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30-40

30화. 불사조 침대 (4)

제목) 불사조 베개 당첨 인증

작성자) 폭발은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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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줄 줄 몰랐는데 감사해요! 

사용감 장난 아니에요 불면증이 5초만에 싹 나았어요 대인배 오르님 찬양해!

└개쩐다

└이걸 진짜 주네

└팔아도 금화 몇만 개는 나올 듯 ㅋㅋ

└와 축하드려요!!

└모험가 오르 그는 대체

제목) 베고 기절했다가 이제야 깼습니다

작성자) 푸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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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생 300년에 이런 제품은 처음 봅니다

상품으로 팔면 대박 날 듯합니다

└부러워부러워부러워

└ㅊㅋㅊㅋ

└데박박

└진짜 편해보인다

제목) ㅋㅋ 이궈궈든

작성자) 방구석경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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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는 받아야 했다고 본다 ㅇㅈ?

└하필 얘가 되네

└나라면 얄미워서라도 안 줬을 듯...

└진짜 공정한 추첨이었나보다

└ㄹㅇ

└넌 양심 있으면 나눔해라

"으히히."

세라펠은 베개 위에 몸을 엎드린 채 게시판을 읽어나갔다.

단숨에 뜨거운 화제로 떠오른 마법사 오르, 그가 보내 준 불사조 깃털 베개는 한 번 몸을 맡기면 다시 떨어지기 힘들 정도로 중독성이 심했다.

게시판에선 대체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떡밥이 쉴 틈 없이 굴러갔다.

지금껏 폐관 수련을 해 현자의 영역에 도달한 마법사가 마침내 세상으로 나왔다, 봉인되어 있던 고대의 대현자다,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게시판에는 본래도 7위계에 도달한 존재인 현자도 간혹 보이긴 했다. 그들 중 하나가 새로운 닉을 판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으나 강력한 부정도 있었고 이런저런 정황으로 아니라고 밝혀졌다.

"은근 질투 나네."

무려 차카브의 관리자인 내 정체를 알려고 하는 녀석들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뭐, 이런 질 좋은 베개를 헌상했으니 오르 그 녀석은 좋게 봐줄까.

"근데 진짜 누구지?"

세라펠은 처음에 그가 혹시 마멋 군주 아인이 아닐까 의심했다.

최근에 나타난 뉴페이스이자 고위계 마법을 잘 다루는 마법사. 조건에는 부합한다.

하지만 그가 올렸던 4위계 고속시전의 영상. 다들 눈치 못 채고 있지만 그 영상에는 시전자의 손이 슬쩍 보이는 장면이 있었다. 프레임 단위로 분석해야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나 엘프족의 손처럼 보였다. 마멋 로드의 손은 확실히 아니었다.

세라펠은 거기에서 오르가 아인이라는 의심은 거두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인간이라는 종족, 정점의 마법 경지에 도달 한 인물. 세라펠은 그 조건에 부합하는 자를 한 명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과거 자신이 섬겼던 군주, 네헤모트다.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대부분은 언데드라고 생각하고 있다. 영웅 중에서도 측근인 자신을 포함해 몇몇 영웅만이 알고 있었다.

'그립네.'

세라펠이 마법에 더 흥미를 가지고 연습했던 것도 그에게 지도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세라펠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불사조 토벌 영상을 보면 오르가 쓴 마법은 방어, 강화 계열이었는데."

지원 계열 마법이다. 네헤모트가 쓸 수 있었던 마법이기도 했다. 네헤모트는 온갖 계통에 능숙한 절대자라 그 비교는 의미가 없기는 했다.

"나보다 마법을 잘 쓰는 건 확실해."

세라펠은 한참 6위계에 머물러 있었다. 7위계인 현자의 영역에는 천부적인 재능은 물론이고 평생에 걸친 노력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인생 전부를 바쳐도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다. 영체인 그녀는 노화하지 않기에 평생 마법을 연마할 수 있는 더 좋은 조건에 있었다.

"얘한테 조금 알려 달라고 해 볼까."

세라펠은 흥미 반의 기분으로 오르에게 DM을 넣었다.

***

율리안 2황녀는 베른하이츠 공작령에서 별다른 소득 없이 황실령으로 귀환했다.

참 어딜 가도 일이 잘 풀리는 일이 없다. 이 작은 황실령이나 자신의 궁궐에서도 이런 상황인데, 나중에 황제가 된다 한들 거대한 제국을 통치할 수나 있을까. 율리안은 심려가 되어 한숨만 푹푹 쉬었다.

황실령 도심의 상점가를 지나며 마침 순찰 중이던 자신의 기사들을 보였다. 모습을 보니 그들이 영지민들과 트러블이 붙은 모양이었다.

율리안은 바람도 쐴 겸 잠시 마차에서 내렸다.

"황녀 전하!"

왕족이 행차하니 방금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이 조용해져서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율리안은 그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전하, 쇤네들의 이야기를 좀 들어주소서."

상점가의 상인들이 얼굴이 새하얘져서는 율리안에게 호소했다.

"세금이 너무 올라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계속 적자입니다."

"세금?"

"예. 처음에는 이주 지원금도 주고, 황실에서 짓는 새 영지라고 하니 믿을 수 있겠다 싶어 다들 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수익도 아니고 매매마다 세금을 떼어가니 도저히 남는 게 없습니다."

"비율이 얼마인가."

"모든 거래의 6할입니다."

"뭐어?"

율리안이 악독한 세율에 입을 떡 벌렸다. 순익이면 모를까, 매매세로 6할을 붙이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세법이었다.

"농민은 더합니다. 이번에 수확한 농작물은 7할을 뜯겼습니다."

"그런데 한 번 이주 온 제국민은 황실령에서 나가지도 못한다지 뭡니까. 그러면 반역이라고...."

"내 확인해 보겠다."

율리안은 그 길로 니클라스를 찾아 방금 들은 이야기에 대해 물어보았다.

"세금? 내가 직접 지정했다만."

"정신머리가 있니? 처음부터 영지민을 마른 오징어포로 만들 생각이었다면 내 너에게 동참할 일은 없었을 것이야."

율리안이 내뱉은 폭언에 니클라스가 불쾌해하며 장부를 꺼냈다.

"나도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는데, 누님. 당장 돈이 없는데 어떡하겠어. 이거 좀 봐. 황실령 사업을 위해 은행 길드와 귀족가 일곱 군데에서 일으킨 대출이 이만큼이야. 매달 갚아야 하는 이자는 이렇게나 된다고."

숫자를 본 율리안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네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이만한 이자를 낼 현금을 어디서 충당할 생각이었어?"

"영지민들이 만들어 주고 있잖아."

"그만큼 안 나오니까 다 죽을상이잖아."

"괜찮아. 지원금을 더 늘리면 이주민이 더 들어올 거야."

"부품을 대체한다는 소리밖에 더 되니? 얘 니클라스, 이건 숫자가 아니야. 진짜 사람들이 힘들어하잖니."

율리안이 정곡을 찌르자 니클라스가 되려 짜증을 냈다.

"저 숲만 해결하면 한 방에 끝난다니까? 저만큼 마나를 머금은 목재는 어디에도 없어. 마도국이든 드워프 왕국이든 당장에라도 웃돈을 주고 사 간다고! 한 번에 청산하고도 떼돈을 벌어."

"너무 위험부담이 크잖아. 저 안에 뭐가 있는지 아직도 모르면서?"

"사업이 빠그라져서 폐하 귀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로 안 돼! 그럼 나도 전 황태자 꼴이 날 거야. 그러니까 누님도 기사단 좀 제대로 써 보라니까! 영지민은 내가 알아서 해!"

되려 성질을 내는 니클라스였다. 생각보다 문제가 훨씬 심각했다.

'황실령은 그대로 두면 안 되겠어.'

율리안에게 니클라스는 황제 승계권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이기도 했지만 친동생으로서 애정도 있는 존재였다.

그 던전을 어떻게든 토벌해 없애야 한다. 그래야 니클라스의 사업도 해결하고 악의 마법사에게 붙잡힌 아인도 구출할 수 있다.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 할 때였다. 율리안이 몸을 돌렸다.

"누님도 진짜... 나도 위험한 건 안다고."

니클라스가 혀를 찼다. 그와 쌍둥이 남매인 율리안은 겨우 몇 초 차이로 세상에 먼저 나와 누나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늘 뭔가를 가르치려 든다.

대부분은 율리안의 말이 맞는 경우가 많아서 니클라스도 그녀를 잘 따는 편이었지만, 돈이 도는 사업만큼은 자신이 위라고 생각했다.

"황자 전하, 그가 도착했습니다."

"오오, 드디어!"

보고를 들은 니클라스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그를 맞이했다.

저택을 나서니 멀리서부터 흙먼지와 돌풍이 부는 것이 보였다. 오직 단 한 명의 모험가, 그리고 한 마리의 명마가 일으키는 장관이었다.

"오오!"

점으로 보이던 그 모험가가 순식간에 눈앞까지 당도했다. 촤아악! 멋들어진 드리프트와 함께 멈추는 모험가. 니클라스가 쌍수 들고 그를 환영했다.

"어서 오게나! 대륙에 11인밖에 없다는 S급 모험가 중 한 명, '음속' 엘로힘."

모험가, 엘로힘이 고삐를 당기자 말이 긴 갈기를 휘날리며 하늘 위로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만큼 긴 장발을 가진 그는 챙이 넓은 모자를 슬쩍 밀어 올리며 황자와 눈을 마주쳤다.

"이곳에서 신수와 겨룰 수 있다 들었소."

"신수? 그런 이야기는 잘 모르겠소만."

어리둥절한 니클라스를 무시하고 터벅터벅 영지로 향하는 엘로힘.

보통이라면 황족에게 용납되지 않을 무례함이었으나 그에게 한해서는 문제 되지 않았다.

'과연 S급 모험가로군.'

'당당한 풍채로다.'

니클라스의 신하들도 그의 태도는 문제 삼지 않았다. S급 모험가는 대륙에 11인밖에 없는 절대 강자다. 한 국가의 왕과 독대해도 무리 없을 지위와 권력을 가진 이들이다.

애당초 모험가는 국적에 연연하지 않는 직업이다. 제국민도 아닌 그에게 제국의 예도를 요구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엘로힘이여, 그대가 본 숲의 던전을 토벌한다면 온갖 부귀영화를 주겠소."

헐레벌떡 말을 쫓는 니클라스의 제안에도 엘로힘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부귀영화는 관심 없소."

"그, 그렇다면?"

"신수를 상대로 승리해 본 적은 아직 없소."

고삐를 쥔 엘로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승리의 명예, 그것만을 원하오."

촥! 절도 있게 고삐를 휘두르자 그의 명마가 벌판을 달려 나갔다. 그 기수는 정확하게 죽음의 숲을 향하고 있었다.

든든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니클라스는 확신에 찬 웃음을 흘렸다.

***

"아이고 잘 잤다."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니 세상 모든 피로가 날아간 듯 개운했다.

불사조 깃털 침대에서 보낸 밤은 전생을 포함한 어떤 잠 중에서도 가장 꿀잠이었다.

"최고다 진짜."

말똥말똥한 눈으로 접견실로 나간다.

마침 마멋들도 눈을 비비적대며 하나둘 깨어나던 참이었다. 위층 굴에서 볏짚으로 묶은 줄을 타고 주르륵 내려오다가 쿵, 머리를 박는 녀석도 있었다.

"아침 체조 시작."

마멋들과 기운차게 체조로 하루를 연다. 스트레칭은 그날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기에 중요한 요소다.

"자, 그럼 오늘도 힘내서 가 보자!"

"마멋, 마멋."

"밀 수확하는 날인 마멋."

엘리베이터로 가서 2층을 터치한다. 마멋들이 탈 자리가 부족해서 몇 마리는 품에 안아 줬다.

밭에 도착하니 밀들이 황금빛으로 잘 여물어서 기분 좋게 바람에 쓸리고 있었다.

마멋들과 함께 수확하며 다음으로 뭘 심을지 고민해 본다.

"어디, 이번엔 뭐가 있나."

: 희귀 작물이 등장했습니다!

[디스이즈팜 상점]

카카오 1금화    밀 종묘 2은화

씨감자 1은화    부추 2은화

"카카오? 와, 이게 나오네."

원래 1금화쯤 하는 작물은 시설 레벨을 한참 더 올려야 나올 텐데, 운이 좋다.

돈은 경마장 덕분에 많이 모았으니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상점에서 작물을 한도까지 최대한 구매했다.

좌르륵! 바구니에 씨앗이 수북이 쌓인다. 밀을 수확한 레벨3 밭에는 카카오를 심기로 했다.

고급 초콜릿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페레○나 피○터블 같은 거.

: 시설 강화가 가능합니다!

밭도 그간 꾸준히 사용해온 덕분에 시설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디스이즈팜]을 금화 10개를 써서 3레벨로 강화한다.

"오."

이제 배수로에 자동 급수장치도 생기고 생산 가능한 밭도 세 개가 더 늘어났다.

조금 더 올리면 트랙터도 나오는 게 아닐까? 우렁이 뿌리는 드론이라든가.

"2층의 밭과 경마장은 레벨이 꽤 올랐고. 이제 비어 있는 3층과 4층에 새 시설을 지어 봄직도 해."

뭘 지을지 고민해 볼 때가 됐다.

4층은 내 방 바로 위니까 운동 시설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접견실에서 체조 말고는 할 게 없긴 하니까.

"어디...."

: 개방 가능한 시설 목록입니다.

 [섬머 비치]     [올 오어 제로]

 [드럼마스터]    [슬라임팡!]

"어라, '섬머 비치' 이거."

수영장 아닌가.

31화. 마법 수업 (1)

전생에 너튜브로 본 해외의 몇십억짜리 대저택 소개 영상이 스멀스멀 기억났다.

곳곳에 설치된 값비싼 장식품, 세련된 디자인, 명품 자동차 콜렉션이 수없이 들어가는 차고.

뭐, 고급 마구간은 있으니 나름 차고는 갖췄다고 할 수 있으려나?

그 저택들의 공통점을 하나 더 꼽자면 반드시 실내 수영장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수영장이라."

수영은 좋아하는 편이다. 땀에 젖어서 기분 나쁠 일도 없고, 몸에 무리 가지도 않는 좋은 운동이다.

"기억나네. 황실에서도 황제가 궁에 수영장을 설치하겠다고 별 난리굿을 다 피웠었는데."

황제는 무릉도원 같은 계곡을 재현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황궁은 외적 침입을 이유로 강보다는 산지에 가까웠다.

기술력의 한계로 끌어온 물이 금방 흙탕물이 되어 버려 보기에는 영 좋지 않았고, 결국 금방 철거됐다.

"실내 수영장을 만들면 거의 대륙 최초겠는데."

아직 던전의 제반 시설도 충분히 만들지는 않았으니 지나친 사치라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여기에 자원을 써도 되려나.

"그래도 체조나 홈트만 하기에는 질리기도 했고, 한계가 좀 있어."

일단 터치해서 내용을 확인해 봤다.

: 미니게임 [섬머 비치]

: 수영 경기로 영웅들과 경주하세요!

: 보유한 모든 영웅의 체력이 상승합니다.

: [유령마무스메], [비스킷러너]가 있으면 [초인 3종 경기]를 개최할 수 있습니다.

: 시설 [목욕탕]과 [사우나]가 함께 제공됩니다

: 개방에 혼돈석 100개가 필요합니다.

"엄청 비싸구나. 던전이 승격하면서 그만큼 고급 시설을 열게 됐단 거겠지."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같이 제공되는 시설인 목욕탕과 사우나.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지고 싶었다.

"지금 거주구역에는 샤워실밖에 없어."

욕조도 없고, 물은 직접 불로 덥혀서 써야 하는 원시적인 방식이다. 마법으로 만든 불을 쓰니 아주 불편하진 않지만 자동화된 널찍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비용이 문제다. 퀘스트로 혼돈석을 얻어 개방한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듯했다.

돈으로 혼돈석을 사 오자니 지금 던전의 자금은 나 혼자서 번 게 아니다.

콜라는 마멋들이 땀흘려 수확한 작물들로 만들었고, 경마장은 모리안이 운영하고 있으니까. 먼저 상의를 하는 게 예의다.

"어디, 금화가 얼마나 있더라."

[보유 금화] 641 골드

"이렇게 많았어? 오…."

금화 한 개는 4인 서민 가족의 한 달 생활비 정도 된다. 황실에 있을 적 내 월급이 2골드였다. 이 정도 재산이면 나름 혼자서 평생 먹고 살 정도는 되었다.

물론 지금은 식구가 많고 집도 넓어서 한참 부족하다.

"어쩌다 이렇게 많아졌지? 가계부를 안 적어서 모르겠네. 콜라는 주점 아저씨랑 세라펠에게 팔고 있고."

세라펠이 가격을 훨씬 쳐주긴 하지만 아저씨와도 거래는 하고 있다.

내 콜라를 워낙 좋아해 주기도 하고, 그쪽 영지민들 사이에서 대인기라 갑자기 거래를 끊으면 실망할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다.

"그간 콜라 판매 대금이 300골드쯤이지."

아무래도 세라펠에게 계속 병당 10개에 파는 건 양심에 찔려서 단골이라는 명목으로 할인을 붙여 주고 있다. VIP 쿠폰도 발행해 주니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원가 은화 한 개짜린데.

경마장은 첫 침입자를 맞은 날 수입이 금화 70개였다. 그 후로 A급뿐만 아니라 온갖 다양한 파티가 왔다고 모리안이 보고했다.

보통 모험가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직업이라 저축이 많지 않다. C급부터 제국 공무원 정도로 저축이 될까 말까. 그것도 비수기에는 얄짤없다.

그래서 대부분 모험가는 많이 잃어야 은화 몇 개에서 금화 한 개였는데, 개중에 100개까지 잃고 간 사람도 있었단다.

