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연단술 해프닝
거처 바로 옆, 선선하고 그늘진 위치에 얼기설기 만들어진 나뭇가지 받침대 위, 중급 영식 열매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잘 널려있었다. 행여나 모를 벌레를 막기 위해 짓뭉개서 배치해 놓은 냄새 독한 풀 무더기도 몇 보인다.
조금 웃기게도 무용이는 그 열매들이 보이는 장소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식탐 많은 녀석이 이런 열매를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리 없다.
통명어수결을 통한 감응으로 단단히 일러두지 않았더라면 분명 하나 이상 빼먹었을 터였다.
'어림도 없지.'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영약은 영약이다. 한유진 본인이 강해져야 녀석도 통명어수결의 혜택을 잘 볼 수 있으니 객관적으로도 줄 이유가 없다.
그래도 그냥 쫓아내기가 좀 불쌍해서, 영액주 한두 방울로 달래준 다음에서야 그는 열매들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원백령 씨, 진짜 고맙습니다.'
영주를 담그고 이 열매를 말리는 등, 본격적인 연단술을 시작하면서 그는 이래저래 느끼는 바가 많았다. 특히 자신의 선생님이라고 볼 수도 있는 원백령에게 아주 고마웠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연단술 강의는 정말로 실용적인 게 맞았다. 단지 그 실용적인 기술을 사용하기 위한 기초마저 좀 어려웠을 뿐이다.
생각건대, 원백령은 그 실용적인 강의를 위해 특별히 자신의 실전 노하우들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했을 것이다. 이왕 가르치기 시작했다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듯한 언사를 보였었으니 꽤 가능성 큰 추측이다.
연단에 쓸 열매를 적당히 말리면 약력이 살짝 줄어드는 대신 성공률이 크게 높아진다는 것도 그런 노하우 중 하나였다.
그리고 제대로 된 연단로가 없는 상황에서 어지술 등을 통해 임시 연단용 돌솥을 제작하는 법도 지금 한유진에게 매우 유용했다.
'이 정도면 더 말릴 필요 없겠는데?'
열매를 살피자니 절로 그런 판단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저물대에서 관련 영식들을 추가로 더 꺼내 들고 있었다.
대부분 풀이었지만 꽃이나 버섯도 몇 보였다. 몇 가지 테스트 후 열매와 상승효과를 일으킬 것으로 판단된 재료들이다. 효과가 따로 놀게 될지언정 최소한 실패를 일으키진 않으리라 판단된 것들이기도 했다.
'오늘 바로 시도해 보자.'
영주 담그기를 제외한다면 대망의 첫 연단이다. 그는 컨디션 회복을 위해 적당한 자리에 앉아 회원공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리 잡고 앉자 한쪽에서 햇볕이나 쬐던 무용한 녀석이 쪼르르 달려왔다. 그러고는 마치 당연한 자기 자리라는 것처럼 한유진의 무릎에 앉았다.
단지 주인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는 일만이 아니었다. 통명어수결로 연결된 터라 이렇게 한유진이 수련할 때 가까이 있으면 녀석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다.
그 증거로, 평범한 황갈색이던 녀석의 털이 예전보다 훨씬 빠르게 은은한 금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흰색 털 부분은 더 하얘지며 갈수록 영험한 모습을 띠어갔다.
언젠가는 과연 선사(仙士)의 영수답다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몇 시간 정도 회원공을 돌리며 충분히 컨디션을 회복한 뒤.
한유진은 미리 제작해 두었던 임시 연단용 돌솥을 가져오고 근처에 모든 영식을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당연히 그렇게 늘어놓은 영식엔 주재료인 과일도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화술을 사용해 돌솥 밑에 불꽃을 만들어 내어 적당히 달군다.
영안술을 특정 방식으로 펼치면 도구 따위 없이도 대략 온도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 역시 연단초해를 보고 익힌 기술이었으니 원백령의 은혜라 볼 수 있다.
적당한 온도가 됐을 때 그는 영액주병의 마개를 열고 내용물을 일부 쏟아 넣었다.
술이 끓는 향기가 훅 퍼져나가자 근처에 있던 무용이가 난리가 났다.
"어허!"
정신 사납게 구는 녀석을 엄히 쫓아낸 한유진이 다음 작업을 이어갔다. 길쭉하여 별다른 특징 없는 생김새의 영식 소량을 어물술로 마구 으깨 집어넣은 것이다.
두어 번 더 비슷한 작업을 반복하자, 돌솥에서 자작하게 끓는 내용물에 선명한 초록빛이 돌며 살짝 걸쭉한 느낌이 나타났다.
'지금!'
생각하며 열매 하나를 으깨 돌솥에 넣었다. 직후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유혹적인 향이 진하게 피어오르고 내용물의 색이 빨갛게 변한다. 농축된 과일의 색이었다.
이후로 그는 일정 간격을 두고 다른 재료들을 적절한 타이밍에 적정한 양으로 추가했다. 손가락에 영기를 피워올려 법문을 만들어 첨가하기도 했다.
파스슥···!
하나의 재료와 법문이 추가될 때마다 빛무리와 영기 파동이 뿜어지며 기묘한 반응이 일었다. 동시에 발휘된 어물술이 내용물을 골고루 섞으며 회전시켰다.
회전하는 내용물은 점점 더 점성이 짙어지며 돌솥의 은은한 굴곡을 따라 총 세 덩이로 나누어졌다. 한유진은 자신의 계산대로 딱딱 흘러가는 상황에 매우 기뻐하면서 더욱 집중했다.
계속해서 때때로 법문을 추가하며 연단술을 이어가던 어느 순간.
그는 문득 내용물이 진짜 사람의 피처럼 붉고 생기 넘친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까지 붉은빛이 날줄 미처 몰랐지만, 약력이 제대로 증폭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바로 그러던 때.
툭- 투둑-
웬 새빨간 액체가 돌솥 안쪽과 바깥 사방으로 점점이 떨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갑작스러운 이물질 투하에, 그리고 일순 맡아지는 비릿한 향기에 깜짝 놀란 한유진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렇게 대각선 위쪽 나뭇가지에 목 매달린 '그것'과 시선이 마주쳤다.
흰자라고는 전혀 없이 온통 검은색만 가득한 눈이다. 눈만 그런 게 아니라 전신이 새까만 어둠으로 물들어 기이하게 일렁이는 모습이고, 그럼에도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한 핏물의 색채가 너무나 선명하다.
일식이 내려앉은 듯 주변이 급속도로 어두워지며 진득한 혈향이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것의 산발한 머리카락이 가공할 빠르기로 자라나 주위 어둠과 동화되더니 곧, 악몽 속 파도처럼 주변을 온통 스스슥 마찰하는 소리로 가득 채웠다.
'원희······?'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놀라서, 심장이 멎어버린 것 아닌가 싶은 순간이었다.
찍-!
뒤편에서 들린 무용이의 울음소리에 그는 꿈에서 깨듯 정신을 차렸다.
주위 광경은 아주 멀쩡했다.
점점이 떨어졌던 핏방울도, 전방 대각선 위 나뭇가지에 목 매달렸던 그것도, 일식이 내려앉은 듯하던 어둠도, 진득하기 짝이 없던 혈향도, 주변을 마찰음과 함께 옥죄어오던 머리카락의 파도도.
아무것도 없었다.
전방 대각선 위 나뭇가지에는 그냥 평범한 덩굴 하나만이 자연스레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씨··· 팔··· 뭐야, 대체?"
두려움에 저항하기 위한 본능적 반응으로 욕설을 내뱉는다. 그러면서 바로 깨달았다.
'환각?'
그는 돌솥 안 내용물을 내려다봤다. 잠시 회전이 멈춘 바람에 곧 타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진짜로 멎은 줄 알았던 심장이 이젠 미친 듯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나, 그런 와중에도 한유진은 연단을 망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일단 법술부터 시전했다.
이런 경우에 필요한 연단 법문을 두어 종 맺어 떨어트리고 어물술로 빠르게 회전시키며 열기를 신속히 방출한다. 그렇게 열심히 내용물을 살려내면서 그는 연신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의 환각이 워낙 강렬했던 탓에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내가 쓴 영식 중에 환각을 유발하는 게 있었나?'
가장 의심 가는 것은 바로 이 연단술의 주재료인 과일이었다. 오감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건 즉 그것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아마도 그게 법혼기에 오르기 전 주의해야 하는 수련 부작용과 겹쳤을지 모른다. 영혼의 법혼 승화율이 높아질수록 온갖 환각을 겪으면서 자칫 미쳐버릴 수도 있다는 그 부작용 말이다.
찍-! 찌직!
통명어수결을 통해 주인의 불안한 마음을 느낀 무용이도 어느새 그의 다리에 딱 붙어 연신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 작은 온기가 놀라울 만큼 위안이 됐다. 녀석이 아니었더라면 환각에서 깨어나는 것 자체가 더 늦었을 터다. 그렇게 첫 연단을 완전히 망쳐버렸을지도 몰랐다.
'이거, 법혼 승화 부작용을 우습게 볼 게 아니겠구나.'
얼마나 놀랐는지 그때는 미처 청심결을 운용할 생각도 못 했다. 앞으로 법혼 승화율이 높아지면 이런 종류의 환각을 더 자주 생생하게 겪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환각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육체를 더 단련하고 오감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지금 그가 만들고 있는 영단의 효능 말이다.
'······이걸 일종의 예방접종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
법혼기에 오르기 위한 최소 조건은 영혼의 4할 이상을 법혼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적어도 그 정도는 승화가 돼야 법력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승화율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다. 법혼기 단계에서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물론 이후의 결단기에 오르는 것까지 훨씬 더 유리하다.
4할만 승화시킨 상태로 법혼기에 올라서 버리는 건 사실상 더 성장하기를 포기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10할 다 승화시키려고 했는데······.'
그러려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 동시에 청심술을 숨 쉬는 것처럼 펼칠 수 있게끔 통달할 필요성도 느껴진다.
미리 알게 되어서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뒤늦게 상태가 악화된 후 깨달았다면 시간을 많이 낭비할 뻔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그는 계속 연단을 이어갔다.
* * *
한유진은 모든 열매를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연단해 냈다.
환각을 겪은 첫 번째 시도에선 다소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고, 두 번째 세 번째 시도에선 살짝 위험했지만 천원성 연단술 강의에서 배운 요령으로 어찌어찌 잘 수습해 냈으며, 나머지 시도에선 그새 익숙해진 듯 아주 순조로웠다.
완성된 영단은 바로 복용하지 않고 보름 정도 숙성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정식 연단로를 사용했다면 불필요한 과정이었겠지만, 임시 돌솥을 사용한 터라 약력 안정화를 위해 추가된 절차였다.
그러는 사이 영주도 잘 익어 이제는 마셔도 괜찮은 상태가 됐다.
원래 과일주는 포도주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몇 달 정도만 숙성시켜도 충분하다. 게다가 이 혈목정과영주는 숙성할 때 간간이 법문을 더함으로써 시간을 더 단축시키기도 한다.
오래 보관할수록 향이 깊어지긴 하겠지만 효과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연단과 수련에 힘쓰면서 그는 한 가지 일과를 더 추가했다. 조금 더 멀리까지 순찰하면서 환각에 대응할 수 있는 영재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열매처럼 육체를 단련시키고 오감을 향상시킴으로써 근본적인 대응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그런 중급 영식이 쉽게 발견될 리 없으니 임시적인 효과라도 낼 수 있는 재료를 찾는 것이었다.
다행히 노력이 빛을 발해 몇 가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쉽게 채집할 수 있는 게 그 별 유쾌하지 못한 기억이 서린 호수 속 어느 이름 모를 수초였다.
하여 그는 본격적으로 수둔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미래에 그 수초들이 다량 필요할 터였다.
'그 도마뱀 새끼들하고도 물속에서 기동전이 가능해야 해.'
꼭 그 수초들이 아니더라도 호수 자체가 미래의 더 빠른 수련을 위한 자원의 보고다. 거기 사는 강력한 수생 동물들로 혈목정과영주를 담그면 훨씬 효과가 뛰어날 것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한유진은 오늘도 은신처 한쪽, 제법 여유롭게 헤엄쳐 놀 수 있는 크기의 못에서 연습에 한창이었다.
그의 신형이 물속을 매우 빠른 속도로 헤엄쳐 나아간다. 몸을 감싸며 은은하게 반짝이는 푸른빛이 모든 방향에서 움직임을 도와주고 있다.
단지 움직임만 도와주는 게 아니라 호흡이 필요 없도록 만들어 주기까지 해서, 영기만 충분하다면 아가미 따위 없이도 긴 시간을 버틸 수 있다.
잠시 후.
무슨 날치처럼 물속에서 힘차게 튀어나온 그가 안정적으로 땅에 착지했다. 분명 방금까지 물속을 헤엄쳐 다녔음에도 전혀 젖지 않은 모습이었다.
수둔술에는 물을 피한다는 뜻의 피수술 효능이 자연스레 포함되어 있다. 피수술 자체가 기초라고 봐도 될 만큼 쉬운 법술이기도 한지라, 사실상 수사라면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뒤늦게 같이 못에서 헤엄쳐 놀던 무용이가 빠져나오더니 전신을 흔들어 사방으로 물방울을 튀겼다.
"속 편한 놈 같으니."
연습 도중 자기도 꽤나 즐겼으면서, 한유진은 괜히 타박하며 그 쓸모없는 녀석에게 피수술을 펼쳐 물기를 제거해 줬다.
나오면서 겸사겸사 잡아챈 영기 품은 물고기로 간식을 만들어 먹은 후.
그는 회원공으로 컨디션을 회복하고 거처 안에 편히 앉았다.
눈앞에는 숙성이 끝난 그 과일 영단 열여덟 알이 영롱한 붉은빛을 내며 놓여있었다.
'일주일에 하나씩 먹으면 되겠다.'
그러면 총 18주, 대략 네 달을 수련할 수 있다.
'그 정도 시간이면 내 실력도 물속에서 도마뱀 새끼들 회 치기에 충분해지겠지.'
생각하며 그는 영단 하나를 잡아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입에 넣었다.
31화. 수련의 성과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하는 한유진의 몸에 언뜻언뜻 붉은 기운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특히 감고 있는 눈꺼풀 안쪽으로도 그런 현상이 보여 조금 위험한 느낌을 줬다.
투드득······!
그의 몸 안쪽에서부터 뼈가 뒤틀리는 듯한 미약한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그 소리에 맞춰 붉은빛이 한차례씩 강해지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약 두 시간 후.
모든 기현상이 사라진 상태로 한유진이 깊은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드러난 눈동자가 어두운 거처 안에서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열매 연단에 성공하고 수련을 시작한 지 오늘로 대략 넉 달째였다. 그리고 소모량을 조절한 혈목정과영주도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보충해야 할 때였다.
수둔술을 포함한 오행법술들에 그럭저럭 만족할 만큼 익숙해졌고 청심술은 잠깐씩 눈붙일 때를 제외하면 항시 숨 쉬듯 펼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법혼 승화율이 무려 5할8푼에 이르렀다.
'고작 4개월 정도 만에.'
이건 분명히 놀라운 성과였다.
하늘의 재능을 타고난 천영근자는 법혼기에 오르는 최소 조건을 달성하기까지 백일 정도밖에 안 걸린다고 한다. 백일만에 수선자로서의 기초를 쌓는다고 하여 '백일축기'라는 단어까지 따로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최소 조건, 4할의 승화율을 의미할 뿐인지라 실제로 법혼기에 오르기까진 시간이 더 걸린다. 그런 천재가 10할 승화율의 '완벽축기'를 노리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2할7푼 승화율을 달성하는 데 걸린 시간이 대략 4개월이었으니까······.'
이렇게나 영기 짙고 영재가 사방에 널려있는 환경에서조차 천영근자의 재능을 절반이 살짝 넘는 수준으로밖에 따라잡지 못했다.
하나 바꿔 말하자면, 그런 수선계 공인 천재의 성장 속도를 절반씩이나 따라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겨우 진영근 하위권에 속한 재능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내가 법혼기에 오르기만 하면 이 재능 부족도 해결할 수 있어. 아니, 단순히 해결하는 정도를 넘어 전무후무한 길을 걷게 될 거다.'
아직은 구상 정도에 불과하지만 가능성이 충분하다.
'드래곤 하트······.'
설령 그 구상이 완전한 망상으로 끝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다른 길이 있을 터였다. 그만큼 그 자신의 각성 능력은 사기적이었으니까.
