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상태 이상
신성재가 112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에 순찰차가 도착했다.
경찰들은 집안에서 쓰러진 놈들을 보고 당황했다.
"어? 집에서 강도를 당하셨다더니, 왜 기절한 사람이 넷이나…."
신성재가 엄살을 부렸다.
"어휴. 무서웠습니다."
"예?"
"저놈들이 다 강도입니다."
경찰 한 명이 기절한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른 경찰은 신성재에게 물었다.
"누가 저 사람들을 저렇게 만든 겁니까?"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집주인이지."
"집주인이…."
"접니다."
"다른 분은 어디 계십니까?"
"혼자입니다."
"네?"
경찰은 당황했다.
"그러니까 네 명을 선생님 혼자서 제압했다는 겁니까?"
"넷 다는 아니고요."
"역시 그건 아니죠?"
신성재가 덩치들을 가리켰다.
"저 둘은 처음에 방심할 때 겨우 기절시켰습니다. 저놈이 칼까지 쥐고 있는 거 보이시죠? 어휴. 무서워라."
"그럼 저쪽 두 사람은…."
"저 양아치는 저 사기꾼이 해머로 때려서 기절시켰습니다. 양아치가 깨어나면 물어보시죠."
"사기꾼이요?"
"저놈이 국회의원 보좌관 사칭 사기를 치더군요."
신성재가 빼앗아둔 명함을 경찰에 넘겼다.
"이걸 주면서요. 나만 속인 게 아니라 저 양아치도 속였습니다. 저 덩치들은 조사해보면 아시겠지요."
경찰이 명함을 확인하며 물었다.
"혹시 진짜 보좌관…."
"변장한 겁니다. 비슷하게 생긴 놈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제가 하는 일이 골동품 복원이라서, 가짜나 위장을 잘 알아봅니다."
"아…."
경찰이 명함을 챙겼다.
"박호진 의원님 사무실 쪽에 연락해서 확인하겠습니다."
신성재는 영상은 굳이 넘겨주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걸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쪽으로 와 보시죠. 이놈들이 찾던 게 있는데."
신성재가 다른 방의 벽 속에 숨겨져 있는 상자를 보여주었다.
"열어보니까 알약이 가득 들어 있더군요."
"예? 알약이요? 이거 혹시…."
"저야 뭐 봐도 모르지만, 아마 마약이겠죠. 여기 숨겨둔 마약을 가지러 왔나 봅니다. 이것 때문에 내 집 벽을 다 부숴놓고 말이야. 나쁜 놈들."
사건이 신고받았을 때보다 커졌다. 경찰이 급히 지원을 요청했다.
신성재가 잠시 기다렸다가 물었다.
"이놈들 뒤에 어느 마약조직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예? 그건 왜 물으십니까?"
"어휴. 보복당하는 게 무서워서 그러죠. 그 조직의 이름이라도 알면 좋겠는데요."
***
은가은이 놀러 왔다가 침입자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마약조직 이름은 들었어?"
"아니. 수사 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더라."
"그 조직을 쓸어버려야 보복할 놈이 없어지는데 아쉽다."
"그러게 말이다."
***
저택의 개조 공사는 두 달이 걸렸다. 실내 인테리어만 한다면 한 달이면 충분했지만, 지하실 공사가 워낙 커서 기간을 길게 잡았다.
게다가 초반에는 경찰이 집을 수색해 마약이 또 있는지 확인하느라 공사 시작이 늦어졌다.
그래도 두 달이 지나 공사가 끝났다.
공사가 완료된 날 오전에 신성재가 집을 보며 말했다.
"깔끔하게 잘 나왔어."
은가은이 옆에서 실실댔다.
"히히히."
"너 뭐 좋은 일 있냐?"
"여기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을 생각하니까 신나서."
"고기는 네가 사와라."
"우와!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저택 주인이 가난한 학생한테 고기 뜯어낸다!"
"너 안 가난해."
"보컬이랑 연기학원에 학원비 냈더니 가난해졌어."
"그 헛된 꿈은 네가 선택한 거고."
"나는 그런 무정한 말이 아니라 응원과 고기가 필요하다!"
"학교나 가. 너 오늘 수업 있다며."
신성재가 은가은을 보내고 집으로 들어갔다.
인터리어 회사 사장인 박성훈이 먼저 와 있었다.
공사비는 꽤 많이 나왔다. 신성재는 그걸 모두 현금으로 이체했다.
"박 사장님이 금을 안 받으셔서."
"네?"
"농담입니다."
박성훈이 집안에 들어가며 말했다.
"하자가 나오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죠. 바로 직원을 보내겠습니다."
그들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박성훈이 말했다.
"공사비는 지하실이 제일 많이 들었습니다. 이 집의 본체는 지하실이 아닐까 싶을 정도죠. 하하하."
"틀린 말은 아닙니다."
지하실은 마법사의 공방으로 쓸 곳이다. 그러니 이 집에서 제일 중요한 공간이다.
박성훈이 지하실 입구를 보면서 말했다.
"이거 지하 미로 같은 느낌이네요."
신성재가 피식 웃었다.
"던전의 미로치고는 너무 짧지요. 겨우 세 번 꺾이는데요."
"하하하. 진짜 미로라는 게 아니라, 느낌이 그렇다는 겁니다."
***
송스 갤러리 관장 송예솔이 유럽 골동품의 동향을 수집해서 정리한 문서를 읽었다.
"란슬롯의 검?"
문서에 란슬롯의 검을 복원해서 영국 박물관에 판 사람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다만, 소문으로 들은 걸 정리한 것이라 누가 팔았는지까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유럽에도 신성재 씨처럼 대단한 복원 전문가가 있나 봐."
그날 점심때 송예솔이 신성재를 만나러 갔다. 복원 의뢰를 하기 위해서였다.
"왜 망원동이 아니라 여기로 오라고 한 거지?"
그녀가 도착하자 바로 앞 저택에서 신성재가 나왔다.
송예솔이 물었다.
"어머. 성재 씨. 거긴 누구 집이에요?"
"내 집입니다."
"네? 신성재 씨 집은 망원동에…."
"샀습니다."
송예솔이 저택을 보았다.
"언제…."
"두 달쯤 전에."
"이 집 가격이…."
"오십억?"
"두 달 전에 오십억이면…."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성재 씨. 혹시 두 달쯤 전에 유럽에 갔다 오셨어요?"
"그랬죠."
"혹시 유럽에서도 활동해요?"
"원래는 그렇게 멀리는 잘 안 가는데, 이 집 살 돈이 필요해서 잠깐 갔다 왔습니다."
그녀가 보고서에서 봤던 검의 가격을 떠올렸다.
"영국에서 란슬롯의 검을 복원한 사람이 신성재 씨였어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대? 국내 뉴스엔 안 나왔는데."
"아니, 그 시기에 거액의 돈이…. 그리고 짧은 복원 기간에 그런 놀라운 완성도까지…. 제가 참 바보 같네요. 성재 씨 같은 능력자가 유럽에도 있다고 생각했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혼자 떠들던 송예솔이 다른 걸 떠올리고 멈칫했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검 하나 복원해서 이 집을 산 거네요?"
"이번엔 복원비를 받은 게 아니라, 녹슨 검을 직접 매입한 후에 복원해서 팔았으니까요."
"와…."
송예솔은 송스 그룹 회장 송충기의 손녀다.
하지만 송스 그룹은 국내 10대 그룹이 아니다. 송예솔도 2세가 아니라 많은 3세 중 한 명이다.
50억 원은 송예솔에게도 큰돈이다. 마음만 먹으면 융통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금방 벌 수 있는 돈은 아니다.
송예솔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신성재 씨. 우리 오늘 밥 같이 먹을래요?"
***
은가은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강의실을 나갔다.
같은 과 남자 동기가 그녀를 불렀다.
"가은아. 점심 같이 먹자. 내가 피자 살게!"
"안돼! 바빠!
다른 동기도 말을 걸었다.
"가은아. 내 친구가 너 소개해달라고…."
"꺼져!"
여자 동기 친구가 은가은을 불렀다.
"야. 어디 가?"
"밥 먹으러!"
"쟤가 먹자는 건 거절하더니?"
"난 맛있는 거 먹을 거야!"
은가은의 학교에서 신성재의 집은 가깝다. 망원동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다.
"이제 집 다 고쳤으니까 오늘 점심은 여기서 먹어야지. 집이 학교랑 가까워져서 진짜 좋…. 엥?"
그녀가 집을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송 관장님이 왜 여기 있어요?"
송예솔이 대문 앞에서 신성재에게 밥을 먹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그녀가 옆을 돌아보았다.
"응? 가은 씨네? 지금 학교에서 수업할 시간 아닌가?"
"수업 끝났거든요?"
"요즘 학교는 편하네. 나 때는 말이야.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라떼 마시고 싶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은가은이 나타나면서 송예솔이 신성재와 단둘이 밥 먹자고 제안한 건 없던 일이 됐다.
송예솔은 근처 카페에서 세 개의 골동품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건 우리 갤러리에서 확보했고요. 이건 신성재 씨가 복원해준다고 하면 우리가 매입하려고요."
은가은이 옆에서 쫑알댔다.
"오빠가 그거 사서 직접 팔면 훨씬 많이 받는데."
"모든 유물을 신성재 씨가 직매입해서 직접 팔순 없잖아요. 골동품은 고객이 있어야 팔 수 있어요."
신성재가 그중 하나를 골랐다. 금속으로 만든 조선 시대 장신구였다.
"이걸로 하죠."
"어머. 그건 황진이의…. 고마워요! 복원비는 최고로 계산할게요!"
복원 비용은 당연히 받는 건데, 이번엔 추가 조건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복원한 골동품들을 처분해야겠는데…."
"저희가 다음 달에 골동품 전시회를 해요. 그때 전시실 하나를 특별관 형식으로 내드릴게요."
"딱 좋군요."
송예솔은 의뢰를 마치고 전시 계획도 약속한 후에, 아쉬운 표정으로 신성재를 몇 번을 돌아보며 떠났다.
은가은이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씩 웃었다.
"훗. 쫓아냈다."
"좋냐?"
"당연하지! 송 관장은 꼬리가 너무 많이 달렸어. 아주 그냥 구미호야."
"근데 이 시간에 왜 왔냐?"
그녀가 신성재의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밥 먹으러 왔지. 집수리 끝났으니까 이제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어도 되잖아."
"안돼."
"엥? 왜?"
신성재는 이 집에 마법 공학을 적용한 경계 시스템을 설치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 작업은 금방 끝나지 않는다.
"지금 들어가면 위험해."
"집이 막 터지고 그래?"
"아니. 네가 하나라도 잘못 건드리면 전부 다 다시 작업해야 해."
"누가?"
"내가. 물론 너를 조수로 부려먹겠지?"
은가은이 움찔하더니 물었다.
"얼마나?"
"너 때문에 망치면, 작업 다 끝날 때까지 너를 조수로 부려먹을 거다."
은가은이 대문에서 뒤로 빠르게 물러나며 말했다.
"학생은 공부해야지!"
"좋은 자세다."
"근데 나는 지금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생선구이 먹자!"
두 사람의 집 가까운 곳에 생선구이를 파는 작은 식당이 있었다. 그들은 인테리어 상황을 점검하러 이곳에 올 때면 그 식당에도 가곤 했다.
그 작은 식당을 찾아간 은가은은 당황했다.
"엥? 여기 문 닫았어? 맛있어지는 마법의 가루를 줬는데 어떻게 망해? 장사 되게 잘됐는데?"
"안 망했어."
"문 닫았는데?"
"사장님이 식당 옮겼어. 손님이 줄을 서는데 가게가 너무 좁잖아.
"어디로?"
"저 모퉁이 지나서."
그들이 골목을 조금 더 지나갔다. 기존보다 다섯 배는 큰 식당이 나왔다.
"우왕. 두 달 만에 이렇게 확장 이전이라니! 맛있어지는 가루 대단해!"
"그 가루를 만든 내가 대단한 거다."
은가은이 식당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사장님! 저희 왔어요!"
꼬마 민수아는 오늘도 식탁에 책과 노트를 펼쳐놓고 있었다. 꼬마가 웃으며 인사했다.
"히히. 안녕하세요."
은가은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수아야. 너 오늘 너무 귀엽다!"
"고맙습니다!"
신성재가 말했다.
"오늘도 귀여운 거야."
그런데 오늘은 가게를 옮긴 첫날이라 아직 정식 영업을 하는 건 아니었다.
박현정 사장이 설명했다.
"시험 운영이라 오늘은 오전에만 장사하고 지금은 정리하려던 중이에요."
은가은은 실망했다.
"앗. 그럼 지금은 밥 못 먹어요?"
"그럴 리가요. 두 분은 언제 오시든 최고의 식사를 차려드려야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고맙습니다. 히히."
음식을 주문하고 조금 기다리는데, 아이가 노트에 그린 그림을 가져와서 신성재에게 내밀었다.
"아저씨. 이거요."
그 그림은 신성재의 얼굴이었다. 상세하게 그린 건 아니고 선으로 눈코입 정도만 표현했지만, 그래도 신성재인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와아. 특징 잘 잡았네. 너 그림에 재능이 있구나?"
"히히. 아저씨 잘생겼어요."
"고맙다."
은가은이 물었다.
"언니는 어때?"
"언니는 못생겼어요."
"어머어. 나 못생겼다는 말 태어나서 처음 들어봐. 학교에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신성재가 물었다.
"근데 왜 남자친구가 없냐?"
"걔들은 너무 생각도 짧고 철이 없어."
"너도 딱히…."
"난 무인도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사람이잖아. 내면의 깊이가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안 달라."
"그리고 난 진짜 잘생긴 연예인 아니면 안 만날 거야!"
"거울은 보냐?"
"오빠가 꿈은 크게 가지라고 무인도에서 그랬잖아!"
"그 꿈이 그런 꿈은 아니었는데?"
"난 그렇게 이해했다!"
"연예인은 어떻게 만나게?"
"나도 가수나 배우가 되면…."
"역시 그게 목적이었구나!"
은가은이 말을 돌리려고 민수아에게 물었다.
"수아야. 근데 넌 학교 안 가?"
"오늘은 안 갔어요."
"식당에 올 때마다 여기 있던데."
민수아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학교 가고 싶은데. 태권도도 가고 싶은데."
"가고 싶으면, 가면 되잖…. 어, 어머!"
신성재가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꼬마 민수아의 상태가 나빠졌다.
41. 정화
꼬마 민수아의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그런 후에는 몸까지 옆으로 스르륵 넘어갔다.
"오빠!"
이미 신성재가 민수아의 옆에 있었다. 그는 민수아가 넘어지기 전에 몸을 붙잡았다.
식당 주인인 박현정이 식사를 준비하다 뛰어왔다.
"수아야!"
신성재가 제일 넓은 식탁 위에 민수아를 눕혔다.
은가은은 당황했다. 민수아는 방금 그녀와 이야기하다 갑자기 기절했다.
은가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난 그냥 학교 가고 싶으면 가라고 한 것뿐인데…."
박현정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민수아의 상태를 살피며 설명했다.
"우리 애가 아파요. 그래서 학교는 못 가는 날이 많아요."
"아…. 어, 어디가 아픈데요?"
"몰라요."
"네?"
박현정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른대요."
그래서 치료제도 없다. 혈압이 내려가면 높이는 약을 쓰고, 열이 나면 해열제를 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박현정이 눈물을 닦았다.
"원인을 모르니까 치료제도 없다고…. 두 분께도 죄송해요."
신성재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면서 민수아의 이마에 손을 댔다. 그의 손에서 전투 마법사가 부상자의 상처를 확인할 때 쓰는 마법이 발현됐다.
그건 원래는 구조물의 약점을 찾는 마법이었다. 그걸 사람의 몸에 맞게 수정해 부상 부위를 파악하는 데 썼다. 그러니까 병을 진단하는 마법은 아니다.
그래도 그 마법을 잘 응용하면 상태가 안 좋은 부분을 찾아낼 수는 있다.
박현정은 휴대폰을 가지러 안쪽으로 뛰어갔다. 신성재가 마법을 사용해 꼬마 민수아의 상태를 계속 확인했다.
"음…."
꼬마의 내부 장기 상당수가 그 마법에 반응했다. 상태가 전체적으로 나쁘다는 뜻이다. 어느 하나만 치료한다고 될 상황이 아니다.
박현정이 휴대폰을 가지고 돌아온 후에 말했다.
"식사는 죄송해요. 수아를 병원에 데려가야 해서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식당은 오늘은 오전에만 운영해서 지금은 손님이 없었다.
그녀가 다시 휴대폰을 들고 한쪽으로 걸어갔다. 구급차를 부르는 중이었다.
신성재가 민수아의 이마에 손을 댄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묘하네."
그는 현대 지구에서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마나가 깃든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당연히 민수아의 몸에서도 마나는 감지되지 않았다.
"오염된 마나에 중독된 건 아닌데…."
상태가 그것과 비슷했다.
은가은이 물었다.
"마나라니?"
"지구에 마나가 있을 리 없는데, 왜 이렇게 증상이 비슷하지?"
그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빠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응급처치 정도는 할 수 있어."
오염된 마나에 중독된 것과 비슷한 상태라서, 마법으로 응급처치는 할 수 있다.
신성재의 손에서 마법이 발현됐다.
꼬마의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잠시 후에 구급차가 도착해 꼬마 민수아를 옮겼다. 박현정도 그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은가은이 식당 밖으로 나와 멀어지는 구급차를 보며 말했다.
"괜찮으면 좋겠다."
신성재가 찜찜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당장 위급한 단계는 피하게 손은 썼어."
"그럼 괜찮은 거야?"
"아니. 앞으로가 문제야."
"문제라는 게 어느 정도야?"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저쪽 세계의 비슷한 증상과 비교하면."
그 지식은 평행세계에서 얻었다.
"이삼 년 안에 큰일 날 수 있다."
"그, 그 정도야?"
"어쩌면 더 빨라질지도 몰라."
은가은이 물었다.
"혹시 치료 마법으로 어떻게 안 돼?"
"되겠냐?"
