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알프레드
신성재가 녹덩어리 칼을 30만 파운드에 낙찰받았다. 원화로 환전하면 5억 원이 넘는 돈이었다.
경매장을 나서며 은가은이 자랑했다.
"오빠. 봤어? 내 연기력. 난 역시 배우를 해야겠지?"
"방금 그건 연기가 아니잖아. 진짜로 가소로워서 비웃은 거라며."
"어디 감히 빌런을 때려잡는 전투 마법사한테 민간인이 싸움을 걸어? 가소롭지."
"그래. 잘했다."
"그러니까 싸게 산 거 맞지?"
"경쟁자가 붙어서 원래 계획보다 비싸게 샀지."
은가은 덕분에 알프레드가 추가 입찰하는 건 막았다. 그런데도 지출이 예상보다 컸다.
"집 담보로 잡히고 대출받은 거에, 내 원래 여유 자금까지 털어 넣었다."
"그럼 5성급 호텔이랑 퍼스트 클래스는?"
신성재가 물었다.
"가은아. 그건 5천에 낙찰받았을 때 하기로 한 건데, 낙찰가가 5억이 넘는다?"
"아니, 그 이상한 남자는 왜 녹슨 칼을 사려고 그 난리야?"
"그 사람도 원탁의 기사의 검일 가능성에 베팅한 거지."
"남들에겐 랜덤 박스나 마찬가지라며."
"그 사람은 도박을 좋아하나 보다."
은가은이 걱정했다.
"어쨌든 파리에 가서 풀코스 먹을 돈은 있는 거지?"
"그건 남겨놨지."
"아싸아."
경매장을 나온 두 사람에게 알프레드가 다가왔다.
그가 영어로 말을 걸었다.
"더 부를 수 있었는데, 거기서 멈췄습니다. 칼의 낙찰가가 높아져 봤자 경매장과 영국만 좋을 테니까."
신성재도 영어로 말했다.
"그 칼의 정체를 내가 더 확신한 거겠지요."
알프레드가 신성재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 칼이 뭔지 알고 있나 봅니다?"
"서로 비슷한 판단을 했을 텐데?"
"아더왕 시대?"
그건 유럽의 전문가들도 알아낸 것이다.
신성재가 범위를 더 좁혀주었다.
"원탁의 기사."
"그 시대에 기사가 그들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 기사의 검일 수도 있습니다만?"
"나랑 비슷한 결론을 내리셨을 텐데?"
단순히 오래된 기사의 검이라고 생각했다면 30만 파운드에서 고민했을 리 없다. 알프레드는 경매장에서 은가은의 얕잡아보는 표정이 보고 나서야 포기했다.
어쨌든 칼은 신성재가 낙찰받았다. 상대가 다시 낙찰받을 수는 없다.
알프레드가 인상을 살짝 썼다.
"나도 그 가능성을 보긴 했습니다만."
"난 30만 파운드를 쓸 만큼 확신한 거고요."
"음…."
알프레드가 잠시 생각하다가 제안했다.
"그 판단을 내가 20만 파운드에 사지요. 50만 파운드를 줄 테니까 칼을 넘겨주십시오."
20만 파운드면 3억5천만 원쯤 된다. 영국에 며칠 왔다 간 것치고는 괜찮은 수입이다.
"당연히, 싫습니다만?"
그렇지만 겨우 20만 파운드를 벌려고 영국에 온 게 아니다.
알프레드가 제안을 추가했다.
"추적되지 않는 돈으로 드리겠습니다. 세금을 낼 필요도 없죠. 그 녹슨 칼만 넘기면 됩니다."
신성재도 제안했다.
"공 하나 더 붙입시다."
"그게 무슨…."
"500만 파운드. 그러면 넘기죠."
알프레드가 인상을 썼다.
"협상할 생각이 없군."
"물론이지."
"후회할 텐데."
신성재가 피식 웃었다.
"재밌네. 협박인가?"
알프레드가 실실 웃으며 두 손을 들고 물러났다.
"천만에. 협박이라니. 난 합법적인 사업가입니다."
그가 신성재의 옆에 있는 은가은을 쓱 쳐다본 후에 말했다.
"좋은 여행 되시길."
알프레드가 인사말까지 남기고 사라진 후에 은가은이 물었다.
"왜? 돈 줄 테니까 그 칼 내놓으래?"
"오! 우리 가은이가 영어를 알아듣는구나! 가르친 보람이 있다."
"뭐래. 나도 생활영어는 좀 하거든? 500만 파운드를 핑계로 거절한 것도 알아."
"그거 핑계 아니야."
"응?"
"거절도 아니고."
"그럼…."
"제안한 거야. 그 가격을 쳐주면 진짜로 넘기려고."
은가은이 입을 벌렸다.
"와…. 영국 호구 잡아서 50억 뜯어낸다는 거 진심이었어? 대동강 물 팔아먹은 김선달이 이런 식이었나?"
"내가 김선달보단 낫지. 난 적어도 사기는 아니니까."
은가은이 알프레드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물었다.
"근데 그냥 보내도 돼? 저 사람이 협박한 거 아냐?"
"그냥 보낸 거 아니다."
"그럼?"
신성재가 영국 동전을 하나 꺼냈다.
"이건 우리가 점심때 햄버거 사 먹고 받은 거스름돈이야."
"동전 몇 개 받은 거 알아."
"이런 동전에 추적 마법을 걸어뒀어. 그걸 저 사람 주머니에 슬쩍 넣어줬지."
***
오래된 녹슨 검은 경매장에서 낙찰받았지만, 귀국 항공권은 내일로 예약되어 있다.
은가은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약속대로 저녁은 근사한 프랑스 요리 풀코스!"
"가자. 고속열차 타면 두어 시간 걸린다더라."
은가은이 신나서 팔을 앞뒤로 흔들었다.
"아싸아! 오늘 밤은 파리 호텔에서 보내나? 막 에펠탑도 올라가고?"
"넌 관광하러 왔냐?"
"응!"
"일단 프랑스 풀코스부터 먹으러 가자!"
"예에!"
***
두 사람은 영국에서 프랑스 파리로 이동해 저녁을 많이 먹었다. 은가은이 식당을 나와 길을 걸으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 맛있었다. 피자랑 파스타는 안 나왔지만 맛있었어."
"그건 이탈리아가 잘해."
"그럼 내일은 이탈리아 가나?"
"내일은 한국 돌아가서 국밥 먹어야지."
은가은이 입맛을 다셨다. 프랑스 요리도 좋지만 국밥도 좋았다.
"생선구이랑 국밥 먹자."
"그런데 그 전에 일 하나 해야지."
"응? 일이 남았어?"
신성재가 프랑스 밤거리를 걸으며 눈짓했다.
"미행이 붙었어."
"앗! 어디?"
"뒤쪽. 돌아보지 마라."
"몇 명이나?"
"가까운 곳에 둘. 조금 떨어진 곳에 하나."
"관광객을 노린 강도야? 프랑스 치안 개판이네."
"아까 경매장에서 본 놈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 그놈이 시켰겠지."
"엥? 경매장은 영국에 있는데?"
"파리까지 따라왔겠지."
신성재는 아까 상대의 주머니에 추적 동전을 넣어두었다. 그 동전이 근거리에서 탐지됐다.
은가은이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낙찰받은 칼을 노리고 쫓아온 거야?"
"아마 그렇겠지."
그녀가 손끝을 입술에 대며 말했다.
"어머. 가련한 불나방들. 마법사의 칼을 노리다니. 그러다 불에 타죽겠지."
"죽이지는…."
은가은이 어두운 골목 쪽으로 눈짓했다.
"저기로 유인하자."
"응?"
"저기서 쓱싹 해."
신성재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은아. 넌 애가 왜 그렇게 과격하냐?"
"그럼 쓱싹 안 할 거야?"
"저것들이 선 넘으면 해야지."
"쟤들은 선 안 넘어?"
"좋은 의도로 따라온 게 아닌 건 알겠는데, 살기가 없어."
"살기를 감추는 경지의 암살자인가? 빨리 쓱싹 해야겠는데?"
"쓱싹 하더라도 그걸 네 앞에서 하진 않아."
"왜?"
"험한 거 보면 네 교육에 안 좋아."
은가은이 불평했다.
"이거 왜 이래? 나 이제 무인도에서 질질 짜던 고딩 아니거든?"
"넌 무인도에서도 질질 짜진 않았어."
그녀는 눈물을 흘릴 시간에 조개나 다른 먹을 수 있는 걸 찾아 무인도 해변을 뒤지고 다녔다.
"근데 왜 미성년자 취급인데? 나 다 컸거든?"
"용돈 필요할 땐 아직 소녀라더니?"
"오빠. 용돈이 이렇게 무섭다."
신성재가 피식 웃었다. 은가은이 핸드백에서 망원 안경을 꺼냈다.
"내가 망을 봐줄 테니까 맘 놓고 쓱싹 해."
지금은 한밤중이다.
"그 안경의 야간 시야 기능은 아직 베타 버전이야. 테스트가 더 필요해."
"설마 눈뽕 맞겠어? 마나 채워줘."
신성재가 손을 내밀어 은가은의 안경에 마나를 부여했다.
"옜다."
"땡큐."
신성재가 가방에서 귀걸이 두 개를 꺼냈다.
"이거 받아."
"이 상황에서 갑자기 귀걸이를 준다고? 이거 뭐야? 설마 유물이야?"
"유물처럼 귀한 건 아니고."
"그럼?"
"마법 공학 통신기."
은가은은 당황했다.
"엥? 이거 아직 만드는 중이라며."
"뻥이었어."
지난번에는 테러 빌런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통신기가 없다고 말했다.
"이건 프로토타입이라 1회용 통신 마법이 걸려있어. 일단 마나를 부여하면, 그 마나가 바닥날 때 마법도 소멸해."
은가은이 귀걸이를 귀에 걸며 물었다.
"혹시 내 귀도 같이 소멸해?"
"그러겠냐? 마법만 사라져."
신성재가 은가은의 양쪽 귀에 손을 대고 마나를 부여했다.
그런 후에 말했다.
"저기 호텔 보이지? 저 건물 높은 곳에 가서 이 골목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안경을 앞에 놓고 찍으면 망원렌즈를 쓴 것처럼 잘 찍힐 거다."
"엥? 오빠를 찍어도 돼?"
"경찰에 제출할 것도 아니고, 표 안 나는 마법만 쓸 테니까 괜찮아."
은가은이 큰소리쳤다.
"알았어. 골목에서 오빠가 저놈들 쓱싹하는 거 확실히 찍을게."
"저놈들이 골드라도 떨구면 우리 호텔은 5성급으로 업그레이드하자."
은가은이 얼른 신성재의 팔짱을 꼈다.
"아싸아. 5성 호텔!"
"너 뭐 하냐?"
"여자친구인 척해야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는 이유를 의심 안 하지. 야한 거 하러 간다고 생각할 거 아냐."
신성재가 푸념했다.
"우리 순수하던 가은이가 언제 이렇게 날라리가 됐지? 어떤 놈한테 물든 거냐? 대학교 놈이냐? 아니면 보컬 학원 사람이냐?"
"나 지금 이거 연기하는 거야. 나 배우가 꿈인 사람이잖아."
"배우한테 물들었구나!"
"아니라고! 골목에나 들어가자고!"
은가은이 신성재를 끌고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
프랑스 남자 두 명이 신성재와 은가은을 조용히 미행했다.
피에르가 말했다.
"어두운 골목에는 왜 들어가는 거지?"
세드릭이 대답했다.
"남자가 여자 양쪽 뺨에 손을 대고, 여자는 남자를 골목으로 끌고 갔지. 그럼 뻔하잖아."
"골목에서 하겠군."
"저 골목을 지나가면 호텔이 나온다. 그 호텔에 가는 거겠지."
"골목도 그냥 지나가진 않을걸?"
"하긴. 여자가 마음이 급해져서 서두르더라."
"좋은 사진이 나오겠어."
그들은 조금 기다렸다가 골목으로 다가가 안쪽을 힐끗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벌써 호텔로 갔나?"
두 사람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피에르가 말했다.
"보는 사람도 없으니 여기서 뭐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난 그 여자가 눈이 돌아가서 덮칠 거라고…."
그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새끼들이 천박하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신성재가 그들의 뒤에 서 있었다.
"어?"
"어떻게 우리 뒤에…."
신성재가 그들이 들어간 골목 입구에서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걔가 말도 안 듣고 많이 먹지만, 그래도 나랑 무인도에서도 같이 살아남고 내가 가르쳐서 대학까지 보냈는데, 너희 따위한테 그런 소리 들으면 내가 기분이 좋겠냐?"
그 말은 한국어로 했다.
당연히 프랑스인 두 사람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눈치로 은가은에 관한 이야기라는 건 알아챘다.
세드릭이 얼른 영어로 말했다.
"아니, 우리는 그 여자가 아니라 당신을…."
피에르가 급히 말렸다.
"야. 입 닥쳐."
신성재도 이제 영어를 사용했다.
"닥치면 다친다?"
피에르가 인상을 쓰며 어깨를 흔들었다. 근육이 단단해 보였다.
"어이. 이쯤에서 멈추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거다."
"새끼가 선심 쓰는 척하네?"
"말이 안 통하는군. 그럼 어쩔 수 없지."
피에르가 신성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신성재는 상대가 적어도 살인청부업자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신성재를 폭행하려는 건 알겠는데,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새끼들 운 좋네."
"뭐?"
"여기서 죽진 않겠어."
"이 새끼가 내가 누군지 알고!"
피에르가 권투선수처럼 주먹을 휘둘렀다. 라이트훅이 신성재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빨랐다.
신성재의 눈에 그 주먹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였다.
신성재는 이미 몸에 전투보조 마법을 둘렀다. 덕분에 동체 시력과 반응속도가 크게 높아진 상태다.
신성재가 손을 내밀었다. 은가은이 있는 곳에서는 피에르의 몸 때문에 그 손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 주먹]
적의 주먹이 닿기도 전에, 바람에 물리력을 부여한 주먹이 피에르의 배에 먼저 꽂혔다.
피에르는 권투선수 출신이다. 배를 맞는 건 익숙하다.
그런데 이건 근력이 아니라 마법으로 힘을 부여한 공격이다.
"커억!"
피에르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주먹은 허공을 허우적거리듯이 지나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피에르의 맷집은 바람 주먹 한 방을 버티지 못했다. 갈비뼈에 금이 가고 내장도 충격을 받았다.
피에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끄으윽."
세드릭은 당황했다. 그는 권투선수 출신이 아니다. 맨손 싸움은 피에르보다 훨씬 약하다.
대신에 그는 칼을 제법 잘 썼다.
세드릭이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잭나이프가 잡혔다. 칼을 꺼내자마자 손잡이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이 새끼…. 어?"
신성재가 순식간에 새드릭의 앞까지 이동했다.
"꺼낸 게 총이 아니라서 사는 거다."
세드릭이 반응하기도 전에, 신성재가 칼을 빼앗아 상대의 어깨에 꽂았다.
"끄아악!"
"여기서 소리 지르면 경찰이 온다?"
"끄끅."
"네가 경찰한테 잡히면, 나한테 죽는다?"
신성재의 말에 살기가 담겼다.
겁에 질린 두 놈이 비틀거리며 골목을 벗어나려고 애썼다.
신성재는 뒤쫓지 않았다. 세드릭은 칼에 찔린 어깨를 옷으로 가려가면서 도망쳤다.
은가은이 마법 공학 통신기로 말했다.
- 오빠. 나이스샷.
"잘 찍었냐?"
- 당연하지. 근데 여기서 보니까, 아까 경매장의 그놈이 방금 도망친 놈들과 마주칠 거 같아.
"알아. 추적 동전 두 개의 위치가 가까워지고 있어."
- 내가 망원 안경을 앞에 놓고 줌 땡겨서 저놈들 얼굴 나오게 찍고 있어.
"셋 다 나오게 찍어."
- 언제까지?
"내가 저놈들 뒤에 나타나기 직전까지."
31. 알프레드 II
알프레드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성재와 은가은을 미행하며 골목에 들어간 정보원 두 놈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둘 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다.
알프레드가 인상을 썼다.
"쯧. 들켰군."
그들은 알프레드 쪽으로 도망쳤다.
"나한테 오다니. 멍청한 놈들."
알프레드가 근처 골목으로 쓱 들어갔다. 두 놈이 그 골목으로 따라 들어왔다.
피에르는 갈비뼈에 금이 가긴 했어도 겉으로는 상처가 보이지 않는다.
세드릭은 달랐다. 어깨에 칼이 박혀 있었다.
알프레드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칼에 맞은 세드릭이 덜덜 떨며 말했다.
"저, 저건 보통 놈이 아니야! 이야기가 틀리잖아!"
피에르도 통증 때문에 쥐어짜듯이 말했다.
"해비급 선수의 주먹에 맞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저놈 정체가 뭐지?"
그건 알프레드도 모른다. 그는 신성재를 경매장에서 보고 같은 열차로 파리까지 따라온 것뿐이다.
알프레드가 혀를 차며 불평했다.
"쯧쯧. A급 정보원이라고 해서 비싼 돈을 주고 고용했는데."
신성재와 은가은이 프랑스 요리 풀코스를 즐길 때 알프레드는 두 놈을 급히 고용했다. 그래서 급행료가 더 들었다.
"미행이나 협박으로 사생활 정보를 캐내는 것조차 실패라니. 실망이야."
그의 뒤에서 신성재가 말했다.
"그러게 더 비싼 놈을 썼어야지. S급 정보원은 없었냐?"
알프레드가 깜짝 놀라 황급히 뒤로 돌아섰다.
"헉! 언제 내 뒤를…."
신성재가 알프레드를 걷어찼다.
"케엑!"
알프레드가 뒤로 쭉 밀려나 골목 벽에 처박혔다.
정보원 두 놈은 신성재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도망쳤다.
"으아아!"
신성재는 도망친 놈들은 굳이 뒤쫓지 않았다. 조금 전에 다른 골목에서 싸울 때 두 놈의 주머니에 위치추적 동전을 넣어두었다.
지금 중요한 건 알프레드다. 그는 영국 경매장에서 신성재와 녹슨 칼을 놓고 경쟁했다.
'이놈 때문에 15만 파운드를 더 썼어.'
2억5천만 원쯤 되는 돈이 괜히 더 나갔다. 그것만 해도 속이 쓰린데, 프랑스까지 따라와 미행을 붙였다.
