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20-30

20화. 잠깐 휴식

한유진은 당연히 바로 다시 능력을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그 '종말 후 지구' 세계의 더 이전 시간대의 문을, 요컨대 '종말 직전의 지구' 같은 문을 열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방금 그런 경험을 했는데 바로 다시 뛰어들 정도는 아니었다.

마지막 머리카락의 파도에 쪼개져 죽을 때는 솔직히 엄청나게 무서웠다. 불행 중 다행으로 워낙 순식간에 죽은 터라 아프진 않았지만······.

'오줌 지리는 줄 알았지.'

어쩌면 진짜 지렸을지도 모른다. 단지 쪼개져 죽은 탓에 전혀 분간할 수 없었을 뿐인지도.

어쨌든, 아무리 그가 수선자라곤 해도 이제 겨우 입문기에 불과했으며, 상대 귀신들은 너무 강력했다. 놈들의 존재감을 떠올리면 아직도 막 소름이 돋고 한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러니 당연히 정신적으로 휴식이 필요했다.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좋을까 고민하던 그는 문득, 자신에게 선협이란 장르를 알려준 대학 동기 친구 박희원 생각이 났다.

- 점심 같이 ㄱ?

그래서 바로 메신저로 연락했다. 돌아온 반응은 저번과 비슷했다.

구체적인 약속을 잡고 컴퓨터로 인터넷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으려니 시간이 금방 갔다.

이번엔 점심으로 먹기 좋은 김치찜 집 앞에서 만났는데, 멀리서 걸어오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한유진이 알은체했음에도 녀석이 조금 어리둥절해하는 반응을 보여 덩달아 한유진도 어리둥절해졌다.

"어······? 뭐냐 너?"

더 가까이 오고서야 한유진을 제대로 알아본 박희원은 조금 당황한 어조였다.

"뭐가?"

"너 뭐냐고."

"그러니까 뭐가 뭐냐고 이 새끼야."

"무슨 화장이라도 했냐? 때깔이 좀 많이 다른데?"

"아아."

한유진은 저절로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나 각성했다. 각성하니까 외모도 버프 되더라."

"지랄 말고."

"아니, 진짜로."

"······진짜로? 네가? 말이 안 되는데?"

"내가 쏜다."

한유진은 낄낄 웃으며 그 김치찜 집으로 들어갔다.

"야 이 새끼야, 각성했다면서 쏘는 게 김치찜이야? 다 구라지?"

당연히 박희원도 투덜대면서 뒤따랐다.

대충 적당한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고 밑반찬이 나오는 와중.

정말로 각성했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되물은 박희원이 부럽다는 기색을 가득 담아 축하를 건넸다.

"축하한다 진짜. 와······ 내 주변에서 각성자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심지어 이 나이에."

"내가 좀 늦게 각성하긴 했지."

"어쩌다가?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각성했냐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한유진이 헛웃었다.

"얼마 전에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땐데, 심심해서 메신저 열었다가 내 중학교 동창이 헌터 돼서 잘 나가는 걸 봤거든."

"어."

"근데 심지어 그 새끼가 내 중학교 시절 짝사랑이랑 사귀더라고?"

원래는 짝사랑의 메신저 프로필을 본 게 먼저였으니 사소한 부분이 좀 바뀐 설명이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론 맞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거 부러워하다가 자고 일어나니까 각성했더라."

"······찌질함이 각성 트리거라고?"

건너편에 앉은 박희원의 한심해하는 눈빛이 한유진은 그냥 웃겼다.

한유진은 자신의 그런 찌질함이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런 면모를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인물 초상화에 반드시 들어갈 수밖에 없는 명암처럼.

중요한 건 그런 찌질함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 그걸 때와 장소를 가려 잘 단속할 수 있는지 없는지다.

"너도 좀 본받아라. 혹시 아냐? 나보다 더 찌질하면 S급 헌터로 각성할지."

한데 그 말에 갑자기 박희원이 헛헛 웃기 시작하더니, 그 웃음이 잦아들긴커녕 점점 더 커졌다. 왜인지는 몰라도 한유진도 같이 웃게 됐다.

"왜 웃어 새끼야, 내 말이 그렇게 웃겼어?"

"아니, 요즘 웹소설 트렌드가 방구석 하남자인데 그거 생각나서. 진짜 그렇게 되면 나도 각성하냐? 나 그거 좀 자신 있는데?"

"방구석 하남자가 트렌드라는 건 또 뭔 소리야."

참으로 어메이징했다.

잠시 관련 잡담을 더 나누고 있자니 곧 주문한 김치찜이 나와서 식사를 시작했다.

"너 만약에."

그리고 한유진은 이왕 친구를 만난 김에 슬쩍 고민하던 바를 꺼내 들었다.

"네 능력이 지식 형태라서 남하고 공유할 수 있으면, 할 거냐?"

"네 각성 능력이 그런 건가 보지?"

"어. 이게 자세히 말하자면 좀 긴데······ 대충 선협 수련법을 알았다고 가정해 보자고."

"엥?"

막 수저를 뜨려던 박희원이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진짜로?"

"대충 그렇다고 치잔 말이지. 그 정도로 파급력 있는 지식이라고."

"······."

상당히 묘한 표정으로 마저 수저를 뜬 녀석은 한동안 침묵하면서 꽤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존나 중요한 이야긴데?"

그러다가 나온 말이었다.

"네 가족이랑은··· 아, 미안."

"아냐."

"음······."

한유진의 가정사를 아는 박희원은 빠른 사과 이후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꼭 공유할 이유가 있나? 돈 말고 얻을 게 없잖아. 어차피 돈은 이제 헌터일 하면 얼마든지 벌 수 있을 텐데."

"그걸 공유함으로써 내가 더 빠르게 더 많이 강해질 수 있다면?"

"그러면······ 공유할 이유가 있긴 하네."

어쩌면 당연한 결론에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러면서도 다시 물었다.

"선협 수련법 같은 건데도? 파급력이 장난 아니라니까?"

"걱정되면 알아서 조절하든가. 원래 그런 건 자기보다 센 놈 안 나오도록 조절하는 게 국룰이잖아."

"음, 역시 그렇겠지."

"근데, 그렇게 해도 진짜 선협 수련법이면 고민되긴 하겠다. 잘못하면 사회 전복되는 거 아니야?"

"그것도 좀 걱정스럽긴 해."

"아니······."

박희원은 완전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진짜로 그 정도 지식이라고?"

"나 각성하고 바로 능력 테스트했는데, A급 받았어."

"······."

이번에야말로 녀석은 정말 크게 놀란 모습이었다. 헌터와 관련된 지식에 빠삭한 만큼 A급의 무게감을 잘 아는 느낌이다.

"구라 아니지?"

"아니야."

"미친······ 일단 나한테 그 지식 좀 알려줘 봐. 내가 잘 검토해 보고 판단할게."

잠깐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그 농담에 풀어진다. 한유진이 헛웃는 사이, 반대로 진지한 표정이던 박희원이 곧 말했다.

"그냥, 조금씩 조금씩 풀면서 반응 보는 게 최선이겠는데?"

"안전하게 가려면 그게 낫겠지만······."

말을 흐린 한유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 종말 후 지구 세계였다.

"세상이 10년 후에 멸망한다면?"

"이건 구라지? 그냥 막 던져보는 거지?"

"당연하지 임마. 내가 무슨 노스트라다무스인 줄 알아?"

"차라리 그 새끼면 낫지. 결국 틀렸잖아."

더 이상의 무거운 논의는 적절치 않은 듯하여, 한유진은 대충 얼버무리면서 웃었다.

녀석과 대화하며 생각을 한번 점검한 것만으로도 꽤 도움이 된 느낌이었다.

"진짜 선협 그거면 나도 좀 알려줘라. 나도 장생 좀 하자."

"영근 없으면 어떡하게?"

"그럼 바로 한강에서 리세마라 해야지. 선협 세계에서 범인은 그냥 살 가치가 없어."

"미친 새끼."

리세마라란 게이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리셋 마라톤'의 줄임말이다. 요컨대 영근을 가질 때까지 반복 환생하겠다는 농담이었다.

"형이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하나 구해줄게, 영근."

"진짜로? 그럼 진짜 형님으로 모신다 내가. 근데······."

"근데?"

"이왕 구해줄 거면 허접한 거 말고, 음양오행천영근 같은 기깔난 걸로 좀 부탁한다."

"그거 이름만 들어도 개쩌네."

이후로는 계속 잡담이 이어졌다.

중간에 한유진이 귀신의 존재를 믿느냐는 질문도 던져 봤지만, 균열도 이능력도 있는데 세상 어딘가엔 비슷한 게 존재하지 않겠냐는 원론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다들 비슷한 생각이겠지.'

누구도 귀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균열과 이능력의 존재는 받아들였으면서도 귀신은 또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워낙 섬뜩한 존재인지라, 아직 증명된 적 없는 만큼 그냥 미신으로 남겨두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야."

대충 식사가 끝나갈 무렵.

"A급 헌터답게, 잘 먹고 잘 사는 모습 프로필 사진에 많이 올려. 그래야지 나도 부러워하다가 각성할 거 아니야."

박희원이 그렇게 말해왔다.

앞으로 한유진이 본격적인 헌터 활동을 시작하면, 지금처럼 편히 자주 만날 수 없으리란 사실을 아는 녀석 나름대로의 축하이자 격려였다.

"오냐."

한유진도 그에 긴말하지 않고 대답하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 * *

집에 돌아온 한유진은 인터넷으로 다른 딴짓을 하지 않고 귀신에 대해 검색해 봤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수확이랄 게 별로 없었다. 대부분 영화에 관한 이야기였고 실제 경험담이라는 것도 조작처럼 느껴지는 게 거의 전부였다.

'진짜 귀신은 본 적도 없을 거면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머리카락 파도에 사람이 큐브 스테이크처럼 쪼개지는 광경을 한번 목격이라도 해 봐야 다시는 이런 조작질을 못 할 텐데 말이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그는 유명 포털사이트와 연동된 지도를 켰다.

그리고 무작정 고등학교를 검색해서 서울 지역에 떠오른 모든 학교 사진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만큼 원희라는 귀신에게서 받은 압도감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결코 잡귀라 부를 수 없는 존재였으니 그 학교나 원희 본인에게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쉽게 검색해 볼 수 있는 대상은 학교뿐이다.

'학교 이름을 확인해 뒀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정장 귀신의 무시무시한 압박감에 짓눌려 쫓기느라 그런 걸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서울에 고등학교가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확인해 가는 한유진은 수선자의 몸과 정신을 가졌음에도 약간의 피로를 느꼈다. 정말로 피곤해서라기보단 지루해서였다.

'그냥 법술서나 읽는 게 나을지도······.'

하지만 그 끔찍했던 경험이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지라, 지금 이 지루한 검색 활동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 고등학교를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창밖으로 해가 저물어 실내가 어둑어둑해지고, 수선자가 됨으로써 눈이 나빠질 걱정 따위는 전혀 없지만 습관에 따라 실내 불을 켠 뒤 다시 검색을 이어 나가길 잠시 후.

"어······."

한유진이 순간 상체를 똑바로 세우며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찾았다.'

못 알아볼지도 모르겠다던 우려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냥 딱 보는 순간 바로 여기라고 알 수 있었다.

'영원고등학교.'

링크를 타고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자, 영원이 정말로 그 영원함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이름치고는 좀 묘하게 느껴진다.

다만 그 점을 제외하고는 홈페이지상 아주 멀쩡하게 보였다. 학교장 인사말이니, 교육목표니, 교직원 소개니, 알림마당 등의 공지사항까지 모두.

매우 정상적인 평범한 고등학교 느낌이다.

'그 원희는······ 지금 열 살도 채 안 됐겠지.'

생각하며 한유진은 홈페이지를 나가 영원고등학교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꽤 흥미로운 정보를 하나 찾았다. 어느 작은 커뮤니티 사이트에 쓰인 글이었는데, 영원고등학교의 배후 재단이 사이비종교라는 이야기였다.

종교와 귀신, 바로 느낌이 올 수밖에 없다.

귀신 아포칼립스의 사소한 퍼즐 하나를 알게 된 듯하여 그는 꽤 흥분됐다. 마음 같아선 내일 바로 이 고등학교를 방문해 뭔가 이상한 점이 있는지 샅샅이 뒤져보고 싶었다.

'사이비종교의 어떤 특성이 귀신을 이루고 성장시키는 어떤 특성과 맞물려서 그 원희 정도의 귀신이······.'

막 그런 생각을 해 보던 때.

키보드 옆에 둔 스마트폰이 갑자기 불이 켜지며 벨소리가 울려서 한유진은 화들짝 놀랐다.

혼자였기에 망정이지, 수사인 자신이 이런 작은 일에 놀랐다는 게 상당히 창피했다.

"여보세요?"

모르는 번호에 광고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일단 받았는데, 건너편 상대는 매우 젊게 느껴지는 여성이었다.

- 한유진 씨 맞으신가요?

"그런데, 누구시죠?"

- 안녕하세요, 이능관리국 소속 주무관 강민아라고 합니다. 조금 더 빨리 연락드리려 했는데······ 통화 괜찮으신가요?

"아, 네, 안녕하세요. 통화 됩니다 지금."

사무관이 붙여주겠다고 했던 그 담당 주무관이다.

한유진은 문득 이 담당 주무관에게 영원고등학교 관련 정보를 요청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21화. 민간 조사 의뢰

담당 주무관과의 통화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이야기는, 의외로 한유진의 지식에 대한 것이 아닌 그 헌터 전문학교와 연결해서 체험해야 한다는 '실습'에 대한 것이었다.

- 가장 빠르게는 사흘 후 E급 균열 실습이 있는데, 참가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이번이 아니어도 한 달 정도 후에 E급 균열 실습이 또 있긴 합니다.

"아직 아무런 사전교육도 못 받았는데 바로 실습에 들어가도 되나요?"

-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유진 씨는 괜찮지 않을까, 저 개인적으로도 생각합니다. 예비 A급 헌터시잖아요? 실습 장소가 학생들이 갈 만큼 E급 중에서도 안전한 편이고요.

"음."

- 편하게 결정해 주시면 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사전교육을 먼저 받고 실습에 참여하는 게 정식 루트는 맞거든요.

정부 기관 소속 공무원치곤 실로 융통성이 넘치는 느낌이다. 서로 잘 조율해서 문제만 안 생기면 된다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니면 균열에 대해 잘 아는 만큼 이런 정도의 일로 문제 생길 리 없다고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사흘 후 그걸로 잡아주세요. 실습은 총 몇 번 거쳐야 하나요?"

- 원래는 세 번 정도 거치셔야 하는데, 오태민 사무관님이 평가관으로 같이 움직일 거라 좀 줄어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줄어들 수도 있어요?"

- 원칙상 평가가 좋으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줄지 않고 늘어나는 경우가 더 많지만요.

"아하."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렇게 이능관리국 소속 공무원이 직접 평가관으로 참여하는 경우는 잘 없다고 했다. 헌터 전문학교 선생들이 외부 인원에 대한 평가도 같이 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당연히 한유진은 자신이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이어 대화하기 시작한 것은 원래 실습 전에 받는 게 정식 루트라던 사전교육에 대한 이야기였다.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헌터 전문학교 야간반에 신청하여 당장 일주일 후부터 교육받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십여 일 정도 후 열리는 이능력 검증훈련센터의 교육 프로그램을 따르는 것이었다.

둘 사이의 교육 내용 차이는 없고 평가 방식과 난이도 또한 비슷하다고 했다.

"전문학교 야간반으로 가겠습니다. 그게 더 빨리 시작하네요."

- 네, 그러면 제가 신청해서 결과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부탁합니다."

이후로는 정말로 한유진의 지식에 관한 대화 없이 통화가 마무리됐다.

'괜히 재촉하면서 압박하는 느낌을 피하려는 거 같네.'

아마도 그 실습 날 직접 대면한 상태로 슬쩍 이야기를 꺼내보지 않을까 싶다. 고작 사흘 후라고 했으니 말이다.

잠시간 더 실습과 사전교육 따위를 생각하던 그는, 결국 꺼내지 못한 영원고등학교 조사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내심 고개를 저었다.

'너무 뜬금없이 조사를 요청할 수는 없어.'

하다못해 지인이 연관되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그 유명한 이능관리국 소속 공무원에게 별 이유도 없이 사적 조사를 의뢰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적절했다.

'하지만 바꿔 말해, 뭔가 그럴듯한 건덕지만 있으면 그 이능관리국을 움직이게 만들 수도······?'

지금 이렇게 특별대우 받는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꽤 많은 양의 카르마를 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원희라는 강력한 귀신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능관리국이 개입하기 충분한 무언가라면 말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곳이 귀신 아포칼립스의 발생 및 진행에 아주 작게라도 연관되어있다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카르마를 쌓을 수 있을 터였다.

여러 방법을 생각해 보던 한유진은 스마트폰을 조작해 자신의 은행 계좌 잔고를 확인했다.

평범한 대학생이 한두 달 생활하기에는 그럭저럭 충분하지만, 지금 그가 생각하는 일을 실천하기엔 아주 부족한 돈이 보인다.

'대출 받을까?'

기초 자격증을 딴 만큼 별 직업이 없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의 대출이 나온다. 이건 정부 차원에서 이능력 각성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정책의 일환인지라 금리도 매우 낮았다.

그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대출받을 결심을 했다. 이전이라면 한참을 고민했을 터인데, 스스로의 각성 능력을 바탕으로 한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결정을 쉽게 만들었다.

부가적으로는 각성 능력을 통해 경험한 일련의 사건들이 그의 결단력을 성장시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현실에서 깨어난다지만 어쨌든 몇 번이나 죽음을 경험했으니, 조금 대담해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앞으로 많이 벌 텐데, 돈으로 카르마를 얻을 가능성이 보인다면 지금부터도 망설이지 않아야겠지.'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는 인터넷으로 괜찮은 탐정사무소를 찾았다.

무언가에 대해 효율적으로 조사하고 싶다면 당연히 그런 쪽의 전문가를 찾아야 하는 법이었다.

본인이 그 일에 마냥 매달리고 싶지 않다면 더더욱.

* * *

할 일이 많으면 시간이 금방 가기 마련이다.

대출받을 계획을 세웠기에 다음날 일찍 은행을 방문했고, 아직 공식적으로 결정하진 않았지만 이미 이능관리국과 계약할 마음을 먹었기에 미리미리 준비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 준비란 우선적으로 화탄술과 옥피술을 골라 내용을 따로 정리하여 USB에 담는 일이었다. 오행종 유적에서 얻은 서책 그대로 건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게다가 법문에 대해 그가 따로 주석을 달기도 해야 해서, 막상 정리를 시작하고 보니 이게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정리하면서 곱씹어 공부한다는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다 카르마를 위해서다.'

카르마가 있어야 각성 능력을 활용하여 이전처럼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그렇게 성장하면 지금 어렵고 골치 아프게 느껴지는 모든 일들이 술술 풀릴 것이다.

