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짜장면 (1)
20년 전, 대륙의 명운이 걸렸던 대전쟁이 있었다.
인간계 각지에 점점 늘어나던 던전은 수많은 인족의 안전을 위협했다.
대 던전 시대.
동시에 부귀영화를 얻을 기회의 시기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모험가로 전직하여 지하를 탐사하며 인생 역전의 꿈을 꿨다.
던전은 위험한 만큼 토벌했을 때 합당한 재보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인간계 한가운데, 제국 남서부에 나타난 그 던전은 결코 모험가들에게 보상을 제공하지 않았다.
난공불락. 그곳에서 살아나온 모험가들은 하나같이 그곳에 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경고는 공포보다 호기심을 먼저 부르는 법. 수많은 이들이 꾸준히 그 던전에 도전했고, 머잖아 그곳은 '최흉'의 이명을 얻었다.
스포츠처럼 여겨지던 던전 공략 붐은 끝을 맞이했다.
각지의 수많은 던전에서 브레이크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재해급 마물이 떼거지로 뛰쳐나와 수많은 국가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인류는 필사적으로 항쟁했으나 희망은 없어 보였다.
후에 이름 붙은 그 대전쟁의 이름은 '대성전'.
그야말로 존망의 명운을 건 대전투였다.
그 전쟁을 끝낸 건 어느 국가의 기사단도, 용사도 아닌 '최흉'의 영웅들이었다.
정점의 마왕이 브레이크가 일어난 모든 던전을 습격해 역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가 지하를 지배하는 데에는 불과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인간계는 그의 수중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명령 한마디면 모든 던전에서 마물들이 튀어나와 세계를 불태울 테니.
최흉의 마왕이 자취를 감춘 것은 바로 그 즈음.
모든 것을 손에 넣고는, 더 이상 아무 흥미도 없다는 듯.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의 던전이 뱉어낸 마물들은 마력이 끊겨 나약해져 있었다. 인간들은 간신히 어떻게든 마물까지는 토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웅은 도저히 손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인외의 영역에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모든 영웅이 풀려난 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은 영웅의 자리로 돌아갔다. 마계로 돌아간 이도 있었다. 인간계에 직접 피해를 입히는 숫자는 얼마 안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거대한 위협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중 한 명.
시트리. 이명 혈기사.
"이봐, 거기 상인 양반."
그녀를 부르는 껄렁한 목소리가 있었다. 불량한 태도의 모험가 일당 세 명이었다.
"방금 술집 주인과 꽤 괜찮은 거래를 한 모양이던데."
"이 동네는 처음인 모양이지. 여기서 장사를 하려면 우리에게 세금을 내야 해. 처음이라 몰랐을 테니 반만 내면 넘어가 주겠어."
주점에서 그녀의 주군이 거래하는 모습을 보고 뒤를 밟은 게 틀림없었다. 그들이 허리춤의 색에서 단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니 시퍼런 날이 슬쩍 드러났다.
시트리는 주군 없이 혼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큐버스인 그녀는 마력의 냄새에 민감했다. 이들에게선 피 냄새가 짙다. 모험가 행세를 하며 도적질도 하는 잡범들이다.
"귀가 막혔나? 아니면 벙어리인가?"
"그 멀대 놈이 데리고 다니는 여자니 멀쩡하진 않겠지. 이봐, 돈도 그놈이 가진 거 아냐?"
이런 잡스러운 놈들에게는 그분의 시간과 심력이 아깝다.
주군께서 당신의 일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보좌한다. 그것이 자신의 일이었다.
"군주님의 패기를 느끼지조차 못하는 미물들이여. 격식이 떨어지는 것이 짐승이나 다름없구나."
"격식, 뭐?"
"지금 우리 욕한 건가?"
"미친 여자가. 좋은 말로 할 때 못 알아듣고."
스릉, 도적으로 변한 모험가들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들이 위치한 장소는 뒷골목.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서는 어느 정도 소란이 나도 눈에 띄지 않을 터였다.
"돈만 내놓고 가. 그러면 얼굴에 흉터 생기는 일은 없게 해주지."
"다행으로 여기거라, 미물들이여."
―쿵!
공기가 변한 건 한순간이었다.
세 명의 도적은 동시에 숨이 막히며 몸이 지면을 향해 짓눌리는 감각을 받았다.
"자비로운 군주께서는 그런 그들에게도 토벌이 아닌 격퇴를 명령하셨으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 여자의 손이 언제 움직여서 검을 빼 들었으며.
왜 그와 동시에 온몸의 마력이 폭포수처럼 땅바닥으로 흘러내리는지.
마치 온몸의 세포가 매혹되기라도 한 듯, 하나도 의지에 반응하지 않는다.
"성국에서 보았다. 치유술이라는 기술은 잘린 팔도 다시 붙여 놓더군."
저벅.
어느새 도적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정체불명의 여자는 그들의 뒤에 서 있다.
"뛰어라. 더 늦기 전에."
―파악!
선혈이 사방으로 튀긴다. 자신들의 팔 한 짝이 바닥을 뒹굴고 있음을 그들은 금방 눈치챘다.
"아… 으아아…!"
그쯤 되니 그들도 현실을 인지했다.
결코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렸다고.
세상에는 절대 적으로 삼지 말아야 할 존재들이 있는 법이었다.
그 단순한 규칙을 어긴 대가는 너무나도 비쌌다.
고통이 전신을 엄습하지만 알 수 없는 힘이 목을 옥죄어와 비명을 크게 지를 수도 없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마력이 다 빠져나가 너덜너덜해진 몸을 간신히 이끌어 팔을 들고 도망치는 일뿐이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인간, 마물, 아니. 어느 쪽도 아니다.
재해(災害).
먼저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지나칠 수 있었을 것을.
그렇다면.
저 재해가 주군이라 부르며 모시던 아까 그 남자는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오히려 그를 건드리지 않았기에, 지금 자신들은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도적들은 스스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뛰어든 것을 후회하며 정신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
"군주님, 늦어서 죄송해요."
시장을 둘러보고 있으니 시트리가 돌아왔다.
"어서 와. 무슨 일 있었어?"
"아, 별 건 아니고 조금 시비가 붙어서요. 괜찮아요. 조용히 해결했어요."
"괜찮아?"
"그들이요? 아, 음… 아마 괜찮지 않을까요."
시트리가 다치지 않았냐고 물어본 거였는데, 생각해 보면 좀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음… 대화로 해결한 거 맞지?"
시트리는 잠깐 미간을 찌푸리고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네에."
"잘했어. 말이 통해서 다행이네."
"…뭐, 비명도 대화로 치자면."
"응?"
"아, 아니에요. 건강한 종묘는 찾으셨나요?"
"응. 여기 얘네들 괜찮아 보인다."
뒤뜰에 샘플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건강해 보였다. 품종만 잘 골라보기로 했다.
퇴비도 그렇고 재밌는 게 많았다.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있으니 한 가지 더 눈에 띈 물건이 있었다.
"오, 콩이다."
콩 주머니도 한 움큼 구매 완료. 은화 세 개를 모두 지불해서 소쿠리 한가득 담아 던전으로 돌아왔다.
"콩이 있으면 장을 만들 수 있고, 카라멜도 있으니 춘장이 나올지도 몰라. 밀가루로 면을 뽑을 수 있으니까…"
조금 늦은 이사 기념 짜장면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기대가 되는걸.
물론 내가 그걸 요리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긴 한데.
"새 풀인 마멋."
"키다리씨인 마멋."
"이것도 키우는 마멋?"
마멋들은 콜라 덕분에 농사에 재미를 들렸는지 밀을 보고 벌써 의욕을 보인다. 던전의 페이스를 생각하면 며칠 안에 수확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됐다.
마멋들과 함께 밭에 밀을 심는다. 땅을 단단하게 다지고 물을 준다.
"무럭무럭 자라라. 탱탱한 면발이 되는 거야."
사르르 부는 바람에 스치는 밀이 꼭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상태창에 메시지가 떴다.
: 튜토리얼 퀘스트 [상점 거래]를 완료했습니다! (6/10)
: 보상으로 미니게임 시설 1개를 무료로 설치할 수 있습니다.
[쉐프 시뮬레이터] [유령마무스메]
[드럼마스터] [슬라임팡!]
"오, 요리 나왔다."
어느 것도 상당히 매력적인 보상이었다.
"시설은 원래 혼돈석을 써서 사야 한단 말이지. 비싼 건 몇십 개까지 내야 하니까 공짜로 주면 더할 나위 없지."
제시된 미니게임은 모두 갖고 싶었다. 특히 슬라임팡. 이거 하면 진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 종일 할 수 있는데….
"아냐, 일단은 요리부터 해야지."
눈물을 머금고 순전히 놀기 위한 시설은 나중에 설치하기로 했다. 정 심심하면 1층 유령의 집 올라가서 미로 찾기나 하다 와도 되니까.
무엇보다 슬라임팡은 20돌짜리, 쉐프 시뮬레이터는 무려 40돌짜리 시설이다. 여기선 효율 중시로 간다.
"쉐프 시뮬레이터."
상태창을 터치하니 뾰로롱, 하는 효과음과 함께 메시지가 나타났다.
: 설치 장소를 선택해 주세요.
"어디, 설치 장소는… 역시 3층이 좋겠지."
거실 옆 부엌에 세팅을 완료한다.
"새로운 시설을 설치하셨나요?"
"그래, 재미있겠지. 빨리 가보자."
"마멋도 궁금한 마멋."
다같이 3층으로 내려가 거실 옆방으로 향한다.
"오오."
태양이가 이미 환하게 비추고 있는 주방.
스테인레스 재질의 찬장과 냉장고, 오븐에 크기별로 나란히 정리된 식칼, 국자와 계량기. 깔끔한 현대식 모던 키친 그 자체였다.
"재료만 있으면 파인다이닝도 만들겠다."
"뭐 하는 곳인 마멋?"
"깨끗한 마멋. 반짝반짝 마멋."
"앞으론 여기서 밥을 만들 거야."
"밥 마멋!"
"맛있는 음식 만드는 마멋!"
마멋들도 밥 얘기가 나오니 신이 나서 귀를 쫑긋거렸다.
여기서 만들어질 요리를 상상하니 벌써부터 위장이 꼬르륵 울리는 기분이었다.
벌써 던전에 유령의 집, 밭, 주방까지 시설을 세 개나 지었다. 엄청 넓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금방 공간이 들어차는 거 아냐?
"좋아, 일단 재료야 재료. 다들 밀 재배 힘내서 해 보자. 끝내주는 요리를 만들어 줄 테니까!"
마멋들과 함께 파이팅을 넣었다.
이후로는 나도 마멋들과 콩과 밀을 열심히 키웠다. 아직 밭이 작아서 일단 코카나무와 바닐라 재배는 뒤로 미뤘다. 밀과 콩은 직접 뿌리를 묻어주고 톡톡, 정성껏 흙을 덮어줬다.
"휴우."
그래도 햇빛 아래에서 땀 흘리며 일하니 살아있다는 기분이랄까. 평생을 어딘가에 갇혀있던 나로서는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
"이거 봐, 콩 열린다."
"마멋, 마멋!"
"색이 좋군요. 튼실한 열매가 나오겠습니다."
4일이 지났을 때는 첫 콩이, 1주일이 지나서는 밀이 결실을 맺었다.
"마멋, 마멋."
한가득 쌓인 밀과 콩을 보고 마멋들이 척, 척. 팔다리를 이리저리 샥샥 뻗었다.
지난번 강강술래에서 한 단계 발전한 새로운 수확의 춤인가? 어쨌든 꽤 웃겼다.
"좋아, 드디어 기다리던 요리 시간이다."
나는 재료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미니게임 [쉐프 시뮬레이터]를 켜 시설을 작동시킨다.
"레시피, 짜장면."
: 재료가 일부 부족합니다.
"부족한 건 알아서 대체하고. 환경이 환경이니까 완벽한 걸 바랄 순 없지. 비슷하게 맛만 나면 돼."
토토토톡, 내 앞에 필요한 도구가 순식간에 준비됐다. 그 모습을 본 마멋 한 마리가 깜짝 놀라 뒤로 꽈당 넘어졌다.
앞치마를 두르고 본격적으로 준비에 임한다.
샥, 샥. 칼갈이에 대고 칼을 갈아본다. 이거 해 보고 싶었단 말이지.
"검을 다루는 솜씨도 경지에 올라 계시군요. 역시 군주님이셔요."
"응? 식칼이야, 식칼. 요리할 거야."
"과연, 검은 적을 베는 것뿐만 아니라 아군을 먹여 살릴 수도 있다… 항상 군주님께는 가르침을 받네요."
짜장면 한 그릇 끓이는데도 시트리는 거창한 의미를 찾고 있었다. 관찰력이 대단하다. 본받고 싶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밀가루 포대를 열었다.
11화. 짜장면 (2)
"마멋들, 이거 깨끗하게 씻어 줘."
"마멋, 마멋."
마멋들에게 콩을 넘긴 후 조리대 앞에 섰다. 커다란 스테인레스제 도마가 놓여있다.
[제분]을 터치하니 준비한 밀이 고르게 걸러지며 밀가루가 된다. 이제 [반죽]으로 넘어갈 준비가 됐다.
쪼르르, 계량기의 눈금 부어진 자리까지 물을 정확하게 맞춘다. 밀가루를 도마에 부어 놓으니 꼭 깃발 뽑기의 모래성 같다.
가운데를 움푹 파 분화구 모양으로 만들어 그곳에 물을 조금씩 부어 나가며 반죽을 시작했다.
"느낌 좋은데."
"밀가루가 찰져 보이네요. 역시 군주님께서 모종도 탁월하게 고르셨어요. 반죽이 잘 되겠는걸요."
상태창에 표시된 만큼 소금을 꼬집어 반죽에 뿌린다.
"눈이 내리는 마멋~"
"한겨울인 마멋~"
손에 힘을 주어 끝마디부터 뭉쳐나간다. 이런 건 역시 손맛이지.
찰싹! 잘 뭉쳐진 반죽 덩어리를 내리치며 공기를 섞어 준다.
"좋아, 이 정도면 될까."
숨이 잠시 죽도록 냉장고에 넣어 놓는다.
"다음은 소스."
가장 중요한 파트다. 짜장면을 짜장면으로 만들어 주는 단계다.
"원래 춘장은 발효가 오래 필요하지."
마멋들은 아직도 드륵드륵 콩을 씻고 있었다.
"너무 오래 씻은 건 아닐까요?"
"딱 좋아. 어차피 물에 불려야 하니까."
콩이 퉁퉁 불어 표면이 말랑해질 때 즈음 인덕션을 켰다. 냄비에 소복이 차오른 물이 금방 팔팔 끓어올랐다.
투입.
"이건… 마법으로 만드신 열기인가요?"
"비슷해. 뭐, 마력은 조금씩 소모되지."
"하지만 열효율이 어마어마하게 좋네요. 불꽃이 직접 보이지도 않고. 3위계… 4위계 마법은 되어 보여요. 신기하네요."
"요즘 인덕션 정도는 입주하면 기본 옵션으로 붙어 있지 않아?"
"세상에, 이게 기본이라니요. 역시 군주님은 시선의 위치가 다르시군요."
시트리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인덕션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표현을 잘못했구나. 아직도 현대의 기억이 돌아온 후유증이 좀 있다. 어느 쪽 지식이 내 상식인지 종종 헷갈리곤 한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덕분에 이렇게 짜장면도 만들어 먹을 수 있잖아.
"셰프 시뮬레이터에는 편의상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과정은 빨리감기할 수 있어."
편리한 기능이다. 잘 삶아져서 표면이 야들야들해진 콩을 소금물과 함께 항아리에 넣고 [발효]를 눌러주니 호로록, 타이머가 돌아간다.
땡! 알림음이 울리고 뚜껑을 여니 진득한 발냄새가 올라왔다.
음, 이거지.
스프처럼 눅진해진 콩 장에 사탕수수로 만든 캐러멜을 크게 다섯 스푼 넣어 섞어준다.
"색깔은 벌써 기가 막힌다."
내가 아는 바로 그 춘장 색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재료.
"마법의 가루."
사탕수수에서 [추출] 버튼을 눌러 나온 흰 가루를 사르르, 장에 뿌려 잘 섞어 줬다.
"어머, 그건 무엇인가요?"
"인류 지혜가 발명한 최고의 조미료야. 주방의 강령술이나 다름없어."
MSG.
감칠맛을 더해 주는 맛의 보고다.
이거 한 스푼이면 다 죽어 가던 요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가 돌아온다.
"어디, 맛을 한 번 볼까."
야채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그간 콜라를 팔아다 마련한 돈으로 쟁여뒀었다.
생양파를 먹기 좋은 사이즈로 썰어다 춘장에 슬쩍 묻히니 달달한 향기가 코로 쑥 들어왔다.
아삭, 한 입 깨무니 양파의 매운 맛과 함께 화아악 머릿속에 달달하고 고소한 춘장의 맛이 퍼져나간다.
"이거지."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지난 20년 인생, 감자의 버석함과 생선튀김의 눅눅함만 느끼다 자극적인 인스턴트 맛이 들어오니 뇌의 시냅스가 정신을 못 차리고 펄쩍 뛴다.
고개를 돌리니 내 시식을 지켜보던 시트리가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시트리, 너도 먹어 볼래?"
"아이, 아니에요. 군주님의 식사를 제가 어찌 감히… 헉, 직접 하사해 주시다니! 영광이에요!"
시트리가 깜짝 놀라서는 내가 집어 준 춘장 찍은 양파를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아삭,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시트리가 충격에 눈을 번쩍 뜨고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대체 이 맛은…"
"깜짝 놀랐지."
"…뒤통수를 얻어맞은 줄로만 알았어요. 흐으으, 어떻게 이런 소스를 만들어 내셨나요?!"