신성재가 말했다.
"킬러를 두 놈이나 보냈다가 실패했으면, 네가 책임을 지고 죽어야지?"
알프레드는 당황했다.
"아, 아니다. 난 정보원을 쓴 것뿐이다! 저놈들은 킬러가 아니야!"
킬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를 미행한 두 놈은 살기가 없었다.
"나한테 칼을 들이민 놈이 킬러가 아니면 뭐지?"
"카, 칼을 썼다고? 아니야! 그건 내가 시킨 게 아니다!"
"내가 그 말을 믿어야 할 이유는?"
"그, 그게…."
신성재가 한 걸음 다가갔다.
"믿을 이유가 없군."
알프레드가 다급히 말했다.
"나,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골동품을 중개하는 사업가란 말이다!"
"오늘처럼 경매로 사서 팔기도 하고?"
"그, 그렇다!"
"낙찰받지 못하면 오늘처럼 죽여서 빼앗기도 하고?"
"아, 아니다! 다시 사들이려고 한 거다!"
"협박해서?"
"아니, 그건 가격을 깎기 위해서…."
이번 대답은 킬러가 아니라고 할 때보다 목소리가 조금 작았다.
신성재가 알프레드를 다시 걷어찼다.
"컥!"
"협박 맞네. 납치도 하려고 했지?"
알프레드가 급히 변명했다.
"나, 납치는 아니다. 그냥 약점을 잡으려고…."
"어떤 약점?"
"그게…."
알프레드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같이 있던 그 얄미운 표정의 여자와의 음란한 사진이나…. 케에엑!"
"그런 사진이 통할 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알프레드는 신성재에게 맞을 때마다 마치 쇠몽둥이로 얻어맞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피부가 찢어지지도, 뼈가 부러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할 정도로 아팠다.
게다가 그가 고용한 정보원은 어깨에 칼을 맞았다. 그러니까 알프레드도 칼을 맞을 수 있다.
겁이 났다. 그래서 대답이 술술 나왔다.
"동양인한테는 그런 사진이 통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이나 유럽도 유명인사이거나 부적절한 관계라면 그런 사진이 통한다. 프랑스인만 아니라면…."
신성재가 물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그 칼을 도로 가져가려는 이유는?"
"난 그 칼이 원탁의 기사의 검이라는 데 배팅했다. 그것만 확인되면 미국이나 유럽의 고객에게 비싸게 팔려고 했다."
"흐음…."
알프레드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진짜다."
신성재가 손을 내밀었다.
"여권."
"어? 어?"
"최소한 여권 수준의 신분증, 명함, 휴대폰, 지갑."
알프레드는 당황했다.
"왜, 왜…."
"왜? 이 새끼가. 너는 내 약점을 잡으려고 정보원까지 고용했는데, 네 정보는 나한테 못 준다는 거냐? 그럼 역시 다 거짓말이었네. 킬러를 보낸 거였어. 역시 죽여야…."
"보, 보여주겠다!"
알프레드가 여권과 명함부터 꺼냈다. 신성재가 그걸 받아 확인했다.
"알프레드. 이름은 들어봤지."
인사동의 도종호 사장이 알프레드란 인물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유물 브로커."
알프레드가 말했다.
"나는 정당하게 유물을 찾아내고 사서 파는 사람이다."
"나한테 한 짓이 정당하다고?"
"정, 정보 수집 차원에서…. 선을 넘은 건 정보원의 일탈이었다!"
"됐고."
신성재가 제안했다.
"알프레드. 나랑 일 하나 하자."
"어?"
"내가 알아달라는 물건이 있으면, 네가 그게 어디 있는지 조사해서 정보를 보내. 내가 팔아달라고 보내는 건 네가 팔아서 돈 가져오고."
유물 브로커 알프레드는 혼란스러워했다.
"지금 내 고객이 되겠단 말인가?"
"열심히 하는 게 마음에 들었어."
알프레드는 마음이 놓였다. 많이 맞긴 했지만 그래도 이야기가 잘 풀렸다고 생각했다.
그가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 그럼 수수료부터 정할까?"
신성재가 히죽 웃었다.
"수수료? 살려주잖아."
"어?"
"배 째면 찾아가서 내가 진짜로 짼다?"
***
신성재가 은가은이 들어간 호텔로 돌아왔다.
그녀는 호텔 안에 있는 식당에서 와인 한 잔에 간단한 음식을 시켜놓고 앉아 있었다.
신성재가 맞은편에 앉았다.
"혼자 마시냐?"
"오빠 걱정돼서 마셨지."
"걱정한 표정이 아닌데?"
은가은이 방긋 웃었다.
"걱정하려고 노력했는데, 걱정이 안 되더라고. 인천공항 갈 때처럼 총소리가 들리고 폭탄이 터진 건 아니니까."
"그땐 걱정은 했냐?"
은가은이 엄지와 검지를 살짝 붙였다 떼었다.
"요만큼?"
"입에서 침 흘리면서 자던데?"
"그건 오빠가 시트 눕혀놓고 있으라고 해서 그런 거잖아! 사람은 원래 누우면 자고 싶다고!"
그러면서 뒷말은 조금 작게 했다.
"그리고 마법사 걱정은 하는 거 아니라며."
"그건 그렇지. 영상은?"
"여기."
은가은이 망원 안경과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보여주었다. 한밤중의 어두운 골목인데도 알프레드, 피에르, 세드릭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은가은이 물었다.
"이 영상은 인터넷에 올리지도 못하는데 쓸 곳이 있어?"
"써야지. 내일."
은가은이 다른 걸 물었다.
"그런데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골드는 좀 떨어졌어?"
신성재가 씩 웃었다.
"알프레드가 짭짤하게 떨구더라."
알프레드의 지갑을 털었더니 현금이 꽤 많이 나왔다.
"여기 말고 5성급 호텔 가나요?"
"호텔에 방 두 개 잡아도 된다."
"아싸아!"
***
신성재가 프랑스의 고급 호텔로 이동해 방을 두 개 잡은 후에 말했다.
"이 호텔은 보안이 좋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네 방에 경계 마법을 깔아놓자."
"어떤 거?"
"누가 어떤 경로로 침입하든 알 수 있는 거."
"그거 다 하면 와인 마시러 가자!"
"혼자 마셔. 난 갈 데가 있다."
"엥? 어디 가게?"
"골목에서 본 그 정보원 두 놈. 살려는 주는데, 마무리는 해야지."
***
피에르와 세드릭은 그 골목에서 도망친 후에 승용차를 몰고 병원부터 갔다. 그 병원은 정보원들이 뒤탈 없이 치료받아야 할 때 이용하는 곳이다.
피에르는 갈비뼈에 금이 갔다는 진단을 받았다.
"내부 장기 몇 곳도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차에 받힌 거냐?"
"아파 죽겠으니까 진통제나 강한 거로 주쇼!"
잭나이프를 꺼냈던 세드릭은 부상이 더 컸다. 칼을 뽑고 상처를 봉합해야 했다.
그들은 치료를 받고 나서 병원을 나왔다.
피에르가 말했다.
"그 새끼한테 복수하자."
세드릭은 살짝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위험한 놈이야."
"뒤에서 들어오는 칼은 막지 못해."
"그러다 실패하면 다음엔 우리가 죽어."
"이 새끼. 왜 이렇게 겁이 많아졌어?"
세드릭이 제안했다.
"일단 어떤 놈인지부터 알아보자. 알프레드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그들은 차를 몰고 병원을 벗어났다.
심야의 도로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피에르가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았다.
문제가 생겼다. 강력한 진통제를 맞은 상태로 운전하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차가 미끄러졌다.
***
신성재가 은가은의 방에 경계 마법을 설치한 후에 호텔 1층으로 내려갔다.
그가 호텔 로비 중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 추적 동전의 위치가…."
급격하게 변했다.
"이 정도면 교통사고가 났겠는데?"
은가은이 물었다.
"오빠가 마법으로 사고를 일으킨 거야?"
"아니. 난 위치추적만 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
"음…. 이런 격렬한 움직임이면 사고가 크게 났을 거야. 그럼 뭐, 마무리는 된 거로 치자."
은가은이 얼른 제안했다.
"앗. 그럼 와인 마시자! 이번엔 한 병 다!"
"알프레드가 떨군 골드가 남았으니까, 그럴까?"
***
알프레드가 이튿날 정보원 브로커를 찾아가서 항의했다.
"A급 정보원을 소개했다더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브로커가 찌푸린 얼굴로 대답했다.
"그 둘은 A급 정보원이 맞아. 최고의 정보원이 둘이나 당해서 우리도 손해가 커."
알프레드가 화를 냈다.
"손해는 내가 더 크지! 내가 어젯밤에 무슨 꼴을 당했는데!"
"우리 정보원들은 지금 팔다리가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 아직 깨어나지도 못했어."
"감히 나를 속이려고 해? 어제 내 눈앞에서 뛰어서 도망치는 걸 똑똑히 봤는데! 그것도 나만 놔두고!"
"그때는 사지가 괜찮았겠지. 그런데 그 후에 우리 쪽 의사한테 치료받고 나오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둘 다 크게 다쳤다."
알프레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사고가 우연 같지가 않았다.
"설마 그놈한테 미행당한 건…."
"A급 정보원이 미행당했다? 그게 그 친구들 전문분야인데 그럴 리가. S급 미행 전문가라면 모를까."
"그럼 추적장치를 썼다면…."
"A급 정보원은 추적장치 같은 건 항상 확인하고 대비해."
"누가 사고로 위장해 그 두 사람을 처리한 거라면…."
"사고 차량을 경찰이 가져갔는데, 인맥을 통해 알아보니까 단순 사고처럼 보인다더라."
"그런데도 누군가에게 당한 거라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상대겠지."
알프레드가 침을 꼴깍 삼켰다. 신성재가 떠나기 전에 한 말이 생각났다.
'배 째면 찾아가서 내가 진짜로 짼다?'
A급 정보원 둘을 찾아내서 사고로 위장해 처리할 수 있다면, 알프레드한테도 그럴 수 있다.
"제, 젠장, 내가 도대체 누굴 건드린 거지?"
***
알프레드는 아예 프랑스를 떠나기로 했다. 어차피 유럽은 국경을 그냥 넘을 수 있다.
"영국에서 왔으니 거긴 제외해야지. 그래. 일단 이탈리아로 가자. 그곳에 들렀다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면 돼."
알프레드는 아예 유럽을 벗어나야 마음이 편할 거라고 판단했다.
***
알프레드가 탄 택시가 공항에 도착했다.
신성재가 밖에서 택시의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알프레드. 어디 가게?"
알프레드는 화들짝 놀랐다.
"히이익!"
"왜 놀라? 도망치려다가 들킨 사람처럼."
"아, 아니, 그게…."
"내리지?"
알프레드가 창백해진 얼굴로 택시에서 내렸다.
"어, 어떻게 여기에…."
신성재가 알프레드의 어깨를 툭 치며 주머니에 추적 마법이 걸린 동전을 하나 더 넣었다.
"이야아.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참 신기하지?"
32. 귀국
알프레드의 주머니에는 추적 마법이 걸린 동전이 들어 있다.
그 동전은 경매장에서도 넣었고 어젯밤에 골목에서도 새로 넣었다. 어젯밤에 넣은 건 주머니가 아니라 지갑 사이에 끼워 넣었다.
지갑에 넣은 건 과충전한 동전이라 지금도 위치추적이 가능했다.
방금 새로 주머니에 넣어준 동전은 알프레드가 또 튈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추적 동전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알면 따라가는 건 쉽다.
신성재가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우연히' 공항 앞에서, 그것도 택시 앞에서 마주칠까? 신기하지?"
알프레드는 겁을 집어먹었다.
그는 이 만남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성재가 우연히 그가 내리는 택시 앞에 서서 문을 열어줄 리가 없다.
'미행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그런데도 신성재와 공항에서 마주쳤다.
'이러면 미국으로 도망쳐도 안심할 수 없어.'
불안해하는 그의 앞에서 신성재가 스마트폰을 꺼내며 말했다.
"아. 그래. 계약금은 줘야지."
"계, 계약금? 얼마나…."
신성재가 스마트폰에 저장해둔 영상을 보여주었다.
"잘 봐. 계약금이니까."
알프레드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그 영상을 확인했다. 어제 파리 골목에서 있었던 일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헉! 이, 이건!"
신성재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여기 네가 보낸 킬러들이 나를 죽이려 한 거 보이지?"
"언제 어떻게 찍었…."
은가은이 근처 호텔 위로 올라가서 촬영했다.
"그리고 이건 그 킬러들이 나를 습격한 후에 너와 의논하는 모습이야."
"이미 말했다시피 이놈들은 킬러가 아니라 정보원이란 말이다."
"누가 봐도 킬러잖아? 네가 고용한 킬러."
알프레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영상이 공개되면 내 경력은 끝장이야. 킬러를 쓴다고 알려지면 부자들이 나한테 유물이나 고미술품을 맡길 리 없어.'
"이, 이건 계약금이 아니다."
"아. 조의금이겠구나."
"뭐?"
"네가 배 째고 튀면, 이 영상이 네 장례식장에서 상영될 테니까."
알프레드는 이 영상이 공개되면 업계에서 쫓겨난다는 것까지만 생각했다. 그런데 신성재가 말한 건 그 정도가 아니다. 장례식이 있으려면 먼저 알프레드가 죽어야 한다.
"지, 지독…."
"응? 뭐라고? 잘 안 들렸어."
"아, 아니다."
"지독하다고 한 줄 알았네. 하마터면 지금 인터넷에 영상을 올릴 뻔했잖아."
"아, 안돼!"
신성재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우린 영국 경매장에 들렀다가 거기서 귀국할 거야."
알프레드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 그러냐? 잘 가라. 만나서 반가웠다."
"항공권 좌석 업그레이드해놔."
"어? 어?"
"퍼스트 클래스로. 두 개."
"아, 아니, 그게 무슨…. 내가 왜…."
"이건 네가 도망치려고 해서, 너 찾아낸 수고비를 받는 게 아니야."
"맞는 것 같…."
신성재가 다른 걸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어제 나를 미행하다가 칼까지 꺼낸 놈들 말이야. 살아는 있냐?"
알프레드가 펄쩍 뛰었다.
"히익. 역시 당신이 한 거였어!"
"어. 그 사고, 내가 한 거야."
신성재가 한 게 아니다.
피에르와 세드릭은 병원에서 나온 후에 심각한 수준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건 추적 동전의 움직임으로 파악했다.
신성재가 뻥을 쳤다.
"나한테 칼 들이민 놈을 그냥 보내줄 순 없잖아?"
"어, 어떻게 그놈들을 찾아내서, 증거도 안 남기고 처리를…."
"그건 네가 몸으로 경험해야 알 수 있는데…."
신성재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궁금해?"
알프레드는 신성재가 무서웠다.
"아, 아니다! 궁금하지 않다!"
"싫으면 말고. 좌석 업그레이드하러 가자."
"어, 어디로…."
"당연히 런던 공항이지?"
알프레드가 얼른 말했다.
"현금! 마침 내가 현금이 있다! 달러로 있다!"
"어제 지갑이 다 털렸는데도 돈이 또 있어?"
"가방에 가지고 다닌다!"
***
신성재는 은가은과 영국으로 돌아갔다. 갈 때도 파리에 올 때처럼 고속기차를 이용했다.
마나가 소진된 동전 두 개는 회수했다. 지금 알프레드의 주머니에는 추적 동전이 한 개만 남아 있다.
영국 경매장은 낙찰받은 검의 해외 반출에 관한 서류 처리를 모두 끝내놓았다.
은가은이 감탄했다.
"서비스 확실하다. 우린 그냥 비행기만 타면 되네?"
"경매장에서 먹는 수수료가 얼마나 비싼지 생각하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영국에서 낙찰받은 검은 상태가 너무 나빠 문화재 취급은 받지 못했다.
그건 외형만 보면 검이라는 것 외에는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검이 얼마나 오래됐는지는 동위원소 측정으로, 아더왕 시대의 기사가 쓰던 형태라는 것은 엑스레이 촬영을 통해 겨우 알아냈다.
그 검은 손상을 방지하는 안전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신성재가 그 케이스에 보호 마법을 추가로 걸었다.
은가은이 물었다.
"그러면 총알 막아?"
"아니."
"그럼 왜 마법을 거는 거야?"
"이동할 때 녹이 많이 떨어지면 복원할 때 더 힘들어져. 그걸 방지하는 마법이야."
그 케이스는 여객기의 화물칸에 실렸다.
은가은이 여객기의 좌석에 앉아서 시트를 손바닥으로 치며 말했다.
"우왕! 나 퍼스트 클래스 처음 타봐! 영국에 올 때는 이코노미였잖아."
"알프레드 때문에 돈을 더 썼으니까, 그놈이 이런 서비스 정도는 해야지."
"알프레드 착해!"
"그놈이 착하진 않아."
"여기서 이제 라면이랑 땅콩 시키면 돼?"
"공짜 서비스 다 시켜."
스튜어디스가 라면은 물론이고 땅콩도 가져다주었다. 영국에 갈 때는 컵라면을 먹었는데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그릇에 담긴 끓인 라면이 나왔다.
은가은이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서 라면을 먹으며 물었다.
"근데 알프레드가 튀거나 통수 치면 어떻게 해?"
"골동품 업계에 그 영상이 공개되면 은퇴해야 하니까 못 튀어. 그리고 통수는…."
신성재가 땅콩을 씹으며 말했다.
"살고 싶으면 그런 짓은 안 해야지?"
퍼스트 클래스의 승객은 네 명밖에 없었다.
다른 자리는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일행과 함께 이용했다.
은가은이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그걸 본 여자가 입맛을 다셨다.
은가은이 그 소리를 듣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 후에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이거 공짜예요. 서비스로 막 줘요."
그녀는 한국어로 말했는데, 상대도 한국어로 대답했다.
"알아요. 지금 라면 먹으면 얼굴이 부을까 봐 그래요."
"아. 그러시…. 어머. 한국분이시구나!"
"그건 아닌데."
엘레나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할머니가 한국분이세요."
"앗. 엘레나 레이! 우왕! 팬이에요!"
미국 가수 엘레나 레이가 살짝 웃었다.
"훗. 어딜 가든 내 팬이 있…."
그녀가 신성재 쪽을 힐끗 보았다.
