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20-30

20. 알리바이

상구파가 모여 있던 단층 건물이 붕괴했다. 스톤 브레이커 마법에 직격당한 쪽은 기둥이 부러지고 벽 두 개도 완전히 무너졌다.

예전에 창고로 썼던 그 건물은 내부에 내력벽이 없다. 건물 절반이 무너지자, 나머지 절반도 제대로 버티지 못했다.

반대편 벽 두 개도 안쪽으로 넘어지며 중간이 꺾였다. 다만, 그쪽은 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아 산산조각까지 나진 않았다.

건물 내부에 내력벽은 없지만, 구역을 나눠놓은 벽은 있다.

그래서 지붕이 붕괴할 때는 아래로 툭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 벽에 걸려 기울어지며 무너졌다. 내부 벽도 일부만 남고 같이 무너졌다.

송스 갤러리 최민구 과장은 패닉에 빠졌다. 그가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건물이 눈앞에서 붕괴했다.

상구파 조직원들은 아직도 그 안에 모여 있다. 조직원들은 신성재를 처리하러 간다면서 무기까지 챙긴 상태였다.

"기, 김 사장?"

최민구가 청부조직 상구파 두목 김상구를 불러 봤다.

잔해 속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다, 다 죽은 건 아니겠지?"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외진 곳에 있는 건물이긴 한데, 무너지는 소리가 워낙 크게 났다. 누군가 그 소리를 듣고 신고할 수도 있다.

"씨, 씨발! 이, 이러면…."

최민구가 여기 있다가 경찰을 만나면, 이 건물 붕괴와 관련된 조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내가 송스 갤러리 직원인 것도 알려질 거야. 왜 청부조직과 같이 있는지도 의심받겠지. 그러다 신성재가 오늘 습격받은 게 송 관장 귀에 들어가면…."

최민구는 끝장난다. 직장이나 경력이 문제가 아니라 교도소에 갈 수도 있다.

그가 무너진 건물 잔해를 보며 말했다.

"김 사장. 어쩔 수 없다고. 살 사람은 살아야지."

최민구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차 옆에서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곧바로 탑승해 출발할 수 있었다.

최민구는 119를 부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가 건물 붕괴를 신고하면,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었는지 설명해야 한다. 사실대로 말하면 체포되고, 거짓말을 해도 나중에 문제가 된다.

최민구가 그곳을 벗어나며 룸미러를 힐끗 보았다.

"그런데 저 양아치 새끼들이 다 깔려 죽었으면, 오늘 내가 한 일도 묻히는 건가?"

***

신성재가 집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말했다.

"스톤 브레이커를 마법진까지 새겨서 썼으니까 적어도 건물 절반쯤은 무너졌겠지."

건물이 붕괴하면 그곳에 새겨놓은 마법진은 모두 소실된다. 거리도 멀어서 스톤 브레이커 마법을 쓴 결과를 직접 확인하진 못했다.

상관없다.

"혹시 안 무너졌으면 다시 찾아가면 되고."

그가 스톤 브레이커 마법진에 1시간의 지연을 건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상구파 조직원들이 그곳에 모일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다.

편의점 여자 점원이 작은 볶음 김치를 신성재의 테이블 옆에 올려놓았다.

"이것도 드세요. 이건 제가 사는 거예요."

"뭘 이런 것까지. 잘 먹겠습니다."

원래는 편의점에서 신용카드 사용 기록과 CCTV 영상만 남기려 했다. 이렇게 점원과 대화까지 했으니 알리바이는 더 확실해진다.

"마법사를 암살하려다 실패했으면 마법사 손에 죽는 게 상식인데."

그건 현대 지구가 아니라 저쪽 세계의 상식이다.

신성재는 저쪽 세계의 지식을 받긴 했지만, 그는 현대 지구의 한국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적이 모여 있는 건물을 반쯤 무너뜨리는 선에서 끝냈다.

"운 좋은 놈은 살겠지."

신성재가 추적 마법을 사용해 동전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의 집을 습격한 놈의 주머니에 넣어둔 500원짜리 동전은 상구파 건물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건 조직원이 무너진 건물 속에 있다는 뜻이다.

"이놈들은 잡았는데."

그런데 최민구의 차에 붙여놓은 추적 동전은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 속도는 차를 타야 낼 수 있다.

"민구가 운이 좋아. 그걸 사네."

***

형사들이 상구파의 사무실이었던 단층 건물 앞에 모였다. 한쪽에는 119구급차가 도착해 있었다.

정복 경찰이 현장을 통제했다. 무너진 건물 주변에서는 노란색 폴리스 라인도 있었다.

형사팀장이 물었다.

"당한 놈들이 상구파라며? 어떻게 된 거야?"

현장에 먼저 도착해 상황을 파악한 형사가 보고했다.

"사무실을 최근에 이곳으로 옮겼나 본데, 보시다시피 옮겨온 건물이 폭삭 무너졌습니다."

"왜? 누가 불도저로 건물을 들이받았어?"

"아니요. 일단 외부 충격은 없었던 거로 보인답니다. 정밀감식을 하면 판단이 바뀔 수도 있지만요."

팀장이 다른 걸 의심했다.

"폭탄이라도 터트린 건 아니고?"

"폭탄이요?"

"예전에 열차 통제센터 테러 때도 폭탄이 사용됐잖아."

"폭탄은커녕, 뭔가 터지는 소리를 들은 사람도 없습니다. 반면에 갑자기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는 들은 사람은 여러 명 있습니다."

"테러도 아닌데 왜 건물이 갑자기 무너졌지? CCTV는?"

"이 주변에는 CCTV가 없습니다."

CCTV가 없는 이유는 짐작이 갔다.

"상구파 놈들이 일부러 그런 곳에 사무실을 만들었겠지. 혹시 건물 주변에 중장비 흔적은 없었어? 불도저의 무한궤도 자국 같은 거 말이야."

"찾아봤는데 없습니다. 그리고 외부 충격은 없었다니까요."

"그건 확실한 건 아니라며."

"사람들이 들은 것도 중장비로 뜯어내는 게 아니라 건물이 한 번에 무너지는 소리였습니다."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멀쩡한 건물이 그냥 무너지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전에 충청도 어디서는 새로 지은 다리가 개통 기념식 하다가 무너졌다는데, 이것도 그럴 수 있죠."

"아. 그런 사건도 있었지."

그 다리도 이번처럼 신성재가 스톤 브레이커로 취약점을 공격해 무너뜨렸다.

"이건 낡은 건물이니까 그냥 와르르 한 거 아닐까요?"

팀장이 혀를 찼다.

"쯧쯧. 하여간 부실공사가 문제라니까."

팀장이 무너진 건물을 둘러보았다.

"건물 이쪽 절반은 지붕까지 완전히 무너졌구나. 저쪽은 반쯤 무너지긴 했는데, 그래도 건물의 형체는 유지하고 있고."

"예. 그래서 상구파 놈들이 살았습니다."

"저기서 어떻게 살았어?"

"그놈들은 저쪽에 모여 있었거든요. 저긴 무너진 후에도 안쪽에 공간이 조금 있어서 죽은 놈은 없습니다."

팀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 멀쩡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무너지는 벽과 천장에 깔려서 많이 다쳤습니다."

"몇 놈이나?"

"아홉 놈입니다."

팀장이 상구파의 조직도를 떠올렸다. 그의 얼굴이 확 펴졌다.

"전멸이네?"

"예. 심부름이나 시키는 똘마니들 빼고, 핵심 조직원은 다 모여 있었나 봅니다."

팀장이 무너진 상구파 건물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내일 우리 팀 회식이나 할까?"

"갑자기요?"

팀장이 싱글벙글 웃었다.

"저 새끼들이 전멸한 걸 보니까 기분이 좋아졌어."

***

무너진 건물에서 구출된 상구파 조직원 중에 그나마 상태가 나은 몇 놈이 정신을 차렸다.

형사들이 병원에서 그놈들을 어르고 달랬다. 그 건물 잔해에서 찾아낸 증거들도 들이밀었다.

"잘 생각해라. 증거가 쏟아져서 어차피 너희는 못 빠져나간다. 협조하는 놈만 선처받아."

결국 한 놈의 입이 술술 열렸다. 골프채로 얻어맞은 세 놈 중 하나였다.

***

이튿날 아침에, 그 형사팀의 형사가 도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 도 형사! 상구파 망했다! 정보 안 찾아줘도 된다.

도서윤이 특별수사지원팀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물었다.

"왜 망했는데요?"

형사가 상구파의 상황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도서윤이 말했다.

"잘됐네요."

- 그런데 그거 알아? 그놈들이 건물에 깔리기 전에 누굴 습격하려고 했나 보더라.

"다른 조직인가요?"

- 아니. 무슨 유물 복원 전문가라던데….

도서윤의 아버지는 인사동에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는 도종호 사장이다.

"그래요? 제가 유물 전문인데. 누군데요?"

- 미안. 수사 중인 사건인데 이름까지 말하는 건 좀 곤란해서….

"어차피 자료 요청하면 우리 특지팀으로 다 들어와요. 나중에 정식으로 요청할 테니까 그냥 말해줘요."

- 신성재라고….

"아! 신성재 씨."

- 어? 아는 사람이야?

도종호를 통해 이야기는 가끔 들었다.

도서윤이 말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최고라고 들었어요."

***

이튿날 오전에 형사들이 신성재를 찾아가며 말했다.

"오늘 밤에는 술이 진짜 맛있을 거야."

"저 이제 휴가 좀 써도 되나요?"

"현장에서 발견한 증거들 안 봤냐? 그거 그냥 다른 팀에 넘겨주게?"

"휴가는 다음에 가야겠네요."

"조금만 더 고생하면 표창장이랑 특별휴가 나올 거다."

형사들이 밝은 표정으로 신성재를 만났다. 그들은 상구파의 상황은 설명하지 않고 어젯밤에 그의 집에서 일어난 일만 물었다.

신성재가 말했다.

"아아. 어제 그 도둑놈들 말이군요."

"아십니까?"

신성재가 당시 상황을 그럴듯하게 적당히 지어냈다.

"어젯밤에는 마당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도둑놈들이 저 담을 넘으려다가 저와 마주치더군요."

"놀라셨겠습니다."

"그놈들이 더 놀라서 바깥으로 떨어지던데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떤 놈들인지 보려고 밖에 나왔는데,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침입자가 셋이나 되는데 무섭진 않으셨습니까?"

신성재가 엄살을 떨었다.

"어휴. 무서웠죠. 제가 착실하게 사는 사람이라서 평소에 그런 놈들을 볼 일이 없거든요."

"그런데 말입니다. 신고 기록이 없던데요."

"그냥 도망치길래 신고는 안 했습니다. 도둑맞은 것도 없는데 귀찮아서."

그때 경찰에 신고했으면, 놈들을 따라가서 상구파의 건물을 무너뜨리고 조직을 전멸시킬 시간을 내기 어렵다.

형사가 담장 위의 CCTV를 가리켰다.

"저 CCTV의 영상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저거 깡통입니다."

"네?"

"인터넷에 CCTV처럼 생긴 가짜 많이 팝니다. 저게 그래도 건전지를 넣으면 윙하고 돌아가기도 합니다."

이 집은 곳곳에 심어놓은 마법진이 경계 시스템의 역할을 한다. 저 CCTV는 위장용이다.

"범인들이 담장을 넘다가 그 위에 설치된 망치 같은 것에 맞았다고 하는데…. 혹시 담장에 그런 장치가 있습니까?"

신성재가 웃었다.

"하하하. 가정집 담장에 망치가 왜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래도 자백 내용 중에 그런 게 있어서…."

"사다리 가져올 테니까 직접 확인해보시죠."

형사들이 담장 위를 확인했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작은 핀이 군데군데 박혀 있네요?"

"장식입니다."

그건 전자제품 수리용 부품을 개조해서 만든 마법 공학용 부품의 일부분이다.

마법 공학은 마나를 동력으로 쓴다. 라이트닝 쇼크처럼 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래서 연구만 잘하면 마법 공학에 현대의 기술로 만든 부품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려면 마법진을 좀 수정해야 하지만, 현대 기술과의 접목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마나로 전기는 만들어도, 전기로 마나를 만들어내진 못한다.

담장을 확인하고 내려온 형사들이 알리바이를 물었다.

"어젯밤 12시쯤에 어디 계셨습니까?"

"집에 있다가…."

신성재가 일부러 손뼉을 쳤다.

"아! 그 시간에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을 먹었습니다. 저 골목 끝에 있는 편의점입니다."

***

형사들은 편의점에 들러 CCTV 영상을 확보했다.

"그래도 여기엔 CCTV가 있네요."

"그러게."

"카드 기록도 확인했습니다."

형사가 아침 교대를 준비하던 여자 점원에게 신성재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맞아요. 이 손님이 어젯밤 자정쯤에 오셨어요."

"손님 얼굴을 다 기억합니까?"

"다는 아닌데, 그분은 확실히 알아요. 여기서 컵라면 드시고, 음료수도 하나 주고 가셨어요. 그래서 제가 볶음 김치를 하나 드렸죠."

형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손님한테 그런 것도 줍니까? 내가 자주 가는 편의점은 국물도 없던데."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냥 답례였어요. 답례."

편의점 CCTV에는 신성재가 컵라면과 음료수를 사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카드 결제 기록도 남아 있었다. 목격자도 나왔다.

형사들이 그 자료를 가지고 복귀했다.

"어차피 신성재 씨를 의심한 건 아니잖아."

상구파의 건물은 낡아서 무너진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난 상태다.

하필 신성재가 습격당한 날에 상구파의 건물이 무너졌으니 찾아와서 조사는 했다. 하지만 신성재는 알리바이가 있다.

"피해자라면 모를까, 용의자로 볼 이유는 없다고 보고하자고."

***

신성재가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검색했다. 폭력조직의 단층 건물이 무너졌다는 기사가 있었다. 사망자는 없지만 모두 중상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내가 이렇게 관대하다."

은가은이 집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뭐가 관대해?"

"다 살려는 줬거든."

"근데 누가 왔다 갔어? 마당에 커피잔이 있네?"

"형사들."

은가은이 호들갑을 떨었다.

"앗! 오빠! 드디어 들켰어?"

"뭘?"

"뭐든?"

"그리고 '드디어'라니?"

"으응? 아니, 그건 뭐, 그냥 말하다 보니까…."

"안 들켰다."

"내가 마법사의 조수라는 것까지 들키는 줄 알았네."

"가은아.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안심하는 표정이거든?"

"다행이라고 생각한 거 맞지?"

"당연하지! 오빠. 나 못 믿어?"

"믿겠냐?"

21. 추적

어젯밤에 신성재가 송스 갤러리 최민구 과장의 차에 붙여둔 추적 동전은, 두 시간 만에 부여된 마나가 모두 소모됐다.

마나가 사라지면서 동전에 걸어둔 자력도 소멸했다. 차의 철판에 붙어 있던 동전이 바닥에 떨어져 옆으로 굴러가다가 흙 속에 박혔다.

신성재는 이미 어젯밤에 동전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추적 마법으로 확인했다.

신성재가 인터넷 지도 사이트를 보며 말했다.

"상구파 사무실에서 한강 남쪽 외진 곳에 있는 공원까지 가는 데 삼십 분."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차가 막히지 않아 이동 시간도 짧았다.

"도착해서 다시 삼십 분 이상."

공원에 도착하고 삼십 분 동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후에는 동전에 깃든 추적 마법의 효과가 끝났다.

"여기서 상무라는 놈과 접선했거나, 아니면 마냥 기다렸겠지."

신성재가 클래식 스포츠카를 운전했다. 목적지는 그 한적한 공원이다.

은가은이 조수석에서 물었다.

"한강은 왜 건너? 강남 가? 오늘 점심은 강남에서 맛있는 거 먹나?"

"가은아. 넌 왜 모든 결론이 먹는 거로 가냐?"

"그럼 점심 안 먹어?"

"먹어야지."

"뭐 먹어?"

"먹기 전에 어디 들러서 일부터 좀 하자."

***

신성재가 찾아간 한강 근처 공원은 사람도 거의 없고 CCTV도 없었다. 낮에도 이럴 정도면 밤에는 사람이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신성재가 공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수상한 놈들이 접선하기 딱 좋은 장소다."

최민구의 차가 어젯밤에 주차됐던 곳은 쉽게 찾았다.

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신성재가 그 차에 붙여뒀던 동전은 바닥에 떨어져서 흙에 박혀 있었다.

신성재가 그 동전을 주웠다. 이 외진 공원에 떨어진 동전을 오전에 누가 챙겨갈 확률은 거의 없다.

신성재가 동전의 상태를 확인했다.

"역시 손상됐네."

그는 어젯밤에 이 500원짜리 동전에 마법을 두 개나 때려 박았다. 작은 동전에서 두 개의 마법이 동시에 유지되게 하려고 마나는 세 배를 부여했다.

그러면 동전이 버티지 못한다. 동전에 깃든 추적 마법과 자석 마법은 이미 완전히 소멸했다. 게다가 오버 히트시킨 마법이 소멸할 때 동전이 좀 손상됐다.

신성재가 동전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복원 마법을 사용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동전의 손상된 부분이 순식간에 복구됐다.

[크로노스의 눈]

동전의 손상될 때의 기억을 통해 어젯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조금 엿보았다.

동전이 작아 짧은 순간의 정보밖에 얻지 못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최민구 과장은 이곳에서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화를 내고 최민구는 머리를 숙였다.

"저놈이 상구파 두목이 말한 상무구나."

만약 이 동전으로 적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최민구 과장을 계속 추적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얼굴을 확인했으니 저놈이 누구인지 찾아낼 수 있다.

신성재가 은가은에게 말했다.

"가은아. 점심 밥값 해야지?"

"뭐 하면 되는데?"

"송스 그룹과 관계된 사람 중에, 현재 상무이거나 과거에 상무였던 사람을 전부 다 찾아."

"엑. 대상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나이는 20세부터 40세 사이. 송예솔 관장과 사이 나쁜 사람이면 더 좋고."

"그럼 대상이 확 줄지. 근데 우리 점심은 맛있는 거 먹어?"

"식당에 룸 잡아놨다. 넌 먹으면서 일해."

은가은이 항의했다.

"와아! 사악한 흑마법사가 밥 먹을 시간도 안 주고 일 시킨다!"

"강남 호텔 뷔페의 룸으로 잡았다. 식사 시간은 무제한으로."

