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법술 수련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한유진은 문득 자신의 볼을 건드리는 축축하고 간지러운 느낌에 눈을 떴다. 그리고 몇 초 정도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머릿속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멍하고 몸뚱이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다.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고 싶은데, 자꾸 볼을 건드리는 감각이 너무 거슬렸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손이 그것의 몸통을 건드렸을 때, 화들짝 놀라는 그것의 반응에 한유진도 정신이 번쩍 나며 상체를 일으켰다.
족제비 같은 생김새에 토끼처럼 귀가 긴 동물이 자신에게서 후다닥 멀어진 상태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넌 뭐냐?"
소리를 내자 흠칫 놀라더니 도망치지는 않고 코만 씰룩인다.
장막처럼 내려앉았던 어둠은 어느새 많이 가신 상태로, 영안술 없이도 어슴푸레한 빛이 있어 주위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때였다. 그리고 안개가 끼어 유난히 더 적막하고 또한 축축했다.
간밤의 전투 흔적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아마도 혈향이 맡아지지 않는 이유는 이미 코가 마비된 탓일 터다.
그리고 그 원숭이 괴물들의 시체에 다른 세 마리의 토끼 족제비들이 붙어 야무지게 식사 중이었다.
"너 이 새끼야, 설마 나 먹으려고 그랬던 거냐?"
한유진이 짐짓 으르렁거리자 그를 빤히 쳐다보던 녀석이 다시 움찔거린다. 그렇게 몇 초 이상 기싸움을 하는가 싶더니, 정말로 먹을 수 없는 대상이라 판단했는지 총총 다른 시체를 향해 움직여 가는 것이었다.
"으······."
약간이지만 긴장했던 한유진은 그제야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했다. 머리가 울리는 것은 물론 양쪽 귓구멍도 아프고, 등이 가렵고, 팔다리가 쑤시고, 관절이 삐걱대고, 아주 난리였다.
치유술이 간절했지만 과도한 영력을 사용한 직후라, 익숙하지도 않은 법술을 부리기가 매우 꺼려진다. 자칫하면 상태를 더 악화시킬지도 모른다.
꽤 오랜 시간을 가만히 앉아 몸을 추스르던 그가 비척비척 일어섰다. 한창 식사 중이던 토끼 족제비들이 일제히 쳐다보는 모습이 꽤 귀여우면서도 살짝 소름 끼쳤다.
'내가 죽었으면 저놈들이 날 포식했겠지.'
그러고 보니 지금 놈들은 자신의 사냥물을 대놓고 눈앞에서 빼앗아 먹는 셈이었다.
물론, 그냥 생각만 그렇게 했을 뿐 한유진은 딱히 녀석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 자신이 배고프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살짝 휘청이는 걸음걸이로 근처 나무뿌리 밑 은신처에 들어선 그는 한쪽에 고이 놓아두었던 법기 영액주병을 잡아들었다.
마개를 열고 그 향긋한 냄새를 즐길 틈도 없이 벌컥벌컥 들이켠다. 다행히 카르마를 추가 소모하여 복원할 때 내용물도 완전히 채워졌었다.
원래 한 모금만으로도 하루를 배고프지 않을 수 있는 영액이다. 그것을 네다섯 모금이나 들이켜고서야 그는 만족하며 병을 내려놓았는데, 대략 반 정도 내용물이 줄어든 듯했다.
"꺼윽······."
난데없이 트림이 나오면서 피로가 조금 가시는 느낌이다. 바로 자빠져 자고 싶었지만 그는 억지로 정신을 다잡고 회원공 수련을 시작했다.
그냥 자는 것보다 이렇게 공법을 통해 육체와 영혼을 자양하는 쪽이 더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 동시에 단련도를 높일 수 있는 건 물론이다.
매 호흡에 풍부한 영기가 빨려 들어와 그의 전신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어 퍼진다. 그렇게 반복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활력이 뿜어져 나와 기분이 매우 좋았다.
한참 뒤.
족히 두세 시간이 넘게 흐르고서야 한유진은 눈을 뜨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일단 육체와 영혼이 골병들고 쇠약해지는 일은 막았다. 아직 완전히 회복됐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법술을 좀 시험해 보는 데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먼저 시도한 법술은 당연히 치유술이었다. 일단 귀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는 듯하여 더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쉬운 법술은 아니었던 터라 두어 번의 실패를 겪은 뒤 성공할 수 있었는데, 청록색 빛무리가 전신을 휩쓸고 스며들자 부상이 눈에 띄는 속도로 사라져갔다.
"어우······."
온탕과 냉탕을 원할 때마다 번갈아 들어가는 것처럼 편안하고 시원하다. 거의 중독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일단 부상을 호전시키고 나자 몸의 찝찝함을 견딜 수가 없어져서, 바로 회원공에 포함된 정화술을 시전했다. 이번엔 별 실패 없이 바로 성공했고, 눈에 보이는 빛무리 대신 투명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모든 더러움을 증발시켰다.
말 그대로 증발시켰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피부에 덕지덕지 묻어있던 피딱지 등이 새까만 흙모래처럼 부서져 내리다가 그대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는 짧은 순간만에 몸에 걸친 의복을 포함하여 매우 깔끔한 상태가 됐다.
'체내 불순물은······ 사라졌는지 잘 모르겠네.'
아무래도 꾸준히 사용해 봐야 알 듯하다.
이어서 그는 아직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나머지 법술들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패를 가졌는데도 사용하질 못하는 멍청하고 답답한 상황은 오늘부로 끝이다.
밖으로 나서서 아직도 눈치를 보며 떠나지 않은 토끼 족제비들을 일견한 후, 적당한 곳에 자리 잡았다.
가장 먼저 펼쳐본 것은 화탄술이었다. 모든 수사들의 기초 공격 법술이기도 한.
단 두 번 만에 성공적으로 펼쳐진 화탄술, 그 붉은빛 찬란한 화염 구체가 전방의 나무에 쏘아져 충돌하자 섬광이 터졌다.
콰과광-!!
귀청을 찢는 폭음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퍼져 나가고 표적물이던 거대한 나무의 기둥 절반 이상이 잿더미로 화해 흩날린다. 그 뒤편의 땅마저 사람 네다섯 명은 들어가 누울 수 있을 만한 구덩이가 파였다.
우지지직···!
"어어···?!"
당연한 수순으로, 난데없이 큰 타격을 입은 거대한 나무가 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한유진이 허겁지겁 물러서고 그 거대한 나무가 다른 나무들과 충돌하며 넘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연신 숲속을 울린다.
꾸웅-!!
땅이 진동하는 충격파를 끝으로 마침내 나무가 완전히 쓰러졌다.
그 와중 떨어져 나간 나뭇잎들이 곳곳에서 흩날려 내려오고, 허공을 부유하던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뒤늦게 우수수 추락하며 잠시 더 소란이 이어졌다.
"······."
이것이 고작 수사들의 가장 기초적인 공격 법술, 화탄술의 파괴력이었다.
'이렇게까지 강하다고?'
만약 어젯밤 이 법술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었다면 전투가 훨씬 수월했을 것 같다.
기선제압?
고함 따위는 필요 없다. 화탄술 한 방이면 그 미개한 짐승 원숭이들은 아마도 즉시 겁에 질렸을 터다.
'물론 아니었을 수도 있겠지만.'
행여나 지금 난 소음이 무슨 위험한 포식자의 주의를 끌었을까 잠시 영안술로 주위를 살핀 그는, 별 이상 징조가 없음을 확인한 후 옥피술 연습으로 들어갔다.
토끼 족제비들이 전부 놀라서 도망친 일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의외로 이 옥피술이 꽤 까다로워서 여섯 번 넘게 시도하고서야 간신히 성공했다.
그의 전신 피부가 백옥 같은 빛을 머금고 윤기를 흘리기 시작했는데, 시험 삼아 근처 다른 나무에 주먹질해 보자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반면 주먹질을 당한 나무는 무슨 강철 둔기에 맞은 것처럼 자국이 남았다.
'이걸로 그 혹성탈출 새끼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을까?'
잠시 생각해 봤지만 곧 고개가 저어졌다. 설령 피해를 막아냈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자신의 몸이 이리저리 튕겨 나가며 매우 불리한 처지에 빠졌을 터다.
그리고 눈구멍처럼 피부가 덮이지 않은 급소들은 이 법술로 보호되지 않는다. 사용 시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다음으로는 은영술을 시도해서 두 번 만에 성공했다.
그저 영적인 기운만을 감추는 법술이라고 자칫 무시당할 수 있겠지만,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겐 아예 인지를 벗어나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들었다.
요컨대 상대의 코앞에 서 있어도 들키지 않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단 뜻이다.
몇 번 정도 더 은영술을 취소하고 시전해 보며 익숙해지고 있던 때, 그는 재차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토끼 족제비 한 마리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감히 날 먹으려고 했던 그놈 같은데.'
용서할 수 없다.
바로 녀석을 대상으로 어물술을 시전했는데, 통쾌하게도 단번에 성공하여 그 작은 녀석을 허공으로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찍- 찌직-!
당연히 놈은 완전히 난리가 났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법술로 만들어진 무형의 힘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바로 앞까지 날아온 그 토끼 족제비의 귀를 모아서 붙잡아 들자, 눈이 마주친 녀석이 금세 발버둥을 멈추고는 코만 연신 씰룩였다.
"야."
"······."
"감히 날 먹으려고 했었지. 역으로 내가 확 구워 먹어주랴?"
동그랗고 새까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계속 코를 씰룩이며 잔뜩 겁먹은 모습이 퍽 귀엽다.
"봐준다, 새끼."
귀를 놓아주며 어물술도 풀어준다. 바닥에 날렵하게 착지한 녀석이 한유진을 한 번 쳐다보고는 빠르게 후다닥 도망쳤다.
풀숲 건너편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그는 마지막 남은 법술, 풍운술로 관심을 돌렸다.
잠시 후.
쿵-!
엄청난 속도로 숲을 달리던 한유진이 그만 경로를 틀지 못하고 나무둥치에 부딪혔다. 다행히 옥피술을 시전한 상태였는지라 다치진 않았지만 꼴이 매우 우스웠다.
"쓰읍······."
법술의 시전 성공과 그것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성공률과 효율성, 위력의 정도와 조절 등도 그렇고.
풍운술의 속도는 아직 초보자일 뿐인 그에게 너무 빨랐다. 그래서 허공을 비행하는 일은 감히 시도조차 못 했다.
사실 다른 법술들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그의 수선 경지처럼 이제 막 입문에 성공했을 뿐이다. 시간을 두고 꾸준히 연습하면서 완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도 대략 어떤 느낌인지는 한 번씩 다 파악했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입문기 수사가 된 기분이다.
터덜터덜 걸어 그 허접한 나무뿌리 밑 은신처로 돌아와 앉은 그는, 지친 심신을 달랠 겸 회원공 수련을 시작하려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첫날 독성을 시험해 보려고 일부 채취해 왔던 그 버섯쪼가리였다.
'지금은 필요 없지.'
수선 입문에 최소 며칠은 걸릴 줄 알았다. 한데 이미 입문해 버렸으니, 영액주병이 있는 한 버섯 따위를 먹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영안술을 시전했을 때였다.
"음······?"
그냥 평범한 버섯치곤 꽤 많은 영기가 포함된 것이 보여 약간의 놀라움을 선사한다.
'이게 영식(靈植)이었다고?'
영식이란 쉬이 짐작할 수 있듯 영적인 식물을 뜻한다. 흔히 영초(靈草)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담으로 지구의 학문적 분류에 따르자면 버섯은 식물이 아닌 균류인데, 수선계에선 그냥 편하게 식물로 치는 듯하다.
어쨌든.
평범 이상의 영기를 품었으면 아무리 허접하더라도 영식이다. 그리고 모든 영식류는 독이 없다면 섭취 시 수련에 이로운 점이 있다는 게 상식이다.
그 버섯을 모조리 입에 쑤셔 넣은 한유진은 마저 채취해 오기 위해 은신처를 나섰다.
한데 바로 그때, 문득 여전히 처리되지 않은 원숭이 괴물들의 시체가 더 많은 영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멍청했다니!'
마음속으로 괴물이라고 단정 지어 버린 탓에, 저놈들의 고기가 수련을 돕는 영육(靈肉)일 수 있다는 점을 미처 고려해 보지 못했다.
정말로 보물을 눈앞에 두고서도 알아보지 못한 멍청한 짓이었다.
'······그 토끼 족제비 새끼들을 구워 먹었어야 했는데!'
그리고 영육을 도둑맞으면서도 그냥 호구처럼 보고만 있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11화. 달라진 전투력
타닥···!
어설프게 만들어진 모닥불 위로 웬 고기가 나뭇가지에 꿰어진 채 익어간다. 기름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불길이 잠시 거세지며 그을음이 피어올라 고기에 묻었지만, 한유진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수선자가 된 마당에 그런 사소한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허접한 수사라도 암 따위에 걸려서 죽진 않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확실히, 수선자가 사기긴 하네.'
일단 입문하여 공법을 수련하기만 하면 아무리 실력이 약하더라도 100세 이상 무병장수할 수 있다. 애초에 수선(修仙)이라는 게 강함이 아닌 장생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유진은 이런 선협 스타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공법도, 법술도, 법기도, 전혀 촌스럽거나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만약 판타지 스타일의 마법을 익혔더라면 그 역시 매우 마음에 들어 했을 테지만, 어쨌든 이 역시도 싫지 않다는 뜻이었다.
원숭이 괴물의 고기는 그것들의 흉악한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하게 향긋한 냄새를 풍겼다. 솔직히 야생 짐승의 고기를 되는대로 도축해서 굽는 거라 냄새가 심할 줄 알았는데, 실로 무식한 생각이었다.
영기를 품은 고기가 보통의 고기와 같을 리 없다. 지금 이 눈앞의 고기처럼 매우 향긋하거나, 아니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준으로 악취가 심하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고기가 빨리 상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숲의 온도가 서늘한 편이기도 했지만, 역시나 영기를 품은 덕에 그것이 다 흩어질 때까지는 어지간해선 상하지 않는다.
덕분에 안심하고 원숭이 괴물 시체들을 한쪽에 쌓아둘 수 있었다. 피는 이미 다 빠질 대로 빠져서 별 지저분해지지도 않았다. 내장 등을 제거할 때가 조금 고역이었지만 어떻게든 견딜 만했고.
잠시 후.
마침내 다 익은 듯하자 한유진은 나뭇가지를 입으로 가져와 크게 한 입 고기를 베어 물었다.
꽤 질긴 듯했지만 못 씹어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씹으면 씹을수록 부드러워지는 느낌이었고, 맛과 향취가 살짝 독특하면서도 엄청나게 좋았다.
제대로 요리해서 먹으면 그야말로 세기의 진미가 탄생할 것 같다. 물론, 좋은 고기는 그냥 굽기만 해도 그 맛의 절반 이상을 끌어낼 수 있긴 하다.