신성재는 이렇게 높은 고도에서는 마나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탐색하고 마법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가볍게 테스트했다. 승객에게 할당된 공간이 이코노미보다 훨씬 더 넓어서 연구하기 좋았다.
그러느라 바빠서 엘레나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모든 사람이 내 팬인 건 아니지만."
은가은이 물었다.
"근데 방한 일정은 오늘이 아니지 않아요?"
"인천공항을 노린 테러 미수 사건이 있었다면서요."
"아. 그거요."
"원래는 내가 한국에 도착하고 사람이 모일 때를 노린 거라던데."
"그쵸."
그 이야기는 이미 뉴스로 나왔다.
은가은은 뉴스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도 알았다. 영국으로 오기 전에 신성재가 그 테러 빌런들을 처리하고 폭탄 차량도 폭파했다.
그렇지만 그걸 알려줄 수는 없다. 은가은이 말했다.
"저도 뉴스에서 봤어요."
엘레나가 지금 이 비행기를 탄 이유를 설명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요청이 왔어요. 입국일을 다른 날로 바꿔 달래요. 비공개로요."
"아! 그래서 오늘…."
엘레나의 친구인 제시카가 옆에서 말했다.
"엘레나. 그런 이야기까지 하는 건 좀…."
"뭐 어때. 한국에 가면 어차피 기자한테 해야 하는 이야기인데."
은가은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가수인 엘레나 레이를 만나서 신났다. 엘레나도 그냥 가면 심심하다면서 같이 수다를 떨었다.
땅콩까지 까먹으며 수다들 떨다가 은가은이 말했다.
"저도 꿈이 가수예요!"
신성재는 마침 마법 테스트가 끝났다. 그래서 그 대화에 슬쩍 끼었다.
"네 꿈은 배우로 바뀌었잖아."
"둘 다 하면 되지."
"그래. 너는 전부터 과학자도 되고 싶었고, 운동선수도 되고 싶었고, 마법사도 되고 싶었는데, 이젠 가수와 배우가 되고 싶지."
"꿈은 꿀 수 있잖아."
"그래. 좋은 꿈 꿔라."
엘레나는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는 말에 웃었다.
"호호. 두 분 친해 보여요."
"별로 안 친합니…."
신성재가 엘레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컨디션이 좀 안 좋으신가?"
"어머. 의사?"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관상을 좀 봅니다."
"진짜요?"
"당연히 농담입니다."
그녀가 설명했다.
"좀 안 좋아지긴 했어요. 그래서 할머니 고향에 잠시 쉬러 가는 거예요."
제시카가 옆에서 또 끼어들었다.
"엘레나. 그런 개인적인 정보는 말하면 안 돼."
"알았어. 이 이야기는 그만할게."
신성재는 더 묻지 않았다. 엘레나의 상태를 확인하려면 몸에 손을 대야 한다. 하지만 제시카가 그런 걸 허용할 리가 없다.
신성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건강은 본인이 잘 챙기셔야지."
엘레나는 은가은과 수다를 많이 떨었다. 자주 웃고, 나중에는 술도 좀 마셨다. 제시카가 말려서 과음까지는 하지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밖으로 나올 때는 기자 세 명과 팬 이십여 명이 엘레나를 맞이했다.
신성재와 은가은은 따로 밖으로 나왔다. 엘레나와 같이 나오면 괜한 오해를 산다.
은가은이 팬과 기자 사이에 있는 엘레나를 보며 물었다.
"비공개 일정인데 팬들은 어떻게 안 거지?"
"엘레나가 언제 입국하는지 항공사 담당 직원은 알겠지. 그 직원이 저 기자 중 누군가의 인맥이겠지."
"그럼 팬들은?"
"아는 사람이 늘어나면, 정보가 샐 위험도 커져."
은가은이 걱정했다.
"지금은 안전한 거 맞지? 막 그 테러범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건 아니지?"
신성재가 주변을 확인했다. 살기는 없다.
"괜찮은 거 같은데."
"잘 좀 확인해봐. 마법도 팍팍 써서."
"너 왜 저 사람한테 신경 써주냐?"
"열 시간이 넘게 같이 이야기하면서 왔잖아. 그럼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
"둘이서 수다를 오래 떨긴 하더라."
신성재가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부끄럼쟁이 요정]
그 마법으로 엘레나를 보는 카메라나 시선이 있는지 확인했다.
"수상한 건 없어. 깨끗해. 그러니까 우린 가자."
***
신성재가 서울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단독주택에 산다. 단독주택이어야 지하실에 공방을 만들 수 있다. 아파트에 공방을 만들면 마법 실험을 하다 문제가 생겼을 때 아래층이나 옆집에 피해를 줄 수 있다.
그의 지하실 공방에는 마법 실험을 하다 문제가 생겨 판매하지 못하게 된 골동품이 쌓여 있었다.
"가은이 데려와서 정리나 시킬걸."
은가은은 집까지 따라와 봤자 심부름만 한다는 걸 눈치채고 공항에서 오다가 튀었다.
"얘가 눈치가 빨라."
신성재가 골동품들을 옆으로 치워 작업대를 비웠다. 그런 후에 작업대 위에 영국에서 산 녹슨 검을 올려놓았다.
검은 녹으로 뒤덮여서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안쪽에 있는 검의 형태를 엑스레이로 확인했다.
"꺼낸 김에 복원하자."
신성재가 손을 검 위에 올렸다.
"5억이나 주고 샀으니까 손이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서."
복원 마법을 쓰다가 손이 미끄러지면, 대상을 복구하는 게 아니라 망칠 수도 있다.
33. 검의 주인
신성재는 무인도에서 평행세계의 마법 지식을 얻을 때 몇 개의 마법을 즉시 개방했다. 그 마법으로 총에 맞은 상처도 회복하고 해적선도 격침했다.
그런 개방 특전은 그때뿐이었다.
그 이후에는 마법 지식을 직접 연구해야 새로운 것을 개방할 수 있었다. 바람 주먹 마법도 많은 연구 끝에 새로 개방한 것이다.
그런데 마법을 어떤 식으로 개방했든 처음에는 숙련도가 낮다. 숙련도가 낮으면 마나를 더 많이 소모한다.
복원 마법은 숙련도가 특히 더 중요하다. 방금 깨졌거나 단순히 손상된 경우는 문제가 안 되지만, 고난도 유물이라면 복원에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신성재는 그동안 복원 마법의 숙련도 향상에 공을 들였다. 40년 전에 만든 녹으로 썩어가는 스포츠카를 가져와 새 차로 복원한 것도 마법 숙련도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40년이 아니라 1,500년쯤 된 녹 덩어리 유물을 복원해야 한다. 이건 스포츠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렵다.
신성재가 마법을 사용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그의 몸에 쌓아놓은 마나가 마법에 반응했다. 마법이 마나를 동력으로 사용해 특별한 힘을 만들어냈다. 그 힘이 칼을 덮은 두꺼운 녹에 스며들었다.
녹의 분자식은 철(Fe)이 산소(O)와 결합한 형태다. 거기서 산소를 떼어내면 철만 남는다.
철검을 뒤덮은 두꺼운 녹이 산소를 뱉으며 철로 돌아갔다.
산소만 제거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이미 잔뜩 부풀어 오른 녹에서 산소만 없애면 철은 부스러기가 되어 떨어질 수 있다.
그런 식의 화학적 복원은 다른 전문가들도 할 수 있다. 그렇게 복원해서는 이 칼을 500만 파운드에 도로 팔지 못한다. 알프레드도 그런 방식으로 복원해 100만 파운드에 팔 생각이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마법은 다르다. 그건 단순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게 아니다.
마법의 힘이 녹의 시간을 되돌려 산소를 떼어내고 철 원자를 원래 있어야 할 장소로 돌려보냈다. 그 장소는 철검의 표면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녹은 점점 사라졌다. 칼은 과거에 존재했던 형태를 되찾아갔다.
그런데 복원 속도가 생각보다 느렸다. 마나도 많이 먹었다.
'예상보다 심한데?'
금속은 파손된 지 오래된 것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칼은 되돌려야 할 시간이 1,500년이다.
시간을 그만큼 되돌리는 건 아무리 숙련도를 높였어도 쉬운 일은 아니다. 마법도 복잡해지고 마나도 더 써야 한다.
'검이 만들어진 시기는 전문가들의 예측과 비슷해.'
신성재는 마법의 반응과 마나의 소모량 등으로 이 검이 만들어진 시기를 대충은 계산할 수 있다.
게다가 이 검은 평범하지 않았다. 기원을 품고 있는 특별한 유물이다. 그런 유물이 단순히 깨진 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손상됐다.
그래서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신성재가 숨을 내쉬며 검에서 손을 뗐다.
"휴우. 무려 세 시간이나 일했다."
기본 복원은 끝났다. 지금 끝낸 건 검의 녹을 철로 바꿔 칼날 표면에 돌려놓는 단계였다.
마법으로 복원했는데도 소실된 부분이 여럿 보였다. 표면이 조금 떨어져 나갔거나, 날이 조금 깨진 부분이 곳곳에 있었다. 흠집은 너무 많아서 다 세기도 어려웠다.
대신에 녹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검의 형태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음은…."
녹이 너무 심하게 슬어 아예 떨어져 나간 부분을 복원해야 한다. 그러려면 검의 원래 모습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신성재가 그 작업을 하기 전에 검에 다시 손을 댔다.
"기원부터 확인해야지."
이 검에서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검에 기원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고, 마법을 인첸트하면 아이템이 된다는 소리다.
그 기원이 얼마나 특별하고 기운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면 등급을 판별할 수 있다.
"희귀 등급이구나."
인사동이나 황학동을 뒤져도 일반 등급조차 구하기 어렵다.
기원이 깃들어 있고 기운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건 고급 등급 유물부터다. 그것만 해도 귀하다.
그런데 이건 희귀 등급이다. 이건 정말 귀한 유물이다.
신성재가 입맛을 다셨다.
"이거 진짜 좋은 건데…. 아쉽다."
현대 지구에서 희귀 등급의 검은 쓸 데가 별로 없다. 등급이 문제가 아니라, 그 형태가 검이라는 게 문제다.
반지나 팔찌라면 어울리는 마법을 인첸트해서 쓸 수 있다. 여성용 목걸이라면 은가은에게 주면 된다.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장검을 들고 다니면 높은 확률로 경찰과 만난다.
"이게 저쪽 세계에서는 참 좋은 건데 말이야."
여기서는 희귀 등급의 검을 휘두를 일이 없다.
아직 복원이 끝난 게 아니다. 이제 이 검의 1,500년 전 형태를 마법으로 끌어내서 그대로 복원해야 한다. 그리고, 이 유물이 누구의 검인지도 확인해야 한다.
신성재가 마법을 걸었다.
[크로노스의 눈]
이 보조 마법을 쓰면 유물이 큰 충격을 받았거나 기원이 생길만한 특별한 사연이 있을 때의 순간을 엿볼 수 있다.
검의 기억이 보였다. 검을 든 기사의 뒤에 아름다운 여성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역시 그 사람의 검이야."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복원한 1,500년쯤 전 유럽 유물에서 이 검을 보았다. 이 검을 들고 있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은 그때 알았다.
이 검의 주인은 그 유물의 기억에서 본 바로 그 사람이었다.
"란슬롯."
***
집으로 튀었던 은가은이 불려왔다. 자료조사는 그녀가 잘한다.
은가은이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이게 란슬롯의 검이라고?"
"어."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그 란슬롯?"
"그렇지."
"그럼 절대로 망가지지 않는다는 그…."
"그 검은 아니더라. 그거였으면 전설 등급이 나왔겠지."
은가은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아깝다!"
"기사가 검을 평생 한 자루만 쓰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이 검도 등급이 높아."
"얼마나?"
"희귀."
은가은도 희귀 등급이 얼마나 귀한 건지 안다.
"우왕! 그럼 란슬롯의 두 번째 검쯤 되는 거네?"
"아마 그렇겠지."
은가은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 복권 긁었더니 당첨된 거지?"
"복권은 아니지. 당첨될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어떻게?"
신성재가 치워둔 유물을 하나 꺼냈다. 복원 실패로 망가진 금속 장식이었다.
"1500년 전 유물인데, 복원하다 망가졌어. 이렇게 망친 건 복원 마법을 다시 써도 못 고쳐."
"이 지하실엔 그렇게 망쳐놓은 골동품이 너무 많은 거 아냐? 그래서 오빠가 돈을 그렇게 잘 버는데도 부자가 아니구나!"
"어쨌든 이건, 란슬롯과 싸운 전사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야. 갑옷에 달려있던 거지."
이 유물은 복원 도중에 망가졌다. 그래도 당시 상황을 엿볼 수는 있었다.
"이 유물을 복원할 때 본 칼의 무늬와, 경매에 올라온 칼의 엑스레이 사진에 나온 무늬가 일치하더라고."
은가은이 물개 박수를 쳤다.
"우와아. 역시 마법 대단해!"
"내가 대단한 거다."
"그럼 이제 이거 팔면 되는 거지? 영국 호구 잡아서 떼돈 번다더니 진짜였어!"
"그러려면 이게 뭔지부터 알려줘야지."
"응?"
"란슬롯의 검이라는 걸 알려줘야 영국에서 500만 파운드를 내겠지."
"그러니까 그건 어떻게…."
"네가 조사해야지?"
은가은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와…. 맛있는 거 먹자고 부르나 했더니 또 일 시키려고…."
"알바 시키는 거지. 너 연기 배우려면 학원비 필요하지? 좋은 학원은 비싸다던데."
은가은이 얼른 앞으로 다가왔다.
"은 조수 준비됐습니다! 뭐부터 조사할깝쇼?"
"이 칼이 란슬롯의 검이라는 근거. 아무런 자료도 없이 칼만 보고 알아냈다고 하면 이상하잖아."
"그럼 이것저것 수집하면서 전설 같은 거 좀 섞을까?"
"그럴듯하게 섞어."
"구라가 섞여도 뒤탈은 없지?"
"어차피 검증은 이 칼을 사는 쪽에서 철저하게 할 거야. 우리는 저쪽에서 이걸 조사하는 단계까지만 가게 하면 돼."
"진품이니까?"
"그렇지. 저쪽에서 철저히 검증할수록 진품이라는 걸 더 확실히 알겠지."
***
신성재가 알프레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번호는 유럽에서 받은 명함에 있었다.
"기사의 검을 복원했다."
신성재는 한국에 있는데 알프레드는 지구 반대편인 유럽에 있다. 그래서 프랑스 공항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여유가 좀 있어 보였다.
- 그 귀한 유물을 다 망쳐놨겠군.
"복원했다니까?"
- 사흘 만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완벽하게 복원하려면 최소한 100일은 걸린다.
신성재가 사진을 전송했다. 방금 찍은 칼 사진이었다.
"되던데?"
- 애당초 완벽한 복원이라는 건 없지. 그래도 네가 한 것처럼 사흘 만에 녹을 다 제거하는 건, 유물의 가치를 망치는 짓이다. 그건 복원이 아니야. 고철로 만든 거….
전송된 사진을 확인한 알프레드가 비명을 질렀다.
- 히이익! 이게 뭐냐!
"복원했다고."
- 사흘 만에 어떻게!
"잘?"
- 이건 말이 안 돼! 최첨단 복원 설비를 이용해도 사흘은 말이 안 된단 말이다!
"기간이 중요한가?"
- 이 퀄리티는 더 말이 안 돼! 이건 원형을 도로 살려낸 수준이잖아! 녹을 제거했는데 어떻게 원형이 이렇게 완벽하게 살아난단 말이냐!
마법을 쓰면 된다. 크로노스의 마법은 녹을 제거하는 게 아니다. 철 원자를 원래 위치로 되돌려놓는 마법이다.
녹이 슬면서 떨어져 나간 부분도 검의 기억과 비교하면 복원할 수 있다. 신성재는 녹슬기 전에 생겼던 손상은 그대로 두고 녹 때문에 생긴 손상만 복원했다.
"안 믿기지?"
- 믿으면 등신이지! 이 사기꾼 놈! 나는 속지 않는다!
"이게 뭔지는 알아볼 수 있지?"
- 원탁의 기사의 검이다!
"그중에서도 란슬롯의 검이지."
- 뭐?
"그것까지는 몰랐냐?"
- 네가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내가 믿….
"이거 영국 국립 박물관에 팔 거다."
알프레드가 잘 걸렸다는 듯이 외쳤다.
- 영국 국립 박물관에서는 철저히 검증할 거다! 가짜 유물에 속을 리 없단 말이다!
"알아. 그래서 그 박물관에 파는 거야."
알프레드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영국을 상대로 뻔히 들킬 사기를 칠 리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이다.
- 들키지 않을 만큼 잘 만든 위작이거나….
"그런 거면 다른 만만한 곳에 팔았겠지."
알프레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 설마 이게 진품이라는 거냐?
"그렇다니까?"
알프레드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신성재는 휴대폰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5분쯤 지난 후에 알프레드가 물었다.
- 얼마를 생각하는 거지?
"500만 파운드."
500만 파운드를 환전하면 80억 원이 넘는다.
- 나한테 제안했던 금액 그대로군. 그때 그 말이 농담이 아니었어. 그때 이미 이 검의 정체를 확신했어.
"당연하지."
- 전문가로 구성된 유물 분석팀을 운용하는 건가?
"내가 원래 아는 게 많아."
알프레드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 나한테 전화한 이유는?
"영국 박물관이 이걸 검증하게 하려면, 그 지역에서 이름값 있는 사람이 가서 입을 좀 털어야지."
- 내 명성이면 가능하겠지.
유럽에서 유물 중개인으로 인지도가 높은 알프레드가 나서야 박물관도 더 진지하게 대응한다.
알프레드도 그가 필요한 이유를 안다.
- 그러면 수수료는? 나는 기존 고객은 최소 10%에서 시작하고, 첫 거래는 30%를 받는다.
신성재가 히죽 웃었다.
"나 죽이려던 놈을 살려준다니까?"
- 어? 아, 아니….
그가 급히 변명했다.
- 다시 말하지만, 파리에서 그놈들을 보낸 건 사생활 사진이나 찍으라고….
"네가 고용한 놈이 나를 칼로 찌르려 했어. 그러면 네가 누굴 보냈든 결과적으로는 그게 그거지."
세드릭은 동료인 피에르가 신성재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걸 보고 잭나이프를 꺼냈다.