"찬란한 광휘의 백마법사 오라버니. 그놈이 누구든 소녀가 싹 다 털어드리겠사옵니다. 어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시지요."

***

은가은은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조사하면서 호텔 뷔페의 음식을 실컷 먹었다.

"후우. 맛있었다."

"이제 다 먹은 거냐?"

"아니. 디저트 먹어야지. 난 망고랑 케이크랑 와플을 삼단 접시에 골고루 쌓아서 갖다 줘. 아. 커피도."

"가은아. 너 너무 많이 먹는다? 뱃속에 그게 다 들어갈 공간이 있냐?"

"오빠! 사람을 밥만 주고 부려먹으려면, 소화도 시켜줘야지!"

"응?"

"소화 잘되는 마법도 걸어줘. 배 비워야 돼."

"전투보조 마법을 그렇게 쓰…. 그래. 가아은아. 더 먹어라. 뷔페에서 더 먹는다고 돈 더 드는 거 아니니까. 가아아은아."

"날씬해지는 마법도 걸어줘."

"그건 운동해."

"쳇."

은가은은 노트북을 두드려가며 부지런히 정보를 수집했다.

신성재가 소화 잘되는 마법을 걸어주고 룸 밖으로 나가서 디저트를 챙겼다. 은가은이 일하는 동안 음식 전달은 신성재가 맡았다.

신정재가 삼단 디저트와 커피를 들고 룸으로 돌아왔다. 은가은이 노트북을 돌려서 화면을 보여주었다.

"1차로 찾은 건 여기까지. 송스 그룹 손자 손녀들도 검색하고, 친척도 찾고, 거기다 경쟁사 2세와 3세들도 찾았어."

"생각보다 빨리 찾았다?"

"본인이나 주변 사람들이 SNS를 하더라. 내가 아이돌 팔 때 이런 거 진짜 잘했거든."

"그것도 아이돌 때문에 쌓은 스킬이구나. 너 가수 되고 싶다고 했던 것도 아이돌을 직접 보려는 게 목적이지?"

"아니거든?"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이야기해라."

"나한테 가수의 재능이 있을 수도 있지!"

"응. 아니야. 없어."

"보컬 학원에서 엄청 잘한다고 했다고. 음색도 좋고, 고음도 잘 지르고!"

신성재가 물었다.

"일반인과 비교한 거지?"

"그렇지!"

"가수와 비교하면?"

"으응? 어…."

은가은이 말을 돌렸다.

"오빠. 내가 2차는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찾아볼게. 학교 친구들까지 다 털 수 있어."

신성재가 노트북 화면을 보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왜? 하룻밤만 시간 주면 송충기 회장한테 숨겨진 자식이 있는지까지 알아봐 줄 수 있는데."

신성재가 화면을 가리켰다. 추적 동전의 잔상에서 본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찾았거든. 송스 쇼핑 송정석 상무."

***

신성재가 송예솔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장소는 송스 갤러리가 아니라 외부에 있는 카페였다.

은가은이 얼른 말했다.

"나도 따라갈래!"

"굳이?"

"응. 굳이."

송예솔이 카페에서 물었다.

"가은 씨도 굳이 왔네요?"

"오빠 조수니까 당연하죠."

"아직 햇병아리 대학생인데?"

"엄청 유능하거든요?"

신성재가 끼어들었다.

"최민구 이야기나 하시죠."

송예솔이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최민구 과장은 본사 감사실에서 내사 중이에요. 물론 본인 모르게요. 갤러리에서 만나면 최민구 과장이 눈치챌까 봐 일부러 여기로 모셨어요."

은가은이 얼른 손을 들었다.

"우리 만난 거 들키면 제 음반 이야기를 했다고 하세요."

송예솔은 살짝 놀랐다.

"음반이 있어요?"

"없죠."

"뭐야. 진짠 줄 알았네."

송예솔이 신성재를 돌아보며 큰소리쳤다.

"어쨌든 최민구 과장은 모르게 확실히 조사할게요."

신성재가 혀를 찼다.

"쯧. 이미 알던데."

"네?"

"최 과장은 만났습니까?"

"오늘은 출근하지 않았어요."

"불상을 깨뜨린 거, 최 과장의 단독 범행이 아니지요?"

"아직 조사 중이라…."

"왜 모르는척하실까?"

송예솔이 입술을 깨물었다.

"맞아요. 혼자 저지르기엔 사이즈가 크죠."

"표정 보니까 뒤에 누가 있는지도 짐작이 가나 본데, 찾았습니까?"

"용의자는 세 명으로 압축했어요."

"더 줄여드리죠."

"네?"

신성재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형사들이 우리 집에 찾아왔습니다."

송예솔은 당황했다.

"형사가 왜…."

"어젯밤에 우리 집 담장을 도적놈 셋이 넘으려고 했거든요."

"어머! 안 다치셨어요?

"괜찮습니다. 그놈들이 담장을 못 넘고 도망쳤으니까. 우리 집 담장이 좀 높습니다."

"아. 다행…."

"형사한테 들었는데, 우리 집 담장을 넘으려던 건 상구파라는 청부조직이더군요."

"처, 청부조직이요?"

신성재가 형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설명했다.

"조직원 하나가 자백했는데, 최 과장이라는 사람의 의뢰였다더군요. 형사에게 최 과장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송예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니까, 최민구 과장이 그 청부업자들을 시켜서 신성재 씨를 공격하려고 한 건가요?"

"갤러리의 과장한테 그런 인맥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그럼…."

"용의자를 세 명까지 줄였다면서요. 그중에 상구파를 움직일 놈이 누구일지는 송 관장님이 찾으셔야지."

송예솔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젠 조폭까지…. 선을 많이 넘었네요."

"찾을 수 있겠습니까?"

"찾아야죠. 본사 감사실을 움직여서…."

신성재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최민구가 왜 급하게 움직였을까요? 감사실에 끈이 있는 놈이 내사 사실을 알려줬겠지요."

"아…."

"이제 그놈을 찾을 정보는 충분히 준 것 같은데."

그녀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야겠어요. 상대가 선을 많이 넘었으니까, 할아버지께서 직접 해결하실 거예요."

신성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해결하는지는 뭐, 지켜보겠습니다."

***

카페에서 나온 후에 은가은이 물었다.

"왜 송정석이 범인이라고 직접 말해주지 않은 거야?"

"상구파가 전멸한 건 사고로 위장하거나 경쟁 조직에 덮어씌울 수 있어."

"이번엔 달라?"

"다르지. 오늘 오전에 형사가 찾아왔잖아. 이 시점에 최민구와 송정석까지 사고를 당하면 내가 의심받아."

"와! 오빠 똑똑해!"

"난 바보인 널 가르쳐서 인서울 대학에 보낼 만큼 똑똑하다."

"우이씨. 나 바보 아니다!"

신성재가 말했다.

"그리고 송스 그룹 일은 송 관장이 직접 처리하는 게 순리에도 맞아."

"하긴. 오빠가 그쪽 내부 문제까지 대신 치워줄 필요는 없지."

***

이틀 후에 은가은이 물었다.

"어떻게 됐대?"

신성재가 대답했다.

"송 관장이 아직 연락을 안 하네?"

"단서를 다 알려줬는데 아직도 못 찾았다고?"

"누군지는 찾았겠지. 집안사람이니까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리나 보다."

***

최민구가 송정석을 찾아가 사정했다.

"상무님. 저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한답니다! 살려주십쇼!"

송정석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최 과장님. 내가 알아봤는데, 이번 일은 본사가 작정하고 나선 거라서 막을 수가 없습니다."

"상무님! 전 상무님이 시키신 대로 한 것뿐이잖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뭐가 중요합니까! 제가 체포되게 생겼는데!"

송정석이 한숨을 내쉰 후에 진지하게 제안했다.

"최 과장님.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이번 일, 최 과장님이 안고 갑시다."

"뭐, 뭐라고요?"

송정석의 세 치 혀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최 과장님 뒤는 내가 봐주겠습니다. 변호사도 최고로 써서 집행유예가 나오게 하겠습니다."

"집행유예…."

"그리고 최 과장님은 이번 일 끝나면 쇼핑 쪽 회사 하나 차려요. 내가 일감 몰아줄 테니까."

최민구는 욕심이 났다.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회사 사장까지 된다면 나쁜 거래가 아니다.

"상무님. 약속 꼭 지키셔야 합니다."

송정석이 실실 웃었다.

"나 송스 그룹 3세입니다. 최 과장님, 아니, 최 사장님은 나만 믿으세요."

***

며칠 후에 송예솔 관장이 신성재를 찾아왔다.

"오늘은 가은 씨가 없네요?"

"걔가 학생이라서, 수업 들으러 갔습니다."

"좋네요."

송예솔이 용건을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신성재 씨를 부르세요."

신성재가 말했다.

"그렇군요."

송예솔은 당황했다.

"네?"

"뭐 이상한 거라도?"

"우리 할아버지가 부르신다니까요?"

"그런데요?"

"가셔야죠?"

"모르는 분을 내가 왜 굳이 찾아가서 만납니까?"

송예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시 모르셨어요? 우리 할아버지께서 송스 그룹 회장님이세요."

"압니다."

"네? 아는데 왜…."

신성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회사 안에서나 회장님이지, 그 회사와 상관없는 외부인이 보면 그냥 돈 많은 영감님입니다만?"

송예솔은 당황했다.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송스 그룹 회장이 만나자고 하면 당연히 움직일 줄 알았다.

그녀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조언했다.

"할아버지를 만나시면요. 성재 씨가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될 거예요."

"예를 들면?"

"할아버지의 인맥을 통한 더 많은 골동품 복원 의뢰를 받는다든가…."

"송스 갤러리에서 나한테 의뢰하는 건 쉽던가요?"

"네? 아…."

어려웠다.

신성재는 일을 가려서 받는다. 기왕이면 복원 마법이 잘 먹히는 골동품을 선호한다. 사연이 있어 보이는 유물을 더 좋아한다.

복원 비용도 비싸다.

설사 그런 조건이 맞는다 해도 요즘은 복원 의뢰를 잘 받지 않는다.

망가진 골동품을 찾아서 완벽하게 복원한 후에 다시 파는 쪽이, 남이 맡긴 물건을 복원해주는 것보다 많이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스 갤러리가 신성재에게 불상 복원을 처음 의뢰했을 때는 거절당했다. 인맥을 통한 후에야 겨우 의뢰할 수 있었다.

송예솔이 현실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안 오세요?"

"안 갑니다."

그녀의 어깨가 처졌다.

"네에. 할아버지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신성재가 물었다.

"송 관장님. 그놈은 어떻게 처벌했습니까? 지금쯤 결론이 났을 텐데."

"최민구 과장은 경찰 조사를 받고 있어요. 혼자서 상구파와 만난 것까진 인정했는데, 다른 혐의는 부인했어요."

신성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기대한 대답이 아니다.

"최민구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송정석 상무를 어떻게 처벌했냐고 물은 겁니다."

송예솔은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그 이름을 아세요?"

22. 창고

신성재가 인상을 썼다.

"내가 송정석이 범인인 걸 어떻게 아는지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닐 텐데요?"

송예솔 관장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경찰도 모르는걸…."

"상황을 추론해서 정답을 찾았습니다."

아니다. 마법을 써서 접선 현장을 봤다.

송예솔이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쉰 후에 말했다.

"송정석은 사촌오빠예요. 우리 할아버지한테는 손자죠. 제가 할아버지 눈 밖에 나게 하려고 벌인 짓이에요."

"능력이야 어떻든 회장 손자라서 상무가 됐겠군요."

"네. 송스 쇼핑에서 상무로 일했어요. 이번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요. 그리고 능력은 제가 훨씬 나아요. 전 사장이고 송정석은 상무잖아요."

"그래서 시기했다? 아니면 경영권 싸움입니까?"

"시기한 것도 맞고, 경영권을 노린 것도 맞아요. 구체적인 건, 집안일이 엮여 있어서…. 할아버지를 만나면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신성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만나야 할 만큼 구체적으로 궁금한 건 아닙니다."

송스 그룹의 경영권 분쟁은 신성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 네."

"송정석 이야기나 계속하시죠."

그녀가 머뭇거리다 설명을 보충했다.

"제가 송스 갤러리 말고도 대표를 맡은 업체가 있어요. 송스 아트홀과 송스 엔터죠."

알고 있다. 그런 정보는 은가은이 미리 조사했다.

"회장님이셨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아, 아뇨. 그 정도 규모는 아니고요. 작게 하는 거예요. 둘 다 회사 이름도 못 들어보셨을 거예요."

"전에는 못 들어봤습니다."

전에는 송스 엔터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이번에 은가은이 알려줘서 알게 되었다.

"네? 아…. 그래도 공연이나 연예계에 관심 있는 사람은 들어는 봤을 텐데…."

"연예계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네…."

신성재가 물었다.

"송정석이 원한 게 그 회사들입니까?"

"맞아요. 하지만 송정석의 능력으로 셋 다 먹을 순 없어요. 제가 가진 셋 중에서 송스 엔터가 타깃이었어요."

"송 관장님한테 엿을 먹이면 엔터를 먹습니까?"

"엿을…. 네. 다른 가족이 도와주면 가능하죠."

"하긴. 송정석 따위가 상무인 걸 보면, 다른 사람들도 한 자리씩 하고 있을 테니까."

"자세한 건 집안일이라서…."

신성재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처벌했습니까?"

신성재는 송스 그룹이 송정석을 처벌할 시간을 일주일이나 주었다.

"할아버지가 제주도로 보내셨어요."

"한라산 동굴에 가둬두기라도 했습니까?"

"네? 아뇨. 송스 그룹의 물류 창고가 있어요. 실권은 다 빼앗고 거기로 쫓아버리셨어요."

신성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날 쓱싹 하려고 청부조직까지 동원한 놈인데, 제주도 휴양지에서 회와 함께 술이나 마시면서 놀게 하는 게 처벌이다?"

송예솔은 또 당황했다.

송스 그룹은 상무 자리에 있던 놈을 회사에서 쫓아내고 아무런 실권도 없는 창고 현장 관리직으로 보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 정도면 귀양 보낸 급의 처벌이라고 생각했다.

송정석은 송스 엔터를 빼앗으려 했지만, 사촌인 송예솔에게 청부업자를 보내진 않았다. 물리적인 위협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도 처벌 수위를 낮추는 데 영향을 끼쳤다.

다만, 그 판단에 신성재에게 청부업자를 보낸 일은 아주 조금만 고려되었다. 신성재는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 문제를 깨닫고 급히 변명했다.

"송정석은 앞으로 다시는 경영권을 노리지 못할 거예요. 평생을 겉으로만 돌면서 그렇게 살아야 해요."

신성재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남들은 먹고살려고 힘들게 일할 때, 평생 한량처럼 놀고먹는 게 처벌이라…."

송예솔은 더 말해봤자 본전도 못 차린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신성재가 제주도가 있는 남쪽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쯧."

그런 후에 일부러 활짝 웃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송예솔이 고개를 더 숙였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

송예솔은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며 사과한 후에 그의 집을 떠났다.

신성재가 은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은아. 공부 잘하고 있냐?"

- 노는데?

"자랑이다?"

- 더 놀아야겠다!

"어차피 놀 거, 제주도나 가자."

- 앗! 제주도? 진짜? 좋지! 거기 기다려! 내가 지금 갈게!

은가은이 다니는 대학교는 신성재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신성재가 말했다.

"그래도 10분은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전화 받자마자 출발했지! 제주도 간다는데 어떻게 참아?"

"넌 섬 싫어하잖아."

두 사람은 무인도에 한 달 동안 조난됐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섬에 간 적이 없다.

은가은이 말했다.

"제주도는 그냥 섬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잖아. 그래서 거부감이 없어."

"하긴. 나도 그렇다."

"근데 제주도는 갑자기 왜 놀러 가는데? 거기에 맛있는 거 있어?"

"놀러 간다고 한 적은 없다만?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 것도 아니야."

"엥? 그럼 왜 가?"

신성재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마법사의 방식으로 빚 갚으러 간다."

***

세 시간 후에 신성재와 은가은이 제주 공항을 나왔다.

은가은이 물었다.

"제주도 왔으니까 일단 뭐 좀 먹자! 갈치 어때?"

"먹으러 왔냐?"

"먹으러도 왔지!"

"오늘 밤 비행기로 올라갈 때까지 굶을 순 없으니까, 먹긴 해야지."

***

은가은이 식당에서 해물 한 상을 시켜먹었다.

"우왕. 갈치가 커! 살도 엄청 두툼해!"

그녀가 뼈를 빼며 감탄했다.

"뼈가 굵어서 제거하기 편해!"

그렇게 먼저 갈치구이를 정리한 후에 살을 먹었다.

"폭신폭신하고 담백해! 맛있어!"

"간도 딱 적당하다."

같이 나온 갈치조림도 은가은을 감탄시켰다.

"양념이 살에 잘 배어서 이것도 맛있다!"

"가은아. 자꾸 내 몫에 젓가락 대지 마라."

"무가 특히 맛있어!"

신성재가 추가로 성게 미역국도 시켰다. 은가은이 그것도 먹고 감탄했다.

"대박! 바다 향이 엄청 많이 나! 미역이 부드럽고 잘 씹히고, 성게 향도 바다 향처럼 느껴져!"

은가은은 갈치조림 국물에 밥까지 비볐다. 갈치살도 팍팍 넣고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우왕. 제주도 오길 잘했다!"

"가은아. 우리 먹으러 온 거 아니다?"

은가은이 밥까지 싹 비운 후에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휴우. 맛있었다."

"생선은 진짜 좋아한다니까."

은가은이 배를 두드리며 물었다.

"그래서 마법사의 집에 용병을 보낸 그 흑막은 어디에 있는데?"

신성재가 정정해주었다.

"용병이 아니라 청부조직의 조폭. 흑막까지는 아니고 뒤에서 수작 부린 놈."

"그래서 흑막 송정석은 어디에 있는데?"

"이번에 좌천돼서 제주도 창고 관리직으로 왔다더라."

"엥? 겨우? 빵에 안 보내?"

"송스 그룹 체면 때문에 조용히 덮었겠지."

"콩가루 집안에 무슨 체면이 있어? 거기 사촌 간에도 서로 견제 엄청 하나 보던데?"

"그룹 내에서 송 관장의 파워가 약한 거겠지."

은가은은 실망했다.

"재벌가의 권력싸움은 좀 더 피 튀기는 줄 알았는데."

