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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재앙급 던전이 살기 너무 편함

1화. 탈주

핵과금 유저가 죽으면 먼저 가 있던 캐릭터들이 마중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진짜 마중 나왔었는지도 모르게 되어 버렸네. 몇 년이나 지났지? 내가 올해로 몇 살이야. 서기 이천… 아니, 제국력 오백 몇이더라."

아직 얼얼한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혼잣말을 폭탄처럼 쏟아냈다. 눈알도 훼까닥 뒤집어 놨으니 가까이서 보면 미친놈, 멀리서 보면 정신병자가 따로 없겠다.

여기에는 깊은 사정이 있다. 나는 방금 후두부에 가해진 커다란 충격 덕에 더더욱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당장 광인이 되어 벌거벗고 황궁 복도를 뛰어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초대형 쇼크였다.

황족이 아니면 샤워는 구경도 못 할 정도로 위생은 개판이요, 후추가 귀해 삼시 세 끼 밋밋한 빵과 고기만 먹고, 주 5일제는커녕 기본 인권 개념도 없어 개 같이 구르는데, 어째서인지 마법으로 만든 커뮤니티 게시판은 있는 내가 살던 가짜 중세 세상이.

게임 속 세상이라고 지금 막 깨달은 참이니까.

아니, 진짜 게임 속인진 모르겠다. 비슷하게 생긴 다른 차원일 수도 있지. 중요한 건 내가 몇 주 전 스무 살 성인식을 마쳤단 사실이었다.

나는 환생했다. 20년 만에야 깨달았다.

"궁정소환사 이안이여, 뭘 혼자서 중얼대고 있는가? 드디어 정신을 놓아 버렸느냐?"

그런 내 앞에서 고압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금발의 여성. 고풍스러운 제복을 입고 부채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잘못을 나무란다.

제국의 제2 황녀 율리안 폰 호엔슈타펜. 몇 년을 밤낮으로 구른 끝에 겨우겨우 황실 공무원으로 취업해서 모시게 된 주군이다.

내가 지금 무릎을 꿇고 조아린 곳은 그녀가 다스리는 황실 어느 궁의 알현실이었다.

사방에 가득한 화려한 장식과 봄꽃의 내음, 일렬로 절도 있게 자리한 호위기사들은 위대한 제국의 국력을 자랑했다.

조금 전 자리에서 넘어져 층계참 모서리에 뒤통수를 세게 찧었던 것도 그녀가 나를 발로 밀쳐 일어났던 사고였다.

평소에도 자주 있던 매도였기에 전혀 원망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감사하고 싶었다. 덕분에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됐잖아.

나는 예를 갖추어 그녀에게 대답했다.

"이안이 아니라 아인입니다. 궁정소환사로 황녀 전하를 섬긴 지 5년차입니다만, 아직도 이름을 틀려주시는군요. 황송합니다."

"시끄럽다. 질문에 대답이나 해. 네 소환마법이 날이 갈수록 질이 떨어지고 있어. 이번에도 기사단이 쓸 무구를 소환하랬더니 또 마물을 꺼냈잖느냐. 본녀에게 반역할 셈은 아니겠지?"

"항상 말씀드리오나 소인의 소환마법은 대상이 임의로 선택되는 경향이 있사옵… 이제 왜 그런지 알겠다. 상태창!"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황녀가 깜짝 놀라며 광인이라도 보는 듯 경멸했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나는 흥분에 젖어 그녀의 눈치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아, 상태창. 회귀, 빙의, 환생자에게 주어지는 마법의 단어 아니던가. 이 세 글자만 말할 줄 알았어도 황실 공무원 같은 몸이 갈려 나가는 직업은 안 골랐을 것을.

내 말에 반응해 눈앞에 스르륵, 창이 떠올랐다.

[플레이어명] : 나스닥거대양봉호로출발

[직   업] : 던전군주

[보유 던전] : 7i 13 (최하급)

[소환 티켓] : 0장

▶ 상세 프로필을 본다

▶ 퀘스트를 본다

기억 그대로다.

이 창피한 플레이어명도, 직업도.

내가 환생한 게임은 소셜 가챠 게임.

나는 소환사가 아니었다.

20년 동안 소환주문이라고 생각해 쓴 마법은 다름 아닌 '가챠'.

뽑기였다.

***

나는 노예 출신이다.

갓난아기 때 도적단이 부모에게서 납치해 돈을 뜯어내려고 했다는데, 그 도적단도 다른 도적단과 전쟁이 붙어 전멸했다는 모양이다.

나는 지나가던 노예상이 주워 적당히 키워 팔려고 했다. 아니면 잡아먹든지.

살던 곳은 돼지우리가 따로 없었는데, 다른 것보다도 잠자기가 고역이었다. 매일 밤 나 같은 노예 애들 수십 명과 좁은 철장에서 구겨져서는 테트리스를 해야 했다.

그때부터 내 집이란 게 가지고 싶어졌다.

꿈은 크게 가져야지. 기왕이면 대저택으로.

사시사철 나무와 꽃이 가득한 정원.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침실.

마음껏 좋아하는 음식을 가득 채워 놓은 창고.

언제든 요리해서 식사할 수 있는 주방.

저택을 지키는 충성스러운 기사단.

집은커녕 주머니에 동화 한 닢 넣을 수도 없는 노예 신분으로는 꿈꾸는 것도 사치였지만.

그러다 여섯 살 때 운 좋게 순찰 돌던 방위 기사단에게 구출됐다. 이 세상에서도 미성년자 노예 매매는 불법이라더라.

유전자 검사가 있는 세상도 아니니, 나 같은 케이스는 대부분 부모를 찾을 수가 없어서 고아원으로 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마법 재능이 있다더라.

제도로 가서 황실에서 키워졌다.

소환마법을 개화했다. 집중하다 보니 마력이 멋대로 진을 그렸고, 웬 갑옷이 튀어나왔다.

마법은 안 그래도 어려운 학문인데, 소환사는 그중에서도 희귀한 직업이었다. 비유하자면 공돌이 중에서도 코딩 전문가였다.

알기 쉬운 정령을 소환해 계약하는 마법사는 정령사로 분류된다.

나는 주로 무기나 방어구― 장비를 소환했기에 기사단 재정에 도움이 됐다. 등급이 그때그때 편차가 심해 황녀에게 구박을 받긴 했지만.

우연인지 기적인지, 딱 한 번 신화 속 영웅을 소환한 적이 있다. 그녀는 2황녀의 기사단장을 맡고 있다. 덕분에 열다섯에는 궁정소환사 직위를 얻었다.

그렇게 거렁뱅이 노예에서 황실 소속 고급 노예로 신분이 올라갔다.

사정이 있어 비밀이긴 하지만, 개쩌는 소환을 한 번 더 하기도 했고.

문제는 간혹, 아니. 꽤 높은 확률로 마물이 나오곤 했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무엇을 어떻게 소환하는지, 마법의 원리가 뭔지 몰랐다.

이제는 안다.

나는 지금까지 가챠를 돌리고 있었다.

뽑기. 심심하면 게임사가 확률을 조작했다가 걸려서 개같이 두드려 맞는 바로 그것이다.

잡템도 나오고, 기물도 나오고, 아주아주, 아주아주아주 낮은 확률로 영웅도 나오는 현질 콘텐츠의 알파이자 오메가.

푸른색의 소환진이 빙글빙글 돌아가다가 무지갯빛이 번쩍하는 순간의 도파민은 이루어 말로 할 수가 없지.

왜 종종 마물이 나와서 황녀에게 핍박당해야 했는지도 명확해졌다.

내가 플레이했던 원작 게임은 '던전 빌더즈'라는 이름이었다.

그렇다. 던전 주인이 되는 디펜스 게임이었다. 제국 출신 소환사가 아니라!

뽑기로 모은 기물에 장비를 입혀 침입자를 막아내고 던전을 육성하는 게 목적이었다. 제국은 병사를 보내는 침략자 측이었으니 오히려 적군 입장이다.

'탈주해야 해.'

전생의 정보를 얻자마자 떠올린 다섯 글자는 명쾌했다.

스포일러로 몇 번이고 읽었던 시나리오가 기억난다. 제국의 미래는 확실했다.

눈앞의 2황녀는 머잖아 황제가 된다. 역사에 기록될 폭군이다. 그녀의 철권통치, 독재를 참다못한 귀족가와 산하국이 반란을 일으키고, 머잖아 제국은 휠로 밀고 간 피자처럼 산산이 조각나 멸망한다.

나는 평생을 남들에게 치여 살았다. 유년기는 노예들 틈에서, 소년기는 황실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지금도 재정상의 이유로 기사 룸메이트와 합방을 한다. 발냄새가 지독한 놈이다.

소원이 있었다. 자그마한 연립주택이라도 좋으니 내 명의 집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를 위해 2황녀의 핍박도, 다른 신하들의 모함도 견뎌냈건만.

제국에 있는 한, 그것은 결코 실현될 리가 없는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애초에 여기는 블랙기업이라는 비유가 아깝지 않을 지옥의 직장이다. 전생에 살던 불반도의 조… 중소기업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이안, 듣고 있느냐?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지 모르겠구나. 정말이지 궁정소환사라고는 봐줄 수 없는 지경이로다."

생각을 정리하며 시간을 끌어 버렸다.

당장 눈앞의 황녀를 상대할 필요가 있었다.

"이안이 아니라 아인입니다. 황녀 전하, 소인은 지금껏 있었던 실책에 책임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소인의 미흡함으로 전하의 휘광에 한 줄기 그림자를 드리워 버렸으니 어찌 고개를 들 수 있을지요."

"허, 머리를 부딪치더니 조금은 입장을 깨달은 모양이구나. 피가 나는데 안 닦아도 괜찮겠느냐? 알았으면 책임을 지고 본녀에게 충성의 맹세를…"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습니다."

"응?"

율리안 2황녀가 말을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이안 소환사, 지금 뭐라고…"

"사퇴하여 충성을 증명하겠다 하였습니다. 소인 같은 무능력자는 전하 같은 위대한 분의 업적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아니, 잠깐. 그만두라는 소린 아니었다."

"전하! 궁정소환사가 소환한 마물 때문에 생긴 피해가 올해만 금화 세 자루에 달합니다."

"다음번엔 얼마나 위험한 마물을 소환할지 모릅니다. 쓸모없는 자입니다."

"그의 요청을 수리하심이 궁을 위해 현명하신 선택이시리라 감히 간언을 올리나이다!"

그녀의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비서관과 집사장이 어시스트했다. 나이스.

날 더러 능력도 안 되는 놈이 철밥통 관직에 앉았느니, 시녀장에게 몸을 대줘서 자리에 앉았느니 호박씨를 까던 친구들이다. 평소에 날 고깝게 봐 왔으니 도와줄 줄 알았다.

"그들의 말이 옳습니다. 현명하신 전하께서 소인의 마지막 충성을 수리하여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니, 그게…"

어째서인지 율리안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평소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 환영할 줄 알았는데.

다른 신하들의 의견은 확실하다. 등을 돌려도 되는 분위기라고 판단했다.

"그간 신세 졌습니다.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율리안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알현실을 나섰다.

"어? 아니, 잠…."

"훌륭하신 결단입니다, 전하."

"그보다 우수한 새 소환사를 수배하겠습니다."

율리안이 내 예상보다 훨씬 당황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등 뒤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이제 나와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아, 자유의 향기. 당장에라도 펄쩍 뛰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집이 이미 있는데 여태 일을 왜 했대.'

[보유 던전] : 7i 13 (최하급)

이건 분명히 내가 전생에서 키우던 계정의 던전이다. 지금도 내 소유고, 잠든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내가 이 게임에 얼마를 과금했는데. 거의 몇 년 치 월급을 다 꼬라박았지, 아마.

그땐 돈을 죄다 데이터 쪼가리에 뿌렸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청약적금이었다.

집!

몇 층이나 되고 방도 많은 드림하우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나도 모르게 싱글벙글해졌다.

'던전부터 찾으러 가자.'

***

한 달 후, 나는 오랜 여행을 거쳐 제국 남서부에 도착했다.

"여기서 더 남쪽으로 가면 마물이 즐비한 죽음의 숲이 있소. 길을 잃지 않게 조심하시오. 소문에 의하면 던전도 있다더군."

마부가 내게 경고해 주었다. 요즘 제국에선 흔치 않은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품삯을 더 얹어 주었다.

"어디, 시작해 보자."

나는 배낭 하나만 멘 채 망설임 없이 어둠 가득한 숲속으로 들어갔다.

기억에 있는 미니맵과 실제 지형은 꽤 차이가 있었지만 정확한 장소로 온 게 분명했다.

퇴치할 준비도 해 왔건만 어째서인지 마물은 만나지 않았다. 몇 번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들었는데 튀어나오질 않더라.

"오."

몇 시간 숲속을 뺑뺑 돈 끝에 마침내 한 가지 특이한 건축물을 찾아냈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융기해 지어진 제단이다. 위에는 이끼가 가득 낀 거대한 벽돌의 산. 동서남북 네 개 방위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꺼먼 입구가 있었다.

지금은 망가져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석상이 제단의 각 모서리에 위치했다. 울창한 숲속에 별안간 나타난 인공 건축물은 바라만 봐도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이거다."

이끼가 가득해 잘 보이진 않았지만 틀림없었다. 

던전, 우리 집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문 하나로 발을 옮겼다. 그 순간 문에서 푸른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몸을 끌어당겼다.

시야가 급변하고.

내 앞에는 옥좌가 놓여 있었다.

: 귀환을 환영합니다, 던전군주님.

: 튜토리얼 퀘스트 [던전 입장]을 완료했습니다. (1/10)

: 다음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지금 확인하시겠습니까?

2화. 던전 입주

"와."

던전에 들어서니 나도 모르게 허파에서 감탄 섞인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나왔다.

"엄청 넓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도중 화아악! 내 몸을 푸른 마력이 휘감았다. 꼭 내 귀환을 반겨주는 느낌이었다.

: 군주와 던전 코어의 동기화 성공!

: [건설] 계열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던전을 설계, 구축할 수 있습니다.

: [지휘] 계열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던전을 수호하는 기물을 통솔하며, 최흉의 마왕에 어울리는 위압감을 선사합니다.

: [마법] 계열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정점에 도달한 최흉의 마왕에게 어울리는 궁극의 마법이 주어집니다.

: [생활] 계열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던전에서 지내고 시설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주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상태창에 정신없이 알림이 뜨기 시작했다.

: [카리스마]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당신을 보는 모든 이들이 정점의 존재가 지닌 위압감에 무릎 꿇을 것입니다.

: [지고의 정신]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당신의 높은 지력이 냉철한 선택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뭐가 너무 많아서 복잡하네. 일단 상태창은 잠깐 치워 놓고, 돌아온 내 집을 둘러보기로 했다.

한가운데 옥좌가 있는 걸 보면 접견실이다. 율리안에게 퇴직 신청을 했던 알현실보다 열 배는 넓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는지 군데군데 수북한 먼지와 거미줄이 쌓여 있다.

홀 양쪽에는 무시무시한 드래곤 동상이 일렬로 세워져 있는 등, 확실히 던전 느낌이 났다.

평생을 살기에는 약간 험악한 인테리어였지만 장점도 있었다. 어디에 모닥불이라도 지펴 놨는지 바닥에서 훈훈함이 올라온다. 축구장만큼 넓은 공간에서도 아늑함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넓어서 갑갑함이 없다. 어딜 어떻게 꾸며도 쓸 공간이 한참 남을 터였다. 어디든 사람이 많아서 미어터지는 제도에서는 상상조차 못 할 여유였다.

지하에 있다는 체감도 전혀 들지 않았다. 천장과 벽에는 구멍이 뚫려 쾌청한 하늘을 감상하거나 쏟아지는 햇빛을 즐길 수 있었다.