그때 세드릭에게 살기는 없었다. 하지만 찌르거나 베는 정도는 저지를 것처럼 보였었다. 게다가 그 모습이 영상으로 남았다.
알프레드가 지구 반대편에서 협상을 걸었다.
- 끄응. 그러면 이번 한 번은 무료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런데 네 목숨값은 되게 싸다?"
- 그러면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런 일을 원하는 거냐!
"아이쿠. 손이 미끄러져서 실수로 영상을 전송할 뻔했다."
- 지독한 놈!
"한국에 와서 란슬롯의 검을 확인하고 프랑스로 옮겨라."
***
알프레드가 결국 한국으로 날아왔다.
신성재는 집이 아니라 외부에서 란슬롯의 검을 보여주었다.
"이게 그…."
"아론다이트는 아니야."
"그 전설의 명검이 아닌 건 나도 안다!"
알프레드가 케이스에 담긴 칼을 휴대용 현미경까지 사용해 확인했다.
칼의 표면에 손상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건 복원 과정에서 생긴 손상이 아니라, 칼을 쓸 때 생길법한 손상이었다.
알프레드가 물었다.
"두 번째 검?"
"아마도?"
"진품처럼 보이는데?"
"진품이라니까."
"아니, 그 녹 덩어리를 어떻게 사흘 만에 이렇게 완벽하게…. 이건 말이 안 돼. 도대체 어떻게…."
복원은 하루에 끝냈다. 나머지 이틀은 은가은이 자료를 수집하고 전설을 적당히 각색해서 섞은 시간이다.
신성재가 말했다.
"확인했으면 프랑스로 옮기고 영국 박물관에 연락해."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로?"
"어. 프랑스."
알프레드가 물었다.
"내가 이 칼을 빼돌리면 어떻게 하려고?"
"먹튀 하면 죽겠지?"
34. 란슬롯
알프레드가 고용했던 프랑스 정보원 두 명은 신성재와 싸운 날 밤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팔다리가 부러져 아직도 병원에 있다.
알프레드가 아예 프랑스를 떠나려고 할 때는 신성재와 공항에서 마주쳤다. 심지어 택시 문을 신성재가 열어주었다.
'게다가 영상까지….'
먹튀를 하면 그 영상이 공개되고, 그러면 알프레드의 부자 고객은 다 떨어져 나간다. 칼 하나 먹자고 그럴 수는 없다.
알프레드가 불퉁한 얼굴로 투덜댔다.
"다시 말하지만, 영국 박물관은 철저한 검증을 할 거다."
"그러라고 영국에 파는 거다. 그런데 검증을 핑계로 괜히 시간만 끌면 프랑스 경매장에 올릴 거라고 전해."
"어? 프랑스?"
"란슬롯의 검을 경매에 올리면 프랑스 부자들이 굉장히 좋아하겠지?"
"그걸 노리고 이걸 프랑스로 옮기라고 한 거냐?"
"당연하잖아?"
***
알프레드가 검을 가지고 프랑스로 갔다. 그는 그 검을 프랑스의 전시관 보안 구역에 보관했다.
그런 후에 영국 국립 박물관을 찾아갔다. 은가은이 만든 자료도 박물관에 넘겼다.
박물관 담당자는 믿지 않았다.
"란슬롯의 검? 그게 말이 됩니까? 어디서 위작을 본 거겠지요."
"내가 볼 땐 진품 같았습니다만?"
"출처가 도대체 어디이기에…."
"최근에 영국 경매장에서 낙찰받아간 겁니다. 아더왕 시대의 검이지요. 난 원탁의 기사의 검인 것까진 알아냈는데…."
"그런데요?"
"그 검에 대해서만은 나보다 한 수 위인 놈이 있어서."
"흐음…. 그래서 그 검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프랑스 파리의 전시관에 맡겨뒀습니다."
"예? 우리한테 판다면서 가져오지도 않았습니까?"
"프랑스에도 고객이 있어서…. 그래도 영국 박물관에 우선권을 주려고 찾아왔습니다."
박물관 관계자들은 그 유물이 프랑스에 넘어가는 건 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전문가들을 보내 란슬롯의 검이라고 주장하는 칼을 조사했다.
전문가들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이건 말이 안 돼. 산화철에서 산소만 제거한다고 해서 이렇게 원형 그대로 돌아가진 않아."
"녹이 떨어져 나간 자국이 곳곳에 보여야 하지."
"그 부분을 그라인더로 갈아버리면 말끔하게 처리할 수 있지만…."
"이건 칼날의 표면에 실전에 사용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갈아서 매끈하게 한 게 아니야."
그래서 처음에는 정교하게 만든 위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사를 하면 할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칼이 만들어진 시기도 확실하고, 일반인은 잘 모르는 기록에 남아 있는 특징도 일치했다. 일주일 전에 녹슨 칼이 경매될 때 확보해둔 자료도 찾아봤지만 같은 칼이라는 결론만 나왔다.
전문가들은 당황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이렇게 복원한 방법이 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
박물관장이 기사의 검을 조사하고 돌아온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칼이 진짜라는 겁니까?"
"모든 방법으로 검증했는데, 거의 확실합니다."
"거의가 어느 정도입니까?"
"99%."
"놀랍군요."
"우리도 놀랐습니다."
검증한 전문가들은 살짝 흥분한 상태였다.
"어떤 기술로 이렇게 복원했는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거 복원한 사람 어디 있습니까? 꼭 만나야 한단 말입니다."
***
알프레드가 한국에 있는 신성재에게 연락했다.
"그래서 영국 전문가들이 당신을 만나야겠다고 주장한다."
- 굳이?
"묻고 싶은 게 많은가 봐."
- 그러니까 복원 노하우를 날로 먹고 싶다?
"기술 공유를 원하더군."
- 실력 차이가 이렇게 나면 공유가 아니라 일방적인 기술 제공이지.
"할 건가?"
- 하겠냐?
알프레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영국에서는 검의 매입 조건에 전문가들과 당신의 협업을 걸었다."
- 프랑스에 팔 거라고 해.
"어?"
- 안 살 거면 프랑스에 판다고 하라고. 그러려고 프랑스에 보관한 거잖아.
"아니, 그 검을 프랑스에 팔면 영국 친구들이 싫어할 텐데…."
- 내 친구는 아니잖아? 아니면 돈 다 내고 사던가. 먼저 살 기회를 줬는데 어디서 수작질이야?
***
한 달이 지났다.
영국 박물관장이 말했다.
"한 달 동안 다양한 전문가를 프랑스로 보내서 할 수 있는 조사는 다 했습니다만, 진품이라는 결론만 나왔습니다."
박물관의 예산을 집행할지 결정하기 위해 이사진이 모였다. 그중 한 명이 물었다.
"그래도 500만 파운드는 좀…. 란슬롯이 검을 한 자루만 쓴 것도 아닐 텐데."
박물관장이 화면에 고문서를 띄웠다.
"과거 기록에 나온 사건과 일치하는 특징을 찾았습니다. 이건 란슬롯의 검 중에서도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검입니다."
"그렇다고 그 검이 아론다이트는 아니잖습니까?"
"전설의 명검 아론다이트였으면 이 가격에 못 삽니다. 어림도 없지요. 이건 란슬롯의 두 번째 검입니다."
"그래도 500만 파운드는…."
"우리가 먼저 살 기회는 있지만, 가격이 안 맞으면 프랑스에 팔겠다더군요."
회의실의 분위기가 나빠졌다.
"뭐요?"
"란슬롯의 검이 나타났다고 하면 프랑스가 무척 갖고 싶어 할 겁니다. 미국에 팔 수도 있고요. 미국에는 500만 파운드쯤은 쉽게 낼 부자들이 여럿 있습니다."
"끄응…."
"그러니까 우리가 사야 합니다."
회의가 조금 더 진행됐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지요. 프랑스나 미국에 넘겨줄 순 없으니까."
***
신성재가 영국으로 날아갔다. 은가은도 따라갔다.
"우왕! 우리 영국 자주 온다!"
"일하러 온 거다. 박물관장 만나야지."
"박물관에는 피시 앤 칩스 먹고 가자!"
"그럴까?"
신성재는 복원기술 교류는 거절했지만, 란슬롯의 검을 넘기면서 박물관장을 만나는 건 동의했다. 80억 원이 넘는 돈을 받는데 얼굴 보고 거래하는 것쯤은 해줄 수 있다.
"중고품 직거래는 역시 얼굴 보고 하는 게 좋지."
"유물이 중고품이야?"
"새 건 아니잖아."
박물관장과 함께 전문가 몇 명이 신성재를 만났다. 복원기술을 묻는 사람도 있었다.
신성재가 선을 그었다.
"반도체 회사에 가서 노하우를 알려달라고 하면 산업스파이로 의심받습니다만?"
"아니, 이건 반도체가 아니라 유물인데…."
"며칠 만에 30만 파운드짜리를 500만 파운드짜리로 만든 비법을 알려달라면서요."
다른 전문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혹시 그럼 논문 발표는…."
"당연히 안 합니다."
마법을 논문으로 발표할 수는 없다.
박물관장이 말했다.
"하하하. 제임스는 그냥 물어만 본 겁니다."
"나도 그냥 대답만 했습니다."
"그런데 신성재 씨. 복원 실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 박물관에 복원이 필요한 유물이 좀 있는데, 맡아주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신성재가 소유한 유물을 박물관이 매입하는 경우라 예산이 많이 들었다.
박물관이 먼저 그 녹슨 검을 매입한 후에 복원을 의뢰했다면 500만 파운드나 썼을 리 없다. 30만 파운드에 낙찰받고 복원비로 20만 파운드를 쓴다 해도 십 분의 일 가격으로 해결할 수 있다.
신성재가 피식 웃었다.
"제가 의뢰를 가려 받습니다."
"예?"
"마음에 드는 의뢰만 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좀 바빠서요. 나중에 좋은 게 나오면 연락해보시죠. 자잘한 거 말고요."
***
영국 박물관 사람들과 헤어진 후에 은가은이 물었다.
"오빠. 왜 바쁘다고 했어?"
"의뢰 막 받아주면 버릇 나빠져."
"아항!"
"그리고 주는 대로 다 받아주면, 저 박물관에서 심하게 손상됐지만 귀중한 유물을 계속 사들여서 나한테 맡기겠지."
"그럼 좋은 거 아니야?"
"그런 건 내가 사서 팔아야 더 좋지. 이번처럼."
란슬롯의 검은 30만 파운드에 사서 500만 파운드에 팔았다. 만약 복원비만 받았으면 수익은 이십 분의 일로 줄어든다.
"우왕! 그러네! 국립 박물관은 정보력이 좋을 테니까 오빠가 불리하네!"
"그래서 영국 박물관의 의뢰는 아주 가끔 받아주려고."
가끔은 받아주긴 해야 유럽에서도 그의 이름값이 올라간다. 그러면 나중에는 알프레드를 통하지 않아도 박물관과 딜을 칠 수 있다.
두 사람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프랑스 파리로 이동했다.
은가은은 신났다.
"이번에도 풀코스로 먹고 가자!"
어차피 귀국 여객기는 내일 출발한다.
두 사람은 그날 저녁은 미슐랭 스타가 찍힌 식당에서 실컷 먹고 호텔로 돌아갔다.
오늘 돈을 많이 벌었다. 그래서 숙소는 5성급 호텔에 좋은 방을 두 개나 잡았다.
은가은이 호텔로 걸어가며 배를 통통 두드렸다.
"프랑스 요리가 양이 많나 봐. 배가 너무 불러서 더 못 먹겠어."
"추가 요리를 그렇게 많이 시켰는데 더 먹으면 사람 아니다. 직원들이 너한테 박수 쳤어. 주방장은 네가 접시 깨끗하게 비운 거 보고 정말 활짝 웃더라."
"아니야. 오빠한테 박수 친 거야."
"누가 봐도 너한테 감탄…. 음…."
"왜?"
신성재가 짧게 말했다.
"꼬리가 붙었다."
은가은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옆에서 걸으며 물었다.
"또 알프레드야?"
"이번엔 살기가 느껴지니까 알프레드는 아니겠지. 알프레드는 협잡질은 해도 살인자는 아니니까."
그래서 유물 중개인 알프레드를 부려먹기만 하고 머리 위에 불벼락을 떨어뜨리진 않았다.
"그럼 누군데?"
"이제 확인하려고."
신성재가 뒤로 돌아서며 마법을 사용했다.
[이글 아이]
신성재가 이글 아이 마법을 사용했다. 무인도에서 해적선을 격침할 때 쓴 이글 아이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정찰 마법이다.
이글 아이도 여러 버전이 있다. 지금 쓰는 건 그 파생형으로, 위가 아니라 옆에서 본다.
그들을 향해 접근하는 승합차가 보였다. 마법으로 승합차의 유리 안쪽을 확인했다.
"운전석에 하나. 뒤에 둘."
운전석은 마스크를 쓰고, 뒷좌석의 두 놈은 아예 복면을 썼다. 한 놈은 권총을, 다른 놈은 전기충격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전기 충격기라…. 납치네?"
"누구를? 앗. 설마 미녀인 나를 납치하는…."
"박물관에서 받은 돈이 목적이겠지."
"아니, 오빠가 오늘 몇 푼이나 벌었다고!"
"외국인이 500만 파운드를 벌었어. 그 돈이면 살인도 가능해."
"그러니까…. 마법사한테 달려드는 불나방?"
"그렇지."
신성재는 걷던 도중에 뒤로 돌아서서 승합차를 보고 있었다. 은가은도 대놓고 돌아보았다.
승합차에 탄 놈들은 당황했다.
"들켰다!"
"조용히 미행하라고 했잖아!"
"더 조용한 곳에서 덮쳐야 하는데 어쩔 수 없지. 지금 잡자!"
갑자기 승합차가 속도를 높였다.
두 사람은 인도에 있고 승합차는 차도로 달려왔다. 그대로 와서 차의 옆문을 열고 권총을 겨누면 전형적인 차량 납치가 된다.
하지만 마법사에게 통하는 수법은 아니다.
신성재가 달려오는 차를 보며 마법을 사용했다.
[염라의 불]
쇠를 녹이는 불이 손끝에서 만들어져 아래로 툭 떨어졌다.
[무빙]
그 불이 도로 경계를 타고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다 승합차와 가까워지는 순간, 도로 안쪽으로 휙 꺾여 들어갔다.
승합차의 앞타이어와 쇠를 녹이는 불이 접촉했다. 쇠도 녹는데 고무 타이어가 버틸 리 없다.
타이어가 뻥 소리를 내며 터졌다. 앞바퀴가 날아간 승합차는 옆으로 휙 돌다가, 건물 벽을 들이받았다.
은가은이 주먹을 쥐었다.
"잡았다!"
"아직 아니야."
차의 문이 열리더니 세 놈이 비틀거리며 내렸다. 도로에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멀리서 지나가던 사람의 시선이 그들 쪽으로 향했다.
이미 차가 부서졌다. 여기서 납치를 해봤자 아지트로 데려갈 방법이 없다.
그들이 비틀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오빠? 저놈들 도망치는데?"
"마법사를 죽이려다 실패했으면 마법사 손에 죽는 게 저쪽 세계의 방식인데…."
"도망치게 두려고?"
"아니. 시킨 놈도 찾아내서 책임을 지게 하려고."
신성재가 동전을 튕겼다. 추적 마법이 새겨진 동전이 도로 위에 바짝 붙어서 날아가다가, 도망치는 놈의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35. 엠마
은가은이 가방에서 망원 안경을 꺼냈다. 마법 공학이 적용된 그 안경에는 원거리 확대, 거리 측정, 야간 시야 같은 정찰 마법이 인첸트되어 있다.
그런데 그 기능을 쓰려면 마나가 필요하다.
"두목 잡으러 갈 때 내가 백업할게. 안경에 마나 좀 채워줘."
신성재가 손을 뻗어 마나를 채워주며 경고했다.
"가은아. 나 따라오면 험한 거 볼 수도 있다."
"나 험한 거 꽤 봤는데?"
"네 눈으로 본 건 아니지."
은가은이 큰소리쳤다.
"오빠. 나 총 맞아본 여자야. 바다에서 해적선이 폭발하는 것도 봤어. 무인도에서 조개 잡아먹으면서 한 달이나 버텼다고. 그리고 나 마법사의 조수야. 괜찮아."
어차피 은가은만 호텔에 보내는 건 위험할 수도 있다. 차라리 데려가는 게 안전하긴 하다.
은가은이 안경을 끼고 도망치는 놈들을 확인하며 물었다.
"저놈들 어디까지 보낼 거야?"
"열심히 도망쳐서 두목이 있는 곳까지 가야지."
신성재가 동전 두 개를 더 던졌다. 이번에도 위치추적 마법이 걸린 영국 동전이었다.
[무빙]
동전이 도로 위를 낮게 날아갔다. 무기로 쓸 만큼 빠르진 않지만 절뚝거리며 도망치는 놈들보다는 훨씬 빨랐다.
동전이 소리 없이 적의 뒤로 따라붙더니 위로 획 올라가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이제 세 놈 모두 추적이 가능하다. 이러면 중간에 흩어져도 한 놈도 놓치지 않는다.
신성재가 마법으로 주변을 훑었다.
[부끄럼쟁이 요정]
파리는 서울보다 CCTV가 적었다. 이 장소에는 그들을 향한 CCTV가 없었다.
"우리는 CCTV가 있는 카페에 가서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리자."
"혹시 디저트도 같이?"
"가은아? 너 풀코스에 추가 요리까지 먹었어."
"저놈들 때문에 소화가 좀 됐어."
***
프랑스 경찰 간부가 물었다.
"제라드 의원의 딸은 찾았나?"
제라드는 프랑스의 유력 정치인이다. 6시간 전에 그의 20대 딸 엠마가 실종됐다는 게 알려졌다.
다른 경찰 간부가 대답했다.
"찾고는 있습니다만, 실종된 지 사흘이나 지나서 쉽지 않습니다."
실종 사실이 알려진 건 6시간 전이지만, 실종된 건 사흘 전이다. 그때부터 어디서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신용카드 역시 사용된 적이 없다.
제라드의 딸은 혼자 사는 데다가 평소에도 며칠씩 연락이 없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겨우 몇 시간 전에야 가족들이 실종 사실을 눈치챘다.
경찰 간부가 지시했다.
"인원을 더 투입해."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다른 데서 사람을 빼서라도 최대한 투입해."