"송스 그룹도 하는 짓을 보면 재벌이 맞긴 해. 대부분의 계열사는 송스 갤러리나 엔터처럼 작지만."

"알지. 그거 내가 조사해줬잖아.'

"그래도 계열사가 많으면 그 사이에서 물류를 맡는 회사가 중요해져. 경쟁할 필요도 없이 수익이 알짜로 나오니까."

"송정석이 있는 곳도 거기야?"

"어. 그 물류 유통 회사의 제주도 창고 관리직."

신성재가 식당 밖을 가리켰다. 멀리 떨어진 곳에 창고 건물이 보였다.

"저기."

"그놈이 지금 저기서 일하고 있겠네?"

신성재가 일어났다.

"그래. 밥 다 먹었으면 빚 받으러 가자."

은가은이 반발했다.

"아니다! 나는 더 먹을 수 있다!"

"응? 가은아? 너 지금 갈치 해물 한 상 풀코스에 성게 미역국까지 먹었어."

"맛있었어."

"많이 먹었다고."

"그래도 해물 라면은 먹고 가자! 소라랑 고동 팍팍 들어간 거로! 빚 다 받으면 서울로 바로 튀어야 할 수도 있잖아!"

두 사람은 무인도에 조난됐을 때 조개를 잡아먹고 살았다. 그 조개도 막판에는 거의 잡히지 않아 굶다시피 했다.

그래서 생선구이도 좋아하지만 조개 요리도 좋아한다.

"어…. 그래. 그것까지만 먹자."

***

은가은은 근처에서 해물 라면을 파는 곳을 찾았다. 괜찮은 횟집에서 식사 메뉴로 파는 해물 라면이 유명했다.

"저기다!"

두 사람은 그곳으로 가서 라면을 주문했다.

은가은은 신나서 해물부터 골라 먹었다.

"히히. 맛있다."

신성재도 부지런히 먹다가 옆을 보았다. 식당 한쪽에는 룸 형태의 별실이 몇 개 있었다. 점원이 그 문을 열었을 때 아는 얼굴이 보였다.

"가은아."

은가은은 신성재의 라면 그릇에서 소라 하나를 몰래 집어가다가 얼른 변명했다.

"앗. 오빠 뿔소라 싫어하는 거 아녔어? 그래서 내가 대신 먹어주려고 했지!"

"좋아하니까 도로 내려놓고, 저기 좀 봐라."

"왜?"

"송정석이다."

송스 쇼핑의 송정석 상무가 횟집의 룸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은가은이 가자미눈으로 옆을 보며 말했다.

"실제로 보니까 아주 그냥 너구리처럼 생긴 게 송 관장이랑 닮았네."

"송 관장은 여우라더니?"

"여우나 너구리나 꼬리 달린 건 마찬가지잖아."

"창고에서 일하는 줄 알았더니, 여기서 술판을 벌였네."

"근무시간에 저래도 안 잘리나?"

"회장 손자는 그래도 되나 보다."

***

송정석은 송스 그룹의 제주도 창고 관리자가 되고 나서 매일 술을 마셨다.

"씨발. 실수 좀 했다고 내가 이 촌구석에 처박혀야 해? 남들은 뭐 실수 안 하고 살아?"

좌천됐어도 회장 손자라는 신분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래서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송 상무님. 잠깐 여기 계시다가 서울로 가셔야지요. 그때까지 제주도에 휴가 왔다 생각하십시오."

"무슨 휴가를 이런 싸구려 회에 술이나 마시면서 보냅니까?"

"이거 자연산…."

"김 차장님. 술 따라줄 여자가 없잖아요!"

"아이고. 다음엔 제가 더 신경 써서 모시겠습니다."

***

송정석은 술에 취해 밖으로 나왔다.

"씨발. 내가 이대로 끝날 거 같아? 할아버지 화만 풀리면 서울에 돌아가서 엔터는 내가 먹을 거다."

신성재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며 물었다.

"송정석. 송스 엔터가 그렇게 탐나냐?"

송정석이 인상을 확 구기며 신성재를 노려보았다.

"너 누구야? 누가 보냈냐?"

"내가 누가 보낸다고 가는 사람이 아닌데."

"이 새끼가! 그럼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데!"

"네가 나 보고 싶어 했잖아."

"뭐? 씨발. 너 따위를 내가 왜? 나 송정석 상무야!"

"난 신성재다."

송정석이 움찔했다.

"어? 신성재? 그 신성재?"

"어. 네가 사람 보내서 담그려고 한 그 신성재."

술에 취한 송정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신성재를 향해 달려들며 주먹을 휘둘렀다.

"이 새끼가! 너 때문에 내가 여기 처박혔어!"

송정석은 격투기 선수 출신 트레이너에게 싸우는 법도 배웠고, 사람도 많이 때려봤다.

송정석이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이 노리는 곳은 신성재의 턱이었다.

술은 취했어도 주먹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나쁘지 않은 정도로는 신성재에게 닿지 못한다.

신성재가 마법을 썼다.

[무빙]

전투보조 마법도 상황에 맞게 쓰면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 마법의 힘이 송정석의 다리를 쓱 밀었다.

달려들던 송정석의 무게중심이 틀어졌다. 몸이 휙 기울어지고 턱을 노리던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송정석이 주먹을 뻗은 채 앞으로 철퍼덕 넘어졌다.

신성재가 송정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맨땅에 다이빙하는 놈이 있네."

송정석이 고개를 들었다. 앞니가 흔들거렸다.

"이 새끼. 죽여버린다!"

"너 말 잘해야 한다? 그거 진심이냐?"

송정석은 술에 취해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고 착각했다. 신성재에게 맞은 게 아니니 겁을 먹지도 않았다.

송정석이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야. 나 송정석 상무야!"

신성재가 다시 마법을 썼다.

[무빙]

송정석의 팔이 옆으로 미끄러지며 일어나려던 몸이 도로 넘어졌다.

"켁! 씨발! 송스 그룹 힘이면 너 하나 묻는 거 일도 아니야!

"그러면 송스 그룹이 망한다?"

"뭔 개소리야! 우리 그룹이 왜 망해!"

"거기에 송 관장도 있으니까 망하는 건 좀 그런가?"

"역시 송예솔이 시켰구나!"

"근데 너 근무시간에 술 처마시는 거, 본사에서도 아냐?"

"씨발. 누가 그런 걸 신경 쓴다고…."

신성재가 히죽 웃으며 미끼를 던졌다.

"송 관장은 관심이 있겠지?"

23. 마법사의 방식

신성재가 말했다.

"네가 송 관장에게 엿을 먹였는데, 송 관장은 호구처럼 가만히 있을까?"

송정석이 화를 벌컥 내며 일어났다.

"가만히 있지 않았잖아! 송예솔이 할아버지한테 고자질해서 내가 여기 왔단 말이다!"

[무빙]

상대가 불안정한 자세로 일어날 때 마법으로 슬쩍 밀면 작은 힘으로도 쉽게 넘어뜨릴 수 있다. 게다가 송정석은 술에 취한 상태다.

길바닥에서 일어나던 송정석이 중심을 잃고 또 나자빠졌다.

"컥!"

"송 관장 생각은 다를걸? 네가 여기로 좌천된 건 회사 차원에서 한 거고, 개인적으로 엿 먹은 건 아직 못 돌려줬으니까."

신성재가 송정석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근무시간에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처마시는 걸 알면, 너한테 엿 먹일 방법이 떠오르겠지?"

"이 새끼가!"

신성재가 자빠진 송정석의 옆을 지나가며 미끼를 또 던졌다.

"제주도에 왔으니 근처에서 술이나 마시다 밤에 서울로 돌아가야겠다."

술값을 계산하느라 횟집에서 조금 늦게 나온 김 차장이 달려왔다.

"아이고. 상무님. 괜찮으십니까?"

송정석이 화를 벌컥 냈다.

"김 차장! 왜 이제 와!"

"예?"

"저 새끼 잡아!"

"이미 갔는데요?"

"김 차장도 봤지? 저 새끼가 나를 쳤다고! 고소해!"

김 차장은 송정석의 말투가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술을 마실 때까지는 김 차장님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냥 김 차장이 됐다.

"저기, 상무님이 먼저 주먹을 휘두르시다가 넘어지신 거…."

"저 새끼가 먼저 쳤다고 말을 맞추면 되잖아!"

"CCTV에 찍혔을 텐데…."

"돈 먹여서 지워!"

"그러다 본사에 알려지면, 감당이…."

송정석이 멈칫하다 욕을 내뱉었다.

"씨발. 송예솔이 본사에 알리겠지."

송정석은 제주도 창고 관리자로 좌천됐다. 원래 자리인 송스 쇼핑 상무로 복귀하려면 사고를 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싸운 상대는 신성재다.

그는 지난번에 신성재의 입을 막으려고 최민구 과장을 시켜 청부업자를 보냈다.

그가 또 신성재를 공격하고 고소까지 한다는 게 알려지면, 복귀는 그만큼 어려워진다.

"저 새끼가 그걸 알고 온 거야! 내가 자기를 못 건드린다고 생각하고 온 거라고!"

화가 치밀었다.

신성재는 송정석의 낮술도 언급했다. 송예솔 관장에게 그 이야기를 전할 것처럼 말했다.

"씨발. 저 새끼 내가 그냥은 못 보낸다."

창고에 있는 경비용 테이저건이 생각났다. 창고는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다.

***

은가은이 안경을 썼다. 그 안경에는 이글 아이의 하위 버전인 망원경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안경의 망원경 성능은 평범한 군용 쌍안경 수준이다. 대신에 쌍안경처럼 크지 않고 평범한 안경처럼 보인다는 게 장점이었다.

마법 공학으로 만든 그 안경이 작동하려면 당연히 마나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신성재가 마나를 충전해주면 망원경 기능을 몇 시간쯤은 쓸 수 있다.

은가은이 그 안경으로 송정석을 감시하며 말했다.

"오빠. 송정석이 창고로 간다."

신성재는 이글 아이로 창고 내부를 보고 있었다.

"제일 큰 창고로 가지?"

"응."

"거기에 테이저건이 있거든."

그 창고에 테이저건이 있다는 건 이글 아이로 이미 확인했다.

"내 입을 막으려고 청부업자까지 보낸 놈이, 내가 한 말을 듣고 참을 리가 없지. 저 테이저건을 꺼내서 날 쏘려고 할 거야."

"창고에 다른 사람도 있어?"

"직원 두 명."

***

송스 그룹의 제주도 물류기지는 대형 창고 하나와 보조 창고 몇 개로 구성되어 있다.

송정석이 제일 큰 창고에 들어갔다. 그곳에 경비 용품이 보관되어 있다.

송정석이 소리를 질렀다.

"다 밖으로 나가!"

직원 두 명이 창고 안에 일하고 있다가 밖으로 나가며 투덜댔다.

"일해야 하는데 왜 저래?"

"몰라."

"술 냄새 많이 나던데?"

"일단 나가. 회장님 손자한테 찍혀서 좋을 거 없어."

송정석은 직원들을 내보내고 창고 문을 닫았다. 창고 내부의 CCTV도 껐다.

그런 후에 경비 물품을 보관해놓은 캐비닛을 열었다. 테이저건이 보였다.

그가 그걸 꺼내 손에 쥐어보았다. 손아귀에 착 감겼다.

"씨발. 이거지. 신성재 그 새끼. 이걸로 오줌을 질질 싸게 만들어주마."

그런데 그는 테이저건을 쏴본 적이 없다. 대신에 예비 배터리나 전극 카트리지는 충분히 있었다.

"한 발 쏴 보자. 어디까지 나가나."

***

은가은이 물었다.

"오빠. 이 안경에 투시 기능은 없어?"

"있겠냐?"

"창고 문을 닫아버려서 안쪽이 안 보여. 어때?"

"다른 직원들을 다 쫓아내고 혼자 남았다."

"뭐 하는데?"

"테이저건 꺼내서 겨눠보네."

"진짜로 오빠를 쏘려나 보다. 연습까지 하는 거 보면."

"그러라고 일부러 마주쳐서 미끼를 많이 던졌거든. 아. 방금 쐈다."

"그럼 오빠도 시작하는 거야?"

"당연하지."

신성재가 마법을 사용했다.

[염라의 불]

쇠를 녹이는 불꽃이 그의 손 위에 생성됐다.

[무빙]

그 불꽃이 창고를 향해 날아갔다.

"이글 아이 마법으로 확인했는데, 저 창고에 기름통이 있더라고."

"저놈이 사고당하면 오빠가 의심받는다더니?"

"그러니까 누가 봐도 저놈 잘못처럼 보여야지."

염라의 불이 땅바닥에 깔린 채로 빠르게 날아갔다. 지금은 낮이라 불꽃을 숨기기 쉬웠다.

불꽃이 창고 앞에서 위로 휙 솟구쳐 창문으로 쏙 들어갔다.

송정석이 테이저건을 허리에 찼다. 그 근처에 기름이 들어 있는 플라스틱 통이 있었다.

쇠를 녹이는 불꽃이 기름통에 꽂혔다.

즉시 기름통에 불이 붙었다.

송정석이 옆을 돌아보고 당황했다.

"어? 뭐, 뭐야!"

마법으로 만든 불꽃은 아직도 화력이 남았다. 기름에 붙은 불이 순식간에 불기둥으로 변해 천장으로 치솟았다.

스프링클러가 화재를 감지하고 물을 뿌렸다.

하지만 창고에는 탈 것이 너무 많았다. 인화물질도 많았다. 스프링클러가 물을 아래쪽으로 뿌렸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송정석은 불기둥을 보고 당황해서 창고 밖으로 도망쳤다.

"으아아!"

창고 문은 닫아두긴 했어도 잠근 건 아니다. 그래서 탈출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송정석이 창고 밖에서 물에 홀딱 젖은 채로 욕을 했다.

"씨발. 이게 뭐야? 갑자기 불이 왜 나! 창고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직원들이 놀라서 달려왔다.

"불이야!"

"소화기!"

"소화기로 될 게 아니야! 스프링클러는!"

"지금 작동 중입니다!"

신성재가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염라의 불]

불꽃이 다시 창고로 날아가 창문을 넘었다.

"더 타야 돼."

화재가 번지지 않은 곳에 불꽃이 떨어졌다. 그곳에도 인화물질이 있었다.

불길이 새로 치솟았다.

창고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직원 중 하나가 송정석의 허리를 보았다. 테이저건이 있었다. 그 테이저건은 창고에서 쏜 상태 그대로였다.

"어? 송 상무님. 그거 테이저건 아닙니까?"

"어? 이, 이건…."

"이미 쏘신 것 같은데, 혹시 그것 때문에 저 화재가 일어난 겁니까?"

송정석이 황급히 테이저건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아, 아니야! 내 탓이 아니란 말이다! 난 아무것도 없는 쪽으로 쐈다고!"

"쏘긴 쏘셨…."

"내가 불을 낸 게 아니라고!"

신성재가 염라의 불을 몇 발 더 던져넣었다. 대형 창고의 화재는 이제 스프링클러로는 막을 수 없는 수준으로 번졌다.

소방차가 출동하긴 했지만, 내부에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 무리한 진입은 하지 않았다.

불길은 대형 창고를 활활 태우고 잿더미로 만들고 나서야 꺼졌다.

불이 꺼진 후에 직원들이 창고 내부를 보며 허탈해했다.

"다 탔는데?"

"조금 남은 것도 물에 젖어서…."

"건질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건져서 뭐하게? 이걸 납품하면 회사 신용에 문제 생겨."

***

제주도 창고 화재사건은 즉시 송충기 회장에게 보고됐다.

"뭐? 제주도 물류 창고가 날아갔다고?"

비서실장이 보고했다.

"예. 화재 때문에…."

"피해가 커?"

"인명피해는 없습니다만, 제주도 계열사나 거래처에 공급할 물건이 모두 그곳에 있었습니다."

"얼마나 남았어?"

"보조 창고에 소량이 있습니다만, 그걸로는 급한 불도 끄기 어렵습니다."

송충기 회장이 즉시 지시했다.

"다른 지역에서 긴급 공수해서라도 채워! 제주도에서 못 구하는 건 이쪽에서 빨리 수배해서 배나 비행기에 싣고 가!"

"회장님. 그러면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 겁니다."

"지금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잖아! 창고 새로 지을 때까지 어떻게 대응할 건지도 계획 세워서 보고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송충기 회장은 답답함을 느끼고 넥타이를 풀었다.

"후우. 화재 원인은 뭐야?"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괜찮으니까 말해봐."

"송정석 상무가 술에 취한 상태로 창고에서 테이저건을 실수로 발사해서, 인화물질에 불이 붙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송충기 회장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시선이 벽시계를 향했다.

"근무시간에?"

"예."

"테이저건은 왜 꺼냈는데? 그 녀석은 경비 부서가 아니잖아."

"신성재라고…."

송충기도 아는 이름이다.

"골동품 복원 전문가? 그 사람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제주도에서 둘이 마주쳤다가, 시비가 붙었는데 송정석 상무가 밀렸나 봅니다."

"치고받았어?"

"아닙니다. 송정석 상무 혼자…. CCTV 영상을 입수했는데 보시겠습니까?"

그 영상은 송정석과 함께 있던 김 차장이 확보해둔 것이다.

송충기 회장이 손을 회장실 TV 쪽으로 흔들었다.

"틀어봐."

비서실장이 회장실의 대형 TV로 CCTV 영상을 재생했다.

영상 속에서 송정석은 신성재 앞에서 혼자 주먹질하고, 혼자 일어나다가 자빠지며 소리 지르는 것처럼 보였다.

송충기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치겠네. 술에 취해서 제 몸도 못 가누는구나. 그것도 징계받아 간 곳에서, 근무시간에!"

"죄송합니다. 그런데 송정석 상무는 자기는 많이 취하진 않았다고…."

"주정뱅이들은 원래 다 그렇게 말해!"

신성재가 떠난 후에 송충석이 김 차장에게 소리 지르는 모습도 있었다.

CCTV에는 목소리는 녹음되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지시를 하는지 알아볼 수는 있다.

송충기가 말했다.

"저놈이 혼자 지랄발광한 건 알겠다. 그 후에는?"

"말씀드렸다시피, 창고에 가서 테이저건을 몰래 꺼내려고 직원을 다 내보냈다가, 사고로…."

"창고에 있던 테이저건을 가져가서 신성재를 쏘려다가, 실수로 불을 냈다는 거잖아!"

