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서로 이득인 거래 (무료 마지막)
카사르녹스는 한참을 더 웃고 나서야 진정했다. 그사이 압박감이 사라진 한유진은 그의 외모를 살필 수 있었다.
과연 드래곤인가 싶을 만큼 굉장한 미남자였다.
머리 위로 솟은 한없이 어둠에 가까운 진보랏빛 뿔에서 후광이 흘러나오고, 눈동자가 세로 동공에 우주적인 색채를 품고 있음에도 이질적이라기보단 엄청나게 멋지다.
검은색과 보라색이 그라데이션처럼 섞인 머리카락을 뒤에서 묶어 길게 늘어뜨렸는데도 여성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입은 로브의 화려함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어 볼수록 감탄만 나온다.
그렇게 상대의 모습을 살피면서도 한편으론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카사르녹스가 다 진정한 듯하자 과감히 질문했다.
"제 기억을 읽으신 겁니까?"
"그래."
그는 평범한 육성을 사용하여 조금 힘 빠진 어조로 답했다. 한바탕 웃고 나니 깨달은 사실 때문에 현타가 살짝 오는 모양이었다.
"네놈이 몇 살에 무슨 야동을 처음으로 봤는지까지 다 읽었다."
"커흠······."
"별로 불쾌해하지도 않는군. 결국 '깨어나면' 다 사라질 일이라 이거냐?"
잠깐 허탈하게 웃던 그가 문득 몸 돌려 안쪽으로 들어갔다.
"들어와라. 계속 서서 이야기하기도 불편하니."
내부의 의자처럼 만들어진 곳에 앉으며 그가 맞은편을 눈짓한다.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한유진은 얼른 그곳으로 가 앉았다.
"아무래도 이 공간이 전부 환상 같은데, 바깥은 계속 위험한 전투 중인 거 아닙니까?"
"찰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깨달았는데 좀 손해를 본다 한들 무슨 상관이겠느냐?"
"제 기억이 아주 심각하게 왜곡된 거짓투성이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나 정도 되는 존재에겐 논리와 증명 없이 바로 사실을 파악해 내는 직감이 있다. 그리고 네게 그 정도 정신 교란 능력이 있었다면, 너를 이 공간에 들인 순간부터 나는 어차피 반쯤 죽은 목숨이니 기꺼이 속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 그렇군요."
아마도 정신계 마법 특유의 반서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확실히, 이렇게 상대가 만든 공간에서조차 상대를 완전히 속여 넘길 수 있다면, 모종의 반서를 일으켜 제 힘에 자기가 다치도록 만드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제 기억을 다 읽으셨다면 따로 질문하실 건 없으실 듯한데······."
"사실 거짓말이다. 일부 기억은 못 읽겠더군."
"예?"
"그래도 중요한 건 대략 다 읽었으니 질문할 게 없다는 말은 맞다."
솔직한 건지 뭔지, 잘 모르겠다.
한유진은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카사르녹스와 시선이 마주치곤 얼른 그 생각을 지워냈다.
"시도 때도 없이 기억이나 생각을 읽어내는 건 아니야. 내가 그런 짓을 하면 네게 어떤 식으로든 압박감이 느껴질 테니 저절로 알 수 있겠지."
"···지금은 그냥 겉으로 티가 난 겁니까?"
"누군가를 속이고 싶다면 표정만이 아니라 몸뚱이에도 신경을 써라. 심장박동이나 동공의 움직임 같은 것 말이다."
그런 부분까지 신경 써서 제어하려면 아무래도 결단기에는 올라야 할 것 같았다.
"더 궁금한 건 없느냐? 편히 물어봐도 좋다."
이 드래곤이 아무래도 자신에게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판단하며 한유진은 마침 잘 됐다는 생각으로 물었다.
"제 각성 능력에 대해 아셨다면 의견이 궁금합니다. 이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전부터 스스로도 매우 궁금했으나, 뭔가 판단을 내리기엔 관련 정보가 너무 적어서 계속 미루기만 했던 의문이다.
하나 돌아온 답변은 좀 허무했다.
"나도 모르지."
"···대략적인 추측만이라도 좀 들려주십시오."
"그저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 같진 않군."
"···그게 끝입니까?"
"다른 거나 물어봐라."
"방금 다 가짜 환상놀음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에 대한 설명만이라도 좀 부탁드립니다."
카사르녹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답했다.
"대충 내뱉은 말이다. 이렇든 저렇든 내 입장에선 전혀 안 중요하니까."
"예?"
"이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환상이든, 아니면 어느 실제적인 가능성의 한 갈래이든, 결국 너 같은 자에 의해 마음대로 조작당할 수 있는 존재일 따름인데,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이어서 그는 손을 내저었다.
"이에 관련해선 더 이상 답해주기 싫구나. 다른 것을 물어라."
상대의 심정을 일부 짐작하며 한유진은 순순히 주제를 전환했다.
"제가 수선자인 걸 어찌 아셨습니까?"
"너희 족속은 우리 종족과 나름 악연이 있지."
"악연이요?"
"우리의 용신께서 너희 족속의 그 진짜 있는지 없는지 모를 도조(道祖)라는 존재를 찾아갔다가 그대로 행방불명이 돼버렸으니, 악연일 수밖에."
도조.
모든 선도의 시작점이자 정점이라 알려진, 드래곤 카사르녹스의 말마따나 진짜로 있는지 없는지조차 불분명한 어떤 신화적이고도 추상적인 존재.
"그리고 너희는 원래도 꽤 유명한 편이야. 그 불모지 같던 네 고향 지구에조차 선(仙)이라는 개념이 전파되지 않았더냐?"
"불모지······."
"지금은 좀 벗어난 듯하다만, 그게 축복일지 저주일진 앞으로 지켜봐야 알겠구나."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이미 너희 지구에서도 관련된 격언이 있지 않느냐. 서로 다른 문명 간의 조우는 분쟁을 동반하기 마련이라는."
이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너무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나름의 고민을 거치는 탓이었다.
게다가 진짜 묻고 싶은 질문이 있긴 한데 상당히 도발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질문인지라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그런 한유진의 심정을 짐작이라도 한 듯, 그가 먼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물어 왔다.
"내 능력에 대해서는 안 궁금한가? 네 그 외단법의 그릇으로 내 드래곤 하트를 쓸 생각이 있을 텐데?"
"···알려주신다면 당연히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알려줘야지. 당연히 알려줘야 하고말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정자 밖 정원의 풍경을 바라보며 고고하게 섰다. 따라 일어서려는 한유진을 손짓으로 제지하면서였다.
"우선 아직 네가 잘 모르는 이 우주의 다섯 대법칙과 그 아래 마법의 분류에 대해 알려주마. 너희 수선자들 식으론 대도법칙에 법술이라 부르는 것들 말이다."
감지계, 파멸계, 인과계, 허무계, 창조계 마법을 품은 운명법칙.
광휘계, 암흑계, 중력계, 공간계, 시간계 마법을 품은 차원법칙.
화염계, 뇌전계, 바람계, 유수계, 대지계 마법을 품은 원소법칙.
육체계, 영혼계, 죽음계, 생명계, 초탈계 마법을 품은 생사법칙.
소통계, 환상계, 감화계, 조작계, 지배계 마법을 품은 정신법칙.
"모든 마법은 이 분류를 벗어나지 못한다. 가령 네가 익힌 화탄술은 원소법칙에 속하는 화염계 법술이겠고, 청심술은 정신법칙에 속하는 감화계 법술이며, 정화술은 운명법칙에 속하는 인과계 법술이다."
"인과계라는 것이, 원인 없이 결과를 만들어 낸단 뜻입니까?"
"바로 그렇다. 네 법력으로 원인을 대체하여 깨끗함이라는 결과를 즉시 만들어 내는 것 아니겠느냐?"
"음."
잠시 생각하던 한유진이 물었다.
"그렇다면, 지둔술 같은 건요?"
"원소법칙의 대지계와 생사법칙의 육체계가 뒤섞인, 복합계 법술이지."
"서로 조합될 수도 있단 뜻이군요."
"그러지 않은 마법이 오히려 더 적을 거다. 화령조술은 무엇이겠느냐?"
갑작스레 마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한유진은 오히려 기꺼워하며 즉시 답했다.
"원소법칙의 화염계에, 생사법칙의 영혼계입니까?"
"그래. 하면 자금광휘술은?"
"차원법칙의 광휘계에 원소법칙의 대지계일 겁니다."
"맞다. 이제 대략 이해했겠지."
"그런데··· 생사법칙의 영혼계에 정신이 포함되지 않는 겁니까? 정신이란 게 대법칙으로 따로 분류될 정도라고요?"
카사르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이 정신을 담아내는 영적 그릇으로서 밀접한 연관성을 갖긴 한다만, 영혼 없는 정신이 존재할 수 있으며 정신이 없는 영혼도 존재할 수 있다. 네 신식이 바로 영혼 없는 정신의 한 단편이지. 정신이 없는 영혼이야 사령술사들이 재료로 막 쓸 만큼 흔하고. 또한 따지자면, 육체 역시 정신을 담아내는 물리적 그릇이 아니겠느냐?"
"아아······."
"게다가 네 의문은 이 우주의 탄생과도 연결 지어 설명할 수 있다. 너는 대법칙 중 가장 처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요컨대 이 우주를 잉태한 혼돈 이전, 태초의 허무에서 무엇이 가장 먼저 나타났을까?"
실로 심오한 질문이었다.
'태초의 허무에서 혼돈이 나타난 창조이니······ 운명법칙인가? 아니, 그 어떤 정신의 의지도 없이 그냥 창조가 발생할 수 있나? 허무라는 건 말 그대로 완전한 허무일 텐데 거기서 의지조차 없이 어떻게 창조가 이뤄졌겠나? 그러면······ 정신법칙? 한데 어떤 정신의 의지가 존재한다면 그건 곧 생명이 아닌가? 설령 일반적인 생명으론 설명되지 않더라도 어쨌든 존재한다는 점은 분명하고, 그렇다면 그 존재가 자리할 차원이 있어야 할 텐데? 가만, 차원이라는 바탕에 원소들이 전혀 없다면 그 형태를 유지할 수가 없잖아? 다시 태초의 허무가 되는 건가?'
혼란에 빠진 한유진을 보며 카사르녹스가 웃었다.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무엇이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게 태곳적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정설이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가 선천적으로 타고났으며, 동시에 후천적으로 추구하는 힘이 바로 정신법칙이지. 환상을 주로 다루는 것을 본 만큼 이미 파악했겠지만."
순간 한유진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카사르녹스가 굳이 이런 설명을 해 준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드래곤 하트를 네 외단법의 그릇으로 삼는다면, 너는 굳이 정신법칙을 힘써 연마하지 않고도 네 기억이나 생각이 읽히는 일을 방지할 수 있을 거다."
"허······."
"어디 그뿐이랴? 네 계획에 들어있는 그 태을오행도경과도 궁합이 좋지. 환상에 원소를 더함으로써 효과를 높이는 건 거의 대법칙 이론만큼이나 검증된 조합이니까."
확실히, 한유진이 미리 알고 있던 빈약한 지식에서도 그런 내용이 있었다.
"무엇보다."
카사르녹스는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과거 명백히 마구스(Magus)에 오른 드래곤이었다. 비록 지금은 반 경지 정도 추락했다지만 그 잠재력까지 날아가 버린 것은 아니지. 만일 내게 불행한 사건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감히 입시시무스(Ipsissimus)의 초월에 도전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마구스라는 경지가 설마 합체기급입니까?"
"완전히 같진 않겠지만 비슷하다. 입시시무스는 너희 수선자들의 진선기 경지와 비견될 테고."
한유진은 어쩔 수 없이 크게 혹했다.
정말로 사실이라면, 비록 지금은 연허기급이라지만 실은 합체기급에 한 번 도달했던 그 잠재력이 보존된 드래곤 하트란 뜻이 아니겠는가?
"잠재력은 높은데 현재 경지는 낮으니, 그만큼 카르마 소모가 줄겠지. 장담컨대 네가 현실적으로 택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지가 바로 나다."
실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하여 고개를 연신 끄덕이던 한유진이 깊은 숨을 내뱉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 모든 호의가 당연히 공짜일 리 없었다.
사실, 심정적으로 보자면 카사르녹스는 이 모든 것이 가짜 환상놀음에 불과하단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 한유진 자신을 찢어 죽였어도 이상하지 않다.
의미의 상실은 허탈감과 함께 분노를 끌어내기 충분한 사건이니까.
모든 의미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이렇듯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만 봐도, 카사르녹스는 과연 위대한 존재였다.
"네 도심(道心)에 걸고 맹세해라."
그가 낮아진 목소리로 언뜻 담담하게 말했다.
"드래곤이라고 다 같은 종족이 아니다. 나는 요정용, 혹은 몽환용이라고 불리는 일족이지. 그렇기에 선천적으로 정신법칙에 속한 힘을 타고난 것이고. 만일 네가 훗날 충분한 여유를 갖춘다면, 나와 우리 일족을 찾아서 네가 느끼기에 적당한 수준으로 도와주어라."
이후로 꽤 긴 시간을 침묵하던 한유진이 물었다.
"당신이 현실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르지. 네 각성 능력으로 과거나 미래를 살펴본다 한들, 다 환상이거나 그저 가능성의 한 갈래일 뿐일지 모르잖느냐."
"······음, 그렇지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잠시 더 침묵하는 때, 그가 먼저 다시 말해 왔다.
"훗날 충분한 여유를 갖췄을 때, 적당한 수준으로, 라고 내가 명시했다. 그리고 만약 태업하지 않았는데도 나나 우리 일족을 찾지 못한다면, 당연히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유리하게 해석하자면 한없이 유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굉장히 거추장스러운 족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걸 손해라고 여기긴 어려웠다.
"제가 약속만 하고 지키지 않는다면요?"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구나. 충분한 여유를 갖췄는데도 굳이 네 도심에 걸고 한 맹세를 어기겠다고? 너희 수선자들이 몹시도 꺼리는 게 바로 심마(心魔)일 텐데?"
"혹시 제가 밉지는 않으십니까?"
"······너 같으면 자기 심장을 수련재료 삼겠다고 온 녀석을 이뻐할 수 있겠느냐?"
쓸데없지만 도저히 참지 못했던 질문인지라, 한유진은 잠깐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단순한 비약 따위로 만들어지진 않을 테니 그나마 좀 낫구나."
"큼······."
"환상과 다름없는 처지인 이 내가, 이 거래를 통해 현실의 진짜 나와 일족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생각하기에 따라선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수준의 이득 아니겠는가."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카사르녹스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건 네게도 이득일 수 있다. 이 거래가 카르마를 대신하는 대가로 작용할 수 있다면 말이지."
이후 다시 눈을 뜬 그가 한유진을 직시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거래하겠느냐?"
51화. < 성공적 도주 (유료 시작) >
카사르녹스의 몸을 두르고 일렁이던 보랏빛 기운, 동시에 한유진을 전장 한복판으로 끌어냈던 보랏빛 기운.
그것이 갑작스레 폭증하며 다른 대마법사들의 공격을 우악스레 밀어냈다. 단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카사르녹스의 뿔에서 흘러나오던 후광과 눈에서 비치는 은하성운을 닮은 빛무리 역시 미친 듯이 증폭됐다.
꿈결 같은 환상이 급격하게 농도를 더하면서 사방의 시공간을 제멋대로 주무르는 듯한 현상이 펼쳐진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를 입을 기세인지라 대마법사들로선 분분히 물러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 헛···!
- 이게 무슨···!
이해할 수 없기에 예상할 수도 없었던 이변이다. 상대의 반격은, 나름 효과적이긴 하나 그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투입되는 힘의 양이 광적으로 비효율적이었다.
당연히 네 대마법사는 온갖 방어와 회피를 선보이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대상의 힘을 억제하는 아스테리온의 봉인이 있는 한 이런 식으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오히려 고마울 수밖에 없다.
반면.
당장의 우세를 위해 미래를 내다 버리는 듯한 그 드래곤의 행동에 배신자인 얀코티는 매우 당황했다. 서로 공멸하지 않는다면 이후 살아남은 네 대마법사에 의해 자신이 어떤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될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강제로 드래곤의 편에 서서 네 대마법사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 한 명이라도 수를 줄여놔야 이후 드래곤이 힘이 빠졌을 때를 대비할 수 있을 터였으니까.
그렇게 그가 스태프 머리의 수정구에서 사악한 핏빛 어둠을 피워올리며 전력으로 공세를 취하던 와중.
문득,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불가해한 광경을 목격한 것이 비단 얀코티뿐만은 아니라서, 다들 상황에도 불구하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드래곤 카사르녹스의 가슴이 갈라지고 있었다.
─!!!
고통인지 뭔지 모를 거대한 용의 포효성이 터져 나오며 그가 뿜어내던 보랏빛 기운이 한층 더 거세진다. 덕분에 그 누구도 감히 방해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됐다.
- 뭐···! 뭘 하는 거냐 대체-!
얀코티의 다급한 외침은 카사르녹스가 만들어 낸 현상의 후폭풍에 휘말려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갈라진 가슴 안쪽에서부터, 한없이 몽환적인 보랏빛이면서 우주의 은하성운처럼 찬란한 무언가가 빠져나온다. 완벽한 구형을 이룬 채 주변으로 끝없는 마력의 파장을 뿜어내며 흡사 살아있는 듯 박동하기까지 하는 그것은.
드래곤 하트였다.
몽환적인 보랏빛이 구름처럼 퍼져 나가면서 주변을 꿈결처럼 이지러트린다. 은하성운이 담긴 듯한 찬란한 빛무리 주변으로 세상 모든 색채의 온갖 마법문이 피처럼 쉬지 않고 흩뿌려진다.
- 나 카사르녹스가······!!
포효성에 섞여 드래곤의 거대한 의지가 모두의 머릿속을 천둥처럼 울렸다.
- 내 심장을··· 분명히 네게 양도했다, 한유진······!!
직후.
위대한 존재에 걸맞은 격을 갖춘 드래곤의 육신이, 무시무시한 빛을 발하며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도저히 묘사할 수 없이 아름다우면서 흉포하게 발광하는 그 빛무리는 그대로 유성처럼 쏘아져 아스테리온 봉인 한쪽 벽에 충돌했다.
직후 터져 나온 섬광과 폭음은 마치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봉인의 벽이 꿈속 환상처럼 마구잡이로 흐트러지다 끝내 사람 한 명이 통과할 만한 작은 구멍이 뚫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멍으로, 이미 육체가 모두 붕괴된 카사르녹스 대신 웬 한유진이라는 이름의 인간 한 명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모습이었다.