"그러면 치안 업무에 차질이 생길 겁니다."
"제라드 의원의 딸을 못 찾으면 우리 자리가 빠질 수도 있어."
"실종된 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이미 사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경찰 간부가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있길 빌어야지. 제라드 의원과 우리를 위해서라도."
***
신성재를 납치하려다가 승합차만 부숴 먹은 세 놈은 1시간 동안 파리를 돌아다녔다. 그런 후에 소규모 범죄조직 '블레트'의 아지트로 복귀했다.
그곳은 단층 건물이고 위치는 파리 외곽이며 주변은 공터였다.
두목이 화를 냈다.
"이 등신 새끼들아! 납치를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 간단한 걸 실패하나!"
승합차를 운전했던 조직원이 변명했다.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갑자기 타이어가 터졌습니다."
두목이 권총을 꺼내 부하들을 향해 휘둘렀다.
"닥쳐! 이거 500만 파운드짜리 일이란 말이다!"
총구가 자신을 향할 때마다 부하들은 움찔했다.
두목은 500만 파운드가 필요했다.
'하필 납치한 년이 제라드 의원의 딸일 줄이야.'
그 조직이 엠마를 납치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예쁜 여자를 발견했는데 혼자 살고 혼자 돌아다녔다. 마침 그런 여자가 필요했다.
그런데 납치해놓고 보니 그 여자가 프랑스의 유력 정치인인 제라드 의원의 딸이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7시간 전부터 경찰이 파리를 들쑤시고 다녔다.
프랑스 경찰이 인원과 자원을 충분히 투입해 수사하면 어지간한 범죄자는 잡힌다. 모든 사건에 그런 수사력을 투입하지는 못할 뿐이다.
그런데 지금 파리 경찰은 진심으로 총력을 기울여 엠마 실종 사건을 조사했다. 수색 1시간 만에 블레트의 조직원들도 그 소문을 들을 정도로 대규모 수사가 진행 중이다.
'우리가 납치했다는 게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야.'
"뒤탈 없는 년을 납치했어야 했는데…."
엠마를 지금 풀어준다고 해서 경찰이 수사를 멈출 리가 없다. 목격자가 있으면 더 빨리 납치범을 찾아낼 수 있다.
그래서 두목은 다른 나라로 도망칠 궁리를 했다.
프랑스 국경에는 철조망이 없다. 튀는 건 어렵지 않다.
'내 돈만 안 묶여 있었어도.'
지금 조직의 돈은 대부분 묶여 있다. 폭탄과 무기를 사는 데도 많이 썼다. 당장 들고 튈 수 있는 현금은 얼마 안 된다.
그러다 500만 파운드의 현금이 움직인다는 소문을 들었다. 심지어 그 돈을 받은 건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 사람이다.
두목은 그 돈만 빼앗으면 다른 나라에 가서 다시 조직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두목이 권총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난 그 돈이 필요하단 말이다!"
부하가 겁을 집어먹었다.
"다시 잡아오겠습니다!"
"지금 당장 필요하다고!"
"자정쯤에 그놈이 있는 호텔에 침입해서 처리하겠습니다."
"오늘 밤에?"
"예!"
"돈이 많은 놈이니까 좋은 호텔을 쓸 텐데, 어떻게 침입하게?"
"그런 호텔에서 도둑질하는 놈을 압니다. 그놈을 데려와서 앞장세우겠습니다."
두목이 인상을 조금 풀었다.
"타깃이 도망치지 않아야 하는데?"
"아까 일은 그냥 단순한 교통사고로 알 겁니다. 그놈을 덮치기 전에 타이어가 터져서 차가 벽을 들이받았습니다."
"미행당하진 않았다고 했지?"
"저희는 한 시간 동안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며 미행이 없는지 확인하고 왔습니다."
두목의 표정이 풀렸다.
"타깃이 언제 귀국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잡아와."
"알겠습니다."
***
범죄조직 블레트는 그들의 아지트에 외부를 감시할 수 있는 CCTV를 설치해두었다.
그런데 그 CCTV가 모든 방향을 동시에 보는 건 아니다. 사각지대가 존재했다.
신성재가 건물 벽에 내부의 소리를 듣는 마법진을 새겼다. 두목과 부하들이 건물 안에서 떠드는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프랑스어로 떠들어대니까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좀 떨어진 곳에서 망을 보던 은가은이 마법 공학 통신기로 물었다.
- 봉쥬르?
"너도 프랑스어는 모르잖아."
- 그럼 도청한 거 아무 소용 없어? 마법 별거 없네!
"그래도 한 마디는 알아들었다."
- 뭔데?
"호텔. 여러 번 말하더라."
- 엥? 우리가 오늘 밤에 호텔에서 자는데?
신성재는 오늘 란슬롯의 검을 팔아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래서 5성급 호텔에 방을 두 개나 잡았다.
- 어머어. 무서워라. 그럼 이제 어떻게 해? 그 건물 폭삭 무너뜨리나?
"그러려고 했는데…."
- 마음 약해진 거야?
"아니.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네?"
- 응? 그 패거리에 여자도 있어?
"이 여자는 프랑스어와 영어를 다 쓰는데, '썸바디 헬프 미'라고 하더라."
- 앗. 나 그 말 알아!
"네가 무인도에서 해적선한테 했던 말이다."
- 그 여자 구해주자!
"그러려고."
- 근데 조심해.
"마법사 걱정은 하는 거 아니다."
신성재가 벽에 마법진을 하나 더 새겼다.
그런 후에 CCTV의 사각지대를 따라 옆으로 이동했다.
그 건물의 창문 유리에는 검은색 시트지가 붙어 있어서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신성재가 손을 얼굴에 댔다. 얇은 천이 복면처럼 얼굴을 덮었다. 이러면 구출 대상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준비를 마친 신성재가 유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빵."
유리가 폭발했다. 파편이 건물 안쪽으로 쏟아졌다.
시트지 때문에 파편의 위력은 감소했지만, 조직원들은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신성재가 건물 내부로 들어가며 영어로 물었다.
"야. 나 찾냐?"
블레트 조직원 일곱 명의 시선이 신성재를 향했다.
두목도 인상을 쓰며 영어를 사용했다.
"누구냐?"
"손님은 아니겠지?"
"여기는 왜 찾아왔지?"
신성재가 아까 납치를 시도한 부하들을 가리켰다.
"쟤들을 미행했지."
두목이 부하들에게 화를 벌컥 냈다.
"이 등신 새끼들아! 하루에 몇 번이나 실수하는 거냐!"
신성재가 일곱 놈을 둘러보았다.
"조직원은 이게 다냐? 이 중에 운 좋은 놈은 몇이나 되려나."
두목이 부하에게 눈짓했다. 부하 중 하나가 CCTV 모니터를 확인했다.
"주변엔 아무도 없습니다."
두목이 명령을 내렸다.
"그럼 당장 저 새끼 잡아!"
옷 속에 손을 넣고 있던 세 놈이 권총을 꺼냈다.
여기가 파리 외곽이지만, 지금처럼 경찰이 파리 전체를 들쑤시고 다니는 때에 총소리를 내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래서 세 놈은 총이 아니라 칼을 꺼내서 신성재 쪽으로 다가왔다.
두목이 제안했다.
"순순히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지."
"그걸 믿으라고?"
"시체 치우는 것도 일이니까."
"경험이 많나 보다?"
"아주 많지."
"어디 보자. 넷이 권총, 셋이 칼이라…. 운 좋은 놈은 없겠어."
신성재가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발로 툭 찼다. 그러면서 마법을 걸었다.
[무빙]
[바람 손]
유리 조각이 떠오르면서 제일 가까운 적을 향해 날아갔다. 단검을 가진 놈이었다.
그놈이 대응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아래에서 위로 솟아올라 목에 꽂혔다.
"컥!"
뒤로 넘어가는 놈이 놓치는 단검을 신성재가 손으로 툭 밀어쳤다.
[바람 손]
단검이 바로 뒤에 있던 놈에게 날아가 가슴에 꽂혔다.
"컥!"
세 번째 놈은 깜짝 놀라서 신성재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으아아!"
그 단검이 신성재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바람 마법에 막혀 속도가 느려졌다. 신성재가 느려진 단검을 손으로 잡았다.
두목이 소리를 질렀다.
"킬러다! 쏴!"
두목은 총소리가 나는 걸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당장 쏘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걸 깨달았다.
부하 셋이 권총을 들어 신성재를 조준했다.
신성재가 단검을 던졌다. 바람 마법이 단검의 방향을 보조하고 속도를 높였다. 날아간 단검이 권총을 조준한 놈의 가슴에 푹 박혔다.
"컥!"
셋을 잡았지만 적은 아직 넷이나 남았다. 빈손이었던 놈도 황급히 권총을 뽑았다.
신성재가 손가락을 튕겼다. 외벽에 새겨놓은 마법진이 반응했다.
[라이트닝 쇼크]
강력한 전자기 충격이 건물을 덮쳤다. 전등이 모조리 나갔다. 환하던 곳이 갑자기 암흑으로 변했다. 조직원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 뭐야! 어디야!"
"그냥 갈겨!"
적은 신성재가 서 있던 곳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 몇 발이 벽에 박혔다.
신성재인 이미 그들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바람 주먹]
제일 뒤에서 총을 쏜 놈의 목에 바람 주먹이 꽂혔다.
"켁!"
신성재가 그놈이 떨어뜨리는 권총을 잡아채 방아쇠를 당겼다. 전투보조 마법 덕분에 어둠 속이 대낮처럼 보였다.
신성재가 가까이 있던 놈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케엑!"
"뒤다!"
뒤라고 소리 지르던 놈에게도 총알을 두 발 먹였다. 그놈도 총에 맞아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부하들이 전멸했다. 이제 두목만 남았다.
방금 사격으로 신성재의 위치가 노출됐다.
두목은 신성재 쪽으로 방아쇠를 당기며 지하 계단으로 뛰어들었다.
신성재가 지하실로 따라 내려가며 말했다.
"이제 너 하나 남았다."
지하실은 일렉트릭 쇼크의 영향을 덜 받아서 전등이 터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부가 밝았다.
지하실에 갇혀 있는 20대 여자가 보였다.
그녀가 프랑스어로 외쳤다.
"소베 므와!"
"영어로 합시다."
"살려주세요!"
"그러려고 오긴 했는데, 누구?"
"엠마예요!"
"엠마. 여기 왜 있는 겁니까?"
"납치됐어요. 사흘 전에요."
두목이 권총 총구를 엠마의 머리에 댄 채로 신성재에게 소리를 질렀다.
"총 버려!"
"내가 왜?"
"버리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는다!"
"처음 보는 여자를 위해서 나보고 죽으라고?"
"뭐? 넌 이 여자를 구출하러 온 거…."
"아니야."
"제라드 의원이 보낸 정부 요원…."
"아니라고."
두목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속을 줄 아나! 총 버려! 아니면 이 여자는 죽는다!"
신성재가 권총을 옆쪽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러면 되냐?"
두목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가 왼손으로 엠마를 붙잡은 채로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멍청한 새끼! 여자 때문에 죽…."
엠마가 갑자기 두목의 오른팔을 붙잡고 바깥으로 힘껏 밀었다.
"지금이에요!"
신성재가 느긋하게 말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엠마는 그가 마법사라는 걸 모른다. 그래서 두목의 팔을 붙잡고 시간을 벌려고 했다.
"빠, 빨리 쏘세…."
두목이 엠마를 옆으로 밀쳤다.
"비켜!"
"꺄악!"
엠마가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두목이 옆으로 밀려난 오른팔을 앞으로 당겨 신성재를 조준하려고 했다.
신성재가 옆에 올려놓은 권총을 집으며 마법을 썼다.
[바람 손]
두목의 오른팔이 느려졌다. 두목의 눈이 커졌다.
"이게 어떻…."
신성재가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9mm 총탄 세 발이 두목의 몸에 퍽퍽 꽂혔다.
36. 제라드
9mm 권총탄 세 발이 두목의 몸에 퍽퍽 꽂혔다.
"케엑!"
두목이 권총을 놓치며 뒤로 나자빠졌다. 신성재가 쓰러진 놈에게 두 발을 더 쏘았다.
그런 후에 엠마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두목의 팔을 붙잡았다가 옆으로 나가떨어진 상태였다.
"네. 괜찮…."
그녀가 일어나려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발목이 아파요."
일어나려고 하니 발목에서 통증이 확 올라왔다. 부러진 건 아니지만 제대로 삐었다.
"좀 봅시다."
신성재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발목에 손을 댔다.
신성재는 의사가 아니다. 만져보는 것만으로는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는 모른다.
마법을 쓰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나가 어떻게 움직이고 마법이 어디를 복원하는지 알 수 있다.
신성재가 그녀의 발목을 손으로 감싸 잡으며 마법을 사용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방금 다친 상처에는 이 마법이 정말 잘 듣는다. 마법으로 총상도 복원하는데 단순히 삔 것 정도는 더 간단하다.
마법이 그녀의 발목을 손상되기 전 상태로 복원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이제 하나도 안 아파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비전으로 전해지는 신비한 마사지?"
신성재가 발목에서 손을 떼고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가 일어나며 말했다.
"진짜 안 아파요."
"그러면 걸을 수 있겠네. 나갑시다."
"네, 네!"
"1층 상태가 좀 험하니까 이해하시고."
"괜찮아요. 납치된 것보다 험하겠어요?"
"소지품 가져갈 거 있으면 챙기시고."
"아! 네!"
엠마가 고개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성재가 그녀를 붙잡았다.
엠마는 당황했다.
"왜…."
"그쪽엔 험한 게 있어서."
그쪽에 두목의 시체가 있다.
"아!"
그녀가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려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있는 상자를 열더니 안에 있는 물건들을 챙겼다. 그러다 아예 상자를 들고 나왔다.
"다른 피해자도 있나 봐요. 이 상자에 소지품을 모아놨더라고요."
엠마는 지난 사흘 동안 갇혀 있던 지하실이 싫었다.
"저 먼저 나갈게요!"
그녀가 1층으로 뛰어 올라가다가 놀라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흡!"
1층에도 시체가 많았다.
신성재가 따라 올라가며 말했다.
"험하다니까."
"이, 이렇게 많은 적과 싸운 거예요? 혼자서요?"
"그러니까 지하실로 내려갈 수 있었겠지요?"
"아…."
신성재가 옆을 보았다. 가방이 하나 있었다. 가방 한쪽이 조금 열려 있었다.
"이놈들한테 폭탄이 있던데, 저것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아뇨. 저는 계속 지하실에 갇혀 있어서요."
그녀도 폭탄을 보며 추측했다.
"그런데 저한테 시키는 일만 잘하면 보내준다고 했어요. 물론 전 믿지 않았지만요. 그게 혹시 저 폭탄이랑 관련된 거 아니었을까요?"
"납치만 하는 놈들은 아니었군요."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그럽시다."
두 사람이 건물을 나섰다. 엠마는 빠른 속도로 걸었다. 발목은 멀쩡했다.
신성재가 엠마를 따라가면서 왼손을 아래로 내렸다.
[염라의 불]
쇠를 녹이는 불이 손에서 만들어져 아래로 툭 떨어졌다가 건물 쪽으로 이동했다. 그 불이 건물 현관을 통해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불꽃은 실내를 날아 구석에 있는 폭탄 가방 안쪽으로 쏙 들어갔다.
신성재가 말했다.
"오늘은 운 좋은 놈이 없네."
폭탄이 건물 안에서 폭발했다. 불기둥이 건물의 모든 창문에서 쏟아져나왔다.
엠마가 비명을 질렀다.
"꺄악!"
신성재가 말했다.
"저런! 그 폭탄이 총격전 도중에 총에 맞았나 보네요."
"아! 그래서 지금 터진 건가요?"
"계속 걸어요. 여긴 위험하니까."
"그, 그러면 요원님은 저를 구하다가 죽을 수도…. 그것도 세 번이나…."
그녀는 신성재가 그녀를 위해 세 번이나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지하실에서 한 번, 1층의 조직원들과 싸울 때 한 번, 그리고 폭탄 때문에 한 번.'
신성재가 말했다.
"안 죽었으니까 됐습니다."
엠마가 신성재의 얼굴을 보았다. 검은색 천이 복면처럼 얼굴을 덮고 있었다. 보이는 건 눈동자밖에 없었다.
"저기…. 요원님 이름이 뭐예요?"
"궁금해요?"
"네."
"가르쳐주면 경찰도 알겠지요?"
"네? 아! 그건 아빠가 해결해줄 수 있어요!"
"이름조차 모르면 해결해주기 더 쉽겠군요."
"그, 그야…. 그럼 제가 어떻게든 사례라도…."
그녀가 상자를 열었다.
"제가 지금 가진 게 이것밖에 없긴 한데요."
신성재가 상자를 보았다.
"뭐, 딱히…."
상자 속에 있는 물건 중에 오래된 목걸이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은으로 만든 사슬 아래에 동그란 장식이 걸려있었다. 그 장식의 한가운데에 작은 보석이 보였다.
그가 그 목걸이를 만져보았다.
'유물이다.'
평범한 유물이 아니다.
'기원을 품고 있다.'
신성재가 그 목걸이를 집었다.
"이건 어디서 났습니까?"
"집안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럼 난 이거 하나면 됩니다."
"더 가져가셔도 돼요."
"충분합니다."
신성재가 그녀의 발밑에 권총을 내려놓았다.
"수상한 놈이 오면 총을 주워서 저기 숨어요. 경찰이 오면 총은 놔두고 두 팔을 위로 번쩍 들어요."
"네!"
"어? 저기 저거!"
신성재가 그녀의 뒤를 가리켰다. 그녀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네? 뭔데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다시 신성재 쪽으로 돌아섰다.
신성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바람이 휑하니 불었다.
"아…."
외곽이긴 하지만 파리에서 폭탄이 터졌다. 경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몰려왔다.
엠마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경찰차의 헤드라이트가 그녀를 비추었다.
***
신성재가 말했다.
"끝났다. 가자."
은가은이 물었다.
"안 다쳤어?"
"다쳤겠냐?"
"근데 그 여자는 엄청 챙겨주더라? 나도 좀 챙겨줘 봐라."
"밥은 잘 챙겨주잖아."
"그건 인정."
은가은이 안경을 벗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건 뭐야?"
신성재가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엠마의 목숨을 구해준 값."