잠시 더 몸과 마음을 가다듬은 한유진이 거처를 나섰다. 바로 입구에 늘어진 채 졸고 있던 무용이가 문득 깨어나 그런 주인의 뒤를 따랐다.
"아니, 따라오지 말고 여기 있어. 오늘이 그 원정 날이니까."
말과 함께 통명어수결로 뜻을 전달한다. 살짝 늦게 그 뜻을 이해한 무용이가 찍찍 울음소리를 내더니 거처 안으로 쏙 들어가 사라졌다.
애완동물과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편리하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지금 같은 경우 조금 곤란했을지도 모른다.
'그간 한 번도 위험 요소의 징후를 발견 못 한 데다가 비상용 토굴도 여럿 마련해줬으니······.'
무용이를 남겨둬도 뭔가 사고 따위가 일어날 리 없다. 사고라고 해봤자 녀석이 몰래 영주 항아리 뚜껑을 열려다가 깨 먹는 정도밖에 없을 터다.
잠시 그때를 생각하던 한유진은 피식 웃고는 풍운술을 발휘해 거처를 나섰다.
호수까지는 이십 분 정도밖에 안 걸렸다. 예전보다 더 단축된 시간으로, 딱히 서두르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그만큼 실력이 늘었다는 증거였다.
수둔술과 지둔술을 연습하며 풍운술에 대한 이해가 덩달아 깊어진 덕이기도 했다. 법혼기에 오르고 나면 풍운술과 결이 비슷한 풍둔술은 쉽게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호숫가에서 예전의 바로 그 자리를 찾아낸 한유진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어찌나 주저함이 없는지 마치 자기 집 안방에 들어가는 듯한 태도였다.
'다 뒤졌다, 이 새끼들.'
그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어떤 적을 만나든 최소한 도망칠 수는 있으리란 자신감이었다.
물속으로 들어선 그의 몸을 감싸며 은은한 푸른빛이 서린다.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헤엄쳐 움직이면서 그는 일단 수초부터 채집했다.
마치 은방울꽃 같은 무늬가 곳곳에 피어난 제법 보기 좋은 생김새의 영식이었다. 꼭 그 무늬가 아니더라도 색감 자체가 화사해서 이 호수 속 분위기를 나름 밝게 꾸며주기도 한다.
낯선 생명체가 고속으로 접근하자 수초 사이에 숨어있던 다양한 물고기들이 허둥지둥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당연히 한유진은 별 신경 쓰지 않고 무자비하게 수초를 채집해 갔다.
채집이 쉬운 만큼 가공법도 까다롭지 않다. 즉, 이렇게 우악스레 뜯어내도 효능엔 문제가 없다.
그는 목표했던 그 수초 말고도 다른 영식들을 많이 채취했다. 하나하나 분석하여 쓸모를 알아내는 일도 수련의 일환이자 작은 재밋거리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다른 수초를 막 쥐어뜯으려던 한유진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휘릭 몸을 회전시키며 대각선 아래 방향으로 쏘아지는 기이한 움직임을 보였다.
딱 그쪽에서 슬그머니 나타나 간을 보던 한 수생 동물, 예의 그 도마뱀 괴물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언제 나올까 했지.'
일부러 호수의 이쪽 영역을 골라 입수했다. 경험상 도마뱀 녀석들의 영역임이 분명했으니까.
공격은 순식간이었다.
수둔술로 탄환처럼 쏘아지며 수계 공격 법술을 함께 펼친다. 주변 환경과 동화되어 투명하게 일렁이는 륜 형상의 기운이 시전자인 한유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예전 그렇게나 빠르게 느껴지던 도마뱀 녀석이 황급히 몸을 틀었지만 한발 늦었다. 거의 기습에 가까운 공격이기도 했거니와, 애초에 그 기습자의 속도가 도마뱀보다 느리지도 않았다.
끼우웅···!!
물속 특유의 둔중한 폭음에 섞여 도마뱀 괴물의 구슬픈 비명이 들려왔다.
진하게 번져나가기 시작한 핏물 사이로 과감히 뛰어드는 한유진의 신형을 자금광휘가 둘러싸며 사방에 빛을 드리웠다.
바로 그때 도마뱀이 최후의 반격을 가해왔다. 영기가 포함되어 감각을 교란하는 핏물 속에서 쩍 벌어진 주둥이가 갑작스레 날아든 것이다.
본성부터가 흉포한 녀석임이 분명했다. 자신이 죽을 것을 깨닫자 공포에 질리는 대신 같이 죽을 기세로 덤벼오는 것을 보면.
하나 그 최후의 발악은 형체가 없는 듯 느껴지는 자금광휘에 완전히 가로막혔다. 어마어마한 척력에 맥없이 밀려나는 듯한 광경이다.
직후 한유진의 손에서 쏘아진 두 번째 수륜이 놈의 몸통을 후려쳐 내부 장기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 놈.'
영기 소모가 심한 자금광휘를 거두며 그는 어물술로 전리품 시체를 끌고 수면 위로 향했다.
그러다가 한순간 번개처럼 반전하여 다시 아래로 쏘아졌다. 공교롭게도 예전 그때의 상황처럼 두 번째 도마뱀 괴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영악하게도 제 동족이 마지막으로 남긴 핏물 사이에 숨어 기습해 보려던 모양이었다. 상대가 일반적인 생물이었다면 통했을지도 모른다.
고속으로 내리꽂히는 한유진의 신형은 거의 인간 작살이 따로 없었다. 또한 이번에도 어김없이 쏘아진 수륜의 기세는 그 영기 파동만으로도 주변을 온통 짓누르는 듯했다.
재차 둔중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기습하려던 놈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로 미처 회피하지 못했기에 머리통이 완전 피떡으로 화했다.
'두 놈.'
한유진은 만족스레 웃으면서 그놈의 시체까지 어물술로 붙잡아 물 밖으로 향했다.
제대로 된 공방 능력과 기동성이 확보되자, 한때 매우 위협적이었던 도마뱀 괴물이 한두 수만에 처리 가능한 사냥감으로 변했다. 지금이라면 서너 마리가 동시에 덤벼들어도 별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뭍으로 나온 그는 두 시체를 적당히 겹쳐놓은 후 씨앗을 던지며 혈목정과술을 펼쳤다. 그렇게 나무가 고속으로 피어났다가 부서져 내리는 과정 이후 씨앗과 함께 여섯 개나 되는 열매를 회수했다.
"좋아, 좋아."
절로 그런 감탄사가 나왔다.
열매의 질이 확실하게 더 좋았다. 플라시보 효과 같은 게 아니라 도저히 모를 수 없는 정도로 영기 농도 차이가 났다.
도마뱀 괴물은 그가 이 원시림에서 처음으로 조우한 영기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생물이었다. 수준이 높은 만큼 그놈들을 양분 삼아 피어난 열매도 수준 높은 것이 당연하다.
근처 바위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그는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호수는 정말로 수련을 위한 자원의 보고였다.
* * *
아마도 목가적인 나날이라고 표현하는 게 그리 어색하지 않을 터였다.
특별한 변화가 거의 없는 울창한 자연 속에서 하루하루 수련하고, 술을 담그고, 영단을 만들고, 애완동물을 챙기며 놀아주고, 때때로 이런저런 특이한 재료로 별미를 만들어 먹고, 하루는 날을 잡아 경치 좋은 곳으로 소풍을 가기도 하는 등.
농업 대신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어느 한적하고 평화로운 농촌 마을의 생활과 비슷할 것 같은 느낌이다.
수련으로 매 순간 성장하는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노라면 심심하다는 감정은 별로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빈틈을 노려 파고드는 외로움도 무용이라는 애완동물 덕에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호수에서 채취한 수초를 영단으로 제조하는 일은 별 어렵지 않았다. 열매를 연단했던 일과 비교하면 그냥 계란을 굽거나 라면을 끓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겸사겸사 호수 생태계를 파악하는 일도 문제없이 진행되어 갔다.
최근 그가 도마뱀 놈들의 씨를 말리다시피 사냥한 결과 조금 변화가 이는 듯했지만, 워낙 넓은 호수였기에 문자 그대로 조금의 변화일 뿐 뭔가 큰 문제가 생길 수준은 아니었다.
설령 모종의 큰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사실 한유진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의 안전을 위협할 만한 강력한 놈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한 마리 발견하긴 했지.'
다행히 매우 느린 녀석이었다. 마치 문어와 거북이를 합쳐놓은 듯했는데 성격이 느긋한 건지 뭔지, 빠르게 움직이는 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또한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녀석이 머무는 영역으로는 거의 가지 않는 편이었다.
'그냥 이렇게 평생 사는 것도 의외로 괜찮겠는데······?'
불현듯 한유진은 그런 감상을 받았다.
자신의 무릎에서 늘어져 자고 있는 무용이를 쓰다듬으며 볕을 쬐고 있자니, 동시에 하루하루 성장하며 자아실현을 이루고 있다 보니, 정말로 이런 생활도 꽤 할만했다.
'어떻게 수사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 틀어박혀서 수련에 열중하나 싶었더니만······.'
생각해 보니 원시림에서 생활한 지가 벌써 2년이 넘어간다.
법혼 승화율은 무려 8할4푼에 도달한 상태였다. 걱정했던 환각도 이제는 자면서도 펼칠 수 있는 청심술과 수초로 만든 '청심단'에 힘입어 큰 문제로 번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법혼 승화율이 높아질수록 그 속도가 느려짐을 눈에 띄게 체감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늦어도 3년 정도만 더 수련하면 오직 천재들에게만 허락된다는 완벽축기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고작 1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만에.
'나는 확실히 천재는 아니야.'
하나 각성 능력으로 이런 풍요롭다 못해 사치스럽기까지 한 환경에서 수련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천재와 비견된다고 볼 수 있다.
법혼기가 멀지 않았다.
새삼 자각하면서 그는 느긋하게 하품했다.
현실에서도 헌터 활동을 위한 사전절차가 거의 다 끝나가는 마당이었으니, 여러모로 모든 일이 제대로 된 궤도에 올라서는 느낌이었다.
32화. 법혼기 승격
시간은 별사건 없이 평화롭게 흘러가 다시 2년이 넘게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계속 이런 식으로 생활해도 괜찮겠다고 느끼는 데는 수선자로서의 능력이 아주 크게 한몫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귀찮고 힘들고 불편할 수밖에 없는 여러 요소가 아무렇지도 않은 덕이었다.
추위와 더위에 대한 내성이 엄청난 것은 물론 어둠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딱딱한 데서 잠들었다고 등이 배기는 일 따위는 없으며 아예 며칠 이상 잠을 안 자도 멀쩡하다.
음식 섭취는 귀찮을 땐 영액주로 대체해 버릴 수 있고 청소나 샤워 등은 정화술 한 방이면 끝난다. 아무런 도구 없이도 필요한 거처나 물건을 뚝딱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이동과 정착이 자유롭다.
벌레나 짐승 따위에게 안전을 위협받는 일은 평범하게는 벌어질 수가 없으며 부상과 질병의 위험도 그냥 없는 수준이다.
'겨우 입문기에 불과하면서 참 여러 방면으로 탈인간스럽구나.'
그리고 그 탈인간스러움은 법혼기에 올라서면 한층 강화될 예정이었다.
법혼기 때부터는 영기만 있다면 수면과 음식 없이도 생존이 가능하다. 순수해진 육체에선 그 어떤 오물도 배출되지 않아 씻지 않아도 청결하다. 법혼으로 승화한 영혼의 힘은 수사 개인의 무의식적 선호에 따라 저절로 주변 더러움을 제거하기도 한다.
향상되는 지능과 신식이라는 초월적인 감각 및 법력의 우월성 등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비범함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저 법혼기일 뿐임에도.
확실히, 선(仙)범(凡)이 유별하다는 말은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선도를 걷는 입장에서 가슴 뛰게 하는 말도 없었다. 모든 인간은 가능한 한 뛰어나지려는 자아실현의 욕망을 가졌으니까.
'나는 오늘 법혼을 이뤄 본격적인 선도의 기초를 다진다.'
생각하는 한유진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명상을 벌써 반나절 이상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의 진지함을 읽은 듯 무용이도 평소처럼 까불거나 얼쩡거리지 않고 근처에 얌전히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
완전히 고요하고 평온해진 호흡과 함께, 어느새 회원공이 움직이며 그의 영혼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완벽축기.
흠잡을 곳 없이 완전하게 법혼으로 승화된 영혼이 느껴진다. 비유하자면 모든 준비가 완벽히 끝난 채 작동하기만을 기다리는 어느 경이로운 기계장치의 소프트웨어와 같다. 하드웨어는 단련된 육체일 테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 법결이 운용됨으로써 그 기계장치의 전원 버튼이 눌렸다.
변화는 빠르면서도 느렸다.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늘어지는 감각 속, 그가 인지하는 영혼의 색채가 무한으로 물들었다.
여태 정교히 쌓아온 모든 법문이 서로 연계된 채 떠올라 본격적인 융합을 시작하며 파문 친다. 마치 작은 태엽 하나의 움직임이 곧 모든 부품의 움직임으로 화하며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듯하다.
법문이란 세상천지 가득한 영기가 신비를 드러내는 현상이자 형태이고 방식이다.
오랜 세월 꾸준히 벼락을 맞아온 바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뇌전의 힘을 담은 문양, 용암에 몸을 담근 채 살아가는 생명체의 가죽에서 발견되는 화염의 힘을 담은 문양 등.
그것들이 바로 법문이다.
간단하게 신비의 결정체라고 칭해도 무리가 없을 터다.
그런 법문들을 모아 원하는 방향으로 상승효과를 일으키도록 설계하여 짜낸 것을 법결이라 하고, 그러한 법결로 이뤄진 공법의 목적은 인간을 영원불멸의 존재인 선(仙)으로 이끄는 것이다.
아마도 십만 년 이상에 걸쳐 꾸준히 검증되고 개선되어 왔을,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을 두고 뿌리내리며 완전히 꽃피워왔을 수선의 정수이자 기초가, 한유진의 영혼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완전히 끌어올려 고정시킨다.
이전의 승화가 그저 준비를 마치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면 이젠 진정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혼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새로운 힘, 법력을 감지했다. 마치 찬란한 금빛을 띠는 것 같았으나 다시 살피자면 영혼을 닮아 도저히 색채를 구별할 수 없이 무한했다.
동시에 그 법력의 흐름에 따라 육체가 강화되다 못해 터져버릴 것처럼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버틸 수 있다.'
경지 상승의 환희와 벅참 속에서도 한유진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열매 영단까지 복용하여 육체를 단련했는데 버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또한 완벽축기의 영향으로 법력이 그만큼 강력한데도 전혀 불안정하지 않다.
회원공에 포함된 일부이며, 또한 지난 몇 년 동안 자는 와중에도 펼치고 있던 청심술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를 침착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육체가 갈수록 충만해지며 한계를 몇 번이고 돌파하는 듯하다. 그런 느낌 속에서 육체에 구속받고 있던 오감이 갑작스레 둑이 무너진 것처럼 외부로 뿜어져 나갔다.
오직 수사만이 갖출 수 있는 새롭고도 초월적인 감각, 신식(神識)의 개화였다.
완벽축기와 열매 영단의 효능으로 향상된 오감을 바탕하여 태어난 신식은 그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다른 평범한 법혼기 수사의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날 것이다.
마치 평생 눈 감고 있던 자가 처음으로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영안술을 사용해야만 희미하게 볼 수 있던 모든 영적인 것들이 그냥 선명하게 보였다. 굳이 육체의 오감을 동원할 것 없이 그저 마음이 가는 순간 인지할 수 있고, 평범한 오감으로는 닿을 수 없는 부분마저 훤히 느껴진다.
가령, 그는 이제 자신의 몸속 영혼의 상태와 법력의 흐름 따위를 그 어떤 방식보다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직접 해부하여 펼쳐놓고 온갖 도구를 활용해 살펴도 이보다 더 자세할 수는 없을 터다.
또한 신식 탄생의 효과는 단지 새로운 감각을 얻어 인지가 확장되는 것만이 아니었다.
마치 몸밖에 새로운 몇 개 이상의 뇌가 추가되기라도 한 것 같다.
창의성 같은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한 번 보면 바로 외울 수 있을 듯했고, 복잡하던 계산이 저절로 풀어져 답을 도출하는 듯했으며, 자연히 무언가를 판단하는 것 역시 너무나 쉽고 명쾌했다.
확장된 인지와 어우러지자 마치 주변 이삼십 미터 반경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항시 집중한 상태로 관찰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고.