그는 조금 많이 구웠다 싶은 양의 고기를 모조리 게눈감추듯 먹어 치웠다. 이후 영액주병의 향긋한 술까지 한 모금 들이켜 입가심하고서야 배를 두드리며 만족했다.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배 속에서 은근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모닥불을 정리하고는 은신처로 들어가 편히 앉았다.
회원공을 운용하기 시작하자 호흡으로 들이마시는 영기와 호응하여 배 속의 열기가 함께 움직인다. 그것이 몸을 단련함과 동시에 영혼 역시 단련하여 성장시킨다.
흔히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다. 수선적 관점에서도 그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영혼을 성장시키려면 육체 역시 성장시켜야 한다.
기본적인 운용을 몇 번 마친 한유진은 과감하게 영혼을 법혼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시도했다.
일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던 영기의 흐름에 더 복잡한 법문이 떠오르고 그것이 신비한 효과를 발휘하며 모종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냥 평범하게 효율적으로 단련되는 정도를 넘어 본격적인 수선의 손길이 닿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느낌이 가득했다. 시원한 것 같으면서도 짜릿하고, 가끔씩 아프고, 그것이 곧 다시금 시원함으로 치환되며 나아간다.
육체의 변화는 물론이고 특히 영혼의 변화가 정말로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입문기에 들어서며 영기 감응력을 얻었다지만, 이토록 선명하게 영혼의 존재를 느끼긴 또 처음인 듯하다.
수사가 법혼기로 올라서려면 영혼을 최소 4할 이상 법혼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영혼이 스스로 영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당연히 법혼은 스스로 법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이 법력이야말로 진정한 수선자의 힘이다.
그 힘이 얼마나 뛰어난가 하면, 법혼기 수사 한 명이 평범한 입문기 수사 열 명 이상을 양 떼처럼 도륙내 버릴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법혼기 수사는 그저 무력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법혼 승화율에 비례하는 지능을 가지는데, 이 지능은 감지력, 연산력, 판단력, 기억력 등을 의미한다.
기습적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여유롭게 손가락만 써서 잡아내거나, 복잡한 수학 문제를 동시에 여러 개씩 풀어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괜히 법혼기부터를 진정한 수선자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입문기는 표현 그대로 이제 막 입문한 수준에 불과하다.
'법혼 승화율이 높을수록 능력과 성장성 면에서 유리하지만······.'
안타깝게도 상응하는 위험이 존재한다. 바로 법혼 승화의 과정에서 온갖 환각을 겪으며 자칫 미쳐 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한유진은 걱정이 없었다.
'미치면 그냥 죽고 다시 수련하면 되지.'
그 악마 추종자들의 세계에서 얼마나 잔혹하게 영혼이 망가졌었는지를 떠올려 보면, 공법 수련의 부작용 정도야 얼마든지 무효화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자신의 각성 능력은 사기적이었다. 이 능력만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선도가 암울해질 일은 없으리라.
한유진은 그렇게 믿으면서 계속 회원공 수련에 집중했다.
* * *
원숭이 괴물 고기를 전부 해치우는 데는 약 보름 정도가 걸렸다. 갈수록 고기에 포함된 영기 손실량이 많아졌기에 조금 서두른 결과였다.
그 영육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한유진은 살짝 버벅댈지언정 꾸준하게 법혼 승화를 진행할 수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됐다.
그가 영기와 빨리 감응할 수 있었던 것은 영근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법혼 승화를 진행하면서 회원공에 포함된 사소한 요령으로 몇 차례 검증해 보니, 그의 영근 재능은 잘 쳐줘야 진영근 하위권에 불과한 듯했다.
'위영근이 아닌 게 어디냐.'
그렇게 위안하다가도 문득 다시 떠올리면 자동으로 한숨이 나온다.
사실 영기 감응을 엄청나게 빨리 성공했을 때부터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무의식적으로 이미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천영근은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서 천영근이라 부른다지만, 그래서 기대하는 것 자체가 과욕이라지만.
그런 과욕을 부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란 동물이다.
천영근과 진영근의 차이를 생각하자니 그 욕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열 배의 수련 속도 차이가 어디 작겠는가? 계산하면 할수록 점점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내 각성 능력이라면, 어쩌면······.'
잠깐 쉬는 사이에 그런 생각을 하던 한유진은 곧 고개를 저었다.
선도는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 쟁취해야 한다지만, 그것도 최소한의 실력이 뒷받침될 때의 이야기다.
'조금 비효율적일지라도, 법혼기의 실력과 안목을 갖추고서 도전하는 게 맞다.'
어떤 것을 어떻게 시도해야 할지도 당장 떠오르는 게 없으니 특히 그렇다. 마냥 '재능 향상'을 바라면서 문을 고정시킨다면, 그곳에서 모종의 성과를 얻는다 해도 나중에 후회할지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재능을 얻고 나면 카르마가 부족할 것 같았다. 지금처럼 영기가 풍부한 수련 장소를 임대하면서 주화입마 같은 위험을 배제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소비다.
선택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면에서도 이쪽이 더 현명할 터다.
그런 결론을 내리고서야 마음이 조금 편해진 그는, 이대로 계속 수련하기보단 다른 영육이나 영식을 찾아 나서는 편이 좋겠다는 계획에 따라 은신처를 나섰다.
실로 오랜만에 나서는 것이었다. 영액주병과 정화술 등의 도움으로 아예 밖에 나갈 일이 없다 보니 그간 겨울잠 자는 곰처럼 처박혀만 있었다.
별다른 위험한 짐승이 찾아오지 않은 것도 컸다. 정말로 숲의 이 구역이 한유진 자신의 것이 된 듯했다.
하지만 이젠 슬슬 주변을 탐사해 볼 때다. 여기서 하루 이틀만 더 머물 것도 아니고, 빠른 수행을 위해서라도 영육과 영식 등이 더 필요하기도 하고.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훨씬 더 영기가 풍부한 장소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오행검을 제외한 모든 소지품을 허리춤의 저물대 안으로 챙겼다. 그 일련의 과정이 제법 익숙하게 보였는데, 그간 온전히 회원공에만 집중한 게 아니라 법기와 법술을 사용하는 일도 조금씩 연습한 덕이었다.
'그 혹성탈출 놈들은 어디에 머물고 있었을까?'
이전부터 몇 번 떠올린 의문이다. 그리고 이 구역의 주인이 되었으니 마땅히 전 주인이 어디에 머물렀었는지, 그곳이 어떤 지형이고 무엇이 있는지는 파악해 둬야 한다.
실수 없이 풍운술을 발동한 그는 속도를 적당히 조절하면서 숲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단순히 땅을 밟고 달리는 것만이 아니라, 중간중간 낮게 스치듯 비행하면서 상당한 거리를 이동하기도 했다.
가히 어지간한 스쿠터 이상 가는 속도였다. 이곳이 거대한 나무와 억센 풀숲 가득한 원시림 한복판임을 고려하면 매우 뛰어난 기동성이다.
굳이 언급할 것도 없이 은영술과 영안술은 진즉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의 실패 끝에 옥피술 역시 성공적으로 펼쳐졌다.
'이게 진짜 까다롭단 말이지.'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고작 보름 만에 무려 네 가지 법술을 동시 시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매우 훌륭한 성과였다.
당연히 그가 가진 초월적인 언어 이해력 덕분이다. 법문의 파악에 전혀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평범한 입문기 수사들이 가장 고생하는 부분을 완전히 날로 먹는 것이었다.
'영근 재능은 평범하지만 오성은 천재 비슷한 거지.'
어쩌면 그래서 더 영근 재능에 대한 욕심이 폭발하는지도 모른다.
보름이 넘게 머무른 숲인데도 조금만 이동하자 완전히 낯선 장소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리고 영원히 달려도 이 원시림의 끝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외롭다.'
문득 그런 감상을 받으면서도 한유진은 주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언가 신기한 것을 발견하거나 영기 짙은 물건을 보면 즉시 멈춰 서서 조사했다.
그렇게 잠깐 탐험했는데도 몇 종류의 버섯과 작은 과일들이 그의 저물대로 들어갔다.
영기를 품은 영식이 독성을 가졌는지 시험하는 방법이 몇 개 있었는데, 치유술과 정화술의 법문 일부를 응용하는 것이었다. 평범했을 때처럼 일일이 보고 만지고 맛볼 필요가 없다.
사실 독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그냥 지나치는 것들도 살짝 아쉬웠다. 만약 연단술(鍊丹術)을 할 줄 알았다면 이런 독성까지도 이용할 수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어디 아쉬운 게 연단술뿐이랴.'
연기술, 부적술, 영식술, 어수술, 금제술, 괴뢰술 등······.
선도를 걸으며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이 엄청나게 많다. 문제는 그것들을 전부 학습하기엔 수명이 부족하단 사실이었다.
공법을 수련하기도 바쁜데 언제 다른 기술들까지 하나하나 배우고 있겠는가? 그 기술들이 전혀 간단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괜히 그런 전문가들이 별로 없어서 그만큼 존중받는 게 아니다.
생각하는 와중, 그는 상당히 안전하게 느껴지는 작은 협곡지형을 발견했다. 유난히 풀숲이 우거져 있어 영안술이 아니었다면 자칫 그냥 지나칠 뻔했다.
"음."
가까이 가서 살피자 은은하게 짐승의 냄새가 난다. 언뜻 익숙한 듯하여 잘 생각해 보니 바로 그 원숭이 괴물들의 냄새 같았다.
'여기가 둥지였나?'
그는 옥피술과 은영술을 점검하고는 그 협곡 안으로 들어섰다.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좁은 길은 사라지고 안쪽이 공터처럼 확 트이는 지형이 나타났다.
그 중앙에 자리한 짙은 흑색의 앙상한 나무가 시선을 잡아끌었는데, 주변으로 체구가 작은 원숭이 괴물들의 시체가 심하게 파먹힌 상태로 널브러져 있어 특히 더 그랬다.
"······."
아무래도 뭔가가 이곳을 습격해서 남아있던 어린 원숭이 괴물들을 학살한 것 같다.
그리고 중앙의 흑색 나무도, 처음부터 그렇게 앙상했던 게 아니라 모종의 열매가 매달려 있었던 듯하다.
주변에 과일 씨앗처럼 보이는 게 몇 보였는데, 유난히 짙은 영기를 품고 있어 못 발견할 수가 없었다.
크르릉···!
바로 그때.
협곡 위쪽에서 무언가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든 한유진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늑대 비슷한 짐승을 목격했다.
비슷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귀 모양이 조금 이색적이고 꼬리에 전갈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침이 달린 탓이었는데, 살펴보는 사이 몇 마리가 더 얼굴을 내밀면서 한유진을 내려다봤다.
은영술을 펼친 상태지만 너무 가까이 온 탓에 놈들의 후각에 발각된 것 같다. 그의 은영술 숙련도가 아직 완벽하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늑대 짐승들은 잠시 간을 보는가 싶더니 이를 드러내며 공격할 기세였다.
한가할 때 먹잇감이 제 발로 나타난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후-."
그에 대응하여, 가볍게 숨을 내쉰 한유진은 전혀 겁먹지 않은 상태로 허리춤의 오행검을 뽑아 들었다.
"덤빌 거면 빨리 덤벼라, 이 새끼들아."
예전의 그 허접했던 자신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한유진 역시 상대를 아주 맛있는 사냥감으로 여길 수 있었다.
저것들을 다 사냥해서 잡아먹으면, 모르긴 몰라도 법혼 승화율이 1할 정도 될 때까지 수련을 지속할 수 있을 듯했다.
선도는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생각하자 쥐고 있던 오행검에 은은한 금빛을 띠는 법문 금제가 나타난다. 이후 검이 저절로 손아귀를 떠나 그의 옆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제법 그럴듯한 수사의 전투태세였다.
그렇게 약간의 긴장감이 흐르고.
- 컹! 크르르릉···!
한 늑대가 협곡의 경사면을 타고 날듯이 내려오는 것을 시작으로 놈들이 전부 공격을 개시했다. 불과 대여섯 마리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수가 꽤 많았다.
그에 대응하여 오행검이 순간 공명한다.
번쩍임과 함께 한 줄기 날카로운 금빛 기운이 쏘아져 선두의 늑대 짐승을 절반으로 쪼개 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뒤편의 두 마리까지 추가로 베어 도살했다.
한없이 예리한 칼날에 베이듯 저항감이 전혀 안 느껴져서, 만약 터져 나온 핏물이 아니었더라면 환각으로 착각했을 터였다.
12화. 다시 수련의 나날
그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오행검이 연신 공명하고 법문 금제가 번뜩일 때마다 금색 빛줄기가 섬전처럼 쏘아진다. 그 형상이 마치 고속으로 날아가는 채찍 줄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달려 들어오던 늑대 짐승들이 팍팍 쪼개지며 여덟아홉 마리가 눈 깜짝할 사이 죽었다. 너무나 예리하게 베어져 죽는 탓에 터져 나오는 핏물마저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가히 파죽지세였다. 아니, 이 경우엔 파랑지세라고 불러야 할 터다.
후방에서 달려오던 늑대 짐승들이 급히 멈추려다가 경사면을 구르는 등 아주 난리였다. 오직 최전방의 늑대들만이 멈출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오히려 더 흉포하게 달려들었다.
- 크헝-!!
늑대처럼 생겨서는 마치 호랑이처럼 포효하는데 제법 등골이 짜릿했다. 하나 그 순간 한유진은 이미 대응하여 오행검의 법문 금제를 변경한 상태였다.
금빛이 푸른빛으로 물들며 번쩍이고 파도처럼 뿜어져 나온 대검 형상의 기운이 늑대 짐승을 후려쳐 피떡으로 만든다. 이어 한순간에 여럿으로 분화되더니 주변을 온통 휩쓸었다.
대지가 갈려 나가고 늑대 짐승 두세 마리의 몸까지 참혹하게 찢어발겨졌다. 놈들의 핏물과 살점 등이 폭죽처럼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광경은 끔찍하면서 또한 위협적이었다.
그제야 늑대들 전부가 확실히 깨달은 듯했다. 상대는 감히 맞서선 안 될 존재였단 사실을.
원래 수선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기운보다 실제 전투력이 더 강하다. 그리고 한유진은 놈들의 후각 때문에 들키긴 했지만 여전히 은영술이 걸려있어 더 기운이 가려져 있었다.
'오히려 좋아.'
그의 짧은 감상이었다.
만약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이만한 양의 영육을 어디서 또 구했겠는가?
뒤편에서 깨갱거리는 소리가 나며 늑대 짐승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한유진은 곧장 풍운술을 사용해 허공 높이 뛰어오르며 옆에 함께 날아오른 오행검을 조작했다.
예의 번쩍임과 함께 쏘아진 금빛 기운들이 도망치는 늑대들을 엄청난 속도로 차례차례 도살한다. 그렇게 고작 몇 초가 지나자 더는 살아있는 놈이 없었다.
