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경마 (4)
"아아악, 도, 도망쳐! 잡아먹힌다!"
"기다려! 같이, 나도 같이 가!"
모험가들이 혼비백산하며 뛰어나갔다. 너도나도 라이트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에게 달라붙어 미궁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진형을 무너트리지 마! 쯧, 이 멍청한 놈들."
모험가 파티의 대장이 혀를 찼다. 던전에 진입한 파티는 셋, 총 열다섯 명이었다.
A급 모험가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무려 제국 2황자의 의뢰에도 길드에서 그들을 모으는 데엔 한참 걸렸다.
A급 파티는 보통 A급 모험가로만 구성될 수 없다. B급, 인맥에 따라 C급도 포함되는 실정이다. 그 사실을 모른 니클라스는 A급 모험가만을 요구해서 수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당연히 파티원들은 모두 초면이었고, 팀워크도 없는 상태였다. 대장이 평소 데리고 다니던 A급 모험가는 둘뿐이었다.
그 두 명만이 곁에 남았다. 나머지는 진즉에 입구를 찾아 도망쳤다.
이 최하급 던전의 미궁 1층에서 이변을 느끼고 겁을 집어먹은 덕분이었다.
'1층이다, 겨우 최하급 던전의 1층이란 말이다.'
물론 던전 입장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결코 최하급 던전에서 보일 현상은 아니었다.
우선 구조. 동굴이 아니다. 세련된 대리석으로 멀끔하게 건축해 놓은 벽면이다.
'최하급 던전이 이렇게 정교한 자동식 미궁으로 이루어져 있다니, 이런 건 한 번도 본 적 없어.'
가장 큰 이변은 그것이었다. 던전에 들어와서 구조를 파악하기도 전에 벽과 바닥이 회전하더니 지형이 변했다.
마치 출구를 찾아보라며 도전장을 내미는 것 같이.
거기서 대부분의 모험가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A급이면 던전에 대한 이해도는 누구보다 높은 베테랑들이다. 던전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는 경험으로 충분히 안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발생했을 때 매뉴얼은 명확하다. 던전에서 즉시 탈출하고 새 대책을 세워 토벌이 아닌 탐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들은 그에 관해 토론을 나눌 새도 없이 습격을 당했다. 어느새 머리 위에서 용암이 쏟아진 것이다.
패닉에 빠진 모험가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잠시, 용암이 슬라임으로 변했다.
'환각 스킬이 분명했어.'
파티에는 상급 치유사도 있었다. 축복 버프를 뚫고 들어올 정도의 환각 디버프라니?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이만한 스킬을 걸어올 마물이 미궁 어딘가에 있다는 의미였다.
세 갈래로 찢어진 파티는 이후 출구를 향한 탐색을 이어나갔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온 끝에 대장의 파티에서도 이탈자가 발생해 버렸다.
"대장, 저희는 괜찮을까요?"
그의 부하가 물었다. 대장도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는 직감했다. 이 안에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여기가 최하급 던전이 아닌 건 확실했다.
"허둥대 봤자 명을 재촉할 뿐이야. 반대로 기회라고 생각해. 다른 놈들이 도망쳤으니 탐사만 마쳐도 보수는 우리가 독점할 수 있어."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내려가도 될까요?"
"여기가 최하급이 아닌 건 확실해. 의뢰는 최하급 던전 토벌이었지. 우리 일은 3층까지야. 거기만 찍고 나가면 보수를 요구할 명분은 생겨. 그다음은 알아서 하라지."
"맞는 말이군요. 보스를 만날 일은 없으니 3층이면 안전하겠어요. 역시 대장입니다."
이젠 마법사도 없기에 파티는 기름을 듬뿍 먹인 횃불을 켜고 앞으로 나아갔다.
도중, '출구는 ↓'라고 붉은 피로 쓰인 듯한 기분 나쁜 문구가 나타났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부하가 어깨를 떨었다.
"대장, 역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심각한 경고 같은데…."
"알겠어, 이건 수수께끼다."
대장이 성큼성큼 나서서는 벽면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 미궁은 수시로 구조가 변해. 지금 돌아가면 분명 들어왔던 입구가 기다리겠지. 하지만 2층으로 가는 길도 미궁의 출구라고 볼 수 있지 않겠나. 화살표 아래의 미믹을 치우면."
대장이 미믹에게 혼란 포션을 사용해 얌전히 만든 후 드르륵, 그것을 밀어내자 아래에 구멍이 나타났다.
"2층 층계다."
대장의 활약에 다른 두 명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역시 대장은 대장이었다. 위기에서도 침착하게 돌파구를 찾아냈다.
저벅, 저벅. 층계참에 투박한 발소리가 울린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세 명의 모험가는 주변을 둘러보고 이곳이 별 볼 일 없는 장소라고 확신했다.
세련된 1층과는 달리 난잡하게 파인 굴이 증거였다.
"하급 마물들의 서식지가 분명하군요."
"내가 뭐랬어, 별 것 아니랬지. 보수는 우리 차지야. 빨리 기록이나 해."
부하가 아티팩트에 던전의 구조를 작성했다.
한창 긴장이 풀어진 채로 그들이 북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여긴 뭐지…?"
모퉁이를 돌아 새 구역으로 나아간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지하라고는 믿기지 않는 탁 트인 전경이 나타났다. 비유하자면 콜로세움. 경기장이다. 정갈한 흙바닥에는 자갈 하나 없다.
그리고.
―쿠웅!
갑작스레 공간을 덮친 살기에 오한이 올라온다.
모험가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벅, 저벅. 그들이 들어왔던 길로 한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침입자들이여, 감사하여라."
전신을 은색 갑주로 두른 기사. 걸음걸이에서는 어딘가 요염함이 흘러나오지만 그 이상으로 박력이 넘친다.
"군주님의 자비 덕에 그대들은 불경을 저지르고도 목숨을 구제받을 기회를 부여받았다."
마물과 수도 없이 싸워본 A급 모험가들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데스나이트… 네임드인가? 최소한 재해급이다.'
그들이 재빠르게 눈짓을 교환했다. 한 명이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가져가려던 때.
"아아아악!"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그의 손이 비틀어지며 찢어진 피부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마물의 손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치 피보라처럼.
마력 흡수. 그것도 그들의 장비와 아티팩트를 뚫고 들어온 걸 보면 주문이나 마법을 뛰어넘는 무언가다.
'설마… 기프트인가?'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에서 영웅과 적대할 정도로 운이 나쁠까. 대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화나게 하지 말아라. 군주님은 자비로우실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대장은 실수를 인정해야만 했다. 1층의 형태가 기묘했을 때 이 던전은 이미 이변이 일어난 상태였다고, 고집을 부리지 말았어야 했다. 진즉 도망친 겁쟁이들이 옳았다.
하지만 그건 결과론이다. 이번이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 운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도 모험가라는 직업이지만.
'아직 기회는 있어.'
즉시 공격하지 않은 걸 보면 탈출할 여지가 있다. 의사가 통하는 마물이다.
"이봐, 우리는 싸울 생각은 없다. 이대로 돌아가게 해 준다면…."
"간이 크군. 군주님의 침소를 침입한 무뢰한을 아무 대가 없이 돌려보내리라 생각하였는가?"
팔 한 짝은 내놓아야 할 분위기다. 대장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으니 마물이 저벅저벅 걸어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가 측면의 문을 열어 안에서 유령마를 몇 마리 꺼냈다.
기세 좋게 안장 위에 올라타는 기사.
"너희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그가 모험가들을 노려본다.
"내기다."
"내기라니?"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을 걸어라. 하나, 나와 경주를 한다. 둘, 어느 말이 가장 빠를지 선택해라. 재물을 다섯 배까지 불리면 풀어주마."
희한한 제안이었다. 다짜고짜 유령마 경주로 내기를 하자는 마물이라니.
하지만 직접 싸워봐야 승산은 없을 터였다. 대장은 그나마 살아 나갈 수 있는 제안이 들어온 사실에 감사했다.
"재물을 내기로 불리면 상처 하나 없이 풀어준다, 틀림없이 그런 의미인가?"
"틀림없다."
"어떻게 믿지?"
"이 유령마 경주는 너희 침입자들에게 내리는 군주님의 자비다. 그 이상 불경을 늘리지 말아라."
마물 기사의 이야기로 보아 그에게는 섬기는 군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 던전에는 군주가 있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적어도 최하급 던전은 절대 아니라는 의미였으니.
"대장, 어쩌죠?"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 없어. 우리가 도망치려고 하면 그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심장을 꿰뚫릴 테지. 내기인지 뭔지를 믿어볼 수밖에."
세 명의 모험가가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동시에 사사삭! 여기저기서 굴을 타고 나타난 수십 마리의 마멋들에 그들이 다시 한번 식겁했다.
"인간인 마멋. 침입자인 마멋."
"말에 타는 마멋? 돈을 거는 마멋?"
"배당률은 이렇게 되는 마멋."
마멋들이 표를 보여 준다. 모험가들이 숫자를 보고 고민에 빠졌다.
"어쩔까요, 대장."
"재산을 다섯 배로 만들어야 하지. 저 기사의 승리에 거는 건 1.5배. 배당이 낮아. 계속 이겨도 4연승을 해야 해. 한 번이라도 지면 끝장이다. 반면 직접 말을 타서 이기면 세 배를 한 번에 얻을 수 있어."
"잠깐, 이거 잘만 하면 오히려 돈 벌 기회 아닙니까?"
"마물 놈들을 어떻게 믿어. 금화가 어디 있다고…."
와르르!
결승선 너머 재단 위에 마멋들이 자루 포대를 엎었다. 번쩍이는 금화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맙소사."
"대체 뭐지, 이 던전은?"
입을 떡 벌리기도 잠시, 모험가 한 명이 자원해서 유령마 한 마리에 올라 고삐를 쥐었다.
"그, 금화 다섯 개를 걸겠어. 전 재산이다."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을 돌아본다.
"…난 일단 한 개다."
"저, 저도."
베팅이 완료되고 첫 번째 레이스가 시작된다. 해설자 마멋이 마이크를 쥐었다.
"침입자 더비를 찾아주신 관중 여러분을 환영하는 마멋! 1번 게이트에는 1관에 빛나는 기사 시트리 선수가 선 마멋! 4번 게이트에는 침입자, 모험가 씨가 준비하는 마멋! 우우, 긴장한 마멋? 손에 땀이 흥건한 마멋! 고삐를 놓치지 않는 마멋!"
게이트에 들어선 말은 총 네 마리다. 나머지 두 마리에는 1성 헬멧 장비를 쓴 마멋이 올라탔다.
"준비가 끝난 마멋! 각 선수, 신호를 기다리는 마멋. 그리고 지금― 게이트가 열린 마멋!"
―두두두두!
게이트가 열리며 네 마리의 말이 쏜살같이 튀어 나간다. 박력에 놀란 대장과 부하는 멍하니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직선 트랙을 달려 순식간에 결승점을 통과하는 유령마들. 눈 깜짝할 새 결과가 정해진다.
"승부가 난 마멋! 기사님이 1착인 마멋!"
결과가 나오자마자 말을 몬 모험가는 마멋들에게 끌어내려졌다.
"잠깐, 잠깐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전 재산을 걸은 마멋."
"전부 내놓고 썩 꺼지는 마멋."
대장과 부하는 동료가 속옷 한 장만 남은 채 탈탈 털리는 장면을 지켜봐야만 했다. 뭐라고 항변하려던 그는 기사가 목에 검을 들이밀자 조용해져서는 터덜터덜 경기장에서 쫓겨났다.
"마머멋. 부하가 베팅한 금화 한 개는 가져가는 마멋. 대장은 승리한 마멋. 여기 은화 오십 개 받는 마멋."
정산에 들어가는 마멋들. 부하가 대장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대장님, 저 마물이 이기는 데 거셨습니까요?"
"당연하잖나. 저 괴물 상대로 이길 리가 없지."
대장이 자신의 앞에 쌓인 은화를 보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계산은 정확해. 마물들에게 놀아나는 게 열 받긴 하지만 일단 어떻게든 돈을 따는 수밖에 없어."
짤랑, 대장이 금화 주머니를 꺼냈다. 니클라스 2황자에게 선금으로 받았던 대금이었다.
좌르륵, 은화를 주머니에 쓸어 담고는 금화 열 개를 추가로 탁 올리는 대장을 보며 부하가 의아해했다.
"대장님, 지금 여기서 탈출할 생각이시긴 합죠?"
"당연하지, 임마.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 하잖냐."
"눈이 풀리셨는데요."
"시끄러워, 돈이나 꺼내. 몇 번 말에 걸 거냐? 내가 방금 보니까 저 기사가 강하긴 해도 말 모는 실력은 마멋들도 꽤 좋거든. 말은 3번이 다리가 튼실해. 이 던전의 군주가 누군진 몰라도 기가 막힌 걸 만들어놨어. 천재가 분명해."
부하는 눈을 꿈뻑이며 천천히 품속에서 금화를 한 닢 꺼내 들었다.
***
"휴우, 잘 자랐다, 잘 자랐어."
그 시각, 아인은 밭에서 농부 마멋들과 함께 재배가 끝난 상추를 수확하고 있었다.
"얘들아, 잎 싱싱한 거 봐봐. 오늘은 드디어 시저 샐러드 먹는 날이야."
"마멋."
"마머머멋."
이마에 흐르는 땀이 오히려 기분이 좋다. 튼실한 상추를 한 장 한 장 포개어가다 보니 아인의 상태창에 알람이 떴다.
: A급 모험가 브래드가 전 재산을 잃고 사기가 0이 되었습니다. 브래드가 도망칩니다!
: A급 모험가 버트가 전 재산을 잃고 사기가 0이 되었습니다. 버트가 도망칩니다!
: 14명을 격퇴하였습니다. 1명 남았습니다.
"경마장 대호황이네."
아인은 휘파람을 불며 호미를 휘둘렀다.
21화. 던전 승격 (1)
―두두두!
던전 지하 2층 경기장. 경기장에는 한참이나 말발굽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골인인 마멋!"
"젠장!"
쾅, 모험가 대장이 관중석 난간을 내리쳤다. 그가 베팅했던 금화 스무 개는 손쓸 틈도 없이 마멋들이 회수해 갔다.
반복되는 베팅 속, 대장은 소위 '졸업' 직전까지도 갔었다. 상금으로 놓여 있던 산더미 같은 금화를 모두 손에 넣어, 들고 돌아갈 주머니가 없어 곤란해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원금까지 까먹어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번에 이기면 전부 복구할 수 있었는데!"
4배의 역배를 노리고 2번 말에게 올인했건만, 허망하게 전 재산을 날린 참이었다.
"그런 게 인생 아니겠는 마멋."
"팔다리는 멀쩡한 마멋. 바닥부터 열심히 일하면 되는 마멋."
쪼르르 난간에 올라온 마멋들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건넸다. 대장은 분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다그닥다그닥, 그에게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
기사 마물이었다. 대장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윽. 저, 전부 잃었다. 나는 어떻게 되지? 감옥에라도 갇혀 노동하게 되나?"
"아직 남지 않았는가."
기사가 검 끝으로 대장의 갑옷 어깨 보호구를 슬쩍 들추었다. 그가 식겁하며 펄쩍 뛰었다.
"아, 안 돼! 이 플레이트아머가 얼마짜리인 줄 알아? 무려 '영웅' 등급의 장비다. 금화 백 개를 준다 한들 절대로 판돈으로는 안 걸어!"
"그럼 나와 검으로 승부를 보겠는가? 환영하마. 진작 그랬으면 빨라서 편했을 것을."
대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데리고 왔던 파티원 열다섯이 전부 있어도 상대가 안 될지 모르는데, 일기토라니? 선택지조차 아니었다.
"아, 아니...."
도중 대장의 눈이 기사가 들고 있던 검에 향했다.
"잠깐, 이 검은 설마. 대장장이 신의 '수작'인가? 어떻게 이걸 가지고 있지?"
모험가 중에 이 전설급 장비들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전설급 장비인 명인의 수작 30정, 초월급 장비인 명작 12정.
던전 중에서도 가장 흉흉하고 무시무시한 곳에 재보로 숨어있다는 그 장비였다.
이 장비를 노리고 재해급 던전에 도전하는 모험가는 인족, 마족 할 것 없이 지금도 수도 없이 목숨으로 대가를 치른다.
'경매로 내놓으면 가치는 환산할 수도 없어. 금화 백, 이백 개 정도 문제가 아니야.'
여기서 물러서면 모험가가 아니지. 대장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이 검을 대가로 준다고 하면 걸겠다. 알고 있나? 내 장비들은 모두 영웅급이다. 단순히 가치를 따져도 금화 삼백 개는 된다고."
살짝 양념을 쳐서 허세를 부린다. 정말 이 내기가 성립한다면 배당률은 열 배 가까이 된다. 그만한 리턴이라면 걸어 볼 가치가 있었다.
기사는 기세등등한 대장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좋다, 올라타라."
유령마를 한 필 내어주는 기사. 대장이 생각한 흐름이 아니었다.
'내가 직접 타라고?'
"3번마인 마멋. 스페셜데이인 마멋. 선두마를 잘 쫓는 선행마인 마멋."
"젊은 친구, 열심히 하는 마멋."
기껏해야 두세 살에 불과한 마멋들에게 격려받으며 안장에 올라탄 대장. 그는 혼이 나간 채 입을 떡 벌렸다.