"총 맞은 건 마법으로 되잖아. 다 죽어가던 나도 살렸잖아."
그 총에 맞은 사람이 바로 은가은이다. 무인도에서 해적의 총에 맞은 그녀를 신성재가 마법으로 치료했다. 그때 총에 맞은 자리는 지금은 아주 흐릿한 흔적만 남아 있다.
"차라리 방금 총에 맞았으면 해결할 수 있지."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마법은 다치자마자 사용하면 총상도 복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성공 확률과 복원완성도가 크게 떨어진다.
그래서 그 마법으로는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 질병은 걸린 후에 증상이 나올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면 복원 마법은 먹히지 않는다.
"오빠는 마법사잖아. 진짜 방법 없어?"
신성재가 아이의 상태를 떠올렸다. 진단 마법 덕분에 정보는 조금 모았다.
"음…."
신성재가 설명했다.
"신체 장기의 기능이 전체적으로 떨어졌어. 그런데 질병이 아니라, 오염된 마나에 의한 상태 이상과 비슷해."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저쪽 세계의 지식에 있긴 있다.
"포션을 마시면 1년 정도는 괜찮아져."
저쪽에서는 그런 경우 포션으로 증상을 완화한다.
"무슨 포션?"
"정화 포션. 상급으로."
"그거 오빠도 만들 수 있어?"
"방법은 아는데, 마나를 품은 식물이 필요해."
"혹시 1년이 아니라 완전히 낫게 하는 건 안 돼?"
저쪽 세계에는 완치 가능한 치료제가 있다. 그렇지만 그 약은 저쪽 세계에서도 귀하다.
"그러려면 엘릭서가 필요해."
"엘릭서도 만들 수 있어?"
"되겠냐? 우리 지구에는 포션을 만들 재료조차 없는데."
포션과 엘릭서 사이에는 약국에서 파는 해열진통제와 수억 원짜리 최첨단 맞춤형 유전자 치료제만큼의 간격이 있다.
그런데 지구에는 포션의 필수 재료인 마나를 품은 식물이 없다. 그러니 엘릭서는 고사하고 포션도 만들 수 없다.
"뭐야. 그럼 겨우 1년만 괜찮게 하는 것도 안 되는 거야?"
"당연히 안 되지. 포션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대체품은 가능할지도…."
예전에는 지구에서는 연금술을 쓸 곳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다 송스 갤러리의 돌로 만든 불상을 복원하면서 유물에 깃든 기원에 대해 알게 됐다.
그 돌 불상은 전설급 유물이다. 전설 등급은 신성재도 지금까지 그것 하나밖에 보지 못했다.
신성재가 두 달 전에 새로 산 집 지하실에서 찾아낸 자물쇠 유물은 고급보다도 낮은 일반 등급이다. 그것만 해도 구하기 정말 어렵다.
그러다 이 식당 주인 박현정의 망가진 국자를 얻었다. 그 유물 국자 덕분에 연금술로 '요리 요정의 축복'을 만들어냈다.
"맛있어지는 가루가 연금술로 만든 거니까, 이론상으로는 다른 약도 가능한데…."
"그 가루는 유물을 써서 만든 거잖아."
"마법의 조미료는 제작 난도가 낮아. 그래서 됐던 거야."
"포션은 어려워?"
"어렵지. 고급 등급의 유물이 있어도 F급 포션의 유사품조차 만들기 어려워. 그런데 수아한테 필요한 건 상급 포션이다. 그건 지금 지구에서는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수준이야."
고급 등급 유물은 구하기 어렵다. 딱 맞는 기원을 찾는 건 훨씬 더 어렵다.
은가은이 말했다.
"어쨌든 가능하다는 거잖아."
"딱 맞는 성격의 유물이 있다면 유사품의 열화판 정도는 가능하겠지."
"연구는 언제부터 하게?"
"집의 마법 처리부터 마무리해야 해. 마법사의 공방이 완성되어야 그 레벨의 연금술 연구를 할 수 있다."
"그게 언제인데?"
"원래는 당분간 쉬려고 했는데."
아까 민수아가 그려준 그림이 주머니에 들어 있다.
"오늘 밤늦게까지 공방에 마법을 세팅하고, 연금술 연구는 내일 아침부터 해야지."
***
신성재는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대문의 도어락 주변에는 경계 마법진을 새겨놨다. 누군가 대문을 몰래 열면 이 마법이 반응한다.
담장과 집의 벽에도 이미 마법진을 새겨뒀다. 그건 본체가 아니라 단말기 역할을 하는 마법이다. 그래서 술식이 간단했다.
그가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곳에 경계와 보안 기능을 가진 복잡한 마법진을 새겼다. 이 마법은 술식이 복잡한 대신에 집 전체를 경계 영역에 넣을 수 있다.
문제는 이 마법진의 동력이다. 저쪽 세계에서는 보통 마나가 깃든 돌을 마법진의 동력으로 쓴다.
여기서도 고급 등급의 유물을 쓰면 동력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유물은 정말 구하기 어렵다. 게다가 유물의 성향이 마법과 맞아야 한다.
신성재가 일반 등급 유물인 자물쇠를 꺼냈다.
이건 조선 후기에 만든, 창고의 문을 잠그는 데 쓰던 자물쇠였다.
그런데 그 창고가 대갓집의 창고였다. 안에 귀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더 철저히 관리되었다.
대갓집의 주인은 물론이고 하인들도 그 자물쇠를 자주 만지고 확인했다. 이 자물쇠는 그렇게 그 집안에서 100년 동안 사용됐다.
그런데도 고급 등급의 유물이 되진 못했다. 대신에 일반 등급 중에서는 상등품이 됐다.
신성재가 그 자물쇠를 벽에 새긴 마법진의 중심에 끼웠다.
그 자물쇠에도 경계 마법이 새겨져 있다. 자물쇠의 마법과 벽에 새긴 마법이 서로 연결되었다.
그가 담장이나 대문 등에 설치한 마법진은 모두 이 마법진의 단말 기능만 한다. 이 마법이 이 집 전체를 경계한다.
신성재가 자물쇠에 손끝을 대고 마나를 보충했다. 자물쇠에서 광택이 자르르 흘렀다.
"반응이 좋다."
이 자물쇠 유물에 마나를 충전하면 그 효과가 사흘은 유지된다. 방어 마법이 작동하면 마나가 더 빨리 소진되지만, 단순 경계 마법만 활성화하면 사흘이 넘게 유지될 수도 있다.
신성재가 지하실로 들어가는 통로에 방어 마법을 설치했다. 그것도 중앙의 마법진이 통제하고 동력을 공급한다.
이제 신성재의 허락 없이 이 지하실로 들어오려면 땅굴을 파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지하실의 외벽은 방공호로 써도 될 정도로 튼튼하다. 그걸 뚫으려면 금고 벽이라도 뚫는 노력이 필요한데, 조용한 주택가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신성재가 이번에는 지하실에 연금술을 보조하는 마법진을 세팅했다. 이 작업은 밤새도록 해야 한다.
***
이튿날 아침에 인사동 도종호 사장이 도서윤 형사에게 말했다.
"신성재 씨 말이야. 이번에 서교동에 50억 원짜리 저택을 샀다더라."
"좋겠다."
"서윤아. 내가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지금도 늦진 않았…."
"소개팅 안 한다고. 사건 수사하느라 바쁘다고."
***
저쪽 세계의 마법사는 연금술을 기본 소양으로 익히고 있다. 전투 경험이 많은 마법사는 회복 포션 정도는 쉽게 만든다. 전쟁터에서는 포션을 만들 일이 자주 생긴다.
"문제는 회복이나 정화 포션을 만들 재료가 없다는 건데…."
포션의 핵심 재료는 마나를 품은 약초다. 저쪽 세계에서는 그런 약초를 회복초나 정화초라고 불렀다.
지구에는 회복초나 정화초가 없다.
그래서 그동안은 연금술은 깊게 연구하지 않았다. 최근에 요리 요정의 축복이라는 가루를 만든 게 유일한 성과였다.
"그러니까 대체품을 써야 한단 말이야."
저쪽 세계에도 회복초의 대체품은 있다. 회복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약한 회복 효과를 보이는 식물은 다양하게 존재했다. 식용 가능한 것도 많았다. 전장에서는 이것저것 섞어 쓰기도 한다.
그렇게 만든 건 유사품이나 열화판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비슷한 식물을 찾아내더라도 마나가 없지만…."
대체품도 마나를 조금은 품고 있어야 열화판의 재료를 쓸 수 있다.
다행히 마나도 대체품이 있다. 유물이 가진 특별한 기운은 마나를 대체할 수 있다.
"약초에 그 기운을 강제로 부여하면 될 것 같은데."
신성재는 마법사다. 식물에 일시적인 마나 부여를 할 수 있다. 다만 그 마나는 몇 시간이면 흩어진다. 그런 재료로 만든 약은 약효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역시 유물이 필요해."
***
신성재가 이튿날 송스 갤러리 송예솔 관장을 만났다.
"어머. 성재 씨를 이틀 연속으로 만나다니. 복권 사야겠다."
"송 관장님은 복권을 사기엔 너무 부자 아닙니까?"
"성재 씨는 안 사요?"
"가은이는 사던데 난 뭐."
"오늘은 혹시 어제 못 먹은 점심 먹으러 온 거예요?"
"골동품 복원의 조건을 바꿨으면 합니다."
신성재는 어제 송스 갤러리의 망가진 골동품을 하나 복원해주기로 했다. 대신에 송스 갤러리의 골동품 전시회에 방 하나를 특별 전시실로 사용하기로 했다.
"네? 조건을 어떤 거로 바꾸시려고…."
"다음 달에 갤러리에서 전시할 골동품들을 지금 가지고 있습니까?"
"전부는 아니지만, 꽤 많이 확보했죠."
"내가 그걸 지금 전부 직접 확인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하나 샀으면 합니다."
아무 유물이나 되는 게 아니다. 약을 만들려면 회복이나 정화와 관련된 유물이 필요하다.
42. 조합
약을 만들려면 회복이나 정화와 관련된 유물을 찾아야 한다. 그것도 고급 등급이 필요하다.
유물이 비싸다고 해서 꼭 기원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유물 비녀는 풍물시장 가판대에서 십만 원에 샀다.
연금술에 쓰는 국자도 박현정의 식당 벽에 장식품으로 걸려 있던 것이다.
그래도 당장 유물을 찾아야 한다면, 오래되고 귀한 유물을 조사하는 게 낫다. 귀한 것에 사연이 있는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송스 갤러리는 그런 귀한 골동품을 모아 다음 달에 전시회를 한다.
송예솔 관장이 말했다.
"알았어요. 우리 갤러리에서 전시한 건 고객이 살 수 있으니까, 성재 씨한테 하나쯤 먼저 팔아도 되죠. 아니다. 두 개 사도 돼요. 언제 보여드리면 돼요?"
"지금."
신성재가 송스 갤러리에서 준비한 골동품들을 하나씩 손으로 만져보았다. 맨손이 아니라 유물을 감정할 때 사용하는 장갑을 꼈다. 그 장갑에는 보호 마법이 인첸트되어 있다.
송예솔이 신성재를 따라다니면서 물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어요?"
"아직은 없군요."
"어떤 걸 찾는데요?"
"부정한 것을 정화하거나, 아니면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이 깃든 거?"
"그럼 이건 어때요? 여기 이 방울은 유명한 무당이 썼던 건데요. 부정한 걸 없애려면 이게 좋지 않나요?"
신성재가 그 방울을 만져보았다. 방울 소리가 그럴듯하게 났지만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무당이 사이비였나 보네요."
"호호. 뭐예요. 그게."
신성재가 다른 유물들도 확인하다가 약탕기에 손을 댔다. 도자기로 만든 약탕기였다.
'음?'
이번에는 느낌이 왔다. 하지만 명확하지 않았다.
신성재가 약탕기의 바닥을 보았다. 미세한 흠집이 있었다. 그가 그릇을 다시 내려놓고 복원 마법을 사용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그 흠집이 복원되는 동안 보조 마법도 걸었다.
[크로노스의 눈]
쓰러진 어머니가 회복하길 바라며 약을 달이는 자식의 모습이 보였다.
이 약탕기에 기원이 깃들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마음은 남았다.
기원이 없으면 스스로 기운을 만들지 못하고, 그러면 아무리 잘 쳐줘도 일반 등급이다.
신성재가 말했다.
"이거 괜찮군요."
일반 등급이지만 지금 쓰려는 목적과 잘 맞았다.
송예솔이 설명했다.
"그건 정조 때 유명한 효자가 썼다고 하는 약탕기예요. 그런 사연 덕분에 가격이 꽤 나가는데…."
"1억 넘습니까?"
"네? 아뇨. 3천만 원이에요."
"적당하네요. 이건 제가 사지요. 남은 것도 마저 확인합시다."
고급 등급의 유물이 있으면 정화나 회복과 관련이 없어도 살 생각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확인해도 약탕기 외에는 일반 등급 유물조차 없었다.
"이 약탕기만 사겠습니다. 골동품 복원 의뢰의 추가 조건은 이걸로 대체하죠."
당연히 복원 의뢰비는 이것과는 별개로 받아야 한다. 이건 추가 조건으로 걸었던 특별 전시실 대신이다.
송예솔이 제안했다.
"다음 달에 전시실도 그대로 준비할게요."
"안 그래도 되는데요."
"성재 씨의 골동품이 팔리면 우리도 수수료를 받으니까 좋아요."
그녀가 살짝 웃었다.
'이렇게 성재 씨랑 긍정적인 관계를 쌓아가면 좋잖아?'
***
일반 유물을 하나 구했다.
"정화가 아니라 회복 계열인 게 조금 아쉽지만, 이게 어디냐."
꼬마 민수아가 걸린 상태 이상은 저쪽 세계에서는 정화 포션으로 해결한다.
정화 포션이 없으면 회복 포션으로도 증상을 완화할 수 있다. 효과가 정화보단 못하지만 안 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이러면 재료는 회복 계열로 맞춰야겠지."
어차피 포션은 재료가 없어서 못 만든다. 고급 유물이 있어도 어려운데 일반 등급 유물로는 어림도 없다.
지금 만들려는 건 유사품이다. 그러려면 회복과 관련된 재료들이 필요하다.
문제는, 현대 지구의 어떤 재료가 제작 조건에 맞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 시험해봐야지."
신성재가 서울의 경동시장을 찾았다. 그곳에 한약재를 취급하는 곳이 많았다.
"인삼은 이게 최선입니까?"
"6년근 중에서는 제일 좋은 겁니다."
"그럼 인삼 한 채에, 홍삼도 좀 주시고요."
인삼만 산 게 아니다. 뭐가 효과가 있을지 모르니 다른 한약재들도 필요했다.
그는 경동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를 종류별로 사들였다.
"말린 대추요? 그것도 주시죠."
한약재를 다양하게 샀더니 스포츠카의 뒷좌석까지 봉지로 가득 찼다.
"SUV를 가져올걸."
오늘 쇼핑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어차피 더 사도 실을 곳이 없다.
신성재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후에 지하실에 약초를 펼쳐놓았다.
약초에 직접 마법진을 그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사들인 약초에 손을 대고 마나를 직접 부여했다. 강제 마나 부여였다.
그 마나가 줄어드는 속도를 계산하면 전부 사라지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 있다. 예상대로 약초에 마나가 남아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역시 오래 가는 것도 대여섯 시간이 한계구나."
그건 이미 예상했다. 현대 지구에서는 인첸트 마법을 일반 사물에 부여해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빠른 건 단 몇 분도 넘기지 못하네."
이번에는 일반 유물 약탕기를 가져왔다. 그 약탕기에 마법진을 새겼다.
그가 새긴 건 재료에 마나를 부여하는 마법진을 수정한 것이다.
신성재가 약탕기에 인삼을 넣고 마법진에 마나를 공급했다. 마법진이 다시 약초에 마나를 부여했다.
그 작업이 끝난 후에 신성재가 약탕기에서 꺼낸 인삼을 확인했다.
"쯧."
인삼에 깃든 건 유물의 기운이 아니라 마나였다.
은가은이 놀러 와서 물었다.
"오빠. 잘 돼? 성공했어?"
"실패다."
"응? 아니, 왜?"
"약탕기에 마나를 넣었더니 약초에 마나가 그대로 들어간다."
"그럼 안 되는 거 아니야?"
약초에 마나를 부여할 거면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안 되지. 가은아. 너 대추 좀 그만 까먹고 국자 가져와라."
"국자? 저건 맛있어지는 가루를 만드는 데 쓰는 거잖아."
"맛있게 먹으라는 마음에는, 그걸 먹고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도 조금은 있어."
"아. 그건 그래. 우리 아빠도 많이 먹고 튼튼해지라고 하거든."
"넌 이미 튼튼하다."
"앗! 그럼 처음부터 국자로 약을 만들었으면 되는 거 아냐?"
"안돼. 그러면 약효는 없지만 맛있는 인삼 같은 게 나올 거야."
"그럼 어떻게 하게?"
"유물을 조합해야지."
신성재가 작업대 위에 판을 올려놓고 마법진을 그렸다.
은가은이 물었다.
"이건 뭐야?"
"간단히 말하면 국자에 깃든 기원이 만들어낸 기운을 받아서 약탕기로 보내는 마법진. 마나 대신에 유물의 기운을 받아서 약재에 깃들게 하는 거지."
"마법진이 엄청 큰데?"
"원래 아이템이나 아티팩트를 조합하려면 술식 계산이 복잡해져."
유물 조합 마법진은 이튿날 완성됐다.
신성재가 약탕기에 약재를 넣었다. 그런 후에 조합 마법진을 가동했다.
은가은이 오늘도 놀러 와서 물었다.
"잘 되고 있어?"
"넌 일할 때는 도망치고 꼭 다 끝나면 나타난다?"
"히히. 그래서 어떻게 됐어?"
신성재가 약탕기에서 인삼을 꺼냈다.
"마나가 아니라 유물의 기운이 부여됐어."
"우왕! 성공이다!"