더불어 오행천둔술과 오행법술에 대한 공부도 손에서 놓을 순 없었다.

자연스레 그는 각성 능력을 활용할 생각을 했다.

하나 그 전에, 과연 '종말 직전의 지구' 문을 열 수 있을지 너무 궁금해서 시도해 봤다가 처참히 실패했다.

'왜 실패했지?'

여태 파악한 그의 능력 작동 방식대로라면 성공했어야 하는데, 왠지 느낌부터가 긴가민가하더라니 문은 또다시 그 '종말 후 지구'로 고정돼 버렸다.

'무조건 내 바람대로 문이 고정되진 못하는 건가? 아니면 그 종말 이전의 시간대로 갈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슬쩍 떠오르는 것은, 그 종말 후 지구가 정말로 이 현실 지구의 미래여서, 종말 이전까진 한유진 자신이 그곳에 살아있는 탓에 문을 고정시킬 수 없지 않았나 싶은 가설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상황임에도 문을 고정시킬 수 있다면 같은 세계에 두 명의 한유진이 존재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 것까지 가능하다면, 내 각성 능력을 활용해서 온갖 기상천외한 짓을 벌일 수 있단 뜻인데······.'

한유진은 어느 순간 고개를 저었다.

이건 고민하면 할수록 복잡해지는, 애초에 불가능해야 우주의 이치상 맞는 느낌이 드는 시간 역설 문제였다.

어쨌든.

엄청나게 위험한 그 종말 후 지구 세계에 재방문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그는 바로 대기 장소를 벗어났다. 어차피 아직 정신적 회복이 덜 된 느낌이기도 했으니 하루 이틀 더 쉰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깨어난 아침.

전날 인터넷으로 찾아 돈을 내고 예약해 놓은 탐정사무소를 방문했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이동해서 도착한 서울 중심지 번화가, 이런 곳에 탐정사무소가 있구나 싶은 번듯한 건물 2층이었다.

예약을 한 덕에 바로 상담실로 안내받은 한유진은 이 탐정사무소의 팀장급 인물을 만나볼 수 있었다.

마흔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평범한 회사원 같은 외모를 가졌는데, 다만 체격이 매우 좋았고 악수를 청해와 맞잡은 손도 꽤나 억센 느낌이었다.

'예상이랑 분위기가 좀 다르네······.'

여느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탐정, 누군가의 불륜 조사를 위해 차에서 잠복하다가 모텔을 나서는 커플의 모습을 카메라로 마구 찍는 그런, 좀 후줄근한 분위기의 남자를 상상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그런 방식의 조사보다 더 험하고 불법적인 일까지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아울 민간 조사 1팀장 강태혁이라고 합니다. 어떤 일로 방문하셨을까요?"

말하면서 그는 상담실 한쪽의 책자를 한유진 앞에 놓았다. 이곳 사무소에 어떤 탐정들이 더 있고 어떤 조사를 맡아왔는지 대략 소개하는 책자인 듯했다.

한유진은 그걸 훑어보는 대신 상대에게 바로 용건을 꺼냈다.

"영원고등학교라는 곳의 배후 재단, 정확히는 그 재단을 설립한 사이비종교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이어 그는 영원고등학교의 주소를 말했다. 전국에 뜻은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이름의 고등학교가 몇 더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정보 말씀이시죠? 사람을 찾으시는 건가요?"

"아니요. 그 종교의 전반적인 걸 다 원합니다. 교단 건물이 어디어디에 있는지, 신도가 몇 명 정도인지, 재산 정도나 사회적 영향력은 어떤지, 핵심 인물이 몇 명이고 누가 있는지, 종교 교리가 뭔지, 어떤 특별한 의식을 하는지 마는지, 한다면 어떤 형식과 목적의 의식인지, 그냥 전부 다요."

"음······ 목적이 구체적일수록 조사가 용이합니다. 왜 그런 정보가 필요하시죠?"

"거기에 좀 큰 문제가 있는 거 같아서요. 단순 탈세나 신도 재산 착취 같은 게 아니라, 더 심각한 수준의 문제요."

"더 심각한 문제라면, 대략 어떤······?"

"그것까진 모르겠어서 제가 여기에 왔습니다."

"음."

한유진으로선 그냥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그럴듯한 이유를 지어내서 말했다간 자칫 조사에 혼란을 줄 수도 있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탓에 근거가 전혀 없는 망상처럼 들리기도 하여, 1팀장 강태혁은 조금 애매한 미소를 띤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사를 거부할 태세는 아니었다.

"평범한 불륜 조사보단 재밌겠네요. 전반적인 조사도 안 될 건 없습니다만, 문제는 비용입니다."

"얼마 정도 될까요?"

"원하시는 정보 범위가 워낙 넓어서······ 우선은 하루 200만 원 정도면 어떨까 싶은데요? 조사를 진행하면서 인력이 더 필요해지거나 하면 늘리는 식으로요."

하루 200만 원.

심지어 조사 진행 정도에 따라 늘어나는 조건으로.

비싸다는 느낌이 확 든다. 미리 인터넷으로 파악한 업계 평균 비용과 대조해 봐도 전혀 싸지 않다.

하지만 조사하는 대상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또 그의 말마따나 조사의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무작정 광범위한 정보를 다 모아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마냥 바가지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뭐··· 리뷰에 실력은 좋지만 비싸다는 평이 몇 있기도 했지.'

이미 어느 정도 비쌀 것은 각오하고 왔다. 한창 헌터 활동을 하다가 돈이 넉넉한 채로 왔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렇게 됐을 때 다시 와서 또 의뢰하면 될 일이었다.

잠시 침묵하며 생각하고 있자니 그가 다른 제안을 해 왔다.

"너무 비싸다고 생각되시면, 가격을 반 이상 깎고 쉬운 조사를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큰 문제라고 말씀하셔서 심도 있는 조사를 해 보려고 비용을 그렇게 책정한 겁니다."

"아니요, 안 깎고 일 200만 원으로 하겠습니다. 일단 며칠 정도 조사하면 얼추 윤곽이 나올까요?"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만 진행해 보시죠. 조사 결과는 매일 저녁 이메일로 보내드릴 거고, 뭔가가 마음에 안 드시면 추가요청을 하시면 됩니다."

"그럼 일주일만 먼저 해 보겠습니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희가 비용이 좀 세긴 해도 다 이유가 있거든요."

그는 시원하게 웃으면서 다른 직원에게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한유진은 부디 이 조사 의뢰가 헛수고로 끝나지 않길 바랐다. 앞으로 돈이 넉넉해질 것과는 별개로 낭비하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었으니까.

꼭 귀신 아포칼립스와 연관된 것이 아니어도 그냥 카르마를 쌓을 수 있을 무언가만, 예를 들어 언론에 제보하기 좋은 사이비종교의 추악한 뒷면 같은 것만 찾아낼 수 있어도 손해는 아닐 터였다.

* * *

영원고등학교에 대한 조사는 현재로선 부가적인 목표일 뿐이다.

확실하게 카르마를 쌓을 수 있는 일은 실습과 사전교육 등의 과정을 거쳐 본격적인 헌터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지식을 퍼뜨릴 준비도 하면서.

기초 법술들만 잘 퍼뜨려도 원하는 정도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터다.

회원공은 일단 영혼을 법혼으로 승화시키는 부분을 완전히 빼고 알려줄 생각이었다. 정화술과 청심술이 포함된 육체와 영혼 단련법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했다.

'괜히 나 혼자 서두를 이유가 없지.'

이전에 한번 생각했듯, 지식을 퍼뜨리는 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결국 다 알려주게 될지 모르겠지만, 상황을 보며 조절할 여유는 충분할 터였다. 미리 급하게 다 알려준다고 해서 그만큼 빨리 효과를 나타내는 게 전혀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오늘이 바로 그 헌터 전문학교와 연계되어 진행한다는 실습 날이었다.

그는 정화술 등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외출준비를 마친 뒤 원룸 건물을 나서 대로변으로 접어들었다. 전에 사무관이 내려주었던 그 위치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몇 번 연락을 취하며 기다리길 잠시.

도착한 사무관의 차에 타자, 익숙한 그 사무관 말고도 웬 여자 한 명이 조수석에 타 있었다. 한유진은 그녀가 바로 담당 주무관 강민아임을 알 수 있었다.

목소리처럼 젊었고 단발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옆에 자리한 사무관 못지않은 엘리트 느낌을 풍겼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요, 방금 나왔습니다."

으레 하기 마련인 인사를 나누며 뒷좌석에 타자 곧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원래는 그냥 대중교통을 이용하겠다고 했는데, 사무관이 어차피 가는 길이라고 바득바득 우겨서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솔직히 편하긴 했다.

초면인 담당 주무관과 마저 인사를 나눈 뒤, 대화는 자연스럽게 잡담으로 흘러갔다.

그러다가 어느새 화제가 부드럽게 전환되어 한유진의 지식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어떻게,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네. 이능관리국과 계약하려고 합니다."

"좋습니다! 절대 실망 안 하실 겁니다."

사무관은 전방주시에 신경 쓰면서도 매우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각성하자마자 A급 헌터 능력을 보인 사람의 지식이라면 그렇게 좋아할 만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결코 작은 실적이 아닐 터다.

'완전히 소속되진 않더라도, 정부 기관과 끈 하나는 닿아있어야 카르마를 쌓기 편할 것 같다.'

한유진의 다른 생각이기도 했다.

그의 확답으로 인해 분위기는 한결 더 부드러워졌고, 사무관과 주무관은 마치 자신들의 화술을 자랑하듯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며 한유진을 동참시켰다.

잡담 같은 느낌이었지만 헌터 활동에 필요한 정보를 적잖이 얻을 수 있어서, 한유진은 저절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휴게소에도 한 번 들리면서 한 시간 반 정도를 이동했을 때.

셋은 서울 서쪽 외곽에 자리한 소위 '균열 터미널'로 불리는 장소에 도착했다.

균열 유도기가 다수 설치되어 그만큼 많은 균열이 이끌려와 열리는, 인류 문명의 안정성에 큰 기여를 한 위대한 발명품으로 운영되는 장소였다.

물론 모든 균열이 완벽하게 이끌려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발명품마저 없었다면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지금처럼 태평치는 못했을 것이다.

한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행은 터미널 안으로 들어섰다.

외관의 미려함을 다소 포기한 요새처럼 느껴지는 구조와 재질에, 곳곳에서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들고 근무를 서는 군인들이 보이고, 헌터임이 분명한 각종 무기와 방어구를 착용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곳에 처음 와보는 한유진으로선 마치 자신의 각성 능력으로 잠깐 다른 세계에 방문한 느낌이었다.

'이게 헌터들의 세계로군.'

조금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그는 사무관의 뒤를 따라 계속 이동했다.

과연, 이능관리국 소속 5급 공무원의 파워는 여기서도 대단하여 거의 지체되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아주 간소한 느낌으로 모든 절차를 통과하고는 헌터 전문학교 학생들이 이미 도착해 대기하고 있다는 장소로 향했다.

22화. 실습 완료 후

일종의 성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 터미널 건물을 지나 도달한 안쪽.

본격적인 균열 지대에 들어서자 아주 독특한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주목하게 되는 건 당연히, 상당한 간격을 두고 곳곳에 생겨난 균열들의 모습이다.

정말 그 명칭대로 허공에 균열이 난 듯한 형상이었다. 중앙에 뚫린 구멍을 포함하여 은은한 무지갯빛을 흘려내는 것이 시선을 확 잡아끈다.

그러한 각 균열들엔 최소 네다섯 명 정도의 헌터들이 주둔병처럼 자리했다. 내부에도 추가적인 인원이 있을 터였고, 버스만 한 캠핑카와 각종 장비를 실은 트럭 및 천막 등이 균열 주변을 임시 주둔지처럼 만들고 있었다.

그냥 방치되는 모양새의 균열도 몇 있긴 했다. 등급과 번호를 알리는 팻말 옆에 '처리'가 완료됐다는 뜻의 파란색 표지판이 멀리서도 아주 잘 보이게끔 세워진 곳들이다.

대부분 더 이상의 위험이나 채집할 자원이 없어 자연 소멸을 기다리거나, 모종의 연구 및 실험을 위해 남겨둔 곳들일 터였다.

균열의 99.9%는 단단한 지표면 위에 형성된다. 그 이유로는 균열 내부에도 대지가 존재하여 서로 연결되려는 성질을 갖기 때문이다, 라는 게 현재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머지 0.1%는 허공이나 물속에 만들어졌다가 금방 붕괴되어 사라진다고 하지.'

생각하며 한유진은 나머지 광경을 살폈다.

황폐한 땅에는 총탄과 폭탄, 그도 아니면 이능력의 흔적으로 짐작되는 울퉁불퉁한 전투의 상흔이 널려있다.

고개를 들어 시야를 멀리 두자, 이 균열 지대를 통째로 둘러싸고 있을 윤형 철조망 지대의 모습 일부가 보였다. 그 더 바깥으로는 중화력을 내뿜을 수 있는 감시초소가 포함된 철근콘크리트 방벽의 모습도 일부 눈에 들어왔다.

"이쪽입니다."

사무관은 이런 풍경이 익숙하다는 듯 움직였다. 그렇게 함께 움직여 도착한 곳은 당연히 실습이 예정된 그 E급 균열 앞이었다.

한성 기업의 한성 길드가 공략권을 가졌고, 이번 실습을 도와줄 '현역 헌터 안전요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장비를 한 번씩 더 점검해라. 균열을 통과하면서는···."

스무 명 정도의 학생들을 앉혀놓고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듯한, 딱 봐도 교관 선생님일 것이 분명한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이야기를 하던 중 슬쩍 한유진 일행을 쳐다봤고, 다른 이들의 시선도 같이 한 차례 쏠렸다.

근처에 있던 한성 길드원 몇몇이 사무관과 안면이 있는 듯 인사를 해 왔다.

한성 길드의 이번 균열 실습 및 공략은 정찰자 두 명을 빼고 계산하여 총 열두 명, 네 명이 하나의 팀을 구성해 총 세 팀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팀당 역할 구성은 방어자 하나, 원거리 공격자 하나, 근거리 공격자 하나, 치유자 하나였다. 각각 탱커와 원딜과 근딜과 힐러로 불리기도 하는 역할군이다.

E급 균열이 대상이라기엔 여러모로 과한 전력이었지만 학생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 같은 물건들은 여기 보관하시면 됩니다. 아시겠지만 균열을 통과하면 고장 나니까요."

담당 주무관의 안내에 따라 그렇게 천막 아래에서 물품을 정리하고 대기하길 잠시.

"진입!"

모든 준비를 마친 한성 길드의 정찰자를 선두로 균열 진입이 시작됐다. 이미 한 차례 다 살폈을 것임에도 정석을 따르는 모습이다.

'아무리 E급 균열이라도 실전이니까, 당연하겠지.'

생각하며 한유진은 학생들보다 앞선 차례로 균열을 넘었다.

이 장소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처음인지라 조금 어색했지만, 몇 번 거치다 보면 금방 익숙해질 터였다.

* * *

균열을 통과하는 감각은 빈말로도 편하다고 할 수 없었다.

마치 거센 물살을 강제로 헤치고 나아가는 것 같아서, 이런 초자연적 성질의 충격이 십여 초 넘도록 지속되니 전자기기 따위가 고장 날 만도 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끔 아날로그 시계 따위도 고장 난다던 이야기가 영 거짓말이 아닌 듯하다.

이 균열 통과의 충격은 단지 전자기기뿐만 아니라 화약 같은 민감한 폭발성 물질에도 영향을 끼쳐 각종 사고를 일으킨다. 사람의 경우에도 비각성자는 이 충격을 버티기가 훨씬 더 힘들다는 모양이다.

어쨌든.

내부 광경은 이질적인 생김새의 나무들이 자라난 숲이었다. 다만 한유진이 방문했던 그 원시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초라해서, 시야 확보가 용이하고 사람이 움직이기에도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실습은 철저하게 한성 길드 헌터들의 지시에 따라 진행됐다. 일체의 사고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매우 엄한 분위기였는지라 학생들이 꽤나 긴장하는 게 보였다.

"근데 왜 학생이 스물 정도밖에 안 온 거죠?"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오른 한유진이 사무관에게 슬쩍 질문했다.

"균열이 하루 만에 다 공략할 수 있는 넓이가 아닙니다. 실습을 며칠에 걸쳐 로테이션으로 진행해도 된다는 거죠. 한 번에 너무 많이 오면 통제가 힘들고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아."

"긴장이 전혀 안 되시는 모양입니다?"

사무관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한유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좀 긴장됩니다."

"적당히 긴장하는 것도 좋지요."

믿는 기색이 아니면서도 사무관은 그리 말했다. 실전에서 방심은 금물이라는 조언을 아주 완곡히 돌려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전방 소형 늑대 3개체! 2팀 앞으로!"

그때 선두에서 적당히 힘이 들어간 한성 길드원의 경고성이 들려와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바로 실습생들을 내보내기보단 몇 차례 전투를 지켜보게 하려는 듯, 한성 길드 공략 2팀이 나서는 앞쪽으로 대형견 크기의 털 없는 늑대처럼 생긴 괴물 세 마리가 이를 드러내며 접근해 오고 있었다.

영역을 침범당한 짐승은 매우 사나워진다는 이치가 여기 균열 속 공간에서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명백히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도망치긴커녕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놈들은 한성 길드 2팀에 의해 무참히 도륙 났다.

섬광을 동반하며 쏘아진 빛줄기가 늑대 괴물 한 마리를 찢어발기고, 다른 한 마리는 특수 재질 방패에 가로막힌 뒤 메이스에 맞아 대가리가 곤죽이 되었으며, 마지막 한 마리는 무려 장검에 그림처럼 참수당했다.

빛줄기야 그렇다 치더라도 방패와 메이스, 장검을 다루는 헌터의 전투가 한유진의 관심을 확 끌었다. 법술에 익숙한 그로서는 오히려 그 둘의 육체 전투가 아주 호쾌하고 박진감 있게 느껴졌다.

'육체 강화 능력에, 가속 쪽 능력도 있는 듯하네.'

일정 경지 이하에서는 빠르고 강한 신체능력도 굉장히 위협적인 힘이다. 특히 장검을 사용하는 헌터의 경우 칼날의 예기가 심상찮은 게 그냥 무기가 좋아서는 아닌 듯했다.

"저기 근딜 헌터는 등급이 어떻게 되나요?"

행여나 들릴세라 잔뜩 소리를 낮춰 묻자, 사무관이 힐끗 장검을 든 헌터를 보곤 답했다.

"B급입니다. 신한철 헌터라고, 검술 고수로 유명한 사람이에요."

"아, 어쩐지."

이후로 비슷한 전투가 한 차례 더 벌어졌다. 이 균열 전체적으론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이 숲에선 늑대형 괴물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그다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생들이 나섰는데, 잔뜩 긴장한 듯하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괴물을 상대로 별로 위축되거나 얼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한유진은 그런 헌터 전문학교 학생들의 모습에 감탄하면서 한편으로는 좀 아쉬워했다.

