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혈령적화주병 (묘사 수정) >
탐색을 위해 그가 신식을 펜던트에 접근시키는 순간, 모종의 위험이 감지되어 얼른 물러나게 됐다.
그저 직감일 뿐이었지만 수선자의 직감이란 때로 예지에 가까울 만큼 정확하다. 스스로의 안전과 연관되었다면 특히나.
'이런 걸 직접 경험하게 될 줄이야.'
책에서나 보았던 일인지라 살짝 긴장되면서도 신기한 기분으로, 그는 일단 주변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구덩이들에서 비치는 은은한 핏빛은 단순한 장식이나 가짜가 아니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그곳에 핏물이 반복적으로 고였었는지, 심지어 육도윤회 신통으로 고통과 원한 같은 감정들이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장소에서 이뤄졌을 모종의 제사로 인해 단순한 핏자국 이상의 무언가로 화한 것 같다.
잠시 더 탐색을 이어가던 그는 선택의 순간이 왔음을 느꼈다.
위험을 무릅쓰고 본격적으로 펜던트를 살펴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곳을 벗어나서 다른 장소를 찾아볼 것인가.
'이쯤이면 슬슬 더 강한 적이 나타나서 방해할 때도 됐으니까······.'
다른 더 중요한 장소를 찾아보겠다고 움직이기엔 시간이 여유롭지 못하다. 이 세상을 훨씬 더 본격적으로 탐사하기 위해 완전히 몸을 피한다면 모를까, 그럴 생각이 없다면 여기서 과감하게 위험을 무릅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선택을 내린 그는 최대한 경계심을 끌어올린 채 신식을 그 펜던트에 위험한 선 이상으로 접근시켰다.
바로 그렇게.
펜던트의 정체를 저절로 알게 됐다.
무한한 지식과 지혜의 펜던트.
가장 깊은 곳이자 가장 드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관조하며 모든 것을 알고 깨닫는 자, 우그타르헬의 증표.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그것에 대한 정보들이 머릿속 가득 떠오른다. 동시에 느껴지는 것은 어마어마한 탐욕이었다.
'목에 걸면, 내가 원하는 모든 지식을 알 수 있을 거다.'
아무런 근거도 없으나 절대불변하는 진리처럼 느껴지는 충동이 머릿속을 온통 휘젓는다. 하나 한편으로, 그는 몽환유심과 육도윤회 신통에 힘입어 저항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굳이 저항해야 할까······?'
당연히 위험하겠지만 어쨌든 모종의 지식을 전달해 주는 물건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차피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 마당에 한번 착용해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딱히 뭔가를 목표하고 방문한 세상도 아닌데 망설일 이유가 있겠는가? 최악의 경우라고 해 봤자 별다른 수확 없이 그저 현실에서 깨어날 뿐인 것을.
깨어나기 직전 어쩌면 꽤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멀쩡하면 그만일 터다.
'······지금 이런 내 생각이 유혹 때문에 드는 합리화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나 객관적으로 다시 되짚어 봐도 논리적으로 틀린 구석이 없다.
결국.
어울리지 않게도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움직인 그가 미라 거인의 두 손에 떠받들린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이어 마지막 고민을 할 틈도 없이 저절로 움직인 손이 그것을 목에 착용해 버렸다.
직후.
머리가 폭발하듯 활짝 열리는 감각과 함께 '생각'의 범위가 무시무시한 수준으로 폭증하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 마치 새롭게 재해석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지는 듯하다. 완전하게 이해했다고 여기던 것조차 실은 색다른 해석이 가능함을 새삼 깨닫는다.
생전 모르던 지식들이 어딘가에서부터 흘러와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코로 냄새 맡아지고, 혀로 맛이 느껴지고, 손으로 촉감이 만져지는 것 같다.
그 둘이 서로 조합되어 전혀 새로운 창의적인 발상이 마구 떠오르고, 또한 그것들이 저절로 무수한 실험을 거친 것처럼 분석되고 정리되고 검증되어 또 다른 창의적 발상의 기반이 된다.
"아······."
반사적으로 환희에 젖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다시는.
결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금 자신의 이 상태야말로 궁극의 행복이자 지성체로서 마땅히 지향해야 할 최종점이었으니까.
오직 무궁한 진리만이 이 무한한 우주에서 티끌만도 못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
그는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하나 실제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이 빠르고 격렬한 생각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대며 정신을 못 차렸다.
눈동자 흰자위가 아득한 칠흑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 꽤 섬뜩한 모습이었다.
* * *
"비켜라."
긴장하여 몰려 서 있던 악마 추종자들은 순간, 뒤편에서 들린 미성에 흠칫 놀라 분분히 몸을 비키면서 고개를 숙였다. 감히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두렵다는 태도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목소리만으로도 바로 특정해 낼 수 있을 만큼 유명한 대주교였다. 잔혹한 성정 또한 유명하여 모든 하급자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지위 낮은 악마 추종자들이 비켜 선 공간을 여유롭게 걸어 '성소'에 들어서는 그녀의 모습은, 두려움의 대상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매우 아름다웠다. 은빛인 듯하면서도 보는 각도에 따라 은은한 보랏빛을 띠는 머리카락이 특히 신비한 분위기를 풍긴다.
완전히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섬섬옥수 같은 손에 핏빛과 어둠이 뒤섞인 기운을 피워올리며 감히 주교 셋을 살해한 침입자를 응징할 준비를 했다.
하나.
그 응징해야 할 적이 이미 우그타르헬의 증표를 목에 걸치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피워올리던 기운을 바로 흩어내며 묘하게 웃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설마 자기가 알아서 착용한 건가?"
- 그래.
"아, 벌써 강신을 마치셨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녀가 우아하게 허리 숙여 예를 표한다.
- 강신? 하하하···!
예상과 조금 다른 반응에 그녀가 힐끗 고개를 들어 살피는 그때, 상대가 여상하게 말했다.
- 잡담은 되었으니 재료나 갖고 와라. 그게 이 증표에 걸린 계약이잖느냐.
"좋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만들고자 하는 성물은···."
- 아니, 무엇을 만들지는 이미 내가 정했다. 직접 착용하고 있으니까.
"···아, 그렇지요."
이런 경우가 굉장히 드문 터라, 뒤늦게 관련 정보를 떠올린 대주교가 다시 예를 표하고는 뒤편의 악마 추종자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잠시 후.
악마 추종자들이 여러 커다란 상자와 각종 물건들을 대령해 왔다. 홀 내부의 한곳에 차곡차곡 정리되는 그 물건들을 보던 침입자, 현재 한유진이되 한유진이 아닌 존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어 그는 저물대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는데, 다름 아닌 옥로주병과 혈목정과양조술에 필요한 혈목의 씨앗들이었다.
파츠츠측···!!
거침없이 뿜어져 나온 법력이 옥로주병을 마구 헤집어 손상시키는 듯하다. 동시에 반대편 손에서 무수한 법문이 반짝이는 빛무리가 뿜어져 나와 혈목의 씨앗들을 기묘한 방식으로 크게 자극시켰다.
- 재료들 수준이 괜찮군.
중얼거린 그가 어물술로 주변에 악마 추종자들이 대령해 왔던 재료들 중 필요한 금속과 다수의 정체 모를 액체가 담긴 유리병들을 끌어왔다.
그러고는 입에서 순양극염을 뿜어내며 금속을 녹이기 시작했고, 한편으론 유리병들의 마개를 제거하고 그 내용물들을 손상된 옥로주병의 표면에 갖가지 방식으로 녹아들게 했다.
계속해서 기묘한 방식으로 자극받던 혈목의 씨앗들이 어느 순간 그런 옥로주병 속으로 빨려 들어가 시끄러운 소리를 터뜨려댔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하기 힘든 그런 소리였다.
이윽고 완전히 녹아내린 금속이 무수한 실처럼 갈라지며 옥로주병의 표면과 내부에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법결을 다각도로 새겨나갔다.
도저히 원래 한유진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연기대사가 와도 기겁하며 혀를 내두를, 아마도 연기종사나 되어서야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그런 난이도의 작업이다.
그는 끊임없이 온갖 귀한 마법 재료들을 소모하면서 옥로주병 전체를 개조해 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원래 옥로주병을 이루고 있던 재료가 과연 남아있긴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한데.
그러는 사이 한유진의 외모가 엄청난 속도로 늙어가고 있었다.
드래곤 하트 제련을 마친 덕에 원래 그의 수명이 오백 년을 훌쩍 넘는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얼마나 경악스러운 속도로 생명력을 소모하는 중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름이라도···."
- 쉿-.
중간에 잠시 작업이 느슨해졌을 때 대주교가 무엇인가를 질문하려 했으나, 한유진은 원영기급 이상임이 분명한 상대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해 보일 뿐이었다.
대주교는 순순히 그 지시를 따라 물러나 섰다.
그렇게 한나절이 넘도록 시간이 흘러갔다.
믿기지 않는 기예를 선보이며 옥로주병을 알 수 없는 무언가로 개조해 가던 한유진의 모습은 이미, 당장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주름 가득한 백발의 노인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숨이 다하기 직전에서야 작업을 끝낸 그는 만족스럽게 완성품을 매만지며 감상했다.
- 혈령적화주병······ 그렇게 이름 붙여야겠어.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그가 별안간 픽 고꾸라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대주교는 무언가를 아직 묻지 못해 안타깝다는 기색이었으나 곧, 영롱하게 매혹적으로 빛나는 새로운 성물 '혈령적화주병'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는 사이 한유진이 보는 세상이 천천히 암흑 속으로 잠겨들고, 이내 은빛 문자들이 떠올랐다.
- 당신은 죽었습니다.
* * *
수확물 선택을 앞둔 대기 공간.
그는 조금 어지러운 듯하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눈을 감은 채 성과를 정리했다.
'과연 예상처럼 위험한 물건이었다······. 아니, 예상보다 더 위험했다.'
신식으로 그 펜던트를 살핀 이후의 모든 일은 대부분 통제불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히 그런 와중에도 모든 것이 엉망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펜던트를 착용한 직후 느껴졌던, 흡사 머리가 터져 나가듯 활짝 열리면서 생각의 범위가 끝없이 확장되는 듯하던 감각은 후유증 없는 흐릿한 꿈속 기억처럼만 남았다. 이후 더해졌던 낯설고 새로운 지식들이나 창의적인 발상들도 마찬가지였고.
이미 예전에 한 번 경험해 본 현상인지라 이렇게 될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생명력이 소모된 일 역시 당연하게도 없었던 일처럼 화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명이 줄어든 것이 아닌, 일종의 공격을 받아 생명력이 빨려 나간 듯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원래 알고 있던 지식들을, 모자람 없이 이해했다고 여기던 그것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재해석해 낸 듯한 깨달음은 비교적 온전히 남았다.
이는 지식이 아닌 지혜 방면의 깨달음으로서 결코 작은 수확이 아니었다. 활용성이 크게 증가한 셈이었으니까.
'게다가······.'
눈을 뜬 그의 시선이 수확물 선택을 기다리는 한 물건으로 향했다.
원래 옥로주병이었으나, 지금은 보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질 만큼 매혹적인 붉은빛으로 탈바꿈한 '혈령적화주병'이었다.
저것을 만들 때의 그는 '자신이되 자신이 아닌' 존재였지만, 그게 모종의 다른 존재가 침범해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아가 악마적인 느낌으로 크게 변질된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요컨대 여자 대주교의 강신이라는 표현은 완전히 틀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웃었던 것이고.
'너무나 크게 변질됐었지만, 그럼에도 그건 분명한 나였다.'
대부분의 기억이 흐릿한 꿈처럼 화했음에도 몇 가지는 충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뚜렷하게 남았다.
펜던트에 어떤 계약이 걸려 있어서, 넘쳐 흐르는 지식과 지혜를 만끽하면서도 물건을 만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작업으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을 알았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각성 능력으로 방문한 세계였을 뿐이니까.'
그래서 어차피 계약을 이행하는 겸 스스로 사용할 물건을 만들려 했고, 괜찮은 발상을 떠올린 후 성공적으로 만들어 냈다.
즉.
혈령적화주병은 전혀 위험한 물건이 아니었다.
스스로 직접 사용하려고 만들어 낸 물건에 숨겨진 부작용이나 함정 따위를 깔아둘 리 있겠는가? 자아가 크게 변질됐었을 뿐 그때 자신은 결코 얼간이가 아니었다.
다만 위험하지 않을진 몰라도 도심에 안 거슬리는 속성의 물건일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다음에 같은 방식으로 펜던트를 목에 걸더라도 저걸 다시 만들어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펜던트를 걸침으로써 변질되는 상태를 원래 의도대로 통제할 수 없을 것이 뻔하니, 그때 변해버린 자신이 어떤 발상을 떠올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물건을 만들어내게 될 터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은 상당한 확률로 매우 꺼려지는 속성을 가졌을 테고.
생각하면서 그는 혈령적화주병에 다가가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법기 수준은 확실히 뛰어넘었고······ 법보인가? 설마 영보는 아니겠지?'
연기술 지식이 부족하고 이것을 제작할 당시의 기억이 많이 없는 탓에 판단이 어렵다. 그저 대략적인 사용법만이 느껴진다.
어쨌든 대단한 물건이라는 점만은 분명했다.
이번에 거른다면 앞으로 영원히 선택할 수 없을지도 모를 그런 수확물이지만, 선택하려면 지금 가진 카르마의 거의 전부를 소모해야 한다.
"후······."
절로 깊은 고민이 담긴 한숨이 나왔다.
무슨 게임 속 한정판 히든 아이템도 아니고, 딱히 뭔가를 바라지 않고 방문한 세계에서 이렇듯 사람을 고뇌하게 만드는 일이 발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꽤 오랜 시간을 계속 고민했다.
하지만 곧 현실에서 대량의 카르마를 수급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점점 강해지면서 한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또한 이 정도의 물건을 지금 가진 카르마 정도로 얻을 수 있다면, 설령 그 속성이 극악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뽑아낼 수 있을 듯했다.
곧.
마음을 굳힌 그가 혈령적화주병을 과감히 잡아들었다.
* * *
대균열로 복귀한 그는 자신이 복귀했다는 것만 간단하게 알린 후 바로 사냥을 위해 움직였다. 혈령적화주병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과연 느꼈던 만큼 쓸모가 있을까······?'
신식을 통해 대략적인 사용법은 파악했지만 실제로 사용했을 때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어떤 효과가 나타날지는 가늠이 힘들다.
풍둔술을 통해 빠르게 거점요새에서 멀어진 그는 곧, 어렵지 않게 만만한 괴물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들개처럼 생겼지만 네 다리의 관절이 많은, 웨이브 당시 주축을 이뤘던 바로 그놈들이었다.
훅···!
돌풍과 함께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난 한유진은 놈들이 채 반응하기도 전 한 손에 든 혈령적화주병을 내밀었다.
그 순간.
파스스슷-!
희미한 파공음과 함께 혈령적화주병 안쪽에서 칠흑빛 실들이 무수히 튀어나와 들개 괴물들을 마구 꿰뚫었다.
이어 놈들은 비명을 지르기도 전 눈 깜짝할 사이에 미라처럼 말라붙더니 곧 완전한 흙먼지로 부서져 내렸다.
튀어나왔던 칠흑빛 실 같은 선들은 역시나 순식간에 병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음······."
찰랑-!
가볍게 흔들어 본 병 속에서 분명한 액체의 느낌이 난다.
'이거 설마······.'
혈목정과영주를, 어쩌면 그것보다 더 뛰어난 효능의 액체를 거의 즉시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인가 싶었다.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기능과 함께 말이다.
81화. < 장거리 정찰의 필요성 >
수 시간에 걸쳐 거진 백 마리에 가까운 괴물들을 혈령적화주병으로 사냥한 그는, 그것이 작동하는 과정을 신식으로 계속 관찰함으로써 마침내 대부분의 성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 들었던 생각이 맞았다. 혈목정과영주보다 더 뛰어난 효능의 영주를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러면서 법보 자체의 공격력 또한 절대 약하지 않았고 말이다.
'여느 법보와는 특징이 이래저래 다른 것 같지만······.'
판타지 식으로 아티팩트라 불러야 좀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이 물건은 삼경조화결로 제련이 가능할 것 같았다. 아마도 제련을 마치면 모든 성능과 특성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가한 장소를 찾아 멈춰 선 그는 혈령적화주병을 살짝 기울여 내용물 몇 방울을 허공으로 떨어트렸다.
그것들을 어수술로 눈앞에 가져와 살펴보니, 루비처럼 반짝이는 액체 안쪽에 좀 더 진한 붉은빛이 흡사 연꽃 비슷한 형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모습이었다.