대박을 내서 금화 서른 개까지 따고 간 사람도 있지만 거기까지. 내가 불사조 깃털을 모아오는 동안 모리안이 모은 금화가 432개다.

시설 강화와 유지비로 여태 상태창에 200개 정도를 바쳐서 이만큼이 남은 계산이다.

"이렇게 보면 시설 유지비도 꽤 많이 드네."

보통 아파트는 한 달에 평당 만 원의 관리비가 나오곤 한다.

내 던전은 5층만 천 평인데, 위층으로 갈수록 넓은 역피라미드형 구조고 2층엔 만 평 단위로 확장된 경마장에 남쪽에 파놓은 밭도 있으니까….

"…생각보다 배꼽이 엄청 큰데?"

고급 스포츠카는 몇억 주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유지비를 낼 재력이 있어야 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이제야 이해가 됐다.

전생에 게임에서는 금화도 현질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전혀 걱정 안 해도 되는 재화였기에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땡전 한 푼 없는 바닥에서 시작한 지금은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괜찮아, 알아서 잘 굴러가겠지."

던전의 시스템은 잘 짜여 있으니까. 성실하게 지내면 부족할 일은 없다.

오히려 시설을 팍팍 늘려서 승급하는 게 재정난을 걱정하지 않을 방법이다.

"무엇보다 중급으로 승격하면 비보창고를 열 수 있어."

내게는 아직 미개방인 뒷심이 있다. 뭐하면 그 안에 있는 걸 내다 팔면 되지 싶다.

다들 좋아하면 수영장은 짓기로 하자. 그렇게 정했다.

"시트리, 모리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수영 좋아해?"

점심 식사를 하며 물어보니 시트리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반응이었다.

"군주님과 수영이요? 세상에, 소인께 그런 영광을 주실 줄이야. 얼마나 오래 걸려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물어본 내가 바보 같아지는 반응이었다. 이쯤 되면 얘가 뭘 싫어할까 싶어진다.

"초인 3종 경기! 꿈의 경기입니다. 본관은 기마병이지만 수영과 육상에서도 얼마든지 두각을 드러낼 자신이 있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유명한 경기였구나?"

"헤엄칠 줄 아는 마멋!"

"재밌는 마멋?"

모리안뿐만 아니라 마멋들도 찬성하는 분위기였기에 다음으로 개방할 시설은 수영장과 목욕탕으로 결정했다.

뜨끈한 목욕물과 사우나, 상상만 해도 못 참겠는걸.

"혼돈석을 모아야겠다."

상태창을 열어 도착한 퀘스트가 없나 살펴봤다. 그러고 보면 튜토리얼이 끝난 지 꽤 시간이 흘렀었다. 이후로 체크를 안 하고 있었다.

: 1장 '제국의 신시대'가 진행 중입니다.

: 주역 '니클라스 폰 호엔슈타펜'의 인과가 13% 파괴되었습니다.

: 주역 '율리안 폰 호엔슈타펜'의 인과가 72% 파괴되었습니다.

: 퀘스트 'A급 모험가 파티' 1~20을 클리어하여 혼돈석 40개가 지급되었습니다.

: 서브퀘스트 '불사조 토벌'을 클리어하여 혼돈석 10개가 지급되었습니다.

: 퀘스트 '광휘를 흩날리는 기수'가 진행 중입니다. 클리어 시 [스킬 강화권]과 [일반 소환 티켓] 30장이 지급됩니다.

"보상이 엄청 쌓여 있었구나."

잠깐 방치해 놓으니 혼자서 잘 굴러가고 있었다. 잘은 몰라도 메인 시나리오까지 진행되는 것 같다.

"메인 시나리오라는 게 어차피 말이 그렇지 이 세상에서는 시간 흘러가면 다 일어날 역사란 의미겠지."

내 기억에 의하면 1장은 주로 율리안과 그녀의 형제 니클라스가 펼치는 모험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 과정에서 율리안은 난폭한 방법으로 큰 공을 세우고, 황제의 눈에 띄어 새 황태녀로 책봉된다.

다만 그게 우리 집 앞에서 벌어지는 줄은 몰랐다.

"나야 뭐 내 집에 조용히 있으니까."

최근에 한 번 만나긴 했어도 별 영향이야 안 줬을 것 같은데.

…아닌가?

이 '인과 파괴'라는 표현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다.

어쨌든 일단 챙길 건 챙기자. 보상으로 들어온 혼돈석을 받고 더 필요한 분량은 던전의 재정으로 구매할까 싶어, 루트를 찾아보기로 했다.

"요즘 혼돈석이 얼마쯤 하려나."

"혼돈석 말씀이신가요? 마계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 희귀한 광석이지요. 진귀한 힘이 담겨있어 경지의 무기를 만들 때나 최고위 마법 시전에도 쓰여 아주 비싸답니다."

"응. 심지어 총량이 한정되어 있지."

비유하자면 금 같은 물건이다. 시세가 안정적이라 투자 용도로도 쓰인다.

"보통 1킬로그램 기준으로 거래하지?"

내 상태창에서 의미하는 혼돈석 한 개도 한 손에 잡히는 정도를 단위로 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봤을 땐 금화 열 개라고 봤어요."

"뭣."

생각보다 비싸네….

당장 50개가 더 필요하니까 전재산을 거의 다 박아야 겨우 지을 수 있는 수준이다.

너무 교환비가 안 좋다. 그야 퀘스트에서 주는 재화를 직접 안 쓰고 시세대로 쓰자면 웃돈을 줘야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암만 그래도 수영장에 금화 오백 개는 선 넘는데.'

그 돈이면 인부들 불러다 수영장을 직접 짓고 말겠다.

아닌가, 다시 잘 생각해 보니 못 지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 생각하니 합리적인 가격 같기도 하고.

심지어 목욕탕도 포함이긴 하지.

목욕탕….

어째 합리적인 걸 넘어 현명한 소비라고 자기최면이 걸리기 시작했다.

"혼돈석을 싸게 구할 방법이 필요해."

바로 생각난 건 역시 마왕 세라펠이었다. 마왕이니 그 정도 인맥은 가지고 있을 듯하고, 콜라를 인질로 잡으면 거래 루트는 뚫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띠링.

그리폰도 제 말 하면 찾아온다고, 타이밍 좋게 알람이 울렸다.

창을 연 나는 연락이 온 게 던전 인터폰 쪽이 아니라 마법사 게시판인 걸 깨달았다.

[방구석경비원] 저기요 오르 선생니임

[방구석경비원] 혹시 몇위계이신지

[방구석경비원] 대답은 안 되시죠..?

말투는 예의 바른데 인사도 없이 냅다 본론부터 꺼내는 게, 슬슬 세라펠의 성격에도 적응되기 시작했다.

[오르] 4위계다

[방구석경비원] 에이

[방구석경비원] …진짜용?

[방구석경비원] 선생님선생님

[방구석경비원] 제가 의심하는 건 아니구요

[방구석경비원] 혹시 이거 문제 한번 풀어 보실래용

그리 말하고는 세라펠이 내게 냅다 이미지를 하나 보냈다. 주문의 함수 공식이었다.

"어려운 거 보내고 있어."

나도 나름 마법사 나부랭이로서 오기가 생기는 도전이었다.

그런데, 어라.

평소 같으면 푸는 게 거의 불가능한 수식이었을 터인데 어째 바로 해답이 보였다.

마법 공식은 수학과 유사한 점이 많다. 전생에 공학 수학을 전공했던 나다. 기억이 떠오른 지금은 더 풀 만했다.

적당히 답을 적어 보냈다.

[방구석경비원] 오...

[방구석경비원] 최소 6위계 확정

[방구석경비원] 선생님선생님

[방구석경비원] 혹시 마법 가르쳐 줄 생각 없으세용

웬 마법 수업.

기운도 좋지, 세라펠은 여기저기 참 바쁘게도 살고 있었다.

…아니지. 잘 생각해 보니까 반대인가?

인터폰이나 게시판으로 내게 DM 보낼 때와, 마법사 게시판에서 활동할 때를 빼면 얘는 현생을 사는 시간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영계에 산다는 게 인터넷 망령이라는 뜻이었나.

[오르] 내가 가르칠 마법은 없다

[방구석경비원] 떼잉 그러지 마시고요

[방구석경비원] 제가 최근에 마법으로 발린 애가 있는데용

[방구석경비원] 걔가 인간이나 악마도 아니고 마멋이에요 마멋

[방구석경비원] 열받죠?????

[방구석경비원] 제가 걔는 이겨야겠거든요

그거 내 얘기잖아.

나 참, 마왕씩이나 되는 분이 왜 나한테 경쟁심을 불태우는 건지.

내 진짜 경지는 4위계니 마왕인 세라펠에게 가르칠 건 딱히 없다. 그야 내가 7위계나 그 상위 주문도 쓸 수 있긴 하지만 던전 코어 덕분이고.

"아니지."

기왕 이렇게 된 거 물어나 볼까.

[오르] 혼돈석을 준다면 고려해 보겠다

[오르] 마법 연구에 필요하다

혼돈석은 흔하게 수요가 많은 물건이니 나중에 아인으로 거래를 요청해도 내가 오르라고 의심을 받지는 않을 터였다.

[방구석경비원] 혼돈석이용?

[방구석경비원] 헉 허헉 헉

[방구석경비원] 초위계라도 연구하시나용??

초위계라니, 경지를 초월한 마법이잖아. 그런 마법을 세상 누가 안다고.

그렇게 대답하려는데 문장이 자동완성됐다.

[오르] 초위계를 인식하는 이는 더는 없다

[방구석경비원] 우와

[방구석경비원] 선생님은 보이시나봐요

[방구석경비원] 그럼 혹시

[방구석경비원] 호오옥시

[방구석경비원] 이거 한 문제만 더...

아까보다 어려운 문제가 날아왔다.

확실히 복잡한 수식이었다. 공학계산기의 도움이 필요했다. 수작업으로 해야 해서 조금 오래 걸렸다.

답을 구해서 전송.

어디 갔는지 대답이 안 돌아온다.

그러기도 잠시.

와르르!

게시판 아래로 좌르륵 혼돈석이 떨어졌다.

"뭐야."

[방구석경비원] 선금이에용

[방구석경비원] 수업 한 번에 열 개씩 드릴게용

개쩌네.

골라카브도 던전을 기깔나게 꾸며 놨던 걸 보면 마왕이라는 직업은 참 돈을 잘 버나 보다.

덕분에 수영장 건설에는 한 발짝 다가갔지만, 이 비싼 걸 그냥 받아도 되려나.

"진짜 가르쳐줄 게 없는데."

이 기회에 나도 마법을 기초부터 연습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놓치고 있던 점을 발견할지도 모르고.

[오르] 성립이다

[방구석경비원] 우헤헤 ㅎㅂㅎ

[방구석경비원] 뭐 알려주실 거예요?

영롱한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돌을 상태창에 먹이니 숫자가 바뀌었다.

[보유 혼돈석] 60개

좋아, 첫 수업이니 쉬운 것부터 가 볼까.

나는 세라펠에게 문제를 보냈다.

32화. 마법 수업 (2)

"와, 이걸 어떻게 풀었지?"

닉네임 [오르]가 보낸 DM을 본 세라펠은 정신이 번쩍 들어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한참 쌓여 있던 먼지가 풀풀 날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닥도 없는 지하로 떨어지며 고통에 절규하는 혼령들 머리 위로 살포시 얹힌다.

―그어어어…

끝이 보이지 않는 공동에 가득 들어찬 혼령들. 그들이 내지르는 괴성이 퍼져 메아리를 만든다.

"아이참, 조용히 좀 해 봐. 집중해서 좀 보게."

세라펠이 그들을 타박하며 안정화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고통스러워하던 혼령들이 고개를 숙이며 조금은 얌전해졌다.

"이건 옛날 문헌에 적혀 있던 상위차원 합성식인데. 나도 못 푸는 거야."

허공에 마력으로 글자를 쓰며 수식을 검증해 보는 세라펠. 과정이 진행될수록 그녀의 눈동자에 감탄이 깃들었다.

그녀의 일상은 대체로 늘 지루했다.

밖에서야 무려 7좌의 마왕이자 제7의 뿌리, 차카브에 소속된 모든 던전을 총괄하는 위대한 이라고 치켜세워주고 질투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던전 게헤놈은 보다시피 미처 성불 못 한, 한 많은 혼령과 악령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종일 소리나 질러댈 뿐인 감옥이다.

골라카브처럼 세련된 인테리어는커녕 지하에 아무렇게나 파놓은 굴이 전부다.

대부분의 침입자가 입구에서 토벌되기에 그 실상을 아는 이도 없다.

교우관계도 없는 그녀는 대충 던전 구석에 놓은 침대 위에 처박혀서 게시판이나 뒤적이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세라펠에게 고위계 마법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는 건 엄청난 자극이었다.

"모험가 오르, 불사조를 쉽게 토벌할 정도면 경험도 많은가 본데. 혹시 S급 모험가 중 한 명일까?"

대륙에 11인만 있다는 S급 모험가는 세라펠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들 모두가 영웅의 영역에 도달했다고는 들었다.

그들의 전투력을 측정할 방법이 없어서 붙인 등급이라던가.

"뭐, 내게 도전하지 않는 것만 봐도 현명한 녀석들인 건 분명하지."

그들 중 누가 마법을 잘 쓰는지는 세라펠도 잘 몰랐다. 세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그녀였다. 골라카브를 두드려 팰 때만 해도 그가 5좌의 마왕인지도 몰랐을 정도였다.

"최근에야 그 녀석."

차카브 13번 던전, 파밍힐의 군주.

마멋 로드 아인.

그에게는 관심이 간다.

"지난번에 마법 방해해 놓고 밥만 얻어먹은 게 좀 미안하긴 하니까."

도무지 살갑지 못한 마멋이다.

마멋은 원래 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물이라 그런지. 던전을 키우는 지금은 항상 심술을 부리는 말투다.

"뭐 대단하다고 맨날 폼 잡고 말이야."

마법 실력이야 좋긴 하다. 사멸하기 직전인 사바텀을 열어서 벌써 첫 승격까지 이뤄냈다. 군주로서의 자질도 충분했다.

아무리 그래도 기아스의 맹약까지 나눈 사이인데 존중이 없다, 존중이.

마왕으로서의 품격을 지키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강자가 진리인 마계의 원칙 때문이다.

그래서 세라펠은 자신의 신상을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는다.

자신이 사바텀 출신이라고, 영웅이었던 전적이, 그때 썼던 이름이 알려져선 안 된다. 그건 곧 그만큼 자신의 빈틈과 약점을 세간에 공개한다는 뜻과 다름없다.

아인은 물론이고 다른 마왕 등을 만나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늘 가면을 쓰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품격 있는 마법을 보여 주면 아인도 자신을 인정할 게 틀림없다. 세라펠은 확신했다.

"걔가 얘기했던 푸른 달도 신경 쓰여."

마계에 간혹 발생하는 블루문 현상. 그 만월의 밤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발생하는 지역과 날짜는 불규칙하기에 찾기는 힘들지만.

실제로 세라펠은 다음 블루문을 쫓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계획이 한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진행하던 일이었건만 어떻게 알았을까. 그를 추궁할 필요도 있었다.

"어디 보여줘 봐, 오르. 나한테 어떤 마법 알려줄래?"

띠링, 마침 알람이 울렸다. 오르에게서 도착한 새로운 메시지.

"마법진 작성법의 기초…?"

세라펠은 고개를 갸웃하며 내용을 확인했다.

마법을 발동하는 데 필요한 진을 그리는 방법이 차분하게 적혀 있다. 마지막에는 풀어야 할 문제가 덩그러니 하나.

아무리 봐도 6위계인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놀리는 건가…?"

마법진도 못 그리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바보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뭔가 숨은 뜻이 있을 게 분명하다. 설마 그만한 고위계 마법사가 이런 기초적인 내용을 수업이랍시고 가르칠 리가 없잖는가.

세라펠은 오르가 보낸 내용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따라 해 보았다. 에메랄드빛 마력을 흘려보내 가장 쉬운 정삼각형부터 그리고 그 위에 점차 복잡한 도형을 쌓아 나간다.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하겠어.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어라?"

지문을 따라가던 세라펠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지막에 제시된 문제. 분명 쉬운 내용이지만 별안간 과정이 뒤바뀌어 있었다.

평면에 삼각형을 작도하는 것만으로 정육면체를 만들어야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소리였구나."

세라펠은 진을 치우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 가기 시작했다. 이 불가능한 문제를 풀어 내려면 사이에 생략된 과정을 찾아야만 한다.

그것이 고위계 마법의 비밀이 분명했다.

높은 경지는 위가 아니라 기본기의 틈새에 있다고, 마법사 오르는 어마어마한 세상의 진리를 가르쳐 준 것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상위차원, 복소평면… 아냐, 기본진에서 그걸 쓰면 4진부터 형태가 망가져."

한참을 고민하며 이리저리 마법진을 가지고 노는 세라펠. 그녀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마력을 흘리는 데 집중했다.

제목) 오늘 왜 방구석경비원 안 보이지?

그 사람 없던 날이 없었는데

사고라도 났나

└그러게요 걱정 되네요

└차단해서 모름

└어떻게 사람이 365일 마법사 게시판만 하겠음 일이 있겠지

└그 사람은 진짜 365일 24시간 함

└백수임?

마법사 게시판에서도 세라펠을 찾는 글이 올라올 정도로 열중하기를 한참.

"알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세라펠은 퀭한 눈으로 완성된 마법진을 바라보며 흐흐흐 웃음을 흘렸다.

"기본진을 허수차원에 그리는 거였어. 그게 네 비밀이었구나, 마멋아! 이제 나도 오르 덕분에 쓸 줄 안다고!"

깨달음을 얻은 세라펠이 마법진을 찍어 오르에게 전송했다. 정답이라 확신한 그녀는 지친 몸을 침대에 던졌다.