바닥에 사뿐히 착지한 그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두 팔을 벌리고 고개를 쳐든 채 상당히 오랜 시간을 가만히 서 있었다.
승리의 희열을 만끽하는 것이었다.
겉보기로 싸움이 쉬웠든 아니든, 그 어떤 익스트림 스포츠보다도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경험이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느낌이 너무나 선명했다.
"찢었다, 한유진."
감탄사였지만, 정말로 늑대 짐승들을 찢어버리기도 했다.
"존나 카리스마 있어."
어느 영화에서 나온 대사를 자신도 모르게 내뱉으면서 그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주위를 살폈다.
살생에 대한 거부감?
그런 건 아주 조금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서로의 목숨을 건 정정당당한 야생의 전투였다. 하물며 그가 선공한 것도 아니고 건방지게도 놈들이 먼저 이를 드러냈다.
한동안 가만히 서서 여운을 만끽한 뒤, 그는 마침내 진정하고는 전투의 뒷정리를 시작했다.
바로 전리품을 챙기는 일이었다.
머리와 내장과 가죽과 발톱 등의 못 먹는 부위를 제거하고 남은 고기를 오행검으로 토막 쳐 정리한다. 혹시 사골처럼 우려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넓적한 뼈 부위를 따로 챙기기도 한다.
묘사하기론 간단했지만, 직접 수행하려면 결코 짧은 시간 안에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일에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늑대 짐승들의 수가 자그마치 스물이 넘었으니까. 또한 주변을 경계할 필요까지 있다.
하여 대략 작업을 마무리 지었을 때는 무려 날이 저물었다가 다시 어슴푸레 밝아올 때쯤이었다. 수사로서 향상된 체력과 정신력이 아니었다면 중간중간 휴식하느라 더 오래 걸렸을 터다.
"후······."
피로와 뿌듯함이 반씩 섞인 숨을 내뱉으며 정리된 고기들을 막 저물대에 넣고 있을 때였다.
찍-!
한두 시간 전부터 주변을 맴돌고 있던 녀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그 귀여우면서도 괘씸한 토끼 족제비였다.
심지어 어쩐지 느낌상 자신을 건드렸다가 어물술에 붙잡혔던 그 녀석 같다.
놈은 한유진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그가 버린 부산물들이 쌓인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계속 눈치를 보더니 살점이 붙은 뼛조각 하나를 입에 물곤 후다닥 도망쳤다.
"허락도 없이 가져가네."
살짝 헛웃으며 중얼거렸지만 딱히 막을 생각은 없다. 어차피 버린 부산물일 뿐이었다. 벌레가 먹으나 토끼 족제비 녀석이 먹으나 그게 그거다.
그는 휴식을 위한 장소를 찾을 생각으로 장내를 벗어났다.
* * *
적당히 크고 모양 좋은 나무 위에서 반나절 정도 푹 쉰 뒤.
한유진은 고생해서 챙긴 늑대 짐승 영육으로 한 끼 거하게 차려 먹은 후, 바로 놈들의 은신처를 찾아 나섰다.
서둘러 움직인 이유는 원숭이 괴물들의 거처에서 발견했던 그 앙상한 나무와 영기 가득한 과일 씨앗 흔적들 때문이었다.
'늦으면 이번에도 다른 짐승들에게 뭔가를 빼앗길지도.'
단지 그런 생각이었는데······.
놈들의 수가 많았던 터라 어디서부터 이동해 왔는지 추적하기가 쉬웠고, 그렇게 필연적으로 발견하게 된 늑대 소굴은,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 달리 너무나 쾌적하고 안전해 보였다.
일단 한쪽이 깎아지르듯 치솟은 암벽지대로 막혀있다는 점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주위 빼곡한 나무와 억센 풀숲들이 천연의 장벽처럼 한쪽으로만 입구를 내며 자리했고, 안쪽에는 대체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모를 담수가 적당히 큰 규모의 못을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 그 못 안에서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은 상당한 영기를 품은 영어(靈魚)였다.
"와우······."
그런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곳이다. 비경(祕境)이라고 칭해도 딱히 과언이 아닌 느낌마저 든다.
이곳이 늑대 소굴이었음을 증명하는 흔적은 한쪽 구덩이에 널린 뼛조각들과 늑대 털 뭉치들이었다. 본거지를 지키는 암컷이나 아직 덜 성장한 새끼가 있을 법한데도 코빼기조차 안 보여서 조금 의아하긴 했다.
'낌새를 알고 도망쳤나?'
잠시 고민해 보던 한유진은 별로 중요치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정말로 도망쳤든 아니든, 지금부터 이곳은 자신의 땅이다. 죽은 놈들이 전부 살아 돌아와도 여기서 자신을 몰아낼 수는 없으리라.
화탄술의 발동 방식을 조정하여 구덩이 속 모든 늑대 짐승의 흔적을 불태워 없앴다. 이후 다른 위험 요소가 있는지 두세 번 정도 면밀하게 살핀 다음에야 그는 안심하고 자리 잡았다.
이곳에 오기 전 특별히 습득했던 부시크래프트 지식을 활용하여, 암벽의 움푹 파인 곳을 기점으로 나무와 진흙과 덩굴 등을 사용해 벽과 지붕을 세웠다. 법술을 사용하면 특별한 도구 없이도 수월하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만들어진 지붕 위로 땅을 포 뜨듯이 하여 옮겨온 이끼를 이식하자, 여느 마이튜브 영상에 나오는 것만큼이나 보기 좋은 거처가 만들어졌다.
평범한 사람에겐 조금 열악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수선자였다. 벽과 지붕이 비바람을 막아주기만 하면 생활에 별 지장이 없다.
그렇게.
한유진의 두 번째 수련 생활이 시작됐다.
챙겨둔 늑대 짐승 고기가 아주 많고 근처 못에는 물고기들이 산다. 밖으로 나가 조금만 돌아다니면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작고 붉은 열매를 쉽게 채집할 수도 있다. 향이 좋은 각종 버섯은 덤이다.
그 모든 먹거리가 영기를 품고 있어 수련에 도움 된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간간이 주변을 탐사하면서 위험 요소를 체크하는 일을 제외하면 그는 항상 새 은신처에서 공법을 익히고 법술과 법기 사용을 연습했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법혼으로 승화해 가는 영혼을 느끼며 하루하루 보람찬 나날이었다.
그렇게 늑대 짐승 고기를 반 정도 소모했을 때.
대략 한 달여가 흘렀다.
법혼 승화율은 7푼 정도에 이르러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성과를 냈다. 이대로라면 모든 먹거리를 소모했을 땐 예상했던 1할을 넘어 2할에 가까운 승화율을 달성할지도 몰랐다.
찍-! 찍-!
그사이 한유진의 평온하면서도 충실한 나날에 생긴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으니, 바로 그 괘씸하기 짝이 없는 토끼 족제비의 존재였다.
놈은 한유진이 자신을 어지간해선 해치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아니면 그냥 바보라서 막연한 느낌만으로도 겁 없이 구는지 몰랐다.
어쨌든 언젠가부터 슬슬 주변을 맴돌더니, 문득 깨닫고 보자 그의 발밑에서 배를 드러내고 누워있을 정도가 됐다.
"······또 이거 달라고 그러는 거냐?"
영액주병을 들어 올리며 살짝 흔들자, 녀석의 새까만 눈동자와 머리가 그 흔들림에 따라 움직인다.
애만 태우면서 좀처럼 줄 기미가 안 보이자, 녀석이 그의 바짓단을 물어 당기고, 다리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다가 두 발로 서서 빤히 쳐다보고,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듯 저 혼자 허공으로 달려들어 자빠지고, 아주 생쇼를 했다.
큭큭대며 웃은 한유진이 마개를 열고 영액주 몇 방울을 떨어트린다. 그 마개 열리는 소리를 귀신같이 들은 토끼 족제비가 잘도 허공에서 받아먹고는 더 달라는 듯 찍찍댔다.
"안 돼."
그는 애처롭게 바라보는 녀석의 머리와 몸통을 쓰다듬으며 상당한 만족감을 느꼈다.
이전에 숲을 탐사하면서 외롭다는 감상을 받은 적 있다.
사실 그때뿐만이 아니라 꽤 빈번하게 그런 감정을 느꼈다. 아무리 수련하는 게 좋고 보람차다지만 사람이 그리운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한데.
이 별 쓸모도 없고 되레 영기 깃든 식량을 빼앗아 먹기만 하는 토끼 족제비 한 마리가 그의 외로움을 놀라우리만치 크게 덜어줬다.
이제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당시 전투의 여파로 쓰러져 있을 때 볼을 건드려본 그 녀석이 맞았고, 첫 어물술의 시전 대상이었기도 한 바로 그 녀석이 맞았다.
'정말로 날 먹으려고 했던 걸까, 아니면 먹기 전에 왠지 안 죽은 것 같아서 확인해 보려고만 했던 걸까.'
사실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안 깨물었으니까.
"이름 지어줄까?"
불현듯 드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그가 물었다. 토끼 족제비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를 쳐다보곤 머리를 갸웃댔다.
"······됐다, 이름은 무슨 이름이야."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렇게 은신처 한쪽의 못으로 다가가자, 물고기를 잡을 예정임을 알고서는 토끼 족제비가 신이 난 채 뒤따랐다.
자신에게 영어 머리와 살점 일부가 떨어질 것임을 아는 모습이었다.
* * *
시간은 한없이 느린 듯하다가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훌쩍 지나가 있기 마련이다.
그가 늑대 소굴을 은신처로 삼은 지 두 달 하고도 보름 정도가 지났을 시점.
마침내 늑대 짐승 고기가 바닥났다. 그리고 못에 많이 보이던 물고기도 점점 뜸해져서 어물술로 건져 올리기가 어려워졌다.
법혼 승화율은 거진 2할7푼을 넘긴 상태로, 조금만 더 수련하면 무려 3할의 승화율을 달성할 수도 있을 듯했다. 그리고 다행히 새로운 수련 보조 음식을 구할 수 있는 장소를 찾은 상태였다.
은신처에서부터 풍운술을 사용해 한쪽으로 약 반 시간 정도 나아가면, 원시림 한복판에 자리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당연히 그렇게 커다란 호수에는 온갖 영기 풍부한 먹거리가 가득했다.
"오늘은 같이 가자."
여태껏 그 호수에 다섯 번 정도 방문하면서 한유진은 큰 위험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상태였다. 아무런 쓸모도 없고 영식을 훔쳐먹기만 하는 작은 토끼 족제비 한 마리를 데려가도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 터다.
그가 익숙한 듯 손짓하자 바닥에 있던 녀석은 날다람쥐처럼 그의 몸통을 타고 올라 품에 안겼다. 정말로 보면 볼수록 귀여워서 한바탕 머리를 쓰다듬어주게 된다.
'지구로 데려갈 수 있으면 좋겠네.'
지금으로선 가능할지 아닐지 모르겠다. 직접 시험해 봐야 알 듯하다.
생각하며 은신처를 나선 그는 풍신술을 통해 그 호수로 이동해 갔다. 품에 안긴 토끼 족제비는 한유진의 빠른 속도에도 별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는데, 은신처 주변을 순찰할 때 몇 번 경험한 덕이었다.
잠시 후.
호수에 도착한 그는 품에 안고 있던 토끼 족제비를 내려줬다. 그리고 마치 바닷가의 백사장처럼 자리한 흙모래 지대를 밟으며 나아갔다.
아주 멀찍이서 몇 이색적인 동물들이 물을 마시거나 햇볕을 쬐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보인다.
거리가 충분하고 만일 덤벼들어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따라오지 않은 상태의 토끼 족제비를 살폈다.
"왜?"
당연히 녀석이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냥 뭔가가 꺼려지는 듯 머뭇거리는 태도였다.
한유진은 혹시 몰라 다시금 주변을 살폈지만 정말로 위험 요소랄 게 없었다. 이 원시림에서 이렇게까지 안전한 장소를 찾기도 쉽지 않다.
"괜찮으니까 빨리 와."
손짓하여 부르자 그제야 녀석이 총총 다가와 다리에 몸을 비빈다.
그런 녀석과 잠시 놀아준 그는, 저번에 방문했을 때 미리 가져다 두었던 바위에 걸터앉으며 호수 안쪽을 살폈다. 토끼 족제비가 따라 올라와선 그의 옆에 자리했다.
이후로 평온한 낚시 시간이 이어졌다. 수련을 겸한 시간이기도 했다.
영안술로 거리가 꽤 있는 깊은 물 속을 바라보며, 은영술로 기척을 감추고, 어물술로 먹음직스러운 물고기를 낚아채 흙모래사장 위로 던져낸다.
그렇게 서너 마리의 팔뚝만 한 물고기가 땅에서 펄떡대며 오늘의 한 끼 먹거리가 될 운명으로 전락했다.
그 물고기들을 쳐다보며 계속 몸을 움찔거리던 토끼 족제비가 문득, 옆에 앉은 한유진을 고개 돌려 한 번 쳐다보더니 잽싸게 달려 나갔다. 자기 몫의 한 마리를 미리 챙기려는 듯했다.
"저거 저, 식탐 그득한 거 보소."
한유진이 낄낄 웃으며 그런 녀석의 행동을 구경하던 바로 그때였다.
불현듯.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함에 웃음이 절로 멎는다. 본능에 따라 돌아간 시선이 여태 주의하지 않았던 방향의 호수 속을 향한다.
시커먼 무언가를 목격했다 싶은 순간 그것이 물보라를 터뜨리며 엄청난 속도로 뛰쳐나왔다. 이제 막 물고기 한 마리를 물어 든 토끼 족제비를 향해서였다.
13화. 동귀어진
반사적으로 오행검을 뽑아 들며 다른 쪽 손으로는 어물술을 펼쳐 토끼 족제비를 끌어당긴다. 하나 그 어물술이 닿는 속도보다 적의 기습이 한발 더 빨랐다.
마치 도마뱀처럼 생겼다. 얼핏 아가미와 갈퀴도 보인다. 꼬리는 확실히 지느러미가 달린 수중생물의 것이다.
그렇게 반사적으로 외형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새, 이미 토끼 족제비는 평소의 잽싸던 모습이 무색하게도 놈의 아가리에 씹혀 그 목구멍 안쪽으로 꿀꺽 넘어가 버리는 모습이었다.
오행검의 법문 금제가 번쩍이고 금빛 기운이 쏘아졌다. 하나 그 수생 도마뱀 괴물이 기다렸다는 듯 꼬리를 휘둘러 대응했고, 그 꼬리에 서린 희뿌연 기운과 오행검의 공격 법술이 충돌하자 날카로운 소음이 터져 나왔다.
소음의 근원지인 꼬리에서 언뜻 놈의 핏물이 흩뿌려지는 것이 보인다. 하나 늑대 짐승을 저항 없이 쪼개버렸던 금빛 기운의 위력을 고려하면 너무나 미약한 성과였다.
- 키아악···!