무려 드래곤 하트와 함께.
- 막아···!
누가 외쳤는지 모를 그 마법적 음성은 폭발의 후폭풍에 휩싸여 꿈속 메아리처럼 덧없이 스러졌다.
또한 동시에 그 출구를 향해 움직였던 다섯 대마법사, 배신자 얀코티를 포함한 일행은 도저히 서로 안심하고 그 구멍을 차례대로 빠져나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악마 추종자인 대마법사를 먼저 빠져나가게 하자니 그대로 도망쳐선 어마어마한 후환을 남길 것 같고, 그렇다고 붙잡아 놓은 뒤 차례대로 빠져나가자니 가장 끝에 남게 될 이가 위험할 것이 분명한지라 순서를 정하기가 어렵다.
- 나를 먼저 내보내라! 나 역시 저 심장이 필요하니 그냥 도망치지 않는다! 내게 저 물건이 얼마나 절실했으면 배신까지 했겠나?!
얀코티가 소리쳤지만 오히려 그 탓에 의심이 증폭되며 서로 더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악마 추종자의 말을 대체 어찌 믿는단 말인가?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
한유진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지둔술과 뇌둔술과 풍둔술 등을 총동원하며 무작정 멀어지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됐나···?! 이쯤에서 자살하면 이걸 내 수확물로 선택할 수 있는 건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머리가 뜨거워지다 못해 끓어오르는 것 같다. 양팔로 겨우 끌어안을 수 있는 커다란 드래곤 하트에서 연신 뿜어져 나오는 무지막지만 영기 파동에 전신 감각이 마비되는 느낌도 든다.
하나 한편으로, 그는 더없이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면서 일단 최선을 다해 도주를 이어갔다.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행여나 물건이 수확물 선택지에 나오지 않을 작은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 동시에 이 도주에 성공함으로써 카르마 소모를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건 그 자체의 가치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을 얼마나 '요행'으로 얻는지도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가?
생각하며 그는 성공적 도주를 위해 드래곤 하트의 영기 파동을 어떻게든 억제해 보려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저물대에 넣는 일은 당연히 고려하지도 않았다. 이런 물건을 이런 상태로 그냥 넣었다간 분명 저물대가 터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아스테리온 봉인 외부는 카사르녹스의 부하들과 인간 수십만 대군의 전투로 인해 지극히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덕분에 드래곤 하트가 가진 엄청난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게 모든 관심을 완벽히 떨쳐냈다는 뜻은 아니었다.
- 저게 대체 뭔···?!
- 어어어···?!
꽤 많은 수의 이들이 도주하는 한유진 쪽으로 홀린 듯 시선을 돌렸다. 그중 몇몇은 결단기급 강자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바로 그때.
- 멈춰라-!!
한 대기사가 몸에 온갖 이로운 마법 축복을 휘감은 채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적아가 불분명했지만 바로 그렇게 정체가 수상한 데다가, 딱 봐도 대단한 보물을 가지고 도망치는 듯하니 멈춰 세우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나타나는 광경부터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분명 꽤 먼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곳까지 달려와 앞을 막는 속도가 미친 듯이 빨랐다.
위협적으로 겨눈 검끝에 서린 기운 역시, 지금 한유진의 법술 수준으론 절대 막을 수 없을 끔찍한 예기가 서려 있었다.
하나.
그는 육체의 강함에 비해 영혼이 너무나 부실한 대기사였다.
아무리 여러 마법 축복을 두르고 있다 해도 그것이 결국 외부의 힘인 이상 한계가 분명하다.
바로, 외부의 간섭을 방어해 낼 수는 있어도 원래 미약하던 본인의 감각과 인지를 강제로 끌어올릴 수는 없다는 한계다.
빠콰쾅-!!
순간 섬광을 동반한 뇌전불꽃이 번쩍이며 한유진의 신형이 잠시 사라져 버린 듯했다.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으나 대기사는 혼란에 빠졌고, 이어 한쪽에서 나타나 도망치는 듯한 적을 쫓으려다가 다시 멈춰 섰다.
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 뇌전불꽃을 두른 흙먼지 덩어리에 불과함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그 짧은 시간 만에 상대의 종적을 놓쳐 버렸다.
지둔술로 땅속 깊이 숨어든 한유진은 여전히 빠른 속도를 유지하면서 계속 드래곤 하트의 존재감을 어떻게든 감추려 시도했다.
하지만 원주인의 통제를 잃어버린 연허기급 드래곤의 심장을 고작 법혼기 수사인 한유진의 능력으로 제어할 수 있을 리 없다.
분명히 그래야 했다.
'어···?!'
꾸준한 시도가 보답을 받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카사르녹스의 자발적 양도가 모종의 마법적 효과를 발휘하기라도 한 것일까.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으나 한유진은 그 드래곤 하트와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직후 심장이 그의 의지에 호응하듯, 광량과 영기 파동을 포함한 모든 존재감이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크기까지 함께 줄어들면서 한 손으로도 들 수 있게 됐다.
심지어 그 존재감이 줄어드는 은폐 효과는 심장을 들고 있던 한유진에게까지 번져 적용됐다.
덕분에 그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결단기급 마법사들의 추적에도 매우 수월하게 도주를 이어갈 수 있었다.
땅속에서 이동하는 상대의 마법적 기척을 감지할 수 없다면 당연히 추적하기도 불가능하다. 충분히 은폐를 간파해 낼 만한 실력을 갖췄을 대마법사들은 어째서인지 여태 추적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하여 그렇게 결국.
한유진은 실로 불가능하게 느껴지던 도주에 성공하고야 말았다.
수확물 선택지에 드래곤 하트가 나타나지 않을 아주 작은 가능성마저 차단해 낸 것은 물론, 그 자체로 카르마 소모를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를 쾌거였다.
* * *
어둡고 공허한, 그러나 더없이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의 대기 장소.
한유진은 원래의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모습으로 돌아온 드래곤 하트를 보며 황홀감에 잠긴 표정이었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현재 가진 카르마를 거의 다 소모한다면 이 대단한 보물을 수확물로 선택할 수 있었다!
'다만······.'
카르마 소모량처럼 선명하게 느껴지진 않지만 다른 대가가 존재함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거래.'
훗날 충분한 여유를 갖췄을 때 적당한 수준으로 카사르녹스와 그의 일족을 도와주겠다는 도심(道心) 맹세.
그것의 존재가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진다.
도심 맹세라는 걸 이런 식으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지만, 한편으로는 꽤 살 떨리기도 했다. 이게 정말 한 번 사인하면 절대로 어겨선 안 될 무거운 계약임을 깨닫게 만들어 주고 있었으니까.
만약 어기게 된다면 그 대가가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 몰라서 더 무섭다.
'어쩌면, 내가 보유한 카르마로 간신히 선택할 수 있는 게 그저 우연이 아닐지도.'
카르마의 부족함만큼 이 도심 맹세의 무거움이 가중됐을지 모른다.
하나 여기서 매우 다행스러운 사실은, 애초에 이 도심 맹세의 조건이 전혀 가혹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훗날 충분한 여유를 갖췄을 때 적당한 수준으로.'
오로지 한유진 자신의 양심에 따를 수밖에 없는 추상적인 내용이다. 동시에 좀처럼 손해를 보기 힘든 내용이기도 하다.
'설마 이런 가능성까지 다 생각해서 거래를 제안한 겁니까, 카사르녹스?'
조건이 살짝이라도 빡빡했다면 여기서 꽤 많이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고민하지 않게 된 만큼 더욱 도움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추후 고스란히 '적당한 수준'으로 도와주는 것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덕분에 계획보다 훨씬 더 빨리 드래곤 하트를 손에 넣게 됐다.
한유진은 그것을 수확물로 선택한 다음, 평소처럼 바로 대기 장소를 벗어나지 않고 몇 가지 실험을 시작했다.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실험하는 것은 도주 중 느꼈던 드래곤 하트와의 연결이었다.
'분명 착각이 아니었어.'
그렇게 대략 십여 번 정도를 시도했을 때.
다시 그 느낌이 찾아왔다.
동시에 드래곤 하트가 흡사 살아있는 듯 그의 의지에 호응하며 광량과 크기가 확 줄어들고 존재감이 극도로 흐려졌다.
'됐다!'
이거면 현실은 물론 다른 세상에 가져가더라도 눈에 띄는 일을 피할 수 있다.
그는 매우 기꺼워하면서 좀 더 능숙하게 해낼 수 있도록 연습을 이어갔다.
별로 오래 걸리지는 않을 일이었다.
52화. < 결단기를 위한 카르마 >
한유진은 침대에서 눈을 뜬 즉시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대기 공간에서와 달리 은폐가 완전히 풀린 상태로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드래곤 하트에 번개처럼 손을 뻗고 '연결'을 시도했다.
대기 공간에서의 연습이 헛되지 않아 바로 연결에 성공한 그는 즉시 존재감을 은폐시켰다.
휘황찬란하던 빛이 확 사그라지면서 크기가 줄어들고 뿜어져 나오던 영기 파동도 없는 것처럼 잠잠해진다.
그렇게 조용해진 드래곤 하트를 손에 든 채 한유진은 진한 여운에 잠겼다.
실로 아름답기 짝이 없는 보물이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사람을 경탄케 만들면서 탐심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이 또 있을까 싶다.
몽환적인 보랏빛을 바탕으로 은하성운을 닮은 빛무리가 흐른다. 내부에서 꿈이 형상화된 듯한 구름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의 모든 빛깔을 품은 법문들이 무수한 유성우처럼 저절로 나타났다가 스러지기도 한다.
찍! 찌직-!
거의 황홀경에 잠겨있던 한유진을 일깨운 것은, 드래곤 하트의 무지막지한 존재감에 화들짝 놀라 깨어난 무용이었다. 녀석은 한유진의 옆구리 부근에 딱 붙어서는 경계하는 기색으로 드래곤 하트를 주시했다.
동시에 은근히······ 식탐이 동하는 것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자기가 절대로 먹을 수 없는 물건임을 알 터인데도 말이다.
"어허."
절대 안 된다는 뜻을 담아 녀석을 단속하며 그는 드래곤 하트를 저물대에 넣었다. 스스로 존재감을 죽인 상태인 만큼 저물대가 터져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음?"
그때 한유진은 문득 숙소 바깥의 소란스러움을 감지했다. 이어 몇 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노크했다.
- 후배님, 괜찮으십니까?
마침 이곳 거점요새에 머무르고 있던 박세룡의 목소리였다.
"······이런."
미환진이 펼쳐져 있었기에 잠깐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방금 드래곤 하트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새어나간 것 같다.
방어를 위한 대부분의 진법 금제는 당연히 내부 동정을 가리는 효과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하나 이 정도 수준의 금제로는 연허기급 드래곤 하트의 존재감을 막기란 무리였던 것이 분명하다.
미환진기를 거둔 한유진은 문을 열고 박세룡을 맞이했다.
그렇게 본 박세룡의 표정은 굉장히 놀랐던 것을 억지로 가라앉힌 기색이 역력했다. 본인은 최대한 관리를 한 모양이지만 신식을 가진 한유진을 속이진 못했다.
"괜찮으십니까?"
"예, 방금 좀 요란했지요? 잠깐 뭘 좀 실험하느라······."
"···요란, 하지는 않았습니다."
살짝 더듬거리며 답한 그가 어째서인지 훨씬 더 정중해진 느낌의 태도로 허리까지 숙여 인사했다.
"쉬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가 지금 무슨 착각을 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한유진의 숨겨진 힘이 S급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때 안전가옥에서 충돌해 겪었던 일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겠네. 오히려 좋아.'
그가 계속 착각하고 있는 편이 행여나 발생할지 모를 마찰을 예방할 수 있을 터다.
박세룡이 물러가는 와중 그 장면을 목격한 다른 헌터들이 몇 있었다. 아마 며칠 지나지 않아 어떤 식으로든 소문이 퍼질 것이다.
잠시 뒤.
외출준비를 마친 한유진은 항상 그래왔듯 무용이를 품에 안은 채 숙소를 나섰다.
이제 드래곤 하트를 얻었지만 카르마가 바닥난 상태다. 원시림으로 넘어가서 수련하기 전, 그 수련의 성과를 현실로 가져올 수 있을 카르마를 쌓아야 한다.
'며칠이면 되겠지.'
사냥도 사냥이지만, 그간 보수를 마나스톤으로 받기를 강력하게 요구해 왔으니 슬슬 결과로 나타날 때가 됐다. 이번의 의도치 않은 사건으로 박세룡이 좀 더 분발해 준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결단기에 오른다면······ 내가 직접 중국으로 넘어가서 베이징을 이 잡듯이 뒤지는 일도 불가능하진 않을 거다.'
특히 정신법칙 관련 능력을 얻는다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역시 실력이 가장 확실한 열쇠다. 그는 점점 더 명료해지는 목표 의식과 함께 거점요새를 나섰다.
* * *
대균열 속 웨이브의 여파 정리가 끝난 지 이틀이 지난 시점.
박세룡은 모든 급한 일을 처리한 뒤 또 다른 급한 일 처리를 위해 잠시 대균열을 떠났다. 바로 한유진이 맡긴 '원희 조사'였다.
그가 보유한 각종 인맥을 동원하면 원희라는 이름을 가진 특정 성별과 연령대의 사람들 주소지를 찾는 일쯤이야 쉬웠다. 그 주소지에 사는 사람들의 사진을 받아보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지 않았다.
하나, 그럼에도 서류나 사진 따위만으론 알 수 없을 요소를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하여 그렇게 박세룡은 화성시 어느 한 곳의 판자촌에 도착했다. 사진으로 확인한 바, 그가 아는 '원희'와 가장 비슷한 느낌이 드는 아이가 사는 곳이었다.
아무리 한국이 비교적 슬럼화가 덜한 국가라곤 해도 완전히 없을 수는 없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직접 구경해 본 적은 없기에, 차에서 내리는 박세룡은 새삼 낯선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이 동네만 세월이 이삼십 년 정도 흐르지 않은 것 같다.
하나 지금 그가 느끼는 이 오묘하게 불편한 기분은 단지 풍경의 낯섦에서만 오는 게 아니었다.
그 스스로도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이게 그 두렵기 그지없던 원희라는 존재가 실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편함인지, 아니면 자신이 목격했던 그 끔찍한 광경이 10년 후 미래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편함인지, 그도 아니면 미래를 예지하면서 어마어마한 힘까지 갖춘 한유진이라는 존재에 대한 불편함인지.
'······어쩌면 좀 더 근원적인, 내가 알던 세계가 부서지고 확장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일 수도 있겠지.'
문득 소설 데미안의 유명한 문구가 떠오른다. 알은 세계이며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던.
그는 여전히 불편하면서도 오묘한 기분에 잠겨 판자촌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대략 점심때가 지난 시점으로,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의 수업이 끝나고 귀가할 시간대였다.
도착해서 본 원희라는 아홉 살짜리 아이의 집은 확실히 너무나 낡아 있었다. 내부에 사람의 기척이 있긴 한데 한 명뿐이라, 조사한 바에 의하면 원희의 할머니일 터였다.
'부모 중 아버지는 사망, 어머니는 도박중독으로 이미 폐인에 가깝다던가.'
정상적인 가정이라기엔 심히 무리가 있다. 설령 그럭저럭 정상적이었다 해도 환경이 이래서야 아이가 밝고 활기차게 자라기는 어려울 터다.
그렇게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자니 곧.
길 끝에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작은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박세룡은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저절로 소름이 돋았다. 미래의 그 원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어린이 주제에 세상 다 산 듯한 느낌을 풍기면서 걸어오던 아이는 문득, 이 판자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장 차림의 박세룡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동시에 박세룡도 최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자제하면서 그 아이를 유심히 살폈다.
"얘야."
이상함을 느끼고 완전히 멈춰 선 아이에게 박세룡이 말했다.
"너, 그 나이에 벌써 이능력을 각성했구나."
"······."
"혹시 헌터 전문학교에 대해 들어봤니? 너처럼 이능력을 각성한 친구들이 많이 가는 곳인데."
이후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저씨."
이름 이원희, 나이 아홉 살.
그 작은 아이가 여느 아이들과 별다를 것 없는 태도와 어조로, 하나 왠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연다.
"아저씨는 이거, 보여요?"
동시에 아이의 발밑으로 뻗어진 그림자가, 이어 주변에 드리워진 모든 그림자들까지 한차례 출렁이며 무수한 속삭임 같은 소리를 흘려냈다.
* * *
마침내 받았다.
한유진은 그 자신의 몫이 보관된 곳이라며 안내받은 작은 창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상당한 양의 마나스톤을 목격할 수 있었다.
대부분 6레벨 이하, 그러니까 하급 영석이었지만 7레벨 이상인 중급 영석도 꽤 보이는 아주 만족스러운 광경이었다.
"고맙습니다.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예, 예."
안내역의 헌터를 떠나보낸 뒤.
그는 문을 닫고 거리낌 없이 그 창고 안의 마나스톤을 전부 카르마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파스스슥···!
마나스톤들이 전부 한 줌도 안 되는 흙먼지로 부서져 내리며 사라진다. 그만큼 한유진은 바닥까지 떨어졌던 카르마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참지 못했다.
하급 영석이 주는 카르마는 이곳의 평범한 괴물 한 마리를 처리했을 때의 절반 정도였다. 그리고 중급 영석은 그 백 배에 살짝 못 미치는 듯했다.
수선계에서 흔히 하급 영석 백 개에 중급 영석 하나로 교환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놀라울 정도로 비율이 잘 맞았다.
'하긴, 그렇게 역사 깊은 수선계에서 교환비가 아무렇게나 정해졌을 리 없지.'
다 이유가 있을 터였고, 지금 그 이유가 한유진만의 방식으로 또 한 번 증명된 셈이었다.
잡념과 함께 천 개가 좀 안 되는 마나스톤을 전부 카르마로 전환하자, 그 양이 대략 괴물 사천 마리를 잡았을 때의 기대치와 비슷했다. 영원의 여신교 놈들의 마약범죄를 밝혀냈을 때보다 살짝 부족한 정도다.
미리 쌓아두었던 양까지 고려하면 수련 성과를 현실로 가져오기에 그리 부족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설마 결단기 수련 성과를 선택해서 가져오는 데 법혼기 때의 네다섯 배 이상이 들진 않겠지?'
비록 결단기라는 경지가 법혼기보다 여러 방면으로 최소 열 배 이상 능력이 뛰어나다곤 하지만, 카르마 계산은 그런 식으로 되지 않는다.