"왜 그걸 골랐냐고. 비싼 거야?"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야. 이거 기원을 품은 유물이다."
"우왕! 엄청 귀한 거 챙겼다! 개꿀이다!"
"빌런을 잡고 아이템도 챙겼으니까 돌아가자."
"응!"
***
이미 프랑스 파리의 경찰에게 엠마의 사진이 배포된 상태였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 중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곧바로 무전이 날아갔다.
"엠마를 찾았습니다!"
- 살아있나?
"네. 지금 두 손을 번쩍 들고 있습니다."
- 휴우. 거기 어디야? 지금 내가…. 아니다. 일단 병원부터 보내!
***
신성재와 은가은은 호텔로 이동했다.
그 시간에 엠마는 병원으로 보내졌다. 사흘이나 납치된 상태라 병원에서 건강상태부터 점검했다.
한밤중에 그녀의 가족들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제라드 의원이 두 손을 위로 들며 외쳤다.
"엠마! 살아있었어! 오! 감사합니다!"
엠마는 주변에 제라드만 있을 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가 보낸 사람이야?"
"응? 그게 무슨 말이냐?"
"나 구해준 사람."
"내가 경찰을 총동원했지!"
"경찰 아니라던데…. 프랑스어가 아니라 영어 쓰고."
"어?"
"난 아빠가 CIA나 MI6 요원이라도 보낸 줄 알았는데…."
제라드가 그녀의 앞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인지 자세히 들어보자. 누가 널 구해줬다고?"
"그러니까, 내가 지하실에 갇혀 있을 때 위층에서 총소리가…."
***
파리에서 폭탄이 터졌다. 한적한 곳에 있는 건물 내부가 박살 났다. 유력 정치인 제라드의 딸 엠마가 그곳에 납치돼 갇혀 있다가 구출됐다.
프랑스 경찰은 폭탄이 터진 현장을 철저히 조사했다.
경감이 제라드 의원을 찾아가 수사 상황을 보고했다.
제라드가 물었다.
"내가 궁금한 건 그놈들이 누구냐는 겁니다."
"그곳은 블레트라는 신흥 조직의 아지트였습니다."
"블레트?"
"예. 무너진 잔해에서 조직에 관한 단서와 총기를 여럿 찾았습니다. 권총은 물론이고 기관단총도 있었습니다. 물론 다 파괴된 상태였습니다만…."
제라드가 서늘한 눈빛으로 물었다.
"생존자는 있습니까?"
"없습니다. 건물 내부에 조직원 일곱 명이 있었는데 다 죽었습니다."
"다른 조직원은 없습니까?"
"조사하는 중입니다."
"조금이라도 관계된 놈은 모조리 체포하시죠."
"당연히 그러겠습니다!"
***
프랑스 TV 뉴스에서 그 사건을 다루었다.
아침에 일어나 호텔 조식 서비스를 먹고 방으로 돌아온 은가은이 말했다.
"프랑스 뉴스라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화면만 보고 대충 이해하면 되잖아."
"오빠. 통역마법은 없어?"
"있겠냐? 그런 건 없다고 여러 번 말했다."
"통역마법만 있었어도 수능 때 영어점수는 날로 먹었을 텐데."
"내가 잘 가르쳐서 네가 그만큼이라도 받은 거다."
"뉴스에서 뭐라고 하는지 궁금한데…."
"인터넷에 올라온 프랑스어 기사를 자동번역 기능을 써서 읽어."
"앗! 그러면 되겠다."
***
프랑스 경찰이 제라드 의원에게 새로 알아낸 것을 설명했다.
"한 달 전에 현금 수송 차량을 작은 폭탄으로 공격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배달부로 이용된 여자는 사망했습니다."
"그런데요?"
"따님이 가져오신 소지품 중에 그때 사망한 여자의 것이 있습니다. 당시에 그 여자도 실종 상태였습니다."
"잠깐. 그러면 설마…."
"이번에는 현금이나 귀금속이 보관된 시설을 노리고 대량의 폭탄을 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따님도 그래서 납치를…."
제라드가 화난 얼굴로 물었다.
"다른 조직원은 찾았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조직원이 사망했습니다."
"그놈들이 천벌을 받았군요. 가만, 천벌이 아닌가?"
제라드 의원이 물었다.
"누가 그놈들을 죽이고 내 딸을 구출했는지는 알아냈습니까?"
"죄송합니다. 의원님. 그 사람은 유럽 어딘가에 있겠지만, 단서가 없어서…."
***
신성재가 한국으로 가는 여객기에서 라면을 먹으며 말했다.
"당분간 영국 박물관 의뢰는 받지 말까?"
은가은이 옆에서 한 입만을 시도하다가 거절당하고 새 라면을 주문한 후에 물었다.
"왜?"
"내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의 출처가 박물관일 테니까. 란슬롯의 검을 프랑스에 안 팔고 영국에 팔아줬는데 이것들이 통수를 쳐?"
"하지만 우리를 납치해서 돈을 빼앗고 죽이려던 건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 놈들인데?"
"어…. 그러면 영국 박물관의 복원 의뢰는 할증 요금 붙여서 받아야겠다."
***
영국 국회의원이 박물관에 찾아와 예산을 많이 쓴 이유를 들었다. 그가 유리 상자 속에 전시된 란슬롯의 검을 보며 물었다.
"이 유물을 도로 사 오는데 500만 파운드가 들었다는 겁니까?"
500만 파운드면 80억 원이 넘는 돈이다.
"30만 파운드에 경매로 판 유물을 열 배가 넘는 돈을 주고 도로 사 와요? 그것도 겨우 한 달 만에?"
박물관장이 옆에서 설명했다.
"이 검의 복원 전 가치는 30만 파운드보다도 못했습니다."
"복원이야 전문업체에 맡기면 되잖습니까?"
"유럽의 복원 업체 여러 곳에 복원 전후의 자료를 보여주고 가능한지 물었습니다."
"결과는요?"
"절반은 우리 박물관을 사기꾼 취급하더군요. 불가능한 걸 보여준다면서요. 다른 절반은 복원한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의원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러면 처음부터 신성재란 사람에게 복원을 맡겼으면 되잖습니까?"
"그 녹슨 검이 란슬롯의 검이라는 걸 알아낸 사람이 신성재입니다. 그 전에는 누가 쓰던 검인지 몰랐습니다. 복원만 잘하는 게 아니라 유물에 관한 지식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500만 파운드는 좀…."
"몇 년 전에 동급 유물이 경매장에서 700만 파운드에 팔렸습니다. 신성재는 영국에서 산 칼이라 영국에 팔아준 거라더군요."
"우리가 안 샀으면요?"
"프랑스 경매장에 올리겠다고 했습니다."
"란슬롯의 검…. 프랑스 놈들이 환장하면서 샀겠군. 젠장."
"예. 사실 우리는 200만 파운드쯤 이익을 본 겁니다. 그리고…."
박물관장이 전시된 검을 보며 말했다.
"이걸 보십시오. 그 녹슨 쇠막대기를 복원해 이렇게 완벽한 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마치 마법 같은 실력입니다."
***
신성재가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저택 앞에 도착했다.
그는 이 집값을 마련하기 위해 란슬롯의 검을 낙찰받고 마법으로 복원해 영국에 도로 팔았다.
은가은이 물었다.
"오빠. 돈은 충분하지?"
"칼 판 돈에서 세금 제하고 이것저것 다 떼도 50억 넘게 남았다. 이 집이 50억이니까 돈은 남아."
"그럼 현금박치기로 지르겠네? 언제 사?"
"지금 사려고."
37. 연금
은가은이 서교동 저택을 보며 말했다.
"칼 팔아서 집을 사니까, 여기서 밥 먹으면 칼밥 먹는 건가?"
"그러겠냐?"
"그런데 이 집은 어떻게 사?"
"부동산 가야지."
두 사람은 제일 가까운 부동산에 들렀다.
"그 집을 보시게요? 그러려면 집주인과 일정을 조정…."
"사려고요."
"예?"
"지금 사려고요."
"아니, 집을 안 보시고요?"
"겉에서 본 것과 도면이면 충분합니다."
1층과 2층 내부는 이미 이글 아이 마법으로 훑어보았다. 지하실은 도면으로 확인했다.
건물 내부 문제는 고치면 된다. 지하실은 아예 개조해야 한다.
어차피 중요한 건 그 땅이다. 그 땅은 마법사의 공방을 만들기 딱 좋은 기운을 품고 있었다.
부동산 사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집, 50억에 나와 있습니다만?"
"네. 전에 전화로 문의했을 때 그렇다고 하셨죠."
사장의 얼굴이 대놓고 밝아졌다. 손님이 집을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사겠다고 했다. 젊은 사람이 그렇게 말해서 처음엔 뭔가 착각했나 했지만,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집주인에게 지금 연락하겠습니다."
계약은 바로 하지는 못했다. 집주인이 지금 외국에 있고 1주일 후에나 귀국한다.
그래서 국제전화로 간단히 통화한 후에 정식 계약은 1주일 후에 하기로 했다. 그전에 가계약금 명목으로 1억 원을 송금했다.
부동산을 나온 후에 은가은이 투덜댔다.
"오늘 당장 마당에서 고기 파티할 줄 알았는데."
"해도 돼."
"어?"
"1억 먼저 보냈잖아. 대신에 도어락 비번을 받았어. 이사 오는 것만 아니면 간단하게는 써도 된대."
"우왕! 진짜?"
"집이 너무 오래 안 팔려서 고민이 많았나 보더라. 조만간 경매에 넘어갈 상황이어서, 고맙다고 편의 봐준대."
"그럼 고기 구워 먹자! 무인도에서처럼!"
신성재와 은가은이 근처 마트에서 산 캠핑 도구를 저택 마당에 펼쳐놓았다.
"오빠. 무인도에도 이런 거 있었으면 편했겠다. 우린 그냥 돌 모아놓고 구웠잖아."
신성재가 마법의 불로 고기를 순식간에 구웠다.
"가은아. 그때는 장비가 문제가 아니었잖아."
"하긴. 그 섬은 먹을 게 너무 없었…. 와. 고기 맛있어! 역시 마법 최고!"
"너한테 뭐든 맛이 없겠냐."
"근데 이 집은 그냥 이대로 쓸 거야?"
"다 뜯어고쳐야지."
특히 지하실은 특이한 구조로 개조해야 한다. 그걸 원하는 대로 공사해줄 곳이 필요하다.
"박성훈 사장님이라고, 예전에 시계 수리해주고 알게 된 분이 있어."
박성훈의 증조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한량으로 살다가 딱 한 번 독립운동가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신성재가 박성훈의 회중시계를 고쳐주면서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박 사장님이 나중에 신세 갚는다고 했으니까, 이번에 갚게 하려고."
은가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공짜로 다 고쳐주는 거야?"
"공짜라니?"
"아니야?"
"개조 비용은 제대로 내야지. 공짜로 하면 부실공사 된다."
"돈은? 설마 우리 포붕이를 팔려는 거 아니지?"
지금 이 집 앞에는 84년식 한정판 스포츠카가 세워져 있다. 그건 폐차 직전이었던 차를 신성재가 숙련도 작업용으로 한땀 한땀 복원해 새것처럼 바꿔놓은 것이다.
덕분에 복원 마법의 숙련도가 많이 오르긴 했다.
"내 차는 네 포붕이가 아니야. 그리고 어차피 남에게 팔면 안돼."
공들여 고친 것이라 아깝기도 하지만, 저건 다른 이유 때문에라도 팔면 안 된다.
신성재는 저 차에 마법을 여러 개 인첸트했다. 그러느라 현대 기술로는 할 리가 없는 형태로 변형된 부품들이 생겼다. 누가 저 차를 사서 뜯어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 차 안 팔아도, 칼 팔고 받은 돈이 많이 남아."
그 돈에서 세금 내고 이것저것 떼고 남은 돈으로 이 집을 사도, 돈이 꽤 많이 남는다. 공사비 정도는 얼마든지 낼 수 있다.
은가은이 말했다.
"난 뭐 우리 포붕이만 안 팔면 돼."
"네 포붕이 아니라고."
은가은이 마당을 보며 말했다.
"근데 학교 친구들 데려와서 이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어도 돼?"
"되겠냐?"
마법사의 집에 아무나 들일 수는 없다.
"그럼 나만 와서 구워 먹어야겠다."
은가은은 신성재가 마법사라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이 집에 들어올 때 허락을 받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래도 되는 건 은가은뿐이다.
갑자기 초대하지도 않은 손님들이 그 집을 찾아왔다. 대문의 도어락에 번호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렸다.
번호는 신성재가 이미 바꿔놓았다. 다른 부동산에서 집을 보러 오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곧바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 새끼야! 문 열어!"
은가은이 물었다.
"오빠. 친구 불렀어?"
"너 찾아온 거 아니냐?"
"난 저렇게 욕하는 새끼는 친구로 안 두는데?"
"욕은 너만 해야 하는구나."
이 집에는 아직 방어나 경계 마법진이 설치되지 않았다.
신성재가 정찰 마법을 직접 사용했다.
[이글 아이]
즉시 대문 앞 상황이 보였다.
"양아치처럼 보이는데?"
밖에 있는 남자가 문을 걷어찼다.
"문 열라고 이 새끼야!"
"양아치 맞네."
신성재가 마당에 앉아서 손가락을 까닥였다. 대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됐다.
"대문 도어락부터 바꿔야겠어. 저건 버튼만 누르면 열리잖아."
"마법 공학 도어락으로 바꿔."
"그건 마나가 필요해서 너는 못 쓴다?"
"앗. 그럼 그냥 도어락으로 해."
대문이 열리면서 양아치 셋이 들어왔다. 두목이 신성재를 향해 걸어오며 물었다.
"너 누구 허락받고 이 집을 사려고 거야!"
"집주인?"
"야 이 새끼야. 좋은 말로 할 때 가계약 그거 취소해라."
"새끼가 좋은 말은 아니지."
"가계약금 그깟 십만 원 때문에 처맞지 말고 빨리 취소하라고!"
"1억."
"어? 뭐?"
"1억 걸었다고. 네가 물어줄 거냐? 그래도 취소 안 할 거지만."
"이 새끼가 어디서 구라를 쳐! 누가 가계약에 1억을 걸어!"
은가은이 옆에서 말했다.
"자꾸 새끼 거리니까 듣는 새끼 기분 나쁘다."
"넌 뭐야! 이 쌍…."
신성재가 마당에 굴러다니는 자갈을 발끝으로 툭 찼다.
[무빙]
돌이 위로 떠오르며 양아치를 향해 날아가 이마를 때렸다.
"악!"
무빙 마법만 사용한 데다가 칼이 아니라 자갈이라 그것만으로 상대를 제압할 순 없다. 그래도 비명이 절로 나올 만큼 아프긴 했다.
양아치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아아!"
은가은이 물었다.
"오빠. 쟤들을 이 마당에 묻고 벚나무를 싶으면 꽃이 많이 필까?"
"넌 왜 무서운 말을 하고 그러냐?"
"오빠가 무서운 게 있어?"
"난 네가 무섭지. 또 뭘 뜯어갈지 모르니까."
이마를 맞은 양아치가 소리를 질렀다.
"씨발. 이것들이! 야! 조져!"
양아치 셋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다가왔다.
은가은이 세 놈을 걱정해줬다.
"쟤들 저러면 안 되는데. 오빠한테 덤비면 큰일 나는데. 난 구경이나…."
신성재가 은가은의 어깨에 손을 대고 마법을 걸었다. 그녀가 물었다.
"엥? 나한테 지금 뭐 했어?"
전투 보조 마법을 걸었다.
"근력과 민첩을 높였으니까 밥값 해라."
"아싸아! 하난 내가 잡을게!"
신성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거 유지 시간 짧다."
양아치 하나가 신성재를 향해 달려와 주먹을 휘둘렀다.
느렸다. 신성재가 그 손을 툭 쳐내고 상대의 배를 걷어찼다.
"케엑!"
양아치의 몸이 위로 떠오르다가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다른 두 놈은 당황했다.
"어?"
은가은이 자기 키만큼 높게 점프해 이단옆차기를 날렸다.
"케에엑!"
"가은아. 그러다 죽어."
"앗! 힘 조절해야 하는데."
"아니. 네가 근육통으로 죽는다고. 그 힘은 대가가 있어."
"뭐야! 그런 건 미리 말해줬어야지!"
마법으로 근력과 민첩을 높였다고 해서 신체의 내구도까지 높아지는 건 아니다.
신성재는 마법사니까 그 부담을 실시간으로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마법을 못 쓰는 은가은은 이단옆차기의 반동을 근육통으로 감당해야 한다.
조금 전까지 기세 좋게 욕하던 양아치는 제일 뒤에서 당황한 얼굴로 주춤거렸다.
신성재가 양아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넌 왜 가만히 서 있냐?"
"네? 네?"
"머리 박아야지?"
"아, 아니…."
양아치가 눈알을 굴리며 대문 밖으로 혼자 도망칠 궁리를 했다. 하지만 대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박아."
"예!"
양아치가 마당에 머리를 박았다.
신성재가 물었다.
"이 집이 안 팔린 이유가 너희들 때문이냐?"
"아, 아니요. 저희는 최근 일 년 정도만…."
"왜?"
양아치가 권력자를 팔았다.
"제가 국회의원님의 보좌관님을 아는데요. 집 보러 온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어주면 용돈을 준다고…."
"왜?"
"그건 저도 잘…."
"밤새도록 박고 싶냐?"
"이 집이 아주 옛날에 잘 나갔던 정치인의 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추측으로는, 자기가 이 집을 먹고 후계자가 된 것처럼 주장하려고 하는 게 아닐지…."
"그런데 이 집이 너무 비싸다?"
"예. 50억이나 하니까…."
"그래서 경매에 넘어가면 수작 부려서 싸게 먹으려고? 먹은 후엔 선거에 한 번 써먹고, 선거 끝나면 싸게 산 집을 비싸게 팔아서 돈 또 벌고?"
"그것까지는 저도 잘…."
"나라 꼴 잘 돌아간다. 그런 놈이 정치를 다 하네."
"그러니까 저는 거기까지는 잘…."
"계속 박아."
"네!"
양아치 두 놈도 시간이 지나서 깨어났다. 신성재가 세 놈을 쫓아냈다.
쫓아내기 전에 양아치들이 집 보러 온 사람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신고하면 찾아간다?"