마법으로 채광 효과를 누릴 수 있게 세팅된 인테리어다. 이 세상은 마법이 많이 발달해 있어서 대부분의 신기하거나 편리한 기술은 마법의 힘이라고 보면 된다.

"이제 여기가 내 집이야."

만족스럽다. 첫인상은 더할 나위 없는 백 점짜리 합격이었다.

옥좌에 입바람을 후 불어본다. 먼지를 털어내 모양을 확인하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의자는 물론 바닥에 깔린 카펫, 사방에 설치된 동상이나 장식 하나하나가 공들여 디자인을 고른 물건들이다.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가 전생에 이 게임, [던전 빌더즈]를 특히 좋아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기물과 영웅을 소환하고, 장비로 그들을 강화하고, 적절한 배치와 던전 건설을 통해 침략자를 막아내는 전략적인 재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 거주 공간을 직접 꾸밀 수 있다는 높은 자유도가 으뜸이었다.

꼭 마이 드림하우스가 생긴 기분이었지.

벽난로를 튼 거실 소파에서 비비적거리며 아기자기한 마멋들과 멍때리고 있는 내 캐릭터를 보면 나도 마음이 편해졌었다.

"이제 그 캐릭터가 나잖아."

[플레이어명] : 나스닥거대양봉호로출발

[직   업] : 던전군주

[보유 던전] : 7i 13 (최하급)

[일반뽑기권] : 0장

: 퀘스트를 확인하시겠습니까?

"퀘스트는 무슨 퀘스트야. 밀린 낮잠이나 때리러 가야겠다."

나는 상태창을 치워 버리고 싱글벙글하며 거실을 찾아 접견실을 뒤로했다.

***

기나긴 복도를 지나쳐 거주구역으로. 기억에 흔적이 남아 있는 거실로 들어섰다.

던전의 최하층은 소위 보스룸인 게 국룰이다. 보통 보스를 쓰러트리면 던전 공략이 끝난다.

다만 이 게임에서는 입장이 반대다. 던전군주인 플레이어가 보스니까, 보스룸은 곧 플레이어의 개인적인 공간을 가리킨다.

아까 살폈던 접견실을 포함해서 최하층 전체를 내 생활공간으로 꾸밀 수 있다는 말씀이다.

최하층인 지하 3층은 대략 3천 평이다. 전생에 나는 이곳의 구역을 나눠 놨었다. 2백 평 정도를 내 생활 구역으로 해서 현대의 아파트처럼 디자인했었다.

"거실은 특히 공들였었지."

거실 하면 당연히 TV와 소파가 있어야 한다.

판타지 세상이기에 TV는 없지만 영상을 녹화한 수정구 화면을 띄워 주는 홀로그램 장치는 있다. 마법 덕분에 시대에 안 어울리는 묘한 첨단 시설이 한두 종류 있었다. 비바, 마도공학.

원래는 친구 메시지나 설정을 볼 수 있는 화면이었다. 뭐가 나오나 틀어보니 던전 내부를 CCTV처럼 지켜볼 수 있었다.

대륙 전역 마법사들의 커뮤니티인 '마법사 게시판'도 접속할 수 있었다. 일단 나중에 체크해보기로 했다.

"너튜브 안 나오는 건 아쉽네.서라운드 스피커도 소파에서 잘 들리게 센티미터 단위로 배치했는데."

소파는 내 캐릭터가 누우면 팔다리가 딱 편안할 사이즈로 맞췄었다. 지금도… 음,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안에는 그리폰의 깃털을 가득 채워 놔서 더없이 푹신하다.

"문제는 이곳도 저곳도 죄다 먼지구덩이구나."

공간이 넓어서 청소하려면 하루 종일 해도 시간이 부족하겠는데.

어디 써먹을 기능이 없나,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퀘스트, 스탯, 스킬… 여기 있나?"

스킬 항목을 열어 본다.

[스킬]

▶ 건설 계열 상세

▶ 지휘 계열 상세

▶ 마법 계열 상세

▶ 생활 계열 상세

"어디, 건설 계열을 보자."

▶ 건설 계열 스킬

[설계]

[건축]

[배치]

[개조]

 …

[청소]

"청소, 이거다."

스킬을 터치하니 던전의 지도가 상세하게 쨘 나타났다.

3층을 터치하고 손가락을 벌려 줌 인, 내가 있는 거실을 선택했다.

: 소모 마력 1 / 실행합니까?

"물론이지."

스킬을 시전하니 화아악!

거실에 쌓여 있던 먼지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공기가 청아해졌다.

모든 가구가 한순간에 왁스 칠이라도 한 듯 광이 반짝거린다. 조명은 그대로지만 한층 빛이 난다.

"후우, 이거지 이거."

나는 만족하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 튜토리얼 퀘스트 [스킬 사용] 완료. (2/10)

보상으로 [일반 소환권]이 10장 지급됩니다.

: 훌륭합니다! 최흉의 마왕 '네헤모트'로 복귀를 위한 위대한 시작입니다!

: 곧 다음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네헤모트, 그런 칭호가 있었지."

나는 게임에서 열렸던 최대규모 PVP 랭킹전에서 우승했던 경험이 있다.

원래는 하우징 컨텐츠를 주로 즐겼고, 내 집 같은 던전을 남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경쟁 컨텐츠는 잘 안 했었다.

그러다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왔던 어떤 글을 보고 긁히는 바람에 대회에 참가하고 일이 커졌었다.

━━━━━━━━━━━━━━━━━━━━━

제목) 님들 전체 과금랭킹 통계 봄?

이번에 누가 경쟁전 앱뜯해서 통계 냈는데 당연히 핵과금러들 전부다 상위권이었음 ㅇㅇ

근데 과금 7위에 '나스닥거대양봉호로출발' 얘는 1억을 질러놓고 경쟁전 32,841위더라 ㅋㅋ

└ 심각하네

└ 그 정도면 지능이 마멋 수준 아님?

└ 나 붙어본 적 있는데 던전 개판으로 지어 놓음

└ 나한테 저 계정 주면 1위 할 자신 있다

└ 만렙 영웅이 불쌍한 정도

━━━━━━━━━━━━━━━━━━━━━

"못 참겠다."

다른 건 몰라도 내 던전을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경쟁전 기록도 퀘스트 보상을 받기 위해서 몇 판 돌려서 있던 건데 말이야.

: 축하합니다. 최흉의 마왕 '네헤모트'의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이 타이틀은 그때 얻었던 이름이다. 상품으로 유니크 칭호를 얻어서 계정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올랐다지만 별로 관심은 없었다. 애초에 팔 생각도 없었으니까.

내겐 직접 만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중요했다.

근데 돌아보면 그냥 비쌀 때 팔 걸 그랬다.

던전 빌더즈는 얼마 안 있어 서비스를 종료해 버렸다.

어떤 예고도 없이, 매출도 잘 나오던 황금알 낳는 거위를 하루아침에 도살했다.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서버실에 불이 나서 도무지 복구할 수 없었다는 도시전설만이 정설처럼 돌아다녔다.

나도 그때는 상실감이 상당했다. 유저들은 보상을 받겠다고 난리가 났고 나도 방법을 찾아보긴 했지만 뭐, 그간의 과금액 전액을 받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고.

내 진짜 집 같았던 던전에서의 추억에 그런 싸구려 값어치를 매기고 싶지 않았기도 했다.

아니, 그런 생각도 있긴 했지만.

젠장,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깝다.

내 돈이!

랭커 계정이!!

후속작이 나온다고 설정이나 시나리오가 유출되어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나는 그 정보들을 찾아다니며 바닥까지 핥아먹을 정도로 달달 외웠는데, 결국 '던전빌더즈 : 리다이브'는 베이퍼웨어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서버 종료 시점이 내가 환생한 시기였어."

제국이 멸망하는 시나리오는 유출된 정보로 알고 있었다. 지금 와서 비교해 보니 내가 20년간 겪어 온 역사와 정확하게 똑같이 들어맞는다. 틀림없다.

"그렇게 보자면 내 던전은 20년이나 주인 없이 방치되어 있었겠구나."

던전에 기물이나 영웅이 하나도 안 남아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주인이 없는 던전을 지킬 영웅은 어디에도 없겠지. 소환이 해제되기도 했겠고, 다들 제 살길을 찾아 떠났을 터였다.

"그건 좀 아쉽네."

영웅들이랑 놀이시설에서 미니게임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었는데.

―좋은 아침입니다, 군주님. 새 놀이시설을 지을 수 있습니다. 지금 확인하시겠습니까?

던전이니만큼 내 하수인은 대부분 적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한 마물이었다.

개중엔 마물이 아니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간형 하수인도 있었는데, 그들을 '영웅'이라고 불렀다.

매출을 위해 4성, 5성 영웅은 죄다 미녀 여캐로 도배되어 있었고, 가챠로 뽑아야 했다.

상태창에서 [도감]을 열어 봤다. 한때 꽉 차서 컴플리트 직전이었던 도감이 영 휑했다.

[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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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24 미믹 ☆

No. 45 유령마 ☆

No. 48 마멋 ☆

No. 77 슬라임 ☆

No. 85 유령지네 ☆

: 도감 컴플리트시 ■■■■의 ■■가 개방됩니다.

"다시 모으고 싶어지네."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전생에 함께 놀았던 영웅들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스토리도 꽤 몰입해서 봤었고, 호감도도 많이 올렸었는데.

"걔들 입장에서는 한참 전 일일 테니 나를 원망하고 있으려나."

지금 던전에 한 명도 안 남아 있는 걸 보면 뭐, 말도 없이 자기를 버린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영웅은 어디에도 없는 게 당연하겠지.

멍하니 상태창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짜리몽땅한 봉제 인형처럼 생긴 동물 몇 마리가 입을 헤 벌리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스코트 SD캐릭터 느낌이랄까. 꽤 귀엽게 생겼다.

마멋이다.

"군주님이신 마멋?"

"틀림없는 마멋."

자기들끼리 속닥대다 멍때리는 모습이 꼭 태어나 사람을 처음 보는 동물 같다.

내가 이리 오라고 손짓하니 짧은 손발을 뒤뚱거리며 뽈뽈뽈 다가온다.

"너희, 내 던전 주민이야?"

"역시 군주님이셨던 마멋. 안녕하신 마멋."

꾸벅 고개를 숙이는 세 마리.

한 마리는 머리가 무거웠는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이마를 콩 박았다. 인사성이 밝은 친구들이었다.

"군주님이 오시니 거실이 깨끗해진 마멋."

"대단한 마멋."

"마멋들은 팔이 짧아서 못 치운 마멋."

구석구석 뭔가 기어다녔던 흔적이 있었는데, 방치된 동안 이 녀석들이 던전을 관리해 온 걸까.

마멋은 개체 수를 잘 늘리기로 유명하니 오랫동안 살아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디 보자."

나는 상태창을 터치했다.

['딸기 화분' 장식을 '배치'합니다.]

[소모 마력 : 1]

슉, 소파 앞 테이블에 자그마한 화분이 하나 나타났다.

"깜짝 놀란 마멋!"

"마법인 마멋?"

"군주님 엄청난 마멋!"

마멋들이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쳤다. 아까 이마를 박았던 녀석은 이번엔 뒤로 넘어지며 꽈당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화분에서 딸기를 떼 녀석들에게 하나씩 던져주었다.

처음엔 경계하던 녀석들이 킁킁 향기를 맡다가 금방 오물거리고는 멍하니 바보같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꽃을 피웠다.

"맛있는 마멋!"

"달콤한 마멋!"

나도 딸기를 똑 따서 하나 입에 넣었다.

청량하고 달콤하니 제철이 틀림없다.

다른 평가가 필요 없다.

맛있다.

입가심도 했겠다, 나는 마멋들에게 거실에서 나가라고 명령하고 마저 낮잠을 청했다.

***

―쿵, 쿵.

천장을 타고 멀리서부터 울리는 진동에 나는 눈을 떴다.

"뭐야."

눈을 비빈다. 꿈은 아니었다.

"던전에 무슨 층간소음이 있어?"

상태창에 메시지가 있었다.

: 침입자가 있습니다.

: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 적을 물리치세요!

―쿵, 쿵, 쿵.

"못 참겠다."

상태창을 연다. 아까 눈에 띄었던 메시지가 있었다. [소지 아이템] 항목에서 신규 표시가 붙은 칸을 망설임 없이 터치했다.

[일반 소환권 x 10]

침입자를 쫓아내려면 기물 배치가 기본.

기물을 얻으려면?

대답은 간단하다. 뽑는다. 소환이다. 전직 궁정소환사였던 나 아인의 주특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즉시 소환권을 터치했다.

그러자 주변에 어둠이 깔리며 내 앞에 화려한 소환진이 나타나 번쩍이기 시작했다.

마멋들이 깜짝 놀라 벌렁 뒤집어지고 거실 바깥으로 굴러 도망갔다.

나는 양손을 마주치며 씨익 미소 지었다.

"자, 드가자."

3화. 첫 소환

"소환인 마멋!"

"군주님이 마법을 쓰시는 마멋!"

"마멋 처음 보는 마멋…."

바닥에 파란 마력으로 기하학적인 도형이 여러 겹 겹쳐지며 그려졌다. 외곽에 수식을 적어 나가니 멋들어진 소환진이 완성됐다.

"이번 소환은 일반 소환권 10연차. 1성이나 2성 장비, 혹은 기물 열 개를 뽑을 수 있어."

2성에는 1성이 진화했거나, 스킬을 보유한 나름 쓸만한 마물이 있다.

"문제는 장비야. 뽑기에서 높은 확률로 기물이 아니라 장비 같은 잡템이 나온단 말이지."

내가 궁정소환사 때 주로 소환하던 것도 기사단이 쓸 장비였다. 던전 빌더즈의 가챠는 기물과 잡템이 섞여 나오는 일체형 뽑기다. 아주 악랄한 BM이다.

"확률 고지표가 있긴 하네."

: 일반 소환권 소환 확률

: 장비 : 70% / 재료 : 20% / 기물 : 10%

: ☆ : 80% / ☆☆ : 20%

"상태창도 공정거래위 신고는 무섭나 보다."

영웅은 3성부터 분포하니 2성 기물이 최고 당첨이다. 장비를 뽑을 확률이 워낙 높아서 기물이 나오기만 해도 성공이다.

"일반 10연차의 장점은 마지막 열 번째에 반드시 2성이 확정이라는 점이야."

장비일지 기물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나씩 뽑는 단차보다는 확실한 이익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소환 버튼을 터치한다.

―화아악!

소환진에서 마력구가 열 개 떠오른다. 이내 시동을 넣은 엔진처럼 가속하며 맹렬하게 회전한다. 번쩍! 스파크가 튀긴다.

"자, 첫 번째는…."

마력의 스파크를 뚫고 형체가 모습을 갖추었다. 첫 소환이 완료됐다.

―띠링!

소환진 위에 마력구 하나가 떠올라 자그마한 행성 모양으로 반짝인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단순했다.

"에이."

못 참고 실망한 티를 내 버렸다.

빛이 멎은 자리에는 이빨이 다 빠진 작은 방패가 하나 놓여 있었다.

: ☆ 낡은 나무 방패를 소환했습니다.

그래,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

아직 기회는 아홉 번이나 있다. 소환진에서 나온 방패를 마멋에게 쥐여 주니 좋다고 팔짝팔짝 뛰어다닌다.

이어지는 소환을 지켜본다.

―띠링! 이번에도 별이 하나.

: 장비 ☆ 망가진 롱소드를 소환했습니다.

: 장비 ☆ 초보자용 도끼를 소환했습니다.

"흠."

황실에서의 안 좋은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듯했다.

율리안이 내게 마력 저장구를 대량으로 투자했는데 전부 1성 장비가 나왔을 때의 그 뻘쭘함이란. 나를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노려봤었지. 상태창이라도 있었으면 2성이 확정인 10연차를 돌렸을 텐데.

그러던 도중 띠링! 네 번째에서 마침내 마력구가 두 개의 별로 분열했다.