마법에 이렇게 진심을 다해 본 게 얼마 만인지.

"옛날 생각난다."

사바텀에 있을 때는 강해지기 위해서 뭐든지 했었지.

그분께 인정받고 싶었으니까.

그분의 옆에 나란히 서고 싶었으니까.

당신이 지금 나를 보고 있다면, 그때처럼 칭찬해 줄까.

세라펠은 추억에 빠지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

세라펠이 DM으로 보내온 사진을 보니 뭘 어떻게 했는지, 마법진을 기괴한 형태로 비틀어서 그려놨다.

"시트리, 이거 뭔지 알겠어?"

"…허수차원에 작성한 건가요?"

"맞지? 왜 굳이 그랬을까?"

내가 낸 문제는 아주 기초 중의 기초적인 내용이었다. 기본기부터 다지자는 의도로 보냈는데 얘는 기묘한 해답으로 자기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마법 천재들이 참 많구나.

하나같이 성격이 이상하고.

"이렇게 그릴 수도 있구나."

나도 한 번 따라해 볼까 싶어 슥 그려봤다.

우리가 있는 세상이 일반적인 3차원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뒷면은 음의 세계, -3차원이라고 표기한다.

허수차원은 i차원이라고 쓰는데, 지금 한 건 세상의 뒷면에서 한 번 더 틈새를 열어 마력을 흘려보낸 거랄까.

나도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비유하자면 눈을 감고 머리 뒤로 다트를 던진 느낌이다.

"오, 이게 되네."

좌우, 상하 반전된 마법진이 꼬불꼬불하게 그려졌다. 보기엔 이상해도 똑바른 형태다. 시트리가 짝짝짝 손뼉을 쳤다.

: path 16을 돌파하였습니다.

: 근원의 경지에 가까워졌습니다!

: 지력이 3 상승했습니다.

: 마력 전환 효율이 12% 상승했습니다.

세라펠 덕분에 나도 기본기부터 점검하며 마법 이해도가 높아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배움은 오히려 내가 받는 것 같은데, 혼돈석까지 받아도 되나…?

조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목욕탕 설치할 때까지만 신세 좀 집시다."

[오르] 정답이다

[오르] [사진]

[방구석경비원] 데박박

[방구석경비원] 제 진보다 훨씬 깔끔하네용

[방구석경비원] 역시 오르르 선생님

[방구석경비원] 다음 수업 준비됐어용!

"다음이라, 뭘 보낼까."

아직 생각해 둔 게 없었다.

이거면 될까 싶어 오늘의 무료 단차를 돌리며 수정구로 녹화했다.

: ☆☆☆ [키클롭스의 망치] (네임드)를 소환했습니다!

"오, 3성 네임드 장비!"

요즘 들어 뽑기 운이 좋은 느낌이다. 3성 네임드면 나름 확률이 1퍼센트밖에 안 된다.

"세상에. 군주님, '수작'을 소환하신 건가요?"

"아, 이거 그런 분류였었지."

[키클롭스의 망치] ☆☆☆ (네임드)

: 대장장이 신의 수작 30정 (No. 01)

: 손재주 +10

: 작업시간 –30%

"시설 보수할 때 좋겠다. 집 공사할 때도 쓸만하겠고."

이 망치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겠다. 1성 장비 [공구 벨트]와 함께 장비했다.

"마침 밭 배수로가 흙이 쌓여서 막혀 있었지."

"마멋, 그런 마멋."

"파이프에 금이 가서 물이 새는 마멋."

농사 마멋들과 함께 가서 배수로를 살펴보았다. 조그만 마멋들은 내가 미처 못 봤던 틈새의 금 위치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키클롭스의 망치로 뚱땅뚱땅 몇 번 때려주니 말끔하게 고쳐졌다. 다시 파이프의 수도꼭지를 열어보니 콸콸 물이 들어오며 문제없이 작동한다.

"순식간에 고쳐진 마멋!"

"군주님 일 잘하는 마멋. 칭찬하는 마멋."

"수확도 대신 하는 게 어떤 마멋?"

"인석들아, 그거 시키려고 너희 고용했잖아. 가서 콩 따오면 오늘은 두부 된장찌개 해 줄게."

"된장 좋은 마멋."

"두부 먹는 마멋. 일하는 마멋!"

마멋들이 쪼르르 달려가서는 다시 일에 열중했다. 내가 찌개는 기가 막히게 끓이긴 해.

나는 소환 마법의 발동 과정만 편집해서 세라펠에게 전송했다. 기본기에 충실하자는 목적에 맞추어 다음 수업은 발동으로 정했다.

[오르] [영상]

[방구석경비원] 신속시전이군용!

[방구석경비원] 이거 기다렸어용

[방구석경비원] 어떻게 해용??

흠….

솔직하게 대답해야겠지.

[오르] 손가락을 움직인다

[방구석경비원] 그리고용?

[오르] 끝이다

[방구석경비원] 개소리 말고

뭣.

[방구석경비원]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방구석경비원] 좀 더 가르쳐주실 거 없나용

방금 좀 심한 말이 지나갔던 거 같은데.

[오르] 마력은 필요없다

[방구석경비원] '_'

메시지는 거기까지.

슬슬 밭일을 끝내고 마방을 둘러보러 갈 시간이었기에 게시판을 닫았다.

그때 상태창에 다른 메시지가 떴다.

: 침입자가 있습니다!

: 위치 – 입구

: 격퇴하였습니다!

이건 또 뭐야.

***

"여깁니다."

S급 모험가, 엘로힘은 황실령에 있던 다른 모험가들의 안내를 받으며 던전의 입구에 도착했다.

명마에 탄 채 창을 들고 그곳을 천천히 탐색하는 엘로힘. 그 매서운 눈길에는 일말의 방심도 없다.

"제단이로군."

"예. 전보다 삐까번쩍해졌습죠. 뺏어간 돈으로 새로 지었는지…."

"돈을 뺏어갔다?"

"아, 아닙니다. 아무 것도."

A급 모험가 대장이 말을 흐렸다. 그의 퀭한 눈은 마치 무언가에 중독된 듯 보였다.

'이들은 틀렸군.'

엘로힘은 그들이 이미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저주에 당했다고 직감했다. 전력적으로도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이 분명했기에 홀로 공략에 들어가기로 판단했다.

"신수의 위치는 2층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아, 조심하십쇼. 오늘은 탐색이라고 하셔서 지금 왔지만 원래 해가 진 후에 와야 합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경기장도 아직 안 열었고…."

"감히 내게 후퇴를 명령한 건가?"

엘로힘이 코웃음을 치며 고삐를 당겼다. 히히힝! 그의 명마가 상체를 일으키며 맹렬히 울부짖었다. S급 모험가다운 패기였다.

"어어? 진짜 지금 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그럼 그 이유를 보여봐라!"

엘로힘이 대장의 멱살을 잡아다 냅다 제단 위로 집어 던졌다.

"으아아악!"

짧은 비명이 들리기 잠시.

―크르르릉!!

―캬아아악!!

―아우우!!

3중의 위협적인 하울링이 숲을 뒤흔들어 놓는다.

"사람 살려!!"

헐레벌떡 도망쳐 굴러 내려오는 대장. 그가 뒤도 안 돌아보고 꽁무니를 뺐다.

"맙소사!"

"나타났군! 도망쳐!"

다른 모험가들도 헐레벌떡 몸을 돌렸다.

제단 위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세 개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전설급 마수, 케르베로스다.

'진짜 지금 가면 안 되는군.'

엘로힘은 대장을 인정하며 기수를 돌렸다.

33화. 우리 집 포포 (1)

"믿겠다, 너는 A급 모험가가 맞군. 정면돌파는 바보짓이다."

던전 입구를 다녀온 엘로힘은 깔끔하게 판단했다. 죽다 살아난 모험가 대장이 풀 범벅이 되어서는 발작했다.

"그러게 뭐라고 했습니까! 삼두지옥견이 입구를 지키고 있단 말입니다!"

"그럼 너희들은 어떻게 저 던전에 드나들 수 있었지? 설마 케르베로스의 여섯 개나 되는 눈을 피할 순 없었을 테고."

S급 모험가는 말을 끝까지 들으면 죽는 병이라도 있는 건가?

대장이 이마를 탁 치고는 엘로힘을 설득했다.

"그러니까 들어 보십쇼. 저 전설급 마물이 정확히 오후 여섯 시만 되면 귀신같이 모습을 감춘다니까요. 그때면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2층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얘기입니다만."

"1층은 미궁이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미궁을 돌파하면 비로소 그 장소가 나타납니다."

"신수와 겨룰 수 있는 경기장이군."

엘로힘의 눈이 시퍼렇게 번쩍였다. 그가 창을 부웅 휘두르자 신묘한 힘을 담은 빛가루가 번쩍였다.

"오오."

"이게 S급의 기프트, 광휘인가!"

"과연 영웅은 손짓 하나도 다르군."

모험가들이 그를 보고 감탄했다.

"대봐야 아는 거지. 아무리 S급이어도 혼자서 신수를 상대하겠어. 당장 삼두견한테서도 도망쳐 나왔는데."

하지만 높은 권력에는 시기도 꼬이는 법. 그를 질투하는 모험가도 한 마디를 냈다.

동의하는 모험가도 몇 있었다. 방금 용맹하게 싸우지 않은 건 사실 아닌가.

재릿, 엘로힘이 눈을 얇게 찢고는.

"히히힝!!"

고삐를 당겨 삽시간에 자신의 청마에 시동을 걸었다.

쐐애액― 쿵! 

그 자리의 모두가 인식하기도 전에 엘로힘은 입을 놀린 모험가를 청마로 덮쳤다. 빛무리가 휘날리며 궤적을 그린다.

"어, 어이쿠!"

바닥에 쓰러진 모험가는 겁에 질려 몸을 벌벌 떨었다. 엘로힘이 그의 갑옷 고리를 창에 꿰어서는 자신의 앞까지 들어 올렸다.

"내게 저 케르베로스를 토벌하는 건 의뢰 축에도 끼지 않는다."

"뭐, 뭐요…?"

"내가 여태 쌓아 올린 전설급 마수의 시체는 백 구를 넘는다."

엘로힘의 험악한 표정을 보고 모험가는 깨달았다. 내가 미친놈을 잘못 건드렸구나.

"기수를 돌린 이유는 하나, 신수를 전력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다. 고작 케르베로스에게 낭비할 광휘는 없다. 그리고 네놈에게도."

"아, 알았소. 이것 좀 놓고…."

"아니, 조금은 남았군."

―쐐애애액!!

엘로힘이 삽시간에 하늘로 날아오른다. 까마득해지는 지상을 보며 오금이 저린 모험가는 눈을 꽉 감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알았소, 알았소! 내가 잘못했소! 히이익!"

중력가속도가 그의 몸을 덮친다. 공중의 빛을 밟고 쏘아진 신속. 쿠웅! 엘로힘이 지상에 착지하자 유성이 쏘아진 듯 굉음이 일어났다.

그가 모험가를 땅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돈은 지천에 널리고 널렸다. 지나가던 동네 꼬맹이의 주머니에도 들어있지. 하지만."

그의 눈에서 광휘가 번쩍인다.

"명예는 오직 한 명에게만 주어진다."

휘릭, 엘로힘이 깔끔하게 창을 집어넣었다. 그의 패기를 직접 목격한 모험가들이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역시 S급인가…."

"확실히 상식이 달라도 뭔가 다르군."

"그냥 미친놈 아냐?"

"쉿."

보통 모험가는 몸 말고 쓸 게 없는 이들이 되는 직업이다.

미지를 탐사한다는 로망이 있기는 해도 대부분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두기 때문에 등급이 올라도 더 희귀한 아이템이나 아티팩트를 목표로 하기 마련이다.

엘로힘처럼 특이한 목적을 쫓는 자는 보기 드물었다.

모험가 대장이 그에게 물었다.

"저녁에 잠입하실 겁니까?"

"잠입? 그런 좀생이 같은 수는 쓰지 않는다."

엘로힘이 기수를 틀며 낮게 말했다.

"경기장으로 가고자 하는 자는 전부 데려와라. 역사를 쓰는 자리다. 축제를 벌이겠다."

***

"이게 뭔 소리래."

마멋들과 오전 농사일을 마치고 거실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별안간 천장이 꽝 울리더니 커다란 진동이 느껴졌다.

"맛!"

"구르는 마멋!"

어디서 유성이라도 떨어졌다고 생각되는 충격이었다. 바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개인 구역을 나서 알현실로 향했다.

"시트리, 방금 소리 들었어?"

"군주님, 외부에 침입자가 있었어요."

아까 상태창에 도주했다고 뜬 걔들이려나.

대체 뭘 했길래 이만한 소리가 났을까.

"도망치고도 이 정도면 위에서 무슨 굿판이라도 벌이고 있나 본데."

"불편하시면 방어 범위를 1층까지 늘릴까요?"

"아냐. 어디까지나 던전의 범위는 지하 영역과 입구까지니까. 벗어나면 내가 불의의 상황에 서포트를 못 해 줘."

"소인은 불의의 상황에 빠지지 않을 자신 있어요."

"혹시 모르잖아."

내 시야에 닿는 위치에 있으면 상관없지만, 던전 밖에서 시트리가 전투에 들어가면 상태창에 뜨지 않게 된다. 다른 기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케르베로스에게도 주의를 당부했던 거고.

'아까 상태창에 떴던 침입자 목록.'

이건 조금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 침입자가 있습니다.

· 침입자 : 모험가 파티

· 인원 : 26명 / 26명

· Lv. 71 '음속' 엘로힘 

S급 모험가 

'무슨 S급 모험가가 여기를 다 찾아왔지.'

그렇게 주변에 폐를 끼친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은 겨우 막 하급 던전으로 승격한 걸음마 단계이고, 인명 피해를 낸 적도 없다.

제국 관청은 늘 일손이 부족하다. 이 정도면 무해 판정이 나와서 금방 방치될 줄 알았는데.

"변수가 있다면 시나리오, 이것 때문 같아."

율리안이 근처에 와 있기도 했으니 어쨌든 안 좋은 방향으로 눈에 띄어버렸다는 걸까.

으음… S급은 좀 빡센데.

아무리 내 직업이 던전 군주라지만 침입자들과 진짜 본격적으로 치고받고 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방치되어 있던 내 집에 돌아온 집주인일 뿐이니까.

조금 특이한 집이라서 계속 뭐가 꼬이고는 있는데, 어느 지역을 가서 살아도 이웃들과 크고 작은 갈등은 해결해야 하기 마련이다.

잘 타일러서 돌려보낼 방법을 찾아야겠다.

"그나저나 집 구조도 문제다."

"진동이 묘하게 거슬리긴 하네요."

"응. 층수가 늘어나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전체가 울리는 구조야."

모리안이 경마장에서 활약하는 동안 밖에 나가 있어서 몰랐다.

아직도 우리 집은 층간소음을 하나도 차단 못 하는 구조였다.

이건 조금 큰 문제였다. 즉시 해결하고 싶었다.

"지금은 마력이 좀 있으니까 다 뜯어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

층간소음은 건물 구조의 문제 때문에 주로 발생한다. 층마다 굴을 판 우리 집은 벽식 구조와 비슷하다. 하중 때문에 철거 못 하는 벽이 많이 있다.

이걸 전체 층을 관통하는 기둥을 설치해 하중이 몰리도록 바꿔주고, 층마다 바닥과 천장을 보강하면 진동이 기둥을 타고 내려가기에 소음이 사라진다.

"어디, 설계도를 짜보자."

[설계] 스킬을 사용해 마력으로 그림을 그린다. 던전 투시도에서 불규칙적인 굴을 모두 치우고 굵직한 기둥 열 개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마멋들이 이동하기 위한 굴도 새로 파 준다. 지금은 이 굴들이 워낙 불규칙하게 나 있어 소리를 공명시키는 역할도 한다.

"이 정도일까. 검토는 더 필요하겠는데… 어디."

[건축] 스킬을 적용해 주문을 발동해 보려 하니 상태창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마력이 부족합니다.

"안 되네."

원인을 찾아보니 스킬 레벨이 부족했다. 지금의 1레벨로는 쓰는 마력 대비 바꿀 수 있는 면적이 너무 적었다.

"원래 마력이 많이 드는 스킬이었어. 미궁 만들 때도 대출혈이었구나."

"건축은 놀라운 주문이지요. 1층은 군주님의 걸작이에요."

"그리고 구조를 바꾸면 인테리어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고… 대공사네. 쉽게 생각해서 할 일은 아니겠어."

"도울 일이 있다면 맡겨 주세요. 대기하고 있을게요!"

시트리가 든든하게 말해 줬다.

층간소음 문제를 모리안에게도 전달하니 깜짝 놀라며 창을 빼 들었다.

"그럴 수가! 본관의 시야가 좁았습니다. 설마 주군께 그런 폐를 끼치고 있었을 줄이야! 죄를 뉘우치는 의미로 스스로 목을 베겠습니다!"

"듀라한이라 목은 원래 떨어지잖아."

"예! 듀라한 조크였습니다!"

모리안의 유령마가 히힝 울며 추임새를 넣었다.

"그동안은 괜찮았어. 내가 아래에 있을 때 경마장에서 경기가 있진 않았잖아?"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제입니다. 경마장을 노리는 침입자들은 주로 저녁에 몰려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짜 큰일이네. 안 쫓아낼 수도 없고."

"주군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일격즉살, 소리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아이, 안 돼 안 돼."

시트리도 그렇고 영웅들은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다. 가끔 마물 토벌을 데리고 가줘야 하려나.

"가능하면 평화적으로 쫓아내 보고 정 어쩔 수 없으면 경마로 격퇴해 줘."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잠깐이라면 생각보다 그렇게 안 시끄러울지도 모르니까."

