야 할 곳 정도는 구분하고 아는 체도 하지 말았어야지. 송 관장 앞에서 괜히 아는 체를 하니까 이런 꼴을 당하잖아."
송예솔은 신성재의 말을 듣고 본사 감사실에 최민구를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송스 그룹 본사 감사실은 은밀히 내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움직임을 감사실 내부에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흘러나온 정보는 송충기 회장의 손자인 송정석 상무에게 들어갔다. 송예솔과 송정석은 사촌지간이다.
"내 실수로 결론 나면 송 상무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래서 불안했다.
"저 새끼가 뭘 알고 있는지는 잡아다가 물어보면 알겠지."
아까 갤러리에서 신성재가 최민구를 보던 눈빛이 생각났다. 그때 그건 사기꾼을 보는 눈빛이었다.
"새끼가 감히 나를 그따위 눈으로 쳐다봐? 내 구둣발에 대가리가 밟힌 후에도 그럴 수 있나 보자."
***
신성재가 유물 비녀를 연구하다 고개를 들고 인상을 썼다.
집 외부에서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기운이 감지됐다.
이 집의 담장에는 경계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다. 그걸 설치한 건 신성재다.
그 마법진도 마나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담장 속에 새겨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법사인 신성재가 집에 있다. 담장의 경계 마법진은 그가 대문을 통과할 때 마나를 받아 가동됐다.
그 마법진의 경계망에 부정적인 움직임이 감지됐다.
그런데 그 마법진은 단순한 형태의 경계 마법이지, 정찰이나 감시 마법이 아니다.
신성재가 지하실 벽에 손을 댔다.
벽에 설치해둔 마법진이 그의 마나에 반응했다. 그 마법진은 외부와 가느다란 은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공급한 마나가 그 은선을 타고 위로 올라가 지붕에 도달했다.
지붕에 설치한 마법진에 마나가 공급되자, 정찰 마법 '이글 아이'가 발동됐다.
이제 신성재는 집 주변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파악할 수 있다. CCTV는 카메라가 향한 방향만 볼 수 있지만, 이글 아이는 그런 제약이 없다.
신성재가 이글 아이로 조직원 세 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감히 마법사의 집에 침입하려고? 미친 건가?"
18. 담장
신성재가 이글 아이 마법으로 집 주변을 훑어보았다.
"저놈들이 타고 온 차가 있을 텐데."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에 낡은 SUV가 한 대 서 있었다.
"못 보던 차네?"
지금 사용한 이글 아이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마법이다. 그래서 차 유리의 틴팅이 진하면 내부 확인이 어려웠다.
"어차피 한패겠지."
신성재가 지하실 공방에서 500원짜리 동전을 몇 개 챙겼다.
***
상구파 조직원 세 놈이 신성재의 집 근처를 서성였다.
신성재의 집 담장은 사람 키보다 높았다. 그래서 담장 밖에서는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담장에는 외부를 향한 CCTV가 한 대 있었다.
그런데 그건 외부를 감시하려고 설치한 게 아니다. 경계 마법을 숨기기 위해 달아둔 것이다.
"CCTV가 왜 있지?"
"무슨 상관이야? CCTV 반대 방향으로 넘으면 되잖아."
"무식한 새끼야. CCTV가 있으면 동작 감지기도 있을 수 있다. 담을 넘다가 센서에 걸리면 경비업체에서 당장 튀어올 거다."
"집안에 사람 있으면 센서는 꺼놨을 거야."
"마당에 동작 감지기를 설치하면 오작동하기 쉬워. 그러니까 마당엔 없겠지."
"가정집에 경비업체 감지기를 왜 달았지?"
"부잣집은 이런 거 많이 달아. 그래서 우리가 먹고살기 힘들어졌어."
"부자라고? 그럼 부수입으로 뭐 좀 챙길까?"
대화가 부수입으로 넘어가자마자 다들 눈이 번뜩였다.
"금이나 보석?"
"현금이 더 좋지."
"내가 아는 장물아비한테 맡기면 금이랑 보석도 처리할 수 있어."
"거긴 제값 쳐주나?"
"금은 분해해서 녹이고 보석도 따로 떼서 팔아야 한다면서 후려치겠지."
다른 놈이 욕을 했다.
"씨발. 고생은 우리가 하는데 돈은 장물아비가 먹네."
"그래도 꽤 짭짤하게 챙겨줘. 뒤탈도 없고."