"오오, 이거지. 기물! 기물 와라!"

마력이 번쩍 빛나고, 소환진 위에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 장비 ☆☆ 철제 갑옷을 소환했습니다.

"쓰으읍…."

아니, 뭐. 나쁘진 않다.

기물에 입혀주면 방어력이 3 올라가는 괜찮은 레어 등급 장비다. 율리안의 기사단도 내가 열심히 뺑뺑이 돌려서 뽑은 이 갑옷을 기본 장비로 채용하고 있었고.

하지만 역시 지금은 기물이 가지고 싶었는데.

: 마물 ☆ 마멋을 소환했습니다.

: 장비 ☆ 해진 가죽 갑옷을 소환했습니다.

: 재료 ☆ 철광석을 소환했습니다.

: 장비 ☆☆ 판금 장화를 소환했습니다.

: 마물 ☆ 마멋을 소환했습니다.

어느새 아홉 번의 소환을 마쳤다. 기물이 나오기는 했지만 마멋만 두 마리가 늘었다. 그 외에는 잡템뿐이다.

역시 첫 가챠에서 기대하긴 힘든가. 진짜 게임이었으면 이 결과를 보고 리세마라를 돌렸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뭐, 확률만 따지면 기물 둘에 2성도 둘이니 잘 나온 편이긴 하다. 2성 확정이 남았으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다.

마지막 열 번째 소환.

마력구가 빙글빙글 회전한다. 여기서 2성은 확정이니 제발 기물이 나오길 비는 수밖에 없다.

"기물 나와라, 기물! 마멋들 너희도 빨리 기도해, 기물!"

내가 재촉하니 마멋들은 영문도 모르고 짧은 팔다리로 뿅뿅 제자리에서 뛰어댔다. 축제인 줄 아나 보다.

그때였다.

―파지지직!!

회전하던 파란 마력구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력한 스파크가 몰아쳤다.

강력해진 나머지 갈 곳을 잃은 마력이 소환진에서 튀어나와 깃털처럼 이리저리 휘날린다.

"뭐야?"

―화아악!

색깔이 변했다.

파란색이었던 마력구가 무지갯빛으로 번쩍인다.

"오."

이 이펙트, 잊을 리가 없는 모양새였다. 이보다 머릿속에 강렬하게 박힌 인상이 또 있을까.

분명 최고 등급에 당첨됐을 때 나오는…

"5성, 5성이야!"

나는 순간 깜짝 놀라 옆에 있던 마멋과 손을 맞잡고 폴짝폴짝 뛰었다.

―띠링띠링! 띠링띠링… 띠링!

다섯 개의 별로 변하는 마력구. 누가 봐도 5성을 소환했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아니, 잠깐."

분명 나는 일반소환권을 사용했다.

여기서 5성이 나올 리가 없는데…?

상태창에 메시지가 출력된다.

: 영웅 ☆☆★★★ [서큐버스 기사 시트리]를 소환했습니다!

: 도감에 [No. 101 기사 시트리]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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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양산형 기물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한 명뿐인 존재, 영웅을 소환했다.

어떻게 일반소환권으로 영웅, 그것도 5성을 뽑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공짜로 준다는데 안 받을 이유야 없지.

화려한 마력의 빛이 사그라들자 한 명의 여기사가 나타났다.

눈에 띄는 적발에 한쪽에만 달린 뿔. 상처 많은 갑주가 투박하게 반짝인다.

나를 목격한 그녀는 놀란 기색을 보이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철컥!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적발의 기사.

"기사 시트리, 소환에 응해 찾아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계약에 의해, 군주님을 위해 던전을 수호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잠깐, 서큐버스 시트리?'

기억났다.

그녀는 분명 2성, 평범한 하급 마물이었다.

20년 전에는 말이다.

***

바로 조금 전, 성국의 지하 감옥 가장 깊은 곳.

"교대일세."

성기사들이 보초역을 교환한다. 새로 투입된 성기사 한 명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자 그의 선임이 어깨를 쳤다.

"자네는 이 보직이 처음이었던가.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이 철문 뒤에도 봉인문이 몇 겹이나 설치되었다네. 그 재해는 지하로도 몇 층은 더 내려가야 있지. 풀려나는 일은 결코 없을 걸세."

"그렇게 듣긴 했습니다만… 대체 이 밑에 가둔 게 무엇입니까? 소문으로는 그 마물을 잡기 위해 저희 부대가 백은 희생했다고 들었습니다."

"잘못된 소문이네."

"그렇죠? 아무리 그래도 마물 하나에 성기사와 사제 백 명은…."

"삼백 명이 넘게 죽었네. 그러고도 억류하는 게 한계였지."

선임의 말에 신입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한 마물이 아닐세. 수준이 그쯤 되면 평범한 마물도 영웅으로 격상하기 마련이야."

"영웅이요? 그런 학살자가 무슨 영웅…"

"영웅의 기준은 상대적이니 말일세."

"…그의 이름이 뭡니까?"

"그가 아니라 그녀일세. 서큐버스면서 기사 흉내를 내는 희한한 마물이지."

"기사, 저희처럼 말입니까."

선임이 진중하게 대답했다. 그 마물에게는 기사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혈기사. 그렇게 부르고 있네. 그 금안에 시선을 마주치면 모든 마력을 뺏기고 말지. 저 한 명 때문에 전장 하나가 초토화된 적도 있었네. 국가적 재해급일세."

"믿기지가 않는군요. 서큐버스는 하급 마물 아닙니까."

"그 '최흉의 던전' 출신일세."

그 말을 들으니 신입도 납득이 되었다.

20년이나 된 일이라 젊은 그는 잘은 몰랐지만, 과거 한창 던전이 유난히 나타나 지금의 대 모험가 시대가 열렸다고 했다.

그 시기에 대륙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재앙급 던전을 모르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그 최흉 출신이라면 저리 경계할 만도 했다.

신입은 부디 자신 차례에 문제가 없기를 바라며, 긴장한 채 등 뒤의 단단한 철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철문의 뒤, 수많은 사제의 신성 결계와 봉인을 지난 지하에.

혈기사라는 이명을 지닌 마물은 신성력 가득한 사슬에 꽁꽁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몇 번이고 스스로 물어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20년 전, 그녀는 영웅을 동경했었다.

그들은 위대한 존재였다.

출신도 종족도, 성별이나 나이도, 추구하는 이상도 제각각이지만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압도적인 힘.

어떤 전설의 무구를 들었든, 환상적인 고위계의 마법을 쓰든, 그들의 가벼운 몸짓 한 번이면 산봉우리가 무너지고 강물이 갈라진다.

그런 영웅이 한 명이 아니다. 두 명도 아니고 무려 수십 명이다. 그들과 모두 계약하고, 던전이라는 한 장소에 모아 군대를 꾸려 통솔하는 정점.

마왕.

대체 그 위대한 이는 어떤 이상을 안고 무엇을 보며 살고 있을까.

흔하디흔한 하급 마물 서큐버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최흉이라는 이명으로 역사에 이름을 새긴 마왕이 그녀가 사는 던전의 주인이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마법을 쓴다고도 했고, 잔혹하게 적을 고문하며 학살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마왕은 감히 직접 얼굴을 볼 수도 없는 위대한 이였다. 영웅들조차 옥좌에 근엄히 앉아 있는 그를 알현하려면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시트리라는 태어난 지 몇 년 안 된 나약한 서큐버스에게, 마왕은 그토록 위대한 존재였다. 그는 유일한 절대자였으며, 시트리를 대체할 마물은 이 던전에 무수히도 널려 있었다.

대부분 던전의 구성원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경외했다. 그녀도 다를 바야 없었지만, 그날의 사건을 계기로 인식이 조금 바뀌었다.

―서큐버스인가.

우연히 홀로 앉아있는 그를 만났다. 그녀가 평소처럼 검을 연습하기 위해 훈련장으로 갔을 때였다.

동료들은 그녀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놀리곤 했다. 하급 마물 주제에 영웅을 동경해서 단련하는 그녀를 모두가 비웃었다.

―조, 존안을, 뵙습.

군주에게도 좋은 말은 못 들을 게 분명했다. 허락받지도 않고 멋대로 창고에서 무기를 꺼내왔으니.

하지만 군주는 그녀를 슥 훑어보고는.

―기사로 전직했군. 시트리인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휘둘러 보아라.

그것도 모자라 훈련을 구경하기까지 했다. 긴장한 그녀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심정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진지하게 그녀를 지켜본 군주가 가까이 다가왔다. 시트리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군주님께 못 볼 꼴을 보여 드렸습…

―포만감이 낮군. 병참은 중요하다. 배를 곯으며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 말하고 군주는 시트리에게 빵을 한 조각 던졌다.

―싸우기 전에는 배를 채워라.

그것은 시트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비로소 이 던전이 자신의 안식처이며, 필사적으로 지켜야 할 장소라고 인식했다.

위대한 이에게 진심 어린 존경을 품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마왕은 갑작스레 잠에 들었다.

그를 따르던 영웅들은 각자의 이유로 던전을 떠났다.

그의 힘에만 충성해 와 실망한 이도, 여태 그를 두려워해 해방이라 여긴 이도, 마력이 부족해 남을 수 없게 된 이들도.

주인을 잃은 던전 코어는 자기장을 잃은 자석처럼 모든 마력을 놓아 버렸다. 던전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쇠락했다.

20년의 세월은 역사조차 지워 버려, 최흉의 땅은 숲에 파묻혔고 제국에 편입되었다.

던전의 마력이 바닥날 때까지 버텼으나, 시트리도 결국에는 던전에서 튕겨 나왔다.

"아아아…!"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추억 가득한 장소를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던전의 무거운 문은 그녀의 입장조차 거부했다.

한참을 입구에서 방황하던 시트리는 결국 정처 없이 여기저기 떠돌게 됐다.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되었다.

어느새 시트리는 대륙의 유명인이 되었다. 그 '혈기사'와 절대 눈을 마주치지 마라. 마력을 밑바닥까지 빨아 먹힌 후에는 피보다도 새빨간 검날이 단숨에 목을 떨어트릴 테니.

단신으로 국가 간 전쟁을 하룻밤 새 종결시킨 재해급 마물을 모르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어릴 적 그렇게나 동경하던 영웅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었다.

시트리에게는 사소한 일이었다. 길을 가던 중 작물이 가득한 밭을 불태우는 인간들을 보고 눈이 돌아가서 전부 쓸어 버렸을 뿐이었다.

식량을 소중히 하라는 그분의 가르침을 지켰다.

'…쓸데없는 짓을.'

자신은 영웅도 뭣도 아니었다.

그때 동경하던 영웅들에게는 따르는 이상이 있었다.

이끌어 줄 절대자가 있었다.

자신이 손에 넣은 건 경지도 무엇도 아니다. 그저 소꿉장난의 연장선일 뿐.

그때의 어린아이가 몸만 커져서 가야 할 방향도 모르고. 이념이나 이상도 모르고.

그러니 인간들에게 포박당해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 않은가.

'…배고프네.'

더는 목적 없이 살아가기에 지쳤을 때였다.

―화아악!

그녀의 몸을 푸른 마법진이 휘감은 것은 그때였다.

4화. 층간소음 (1)

"비상, 비상사태다!"

성기사들이 허겁지겁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성국에서는 대낮부터 난데없이 국가적인 위기가 발생했다.

"무슨 일인가!"

"저기 좀 보십시오!"

기사단장이 부하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지하 감옥의 위로 치솟은 푸른 마력의 기둥은 구름을 꿰뚫을 기세였다.

"저건!"

"설마… 소환마법인가?!"

"수감자를 탈옥시키려는 자가 있다. 당장 대응해! 소환 대상은 누구냐!"

단장이 올라오는 보고에 헛웃음을 뱉었다.

"최하층? 웃기는 소리. 그 '혈기사'를 소환하려는 자가 있다고? 불가능해. 그건 재해급 마물이다. 그걸 소환해 계약할 정도면 경지에 오른 마왕이 아니고서야…."

"단장님."

부하가 하늘을 보고 얼어붙었다.

그 소환진을 보고 단장도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기하학적이며 아름다움 역시 갖춘 경지에 오른 마법진.

그것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 단숨에 직감했다.

저것을 시전한 마법사는 누가 되었든, 위대한 대마법사임이 틀림없다고.

그 푸른 마력의 기둥에 휩싸인 시트리.

그녀는 주문진에 쓰인 술식을 읽고는 곧 그 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환희했다.

따라갈 수 없는 깊이가 있으면서도, 어딘가 다정함이 느껴지는 푸른 마력.

20년간 추억하기만 했던 그 마력의 주인을 그녀가 착각할 리가 없었다.

'…군주께서는 저 같은 죄인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지요.

아아, 이것은 천운이다.

과거에 나약했던 자신의 업보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소환 계약에 응하자, 시야가 변하고.

―번쩍!

눈앞에 서 있는 자는, 명실상부한 그녀의 주인.

부활의 후유증으로 마력은 이전보다 쇠락한 듯 보였으나, 인간인지 마족인지 알 수 없는 중성적인 얼굴과 흑요석 같은 새까만 머리카락을 그녀가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절대자의 위엄은 20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마족에게 가족이라는 개념은 없다.

하지만 만약 부모님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면.

잃어버린 부모님과 다시 재회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기쁨은 잠시.

시트리의 심장에 통증이 일었다.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마음은, 사죄.

당신이 잠에 빠졌을 때, 너무나도 나약하고 미약했던 자신은 아무런 도움조차 드리지 못하고.

당신이 일궈놓은 명예의 편린마저 이 20년간 결국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치밀어오른다.

당신이 돌아오시리라는 믿음을 진즉 저버린 나는 여전히 죄인이 아닌가.

자격 없는 자신이 지금 입에 담을 수 있는 건 형식적인 충성의 맹세뿐. 그는 어디까지나 수호자로서 자신을 불렀으리라. 

자아는 필요없다.

"기사 시트리, 소환에 응해 찾아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계약에 의해, 군주님을 위해 던전을 수호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고개를 숙인 자신에게 저벅, 절대자가 한 걸음 다가온다.

"시트리인가."

심장이 터져나갈 것만 같다.

"영웅이 되었군."

그는 지금도.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아.'

그의 한마디만으로 피가 뜨겁게 타오른다.

자신을 이끌어 줄, 이상을 보여 줄 절대적인 존재가.

다시금 자신을 찾아주었다.

이번에는 후회하지 않도록. 시트리는 다짐하며 그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군주님, 명령을 내려주세요."

"명령이라."

그가 여유로운 태도로 턱을 어루만지고는 대답했다.

"점심 식사는 어디 없는가."

***

"맛있당."

나는 시트리가 가져온 샌드위치를 우적이며 상태창을 터치했다. 어떻게 지하 창고에 있던 통조림으로 순식간에 요리를 해 오더라.

"죄송해요. 군주님께 어울리지 않는 조촐한 음식이라…."

"마침 점심때도 지나서 배가 고팠거든. 요리 어디서 배웠어?"

"아, 혼자 오래 지내다 보니 체득했습니다만… 입맛에 맞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위대한 분께 실례했습니다."

"맛만 있는데 뭘. 그보다 위대한 분이니 뭐니 아까부터 계속 올려 치니까 오글거려서 체하겠다, 야. 말 편하게 해."

가볍게 던진 말이었건만 시트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아뇨. 20년 만에 존안을 뵈었음에도 군주님의 품격은 그대로이신걸요. 말투도 위엄있으시고, 손짓 하나에도 기품이 넘치세요."

"에이, 내가 어딜 봐서. 얘들도 별생각 없던데."

내가 멍때리고 있는 마멋들을 가리키니 시트리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미물들의 무례는 대신 사과드리겠어요. 저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군주님의 강대한 마력을 느끼지 못하지요. 소인은 군주님을 다시 뵌 순간 확신했어요. 저희를 이끌어 주실 위대한 분이 틀림없노라고."