그는 여태까지의 경험과 느낌적인 부분을 종합하여 가늠해 보기 시작했다. 법혼기 수사의 향상된 지능으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흠."
어쩌면 조금 부족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든다.
'뭐······ 결단기급 수행을 꼭 한 번에 가져올 필요는 없으니까.'
결단 직전까지만 수련한 뒤 그 성과를 안정적으로 가져오고, 넉넉하게 보름 정도 충분한 카르마를 쌓은 뒤 다시 각성 능력을 통해 결단기에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가사 불명의 노래를 아무렇게나 흥얼거리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아직 잠을 자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당장 급한 무언가가 없는지라, 한숨 자고 일어나도 충분히 괜찮을 때였다.
계속 노래를 마구잡이로 흥얼거리면서 미환진 법기를 설치하는 등 잘 준비를 하고 있자니 문득, 그의 품속에 있던 무용이가 박자에 맞춰 머리를 둠칫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너 뭐하냐?"
찍-!
"형님 노래가 그렇게 좋았어? 감각 있구나 아주!"
미치도록 귀여운 모습이었는지라 참지 못하고 한바탕 쓰다듬어준 후.
기분 내키는 대로 영액주와 옥로주까지 흥청망청 줘버리고는 녀석을 가슴팍 위에 올린 채 침대에 누웠다. 보면 볼수록 귀여운 것 빼곤 전혀 쓸모가 없는 녀석이 살짝 취기가 도는 모습으로 나른하게 늘어진다.
"이번엔 같이 가자, 네 고향으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는 눈을 감고 각성 능력을 발동했다.
드디어, 결단을 위한 수련의 시작이다.
53화.< 과도한 존재감 >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원시림.
햇빛이 가려지는 터라 살짝 어두컴컴한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수선자인 한유진에게 가장 선명히 다가오는 환경적 요소는 바로 풍부하기 짝이 없는 영기 농도였다.
지구의 열 배 이상, 대균열의 세 배 이상.
'이거지, 이거야.'
새삼 감탄하면서 그는 무용이를 자유롭게 풀어줬다. 바닥에 내려선 무용이는 그럭저럭 오랜만이라 할 수 있을 고향의 느낌에 잔뜩 신이 난 기색으로 주변을 마구 뛰어다녔다.
꼴에 입문기급 능력을 갖췄다고 그 속도가 매우 빠르기도 해서, 털색인 금빛 덩어리가 온갖 군데를 휙휙 날아다니는 듯했다.
"너한테는 딱 금의환향인가? 동족들 만나면 막 인기 폭발하는 거 아니야?"
찍! 찌직-!
"무수한 악수 세례와 함께 예쁜 암컷들이 막 달려들··· 아, 너 암컷이었지?"
찌직! 찍! 찍-!
"웬 놈팡이 같은 새끼는 만날 생각도 마라. 우선 원영기급에 올라서 인간 모습으로 화형(化形)할 수 있기 전까진 절대 안 돼!"
사실 그렇게 화형할 수 있게 된다면 상대가 그 누구든 더더욱 허락하지 못할 느낌이었지만, 일단 그렇게 일갈했다.
상당한 시간을 무용이가 마음껏 뛰어놀게 해준 그는 마침내 진정한 녀석을 품에 안고 예의 그 늑대 짐승들이 머무는 은신처로 향했다.
'그냥 호수 근처에 따로 동부를 만들어 볼까?'
문득 그런 생각도 떠올랐지만 그런 건 좀 천천히 고려해 봐도 된다. 일단 익숙한 장소에서 머무는 일도 썩 괜찮을 터다.
이동하면서 그는 드래곤 하트에 대해, 그리고 외단법으로 굳이 드래곤 하트를 계속 고집한 일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수선계에도 판타지 쪽의 드래곤과 비견되는 진룡(眞龍)이 당연히 존재한다. 요족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종족값을 가졌음은 물론이다.
하나 그들에 대해 딱히 고려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들이 결국 요족(妖族)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수선계의 진룡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요족이다.
그리고 모든 요족은 천요(天妖)라 불리는 어떤 신화적이고도 추상적인 존재의 피를 이은 후손들이다.
'마치, 요괴들의 도조와 같은 존재랄까.'
요괴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조상 천요가 도조와 같은 급이라고 주장한다. 수선자들은 당연히 천요가 대단하긴 하지만 명백히 도조 아래의 존재일 뿐이라며 못 박는다.
하나.
그 자존심 강하고 요족에게 매우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수선자들조차 천요를 도조와 같이 언급할 만큼, 그 존재가 지고하다는 점은 분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이러하다.
요괴의 종족값이 높다는 건 그만큼 천요의 피를 짙게 이었다는 뜻이며, 천요의 피는 태생적으로 수선자에게 이롭지 못하다.
'외단법의 많은 부작용은 결국 그릇이 천요의 피가 섞인 요족 내단이라는 점에서 기원하지.'
그 부작용이 얼마나 성가시고 해소하기 까다로웠으면 위단법이라는 것까지 새롭게 탄생했겠는가?
'즉, 설령 드래곤과 진룡이 같은 레벨의 존재라고 해도, 내게는 드래곤 쪽이 훨씬 더 나은 선택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상대가 요족인 진룡이라면 카사르녹스 때와 비슷한 계약 같은 건 조금도 기대할 수 없을 터다. 요괴와 수선자의 관계란 실로 더 이상 나쁘기가 어려울 정도니까.
생각하는 사이 그 늑대 짐승들의 은신처에 금방 도착했다.
그는 예전에 했던 방식대로 약한 척을 하며 놈들을 유인했다. 그러면서 이미 머릿속으론 은신처의 어디에 무엇을 짓고 놓을지 계산하고 있었다.
* * *
늑대 짐승들 처리는 대균열 속에서 괴물들을 사냥하는 것만큼이나 손쉬웠다. 요컨대 잡초를 뽑는 작업만큼이나 별다를 게 없었단 뜻이다.
무용이마저 경금검기를 내뱉어 두어 마리 처리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거처와 몇 가지 생활에 필요한 시설 및 물건들을 만들어 내는 일도 금방 끝났다. 여기서 한두 해 생활한 게 아니었기에 이전보다 좀 더 세련된 구성으로 개선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채 반나절도 안 걸려, 미환진기를 잘 배치하는 작업을 끝으로 수련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찍! 찍-!
무용이는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집이라는 것처럼 신이 난 모습이었다. 주인의 품을 벗어나선 못 쪽으로 향하는 것이, 제 능력으로 영기 품은 물고기를 사냥해 보려는 듯하다.
'저거, 가만 놔두면 아주 영어 씨를 말리겠구만.'
이제 이곳의 물고기가 품은 영기 정도론 수련에 별 도움이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 거처 바로 옆에서 물고기를 낚아 먹기가 매우 운치 있으면서 또한 별미인지라, 나중에 적당히 자제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혈목정과영주는 그 호수 괴물들로 담그면 딱이겠고······ 아, 그 혹성탈출 놈들 찾아가서 열매도 챙겨야지.'
이미 법혼기에 오른 터라 큰 효과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전혀 없진 않을 터이니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이득이다.
'내일 가자.'
시간상 그래도 된다. 지금은 당장 해보고 싶은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는 저물대에서 여태 얌전히 잠들어 있던 드래곤 하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꽤 긴 시간을 감탄에 잠겨 그걸 구경하기만 했다.
솔직히 그냥 보고만 있어도 계속 행복한 그런 물건이었다.
하나 언제까지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법.
눈을 감은 그가 드래곤 하트와 연결을 시도하며 은폐 상태를 풀었다.
직후.
원래의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회복한 드래곤 하트가 크기마저 양팔로 겨우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커졌다. 뿜어져 나오는 영기 파동이 이 농도 짙은 원시림 속에서도 벅차기 그지없었다.
"음······."
잠시 가만히 있던 그는 문득 한 가지 걱정을 떠올렸다.
그가 여기서 오래 머물며 주변을 많이 탐사해 보긴 했지만, 이 드래곤 하트의 기척이 대체 어디까지 퍼져나갈지는 가늠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미환진 법기로도 이 기척을 은폐할 수 없다는 게 이미 현실에서 증명됐다. 영석을 끼워 넣고 발동한다 한들 진법의 방어력과 살상력을 높일 뿐 은폐력에는 별 변화가 없다.
'내 진법술 지식으로도 뭔가··· 딱히 미환진 법기보다 나을 게 없단 말이지.'
적절하고 충분한 재료가 있다면 모를까, 지금 상태에선 지금의 이 조치가 최선이다.
'아예 없는 것보단 낫겠지. 원래도 영기가 풍부한 곳이니 좀 기척이 가려질지도 모르고.'
설령 뭔가가 습격해 오더라도 잘 대처하면 그만이다.
대처에 실패하면?
일단 죽은 다음 대책을 마련하면 된다.
그는 걱정을 접고는 눈을 감은 채 특수공법 삼경조화결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삼경조화결은 실력 향상을 위한 공법이 아니다. 이름처럼 총 세 가지 단계를 거쳐 특정 대상과 수련자의 부조화를 해소하는, 영적 동화작용을 위한 특수공법이다.
이러한 일을 짧게 '제련'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주로 법보 이상의 영적 특성을 갖는 물건들을 최대한 잘 활용하기 위해 쓰이며, 때때로 원주인의 손을 떠나 그 성능이 한풀 꺾여버린 법보 따위를 일부 회복시키기 위해서도 쓰인다.
또한 신외화신(身外化身)이라 불리는 일종의 분신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쓰이기도 한다. 분신만큼 영적 동화가 중요한 물건이 또 없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처럼, 외단법에도 충분히 유용하게 쓰일 수 있지.'
사전에 영적 동화를 마치는 것만으로도 매우 많은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이 드래곤 하트는 강탈한 것이 아니라 거래로 정당하게 양도받은 덕인지, 삼경조화결로 제련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살짝살짝 연결되어 존재감 은폐 등의 일이 가능했다.
'제련까지 다 성공적으로 마치면, 흡사 원래부터 내 심장이었던 것처럼 변할지도 몰라.'
그러면 분명 외단법인데도 진단법만큼이나 정통의 느낌을 내며 결단기에 오를 수 있을지 모른다. 실로 꿈만 같은 일이다.
기대심과 함께 그가 본격적으로 삼경조화결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처음 본격적으로 운용해 보는 공법인지라 당연히 미숙한 점이 많았다. 하나 초월적 이해력에 법혼기 수사의 지능까지 더해진 그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리는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고요히 잠든 듯, 그는 삼경조화결을 운용하며 드래곤 하트의 제련을 시도해 나갔다.
못에서 다 놀고 온 무용이가 잠시 근처를 어슬렁거렸지만 주인을 방해하진 않았다. 기어코 스스로의 힘만으로 잡아낸 작은 물고기를 근처에서 냠냠 뜯어먹으며 행복하게 뒹굴뒹굴거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슬슬 해가 저물어가는 무렵.
나른하게 누워있던 무용이의 귀가 쫑긋거리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한유진 역시 인상을 찌푸리면서 삼경조화결을 멈추고 눈을 떴다.
"······무용아, 빨리 나한테 와라."
드래곤 하트를 은폐하고 저물대에 넣으면서 말하기 무섭게.
푸화악-!
펼쳐두었던 미환진 금제가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거의 종잇장처럼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젠장······.'
걱정했던 불청객이 진짜로 찾아오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분이 나쁘다.
심지어 그 불청객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최소 결단기급, 아니, 결단 중후기급이라서 더욱 그랬다.
'하긴······ 저 정도 능력이 있으니까 멀리서도 이 냄새를 맡았겠지.'
여기 원시림에서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었지만 저런 녀석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즉, 그가 탐사해 본 범위 바깥의 아주 먼 거리를 두고 서식하는 놈일 수밖에 없단 이야기다.
그런데도 이렇게 찾아왔다는 점부터가 놈의 능력을 증명했다.
찢겨나간 금제의 여파를 지나치며 천천히 들어서는 놈은 전체적으로 흑갈색 곰을 닮은 짐승이었다.
하나.
등가죽을 포함하여 몸 곳곳에 솟은 은빛 금속성 가시와, 마찬가지로 금속성 철퇴 같은 가시가 흉악하게 돋아난 긴 꼬리를 보면, 무엇보다 놈의 몸을 감싸며 끝없이 나타나 부스러지는 듯한 황색 기운의 모습을 보면 그 흉포함과 비범함을 모를 수가 없었다.
놈은 마치 독 안에 든 쥐를 대하듯, 하나 그 쥐가 모종의 방법으로 도망쳐 버릴 것을 염려하듯 아주 천천히 접근해 왔다.
'대지계 기운을 풍기는 놈한테 지둔술로 도망치는 건 위험할 테고··· 풍둔술로 도망치는 게 나을까?'
무용이를 품에 안은 채 고민하는 그때.
- 끼아아아아악···!!
거대하며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하늘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고개를 치켜들자, 앵무새처럼 빛깔 화려하지만 날개가 두 쌍이나 달린 웬 프테라노돈 같은 괴물 한 마리가 허공을 배회하는 모습이 보였다.
'또 익룡이냐?'
천원성 전투가 생각나는 모습이다. 물론 지금 나타난 녀석은 결단기급에 불과한 듯하지만, 분명하게 그 자신의 드래곤 하트를 노린다는 점에서 더 위험했다.
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경쟁자의 등장에 급해지기라도 했는지, 그 곰 같은 녀석이 한순간 속도를 높여 돌진해 왔다. 돌진했다 싶은 순간 이미 코앞까지 들이닥치는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황급히 뇌둔술을 펼치자 섬광과 벽력음이 터지며 한유진의 신형이 훌쩍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하나 그렇게 나타난 그를 둘러싸며 암석인지 금속인지 모를 단단한 가시들이 무수히 치솟아 비좁은 감옥 같은 구조를 형성했다.
- 크허헝···!!
이어 엄청난 포효성과 함께 모든 것을 박살내며 곰의 앞발이 들이닥쳤다. 급히 지둔술을 발휘해 보려던 시도는 이 감옥을 구성한 상대의 힘에 의해 맥없이 가로막혔다.
그 찰나의 순간.
품속에 있던 무용이가 거세게 발버둥 쳐 벗어나더니 날아드는 곰 앞발을 가로막았다. 통명어수결로 전수해 준 자금광휘술을 최대한 발휘하는 채였다.
당연히.
다음 순간 녀석은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약간의 피를 흩뿌리며 산산조각 나버렸고, 한유진 역시 별다를 바 없는 꼴로 모든 방어 수단이 짓뭉개지며 세상이 암흑으로 물드는 경험을 했다.
그렇게 모든 감각이 사라진 어둠 속.
- 당신은 죽었습니다.
예의 신비로운 은빛 문자들이 떠오른다.
언제 멀쩡해졌는지 모를 모습으로 그 은빛 문자들을 바라보는 한유진의 표정이 더없이 음침했다.
54화. < 천영근자 이원희 >
당연히 수확물로 선택할 것이 없었다.
혹성탈출 놈들의 열매를 미리 챙겼다면 또 모르겠으나, 설령 그랬어도 굳이 현실로 가져가진 않았을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대기 장소에서 오래 머물 이유가 없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며 무뚝뚝하게 서 있던 한유진은 문득,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감정을 다 가라앉히고 나서야 대기 장소를 벗어났다.
현실 침대에서 깨어난 그는 가장 먼저 무용이를 살폈다.
녀석은 화들짝 놀라 깨어난 채 어리둥절하면서 경계심 어린 기색이었다. 저절로 손이 가서 쓰다듬어주게 되는 모습이다.
"짜식······ 네 충성심은 잘 봤다. 별 쓸모는 없었다만."
무용이는 비록 입문기급 능력을 갖췄다고는 하나 태생이 그냥 영기 품은 짐승일 뿐이다. 하여 지능이 별로 높지 못하다.
요컨대 녀석의 그 희생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일 수밖에 없단 이야기였다. 실로 감동적이게도.
찍! 찌직-!
"우쭈쭈, 그래, 그래, 놀랐쪄? 응?"
찍!
"이제 다 괜찮으니 걱정 마라. 현실에선 그런 일 없을 테니까."
머리를 쓰다듬고 작은 볼을 주물거리는 등.
녀석을 달래주면서 한유진이 살짝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그냥, 복수 명단에 그 곰 새끼를 올려놓기만 하면 된다. 마침 잘됐지 뭐냐? 내가 결단기에 오른 다음 그 새끼를 조져서 법보 재료로 삼으면 딱일 것 같더라고."
아직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내심 자신의 법보를 오행환과 비슷한 유형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뭔가 직접적인 공방 효과를 가졌다기보단 법술을 보조해 주는 쪽으로 말이다.
각성 능력을 통해 여러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고, 법술 습득에서 가장 고생스러운 부분을 초월적 이해력 덕에 날로 먹을 수 있으니.
오행환처럼 법술을 보조해 주는 유형의 보물이야말로 그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
'대지계 속성 재료를 미리 하나 찾은 셈 치자. 결단 중후기급이었으니 질이 떨어질 염려도 없겠지.'
그 허공을 배회하던 날개 두 쌍의 익룡 놈은 아마도 바람계 속성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중에 직접 확인해 봐야겠지만.
계속 무용이를 쓰다듬으면서 그는 생각에 잠겼다.
드래곤 하트의 무지막지한 존재감 탓에 원시림에서 삼경조화결을 완수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삼경조화결은 애초에 실력 향상을 위한 공법이 아닌 만큼 환경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일단 제련을 마치고 나면 그 존재감을 좀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그때 원시림에 가서 수련하면 된다. 가기 전에 기척 은폐를 위한 더 나은 수단을 마련하는 것도 좋을 터였고.
잠시 더 평온함을 찾기 위해 가만히 시간을 죽이던 그는, 어차피 생각할 거리가 생긴 참에 카르마나 쌓자는 심산으로 숙소를 나섰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거점요새를 나서려던 때였다.
"한유진 헌터님!"
어느 한 헌터가 그를 불러세웠다.
"박세룡 부단장님이 찾으십니다. 그 일전에 맡기신 일로 관련해서, 대균열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짧게 이어지는 나머지 이야기를 들은 한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원희를 진짜로 찾아냈구나.'
살짝 오묘한 기분에 젖은 채 그는 즉시 박세룡이 기다린다는 곳으로 향했다. 풍둔술을 사용하면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곳이었다.
* * *
대균열 바깥에는 당연히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온갖 방어시설들이 마련돼있다. 자연히 그 방어시설 운용자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 역시 작은 도시 같은 분위기를 형성할 정도로 만들어져있다.