과연 법보 수준의 물건이 만들어 내는 영주답다.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며 한 방울 맛보자, 소량임에도 불구하고 입에 들어가는 순간 달콤하면서 진한 향취에 절로 감탄성이 나올 뻔했다.
그냥 이 맛과 향취만으로도 이미 혈목정과영주를 뛰어넘었다.
'괴물들을 죽여 만들어진 영주라고는 믿기지 않는군······.'
문득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 악마 추종자들의 궁전에서 보았던 흑마법서들, 피와 영혼으로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던 그 책들과 혈목정과양조술은 일부 원리를 공유하는 면이 있다.
아마도 펜던트를 착용함으로써 자아가 변질됐었던 그때의 자신이 바로 그런 면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다.
'사람을 재료로 혈령적화주를 만들 수도 있으리란 점에서 특히 그렇지······.'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재료로 만들었을 때 진짜 제대로 된 맛과 향취와 효능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생각하던 한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펜던트를 통해 변질된 자신은 그 무궁하게 느껴지는 지식과 지혜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심각하게 악마처럼 비틀려 버리는 것 같았다.
'다음에 다시 방문해서 펜던트를 걸치면, 대체 무엇을 만들어내게 될까.'
혈령적화주병을 수확물로 선택하면서 소모한 카르마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비록 지금 쓸모를 확인한 바 그만한 가치가 있긴 했지만, 다음번에도 이번처럼 운이 좋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기억의 대부분이 꿈처럼 흐릿해져 버리니, 성능과 별개로 얼마나 극악한 속성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물건을 대량의 카르마를 소모하면서 복불복 가챠처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무슨 게임 뽑기 시스템도 아니고.'
헛웃음이 나오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첫 번째 가챠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혈령적화주 한 방울을 무용이에게 나눠줬다.
"맛 한 번 봐라."
찍-!
처음 그 향취가 허공에 퍼져나갔을 때부터 눈을 떼지 못하던 녀석은, 한 방울 호로록 입에 넣고서는 원래도 동그랗던 눈을 좀 더 크게 뜨며 잠시 몸이 굳었다.
"맛있어?"
찍···! 찍찍! 찍!
평범한 짐승이던 시절 처음 영액주를 맛본 것마냥 흥분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작은 한숨이 나오게 만든다.
왜인지, 앞으로 영지가 얼마나 향상되든 저 식탐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잠시 한가롭게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하던 중.
추적 관련 이능력을 가진 헌터가 포함된 한유진만을 위한 특무대 십여 명이 나타났다. 그가 이동한 흔적을 임무에 따라 뒤쫓아 온 것이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한유진은 친근하게 인사하며 호의를 보였다.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공적을 기록해 주고 만일을 대비하는 등 다양한 부분에서 서포트해 주는 이들이다. 친근하게 대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
"고생하십니다. 잠시 쉬고 계셨습니까?"
"예. 몇 가지 생각해 볼 게 있어서요."
특무대 대장의 넉살 좋은 질문에 간단히 답하자, 대략 서른 후반이나 마흔 초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대균열에서 산책하듯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아마 한유진 부단장님밖에 없을 겁니다."
여담이지만 한유진은 S급 헌터인 만큼 진즉 박세룡과 같은 개척단의 부단장이 된 지 오래다.
그렇게 장소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잡담이 오가는 와중.
"오늘은 운이 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괴물들이 안 보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뭐, 이런 날도 있을 수 있죠."
대답하며 그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현실 대균열에서 혈령적화주병을 사용하면 괴물의 시체를 남기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것은 곧 뒤따라오는 특무대가 그의 공적을 확인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나중에 마나스톤으로 받게 될 보수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어차피 현실에서 수련할 게 아니라면 굳이 여기서 혈령적화주병을 쓰고 다닐 이유는 없겠지.'
지식과 각성초 보급을 통한 카르마 대량 수급을 기다려야 한다지만 길어도 몇 달 안에 결과가 나올 터이니, 본격적인 수련을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무엇보다 이미 결단기를 코앞에 둔 상태인지라 영주를 통한 수련은 딱히 의미가 없기도 했다.
잠시 더 한담을 나누던 그는 휴식을 마치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 얻은 물건의 성능 테스트를 마쳤으니 이제 본 목적인 카르마 수급에 충실할 때다.
운이 없는 것 같다고 했던 특무대 대장의 말을 완전히 뒤바꿔주는 것도 소소한 재미일 터였다.
* * *
그는 사흘 정도 사냥에 열중한 뒤 하루이틀 휴가를 갔다 오는 식으로 생활패턴을 조금 바꿨다.
너무 대균열에서만 있으면 환경적 특성 때문에 지인들과 연락이 끊어지는 문제가 생기는 탓이었다.
특히 이원희를 제자로 받아들일 마음을 굳힌 이상, 자주 만나보면서 관계를 다질 필요가 있었다. 모든 인간관계는 맥락을 따라 흘러가야 수월하고 부작용이 없는 법이니, 그 맥락을 형성하는 과정인 셈이었다.
그렇게 이번에도 아이의 집을 방문해서 데리고 나와 근처 파스타 전문점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있던 때.
"배울래요."
"응? 뭐를?"
"그거요. 그··· 제 이능력을 더 잘 조절할 수 있다는 거요."
"잘 생각했다!"
한유진은 대놓고 기뻐하면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진심이기도 했지만, 아이가 용기를 내서 한 선택에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 실망하지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이후로 그는 조금 더 자주 대균열을 외출하면서 꾸준히 이원희를 만나 기초적인 지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홉 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 회원공 지식을 그냥 툭 던져준다고 알아서 잘 익힐 리가 없다. 아무리 천영근자로서 비범한 오성을 가졌으리라 여겨져도 말이다.
강호무림에서 그 인피를 통해 얻은 화신공법은 당장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그가 아는 초심자에게 가장 적합한 수선공법은 바로 회원공이다. 약간의 실수 정도는 완전히 무해하게끔 만들어졌고, 그렇게 안전성에 신경 쓰면서도 육체와 영혼의 단련 속도가 느리지 않았으니까.
또한 포함된 법술 청심술만으로도 초보자에게 추천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정화술도 빼놓기에는 아쉬울 만큼 유용했고.
'과연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하면 얼마나 빠를까······?'
천영근자, 수선계에서조차 모두가 인정하는 천부적 재능의 보유자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아직 정식 제자로 받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며 기대가 된다.
앞으로 그가 각성 능력을 통해 얼마나 빠른 성취를 이루든, 아마도 유일하게 따라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제자가 될 터였다.
대균열에서는 여전히 사냥 활동에 열중하면서 겸사겸사 신통과 법술을 융합하는 수련을 시작했다.
바로 원력대수와 중급 오행법술을 결합하는 시도였는데, 원력대수를 익힌 것이 비교적 최근이었는지라 강호무림에서 이것저것 많이 시험해 볼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 따로 연습할 세계를 찾지 않아도 될 만큼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았다.
특별한 계산 없이 본능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신통에다가 이미 능숙해질 대로 능숙해진 오행법술을 더할 뿐인 일이다.
심지어 오행법술에 대해서는, 그 펜던트를 걸침으로써 원래 알고 있던 지식들을 살짝 다른 느낌으로 재차 깨닫는 과정을 통해 더욱 능숙해진 상황이었다.
화르르륵···!
본래 반투명해야 할 원력대수에 순양극염이 융합된 상태로 무시무시한 화염의 손이 만들어진다. 그것이 곰과 비슷하지만 털 없이 딱딱한 갑옷을 걸친 외형의 괴물을 가볍게 후려쳤다.
푸확-!
타격음이 아닌 가루로 된 형상이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맞닿는 동시에 잿가루로 타올라 버린 괴물의 몸이 터져 나가며 발생한 소리였다.
근처의 수풀과 나무들도 채 화염이 번지기도 전 모조리 새까맣게 연소된 모습으로 분분히 무너져 내렸다.
"흠······."
이것으로 몇 차례 연습을 거친 그는 효과에 만족하며 신통과 법술을 거뒀다.
위력은 만족스럽지만 대균열 사냥에서 써먹기는 좀 애매하다. 혈령적화주병을 사용할 때와 비슷하게 흔적이 잘 안 남는 탓이다.
눈에 띄는 잿가루가 남긴 하니 그나마 낫지만, 어떤 괴물인지를 알 수 없게 되는 터라 공적 계산에서 손해를 볼 여지가 다분했다.
'순양극염은 이 정도로 됐고······ 심해한빙수도 충분히 연습했고······.'
경금검기는 융합시키기에 딱히 어울리는 느낌이 아니다. 풍운령호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나마 뇌룡을 더해 보는 것이 법술이나 금제를 상대할 때, 그리고 귀신 따위를 상대할 때 유용할 것 같았다.
'심해한빙수에 뇌룡까지 더하는 것도 괜찮겠군. 특별히 신경 써서 상대해야 할 적이라면 말이지.'
이런저런 생각과 검증을 거치면서 그는 한참을 더 사냥에 열중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원래 예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나오게 됐음을 깨달았다.
풍둔술로 허공 높이 떠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자,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수해(樹海)가 사방 지평선에 걸쳐 펼쳐진 모습이 보인다. 중간중간 드높게 솟은 산맥의 모습들도 더해져 이 대균열이 온전한 이세계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그냥 느낌만이 아닐 수도.'
온갖 위험이 도사린 탓에 탐사가 매우 어렵다고는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조차 전체 넓이를 가늠조차 못 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대균열이다.
수십 년이라는 세월을 통해 거점요새들이 지어진 장소와 그 주변 광범위한 지역의 안전성이 어느 정도 증명됐지만······.
작정하고 외부 멀리 나아간다면 또 어떤 새로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런 장거리 정찰 시도를 여태 아무도 안 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전자기기 따위를 들여올 수 없는 대균열의 특성 탓에 이런저런 제약이 너무 심해서 좀처럼 성과가 없는 상황이었다. 성과가 없으니 시도하는 일도 점점 더 소극적으로만 되어가는 중이었고.
이는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일본과 중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바로 그렇기에.
이 현실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그는 직접 먼 거리까지 정찰해 볼까 싶었다.
혹시 모를 일이었다. 원시림에서처럼, 위험이 없는 장소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강력한 적이 등장해 버릴지.
"흠."
아무래도 박세룡과 짧게 상의해 보는 게 좋을 듯했다.
82화.< 마이그브라 정착지 >
장거리 정찰에 대한 안건은 예상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위험하게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그만큼 실패의 경험이 많단 뜻이겠지.'
무려 S급 헌터가 정찰을 시도한다면 여태까지와 달리 성과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행여나 귀중하기 짝이 없는 S급 헌터 전력이 해를 입기라도 한다면 실로 큰일이다.
가뜩이나 한국은 일본과 중국에 비해 S급 헌터의 수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으니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소중할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한유진의 생각을 꺾을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는 정말로 극악한 위험을 마주치지 않는 한 어떻게든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몽환유심 신통 하나만으로도 거의 모든 위험에 대처할 수 있으니, 무리하지 않고 조심하면서 움직인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단지 위험을 파악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기대하는 바가 있기도 했다.
새로운 마나스톤 광산이라든가, 혹은 특별히 중요한 무언가를 알림으로써 얻게 될지 모를 카르마라든가.
그렇게 결국 한유진의 특별정찰 임무가 결정됐다.
또한 바로 이 일 때문에 황해남도 동북부의 대균열 거점요새를 지키던 대한민국의 또 다른 S급 헌터, 최강백이 움직였다.
사실 대면해서 인사를 나누는 일이 매우 늦긴 했다. 아직 어린 이원희를 논외로 쳤을 때 국내에 셋뿐인 S급 헌터들끼리 안면조차 트지 않을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특히 최강백의 경우는, 거의 차원 충돌 사태 초창기부터 활동해 오며 헌터업계의 전설처럼 여겨지는 노인이자 동시에 이곳 대균열 개척단의 단장이기도 하다.
'따지자면 내가 먼저 찾아갔어야 하는 거로군.'
어쩌면 그 일로 상대가 이미 기분이 상해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다행히도.
거점요새의 회의실에서 직접 만나게 된 최강백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허허······ 한유진 씨, 너무 반갑습니다."
웃으며 악수를 청해오는 그에게선 굳이 육도윤회 신통이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을 만큼 호의가 가득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170cm가 겨우 될까 말까 한 키를 가진 그는, 몸이 다부지지만 노화의 흔적이 역력하여 분명하게 인생의 황혼으로 접어든 느낌을 풍겼다.
전체적인 인상이 박세룡과는 정 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그럼에도 역시 S급 헌터인지라 행동거지에마저 힘이 없진 않았다.
힐끗 살피게 된 그의 무기는 마나 합금으로 특수제작한 것이 분명한 미늘창이었다. 앞쪽은 도끼날, 뒤쪽은 망치, 위쪽은 뾰족한 창날이 달려 온갖 방식으로 공격할 수 있을 그런 냉병기다.
잠깐 살폈을 뿐인데 그런 한유진의 시선을 눈치챈 듯 그가 설명했다.
"괴물들을 잘 상대하려면 이런 무기가 필요하더군요. 어떤 놈은 찔러야 아파하고, 어떤 놈은 망치로 때려야 상대하기 편하고, 또 어떤 놈은 날카롭게 끊어내야 할 부분이 많아서······."
"확실히 다방면으로 쓸 수 있겠군요."
이런 면에서 강호무림과의 차이가 확 느껴진다. 주로 상대하는 적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최강백은 한유진을 대단한 애국자로 오해하는 듯했다.
그가 S급 헌터 인증을 마치기 무섭게 대균열의 웨이브 사태를 막기 위해 투입된 것으로도 모자라 너무나 열심히 소탕작전을 펼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전부 카르마를 쌓기 위한 작업이었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확실히 한유진은 개척단 임무에 굉장히 충실한 편이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조차 미루며 그렇게 헌터 활동에 매진하는 모습이 애국심으로 해석될 법도 했다.
굳이 상대의 환상을 깨트릴 이유가 없는지라 그는 적당히 맞춰주며 친분을 다졌다.
그러던 중.
"보통 사려 깊은 게 아니십니다그려. 저랑 거의 비슷하게 늙은 친구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허허허···!"
괜히 뜨끔하게 만드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한담이 끝난 후 오가기 시작한 대화는 당연히 장거리 정찰에 대한 것이었다. 최강백은 자신이 머물며 지키던 거점요새에 보관돼 있던 관련 자료를 가져온 상태였다.
"양이 상당해서······ 다 살펴보려면 며칠 걸릴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딱딱한 가방에서 꺼내놓는 서류뭉치는 확실히 적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 기준으로는 그 며칠도 다소 줄여 말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한유진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툭-
툭-
그는 한 번에 수십 장 이상의 문서들을 옆으로 옮겨 놓는 모습을 보였다. 박세룡은 뭔가를 짐작했으면서도 설마 싶은 기색이었고, 최강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됐다.
"남쪽으로는 그래도 제법 정찰이 진행됐었군요?"
"그렇긴 한데, 지금 그걸 읽은 건가요? 어떻게?"
"제 능력 중 하나입니다. 이런 걸 일일이 펼쳐볼 필요가 없지요."
"허······."
답을 들은 최강백이 놀라워하는 동시에 박세룡은 살짝 경이로움마저 느끼는 듯했다.
잠시 후.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모든 서류를 살피고 이런저런 질문을 통해 세세한 정보까지 전부 파악한 한유진은,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임무에 나서겠다며 그 자리에서 통보했다.
'북서쪽이 가장 정찰 성과가 미미하고, 심지어 실종자도 많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쪽부터 살펴보는 것이 옳다.
혹시 특무대의 도움이 필요한지, 다른 요청할 장비나 물건 등이 있는지, 자잘한 대화를 마저 나눈 그는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이어 숙소에서 잠에 빠져있던 무용이를 챙겨 안고 거점요새를 나섰다.
무언가 성과가 있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없어도 그만큼 안전하다는 뜻일 테니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묘한 기분과 함께였다.
* * *
먼 거리를 이동하자니 탑승감이 생각 이상으로 편안했던 풍운령호가 절로 떠오른다.
하지만 이건 어디에 놀러 가는 일이 아니었고 기동성보다는 은밀성이 중요했기에, 그는 직접 풍둔술을 써서 몽환유심 신통으로 기척을 가린 채 움직였다.
좀 번거로워도 충분히 안심될 만큼 은밀하면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흔들림을 없애고 불어닥쳐 오는 돌풍을 막아주는 등, 한유진의 배려를 받은 무용이만이 품에서 하품을 쩍쩍 해대거나 심지어 졸기까지 하는 태평한 모습을 보였다.