놈은 자신이 다쳤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란 듯 뛰쳐나올 때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 호수 속으로 도망쳤다. 정말로 평범한 생물이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당연히 한유진은 놈을 죽여 버리기 위해 연신 오행검을 조작해서 금빛 기운을 쏘아냈지만, 단 한 발만 추가로 적중해서 약간의 상처를 남겼을 뿐 나머지 두 발은 놈의 잽싼 움직임에 아슬아슬하게 땅만 갈랐다.
솔직히 그 빗나감에는 한유진이 당황한 탓도 조금 있었다. 모든 일이 워낙 순식간에 벌어졌는지라 계속 얼떨떨했던 것이다.
그렇게 일이 초 정도가 지난 후.
앉아 있던 바위에서 벌떡 일어선 채 가만히 있던 그는 문득, 상황을 새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토끼 족제비가··· 녀석이 사냥당했구나.'
여태 그와 함께 지내며 온갖 영기 깃든 음식들을 배불리 먹었으니, 평범한 황갈색이던 털마저 은은한 금빛으로 변해가며 녀석 자체가 꽤 많은 영기를 품게 된 상태였다.
아마도 다른 포식자들에겐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 모습이었을 터다.
뭔가 끓어오르는 감정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귀여워하며 함께 지내던 녀석이었는데도, 그냥 이렇게 갑자기 죽었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호수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오행검의 내장 방어 법술을 끌어내 금빛 종 형태의 방어막으로 몸을 보호하면서, 딱히 물속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는 법술 같은 건 모르지만 그래도 초등학생 때 잠깐 수영을 배웠었다는 사실 하나만을 믿고서.
자신이 데려왔으니까 지키진 못했더라도 복수는 해 줘야 한다는 의무감인지.
아니면 감히 주인의 눈앞에서 그 애완동물을 해친 괴물에 대한 분노인지.
그도 아니면 괴물의 배를 갈라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녀석을 꺼내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생각 때문인지.
한유진 자신조차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지금 반드시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확신이, 도저히 거부하고 싶지 않은 강박적인 충동이 있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이런 게 하나둘씩 쌓이다 보면 그 악명높은 심마(心魔)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번 싹트면 선도를 걷는 데 있어 두고두고 화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아무리 내가 더 강하더라도 물속에선 위험하다.'
몸을 움직이기 전부터 그런 판단을 했다. 하지만 이미 물속으로 뛰어든 상황에 전혀 쓸모가 없는 판단이었다.
생각보다 더 어둡게 느껴지는 물속에서 그는 영안술에 집중해 주위 사방을 살폈다. 땅 위에 있을 때와 달리 발밑까지 살펴야 하는지라, 단지 한 방향의 경계구역이 추가되었을 뿐인데도 매우 빈틈이 많아진 기분이었다.
풍운술은 물속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냥 맨몸으로 수영하는 것보단 나아서, 한유진은 무작정 직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점점 더 뭍에서 멀리, 점점 더 호수 속 깊이.
그렇게 얼마를 헤엄쳤을까.
수선자의 비범한 육체로도 반 이상 호흡을 소모했다고 느끼는 때, 어두운 그림자가 발밑을 훅 스쳐 지나갔다. 그 자취를 따라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언제 거기까지 이동해서 날렸는지 모를 공격이 방어막을 후려쳤다.
원숭이 괴물들의 광포한 공세 속에서도 멀쩡했던 보호막이 그 한 방에 살짝 찌그러지며 흔들렸다.
─!!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귀가 아플 만큼 거대한 충격음이었다.
오행검의 공격을 막아냈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실로 놀라운 공격력이다. 한유진은 청심술을 동원해 최대한 침착해지려 애쓰면서 연신 주위를 살폈다.
도마뱀 괴물의 모습을 시야에 담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놈은 뭍에서도 빨랐지만 물속에서는 그 몇 배 이상으로 빨라서, 마치 주변의 물이 놈의 의지에 따라 움직임을 도와주는 것 같았다.
필시 영기를 사용해서 만들어 내는 현상일 터다. 그러니 이것은 본격적으로 영기를 다룰 줄 아는 괴물과의 첫 전투인 셈이다.
'지금!'
겨우 시야에 포착한 놈을 향해 금빛 기운을 쏘아낸다. 방어막을 통과해 날아간 그 공격은 아쉽게도 놈의 등 위쪽을 살짝 스치며 지나갔는데, 한유진이 조준을 잘못한 게 아니라 놈이 적극 움직여서 피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놈이 보호막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싶은 순간 예의 충격이 가해지며 굉음이 터져 나오고 보호막이 찌그러졌다.
실로 답답하게도, 비슷한 일이 두 차례 더 반복됐다.
오행검의 몸체가 불안하게 진동한다. 이제 두세 번만 더 공격받으면 그대로 보호막이 파괴되는 것은 물론 법기의 내구성에까지 타격이 갈 듯한 모습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판단한 그가 놈이 접근하는 때를 노려 보호막을 폭발시키려 했다. 원숭이 괴물들을 일거에 쓸어버렸던 그 공격이라면 분명 역으로 죽일 수 있을 터다.
한데 그 순간 떠오르는 건, 놈의 뱃속으로 들어간 토끼 족제비가 아직 안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너무 심하게 도마뱀 괴물을 상하게 하면 그 뱃속의 녀석까지 정말로 죽어 버릴지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이미 죽었을 거야.'
그런 상식적인 결론을 내리기까지 몇 초의 시간이 지체됐다.
그사이 도마뱀 괴물은 고속으로 헤엄쳐와 여태까지 중 가장 강력한 공격을 날렸다. 희뿌연 기운이 서린 꼬리가 거센 수류를 동반하며 보호막의 심하게 찌그러진 부분을 후려친 것이다.
─!!!
터져 나온 소리가 워낙 거대해서 머리가 띵해질 정도였다.
두세 번은 더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보호막이 겨우 무너지지 않은 상태로 약화됐고, 그런 파괴의 징조를 놈 역시 빠르게 눈치채곤 즉시 몸을 틀어 재차 돌진해 왔다.
한유진은 이번에야말로 망설이지 않고 보호막을 폭발시켰다.
놈의 공격보다 한발 앞서 흩어져 나간 금빛 종의 파편들이 예리한 칼날 폭풍으로 화해 전면을 포함한 주위를 휩쓴다.
끼우우웅···!!
날카롭고 구슬프게 느껴지는 괴물의 비명과 함께 물속에서 대량의 핏물이 확 번졌다.
슬슬 남은 호흡량이 매우 절박해진 한유진은 그 도마뱀 괴물을 물 밖으로 끌고 나가기 위해 옥피술을 몸에 두르며 서둘러 전진했다.
바로 그 순간.
영기를 품은 탓에 영안술의 시야를 가리는 효과를 내던 핏물의 장막을 뚫고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아니, 그렇게 날아들었다고 인지한 순간 이미 몸통을 후려맞아 튕겨 나가고 있었다.
아프다.
단지 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 벌어졌는지 모를 입에서 소중한 공기가 빠져나가 정신없이 기포를 만들어내고, 자신이 아래로 튕겨 나갔는지 위로 튕겨 나갔는지도 구분할 수가 없다.
시전했던 옥피술 덕에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 좋은 상황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기감에 오행검을 조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미 완전히 놓쳐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급속도로 들이닥쳐 오는 무언가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가 아는 공격 법술은 화탄술뿐이다. 물속에서 시전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익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어차피 방법이 없었다.
'씨발놈이, 감히.'
죽음을 확신한 채 마음속으로 짤막한 욕설을 떠올리며, 그는 모든 영기를 쥐어짜 폭발시킨다는 감각으로 화탄술을 시전했다.
어둡던 호수 속을 밝히는 섬광이 번쩍인다.
직후 무수한 기포가 피어오른다 싶더니, 그것이 형용할 수 없는 폭발로 화해 시야를 포함한 모든 감각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절대적인 어둠이 내려앉는 그 짧은 순간, 얼핏 원래 상대하던 놈이 아닌 다른 도마뱀 괴물의 비명을 들은 것 같았다.
- 당신은 죽었습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예의 신비로운 은빛 문자들이 떠올랐다.
- 수확물을 선택하십시오.
* * *
어두운 공허 속 대기 장소에서 한유진은 눈앞에 펼쳐진 수확물들을 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물건들이 아주 많았다.
그가 죽는 시점에서 미처 우려먹어보지 못한 늑대 짐승의 뼈 따위가 저물대에 제법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자신의 땅인 은신처에 보관해 둔 물건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원시림 세계에 방문하기 전 느낌적으로 확신했듯, 자신의 수련 성과를 수확물로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 형태가 마치 작은 사람을 빛으로 조형해 놓은 듯했다.
내부에서 더 밝은 광량으로 정교하게 움직이는 빛줄기들은 분명히 회원공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얼핏 법혼으로 일부 승화한 영혼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전혀 쓸모없지만 작고 귀엽던 토끼 족제비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안 보였다.
'별로 오래 같이 지내지도 않았는데, 그깟 짐승 새끼가 대체 뭐라고.'
한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서는 한참을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일부러 이름도 안 지어줬는데.'
수확물로 선택할 수 있을지 없을지 좀처럼 감이 안 와서, 만족할 만큼 수련하고 떠날 때 선물을 잔뜩 안겨줄 생각은 했었다. 그 이상으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고.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는데도 이렇게 혼란스러운 느낌이 드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하지만 곧.
그는 천천히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어쨌든 최선을 다해서 복수해 주려 노력했고, 확실하게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큰 타격을 주기는 했다. 그 호수에 다른 포식자가 부재할 리 없으니 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감히 함부로 사냥해 잡아먹었던 그 작은 토끼 족제비처럼, 그 자신도 남의 한 끼 먹잇감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후······."
깊은 한숨을 마지막으로 일단 여태까지의 수련 성과를 선택하려 할 때였다.
불현듯, 말도 안 되지만 왠지 가능하리란 느낌이 드는 발상이 떠올랐다.
자신의 각성 능력은 바람에 따라 문을 고정시킨다. 이번에 수련했던 원시림 세계의 문도 그런 명확한 바람에 따라 고정됐다.
그렇다면 만약.
다시 원시림 세계의 문을, 자신이 방문했던 바로 그 최초의 시점으로 고정시킬 수 있다면.
"······."
한참을 침묵하며 생각하던 그가 어느 순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수련 성과를 의미하는 빛의 소인 형상 앞에 섰다.
선택에 필요한 카르마는 현재 남은 양의 절반 정도로,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양이었는데, 일단 한유진이 보기에는 매우 저렴했다.
무려 2할7푼의 법혼 승화를 마친 수련 성과다. 이런 걸 선택하는데 이전에 법기들을 복원하며 선택할 때보다 더 적은 카르마가 소모된다는 건 매우 싸게 느껴졌다.
'내가 직접 노력해서 쌓은 성과여서인가.'
그 법기들은 별 노력 없이 그냥 주워 왔을 뿐이라서 비쌌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시의 그에게 있어 매우 가치가 큰 물건들이었기에 그만큼 비쌌을 수도 있다.
같은 물건이라도 어떤 상황의 누구에게 주어지느냐에 따라 가치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법이다. 이곳의 수확물 선택은 그런 이치를 담아 카르마가 소모되는 듯했다.
어쨌든.
덕분에 부담 없이 수련 성과를 선택한 한유진은 곧, 무사히 현실의 침대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눈만 깜빡이면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확실히 원시림에서 느껴지던 그 수련 경지가 무사히 옮겨왔다.
'옮겨왔다고 해야 할지, 나타났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실없이 사소한 표현을 고민하던 그는 순식간에 앞으로의 계획을 짜냈다.
그 원시림의 그때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곧장 시험해 보고 싶지만, 앞서 방문하면 더 좋을 곳이 있었다.
바로 말법 이후의 영원대륙, 그곳의 폐허가 된 오행종 유적이었다.
'물속에서 기동성을 확보해 주는 법술이 필요해.'
아니면 그런 용도의 법기가 있어야 할 듯하다.
겸사겸사 짐승을 길들이고 성장시킬 수 있는 어수술 지식도 있으면 매우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느낌처럼 녀석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한참을 더 가만히 누워 생각을 마저 정리했다.
그러고는 이번엔 전혀 현실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고 바로 눈을 감았다.
14화. 오행종 유적 재탐사
매우 황폐한 느낌 가득한 어느 산맥의 초입부.
보이는 것이라곤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의 모습뿐이며, 그것들이 죽은 건지 산 건지 알 수가 없고, 자연히 다른 곤충이나 동물들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는다.
하늘은 딱히 구름이 끼지 않았는데도 잿빛으로 우중충하다. 땅은 오랜 가뭄에 시달린 듯 쩍쩍 갈라져 회생이 어려울 것 같다.
'어우······.'
입문기 수선자가 된 이후 다시 방문한 말법 이후의 영원대륙이다.
평범했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한 어마어마한 공백감과 메마름에 그는 몸서리쳤다.
방금 전까지 있던 현실에서도 원시림과 비교해 영기 농도가 1할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어서 매우 척박하다고 느꼈었는데, 지금 이곳과 비교하면 현실은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정말로 단 한 줌의 영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래서야 아무리 영혼이 스스로 영기를 생성해 낼 수 있다지만 그 이후의 회복이 불가능하다.
비유하자면 몸을 움직여서 힘을 쓸수록 체력이 빠지는데 그 체력을 회복할 물과 음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진짜로 물과 음식이 없기도 하지.'
원래 존재하던 모든 먹거리가 더는 번성하지 못하고 천천히 사멸해 갔을 것이다.
영기가 없는 것처럼 매우 희박한 것과 정말로 완전히 없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생명의 아주 중요한 구성요소인 영혼, 그 영혼을 이루는 데 있어 영기가 아주 소량만 함유될 수는 있어도 아예 부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천지 가득한 영기의 근원이 우주적인 힘의 흐름, 혼원계에 있다는 점을 떠올려봐야 한다.
한 세상이 혼원계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렸을 때만 이 같은 현상이 만들어질 수 있고, 그것은 곧 전 우주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척박한 환경에 처해버렸다는 뜻일 터다.
그런데도 살아남아 번성할 수 있다면 이미 우주적으로 강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하는 사이 그는 이미 오행종 유적으로 향하는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풍운술 같은 법술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수선자가 됨으로써 강해진 육체의 힘만을 소모했다. 언제 영기가 필요할지 모르니 잠깐의 편의를 위해 함부로 낭비할 수가 없다.
잠시 후.
단 한 번도 쉬지 않았기에 더 빨리 오행종 유적에 도착한 그는, 아주 약간만 지쳤음을 느끼면서 기억을 더듬어 탐사에 나섰다. 그렇게 이전에 처음 찾아냈던 그 장서각을 발견했다.
이미 살펴봤던 기억이 생생한 곳이라 그냥 지나치려다가, 문득 그곳의 문이 닫혀있다는 점을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내가 그때 문을 닫고 나왔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기억은 없다. 하여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다 썩어 너덜거리는 문을 거침없이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서고 몇 걸음 나아가기 무섭게 내구도가 다한 문짝이 떨어져 나뒹군다.