박세룡과 원희는 바로 그런 장소의 어느 한적한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저택 같은 느낌을 풍기는 고위층 인사들을 위한 숙소였다.
"오셨습니까."
"예,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이는···?"
채 질문을 끝맺기도 전.
숙소 거실 소파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다른 사람의 것임이 분명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어린이, 이원희가 보였다.
그냥 보자마자 그 '원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유진은 박세룡이 건네주는 신상 명세가 적힌 서류뭉치를 신식으로 거의 한순간에 훑어내곤 그것을 다시 돌려줬다.
내용을 보니 여기 오기 전 이능력 검증훈련센터까지 들른 모양이었다.
"다 읽었습니다."
"아, 예?"
조금 당황한 그를 지나쳐 들어서자, 이쪽에 슬쩍 관심을 주면서도 고개를 돌리진 않고 있던 아이가 마침내 한유진을 쳐다봤다.
"안녕."
맞은편에 앉으며 친근하게 인사한다. 그러면서 슬쩍 신식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이미 S급 이능력을 각성했다니······.'
직전 박세룡이 건네준 서류에 적혀있던 내용이다. 그림자 등의 어둠을 다룰 수 있으면서 놀랍게도 그 어둠에 미약한 자아의지까지 부여할 수 있다고 한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네 번째 S급 헌터가 될 인재인 셈이다. 능력의 특수성과 나이를 고려했을 때 장래가 매우 촉망되기도 하는.
하나 다른 특이사항으로 적혀있길, 어째서인지 자신의 능력을 상당히 싫어한다는 모양이었다. 심리상담사의 소견에 따르자면 단순히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 살짝 무서워하는 느낌마저 있다고.
'그래서 각성 사실을 감추면서 헌터 전문학교에 가지 않았던 건가.'
만약 박세룡이 직접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발견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아이, 이원희의 능력을 감추는 솜씨는 뛰어났다.
생각하는 와중 계속 신식으로 살펴본 결과.
그는 눈앞의 이 아이가 수선계에서도 천재로 대우받는 그 천영근 보유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기본적인 수련 환경만 주어진다면 겨우 백일 정도 만에 법혼 승화율 4할을 달성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천영근자.
원시림이라는 대단한 환경적 이점을 누리면서 수련했던 한유진 자신조차 알려진 천영근자의 수련 속도를 절반이 살짝 넘는 수준으로밖에 따라잡지 못했었다.
'이 정도 재능에 각성한 이능력마저 암흑계와 영혼계가 뒤섞인 것이었으니, 그 종말 후 지구에서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도 납득이 간다.'
그가 내심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자니 곧, 이원희가 물어 왔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내가 아저씨로 보여? 삼촌이라고 해라."
"삼촌 아닌데요."
"당연히 그 삼촌은 아니지. 근데, 오빠와 아저씨 사이에 있으면서 앞으로 계속 만나야 될 것 같거나 어느 정도 친분이 생겼거나 앞으로 그렇게 될 것 같은 대상은 그냥 삼촌이라고 퉁치기로 우리 사회가 어느새 암묵적인 합의를 이뤄냈단다."
"···뭐라고요?"
"네가 날 삼촌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잠시 눈동자만 굴리던 이원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삼촌."
"좋아, 역시 똑똑하구나. 삼촌이 된 기념으로 한 가지 선물을 줄까 하는데, 혹시 받을 생각 있니? 네 이능력을 좀 더 잘 다스리는 법에 대한 건데."
자신이 꺼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탓인지 이원희는 침묵하며 좀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 그런 와중 문득, 한유진이 여태 안고 있던 무용이에게로 시선이 향하는 모습이었다.
"음······."
잠깐 고민하던 한유진이 무용이를 내밀었다.
"한번 쓰다듬어볼래?"
"···그래도 돼요?"
"너 혹시 동물을 보면 막 괴롭히고 싶다거나 상처입히고 싶은 충동이 든다거나 그러니?"
"아니요!"
살짝 성내며 답하는 모습에 한유진은 안심하며 무용이를 건넸다.
아주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그런 무용이를 받아 든 아이는, 생각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에 놀랐는지 조금 경직되기까지 했다.
찍! 찍-!
귀여운 울음소리를 들은 이원희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반짝거린다. 그걸 보며 한유진은 품고 있던 경계심이 일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무용한 녀석을 이용해 제대로 안면을 트면 되겠다.
생각하며 그는 이 아홉 살짜리 천재를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머릿속 한구석에서 고민했다.
* * *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새 해가 다 저물어 슬슬 달이 보일 때였다.
"쟤를 계속 여기서 머물게 할 수는 없겠죠?"
"여기가 교육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지요."
"음······ 원래 그 판자촌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혹시 방법 없냐는 뜻을 담아 한유진이 곁에 선 박세룡을 쳐다봤다.
"보호자인 할머니를 대상으로 서울에 임대주택을 포함해서 여러 방면으로 지원해 주겠습니다."
"그거 좋네요. 할머니랑 사이는 어떻던가요?"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한데······."
조금 갈등하는 기색이던 박세룡이 슬쩍 뒤편의 숙소를 쳐다보고는, 잔뜩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가르쳐 키우실 생각이십니까?"
"네, 일단은요."
무려 천영근을 가진 어린 천재를 발견했는데 이걸 안 키운다는 것도 웃긴 이야기다.
설령 뭔가를 가르치지 않더라도, 행여나 그 영원의 여신교 같은 이들과 접촉하게 될 일을 막으려면 이원희는 반드시 곁에 두고 지켜봐야 한다.
"······."
한데 대답을 들은 박세룡은 더욱 갈등하는 기색이 됐다.
한유진은 왠지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섭습니까?"
"···예. 솔직히 그렇습니다."
"저 아이의 잠재력에 대한 겁니까, 아니면 저 아이를 손에 넣고 훗날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를 저에 대한 겁니까?"
"둘 다입니다."
직후.
갑작스레 박세룡이 무릎을 꿇었다. 한유진은 겉으로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나 속으론 잠시 놀랐다.
절대로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취한 행동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선생님."
후배님이었던 칭호가 다시 바뀌었다.
"선생님은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저에 대한 조사는 다 해 보셨을 텐데요?"
"선생님은 그런 조사 따위론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제 추측을 한번 말씀드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잠깐의 침묵 후 그가 말했다.
"회귀자나 환생자, 혹은 시간 여행자나 평행세계 여행자. 맞으십니까?"
"음······."
이전에 그 드래곤 하트의 기척 때문에 생긴 착각과, 이번에 이원희를 찾아냄으로써 그때 안전가옥에서 경험한 환각이 진실임을 깨달은 점이 더해져, 이런 추측까지 해낸 것 같다.
"선생님의 각성 능력은 마나 관련 지식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런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더 격 높은 그런 능력인 게 분명합니다."
"일단 일어나세요."
한유진은 그가 더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어물술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왜 이런 행동을 하십니까?"
"선생님의 진정한 목적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목적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다시 무릎을 꿇으려는 그를 한유진이 즉시 제지했다.
"어허, 계속 이러시는 거 별로 안 좋습니다."
단호하게 말한 뒤 그가 덧붙였다.
"지금 저와 박세룡 씨의 관계가 나쁘지 않습니다. 이대로 계속 잘 발전하면, 알아서 자연스럽게 박세룡 씨가 원하는 그런 관계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아시겠어요?"
"···네, 선생님."
"호칭도 원래대로 부르시고요."
"예, 후배님.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박세룡의 권력지향적 면모가 이런 식으로 발동될 줄은 몰랐다.
전에도 한 번 느꼈지만,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는 격언을 이렇게나 잘 지키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대체 혼자서 뭘 어디까지 추측해 본 거야.'
내심 속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한유진은 그와 몇 가지 더 자잘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참, 여유 되시면 이원희 아버지에 대해서도 한 번 조사해 보세요. 아무래도 자기 능력을 꺼리는 이유가, 그걸로 자기 아버지를 사망하게 만들어서인 것 같습니다. 그냥 추측이긴 합니다만."
"예,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무난하게 작별했다.
원희에 대한 일도 대략 처리했겠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서 다시 드래곤 하트 제련을 위한 각성 능력을 사용해 볼 차례였다.
* * *
어둡고 공허한 대기 장소.
한유진은 예의 그 문 앞에 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어떤 바람을 떠올려야 실패 없이 드래곤 하트 제련에 적합한 세상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여태 경험한 바가 있고, 스스로의 각성 능력인 만큼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바가 있으며, 법혼기 수사답게 향상된 지능도 있다.
목적에 딱 맞는 이상적 형태의 바람을 떠올려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잠시 후.
몇 번의 검토까지 마친 그가 진지한 태도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손이 닿아 고정된 문의 형태는, 금도금 된 무늬가 새겨진 양옆의 문설주, 고풍스럽게 드리워진 처마, 옥과 금으로 장식된 문짝 등, 동양적이면서도 상당히 세속적인 느낌을 풍기는 모습이었다.
'청운천주의 강호무림······?'
강호무림이라는 단어는 매우 익숙하다. 그야 무협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니 익숙할 수밖에 없다.
잠시 생각하던 한유진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선협 같은 세계도 있는데 무협 같은 세계가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영기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걸 이용해 육체적인 무술을 발전시키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그 배경에 동양적 느낌의 문화만 더해지면, 딱 강호무림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무협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다.
'대략 안전하면서도 그럭저럭 도움이 되는 세계를 원했으니, 잘 찾아보면 분명 내가 얻어갈 만한 게 있을 거다.'
그는 마지막으로 준비를 점검한 뒤.
잠든 상태의 무용이를 고쳐 안으며 문을 열고 나아갔다.
55화. < 청운천주의 강호무림 >
통과해 나온 문이 사라지는 사이.
한유진은 무용이가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주변 광경을 살폈다.
그리 울창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어느 산중의 흙길 위였다. 길은 아래쪽으로 계속 이어지다가 모퉁이를 돌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이다. 위쪽으로는 많이 낡아서 버려진 지 족히 몇 년은 지난 듯한 건물이 보인다.
하늘엔 유유히 떠 가는 구름과 함께 아름다운 노을이 져 있어 잠시 그를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영기 농도는 지구의 9할이 좀 안 되는군.'
단지 영기 농도 하나만 갖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몇 가지 추측을 해 볼 수는 있다.
아마도 이 세상의 무력 수준은 그리 높지 못할 것 같다. 애초에 그의 바람이 안전을 원하기도 했거니와, 영기 농도가 1할 정도 낮은 것만으로도 많은 요소들이 크게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법문의 형성 빈도라든가, 특별하고 뛰어난 효과를 내는 영식의 성장이라든가,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을 영수의 탄생이라든가.
'다짜고짜 틀어박혀서 드래곤 하트 제련을 시도하기보단, 일단 며칠 정도 돌아다니면서 이 세상 분위기를 살피자.'
생각하며 그는 바로 근처의 건물로 향했다.
가까이서 본 그곳은 일종의 암자 혹은 영당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듯했다. 건물 안쪽을 둘러보기 시작하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는데, 특히 입구 위쪽에 걸린 현판의 문자와 내부의 '불상'이 결정적이었다.
'윤회성불교라······.'
당연히 이 세상의 문자는 한자가 아니었고, 이곳의 '불'도 지구의 그 '불'과 똑같지 않았다.
하나 느낌적인 부분에선 비슷했다. 아무리 세상이 다르더라도 인간이라는 종족이 만들어 내는 문명은 결국 서로 유사성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따지자면 여태 방문했던 선협 세상과 판타지 세상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아니면, 애초에 내 각성 능력으로 이동할 수 있는 세상이 그런 곳들뿐일지도 모르지.'
혹은 인간이라는 종족이 이렇듯 여러 세상에 분포된 현상과도 연관되었을 수 있다. 사실 뭔가 이상함을 느끼면서 따지려면 그 부분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
둘러보기를 마친 그는 이 작은 버려진 암자의 가장 큰 건물, 돌로 된 불상이 모셔진 곳으로 가 섰다.
지구의 불상보다 좀 더 연륜이 있어 보이고 근육질이다. 하나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충분한 자비로움을 드러낸다.
'이 윤회성불교의 성인도 부처라고 부르나?'
잡념과 함께 혹시 영적인 무언가가 있을까 신식으로 샅샅이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찍-!
"마음에 든다고?"
왠지 무용이는 이 윤회성불교의 성인 불상이 마음에 든 기색이다. 그런 녀석을 쓰다듬어주고 여기를 떠나려던 때였다.
법혼기에 오르며 향상된 오감, 그중 청각을 통해 누군가가 급히 접근해 오는 기척이 감지됐다.
뭔가를 짐작한 한유진은 슬며시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장내 한곳에 자리 잡았다.
'괜히 여기에 문이 열린 게 아니겠지. 뭔가 내 바람과 부합하는 사건이 벌어질지도?'
은영술과 영안술을 동시에 펼치면서 그는 만에 하나를 위한 긴장감도 놓치지 않았다.
곧.
두 명의 사람이 불안하고 지친 기색으로 이 암자의 담장 안에 들어섰다.
* * *
서광세가의 옥면검룡, 서광가후.
현백파의 청류백봉, 은미령.
한 쌍의 선남선녀처럼 보이는 두 검수는 언뜻 시야에 들어온 암자를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둘 다 내공을 발휘할 여력이 거의 바닥난 상황인지라, 여기를 그냥 지나치면 안 그래도 쌀쌀한 이 날씨에 풍찬노숙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건 고스란히 체력과 정신력의 손실로 이어질 터였고 말이다.
"미령 소저, 잠시 쉬어가는 게 좋겠소."
서광가후의 그 제안에 은미령도 바로 수긍했다. 비록 여태 쫓기고 있었다지만 느낌상 추적을 떨쳐낸 지가 벌써 한나절이다.
버려진 지 몇 년은 지난 듯한 인기척 없는 암자 내부를 빠르게 둘러보면서 둘은, 그나마 가장 크고 상태가 좋아 보이는 중앙 불당으로 향했다.
"두 시진 정도 쉰 다음 강서로 넘어가기만 하면, 그때부턴 태양문의 영역이니 안전할 것이오. 불침번을···."
말하며 안으로 들어서려던 서광가후가 흠칫 놀라 검 손잡이를 잡았다. 한 발 뒤에서 따르던 은미령 역시 비슷했다.
웬 유랑도사 비슷한 차림의 한 남자가 허깨비처럼 서 있는 모습은 계속 보고 있으면서도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찍-!
그때 그 정체 모를 이의 품속에서 웬 귀여운 짐승이 울음소리를 낸다. 덕분이랄지 급격히 살벌해지던 분위기가 살짝 주춤했다.
"···도사께선 누구십니까?"
"그냥 떠돌이 행인이오. 그쪽 둘은?"
되돌아오는 반문에 서광가후의 시선이 빠르게 상대를 훑었다.
진짜 떠돌이 행인이라기엔 보따리 등이 없고, 행색 역시 흙먼지 따위로 더러워진 부분이 조금도 안 보이며, 무엇보다 지금도 계속 기척이 전혀 잡히지 않는 아주 괴이한 자였다.
"어느 고인이신지 모르겠으나, 쉬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빠른 판단을 내린 그가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며 오른손 주먹을 왼손으로 감싼 채 가슴 높이로 들어 보였다. 딱 포권지례라 부르면 적당할 인사였다.
"선객이 있는 줄 몰랐으니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여기는 주인 없는 버려진 암자인데 무슨 객의 선후를 따지시오? 그냥 들어오시오. 이제 날도 어두워지는데."
"아닙니다. 도사님의 좌망수행을 방해할 수야 없지요. 저희는···."
바로 그때.
- 허허허.
낯설고 음산한 다른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장내를 메아리처럼 울렸다.
- 고작 도망쳐온 곳이 여기인가? 이번 세대의 용봉들이 대단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다 허명인 모양이로구나.
"···누구냐."
잔뜩 긴장한 서광가후와 그 옆의 은미령이 즉시 검을 뽑아 들며 사방을 경계했다. 그러면서 힐끗 건물 안쪽 구석에 선 정체불명의 도사를 보더니, 이를 악물고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었다.
자칫 스스로를 가두는 꼴로 보일 수 있겠으나, 상대가 음성을 전해오는 수법이 어찌나 고명한지 그 위치를 전혀 알 수가 없어 일단 몸을 엄폐하려는 의도였다.
- 하나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는 알겠군. 실로 기린과 봉황의 용모로다.
그 사방에서 울리는 듯한 소리 이후.
서광가후가 활짝 열어놓은 문 바깥으로, 금실로 화려하게 치장된 검은색 치렁치렁한 의복을 입은 한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 중년인을 본 두 젊은 남녀의 안색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음마고주."
여자, 은미령이 중얼거린 말에 기이한 빛이 도는 듯한 안광을 가진 그 중년인의 시선이 단번에 꽂힌다.
"군이라고 칭하도록."
기묘하게 울리던 소리가 평이하게 바뀌었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음산함은 한층 진해졌다.
"무림의 명망 드높은 선배님께서 저희 같은 일개 후기지수들에게 어쩐 용무이십니까?"
"뻔하지 않으냐? 본좌에게 그 장보도(藏寶圖)를 건네거라."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두 젊은 남녀는 약간의 식은땀마저 흘리면서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러는 때 중년인이 덧붙였다.
"그리고 너희 둘을 데려가야겠다."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본좌가 속한 암영신교가 아니겠느냐?"
말하면서 상대를 압박하려는 것처럼 느긋하게 접근해 오던 중년인이 어느 순간.
안쪽에 조용히 선 한 도사 차림의 누군가를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 최대한 그 반응을 억눌렀기에 두 젊은 남녀는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분명하게 놀란 모습이었다.
"한데, 그쪽은 대체 누구시오?"
이후 마치 원래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 분위기를 유지하며 묻는다.
그래도 태도가 전혀 오만하지 않고 적대하기 싫다는 듯 최소한의 격식을 차린 어조였다.
"그냥 떠돌이 행인이오."
돌아온 대답은 젊은 남녀가 처음 물었을 때와 비슷했다.
이후로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두 남녀는 최소한 이 암자를 먼저 차지하고 있던 정체불명의 기인이 적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슬금슬금 그쪽으로 물러나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그런 모습을 보는 중년인, 음마고주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들으셨겠지만 본좌는 음마고군이라 불리는 사람이오. 혹 별호가 있으시오?"
"딱히 없소만."
다시금 가볍지 않은 침묵이 흐른다.
음마고주인지 음마고군인지, 중년인은 무슨 판단을 내렸는진 모르겠으나 그 도사 차림의 이에게서 시선을 뗐다. 이어 원래 목표물이던 두 젊은 남녀를 쳐다봤다.