게다가 소개한 사람에게는 따로 뒷돈도 챙겨준다.
그들이 담장 밖에서 오늘 일로 얻을 부수입을 생각하며 히히덕거렸다.
그들의 대화에 긴장감은 전혀 없었다. 처음 하는 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놈이 담장 주변을 살펴보다가 한쪽을 가리켰다.
"CCTV는 저쪽은 안 찍힌다. 저쪽으로 담을 넘자."
조직원들이 신성재의 집 담장으로 접근했다. 덩치가 있는 놈이 먼저 점프하며 담장 위를 손으로 잡았다.
다른 두 놈이 담장에 매달린 놈의 신발 바닥을 손으로 밀어주었다.
위에 놈이 팔에 힘을 주고 몸을 담장 위로 올리며 말했다.
"쉽네."
신성재가 마당에서 조직원을 삐딱하게 쳐다보며 경고했다.
"너, 그 담 넘으면 죽는다?"
"헉!"
담장 아래에 있던 놈이 물었다.
"왜?"
담장 위로 상체를 올린 놈이 욕을 했다.
"씨발. 집주인이 마당에 있다!"
"병신 새끼야! 넘기 전에 확인했어야지!"
다른 두 놈도 허겁지겁 담장 위로 올라갔다. 두 번째 놈은 세 번째 놈이 올려주었다. 마지막 놈은 몸이 가벼워서 혼자 힘으로 담장 위로 올라갔다.
신성재가 담장 위의 세 놈에게 말했다.
"아니다. 그 경계를 넘지는 못할 테니까, 살겠네."
세 놈은 그 말을 심각하게 듣지 않았다. 그들이 담장 위에서 서로를 보았다. 셋 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드러나진 않았다.
"어쩌지?"
"씨발. 짭새나 경비업체에 이미 연락했을 수 있어."
"아냐. 내가 담 위로 올라왔을 때부터 마당에 있었어. 아직 연락 못 했을 거다."
한 놈이 아예 마당으로 들어가려고 다리를 담장 위로 올렸다.
"신고하기 전에 처리하면 돼!"
신성재가 손을 옆으로 슬쩍 흔들었다.
"꿈이 크구나."
지금 그의 발밑에는 담장과 연결된 은선이 지나가고 있다.
그의 손에서 아래쪽으로 방출된 마나가 그 선을 타고 담장으로 이동했다.
담장 곳곳에 마법 공학으로 만든 침입방지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장치의 코어 역할을 하는 건 소형 마법진이다.
신성재가 라이트닝 볼트를 변형한 침입방지장치를 선택했다.
"여기가 한국인 걸 다행으로 알아라."
저쪽 세계에서는 마법사의 집에 이런 식으로 침입하는 놈은 죽여도 된다. 하지만 현대 한국에서 그러면 일이 복잡해진다.
마나는 압축하는 게 힘들지 흩어지게 놔두는 건 쉽다. 라이트닝 볼트에서 압축하는 수식을 빼고 나머지만 쓰면 마법진의 구조는 간단해진다.
신성재의 마나가 그 마법진에 들어갔다가, 담장 전체에 엷게 퍼졌다.
담장 위에는 전기충격기의 전극처럼 생긴 금속이 넓은 간격으로 박혀 있다. 마나가 그 전극들 사이에 마치 끈처럼 길게 걸쳐졌다.
신성재가 말했다.
"한국이니까 살겠네."
"뭔 개소리…."
갑자기 담장 전체에서 라이트닝 쇼크가 터졌다.
"케에엑!"
라이트닝 볼트 하나를 분해해 담장 전체에 퍼트렸기 때문에 위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래도 담장 위로 올라오려던 놈들을 바깥으로 튕겨낼 정도는 되었다.
"꾸엑!"
세 놈이 비명과 함께 담장 바깥쪽으로 튕겨 나갔다.
신성재가 이글 아이로 밖을 내려다보면서, 담장 위에 다리를 걸쳤던 놈에게 마법을 썼다.
[무빙]
아래로 떨어지는 놈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가, 한쪽 발이 비틀린 상태로 단단한 바닥에 충돌했다.
조직원의 발목이 돌아갔다.
"끄아악!"
마법으로 조작하지 않았는데도 잘못 떨어져서 팔이 부러진 놈도 있었다.
"파, 팔! 아아악!"
신성재가 마당에서 말했다.