"아직은 아니야. 이 약재들로 회복 보조제를 만들 수 있는지는 실험을 더 해봐야 하니까."
은가은의 귀에는 그런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럼 유물 두 개를 조합했으니까 효과가 더 좋아졌어?"
"그럴 리가."
"엥? 아니야?"
"유물 국자의 기운에서 회복 성향은 얼마 안 되더라. 약탕기가 그 성향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유물의 차이에 따른 손실도 발생했지. 남은 기운을 약초에 부여할 때도 흩어지는 게 있었어."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가 반복됐구나?"
"알아듣는 걸 보니까 바보를 가르쳐서 대학에 보낸 보람이 있다."
"우이씨. 나 바보 아니다."
"어. 그래."
***
하루가 더 지났다. 신성재가 약재를 다양하게 조합해보았다.
"잘 안 되네."
"왜?"
"저쪽 세계처럼 약초를 조합해야 효과가 좋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봐."
"그럼 이제 안돼?"
"저쪽 세계는 전쟁터에서 보급이 부족하면 이것저것 풀을 뜯어서라도 대체품을 만들어."
"엥? 풀?"
"약초 말고 다른 식물들도 확인해야겠다."
"그러면 잡초나 꽃을 쓰는 거야?"
"좋은 생각이야. 꽃도 써봐야지."
신성재는 다양한 식물들을 수집했다.
실험은 약초로 시작했다가 일반 식물로 확장하고, 나중에는 꽃이나 채소, 과일까지 가리지 않고 사용했다. 단일 개체도 연구하고 몇 가지 식물을 조합하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을 더 작업한 후에 신성재가 말했다.
"됐다!"
소파에서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보며 낄낄대던 은가은이 뛰어왔다.
"뭐야? 됐어?"
"일곱 가지 식물을 조합해서 성공했다."
은가은이 흥분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그럼 정화 포션을 만든 거야?"
"아니."
"그럼 회복 포션?"
"그것도 아니고."
"엥?"
"정화는 유물의 기운이 달라서 안 돼. 회복 쪽에서 성과가 나왔다."
"회복 포션 아니라며."
"이건 회복 포션이라고 하기엔 효과가 너무 약하니까."
회복 관련 고급 등급 유물이 없어서, 고급 국자와 일반 약탕기를 조합했다. 거기서 기운의 손실이 꽤 크게 발생했다.
재료도 문제였다. 이것저것 다 시험했는데 결국 약재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식용 가능한 식물들이 궁합이 맞았다.
은가은이 걱정했다.
"효과가 약해도 도움이 되긴 하는 거지?"
"이걸 매일 먹어야 꼬맹이의 건강에 도움이 되겠지."
"매일 얼마나 먹어야 하는데?"
신성재가 손가락 한 마디를 보여주었다.
"이만큼?"
은가은이 마음을 놓았다.
"에이. 뭐야. 많이 먹는 것도 아니네. 그럼 그냥 매일 먹으면 되잖아."
"그러네?"
"이거 만드는 법만 가르쳐주고 알아서 매일 먹으라고…. 아. 그건 안 되겠구나."
신성재가 작업대 위의 마법진과 유물 두 개를 가리켰다.
"당연하지. 이걸 만들려면 마법진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하니까."
마법진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밖에 없다.
"그럼 이건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해?"
"저쪽 세계의 방식으로 하면 F급 회복제."
"F급?"
"F급은 최하급에 붙는 등급이야."
"회복제는?"
"이건 포션의 유사품의 열화판이거든. 저쪽 세계에서는 이런 거에 포션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사기꾼으로 잡혀간다."
은가은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오빠. 이게 최선이야?"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은가은이 회복제 한 알을 손가락으로 집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기 들어간 일곱 종류의 식물은 다 먹을 수 있는 거야?"
"그렇지. 당근 같은 게 들어가니까."
"엑. 당근. 난 감자가 더 좋은데."
"감자는 시험해봤는데 안 되더라."
"이거 맛은 어때?"
"먹어봐. 지금 만든 건 다 너 줄게."
은가은이 활짝 웃었다.
"앗! 나부터 챙겨주는 거야?"
"아직 임상시험을 안 해서."
"으응?"
"먹어도 되는 거로만 만들었으니까 부작용은 딱히 없겠지."
"'없어'가 아니라 없겠지?"
"설사 미세한 부작용이 있더라도 회복 효과가 그걸 상쇄하고도 남으니까 몸에 나쁘진 않아."
마법사의 판단으로는 이 회복제는 몸에 나쁠 리가 없다.
"그래도 꼬맹이가 먹을 건데 먼저 시험은 해보는 게 좋잖아?"
은가은이 항의했다.
"왜 그 시험 대상이 나야?"
"네가 조수잖아."
"그, 그치만! 그럼 오빠도 먹어야지!"
"난 연구하면서 이미 많이 먹었어."
은가은이 신성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멀쩡해 보였다.
"먹어도 괜찮은 거 맞지?"
신성재가 말했다.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내가 해독 마법이라도 걸어줄게."
"해독 마법도 있어?"
"그것도 아직 사람한테는 시험을 안 했다만…."
은가은은 당황했다.
"아니, 오빠?"
신성재가 진지하게 물었다.
"가은아. 오빠 믿지?"
"믿겠냐고!"
"어쩌겠냐. 이거 미리 먹어볼 사람이 나랑 너밖에 없는데."
"췟. 꼬맹이 때문에 먹는다."
은가은이 투덜대며 회복제를 입에 넣고 씹었다.
"으. 맛없어. 아니, 이거 왜 맛이 없어? 유물 국자를 써서 만들었는데!"
"약이 맛있으면 과자처럼 많이 먹을 수 있잖아. 그래서 일부러 맛없게 만들었다."
"그러면 내가 먹을 것만이라도 맛있게 해줘!"
"포기하고 그냥 먹어."
***
이튿날 은가은이 신성재를 찾아와서 호들갑을 떨었다.
"오빠! 이거 끝내줘!"
신성재는 회복제를 추가로 만들면서 물었다.
"컨디션이 좋아졌냐?"
"숙취 해소에 끝내줘!"
신성재가 은가은을 돌아보았다.
"응? 너 설마 어젯밤에 회복제 먹고 나서 술 마셨냐?"
"어? 왜? 술 먹으면 안 돼?"
"되긴 하지."
"거봐! 난 오빠 실력을 믿었지!"
"술 마시고 싶어서 믿은 거겠지."
은가은이 신나서 말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어제 술 마신 거에 비해 숙취가 덜한 거야. 그래서 혹시나 하고 오빠가 준 그 약을 먹었더니!"
"심지어 아침에 하나 더 먹었구나."
"속이 편안해지고 숙취가 평소보다 훨씬 빨리 사라지는 거 있지? 나 지금 아주 멀쩡해!"
"잘했다. 꼬맹이한테 먹일 약을 테스트하랬더니, 그걸로 숙취해소제 실험을 했구나. 참 잘했다."
"잘했으면 더 줘!"
"주겠냐!"
43. 회복
은가은이 F급 회복제의 숙취 해소 효과를 알아냈다. 그런데 처음 만든 몇 개는 테스트하느라 이미 다 썼다. 이제 숙취 해소에 쓸 게 없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더 줘!"
"어허."
"내놔!"
"주세요."
"주세요!"
신성재가 물었다.
"또 술 마시고 먹게?"
"응!"
"우리 가은이가 평소처럼 대책 없는 거 보니까, 부작용은 딱히 없구나."
신성재가 플라스틱 약병에 F급 회복제를 넉넉히 담아서 주었다.
"하루에 하나씩 매일 먹어라."
"그럼 몸에 좋아?"
"숙취 해소 효과가 나왔다며. 그럼 건강한 사람이 먹어도 도움이 된다는 뜻이야. 적어도 종합영양제보다는 좋을 거다."
"그럼 지금 하나 더 먹을까?"
"하루에 하나만. 이건 더 먹어봤자 효과 없다."
은가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 아침에 먹은 것도 숙취 해소 효과가 있었는데?"
"어제 먹고 오늘 새로 먹었으니까 효과가 있지."
"아항!"
"내가 바보를 가르쳤어."
"나 바보 아니다!"
은가은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근데 오빠. 이건 포션의 유사품의 열화판이라며. 진짜 포션은 이것보다 얼마나 더 좋아?"
"굳이 비교하자면, 이건 최하급 회복 포션에 알약 크기의 천을 살짝 적신 수준?"
"겨우?"
"효과는 약하지만, 대신에 매일 먹으면 몸에 좋아."
"숙취 해소 효과는 왜 생긴 거야?"
"숙취라는 건 술이나 알코올 대사물질 때문에 몸에 데미지가 들어간 거야. 회복제가 그 데미지를 회복시킨 거지."
"그럼 이걸 많이 먹으면 포션처럼 되는 거 아니야?"
"그래도 되면 이게 왜 F급이겠냐?"
"아!"
"그리고 포션은 원래 들이붓는다고 좋은 게 아니야. 하루 기준으로 한계치가 있어. 이 회복제는 하루에 한 알이 적정량이야."
은가은은 마법을 배우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마나를 느끼지 못해서 배우는 건 실패했지만, 주워들은 게 좀 있다.
그래서 신성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했다.
"알았으니까 라면 먹자. 해장하게."
"숙취는 이제 없다더니?"
"그래도 해장은 해야지!"
신성재가 라면을 끓였다. 연금술로 만든 가루도 조금 넣었다.
은가은이 물었다.
"그 맛있어지는 가루도 몸에 좋아?"
"아니. 이건 회복 효과는 없…. 음. 아니다."
"뭐가 아닌데?"
"유물 국자의 기운에 회복을 바라는 마음이 약간은 있었으니까, 건강에 미약한 도움을 줄지도 모르지."
"오빠도 모르는구나."
"맛있으면 됐지."
"하긴. MSG보다 더 맛있어지니까 그거면 됐지."
신성재가 라면 두 그릇을 식탁 위에 올렸다. 은가은이 라면을 먹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지금 놀라운 걸 알았어! 회복제를 먹고 라면을 먹으니까 더 맛있어!"
"넌 회복제에서 사이드 이펙트만 찾아내는구나."
"이거 왜 더 맛있어?"
"글쎄다? 미각도 조금 회복됐나?"
"역시 연금술 대단해!"
"내가 대단한 거다."
은가은이 눈을 반짝이며 입맛을 다셨다.
"오빠. 그럼 이제 납을 금으로…."
"되겠냐?"
"황금은 아직도 안되는구나."
"황금은 앞으로도 안 돼."
***
신성재와 은가은이 집 근처에 있는 박현정의 식당에 갔다.
박현정은 식당을 확장 이전하자마자 며칠 문을 닫았다. 꼬마 민수아가 아팠기 때문이다.
그 식당이 오늘 다시 문을 열었다. 오늘도 정식 오픈은 아니다. 오전에만 영업해서 지금은 손님이 없었다.
원래는 이미 정식으로 오픈했어야 하지만, 딸이 아파서 그 시기를 일주일쯤 늦추었다.
꼬마 민수아는 구석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은가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이제 괜찮아?"
민수아는 활짝 웃었다.
"히히. 이제 괜찮아요. 병원에서 놀다 왔어요."
"다행이다. 이젠 병원 가지 마."
"웅…. 병원은 안 가도요. 학교도 가고 태권도도 가고 싶은데."
꼬마는 일주일 전에도 이 이야기를 하다 쓰러졌다. 그래서 은가은이 움찔했다가, 신성재의 가방을 보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괜찮아! 이제 네가 가고 싶은 곳은 다 갈 수 있어!"
"와아! 진짜요?"
꼬마의 어머니 박현정 사장이 다가왔다.
"말씀은 고마운데요. 그러면 우리 애가 기대를…."
은가은이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오빠! 그거!"
"맡겨놨냐? 아. 맡겨놨구나."
신성재가 플라스틱 약병을 넘겨주었다. 은가은이 그걸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제가 먹는 건강보조식품인데, 이거 먹으면 컨디션이 진짜 좋아져요."
"이건…. 상표도 없는데요?"
"진짜예요. 막 숙취, 아니, 몸 상태가 진짜 좋아지는 거예요. 이거 먹여보세요."
약병에는 상표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박현정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어디서 만든 건데요?"
"어…."
은가은이 신성재를 돌아보았다.
신성재가 어색하게 웃었다.
민수아의 상태 이상에는 원래는 정화 포션을 써야 한다.
그런데 이 약은 정화 포션이 아니라 회복 포션의 유사품의 열화판이다.
정화 포션을 만들었다면 한 번 먹고 1년은 괜찮겠지만, 이건 매일 한 알씩 먹어야 했다.
그래도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신성재가 설명했다.
"제가 만들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식물 일곱 가지를 조합해 만든 거라 부작용은 없습니다. 당근처럼 비타민이 풍부한 채소도 들어갑니다."
회복이나 정화 포션은 부작용이 별로 없다. 몇 병 정도는 연달아 마셔도 몸에 해를 끼치진 않는다.
이건 회복 포션과는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효과가 약하다. 대신에 부작용이 더 없다.
그렇다고 해도 정체불명의 약을 딸에게 줄 엄마는 거의 없다.
신성재가 제안했다.
"직접 드셔 보시면 효과가 느껴지실 겁니다."
박현정이 고민 없이 한 알을 꺼내 입에 넣었다.
회복제는 작고 둥근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냥 삼키기엔 크기가 커서 씹어먹어야 한다.
"맛이 없네요."
맛이 없어야 많이 먹지 않는다. 한 번에 열 개쯤 먹어도 상관없지만, 그러면 배만 부르고 아홉 개는 효과 없이 낭비된다.
은가은이 옆에서 손뼉을 쳤다.
"어머. 사장님이 거절하시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직접 드셨네요?"
"맛있어지는 가루도 신성재 씨가 직접 만든 거잖아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아니까…."
병원에서는 민수아가 왜 아픈지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박현정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직접 이 약을 먹었다.
박현정은 신성재를 믿지만, 이걸 딸에게 그냥 먹일 수는 없다.
"제가 먼저 며칠 먹어봐도 될까요?"
"마음이 놓일 때까지 드셔도 됩니다."
이튿날부터 식당이 정식으로 오픈했다. 전에는 혼자 일했는데 이제는 직원도 몇 명 있었다.
좁은 곳에서 할 때도 줄을 서던 식당은, 다섯 배나 넓은 곳으로 옮겼는데도 여전히 장사가 잘됐다.
정식 오픈 첫날은 손님이 줄은 서지 않았지만, 다음날부터는 다시 손님들이 줄을 섰다.
박현정은 바빠졌다. 그녀는 넓은 식당을 관리해본 경험이 없어 초반에는 시행착오를 꽤 겪었다. 그럴 때마다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며칠을 바쁘게 일하다가, 퇴근한 후에 문득 깨달았다.
"내가 체력이 이렇게 좋았나?"
그러고 보면 요즘 밤에 잠도 잘 자고 컨디션도 굉장히 좋았다.
지난 며칠 사이에 몸에 좋은 일을 한 건 하나밖에 없다.
그녀가 약병에서 회복제를 꺼냈다.
여기에 어떤 식물이 들어가는지는 이미 들었다. 그 식물들이 어떤 것인지도 검색해봤다.
재료 중 하나가 당근이고, 다른 것도 비슷한 수준의 식물이다. 모두 먹어도 상관없는 것들이고 평소에 먹는 것들이다.
그런 것 일곱 가지가 조합되었을 뿐이다.
그녀가 회복제를 가만히 보았다.
"이런 거 많이 먹여보긴 했는데…."
병을 병원에서 치료하지 못하면 민간요법이라도 찾아보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전에도 몸에 좋다는 건 다양하게 먹여봤다. 그중에는 이런 것도 많았다. 각종 식물을 뭉친 것부터, 카레의 원료인 강황 가루를 뭉친 것까지 민간요법이라면 다양하게 써보았다.
"신성재 씨가 만든 거니까, 이것도 시도를 해봐야…. 음?"
그녀는 문득, 약병의 약이 너무 많이 줄어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이 집에는 두 명만 산다.
박현정이 고개를 획 돌렸다.
"민수아! 너 이 약 먹었니?"
민수아가 외쳤다.
"나도 태권도 가고 싶어!"
"그렇다고 이걸 먹으면 어떻게 해!"
"나 이제 괜찮다고!"
꼬맹이 민수아가 자기는 괜찮다고 바락바락 우겼다.
"너 그러다가 또 열나면…. 열이…."
생각해보니 지난 며칠 동안 민수아는 아무런 이상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아주 기운이 넘쳐서 소리까지 질러댔다. 이런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본다.
박현정의 손이 살짝 떨렸다.
"너 이거 언제부터 먹었어?"
"처음부터!"
"이, 이상한 건 없었어?"
"맛없어. 그래도 참고 먹었어."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정말로 이 약이 효과가…."
그녀가 휴대폰을 찾았다. 신성재의 전화번호는 지난번에 받아두었다. 손이 떨려서 전화를 걸기 힘들었다.
겨우 전화가 연결됐다. 그녀가 급히 말했다.
"성재 씨. 저번에 주신 약 말인데요. 일곱 가지 식물을 뭉쳐서 만든 그거요. 혹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괜찮으시면 지금…. 제가 찾아갈게요!"
***
한 달이 지났다.
신성재와 은가은이 식당을 찾았다.
박현정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다가왔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은가은이 물었다.
"오늘은 수아가 없네요?"
박현정이 환하게 웃었다.
"태권도 갔어요."
"어머. 벌써 그렇게 좋아졌어요?"
"병원에서도 깜짝 놀라요. 어떻게 된 건지 자기들도 신기하대요. 아. 그래서…."
그녀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병원에서 그 약을 몇 개 얻고 싶대요. 검사해보고 싶다고…."
신성재가 말했다.
"넉넉히 주세요. 그래야 다양한 검사를 할 테니까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박현정이 걱정했다.
"혹시 비법이 노출되면…."
"병원에서 찾아낼 수 있다면 그러던가요."
비법을 알아내려면 현대 기술로 마법과 연금술을 역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될 리가 없지만요."
"아. 그럼 안심하고 몇 알 보낼게요."