그때쯤 그들도 도사가 딱히 선인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접근하는 행동을 멈춘 상태였다. 애초부터 적아가 불분명했거니와, 괜히 더 접근했다간 방관자로 남을 이를 적으로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명확한 선택지를 주지."
잠시 방해받은 일을 만회하려는 듯, 한층 더 음산해진 어조로 중년인이 말했다.
"얌전히 장보도를 내놓고 본좌를 따라가겠느냐? 아니면 여기서 헛되이 죽겠느냐?"
실로 생사의 선택지였다.
그런 무겁기 그지없는 선택지를 내놓은 중년인이 품에서 작은 나무함 두 개를 꺼내 들었다.
한 나무함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보이는 것은, 흑백이 기묘하게 엉킨 무늬를 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의 웬 연충이었다.
중년인의 별호에 고(蠱)가 들어가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음양고에 대해선 이미 들어봤겠지. 살기를 택한다면 이걸 너희 몸에 심을 것이다."
"그딴 걸 심을 바에야 차라리 죽···."
"음양고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말해주마. 이건 내공을 최소 반 갑자 이상 향상시킬 수 있는 영충이자 동시에, 백독불침의 공능을 선사하는 귀충이며, 우리 암영신교의 핵심 인원들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세례물이기도 하다. 본좌 역시 몸에 이 음양고가 한 마리 심어져 있지."
세간에 알려진 음양고의 효과는 그저 '양고'를 가진 이가 '음고'를 가진 이의 생사여탈권을 가진다는 부분뿐이다.
하여 나머지 효과를 듣자 두 젊은 남녀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반 갑자의 내공이란 고된 수련을 30년 동안 이어갔을 때의 기대 성과를 뜻하고, 백독불침은 백 가지 독을 막는다는 뜻으로 굳이 더 설명할 것도 없이 엄청나게 유용한 효과였다.
암영신교의 핵심자들이 전부 음양고를 받아들인다는 것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음양고가··· 선배님의 독문고충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본좌는 그저 이것을 관리할 뿐이다. 그리고 너희는 운이 매우 좋구나."
그의 기이한 빛을 머금은 듯한 두 눈이 남녀를 차례대로 훑었다.
"너, 옥면검룡은 흑사혈녀께서 점찍으셨다. 그리고 너, 청류백봉은 무려 우리 암영신교의 이공자께서 마음에 들어 하신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작 너희 따위를 잡는 데 본좌가 직접 움직였겠느냐?"
그는 말하면서 다시 나무함의 뚜껑을 닫았다. 이후 그 두 개를 남녀 쪽으로 하나씩 허공섭물의 묘리를 발휘해 전달했다.
오직 절정경에 달한 무인만이 펼쳐 보일 수 있는 내공기예 중 하나인 바로 그 허공섭물이었다.
고절한 기예 앞에서 두 젊은이는 얼결에 나무함을 하나씩 받아 들고 말았다.
"요컨대 본좌가 너희를 데려가겠단 말은, 포로 따위로 잡아가겠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암영신교의 핵심 제자로 삼아주겠다는 이야기다."
거기까지 말한 중년인의 기세가 갑작스레 살벌해졌다.
"설명은 다 끝났으니, 이제 선택해라. 설마 지금껏 보인 본좌의 호의를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자 잿빛으로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마치 무수한 벌레들의 집합체처럼 꿈틀거렸다.
"거절한다면······ 궁극의 고통이 뭔지 알려주겠다."
두 젊은 남녀의 안색이 좀 더 창백해졌다.
음마고주의 잔혹함은, 그에게 당한 피해자들의 처참함과 함께 무림에서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였다. 단지 보기에만 끔찍해서가 아니라 그 과정을 포함해서 말이다.
혹자들의 말에 의하면 피해자들은 전부 오랜 시간을 분근착골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다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음마고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흉악해졌다.
음마고주는 비록 절정경이긴 하지만 곧 화경에 오를지도 모르는, 말하자면 초절정의 경지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강자였다. 그리고 서광가후나 은미령은 이제 막 일류경에 발 디뎠을 뿐인, 말 그대로 후기지수 중 잘나가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 둘이 초절정 고수 앞에서 성공적으로 도주할 가능성은 한없이 작았다.
어느 순간.
서광가후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순간 중년인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드리워졌다.
"고를 삼켜라. 절대 씹어서는 안 된다."
"······."
"그리고, 그 전에."
잠시 말을 끊은 그가 여태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도사를 쳐다봤다.
"저자를 죽여라."
"음?"
반응은 즉시 나타났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가벼운 의문성이었다.
"갑자기 나를 죽이라고?"
"그러면, 별호조차 없는 무명인사 주제에, 감히 이런 상황에서 살기를 바랐나? 어차피 여기 있던 것부터가 죽을 운명이었음을 진정 몰랐다고?"
말을 잇는 와중 중년인의 전신을 타고 예의 잿빛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나름 귀식술에 조예가 깊은 듯하다만, 네 허장성세는 다 간파됐다. 굳이 본좌가 손을 쓸 것도 없지."
말한 이후 그가 식은땀투성이가 된 서광가후를 재촉했다.
"저자를 죽여라."
56화. < 법술 vs 무림인 >
상황은 명백했다.
음마고주는 도사를 살려주고 싶지 않다. 그리고 경험과 논리를 바탕으로 판단한 바 도사가 감히 건드려선 안 될 대단한 고수일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만에 하나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자기 대신 서광가후라는 희생양을 내세운 것이었다.
판단이 맞다면 어차피 처리해야 했을 놈을 잘 처리한 셈이고, 틀렸다면 상대가 손 쓰는 모습을 보며 실력을 가늠한 뒤 직접 해치우거나 도망치면 된다.
그런 사실을 서광가후도 모르지 않아 이리도 긴장하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 도사 차림의 인물이 범상치 않다고 여기고 있었으며,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배신하라는 협박에 굴한 즉시 대뜸 낯선 이를 죽이라고 하니 심리적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
이미 협박에 굴한 순간 다음 선을 넘기도 쉬운 법이었다.
설령 진짜로 협박에 굴한 게 아니라 어떻게든 시간을 끌며 기회를 엿보려던 것일지라도, 또다시 생사의 선택지가 주어졌으니 회피할 방도가 없다.
하여 그가 여태 꼬나쥐고 있던 검을 막 도사에게 겨누려던 순간.
퉤-!
불현듯, 그 도사가 품에 안고 있던 무해해 보이는 짐승이 입에서 뭔가를 뱉어냈다.
뱉어냈다고 느낀 순간 그 금색 빛줄기가 서광가후의 발 바로 앞에 꽂혀들어 사라졌는데, 그로 인해 만들어진 바닥 구멍의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
"······."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서광가후는 그 바닥에 만들어진 예리한 구멍을 보며 얼어붙었고, 은미령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으며, 무엇보다 음마고주의 표정이 참으로 해괴해서 볼만했다.
"어휴."
그리고 도사가 짧은 한숨과 함께 혀를 찼다.
"위력에 의한 간접정범은 정상 참작되기 마련이지. 그러니까 딱 한 번 봐준다. 알겠어?"
"···예?"
"뒈지기 싫으면 가만있으라고."
다소 상스러운 어투로 말한 도사, 한유진이 마침내 상황을 방관하던 태도에서 벗어났다.
오가는 대화가 제법 이 세상에 대한 윤곽을 그릴 수 있게 해줘서 가만있었더니, 사람을 아주 가마니로 본 것이 분명했다.
"자."
한유진은 안고 있던 짐승, 무용이를 들어 올려 음마고주를 향해 내밀었다.
"일단 네 상대는 얘다. 재밌겠지?"
"···뭐라고?"
음마고주는 여전히 해괴한 표정인 채 반사적으로 답했다.
"얘를 이기면 내가 직접 상대해 주마. 시작!"
직후.
퉤!
무용이가 다시 경금검기를 뱉어냈다. 음마고주는 즉시 반응하여 그것을 쳐내려다가 문득 위험을 감지했는지 급격히 몸을 틀어 피했다.
파슥-!
과연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아, 그가 두르고 있던 기운이 무력하게 관통당하곤 그 뒤편 땅까지 깊은 구멍이 생겨났다.
해괴하던 음마고주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 진지해진다. 직후 재차 날아드는 금색 빛줄기를 피하며 즉시 공격해 들어갔다.
마치 신형이 두세 갈래로 분열되는 듯한 기이한 움직임이었다.
운회음류보(雲灰陰流步)라 불리며 상대의 감각을 속임과 동시에 방향 전환이 매우 자유로운 보법이다. 연계되어 뻗어진 손에서 잿빛 어두운 기운이 급속도로 쏘아졌다.
마치 벌레 떼 우는 듯한 소리와 함께 회색빛 장영이 덮쳐든다. 한 번만 적중당하면 끊임없이 회색 벌레 같은 기운의 침식을 받게 되는 악명 높은 회고천사장(灰蠱天邪掌)이었다.
찍!
"어휴···."
그에 맞서 다급한 울음소리와 한숨 이후.
도사에게서 자금빛 광휘가 뿜어져 나오더니 음마고주의 장법을 아주 가볍게 막아냈다. 회고천사장 특유의 기운 침식 효과는 조금도 발휘되지 못했다.
하나 그 장영 뒤에서 귀신 같은 얼굴로 달려든 음마고주는, 명백히 전력을 다하는 기색으로 한순간에 수 차례가 넘는 치명적 일격을 연신 쏟아냈다.
파바박-!
어찌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지 그가 박차는 건물 바닥이 반쯤 부서져 나간다. 흡사 두어 개의 분신과 협공하는 듯, 어두운 잿빛 기운이 휘몰아치며 커다란 장영이 자금빛 광휘를 사방에서 두들겼다.
일부는 단순한 위력으로 타격하고, 일부는 침투경의 묘리를 살려 정체 모를 광휘를 파훼하려 하고, 나머지 일부는 내가중수법의 묘리를 통해 보호막 안쪽으로 직접 충격을 투사하려 시도한다.
구우우웅···!
하나 그 모든 시도는 기묘한 낮은 공명음만을 일으킨 채 모조리 막혀버렸다.
"호, 호신강기(護身罡氣)···?!"
살기 위해 허겁지겁 물러났던 두 남녀 중 여자, 은미령이 경악하여 중얼거린다.
무림의 상식대로라면 지금 한유진의 보호막은 그렇게밖에 해석될 수 없었다.
또한, 단지 호신강기만으로 초절정 고수의 공격을 제자리에서 모두 받아내려면 화경의 경지만으론 부족했다!
그때 여전히 신형이 기이하게 중첩되어 일렁이는 모습으로 원래 자리까지 황급히 물러선 음마고주가 불현듯 기운을 거두더니 머리를 숙이며 포권지례을 취했다.
"소인이 감히 눈이 어두워 현경에 오르신 고인을 몰라뵈었습니다. 저희 암영신교의 체면을 봐서라도 부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음, 그래그래. 이걸 막아내면 살려주마."
여상하게 답한 한유진이 손을 뻗어 직접 법술을 시전했다.
일련의 기운이 마치 물처럼 모여들어 륜의 형상을 취한 직후, 가공할 속도로 쏘아진다.
음마고주는 정말로 막아낼 생각이었다. 설마 저 정도 실력을 갖춘 반로환동의 현경 고수가 한 입으로 두 말하진 않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 들이닥치는 그 수륜의 기세를 느꼈을 때 몸이 저절로 움직여 간신히 피해냈고, 그렇게 빈 땅에 수륜이 적중했다.
꽈과광-!!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져 나오며 흙더미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암자 전체가 진동하면서 건물들에 쌓여 있던 흙먼지가 부스스 떨어져 흩날리고, 부실하던 담장 일부는 무너져 내리기까지 했다.
공격이 떨어져 내린 곳엔 어둡고 큰 구덩이가 생겨났다. 범위는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으나 깊이가 대단해서, 사람이 뛰어내리면 자력으로는 도저히 올라올 수 없을 수준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던 음마고주의 안색이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창백해졌다.
"뭐야, 막으라니까 왜 피해?"
"소, 소인의 실력으론 그런 강기공(罡氣功)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내가 만족할 때까지 버텨봐라. 대신 위력을 좀 낮춰줄 테니까, 전부 버티면 정말로 살려준다."
말을 끝맺은 한유진이 가벼운 날숨을 뱉어냈다.
그 날숨에서 희미한 연녹빛 법문 파동들이 반짝인다 싶더니 순식간에 강렬한 돌풍으로 화해선 상대를 덮쳐갔다.
대경한 음마고주가 전력으로 내공을 발휘하며 온갖 회피와 방어를 선보였다.
몸에서 기이한 일렁임을 뿜어내며 고속으로 움직이자, 법혼기 수사인 한유진조차 신식 없이 방심하면 순간 헷갈릴 것 같았다.
그 상태로 절반 이상의 풍검을 회피하고, 나머지 절반은 몸에 두른 잿빛 기운으로 어떻게든 흘려내고, 나머지는 잿빛 기운이 가장 집중된 손으로 후려쳐 튕겨낸다.
단순히 힘으로 튕겨내는 게 아니었다. 이화접목의 묘리를 살려 경로를 미세하게 틀어 다른 풍검과 상쇄시키는, 실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기예였다.
그렇게 풍인술의 모든 힘이 상쇄될 때까지 음마고주는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끝내 살아남았다.
아무리 평범한 입문기급으로 위력을 조절했다지만 실로 놀라운 일이어서, 한유진은 반사적으로 박수칠 뻔했다.
감히 자신을 죽이려 했던 괘씸한 놈을 통해 이 세상의 무력 수준을 알아보려던 목적도 잊고 말이다.
"앞으로 세 번 남았다."
그는 감탄을 담아 남은 횟수를 알려주며 화탄술을 펼쳤다.
튕겨낸 손가락 끝에서 작은 불씨가 반짝인다 싶더니 순식간에 사람 머리통만 해지며 쏘아진다.
순간 불어닥치는 열기 섞인 돌풍에 서광가후와 은미령이 기겁하여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음마고주 역시 연이어 펼쳐지는 경천동지할 수단들에 기겁한 기색 가득했으나, 최선을 다해 날아드는 열양기공에 대응했다.
회고천사장으로 연신 잿빛 장영을 쏘아냄과 함께 운회음류보의 구명식을 발휘해 여태까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거리를 벌린 것이다.
꽈과과광-!!
이전의 수륜술 때보다 훨씬 더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
작은 지진이 발생한 듯, 건물들이 단지 흙먼지를 떨어트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불안하게 흔들거린다. 또 한 차례 담장의 부실한 부분들이 무너져 내린 것은 덤이다.
떨어져 내린 흙먼지 따위로 잠시 혼탁해졌던 공기는 곧, 불어닥치는 열기 섞인 돌풍에 멀리멀리 흩어져 사라졌다.
드러난 빈 땅의 구덩이는 대기가 끓어오르는 모습으로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지옥 같은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 두 번."
"고, 고인께선 부디 용서를···!"
겁에 질린 음마고주를 보던 한유진의 눈에서 순간 자색 광망이 번뜩였다. 그에게 용서를 비느라 눈치를 보던 음마고주 역시 그 광망을 목격했다.
직후.
"크학···!"
그가 매우 고통스러운 듯한 짧은 비명을 터뜨리며 비척비척 물러섰다. 코피까지 주르륵 터뜨리는 채였다.
하나, 환몽심탈술을 시전했던 한유진은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아무리 입문기급 시전이었다지만, 이걸 막아?'
이 세상 '무림인'들은 그 아스트라디아 세상의 기사들처럼 약점 명확한 성장을 이룬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지구 헌터들과 비교해 봐도 훨씬 더 우월했다.
판단하기에, 지금 눈앞의 이 음마고주는 한국의 S급 헌터인 박세룡보다 힘의 체급이 낮은 듯했으나, 단지 체급만 좀 부족할 뿐 기술적 측면을 고려하면 박세룡이 최소 셋은 있어야 상대가 될 것 같았다.
일단 환몽심탈술을 방어해 낸 것만으로도 박세룡보다 영적 측면에서 명백히 뛰어남을 증명했다.
"마지막이다. 정신 차려라."
친절하게 경고까지 해 준 한유진이 음마고주를 향해 손가락을 겨눴다.
직후.
빠콰쾅-!!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내리쳤다. 피하고자시고 할 시간이 없는 거의 즉발에 가까운 공격이었다.
"끄허허··· 어어어···!"
그 낙뢰에 맞은 음마고주는 전신이 시커멓게 탄 모습으로 입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경련했다.
"그걸 맞고도 살다니!"
이번엔 더욱 감탄해서 한유진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소리쳤을 때.
털썩-
음마고주가 원망 가득한 눈빛을 품은 채 나무토막처럼 뒤로 넘어갔다.
그렇게 신식으로 살피는 와중 곧, 무력하게 숨이 끊어지는 모습이었다.
"아이고··· 그게 마지막이었는데!"
너무나 감탄스러웠기에 진짜로 살려줄 마음도 있었다. 한데 이렇게 죽어 버렸으니 더는 고민할 가치가 없게 됐다.
찍! 찌직-!
"그래, 그래. 나쁜 악당은 너굴맨 대신 내가 처리했으니까 안심해라."
품속 무용이를 한 번 쓰다듬으며 한유진은 감히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두 젊은 남녀를 쳐다봤다.
"자, 그럼······."
뭔가 더 말을 하기도 전.
"고, 고인께선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서광가후가 완전히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엎드려 외쳤다.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위력에 의한 간접정범은 정상 참작되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좀 짜증 났던 건 사실이지."
잠시 이어지는 침묵에 엎드려 비는 서광가후의 떨림이 심해졌다.
"그 장보도인지 뭔지하고, 네가 받은 음양고를 내놔라."
"여기··· 여기 있습니다···!"
서광가후는 품에서 허겁지겁 웬 비단 쪼가리를 꺼냈다. 그리고 음양고가 든 나무함과 함께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건네주는 모습이었다.
"너도 음양고는 내놔라. 설마 그거 먹고 암영신교인지 뭔지에 가려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은미령도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다가와 한유진에게 더없이 공손하게 나무함을 건넸다.
"고인께서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구명지은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온 노력을 다해 갚겠습니다."
"음."
미세하게 몸을 떠는 와중에도 나름 또박또박 하는 말이 참으로 듣기 좋다.
'진짜 미인이긴 하네.'
사실 그런 감상에는 은미령이라는 여자의 실로 뛰어난 외모가 한몫했다. 현대적 안목을 가진 한유진으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미모였다.