그때쯤 모든 변화가 마무리되고 안정화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입문기에서 그렇게 시간을 투자하여 단련해 왔으니 변화는 빠르고 부드럽게 끝나야 마땅하다. 완벽축기를 이룬 만큼 더더욱 그렇다.
'드디어.'
생각하며 한유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길게 내뱉는 숨결에 변화의 잔재가 살짝 묻어나듯 영기 파동이 반짝이다가 사라진다.
찍-! 찍!
주인의 성취감 가득한 기분을 감지한 무용이가 다가와 난리를 피웠다. 여태 얌전히 있던 것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유난스러웠다.
아마도 주인이 법혼기가 됨으로써 자신 역시 입문기급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아는 듯했다.
"어허, 가만히 좀 있어라."
하나 한유진은 지금 막 승격을 마친 상황에 바로 수련부터 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 큰 성취를 이룬 다음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놀아줄 필요가 있다.
'아닌가? 아님 말고.'
어쨌든 지금은 그래도 된다.
그는 무용이를 품에 안아 들며 밖으로 나섰다. 언제 밤이 됐는지 아주 깜깜했지만 굳이 영안술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무용이야 원래 밤눈이 밝은 짐승인지라 별문제 없었고 말이다.
향하는 곳이 이전에 특별히 따로 담가둔 영주 항아리가 있는 장소임을 알자 쓸모없이 식탐만 많은 녀석이 또 흥분하며 좋아했다.
"오늘 이거 다 마셔버려야겠다."
충분히 그렇게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영주 항아리를 통째로 챙긴 그는 아예 다른 곳에 비축해 둔 고기까지 상당량 꺼내와 흥청망청 굽기 시작했다.
실로 아름답고 보람차기 그지없는 밤이었다.
* * *
한유진은 바로 현실로 귀환하려 들지 않았다.
법혼기에 오르며 성장한 능력에 적응할 필요성이 있었고, 여태 제대로 연습하지 못했던 지둔술 등에 익숙해질 필요성도 있었다.
결단기를 위한 수련은 어차피 적당한 공법이 없어 불가능하다. 그는 하루 종일 법술만 수련하며 빠르게 실력을 길렀다.
그렇게 약 두 달 정도 만에 법술 특화 방어막인 파법뇌벽술을 익혔고, 지둔술에 능숙해지는 것은 물론 풍둔술까지 익혀냈다. 그럼으로써 법혼기 수사답게 허공을 날 수 있게 됐다.
화둔술과 뇌둔술도 당연히 익혔다.
다른 오행 속성의 둔술들을 익히면서 절로 깨달아지는 부분이 많았고, 무엇보다 법혼기에 오름으로써 향상된 지능 덕에 예전보다 수련이 몇 배 이상 수월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의 새롭고 특별한 법술을 제작하려 했다.
바로 '탈출'을 위한 법술이었다.
꼭 죽거나 완전히 무력화되는 방식으로만 그 대기 장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항상 마음에 걸리던 부분이다. 자칫 원치 않는 어중간한 상황에서 고통받게 될지도 모르는 탓이다.
즉, 탈출 법술이 습관이라도 되면 큰일 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법혼기에 오른 내 정신으로, 어지간히 멍청하게 굴지 않는 한 괜찮을 거다.'
그렇게 고민하고 또 고민한 다음에야 법술 제작에 들어갔다.
이왕 만들기로 했다면 최대한 빠르고 확실하고 편안하게 탈출할 수 있어야 한다. 방식을 구상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 구상을 실현하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
그 탈출 법술이 완성되고 약 사흘 후.
한유진은 꽤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상당히 정이 든 은신처를 돌아보며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품에는 무용이를 안고서 쓰다듬는 채였다.
무용이는 그가 법술을 수련하는 동안 곁에서 통명어수결의 효용을 톡톡히 누렸다.
대략 입문기급 힘을 갖추게 된 것은 물론, 영적 소통 방식으로 아주 쉽게 전수된 몇 가지 법술도 펼칠 수 있게 됐다. 주로 숨고 도망치는 것들이었지만 공격용 법술도 분명 존재했다.
'아직 영지가 덜 발달했으니 A급은 절대 아니겠고, C급? 잘하면 B급 하위권 정도는 되려나.'
막상 B급 헌터와 붙으면 상대가 무용이의 능력을 잘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기긴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이 쓸모없던 짐승이 무려 B급 헌터와 맞붙을만하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내 애완동물마저 이럴진대, 이제 나는 현실에서 명백히 먼치킨이겠구나.'
바로 이런 힘을 위해 선협식 수련을 시작한 거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제 가자."
여유롭게 마저 마음을 정리한 그가 평소 애용하던 바위에 앉았다. 그리고 무용이와 함께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담아 처음으로 그 탈출 법술을 시전했다.
과연 힘들게 만들어 낸 보람이 있었다.
- 당신은 죽었습니다.
그 어떤 느낌도 없이 세상이 한순간에 암전되더니, 은빛 문자들이 신비롭게 떠올랐다.
아주 짧은 순간 만에 뇌와 심장이 완벽하게 망가진 것이었다. 그 어떤 강력한 존재가 곁에 있더라도 마음대로 살려낼 수 없도록.
- 수확물을 선택하십시오.
대기 장소에서 문득 새삼 정신을 차린 그는 눈앞에 펼쳐진 수확물들을 살폈다. 그리고 한쪽에서 잠든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둥둥 떠 있는 무용이를 바로 선택했다. 카르마 소모 따위는 계산하지도 않았다.
이어 선택한 것은 당연히 여태까지의 수련 성과로, 둘 다 선택하고 나자 남은 카르마의 양은 대략 7할4푼 정도였다.
'소모된 게 고작 2할6푼?'
무려 법혼기에 오른 수련 성과를 선택했는데 이렇게나 저렴하다니, 절로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다. 필시 환경의 도움을 받았을지언정 거저 주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나머지는 사실상 선택할 필요가 없다. 필요할 때 언제든 다시 채집하거나 만들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다 됐다.'
수확물 선택을 확정하며 그는 바로 현실에서 깨어날 준비를 했다.
머릿속으론 앞으로 어떤 일부터 하면 좋을지 계획을 세우면서였다.
33화. 현실 습격
중국 베이징의 외곽, 순이구 지역 서북쪽엔 좋은 자연환경을 벗 삼은 고급 별장들이 다수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크고 웅장한 어느 별장에 한 40대 남성이 들어서고 있었다. 둥그스름한 턱선이 순한 느낌을 주는 데다가 평소 자주 웃고 다니는지 금방이라도 미소를 지을 듯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공안부 소속 경호 요원들의 인사를 대강 흘려 받으면서 잘 관리된 정원을 지나 별장 건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익숙한 듯 복도를 걸어 화려한 디자인의 문 앞에 섰다.
정중한 노크 후.
답변은 수십 초가 지나서야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 들어오시게.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는 순간 비릿하여 불쾌한 냄새를 맡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넓고 화려한 방 한쪽 커다란 침대 위에 나체로 널브러진 여자들의 모습에도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직 방 중앙의 소파에 앉아 가운을 걸치고 앉은 노인에게만 집중하며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신 내용을 확인해 봤습니다. 확실히 한국 수사기관에서 먼저 알고 찔러본 건 아니었습니다."
"허······."
노인은 어이없다는 듯 짧게 웃었다.
"하면, 그 민간인 제보자는 대체 어찌 냄새를 맡았다고 하오?"
"그것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단지 이능관리국과 어떤 연결점이 있긴 하더군요."
이후 남자는 노인에게 알아낸 바를 간결히 설명했다.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는 짧은 내용이기도 했다.
하나 아무리 짧은 내용이더라도 아직 세간에 공개된 정보가 아닌 것을 입수했다는 점부터 이들의 첩보력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기이하구나······ 느낌이 기이해······."
노인은 고민하는 표정으로 꽤 오랜 시간을 침묵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수석 비서를 보며 말했다.
"어찌 생각하시오?"
"아무래도 우연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다른 우연적인 부분이 몇 더 있긴 합니다만."
"혹시 우리랑 비슷한 과일 확률은?"
"특별한 단서 같은 건 전혀 없었습니다."
다시 잠깐 침묵하던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확인을 좀 해 보고 싶은데, 어찌 생각하나?"
노인이 여태 하던 반존대를 접으며 더 편한 어조로 말했다. 이는 그 둘의 관계가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긴밀하다는 뜻이었다.
남자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힐끗 방 한쪽 침대 위 여자들을 살폈다.
"신경 쓰지 마시게. 다 제정신이 아니니까."
"다일사불여소일사입니다. 하물며 다른 나라이지 않습니까."
대략 긁어 부스럼이라는 뜻이다.
"하나 소심사득만년선이라지."
이는 대략 매사에 주의해야만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단 뜻이다.
"십년흑귀······ 아니, 백년흑귀 두 마리면 충분할 것 같은데."
"사도께선······."
"알지 않나, 내게 이 정도 재량권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내 상황이 마냥 편치 않고 시간도 부족하다는 것을."
노인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데 수석 비서로서도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못해도 차관급에 해당하는 그의 모든 권력이 대부분 상대방에게서 기원하는 탓이었다.
심지어 그런 권력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아예 목숨까지 함께해야 하는 절대적 운명공동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합한 사역사를 추려보겠습니다."
"너무 뛰어난 자는 고르지 말도록 하게. 추후 우리 손으로 처리해야 할 수도 있으니."
남자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몸 돌려 방을 나섰다. 노인은 다시 한숨을 쉬다가 몸을 일으켜 침대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 * *
예상치 못하게 대량의 카르마를 얻어 훨씬 더 이른 시간 만에 법혼기로 승격했다. 그래서 원래 세워두었던 계획에 몇 가지 변경점을 줄 필요가 있었다.
하나 한유진은 바로 그런 일에 집중하는 대신 이틀 정도를 그냥 푹 쉬면서 헌터 전문학교 야간반 사전교육에만 신경 썼다.
어떻게 쉬었는가 하면, 굳이 식사가 필요 없음에도 라면과 김치 등을 포함한 온갖 음식을 찾아 먹었고, 마이튜브 쇼츠를 몇 시간 넘게 돌려보기도 했으며, 친구 박희원을 다시 만나 별 의미 없는 수다를 떨기도 했다.
무용이와 노는 것은 일상이라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는데, 어쨌든 전부 떨어진 현실감을 끌어올리기 위한 일이었다. 원시림에서 5년도 더 넘게 수련에만 열중했더니 전체적으로 붕 뜬 느낌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여기가 내 고향이자 본진이야.'
각성 능력으로 다른 세상에서 얼마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든, 결국 이곳에서 시작하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또한 카르마를 얻는 일도 오직 이곳 현실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현실감을 되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귀환한 지 사흘째 아침.
그는 컴퓨터 메모장 등을 이용해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정리했다.
'사실, 여태까진 그냥 일단 강해지고 보자는 마인드였지.'
딱히 문제라고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실제로 그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으니까.
하나 이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원대한 목표를 세워볼 때도 됐다. 그렇게 강해져서 과연 무엇을 이룰 것인가에 대해 말이다.
우선 그는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뿐 확실하게 S급 헌터가 됐다. 다른 세상이라면 몰라도 여기서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상위급 강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S급 헌터로 잘 활동하면 끝인가? 그렇게 카르마를 쌓고, 지식도 좀 풀면서 추가 카르마를 쌓고, 그 와중 벌리는 돈으로 여유롭게 사치도 부리고, 애인도 만들고 하면서?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지구가 계속 평화로우리란 보장이 있다면 그것도 썩 나쁘진 않을 터다. 하지만 그러기엔 일단 종말 후 지구에 대한 의혹이 풀리지 않고 남아있다.
하니 그 의혹에 대한 해결을 일차적인 목표로 잡고 좀 더 부지런히 달릴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달리다 보면, 그는 자연스레 점점 더 강해지면서 S급 헌터조차 아득히 뛰어넘게 될 터였다.
그때가 되면 단순한 헌터 활동만으론 이래저래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 분명했다. 카르마를 쌓는 일에서든, 개인적인 보람을 느끼는 일에서든.
'여기를······ 이 지구를 내 영지로 삼는 거다.'
문득 떠오른 발상이었지만 그보다 더 적합한 게 또 없었다.
이 지구는 그의 고향이자 본진이며 유일한 카르마 수급처다. 현실의 몸으로 다른 세상에 정착할 수 있지 않다면, 좋으나 싫으나 이곳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고 발전시켜야만 한다.
'지구 전체를 내 것으로 여기면서 지키고 발전시킨다. 내 수선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여 온갖 세계의 다양한 지식을 함께 적절히 풀면서.'
누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했던가.
더 많은 카르마를 더 효율적으로 벌기 위해서라도 결국 그런 목표를 세울 수밖에 없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게 딱히 불만스럽지도 않았다.
문득 예전에 친구 박희원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만약 현실에서 선협 능력을 각성하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녀석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웃으면서 그냥 신이 되는 거라고 답했었다.
'신······.'
한때 세계 전체가 심각히 우려하던 '절대자 출현'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 될 줄이야.
물론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각성 능력이라면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여겼다.
'다른 세계의 무력 수준이 어떤지를 생각해 보면, 꼭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지.'
지구 인류는 아직 신비학 분야에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신비학이 발전할수록 개인의 힘이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이다.
'어차피 언젠가 벌어질 일이라면, 내가 그 주인공이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그렇게 어느 평범하게 낡고 비좁은 원룸에서 더없이 거창하고 원대한 목표가 세워졌다.
'내가······ 신세계의 신이 되는 거다.'
사전교육이 끝나는 시기에 맞춰 S급 헌터가 되었음을 알리고, 그때까지 다 정리한 지식을 넘겨주면서 원래 계획보다 더 빠르고 폭넓은 보급을 주문한다.
분명 어마어마한 주목을 받게 되겠지만 어차피 원래부터 각오했던 바였다. 그리고 법혼기 수사가 되었는데 그런 걸 굳이 꺼릴 이유도 없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그러려면 이미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갖 국제법을 다 어기며 독재자 짓을 하고 있는 S급 범죄자들부터 정을 맞았어야 한다.
그놈들이 멀쩡한데 안전한 대한민국에서 정부와 협력하며 보호받을 자신이 정 맞을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당연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정을 내리치려 시도할지 모르겠지만, 일차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보호막을 뚫어야 할 것이며, 이차적으로는 법혼기 수사인 한유진 자신의 무력을 뚫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그 시기가 결코 늦어서도 안 될 터였다. 그는 카르마만 충분하다면 하룻밤 자고 일어날 때마다 계단식으로, 아니, 절벽식으로 확확 강해질 수 있었으니까.
방심은 금물이지만 과하게 움츠리는 것도 어리석다. 스스로의 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결론을 낸 한유진은 휴식을 끝내고 바로 행동에 나섰다.
우선은 보급하려는 지식을 따로 정리하는 작업부터였다. 법혼기 수사가 된 이후 마음먹고 작업을 시작하자, 효율이 거진 예전의 일고여덟 배에 달했다.
그러면서 이제 며칠 남지 않은 헌터 사전교육에 오늘도 출석도장을 찍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름 유익한 지식도 있으니까.'
이제 헌터 사전교육에서는 원시적인 몇 가지 법문 활용법, 지구식 표현으로는 글리프 활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빛이 없거나 호흡이 불편한 곳 등에서 써먹을 수 있을 아주 원시적인 기술들이다.
그는 자신의 지식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 과연 어떤 파장이 일어날지 매우 기대가 돼서 몸이 근질거렸다. 세운 계획과는 별개로 부와 명예를 얻는 일에 관심이 없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곧 긍정적인 방향으로 격변할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며 택시에서 내려 원룸 건물로 향하는 때였다.
문득.
법혼기 수사라면 마땅히 항상 펼쳐져 있는 신식 감각망에 무언가가 걸려 들었다. 그것들은 감지된 순간부터 이미 그를 공격해 오고 있었다.
저절로 사고가 가속하며 세상이 느려지는 듯하다.
허공중 밤바람에 흩날리던 먼지들이 거의 멈춰 버린다. 대로변에서 떨어진 골목길, 하나 딱히 으슥하다곤 볼 수 없는 그런 길임에도 이런 습격을 당하게 될 줄 미처 몰랐다.
전신에 새까만 기운을 두른 괴인형체 둘이 그를 향해 손톱을 세우며 흉포하게 달려드는 모습이었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아주 자세히 그것들을 살피던 한유진의 마음이 더없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귀신.'
종말 후 지구에서 보이던 바로 그놈들이다. 외형과 풍기는 기운에 거의 차이가 없다.