"그런데 그거, 다른 환자에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신성재가 만든 회복제가 모든 상태 이상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민수아와 비슷한 케이스여야 약발이 잘 받는다.
은가은이 속삭였다.
"숙취에는 효과가 끝내주던데?"
"그러네. 어쩌면 다른 환자에게도 효과가 조금은 있겠다."
은가은이 걱정했다.
"오빠. 의사가 진짜로 뭔가 알아내면 어떻게 해?"
"박수라도 쳐줘야지."
의사가 그 약을 직접 분해하고 실험해 조사할 리는 없다. 성분을 알고 싶으면 외부 분석실에 의뢰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특별한 걸 찾아낼 수 없다.
"내가 이미 회복제를 분석 회사에 맡겨서 결과를 받아봤는데 별다른 건 안 나오더라."
신성재가 박현정에게도 설명했다.
"병원에서 그 약을 조사해도 특별한 성분은 못 찾을 겁니다. 그러면 그 약 때문에 수아가 괜찮아진 게 아닐 거라고 말할 겁니다."
"어머. 그래요?"
"누구 말을 믿을지는 사장님이 결정하셔야 하는데…."
"저는 무조건 신성재 씨를 믿어요!"
약효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했는데 안 믿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약을 계속 부탁드려요!"
"부탁 안 하셔도 드릴 겁니다."
그건 은가은이 숙취 해소제로 쓰고 있지만, 원래는 민수아를 위해 만든 약이다.
박현정이 미리 챙겨둔 봉투를 꺼냈다. 봉투가 무척 두꺼웠다.
"아. 그리고 이거…. 약값으로 약소하지만…."
요즘은 신성재가 준 맛있어지는 가루 덕분에 장사가 너무 잘 된다. 회복제 덕분에 딸도 건강해졌다.
신성재가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밥 먹으러 올 때 반찬이나 넉넉하게 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당연히 그럴게요!"
은가은도 한마디 했다.
"생선구이도요!"
"물론이죠. 가은 씨한테는 좋은 생선을 따로 구해서라도 구워줄게요!"
은가은이 아쉬워했다.
"그런데 여기 점심때나 저녁때 오면 줄이 너무 길어서 먹기 힘들어요."
박현정이 주방 옆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예전 사람은 다른 용도로 쓰던 곳인데 박현정이 이곳을 인수하면서 용도를 바꾸었다.
"저 방을 예약자 전용으로 쓰기로 했어요. 저기서 드세요."
은가은이 말했다.
"오늘은 예약 안 했는데…."
"저 방은 신성재 씨가 항상 예약해둔 거로 할게요."
박현정은 음식을 모두 새로 만들어서 가져왔다.
은가은이 그걸 먹어보고 감탄했다.
"꺄아. 사장님. 요리가 더 맛있어졌어요!"
"두 분을 위해서 따로 좋은 재료를 준비해뒀어요."
"근데 소고기 요리도 팔아요? 메뉴판엔 없던데."
"한우로 따로 준비했어요."
"히히. 맛있어요!"
44. 공원
송스 갤러리의 골동품 전시회가 문을 열었다.
전시회의 정식 명칭은 '시간을 담은 조각들. 유물이 속삭이는 이야기'이다.
신성재가 전시장에서 골동품들을 보며 말했다.
"속삭이는 게 아니라 보여준다는 게 맞는데 말이지."
송스 갤러리는 이번 전시회에서 전시실 여러 개를 특별관으로 꾸몄다. 각각의 특별관은 나름의 주제가 있었다.
그중에는 조금 특이한 특별관도 있었다.
골동품 업계를 제법 아는 사람들이 그 특별관을 보며 말했다.
"이 방에 있는 건 전부 신성재가 복원한 거라더라."
"그 신성재? 그럼 복원 상태는 확실하겠네."
골동품을 자세히 보며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신성재가 완벽하게 복원했어도, 처음부터 손상되지 않은 것보단 골동품의 가치가 못하지 않아?"
"대신에 가격을 그만큼 깎아주잖아."
이번 전시회에는 외국에서 온 손님도 여럿 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엠마가 골동품들을 구경했다.
관장인 송예솔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엠마 르로이. 반가워요."
"송예솔 관장님. 좋은 전시회에 초대해주셔서 제가 더 고맙죠."
엠마는 한국어를 사용했다. 발음이 어색하긴 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원래 한국에 관심이 많아서 약간은 할 줄 알았어요. 이번에 한국에서 활동하려고 정식으로 배웠어요."
엠마는 프랑스에서 납치돼 죽을 뻔했다가 구출된 후로 생활 방식을 바꾸었다. 일도 본격적으로 했다.
엠마는 한국에 프랑스 패션 브랜드를 들여오는 일을 맡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력 정치인이고, 어머니가 그 패션 기업의 사장이다.
"한국 기업과의 협업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직 정식으로 진출한 것도 아닌데 그런 이야기는 빠르죠. 오늘은 그냥 놀러 온 거예요."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사는 생활은 접었지만, 아직도 노는 게 좋았다. 어릴 때부터 본 게 있어서 예술품이나 유물에도 관심이 많았다.
엠마가 특별관에 들어가 골동품을 보며 물었다.
"신성재 특별관? 무슨 뜻인가요?"
"신성재 씨가 복원한 작품들을 전시하는 거예요. 여기 있는 건 모두 원래는 파손됐던 골동품들이죠."
"어머. 손상된 적이 없는 줄 알았어요. 실력이 대단하네요."
송예솔이 자랑했다.
"최고의 능력자죠."
신성재가 특별관에서 나오는 엠마를 발견했다.
은가은이 옆에서 물었다.
"오빠. 쟤 걔잖아. 프랑스에서 구해준 걔."
"그러게. 한국엔 왜 왔지?"
엠마와 송예솔이 특별관에서 나오다가 신성재와 마주쳤다.
송예솔이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신성재 씨예요. 여기는 엠마. 프랑스 패션 브랜드의 한국 담당자세요."
"그렇군요."
엠마가 신성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혹시 어디서 본 적이 있나요?"
"그럴 리가요."
프랑스에서 엠마를 구출할 때는 얼굴을 얇은 천으로 가렸다. 마법을 써서 얼굴에 붙였기 때문에 그 복면이 벗겨졌을 리도 없다.
엠마가 물었다.
"어디선가 만난 느낌인데, 혹시 프랑스에 오신 적이…."
"일 때문에 한 번?"
"아. 그렇군요."
송예솔이 제안했다.
"성재 씨. 셋이서 식사라도?"
은가은이 물었다.
"넷 아니고요?"
"어머. 가은 씨는 아직 학생 아닌가? 비즈니스에 끼기엔 너무 이른데."
"조수라고요. 조수."
신성재가 거절했다.
"일정이 있어서요."
"아쉬워라. 그럼 나중에 우리 둘이 식사해요. 일 이야기도 할 겸."
은가은이 말했다.
"우리 셋이요."
송예솔과 엠마가 다른 전시실로 이동했다.
은가은이 신성재 옆에서 송예솔을 째려보며 말했다.
"송 관장이 꼬리가 더 늘었어."
"그 꼬리는 네 눈에만 보이나 보다."
"엠마라는 저 여자도 눈썰미 장난 아니다. 그때 얼굴 다 가렸는데."
"패션 업계에 있으니까 보는 눈이 좋나?"
"근데 오빠. 프랑스는 왜 갔었다고 했어? 그냥 한 번도 안 갔다고 하지."
"프랑스 유력 정치인의 딸이잖아. 빽이 안 통하는 나라도 아니야. 따로 확인해서 거짓말인 걸 알면 골치 아파져."
"아!"
"역시 넌…."
"아니다!"
"난 바보라는 말은 안 했다."
"하려고 한 거 안다!"
***
식당 주인 박현정은 꼬마 민수아와 비슷한 증상의 희귀병 아이 환자 모임의 회원이다. 그 병의 증상에는 특징이 있어서, 비슷한 증상의 아이들만 따로 모일 수 있었다.
워낙 희귀병이라 비슷한 특징을 가진 환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당연히 회원도 적었다.
병의 원인을 모르니 치료제도 없었다. 열이 오르면 해열제를 투여하는 식으로 증상이 나타나면 그것만 잠시 해결하며 버텨야 했다.
다들 당장 생명이 위험한 수준은 아니지만, 상태는 조금씩 나빠지는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민수아는 병의 증상도 먼저 나타나고 상태도 다른 아이들보다 나쁜 케이스였다.
민수아가 좋아진 후로는 박현정은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인터넷 카페에 글을 남긴 일도 없다.
일부러 거리를 둔 건 아니다.
그동안은 가게를 확장 이전하고, 그동안 미뤄둔 일들을 하느라 바빠서 카페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미뤄둔 일에는 놀이공원도 있다. 민수아가 그곳을 그렇게 가고 싶어 했다.
그날도 박현정은 가게가 쉬는 날에 딸과 함께 놀이공원에 갔다. 예전 같으면 걱정돼서 타지 못하게 하던 바이킹도 탈 수 있었다.
"꺄아아! 재밌다!"
"호호호. 정말 신난다아!"
실컷 놀고 나서 딸에게 시원한 주스를 사주었다. 꼬마는 이제 밥도 잘 먹고 주스도 잘 마셨다.
박현정은 벤치 옆자리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셨다.
그녀가 위를 보았다. 맑은 하늘이 보였다.
"이렇게 날이 좋을 때 더 우울해지곤 했었는데."
지금은 파란 하늘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쉬는데 전화가 왔다. 가끔 오프라인 모임에서 보던 옆 동네 사는 회원이었다.
- 요즘 카페에 글도 안 쓰고 모임도 안 나와서 전화했어요. 오늘 보니까 가게도 없어졌던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박현정이 웃었다.
"아니에요. 요즘 좀 바빠서요. 가게는 근처로 옮겼어요."
- 수아는 괜찮은 거죠?
"그럼요. 지금도 용인 놀이공원에 왔는데."
- 네? 용인 놀이공원이요? 거기…. 가도 돼요?
박현정은 그동안 민수아를 놀이공원에 데려가지 못했다. 놀이기구를 타면 쓰러질 수 있는데, 그걸 타고 싶다고 보채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였다.
"네. 이제 괜찮아요."
아이를 놀이공원에 데려가지 못하는 건 지금 전화를 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 혹시 수아는 치료법을 찾은 거예요?
"그건 아닌데, 요즘 먹는 건강보조식품이 몸에 맞아서 모든 수치가 정상…."
전화를 건 사람이 급히 외쳤다.
- 그거 뭔데요? 어디서 살 수 있어요?
"네? 아뇨. 파는 건 아니에요. 아는 분이 직접 만들어서 선물한 거…."
- 그분 혹시 의사예요? 아니면 한의사?
"아뇨. 골동품 전문가예요."
- 고대의 신비한 비전 한약 같은 걸 아는 분이세요?
"아뇨. 그게 아니라…."
- 수아 엄마. 우리 사정 알잖아요. 좋은 정보 있으면 공유해요. 네?
박현정은 난감했다.
***
신성재와 은가은이 놀이공원에 방문했다.
"밥 먹자!"
그들은 놀이기구를 타러 온 게 아니다. 놀이공원에는 음식 관광을 하러 왔다.
은가은이 큰소리쳤다.
"오늘 여기서 파는 거 내가 다 먹어볼 거야!"
"가은아. 그러면 배 터져."
"그럼 반씩만 먹을 테니까 나머진 오빠가 먹어."
"같이 배 터져 죽자는 거냐?"
"그럼 어쩌지? 남은 걸 버릴 수는 없…. 아! 맞다! 오늘 수아도 이 놀이공원에 놀러 온다고 했어!"
"네가 그 소리를 듣고 여기로 밥 먹으러 가자고 했잖아. 그리고 수아는 아직 초딩 저학년이다.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냐?"
"에잇. 어쩔 수 없지. 내가 열심히 먹어야겠다."
"그런 건 열심히 하지 말라고."
***
박현정은 난감했다.
"그 건강보조식품은 먹을 수 있는 식물 일곱 개를 조합해 만든 거예요."
신성재는 그 식물이 뭔지도 알려주고, 병원에서 의사가 분석하는 것도 허락했다.
- 그럼 그대로 섞어서 만들어 먹으면 돼요?
"아뇨. 조합하는 과정에서 비법이 들어가고, 그래서 약효가 나온다고 했어요. 성분 자체는 병원에서도 전문기관에 맡겨서 분석해봤는데 특별한 게 나오진 않았대요."
- 그래도 수아는 효과가 있었잖아요.
"다른 사람한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대요."
- 수아 엄마. 그럼 저도 조금만 나눠줘요. 우리 애도 먹여보게요. 네?
***
은가은이 물었다.
"F급 회복제 말이야. 다른 사람 줘도 돼?"
신성재가 물었다.
"안될 건 없는데, 누구 주게?"
"이번에 친구들이랑 파티룸 빌려서 생파를 하는데…."
"거기서 밤새도록 술 마시게?"
"친구가 남친이랑 헤어졌대. 위로해줘야지. 네 명인데 미리 한 알씩 먹고 시작하려고."
"그러던가. 남은 거 있지?"
"응! 많… 았는데…."
"왜?"
"요즘 엄마랑 아빠가 자꾸 꺼내먹어."
"효과가 있으시대?"
"응. 나랑 똑같아. 숙취 해소에 끝내준대."
"그럼 아줌마랑 아저씨 거는 따로 챙겨드려야겠다."
***
박현정은 전화를 받고 난감해하다가, 소떡소떡을 먹으며 걸어오는 신성재와 은가은을 발견했다.
"아. 제가 지금 그분한테 물어보고 말씀드릴게요."
- 꼭 좀 부탁드려요.
박현정이 통화를 마친 후에 신성재를 향해 뛰어갔다.
"신성재 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가은이랑 밥 투어를 왔습니다. 여기서 파는 거 다 먹어보려고요."
"그렇군요. 그런데 저기…."
"하실 말씀이라도?"
박현정이 방금 통화한 내용을 설명했다.
신성재가 이야기를 들은 후에 말했다.
"수아가 그걸 먹고 괜찮아졌다는 소문이 나면, 원하는 사람이 생기는 거야 당연한 일이죠."
"죄송해요. 제가 수아가 건강해졌다고 하는 바람에…."
"뭘요. 좀 더 만드는 게 뭐 힘들다고. 다만, 다른 아이한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원래 민수아의 상태 이상을 고치기 위해 만든 약이다. 다른 병에 걸린 아이라면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고마워요. 그럼 몇 알만 줄게요. 효과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테니까요."
신성재와 은가은은 다시 음식을 찾아 떠났다.
박현정이 전화를 걸었다.
"일단 세 알만 드릴 테니까, 먹여보고…."
- 지금 당장 갈게요!
"약이 집에 있어요. 저녁때 가게 쪽에서 드릴게요."
***
신성재와 은가은은 놀이공원에서 파는 음식을 몇 개 사서 먹었다.
"오빠. 큰일 났어."
"배부르냐?"
"응."
"그럼 그만 먹어."
"난 아직 더 먹을 수 있다!"
"그러다 배 터져."
은가은이 제안했다.
"우리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좀 타자."
"왜?"
"소화 시키려고!"
"그게 목적이면 걸어."
"앉아서 소화 시키고 싶다!"
"그런 게 있겠냐?"
은가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그러니까…. 대관람차는 너무 천천히 움직이니까 소화가 될 리 없고, 바이킹도 애매하고…."
"어차피 네가 직접 움직이는 게 아니야."
"역시 롤러코스터가 제일 빨라! 가자!"
"네가 속도 내는 거 아니라고."
두 사람이 롤러코스터를 향해 걸어갔다. 줄이 좀 있었다.
은가은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줄 설 가치가 있을 거야. 엄청 재미 있…. 어? 드론이다."
신성재가 인상을 찌푸렸다.
"놀이공원에서 드론을 날려?"
"안돼?"
"허가받았으면 되겠…."
"앗! 저러다 충돌하겠다!"
드론이 롤러코스터를 향해 돌진했다. 이대로면 롤러코스터 궤도열차와 드론이 충돌한다.
신성재가 날아가는 드론을 마법으로 툭 밀었다.
[무빙]
드론의 방향이 옆으로 살짝 틀어졌다가 곧바로 원래 방향으로 돌아왔다. 지연된 시간은 무척 짧았다.
롤러코스터 궤도열차가 고속으로 지나가자마자 바로 뒤에서 드론이 폭발했다. 폭발력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만약 궤도열차와 충돌했다면 공중에서 탈선시키고도 남을 위력이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뭐가 터진 거야!"
"자폭 드론이다!"
"빗나갔어!"
은가은이 드론이 폭발한 곳을 보며 물었다.
"이쯤 되면 오빠가 테러 빌런 뒤에 있는 흑막인 거 아냐? 왜 자꾸 오빠 주변에서 이런 사건이 터져?"
"가은아. 난 네가 의심스럽다?"
"엥? 나처럼 착하고 예쁜 애가 어딜 봐서 흑막이야?"
"사건이 터질 때마다 너도 같이 있었어."
은가은이 손뼉을 쳤다.
"앗! 그럼 그냥 재수가 없는 거로!"
"너와 나 중에 누가 재수가 없는 걸까?"
"어…. 그럼 우연인 거로!"
신성재가 정찰 마법을 사용했다.
[이글 아이]
롤러코스터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이글 아이 마법을 띄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신성재가 그 마법으로 주변을 조사하며 말했다.
"지난 몇 년간 외국에서도 테러 사건이 여러 번 터졌어."
"나도 뉴스에서 봤어. 미국은 꽤 막았는데 일본은 많이 당했다더라."
"한 대 더 온다."
"앗! 어디?"
"오른쪽."
폭탄 드론이 한 대 더 날아왔다. 롤러코스터 궤도열차는 아직도 레일 위를 달리고 있었다.
레일 위를 고속으로 달리는 궤도열차가 폭탄 드론에 맞으면, 설사 파괴되지 않는다 해도 선로를 이탈해 공중으로 날아간다.
그러면 참사가 벌어진다. 만약 궤도열차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떨어지면 대참사가 터진다.