롤플레잉치곤 유난이 심하다.

'혹시 스킬에 뭐가 있었던가?'

▶ 지휘 계열 스킬

[카리스마] Lv.10

: 당신은 최강의 던전을 지어 정점에 도달했던 존재입니다. 그에 걸맞은 말투와 행동을 상시로 보이게 됩니다.

: 지휘 성공 확률 50% 상승

'카리스마, 이거구나.'

내가 말이나 행동을 가볍게 해도 부하들에게는 저절로 무게감 잡는 것처럼 보인단 소리다.

괜히 속 빈 강정이 되기는 싫은데. 끄는 방법은 없는지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됐어. 내가 옛날처럼 마왕인 것도 아니고, 지금은 군주라는 호칭도 과분한 최하급 던전 주인일 뿐이잖아. 말투는 풀어도 돼."

"으음… 그쪽이 편하시다면야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쭈뼛거리며 꾸벅 고개를 숙이는 시트리.

이렇게 보니 좀 신기하긴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시트리는 평범한 2성 기물 중 하나였다.

몇 살 안 된 어린 서큐버스였고, 스크립트에 이름이 나오는 캐릭터라 기억하고 있었다.

기습 이벤트를 막다 보면 대사를 몇 마디 쳐 주곤 했던 것 같은데.

전생의 기억을 최근에 떠올려서 그런가. 몇십 년 전 한참 전 일인데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꼬마 서큐버스가 20년이 지나서 완연한 성체가 되었다고 하니 기분이 묘했다. 서큐버스라는 종족이 원래 성숙하게 태어나서 젊은 시절이 길다고는 하지만.

분위기도 아예 달라져서 얼핏 보면 서큐버스인지 알기 힘들다. 꼭 제국의 품격 높은 기사님 같다.

'아니지. 기사가 뭐야, 영웅님이지.'

시트리는 무려 5성이다, 5성!

앞으로 던전에 어지간한 침입자가 와도 그녀 혼자서 다 쫓아내 줄 수 있을 터였다.

'20년 동안 별이 세 개나 더 붙었다는 건 고생깨나 했나 보네.'

나도 이 세상에 환생해서 참 빡세게 굴렀지만, 시트리도 같은 시간 사연이 많았다는 뜻이겠지.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시트리."

"네, 군주님."

"그동안 고생했어."

내 말에 시트리가 잠깐 숨이 멎은 듯 얼어붙었다. 흠, 생각해 보면 이제 5성 선생님인데 경솔하게 말실수했나.

하지만 기우였던 모양이다. 시트리가 내 앞에 절도 있게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숙였다.

"소인이 태어나 천지보다 넓고 심해보다 깊은 경지를 목도한 것이 있다면 바로 군주님의 끝을 알 수 없는 은혜일 것입니다. 평생의 충성을 맹세하겠나이다."

흠.

서큐버스들이 말투가 원래 이런가, 아니면 얘가 어디서 사극을 많이 보고 왔나.

매번 이런 반응이면 내가 부끄러워서 못 버티겠는데.

[도감]

5 / 107

No. 24 미믹 ☆

No. 45 유령마 ☆

No. 48 마멋 ☆

No. 77 슬라임 ☆

No. 85 유령지네 ☆

No. 101 기사 시트리 ☆☆★★★

도감에도 멋들어지게 추가됐고.

소환을 계속 해나가다 보면 도감은 자연히 채워진다. 픽업 소환처럼 시기를 놓치면 안 되는 기물도 있기도 하지만.

전에는 서비스 종료로 아깝게 컴플리트를 놓쳤으니 이번에는 꽉 채워봐야지.

어라, 그러고 보니 원래 도감은 번호가 99까지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107번까지 있다.

'시트리는 원래 따로 도감에 기록되지 않는 일반 서큐버스였지. 그런 식으로 추가된 건가?'

100번대 넘버링이 주로 그런 영웅이 아닐까 싶었다. 스크롤을 내려보니 이름 일부는 알 수 있었다.

[도감]

No. 100 ■■ ■■ ■■

No. 101 기사 시트리 ☆☆★★★

No. 102 신제 ■■■

No. 103 ■■■■■■■■■■

No. 104 ■■■ ■제 ■■■

No. 105 ■■■ 마스터 ■■■■

No. 106 신살■ ■■■■■■

No. 107 마■ ■■■ ■■■

글자가 깨져서 잘 보이진 않았다.

―쿠르릉!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팔짱을 끼고 천장을 바라봤다.

"참 문제네. 던전에 층간소음이 말이나 되나."

죽자 사자 평생 모은 돈으로 모처럼 새집에 입주한 첫날, 윗집에서 어린이 축구단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난다면?

이거 사람 미쳐 버린다.

"어디 보자."

상태창을 여니 정보가 표시됐다.

: 튜토리얼 퀘스트 [소환]을 완료했습니다! (3/10)

: 튜토리얼 퀘스트 [침입자 대응]이 진행 중입니다. (4/10)

: 보상 : 혼돈석 20개

· 침입자 : 니클라스 제국병 정찰대

· 인원 : 10명 / 10명

· 평기사 헤라 Lv. 11

체력 16/17

상태 경계

· 일반병 지프 Lv. 6

 …

던전 1층에 침입자가 있었다. 그들이 부산대는 소리가 내가 있는 3층까지 외벽을 타고 전해진 것이었다.

하긴 이 던전은 아파트처럼 철근 콘크리트를 쓰고 층을 구분한 게 아니라 화강암 동굴을 파서 만든 일체형 구조이니 진동이 전 층으로 퍼질 수밖에 없다.

보수공사가 필요하겠네. 그건 나중에 생각한다 치고, 그보다.

"침입자가 제국병이라고?"

이것 참. 제국에서 탈주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어디서 나타난 악연인지. 나로서는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주제도 모르고 군주님의 침소를 침략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네요. 명령만 내려 주세요! 소인이 당장 토벌하고 돌아오겠어요."

시트리는 싸울 의욕이 가득했다. 하지만 말이지.

"어우, 야. 던전은 전 구역 내 집이야. 안에서 누구 죽어서 흉흉해져 봐, 밤에 어떻게 자냐. 사고 매물이면 집값도 떨어져. 나중에 부동산이 말도 안 되게 후려친다니까."

"예? 어… 부동산이요?"

"토벌은 안 돼, 절대 안 돼."

내 요구에 시트리가 살짝 당황하며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음… 그럼 토벌이 아니라 포박이나 격퇴하는 쪽으로 할까요?"

"그래. 포로로 잡아봐야 먹여 살리기도 귀찮으니까 쫓아내 버리자."

침입자에게 승리하는 퀘스트 달성 조건은 세 가지, 토벌, 포박, 격퇴다. 쓰러트리거나, 포로로 잡거나, 쫓아내면 된다.

'무엇보다 보상이 눈에 띄네.'

혼돈석, 이건 인게임에서 핵심 재화였던 아이템이다. 마계 죽음의 화산 심부에서만 캘 수 있다는 희귀한 자원이다. 거창한 이름인데, 그냥 돌이라고 부르면 된다.

'가챠 티켓은 물론이고 각종 아이템을 살 수 있어. 무엇보다 시설을 짓고 레벨을 올리는 데에는 필수지.'

혼돈석을 손에 넣으면 혹시 상태창에 상점 같은 게 나오진 않을까? 꽤나 기대가 된다.

나는 스킬창을 열어 [건축 계열]에서 [설계]를 터치했다.

마력으로 그려진 1층의 지도가 홀로그램처럼 눈앞에 나타난다. 기억 속에 있는 게임의 인터페이스와 같았기에 사용은 익숙했다.

"격퇴가 목표면 이 작전으로 가자."

"어떤 작전이신지요?"

"다시는 얼씬거릴 엄두도 못 내게 겁을 잔뜩 주는 게 최고겠지. 어디, 이건 빼고, 새로 넣고."

내 손끝에서 펜도 없이 마력의 선이 그어지며 새로운 설계도가 그려진다.

"와아, 명화가 따로 없네요."

벽과 벽을 꼼꼼하게 이으며 촘촘히 그려 나간다. 설계도에 틀린 부분이 없는지 한 번 더 체크했다.

"유령의 집, 완성."

나는 [배치]를 터치했다.

: 완성도가 높습니다! 1층의 미궁이 [시설] [유령의 집]으로 분류됩니다.

: 미니게임 [호러 하우스]를 시작합니다!

: 침입자의 [공포] 수치가 충분해지면 격퇴에 성공합니다!

"미궁에서 만나자, 병사들."

5화. 층간소음 (2)

제국 황실, 율리안 2황녀의 궁.

"이 보고서는 무엇이냐? 숫자가 잘못된 게 아니냐? 기사단의 유지비가 몇 주 만에 두 배나 늘어나다니!"

율리안이 신경질을 내며 비서관을 나무랐다. 그가 어깨를 움츠리며 변명했다.

"그게… 훈련에 들어가는 장비 유지보수비가 예상보다 상당합니다."

"새 장비를 매수하면 될 게 아니야!"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기사들이 기존 장비가 아니면 쓰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기존 장비라면 이안 소환사가 소환한 무기와 방어구 말이더냐?"

"예. 알고 보니 동급의 품질이나 조형의 장비를 만들 수 있는 장인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장비를 바꾸자니 기사단의 전력이 급감했고…."

"이안 소환사의 장비가 그렇게 특별했단 말이야?"

율리안이 보고서를 내던지고는 혀를 찼다.

그녀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인 소환사가 궁 재정에 미치는 기여도는 상당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황실은 늙어서 국정 능력이 없어진 황제를 대신해 자식들이 각자의 궁을 운영하며 신하국에 정치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율리안이 운영하는 '승리궁'도 그중 하나였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하나는 무엇보다도 경제, 돈이었다. 황실 운영에서 가장 많은 지출이 발생하는 곳은 국방비였다.

국경의 외국, 야만족, 끝도 없이 증식하는 마물, 지금은 휴전 중이지만 한때 강대한 위협이었던 마족까지.

기사단과 방위병의 적절한 운영은 필수였다.

그런데 그 기사단의 운영비가 당장 몇 할이나 뛰었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게 고작 한 명의 소환사가 퇴직했다는 이유 때문이라니.

"다른 소환사 수배는 어떻게 되었느냐."

"그게, 소환사가 희귀하기도 하고, 이안 소환사만큼 생산력이…."

비서관이 말끝을 흐렸다. 결론은 그의 퇴직을 받아들인 건 크나큰 실수였다.

'어쩐지 보내기 싫더니만.'

율리안은 그때도 다른 신하들이 보채지 않았다면 그의 퇴직을 윤허하지 않았을 터였다.

평소 그가 우수하다고는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집중력이 낮아 보여 사고를 치지 말라는 의미로 자주 혼을 냈을 뿐이었다.

그의 이름이 아인이라는 사실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일만 잘 하면 얼마든지 제대로 불러줄 용의도 있었다.

"이안 소환사가 어디로 갔다고 했지?"

"남서부로 향하는 마차를 탔다고 증언이 있었습니다."

"남서부."

제국은 넓다. 대륙 인간계 영토의 4할을 차지하는 대국이다. 당장에라도 그를 복직시키고 싶었지만 그 증언만으로는 도무지 찾아낼 수 없을 터였다.

애초에 남서부라면 20년 전만 해도 죽음의 땅으로 불렸던 위험한 장소였다. 율리안이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라 그녀도 잘은 몰랐다. 지금은 어느 정도 개척이 되어서 마물만 조금 나오는 땅이라고 했다.

"전하, 니클라스 2황자가 찾아왔습니다."

고민할 거리도 많거늘, 귀찮았지만 다른 형제의 방문은 분명 정치적인 안건일 테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특히 니클라스는 개간 사업으로 제국의 영토를 넓히고 있는 유능한 인재였다.

"들라 해라."

알현실을 찾아온 건장한 청년, 율리안과 같은 황금색 머리칼을 가진 니클라스가 여유만만한 미소로 율리안에게 인사했다.

"근심 가득한 얼굴이로군, 누님."

"무슨 용건이냐, 니클라스."

"하하, 용건이 없으면 형제를 찾아오지도 못하나. 잠깐 지나가던 길에 승리궁이 보여서 누님 생각에 들렀지."

니클라스가 능글거리며 그녀의 옆에 섰다.

"잠깐 기사단을 보고 왔어. 여전히 늠름하더군. 전부터 승리궁의 전속 기사단은 강인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잖아."

"물론이다. 그들의 주군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기사단장은 안 보이던데, 무슨 일 있어?"

"남의 궁 사정에 그리 관심 보이지 말아라."

기사단장. 율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아인 소환사가 소환했던 신비로운 존재였다. 뭐라더라, 영웅의 영혼이 잠드는 장소인 카발라에서 불러왔다고 했던가. 그만큼 우수한 능력으로 기사단을 이끌어 주고 있었다.

문제는 아인이 퇴직한 소식을 듣고는 그도 무기한 파업에 들어가 버렸다는 점이었다. 기사도 정신이 투철한 인물이라 퇴직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기사단장이 그렇게 아인 소환사를 특별히 여기고 있었다고는. 율리안도 미처 모르고 있던 부분이었다.

이도 저도 아인, 그가 없어져서 터진 문제였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개간 중인 사업지에서 본격적으로 공사에 착수하는데 누님의 협력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내 기사단도 실력은 자신 있지만 말이야,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서 보험을 들어놓고 싶거든."

"허, 네가 저자세로 나올 정도면 상당한 모양이구나. 리치의 무덤이라도 파헤칠 생각이니?"

"비슷해. 남서부, 죽음의 숲을 캐려고 하거든."

남서부, 그 말에 율리안의 귀가 번쩍 뜨였다.

"분명 네가 황실령으로 선포하고 개간하던 그 땅 말이지."

"맞아. 늙은이들은 무슨 미친 짓이냐며 만류했지만 말이야. 벌써 3년째 잘 굴러가고 있어. 영지에 주민도 많아졌지. 최흉이니 뭐니 어차피 옛날 일인데 다들 겁에 질려서 눈앞의 기회를 못 잡는다니까. 우린 아니잖아?"

니클라스가 그 영지에 눈독을 들인 건 율리안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 지역의 나무는 고목이라 고가에 수출할 수 있지. 길을 뚫으면 왕국과 새 무역로도 생기고, 깨끗한 땅이 백만 평은 생겨. 어때, 맛있겠지."

율리안은 그의 제안에 망설이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시종들이 그녀의 시클라스를 가져와 입혀주었다.

"언제 출발하니?"

"역시 누님이야, 얘기가 잘 통하는데. 당장이라도 갈 수 있어. 우리 제국에는 위대한 발,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으니까."

그의 말대로 황실에 설치된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하면 남서부의 백작령까지는 당장에라도 이동할 수 있을 터였다. 그곳에서 죽음의 숲 지역까지는 이틀도 걸리지 않는다.

직접 이동하면 한 달은 족히 걸릴 거리를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제국 마도공학의 결정체다. 쓸 때마다 드는 비용이 무지막지하기에 어지간한 귀족 이상이 아니면 쓸 엄두를 낼 수 없긴 하다.

"내일 정오에 출발하지. 준비를 마쳐 두렴."

"기대하겠어."

니클라스가 손가락을 튕기고는 알현실을 나섰다.

그동안 율리안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남서부. 마침 한 달이면 그 정도가 이동할 한계야.'

그곳부터 포위망을 펼쳐 수색하면 분명 그를 다시 잡아 올 수 있으리라.

아인 소환사.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율리안은 발걸음을 옮겼다.

***

"오케이, 굿. 미궁 완성."

새롭게 설계한 지하 1층의 구조는 만족스러웠다. 제작자인 나도 떨어지면 한 번에 출구를 못 찾을 자신이 있었다.

"니클라스는 제국 2황자였지. 이 외지의 던전에는 무슨 일일까."