그들의 실력이 아쉬운 게 아니라, 아직 법혼기에 오르지 못해 신식이 없어 그들의 영근이 어떠한지 살피지 못하는 게 괜히 아쉬웠다.

그 와중 한 학생은 각성 능력이 B급이라더니, 얼핏 손처럼 보이는 형상의 새까만 기운 여럿을 쏘아내어 달려드는 늑대 괴물 셋을 혼자서 피떡으로 만들어 버렸다. 땅이 움푹 파이고 나무 하나를 부숴 쓰러트린 것은 덤이었다.

같은 학생들 사이에도 가장 미래가 촉망받는 우등생인 듯, 그에게 쏟아지는 눈빛부터가 좀 다른 느낌이었다.

'어쩌면 쟤들이 더 서열에 민감할지도.'

십 대 중후반 나이서부터 이미 등급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능력을 갖고 그에 비례하는 대우를 받을 테니, 그런 게 과연 학생 교육에 좋을지 아닐지 모르겠다.

물론 뛰어난 헌터를 길러낸다는 목적에는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러던 마침내.

한유진의 차례가 왔다.

그가 앞으로 나서자 여태까지처럼 한성 길드의 힐러 한 명이 손을 뻗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 보였다.

치유능력과 함께 방어능력도 갖춘 헌터로, 대상에게 투명한 보호막을 씌울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유사시 다른 헌터들이 개입할 것까지 생각하면 어지간해선 다칠 염려가 없는 셈이다.

물론, 한유진은 그들의 도움 없이도 괜찮았다.

"전방 소형 늑대 2개체!"

그 외침이 있기 전부터 놈들의 접근을 영안술로 파악하고 있던 한유진은, 적당한 거리가 되기 무섭게 바로 화탄술을 시전하여 던졌다.

던졌다고 표현했지만 손의 움직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쏘아진 화염체는, 미처 놈들이 반응할 새 없이 섬광과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광-!!

강력한 폭발에 섞여 거센 불길이 치솟는다. 근처의 나무들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화해 우수수 쓰러져 나가는 모습이 그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좀 더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워우······."

뒤쪽의 헌터 한 명이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냈다.

모두가 놀라고 감탄해서 한유진을 쳐다보는 와중.

막상 일을 벌인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즐기기보단, 늑대형 괴물을 죽임으로써 희미하게 포착된 어떤 느낌에 집중했다.

'카르마.'

그게 확실했다. 자신의 각성 능력과 연결되어 느껴지는 지극히 추상적이고도 오묘한 에너지.

확실히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건 카르마를 빠르게 쌓기 좋은 행위였다. 생명체와 카르마는 서로 도저히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가졌으니까.

물론 죽이는 행위가 카르마를 쌓기 좋다면, 역으로 살리는 행위 역시 비슷한 카르마를 쌓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하나 현대사회에서 그 자신의 힘만으로 다른 생명체를 완전히 살려낼 수 있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런 위중한 환자가 한유진 자신에게 쉽사리 떨어질 리 없다. 또한 상대가 그렇게 위중하다면 C급 판정에 불과한 그의 치유술로 살려내기가 어려울 수도 있었다.

나중에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은 이렇게 헌터 활동으로 균열 처리 활동을 하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하다.

"계속 이대로 해도 되겠지요?"

"물론이죠."

한유진이 가까이 선 헌터에게 슬쩍 묻자, 1팀 팀장이면서 공략대장이기도 한 남자는 즉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후로 괴물과 조우할 때마다 한유진의 화탄술이 쏘아져 놈들을 초전박살 냈다.

콰쾅-!!

콰르르릉-!!

섬광과 폭음이 터져 나오고 괴물이 오는 족족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증발하듯 죽어 버린다. 뒤편으로 잠시 물러난 공략대장이 사무관과 대화하는 것이 작게 들려왔다.

"저분은 실습 의미가 없겠는데요? D급 균열에 들어가도 지금이랑 비슷할 거 같습니다."

"예비 A급이거든요, 저분이."

다른 쪽에선 학생들의 교관 선생이자 통솔자인 노인이 감탄의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단지 감탄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다가와선 질문을 던지기까지 했다.

"실례합니다만, 그 공격 몇 번이나 더 하실 수 있습니까?"

"지금 상태로는 대략··· 보수적으로 잡고 40번 정도는 무리 없을 듯하네요."

"허······ 대한민국에 또 한 명의 A급 헌터가 나오겠습니다. 어쩌면 S급까지 성장하실지도요. 저는 김학만입니다. 성함이?"

학생 통솔은 어디다 내팽개치고 갑자기 왜 친목을 시도하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한유진은 그냥 기분이 좋고 만족스러워 순순히 답해주며 안면을 텄다.

그렇게 와서 대화를 시도하는 게 비단 헌터 전문학교 선생뿐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성 길드 헌터들의 눈빛이 심상찮았다.

강력한 헌터를, 그것도 이제 막 실습을 거치는 단계의 슈퍼 루키를 자신들의 길드에 끌어들일 수 있다면 여러모로 큰 이득일 수밖에 없다. 같이 공략에 나서기만 해도 그만큼 든든한 것이다.

"미쳤네, 미쳤어······."

"저거 내가 맞으면 바로 뒈지겠지?"

"교관님도 그냥 가겠는데?"

그사이에 얼핏 들려오는 학생들의 감탄 섞인 속삭임들이 한유진을 한층 더 우쭐하게 만들었다.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고 상당히 애써야만 했다.

바로 그러던 때.

"전방··· 중형 멧돼지 1개체!"

그 살짝 긴장감 섞인 외침이 모두를 주목시켰다. 물론 영안술을 펼친 한유진은 진즉부터 멀리서 접근해 오는 놈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금껏 일으킨 소음에 자극받은 듯 씩씩대는 놈은 솔직히 멧돼지라기보단 코뿔소를 더 닮았다. 크기에서부터 그랬는데, 그래도 털가죽과 뿔 엄니가 있어 멧돼지 느낌도 나긴 했다.

뀌에에에에엑···!!

숲을 쩌렁쩌렁 울리는 날카로운 괴성과 함께 돌진을 시작하자, 땅이 미약하게 울리면서 방해되는 나무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가는 광경이 꽤나 위협적이었다.

하여 자연스레 한성 길드 헌터들이 나서려던 순간.

이미 한유진이 조금 더 힘을 불어넣어 완성한 화탄술을 쏘아냈다. 누가 봐도 이전까지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는 그것이 돌진해 오던 멧돼지인지 코뿔소인지 헷갈리는 놈의 머리통에 직격했다.

푸콰쾅-!!

여태까지와는 조금 다른 폭음이 터져 나왔다. 놈이 몸에 품고 있던 영기의 방해를 받은 탓이었는데, 물론 그 정도로 한유진의 법술을 견뎌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화염이 폭발하고 휘몰아치는 불길 속, 머리통에서부터 상체 가슴팍까지 그야말로 박살이 난 괴물이 쓰러져 뒹굴었다. 워낙 덩치가 큰 놈이라 그렇게 나뒹구는 모습마저 스펙터클했다.

치지직······!

핏물이 열기에 증발해 가는 소리가 잦아들고, 끓어오르던 열기가 아지랑이의 형태로 빠르게 흩어져 사라진다. 놈의 덩치가 컸던 만큼 그 상처 단면이 새까맣게 불탄 흔적도 아주 잘 보였다.

얼핏 고기가 익다 못해 타는 냄새가 맡아졌다.

한유진은 늑대형 괴물보다 확실히 더 많이 쌓이는 카르마를 느끼며 미소 지었다.

* * *

당연하게도 실습은 별다른 사고 없이 무사히 종료됐다.

사무관은 한유진이 내심 기대했던 대로 더는 실습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평가를 내려줬다.

하지만 한유진은 다음 실습에도 나가길 원했다.

대충 시간을 계산해 보니, 어차피 사전교육을 수료하기 전까진 헌터 활동을 못 할 텐데, 그 사전교육을 받는 기간 안에 다음 실습 계획이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티끌 모아 티끌이라지만 어차피 놀 수밖에 없는 기간이라면 괴물 몇 마리라도 더 죽여서 카르마를 쌓는 게 낫다.

사무관은 당연히 그런 '겸손한' 요청을 받아들였다.

부가적인 요소도 있긴 했다.

다음 실습은 이번처럼 한성 길드가 아닌 다른 유명한 길드의 도움을 받아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 그들과 미리미리 안면을 트고 실력을 보여줄 수 있다면, 추후 시장에 나와 계약할 때 더 유리할 터였다.

그게 그냥 망상이 아닌 것이, 돌아가는 한유진의 주머니엔 한성 길드 공략대장이 건네준 명함이 들어있었다. 추후 꼭 같이 활동하고 싶다는 진정성 담긴 이야기와 함께 받은 명함이다.

"두 분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뭘요, 이게 제 일입니다."

"들어가서 푹 쉬세요!"

이번에도 차로 집까지 태워다준 사무관에게 감사를 표하고, 담당 주무관과도 인사한 뒤 그는 홀가분하게 헤어져선 원룸으로 향했다.

도착 후, 정화술로 씻기를 대체하며 옷을 갈아입고 습관에 따라 컴퓨터 책상 의자에 앉을 때까지, 그는 여전히 반쯤 붕 뜬 기분이었다.

'이제 진짜로 헌터 활동을 시작할 때가 머지않았구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꿈처럼 여길 수밖에 없던 것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이런데도 들뜨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더 그렇게 즐거운 기분을 만끽하던 그는, 마침내 진정하고는 오늘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바로 조사 의뢰 보고서를 받아보는 것이었다.

메일로 온 보고서는 기대했던 것보다 분량이 상당했고 내용도 충실했다. 물론 이제 겨우 하루 차에 불과한 만큼 그렇게 막 중요한 정보랄 것은 없었다.

조금 더 보고서를 읽으며 시간을 보낸 그는 마침내 모든 일을 마무리하곤 침대에 누웠다.

'이제 슬슬 법술 수련을 위한 세계를 찾아야겠지.'

꼭 법술 수련이 아니더라도, 진법술이나 연단술 혹은 부적술 등을 배울 수 있는 세계도 좋다. 바로 성공하긴 어렵겠지만 꾸준히 시도하면서 알맞은 세계를 찾아낼 계획이었다.

'너무 길게 체류할 생각은 없어. 현실과 괴리감이 생기지 않을 만큼······ 딱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만 머물 수 있으면 만족할 텐데······.'

그는 대략 어떤 형식의 바람으로 문을 고정시킬지 궁리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곧.

어두운 공허 속 대기 장소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제법 익숙하게 오행검과 영액주병과 저물대 등의 모든 필요한 물품을 챙겼다.

이후 천변만화하는 문 앞으로 가서 꽤 오랜 시간을 눈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마침내 뻗어진 손이 문에 닿고 형상이 고정됐다. 모종의 법문들이 빛을 발하며 매우 견고한 느낌을 주는 철문이었다.

- 천원성 전선계.

'전선(戰線)계?'

해석되기로는 천원성이라는 이름의 요새가 있는, 전쟁에서 전선의 역할을 하는 세계라는 뜻이다.

이름의 형식을 보니 수선 문명 세계일 듯했다. 거기에 한 세계를 전선으로 삼을 만큼 그 전쟁이 상상초월로 위험할 것임을 추측해 볼 수도 있었다.

'법술 수련과 연단술 등의 배움을 원했으니······ 당연히 수선 문명 세계로 문이 고정됐겠지.'

그러면서 전선 역할을 하는 곳이라면 위험에 비례하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가보지 않고서는 판단할 수 없다. 한유진은 마음의 각오를 다진 채 그 철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아악······!"

"여기···! 여기 도와줘···!"

통과해 나온 문이 사라지는 것을 일별할 틈도 없이, 사방에서 탄내와 열기가 훅 느껴지고 은은한 피 냄새가 풍겨오며 고통에 찬 아우성이 가득했다.

직전에 크고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거인족이 만들었나 싶은 수준으로 거대하고 웅장한 성벽 곳곳이 부서진 상태였고, 각종 잔해와 끔찍하게 큰 괴물의 시체에 깔린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의 행색과 느껴지는 기운을 보면 다들 수선자임이 분명했다.

자신 말고 다른 수선자를 보는 건 처음이다. 동시에 그런 자신과 같은 수선자들이 길가의 쓰레기처럼 죽어 널브러진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다.

"이봐, 너!"

문득, 멍하니 주변을 살피던 한유진을 누군가 성난 목소리로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눈이 부리부리하고 수염 덥수룩한 중년 수사 한 명이 그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빨리 움직이지 못해!"

"아, 네···!"

그 중년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최소 법혼기였다. 자신 같은 입문기 수사가 열 명 넘게 있어도 양 떼처럼 도륙내 버릴 수 있는 강자라는 뜻이다.

한유진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움직였다. 다행히 군 생활을 하며 키운 눈치가 좀 돼서, 얼른 구조활동에 참여해 눈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발견한 것은 상체가 통째로 날아가 죽은 어느 수사의 시체였다.

저물대 같은 물건은 누가 이미 쓸어갔는지 전혀 안 보인다. 하나 허리띠에 걸린 신분증 역할의 옥패는 멀쩡했다.

'병 127대 소졸, 동은주 연가 연비원.'

동은주 지역 연씨 가문의 연비원이라는 수사였던 듯하다. 소졸이라는 걸 보면 경지도 그리 높지 않았을 터다.

딱 자신에게 맞는 신분이라고 생각하며 한유진은 자연스럽게 그 옥패를 챙겨 자신의 허리춤에 달았다. 당연히 이 세계로 넘어올 때 의복이 다른 수사들처럼 변한지라 어색함은 없었다.

'이제부터 나는 연비원이다.'

생각하며 그는 내심 계획을 세웠다.

이 위험천만하게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전쟁터에서 무엇을 얼마나 배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반드시 이 위험에 비례하는 기회가 있을 터였다.

23화. 천원성 연단술 강의

전투의 뒷수습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 갔다. 이곳에 평범한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전부 수선자였기 때문이다.

잔해 따위를 치우는 데 다들 중장비 하나 이상의 몫을 하면서 기동성도 좋고 다친 이를 치료할 수도 있다. 청소 따위의 하찮은 일은 그냥 손짓 한 번이면 끝난다.

'이런 자들이 바글거리는 세상이라면 문명이 정체될 만도 하구나.'

한유진은 딱히 고찰해 보지 않았음에도 절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오직 개인의 능력을 함양하는 것만으로도 지구 현대사회에서 어렵다고 느껴지는 대부분의 일들을 쓱싹 처리해 버릴 수 있는데, 대체 누가 고생해서 범인들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그것을 보급하며 인프라를 깔겠는가?

그런 걸 개발할 시간에 자신도 수련이나 해서 똑같이 능력을 갖추고 장생하는 게 훨씬 더 보람차고 이득이지 않겠는가?

또한 그렇게 능력 뛰어난 자들이 군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이치일진대, 대체 누가 어떻게 사회구조를 개혁할 수 있겠는가?

설령 어느 괴짜가 그런 걸 시도하더라도 다른 강자에게 방해받거나 이득을 빼앗기거나 진압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않겠는가?

'이런 세상에서 발전할 수 있는 문명 분야는 오직 수선과 연관된 것뿐이겠지.'

그리고 그게 딱히 문제라고 볼 수도 없었다.

지구가 더 살기 좋을지는 몰라도 생존을 위한 무력 면에선 수선계와 비교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구야말로 사상누각의 표본일지도.'

따지자면 지구의 역사는 이런 수선계와 비교했을 때 아주 짧은 편이다. 수천수만 년이 더 흐른 뒤엔 어떤 변화가 일어나있을지 정말로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상념을 이어가면서도 한유진은 눈총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이곳 천원성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다른 수사들이 죽은 수사들의 시체에서 저물대 등의 재화를 얻으려 혈안이 되었다면, 그는 각종 정보를 얻으려 혈안이 됐다.

"정중 금제가 먹통이라는군."

"그럼 내 공적치는?"

"짧아도 이레 정도는 영단이나 공법서 교환 등이 어려울 거라던데?"

"젠장, 이번에 승화단을 교환하려고 했는데···!"

그런 식으로 투덜거리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한유진은 바로 그 정중 금제라는 것의 정체를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일종의 중앙정보처리 시스템 역할을 하는 듯했다. 다른 방어적인 역할도 있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수사 개개인의 신분과 공적을 증명함으로써 보상 체계를 굴리는 아주 중요한 수단임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걸린 옥패를 좀 더 자세히 살피고서야 그것이 단순한 옥패가 아닌 일종의 법기임을 알아챘다.

'큰일 날 뻔했네.'

생각하며 이리저리 작동시켜 보려 했으나, 과연 정중 금제가 먹통이라서인지 전혀 반응이 없었다. 이 옥패는 그저 단말에 불과하여 이것만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할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 자신의 초월적인 이해력으로 한 번 더 추측을 검증하던 한유진은 문득, 주변에서 들려오는 어떤 대화에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듣기론 무슨 진법술 공개 강의가 있다던데?"

"아, 그 소식 말인가. 진법술뿐만이 아니라 수선사예는 다 연다고 하더군."

"공적치 교환이 중지된 걸 보상해 주려는 거겠지?"

"아마도 그럴 걸세."

"혹시 법술 관련 강의는 없다던가?"

"그것까진 잘 모르겠는데······."

수선사예는 수선기예 중 으뜸으로 치는 네 가지, 진법술과 연단술과 연기술과 부적술을 뜻한다.

'이게 내 기회인가!'

때마침 신분과 공적을 확인하기 어려워진 상태에서 모두에게 개방되는 수선사예 강의가 열린다니, 너무 시기적절해서 정말로 이렇게 편히 기회를 누려도 되는 건지 살짝 의심될 지경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이보다 더 한유진 자신의 바람에 잘 부합할 수가 없었다. 각성 능력이 제대로 한 건 해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초월적인 이해력을 가진 만큼 생각보다 덜 유익할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분명히 배우는 점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법문 하나만 더 알게 된다고 해도 무조건 이득일 수밖에 없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계속 전장 정리를 해나갔다. 물론 그러면서 주변 수사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상황을 관찰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 여러 번 방문하게 될 듯한 느낌이었다.

* * *

한유진은 적당히 인적없는 장소를 골라 무사히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어쩌면 신분 관련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는데, 정중 금제가 무력화된 지금 천원성 전체가 어수선한 분위기인지라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날이 밝았을 때.

소문처럼 수선사예 공개 강의가 열렸다. 네 가지 강의 모두 결단기 수사들이 직접 진행하는 만큼 절대 허접할 리 없어 보였다.

다만 문제는, 그 강의들이 거의 비슷한 때에 동시에 열린다는 점이었다. 참여할 의사가 있는 모든 수사는 강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상식적으로 당연한가······?'

네 가지 전부 수선기예 중에서도 어렵다는 평이 자자한 것들이다. 수련할 시간도 부족한 마당에, 누가 감히 수명이 넘쳐흘러서 그 네 가지를 다 배우려 하겠는가? 하나만 겉핥기식으로 배우기에도 벅찰 텐데 말이다.