귀엽지 않았다면 감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여태 제대로 된 정찰이 이뤄지지 못한 범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자, 그는 마치 세기의 탐험가 혹은 모험가가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구 인류 중 그 누구도 발 딛지 못한 장소를 처음으로 보고 느낀다는 건 실로 각별한 맛이 있었다.
물론 마냥 재밌게 즐기기만 하진 않았다.
정찰이라는 임무에 따라, 신식으로 탐지되는 것들 중 기록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몇 가지는 표본까지 채취하여 챙겨온 특수 용기에 담아야 했다.
이런 게 전부 카르마라고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귀찮거나 고된 일은 아니었다. 겸사겸사 괴물들이 보일 때마다 원력대수로 때려잡는 것도 스트레스 풀기에 제격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임무에 열중하자니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얼핏 짧은 기간처럼 느껴질 수 있겠으나, 그의 이동속도가 무시무시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절대로 짧은 기간이 아니다.
현재 그는 밤이 찾아온 시간대에 맞춰 적당한 공터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수선자로서 이런 점이 참 편했다. 식사도, 수면도, 씻기 위한 물도, 불꽃의 온기 따위도 필요가 없으니, 어디를 가든 정말로 신선마냥 유유자적할 수 있다.
무용이는 아직 입문기급에 불과한지라 조금 예외였지만, 영액주 등을 챙겨주면서 품에 안고 다니면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지금도, 밤이 깊었지만 녀석은 낮에 이동하던 와중 늘어지게 한숨 잔 터라 눈동자가 아주 말똥말똥했다.
찍! 찍-!
"···옷 달라고?"
강호무림에서 현실 지구로 귀환한 이후.
녀석은 여태 한 번도 옷을 입지 않았다. 몇 번 달라고 한 적 있었으나 한유진이 아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바로 수긍하며 이후로는 그런 뜻을 전해오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특별히 입고 싶은 모양이었다.
순순히 저물대 한곳에 고이 모셔놓은 옷을 꺼내서 입혀주자 연신 코를 씰룩이면서 좋아하는 모습이다. 하나 동시에,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조금 기색이 가라앉는 듯도 했다.
통명어수결을 통해 전해져 오는 감상에 한유진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당연히 보고 싶지."
찌직···! 찍!
"원래 세상사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다. 앞으로 내가 계속 선도를 걷는다면 이런 일이 더 많아질 거야."
문득 은미령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이전에 한유진 역시 오행종 유적에서 얻은 잡서들을 통해 접해 본 말이기도 했다.
"선범이 유별하다는 게 이런 거겠지······."
사람 한 명 없는 대균열 속 대자연을 한동안 탐험하고 다녔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따라 유난히 밤하늘의 별빛이 찬란하기 때문인지.
수많은 추억들이 떠오르면서 절로 감상적이게 된다.
그렇게 그리움에 젖어 얼마를 휴식하고 있었을까.
불현듯.
한유진은 잠시 풀어두었던 무용이를 바로 어물술로 끌어와 품에 앉았다. 동시에 신식과 영안술을 극한까지 발휘하며 하늘 이곳저곳을 살폈다.
어두운 와중 한 쌍의 눈동자만이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는 신비로우면서도 살짝 소름이 돋는 모습이었다.
'···착각인가?'
하늘에서부터 무언가 시선이 느껴졌던 것 같다.
조용히 감상에 젖어 쉬고 있지 않았더라면 미처 못 느끼고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그런 감각이어서, 진짜로 느낀 건지 아니면 예민했을 뿐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하나 그는 자신의 감각을 상당히 믿는 편이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그 감각을 믿어 손해 볼 여지가 없었다.
바로 그런 생각과 함께 좀 더 확신을 담아 하늘을 훑어보던 와중.
법혼기 수사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드넓게 뻗어나간 신식에 무언가가 마침내 잡혀 들었다.
그 즉시 한유진의 신형이 한 줄기 바람만을 남기고 훅 꺼져버리는 듯했다.
* * *
크이브낙.
마이그브라의 자랑스러운 감시자 중 한 명으로서, 그녀는 오늘도 주령계약을 맺은 '밤그림자 천촉수'를 통해 정착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항상 하는 일이었고 백 번 중 아흔아홉 번은 아무런 일도 없이 교대하게 되는 지루하고 뻔한 임무였지만, 그 백 번 중 한 번조차 막상 살펴보면 별것 아닌 경우가 대다수인 그런 임무였지만.
그래도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일임을 모르는 자는 부족 내에 없었다.
하여 감시자라는 직책은 결코 낮지 않은 대접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모든 감시자들은 약간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다.
크이브낙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녀는 감시자들 중에서도 유난히 임무에 충실한 편이었다.
바로 그렇게 오늘도 어김없이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던 와중.
저절로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어두운 숲속에서 조용히 있는지라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칠 뻔했지만, 대상이 하늘이 가려지지 않는 공터에 자리한 터라 가까스로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
마이그브라는 이미 인간들이 이 광활한 카찰리카 대수림의 몇몇 장소에 요새를 건설하고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파악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인간들은 여지껏 계속 자신들의 존재를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오늘 그 인간들 중 한 명이 소름 끼치게도 정착지 근처까지 접근해 온 것이 분명했다!
'알고 온 건가? 그저 우연인가?'
그녀가 알기로 과거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다고 했다.
물론 지금처럼 가까이 접근한 적은 처음인 듯하지만, 어쨌든 인간들이 이쪽 방향을 정찰하려 몇 차례 시도한 적이 있었고, 그에 마이그브라에서 직접 그들을 조용히 제거한 적이 몇 번 있다고 들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조용히 제거하면 되겠지?'
어떤 식으로 일이 처리되든 최초 발견자인 그녀 자신의 공이 크다. 어쩌면 새로운 주령계약을 맺을 짐승을 배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절로 살짝 흥분하며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때였다.
주시하고 있던 상대가 돌연 조금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그에 긴장하여 다시 정신을 집중하는 순간.
갑작스레 상대가 사라졌다. 여태 보이던 것이 전부 혼령의 장난질이었다는 것처럼.
하지만 정말로 그런 혼령의 장난질일 리는 없다.
'어디로 갔지···?!'
당황한 그녀가 얼른 주령계약을 맺은 밤그림자 천촉수를 움직여 사방 곳곳을 훑어보려 할 때.
계약수의 코앞에서 그 인간이 불쑥 나타나 그녀를 화들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채 무언가 대처하기도 전 상대의 눈동자에서 자색빛이 폭발하는 것을 목격한 것 같았다.
직후.
"헉···!"
그녀는 악몽을 꾼 듯 헛숨을 들이켜며 침대 위에서 번쩍 눈을 떴다.
"···하."
전부 꿈이었다.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잠시 더 침대에 누워있다가 곧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할 일이 제법 많았다. 아마도 정착지를 한 바퀴 전부 돌아보다시피 움직여야 할 것이다.
'무슨 일 때문인가 하면······.'
왠지 머리가 살짝 멍한 느낌이었지만 곧 이유를 성공적으로 떠올려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털면서 방을 나섰다.
83화.카르마 대량 획득
마이그브라 정착지의 지성체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신체구조는 이족보행을 하며 인간과 비슷했지만, 피부가 맨살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황갈색 계열의 얼룩덜룩한 털가죽이었고 귀 모양이 사막여우를 연상시키듯 크고 길쭉했다. 이목구비는 고양잇과 짐승의 특성을 띠면서도 애매하게 인간을 닮아 얼핏 귀엽지만 살짝 불쾌함이 느껴졌다.
그들은 자신들은 '아헤티'라고 불렀는데, 초월적 이해력으로 해석되는 바에 따르자면 '산맥의 주인'이었다.
과연 그 이름에 따라 그들의 정착지는 산맥의 겉과 내부에 걸쳐 광대하게 건설돼 있었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모습은 거의 안 보였고 신비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생활의 편리를 보장했으며, 구성원의 수는 십만에 좀 못 미치는 듯했다.
대한민국 어느 한 지역의 중소도시만 한 규모로서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수다.
이들의 전투술은 주로 영적인 계약을 맺은 짐승을 강제로 동원하거나 영혼에 온갖 방식으로 상해를 입히는 등 상당히 꺼림칙한 방식이었다.
전투원의 수는 대략 일만이 살짝 넘는 정도였다. 대부분 B급에서 A급 헌터에 이르는 무력 수준을 가진 듯했고 S급 헌터 이상의 무력을 가진 이들이 약 서른 명이었다.
그중 족장 '마이그브라 아우락'은 평범한 S급을 훌쩍 뛰어넘은, 아마도 수선자로 치자면 결단기급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다.
다만 그 족장은 수십 년 전, 지구에 차원 충돌 사태가 발생하기도 이전에 또 다른 이종족과의 전투에서 크게 다쳐 아직까지도 부상이 다 낫지 못한 상태라는 모양이었다.
전부 감시자 크이브낙을 통해 알아낸 정보였다.
그녀는 몽환유심으로 강화된 환몽심탈술에 당해 짧은 시간 무려 두 달이 넘는 체감 기간을 꿈속에서 보내며 온갖 정보를 한유진에게 가져다 바쳤다.
그런 정보들 중엔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 몇 존재했다.
'가령, 여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던 웨이브 현상의 배후가 바로 이 아헤티 놈들이라는 정보라거나······.'
족장이 완전히 회복할 시 헌터들을 크게 한 번 털어먹을 계획을 가졌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그가 가장 주목하게 되는 건 바로 이들의 차원유랑 비술에 대한 정보였다.
놀랍게도 이들은 자신들이 생존할 만한 다른 세상을 자력으로 탐색한 후 이동해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아헤티 종족은 상당히 많은 차원에 걸쳐 부족 단위로 존재하는 종족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의 대족장은 무려 여러 차원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단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 대족장의 무력에 대한 정보는 크이브낙을 통해서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리 약해도 원영기급이고 어쩌면 화신기급을 넘어선 합체기급일 가능성도 있다.
여러 차원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충분했다.
'다행히 이놈들을 상대하면서 그 대족장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만약 대족장이 언제든 개입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들이 지금 같은 상황에 처했을 리 없다. 족장이 부상에서 수십 년째 회복을 못 하면서 납작 엎드린 채 숨어있는 상황 말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들의 인간에 대한 태도는 적대적이라기보단 방어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지구 인류의 총 전력을 알 수 없는 만큼 두려움이 어느 정도 깔려있고, 그러면서도 관찰되는 헌터들의 수준을 보며 무시하는 마음이 존재하지만, 일단 족장이 회복할 때를 기다리자는 신중함이 지배적이다.
주기적으로 웨이브를 일으키는 것도 공격해 없애려는 의도보단 활동을 위축시키려는 목적이 강했다. 인간들이 대균열에서 마음껏 활개 치도록 놔둔다면 지금처럼 계속 숨어있기가 어려울 테니까.
'여기가 각성 능력으로 방문한 세상이었다면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찾아가 보는 일도 고려했겠지만······.'
이곳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현실이다.
가장 강하다는 족장마저 상처 입은 결단기급에 불과한 만큼 충분히 싸워 이길만했으나 지금 괜히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돌아가서 개척단에 알린 후 어떤 결정이 내려지는지 보고 그때 개입해도 충분했다. 이 아헤티 종족이 당장 사생결단을 내야 할 만큼 심대한 위협으로 자리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웨이브 현상의 주범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생각하는 와중에도 계속 크이브낙을 꿈속에 빠트린 채 정보를 수집하던 한유진은 잠시 후.
더 이상 법술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판단과 함께 이 목격자를 제거할 마음을 먹었다. 아무래도 직접 마주쳐서가 아닌 주령계약이라는 영적 연결을 맺은 짐승을 통해 법술을 시전한 상황이었는지라 한계가 느껴졌다.
어떻게 제거해야 할지는 분명하다. 영혼을 다루는 일에 능숙한 놈들인 만큼, 그 영혼을 완전히 망가트려야 흔적을 지울 수 있다.
'너희 부족의 업보라고 생각해라.'
단지 적대적 세력을 상대하는 일일 뿐이다.
자색빛을 발하며 환몽심탈술을 유지하던 한유진의 눈에서 순간 육도윤회가 떠올랐다.
꿈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크이브낙은 갑작스레 주변 모든 것이 돌변하는 경험을 해야 했다. 그 혼자만이 마치 차원이동한 것처럼 전혀 낯선 세상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바로 육도윤회의 세상들로, 그녀는 채 당혹스러움을 떨쳐내기도 전 무시무시한 감정의 폭풍에 그대로 휩쓸렸다.
행복과 기대와 슬픔과 분노와 혐오와 절망이 미친 듯이 휘몰아치며 그녀의 영혼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깎아낸다. 현실에서는 불과 일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그녀가 체감하기론 무려 며칠에 달했다.
겨우 A급 헌터 수준에 턱걸이한 그녀의 능력으로 버텨낼 수 있는 신통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 감시자가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부족 내 별실에서 영문도 모른 채 영혼이 부서져 내려 사망했다.
가장 능력이 뛰어난 족장이 직접 나서더라도 도대체 무엇에 당해 죽었는지 밝혀내기는 어려울 터였다.
* * *
거점요새로 무사히 복귀한 한유진은 며칠에 걸쳐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만큼 수확이 많았다고 볼 수 있었으며, 그 자신이 알게 된 것들을 단지 문자로만이 아닌 그림으로도 자료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그림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수선자다운 능력으로 금방 전문가처럼 필요한 것들을 그려낼 수 있게 됐다.
당연히 가장 공들여 묘사한 것은 아헤티 종족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또한 당연히, 그 보고서를 받아보게 된 개척단 지휘부는 난리가 났다.
살아있는 이종족을 발견한 것만도 놀라운데, 그놈들이 자신들을 예전부터 몰래 관찰해 오고 있었으며 웨이브를 일으킴으로써 견제까지 해 왔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보고서를 작성한 한유진이 개인적으로 첨부한 의견도 난리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놈들이 가진 차원유랑 지식을 손에 넣는다면, 여태 극복하지 못했던 '균열 통과 충격' 현상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대균열을 포함한 모든 균열 내부로 온갖 현대문물을 들여올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각종 전자기기를 포함하여 차량과 중장비 등의 기계는 물론 총화기와 폭탄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도저히 한국 혼자서 어떻게 해결하고 삼킬 수 있는 건수가 아니었다. 상대해야 할 적의 전력부터가 그랬다.
"이건······ 정부와 신중하게 의논한 다음, 아마도 국제적인 사안으로 다뤄지게 될 듯합니다."
숙소까지 직접 찾아온 박세룡이 하는 말에 한유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물었다.
"그 다음엔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 같습니까?"
"정보 검증이 여러 번 이뤄질 겁니다. 하지만 그 검증이 적대적 세력을 건드리는 일인 만큼, 처음부터 국제연합 토벌단이 함께 꾸려질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렇게 말한 박세룡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보고서의 정보들을 대체 어떻게 얻으신 겁니까? 이러면서도 정체를 노출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거짓이나 허풍이 섞였을까봐 겁나십니까?"
농담조로 물었음에도 박세룡은 감히 자신이 그런 불경한 생각을 품었겠냐는 듯, 하지만 사안이 워낙 중대한지라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전부 사실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원유랑 비술에 대한 것도 사실이니, 아무리 그 지식이 난해하더라도 균열 통과 충격 정도는 해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차원을 유랑할 수 있을 정도의 비술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해낼 수 있을 법도 하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이종족의 신비학 지식을 얻게 되는 만큼 각국이 만족하기엔 충분할 겁니다."
"예,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게 영혼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현재 지구 인류가 가장 무지한 분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박세룡이 돌아가고 한유진은 다시 평소대로의 생활로 복귀했다.
그렇게 며칠 후 대균열 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자신이 보고한 내용이 어마어마한 이슈로 사회를 강타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인터넷을 잠깐 둘러보기만 해도 온통 그 아헤티 종족과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을 수확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위험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거론되면서 과연 국제사회가 힘을 합쳐 그들을 토벌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아주 뜨거웠다.
부가적으로는 그 이종족을 꼭 토벌해야만 하는지, 혹시 평화적인 교류는 불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도 활발했는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의학 등,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이 다 튀어나와서 제각각의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국제적이고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기까지 얼마 안 남은 듯했다. 온갖 매체가 시끄러운 것도 전부 미디어를 통한 여론 형성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터다.
여담이지만 최초 발견자로서 미친 듯이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과 여러 국가의 초청 등은 전부 거절하는 중이었다. S급 헌터가 마음먹고 거절한다면 그걸 어찌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바로 그때쯤.
왜 안 들어오나, 의아하게 생각하던 카르마가 마침내 무언가 알 수 없는 조건을 만족한 듯 쌓이기 시작했다.