게다가 그냥 잡귀라고 치부할 놈들도 아닌 것이, 둘이 합쳐 A급 헌터 정도는 어렵잖게 처리할 수 있을 그런 정도의 힘이 느껴졌다. 만약 그가 법혼기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이것들의 기습을 감지하고 대처하기에도 급급했을 터다.
하나 놈들에겐 안타깝게도.
그는 고작 하룻밤 만에 이전보다 족히 열 배 이상 강력해진 상태였고, 심지어 상대의 정체와 대처법을 모르지도 않았다.
놈들이 달려드는 채 1초도 안 될 짧디짧은 순간.
대처를 위해 손을 들어 올리며 머릿속으로는 이미 상황 이후에 대해 몇 가지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이 일의 배경에 이르기까지 가설을 세우는 중이었다.
난데없이 귀신들이 나타나 공격해 올 만한 이유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얼마 전 자신이 제보하여 소탕당했던 그 사이비종교이자 국제 마약범죄 조직 놈들밖에 없었다.
'역시, 내 감이 맞았구나.'
그 사이비종교 놈들은 확실히 귀신 원희와 연관이 있다. 마약이라는 범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음이 지금 이 순간 명확해졌다.
'잘됐다.'
안 그래도 종말 후 지구에 대한 단서를 찾기 곤란하던 차였다. 결단기에 오른 후 그 세계에 방문해서 위험한 탐색을 해 볼 수밖에 없나 싶었는데.
알아서 단서가 나타났다.
'날 잡고 싶었으면 원희까진 아니더라도 그 정장 귀신 정도는 데려왔어야지.'
생각하는 그의 몸을 두르며 시퍼런 뇌전의 장벽이 형성된다. 동시에 그 안쪽에서부터 웬 검 끝이 불쑥 튀어나와 청백색 법문 금제를 번뜩였다.
적막하던 주택가 밤거리를 통째로 뒤흔드는 벽력음이 터져 나왔다.
34화. 초고속 심문
파법뇌벽술은 자금광휘술보다 물리적 방어력이 낮은 대신 법술적 방어력이 높다.
또한 뇌전의 특성상 방어와 반격이 동시에 이뤄지고, 만약 다른 뇌전계 법술을 시전한다면 저절로 합류해 위력을 상승시키기도 한다.
하여 한유진이 오행검을 통해 쏘아 낸 뇌전의 기운은 원래보다 두 배 가까이 강해졌다. 또한 법혼기에 오름으로써 법력을 다루게 된 만큼 위력이 기본적으로 예전보다 일고여덟 배 이상이었다.
즉.
지금의 공격은 그가 예전에 오행검을 다룰 때와 비교해 족히 열다섯 배 이상 강력했다.
벽력음을 인지했을 땐 이미 골목길 전체를 흑백으로 번쩍이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섬광이 지나간 후였고, 그 섬광과 함께 목표물에 명중한 뇌전은 A급 헌터를 어렵잖게 처리할 수 있을 귀신 두 마리를 증발시키듯 없애버렸다.
동시에 펼쳐진 영안술이 신식과 더해지며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시각을 선사한다.
신식을 개화했다고 하여 영안술이 쓸모없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신식에 힘입어 한층 더 뛰어난 수준으로 법술을 펼칠 수 있으니, 이전이라면 보지 못했을 '흔적'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없애버린 두 귀신과 방금까지 연결되어 있던 모종의 기운 잔재를 따라 한 걸음 내디뎠다.
콰르릉-!
그렇게 섬광과 뇌성을 동반하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단거리 속도에서만큼은 오행둔술 중 최고인 뇌둔술이었다.
비슷한 수준의 인지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에겐 거의 순간이동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습격의 현장에서 대략 이백 미터 떨어진 어느 건물의 옥상, 한 꾀죄죄한 인상의 남자가 다루던 귀신들의 소멸을 감지하곤 놀라던 때.
한 줄기 우르릉거리는 소음과 함께 청백색 빛이 번쩍이더니 남자의 목표물이던 한유진이 코앞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채 반항할 새 없이 뻗어진 손이 멱살을 틀어잡았다.
"영원의 여신교, 맞지?"
남자는 기겁하면서도 훈련에 따라 즉시 반응했다. 허리춤에서 신속히 뽑아 든 군용 대검을 곧장 상대방의 목덜미로 찔러넣은 것이다.
원래 임무는 살해가 아닌 귀신들을 이용한 무력화 및 빙의다. 그게 여의찮다면 다루는 귀신들로 하여금 영혼을 포식하게 하여 기억의 단편이라도 건지는 게 목적이다.
하나 이런 상황이라면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런 본능에 가까운 판단으로 행한 제법 신속하고 매서운 대응이었으나······.
한유진은 날아드는 대검의 끝을 손가락만으로 잡아냈다. 희미한 자금광휘가 서린 손가락이었다.
파악건대, 상대가 잘 훈련받은 일종의 암살자임은 확실했으나 다루던 귀신들과 달리 본신의 힘은 D급 헌터만도 못했다.
법혼기에 오른 인지능력으로 이 정도 속도에 반응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힘 역시 평범한 사람보다는 강했지만 법혼기 수사의 육체를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었고 말이다.
쩌억-!!
"컥···!"
언제 날아들었는지 모를 손이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단순한 손찌검이라기엔 거의 두개골에 금이 간 듯한 심상찮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남자가 일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쯤 됐으면 상황 파악을 해야지. 뒤지기 싫으면 가만있어."
말과 함께 대검을 빼앗아 든 한유진이 한 번 더 무력시위를 했다.
손에서 붉은빛 화염이 피어오른다 싶더니 대검이 한 줌 시뻘건 쇳물로 변해 줄줄 흘러내린 것이었다. 손잡이 등의 비금속 부분은 연기조차 내지 못하며 약간의 재로 부서져 내리는 모습이다.
"괴, 괴물······!"
강력한 따귀 후리기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남자는 그 장면을 보고 경악하며 신음했다.
"이건··· 이런 정보는······."
"그냥 A급 헌터 정도라고 들은 모양이지? 누구한테 들었는데? 영원의 여신교 관계자가 아직도 한국에 있나? 아니면 중국에서 왔어? 근데 중국 놈 치곤 한국어 잘하던데, 조선족인가? 너희 귀신 다루는 법은 어떻게 알았냐? 균열에서 얻은 지식이야?"
거의 대답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연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한유진의 두 눈에 서늘한 빛이 맴돌았다.
남자는 그 광경에 저절로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무언가.
격이 다른 미지의 존재를 건드린 것 같은, 그런 압도감이 밀려든다.
"너 조선족 아니구나."
그리고 그런 압도감을 선사하는 상대가 마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단정 지어 말하는 것이었다.
"중국인도 아닌 것 같네. 뭐냐?"
"고, 고려인인데······."
"고려인은 보통 한국어 잘 안 하지 않나? 뭐 어쨌든, 살려줄 테니 항복해라. 목숨까지 바칠 만큼 그 사이비종교에 독실한 건 아니겠지? 너도 그놈들이 정상 아니라는 거 알잖아?"
도대체 이게 심문인지 뭔지 모르겠는 폭풍 같은 질문 공세였다. 하지만 남자는 상대가 그런 질문만으로도 얼추 답을 알아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건 마냥 착각이 아니었다.
한유진의 신식은 그 남자의 아주 미세한 반응조차 놓치지 않고 감지해 낼 수 있었고, 향상된 지능은 그런 작은 반응들을 빠르고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었다.
"어차피 네 임무는 글렀어. 근데 온전히 네 잘못은 아니야. 나 같은 사람을 너 따위한테 어떻게 해 보라고 임무를 내린 그놈들이 멍청한 거지. 그리고, 내가 지금 그냥 풀어줘도 그놈들한테 팽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 있어?"
"그···."
"너 귀신 다루는 법 배우면서 그놈들한테 무슨 약속 받았어? 부귀영화를 안겨주겠다고 하디? 근데 내가 알기로 이런 귀신 다루는 게 상당히 위험한 일이거든? 거의 맨손으로 독극물을 다루는 수준인데, 그거 알고도 지원한 거야?"
"그, 그런 이야기를 듣긴 했···."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원래 계약할 때 위험 요소 고지를 제대로 못 받으면 그거 사기야. 너 반서(反噬)가 뭔지 알아?"
반서란 넓게 보자면 법술의 부작용을 뜻하는데, 좁게는 주로 사역하던 존재에게 역으로 당하는 일을 가리킨다.
"귀신들이 너 보면서 입맛 다신 적 없었냐고."
있었다.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몇 가지 섬뜩한 기억을 되짚으며 몸을 떨었다. 그런 반응을 한유진이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고민하지 말고 항복해.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다. 네 목숨 갖고 사기 치던 놈들한테 의리 지킬 필요 없잖아? 그냥 아는 정보 시원하게 다 불고 귀화나 하자. 너 여기서 헌터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모르지? 알면 더 이야기가 쉬울 테고."
"그···."
"암살 시도한 건 네가 빠르게 항복 결심하면 봐줄게."
"정말··· 이십니까?"
"나는 네가 가진 정보가 필요해. 요컨대 거래하자는 거지."
이어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잠깐 침묵하던 한유진이 다시 말했다.
"선뜻 결정하기에 그 사이비종교 놈들이 무서우면, 지금 누구 주먹이 더 가까운지 한번 다시 생각해 보라고. 내가 정당방위로 교전하던 중 힘 조절을 살짝 잘못해서 네 팔다리 한두 개, 눈깔 한두 개는 날려버릴 수도 있는 거니까."
그에 남자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태연하게 말하는 어조에서 결코 허세가 아님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한데, 그 떨림이 잠깐 이어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심해지는 기색이었다. 그에 신식으로 상대를 감시하던 한유진은 그만 이마를 짚었다.
"씨발······ 내가 방금 말했지, 너 이거 위험한 짓이라고. 너보다 강한 귀신을 둘씩이나 부리면서 멀쩡할 줄 알았어?"
"흐헉··· 꺼흐윽···!"
남자의 부릅떠진 눈 흰자에 온통 핏줄이 돋다 못해 곳곳이 터져 나간다. 동공이 엄청나게 확대되다가 마치 먹물이 터지듯 검은빛 기운이 뿜어지며 완전한 어둠으로 물든다.
벌어진 입에선 제대로 된 비명조차 나오지 못하고, 떨림은 경직으로 변해 발버둥조차 어렵게 만든다.
한유진의 신식에 남자의 영혼이 두 검은빛 귀기에 마구잡이로 찢겨나가는 것이 감지됐다. 단순히 찢기는 게 아니라 흡사 파먹히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귀신을 부리는 수단으로써 남자의 영혼과 동화된 귀기인 듯했는데, 안타깝게도 그가 익힌 치유술은 육체적 부상엔 몰라도 이런 영적 부상엔 별 효과적이지 못했다. 심지어 이렇게나 빠르고 격렬히 진행되는 파멸적 부상에는 더더욱.
"너 못 살린다. 내가 아니라 다른 누가 와도 못 살려."
한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에 고통으로 벌벌 떨던 남자에게서 절망의 기색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죽도록 만든 놈들한테 복수나 하자. 누구야? 어디의 누가 너한테 이런 짓 하라고 시켰어?"
"꺼흐흑···!"
아주 잠깐 더 격렬히 몸을 떨던 남자가 입을 뻐끔거렸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하나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애초부터 버리는 패였나······?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네.'
청심술에 힘입어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던 한유진과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귀신만큼이나 무섭게 변한 눈이 끔찍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분명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 이징···!!"
마치 비명처럼 나온 말이었다.
그 말이 끝난 순간 남자가 입으로 피를 뿜었다. 단순히 입에서만이 아니라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마지막으로 몸을 경련했다.
그렇게 영혼이 찢겨 부서진 채로, 다루던 귀신들의 잔재와 함께 영원한 고요 속으로 잠겨 들었다.
"······."
몇 분 정도를 침묵하며 그 처참한 죽음을 보던 한유진이 주섬주섬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하는 번호는 당연하게도 경찰이 아닌 이능관리국의 담당 주무관 번호였다.
* * *
베이징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로 단순하게 그 지역에 위치한 특정 세력이나 개인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그곳에서 주로 생활하는 이런저런 유력자를 뜻하는지, 그도 아니면 자신이 생활하던 곳이니 다른 추가적인 단서가 거기에 있다는 의미인지.
'설마 중국 정부가 배후일 리는 없겠지.'
한유진이 고민하는 사이.
담당 주무관 강민아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경찰 인력을 대동하고서 현장에 나타났다.
조용하던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 와중, 그녀는 이능범죄수사국 소속의 남자 한 명을 곁에 두고서 대화에 나섰다. 이런 살인사건에 수사관이 빠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한유진은 그녀의 질문에 따라 사건의 경과를 처음부터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 표정 딱딱하고 융통성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은 수사관의 지위를 가늠해 봤다.
'담당 주무관보다 낮진 않은 모양이네.'
신식까지 동원하여 그런 느낌을 파악한 결과, 못해도 6급 공무원인 경감 정도임을 알 수 있었다. 5급이라기엔 현장에 일차적으로 직접 나섰으니 아닌 듯했고 말이다.
"잠시."
설명을 끝냈을 때 수사관이 나섰다.
"한유진 씨는 예비 A급 헌터시죠. 하면 이 사망자가 부렸다던 소환수 둘이 C급 정도였단 뜻입니까?"
요컨대 A급이긴 해도 예비에 불과한 네가 방금 진술대로 그렇게 빨리 처리해 버릴 수 있었다면, B급도 아닌 C급 수준이 아니었겠느냔 질문이다.
딱히 취조 같은 건 아니고 단지 진술의 객관성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그래서 한유진도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기분으로 답해줄 수 있었다.
"그렇진 않습니다. 원래는 그냥 며칠 있다가 헌터 사전교육이 끝나는 때 맞춰서 알리려고 했는데, 제가 S급이 됐거든요."
"네?"
옆에 있던 담당 주무관이 먼저 잘못 들었다는 것처럼 반문하고, 대화 중이던 표정 딱딱한 수사관도 조금 해괴해진 얼굴이었다.
A급과 S급, 단지 한 등급 차이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S급 헌터가 세계적으로 채 백 명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국가에 있어 얼마나 중요하며 위험한 인적자원인지도 알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에는 딱 두 명이 존재할 뿐인데, 그중 한 명이 언제 은퇴할지 모를 70대 노인임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폭탄선언이 따로 없었다.
'이 정도는 미리 밝혀줘야 괜히 힘 뺄 일 없겠지.'
설령 이 사건을 정당방위로 보기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더라도, 이제는 알아서 정당방위라고 확정 지어줄 것이다. 한유진 자신의 특수성까지 고려했을 때 결코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이왕 밝힌 김에 검증도 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제 말을 최대한 진지하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반서로 죽어버린 남자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제가 그냥 이유 없이 공격받은 게 아니거든요."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감히 보복을 행해온 놈들에게 긁어 부스럼이란 게 뭔지 알려주고 싶었다.
35화. 오행종 유적, 바위 뒤
한유진은 자신의 각성 능력에 대해 굳이 밝히지 않으면서도 이번 사건이 얼마나 무거운 건지 잘 설명해 줄 수 있었다.
놈들이 거하게 삽질을 해준 덕이었다.
자신들이 귀신이라는 꺼림칙한 존재를 다루며 그 귀신들이 절대 약하지 않아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공개된 적 없는 제보자의 정체를 파악해 보복을 가해 올 만큼 여느 마약범죄 조직 이상으로 음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서 다 증명해 줬지 않은가?
'일부러 한국어에 능숙한 고려인을 골라 보낸 듯한데, 죽으면서 베이징이라고 외칠 줄은 몰랐겠지.'
임무에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정보가 유출될 일 없고,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히트맨이 알아서 죽어버릴 테니 역시 정보가 유출될 일 없으리라 판단한 것 같다.
애초에 귀신이라는 존재가 한 번도 드러난 적 없는 상황에서 그 짧은 시간 만에 히트맨이 제압당하고 핵심을 찔리며 심문당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을 터다.
확실히 일반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했다. 하나, 습격당한 자가 S급 헌터임을 밝힌 시점에서 모든 게 말이 되는 느낌으로 변했다.
물론 영원의 여신교 입장에서 지금 상황이 꼭 치명적인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비록 평범한 마약범죄 조직이 아닌 귀신을 다루는 특별한 이능범죄 조직임이 들통났고, 베이징과의 연관성도 불확실하게나마 드러났다지만, 어차피 국제 마약범죄 조직으로 수배당한 처지에서 딱히 달라지는 게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유진은 놈들이 자신에게 굳이 암살자를 보내왔다는 점에 다시금 주목했다.