"송정석 상무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만, 정황상…."

송충기 회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새끼 당장 쫓아내!"

"예?"

"앞으로 회사에 발도 못 붙이게 해!"

"회장님. 진정…."

"그거 아주 회사 말아먹을 새끼야!"

****

신성재와 은가은은 송스 그룹의 제주도 물류 창고를 날려버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튿날 신성재의 집으로 송예솔이 찾아왔다.

은가은은 신성재의 집에서 오메기떡을 먹고 있었다.

신성재가 물었다.

"송 관장님도 드릴까요? 어제 제주도에서 사 온 건데."

"아뇨. 전 괜찮아요."

은가은이 옆에서 오메기떡을 먹으며 말했다.

"맛있는데."

송예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제 송정석을 만나셨다면서요?"

"제주도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송정석을 잡으려고 제주도에 가긴 했지만, 횟집에서 만난 건 우연이다.

은가은이 옆에서 바람을 잡았다.

"오빠한테 주먹을 휘두르다가 혼자 자빠지던데요. 가정교육이 문제인가?"

송예솔이 은가은을 살짝 째려본 후에 신성재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송 관장님이 한 일도 아닌데 사과는 무슨."

송예솔은 창고에 불이 난 일을 이야기하고, 후속 조치도 말했다.

"송정석은 회사에서 완전히 퇴출됐어요. 할아버지가 그렇게 결정하셨거든요."

"돈 많은 백수가 됐겠군요."

"이젠 돈도 없어요. 이번 창고 화재로 회사가 엄청난 손해를 봤거든요. 그걸 물어내게 할 거예요."

신성재가 씩 웃었다.

"이제야 송스 그룹의 조치가 좀 마음에 드네요."

"제주도 창고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금일봉을 지급했어요."

"입단속인가요?"

"송정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려지면 우리 집안에는 좋을 게 없으니까요."

옆에서 은가은이 물었다.

"그럼 오빠한테도 봉투 주러 온 거예요?"

"신성재 씨가 원한다면…."

신성재가 말했다.

"내 입도 막으려고요?"

"아, 아뇨. 저는 사과의 의미로…."

"농담입니다."

신성재가 송스 그룹의 제주도 물류 창고를 날려버렸다.

사과는 이미 마법사의 방식으로 받았는데, 봉투까지 받을 생각은 없다.

"최민구는 이제 어떻게 하려나."

***

송스 갤러리 최민구 과장은 송정석이 송스 그룹에서 쫓겨났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새끼가 나한테 약속한 거 하나도 못 지키게 됐는데, 내가 왜 독박을 써?"

최민구가 형사 앞에서 자백했다.

"저는 위에서 시켜서 한 겁니다. 송정석 상무가 다 시켰습니다!"

송정석도 체포됐다.

24. 고철

광역 특별수사지원팀은 열차 테러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부서다. 그래서 그 팀은 조금이라도 테러가 의심되는 사건은 즉시 정보를 받아본다.

테러일 확률이 거의 없는 사건도 보긴 한다. 다만 그런 건 따로 모아뒀다가, 수사기관에서 결론이 난 후에 한꺼번에 검토한다.

송스 그룹의 제주도 창고 화재사건도 시간이 꽤 지난 후에 특지팀의 회의 테이블에 올라왔다.

형사가 설명했다.

"이 사건에서 창고에 불을 지른 건 송정석입니다. 물론 송정석은 자기 짓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팀장이 물었다.

"그럼 불이 왜 났대?"

"저절로 났다는데요?"

"뭔 개소리야?"

"그리고 송정석은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 취급이랍니다. 그룹 차원의 법률 지원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재벌 3세인데, 자기네 창고 태워 먹은 정도로 큰 처벌을 받진 않았겠지."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어? 화재 때문에?"

"아닙니다. 공범인 최민구가 자백했거든요. 송정석의 지시로 골동품 복원 전문가에게 청부업자를 보냈답니다."

"그래도 재벌 3세인데…. 사건이 그거 한 건이 아니구나?"

"예. 송정석은 그 청부업자를 이용해서 다섯 건의 폭행 사건을 더 저질렀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회의 테이블에서 자료를 같이 검토하던 도서윤 형사가 말했다.

"아! 신성재 씨 집에 청부업자가 찾아갔던 그 사건! 송정석이 시킨 거구나."

팀장이 물었다.

"왜? 도 형사가 아는 사람이야?"

"아빠 거래처 사람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몰라요."

***

1년이 더 지났다.

신성재가 집 지하실 공방에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지금 그가 찾는 것은 적당히 손상된 유물이다. 그중에서도 원래는 고가였는데 손상되면서 가치가 폭락한 것이 필요했다.

그런 유물이 인터넷에 매물로 직접 올라오는 경우는 드물다. 대신에 그게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가끔 나온다.

은가은이 집으로 놀러 왔다가 지하실로 내려왔다.

신성재가 물었다.

"가은아. 너 지금 수업시간 아니냐?"

"쨌어."

"아저씨랑 아줌마가 내주시는 등록금이 이렇게 녹는구나."

"오빠랑 노느라 등록금이 녹았다고 해야지."

"나 팔아먹지는 말고."

신성재는 노트북만 보고 있었다. 은가은이 그 옆을 서성거리며 말했다.

"오빠. 나 연기 하는 거 어때?"

"배우?"

"응!"

"넌 되고 싶었던 게 참 많아. 과학자, 운동선수, 마법사. 그게 다 안되니까 가수를 한다면서 보컬 학원비까지 뜯어가더니?"

"꿈이 좀 변할 수도 있지!"

"그래서 가수는 포기하고?"

은가은이 자랑했다.

"포기한 건 아니야. 보컬 학원에서 나 이제 노래 되게 잘한다고 했어. 기본기가 단단히 잡혔다고 했다고."

"그동안 거기에 쓴 돈이 얼마인데, 음치 아니면 너 정도는 해야지."

"우이씨. 나 이제 노래 잘한다고."

신성재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잘 나가는 가수랑 비교하면?"

"인간적으로 유명 가수랑은 비교하지 말자!"

"학원에서 아직 멀었단 소리를 들었구나. 그래서 노선 바꾸는 거냐? 전문용어로 그걸 잡캐라고 한단다."

"그게 아니라!"

은가은이 당당하게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연기가 되잖아. 이미 실전에서 연기력을 증명했잖아."

신성재가 고개를 돌렸다.

"실전이라니? 언제?"

"오빠 옆에서 마법사의 조수 할 때. 마치 스파이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했잖아."

"하긴. 아무도 너를 경계하지 않더라."

"거봐!"

"그러니까 네 말은, 배우가 가수보다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치!"

신성재가 옆을 가리켰다.

"가은아. 저기 거울 있다. 저기 서봐."

"응? 왜?"

"배우가 되려면 예뻐야 유리한데, 네 얼굴을 봐라. 통통하고 귀여운 게 꼭 만두 같다."

은가은이 발끈했다.

"우이씨. 난 연기력이 된다고!"

"설사 실력이 된다 치더라도, 지금 네 상태로는 그 연기력을 보여줄 기회조차 못 잡아."

"살 빼면 되잖아!"

신성재가 방긋 웃었다.

"오늘 점심은 참치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내일부터 뺄 거야!"

"그래. 이래야 우리 가은이지."

"오빠가 마법사면 뭐해? 도움이 안 돼! 살 빼는 마법만 있으면 간단히 해결되는데!"

"운동해."

"그것도 내일부터 할 거야!"

"한 달 뒤에도 똑같은 소리를 하겠구나."

"아니라고!"

"나 일한다. 방해할 거면 가라."

그녀가 당당하게 말했다.

"참치는 먹고 갈 거야."

그녀가 지하실 공방에 새로운 물건이 들어온 게 있나 구경했다. 그러다 거치대 위에 놓인 비녀를 잡았다.

"이건 아직도 빛난다."

1년 전에 발광 마법을 인첸트한 비녀에서는 은은한 빛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이거 언제까지 빛나?"

"그건 거기 담긴 기원이 아이템의 코어 역할을 해. 코어의 힘이 모두 사라지면 빛도 꺼져."

"그게 언제인데?"

"며칠 전에 빛이 꺼졌어."

은가은이 비녀를 보았다.

"응? 지금도 이렇게 빛나는데?"

"그 코어가 말이야. 충전이 되더라고."

"어? 그게 왜 가능해?"

"방전된 비녀에 마나를 넣었더니 기원의 힘이 다시 충전되더라. 기원에서 나오는 기운과 마나가 비슷한 성격이라 그런가 봐."

은가은이 나름의 방식으로 그 이유를 이해했다.

"아! 이거 건전지가 아니라 충전지 방식이구나!"

"비슷하지. 전기가 아니라 마나를 써서 기운을 충전한다는 게 다르지만."

그녀가 은은한 빛이 나는 비녀를 머리에 대보며 말했다.

"근데 1년이면 진짜 오래 간다."

"여행자의 반딧불이란 마법은 마나 소모량이 워낙 적거든. 만약 염라의 불처럼 격렬한 걸 걸어놨다면 금방 기운을 다 소모했겠지."

그녀가 비녀를 머리카락에 꽂아보며 물었다.

"그렇구나. 그럼 이 비녀는 어느 정도 수준의 유물이야? 그러니까 등급 같은 걸 따지면 어떻게 돼?"

"고급"

"오! 고급 유물! 고급이면 좋은 건가?"

"아무런 효과가 없는 골동품보단 좋지."

"이것보다 더 좋은 것도 있어?"

"희귀. 근데 그 비녀는 희귀가 되기엔 서사가 부족해."

은가은은 기원을 가진 다른 유물이 생각났다. 그 유물 덕분에 신성재가 현대 지구에 기원과 기운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럼 송스 갤러리에서 의뢰받았던 그 쪼개진 불상은?"

은가은은 그 불상의 유래를 조사하고 신성재와 함께 현장 답사도 했다. 신성재는 오는 길에 콘크리트 다리도 하나 무너뜨렸다.

은가은이 물었다.

"그 불상은 희귀야?"

"아니."

"에이. 더 좋은 건 줄 알았더니, 그것도 고급이야?"

"그 불상은 전설급 유물이지."

"응?"

"그 불상에는 수백 년에 걸쳐 쌓은 전설이 있잖아. 희귀보다 대단한 거야."

은가은이 비녀를 꽂은 모습을 거울이 비춰보며 말했다.

"이 빛나는 비녀보다 더 좋은 게 희귀인데, 희귀 위에 있는 게 전설이면…."

그녀가 손뼉을 쳤다.

"엄청 좋은 거네!"

"엄청 좋은 거지."

"그건 안 파나?"

"안 팔겠지."

"그럼 마법으로 몰래 쓱싹 하면?"

신성재가 은가은을 다시 돌아보았다.

"내가 너한테 도둑질하라고 가르친 기억은 없는데?"

"에이. 농담이지."

"농담 맞지?"

그녀가 비녀를 내려놓고 주변을 보며 말을 돌렸다.

"고급보다 낮은 등급도 있어?"

"있지."

이 지하실은 신성재가 마법을 연구하는 곳이다. 그래서 연구에 필요한 물건이 많았다. 드릴이나 그라인더, 조각용 칼, 3D 프린터 등의 제작 장비가 자리를 차지했다.

그건 모두 인첸트 마법을 연구하느라 쓰는 장비들이다. 어떤 소재나 형태가 마법에 잘 반응하는지 알아내려면 다양한 시도가 필요했다.

이 지하실에는 골동품도 많았다. 그 골동품은 대부분 마법을 연구하기 위해 사들였다.

그렇게 사들인 골동품 중에는 마법을 인첸트했을 때 반응이 다른 것이 있다.

신성재가 그중 하나를 집었다. 마패였다.

"이런 게 일반 등급 유물이야. 마법진을 새겼을 때 마나의 자연 소모가 적어서 효과가 더 오래 유지돼."

"이건 어떤 기원을 품고 있는데?"

"없어."

"응?"

"그러니까 일반 등급이지. 핵 역할을 하는 기원이 없으니까 스스로 동력을 공급하진 못해."

"기원이 깃든 것도 아닌데 왜 더 오래 유지돼?"

"기원까지는 되지 못한 사연이 있겠지. 예를 들면 이 벼루는 누군가 아주 오랫동안 쓴 거야. 여기에 어떤 사연이 얼마나 깃들었는지는 아직 연구 중이다."

그런 일반 등급 골동품조차도 귀했다. 대부분은 그냥 평범한 골동품이었다.

당연히 고급 등급부터는 훨씬 더 귀했다.

"등급도 없는 골동품이 너무 많다."

"연구가 끝난 건 도로 팔아야지."

멀쩡한 골동품을 샀다가 도로 팔면 손해를 보기 쉽다. 복원해도 가치가 낮은 건 거래 수수료조차 안 나왔다.

그쯤은 감수해야 한다. 마법 연구는 원래 돈이 많이 든다.

연구에 필요한 돈은 적당히 손상된 고가의 골동품을 마법으로 복원하고 비싸게 팔아서 번다.

그렇게 해도 연구비가 부족할 때는 복원 의뢰를 받아준다. 송스 갤러리처럼 고가품만 복원 의뢰를 하는 곳도 있다.

은가은이 툴툴댔다.

"그 실력으로 내 명품 가방 좀 고쳐달라니까."

"가은아. 시장에서 산 싸구려 짝퉁 가져와서 명품으로 만들어달라며. 그건 고치는 게 아니라 새로 만드는 거야."

"그러니까 마법으로 쓱싹!"

"복원 마법은 창조 마법이 아니다."

짝퉁을 정품으로 바꾸는 건 창조 마법의 영역이다.

"쳇. 짝퉁도 안 되고, 낡은 가방을 새것으로 바꿔 주지도 못하고."

"가죽 복원은 마나를 너무 많이 잡아먹으니까 가성비가 떨어져."

가죽은 마나도 많이 먹고 손도 많이 간다.

그 노력으로 가방 하나 복원하느니, 금속 골동품을 복원해 팔고 새 가방을 사는 게 훨씬 낫다.

"철가방이라면 금방 고쳐줄게."

금속은 복원 마법이 잘 먹힌다.

"오빠. 나 대학생이야. 쇠로 만든 가방 들고 뭐 하라고? 총알이라도 막게? 아…. 무인도에서 총알 날아오던 거 생각난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오빠. 나 어지러워. PTSD가…."

"그렇게 약 팔아도 네 낡은 가방은 안 고쳐준다."

"쳇."

은가은이 툴툴대며 골동품들을 뒤적였다.

"근데 여기 이제 너무 비좁은 거 아냐?"

"그렇긴 하지."

이 집의 담장과 벽 곳곳에는 정찰 마법과 경계, 방어 마법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지하실 공간 자체가 부족한 건 마법으로도 해결하지 못했다. 오히려 마법 수준이 높아지면서 더 넓은 공방이 필요해졌다.

신성재가 말했다.

"그래서 이사 가려고."

은가은이 고개를 휙 돌렸다.

"응? 이사? 어디로? 설마 막 멀리 가는 거 아니지? 섬은 아니지?"

"우리가 섬은 좀 싫어하잖아?"

"그치. 난 섬으로는 여행도 안 가."

"넌 작년에 제주도에 가서는 그렇게 맛있게 먹더니?"

"거긴 섬 느낌이 아니라서 가끔은 괜찮아.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

"서교동으로 가려고."

"옆 동네 서교동?"

은가은이 신나서 폴짝 뛰었다.

"아싸아! 우리 학교랑 더 가까워졌다!"

"가까워진 게 그렇게 좋아할 일이냐?"

은가은이 손가락을 꼽았다.

"좋지! 서교동이면 수업 중간에 시간 비면 와서 낮잠 자도 되고, 밥도 거기서 먹어도 되고, 술 마시다 피곤하면 거기서 자도 되고."

"그거 다 네가 지금도 하는 거다?"

"지금보다 더 자주 할 수 있잖아. 아싸아."

"그러라고 널 대학 보낸 줄 아냐?"

"내 등록금은 엄빠가 주는데?"

"과외는 내가 했지. 바보를 가르쳐서 인서울 대학교에 보낸 내가 자랑스럽다."

은가은이 신난 얼굴로 물었다.

"아, 됐고, 이사 어디로 갈 거야? 나도 좀 찾아볼까?"

"이미 봐둔 곳 있다."

"어딘데?"

"서교동. 문제는 가격이지. 그 집이 여기보다 넓은 건 좋은데, 훨씬 더 비싸거든."

"돈 더 벌어야겠다."

"그러려면 귀한 유물을 사서 복원한 후에 비싸게 팔아야지. 그런 유물을 찾으려고 외국 사이트까지 검색했는데…."

신성재가 노트북을 옆으로 돌렸다.

"이게 경매에 떴다."

노트북 화면에는 영어로 된 기사가 하나 떠 있었다.

"응? 칼이네?"

녹으로 뒤덮인 아주 오래된 철검이 발견돼 경매에 올라왔다.

발견된 곳은 영국이고, 경매장의 위치도 영국이다.

"이거 내가 전에 본 적 있는 칼이다."

"응? 이걸 어디서 봤는데?"

신성재가 대답했다.

"예전에 복원해준 다른 유물의 천오백 년쯤 전 기억에서."

25. 인천공항

신성재가 봐둔 집은 서교동의 단독주택이다.

그 집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다.

은가은이 신성재와 함께 그 집을 보러 갔다.

"부동산엔 안 들러?"

"그 집을 매입할 자금을 아직 못 벌었잖아."

"그럼 집 안쪽은 안 봐?"

"실내는 이글 아이로 대충은 확인했다."

이글 아이 마법으로 창문 안쪽은 대충 둘러보았다. 문제는 창문이 없는 지하실인데, 그건 도면을 조회해 넓이만 확인했다.

은가은이 서교동에 도착한 후에 신나서 말했다.

"히히. 이 동네가 우리 학교랑 훨씬 더 가깝다."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오빠가 사려는 건 어느 집이야?"

신성재가 앞을 가리켰다.

"저 집."

은가은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 저 집. 저… 집?

그녀는 그 집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저 집은…."

"왜?"

은가은이 두 팔을 옆으로 벌리며 외쳤다.

"쩐다! 엄청 크잖아!"

"아주 옛날에 정치인이 살았던 곳이라더라."

"응? 정치인이 이런 큰 집에서 살아?"

"그랬다더라고."

"정치인은 월급이 그렇게 많아?"

"그러겠냐?"