"마멋도 궁금한 마멋!"
"먹고 싶은 마멋!"
발아래에서 뿅뿅 튀어오르는 마멋들.
"조금만 기다려. 너희에게는 완성하고 줄게."
춘장도 됐겠다, 숨을 죽여 놓은 반죽을 꺼내 면 제조에 들어갔다.
자동 롤러 기계를 쓰니 편하게 반죽이 주욱 밀려 나갔다. 덜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끝에서 면발이 주루룩 밀려 나오는 걸 손으로 받아 적당한 길이에서 끊는다.
모터일 리는 없고, 원리는 몰라도 마도공학으로 만들어진 물건이겠지. 역시 마법은 편리하다.
요리하기 좋게 1인분씩 말아 놓고 자리를 옮긴다.
"드디어 본방송이다."
인덕션이 있어도 불은 별개지.
전기로는 불맛을 재현할 수 없으니까.
화륵!
화덕에 마력을 투입하니 불이 올라온다. 그 위에 달각, 커다란 중화식 프라이팬을 올렸다.
요리를 전부 튀길 기세로 기름을 충분히 투입한다. [볶기]를 터치하니 슬금슬금 힘을 조금만 줘도 기분 좋게 프라이팬이 움직인다.
양파와 고추, 돼지고기를 썰어 넣어 먼저 볶다가 설탕을 넣어 준다.
양파 색이 노릇해질 때 즈음 춘장을 투하. 물과 전분을 섞어 힘차게 볶으니 화르륵! 냄비에서 커다란 불꽃이 올라왔다.
"깜짝 놀란 마멋!"
"군주님이 불마법 쓰는 마멋."
"맛있는 냄새인 마멋…"
마멋들은 흐르는 침을 닦는 것도 잊은 채 내 불쇼를 구경하기 바쁘다.
삐빅―
마침 상태창의 타이머가 울렸다. 조리 타이밍을 알려주는 기능이다. 체에 면을 1인분씩 넣어 끓는 물에 투하한다.
"마멋들, 그릇 준비하자."
"마멋, 마멋."
뽈뽈 조리대 위를 돌아다니며 일사불란하게 그릇을 나르는 마멋들.
―삐삑!
타이머가 알람과 동시에 물에서 체를 꺼내 촤악! 물기를 한 번에 털어내고 그릇에 담는다. 동시에 짜장 볶기도 끝난다.
"미니게임 진짜 편하네. 시간도 딱딱 알려 주고 필요한 스킬은 알아서 켜 주고."
재료를 키우느라 품도 많이 들었고 그 갓겜 슬라임팡까지 포기했으며 시설 투자비에다가 마력에다가 무지막지하게 썼지만!
짜장면을 먹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할까.
여기서 현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자체가 내게는 기적이나 다름 없었다.
사르르, 볶아진 짜장을 그릇에 놓인 면 위에 듬뿍 담는다. 조명에 반사되는 기름기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벌써부터 예술이다.
"마멋들, 배달!"
척척, 마멋들은 시키기도 전에 벌써 짜장면과 식기를 식탁으로 나르고 있다. 포크까지 정갈하게 놓고는 컵에 콜라도 한 잔씩 따라놓는다.
나도 앞치마를 벗고 식탁 앞에 앉았다. 코로 들어오는 향기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사 기념 짜장면을 드디어 먹는구나."
젓가락 대신 포크긴 했지만. 면을 이리저리 비비니 쫘악쫘악,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소리가 귓가를 자극한다.
"던전 입주를 축하하며."
"부활을 축하드려요, 군주님!"
"마멋, 마멋!"
우리는 경건한 자세로 짜장면을 후루룩, 입에 집어넣었다.
"허어."
감탄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미사어구가 필요 없다.
맛있다….
지금까지 참은 시간과 투자한 품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자극적인 맛이었다.
"멈출 수 없는 마멋!"
"천상의 맛인 마멋!"
마멋들도 바닥에서 조그만 그릇에 담은 짜장면을 호로록 흡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먹성도 좋네.
지금은 나도 마멋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짜장면을 먹기 바빴다.
쫄깃한 면에 아삭한 양파, 고소하고 달달한 짜장. 그리고 마무리는 시원한 콜라 한 잔.
"이게 극락이지."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그릇은 바닥까지 깔끔해져 있었다. 양파 한 조각 남지 않았다.
: [수제 짜장면] 요리에 성공했습니다!
완성도 ☆☆☆☆
: 쾌적함이 1 증가했습니다!
: [쉐프 시뮬레이터]를 종료합니다.
미니게임이 끝나니 척척, 알아서 말끔하게 주방이 정리된다. 마법은 좋은 문명이다.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 싶었지만 재료를 더 썼다간 밀밭이 허허벌판이 될 테니 참아야지. 원래 이런 건 아껴 먹어야 제맛이거든.
행복하구나. 이대로 바닥에 드러눕고 싶은 기분이다.
: 튜토리얼 퀘스트 [미니게임 (2회)]를 완료했습니다! (7/10)
: 보상으로 7위계 마법 사용권 (1회)가 지급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튜토리얼 퀘스트는 알게 모르게 계속 진행되고 있네. 지금까지 던전에서 지내는 방법을 알려 주는 느낌인데, 전부 깨면 뭐가 기다리고 있으려나?
그동안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계속 보상이 괜찮기도 해서 스크롤을 내려 봤다.
: 튜토리얼 퀘스트 [고위계 마법 사용]이 진행 중입니다. (8/10)
: 보상 : ☆☆☆ 확정 소환권
"오, 3성 확정?"
이것도 꽤 구미가 당기는데….
가챠게임의 매력이 이런 점이었지. 한 번 빠져들면 끊임없이 뭘 퍼줘서 도저히 끌 수가 없게 만든다니까.
퀘스트도 꽤 구성이 잘 되어 있다. 전에 얻은 보상으로 다음 단계를 깨서 착착 진행하는 방식이다.
"마법은 내 전문 분야이기도 하고."
기왕 기회가 생겼으니 적절한 마법을 활용해 봐야겠다.
7위계 마법이라.
원래 소환사 신분으로는 꿈도 못 꿀 경지이긴 하다. 종족을 막론하고 7위계의 경지에 다다른 자는 '현자'라고 불리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내 소환마법은 원래는 3위계로 분류되는 마법이었어."
갑자기 7위계로 순식간에 스텝업을 해도 체감이 잘 안 되긴 하네.
지금은 코어와 연동한 덕에 쓸 수 있는 마법이 꽤 있다. 내가 전생에 계정 캐릭터를 키우며 배워 놨던 주문들이다.
"군주도 일단은 기물이라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으니까."
어디, 뭐가 있나 볼까.
▶ 마법 주문
○ 7위계
[옥염신궁]
[불사군세] (5분)
[7위계 화염룡 소환] (1시간)
[천신결계]
내가 전생에서 주로 투자했던 마법은 [화염] 계열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멋있으니까.
그 외에는 언데드 계열 주문이 있다. 던전 군주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계통의 마법이다.
"옥염신궁, 화염 속성에서는 거의 최강 공격마법이었지."
[불사군세]는 던전 군주로서 기본 소양이랄까, 언데드를 불러내는 기능이고. [화염룡 소환]은 화염 계열 하수인 소환, [천신결계]는 방어마법이다.
"막상 던전에 직접 도움 될 만한 건 없긴 하네."
당장 대단한 위협이 있지도 않으니, 일단 퀘스트를 깨는 게 던전을 키우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이전 내 캐릭터를 생각하면 7위계 위도 얼마든지 쓸 수 있었으니 마력 생산량을 빨리 올리는 게 낫다.
그만한 마법이 필요할까 싶긴 하지만.
적당한 마법을 써서 퀘스트를 넘어가고 확정 소환권이나 받아야지.
어떤 걸 써보는 게 좋을까, 기분 좋게 빵빵한 배를 두드리고 있던 때였다.
―쿠웅!!
별안간 지진이라도 난 듯 던전 전체가 흔들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질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마머멋!"
"맛!"
벌러덩 나자빠지는 마멋들을 뒤로하고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침입자가 있습니다!
· 인원 : 1마리
· 암흑룡 (마왕 세라펠 군단 소속)
Lv. 70
체력 90/90
상태 호기심
"뭐야 이게, 드래곤?"
"호위하겠습니다! 군주님, 명령을!"
시트리가 즉시 내 옆에 붙어 검을 뽑아 들었다. 습격받은 건 다름 아닌 2층의 밀밭이었다. 유일하게 외부에 노출된 구간이다.
"마멋들은 안에서 기다려."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시트리와 함께 2층으로 이동해 밭으로 뛰어갔다. 철문을 나가자마자 눈앞에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크르릉…
드래곤. 온몸이 시꺼먼 흑룡이다. 크기도 무지막지 큰 성체다. 밭 구역 천장의 채광용 구멍에 머리를 처박아 온 것이다.
"허, 아니."
재해급 마물이라고 불리는 드래곤이다. 한 마리가 나타나면 하룻밤 사이에 도시 하나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으니 당장에라도 혼절해야 정상이었겠으나.
"내, 내 밀가루… 내 짜장면…."
머리가 핑 돌았다.
그놈의 이빨 사이로 우적우적 씹히는 밀을 보니 뚝, 이성이 끊겼다.
"못 참겠다."
남의 집에 불법 침입한 것도 모자라 소중한 식량을 훔쳐먹어?
"야 임마!"
나는 상태창을 터치했다.
: 7위계 [옥염신궁]을 발동합니다.
: 발동이 불가능합니다. 마력이 부족합니다.
: [무제한 마력 사용권]을 사용합니다.
: 마법 발동에 마력 제한이 사라집니다.
12화. 경지에 이른 대마법사
마법.
그것은 이 세상의 기본적인 상식과도 같지만, 일반인은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는 신비로운 학문이다.
마법과 가장 유사한 학문을 찾자면 수학이다. 기초적인 원리는 세상 누구나가 이해하며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조금만 심화 과정에 들어가면 외계어가 되어 버린다.
수식으로 정리되는 점이나, 기초 공식이 점점 발전해 고차원의 개념이 되는 점, 그 학문을 발전시킨 소수의 천재들 덕에 인간계 모든 인족이 혜택을 누리는 점도 비슷하다.
시트리는 검사다. 20년 전, 기사 영웅들을 동경해 검을 손에 집었다.
하지만 태생이 서큐버스, 마력에는 민감한 종족이다. 마법에도 약간은 조예가 있었다.
그녀가 도달한 경지는 2위계.
대부분의 평범한 마법사가 노력하면 닿을 수 있는 위치였다.
2위계를 넘어서부턴 그 숫자 하나마다 어마어마한 격의 차이가 존재한다.
2위계 마법사는 평생 노력해서 운이 좋으면 3위계에 오를 수도 있다.
4위계부터는 재능의 영역이다.
5위계에 도달한 마법사는 천재라고 불린다.
6위계에 도달한 마법사는 영웅이라 불리고,
7위계에 도달한 마법사는.
"위인."
시트리의 눈앞에서 푸른 마력이 소용돌이친다.
시전자는 물론, 그녀의 주인이자 이 던전의 군주인 아인이었다.
그의 몸에서 생명의 근원인 마력이 끊임없이 뿜어지며 유려한 마법진을 그린다. 기초가 되는 제1진, 그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2진과 3진.
4진부터는 그 형태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이미 시트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경지를 뛰어넘었다.
"이것이…"
위인의 마법.
전설로만 들었던 7위계 마법을 난생처음 목도하는 순간이었다.
"감히 짐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는가."
그녀의 주군이 냉정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 침착하면서도 날카로운 모습에 시트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간 시트리가 재회한 군주는 꽤나 다정했다. 과거 최흉의 마왕이라 불렸던 역사가 무색할 정도였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음은 물론, 하급 마물인 마멋들에게조차 일일이 손수 만든 요리를 나누어주지를 않나, 침입자들의 목숨조차 일절 빼앗지 않았다.
더는 그에게 전과 같은 야망이, 이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시트리였다.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 군주에게 충성하며 배울 점은 산더미같이 있었으니.
하지만.
"무엄하군."
―후욱!
그가 뿜어내는 패기에 짓눌린다. 무릎이 후들거린다. 시트리는 다시금 확신했다.
그 침입자들은 피해조차 되지 않았기에 가지고 놀다 돌려보냈을 뿐.
자신의 주군은 적으로 판단된 존재에게는 일절 자비도, 용서도 베풀지 않는다.
지금 그녀는 확신했다.
절대자는 여전히 건재했으며.
그에게는 자신 따위가 짐작하지도 못한 이상이 있음을.
귀환한 군주의 던전은, 전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구축할 것이라고.
"크릉―?!"
암흑룡도 적의 패기를 느꼈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급히 구멍에서 머리를 빼 커다란 날개를 휘두른다. 이어 돌풍을 일으키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드래곤이 그들을 향해 입을 쩌억 벌렸다. 위협을 느끼고 선제공격을 할 생각이다.
"군주님!"
시트리가 즉시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암흑룡은 재해급 마물. 그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고 절명하지 않을 생명체는 없다.
군주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마법진이 입방체의 형태를 이뤄 정제된다.
화악!
그의 손이 하늘의 태양을 따와 압축한 듯한 착각이 인다.
불꽃은 단숨에 활대의 모양으로 변형한다. 시위도 없이 타오르는 화살을 건다.
시트리가 본 그 어떤 활보다도 유려하고 선명한 곡선이었다.
"피해 보아라, 미물이여."
화살이 손을 떠난 것은 순식간.
―쐐액!
불꽃은 인식할 수 없을 속도로 쏘아져 드래곤의 날개를 꿰뚫었다.
―콰과광!!
청명한 하늘에 난데없는 대폭발이 일었다. 숲을 통째로 집어삼킬 정도의 위력. 조금만 스쳐도 닿는 만물을 무로 되돌릴 정화의 불꽃이다.
저것이 지상으로 쏘아졌다면 분명 작은 국가 하나는 사라졌으리라. 시트리는 7위계 마법의 위력을 똑똑히 목격한 충격에 침을 꿀꺽 삼켰다.
홱, 군주가 주먹을 쥔다. 그러자 불꽃은 한데 모여 사라졌다. 하늘은 언제 그런 소란이 있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이 대륙의 존망이 저 손짓 하나에 달려 있다는 착각이 인다.
한쪽 날개에 구멍이 뚫린 드래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그 눈에 공포가 깃든다.
마물은 목숨을 보전하기를 선택했다. 던전을 뒤로하고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이끌며 멀어져 갔다.
시트리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군주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여전히 위엄을 잃지 않은 채로, 다만 평소처럼 온화한 말투로 돌아온 그가 물었다.
"부상은 없는가, 시트리."
***
"긴급한 소식입니다."
남서부 황실령에 머물며 개간 사업을 착실히 진행하던 니클라스 2황자는 경비대의 다급한 보고를 받았다.
"죽음의 숲에 드래곤이 나타났습니다."
"드래곤이라니?"
니클라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던전 브레이크는 헛소리로 취급하고 사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 영지에 지을 건물 자재 반입도 끝났고, 섭외한 용병들로 숲의 마물 토벌도 막 시작한 참이었다.
여태 투자한 돈이 얼만데, 이 시점에서 무슨 날벼락 맞을 소리인가.
"확실한가? 드래곤이라니, 그 던전에서 출현한 건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색으로 보아 암흑룡이었습니다. 금방 사라졌습니다."
"…그럼 문제는 없지 않나? 우연히 근처를 지났을 수도 있고."
당연히 큰 문제다. 하지만 사업을 무산시킬 수 없던 니클라스는 현실을 외면했다.
"그게, 숲 쪽에서 쏘아진 마법을 맞고 치명상을 입어 퇴각했습니다."
"…뭐라고?"
더 안 좋은 소식이었다. 드래곤만 나타나도 대형 사고인데, 그 재해급 마물을 일격에 쫓아낸 존재가 숲에 있다니?
"누님, 혹시 누님이 하셨어?"
어떻게든 희망을 찾는 니클라스의 질문에 율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암흑룡을 피해 입힐 정도면 적어도 6위계 이상의 마법이야. 내가 그런 걸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6위계? 하하, 또 헛것을 본 게 분명하군. 재해급 마물에, 그런 경지에 도달한 마법사가 하필 이 땅에 있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일간에는 숲에 정체를 숨긴 현자가 살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의 심기를 건드리면 천벌을 받는 게 아닐지…"
조용해진 집무실. 니클라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냐, 설마 진짜 현자가 있으리라고. 뭐 하러 이런 외진 곳에서 살겠어. 하하, 하…. …아니지? 진짜면 나 큰일 난다."
율리안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감은 지금껏 틀린 적이 없었다. 아인이 궁을 떠날 때 들었던 불길한 예감도 지금 결과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여기 있을 게 분명한데, 미치겠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그 소환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빈손으로 돌아가기에는 도무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니클라스의 사업은 벌써 관심을 떠났다. 아인을 찾으면 한시라도 빨리 영지를 떠야겠다고 다짐한 율리안이었다.
***
한편, 죽음의 숲에서 암흑룡이 퇴각한 소식은 다른 장소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지하,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거대한 공동. 사방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암석밖에 없는 장소.
던전이다.
그곳에 전신을 값비싼 아티팩트로 주렁주렁 치장한 마족 모험가 파티가 하나.
아니, 지금은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파티원은 모두 처참한 꼴이 되어 사망했다.
"자, 자비를…!"
마지막 남은 파티장은 피 칠갑이 된 채로 목숨을 구걸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선 거대한 거인의 악령은 공격을 멈출 기색이 없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S랭크 모험가인 내가, 겨우 입구에서…!"
이 던전의 위험함은 알고 있었다. 20년 전에 마계에 탄생해 점점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재해급 던전.