과연 순수한 보복이 목적이었을까? 아니면 들키게 된 연유를 파악해 모종의 우려를 해소하거나 대비하는 게 목적이었을까?
만약 후자라면 이쪽에서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놈들을 크게 자극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놈들이 발작이라도 한다면 뭔가 추가적인 단서를 얻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에서 잘 해줘야겠지.'
자신은 이제 S급 헌터였다.
다른 이유를 전부 제쳐두고서라도, 국가적 핵심 인재가 도심 한복판에서 습격당했으니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정부의 첩보기관이 움직일 이유로는 부족하지 않을 터였다.
어쨌든.
몇 가지 추가적인 진술을 포함하여 모든 중요한 이야기가 끝난 후.
담당 주무관은 거처를 자신들의 안전가옥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 왔다. 이미 한 번 습격을 당했으니 두 번 세 번도 가능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안전가옥에 대한 짧은 설명을 들은 한유진은 별 고민하지 않고 바로 수락했다.
흔히 안전가옥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 달리 서울 도심지 한복판에, 그것도 엄청나게 비싸며 그만큼 외부인 접근이 어렵고 프라이버시 보호가 확실한 최고급 아파트였기 때문이었다.
단지 자신의 신원이 파악당한 일로 살짝 찜찜할 뿐이었는데, 그에 대한 우려를 표하자 담당 주무관은 이번엔 결코 정보 누설이 없을 거라며 믿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비밀을 지킬 필요성이 불분명한 어느 사건 제보자에 대한 정보와 무조건 비밀로 유지해야 하는 안전가옥에 대한 정보의 취급이 같을 리 없다. 상대가 무슨 CIA도 아니고, 설마 이런 정보마저 탈취당하진 않을 것이다.
S급 헌터 검증은 시간이 늦은 만큼 내일 진행하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그런 탓에 예정돼 있던 균열 실습을 취소해야만 했는데, 이게 왜 안타까운 일인가 하면, 이능력 각성자들이 여러 차례 힘 쓰는 광경을 가까이서 신식으로 관찰해 볼 기회였기 때문이다.
대체 지구 사람들의 영근에 무슨 특이한 점이 있기에 각성 능력이라는 게 존재할까?
굉장히 궁금했지만 꼭 이번만이 기회는 아니었던지라 조금 아쉬운 정도로 단념할 수 있었다. 원래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변수가 발생하고 계획은 항시 변하는 법이다.
원룸으로 돌아왔을 때는 깊은 새벽이었다.
심심하게 홀로 있던 무용이를 한바탕 쓰다듬어준 뒤, 그는 녀석을 품에 안고서 귀중한 물건들만 챙겨 밖으로 나섰다. 당연히 제공받은 안전가옥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내가 안전가옥이란 데를 다 가보게 될 줄이야.'
한차례 습격당한 일로 가게 된 것임에도 마음은 별로 무겁지 않다. 스스로의 힘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덕이다.
은영술을 최대로 발휘하고 신식으로 주변을 꼼꼼히 살피면서 그는 유령처럼 빠르게 움직여갔다.
만에 하나 두 번째 암살자가 있더라도 그를 추적해 올 수는 없을 터였다.
* * *
더없이 황폐한 어느 산맥의 초입부.
말라비틀어져 죽은 나무들이 가득하고 쩍쩍 갈라진 땅과 우중충한 하늘이 더해져 완전한 종말의 느낌이 한껏 풍겨오는 장소.
세 번째로 방문한 말법 이후의 영원대륙이다. 한유진은 오행종으로 향하는 산길을 오르면서 짧게 생각했다.
'살짝 서둘러 방문한 감이 있지······.'
원래대로였다면 좀 더 늦게 방문했을 것이다. 아마도 헌터 사전교육이 끝나고 S급 판정마저 잘 마친 다음 방문하지 않았을까 싶다. 현실에서 맥이 끊기는 느낌을 피하려 했을 테니 말이다.
하나 습격이 발생한 만큼 그런 사소한 이유로 할 일을 미룰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 수련할 공법을 선택해야 하고 즉시 전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법기도 얻어야 한다. 이제 중상급 법기인 오행검만으로는 조금 부족했으니까.
이번 방문에서 무용이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 공허한 대기 장소에서 전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잠에 빠져있는 녀석을 살피다가, 그냥 거기서 계속 잠들어있게 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여기 데려와봤자 황폐함에 고통이나 받겠지.'
이곳엔 영기가 없기에 그는 법혼기 수사임에도 음식을 섭취해야 했다. 녀석을 데려오면 영액주를 나눠마셔야 할 테니 거주할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그러니 그냥 거기 놔두는 게 맞았다. 자신만 좀 외로움을 견디면 되는 거다.
사실 외로움을 느낄 틈이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 내문 구역 장서각의 옥간들을 읽는 일만 해도 엄청나게 바쁠 것이 분명했으니까.
'바위로 막혀있던 구역을 먼저 가볼까?'
외문 구역을 지나 바로 내문 구역으로 향하면서 그는 잠시 고민했다.
지둔술에 능숙해진 만큼 그 무식하게 단단하기만 한 바위를 통과하는 일은 쉬울 것이다. 안에서 무엇을 발견하느냐에 따라 이번 방문에서 할 일의 우선순위가 바뀔 수도 있다.
'괜히 궁금증을 참느니 시원하게 해소하는 편이 집중하기에도 낫겠지.'
현재까지 이곳 오행종 유적에서 유일하게 탐사하지 못한 부분이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그는 내문 구역에 도착하자마자 그 바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즉시 바위에 손을 대며 지둔술을 펼쳤다.
그의 신형이 희끄무레한 빛으로 변해 바위 속으로 스며든다. 그렇게 대략 오륙 미터 정도를 나아가자 반대편 공간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
'쉽구만.'
바위는 무식하게 튼튼했지만 말법의 재앙을 겪으며 영기를 전혀 품고 있지 못했다. 덕분에 아주 편히 통과했다.
'만약 내구성에 비례하는 영기를 품고 있었다면 시도조차 못 했겠지.'
생각하며 그는 안쪽 광경을 살폈다. 빛 한 점 없이 어두웠지만 영안술은 물론 신식까지 개화한 그에겐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꽤 특이한 장소라 할 수 있었다.
한때 어떤 느낌을 품고 있었을지 잘 모르겠지만, 마치 내문 구역에서도 특히 더 중요한 이들을 위해 소규모 거주지를 만들어 놓은 듯하다. 그러면서도 한쪽에 매우 삭막한 외형의 건물이 있어 조금 헷갈리게 만든다.
하나씩 돌아보면 된다.
한유진은 딱히 서두르지 않으며 외곽의 건물들부터 수색하려 했다. 그렇게 한 건물에 들어서기 직전, 중심부 광장처럼 보이는 곳에 펼쳐진 특이한 장면을 목격하곤 그쪽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보자 정확히 열두 구의 수사 해골이 법포를 걸친 채 널브러져 있었다. 법포들이 이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살짝 낡은 느낌만을 풍길 뿐 형태가 멀쩡한 것을 보아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여기는 확실히 신분 높은 자들이 머무르던 장소가 맞는 듯했다. 입구가 막혀있긴 했지만 죄수들이 이런 옷을 걸치고 있었다는 건 여러모로 말이 안 됐으니까.
그런 수사들의 해골이 둘러싼 중심부, 이 광장의 중심이기도 한 곳엔 반투명한 옥 받침대에 올려진 수박만 한 크기의 구형 금속체가 자리했다.
먼지가 쌓였다는 점을 제외하면 금색과 은색이 뒤섞여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구체다. 단지 색깔만 예쁜 게 아니라 산과 바다가 포함된 어느 비경의 모습을 유려하게 묘사한 양각조각 예술품이었다.
한유진의 신식이 그 구체와 주변을 둘러싼 수사 해골들을 포함하여 모든 단서를 살핀다. 향상된 지능은 딱히 집중하지 않고서도 그럴듯한 가설을 몇 개나 떠올려 냈다.
그리고 기억 한편에 묻혀있던 어느 사소한 정보마저 끌어내 성공적으로 결합하기도 했다.
'······산해주?'
조금 안 믿기면서도 들뜨는 기분이 든다.
산해주, 아마도 정식 명칭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고위 수사들이 사용할 만한 동천(洞天) 보물을 뜻한다. 판타지 식으로 치면 사람이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는 넓고 활용도 높은 아공간 아티팩트다.
'동천 보물일까? 정말로?'
명확한 단서는 하나도 없었으나 느낌이라는 게 있었다. 주변 수사 해골들이 널브러진 자세가 마치 이 보물에서 죄 튕겨 나온 것 같았으니까.
그가 아는 바대로라면 동천 보물의 활용도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내부에 영기가 흐르는 영맥(靈脈)이 존재하는 게 기본조건인지라 단순한 거주지나 창고로만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안에서 밭을 개간해 온갖 영식을 기르거나 몇 종류 영수를 풀어 사육할 수도 있다. 이동이 곤란한 각종 유용한 장비들을 마음껏 설치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가령, 복잡하고 정교한 진법으로 특별한 불꽃을 피워내는 연단로라든가, 비슷하게 덩치가 크고 섬세한 진법이 들어가는 연기대라든가.
동천 보물의 등급이 높다면 내부 영기 농도가 짙어 수련에도 큰 도움이 된다. 꼭 안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그저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그 영기 농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갖고 싶다···!'
어쩔 수 없는 소유욕이 은은하지만 매우 짙게 피어올랐다. 이는 마치 평범한 사람들이 훌륭한 집을 보곤 내 집 마련 욕구를 느끼는 것과 같았다.
원상복구하며 수확물로 선택하는 데 어마어마한 카르마가 필요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한유진은 일단 그 금속 구체의 먼지를 털어내곤 저물대에 챙겼다.
저물대에 넣으면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아주 묵직해진 기분이다.
그는 살짝 들뜬 상태로 재차 주변을 살폈다. 그렇게 신식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발견하지 못했을 희미한 흔적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흔적은 이 동굴에서 가장 삭막하게 지어진 직사각형 구조의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이질적인 겉모습만큼이나 특별한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선 그는 완전히 난장판이 된 내부 광경에 멈칫했다.
가장 먼저 주목하게 되는 건 이 난장판의 원인처럼 느껴지는 중심부, 어느 대 위에 꽂힌 새까맣고 고풍스러운 깃발이었다. 주변에 일정한 규칙을 갖고 박힌 온갖 금속과 옥기둥들이 한때 매우 삼엄한 금제가 펼쳐져 있었음을 짐작게 했다.
'뭐지?'
분명 말법의 재앙 속에서 완전히 힘을 잃었을 터인데도 비범한 느낌이 풍겨 나오는 듯하다.
이런 비슷한 느낌을 어디서 받아봤는가 했더니, 내문 구역 연기각 최상층의 통천령보 오행진령거석을 보며 받았던 느낌과 비슷했다.
'갖고 싶다······!'
분명 카르마가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도 한유진은 손까지 잘게 떨면서 다가가 그 칠흑빛 깃발의 깃대를 잡았다.
선도에 입문하고서 물욕이 사라졌나 싶었더니, 이런 물건들 앞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오행진령거석 때와 달리 너무나 멋진 외형이라 특히 더 그랬다.
'카르마······! 카르마가 부족해······!'
깃대를 잡은 채 그가 속으로 몇 번이고 탄식했다.
36화. 드래곤 하트 외단법
법기, 법보, 영보, 통천령보, 그리고 선보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외형과 성능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방패처럼 생겼지만 공격용일 수도 있고, 검처럼 생겼는데 회복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경향성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방패처럼 생겼다면 보통은 방어용이라는 뜻이다.
그런 측면에서 깃발류 물건은 진법용으로 많이 쓰인다. 그리고 혼령 사역용으로도 꽤 많이 쓰인다.
두 용도 모두 직접적으로 다른 물건과 부딪히며 싸울 일 없고, 면적이 넓어 법문 금제를 새기기도 용이할 테니 나름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이유가 있는 셈이다.
하나 사실, 그런 이유와 함께 굉장히 유명한 무언가의 모조품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뭐였더라··· 천지호련기, 무극귀혼번이었나?'
둘 다 엄청나게 유명한 선보(仙寶)의 이름이다.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불확실하지만 어쨌든 매우 유명하여 수많은 모조품을 낳았으니, 깃발류 보물에 진법용과 혼령 사역용이 많은 이유라 볼 수 있다.
그러니 지금 눈앞의 이 깃발도 어떤 용도일지 대략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또한 그런 짐작을 바탕으로 신식을 동원하면 확인하는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한동안 깃발을 잡고 정체를 파악하던 한유진의 표정에 의외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곳이 오행종이라는 정도 종문임에도 불구하고 예상과 달리 혼령에 대한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나자 깃발 주변을 둘러싼 삼엄한 금제의 흔적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못해도 영보, 느낌상 통천령보.'
생각하는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종말 후 지구의 귀신 원희였다.
'만약 이걸 원상복구하면서 수확물로 선택할 수 있다면······ 내가 그 원희를 부릴 수 있게 되는 거 아닌가?'
현재로선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등골을 타고 전율이 흐른다.
그는 입문기 시절 법혼 승화의 부작용으로 주로 원희의 환각을 봤을 만큼 그 귀신을 두려워했다. 애초에 귀신이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거니와 일대일로 마주쳤던 상대 중 가장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를 부릴 수도 있으리란 상상은 가진 두려움만큼이나 가슴 뛰게 만들었다.
어디 원희뿐이랴? 정장 귀신을 포함하여 그 종말 후 지구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귀신을 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세계를 완전히 끝장내버린 놈들을 말이다.
꽤 긴 시간을 더 그 깃대를 만지작거리며 아쉬워하던 그는, 결국 카르마가 부족하리란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 깃발을 저물대에 넣었다. 그리고 주변을 마저 둘러봤다.
물건이란 물건은 죄 부서졌고 바닥과 벽과 천장 모두 가릴 것 없이 거대한 짐승 떼가 할퀴고 간 것처럼 엉망이다.
'아무래도 여긴······.'
정도 종문인 오행종이 쓰긴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폐기하자니 너무 아까운 마도 속성 보물들을 모아놓았던 장소 같다. 일종의 창고이자 봉인지로서 말이다.
그렇다면 건물의 삭막한 외형도 설명이 된다. 봉인 금제와 어우러지는 실용성이 우선이었을 테니 겉을 꾸미는 건 오히려 방해가 됐을 터다.
혹시 건질 게 있나 싶어 내부를 잠시 더 수색했지만, 어찌나 철저한 파괴가 이뤄졌는지 다 조각들뿐이었다. 그럼에도 한유진은 그 조각들 중 일부를 챙겼다.
이 정도로 부서지고 망가진 것도 수확물로 선택할 때 원상복구가 가능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실험용이었다.
그렇게 그 창고이자 봉인지인 건물을 나선 그는 나머지 장소를 하나하나 전부 수색했다.
신식을 개화한 덕에 숨겨진 공간도 모두 놓치지 않고 살필 수 있었는데, 아마도 과거 멀쩡했을 때는 전부 금제로 가려져 있었을 그런 장소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수확이 적지 않았다.
내용물이 전부 썩다 못해 흙먼지처럼 변해버린 옥병 및 옥함 수십 개, 최소 법보일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 다수, 이곳 거주자들이 개인적으로 보관해 왔을 몇 법술서와 수선계 관련 정보가 담긴 잡서들, 고급임이 분명한 부적술 도구와 연단로 등.
심지어 어떤 곳에선 축소화 법술이 풀리며 건물 내부를 반파시킨 웬 배 한 척을 볼 수 있었다. 허공을 날 수 있는 비선(飛船) 같았는데 너무 커서 챙길 엄두도 안 났다.
'여기 물건들은 내가 결단기에 오른 후에나 마음껏 수확물로 선택할 수 있겠구나.'
일단 대부분의 물건을 챙기긴 했지만, 카르마가 부족한 만큼 수확물로 선택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을 터다. 내용물을 뺀 옥병 및 옥함들과 서책류 정도만을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것들만으로도 상당히 짭짤한 수확이긴 했다.
이전에 한 번 챙겨놔야겠다고 생각했던 옥병 및 옥함 등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 중요한 건 서책류다.
법술서 중 일차적으로 마음에 드는 건 둘이었다.