"괜찮으시다면 존성대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봐서 알려주마. 일단··· 너희 원래 어디로 가려고 했지?"
잠시 멈칫한 은미령은 상태 안 좋은 서광가후를 대신해 답했다.
"여기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장강(長江)을 건너 강서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곳은 태양문의 영역으로 저희를 쫓는 암영마교가 감히 발 디딜 수 없는 곳입니다."
암영신교가 아닌 암영마교라고 했다. 또한 태양문이라는 집단이 매우 강력한 모양이다.
"잠시 동행하자. 가면서 이래저래 물어볼 게 많다."
"저희로선 감사할 따름입니다."
"휴식은 가면서 천천히 하자고. 그러니까, 쟤 좀 네가 달래봐라."
여전히 엎드려 떠는 서광가후를 턱짓하며 한유진이 말했다. 은미령은 살짝 난처한 표정이었으나 즉시 움직여 그에게로 향했다.
* * *
한유진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건 당연히 이 세상 무림인들의 강함 경지에 대한 것이었다.
은미령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대략 이러했다.
그저 무술 익힌 범인과 다름없는 삼류경.
세상천지의 기를 느끼고 다룸으로써 힘과 속도가 비범하게 향상되며, 무기의 강도와 예기 등을 올릴 수 있는 이류경.
오감이 향상되고 사고가 민첩해지며, 본격적으로 기를 외부로 발출할 수 있어 검명(劍鳴)등의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일류경.
단지 기를 발출하는 정도를 넘어 검기(劍氣)와 도기(刀氣) 등을 형성할 수 있는 절정경.
절정경의 끝무리, 검기 등이 실처럼 휘감겨 올라가 하늘거리는 검사(劍絲) 등을 만들어 내는 때를 초절정 경지라고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파괴와 굳셈의 정수라 부를 있는 강기(罡氣)를 형성할 수 있는 조화경. 이 경지는 짧게 화경이라고도 부른다.
강기에 의념을 불어넣어 각종 기이한 형상이나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현묘경. 이 경지 역시 짧게 현경이라고도 부른다.
'마지막으로, 그저 의념만으로 상대의 생사를 좌우하는 생사경이라······.'
한유진은 문득 의심이 들었다.
'그거 설마, 신식비술인가?'
57화.< 정도맹 방문 >
신식비술이란, 본인의 신식으로 상대방의 신식 및 정신에 타격을 입히거나 그러한 종류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비술을 뜻한다.
예전 홍련진화공에 대해 고민할 때도 생각했듯, 수선계에서 이러한 신식비술의 귀중함은 거의 통천령보와 맞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신식비술 나름이겠지만······.'
수선계의 상식대로라면 신식비술의 경우 태생적인 결함이 없는 한 그 수련자의 경지에 따라 강화되기 마련이다.
즉.
이 세계 생사경의 비밀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기대할 수 있는 이득이 통천령보 수준이라는 뜻이었다.
'좋아, 좋아.'
확실히 이 세상은 그저 환경이 열악했기에 이런 식으로 발전했을 뿐, 어떻게 보면 수선계의 극초기 형태라 봐도 무리가 없을 듯했다.
오랜 역사를 기반으로 발전된 현묘한 공법.
그 공법의 진도를 급가속시킬 수 있는 영단.
어려운 법술 대신 공방 능력을 보강해 주는 법기.
특수한 상황에서 비장의 한 수로 쓰이는 부적 등.
그런 것들이 없다면 인간은 당연히 육체를 중시하면서 성장하고 전투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영혼보다는 육체 쪽이 훨씬 더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선계의 역사를 봐도, 태곳적을 지나 상고시대를 거쳐 고대에 이르기까지 연체사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체' 대신 '기'를 중점적으로 단련하는 수련법이 더 뛰어나지면서, 상대적으로 연체법이 경지 올리기가 힘들고 딱히 강점도 없다는 평을 받으며 사장됐을 뿐이다.
그러니 이곳 무림을 수선계의 극초기 형태라 보는 건 결코 무리한 생각이 아니었다.
'증거 또한 있지.'
생각하며 한유진은 저물대에서 나무함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흑백이 기묘하게 엉킨 무늬를 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의 연충이 보인다. 음양고라고 불리는 녀석이다.
'이거··· 분명히 법문이다.'
그 흑백 기묘하게 엉킨 무늬는 단지 연충의 형태를 따라 길게 늘어났을 뿐 분명한 법문이었다. 아니, 몇 종류의 법문이 체계적으로 얽혀 구성된 법결이었다.
요컨대 이 음양고는 벌레라는 매개체를 통한 일종의 법술이다.
"암영마교에 대해 말해 봐라."
해가 완전히 저물어 어두워진 관도를 걷던 중.
꽤 길게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나온 목소리에 서광가후가 흠칫 놀랐다. 은미령도 살짝 놀란 기색이었지만 서광가후만큼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신적 충격 때문인지 상태 안 좋은 동료를 대신해 계속 한유진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었다.
다시 시작된 은미령의 설명을 들으면서, 몇 가지 부가적인 질문을 추가하기도 하면서 한유진은 점차 이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이 무림이라는 세계의 역사는 대략 삼사천 년 정도였다. 지구의 서기 역사보다도 천 년 이상 긴 셈이다.
그리고 암영마교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지는 채 백 년도 안 되었다.
하나 그렇게 역사 짧은 신진세력치곤 너무나 빠르게 강성해져서는, 정도맹과 사도맹을 동시에 위협할 지경까지 됐다는 모양이었다. 다른 역사 깊은 세력들의 입장에선 실로 놀라 자빠질만하게도.
'뭔가 있는 건가?'
역사 짧은 신진세력이 이런 음양고라는 물건을 운용할 수 있다니.
외부인인 한유진이 보기에도 확실히 이상한지라 절로 관심이 동한다. 드래곤 하트 제련을 마치면 꼭 한 번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해서 몇 가지 더 궁금한 것을 묻던 그가 어느 한 내용에 놀랐다.
"각성향···?"
"예. 그것 없이는 대부분의 이들이 무공에 입문조차 못 할 겁니다."
온갖 질문에 답해주면서 은미령은 슬슬 이 도사 차림의 남자가 아주 기본적인 상식조차 잘 모른다는 점을 깨달았다. 하나 감히 그 연유를 캐묻진 못하고 그저 수동적으로 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한유진은 덕분에 아주 중요한 사실을 또 하나 알았다.
이 세상의 무공 역시 기를 다루는 수련법인 만큼, 그 기를 느끼는 재능 없인 제대로 된 입문이 불가능하다.
요컨대 영기와 감응하는 영근이 필요하단 뜻이다.
한데 이 세상엔 '각성초'라 불리는 영식으로 만드는 '각성향'이라는 물건이 존재하여, 몇 년 이상 그 향을 맡으면서 수련하면 열 명 중 한 명꼴로 최소한의 기감을 깨우칠 수 있다고 했다.
'이거 무영근자 중 1할 정도를 위영근자로 만들 수 있단 뜻 아닌가?'
심지어 그 각성초라는 게 딱히 귀하지 않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키우기도 간단해서, 만일 지구로 가져가 퍼트린다면 어마어마한 카르마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신식비술보다 더 대단한 수확이겠구나.'
또한 온갖 영초와 최소 화경급 고수의 정묘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벌모세수법'에 대한 이야기도 제법 놀라웠다.
그건 평범한 위영근의 재능을 위영근 최상위권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외도(外道)비술이었다!
'신식비술에 영근 관련 외도비술까지 있다면, 이 세상의 수준을 마냥 낮다고 평하긴 어렵겠군.'
단지 환경적 열악함으로 인해 발전 진도가 느릴 뿐이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애초에 수선계와 비교하여 역사가 매우 짧기도 하고 말이다.
그는 은미령에게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동시에 머릿속 한구석에서 앞으로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드래곤 하트 제련 외에도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을 듯해 상당히 기꺼운 마음이었다.
* * *
서광가후가 갖고 있던 장보도는 완성본이 아닌 일부에 불과했다. 강호무림 곳곳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파편들을 전부 모아야 숨겨진 보물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장보도 파편들의 등장을 두고 정(正)마(魔)를 충돌시키려는 사(邪)도맹의 음모이니 뭐니 말이 많은 듯했지만, 한유진은 그런 뒷배경엔 별 관심이 없었다.
정치적 전략적 대처는 이곳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는 자신과 인연이 있는 듯한 그 장보도를 통해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어쨌든.
다른 장보도들과의 합류를 위해서라도 정도맹 본부로 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본부는 앞서 은미령이 말했던 강서의 태양문 영역에 존재했다.
강서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추적이나 충돌은 없었다.
딱히 서두르지 않았음에도 그랬다는 점을 고려하면, 암영마교 측에선 음마고주 한 명으로 이 둘을 잡아 오기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죽어버린 상황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터다.
태양문의 영역에 들어서자 눈에 띄게 안심하는 은미령과 서광가후를 보며 한유진은 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정도맹으로 가자."
"예!"
"예···."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답하는 서광가후의 안색이 매우 초췌했다.
문득, 훤칠한 놈이 계속 그렇게 기죽어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한유진이 짧게 위로해 줬다.
어차피 벌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한번 다독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심산이었다.
"이 친구야."
"예, 마, 말씀하십시오."
"너무 그렇게 자학하지 마라. 원래 사람은 완벽하지 못하다. 누구나 다 실수하고 찌질하게 굴 때가 있는 법이야. 나도 자주 그랬어."
"······."
"중요한 건 같은 실수와 찌질함을 반복하지 않는 거다. 알겠냐?"
"예··· 감··· 감사··· 합니다."
거의 형식적인 위로였을 뿐인데 서광가후는 그 즉시 울먹거렸다.
"내가 입 가벼운 사람은 아니니까 뭐 소문날 걱정도 하지 마라. 거기 있던 사람 중 음마고주인지 고자인지는 이미 뒈졌고, 여기 은미령은 그래도 네 동료인데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않을 거다. 그렇지?"
"예, 대협. 물론입니다.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우겠습니다."
은미령이 즉시 대답하자 서광가후는 눈을 질끈 감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여태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너 몇 살이냐?"
"이제 약서입니다······."
약서라는 표현이 어색했으나 초월적 이해력의 도움을 받아 해석된 바, 지구의 약관이라는 표현과 같았다. 요컨대 스물이라는 뜻이었다.
"완전히 애구만. 그 나이엔 그럴 수도 있어. 다 그렇게 흑역사 쌓으면서 크는 거야."
말하다 보니 불현듯, 어쨌든 간에 자기 살자고 남을 죽이려 했던 놈인데, 이렇게까지 위로해 줄 필요가 있나 싶어 갑자기 괘씸해진다.
아무리 그게 협박에 따른 행동이었다지만 말이다.
"뚝 그쳐라. 덩치 큰 사내새끼가 질질 짜는 것도 보기 싫다."
"예, 대협!"
그렇게 대충 서광가후를 단속한 뒤 셋은 계속 움직였다.
여태 한 번도 쉬지 않았지만 서광가후는 한유진의 위로에 힘을 얻었는지 발목을 잡지 않았고, 은미령은 힘겨운 상태이긴 했으나 바로 나가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한나절 정도를 더 이동하여 마침내 정도맹 본부에 도착했다.
굉장히 넓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장소였다. 크고 화려한 정문부터가 정도맹이라는 단체의 강성함을 드러내는 듯해 한유진조차 꽤 감탄하게 만들었다.
"잠시 손님으로 머물까 싶은데, 네 능력으로 처리되나?"
"물론입니다, 대협.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은미령에게 말했는데 옆쪽의 서광가후가 힘 있는 목소리로 답하더니, 정문을 지키는 수문호위들에게 늠름한 태도로 다가가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한유진이 소리 없이 헛웃었다.
그리고 그런 한유진을 보는 은미령의 표정에 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 * *
한유진이 안내받은 곳은 정도맹의 동쪽 구역, 경빈각이라는 이름이 붙은 귀한 손님을 위한 장소였다.
아주 마음에 드는 장소였다.
잘 관리된 정원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온갖 꽃들이 피어있어 눈을 즐겁게 했고, 연못에는 비단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치며 운치를 더했다. 한쪽 가산(假山)에선 작은 인공폭포가 졸졸졸 흘러내리며 귀까지 즐겁게 만들었다.
정원이 그 정도였으니 건물의 품격 역시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이 시대 문명 수준으로는 더 이상 좋을 수 없으리라 여겨지는 구조와 가구들만이 보였다.
특별히 주목할 부분으로는 바로, 이 경빈각을 둘러싸고 펼쳐진 몇 가지 진법이었다.
청원성에서 진법술 강의를 들은 한유진은 그것들의 존재와 설치 목적 및 원리를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소음의 출입을 막고 정문이 아닌 장소를 통하려는 도둑 따위를 방지하는 듯했는데, 입문기급 수사라면 누구나 강제돌파할 수 있을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목적 명확한 진법이 온전하게 구축되어 잘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확실히 이 세상은 수준이 낮은 게 아니라 그저 진도가 늦을 뿐이었다.
'여기서 내 무력은 최소 현경급이야.'
한유진은 정원의 연못을 구경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무림 십대고수와 같은 반열이니, 아무리 내 신원을 파악할 수 없더라도 감히 홀대하지 못할 거다. 또한 나를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이 당연히 발생하기도 하겠지.'
너무 깊게 연관될 마음은 없지만 일부는 그럴 필요성이 있다. 이 무림 세계의 각종 공법 따위를 얻기 위해서다.
'명성이 있어야만 앞으로 움직이는 데 훨씬 편해. 그 장보도 탐사에도 잡음 없이 낄 수 있을 테고.'
드래곤 하트 제련?
그건 좀 천천히 해도 된다.
도망치는 수단까지 고려하면 무력이 전혀 급하지 않은 상황이고, 이 세상은 10년 후 종말이 예약돼 있지도 않으며, 현재 그 자신의 수명은 최소 200년이다.
'여기서 아예 그냥···?'
그런 요소들을 바탕으로 생각을 이어가는 때.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의 시선이 경빈각 정문 쪽을 향했다. 수문호위들과 잠시 실랑이가 이는 듯하더니 곧, 불청객이 나름 위세가 있는 자인지 무리 없이 들어서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정원 안쪽으로 들어서는 중년인의 모습이 보였다.
깊은 눈매와 진한 눈썹으로 인상이 매우 강렬하고, 고풍스러운 검은색 무복에 은 장식 달린 허리띠를 두른 남자였다. 깔끔하게 묶어서 뒤로 넘긴 머리카락과 더해지자 상당한 카리스마를 풍겼다.
"처음 뵙겠소이다."
그는 적당한 거리까지 다가와선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다.
"정도맹의 흑호단 단주를 맡고 있는 섬뢰검 독준성이라 하오."
"음, 반갑소."
한유진은 대충 마주 손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한데 어쩐 일이시오? 오늘은 편히 쉬라는 이야기밖에 듣지 못했는데."
"협객께서 음마고주를 참살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 정녕 사실인지 궁금해 이리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하게 됐소이다."
"그건 사실이오."
간단하게 답하는 한유진의 모습에 독준성의 눈에서 광망이 흐르는 듯했다.
"하면, 부디 이 독모와 한 수 겨뤄주실 수 있겠소?"
"갑자기?"
"만일 피곤하시다면 후일로 미뤄도 무방하오."
아무래도 전과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고 또한 이용하기 좋은 기회인지라, 한유진은 슬며시 웃으면서 물었다.
"겨루는 방식은 어떻게 되는 거요?"
"그야 평범한 방식대로, 살초를 쓰지 않고 목숨에만 지장 없으면 되지 않겠소."
"음."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린 그가 완전히 몸 돌려 섰다.
"알았으니 바로 시작합시다."
"······."
독준성의 날카로운 눈빛이 한유진의 품속 무용이에게 꽂혔다.
"그 짐승을 안고 나를 상대하겠단 말이오? 설마 나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소?"
"주무기로 검을 쓰시는 모양이군?"
"···그렇소."
"별호를 보아 쾌검이 주특기인 듯하고?"
"맞소. 그러니···."
"그럼 한 번 막아보시오."
직후.
한유진이 번개처럼 검결지를 뻗었다. 금빛이 번쩍이고 그에 반응한 독준성이 보검을 뽑아 휘둘렀을 때.
그는 자신의 검날이 뿌리부터 잘려나가 있음을 깨달았다.
챙그랑···!
언제 거기로 날아갔는지 모를 보검의 잘린 검신이 정원 한쪽 돌 위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한 번 죽은 셈인데."
한유진이 웃으면서 이어 물었다.
"더 하고 싶나?"
58화. < 정도맹주와의 거래 >
독준성의 반쯤 초점 잃은 눈이 잘려나간 자신의 애검을 향했다.
맹아검이라는 이름이 붙은, 무림의 백대 보검 목록에서 항상 50위권 내를 유지한 자신의 자랑이자 보물이던, 때로는 친우처럼도 느껴지던 물건이 잘려나간 모습은 실로 비현실적이었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그가 한유진을 쳐다봤다. 이전과 달리 건방짐이 완전히 사라진 태도였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바보가 아니라면 실력 차를 알 수밖에 없다. 상대는 웬 짐승을 품에 안은 채 한쪽 손의 손가락만 뻗어 자신의 보검을 날려버렸고, 마음만 먹었다면 그게 검이 아니라 목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그는 알 수 없는 억울함과 절박함을 느끼며 거의 땅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허리를 숙였다.
"고, 고인께서는 한 수만 더 겨뤄주십시오. 부디 제가 공격해 볼 기회를······!"
"나더러 그쪽의 한 수를 받아달라는 건가?"
"예! 부디!"
이미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지만 좀 더 확실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지라, 또한 무림인의 전력은 견식해 볼수록 좋은지라 한유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무기가 없어지지 않았나?"
"제가 바로 마련해 오겠습니다!"
그는 잠시 기다려달라는 듯 목례해 보이더니 즉시 몸 돌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한 걸음마다 신형이 번개처럼 쭉쭉 뻗어나가는 모습이 실로 재빨라서, 입문기 시절 한유진이 풍운보를 전력으로 펼치는 것과 비슷했다.
'음마고주보다 실력이 뛰어난 듯한데?'
문득 생각하는 사이.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수문호위에게서 빌렸는지 검 두어 자루를 가져온 그가 나머지를 바닥에 놓고 하나를 허리춤에 찼다.
원래 차고 있던 보검의 검집을 풀어놓을 때 잠깐 스쳐 지나간 애통해하는 표정이 살짝 웃기면서도 안쓰러웠다.