수영장을 지으면 물소리도 날 텐데, 새 구조로 한시 빨리 바꾸는 게 맞겠다 싶었다.

슥 경마장을 둘러보고 이만 나가려는데 한 가지 위화감이 있었다.

"어라, 그런데 마구간에 포포가 안보인다?"

"예? 종말께서 말입니까? 그럴 리가, 조금 전까지 분명히 마방에 계셨습니다만."

모리안이 당황하며 마방을 확인했다. 인터페이스에는 포포가 한 시간 전 자리를 비웠다고 적혀 있었다.

"얘 어디 갔어."

던전을 뒤져봐도 어느 층에도 없다. 모리안이 식겁하며 입을 쩍 벌렸다.

"조, 종말께서! 실종! 본관의 책임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실태를…! 주군! 죽여 주시옵소서!"

"됐어. 밖에 바람 쐬러 갔나 보지."

"그건 그것대로 큰일입니다! 종말께서 산책을 하신다는 말씀은, 대지가 갈라지고 산이 불타리란 뜻입니다!"

음….

맞는 말이긴 하네.

잠깐 잊고 있었는데, 포포는 어지간한 슈퍼카를 뛰어넘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발굽에서 불꽃도 나온다. 자율주행 AI는 제멋대로라 난폭하지.

"찾으러 다녀올게."

"동행하겠습니다!"

"아냐. 어차피 내 말밖에 안 들으니까."

나는 불멸자의 투구를 찾았다.

밖에 나갈 땐 이 신분이 가장 안전하겠지.

모험가 오르로 활동할 때였다.

***

"그래, 엘로힘이 벌써 숲에 진입했다고. 토벌은 시간 문제로군, 하하하!"

니클라스가 발코니 너머로 죽음의 숲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해가 지며 길게 뻗은 그림자가 불길함을 풍겼지만 니클라스에게는 그것들이 전부 금화로 보였다.

"저 던전에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가 살고 있든, 얼마나 흉폭한 마물이 있든. 이렇게 괴롭히면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테지. 나도 질기기로는 유명한 놈이야. 어디 누가 버티나 해 보자고. 제 발로 기어 나갈 때까지 괴롭혀 줄 테니!"

비서관은 철부지 2황자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S급 모험가를 고용하라고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비용이 허락하는 한에서라고도 간언했었다.

하지만 니클라스는 또 마법의 주머니라도 가진 마냥 길드에 알선금을 펑펑 뿌려 버린 게 아닌가.

덕분에 황실령의 금고는 바닥이 다 보여 개미가 집을 지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황자 전하, 한 국가의 왕실조차 다루기 힘든 S급 모험가, 그것도 '음속'을 고용하신 건 감축할 일입니다만. 이제는 진짜로 현금이 없습니다. 귀족가에 지불할 이자 납기일이 사흘 후입니다만…."

"어허, 자네는 꼭 기분이 좋을 때 초를 치는 나쁜 버릇이 있단 말일세. 현금이 부족하면 곡식으로 대체하면 되잖나. 마침 이모작의 수확철이니 걷어 들여서 보내게."

"영지민에게서 세수는 지난주에 걷었습니다."

"다음 달 분을 미리 걷는다고 해. 1할 감면해 준다고 하고. 그리고 다음 달에 기본세를 2할 인상하면 그만 아닌가."

그런 짓을 했다간 시장에 도는 통화량이 줄어 경제가 파탄 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이 남자는 모르는 건가?

아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알면서도 무리한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실제로 이 땅은 수확량과 작물의 질이 좋아 그리한대도 굶어 죽는 영지민이 나오진 않는다.

니클라스는 처음부터 땅의 이점을 이용해 자원을 한계까지 쥐어짤 생각이었다. 그곳에 몰려든 인간을 포함해서.

황실령을 선포하고 3년. 볼륨이 충분해지자 본격적인 수확에 나선 것이다.

"문제 될 것 있겠나! 저 들판을 보라고! 햇빛을 머금어 황금이 따로 없잖는가! 이런 사업지를 찾아내다니, 역시 내 안목은 대단하지 않나, 하하하!"

니클라스가 자신에 취해 양천대소하던 때였다.

―화르륵!

황금 들녘에 불꽃이 피어오르며 돌풍이 몰아쳤다.

니클라스가 웃음을 뚝 멈추고 정색하며 눈을 크게 떴다.

"…비서관."

"예."

"저기 뭐가 달리고 있는 겐가?"

비서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하의 세금이 불타고 계십니다."

34화. 우리 집 포포 (2)

"더럽게 좁군."

한 시간 넘게 침묵하던 엘로힘이 끝끝내 한 마디를 내뱉었다.

1층 미궁 영역을 수십 명의 모험가들이 낑낑대며 돌파하던 중이었다.

"구조가 더 악질로 변했습니다. 전에는 이런 기어가는 통로는 없었는데."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조금만 있어 보십쇼. 층계 위치는 안 변하니까 바로 이 앞인데… 망할! 막혀 있군!"

엘로힘이 한숨을 쉬었다. 결국 후위에서 못 참고 탈락자가 나왔다.

"으아아, 난 빠져나가겠어!"

정신력이 한계에 다한 모험가 한 명이 포기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도망쳤다. 미궁엔 지속적으로 공포심을 부여해 사기를 떨어트리는 효과가 있었다. 어지간한 이들은 금방 나가떨어진다.

"근성이 없군."

"쯧, 조금만 더 가면 기회의 땅이 있거늘."

대장도 그를 보고 혀를 찼다. 하지만 어차피 막힌 길이었다. 경마장으로 가는 2층 층계를 찾으려면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가 탐색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던전 밖으로 나갔던 모험가 한 명이 되돌아와서는 대장에게 급보를 전했다.

"대장! 오늘 경마 없나 본데요?!"

"뭔 소리야?"

"밖에 있답니다! 경마장의 에이스 '검은 종말' '포포 더 아포칼립스'가요!"

"뭐? 바이콘이 왜 던전 밖에 있다냐?"

"바이콘?"

엘로힘이 그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가 지금 만나러 가는 신수 아니었나."

"그랬습죠. 아, 포포 더 아포칼립스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만 올라와 있고 본 경기 전에 세레모니만 해서 참가는 안 합니다. 실제로는 '폭주선 실버쉽'이 무려 3관에 빛나는 1번 인기마죠. 기수는 '신제 모리안'이라는 듀라한 친구인데, 실력이 어마어마합니다."

"망할."

엘로힘도 몸을 틀어 미궁을 탈출한다. 던전에 목표였던 바이콘이 없다면 더 볼 일은 없었다.

같은 시각, 황실령의 영지민들은 비보를 전해 듣고 한숨을 푹 내쉬던 중이었다.

"아니, 지금도 말라 죽기 직전인데 세금을 더 올리겠다고?"

"해도해도 너무한 거 아니요!"

"세금을 또 내면 뭘 먹고 살라고?"

발 없는 말이 유령마보다 빠른 법이다. 특히 돈에 관련된 것이라면.

"황실령에서는 사람처럼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욕심 많은 귀족의 등쌀에 못 이겨 이주해 왔건만, 황실도 다를 바 없구만!"

"귀족 중 최고가 황족 아니오. 수법도 제일 사악하구만!"

"쉿, 말 작게 하시오. 혹시 경비대가 들으면 잡혀가겠소."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지. 내 평민이야, 평민. 노예가 아니란 말이야! 이런 식으로는 못 산다!"

"옳소!"

"지도자를 잘못 만나 무슨 고생인지!"

영지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모인 이들은 그간 니클라스에게 쌓여있던 울분을 하나둘 토해내기 시작했고, 분위기는 점점 과격해졌다.

"저 탱자탱자 노는 놈들 뱃속 불려 줄 바에야 차라리 우리가 먼저 밭을 태워 버립시다!"

"뭐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몇 달을 가꾼 밭이잖소."

"여기 이주 계약서 보시오."

머리가 돌아가는 상인 한 명이 황실령 이주 계약서를 들고 왔다.

"최저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는 영지민이 발생할 경우, 영주는 세금을 3개월까지 감면해 준다. 이거 보이시오? 제국 표준법이오. 황명으로 반드시 들어가는 문장이지."

"그 말은 즉."

"수확량이 딱 먹고 살 만큼만 있으면 세금을 안 내도 된다는 거요?"

"당장 밭을 불태웁시다!"

영지민들이 주먹을 치켜들며 뜻을 합쳤을 때, 한 명이 반대 의견을 냈다.

"잠깐 기다리시오.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와 별개로 밭을 불태운 게 반역이랍시고 잡아가면 어쩌겠소? 처형당할지도 모른단 말이오."

"그, 그건…."

"그것도 그렇구려…."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그의 말대로 영지에 대한 테러 행위는 별개였으니.

그때였다.

―화아악!!

영지 멀리서부터 푸른 화염의 벽이 피어오르며 밀밭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쏜살같이 지나가며 돌풍을 일으킨다. 불이 빠르게 번져나가며 작물들을 잿더미로 만든다.

그야말로 종말을 연상시키는 풍경.

갑자기 나타난 이상 현상에, 영지민들을 모두 넋을 잃고 입을 떡 벌렸다.

그러기를 잠시.

"워후!"

"여신께서 사자를 보내셨다!"

"불이오! 이건 기적이야!"

"2황자 엿먹어라!"

영지민들이 환호하며 양팔을 치켜들고 만세를 불렀다. 그들의 시야에 언덕 위를 박차고 올라선 한 마리의 말이 보였다.

"저, 저거!"

"그야말로 신수의 풍채로다…!"

화려한 갈기를 자랑하며 콧김을 내뿜는 바이콘.

영지민들은 그를 향해 큰절을 했다.

바이콘은 멋들어진 두 개의 뿔을 자랑하며 콧김을 내뿜고는, 간만의 산책에 만족하며 동쪽으로 질주를 이어 갔다.

***

"저기 있다!"

황실령을 한참 뛰어다닌 모험가들이 목표를 시야에 넣었다. 황실령 북부 산지에 휑한 땜빵을 만들고는 태평하게 발굽을 고르는 신수.

"아, 아포칼립스 바이콘이다!"

모험가들이 긴장하며 그 이름을 외쳤다.

전투태세를 취한 이는 없었다. 격퇴 명령이 내려와 일단 쫓아오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제정신이 박힌 모험가라면 그것과 직접 싸울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떡하지?"

"시간이라도 끌어. S급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정보다."

"우리가 저거 상대로 시간을 어떻게 끌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라 반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봐, 리사."

남자 모험가 한 명이 별안간 여자 모험가 한 명 앞에 무릎을 꿇고는 품에서 반지를 꺼냈다.

"혹시 우리가 내일도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때는 나와 함께해주겠어?"

"야 이 미친놈아! 그걸 꼭 지금 해야 해?!"

"저 친구는 죽었군."

"아냐, 우리 다 죽었어."

모험가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A급 대장의 말만 믿고 큰돈을 벌 수 있다기에 황실령에 반쯤 끌려왔던 참이었다.

무려 S급 모험가까지 있어 워낙 많은 인원이 우르르 던전으로 향했기에 그들은 제비뽑기로 영지에 남아 있던 예비 병력이었다.

달콤한 기회에는 당연히 그만한 위험부담이 따른다는 세상의 이치를 왜 잠시 잊었을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눈앞의 재해급 신수가 부디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길 바랄 뿐이다.

―화르륵!

불길이 치솟는다. 종말을 고하는 신성한 불길이다.

퇴로는 사라졌다. 어느 누구 하나 농담할 기력조차 잃었다. 침묵만이 감돌며 간신히 마른 침을 넘기는 소리만이 맴돌고 있을 때였다.

―저벅.

치솟은 푸른 불길의 장막 사이로.

한 남자가 유유히 걸어 들어왔다.

"뭐…?"

모험가들이 눈을 의심했다. 스치기만 해도 영혼까지 불타버릴 초고열이다.

산보라도 하는 걸음걸이로 이 사지에 몸을 들인 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인간이 맞기는 한 것인가?

"모험가…?"

"S급인가! 살았어!"

모험가들의 얼굴에 희망이 깃들었다. 검은 철갑을 두른 남자의 행색은 분명 모험가가 틀림없었기에 자신들을 구할 아군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잠깐, S급이라고? 분명 여기 와 있는 S급은 '음속' 엘로힘이라고 하지 않았나?"

"엘로힘은 저런 중갑은 입지 않아."

"그럼 저건 누구지…?"

그들이 의문은 한 마법사에 의해 해소되었다. 그녀가 게시판을 열고는 빠르게 스크롤하더니 이내 입을 떡 벌렸다.

"트, 틀림없어!"

"뭐가?"

"오르! '신수 학살자' 오르야!"

"뭐라고?"

모험가들이 전율했다. 그들도 다른 마법사들을 통해 그 이름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마법사 게시판에 뜬금없이 나타난 고위계의 대마법사 모험가. 재해급 신수인 불사조를 반나절 만에 열 마리나 토벌한 전설적인 일화는 지금도 심심하면 화자되는 떡밥이었다.

"실존인물이었다고…?!"

"투구를 봐! 대장장이 신의 수작이야!"

"지, 진짜다!"

그들의 의심을 사그라트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오르가 팔을 뻗어 힘차게 주먹을 쥐었다.

"종말이여."

―화악!

겨우 한 마디의 진언이었지만 어마무시한 무게가 담긴다.

위엄 넘치는 패기가 불꽃의 벽을 날려버리며 종말의 이각마와 대치한다.

"이곳은 그대가 있을 땅이 아니다."

그리 말하며 저벅, 저벅. 오르가 조금씩 아포칼립스 바이콘을 향해 다가갔다.

"미쳤어! 단신으로 싸울 셈이야!"

"맙소사… 오르! 같은 신수라도 그놈은 불사조와 차원이 다릅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아포칼립스 바이콘에게 5위계 이하의 마법은 통하지 않아요!"

바이콘이 이빨을 드러내며 콧김을 뿜었다. 명백한 위협의 의미였다.

"―푸르릉!"

"본좌에게 반항하는가."

파앗!

오르가 마법진을 그린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진에서 쏘아진 사슬이 촤르륵 바이콘의 몸을 감는다.

"무슨 마법이지?!"

"뭔지도 모르겠지만 통했어!"

모험가들은 입을 벌린 채 이해할 수도 없는 강자들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히― 히히힝!!"

울부짖으며 저항하는 바이콘. 이내 말발굽으로 지면을 긁으며 가속도를 붙인다. 사슬이 하나둘 끊기기 시작하고 돌진을 준비한다.

"음…!"

오르가 주먹을 더욱 강하게 쥐며 사슬의 강도를 올렸다. 그가 모험가들을 향해 외쳤다.

"당장 이 장소를 피하라!"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모험가들은 허겁지겁 몸을 돌렸다.

"아, 예!"

"가, 감사합니다!"

"오르님, 무운을!"

마지막까지 오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마법사는 그의 모습을 수정구에 담았다.

이 잔혹한 세상에도 아직, 영웅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를 간직하며.

"무사히 돌아오시길…!"

진심으로 그의 귀환을 염원했다.

***

"포포야, 너 진짜 이렇게 맘대로 굴래? 내가 오면서 다 봤어.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폐를 끼치면 어떡해."

"푸릉푸릉."

포포는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발굽으로 바닥을 긁어 불만을 표현했다.

아까부터 [지휘] 스킬로 귀환 명령을 계속 내리고 있는데 하나도 안 먹힌다. 얘 진짜 고집 세네.

"일단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니까. 사람들 많은 데서 아빠 창피하게 계속 이럴래."

"푸르릉!"

"어휴, 알았어.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푸릉."

"응."

"푸르르릉."

"그래, 그래."

"히히힝!"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요약하자면 포포는 요즘 들어 자기를 안 타준 게 불만이었다고 한다.

경마장에서 실버쉽은 모리안이랑 신나게 달려대는데 나는 뭐냐. 대충 이런 뉘앙스 같다.

신경 못 써 준 내가 잘못하긴 했다. 마방도 제일 좋은 곳으로 줬고 경마장에서 우대도 해 주니 좋아할 줄 알았다.

말은 달려야만 하는 동물이구나. 교훈을 얻었다.

"그래, 앞으로 1주일에 한 번은 타 줄게. 대신 너도 이렇게 멋대로 밖에 나오고 그러면 안 돼. 알았어?"

"푸릉."

"그럼 화해의 선물이야."

나는 주머니에서 콩알만 한 검은 물건을 꺼냈다.

"아직 나도 못 먹어 봤어. 수확해서 만든 첫 초콜릿이야."

"풍."

포포는 천천히 내 손에 올려진 초콜릿의 냄새를 맡고는 긴 혓바닥으로 낼름 전부 쓸어갔다.

아작아작 씹어먹고는 이정도면 돌아가주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태운 밭은 나중에 변상해야겠다. 밀은 여유분이 좀 있었으니까 영지민들에게 나눠줘야겠네."

자기 때문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포포는 어느새 갈기나 휘날리며 자랑하고 있었다.

"그럼 돌아가자. 시트리랑 모리안이 걱정하겠다. 웃차. 어억."

포포는 아직도 기운이 남았는지 내가 올라타자마자 지면을 박차고는 냅다 최고속도까지 돌진했다. 목이 꺾일 뻔했다.

"저기 봐!"

"오르님이 바이콘을 제압한다!"

"저런 처절한 사투는 난생처음 보는군!"

스쳐 지나가며 모험가들이 뭐라고 외친 것 같은데, 바람 소리가 심해서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포포는 나를 태운 채 사람이 없는 산지를 한참 더 뛰어다니고서야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35화. 초콜릿 (1)

제목) 재해급 신수 상대로 1승.movie

작성자) 애기븝미

[영상]

└저거 종말의 이각마인가요?

└님 요즘은 아포칼립스 바이콘이라고 불러요

└신화에 나오는 마수 아님?

└재해급이잖아 ㄷㄷ

└혼자 싸우는데

└와

└이거 환상마법 아니죠?