신성재가 이글 아이로 드론을 보면서 오른손을 아래로 내리고 마법을 사용했다.
[염라의 불]
작은 불꽃이 손에서 만들어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무빙]
45. 드론
지금 이 놀이공원에는 놀러 온 사람이 많았다.
쇠를 녹이는 불은 대낮에도 사람들의 눈에 보인다.
신성재가 염라의 불을 만들 때 마나 소모를 줄이고 화력을 낮추었다. 화력이 약해진 만큼 불의 밝기도 줄어들었다.
빛을 가리는 마법 술식도 추가했다. 그 술식이 염라의 불에 부여한 마나를 꽤 소모했다. 그만큼 화력은 더 약해졌다.
원래 염라의 불은 철판을 순식간에 녹여서 뚫고 들어간다. 지금 만든 건 그런 위력은 없다. 화력이 약해 쇠를 녹이지 못한다.
그렇게 만든 염라의 불은 촛불보다 밝기가 약해졌다. 밤에는 여전히 보이지만, 지금 같은 대낮에 바닥에서 움직이면 시선을 피할 정도는 됐다.
염라의 작은 불이 길바닥 위에서 움직였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위쪽 롤러코스터를 향하고 있다.
폭탄 드론이 롤러코스터 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그 비행경로에서 CCTV 사각지대를 찾아야 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이라면 더 좋다.
[부끄럼쟁이 요정]
마법으로 CCTV와 활성화된 스마트폰 카메라를 찾았다. 근처에 카메라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사각지대를 더 쉽게 찾았다. 카메라가 향하지 않은 곳이 하얗게 빛나는 공간에서 검게 칠해진 부분처럼 쉽게 구분됐다. 그런 지역이 몇 개 있었다.
'분수대.'
조용히 날아오는 드론의 이동 경로에 분수대가 있었다.
신성재가 요격 지점을 정했다. 바닥에 붙어서 이동한 불꽃이 분수대 근처를 맴돌았다. 분수를 비추는 조명이 불꽃의 빛을 숨겨주었다.
잠시 후에 폭탄 드론이 분수대 위를 지나갔다. 마침 분수가 위로 솟구쳤다.
'지금.'
염라의 작은 불이 물줄기 사이의 공간을 파고들며 위로 휙 올라갔다. 그 불이 날아가는 드론에 달라붙었다.
그 불꽃으로 쇠는 녹이지는 못해도 피복을 녹여 합선을 일으킬 수는 있다.
드론의 아래쪽에서 불꽃이 요란하게 튀다가, 적재한 폭탄이 폭발했다.
폭발음이 사람들의 귀를 때렸다.
"꺄아악!"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에서 분수대 쪽으로 이동했다. 위로 뿜어진 분수의 물이 폭발 압력 때문에 동심원 형태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게 보였다.
"또 폭탄 드론이 터졌다!"
"한 대가 아니란 거잖아!"
겁에 질린 사람들이 속출했다.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지훈아!"
"엄마!"
놀이공원이 혼란에 빠졌다. 공원이 워낙 넓어서 분수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혼란이 좀 덜했다. 그렇다고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못 들은 건 아니다.
공원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혼란이 커졌다.
신성재는 이글 아이 마법으로 주변을 수색했다.
"드론을 조종한 놈은 놀이공원에 있다."
마법으로 위에서 내려다보고는 있지만, 놀이공원이 너무 넓었다.
은가은이 망원 안경을 꺼냈다.
"내가 드론이 날아온 방향을 볼게! 오빠. 마나 좀!"
신성재가 안경에 마나를 충전해주며 말했다.
"드론이 날아온 방향은 중요하지 않아. 다른 위치에서 무선조종을 했을 테니까."
"그럼 어디를 봐?"
"여기서 보이는 곳은 전부 다 확인해. 높은 곳 위주로."
"응!"
***
테러 빌런 두 놈이 대관람차에 타고 있었다. 한 놈은 드론 조종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옆에 있던 놈이 쌍안경을 내리며 화를 냈다.
"또 실패다!"
"드론이 분수대의 물에 맞아 고장 난 것 같아. 하필 그때 분수가 뿜어져서…."
"더 높게 날렸어야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게 저공비행 하라며!"
"씨발. 이제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야. 남은 드론 두 대 다 날려!"
"그건 다른 놀이기구를 공격할 때 써야 하는데?"
"롤러코스터가 메인이고 다른 건 다 추가 목표란 말이다! 그러니까 두 대 다 써!"
"씨발. 알았다."
관측병 역할을 맡은 테러 빌런이 쌍안경을 들며 지시했다.
"한 대는 롤러코스터를 때리고, 다른 한 대는 또 빗나갈 때를 대비해서 아예 그 앞 선로를 때려!"
드론을 조종하던 놈이 옆에 놓인 컨트롤러 두 개를 양손으로 하나씩 잡았다. 능숙한 사람은 한 손으로 하나씩 조종이 가능한 컨트롤러였다.
"동시에 두 대를 조종하려면 저공비행은 못 해. 높게 띄워야 한단 말이다."
"어차피 두 번이나 터졌어! 이제 숨겨봤자 의미가 없으니까 그렇게 해!"
롤러코스터에서 조금 떨어진 숲에 숨겨둔 드론 두 대가 이륙했다. 둘 다 아래쪽에 폭탄이 붙어 있었다.
***
신성재는 이글 아이로 주변을 확인하다 드론을 발견했다. 두 대가 롤러코스터를 향해 날아갔다.
"이 새끼들이?"
이번에는 고도를 낮춰 은밀히 접근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놓고 높게 날아왔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 드론을 발견했다.
"폭탄 드론이 또 날아온다!"
"도망쳐!"
이번엔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도망치는 사람이 많지만 드론을 쳐다보는 사람도 많았다. 스마트폰으로 드론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면 염라의 불은 쓰기 어렵다. 아무리 밝기를 낮춰도 대놓고 보면 보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드론은 분수대 위에서 염라의 불로 잡았지만, 첫 번째 드론은 무빙 마법을 이용해 방향을 조금 비틀기만 했었다. 그랬더니 비틀어놓은 비행 궤도를 테러범이 다시 원래대로 돌려놨었다.
신성재가 마법을 썼다.
[무빙]
신성재는 두 대의 드론 중에서 한 대만 노렸다. 이번에는 조금 전처럼 갑자기 마법을 쓴 게 아니다. 대놓고 마력을 집중해 출력을 높였다.
날아오던 드론 한 대가 크게 휘청이더니, 다른 드론을 향해 날아갔다. 드론 두 대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
테러범이 쌍안경으로 드론을 보며 화를 냈다.
"조종 똑바로 해! 한 대가 왜 저래!"
"뭔가 이상해! 4번기가 말을 안 들어!"
"고장이냐?"
"몰라! 양손으로 하나씩 조종하느라 컨트롤이 어렵다!"
"씨발. 저러다 충돌하겠다!"
드론 두 대를 조종하던 놈이 무선 컨트롤러 한 개를 내밀었다.
"하나 맡아!"
"안돼! 난 조종할 줄 모른단 말이다!"
조종하던 놈이 컨트롤러 한 대는 옆에 내려놓고 다른 한 대만 양손으로 잡았다. 양손을 다 쓰면 더 잘 조종할 수 있다.
그 드론이 롤러코스터 궤도열차를 향해 날아갔다.
"뭐야? 왜 아직도 4호기가 왜 3호기를 따라가지?"
"전파교란이나 해킹당한 것 같다!"
그 테러범은 드론을 조종할 줄만 알지 엔지니어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 이 현상이 교란이나 해킹이라고 착각했다.
***
신성재가 무빙 마법으로 드론 4호기를 밀었다. 테러 빌런이 4호기의 조종을 포기한 덕분에 무빙으로 밀기 쉬워졌다.
드론 두 대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드론이 충돌하기 직전에 3호기가 공중에서 급격한 회피 기동을 했다.
신성재의 4호기가 그 드론을 스쳐 지나갔다가 선회하며 다시 3호기를 노렸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 두 대는 왜 저래?"
"공중전이라도 하는 거 같아."
신성재가 4호기에 걸었던 무빙 마법을 중단했다. 대신에 3호기에 마법을 걸었다.
[무빙]
드론은 폭탄의 무게 때문에 움직임이 조금 둔했다. 그런 드론의 프로펠러 한 개만 무빙 마법으로 밀었다.
3호기가 공중에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신성재가 3호기에 건 마법을 중단하고 다시 4호기에 마법을 걸었다.
[무빙]
마법을 중단했다가 재사용하는 걸 반복했더니 마나 소비가 더 커졌다.
상관없다. 이제 거의 다 잡았다.
비틀거리는 3호기가 다시 중심을 잡는 사이에, 4호기가 그 뒤를 정통으로 들이받았다.
드론 두 대가 공중에서 충돌하고 아래로 추락했다. 롤러코스터 근처 아래쪽에는 작은 숲이 있었다.
두 대가 동시에 바닥에 충돌하며 폭발했다. 화염이 치솟았다.
"으아아!"
"폭탄이 또 터졌다!"
***
대관람차에서 드론을 조종한 테러범들이 화를 냈다.
"그거 하나 못 피하나!"
"내 잘못이 아니다! 전파교란이나 해킹당한 게 확실해! 격추되기 직전에 3호기도 조종이 잠깐 안 됐단 말이다!"
"그냥 첫 번째 시도에 성공했으면 되는데 네가 실수했잖아! 이건 다 너 때문이다!"
***
은가은이 망원 안경으로 주변을 조사하다가 말했다.
"오빠. 대관람차가 이상해. 매달려있는 관람차 한 대가 흔들려."
그녀가 안경다리를 만졌다. 확대 배율이 조정됐다. 관람차가 더 가깝게 보였다.
"두 사람이 싸우고 있어. 앗! 한 명이 쌍안경을 가지고 있어. 작은 거."
"얼굴은?"
"둘 다 마스크랑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찾았구나."
"그치?"
"혹시 모르니까 다른 곳도 찾아보다가, 대관람차에서 내릴 때쯤 되면 그놈들을 보고 있어."
"응!"
신성재는 이글 아이 마법을 더 높이 띄워 새로운 드론이 날아오는지 확인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그놈들 아직도 싸우냐?"
"싸우기는 하는데, 곧 내릴 거야. 대관람차가 거의 다 내려왔거든."
"그놈들이 싸우니까 드론도 안 날아오네. 드론 공격은 끝난 것 같은데…."
다른 문제가 있다.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너무 많이 몰려간다."
"공원 직원들이 통제 안 해?"
"하는데 쉽지 않아."
"앗! 그놈들이 관람차에서 내렸다."
"어디로 가냐?"
"출구 쪽으로 바로 가는데?"
신성재도 이글 아이로 그쪽을 확인하던 중이다.
"나도 찾았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빠져나갈 생각이겠지."
공원에 있던 사람들이 출구를 향해 몰려갔다. 뛰어가는 사람도 있고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공원 출구 쪽은 혼잡했다. 그나마 대혼란에 빠지지 않은 건, 폭탄 드론의 추가 공격이 없기 때문이다.
은가은이 걱정했다.
"저놈들이 저기 섞여서 빠져나가면 어떻게 해?"
신성재가 은가은과 함께 출구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못 나가게 해야지."
"어떻게?"
"저놈들이 드론을 조종하려면 무선 컨트롤러가 있어야겠지?"
"그렇지?"
"그걸 대관람차에 버리고 왔을 리 없잖아. 증거물이니까."
"저 가방에 있겠구나?"
"무선 컨트롤러 네 개가 들어가기 딱 좋은 가방이지."
"밖으로 나갈 때 잡힐까?"
"지금 출구에 사람 몰린 걸 봐라. 가방 검사를 하려고 막으면 폭동 일어날 거다. 일단 출구를 빠져나가면 차를 타고 이동할 텐데, 그러면 완전범죄지. 못 잡아."
"그럼 빨리 잡아야 하잖아."
"우리가 안 잡아도 돼."
두 놈이 신성재와 은가은의 앞쪽을 지나갔다. 거리는 30m 정도였다. 나가려는 사람이 많아서 일단 걸음을 멈춰야 했다.
신성재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무빙]
테러범이 한쪽 어깨에 걸친 가방의 지퍼가 뒤로 당겨졌다. 작은 지퍼를 들키지 않고 움직이려면 더 집중해야 했다. 그래서 손가락까지 까닥이며 정밀하게 마법을 썼다.
지퍼가 반쯤 열렸다.
신성재가 오른손을 옆으로 휙 젖혔다. 무빙 마법이 강하게 들어갔다.
가방이 옆으로 휙 당겨지며 가방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가방이 길바닥에 툭 떨어졌다. 지퍼가 열린 곳으로 드론 컨트롤러 하나가 빠져나왔다.
신성재가 소리를 질렀다.
"어? 저 가방에 드론 조종장치가 들어 있다!"
은가은도 외쳤다.
"한두 개가 아니다! 많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그 가방을 보았다. 밖에 떨어진 컨트롤러는 하나인데, 안쪽에도 몇 개가 더 들어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여자가 옆으로 피하며 소리를 질렀다.
"꺄악! 테러범이다!"
그곳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어? 진짜 드론 컨트롤러다!"
"저 새끼가 범인이다!"
겁먹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더 생겼다. 놀이공원의 보안요원들이 그쪽으로 뛰어왔다.
컨트롤러 가방을 들고 있던 놈이 동료를 돌아보았다.
동료는 이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마치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
테러범이 일단 둘러댔다.
"아, 아니, 이건 그냥 취미로…."
놀이공원에는 가족이 놀러 온 경우가 많았다. 자기 아이가 위험할 뻔한 남자가 가방을 집어 뒤집었다. 드론 조종장치가 세 개 더 나왔다.
폭발한 드론은 네 대고 가방에 들어 있던 컨트롤러도 네 개다.
남자가 테러 빌런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이 새끼야!"
"케엑!"
그걸 보고 달려든 사람이 몇 명 더 있었다. 이단옆차기를 날리는 사람도 있었다.
신성재가 그걸 보며 동전을 툭 던졌다.
[무빙]
추적 마법이 걸린 동전이 날아가 다른 테러범의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오백 원짜리라 내일 새벽까지는 위치추적이 가능하다.
"가자."
"응? 저거 더 구경 안 하고?"
"사람들이 잡았잖아."
"한 놈 더 있잖아."
"저놈까지 지금 잡기엔 목격자가 너무 많아. 대관람차 앞에는 CCTV가 있으니까 경찰이 찾아내서 잡겠지."
"혹시 경찰이 놓치면 어떻게 해?"
"그놈 주머니에 추적 동전 넣어놨다."
46. 체포
롤러코스터 궤도 열차는 드론 두 대가 충돌해 폭발한 후에 승강장에 도착했다.
첫 번째 드론이 바로 뒤에서 폭발했을 때부터 롤러코스터에 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그들은 궤도 열차가 승강장에 들어가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사, 살았다!"
"이거 빨리 올려!"
직원들이 뛰어오고 궤도열차의 안전바가 올라갔다. 곧바로 뛰어서 도망친 사람도 있지만, 다리가 풀려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 나 좀…. 야 이 새끼야! 나도 데려가라고!"
커플 하나가 거기서 헤어졌다.
눈물 콧물을 뿌려대는 승객들도 있었다. 그들은 고속으로 달리는 롤러코스터에서 폭탄 공격까지 받았다.
"다시는 이런 거 안 탈 거야!"
모든 탑승객의 반응이 그런 건 아니다. 그 난리가 났는데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와. 너무 재미있…. 뭐야. 사람들 반응이 왜 그래? 왜 다 울고불고 난리야? 롤러코스터 탄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
"너, 너 괜찮아? 안 무서웠어?"
"무서웠지. 그래서 처음부터 눈 꼭 감고 탔어. 근데 폭죽 터지는 소리가 자꾸 들리던데 뭐였어?"
"아니다. 난 네가 진짜 부럽다."
***
드론을 조종한 테러범은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고 잡혔다.
다른 놈은 출구로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도망쳤다.
신성재가 말했다.
"우리는 수아나 만나자."
"어디 있는지 알아?"
"이글 아이로 정찰할 때 봤어."
그들은 출구 반대 방향으로 조금 걸어갔다. 식당 사장 박현정이 민수아와 함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박현정이 일어났다.
"어머. 두 분도 돌아오셨네요?"
신성재가 물었다.
"정문이 너무 붐벼서 여기 계신 건가요?"
"네. 저기 휩쓸렸다가 수아가 다치면 안 되니까요."
"범인은 잡았답니다. 드론 조종장치를 가진 놈을 잡았으니까, 추가 폭발은 없을 겁니다."
박현정이 손을 가슴에 댔다.
"휴우. 다행이에요."
"여기 출구가 한산해지려면 꽤 기다려야 할 텐데, 식사는 하셨어요?"
"아뇨. 뭔가 먹으려다가 이 사태가 생겨서…."
"같이 식당으로 가시죠."
놀이공원에서 폭탄 드론 네 대가 폭발했다. 그런 비상상황에서 놀이공원이 정상적으로 영업할 리 없다.
공원 내 식당도 영업을 중단했다. 박현정도 식당 사장이지만, 남의 가게 조리도구를 함부로 쓸 수는 없다.
그래도 영업하는 곳을 찾을 수는 있었다. 놀이공원에서 직접 운영하는 길거리 음식 부스에서 츄러스와 붕어빵, 미국식 핫도그를 팔았다.
음식 부스를 담당한 알바 직원이 영업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안 팔아도 된다는 연락을 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요."
네 사람은 그곳에서 간식을 사 먹었다. 민수아는 츄러스를 먹고 박현정은 붕어빵을, 신성재는 미국식 핫도그를 먹었다.
은가은은 셋 다 먹었다. 그런 후에 말했다.
"바쁘게 움직였더니 소화가 좀 됐어. 이따가 식당 문 다시 여나?"
신성재가 대답했다.
"폭탄이 터졌는데 하겠냐?"
"상황 종료됐잖아."
"그래도 오늘 영업은 여기서 끝내겠지."
은가은이 물었다.
"앗! 그러면 입장료 돌려주나?"