'마냥 방심하는 건 좋지 않겠지.'
풀어지려는 긴장을 다잡은 한유진은 상대가 준비를 마치고 자세를 잡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게."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 비장한 어조에 조금 더 긴장의 끈을 조이는 때.
다리를 벌리며 자세를 낮춘 독준성의 검집에서 검이 벼락처럼 뽑혀나왔다.
섬전십이검뢰(閃電十二劍雷).
느려진 세상 속에서도 꽤 위협적인 빠르기로 날아드는 검날이 순간 열두 갈래로 분열되어 전신 요혈을 노린다.
별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기운의 운용법이다.
한유진은 그게 말로만 듣던 강기임을 즉시 알 수 있었고, 독준성이 음마고주보다 한 경지 높은 화경의 고수였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다행히 화경의 고수가 전력으로 내뻗은 쾌검도 그의 신식과 인지능력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었다.
적절하게 뿜어져 나온 자금광휘가 쏘아져 온 검강을 무리 없이 막아내고는, 조금 더 진한 자금광휘에 휩싸인 손이 손가락만으로 진짜 검을 붙잡아 멈춰 세운다.
그 순간 독준성이 전신을 허공에서 회전시키며 검을 비틀어 빼냈다. 그렇게 다시 땅에 착지한 직후 번쩍이는 섬광을 터뜨리며 마치 잔상을 남기는 듯 한유진의 좌측으로 돌아 재차 검을 뻗었다.
광영보(光影步)라 불리는 상승무학으로 굉장히 빠르면서 또한 환(幻)의 묘리를 더해 상대의 인지를 교란하는 효과가 있다.
꽈쾅-!!
굉음과 함께 들이닥치는 검은 이전의 그 검술보다 조금 느린 듯했으나 상대의 착각을 유도하는 음흉함이 뛰어났다. 진짜 공격이 한발 늦게 다른 각도로 쏘아지는 것이었다.
벽력천뢰유영(霹靂天雷遊影)이라 불리는 쾌검을 가장한 환검으로, 섬뢰검 독준성의 별호와 알려진 소문에만 신경 쓴다면 자칫 당할 수도 있는 비장의 한 수였다.
하나.
이번에도 그 검은 자금광휘를 두른 손가락에 맥없이 붙잡혔다.
그리고 이전처럼 상대가 빠져나가는 일을 방지하려는 듯, 일련의 물 같은 기운이 함께 뿜어져 나오더니 엄청난 압력으로 검을 고정시켰다.
파캉!
하여 독준성의 힘과 한유진의 힘을 견디지 못한 검이 그대로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후다닥 뒤로 물러선 독준성은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한유진을 보며 더 이상 정중할 수 없는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제가 완벽하게 졌습니다."
"음, 그래."
화경급 무인의 전투력을 대략 가늠할 수 있게 된 한유진도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심하지만 않으면 당할 일 없는 수준이었고 상대의 머릿수가 몇이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몸을 피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때.
한유진의 표정과 태도를 본 그가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단순히 허리를 숙이는 정도를 넘어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부디 고인의 존성대명을 알려주십시오."
"한유진이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고인의 사문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왜?"
"가능하다면··· 제자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순간 한유진은 살짝 황당한 표정이 됐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독준성이 고개를 숙인 채로 절절하게 말했다.
"저 독준성, 사문 없는 낭인으로 시작하여 정도맹에 들어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실로 수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여태까지는 나름대로 잘 헤쳐왔다 자부합니다만··· 도저히··· 도저히 현경에 오르는 길을 찾을 수가 없는 느낌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가 아예 몸을 엎드리며 외쳤다.
"저는 여기서 멈춰 안주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저를 제자로 삼아주십시오! 견마헌성을 다하리라 하늘에 맹세하겠습니다!"
그저 황당하다는 표정이던 한유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서로 이용해먹을 구석이 많을 거다, 이거냐?'
비록 패하긴 했다지만 독준성은 정도맹에 자리 잡은 화경의 고수로서 그 입지가 절대 좁지 않을 터다. 동시에 한유진 자신은 화경급 고수를 제압할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췄으나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처지다.
확실히 생각하면 할수록 스스로 '견마헌성'을 다하겠노라 맹세하는 '제자' 한 명이 있어서 나쁠 게 없었다.
스승과 제자라는 사이가 어찌 소설에서 나오는 그런 정겹고 의리 깊은 관계만이 존재하겠는가? 이렇게 서로 상사와 부하처럼 이득을 주고받는 관계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다.
물론 지금 바로 제자로 받아주는 건 모양새가 살지 않는다. 상대도 그러한 점을 모르지 않을 테니, 그저 거래하자는 의도를 한번 직접 드러냈다고 봐야 한다.
'무림인에게 법술을 가르쳐 주면 과연 어떻게 될까?'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도 있는 터라, 그는 잠시 침묵하며 엎드린 독준성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을 대뜸 제자로 맞이하고 싶진 않군."
"물론 저 역시 얼마나 무리한 요청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 언짢게만 여기지 마시고, 제 절박함을 깊이 헤아려 주십시오. 만일 지금 제 행동에 일말의 위선이나 거짓이 섞였다면 즉시 자결하겠습니다."
그 절절한 어조와 태도에서는 정말로 일정 수준 이상의 진심이 담겨 있기도 했다.
"자네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지 않나? 서로 조금씩 교류해 볼 필요가 있겠지."
"···바, 받아주신다는 이야기십니까?"
독준성이 그 강렬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희망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한유진이 말했다.
"각성초와 각성향 한 상자씩, 그리고 각성초의 씨앗 한 상자와 재배법, 끝으로 각성향을 만드는 다양한 비법들이 필요하다."
"일주일 내로 전부 마련해 오겠습니다!"
다시금 고개를 숙여 최대한의 예를 표한 독준성이 모든 비무의 흔적을 처리한 후 장내를 떠나갔다.
그런 독준성을 지켜보던 한유진은 확실히 입지 넓은 수하 한 명이 있어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전적으로 믿지 않고 대충 써먹기만 해도 상당한 수고를 덜 수 있을 터였다.
* * *
다음 날.
정도맹주의 초청을 받은 한유진은 여전히 무용이를 품에 안은 채 정도맹 본부 중앙구역으로 향했다.
길을 안내하는 무사의 태도와 눈빛에서 존경의 기색이 가득했는데, 아무래도 음마고주를 처리한 전과와 독준성과의 비무 결과가 알려진 듯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정도까지 공경하는 태도를 보이긴 힘들 것이다.
'이거 좀 기분이 나쁘지 않네.'
괜히 으쓱해지려는 어깨를 다잡으면서 도착한 곳은 확실히 엄숙한 분위기가 내려앉은 장소였다.
건물 안의 쾌적한 복도를 지나 객실로 들어서자 이미 한 명의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이라지만 머리카락과 눈썹과 수염 모두 생기가 느껴지는 은빛이었고, 그저 앉아 있을 뿐인데도 그 정정함이 풍겨오는 듯했다.
백화검존 한무정.
현경의 고수이면서 그 대단한 태양문의 장로 출신이기도 한 인물로, 삼십여 년 전 정사대전에서 사파의 화경급 고수 둘을 동시에 베어 죽이는 대단한 전공을 세워 크게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는 모양이다.
"어서 오시오."
그는 정도맹이라는 대단한 단체의 맹주를 맡은 자이면서도 상당히 정중하게 한유진을 맞이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직접 맞은편 의자를 빼주기까지 한 것이다.
"고맙습니다."
하여 한유진도 예의를 차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성격이 원래 오는 대로 돌려주는 느낌이 강했다.
정도맹주가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는 사이, 몇 명의 시비가 들어서선 차와 다과 등을 세팅했다. 보통 차가 아닌지 수선자인 한유진에게도 향이 꽤 좋게 다가왔다.
그들이 전부 나간 후.
정도맹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감사부터 전해 왔다.
"암영마교의 흑수에서 우리 정도의 미래들을 구해주어 매우 감사한 마음이외다."
"딱히 의도하고 한 일은 아닙니다. 그 음마고주라는 놈이 자살해 버린 셈이지요."
자신에게 덤빈 일을 그렇게 표현하자 정도맹주가 헛헛 웃었다.
"어제는 또 우리 맹의 흑호단 단주와 한 수 겨뤄주셨다고 들었소. 여러모로 크게 신경을 써 주셨다고 들었는데······."
"그저 비무였지 않겠습니까. 한 수 가르쳐 달라길래 어울려 줬습니다."
"과연 대범하시오."
비슷하게 편안한 느낌으로 몇 번의 잡담이 더 오간다. 그사이 맛본 차는 과연 그 향만큼이나 부드러워서 아주 흡족했다. 차에 대한 이야기로 몇 번의 대화가 오갈 정도였다.
한두 차례 정도맹주의 시선이 한유진의 품속 무용이에게로 향하기도 했다. 하나 뭔가 물어보기 애매하다고 여겼는지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충분히 편안해진 분위기에서 본론이 나왔다.
"정도맹에 방문하신 이유를 알 수 있겠소?"
신원 불명의 현경 고수가 자리를 잡았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을 것이다.
한유진은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용건을 꺼냈다.
"대충 조사해 봐서 아시겠지만, 제가 무림에 딱히 연관된 적 없고 모르는 게 많아서, 당연히 여러 무공들에 관심이 매우 큽니다."
"무공들··· 비급을 원하신다는 말씀이오?"
"바로 그겁니다. 어떻게 잘 얻을 방법이 없겠습니까?"
"어째서 그런 걸 원하시오? 본인이 익히려는 것은 아닐 터인데."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답했다.
"제가 익힌 것과 비교해 보고, 보강하거나 새로 하나 만들어 보려는 목적입니다."
"대종사의 길을 원한다는 말씀이구려."
그는 이해가 간다는 듯, 하나 명백히 조금 곤란하다는 듯 수염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하긴, 우리 정도 경지에 오르면 한 번쯤은 다 생각해 보는 일 아니겠소. 천하의 모든 무공을 견식해서 새롭고 더 뛰어난 무공을 창조하는 일 말이오."
"바로 그겁니다."
"하나······ 단지 생각에서 그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오. 대체 어느 세력이 자신들의 무공 비급을 선뜻 낯선 이에게 내놓으려 하겠소."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한유진이 물었다.
"거래의 형식으로도 어렵겠습니까?"
"거래? 무슨 거래 말이오?"
"가령 이런 겁니다."
말과 함께 그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작은 화탄술을 시전했다.
호두알만 한 크기의 불덩이일 뿐이었으나 순간 장내에 무시무시한 열기가 들어찼다. 정도맹주가 그 즉시 긴장하여 눈을 번뜩이는 때.
스스로 화탄술을 흩어버린 한유진이 말했다.
"제 이 무공을 태양문의 무공과 교환하는 겁니다. 서로 유출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말이지요."
"······."
정도맹주이기 이전에 태양문의 장로였던 노인, 한무정의 얼굴에 복잡미묘한 표정이 서렸다.
방금 느껴졌던 그 열기는 평소 무림에 적수가 몇 없노라 자부하던 자신에게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그 정도 수준의 무공을 얻을 수 있다면 태양문의 입장에선 분명하게 이득이다.
"비밀이 잘 지켜질지가 문제인데······."
"혹시 정도맹에는 무공비급 같은 게 없습니까?"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질문한 것이다. 정도맹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 있소. 하나 그대 눈에 찰만한 상승무학은 하나도 없을 거요."
"제가 아까 말했듯 저는 무림에 대해 많은 걸 모릅니다. 아무리 수준 낮은 것들이라도 제 식견을 넓히기엔 충분하다는 뜻이지요."
"허어······ 그렇단 말씀이오······?"
다시금 수염을 쓸어내리며 그가 뭔가를 고민했다.
"사문이 어찌 되시는지 알 수 있겠소?"
그리고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익히 예상했던 바라 한유진은 웃으며 선선히 답했다.
"오행종이라고 하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으실 겁니다. 정사마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으니 말이지요."
"오행종, 확실히 들어본 적 없소. 말로만 듣던 일인전승의 신비문파인 것이오?"
잠시 위쪽 허공을 보며 생각하던 한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런 셈입니다."
"뭔가 사연이 있는 모양이구려. 어쨌든 스스로 정사마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확언하셨으니 조금 마음이 놓이는 바요."
단지 말뿐인 것에 어찌 마음이 놓이겠느냐만, 정도맹주는 그렇게 말해 주면서 뭔가를 다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물었다.
"장보도 한 조각을 이미 갖고 계신다고 들었소."
"서광가후에게서 받았지요. 목숨을 구해준 값이라더군요."
"허허······ 혹시, 그 장보도가 완성된 이후 탐사에 나서주실 수 있겠소?"
내심 원하던 바를 상대측이 오히려 제안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힘써주시기로 약조하신다면, 우리 정도맹의 장서각을 개방하는 일도 무리가 아니오. 당연히 유출하지 않겠다는 맹세가 필요하겠지만."
"좋습니다. 유출 걱정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아주 시원하게 답하는 한유진의 태도에 정도맹주가 잠시 멈칫했다가 허허 웃었다.
"그럼 그때까지 신세를 져야겠군요."
"오히려 바라는 바외다. 혹시 객경으로 계속 남으실 마음은···?"
"거기까진 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마주 앉은 둘은 서로 분위기 좋게 웃으면서 차를 즐겼다.
* * *
한유진은 경빈각으로 향하는 대신 바로 안내역 무인에게 말해 장서각으로 향했다.
도착한 장서각은 예상보다 더 큰 모습으로 삼엄한 경비가 갖춰져 있었다. 당연히 정도맹주의 직접적인 허락을 받은 그는 아주 순조롭게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총 3층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안내역 무인의 설명을 대략 요약하자면, 이곳의 무공비급들은 특별한 세력에 속하지 않은 것이거나 정도맹에 가입한 문파들에게서 일부 증여받은 것들이라고 했다.
또한 위로 갈수록 더 상승의 무학이 보관되어 있어, 가장 위층인 3층에는 화경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는 무공도 몇 있다고 했다. 섬뢰검 독준성의 무공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는 정보는 덤이었다.
"저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간략한 설명을 마친 안내역 무인이 밖으로 나가고, 한유진은 본격적인 둘러보기를 시작했다.
'독준성이 낭인 출신이라는 건 확실하겠군.'
하긴, 조금만 조사해 보면 들킬 거짓말을 감히 했을 리 없다.
'굳이 내 제자가 되기를 청한 이유는 뭘까. 정파 내부의 정치에 휘말리기 싫어서? 처지상 다른 이에겐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어서? 혈혈단신으로 나타난 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만만할 듯해서?'
그도 아니면 새로운 현경급 거물의 밑에서 텃세 걱정 없이 한자리 굳게 차지하려는 심산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아주 대단한 기회처럼 느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이유야 여러 가지로 있을 터였다. 하다못해 운명적 인연을 느꼈다는 비이성적인 감상도 이유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사이.
그는 1층의 여러 무공비급들을 초고속으로 훑어보며 지나갔다. 신식을 동원하면 굳이 책장에서 꺼내 펼쳐볼 것도 없이 그 내용을 다 파악할 수 있었다.
법혼기 수사로서의 안목 또한 있기에 무엇을 걸러야 하는지도 대략 판단할 수 있어서, 고작 차 한 잔 정도 마실 시간 만에 그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게 됐다.
'다 잡서 수준이로군.'
효용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도저히 기억할 만한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다.
다행히 2층의 무공비급들부터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정도맹에 속한 역사 깊은 세력들이 증여한 그것들은, 비록 뒷부분의 내용이 끊겨 있다지만 충분한 깊이가 있었고 앞길이 막혀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특히 주목하게 되는 건 각각 서광세가, 비류세가, 현백파, 운해파, 윤회성불사의 무공들이었다.
그것들이 유난히 뛰어나서라기보단, 좀 더 무공이라는 근본에 치중하여 어떤 특별한 속성을 띠지 않고 범용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무공을 지구에 보급할 생각이 있는 한유진으로선 그러한 측면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양문의 무공은 기대했던 것과 달리 너무 화속성에 치우쳐져 있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력할 것은 분명했지만 이후의 성장에 이런저런 제약이 생길 것 역시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길을 밟아 진선기까지 오를 수 있다면 모를까.'
제약을 타파할 방법이야 많겠지만 어쨌든 무공 주제에 실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일이다.
대략 기억할 만한 무공을 전부 정성 들여 기억해 낸 그는 3층으로 올라섰다.
3층은 확실히 넓이가 줄었으면서 또한 보관된 비급도 몇 되지 않았다. 집중하여 하나하나 신식으로 살피던 한유진은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다.
'어쩐지 정도맹주가 너무 시원하게 허락하더라니.'
화경에 오를 수 있는 상승무학도 몇 보관되어 있다기에 기대했건만, 그런 무공은 고작 셋뿐이면서 전부 이후의 길이 막혀있는 느낌이었다.
안타깝게도 독준성이 익혔으리라 짐작되는 심법 명광심뢰공(明光心雷功)도 그랬다. 누가 이 심법을 창안했는진 모르겠으나 만일 의도했다면 실로 뻔뻔한 작자일 것이다.
'제 수하들이 현경에 올라서는 일은 절대로 보기 싫었던 모양이지.'
잠시 그 무공비급을 들고 고민하던 한유진은 이걸 잘 이용해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 책장에 돌려놓았다.
독준성이 상황을 안다면 자신이 정도맹의 장기말로서 철저히 이용당했음을 깨달을 터다.
그러면 누구에게 매달리겠는가?
'당연히 나뿐이겠지.'
이후로도 얼마나 쓸모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명의 확실한 수하를 만드는 일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3층의 모든 무공을 몇 차례 더 읽고 완벽히 암기하여 장서각을 나섰을 때.
해가 한 번 저물었다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밤새 기다렸는지 안내역의 무인이 조금 피로한 기색으로 서 있다가 급히 정신을 차리는 모습이다.
"계속 기다린 건가?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를 격려해 준 한유진은 바로 경빈각으로 향했다. 무공들의 암기를 마쳤으니 그것들을 곱씹으면서 완전히 소화할 차례였다.
한데.
막상 경빈각에 도착하자 신식을 통해 낯선 인기척들이 꽤 느껴졌다.
다름 아닌 그의 시중을 들기 위해 새로 온 십여 명의 시비들이었다. 모두 젊고 미모가 뛰어날 뿐 아니라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역력했고, 오가는 대화를 들어보니 전부 이름난 세가 출신들이었다.
'하.'
아주 전통적이고 뻔하지만 그만큼 효과가 좋은 미인계다.