어쩌면 한유진 자신도 결국 하나를 택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할지 모른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고민하던 그는 결국 연단술을 택해 그 강의가 열린다는 서쪽 광장으로 향했다.

연단술을 택한 이유는 그것이 가장 본신의 수련과 연관이 깊은 학문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제 얻은 정보 중에서 이번 연단술 강의가 매우 실용적일 것이라는 카더라 소식이 있었기에 마음이 끌리기도 했다.

천원성의 넓이는 그 거인족이 만들었나 싶은 거대한 성벽만큼이나 어마어마하여, 서쪽 광장까지 도착하려면 풍운술을 전력으로 펼쳐 한참을 달려야만 했다.

이동하는 와중 구름이나 비검 따위를 밟고 날아가는 법혼기 수사들을 적잖게 볼 수 있었다. 한유진은 지구에서 예비 A급 헌터라며 대접받는 자신의 상황이 문득 좀 우스워졌다.

도착한 서쪽 광장에는 이미 상당한 인파가 몰려있었다. 그리고 마침 타이밍이 잘 맞았는지 한쪽에 마련된 단상 위로 누군가가 올라서는 모습이 보였다.

영안술을 펼쳐서 보니 매우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분위기마저 고고하여 선자라는 표현이 그보다 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신 차려라, 한유진. 저건 결단기 괴물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때, 듣기 편안한 미성이 부드럽게 광장을 울렸다. 전혀 크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기묘한 소리로, 법술임이 분명했다.

- 도우들, 오늘 이렇게 많이 자리해 주어 고맙습니다. 정말로 제 체면이 서는군요.

따지자면 강의하며 베푸는 것은 그 결단기 여자 수사일 텐데, 어차피 강의하기로 했다면 최대한 많은 사람이 들어야만 한다는 그런 사고방식이 담긴 인사였다.

- 제 소개는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몇 없을 것으로 생각되고, 설령 있다고 해도 강의를 듣는 덴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요.

그 거두절미하는 말을 시작으로 바로 강의가 시작됐다. 오늘은 연단술의 기초를 한 번 짚고 넘어가겠다는 말에 한유진은 오히려 기꺼운 마음이었다.

오행종 유적에서 얻은 연단술 관련 서책을 전부 한 번씩은 읽어봤기에, 단상 위의 결단기 수사가 강의하는 내용이 아주 낯설진 않았다.

또한 그녀는 과연 결단기 수사답게 허공을 커다란 칠판처럼 사용하며, 아니, 단순한 칠판보다도 훨씬 더 다채롭고 유용하게 사용하며 강의를 진행했다.

마치 극도로 공들여 제작한 영상자료를 펼쳐 보이는 듯했다.

덕분에 한유진의 이해력이 발동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또한 그런 덕분에 단순한 서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혹여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겠다던 생각은 완전한 망상이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초월적 이해력이 결코 완벽지 못하다는 사실을 피부 생생히 깨달았다.

이해력 측면에서 완벽하지 못하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눈앞에 주어진 것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는 뜻이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수학 공식을 파악하는 일과 비슷했다.

어떤 수학 공식을 접했을 때 그것을 기호에 따라 정확히 계산해 낼 수 있다고 해도, 그 공식이 왜 생겨났으며 어떻게 유도되고 어떤 상황에서 창의적으로 응용될 수 있는지를 모른다면 결코 통달했다고 볼 수 없다.

'이래서 스승이 중요하다는 거구나.'

수선계의 길디긴 역사상 그 자신과 비견되는, 혹은 더한 이해력을 가진 천재가 분명 다수 존재했을 터다. 하나 그런 천재들 중 누구도 감히 수선의 길을 독학으로 걷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는 정신없이 강의 내용에 빠져들었다.

분명히 오늘은 기초를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강의를 하겠다고 했는데, 도저히 기초라고 느껴지지 않는 수준의 지식이 꽤 많이 나왔다.

결단기씩이나 되는 수사가 가르치는 일에 서툴러서는 아닌 듯하고, 수선사예가 어렵다 어렵다 하더니만 정말로 이 정도 난이도의 설명이 기초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핏 드는 감상으로는, 지금 듣는 강의 내용이 오행종 유적에서 얻은 연단술 지식보다 훨씬 더 뛰어난 듯했다.

'진짜로 어마어마한 기회가 맞구나.'

거의 희열이 느껴질 지경이다.

그 자신의 초월적 이해력이 결코 완벽지 못하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어쨌든 눈앞에 주어진 정보를 이해하는 데는 실로 초월적이라는 표현이 부끄럽지 않은지라, 그는 강의의 난이도에도 불구하고 전혀 뒤처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 이곳에 자리한 많은 입문기 수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대부분 어느 순간부터 눈이 풀리고 표정이 멍한 것이, 이야기가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오고 머릿속에선 온갖 잡념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 뻔한 모습이었다.

이 강의가 매우 실용적일 것이라던 카더라 소식을 믿은 참사처럼 보였다.

'아니면, 이 정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선 그 어떤 실용적인 기술도 배울 수 없단 뜻이겠지.'

연단술이라는 학문 기술의 특성이 그 결과물을 복용함으로써 효용을 누린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기본이 받쳐줘야 본인을 해칠 우려를 배제할 수 있을 터였다.

한유진은 작게 고개를 흔들어 그런 상념을 떨쳐내고는 좀 더 강의에 집중했다.

* * *

강의가 시작된 지 나흘째.

다행히 한유진은 계속 문제없이 천원성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며칠만 더 지나면 정중 금제가 복구되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지만 지금 당장은 매우 평화로웠다.

하지만 연단술 강의 상황은 별로 평화롭지 못했다.

첫날 그 많던 인파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반의반의반도 안 되는 숫자만이 남아 강의하는 결단기 여자 수사를 조금 기운 빠지게 만들었다.

첫날 많이 와줘서 체면이 선다던 인사말이 지금쯤 창피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반면, 한유진은 직접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부적술 강의가 날로 인기가 늘어 매우 성황이라고 들었다.

그쪽은 워낙 재료비가 싸고 결과물이 실패한다고 하여 수사에게 큰 해가 될 우려가 없는지라, 또한 그러면서도 성공한 결과물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지라 인기가 많은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애초에 부적술이 수선사예 중 하나로 꼽힌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오늘도 연단술 강의를 위해 그 결단기 여수가 단상에 올랐다. 한유진은 첫날과 달리 단상 가까이에 자리할 수 있었다.

- 오늘은 요수의 혈육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여 회복 영단을 만드는 기술을 강의할 겁니다.

확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회복 영단이란 단순히 육체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을 넘어 영혼의 상태도 일부 회복시켜 전투 지속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불현듯.

그 결단기 여수의 시선이 단상 가까이 앉은 한유진에게로 향했다. 강의하며 무심코 스치는 그런 시선이 아니라 명확한 흥미를 띤 시선이었다.

- 후배는 이름이 어찌 되나?

그제야 한유진은 이 연단술 강의 광장에 입문기 수사가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4화. 요족 공격

어떤 이름으로 답해야 할지는 뻔하면서도 뻔하지 않았다.

연비원이라는 이름을 대면 당장 신분 옥패를 활용할 수 있겠지만, 있는지 없는지 모를 연비원의 지인들이라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어차피 정중 금제가 회복되면 들킬 우려가 크다.

반면 자신의 본명이나 아무 가명을 댄다면, 신분 옥패를 제시하는 일조차 곤란해지겠지만 남의 신분을 빼앗아 사칭하다가 들키는 상황보단 나을지 모른다.

"연비원입니다."

그럼에도 한유진은 그렇게 답했다. 일단 연비원의 신분을 이용해 보기로 결정했으니 한번 끝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추후 다시 방문할 예정인 만큼 이참에 연비원이라는 자의 신분이 얼마나 유용한지 확인해 둘 필요성도 있었다.

- 열정이 있는 건 좋게 보인다만, 내 강의를 제대로 이해하고서 여기 있는 게 맞나?

"여태 강의해 주신 내용은 전부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 전부 이해했다고?

결단기 여수, 원백령에게서 살짝 불신의 기색이 드러났다.

강의가 시작된 날로부터 나흘째인지라, 당연히 한유진은 딱히 열심히 조사하지 않고서도 상대방의 이름과 신분을 알 수 있었다.

원백령이라는 결단 초기 여수는 본인이 연단술 대사의 실력을 갖췄음과 동시에, 원영 후기 연단 대종사 복창광의 적전제자라는 대단한 배경까지 갖춘 인물이다.

그리고 복창광이 원로로서 속한 태청궁은 지나가면서 듣기론 여러 세계에 걸쳐 세력을 뻗은 초거대 초강력 수선종문이었다. 무려 합체기 태상장로가 자리 잡고 있다고 했으니까.

입문기 이후 법혼기 이후 결단기 이후 원영기 이후 화신기 이후 합체기다.

공법에 따라선 화신기와 합체기 사이 연허기라는 경지가 특별히 더 존재하기도 한다던데, 어쨌든 그 위로는 도겁기와 진선기만이 존재하는, 수선계 전체로 따져봐도 그 위상이 절대 가볍지 않은 무시무시한 존재가 바로 합체기 수선자였다.

- 화속성 영식을 가공할 때 굳이 화정 용해 법문이 필요한 이유는?

"첫 번째로는 같은 화속성이라 가공하면서 손실되는 기운을 최소화할 수 있고, 두 번째로는 해당 화정 용해 법문 중 이것과 이것이······."

한유진은 조금 곤혹스럽다고 느끼면서도 침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상대가 강의하면서 이용하는 방식대로, 허공에 간단한 법문 응용으로 빛을 그려내면서였다.

질문 자체는 간단하게 답변할 수도 있었지만, 한유진은 상대의 의도를 짐작하여 관련된 강의 내용을 줄줄이 읊어 나갔다.

"······하여, 추후 융합 과정에서 이 법문은 자칫 앞서 사용된 정화 법문 두 종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법문과 충돌했을 땐 이렇게, 조합하면 의도적인 추가 상극효과를 일으키면서 불안정한 영력 파동을 진정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하나 이 조합 과정에서 또 주의해야 하는 점이, 만약 그 화속성 영식의 독성이······."

- 그 정도면 됐다.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군.

결단기 여수는 손을 내저으며 한유진의 답변을 중지시켰다. 이미 충분히 만족한 기색이었다.

주변의 많은 법혼기 수사들이, 그리고 일부 결단기 수사마저 한유진에게 꽤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 입문 중기에 불과한 듯한데, 언제 그런 연단 법문 지식을 쌓았느냐?

"후배가 관심이 있어 평소에 틈틈이 공부해 왔습니다."

- 네 신분 옥패를 줘보거라.

한유진은 조금 긴장한 채 자신의 허리춤에서 옥패를 떼어내 어물술로 날려 보냈다. 그걸 부드럽게 잡아든 결단기 여수는 힐끗 한유진을 한 번 쳐다보곤, 자신의 저물대에서 무언가를 꺼내 옥패와 같이 돌려보냈다.

웬 서책이었다. 제목은 단순한 '연단초해'였고 새것처럼 깨끗하면서도 어딘가 손을 탄 느낌이 있었다.

- 내가 입문기 때 공부하던 책이다. 주석도 적혀 있으니, 만일 네가 그것을 다 익힌다면 그때 나를 찾아오거라. 혹은 태청궁으로 직접 찾아와도 좋다. 외문제자로 받아주마.

"헉······."

그 헛숨 들이켜는 소리는 한유진이 낸 게 아니었다. 곁에 있던 한 법혼기 수사가 낸 소리였다.

그저 흥미와 약간의 감탄을 담아 한유진에게 쏟아지던 시선이, 일순간에 부러움과 질시 섞인 강렬한 느낌으로 돌변했다. 다들 워낙 비범한 인물들인지라 거의 찔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가, 감사합니다."

한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당황하여 살짝 말을 더듬었다. 하나, 그런 반응이 정말로 감격한 모습처럼 느껴졌는지, 상대 원백령은 꽤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이었다.

- 아직 젊고 연단사로서의 재능이 있으니, 이 정도를 챙겨주는 일쯤이야 별것 아니지. 방심하지 말고 정진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 그럼······ 강의를 진행하겠습니다, 도우들. 잠시 시간을 끌어 미안합니다.

예의상 사과를 한 원백령이 평소처럼 강의를 시작했다. 그에 한유진은 바로 집중하면서도 한편으론 살짝 잡념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결단기 수사가 입문기 시절 주석을 달며 공부하던 서책이라니······'

겨우 입문기 때 공부하던 내용이라지만, 어쩌면 바로 그렇기에 더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별 친분도 없는 자에게 그저 재능이 좀 보인다는 이유로 이런 걸 턱 넘겨줘도 되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내가 그렇게 잘했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이 넓은 광장에서 입문기 수사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재차 고려해 봐야 했다.

'연단사의 희귀성도 한몫했겠군.'

주석을 단 서책 정도로 호감을 사 끌어들일 수 있다면, 적어도 손해는 아닐 것이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만 보더라도 확실히 연단술은 배울 가치가 있다.

잡념을 마무리하며 한유진은 좀 더 강의에 집중했다.

* * *

결단기 수사, 원백령이 건네준 연단초해 서책은 확실히 보물이라고 할만했다. 오행종 유적에서 얻은 연단술 관련 서책은 이것과 비교하면 그냥 쓰레기였다.

쓰레기라는 표현이 조금 심하다면, 유아용 학습책 정도로 순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깊지 못한 수박 겉핥기식의 내용만을 담았다는 뜻이다.

어쨌든 그렇기에 한유진은 강의가 없는 시간에도 그 연단초해를 읽으며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강의를 직접 듣는 것만은 못했지만 곳곳에 달린 주석들 덕에 조금의 허술함도 느낄 수 없었다.

'이 정도 알았으면 그 원시림의 많은 영재(靈材)들을 더 효율적으로 섭취할 수 있겠지.'

무엇보다 이전에 얻은 혈목정과양조술을 제대로 활용할 수도 있을 듯했다.

그저 혈목정과의 편의성에 주목하여 수확물로 선택했던 것인데 이런 이득이 생길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원시림에 어떤 재료가 있는지 다시금 살펴봐야 확신할 수 있겠지만, 몇 번 실패하더라도 어떻게든 레시피를 한 번 완성하기만 하면 이후로 쭉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아마 법혼기에 오른 뒤에도 적잖은 도움이 될 터였다.

그렇게 나흘이 더 지났다.

슬슬 연단술 강의의 난이도는 법혼기 수사들마저 상당수 나가떨어질 만큼 어려워졌다.

한유진도 초월적 이해력에 힘입어 간신히 머릿속에 담기만 했을 뿐, 강의 내용을 떠올릴 때마다 이것저것 뒤섞여 혼란스러운 느낌이라 완전히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하나 사실 그 정도까지 따라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기에, 이제 원백령은 한유진을 자주 쳐다보면서 때때로 대견하다는 듯 미소 짓기까지 했다.

상대가 자신을 손가락질 한 번에 없애버릴 수 있는 결단기 괴물임을 알면서도, 나이도 최소 백 살이 넘었을 것을 알면서도 순간순간 마음이 설렐 때가 있었다.

그만큼 원백령이라는 결단기 여자 수사의 미모와 분위기는 특출난 데가 있었다. 수사에게 범인의 나이 기준을 가져다 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고 말이다.

'여기 출석하는 놈들 중 못해도 1할은 저 여자 미모를 감상하려고 오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하나 그렇게 좋은 날도 다 지나가서, 강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와중 한유진은 불현듯 피부가 저릿해지는 느낌과 함께 모종의 광범위한 영적 파동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오······ 정중 금제가 드디어 복구된 모양이군!"

"지금껏 요족이 공격해 오지 않아서 다행일세."

주변을 지나던 수사들의 대화를 들은 한유진은 자신의 허리춤에 걸린 옥패를 절로 쳐다보게 됐다.

'슬슬 결과가 나오겠구나.'

중앙정보처리 시스템 역할을 하는 정중 금제가 복구되고서도 계속 이 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주의했음에도 결국 발각되어 첩자 따위로 의심받게 될 것인가?

그렇게 조금 걱정되면서도 궁금한 마음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때.

직전과 비슷하게 광범위하지만 훨씬 더 강력한, 마치 머리통에 돌을 얻어맞은 듯 충격적이고 사람을 기겁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법술적인 경고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그 경고음들을 곧장 짓눌러 으스러뜨리는 듯한 심어(心語)가 한유진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 이제 죽을 시간이다, 인간 버러지들아.

얼핏 담담하게 말하는 것 같았으나 진득한 살의와 잔혹함이 담긴 어조였다.

마치 그 선언을 기다렸다는 듯, 방금 복원되었을 정중 금제의 파장이 이상하게 점점 더 흔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천원성을 뒤덮으며 펼쳐졌던 푸른빛 보호막이 기이한 황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저, 저거 뭐야?!"

"금제 방어막이······?!"

주변 수사들이 매우 당황하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당연하게도 보호막은 그저 색만 이상하게 물든 것이 아니었다. 한유진은 그 보호막이 변색되는 속도에 따라 주변 영기가 함께 변질되면서 호흡이 어려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요기(妖氣)인가?'

정중 금제에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게 틀림없다. 그리고 상황의 공교로움을 보면 방금 그 무지막지한 심어를 날린 요족의 음모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다들 바보가 아닌지라 상황의 위태로움을 눈치챈 듯했다.

하나 그렇게 당황하고 다급한 기색이면서도 정신없이 움직여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이었고, 당연히 한유진도 적당히 눈치를 보며 그들과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죽지 않으려면 여기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이들과 힘을 합쳐 싸워야 했다.

그렇게 풍운술을 펼친 채로 날듯이 움직여 일단의 수사 무리와 함께 성벽 근처까지 도달했을 때.

황색으로 변질되다 못해 곳곳이 누더기처럼 구멍이 뚫리며 기이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보호막 바깥쪽, 굉장히 먼 거리일 텐데도 워낙 거대한지라 그 모습이 아주 잘 보이는 웬 익룡 한 마리가 나타났다.

당연히 그냥 익룡이 아니었다. 곳곳을 귀금속으로 장식한 채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타버릴 듯한 어마어마한 요기를 뿜어내는 존재였다.

그 요족은 별다른 괴성 따위 없이 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날개를 펄럭이며 한껏 벌리는 입 바로 앞에서 금빛 구체가 뭉쳐 든다 싶더니, 그것이 빠르게 덩치를 부풀리며 천원성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아직 닿으려면 멀었는데도 일대의 수분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용광로에서 뿜어지는 듯한 열기가 사방을 잠식했다. 대기가 아지랑이처럼 끓어오르는 게 보일 정도였다.

한유진은 다급히 옥피술을 시전하고 오행검의 수계 법문 금제로 몸을 덮었지만, 새어 나오는 비명을 참지 못했다. 물이 끓어오르면서 오히려 더 뜨거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냥 바로 죽는 게 낫겠다. 어차피 못 살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초월적인 열기와 고통이었는지라, 정말로 그걸 행동으로 옮기기 직전.