'날 더러 쟤를 이기라고?'
기사가 탄 1번마. 얼추 헤아려도 승률이 7할이 넘었다. 항의할 틈도 없이 유령마들이 게이트에 정렬한다.
"젠장! 이기면 될 거 아냐, 이기면! 정신 차리자. 까짓거 말 한 번만 잘 몰면 수작이 손에 들어와. 인생 피는 거야!"
덜컹, 게이트가 열리고.
아쉽게도 15초 만에 대장의 원대한 꿈은 끝났다. 스타트부터 늦은 대장은 4마리 중 4착으로 일생일대의 레이스를 끝냈다.
"안 돼! 내가 평생 모은 돈으로 산 장비가!"
대장은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려 했지만 시트리에게 마력을 빨리니 금방 조용해졌다.
쓰러진 그에게서 마멋들이 대가를 받아내고는 포탈 위에 올려놓았다.
던전은 마지막 침입자를 이물질인 양 1층 포탈을 통해 퉤 뱉어냈다.
전원이 격퇴당했다는 소식이 니클라스에게 전해지기까지는 한 시간이 더 걸렸다.
니클라스 2황자는 불행한 예감이 현실로 밝혀지자 제자리에 쪼그리며 좌절했다.
***
"황녀 전하, 사람의 흔적이 있습니다."
기사들이 율리안에게 보고했다. 니클라스의 본대에서 나와 친위대를 데리고 숲 외곽을 정찰하던 중이었다.
기사 한 명이 가져온 찢어진 옷가지를 보고, 율리안은 그것이 황실 승리궁의 물건임을 바로 알아챘다.
"설마."
그녀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그 옷가지는 아인이 처음 숲에 막 왔을 때, 길을 가다가 나무 진액이 묻어서 버렸던 것이었다.
"...마물에 당했나 봐."
다만 그를 보고 내린 결론은 조금 어긋났지만.
한참이나 황실령에서 찾을 수 없었으니 그런 추측이 나올 법도 했다.
"안쪽을 탐색하겠어."
"전하, 숲은 저희끼리만 진입하기에는 위험합니다."
"이 지역만 조금 살펴봐.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조금은 무리한 요구였지만 황족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기사들은 율리안의 명령에 따라 숲 안으로 나아갔다.
율리안은 길도 없는 나무 사이를 헤치며 여기저기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사단이 진입한 방향은 숲의 남동쪽이었다. 그들의 발밑 지하에서는 거대한 던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위협을 알아챌 리도 없었다.
율리안은 도중 호위가 자신에게서 떨어졌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던전 구역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결계는 마법사인 그녀만이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의 호위기사들은 별안간 황녀가 증발해 버려 비상이 걸렸다. 율리안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숲에서 미약한 마력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아티팩트로 그것을 체크했다.
"아인의 마력과 색이 같아. 여길 왔었어."
숲을 나아가는 율리안의 귓가에 물소리가 들렸다. 곧 근처에서 맑은 개울을 발견했다. 어째 농업용 용수로가 설치된 것이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꺄악!"
그 흔적을 쫓던 율리안이 물기 가득한 이끼에 발이 미끄러졌다. 거하게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찢어진 치마 레이스 사이, 종아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율리안은 상처를 돌보기도 전에 다른 것에 눈을 빼앗겼다. 발아래의 지형이 희한한 모양이었다.
'지하가 있어…?!'
거대한 구덩이였다. 흙이 쏟아지지 않도록 제방도 설치되어 있다. 용수로의 파이프는 그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율리안은 그것을 살피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편, 아인은 마멋들과 함께 농사한 작물을 수확하던 중이었다.
"할라피뇨 탱글한 거 봐. 엄청 매우려나. 어디 맛 좀 볼까."
상추와 할라피뇨가 다 자라 신이 나 있던 아인이었다. 그가 청양고추보다는 두툼한 고추인 할라피뇨를 하나 베어 물자 아삭 기분 좋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키야, 화끈하네."
고추와는 다른 얼얼함이 입안에 확 퍼졌다. 아인은 찔끔 흘러나오는 눈물을 숨겼다. 오랜만에 섭취한 싱싱한 섬유질은 그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맛있는 마멋? 달콤한 마멋?"
아삭거리는 소리를 들은 마멋들이 호기심에 쪼르르 몰려들었다.
"너희도 먹어 볼래?"
모터가 달린 듯 고개를 파닥이는 마멋들. 아인이 손톱으로 할라피뇨를 작게 잘라 나눠주니 양손으로 한 덩이씩 들고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표정이 험악해졌다.
"이건 무엇인 마머엇!"
"군주님이 우리를 속인 마멋!"
"하하하, 그렇게 매웠어? 원래 그냥 먹는 채소는 아니야. 나중에 맛있게 해서 다시 줄게. 여기 상추로 입 달래."
"이게 맛있어지기는 하는 마멋?"
"믿을 수 없는 마멋...."
상추로 입을 틀어막고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한 마멋들을 뒤로 하고, 추수를 이어나가던 아인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오, 이건 뭐지? 얘들아, 여기 와서 봐봐."
[황금 파프리카]
: ☆☆ 희귀 재료
: 마력 +1
: 15분 동안 랜덤한 효과가 발생합니다.
"희귀 작물! 드디어 나왔구나."
농사를 하다 보면 가끔 얻을 수 있는 특수 아이템이었다. 똑, 줄기를 따니 입에 쏙 들어갈 사이즈의 조그만 파프리카가 찬란하게 반짝였다.
"예쁜 색깔인 마멋."
"맛이 다른 친구인 마멋?"
"마력 최대치를 올려주는 아이템이 됐어. 이건 거절할 이유가 없지. 랜덤 효과, 뭐가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농사만 지어도 마법 능력을 올릴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이익이었다.
그가 황실에서 깨우친 교훈 중 하나는 이 세상에서 마법을 잘 쓰면 살아가는데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아인은 망설이지 않고 파프리카를 입에 집어넣었다.
"오...?!"
알싸한 향이 머리 안쪽까지 퍼진다. 하지만 방금 먹었던 일반 파프리카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끝맛이 달콤하고 식감도 훨씬 아삭거리네. 와, 이건 그냥 먹기 아까울 정도였는데. 역시 희귀품은 다르네."
"군주님만 혼자 맛있는 거 먹은 마멋!"
"치사한 마멋!"
"하하, 다음에 더 나오면 너희도 나눠줄게. 이번엔 시저 샐러드 만들어 줄 테니까 참아."
"샐러드 마멋."
"기대하는 마멋!"
새 메뉴에 기대감을 품은 마멋들이 쪼르르 달려가 마저 상추를 뽑았다.
아인의 상태창에 메시지가 떴다.
: [황금 파프리카]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 이런! 패시브 효과 하나가 없어졌어요.
: [카리스마]가 15분 동안 사라집니다.
"완전 무작위라 이런 효과도 있구나."
만약 전투 중 디버프에 걸린 상황에서라면 유용했겠지만 지금은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어차피 긴 시간은 아니니 큰 의미는 없다고 아인은 생각했다.
"효과가 없어졌다는 건 반대로 무작위 효과가 생길 수도 있다는 소리겠어. 다음번엔 아껴서 먹어 봐야겠다."
마멋들에게 줬다가 갑자기 거대해지거나 하진 않을까? 얘들도 타고 다니면 푹신하겠는데... 아인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해 보았다.
―짤랑!
경고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 결계가 침입자를 탐지하였습니다.
"뭐지?"
지난번 암흑룡이 침범한 이후 설치했던 결계다. 햇빛을 받기 위해 천장을 뚫은 밭 구역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알림이다.
"마멋들, 여기 지키고 있어."
아인이 ☆접이식 사다리를 꺼냈다. 천장 위로 올라가 본다.
그간 쌓아놓은 마력이 꽤 있었다. 숲을 통해서 들어왔으니 마물이리라 예상한 아인은 전투 마법을 쓸 만반의 준비도 했다.
"세상에, 이안 소환사!"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건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인물이었다.
율리안 2황녀, 그의 전 상사였다.
'이분이 왜 여기 계셔?'
상황을 파악하느라 잠시 굳어 버린 아인을 향해 걸음을 서두르는 율리안. 황족으로서의 품격은 조금 덜어낸 모습이었다.
아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회한이 담겼다. 방금까지 농사를 짓던 아인은 흙과 먼지투성이에, 품격이라곤 하나도 없는 작업복 차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율리안은 사연이 어느 정도는 추측이 되었다.
"이안 소환사, 목숨은 무사한 듯하여 다행이구나."
"제국의 달을 뵙습니다, 황녀 전하. 이안이 아니라 아인입니다만 평생 틀려 오셨으니 앞으로도 편하신 대로 부르시지요. 환각 마법이라도 당한 줄 알았습니다. 어찌 호위도 없이 이 불모지에 옥체를 들이셨나이까."
"호위? 뭐야, 다 어디 갔어."
그제야 기사들의 행방을 눈치챈 율리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대를 먼저 만난 게 천운이로군. 이안 소환사, 마족이나 악한 마법사에게 붙잡혀 계약을 강제당했지?"
"예?"
이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뜬구름 잡는 소리일까. 아인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니 율리안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게 아니고서야 황실을 떠나 이런 꼴로 숲속에서 구르고 있을 리가 없잖아. 어때, 반성은 좀 했어? 그간 얼마나 내 품이 편했는지 조금은 깨달았니?"
"황실 말이죠, 흠...."
"알았으면 황실로 돌아오도록 해. 내 특별히 그간의 공로를 참작해 복직시켜 주겠어. 마침 나는 마법사니 네게 걸린 구속도 풀어줄 수 있고."
아인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제국 황실의 실정에는 빠삭한 그였다.
전생에 아인의 영지였던 던전 앞마당은 지금 니클라스 2황자가 관리하는 황실령이다. 율리안이 여기 있다는 건 그를 따라서 사업을 하러 왔을 테고, 그녀의 기사단은 나름 전투력이 높기로 유명하니 숲의 정찰을 맡았으리라.
하지만 던전의 침입자는 모험가였다. 즉 율리안은 개별 행동 중이다. 그리고 자신을 보자마자 저런 용건을 꺼낸다는 건 꽤 급하다는 의미였다.
'설마 여태 날 찾으려 숲을 정찰했나?'
아인이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이유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소환해 오던 장비들. 그건 다른 소환사를 찾는다고 쉽게 대체될 게 아니다.
애초에 장비 소환마법은 소환사 중에도 거의 없는 희귀한 계열이다. 황실의 머리 굳은 신하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소환마법이 목적이다. 아인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대부분 정답이었다.
"황녀 전하."
"그래, 계약 내용을 말해 보아라. 본녀가 바로 디스펠을...."
"저를 찾으러 이 불모지까지 찾아와 주신 은혜에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아인의 이어지는 대답에 율리안은 숨이 멎을 뻔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여기에 남겠습니다."
22화. 던전 승격 (2)
여기에 남겠다는 아인의 대답.
율리안은 이해가 안 되어서 그에게 재차 확인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 숲에 남겠다고?"
"그렇습니다."
"너, 지금 주군인 본녀의 명을 어기겠다는 말이야?"
"전 주군이시지요."
"그럼 지금은 누구를 섬기는데. 어떤 미친 마법사야. 위대한 제국의 2황녀이자 무려 4위계의 마법사인 나를 두고 감히."
율리안이 다그치니 아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묘한 마력의 흔적이 있어. 매혹, 세뇌, 조종을 당하고 있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충성하지 않습니다."
"불쌍하게도."
율리안이 아인을 향해 동정하는 눈길을 보냈다. 아인은 슬슬 그녀가 귀찮아졌다.
'내가 황실에 왜 돌아가.'
황실에서 빡세게 일하던 생활이 몸에 밴 아인은 지금도 새벽이면 눈을 번쩍번쩍 뜬다.
그의 직책은 궁정소환사지만 소환한 장비의 관리나 기사단의 민원도 죄다 맡고 있었기에 늘 과도한 업무량이 함께했다.
그 모든 걸 집을 사고 싶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었으나.
'이미 이런 좋은 집이 생겼는데.'
당연히 지금 아인에게 황실로 돌아갈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진작 율리안에게 해고되었으니 명령을 들을 이유도 없었다.
자신이 없어져서 승리궁 운영에 차질이 생겼다고는 예측이 됐지만, 아인은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추측할 수 없었다.
'직접 찾아온 걸 보니 좀 딱하긴 하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녀님인데, 나를 대신할 소환사도 있겠지.'
아인은 율리안이 어쩌다 자신의 목격 정보를 듣고 찾아왔다고 추측했다. 당연히 사업이 본 목적이지 자신을 찾으러 이 외지까지 찾아왔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안 소환사, 가만히 있어라. 지금 디스펠을 써볼 테니...."
"아니, 부상을 입으셨군요. 이리 보여 주시죠."
아인이 율리안의 상처를 발견하고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주문진을 그려 주문을 시전했다. 힐, 2위계 치유주문이다.
마력이 휘감자 환부가 순식간에 아물고 율리안의 통증도 함께 사라졌다. 그녀가 놀라며 아인에게 물었다.
"치유 주문도 쓸 줄 알았어?"
"마법과 원리는 같습니다. 높은 위계는 어렵지만 이 정도는 비상용으로 배워 뒀습니다."
아인으로서는 복귀를 거절한 대신이라고는 뭣하지만 전 상관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보인 것이었다. 심각한 블랙기업이긴 했어도 월급을 밀리지 않고 따박따박 준 게 어딘가.
하지만 율리안은 그 행동을 조금 과하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내게 충신은 아인 소환사밖에 없었구나.'
그제야 그녀는 확신했다. 경력이 길다고 해서 비서관과 집사장의 간언에만 귀 기울였던 게 실수였다. 귀찮은 사고를 치긴 했어도 아인만큼 궁에 도움이 되는 이가 없었다.
지금도 보라, 못된 마법사인지 흑마술사인지, 명줄을 붙잡힌 게 분명한데도 자신부터 걱정해 주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그는 전에도 늘 이런 태도였다. 소환마법으로 자신을 황태자에게서 구출해 냈을 때도 상을 바라거나 비밀을 빌미로 뭔가를 요구하기는 하기는커녕 묵묵하게 일을 계속했다.
정치에 요령이 없을 뿐이겠지. 그간 자신이 궁의 운영에 집중하느라 눈이 멀었었다.
지금도 기사단장이 아인 소환사의 복귀를 강력하게 요청하며 명령을 거부하는 이유를, 율리안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아인 소환사."
"예, 황녀 전하."
"그대를 무슨 일이 있어도 구출해 주마. 본녀의 궁으로 복직하면 두 배의 봉급과 승진을 약조하겠어."
율리안의 속을 모르는 아인은 그 제안이 갑작스럽기만 했다. 무엇보다 반갑지도 않았다.
'두 배여도 적은데.'
던전을 운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아니, 애초에 제도로 돌아가면 던전을 관리할 수도 없다.
이 아가씨를 어떻게 돌려보내야 하나. 아인이 고민하고 있을 때 구멍 밑에서 인기척이 났다.
"군주님, 위에 계신지요."
―화악!
자리에 내려앉는 무거운 압력에 율리안은 소름이 돋았다. 마력회로가 본능적으로 경고를 보낸다. 저 밑에 있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위험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당황하는 아인의 표정을 보니 더더욱 확신이 든 율리안이었다. 그녀가 허리춤에서 완드를 꺼내 들고 싸울 준비를 할 때였다.
"전하,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뭐? 그럼 너는?"
"저는 떠날 수 없습니다. 저를 잊어버리십시오. 다시는 여기에 돌아오지 마십시오."
아인이 율리안을 급하게 밀어 근처의 나무 뒤로 몸을 숨기게 했다.
"잠깐만, 아인!"
그녀의 말을 들은 아인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름 똑바로 불러 주셨네요?"
율리안은 구덩이 쪽으로 돌아가는 아인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아래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척이 보여, 그녀는 급히 몸을 숨겼다.
동시에 아인의 상태창에 메시지가 떴다.
: [황금 파프리카]의 효과가 끝났습니다.
: [카리스마]가 활성화됩니다.
―쿠웅!
율리안은 쓰러질 뻔한 다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마치 목을 죄인 듯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세상에.'
저 구덩이에서 올라온 존재는 대체 뭐지?
이 숲에 어떤 괴물이 살고 있는 거야?
보이지도 않는데 이만한 패기를 뿜어내는 이는 대체 어떤 경지에 오른 건지.
"...하악."
율리안은 비명이 나올 뻔한 입을 틀어막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아인, 아인은.
저런 괴물 소굴에 붙잡혔으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진작 탈출할 희망을 잃어버렸음도 당연했다. 율리안은 그제야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구덩이에서 올라온 시트리는 아인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보고를 올렸다.
"침입자들의 격퇴에 성공했습니다. 모두 군주님의 신묘한 책략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도망쳤답니다."
"음."
군주 아인이 상태창을 확인했다.
: 침입자를 격퇴했습니다!
: [하급 던전]의 승격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던전을 승격하겠다."
"아, 정말인가요? 진심으로 감축드려요! 군주님의 이름이 다시금 대륙에 울려 퍼질 날이 하루 더 앞으로 다가왔네요!"
시트리가 손뼉을 마주치며 기뻐했다. 아인이 상태창을 터치하니 승격이 이루어진다.
―쿠구구궁!
지하에서 거대한 진동이 울린다. 마멋들이 놀이기구를 타는 마냥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파아앗!