이유야 어찌 됐든 남의 집에 맘대로 들어와서 층간소음을 유발하는 건 상도가 아니지.

다시는 못 찾아오게 확실한 충격을 줘서 쫓아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럼 잠깐 움직여 볼까. 마침 철제 갑옷도 소환했었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갑옷을 챙겨입었다. 시트리가 내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어디로 향하시는지요? 시키실 일이 있다면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던전에 놀이시설을 많이 지어놨거든, 기억해?"

"아, 들어는 봤어요. 소녀는 이용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만."

"그중에 유령의 집 같은 것도 있었어. 레이스랑 스켈레톤 잔뜩 집어넣어서 담력 시험도 하고 그랬지. 영웅들에게 반응 좋았을걸?"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유령의…?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력 훈련시설 이야기는 들어봤던 것 같네요. 극악무도하다는 평가였는데…."

나는 중얼거리는 시트리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산책 다녀오자. 재밌겠다."

***

―파악!

선봉에 선 여기사가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기세 좋게 유령지네를 쓰러트리고는 부하들에게 침착하게 명령을 내린다.

"다음, 전진해라. 함정을 주시해라."

"예."

병사들은 진형을 갖추며 흘끔 여기사를 돌아보았다.

"역시 헤라 대장님이군."

"저래 봬도 일단 기사니까. 지금이야 정찰대에서 우리 같은 일반병이나 지휘하는 신세지만."

"쉿, 입조심해. 들릴라."

병사들이 걸음을 옮기며 소곤소곤 사담을 나누었다. 헤라가 그들을 나무랐다.

"앞에, 시끄럽다. 던전에서는 불의의 사태에 주의하라 하지 않았나."

경계하라는 명령에도 병사들은 긴장이 풀려 있었다.

"돈 될 것도 없는 겨우 최하급 던전 아닙니까. 주인도 없는 곳입니다."

"이 던전도 벌써 몇 번이나 탐색해 본 곳이죠. 길을 잃을 리도 없습니다."

"저희도 모험가 잔뼈는 굵은 놈들입니다. 아까 같은 하급 마물은 눈 감고도 처리합니다요."

모험가 출신인 일반병들이다. 기사도와는 거리가 먼 거친 자들이었다.

헤라는 나름 니클라스 2황자 기사단 소속이다. 한때는 기대받는 유망주였으나 공금을 횡령하다가 걸려서 강등당하고 출셋길이 막혔다.

니클라스 2황자는 젊은 나이에도 제국 각지에서 사업을 많이 벌이는 야망가였다. 헤라는 그의 개간지 중 하나로 좌천되어 정찰대나 끌고 다니는 입장이 됐다.

본격적으로 숲을 개간할 생각인지 곧 2황자가 도착해 사업지를 둘러본다 했다. 높으신 분의 안전을 위해 몇 번이고 돌아봤던 숲과 던전을 또 정찰하는 게 오늘 임무였다.

"쯧."

물론 주인도 없는 허접한 던전이다. 과거 최흉의 던전이라 불렸던 이곳은 중급 마물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해 있었다.

하지만 던전은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늘 경계해야 하는 곳이거늘.

그녀는 차라리 사고가 한 번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허접한 던전에서야 큰일은 없을 테고, 그럼 이 얼빠진 놈들도 정신을 차리겠지.

나름 실력에는 자신 있는 그녀였으니 활약을 보여 주면 존경받을 기회도 될 것이었다.

"대장님, 어째 여기가 지도랑 다른데요."

선행하던 병사 한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지도도 볼 줄 모르나. 뒤로 빠져라."

헤라가 앞으로 나섰다. 몇 번이고 탐색했던 구역이니 헛갈릴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음?"

헤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지도상 없어야 할 위치에 나타난 대리석 벽면을 손으로 만져 확인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지금껏 마멋들이 파놓은 굴뿐이었던 최하급 던전에 웬 깔끔한 대리석 벽면이?

그런 의문을 가진 순간.

―쿠구궁!!

그녀의 등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며 불빛이 사라졌다. 드르륵, 드르륵, 벽이 살아 움직이는 듯 사방에서 잡음이 공감각을 마비시킨다.

던전의 구조가 변했다. 헤라가 직감했다.

"대장!"

"전원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소음이 잦아들고, 고요가 깔린 후.

팟, 병사들이 횃불을 켰다.

"이건…."

헤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눈앞에 있었던 대리석 벽면이 사방에 정갈하게 깔려있었다. 지나왔던 길은 막혔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지나왔던 길은 아니다.

"대장, 어떻게 해야…."

병사들 사이에 혼란이 더 퍼지기 전에 헤라는 횃불을 들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최하급 던전이다. 침착하게 출구를 찾아 나가면 그만이다."

정찰병 대장 헤라는 날카롭게 눈을 부라리며 어둠 속으로 길을 찾아 나갔다.

6화. 층간소음 (3)

미궁을 조금씩 전진하니 어둠에도 눈이 익는다.

던전에 갇힌 경험이 처음도 아니다. 갑자기 변화한 환경에서도 베테랑답게 함정에 주의하며 주변을 살핀다. 동시에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다.

"대장님, 갈림길인데 고민 좀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향을 아십니까?"

"단서가 없는 현재로서는 어딜 고르나 똑같다. 그러느니 한쪽만 탐색해서 혼란을 줄이는 편이 낫다."

"그런가요?"

"벽을 놓치지 않으면 미궁에서는 언젠가 탈출하는 법이다."

물론 그 전에 강한 마물에게 죽지 않았을 때 이야기지만. 던전은 언제 어디서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다.

그래도 겨우 1층밖에 없는 최하급 던전이니 이 방법도 별 문제는 없겠지, 막연하게 판단한 헤라였다.

"내 판단에 토 달 시간 있으면 후방이나 더 경계해라. 언제까지 기본적인 것만…"

가르쳐야 하냐고 타박하려고 본대를 향해 고개를 돌린 헤라는 순간 숨통을 옥죄어오는 압박감에 말을 마치지 못했다.

본능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경고했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살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고차원의, 고등생물이 뿜어내는 위압감.

"대장님?"

병사들은 그 아우라를 느낄 수준조차 되지 않았다. 이상을 느낀 건 헤라 한 명이었다.

"전원 경계도를 올려라. 예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다."

"심각한 상황이라면…"

"던전 브레이크."

병사 중 누군가가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헤라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었다.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병사가 한 명 있다는 점이 위안이 되었다.

"던전 브레이크라니, 던전 코어가 폭주하면서 갑자기 대형 던전으로 진화하는 현상 말이야?"

"에이, 여긴 던전군주도 없었고 소멸할 일만 남은 최하급이었잖아."

"브레이크는 어떤 던전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헤라가 말했다. 그녀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원인 불명의 이유로 던전이 폭주해서 도시를 집어삼킨 일은 간혹 발생했었다.

"백 년에 대륙에서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천재지변 아닙니까. 설마 그게 일어나겠어요."

"갑자기 구조와 지형이 바뀐 건 명백히 이상해. 그리고 벌써 20년 전에 예외가 있지 않았나. 주의해라."

헤라가 더욱 주의하며 길을 나아갔다. 아직은 괜찮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미궁으로 지형이 바뀌었지만 오른쪽 벽에서 떨어진 적도 없고 여태 마물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시간은 걸리더라도 분명 입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고, 탈출은 가능할 터였다.

"또 갈림길입니다."

병사 한 명이 보고했다. 헤라도 두 갈래로 나뉜 대리석 벽 구조를 목격했다.

…어쩐지 낯이 익었다.

지형이 변경되고 나서는 직각 반듯한 통로가 반복되었기 때문에 방향감각은 점점 마비되어만 갔다.

'기분 나쁘군.'

병사 한 명이 갈림길을 살피더니 검집으로 대리석을 툭툭 내리쳤다. 그 바람에 모서리에 금이 가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거기, 얌전히 있어라."

"예."

하여간 부산스러운 놈들이다. 헤라는 초조함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리 걸어도 통로만 이어진다.

답답함이 이어지고, 어쩐지 숨이 더욱 막혀오는 느낌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한.

―후후.

그러고 보면 어디선가 여자의 웃음소리 같은 게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환청인가?

점점 지쳐가는 그들의 앞에 다음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건."

헤라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갈림길 모서리에 간 금, 바닥에 떨어진 대리석 부스러기. 아까 전 한 병사가 벽면을 살피며 냈던 흔적이었다.

"어쩐지 이런 것 같더라니. 여태 같은 장소를 빙빙 돌던 게 아닙니까!"

한 병사가 불만을 터트렸다.

"진작 왼쪽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미궁은 정교하게 만들면 벽을 짚고 가도 탈출할 수 없다고요."

그렇게 던전에 대해 잘 알면 네가 대장을 하고 있겠지. 뭐라 쏘아붙이려던 헤라는 극한 상황에서 분열이 더 위험하다고 알고 있었기에 일단 그를 진정시켰다.

"왼쪽으로 가지. 지나간 길에 표식을 남기겠다."

표식용 염료로 갈림길에 커다랗게 빨간 엑스자를 남긴다. 본대는 왼쪽 통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약 30분.

"이런 썅."

잠시 후 그들 앞에 펼쳐진 광경에 병사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다시 마주친 갈림길에는 커다란 엑스 표시가 되어있고, 그 아래에 문구가 추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출구는 ↓

질 나쁜 장난 같은 새빨간 글자.

마치 흐르는 피처럼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모습에 헤라는 소름이 돋았다.

마침내 그녀도 확신했다. 여기는 더 이상 자신들이 손쉽게 공략하던 최하급 던전이 아니라고.

"아래… 라니."

"저, 저건가."

병사들도 식은땀을 흘리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공포에 범벅이 됐다.

메시지 아래에는 누가 봐도 수상한 궤짝 하나 놓여 있었다. 절대 출구처럼 생기진 않았다. 

"망할, 어떤 놈이 장난질이야!"

성질 급한 병사 한 명이 궤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헤라가 즉시 위기감을 느꼈다.

"함정이다, 건드리지 마라!"

하지만 병사는 말을 듣지 않고 궤짝을 만졌다. 그 순간 와그작! 상자가 열리고 날카로운 이빨이 튀어나와 그의 손을 힘차게 깨물었다.

"으윽!"

"말했거늘, 멍청이가!"

궤짝으로 위장해 사람을 노리는 마물, 미믹이다. 지능이 낮은 하급 마물이기에 먼저 열지만 않으면 위험하지 않건만 보기 좋게 걸려버렸다.

헤라가 급히 검을 휘둘러 미믹의 뚜껑을 내리쳤다. 병사들도 합세해 몇 번 검을 휘두르고 나서야 미믹은 나뭇조각이 되어 잠잠해졌다.

"허억, 허억, 대체…"

"적습이다. 주의를…"

"후훗."

전투의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들려온 여자의 웃음소리. 병사들의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갈림길의 오른쪽이었다. 병사들이 시선을 집중했다.

어둠 속에서 호박석 같은 눈동자가 빛난다.

또각, 하는 발소리와 함께 정체 모를 인영이 유혹하듯 스르륵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실루엣은 기사, 아니. 여자, 같기도 했다.

"마물인가?!"

"지긋지긋한 놈들!"

"감히 우리를 놀려!"

병사들이 분노에 차 그녀를 향해 뛰었다.

이성을 완전히 잃었다. 마치 지금까지 천천히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홀리다가 한 번에 터져버린 것처럼.

"이봐, 멈춰라!"

헤라의 명령은 그들의 귓가에 닿지 않았다. 집단최면에 걸린 듯 통로로 우르르 몰려 나가는 병사들을 보고, 그녀는 지금까지 그들이 농락당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매혹 마법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매혹에 걸려 있었다. 정신력이 강한 자신을 제외하면, 병사들은 이성적인 사고를 점점 잃어가던 상태였던 것이다.

헤라는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 검을 역수로 쥐고 만반의 태세를 잡았다. 그 순간.

"우와아아악!!"

비명과 함께 기세 좋게 돌진하던 병사들이 방향을 틀어 어둠 속에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검이고 방패고 내던지고 무작정 달린다. 혼절하려는 자도 있었다.

헤라는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헉."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오니 어둠 속에서 모습이 마침내 드러났다.

불타는 듯한 적발의 머리칼 틈새로 삐져나온 한쪽의 뿔이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명확하게 알려준다.

서큐버스. 뿜어내는 살기와 마력의 수준이 평범한 마물이 아니다. 저 개체 하나가 나타나기만 해도 하룻밤 사이에 도시 하나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재해 그 자체다.

'…맙소사.'

평범한 서큐버스를 마주쳤다면 생명력이나 마찬가지인 마력을 뺏길 걱정을 해야 한다.

심지어 눈앞의 존재는 격이 달랐다. 그 몸을 감싸고 있는 백은의 갑주. 어지간한 고위기사의 플레이트 아머보다 튼튼하고 품격이 넘친다.

…괴물이다.

헤라는 저 서큐버스와 검으로 붙는다 해도 1초 만에 합에서 밀려 심장을 찔릴 자신이 있었다.

다리가 떨리고 오금이 저린다.

본능이 경고한다. 당장 그녀의 앞에서 몸을 피하라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서큐버스와 함께 어둠 속에서 거대한 얼굴이 드러난다.

"허, 허억…!"

드래곤이다.

무시무시한 드래곤이 당장에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 눈앞에서 커다란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전설급 마물이다. 국가의 군대가 통째로 와서 전쟁을 벌여도 상대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신수다.

그 드래곤을 애완동물인 양 다루며, 옆구리에 끼고 사악한 웃음을 흘리는 저 서큐버스는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더 이상 확률은 중요하지 않았다.

던전브레이크는 지금 여기에 발생했다. 믿을 수 없어도 그것이 진실이었다.

"히이이익!!"

여기사는 현명한 결단을 내렸다. 일단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다. 즉시 고개를 돌리고 꽁무니를 뺀다. 등을 돌리고 종아리가 터져라 뛴다.

도중, 자신을 뒤따라오는 한 명의 병사가 눈에 띄었다.

"뛰어, 목숨이 아까우면 당장 도망쳐라!"

"아, 도망. 물론 그래야죠. 네네."

어째서인지 그 병사는 목숨이 걸린 이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경보를 하고 있었다.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투구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칼이 기분 좋게 위아래로 흔들린다.

…잠깐.

우리 병사 중에 검은 머리가 있었던가…?

***

"허억, 허억."

얼마를 정신없이 달렸을까, 산소가 부족해서 더는 뛸 수 없을 때 즈음 헤라는 걸음을 멈추었다.

복도를 반대로 뛰었던 것 같기도 했고, 계단을 올라왔던 기억도 희미하게 있었다. 어쨌든 운 좋게 미궁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출구는 ↓'에서 화살표는 미믹을 가리킨 게 아니라 뒤쪽으로 가라는 의미였다. 이제야 헤라는 이해가 됐다. 나중에야 정답을 깨닫고 허망해지는 악질 장난이었다.

"대, 대장, 드래, 드래곤이."

병사들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했다. 어느 하나 녹초가 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모두 바닥에 널브러져 숨을 골랐다.

"허억, 누, 누가 죽었나."

"모, 모르겠습니다. 뒤, 뒤를 못 봐서."

"며, 몇 명이지. 하나, 둘…"

간신히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숫자를 셌다.

"…열, 열하나. 이럴 수가, 기적입니다. 전원 살아 나왔습니다."

"잠깐, 열하나라니?"

헤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던전에 들어온 건 열 명이다."

"예? 그럴 리가요. 대장님 빼고 열 명이겠죠. 아까부터 심심해서 맨 뒤에서 계속 셌는데 저희는 계속 열한 명이었습니다."

"대체 무슨 소리냐. 이젠 숫자도 못 세는…"

헤라는 눈대중으로 병사들을 훑다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많다.

분명 한 명이 더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수준 낮은 놈들 사이에서 처음에 던전 브레이크라는 단어를 언급한 녀석이 있었다.