└오르다

└오르 선생님인데?

제목) 상황설명

작성자) 애기븝미

제국에 어떤 소문이 있어서 확인해 보러 갔다가요

비상이 걸려서 긴급 의뢰를 받게 됐는데요

바이콘이 있어서 죽었다 싶었는데요

오르 선생님이 쫓아 주셨어요

└모험가셨구나

└진짜 심장 떨어지셨겠다

└고생하셨음 ㄷㄷ

└오르를 직접 봤다고?

└와 부럽다…

└악수 했음?

└아뇨 상황이 급해서

제목) 젠장 또 오르를 봐 버렸어

[스크린샷 사진]

그를 숭배해야만 해

└ㄹㅇ

└재해급이랑 일기토? 제정신으로는 못함

└(숭배콘)

└(숭배콘)

└콘은 언제 만든거야 ㅋㅋ

└신수학살자 오르콘이 출시되었습니다 스토어에서 무료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제목) 바이콘 격퇴 영상 분석

[영상]

아포칼립스 바이콘의 발굽에서 나오는 불꽃은 신화에 따르면 섭씨 2천도가 넘는다고 함

이걸 뚫고 들어가려면 화염 저항을 200 이상 올리거나 5위계 이상 보호주문을 써야 함.

바이콘은 신수임. 오르는 신수를 구속한 사슬 마법을 썼음. 신계 무구 소환 아니면 개념구현 장비로 보임.

다들 알겠지만 이건 최소 7위계임. 현자가 분명함.

게다가 바이콘을 무력으로 제압해 올라타서 힘겨루기까지 했다?

초인임 초인. 반박시 내말이 맞음.

└깔끔한 정리 감사합니다.

└이렇게 보니까 개쩌는걸 알겠네

└(숭배콘)

└(숭배콘)

└(불사조 베개콘)

└개념구현이면 진짜 미쳤네 나도 배우고 싶다

"그렇게 대단한 거 아니었는데. 포포 발도 그렇게 안 뜨겁고. 그치, 포포야?"

"푸릉."

다음 날 아침, 나는 마구간에서 밤새 포포 발굽에 낀 진흙을 닦아주며 물었다.

"너 때문에 이상한 오해를 샀잖아. 다음부터는 진짜 멋대로 나가면 안 돼."

"푸르릉."

그럼 산책을 자주 시켜 주든가, 하는 반항적인 대답이었다. 포포는 발이 빠른 만큼 참 다루기 힘든 친구다.

"케르 성격 반만 닮으면 참 좋겠네. 케르는 셋 다 이렇게 온순한데."

"헥헥." "끄응?"

마침 아침 식사 준비던 케르가 옆에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내 다리를 끌어안으며 꼬리를 살랑거린다. 아이구, 귀여운 녀석.

"푸릉!"

나와 케르가 사이 좋은 걸 보고는 질투가 났는지 포포가 고개를 홱 돌렸다.

"포포 넌 여기서 밥 먹어. 케르는 나랑 식당에서 신메뉴 먹을 거야."

"푸릉?!"

말썽 피우는 녀석은 반성 좀 하라지.

나는 포포를 마구간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군주님! 준비된 마멋!"

"출발하는 마멋!"

농부 마멋들이 짝을 맞춰 소쿠리를 짊어지고 정렬해 있었다.

우리는 함께 경마장을 나서 복도를 지나치고 남쪽의 큰 철문을 넘었다. 밭 구역으로 들어서니 편안한 녹색 시야와 함께 흙내음이 확 들어왔다.

"초콜릿을 수확하는 날이야!"

"마머멋!"

"달콤이를 따는 마멋!"

상태창을 열어 밭의 상황을 확인해본다.

[밭1 (3레벨)] 카카오나무 / 100%

[밭2 (3레벨)] 사탕수수 / 70%

[밭3 (2레벨)] 밀 / 50%

[밭4 (2레벨)] 밀 / 50%

[밭5 (2레벨)] 부추 / 20%

[밭6 (1레벨)] 양파 / 70%

전보다 밭을 하나 추가했고 3레벨 밭도 한 개 늘었다. 초콜릿은 기호품인 만큼 특별히 상등급 밭에서 재배했다.

"가자, 수확 시작!"

"마머멋!"

마멋들이 힘차게 달려 나가서는 나무를 쪼르르 기어 올라가 잘 익은 열매를 떨어트린다.

몇 마리가 그간 소환했던 1성 망치를 손에 쥐고 기운 좋게 휘둘러서는 단단한 껍질을 부순다.

그 자리에서 콩만 분리해 소쿠리에 골라 담는다.

이제는 밭일을 너무 잘해서 기특하다. 다음 달에 특별히 보너스좀 줘야겠다.

"슬슬 2층 공간만으로는 밭이 꽉 차네."

공간은 아직 조금 더 있지만 구석은 시간에 따라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 아예 위로 올라가서 새 땅을 개간하는 것도 고려해봐야 하려나.

"군주님, 밭을 늘리는 마멋?"

"글쎄다. 위쪽을 결계로 보호하고 있다고는 해도 외부인이 들어올 위험이 있기도 하고."

숲에는 야생 마물도 잔뜩 살고 있어서 조금 걱정이 된다. 마멋들이 작업 중에 습격받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마물이라도 막아 줄 경비병이 있으면 밭 구역을 안심하고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밭 확장] - 시설 레벨 4 필요 / 20골드

수확을 해서 경험치를 올리고 3레벨 밭이 두 개 더 생기면 시설 레벨을 4로 올릴 수 있다.

그래도 지금부터는 확장에 금화를 20개나 달라는 건 너무 비싸지 않나?

"급이 올라갔으니 인플레이션도 생겼다 이 말씀이시구만."

시설은 계속 확충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달라는 대로 드려야지. 풀 한 포기 안 나는 암석지대를 질 좋은 밭으로 바꿔 주는 데 금화 20개면 사실 싼 걸지도 모르겠다.

―띠링!

알람이 와서 창을 열었다. 마법사 게시판의 DM이었다.

[방구석경비원] 선생님선생님

[방구석경비원] 여기 문제 풀어왔어용 ㅎㅅㅎ

[방구석경비원] 어때용?

세라펠이었다. 첨부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또 희한한 마법진을 작성해 왔다.

"진을 미리 잔뜩 그려서 스톡해 놨구나. 발동 할때 연결만 해서 그리는 과정을 생략했어. 즉시시전까진 아니어도 고속시전으로는 보이네."

마법은 인식, 발동, 시전 세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효과가 발휘한다. 어느 한 단계도 빼먹을 수 없다. 때문에 이 과정을 생략한 것처럼 보이는 즉시시전은 환상의 기술로 여겨진다.

당연하지만 나도 쓸 줄 모른다. 상태창을 터치해서 나가는 스킬 주문이나 마법은 뭐, 적당히 되고는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어떤 원리이려나."

상태창은 이런 편리한 스킬을 쓰는 등 시스템에 접근하게 해주는 대신 내 혼돈석과 금화, 마력 등 자원을 대가로 받아 가고 있다.

가져간 자원은 어디로 가는 걸까.

"던전에서 오고 활성화된 시스템이니까."

지하 깊숙이 있는 던전 코어가 해 주고 있는 거려나.

나중에 확인해 보기로 하고 다시 세라펠의 영상을 재생했다.

"신속시전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마법진의 스톡. 나도 좋은 배움을 얻었다.

[오르] 정답이다. 다음 수업은 기다려라.

[방구석경비원] 야호~

[방구석경비원] 기대할게용!

[방구석경비원] 선생님 근데요 근데요

[오르] ?

[방구석경비원] 호옥시 어제요

[방구석경비원] 바이콘이랑 싸우신 거 선생님이신가요?

아, 게시판에 영상을 찍혔으니 얘도 봤겠구나.

흠.

슬슬 내 정체가 들킬 위험이 있겠다는 걱정이 살짝 들었다.

마멋 로드 아인과 모험가 오르는 둘 다 마법을 잘 쓴다. 아인이 소환 마법을 쓰고, 오르는 전투 마법이라 계통은 다르지만.

아포칼립스 바이콘은 포포밖에 없고, 출연한 지역도 같으니 아인=오르라는 방정식을 도출하기는 어렵지 않을지도 몰랐다.

'선수를 쳐야겠다.'

나는 세라펠에게 답신을 보냈다.

[오르] 그 바이콘은 무고한 피해를 내고 있었다

[오르] 그저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오르] 그 땅에는 약간의 인연이 있어 주시하고 있었다

거 참, 내가 봐도 허접한 변명이다.

이 정도로는 안 속으려나…?

[방구석경비원] 데박

[방구석경비원] 역시 스승님

[방구석경비원] '마법은 공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방구석경비원] 위대한 초대 현자 델리파커스의 이상을 지키시다니요

[방구석경비원] 댕멋져용

창피해 죽겠네. 우리 집 포포가 벌인 일이라 내가 뒷수습한 것뿐인데.

[방구석경비원] 근데용근데용

[방구석경비원] 그 땅에 인연이 있으시단 건

[방구석경비원] 혹시 사바텀 출신이세요?

모험가 오르에 점점 내가 감당 못 할 설정이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다음 문제를 보냈다.

[방구석경비원] 맞죠? 맞죠?

[방구석경비원] 데박데박데박

[방구석경비원] 선생님 그럼요 혹시

더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창을 끄고 접속을 종료했다.

괜한 오해를 안 했으면 좋겠네.

'현자라.'

7위계를 돌파한, 생물이 불가능한 마법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그런 칭호를 얻는다.

그러고 보면 내 계정에도 그만큼 마법을 잘 쓰는 영웅이 한 명 있었지.

띠링, 이번에는 인터폰 쪽으로 연락이 왔다. 또 세라펠이었다. 얘는 하루 종일 타이핑만 치면 손가락 안 아픈가.

[000] 뭐냐

[세라펠] 야야야

[세라펠] 너 아포칼립스 바이콘 멀쩡해?

[000] 그대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세라펠] 이게 진짜

[세라펠] 걱정해 줬더니 말하는 태도 봐

자동완성 때문에 그래. 나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치려고 했다고.

[000] 부관의 보고에 의하면 어제 근처 인간의 영역을 침략하고 온 것 같더군

[000] 발굽이 지저분해지고 꽤 흥분한 것 말고는 멀쩡했다

[000] 무슨 일인가

[세라펠] 와 걔도 대단하네

[세라펠] 신수는 신수구나

[세라펠] 야 너 오르라고 알아?

[세라펠] 검은 갑주의 마법사인데

마왕님,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000] 모른다

[세라펠] 진짜 세상 돌아가는 일은 하나도 모르는구나?

[세라펠] 응애네 응애

[세라펠] 나도 몰랐고 말이야

[세라펠] 하긴 방금 태어난 애기 마멋이 뭘 알겠어

[세라펠] 그 사람으로 추정되는 모험가가 혹시 침입해오거든 절대 싸우지 마

[세라펠] 나부터 불러. 알았지?

그야 내가 나를 토벌할 일도 없겠지만.

[000] 이유는?

[세라펠] 내 말대로 해.

[세라펠] 알았어?

[000] 알았다.

[세라펠] 정보료로 콜라 한 박스.

[000] 재고가 없다

[세라펠] 거짓말하지 말고.

진짠데.

어제 포포가 입힌 피해 때문에 황실령에 복구 물자로 같이 보낼 생각이었으니 세라펠에게 나눠줄 물량은 택도 없다.

"대신 초콜릿 만들 예정이었으니 있다가 시제품이나 보내 줘야겠다."

만들다 실패한 거나 몇 개 던져 줘야지.

[000] 조금 기다려라

[000] 더 좋은 걸 주겠다

[세라펠] 뭣

[세라펠] 진짜지

[세라펠] 아니기만 해 봐

창을 치운다. 나도 마멋들과 합류해 마저 코코아 수확에 들어갔다.

"웃차."

튼실한 코코아를 뜯어 바닥에 깨니 안에서 검은 콩이 우수수 흘러나온다. 벌써 밭은 진한 향기로 가득 찼다. 달콤한 초콜릿 향은 아니고 99% 카카오 초콜릿의 씁쓸함에다가 기묘한 텁텁함이 섞인 느낌이랄까.

"다 됐다!"

[카카오 콩] 재료 아이템

: 체력 2 회복

: Lv.2 피부 미용 효과

: 생으로 먹으면 씁쓸하니 주의!

"오, 부가 효과가 붙었네?"

선두도 아니고, 무려 금화를 주고 사서 심은 작물이라 그런지 아이템으로서의 성능도 심심치 않게 붙었다.

"이걸로 만든 초콜릿도 효과가 유지되겠지."

좋은 음식은 보약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음식은 재료부터 중요하고.

나중에는 던전에서 직접 수확한 작물로 밥만 지어 먹어도 건강도 챙길 수 있지 않을까.

수확을 마치고 1번 밭이 깨끗해진다.

"다음으로는 뭘 심을까."

초콜릿으로 디저트는 됐고, 다시 한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짜장면은 먹어봤으니 이번에는.

"김치찌개다."

상점에서 배추 씨앗을 사다가 1번 밭 앞에 수북이 쌓아놓는다. 파종은 마멋들에게 맡기고, 나는 초콜릿을 요리하기 위해 케르와 함께 5층으로 내려가 주방을 찾았다.

"밀가루, 설탕, 기름 있고. 초콜릿까지 만들 수 있으니까."

오늘은 도넛을 만들어야겠다. 어릴 때 시장에 가서 천 원짜리를 내고 먹던 추억의 시장 도넛이다.

초콜릿 아이싱을 만들어 위에 사르르 뿌리면 그보다 더 훌륭할 수 없겠다.

"카카오 콩으로 초콜릿 만드는 건 간단하지. 손이 고되어서 그렇지."

샥, 가볍게 손짓하니 주방이 착착 세팅된다. 밀가루를 반죽하고 설탕을 녹일 준비가 됐다. 도넛을 만들며 초콜릿도 세팅이 완료되어야 한다.

새까만 콩을 잘 씻어서 오븐에 넣고 고온으로 로스팅한다. 커피콩을 숙성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다.

"오래 걸리는 과정은 빨리 감아 주고."

다음으로 콩의 껍질을 벗긴다.

"이것도 일일이 할 필요가 없지."

온갖 편리한 마법 주문이 세팅된 최첨단 주방이다. 상태창에서 버튼 하나를 터치하는 것으로 마력 1만으로 몇 킬로는 되는 카카오 콩의 껍질을 모두 벗길 수 있었다.

갈색 속살이 드러난 콩을 분쇄기에 넣고 갈아준다.

"왕, 왕!"

"크르르릉…."

분쇄기 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케르가 식겁해서는 짖어댔다.

백사장의 모래보다 곱게 갈린 카카오 가루.

온도가 따뜻하게 유지되는 철판 위에 올린다. 이제 여기서 갈아주면 찐득해지며 익숙한 초콜릿의 모습으로 변한다.

"아이고, 힘들어. 여기도 자동으로 해야겠다. 바닐라도 넣어주고."

향신료를 첨가한다. 마법으로 거대한 주걱을 움직이니 꼭 공장 기계를 돌리는 기분이다.

20분쯤 지나니 이제 내가 아는 익숙한, 달콤한 초콜릿 향이 주방에 가득히 퍼지기 시작했다.

"어디 맛을 볼까."

나는 초콜릿 반죽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찍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달콤한 갈색 덩어리가 자신을 맛봐 달라고 내게 온몸으로 어필해 왔다.

36화. 초콜릿 (2)

손가락 끝에 묻힌 갈색의 초콜릿 원액.

코코아 버터가 섞여 번들거리는 게 찐득하니 벌써부터 달콤함을 강렬하게 자랑해 온다.

"어디."

나는 초콜릿을 슬쩍 핥아 맛봤다. 그리고.

"우와…!"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단 음식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식사 후에 디저트를 챙겨 먹거나 간식을 자주 찾는 편도 아니고.

하지만 이건 달랐다. 뇌에 활력이 확 돌면서 눈이 번쩍 뜨인달까.

이 행성에 존재하는 모든 행복을 실전압축해서 머리에 때려박는 기분이다.

"위험한데."

아직 완전히 갈지 않아서 약간 분말이랄까 덩어리가 씹히는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부드러움이나 당도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포포가 먹었던 샘플은 아직 덜 여문 코코아 열매를 하나 따서 만들어 봤던 건데, 바로 화를 풀었던 것도 납득이 갔다.

"시트리나 모리안도 좋아하겠다."

반은 끓였다가 굳혀서 판 초콜릿 형태로, 바리에이션을 주고자 그 중 또 반에는 땅콩을 갈아서 뿌려 같이 굳히기로 했다.

나머지 반은 도넛에 뿌릴 아이싱이다. 초콜릿을 굳히는 동안 본격적으로 도넛도 만들 때가 됐다.

치르르르―

기름통에 도넛 반죽을 떨어트리니 벌써 귀부터 맛있다.

"캬, 침 고이네."

마멋들이 은근 몸 크기에 비해 많이 먹는단 말이지. 마리 당 한 개씩은 먹으려나.

"그럼 총 백 개는 만들어야 넉넉하려나?"

아예 도넛 기계가 있으면 편리하겠다 싶어 상태창을 열어 보니 돈을 내고 설치할 수는 있었다.

"으악. 금화 백 개네. 이건 못 내지. 얌전히 직접 튀기겠습니다."

갓 튀긴 따끈한 도넛이 넘사벽으로 맛있긴 하다. 튀김기는 한 번에 열 개도 안 들어가니 시간은 조금 걸리겠다.

"왕, 왕."

"으르르… 쩝쩝."

그런던 중 등 뒤에서 기묘한 소리가 났다.

이상한 낌새에 고개를 돌린 나는 기절초풍할 뻔했다.

"케르야!!"