신성재는 말로만 경고하는 게 아니다. 양아치들도 그걸 깨달았다. 세 놈은 대문에 생긴 발자국을 옷으로 닦고 나서 도망쳤다.
이틀 후에 신성재와 은가은이 그 집을 다시 찾아왔다.
은가은이 불평했다.
"어제는 근육통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
"그럴 거라고 경고했잖아."
"그 말을 옆차기 날리고 나서 했잖아!"
오늘은 집 근처에 어떤 식당들이 있는지 보러 다녔다.
은가은이 물었다.
"오빠. 국회의원이 이 집 때문에 꼬장 부리면 어떻게 해?"
"가은아. 마법사가 꼬장 부리면 국회의원은 다음 선거에서 떨어진다?"
"안 그러는 게 그 국회의원한테도 좋겠네. 밥 먹으러 가자!"
은가은이 집에서 가까운 식당을 골랐다.
"여기서 먹자!"
"여기 메뉴에 생선구이가 있어서?"
"응!"
그곳은 박현정이 운영하는 작은 밥집이었다. 그녀의 딸인 꼬마 민수아가 식당 한쪽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은가은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이런 생선은 오빠가 마법의 불로 구우면 더 맛있는데."
"남의 식당에서 마법을 쓸 순 없잖아."
"오빠. 마법의 가루 같은 건 없어?"
"가루?"
"음식이 MSG를 썼을 때보다 더 맛있어지는 가루!"
"그런 게 있긴 한데."
"뭔데?"
신성재가 설명했다.
"요리 요정의 축복이라는 게 있어."
"어? 오빠 축복도 가능해?"
"진짜 축복이 아니라, 그런 별명이 붙을 만큼 음식이 맛있어지는 가루야."
"MSG보다 더?"
"훨씬 더."
"그럼 그걸 만들었어야지!"
"그걸 현대 지구에서 만들려면 연금술이 필요해."
신성재는 연금술 지식을 가지고 있다. 마법이 전공이라면 연금술은 부전공과 교양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마법사도 포션을 제작할 수 있다. 연금술사에게 포션의 원가 경쟁력과 생산성은 밀리지만, 품질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포션 보급에 문제가 생기면 마법사가 직접 포션을 만들어 쓴다.
문제는 재료다. 연금술에는 마나를 품은 재료가 필요하다. 현대 지구에는 그런 재료가 없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연금술 연구는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신성재가 말했다.
"연금술은 안 할 거야."
은가은이 물었다.
"잘 안됐구나?"
"원래 안 하려고 했어. 난 마법사이지 연금술사는 아니니까."
은가은의 생각은 달랐다.
"오빠가 배가 불렀어. 무인도에서 굶던 시절을 벌써 잊었어?"
"응?"
"더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해서 연금술을 연구해야지!"
"가은아. 파는 음식도 맛있어. 지금 이것도 맛있잖아."
"물론 맛있지! 그런데 지금 이 생선구이에 그 마법의 가루를 뿌려서 구우면 어떻겠어?"
"어…."
신성재가 입맛을 다셨다.
"맛있겠는데? 만들어야겠는데?"
"응? 아직 안 되는 거 아니었어?"
"요리가 맛있어지는 가루 하나 정도는…."
신성재가 식당 벽에 장식으로 걸려있는 아주 오래된 국자에 손을 대며 말했다.
"방법이 지금 생겼다."
38. 맛있어지는 가루
신성재가 집 근처 작은 식당의 주인 박현정에게 물었다.
"벽에 걸린 이 국자는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손님은 어차피 신성재와 은가은뿐이다. 가게가 너무 작아서 점원도 따로 없다.
박현정이 다가와 설명했다.
"그건 고향에서 동네 할머니가 쓰시던 거예요."
옆에서 은가은이 물었다.
"그런 국자를 걸어놓으신 걸 보면, 그 할머니께서 요리를 잘하셨나 봐요."
"아뇨. 국밥집 하셨는데 맛은 그냥 국밥이었어요."
"엥? 그런데 왜 걸어놓으신 거예요?"
"대신에 푸짐하게 퍼주시는 거로 유명했죠. 그 할머니가 가게를 정리할 때, 이 국자가 그럴듯해 보여서 얻었어요. 가게에 장식용으로 걸어두면 좋겠다 싶어서요."
"아…."
은가은이 신성재의 귀에 속삭였다.
"오빠. 이거 맞아?"
"어."
신성재가 박현정에게 제안했다.
"이 국자를 제가 사고 싶습니다."
"네? 그건 골동품이 아닌데요? 전에 손님이 보더니 가치가 없다고 했는데…."
신성재가 국자의 손잡이 뒤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건 옛날에 생필품을 생산하는 작은 공장에서 만든 국자입니다. 양산품인 데다가 상태가 찌그러지고 휘어서 이대로는 가치가 없긴 합니다."
박현정도 안다. 예전에 손님이 비슷한 설명을 해줬다.
그녀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우리 가게에 오래 걸어둔 건데, 몇만 원 받고 팔기엔 좀…."
"백만 원 드리죠."
"네? 이게 왜 백만 원이나 해요? 고철값밖에 못 받는다던데…."
"저한테 필요한 거라서요."
이건 보통 사람에게는 그냥 찌그러진 국자다. 공장에서 만든 국자가 오래되고 찌그러졌으면 고철 취급밖에 받지 못한다.
박현정이 꼬마 민수아를 돌아보았다. 백만 원이면 딸의 병원비에 보탤 수 있다. 벽에는 다른 국자를 걸어두면 된다.
"네. 팔게요."
신성재는 찌그러진 국자를 들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득템했네."
그는 서교동의 가계약 상태인 집이 아니라 망원동에 있는 원래 집으로 갔다. 그곳 지하에 마법 공방이 있다.
그곳에서 작업대 위에 찌그러진 국자를 올려놓았다.
은가은이 거기까지 따라와서 물었다.
"근데 오빠. 이 국자에 뭐가 있어?"
"이거 유물이야. 그것도 기원을 품은 유물."
"엥? 이거 공장에서 만들었다면서? 혹시 일제 강점기 공장에서 만든 거야?"
"해방 이후에 만든 거야."
"그런데도 유물이 될 수 있어?"
"그럴만한 사연이 있겠지."
이제부터 그걸 알아봐야 한다.
신성재가 국자에 손을 대고 복원 마법을 사용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찌그러진 국자가 서서히 펴졌다. 그 상태로 보조 마법을 썼다.
[크로노스의 눈]
이 국자가 찌그러진 건 한두 번 일어난 일이 아니다. 쓰면서 조금씩 찌그러진 것이라 그것 자체는 마법에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 국자가 왜 유물이 됐는지 알 수 있었다.
어느새 국자가 완전히 펴졌다. 비록 광택이 나진 않았지만, 찌그러진 적이 없는 것처럼 복원됐다.
신성재가 국자에서 손을 뗐다.
은가은이 물었다.
"뭔데? 유물이 된 이유가 뭔데?"
"한국전쟁이 끝나고 다들 배고플 때, 부산에서 국밥을 팔던 아줌마가 쓰던 국자야."
"그 아줌마가 국자로 총알을 튕겨냈나?"
"그러겠냐?"
"그럼?"
"국밥을 퍼서 그릇에 담아줄 때, '맛있어져라'라고 말하더라."
"엥? 그런다고 국자가 유물이 돼?"
"진심이었겠지.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수십 년 동안 진심으로 맛있게 먹길 바라면서 국밥을 퍼줬겠지."
"와…. 그럼 이건 유물의 등급이 뭐야?"
"너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등급부터 따지냐?"
"앗. 그럼 그건 안 묻…."
"고급."
"일반보다 높구나! 귀한 거 얻었다!"
"귀하지."
"백만 원이면 날로 먹었네?"
"너무 날로 먹긴 했지."
일반 등급의 유물은 인첸트한 마법이 좀 더 길게 유지되는 효과만 있다. 그런데 그런 유물조차 구하기 어렵다.
고급 유물부터는 유물에 깃든 기원이 특별한 기운을 만들어낸다.
신성재가 국자를 들고 자세히 살폈다.
"국자를 만졌을 때 유물이란 걸 알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맛에 관한 기원이 깃들었어."
"그럼 이걸로 그 맛있어지는 마법 가루를 만들 수 있는 거야?"
신성재가 설명했다.
"연금술로 만드는 요리 요정의 축복. 그 가루를 만들려면 원래는 마나를 품은 식재료가 필요해. 그걸 이 유물의 기운으로 대체해보려고."
은가은이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반짝였다.
"오빠! 내가 이번엔 정말 진심으로 성공하길 바랄게!"
"그래야 맛있는 걸 먹으니까?"
"응!"
***
신성재는 며칠 동안 연금술로 마법 가루를 만드는 실험을 했다. 만드는 방법은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마법사이지만 연금술도 평소에 조금씩 연구했다. 그러면서 연금술에 필요한 기본 마법들은 이미 개방한 상태다.
게다가 이건 포션이 아니라 마법의 조미료를 만드는 연금술이다. 마법 조미료는 재료만 있다면 만들기 쉬운 편에 속한다.
은가은이 옆에서 연금술 재료를 보면서 물었다.
"근데 이거 다 원래 음식에 쓰는 조미료 아니야?"
"요리 맛이 좋아지는 가루니까, 조미료가 연금술 재료인 건 당연하잖아."
"엥? 그런가?"
"당연히 그렇지."
신성재가 연금술 재료를 옛날 공장에서 생산된 고급 등급 국자 유물에 담았다.
"저쪽 세계에서 쓰는 마나가 깃든 약초는 없지만, 비슷한 재료에 기운을 부여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기원이 만들어내는 기운?"
"그렇지."
조미료 재료를 그냥 국자에 담기만 한다고 마법의 가루가 생기는 건 아니다. 이제부터 연금술이 필요했다.
이 국자에는 마나 부여의 마법진을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 마법진은 마나가 아니라 국자에 깃든 기운을 사용하도록 개조된 상태다.
신성재가 마법진을 활성화했다. 그렇게 잠시 기다렸다가 국자에 담긴 조미료 재료를 소형 절구 세트에 넣었다. 그건 마늘이나 약초를 갈 때 쓰는 작은 절구였다.
신성재가 절구용 공이를 은가은에게 내밀었다.
"이건 네가 해라. 너도 뭔가 하는 게 있어야지."
"엥? 마법사가 갈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이 단계는 아니야."
은가은이 절굿공이를 잡고 조미료 재료를 갈았다.
"좀 더 정성을 담아야지."
"그러고 있다고."
"그게 너의 최선이냐?"
"우이씨!"
은가은은 조미료 재료가 완전히 부서질 때까지 갈았다.
신성재가 그 재료를 다시 국자에 옮긴 후에, 국자에 새겨둔 연금술용 마법을 발동했다.
[요리 요정의 축복]
곧바로 재료에 푸르스름한 빛이 서리다가 사라졌다. 조미료 재료는 아주 고운 가루로 변해 있었다.
은가은이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됐어? 됐어?"
신성재가 완성된 가루를 조미료통에 옮겨 담았다.
"됐다."
은가은이 얼른 물었다.
"라면 끓일까?"
"어?"
"맛있어지는 마법의 가루는 원래 라면에 넣는 거잖아!"
"이거 아주 조금만 넣어라. 욕심부려서 많이 넣으면 맛이 산으로 간다."
"MSG처럼?"
"그것보다 훨씬 더 조금만 넣어."
10분 후에, 은가은이 라면 국물을 마시며 탄성을 내뱉었다.
"크아아! 이거지!"
신성재도 라면을 먹었다.
"음…."
"왜?"
"맛이 저쪽 세계의 기억하고 좀 달라서. 마나 대신에 유물의 기운을 써서 그런가?"
"난 맛있는데?"
"물론 맛있지. 원래 예상보다 좀 더 한국적인 맛이 됐어."
***
신성재와 은가은은 서교동에서 집주인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쓰고 서교동의 저택을 정식으로 인수했다.
은가은이 그 집에 마법의 조미료통을 갖다놓으며 물었다.
"근데 오빠. 이건 효과가 얼마나 가? 원래 마법은 우리 세계에서 쓰면 효과가 금방 없어지잖아."
"마나를 써서 만들었으면 잠깐도 유지하기 어렵지."
추적 마법을 새긴 동전은 그 효과가 하룻밤을 겨우 넘긴다. 마나를 과충전해도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마법으로 연금술 재료를 만들면 그 시간이 훨씬 더 짧아진다. 연금술로 가공할 때는 불안정한 상태의 마나는 쉽게 휘발된다.
그 두 가지가 겹쳐지면 연금술의 효과가 유지되는 시간은 극단적으로 짧아진다.
하지만 그건 지금 만든 맛있어지는 가루에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다.
"국자 유물이 가진 기운은 우리 세계의 것이잖아. 그래서 연금술 효과가 상당히 오래 가."
"얼마나?"
"대충 계산해보니까 한 달은 가겠더라."
"우왕. 역시 마법 인첸트는 유물을 이용해야 하는구나!"
"당연하지. 고급 등급 이상에 원하는 특성의 유물을 구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효과는 확실해."
***
두 사람은 집을 매입한 기념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신성재가 말했다.
"오늘은 생선구이 팔던 그 식당에 가자."
"난 좋긴 한데, 거기 가는 이유가 있는 거야?"
"거기 사장님 덕분에 좋은 국자를 얻어서 연금술이 성공했잖아."
"그치."
"좋은 걸 너무 싸게 샀으니까, 선물을 주려고."
***
민수아는 오늘도 식당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꼬마가 두 사람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은가은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언니 기억해?"
"네! 삼촌이랑 언니 덕분에 엄마가 용돈 줬어요."
신성재가 투덜댔다.
"난 왜 삼촌이냐."
"어머. 오빠가 그럼 쟤한테도 오빠겠어?"
"너한테도 이모라고 해야지."
"꼬마가 사회생활을 아네. 너 이름이 뭐니?"
"민수아요!"
"아유. 이름도 예쁘다."
오늘도 식당에 손님은 없었다. 그들은 고등어구이 정식을 주문했다.
신성재가 작은 조미료통을 꺼냈다. 여기에 맛있어지는 마법의 가루를 조금 덜어왔다.
"생선을 구울 때 이걸 뿌려줄 수 있습니까?"
혼자서 식당을 운영하는 박현정이 물었다.
"네? 이게 뭔데요?"
"제가 만든 수제 조미료인데, 요리가 맛있어집니다."
일반 손님이 그런 요구를 하면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신성재는 며칠 전에 찌그러진 국자를 백만 원에 사 준 사람이다.
게다가 지금은 다른 손님도 없다. 가루를 뿌려 생선을 구운 후에 프라이팬은 설거지하면 된다.
"알았어요."
"아주 조금만 뿌려야 합니다."
"네."
박현정이 마법의 가루를 뿌려 구운 생선구이 세트를 가져왔다.
"생선에만 뿌렸어요."
"찌개에도 효과가 있을 텐데, 생선에만 써도 좋긴 하죠."
은가은이 고등어살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그녀가 감탄했다.
"우우웅. 이거지!"
"맛있냐?"
"끝내줘."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계산할 때 박현정이 조미료통을 돌려주려고 했다.
"이거 가져가셔야죠."
"그거 드릴 테니까 써보세요."
"네?"
"음식이 더 맛있어질 겁니다."
두 사람이 나간 후에 박현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특이한 분이시네?"
그녀가 식탁을 치우려 했다. 생선구이가 한 토막 남아 있었다.
박현정이 젓가락을 가져와, 아직 손대지 않은 부분을 조금 떼어서 먹어봤다.
"얼마나 맛있어진다고 저렇게 큰소리를…."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
은가은이 물었다.
"오빠. 일부러 고등어 한 토막 남긴 거지?"
"어. 맛을 봐야 마법의 조미료를 쓸 생각이 들 테니까. 그냥 가루만 주면 버릴 수도 있잖아."
***
박현정은 그날 밤에 가게에서 파는 모든 음식을 하나씩 새로 만들었다. 그 음식을 만들면서 신성재가 준 마법의 조미료도 조금씩 뿌렸다.
그 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몇 종류밖에 없지만, 그래도 다 먹기엔 양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음식이 완성될 때마다 맛을 조금씩 보았다.
"맛있어."
그냥 맛있는 정도가 아니라 고급스럽게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맛있어서, 조금씩만 맛을 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배가 부를 정도로 먹어버렸다.
"이 가루는 뭘까? MSG는 아닌데…."
MSG로 만드는 감칠맛은 아주 잘 안다. 이건 그것과는 느낌이 다른 맛이었다.
마법의 가루는 원래 MSG의 별명이다.
"이게 진짜 마법의 가루 같아."
***
이튿날에는 신성재가 혼자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작은 식당에는 오늘도 손님이 없었다.
그가 들어오자 박현정이 다가왔다. 그녀가 조미료통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저기, 이거요."
"써보셨어요?"
"네. 음식이 정말 맛있어졌어요."
"그럴 거라니까요."
"그런데 이거…. 직접 만드신 거라고 하셨죠?"
"그렇죠. 좋은 재료만 써서 비법으로 완성한 수제 조미료입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혹시 이 조미료를 파실 생각이…."
신성재가 지금 준 건 손가락 크기의 조미료통 하나 분량이다. 아무리 아껴 써도 금방 떨어진다.
"그건 대량생산이 안 되는 거라서요."
많이 만들지 못하는 건 아니다. 연금술로 국자의 기운을 많이 뽑아 쓰면 된다. 그러다 국자의 기운이 모두 소모된다 해도 상관없다. 기원을 품고 있는 유물은 마나를 이용해 다시 충전할 수 있다.
다만, 재료가 준비된다 해도 마법의 조미료를 만들 때는 신성재가 연금술을 써야 한다. 그래서 대량생산은 어렵다.
박현정의 어깨가 처졌다.
"아. 네…."
"물론 식당 한 곳에서 쓰는 양쯤은 남지만요."
"네?"
신성재와 은가은이 많이 먹긴 하지만, 마법의 조미료는 조금만 써도 음식 맛이 좋아지기 때문에 소모량이 적다.
그러니 만들어둔 조미료는 남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마법 조미료는 한 달이면 맛있어지는 효과가 사라진다. 그러면 남은 건 버려야 한다.
"좀 드릴까요?"
박현정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그래도 될까요? 네. 그럼 제가 살게요. 가격은 얼마나…."
"선물입니다"
"네?"
어차피 원가는 얼마 안 든다. 마법의 조미료에서 제일 중요한 건 유물 국자인데, 그건 박현정 덕분에 손에 넣었다.