던전 입구 제단에서 하늘을 향해 푸른 빛이 쏘아졌다. 제단이 한층 높게 솟아오르며 위엄을 과시한다. 망가졌던 모서리의 사신수 동상도 수복되며 본모습을 되찾았다.
시트리가 던전의 강해진 위용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피부가 저릿해지는 설렘이었다.
"단숨에 던전이 이리도 위대한 모습으로... 정말이지 군주님의 경지에는 항상 감탄하게 되네요."
"층이 확장되었다. 탐방하러 가지, 시트리."
"네!"
지하로 돌아가는 아인과 시트리.
그들이 모습을 감추고 한참이 지나서야 율리안은 간신히 걸음을 뗄 수 있었다.
"뭐야, 대체 뭐였지, 그것들은."
평범한 마물이나 마족이 아니었다. 모습을 들킨 순간 자신 정도의 마법사는 일격에 살해당할 게 분명했다.
율리안은 내내 몸을 숨긴 채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지도 못했다.
"둘 있었어. 던전의 군주와 부관. 아인을 끌고 간 게 분명해."
그들의 대화도 제대로 듣지 못한 율리안은 정신없이 출구를 찾아 결계를 빠져나갔다. 자신을 수색하던 기사단과 합류할 수 있었다.
죽음의 숲을 뒤로하며, 율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태어나 이렇게나 공포에 떨어 본 적은 두 번째였다. 그 날 이후로 다시는 적 앞에서 약한 마음을 갖지 않기로 다짐했거늘.
"...아인."
자신은 위대한 제국의 황족이다.
율리안은 이번만큼은 도망치지 않겠다고, 자신의 신하를 반드시 저들에게서 구해 내겠다고 다짐했다.
***
"승격이야, 승격. 얏호!"
마침내 우리 집이 첫 승격에 성공했다. 마력 생산량도 늘었고 각종 상한 제한도 많이 풀렸다. 마멋들도 신이 나서는 기쁨의 댄스를 췄다.
무엇보다 맘에 드는 건 층수가 늘어난 점이었다. 공짜로 확장공사를 한 느낌이랄까.
2층에서 3층으로 내려가니 이게 웬걸. 새 공간이 널찍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거의 천 평은 되겠다. 축구장도 짓겠는데?"
4층도 똑같은 공간이 생겼다. 여기에는 또 무슨 시설을 지어 볼까. 침입자 대응은 미궁과 경마장에서 잘 되고 있으니 놀이 시설을 한두 개 늘려도 되려나. 기대된다.
"오."
상태창에도 알람이 떴다. 평소보다 글자가 번쩍이는 걸 보면 중요 메시지였다.
: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하였습니다! (10/10)
: 보상으로 [픽업 소환 티켓] 10장을 지급 받았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1장 [제국의 신세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픽업 소환. 드디어 왔구나."
튜토리얼이 끝났으니 픽업 소환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픽업에서는 상시가 아닌 그때만 얻을 수 있는 기물을 소환할 수 있다.
시기를 놓치면 도감을 컴플리트할 수 없으니까 가능하면 뽑고 넘어가고 싶다.
"지금 픽업은, 어디 보자."
: [데스나이트] 픽업 소환 (~1달 후까지)
: 기간 동안 [유령마], [데스나이트]의 소환확률이 높아집니다.
: 네임드 기물 [듀라한]이 목록에 추가됩니다.
"오, 데스나이트 소환이라. 유령마에 탑승하면 전투력이 높아지는 기물이야."
마침 경마장 시설도 있으니 지금 소환하기에는 타이밍이 찰떡이다.
그리고 듀라한. 이것도 꼭 뽑고 싶은 기물이다. 머리가 없는 기수로 굉장히 멋지다.
: 군주가 투자한 시설과 마물 총합 레벨을 기반으로 픽업 소환이 결정됩니다.
메시지를 보니 데스나이트 픽업이 나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경마장 시설에 투자를 많이 한 내게 가장 어울리는 영웅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당연히 거절할 이유야 없지. 픽업 소환권은 아끼지 않고 여기에 쓰기로 했다.
"오늘은 다들 수고했으니 같이 샐러드 해 먹고 소환은 내일 하자. 중요한 의식이야. 할 수 있는 민간신앙은 전부 동원해야겠어."
"소환이군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소인도 군주님께서 최상의 컨디션을 내실 수 있도록 보좌하겠어요."
: 하급 던전으로 승격하였습니다.
: 던전의 이름을 변경할 수 있습니다.
: 현재 던점의 이름은 [7i 13]입니다.
"던전 이름을 정할 수 있게 됐구나."
지금까지 적혀 있던 7i 13이라는 의미 불명의 이름은 7번 뿌리의 13번 던전이라는 뜻이겠지. 개성 넘치는 마이홈에 이런 성의 없는 이름은 용납 안 된다. 어디, 뭐로 정할까.
"옛날에는 뭐였더라."
"저희 던전의 칭호라면, 과거에는 10번 뿌리 킴라누트의 정점을 의미하는 '사바텀'이었답니다."
"어우, 어려워. 기억도 못 하겠다. 가장 유명한 집 이름이면… 반포○이일까."
"신비한 울림이군요."
"아니다, 기왕이니 크게크게 가자. "
"어떤 이름으로 하시겠어요?"
"논현동."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강남에 마이홈을 하나 장만하는 게 꿈 아니겠어.
여기서는 스케일을 키워서 던전에 아예 동네 이름을 붙여버리기로 했다.
"논현... 고대의 언어로군요. 조금 발음하기 어려운데, 어떤 의미인가요?"
"음... 논은 농사를 짓는 땅이고, 현은 대충 언덕이라는 의미야."
"논현―파밍힐. 기억하겠습니다."
오, 시트리가 영어로 말해 주니 그럴싸해졌다.
: 던전 이름이 설정되었습니다.
[플레이어명] 아인
[직 업] 던전군주
[보유 던전] 논현(파밍힐) (하급)
"파밍에는 높은 경지로 향한다는 뜻도 있지요. 근원에 도달하시겠다는 군주님의 충만한 의지는 전해졌답니다. 저 시트리, 대업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어요."
"어, 음... 그래."
"마멋."
"마멋, 마멋."
약간 의도가 잘못 전달된 듯했지만 입주민들도 신나 하는 걸 보니 나도 뿌듯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축하 기념으로 시저 샐러드랑 파스타 먹으러 가자."
"샐러드 마멋!"
"빨리 먹고 싶은 마멋!"
쪼르르 어깨에 올라타는 마멋들을 데리고,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기운을 잘 차리고 내일 소환을 대비해야지.
과연 뭘 뽑을 수 있을까, 기대가 됐다.
23화. 소환마법 (1)
"대체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2황자 니클라스가 아무리 다그쳐도 얻을 만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1층에서 미궁에 겁을 먹고 도망쳐 나온 모험가 열두 명은 정찰대와 비슷한 증상이었다. 공포, 혼란, 패닉. 기억이 날아간 이들도 있어서 증언을 맞추기 쉽지 않았다.
2층으로 내려간 이가 세 명이 있었으나 그들은 더더욱 몰골이 처참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속옷 차림인 건 물론이고, 끔찍한 마법에라도 당한 듯 눈에는 초점을 잃었다.
"내 돈, 내 장비. 수작이 코앞에 있었는데."
대장의 상태가 가장 심각했다. 무려 상급 던전의 히드라도 토벌한 적이 있던 경력자다. 노련한 A급 모험가로 유명하던 그가 반나절 만에 폐인이 되어 돌아왔다.
"저는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그 던전에 가까이 가지 마실 것을."
정찰대의 기사 헤라가 모험가 대장을 보며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니클라스는 혀를 차며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이봐, 대체 그 아래에 뭐가 있었어?"
"최하급 던전이 아니었지? 몇 층까지 탐사했나?"
"아티팩트에는 2층까지라고 기록되어 있던데."
"재해급 마물이었나? 흑마술이었어?"
남은 모험가들이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는 대장의 어깨를 흔들었다. 대장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퀭한 눈으로 대답했다.
"...아니, 그곳은 천국이었다."
대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표정과 전혀 달랐기에 모험가들이 의아해했다.
"나는... 그 던전의 2층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느꼈다. 내가 살아 있음을. 이 세상에 존재함을."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돌아가야 해!"
벌떡, 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던전은 완전히 미쳤어. 지금도 믿기지가 않아. 그 던전에는 희망이 있었다. 대륙 어디에도 없는 진짜 모험이 있었어!"
"맙소사, 이 양반이 진짜 미쳤군."
"내가 미친 걸로 보이나? 내 눈을 봐."
모험가들이 대장의 기세를 보고 주눅 들었다. 확실히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생기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내가 한 경험을 이야기해 주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둘 몰려드는 모험가들. 평소 모험 썰풀이를 자주 하던 대장은 달변가였다. 청중은 점점 그의 경험담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됐어. 정신을 차렸을 땐 입구로 쫓겨난 후였지."
"그게 정말이야? 재해급 마물이 목숨을 뺏기는커녕, 정말 규칙대로 재산만 가져가고 상처 하나 안 입혔다고?"
"우리 셋 다 멀쩡하게 돌아온 게 그 증거잖나."
"일리는 있어. 던전의 마물은 군주에게 거역할 수 없거든. 그 던전의 새 주인이 또라이 같은 명령을 내린 거야."
"잠깐, 분명 금화 백 개도 안 들고 있었다고 했지. 그런데 그 '수작'을 손에 넣을 뻔했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대장.
"대장장이 신의 수작이라니."
"평생을 일해도 못 살 전설급 장비야."
"그런 장비가 겨우 2층에 있을 정도면, 보스룸에는 얼마나 진귀한...."
침을 꿀꺽 삼키는 모험가들에게 대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말도 안 되는 갑부가 저 던전의 새 군주가 된 게 분명해. 심지어 전투가 아니라 규칙이 있는 결투를 원하지."
"목적이 뭐지?"
"그야 모르지. 하지만 돈이 산더미같이 많으면 머리가 이상해지기 마련이잖나. 우리를 부른 황자 전하만 봐도...."
"쉿, 말조심해. 들릴라."
모험가들이 각자 조심스레 자신의 안주머니를 꺼내 보았다.
그곳에는 각자 그간 모아 온 금화가 상당히 쌓여 있었다.
"나는 당장 은행에서 맡겼던 돈을 찾아 돌아올 예정이다. 재도전하겠어."
"진심이야?"
"언제까지 목숨 걸고 지긋지긋한 모험가 일만 하겠어. 단번에 인생 역전할 절호의 기회야."
"저, 저도 같이 갑시다, 대장."
속옷 차림의 부하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들의 태도를 보고 모험가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청중 중에서도 모험가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나도 안내해줄 수 있나?"
***
"제국의 별을 뵙습니다. A급 모험가, '백금의 놀란'이 인사드립니다."
투박한 갑주로 몸을 감싼 검사가 니클라스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모험가 캠프를 나오던 니클라스가 그를 발견하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길드에 수배한 추가 병력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었다.
"오오, 드디어 도착했는가. 기다리고 있었네! 놀란, A급 모험가 중 최고의 실력을 가졌다지."
"하하, 높게 평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놀란이 백금처럼 반짝이는 이빨이 드러나도록 훤칠한 미소를 지었다.
"곧 S급으로 승급도 앞두고 있다지. 대륙에 열한 명밖에 없다는 그 S급에!"
"부끄럽습니다만, 용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용사!"
니클라스는 순식간에 기분이 든든해졌다. 그래, A급도 같은 A급이 아니지. 이 정도는 되어야 황족인 내가 부리기에 어울리지 않겠는가.
모험가의 등급 하나 차이에는 거의 100배에 가까운 전투력 차이가 있다고 들었다. 곧 S급으로 승급할 그라면 저기 패배자처럼 널브러진 A급들의 역할을 대체해 주고도 남으리라.
'겨우 던전 하나, 조금 무성할 뿐인 숲 정도에 뭐 이렇게 애를 먹는단 말인가.'
니클라스는 차기 황제가 되고 싶은 욕심이 많았다. 어떻게든 이 황실령을 성공적인 영지로, 제국 제2의 중심지로 키워 내서 실적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황제에게 올라갈 보고서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쓸 수 있는 수단은 모두 쓰고 있다.
국방비는 율리안에게 떠넘기면 된다. 무리하게 모은 이주민에게 지급한 지원금은 그에 몇 배가 되는 세금으로 다시 빨아들인다.
이번 길드 의뢰도 인맥을 이용해서 대금 지급은 구두로만 약속했다.
황실령은 어떻게 보면 사기로만 이루어진 위태위태한 땅이었지만 밖에서 보면 천만금이 들어간 거대한 규모의 사업으로 보인다.
일단 거짓말을 하고 나중에 실제로 만드는 게 니클라스의 방식이었다.
"놀란이여, 이 땅의 이력은 알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상황도 전해 들었습니다. 던전 처리가 곤란한 모양이더군요. 맡겨만 주시죠. 바로 탐색에 나서겠습니다."
"오오!"
도착하자마자 쉬거나 조건을 붙이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실로 모험가에 어울리는 자질이다. 신뢰감이 갔다.
얼마 안 있어 출발한 니클라스는 숲의 입구까지 놀란과 함께했다. 파티가 아티팩트로 꼼꼼하게 측정부터 시작하는 전문가다운 솜씨를 보였다.
"하급에서 중급 마물 서식지로 보입니다. 그럼 진입하겠습니다."
파티가 발을 옮기려는 그때.
―쐐애애액!
어디선가 고막을 찢어버리는 굉음이 발생했고.
―콰아아앙!!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며 파티가 향하던 방향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수백 그루의 나무가 뿌리째 뽑혀 하늘을 날고 흙이 파여 폭풍이 인다.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긴다.
흙먼지에 뒤덮여 토기 인형 꼴이 되어버린 니클라스는 갑작스런 상황에 기침을 쿨럭이며 멍하니 눈을 꿈뻑였다.
크레이터에서 일어서는 조그마한 인영.
"오랜만이네, 여기."
망토를 휘날리는 백발의 여성이 숲을 바라보며 짤막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마물인가! 전투태세!"
놀란이 즉시 검을 꺼내고 여자와 싸울 준비를 했다. 그의 파티원들도 함께 싸움을 준비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니클라스는 당황했지만 잘된 일이기도 했다. 놀란의 싸움을 직접 볼 수 있을 터였다.
"응? 얘네는 뭐야."
톡.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콰콰쾅!!
니클라스가 느낄 수 있었던 건 폭음 후에 이어지는 이명.
마법인지, 주문인지. 무엇인지 인식할 수도 없었던 공격 후에 시야에 들어온 건 바닥에 걸레짝처럼 널브러져 정신을 잃은 놀란이었다.
"으... 으어억...."
조금 전까지 찬란하게 빛나던 백금의 갑주는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 바스라졌다.
"대, 대체 이게 무슨...."
니클라스는 말도 제대로 못 해 어버버거리며 여자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하늘에 대고 손을 흔드는 여자. 그림자가 휙 사라진다. 저 뒷모습은 뭐지? 새까만 날개와 꼬리가 달린 게 꼭 용처럼 생겼는데.
"너희들, 계속 나 방해할 거야?"
귓가를 파고드는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
패기에 압도되어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니클라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래. 모처럼 좋은 장소로 산책 나왔으니까 기분 잡치기 싫어. 사라져."
니클라스는 즉시 말을 돌려 꽁무니를 뺐다.
대체 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왜 하필 여기인지. 하늘에서 떨어진 불운을 저주해 보지만 행운의 여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왕 세라펠이 과거 최흉이 있던 죽음의 숲을 찾은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마멋 로드가 13번을 하급 던전으로 승격에 성공했다고 부관이 보고했다. 약속대로 그를 찾아온 것뿐이었다.
그간 그와는 종종 던전 채널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해왔다.
"참 말을 이쁘게 안 해.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러는 건지."
[세라펠] 콜라 떨어졌어
[000] 우연이군
[000] 시도 때도 없는 그대의 메시지 테러에 내 인내심도 마침 떨어진 참이었다
[세라펠] 그렇게 많이 샀는데 서비스 좀 줘
[000] 보냈다
[세라펠] 아싸
[세라펠] 어제 승격했다며
[세라펠] 찾아갈게
[000] 오지 마라
[세라펠] 관리인으로서 확인해야지
[000] 귀찮다
[세라펠] 어이없네
[세라펠] 공물이나 준비해 놔
[세라펠] 대답 안 해?
[000] 알겠다
[000] 친우의 방문에는 성의를 보이겠다
"친우는 뭐야."
고작 군주 주제에 마왕인 자신을 향해 이런 표현을 쓴 것도 겁대가리가 없다.
늘 칙칙한 지하에 처박혀 있느라 실제로 세라펠은 친구가 없기는 했지만.
하여간 웃기는 놈이었다.
장장 20년 만에 돌아온 땅에 향수에 젖은 세라펠은 여기저기 둘러보며 천천히 숲을 거닐었다.
그리고 던전 입구에 다 도착했을 즈음.
―화아악!
하늘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 개수는 여섯 개.
"6위계 마법...?"
소환진이었다.
"...처음 보는 구축식이야."
당연히도 여기에 저만한 마법을 다룰 이는 한 명밖에 없었다.
아인, 그 남자다.
세라펠은 걸음을 서둘렀다.
***
"좋아, 오늘은 픽업 소환이다!"