"마법 공학과 현대 기술의 조화. 이게 진짜 예술이지."
지구가 과학기술로 문명을 발전시켰듯이, 평행세계는 마법 공학으로 문명을 이루었다. 원리는 달라도 양쪽이 도달한 문명 수준은 비슷했다.
담장에 설치된 라이트닝 쇼크는 마법 공학을 기반으로 만든 침입방지장치다. 그 장치에 필요한 마법 공학 부품은 전자제품 수리용 부품으로 대체했다. 그러면서 생기는 오차는 마법진을 수정해 해결했다.
이 라이트닝 쇼크는 전기가 아니라 마나를 동력으로 쓴다. 외부에서 전선을 가져다 꽂아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사 경찰이 그걸 조사한다고 해도 뭔지 알아낼 수는 없다. 누가 물어보면 장식품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조직원 세 놈은 라이트닝 쇼크를 얻어맞고 시멘트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끄으으. 뭐, 뭐에 당한 거야?"
라이트닝 쇼크는 전기에 감전된 느낌이 아니라 대놓고 얻어맞는 충격을 준다. 게다가 전기 스파크를 눈으로 본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놈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당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끄아아…. 내 팔이 부러졌어!"
"담장에서 망치가 튀어나온 것 같아!"
"가정집에 저런 게 왜 있냐고!"
신성재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내 집에 침투하려 한 놈은 처음인데."
그래서 이번이 담장에 설치한 방어 시스템의 첫 실전 사례였다. 마법 공학을 이용한 장비의 첫 공격 사례이기도 했다.
"위력이 딱 좋아. 테스트를 안 했는데도 출력을 딱 맞췄어. 역시 난 천재야."
신성재가 나자빠진 세 놈에게 다가갔다. 셋 다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가 그놈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둑놈들인가?"
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경찰을 불러야겠어."
세 놈이 허겁지겁 일어나려고 했다. 당장 아파 죽을 것 같지만, 체포되고 싶은 놈은 없었다.
한 놈이 몸을 반쯤 일으키며 신성재의 휴대폰을 향해 팔을 뻗었다.
"너 이 새끼! 그거 당장…."
신성재가 인상을 썼다.
"내가 그래도 새끼는 아니지."
신성재는 조직원이 내민 팔을 잡고 그대로 돌려버렸다.
"끄아악!"
신성재가 지하실 공방에서 가져온 500원짜리 동전을 흘렸다.
[무빙]
그 동전이 손목이 꺾여 비명을 지르는 놈의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그러면서 조직원의 팔이 더 꺾였다.
"으아아! 팔! 내 팔!"
이제 한 놈은 발목이 돌아가고, 두 놈은 한쪽 팔이 부러지거나 꺾였다.
신성재가 팔을 꺾은 놈을 툭 밀며 말했다.
"지금 신고하면 경찰이 몇 분 만에 오려나."
세 놈 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이미 한 놈은 팔이 부러졌다. 방금 팔을 꺾인 놈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발목이 돌아간 놈도 있다.
그들은 신성재가 싸울 줄 안다는 걸 깨달았다.
경찰이 오기 전에, 그리고 다른 주민이 보기 전에 지금 이 몸으로 신성재를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세 놈이 겨우 몸을 일으키더니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발목이 돌아간 놈은 부축받아야 움직일 수 있었다.
도망치는 놈들이 협박을 남겼다.
"신고하면 죽여버릴 거다!"
"내가 너 얼굴 봤다!"
"집 주소도 안단 말이다!"
세 놈은 그렇게 떠들며 도망쳤다.
신성재는 도망치는 놈들을 바로 뒤쫓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조직원의 주머니에 넣어놓은 500원짜리 동전에는 추적 마법이 새겨져 있다.
사물에 거는 인첸트 마법은 유지시간이 짧다. 그 시간을 늘리려면 마나를 때려 박아야 하는데, 그러면 마법진이 쉽게 붕괴한다.
그는 동전 속 추적 마법진에 허용한계 이상으로 마나를 쑤셔 넣었다. 덕분에 오늘 밤 내내 추적 효과가 유지되지만, 내일이 되면 동전은 모든 마나를 잃고 1회용 마법진도 소멸한다.
그러면 남는 건 평범한 500원짜리 동전뿐이다.
그 마법은 단시간 추적에는 GPS 추적기보다 우수한 성능을 발휘한다. 대상이 건물 내부나 지하, 통신 음영지역, 심지어 무인도에 있어도 추적되기 때문이다.