천원성 중심부에서 한 인간 수사가 빛살처럼 쏘아져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겨우 이따위 수작질을 믿고 있었느냐!

이번의 심어는 머릿속을 거대하게 울리는 건 같았으나 그것이 매우 시원하고 쾌적한 느낌으로 모든 혼란과 두려움을 싹 날려버렸다.

이어 쏘아져 나간 인간 수사의 신형이 떨어져 내리던 금빛 화염체와 맞닿는 순간.

실로 형언할 수 없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더 이상 빠를 수 없을 듯한 속도로 고리형 충격파가 지평선을 뛰어넘을 기세로 퍼져 나가고, 금빛 구체의 등장에 안 그래도 확 밀려났던 구름들이 완전히 찢어발겨져 스러진다.

허공이 통째로 출렁이는 파동과 함께 마치 하늘 자체가 폭풍우 속 바다처럼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천원성 성주 구소보.'

화신기 수사의 실력 행사가 분명했다.

25화. 이상 감지

한유진은 단지 그 여파를 제외하면 둘의 전투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제대로 살필 수 없었다.

마치 용의 구슬을 모아 소원을 비는 어떤 만화에서 초반에 잠깐 나왔다가 쩌리가 되어버리는 한 조연의 시점으로 전투를 보는 듯했다.

빛이 번쩍이고 정체가 뭔지 모를 궤적이 잔상처럼 수십 넘게 남는다.

연신 뿜어져 나오는 충격파와 함께 하늘이 뒤흔들리는 듯한 현상이 채 가시기도 전, 웬 시커먼 탑 하나가 나타나 익룡의 머리 위에서 오묘한 빛을 뿜어내는가 싶더니 투박한 석검이 나타나 그 탑을 후려쳐 빛으로 무너트리고 익룡이 브레스를 뿜는다.

그 브레스가 무언가에 의해 반으로 쪼개졌다 싶은 순간, 익룡은 어마어마한 괴성을 터뜨리고 날개를 펄럭이며 일시에 엄청난 거리를 돌파해 움직였다. 그러면 어디서 터져 나왔는지 모를 청명한 금속음이 흩뿌려지며 익룡의 포효를 상쇄시켰다.

제대로 알 수 있는 건 그 둘의 전투가 용호상박으로 매우 치열하다는 점이었으며, 느껴지는 영기와 요기의 파동이 한 수 한 수가 산을 쪼개는 위력이 담긴 것 같다는 점뿐이었다.

'제대로 힘을 모아서 공격하면 그냥 산이 아니라 태산도 쪼개겠구나.'

안타깝게도 한유진은 그런 화신기 강자들의 전투를 오래 감상하지 못했다. 그 둘의 전투와는 별개로 천원성을 향해 수많은 요족이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벽을 사수하라-!!"

누군가의 법술을 통한 목소리가 전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수사와 요족의 전쟁에서 성벽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싶겠지만, 그것이 어떤 방어금제를 활성화하는 매개체임을 알고 나면 바로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처음 정중 금제가 변질되며 느껴졌던 위기감은 화신기 수사이자 이곳의 성주인 구소보가 등장함으로써 상당량 희석됐다.

한참 위 상공에서 벌어지는 위대한 전투가 절로 사람들의 전의를 북돋는 효과를 내고 있었고, 한유진도 자연스럽게 그에 영향받아 용기백배하게 됐다.

'이참에 내 실력이 얼마나 통하는지 한번 봐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성벽에 오른 그는, 성벽 너머 지평선에서부터 가히 해일처럼 몰려들고 있는 각양각색의 요족 공세를 보며 절로 입이 벌어지고 등골에 전율이 흘렀다.

이제야 하나의 세계를 전선으로 삼아 벌어진다는 대전쟁의 진면모를 살짝 엿본 듯했다.

- 키야아아아악-!!

그때가 마침 한 요족이 허공을 낮게 비행하여 구멍 숭숭 뚫린 정중 금제 방어막을 통과해 들어올 때였다. 한유진과 주변 수사들의 공격이 일제히 그 맹금류를 닮은 요족에게로 쏘아졌다.

대부분 법기를 사용한 공격이었고, 한유진도 오행검의 법문 금제를 조작하여 금색 기운을 쏘아내는 공격을 했다.

기세 좋게 들이닥쳤던 그 맹금류 요족은 머릿수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불쌍할 만큼 처참해진 몰골로 성벽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하나 그사이 다른 수 마리의 요족들이 제각각 다른 위치에서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 크히히히힉···!

인간과 비슷하지만 외눈박이인 데다가 머리가 셋인,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의 키클롭스를 닮았지만 팔까지 세 쌍이나 달린 삼두육비의 괴물이 침입하여 여섯 개나 되는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법술은 그냥 몸으로 버텨내는 모습이 터프하기 짝이 없다.

마침 한유진이 그 근처에 있었기에 다른 곳에서 침입하는 요족의 모습을 살필 새가 없었다. 그는 온 집중을 다해 주변 수사들과 협력하여 그 괴물을 죽이거나 쫓아내려 했다.

콰콰콰쾅-! 파가각!

"허윽···!"

한 수사의 법기를 통한 방어막을 요사스런 금빛 번쩍이는 무기가 폭풍처럼 날아들어 후려친다. 얼마나 빠른지 거센 바람이 몰아치면서 잔상이 흩뿌려지는데, 한 번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뜯겨나가고 뼈가 조각날 기세였다.

안쪽의 법혼기 여자 수사가 괴로운 듯 칠공에서 피를 터뜨리며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새, 다른 수사들은 그 아군을 구하고 본인이 공격 목표가 되지 않기 위해 전력으로 공격을 가했다.

온갖 법기를 통한 공격과 법술이 날아가 그 삼두육비의 괴물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간다. 그중 한 공격은 벼락처럼 굉음을 터뜨리며 쏘아지더니 기어코 놈의 팔 하나를 끊어내기까지 했다.

하나 그런 위중한 부상에도 놈은 기어코 두들기던 보호막을 깨트리고는, 그 안쪽의 수사를 검으로 푹 꿰어들어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누가 말리거나 저지할 새 같은 건 없었다.

아드득-!

사람의 머리통이 외눈박이 삼두육비 괴물의 입안에서 과일처럼 으스러진다. 피와 뇌수가 입가로 질질 새어 나오고, 놈은 계속해서 수사의 남은 신체를 과육처럼 뜯어먹으면서 나머지 손에 든 무기로 날아드는 공격을 모조리 쳐내고 흘리며 급히 물러서는 모습이었다.

그 놀라운 신체능력과 무기술에도 불구하고 감탄보단 잔혹함에 구역질하게 된다. 심지어 그렇게 죽은 수사가 한유진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법혼기 경지라는 점에서 더 처참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공격은 그 괴물 같은 요족의 피부조차 제대로 긁어내지 못했다. 구릿빛 광채에 전부 막혀 흡사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했다.

화신기 수사의 등장과 울려 퍼졌던 심언, 그리고 벌어진 웅장한 전투로 인해 잠시 끓어올랐던 전의가 싸늘하게 식는다.

'장생을 위해 수련한다는 자들이······ 사방에서 개미처럼 죽어 나가고 있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겪는 전장의 참혹함과 광기였다.

요족들의 모습도 무시무시했지만 그런 요족들을 상대로 물러설 기색이 전혀 없는 인간 수사들의 모습도 한유진의 눈엔 괴물처럼 무시무시했다.

지금은 같은 편이라지만, 추후 저런 이들과 마찰이 생겨 싸우게 된다면 얼마나 지독한 태도를 보여줄지 저절로 예상이 된 탓이었다.

바로 그렇게 안색이 안 좋았던 탓일까.

아무래도 그런 약해 보이는 대상은 아군보단 적군의 눈에 더 잘 띄는 모양이었다.

정중 금제 보호막 내부로 침투하여 허공을 날아가던 사마귀와 전갈을 섞어놓은 것 같은 생김새의 요족이 불현듯,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그를 향해 내리꽂혔다.

한유진은 본능적으로 옥피술을 시전하고 오행검의 종 형상 방어막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공격을 방어하는 즉시 그 방어막을 폭발시켜 적을 난도질하려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미 놈의 낫 같은 팔이 종 형상 방어막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고는 한유진의 코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씨발.'

그 욕설을 미처 내뱉을 새도 없이 거대한 충격이 덮쳐드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모든 시야가 암전됐다.

- 당신은 죽었습니다.

한유진은 조금 허탈해진 상태로 그 신비롭게 떠오르는 은빛 문자들을 바라봤다.

- 수확물을 선택하십시오.

* * *

수확물로 선택해야 하는 건 당연히 결단기 수사 원백령에게서 받은 연단초해 서책이었다. 옥패 등의 물건은 현실에서 거의 쓸모가 없다.

그렇게 침대에서 깨어난 그는 옆에 나타난 연단초해 서책을 들고 잠시 상념에 잠겼다.

비록 허무하게 죽어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 이세계 방문은 원래 목표했던 바를 아주 잘 충족시켰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리 오래 체류하고 싶지 않다던 바람마저 충족된 셈이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적절한 시기에 잘 죽은 것 같네.'

연비원의 신분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 테스트해 보겠다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어쨌든 정중 금제가 무력화된 시기를 매우 잘 이용해 먹었다.

'심지어 죽을 때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

아주 잠깐의 저항조차 못 한 데서 오는 엿 같은 무력감만 뺀다면, 그보다 더 깔끔하게 죽기도 어렵다. 적어도 누구처럼 머리통이 산 채로 씹히지는 않았잖은가?

그 장면을 생각하니 다시 속이 안 좋아지는 듯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나도 여러 방식으로 죽어본 사람이야.'

그중 하나는 웬 무시무시한 귀신에게 큐브 스테이크 무더기로 화하기도 했다.

생각하며 그는 대강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 연단술 강의로 쏠쏠한 이득을 봤으니, 이삼일 정도 그 배움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 후 다시 천원성을 방문하여 다른 수선사예 강의를 들으면 좋을 듯하다.

'천원성 공개 강의 내용들만 다 배워놔도 법혼기까지 그럭저럭 써먹을 수 있겠지.'

수선사예가 아닌 법술 수련에 대한 욕심도 나긴 했다.

그 천원성에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힘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자신과 같은 경지임에도 더 뛰어난 공방 능력을 펼쳐 보인 수사들을 몇 목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던 한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죽은 건 익힌 법술의 가짓수나 숙련도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냥 상대의 힘이 그 어떤 수단으로도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만약 그래도 법술을 익힌다면, 역시 숨고 도망치는 것부터 익히는 게 좋을 거 같다.'

계속 생각해 보자니 그 전투에서 자신은 입문기에 불과할 뿐인데도 너무 드러나 있었다. 은엄폐에 최선을 다해도 모자랄 시간에 말이다.

마냥 도망쳐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더 오래 적을 막으면서 결과적으로 더 큰 기여를 하게 되지 않겠는가?

여태 경험한 싸움과는 완전히 다른, 처음 겪는 대규모 전쟁 속 혼전이었으니 꼭 어리석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다행히 그는 기회가 많았고 다음번엔 더 잘할 수 있을 터였다.

'현실에서만 바보짓을 안 하면 돼.'

그렇게 이번 모험의 성과 정리를 마무리한 그는, 현실에서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우선순위를 매기기 시작했다.

* * *

할 일이 많았다.

법술 지식을 따로 정리하는 일은 어렵진 않아도 시간이 많이 필요했고, 그와 관련하여 이능관리국의 계약서 샘플이 도착해 검토를 위한 실력 있는 변호사를 찾기도 했다.

이능관리국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워낙 중대한 사안인지라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막상 법률 전문가의 검토까지 마치고 나자 기분이 한결 상쾌했다.

그 와중 천원성 강의로 얻은, 그리고 수확물 선택으로 얻은 연단술 지식을 소화하는 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혈목정과양조술과도 연계하여 소화하느라 더욱 그런 면이 있었다.

당연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고, 헌터 전문학교의 야간반 사전교육이 시작됐다.

생각 외로 수업을 받는 사람이 많아서 스물이 조금 넘었다. 아무래도 각성한 지 꽤 오래된 사람도 이런저런 사정 탓에 지금에서야 교육을 받는 경우가 있는 듯했다.

교육 내용은 전혀 부실하지 않았다.

겨우 나흘이 됐을 뿐인데도, 헌터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상식에서부터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포함하여 각종 위험에 직면했을 때의 대처법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내용을 배웠고, 유념해야 할 법률 지식 일부와 의무 사항 따위도 알게 됐다.

짧은 교육 기간 내에 최대한으로 압축해 놓은 듯, 내용이 부실하긴커녕 살짝 과하다는 느낌까지 든다.

앞으로 이런 교육이 열흘 이상 남았고 중간과 마지막에 엄격한 시험까지 치른다고 생각하니 새삼 고3 시절이 떠오를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정리하고 소화해야 할 지식이 많았는지라 더더욱.

어쨌든,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균열 처리에 나서면서 주의해야 할 점들이었다.

'모든 안전 수칙은 피로 쓰인다더니.'

그런 생각이 절로 떠오르는, 하나하나 관련 사례가 존재하여 왜 그런 주의점이 존재하는지를 잘 이해하게 만들어 주는 교육 내용이었다.

조금 낯설긴 해도 매우 바쁘고 충실한 나날이었다. 이변이랄 게 딱히 없는.

단 하나, 이상하게도 이틀 전부터 도착하지 않고 있는 민간 조사 의뢰 보고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오늘도 교육이 끝난 밤늦은 시간.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 한유진이 생각했다.

'오늘이 계약한 일주일의 마지막 날인데······.'

설마 떼먹힌 건가 싶었지만 그전까지 충실한 내용의 보고서가 따박따박 왔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뭔가 다른 사정이라도 생긴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벌써 이틀이나 기다린 것이었다. 상황에 따라 하루이틀 정도는 딜레이될 수도 있겠거니 싶었어서.

하지만 더는 기다려줄 수 없다. 여기서 더 조용히 기다리면 호구가 따로 없을 것이다.

'오늘까지도 안 오면 내일 업무시간에 바로 전화해야겠다.'

생각하며 그는 뭐 별일이야 있을까 싶었다.

대한민국의 이능범죄 발생률은 세계적으로 1, 2위를 다툴 만큼 낮고, 검거율은 반대로 세계 3위권 안에 들 만큼 높았으니까.

높은 검거율은 수사해야 할 범죄 건수가 적어서 인력이 더 집중적으로 투입될 수 있는 덕분이겠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높은 검거율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택시 유리창 너머로 흘러가는 야경을 보던 한유진은 문득, 종말 후 지구의 그 학교에서 마주쳤던 강력한 귀신, 원희를 떠올렸다.

피부에 살짝 소름이 돋으면서 절로 한 가지 우려가 함께 떠올랐다.

정말로 별일 없는 걸까, 하는 그런 불길한 생각이었다.

26화. 예상치 못한 카르마

원룸에 도착해 들어서기까지 머릿속이 매우 복잡했다.

온갖 상상이 마구 휘몰아치면서, 한유진은 원래 평온하게 느껴져야 했을 밤거리를 조금 긴장한 채로 이동해야만 했다.

'여긴 현실이야.'

다시 시작할 수 없고 죽으면 침대에서 깨어날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더 조심하게 된다. 그건 원룸에 들어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커튼을 치고 불을 끈 상태로 컴퓨터 전원을 켠다. 그렇게 확인한 메일함은 여전히 아무것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라 더 불길함을 가중시켰다.

'단순 태업이거나 먹튀일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서울 중심지 번화가에 번듯한 사무실까지 차린 곳이다.

리뷰를 살폈을 때 한두 해 영업한 것이 아니었고, 단순 태업이라기엔 평이 좋기도 했으며 이전까지 보내오던 보고서의 양과 질 또한 매우 훌륭했다. 그가 먹튀를 걱정할 만큼 대단한 금액의 건수를 맡긴 것도 아니었고.

뭔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물론 걱정처럼 그 사이비종교에 의해 어떤 해를 입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가령, 가족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 연락할 경황도 없이 병원에 가 있다거나.

'아니야.'

만약 그런 일이었다면 그래도 고객들에게 연락 정도는 했을 거다. 벌써 사흘이나 지났잖은가.

'혹시 본인이 사고를 당했다면?'

그것도 생각해 보니 아닌 듯했다. 탐정사무소 직원 전부가 일시에 같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팀장이 부재하게 됐을 때 다른 직원 누군가가 반드시 뒷수습을 했을 터였다.

'진짜로 그 사이비종교 놈들한테 무슨 납치라도 당했나? 사무소 인원들이 전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려 할수록 점점 더 이상한 점들이 부각된다. 하나 그렇다고 정말 그 사이비종교 놈들이 무슨 짓을 했다기엔, 사실 그것도 상식에 안 맞았다.

사람 한 명도 아닌 여럿에게 손을 대면 그게 얼마나 큰 파장으로 번지게 될진 아무도 모른다. 여기가 무슨 갱단이 활개 치고 다니는 남미의 어느 후진국도 아니고, 사이비종교 놈들이 아무리 무식하더라도 그런 계산조차 못 할 리는 없다.

'만약 그런데도 정말 손을 썼다면 필시 그만한 이유가······.'

어쩔 수 없이 재차 떠오르는 건 그 귀신 원희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채 열 살도 안 되었을 터다. 그러니 아예 영원고등학교 및 사이비종교와 일체의 접점이 없을 수 있다. 설령 접점이 있더라도 나이를 고려하면 이번 사태와는 연관이 없을 것이다.

'내가 그 사이비종교를 너무 심하게 경계하는 건가, 지금?'

객관적으로 보자면 별 유명하지도 않은 일개 사이비종교에 불과했다. 종말 후 지구에서도 단지 그 학교에 강력한 귀신이 있었을 뿐이고.

한데 주관적으로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 원희는, 단지 거기에 강력한 귀신이 있었다는 정도로 넘어가기 매우 힘든 존재였다.

'그래서 조사를 맡겼지. 돈으로 카르마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돈이야 앞으로 많이 벌 테니까, 미래에 그런 강력한 귀신이 등장하게 될 장소라면 뭔가가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하필 그 학교의 배후가 의심하기 딱 좋은 사이비종교였으니까.

그래서 조사를 맡겼다.

전 세계적인 종말인 귀신 아포칼립스의 발생과 진행에 뭔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정말로 혹시 모른다는 정도에 불과했고.

한데 이런 문제가 생겨버렸다.

불확실한 부분이 너무 많고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고민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냥,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지금 제일 중요한 게 뭐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안전이다.

'내가 위험할 가능성이 존재하나?'

사이비종교 놈들이 정말로 탐정사무소 직원 전부를 건들 만큼 비이성적이고 무모하다면, 그 탐정사무소에 조사를 의뢰한 자신이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일단 계약서부터가 그 사무소에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유진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와 주소까지 적힌 계약서가.

'이런 내 걱정이 망상의 수준인가?'