"그러겠지?"
"우리도 남는 게 있구나."
"가은아. 먹는 게 남는 거라고 하잖아? 넌 오늘 남는 게 많아. 아주 많아."
***
경찰 광역 특별수사지원팀은 테러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놀이공원 폭탄 드론 사건이 터지자마자 특지팀이 움직였다. 일부는 현장에 출동하고, 일부는 현장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분석했다.
도서윤 형사는 긴급히 만들어진 특별수사본부 회의에 팀장과 함께 참석했다.
본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내가 수사본부장이군요."
"이제 그만 받아들이시죠."
"아니, 왜 나만 매번 욕받이를…."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다른 나라에 비하면 피해가 거의 없는 상태로 이런 테러를 막았잖습니까? 그때마다 본부장님이 책임자셨으니까, 그걸 고려한 인선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게 내가 막은 겁니까?"
"윗분들은 그래야 명분이 선다고 생각하니까…."
"보고나 들읍시다. 특지팀. 시작하세요."
대기하던 도서윤 형사가 현장 영상을 대형 스크린에 띄웠다.
"첫 번째 폭탄 드론의 CCTV 영상입니다. 드론은 간발의 차이로 롤러코스터를 빗나가 폭발했습니다."
"드론이 멈칫한 건 뭡니까?"
"드론 개조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오작동한 것으로 추측하지만, 확실한 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필 충돌 직전에 오작동해요?"
"전문가들 의견으로는 폭탄 드론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결함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두 번째 드론에도 그런 결함이 있습니다."
두 번째 드론은 선명한 영상이 없었다. CCTV 사각지대에서 폭발했기 때문이다.
"근처에는 CCTV가 없지만, 아주 멀리서 촬영한 영상이 있습니다. 드론은 분수 위를 지나갈 때, 분수가 분출하자마자 비틀거리더니 폭발했습니다."
"그러니까 분수의 물에 젖어서 터졌다?"
"현장에서는 노출된 배선에 물이 닿은 것이 원인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본부장이 말했다.
"운이 좋았군요. 둘 중 하나라도 롤러코스터에 충돌해서 터졌으면…."
"궤도 열차가 추락했을 겁니다."
"그런데 궤도 열차는 왜 계속 달린 겁니까? 긴급 정지 기능은 없습니까?"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 데다가, 비상 정지를 하면 롤러코스터가 폭탄 드론의 고정 표적이 될까 봐 세울 수 없었답니다."
"어…. 그건 맞네. 열차가 서 있으면 폭탄 드론이 빗나갈 리 없지. 차라리 한 바퀴 돌고 빨리 돌아오는 게 나았을 수도 있겠어요."
"담당자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에 사용된 폭탄 드론은 네 대였다.
"그럼 마지막 두 대는?"
"놈들의 최초 목표는 네 대의 폭탄 드론으로 놀이기구 네 개를 타격하는 것이었습니다."
"네 개나?"
"예. 범인은 대관람차에서 무선으로 드론을 조종해 타격하고, 겁먹은 사람들 틈에 섞여서 탈출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네 대 다 롤러코스터만 노렸잖습니까?"
"처음 두 대가 연달아 실패해서, 마지막 두 대도 기존 목표는 포기하고 롤러코스터를 공격했습니다."
"롤러코스터가 제일 화려하게 터지니까?"
"네. 한 대는 롤러코스터를, 다른 한 대는 레일을 노려서 확실하게 부수려고 했습니다."
"그건 범인이 자백한 겁니까?"
"아닙니다. 출구에서 체포된 놈은 인명피해 없이 겁만 주려고 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군요."
"범인의 의도는 드론의 비행 궤도를 분석해 알아냈습니다."
다른 간부가 물었다.
"그럼 그 두 대는 왜 추락한 겁니까?"
"그 상황은 영상이 확보됐습니다."
도서윤이 폭탄 드론의 공중전 영상을 보여주었다. 한 대는 회피하려 하고 다른 한 대는 추격하는 영상이었다. 두 대는 결국 충돌해 추락한 후에 폭발했다.
"무선조종용 전파를 해킹한 게 아닐까 합니다."
"그 짧은 시간에?"
"누군가 폭탄 드론 테러를 예상하고 미리 준비해서 막으러 갔다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본부장이 인상을 썼다.
"예전에도 이런 일 몇 번 있었습니다. 그때도 누군가 나타나서 테러를 막았지요.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본부장을 맡았습니다."
회의실 참석자 중 한 명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다크?"
본부장이 물었다.
"이번에도 그 사람이 한 겁니까?"
"그건…, 조사 중입니다."
***
놀이공원 폭탄 드론 사건이 뉴스에 나왔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목격담도 인터넷에 올라왔다.
- 또 다크가 테러를 막았다!
- 누가 한 일인지는 아직 모른다.
- 테러범을 찾아서 결정적일 때 처리했잖아. 이건 다크의 방식이다.
- 다크는 칼이나 총을 쓰는데, 이번에는 현장에서 드론을 해킹해 격추했다. 이건 다크의 방식이 아니다.
- 다크가 성장했구나!
- 아. 그런가?
- 난 네 대 중에 두 번째 드론도 다크가 터트렸다고 본다.
- 분수대에서 터진 거? 어떻게?
- 그건 나도 몰루?
다른 인터넷 게시판에는 첫 번째 드론의 움직임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 공개된 영상을 잘 보세요. 마지막 순간에 드론이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돌아옵니다. 저는 이때부터 다크가 드론을 해킹했다고 봅니다.
- 그건 좀 무리 아닌지.
- 처음부터 준비했다면 가능하죠.
사람들은 다른 것도 걱정했다.
- 테러범 하나가 도망쳤다는데, 빨리 못 잡으면 그놈이 또 폭탄 드론으로 테러하는 거 아닙니까?
***
형사가 조수석에서 물었다.
"그 새끼들은 왜 폭탄 드론 테러를 했대?"
뒷좌석에서 다른 형사가 대답했다.
"누가 돈을 많이 준다고 했답니다."
"추적 불가능한 코인으로?"
"네."
"누가 준다고 했는지는 모르고?"
"그렇답니다."
"개 같네. 이게 벌써 몇 번째야?"
"그러게 말입니다."
운전하던 형사가 말했다.
"형님. 다 왔습니다."
앞에는 허름한 창고형 건물이 있었다.
그들은 체포된 범인과 같이 있다가 도주한 놈을 쫓는 중이다.
"놀이공원 현장에서 잡았으면 우리가 이 고생을 안 하는데."
"그때는 그놈이 한패인지 아무도 몰랐잖습니까?"
신성재와 은가은은 알았다.
형사들이 승합차에서 내렸다. 모두 총기로 무장했다.
도망친 놈은 인파에 섞여 사라졌다. 어느 차를 타고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두 놈은 서로 마스크를 쓴 상태로만 만나서 인상착의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도 단서는 있었다.
경찰은 대관람차 주변 CCTV를 확인해 도주한 놈의 체형을 확인했다. 체포된 놈이 진술한 것도 참고했다.
그렇게 나온 몽타주를 기반으로 현장을 떠난 차량을 조사했다. 차 번호를 보고 모든 소유주를 찾아가 실제로 운전한 사람을 확인했다. 운전자의 휴대폰 위치기록도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대포차 30대를 찾아냈다.
그 30대의 위치를 다시 CCTV를 뒤져서 모두 추적했다.
그중 한 대가 이 창고 쪽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이 지역 형사들이 이 창고를 조사하러 왔다.
"테러범 새끼 때문에 우리가 개고생한다."
"그래도 우리가 그놈을 잡으면 표창은 기본에 한두 명은 승진입니다."
"그러다 총 맞아 죽어도 승진이지."
"어…. 그건 좀."
"다들 방탄조끼 점검하고, 권총 확인해. 승재야. K2 가져온 너는 뒤에서 조준하고 있어."
"예!"
다른 대포차 29대도 형사팀이 찾아갔다. 이 차가 범인의 차일 확률은 겨우 30분의 1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
형사들이 찾은 곳은 정확했지만, 테러범은 이미 두 시간 전에 그곳을 떠났다.
테러 빌런이 산을 빠져나와 도로로 내려가며 혼잣말을 했다.
"후우. 완벽하게 빠져나왔다."
바로 앞에는 시골 버스 정거장이 있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막차 버스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이제 여기서 버스를 타고…."
"그 버스가 아니야."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테러범이 권총을 뽑으며 휙 돌아섰다.
"누…."
신성재가 손을 뻗었다.
[바람 주먹]
"케엑!"
"네가 탈 건 범인 호송 버스잖아."
테러범은 뒤로 날아가 버스 정류장에 처박히며 기절했다.
신성재가 테러범의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추적 동전을 꺼냈다. 아직 마나가 남아 있었다.
테러범의 권총에서 탄창도 빼냈다. 약실의 총탄도 제거했다.
그 총탄까지 탄창에 넣은 후에 그걸 근처 풀숲에 던졌다. 이러면 경찰은 주변을 수색해 탄창을 찾아낼 수 있어도 지나가던 사람은 찾기 어렵다.
신성재가 탄창이 비워진 권총을 테러범의 손에 올려놓았다.
"이놈이 버스가 오기 전에 깨어나면 문제가 되겠는데? 다리에 보험을 걸자."
***
헛걸음한 형사들이 창고를 떠나다가 연락을 받았다.
"어? 권총을 가진 놈을 찾았답니다! 인상착의가 우리가 찾던 놈과 비슷합니다!"
"거기 어디야? 상황은?"
"기절한 상태로 버스 기사에게 발견됐답니다! 다리도 부러졌답니다."
"어? 뭐? 왜…."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 거기로 밟아!"
***
도주한 테러범을 체포했다는 뉴스가 떴다.
- 역시 다크 히어로!
- 누가 잡았는지는 모른답니다.
- 이건 누가 봐도 다크가 마무리한 거죠. 딱 봐도 다크의 방식이잖습니까?
- 그럼 도대체 어떻게 도망친 테러범을 찾아낸 거죠? 경찰이 총동원돼도 못 찾던 놈인데요.
- 그거야 저도 모르죠.
- 아, 예.
***
박현정은 딸을 데리고 놀이공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후에 약속장소로 나갔다.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미안해요. 놀이공원에서 사고가 있어서요."
희귀병 모임에서 만난 아이 엄마가 계속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흔들었다.
"아뇨. 제가 더 죄송하죠. 테러 사건 기사 봤어요. 괜찮으시죠?"
"네. 수아도 다치지 않았고, 거기서 아는 분을 만나서 도움도 받았어요."
"저기, 그런데…. 제가 마음이 급해서…."
"만드신 분께 말씀드리고 가져왔어요."
박현정이 작은 약병을 가방에서 꺼냈다.
그 안에 F급 회복제 세 알이 들어 있었다.
47. F급 회복제
아이 엄마가 작은 약병을 받았다.
"이게 수아가 먹은 그 약…."
안에는 F급 회복제 세 알이 들어 있었다.
신성재의 동네 식당 주인 박현정이 설명했다.
"약이 아니라 건강보조식품이에요. 먹을 수 있는 식물들로 만들어서 약 성분은 없대요. 그리고 우리 수아는 몸에 잘 맞았지만, 다른 아이들한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어요."
아이 엄마가 약병을 두 손으로 꼭 쥐며 말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아니, 안 괜찮아요. 우리 애도 수아처럼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
F급 회복제 세 알을 얻어간 아이 엄마는 한 알을 그날 밤에 아이에게 먹였다.
아이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불평했다.
"엄마. 맛없어."
"몸에 좋은 거라서 그래."
그 집에는 이미 온갖 건강보조식품과 각종 민간요법으로 만든 것들이 쌓여 있었다.
그중에 효과가 있는 건 없었다.
"대신에 오늘은 다른 건 먹지 말고 이것만 먹어보자."
아이가 회복제를 먹은 날 밤에는 특별한 효과가 보이진 않았다. 깊게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것도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아이 엄마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아이가 아침을 먹다가 말했다.
"엄마. 더 줘."
"응? 너 지금 뭐라고…."
"밥 더 먹고 싶어."
아이 엄마의 손에서 숟가락이 툭 떨어졌다. 평소에는 입이 너무 짧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아이가 밥을 더 달라고 했다.
"그, 그래! 더 줄게! 더 줘야지!"
억지로 먹이면 토하던 아이가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아침만 잘 먹은 게 아니라, 점심과 저녁도 잘 먹었다.
둘째 날은 상태가 더 좋아졌다. 밥도 잘 먹고 활동량도 많이 늘어났다. 말도 많아졌다.
셋째 날은 아파트 놀이터에서 잠깐이지만 뛰기까지 했다. 심지어 빼빼 말랐던 아이가 조금 살이 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이제 약효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세 알을 받아온 회복제가 떨어졌다.
아이 엄마가 박현정을 찾아갔다.
"수아 엄마. 이 약 어디서 샀어요?"
"말했다시피 아는 분이 직접 만든 거예요. 파는 게 아니라요. 그런데… 효과가 있어요?"
아이 엄마가 활짝 웃었다.
"우리 종호가 오늘 놀이터에서 뛰어놀았어요. 그러는 거, 진짜 1년 만에 봐요."
"어머. 잘됐다. 우리 수아도 이제 태권도장 다녀요."
"그러니까 이 약, 저도 꼭 사고 싶어요. 값이 얼마던 상관없어요."
박현정도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그녀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
"제가 그걸 만든 분께 여쭤볼게요."
"잘 좀 말해줘요. 네?"
***
점심때 은가은이 놀러 왔다.
"오빠! 밥 먹으러 가자!"
"넌 학식은 안 먹냐?"
"오늘은 맛없는 거 나왔단 말이야."
"놀라운데? 너한테 맛없는 게 있다고?"
"F급 회복제?"
"그건 일부러 맛없게 만든 거고."
"오늘은 생선구이가 먹고 싶어."
"밥값은 내가 내고?"
은가은이 손끝으로 입술을 가리며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칼 하나 고쳐 팔면 50억 버는 부자가 가난한 학생 밥 사주는 거 아까워한다!"
"너희 집 안 가난해."
"난 학생이라 가난해!"
"보컬이랑 연기학원 중 하나를 그만 다녀."
"보컬학원은 이번 달은 할인받았어. 오래 다녔더니 할인을 다 해준다?"
"학원이 미안한가 보다. 그렇게 오래 가르쳐도 안 되니까."
"아니거든! 조금씩 꾸준히 늘고 있거든?"
"학원비 할인받은 돈으로 술 먹어서 가난해진 거냐?"
"앗! 어떻게 알았지?"
"진짜였냐?"
***
두 사람은 박현정의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박현정이 식사를 가져온 후에 회복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며칠 전에 놀이공원에서 이야기했던 아이가요. 세 알 먹여봤는데 효과가 무척 좋았나 봐요. 아이 엄마가 꼭 좀 사고 싶다고…."
"뭐, 그러시죠. 만들기 어려운 것도 아닌데."
어차피 소문이 날 건 예상했다. 그런 아이가 몇 명 더 있다 해도 상관없다. 만들 때 좀 넉넉하게 만들면 된다.
"어머! 고마워요! 그럼 가격은 얼마나…."
"그걸 돈 받고 팔면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쪽으로는 허가받은 게 없어서."
먹을 수 있는 식물 일곱 개를 섞어서 아는 사람에게 나눠주는 건 처벌하기 어렵다. 산채비빔밥도 식용 식물을 섞어서 만든다.
그런데 환자에게 약처럼 생긴 걸 주면서 돈을 받으면 그때부터는 무허가 약장수가 된다.
"아…. 그래도…."
"문제가 생기면 그만 만들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박현정도 곤란해진다. 이제 민수아는 F급 회복제가 꼭 있어야 한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대신에 오늘 식사는 제가 특별히 더 신경 쓸게요."
"이미 평소에도 신경 쓰시던데요."
"더 쓸게요."
옆에서 은가은이 말했다.
"근데 오빠. 이러면 회복제가 금방 소문나는 거 아니야? 그때마다 만들어줄 수는 없지 않아?"
옆에서 박현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 엄마한테 비밀로 하라고 할까요?"
"그럼 비밀이 지켜질까요?"
"그, 글쎄요?"
"소문이 나긴 할 겁니다."
신성재가 말했다.
"일단 밥부터 먹죠. 그 문제는 차차 생각해보고, 그 '건강보조식품'은 일단 가진 걸 나눠주세요. 며칠 후에 새로 만들 생각이니까요."
"아, 네. 그럼 며칠 분만 나눠줄게요."
***
신성재가 집으로 돌아왔다.
은가은이 따라왔다.
"아. 배부르고 맛있다."
"네가 맛없는 게 어디 있다고."
"있잖아. F급 회복제. 아! 오빠. 회복제는 그럼 어떻게 하게?"
"더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
"몇 명은 그렇겠지. 그렇게 소문이 조금씩 퍼지다가 나중에 막 백 명이 넘으면…."
"백 명까지는 지금 방식으로 만들어도 감당할 수 있어."
"그럼 몇천 명이 되면?"
"오염된 기운에 의한 아이들의 상태 이상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
"어느 아이가 오염된 기운 때문에 아픈지는 어떻게 알아?"
아이를 직접 한 명씩 마법으로 검사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면 일이 너무 복잡해진다. 더 간단한 방법도 있다.
"박 사장님에게도 말했지만, 세 개 정도 먹어봐서 효과가 있으면 당첨이고, 없으면 꽝이지."
***
식당 주인 박현정을 통해 신성재의 F급 회복제를 먹는 아이는 처음에는 한 명이었다. 며칠 후에는 두 명이 되고, 다시 세 명이 됐다.
모두 특정 증상의 희귀병 모임에서 만난 사이다. 소문이 안 날 수가 없다.
- 우리 아이가 뛰어다녀요!
- 그 약 어디서 구할 수 있어요? 저도 좀. 제발요.
***
한 달이 지났다. 신성재가 말했다.
"세 개만 먹어도 확인이 될 줄은 알았는데."
희귀병 모임에서 회복제 세 개를 사흘 동안 먹어서 확실한 효과를 본 아이들은 여럿 있었다.