"이 집 얼마인데?"

"비싸."

"막 10억 넘어?"

"지금은 50억도 넘어."

"와아! 와아…. 아? 50억이면 너무 비싼 거 아냐?"

"비싸지."

"오빠 골동품 팔아서 진짜 돈 많이 벌었…."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닌데? 많이 벌긴 했어도 이 집을 살 만큼 벌진 못했을 텐데?"

"많이 벌었던 돈도 대부분 연구비로 썼다."

"엥? 그럼 지금 거지야?"

"그렇다고 거지는 아니지."

"아니, 어쨌든 그럼 이사는…."

그녀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계산하다가 말했다.

"오빠. 여긴 포기해. 50억이 없잖아. 지금 집에서 어떻게든 잘 해봐."

"여기로 이사 올 거야. 이미 결정했어."

"왜?"

"여기가 터가 좋거든."

은가은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혹시 마법사는 풍수지리도 봐?"

"여긴 집터가 조금 특별해. 집터 전체를 놓고 보면 일반 등급 유물 수준은 될 정도로."

"일반 등급이면, 기운을 스스로 만들어내진 못하지만, 마법진의 마나가 좀 오래 유지되는 효과는 있는 거?"

"맞아. 그러니까."

신성재가 저택이 지어진 땅을 보며 말했다.

"이 집터는 마법사의 공방을 만들기 딱 좋은 곳이지."

"그럼 이 으리으리한 저택은 무슨 돈으로 사게?

"지금 사는 집을 담보로 5억을 대출받았어."

은가은이 저택을 보았다. 지금 신성재가 사는 집도 단독주택이긴 한데, 딱 봐도 급이 달라 보였다.

"5억은 대출받았으면, 나머지 45억은?"

"이번 주에 그 돈을 벌려고."

"대출이 아니라 버는 거지?"

"그렇지?"

은가은이 손뼉을 쳤다.

"드디어 은행 터는구나! 전설의 은행 강도 나오나요?"

"넌 자꾸 날 도둑놈이나 강도로 만들려고 한다?"

"아니, 그것 말고는 한 방에 45억을 벌 방법이 없잖아."

"있어."

"뭔데?"

"이번 주에 영국 좀 갔다 오려고."

"앗! 영국 은행을 털게?"

"야. 넌 진짜…."

"아니야?"

"아니야."

"그럼?"

"영국에서 호구 잡으려고."

"응? 잠깐만. 영국?"

은가은은 오늘 영국에 관한 기사를 하나 봤다. 신성재가 노트북으로 보여준 기사인데, 영문 기사라서 제대로 읽진 않았다. 그래도 무슨 내용인지는 안다.

"혹시 아까 보여준 그 녹슨 칼? 경매에 올라온다는 그거?"

"어."

"그 칼이 어떻게 50억이나 해?"

"낙찰은 5억 미만으로 받을 거야."

"그 고철은 5천만 원도 많아 보이는데?"

"아무도 입찰 안 하면 그 가격에 살 수도 있겠지."

"근데 50억에 팔아?"

"세금 내려면 50억보다 더 비싸게 팔아야지."

은가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고철을 사서 50억을 남기려면…. 오빠! 진짜 호구 잡으러 가는구나?"

"영국 호구지."

"그럼 영국에 가야겠네?"

"경매장이 거기 있으니까?"

은가은이 눈을 반짝거리며 오른손을 들었다.

"나도! 나도 데려가! 내가 바람 잡을게!"

신성재가 물었다.

"가은아. 너 집에서 영국 여행을 허락받을 자신 있냐?"

***

이튿날 은가은이 신성재를 찾아왔다.

"오빠! 엄빠한테 허락받았어!"

신성재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확인해 본다?"

"얼마든지!"

그가 곧바로 은가은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아저씨. 가은이가 영국 여행을 허락받았다는 구라를 치네요?"

- 항공권과 체류비는 신 선생이 다 댄다며?

"네?"

신성재는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

- 가은이가 신 선생 따라가서 일을 도와주면서 해외 경험을 쌓겠다던데? 그래서 허락했지.

"아니, 절 믿으세요?"

- 내가 다른 놈은 몰라도, 무인도에서 우리 가은이를 보호하고 살려서 데려온 신 선생은 믿어.

"어…."

- 왜? 아니야?

"아니긴요. 다른 놈은 몰라도 저는 믿으셔야죠."

신성재가 통화를 마친 후에 은가은을 돌아보았다.

은가은이 두 손을 허리에 댄 채로 씩 웃었다.

"어때? 진짜지?"

"정보 제공에 문제가 꽤 있다? 너 아저씨한테 이번 여행이 공짜라고 했냐?"

은가은은 당당했다.

"당연히 고용주가 출장 비용을 대야지!"

"야. 꺼져."

"아 몰라. 나도 영국에 데려가!"

***

은가은은 결국 신성재에게 달라붙는 데 성공했다.

영국 경매가 코앞이라 오늘 당장 출국해야 한다.

공항으로는 신성재의 차로 이동했다.

그런데 그 차는 평소에 쓰던 클래식 스포츠카가 아니라 평범한 SUV였다.

은가은이 물었다.

"포붕이는 집값에 보태려고 팔아먹었어? 이 차는 뭐야?"

"안 팔았다. 이건 외부에 장기 주차해도 부담 없는 차라서 가져가는 거야."

"샀어?"

"큰 짐을 차에 실을 일이 가끔 있어서 중고로 샀다."

은가은이 시계를 보았다.

"그래서 차가 이렇게 느리구나? 오빠. 비행기 시간 안 늦어?"

"아슬아슬하지?"

은가은이 타박했다.

"그러니까 미리 출발했어야지!"

"가은아? 여권 잃어버린 건 누구지?"

"으응?"

은가은이 여권을 잃어버려서 그걸 찾느라 몇 시간을 낭비했다. 그래서 공항 갈 시간이 빠듯해졌다.

그녀가 얼른 태도를 바꾸었다.

"앗! 아직 안 늦었어! 더 밟아! 오빠! 달려!"

"지금 제한속도 꽉 채워서 달리고 있다만?"

"살짝만 과속하면 안 될까?"

"이 도로에 과속 단속 카메라가 얼마나 많은지 아냐?"

"몇 대인데?"

"나도 모르지만, 보면 알겠지."

신성재가 운전하면서 마법을 사용해 도로 앞쪽을 스캔했다.

[이글 아이]

[부끄럼쟁이 요정]

두 개의 마법을 조합하면 상당히 먼 곳까지 남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처럼 탐색 대상을 사람의 눈이 아니라 카메라 렌즈로 설정할 수도 있다. 탐색 조건에서 차량용 블랙박스처럼 작은 렌즈는 제외했다.

"음?"

"왜?"

신성재가 인상을 살짝 썼다.

"이상한 게 걸리네?"

카메라가 있을 리 없는 위치에서 도로를 향한 꽤 큰 카메라가 감지됐다.

그가 그 위치에 카메라 탐지 마법을 다시 사용했다. 대상 지역이 좁아지면서 정보가 더 자세하게 들어왔다. 다른 방향으로 향한 카메라가 한 대 더 감지됐다.

"누가 한강에 사는 새라도 찍으러 온 건가?"

찜찜했다. 쎄한 느낌도 들었다.

신성재가 '부끄럼쟁이 요정' 마법으로 파악한 위치에 정찰 마법을 사용했다.

[이글 아이]

이글 아이는 몇 가지 버전이 있다.

지금 이건 무인도에서 해적선을 격침할 때도 쓰고 제주도에서 창고를 태워버릴 때도 썼던 정찰 마법이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도로에서 꽤 벗어난 곳에 낡은 창고가 있었다. 그 건물 창문에 고배율 망원경이 두 대 보였다. 그중 한 대는 카메라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카메라가 향하는 방향이 인천공항 쪽이었다.

"공항을 감시하네? 왜?"

"응? 누가?"

지금 쓰는 이글 아이 마법은 대상 지점을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본다. 현장에 차 네 대와 사람 두 명이 보였다. 그 두 명은 차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딱히 뭔가 하진 않아도 수상한 놈들."

"그게 무슨 말이야?"

"쎄한 느낌?"

"겨우 그냥 느낌?"

"마법사의 느낌을 무시하지 마라."

은가은이 시계를 확인했다.

"그냥 경찰에 신고하고 가면 안 돼?"

"현장에 신고할 만한 단서가 없어. 경찰이 와도 그냥 둘러보고 갈 거야."

신성재가 차의 방향을 틀어 도로를 벗어났다.

"확인 좀 해보자."

"오빠. 우리 비행기 시간 빠듯하다며. 다른 데 샐 시간은 없잖아."

신성재가 상황을 설명했다.

"가은아. 우리는 지금 영국행 국제선 여객기를 타야 하잖아?"

"그치!"

"그런데 쟤들이 인천공항을 감시하고 있네?"

"어?"

"찜찜해서 비행기 타겠냐?"

은가은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그…렇네? 하늘에서 무슨 문제 생기면 깨꼬닥이니까?"

"그치."

"그럼 빨리 확인하고 얼른 공항 가자!"

***

신성재는 현장에서 꽤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그런 후에 트렁크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 속에는 새 모형이 들어 있었다.

신성재가 모형의 등을 열었다. 안쪽에 공간이 있었다.

"스마트폰은 여기에 넣어."

"어? 이건 뭐야?"

"우리 스마트폰을 대신 이동시켜줄 새. 누가 스마트폰 위치를 추적하면 계속 차를 타고 이동한 것처럼 나올 거다."

"진짜 새가 아니라 인형인데?"

"마법 공학으로 만든 새 모양 드론이야. 까마귀 모형을 개조했지."

은가은이 진지하게 조언했다.

"오빠. 다음부터는 좀 더 귀여운 새를 쓰자. 까마귀는 좀 그렇잖아."

"네가 만들어오던가."

"다시 보니까 까순이도 귀엽네."

"그새 이름을 붙였냐?"

"까순이한테는 비행 마법진을 심은 거야?"

"맞아. 그래서 마나가 떨어지면 추락해. 그 전에 일 끝내고 회수해야 해."

은가은이 스마트폰을 까마귀 드론의 몸통에 넣었다. 신성재도 그의 스마트폰을 넣었다.

그런 후에 까마귀 드론을 날렸다. 까마귀가 숲 위를 저공으로 날아갔다.

그들이 타고 온 중고 SUV에는 통신장비가 전혀 없다.

신성재가 차의 보닛에 새겨놓은 마법에 손끝을 대고 마나를 투입했다.

카모플라쥬 마법진에서 마치 한지 위에 먹물이 번지듯이 다른 색이 퍼져 나왔다. 차를 세워둔 숲과 비슷한 무늬와 색이었다.

이 위장 효과는 마법진의 마나가 모두 소진되거나, 신성재가 마법을 캔슬할 때까지 유지된다.

차 전체에 위장색이 덮였다. 이러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다.

신성재가 말했다.

"가은아. 넌 차에서 기다려."

"오빠. 무슨 일인지 확인만 하고 얼른 와. 비행기 놓치면 영국에 못 가."

"오래 안 걸린다."

은가은이 안경을 꺼내 얼굴에 썼다. 망원경 마법이 새겨져 있는 안경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마나 좀 채워줘! 내가 백업할게!"

"그걸로 망을 볼 수는 있는데, 네가 본 걸 나한테 어떻게 말해주게?"

"마법 통신기 없어?"

"추적당할 위험이 없는 마법 공학 통신기를 개발하는 중이긴 해."

"없구나."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시트 젖히고 누워 있어라."

"쳇. 알았어."

신성재가 수상한 창고로 이동했다.

창고 밖에는 네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한 대는 승합차이고, 세 대는 수입 전기 승용차였다. 차의 유리에는 짙은 틴팅이 되어 있어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내부가 보이지 않는 건 창고도 마찬가지였다. 창고의 모든 창문은 검은색이었다. 망원경이 설치된 곳만 창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밖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신성재가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남자 둘이 신성재를 휙 돌아봤다. 한 명은 반사적으로 손을 허리 뒤로 보내다가 멈췄다.

신성재가 그 동작을 못 봤을 리가 없다.

'이것 봐라?'

보통 사람은 허리 뒤에 뭔가 꽂아놓고 다니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러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누구쇼?"

"한강 주변을 산책하던 사람인데,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우리가 뭘 하던 왜 신경 씁니까?"

"여기 주인은 아닌 것 같은데."

남자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거 다 돈 내고 빌려서 쓰는 겁니다."

"누구한테?"

남자가 멈칫하다 인상을 풀며 웃음을 지었다.

"그게 왜 궁금합니까? 여기 땅 주인이랑 아는 사이인가?"

신성재가 대놓고 물었다.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인천공항을 관찰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리더인 남자의 표정이 싹 변했다.

"봤구나?"

"그러니까 확인하러 왔지?"

리더가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침입자다!"

옆에 있던 남자가 허리 뒤에서 칼을 뽑았다.

창고에서도 반응이 있었다. 창고 문이 벌컥 열리며 세 명이 더 나와 신성재를 반원형으로 둘러쌌다. 그중 두 명은 칼을 가지고 있었다.

리더가 실실 웃었다.

"아무것도 못 봤으면 하루쯤 더 살 수 있었는데."

신성재도 피식 웃었다. 상대는 하루를 더 산다고 했다.

"지금은 보내주는 척하고 미행해서, 내일쯤 죽이려 했구나?"

"그래야 탈이 없는데, 이미 의심하고 있으니 넌 여기서 죽어야겠다."

"경찰이 실종자의 휴대폰 위치를 추적할 텐데?"

"네가 죽은 건 일주일만 숨기면 돼."

"일주일 후가 디데이인가 보다? 왜? 그때 인천공항에 누가 오냐?"

리더의 표정이 굳었다. 대답으로 충분했다.

신성재가 혀를 찼다.

"쯧."

26. 테러 빌런

신성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느낌이 쎄해서 혹시나 했다만, 테러 빌런 새끼들이었네."

"뭐?"

"내가 좀 바쁘긴 한데, 그래도 먼저 본 사람이 치워야지."

인천공항을 노리는 놈들의 리더가 신성재를 노려보며 말했다.

"넌 우연히 이곳에 온 게 아니야. 이런 한적한 곳에서 마스크를 쓴 것도 이상해. 그렇군. 대화를 통해 정보를 빼내려는 건가?"

신성재가 히죽 웃었다.

"정보라면 이미 꽤 얻었지?"

"그럼 이제 내 차례다."

리더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잡아. 저 새끼가 뭘 아는지 알아내야겠다."

그의 부하 넷 중에 셋이 칼을 흔들면서 신성재를 향해 움직였다. 한 놈은 뒤에 남아 있었다.

리더가 말했다.

"내 부하들은 프로다. 어디 벌레처럼 꿈틀대면서 반항…."

신성재가 손을 쓱 흔들었다. 신성재를 중심으로 바람이 소용돌이치듯 불었다.

이곳은 바닥이 흙이다. 지푸라기 같은 것도 많았다. 그런 것들이 바람에 휘말려 위로 떠올랐다가, 바깥으로 쫙 퍼져나갔다.

흙과 지푸라기가 빌런들의 얼굴을 덮쳤다.

"큭. 갑자기 강풍이…."

선두에 선 놈이 단검을 든 손으로 눈 앞을 가려 흙바람을 막았다가 팔을 내렸다.

바로 앞에 신성재가 서 있었다.

"어?"

신성재가 팔을 뻗으며 마법을 썼다.

[바람 주먹]

바람 주먹은 거리가 가까울수록 위력이 강한 근접 공격마법이다. 지금처럼 바로 앞에서 마법으로 적을 타격하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케엑!"

적의 갈비뼈가 와장창 나갔다. 바람 주먹에 당한 놈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놈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졌다.

신성재가 손을 뒤집었다.

[무빙]

떨어지던 단검이 신성재의 손으로 스르륵 이동했다.

"이렇게 이용할 게 많은 장소에서 나와 싸우자니. 미친놈들인가?"

리더가 소리를 질렀다.

"보통 놈이 아니다! 죽여! 쏴!"

두 놈이 단검을 앞으로 겨누며 신성재를 경계했다. 공격이 아니라 방어 자세였다.

뒤에 있던 놈은 권총을 뽑았다. 소음기도 따로 꺼내 서둘러 총구에 끼웠다.

신성재가 말했다.

"탱커가 둘에, 원거리 딜러가 하나."

권총을 뽑은 놈이 소음기 장착을 마쳤다.

"됐…."

신성재가 손을 위로 휙 들며 방금 빼앗은 단검을 던졌다.

[바람 손]

바람 마법이 날아가는 칼날의 뒤를 밀어주고 궤도를 보정했다. 단검이 작살처럼 날아가 권총을 가진 놈의 목에 푹 꽂혔다.

"컥!"

권총에 소음기를 조립한 놈이 뒤로 나자빠졌다.

"탱커들이 허수아비네. 전장에서 그러면 전투 끝나고 대가리부터 박는다."

벌써 두 놈이 신성재의 손에 당했다.

앞에 있던 두 놈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신성재의 전투력이 그들의 예상보다 훨신 더 강했다.

리더가 외쳤다.

"저 새끼도 프로다! 무기를 바꿔!"

그들은 왼손으로 단검을 옮겨 잡고 오른손은 허리 뒤로 넘겨 권총을 뽑았다.

신성재가 물었다.

"너네는 총이 왜 이렇게 많냐?"

한 놈은 권총으로 신성재를 겨누었다.

지금 이곳에는 차가 네 대가 있다.

신성재가 그중에서 바로 옆에 세워진 승합차 뒤로 쓱 이동했다. 승합차가 방패로 쓰기 제일 좋았다.

권총을 겨눈 놈은 방아쇠를 함부로 당기지 않았다. 총소리 때문이다.

다른 놈이 서둘러 소음기를 끼웠다.

신성재가 손가락으로 승합차 철판에 간단한 마법진을 그렸다. 영구 마법진을 새긴 게 아니라, 잠깐 쓸 1회용 강화마법을 걸었다.

먼저 총을 겨눈 놈은 총소리가 부담스러워서 신성재를 쏘지 못했다. 다른 놈이 소음기를 다 결합하길 기다렸다.

한 놈이 소음기를 장착한 후에 신성재 쪽을 조준했다. 신성재는 승합차 뒤에 있어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놈도 뒤늦게 권총에 소음기를 끼웠다.

신성재가 승합차에 마법진을 하나 더 그리며 말했다.