'한데 뭐······ 음험한 수작도 아니고, 단지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에 불과하니 굳이 물릴 것까진 없겠지.'
괜히 헛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그가 안으로 들어섰을 때.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하는 시비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여 절로 걸음이 멈췄다.
현백파의 청류백봉 은미령이었다. 실로 이 자리에 있기엔 너무 눈에 띄는 명성과 실력을 갖춘 여인이다.
"아니, 너는 왜 여기에 있지?"
세가도 아닌 현백파 같은 대문파에서 미인계를 썼다기엔 조금 이상하여 저절로 그런 질문이 나온다.
그에 은미령은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답했는데, 귓불이 은은하게 붉어지는 것을 한유진은 모를 수가 없었다.
"제가 자원했습니다."
"······."
한 차례 눈을 굴린 한유진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59화. < 고분지의 보물 >
평온하리라 생각했던 정도맹 경빈각에서의 생활이 호화찬란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한유진이라는 새로운 현경 고수의 호감을 사 끌어들이려는 세력들이 그저 여인만 보냈을 리 없다.
온갖 금은보화는 물론 그림과 옥조각 같은 각종 예술품이 선물이라며 경빈각에 도착했고, 심지어 그중에는 비록 백대 보검의 말석이라지만 어쨌든 보검임이 분명한 '회옥검'이 포함돼 있기도 했다.
회색 반투명한 옥으로 만들어진 듯한 검이었는데, 질감이 금속이면서 탄성도 있어 재질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법기가 아닌지라 한유진에겐 그저 장식품일 따름이었다.
삼시세끼 식탁에 올라오기 시작한 갖가지 산해진미들은 더는 식사가 필요 없는 몸인데도 저절로 밥때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오늘은 어떤 음식이 나올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다시금 여인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미인계가 뻔하면서도 효과적이라고 여겨지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람은 원래 이성의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가졌고, 단지 그렇게 유혹받는 것만으로도 자존감이 채워지는 동물이며,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믿으며 심리적 장벽마저 허술해지기 쉽다.
특히 경험이 부족하면서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을수록 더 잘 먹혀드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미인계의 대상이 되었다는 걸 불쾌하게 여기긴커녕 은근한 자랑으로까지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런 종류의 미인계는 출세의 증거다.
따라서 시행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일의 성패에 구애받지 않고 추후 기분 좋게 마주할 수 있는 아주 대단한 계책이다.
만약 법혼기에 올라 그만큼 정신력이 강해지지 않았더라면 알면서도 그냥 당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한유진은 경빈각에서의 생활을 이어갔다.
내쫓지 않고 일부러 놔두는 가장 큰 이유는 혹시 자신의 수련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법혼기에서 결단기에 오르려면 두 번의 변화를 거쳐야 한다.
처음 법혼기에 오르면 법혼이 뿜어내는 법력의 느낌은 기체에 가깝다. 이것이 액체처럼 진해지면 법혼 중기에 올랐다고 볼 수 있고, 고체처럼 더욱 진해지면 법혼 후기에 오른 셈이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상승 변화를 겪을 때마다 법혼의 특성 때문에 수선자의 감정이 무뎌지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적절한 경험과 자극으로 해소하지 못한다면 끝내 모든 일에 무심하게 되어 자아실현 욕구는 물론 삶에 대한 의욕마저 잃어버리는 최악의 상태로 몰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수선계에서 악명 높은 수도삼겁(修道三劫) 중 첫 번째인 무심겁(無心劫)이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오는지를 알 수 없으며, 해결하는 방법도 제각각이고, 그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도 예측이 불가능하다.
서책에서 본 내용에 따르자면, 어느 한 수사는 법혼기에 오르자마자 무심겁을 마주하게 되어 결단 중기에 이르러 겨우 해결했다는 사례도 있었다.
무슨 수를 쓰든 원영기 이전에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 또한 있었는데, 다름 아닌 수도삼겁 중 두 번째인 열혼겁(裂魂劫)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한유진은 경빈각의 호화찬란한 생활에 경각심을 가지면서도 굳이 멀리하지 않으며 마음껏 즐겼다. 꼭 무심겁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경험이 한 번쯤은 필요하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대략 나흘이 흘렀을 때.
예정보다 조금 이르게 '부탁'을 완수한 독준성이 찾아왔다. 하여 무공에 대한 지식을 소화하던 그는 각성초와 각성향에 대해서도 연구하게 됐다.
실로 풍요로우면서도 바쁜 나날이었다.
* * *
달그락-
"음, 고맙다."
경빈각의 한쪽 작은 다용도실, 현재는 한유진이 작업실처럼 사용하는 곳에서 각종 분말들을 놓고 각성향을 시험하던 때.
은미령이 차와 다과를 대령해 와 한유진은 습관처럼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말없이 목례한 후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물러나는 모습이었다.
"잠깐."
한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불러세우곤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안 그래도 쉬려던 참인데, 잠시 대화나 하지."
"예, 은공."
언젠가부터 호칭을 은공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그녀가 순순히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신식으로 살펴도 불편해하는 기색이 느껴지긴커녕, 이전에 한번 그랬듯 희미하게 붉어지는 귓불을 보아 매우 반기는 태도였다.
'아무리 봐도 착각이 아니야.'
은미령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 다른 시비들보다 훨씬 더 진심인 느낌으로.
정확한 계기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 같은 미인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에 한유진도 마음이 살짝 들떴다.
여기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그는 사실 나이가 많지 않다. 연애 경험 또한 많지 않은 터라 이런 상황에서 동요하지 않기가 어렵다.
하나 당연히, 그게 막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드는 미약한 감상일 뿐이기에, 질문하는 한유진의 모습은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자원해서 왔다지만 많이 심심할 텐데, 불편한 점은 없나?"
"예, 은공. 오히려 너무 풍족해서 곤란합니다."
"여기 생활이 좀 그런 감이 있지. 속내는 알겠지만 사람들 호의가 지나치단 말이야."
몇 번의 잡담 이후.
"혹시 여기 있는 일로 명성에 해가 되진 않던가?"
"삿된 음해꾼들이야 어딜 가나 있는 법이지요. 제가 은공에게 보답할 방법이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딱히 보답 같은 걸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어쨌든 네가 불편하지 않다면 됐다. 만일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하도록 하고."
"예, 은공."
"그나저나."
그녀를 불러세운 것이 꼭 목적이 없지는 않았다.
"내가 여기 장서각에서 현백파의 무공을 좀 보게 됐는데, 몇 가지 궁금한 부분을 물어봐도 될까 싶군."
"하문하십시오. 사문에 누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답해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유진은 현백파의 무공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는지에 대해 주로 질문하기 시작했고, 은미령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성실히 대답해 나갔다.
그러고 있는 때.
한 시비에 의해 서광가후가 찾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유진은 마침 잘됐다는 생각으로 그를 즉시 초대했고, 장내에 들어선 서광가후는 한유진과 함께 있는 은미령을 보고 잠시 멈칫했으나 곧 정중하게 예를 취해 보였다.
"대협을 뵙습니다."
"마침 잘 왔다. 내가 이곳 장서각에서 서광세가의 무공을 조금 보게 됐는데, 관련하여 몇 가지 질문해도 되겠나?"
"아··· 예, 하문하십시오."
"일단 앉지."
그렇게 뜻밖의 무공 담화 자리가 마련됐다.
자그마치 현경 고수와 무공을 논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한지라, 원래 있던 은미령은 물론 서광가후도 아주 열정적으로 임하는 모습이었다.
"한데."
문득 떠오른 바에 한유진이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아!"
서광가후가 거의 이마를 칠 기세로 본래 용건을 떠올렸다.
"맹주께서 말씀하시길, 며칠 이내로 장보도 조각이 다 모일 것이라며 준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용건이로군."
슬슬 무공 지식 소화도 끝나가던 참이고, 각성초와 각성향 분석도 필요한 만큼의 성과를 얻은 상황이었다.
"출발할 때 다시 알려달라고 전하게."
"예, 대협."
"그리고, 나중에 서광세가를 한번 방문하고 싶은데, 그때 자네를 찾아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맡겨만 달라는 말을 두세 차례나 반복했다. 한유진도 웃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확실히 본성이 악한 친구는 아닌 듯하여, 그때 용서해 주길 잘했다는 감상이 드는 일이었다.
* * *
모든 장보도 조각이 모여 탐사대가 출발하기까진 닷새 정도가 소모됐다.
한유진이 한 일이라곤 그냥 태평하게 기다리다가 함께 출발한 것뿐이었다.
사소한 해프닝으로 생전 처음 말을 타게 됐는데, 그는 법혼기 수사의 눈썰미와 신체 제어 능력을 포함한 온 노력을 다하여 간신히 어색하지 않은 승마술을 선보일 수 있었다.
'진땀뺐네.'
그냥 마차나 수레에 타고 가도 될 일이었으나 괜한 자존심이 발동하여 고생을 자처한 셈이다.
어쨌든 창피를 면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느긋한 여정을 시작했다. 곁에 자발적으로 따라붙은 은미령과 서광가후를 대동한 채였다.
은미령이야 경빈각에서부터 그의 시비였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서광가후는 어느샌가 한유진의 보좌 역할을 자처하며 이동하는 내내 돕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덕분에 편하기는 했다. 사실 그들의 도움이 수선자인 한유진에게 거의 불필요했지만 말이다.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엉뚱하게도 무용이었다.
은미령이 어떻게인진 몰라도 녀석의 식탐을 파악하고선 온갖 주전부리를 챙겨와 호감을 샀고, 하여 일주일간의 여정을 거쳐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엔 무용이가 그녀의 품에 안겨 잠들 정도로 친해졌다.
단지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그녀는 진심으로 무용이를 귀여워했다. 아마도 그걸 느꼈기에 녀석도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을 것이다.
여담으로, 막상 제자를 자처했던 독준성은 흑호단 단주로서 이번 탐사에서 맡은 임무가 있는 터라, 꾸준히 찾아와 인사했을 뿐 계속 옆에 붙어있진 못했다.
어쨌든.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는 인적 드문 분지 지형에 숨겨진 이름 모를 고분지였다.
이런 곳에 고분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껏 어떻게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였으나, 곧.
한유진은 정도맹의 진법사들이 뭔가를 밝혀내기도 전에 스스로 이유를 파악해 냈다.
'은폐 진법이 설치돼 있었군. 최근에 누군가가 깨트린 것 같고.'
신식과 영안술을 통해 가볍게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그런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과 달리 방해가 전혀 없어서 좀 허전한 기분이외다."
도착 후 사람들을 챙기던 정도맹주가 한유진에게 다가와 하는 농담 섞인 말이었다.
"저야 좋지요. 보수는 이미 다 받았으니 말입니다."
"허허······."
"이제 본격적인 고분 탐사를 시작하겠지요?"
정도맹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실 허전하다고 말은 했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하니, 아무래도 방해가 한 번쯤은 들어오지 않을까 싶소."
"그러면 제가 탐사 작업을 좀 돕지요."
"으음?"
정도맹주가 의아하다는 기색으로 눈썹을 올린다. 이런 고분지 탐사는 진법사와 기관사가 할 일이지, 무공이 높다고 꼭 도움이 되진 않는 탓이었다.
하나 한유진은 괜히 여기서 죽치면서 시간을 버릴 마음이 없었다.
또한 여기서 크게 활약한다면 그 즉시 명성이 될 것인 바, 앞으로 활동하는 데 많은 방해물을 치워줄 수 있을 터였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파악하고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어떻게 말이오?"
한유진은 곁에 선 은미령의 품에 안겨 하품을 쩍 하는 무용이를 힐끗 보곤 말했다.
"이렇게 말입니다."
직후.
그의 신형이 땅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지표면에서 희미한 빛무리가 엄청난 속도로 고분지를 향해 쏘아져 나가는 것만이 보여, 그 광경을 목격한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아, 아니···?!"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정도맹주조차 대체 무슨 해괴한 수법인지를 파악하지 못해 말을 더듬었다. 주변의 다른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은미령과 서광가후만이 크게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납득하는 기이한 모습인지라, 정도맹주의 관심을 끌었다.
"저게 대체··· 어떤 수법인지 자네들은 아는 건가?"
정도맹주의 시선이 특히 집중된 쪽은 한유진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무용이를 안고 있는 은미령이었다.
그녀는 조금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답했다.
"은공께서는 여러모로 특별하십니다. 이전에 음마고주를 상대했던 수법만 해도······."
바로 그때.
멀어져가는 주인의 모습을 보던 무용이가 은미령의 품에서 뛰쳐나오더니, 녀석 역시 약간의 빛무리와 함께 땅에 스며들듯 모습을 감춰 고속으로 따라가는 모습이었다.
"헛···?!"
주변 무인들이 재차 놀라고 정도맹주의 눈에서 뜻 모를 안광이 번뜩였다.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서로의 무공을 '거래'하자던 그 한유진의 제안이었다.
한편.
서슴지 않고 지둔술을 드러낸 한유진은 아주 단순하고 명확한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 무림 세계에선 자신의 지둔술에 대처할 수 있는 이가 없다. 또한 지둔술이 유일한 도주법도 아닌 만큼, 이 정도 패를 보여주는 것쯤이야 순조로운 일 처리를 위한 투자에 불과했다.
"음?"
빠르게 나아가던 그는 뒤쫓아오는 무용이의 기척을 느끼고는 피식 웃으며 잠시 녀석을 기다려줬다. 고작 입문기 수준에 불과한 녀석이니 기다려주지 않으면 자칫 도중에 힘이 바닥나서 땅속에 갇혀버리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도착한 무용이를 품에 안으며 그가 물었다.
"왜 굳이 따라왔어?"
찍-! 찌직!
"요새 은미령이랑 잘 지내는 것 같더니, 아무리 그래도 형님이 더 좋지?"
찌직-! 찍-!
"오냐,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널 어떻게 먹여 키웠는데!"
잠시 무용이를 쓰다듬어준 그가 이동을 재개했다.
그렇게 첫 번째 고분에 도착해서는 신식으로 단숨에 내부 구조를 훑어, 어떤 기관과 진법이 깔려있는지 파악하고 간단한 어지술을 통해 전부 조금씩 건드려 발동시켰다.
파콰콰쾅!
쿠르릉···!
꽈광-!!
헛되이 발동한 기관과 진법들이 꽤 시끄러운 소리를 터뜨린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강철 가시들이 맹렬히 튀어나오고, 진법이 독무 섞인 바람을 뿜어냈다가 곧 폭발을 일으키는 식이었다.
잠시 후.
모든 위험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그는 첫 번째 고분에서부터 이어진 통로를 따라 두 번째 고분으로 향했다.
이후로 벌어진 일은 첫 번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고분지에 이런 함정들을 마련해 놓은 이들은 한유진처럼 땅속을 마음대로 오가는 자가 있으리라곤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을 터다.
'구조가 생각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네.'
어찌됐든 이 고분지는 확실히 보통 장소가 아니었다.
거의 작은 지하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규모가 크다. 관과 부장물 등이 감지되긴 했지만 결코 단순한 고분들이 아니었다.
기관과 진법이 생각 이상으로 철저하게 깔려있는 것도 상당한 의문점이었다. 그저 도굴꾼을 막기 위해서라기엔 누가 봐도 너무 과한 수준이었으니까.
'무림의 정통 방식대로 발굴하려 했다간, 피해도 컸겠지만 몇 달이 넘게 걸렸을지도 모르겠군.'
이 고분지의 은폐 진법을 최근에 누군가가 깨트린 것 같다는 정황까지 고려하면, 이 장보도 사태는 배후가 분명히 존재하는 음모일 수밖에 없다.
하나 그 배후로서는 안타깝게도 한유진은 어울려 놀아줄 마음이 없었다.
그냥 자신과 인연이 있는 듯한 이 고분지에 무엇이 잠들어있는지 확인하면서, 겸사겸사 정도맹을 도와 명성까지 얻는다면 말 그대로 일거양득이다.
그는 한 개의 고분에 거의 몇 분 정도밖에 소모하지 않으면서 꽤 넓은 고분지를 빠르게 돌파해 나갔다. 혹시 주목할 만한 보물이 있나 신식으로 살피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마침내 고분지의 중심부, 가장 크고 견고하게 만들어진 고분에 도착한 그는 신식으로 끔찍한 무언가를 감지한 즉시 움직임을 멈췄다.
"어우······."
절로 그런 소리가 나올 만큼 고분 아래쪽으로 무수한 백골들이 가득했다.
흙으로 잘 메워져 있고 딱히 방해되는 영기가 존재하지도 않는 터라 얼마든지 지둔술로 통과할 수 있는 구역이었지만, 기분상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여 길게 돌아 그 중앙 고분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마치 고문실처럼도 느껴지는 장소를 둘러보며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가늠해 봤다.
'대규모 인체 실험이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한데······.'
가장 먼저 주목하게 되는 건 당연히 한쪽에 잘 정리된 채 놓여있는 서책들이었다.
종이가 아닌 천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그 서책들은 꽤 오랜 세월이 지났을 터인데도 전혀 썩지 않은 모습이었다. 덕분에 내용을 파악하기가 아주 수월했다.
잠시 후.
모든 내용을 신식으로 훑어 이해한 한유진의 표정에 묘한 기색이 가득했다.
'원력을 수련하는 방법을 연구해 냈다니.'
원력(元力)이란, 그가 오행종 유적에서 본 태극회원공에서 육체와 영혼을 영구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바로 그 힘이었다.
법력처럼 그냥 영기보다 명백히 상위격에 속하는 힘이자, 육체를 적극 사용하는 무림인들에게 더 잘 어울릴 것이 분명한 그런 힘이기도 했다.
'한데······.'
조금 더 내용을 곱씹으면서, 동시에 태극회원공과 비교해 보기도 하면서, 그는 이곳에서 얻은 공법의 맹점을 즉시 파악해 냈다.
'발상은 좋았지만 중간 단계를 너무 많이 건너뛰었어. 이대로 수련한다면 백에 구십구는 주화입마로 죽을 거다.'
비유하자면 거의 법혼 없이 법력을 만들어 다루려는 꼴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공법을 충분히 잘 보강할 수 있다.'
한유진의 눈빛에서 뚜렷한 흥미와 기대가 드러났다.
'이 세상 무공과 잘 조합해 낸다면, 애초에 위영근 정도로 재능 부족한 이들에겐 가히 최고일 수밖에 없는 신공이 탄생할지도 모르겠군.'
자신에겐 과연 얼마나 쓸모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구에 성공적으로 보급한다면 얻게 될 카르마가 무시무시할 터였다.
60화. < 명성을 떨칠 신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