마멋들과 함께 아침 체조를 마치고 선언하니 다들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어제 저녁에 다 같이 먹은 샐러드가 맛있어서 더 기분이 좋은지도 모르겠다.
"소환인 마멋!"
"동료가 늘어나는 마멋!"
"영웅님도 오는 마멋?"
꼭 와야 할 텐데 말이야.
"오늘 소환은 어디에서 하시나요?"
"모처럼이니 밖에 나가서 해보자. 원래 이런 의식은 기운이 중요해. 하는 김에 소환 마법도 체크해 보려고."
"네. 군주님의 소환마법은 늘 기대되네요."
시트리와 함께 준비물을 가지고 던전 입구 밖으로 나간다. 멀끔해진 제단이 나를 맞아주었다.
"한번 확인하고 싶었단 말이지."
내가 그간 제국에서 쓰던 소환마법은 가챠였다. 그러면 나는 가챠가 아닌 소환마법은 아예 못 쓰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나는 마법에는 기본적으로 재능이 있는 편이다. 그래서 제국 황실에서 어릴 때부터 데려간 거기도 하고. 아마 가챠를 돌리는 모습 때문에 소환 계통이라고 오해받았겠지.
"마법을 얼마나 쓸 수 있나 해봐야겠어."
하다못해 농사를 짓다가 물을 주거나, 유령마 경기장 바닥 흙을 갈 때도 마법이 있으면 훨씬 편해진다. 마도공학으로 응용해서 편리한 기계도 만들 수 있고.
아무튼 마법은 만능이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어서 그만큼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준다. 마법 최고.
"우선 마력 정리부터."
자연에는 마나가 존재한다. 생명의 체내에 흐르면 마력이라고 부르는데, 마력이 흐르는 길은 마력회로다. 피와 핏줄 같은 느낌이다.
다른 점은 훈련해서 의도적으로 흐르는 방향이나 양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걸까. 주로 손끝으로 방출하게 된다.
화악! 몸속에서 회전시킨 마력을 분출시키니 가벼운 라이터 사이즈 불꽃이 피어오른다. 마법진 없이 쓸 수 있는 무위계 마법이다.
"역시 군주님이시네요. 마력 흐름도 굉장히 안정된 모습이셔요."
"에이, 이 정도는 시트리도 충분히 하잖아."
"저는 2위계 정도밖에 조예가 없답니다. 군주님께서 쓰시는 마법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지요."
"에이, 또 그런다."
슬슬 본격적으로 위계를 올려 볼까.
나는 흘러나오는 마력으로 마법진을 그렸다.
24화. 소환마법 (2)
마법의 사용은 세 단계를 거친다.
인식, 발동, 시전이다.
먼저 내가 지금부터 쓸 게 어떤 마법인지, 주문의 원리를 머릿속으로 인식한다.
인식을 기반으로 마법진을 그려 발동.
마법진에 마력을 본격적으로 불어넣으면 지력 스탯을 참조하여 시전이 진행된다.
쉽게 비유하자면 즉석에서 엔진을 하나 설계해 만들어 연료를 넣고 작동하는 과정이다. 설계도가 잘못되거나, 연료나 출력이 부족하면 자동차는 굴러가지 않기 마련이다.
나는 손끝으로 푸른 마력을 흘려보내 첫 번째 마법진을 그렸다. 수식의 바탕이 되는 주 마법진이다. 찌그러진 곳 하나 없는 깔끔한 원을 만들었다.
허공에 VR 컨트롤러로 그림판을 칠하는 느낌이다. 도형을 예쁘게 그릴수록 마법의 효과는 좋아진다.
큰 원 안에 작은 원을 그리고 내부를 다른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채워나간다. 이건 일종의 설계도다. 쓸 주문에 따라 채워야 할 도형의 종류나 그리는 방식도 달라진다.
"와아, 깔끔한 마법진이네요. 소환마법의 진은 처음 봤어요."
"그랬구나. 소환마법이 희귀하긴 하지. 이제 외곽에 수식을 적으면 완성이야."
"룬 문자군요. 어떤 의미인가요?"
"각각 소환수, 계약, 전이를 축약했어."
"저는 마법을 체계적으로 배우진 못해서 신기하네요. 축약어 대신 모든 문장을 적어 넣어야 하거든요."
"기회가 되면 룬 문자를 배워 봐. 편해."
이 세상의 마법은 알기 쉬운 편이다. 진의 외곽에 수식이라 불리는 문장을 적어넣으면 효과가 발휘된다. 외곽에 '불꽃이 발생함'이라고 적으면 활활 타오르는 식이다.
매번 전문을 적으면 귀찮으니 축약한 공식이 몇 개 있다. 그게 바로 룬 문자다.
"이렇게 생각하니 수학이랑 비슷하네."
수학도 간단한 원리도 증명에는 빽빽한 수식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수식에 대한 증명을 다 써 가며 문제를 풀진 않으니까.
룬 문자 작성도 원리만 따지면 미분 공식과 비슷한 느낌이다.
"다음은 2위계."
위계를 올리는 건 조금 어렵다.
한 마법에 마법진을 여러 개 쌓을수록 위계가 올라간다. 보통은 위력이 강해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효과가 뒤바뀌기도 한다.
보통 마법사 한 명이 평생 팔 수 있는 계열은 하나라서, 한 마법의 위계를 인생에 걸쳐 주구장창 올리게 된다. 높은 위계에 도달할수록 강력한 마법사로 존경받는다.
두 번째 마법진은 기본진보다 조금 작다. 첫 진 위에 정확히 수평이 되도록 그리고 조심스럽게 연결한다.
"이렇게 연결하는 거였군요! 꼭 잘 지어진 건물을 보는 기분이에요."
"건축은 조금 배웠거든. 자신 있는 분야야."
"역시 군주님, 만고에 대한 지식이 가득하시군요. 저도 이 소환마법 덕분에 군주님을 다시 모실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벅차오르네요."
마법진의 도형을 쌓는 건 건축 설계도를 그리는 작업과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위계가 높아질수록 기초공사를 잘해 놔야 튼튼하게 지어진다.
전생의 기억이 지금껏 영향을 주고 있었나 보다.
2진에 이어 3진도 구축. 꼭 커다란 웨딩케이크처럼 생겼다. 넘어지면 대참사가 일어나니 조심스럽게 다룬다.
"4진부터는 많이 어려워."
"그렇군요. 재능이 없으면 평생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하니까요."
여기부터는 단순히 층수를 쌓는 게 아니라 차원을 추가해 틈을 열어 관통시켜야 한다.
복소평면에 진을 그리고 위상을 뒤틀어서 연결하는 방식인데, 3D프린터로 뽑은 뫼비우스의 띠라고 보면 되겠다.
말로 설명하자니 무슨 소리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눈으로 보면 하여튼 이리저리 꼬아놓은 슬라임 같다.
"세상에... 지난번에도 느꼈는데, 소인은 뭘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시트리가 입을 멍하니 벌리고는 내 마법진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나도 자력으로 만들 줄 아는 마법진은 여기까지다. 스무 살에 4위계를 쓸 줄 알면 나름 천재 소리는 듣는다.
'율리안이 열여덟에 4위계에 도달해서 티가 안 나긴 했지.'
나라는 범부가 주목받기에 세상은 넓고 천재는 너무 많았다.
제국 황족 여자들이 대대로 마법을 잘 쓰는 핏줄이라긴 하다더라. 덕분에 그녀에게 유난히 구박받기도 했다.
"내 소환마법이 가챠를 보조해 주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가챠도 일종의 소환마법이니까, 추측하자면 나는 소환마법을 두 종류 가지고 있던 셈이다.
가설이 맞는지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 보았다.
: 듀라한 소환 확률 4% → 8%
"오, 확률이 늘어났네?"
가챠를 내 마법과 조합해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합쳐져서 위계가 높아진 덕에 확률이 올라간 듯했다.
"티켓은 열 장. 픽업 소환이니까 10연차면 마지막 열 장째에 최소 3성 확정이야."
확률도 올렸겠다, 본 게임에 들어갈 때가 됐다.
"마멋들, 지금이야!"
"마멋!"
대기시킨 마멋들이 샤삭 튀어나와 나를 원형으로 둘러쌌다. 팔을 휘적대며 빙글빙글 강강술래를 돈다.
"군주님, 이건...?"
"의식이야. 픽업 때는 무엇보다도 기운이 중요한 법이거든."
테마곡 깔아놓기, 소환 버튼 눌렀다가 취소하기, 단챠로 제물 바치고 재가동하기 등등. 픽업 의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조금이라도 픽업 기물을 뽑을 확률을 높이기 위한 필사적인 발버둥이다.
물론 검증된 건 하나도 없다. 물 떠 놓고 비가 오길 기대하는 쓸모없는 민간신앙에 가깝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확률은 확률이고 수학적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하지만 만약, 만에 하나.
가챠의 신이 존재한다면.
민간신앙이 진짜라서, 이 의식들로 픽업을 뽑을 확률이 진짜 0.01%라도 올라간다면.
그걸 안 했다가 나중에 후회한다면?
의식을 치러서 손해 볼 건 없잖아?
이래서 종교가 생기는구나 싶다.
"마멋!"
"마머멋!"
마멋들이 덩실덩실 춤을 춰주니 나도 함께 텐션이 올라갔다.
팟 하고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왔다.
'지금이다!'
망설임 없이 소환 버튼을 터치했다. 그러니 내가 그린 소환진이 거대해지며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우르릉 쾅쾅!
먹구름이 끼고 번개가 친다. 어느새 두 개 더 추가된 마법진. 합계가 여섯. 확률이 강화된 픽업 소환은 무려 6위계의 마법이 되었다.
소환진에서 익숙한 마력구가 떨어지며 별 모양으로 번쩍인다.
"좋아, 와라!"
띠링, 띠링, 띠링!
대박이다. 첫 번째부터 3성이었다.
번쩍 빛이 일고 안에서 어떤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느낌 좋은데!"
첫 번째 형체가 정체를 드러내고.
: 마물 ☆☆☆ [케르베로스]를 소환했습니다.
"오오, 기물이야!"
"컹컹컹"
"컹컹?"
"헥헥."
머리 세 개 달린 강아지, 지옥의 수문장으로 유명한 케르베로스가 나왔다. 의외로 견종은 골든 리트리버였다. 털이 푹신해 보이는 친구였다.
소위 픽뚫이라 부르는, 픽업과 상관없는 기물이 나온 상황이었다. 성능 좋은 기물이기도 하고, 귀여우니까 마음에 들었다.
"어서 와, 케르베로스."
"컹컹!"
인간의 친구인 강아지답게 내게 반갑게 달려든다. 손을 핥는 혀가 세 개라 정신이 없긴 했다. 머리 셋 다 눈이 굉장히 맑았다.
"새 친구인 마멋."
"컹컹."
"입구를 지켜주는 마멋?"
마멋들과는 말이 통하는지 금방 친해지는 기색이었다.
소환이 계속된다. 마력구가 연속으로 떨어지며 마법 시전이 이뤄졌다.
: 장비 ☆☆ [사슬 장화]를 소환했습니다.
: 마물 ☆ [마멋]을 소환했습니다.
: 재료 ☆ [혼돈석 조각]을 소환했습니다.
: 마물 ☆ [유령마]를 소환했습니다.
: 장비 ☆☆ [미스릴 랜스]를 소환했습니다.
: 재료 ☆☆ [상급 돼지고기]를 소환했습니다.
: 마물 ☆ [유령마]를 소환했습니다
: 마물 ☆ [유령마]를 소환했습니다.
"벌써 아홉 번 끝나 버렸네. 기물이나 2성도 꽤 나온 건 좋은데 3성은 또 없었어. 그래도 마지막은 확정이니까!"
여기서 픽업인 듀라한을 뽑으면 된다.
확률도 그렇게 높은데 설마 안 나오겠어?
8%로 10연차면 거의 100%나 다름없다. 물론 실제로는 독립시행이라 50%가 조금 넘는 정도지만 100%라고 믿으면 어쨌든 100%가 된다.
"제발!"
"군주님, 실례에 사과드려요!"
마지막 소환진에 마력이 회전하려는 찰나, 내 머리에 무언가가 씌워졌다. 시트리가 마멋 인형 탈을 냅다 꽂은 것이었다.
"깜짝이야, 인형 탈은 갑자기 왜?"
시트리의 행동이니 이유가 있을 터였다. 고개를 돌리니 숲 북쪽에서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었다.
조그만 키에 화려한 망토, 얼굴에 쓴 가면은 본 적 있는 모양이었다.
마왕 세라펠이었다.
쟤 때문이었구나. 내 정체가 세간에 알려지면 옛날 일 때문에 곤란해질 일이 많다. 시트리의 빠른 판단은 옳았다.
승격 때문에 찾아온다고는 했었지. 아무리 자기가 관리하던 영역이라고는 해도 약속 시간도 안 잡고 막무가내로 들어오나. 지금은 내 앞마당인데 말이다.
"어휴."
덕분에 한창 기세를 올린 뽑기도 방해받았다. 딱 나올 때가 됐었는데. 그게 제일 아쉽다.
일단 소환을 일시 정지했다. 괜히 부정 타서 못 뽑으면 안 되니까.
나는 불청객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
현장에 도착한 마왕 세라펠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 역시 마법에는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마법사 게시판이야 젊은이들이 많아서 자기 마법을 자랑하기 바쁘지만, 본래 마법은 비밀스러운 신비다.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마법사라면 자신의 마법을 남에게 보여 주는 것도 꺼리고, 몇 위계에 도달했는지도 숨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늘에 자랑스럽게 펼쳐진 저 6위계의 마법진은 대체 무엇인가.
따라 해 볼 수 있으면 따라 해 보라는 듯, 숨기려는 기색은 하나도 없이 자신감이 가득하다.
"우와아."
머리를 있는 대로 치켜들던 세라펠은 자신이 어딜 걷고 있던지도 모른 채 걷다가 쿠당, 턱을 어딘가에 부딪쳐 버렸다.
"아파라앗."
세라펠이 턱을 쓰다듬으며 시선을 내리자 그가 있었다.
군주 아인.
불쾌해 보이는 표정이다.
"어머, 마멋아."
화악! 아인이 주먹을 치켜들자 시전되던 마법이 태엽이 풀린 시계처럼 일시 정지한다.
"저만한 6위계를 구축해 놓고 홀드까지 할 수 있다고?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대답 없이 세라펠을 내려다보는 군주 아인.
세라펠은 그제야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깨달았다. 아인을 보좌하는 하수인들도 그녀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다.
"뭐야. 지금 내가 대마법의 시전을 방해했다고 그래?"
눈을 번뜩 뜨며 미간을 찌푸리는 세라펠.
정작 그녀를 보며 아인은.
'그냥 일시 정지 눌러놨는데.'
자신의 던전에 처음 찾아온 손님을 어떻게 반겨 줄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한 번이다."
척, 군주 아인이 조용히 검지를 올렸다.
세라펠은 그것을 경고로 받아들였다.
한 번이라도 더 방해하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미. 그의 부관인 혈기사도 진중한 태도인 걸 보면 분명했다.
'중요한 마법이었나...? 하긴, 나도 구축형을 읽을 수 없을 정도야. 6위계. 상위 차원을 적어도 네 개 이상 관통해서 진을 쌓았어. 아인,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물론 정작 그가 했던 말에는 상당히 의미의 차이가 있었다.
―한 번 남았어요!
소환이 한 번 남아서 지금은 접대할 수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뜻이었다.
허나 그 짧은 문장은 세라펠이 아인에게서 제대로 된 마법사로서의 긍지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마왕인 자신을 무시한다면 전쟁조차 불사해야 하거늘, 그보다도 마법을 예우하겠다는 자세.
요즘은 보기 힘든 제대로 된 마법사다.
휙 몸을 튼 아인은 세라펠에게 흥미가 없다는 듯 제단으로 돌아갔다. 물론 약속 없이 찾아온 건 자신이지만, 그 태도에 세라펠은 역시 기분이 상해 버렸다.
'뿌리의 주인인 내가 직접 와 줬는데 대우가 이게 뭐야?'
그녀가 투덜대며 아인을 쫓았다.
"야, 아무리 그래도 뭐야. 무슨 마법인지 정도는 설명해 줘도 되잖아."
"친우라고 하지 않았나."
짧은 그의 대답에서 의미를 찾는 세라펠.
분명 던전 채널로 자신을 그렇게 불렀었지.
...마법을 방해하면 우호적인 관계는 끝이라는 의미인가?
얼마나 저 마법이 중요하면.
위대한 마법이라고는 직감했다. 관심을 주지 않아서 실망스러운 마음에 그를 방해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친우 사이가 끝나 버려.'
콜라를 못 먹게 되는 건 중대한 리스크였다.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동은 잠깐만 참아주자고 생각한 세라펠이었다.
홱, 아인이 주먹을 쥠과 동시에 마력이 화려하게 분출한다. 막대한 연료를 동력으로 정신없이 회전하는 마법진을 보고 세라펠은 넋을 놓았다.
이것이 군주 아인의 마법.
잘 짜인 기계장치가 작동하듯, 정교하며 아름답고, 강렬하다.
"...흐응."
마법진에서 쏟아지는 별무리의 반짝거림을 만끽하며, 세라펠은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25화. 신의 발굽 (1)
세라펠을 잠깐 기다리게 시킨 후, 나는 소환진 앞으로 돌아와 양손을 비볐다.