7번 뿌리 '차카브'의 영광스러운 정점을 차지한 던전. 모든 망자가 모이는 장소. 통칭 '영계'.
토벌한다면 마왕의 좌와 끝없는 부귀영화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 달콤한 유혹에 빠져 지금까지 스러진 자들이 몇이나 될 것인가.
파티장은 자신만은 다를 줄 알았다. 자신은 던전 공략에 성공하리라고.
그것이 덧없는 환상과 꿈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죽음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사, 살려…!"
콰아앙!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영혼의 주먹이 떨어진다. 곧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자리에는 한 명의 여성만이 서 있었다.
날파리를 향해 손가락을 튕기는 정도의 노력으로 S랭크 파티를 순식간에 전멸시킨 그녀는, 흥미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거대한 공동의 중앙. 조금은 쓸쓸하게 덩그러니 놓인 옥좌.
발밑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영혼들에게 줄 안식은 없다는 듯, 화려한 은발을 뽐내는 여성이 다리를 꼬며 그에 앉았다.
다만 길이는 조금 짧았기에, 위엄을 표출하기에는 부족했지만.
"마왕님."
그런 그녀에게 데스나이트 제너럴이 다가와 예를 표하고는 보고를 올렸다.
보고를 들은 마왕이 미간을 찡그렸다.
"다시 한번 말해 보겠어?"
날카로운 에메랄드빛 눈빛이 쏘아진다. 그녀의 머리 위에 둥둥 뜬 헤일로도 성질을 부리듯 모양이 날카로워졌다.
"짐의 용 군단 정찰병이 불의의 적을 만나 패퇴하였다. 겨우 그런 보고를 올리기 위해 짐의 시간을 빼앗았다 이 말이야?"
그녀의 앞에 무릎 꿇은 스켈레톤 부관이 고개를 숙였다.
"짐이 항상 뭐라고 했지."
또각, 가볍게 다리를 풀며 일어난 그녀가 말했다.
"짐에게 허락된 소식은 승리와 죽음뿐이라고."
10대 옥좌 중 7좌에 앉은 마왕.
마계의 일곱 번째 뿌리, 그에 소속된 모든 던전을 총괄하는 영계의 군주.
마왕 세라펠은 불쾌함을 표출하며 부관에게 물었다.
"그래, 정찰 지역이 어디라고?"
"13번 던전입니다."
"…13번이라."
그 이름을 들은 세라펠의 눈에 회한이 깃들었다.
지금은 13번이라는 단순한 번호로 전락한 최하급 던전. 그녀가 그곳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세라펠이 마왕의 좌에 오른 것은 10년 전.
20년 전에 그녀의 칭호는 영웅에 불과했다.
지금이야 조금 세력을 키운 어중이떠중이들도 옥좌에 올라있지만, 당시 마왕이라는 칭호는 오직 그녀의 군주 한 명을 위한 것이었다.
절대자, 정점이자 최흉.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일조차 불경인.
13번 던전은 한때 그녀의 집이자 고향이었다. 이제는 주인을 잃고 몰락하여 소멸할 일만 남았지만. 자신 뿌리 휘하에 두고 1년에 한 번 정찰을 보내는 정도로 관리만 하고 있었다.
"정찰병의 보고로는 던전이 새 군주를 맞았다고 합니다만…"
콰앙!
세라펠이 격한 분노와 함께 마력을 폭발시켰다. 부관은 긴장하며 더욱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새 군주라고?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온 놈이야. 그 땅의 역사도 모르고 감히."
그녀의 눈에서 녹색 마력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13번 던전을 점령한 행위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이 없었다.
허나 곧 그녀가 다른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생긋 입꼬리를 올렸다. 악마 같은 미소였다.
"본디 그 던전은 출입조차 불가능한 위대한 분의 영역이었어. 그런 던전에 주인으로 인정받은 데다, 짐의 암흑룡을 쫓아낼 정도의 능력은 갖추었겠다?"
털썩, 다시 옥좌에 앉은 세라펠이 다리를 반대로 꼬며 톡톡, 손잡이를 두드렸다.
"흥미가 생겼어. 직접 살펴보겠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녀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마왕회의를 소집해. 어디 그 예절도 모르는 군주의 상판떼기를 직접 보자고."
***
"휴우, 갔나?"
하늘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이제 드래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려고 입을 열었을 땐 진짜 큰일 났다 싶었는데, 다행히 어떻게 마법이 나가서 쫓아낼 수 있었다.
"어떻게 한숨 돌리긴 했다."
시선을 돌리니 엉망이 된 밀밭이 보였다.
뜯어먹힌 밀을 보니 다시 열이 받는 기분이었다. 무슨 드래곤이 밀을 먹어. 쟤네 육식 아니었어?
"아깝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오히려 드래곤이 습격했는데 이 정도 피해로 끝난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밭이야 다시 복구하면 되니까. 다친 애들도 없고 건물도 멀쩡하니 불행 중 다행으로 알자.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게 결계라도 켜 놔야겠다."
밭은 외부와 이어진 구간이라 조금 불안하긴 했었지. 시설에는 어느 정도 침입자를 방어할 수 있는 결계가 있다. 유지에 마력이 소모되어서 지금까지는 꺼두고 있었다.
나는 밭 시설 관리에서 [결계 활성화]를 터치했다. 이것도 드래곤을 막을 순 없지만 적어도 침입은 바로 알 수 있게 된다.
그나저나 드래곤이 어디서 튀어나왔지? 용족은 마계 깊숙한 장소에서나 나타나는 고레벨 마물이라 여기서는 볼 일이 없어야 할 텐데.
: 튜토리얼 퀘스트 [고위계 마법 사용]을 완료했습니다. (8/10)
: ☆☆☆ 확정 소환권이 지급되었습니다.
"오, 3성!"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퀘스트가 완료되어서 3성 확정 소환권이 들어왔다.
꼭 갖고 싶었던 보상이다. 여기선 기물이 꼭 나왔으면 좋겠다.
물론 영웅이면 더 좋다. 시트리와 오랜만에 만나니 반가웠기도 했고, 내 옛날 던전 얘기로 즐겁게 대화도 나눌 수 있었으니까.
한참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때 있었던 영웅들을 한 번씩 다 만나보고는 싶다.
그리고 지금 내 유일한 영웅인 시트리는 어째서인지 또 무릎을 꿇고 사극을 찍고 있었다.
"소인, 다시 한번 군주님의 위대한 힘과 끝을 알 수 없는 지혜에 탄복하였사옵니다."
"왜 또 그래."
"기적이라 불리는 7위계 마법을 그저 과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긴박한 상황에도 후일을 생각해 전략적으로 절제하시는 모습까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응?"
과도한 시트리의 반응에 내가 벙쪄 있으니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다.
"암흑룡은 분명 용군단 소속, 어느 마왕의 수하이겠지요. 물론 저쪽이 선제공격을 해 왔습니다만, 그를 토벌했다간 주인인 마왕과 시비가 붙어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에요. 군주님께서는 그 가능성까지 예상하여 배상을 받기 위해 살려 돌려보내신 것이지요."
흠….
잘은 몰라도 그렇게 됐구나.
"그 드래곤이 우리 집에 왜 왔을까?"
"정찰병이 아니었을까요? 군주님의 던전이 소속된 뿌리를 통치하는 마왕이 관리차 보내지 않았을지요."
그러고 보면 모든 던전은 열 개의 소속 중 하나로 편성된다고 했었나.
위치는 따로따로여도 던전끼리는 이어진 보이지 않는 지맥 같은 게 있다는 모양이다.
"쉽게 말하면 그 마왕이라는 친구가 아파트단지 관리인이라는 소리지."
: 튜토리얼 퀘스트 [마왕 알현]이 진행 중입니다. (9/10)
: 보상 : 혼돈석 40개
: 메인 시나리오가 곧 시작됩니다!
뭐, 어떻게 보면 건물에 입주하고 관리인과 계약서를 안 적은 나도 반쯤은 책임이 있네.
어차피 한 번은 만나봐야 하는 친구다.
먼저 우리 집에 민폐를 끼친 건 저쪽이니까.
"반상회 열리면 관리비 깎아 달라고 해야겠다."
13화. 마왕 회의 (1)
던전의 구조에 관해서.
내 던전은 기본적으로 지하에 지어진 구조다. 화강암 베이스의 동굴이고, 지금은 지하 1층부터 지하 3층까지 있다.
각 층은 커다란 메인 계단으로 이어지는데, 꽤 찾기 어렵게 숨겨져 있어 침입자들은 한참을 탐색해야만 다음 층으로 내려올 수 있다.
그런데, 나까지 그 메인 계단으로 다니면 동선이 너무 길어서 불편하잖아?
그렇다고 통짜형 비상계단을 두면 침입자에게 발견됐을 때 한 번에 침략을 허용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건 없다.
던전의 레벨이 오르면 증축을 하게 되는데, 지금 3층인 내 방은 그만큼 지하로 더 내려가게 된다. 만약 10층이 됐다고 치자. 바깥으로 나가려면 10층을 일일이 걸어 올라가야 할까?
대부분의 일상적인 문제는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원리를 설명하자면 공식만 몇 페이지를 적어야 하고 나도 전부 이해하는 건 아니다.
스마트폰도 프로그램을 짤 줄 알아야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던전에는 몇 개의 소위 엘리베이터, '포탈'이 있다. 하나는 군주인 내 전용으로, 최하층 알현실에서 어디든 갈 수 있는 물건이다.
입구에도 연결되어 있다. 던전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나를 바로 알현실로 보내준 포탈이다. 외출을 할 때도 애용한다.
다른 하나는 영웅들 전용. 최하층 이외의 전층을 돌아다닐 수 있고, 최하층은 내 허가가 있어야 올 수 있다.
그 외의 마물들은 도보다. 마멋들은 굴을 잘 파고 다녀서 자기들만의 작은 통로가 있기에 여기저기 잘 돌아다닌다.
조금 특수한 하나가 있는데, 바로 지상 1층의 '외부인용'이다. 출입구 밖, 재단 옆에 있는 물건으로 얼핏 보면 장식 같아서 지나치기 쉽다.
모든 던전은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어도 개념이랄까 혼이랄까, 나무의 뿌리 같은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다. 같은 뿌리끼리는 이 외부인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오고 갈 수 있다.
지금까지는 쓸 일이 없었던 그 외부인용 포탈에.
"…군주께서 일면을 요청하셨습니다."
시꺼먼 망토를 휘날리며 새끈한 갑옷을 자랑하는 데스나이트가 한 명, 화려한 깃발을 메고 내게 예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 던전이 7번 뿌리라고 했던가?"
"네, 차카브라는 이름이에요. 이 데스나이트는 차카브를 총괄하는 1번 던전, '게헤놈'에서 온 사신이랍니다."
정확하게는 아니어도 기억이 스멀스멀 났다. 내가 옛날에 마왕 칭호를 달성했을 때도 소속 뿌리 동맹을 위해 출정했던 때가 많았다.
"음… 1번 던전의 군주님이면 좀 강하시지?"
"마왕이십니다. 군주님의 존함은 하라브·세라펠. 위대한 혼의 주인이십니다."
"아하, 아파트 관리인!"
전에 밀밭을 먹어 치운 그 암흑룡의 주인이다.
'잠깐, 마왕 세라펠이라면.'
전생에서 본 기억이 있다. 으음, 분명 유출된 던전 빌더즈 : 리다이브 시나리오의 주역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텍스트만 적혀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내가 아는 제국의 역사가 그 유출본과 똑같다는 점을 감안하면.
'같은 사람임이 분명하겠지.'
대륙의 명운을 결정할 대전쟁, '성전' 이후 인간계와 마계는 20년 간 평화로웠다.
그 평화를 깨트린 두 주역이 분명 제국의 새 황제 폭군 율리안과 마왕 세라펠이었다.
기억을 최근에 되찾아서 그런가, 20년도 더 된 기억이 아니라 마치 엊그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꼭 이 나잇대의 내가 동시에 두 명 머릿속에 있는 느낌이랄까.
"용건이 뭐라셔?"
"그것이… 본래 새로이 취임한 던전 군주는 해당 뿌리의 마왕에게 자격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아파트 반상회에 나오라는 얘기 같다.
이야기를 들은 시트리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무엄하구나. 지금 감히 내 군주께 감히 복종을 요구하였느냐? 상응하는 각오는 되어있겠지."
스릉, 시트리가 냅다 검을 뽑아 들었다.
"윽…!"
데스나이트도 그에 지지 않고 발검해 전투태세를 취했다. 어째 아까부터 긴장한 기색이더니 시트리를 보고 한계에 달했다.
"에이,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지 말자. 둘 다 검 내려. 그러다 다친다."
"아앗, 죄송해요, 군주님."
시트리가 내 뜻을 바로 알아줬다. 앞마당에서 전쟁은 절대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데스나이트는 잔뜩 겁먹은 채로 천천히 걸음을 물러섰다.
"검은 친구, 금방 준비하고 올 테니 기다려."
데스나이트를 대기시키고 시트리와 함께 3층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군주님께 민폐를 끼쳐 버렸어요. 수습할 기회를 주신다면…."
"괜찮아. 너무 쉽게 보여도 안 되니까. 어차피 잘 됐어. 먼저 공격받은 건 우리니까 얕보이면 안 되지."
"베풀어주신 자비에 감사드려요. 그런데, 음… 어차피 군주님께서 직접 나서신다면 얕볼 이가 천지 어디에 있을까요."
"나를? 겉보기에는 평범하잖아."
"군주님께서요? 후후, 겸손함이 지나치시네요."
가벼운 웃음을 흘리는 시트리. 그녀가 농담을 하는 성격은 아니다.
상태창의 스킬을 하나 확인해 본다.
[카리스마] Lv.10
: 당신은 최강의 던전을 지어 정점에 도달했던 존재입니다. 그에 걸맞은 말투와 행동을 상시로 보이게 됩니다.
'이 패시브 스킬이 있었지.'
본래는 전생에 계정에서 가지고 있던 스킬인데, 던전에 돌아오며 활성화됐다.
목소리가 굵어 보이기라도 하려나.
뭐, 그 마왕이라는 친구에게 통할진 모르겠지만 관리비 협상을 하러 가는 자리니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일단은 이웃이니까 친하게 지내야겠지. 떡은 없으니까 다른 선물이라도 가져가자."
나는 콜라를 박스 채로 들었다. 시트리는 두 개를 너끈히 들었다.
"군주님,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정체는 숨기시는 게 어떠실지요."
"그래? 왜?"
"군주님의 던전은 이전부터 기묘한 전설이 돌아 노리는 이가 많았어요. 다만 단단한 결계에 의해 군주의 자리를 노리는 이는 출입할 수 없었지요. 오히려 격이 낮은 하급 마물이나 수준 낮은 인간들은 들어올 수 있었나 본데요…."
시트리가 내게 경고를 전해줬다.
"행여 군주님께서 돌아오셨다고 알게 되면 주제를 모르고 공격해 올 적들이 있을 게 분명해요."
"일리 있는 말이네."
괜히 내가 과거의 그 마왕이라고 오해를 사면 뜯어먹을 게 있어 보이겠지. 지금은 환생했을 뿐인 소시민이니까 문제에 휘말려도 곤란한다.
어차피 평생 살 집이고, 집값을 올리는 건 나중에 대출이 필요해졌을 때나 하면 된다. 그때까지는 저평가받는 게 세금도 덜 내고 오히려 좋다.
"좋은 게 있어."
최근 무료 단차에서 나온 장비가 있었다.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하나 꺼냈다.
[위장용 인형 탈] ☆☆
: 전단지를 나눠줄 일이 있으면 이 탈을 쓰세요. 가족도 못 알아본답니다.
인형 탈을 머리에 쓰고 시트리를 돌아보았다.
"어때?"
시트리가 깜짝 놀라며 눈을 꿈뻑였다.
"쓰시는걸 보지 않았다면 못 알아봤겠는걸요. 커다란 마멋… '마멋 로드'처럼 보이네요. 인식 조작 능력이 있는 아이템인가 봐요."
"그래? 효과 확실하네. 출발하자."
지상으로 돌아가니 데스나이트가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군주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나야, 나. 내가 원래 마멋이거든. 지금까지 변장하고 있었어."
"변장… 이셨습니까?"
"그래. 던전 군주가 마멋이라고 하면 좀 창피하잖아. 마왕님 앞에서야 본모습을 보여 드려야지."
"마멋 로드가 드물긴 하지요. 알겠습니다."
다행히 데스나이트는 큰 의심을 품지 않았다. 사절치고 긴장한 기색도 그렇고, 순진한 친구라 다행이다.
그가 엘리베이터 발판 위에 올라서서는 스크롤을 찢었다. 포탈이 열리고 나는 안내를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
어느 인간계 국가도 쫓아올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고 미려하게 솟은 첨탑.
창밖으로는 넓디넓은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빽빽이 들어선 건물, 높은 장벽은 개미 한 마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는다.
어느 건물도 흉악하고 뾰족한 뿔을 옥상에 장식했다. 동시에 세련된 모던한 디자인. 마도공학으로 작동하는 불빛이 마치 네온사인처럼 번쩍인다.
흔히 번화한 마계 영지의 풍경이다.
"방문할 때마다 마왕님의 영토는 감탄밖에 나오질 않는군요."
정장을 입고 얼굴에는 가면을 쓴 마족들이 점잖게 와인잔을 들고는 사담을 나눈다. 그들의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며 따라다니는 헤일로는 각 뿌리를 통치하는 마왕의 상징이다.
"인상적이었다니 영광입니다. 최근 확장공사가 있었지요. 서부에 악마 거주구를 신설했습니다."
"공허 악마들은 계약을 까다롭게 하기로 유명한데, 수완이 대단하시군요."
"군단장과 1세기에 8할 금리로 체결했습니다."