하나는 '환몽심탈술'이라는 환상계 법술로, 대상이 현실을 꿈으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고, 상대가 잠든 상태라면 그 꿈에 개입하여 내용을 조작해 괴롭히거나 정보를 캐내는 등 여러 방면으로 활용이 가능했다.
다른 하나는 '백운윤식술'과 '흑운심토술'이라는 농사용 법술 세트로, 언젠가 그가 동천 보물을 갖게 되었을 때 그 안에서 영식을 기르려면 꼭 필요한 지식이었다.
나머지 서책들도 일단 잡서로 분류하긴 했으나 결코 가치가 낮지 않았다.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는 수선계 지식을 채워준다는 점에서 때로는 그 어느 법술보다 유용할 수도 있다.
그렇게 대략 수확을 정리하면서 그는 동굴을 나섰다.
이제 원래 목적이던 공법과 법기를 얻을 차례였다.
* * *
이전에 방문했을 때와 비교해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당연히 신식의 존재였다.
옥간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힘을 잃은 법기들도 마치 해부하듯 내부구조를 살펴 그 수준과 용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여 장서각으로 향하기 전 한유진은 두 개의 법기를 만족스럽게 챙길 수 있었다.
하나는 그 수련 동부들이 자리한 협곡에서 발견한 적 있는 끊어진 밧줄 형태의 법기였다. 아마도 상급일 것으로 짐작됐으며 적을 구속하는 용도인 듯했다. 특별한 제압용 법술이 없는 그의 빈틈을 메워주기에 딱 좋다.
다른 하나는 연기각에서 얻은 팔찌 형태의 법기였다. 은은한 오색빛 수정으로 만들어졌고 내부에 일련의 법문 금제가 은빛으로 새겨져 있어 마치 예술품처럼도 보인다.
오행 속성의 법술 시전을 도와주는 최상급 법기로, 수확물 선택에 적잖은 카르마가 필요할 것이 분명했지만 그 이상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었다.
'어설픈 거 두세 개 선택하느니 이거 하나가 낫지.'
결단기에 오르기 전까지 계속 사용하게 될 것인 만큼 아껴서는 안 되는 소비다.
내심 결정을 굳히면서 그는 장서각에 도착했다.
바로 공법서들이 있는 구역으로 향한 후 이전에 살폈던 서책을 포함해 모든 옥간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옥간을 읽는 법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방법 자체는 직관적이었지만 그 직관적인 방법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수용하기가 꽤 벅찼다.
안쪽과 바깥쪽을 가리지 않으며 새겨진 미세하고 빼곡한 글자들이 그저 경탄스럽다. 놀랍게도 한번 읽고 지나간 부분이 나중에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 새로운 정보로 화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부분들은 서로 연결되며 입체적인 그림으로까지 화한다.
어떻게 법술을 녹여내지 않고서도 이런 물건을 만들어냈는지, 실로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옥간 제작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겠구나.'
물론 이곳에 보관된 옥간들이 특히 비범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옥간 자체도 놀라웠지만 더 놀랍고 흥미가 동하는 건 당연히 내용이었다.
오행종답게 오행 속성 공법들이 주로 있었고 등급을 파악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원영기까지 수행할 수 있으면서 추후 화신기를 위해 공법을 전환할 때 큰 문제가 없으면 최고 등급이다.
그런 최고 등급 공법의 수는 많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전부 살펴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한유진은 중간중간 배고프고 목마를 때마다 영액주를 마셨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듯하면 잠깐씩 수면을 취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그는 총 여섯 개의 최고 등급 공법을 한 번씩 다 읽고 내용을 파악해 냈다.
전부 다 굉장히 매혹적이어서,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이 사람을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젠장.'
그는 이 중 하나를 택하기 전에 다른 것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혹시 그렇게 알게 된 정보가 선택지를 좁힐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여기서 봤던 것 같은데······.'
기억을 되짚으며 이리저리 헤매길 잠시.
마침내 찾던 서책 '수선경지경요'를 발견하곤 잡아들었다. 이어 휙휙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 순간 손을 멈췄다.
결단(结丹)에 대한 내용이 담긴 부분이었다.
입문기를 거쳐 법혼기, 그 법혼기 이후의 경지가 바로 결단기다. 단을 맺는다는 뜻으로, 이 법단은 법혼이 한 차례 더 승화한 것이며 추후 원영이 태어나는 알이자 씨앗이라고 볼 수 있다.
법혼기에 오르기도 어렵지만 결단기에 오르기는 그보다 더 어렵다. 하여 수선계 역사상 조금이라도 더 쉽게 승격하기 위한 온갖 연구와 실험이 끊긴 적이 없다.
그렇게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자리 잡게 됐다.
하나는 외(外)단법이다. 법혼을 바로 법단으로 승화시키는 게 아니라 외물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흔히 요족 내단이 사용되며 재능 부족한 수사들이 택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위(僞)단법이다. 이 역시 외물의 힘을 빌린다는 점은 같으나, 수사 본인의 정혈을 포함하여 연단술 등의 기술로 맞춤형 외단을 만들어내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마지막 하나는 진(眞)단법이다. 오롯한 자신의 능력만으로 법단 승화를 이뤄내는, 가장 어렵지만 그만큼 발전 가능성이 높으며 부작용 따위도 없는 정통의 방법이다.
'내가 염두에 둔 게······.'
바로 드래곤 하트를 이용한 외단법이었다.
일반적으로 외단법은 재능 부족한 수사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여겨지는 핵심적인 이유는, 법단 그릇으로 선택되는 요족 내단의 수준이 높을 수가 없다는 점이 크다.
그릇이 타 존재의 것이라는 점에서부터 부작용이 없을 수가 없는데, 거기다가 수준까지 낮다면 이후로 경지를 높이는 데 당연히 온갖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수준이 높은 요족 내단을 구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의문은 한 마디로 반박할 수 있다.
그걸 대체 누가 구해주겠는가?
재능이 부족해서 진단법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를 위해, 추후의 성장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최소 원영기급 이상의 요족 내단을 구해달란 말인가?
원영기급 요족 내단이 얼마나 귀한 줄 알고?
'그야말로 헛꿈 꾸는 소리지.'
물론 길디긴 수선계의 역사상 그렇게 운 좋은 외단법을 이뤄낸 자가 없진 않다.
집안 어르신이 화신기급 괴물이라면, 그리고 그 집안 어르신과 매우 친하다면, 운 좋게 원영기급 요괴 내단을 하나 얻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제서야 진단법을 이뤄낸 자와 비슷한 선에 서게 된다.
그러니 외단법은 재능 부족한 수사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지일 수밖에 없다. 최소 화신기급 요족 내단을 얻어야지만 진단법보다 뛰어나질 수 있는 효율 극악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내가 드래곤 하트를 얻는다면?'
그걸로 외단법을 써서 결단기에 오른다면.
드래곤 하트가 그의 기대만큼 사기 먼치킨스럽다는 가정하에, 진단법을 이뤄낸 자들보다 훨씬 더 앞서가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앞서가게 될진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이보다 더 나은 구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그의 재능은 별로 좋지 못했다. 고작 진영근 하위권에 속하는 재능으로, 특별한 영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각성 능력을 통한 환경적 이점을 누릴 수 있다지만.
진단법을 이룬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니 그 어려운 진단법보다도 더 뛰어나질 가능성이 높은 드래곤 하트 외단법이야말로 최선의 구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쩌면, 내 재능과 체질까지 통째로 뒤바꿀 수도 있어.'
수선경지경요 책장을 넘기는 그의 눈에 주목할 만한 내용이 들어왔다.
한 수사가 매우 특별한 요족 내단으로 결단기에 올라, 진단법을 뛰어넘은 것은 물론 특이한 고유신통과 영체마저 얻게 된 사례였다.
37화. S급 검증
관련 내용을 마저 다 읽고 머릿속에 저장한 그는 다른 서책을 찾아 나섰다.
근처에서 봤던 기억이 생생했기에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는데, 바로 '삼경조화결'이라는 일종의 특수공법서였다.
해당 특수공법은 다양한 곳에 쓰일 수 있지만, 그가 염두에 둔 목적은 바로 외단법에 쓸 그릇을 수사와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외단법은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다. 그릇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그렇다.
그는 집중해서 삼경조화결의 내용을 읽었다. 그렇게 필요한 만큼 이해를 갖춘 다음에야 이전에 공법서들이 있는 구역으로 돌아갔다.
'선택의 시간인가.'
앞서 골라둔 여섯 개의 최고 등급 공법들을 재차 가볍게 살핀다. 삼경조화결과의 궁합을 보는 것이었다.
화염의 파괴력을 극대화하면서 시선의 마주침을 통해 상대방의 신식과 영혼을 불태울 수 있는, 동시에 자신의 신식과 영혼을 강화하고 보호할 수 있는 홍련진화공.
뇌전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뇌전을 만들어 기를 수 있는, 그렇게 온갖 법술을 쉬이 파훼할 수 있으며 마물 및 귀물에 대해서도 엄청난 위력을 보이고 어지간한 금제마저 그냥 힘으로 뚫어버릴 수 있는 자소신뢰경.
바람과 구름을 부리면서 더없이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공방 측면에서도 딱히 모자람이 없지만 특출난 기동성을 통해 애초부터 대부분의 위험을 회피해 버릴 수 있는 운룡소요공.
공방에 뛰어난 것은 물론 육체와 영혼에 대해 굉장한 치유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 대단한 치유력으로 인해 신체가 다시 어려지는 반로환동 현상이 발생하여 최소 삼백 년 이상 수명이 증가하는 태청현수치원공.
공격에도 딱히 부족함이 없으나 방어에서 특히 무시무시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대지에 발 딛고 있는 한 어지간해선 밀려나거나 지치지 않게 되는 경금후토진위공.
오행의 속성을 띠지 않으며 원력(元力)이라는 특별한 기운을 만들어 육체와 영혼을 약간이지만 영구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그렇게 원력대수라는 특별한 신통도 하나 깨달을 수 있는 태극회원공.
'여기서 하나만 골라 익히라고?'
다시 살펴봐도 바로 결정장애가 오면서 사람을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수선계에서 신식에 대한 공방 수단은 거의 통천령보만큼이나 귀중하고 유용하다. 홍련진화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만나는 대부분의 적을 기겁하게 만들 수 있단 뜻이다.
자소신뢰의 파법에 대한 효용성과 마물 및 귀물에 대한 강력함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위대함을 알 수 있다. 파법의 범위에 금제가 포함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모든 공법을 통틀어 가장 신속해질 수 있는 운룡소요공 역시 비슷하다. 어느 영화에서 나온 아주 멋진 대사도 있지 않던가? 천하 모든 무공의 견고함이 파훼될 수 있어도 오직 속도만은 파훼되지 않는다던.
특별한 약점이 없으면서도 대단한 치유력으로 수명까지 늘어나게 해주는 태청현수 역시 마냥 경탄할 수밖에 없다.
경금후토진위공이 그나마 거북이 같은 미련한 느낌이 좀 들긴 하지만, 공법에서 묘사된 대로라면 거의 불사신에 가까운 수준이라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
마지막 가장 무난하게 느껴지는 태극회원공마저 추후 공법을 바꾸더라도 육체와 영혼의 강화 효과가 남고 신통 하나를 깨달을 수 있어 지극히 뛰어나다.
하지만.
열심히 살피던 한유진은 눈을 감으며 몇 가지를 제외했다.
바로 홍련진화공, 태청현수치원공, 경금후토진위공이었다.
'세 공법 다 육체 혹은 영혼에 특별한 변화를 일으키지.'
법혼기 동안 삼경조화결로 육체와 영혼을 외단법에 쓸 그릇과 동화시켜야 하는데, 그 와중 변수가 생기면 안 될 듯했다.
태극회원공의 경우는 특별한 속성이 없거니와 공법에서 묘사된 원력의 특성을 잘 살펴봤을 때 괜찮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주 본질적인 힘이었기 때문이다.
즉.
자소신뢰경, 운룡소요공, 태극회원공, 셋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
'난제로다, 난제야.'
귀신과 연관된 영원의 여신교 놈들과 앞으로 자주 부딪힐 것 같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소신뢰경이 끌린다. 법술과 금제 파훼에 능하다는 점도 물론 너무나 매력적이다.
하나 운룡소요공의 속도는 현실에서 가능한 한 위험을 멀리해야 하는 그에게 딱 적절했다. 전투 등에서 딱히 약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태극회원공은 특별한 속성이 없으면서 변수 걱정도 없이 육체와 영혼을 강화할 수 있는 점이 끌렸다. 수사의 근원적인 실력을 키우는 셈이었으니까. 원력대수라는 신통도 당연히 끌리는 포인트였고.
여담으로 짧게 설명하자면, 신통은 법술과 달리 훨씬 더 본능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능력이라고 보면 된다. 지구 헌터들의 각성 능력이 딱 좋은 예시일 터다.
한유진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 선택이 훗날의 수십 년을, 어쩌면 수백 년을 좌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아."
그는 문득 떠오른 어떤 생각에 저물대에서 서책들을 꺼냈다. 법혼기에 올라 향상된 지능이 아니었더라면 계속 까맣게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찾아서 잡아든 것은 이 오행종에 대한 여러 잡설이 적힌 일반 서책이었다. 예전에 이 서책에서 오행검과 영액주병 등의 정보를 얻은 적도 있다.
'이쯤이었을 텐데······.'
바삐 책장을 넘기던 손이 어느 순간 멎는다.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한유진의 표정이 조금 복잡미묘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들고 있던 책과 다른 공법서들을 내버려둔 채 장서각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방금 읽은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적어도 고민할 일은 없게 될지도.'
성공하기 매우 어렵겠지만, 그 자신의 각성 능력을 잘 활용한다면 혹시 또 모를 일이다.
'이건가.'
마침내 한 권의 얇은 서책을 찾은 그가 눈을 빛내며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오행종 설립의 근원은 그 연기각 최상층에 자리한 통천령보 오행진령거석이다. 그리고 오행진령거석은 공격용도 방어용도 아닌 기묘한 물건이다.
바로, 누가 만들었는진 모르겠지만 하나의 도경(道經)을 품고 있는 보물이었다.
그 도경의 이름은 태을오행도경(太乙五行道經)이며, 앞서 살핀 오행 속성의 다섯 공법이 모두 그 태을오행도경에서 분리되어 만들어졌다. 원상태로는 도저히 아무나 익힐 수 없었던 탓이다.
하니 만약, 그 태을오행도경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다섯 공법 중 하나만을 택할 이유가 전혀 없을 터였다.
* * *
법혼기에 오름으로써 향상된 지능 덕을 아주 톡톡히 봤다. 단시간에 많은 정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는데, 만약 예전의 그 평범한 지능이었다면 세 번은 더 방문해야 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충분히 만족한 상태로 탈출 법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그렇게 대기 장소에 서게 됐다.
무용이는 출발할 때 모습 그대로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잠시 그런 녀석을 살피던 그는 수확물들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나였다.
마음 편히 선택할 수 있는 건 내용물을 제외한 약병 따위들, 그리고 서책류와 옥간뿐이었다.
팔찌 법기는 아끼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음에도 꽤 비쌌다. 다행히 밧줄형 법기가 생각보다 저렴해서 마음이 살짝이나마 편해졌다.
통천령보로 추측되는 깃발은 감히 엄두도 안 났다. 내심 산해주라고 임시 이름을 붙인 금속 구체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특이한 건, 그 두 개의 물건을 원상복구하는 방식이 두 가지였다는 점이다.
하나는 전성기 때의 상태로 복원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완전한 초기 상태로 성능만 멀쩡하게 복원하는 것이었다.
'둘 다 일종의 성장형 보물이기 때문이겠지.'
동천 보물은 여러 자원을 투입하여 내부 공간을 넓히고 영기 농도를 짙게 만들 수 있다. 혼령 사역 보물도 많은 혼령을 포획할수록 강해지는 게 상식이다.
'나중에 얻게 될 때 초기 상태로 얻어야겠다.'
그래야 카르마를 많이 아낄 수 있을 터다. 그때 상황이 급하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음 순간.
그는 침대에서 눈을 뜨며 일어났다. 동시에 옆에 있던 무용이가 잠에서 깨며 조금 멍한 기색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듯 하품이나 쩍 하는 꼴이 왠지 얄밉다. 방금까지 그는 말법의 재앙이 덮친 곳에서 보름이 넘게 고생하고 왔지 않은가.
"음."
또한 그래서인지 깨어난 장소의 모습이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그는 이 넓고 쾌적한 안전가옥을 제대로 구경하지도 않고 바로 능력을 사용했었다.