맙소사, 케르가 굳히고 있던 판 초콜릿에 머리 세 개를 전부 처박고 쩝쩝대며 신나라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야 임마!"

나는 바로 케르를 조리대에서 떼어냈다. 판 초콜릿은 4분의 1은 없어져 있었다. 아직 넉넉하게 남긴 했지만 케르가 적어도 500그램은 먹어 치운 듯했다.

입가를 갈색으로 덕지덕지 바르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신나서 나를 올려다보는 케르 1호, 2호. 3호는 지가 잘못한 건 아는지 눈을 안 마주치고 딴청을 피운다.

"아이고, 큰일 났다."

강아지가 초콜릿을 먹으면 안 되잖아!

잘은 몰라도 사람이랑 다르게 초콜릿이 그 뭐지, 간에 안 좋던가 쓸개에 안 좋던가.

그래서 먹으면 큰일 난다고 봤었는데.

"토하게 해야 해."

나는 곧장 케르를 안아 들고 주방을 뛰쳐나갔다. 강아지 주제에 더럽게 무겁다.

접견실을 가로질러 포탈을 타 일단 1층으로 나갔다.

"어떻게 토하게 한담."

강가까지 뛰어간다. 강아지가 초콜릿을 삼켰을 땐 과산화수소수를 먹여 토하게 해야 한다는 생활상식을 본 적이 있었다.

당연히 그런 게 있을 리 없으니 액체라도 찾자는 생각에서였다.

쏴아아 물이 힘차게 흐르는 강가에 도착해 다짜고짜 케르의 머리를 물가에 대고 눌렀다. 정확히는 두 개밖에 못 눌렀다. 얘 머리는 세 개인데 내 손은 두 개니까.

"케르야, 일단 마셔. 물을 많이 마시고 토해야 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케르가 꿀꺽꿀꺽 물을 마시기는 했다.

하지만 고개를 든 케르가 한 건 토가 아니라.

"끄어엉."

기분 좋은 트름이었다.

오히려 소화가 잘 됐나?

그러면 안 되는데…?

"아니, 토해야 한다니까. 케르야. 너 진짜 큰일 난다?"

나는 케르를 뒤집어서 배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얘는 급한 내 맘을 모르는지 헥헥대며 웃어댔다.

"노는 거 아냐!"

"깽!"

케르의 배를 거의 퍽퍽 때리는 수준으로 힘을 주니 그제야 케르가 내게서 몸을 떨어트리고는 정색을 했다.

얼굴 셋 다 '지금 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는데 거기서 조금만 더 선 넘으면 우리 관계는 거기서 끝이요' 하는 표정이었다.

답답해 죽겠네.

"어머, 군주님? 무슨 일이셔요?"

"시트리!"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시트리는 내가 케르를 다루는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합류해서 진중한 태도를 보였다.

"오늘도 군주님의 더없이 뜻이 깊은 행보를 뵙는군요. 케르님께서 군주님의 위업을 방해하셨기에 엄벌은 필수. 허나 케르님은 본 던전의 수호자이시지요. 위엄이 떨어지지 않으시도록 단둘이 대면하고 계셨군요."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케르님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으로 군주님의 요리를 방해하였겠거니 추정했습니다만, 소인의 억측이었을지요."

"아, 그건 맞아."

시트리는 역시 통찰력이 좋았다. 억지 해석을 곁들이기도 하지만. 설명하기 빠르겠다 싶었다.

"그 초콜릿이 케르 종족에게는 독이거든."

"그런가요? 몰랐던 정보였네요. 케르님은 최상급 이하의 독에 면역이시지만요."

"…응?"

잠깐 생각해보니 케르는 평범한 강아지는 아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평소에 둘둘 감고 다니는 버프가 몇 종류는 된다.

대충 노려보기만 해도 대상을 겁에 질리게 하는 [상급 위협]이라든가, 입구 수호자라는 방어형 자리에 어울리는 [방어력 강화]나 [막기 효율 상승]이나 [상급 독 면역]이나….

"흠."

"군주님만큼은 아니어도 다양한 저항과 면역을 가지고 계시지요. 그야말로 입구 수호에 어울리셔요. 혹시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케르는 더없이 건강하다. 덕분에 확인했다.

"시트리, 너는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혼자 착각해서 진 빼고 있었다고 고백하기는 조금 창피해서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네. 어제 층간소음의 문제도 있었고 해서, 군주님의 처소를 더럽히는 불경한 이들이 있을까 순찰하던 참이었답니다. 최근에는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어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찾아서 일을 하기는, 고생이 많았다.

"수고했어. 준비 거의 다 되었으니까 내려가서 밥 먹자."

"후후, 권유해 주셔서 감사해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왕 왕."

"케르 넌 초콜릿 없어. 이미 다 집어먹었잖아."

"끄응…."

"도넛은 줄게."

"왕!"

케르가 폴짝 뛰며 내 뒤를 쫓아왔다.

***

"뭐야 이건?"

마법진을 그리며 오르의 문제를 풀던 세라펠은 던전 뿌리를 통해 전송된 물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은박의 포장지를 열어보니 안에는 흑색에 가까운 갈색의 판때기가 들어있다.

아인이 콜라보다 좋은 물건이라고 보낸 선물이었다. 세라펠은 다른 음료가 올 것이라 기대했건만 조금은 실망했다.

"음식인가?"

함께 온 메시지를 보니 초콜릿이라고 하는 간식이라고 했다.

킁킁대며 향을 맡았지만 처음 맡아보는 듯 생소하다. 똑, 판을 부러트려 한입에 들어가도록 잘라 별 기대 없이 던져넣어 본다.

"달잖아―!"

번쩍,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혀를 부드럽게 감싸는 식감에 감탄하기도 잠시,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며 쌉쌀하고 기묘한 뒷맛이 남는다.

세라펠은 다음 조각을 입안에 넣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어느새 그 맛에 중독됐음을 깨달았다.

"헉."

아인, 무서운 남자.

대륙에도 솜씨 좋은 요리사는 수도 없이 있거늘, 대체 어디서 이런 맛을 내는 법을 발견해 오는 거야?

콜라도 초콜릿도 색이 시꺼먼 게 분명 사악한 무언가와 계약한 게 틀림없다. 혹은 아인이 그 사악한 존재 자체이거나.

"아무렴 어때."

사악하기로 따지자면 자신도 지지 않는 마왕이다. 세라펠은 입에 들어온 달콤함을 조금도 놓치지 않기로 하며 초콜릿을 즐겁게 굴렸다.

***

"영지민들이 세금을 못 내겠다고 합니다."

"망했군."

니클라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심에 빠졌다.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수확철에 들어서자마자 웬 신수가 나타나서 홀라당 밭을 다 태워먹는단 말인가.

이쯤 되니 니클라스도 그간 애써 외면했던 현실을 인정해야 할 단계에 들어섰다.

황실령에 나타났던 드래곤은 진짜였고, 놀란을 손가락 하나로 날려 버렸던 그 여자 대마법사는 숲의 던전으로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저곳은 던전브레이크가 일어나 재해급 신수가 뛰쳐나오는 지옥도가 되어 버렸다고.

사업이고 뭐고 당장에라도 도망쳐서 목숨이라도 챙기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아니."

황족이다.

황제의 친자란 말이다.

이만큼 일을 벌려 놓고 빚만 잔뜩 떠안고 황궁으로 돌아간다? 명예가 실추하는 걸 뻔히 아는데 야반도주해 잠적한다?

어느 것도 자존심 강한 니클라스에게는 고려조차 할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 재해급 신수를 쫓아냈다고 하지 않았나."

"그야 그렇습니다만…."

"나는 죽더라도 이 땅에서 죽는다. 엘로힘 그 남자에게는 신수와 맞붙을 능력이 있을 터."

니클라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신수를 토벌하면 우리도 기사단을 일으킨다. 영지민도 전부 징집해서."

"그 말씀은."

"전쟁이다. 나와 던전,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다."

신하들은 혼자서만 비장한 니클라스를 보고 생각했다.

'탈출해야겠군.'

침울하게 가라앉은 니클라스의 저택과는 반대로, 황실령 영지에는 전과 다르게 활기가 돌았다.

"세금이 없다!"

"축제를 벌이세!"

"암소를 잡아야겠어!"

본래 황실령은 풍족한 땅이다. 제국법으로 이번 달 세금이 면제되면서 오히려 가계 사정이 여유로워지는 기묘한 역전이 발생했다.

덕분에 영지민들은 이 틈을 타 수확제를 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농민들과 시장 상인 대표들이 광장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쿠웅!

별안간 광장에 들어온 마차에서 산더미 같은 곡식이 내려왔다. 영지민들이 그걸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뭡니까?"

한 농부가 밀을 내리던 여성에게 물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적발의 여성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구호물품이다."

"구호라니, 어디서 말입니까?"

"자세히는 설명할 수 없지만, 소인이 섬기는 주군께서 보내셨다."

"주군이 계시다고요? 혹시 기사님이십니까?"

"어디서 오셨지? 귀족이신가?"

영지민들이 모여들며 웅성거림이 커졌다.

"영지의 밭이 불타서 그대들의 생활이 어려울 것을 걱정하셨다. 걱정 없이 받아라."

"어느 분인지는 몰라도 성군이시군!"

"이렇게 빨리 대응하신 걸 보면 근처 영지의 주인이신가?"

"허어, 이름을 알아야 감사라도 할 텐데."

"황자 전하께서 좀 본받으셨으면 좋겠군."

"기사님, 그 영주님께는 꼭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덕분에 다음 추수까지도 지낼 만하겠습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한 명이 여성을 알아보고는 아는 척을 했다. 술집 주인이었다.

"아니, 기사님 아니십니까?"

시트리는 가볍게 눈인사만을 했다. 영지민과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아인의 명령도 있었고, 그 술집 주인은 평소에도 거래를 하느라 안면이 있었다.

"이 구호품은 대체… 서, 설마 보내신 주군이라는 분이 그분입니까?"

시트리가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며 술집 주인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주군께서는 세간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신다."

"아하, 그랬군요. 잘 알겠습니다."

비밀을 독차지한 즐거움에 싱글거리며 시트리에게서 떨어지는 주인. 그에게 영지민들이 몰려들었다.

"그 귀족이 누군데 그러오?"

"아 왜, 내가 얘기한 적 있잖소. 처음에 콜라를 팔러 왔던 귀인이 계셨다고."

"에엥? 설마 그분이 그분이셔?"

"콜라를 만드신 데다 이렇게 마음씨까지 넓은 분이라고? 엄청 젊다고 하지 않았어?"

"저명한 귀족 2세인 건가? 잘은 몰라도 대단하구먼."

"내 비범한 분일 줄은 알았지. 귀한 흑발이었거든."

"흑발! 보기 힘든 머리색 아닌가. 귀족이 틀림없구먼 그래."

"허어, 정체불명의 흑발 도련님이라…."

"꼭 황실령에 한 번 더 방문해 주셨으면 좋겠구먼."

그렇게 얼빠진 소문으로 의도치 않은 신분이 하나 더 만들어지는 순간.

"에취! 어우, 겉옷 하나 더 걸쳐야겠다."

아인은 평소처럼 마멋들과 밭에서 씨를 뿌리고 있었다.

37화. 군주상 (1)

니클라스 2황자는 영지 시내로 나가 시찰을 돌기로 했다.

몇 달을 고생해 경작 지은 땅이 하루아침에 불타는 큰 사건이 있었다. 영지민들이 비탄에 빠져 있을 테니 황족인 자신이 나가서 얼굴이라도 비춰 주면 다들 기운을 내지 않겠는가 하는 발상이었다.

"집사장이 보이지 않는군, 어디 갔나?"

"장기 휴가를 신청했습니다."

"이 바쁜 시기에 장기 휴가라니, 정신머리가 있는 건가. 승인한 기억도 없네만."

하루에 찍는 도장도 워낙 많으니 못 보고 지나쳤나, 니클라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기사단장은 어디 갔어?"

"기사단장도 장기 휴가입니다."

"뭐야? 왜들 이래?"

보고를 올리는 비서관이 니클라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입을 꽉 다물었다.

'내가 먼저 신청했어야 했는데. 망할 놈들.'

비서관은 이래서 눈치 빠른 놈들이 싫었다.

거리로 나간 니클라스는 예상 밖의 풍경에 당황했다.

"이건 또 뭔가?"

비탄에 빠져 활기가 없으리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마을에는 어느 때보다도 생기가 넘쳤다.

사방에 술잔과 먹다 남은 안줏거리가 널려 있었다.

"밤새 파티를 벌이기라도 한 건가?"

"그래 보입니다."

"허어, 이게 무슨 일인가."

먹을 게 없다고 제국법까지 근거 삼아 세금을 감면받은 게 엊그제의 일이건만, 다 같이 굶어 죽으려고 정신줄을 놓아 버리기라도 했나.

비서관이 시종을 시켜 상황을 파악해 왔다.

"흑발의 귀족이 영지의 사정을 듣고는 어제 식량을 잔뜩 풀고 갔답니다. 그걸로 수확제를 열었다고…"

"뭐라고!"

보고를 들은 니클라스는 열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입고 있던 망토를 쥐어뜯을 기세로 잡아당겼다.

"어떤 놈이야! 감히 이 제국의 2황자 니클라스 폰 호엔슈타펜의 땅에서 수작을 부려? 내가 아니라 영지민에게 직접 식량을 전달하다니!"

그건 일종의 도전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행위였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귀족 정치계다. 니클라스를 통하지 않았다는 건 그와 정치적 친분을 쌓을 의사가 없었다는 뜻이며, 그의 영지가 몰락하고 있다고 조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구호품이나 다름없는 식량을 보낸 건 내 실패 후에 자신이 영지를 먹어 치우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어. 대체 누구지?"

니클라스가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자신을 먹어 치우려 눈독을 들일 귀족은 순식간에 다섯도 넘게 생각이 났다.

그렇게 니클라스가 심각한 분위기에 빠져 있을 때, 아직 술이 덜 깬 영지민들이 지나가다가 그를 발견하고 예를 표했다.

"어이쿠, 이게 누구십니까. 제국의 별, 황자 전하 아니십니까! 존안을 뵙습니다!"

"큰 절 받으십시오! 하하하하!"

서민의 무례함에 니클라스가 진절머리를 냈다.

기사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자 몇 명은 정신을 차렸지만 아직도 고주망태인 한 명이 무릎을 꿇은 채로 실실 미소를 지었다.

"전하, 아침부터 왜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옛말에 웃어야 복이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콜라라도 한 잔 드릴깝쇼? 아, 이건 아껴 먹으려고 했던 건데."

영지민이 콜라병과 함께 품에서 종이에 싼 조그만 무언가를 꺼냈다. 기사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니클라스가 물었다.

"그건 무엇인가?"

"히히, 어제 그 귀족의 기사가 주고 갔습니다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미의 간식이랍디다. 제가 특별히 아끼다가 드리는 겁니다. 왜, 원래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하잖습…"

"어허, 쉿, 쉿. 자네 취했네."

동료 영지민들이 그가 더 헛소리를 못 하게 입을 틀어막고 끌고 갔다.

"그 귀족놈이 주고 갔다고?"

니클라스가 종이 포장을 열었다. 안에 들어있는 까만 덩어리. 그것을 입에 넣자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사르르 행복으로 가득 찼다.

"아아, 과연. 그 말대로다."

"황자 전하."

"음, 잠깐 정신을 놓았군."

니클라스가 초콜릿을 오도독 씹어먹고는 입가를 닦았다.

"이런 맛있… 사악한 물건까지 풀어 영지민을 포섭하다니, 나에 대한 명백한 적대 행위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엘로힘은 어딨나!"

그 길로 엘로힘을 찾아간 니클라스는 모험가 캠프의 문을 거칠게 박찼다.

"엘로힘, 더는 기다릴 수 없소! 당장 숲의 던전을 토벌하든가, 다른 S급을 불러오…"

니클라스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안에서 뿜어지는 열기 때문이었다.

"흡."

물구나무선 채 손가락 하나로 푸시업을 하던 엘로힘. 그의 몸에서 투지가 뿜어져 나온다.

"신수가 눈앞에 있었소."

"…무슨."

"허나 놓치고 말았지. 수준 낮은 이들을 꽁무니에 달고 다니느라."

파앗! 그가 반동으로 뛰어 니클라스의 앞에 꼿꼿이 서서는 팔짱을 꼈다. 박력에 압도된 니클라스는 뭐라 하지 못하고 마른 입술을 혀로 훔쳤다.

"말했지만 내 목적은 신수에게 승리했다는 명예뿐이오."

"그, 그렇다고 했지."

"오르라는 작자처럼 합을 주고받는 정도로 이름을 알릴 생각이 아니오. 완벽한 승리를 바라지."

화아악! 엘로힘의 몸에 빛이 깃들었다.

광휘. 그를 영웅의 영역으로 도달하게 해 주는 명예로운 기프트다.

"더없이 명예로운 승리를!"

그가 양팔을 뻗는다. 번쩍이는 빛이 후광이 되어 마치 나무줄기의 형태처럼 뻗어 나간다.

그를 보며 니클라스는.

'왜 또 똑같은 소리지?'

지랄견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엘로힘으로서는 자신이 영광을 누리는 순간을 목격할 관중, 승부의 정당한 조건, 방해자도 없을 필드, 전력을 다할 최상의 컨디션 등 모든 걸 갖추길 원한다는 완벽주의자적인 이상을 어필한 것이었으나.

니클라스 같은 평범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 보면 당연히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상대가 일단은 재해급 마물도 단신으로 토벌하는 S급 모험가이니 심기를 거스르는 소리를 할 수도 없고.

S급 모험가.

달리 말하면 한 명이 국가의 기사단 1개 대대와 맞먹는 공성병기다.

신분은 니클라스가 한참 위여도 그들은 국가와 법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다. 혹시 아는가, 사실 그가 상또라이라 갑자기 수틀려서 니클라스의 목을 냅다 꺾어 버릴지.