오묘하기 짝이 없으면서 굉장히 벅차오르는 그런 느낌이었다. 예전에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했기에 거의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대박이다!'
가늠해 보니 놀랍게도 강호무림에 가기 전 쌓아놨던 양보다 족히 두 배 이상 많았다!
각성 능력을 통해 다른 세상에서 결단기에 오른 후 그 수련 성과를 현실로 가져오기에 차고 넘치는 양이다.
그만큼 대균열에서 아헤티라는 이종족을 발견한 일이 대단하다는 뜻일 터였다. 심지어 성공적으로 그들을 토벌하고 그 성과가 보급된다면, 그때 다시금 막대한 카르마 수급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쯤이면 오행종 유적에서 통천령보를 가져오기에도 충분하겠지?'
저절로 가슴이 두근두근 뛰면서 열이 나는 듯했다. 닿을 수 없는 그림 속 떡처럼 느껴지던 통천령보가 마침내 손에 잡힐 것 같았으니, 수선자로서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결단기에 오르는 건 어차피 확정된 일이다.
하여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이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는데, 바로 결단기 수사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본명법보(本命法寶)에 대한 일이었다.
낮에 이원희를 만나 전학 간 학교에서의 생활에 대해 묻는 등 친분을 다지고 작별한 후.
돌아온 안전가옥에서 미환진기를 설치한 그가 침대에 누워 각성 능력을 사용하려 했다.
'결단기에 오르고 난 다음 가면 지나치게 눈에 띌 우려가 있으니······.'
아직 법혼기인 지금 상태로 천원성에 가서 연기술 강의를 들을 생각이었다.
어쩌면 연속으로 방문해서 부적술 강의까지 해치워버려야 할지도 몰랐다.
84화. 천원성 모든 강의 이수
짧게 머물 예정이었고 눈에 띄는 것을 피해야 하는지라 이번에도 무용이는 데려오지 않았다.
방문 직후 해야 할 일은 이전과 같았다.
큰 전투 직후의 난리통을 수습하면서 쓸만한 신분패를 줍는다. 저번에 진법술 강의자인 송자문에게 들켰었지만 별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그 운곡문 이곤의 신분을 쓸 생각이었다.
강의 시작 전까진 저번처럼 각종 정보를 습득하며 보냈다. 모든 강의를 다 들은 후에도 이곳 천원성에 오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준비를 해둬서 나쁠 게 없다.
그러던 와중.
어쩌다 보니 이곳에 처음 방문했을 당시 사용했던 신분인 동은주 연가 연비원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됐다.
'고작 법혼 후기의 수사가 가주로 있는 세가란 말이지······?'
사실 고작이라기엔 대부분의 소규모 수선세가들의 현실이 그렇다. 아예 법혼기 수사가 존재하지 않는 곳도 허다한 만큼, 동은주의 연가 정도면 그 일대에선 꽤 먹어주는 세력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 결단기를 코앞에 뒀고 지금 상태로도 이미 결단기급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한유진에겐 가소롭게만 느껴졌다.
나중에 어쩌면 연비원의 신분을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몽환유심 신통으로 세가 전체를 속여넘길 수 있을 테니 자신의 출신성분으로 삼기에 딱 좋았으니까.
몇 가지 자잘한 문제들은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 다시 고민해 보면 될 일이다.
연기술 강의는 성의 남쪽 광장에서 열렸다.
강의를 맡은 수사는 결단기이자 연기대사인 자로 이름은 도명휘였고, 중년이라고 말하기엔 상당히 젊어 보이는 외모를 가진 미남자였다.
다른 강의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강의 역시 첫날은 기초를 다뤘다.
고체 상태의 영재를 액체 상태로 만드는 법, 그 상태에서 필요한 성분만을 추출해 분리하거나 불순물을 제거하는 법, 다른 특성을 가진 영재와 순조롭게 융화시키는 법, 그것을 다시 고체 상태로 안정화시키는 법 등.
전반적으로 재료를 다루는 내용이었고 몇 가지 연기대사로서의 요령을 알려주며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강의가 끝난 다음 한유진은 이전에 참가했었던 그 소규모 교류회를 찾아갔다.
다름 아닌 옥로주병을 재차 얻기 위해서였다. 혈령적화주병의 제작 재료로 사용됐던 만큼, 그 완성품을 수확물로 선택하면서 당연히 소모하게 돼버린 탓이다.
옥로주병은 옥로주병만의 맛과 향취가 있기에 무용이를 위해서라도 꼭 다시 얻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거래하면서 겸사겸사 가위부를 한 장 더 얻었다.
'언젠가 허풍을 떨 일이 한 번쯤은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이 벌써 결단기를 코앞에 두고 말았다.
아무래도 가위부는 그냥 부적술을 익힐 때 교보재로 사용해야 할 듯했다. 다른 존재의 기세를 모방하는 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의 둘째 날에는 흔히 쓰이는 재료들의 조합과 상성에 대한 가르침이, 셋째 날에는 재료를 고체화시키며 어떤 유형의 법결을 어떻게 새겨넣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이어졌다.
그렇게 점점 더 심화적인 내용으로 들어갈수록 당연하다는 듯 입문기 수사들이 나가떨어졌다.
한데, 일정 수준까지 강의 내용의 심도가 깊어진 후 거기서 딱 멈췄다.
남은 나날 동안 이어진 강의는 망가진 법기나 법보를 어떻게 수리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주였고, 그에 필요한 요령과 지식들을 단편적으로 가르치는 느낌이었다.
'강의 실력이 부족한 건가, 아니면 연기술 지식을 베풀기에 인색한 건가.'
한유진은 자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의 이 강의만으로도 충분히 도움 되는 것은 맞았지만 연단술과 진법술 강의와 비교하자면 부실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든 기초는 배웠기에 현재 가진 오행환을 참고해서 본명법보를 만들어낼 수 있을 듯했다.
물론, 평범한 수준의 법보에 만족한다면 말이다.
'당연히 그런 평범함에 만족할 수야 없지.'
다른 수선자라면 현실과 타협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기적이기 짝이 없는 각성 능력을 가진 한유진 자신이 그럴 수는 없다.
그건 정말로 스스로의 각성 능력을 끔찍하게 모독하는 짓이었으니까.
바로 그렇게 생각하자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선협 요소가 어우러진 SF 느낌의 세계가 정말로 있다면, 그 세계의 연기술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단지 상상일 뿐이지만 일반적인 수선계보다 뒤떨어지진 않을 것 같다. 위력 면에선 몰라도 편리성이나 활용성 면에서 특히 강점을 보일 그런 느낌이다.
어쨌거나 가보기 전까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요족들이 침공해 오는 마지막 날까지 열심히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이번의 연기술 강의에서 느낀 실망감을 회복하기 위해 바로 부적술 강의를 듣기로 마음먹고는, 요족들과의 전투로 정신력을 낭비하지 않고 탈출 법술을 사용했다.
전투는 부적술 강의까지 전부 들은 후 시원하게 한 번 치를 생각이었다.
* * *
바로 재방문하여 신분패를 줍고 겸사겸사 정보를 얻으면서 하루를 보낸 뒤.
이번엔 천원성 동쪽의 광장으로 향했다. 가장 많은 수사들이 듣는 강의인 만큼 도착하기 전부터 심하게 북적거렸다.
강의를 맡은 결단기이자 부적대사인 수사는 적문유라는 이름을 가진 성마른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그리고 단상에 올라 짧은 인사 후 곧장 강의를 시작하는 것만 봐도 인상과 같은 성격을 가진 듯했다.
다행히 강의 진행조차 그처럼 조급하진 않았다. 오히려 매우 꼼꼼했다.
연기술 강의가 어딘지 부실한 느낌을 풀풀 풍겼다면, 이 부적술 강의는 태생부터 실용적일 수밖에 없는 기예를 가르치기 때문인지 너무나 알찬 느낌이었다.
특히 강의를 들으면서 한유진은 그가 입문기 수사들을 많이 배려한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그들이 가장 많이 부적을 사용하기 때문인 듯했다.
하나, 그들을 배려한다고 해서 그 내용의 수준이 낮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는지라, 시일이 지날수록 이 강의에서도 수많은 입문기 수사들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다른 강의와 비교하면 생존율이 매우 높은 편이었고 중간에 나가떨어진 이들조차 수확이 적지 않을 터였다.
강의는 부적지 및 영묵의 종류와 제작법을 포함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법술을 어떤 식으로 부여해야 하는지가 주된 내용이었다.
모든 정식 부적은 표면의 법결을 자세히 살핌으로써 진위를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어짐과 동시에 핵심을 숨겨야 한다. 그러면서 성능에 문제가 없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또한 부적을 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재료보다는 부적사 스스로의 집중력과 숙련도였다. 한 획을 그릴 때마다 아주 약간의 오차만으로도 실패라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한유진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여러 작은 교류회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부적술에 필요한 재료를 구했고, 그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으며 연습에 매진했다.
겸사겸사 동은주 연가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도 해 봤는데, 이미 한 번 단서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성과가 없었다. 딱히 유명할 거리가 없는 그저 그런 수선세가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다가온 마지막 강의 날.
그는 기초 법술 몇 가지를 성공적으로 부적에 담아낼 수 있었다.
실로 재능이 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초월적 이해력과 펜던트를 걸침으로써 얻었던 색다른 깨달음이 상당한 도움이 됐다.
만약 강의자인 적문유가 그런 한유진의 성취를 알았다면 원백령이나 송자문 때처럼 태청궁에 입문하지 않겠느냐며 물어왔을지도 모른다.
완성된 부적 몇 장을 뿌듯하게 챙긴 그는 마침 정중 금제가 회복되는 것을 느끼면서 여유롭게 성벽으로 이동해 갔다.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시원하게 한판 싸울 시간이었다.
* * *
- 겨우 이따위 수작질을 믿고 있었느냐!
천원성 성주 구소보의 심언과 함께 떨어져 내리던 금빛 화염체가 가로막혀 폭발했다.
고리형 충격파가 하늘을 뒤집어엎고 번쩍이는 빛과 잔상만이 보이는 화신기급 존재들의 전투가 이어진다. 그래도 한유진은 그들의 전투를 예전보단 좀 더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속으로 연신 감탄하면서 그것을 계속 감상하던 와중.
"성벽을 사수하라-!!"
누군가의 법술을 통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자연히 시선을 돌린 성벽 바깥으로는 지평선에서부터 해일처럼 몰려들고 있는 각양각색의 요족들이 보였다.
하나의 세계를 전선으로 삼아 벌어지는 대전쟁이다. 이런 곳에선 아무리 한유진 자신이 결단기급 힘을 발휘하더라도 큰 역할을 해낼 수 없다.
'하지만 국소적으로는 어떨까.'
그가 은근히 힘을 끌어올리며 대비하는 그때.
- 키아아아악-!!
한 맹금류를 닮은 요족이 낮게 비행하여 구멍이 숭숭 뚫린 정중 금제 방어막을 통과해 들어왔다. 하나 놈은 너무 기세가 좋았던 나머지 근처에 자리하던 모든 인간 수사들의 이목을 끌어 집중 공세를 얻어맞아야 했다.
놈이 처참해진 몰골로 성벽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사이 다른 위치에서 여러 요족들이 침투해 들어온다. 그중 한 마리에게 한유진의 시선이 바로 꽂혀들었다.
- 크히히힉···!
인간과 비슷하지만 외눈박이인 데다가 머리가 셋인,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의 키클롭스를 닮았지만 팔까지 세 쌍이나 달린 삼두육비의 괴물이다.
놈은 여섯 개나 되는 무기를 폭풍처럼 휘두르면서 어지간한 법술은 그냥 몸으로 버텨내는 터프함을 뽐냈다.
'전에는 물러나게 만드는 게 최선이었지.'
생각하며 그가 놈을 향해 검지를 겨눴다. 그 순간 삼두육비 요괴가 무언가를 감지하곤 고개를 휙 돌려 그를 쳐다봤으나.
순양극염탄사의 속도가 놈의 반응보다 조금 더 빨랐다.
푸확···!
- 캬아아악···!
왼쪽의 팔 두 개가 화염의 선에 적중당해 그대로 불타올라 끊어져 나간다. 그 와중 나머지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내는 모습이 제법 훌륭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어느새 뇌성과 섬광을 동반하고 지근거리에서 나타난 한유진이 원력대수를 펼쳤다. 반투명한 손이 도망치려던 요괴를 손바닥으로 내리친 순간.
꽝-!!
굉음이 터져 나오며 놈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꽝-!! 콰쾅-!!
연이어 두 번 정도 더 내리치자 겨우 붙어있던 숨이 완전히 끊어지며 전신이 피떡으로 화했다.
"가, 감사합니다, 선배님···!"
근처의 한 법혼기 수사가 인사해 온다. 그를 결단기 수사로 착각한 것이 분명했다.
한유진은 짧게 고개만 끄덕인 후 위쪽을 살폈다.
과연 그의 계산대로, 마침 사마귀와 전갈을 뒤섞어 놓은 듯한 생김새의 요족이 막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예전엔 바로 그를 노리며 내리꽂혔던 놈이 이번엔 아무것도 못 봤다는 양 지나치려는 모습이다.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린 그가 즉시 뇌성과 섬광을 터뜨리며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사마귀전갈 요괴의 코앞에 나타나며 얼핏 친근하게 물었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 자, 잠깐···!
놈이 무언가 마저 말을 내뱉기도 전.
한유진이 바로 원력대수를 펼치며 그 신통에 심해한빙수를 녹여냈다. 거의 한순간에 만들어진 커다란 물의 손이 상대가 대처할 수 없는 속도로 들이닥쳤다.
퍼퍼펑-!!
그렇게 놈이 창졸지간 만들어 낸 보호막을 통째로 박살 내며 그 안의 몸체를 후려쳐 으깨버렸다.
놈의 시체가 맥없이 추락하는 것을 보자니 실로 감회가 새로웠다.
이전에 한쪽 팔이 날아가고 두피 가죽이 반 이상 녹아내리고서야 겨우 이겼던 놈을, 이제는 무슨 파리 때려잡듯 그냥 죽여버린 것이다.
'또 빚을 갚아줘야 할 놈들이 있었는데.'
생각하며 신식과 함께 영안술을 발휘해 주변을 훑는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기억에 남은 놈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이족보행 호랑이 같은 외형을 가진 놈으로, 인족치고 호탕하다면서 달려들었던 바로 그놈이었다.
우연찮게도 같은 순간 서로 시선이 마주쳤다. 놈은 과거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던 모습이 무색하게 즉시 몸을 빼려는 기색이었다.
하나 한유진의 육도윤회 신통이 한발 빨랐다.
그의 뒤편에서 후광처럼 나타난 여섯 세계들이 순환하며 무궁무진한 감정의 폭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신통은 단지 목표한 호랑이 요괴에게만 힘을 발휘하지 않았다. 상당히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며 분노의 세계 야수도의 감정을 집중적으로 일으켰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그가 나지막하게 말한 직후.
요족들이 미친 듯이 포효하면서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호랑이 요괴는 딱 한유진의 의도에 따라 그를 향해 달려들어오는 모습이었다.
"너를 위해 내가 예전에 못 줬던 콘프로스트를 준비했다."
말하며 그는 한 손에 금련구전만개를 펼쳐냈다. 그것을 포효하며 달려드는 호랑이 요괴의 입속으로 향하게끔 흘려보냈다.
곧.
그 중급 오행법술을 덥썩 삼켜버린 놈은, 호랑이 기운 대신 뿜어져 나온 경금검기의 폭발에 전신이 산산조각으로 찢겨나가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주변의 많은 요족들을 동반자로 데려갈 테니 저승길이 외롭진 않을 터였다.
85화. 법보의 중요성과 필요성
빠콰쾅-!!
들어올린 손과 하늘에서 내리친 벼락이 이어진 채 거대한 용의 형상을 띠어간다. 동시에 만들어지는 먹구름이 일대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어 그가 들어올렸던 손으로 한 곳을 가리킨 즉시,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거대한 벼락의 창이 내리꽂혀 상당한 범위를 뇌전지옥으로 만들었다.
- 쿠오오오···!!
포효하는 뇌룡을 근처에 둔 채로 풍운령호를 소환한다.
날숨을 빌어 급속도로 만들어진 구름과 폭풍의 호랑이는 탄생한 즉시 쩌렁쩌렁한 포효를 발하며 요혼기 이하의 요족들을 일제히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개중 특히 약한 몇 놈은 아예 머리가 터져버리거나 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천둥벼락의 용과 구름폭풍의 범을 호위로 둔 한유진은 눈에 보이는 요족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해 죽이기 시작했다.