'그땐 아주 조심스럽게 열었었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시기라, 특히 악마 추종자들의 세계에서 호되게 고생했던 직후라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그러니 더더욱 저렇게 낡아서 불안정한 상태의 문을 굳이 닫았을 것 같지 않다.
내부를 한 차례 돌아본 그는 마침내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방문했던 흔적이 전혀 없다.'
누군가 정리했을 리는 없으니, 지금 이곳이 그가 방문하기 전의 시간대라는 뜻일 수밖에 없었다.
"하."
그는 반사적으로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느낌적으로 가능할 것 같더라니, 자신의 각성 능력은 정말로 원하는 세계의 특정 시간대를 골라서 방문할 수 있었다!
'심지어 몇 번이고 다시 그렇게 방문할 수도 있단 뜻이잖아?'
그 쓸모없던 작은 짐승과 재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얼마든지 그를 되돌려 재시도할 수 있을 터였다.
능력이 너무 사기적으로 느껴져서 조금 걱정될 지경이다.
대체 자신이 뭐길래 이런 엄청난 능력을 각성하게 된 것일까. 전생이라는 게 진짜 존재해서 그때 세상을 구하기라도 했나? 아니면 그냥 단순한 운에 불과한가?
'알 수 없지.'
이전에도 비슷한 고민을 해 봤지만 결론은 항상 같았다.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적어서 제대로 된 결론을 낼 수가 없다. 현재로선 해가 되는 점이 없으니 잘 이용하면 된다.
혹시 모를 위험성을 고려해서 안 쓴다는 선택지는 단 1초도 고민할 가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수확물을 복원할 수도 있었지.'
이전엔 미처 몰랐던 정보라 심하게 훼손된 책들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한 번씩 다 살펴봐야 할 듯했다.
'하지만 그 전에······.'
다 살펴보는 건 좋지만 사용할 수 있는 영기가 제한되어 있단 사실을, 그렇게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단 사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성과가 있을 게 확실한 더 중요한 곳부터 살펴봐야 마땅하다.
그는 바로 장서각을 나서 내문 구역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이전과는 또 새로운 시선으로 폐허가 된 오행종 유적을 살폈다.
이곳이 먼 과거 멀쩡하고 깔끔한 상태로 많은 수사들이 오갔을 것을 생각하니, 문득 그때의 시점으로 이 세계를 다시 방문해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과연 오행종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여기서 숨 쉬며 살아가던 수사들은 얼마나 뛰어났을까?
'만약 정말로 그 시대에 방문한다면······.'
잠시 망상하고 있자니 내문 구역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단지 몸을 움직이는 체력만으로도 자신이 평범했을 때와 비교해 얼마나 강해졌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는 내문 구역 인사들의 수련 동부가 자리한 그 협곡으로 향했다. 도착해서는 주위 풍경을 그냥 슥 한 번 훑어보곤 바로 가까운 동부로 움직였다.
전에 방문했을 땐 어둠을 꿰뚫어 볼 수가 없어 입구 주변부만을 살펴봐야 했지만, 이젠 아니다.
동굴 깊이 들어서는 한유진의 눈동자에 번뜩이는 빛이 서린 듯했다. 그렇게 영안술을 시전한 채 어둠에 전혀 구애받지 않으면서 그는 내부를 살폈다.
생각보다 넓었다. 만약 당시에 억지로 깊이 들어왔다면 자칫 길을 잃고 헤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넘어져 어디 부딪히기라도 했다면 꽤 많이 아팠을 것이다.
'이런 것도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하나.'
잡생각을 하며 파악한 구조는 대략 이러했다.
가장 먼저, 휴식을 취하거나 손님을 접대했을 것으로 보이는 거실용 공간이 있고, 그 안쪽으로는 더 이상 낡을 수 없는 상태의 포단이 깔린 수련용 공간이 있으며, 목적이 딱 정해지지 않은 듯한 분리된 구역들이 셋 더 존재한다.
동부 주인의 해골은 바로 그 수련실의 중앙 포단 위에 있었다. 최후의 순간,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에서 눈감은 모양이다.
한유진은 괜히 살짝 안타까운 기분이 들어 작게 목례하고는 그 해골과 주변 유품을 살폈다.
저물대가 이미 망가진 탓인지, 오행검을 제외하면 별 쓸만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첫술에 배부르랴.'
그는 동부를 나서 계속 다른 동부들을 탐사해 갔다.
도중, 그 입구 근처에서 죽어 오행검과 영액주병과 저물대를 선물해 줬던 그 수사의 해골을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가 방문하기 전 시간대여서인지 수확물로 선택했던 세 가지 법기들이 그대로 존재하는 모습이다.
한유진은 새삼 자신이 가진 오행검과 저물대 등을 보며 새로운 정보를 확인했다.
'어떤 한 세계의 특정 시간대를 계속 방문할 수 있다면, 그곳에 존재하는 물건을 여러 번 수확물로 선택할 수도 있겠지.'
단지 카르마의 소모를 부담하기만 하면 된다. 이건 상당히 귀중한 정보였다.
이번에도 짧게 묵념하여 예를 표한 그는 동부 탐사를 재개했다.
모든 동부를 탐사했을 때의 수확은 살짝 어중간했다.
방어용으로 짐작되는 우산 형태의 법기 하나.
매우 예리한 송곳 형태의 공격용 법기 하나.
끊어져 망가진 상태의 밧줄형 법기 하나.
용도를 알 수 없는 반지와 팔찌 등의 장신구형 법기 셋.
부적술용으로 보이는 붓 등의 도구가 담긴 상자 하나.
그 정체와 쓸모를 짐작할 수 없는 여러 금속조각들.
마지막으로 한때 영석이었을 힘 잃은 돌멩이들 다수.
'분명 이것들 중 몇 개는 유용하겠지만······.'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는 느낌이다.
사실 이런 물건들밖에 없는 이유를 약간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말법의 재앙이 닥치며 최소한의 호신을 제외한 모든 물건이 원래 가치를 잃었을 테니, 대부분 먹을 것과 교환되거나 진즉 소모되었을 터였다.
'역시 이 세상에서 가장 온전하게 얻을 수 있는 수확은 지식뿐이야.'
생각하며 그는 내문 인사들의 거주지였을 그 협곡을 마지막으로 돌아본 후 자리를 떴다.
이전엔 그냥 지나쳐야만 했던 험지 위의 장소들을 탐사할 차례였다.
* * *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원래 거주지에 가깝도록 지어졌는지, 내문 구역 인사들이 사용했을 장서각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깎아지르듯 가파른 절벽 위 외롭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풍운술로 그 앞에 내려서고 보자 외문 구역 건물들과 비교해서 외관이 매우 멀쩡함을 알 수 있었다. 필시 보통 재료들로 지어지지 않았을 터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내부의 물건들도 놀라울 만큼 멀쩡하게 보여 그를 매우 흡족하게 만들었다.
한데 잠시 후 그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책장에 놓인 물건 중 절반 이상이 책이 아니었던 탓이다. 옥 재질의 작고 얇고 길쭉한 직사각형 판들이 서로 연결되어 돌돌 말린, 그렇게 말린 상태로 완전히 붙어 고정돼선 펼쳐볼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마치 죽간을 대나무가 아닌 옥으로 만들어선 둘둘 말아 작게 축소시켜 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게 그 옥간이구나.'
말하자면 수사 전용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손가락으로 편히 잡을 수 있을 만큼 작고 가볍지만 매우 많은 정보가 담겨있고, 재질인 옥 역시 범상한 것을 쓰지 않아 굉장히 튼튼하다고 들었다.
한데 지금 중요한 건 그 옥간을 아무나 읽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수사가 법혼기에 오르면 신식(神識)이라는 새롭고 격 높은 영적 감각을 얻는데, 그 신식을 통해서만 옥간을 읽을 수 있었다.
'나중에 또 와야겠네.'
한숨을 쉰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선 나머지 책의 형태를 취한 물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깐 들었던 실망감이 곧 급속도로 녹아 사라졌다.
가장 먼저 집어들게 된 책의 제목이 느낌부터가 비범한 '오행천둔술'이었다. 한껏 기대하며 펼쳐본 내용은 저절로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고 심장을 두근두근 뛰게 했다.
오행인 화,뇌,풍,수,토 다섯 가지 속성의 둔술을 한데 모아 집대성한 오행종의 최상급 이동용 법술로, 풍운술 따위와는 같이 언급하는 것 자체가 모욕인 어마어마하게 뛰어나고 귀중한 법술이었다.
'이걸 익히면 물속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단지 그뿐만이 아니다.
완벽하게 익힌다면 같은 경지의 수사들 중에선 감히 따라올 수 있는 자가 없으며, 그냥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행이 의미하는 모든 물질의 상태를 마음대로 통과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만큼 결코 쉽게 익힐 수 있는 법술이 아니었다. 단지 외우는 데만도 엄청나게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 정체불명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책을 원래 자리에 둔 그는, 옆의 다른 책을 집어들어 살폈다. 이것 역시 제목이 비범했다.
15화. 카르마가 부족해
이번에도 둔술인 것을 보아 근처에는 다 비슷한 종류의 법술들을 가져다 놓은 듯했는데, 어쨌든 제목은 '운룡둔술'이었고 그가 현재 익힌 풍운술의 상위격 법술이었다.
오행천둔술과 비교하여 만능이라는 느낌은 적었지만 이 둔술의 장점은 장거리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비행하는 데 있었다.
또한 구름을 만들어내거나 조종하여 자신의 기운을 감추는 묘용도 있는 것 같다. 이는 꼭 비행할 때뿐만이 아닌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운용이 가능할 듯했다.
그 옆의 '암영둔술'이라는 책은 이동 중 자신의 기운을 감추는 데 중점을 둔 법술이었으며, 또 그 옆의 책은 '성광천둔술'이라는 공방의 묘용이 담긴 전투를 위한 법술이었다.
'오행천둔술이 절대적으로 최고인 건 아니군.'
특정 상황에 특정 목적을 위해서는 더 나은 둔술이 존재할 수 있는 듯하다. 사실, 그런 게 원래 세상의 기본 이치이긴 했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한유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오행천둔술이었다. 이 법술을 익히는 데 앞서 화둔술, 뇌둔술, 풍둔술, 수둔술, 지둔술이라는 각각의 하위 법술을 따로 익혀 활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굳힌 그는 오행천둔술 책을 저물대에 챙겼다. 저물대 사용에 아까운 영기가 미량 소모됐지만 책이 너무 두껍고 커서 그냥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이후 그는 둔술서들을 지나쳐 다음 구역의 책들을 살폈다.
이번의 것은 공법서들이었다. 전부 법혼기에서 원영기까지 수련할 수 있는 것들이었는데, 책보다 옥간의 형태로 놓여있는 것이 더 많아 살펴볼 의욕을 조금 꺾이게 만들었다.
특히 공법의 경우는 하나밖에 수련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중에 다시 올 건데, 지금 뭘 하나 정해도 그때 보면 더 마음에 드는 공법이 나오겠지.'
하여 대략 제목과 내용을 아주 가볍게 훑는 선에서 지나쳤다. 몇 공법이 호기심을 강하게 끌었지만 애써 참아냈다.
그다음 구역에서는 전투를 위한 법술을 찾아볼 수 있었다. 대단한 것이 많았지만 의외로 한유진의 관심을 잡아끈 것은 비교적 간단한 제목의 책이었다.
'오행법술.'
펼쳐서 살펴보니 과연, 오행 속성의 각종 유용한 법술들을 많이 수록해 놓았다.
어화술, 피화술, 어뢰술, 피뢰술 등의 아주 기초적인 법술에서부터 화령조술, 낙뢰술, 풍인술, 수륜술, 경금검기술 등의 공격용 법술은 물론, 파법뇌벽술과 자금광휘술이라는 이름 거창한 방어용 법술까지.
거의 오행에 속한 법술들을 총망라해 놓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읽으면 읽을수록 이 오행법술서의 진짜 목적을 알 것 같았다.
이 책에 수록된 법술들을 하나하나 전부 익히라는 게 아니라, 어느 유형의 법술에 어떤 법문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파악해서 스스로 응용하고 창조하는 방법을 깨달으라는 듯했다.
실제로 뒤편에 보니 저자의 그런 의도를 담은 말이 적혀있기도 했다.
'여기가 괜히 오행종이 아니구나.'
생각하며 그는 나머지 법술서들을 슥 쳐다봤다.
'이것만 익히려고 해도 한세월이 걸릴 텐데······.'
심지어 그 자신의 초월적인 언어 이해력을 고려한 판단이다.
법문이라는 가장 어려운 관문을 날로 먹을 수 있음에도, 그 모든 중의적인 뜻과 활용 방법과 상생상극과 영기 및 법력의 운용법을 그냥 알게 되는데도.
이 법술이라는 선도의 수단은 정말로 얕볼 수가 없었다. 당연히 공법 등도 마찬가지였고.
'선협식 수련으로 성장하는 건 좋아.'
한유진은 생각했다.
'하나 오직 이 방식에만 집중한다면······ 내가 과연 진선기까지 오를 수 있을까?'
불현듯 떠오른 의문이었다.
막상 걷기 시작한 수선의 길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 초월적인 언어 이해력 덕에 그나마 여기까진 쉽게 왔지만,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어려워질 것이 뻔했다.
길디긴 수선계의 역사상 자신만큼의 이해력을 가진 이가 과연 없었을까?
그럴 리 없다. 한유진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이해력을 갖고 천영근까지 가졌던 이가, 심지어 체질적으로 수련에 유리한 영체(靈體)까지 가졌던 이가 분명 존재했을 터다.
한데 그런 이들이 전부 진선기에 이르렀던가?
'진선기는커녕, 그 네 단계 아래인 원영기에 올랐다는 이들조차 별로 없지.'
그 바로 위의 화신기 수사만 해도 반쯤 전설처럼 여겨지는 마당이었다. 적어도 그가 여태 살펴본 수선 관련 서적들에 의하면 그랬다.
'내 각성 능력을 더 활용해야 해.'
이미 활용하고 있지만, 보다 더 적극적이고 색다른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
잠시 더 멍하니 있던 그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이 장서각의 책들을 살펴보는 일을 이어갔다.
* * *
모든 책을 챙기지 않은 이유는, 어차피 챙겨봤자 법혼기에 이를 때까지 제대로 살펴볼 수 없으리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챙긴 오행천둔술과 오행법술만을 집중해서 익혀도 시간이 모자랄 판이다. 그리고 남은 카르마가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한유진은 그 둘 외에 추가로 두 가지 법술서만을 챙겼다.
바로 '통명어수결'이라는 영적 짐승을 기르고 가르치는 데 필요한 지식이 담긴 책 하나, 그리고 '혈목정과양조술'이라는 책 하나였다.