그를 인간의 감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 러니까 던전 토벌은 언제 한단 말인가?"

"금일 결판을 내겠소."

"아, 오늘! 무조건일세. 더는 미룰 수가 없어. 반드시일세! 내 모험가들에게도 알리겠네."

니클라스는 몇 번이나 당부를 남겼다.

엘로힘은 파트너 청마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다가올 승부를 준비했다.

***

"백작님, 니클라스 황실령에서 공수한 간식거리입니다."

"음, 주문한 대로 도착했군."

한편, 황실령에서 산 하나를 건너면 나오는 이웃 영지들에서는 니클라스의 우려와는 전혀 다른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황실령의 재정이니 사업이니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특출난 간식거리에 대해서였다.

"요즘 이 포션이 영지민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기라지."

"예. 콜라라고 하는데, 워낙 귀해서 한 병에 은화 열 개는 줘야 합니다."

"은화 열 개? 서민들이 그만한 돈을 내고 고작 이 음료 한 병을 먹을 정도라니, 어지간한 포도주도 그 가격이면 안 먹겠구먼."

"그렇습니다. 그만큼 특별한 음료라는 뜻이지요."

백작이 차가운 콜라의 뚜껑을 따 한 모금 들이키고는 눈을 번쩍 떴다.

"맙소사! 이게 대체?"

"이쪽도 드셔 보시죠. 초콜릿이라고 합니다."

"허어, 달고 부드러운 것이 천상의 진미로다! 달면서 부드럽고 뒷맛이 기묘해! 딸에게 선물로 주면 점수를 왕창 따겠군. 더 구할 수 있나? 아닐세, 내 황자 전하께 서신을 써야겠네."

"콜라와 초콜릿은 전하께서 개발하신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소문에 의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흑발의 공자라고 합니다. 황실령은 첫 유통지일 뿐이라고 하더군요."

백작이 턱을 쓰다듬고는 손가락을 딱 쳤다.

"흑발 귀족이면 제국민이 아닐 거야. 황실령은 국경이니 왕국민이 분명해. 누구보다 먼저 그 흑발의 공자를 찾아야 한다. 거래를 터야 해."

"알겠습니다."

하지만 좋은 생각은 동시에 어디서든 여러 사람이 동시에 해내는 법.

"찾아! 흑발이다!"

"흑발의 귀족 청년이야!"

"초콜릿 공장을 지어 주겠다고 해!"

"혼약은 관심 없으시냐고 여쭤보고!"

제국 사교계에서 흑발의 공자를 애타게 찾기 시작한 건 그 즈음부터였다.

***

: 침입자가 있습니다.

· 침입자 : 모험가 파티

· 인원 : 124명 / 124명

· S급 모험가 '음속' 엘로힘 Lv. 71 

체력 81/81

...

"얘 또 왔네."

간단하게 밀면으로 저녁을 후루룩 말아먹고 다 같이 후식으로 초콜릿을 하나씩 고르고 있는데 천장이 쿵쿵대며 진동이 일어났다.

"침입자! 감히 주군의 석반 때를 방해하다니, 예도를 모르는 놈들. 본관이 책임지고 토벌하여 목을 가져오겠나이다!"

"야야, 토벌은 안 된다니까. 왜 그렇게 목에 집착해."

"듀라한이라 그렇습니다!"

모리안이 벌써 너무 흥분했길래 일단 진정시키고 대책을 강구했다.

"오늘은 포포랑 산책 다녀오려고 했는데."

"군주님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든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에요. 전에도 강한 경고를 주고 쫓아냈거늘, 저들은 학습을 모르는 걸까요?"

"S급 모험가 엘로힘, 얘는 벌써 세 번째야."

처음은 입구컷, 두 번째는 미궁에서 2층 층계를 못 찾고 후퇴했다.

내 던전, S급 모험가도 격퇴할 정도면 생각보다 잘 지은 게 아닌가? 입구에 편성한 케르나 미궁도 그렇고, 나름 왕년 고인물로서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3트를 해오니 보람이 없어지려고 했다.

덕분에 격퇴 보상으로 경험치를 쌓기는 했지만.

"뭔가 목적이 확실하게 있나 본데."

S급이니 사기를 떨어트려 격퇴한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았다. 토벌해 버리면 우리 집이 이상한 오해를 살 것 같고.

애초에 토벌할 수나 있나? S급을?

레벨만 봐도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한참 위 같은데.

포박은 체력을 50퍼센트 아래로 떨어트려야 하니, 나랑 시트리, 모리안 셋이서 열심히 돌려차면 언젠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3층, 4층에 새 방어 시설을 설치하지는 않았으니까."

경마장에서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겠다.

"얘네 쫓아내고 꼭 방음 공사해야지."

: 퀘스트 보상 - [일반 소환 티켓] 30장

여기서 공사 도와줄 친구도 뽑았으면 좋겠고.

"다 같이 가 보자."

내가 일어서자 식당에 함께 있던 전원이 전투태세를 갖추며 눈빛을 바꾸었다.

"경마장을 여는 마멋!"

"마머멋! 큰 경기인 마멋!"

"제1회 군주상인 마멋!"

"영예의 우승마는 누가 되는 마멋?"

마멋들이 흥분하며 구석의 굴을 찾아 파고들었다. 나는 두 사람과 동행하며 접견실을 지나 포탈로 향했다.

"아, 놓고 온 게 있다. 먼저 가 있어 줘."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주군!"

생각해 보니 포포가 간식을 먹고 싶어했는데 주방에 놓고 왔다. 두 사람을 먼저 올려보내고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

"여기인가."

음속 엘로힘은 마침내 그곳에 도달했다.

폭발 계열 마법사들을 동원해 미궁을 거칠게 돌파하여 2층에 금방 당도할 수 있었다. 한 층 지하로 내려온 그를 맞이한 건 더욱 끝없는 어둠이었다.

"갑갑하군. 분명 달릴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합죠. 거 있어 보쇼. 이쪽이 틀림 없…."

모퉁이를 돌던 A급 대장이 말을 멈추었다.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힘 역시 그 장소에 발을 들여놓고는 인정했다.

―화륵, 화륵, 화르륵!

벽면에 걸린 수백, 수천 개의 횃불이 켜진다. 점점 강해지는 빛. 마침내 중앙의 성화가 오르며 경기장의 가동을 알린다.

파아앗! 사방을 가득 메우는 섬광. 태양슬라임의 번쩍이는 빛무리였다.

엘로힘은 공간의 구석 하나하나 시선을 두고는 감탄했다.

"호오."

이곳은 대장의 말대로 정당한 승부를 위한 장소가 분명했다. 오직 경주를 위한, 말이 최고 속도로 달릴 수 있도록 기량을 펼치게 만들어진 경기장이었다.

"파밍힐 경마장, 이 장소의 이름입죠."

―둥, 둥, 캉캉캉!

침입자들을 환영하는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관중석에서 머리를 빼꼼 치켜든 마멋들이 북과 갑옷을 악기처럼 쳐대며 분위기를 달궈댔다.

―다그닥.

그런 엘로힘의 앞에 유유하게 한 마리의 유령마가 걸어 들어온다.

그리고 그 기수.

목을 빙 두르는 섬뜩한 꿰맨 자수를 한 듀라한이, 자신의 키보다도 큰 기다란 창에 거대한 깃발을 꿰고는 휘익! 가벼운 품새로 휘둘렀다.

"도전자는 이름을 밝혀라!"

쩌렁쩌렁한 듀라한의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진다. 유령마가 땅을 차는 소리에 엘로힘의 피가 끓기 시작했다.

"신수는 어디에 있나."

"하!"

듀라한이 고삐를 당기자 그녀의 유령마가 거칠게 날뛰며 콧김을 뿜었다.

"감히 그분의 발굽에 도전하는가! 어리석은 인간이여, 주제를 알아라! 본관, 신제(神蹄)와 천하제일마 폭주선(暴注船)을 밟고 넘어보아라. 본관보다 발이 느린 자에게 군주님의 존안을 뵐 자격은 없다!"

"호오, 신제라."

엘로힘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삐를 당겼다.

38화. 군주상 (2)

―파밍힐 경마장을 많은 관객 여러분이 찾아 주신 마멋! 명경기가 기다리는 마멋! 오늘의 진행은 저 마멋인 마멋! 해설에는 마멋이 나와 주신 마멋.

―마멋인 마멋.

두 마멋의 중계가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다른 마멋들은 그간 경마에서 따거나 군주가 소환한 갑옷을 두들겨 화음을 만든다.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한 명씩 모험가들이 관중석으로 입장한다. 금화를 지불하고는 마멋에게서 마권을 발급받는다.

"출전은 18마리인가. 역대급이군."

"잔디, 우회전, 3,200m. 지금껏 없었던 장기전이야."

"조건이 다르면 여지껏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던 말도 활약할지도 모르지. 어디에 베팅할지 더 어려워졌어."

"그만큼 대박 내기엔 최고의 기회 아니겠나! 배당률을 봐, 인기 없는 말이 우승이라도 하면 단숨에 50배도 가능해!"

마권을 사는 모험가들은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금화를 베팅했다. 전에 없던 대경기에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엘로힘 성님은 진짜 선수로 출전하실 생각이군."

"선수는 우승했을 때만 상금을 받아 갈 수 있지. 세 배였나, 다섯 배였나?"

"참가 말 수가 늘어서 더 늘은 모양이야. 열 배인 모양인데."

"어마어마한데. 100골드 몰빵하면 1000골드…! 인생 역전이잖아!"

모험가들이 손에 쥔 마권이 땀으로 촉촉해지던 때, 냉정한 이도 있었다.

"물론 엘로힘 성님이 S급 모험가이지만 승률은 반반이라고 봐. 상대에 저 '폭주선' 실버쉽이 있어. 3관마라고."

"첫 출전인 루키는 마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기 마련이지."

"이봐, 오늘은 '독주(獨走)' 블러드 캡도 있어. 삼파전이야."

"기수에는 '혈기사'인가. 만만치 않겠군."

침착하게 분석하는 고인물들. 신입들은 대부분 그들의 선택을 따르면서도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기회라는 유혹에 쏠려 역배에 전재산을 걸기도 했다.

"저기 봐!"

"오오오…!"

그들 누구나 상금이 담긴 금화통이 공개되자 이성을 잃고 눈을 번득인다.

거대한 유리 금고 안에는 그야말로 깔려 죽을 정도의 금화가 한가득 쌓여 있다.

누구나가 그 금화가 자신의 것이라는 환상을 꿈꾸며 객석에 착석한다.

"이런 잔디는 처음 보는군."

엘로힘이 바닥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고는 감상을 냈다.

"승마 명소로 알려진 초원도 지면의 높낮이 때문에 말의 다리에 피로가 쌓이기 마련이지. 이 장소는 그야말로 달리기 위해서만 만들어졌군."

"경기장은 군주님의 은총으로 건설되었다. 그분의 위대함을 조금은 알겠는가? 도전자여."

다그닥, 말에 탄 모리안이 엘로힘에게 말했다. 그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우러러보는 건 이 빛뿐이다."

광휘를 휘감는 엘로힘. 같은 영웅으로서 기프트를 다루는 모리안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세피라의 틈새에서 내려온 광휘인가."

"인정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명예지. 너희에게는 지킬 명예가 있나?"

"무슨 의미지?"

엘로힘이 눈매를 굳히며 모리안에게 삿대질을 했다.

"던전에서 마물이나 다름없이 지내는 네놈들의 약조를 믿을 수 있냐 이 말이다. 내가 승리하면 신수와 결투할 기회는 분명히 주어지는가?"

"하하하, 기도 안 차는 소리를!"

부웅! 모리안이 깃발을 휘두르며 크게 펄럭였다. 던전, 파밍힐의 상징이 황금색으로 번쩍인다.

"본관의 시작은 비록 마물이었으나 지금은 영웅의 영역에 도달한 자다. 결투의 약조를 깨는 일은 영웅으로서도 수치이며, 섬기는 주군의 품격도 떨어트리는 일이다. 무지한 인간이여, 본관을 모욕한 일은 넘어가 주마. 허나."

쿵! 모리안의 유령마 실버쉽이 지면을 강력하게 찍었다. 그녀의 패기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엘로힘의 피부를 저릿하게 만들었다.

"본관의 주군께 조금이라도 실추를 가해 보아라. 그 순간 네놈에게 짐승의 싸움이 무엇인지 알려 주겠다."

흘러나오는 살기.

엘로힘은 그간의 경험에서 협박이 아닌 진짜 경고임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목적은 신수이지 미친 듀라한이 아니었다. 눈앞의 기수와 본격적인 전투는 피하고 싶었다.

"확실하게 약조할 수 있는가?"

"명예로운 경기를 맹약하지! 네놈이 명예를 지키는 한 피는 흐르지 않을 것이다. 본관보다 먼저 결승점을 통과해 보아라,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 패배한다면 이곳을 떠나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화악!

마력이 두 사람을 감싼다. 기아스, 맹약의 마법. 어떤 행위로도 결코 깰 수 없는 세계의 규칙에 스스로를 옭아넣는 행위다.

"맹약하겠다. 승리의 영예는 오직 빛에게만 허락되었음이 자명한 이치."

엘로힘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맹약을 받아들였다. 마력이 폭발하며 둘을 구속한다.

"이봐, 맹약이야!"

"누구지? '음속'과 '신제'인가!"

"볼거리가 늘었군!"

성립된 승부에 한껏 객석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추가 마권 구입도 가능한 마멋. 음속과 신제 단일 베팅인 마멋."

마멋들이 쪼르르 객석을 돌아다니며 그새 추가 발권한 마권을 팔아댔다. 바구니가 금화로 가득 차고 금고에 쌓인 금화의 산은 점점 높아져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제1회 군주상, 본마장 입장인 마멋!

―모습을 드러내는 마멋, 13번의 블러드 캡. 평소와 같은 모습인 마멋. 지난 침입자 더비에서는 패퇴했으나 반짝임은 어디 가지 않는 마멋.

해설과 함께 경기장의 준비가 시작됐다. 마멋들이 유령마들의 줄을 끌어주며 경기장에 한 마리씩 입장시킨다.

"블러드 캡! 전재산 다 걸었다!"

"드가자!"

"스페셜데이 믿는다 내 새끼!"

―1번 레일에는 스페셜데이와 마멋 기승인 마멋.

―여섯 살 암말인 마멋.

―페이스메이커는 바로 이 말! 파프리카 블랙과 마멋인 마멋.

―거리 연장이 기대되는 마멋.

말들이 들어올 때마다 환호와 박수가 끊이질 않는다. 경기장에 처음 온 이들도 금방 분위기에 휩쓸려 한 번뿐인 축제를 즐기게 된다.

그것이 경마의 매력이다. 한참을 걸려 준비된 단 한 번의 2분짜리 경주에, 수백 명의 염원이 담겨 명운이 단숨에 결정된다.

―1번 인기! 10번마 폭주선 실버쉽이 지금 들어오는 마멋. 힘이 넘쳐 보이는 마멋. 신제가 기승하는 마멋.

―그에 도전하는 청마와 음속 엘로힘. S급 모험가의 자존심은 지켜질 것인 마멋?

후끈거리는 열기로 피까지 증발해 버린 게 아닌가 착각이 일며.

―잔디 구장의 상태는 양호! 하지만 스피드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마멋! 전설은 누가 쓰게 될 것인가 기대되는 가운데 모든 말이 게이트에 들어간 마멋!

18마리의 말이 나란히 선다. 엘로힘은 고개를 숙이며 허리를 뒤로 뺐다. 시작부터 전력 질주를 할 기세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 신제의 태도를 살핀다.

그 눈에는 앞으로 달려야 할 잔디밭만이 비춘다. 진작 자신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다.

"흥."

적수로는 충분하다. 엘로힘이 오른손에 고삐를 감은 순간.

―덜컹!

18개의 게이트가 동시에 열리며 달려 나가야 할 길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다.

두두두두―!! 말발굽이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운다. 판단력을 흐트러트리지 않도록 기수들이 집중하며 말머리를 이끈다.

―제1회 군주상의 스타트인 마멋!

―안쪽에서 파고드는 마멋, 13번 블러드 캡! 

―4번, 파프리카 블랙도 있는 마멋!

―선행 2마가 치고 나가는 형태가 된 마멋, 다른 말들은 각자 어떻게 쫓아갈 것인 마멋?!

혈기사가 스타트와 동시에 힘 있게 치고 올라가며 선두를 맡는다.

그 모습에 엘로힘은 조금 놀랐다.

'다른 말들은 들러리가 아니었나?'

이 경주는 어디까지나 자신과 신제의 일대일 승부라고 여기던 엘로힘이었다.

오판이었다. 경기장을 달리는 유령마와 기수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필살. 진심으로 우승을 노리며 경주에 임하고 있다.

심지어 저 조그마한 기수 마멋들까지도. 고삐를 쥔 손의 각도부터 엉덩이를 쭉 내민 자세를 보면 결코 구색만 맞추고자 나온 초보자가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 걸렸기에 저리 필사적으로 달리는가?'

엘로힘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마멋들의 눈도 자신과 같았다.

불이 붙었다.

명예에 목말라 투쟁하는 전사들의 눈이다.

'1등 해서 짜장면 먹는 마멋!'

'군주님이 콜라 한 박스 준다고 한 마멋!'

그들이 머릿속에 그린 명예는 엘로힘의 생각과는 조금 차이가 있긴 했지만.

"신제와 폭주선은."

―딥 고스트가 3위, 안쪽에서 먼데이 다이아몬드. 실버쉽은 후방인 마멋. 1코너에서 2코너로 향해 가는 마멋.

―백 스트레치에 들어가는 마멋. 스타트가 정리된 마멋. 힘겨루기가 조용해진 분위기인 마멋.