"잠깐 방해받긴 했지만, 이걸로 마지막 소환이야. 듀라한 뽑자, 듀라한!"
세라펠 덕분에 기껏 마멋들이 춤춰 준 의식 효과가 사라진 듯하지만 3성 이상 확정이 남아 있으니 어쨌든 좋았쓰!
네임드 마물 듀라한, 아니면 데스나이트라도!
3성 기물이면 뭐라도 합격이다. 상태창을 힘차게 터치하니 일시 정지한 마법진이 기세 좋게 회전하며 마력이 비처럼 쏟아졌다.
―띠링, 띠링, 띠링!
10연차의 마지막 소환답게 3성 확정이다.
제발 기물이 나와달라고 빌던 순간.
―띠링!
"어? 뭐야, 설마."
―띠리링!
"군주님, 이건!"
마법진에서 별안간 두 개의 행성이 더 떨어졌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파란 별무리가 번쩍! 무지개 빛으로 바뀌며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잠깐, 이거...!"
"마멋!"
"마머멋?!"
지켜보던 마멋들도 깜짝 놀라 방방 뛰고 난리가 났다.
별이 다섯 개. 심지어 무지개색.
"5성 영웅이야!"
―쐐애액!
하늘에서 빛이 떨어지고.
―히히힝!
내 앞에 멋들어진 유령마에 탑승한 푸른 머리칼의 기사가 한 명 나타났다.
목에는 꿰멘 듯한 일자 흉터가 길게 나 있다.
틀림없는 듀라한이다.
"신제 모리안. 소환에 응하였다만, 나를 부른 것은 그대인가."
날카로운 눈매에서는 패기가 넘친다. 고삐를 휘어잡으니 유령마가 육중한 앞다리를 들어 올렸다.
척, 그녀가 들고 있던 창을 휘두르며 나를 향해 외쳤다.
"계약은 거부하겠다. 나는 오로지 위대한 주인의 명만을 따른다. 그분께 보은하기 전까지, 두 아비는 섬길 수 없다!"
***
마계에는 국가가 없다.
힘이 강한 자가 귀족이라는 이름의 리더가 되어 영지를 통솔한다. 영지는 때로 던전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마왕의 좌에 오른 이들은 귀족들을 통솔할 수 있게 되나,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영지만을 가꾼다. 마계는 법도 인권도 없는, 힘이 전부인 야만적인 장소다.
무법지대를 방치하면 금방 공멸할 걸 알기에, 귀족들은 정장을 입고 예의를 갖추는 길을 택했다. 서로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조심하자는 공익적인 목표가 담긴 문화다.
그러지 않았다면 마계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는 땅이 되었으리라.
그렇기에 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영지권 바깥에 사는 마족은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한 명을 죽이고 백 걸음을 나아가면, 또 누군가를 죽이고 온 다른 이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처절한 야생. 싸움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휘말리고 죽을 수밖에 없다.
그 듀라한 역시 싸움이나 힘에는 관심이 없는 이였다.
듀라한은 데스나이트의 아종이다. 생전 기마병이었던 기사가 죽어 영체가 되면 데스나이트가 되고, 더욱이 참수를 당했다면 듀라한이 된다.
그 듀라한은 생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왜 참수당했는지, 인간일 때는 어느 왕에게 충성했는지. 머리통이 떨어진 탓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목표는 확실했다.
달리고 싶다.
그녀는 창을 휘두르기보다, 말에 타고 싶어서 기사가 되었던 듯했다.
광활한 평원을 누비고 싶다. 자신의 다리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신속의 세상에 들어서고 싶다.
그 일념으로 고삐를 쥐고 앞만 보고 달렸다. 뒤도 옆도, 발아래도 돌아보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에게 짓밟힌 마물과 마족은 점점 늘어났다. 그녀는 이름 있는 마물이 되었고 최흉의 던전에 입성했다. 정점의 마왕의 수하로서 달리게 됐다.
허나 경지에는 이를 수 없었다. 타고난 신체의 한계 때문이었다.
듀라한, 참수당한 기사. 그녀의 머리는 목 위에 붙어 있을 수 없다. 종족 특성인 저주 때문이다. 어떤 방법을 써도 고정할 수 없기에 평범한 기수처럼 말을 탈 수는 없다.
적을 향해 달리고 장창을 휘두를 때도 한쪽 팔은 반드시 머리를 품어야 한다. 부자유스러운 팔과 무너진 균형의 제약을 가지고는 한계가 있었다.
데스나이트의 최고봉에 오를 수는 있었어도, 영웅의 영역에는 들어설 수 없었다.
듀라한이 그렇게 던전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낭비하던 때였다.
영웅 한 명이 자신을 찾았다. 한낱 마물에게 초월자인 영웅은 존경스러운 존재였다. 그가 군주를 알현할 기회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군주는 즉 이 최흉의 던전의 마왕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평생 미물은 얼굴을 볼 일도 없는 그 절대자를.
"강해지고자 하는 마물은 앞으로 나오라."
뿌리에서 가장 강한 마물만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군주가 그리 말했다.
다들 부대에서는 몇천 마리의 마물을 통솔하는 강자들이거늘, 모두가 그의 패기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듀라한은 겁도 없이 가장 먼저 그의 앞에 나서서 무릎을 꿇었다.
"더 빨리 달리고 싶습니다."
예의 하나 없는 듀라한의 태도에 부관 영웅들이 긴장했으나, 군주는 불쾌한 기색 없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고는.
"좋다."
그의 강대한 마력으로 강화주문을 시전했다.
위대한 이의 축복을 받은 것만으로 듀라한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녀의 한계가 마침내 뚫리고, 더 높은 경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1초도 낭비하지 않고 땅을 달리며, 군주를 위해 전장을 신속으로 누비었다.
인간계에서 가장 험난하기로 유명한 협곡을 뛰어 넘나들 수 있었다.
"하하하하!"
그녀의 돌진을 막을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주군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더 빨리 대륙의 끝까지 달려가고 말겠다.
그 각오와 함께 조금 더, 조금 더.
속도의 한계를 돌파한 그녀는 마침내 영웅의 영역에 도달했다.
"여기인가."
떨어졌던 목은 원위치로 돌아와 있었다. 영웅의 경지에 도달한 그녀는 인과조차 무시하는 재능을 개방하여 저주를 극복한 것이었다.
돌아온 시야의 높이로 떠오르는 태양을 본 그녀는 승전보와 함께 귀환했다.
하지만 돌아갈 장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주군은 깨어나지 않는 잠에 들었고 던전이 산산이 해체되었다는 소식만이 들려왔다.
허망했다.
아직 털끝만큼도 은혜를 갚지 못했는데.
...지금부터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깃발을 들어, 자신의 창에 매달았다.
할 줄 아는 건 이것뿐이다. 그녀는 다시 고삐를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1년이 걸리고, 5년이 걸리고, 10년이 걸리도록.
되찾은 시야에서 바라본 대륙은 아름다웠다. 위대한 군주가 베풀어 준 자비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경치였다.
전부 그분의 것이 되었어야 마땅했거늘.
적어도 그의 명예만큼은 어디에나 퍼질 수 있도록, 그녀는 깃발을 대륙 전역에 펄럭이고 다녔다.
그 과정에서 몇 개의 전쟁에 휘말리는 일도 있었다. 국가를 무릎 꿇린 일도 있었다.
신의 발굽, 신제(神蹄).
사람들은 그녀를 기마를 가장 잘 다루었다는 여신, 모리안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런 것도 하등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그저 달리고, 또 달리기만을 반복했다.
갑작스레 마법진이 모리안을 감싸 여정이 끝난 것은 20년이 지났을 때였다.
***
: 도감에 [No. 102 신제 모리안]을 기록합니다!
[ 10 / 107 ]
"신제 모리안."
내가 소환한 듀라한은 영웅으로 진화해 있었다. 시트리처럼 비중 있는 마물이었던 기억이 난다. 분명 영웅들을 다 성장시키고도 마력이 남아서 마물에게 투자할 때가 있었다.
흘러내리는 푸른 장발은 한쪽 눈과 목의 상처를 다 가릴 정도다. 그 눈은 명백히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지금 마멋 로드의 모습이었다. 나 같아도 수상한 마멋이 다짜고짜 정직원으로 고용하겠다고 하면 아무리 계약서 내용이 좋아도 한 번 의심하고 보겠지.
하지만 지금은 인형탈을 벗을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 '신제'를 소환 계약한 거야? 세상에, 대체 너 뭐 하는 애야?"
그 원인인 세라펠은 어느새 내 옆에 총총 다가와서는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얘 때문에 내 정체를 얘기할 수도 없고. 신입사원이랑은 첫인상이 중요한데 말이야.
"새 영웅님인 마멋."
"어서 오시는 마멋."
"크릉, 크릉."
그나마 마멋들과 케르베로스가 모리안을 반갑게 맞아 주기는 했는데, 영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다.
"여긴... 설마 사바텀인가? 사바텀을 열었다고? 모욕이다! 그분만큼 이곳을 전능한 장소로 되돌릴 이는 어디에도 없다!"
모리안의 말에 세라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여기 출신이야? 혈기사도 그렇고, 이유 없는 소환은 아니라는 뜻이구나. 정신머리도 똑바로 박혔고... 마음에 드네."
팔짱을 끼고 싱긋 입꼬리를 올리는 세라펠.
얘는 몰라도 모리안은 오늘부터 우리 식구니까 잘 대해줘야지.
듀라한이니까 승마는 분명 좋아할 테고.
경마장... 재밌어하려나.
"모리안."
"무엇이냐."
"내 던전, 예전만큼은 못해도 분명 마음에 들 거야. 아래에 재밌는 시설이 있는데 속는 셈 치고 한 번 체험해 볼래?"
모리안은 인상을 찡그리고 눈치를 보았다. 시트리와 세라펠을 돌아보더니 결국 수긍했다.
좋아, 손님맞이의 시간이다.
이사해 오고 처음 찾아온 손님이니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로 2층까지 직행한다. 경마장 앞에 도착해 간식거리로 콜라와 콩조림을 한 접시씩 건네주었다.
"와아, 콜라다! 이것만 기다리고 있었어."
"...이건 뭔가?"
"어머, 소인도 주시나요? 송구하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시트리.
세라펠은 기다리지도 않고 콩을 먹이 저장하는 마멋들처럼 볼에 잔뜩 집어넣었다. 나름 마왕이라고 자세에 기품은 있었다.
"어머, 고소해라."
"...이 음료는 무엇인가?!"
모리안은 미심쩍어하다가 콜라를 한 모금 맛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도 아직 의심은 거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디 보자.'
나는 경마장 문을 열기 전에 상태창부터 확인했다.
[유령마무스메] 시설 현황
[경마장] Lv. 1 (2단계 강화 가능)
[고급마구간] Lv. 1 (2단계 강화 가능)
: 시설 경험치가 충분합니다!
: 금화 50개로 강화가 가능합니다!
침입자들을 격퇴한 덕에 시설 경험치가 쌓여서 레벨을 올릴 수 있게 됐다.
실전은 한 번밖에 없었는데 벌써 2나 오른다. 침입자들 레벨이 높았으려나. 1레벨 시설이라 금방 오른 걸 수도 있고.
'혼돈석이 안 드는 강화는 환영이지.'
금화가 꽤 많이 들어가긴 하지만 혼돈석으로 하는 강화에 비하면 한참 저렴하다.
안 할 이유가 없었기에 상태창을 터치해 시설 강화를 완료했다.
: 축하합니다! 시설 레벨이 올랐습니다!
[경마장] Lv. 1 → Lv. 3
[고급마구간] Lv. 1 → Lv. 3
어디 어떻게 바뀌었나 볼까. 덜컹, 경마장의 대문을 열고 안을 확인했다.
"와아."
시트리가 가장 먼저 감탄을 냈다. 나도 이건 상당히 놀랐다.
지금까지 400미터 직선 트랙만 있던 조그마한 경마장은 원형 트랙으로 확장된 모습이었다. 꼭 올림픽 경주 경기장 같달까. 전체 트랙 길이도 1,600미터까지 늘어났다.
양쪽으로는 관중석이 생겼다. 이제 흙밭에 대충 서서 나무판자에 기대 구경하지 않아도 된다.
"뭐야아? 던전에 이런 시설이 왜 있어? 완전 재밌어 보여. 얘 마멋아, 너 진짜 뭐야?"
"이건...."
세라펠도 세라펠이었지만 가장 반응이 좋은 건 역시 모리안이었다.
넋을 잃고는 유령마를 끌고 트랙으로 들어가더니 돌멩이 하나 없는 고른 지면을 보고 감탄한다. 게이트를 발견하고는 제대로 신이 난 기색이었다.
말타기를 좋아하는 듀라한이니 마음에 들 줄 알았다.
이만한 경기장이면 그 녀석도 달리기에 만족하려나.
"잠깐 구경하고 있어."
나는 경기장 옆의 마구간에서 녀석을 데리고 나왔다.
"푸르릉."
포포는 처음엔 귀찮은 기색이었지만 경기장 트랙을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흠, 이 정도면 뛰어 줄 만하지'라고 말하는 듯 갈기를 쫙 휘날렸다.
포포와 함께 돌아오니 모리안이 입을 떡 벌리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수 아닌가. 그대는 신수의 기수인가?"
"어때, 우리 포포랑 경주 한번 해 볼래?"
내 질문에 모리안이 이빨이 드러나도록 환한 미소를 지었다.
26화. 신의 발굽 (2)
영문 모를 소환 때문에 모리안은 혼란스럽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기장에 들어선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가슴 속이 벅차올랐다.
한눈에 그 장소가 무엇을 위한 곳인지 깨달았다. 유령마 경주를 위한 경기장이다. 여태 끝없는 벌판을 달려오긴 했어도 이토록 명확하게 목적지가 정해진 경주 무대는 처음이었다.
고른 흙바닥에선 달리는 것 외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배려심이 느껴진다. 공정한 출발을 위한 게이트. 판독을 위한 수정구가 몇 개나 달린 결승점은 그녀의 승부욕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자신의 20년 전 고향은 과거의 위상을 찾아볼 수 없게 몰락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길을 찾아가고 있음도 사실이었다.
이만큼이라도 복원을 가능했던 건 저 새로이 취임한 던전군주 덕이었겠지.
그가 대체 어떤 인물인지 관심이 생길 즈음, 마구간과 연결된 경기장 입장문이 활짝 열렸다.
군주는 한 마리의 말에 탄 채였다. 그를 보고 모리안은 불끈 고삐를 쥐었다.
종말의 바이콘. 신수의 영역에 사는 마물이다. 말이라는 종에서는 정점이다. 기마병인 모리안은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짐과 함께 달려 보겠는가, 신속의 기수여."
"본관과 승마로 결투하자는 의미인가."
"결과에 따라 귀관이 원하는 보상이 있을 것이다."
"원하는 보상이라니? 본관은 선대 군주를 알현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 불가능한 소원을 그대가 이뤄 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군주가 여유롭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째서일까, 모리안은 그 마멋 군주가 마치 어떤 기적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얼마 만일까.
모리안의 심장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승마 경주로 펼치는 대결, 그것도 대륙을 평생 찾아다닌들 구경도 못 할 신수와의 싸움이다.
여기서 물러서는 건 정신이 제대로 박힌 기마병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을 행동이다.
애마의 안장에 올라탄 모리안은 창을 등 뒤에 매달았다.
"군주여, 아직 그대의 존함을 듣지 못했다."
"아인이다."
"군주 아인. 본관은 본 경주에 사력을 다할 것을 맹세하겠다."
다그닥, 게이트에 아인과 모리안이 들어섰다. 관중석을 채운 마멋들이 환호를 보낸다.
긴장이 장내를 지배하기를 잠시.
덜컹, 게이트가 열리고.
홰액!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모리안. 몇 번이고 평원을 함께 달렸던 유령마는 마치 자신과 한 몸 같다. 1초도 안 되어 최고 속력에 도달한다.
"아니...?!"
그런 그녀의 옆을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어 마력의 돌풍을 일으키는 존재가 있다.
화려한 갈기를 휘날리며 눈빛을 번득이는 종말의 바이콘. 신수에 어울리는 품격을 자랑하며 힘차게 지면을 박찬다.
고삐를 쥔 아인은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다.
그의 위엄을 직접 목격한 모리안은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인정해야만 했다.
이 남자에겐 한 던전의 군주를 맡을 품격이 있다.
하지만 정점의 마왕에 미치는 이는 어디에도 없을 터.
"이럇!"
매서운 기세로 달려 나가는 두 명마.
정작 신수 위에 탄 아인은.
'아이고, 엉덩이 아파라.'
맹렬하게 달리는 포포 덕분에 매달린 종이 인형의 기분을 체험 중이었다.
분명 핸들은 내가 쥐고 있는데 얘를 운전하고 있다는 감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난폭한 자율주행 기능이 켜진 기분이다.
아인은 밀려오는 구토와 꼬리뼈의 통증을 참으며 간신히 포포의 등 위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지만.
"역시 군주님, 신수를 몰고 가시면서도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시네요."
"지난번도 그렇고 흐트러짐이 없네. 마멋 주제에 어디서 저렇게 온갖 문무를 익혔는지. 어느 귀족 출신이려나. 혈기사, 넌 알아?"
"후후, 신하로서 군주님의 정보를 누설하는 경솔한 짓은 하지 않는답니다."
다소곳하게 앉은 시트리를 보고 코웃음을 치는 세라펠이었다.