"1세기채면 꽤 짧군요."
"리스크는 높지만 그만큼 던전도 강화됐으니 이익입니다. 이 도시 전체가 제 던전 그 자체이지요."
"하하하, 놀랍군요. 마왕님의 도시기획을 베끼고 싶을 정도입니다."
도시의 주인, 마왕 골라카브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는 이 지상형 던전 옥스를 훌륭하게 키워내 5번 뿌리의 톱에 올랐다.
오늘처럼 모일 일이 있을 때마다 다른 마왕들도 기가 막히게 지어진 자신의 던전을 부러워한다.
던전은 자치구로, 그 외의 영지는 국가로서 운영한다. 골라카브는 이미 황제나 다름이 없었다.
'언젠가는 더 위쪽 자리로도 올라갈 수 있겠지.'
마침 정점의 좌는 20년 전부터 공석이다. 소문에 의하면 10좌는 무언가가 다르다고 했다. 소속된 던전뿐만 아니라 마계의 모든 던전, 영지를 모두 휘어잡을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했던가.
그는 야망가였다. 시선을 가로막는 천장이 있다면 올라서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 회의는 주제가 무엇이었죠?"
"세라펠 마왕님께서 소집을 요청하셨죠. 본래 지하에서 잘 나오지 않는 분이시건만."
세라펠. 그 이름을 듣고 골라카브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서 굴러먹던 여자인지 몰라도 단숨에 7좌를 차지한 마왕이다. 자신보다 무려 두 개나 자리가 높다.
'모든 마왕의 권한이 동등하다고는 해도.'
높은 좌의 마왕이 경지 또한 높은 건 당연하다. 골라카브는 7좌를 뺏기 위해 그녀에게 일기토를 신청한 적이 있었다.
이빨이 전부 깨지고 바닥에 처박히는 데는 채 3초가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신사적인 예의범절이 중요한 마계라고 해도 그 근본에는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이 있다.
'강자가 진리다.'
힘이 강한 자가 모든 걸 갖는다. 이 세상이 탄생했을 때부터 당연한 상식이었다.
자신의 영지에서 마왕 회의를 하겠다는 세라펠의 일방적인 요청도 거부할 수가 없다. 골라카브는 기대하던 마상시합 구경도 취소하고 이 자리를 마련했다.
'별거 아닌 주제이기만 해 봐라.'
온갖 망신을 줘서 다시 지하에 처박아 주지. 망자만 가지고 노는 음침한 여자 같으니.
"세라펠 마왕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부관이 소식을 전하고 곧 그녀가 입장했다. 동시에 여태 화기애애하게 잡담을 떨던 마왕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150센티 정도 되는 조금은 작은 신체지만 풍겨 오는 위압감은 어느 거인보다도 강대하다. 또각, 또각. 넓은 홀에 울리는 힐 소리가 마치 죽음으로의 카운트다운 같다.
얼굴에는 여타 마왕과 다를 바 없이 가면을 썼다. 마왕은 늘 목숨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신분을 숨기는 건 필수적이다.
당연하다는 듯 상석에 앉은 세라펠은, 다리를 꼬고 날카로운 눈매를 흘겼다.
"뭐해? 너희들 시간 많아?"
마왕들이 하나둘 테이블에 앉기 시작했다. 화합의 장은 사라지고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네 명. 나름 많이 나왔네."
현재 마왕의 숫자는 여덟 명이다. 출석률은 5할이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이 정도면 높은 편이었다.
'이러려고 나를 이용했겠지.'
그나마 마왕 중에서 골라카브가 인맥을 관리하는 편이었다. 나머지는 서로에게 관심도 없다. 참가율을 높이려고 세라펠은 굳이 자신의 안방을 회의 장소로 잡았으리라.
"세라펠님."
골라카브가 진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긴급히 소집하신 회의인 만큼, 마계에 큰 영향을 끼칠 중요한 주제라 사료됩니다만. 어떤 안건이신지요."
"그분의 던전에 새 군주가 취임했어."
"그분이라 하시면…?"
"설마, 전대 10좌 군주님의?"
"대사건 아닙니까! 그 던전에 출입할 수 있는 군주가 지난 20년간 있었습니까?"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떤 인물입니까?"
"내 암흑룡을 일격에 겁에 질리게 할 마법을 쓸 실력은 돼. 지금부터 알아보려고 여기로 불렀어."
"여, 여기로 말입니까?"
골라카브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만한 실력을 가진 데다 최흉의 던전에 인정받은 군주다.
얼굴도 모르는 불한당을 내 안방으로 불러? 부를 거면 네 던전으로 부르든가.
정신 나간 미친놈이라 여기서 마법을 난사하면 어쩌려고. 암흑룡이 겁을 먹을 정도면 최소 6위계는 썼단 소리 아닌가.
"차카브 13번 던전의 군주가 도착했습니다."
"잠, 잠깐!"
부관의 보고에 골라카브가 당황했다. 하지만 저지할 새도 없이 세라펠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들어오라고 해."
세라펠을 제외한 세 명의 마왕은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회의장에 들어찬 부관과 호위들도 허리를 곧추세웠다.
뚜벅, 뚜벅. 한 남자가 걸어 들어온다.
그의 모습을 본 마왕들은 곧 허탈한 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벌써 그를 비웃는 태도를 보이는 자도 있었다.
들어온 이의 종족은 마멋이었다. 인간형. 로드까지 진화한 상위종족이지만 결국은 한낱 마멋이다. 기대만큼 대단한 인물은 아닐 게 분명했다.
세라펠 역시 피식 웃으며 위엄과는 거리가 먼 귀여운 얼굴을 한 마멋 로드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가 위대한 이의 던전을 차지한 건 사고가 틀림없으리라. 암흑룡이 도망쳐온 것도 뭔가를 착각했음이 틀림없고.
그들 앞에 선 마멋, 정확히는 마멋의 탈을 써서 위장한 아인은 바짝 쫄아 버렸다.
'수많은 던전의 관리인이니까 대지주일 텐데,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모여 있네.'
회의장도 무지막지하게 넓으니 부자들이 틀림없었다.
'아니, 3성 기물이 이렇게 많아? 데스나이트는 양반이었네. 무슨 리치에 오크 로드에… 마왕이 괜히 마왕이 아니구나.'
전생에도 던전과 마왕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던 아인이었기에 조금은 편하게 생각했다. 던전군주를 아파트 입주자로, 마왕은 일대 지주 정도로. 오늘도 이웃집에 떡 돌릴 정도로 마실 나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계 역시 인간계만큼이나 거대한 영토와 인구수를 자랑하는 지역이라고 생각하면, 그의 인식은 조금 더 개선될 필요가 있었다.
평생 제국에만 갇혀 있었고, 마계의 설정은 전생에서 글자로 읽은 게 전부인 아인이었다.
지금 그는 따지자면 제국의 황제와 왕국의 국왕, 성국의 교황이 모인 자리에 서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오, 저 조명은 좀 이쁜걸.'
하지만 시선이 천장에 닿자 긴장은 단숨에 사라졌다. 아인의 관심은 순식간에 깔끔한 회의장의 인테리어에 쏠려 버렸다.
어떻게 하면 내 방도 이렇게 꾸밀 수 있을까, 고민에 빠진 아인이었다.
그런 그의 속내를 알 길이 없는 마왕 세라펠이 마멋의 탈을 쓴 아인을 보며 조소했다.
저 어리버리한 태도를 보니 역시 보잘것없는 자다. 오히려 경지가 낮아 13번 던전에 들어갈 수 있었겠지.
세라펠은 그를 당장에라도 쫓아낼 셈으로 말을 걸었다.
"네놈이 13번 던전의 주인이더냐?"
그리고.
그 귀염뽀짝한 마멋이 입을 여는 순간 모든 것은 바뀌었다.
"―그렇다."
―쿠웅!
그의 음색에서 뿜어지는 패기가 회장의 모든 이를 무겁게 짓누른다.
절대적인 압도에는 대단한 마법이나 검술도 필요 없이, 단 한 마디면 충분했다.
마멋은 까딱.
이 자리의 최고 상급자인 7좌의 마왕, 세라펠 앞에서 주눅 드는 기색도 하나 없이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그대가 관리인인가?"
절대자인 마왕을 그리 불렀다.
세라펠이 씨익, 입꼬리를 올린다.
'…내가 괴물들을 집안에 들였군.'
골라카브는 이 상황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둔 과거의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14화. 마왕 회의 (2)
회의장에는 긴장감이 짙게 내려앉았다.
목소리가 울릴 정도로 회장의 천장은 높고 면적은 넓다. 그 외곽을 빽빽이 메운 부관과 호위들. 데스나이트부터 고위 악마, 오크와 언데드 로드, 리치등 종족도 직업도 다양하다.
모두 테이블에 앉은 네 명의 통치자, 마왕의 수하다.
오늘 의제의 주인공은 그런 절대권력을 가진 강자들 앞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어떤 마계의 주민도 그 자리에 서면 당장에라도 혼절할 것이 분명하거늘.
오히려 자신들을 제압할 정도의 패기를 내뿜는 이가 겨우 마멋이라는 사실이, 마왕 골라카브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전대 네헤모트의 던전에 취임한 새 군주.'
'우연은 아니었다…는 뜻이겠군.'
마왕들이 긴장하며 그의 기색을 살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발언권을 가진 자는 그들 중 가장 높은 좌에 앉아있는 마왕 세라펠뿐이었다.
"지금 짐을 관리인이라 칭하였는가?"
"틀림없는 모양이로군."
마멋 로드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훑는다. 꿀꺽, 골라카브가 침을 삼켰다.
뚜벅, 뚜벅. 마멋 로드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지배자에 어울리는 기품 있는 발걸음이었다.
마치 태생이 지배자인 것 같은 움직임. 마멋으로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품새다. 대체 출신이 어디란 말인가? 마왕들은 점점 눈앞의 인물이 궁금해졌다.
"깔끔한 군주전이로군."
그가 입 밖으로 낸 감상에 골라카브가 눈매를 찌푸렸다.
지금 감히 내 던전을 평가한 것인가?
"허나 지상형, 상공에서의 공격에 무력하다. 결계는 동위계의 공격마법에 돌파당하는 법이지."
"말을 아끼게나, 마멋."
결국 참지 못한 골라카브가 점잖게 그에게 경고했다. 반면 세라펠은 그 군주의 태도가 재미있어서 참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커다란 마멋아, 마법에 조예가 있는 모양이구나."
"사실이다."
"내 암흑룡을 일격에 토벌한 것도 네놈이렷다?"
"그 역시 사실이라 한다면?"
그의 대답에 마왕들이 긴장했다.
지금 그는 인정했다. 자신이 6위계 이상의 경지에 이른 강력한 마법사임을.
본래 마법사는 자신의 마법을 결코 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전공 계열이 무엇인지는 물론이고, 도달한 경지, 개발한 고유 마법도 전부 비밀이다.
수식이 파헤쳐지고 약점을 찔린 순간 마법사의 생명은 끝난다. 보일 일이 없다면 무덤 끝까지 성과를 가져가는 게 마법사라는 이들이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덤빌 테면 얼마든지 덤벼 보라는 자신만만한 태도다. 어지간한 경지에 오른 자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7위계의 현자… 아니, 어쩌면 초월자인가?'
기습이라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7위계를 난사할 정도의 실력자라면.
단어 선택 하나하나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전쟁이라도 벌어지는 순간 파멸은 확정이었다.
오해가 깊어지는 와중, 아인은 회의장을 여기저기 둘러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우와, 저기는 듀라한도 있다. 나도 언젠가 뽑고 싶네. 마계 건축 유행이 많이 바뀌었구나. 굉장히 현대적이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가 전쟁을 대비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아인은 마음에 드는 인테리어를 머릿속에 집어넣기 바빴다. 돌아가면 자신의 던전도 참고해서 꾸밀 생각이었다.
아까 있었던 대화는 카리스마 스킬에 의해 약간의 왜곡이 있었다.
―와, 이 던전은 되게 공들여 지으셨군요.
―방어력은 어떻습니까? 저도 전에 보스룸을 지상에 지은 적이 있었는데, 결계가 금방 깨지지 뭡니까, 하하하.
―마법 말입니까? 아이구, 그냥 쪼끔 씁니다.
아인은 분명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이웃집 주민끼리 넉살 좋게 교류하는 기분으로 최대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
카리스마 스킬은 패시브라 해제될 리도 없었기에 이 분위기의 간극이 좁혀질 리도 없었다.
'좀 딱딱한 분들이네. 하긴 마왕이라고 했으니 예의를 지키는 것 같기도 하고.'
나름 황녀를 모시던 짬밥이 있던 아인이었기에 사교계의 말투는 쓸 줄 알았다.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달이 안 되는 게 문제였지만.
"내 영역에 침입자를 보낸 건 그대인가?"
마멋 로드가 세라펠에게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질문했다.
이 당돌한 녀석 보게. 벌써 전설로 남은 그 던전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선포했다.
"그랬다면 어쩌려고? 애초에, 그 던전이 어떤 장소인지나 알고 있어?"
"물론이다."
"알긴 뭘 알아. 수명도 짧은 마멋이 20년 전의 일을 알 리가 없지."
세라펠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곳은 성역이야. 지금 마계가 전성기를 맞은 게 어느 분의 은혜인지 알아? 그분이 안 계셨다면, 그 던전이 없었다면 너는 태어나지도 못했어!"
세라펠이 흥분하며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녀로서는 분노할 만도 했다. 세라펠은 20년 전, 최흉의 마왕 네헤모트에게 가장 충성하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는 인간으로서 첫 생애를 보냈다. 영웅이라 불리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한을 가진 영혼은 카발라에 초대받는다 한들 이승을 떠돌기 마련이다. 그녀는 어느 쪽도 가지 못하고 원념 가득한 혼들의 세상을 한참이나 방황했다.
멈춰버린 심장에 한을 맺은 채 얼마나 영계를 떠돌았을까, 위대한 군주는 그녀를 소환하여 두 번째 삶을 부여해 주었다.
이번에야말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영웅으로서의 삶을.
"그 던전을 멋대로 쓰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 이방인아. 네놈 따위가 군주로 있어 봐야 과거의 명성은 바랠 뿐이고, 역사를 욕보이는 일이 될 테지."
"용납하지 않는다 함은?"
"퇴거해. 불응하면 전쟁뿐이야."
마멋은 슥, 턱을 쓰다듬고는 대답했다.
"관리인이여, 그대의 걱정은 던전의 명성이 바래는 일인가?"
"그래. 당연하지만 그분의 전성기만큼 던전의 발전은 불가능…."
"하면 되지 않겠나."
너무나도 쉽게, 그가 목표를 입에 담는다.
"…뭐라고?"
"이루겠다 하였다. 선언하건대, 지금 이 던전은 내 것이다. 품격이 떨어지는 일은."
쿵, 그가 위엄있게 발걸음을 내디디니 다시금 패기가 쏟아졌다.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그의 선언을 들은 세라펠이 눈을 부라렸다.
그의 진의를 꿰뚫어 보고자 눈동자에 마력을 담는다.
―아, 집값이요. 물론 떨어지면 안 되지요. 걱정 마십시오. 벽지는 깨끗하게 다시 도배할 겁니다. 단지에는 폐 끼치지 않을 겁니다.
자기 집이니 직접 관리하겠다는 당연한 아인의 대답이었지만, 세라펠이 받아들인 의미는 조금 달랐다.
'지금 이 남자는.'
도전하겠다 선언한 것인가.
마왕 네헤모트의 좌에.
"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비범한 자로 보이긴 해도 세상에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 있는 법이거늘.
"무엄한 자로군."
"주제도 모르고…."
마왕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동의하며 세라펠이 즉시 그의 목을 칠까 생각한 때였다.
"그대가 내 침소를 먼저 공격하였으나, 동맹의 징표다. 선물을 주도록 하지."
마멋 로드가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호위기사가 짐을 들고 회장으로 걸어 나왔다.
뚜벅, 뚜벅.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커지자 마왕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리고.
"으음…?!"
가장 먼저 그녀를 알아본 건 2좌의 마왕이었다. 세간 소식에 민감한 그는 각종 현상수배나 유명한 영웅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저, 저거…! 아니, 저 기사는!"
"왜 그러십니까?"
"기사를 잘 좀 보시오!"
"서큐버스군요. 조금 특이하긴 한… 잠깐, 서큐버스 기사?"
1좌의 마왕도 무슨 의미인지 눈치챘다.
달그락, 달그락. 유리병이 여럿 든 나무 박스를 품에 들고 들어오는 마멋 로드의 부관.
붉은 머리칼과 한쪽뿐인 뿔, 은빛 갑주. 그 특이한 인상착의가 또 있을 리가 없었다.
"'혈기사'잖소…!"
"혈기사? 성국과 지저국의 전쟁을 끝낸 그 혈기사 말입니까? 명실상부한 영웅 아닙니까!"
골라카브도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마계의 어지간한 귀족들은 모를 리가 없는 사교계에서 유명한 이름이었다.
혈기사를 부하로 삼고 싶어 그녀에게 스카웃 제의를 날린 던전군주와 귀족은 수도 없이 있었다.
'지금껏 전부 거절당했다고 들었는데.'
난데없는 영웅의 출현에 가장 열 받은 건 골라카브였다. 그는 진즉 자신의 던전을 방어할 전력으로 혈기사를 스카웃한 적이 있었다.
돌아온 건 마력을 모두 빨린 채 동강 나서 발견된 사신의 싸늘한 시체였다.
지금껏 군주들 사이에서 혈기사는 결코 따올 수 없는 벼랑의 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간들에게 붙잡혀 유폐되었다고 들은 게 마지막이었다. 대체 어떻게 혈기사를 빼왔지?'