엘로힘이 가장 경계하는 실버쉽은 후방이다. 첫 코너를 돌며 위치를 확인한 그는 견제에 들어갔다.

'강하게 나오던 태도에 비해 별 것 없군. 아니면 방심하게 할 작전인가?'

적진 한복판이다. 그는 긴장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어느새 선행한 두 마리가 쏜살같이 앞에서 달려나간다.

―거리를 벌리는 선두 그룹! 20마신 차이인 마멋! 쫓아갈 수 있을 것인 마멋?!

"엄청나게 먼데!"

"이러면 승부 정해진 거 아냐? 저 둘 중 하나가 1등으로 들어오겠구만!"

"하하! 자네는 경마장이 처음인가?"

관중 모험가가 마권을 꽉 쥐며 입꼬리를 올렸다.

"거리가 긴 경주다. 도주마가 없어서 선행마가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버린 상황이야. 체력 소모를 그대로 부담하고 있어."

"그 말은?"

"잘 봐, 세 번째 코너를 돌면 슬슬 결과가 나타날 테니. 20마신으로는 어림도 없어. 더 벌리지 않으면 혈기사는 못 치고 나가."

관중석이 환호와 함께 달아오른다. 두 번째 코너를 지나면서였다.

'뭐지?'

엘로힘은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자세를 흐트러트렸다간 자신도 속도를 잃고 만다.

―치고 올라오는 마멋! 폭주선에 불이 붙은 마머머멋!!

―실버쉽인 마멋!

'설마!'

힘을 아끼고 있던 신제가 몸을 숙이며 수많은 말들 사이로 파고든다. 거대한 벽과도 같은 공간에 진로가 마법처럼 보이기도 하는 양 방해물이 없는 것처럼 돌진한다.

"생각처럼 두지는 않는다!"

엘로힘이 빛을 휘감았다. 그의 청마가 푸른 안광을 뿜으며 발굽이 더욱 힘차게 지면을 박찬다.

"나 역시 하늘의 부름을 받은 영웅이다. 청마는 본래 요정의 호수에서 내려온, 고대 왕의 특서를 옮기던 명마의 자손이다. 빛의 영광은 오로지 나와 함께한다. 추월은 용납하지 않겠다!"

화아악!

빛의 갈래와 함께 속도를 올리는 엘로힘. 세 번째 코너에 들어선다.

―치고 들어오는 마멋!

―혈기사, 괴로워지는 마멋!

―다른 말들은 어떻게 진입할 것인 마멋!

―남은 거리, 앞으로 600!

20마신, 거의 50미터에 달하던 선행 그룹과의 거리는 이제 모두 좁혀졌다.

안쪽인가, 바깥쪽인가. 마지막 코너에서의 판단이 최종 코스를 결정하고 승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빛이여!"

다른 말들을 치고 나가기 위해 바깥쪽을 택한 엘로힘. 우글우글 길이 막힌 마군을 피하자마자 모든 광자를 속도로 변환해 총알처럼 쏘아진다.

남은 것은 직선코스뿐. 승리로 향하는 로열로드만이 그를 마중한다.

"오오오오오!"

필살을 담아 그가 외친 순간.

"파고들었다!"

"저런 미친!"

"폭주한다!"

트랙의 제일 안쪽.

분명 마군의 최후방에 있었던 신제와 그의 유령마 폭주선 실버쉽.

다른 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인한 다릿심으로 원심력을 버텨내며 최소각으로 쏘아진다.

"뭐… 라고!"

엘로힘의 시선이, 신제를 스친다.

"크― 하아아아!!"

빛이 아닌 또 다른 광.

목이 끊어질 기세로 질주하는 그 기사의 눈은 그야말로 광인이나 다름없었다.

엘로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패배라는 불길한 직감이었다.

***

"어이구, 포포가 신상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

"푸릉."

도넛을 산더미같이 준비해서 쌓아 주니 포포가 와작와작 잘도 씹어먹는다.

"나머지는 나중에 먹자. 산책가는데 체할라."

"푸르릉."

간식도 먹고, 산책도 가고. 오늘은 포포가 호사 누리는 날이다.

"그럼 가볼까."

나는 머리에 마멋 인형탈을 쓰고 포포에 올라탔다.

39화. 군주상 (3)

―바깥에서 2번 인기, 블러드 캡!

―밀고 들어오지만 빠져나오는 말은…!

―실버쉽! 실버쉽과 신제인 마멋!

―남은 거리 400!

―실버쉽, 선두인 마멋!

마멋들이 목청이 터져라 중계를 외치는 와중.

소리는 엘로힘의 귀에 닿지 않는다. 그의 몸은 돌진한 유령마가 남긴 풍압이 스쳐 지나갔기에.

"빛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가호는 자신과 함께했으며 청마는 어느 때보다도 절호조였다.

이것이 최선이다. 최속이다. 실로 음속에 도달할 것만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화려한 광휘가 그 초월의 영역으로 데려다주고 있건만.

저 앞에서 쏘아진 마창과도 같이.

하나의 무구처럼 물아의 경지가 된 듀라한은 어째서 추월할 수 없는 것인가.

"윽…!"

인정해야만 했다.

순수한 기량 차이다.

그 외에는 어떠한 이유도 없었다.

―두두두두!

마지막 직선. 변수는 더 이상 없다.

―블러드 캡! 블러드 캡도 돌진하지만!

―결승점을 통과하는 말은…!

―실버쉽인 마멋!!

"우오오오!"

"폭주선이 유관이다!"

"우승이라고!"

환호와 함께 하늘에 수백 장의 마권이 뿌려진다. 희비가 교차하며 관객석에서 모리안에게 베팅한 모험가와 마멋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제1회 군주상을 차지한 마멋! 폭주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 마멋? 신제 모리안인 마멋!

유령마 실버쉽에 올라탄 모리안이 트랙에서 속도를 줄이며 투구를 벗었다. 객석을 향해 세레모니를 하자 다시 한번 박수가 터졌다.

"말도 안 되는 명승부였군."

"음속과 신제, 혈기사의 삼파전을 직접 볼 수 있을 줄이야. 오길 잘했지."

"나는 신제에 걸었다고! 배당은 1.2배밖에 안 됐지만 이게 어디야."

"연승을 못 맞췄어. 젠장, 한 번에 5배 벌 수 있었는데."

"오늘 경기는 여기까진가?"

"워낙 큰 경기였으니 한 번만 하겠지."

모험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로 경기장이 가득 찼다.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모리안이 기수를 돌려 엘로힘을 향했다.

"맹약을 이행하겠다."

"자, 잠깐."

모리안의 마력이 엘로힘을 휘감는 순간, 그가 다급하게 팔을 내저었다.

"신제의 기수여, 패배는 인정한다. 그대의 기마에도 긍지를 보았다."

"문답무용. 계약을 이행하라."

"허나! 나는 신수와 대결하기 위해 이 외지까지 찾아왔다. 한 번의 패배로 매몰차게 전사를 내쫓는 게 정녕 그대가 섬기는 군주의 방식인가?"

궁지에 몰리니 혓바닥이 길어지는 엘로힘이었다. 그를 보고 모험가들도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저 양반 왜 저래. 졌으면 나오지."

"그러게. 규칙을 안 지켰다가 주인장이 경마장 문이라도 닫아 봐. 우리만 손해 아니야."

"S급이라고 전부터 우쭐대더니 결국 입만 산 놈이었어."

"어이, 형씨! 말 타다 졌으면 장비나 내놓고 나가쇼!"

관객들이 엘로힘을 향해 야유하기 시작했다. 엘로힘이 혀를 찼다.

'이 도박중독자 놈들. 감히 마물의 편을 들어?'

모험가는 국가나 종족을 안 가리는 편이다. 마족으로 구성된 모험가 파티도 있고, 마계에도 모험가 길드가 있다.

인족 모험가들은 그들과도 종종 교류할 일이 있었기에 듀라한 영웅이 상대라도 지킬 건 지켜야지, 하는 쪽이라 꼭 엘로힘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이도 많았다.

"맹약을 이행하라."

신제의 기수는 물러줄 기색이 없다. 엘로힘은 구속력을 느꼈다. 어느새 자신의 손이 품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내 바닥에 떨어트리고 있었으니.

'이대로는 안 된다.'

화악! 엘로힘이 주먹을 꽉 쥐어 한계까지 빛을 휘감았다. 머리 위로 뻗자 하늘이 응답하며 쿠궁! 경마장의 천장을 뚫고 광휘를 쏘아냈다.

"기물파손 마멋!"

"악질 손님인 마멋! 쫓아내는 마멋!"

엘로힘이 맹약의 구속에 몸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패배하면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다만, 언제 이행할지는 약속하지 않았다."

광휘의 권능으로 규칙을 조금이라도 비틀어 보려는 무모한 시도였다. 그 바람에 신체에 무리가 간 엘로힘은 토혈을 했다.

"비열한 자로군. 실망이다."

부웅, 모리안이 장창을 꺼내 들었다. 명백한 전투 의사였다. 엘로힘도 거부할 여력은 없었다. 그 역시 창을 꺼내 대치한다.

"뭐야, 갑자기 전쟁이야?!"

"이런, 영웅 둘이 맞붙으면…"

"휘말리면 죽는다, 도망쳐!"

관객석에서 패닉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전염되어 전원이 그 자리를 도망치려던 때였다.

―쿠웅!

자리에 내려앉는 무거운 공기.

부산스러워지던 관객이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지며, 온도가 싸늘하게 일변한다.

―다그닥, 다그닥.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일목요연했다.

천천히 경마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한 마리의 유령마.

아니, 두 개의 뿔을 가진 이각수.

발굽에서 서늘하게 타오르는 푸른 불꽃은 세상의 종말을 상징한다.

하룻밤 사이에 도시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알려진 재해災害급 신수神獸.

그를 단순히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소환수처럼 부리는.

안장도 없이 등에 올라탄 한 명의 인영.

이형이라고 해야 할까.

2미터를 훌쩍 넘는 거대한 몸집의 남자.

던전의 주인.

군주가 경마장에 나타났다.

"…저, 저 남자인가?"

"마물… 아니, 마인…?"

"지금 처음 나타난 거 맞지…?"

몇 번이고 경마장을 찾았던 모험가들도 이 던전의 주인은 처음 봤다.

그들도 항상 궁금해하며 추측하던 주제였다.

대체 저만한 경마장을 만들고 혈기사나 신제 같은 영웅들을 다루는 던전군주가 누구인가.

항간에서는 돈이 너무 많아 미쳐버린 귀족이라고도, 살인을 너무 많이 해 수배당한 마족이라고도, 언급해서는 안 되는 외신이 실험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모두 틀렸다.

군주의 정체는 아주 알기 쉬운 모습이었다.

"마멋이잖아…."

"마멋… 마인…?"

"마멋 로드야."

진화한 인간형 마멋이 아포칼립스 바이콘을 타고 경기장을 거니는 모습.

기묘한 명화가 따로 없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신제여."

그 순간.

"허억…!"

"윽!"

급이 낮은 모험가들은 숨이 턱 막혀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감히 그 앞에 서 있기도 힘이 든다. 얼마나 그가 두려운 존재인지 본능으로 깨닫는다.

"부르셨나이까, 주군."

신제가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경마장이다. 토벌은 없도록 하라."

"존명."

흡사 고귀한 귀족과도 같은 절제된 손짓.

그 모습을 보고 엘로힘은 깨달았다.

저 신제가, 영웅의 영역에 있는 존재가 고개를 숙일 존재라면.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나는 지금 목숨을… 동냥 받은 것인가?'

S급 모험가인 내가 고작 마멋에게.

엘로힘은 허탈함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긴장하던 모험가들도 고개를 들어 상황을 파악하고는 정신을 차렸다.

"군주가 규칙을 지켰다!"

"경마장은 괜찮은 건가…?"

"마멋 로드! 환급은 받아갈 수 있나?!"

모험가 한 명이 당첨된 마권을 흔들며 물었다. 마멋 군주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빛에 모험가가 잠시 긴장했으나.

"물론이다, 받아 가라."

군주가 깔끔하게 대답하자 모험가들의 입가에 환희가 걸렸다.

"환급받으랍신다!"

"돈 받으러 가자!"

마멋들이 금고를 열자 모험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산더미 같은 금화를 삽으로 퍼다가 당첨된 이들에게 뿌려준다.

"마멋 로드!"

"마멋 로드!"

던전의 경마장은 따지고 보면 모험가를 잡아먹기 위한 함정이다. 던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다. 막대한 보상을 미끼로 모험가의 목숨을 꾀어낸다.

그것을 알고도 도전하며 마물과 싸우는 게 모험가라는 족속들이다. 그들은 그 위험부담을 알고도 경마에 도전하고 있었으나.

"신제! 신제!"

"실버쉽! 실버쉽!"

"마멋 로드!!"

던전이 정당한 규칙을 제공한다.

그게 확인된 지금, 경마장이 얼마나 막대한 메리트를 갖추고 있는지 이 자리에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파밍힐 경마장이 모험가들이 도전할 던전을 넘어서서 명백한 오락장으로 자리 잡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제공한 아인은.

'다들 엄청 신이 났네…?'

자신이 만든 심심풀이용 놀이시설이었던 경마장의 여파가 얼마나 커질지 아직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침입자를 격퇴했습니다!

: 남은 침입자 1명 / 124명

: 침입자들이 전의를 잃고 돌아갑니다!

: 금화를 116 얻었습니다!

: 대량의 장비를 얻었습니다!

: 경험치를 500 얻었습니다!

: 시설 레벨업이 가능합니다!

'뭐가 엄청 많이 올랐네.'

일단 들어오는 건 많으니 운영은 계속하기로 생각한 아인이었다.

'마멋 탈 쓰고 오길 잘했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생길 법도 했다. 던전군주로서 마멋 로드 위장을 한 건 올바른 선택이었다.

"마멋 로드…!"

엘로힘이 아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지막까지 격퇴되지 않은 한 명이었다.

아인은 모리안에게 그에 대해 전해 듣고는 엘로힘에게 물었다.

"빛의 전사여, 신수와의 대결을 원하는가."

"…그렇다. 나는 그를 위해 여기까지."

"올라타라."

아인이 가볍게 손짓했다. 엘로힘은 너무나도 쉬운 그의 반응에 벙쪘다.

"주군! 그는 이미 패퇴하여 자격을 잃었습니다. 주군께서 상대하실 수준조차 아닙니다!"

모리안이 격하게 반응하였으나 군주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겨우 찾아온 명예 회복의 기회였다. 엘로힘은 맹약이 몸을 구속하는 와중에도 간신히 말의 고삐를 찾아 안장에 올라탔다. 광휘의 힘을 빌려 조금이라도 더 버틴다.

"어이, 저기 봐."

"달리려는 모양인데!"

"종말이다! '검은 종말'이 뛴다!"

"포포 더 아포칼립스다!"

해산하려던 모험가들이 우르르 몰려와 다시 객석에 들어찼다.

그간 경마장의 상징으로만 여겨지던 포포였다. 항상 경기 전 한 바퀴 위용을 뽐내고 사라지던 그다. 실제로 달리는 모습은 볼 수 없었기에 모두가 관심을 보일 법도 했다.

―게이트에 들어서는 마멋! 한 번의 패배로는 꺾이지 않는다! 불굴의 투지로 다시 일어선 청마에 음속이 기승. 2번 게이트인 마멋!

―파밍힐 경마장의 살아있는 전설! 지나간 족적에는 종말만이 남는 마멋! 재해급 신수, 검은 종말 포포 더 아포칼립스가 1번 게이트에 들어서는 마멋! 군주님께서 기승하는 마멋!

질세라 마이크를 붙잡은 중계 마멋들의 목소리가 울린다. 금세 불이 붙는 객석.

엘로힘이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눈에 다시 한번 빛이 깃든다.

'재해급 신수를 상대할 기회는 지금뿐이다. 일기토에서 승리했다는 명예를, 칭호를 손에 넣을 기회는 오직 지금밖에…!'

승부욕이 생기가 되어 불타오르는 순간.

덜컹!

―쐐애액!

게이트가 열리고, 중력가속도와 함께 공기저항이 귓가를 덮친다.

"빛이여!"

페이스를 조절할 여유는 없다. 시작부터 모든 광휘를 휘감아 최고속력에 도달하는 엘로힘. 제로백까지는 채 1초가 걸리지 않는다.

그런 엘로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니…?!"

여유롭게 자신의 앞을 선행해 나아가는 종말의 바이콘과 그 기수인 마멋 로드였다.

"좋은 센스군."

그가 남긴 한마디에 엘로힘은 깨달았다.

처음부터 이 경주를 승부로 여긴 건 자신밖에 없었음을.

이미 존재하는 세계가 너무나도 다른 탓에, 그에게 자신은 처음부터 상대도 아니었음을.

"…하하."

엘로힘의 빛이 꺼져 간다. 그가 고삐를 놓으며 속도를 떨어트렸다. 그의 청마가 천천히 발굽을 멈추었다.

―콰아앙!

음속을 돌파한 종말의 이각마가 거대한 파동을 남기며 돌진한다. 푸른 불꽃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 모습은 그야말로 종말이나 다름없다.

"오오오!"

"종말! 종말!"

그를 향해 모든 모험가가 환호하며 마권을 흔들었다. 관중석에 포포에게 걸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엘로힘은 그를 인정하며 비로소 고개를 숙였다.

불끈, 군주가 주먹을 쥐어 승리를 선언한다. 그와 함께 하늘에서 금화의 비가 내린다. 포포에게 신뢰를 보낸 이들을 위한 화답이었다.

"히― 히히힝!!"

포포의 울음소리가 경기장에 울리고, 아래에서는 모험가들의 축제가 벌어졌다.

그들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던 아인은 어째 일이 좀 커졌다고 느끼긴 했지만.

'다들 재밌어하니 괜찮겠지.'

방음 공사만 제대로 하자고 생각했다.

40화. 리모델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