상황은 그저 탐정사무소의 일일 보고서가 끊겼을 뿐이지만, 그리고 조사하던 대상이 무슨 조폭 무리도 아닌 사이비종교에 불과하다지만.

그는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안다. 미래 종말한 지구에서 그 종교와 연관된 곳에 얼마나 강력한 귀신이 자리 잡게 되는지를. 그러니까 이처럼 경계할 이유가 최소 하나는 있는 셈이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시간에 탐정사무소의 사람들이 모진 고초를 겪고 있을지도 몰랐다. 단순한 고초의 수준을 넘어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을지도 몰랐고.

한유진은 스마트폰을 잡아 들었다.

벌써 자정 무렵으로 매우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잠깐 고민한 끝에 이능관리국 담당 주무관의 번호를 통화 직전의 상태로 화면에 띄웠다.

"후······."

비유하자면 대략 그런 기분이었다.

갑자기 심한 가슴 통증이 느껴졌는데, 이게 그 위험하다는 심근경색의 전조증상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고, 119에 연락하자니 괜히 번거롭고 쪽팔리게 일 벌이는 거 아닌가 싶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진짜 심근경색일 확률은 낮은 듯하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자니 느낌상 불안하고.

'차라리 내가 그냥 어리석고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지.'

그는 과감하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설령 이게 바보짓으로 판명 나더라도 괜찮아. 나중에 이불킥 몇 번 하면 그만이야.'

생각하는 때,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살짝 우려했던 바와 달리 통화가 연결됐다.

- 네, 주무관 강민아입니다.

"한유진입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한유진은 잠시 말을 고르고는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 * *

어떻게 그 사이비종교를 알게 됐고 왜 조사까지 의뢰했는지는, 대충 지인과 연관된 사적 이유라고 뭉개며 넘어갔다. 그 사이비종교를 어째서 위험하게 여기는지도 거의 얼버무리다시피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나 다행히 담당 주무관은 그런 한유진을 추궁하지 않았다. 그리고 걱정했던 것처럼 엉뚱하다는 식으로 반응하지도 않았다.

- 우선 외출을 자제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안전에 신경 쓰시면서요.

"네, 그럴 생각입니다."

- 말씀하신 자료는 메신저나 메일로 보내주시면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

- 아닙니다. 한유진 씨가 그렇게 걱정하실 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설령 별일 아니더라도 조심해서 나쁠 게 없고요.

그 말을 듣자니, 앞서 혼자 고민하느라 무겁고 복잡해졌던 마음이 확 풀어지는 듯했다.

한유진은 몇 번 더 감사를 표한 뒤 통화를 종료하고 여태 탐정사무소에서 받은 자료들을 온라인으로 전송했다.

이후 원룸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시간이 흘렀다. 곧 연락 주겠다던 담당 주무관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대략 한 시간이 조금 안 지났을 때.

기다리던 담당 주무관의 연락이 메신저로 도착했다.

- 경찰 확인 결과, 보내주신 자료의 종교 건물에서 긴급 신고 두 건이 접수된 적 있었습니다. 당시엔 스마트폰 오작동으로 보고 넘어간 모양인데, 한유진 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나 보네요.

소름이 돋았다.

한유진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탐정사무소 사람들이 어떻게 된 건지 걱정하면서 물었다.

- 그밖에 다른 소식은 없나요? 그 긴급 신고가 누구 폰이었고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 스마트폰 주인은 그 아울 민간 조사 사무소의 강태혁 씨였는데, 다른 정보는 아직 없습니다. 경찰특공대가 출동 중입니다.

- 네? 경찰특공대가요?

- 사람이 거기서 실종된 정황이 뚜렷하니까요. 규모를 고려하면 이능범죄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고요.

조금 얼떨떨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만약 이능관리국 소속 공무원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신속하고 과감한 움직임이 가능했을 리 없다.

사실 그런 걸 고려하고서도 잘 안 믿겼다. 대한민국 경찰이 원래 이 정도로 빨랐던가?

- 추가 정보 들어오면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 네, 부탁합니다.

어쨌든 무려 경찰특공대까지 출동하고 있다니 더 마음이 놓인다. 이제 조심해야 할 건 혹시라도 그 사이비종교의 몇 미친놈이 이미 한유진 자신에게 접근해 오고 있을 가능성이었다.

비록 자신이 A급 헌터의 힘을 가졌다지만, 그는 각성 능력을 통해 많은 경험을 했는지라 조금도 방심하지 못했다.

'A급 헌터가 수선계에서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데, 만사가 불여튼튼이지.'

그는 조금 긴장되면서도 첩보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으로 외부 동정을 살폈다. 영안술을 잘 발휘하면 커튼을 들추지 않고서도 바깥 풍경을 살필 수 있었고, 심지어 벽도 어느 정도 투과해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런 이상 징조도 없었다. 그렇게 대략 삼십 분 정도가 더 흘렀을 때.

- 건물 지하에서 미처 정리가 안 된 대규모 마약 제조시설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메신저를 통해 온 소식에 한유진은 그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웬 마약······?'

불현듯 떠오르는 건, 예전에 커뮤니티에서 본 어느 힐러 헌터가 마약을 하다가 검거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각성 검사를 받을 때 혈액검사로 인해 잠깐 하게 됐던 생각이었다. 어차피 남의 일이라던.

바로 그 순간.

"어어······?"

한유진은 오묘하기 짝이 없는, 동시에 매우 벅차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끼면서 반사적으로 그런 소리를 냈다.

카르마였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처음 갖고 있던 양의 서너 배가 족히 넘는 카르마가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부터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 * *

예상치 못한 대량의 카르마를 쌓게 된 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감히 대한민국에서 '대규모'라고 칭해질 만한 마약 제조시설을 운영하던 놈들을 체포한 것도 분명 좋은 일이었고.

이로써 최근 기승을 부리던 마약 사건들이 확 잠잠해질지도 모르겠다.

하나.

안타깝게도 탐정사무소 사람들은 끝내 찾지 못했다. 마치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흔적이 전혀 없다고 했다.

단지 그 사람들뿐만이 아닌, 그 사이비종교의 고위층 핵심자들도 다 함께 유령처럼 사라졌다는 모양이었다.

'어쩌다가 마약에 대한 일을 탐정사무소 사람들에게 들키고, 입막음조로 일단 다 처리··· 하긴 했는데, 문제가 커질 걸 알고 도망친 건가. 제조시설은 옮기려던 와중 걸려 버린 거고.'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는 일이었다.

며칠의 시간이 흐르면서 추가적인 사실들이 더 밝혀졌다.

담당 주무관은 한유진에게도 중요한 정보를 공유해 줬다. 이번 사건의 주요 관계자로 여기는 태도였고, 뉴스 등을 통해 접하는 것보다 훨씬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였다.

그 사이비종교의 정식 명칭은 '영원의 여신교'였다. 또한 원래 한국에서 발원한 게 아닌 중국에서부터 흘러들어왔다는 듯했다.

하여 한국 경찰청과 마약수사대 등, 정부 기관 차원에서 중국 공안부와 세관 등에 정보를 넘기고 공조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마약을 제조하고 있었다면 중국에서도 그러고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국제 마약범죄 조직을 대상으로 당연히 취해야 할 조치들이다.

그 와중 한유진의 주변으로는 여전히 위험이랄 게 없었다.

아무래도 그 사이비종교 놈들이, 아니, 이제는 국제 마약범죄 조직으로 밝혀진 그놈들이 괜한 보복 따위를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고위층 핵심자들이 전부 도망친 마당에 그럴 여유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헌터 사전교육을 등의 일상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한유진은 별로 마음이 편치 못했다.

정말로 앞으로 계속 안전할지 의문이었고, 그 사이비종교가 마약범죄 조직이었다면 그 귀신 원희의 강력함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으며, 정황상 탐정사무소의 사람들이 다 죽은 듯하여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일종의 제보자로서 상당한 포상금을 받게 될 거라던 담당 주무관의 말은 딱히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 영원고는 이름을 바꾸게 될지도 모르겠네.'

오늘도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그런 잡생각을 하던 한유진은 결국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앞으로 계속 안전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면 힘을 키우면 된다. 그 귀신 원희의 정체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힘을 키우면 된다. 그 탐정사무소 사람들의 복수라도 해주고 싶다면 힘을 키우면 된다.

전부 다, 그냥 힘을 키우면 된다.

그리고 당분간 그는 카르마가 부족할 일이 없었으니.

중단됐던 원시림에서의 수련을 재개할 때였다.

27화. 다시 원시림에서

본격적인 헌터 활동이 거의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 이런 식으로 대량의 카르마를 얻게 될지 몰랐다. 여러 찜찜한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이건 확실히 반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카르마만 충분하다면 그는 한숨 자고 일어날 때마다 계단식으로 확확 강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성장은 특히 두드러질 예정이다.

계단 정도가 아닌 작은 절벽 수준으로.

'법혼기에 오르기 충분한 양이야.'

진정한 수선자라 부르기 조금 애매한 입문기를 벗어날 수 있다. 이미 A급 헌터 전력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법혼기에 오르면 분명하게 S급 헌터가 될 수 있을 터다.

사실 그런 등급보다는 자신이 그만큼 더 현실에서 안전해지리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S급 헌터는 전 세계적으로 채 백 명이 안 되는 최상위 강자들이다.

어지간한 화기로는 죽일 수 없고 본격적인 군사력을 동원해야만 상대할 수 있다고 평가받는, 하지만 상대가 개인임을 고려하면 시가지 등에 숨어들었을 때 제압할 방법이 거의 없다고 알려진 살아있는 전략병기들.

헌터는 군인으로서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국제협약이 사실상 이들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건 거의 상식이다. 많은 위정자들이 진정으로 우려하면서 견제하려는 대상도 바로 이들이고.

실제로 몇 후진국에서는 S급 헌터의 무력을 갖춘 이가 정권을 뒤집어엎고 독재자로서 군림하고 있다. 벌써 수십 년째 멀쩡히, 자신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반군'을 싹 쓸어버리곤 말이다.

'요컨대, 방심하지만 않으면 어지간해선 죽을 일 없어진다는 거다.'

그 사이비종교 국제 마약범죄 조직 놈들이 보복해 오든 말든 무사할 수 있다. 헌터 활동을 하면서도 안전할 수 있는 건 물론이다. 돈과 명성 따위는 지금으로선 부가적인 것들일 뿐이고.

'돈과 명성이 부가적이라니······.'

문득 한유진은 자신의 사고방식이 어느새 매우 수선자다워졌음을 깨달았다.

돈과 명성은 확실히 부가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장생하면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들이니까.

처음 각성을 염원했던 이유는 분명히 돈 때문이었는데, 막상 각성하고 보니 성장을 위해서라면 돈 따위는 마구 퍼부을 수 있는 사고방식을 저절로 갖게 됐다.

'물론, 그렇다고 돈과 명성에 아주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더 강한 힘을 갖게 될수록 누군가에게 음해 받을 걱정 없이 그것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터다.

대략 그 정도에서 상념을 마무리하며 한유진은 눈앞의 천변만화하는 문에 집중했다.

이번 수련을 위한 원시림 방문에는 사실 부가적인 목표가 하나 더 있다.

카르마 부족으로 인해 잠시 미뤄둬야 했던, 그 건방지고 쓸모없는 토끼 족제비를 통명어수결로 길들이는 것이었다.

'아마 그렇게 귀속시켜야만 수확물 선택으로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녀석은 분명히 지금이나 앞으로나 그에게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다. 하나 사람이 어떻게 항상 쓸모 있는 일만 하면서 살겠는가? 그냥 생각날 때마다 귀여워해 주면서 스트레스만 풀 수 있어도 충분하다.

원시림처럼 쉽게 외로워질 수 있는 곳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어쨌든.

지금 방문하려는 원시림의 장소와 시점을 어떻게 골라야 할진 명확했다.

'저번과 똑같이.'

만약 그 토끼 족제비 녀석이 습격당하기 직전 시점으로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때는 과거의 자신이 엄연하게 존재하는 만큼 될 리가 없었다.

꼭 동시간대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어떤 방식으로든 각성 능력을 통한 과거 개입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 내가 막 방문하려는 원시림에 먼 미래의 한유진이 미리 가서 쌓아놓은 선물 무더기가 있어야겠지.'

요컨대 같은 시간대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물론, 같은 장소에도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건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해지는 시간 역설 문제다.

그리고 사실, 한유진은 자신의 각성 능력에 대해 점점 더 깨닫게 되는 바가 있어 그런 시간 역설 문제를 고민하지도 않았다.

'내 각성 능력은 알면 알수록······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느낌이야.'

정말로 시뮬레이션이라는 게 아니라 느낌이 그렇다는 말이었다.

어느 한 세계의 특정 시간대를 완벽히 구현한 시뮬레이션을 체험한다고 생각하면 다 찰떡처럼 설명이 된다.

시뮬레이션에서 아무리 과거나 미래에 개입해 봤자 그게 원본에 영향을 끼칠 리 없다. 또한 그렇게 벌어진 사건들은 애초에 진짜로 존재한 적 없으니 다른 시뮬레이션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이미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상황에 다른 시뮬레이션이 개입해 오는 건 좀 이상하지 않겠는가? 시뮬레이션을 대상으로 또 시뮬레이션을 돌린다니, 그런 짓을 하는 순간 더는 시뮬레이션이 아니게 될 뿐이다.

'종말 후 지구의 과거 시점으로 문을 고정시키지 못한 건······ 시간 역설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

각성 능력을 다루는 데 아직 미숙해서일 수도 있고, 애초에 능력이 그런 한계를 가졌을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 당장 깊이 고민해 볼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자신이 처음 원시림을 방문했을 때의 그 장소와 시점으로 문을 고정시키는 일이었다.

그렇게 바람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정리한 한유진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문은 기대에 잘 부응했다.

마치 제대로 된 문명이 존재하지 않는 듯, 대충 돌덩이가 쌓이고 무성한 덩굴식물로 가려지기만 한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성공하리라 익히 예상했음에도 한껏 들뜬 기분이 된 그는 늘어진 덩굴식물 따위를 치우며 안으로 들어섰다.

혹은 밖으로 나왔다는 식으로 표현해도 문제가 없을 터였다.

사방 가득한 초목의 냄새,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들, 그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만들어 내는 어둑한 풍경 속 무수한 수풀들까지.

이곳은 그 끝을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광활한 원시림이다.

복장은 이전처럼 현대적으로 실용성 넘치는 탐험가 옷이었다. 그는 짙디짙은 영기를 흠뻑 들이마시면서 저물대 등의 물건을 허리띠에 착용했다.

"다 뒤졌다, 새끼들."

딱히 대상을 지정하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원숭이 괴물들과 늑대 짐승들이 머릿속에 잠깐 떠오르긴 했다.

미리 생각해 뒀던 바에 따라, 기억을 더듬으며 이동한 한유진은 어렵지 않게 그 나무 밑 뿌리가 드러나며 형성된 토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 한 명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처음 봤을 때의 바로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는 이거 파내느라 고생 좀 했었지.'

생각하며 그는 오행법술서로 알게 된 어지술을 펼쳤다.

쿠르르릉······!

은은하지만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가 나며 토굴이 저절로 넓어진다. 부산물인 흙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여 한유진의 좌우로 날아가 뒤편에 골고루 흩뿌려졌다.

일종의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실로 수선자의 고상한 풍모가 있지 않은가?

예전 그때보다 더 넓고 더 아늑한 느낌의 토굴을 만들어 낸 그는, 근처 암벽지대로 이동해 그때와 똑같은 돌덩이를 찾아 어물술로 허공에 둥둥 띄워 가져오기까지 했다.

기대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그 원숭이 괴물의 습격이었다.

'감히 나를 무섭게 했었겠다.'

괜히 웃음이 나는 기분으로 한유진은 생각했다.

'이번엔 내가 공포를 알려주마.'

이 사소하지만 통쾌할 것이 분명한 복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심력을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행여나 역으로 당할 걱정?

그런 건 어지간히 방심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선도에 입문한 지 불과 반나절 정도밖에 안 지났던 그때도 승리했는데, 이 영기 풍부한 장소에서 그는 자신이 패배하는 광경을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 * *

아늑한 구덩이에 앉아 회원공을 돌리고 있으려니 시간이 금방 갔다.

사위가 먹처럼 어두워진 한밤중.

원시림의 밤은 조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 가까운 곳의 풀벌레 소리,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야행성 산새 소리, 그보다 더 멀리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짐승의 하울링 소리 등.

어떤 면에선 굉장히 소란스럽고 치열하다 볼 수 있을 터다.

그런 장소에서 한유진은 딱 그때와 비슷한 기운이 풍기게끔 은영술을 펼친 상태였고, 놈이 올 것을 대비하여 바깥 동정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는 사실 그냥 복수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부가적인 목표인 토끼 족제비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하여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던 어느 순간, 한유진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바스락-

이어 과거 그를 화들짝 놀라게 만들었던 예의 그 낯선 소음이 들려왔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덜그럭-!

그때처럼 입구를 막고 있던 돌덩이가 크게 흔들렸다. 한유진은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손으로 틀어막으면서 오행검을 그쪽으로 겨눴다.

'넌 뒤졌다, 진짜로.'

물론 그때도 뒤졌었지만 이번엔 좀 다른 방식으로 뒤질 예정이다.

바로 그런 생각을 하는 때 꽤 무거운 수준의 돌덩이가 훅 뒤쪽으로 날아가 사라졌다. 이어 외부와 통하는 구멍으로 샛노란 눈동자를 빛내는 원숭이 괴물 얼굴이 보였다.

놈은 이상한 막대기를 겨누고 다른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모습의 한유진을 보더니,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듯 살짝 얼굴을 뒤로 빼는 기색이었다.

"어딜 갈라고, 이 혹성탈출 원숭이 새끼야."

마침내 한유진이 웃음기를 참지 않고 소리 내며 오행검의 법문 금제를 작동시켰다.

회청색 빛이 흐르고 검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매서운 바람이 그 원숭이 괴물을 후려쳐 쓰러트렸다. 그리고 놈이 채 비명 지를 새도 없이 마구 휘몰아치며 정신없게 만들었다.

바람에 섞인 보이지 않는 칼날들이 제 털가죽을 연신 스치는 걸 못 느낄 리가 없다. 놈은 자신이 상대를 잘못 건드렸음을 깨닫고는 완전히 당황한 눈빛이었다.

"무섭냐? 응?"

한유진은 그런 놈을 위협하며 뒤로 물러서게 만들고는, 아주 느긋한 태도로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완전히 겁에 질려 웅크린 원숭이 괴물을 내려다봤다.

"나도 그때 존나게 무서웠다. 이걸 확 그냥!"

검을 치켜올리며 법문 금제를 자극하자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한층 더 흉포해진다. 원숭이 괴물이 화들짝 놀라 웅크리는 모습이 꽤 우스우면서도 불쌍하다.

"어쨌든 그때도 내가 이겼었으니까, 고문은 안 하마."