"소음기를 쓴다고 해서 총소리가 안 나는 건 아닌데 말이지."

신성재는 적의 현재 위치와 상태를 이글 아이 마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더도 권총을 뽑은 후에 손짓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부하 두 명이 권총에 소음기를 끼운 후에 승합차의 좌우로 천천히 움직였다.

빌런 리더는 뒤에서 승합차를 조준했다.

부하들이 서로 수신호를 교환한 후에 승합차 좌우에서 동시에 앞으로 뛰어갔다. 차의 양쪽에서 가운데에 있는 신성재를 쏘려는 생각이었다.

신성재가 차에 새겨둔 마법을 발동했다.

두 놈이 승합차의 옆쪽을 통과할 때, 차의 양쪽 유리들이 그놈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폭발하듯 터졌다.

"으악!"

잘게 부서진 유리 파편이 두 놈을 덮쳤다. 틴팅이 되어 있는데도 유리가 깨지고 파편이 꽤 많이 튀어나왔다.

강화유리 파편에 두들겨 맞은 두 놈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두 놈 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상태였다. 놀라서 몸을 움츠리던 놈이 실수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승합차의 유리를 관통했다. 소음기를 썼는데도 총소리가 제법 컸다.

총을 실수로 쏜 놈은 당황했다. 추가 오발을 막기 위해 일단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뗐다.

그 순간 신성재가 그놈의 앞에 나타나 목에 바람 주먹을 꽂았다.

"컥!"

적이 고꾸라졌다.

신성재가 넘어지는 놈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아 승합차 반대쪽으로 갈겼다. 총탄이 유리에 추가로 구멍을 내며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승합차 반대편에 있던 놈은 총탄 세 발을 얻어맞고 나자빠졌다.

"케에엑!"

뒤에 있던 리더가 정신을 차리고 신성재를 향해 방아쇠를 미친 듯이 당겼다.

"으아아!"

신성재는 이미 차 뒤로 사라졌다.

리더가 신성재를 향해 계속 사격했다. 그는 승합차의 얇은 철판은 권총으로 뚫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뚫리지 않았다.

신성재는 이미 차의 뒤쪽 철판에 강화마법을 걸어놓았다.

간단한 마법이라 대단한 방어력은 없었다. 그래도 차의 얇은 철판을 강화하면 9mm 권총탄 정도는 충분히 막는다.

강화마법은 부여한 마나가 모두 소모되면 사라진다. 그 마나는 총탄을 막아낼 때마다 급격히 소모된다.

신성재가 철판에 손을 댔다. 이렇게 손을 대고 마나를 보충하면, 적이 탄창을 다 비워도 단 한 발도 이 철판을 뚫지 못한다.

리더가 사격을 중단했다. 그놈이 신성재가 있는 쪽을 권총으로 겨누며 말했다.

"해치웠나?"

"그러겠냐?"

"젠장! 왜 안 뚫리는 거야!"

"네가 총을 살살 쏘겠지."

"씨발. 그럼 이건 어떠냐!"

리더가 왼손으로 리모컨을 눌렀다.

이곳에는 수입 전기차가 세 대 있다. 그중 한 대의 실내에는 사람 손 대신에 버튼을 눌러주는 기계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실내에 설치된 기계장치는 리모컨의 신호를 받자마자 차량의 시동 버튼을 눌렀다.

차의 운전석에는 사람처럼 생긴 인형이 앉아 있었다. 그건 차량의 운전 보조 시스템을 속이기 위한 인형이다.

실제 차량 조작은 내부에 설치된 기계장치가 담당했다.

사람이 타지 않은 전기차가 저절로 출발했다가 곧바로 속도를 높여 그곳을 떠났다.

신성재가 승합차 뒤에서 물었다.

"차만 보내고 너는 안 타냐?"

리더가 신성재가 있는 방향으로 총구를 향한 채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 너 누구냐!"

"그건 네가 말해야지. 목적이 뭐냐?"

"네가 어디서 왔든 상관없다! 이미 차는 떠났으니까!"

신성재가 저 멀리 달려가는 외제 전기차를 향해 정찰 마법을 사용했다.

[이글 아이]

달리는 차의 유리에는 짙은 틴팅이 되어 있었다. 승합차보다 훨씬 더 짙었다.

그래도 빛이 투과하기는 해서, 이글 아이 마법을 유리에 바짝 붙이면 내부를 흐릿하게 볼 수는 있었다.

"저 차의 오토파일럿 기능을 이용하는 건가? 운전석에 사람처럼 생긴 마네킹까지 앉혀놨네?"

"그걸 봤다고? 틴팅 때문에 내부가 보이지 않았을 텐데?"

"운전석에 달아놓은 건 시동 버튼이나 운전대를 대신 눌러주는 장치일 테고."

신성재가 옆을 보았다. 이곳에는 같은 차종이 두 대가 더 있었다.

"개조가 끝난 건 한 대뿐인가 보다? 저 두 대는 아직 작업 중이냐?"

"너만 아니었으면 세 대 다 보낼 수 있었다!"

리더는 싸우기 전에 신성재를 죽여도 일주일만 숨겨두면 된다고 했다.

"일주일 뒤에 세 대나 인천공항에 처박으려 했다고?"

"너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됐겠지! 그랬으면 정말 화려한 쇼를 봤겠지! 하지만 지금 저 한 대로도 부족하진 않을 거다!"

신성재가 빼앗은 권총을 이곳에 있는 다른 차량의 유리에 발사했다. 지금 도로 위에 올라간 차와 같은 차종이었다.

총탄이 연달아 꽂히면서 차 유리가 완전히 박살 났다. 순식간에 탄창이 비었다.

신성재가 유리를 부순 차의 운전석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개조 작업 중인 장치가 있었다.

"이거, 열차 테러 사건 때 테러범이 쓴 장치랑 비슷하게 생겼다?"

신성재가 그때 오송 공사현장에 직접 들어가 테러리스트 다섯을 잡고 열차 충돌을 막았다.

신성재가 인상을 썼다.

"그 빌런 새끼들이랑 한 패냐?"

신성재가 그 말을 하는 도중에도 이글 아이 마법으로 차량을 추적했다. 도로 위로 올라간 폭탄 차량의 모습이 마치 보조 스크린을 띄워놓은 것처럼 시야 한쪽에 떠 있었다.

리더는 신성재가 있는 승합차 쪽을 권총으로 조준한 채로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그는 신성재의 탄창이 비었다는 걸 몰랐다.

'권총으로는 저 차가 안 뚫려. 더 강한 화력으로 죽여야 해!'

창고 안에는 기관단총이 있다. 그는 신성재와 대화하며 창고로 후퇴하려고 했다. 시간을 벌 목적으로 간단한 대답도 했다.

"열차 테러를 맡은 건 모르는 놈들이다. 하지만 난 그놈들처럼 실패하지 않아!"

"수법을 보면 한패인데 모르는 사이면, 점조직이네."

신성재가 이글 아이 마법을 달리는 차 측면으로 이동시켰다. 차량 내부의 내비게이션이 대충 보였다.

"목적지는 인천공항 제2 여객터미널이네?"

인천공항이 타깃이라는 건 이곳에 설치된 망원 카메라를 보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인천공항은 넓고 시설물도 많다. 그런데도 신성재는 정확한 위치를 말했다.

리더는 당황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뒷좌석 가득 채워놓은 건…. 폭탄? 이 새끼들이? 네가 말한 쇼가 불꽃놀이였냐?"

"어, 어떻게 그것까지 알지? 차가 출발할 때까지 내부를 볼 틈은 없었는데!"

이곳에 있는 다른 차는 개조가 덜 끝나서 아직 폭탄이 실려 있지 않았다.

리더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너! 이미 우리가 여기서 뭘 하는지 다 알고 왔구나!"

"눈치챘냐?"

리더가 소리를 질렀다.

"그럼 너도 알겠구나! 저건 랜드 미사일이다! 도로를 자동으로 달려가서 목표를 파괴하는 미사일이란 말이다!"

정찰 마법으로 확인한 차량 뒷좌석에는 폭탄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게 터지면 인천공항 여객터미널에 있는 사람들이 폭발에 휘말린다.

그런데 놈들의 디데이는 오늘이 아니라 일주일 후였다.

신성재가 말했다.

"일주일 후에 인천공항으로 중요한 사람이 오거나, 아니면 그날 사람이 많이 몰릴 일이 있겠지."

신성재가 권총은 던져버리고 승합차 옆으로 걸어 나왔다. 빈손이었다.

리더는 당황했다. 권총으로 신성재를 조준하며 소리쳤다.

"이 새끼! 무슨 생각으로 거기서 나온 거지?"

"공항이 터지는 걸 막으려고."

일주일 뒤에 한국에 누가 오는지는 지금은 모른다. 그런데 지금도 여객터미널에는 공항 이용객이 많다. 저 폭탄이 거기서 터지면 사상자가 수백 명은 생긴다.

신성재는 오늘 인천공항에서 영국행 여객기를 타야 한다. 공항이 터지면 그 비행기도 못 뜬다.

리더가 소리를 질렀다.

"너 따위가 어떻게 막아! 이미 랜드 미사일이 떠났단 말이다!"

신성재가 오른손을 들며 마법을 발동했다.

[염라의 불]

쇠를 녹이는 불꽃이 그의 오른손에서 피어났다.

[무빙]

그 불꽃이 이미 도로 위로 올라가 고속으로 달리는 전기차를 향해 날아갔다.

리더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사람 손에서 불꽃이 생기더니 멀리 날아갔다.

테러 빌런 리더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너, 너 도대체 누구야! 너 뭐야!"

신성재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봤구나?"

'봤구나'는 전투 직전에 테러 빌런 리더가 그에게 했던 말이다.

"나를 죽이려다가 실패했으면."

신성재의 목소리가 더 서늘해졌다.

"죽어야지."

27. 테러 빌런 II

사람의 손 위에서 불꽃이 만들어지더니 멀리 날아갔다. 테러 빌런 리더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 불은 도대체 뭐야?'

이상한 건 또 있었다. 부하들이 권총을 쥐고 신성재의 좌우로 달려갔을 때, 차의 유리가 때맞춰 폭발하듯 터졌다. 그때는 다급해서 그 이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 유리가 하필 부하들이 뛰는 속도에 맞춰서 터졌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보면 혼란, 당혹, 호기심, 놀람, 불안, 경외 또는 공포에 빠진다.

그런데 그 현상을 일으킨 사람이 방금 부하 넷을 제거했다.

리더는 공포에 질렸다.

"으아아!"

칼이 있다면 칼을 마구 휘둘렀겠지만, 지금 그가 가진 건 권총이다.

"죽어!"

리더가 권총의 방아쇠를 꽉 당겼다.

신성재가 왼손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바람 주먹]

바람 주먹 마법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위력이 감소한다. 그래도 이 거리라면, 권총을 쥔 손을 밀어낼 정도의 위력은 나온다.

리더의 손이 옆으로 휙 젖혀졌다. 총탄이 발사됐지만 한참 벗어난 방향으로 날아갔다.

리더가 권총의 총구를 다시 신성재 쪽으로 돌리려 했다.

신성재가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발로 툭 차며 마법을 썼다.

[무빙]

단검이 위로 떠올랐다. 그 단검을 왼손으로 툭 밀었다.

[바람 손]

바람 계열 전투보조 마법이 단검을 밀어 속도를 높였다. 대충 던진 단검이 정확한 궤도를 잡으며 리더를 향해 날아갔다.

리더가 다급히 왼팔을 들어 그 칼을 막으려 했다.

막는 데는 성공했다. 대신에 칼날이 리더의 팔에 꽂혔다.

"으아악!"

리더가 비명을 지르며 오른손의 권총 방아쇠를 다시 당기려 했다.

[바람 주먹]

신성재의 마법에 얻어맞은 리더의 손이 옆으로 다시 휙 젖혀졌다. 권총이 발사되면서 총탄이 또 옆으로 날아갔다.

갑자기 권총의 장전 슬라이드가 뒤로 젖혀진 채 고정됐다. 탄창이 비었다는 뜻이다.

리더는 두 번이나 바람 주먹에 당하고 나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신성재가 왼손을 흔들 때마다 리더의 오른손이 주먹에 맞은 것처럼 옆으로 밀려났다.

"이, 이것도 네가 뭔가 한 거냐?"

"눈치가 느린 놈이네."

공포에 질린 리더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너, 너, 너 누구야! 어떻게 이런 일이…."

"죽을 놈이 궁금한 게 많구나."

신성재가 조금 전에 날린 염라의 불이 도로를 달리는 폭탄 차량을 거의 따라잡았다.

신성재가 그 차량이 달리는 방향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거 치워야겠는데, 도로에 차가 많아."

리더는 신성재가 옆을 보자마자 권총을 버리고 오른손으로 단검을 뽑았다. 뽑자마자 단검을 신성재를 향해 던졌다.

리더의 비도술은 나쁘지 않았다. 급하게 던졌는데도 단검이 정확히 신성재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신성재가 왼손을 슬쩍 들며 마법을 썼다.

[바람 손]

바람 주먹은 공격마법이다. 반면에 바람 손은 전투보조 마법이다.

날아오던 단검이 바람에 붙잡혔다. 신성재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오던 칼날이 눈에 보일 정도로 느려졌다. 마지막에는 신성재의 바로 앞에서 거의 정지한 채로 공중에 떠 있었다.

리더가 그걸 보고 소리를 질렀다.

"너, 너 도대체 누구야! 누구냔 말이다!"

신성재가 그 칼을 손으로 잡아 리더에게 도로 던졌다. 바람 손 마법이 날아가는 칼날의 뒤를 강하게 밀었다.

칼날의 속도가 빨라졌다. 리더가 급히 몸을 젖혔다.

리더가 피하는 방향으로 칼날의 방향이 꺾였다. 몸을 젖히던 리더의 목에 칼날이 푹 꽂혔다.

"컥!"

리더가 손으로 목을 잡으며 뒤로 나자빠졌다.

이제 이곳에 있던 빌런은 모두 제압했다. 넷은 죽었고, 처음 바람 주먹에 맞은 놈은 목숨만 붙여놓았다.

"운이 좋으면 살겠지."

신성재가 멀어지는 폭탄 차량에 집중했다. 이미 이글 아이 마법으로 차량 주변 상황을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저건 터트려서 처리하는 게 제일 확실한데…."

염라의 불은 이미 폭탄 차량을 따라잡았다.

그런데 버스 한 대가 폭탄 차량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 폭탄을 터트리면 버스가 휘말린다.

***

버스에 탄 아이가 창가를 보며 말했다.

"엄마! 저기 별이 날아다녀!"

아이 엄마는 스마트폰을 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응. 그러니? 근데 낮에는 별이 안 보여."

"반딧불인가?"

"반딧불도 안 보여."

아이의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버스와 폭탄 차량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럼 뭐지? 도깨비불인가?"

"어린이집에서 보는 동화책에 반딧불이랑 도깨비불이 나오니?"

"응!"

***

버스의 속도가 폭탄 차량보다 조금 빨랐다. 폭탄 차량은 제한속도보다 조금 낮게 안정적으로 주행했다. 차 사이의 간격이 점점 멀어졌다.

뒤쪽에서 다가오는 차도 있었다. 폭발에 휘말릴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전한 거리도 아니었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데."

이대로 폭탄 차량이 염라의 불과 무빙의 통제 거리를 벗어나면 대참사가 벌어진다. 더 늦기 전에 여기서 해결해야 한다.

"어쩔 수 없지."

신성재가 오른손의 손끝을 아래로 까딱 내렸다.

폭탄 차량을 따라붙으며 날아가던 염라의 불이 아래로 하강했다. 그러다 달리는 차량의 뒤에서부터 유리를 파고들었다.

쇠를 녹이는 불은 유리도 녹인다. 유리는 열을 받으면 부드러워진다.

염라의 불이 뒷유리를 뚫고 차량 내부로 파고들었다.

그 차의 뒷좌석과 트렁크에는 대량의 폭탄이 실려 있었다.

염라의 불은 뇌관이 없어도 폭탄을 터트릴 수 있다.

신성재는 더 확실히 차량의 폭탄을 제거하길 원했다. 다시 염라의 불을 만들어 날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하이드라]

즉시 불꽃이 네 개로 갈라져 쌓여 있는 폭탄 네 개에 파고들었다. 넷 중 하나만 터져도 나머지 폭탄까지 다 터트릴 수 있다.

마법으로 만든 불꽃 네 개가 마치 뇌관처럼 작용했다.

도로를 달리던 차가 갑자기 폭발했다.

차에 실린 폭탄의 양이 너무 많았다. 폭발력이 지나치게 강했다.

강력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충격이 앞쪽에서 달리던 버스도 때렸다.

"꺄악!"

버스에서 비명이 들렸다. 거리가 꽤 벌어졌는데도 유리에 금이 쩍쩍 갔다.

그 버스는 모든 유리에 틴팅을 한 상태였다. 유리에 금이 가긴 했지만, 파편이 튀진 않았다.

버스 기사는 기겁했다. 급히 사이드미러로 뒤를 확인했다. 도로 위에서 거대한 불꽃이 치솟는 게 보였다.

"포, 폭격? 설마 미사일?"

기사가 버스의 가속 페달을 밟았다. 빨리 이 장소를 벗어나고 싶었다.

뒤쪽에서 달리다가 앞쪽에서 차량이 폭발하는 걸 본 사람들도 있었다.

"으아악!"

운전하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도로에 차량이 별로 없어서 추돌 사고는 나지 않았다.

제일 앞에서 달리던 차량은 버스처럼 앞유리에 금이 쩍쩍 갔다. 급브레이크를 밟았는데도 차가 폭발한 차량 쪽으로 미끄러졌다.

"으아아! 서! 서!"

그 차는 폭탄이 터진 지점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서 정지했다.

더 뒤에서 오던 차들도 브레이크를 밟았다. 폭발 화염이 워낙 커서 못 볼 수가 없었다. 다들 일단 차를 세웠다.

앞유리에 금이 간 선두의 차는 서둘러 후진했다.

도로 위에 차를 세운 사람들은 당황하고 겁을 먹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

"차 돌려!"

"아니, 잠깐만. 끝난 거 같…."

남아 있던 폭탄 하나가 뒤늦게 폭발했다. 불꽃이 다시 치솟으며 파편이 튀었다.

조금 전보다는 폭발이 약했다. 그렇지만 도로 위의 사람들을 패닉에 빠지게 하기엔 충분했다.