성국은 인간계에서 나름 강국으로 위세를 떨치는 국가다. 그곳의 통치자인 교황이 통솔하는 성기사와 사제 군대는 골라카브도 모두 막을 자신이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 혈기사를 대단한 방위 병력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호위기사로 계약해 부리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뭔가. 겨우 짐을 나르는 정도라면 다른 부관에게 시켜도 되잖는가.
굳이 영웅을 시켜 짐을 나르게 해 마왕들 앞에 내놓다니. 과시할 의도다.
이 마멋 로드, 정치력에 있어서도 풋내기가 아니었다.
골라카브가 이를 뿌득 갈았다. 예절이 중요한 마계 사회다. 자신은 무려 마왕이다. 신입 군주라 하면 마땅히 예의를 지켜야 하거늘.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 한들 이 무슨 자만인가.
"저희 군주님께서 드리는 입주 기념 선물입니다."
혈기사가 마왕들의 뒤를 돌며 탁, 탁, 병을 하나씩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뒤를 지나칠 때마다 마왕들은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마왕 세라펠의 앞에 병을 놓았을 때였다.
"너."
세라펠이 턱을 치켜 올리며 시트리를 불렀다.
"네, 마왕님."
"그 던전 출신이야?"
세라펠의 질문에 시트리가 단정하게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요."
가볍게 턱짓하는 세라펠. 그녀의 시선이 시트리의 검 손잡이 인장을 향했다.
"그거, 수작이잖아."
"알아보시는군요. 먼 옛날, 군주님께서 하사하셨던 소중한 비보랍니다."
검을 만지작거리며 회한에 젖은 듯한 시트리의 표정을 보고 세라펠도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 역시 최흉의 마왕에게 받았던 장비를 지금도 던전에 재보로 장식하고 있었다. 시트리의 수작을 뛰어넘는 명작이 무려 3정이나 있다. 침입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세라펠이 시트리에게 물었다.
"네 지금 군주는 섬길 만한 자이더냐."
시트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확신합니다."
세라펠은 그녀의 대답을 듣고는 다시 한번 마멋 로드를 돌아보았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지.'
세라펠이 테이블 위에 놓인 병에 손을 댔다. 방금 창고에서 꺼내온 듯 시원했다. 안에는 뽀글뽀글 기포가 터지는 검은 액체가 들어 있다.
'포션? 아냐, 마법이나 주술의 흔적은 없어.'
마왕들을 향해 여유롭게 양손을 펼치는 마멋. 마셔 보라는 뜻이다.
좋다, 어디 어떤 수준인지 직접 파악해 주지. 세라펠이 병에 든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뭐야, 맛있어!"
그녀가 찐목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15화. 마왕 회의 (3)
"뭐야, 이거?! 맛있잖아! 시원해!"
난생처음 느껴보는 상쾌함에 세라펠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음료, 이건 음료수였다. 그것도 완전히 처음 마셔 보는 맛이었다.
"에잇."
참지 못한 세라펠은 남은 음료도 단숨에 원샷을 때려 버렸다.
"대, 대체 이게 뭐길래?"
"우오옷, 이 맛은 대체?!"
1좌와 2좌의 마왕도 음료를 마시고 바로 황홀해했다. 5좌, 골라카브만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손을 부들댔다.
혈기사급의 부하를 자랑하며, 이만한 기술이 담긴 신문물을 선물로 준다.
골라카브도 5좌의 마왕에 오른 자다.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껏 마멋 로드가 보인 행동들에 담긴 정치적인 의미를 깨달았기에 더욱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아하하하!"
반면, 세라펠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마멋아, 최고의 공물이었다!"
그는 남자를 인정하기로 했다.
저만한 패기를 뿜으며 7위계 마법을 자랑하고, 10좌를 노린다는 야망을 숨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힘에 취한 단순한 정신병자는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분수를 똑똑히 아는 계략가였다.
이 음료는 공물이다. 본래 뿌리에 소속된 던전 군주들은 마왕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 그 비율은 5할이 넘을 때도 있다.
그는 선제공격을 빌미로, 이 음료를 세금으로 대신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해 온 것이다.
매력적인 공물이기에 거절할 이유도 없다. 그의 입장에서는 비용을 아꼈겠지. 동시에 지금은 자신이 세라펠의 밑이라고 인정하며 보호를 요청한다.
자신에게 능력이 있더라도 아직은 미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던전을 성장시키겠다는 목표가 결코 허황되지 않았음을 표현했다.
세라펠은 냉철한 열정가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마치 그분이 생각나는 것만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13번 던전의 군주여, 이름을 밝혀라."
"아인이다."
"아인, 그 13번 던전은 짐에게 있어서, 아니. 모든 군주들에게 있어 아주 큰 의미를 지닌 장소야. 그대가 그 군주를 맡을 자격이 있음은 인정하마. 허나."
사륵, 세라펠의 손에서 에메랄드빛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와야 함도 당연한 이치야. 아인, 5년의 기한을 주겠어. 그 안에 그대가 정말 그 던전을 전성기 시절의 그 모습, '최상급'을 뛰어넘은 '재앙급'으로 성장시킨다면."
세라펠이 슥, 손을 움직이니 진이 그려지고 주문이 발동된다.
"나는 마계를 정복해 그대에게 내가 가진 모든 걸 바치도록 하지. 그때, 그 시절처럼."
그녀의 선언을 본 다른 마왕들이 식겁했다.
"매, 맹약의 마법을…?!"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어길 수 없는 선언이잖습니까!"
다른 이들이 날뛰든 말든, 세라펠은 즐거워하며 입꼬리를 싱긋 올렸다.
"대신, 5년 안에 13번 던전이 재앙급에 도달하지 못했을 경우, 그대에게서 던전에 대한 전권을 회수하겠어. 이의는 없겠지."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는다.
세라펠이 한 말의 무게를 그 자리의 모두가 인지했다. 맹약은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그 어떤 마법이나 꼼수로도 어길 수 없다.
"서약한다면 마력을 불어넣어."
세라펠의 제안에 슥, 마멋 로드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거절한다."
"뭐, 뭐라고?"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회의장이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무려 7좌의 마왕이 모든 걸 거는 맹약이다. 다른 마왕들은 그 좋은 조건이라면 앞뒤 안 보고 계약했을 터.
"마멋아, 네가 지금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알고 있어?"
"물론이다."
아인의 생각은 확고했다.
'거 참 당돌한 친구야. 갑자기 세상을 준다니 뭐니 해도 말이지.'
자신의 집을 키우는 데만 관심이 있는 아인은 그런 조건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던전을 못 키워서 쫓겨나면 안 되지. 담보대출로 코인 투기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런 식으로는 집 안 날린다, 야.'
그렇다고 대놓고 부정하면 분위기가 안 좋아질 것 같았기에 속으로 생각을 삼킨 아인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디까지나 이웃들과 친목을 다지는 자리다. 괜한 분란은 피하고 싶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내 던전은 내 것이다.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는다."
"던전을 키울 자신은 있고?"
"물론이다."
요놈 봐라. 세라펠이 입꼬리를 올렸다.
"나, 차카브의 통치자이자 게헤놈의 주인. 7좌의 마왕 세라펠은 스스로에게 맹약하노니."
―화악!
에메랄드빛 마력이 돌풍이 되어 휘몰아친다.
"현 시점을 기준으로 5년 이내에 차카브 13번 던전이 재앙급으로 성장하지 못할 경우, 전력을 동원하여 소유권을 회수할 것을 선언한다."
철컹, 마법진이 세라펠의 심장으로 스며든다. 자신을 옭아매는 혼자만의 계약이다.
"위대한 현자, 델리파커스의 이름에 걸고."
마왕들이 갑작스레 진행된 사건을 따라가지 못해 식은땀을 흘렸다.
세라펠이 아인을 향해 실실댔다.
"이걸로 나는 네가 계약하든 말든 환수를 진행할 거야. 기정사실이야. 한 번 선언한 맹약은 나도 못 어겨. 상관은 없지? 던전을 재앙급까지 키우겠다고 자신만만했으니까."
아인은 제멋대로인 세라펠의 태도가 어이없긴 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달라진 건 없었다.
"물론이다."
"좋아. 그럼 성공했을 때의 맹약, 받아갈래?"
5년 안에 던전을 최고 등급까지 성장시킨다는 조건이다.
성공하면 어마어마한 보상이 주어진다. 무려 7좌의 마왕이 아인을 위해 마계의 모든 것을 정복해 넘긴다. 재보, 명예, 인력, 세상 그 자체이다.
실패하면 그 즉시 세라펠이 적이 된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했다.
'내 던전을 그동안 열심히 관리하긴 했나 보다. 애정이 깊은가 보네. 어차피 스스로 맹약도 걸었고, 안 받는 것보단 나으려나.'
아인은 판단을 내리고 시트리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에 문제가 없다는 확인이었다.
아인이 팔을 올려 푸른 마력을 흘려보냈다. 두 사람의 마력이 회오리치며 섞이고.
―번쩍!
"맹약은 완료됐어."
한창 소란이 벌어졌던 회의장이 잔잔해졌다.
하지만 평화는 짧았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쿵, 의자를 박차고 골라카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세라펠, 당신도 알고 계시겠지요. 그간 불경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어도, 13번 던전은 모든 군주들이 손에 넣고 싶어 하던 성역이었습니다. 지금껏 다른 모든 이는 무시해 온 당신께서, 저런 근본도 없는 군주에게 그곳을 넘기시다니요!"
세라펠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가 골라카브를 혐오스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나는 품격 없는 이는 상대하지 않아. 골라카브, 너는 네 추잡한 욕망을 학습된 예의와 단정한 정장으로 숨기고 있을 뿐이지. 내가 그 정도도 못 알아볼 것 같아?"
"윽… 저 자라고 다릅니까? 마멋! 겨우 마멋이란 말입니다! 애초에 7위계에 도달했는지 어떤지도 모릅니다. 이 자리에서 그가 증명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부 허세일지도…!"
"언성을."
골라카브의 말을 끊는 묵직한 목소리.
마멋 로드가 검지를 입가에 가져간다.
"너무 높이지 말아라."
"이놈이…!"
팟, 골라카브가 마멋을 삿대질하며 외쳤다.
"짐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거든 어디 네놈의 잘난 마법으로 해 보아라! 어차피 허세꾼이 이 자리에서 보여 줄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마멋 로드, 아인은 눈을 꿈뻑이며 열을 내는 골라카브를 바라보았다.
'싸우지 말라고 한마디 했다고 되게 화내네.'
거 참 성질머리 나쁜 아저씨네. 만만해 보인다고 화살을 괜히 이쪽으로 돌리고 말이야.
아인은 끼어든 것을 후회했다.
'마법이라. 소환도 괜찮으려나.'
높으신 분들은 직접 보여 주고 증명해야 믿기 마련이었다. 마법이 보고 싶으면 보여 줘야지. 아인이 선택한 건 역시 자신의 주특기인 소환마법이었다.
그가 상태창을 터치했다. 소지품에 마침 적당한 게 있었다.
'3성 확정 소환 티켓. 쓰고 싶었단 말이야.'
―화아악!
마멋 로드의 앞에 푸른 마법진이 그려진다.
절로 그려지는 술식. 진이 겹쳐지며 회전한다.
"무, 무영창…?!"
"언제 진을 그렸지? 손이 안 보였는데!"
마왕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번개가 치듯 마력이 떨어지고 파라락, 풍압이 일며 책장에 꽂힌 책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마멋 로드는 한 마디만을 선언했다.
"자, 들어가지."
그의 언질에 반응하며 마력이 더욱 세차게 몰아친다.
"소환마법…! 술식이 까다로워 다루기 어렵기로 유명한 마법 아닙니까?"
"심지어 무영창에 즉시 시전… 어지간히 전문가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기술입니다."
1좌와 2좌의 마왕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아인이 구축하는 마법진을 보고 세라펠이 '요놈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마멋이지만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녀의 이전 주인이었던 최흉 네헤모트, 온갖 마법에 통달한 그였지만 그중에서도 그가 특출났던 분야가 바로 '화염'과 '소환'이었다.
던전이 그렇게나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막강한 군대. 그 주전력은 뭐니뭐니 해도 네헤모트가 소환해 계약했던 영웅들이었으니.
'…그립네.'
겹겹이 쌓여 가는 마법진을 보며 세라펠이 애환에 젖었다. 나도 언젠가 저 마법에 구원받아 비로소 영웅으로 격상한 적이 있었지.
지금은 자취를 감춘 과거 군주의 모습이 문득 생각난다. 아직도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던 그날에 더해, 그의 던전조차 지켜 오지 못한 지금까지의 나날엔 후회만이 남아 있다.
저 새로운 군주라면 보여 줄지도 모른다. 20년 전 웅장했던 자신의 고향, 전성기의 사바텀을.
조금이나마 속죄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세라펠의 추억을 담아낸 마법진이 화려한 입방체로 겹쳐진다.
"이건… 어떻게 구축했지?"
"모르겠습니다. 5위계… 그 이상으로 보입니다만."
아인의 마법 시연을 보며 골라카브가 이빨을 뿌득 갈았다. 허세가 아니라 진짜였단 말인가.
―띠링, 띠링, 띠링!
떠오르는 행성은 셋.
'왔다! 3성 확정! 자, 기물이냐, 장비냐!'
아인은 신이 나서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소환진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 화아악! 푸르게 빛나던 세 개의 행성이 찬란한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오, 이거…! 네임드 소환이잖아!"
네임드 소환.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개체를 소환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영웅이 아니라 기물이나 장비라는 뜻이기도 했지만, 네임드는 영웅에 필적하는 가치가 있었다. 소환 확률은 영웅과 동일한 1퍼센트니 당첨이다.
"과연!"
번쩍!
노랗게 변한 마력이 진에서 터져 나오며 돌풍이 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히― 히히힝!!"
: 네임드 기물 ☆☆☆ 아포칼립스 바이콘을 소환했습니다!!
: 도감에 바이콘을 기록합니다!
[ 8 / 107 ]
"바이콘, 나이스!"
아인은 성공적인 소환에 만족했다. 상태창에 설명이 떠올랐다.
[아포칼립스 바이콘]
등급 : ☆☆☆
종류 : 네임드 마물
설명 : 바이콘의 궁극 진화형입니다. 탈것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달리기를 좋아한 나머지 천계의 도시를 몇 개 멸망시켰다가 추방당했다고 합니다.
전투력도 마물 중에는 최상급인 데다 발이 빠른 탈것이기도 한 기물이다. 늠름하게 턱을 치켜들고 갈기를 휘날리는 바이콘이 아인과 눈을 마주쳤다.
"우쭈쭈."
아인이 턱을 긁어 주니 푸르릉, 바이콘이 콧김을 내뿜으며 멋들어지게 갈기를 털었다. 아인이 콜라를 먹여주니 바이콘이 꿀꺽꿀꺽 삼키고는 트림과 함께 불꽃을 뿜어냈다.
"…맙소사, 지금 '종말'을 소환한 건가?"
"설마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아니겠지요."
마왕들이 긴장하며 마멋 로드의 행동을 유의 주시했다.
이 회의장에도 물론 일반인이 보면 까무러칠 마물이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 아포칼립스 바이콘이라니. 저 신수가 나타난 국가는 멸망을 각오해야 한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 아닌가.
척! 마멋 로드가 기품 있게 바이콘에 탑승했다. 마법의 안장과 고삐가 나타나 부드럽게 그의 손에 쥐어진다. 바이콘이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계약했다는 의미였다.
"어이쿠."
마왕들은 행여나 바이콘이 자신을 향해 돌진할까 깜짝 놀랐다.
그들을 바라보며 마멋 로드가 물었다.
"어떠한가, 자격의 증명으로는 부족한가?"
16화. 마왕 회의 (4)
"어떠한가, 자격의 증명으로는 부족한가?"
마멋 로드가 묻는다.
골라카브는 입을 꽉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더 무엇이라 반박하고는 싶었다. 부하나 다른 마왕, 심지어는 세라펠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체통을 잃는 건 도무지 환영할 만한 결과가 아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 자리에서 저 괴물 같은 군주에게 전쟁을 걸리는 일도 피해야만 했다.
종말의 바이콘, 물론 무시무시한 신수이나 마왕인 자신이 전력을 내면 쓰러트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 군주는?
그가 숨긴 마법의 힘은?
밖이라면 모를까, 던전의 방비 안으로 적을 초대해 버린 지금, 더 시비를 거는 건 도무지 상수가 아니다.
"부족한 모양이군."
골라카브가 대답을 망설이자 홰액, 하고 마멋 로드가 고삐를 당겼다.
"히히힝!!"
귀가 찢어지도록 울어 재낀 바이콘의 발굽에서 푸른 불꽃이 뿜어진다. 도움닫기도 없이 제자리에서 뛰어오른다.
"우왓!"
깜짝 놀란 마왕들이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부관들이 군주를 지키려 모여든다.
바이콘은 그런 그들을 신경 쓰지도 않고 단숨에 내달리기 시작했다.
지상이 아니었다. 회의장의 높디높은 벽면을 수직으로 타고 오른다.
―두두두두!!
단 한 마리가 돌진할 뿐인데 마치 기마군이 진격하는 착각이 인다.
마치 신창처럼 쏘아진 바이콘은 2초도 안 되는 순간에 50미터가 넘는 첨탑의 벽을 달려 올라가더니 파앗! 반대편으로 기세 좋게 날아올랐다.
탓, 탓!
능숙하게 반대편 벽을 타고 다시 지면으로 착지하는 바이콘. 마멋이 고삐를 잡으니 자리에 멈추며 늠름한 상체를 일으킨다.
"히히히힝!!"
그 모습을 보고 마왕들이 벙쪄서는 바보처럼 입을 헤 벌렸다.