조금 멀리 있는 놈들은 순양극염탄사로 저격하고, 가까이 있는 놈들은 원력대수로 으깨버리거나 쥐어짜 으스러뜨리는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또한 그런 와중에도 후광처럼 빛을 발하는 육도윤회 신통이 유지되면서 좀처럼 그를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직시하는 순간 정말로 버티기 힘든 온갖 감정의 폭풍에 휩쓸리는 탓이었다.
- 그만-!!
하나 그런 위용을 발휘하면 당연히 눈에 띄기 마련이었고, 마침내 한 법단기 요족이 성벽 위에 착지하며 그를 가로막았다.
거대한 두꺼비를 닮은 놈이었다. 등에 얹은 금과 옥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작은 궁전의 모습이 퍽 신기하면서도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놈의 법보가 분명했으니까.
무엇보다 풍겨오는 기세가 완숙한 법단 중기 수준이었다. 인간 수사로 쳤을 때 결단 중기라는 뜻이다.
- 결단기씩이나 되어놓고 어찌 후배들을 괴롭히는가!
"이 전쟁에 그런 규칙이 있었나? 내 눈엔 요혼기 요괴가 입문기 수사들을 마구 잡아먹는 광경이 보였었는데."
말하면서 한유진은 놈을 계속 살폈다. 여전히 육도윤회 신통을 발휘하고 있음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아마도 등에 얹은 작은 궁전 모양의 법보가 뿜어내는 빛무리 덕인 듯했다.
바로 그때.
- 잠깐······ 이제 보니 결단기가 아니로구나!
놈이 한유진의 진짜 수준을 눈치채고는 어째서인지 매우 분노했다.
- 법혼기 버러지 주제에 감히 나를 우롱해?!
"지 혼자 착각해 놓고선 우롱이라니, 머리가 좀 모자란가?"
하나 더 조롱할 새가 없었다. 놈의 전신에서 요력이 폭발함과 동시에 가공할 속도로 혀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콰릉-!
벽력음을 동반한 뇌둔술로 그 공격을 피했으나 마치 예상했다는 듯 혀가 방향을 틀어 즉시 추격해 온다. 그리고 놈의 궁전 법보에서 금빛과 녹빛으로 형성된 두꺼비 머리 형태의 요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잘게 저며 죽여주마-!!
놈이 발하는 심언의 강도가 거의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였다.
쏟아져 나온 두꺼비 머리 요병들은 제각각 빠른 속도로 활을 쏘아내거나 창을 앞세운 채 자폭하듯 돌진해 왔는데, 공격 하나하나는 그리 강력하지 않았으나 수가 매우 많았다.
퍼버버버버벅-!!
"아아악···!"
"악!"
한유진이 피한 자리로 쏟아진 요병들의 화살 세례에 애꿎은 법혼기 이하 인간 수사들이 큰 부상을 입거나 그대로 죽어 나간다. 안타깝게도 한유진은 그들을 신경 써줄 틈이 없었다.
쏟아지는 화살과 달려드는 창잡이 요병들의 공격을 피하고 원력대수로 쳐내고 막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단지 이렇게 방어만 한다면 결국 말라 죽을 것이 뻔했기에 기회를 노려야 해서 더욱 여력이 없기도 했다.
- 미꾸라지 같은 놈!
게다가 두꺼비 요괴 본인의 법술까지 더해져 날아들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독기가 느껴지는 화살들이 악령 같은 이목구비를 형상화하며 날아드는데, 제법 뛰어난 영성을 가진 것이 분명하게도 연이어 뇌둔술을 펼치는 한유진을 잘도 쫓아왔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순양극염탄사로 그 법술 투사체들을 요격해 없애야 했다. 더불어 계속 추격해 오는 두꺼비의 혀를 불태워버리려 시도했으나 정확히 적중했음에도 그저 물러나게 만드는 선에서 그쳤다.
주변에 호위처럼 두르고 있던 뇌룡과 풍운령호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 여유조차 갖지 못했을 터다.
그렇게 수세에 몰리는 전투가 잠시 더 이어지던 중.
커허헝···!!
풍운령호가 스스로를 구성하던 힘마저 폭발시키며 폭우처럼 쏟아지던 공세에 빈틈을 만들어냈다.
한순간 형성된 그 공백지대를 뇌룡의 힘을 끌어온 한유진이 연속으로 뇌둔술을 펼쳐 빠르게 통과했다. 이어 곧바로 원력대수를 발휘하며 두꺼비 요괴를 향해 휘둘렀다.
그 원력대수에 찰나간 심해한빙수와 뇌룡이 녹아들어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무지막지한 중량감을 폭발시킨다.
대응하여 나타난 것은 환영 같은 느낌을 풍기는 궁전의 성벽이었다.
쩌어엉-!!!
순간 일대의 모든 소음을 잡아먹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구형으로 퍼져나가며 발 딛고 싸우던 성벽 바닥에 광범위한 균열을 만들고 주변의 약한 이들과 각종 법술들의 여파를 모조리 튕겨내 버린다.
하나 막상 반투명한 모습으로 공격을 방어해낸 궁전의 성벽은 일부 훼손됐을지언정 부서지지 않았다.
- 네놈···! 이 위력은 법혼기가 아니야! 결단기잖아! 감히 나를 우롱해?!
자기 혼자 또 착각해선 분노를 터뜨리는 모습에 혹시 정말로 모자라냐고 조롱해 줄 시간은 아쉽게도 없었다.
심언과 함께 다시금 혀가 쏘아져오고,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요력이 한층 더 진해지며 무시무시한 암녹색 독기가 늪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펼쳐낸 자금광휘와 혀가 충돌한 순간, 예상했던 충격 대신 엄청난 접착력에 그대로 신형이 고정돼 버렸다.
둔술을 펼치려던 모든 시도는 그 혀가 만들어내는 비상식적인 접착력에 전부 효과를 잃었다. 하여 그사이 퍼져온 암녹색 독기의 늪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콰르릉-!!
자금광휘에 더해진 파법뇌벽이 연신 굉음을 터뜨리며 맹렬하게 독기를 태워 막는다. 하나 그 독기의 늪에서 오히려 힘을 얻는 요병들까지 공격을 집중해 오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법력이 소모돼 갔다.
한 번에 방어가 뚫리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죽을 운명이다.
그때 한유진은 문득 혈령적화주병을 떠올리곤 그것을 꺼내 들어 전방으로 겨눴다.
파스스스슷-!
겨눈 즉시 병 속에서 곧게 쏘아져 나간 검은빛 무수한 선들이 두꺼비 요괴의 혀를 가차 없이 꿰뚫어 이리저리 파고들었다.
끄우우어어엉···!!
두꺼비 요괴는 심언 대신 고통에 찬 묵직한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황급히 혀를 거뒀다. 이어 끈질기게 달라붙는 혈령적화주병의 검은빛 선들을 떨쳐내느라 독기를 퍼뜨리던 것도 멈추고 펄쩍 뛰어 상당한 거리를 물러나 버렸다.
- 잘도 그런 흉악한 법보를 숨기고 있었구나!
'이거··· 위력이 무슨···?!'
두꺼비 요괴가 놀란 것만큼이나 한유진도 놀랐다. 이전에 순양극염탄사로도 놈의 혀를 어쩌지 못했었기에 더욱 그랬다.
동시에 자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결단기급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자신의 실력을 보조하기에 오행환은 격이 부족했다. 아무리 최상급이라지만 결국 법기에 불과한 탓이다.
진짜 결단기에 오르고 나면 이 '템빨 부족'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찰랑-!
여전히 쏟아지는 요병들의 공격을 피해 둔술을 발휘하며 움직이자 혈령적화주병 안에서 꽤 차오른 액체감이 느껴진다. 방금의 짧은 공격으로 법단 중기 요괴의 정혈을 빨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피할 것은 피하고 막아야 할 것은 막으면서 요병들을 향해 혈령적화주병을 겨눴다.
파스스슥-!
무수히 뻗어져 나간 검은빛 선들이 한순간에 수십이 넘는 요병들을 꿰뚫어 헤집는다. 단지 그냥 없애버리는 수준을 넘어 놈들을 구성하던 영성을 흡수하기까지 하는 공격이다.
중급 오행법술로 적을 상대하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편하고 효과적이었다!
'이래서 수사들이 법보 같은 물건에 목숨을 거는 거였구나!'
아무래도 결단기에 오른 후 만들게 될 법보의 유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바로 그렇게 혈령적화주병으로 상황을 좀 타개하나 싶던 때였다.
- 그거 평범한 법보가 아닌 듯하군?
어딘지 간사한 느낌이 드는 심언과 함께 뒤편에서 살벌한 기운이 폭발했다.
뇌둔술을 발휘하며 자금광휘와 파법뇌벽을 증폭시키고 회피 동작을 취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으나 이미 심언이 들려온 때부터 상대는 절대 실수하지 않을 기회를 포착한 상태였다. 애초에 그렇지 않았다면 기척을 냈을 리가 없다.
두꺼비 요괴의 공격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양으로 쉼없이 몰아치는 것이 아닌 찰나에 집중되어 목숨을 취하는 공격이 한유진의 등판을 꿰뚫어 심장을 터뜨렸다.
- 하···! 이거 정말로 결단기가 아니었잖아?
황당하다는 듯한 배후 공격자의 심언과 함께 피를 토하며 숨이 끊어진 한유진은 순간.
자색빛 꿈결로 흐트러진 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멀쩡하게 나타나 혈령적화주병을 조준했다.
상대는 몸의 반 이상이 그림자로 물든 채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박쥐를 닮은 요괴였다.
- 뭣···?
놈은 분명 죽였다고 생각한 대상이 멀쩡히 부활하는 모습에 잠깐 당황한 듯했지만, 혈령적화주병의 검은빛 선들보다 한발 먼저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어 모습을 감췄다.
'우리 편 결단기 수사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반격에 실패한 한유진은 재차 공격을 쏟아붓기 시작한 두꺼비 요병들의 공세를 피하며 속으로 괜히 성질을 냈다.
법혼기에 불과한 자신에게 법단기 요괴가, 그것도 중기 이상인 요괴가 둘이나 붙었는데 지원이 없는 상황이 매우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상대하기 아주 까다로운 조합이었다. 한 놈은 물량으로 쉬지 않고 공격을 쏟아부으면서 정신없게 만들고 다른 한 놈은 그림자에 숨어 치명적인 한 방을 노렸으니까.
- 흐흐흐···! 결단기가 아니라고? 그런데도 이렇게나 잘 싸워? 네놈 혹시 무슨 태청궁의 진전제자(眞傳弟子)라도 되느냐?
그런 심언을 발하는 두꺼비 요괴는 굉장히 탐욕에 찬 기색을 드러냈다. 평범하지 않은 상대를 죽였을 때 당연히 따라오기 마련인 전리품을 욕심내는 것이 분명했다.
- 저 붉은색 병은 내 거다!
- ···그래, 대신 저놈의 영육은 내 거다!
- 나머지는 살펴보고 공평하게 나누기로 하지. 키히히힉···!
- 흐흐흐흐···!
놈들이 다른 인간 결단기 수사의 개입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 기색인지라,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한유진은 속으로 탄식했다.
아무래도 법단 중기 요괴를 참살해 보는 경험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 * *
몽환유심 신통으로 부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상대가 이미 그 수단을 겪어봤다면 더욱 그렇다.
법력의 소모량이 매우 크기도 하거니와 일종의 쿨타임이라고 불러야 할 준비시간이 필요해서, 연속으로 공격을 받으면 결국 당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대기 공간에서 수확물을 선택하고 현실에서 깨어난 후.
그는 이번 천원성 연속 방문의 성과를 차근차근 정리했다.
혈령적화주병의 재료로 소모됐던 옥로주병을 다시 얻었고 연기술과 부적술의 기초를 배웠다. 현재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했으며 혈령적화주병의 위력을 제대로 체감하기도 했다.
법보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새삼 다시 깨달은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찍! 찍-!
함께 잠들었던 무용이가 깨어나 존재감을 발한다. 그는 반사적으로 녀석을 품에 안고 쓰다듬으면서 생각을 이어갔다.
애니멀 테라피의 효용으로 머리가 훨씬 더 매끄럽게 돌아가는 느낌이다.
'계속 일대일이었다면 이겼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럴 가능성은 있었다. 만약 졌더라도 결코 쉽게 지진 않았을 터다.
무려 법보를 가진 완숙한 법단 중기의 요괴를 상대로 말이다.
이는 즉······.
'원시림의 그 곰새끼를 이길 가능성이 충분하다.'
비록 결단 중후기급에 달하는 기세를 뿜어냈었다지만, 놈은 그저 신통과 비슷한 힘을 휘두를 수 있을 뿐 법보를 가진 것도 아니고 법술을 다루지도 못할 터다.
먼저 그놈을 찾아내서 기습을 가하는 식으로 전투를 시작한다면 승산은 더욱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익룡 놈도 마찬가지일 터였고.
'카르마가 충분하기도 하니까 놈들을 사냥한 수확물을 두고 올 필요도 없겠지.'
생각하면 할수록 모든 조건들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직전에 패배를 경험했기 때문일까.
그는 지금 매우 강렬하게 결단기에 오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중이었고, 딱히 안 될 이유가 없는 듯하자 더욱 참기가 힘들었다.
이미 두 번 연속 각성 능력을 발동한 상황이라지만 뭐 어떤가?
그냥 하루 웬종일 잠으로 보내게 될 뿐이다.
"가자, 무용아."
결단기에 오를 시간이다.
그는 방금 일어난 것이 무색하게 다시 침대에 누웠다.
86화. 마침내 곰사냥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라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어두운 느낌을 주는 원시림 속.
한유진은 무용이를 품에 안은 채 깊이 호흡했다. 사방 가득한 농도 짙은 영기는 겪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느낌이다.
찍! 찍-!
"아, 그래, 그래."
즉시 보채기 시작하는 녀석에게 그는 바로 옷을 꺼내 입혀주었다. 똑똑하게도 녀석은 각성 능력으로 방문한 세계에선 설령 옷이 훼손되더라도 괜찮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통명어수결을 통해 연결된 만큼 굳이 공들여 설명해 주지 않아도 어렴풋이 느끼며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또 입겠냐는 생각으로 자신도 은미령이 만든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강호무림 세계에서 워낙 오랜 시간을 입었던 유형의 옷인지라 탐험가 복장보다 익숙하고 편했다.
"가자!"
그렇게 준비 아닌 준비를 마친 그는 풍둔술을 발휘해 움직였다. 향하는 곳은 원숭이 괴물들의 둥지였다.
이제는 힘의 차이가 너무 나는지라 그냥 살려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곧 절로 고개가 저어진다.
결단기에 오르는 과정에서 혹시 모를 변수를 남겨두고 싶지 않다. 나중에 다시 방문했을 때라면 몰라도 이번은 아니다.
'고통 없이 보내주마.'
딱히 그가 자비를 베풀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지도 않다. 영역 의식 강한 놈들이 침입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생각해 보면, 그 역시 필요성이 느껴질 때 놈들을 죽여 없애도 무방하다.
곧.
예의 원숭이 괴물들 둥지에 도착한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짐과 동시에 혈령적화주병을 꺼내 조준했다.
파스스슥-!
그 즉시 뻗어져 나간 검은빛 선들이 상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목숨을 거둬갔다. 놈들은 한순간에 전신이 꿰뚫려 눈 한 번 깜짝일 사이 흙먼지로 부서져 내리는 모습이었다.
습관처럼 병을 살짝 흔들어 안에 차오른 액체감을 느끼다가 문득, 품에서 자신을 간절히 올려다보는 무용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절로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자."
찍-! 찌직!
어수술로 몇 방울 꺼내주어 녀석이 호로록 마시고 좋아하는 걸 구경하다가, 그는 공터 중앙의 흑색 나무에서 열매들을 수확해 옥함에 담았다.
이제 드래곤 하트 제련까지 마친 자신에겐 조금도 효과가 없을 것이 분명했지만, 이원희에게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천영근자인데다가 성장기인 만큼 더더욱.
'예전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연단해 낼 자신도 있고.'
펜던트를 걸쳐 얻게 된 색다른 깨달음으로, 이전엔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괜찮은 발상을 저절로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법혼 승화 부작용을 막아줄 영단도 충분히 만들어서 가져가면 좋겠지.'
아직 정식 제자로 받진 않았지만 그저 형식상의 문제일 뿐이다. 여태 형성해 온 인간관계 맥락에 따르자면 이미 받은 것과 다르지 않다.
다음으로 찾아가야 할 곳은 당연하게도 늑대 짐승들의 은신처였다.