마법의 조미료는 조금만 써도 효과가 있다. 한 달에 한 번 만들 때 조금 넉넉히 만들면, 식당에서 한 달쯤 쓸 양은 충분히 나온다.
"제가 저 앞쪽 집으로 이사 왔습니다. 밥 먹으러 여기 왔을 때 기왕이면 맛있는 걸 먹고 싶어서요."
"어머! 그러시구나! 그래도 공짜로 받는 건 죄송해서…."
***
신성재가 며칠 후에 집을 나섰다.
오늘은 꽤 큰 인테리어 회사 사장인 박성훈을 만나기로 했다. 그 회사는 인테리어가 주력이지만 단독주택 건축도 한다.
저택 지하실을 마법사의 공방으로 개조하려면 공사를 꽤 크게 해야 한다. 그래서 주택 건축도 하는 박성훈의 회사에 그 일을 맡길 생각이다.
신성재가 차를 타고 가면서 박현정의 식당을 보았다.
손님들이 식당 밖에까지 줄을 서 있었다.
"다음번엔 가루를 좀 넉넉하게 만들어야겠는데?"
39. 지하실
신성재가 박성훈을 만났다.
박성훈의 증조할아버지는 한량으로 살다가, 딱 한 번 독립운동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때 총탄에 맞아 망가진 회중시계를 신성재가 맡아서 복원했다. 그러면서 박성훈에게 그 사연을 알려주었다.
박성훈은 그 신세를 갚겠다며 인테리어나 집수리를 할 일이 있으면 맡겨달라고 했다. 그는 꽤 큰 인테리어 업체의 사장이다. 그 회사는 단독주택도 건축한다.
박성훈이 신성재를 만나 자랑했다.
"작년에 연예인의 의뢰를 받아 양평에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이 이번에 상을 탔지 뭡니까? 하하하."
"역시 실력은 확실하시군요."
"제가 독립운동가 집안이잖습니까? 일은 제대로 해야죠. 하하하."
"어…."
"물론 증조부님이 유공자로 선정된 건 아니지만, 독립운동으로 훈장까지 타신 분을 살리셨죠.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 아닙니까?"
신성재가 그냥 본론을 꺼냈다.
"저는 집을 지을 건 아니고요. 내부 인테리어를 하려 합니다."
"아파트입니까? 우리 회사가 아파트 인테리어를 잘합니다."
"단독주택입니다."
"단독도 우리 회사에서 잘합니다."
박성훈은 신성재가 최고 수준의 골동품 복원 전문가라고 알고 있다. 한국은 물론이고 유럽의 유물과 관련된 역사에도 정통한 학자라고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그에게 해준 사람은 인사동 도종호 사장이다.
박성훈이 물었다.
"역사학자의 서재 느낌으로 인테리어를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신성재는 역사에 정통한 게 아니다. 유물의 기억을 보고 학자들도 모르는 이야기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박성훈을 말하는 학자풍 서재는 관심 없다.
"실내는 깔끔하게요."
"깔끔한 거 좋지요. 단독주택에 적당한 디자인으로 뽑아보겠습니다."
"특히 지하실이 중요합니다. 그곳을 많이 개조해야 하니까요."
"집에 지하실이 있습니까? 반지하가 아니라요?"
신성재가 태블릿에 집 사진을 띄웠다. 거기에는 직접 그린 도면이 있었다. 정식 건축 도면이 아니라, 형태를 설명하기 위한 도면이었다.
"지하를 이런 식으로 고치려고 합니다."
"어? 이러면 공간이 너무 좁아지…. 아니, 잠깐만요."
박종훈이 도면에 적힌 숫자를 확인했다.
"이거 집이 너무 큰데…."
"큰 건 못 하십니까?"
"아니,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거 지하실의 형태가…. 혹시 여기 위치가 서교동입니까?"
"이 집을 아시나 봅니다?"
"회사에서 멀지 않아서, 지나가다가 관심 가지고 본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많이 비쌀 텐데요."
"오십억쯤 하더군요."
박성훈은 살짝 당황했다.
"어…. 골동품 복원이 돈이 그렇게 많이 됩니까? 종호는 부자가 아니던데…."
"힘들게 벌었습니다."
그 집값을 마련하려고 유럽까지 날아가서 란슬롯의 검을 경매로 사고, 그걸 다시 복원해 영국 박물관에 팔았다.
사실 힘들지는 않았다. 그냥 말이라도 그렇게 했다.
그렇게 번 돈에서 세금 내고 이것저것 떼고 남은 돈으로 집을 샀다. 그러고 남은 돈으로 내부 공사를 해야 한다.
"당연히 힘들게 모으셨겠지요. 하하하."
신성재가 지하실 도면을 몇 장 보여주며 물었다.
"이런 형태로 가능하시겠습니까?"
"어떻게든 가능하게 해야지요. 다른 분도 아니고 우리 증조부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준 신성재 씨의 의뢰인데요."
***
이튿날 박성훈이 회사 실무자와 함께 신성재의 새집으로 찾아왔다. 현장을 보면서 디자인도 정하고 견적을 내기 위해서였다.
1층과 2층의 인테리어는 고급 자재를 써서 품위 있고 깔끔하게 만들기로 했다.
저택에는 굉장히 넓은 지하실이 있었다.
박성훈이 지하실에 내려와서 말했다.
"이 집은 정말 튼튼하게 잘 지었습니다. 기둥에 철근을 많이 쓰고 벽도 튼튼합니다. 특히 이 지하실은 거의 방공호 수준입니다. 아마 근처에 포탄이 터져도 버틸 겁니다."
"아주 옛날에 정치인이 썼다던데요."
"그럼 진짜 전쟁까지 대비해서 지은 건가?"
신성재가 물었다.
"내부의 벽은 모두 헐고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이 집은 힘을 기둥이 다 받는 구조라서, 안쪽 벽은 힘을 안 받습니다. 그냥 다 헐면 됩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박종훈이 신성재가 그려준 도면을 보며 물었다.
"이러면 지하실로 들어갈 때 통로를 꺾어 들어가야 합니다. 입구 쪽에 벽이 많이 생겨서 동선도 나쁘고요. 그러면 생활할 때 불편하실 텐데…."
"던전이 다 그렇죠."
"네?"
"그런 구조를 좋아해서요."
"아, 예."
***
인테리어 업체의 현장 확인 작업이 끝났다. 공사는 며칠 후에 시작하기로 했다. 사장이 직접 찾아올 정도로 신경 쓰는 곳이니 완성도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날 점심때 은가은이 찾아와서 물었다.
"이 집에 마법은 언제 깔아?"
"인테리어 공사가 다 끝나야지."
"그럼 그때까지는 그냥 놔둬?"
"담장에 경계 마법은 심으려고."
"오빠가 없으면 마법진은 밤에만 작동하잖아."
마법진에 충전한 마나는 하룻밤이면 사라진다. 신성재가 집에 있을 때는 상관없는데, 공사 기간에는 매번 그러기 어렵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
양아치가 어깨를 움츠리며 서교동 저택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 셋이 더 있었다. 그중 둘은 덩치가 컸다. 제일 뒤에 있는 건 양복을 입고 안경을 쓴 남자였다.
안경을 쓴 김성천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수단을 가리지 말고 해결하라고 돈을 줬는데, 의원님 돈을 받아먹고 그거 하나 못해?"
양아치가 굽실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보좌관님!"
김성천이 양아치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툭 밀었다.
"의원님 돈이 그냥 돈인 줄 알아?"
"죄송…."
"꼬리표 안 달린 돈은 네깟 놈이 가진 돈의 열 배의 가치가 있다. 네가 그런 돈을 먹었으면서 이 집이 팔리게 놔둬?"
"잘못했…."
보좌관이 양아치를 걷어찼다. 양아치가 뒤로 밀려나 담장에 부딪혔다.
"컥!"
보좌관이 소매를 툭툭 털며 말했다.
"보안 시스템 없는 건 확인했으니까, 담장 넘어가서 문 열어."
양아치가 허겁지겁 담장에 매달렸다. 담이 너무 높았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가 담장을 넘은 후에 마당에서 대문을 열었다.
김성천 보좌관이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뒤따라온 덩치들에게 물었다.
"연장은?"
덩치들이 해머를 보여주었다.
"가져왔습니다."
"저 양아치 새끼한테 줘."
김성천은 신발을 신은 채로 집안에 들어가서 지시했다.
"주변에서는 망치 소리가 좀 나도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한 줄 알 테니까, 부숴."
"예?"
"여기부터."
김성천이 나무로 만든 벽을 가리켰다. 양아치가 뒤늦게 그 말을 알아듣고 해머로 벽을 쳤다. 툭 소리가 났다.
덩치가 양아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벽이 부서지게 쳐! 이 새끼야!"
양아치가 이번에는 해머로 벽을 힘껏 쳤다. 나무가 떨어져나오고 시멘트벽이 드러났다.
"여기는 아니군."
그가 실내를 걸어가며 옆을 가리켰다.
"여기."
그가 내부를 가리킬 때마다 양아치가 벽을 부수었다. 몇 번 그러고 난 후에 양아치가 숨을 헐떡였다.
김성천이 안방에 들어가 벽을 가리켰다.
"여기."
"조, 조금만 쉬었다가…."
덩치가 양아치를 걷어찼다.
"이 새끼야! 보좌관님이 시키시는데 쉰다는 소리가 나와?"
"케엑!"
김성천이 말했다.
"시키는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새끼는 드럼통에…."
"하, 할 수 있습니다!"
양아치가 허겁지겁 일어났다. 해머를 들고 다시 벽을 치려 했다.
뒤쪽에서 신성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벽은 그렇게 부수는 거 아닌데."
덩치들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김성천이 손끝으로 안경을 조금 올리며 물었다.
"손님인가?"
"집주인이다."
양아치가 신성재를 가리키며 외쳤다.
"보좌관님! 저 새끼입니다! 저 새끼가 이 집을 샀습니다!"
신성재가 물었다.
"새끼?"
"그, 그래! 이 새끼야!"
"너를 드럼통에 넣겠다던 저놈들을 믿고 하는 소리냐?"
"어? 아, 아니, 그게…."
김성천이 물었다.
"어디부터 들었지?"
"꼭 들어야 알아? 벽을 부수면서 뭔가 찾는 게 뻔히 보이는데? 왜? 내 집 벽 속에 금두꺼비라도 있냐?"
김성천이 신성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집을 현금으로 살 정도면 돈은 꽤 있나 본데."
"많지."
"그 돈을 합법적으로 벌었을까?"
"왜? 국회의원으로 권력으로 탈탈 털어서 조지게?"
"상황을 아는 듯하니 이야기가 쉽겠군.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 너처럼 돈이 꽤 있다면 먼지가 많이 나지."
김성천이 제안했다.
"선택해라. 이 집을 공사 전까지 비우거나, 아니면 감방에 가거나."
"일단 그 국회의원 이름부터 좀 듣자. 다음 선거에서 떨어질 사람 이름은 알아야지."
"너 따위가 들어도 되는 이름이 아니다."
김성천이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뭐해? 끌고 와!"
덩치들이 신성재를 향해 걸어갔다.
신성재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들이 신발도 안 벗고 들어왔네?"
신성재가 바닥에 떨어진 나무토막을 걷어찼다.
[무빙]
나무토막이 앞에서 걸어오던 덩치의 정강이를 때렸다.
"악!"
덩치가 고통 때문에 몸을 움츠렸다. 상체가 앞으로 조금 기울었다.
신성재가 덩치의 따귀를 때렸다.
[바람 주먹]
동작은 따귀를 때리는 모습인데 정작 뺨을 친 건 근접 전투 마법이다. 그걸 다른 놈들이 눈으로 구분할 수는 없었다.
덩치의 고개가 돌아가면서 몸뚱이도 옆으로 휙 돌아갔다. 덩치가 바닥에 나자빠졌다.
"어?"
"어?"
"히익!"
두 놈은 당황한 소리를 냈다. 양아치는 저번에 본 게 있어서 비명을 질렀다.
김성천이 소리를 질렀다.
"씨발! 칼을 써! 뒷일은 내가 책임진다!"
다른 덩치가 옷 속에서 칼을 뽑았다. 날이 시퍼렇게 선 단검이었다.
신성재가 물었다.
"정치인 밑에서 일하는 놈이 칼을 쓰네? 너 이거 감당되냐?"
"우와아아!"
덩치가 소리를 지르며 신성재를 향해 달려들었다.
신성재가 다른 나무토막을 걷어찼다.
[무빙]
달려오던 놈의 발목을 나무토막이 때렸다. 덩치가 균형을 잃고 옆으로 휙 나자빠졌다.
"이 새끼들은 어떻게 실전에서 배우는 게 없냐. 같은 수법으로 두 번째니까 피했어야지."
넘어진 놈이 허겁지겁 일어나려 했다.
신성재가 일어나는 놈의 따귀를 때렸다. 이번에도 바람 주먹이 손바닥보다 먼저였다.
일어나던 놈이 개구리처럼 철퍼덕 엎어졌다.
신성재가 김성천을 쓱 쳐다보았다.
"야. 이제 너만 남았네?"
당황한 김성천이 양아치에게 지시했다.
"너, 너도 가서 싸워!"
"저, 저는 상대도 안 됩니다!"
"해머 있잖아!"
"해머로 덤비면 제가 해머로 죽습니다!"
"이 새끼가…."
신성재가 김성천을 향해 걸어갔다.
"해머는 네가 들던가."
김성천이 급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나 박호진 의원님의 보좌관이다! 나를 건드리면 넌 국가권력을 상대해야 한다!"
"아이쿠. 무서워라."
"넌 저 두 사람을 폭행했다! 체포돼서 감옥에서 몇 년쯤 썩기 싫으면 당장 꿇어 이 새끼야!"
신성재가 그 명함을 탁 가로챘다.
"박호진의 비서 김성천. 어디 보자."
신성재가 스마트폰으로 김성천을 검색했다. 인터넷에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그가 사진 속 김성천과 눈앞의 김성천을 비교했다.
"사기꾼 새끼였네."
"어? 어? 그게 무슨 소리냐! 검색했으면 내 사진을 확인했을 텐데!"
"이름이 같고 얼굴이 비슷한 사람을 찾은 후에, 똑같아 보이게 변장을 좀 했네?"
"아, 아니…."
"난 또 정체를 숨기려고 변장한 줄 알았지."
신성재가 허리에 찬 액션캠의 녹화 버튼을 껐다.
"이건 널 협박하려고 준비했는데, 필요 없겠어."
명함은 주머니에 넣었다.
"박호진은 다음 선거에서 떨어뜨리려 했는데, 사기 피해자였구나."
박호진이 이번 일과 상관없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박호진 의원이 네가 어떻게 자기를 팔면서 사기를 쳤는지 알면 참 좋아하겠지? 네가 말한 그 국가권력 맛은 네가 보겠네?"
양아치는 사기당했다는 걸 깨닫고 김성천을 향해 욕을 내질렀다.
"개새끼야! 국회의원 보좌관이라고 했잖아! 나도 키워준다고 했잖아!"
김성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갑자기 옆에 있던 해머를 번쩍 들었다. 양아치가 겁먹고 뒤로 물러났다.
김성천이 신성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면서 해머를 크게 휘둘렀다.
"카메라 내놔!"
신성재가 해머의 헤드에 바람 손을 슬쩍 걸었다. 해머가 김성천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으아아!"
김성천이 해머를 놓치며 나자빠졌다. 놓친 해머가 뒤에 있던 양아치의 몸통을 때렸다.
"케에엑!"
신성재가 그걸 보며 말했다.
"부하를 죽여 입을 막으려는 거냐? 정치인은 독하네. 아 참. 넌 정치인이 아니고 사기꾼이지."
"너 이 새끼…."
신성재가 김성천의 턱을 걷어찼다.
"케엑!"
"이게 어디서 욕이야?"
이제 이 집에 침입한 놈은 모두 기절했다.
신성재가 주변을 보았다. 김성천은 벽을 뜯어내고 있었다.
"이 집에서 보물이라도 찾으려고 했나 본데…."
신성재가 나무가 뜯겨나가고 시멘트가 노출된 벽에 손끝을 대고 마법진을 그렸다.
예전에 상구파의 건물을 무너뜨릴 때는 먼저 마법으로 취약점을 파악한 스톤 브레이커 마법을 썼다.
지금 그린 마법진이 그때 건물의 취약점을 찾으려고 썼던 바로 그 마법이다.
"벽 안에 뭔가 있으려면 공간도 있어야…. 아. 있다."
신성재가 고개를 갸웃했다. 수상한 공간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신성재가 먼저 서재의 벽을 덮은 나무판을 뜯어냈다. 나무판이 손쉽게 떨어졌다.
그 안쪽 공간에는 자물쇠로 잠긴 금속 상자가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았다. 알약이 가득 든 비닐봉지가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이거 마약인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짐작이 갔다.
"여기가 그동안 빈집이었으니까 이 근처에 유통하는 마약을 숨겨놓는 곳으로 썼구나. 그러다 내가 여길 사니까 급하게 찾으러 왔어. 그게 아니면 저 사기꾼 새끼가 약을 빼돌리러 왔겠지."
이 마약은 경찰에 신고해서 처리하면 된다.
그런데 수상한 공간은 지하실에 하나 더 있었다.
신성재가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의 벽 중 하나에 손을 댔다. 그 벽은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지하실 시멘트벽이었다.
[스톤 브레이커]
벽이 조금 부서졌다.
내부 공간에는 금속으로 만든 상자가 들어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았다. 금괴 열 개와 골동품 세 개가 나왔다.
이 집은 오래전에 정치인이 살았다. 그 정치인은 예전에 사고로 사망했다.
"비자금인가? 그럼 이젠 내 거지."
신성재가 금괴를 챙기고 골동품도 확인했다.
"어…."
골동품 두 개는 평범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만든 자물쇠는 평범하지 않았다.
"일반 등급 유물이네?"
일반 등급의 유물은 스스로 기운을 만들어내진 못한다. 대신에 마법을 인첸트했을 때 그 효과가 오래 간다.
"유물의 타입이 자물쇠니까…. 경계 마법을 인첸트하면 사흘은 가겠는데?"
그러면 사흘에 한 번만 마나를 보충해도 이 저택의 보안 레벨이 크게 높아진다.
"득템했다."
40. 상태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