"1코너를 지나는 마멋! 듀라한이 단숨에 안쪽으로 파고드는 마멋!"
모리안의 기술은 정확했다. 평생을 말 위에서 보낸 듀라한이다. 그녀의 유령마가 몸을 기울인 채 안쪽 펜스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맹수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그러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모리안이 총알처럼 쏘아졌다. 그녀가 영웅으로서의 재능, 기프트를 사용한 것이었다.
인과의 역전이다. 그녀는 이 코너에서 '속력이 떨어진다는 결과'를 역전시켜 오히려 가속했다. 듀라한임에도 머리가 목 위에 붙어 있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두 명마의 거리가 벌어진다. 직선 코스에 들어서서는 더욱 격차가 명확해졌다.
'코너에서 속도는 우위다. 결승점은 다음 2코너를 빠져나가고 대략 200미터. 가속을 붙이기에는 부족한 길이야.'
순수한 속도 승부라면 패배할 수도 있다. 상대가 다른 무엇도 아닌 신수 아포칼립스 바이콘 아닌가.
하지만 여기는 코너가 낀 타원형 트랙이다. 기술도 필요한 진짜 승마 경주. 모리안은 결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직선코스에서 선두를 유지하면 다음 코너도 먼저 돌파할 건 자명한 일이다.'
그걸로 승리는 확정된다. 모리안은 도주를 선택했다. 고삐를 내리친다. 유령마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콧김을 뿜어냈다.
더욱 빨라지는 속도. 마침내 2코스에 진입하고.
"마머멋! 여전히 선두는 듀라한인 마멋! 거리 차이는 1마신! 1마신인 마멋!"
말 한 마리만큼 벌어진 둘 사이의 거리. 코너는 고작 400미터다. 모리안이 승리를 확신한 순간이었다.
―쐐애액!!
우측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전보다도 훨씬 강력해진 푸른 마나가 불꽃 형태로 승화하며 내뿜는 고열이었다.
"아니?!"
군주 아인의 자세를 보고 모리안이 탄성을 내질렀다.
엉덩이를 쭉 하늘로 뻗어 들고 상체를 고꾸라뜨릴 듯 앞으로 숙인 자세.
정면에서 보면 바이콘의 두꺼운 목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각도다.
그 기묘한 자세의 의도를, 모리안은 금세 깨달았다.
"공기저항을 없앴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속도에서 역전당하다니, 그것도 코너에서.
이만한 저력을 어디에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모리안은 그제야 자신의 유령마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 경주 길이는 한 바퀴를 조금 넘는 1,800미터이다. 지금 그들은 골인 지점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벌써 1,500미터 가까이 뛰었다. 모리안은 그 구간을 내내 전력으로 도주해 뛰어왔다. 말이 지칠 만도 했다.
하지만 아포칼립스 바이콘은 그간 어디에서 뛰고 있었나.
초반 거리를 유지한 후로는 무리해서 추월하려 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1마신 뒤를 유지했다.
"1마신...!"
모리안은 비밀을 깨달았다.
자신은 계속해서 속도를 올려 왔다. 가속도를 유지한 경주였다. 그만큼 선두에서 뚫어야 하는 공기저항도 단단했다.
속도가 빠를수록 공기는 단단한 벽이 되어 머리를 덮친다. 현재 속도가 시속 100km를 넘을 정도임을 생각하면.
자신과 유령마가 그 공기의 벽을 뚫고 흘려내 저항이 없어지는, 마치 태풍의 눈처럼 조용해지는 편안한 구간.
그곳이 바로 1마신 뒤였다.
군주 아인과 바이콘은 산보라도 하듯 편안하게 힘을 아껴 온 것이었다.
"처음부터 추월할 힘을 남겨놓을 생각이었나!"
스쳐 지나가는 아인이 그녀에게 말했다.
"도주마는 선행마에게 추월당하는 법이지."
"뭐라고...?"
모리안은 목의 상처가 아릿하게 따끔거렸다.
소름이 올라온 덕분이었다.
'나를 도발해서 도주하게 한 것도 처음부터 모두 전략이라고? 선행마? 승마에는 내가 모르는 체계적인 전략이 더 있다는 의미인가?'
기프트조차 쓰지 않고 영웅인 자신을 추월해 간다.
단순히 달리기만 해서는 알 수 없는 경주의 세계. 그리고 그 너머를 이미 저 군주는 알고 있다.
'당신은 대체 누구지.'
모리안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았다. 자신을 추월해 쏜살같이 달려가는 군주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예술 작품과도 같았다.
"골인! 군주님이 1착으로 들어온 마멋! 승부가 결정된 마멋!"
마멋들이 벌떡 일어서서 짝짝 박수를 보낸다. 모리안은 유령마의 속도를 늦추며 터지는 축포 속에서 그와 마주 섰다.
"신제 모리안이여."
"...호명하셨나이까, 군주님."
"더 필요한 것이라도 있는가."
모리안은 말에서 내려 처음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명백히 아인을 군주로 인정한 태도였다.
"없습니다. 다만 본관이 원하는 것이라면."
"훌륭한 경주였다. 계속 달리고 싶은가."
"...그렇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라."
희한한 일이었다.
언젠가 모리안이 들어 본 적 있는 말투였다.
"그럼 내려가서 식사를 하지."
모리안은 아직도 두근거리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며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
"맛있어! 뭐야 이거, 분명 풀떼기였는데. 위에는 뭘 끼얹었어? 유령 지네 즙이야?"
"으악, 입맛 떨어지게. 그걸 왜 뿌리는데."
"왜, 몰랐는데 그럴 수도 있지."
세라펠은 투덜대면서도 전채로 내놓은 상추 샐러드를 신나서 아삭아삭 씹어먹었다.
위에는 양파와 할라피뇨를 으깨서 올리브 오일과 섞은 드레싱을 뿌렸는데, 입맛에 맞았나 보다.
남의 집에 처음 놀러 와서 식탁까지 바로 앉는 게 뻔뻔하기도 한데, 나름 집들이니까 나도 접대하는 재미가 있다.
"오늘 메인 요리는 이거지."
아까 뽑기에서 재료로 고급 돼지고기가 한 토막 턱 나왔었다. 깔끔하게 손질까지 된 삼겹살이 통째로 열 근 소환됐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커다란 식칼로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잘라낸다. 커다란 중화 프라이팬에 튀기듯 굽기 시작하니 기분 좋은 냄새가 살살 올라온다.
"우와, 맛있겠다... 무슨 고기야?"
"군주님의 비밀을 너무 알려고 하지 마세요. 아무리 마왕님이라도 그 이상은... 아시죠?"
"엄청 깐깐하게 구네. 야, 신제. 너도 여기 출신이었다며. 이 역사적인 던전에서 고기나 구워 먹는 저 마멋을 내버려둘 거야?"
"본관은 군주를 인정했다."
잡담 떠는 소리를 들으며 힘차게 팬을 휘둘러 불맛이 고루 배도록 저어 준다. 뜰채로 건져 기름을 털어 내고 소금을 꼬집어 가볍게 간을 해서 완료.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려내니 향기를 코로 빨아들이고는 세라펠이 참지 못하고 바로 포크를 휘둘렀다.
"맛있다아... 엄청 쫀득쫀득해. 고소해. 와앗, 뒤에는 짭쪼름해."
"말하면서 드시지 마세요, 품격이 떨어진답니다."
"얘들 진짜 겁대가리가 없구나. 야, 나 니들 뿌리 주인인 마왕이거든. 어머, 그건 뭐야?"
세라펠이 우아하게 식사하는 시트리의 손을 가리켰다.
"젓가락이랍니다. 처음 보셨겠지요. 아인 군주님께서는 주로 이 도구로 식사를 하셔요. 익숙해지면 꽤 편하답니다."
"이게 편하다고? 못 믿겠는데...."
"현미밥 대령입니다요. 된장국도 있어."
된장은 춘장을 만들던 방법과 비슷한 요령으로 만들어봤다. 요리야 매일 하고 있으니 경험치가 금방 쌓였는데, 2레벨로 오른 주방 시설 덕에 된장도 짧은 시간에 풍미 있게 만들어졌다.
"오, 오옷... 녹는다앙...."
세라펠이 된장국을 쭉 들이키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음에 들었나 보네.
"고기 넣어서 먹어도 맛있어."
"진짜다... 기름이 둥둥 떠서 더 맛있어."
"고기는 상추 싸서 먹어도 맛있고."
"상추 완전 좋아. 내 던전에 자라는 풀은 다 시들해서 절대 이렇게 못 먹거든. 볼래?"
세라펠이 수정구로 사진을 몇 장 보여 줬다. 말라 비틀어진 게 엉망진창이었다.
"으악, 혹시나 집에 돌아가서 그거 뜯어먹지 마. 배탈 나겠네."
"얘, 마멋아. 나 이거 음식 사진 게시판에 올려도 돼?"
"게시판에?"
"응, 자랑하려고."
"상관은 없는데... 다른 건 안 나오게 해."
"아싸."
세라펠이 신나서는 수정구로 식탁을 요리조리 촬영했다.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나고 지상으로 다시 올라오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전성기의 사바텀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나쁘지 않았어. 승급한 보람은 있네. 합격이야. 아, 참고로 던전 이름은 뭐야?"
"파밍힐이라고 붙였어."
"뭐? 아하하핫!"
세라펠이 깔깔 웃었다.
"마지막까지 마음에 드네. 그럼 또 봐."
포탈을 타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세라펠.
합격이라니, 오늘 방문은 일종의 시험이었나.
뭐, 나름 북적거려서 재밌었으니 나도 나쁘지 않았다.
"군주님."
모리안이 내게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까 식사할 때부터 어딘가 쭈뼛거리는 느낌이었다.
"본관에게 맡기실 임무가 무엇이기에 이런 분에 넘치는 친절을 베푸시는 것입니까? 본관이 넘어야 할 고행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선대 군주님을 알현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임무도 수행해 보이겠습…."
"아, 잠깐만."
나는 아까부터 답답했던 마멋 인형 탈을 비로소 벗었다. 세라펠이 있어서 그동안 갑갑했다. 밥 먹기도 힘들었다.
"응, 모리안. 뭐라고 했어?"
모리안은 나를 보고 시간이 정지한 듯 얼어붙더니, 잠시 후 털썩 무릎을 꿇었다.
27화. 불사조 침대 (1)
"주군!! 살아 계셨군요, 전하!!"
"어우 야, 전하는 뭐야 전하는. 얘가 시트리보다 더 심하네. 시트리, 얘 좀 떼어 줘."
한참이나 모리안에게 바짓가랑이를 붙들려 움직이는 데 애로사항을 겪어야 했다.
"주군, 언질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 외부인이 있었잖아."
모리안이야 이제 우리 식구지만, 세라펠에게 내가 전 마왕이었음을 들켰다간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나 버릴 게 틀림없다.
아직 나도 접근 못 하는 재보 창고를 노리고 여기저기서 들쑤실 게 분명하다. 마왕 좌에 앉아 있는 세라펠 본인도 더 높은 자리를 목표로 하고 있다니, 군대를 몰고 쳐들어올지 모르고.
정작 환생한 나는 마법 조금 쓰는 것 말고는 별 힘이 없는데 말이다. 밖에서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사서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사절이다.
"어떻게 장만한 우리 집인데. 착실하게 가꿔 나가야지. 그치, 케르?"
"왕왕."
"헥헥."
케르베로스에게 남은 삼겹살을 주니 신이 나서 받아먹고는 벌러덩 드러누워 내게 훤히 배를 드러냈다. 긁어 주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군주님, 케르베로스 님은 강력한 마물이시죠. 층계의 방어를 맡기시겠어요?"
"배치 말이구나. 음, 시트리 네 말대로 한 번 정리할 때가 되긴 했어."
나는 상태창을 터치했다.
[던전 현황]
▶ 보유 기물
▶ 영웅
[혈기사 시트리]
[신제 모리안]
▶ 마물
▶ 네임드
[아포칼립스 바이콘 (포포)]
▶ 일반
케르베로스 (케르)
마멋(농부) x 22 마멋(일반) x 35
유령마 x 17 미믹 x 24 슬라임 x 112
태양슬라임 x 7 유령지네 x 21
"마멋들은 언제 이렇게 늘어났대."
매일 무료 뽑기에서 꾸준히 나오긴 했지.
태양이도 먹이를 뇸뇸 흡입하고는 금방 여러 개로 분열했다.
나는 던전 지도를 열어 지휘 스킬을 터치했다. 기물의 진형을 짜주고 전략, 전술을 설정하는 항목이 나타났다.
"이것도 오랜만이다."
"케르베로스 님은 본래 파수견이지요. 입구에 배치하는 게 맞지 않을지요."
"이론상으로는 그런데 너무 정 없잖아. 비 오면 쫄딱 젖는 데다가 혼자 밖에서 심심할 텐데."
"왕왕."
"본인도 좋다고 하시네요."
하긴 강아지를 집안에서 키우면 애가 더 스트레스 받기 마련이다. 풀어 둘 때는 풀어 줘야겠다.
"알았어. 케르는 입구 마당에 편성, 소극적인 방어 태세로 후열 배치야. 혹시나 침입자를 발견하면 [위협] 스킬로 쫓아내 보고 안 먹히면 바로 후퇴해서 모리안에게 보고해. 매일 저녁은 들어와서 같이 먹고."
"왕!"
"입구 수호자는 정해졌네요. 현재 저희 던전은 5층이지요. 5층은 물론 군주님의 공간이고요. 각 층계마다 수호자를 배치하는 걸 추천드려요."
시트리가 좋은 포인트를 짚어줬다. 던전에는 층마다 중간보스가 기다리고 있는 게 국룰이니까.
뭐, 침입자들에게 어서 옵쇼 하고 던전에 쳐들어오라고 홍보하고 다니지는 않겠지만. 어디까지나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서다.
"2층은 모리안이 맡아줘. 유령마도 그렇고, 경마장은 전문가일 테니까."
"충!"
모리안이 절도 있게 각을 잡았다. 등에 꽂힌 깃발이 자랑스럽게 펄럭인다.
얘 말투가 시트리보다 심각한데 앞으로 안 나으려나.
"시트리, 그리고 너는...."
모리안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라고 하려 했더니 입을 꽉 다문 게 영 심기가 불편해 보이셨다.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었어?"
"유령마는 저도 잘 모는데요. 방금 들어온 신입한테 그렇게 쉽게 줘 버리시다니요."
아, 그래서 삐지셨구나.
하긴 시트리는 내 던전에서 첫날부터 함께 했으니 더 대우를 해 주는 게 맞는 이치다.
"시트리는 1층 미궁 수호자를 맡을래?"
"군주님의 명은 감사하지만 겨우 1층은...."
깊을수록 좋은 건가? 기준을 잘 모르겠네.
"그럼 계속 내 호위를 할래?"
"직속 호위! 후후, 당연히 소인이 맡아야 할 책무이지요. 군주님의 배필... 아니, 보필은 맡겨만 주세요!"
시트리가 기뻐하며 폴짝폴짝 뛰었다. 좋아해 줘서 다행이었다.
오늘은 새 식구도 많이 늘었고 여러 일이 있었으니 이쯤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TV와 소파가 설치된 아늑한 거실을 넘어 침실로 들어간다. 개인실은 내 마력으로 승인해야만 들어올 수 있다.
"엇차."
샤워하고 침대에 누우니 살짝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동안 조금씩 걸리던 부분이었는데, 던전 승격을 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난하다.
"침대가 딱딱해."
거실은 괜찮지만 내 침실은 세팅이 안 되어 있었다. 때문에 황실령 시장에서 적당히 사 온 이불을 겹겹이 깔아 침대를 만들어놨다.
하지만 리넨도 아닌 양털 이불을 겹쳐놔 봤자 뻣뻣함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 짚단을 깔까도 생각해 봤는데, 금방 벌레 먹을 것 같아 위생상의 이유로 포기했다.
"베개랑 침대를 새로 사야겠어."
황실에서 쓰던 침대도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 기왕이면 황제가 쓸법한 최고급품에 누워 자고 싶었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 잠자리가 불편한 것만큼 짜증 나는 일은 없다.
푹신한 침대가 갖고 싶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 황제의 침대는 뭐로 만들었을까?"
아무리 이 가짜 중세 시대라도 그렇게 기술력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나름 명품 브랜드가 옷이나 시계도 판다. 작지만 주식 시장도 있으니까 비교적 근대에 가까운 듯하기도 하다.
정보를 얻을 만한 곳이 어디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세라펠이 말했던 마법사 게시판이 떠올랐다. 나는 거실로 나가 TV를 조작해 보았다.
"오."
[마법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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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이렇게 사람이 많다고?"
벌써 자정이 다 되어가건만, 시간을 절찬리에 낭비 중인 마법사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다.
물론 침대 재질을 찾으려고 한밤중에 벌떡 일어난 나도 할 말은 없었다.
제목) 4위계 어떻게 가는지 알려 달라고
작성자) 냉법
오늘 안에 안 알려 주면 바지에 똥쌈
└원을 4개 그림
└마력을 넣음
└이게 어려움?
└뿌다닷
제목) 불사조깃털 완드 20골드 비싸요?