풍둔술을 통해 순식간에 도착한 그는 예전처럼 굳이 유인하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냥 바로 쳐들어가서는 놈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혈령적화주병을 겨눠 초고속 죽음을 선사해 줬다.
깨갱거리는 소리 따위가 날 여지도 없이 불과 일 분도 걸리지 않아 모든 늑대 짐승이 한 줌 흙먼지로 화했다.
'원영기쯤 되면 콧방귀 한 번으로 다 정리해 버리겠는데, 이거.'
처음 이놈들과 어떤 식으로 전투를 치렀었는지 떠올려보면 당시의 자신이 너무나 약하게 느껴진다. 막상 그때 당시의 스스로는 매우 강력하다고 느끼면서 승리 후 온갖 꼴값을 다 떨었었는데 말이다.
잡념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늑대 짐승들의 은신처를 생활에 편리하게 꾸미는 작업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그렇게 몇 분 정도 만에 모든 작업이 끝난 후.
미환진기까지 설치한 그는 딱히 휴식을 취하지 않고 바로 수색에 나섰다.
찾으려는 대상은 당연히 그 건방진 곰새끼였다.
결단기에 오르는 와중 방해받지 않으려면 놈을 먼저 찾아 사냥해야만 한다.
* * *
결단 중후기급에 이른 짐승들의 오감은 어느 정도로 뛰어날까. 드래곤 하트 정도의 존재감은 과연 얼마나 멀리까지 뚜렷하게 퍼져나갈까.
이제 실력이 오른 한유진은 대략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 짐작에 따라 설정된 수색 대상 구역이 실로 광범위했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설령 오래 걸리더라도 괜찮았다. 그사이 혈령적화주병을 삼경조화결로 제련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현재 보유한 것 중 가장 강력한 물건이고 앞으로도 계속 유용하게 쓰일 물건이다. 제련이 가능하다는 걸 파악한 시점에서 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그렇게.
대균열에서 행했던 장거리 정찰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수색 활동이 이어졌다.
낯선 무언가를 일단 기록하는 대신 스스로 정체와 쓸모를 탐구해 보고, 표본으로 채취하는 대신 연단술에 유용하게 쓰일 것 같은 영식들을 채취한다.
조급함 따위는 전혀 없었다.
무려 결단 중후기급의 짐승을 찾는 일이다 보니 일단 근처에 접근하기만 하면 무조건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 힘을 가진 놈의 영역이 비좁을 리 없었고 겁 많은 초식동물처럼 숨어있지도 않을 터였으니까.
여유롭게 수색 활동을 이어가며 그는 순조롭게 혈령적화주병을 제련해 갔다.
제아무리 강력하고 유용한 물건이어도 감히 연허기급 드래곤의 심장과 비교할 바는 아닌지라, 또한 애초에 이런 식으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인지라 제련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약 보름 정도가 지났을 때.
그는 벌써 심경 단계를 지나 기경 단계 절반 이상을 제련해 낸 상태였다.
자연히 느껴지는 점은 확실히 남의 손을 한 번도 탄 적 없는 물건일수록 제련이 편하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혈령적화주병은 딱히 영성을 가지지도 않았기에 더욱 그런 면이 있었다.
이래저래 마음에 드는 구석뿐인지라 그 이카파 판게아를 한 번 더 방문해서 뽑기를 진행해 볼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그와 함께 드는 또 다른 생각이 있었다.
'내가 지금 이런 마음을 품은 만큼, 유용하지만 더 교묘하게 극악한 물건이 만들어질 듯한 느낌이다.'
펜던트를 걸쳐 변질되는 자신은 그 무궁무진하게 느껴지는 지식과 지혜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크게 악마적으로 비틀려 버린다. 아마도 그 상태의 자신은 멀쩡한 상태의 스스로를 어떻게든 타락시키고 싶어 할 것 같았다.
처음부터 도심에 너무 크게 거슬리지 않도록, 유용하지만 일부 극악한 면이 있는 물건들을 조금씩 사용하게 만들면서.
'결국 내 본명법보를 만드는 데는 절대 이용할 수 없을 방식이란 말이지······.'
역시 필요한 재료를 모두 구한 후 SF에 선협 요소가 더해진 세계를 방문해 보는 게 좋을 듯하다. 그런 세계가 정말로 있을진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 정도가 흘렀을 때.
슬슬 혈령적화주병의 기경 단계 제련도 끝나갈 무렵.
마침내 그는 기억 속 남아있는 그 결단 중후기급 기세를 감지하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복수할 시간이다, 무용아."
작게 중얼거린 그가 몽환유심으로 모습과 기척을 감추면서 기세의 진원지를 향해 이동해 갔다.
* * *
깊고 넓은 구덩이를 볼록한 형태의 암석이 뚜껑처럼 덮어 만들어진 은신처 속.
휴식을 취하고 있는 놈은 전체적으로 흑갈색 곰을 닮았다.
하나 등가죽을 포함하여 몸 곳곳에 솟은 은빛 금속성 가시들과, 마찬가지로 금속성 철퇴 같은 가시가 돋은 긴 꼬리를 보면 직접 자극해 보지 않고서도 놈의 흉포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그냥 쉬고 있는 와중에도 몸을 감싸며 나타나 끊임없이 부스러지는 듯한 황색 기운의 모습이 꽤 위협적이었다.
그릉···!
잠시 뒤척이며 숨을 내쉬는 소리가 은신처를 진동시킨다. 덩치가 어지간한 트럭만 한 녀석이라 살짝 움직인 것만으로도 크게 들썩이는 느낌이다.
그렇게 태평하고 안온한 시간이 흐르던 어느 순간.
그릉···!
다시금 뒤척이며 슬쩍 눈을 뜬 곰 짐승은, 문득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딱히 뭔가를 판단해서라기보단 그저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하나 그렇게 움직이기 직전 문득 스스로 꿈을 꾸고 있음을 깨달았다. 굉장히 느긋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꿈이었다.
코앞에 생전 보지 못한 기묘한 여섯 종류의 환영이 아른거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주시할수록 행복해지는 감각에 의문을 느끼기보단 일단 즐기게 됐다.
전부 꿈에 불과했으니까.
그릉···! 그릉···!
은신처를 진동시키는 숨소리가 연신 흘러나온다. 자신도 모르게 눈에 초점이 풀리기까지 했다.
본능이 앞서는 짐승답지 않은 방심이다. 하나, 놈이 이 지역에서 얼마나 오랜 세월을 패왕으로 지내왔는지를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이상할 것도 없는 상황이다.
설령 방심하더라도 부지불식간에 당해 버리진 않으리란 태산 같은 자부심과 믿음이 깔려있다는 뜻이었다.
오랜 평화는 경계심과 판단력을 녹슬게 만들기 충분하다. 본능적 감각이 뛰어난 짐승일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행복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긴커녕 점점 더 깊어져만 갔고 곰은 그에 비례하여 모든 생각을 끊어낸 채 거의 잠든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됐다.
바로 그 순간.
한없이 깊어졌던 행복감을 날카롭게 관통하며 한 줄기 위기감이 피어올랐다. 하나 늪에 빠진 사람이 단번에 탈출할 수 없듯 곰 역시 바로 정신을 일깨우지 못했다.
그렇게 아무런 대비도 못 한 상태에서 심해한빙수가 더해진 원력대수의 일격을 머리통에 직격당했다.
꽈아앙-!!!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놈이 누워있던 바닥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균열이 한순간에 만들어지고, 뿜어져 나온 충격파가 모든 흙먼지를 날려버리는 것을 넘어 은신처를 뚜껑처럼 뒤덮은 암석마저 크게 들썩이게 만든다.
꺼흐흐흥···!
놀랍게도 그 강력한 일격을 머리에 직격당하고도 곰은 죽지 않았다. 눈과 코와 귀와 입에서 모두 피를 쏟아내면서도 발작하듯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힘을 폭발시켰다.
콰콰콰쾅-!!
콰르릉···! 꽈콰쾅-!!
주변의 모든 대지와 암석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조작당하는 듯 날카롭게 굳은 가시를 내뻗치고 그중 일부는 자잘하게 부서져 가공할 위력을 품고 회오리치기 시작한다.
쿠구구구구궁···!!
일대에 지진이 일어나는 듯한 현상까지 발생하면서 주변 영기가 폭풍우를 만난 바다처럼 거칠게 요동쳤다.
"쯧."
그런 와중, 기습을 성공시킨 한유진은 놈을 즉사시키지 못했음에 혀를 차며 바로 혈령적화주병을 내밀었다.
현재 자신의 가장 강력한 공격수단이었으니, 아무리 큰 부상을 입었다지만 결단 중후기급의 존재를 상대로 절대 아껴선 안 될 힘이다.
파스스스슷-!
굉음들 속에서도 유난히 섬뜩하게 들리는 희미한 파공음과 함께 무수한 검은빛 선들이 쏘아져 포효하려던 곰의 전신을 마구 꿰뚫었다.
동시에 연속으로 휘둘러진 원력대수가 행동을 방해하고 그 원력대수에서 분리되어 나온 심해한빙수가 뱀처럼 형태를 변형하며 놈의 신체를 빠르게 얽어맸다.
커허헝-!!!
마침내 터져 나온 포효성과 함께 놈이 최후의 발악을 시전했다. 그에 심해한빙진옥 법술이 가닥가닥 끊어져 나가고 휘둘린 원력대수마저 강렬한 반탄력에 즉시 파괴돼 버린다.
하지만.
여전히 몸에 박혀 급속도로 정혈을 빨아들이는 혈령적화주병의 공격에 의해 결국, 그것이 마지막이었다는 듯 휘청이며 쓰러져 버렸다.
거칠게 헐떡이던 소리는 빠르게 줄어들다가 곧 완전히 끊어졌다.
한바탕 난리가 펼쳐졌던 장내에서 한유진은 죽어버린 곰을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87화. < 결단기 승격 >
유난히 가파르고 높게 치솟은 석산의 최정상 봉우리, 살짝 분지처럼 형성되어 온갖 짐승들의 털과 깃털 따위로 꾸며진 둥지 안.
무시무시한 중량감을 뿜어내는 커다란 물의 손이 한순간에 형성되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몽환유심이 더해진 환몽심탈술에 당한 채 육도윤회의 천락도에 깊이 빠져들어 정신을 못 차리던 익룡의 머리를 정확하게 강타했다.
쩌어엉-!!!
금속과 금속이 거세게 충돌한 듯한 굉음이 발생하며 충격파가 뿜어져 나갔다. 둥지가 완전히 해체되어 버림과 동시에 딛고 선 봉우리의 상당한 범위가 쩍쩍 균열이 생기며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했다.
곰을 타격했던 것과 동일하게 그저 힘으로만 내리친 공격이 아니다. 원력무도의 창시자로서 내가중수의 묘리를 담아낸 회심의 한 수다.
무공과는 많이 이질적인 신통과 법술을 융합시킨 공격인 만큼 내가중수법을 온전히 펼치긴 어려웠지만 영 효과가 없진 않았다.
대부분의 위력이 공격한 적의 체내를 진탕시키며 충격을 온전히 전달했고 외부로 방출된 것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도 봉우리가 붕괴할 지경이었지만 결단기급 힘이 담긴 공격이었음을 고려하면 미미한 여파였다.
키야아아아악-!!
치명적인 공격을 당한 익룡이 머리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아내며 비명처럼 포효했다.
일시에 뿜어져 나온 어마어마한 돌풍이 흡사 강철의 벽처럼 주변 모든 것을 밀쳐버리며 마침내 봉우리를 산산조각 낸다. 이어 그것이 무수한 칼날들로 화해 위아래좌우 할 것 없이 모든 방면을 마구잡이로 찢어발겼다.
그 끔찍한 돌풍의 소음이 일대를 쩌렁쩌렁 울리면서 흡사 재앙이 강림한 듯했다.
하나 바로 그 순간.
자신에게 몰아쳐 오는 공격들을 몽환유심으로 꿈처럼 바꿔버린 한유진이 혈령적화주병을 내밀었다. 놈을 찾아내는 데 걸린 시간 동안 마지막 체경 단계 제련까지 완전히 끝마친 상태의 물건이었다.
파스스슷-!!
예전보다 배 이상 빠르고 세차게 뿜어져 나간 백여 줄기의 흑선들이 일부는 직선으로, 일부는 나선으로 회오리치는 듯한 움직임으로 마지막 발악을 부리던 익룡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꿰뚫는다.
그리고 가공할 속도로 정혈을 빨아들이며 혈령적화주병을 매혹적인 붉은빛으로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모든 제련을 마친 만큼 당연히 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게 됐다. 그 공격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혈령적화주의 품질 역시 크게 향상됐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키아아아악···!
익룡은 결국 전신이 빠르게 쭈글쭈글해지며 추락하다가 흙먼지 덩어리로 부스러져 흩날리게 됐다.
놈이 만들어낸 폭풍의 여파가 잠잠해질 때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익룡처럼 생긴 주제에 곰새끼보다 맷집이 좋다니······.'
확실히 발악이 더 심했다. 만약 기습에 실패했다면 어떤 싸움을 벌여야 했을지 상상하기조차 싫어진다.
어쨌든 피해 없이 완벽하게 승리해서 다행이었다.
'이번에도 부산물은 못 얻었군.'
살짝 아쉬웠지만 그래도 낙심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달포 전.
결국 혈령적화주병을 써서 곰을 죽였을 때, 그는 놈에게서 얻어야 할 여러 수확물들의 질이 많이 손상됐음을 깨달았다. 정혈이 급속도로 빨려 나가면서 돌이킬 수 없는 훼손이 발생한 것이다.
하나 다행히도 혈령적화주병을 체경 단계까지 제련했을 때 그것이 꼭 손해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과연 일반적인 법보와는 많은 부분에서 다르게도, 혈령적화주병은 내용물을 소모함으로써 스스로 성장할 수 있었다.
마치 피를 많이 마실수록 점점 더 강력해지는 마검처럼 말이다.
대체 제작하면서 무엇을 재료로 사용했기에 이런 대단한 특성까지 갖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과연 어느 정도까지 계속 성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원했던 오행 속성의 재료는 결단기에 오른 후 재방문해서 얻으면 그만이다. 이미 놈들의 서식지를 찾아낸 만큼 그리 번거롭지도 않을 터다.
생각하며 그는 이번에도 혈령적화주에 식탐을 드러내는 품속 무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옥로주로 만족해라."
찌직-! 찍!
"영액주도 좀 줄게."
녀석과 협상 아닌 협상을 하면서 그는 주변을 한 차례 돌아본 뒤 장소를 벗어났다.
아직 수색 활동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처음 설정했던 범위를 전부 훑어보며 위험 요소를 살필 계획이었다.
* * *
넉 달 하고도 삼 주.
내심 설정했던 모든 수색 대상 구역을 훑어보고 위험을 체크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얼마나 광범위하게 돌아다녔는지를 안다면 결코 길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살핀 곳은 은신처에서 매우 가까운 호수였다. 예전 법혼기에 오르기 전 발견하고 경계했던 그 문어와 거북이를 합쳐놓은 듯한 수중생물 때문이다.
이미 결단 중후기급 짐승을 둘씩이나 사냥해 낸 마당이라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상 가서 보게 된 녀석은 겨우 법혼 중기급에 불과했다.
게다가 성격마저 온순하고 느긋하여 한유진을 발견하고도 그냥 신기해하는 감정만이 느껴졌다. 분명 제 영역에 나타난 낯선 생명체일 텐데도 말이다.
원숭이 괴물들과 늑대 짐승들은 침입자를 향해 가차 없이 공격성을 드러내는지라 그로서도 처리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하나 이 문어 거북이 녀석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놈의 영역을 가만히 살펴보니 여러 수중생물들이 공존하는 모습이 보여, 그러한 성격이 천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작 법혼 중기급에 불과한 놈이, 그것도 물속에서 사는 놈이 내가 결단기에 오르는 기척을 느끼고 갑자기 공격해 오진 않겠지······.'
결국 호수 속 그 녀석을 멀쩡히 놔둔 채 그는 은신처로 복귀했다.
그리고 자잘한 놈들의 혹시 모를 방해를 막기 위해 미환진기 안쪽으로 각종 진법을 여러 겹 설치했다.
이어 진행된 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정신을 집중하기 위한 소소한 작업이었다. 바로, 원숭이 괴물들의 둥지에서 수확한 열매와 호수에서 수확해 온 법혼 승화 부작용을 막아주는 영식으로 연단술을 펼친 것이다.
여담으로 법혼 승화 부작용을 막는 영단은 과거에 이미 청심단이라고 이름 붙였었고, 열매로 만든 영단은 그 색깔에 따라 이번에 주과단이라고 이름 붙였다.