바이콘이 지나간 벽면은 금이 가고 패인 데다 불꽃도 남아 있었다.
'…투석기 공격에도 끄떡없는 본성이거늘.'
식은땀을 흘리는 골라카브를 향해 세라펠이 호탕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하하핫! 골라카브, 아직도 부족하느냐?"
"…충분합니다."
결국 골라카브는 한 영지를 다스리는 주인의 위엄을 버리고 안전을 선택했다.
"완전히 정신 나간 놈이야, 하하핫!"
세라펠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회장에 울려 퍼진다. 그녀가 턱을 괴고는 아인에게 턱짓했다.
"내 감은 역시 틀림없었어. 이만 돌아가, 군주 아인. 지켜보고 있을 거야."
"알겠다. 아, 마왕 세라펠."
마멋 로드가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푸른 달을 조심해라. 그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으리라."
"…뭐?"
그의 말을 들은 세라펠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아인은 신경 쓰지 않고 용무가 끝났다는 듯, 바이콘에 탄 채로 마왕들에게 등을 돌렸다.
다그닥, 다그닥. 그의 호위기사 서큐버스가 뒤를 따른다.
마왕들의 혼을 빼놓은 신입 군주가 완전히 회장을 나가고, 무거운 철문이 닫히고서야 안도의 한숨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신묘한 군주였습니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었을지요. 마멋 로드가 저만한 경지에 오르다니…."
"불로불사의 현자가 아닐지요. 저만한 마법을 구사한 데다 그 패기는… 분명 10좌뿐만 아니라 9좌도 공석이었지요. 긴장해야겠습니다."
"…웃기는 소리를."
뿌득, 골라카브가 손에 힘을 주어 그가 가져온 콜라병을 쪼개 버렸다.
"어머, 힘자랑해? 나도 몇 개든 부술 수 있는데."
"…아닙니다."
"많이 분한 모양이지. 자기보다 먼저 치고 나갈 후보가 자꾸 나타나서."
세라펠이 깔깔대며 부관을 불렀다. 아인이 공물로 놓고 간 콜라는 한 박스가 더 있었다.
데스나이트가 가져온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는 세라펠. 그녀는 그가 남긴 마지막 문장을 곱씹었다.
―푸른 달을 조심해라.
…그 정보는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 군주에게도 말한 적 없는 기밀이거늘.
"군주 아인, 어디 네 던전을 구경해 보자고."
***
마왕들을 만나고는 포탈을 통해 집으로 돌아왔다.
"어우, 진땀 뺐다. 높으신 분들은 어려워."
"훌륭하셨어요. 경지의 위압으로 마왕들도 제압하시는 모습이라니. 소인, 감명받았답니다."
"담보대출 받으라고 할 때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어. 질 나쁜 업자한테 걸린 줄 알았거든."
시트리와 이야기를 나누며 접견실에 들어서니 상태창에 알람이 떠 있었다.
: 튜토리얼 퀘스트 [마왕 알현]을 클리어했습니다! (9/10)
: 보상으로 혼돈석 40개가 지급되었습니다.
오, 유료재화인 혼돈석을 지급받았다.
혼돈석 한 개로는 일반 가챠 한 번을 돌릴 수 있다. 5성도 나오는 하루 1회 무료 단차와 같은 종류다.
하지만 아직 던전의 발전도가 낮아 등급이 최하도인 지금은 기반 시설이 더 급하다. 가챠는 망했을 때 정말 아무것도 안 남으니까.
가챠를 돌리고 싶긴 하지만 괜히 도박중독자가 되지 말고, 여기선 현명하게 가자.
"오늘 뽑기는 우리 포포로 만족이야. 그렇지, 포포야."
"푸르릉."
턱을 긁어 주니 바이콘, 포포가 기분 좋은 듯 대답해 왔다.
"바이콘은 멋있어서 참 좋다니까. 옛날에도 바이콘만 타고 다녔는데."
"확실히 자주 타고 다니셨던 기억이 나네요. 군주님께 어울리는 마물이에요. 포포 님이라고 하는군요."
"응. 아포칼립스의 포포."
3층으로 돌아오니 마멋들이 접견실을 깔끔하게 청소하고 있었다.
"군주님 다녀오신 마멋."
"맛. 커다란 친구가 늘어난 마멋."
"이 녀석! 방금 닦은 바닥에 발자국을 묻히는 마멋!"
마멋들이 포포를 보고 뿅뿅대긴 했는데 포포가 찌릿 눈총을 주니 금방 조용해졌다. 조금 무섭게 생기긴 했지.
"그러고 보니 포포가 지낼 데가 없구나. 관리는 어떻게 할까. 마구간을 지을까. 시트리, 도와줄 수 있어?"
"죄송해요. 저는 바이콘을 만질 수 없거든요. 포포 님을 관리할 수는 없는데…."
"아, 애가 마력이 좀 세긴 하지."
"아포칼립스 바이콘. 재해급을 뛰어넘는 재앙급 마물을 단숨에 소환하시다니, 군주님의 경지에 다시 한번 감탄했어요."
"에이 뭘, 운이 좋았어."
아무리 3성 확정이어도 네임드가 나온 건 순전히 가챠 운이니까.
"그 강인한 마왕들조차 군주님의 화려한 언변 앞에서는 정신을 못 차리더라구요. 특히 마왕 세라펠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이로 유명한데, 이만큼이나 유리한 협상을 해내실 줄은 몰랐어요."
"협상?"
마지막에 던전을 잘 관리하면 마계를 주겠다느니 하는 맹약을 하긴 했었다.
맹약은 꽤 무게가 있는 마법이다. 한 번 성립되면 결코 해제할 수도 없으며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강제성을 지닌다.
뭐, 맹약까지 써야 하나 싶긴 했는데 그만큼 나를 잘 봐줬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긴 했다.
"관리비 협상은 잘 됐지."
"네. 본래 마왕에게 헌상해야 할 세금은 던전의 모든 생산품에 해당하거든요. 콜라로 봐주겠다는 이야기가 되었지요. 군주님께서 위엄을 보이신 덕분이에요."
위엄보다는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대하니까 진심이 통했지 싶은데. 이웃끼리는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야, 암.
"좋아. 관리비도 잘 깎았고, 새 가족도 생겼으니까 오늘도 맛있는 거 해 먹을까."
"마멋, 특식인 마멋."
"군주님, 어떤 메뉴인 마멋?"
"수확해 놓은 마지막 밀가루로 봉골레 파스타 해 먹자. 시장에서 좋은 오일을 사 왔어."
"스타인 마멋. 별님인 마멋?"
"반짝반짝 마멋."
뭔지도 모르면서 마멋들은 좋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제는 푸르릉대는 울음소리도 섞여서 들려온다. 식구가 늘어난 체감이 된다.
"포포도 면 요리 잘 먹겠지?"
"네. 바이콘은 잡식성이니 괜찮아요."
"오케이. 아직 저녁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포포 집이나 지어 볼까."
[건설] 항목을 열어 [설계]를 터치한다.
슥슥, 마력의 홀로그램이 마구간의 기초도면을 만들어 나간다.
"군주님의 설계는 언제 봐도 유려하네요."
"마력이랑 재료가 충분해지면 던전 전체를 리뉴얼하려고. 층간소음 없는 기둥식 구조로 다시 지으려고 해."
내가 도면 샘플을 보여 주었다. 전생에 살던 한국에서는 벽식구조 아파트가 많았다. 위층의 소음이 아래층으로 그대로 전달되는 구조다.
지금 던전은 동굴 형태니 전체가 통짜 벽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층마다 지지해 주는 기둥을 받쳐 주면 소음을 흡수하고 나중에 구조를 바꾸기도 좋아."
"과연… 이런 설계는 처음 봤어요. 어디서 배우셨나요?"
"배울 기회가 있긴 했었지."
이번 생에선 노예에서 인권 없는 황실 공무원으로 살아온 나였다. 전생에서는 건설공학을 전공했었다.
그때도 집이 가지고 싶어서 학과를 골랐었는데, 평생 자가랑은 연이 없었지. 경영학과 나온 애들이 금융권에서 돈을 쓸어 담는 동안 나는 공구리 냄새나는 현장을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지금 내 던전은 그만큼 소중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잘 꾸며 볼 생각이다.
"포포야, 어때. 네가 살 집이야."
포포에게 완성된 마구간의 설계도를 확대해서 보여 주었다. 하지만 별로 반응은 좋지 않았다. 포포가 미간을 찡그리고는 발길질을 했다.
"별로 맘에 안 드나 본데."
"아포칼립스 바이콘은 신수로 분류되는 최상급 마물이지요. 그만큼 대우를 원하는 게 아닐까요?"
"대우라…."
거 참 입맛 까다롭기는.
직접 만든 마구간이 아니라 왕궁이라도 준비해 줘야 하나.
상태창을 슥슥 훑어보던 나는 적당한 걸 하나 발견했다.
"이건 어때?"
[유령마무스메] (미니게임)
: 유령마를 타고 경주장을 신나게 달려 보세요! 라이벌과 선의의 경쟁을 통해 챔피언에 도전하세요!
: 유령마들의 숙소 '고급 마구간' 시설이 함께 제공됩니다.
: 30 혼돈석으로 개방
전에 개방됐었던 미니게임이다.
내가 미니게임에 포함된 고급 마구간 숙소 도면을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포포가 그걸 보고는 만족한 듯 콧김을 푸르릉 뿜어냈다.
"누가 네임드 아니랄까 봐 눈이 높으셔."
유령마무스메라. 재밌는 미니게임이었지.
열심히 여물 먹여 키운 말들을 타고 던전에 지어 놓은 경주장에서 승부를 볼 때의 짜릿함이란.
이건 순서는 나중이 되더라도 꼭 열어야 하는 미니게임이다. 게임 자체보다는 그에 포함된 시설이 중요하다. 유령마를 타고 다니는 데스나이트 기물이 늘어나면 그들의 전투력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우리 던전에 유령마가 몇 마리 있더라?"
"열둘이에요. 1층을 배회하고 있지요."
"생각보다 꽤 있구나. 시설이 있으면 걔들 전투력도 올라가니까."
좋아. 이번에 얻은 40개에서 10개는 밭을 확장하는 데 쓰고, 30개는 [유령마무스메] 개방에 쓰기로 결정했다.
"기대해, 포포야."
나는 망설임 없이 [개방]을 터치했다.
[유령마무스메]를 개방하니 경주장과 고급 마구간, 두 시설을 설치할 수 있었다.
장소는 2층으로 결정했다. 3층의 내 거주 구역은 남쪽이다. 소음을 고려해 북쪽을 확장해서 짓기로 했다.
척, 척, 척, 척!
여태 공실로 휑했던 자리를 자재들이 채워 가며 시설이 완성된다.
"와아, 깔끔한데요. 그야말로 유령마들의 기숙사라는 느낌이에요."
시트리의 감상대로 고급 마구간은 모던한 현대식 건물이라는 느낌이었다.
최첨단 냉난방 완비, 여물과 사료도 신선했고 물통도 깔끔하다. 각 마방에 입실한 말의 상태가 우측에 붙은 마력판으로 실시간으로 출력됐다.
"포포야, 마음에 들어?"
"푸르릉."
이 정도는 되어야 네임드인 이 몸이 지내줄 수 있지. 포포는 그런 태도로 갈기를 휘날리고는 시크하게 자기 마방을 골랐다.
"마멋, 여기 푹신한 마멋."
"물도 잘 나오는 마멋."
어느새 근처 굴에서 몰려온 마멋들도 무리를 지어 마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꼭 인형 뽑기 통에 와르르 몰아넣은 인형들 같았다.
1층을 돌아다니던 유령마들을 모두 집어넣으니 다들 신나서 히힝 울어댄다.
: 아포칼립스 바이콘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습니다!
: 유령마들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 마멋들이 따끈따끈합니다!
경기장은 방금 지은 1레벨 시설이라 400미터짜리 직선 코스만 덩그러니 있었다.
"아직은 연습용 트랙이구나. 경기장 만렙을 찍으면 규모가 상당해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확인해 보니 3만 평 규모까지 커진다.
음… 그 정도면 거의 돔구장 아닌가.
풀트랙 경기장에서 유령마들이 다 같이 뛰면 장관이긴 하겠다.
: 던전에 시설이 늘어났습니다. 점점 살기 좋아지고 있군요! 곧 던전 레벨이 최하급 → 하급 '승격' 조건을 만족합니다!
: 튜토리얼 퀘스트 [던전 승격]이 진행중입니다. (10/10)
: 곧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그럼, 누구 집인데.
착착 다음 단계로 올라가 줘야지.
17화. 경마 (1)
다음날은 밭을 가장 먼저 손보기로 했다.
마구간 앞에서 짝짝 손뼉을 치니 편하게 잠을 잔 마멋들이 기운이 가득해서는 데굴데굴 빠릿하게 기어 나왔다.
얼굴에도 윤기가 잘잘 도는데, 혹시 여물을 주워먹은 건 아니겠지?
2층으로 가서 작업을 시작하니 마멋들이 영차영차 사탕수수 수확을 시작했다.
: [밭] 시설을 강화합니다.
밭의 개수를 늘린다 (2혼돈석)
밭의 품질을 올린다 (1혼돈석)
밭 하나는 일반적인 뒷마당 텃밭 사이즈로, 큰 편은 아니다.
마멋들은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해도 마력을 먹고 알아서 숫자가 늘어나는데, 얘들도 그렇고 기물이 늘어날수록 먹을 입이 많아지니 숲의 확장은 필수다.
"지금도 생산량은 부족하지. 일단 개수부터 늘리자."
현재 보유한 밭은 두 개. 하나는 밀, 하나는 사탕수수, 코카나무, 바닐라를 번갈아 재배한다.
밀 재배는 1주일이 걸리고, 밭 하나에서는 면 100인분을 만들 수 있는 밀가루가 나온다. 아주 넉넉한 건 아니다.
"개수를 세 개 늘려서 총 5개로. 남은 4돌로는 세 개를 2레벨로, 하나를 3레벨로 강화해야겠다."
중요한 작물은 3레벨 밭에서 기를 생각이다.
혼돈석 사용을 완료한다. 바닥이 드르륵 갈리며 돌이나 이물질 따위를 제거하고 고른 흙밭으로 만들어 준다.
: [밭] 시설의 레벨이 2로 올랐습니다!
: 쾌적함이 1 올랐습니다!
: 디스이즈팜 상점이 개방되었습니다.
"오, 상점! 이제 여기서 심을 작물을 구매하면 되겠다."
상태창을 열어 뭘 키울 수 있는지 체크해 본다.
[디스이즈팜 상점]
밀 종묘 2은화 적상추 1은화
씨감자 1은화 할라피뇨 2은화
밭 한 개에 심을 양이라고 생각하면 가격은 싼 편은 아니었다.
"상추 좋다. 면도 좋긴 한데 섬유질이 좀 부족한 느낌이 있었단 말이지."
전부 다 사고 싶긴 한데….
"시트리, 우리 얼마 있어?"
"아, 그동안 마을에 콜라를 판 수익금이 있지요."
"응, 꽤 많이 팔지 않았어?"
"네. 스무 박스 정도 판매했는데요. 어디… 은화 두 장 남아 있어요."
"…그것밖에 없어?"
"그간 새로운 메뉴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재료를 구매하셨으니까요."
으음. 내가 눈이 돌아가서 시장에서 닥치는 대로 사기는 했다. 늘 마트에 가면 뭐 그리 살 물건이 많은지 모르겠다.
오늘 파스타에 넣을 조개, 그것도 비쌌지. 양은 쥐꼬리만 했는데 말이야.
"고민 좀 해 보자. 밀이랑 사탕수수, 콩은 심어야 해. 그러니 남는 밭은 두 개야."
지금 내게 필요한 메뉴가 무엇인가?
내 위장이 본능에서, 진심으로 원하는 음식은 과연 무엇일까?
"으으으음…."
고민 끝에 답이 나왔다.
샐러드.
시저 샐러드다.
아삭아삭한 식감, 한 입 넣으면 입안에 퍼지는 비타민의 상쾌함.
"상추랑 할라피뇨를 사야 해. 둘 다 여기서 안 나는 야채라 밖에서는 못 사. 할라피뇨는 빻아서 양파랑 섞으면 드레싱을 만들 수 있을 거야."
다음번에 밀을 못 심게 되긴 하지만 저장량으로 잠깐 버틴다.
샐러드, 하여튼 일단 샐러드다.
"아, 잠깐만. 그래도 부족하구나."
다 사려면 은화 세 개가 필요한데 수중엔 두 개뿐이다. 할라피뇨는 포기해야 한다.
밥 한 그릇 마음껏 먹기도 힘든 현실이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내 앞에 알람이 울리며 마력의 창이 떴다. 상태창과는 다른 두 번째 창이었다.
"이건 뭐지?"
"군주 연락망이네요. 마법사 게시판과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 네트워크에요."
"아하, 인터폰이구나."
던전 입주민끼리 연락망도 잘 구축되어 있었다.
인터폰을 열어보니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방구석경비원] 마멋 게 있느냐
흠.
잘못 보낸 메시지인가. 딱히 아는 다른 군주도 없고.
일단 잘못 보내신 것 같다고 정중히 답장하는 게 좋겠지, 하는데 자동완성기능이 문장을 만들어서 멋대로 전송해 버렸다.
[000] 메시지를 보낼 땐 신분을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
000이 내 닉네임인가. 기본 설정인가 보다.
[방구석경비원] 아 뭐야 계정 이거 아닌데
[세라펠] 어흠, 아인 게 있느냐
메시지를 보낸 녀석은 얼마 전에 본 내 단지의 관리인인 세라펠이었다. 닉네임 센스가 이상한 친구였다.
그러고 보면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 목소리도 그렇고 묘하게 낯이 익은 인상이었다.