"당장 빠져나가!"

"역주행이라도 하라고!"

***

신성재가 멀리서 불꽃이 치솟는 걸 보며 말했다.

"저렇게 먼 곳에 마법을 썼더니 마나가 쭉쭉 빠진다."

그는 폭탄 차량을 터트리려고 염라의 불과 무빙, 하이드라를 썼다.

차량을 추적하느라 이글 아이도 사용했다.

게다가 두목을 잡을 때도 마법을 섞어서 썼다.

엄폐물로 사용한 승합차에는 마법진을 두 개나 그렸다.

짧은 시간에 여러 개의 마법을 중복해서 사용했더니 피곤했다.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지."

이제 탐지 마법으로 그의 머리카락이나 지문 같은 흔적이 남았는지 찾고, 찾은 건 마법으로 없애야 한다.

***

은가은은 차에서 입을 벌린 채로 졸고 있었다.

신성재가 돌아와 차 문을 열었다.

"가은아?"

"어? 끝났어?"

"넌 나를 백업한다더니 잠이 오냐?"

"마법 공학 통신기가 없으니까 그냥 시트 젖히고 있으라며. 누워 있으니까 잠이 솔솔 온다."

"부럽다."

은가은이 제안했다.

"오빠. 피곤하면 운전은 내가 할까?"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는 거, 네 실력으로 되겠냐?"

"웅…. 조수석에서 응원할게!"

"입가에 침 좀 닦고."

"앗! 빨리 말해주지!"

신성재가 차를 몰고 그곳을 벗어났다.

숲 지역을 빠져나올 때 차량에 걸어둔 카모플라쥬 마법의 세팅을 변경했다. 차의 색이 흔한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신성재는 큰 도로에 합류하기 직전에 카모플라쥬를 완전히 해제했다. 차의 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

도로에서 폭탄을 실은 차량이 폭발했다. 그냥 터진 것도 아니고 대폭발이었다.

즉시 경찰이 현장에 출동했다. 군 폭발물 처리반은 오는 중이다.

형사들이 현장을 보며 놀라워했다.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도로가 부서졌네."

"화약을 얼마나 터트린 거야?"

"승용차였다는데, 저 정도가 되려면 안에 폭탄을 꽉꽉 채웠을걸?"

"다행히 주변에 다른 차가 없을 때 터졌어."

"그러게. 운이 좋았지."

***

인적이 드문 한강 주변 풀밭에서 총소리가 여러 번 났다는 신고가 경찰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신고자의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로에서 폭탄이 터졌다.

"폭발 기사를 보고 허위신고한 거라도 상관없어! 당장 총소리가 들린 현장에 가서 확인해!"

형사들과 경찰특공대가 현장으로 출동했다.

"헉! 이게 뭐야!"

그들이 발견한 건 테러범들의 시체였다.

바닥에는 소음기를 장착한 권총과 단검이 떨어져 있었다.

"차량 세 대 발견! 두 대는 총탄에 피격됐습니다!"

현장에는 도로에서 폭발한 차와 똑같은 차종의 수입 전기차도 두 대 있었다. 그중 한 대는 신성재가 권총으로 유리창을 부숴놔서 내부가 훤히 보였다.

경찰은 함부로 접근하진 않았다. 이미 동일 차종이 도로에서 폭발했다.

"내부에 폭탄이 있을 수 있다! 드론 가져와!"

현장에 출동한 경찰특공대가 드론을 띄웠다. 그 드론이 차량에 접근해 내부 모습을 전송했다.

"폭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차량 내부 조사는 폭발물 처리반이 올 때까지 대기해!"

현장에는 조사할 게 더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테러범들의 상태도 확인했다.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테러범 넷은 죽었는데, 신성재가 바람 주먹으로 갈비뼈를 부러뜨린 놈은 아직 살아있었다.

"구급차 빨리 불러!"

창고의 문은 세 놈이 신성재와 싸우러 나올 때 열린 상태 그대로였다.

"저 창고에 드론부터 들여보내!"

차량 내부를 확인한 드론이 이번에는 창고로 들어갔다. 드론에서 전송된 창고 내부 모습이 경찰특공대 장비의 모니터에 떴다.

"잠깐. 방금 그거 기관단총이야? 다시 확인해!"

"확인했습니다! 기관단총입니다!"

"이 새끼들이…. 더 수색해!"

"어? 폭발물이 있습니다!"

"뭐야…. 이건 너무 많잖아!"

도로에서 터진 폭탄의 세 배쯤 되는 폭발물이 창고 내부에 보관되어 있었다.

"부비트랩을 조심해! 다들 창고에서 더 멀어져! 지금 저게 터지면 여기까지 휘말린다!"

현장을 조사하러 온 형사부터 구급대원들까지 뒤로 빠르게 이동했다.

드론을 조종하던 대원만 후퇴하지 않고 계속 창고 내부를 수색했다. 그러다 뭔가를 찾았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놈들의 타깃은 인천공항입니다! 벽에 인천공항 도면과 도로망 정보가 붙어 있습니다!"

뒤로 빠지던 사람 중에서 몇 명이 도로 뛰어왔다. 경찰특공대 현장 지휘관도 있었다.

"폭탄 차량도 인천공항에 가는 길에 터졌다! 이 새끼들이 공항을 노린 게 확실해!"

"그런데 디데이가…."

"당연히 지금이겠지!"

"일주일 뒤입니다."

현장 지휘관은 당황했다.

"어? 잘못 본 거 아니야? 폭탄은 도로에서 오늘 터졌는데?"

드론과 무선으로 연결된 장비의 외부 모니터는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여기 이 종이를 보십시오! 확실합니다! 일주일 뒤입니다!"

"그럼 도로에서 폭발한 차는 왜…. 지금 터진 거야?"

갑자기 현장 지휘관의 무전기로 통신이 들어왔다.

- 폭탄 차량과 동일한 차종의 차량이 인천공항 방향 도로를 달리고 있답니다!

"그 차가 희귀한 모델은 아니잖아."

- 틴팅이 너무 진해 차량 내부가 보이지 않는답니다! 정지 신호도 무시했습니다!

"뭐? 마, 막아! 쏴서라도 막아!"

28. 요격

사건 현장 지휘관은 폭탄 테러 의심 차량을 쏘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에게 인천공항 방향 도로에 있는 병력을 지휘할 권한은 없다. 애당초 관할이 다르다.

그래도 상부에 의견은 낼 수 있다.

"여기 지금 똑같은 차가 두 대나 더 있습니다! 유리에 진한 틴팅을 해서 내부가 보이지 않는 것도 똑같습니다!"

단지 그 정보만으로 도로를 달리는 차를 쏘는 건 지나친 조치다.

그런데 그 차는 정지 신호를 무시했다.

두 가지 정보가 조합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장에 발포 명령이 떨어졌다.

"총을 쏴서라도 막아!"

인천공항 방면 도로의 군 초소에 있던 병사가 달려오는 차량을 향해 사격했다.

총탄이 타이어에 박혔다.

"펑크가 안 납니다!"

"운전석에 갈겨!"

총탄이 계속 날아갔다. 앞유리가 조금 부서지며 내부 모습이 확인됐다.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뭐야! 총에 맞아도 안 움직이잖아!"

"사람이 아니라 마네킹 같습니다!"

실탄을 가진 병사는 계속 사격했다. 총탄이 차체를 때렸다. 불꽃이 튀었다.

그런데도 차는 계속 달려왔다.

"그, 그만 쏴! 폭탄이 여기서 터지면 우리도 다 죽어!"

초소 지휘관이 전화로 상급자에게 보고했다.

"차에 방탄처리가 된 것 같습니다! 총알이 튕겨 나갑니다!"

차체만 그런 게 아니다. 타이어는 총에 맞아도 한참을 더 달릴 수 있는 특수 타이어였다.

차량 발견이 너무 늦어 초소 앞 도로에 차단 시설도 미처 설치하지 못했다.

폭탄 차량이 초소 도로를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인천공항 바로 앞 도로 쪽에도 명령이 떨어졌다.

"도로에 장애물 설치해! 차량 통과를 막아!"

그곳은 그나마 시간이 있었다. 그쪽에서 긴급하게 도로 차단 장애물을 설치했다. 폭탄 차량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장애물이었다.

"차단했습니다!"

장애물 설치는 끝났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생겼다.

"도로에 일반 차량이 많습니다! 차들이 장애물 앞으로 몰려듭니다!"

그 도로를 달리던 차들이 차단 장애물 앞에서 멈췄다. 인천공항 앞 도로는 순식간에 주차장으로 변했다.

그곳으로 차들이 계속 도착했다.

만약 폭탄 차량이 이곳까지 뚫고 들어와 폭발하면 참사가 벌어진다.

대원들이 도로 위를 뛰어다니며 외쳤다.

"차에서 내려서 대피하십시오! 빨리 대피하라고!"

***

은가은은 망원경 마법이 인첸트된 안경을 꺼냈다.

"오빠. 여기 마나 좀 채워줘."

"뭐하려고?"

"내가 그래도 조수인데, 나도 뭔가 하는 게 있어야지."

신성재가 오른손을 내밀어 안경에 마나를 부여했다.

은가은이 안경을 끼고 주변을 확인했다.

"저 앞에는 차가 살짝 막히나 봐. 옆은 뭐 별거 없고, 뒤는…. 엥?"

"왜?"

"오빠. 뒤에서 수상한 차가 오는데?"

"너 지금 일하는 척하는 거 아니지?"

"우이씨. 진짜라고."

신성재가 물었다.

"어떻게 수상한데."

"차 앞유리가 깨져 있어."

"응?"

"운전석에 있는 건… 마네킹인가?"

신성재의 표정이 굳었다.

"차종은?"

"미국산 전기차?"

신성재가 혀를 찼다.

"쯧. 남은 놈이 있었나?"

은가은도 상황을 깨달았다.

"앗! 저거 혹시 그거야? 폭탄차?"

"아마도. 거리는?"

은가은이 안경대를 손가락으로 잡았다.

"잠깐만. 여기 락온 기능이…. 됐다. 523미터. 521, 519.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저 차가 더 빨라."

신성재가 창문을 열었다. 방음 마법 덕분에 조용하던 차 내부로 외부 소리가 시끄럽게 들어왔다.

신성재가 정찰 마법을 사용했다.

[이글 아이]

정찰 위치는 후방 500m였다. 시야 한쪽에 이글 아이로 만든 화면이 떴다. 직접 보니 더 확실했다.

"랜드 미사일이다. 한 대가 더 있었구나."

"응? 현장에 남겨둔 두 대는 개조 작업 중이었다며?"

"이미 개조를 끝내고 다른 곳으로 옮겨놓은 차가 또 있었겠지."

"그럼 빌런들은 세 대가 아니라 네 대를 준비한 거네? 인천공항을 아예 무너뜨릴 생각이었나?"

"2터미널 한 곳만 공격하려던 게 아니란 소리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터트려야지."

신성재가 창문 밖으로 왼손을 내밀었다.

[염라의 불]

[무빙]

쇠를 녹이는 불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나와 아래로 쓱 가라앉았다가 도로 밖으로 벗어났다.

폭탄 차량이 그 지점을 지나가면 염라의 불을 다시 띄워 쫓아가게 하다가, 주변에 차가 없을 때 터트릴 생각이다.

그러다 의문이 생겼다.

'추가 폭탄 차량이 한 대뿐일까?'

신성재가 테러 빌런 다섯을 잡은 곳에는 폭탄 차량이 세 대나 있었다. 그중 한 대는 개조가 끝난 상태였다.

'더 만들었을 수도 있지.'

신성재가 말했다.

"가은아. 같은 차종이 또 있는지 앞뒤로 다 확인해."

은가은이 망원경 안경을 쓰고 앞뒤로 고개를 휙휙 돌리며 말했다.

"앞은 없고, 뒤는…. 872미터 뒤에 차가 또 있어. 저건 똑같은 건 아닌데, 같은 회사 차야. 근데 유리가 멀쩡해."

같은 회사의 다른 차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신성재가 그 차의 앞유리에 이글 아이 마법을 사용했다. 운전석에 조작장치가 설치된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지금 도로 옆에 띄워놓은 염라의 불은 한 개다. 두 대중 뭘 먼저 터트릴지 정해야 한다.

"앞쪽을 터트려서 일타이피를 노려야…."

제트기 소리가 들렸다.

신성재가 하늘을 슬쩍 보았다.

"아니다. 한 대는 공군이 맡아주겠지."

은가은도 망원 안경으로 하늘을 확인했다.

"아! 전투기다!"

초계 중이던 공군 전투기가 도로 방향으로 고도를 낮추며 날아왔다.

첫 번째 폭탄 차량이 터졌을 때 공군에도 비상이 걸렸다. 그때부터 주변 하늘에는 초계기가 날아다녔다.

KF-16 전투기의 벌컨포가 지상을 향해 불을 뿜었다. 예광탄이 마치 레이저처럼 도로 위로 쏟아졌다.

타깃은 도로 위를 돌진 중인 폭탄 차량이었다. 20mm 기관포탄이 도로를 긁다가 차량에 퍽퍽 꽂혔다.

곧바로 차량이 폭발했다. 강력한 충격파와 함께 거대한 화염이 도로를 뒤덮었다.

이번에는 그 근처에 다른 차는 없었다.

지휘부에 보고가 들어갔다.

"전투기가 폭탄 차량을 요격했습니다!"

"됐어!"

"피해는!"

"인명피해는 없습니다!"

"휴우. 해치웠구나."

신성재가 염라의 불을 움직였다. 쇠를 녹이는 불이 두 번째 차에 달라붙어 옆유리를 파고들었다. 차 내부에는 폭탄이 있었다.

염라의 불이 그 폭탄에 닿자마자 두 번째 차도 폭발했다.

지휘부에 다시 보고가 들어갔다.

"폭탄이 또 터졌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뒤에서 따라오던 다른 차가 폭발했습니다!"

"그 도로에 동일 차종은 없었잖아!"

"같은 회사의 다른 모델입니다!"

"제, 젠장! 비슷한 차 전부 다 추적하고 조사해!"

두 번째 차가 터졌을 때도 인명피해는 없었다.

"다행히 공군이 두 대 다 파괴했나 보군."

"그런데 두 번째 차에도 폭탄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상공을 계속 초계 중인 전투기 조종사에게 그 질문이 들어갔다.

조종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번째는 제가 쏜 게 아닙니다!"

- 뭐?

지휘부는 혼란에 빠졌다.

"전투기가 저격한 게 아니라고? 그럼 뒤에 따라오던 폭탄 차량은 누가 터트린 거야?"

"모르겠습니다."

차량이 폭발한 뒤쪽은 도로가 차단됐다. 반면에 앞쪽 도로는 멀쩡했다.

신성재의 차 창문으로 까마귀 드론이 날아왔다.

은가은이 조수석 창문을 열었다. 까마귀 드론이 차 안으로 쏙 들어왔다.

"오빠. 까순이 복귀했어. 근데 내 스마트폰을 얘가 안 뱉어."

"양 날개 중간을 눌러봐."

은가은이 그곳을 눌렀다. 까마귀 드론의 등이 열리며 수납공간이 나타났다.

은가은이 얼른 휴대폰을 꺼냈다.

"뉴스 떴나 보자."

도로에서 차가 폭발했다. 그냥 터진 것도 아니고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대폭발을 일으켰다.

첫 번째 차가 터졌을 때는 상황 파악이 안 돼 속보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방금 두 대가 더 터졌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속보가 나왔다.

그 기사는 여러 인터넷 게시판으로 옮겨갔다.

- 공항 가는 도로에서 폭탄이 터졌다는데요?

그 밑에 댓글이 줄줄이 붙었다.

- 세 번 터졌답니다.

- 같은 차가 세 번이요?

- 세 대요.

- 누가 터트린 건데요?

- 첫 번째 차는 왜 터졌는지도 모릅니다.

- 두 번째 차가 터진 도로에 제가 지금 있습니다. 두 번째 차는 전투기가 날아와서 기관포로 요격했습니다.

- 공군! 이제 우리도 공군을 부르면 되는구나!

- 열차 테러 이후로 이런 사건이 생기면 공군도 초계기를 띄우는 규정이 생겼습니다.

- 피해는 없나요?

- 속보 떴는데, 인명피해는 없다고 나옵니다.

- 속보를 어떻게 믿나요?

- 제가 현장에서 봤는데요. 누가 다칠 수가 없습니다. 혼자 달리는 차를 전투기가 기관포로 바바박 긁었으니까요.

- 세 대가 터졌다면서요? 그럼 세 번째는요?

- 그건 왜 터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댓글이 붙었다.

- 첫 번째 폭발 전에 이쪽 지역에서 총소리 비슷한 게 여러 번 들리던데.

- 잠깐만요. 폭탄 차량이 터지기 전에 총소리가 들렸다고요?

- 경찰차 여러 대가 달려가는 것도 봤습니다. 인천공항 쪽이 아니라 총소리가 난 쪽으로요. 그쪽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졌나 봅니다.

***

신성재가 테러 빌런 다섯을 잡은 곳은 경찰이 조사 중이다. 군 병력도 출동해 주변을 경계했다. 창고에 있는 폭탄은 처리반이 터지지 않게 조치했다.

2차 공항 테러 시도를 전투기가 요격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쪽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난리 나는 줄 알았다."

다섯 명의 테러범 중에 유일한 생존자는 구급차에 실려서 병원으로 이송됐다.

형사팀장이 지시했다.

"그놈 깨어나면 철저히 조사해. 누가 이런 테러를 저질렀는지 알아내라."

"누가 이 테러범들을 죽였는지도요."

"당연하지."

다른 형사가 물었다.

"팀장님. 그런데 이거 우리가 맡을 수는 있는 겁니까? 광수대나 다른 곳에서 가져가지 않을까요?"

"이 자식이 재수 없게.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

***

경찰 광역 특별수사지원팀은 열차 테러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그 팀은 평소에는 강력사건 위주로 수사를 지원하다가, 테러 의심 사건이 발생하면 거기 주력한다.

그래서 이번 차량 폭탄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특별수사지원팀도 현장에 출동했다.

현장에 있던 경찰들은 파악된 정보를 특지팀과 공유했다. 특별수사지원팀은 사건을 분석하고 지원할 뿐 빼앗지는 않는다.

그래서 정보 공유도 쉽고 담당 팀의 의견도 디테일하게 들어볼 수 있었다.