작성자) 애기븝미
오늘 샀는데 사용감이 좀 구려요
└정보 : 불사조는 토벌이 불가능함
└팩트는 불사조 템이 시장에 있을리가 없음
└그거 짝퉁임 금화 20개 날리셨음
└아
대륙 전역의 온갖 마법사들이 별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인족과 마족도 다 섞여 있는 듯했다. 마법사이기만 하면 종족에 대한 편견은 없나 보다.
제목) 님들아 오늘 저녁 평가좀
작성자) 방구석경비원
[사진]
└일기장 사용 자제좀요
└여기 마법사 게시판임
└이분 마법사 맞긴 함?
└6위계임 깝 ㄴㄴ
└2위계 아래다에 마석 2개 겁니다
└인증빵 뜰래
└제 마법은 천박한 분과 겨루는 데 쓰지 않습니다
"이거 우리 집 저녁인데?"
익숙한 식탁 풍경이 올라와 있어 닉네임을 확인하니 [방구석경비원]이 작성한 글이었다.
어디서 본 기억이 있어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던전 메신저를 열어 예전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방구석경비원] 아 뭐야 계정 이거 아닌데
[세라펠] 어흠, 아인 게 있느냐
"세라펠이네."
[방구석경비원]
[게시글 10175 / 댓글 87122]
게시글과 댓글 숫자를 보면 활동을 어지간히도 열심히 하는 모양이다.
거의 하루 종일 게시판만 들여다보는 수준인데. 얘는 자기 던전에서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익명 게시판에서 아는 척하기도 뭐하고, 정보가 목적이니 나도 일단 적당히 닉네임을 입력해 글을 써 보기로 했다.
게시판에는 생각한 글자가 마력으로 타이핑되어 업로드되는 방식인데, 또 스킬의 영향인지 글자가 알아서 자동 완성되어 버렸다.
닉네임도 가장 많이 보이는 동그라미 두 개를 따라서 00이라고 적었는데, 알아서 '오르'라고 자동 변형됐다.
제목) 질문에 대답하라
작성자) 오르
가장 푹신한 침대와 이불을 제작하려 한다.
어떤 재료를 사용해야 하는가?
첫 글이니 예의를 갖추려고 했는데 굉장히 버릇없어져 버렸다.
다행히 나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다들 친절하게 답글을 달아 주었다.
└푹신한 이불은 속재료가 중요하지
└황금 양털 이불 아니야?
└아까 누가 불사조 얘기했는데
└불사조 깃털이 갑임
└불사조털 이불을 덮어본 사람이 있음?
└5좌 마왕 이불이 불사조 깃털임 돈지랄 자랑한다고 신문에 인터뷰한 적 있음
└금화 백만 개는 줘야 한다던데
└내가 옥스 부관일때 딱 한 번 덮어 봤음. 그냥 차원이 다름
└무게감이 없는데 부드러움만 있음 말로 설명 못 함
└근데 불사조 깃털을 어떻게 모아 옴?
└못 모으지 그러니까 저 가격이지
└전설급 신수에요 A급 모험가 파티가 달라붙어도 토벌 못 해요
└데박박
└나도 누워보고 싶당
"불사조 깃털이구나."
좋은 정보를 얻었다. 직접 사용해 본 사람의 증언이 있으니 꽤 신빙성이 있겠다 싶었다.
말로 설명 못 할 편안함이라니, 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저런 표현을 쓰는 걸까.
"결정했어. 불사조 깃털 침대를 만들자."
불사조, 피닉스라고도 부르던가.
3성 마물이다. 옛날에 던전에 몇 마리 있었던 것 같다.
어디 있는진 몰라도 걔들을 찾아보면 깃털 정도야 빌려주지 않을까.
그런데, 모든 이용자가 친절한 건 아니었다.
└못 보던 닉인데, 얘 뉴비 아니야? 뉴비는 닥눈삼이나 해. 마법사 인증이나 하고 질문글 올려. 공지에도 적혀 있잖아.
세라펠이었다. 공지가 있었구나. 텃세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건 내가 나빴다.
"인증이라."
기왕 편안함이 올라간 덕에 잘 쌓여 가는 마력을 낭비하기는 좀 그렇고.
"마침 열두 시가 지났네."
오늘의 무료 가챠가 리셋됐다는 의미다. 나는 상태창을 열어서 단챠 소환을 누르고 수정구로 녹화를 시작했다.
"자, 오늘은 뭐가 나올까."
깜깜한 방, 침대에 엎드려서 쌓여가는 마법진을 지켜보는 것도 나름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네 개의 마법진이 맹렬하게 회전하고.
―화악!
: ☆☆☆ 불멸자의 투구를 소환했습니다!
"오, 나이스. 3성이다."
머리를 모두 감싸 주는 풀헬름이다. 세련되게 빠진 새카만 투구를 슬쩍 써보니 가볍고 시야 확보도 잘 되는 게 착용감도 좋았다.
"이건 써먹을 데가 많겠어. 소환 장면만 빼고 업로드해야겠다."
제목) 제목없음
작성자) 오르
[영상]
└와
└4위계인데?
└진 그리는 속도 미쳤다
└4진 어느 평면에 그린 거임?
└전대륙수인마법협회입니다. 회원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DM 부탁드립니다.
└이 정도면 5위계나 6위계 이상이시겠는데
└아까 자칭 6위계라던 분 어디 감
└인증빵 하신다던 분
음... 그렇게 대단한 거였나?
축약어가 안 보이는 각도였기도 했고, 시전을 끝까지 보여 주진 않아서 소환 마법임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듯했다.
세라펠은 더 댓글을 달지 않았는데, 대신 DM이 와 있었다.
[방구석경비원] 선생님 안녕하세용
[방구석경비원]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몇위계이신지 여쭤봐도 될가요
[방구석경비원] 뉴비가 아니신거 같아서용
흠.
어째 DM에서는 말투가 굉장히 공손해졌다.
불특정 다수 앞에서는 난동 피우다가도 일대일로 대면하면 급격히 얌전해지는 타입의 성격이 있곤 하지. 그런 건가.
의외네.
[방구석경비원] 근대용근대용
[방구석경비원] 불사조는 진쟈로 댕세거든용
[방구석경비원] 그정도로는 못잡을 수도 잇어용
[방구석경비원] 죽을수도 잇거든용..?
초면인 사람도 걱정해 주고, 오지랖이 넓은 관리인이었다.
[오르] 배려에 감사하지
짧게 답장한 후 게시판을 종료했다.
다음 날, 나는 시트리를 불렀다.
"불사조 찾으러 가자."
"불사조 말이신가요, 네. 호위는 맡겨 주세요!"
"잠깐, 전설급 신수인 불사조 말입니까? 군주님의 안위가 우려됩니다만."
모리안은 염려를 내비쳤지만 시트리는 외출을 나갈 수 있어 신이 난 기색이었다.
나는 불멸자의 투구를 쓰며 짐을 챙겼다.
"전설급 마물 토벌하려면 모험가 라이센스 필요하던가?"
28화. 불사조 침대 (2)
"A급 모험가가 몇 명이 투입됐는데 그깟 던전 하나를 토벌 못 하는겐가! 일주일이나 지났단 말일세!"
니클라스 2황자가 모험가들을 한데 모아 놓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길드에 지불한 알선비, 이동비에 계약금으로 지불한 선금까지 벌써 금화를 셀 수 없이 지출했다.
1주일 안에 숲 정리가 끝난다는 그들의 말만 믿고 벌목할 나무꾼들도 섭외해 준비했다. 숲을 개간한 후 생긴 땅에는 새로운 도시계획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기한이 넘어가 겨울이 되면 사업은 또 1년이 늦춰지고 당연히 비용도 추가된다.
사업이란 게 그렇다. 한 군데가 막히면 댐 전체가 넘쳐 흐르듯 단순히 모험가 파티에 소모된 금화만 날리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런 긴박한 니클라스의 심정을 이해하는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마땅한 결과가 나오기는커녕 모험가들은 황실령에 죽치고 앉아 지지부진 숲 탐색만 반복할 뿐이었다.
"황자 전하, 기록 결과를 직접 보여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던전은 당초 저희에게 의뢰하셨던 최하급이 아니었습니다. 3층에서 끝날 규모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대륙의 내로라하는 모험가들인 자네들이 그토록 애를 먹는단 말인가?"
"그래서 추가금도 받지 않고 저희 인맥을 동원해 A급 파티는 가능한 한 모두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던전 탐색을 이어 가고 있으니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시지요."
대장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문가가 저리 나오니 니클라스로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실제로 하루에도 몇십 명씩 던전에 들락대는 건 사실이었다.
그 안에서 뭘 하는진 모르겠지만.
'A급 최강자라던 백금의 놀란도 그 던전의 군주로 추정되는 여자에게 깨져 버렸지.'
애초에 A급들에게, 아니. 모험가들에게 맡겨서 해결될 건수이긴 한 건가?
비상 회의를 연 니클라스에게 비서관이 간언했다.
"A급들로 안 된다면 S급을 데려오면 됩니다. 더 강한 모험가면 해결하지 않겠습니까."
"명답일세! 하하하하! 죽음의 숲 개간이 코앞이군!"
이쯤 되면 모험가에게 맡길 게 아니라 다른 수단을 강구해 볼 만도 하건만, 니클라스는 무능한 신하들의 충언 아닌 충언을 따르기를 택했다.
그 광경을 본 율리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황실령을 잠시 떠났다.
던전 토벌대가 본격적으로 구성되면 틈을 타 아인을 빼 올 생각이었건만, 니클라스의 무능함을 보면 택도 없게 생겼다.
그녀가 찾은 곳은 황실령에서 며칠 북부로 가면 나오는 국경지대, 베른하이츠 공작령이었다.
"존안을 뵙습니다, 황녀 전하. 철과 흙바람이 난무하는 땅에는 어인 일이신지요."
베른하이츠 가문은 제국 건국 때부터 황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의 협력을 받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각하의 영지에서는 기이한 마물이 다수 목격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시시포스 산맥 말씀이시군요. 맨몸으로는 오를 수 없는 골짜기 지형의 험지이기도 하고, 왕국과의 국경지대인지라. 양측 다 접근할 일이 없는 장소이기에 천 년 넘게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미지의 장소입니다."
"전설급 마물도 서식하고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영지로 넘어오는 위험한 마물은 기사단이나 모험가들이 토벌합니다만, 손을 못 대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인력이 없어 방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를테면?"
"최근에는 불사조도 목격되었습니다."
공작의 대답에 율리안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가 기사단의 협력을 받고 싶군요. 텔레포트 계열 마법사들을 수배해 두었습니다."
"그 말씀은?"
"전설급 마물을 텔레포트로 어느 장소에 떨어트리려 합니다."
"아, 소문으로 듣던 죽음의 숲 건이군요."
공작은 정치적인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그는 율리안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
"최근 귀족가에서 뜨거운 주제입니다. 과연 황실의 젊은 황자께서 그 저주받은 최흉의 땅 개척에 성공할 수 있을지 말이지요. 해내기만 한다면야 제국의 신시대가 열릴지도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니클라스가 다음 황태자 자리에 오를지도 모른다. 막대한 제국의 권력 그 자체인 황제의 의도를 마음대로 해석했다간 불경이 될 수도 있기에, 공작은 그렇게 에둘러서 표현했다.
"황녀 전하께서도 함께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1황녀 전하께서도 북부에서 움직이고 계신 듯한데, 전하께서는 승계전에 참가하지 않으십니까?"
"공작."
율리안의 싸늘한 한마디에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실례했습니다. 늙으면 말이 많아지는 법입니다, 이해해 주시길. 불사조 급의 강력한 마물을 죽음의 숲에 떨어트린다,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할 매우 위험한 작업이 되겠습니다만. 전하께서 가지신 두둑한 담력은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대화는 일반인이 들으면 까무러칠 내용이었다.
전설급 마물을 텔레포트로 투하시켜 버린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공작은 막무가내라 보일 수 있는 율리안의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혹 그녀가 차기 황제가 되었을 때 돌려받을 게 생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한 베팅은 얼마든지 할 만했다.
"황녀 전하, 전하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으십니다."
정치는 신물이 나도록 해 본 능구렁이 같은 공작이었다. 아직 젊은 율리안이 상대이니 이권을 최대한 챙기고 싶었던 그는 손가락을 들었다.
"하나는 전하의 승리궁과 저희 공작가가 드러나지 않는 동맹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이번 한 번만 협력하고 말 사이라면 너무 아쉽지 않겠습니까. 저도 전하와는 장기적으로 좋은 관계를 이어 가고 싶습니다. 그를 위한 보안 절차는 필요하겠습니다만."
황제의 후계자들과 뒤로 모두 손을 잡아, 누가 차기 황제가 되든 정치적 이점을 챙긴다.
공작으로서는 이익만 보는 제안이다.
"다른 하나는 무엇이오?"
"오늘 품격 높은 교류의 시간을 가졌던 것에 감사하며, 이대로 헤어지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 거절이었다.
율리안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가 공작의 의도를 읽고 눈을 일자로 찢었다.
"공작 각하!"
그때였다. 두 사람의 접견실에 기사 한 명이 급히 뛰어들어 와 보고를 올렸다.
"불사조가 토벌되었습니다!"
"뭣?"
공작이 귀를 의심했다.
불사조는 전설급 마물이다. 평범한 사람은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타 버리기 때문에 접근하지도 못한다.
"언제? S급 모험가인가? 한참 걸렸을 텐데, 왜 몰랐지?"
"바, 방금입니다!"
"방금? 무슨 소리인가. 그런 거물이 영지에 들어왔다면 길드에서 보고를 올렸을 터인데."
"그게, 반나절 전에 라이센스를 취득한 신입 모험가랍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열 마리 토벌해 갔답니다."
"뭣."
공작이 율리안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황녀 전하, 전하께는 한 가지 선택지가 있으십니다."
***
집에서 외출을 나오고 하루 만에 전설급 마물이 산다는 산맥 등지에 도착했다.
포포를 타고 오니 금방이었다. 시트리가 탄 유령마에 속도를 맞춰 줘야 할 정도였다.
"길이 엄청 험하네. 시트리, 거기 미끄러우니까 조심해."
"어머, 소인의 걱정까지... 상냥하셔라. 꺄악."
말 끝내기가 무섭게 시트리가 이끼 낀 바위를 밟고 미끄러졌다. 손목을 잡아 주니 실실대며 폴짝 뛰어오르는 게 어째 일부러 그랬나.
"이봐, 거기 형씨들!"
산을 타려고 하니 우리를 불러 세우는 이들이 있었다. 네 명인 모험가 파티였다.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우락부락한 팔근육의 흉터를 자랑하며 내게 다가왔다.
"자네들 공작령 처음이야? 이 위는 들어가서 좋은 꼴 못 봐. 무슨 퀘스트인데 여기를 돌아다녀?"
"퀘스트는 없고 볼 일이 좀 있어서요."
내가 대답하니 대장이 겁을 먹은 듯 한 발짝 물러섰다. 돌아가서는 자기들끼리 뭐라 쑥덕댄다.
―대장, 저놈 뭡니까?
―장비가 새 거야. 여자는 호위 기사 같은데 쟤도 장비 좋아 보여. 모험가 흉내 내려는 귀족 자제가 분명해.
―그런 것 치고는 태도가 너무 세지 않아?
―저런 놈들이 막상 까 보면 별거 없어. 보아하니 초보 같은데 안내해 주는 척 털어먹자고.
비밀 작전은 안 들리게 짜야 하지 않나. 시트리가 정색하며 검을 뽑으려 드는 걸 저지했다.
"형씨, 우리 파티가 이 근방 길은 잘 알아. 은화 열 닢만 주면 에스코트해 주지. 어때."
"열 닢이라."
시트리는 들을 가치도 없다 여기며 내게 무시하자는 눈빛을 주고 있었지만 그들 중 마법사의 손에 들린 지도에 눈길이 갔다.
"희귀한 마물이 나오는 장소도 아십니까?"
"얼마나 희귀한 마물을 찾길래? 이 근방에 우리가 탐색 못 한 지역은 없다고 봐도 돼. 전설급 마물도 구경이라면 시켜 줄 수 있어."
"아, 마침 불사조를 찾는데요."
"불사조라고!"
대장이 싱글대며 파티원들을 모아 2차 회의에 들어갔다.
―이봐, 불사조 이 근처에 많이 있지.
―20년 전 대성전 이후 최흉에서 흘러나온 불사조들이요, 대부분 여기서 살죠.
―전설급인 데다 모여드는 습성도 있어 위험하지요. 토벌할 인력이 없어 방치하던 실정 아니었습니까.
―그래, 바로 그거야. 저 풋내기가 불사조에게 뛰어들면 장비와 돈은 그대로 남겠지. 우린 그때를 노리자고.
당사자에게 다 들리도록 작전을 속닥거린 어수룩한 친구들은 한껏 들떠서 내게 제안했다.
"그 신수를 만나러 가겠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저명한 모험가인 모양이군. 대금은 필요 없어, 당장이라도 안내해 주지."
음흉한 구석이 있다는 점만 빼면 친절한 친구들이었다. 물정 모르는 순박한 시골뜨기 느낌이랄까.
허세는 아니었는지 그들은 험한 산맥 지형을 뚫고 지나다닐 루트를 모두 꿰고 있었다. 시트리조차 산을 타는 모험가들의 솜씨에는 감탄할 정도였다.
세 시간 정도 하이킹을 진행했다. 구름이 안개와 섞여 창 모양 가시나무가 빽빽한 정상 부근에 도달할 즈음.
"보이는군. 저게 불사조의 둥지다."