'푸른 달에 관한 건인가?'
시나리오 스포일러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세라펠은 머잖아 큰 사고를 치게 된다.
마계에는 아주 드물게 달이 파랗게 보이는 블루문 현상이 일부 지역에서 관측된다고 한다. 그 달빛을 받으면 마족이나 마물이 대량의 마력을 얻어 진화하기도 한다던가.
그게 꼭 좋은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라서, 모종의 이유로 푸른 달을 노린 세라펠은 폭주한다고 했다.
[000] 무슨 일인가.
[세라펠] 뭐 해.
[000] 나는 바쁘다.
[세라펠] 지금 짐이 연락했는데 큰절 올리지는 못할망정!
[세라펠] 바쁘긴 뭐가 바쁘단 말이야
거 참, 중요한 얘기를 하려던 것도 아닌 듯한데.
먼저 열심히 일하는 사람 방해해 놓고 성질부리기는. 하긴 성격이 좀 급해 보이긴 했다.
[000] 그대는 시간이 많은가 보군
[세라펠] 짜증
[세라펠] 뭐 하는데
[000] 하수인들의 병참 시설을 연구 중이다
[세라펠] 호오
[세라펠] 짐의 경고를 이해하긴 한 모양이구나.
[세라펠] 어디 그 던전의 품격을 짐에게 보여 보거라. 마멋에게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거 아까부터 마멋 타령 엄청 하네.
마멋들이 그렇게 무시할 종족인가.
"이렇게 귀엽고 일도 잘하는데, 그치."
"마멋, 마멋."
짜리몽땅한 다리로 밭을 이리저리 뽈뽈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된다니까.
[세라펠] 야 뭐해
[000]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세라펠] 계속 보고나 해. 그 던전은 내 관리 책임이야.
어우, 귀찮아.
일대 지주인 건 알겠는데 엄연히 토지와 건물은 내 명의다. 직업 정신이 너무 투철한 이웃이 걸려 버렸다.
[000] 그대는 관심병인가?
[세라펠] 뭐어? 내가 어디가!
[000] 계속 쳐다봐 달라고 하는 게 지랄견이 따로 없군
[세라펠] 누구 보고 지랄견이래! 이게 진짜 정신을 놨구나?
[000] 연락은 끊겠다. 마저 작물 재배를 해야 한다
[세라펠] 잠깐만. 무슨 작물? 혹시 이 검은 물 만들 때 쓰는 풀이야?
[000] 그렇다
[세라펠] 세금.
짧은 메시지 후에 장문이 연타로 날아왔다.
[세라펠] 그간 13번 던전은 짐이 유지하고 관리해 왔어. 원래 던전은 뿌리에서 제명되면 순식간에 소멸해. 네가 그 던전에 사는 게 누구 덕인지 알겠지?
[세라펠] 세금 더 내.
흠… 나름 일리 있는 주장이긴 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내가 찾을 때 즈음 이미 던전은 소멸하고 없었을 거란 뜻이겠지.
[000] 한 박스 놓고 갔는데, 벌써 다 마셨나?
[세라펠] ….
[세라펠] 시끄러, 더 내.
마구잡이로 세금을 요구하는 마왕이었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가 따로 없었다.
아니, 그녀 정도면 마법도 다룰 줄 알 테고 입만 뻥긋해도 소유한 기물들이 줄지어 출동할 테니 칼이 필요 없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고 그냥 주면 나쁜 버릇이 들겠지. 앞으로 콜라를 계속 뺏길지도 모르고.
대화창 옆에 뜬 상태창에 눈길이 갔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
[000] 거래를 하지.
[세라펠] 거래라니?
[000] 콜라를 팔겠다. 금화 열 개다.
한 박스에 열 병이니까 한 병에 금화 한 개다.
지금까지는 은화 서른 개에 마을에다 팔고 있었으니 그 세 배가 넘는 가격이다.
침묵. 답장이 안 돌아온다.
음… 조금 양심이 없었나?
내가 눈을 꿈뻑이기도 잠시.
[세라펠] 몇 병 있어?
오, 구매할 생각이 들었나 보다. 좋아. 이 대금으로 상추와 파프리카를 살 수 있겠다.
[000] 여유분은 한 박스뿐이다.
[세라펠] 그럼 금화 백 개네. 보냈어.
―와르르르!
채팅창 밑으로 금화가 쏟아지며 발밑에 수북하게 쌓였다.
설마 한 병에 금화 열 개로 알아들었나? 근데 이렇게 아낌없이 돈을 지불했다고?
[세라펠] 그렇게 저렴한 가격에 넘겨주다니
[세라펠] 맹약이 쫄리긴 하나 보네?
[세라펠] 하지만 맹약은 어떤 방법으로도 풀 수 없는 거 알지
[세라펠] 어디 5년 안에 던전을 성심성의껏 키워보라고
[세라펠] 콜라나 줘
[세라펠] 콜라
[세라펠] 빨리
"시트리, 콜라 한 박스. 빨리."
"네!"
시트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3층에서 콜라 한 박스를 꺼내 왔다. 나는 채팅창의 확장 기능을 열어 콜라를 전송했다.
[세라펠] 이거야, 이거!
[세라펠] 더 있으면 말해. 그때는 정가로 쳐 줄게
흠….
물론 이 세상 사람들 입에 자극적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콜라가 그 정돈가?
어쨌든 잘 됐다. 나는 금화를 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상태창을 터치했다.
"종묘 전부 다 줘."
그러자 금화가 사라지고 내 앞에 씨앗들과 씨감자, 밀 종묘가 수북하게 나타났다.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 훌륭한 시저샐러드와 감자칩, 매쉬 포테이토, 샌드위치가 되겠지. 벌써 입에 침이 고였다.
세라펠, 친절한 관리인이구나. 앞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어졌다.
[세라펠] 그럼 던전 육성 수고해
[세라펠] 하급 던전으로 승격할 때 찾아갈게
승격. 지금은 최하급 던전인 내 집이 시설과 기물 등, 레벨이 충분해지면 하급으로 승격한다.
승격의 좋은 점은 무엇보다 평수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3층짜리 던전이 5층이 된다.
"나도 기대되는데."
좋아, 새 작물이 생겼으니 오늘도 열심히 해 볼까.
나는 씨앗 통을 들고 마멋들과 함께 밭일을 위해 나섰다.
***
하루를 마치고는 마구간에 포포를 구경하러 갔다.
"움뇸뇸. 포포야, 파스타 맛있었지잉."
"푸릉."
어째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현황판을 보니 [고기 원함]이라고 쓰여있었다.
고기, 물론 좋지. 마침 돈도 많이 생겼겠다, 마을에서 좀 사 올까 싶었다.
"가장 좋은 건 농장을 짓는 건데."
사 오는 고기야 질기고 퍽퍽하고, 황실에서 먹던 품질보다 떨어지면 떨어졌지 좋진 않겠지.
뭐든 우리 집에서 직접 길러서 만드는 던전산이 마력을 머금어서 가장 맛있기 마련이다.
"근데 자리가 좀 빈다."
소등시간인데 유령마 몇 마리가 마방에 없었다. 마멋들도 숫자가 적고.
바깥으로 나가보니 경기장이 소란스러웠다. 가까이 가서 구경해 보니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달리는 마멋! 코앞인 마멋!"
"젖 먹던 힘까지 내는 마멋!"
"마아악! 전 재산을 잃는 마멋!"
어느새 마멋들이 연습용 트랙에서 유령마들을 경주 붙여 놓고 내기를 하고 있었다.
음, 경마. 인류가 말을 탄 기원전 3500년부터 시작된 유구한 전통이지.
치열한 경주 끝에 파악! 아슬아슬하게 머리 하나 차이로 결승점을 통과하는 유령마들. 승부가 결정됐다.
그에 따라 마멋들도 희비가 갈렸다. 신이 나서 뿅뿅 뛰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벌러덩 드러누운 녀석도 있었다.
"마하핫, 대박인 마멋. 역배인 마멋."
"전부 잃은 마멋…."
"힘이 안 나는 마멋…."
뭘 걸고 있나 했더니 돈도 아니고 밀의 줄기나 돌멩이 따위로 내기를 하고 있었다.
소중한 물건이었구나.
: 튜토리얼 퀘스트 [던전 승격]이 진행 중입니다. (10/10)
: 곧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합니다.
: 곧 새로운 침략자가 나타납니다.
상태창은 곧 우리 집이 시끄러워진다고 경고해 주고 있다. 지난번에 그렇게 겁을 줘서 쫓아냈는데 또 누가 찾아오는 걸 보면 다른 세력인가.
이번에 얻은 교훈이 있다. 돈이 없으면 사람은 의욕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이었다.
씨앗을 사지 못했을 때 농사를 하기 싫어졌던 그 아찔함이란.
"경마장이라."
재밌는 생각이 났다.
18화. 경마 (2)
제국 남서부 황실령은 신개척지다.
역사적으로도 최초이자 마지막인 재앙급 던전이 발생했던 저주받은 땅은, 마왕이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 땅에 함부로 발을 딛으려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불과 열넷의 나이부터 사업에 눈을 떠, 이 지역을 개간하고자 젊은 패기를 부린 제국의 2황자 니클라스를 제외하면.
안 그래도 마나와 온갖 자원이 넘치는 꿀통 같은 땅이었다. 마왕이 지어 놨던 도시의 기반이 될 건물들도 얼추 자리에 있었다.
니클라스는 버려진 땅을 낼름 자신의 황실령으로 선포하고 거주할 제국민을 모았다.
국가지원금 덕에 갈 곳 없던 가난한 평민이 금방 모였다. 나름 기사도 한두 명 편성된 방위군도 주둔했기에 범죄자는 흘러들지 않는 깨끗한 지역이 됐다. 넓은 땅과 풍성한 마나를 기반으로 농업이 금방 발달했다.
외곽이라는 위치상 다른 도시와의 교류는 적다. 보따리상들이 한참을 걸려 마차를 타고 와서는 화물째로 짐을 내다 팔고 곡식을 사 간다.
단 하나, 죽음의 숲 안에 그 최흉이라 불리던 던전의 잔해가 지금도 남아 있다는 조금 불편한 사실을 제외하면.
니클라스 황실령은 성공적인 개척지였다.
"사업은 늘 리스크가 있기 마련이지. 노인네들은 리스크에 민감해. 세상이라도 멸망하는 줄 안다니까. 이 땅은 그 마왕인지 뭔지가 활동한 덕에 흙 한 줌, 나무 한 그루에도 마나가 짙게 배었어. 뭘 키워도 대박이 난다고. 이런 땅은 방치하는 게 범죄야, 범죄. 무슨 말인지 알지, 누님?"
니클라스가 강하게 성토했다. 정작 율리안은 정신이 다른 곳에 있는 듯 별 반응이 없었다.
둘의 대화를 옆에서 차분히 듣던 비서관은 속으로 혀를 찼다.
'황자님은 암흑룡이 어떤 마물인지 배우실 기회가 없었던 건가?'
아니면 그에게 20년 전 성전의 끔찍함을 알려 줄 사람이라도.
그때 최흉의 마왕을 포함한 던전군주끼리 벌인 전쟁에 휘말린 제국이 느낀 감정은 오직 하나였다.
끝을 알 수 없는 무력감.
재해급 마물들이 삶의 터전 여기저기를 날뛰어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던.
인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던 그 시절을 옛사람들은 누구나 잘 알거늘.
요즘 10, 20대 젊은이들은 옛날이야기로 치부하고 마법사 게시판이나 종일 뒤적이기 바쁘지.
벌써 제국 귀족가의 가주들도 많이 세대교체가 됐다. 황실도 머잖아 그렇게 될 테고. 비서관이 한숨을 푹 쉬며 수염을 튕겼다.
"누님, 황실령이 5년 안에 제2의 수도가 될 거야. 잘 봐. 그만한 공을 세우면 폐하에게 점수도 왕창 딸걸."
"꿈이 크구나. 당장 암흑룡이나 의문의 마법사 문제도 하나 파악하지 못했으면서."
"크게 가져야지. 안 그래도 모험가 길드에서 무려 A급 파티를 셋이나 수배했어. 오늘 도착할 예정이야. 저 숲에 뭐가 있든 프로들이 탐사하면 순식간에 해결할 거라고."
드래곤을 상대하려면 국가의 모든 모험가를 긁어모아도 시원찮을 판이거늘. 비서관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탐사대에 기사 좀 빌려줘. 잘 풀리면 누님에게도 좋은 일이야. 어차피 누님이나 내가 차기 황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 저쪽 1황녀에게 넘겨줄 수는 없잖아. 황태자도 폐위된 지 오래니 절호의 기회야. 집중 좀 해 봐."
니클라스가 율리안을 닦달했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황태자 얘기를 내 앞에서 꺼내니?"
"에이, 어차피 옛날 일이잖아."
"나 참."
율리안이 니클라스를 경멸하는 눈으로 째려보았다.
제국의 1황자가 황태자 직에서 폐위당했던 사건은 율리안에게도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벌써 10년은 된 일이다. 유년기의 율리안은 흑마술사들에게 납치당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율리안을 인질로 황실에 몸값을 요구했으나, 돈을 받았음에도 풀어주지 않았다. 율리안은 끔찍한 주술의 제물로 쓰일 뻔했다.
그 배후에는 황태자가 있었다. 황제가 서열이 낮은 자식들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미리 제거하려고 사주를 벌인 것이다.
"누님, 그때 혼자서 흑마술사들을 마법으로 다 때려잡고 당당하게 탈출해서 돌아왔잖아. 자랑스러운 일 아니야?"
"아니, 뭐. 그랬었지."
"아직도 기억한다고. 그때 누님이 얼마나 멋있었는데."
율리안은 헛기침을 하는 척 손을 입으로 가져가서는 몰래 손톱을 까득 깨물었다.
'…내 힘으로 탈출했던 게 아니었어.'
그때 율리안은 어린아이였다. 난생처음 마주한 불합리한 폭력 앞에서 벌벌 떨기에 바빴다.
맞서 싸우기는커녕 여기가 어딘지 파악하지도 못하고 흑마술사들에게 당하기 직전, 별안간 그녀를 푸른 마력이 휘감았었다.
―황녀님?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는 그가 있었다.
아인 소환사.
그가 소환마법으로 자신을 황궁으로 데려와 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소환마법은 본래 그렇게 작동하지 않거늘, 어떻게 자신을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아인의 마법이 특별하단 뜻이었겠지.'
그때 그의 앞에서 눈물범벅인 얼굴을 보여 버린 치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때문에 그 일은 무조건 비밀로 하라고 했다. 명령을 잘 들은 상으로 특별히 자신의 궁에 취직시켜 주기도 했다.
…좀 더 잘 대해 줬어야 했나?
어쨌든 그 덕분에 목숨을 한 번 건진 건 사실이었으니.
제도에서 남서부라면 이 황실령이 아니면 달리 향할 곳이 없거늘. 목격 정보가 잘못되었을까. 왜 여태 찾을 수가 없을까.
율리안은 아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니클라스의 말은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황녀님."
도중, 그녀의 호위기사가 보고를 올렸다.
"목격자가 나타났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율리안은 자신을 부르는 니클라스를 버려 두고 즉시 그 목격자를 만나러 갔다.
마부였다. 황실령에 가끔씩 들리며 운송 일을 하는 자라고 했다.
"이 지역에는 한 달에 한 번 다닙니다. 보통 손님은 두 부류입니다. 보따리 상인, 아니면 가난한 이주민이죠. 그 손님은 정확히 기억합니다요. 삯을 더 준 데다 특이한 검은머리였습죠."
"검은 머리."
제국에서 흔한 머리색은 아니다. 율리안은 아인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짐이 별로 없었으니 이주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을 많이 하다 보면 대충 무슨 사연이 있는지 추측이 갑지요. 제도에 큰 꿈을 가지고 입성했다가 포기한 젊은이죠. 많이 있습니다."
"여기 내린 게 확실하더냐?"
"확실합니다요. 달리 갈 곳도 없으니 이 동네에서 살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요."
마부의 확신은 일리가 있었다. 그의 말대로 한 번 황실령에 정착한 이주민은 보통 지원금을 노린 가난한 이들이기에 다시 떠나지 않는다.
"다시 도시를 수색해. 최근에 전입한 이가 없는지 꼼꼼하게."
"받들겠습니다."
기사들이 율리안의 명령을 듣고 분주히 움직였다.
'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는 몰라도.'
찾기만 하면 바로 끌고 황실로 돌아갈 테니 각오하고 있어, 아인.
율리안이 주먹을 꽉 쥐었다.
탁, 그런 그녀의 앞에 음료병이 한 잔 놓였다. 마부가 싱글대고 있었다.
"이건 무엇이냐?"
"헤헤, 귀하신 분께 바치는 헌상품입니다요. 요즘 황실령에서 대인기인 신상 음료입니다. 포션이라는 것 같더군요."
"새까만 게 기분 나쁜데."
율리안은 병을 들어 내용물을 이리저리 확인하며 흔들어 보았다.
"어이쿠, 그렇게 흔드시면 안 됩…."
그녀가 뚜껑을 여니 푸쉭! 검은 액체가 기포와 함께 폭발하며 율리안의 얼굴에 쏘아졌다.
"아이구! 흔드시면 안 되는데!"
"이놈! 허튼짓하지 마라!"
호위기사가 마부를 험악하게 붙잡았다. 마부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됐어."
그런 호위기사를 저지하는 율리안. 그녀는 시녀가 얼굴을 닦아 주는 와중, 입술에 묻은 검은 액체를 핥아 보며 말했다.
"맛은 괜찮네. 이거, 어디서 파니?"
***
: 튜토리얼 퀘스트 [던전 승격]이
진행 중입니다. (10/10)
: 보상 - 픽업 티켓 10장
: 곧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 곧 새로운 침략자가 나타납니다.