"저놈들, 어디까지 가려나."
***
상구파 조직원 세 놈은 신성재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최민구 과장이 차를 세워두고 대기했다.
두 팔이 멀쩡한 놈이 그 차의 손잡이를 당겼다. 문이 잠겨 있었다.
"씨발! 열어!"
최민구가 뒤늦게 문을 열어주었다. 세 놈이 차 안으로 뛰어들 듯이 탄 후에 숨을 헐떡였다.
"헉헉."
최민구가 급히 물었다.
"왜 벌써 온 거야? 어떻게 됐어? 성공했나? 어? 왜 그 새끼는 없어? 혹시 죽였어?"
최민구의 위치에서는 신성재의 집이 보이지 않는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이면도로에 대포차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조수석에 탄 조직원은 발목이 돌아갔지만 두 손은 멀쩡했다. 그가 최민구의 멱살을 잡았다.
"씨발! 저 집 뭐야! 보안장치가 있잖아!"
"커컥. 이, 이봐. 경보장치 같은 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며?"
"그게 아니야! 뭔가 다른 게 있다고!"
최민구가 조직원의 팔을 밀어내며 말했다.
"뭐가 있다는 건데?"
"몰라, 씨발!"
신성재가 마법 공학으로 만든 라이트닝 쇼크는 전격 계열이긴 하지만 감전 화상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뭔가에 당해 담장에서 떨어지고 다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에 당했는지는 깨닫지 못했다.
조직원이 소리를 질렀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
"어? 어! 그래야지!"
최민구가 얼른 차를 출발시켰다.
***
최민구 과장과 조직원 셋은 일산 방향에 있는 상구파 사무실로 이동했다. 그들은 차를 근처 골목에 세워두고 사무실 건물로 걸어갔다.
조직원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설마 미행당한 건 아니겠지?"
운전을 맡은 최민구가 말했다.
"오는 동안 그렇게 뒤를 돌아봤으면서 아직도 찜찜한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상구파는 예전에 창고로 사용됐던 단층 건물을 사무실로 사용했다. 그들이 최민구에게 말했다.
"어이. 안에 들어가면 큰형님한테 좋은 쪽으로 말씀드려라."
"맞아. 이건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 집이 이상했다고."
그들이 절뚝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중 한 놈의 주머니에는 위치추적 마법이 새겨진 동전이 들어 있었다.
그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후에, 신성재가 그곳에 나타나며 말했다.
"저놈들을 나한테 보낸 놈이, 여기 있겠네?"
19. 붕괴
상구파 사무실은 예전에 창고로 사용됐던 단층 콘크리트 건물이다. 기둥은 당연히 철근 콘크리트이고, 벽도 시멘트를 발라 만들었다.
창문에는 방음처리도 되어 있었다. 이중유리에 계란판처럼 생긴 방음 소재를 붙인 것뿐이지만, 효과는 괜찮아서 안에서 비명을 질러도 밖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신성재가 그 건물 벽에 손가락을 대고 움직였다. 그 손끝을 따라 마법사의 눈에만 보이는 선이 그어졌다.
순식간에 간단한 마법진이 벽에 새겨졌다. 손을 펴 그 마법진에 마나를 공급했다.
정찰이나 탐지에 쓰는 마법이 발동됐다.
[여우의 귀]
마법진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벽 전체로 퍼졌다. 건물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가 그 마나에 닿았다가 마법진에 모였다. 그렇게 모인 소리가 벽에 손을 댄 신성재에게 전달됐다.
잡다한 소음이 너무 많았다.
"어우. 시끄러워."
신성재의 손끝이 마법진 위에서 다시 움직였다. 마법진에 추가 옵션이 붙었다.
곧바로 사람 목소리 음역의 소리만 걸러져 그에게 들어왔다.
신성재가 마법진에 옵션을 더 추가했다. 이제 목소리의 위치까지 파악됐다.
상구파 조직원들의 대화는 이 벽이 아니라 건물 반대편에서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역시 두목이 여기 있구나."
***
송스 갤러리 최민구 과장은 상구파 사무실에서 두목 김상구를 만나 따졌다.
"김 사장님. 실력 좋은 사람들을 보내준다고 했잖습니까? 무슨 실력자가 담장을 넘다가 떨어집니까? 그것도 세 명 다 떨어졌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김 사장이 세 놈을 노려보며 물었다.