테러범들이 순식간에 전멸하는 바람에 창고에는 서류나 메모 등이 파기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특지팀의 팀장이 그 자료를 보며 말했다.

"이 새끼들은 일주일 뒤에 엘레나 레이가 내한할 때를 노렸어."

특지팀 형사가 물었다.

"그게 누군데요?"

도서윤 형사가 옆에서 설명했다.

"엘레나 레이는 잘 나가는 미국 가수예요. 엘레나가 입국하면 공항에 팬이 최소 수백 명, 어쩌면 천 명 이상 모일걸요?"

"미국 가수인데 한국에서 그렇게까지 모인다고?"

"엘레나의 할머니가 한국분이시거든요. 그래서 우리말도 잘하고 한국에 팬도 많아요."

"거기에 공항 이용객들까지 있을 텐데."

"그때 이런 엄청난 화력의 차량 폭탄 테러가 공항에서 일어나면 최소 수백 명이 사망했겠죠."

"폭탄 차량이 개조 중인 것까지 포함해 다섯 대가 발견됐잖아. 피해자가 천 명이 넘을 수도 있지."

승용차의 오토파일럿 기능을 이용해 만든 랜드 미사일은 다섯 대가 발견됐다. 대형 폭탄 다섯 발이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공항에서 터지면 대참사가 벌어진다.

도서윤이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큰일 날 뻔했죠."

창고 밖에는 전투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승합차는 유리가 깨져 있고 철판에도 권총탄 자국이 여럿 있었다.

랜드 미사일로 개조되던 차량 한 대는 유리창이 총탄으로 박살 난 상태였다.

다른 한 대는 상태가 멀쩡했다.

바닥에 있던 테러범의 시체는 이미 모두 치웠다. 그곳은 과수대가 조사하고 있었다.

특지팀 팀장이 말했다.

"놈들의 계획대로면, 폭탄 차량은 1주일 후에나 공항으로 가야 해. 그런데 오늘 공항으로 가다가 폭발했단 말이야."

도서윤이 의견을 냈다.

"전멸하기 전에, 준비된 거라도 급하게 공항으로 보낸 거겠죠."

"누가 이놈들을 처리했을까?"

"시체를 보면 오송 공사현장과 비슷한 점이 있어요."

"목에 칼 맞은 거?"

"네. 차량을 개조하는데 쓰는 장치도 열차 테러 때 사용된 것과 비슷하고요."

팀장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누군가 나타나서 테러범들을 제거하고 테러도 막았다는 건데…. 누가?"

도서윤이 대답했다.

"히어로?"

"응?"

"오송에서 구출된 엔지니어가 그랬잖아요. 히어로가 구해줬다고."

"아니, 무슨 히어로가 적을 이렇게 막 죽이지? 히어로는 아무리 적이라 해도 목숨은 살려주는 거 아냐?"

"다크 히어로는 빌런을 죽여요."

팀장이 물었다.

"다크? 빌런? 도 형사. 그쪽으로 취미가 있나 봐?"

"네? 앗! 아니에요!"

29. 생활연기

신성재와 은가은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은가은은 초조했다.

"오빠. 비행기 시간에 늦었어. 도로 통제 때문에 망했어. 우리 이러다 영국 못 가면…."

괜한 걱정이었다.

"앗! 모든 항공기 출발 지연이다!"

신성재도 여객기의 출발과 도착 상황을 확인했다.

"우리 비행기도 아직 출발 안 했다."

공항 직원이 사람들에게 지연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인근에서 테러가 발생해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출발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물론 항의도 빗발쳤다.

"그래서 비행기가 언제 뜨냐고!"

"안전이 확인되는 대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나 중간에 환승해야 하는데, 늦게 출발하면 어떻게 하냐고!"

공항 근처에서 세 번이나 차량 폭탄 테러가 시도됐다.

모두 저지하긴 했지만, 인천공항은 위험요소가 모두 사라졌다고 확인될 때까지 비행기의 이륙을 지연시켰다.

덕분에 두 사람이 타야 할 영국행 항공편도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은가은은 신났다.

"좋은 일 하니까 비행기도 안 놓치고 좋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가은아. 일은 내가 다 했다만?"

"내가 백업하려고 했잖아. 오빠가 말리지만 않았으면 망원 안경으로 보면서 수신호라도 했을 거야."

신성재는 마법 지식을 받을 때 빌런을 죽인 기억도 받았다. 그래서 그런 일에 내성이 좀 있다.

하지만 은가은은 아니다. 그래서 빌런을 죽이는 모습을 못 보게 하려고 일부러 차에 있게 했다.

"백업은 딱히 필요 없었다만?"

"공항 오다가 내가 폭탄 차량 찾았잖아."

그녀가 그 차를 빨리 찾은 덕분에, 그 폭발에 다른 차가 휘말리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래. 오늘은 한 건 했네."

"히히히. 별말씀을. 이제 시간 많으니까 밥 먹자!"

"너는 아직도 배가 고프냐?"

"응!"

***

합동수사본부가 급히 만들어져 인천공항 테러 사건을 조사했다.

본부장이 한숨을 쉬었다.

"열차 테러 때도 내가 본부장을 맡았는데 왜 또 나한테…."

"그야 경험자시니까…."

"전에도 범인들을 놓쳤다고 욕을 많이 먹었는데 경험은 무슨."

사건 현장에는 대규모 수사팀이 투입됐다.

도로에서 폭발한 차의 파편은 철저히 조사됐다.

본부장이 물었다.

"놈들의 차가 왜 터졌는지 모르겠다고요?"

"죄송합니다."

테러 차량 세 대 중에 한 대는 전투기가 요격했다. 그런데 두 대는 폭발 원인이 파악되지 않았다.

염라의 불은 차 유리를 뚫고 들어가 폭탄을 터트렸다. 유리에 난 구멍이나 녹은 흔적은 차가 폭발할 때 사라졌다.

수사팀은 신성재가 직접 습격한 창고 거점도 철저히 조사했다.

본부장이 물었다.

"그놈들을 누가 잡았는지 모른다는 겁니까? 단서가 아예 없어요?"

"죄송합니다."

"머리카락이나 지문도 없다고?"

"찾지 못했습니다."

본부장이 몸을 뒤로 젖히며 탄식했다.

"허…. 열차 테러 때 오송 공사현장 상황과 똑같군요. 그때도 머리카락 하나 찾지 못했는데."

두 번째와 세 번째 폭탄 차량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는 찾아냈다. 파주 쪽에 아지트가 있었다.

"그래도 파주에는 단서가 있지요?"

"범인들이 시한장치를 이용해 불을 지르고 도망쳐서…."

본부장이 천장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욕은 내가 다 먹겠네."

"그래도 거기서는 범인들이 미처 없애지 못한 단서를 조금 찾았답니다."

본부장이 조금 기대했다.

"아. 그래요? 기자들 앞에서 발표할 만한 게 있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

"후우. 기자회견장에 같이 가시죠."

"예?"

"욕은 같이 먹어야지요?"

***

랜드 미사일 사건에 관한 기사가 계속 올라왔다.

TV 뉴스 채널에서 대테러 전문가를 초대해 사건을 설명했다.

전문가가 화면에 지도를 띄워놓고 설명했다.

"테러범들은 이곳에서 차량을 개조하고, 저곳에는 개조가 끝난 차량 두 대를 옮겨놨습니다."

"차량을 두 지역에 나눠둔 이유가 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요. 서로 다른 길을 이용해 공항으로 보내려 했다거나, 이번처럼 한 곳이 들키면 다른 곳에서 바로 테러를 저지르거나.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합동수사본부의 발표로는 제1, 제2 여객터미널을 모두 노렸다던데요."

"인천공항 여객터미널이 넓긴 하지만, 다섯 대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폭발했다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을 겁니다."

첫 번째 장소에 있던 테러범 다섯은 전멸했다. 넷은 죽었고, 하나는 병원에 있다.

문제는 두 번째 랜드 미사일을 보낸 곳이다.

"그곳에 있던 적은 도주했습니다. 첫 번째 폭탄 차량이 도로에서 터지니까, 보관하고 있던 폭탄 차량만 보내놓고 바로 도망친 것 같습니다. 현재 경찰이 추적 중입니다."

진행자가 물었다.

"그럼 이쯤에서 다들 궁금해하는 걸 묻고 싶습니다. 이쪽에서 발견된 테러범 다섯 명은 누가 잡았을까요?"

"그건 경찰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열차 테러 사건 때 오송에 나타난 사람이 이번에도 테러범을 잡은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

범인들의 수법은 열차 테러 사건 때와 비슷했다. 열차와 전기 승용차는 하드웨어가 다르지만, 버튼이나 레버를 대신 누르고 움직여주는 조작장치는 비슷했다.

인터넷 게시판도 그 사건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 열차 사건 때 테러조직을 잡았어야 했는데, 그때 놓치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 그래도 그때처럼 제일 중요한 테러범들은 잡았습니다.

- 경찰이 잡은 건 아니죠. 다크 히어로가 잡았죠.

- 그런데 왜 히어로가 아니라 다크 히어로라고 하나요?

다른 사람이 그 밑에 댓글을 달았다.

- 다크 히어로는 빌런을 죽여요.

***

인천공항 테러 미수 사건은 외국에도 알려졌다.

인천공항의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게다가 경제력도 전 세계 최상위권에 있는 대한민국의 국제공항이다.

세계 각국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은 조금 긴장했다. 그들은 비슷한 테러가 자기네 나라에서 발생할 수 있는지 점검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도서윤 형사가 보고했다.

"미국 쪽에서도 같은 방식의 테러 시도가 있었답니다."

팀장이 물었다.

"우리처럼 잘 막았대?"

"아니요. 발견이 조금 늦어서 대응도 조금 늦었습니다."

"저런."

"그래도 공항이 직접 공격당하기 전에 저지에 성공했습니다. 부상자가 몇 명 나왔지만요."

"사망자가 없으니까 다행이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터졌다. 다른 팀원이 보고했다.

"일본도 미국과 비슷하게 폭탄 차량을 발견했지만, 대응이 조금 늦었답니다."

팀장이 혀를 찼다.

"쯧쯧. 공항 여객터미널에서 터졌대?"

"예. 이용객들이 대부분 대피했는데도, 사망 일곱 명에 부상자도 오십여 명이나 됩니다."

"아니, 왜 전부 대피하지 않은 건데?"

"절차 때문에 통보가 지연돼서, 대피 경고가 조금 늦게 됐나 봅니다. 책임자가 방송에 나와 허리를 숙이면서 사과했습니다."

***

살아남은 테러 빌런은 병원에서 깨어났다.

형사가 의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상태가 어떻습니까?"

"환자가 많이 다치긴 했는데,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취조해도 되겠군요."

"아니, 그래도 많이 다친 환자…."

"인천공항 폭탄 테러범입니다. 저놈만 산 채로 잡혔습니다."

"병실에서 하시는 건 괜찮습니다."

***

형사들이 테러 빌런을 조사해 알아낸 정보가 특별수사지원팀에도 넘어왔다.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외국에서 들어온 청부업자이고, 돈을 주니까 한 것뿐이다?"

도서윤 형사가 대답했다.

"네. 누가 시켰는지도 모르고, 거액의 청부대금은 비트코인으로 받기로 했답니다."

팀장이 자료를 보며 말했다.

"1인당 70만 달러쯤 되는 비트코인이면, 우리나라에서는 10억 원쯤 하잖아. 원화로 10억씩 딱 떨어지는 거 나만 이상해?"

다른 형사가 말했다.

"다른 거점에도 일당이 있고, 차와 폭탄 구하는 비용도 고려해야죠. 그러면 총예산은 500만 달러쯤 될 겁니다. 그걸 머릿수대로 나눴겠죠."

"쓰읍. 달러 기반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한 게 아닌가?"

***

한국은 공항 테러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인명피해 없이 해결했다.

테러 예정일보다 일주일이나 빨리 사태를 해결한 한국 덕분에, 그 정보를 받은 미국은 최소한의 피해로 테러를 막아냈다.

일본은 사상자가 많이 나왔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미국과 일본 사례가 올라왔다.

- 미국이 경악하고 일본이 부러워하는….

- 경찰?

- 다크 히어로 이야긴데요.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 다크 히어로는 누굴까요?

- 너뉴버들이 온갖 추측 영상을 올렸는데,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는 거더군요.

-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다크 히어로는 한국에 있습니다.

***

신성재가 영국에 도착했다.

은가은이 영국 국제공항을 나오며 툴툴댔다.

"퍼스트 클래스는 기대도 안 했지만, 혹시 비즈니스는 아닐까 했거든? 근데 이코노미였어."

"나 혼자 왔으면 비즈니스를 탔겠지. 그거 한 장을 둘로 나눠서 네 항공권까지 사느라 이코노미로 떨어진 거야."

은가은이 얼른 말을 바꾸었다.

"다시 생각하니까 이코노미도 괜찮았어. 하늘에서 먹는 컵라면도 맛있었고. 진짜야."

"일단 숙소부터 잡자."

은가은이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근데 오빠. 호텔은 항공권이랑 달라서, 어차피 한 명이나 두 명이나 방 하나 잡으면 비용 똑같지 않아?"

"그래서?"

"5성급 호텔 가나요?"

"아니."

"아, 왜!"

"경매 예산에 보태려고."

"집 담보로 잡혀서 받은 5억이 있잖아."

"경매에서 그 칼을 낙찰받으려면 돈은 여유가 있을수록 좋아. 호텔비 때문에 간발의 차이로 낙찰 못 받으면 얼마나 억울하겠냐?"

은가은이 툴툴댔다.

"그 고철 칼은 내가 보기엔 5천만 원도 안 할 거 같아."

신성재가 제안했다.

"5천에 낙찰받으면 저녁밥은 파리 가서 풀코스로 사줄게. 잠은 5성급에서 자고, 돌아갈 때는 퍼스트 클래스 타고 가고."

은가은은 신났다.

"아싸아! 저녁은 풀코스다!"

***

영국 경매장에 올라온 물건은 녹슨 칼이었다.

그런데 물건의 상태가 너무 나빴다. 칼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지만, 녹이 굉장히 심하게 슬었다.

경매장에서는 그 칼을 경매에 올리기 전에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녹을 제거해도 원형을 완전히 복원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원래는 그런 엉망인 물건은 이 경매장에 거의 올라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경매에 올라온 건, 그 칼이 좀 특별하기 때문이다.

신성재가 말했다.

"아더왕 시대의 기사가 쓰던 검이야. 누구의 검인지는 손상이 워낙 심해서 전문가들도 밝혀낼 수 없었지만."

"오빠가 아는 칼이라고 했지?"

"예전에 복원해준 유럽 유물의 천오백 년쯤 전 기억에서 봤어."

"오빠가 생각하는 예상 낙찰가가 얼마인데?"

"우리 돈으로 최소 1억. 최대 5억."

"집 담보로 대출받은 거 다 쓰게?"

"아무도 관심 안 보이면 5천에 낙찰이지만, 경쟁 붙으면 5억까진 써야지."

은가은이 장담했다.

"걱정하지 마. 1억도 많아. 저런 녹슨 쇠막대를 1억이나 주는 게 말이 되나 싶은 정도라니까? 아무도 입찰 안 할 거야."

***

그날 오후에 경매가 시작됐다. 경매 후반부에 그들이 기다리는 물건이 나왔다.

"이번 물품은 아더왕 시대의 기사가 사용했다고 추정되는 검입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 들렸다.

은가은도 옆에서 툴툴댔다.

"유럽까지 와서 점심을 햄버거로 때웠어. 이게 말이 돼?"

"느긋하게 식사하면 이 경매에 늦어."

"그래도!"

"영국 요리보다 햄버거가 네 입에 더 맞을 거다."

"아니다! 나는 뭐든 다 맛있다!"

주위의 몇 사람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해 말했다.

"오빠. 내기 기억하지? 저녁은 파리 풀코스?"

"그러려면 5천에 낙찰받아야지?"

아무리 아더왕 시대 기사의 검이라고 해도 물건의 상태가 너무 나빴다. 녹이 너무 심하게 슬어서 검이 아니라 쇠막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은가은이 속삭였다.

"5천도 많아. 저런 고철을 어떤 바보가 사겠어?"

경매는 1만 파운드에서 시작했다. 2천만 원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은가은이 주먹을 꼭 쥐었다.

"아무도 입찰 안 하잖아. 잘하면 날로 먹겠…."

문제가 생겼다. 경쟁자가 붙었다. 심지어 한 명이 아니었다.

가격이 순식간에 5만 파운드, 9천만 원까지 올라갔다.

신성재가 혀를 찼다.

"쯧."

은가은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오빠. 저런 녹슨 쇳덩어리에 왜 경쟁이 막 붙어?"

"원탁의 기사의 검일 수도 있잖아."

"그럼 우린 저 칼 못 사?"

"사야지."

경매 가격이 계속 올라갔다. 경매가가 15만 파운드, 2억5천만 원까지 오르자 경쟁자는 한 명만 남고 다 떨어져 나갔다.

신성재가 경쟁 상대를 보았다.

"저 사람은 이 랜덤 박스 같은 물건에 얼마까지 쓸 생각이지?"

알프레드는 15만 파운드까지 가격이 올랐는데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 신성재가 가격을 두 배로 높였다.

"30만 파운드."

상대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녹을 뭉쳐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인 칼에 5억 원이 넘는 가격이 붙었다.

알프레드가 신성재 쪽을 힐끗 보며 고민했다.

여기서 가격이 더 올라가면 신성재가 불리해진다. 상대의 고민을 덜어줄 필요가 있다.

신성재가 말했다.

"가은아. 너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지?"

"물론이지."

"100만 파운드까지 올라가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연기해봐."

"저 사람 상대로?"

"네 연기가 통하면 오늘 저녁은 프랑스 요리 풀코스다."

은가은이 알프레드를 슬쩍 쳐다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눈빛에서 입꼬리, 다리를 꼰 자세와 손짓까지 전부 다 상대를 얕잡아보는 모습이었다.

그런 후에 신성재에게 물었다.

"이렇게?"

"너 왜 이렇게 연기를 얄밉게 잘하냐? 감정이 제대로 담겼다?"

"마법사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게 가소롭잖아."

"너 그거 연기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구나?"

"생활연기라고 해줘."

알프레드는 은가은의 모습을 보더니 혀를 차며 입찰을 포기했다.

은가은이 실실 웃었다.

"히히. 저녁은 풀코스다."

30. 알프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