"던전 승격. 우리 집을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지."
지금 내 던전은 최하급이라는 등급이다. 층수는 겨우 3층으로, 원래는 군주도 없고 최하층에 등장하는 2성급 정도 마물을 토벌하면 소멸하는 수준이다.
"승격하면 최하급에서 하급 던전으로 올라갈 수 있어. 메리트가 되게 많았는데."
: 하급 던전 승격 시
· 3층 → 5층
· 층당 면적 20% 증가
· 시설 레벨 상한 3 → 5
· 시설 개수 제한 5 → 15
· 쾌적함 1당 마력 생산량 0.1 → 0.2
· 기물 레벨 상한 20 → 40
"맞아, 이렇게 엄청 많았어."
던전 등급이 낮으면 시설이든 마력이든 제한이 걸린다. 쾌적하게 지내려면 주방 같은 시설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필요하다.
"기물 레벨 제한도 있었지. 어, 그럼 시트리. 혹시 지금 힘이 제한되어 있거나 그래?"
시트리가 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해요. 마력을 더욱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함이 마땅하였는데…."
"아냐, 아냐. 레벨 락이 걸려 있었구나. 잠깐 잊고 있었어."
이건 충분한 마력을 제공하지 못한 내 탓이다. 5성 영웅은 100레벨까지도 올릴 수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기껏 소환해 놓고 어울리는 환경을 제공해 주지 못해서야 군주 실격이지. 나던 힘이 안 나는 느낌일 테니 시트리도 답답하겠다 싶었다.
"그리고 층수도 늘어나니까."
내 방은 더 깊게 내려가 안락해진다. 승격을 최우선 목표로 잡아야 한다.
"픽업 소환이라. 이것도 기대된다."
마지막 튜토리얼 퀘스트의 보상으로는 픽업 티켓 열 장도 들어온다.
픽업 소환은 일반 소환에서 얻을 수 없는 기간 한정 영웅을 획득할 수 있다. 평소 영웅 소환 확률이 1%인데 비해 확률도 4%로 훨씬 높다.
던전 승격에 필요한 조건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 하급 던전 승격 조건
· 침입자에게 승리 (1 / 2)
· 시설 건설 (4 / 3)
· ☆☆☆ 이상 기물 보유 (2 / 1)
"다음으로 공격해 오는 침입자 한 번만 쫓아내면 되겠다."
그걸로 튜토리얼 퀘스트는 모두 끝난다.
"침입자를 경계할까요? 언제든지 싸울 준비는 되어있답니다."
시트리가 불끈 주먹을 쥐며 의욕을 보였다.
"그보다는 이걸 활용해 보려고."
우리는 유령마 경기장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나는 경기장에 길게 뻗은 직선 트랙을 가리켰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시설을 활용한다고 하셨죠. 어떤 신묘한 책략이 있으신가요?"
"지금 1층은 공포의 집이잖아. 미궁을 돌파한 침입자는 2층 여기로 내려온단 말이지."
"그렇지요. 유령마들로 습격해서 토벌하시는 전략인가요?"
"에이, 토벌할 생각이면 이렇게 안 했지."
[시설 관리] 항목을 터치해 경기장의 이름을 '경마장'으로 재설정한다.
유령마 두 마리를 데리고 나와 한 마리의 고삐를 시트리에게 건넸다.
"시트리, 유령마는 탈 수 있지?"
"그럼요."
나와 시트리가 각자 유령마에 올라탄다. 경기장 트랙 시작점까지 걸음을 옮기니 푸릉! 말들이 고개를 흔들며 콧김을 뿜어냈다.
"마멋들! 우리 둘 중 누가 이길 것 같아?"
"마멋… 어려운 마멋."
"군주님이 이기지 않는 마멋?"
"모르는 마멋. 경주는 유령마의 발이 더 중요한 마멋. 기사님의 말도 빠른 마멋."
수군수군 고민에 들어간 마멋들. 한참 회의를 진행하더니 자기들끼리 돌멩이를 걸며 베팅을 시작했다. 내게 건 녀석이 8할 정도로 많았다.
"그럼 간다, 시트리. 봐 주지 말고 전력으로 달려."
"아, 알겠습니다!"
상태창을 터치해 경마장을 가동한다.
고삐를 쥐고 자세를 잡으니 셋, 둘, 하나. 카운트가 시작되고.
덜컹! 게이트가 열리는 걸 신호로 나와 시트리의 유령마가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19화. 경마 (3)
최흉 던전의 2층 경마장에서 시작된 유령마 경주. 아인과 시트리가 각기 말에 올라탄 채로 기세 좋게 돌진한다.
―두두두!
박진감 넘치는 스타트를 끊은 두 유령마는 눈앞에 당근이 매달린 것마냥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 나간다.
아니, 유령마이기에 싱싱한 당근을 먹지는 않는다.
그들은 말 그대로 죽은 말의 영혼이다. 언데드이다. 영체이기에 당근도 영혼을 빨아 먹는다. 혼이 먹힌 당근은 색을 잃고 무로 변한다.
그렇게 무가 된 당근은 영양은 없지만 매콤한 맛이 돌기에 자극을 좋아하는 마멋들이 입가심으로 씹어먹는다.
"각 유령마, 기세 좋은 스타트를 끊은 마멋. 1번에 군주님, 2번에 기사님인 마멋."
가장 말솜씨가 좋은 마멋 한 마리가 마침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무를 집어 들고 중계를 시작했다. 다른 마멋들도 분위기에 동조해 신이 났다. 경기의 열기가 후끈하게 퍼져나간다.
유령마의 강철 발굽이 경기장 바닥을 힘차게 찍어 누른다. 순식간에 가속도가 아인의 몸을 덮쳤다.
"재미있군."
아인은 던전군주답게 말을 탈 때도 위엄이 넘쳐 흘렀다. 고삐를 내리치니 시원한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배당률은 군주님이 1.2배, 기사님이 4배인 마멋. 기사님이 역배 대박인 마멋. 코스는 400미터 직선 코스인 마멋. 시작부터 발이 빠른 유령마가 유리한 마멋. 현재 군주님이 반마신 앞서는 마멋. 아! 말씀드리는 순간인 마멋!"
마머머멋! 환호성과 절규가 동시에 퍼져 사방에 울린다. 두두두! 매서운 달리기로 시트리의 유령마가 아인의 유령마를 바짝 따라붙는다.
"마멋! 군주님, 더 빨리 달리는 마멋!"
"기사님이 쫓아가는 마멋!"
트랙 옆을 빼곡하게 채우고는 각자 베팅한 선수를 응원하는 마멋들.
그들의 환호가 총알처럼 쏘아지는 아인과 시트리의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안장에서 엉덩이를 떼고 허리를 굽혀 공기저항을 최소로 줄이는 시트리. 숙련된 선수의 몸놀림이다. 그녀의 시선이 아인과 마주친다.
"봐주지 말라고 하셨죠?"
"훗, 물론이다."
아인은 전력투구하는 부하에게 만족하며 자신도 속도를 올렸다.
"반마신에서 머리, 머리에서 코! 나란히 달리는 마멋! 결승 지점까지는 100미터! 직선 트랙을 제패하여 최흉 컵 초대 우승자가 될 영예의 명마는 누가 될 것인 마앗!"
고점으로 향하는 열기 속, 박력 있는 두 말의 형체가 쏜살같이 쏘아지고.
쐐액! 마침내 결승점을 통과한다.
"골인인 마멋!"
"누가 이긴 마멋?!"
녹화 수정구가 골인 직전의 리플레이를 공중 전광판에 띄우며 재생한다.
마멋들이 푹신한 양손을 꽉 쥔 채 숨죽여 화면을 지켜본다.
슬로우모션으로 움직이는 두 유령마. 아슬아슬하게 코끝 차이로 한 마리가 앞서 들어온다.
"승부가 결정된 마멋! 코 차이로 기사님이 1착인 마아아앗!"
승자가 선언된다. 시범 경기는 시트리의 승리였다.
"대박인 마멋! 역배 터진 마멋!"
"우웃, 또 전부 잃은 마멋. 파산인 마멋."
"모든 힘을 잃어버린 마멋…."
"다시 돌을 캐야 하는 마멋…."
"명승부였던 마멋!"
마멋들이 환호하며 경주를 마친 아인과 시트리를 맞아주었다.
시트리가 결과에 당황했다. 명령대로 전력을 내기는 했지만 정말 자신이 승리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군주님, 송구했습니다! 부하들이 많은 자리에서 소인이 눈치도 모르고…."
"훌륭한 실력이었다, 시트리."
하지만 그녀의 군주는 품격 있는 태도로 패배를 받아들이며, 승자인 시트리에게 축하의 갈채를 보냈다.
"귀관은 짐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만족스러운 결과다."
"그, 그러신가요? 실례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전력을 내지 않아 귀관의 실력을 파악하지 못하였다면 더욱 손실이었을 것이다. 귀관에게 본 경마장을 맡길 수 있겠군."
"…그 말씀은."
아인의 눈에서 푸른 마력이 불타올랐다.
그 진중한 모습에서 시트리는 이 경기 또한 그의 큰 뜻이 있었음을 알아챘다.
침입자를 효율적으로 격퇴하기 위한 미궁 설계, 장기적으로 하수인들에게 병참을 보급하기 위한 밭와 요리 시설 설치, 인간들의 동태를 살피고 수복을 위해 직접 옛 영지에 잠입하였던 거래 활동 등.
군주의 행동에는 언제나 시트리로서는 바로 알 수 없었던 더 큰 대의가 숨겨져 있었다.
'이 경주도 내게 바라시는 다음 단계가 있을 게 분명하셔.'
그리 판단한 시트리는 직접 그의 의도를 추측하기로 했다. 언제까지고 일일이 의사를 물어보며 행동하는 단순한 장기말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제는 하급 마물이 아니라, 영웅으로서 그의 곁에 머물고 싶으니.
군주가 마멋들을 둘러본다. 경마에 베팅을 했다가 환희에 찬 이도, 절망하는 이도 있다.
그 어떤 마법도 쓰지 않았건만, 모두가 '감정'을 조종당했다.
"시트리여, 경마장은."
"침입자를 격퇴할 시설… 인지요?"
"…그렇다."
그 문답으로 충분했다.
시트리는 위대한 군주를 향해 무릎을 꿇고 맹세를 올렸다.
"기수는 맡겨 주시옵소서. 저 시트리, 군주님의 명예를 걸고 침소에 기어드는 어리석은 적들을 경마로 격퇴하겠나이다."
그런 그녀의 대답을 본 아인은 든든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트리가 잘 알아준 모양이야.'
아인은 인게임에서 침입자들의 '사기' 수치를 떨어트려 격퇴 판정을 냈던 경험을 살릴 생각이었다.
도박은 계속하면 결국 하우스가 이긴다. 경마장도 마찬가지다. 침입자들이 경마장에서 베팅을 하면 돈을 잃을 것이고, 사기가 떨어지면 제 발로 돌아가리란 계산이었다.
싸우러 온 상대들을 경마장에 앉히는 데까지가 어렵겠지만. 게임에서도 불가능했던 건 아니니 시트리가 맡아서 잘 해주리라 생각한 아인이었다.
반면 시트리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희망을 빼앗는 전략이야.'
아인의 명령에서 또 다른 이유를 찾고 있었다.
'군주께서 침입자들을 토벌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있으실 테야. 이를테면 위협도의 상승.'
아직 최하급인 던전에서 침입자들이 닥치는 대로 죽어 나가면 밖에서는 더 위험하다고 경계하게 되고, 그만큼 강한 침입자들이 한 번에 몰려오게 된다.
적은 인족만 있는 게 아니다. 더욱이 최흉이라 불렸던 이 던전이 부활했다고 알려지면 마계에서 몰려올 이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아직 방비능력이 부족한 현재로서는 하책이다. 군주가 언젠가 언급했던 '부동산'이란 단어가 그런 의미이리라고 시트리는 추측했다.
'그래서 마왕 세라펠이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마련하셨어. 침입자는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쫓아내서, 바깥에는 우리 던전이 위험한 게 아니라 그들이 약했다고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이지.'
그리 하면 던전이 성장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지력이다. 처음에 적을 토벌하지 말라는 명령이 의아했던 시트리는 이제 그의 큰 뜻을 이해하며 혀를 내둘렀다.
'이번에는 침입자의 금화, 더 나아가 장비까지 털어먹을 수 있어. 던전 재정에도 도움이 돼.'
마왕 세라펠에게 받은 금화로는 부족하다. 본래 던전 운영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금화가 들어간다.
"이 원한은 침입자들에게 갚아주는 마멋."
"뺏긴 만큼 다시 뺏어주는 마멋!"
돌멩이를 잃은 마멋들도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중요한 임무다. 시트리가 주먹을 가슴에 올리며 충성을 표했다.
"맡겨주세요, 군주님!"
"충의를 기대하겠다."
군주는 화려한 풍채를 과시하며 등을 돌리고 경마장을 떠나갔다.
***
죽음의 숲 입구, 고급 장비와 아티팩트로 몸을 치장한 모험가들이 진을 쳤다. 몸이 우락부락한 대장이 대검을 짊어지고는 코웃음을 쳤다.
"이름만 거창했지 별 것 없어 보이는군요. 여기가 정말 그 최흉의 던전이 있던 땅이 맞습니까?"
"마나가 많이 흐르는 지맥이라는 점 말고는 식생도 특이할 건 없네요. 마물 등급도 낮아 보이고요."
모험가 파티의 마법사가 마물 멧돼지의 시체를 불태우며 말했다. 입구에서 그들을 향해 뛰어든 마물을 손쉽게 쓰러트린 참이었다.
길드에서 섭외한 모험가들이 도착한 다음 날, 니클라스 2황자는 즉시 탐사를 위해 세 파티, 열다섯 명의 A급 모험가를 이끌고 숲 입구에 도착한 참이었다.
"정말 별 것 없어 보이는가? 암흑룡이 나타났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하하, 황자 전하. 암흑룡은 환경상 인간계에서 서식할 수 없습니다. 와이번과 드래곤을 착각하는 일은 흔히 있지요. 아, 부끄러워하실 건 아닙니다. 비전문가시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가, 와이번인가!"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니클라스는 안심이 됐다. 그럼 그렇지, 뜬금없이 드래곤이 인간계 한복판에 나타날 리가 없지 않은가.
"말씀하신 와이번에게 쏘아졌다는 마법도 드레이크의 화염구 같은 것이겠지요. 그 둘은 종종 영역 다툼을 합니다. 환경으로 보아 그 정도 중급 마물은 서식할 수 있습니다."
"든든하군. 그럼 탐사를 부탁하겠네."
"맡겨만 주십쇼. A급 모험가 아니겠습니까. 받은 만큼의 의뢰는 반드시 해냅니다. 프로니까요."
모험가들이 자신감을 내비치며 숲 안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그들의 앞에 한 명이 더 붙었다. 본래 이 지역의 정찰대를 맡던 여기사 헤라였다.
"…따라오시오. 안내하겠소."
탐사대가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니클라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율리안으로 돌아보았다.
"여태 괜히 쫄고 있었네. 지도 작성과 던전 토벌을 맡겨 놨어.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누님 기사단도 부탁해."
"글쎄. 별로 흥미는 안 가는구나."
율리안은 숲을 둘러보았다. 높게 솟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사방으로 들어찼다.
황실령 저택 창문으로도 보이던 숲의 전경이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박력이 넘쳤다. 이 안으로는 절대 발을 들여선 안 될 것만 같은 직감이 든다.
"주변을 탐사하고 있으마."
율리안은 그리 말하고 기사단을 이끌고 숲의 외곽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진입한 모험가들은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그들은 선행하며 길을 안내하는 헤라는 반쯤 무시하고 이리저리 마물을 쓰러트리며 마음대로 숲을 들쑤시고 있었다.
"대장, 갈수록 말빨이 좋아지십니다."
"하하, 그래 보였냐?"
"선금으로 금화 오십 개에 성공 보수로 서른 개 추가였던가요. 뭐가 받은 만큼입니까. 딱 봐도 열 개 치도 안 될 쉬운 의뢰잖슴까."
"조용히 해 임마, 기사님 들으시겠다."
"에이, 벌써 겁에 질리신 게 저희 얘기는 들리지도 않으실걸요. 거기, 기사님! 어떻게 일당 좀 나눠드리렵니까?"
모험가들이 예의도 없이 킬킬대는 소리를 무시하고 헤라가 나아간다. A급 모험가는 나름 어디 가도 꿀리지 않는 인재들이다. 안 그래도 거친 이들이 대접받는 습관까지 들었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헤라의 발걸음이 멈췄다. 낡은 재단 앞이었다.
"여기가 던전이다."
"어디, 소문대로 별 볼 일 없고. 최하급, 그것도 1층밖에 없는 판정이라 하셨죠."
"최하급 던전은 대부분 3층이지. 기사님이 층계를 못 찾은 걸 수도 있어. 후딱 끝내고 나오자고."
기세 좋게 발걸음을 옮기는 모험가들. 그런 그들에게 헤라가 경고했다.
"나는 들어가지 않는다."
"예?"
"비겁하다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그대들도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 던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헤라는 짙은 기미가 드리운 피폐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귀환은, 순전히 운에 달렸다고 생각해라."
모험가들은 그녀의 경고에 피식 웃었다. 제국 기사의 수준이 겨우 이 정도인가? 황실 기사단은 대우가 좋다던데, 모험가 은퇴하면 지원해 봐도 괜찮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던전의 입구로 들어가는 모험가 열다섯 명. 그들의 인영이 계단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아아아아악!!
첫 비명이 들려온 건 정확하게 13분 후였다.
헤라는 더 그들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틀어 전력으로 도망쳤다.
20화. 경마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