"사실이야?"
발목이 나간 놈이 변명했다.
"형님. 저희는 억울합니다. 담장을 넘다가 떨어진 건 맞는데, 거기서 뭔가 충격을 받아서 그런 겁니다."
"무슨 충격?"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망치나 쇠파이프 같은 건데…."
"봤어?"
"보진 못했습니다만, 느낌이…."
"이런 느낌이냐?"
김 사장이 골프채를 뽑았다.
"혀, 형님!"
"이 새끼들이 손님 앞에서 가오 빠지게!"
김 사장이 골프채로 부하들을 두들겨 패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시킨 일은 무조건 해냈어야지!"
"으아악!"
"그 자리에서 다시 담장을 넘어서라도 내가 시킨 건 끝냈어야 했단 말이다!"
금속으로 된 골프채 헤드가 셋의 몸에 퍽퍽 꽂혔다.
"케엑! 형님! 사, 살려…."
김 사장이 부하 셋을 실컷 두들겨 팬 후에 골프채를 아래로 내려 지팡이처럼 짚었다.
"후우. 최 과장. 실수에 대한 보상은 이 정도면 만족하나?"
최민구는 겁을 집어먹었다.
"어? 어? 아, 난 만족…."
그렇게 말하다, 만족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조직원이 몇 대를 맞든 최민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최민구가 정신을 차리고 제안했다.
"김 사장. 신성재가 잠들었을 때 다시 들어가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김상구 사장이 인상을 썼다.
"그 새끼가 신고했으면?"
"안 했을 겁니다. 담장에 뭔가 설치해서 사람을 다치게 한 건 죄가 되니까요."
"그래도 했으면?"
최민구가 입술을 핥았다.
"신고를 취소시켜야지요. 이번 일은 그러는 게 오히려 뒤탈이 없을 겁니다."
김 사장이 방금 두들겨 팬 놈들을 보았다. 셋 다 다쳤다. 한 놈은 팔이 부러지고 다른 놈은 팔을 삐었다. 발목이 돌아간 놈도 있다.
거기에 골프채로 맞기까지 했다. 이러면 오늘 밤에는 써먹을 수 없다.
김상구가 다른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야. 나가 있는 애들 불러들여."
"셋 다 말입니까?"
"그래. 다 불러들여."
지금 이곳에 멀쩡한 부하 셋이 있다. 외부에 있는 셋이 오면 다친 놈들을 빼도 여섯이 된다.
김상구가 말했다.
"신성재란 놈은 새벽 세 시, 모두 잠든 시간에 다 같이 가서 작업한다."
"예. 형님."
최민구가 마음을 놓았다.
"김 사장님. 화끈하게 하는군요. 그럼 뒷일은 믿고 맡기겠…."
"최 과장. 그런데 말이야."
김상구가 바닥에 쓰러진 부하 셋을 가리켰다.
"우리 애들이 다쳤잖아. 그러니까 돈을 더 줘야겠어."
"어? 뭐요?"
그가 바닥에 쓰러진 부하들을 골프채로 가리켰다.
"봐. 많이 다쳤잖아."
"그건 방금 김 사장이 심하게 패서 더 다쳤…."
김 사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일하다 다쳐서 돌아오지 않았으면 나한테 맞지도 않았겠지. 그러니까 이건 그 뭐냐, 산재처리로 돈 더 줘야지?"
"아니, 이런 일에 무슨 산재가 있다고…."
"그리고 신성재한테는 우리 애들 여섯을 보낼 거야. 사람 더 쓰면 돈 더 주는 건 상식 아니야?"
최민구는 김상구가 돈을 제대로 뜯어내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김 사장! 당신 양아치야?"
김 사장이 히죽 웃었다.
"최 과장. 우리가 양아치인 거 몰랐어?"
"어?"
"그리고 이런 법? 우린 법 없으면 더 잘 사는 사람들이야."
최민구가 조금 강하게 나갔다.
"김 사장.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알잖아. 내가 아니라 상무님을 감당할 수 있겠어?"
김상구가 비웃었다.
"그 감당은 최 과장이 해야지. 반응을 보니까 신성재를 못 잡으면 제일 곤란해지는 건 최 과장 같은데."
최민구는 상구파의 조직원을 셋이나 동원해 신성재를 납치하려 했다.
그런데 실패했다. 게다가 들켰다. 그러면 선은 이미 넘었다.