어수술 책이야 길게 말할 것 없다. 혈목정과양조술이야말로 상당히 독특했는데, 책의 핵심은 수련을 돕는 영주(靈酒)를 빚어내는 부분이었지만, 정작 한유진은 앞쪽의 혈목정과에 대한 내용에 주목했다.
혈목은 원래 아주 흔한 종류의 요괴 나무다. 그것을 한 원영기 수사가 온순하도록 품종 개량하여 영기를 품은 짐승의 사체 등에서 피를 흡수해 열매를 맺게 만들었다. 오로지 그 열매로 술을 담가 먹기 위해서.
여기서 중요한 건 그렇게 맺힌 열매가 수련을 도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직접 요리해서 먹는 것과 비교해 거의 손실이 없는 정도로.
고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먹어 치우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미처 먹지 못하고 방치된 고기들에서 영기 손실이 발생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혈목정과로 만들어 섭취하는 것이 무조건 이득일 수밖에 없다.
단시간에 더 많이 먹을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도축 등의 번거로운 과정을 건너뛸 수 있는 것은 덤이고.
당연히 이 법술을 펼치려면 그 개량된 품종의 혈목 씨앗이 필요했는데, 법술서 옆의 옥함에 씨앗 세 개가 얌전히 놓여있어 흔쾌히 챙길 수 있었다.
말법의 재앙을 겪으며 이미 죽은 씨앗이었지만 수확물 선택 과정에서 복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장서각을 한 번 전부 돌아본 그는 내문 구역 탐사를 재개했다.
대부분의 장소에서는 별 성과가 없었다. 심지어 각종 법기와 법보들을 보관한 연기각에서조차 그랬다.
법보란 법기의 상위격 아이템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결단기 수사부터 제대로 이용할 수 있는 물건인지라 지금의 한유진에겐 그냥 그림의 떡이었다.
지금 수준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법기들은 대부분 힘을 잃어 용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당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었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최대한 머리를 굴리면서 쓸만해 보이는 것들은 전부 저물대에 넣었다.
한데, 절대로 쓸 수 없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물건이 있었다. 바로 연기각의 최상층, 한때 삼엄한 금제들이 깔려있었을 중앙 단상 위에 놓인 물건이었다.
'이게 그 통천령보인가······.'
법보보다 상위격 아이템인 영보, 그런 영보 중에서도 특급으로 분류될 만한 물건을 뜻한다.
그가 아는 수선계의 상식대로라면 통천령보는 스스로 사람 못지않은 영성을 가져 인간의 모습으로 화형하거나 또는 그런 화신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주인 없이도 최소 원영기급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오행종의 통천령보는 특이하게도 거대하고 매끈한 칠흑빛 바위였다. '오행진령거석'이라고 불렸으며 이 오행종 설립의 근원이기도 한 물건이다.
'수확물 선택으로 얻으려면 과연 어느 정도의 카르마가 필요할까.'
아마도 원영기급 실력을 바탕으로 열심히 카르마를 쌓아야지만 이 물건을 현실로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치면, 원영기가 됐을 때 여기를 다시 방문하게 될지도 모른단 뜻이군.'
정말로 두고두고 사골 우려먹듯이 방문하게 될 듯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연기각을 나섰다.
잠시 후.
한유진은 내문 구역에서 마지막 남은 미탐사 장소 앞에 섰다. 바로 무시무시한 크기의 바위로 틀어막힌 커다란 동굴 입구였다.
들어 올린 손 위로 밝게 타오는 화염의 구체가 만들어진다. 시전한 화탄술에 전력을 담으며 한유진은 내심 속으로 경악했다.
원시림에서와 비교해 영기 소모량이 근 서너 배에 달하는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전력으로 법술을 시전한 것이 처음이라 여태껏 미처 올랐다.
'말법의 재앙이 무섭긴 무섭구나!'
그는 죽으면 그냥 현실의 침대에서 깨어날 뿐이지만, 여기서 도망치지도 못하고 이 대재앙에 직면했을 수사들이 얼마나 절망스러웠을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상념과 동시에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화탄술이 그의 손을 떠나 바위를 직격했다.
콰과광-!!
적막하던 오행종 유적을 통째로 뒤흔드는 듯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일을 벌인 한유진 자신조차 슬쩍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한데, 흙먼지가 가시고 드러난 광경은 그를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
바위는 표면만 아주 살짝 금가고 부서졌을 뿐이었다. 한 줌 영기도 깃들지 않은 주제에 이토록 단단할 수 있다니, 눈을 의심할 지경이다.
"미친."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은 그는 이 바위 뚫기를 즉시 포기했다. 아무래도 법혼기에 이른 다음 다시 시도해 봐야 할 것 같다.
아니면 지둔술을 익혀서 부수지 않고 통과한다든가 말이다. 예전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 이 바위엔 영기가 전혀 깃들지 않은 상태이니 가능할 터였다.
그렇다면 이젠 외문 구역을 탐사하고 성과를 얻는 일만 남았다. 내문 구역에서 만큼의 성과는 없겠지만, 어쩌면 자잘한 수선계 상식이나 정보는 거기서 더 많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외문 구역을 향해 산을 내려가던 그는 문득,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을 보며 타이밍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때도 다시 외문 구역으로 내려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이 저물었었다.
문득 그때의 갈증과 허기가 떠오른 그는 영액주병의 마개를 열고 영액주 한 모금을 살짝 들이켰다. 원시림에서처럼 양껏 들이키는 게 아니라 딱 정량을 지키는 행동이었다.
'오래 버텨야지.'
앞으로 몇 차례 이상 다시 방문하게 될 장소인 만큼, 이참에 완벽한 지도를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아무리 사소한 이득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염려되는 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오행천둔술이 적힌 책의 재질이 범상치 않다는 점이었다.
일반 서책을 수확물로 선택할 때와 비교해 자칫 카르마를 과소비하게 될 수 있다. 그러니 아예 필요한 부분을 전부 외울 생각이었다.
딱 수둔술과 지둔술 정도만 외워도 당분간 책을 통째로 가져갈 필요가 없을 터다.
'조금 고생하겠구나.'
외문 구역으로 들어서며 그는 작게 탄식했다.
모든 일을 만족할 만큼 마쳤을 때, 어떻게 해야 고통 없이 편히 돌아갈 수 있을지도 방법을 마련해 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여길 떠난 다음 무엇을 할지도 재차 계획해 볼 필요가 있었다.
'카르마가 부족해.'
2할7푼의 법혼 승화를 마친 수련 성과를 선택했을 때 소모됐던 카르마의 양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지금 남은 카르마는 너무나 부족하다.
'어쩌면 이제 슬슬······.'
현실에서 헌터 활동을 시작할 때가 된 듯했다.
16화. 이능력 검증훈련센터
한유진은 비교적 멀쩡한 어느 건물 안에 앉아 무더기로 쌓인 책들을 앞에 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모든 외문 구역을 돌아보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하기까진 대략 나흘 정도 걸렸다. 만약 법술을 써서 돌아다닐 수 있었다면 훨씬 빠르게 끝났을 터다.
외문 구역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만한 곳은 사실 뻔했다.
장서각이 가장 우선이었고 그다음이 진법전, 그다음이 연단전, 그다음으로는 연기각 등의 순으로 살피면 됐다. 또한 그곳들에서 가장 중요한 수확물은 바로 책이었다.
흔히 수선기예라 부르는 것들 중 가장 으뜸으로 치는 네 가지는 바로 진법술, 연단술, 연기술, 부적술이다. 언급한 순서대로 해당 분야 전문가의 몸값이 높다고 보면 된다.
금제술이라고도 부르는 진법술은 수선기예중 가장 복잡하고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세력을 가진 입장에서는 방어와 편의 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지라 매우 귀중하다.
연단술은 영약이란 게 수련과 떼어놓을 수 없는 물건이다 보니 그 학문 기술이 전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당연히 귀중할 수밖에 없다.
연기술은 제작하는 법기와 법보 등의 물건이 수사의 능력을 여러 방면으로 크게 보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귀중하다. 쉽게 RPG 게임에서 아이템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부적술은 가끔 발생하는 곤란한 순간이나 위험한 순간에 아주 요긴하게 쓰일 수 있어 귀중하다. 소모품인지라 제작비와 판매가 모두 영단 및 법기 등과 비교해 싼 편이고, 따라서 부적의 효과를 크게 볼 수 있는 경지 낮은 수사들에게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나머지 수선기예들, 예를 들어 각종 영식을 기르고 수확하는 영식술이나, 판타지에서의 골렘 비슷한 꼭두각시를 제작하는 괴뢰술 등은 별로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편이었다.
영식술의 경우는 순전히 경지 낮은 수사들이 먹고살기 위해 워낙 많이 익히는 탓이며, 괴뢰술의 경우는 학습하고 제작하고 다루는 데 필요한 노력 대비 유용성이 별로인 탓이다. 나머지 기예들도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어쨌든.
한유진은 원래 이러한 수선기예들을 익힐 생각이 별로 없었다. 수련에만 집중하기에도 시간과 정력이 부족하다는 합리적인 이유에서였다. 꼭 익히지 않더라도 자신의 각성 능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기기도 했고.
한데 이번에 오행종을 탐사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오히려 그런 수선기예들을 할 줄 알아야 자신의 각성 능력을 더 잘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연기술을 할 줄 모른다면 이곳의 연기각 등에서 좋은 물건이 나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다른 세상에 방문해서도 쓰기 알맞은 물건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스로 각종 재료를 통해 자신에게 적합한 물건을 만들어 낼 줄 안다면 가능성의 폭이 확 넓어진다. 재료를 구하는 것과 완성품을 구하는 것의 난이도 차이는 어마어마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라면, 그 기예들을 어떻게 빨리 익히느냐겠지.'
아무리 초월적인 언어 이해력이 있어도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바로 여기서 그 자신의 각성 능력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카르마가 부족해서 수련 성과나 물건 따위를 못 얻는다.'
헌터 활동으로 충분한 카르마를 쌓기 전까지는 일종의 각성 능력 휴식기가 될 수밖에 없단 뜻인데, 바로 그 기간을 활용할 방법이 있었다.
'지식을 얻는 데는 거의 내 수명만이 필요하지.'
그리고 마침 수선은 원래부터 강함이 아닌 장생을 목표로 한다.
법혼기에만 올라도 근 200년을 무병장수할 수 있고, 만약 결단기에 오른다면 공법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최소 수명이 400년이다.
'400년이면······ 지구에서 1,600년대가 뭐하던 때였더라? 대항해시대였나?'
어쨌든 산업혁명 이전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매우 옛날이라는 뜻이며, 이는 400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긴지 체감할 수 있는 일이다.
'조금 돌아가는 게 오히려 목표 지점까지 더 빨리 안정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마냥 수련에만 매진한다고 실력이 원하는 만큼 팍팍 늘 것 같지 않다. 지금 한유진이 이런 생각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심지어 그는 선협식 수선기예 말고도 다른 세계의 기술들도 가리지 않을 심산이었다. 판타지 세계의 아티팩트 제작술이라든가 연금술 등을 접하면,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결합해 더 나은 무언가를 창조해 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
바로 그래야 자신의 각성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일 터였다.
'드래곤 하트로 연단술을 하면 뭐가 나올까?'
쉬면서 가볍게 생각해 보던 그가 잠시 후, 어떤 기막힌 발상을 떠올리곤 눈을 크게 떴다.
그냥 연단술에 써먹는 것보다 훨씬 더 낫게 느껴지는 방법이 있었다. 어쩌면 진영근 수준에 불과한 자신의 재능까지 확 바꿔버릴 수 있을 그런 방법이.
심지어 어쩌면 영근 재능뿐만이 아닌 체질마저 수련에 유리한 영체(靈體)로, 아니, 그보다 격 높다고 여겨지는 도체(道體)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얻게 될 드래곤 하트가 정말로 여느 장르 소설에서 묘사되는 만큼 먼치킨스럽다면 말이다.
만약 그게 진짜 가능하다면 자신이 어떤 힘을 누리게 될지 상상의 나래가 마구마구 뻗어 나갔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면서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이, 딱 처음 수선을 접했을 때와 비슷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그는 간신히 진정해 냈다.
하나 마음속 한구석에 그 드래곤 하트에 대한 계획이 저절로 세워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아."
현실의 침대에서 깨어난 한유진은 반사적으로 침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생각보다 아프잖아······."
영액주병의 영액주가 바닥나고 더 이상 끈질기게 버틸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는 때.
그는 과감하게 '탈출'을 시도했다. 화탄술의 법문 일부를 바꿔 시전자를 충분히 잘 해칠 수 있게 만든 다음 무방비 상태의 머리 위로 떨어트린 것이다.
당연히 조금 겁이 났지만 논리적으로 안 될 이유가 없었고, 느낌적으로도 그랬으며, 지금 결과적으로도 그랬다.
물론 매우 극단적인 행동인 만큼 정말로 자신이 지금 이래도 괜찮을지, 현실에서 무사히 깨어날 수 있을지, 의식적으로 수십 번 넘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행여나 습관이라도 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현실에서 무심코 그런 일을 저질러 버리면 그만한 개죽음이 또 있을까?
어쨌든.
화탄술의 폭발력이라면 깔끔하게 블랙아웃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끔찍한 열기가 잠깐이지만 느껴졌다. 장차 이런 화염계 법술에 당하게 될 적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게 됐다.
'남은 카르마는······.'
그는 주변에 놓인 수확물들, 거의 전부 서책인 그것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문 구역에서 애써 챙겼던 법기들은 단 하나도 가져오지 못했다. 의외로 그것들을 복원하여 선택하는 데 굉장한 양의 카르마가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최소 상급 법기들이었을 거야.'
오행검은 오행종에서 모든 내문제자에게 나눠주는 일종의 기본 법기라서 중상급에 그치는데, 그런 오행검조차도 사실 지금의 한유진에겐 부족함이 없었다.
서책을 제외하고 가져온 물건이라면 일단 품종 개량된 혈목의 씨앗 정도가 있었는데, 문득 눈에 들어와 옥함을 열어보니 생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마저 수확물 정리를 마친 그는 매우 오랜만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현실의 시간은 얼마 안 지났지만 체감상으로는 오랜만인 게 맞긴 했다.
"허······."
그래서 거울을 봤을 때 살짝 놀랐다.
원래도 못생기진 않았지만 더 훤칠해진 외모가 보인다. 미묘한 틀어짐과 불균형이 해소되고 피부가 광고모델처럼 깨끗해진 덕이었다.
'키도 좀 자랐나?'
그냥 자세와 체형이 개선돼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느낌상으로는 훌쩍 자란 듯했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그 오행종 유적 내문 구역의 수사 해골이었다. 오랜 세월 풍파를 맞았음에도 옥처럼 희고 윤기가 나던.
'나도 곧 내면조차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구나.'
한유진이 생각했다. 일반적인 쓰임새와는 좀 다른 의미의 내면이겠지만 말이다.