작업은 느긋하고 평화롭게 며칠에 걸쳐 이어졌다. 광범위한 구역을 수색하면서 온갖 영식을 많이 얻었기에 그것들로 새로운 영단 제조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무용이는 은신처 한쪽 못에서 저 혼자 영어들을 사냥하며 행복한 한때를 보냈고, 가끔 혈령적화주병에 욕심을 내는 때를 제외하면 한유진이 중요한 일을 앞뒀다는 것을 알기에 좀처럼 방해하지 않았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유유히 흘러갔다. 지금 경지에서도 오백 년이 훌쩍 넘는 수명을 가진 그에겐 찰나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그런 시간이었다.
그렇게 어느 날 마침내.
맑은 하늘 아래서 평평하게 깎아 만든 바위에 앉아 있던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편안히 웃었다.
'오늘 결단기에 오른다.'
결심하며 살짝 입을 벌리자 그 안에서 한 줄기 환상처럼 드래곤 하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물대에서 나타난 게 아닌 몸속에서 나타난 이유는 당연히, 체경 단계 제련을 마쳤을 때부터 이렇게 더 확실한 방식으로 보관할 수 있게 된 덕이었다.
완전히 나타난 드래곤 하트의 크기는 주먹보다 살짝 더 큰 정도였고, 몽환적인 보랏빛을 바탕으로 은하성운을 닮은 빛무리가 흐르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내부에서 꿈이 형상화된 듯한 구름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의 모든 빛깔을 품은 법문들이 무수한 유성우처럼 나타났다가 스러지기도 한다.
실로 경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물건이다.
그리고 이젠 외단법의 재료가 되어 자신의 법혼과 하나가 될 물건이기도 하다.
'마침내 이 순간이 오는구나.'
새삼스런 감회와 함께 그는 다시 드래곤 하트를 입안으로 삼켰다.
꿈결 같은 자색빛으로 화해 몸속으로 스며든 그것은, 명치 부근에 자리 잡은 후 느리지만 확실한 변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결단기에 오를 때 사용하게 될 법결은 태극회원공의 것이다. 하지만 사실 태극회원공만의 고유한 법결은 아니고, 모든 결단 이상의 공법이 당연하게 포함하고 있어야 할 그런 공통적인 법결이다.
법혼을 법단으로 승화시킨다.
한유진은 이미 법단의 그릇이 존재하는 만큼 법결의 일부를 살짝 다르게 운용해야 했다. 난이도가 많이 낮아졌다고 볼 수 있었지만 뭔가가 잘못될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그가 꼭 각성 능력을 통해 결단기 성취를 이루려던 첫 번째 이유다.
전신을 폭발시킬 기세로 흐르는 법력이 그가 운용하는 법결에 따라 드래곤 하트를 중심으로 일련의 흐름을 형성했다.
그 흐름에 따라 자연히, 또한 한유진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부드럽게, 머리에 자리하던 형체 불분명한 법혼이 움직여 내려갔다. 전신에 신경계처럼 뿌리내린 상태를 온전히 유지하는 채였다.
평온한 표정으로 앉은 그는 어느새 형용할 수 없는 색채의 빛으로 둘러싸여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앉아 있던 바위는 진즉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가루로 부서져 내린 상태였고, 그 아래 바닥도 점차 구덩이를 형성하며 주변으로 흙더미가 밀려나는 모습을 보였다.
안전하게 멀찍이 떨어진 무용이가 그런 한유진을 지켜보며 기특하게도 주변을 경계했다. 다행히 아무런 방해나 위협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하루가 꼬박 흘러갔다.
명치 부근의 드래곤 하트가 만들어내는 모종의 흐름은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만큼 뚜렷하고 강해진 상태였고, 머리에서부터 천천히 내려가던 법혼과 조우하여 본격적인 합일을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그 과정에서부터 주변의 광범위한 영기가 묵직하게 회오리치듯 한유진을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이것이 꼭 각성 능력을 통해 결단기 성취를 이루려던 두 번째 이유다.
주변의 영기가 풍부할수록 결단기에 올라서는 과정이 쉬워지며, 단지 쉽게 오르는 것에서 그칠 뿐만 아니라 안정화에 걸리는 시간을 크게 줄여주기까지 한다.
또한 정말로 진실이라고 검증되진 않았으나, 수선계에선 가능한 한 영기가 풍부한 장소에서 결단기에 올라야 성장잠재력이 깊어진다는 미신 같은 믿음이 퍼져있기도 했다.
마치 대자연과 그 이면 혼원계의 세례를 받는 듯한 광경이었다. 실제로 한유진 본인의 감상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드래곤 하트와 법혼이 합일해 가며 완전한 수선자의 법단(法丹)으로 승화해 간다. 태극회원공의 무수한 법결이 회오리치듯 스며들었다가 뿜어져 나오길 반복하며 마치 그것을 담금질하는 듯했다.
아름답기 짝이 없는 드래곤 하트가 천천히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크진 않았으나 분명하게 눈에 띄는 변화로, 그 구체를 한 바퀴 돌듯 희미한 도문(道紋)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격렬하면서도 조용한 변화 속에서 한유진은 문득 생각했다.
'진단법을 시도했더라면 이보다 열 배는 더, 아니, 어쩌면 백 배는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구나.'
이미 존재하는 그릇에 법혼을 합일하는 일과,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법혼을 온전한 법단으로 승화시키는 일의 난이도 차이는 굳이 묘사할 필요조차 없을 터다.
다행히 그의 결단 과정은 어떤 문제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삼경조화결을 통해 완벽히 제련한 드래곤 하트는 이미 그와 한 몸이나 다름없었기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굉장히 적었다.
점점 더 그가 뿜어내는 기세가 강렬해지면서 주변의 농도 짙은 영기 흐름도 더욱 거세고 광범위해졌다. 평범한 수사의 결단기 승격 현상을 이미 한참이나 초월한 상태였다.
언뜻.
허공에 떠올라 앉은 채 승격을 진행해 나가는 그의 뒤편으로 금빛과 자색빛 뒤섞인 드래곤의 형상이 떠오른 것 같았다.
88화.< 승격의 결실 >
법혼기 수사와 결단기 수사의 차이점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전반적인 모든 능력이 향상된다. 당연하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인 것이, 그저 원래 보유하던 수단들이 강화되는 정도를 넘어 아예 새로운 종류의 수단을 갖출 수 있는 발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본명법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주인인 수사가 죽지 않는 한 끝없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도구이자 선도수행의 동반자가 생기는 셈이다.
세 번째로 신식을 수사 본인에게서 분리해 운용할 수 있게 된다. 특정 사물에 깃들어 근처를 감시하거나 부름에 응답할 수 있고, 복제할 수 없는 고유한 증표 혹은 열쇠를 만드는 일 등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네 번째로 명상하듯 혼원계와 더 고차원적인 감응을 이뤄 본격적인 도(道)에 대한 깨달음을 탐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좌망(坐忘)수행은 영기가 풍부한 장소, 즉 혼원계와의 연결이 밀접한 장소에서 해야 더 효과가 좋다.
여담으론 네 번째가 바로 결단기 수사부터 종문을 세울 자격이 생긴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도에 대한 깨달음을 탐구할 수 있게 된다는 건 새로운 공법이나 법술을 창시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뜻으로, 한 수선 집단이 독창성을 갖출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차이점들만 봐도 결단기 수사의 대단함을 알 수 있다. 한유진이 비록 이전부터 결단기급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지만 말 그대로 힘의 영역에서 그쳤을 뿐이다.
진짜 결단기에 오른 이제야 비로소 그는 수선계의 하위층을 벗어났다고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연허기급 드래곤 하트라는 무시무시한 그릇을 바탕으로 외단법을 이뤄낸 만큼, 어마어마한 변화들이 추가로 존재했다.
'드디어, 내 재능이······.'
결단기 승격의 여파로 일부 엉망이 됐던 은신처를 정비한 후.
그는 적당한 곳에 앉아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감격에 젖었다.
일단 진영근 하위권에 불과하던 영근재능이 엄청나게 향상됐다.
'천영근 수준인 건 분명하다. 그리고 아마······ 천영근 중에서도 상위권일 거다.'
생각하면서 천천히 호흡한다. 별로 집중하지 않았는데도 원시림의 농도 짙은 영기가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와 육체와 영혼을 어루만지고 단련시킨 뒤 빠져나가는 것 같다.
농담이 아니라 체감하기로 전보다 열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이전에 10년 동안 수행해서 얻어야 했을 성과를 이젠 1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만에 얻어낼 수 있을 테니, 여느 위영근자와 비교한다면 수련 속도가 백 배 이상도 차이 날 것이다.
그렇게 천영근 상위권의 재능을 갖게 된 법혼, 이제는 법단이라 불러야 할 그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법력도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이전의 법력이 오묘한 흰빛에 가까웠다면 지금 이것은 은은한 금빛에 자색빛이 섞여 흐르는 느낌이다. 마치 꿈처럼 존재하지 않는 듯 허무하면서도 동시에 묵직하기 짝이 없어 아주 약간만 동원해도 대단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듯하다.
당연히 이름을 붙여줘야 할 만큼 특별한 속성을 띤 법력이었고,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몽환진룡법력(夢幻眞龍法力).'
드래곤 하트의 주인인 카사르녹스가 몽환룡이었던 만큼 실로 적절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하여 당연히, 변화한 육체의 이름도 비슷하게 짓는 것이 마땅했다.
'몽환진룡도체(夢幻眞龍道體).'
사실 그는 영체와 도체를 구분할 지식이 부족하다. 도체는커녕 영체조차 구경해 본 적 없으니 서책에서 본 것만으로는 판단이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엄청난 몸을 도체라 부르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도체라 부르겠는가 싶은 마음이었다. 설마 이 정도 수준의 몸이 영체에 불과하리라곤 믿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감을 비롯한 기본적인 신체능력이 향상된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주목해야 할 변화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현실과 몽환의 경계에 걸친 듯한 비상식적인 지구력과 회복력이다. 단지 육체에 국한되서가 아닌 영혼을 포함해서 말이다.
다른 하나는 정신 방면에 대한 불가사의한 은폐력과 방어력이다. 효과성이 뛰어난 것은 물론 그 원리가 본인에게도 설명이 어려울 만큼 신묘하여 파훼될 걱정은 없을 것 같다.
'이제 내 격에 맞는 본명법보만 갖춘다면, 온 수선계를 뒤져봐도 원영기 미만 최강이 아닐까.'
저절로 그런 자만심이 피어오를 지경이었으나 그는 스스로를 잘 단속했다. 바꿔 말하자면 원영기급 존재와는 여전히 대적할 수 없단 이야기였으니까.
이는 힘의 문제가 아닌 수단의 문제다. 원영기에서 트이는 시공간 감각, 그것을 활용한 공방을 지금의 그 자신은 따라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이런 식이다.
원영기급 존재는 시공간 좌표를 살짝 뒤틀어 공격을 미래에서 행한 후 그것이 과거에 적중하도록 만들 수 있다. 즉, 당하는 입장에선 이미 한 방 얻어맞은 후에 상대가 그 공격을 시전한다는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좌표를 뒤트는 데 명백한 한계가 있겠지만 원영기급 존재에겐 0.1초만으로도 충분할 터였다.
그만큼 경지의 벽은 높고도 험하다. 가면 갈수록 이러한 차이는 심화될 테니 자만은 금물이다.
생각하며 그는 계속 자신의 변화한 실력을 차근차근 점검해 나갔다. 아마도 하루이틀 만에 끝나진 않을 터였다.
* * *
승격한 자신의 능력을 모두 파악하고 적응하는 데는 보름 정도가 걸렸다.
현재 그는 비범한 느낌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책을 처음부터 느긋하게 살펴보는 중이었다. 내용은 진즉 머릿속에 전부 암기했는지라 그저 감성에 젖은 행동일 뿐이었는데, 충분히 그럴만했다.
오행천둔술.
마침내 오행종 최고의 둔술을 수련하고 시전할 수 있게 됐다. 이전에는 이 법술을 펼치는 데 필요한 인지력이 부족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아닐 것이다.
화둔술, 뇌둔술, 풍둔술, 수둔술, 지둔술.
다섯 속성의 둔술들은 이 오행천둔술의 하위 법술에 불과하다. 여태 굉장히 유용하게 잘 사용해 왔음에도 말이다.
그러니 이 오행천둔술의 효용을 감히 의심할 필요가 없다.
책을 저물대에 넣은 그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신형이 한 줄기 자색빛으로 흐트러져 빛살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그렇게 치솟는가 싶더니 찰나에 방향을 바꿔 그대로 땅에 직격했다.
하나 직격했다 싶은 순간 아무런 여파도 없이 환영처럼 스며들어선 땅속을 어마어마한 속도로 통과해 다녔다.
뚫거나 밀치며 이동하는 것이 아닌 문자 그대로 통과해 다니는 것이었다. 지둔술과 비슷하지만 영기에마저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 뚜렷하게 다르다.
잠시 후 원래 자리에서 다시 실체화하며 나타난 그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속도도 물론 대단했지만 그 어떤 것도 자신을 구속할 수 없다는 해방감이 실로 경이로웠다.
'익숙해지는데 별로 안 걸릴 것 같다.'
아마도 계속 하위 법술들을 사용해 온 덕일 터다.
그의 신형이 다시금 자색 빛줄기로 화해 순식간에 은신처 한쪽 못에 도달했다. 그곳에선 무용이가 영어 한 마리를 사냥해 냠냠 뜯어먹는 중이었다.
"아예 물고기 씨를 말리는구나."
찍-! 찍-!
변명하듯 우는 녀석의 식사를 조금 기다려준 그는, 녀석이 스스로 정화술을 발휘해 뒤처리까지 하는 것을 보곤 품에 안고 은신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떠나기 전 여길 크게 한 번 둘러볼 생각이다."
울음소리 없이도 통명어수결을 통해 전해져오는 의문에 그가 답해 줬다.
모든 정리를 마친 후 그의 신형이 무용이와 함께 한 줄기 자색빛으로 물들어 쏘아졌다. 아주 작은 여파조차 없는 급가속 기동이 마치 환상처럼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수십 초도 채 걸리지 않아 도달한 예의 호수를 지나쳐 날아가며 그는 잠시 무용이에 대해 생각했다.
통명어수결의 장점에 의해 녀석은 저절로 한계가 뚫려 성장하고 있었다. 아마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법혼기 수준에 올라서는 여느 S급 헌터를 능가하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식탐꾼이 S급 헌터보다 강해지는 날이 오다니.'
어쩐지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려 한다.
녀석에게도 태극회원공을 전수해 줄 예정인데, 원력대수를 익히면 그게 족제비 발 모양일지 아니면 사람의 손 모양일지 살짝 궁금해진다.
어쨌든.
향하는 방향은 그가 결단기에 오르기 위해 위험 요소를 탐색하면서 이상을 감지했던 곳이었다. 다른 것이 아닌 영기 농도가 조금 더 짙어지는 현상을 감지한 것이다.
안 그래도 영기가 풍부한 이곳 원시림에서 더 영기가 풍부해진다는 건 확실히 원인을 탐사해 볼 가치가 충분했다. 그냥 환경적 요소 때문일 가능성보단 무언가 특별한 생명체나 물건이 자리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그 곰새끼 정도가 이 원시림의 최강자 라인일 리는 없겠지.'
결단기급 짐승이 존재한다면 원영기급 짐승 역시 존재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만약 지금 향하는 방향에 그런 강력한 생명체가 자리 잡고 있다면 접근하는 일 자체가 매우 위험할 터였지만······.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던 만큼 최악의 경우라 해 봤자 몸이 좀 아프고 기분이 좀 나쁘게 될 뿐이다.
여기서 계속 머물며 수련을 이어가지 않는 건 더 이상 태극회원공을 익힐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미 원력대수 신통을 완전하게 얻었고, 태극회원공 특유의 원력을 통한 육체와 영혼 강화 효과는 그 자신에게 전혀 효용을 발휘하지 못한다.
즉.
현실로 돌아가서 더 많은 카르마를 쌓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지금 가진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카르마를 얻은 후, 오행종 유적에 방문해서 최우선적으로 오행진령거석 통천령보를 손에 넣어야 했다.
'그래야 태을오행도경을 얻을 수 있다.'
다행히 대량의 카르마를 수급할 여지가 아직도 넘쳐났다.
기초적인 수선공법과 법술 지식, 그리고 직접 창시한 원력무도 지식의 보급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각성초와 각성향 역시 마찬가지다.