송예솔 관장의 의심도 받고 있다. 신성재를 붙잡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최민구의 상황은 심각해진다.
'여기서 그만두면 난 끝장이야.'
송스 그룹이 법으로만 조져도 그의 인생은 끝장난다.
최민구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의뢰금은 내가 주는 게 아니야. 상무님이 주신다고."
"그럼 연락해."
"지금은 불가능해. 상무님이 먼저 연락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해."
"그럼 여기서 기다려."
"어?"
"연락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
신성재가 건물 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포기를 모르는 놈이네."
두목은 신성재를 '작업'하겠다고 말했다.
그 '작업'이 어디까지인지는 대화만으로는 알 수 없다. 폭행이나 협박일 수도 있고, 살인일 수도 있다.
지금 대화 분위기로는 납치는 기본이고 나머지는 옵션으로 보였다.
신성재는 최민구가 상무의 연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들었다.
"그래. 최 과장 혼자 저지르기엔 이번 일의 사이즈가 좀 크긴 했지."
신성재를 처리하려고 상구파를 동원하는 건, 최민구가 눈이 돌아가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송충기 회장의 돌 불상을 쪼개놓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그건 누군가 그만한 이익을 보장해줘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건물에 다 모인다니까 잘됐다."
신성재가 건물 벽에 마법진을 새로 그렸다. 다리를 무너뜨릴 때 썼던, 콘크리트 구조물의 취약점을 탐지하는 마법이었다.
마법 공학은 건물의 취약점을 잘 찾는다. 마법 파동이 건물 벽과 기둥에 퍼지면서 정보를 전송했다.
"건물이 많이 부실하네. 그럼 더 좋지."
무너질 정도로 상태가 나쁜 건 아니다. 그렇지만 부실한 곳이 많았다. 철근도 부족하고, 몇 곳은 균열이 좀 깊었다.
신성재가 예전에 다리를 무너뜨릴 때는 스톤 브레이커 마법을 직접 날렸다.
이번엔 마법진을 쓰기로 했다.
신성재가 이쪽 벽에 스톤 브레이커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에 더 많은 마나를 밀어 넣으면 더 강력한 스톤 브레이커를 쓸 수 있다.
그 마법진에 발동시간 지연 옵션도 추가했다.
두목은 사람들이 모두 잠든 새벽 3시에 신성재를 치겠다고 했다. 1시간 전에 그의 집 근처에 도착하려고 해도, 2시간 전에만 출발하면 시간은 남는다. 그렇게 쳐도 새벽 1시다.
지금은 밤 11시다.
"나가 있는 조직원 셋이 여기로 돌아올 시간은 줘야지."
신성재가 스톤 브레이커 마법의 발동 시기를 1시간 후로 세팅했다.
신성제가 마법진 세팅을 마치고 그곳을 나오다가 근처에 세워진 차를 발견했다. 송스 갤러리 주차장에서 봤던 차였다.
"최 과장 차구나."
신성재가 500원짜리 동전을 꺼냈다. 추적 마법은 이미 새겨두었다.
신성재가 동전의 반대쪽 면에 자석 마법을 추가했다.
그 동전은 차의 철판에 아주 잘 달라붙었다.
작은 동전에 추적 마법과 자석 마법을 동시에 걸었다. 그러면 마법 유지시간이 훨씬 더 짧아진다.
"두 시간은 버티겠지."
그 후에는 동전이 자력을 잃고 주차장이나 길바닥에 떨어진다. 보통 사람은 길에 떨어진 동전을 수상하게 보진 않는다.
신성재가 그곳을 떠났다. 상구파의 단층 건물에는 지금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일산 방면 경찰서의 형사가 광역 특별수사지원팀 도서윤 형사에게 하소연했다.
"상구파라고, 폭행 청부조직이 있어. 그런데 그놈들이 최근에 김포에 있던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겼더라. 그놈들만 잡으면 우리 사건 여러 개가 한 방에 해결되는데 말이야."
도서윤이 물었다.
"선배님. 그놈들을 찾기만 하면 체포할 수 있는 건가요?"
형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빽이 있는 놈들이라서 지금 단서만으로는 체포 못 해. 확신은 있는데 증거가 없거든."
"무리해서 잡아봤자 또 풀려난다는 이야기네요?"