"넌 여기 세상 모습이 신기하지도 않냐?"
찍-!
통명어수결을 통해 전해지는 건, 영기 농도가 낮아 마음에 안 든다는 느낌이었다.
"적응해라. 여기가 부족한 게 아니라 거기가 너무 과했던 거니까."
그는 무용이를 다독이면서 집안을 천천히 구경했다. 확실히 최고급 아파트인지라 원래 살던 원룸과는 비교가 안 됐다.
'각성하기 전엔 이런 데서 사는 게 평생의 목표였는데.'
살짝 감상에 젖을 때쯤 구경을 마무리한 그는 스마트폰을 어물술로 끌어와 손에 잡았다. 오늘 S급 검증과 함께 지식 보급을 위한 정리 작업까지 끝낼 계획이었다.
빨리 카르마를 쌓아야 한다. 그래야 드래곤 하트를 얻든지 말든지 할 것이며, 그 드래곤 하트가 있어야만 삼경조화결 등을 수련할 수 있다.
'한동안 현실에서만 있겠군.'
물론 각성 능력을 아예 사용할 일이 없으리란 뜻은 아니다. 단지 원시림 때처럼 길게 머물 일이 없으리란 뜻이다.
카르마를 아끼면서도 각성 능력을 활용할 곳은 많았다.
'천원성 강의가 남았고······ 드래곤 하트 탐색을 시작해야 하고······ 수선기예 등을 빠르게 익힐 수단도 찾아봐야 하고······ 혹시 SF 느낌의 세계가 있을지 시험해 보는 것도 좋겠고······.'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불현듯 떠오른 어느 유명한 문구에 절로 헛웃음이 나온다.
당연하지만 전혀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누가 시켜서 강제로 해야 하는 노동이 아니라, 하나를 해결할 때마다 눈에 띄게 성장할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들이었으니까.
'그래도 며칠 정도는 현실에 집중해 볼까.'
사실 원래도 그러려고 했다. 습격 때문에 전력 보강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빨리 오행종 유적에 가지 않았을 터다.
담당 주무관에게 메신저로 연락하면서 그는 외출준비를 했다.
* * *
대중교통을 통해 도착한 곳은 예의 그 이능력 검증훈련센터였다. 그리고 입구에서부터 사무관 오태민과 담당 주무관 강민아가 모두 마중 나와 있었다.
"소식은 다 들었습니다. 많이 당황하셨겠습니다."
사무관은 그런 인사말을 시작으로 진심 가득한 유감을 표하며 한유진의 안위를 챙겼다. 자신이 직접 현장에 가지 못한 것을 상당히 미안해하는 태도였다.
한유진은 그런 상대의 태도에 연신 괜찮다고 답하며 빨리 검증이나 시작하자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유감스러운 사건이긴 했지만 사무관에게 사과받을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A급 이상 헌터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이능훈련실로, 예전에 처음 방문했던 훈련실보다 살짝 좁았지만 자리한 설비와 물건들의 모습이 훨씬 비범했다.
"본격적인 화력 테스트는 내일 야외에서 진행할 겁니다. 오늘 여기선 염동력 등을 확인할 예정이고요."
이미 메신저로 고지받은 내용에 한유진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S급 검증임에도 인원이 당사자를 포함하여 고작 셋이라니, 매우 초라했지만 다 이유가 있었다.
'습격까지 당한 만큼 내 힘을 일부 감추는 것도 좋겠지.'
예전에 A급 실력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건, 그 정도 실력은 보여줘야 지식 보급을 추진할 자격이 갖춰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굳이 S급이라는 사실을 추가로 공개할 필요가 없다. A급 자격만으로도 지식 보급엔 별문제 없을 테니까. 어쩌면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 수도 있을 터였고.
"말이 나온 김에 염동력부터 확인해 볼까요?"
사무관이 한쪽 컴퓨터 기기 앞에 서서 열심히 무언가를 조작했다. 그사이 한유진은 담당 주무관의 안내에 따라 어느 설비 앞에 섰다.
곧, 다양한 형태의 물건들이 눈앞에 나타나며 그 너머로 과녁의 모습이 보였다. 이전에 경험했던 염동력 테스트 형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준비되시는 대로 시작하시면 됩니다."
그의 어조에 담긴 기대감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담당 주무관도 말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한유진이 S급 헌터로 판명 나게 될 일을 굉장히 기대하는 듯했다.
'······당연한가?'
선협 세계 밸런스에 익숙해졌다 보니, 여기 현실에서 S급 헌터가 갖는 위상에 대해 조금 둔감해진 것 같다.
잠시 염동력 테스트용 물건들과 멀리 떨어져 나타난 과녁들을 보던 한유진이 물었다.
"분명 망가질 텐데,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사무관은 즉답했다.
예전처럼 방심해서 그렇게 답한 게 아니었다. 분명히 망가질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망가짐을 통해 S급 위력을 측정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판단일 터였다.
"힘 아끼지 마시고, 다 고철로 만들어 버리시면 됩니다."
어째서인지 그게 약간의 도발처럼 느껴진다. 한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슬쩍 웃었다.
그러면서 어물술을 발휘했다.
어물술, 원거리에서 물건을 조종하는 수선자의 기초 법술.
하지만 성능이 낮아서 기초 법술로 취급되는 게 아니다. 매우 유용한데도 법결이 간단하기에 기초 법술인 것이다.
끼기기기긱-!!
한순간.
안쪽이 텅 빈 상자 형태의 금속체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붙잡힌 듯 마구잡이로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이어 총 열두 덩이로 무자비하게 찢어발겨지고, 제각각 다른 과녁을 향해 가히 총탄 같은 속도로 쏘아졌다.
콰콰콰콰콰콰쾅-!!
이능훈련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이 중첩되어 터져 나왔다.
과녁들이 전부 박살나며 날아 가는 광경은 그 어느 영화 속 연출보다도 박력 넘쳤다.
38화. 뜻밖의 훼방
염동력 테스트는 금방 끝났다. 테스트를 진행할 설비 자체가 거의 고철로 화해버렸으니 금방 끝날 수밖에 없었다.
끼기기기긱-!!
한유진은 아예 그 고철 잔해들을 한곳으로 모아 몇 개의 금속 덩어리로 뭉쳐버리는 강력함을 선보였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 이유는 종류별로 따로 뭉쳤기 때문이고, 그 과정이 동시에 이뤄지며 멀티태스킹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S급일 수가 없겠네요."
모든 과정을 지켜본 사무관이 거의 경이에 젖은 기색으로 말했다. 충분히 그럴만한 것이, 사무관 오태민의 각성 능력이 바로 염동계였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계열의 이능력인데 도저히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는 힘을 목격하면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사무관처럼 경이에 젖거나 혹은 두려움에 질리거나.
이능관리국 소속 5급 공무원 엘리트로서 그가 보인 반응은 매우 잘 어울렸다. 동시에 부가적으로는 한유진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도 했다.
'나도 이런 거 은근히 좋아한다니까.'
내심 자각하며 그는 사무관의 안내에 따라 다음 테스트를 진행해 나갔다.
옥피술을 통한 방어능력은 이전처럼 기계로 마나 농도를 살피는 식으로 이뤄졌다. 자금광휘술을 굳이 보여주지 않은 이유는 옥피술만으로도 S급 판정을 받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풍운술만으로 이동능력 방면에서 S급을 충분히 받아낼 수 있었고, 은영술은 전부터 이미 S급이었다.
남은 건 내일 야외에서 본격적인 위력을 시연하기로 한 화탄술과, 마찬가지로 같은 장소에서 테스트하게 될 영안술.
그리고 이제 병원에서 테스트할 수 있을 치유술이었다.
엉망이 된 설비의 정리를 위해 사무관이 인원을 호출한 뒤, 셋은 훈련실을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향하면서 나눈 이야기는 앞으로 한유진이 어떻게 활동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전처럼 그냥 A급 헌터였다면 이런 대화가 굳이 나올 이유가 없었다.
정부와 계약하든 기업과 계약하든 그건 한유진이 알아서 할 일이었으며, 사전교육이 끝나는 때에 맞춰 사무관이 한 번 정도 이능관리국 소속이 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하는 정도면 족했을 터다.
하지만 그는 이제 S급 헌터였다.
그것도 처음엔 A급이었다가 채 사전교육을 끝마치기도 전에 S급으로 올라서 버린, 더불어 각성 능력의 형태가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이기까지 한 아주 특별한 인재였다.
모르긴 몰라도 사무관의 위쪽 라인으로 전부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다.
한유진 본인의 요청에 의해 그 사실이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을 뿐, 원래대로였다면 오늘 아침부터 관련 소식이 뉴스 속보로 도배됐어도 이상하지 않다.
'좀 아쉽긴 하네.'
한유진은 대화하는 도중 문득 짧게 생각했다. 전략적 판단으로 S급 실력을 숨기기로 했으나 그 탓에 유명세를 누리지 못하게 됐으니, 물론 이렇게 웅크리는 기간이 별로 길진 않겠지만 괜히 아쉽고 답답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때.
"혹시 저희 이능관리국과 관리 지원 계약을 맺는 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네?"
"일종의 매니지먼트 계약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후로 사무관은 대략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헌터가 프리랜서로 뛰지 않고 굳이 기업과 계약하여 수익을 나누는 덴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안정적인 기본 급여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성과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을 수도 있으니 프리랜서 활동과 비교해 봐도 크게 수익이 줄지 않는다.
그리고 기업의 네트워크를 통해 더 많은 활동 기회를 얻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되레 수익이 늘어날 수 있다. 소속된 기업의 이런저런 광고를 받을 수도 있으니 더욱 그렇다.
또한 장비 및 훈련 측면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 테고, 의료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세금 처리 등의 행정적 지원과 법리적인 지원 역시 빼놓지 못할 중요한 요소다.
이것들만으로도 다른 부가적인 것을 따지지 않고 기업과 계약하기엔 충분하다.
한유진도 바로 그런 이유들을 생각하며 당연히 기업과 계약할 생각이었다. 이능관리국과 계약하는 건 주로 치안유지 쪽 일에 투입된다고 알려졌기에 적극적으로 카르마를 쌓아야 하는 입장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한데, 지금 사무관이 제안하는 건 한유진의 구미를 확 당기게 만들었다.
어차피 그는 장비 및 훈련 등의 지원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의료적인 부분에서도 그렇다.
단지 네크워크적인 지원, 그리고 행적적인 지원과 법률적인 지원이 아쉬울 뿐이었는데, 지금 정부 기관인 이능관리국이 돈도 안 받으면서 그걸 해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되는 건가요?"
"안 될 이유가 없지요. 저희 입장에서도 얻는 게 크니까요."
S급 헌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략적인 임무 배정이 가능할 테니 확실히 얻는 게 있다.
물론 그렇다는 건 한유진 입장에서 때때로 별 내키지 않는 일을 맡게 되리란 뜻이었지만, 그런 책무는 다른 어디와 계약하더라도 피할 수 없었다.
"그럼 혹시 제가 공무원이 되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혹시 원하십니까?"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음······."
완전히 뜻밖의 제안이었기에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잠시 머뭇거리던 한유진은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물었다.
"그 최강백 헌터가 혹시······?"
고령인 70대인지라 언제 은퇴할지 모르지만, 차원 충돌 사태 초창기부터 활동해 오며 한국 헌터 업계의 전설처럼 여겨지는 노인의 이름이다.
"맞습니다. 그분이 저희와 맺은 계약과 똑같습니다."
"아."
여담으로, 다른 한 명은 40대 남성이며 이름은 박세룡이다. 소속은 한국 글로벌 대기업 '엑시온'이 운영하는 명실상부한 국내 랭킹 1위의 엑시온 길드다.
"일단은 확 끌리네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한유진과 연관된 일로 또 한 건 해냈다고 생각한 사무관이 거의 핸들을 내려칠 듯 기뻐했다. 진심으로 너무나 기쁜데 간신히 참아낸 모양새였다.
잠시 후.
병원에 도착한 셋은 별다른 문제 없이 치유능력 검증을 마칠 수 있었다. 예전에 C급 판정을 받았던 만큼 어쩌면 A급에서 그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무리 없이 S급 판정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남은 두 능력도 결과가 같으리라고 치면 거의 모든 방면에서 S급 판정을 받아 버린 것이다.
"이게 알려진다면 국제적으로 유명해지실 겁니다."
"몇 번 실전으로 증명된 다음엔 세계 랭킹 한 자릿수도 문제없을걸요?"
병원을 나오면서 하는 사무관의 말에 담당 주무관이 들뜬 기색으로 덧붙인다. 그에 한유진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지금 1등이 그 에단 크로스죠?"
"네. 그 헌터는 워낙······ 아시다시피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지 않습니까."
미국 국적의 40대 남성으로, 마주하는 모든 괴물을 그냥 시선만으로 죽여 버리는 듯한 불가사의한 무력을 여러 번 증명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며 그만큼 강하다고 여겨지는 헌터다.
'정신계 능력일 거란 추측이 정설처럼 떠돌지만, 혹시 모르지.'
이전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여겨질 뿐이었는데, 자신 역시 국제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단 이야기를 들으니 호기심이 치민다.
과연 법혼기 수사인 자신과 맞붙었을 때도 그런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진짜로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마침 점심때였는지라 셋은 바로 헤어지지 않고 근처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했다.
그러는 와중 한유진은 자신이 보급하려는 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었다.
앞서 언급됐던 이능관리국과의 관리 지원 계약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몇 번의 실전경험 후에는 구 북한 지역 대균열에도 가야 할 듯하단 말에 오히려 기꺼웠다.
어차피 대한민국 소속 B급 이상의 헌터라면 마냥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더 많은 카르마를 쌓을 수 있을 장소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 없이 유익한 시간이었다.
식사 후 작별하고 주변 경계와 함께 안전가옥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사 계획대로 돌아가는 경우는 의외로 별로 없는 법이었다.
* * *
안전가옥에 무사히 돌아온 한유진은 지식 보급을 위한 정리 작업을 무리 없이 끝마칠 수 있었다. 그간 짬짬이 처리해 온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후엔 각성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푹 쉬었다. 그렇게 쉬면서 새로 얻은 두 법기의 이름이나 정했다.
팔찌 형태의 법기는 직관적으로 오행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오행 속성의 법술 시전을 도와주는 팔찌이니 이보다 더 직관적일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밝은 회색을 띠며 군데군데 진한 붉은색이 들어간 밧줄 형태의 법기도 비슷하게, 봉령삭이라는 직관적인 이름을 붙였다. 단순히 물리적으로만 대상을 묶는 게 아니라 영기를 봉인하는 효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름 붙인 두 법기를 주변이 상하는 일 없도록 조심스럽게 사용해 보면서, 봉령삭으로는 쓸모없이 귀엽기만 한 녀석을 포박해 보기도 하면서 마음 편히 낄낄댔다. 나중에 삐진 녀석을 달래느라 영액주가 좀 소모됐지만 딱히 손해는 아니었고 말이다.
이후 그는 회원공을 돌려 피로를 풀었다. 공법으로 수면 회복을 대체하는 건 법혼기 이상의 수사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랜만에 게임이나 좀 해 볼까?'
피로를 다 풀어낸 뒤 방 한쪽의 컴퓨터를 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 결국 컴퓨터를 켜고서도 게임은 건들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혼자 심심해질 일이 많을 듯한 무용이를 위해 여러 애완동물용 장난감을 주문했다.
이제 입문기급 능력을 갖췄는지라 영지도 어느 정도 발달한 무용이가 금방 질려할 것이 뻔했지만, 그렇게 질려하면 또 다른 걸 잔뜩 주문하면 그만이었다.
"나중에 천원성에서 연기술 강의 듣고 나면, 내가 직접 장난감 하나 만들어줄게."
찍! 찍-!
뭔가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 않았지만 어쨌든 녀석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여 그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 있자니 시간이 금방 가서 슬슬 해가 뜰 무렵이 됐다.
한데 그러던 때.
갑자기 스마트폰이 울리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담당 주무관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그 짧지 않은 메시지를 빠르게 읽은 한유진은 조작하고 있던 컴퓨터로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를 열었다. 그러자 올라온 지 몇 분 안 되는 뉴스 속보들이 메인에서부터 그냥 보였다.
- 대한민국의 새로운 전설, 새 S급 헌터 탄생!
- 새 시대의 서막이 열리는가? 세 번째 S급 헌터
- 대한민국의 세 번째 S급 헌터는 누구?
- 경직된 국내 헌터 업계의 판도를 뒤바꿀 게임 체인저의 등장
- 박세룡 게 섰거라! 뉴페이스 S급 헌터의 재능은 역대급?