사이코패스도 아닌 한유진이 그런 걸 좋아할 리 없다. 그는 단지 예전의 겁에 질렸던 기억을 통쾌하게 되갚아줬다는 감상만 느끼면서 오행검을 까딱 움직였다.

한 줄기 날카로운 풍검이 급속도로 쏘아져 놈이 채 반응할 새 없이 참수해 버렸다. 연이어 뿜어져 나온 화염은 그렇게 참수된 머리통만을 주변 수풀 따위와 함께 불태웠다.

몸뚱이를 보존한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그때처럼 탄 내를 풍기는 건 좋지만, 고기까지 태워버리는 건 아무래도 아깝지.'

머리는 어차피 비위상 못 먹는 부위라 함께 처리했고, 도축은 나중에 하면 될 것이다. 피 냄새로 토끼 족제비 놈들을 유인도 할 겸 말이다.

그는 다른 원숭이 괴물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당시와 비슷한 자리에 우뚝 섰다. 당연히 만만해 보이도록 은영술을 유지한 채로였다.

'내가 먼저 이렇게 유인했든 아니든, 공격해 오는 놈은 다 죽일 거다.'

상대를 죽이려 했으면 자신도 죽을 각오를 해야 마땅하다는 아주 당연한 논리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자연의 이치였다.

잠시 후.

생각보다 빠르게 그 원숭이 괴물 일곱 마리가 나타났다. 그때는 워낙 긴장한 상태였는지라 시간을 더 길게 느꼈던 모양이다.

어쨌든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처음 화탄술을 배우면서 했던 생각인데, 이거면 원숭이 괴물들을 한 방에 기선제압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반갑다, 이 새끼들아."

그래서 한유진은 딱히 망설이지 않았다. 오행검을 옆 허공에 띄운 상태로 오른손에 화탄술을 만들어 근처 바닥으로 던진 것이었다.

콰콰쾅-!!

작정하고 던진 법술의 섬광과 폭음은 과연 굉장했다. 동족이 당했다는 복수심 때문인지 흉성 가득하던 놈들이 기세가 확 죽으면서 움찔 떠는 모습이었다.

한유진은 그런 놈들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왜, 그때처럼 포효 한 번 질러보지 그래?"

고함도 아닌 그냥 여유롭게 내뱉은 말이었다. 한데 놈들은 그에 더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여 한유진의 미소를 한층 짙게 만들었다.

"설마 도망칠 거냐? 여기 너희 영역 아니었어?"

짐승은 자기 영역을 침범당했을 때 쉽게 도망치지 않는다. 다른 영역에 가서 자리 잡으려면 어차피 싸워야 한다는 걸 본능적 차원에서 알기 때문이다.

- 쿠와아아아아악-!!!

그 순간 한 원숭이 괴물이 예의 포효를 내질렀다. 명백히 전의를 북돋으려는 행위였고, 다른 원숭이 괴물들도 따라 포효를 터뜨리며 용감하게 한유진을 공격해 들어왔다.

한유진은 소리 내어 웃으며 오행검을 조작했다.

법문 금제가 섬광을 터뜨리고 금색 기운이 줄기줄기 쏘아져 달려들던 놈들을 차례로 도륙 낸다. 땅이 울리는 기세로 달려들던 놈들이 맥없이 쪼개져 나뒹구는 모습은, 뿜어져 나온 핏물과 내장 등이 아니었더라면 마치 환각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숨 한 번 들이켜는 사이 끝나버린 전투에 한유진은 시원하면서도 왠지 좀 허탈했다.

'그때 그렇게 무서웠던 놈들이······.'

역시 힘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 자신 역시 더 강한 상대를 만난다면 지금 저놈들처럼 허무히 죽게 될 터였다.

잠시 더 끝나버린 싸움의 현상을 살피던 그는, 어차피 이대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상기했다. 토끼 족제비들이 아마 그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냥 시간을 버리지 말고, 이놈들 둥지에나 가보자.'

어차피 그 늑대 짐승 놈들이 이 원숭이 괴물들의 둥지를 다 털어버리기 전에 방문할 필요가 있다. 그 앙상하던 흑색 나무와 주변에 널려 있던 영기 짙은 씨앗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무슨 과일이 달려 있었는지 한번 봐야지.'

배운 연단술을 제대로 활용할 첫 영식일 수 있었다.

28화. 무용한 녀석

따지자면 그렇게까지 엄청 오래된 일도 아닌지라, 한유진은 거의 헤매지 않고 기억을 더듬어 원숭이 괴물들의 둥지를 재방문할 수 있었다.

풀숲이 우거져 있어 영안술이 아니라면 쉽게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릴 만한 작은 협곡 지형.

만에 하나를 대비해 옥피술을 두르고 오행검을 잡아든 채 그는 안으로 진입했다. 그렇게 몇 분 지나지 않아 공터처럼 확 트이는 지형에 도달할 수 있었다.

끼익···! 끽!

끼에엑!

동시에 낯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원숭이 괴물들의 새끼임이 분명한 작은 원숭이들이 놀라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나무 위로 도망치는 놈도 있고 주변을 둘러싼 협곡 벽으로 무작정 달려가는 놈도 있다. 제자리에서 어쩔 줄 모르는 놈도 보인다.

"흠."

새끼들마저 죽이자니 별로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다. 하나 그렇다고 저놈들을 책임지고 키워줄 것도 아닌지라, 내버려두면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차라리 그가 직접 마무리 짓는 게 나을 터였다.

"유감이지만, 너희 보호자들이 나한테 먼저 덤빈 걸 어쩌겠냐? 최대한 편히 죽여주마."

살짝 유감을 담아 말한 한유진은 즉시 오행검 법문 금제를 조작했다.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금색 기운들이 빠른 속도로 날아간다.

공포에 질린 울음소리가 전부 잦아들기까진 채 십 초도 안 걸렸다. 한유진은 어물술로 그 새끼들의 시체를 모은 뒤 웬 옥함을 하나 꺼내 들었다.

'하필 새끼들인 데다 유인원이라서 그냥 먹기 꺼려지는데, 이게 있으니 다행이지.'

생각하며 옥함 안에서 개량된 혈목의 씨앗을 하나 꺼내 든 그는, 혈목정과양조술에 포함된 법술을 시전하며 그것을 어물술로 시체 위에 떨어트렸다.

잠시 후.

씨앗이 빠르게 발아하더니 원숭이 괴물 새끼들의 시체에 급속도로 뿌리내리며 성장했다. 마치 타임랩스 영상이라도 보는 듯했다.

혈목은 전체적으로 고동색이었지만 금속 느낌의 붉은 광택을 내며 매우 특이한 감상을 줬다. 피어난 잎사귀는 청록색으로 테두리가 밝아 화려한 감이 있었다.

그렇게 대략 사람 가슴높이 정도까지 자라난 혈목에서 피처럼 새빨간 열매 하나가 만들어졌다. 호두만 한 크기에 완전한 구형으로, 얼핏 옥구슬로 착각할 듯한 외형이었다.

열매는 한유진이 뭔가 조치를 하기도 전에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그걸 얼른 받아 드는 새, 나무는 피어났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시들더니 흙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와우."

법술의 오묘함과 신비함에 감탄하며 그는 어물술로 그 흙모래 잔해를 뒤적였다. 그렇게 처음 사용했던 씨앗을 온전히 찾아낼 수 있었다.

어떤 법술로 싹틔우냐에 따라 이번처럼 열매를 맺을 수도, 다른 또 하나의 씨앗을 맺을 수도 있다. 지금은 당연히 부족하지도 않은 씨앗을 보충할 이유가 없었다.

다시 옥함에 씨앗을 보관하고 저물대에 넣은 한유진은, 잠깐 더 열매를 살피다가 그것도 저물대에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부터 내심 주목하고 있던 공터 중앙의 흑색 나무를 쳐다봤다.

이전에 봤을 때와 달리 전혀 앙상한 느낌이 없었다. 잎사귀가 하나도 없는 건 확실히 특이했지만, 나무 곳곳에 달린 총 여섯 개의 주먹만 한 주홍빛 과일이 더 시선을 끈다.

가까이 가서 살피던 그는 곧, 이 과일들이 예상보다 더 특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짙은 영기를 품은 수준이 아니라 모종의 법문 파동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하급이 아닌 중급 영식이었다.

'상급 영식일 리는 없겠고.'

상급 영식부터는 결단기급 수사도 귀하게 여기는 보물이다. 그러니 이곳이 아무리 영기가 풍부하더라도 이렇게 약한 원숭이 괴물들이 점유하고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중급 영식을 점유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지.'

이런 환경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했을 터다.

어쨌든, 그는 다행히 천원성 연단술 강의를 들은 터라 이러한 영식을 손실 없이 채취할 수 있는 간단한 법술을 배운 상태였다.

몇 가지 연단 법문으로 짧게 테스트해 본 후, 딱히 주의할 만한 성질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수확을 시도했다.

그의 손에서 금빛 기운이 은은하게 뿜어진다. 그것이 주홍빛 열매를 부드럽게 감싸 흘러나오던 영기와 법문 파동을 차단하자, 열매가 저절로 톡 떨어져 나왔다.

그걸 가볍게 받아 든 한유진은 한번 냄새를 맡았다. 생긴 건 용과와 비슷한 느낌인데 향은 매실을 연상시켰다.

'복숭아였으면 원숭이랑 딱 어울렸을 텐데.'

실없는 감상과 함께 그는 나머지 열매들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채취해 저물대에 넣었다. 대략 보름 간격으로 법술을 갱신해 주기만 하면 열매의 약력이 손실될 우려는 없다.

'옥함 같은 것도 언제 한 번 수확물로 많이 얻어놔야겠다.'

그러면 번거롭게 주기적으로 법술을 갱신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이번처럼 형태가 고정된 과일 같은 게 아닌, 가령 꿀 같은 형태의 영재를 발견한다면 보관함이 꼭 필요할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때.

모든 열매를 수확당한 검은 나무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앙상하게 말라붙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걸 자세히 살피던 한유진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죽어가는 건 아닌 듯했다.

열매 좀 따였다고 나무가 죽어버리는 건 이상하다. 추측건대 오히려 이게 원래 상태이고 이전의 모습은 열매의 생존을 위해 부풀어 오른 상태일지 몰랐다.

언제 다시 열매가 맺힐지 모르겠으니 적당한 간격으로 와서 확인해 봐야 할 듯하다.

수확도 마쳤겠다, 이제는 그 원숭이 괴물 시체들을 지켜보며 토끼 족제비들을 기다릴 때다.

한유진은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론 살짝 긴장되는 마음으로 장내를 벗어났다.

* * *

돌아가는 길에 풍운술이 아닌 지둔술을 한번 시전해 봤다. 지구에서는 마땅한 장소와 시간이 부족했지만 여기서는 아니었고, 앞으로 하게 될 수련에는 당연히 법술 수련도 포함되어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던 한유진의 신형이 순간, 땅에 녹아들듯 사라지며 희끄무레한 빛무리가 지표면을 엄청난 속도로 이동한다. 그러다가 한곳에서 다시 한유진의 모습이 불쑥 나타나더니 급히 멈춰 섰다.

"음······."

하마터면 꼴사납게 나무둥치에 부딪힐 뻔했다. 예전 풍운술을 처음 연습하던 그때처럼 말이다.

요컨대 제어가 힘들었다. 게다가 영력 소모가 엄청나서 서너 번만 더 펼치면 완전히 지쳐버릴 듯했다. 이런 원시림 같은 유리한 환경에서도 그렇다면 지구에서는 두세 번 만에 지칠 수도 있단 뜻이다.

'연습조차 법혼기에 올라야 제대로 할 수 있겠구나.'

하지만 그만큼 뛰어난 법술이긴 했다. 방금 어설프게 펼친 것만으로도 그 위능을 충분히 체감할 수 있었을 만큼.

지둔술은 원래 속도가 강점이 아닌 둔법인데도 엄청나게 빠른 느낌이었고, 땅속으로 스며들듯 하여 이동하는 감각은 마치 육체 없는 정령이라도 된 듯 신비로웠다.

'영기가 많이 소모될 만도 하지.'

무려 땅에 스며들어 이동할 수 있는데 영기 소모가 적다면 말이 안 된다. 설령 그런 법술이 존재한다 해도 다른 약점이 반드시 있을 터였다.

잠시 후.

원숭이 괴물들을 도륙 낸 장소에 도착한 한유진은, 예전 그때처럼 저것들 사이에 누워있을까 고민하다가 꼭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판단하곤 근처 나무 위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는 기다리면서 통명어수결에 대해 떠올려봤다.

사실 통명어수결은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단점이 매우 크다고 평가받는 법술이었다.

바로 두 가지가 단점이었는데, 하나는 귀속시킨 영수의 수명이 주인과 동화되어 버린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주인의 경지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까지만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 둘이 왜 단점인가?

보통 수사가 영수를 들일 때는 강력한 만큼 수명이 매우 긴 요괴 따위를 길들이기 마련이다.

원래도 수명이 최소 수백 년 단위인 요괴는, 한 번 잘 길들이기만 하면 그 주인이 죽더라도 가족이나 지인에게 넘겨주어 대대로 부릴 수 있다.

당연히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만큼 성장하고 수명이 늘면서 점점 더 대단해지는 것인데, 통명어수결은 그런 이득을 기대할 수가 없다.

또한 두 번째 단점인 주인의 경지보다 낮은 수준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써먹기도 애매하다. 정작 중요한 전투 등에서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면 아무리 다른 장점이 많더라도 확 떨떠름해지는 것이다.

'근데 난 상관없지.'

어차피 그런 도움을 기대하고 영수를 들이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런 도움을 기대하고서 다른 더 강한 영수를 들이려고 하면, 그놈을 키우기가 결코 쉽지 않을 터였다. 세상에 어디 좋기만 한 일이 있겠는가?

통명어수결의 장점은 학습과 시전을 포함하여 귀속시킨 영수에 대한 감응과 통제가 매우 편하다는 데 있다.

또한 주인이 익힌 법술 중 몇 가지를 영적 소통의 방식으로 아주 쉽게 전수할 수 있다. 수명이 동화되는 것도 원래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을 토끼 족제비 같은 녀석에겐 오히려 장점일 테고 말이다.

게다가 주인의 경지보다 낮은 수준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제약 대신, 그 한계선까지 성장하는 데 자원이 거의 필요치 않다.

여러모로 이름에 괜히 통명(通命)이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중요하게 써먹을 마음이 없다면 이만한 어수술이 또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나타나기만 해라.'

생각하는 사이.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다리던 토끼 족제비 녀석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은 주위를 아주 조심스럽게 살폈는데, 은영술을 최대로 발휘하고 나무 위에 숨은 한유진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여 안심했는지 원숭이 괴물들의 시체를 야금야금 뜯어먹었다.

그렇게 두 마리가 식사를 시작하자 금방 두 마리가 더 추가됐다.

한데, 막상 한유진의 표정은 전혀 밝지 않았다.

'왜 안 오지······?'

고대하던 녀석의 모습이 안 보였다. 다 비슷하게 생긴 놈들이었지만 서너 달을 함께 지냈는데 영안술까지 펼치고도 구별을 못 할 리가 없었다.

'이런 데서 그 나비효과가 나타난다고?'

왜 안 나타날까, 대체 이유가 뭘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상태로 잠시 망연하게 있을 때.

"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나타난 즉시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녀석이었다.

언제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무거웠냐는 듯, 한순간에 기분이 들떴다가 문득 떠오른 어떤 생각에 다시 무거워진다.

그는 소리 내지 않으며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은영술을 풀고 잠시 기다렸다.

곧, 식사에 한창이던 토끼 족제비 몇 마리가 뒤늦게 그런 한유진을 발견했다. 움찔 놀라는가 싶더니 바로 도망치지는 않는 모습이다.

그렇게 눈치를 보는 녀석들 중엔 한유진이 주시하는 바로 그 녀석도 포함돼 있었다.

'그냥 저 사체들 사이에 쓰러져 있을걸.'

뒤늦게 그런 후회를 하면서 한유진은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바로 녀석을 어물술로 끌어와야 하는지, 아니면 예전처럼 녀석이 스스로 거리를 좁혀오게끔 유도해야 하는지.

'내가 이렇게 멍청했나?'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별것도 아닌 일로 혼란에 빠져들기 직전.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생각에 그는 영액주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마개를 열어 몇 방울을 땅에 떨어트렸다.

옅지만 분명한 영액주의 향기가 퍼져나간다. 후각이 발달한 짐승이라면 더 분명하게 맡을 수 있을 터다.

한데 막상 실행하고 보니 또 이게 아닌가 싶었다.

'갑자기 이런다고 유인이 될 리가······?'

엉뚱한 놈이 먼저 호기심을 품고 다가오면 어쩌나, 그놈은 바로 쫓아내야 하나, 그냥 짐승 하나 길들이는 일에 뭔 뻘짓을 하는 건가.

스스로도 판별하기 힘든 오묘한 감정에 젖어 자괴감까지 느껴지던 그때.

주의하던 그 녀석이 가장 먼저 슬그머니 다가오려는 모습에 한유진의 기분이 또 바로 좋아졌다.

"그렇지!"

동시에 반사적으로 낸 감탄사가 몇 토끼 족제비를 움찔 놀라게 만들었다. 막 호기심을 보이던 녀석마저 움찔 굳는 모습에 한유진도 덩달아 굳었다.

"어휴, 씨발···!"

그는 마침내 자기 자신의 찌질함을 참지 못했다.

"그냥 일로 와, 이 새끼야."

어물술로 단숨에 그 녀석을 포박해 들어서는, 화들짝 놀라 발버둥 치는 놈을 바로 앞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영액주 십여 방울을 더 떨어트렸다.

"먹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먹으면 평생 같이 가는 거고, 안 먹고 도망치면 그걸로 끝인 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쨌든 해치지 않겠다는 느낌을 주는 게 맞을 듯해서, 한유진은 놈의 앞에 쭈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렇게 놈이 코를 씰룩거리면서 까만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는 모습을 보다가, 대략 이 정도면 됐겠다 싶어서 어물술을 완전히 해제했다.

잠시간.

녀석은 자신을 구속하던 힘이 사라졌음을 느끼고도 도망치지 않았다. 상황 파악이 어려운 듯, 혹은 함부로 움직이기 너무 무섭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네가 그러다가 그 도마뱀 새끼한테 잡아먹힌 거 아니냐. 이 필요 없을 때만 잽싸고 필요할 때는 둔한 놈아."

한유진은 중얼거리면서 아예 근처 나뭇잎을 하나 어물술로 끌어와 그 위에 영액주를 따랐다. 그릇까지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런데도 안 먹으면 진짜······."

바로 그 순간.

한유진의 정신이 다른 데 팔렸다고 생각했는지 녀석이 후다닥 도망쳐 버리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풀숲 너머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한유진은 그만 눈을 감았다.

"씨발놈······."

아무래도 방법이 잘못된 것 같다.

그때랑 완전히 똑같게 행동했어야 했다. 경계심 많은 야생동물과 친해지는 게 어디 이런 방식으로 가능하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내가 꼭 멍청해서 이런 게 아니야.'