"그 경우는 나쁜 기운이 병의 원인이 맞지만, 나머지는 아닌데 말이야."
그런데 확실한 효과가 없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효과가 없으면 아픈 원인이 다르다는 뜻이니까."
은가은이 물었다.
"그런 아이들도 효과가 조금씩은 있다던데?"
병의 원인이 다른 아이들도 상태가 조금은 나아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이 부모는 그 작은 차이를 확실히 느꼈다.
박현정이 사과했다.
"미안해요. 우리 희귀병 카페에 효과가 확실한 아이한테만 공급한다고 확실히 공지했는데…."
아이의 상태가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부모는 F급 회복제를 계속 원했다.
이제 그 회복제를 원하는 사람이 백 명이나 됐다. 원래 50명 남짓이던 특정 희귀병 카페였는데, 한 달 만에 소문을 듣고 유입된 사람이 50명이나 추가됐다.
그중에서 F급 회복제의 약발이 제대로 받는 아이는 민수아를 포함해도 31명이었다.
신성재는 고급 유물 국자와 일반 유물 약탕기를 사용해 F급 회복제를 100명이 먹을 양까지는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상태로도 카페에 가입한 사람 모두에게 나눠줄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러면 상태 이상에 걸린 아이가 새로 나타났을 때 줄 게 없어진다.
신성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세 개를 먹으면 테스트가 될 거라고 한 건 저니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지만 이렇게 달라는 사람이 계속 늘어나면, 정작 필요한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기겠죠."
"네. 그래서 저랑 다른 부모님들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 꼭 확인하고 대상자를 선별하고 있어요."
"그러다 삐끗하면 완장질이 되는데…."
박현정도 그동안 민수아를 키우면서 많은 일을 경험하고 겪었다. 완장질도 당해봤다.
"그렇게 안 되도록 조심할게요. 제가 정신 바짝 차려야죠. 아니면 신성재 씨가 직접 관리…."
"그건 박 사장님이 하셔야죠. 제가 그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아, 예. 당연히 제가 해야죠. 저기 그런데…."
"또 무슨 문제가?"
박현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효과가 거의 없어서 약을 못 받은 아이의 부모님이, 사례를 크게 할 테니까 좀 팔아달라고…."
"전에도 말했듯이, 지금 상황에서 돈을 받으면 사이비 약장수로 체포됩니다."
박현정이 말했다.
"사이비 아니시잖아요."
F급 회복제를 먹고 민수아가 건강해졌다. 같은 상태 이상에 걸린 아이들은 모두 눈에 보일 정도로 건강이 좋아졌다.
신성재가 말했다.
"누군가는 사이비라고 생각하겠죠. 못 받은 70명 중에 누군가가 앙심을 품고 신고할 수도 있고요."
옆에서 은가은이 물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요즘 세상에 그러는 사람 찾는 거 어렵지 않아."
***
그날 밤에 신성재가 지하 공방에서 유물 조각 몇 개를 만지작거렸다.
회복 계열 고급 등급 유물은 구할 곳이 없다.
대신에 기원의 파편은 모아둔 것이 있다.
그 파편은 부서진 유물의 조각이 다른 장신구의 부품으로 사용된 경우에 생겼다.
그런 개조 작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업체의 박스에 담겨 있던 폐기 물품에서 찾은 것도 있었다.
신성재가 그런 걸 사들여 기원의 파편이 담긴 부분만 따로 떼어냈다.
이 파편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걸 조합하면 뭔가 되려나…."
신성재가 그동안 확보한 일반 등급 유물 중에서 머리핀을 꺼냈다. 머리카락에 사선으로 끼우는 형태의 머리핀이었다.
"이걸 베이스로 하고."
그 머리핀에는 네 개의 조각을 붙일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염라의 불]
신성재가 쇠를 녹이는 불을 사용해 머리핀 위에 기원의 파편이 담긴 조각들을 용접하듯이 붙였다.
그런 후에 머리핀에 손을 대고 결과를 확인했다.
"일반 유물에 기원의 파편 네 개를 붙이니까 기운이 약하게 생성되긴 하는데…. 이건 회복제 생산에는 못 쓰겠다."
***
이튿날 점심때에 은가은이 물었다.
"오빠. 회복제 더 만들 방법 없어? 최하급인 F급이니까, 오빠가 마법이나 연금술로 어떻게 쓱싹쓱싹하면…."
"방법이 있기는 해."
은가은의 얼굴이 확 펴졌다.
"진짜?"
"네가 가져가는 숙취해소제 분량을 애들한테 넘기면 그만큼 여유가 생기겠지."
은가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으, 응? 으, 으…. 아, 알았어. 숙취는 참아볼게."
"그걸 왜 참아. 그냥 술을 줄여."
"근데…. 진짜 진짜 숙취 심한 날에 딱 한 개씩만 먹는 건 안 될까? 회복제가 남는 게 있을 때만 말이야."
"농담이다. 네가 가져가는 몇 개 더한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냐."
"엥? 농담이었어?"
"어."
"에이. 난 또 방법이 있는 줄 알았네."
"그건 농담이 아니고."
"응?"
방법은 있다.
"회복 계열 고급 유물이 있으면 생산량을 확실히 늘릴 수 있지. 그러면 더 쉽게, 더 많이 만들 수 있으니까."
은가은이 대안을 제시했다.
"지금처럼 국자랑 약탕기 같은 걸 조합하면…."
"설사 운이 좋아서 유물을 지금과 같은 조합으로 한 세트 더 준비한다 해도, 지금보다 조금 더 만드는 정도겠지."
은가은이 물었다.
"그럼 희귀 등급 회복 계열 유물이 있으면?"
신성재가 웃었다.
"희귀가 있으면 대박이지. 그런데 그건 진짜 구하기 어려워."
영국에 500만 파운드를 받고 판 란슬롯의 검이 희귀 등급 유물이다.
"거기에 회복 계열이라는 조건까지 추가하면 찾는 건 더 힘들다."
전설은 희귀보다 더 찾기 어렵다. 전설 등급은 지금까지 돌 불상 딱 하나만 보았다.
은가은이 말했다.
"회복 계열로 고급 유물 하나만 찾으면 좋겠다."
"그러면 네가 할 일이 많아지겠지."
"엥?"
"회복제를 많이 만들려면 재료도 많이 준비해야지. 그걸 누가 할까?"
"어? 아. 어…."
은가은의 눈동자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마법사의 연금술을 남들 앞에서 보여줄 수는 없다. 그러면 회복제를 만들 때 일할 사람은 신성재와 은가은밖에 없다.
"내, 내가 해야겠지?"
"농담이다."
"그치! 농담이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오빠도 나 못지않게 일하는 거 싫어하는데!"
"아무리 고급 유물이 있어도 대량으로 만들려면 수작업으로는 무리야. 만들 사람이 우리밖에 없으니까 남에게 맡길 수도 없어."
"맞아. 마법이나 연금술을 남에게 보여줄 순 없어. 어? 잠깐. 그러면 고급 유물 있어도 몇백 명 분량이 한계…."
"생산량을 확실히 늘리려면 기계를 써야 해."
은가은은 당황했다.
"엥? 기계라니? 연금술이 기계랑 무슨 상관인데?"
저쪽 세계에는 마법 공학이 있다.
"회복 계열 고급 유물이 있다면, 마법 공학으로 회복제 생산을 자동화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우왕! 그거 만드는 데 오래 걸려?"
"어. 오래 걸려. 우리 세계에서 구현하려면 마법 공학과 연금술을 더 연구해야 해. 그리고 어차피 지금은 회복 계열 고급 유물이 없어서 못 만들어."
그 대체품을 만들려고 어젯밤에 일반 유물에 기원의 파편 네 개를 붙여보았다. 하지만 그건 회복제 생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신에 개인용 아이템이 하나 만들어졌다.
48. 개인용 아이템
은가은이 물었다.
"회복 계열 고급 유물을 찾는 게 제일 중요한 거지?"
"그래야 회복제의 생산량을 늘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찾기 어렵지. 박물관이라도 털면 혹시 있을까 싶지만, 그럴 순 없잖아."
"그러면 지금은 복잡한 생각은 접어두고!"
신성재의 집 마당에는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장소가 있다. 바닥에 바람 마법이 새겨져 있어 불도 잘 붙고 연기는 위로만 올라간다.
은가은이 그곳에 막대기를 꽂았다.
"무인도에서 구출된 날을 기념하는 파티를 하자! 내가 준비 다 했어!"
신성재가 물었다.
"오늘은 우리가 구출된 날이 아니다만?"
"일주일쯤은 빠를 수도 있지! 그럼 조난된 기념을 하자!"
"그날은 3주 전이고."
"조난 3주차 기념!"
"그걸 왜 기념해?"
"지금 그게 중요해? 파티가 중요하지!"
"파티 음식이 중요하겠지. 그런데 네가 준비한 음식이 왜 이러냐?"
모닥불 옆에는 생선구이가 있었다. 그 생선구이는 직접 구운 게 아니라 박현정의 식당에서 샀다.
풀떼기 몇 개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마트에서 조개도 샀다.
은가은이 풀떼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무인도에서 먹었던 풀은 구할 수가 없어서 상추랑 깻잎, 당근으로 대신했어. 우리가 섬에서 먹을 수 있는 풀 찾으려고 이것저것 씹어보다가 배탈 난 거 생각난다."
"그러니까 파티 음식이 왜 이러냐고."
"당연히 무인도 추억 세트니까!"
"생환 기념도 아니고 이게 뭐냐."
"선물도 있어!"
은가은이 종이로 예쁘게 포장한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 이건 내가 오빠를 위해 준비한 선물."
"좋은 거냐?"
"당연하지! 생존에 최고로 좋은 거야!"
"응? 생존?"
신성재가 상자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호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휴대용 멀티툴이 들어 있었다. 스위스 아미 나이프처럼 생긴 멀티툴에는 칼날은 물론이고 톱과 드라이버, 심지어 부싯돌 기능을 하는 금속 막대까지 붙어 있었다.
"이게 뭐냐?"
"우리가 무인도에 있을 때 오빠가 이거 하나만 있으면 진짜 좋겠다며."
"그걸 구출되고 몇 년이 지나서 주냐?"
"응!"
"마법사한테?"
"응응!"
"어…. 그래. 고맙다. 알바라도 해서 샀냐?"
"아니. 점심값 아껴서 샀지."
"그 점심값은 네가 자꾸 여기 와서 먹으니까 아낄 수 있었던 거 아니냐?"
"응!"
"그래. 이렇게 당당해야 가은이지."
은가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오빠는 나한텐 뭐 선물 없어?"
"음…. 마침 딱 좋은 게 있지. 기다려라."
신성재가 안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오다가 주웠다. 이거 너 해라."
은가은이 활짝 웃었다.
"앗! 오늘을 위해 준비한 거야?"
"오늘 이런 뜬금없는 파티를 할 줄 어떻게 알고 준비하겠냐? 그래도 그거 내가 직접 만든 거야."
그건 기원의 파편을 조합하는 실험을 하다가 만든 아이템이다. 그런데 베이스로 사용한 유물이 여성용 머리핀이라 신성재가 쓰긴 어렵다.
게다가 그 아이템은 마법사인 신성재에게는 필요 없다. 아이템의 효과보다 더 좋은 마법을 자신의 몸에 직접 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 주려고 만들었다고?"
"어. 그랬다고 치자."
그녀가 신나서 상자를 열었다. 머리카락 한쪽에 비스듬하게 끼우는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어머! 머리핀이다. 장식이 네 개나 붙어 있다. 와아…. 근데 장식이…. 아무거나 대충 붙인 거 같다."
신성재가 준 머리핀에는 네 개의 장식이 달려 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촌스러운 디자인은 진짜 뭐지?"
그 네 개의 장식에는 각각 기원의 파편이 들어 있다. 그 장식들은 원래는 서로 다른 유물에 붙어 있던 것들이다.
그래서 그 머리핀에 달린 장식 네 개는 크기와 모양이 다 달랐다.
"나보고 이걸 하라고?"
"어."
"대충 이것저것 붙여놓은 거 같아."
"대충은 아니고 이것저것 붙여놓은 건 맞아. 장식은 전국 여기저기에서 모은 골동품에서 수집했다."
"골동품?"
"그 장식 네 개를 머리핀에 붙이고 지금 형태로 가공하는 작업은 내가 했지."
"디자인은 이래도 골동품을 모아서 만든 수제품이란 말이지?"
그녀가 머리핀을 머리카락에 끼워보았다.
"어때? 어울려?"
"어울리겠냐?"
그녀가 발끈했다.
"뭐야! 안 어울린다고 할 거면서 왜 줬는데! 무슨 선물이 이래!"
신성재가 머리핀의 기능을 설명했다.
"그게 있으면 몸에 활력이 생겨. 거기 담긴 힘이 네 몸의 신진대사가 활발해지게 도와주니까."
"응?"
"먹는 거에 비해서 살도 덜 찌겠네. 신진대사가 활발해진 만큼 칼로리 소비가 많아질 테니까."
"자, 잠깐!"
"넌 다이어트 할 성격이 아니니까 그렇게라도…."
은가은이 두 손을 쭉 내밀었다.
"잠깐마안!"
그녀가 신성재의 말을 막은 후에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머리핀을 빼냈다. 그런 후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거 그럼 마법 아이템이야?"
"대단한 마법을 인첸트한 건 아니야. 자잘한 건강 보조마법을 몇 개 걸었어."
"그럼 이 장식들이 제각각인 이유가…."
"건강과 관련된 유물 조각을 몇 개 구했으니까."
"건강? 앗! 그러면 회복제 제작에 이걸 쓰면…."
"그게 되면 이걸 너한테 주겠냐?"
"아니, 왜! 줄 수도 있지!"
"아니야. 안 줘. 그리고 이건 회복제 만드는 데는 못 써. 만들어놓고 보니까 각각의 기운이 복잡하게 얽혀있더라."
"맛있어지는 국자에서는 회복의 기운만 뽑아 쓰잖아."
"그건 온전한 유물이고, 이건 기원의 파편을 모아서 만든 거라서 제약이 많아. 분리가 안 돼."
"파편은 마법으로 복원이 안 돼?"
"조각만 남아서 안 돼. 기원의 파편만 들어 있는 상태로는 쓸모가 없길래, 일반 유물 머리핀에 붙여서 아이템으로 만들었어."
은가은도 그동안 마법사의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게 있다. 그녀가 뒤늦게 이게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만. 그러니까 서로 다른 유물 파편이…. 조합이 돼?"
"처음엔 안 됐는데 결국 성공했지. 내가 이렇게 대단하다."
"우왕!"
"만들어놓고 보니까 어디 써먹을 데도 없어서 너 주는 거야."
머리핀의 장식 하나하나에 기원의 파편이 들어 있다. 은가은이 머리핀을 다시 보며 말했다.
"마법사가 만든 아이템이라서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다는 거지?"
"다이어트만이 아니라, 활력 증가에 건강 보조 효과까지 있다. 네 컨디션이 좋아지면 숙취 해소 능력도 올라가겠지."
"아싸아. 숙취 해소!"
"그 머리핀의 받침대도 100년쯤 전에 유럽에서 만들어진 일반 유물이야."
지금 이 아이템은 일반 유물 머리핀에 고급 유물 파편들을 붙여 만들었다.
"앗! 엔틱이구나!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지! 역시 뭔지 모를 깊이가 있네!"
"촌스럽다더니?"
"그건 취소! 내 눈이 삐꾸였어!"
그녀가 머리핀을 머리에 비스듬하게 꽂았다. 그런 후에 거울을 보며 말했다.
"핀에 붙은 장식 네 개가 다시 보니 진짜 그럴듯하다."
신성재가 주의할 점을 알려주었다.
"그걸 쓰다가 몸에 기운이 지나치게 난다든지, 머리가 이상할 정도로 맑아진다든지 하면 나한테 꼭 말해라."
은가은은 당황했다.
"어? 잠깐. 설마 나한테 테스트를…. 조금 전에 인첸트랑 마법 공학을 더 연구해야 한다더니, 그게 혹시 이거야?"
"마법 공학은 아니고, 마법 인첸트 테스트는 맞아."
"나 혹시 모르모트 된 거야?"
"싫으면 말고. 내놔."
은가은이 두 손으로 머리핀을 붙들었다.
"싫다고는 안 했다!"
"그거 내가 먼저 테스트로 써봤는데 괜찮더라."
"오빠는 마법사니까 괜찮겠지. 나는 바람만 불면 쓰러질 수선화 같은 사람이라고."
"들장미겠지."
은가은은 실실 웃었다.
"이제 마법 머리핀이 생겼으니까 다이어트가 더 잘 되겠다. 은가은. 드디어 배우로 데뷔하나요?"
신성재가 마당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 양이 많았다.
"가은아. 너 이제 사기도 치냐?"
"사기 쳐서 배우 되려는 건 아니다!"
"그거 말고, 다이어트."
"아! 그거…. 내일부터 할 거야! 이번엔 진짜야!"
"어. 그래."
***
은가은이 학교에 갔다.
그녀의 친구 서아린이 한마디 했다.
"야. 넌 얼굴 믿고 그러는 거야?"
은가은이 손가락으로 목 주변의 머리카락을 휙 넘겼다.
"훗. 난 그래도 되니까?"
"아냐. 안돼. 가은아. 정신 차려. 네가 얼굴을 믿으면 어떻게 해? 그거 사이비를 믿는 거랑 똑같은 거야."
"내 얼굴이 왜!"
"얼굴 믿고 싶으면 다이어트라도 해. 네 몸속에 지금 예쁜 애가 갇혀 있다?"
"야. 오늘은 뭐가 맘에 안 드는데?"
서아린이 은가은의 머리를 가리켰다.
"머리핀. 어디 풍물시장에서 샀어? 그런 게 어울릴…."
"이거 할머니께서…."
"어울릴 정도로 너랑 잘 맞네! 예쁘다!"
"그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는 아니고."
"응? 야! 그 머리핀은 너무 구닥다리…."
"100년 전에 유럽에서 레이디가 사용한 골동품이래."