갈림길에서 굳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겼던 녀석도.

"전원 얼굴을 보여라!"

헤라의 명령에 병사들이 의아해하며 천천히 투구를 벗었다. 사내들의 땀내가 훅 풍겼다.

그들 중 한 명만이 투구를 벗지 않는다. 헤라는 이상을 직감했다.

"헤라 대장."

그가 말을 꺼낸다.

무게감 있는 목소리. 분명 던전 브레이크를 언급했던 자다.

그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쿠구궁! 던전의 벽면이 이동하며 공간이 갈라졌다. 순식간에 다른 병사들과 격리되어 그와 헤라, 둘만이 남았다.

헤라는 그가 누군지 단숨에 깨달았다.

군주.

여태 주인 없이 방치되었던 이 던전의 새 주인인지, 그간 자신들을 놀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잘못 걸렸다. 자신은 곧 죽는다.

삽시간에 이해했다. 공포를 느낄 틈도 없었다.

그가 투구를 벗었다.

보기 드문 새카만 흑발의 건장한 남성이었다. 미형의 얼굴은 나이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종족조차. 첫 인상은 던전군주답게 당연히 마족이라 생각했으나 뿔은 없고, 인간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품격.

그에게서는 그저 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자체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과 힘이 있었다.

헤라는 자신과 차원 자체가 다른 존재를 태어나 처음 목도하며, 이것이 생의 마지막이라 여기고 모든 걸 포기했다.

"지켜야 할 주의 사항을 알려 주마."

그가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며 차분하게 말했다.

"던전에서는 정숙하라."

헤라는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 이어진 그의 질문.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수많은 의문을 가지며, 헤라는 혼절했다.

"어떠한가. 짐의 던전은 즐거웠는가?"

7화. 나 혼자 농사 (1)

: 침입자들의 [공포] 수치가 80을 돌파하였습니다!

: 침입자들이 [도주]를 선택했습니다!

: 침입자를 격퇴하였습니다!

: 튜토리얼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4/10)

: 혼돈석이 20개 지급됩니다.

"야호."

나는 상태창 아래로 와글와글 떨어진 혼돈석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보상보다도 확실하게 침입자를 쫓아냈다는 사실이 기뻤다. 원만하게 층간소음을 해결했다. 이제 낮잠이 방해받는 일은 없겠지.

"역시 군주님이셔요. 던전을 자유자재로 다루시며 적을 공포로 압도하시는 모습에 소인, 감명받았어요."

시트리가 온갖 미사어구를 붙이며 예를 표했다. 항상 리액션이 과하네.

"가까이서 지켜보니 재밌는 애들 같던데 뭘.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닐 테고. 말단은 늘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직접 가신다고 하셨을 땐 혹시 격퇴가 아니라 토벌하시나 하였는데, 큰 그림이 있으셨군요. 저들에게 직접 군주님의 위용을 보여 주실 생각이 아니셨는지요?"

"응?"

그냥 쓸 인력이 없어서 직접 뛴 것뿐이었다.

저들이 또 쳐들어오면 귀찮아진다. 확실하게 겁을 줘서 내쫓을 작전을 짰다. 던전 브레이크로 오해하게 하면 두 번 다시 안 찾아오겠지.

던전 브레이크가 뭔지 모르면 설명해 주려고 잠입했는데 다행히 잘 알고 있더라.

물론 드래곤도 가짜였다.

나는 접견실 벽에 장식된 커다란 드래곤 석상을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 보면 아무리 던전 브레이크라도 1층에 드래곤이 있는 건 말이 안 되지. 저만한 덩치가 머리만 덩그러니 있는 것도 이상하잖아.

혹시나 던전을 토벌당할 걱정도 없다. 걔들이 상부에 보고를 올려도 최하급 던전에서 드래곤을 봤다는 말은 안 믿을 테고, 이런 변방의 작은 던전은 방치되기 마련이다.

제국 공무원이었던 나다. 얼마나 행정이 구멍 나 있는지는 잘 안다.

"마멋, 마멋."

마멋들이 아장아장 걸어와서는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칭찬을 바라고 있구나. 비밀 굴을 통해 몰래 미믹을 가져다 놓은 건 마멋들이었다.

"그래, 너희 마멋들도 잘했어."

"마멋, 마멋!"

"마멋 도움이 된 마멋?"

마멋들이 신이 나서는 이리저리 뿅뿅 뛰어다녔다.

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해준 건.

"시트리, 활약 좋았어. 매혹 덕분에 쟤들이 쉽게 속아 넘어갔어."

"아, 또 이름을…."

시트리가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군주님의 바다와도 같은 넓은 아량에 탄복하였습니다. 군주님의 위대한 이름을 던전에 새겨 만천하에 위용을 알리면 어떨까 하는데요."

"응? 이름?"

"군주님의 성함은 고대인의 존귀한 언어로 쓰였지요. 지금껏 이를 읽을 수 있는 이는 없었지요. 실은 소인이 그간 조금씩 연구하고 있었습니다만. 무례가 안 된다면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어, 별로 좋은 예감이 안 드는데.

시트리가 종이에 삐뚤빼뚤한 선을 그어 내게 보여 주었다.

무려 한글이었다. 방향이 엇나간 충성심이 가짜 중세인에게 한글을 독학하게 만들었다.

"분명 예전 던전에 적힌 군주님의 성함은 이렇게 썼었지요. 발음이 '나스닥출발'…."

"이런 젠장."

나는 즉시 상태창을 열어 유료 재화인 혼돈석을 사용했다.

: 혼돈석 10개로 플레이어명을 변경합니다.

: 정말요? 다른 것부터 사야 하지 않을까요?

"기본 이름이든 뭐든 좋으니 당장 바꿔 주십쇼."

: 플레이어명 변경이 완료되었습니다!

[플레이어명] 아인

[직   업] 던전군주

[보유 던전] 7i 13 (최하급)

▶ 상세 프로필을 본다

"내 이름은 아인이야."

"아인 군주님, 받들어 모시겠어요."

평생 나스닥출발 군주님이라고 불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다음부터 닉네임은 신중하게 지어야지, 진짜.

***

침입자도 쫓아내서 당장 걱정도 없어졌겠다, 우선 집을 좀 치우기로 했다.

"집 청소하고 가구 배치 새로 하자. 너희도 도와."

"마멋."

"마멋마멋."

마멋들이 뒤뚱거리며 여기저기 굴에서 몰려나왔다. 각자 행주와 빗자루를 들고는 일사불란하게 몰려다닌다.

나도 머리에 두건을 둘러매고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 스킬이 있어도 마력은 함부로 낭비해선 안 되는 자원이기도 하고, 이런 건 직접 해야 마음이 편하다.

지하 3층, 거실부터 쭉 돌며 시트리와 함께 하나씩 치워나갔다.

"여기까지는 내 개인 구역으로 써야겠다. 거실 위치는 정해져 있으니 부엌, 식당, 침실, 서재. 운동실이랑 게임방도 만들까."

빈 방이 많아서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겠다 싶었다.

"구석구석 쌓인 먼지는 직접 닦아야 마음이 편하다니까."

쓱싹쓱싹, 앞으로 내가 지낼 집이니 성의껏 깔끔하게 광을 낸다.

그러기를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째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그냥 타협하고 마법으로 치울까. 어디, 청소 스킬을 3층 전체에 쓰면."

: 필요 마력 20 / 잔여 마력 40

"어라, 던전에 마력이 이것밖에 없어?"

"던전의 마력은 핵인 '던전코어'에 저장된답니다. 그간 군주님께서 안 계셨으니 마력이 소모되고만 있었겠지요."

"크기가 쪼그라든 것도 마력을 아끼려고 그랬던 거구나. 조금만 지났으면 사라져 버렸겠네."

내 던전은 그야말로 붕괴 직전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겨우 청소 정도에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마력은 중요한 자원이지. 마법을 포함한 스킬을 쓰는 데는 물론이고, 영웅 성장에도 필요해."

[마력 생산량] 0.1 / 시간

[쾌적함] 1 / 100

마력은 방치 보상이다. 게임을 꺼놓고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접속하면 레벨에 비례해 일정 치 쌓이는 방식이었다.

"즉, 잘 먹고 푹 자면 많이 쌓인단 소린데."

특히 내 '쾌적함'에 따라 많이 쌓인다. 던전 레벨이 높다는 건 곧 살기 좋다는 뜻도 된다.

―꼬르륵.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구나."

위장이 우렁차게 울리는 걸 보니 때가 됐다 싶었는데 뜬금없이 시트리가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응?"

되짚어 보니 내 배가 아니라 시트리에게서 난 소리였다.

얘도 배고팠구나.

"뭐 있나 한 번 볼까. 시트리, 창고 어디 있었어?"

"아, 이쪽이에요."

시트리와 안내를 받아 창고로 향한다.

"여기도 엄청 크네."

일반적인 집의 창고보단 부둣가의 컨테이너 적재를 위한 장소에 가까웠다. 안에는 무도회용 가면부터 볼링핀까지 별 잡동사니가 다 쌓여있었다.

그중 한쪽 벽은 커다란 장식문으로 막혀 있었다.

[재보 창고]

: 중급 던전으로 승격하면 개방됩니다.

"이런 것도 있네. 혹시 안에 내가 그동안 모아놨던 아이템이 다 있으려나."

"그렇다고 생각되네요. 제 검, 기억나시나요?"

시트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을 들어 보였다. 손잡이에 인장이 새겨진 고풍스러운 대검이다.

"군주님께서 제게 하사하셨던 비보랍니다. 이 인장의 문양은 대장장이 신의 수작 30선 중 하나라는 뜻이지요. 영웅의 상징이랍니다."

기쁜 얼굴로 자랑하는 시트리.

음, 기억엔 없지만 예전에 남는 템을 장비해 줬을지도 모르겠다.

'수작이면 조금 좋은 3성 장비 정도일 텐데 되게 아끼는구나.'

"아, 혹시 실례가 되었을까요? 혹시 저따위가 군주님의 비보를 쓰는 게 불쾌하시다면 지금이라도 반납하겠습니다!"

"아냐아냐, 계속 써. 오래 썼으니 손에도 익었을 테고."

"아…! 감사합니다!"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이는 시트리. 참 감사할 일도 많다 싶었다. 매사 긍정적이면 좋지. 나도 기운을 나눠 받는 기분이다.

재보 창고는 나중에 열어보기로 하고 마저 선반을 뒤적거려봤다.

"식료품은 거의 없구나. 그나마 마법으로 보존된 통조림 몇 개가 전부네."

말이 통조림이지 소금에 푹 절인 고깃덩이와 기름을 철통에 처박은 전투식량에 가까웠다. 이걸로 잘도 샌드위치를 만들었었네.

"마멋들, 너희는 여태 뭘 먹고 지냈어?"

"마멋 흙 먹는 마멋."

"으악, 진짜?"

"꽤 맛있는 마멋."

"군주님도 먹는 마멋?"

"아무리 그래도 흙은 좀… 시트리, 너는?"

내 질문에 시트리가 손을 턱에 붙이고 생각에 빠졌다.

"빵이면 운이 좋고, 여의치 않으면 마물도 잡아먹었던 것 같아요."

이거 원, 다들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가 없었던 건가.

제국에서 가지고 나온 돈도 거의 없으니 식료품을 사러 다녀올 수도 없고.

"어차피 이 동네 음식도 맛이야 뻔하겠지."

마력이 없으면 스킬을 쓸 수 없고, 던전 관리에는 크나큰 제약이 생긴다. 딸기 화분 같은 장식물을 배치해서 얻는 음식으로는 당연하지만 소모되는 마력이 더 크다. 엔트로피 보존 법칙이다.

현대의 기억을 되찾은 내 혓바닥은 이 폭력적으로 맛없는 가짜 중세의 음식을 있는 힘껏 거부하고 있었다.

"짜장면 먹고 싶네."

이삿날에 이삿짐 옮기고 새참 먹을 때 됐으면 당연히 그 맛이 들어오는 게 순리인데 말이야.

"짜장면이 무엇인가요?"

"흠… 면 요리는 먹어봤지."

"면… 밀가루나 옥수수를 유령 지네처럼 길게 만든 그거 말인가요."

"아냐, 그렇게 무서운 비주얼은 아냐. 짜장면은… 달콤하지."

"달콤…."

"고소하기도 하고."

"고소…."

"풍미도 있고, 불맛이 확 올라온다고 할까."

"불맛이라, 불에도 맛이 있군요. 군주님께는 늘 새로운 걸 배우네요."

"거 설명하기 어렵네. 하여튼 맛있어."

"오…."

내 얘기를 듣고는 시트리도 군침이 도는지 입가를 닦았다. 나는 쩝쩝 입맛을 다시다가 상태창을 열었다.

"안 되겠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파야지."

어차피 식재료 문제는 언젠가 해결해야 한다. 평생 발효도 안 된 딱딱한 빵에 소금 친 고기만 먹고 살 수는 없었다.

"지금 던전은 1층이 방어 구역이지."

"네. 이번에 미궁으로 개조하셨지요."

"3층은 접견실과 내 개인실이고. 그럼 2층은 어떻게 되어있지?"

지도를 확인한다. 안은 뻥 뚫려있었다.

"공실이네?"

깨끗한 동굴이다. 침입자를 방비하기 위한 함정 같은 것도 전무했다.

"여기는 마멋들 집인 마멋."

"친구들도 여기서 자는 마멋."

"마멋 동굴은 북쪽이고, 남쪽 여기. 확장해서 지상이랑 구멍을 뚫을 수 있어 보여."

내가 한 구역을 가리켰다. 마침 근처 호수에서 이어진 강 지반과 가까워 고도가 낮은 부분이 있었다.

"군주님, 묘책이 떠오르셨나 보네요."

"응. 2층에 천장을 뚫자. 햇볕 잘 드는 땅을 확보할 거야. 채광 마법으로 밭을 키울 일조량을 챙길 순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그 다음은요?"

[시설 구매]에서 [생산 시설]을 터치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설계해야 하는 건설 스킬과 다르게, 이미 완성된 구조물을 던전에 배치하는 기능이다.

: 혼돈석으로 구매 가능한 생산 시설의 목록입니다.

[기본 밭] 10 혼돈석

[기본 논] 10 혼돈석

[직물 공장] 20 혼돈석

방향도 정해졌겠다, 그날은 청소를 적당히 마치고 통조림 식사를 한 뒤 잠에 들었다.

다음 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2층 천장을 뚫는 공사를 시작했다.

마멋들은 굴 파기의 달인이었다. 겨우 백 마리서 두 시간 만에 시원하게 반경 200미터, 높이 30미터의 구멍을 뚫어냈다.

상태창에서 밭 구매를 터치하니 좌르륵, 흙바닥이 정갈하게 갈리며 열을 맞춘다.

"군주님, 이건…."

여태 내가 뭘 하는지 의문을 품던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뿅, 뿅!

갈라진 틈으로 조그마한 새싹이 사랑스러운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오?!"

그 모습을 보고 시트리와 마멋들이 깜짝 놀라며 흠칫했다.

"밭… 밭이네요! 던전에서 이런 싱싱한 싹을 볼 수 있을 줄이야. 깜짝 놀랐어요."

시트리가 신기해하며 막 발아한 새싹 옆 흙을 부드럽게 다듬었다.

"밭이 뭐인 마멋?"

"풀인 마멋."

"이끼가 아닌 마멋?"

"처음 보는 마멋."

나는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꼈다.

"잘 봐, 지금은 조그맣지만 조금만 지나면 훌륭한 식재료가 나올 테니까."

"밥 나오는 마멋?"

"향기가 좋은 풀인 마멋."

시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과연, 식량을 직접 조달하려는 군주님의 큰 그림이셨군요. 장기적으로는 기물 유지 비용도 줄어들어 자원이 풍부해지겠어요. 역시 군주님이시군요."

거기까진 생각 안 했는데.

난 짜장면이 먹고 싶어.