잡념을 대충 털어내면서 그는 씻는 과정을 정화술로 대체해 버리곤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외출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스마트폰과 블루투스 이어폰을 챙기는데, 그 행위가 왜 이리 낯설게 느껴지는지 몇 차례 헛웃음이 났다.
'내가 만약 각성 능력으로 다른 세계에서 수십 년을 산다면, 다시 돌아왔을 때 조금 부적응자처럼 굴게 될까?'
실로 현실적인 걱정이었다. 능력의 대단함 뒤에 가려진 그림자 중 일부일 터다.
'심하면 더는 이곳을 현실이라고 못 느끼게 될지도.'
물론 이건 조금 앞서나간 걱정일 터였다.
어쨌든.
향하려는 곳은 이능력 검증훈련센터였다. 그가 사는 곳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이삼십 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풍운술로 가면 더 빠를 텐데.'
걸리면 과태료를 물 수밖에 없으니 자중해야 한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너무 관심종자처럼 보일 것이다.
원룸 건물을 나서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접어든다. 그 와중 이어폰을 귀에 꽂고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재생했는데, 평범했을 때는 미처 못 느꼈던 음질의 열악함에 기겁하고는 바로 그만뒀다.
이제 보니 헌터용 이어폰이 괜히 비싼 게 아니었다. 지금으로선 그냥 도시의 소음을 즐기는 게 훨씬 나았다.
그렇게 체감상 오랜만인지라 괜히 반갑게 느껴지는 도시 풍경을 감상하면서 버스 정류장에 서고, 알아둔 번호의 버스가 오자 천천히 올라타고, 수선자가 됨으로써 버스의 흔들림 체감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탐구해 보고, 바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도 구경하는 등, 일상을 마음껏 누렸다.
'이게 힐링이지.'
남들은 원시림 같은 곳으로 캠핑 가는 게 힐링이라고 여기겠지만 지금의 한유진에겐 아니었다.
워낙 즐긴 탓인지 시간이 금방 갔다.
도착한 이능력 검증훈련센터 정류장에서 내린 그는 일이 분 정도를 느긋하게 걸어 센터 건물을 시야에 담았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규모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었는데, 유독 한유진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십 대 자녀가 포함된 가족 단위 방문자 둘이었다.
'자식이 각성했나 보구나.'
아마도 그의 중학교 동창생도 과거에 저런 모습으로 방문하지 않았을까 싶다. 꼭 여기 센터는 아니었겠지만.
'내가 바로 대기만성자, 웃고 있는 치타 아니겠냐.'
괜히 웃음이 나는 걸 참으면서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에서 조금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데스크에 서 있던 공무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대로 다가가자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떤 일로 오셨어요?"
"이능력 각성 신고하려고 왔습니다."
"네?"
의외라는 듯한 반응이 돌아온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 한 번 생각했듯 그 자신 정도의 나이에 각성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보통은 십 대 중후반에 각성하기 마련이니까.
"아, 이능력 각성 검증은 저기 좌측으로 가시면 됩니다. 가보시면······."
마저 안내를 들은 한유진은 짧게 감사를 표하곤 그쪽으로 향했다.
검사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일단 규모가 적지 않았고 그보다 앞서 건물로 들어왔던 일가족을 발견해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문으로 나눠진 장소에 들어서는 때,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앞서 먼저 들어온 일가족을 한차례 훑곤 그 뒤에 따라 들어서는 한유진에게 조금 길게 머물렀다.
'내 또래는 한 명도 없구나.'
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애들이 넷, 그리고 그들의 보호자로 보이는 어른들뿐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카운터의 한 여직원이 그렇게 안내했다. 앞서 들어선 일가족과 다른 여직원에게로 간 한유진은, 방문목적을 밝히고 신분증을 제시하는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쳤다.
여기 사람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적당히 사무적이고 적당히 친절한 태도로, 마치 주민센터에 온 민원인을 상대하는 듯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셔야 돼요."
"괜찮습니다."
"그럼 여기 안내 동의서 읽어보시고······."
직원은 한 서류를 내밀면서 능숙하게 형광펜으로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치고 서명해야 할 부분들을 동그라미 쳤다.
빠르게 읽어보니, 말 그대로 여러 정보와 주의할 사항 등을 안내하는 서류였다. 개인정보 제공에 동의를 구하면서 겸사겸사 이능력을 각성하지 않았다고 판명될 시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도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그 내용을 보자 문득 인터넷 등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각성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와서 검사받는 사람들이 많다지.'
정말로 각성하기를 기원하는 행위일 수도 있고 약간의 정신병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미친놈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건 분명했다.
'설마 내가 그런 사람으로 오해받은 건 아니겠지?'
나이가 나이다 보니,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별문제 아니었다.
서명을 마치고 서류를 건네자 직원이 이번엔 다른 서류를 건넸다. 대략 서너 페이지 정도 되는 일종의 적성 검사지였다. 가장 먼저는 정말로 각성했는지를 묻고, 어떤 종류의 능력인지 등을 차례차례 묻고 있었다.
"저쪽에서 작성하신 다음 가져오시면 됩니다~."
"네."
어차피 한 시간 기다려야 한다고 했으니 시간 때우기로 딱이다. 그렇게 한쪽에 있는 스탠딩 테이블에 가서 검사지를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한유진 님?"
"네?"
직원의 부름에 가까이 다가가자, 조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웬 서류 하나를 추가로 건네왔다.
"이 서류에도 서명해 주셔야 돼요. 이번에 추가된 건데, 혈액검사 하면서 기본적인 건강검진도 받을 수 있어요."
"혈액검사요?"
별생각 없이 반문하면서 그는 대략 내용을 읽어보고 흔쾌히 서명했다. 한데 그 반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직원도 심심했는지, 잡담하듯 관련 이야기를 흘렸다.
"근래 들어 웬 마약성 약물로 신체능력을 높여서는 각성했다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더라고요."
"그런 약물이 있다고요?"
"네네. 부작용이 큰데 효과가 있긴 있나 봐요. 가끔은 마나 스캔기도 속는다고 해서······ 물론 그 뒤에 다 드러나긴 하는데······."
이어지는 짧은 잡담을 마무리한 후.
원래 자리로 돌아가 적성 검사지를 마저 작성하며 그는 문득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원시림에 방문하기 직전, 휴식 삼아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가 비슷한 이야기를 본 적 있다. 어떤 치유계 능력을 가진 헌터가 마약을 복용하다가 걸렸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그거랑 연관이 있나?'
잠시 생각하던 한유진은 곧 머릿속에서 그 의문을 지워냈다.
어차피 남의 일이었다.
17화. 기초 자격증 따기
기다리는 시간이 지나간 뒤.
혈액검사를 포함한 이능력 보유 검사는 금방 끝났다. MRI와 비슷하게 생긴 기계를 통하면 검사자의 마나 활성도를 바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간혹 각성했음에도 마나 활성도가 너무 낮은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몇 가지 특수한 약물 등을 복용하면 대부분 정확하게 검사할 수 있다고 한다. 한유진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이긴 했다.
한데.
모든 검사가 끝난 다음 이상하게도 그는 꽤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보다 늦게 검사한 사람들도 상담실 같은 공간으로 먼저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내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 검사 결과가 평범하진 않나 보군.'
사실 검사 방식에 대해 알았을 때부터 대략 짐작하긴 했다.
마나 활성도 체크란 곧 육체가 마나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받았는지 체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이곳보다 영기가 열 배 가까이 풍부한 원시림에서 회원공이라는 아주 뛰어난 방법으로 육체와 영혼을 열심히 단련했다.
마나 스캔기가 법혼으로 일부 승화한 영혼의 상태까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다만 육체와 영혼은 별개가 아닌바, 그의 몸이 이제 막 각성한 이들과 비교해서 얼마나 뛰어날지는 대략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최소 열 배 차이는 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길 잠시 후.
"한유진 님?"
잠시 안쪽으로 사라졌던 카운터의 직원이 그에게 직접 다가와 말했다.
"네?"
"오래 기다리셨죠? 이쪽으로 오세요."
유난히 더 친절해진 태도는 아무래도 착각이 아니었다. 그 직원을 따라 안쪽의 상담실 같은 공간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략 마흔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둘과 서른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 총 세 명의 사람이 보였다.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친절하게도 상대 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오기에 한유진도 마주 인사하며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직원이 밖으로 나가는 새 그는 무심코 가장 젊어 보이는 서른 중후반쯤의 남자가 찬 신분증 목걸이를 살폈다.
'이능관리국 사무관, 오태민.'
소위 헌터 관리국이라고도 불리는 정부 기관 소속 인사였다.
'사무관이면 몇 급 공무원이지?'
생각하는 때 중간에 앉아 있던 마흔 대 남자가 컴퓨터를 조작해 모니터 화면에 검사 결과표를 띄웠다. 모두의 옆쪽에 자리해서 책상 반대편에 앉은 한유진도 편히 볼 수 있는 화면이었다.
"일단 이능력 각성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혈액검사 결과부터 한번 보실까요?"
이후로 혼자 가운 차림이어서 의사임이 분명한 그 남자의 대략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간 수치, 콜레스테롤 수치, 신장 수치, 혈당 수치, 갑상선 호르몬 수치 등, 혈액검사로 알 수 있는 모든 신체정보가 건강하다는 이야기였다.
"혈액검사 결과는 이 정도로 하고······ 여기 보시면, 이게 마나 활성도 수치거든요."
설명하며 마우스 포인터로 강조하는 수치는 2,477이었다. 한데 그 옆에 평균 수치라며 나와 있는 숫자가 80에 불과했다.
"한유진 님의 마나 활성도가 평균치보다 서른 배 이상 높습니다. 이게 정말······ 현역 베테랑 헌터도 이 정도로 나오기는 힘들던데, 정말로 며칠 전에 각성하신 거 맞으시죠?"
"네."
"특별히 아프다거나 하신 부분도 없고요?"
"네, 없어요."
혹시 무슨 신종 이능질병이 아닐까 싶은 모양이다. 의사로서 당연히 해볼 법한 생각이고 또 확인해야만 하는 부분인지라, 한유진은 그냥 짧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이제, 아까 밖에서 작성하신 문답지 내용을 좀 보겠습니다."
의사가 컴퓨터를 조작해 다른 화면을 띄웠다. 밖에서 작성했던 그 적성 검사지였다.
그리고 여태 가만히 있던 의사 옆의 다른 마흔 대 남자가 나서며 물어 왔다.
"각성 이능력을 마나 관련 지식이라고 적으셨는데, 이게 혹시 마나를 다루는 지식을 알게 되셨다는 뜻인가요?"
"네. 어떤 식이냐 하면······ 지금 잠깐 보여드려도 되죠?"
"최대한 안전하게 부탁드립니다."
당연하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인 한유진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영기를 발출했다.
아주 간단한 법문 하나를 더하면서였는데, 그것이 작은 빛의 형상을 취하며 모습을 드러낸 후 불현듯 아홉 덩이로 분리되어선 천천히 꼬리를 물며 회전을 시작했다.
"아니······."
놀란 소리를 낸 것은 그 이능관리국 소속 남자였다. 사실 한유진도 내심 그를 주의하고 있었는데, 얼핏 그에게서 영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안술을 쓰면 각성자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지만 일부러 자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보니 딱히 써볼 필요가 없을 듯했다.
본인이 이능력 각성자라서 마나를 다뤄보지 않았다면 이처럼 놀라지 않았을 터였다.
"지금 글리프를 쓰신 거 맞나요?"
글리프(Glyph)란 법문의 지구식 표현이다. 여느 판타지 소설에서 단골로 나오는 룬과 같다고 보면 된다.
여담이지만, 룬이라는 표현이 마나처럼 국제 표준으로 채택되지 못한 이유는, 고대 북유럽에서 쓰이던 실제 룬 문자가 그쪽 국가들의 무형유산으로 아직 엄연히 존재하는 탓이었다.
완전히 추상적인 개념이었던 마나하고는 이래저래 사정이 다른 셈이다.
"네."
"따로 배우신 적 없으시죠? 주변에 무슨 관계자가 있다거나······?"
"그런 거 없어요."
한유진은 그의 놀라워하는 반응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하여 저절로 활짝 웃게 되려는 걸 애써 참았다.
"다른 것도 보여주실 수 있나요?"
"여기서요?"
"아."
그는 정신을 차린 듯 자신을 쳐다보던 의사 옆 중년인에게 눈짓했다. 이어서 할 일 하라는 제스쳐로, 명백히 윗사람이어야 취할 수 있을 그런 태도였다.
중년인은 자연스럽게 다시 검사지를 두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가 하는 일은 검사지의 내용을 일차적으로 확인하고, 이제 막 이능력 각성을 확인받은 이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이능력 각성자가 받을 수 있는 여러 복지혜택 등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능력을 각성했다고 바로 헌터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될 수 있긴커녕 이능력 활용에 필요한 아주 기본적인 증명서조차 발급되지 않는다.
이곳은 그냥 정말로 이능력을 각성했는지 검사하는 장소에 불과했다. 이제 한유진은 센터의 다른 장소에서 자신의 이능력 사용과 조절에 문제가 없단 사실을 검증받아야 했다.
그래야 흔히 기초 자격증이라고도 불리는 '이능력 보유-적합 증명서'가 발급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여타 다른 분야의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헌터 사전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중년인의 설명이 다 끝나자 이능관리국 소속 남자가 즉시 나섰다.
"바로 기초 자격증 따러 가실까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사무관이 정확히 몇 급 공무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말단은 아닌 게 확실한 이가 옆에서 직접 도와주겠다니 아주 좋다. 이건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는 특별대우였다.
의사와 그 옆의 중년인과 작별한 후, 사무관과 함께 걸어 향하는 장소는 지하 1층이었다.
"특정한 지식을 각성하는 게 아주 드문 케이스는 아닙니다만, 한유진 씨처럼 글리프를 능숙하게 다루는 건 처음 봅니다. 혹시 마나 활성도가 높은 이유도 관련 있나요? 어떤 특별한 운용법을 써보셨다거나."
바로 핵심을 찔러오는 것이 꽤 날카롭다. 한유진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시원하게 수긍했다.
"네. 심신을 단련하는 일종의 훈련법도 알게 됐거든요."
"허······ 근데, 아무리 그래도 각성한 지 며칠밖에 안 되셨는데······ 다른 활용 능력은 뭐가 있나요?"
이번에도 한유진은 전혀 숨기지 않고 기초 법술들로 행할 수 있는 일 전부를 알려줬다.
'괜히 힘숨찐이 될 필요가 없지.'
보통 미디어에서 다루는 주인공들이 힘을 숨기고 약한척하는 건, 혹여나 존재할지 모를 미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을 따르는 것이다. 겸사겸사 정말로 적이 존재한다면 전력을 오판하게끔 만들기도 하고.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그냥 성격상 힘숨찐이 안 맞는 게 아니라 명백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꼭 그럴 필요성을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카르마 수급을 위해 어차피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여.