"엄청 고풍스럽고, 엔틱하고, 또 그…. 클래식한 디자인이네!"
"남들도 그렇게 볼까?"
친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아니어도 괜찮아. 난 이거 포기 못 해."
그들의 앞으로 박소연이 지나가다 머리핀을 보고 피식 웃었다.
"가은아. 넌 머리핀 보는 안목도 참 저렴하다. 그런 건 어디서 팔아?"
"뭐? 야. 박소연. 패드립 하냐? 이거 할머니가…."
"으, 응? 아. 나 스케줄 있지."
박소연이 그 자리를 재빨리 벗어났다.
은가은이 말했다.
"아오. 주먹이 운다. 쟤는 왜 점점 더 싸가지가 없어지냐?"
서아린이 옆에서 같이 욕했다.
"쟤 연예인 돼서 단역 몇 번 출연하더니 아주 그냥 콧대가 하늘을 찔러."
"근데 너도 내 머리핀 보고 구리다고 했잖아."
서아린이 얼른 말을 돌렸다.
"소연이가 너랑 같은 연기학원 다니잖아."
"그치."
"그런데 쟤는 데뷔했네? 가은아. 넌 오늘 점심은 샐러드 먹어."
"지금 풀떼기 따위로 소중한 점심을 채우란 거야?"
"가은아. 쟤 이기고 싶으면 그래야 돼."
은가은이 마법 머리핀을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아냐. 안 그래도 돼. 내가 믿는 게 있어."
***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은가은은 아이템 머리핀을 몸에서 떼지 않았다.
서아린이 학교에서 물었다.
"가은아. 너 요즘 다이어트 해?"
"평소랑 똑같이 먹는데?"
"그니까! 평소랑 똑같이 그렇게 많이 먹는데 왜 너만 살이 빠져?"
"내가 원래 살이 잘 빠지는 체질이야."
"나한테도 구라 치냐?"
은가은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물었다.
"어머. 너 그런 험한 말은 어디서 배웠니?"
"너한테 배웠잖아!"
"아. 내가 그랬지."
서아린은 다른 것도 물었다.
"화장품은 뭐 써?"
"너랑 똑같은 거. 저번에 같이 샀잖아."
"그럼 어디 피부과에서 시술받았어?"
"그럴 돈 있으면 술 마셨지."
서아린이 화를 냈다.
"근데 왜!"
"왜라니?"
"왜 피부가 좋아지는데! 왜 광이 나는데!"
"원래 좋았어."
서아린이 은가은의 몸을 손으로 눌러보며 말했다.
"너 요즘 살도 좀 빠졌어. 전에는 예쁜 찐빵 같았는데."
"내가 그래도 찐빵은 아니었다고!"
"가슴 이야기였어."
"그치? 가슴 맞지? 어? 잠깐. 나 혹시 가슴도 빠졌어?"
"아니. 그래서 더 신기해. 왜 가슴만 빼고 살이 빠지지?"
은가은이 머리핀에 손을 대며 웃었다.
"히히. 역시 효과 확실하네."
서아린이 물었다.
"효과? 너 어디서 PT라도 받아? 어디야? 거기 쌤은 잘 가르쳐?"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마법 아이템인 머리핀 덕분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훗. 난 원래 살이 잘 빠지는 체질이야. 타고 난 거지."
"가은아. 그러다 손모가지 날아가."
49. 뒷조사
저녁때 은가은이 신성재를 찾아와 말했다.
"오빠. 나 이제 배우 해도 될 거 같지 않아?"
"가은아. 세상에는 무리라는 말이 있단다."
"내가 연예인 하면 잘할 거라며!"
"내가? 언제?"
"무인도에서!"
"그거야 무인도에서 너 힘 나라고 한 소리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무슨 소리를 못 했겠냐."
"엘레나 레이도 나 응원해줬다고!"
란슬롯의 검 때문에 유럽에 갔다 올 때 여객기에서 미국 유명 가수 엘레나 레이를 만났다. 그때 엘레나가 은가은의 꿈을 응원해줬다.
"그걸 전문용어로 팬서비스라고 한단다."
"나 요즘 살 엄청 많이 빠졌어!"
"너 아직도 탱글탱글해."
"친구가 부러워했단 말이야!"
"친구한테 사기를 당했구나."
"여기서 더 뺄 거라고!"
신성재가 고기를 구우며 은가은을 보았다.
은가은은 잘 익은 고기부터 부지런히 집어 먹으며 살을 빼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고기 먹으면서 하는 건 아니지 않냐?"
"히히. 마법의 머리핀이 있으니까 고기 많이 먹어도 살 안 찌잖아."
신성재가 손을 내밀었다.
"머리핀 줘봐."
그녀가 얼른 두 손으로 머리핀을 눌렀다.
"앗! 안돼! 이건 이제 내 분신이야!"
"상태 좀 보려고 그런다."
"상태만 보는 거지? 돌려줄 거지?"
은가은이 머리핀을 머리카락에서 빼 신성재에게 돌려주었다.
"너 눈에 의심이 가득하다?"
"아니야. 나 진짜 오빠 믿어."
"그럼 이 손 놓지?"
은가은은 머리핀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으응? 어머. 내가 왜 이걸 아직도 잡고 있을까?"
신성재가 머리핀을 받아 상태를 확인했다.
이 머리핀의 네 개의 장식에는 마법이 하나씩 인첸트되어 있다. 은가은의 몸에 딱 맞춰 세팅한 마법 덕분에 그녀는 잘 먹는데도 살이 점점 빠지고 피부도 더 좋아졌다.
다만, 온전한 기원이 아니라 파편을 모아 만든 아이템이라서 마나를 가끔 보충해줘야 하는 단점은 있었다.
"최근에 얼마나 먹고 마셨으면…."
"뭐! 왜!"
"과부하가 걸려서 기운의 손실이 예상치의 두 배를 넘었어. 무리하면 기원에도 손상이 가겠는데? 덕분에 기원의 파편에 관한 데이터는 잘 뽑겠지만…."
"자, 잠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고, 고장 난 거야?"
"그 정도는 아니야. 외부 손상은 내가 복원 마법으로 복구하면 돼. 기원 쪽은 아직은 괜찮아."
은가은이 얼른 고기 굽는 집게를 잡았다.
"오빠! 고기는 내가 구울 테니까 먹기만 해!"
"갑자기?"
"원래 내가 구워주려고 했어! 알잖아? 나 무인도에서 고기 굽던 여자야!"
"그건 작은 생선이고."
"소고기도 잘 구워!"
"그런데 어째서 그동안은 주로 내가 구웠을까?"
"마법으로 구우니까 더 맛있으니…. 에이. 지난 일은 잊어! 오늘은 내가 구울게!"
"오늘은?"
"으응? 내일도 구울까?"
신성재가 피식 웃으며 머리핀을 챙겼다.
"이거 손보려면 준비가 필요하고 지금은 술도 마셨으니까, 내일 공방에서 고쳐줄게."
"응!"
은가은이 상추 쌈을 만들어서 내밀었다.
"오라버니. 쌈도 좀 드시지요."
"네가 이 쌈에 뭘 넣었을지 알고?"
"히히. 정성?"
"내가 알아서 먹을 거니까 너는 수상한 짓…. 음?"
"앗! 마늘 많이 넣은 거 나 아니야!"
신성재가 쌈에서 마늘을 덜어내며 말했다.
"밖에도 수상한 놈이 있네?"
"엥? 저 밖에?"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마당이다. 은가은이 몸을 기울이고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혹시 우리 대화를 다 엿들었을까?"
"여긴 결계가 있어서 그냥 말해도 밖에서는 안 들려."
"뭐야! 괜히 속삭였네!"
"소리 지르는 건 들려. 결계의 출력을 그 정도로 세팅했거든."
"그럼 이 크기는 괜찮지?"
"어."
그 결계는 지하실에 설치한 저택 보안 마법진의 기능 중 하나다. 결계 덕분에 이렇게 밤에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어도 모기나 날벌레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결계의 출력은 딱 그 정도다. 출력을 더 높이면 경계 마법진의 핵인 자물쇠의 힘이 너무 빨리 소모된다.
은가은이 평소 목소리로 물었다.
"지하실의 마법진으로 수상한 놈을 발견한 거야?"
"그렇지. 집에 침입하려는 놈을 알려주는 기능도 있으니까."
"그놈은 지금 뭐 하는데?"
신성재가 정찰 마법을 사용했다.
[이글 아이]
곧바로 집 전체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야가 그의 시선 한쪽에 생성됐다. 마치 공중에 보조 모니터를 띄워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집안에서 나는 소리를 엿듣고 있다."
"우리 목소리는 안 들린다며."
"안 들리지. 저놈 목소리는 들리고."
신성재가 저택에 걸린 마법을 사용해 담장 밖 말소리를 집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걸 은가은도 들을 수 있게 실제 음성으로 전환했다.
모닥불에서 담장 밖에 있는 놈의 목소리가 나왔다.
- 마당에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느낌이 안 좋은데?
은가은이 손으로 입을 가리켰다. 신성재가 설명했다.
"이거 일방통행이야. 지금도 우리 대화는 밖에서는 못 들어."
"와. 저거 도둑놈이야?"
목소리가 더 들렸다.
- 오늘은 안 되겠다. 돌아가야겠어.
신성재가 말했다.
"포기하고 간다."
"엥? 그냥 보내주게?"
"그럴 리가."
신성재가 500원짜리 동전을 담장 위로 툭 던졌다.
[무빙]
동전이 담장을 타고 내려갔다가 바닥을 따라 이동해 그곳을 떠나는 놈의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돌아간다잖아. 그럼 따라가서 왜 여기 왔는지 알아봐야지."
은가은이 손을 비볐다.
"오랜만에 출동이다!"
"넌 안 와도 돼."
"나도 밥값은 해야지!"
"먹던 거 혼자 치우기 싫어서 따라가는 건 아니겠지?"
"앗! 어떻게 알았지?"
***
신성재의 집을 감시했던 남자가 흥신소 간판이 달린 사무실에서 말했다.
"형님. 그 집 이상하던데요?"
"왜? 뭐가 어떤데?"
"마당에 사람이 두세 명 있는 것 같은데, 말을 한마디도 안 합니다."
"들킨 거 아냐?"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아무도 없을 때 담장에 쓱 붙었습니다. 올 때도 괜히 찜찜해서 미행하는 놈이 있는지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그럼 도청기는 못 심었겠네?"
"사람 없을 때 다시 가야죠. 그런데 사장님. 이번 건수는 냄새가 많이 나는데, 의뢰인이 누구입니까?"
"몰라. 돈을 두 배로 받는 대신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기로 했어."
"도청기를 심을 집이 되게 부잣집이던데요."
두목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 도청하다가 좋은 거 알아내면 거기서도 돈 뜯자. 이번 일로 한 몫 제대로 잡아야지."
"그 집은 느낌이 싸했다니까요. 이번엔 조심하는 게…."
"그 집에서 뜯어낸 돈은 반은 너 줄게."
"흐흐. 그러면 먹고 죽어도 고 해야죠. 이번에 작전주 정보 진짜 확실한 거 얻었거든요. 그걸로 돈 복사나 해야지."
"그거 어딘데? 같이 좀 먹자."
"에이. 저도 어렵게 알아낸 건데 맨입으로…."
갑자기 흥신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신성재가 모자를 쓰고 얼굴을 천으로 가린 상태로 들어왔다. 마법으로 얼굴에 천을 붙인 것이라 노출된 부분은 눈동자밖에 없었다.
신성재가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긴 뭐 간판만 흥신소고, 실제로 하는 일은 불법 뒷조사에 협박이 전문이더라?"
두목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어디서 오신 분인가?"
"그동안 너희 때문에 피해 본 사람 중 하나가 보냈는데, 뭐 짚이는 거 있냐?"
"그러니까 누가…."
"너무 많아서 모르겠지?"
사장이 CCTV 모니터를 확인했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혼자 왔네? 조져."
"이거 따로 계산해줘야 합니다."
"알았어. 새끼야."
부하가 삼단봉을 꺼내 휙 흔들었다. 삼단으로 접혀 있던 봉이 펴지며 길이가 쭉 길어졌다.
"삼단봉이네? 나도 그런 거 있는데."
신성재가 삼단봉을 꺼냈다. 그 삼단봉의 내부에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강화마법도 걸려있어서 사람이 도끼로 내리쳐도 잘리지 않는다.
신성재의 삼단봉은 마나가 들어가자마자 스르륵 펴졌다.
직원이 전진하며 삼단봉을 휘둘렀다. 검도 유단자의 움직임이었다.
"타핫!"
지금 신성재의 몸에는 전투보조 마법이 걸려있다. 근력은 물론이고 민첩과 동체 시력, 반사신경 모두 크게 강화된 상태다.
그 상태에서는 직원의 삼단봉 따위는 느릿한 허우적거림으로 보였다. 신성재가 상대의 공격을 가볍게 제쳤다.
상대가 다시 공격하려 했다. 그러기 전에 신성재가 삼단봉을 앞으로 툭 밀었다.
전격 마법이 발동했다. 상대의 몸이 마비됐다.
"케에엑!"
"너 방금 내 머리 노렸더라?"
신성재가 상대를 발로 툭 쳐서 자빠뜨린 후에 퍽퍽 소리가 나게 두들겨 팼다.
"팔을 노렸으면 봐주려고 했는데!"
봐줄 생각은 없었다.
마법이 깃든 삼단봉에 맞으면 그냥 맞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아프다.
"끄악! 끄아악! 끄아아악!"
그놈은 딱 세 대만에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두목이 황급히 서랍을 열더니 손을 넣었다.
신성재가 말했다.
"그거 총이면 너 죽는다?"
두목이 칼을 꺼냈다.
"단검이구나. 이 새끼 살겠네."
"씨, 씨발! 누가 보냈어!"
"맞춰보라니까?"
"모, 몰라! 씨발!"
"의심 가는 사람이 너무 많지? 그러게 선은 넘지 않고 살았어야지."
신성재가 두목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피해자 중 한 명일까? 아니면, 의뢰인 중 한 명일까?"
"뭐, 뭐?"
"나를 누가 보냈을까?"
"으아아!"
두목이 단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신성재가 삼단봉으로 두목의 손목을 후려쳤다. 칼을 쥔 손목이 뚝 부러졌다. 단검은 위로 날아가 사무실 천장에 박혔다.
"끄아악!"
신성재가 물었다.
"야. 작전주 그거 어디냐? 나도 좀 먹자."
두목의 눈이 커졌다. 그건 방금 직원과 하던 대화였다.
"그, 그걸 어떻게…."
"도청장치는 너희만 설치하는 게 아니야."
도청장치가 아니라 마법으로 엿들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도청장치라고 말했다. 그러면 지금 기절한 놈을 뒤따라온 게 아니라, 예전부터 이 사무실을 노리고 작업했다고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
신성재가 삼단봉으로 두목도 두들겨 팼다.
"끄아아악!"
사장은 단 두 대만에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밖에서 망을 보던 은가은이 마법 공학 통신기로 경고했다.
- 한 놈 더 들어가.
신성재가 사무실 소파에 앉았다. 흥신소의 다른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장님.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이거 잘 엮으면 짭짤…. 어?"
신성재가 손을 들었다.
"어. 왔냐?"
"뭐, 뭐야?"
"뭐긴 뭐야. 습격이지."
흥신소 직원의 눈동자가 쓰러진 두 놈을 향했다. 판단은 빨랐다. 그놈이 뒤로 휙 돌아서 도망치려고 했다.
신성재가 소파 테이블의 재떨이를 발로 찼다.
[바람 손]
유리로 만든 재떨이가 고속으로 날아가 도망치는 직원의 무릎 뒤를 때렸다. 직원은 다리가 꺾이며 뒤로 나자빠졌다.
"케엑!"
그놈은 나자빠지면서 뒤통수를 바닥에 찍고 그대로 기절했다.
"운이 좋은 놈이야. 다른 놈들보다 덜 맞았잖아."
은가은이 물었다.
- 나 이제 들어가도 돼?
"험한 꼴 볼 생각 말고 거기 있어라."
신성재가 사무실에 있는 자료들을 대충 뒤적거렸다. 두목의 책상 위에 익숙한 회사의 이름이 적힌 문서가 있었다.
"쓰읍."
책상 위에는 두목의 노트북도 있었다. 노트북은 잠금화면 상태였다.
신성재가 기절한 두목의 오른손을 가져가 지문을 전원 버튼에 댔다. 잠금이 풀렸다.
그 상태에서 노트북의 잠금 기능을 비밀번호 방식으로 전환했다.
[부끄럼쟁이 요정]
내부에는 CCTV가 없었다. 그러면 그가 들어온 CCTV만 처리하면 된다. 그건 옆에 놓인 PC와 연결되어 있었다.
신성재가 그 PC에 손을 대고 간단한 마법을 썼다.
[라이트닝 쇼크]
컴퓨터 내부 부품들이 마치 합선이라도 된 것처럼 타버렸다. 저장된 CCTV 영상도 모두 사라졌다.
신성재가 노트북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은가은이 다가왔다.
"뭐 좀 나왔어?"
"이런 짓을 전문적으로 하는 놈들이더라."
"다시는 못 하게 만들지 그랬어."
"몇 군데 분질러놨어."
"와. 관대해라."
"겨우 이런 거로 다 죽일 순 없잖아."
은가은이 노트북을 보며 물었다.
"그럼 누가 시켰는지는 알아냈어?"
"이놈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 중에 저번에 집에 왔던 사기꾼이 팔아먹은 정치인 이름이라도 나오나 했더니."
"아니야?"
"아니더라. 그런데 말이야. 그 사무실에 송스 엔터에서 만든 홍보 자료가 있네?"
은가은은 당황했다.
"엥? 송 관장의 송스 엔터가 왜 여기서 나와?"
"나랑 송스 엔터 양쪽을 동시에 뒷조사하는 놈이 있다는 뜻이지."
"그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은 어떻게 찾게?"
"송예솔 관장을 떠보려고. 송스 엔터도 엮였으니까 뭔가 아는 게 있겠지."
50. 송스 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