안 되면 일단 파전이라도. 파랑 밀가루만 나오면 대충 해 먹을 수 있으니까.

"장기적이라… 마력이 그렇게 필요하려나?"

"물론 어마어마하게 필요해지겠지요. 군주님께서는 이전에 휘하에 두셨던 영웅들을 다시 불러 모으실 생각이시잖아요?"

"으응?"

그야 뭐 도감을 다 채우면 좋겠지…?

하지만 그러려면 가챠 티켓을 얼마나 모아야 할지 감도 안 온다. 하더라도 한참 먼 미래의 이야기일 텐데.

"군주님의 명성이 다시 대륙 전역에 울려 퍼질 그날이 기대되네요. 그 첫걸음으로 소인, 본 밭을 군주님의 침소라 여기고 외적으로부터 철저히 수호하겠어요. 짜장… 아니, 던전을 위해서!"

눈동자를 생글생글 반짝이는 시트리였다.

짜장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뭐, 무리해서 천장을 터서 외부와 연결했으니 보호할 필요야 있겠지. 혹시 멧돼지가 뛰어들지도 모를 일이고.

"좋아, 본격적으로 농사 한번 해 볼까."

: 미니게임 [디스이즈팜]을 시작합니다!

: 성과에 따라 희귀한 작물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짜장면은 몰라도 파전은 먹고 만다.

나는 기세 좋게 상태창을 터치했다.

8화. 나 혼자 농사 (2)

나는 밭 앞에 서서 마멋들을 돌아보았다.

"좋아, 마멋들. 앞으로 너희 저녁밥이 될 소중한 작물이야. 키우는 방법을 알려줄 테니 잘 관리해야 해."

"알겠는 마멋!"

"맡겨 주는 마멋!"

마멋들이 가슴을 쭉 펴고 어디서 찾아왔는지 밀짚모자를 썼다. 준비만반이다.

상태창을 터치했다.

[밭갈기] [씨뿌리기] [물주기] [수확하기]

 남은 행동 3 / 3

▶ 밭의 상태를 본다. [밭1] [밭2]

미니게임, [디스이즈팜]이 시작됐다. 밭의 정보와 행동 횟수, 행동 목록이 표시됐다.

던전에는 이런 식으로 새 시설을 설치할 때마다 소소한 미니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자원을 모을 컨텐츠가 끝도 없이 있었으니 시간 보내기에는 최고였었지.

각 행동에는 1씩 마력이 소모된다. 그러니 남는 마멋들을 활용하면?

공짜로 작물을 키울 수 있다 이 말이지.

"내가 먼저 밭을 갈고 씨를 뿌려 놨어. 너희가 해 줄 건 이렇게."

내가 [물주기]를 터치하니 공중에 마법진이 그려지고는 조그마한 구름 덩이가 나타났다. 밭에 쏴아아, 비가 내린다.

"밭이 말라 갈라지기 전에 물을 줘야 해. 대신 흥건해지면 안 돼. 작물이 썩어버리거든. 풀에 붙은 벌레도 잡고. 알았지?"

"물, 벌레. 기억한 마멋. 할 수 있는 마멋."

"맛있는 거 먹는 마멋."

의욕이 넘치는 마멋들을 보니 든든했다.

"소인도 전력을 다하겠어요. 짜장면을 먹을… 군주님께서 드실 수 있도록!"

시트리도 의욕이 넘쳤다.

일해 줄 용역도 충분하겠다, 나는 3층의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청소하다 말았었지."

여전히 거실과 침실을 빼면 거주 구역은 휑하고 군데군데 지저분했다.

일단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치우고 걸레질을 했는데도 뭔가가 부족했다.

"알겠다, 조도가 약해."

지하이다 보니 태양광이 부족하다. 복도에 1미터 간격으로 횃불이 걸려있지만. 형광등이 아니다 보니 환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방법이 없을까."

상태창을 열어서 이것저것 뒤적이다 보니 빨간 점이 찍힌 알람이 하나 있었다.

: 일일 무료 소환권이 남아 있습니다.

어라, 일일 무료 소환?

그러고 보니 소셜게임에는 하루에 한 번, 단챠를 무료로 뽑게 해 주는 게 국룰이다. 매일 접속을 유도하게 하는 판매 전략이다.

나도 여태 아침에 일어나 하는 첫 소환은 어째 마력이 덜 든다 했더니 그런 이유였구나.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 줄 알았지 뭐야.

"무료면 또 거절할 이유가 없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1회 소환을 터치했다.

화려한 마법진이 그려지고 외곽에 소환의 술식이 적혀나간다.

"자, 오늘은 뭐가 올까!"

양손을 비비며 기다린다. 무료 소환은 단 한 번의 기회이지만 완전히 랜덤. 운이 정말 좋다면 5성 영웅을 뽑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번쩍, 빛이 일고. 띠링!

행성은… 하나.

"음음, 그래그래. 평소의 가챠구나."

: ☆ 태양슬라임을 소환했습니다.

"오, 그래도 나름 기물… 태양슬라임?"

―뾰옹!

샛노란 탱탱볼이 번쩍거리며 소환진에서 튀어나왔다. 아이고, 내 눈. 온몸으로 존재감을 뿜어내며 통통 나를 향해 튀어 오른다.

"뀽뀽."

눈도 입도 없는데 어디서 울음소리를 내는 건지. 양손으로 받아 드니 말랑하면서도 푹신한 베개 같은 촉감이 느껴졌다.

: 도감에 '태양슬라임'을 기록합니다!

[ 7 / 107 ]

어쨌든 없는 녀석이 나왔으니 좋지 뭐. 소환되자 마자 나한테 안기는 걸 보면 붙임성도 꽤 있는 게 귀엽기도 하고. 쳐다볼 때마다 시력이 0.1씩 줄어드는 기분인 게 문제지만.

"잠깐, 이렇게 밝은 빛을 낼 수 있으면…"

조명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마침 거주 구역의 복도는 창문이 하나도 없어서 어두컴컴하길래 조금 불만이던 참이었다.

"야, 태양아."

"뀽?"

"너 분열 스킬 같은 거 있지 않았어?"

내가 얘기하니 태양이가 몸을 푸르르 떨고는 손바닥 위에서 뾱 두 개로 갈라졌다. 밝기도 아까보다 살짝 떨어졌다.

"이거다."

나는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설계]로 복도마다 받침을 만들어서 [배치]. 태양이에게 100개로 분열을 부탁하니 딱 적당히 형광등 정도의 밝기가 되었다. 받침에 하나씩 올려놓으니 완벽한 전등이 되었다.

"오늘부터 네 자리는 여기야."

"뀽?!"

태양이가 내 얼굴에 점액을 뱉었다. 항의 표현인 모양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같은 자리에 계속 있으라고 하면 질리겠지.

입술에 붙은 태양이의 점액을 떼어내다가 살짝 입에 들어왔는데 은근 맛이 괜찮았다. 꼭 청량한 탄산수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녀석을 먹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태양아, 던전에서는 누구나 일을 해야 해."

"뀽…."

"여기가 아니면 침입자 막으러 가야 하는데? 거기는 엄청 위험한걸? 네가 버틸 수 있겠어?"

"뀽뀽."

"에이, 나도 블랙 기업에서 일했었는데 하루 종일 일만 시키진 않지. 밤에는 퇴근시켜 줄 거야. 밥도 맛있는 풀로 줄게."

"뀽!"

"그래그래, 퇴근할 땐 불 끄고 나가고."

"뀽뀽."

극적으로 노동자와의 협상을 체결했다. 태양이는 먹성 좋은 초식 슬라임답게 '맛있는 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제 좀 안이 화사하네. 지상 3층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화창해졌다. 

남은 시간은 마저 밭을 관리하고, 밤에는 TV를 만지작거리며 뒹굴거렸다. 블랙기업에서 일하다 와서 그런가, 워라밸이 잡힌 생활에도 감사하게 된다.

TV에는 별다른 컨텐츠는 없었지만 마법사 게시판을 구경할 수 있었다. 

마법사 게시판은 대륙의 마법사라면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커뮤니티다.

[마법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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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위계 파이어볼트 VS 아이스볼트

작성자) 방구석경비원

지력, 마력량 같음

뭐가 더 셈?

└닥 아볼

└보통 빙결계가 전환효율이 좋습니다

└전 세계 1억 화염계 마법사 무시발언인가요

└이건 솔직히 아볼이죠

└이분 주기적으로 논쟁떡밥 올리는데 밴좀요

└(먹이금지콘)

└화염계 마법사가 1억명이나 돼요?

└님이 믿는 게 진실이에요

└둘 다 쓰세요 그냥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다. 보고 있으면 시간이 잘 간다.

이 세상에서 딱 하나 현대보다 대단한 점이 있다면 바로 마법과 스킬― 주문이다. 주문은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주며 삶의 질을 굉장히 높여준다.

그만큼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뭐.

소환 전공이기는 해도 평생 몸담은 분야라 좋아하기도 하고.

남은 시간은 게시판을 눈팅하며 보냈다.

***

다음 날 아침, 스트레칭을 하며 밭으로 나가보니 마멋들이 밭을 둘러싸고 강강술래를 돌고 있었다.

"수확의 춤인 마멋."

"축제인 마멋."

나도 내 키보다 높게 자란 작물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이게 하루 만에 이렇게 크나?"

: 첫 재배 보너스!

: 농작물이 10배 속도로 자라났습니다!

"이런 게 있었구나, 운이 좋은걸. 하지만 아무리 열 배라도 엄청 빨리 자라는 편이네."

"던전에는 어디든 마력이 깃들어있으니 그 영향이 아닐까요? 훤칠하니 색도 좋고, 어떤 맛일까 궁금해지네요!"

시트리가 작물의 줄기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좋아, 어디 뭐가 열렸나 볼까."

: 사탕수수를 수확했습니다!

: 바닐라를 수확했습니다!

: 코카열매를 수확했습니다!

…응?

잠깐만, 내 매콤한 파는?

바삭바삭한 부침가루가 될 밀가루는?

다 어디 가고 웬 향신료만 잔뜩 나왔지?

"이럴 수가."

그러고 보니 처음에 뭘 심을지 안 정했구나.

땅에 가장 적합한 종묘가 알아서 랜덤으로 들어갔나. 알아서 원하는 작물이 자라길 바란 내가 너무 안일했다.

"군주님, 이거 보는 마멋."

"열매가 잔뜩인 마멋."

"이건 줄기가 달콤달콤인 마멋."

마멋들이 캐온 열매와 사탕수수를 바구니에 한가득 담아서는 내게 자랑했다.

"그래, 수고했어. 배는 못 채워도 사탕가게는 차릴 수 있겠다 야."

"처음 보는 작물들이네요. 이걸로 군주님께서 말씀하신 음식들을 만들 수 있나요?"

진지하게 열매들을 살펴보는 시트리.

"나도 그러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아니야. 이 줄기는 말려서 빻으면 설탕이 나오고, 이 검은 알갱이는 풍미를 더해주는 향신료거든. 빨간 열매는 위험하니까 그냥 먹지 마. 콜라 만들 때도 한참 삶았다고 옛날에 봤…"

잠깐.

언젠가 너튜브에서 본 상식 채널의 지식이 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코카 열매, 콜라의 재료.

사탕수수 덕에 설탕이 대량으로 생겼잖아. 이건 순서만 반대이다 뿐이지 이 가짜 중세의 끔찍한 식문화를 단번에 바꿔줄 혁명적인 원재료일지도 몰랐다.

"탄산수."

태양이가 만들 수 있다. 마침 내 던전 1층에는 슬라임들이 잔뜩 있다. 슬라임은 번식력도 좋아서 풀만 먹여도 금방 개체가 늘어난다.

"이거다."

"새로운 계책이 떠오르셨나 보네요."

"응. 세트 메뉴를 만들 수 있겠어."

한식에서 양식으로. 당초 계획과는 굉장히 달라졌지만 현대의 음식을 재현할 수 있다는데 아무렴 어떠랴. 나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남은 바닐라 잎을 슬라임들에게 먹이로 제공해서 분열시킨 후 탄산을 생성, 근처 강가에서 퍼온 깨끗한 물과 섞으니 깔끔한 탄산수가 만들어졌다.

코카 잎을 푹 삶아 우려낸다. 설탕은 고온에서 녹여 카라멜로 만들고 있는 대로 들이부었다.

마지막으로 바닐라 향을 첨가해 완성한다.

"허."

기적의 검은 물, 콜라의 탄생이었다.

물론 배합 비율이 틀려 첫 잔은 씁쓸하고 시큼하기만 한 기묘한 물건이 나왔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니 비슷한 맛이 나기 시작했다. 딸기 화분에서 딴 열매로 살짝 과즙을 내 섞으니 더욱 그럴싸해졌다.

[시원한 콜라]

: 소비 아이템 (포션)

: 효과 5분간 쾌적함이 1 증가합니다.

마법의 위력이 1% 증가합니다.

: 제작자 군주 아인

"아이템이 됐네?"

던전산 재료로만 제작한 덕분일까, 콜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포션 판정을 받게 됐다.

덕분에 마침내 내 앞에는 어엿한 세트 메뉴가 놓이게 됐다.

"메인 메뉴는 샌드위치, 사이드로 바닐라 맛 사탕수수 칩, 그리고."

음료수로는 콜라.

어느 패스트푸드 점에 가도 남부럽지 않은 구성이다.

"허억… 마, 맛있겠다…."

세트 메뉴를 눈앞에 두니 시트리가 정신을 못 차리고 머리를 처박기 직전이었다. 입가에서 칠칠치 못하게 침이 질질 새어 나왔다.

"이 검은 물은… 포션인가요? 달콤한 향기가 나네요."

"일단 마셔 봐. 샌드위치 한 입 먹고, 한 모금 쭈욱."

나는 빵을 베어 물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딱딱하고 짭쪼름한 중세식 샌드위치다.

하지만 거기에 콜라 한 모금이 들어가면?

꼴깍, 꼴깍―

"캬아, 이거지!"

지금 여기는 점심시간 압구정 한복판의 서○웨이나 다름 없었다. 내 반응을 본 시트리가 반신반의하며 콜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으음…?!"

눈을 번뜩 뜨는 시트리. 여태 깨작거리기만 하던 그녀의 입이 진미를 맛본 듯 빠르게 샌드위치를 씹어 넘기기 시작했다.

"어때?"

"맛있어요! 설마 세상에 이런 액체가 있을 줄이야… 겨우 음료로 음식의 풍미조차 바꿔버리는 일이 가능하다니…!"

"봐, 내가 맛있을 거라고 했지."

"마멋, 마멋."

"마멋들도 먹고 싶은 마멋."

테이블 아래에서 침을 줄줄 흘리는 마멋들. 나는 작은 컵에 조금씩 콜라를 담아 한 잔씩 나누어주었다.

꼴깍꼴깍, 조그만 손으로 컵을 받아 들고 잘도 받아 마시는 마멋들.

"맛…?!"

"마마맛!"

탄산의 충격으로 입을 쩍 벌리기도 잠시, 청아함이 머리를 사르르 지나가니 방긋방긋 미소를 짓는다.

"맛있는 마멋!"

"밭에서 나온 물이 맞는 마멋?"

"마멋 이런 달콤한 물은 처음 먹어 본 마멋."

"군주님은 마술사인 마멋."

마멋들이 신나서는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향해 컵을 우르르 내밀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마멋, 마멋."

"밭을 열심히 가꿔야 콜라가 더 나오겠지?"

"그런 마멋."

"어제 열심히 했으니까 상이야. 내일도 밭을 잘 돌보면 또 줄게."

콜라를 한 잔씩 따라 주니 귀를 쫑긋거리며 다들 신이 났다. 콜라를 바닥에 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녀석도 있었다.

"군주님, 저, 저도…."