"그렇지. 도 형사. 특지팀에는 다른 곳에서 들어온 정보가 많잖아. 거기서 뭐라도 좀 찾아줘. 그 새끼들 때문에 몇 달째 고생했더니 환장하겠다. 도와주면 내가 신세 안 잊을게."
***
최민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김 사장. 나가서 담배 좀 피우고 올게."
김상구 사장이 실실 웃었다.
"왜? 여기서 피우지?"
"맑은 공기 마시면서 피우려고."
"통화는?"
"그건 상무님이 먼저 연락 주셔야 한다니까?"
"얘들이 연장 다 챙겨놨지만, 네가 확답을 받아와야 신성재를 작업하러 갈 거야. 알지?"
"전화 오면 내가 잘 말씀드릴게."
최 과장이 상구파의 건물을 빠져나온 후에 욕을 했다.
"씨발. 깡패 새끼들 사이에 있으니까 쫄리네."
그가 건물 밖에 나와서 차에 몸을 기댄 채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신성재 그 새끼 때문에 일이 너무 복잡해졌어. 역시 그 새끼가 없어져야 해."
***
신성재는 이미 그의 집이 있는 마포구 망원동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시계를 보았다.
"슬슬 시간이 됐으니까, 알리바이 만들러 가자."
신성재가 늦게까지 영업 중인 동네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 어머! 안녕하세요?"
점원은 지난번에 이곳에서 일하다 강도의 칼에 팔을 찔린 바로 그 여자였다.
신성재가 물었다.
"팔은 괜찮으세요?"
"네! 다행히 겉만 베인 거래요. 흉터는 살짝 남겠지만요."
그녀는 그때 팔을 꽤 깊게 찔렸었다. 그대로 두면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신성재가 상처를 봐주는 척하며 마법으로 손상 부위를 복원했다.
그 마법은 상대가 모르게 썼다. 그런데도 그녀는 고마워했다.
신성재가 말했다.
"다행이네요. 오늘은 컵라면이나 하나 먹으려고 왔습니다."
"앗! 제가 사드릴게요!"
"괜찮아요. 이건 내가 사야죠."
신성재가 지금 여기 들어온 건 신용카드 사용 기록과 이곳에서 라면을 먹는 모습을 남기기 위해서다. 알바생이 라면을 대신 사주면 신용카드 기록이 남지 않는다.
신성재가 음료수도 하나 가져와 알바생에게 주었다.
"마셔가면서 해요."
"앗. 여기 우리 오빠 가게라서 안 이러셔도 되는데. 아. 친오빠요."
"괜찮으니까 마셔요."
신성재가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몇 분 기다렸다가 뚜껑을 열었다. 그가 라면을 한 입 먹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 됐다."
***
상구파의 사무실 건물 벽에 새겨놓은 마법진의 지연 효과가 끝났다. 저장해둔 마나가 마법진의 회로에 스며들었다.
마법진이 그 마나에 반응하면서 스톤 브레이커 마법이 발동됐다.
평범한 벽에 손가락으로 빠르게 새긴 마법진은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지금 이 마법진도 지난 1시간 동안 자연 소실된 마나가 절반 가까이 된다.
상관없다. 처음부터 두 배의 마나를 넣었다. 남은 절반만으로도 충분한 위력이 나왔다.
스톤 브레이커 마법이 건물 벽을 타고 쫙 퍼져나갔다. 그 마법이 취약점을 지날 때마다, 마치 번개가 내리치듯이 균열이 쩍쩍 생겼다.
그 균열은 벽에만 생긴 게 아니다. 균열이 지나는 길에 있는 기둥에도 새로운 균열이 쩍 생겼다.
그 건물의 취약점 몇 곳에는 특히 깊은 균열이 만들어졌다.
최민구가 차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송정석 상무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
건물이 쪼개지고 있는 건 반대쪽이라서, 그가 있는 방향에서는 균열이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콘크리트가 갈라지면서 내는 쩍쩍 소리는 들렸다.
"뭐, 뭐야!"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건물 기둥이 뚝 부러졌다. 반대편 벽 두 개도 와르르 무너졌다.
한쪽 기둥과 벽 두 개가 사라졌는데 건물이 버틸 수는 없다. 나머지 벽 두 개도 지붕과 함께 반쯤 무너져내렸다.
최민구 과장이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으아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 건물이 갑자기 왜 무너져!"
그러다 저 단층 건물 안에 상구파 조직원들이 모두 모여 있다는 게 생각났다.
"설마…. 전멸한 거야?"
20. 알리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