우리 앞에 숯으로 지은 거대한 집이 나타났다. 그 위에 고개를 치켜들고 멋들어진 자태를 뽐내는 불타오르는 매, 불사조가 있었다.
"한참 멀리 있는데도 뜨겁군. 불사조의 불꽃은 원하는 것만 태우지. 일종의 경고야.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결계 같은 거지."
대장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내가 키우던 불사조는 아니었다. 내가 키우던 애들은 갈기가 푸른색이었는데 얘는 붉은색이다.
"어때, 형씨. 직접 보니 상대해 볼 만할 것 같아?"
"눈매가 한 성격 하게 생겼네요."
대장이 큭큭 웃었다. 내게 기대하는 게 많은 모양이다.
"시트리."
"네, 군주님."
내가 부르자 시트리가 즉시 반응하여 검을 빼 들고 뛰어올랐다. 불사조 역시 저항하며 그 거대한 날개를 펼쳐 낸다. 마른하늘에 별안간 쌍무지개가 그려졌다.
"미친! 진짜 달려들었어!"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모험가들이 우왕좌왕 도망친다.
나는 스킬창을 열어 [지휘]를 터치했다.
"전략, 선봉대."
주문진이 그려지며 내 마력이 시트리의 팔다리를 휘감는다.
"전술, 극점."
검이 강화되며 번쩍인다. 부리를 쩍 벌리며 불꽃을 모으는 불사조. 시트리의 검이 폭발하며 궤적을 이루고.
스윽― 콰앙!!
강렬한 화염이 폭발해 날아오른다.
"화염 보호의 장막."
화염 마법은 전문이다. 추가 마법진을 펼쳐 불꽃을 상쇄한다.
연기가 허공으로 사라졌을 때, 하늘에서는 은은한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불사조의 깃털이 수도 없이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야호, 시트리. 빨리 줍자."
시트리와 깔끔한 승리를 축하하며 자루 포대에 불사조의 깃털을 열심히 쓸어 담았다.
"...대박 쇼츠 건졌다."
찰칵 소리가 나 뒤를 돌아보니 모험가의 마법사가 수정구로 나를 찍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대체 무슨 일이."
"...S급? SS급 모험가인가?"
대장을 포함한 다른 이들은 입을 떡 벌리고 제자리에 굳어 있었다. 마법사가 총총 뛰어와서는 내게 물었다.
"저기, 까만 갑옷 모험가님, 이름이 뭔가요?"
본명을 댈 수는 없고, 모험가 라이센스 만들면서 쓴 가명을 대야겠지.
"오르, 라고 합니다. 신입 모험가입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29화. 불사조 침대 (3)
제목) 불사조 단체 승천 영상.movie
[영상]
└?
└??
└제가 뭘 보고 있는 건가요
└모험가 두 명 파티야?
└요즘 환상 마법은 굉장히 리얼하네요
└저게 어딜 봐서 환상 마법이야
└환상 마법은 시전자 마력 색으로 반투명하게 보임 저거 환상 아님
└진짜 둘이서... 불사조를 잡는다고?
└와 ㅋㅋ 댕시원하네
제목) 얼마 전에 불사조 깃털 누가 물어봤는데
혹시 그 사람 아냐?
베개인지 이불인지 만든다고 그랬잖아
└진짜 이불로 쓰려고 불사조를 잡으러 간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올해 들어본 말 중 가장 웃긴 듯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제목) 영상 올린 사람인데요
환상 마법 아니고 제가 실제로 목격한 거 맞아요
2인조 파티인데 한 명은 마법사고 한 명은 검사였어요
[영상2]
└와 진짠가 본데
└그 마법사 이름이 뭐래요?
└'오르'요 라이센스도 봤어요
└그 4위계 신속시전한 뉴비 고닉이잖아
└ㄹㅇ이었네
└근데 그때 실력 보면 이해 가긴 함
└소름
제목) 신속시전 쓰는 마법사 보통 별거 없다
작성자) 5555
마법 빨리 써봤자 실속도 없다
시간 더 들여서 마법진 정확히 그리고 효과 강화하는 게 낫다
└이건 뭔 소리야
└4위계를 신속시전하잖아 뭔 뜻인지 모름?
└야 너 누군지 아는데 얼마 전에 3위계 진 구축 맞냐고 물어보던 놈이잖아
└3위계도 제대로 못 쓰는데 최소 6위계에 훈수 두는 거임?
└ㅋㅋ
└그게 아니라 신속시전은 부작용이 많을 수밖에 없다. 주문 위력이 약해지거나 수식이 꼬이는 경우를 자주 봤다. 그 영상도 시전 결과는 안 보여줬잖나.
└결과가 저기 있잖아 ㅋㅋ 불사조 잡는 거 안 보여?
└하여간 초보들이 허세는
└1위계 차이에 몇 년 걸리는 지나 아나
└그만 패라 애 울겠다
제목) 불사조 이불 가격 떡락 아님?
한 마리도 아니고 열 마리를 순살했는데
깃털로 집도 짓겠다 야
└ㄹㅇㅋㅋ
└ㄹㅇㅋㅋ
└누구 마왕이 갖고 있다 하지 않았나
"이 자식들이...!"
수많은 던전의 군집인 5번 뿌리 액제류스의 주인이자 5좌의 마왕, 골라카브는 머리끝까지 달아오른 열에 게시판을 밀어 치워버렸다.
"내 이불 가격을 네놈들이 왜 걱정하냔 말이다!"
골라카브가 씩씩대며 발코니로 걸음을 옮겼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거대한 도시를 이룬 그의 던전은 수많은 마물과 마족이 체계적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신수인 불사조는 없었지만.
이만한 사회를 만들고 그 주인이 된 자신이 고작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 몇 개 때문에 이리도 분노해야만 하는가.
"마법은 내 전공도 아니란 말이다."
까짓거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만 쓸 줄 알면 됐지, 위계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마법사는 마법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또라이들뿐이다. 애초에 상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골라카브는 혀를 차며 접견실로 돌아섰다.
"에이, 쯧."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천장 높은 위치에 찍힌 자리가 눈에 띄었다. 지난번 세라펠이 주최한 회의에서 마멋 로드가 바이콘으로 낸 상처다.
저기까지 손이 닿는 부하가 없어서 미처 고치지 못한 흔적이었다. 세라펠은 당연히 나 몰라라 해서 수리를 요청할 수도 없었고.
침실에 들어선 골라카브는 자신의 침대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분명 대륙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이불이다. 불사조를 막무가내로 토벌한 그 오르라는 놈은 명인의 손길이 들어간 이만한 이불을 만들지는 못하리라.
몸을 맡기니 아늑함이 몰려온다.
내 이불이 최고다, 골라카브가 믿어 의심치 않으며 본능적으로 게시판을 다시 열었다. 어차피 이 이불을 평생 만져볼 일도 없는 가난한 이들을 비웃기 위해서였다.
제목) 불사조 깃털로 침대를 만들었다
작성자) 오르
양이 많아서 침대와 이불, 베개를 모두 만들고도 남았다
본 게시판 이용자들의 협력에 감사하며 추첨으로 불사조 깃털 베개를 선물하고자 한다
받고자 하는 이는 댓글을 남기라
[영상]
└쩐다 이불이 아니라 침대를 통째로 만드네
└ㄷㄷㄷㄷ
└와 진짜 푹신해 보여요
└베개 진짜 주는거임?
└댕꿀잠 자겠네
└후기좀요
└추첨 참가합니다
└참가
└진짜 그 귀한 불사조 깃털을 뿌려?
└미쳤다 참가요
└나나나나나나나나 제발
작성자 '오르'의 글에는 벌써 댓글이 백 개 넘게 달리고 있었다.
게시판을 지켜보던 골라카브는 이불 위에 누운 채로 한참을 날뛰었다.
***
"깃털 엄청 많이 모았네, 대박이었어."
집으로 돌아온 나와 시트리는 각자 몸보다도 큰 자루를 등에 멘 모습이었다.
토벌한 불사조에는 내 던전 출신도 있고 아닌 녀석도 있었는데,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마물들은 내가 아니라 던전이 필요했던 거기도 했겠지. 소환으로 계약해 던전에 묶어야만 다룰 수 있는 모양이다.
토벌도 필수불가결했다. 불사조는 자기들끼리 뭉치는 습성이 있어서 그냥 내버려뒀다간 산맥을 빠져나와 주변이 위험해졌을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같은 마물인 마멋들과는 꽤 친한데 말이야. 조금은 아쉬웠다.
"감축드려요, 군주님. 대륙에 군주님의 명성을 떨치시려는 새로운 계획이셨지요."
"응?"
"모험가 '오르' 님으로서, 군주님은 벌써부터 거대한 위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들의 영지를 다수의 전설급 마물이라는 위험으로부터 해방하신 업적, 그들이 경외하고 찬양하겠지요."
"음... 그러...려나?"
표현은 좀 과장되지만 감사받을 일 정도는 되겠지 싶었다.
"추종자가 충분히 늘어나면 언젠가 오르의 정체가 군주님이셨다고 밝혀, 저들 국가의 분열과 전복을 유도하실 생각이 아닌지요."
"응? 아니?"
"아아, 실례했습니다. 군주님의 위대한 의도에는 항상 그 너머가 있을 것이 당연할진대, 미천한 소인이 멋대로 축소하여 상상해 버렸어요. 부디 용서해 주세요."
시트리는 늘 상상력이 풍부해서 즐겁겠다 싶었다.
뭐, 이번에 불사조 깃털을 모은 건 시트리의 공이 컸으니 지금은 즐기게 내버려두기로 했다.
"충!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주군!"
접견실로 내려오니 모리안이 각을 잡고 인사를 해왔다.
"보고드립니다. 군주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1주일, 겁도 없이 침소를 침략한 침입자는 총 150명이 있었습니다. 전원 모험가로 본관의 방어선인 경마장에서 격퇴하였습니다!"
"150명? 뭐 그렇게 많이 왔대."
나는 식겁하며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모리안의 말대로 그간 침입자가 많이 있었다.
"어째 던전에 금화가 엄청 늘었다? 잡다한 장비도 엄청 많네."
"마멋, 마멋."
"갑옷 많은 마멋."
그러고 보니 돌아다니는 마멋들이 싱글벙글해서는 다들 뭔가를 두르고 있었다. 샌들을 머리에 쓰거나 방패를 스케이트보드처럼 타고 다니는 식이었다.
농부 마멋들은 희귀급 헬멧을 물통으로 쓰는 등 양껏 활용하고 있었다.
"예, 143명이 탈탈 털리고 돌아갔습니다."
"그럼 7명은?"
"따고 돌아가게 놓아줬습니다. 맛집이라고 소문이 나야 더 윤기 좋은 물고기가 낚이는 법입니다."
흠....
어째 얘도 내 명령을 살짝 오해한 기분이 드는데, 내 착각인가.
뭐, 전원 격퇴라는 훌륭한 결과였고, 던전의 재정도 좋아졌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자, 그럼 바로 이불 만들어 보자."
자루 입구를 열어 수북이 쌓인 깃털을 보니 생산직 영웅이 있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전에 대장장이 영웅도 있었는데, 어떻게 다시 못 데려오려나."
그 친구도 5성이었다. 확률이 있으니 소환하려면 오래 걸리겠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해야지. 대부분의 문제는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어."
마법에 적절한 해결책이 없으면 스킬, 즉 주문에는 있기 마련이다.
선구자들이 이천 년 가까이 마법과 주문을 수도 없이 발전시켜 온 덕분이다. 고마워요, 문명.
스킬창을 열어 쓸 만한 게 뭐가 있나 확인해 본다.
"건설 계열에 있으려나. 배치, 개조, 청소, 아니고... 이거다."
내가 찾은 스킬은 생활 계열의 [제작], '크래프트'라고 불리는 주문이었다.
터치하여 주문진을 그린다. 대부분의 스킬 주문은 마법으로 분류되지 않는, 다른 주력기를 보조하기 위한 기술이다.
위계 자체는 높지 않은 게 보통이다. 내 제작은 2위계에 그쳐서 진도 두 개뿐이었다.
"와아, 직접 만드시나요?"
"응, 이 정도는 한 번 해보려고."
[제작]으로는 각종 생필품을 만들 수 있었다. 대부분은 재료가 필요하다. 당연히 무에서 창조하는 건 불가능하다.
목록에서 '이불'을 찾아 선택한다.
: 사이즈를 지정하세요.
기왕이니 큰 게 좋겠지. 지금 침대는 딱 나 혼자 들어갈 크기니까 두 발 뻗고 편안하게 자고 싶고. 가끔 일을 잘하는 마멋들에게 상도 줄 겸 구석 자리를 내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최대한 크게 가보자."
터치해서 줌인하듯 크기를 키우니 주문진도 슉 늘어났다. 퀸, 아니. 킹사이즈? 더블 퀸까지도 되겠다.
"이 안에 재료를 넣으면 돼."
"맡겨주십시오, 주군."
힘쓰는 일에는 모리안이 먼저 나섰다.
주문진 위에 불사조 깃털을 후두둑 털어 넣는다.
: 재료가 충분합니다!
"벌써?"
첫 자루의 반도 다 넣지 않았는데 메시지가 떴다.
일단 마력을 불어넣어 시전을 완료한다. 주문의 효과로 척척 알아서 바느질이 진행되더니 불빛이 꺼질 때 즈음엔 어느새 커다란 이불이 만들어져 있었다.
"오오, 이게 말로만 듣던 불사조 깃털 이불이군요!"
"색깔 좀 보세요, 은은한 게 고급스러워요."
슬쩍 만져보니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감촉 미쳤네. 너희들도 와서 만져 봐."
"...오."
"이렇게 부드러운 느낌은 처음이에요."
아직도 깃털은 많이 남았다.
질 좋은 수면에는 이불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바닥, 침대 매트리스도 큰 역할을 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침대도 만들어 봐야겠다."
이어서 [제작] 주문을 한 번 더 가동한다. 목록에서 침대를 선택, 아직 한가득한 두 번째 자루를 몽땅 쏟아부으니 시전이 일어났다.
은은한 무지갯빛을 슬며시 반짝이는 커다란 매트리스가 완성됐다.
"엄청 크다. 잘 낑기면 열 명도 자겠는데?"
참을 수 없지, 나는 곧장 이불을 들고 침대에 뛰어들어 사용감을 실험했다.
그리고 결과는.
"...헉!"
급히 정신줄을 붙들어야만 했다.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돌렸다.
"시트리, 나 지금 잠들었어?"
"거의 직전까지 가셨어요."
"와, 이거 진짜 미쳤다. 쿠션감은 몸에 딱 맞게 눌러 주는데 완전히 기분 좋게 따뜻하고, 이불은 말도 못 해. 덮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가벼운데 부드러운 느낌만 있... 아니다, 말로 해서 뭐 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침대와 이불에 묻어 있던 먼지며 잡풀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정화 능력을 가진 불사조의 특성 덕분인 듯했다.
"시트리, 모리안, 너희도 와서 누워 봐. 이건 진짜 체험 못 해 보면 손해야."
"네에? 어찌 소인이 감히 군주님의 침소가 될 자리에 눕겠어요, 불경이옵니다. 심지어 방금 밖에서 들어와서 몸에 먼지가 많아요. 새 침대를 더럽히고 말아요."
"그, 그렇습니다! 주, 주군께서 방금 누우셨던 곳에 어찌... 온기도 그대로일 텐데!"
"에이, 너무 오버한다. 더러운 건 괜찮아. 이거 저절로 깨끗해져."
내가 시트리와 모리안의 손목을 잡아끄니 둘 다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참는 두 사람.
"며, 명령이시라면."
슥, 모리안이 먼저 누우려니 시트리가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의 어깨를 밀쳤다.
"잠깐, 신제의 기수여. 군주님의 명령을 지킴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다. 내가 그 자리에 눕겠다."
"혈기사여, 주군께서 본관에게 이 자리에 누우라고 명령하셨다. 듣지 못했는가."
"그 자리를 직접 지정하진 않았다. 군주님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서야 큰일이로다."
"뭣이?"
어째 둘이 분위기가 험악해지길래 지긋이 어깨를 눌러 침대에 쓰러지게 했다.
"허억."
"흐어...."
이불도 덮어 주니 둘 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주체 못 하게 됐다.
"어때, 내 말이 맞지."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모처럼 기분 좋게 쉬는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 나는 마멋들도 불러 새 침대를 체험하게 했다.
마멋들은 더 내성이 없어서 침대에 올라오자마자 픽픽 쓰러져 잠들었다.
나중에 침대를 방으로 옮기고 남은 깃털로 베개를 열 개 만들어 두 개는 시트리와 모리안에게, 세 개는 마멋들에게 나눠줬다.
세 개는 게시판을 통해 배포하기로 했는데 댓글이 삼백 개나 달려서 곤란해졌다. DM으로 돈을 내고 사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방구석경비원] 선생님선생님
[방구석경비원] 솔직히 이거는 저를 뽑아주셔야 한다고 보는대용
[방구석경비원] 제가 디엠까지 보내면서 충고드린 거 안 잊으셨죵
[방구석경비원] 강호의 도리 아시죵
[방구석경비원] 진쟈 제발
[방구석경비원] 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
에이, 부정 추첨은 안 되지.
하지만 운도 좋지, 세라펠은 마멋이 던진 주사위에 당첨되어서 기어이 불사조 베개를 받아 갔다.
30화. 불사조 침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