'······뭐지?'
황당한 심정이다.
분명히 당분간은 비밀로 하기로 했는데, 정보가 샜단 말인가?
'일 처리를 이딴 식으로 한다고?'
황당함은 곧 실망감으로, 그 실망감은 곧 은은한 짜증으로 변했다.
이로 인해 혹시 생길지 모를 문제 때문이 아니다. 분명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그걸 못 지킨 상대의 무능함 때문이다.
이런 이들을 믿고 지식 보급을 추진하면서 관리 지원 계약인지 뭔지를 맺어도 될까? 이 안전가옥에 대한 정보도 과연 담당 주무관의 장담처럼 비밀로 잘 유지될 수 있을까?
- 어떻게 된 건가요?
한유진은 평소 자주 붙여 쓰던 'ㅋ'나 'ㅎ'따위의 문자 없이 건조하게 물었다. 그러자 메신저 답장 대신 전화가 왔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자는 심정으로 여상하게 말하자, 담당 주무관은 바로 사과부터 해 왔다.
- 죄송합니다. 분명 비밀로 유지하기로 했는데, 저희 이능관리국 쪽에서 소통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말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소통에 어떤 식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건가요? 제 의사가 이능관리국의 다른 쪽으로 전달이 잘 안되었던 건가요?"
딱히 추궁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막상 말하고 보니 그런 느낌이 돼버렸다. 하나 한유진은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뭐라고 덧붙이는 대신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담당 주무관은 평소 유능한 사람이라고 느꼈던 그 이미지답게, 괜한 말로 더 짜증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단지 그의 속내를 잘 파악한 듯 재차 사과하며 이번 일의 원인을 명확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한유진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박세룡이······? 그 사람이 왜?'
대한민국의 두 번째 S급 헌터, 전설이긴 하지만 이제 고령인지라 점점 입지가 좁아져 가는 최강백을 대신해 한국 헌터 업계의 일인자로 여겨지고 있는 엑시온 길드 소속 중년인.
그가 잠시 필요에 의해 웅크리려던 한유진 자신을 강제로 빛 아래 서게 만들었다.
39화. 사이코패스적 응징
박세룡, 그가 새로운 S급 헌터의 등장을 이처럼 알게 된 건 별로 놀랍지 않다.
국가에 둘밖에 없는, 이제 셋으로 늘어났다지만 어쨌든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대균열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하는 그에겐 알려져야 할 정보였을 수 있다. S급 헌터가 한 명 더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이런저런 전략적 판단이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혹은 이능관리국 기관 차원에서 뭔가를 결정하기도 전에 저절로 알게 됐을 수도 있다. 근 20년에 달하는 세월을 S급 헌터로 활동해 오며 쌓아왔을 인맥의 힘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굳이 확인할 것도 없이 이능관리국 내부에서 박세룡과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중 일부는 새로운 S급 헌터에 대한 정보를 알아서 갖다 바쳤을 수도 있다.
'아니, 둘 다인가?'
자연스레 보고를 받을 수 있는 위치이면서 이능관리국 내부의 사적 인맥을 통해 더 자세한 정보까지 캐낼 수 있는, 동시에 이런 일을 강제로 추진할 수 있는 권력까지 갖춘 자일지도 모른다.
- 아직 상황 파악에 미진한 점이 많습니다. 하나 일단 뉴스로까지 나갔으니 알려드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이해합니다. 어쨌든 실수는 아니었던 거군요."
무능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기도 좀 애매하다. 이건 박세룡이라는 강자가 일종의 정치적 선빵을 날린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도 아직 모르는 거죠?"
- 그렇습니다. 아, 잠시······.
그때 담당 주무관에게 무언가 중요한 소식이라도 온 듯했다. 몇 초 정도 다른 누군가와 작게 대화하던 그녀는 매우 당황한 기색으로 한유진에게 말했다.
- 지금 박세룡 씨가 한유진 씨의 안전가옥 위치를 확인하고 그쪽으로 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 직접 사과하려는 목적이라는데, 이게······.
"······그 사람이 안전가옥에 대한 정보에도 접근할 수 있나요? 아무리 S급 헌터라지만 이능관리국 소속도 아니지 않습니까?"
- 죄송··· 죄송합니다.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아무래도, 저희 이능관리국 김재훈 차관님과 연관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전화 건너편 담당 주무관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얼핏 느껴지기에 그 떨림은 한유진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이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는 수치스러움 때문인 듯했다. 더불어 통제할 수 없이 흘러가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과 분노도 일부 섞였을지 몰랐다.
"차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박세룡하고 어지간히 친한가 보죠?"
담당 주무관의 처지에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도 결국 짜증을 이기지 못한 한유진이 낮게 질문하는 때.
선명한 현관 인터폰 벨 소리가 울렸다.
"빨리도 왔네요, 그 사람. 이미 한참 전에 출발했던 모양입니다."
- 대면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제가 바로······.
"아니요, 괜찮습니다. 무려 차관급 인사가 작정하고 도와준다는데 주무관님이 어떻게 막겠습니까? 제가 알아서 해결하죠."
그런 말과 함께 통화를 끊어버린 한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곁의 무용이를 바라봤다.
"방에 좀 숨어있을래?"
찍!
작게 대답한 무용이가 즉시 한쪽 방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고, 한유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거실에 나가 벽면 인터폰을 확인했다.
진짜 그 사람이었다.
뉴스로나 가끔 접했던 남자, 대한민국의 두 번째 S급 헌터, 대균열에서 주로 활동하며 적잖은 공로를 세워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영웅처럼 여겨지는 자.
한데 오늘 이렇게 보게 된 상대의 얼굴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유진은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바로 인터폰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줬다. 화면으로 보이는 중년인은 별 질문도 없이 바로 문이 열리자 살짝 뜻밖이라는 기색이었다.
곧.
누군가가 현관으로 들어서는 기척 이후 거실과 이어지는 복도에서 그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실제로 보자 체격이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190을 넘는 키와 어울리는 탄탄한 근육이 붙었고, 머리 스타일이 매우 잘 관리받은 듯 세련미가 넘쳐 위험하면서도 절제된 분위기를 풍긴다.
맞춤 정장을 입고 있어 더욱 그랬다. 차갑고 계산적인 느낌 가득한 눈빛이 어느 영화에서 나온 마피아 보스를 연상시킨다.
"처음 보는군. 이런 식으로 첫인사를 하게 되어서 유감이네. 자네가 한유진이겠지?"
"듣기론 사과하러 오셨다고요?"
"자네도 소식이 늦지 않군. 하긴, 그러니 바로 문을 열어줬겠지."
그는 거실을 둘러보더니 한쪽의 손님 접대용 소파를 보며 물었다.
"앉아도 되겠나?"
"그러시죠."
확실히, S급 헌터로 오래 활동해 와서인지 말투나 행동거지 모두 평범한 느낌이 아니다.
자리에 앉은 그는 한유진이 맞은편에 앉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내 독단에 사과부터 하지. 허락도 없이 세간에 드러나게 만들어서 미안하네."
"왜 그러셨습니까?"
"간략히 설명하자면······ 대균열에서 압박을 좀 해소하기 위해서였네. 아직 엠바고가 걸려있어서 자네는 몰랐겠지만, 불과 며칠 전에 7레벨 마나스톤 광산이 발견됐거든. 대규모인 데다 심지어 노천광산이야."
잠시 한유진의 반응을 살피던 그가 이어 변명했다.
마나스톤이란 수선계에서 영석(靈石)이라 불리는 바로 그 물건의 지구식 표현이다. 영기를 품고 있는 광물로서, 수선계에서는 물론 이곳 지구에서도 어마어마한 유용성을 보인다.
그 유용성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따지기가 무의미하다.
에너지 전환 효율이 기존 화석연료 대비 두 배 이상이라는 점부터가 매우 대단한데, 건축, 제조, 의료, 군사방위, 정보통신, 농업, 심지어 환경보호 분야에 이르기까지 안 쓰이는 곳을 찾기가 더 힘들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에 헌터가 엄청난 고수익 직종일 수 있는 것이고.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가서.
7레벨이라는 건 한유진이 알기로 중급 영석에 속하는 등급이었다. 오직 대균열에서만 구할 수 있는 등급이기도 했고.
그런 7레벨 광산이, 그것도 대규모 노천광산이 발견됐다면 확실히 굉장한 사건이다. 자연히 박세룡이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구 북한 지역의 대균열이 매우 위험하여 한중일 세 국가의 반강제적인 협력을 끌어냈다곤 해도, 북한이 멸망한 지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는 상황이며 그 긴 시간 동안 치명적인 위기 없이 방어에 성공해 왔다.
이제는 단순히 방어하는 정도를 넘어 대균열 안쪽을 조금씩 개척하는 상황이기까지 했으니.
슬슬 각자의 이득만을 생각하며 갈등이 고조되기에 딱 좋은 시기였다. 붙어있을 때의 덩치가 무시무시한 한중일 동아시아연합을 견제하려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온갖 수작질이 더해진다면 더욱 그렇다.
하여 그 노천광산을 두고 세 국가 헌터들 사이의 긴장감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는지라, 새로운 S급 헌터의 등장을 도저히 여유롭게 기다려줄 수가 없었다는 변명이었다.
"그래서, 당사자한테 말 한마디 전할 시간조차 없었습니까? 이렇게 직접 찾아올 수는 있으면서?"
"이게 다 자네 실력을 급히 공개하면서 만들어진 여유야. 물론 이것도 간신히 숨 돌릴 정도에 불과하네만, 어쨌든 내가 일을 저질렀으니 수습은 해야 하지 않겠나."
"외교부 장관도 아니시면서 그런 갈등까지 조정하시는 모양입니다?"
"대균열은······ 자네가 직접 가보면 알겠지만, 그 안에선 법률적 질서가 살짝 흐려지는 감이 있다네. 단순한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부분이 꽤 많단 뜻이지."
"이런 중대한 사건에서조차?"
"상황이 유리하다면 국가가 직접 그런 풍조를 더 조장하기도 한다네."
실로 어메이징한 이야기였지만 왠지 바로 납득이 간다. 원래도 국제외교는 생각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우악스레 돌아가는 부분이 적지 않았으니까.
"뭐, 대략 알겠습니다."
그래서 한유진이 말했다.
"정말로 그런 이유에서였다면, 대균열로 돌아가시기 전 짧게 기자회견 열어서 사과만 해 주시죠. 저도 이유 없이 그냥 비밀로 하려던 게 아닌데,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였다니까, 그 애국심을 존중해서 없던 일로 쳐 드리겠습니다."
"······."
"왜 갑자기 답이 없으시죠? 그리 어려운 요청은 아닐 텐데요."
한유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요컨대 이런 질문이었다.
네가 정말로 순수하게 국익을 위해 이런 무례를 저지른 게 맞느냐는.
기득권에 속하는 네가 새로운 강자의 등장을 견제하고, 자신이 보다 위에 있음을 과시함으로써 권력을 지키려는 의도가 정말 조금도 없었느냐는.
"지금 이 개인적인 사과로는 부족한가?"
"부족하다기보단 찜찜해서 그렇습니다. 사회 경험 전무할 20대 애송이 정도는 아무리 S급이라지만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뭐 그런 걸 과시하려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이렇게, 안전가옥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도 압박감을 주려는 것 같았고."
"······."
"다 제 착각이라면 짧은 기자회견으로 사과하는 정도야 어렵지 않으시겠죠."
박세룡이 짐짓 어이없다는 듯 약간 위쪽을 쳐다본다. 그리고 작지만 분명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친구가 아주 당돌해."
"하하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전형적인 대사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거 혹시 할 말 없다는 뜻입니까? 어조가 딱 그랬는데요?"
"이제 막 S급이 돼서 그런가······ 굳이 이렇게 날 선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나? 이 나를 상대로?"
그 순간.
한유진의 눈 안쪽에서 자색 광망이 번뜩였다.
* * *
법혼기 수사의 지능은 범인의 상상을 훨씬 능가한다.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측 말과 행동의 모순점을 바로 찾아내 찌를 수 있는 것은 물론, 법술 하나를 헤아려 파악하고 일부를 살짝 뒤틀어 응용하기에도 충분하다.
그러한 사실을 박세룡이 알 리 없었다.
그는 한유진과 다시금 눈을 마주친 즉시 흡사 발가벗겨지는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무슨 놈의 눈빛이······?'
일을 너무 가볍게 여겼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 그때.
S급 헌터가 되고서 거의 처음 느껴보는 현기증이 살짝 돌았다. 그리고 뭔가 현실감이 확 멀어지면서 정신이 멍해졌다.
'꿈?'
순간 난데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박세룡은 고개를 흔들어 그 망상을 떨쳐냈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당최 모르겠다. 하나 그에 대한 위화감을 제대로 곱씹어보기도 전 기겁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맞은편의 한유진이 기습을 가해온 것이다!
박세룡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대균열에서의 수많은 전투 경험이 없었다면 결코 그렇게 반응해 내지 못했을 터다.
몸을 감싸고 진회색 기운이 뿜어져 나와 방어막을 형성한다. 동시에 앞쪽 낮은 테이블을 걷어차 상대를 방해하며 소파째 뒤로 넘어가자, 금색 빛줄기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콧등을 스쳐 지나갔다.
경금검기.
그 법술의 예기는 S급 헌터인 박세룡의 능력으로도 막아낼 수 없었다. 하나 본능적 차원에서 취한 회피 동작이 목숨을 구했다. 펼쳐낸 방어막이 비록 뚫렸다지만 찰나의 시간을 벌어주기도 했고.
"자네 미쳤나-!"
박세룡은 잽싸게 몸 굴려 일어서며 고함쳤다. 그러면서 바로 반격했는데,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이었기 때문이고, 그런 최선을 행해야 할 만큼 방금 기습이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진회색 물처럼 흐르는 기운이 일순 급가속하며 창날처럼 쏘아진다.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고 상대방의 회피할 공간까지 점하는 채였다.
대응하여 나타난 것은 자색과 금색이 섞인 웬 빛무리, 자금광휘였다.
놀랍게도 박세룡의 공격은 그 빛무리에 맥없이 가로막혔다. 그사이 상대는 여유롭게 손을 뻗어 불덩이를 만들어 냈다.
끔찍한 열기가 느껴진다. 그 열기를 느꼈다 싶은 순간, 생존본능에 자극받은 진회색 기운이 그 어느 때보다 전력으로 뿜어져 나와 구형 방어막을 이뤘다.
직후 화염구가 섬광과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흡사 세상이 통째로 부서져 나가는 듯한 어마어마한 폭음이었다.
충격에 튕겨 나가 정신없이 구르던 박세룡이 정신을 차렸을 땐, 아파트 한 층 전체가 거의 기둥만 남은 상태로 박살 난 모습이었고, 건물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불길한 굉음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네가···! 아무리 화가 났어도 이건, 이건 정말로···! 도심 한복판에서 어떻게 감히···?!"
"음, 역시 S급은 S급이라 이건가."
"정말로 미친 건가?! 이건 테러야!!"
"테러는 네가 나한테 한 짓이 테러지."
그런 어이없는 말과 함께 상대가 다시 손을 뻗어 공격을 날려온다. 박세룡은 한유진이라는 20대 애송이가 완전한 사이코패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못 건드렸구나!'
하지만 뒤늦은 후회였고, 놈의 뻗어진 손에서 예의 금색 빛줄기가 줄줄이 쏘아져 왔다.
박세룡에게서 사출된 진회색 기운이 건물 곳곳에 박혀 든다. 그 기운들의 탄성에 힘입어 그는 곡예와 다름없는 회피를 선보였고, 이후 곧 무너질 듯한 아파트 건물 바깥으로 휙 나가버렸다.
외벽에 진회색 기운을 박아 넣으며 빠르게 지상으로 내려가는 박세룡의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그냥 미친놈이 아니야. 그 금색 빛줄기는 대체 뭐지? 전해 들은 이야기엔 그런 게 없었는데?'
엄청나게 빠르고 날카로워서 감히 대적할 엄두가 안 난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강철을 두부처럼 뚫는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그 자금색 광휘 보호막도 충분히 경악스럽다.
일단 피하고 봐야 했다.
저런 놈을 일대일로 상대하는 것보단, 놈이 지금 도심 한복판에서 벌인 테러 행위를 신고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상대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할 터였다.
한데 바로 그때.
빠콰콰쾅-!!
난데없는 거대한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도저히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속도의 공격이었다.
40화. 우물 밖을 보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