시트리가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물론 시트리도 얼마든지 더 줄게. 만드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아."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후후, 저로서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물건을 만들어내셨는지 상상도 안 되는데. 역시 군주님이셔요. 경지에 도달하신 분은 평소에 보시는 경치가 다르군요."

평소의 시트리답게 반응이 과하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이해하기로 했다. 그간 중세 음식은 맛없어서 도저히 손이 안 갔거든.

: 쾌적함이 증가했습니다! (2/100)

: 마력 생산량이 증가했습니다! (0.2 / 시간)

: 튜토리얼 퀘스트 [시설 관리]를 완료했습니다! (5/10)

: 훌륭합니다! 그대로만 계속하세요!

"좋아. 농사를 계속하다 보면 밭의 레벨도 오를 거고, 경작할 수 있는 작물도 늘어날 거야. 빨리 파랑 밀이 나오면 좋겠네."

"파…는 모르겠습니다만, 밀 종묘가 필요하시단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마침 근처에 인간들의 영지가 있었지요."

철컥, 시트리가 절도있게 검집을 정비했다.

"본래 이 영지는 군주님의 것. 주군에게 세금을 상납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불응하는 자에게는 군주님의 명성을 보여 드릴―"

"맞아, 꽤 큰 마을이 있었지. 거기서 구매하면 되겠다. 시트리, 너 천재다."

너무 상태창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그 간단한 생각을 못 했네.

"구매… 말씀이신가요?"

"응. 너도 같이 가자. 혹시 모르니 호위로?"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 시찰이란 말씀이시군요. 명을 받들겠어요."

시트리가 의욕이 과하긴 하지만 늘 협조적이니 굉장히 든든하다.

"아, 하지만 돈이 없구나."

당연하지만 제국에서 공무원이랍시고 국민연금과 4대보험을 챙겨주진 않았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까짓거 다 쓰면 또 갈아넣으면 그만 아니냐? 하는 게 상식인 시대다.

"앞으로 내 집에서 살려면 돈이 있긴 있어야 할 텐데."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 본다.

상단부에 떠 있는 자원 표시줄에 그려진 아이콘은 크게 세 개다.

[혼돈석] (0개)

 귀중한 자원입니다. 뽑기티켓 구매, 미니게임 시설 설치 및 강화, 상점 구매에 사용됩니다.

[마력] (22)

 생명의 근원입니다. 마법 및 스킬의 사용, 기물의 유지, 레벨업에 사용됩니다.

[금화] (0개)

 대륙의 공용 화폐입니다. 시설의 유지, 시설 재료의 구매, 개발에 사용됩니다.

밭의 새 작물 묘종을 사거나 나중에 던전을 수리하려 해도 금화가 필요해진다. 건물에 살면 관리비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지. 적어도 토지세는 안 내잖아. 이 정도는 벌어야겠지.

"소환한 장비를 팔기에는… 잡템이라도 다 쓸 데가 있고."

도중, 내 시선이 기포가 뽀글 올라오는 콜라로 향했다.

"이거, 얼마에 팔 수 있을까?"

9화. 콜라

제국의 남서부 극한의 땅.

지금은 '황실령'이라 불리는 그 땅은 꽤나 복잡한 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초강국 제국이 옴짝달싹 못 했던 적이 있었다. 

불과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것이 오직 단 하나의 던전과 그 군주에 의해 생긴 일이라 기록된 것을 떠올리면, 제국은 지금도 그렇게 치욕스러울 수가 없었다.

던전은 대륙 각지에서 무작위로 발생하는 재해 같은 현상이다. 폭우나 폭풍과 다를 바가 없다.

규모가 작으면 문제가 없다. 소나기나 잔바람은 눈에 띄지도 않고,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지도 않은 채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던전은 심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던전의 규모는 '최하급'부터 '최상급'까지 분류된다.

평소 대부분의 상급 이상의 던전이 마계에서 발생하고 그 군주들이 마족인 점을 생각하면, 최상급을 뛰어넘는 '재앙급' 던전이 인간계 한복판에 나타난 건 멸망의 신호나 다름없었다.

"제국기사단도 그때 전력이 많이 죽었다고 하더군. 뭐, 20년이나 된 일이고 워낙 전쟁통이라 제대로 된 기록은 안 남았지만. 폐하도 그때 심력도 체력도 너무 많이 쓰셔서 단숨에 늙어 버리셨고."

그래서 후계자가 급해 우리를 낳았나 보지. 니클라스 2황자가 농담조로 껄껄댔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율리안 2황녀는 영 마차의 좌석이 불편해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던전에는 무엇보다 '영웅'이 그렇게나 많았다고 해."

"영웅?"

"강해지고 강해져서 생물의 한계를 넘은 이들이라 하지. 특별한 재능, '기프트'에 눈을 뜬 강자들 말이야."

율리안도 알고는 있었다. 소드마스터 칭호 같은 걸 받는 이들이다.

"신화에 따르면 영웅의 혼은 세계에 선택받아 죽어서도 '카발라'라는 그들의 낙원에 간다고 해."

"동화책에서 본 것 같네."

"그 던전의 군주는 카발라의 영웅도 소환해 던전의 하수인으로 썼다고 해." 

"살아있는 영웅 뿐만 아니라 과거의 영웅도 불러 신하로 부렸다고? 대체 얼마나 강인한 존재였길래."

"믿거나 말거나 그중에는 현자도 있었다더군."

"말도 안 돼. 현자는 7위계 마법사잖아. 그런 영웅을 겨우 던전을 지키는 마물 취급했다니."

마법에 조예가 있는 율리안은 그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녀도 마법에 한해서는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어오며 자랐다. 그런 그녀가 작년에 도달했던 경지가 간신히 4위계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업적이다. 재능이 없다면 평생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니까.

"마물이 아니라 영웅이라니까."

"그런데 너는 지금 그런 최흉의 던전이 있었던 숲을 개간하겠다는 거니?"

"희한하게도 그 재앙급 던전의 군주가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췄거든. 흔적도 없이, 그야말로 증발해 버렸지. 그대로 계속 있었다면 정말 대륙이 쪼개졌을 텐데 말이야."

율리안도 역사책에서 본 이야기였다.

"안전해진 지 오래됐어. 벌써 몇 번이나 정찰을 돌아서 검증을 마쳤어. 여기 보고서도 있고."

율리안은 니클라스가 넘긴 서류를 팔락 넘기며 내용을 확인했다.

…확실히 문제는 없어 보였다. 니클라스는 이미 개간지 근처에 작은 영지도 만들어 제국민을 이주시켜 놓은 지 3년이 넘었다.

"누님, 돈만 나오면 선조의 무덤도 파야 하는 세상이야. 누님도 기사들 갑옷 한 번 갈아주려면 금화가 짐마차 단위로 깨지잖아."

맞는 말이었다. 나 원, 갑옷이나 창이나 대체 왜 그렇게 비싼지.

금화 한 개면 4인 가족이 한 달을 살 수 있다.

기사단장의 플레이트아머는 금화 백 개를 줘야 겨우 양질의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아인 소환사.'

황실 기사단이나 일반병은 비교적 저렴한 장비를 쓰기도 하고, 이쪽 비용은 국방비에서 지출된다. 반면 율리안의 직속 승리궁 기사단 이백여 명의 엘리트가 쓰는 최고급 장비는 승리궁 예산에서 지출된다.

율리안의 주머니는 지금까지 돈이 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승리궁을 운영하기 시작한 5년 전부터 내내 아인 한 명이 소환한 장비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때문에 그녀는 여태 국방비에 대한 명확한 감이 없었다. 무능한 비서관도, 승리궁의 그 누구도.

황실의 그 고위직을 차지할 인재들이 단 한 명도 경제 감각이 그토록 없는 게 말이나 되느냐 따지고 싶었지만 의외로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내다 버린 건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간 어느 누구도 아인 소환사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은 알고도 모른 척했든지.

정치 싸움이었겠지. 그놈의 밥그릇이 뭐라고.

율리안은 전부터 이놈의 얇은 귀가 문제였다.

'아인은 남서부로 향했다고 했으니까 니클라스 황실령을 떠돌고 있을지도 몰라.'

율리안은 어떻게든 그를 찾아서 복직시켜야만 했다. 당장 내일부터 꿀꿀이죽을 먹지 않으려면.

그렇게 텔레포트 후에도 한참을 달려 먼 외지에 도착한 둘이었지만.

"그게 무슨 말인가?"

니클라스는 경비대장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순찰대의 보고입니다, 신빙성은 없습니다만."

"당연히 없겠지. 던전브레이크는 백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천재지변이다. 물론 20년 전의 사고가 있긴 했지만, 그게 여기서 나타났을 리가 있겠나?"

"하지만 순찰을 다녀온 병사들의 증언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안에서 드래곤을 봤다느니…"

"던전브레이크일 리가 없지."

율리안이 한심하다는 듯 경비대장을 나무랐다.

"그게 언제라고?"

"일주일 전입니다, 저하."

"브레이크가 발생하면 그 즉시 재해급 마물이 던전을 뛰쳐나온다. 이 정도 땅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어야 정상이야."

"그렇습니까…"

니클라스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작전을 수행한 순찰대장의 증언을 들어보겠다. 기사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곧 두 황족 앞에 여기사가 한 명, 겁에 잔뜩 질린 채로 들어왔다.

율리안은 그녀의 시선이 자신들이 아닌 그 너머를 향하고 있다고 알 수 있었다.

"대답하거라. 그 던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바짝 말라 갈라진 입술로 힘겹게, 여기사 헤라가 대답했다.

"…황실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 되는 자로서, 저하들께 감히 말씀 올리건대."

며칠이나 잠을 못 자 퀭한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 던전에는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악신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

"오, 생각보다 큰 동네구나."

나는 던전을 나서 숲 밖으로 나왔다. 던전에는 내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어 3층에서 바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숲에서 두 시간쯤 거리에는 잘 가꿔진 영지가 있었는데, 이것도 저것도 최근에 지어진 걸 보면 영지민들도 이주 온 지 얼마 안 됐나 보다.

"근데 나 안 이상해 보여?"

동행한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우스꽝스럽게 생긴 무도회용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모르니 위장용이다.

시트리도 뿔을 숨기기 위해 로브를 깊게 눌러쓰니 교회의 이단심문관 같은 꼴이 됐다. 등에는 콜라를 꽉꽉 눌러 담은 포션병이 잔뜩 담긴 가방을 멨다.

"설마 이상할 리가요. 군주님께서는 어떤 복장을 하셔도 손짓 하나하나에 품격이 넘쳐 흐르셔요. 영지민 시찰에 더없이 어울리는 위장입니다."

"얘는 뭘 해도 전긍정이니 알 수가 없네. 시트리, 넌 이상해 보여." 전긍정 !! 전긍정 !! 

"그럴 수가… 군주님의 품격을 쫓아가지 못해 송구합니다. 앞으로 더 정진하겠어요."

"아이고. 농담이었어, 부탁이니 그러지 마."

지금도 혼자서 사극을 찍고 계시는데 얼마나 더 고풍스러워지시려고.

시장 골목은 활기가 가득 차 있었다. 어느 가게도 손님이 많았는데, 행색이 주로 모험가인 듯싶었다. 길드의 의뢰로 마물을 토벌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방랑자들이다.

물론 던전에도 자주 쳐들어오는 침입자들이고.

"국경이 가까운 외곽지대라 많이 몰렸나 보다."

우리 집에만 안 찾아오면 좋겠네. 외관을 모던하게 꾸미면 던전으로 못 알아보고 지나치지 않을까? 숲 한가운데에 나타난 파티장… 그게 더 어색하겠다. 나중에 생각해 봐야겠다.

시장을 찾은 목적은 일단 콜라 판매, 그리고 그 돈으로 밀 묘묙을 사 돌아가는 것이다. 주점에서 매입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근처에서 가장 사람이 많아 보이는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이게 뭐야. 음료수라고? 술도 아냐? 시꺼먼 게 상한 것처럼 보이는데. 봐, 안에서 기포가 올라오잖아. 벌레 먹은 게 틀림없다고."

대머리에 근육질인 술집 주인은 콜라의 비주얼을 보고 처음엔 역겹다는 반응을 보였다.

"에이, 신선한 물건이에요. 만져 보세요, 시원하잖아요."

소환사라는 직함이지만 나도 어엿한 마법사다. 1위계 빙결마법 정도는 간단히 쓸 수 있다. 콜라는 온도가 생명이지. 시원하게 온도를 유지해 둔 상태였다.

"그리고 그냥 음료수가 아니에요. 특별한 효과가 있거든요."

"특별한 효과? 못 믿겠는데. 내가 장사 경력이 얼만데, 어쭙잖게 허세 부리는 사기꾼들을 얼마나 본 줄 알아?"

그때 시트리가 끼어들어 턱, 주인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가 품속에서 검집을 꺼내며 당장에라도 뽑을 기세를 취했다.

"더는 참을 수가 없군. 평민, 그 이상 무례한 발언은 용서하지 않겠다. 네 앞에 계신 분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

나도 평민인데.

그나마 노예 출신에서 승격한 거고.

"자네는 또 뭔가? 이봐, 같잖은 협박이 먹힐 줄 알았다면 오산…"

도중 주인의 눈길이 한 장소로 향했다. 시트리가 반대편 손에 쥔 검을 향해서였다.

"잠깐, 그 검의 인장은… 서, 설마. 영웅… 이십니까?"

시트리의 검. 그러고 보니 대장장이 신의 수작이니 어쩌니 했었지.

"그렇다. 그리고 이 분은 내 주군 되시는 분이다."

"영웅 되시는 분을 호위로 쓰실 정도라면… 호, 혹시 저명한 연금술사시라든지. 이건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포션입니까?"

술집 주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귀찮은 잡상인을 상대하다가 갑자기 대박 건수를 잡았다는 듯 바로 콜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 한번 마셔 보겠습니다."

꼴깍꼴깍, 콜라를 한 모금 마셔 보는 술집 주인.

"으, 으음…?!"

번뜩, 그가 눈을 크게 뜨고는 혀를 내둘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콜라를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쭉 원샷으로 들이킨다.

탁! 컵을 다시 내려놓았을 때는 이미 깨끗하게 비워진 후였다.

그리고는 눈을 반짝이며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얼마나 있습니까?"

"열 병 정도요?"

"제가 전부 사겠습니다. 한 병에 은화 하나… 아니, 두 개를 드리죠!"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지.

나는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고개를 까딱였다.

"두 개는 너무 짠데. 어디서 이런 거 마셔 봤어요?"

"그, 그렇지요. 연금술사님의 포션이라면 모험가들에게도 잘 팔릴 테고. 그럼 세 개, 어떻습니까."

"다섯 개로 합시다."

"열 병에 은화 오십이라… 으음."

"대신 다음번에도 아저씨에게 가장 먼저 거래하러 오죠. 어때요."

주점 주인이 잠시 고민하고는 쾅, 기운차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좋습니다. 이건 분명 순식간에 팔릴 겁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청량함에 기운이 솟는 달콤함까지. 제가 여기저기 떠돌며 술만 이십 년을 팔았지만 이런 건 처음이군요. 순식간에 동날 게 분명합니다. 장담하지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거래는 깔끔하게 성사됐다.

주점을 나서는 내 동전 주머니에서는 기분 좋게 은화가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가격에 팔았네. 주점 아저씨, 인상 괜찮더라. 비즈니스는 확실하게 할 것 같은 타입이랄까. 떼먹진 않을 것 같아. 시트리, 덕분에 쉽게 풀렸어."

"감축드려요, 군주님. 그런데…"

시트리가 슥, 뒤를 돌아보고는 내게 물었다.

"따라붙는 날파리가 있네요. 어떻게 할까요?"

"날파리? 쫓아 버리면 되잖아."

"격퇴, 명을 받들겠어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응?"

어느새 시트리는 모습을 감춘 후였다.

급한 일이 생겼을까. 나는 기분 좋게 밀을 사러 가기로 했다.

10화. 짜장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