한유진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녀석이 똑같은 녀석이라는 걸 좀, 체감해 보고 싶었다고.'

영액주를 그렇게 광적으로 좋아하던 녀석이라면, 어쩌면 이런 식으로 접근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최소한 도망쳐 버리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 여겼다.

철학적 관점에서, 이미 죽은 애완동물을 과거로 돌아가 똑같이 만난다고 해도, 과연 정말로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느냐에 대해 의견이 많다.

그리고 꽤 많은 이들이 결국 다른 존재라는 결론을 내린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기에 그때의 고유한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연속성을 되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유진은 좀 다르게 생각했다.

만약 애완동물이 아니라 도저히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라면.

과거로 돌아가 아직 죄짓지 않은 그 원수를 발견했을 때, 다른 존재라고 여기며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시점에서는 접점이 없고 미래가 조금이라도 변하면 놈이 내 원수가 안 될 가능성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난 아마 못 그럴 거 같았지.'

그래서 토끼 족제비에게도 같은 논리를 적용하려 했다.

아직 내게 죄짓지 않은 과거 시점의 원수를 다른 존재라고 여길 수 없다면, 그러한 기준은 마땅히 토끼 족제비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비록 서로 같은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기에 심리적 정서적 연속성이 좀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같은 육체와 영혼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역시 이성과 감정은 때때로 다를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영액주를 전혀 못 알아본 채 후다닥 도망쳐 버리는 모습은, 놀랍게도 거의 칼에 찔린 듯한 느낌을 선사했다.

'저깟 짐승 새끼가 대체 뭐라고.'

아이러니하게도 녀석이 죽었을 때보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이 더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세상사 마음처럼 안 된다더니만.'

다시 방문해서 완벽하게 그때의 행동을 되풀이해 볼까도 싶었지만, 그런 식으로 해봤자 지금 이 감정을 지워내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그래······ 그때 복수라도 해 줬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던 때.

"······."

뜨인 그의 눈에 언제 슬그머니 다가왔는지 모를 그놈이 풀숲 사이에 숨어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들어왔다.

'이 씹것이 진짜······.'

한유진은 아주 살짝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화가 나는 기분이었다.

사람을 농락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한껏 감정에 젖었다가 슬슬 체념하고 마무리 지으려던 순간 다시 나타날 건 또 뭐란 말인가?

"너 나 놀리냐?"

한유진은 짐짓 으르렁거렸다. 그에 토끼 족제비가 흠칫 놀란다. 한데 그러면서도 도망치지는 않고 코를 씰룩이며 눈치를 본다.

아주 익숙한 모습이다. 녀석은 친해지기 전에 항상 저런 모습으로 간을 봤었다.

어이가 없어서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후로 한유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계속 서로 눈싸움하듯 시간이 흐르고.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는 것을 넘어 완전한 아침에 접어들었을 무렵.

토끼 족제비가 마침내 슬그머니 다가와 한유진이 대충 만들어 놓은 나뭇잎 그릇 속 영액주를 핥으려 했다. 그렇게 핥기 직전 무슨 함정이라도 발동할 것을 경계하는지 후다닥 물러서는 모습이 웃기다.

"생쇼를 해라, 아주."

말소리에 다시 놀라면서도 끝내 도망치진 않는다. 분명히 무서워하고 있는데, 영액주의 향기를 도저히 그냥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그 식탐 그득한 모습으로 달려 나가던 때처럼.

"허······."

절로 다시 헛웃음이 나온다. 그사이 토끼 족제비는 마침내 영액주를 한 번 제대로 핥고 후다닥 물러났다.

직후 씰룩거리던 코마저 멈추곤, 입맛을 다시며 한유진과 나뭇잎 그릇을 번갈아 쳐다본다.

"내가 아까 말했지, 먹으면 평생 같이 가는 거라고."

한유진은 덤덤하게 말하면서 영액주를 그 나뭇잎 그릇에 추가해 줬다. 토끼 족제비는 다시 코를 씰룩이기 시작하며 그 영액주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네 이름은 무용이다. 넌 쓸모가 없으니까."

부르기에 별로 쪽팔리지도 않고,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물론 정말로 쓸모없다는 뜻만 가진 건 아니었다. 실은, 넌 무용해도 딱히 상관없고, 이왕이면 그때처럼 허무하게 죽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용(武勇)은 갖추라는 뜻을 품었기도 했다.

쪽팔리기 때문에 지금 소리 내어 말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29화. 오행법술 입문

토끼 족제비, 이제는 무용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녀석과 몇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며 좀 친해졌다. 최소한 녀석이 무작정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는 관계를 발전시켰다.

영액주의 도움이 매우 컸다. 그러는 와중 다른 토끼 족제비들도 은근히 주변을 기웃거렸지만, 당연히 한유진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단지 눈길도 주지 않는 정도를 넘어 놈들이 원숭이 괴물들의 시체를 먹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혈목 씨앗을 꺼내 세 개의 혈목정과를 만들어 냈다.

빠르게 피어났다가 순식간에 흙모래처럼 부서져 내리는 혈목의 잔해 속에서 씨앗까지 잘 회수하며, 그는 무용이를 품에 안고 말했다.

"가자."

어디로 가자는 건지는 명확했다. 계속 그 나무 밑 토굴에서 생활하는 것보단 늑대 짐승들의 은신처를 빼앗는 게 훨씬 나았으니까.

일단 그가 알고 있는 장소 중에서 가장 안전하고 쾌적한 데다가 한동안 생활한 적 있어 주변 환경을 잘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 근처에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기억이 서렸지만 어쨌든 아주 유용한 수련자원이 넘쳐나는 호수도 있다.

법혼기까지 생활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장소였다. 물론 이 원시림 어딘가에는 더 좋은 장소가 있겠지만, 그런 건 천천히 찾아봐도 된다.

'이번엔 얼마나 지내게 되려나.'

본격적인 수련에 앞서 현실의 상황을 잘 정리해 따로 적어놔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다시 현실로 돌아갔을 때 헷갈리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생각하며 기억을 더듬어 움직이자니 늑대 소굴까지는 금방이었다.

위험한 냄새를 맡았는지 무용한 녀석이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며 조금 불안해했다.

"이 형님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마."

그렇게 말하면서 문득 녀석이 암컷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어차피 짐승인데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그리고 성별에 맞춰 형님을 대체할 만한 표현이 오빠나 오라버니밖에 안 떠올랐는데, 애완동물을 상대로 본인을 그렇게 칭할 생각을 하니 절로 표정이 안 좋아지기도 했다.

대충 그런 잡생각을 하면서 한유진은 놈들의 소굴 근처에서부터 일부러 은영술을 조절해 기운을 풍겼다.

이어 벌어진 일은 매우 단순했다.

당연히 자신들의 소굴 근처에서 낯선 데다가 딱히 강한 것 같지도 않은 기척을 느낀 놈들이 벌떼처럼 튀어나왔고, 별로 간을 보지도 않고서 덤벼들어 왔다.

그런 놈들을 마중한 건 오행검에서 쏘아져 나간 금색 기운들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먼저 죽이려고 했으면 당연히 반격을 각오했어야 한다.

'특히 지금은 더 거리낄 게 없는 정당방위란 말이지.'

그런 사고방식으로 꼬리에 침 달린 늑대들을 모조리 도륙 낸 그는, 이어 소굴 안쪽으로 들어가 예전 그때와 달리 미처 도망치지 못한 몇 파수꾼과 새끼들마저 모두 저세상으로 보내 버렸다.

별로 치열하지 않았지만 모르는 자가 봤을 때 매우 인상적이었을 전투가 끝난 뒤.

"어떠냐, 응? 이 형님한테 경외심 같은 거 안 느껴지냐? 아직 그럴 머리가 없나?"

찍-!

"개쩐다고? 나도 알아 인마."

계속 품에 안고 있던 무용한 녀석을 두 손으로 들어 잠깐 놀려주다가 뒷정리를 시작했다.

대부분은 그냥 혈목정과로 만들어 버렸다. 편하기도 했거니와 그 열매로 만들어 낼 혈목정과영주에 대한 기대가 꽤 있었기도 하다.

전부 과일로 만들지 않은 건 좀 비효율적이더라도 식단의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영양 같은 이유에서가 아닌 맛과 정서적인 이유에서.

'수련은 마라톤이야.'

무작정 힘껏 달리는 게 능사가 아니다. 사소한 비효율, 약간의 휴식이 결과적으로 더 오래 멀리 나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는 사실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아주 간단한 이치였다.

일부러 남겨둔 고기까지 전부 잘 도축하여 저물대에 수납하고, 비경 안쪽에 남은 늑대들의 흔적을 화탄술로 불태워 제거하고, 혹시 모를 위험 요소가 남아있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체크하고.

그렇게 예전 그때처럼 잘 자리를 잡았다.

예전 그때 사용하던 바위 하나를 가져와 의자로 삼은 한유진은, 앞에 무용이를 내려놓고선 눈을 감고 집중하며 영기를 끌어냈다.

들어 올린 오른손 검지 끝에 불쑥 핏방울 하나가 피어오르더니, 그것에서 희미하게 온갖 색채의 빛무리가 흐르며 언뜻언뜻 법문을 드러낸다.

한참을 더 그렇게 집중하여 통명어수결의 금제정혈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낸 그가 마침내 눈을 뜨고 눈앞의 쓸모없는 녀석을 내려다봤다.

"이건 계약서 비슷한 거다. 앞으로 네 성장의 씨앗이 되기도 할 테고."

어물술로 그 유난히 반짝이는 핏방울을 날려 보낸다. 그 즉시, 과연 식탐 가득한 녀석답게 무슨 맛있는 느낌이라도 받았는지 알아서 꿀꺽 삼켜버리는 모습이었다.

"돼지가 따로 없구만."

한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효과를 발휘하려면 몇 시간 정도 걸릴 듯하니, 그 사이에 머물 거처를 만들고 있으면 딱일 듯했다.

* * *

법혼기를 위한 수련, 육체와 영혼의 단련은 꼭 앉아서 회원공만 돌릴 필요가 없다.

그냥 무작정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나름 운동이 되듯, 법술 수련 등으로 한껏 힘을 소모하는 일도 꽤 도움이 된다. 지구의 헌터들이 회원공 같은 뛰어난 수련법 없이도 성장할 수 있는 원리가 바로 이것이다.

한유진은 지금 은신처에서 꽤 떨어진 장소에 서 있었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입문에 성공한 오행법술서의 법술들을 차례로 펼쳐볼 심산이었다.

'우선 화령조술부터.'

생각과 함께 뻗어진 손에서 순간 불길이 휘몰아치고, 그것이 제법 날렵한 형태의 두 마리 새처럼 변화하더니 정말로 살아있는 듯 날개를 펄럭이며 주변을 날아다녔다.

법술의 이름에 괜히 영조(靈鳥)가 들어가는 게 아니다. 그냥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 불새들은 약간의 영성을 띠고 있었다.

일단 목표를 지정하면 더는 신경 쓸 필요 없이 알아서 공격한다. 방어를 우회하거나 페이크를 넣는 등 상당히 교활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최후의 순간엔 폭발을 일으켜 더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다.

지금은 두 마리에 불과하지만, 법혼기에 도달하면 법술이 능숙해짐에 따라 열 마리 이상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가라."

아직 미숙한 터라 직접 소리 내어 뜻을 전달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어쨌든 그 명령에 따라 두 마리 불새는 즉시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가 목표한 나무를 직격했다.

콰콰쾅-!

꽈광-!!

두 번의 폭발 속 거대한 나무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밑동이 잿더미로 박살 나며 빠르게 넘어갔다. 다른 나무들과 부딪히기도 하며 조용하던 숲속에 한차례 큰 소란이 일었다.

바로 그때 한유진은 두 번째 법술을 시전하고 있었다.

눈까지 감은 채로 집중하던 그가 한순간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그 쓰러지는 나무를 손으로 가리켰다.

빠콰쾅-!!

직후 마른하늘에서 나타난 두꺼운 청백색 뇌전이 무서운 정확성으로 내리꽂혔다.

터져 나온 섬광에 일순간 시야가 흑백으로 물들고 그나마 멀쩡하던 나무의 몸체가 새까맣게 타 모래처럼 부서져 내린다. 지독한 탄내가 흐린 연기를 동반한 채 잠시 휘몰아쳐 주위를 압도했다.

"후······."

낙뢰술은 시전하기까지 좀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분명하지만, 일단 성공적으로 펼치기만 하면 매우 빠르고 강력했다. 기습을 가하는 상황이거나 느린 적을 상대로는 이만한 법술이 또 없을 터다.

고작 두 번의 법술 시전 만에 최소 백 년이 넘게 살았을 거목이 형체도 잘 남지 않았다. 그는 대상을 바꿔 세 번째 법술을 시전했다.

후···!

가볍게 입을 모아 내뱉는 숨결에 영기와 법문 파동이 반짝인다 싶더니, 그것이 순식간에 돌풍으로 화해선 목표한 다른 나무에 적중했다.

콰가가가각!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수십 번 이상 도끼질한 듯한 흔적이 다수 나타난다. 중요한 건 공격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콰가가가각-!

파가각-!

날숨을 빌어 시전한 풍인술은 그 힘이 다하기까지 집요하게 나무를 깎아냈고, 그 나무를 완전히 쓰러트리고도 모자라 다른 옆의 나무까지 절반 넘게 파먹어 버리고서야 천천히 스러졌다.

눈에 보이지 않으며 특별한 형태도 없고 빠른 데다가 지속성까지 높은 공격은 적이 대처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다수를 상대할 때도 유용할 것이 분명하다.

네 번째 법술을 시전하자, 뻗은 한유진의 손에서 영기가 물처럼 응집되더니 선명한 륜(輪)의 형태를 취하고서 빠르게 날아갔다. 그렇게 날아가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유난히 묵직했다.

꽈광-!!

그리고 반 이상 깎여나갔던 나무와 충돌하자 거의 폭탄이 터진 것 같은 굉음이 발생했다. 나무는 잠시도 버티지 못한 채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리며 여태까지중 가장 격렬한 기세로 넘어갔다.

수륜술은 날카로움보단 묵직한 충격에 특화된 법술이다. 무기로 치자면 검이 아닌 둔기, 그중에서도 전투도끼나 전투망치 같다고 보면 된다.

'이제 남은 건······.'

소모한 영기 정도를 가늠하며 한유진은 검결지를 취했다. 주먹을 쥔 상태에서 검지와 중지만을 붙여 세운 손 모양이다.

그렇게 만들어 낸 검결지에 순간 금빛이 서리더니, 가볍게 휘두르는 동작을 따라 그 기운이 고속으로 쏘아졌다. 마치 무협 소설 속 고수가 검기를 발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파슥-!

평범한 사람의 눈엔 잠시 금빛이 번쩍이는 것만 보였을 터다. 하나 적중당한 거목은 사선으로 절단난 채 거의 미끄러지는 느낌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나무가 완전히 쓰러져 모든 소란이 잦아들었을 때, 그는 다시 검결지에 서린 경금검기술을 쏘아냈다.

쏘아진 법술의 기운이 도중 두 갈래로 갈라져 제각각 다른 방향의 거목을 베어냈다. 그 거목들 역시 스르륵 미끄러지는 듯하다가 곧 요란하게 넘어가 버렸다.

숙련되면 두 줄기가 아니라 세 줄기 네 줄기로도 분열시킬 수 있다. 검광분화라고 불리는 기술이다. 또한 당연히, 그는 자신의 경금검기술이 무협 소설에서 등장하는 검기 따위보다 훨씬 강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무려 법술인데.'

오행검을 조작해 쏘아내는 금색 기운의 정체이기도 하다.

'이제 마무리로······.'

영력이 거의 다 소모된 느낌이었지만 그는 애써 집중하며 마지막 법술을 펼쳤다.

순간, 그의 몸을 둘러싸며 금색과 자색 섞인 빛무리가 후광처럼 뿜어져 나왔다.

아무런 실체 없는 그냥 빛처럼 보였지만, 실은 옥피술을 한참 능가하는 내구성의 보호막이었다. 게다가 옥피술처럼 피부가 덮이지 않은 곳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약점 따위도 없다.

단지 기초 법술이 아닌지라 영기 소모가 심할 뿐인데, 그마저도 법혼기에 오르면 딱 적정한 수준으로 느껴질 터였다. 능숙해질수록 이 눈에 띄는 광량도 좀 조절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한동안 더 그 자금광휘를 유지하던 한유진은, 마침내 완전히 지친 느낌을 받고서야 법술을 중단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후······."

그렇게 숲의 신선한 공기와 농도 짙은 영기를 호흡하며 쉬고 있으려니, 잠시 뒤편에 홀로 있던 무용이가 다가와 바짓단을 물어 당겼다.

"왜?"

찍-!

"이제 가자고?"

아무래도 그가 법술을 연습하면서 일으킨 소란 때문에 좀 불안한 듯했다. 통명어수결로 연결된 덕에 그런 감정을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 가자."

법술 수련에 앞서 이미 수 차례 주변 안전을 확인했지만, 한유진은 딱히 고집 피우지 않았다. 녀석을 안아 든 그는 풍운술을 펼쳐 은신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돌아가면서 지둔술을 연습할 여력까진 없었다.

약 이십 분 후.

무사히 은신처에 도착한 그는 귀여운 것 빼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녀석을 풀어주며 한쪽으로 향했다.

예전 그때처럼, 암벽의 움푹 파인 곳을 기점으로 거처를 만들어 놓은 장소였는데, 그때와 다른 부분이라면 순수한 어지술만으로 만들어 냈다는 점이었다.

어지술은 힘을 많이 투자하면 단순한 흙더미를 암석처럼 굳힐 수도 있다. 하여 지금 눈에 보이는 거처의 모습은 예전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아늑해 보였다.

안에 들어선 그는 혈목정과양조술에 적힌 방법에 따라 어지술로 특수제작한 항아리를 살폈다.

살짝 뚜껑을 열자 향긋한 술 내음이 그의 기분을 들뜨게 만든다. 처음 시도하는 양조였음에도 성공적으로 되어가는 듯했다.

'그 연단술 강의 안 들었으면 어쩔 뻔했냐, 진짜.'

다시 뚜껑을 닫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밖으로 나섰다. 영주가 담긴 항아리 말고도, 원숭이 괴물들의 둥지에서 수확한 열매를 말려 숙성시키는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살펴야 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영주보다 더 기대하는 게 바로 그 열매들이었다.

초월적 이해력을 동원하여 시간을 투자해 열심히 살핀 결과, 그 열매들에 담긴 효능이 육체를 단련함과 동시에 오감까지 향상시킬 수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오감의 향상은 곧 법혼기에 올라섰을 때 신식을 다루는 기초가 더 튼튼해진다는 뜻이다. 신식의 유용성과 중요성을 고려하면 무조건 반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 역시 천원성 연단술 강의를 듣지 않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섭취해야 좋을지 전혀 갈피를 못 잡았을 터다.

30화. 연단술 해프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