대균열 속 아헤티 종족의 마이그브라 정착지 문제도 이제 막 다뤄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결단기에 올랐으니 직접 베이징을 찾아가서 영원의 여신교에 대한 단서를 찾아 해결하는 일도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냥 평범하게 대균열을 싹 쓸어버리면서 마나스톤 광산을 여럿 찾아내는 것도 성과가 좋을 테고······.'
여차하면 아예 다른 대균열을 찾아가서 그곳의 특별한 무언가를 찾아보는 일도 가능하다.
가령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알려진 아프리카 대륙의 대균열이라든가, 두 번째로 위험하다고 알려진 알레스카 지역의 대균열이라든가.
능력이 향상되고 시야가 넓어질수록, 직접 해결해야 할 듯한 문제들도 점점 많아지는 느낌이었다.
지구 인류는 명백하게 대균열을 처리할 능력이 없다. 처리하긴커녕 그 내부를 탐사하는 일조차 애를 먹는 와중이고, 아프리카 대륙의 경우는 아예 주변국들이 죄 멸망해 버린 채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는 마당이다.
그 모든 것들은 그 자신이 지구 전체를 영지로 삼으려 한다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정리하던 중.
오행천둔술의 빠른 속도 덕에 그는 벌써 이상을 감지했던 그 장소에 도착하게 됐다.
89화. < 원시림의 혼원석 >
결단기에 오른 덕인지 영기 농도가 상승하는 것이 조금 더 분명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그는 향상된 인지력과 신식, 그리고 오행천둔술의 속도에 힘입어 엄청난 속도로 주변을 살피며 근원지를 향해 나아갔다. 밑에서 누군가가 목격했다면 그저 하늘에 웬 자색빛 한 줄기가 휙 지나치는 장면만을 볼 수 있었을 터다.
그렇게 빠른 수색을 이어가며 그는 내심 베이징 전체를 뒤지는 일도 별 어렵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게임으로 치자면 거의 맵핵을 키고 다니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이게 수선자의 힘이지.'
원영기급 존재와 대적할 수 없다고 해서 기죽을 이유가 없다. 그저 자만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사실 결단기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재앙적인 존재다.
뒤따라올 부작용을 고려치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면 지구정복이라는 우스갯소리마저 더는 꿈이 아니니까.
그러니 영원의 여신교라는 놈들의 진짜 정체가 무엇이든 한유진 자신을 감당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런 식으로 숨어있지 않았을 터다.
잠깐 생각하는 사이.
그는 실로 어마어마한 거리를 지나쳐 영기 농도가 두 배 가까이 짙어진 장소에 도달했다. 이토록 영기 농도가 짙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과연, 그렇게 짙은 영기 농도 덕분인지 식생은 물론 바닥마저 상당히 독특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 영기의 풍부함이 하루이틀 지속된 것이 아닌 모양이다.
나무들은 그저 크고 거대한 것을 넘어 몸체 곳곳에 푸른빛을 발하는 수정 같은 조직을 달고 있었다. 그 조직들에 온갖 곤충들이 오가며 서로 공생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닥에는 여러 기화이초들이 널린 것으로도 모자라 빛을 품은 수정들이 곳곳에서 자라나는 모습이었는데, 아마도 영석과 비슷한 물질인 듯했다.
내려가서 살펴볼까 싶었으나 그때 더욱 관심을 끄는 광경이 신식으로 감지됐다.
너무나 짙은 농도 때문에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느낌으로 영기가 뿜어져 나오는 중심부.
그곳엔 대략 3층 건물 높이 정도의 돌기둥이 하나 자리해 있었고, 그 돌기둥 곳곳엔 오묘한 백색빛을 뿜어내는 자잘한 수정조각들이 박혀 아름답게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근처 반경 수십 미터 안쪽으론 그 돌기둥에 박힌 것과 비슷하지만 격이 좀 떨어지는 듯한 수정들이 빼곡하게 자라나 있어, 그 어떤 초목과 곤충도 침범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그 돌기둥을 감싸며 흡사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듯 아지랑이처럼 투명한 뱀의 형상이 비쳐 보였다. 그냥 뱀이 아니라 머리에 길고 구불구불한 뿔이 돋아났고 몸통 곳곳에 날개가 달린 기괴한 모습의 뱀이다.
'영체인가······?'
그렇게 긴가민가하며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살피던 와중.
문득, 뱀의 머리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감지되자, 즉시 형용키 힘든 위기감이 덮쳐왔다.
상당한 거리를 둔 상태였고 둘 사이에 온갖 장애물들이 있어 일반적으론 어떤 일이 벌어지든 대처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위기감은 점점 더 강해져만 갔고 한유진은 자연스레 깨달았다.
'역시 원영기급 존재인가.'
진짜 원영기 수사와는 이래저래 다른 부분이 많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자신이 대적할 수 없는 존재라는 확신이 든다.
살고 싶다면 당장 도망쳐야 하겠으나, 그는 겁먹지 않고 놈이 똬리를 튼 그 돌기둥에 관심을 집중했다. 이 짙어진 영기 농도의 원인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 정도 존재가 저토록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물건이라면 설령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더라도 관심을 집중해 봐야 한다.
식견이 부족하여 바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여러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혼원석 같은 건가, 설마?'
영석의 상위격 물질을 말함이다.
영석이 그저 농축된 영기를 손실 없이 품고 있을 뿐이라면, 혼원석은 그런 수준을 넘어 스스로 영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세상천지에 가득한 영기의 근원이자 현실과 반쯤 겹친 상태로 존재하는 우주적인 힘의 흐름, 그 혼원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련에 도움이 되며, 진법에 사용하면 반영구적인 효과를 구축할 수 있고, 특히 통천령보를 제작하는 데 필수적인 재료로 들어간다.
요컨대 매우 대단한 보물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게 저 정도 크기로······?'
계속 돌기둥에 관심을 쏟던 한유진이 절로 일어나는 욕심을 느끼던 그때.
마침내 그런 상대의 시선과 행동을 참지 못했는지 뱀이 행동에 나섰다. 아마도 오랜 세월 감히 자신의 영역에서 이런 건방진 태도를 보이는 생물이 없었을 것이다.
놈이 입을 벌려 조준하고 한유진의 신형이 자색빛으로 변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직후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간 백색 섬광이 별다른 소음도 없이 궤적에 자리한 모든 것을 증발시켰다.
파츠츠츠츳···!
단지 그런 소리만이 무수한 나뭇잎 스치듯 주변을 울렸을 뿐이었다.
쾅-!!
하나 뒤이어 놈이 꼬리로 바닥을 내리쳤을 때는 천지를 떨어 울리는 어마어마한 굉음이 폭발했다.
충격파는 주변으로 아무렇게나 뿜어져 나가는 대신 땅으로 집중되어 광범위한 지진을 일으켰다.
수많은 나무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쓰러져나간다. 바위들이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벼락이 연달아 내리치는 듯했고, 경사가 급한 모든 지형에서 산사태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
땅속 한유진은 오행천둔술의 오묘함에 힘입어 그 대부분의 충격을 무시할 수 있었다. 하나, 충격과 함께 투사되어 온 영기의 파동만은 그냥 지나쳐 넘길 수가 없었다.
그만큼 너무나 막대한 힘이었고 흡사 살아있는 것처럼 그를 포착하자 사방에서 몰려들기까지 했다. 극렬하기 짝이 없는 공격성을 품은 채 말이다.
결국 땅속에 숨는다는 이점을 거의 느끼지 못한 그가 지면으로 튀어 나가며 혈령적화주병을 조준했다.
도망치긴커녕 놈에게 접근하며 공격했다는 뜻이다.
- 캬아아아아-!!
그 말도 안 되게 건방진 행동에 뱀이 분노에 찬 포효를 터뜨렸다. 실로 오랜만에 받게 된 도전은 심심함을 해소해 준 것이 아니라 어떤 역린을 건드린 것 같았다.
'돌기둥이 그만큼 소중한가.'
왠지 그런 느낌을 받는 사이 빠르게 쏘아져 나간 혈령적화주병의 공격은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놈의 전면 허공이 아지랑이처럼 끓어오른다 싶더니 맞닿은 공격을 박제하듯 사로잡아버린 것이다.
흑선들의 회수가 불가능해진 상황에 한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온갖 신통과 법술을 펼쳤다.
육도윤회를 전력으로 일으키고 몽환유심으로 현실을 꿈으로 치환해 혈령적화주병의 봉쇄를 풀어내려 했으며, 원력대수에 심해한빙수를 담아 뇌룡까지 일시에 더한 후 강맹하게 휘둘렀다.
그 원력대수가 허공의 아지랑이 같은 장벽을 후려치는 사이 반대편 손으로 이십여 줄기에 달하는 순양극염탄사를 쏘아내기도 했다.
하나, 그 모든 수단들이 약간의 여파만을 남긴 채 허공 장벽을 파훼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이전보다 더 빠르게 날아든 놈의 광선 브레스에 왼쪽 팔과 어깨를 포함한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는 경험을 했다.
'하······!'
놀랍게도 그런 꼴이 되고서도 죽진 않았다.
결단기 수사부터는 더 이상 머리가 가장 중요하지 않다. 물론 엄청난 타격임에는 분명하나 시간만 주어진다면 다시 회복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몽환진룡도체는 그 어느 신통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지구력과 회복력을 갖기도 했다.
오행천둔술을 통해 연이어 날아드는 광선 브레스를 피하길 몇 번, 잠깐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의 부상은 이미 절반이 넘게 회복된 상태였다. 마치 꿈결 같은 자색빛 일렁임이 몸을 원상복구시키는 광경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싸움이 비등하진 않았다. 비등하긴커녕 그냥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면서 발악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파파팍···!
결국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혈령적화주병의 흑선들이 아지랑이의 휘말림 속에서 끊어져 나갔다. 손상이 막심한 듯 매혹적인 붉은빛이 크게 어두워지는 모습을 확인하는 찰나.
시야 전체가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한없이 밝은 무언가를 목격했다 싶은 순간 다시금 모든 것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 당신은 죽었습니다.
한유진은 신비롭게 떠오르는 그 은빛 문자들을 보며 그냥 헛웃었다.
'뭐에 죽은 거야?'
아마도 그 밝은 무언가가 광선 브레스가 아니었을까 짐작되지만, 전조조차 확인하지 못했는지라 단언할 수는 없다.
- 수확물을 선택하십시오.
어쨌든 딱히 마음 상할 일은 아니었다. 놈과 적당히 싸운 후 무사히 퇴각해서 원시림 탐사를 마저 이어갔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죽어보는 것도 나름 유익한 경험이었다.
원영기급 존재와는 확실히 절대 함부로 싸워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으니까.
이제 계획대로 현실에서 일할 차례였다.
* * *
대균열로 복귀하기 전.
이번에도 이원희를 만나 유명한 맛집이라는 수제 햄버거집에서 밥을 사줬다. 나이 차가 상당한 만큼 같이 뭔가를 하며 놀아주긴 애매하고, 이런 맛집 투어나 하는 것이 호감을 쌓기 좋았다.
"전에 얘기했던 친구들하고는 계속 잘 지내?"
"네."
새로 전학 간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다. 잠시 생각하던 이원희가 좀 더 성의 있게 답해야겠다고 느꼈는지 말을 이었다.
"저번에는······."
대략 다이어리 및 스티커 등을 파는 가게에서 이런저런 걸 사고 그걸로 꾸미기 놀이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자 계속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모습이 딱 그 나이대의 아이다운지라 한유진은 절로 웃음이 나오려 했다.
또래 친구와 함께 노는 경험은 중요하다. 설령 그 우정이 매우 한시적이고 딱히 배우는 게 없는 사소한 일처럼 느껴질지라도, 그런 사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한 개인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특히 그런 것들은 한유진이나 다른 누군가가 아무리 신경 써준다 한들 대체해 줄 수가 없는 경험이었다.
대략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뒤.
둘은 회원공 수련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테이블 한쪽에 공책 등을 펼쳐놓고 마치 과외 선생님이 숙제를 점검하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잘했네!"
그가 진심을 담아 감탄하자 이원희의 표정이 알게 모르게 살짝 상기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법문을 연필로 공책에 그려냈을 때, 일반적으로는 제대로 그려냈는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법문이란 게 워낙 오묘한 부분이 있어 형태가 같더라도 어떤 순서에 따라 그려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 결단기에 오른 한유진은 신식만으로 그것을 어떤 순서와 빠르기로 그려냈는지 모조리 판별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에 담긴 약간의 느낌마저 추측이 가능했다.
"여긴 좀 더 부드럽게 지나가는 게 좋을 거야. 누차 말했듯 나중에 영기로 그려낼 때 이야기지만."
"네."
부족한 몇 부분들을 꼼꼼히 짚어준 뒤.
"지금처럼만 계속 배우면 몇 달 안에 회원공 수련을 시작해도 되겠다."
그 말에 이원희가 은근히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막상 배우기로 결심하자 관심이 안 생길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아이를 집에 바래다준 후.
대균열로 복귀하면서 그는 자연스레 생각했다.
천영근에 달한 재능을 막상 갖고 보니 이원희의 가치가 더욱 높게 느껴진다. 수도삼겁을 제대로 극복해 낼 수만 있다면 원영기에 오르는 일이 따놓은 당상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단지 그렇게 귀중한 재능을 가진 아이로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이제는 그 역시 슬슬 정이 들기 시작해서 쭉쭉 성취를 이뤄나가는 모습을 그냥 순수하게 지켜보고 싶었다.
제자를 키운다는 건 자신에게 별 이득이 없더라도 충분히 보람차고 만족스러운 일이다. 그가 강호무림 세계에서 익히 경험한 사실이다.
계속 이런저런 잡념을 떠올리며 평범하게 걷던 와중.
그는 품속 무용이가 옥로주를 원하는 느낌에 녀석을 내려다봤다.
"그렇게 먹고도 또 먹을 배가 남았냐?"
찍-! 찌직! 찍!
당연하지만 수제 햄버거집에서 그와 이원희만 식사했을 리 없다. 녀석은 자기 몸통만 한 크기의 햄버거를 하나 통째로 먹어 치웠다.
그러고도 지금 또 옥로주를 달라고 하니 이렇게 식탐을 부리도록 내버려둬도 되나 싶었지만, 까만 눈을 반짝이면서 기대하는 모습을 보니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 몸에 나쁜 것도 아니고, 애초에 너 주려고 얻은 건데."
중얼거리면서 그는 무용이에게 옥로주를 주며 자신도 한 모금 들이켰다. 좀처럼 질리지 않는 그 맛과 향취를 즐기며 잠시 더 걸음을 옮기던 그는 곧.
한순간 자색빛으로 화해 대균열이 자리한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일반적인 방식으론 도저히 측정할 수 없을 그런 대단한 속도였다.
* * *
이번에 대균열로 복귀한 이유는 사냥 같은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박세룡을 만나 지식 보급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물었고, 성과가 나오기까지 정말로 얼마 안 남았다는 점을 확인한 후, 이번엔 영원의 여신교에 대한 일을 조사하고 있다던 국정원에 관해 물었다.
박세룡은 한유진의 그런 질문에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하나, 잠시 대균열을 나갔다 오자 능력 좋게도 관련 자료 일부를 서류 형태로 가져왔다.
저절로 감탄하면서 묻게 될 만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국정원이 수집했을 정보까지 이렇게 가져오는 겁니까?"
"제가 인맥이 좀··· 넓습니다."
"그거 엑시온과도 연관이 있겠죠?"
"그렇습니다."
글로벌 대기업, 소위 '재벌'이 한국에서 가진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원하는 정부 측 인사에게 연락을 넣어 뭔가를 요청하거나 협상하는 일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박세룡은 바로 그 엑시온 그룹 길드의 상징처럼 자리매김한 S급 헌터로서 재벌의 영향력을 빌려 쓰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게다가 요청한 정보가 또 다른 S급 헌터이면서 요근래 가치를 미친 듯이 드높이고 있는 한유진 자신과도 연관된 것이었으니, 명분도 나름 있는 셈이었다.
"제가 직접 가서 조사해 볼까 싶습니다."
"···베이징에 말씀이십니까?"
"네."
"위험··· 하지 않겠습니까?"
물으면서 박세룡은 과연 이런 질문이 적절한지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안 위험하고, 제가 가면 바로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그렇다면······ 국정원과 연계해서 방문하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지금 제가 가져온 정보는 피상적인 것들뿐이라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인지라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연락을 좀 넣어주세요. 이동 수단은 따로 수배할 필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박세룡이 다시 바쁘게 대균열을 나섰다.
한유진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겸, 한 줄기 자색빛으로 화해 거점요새를 순식간에 벗어났다.
중국에 가 있는 동안 행여나 문제가 될지 모를 요소들을 뿌리째 뽑아버릴 요량이었다.
90화. < 혈린회와 상무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