그러한 판단으로 그의 능력을 전부 듣게 된 이능관리국 소속 사무관은 잠시 발걸음까지 멈추며 그를 쳐다봤다.
"······염동력, 방어막, 화염술, 이동능력, 관찰능력, 은폐능력, 치유능력, 맞나요?"
"네."
"그걸 다 지식의 형태로, 그러니까 각성 능력이 아니라 학습해서 사용하실 수 있단 거죠?"
"그럼요."
"혹시 다른 사람도 배울 수 있을까요?"
"마나를 느낄 수만 있다면, 아마도요."
그래야 자신이 카르마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익혀 쓰진 못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만한 카르마 수급처가 또 없다.
지식을 마냥 아껴서는 안 된다.
더 많이 더 널리 베풀어 혜택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들에게 영향을 주면 줄수록 상응하는 양의 카르마로 돌아올 터였다.
물론 뒤통수 맞는 일 없게끔 잘 조절해야겠지만 말이다.
"헌터가 아니라 학자나 교육자를 하셔야겠는데요?"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에 한유진은 그냥 웃고 넘겼다.
지식을 퍼뜨리는 일은 꼭 직접 주도하지 않아도 된다. 근원지가 자신이기만 하면 결과에 별 차이가 없을 텐데, 균열을 처리하는 일은 그렇지 못했다.
다시 걷기 시작한 사무관을 따라 도착한 곳은 지하 1층에서도 꽤 안쪽에 자리했다. 그리고 왠지 분위기를 보니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여깁니다."
한 이능훈련실 앞에 멈춰 선 그가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눌러 문의 잠금을 해제하며 들어선다. 한유진도 뒤따라 들어서며 내부 광경에 조금 감탄했다.
지하에 이만한 넓이의 공간을 기둥도 없이 파놨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구조는 둘째치고 바닥과 벽과 천장을 이루는 재질 역시 딱 봐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한쪽의 컴퓨터 기기로 이동한 사무관은 전원을 켜고 무언가를 열심히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끔 한유진의 주민등록번호 따위를 묻기도 했다.
'뭔가 정식 절차를 하나도 안 따르는 듯한데.'
그런 느낌이었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장소를 포함하여 모든 게 특별대우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사무관이 무언가를 추가로 조작하자, 훈련실 한쪽 벽에 있던 금속 원기둥 하나가 홀로 스르륵 미끄러져 와 중앙에 섰다. 대체 뭐로 어떻게 이동했는지 모를 신기한 움직임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르는 게 당연한 장소와 물건들이었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사람이었던 한유진이 신기함을 느낄 만도 하다.
"우선 그 화염술부터 테스트해 볼까요? 한유진 씨도 궁금하시죠? 자기 공격력이 어느 정도인지."
"네, 그렇긴 하네요."
사실 충분히 잘 알고 있어서 별로 안 궁금했지만 한유진은 장단을 맞춰줬다. 평범하게 각성한 경우라면 그의 말처럼 제대로 테스트해 볼 기회가 없는 게 정상일 테니까.
한유진은 수련실 중앙에 가만히 선 금속기둥을 쳐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런 태도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사무관이 친절하게 말해 왔다.
"너무 멀면 조금 가까이서 공격하셔도 됩니다. 혹시 마음에 걸리는 점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시고요."
"그게, 저거 얼마나 튼튼한가요?"
"아."
사무관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3레벨 마나 합금이라 어지간한 피해로는 흠집도 안 나요. 복합장갑 구조이기도 하고, 걱정 없이 공격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만에 하나 고장 나면 어떻게 하죠?"
"세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겁니다."
호언장담하는 말에 안심한 한유진은 다시 그 금속 원기둥을 눈에 담았다.
어느새 활성화된 영안술이 그 기둥이 품은 영기 농도를 알려주고 있었고, 그것이 대략 어떤 복합적인 구조를 가졌는지도 파악할 수 있게 해줬다.
'아무래도 망가질 것 같은데, 설마 구차하게 말 바꾸진 않겠지.'
물론 그래도 본격적인 헌터 활동을 시작하면 충분히 갚아낼 수 있을 터다. 불쾌한 인연 하나가 만들어지겠지만 말이다.
상념과 함께 그는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화탄술을 딱 평범한 수준으로 시전했다.
그 작열하는 화염의 구체가 곧 화살처럼 쏘아져 금속 기둥을 직격한 순간.
꽈과광-!!
밀폐된 훈련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폭음과 함께 열기 섞인 돌풍이 휘몰아쳤다. 화들짝 놀란 사무관의 시선이 타격 중심부의 광경에 못 박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지간한 피해로는 기스도 안 난다던 물건이, 마치 용광로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선 반 이상 녹아 부서진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 기둥이 서 있던 바닥마저도 두꺼운 타일이 마구 깨져 파헤쳐졌다. 한유진이 일부러 조정하지 않았다면 큰 구멍이 뚫렸을지도 몰랐다.
'지하 2층은 없는 것 같았는데.'
혹시 안내도에 표시되지 않은 기계실 따위가 있을지도 몰라 신경을 좀 썼다.
사무관은 십여 초가 넘도록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차례 한유진과 금속 기둥을 번갈아 쳐다봤을 뿐이었다.
"이건······ 최소 A급 위력인데······?"
그 중얼거림을 들은 한유진은 태연히 생각했다.
과연 선협식 수련법이 파워 밸런스가 미치긴 했다고.
18화. 예비 A급 헌터
곧 충격을 수습한 사무관은 그 엉망이 된 금속 기둥의 잔해를 그냥 둔 채로 나머지 테스트를 진행해 나갔다.
방어력의 경우는, 한유진이 옥피술을 시전한 다음 마치 레이저 온도계처럼 생긴 기계로 마나 농도를 살피는 방식이었다.
"각자의 방어능력마다 다른 점이 너무 많아서 속단하긴 이릅니다만, 이 정도면 실전에서 충분히 몸을 잘 보호할 수 있을 겁니다. 체감은 어떤가요?"
"느낌상 금속판을 두른 정도는 되지 않나 싶습니다."
"훌륭하네요. 못해도 C급이고 어쩌면 B급일 수도 있겠는데······ 피부에 딱 맞춰 발동되는 형식이라 험한 테스트가 불가능한 게 아쉽습니다. 최대한 많이 파악해 둘수록 실전에서 그만큼 안전할 텐데 말이죠."
이후 무게감이라든가 마나 소모량 등을 물어 확인한 사무관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이동능력 테스트도 간단했는데, 훈련실 한쪽 길게 자리한 'U'자 형태의 트랙을 열심히 달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차량 속도를 재듯 측정이 완료됐다.
풍운술을 시전한 한유진은 굳이 비행능력은 선보이지 않고 그 달리기 트랙을 빠르게 주파했다. 컴퓨터 기기 앞에 서서 기록을 확인한 사무관이 열정적으로 박수를 쳐서 조금 민망했다.
"B급 가속능력 못지않습니다! 한 번만 더 테스트해 봅시다!"
자신의 일처럼 흥분하는 사무관의 모습이 첫인상이었던 '오만한 엘리트' 같은 느낌을 상당량 희석시켰다.
이어진 염동력 테스트가 좀 오래 걸렸는데, 여러 형태의 물건을 각 무게별로 들고 움직이고 던져보는 일이었다. 아무렇게나 던지는 게 아니라 이십여 미터 거리를 두고 랜덤한 위치에서 떠오르는 표적지를 향해서였다.
쾅! 콰앙-!
허공을 날아간 쇠막대 형태의 물건이 표적지를 정확히 강타한다. 거의 부서질 듯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넘어가는 모습이라, 한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사무관의 눈치를 살폈다.
"위력, 속도, 정밀도, 전부 다 B급 이상입니다. A급부터는 전용 훈련실이 따로 있으니까, 나중에 거기서 다시 확인해 보죠."
지금은 기초 자격증을 따는 건데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지만, 한유진도 자신의 어물술이 과연 A급 판정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했기에 그냥 넘어갔다.
은영술은 마나 스캔기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검사자가 서 있을 수 있는 기계에서 진행됐다. 그리고 나온 결과가 한유진 본인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S급······ 입니다. 은폐력이 대단하네요."
"S급이라고요?"
"지금도 이미 공기에 가까운 수준이라 더 나아질 구석이 없어요. 비가시 위장막 같은 장비를 더하면 훨씬 완벽해질 겁니다. 정찰자를 하셔도 되겠는데요?"
정찰자란 가장 먼저 균열에 진입하여 내부환경을 파악하고 위험 요소를 체크하는 역할군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역할인데, 적합한 재능을 가진 이가 드물어 매우 귀한 자원으로 여겨지고 당연히 몸값도 그만큼 셌다. 후속 전투에서는 아예 빠져도 된다는 조건이 보통으로 여겨질 정도로.
'은영술이 내 생각보다 더 괜찮은 법술이었군.'
아니면 이곳 지구의 마나를 은폐하는 능력이 그만큼 허접하다는 뜻일 터다. 능력이 허접하면 자연히 그를 판단하는 기준 역시 허접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남은 것은 영안술과 치유술이었는데, 둘 다 여기서는 마땅히 테스트할 방법이 없었다.
"한유진 씨."
하여 테스트를 일단락하기로 한 사무관이 덧붙이듯 말했다.
"지금 나온 테스트 결과만으로도 충분히 A급 헌터가 되실 수 있습니다."
"A급······."
"물론 본인을 위해서라도 사전교육은 받으셔야 합니다. 실전도 몇 번 경험하셔야 할 텐데, 그건 제가 직접 헌터 전문학교 쪽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학교 쪽이라면, 그쪽 선생님들을 얘기하시는 건가요?"
"현역 헌터 안전요원도 붙을 겁니다. 학생들이 실습할 때 끼어가는 형식이 될 거라서요. 한유진 씨처럼 늦게 각성한 경우에는 보통 다 이렇게 합니다. 원래는 본인이 직접 신청하는 거지만요."
"아아."
"그리고······."
잠시 말을 흐린 그가 최대한 정중하고 친절한 느낌을 담아 물어 왔다.
"각성 능력이 지식이라면, 혹시 그 지식을 공유할 의사가 있으십니까?"
"그렇다고 치면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될까요?"
바로 나온 한유진의 긍정적 뉘앙스에 그는 아주 반기는 태도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짧게 요약하자면, 특허를 내고 원하는 대상과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뒤 로열티를 받는 식인데, 만약 정부 기관인 이능관리국과 직접 계약한다면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도와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유형의 라이선스 로열티는 1할 정도로 책정되는 게 보통입니다. 더 많이 원하신다면 제가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런데도 조건이 영 별로다 싶으시면, 특정 기업과 협상해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끝에서 그가 말을 흐렸지만 한유진은 뒤 내용을 익히 예상할 수 있었다.
개인이 정부 기관의 도움 없이 글리프 관련 지식을 특허로 등록하기까지 얼마나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릴지를. 이후의 계약 과정도 비슷하게 시간과 정력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바로 결정하기엔 너무 중요한 이야기라는 거 압니다. 해서 일단 담당 주무관을 한 명 붙여드릴까 싶은데, 어떠신가요?"
"담당 주무관을요?"
무슨 엔터계 매니지먼트도 아니고 담당자를 붙여주겠다니, 한유진은 순간 이능관리국이 그렇게 한가한가 싶었지만, 곧 납득했다.
자신은 각성하자마자 A급 헌터의 재능을 증명했다. 무엇보다 그 재능은 지식의 형태로서 남에게 공유해 줄 수도 있다.
지식이 곧 힘이라는 건 국가 단위 차원에서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하물며 나라의 부강함에 비해 인구가 적은 편이어서 항상 헌터 전력의 부족함을 느끼는 국가라면, 심지어 삼팔방어선 너머 구 북한을 멸망시켜 버렸던 대균열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구 북한 지역의 대균열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위험하다고 평가받는 마경이다.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까지 위협을 주고 있어 세 국가 간의 긴밀한 협조를 강제로 끌어내기까지 한.
만약 한유진의 지식을 통해 헌터 전력을 강화할 수 있다면 한국 정부로선 매우 탐을 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게 보니 이런 대우가 당연한 것 같기도······?'
간단히 생각해 보며 그가 다른 것을 물었다.
"담당관은 저도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원하는 다른 게 있어서요."
"다른 거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돈도 좋지만 제 지식이 최대한 널리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국내 전체는 물론 해외로까지요."
"아~ 그런 이야기였군요."
잘 알았다는 듯 사무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도 한유진이 돈과 함께 명성을 추구한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저희 이능관리국과 계약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기업하고 계약하면, 최대한 기술을 독점하면서 이익을 뽑아내는 데 집중하기 마련이거든요."
타당한 이야기에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 태도를 취했다.
물론 그러면서 다른 부분도 고려했다.
그가 알기로 대한민국의 부패인식지수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기억대로라면 100점 만점에 84점인가로 세계 10위 안에 드는 수준일 것이다.
나라에 환란이 많았던 탓인지, 거기에 차원 충돌로 인한 균열 발생과 이능력 각성자들의 등장이라는 초자연적 사태까지 덮쳤기 때문인지, 말만 번지르르한 자들은 일찍 도태되어 사라졌고 지금껏 그런 기조가 잘 유지되어 왔다.
물론 아무리 다른 국가들보다 낫다고는 해도 정치라는 것의 특성상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 자주 벌어지곤 하지만, 그래도 덮어놓고 불신할 정도는 아니다.
요컨대 그가 이능관리국과 계약해서 크게 뒤통수 맞을 우려는 별로 없단 뜻이었다.
'그리고, 이능관리국이 정부 기관 중에서도 좀 많이 특별하다지.'
일개 국이라기엔 그 중요도나 독립성이 매우 크다고 들었다. 한때 이능관리청을 넘어선 이능관리부로까지의 승격이 논의되었을 만큼.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이능력자에 대한 각종 국제협약 등에 의해서, 그리고 이능력이라는 것 자체가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여러 정치 논리와 우려들에 의해서 지금의 이런 오묘한 상태에 놓였다는 모양이다.
"자, 그럼, 장소를 옮겨서 마저 테스트해 볼까요?"
관찰능력과 치유능력, 그리고 A급 이상의 전용 훈련실이 따로 있다는 염동력에 대한 이야기다.
기초 자격증은 이미 따고도 남을 텐데, 라는 생각은 이어지는 사무관의 말에 깨끗이 사라졌다. 어차피 나중에 헌터 활동을 하려면 다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공무원이 직접 옆에서 도와줄 때 해치워 버리는 게 낫다. 하여 그는 순순히 사무관을 따라 움직였다.
* * *
염동력은 같은 센터 건물의 한곳, 전용 훈련실에서 충분히 테스트해 볼 수 있었다. 결과는 위력과 속도에서 A급, 정교함에서 B급, 종합 A급이라는 결과였다.
이어 치유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차를 타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는데, 가는 와중 사무관이 바쁘게 전화를 걸어 모종의 행정사무를 처리하는 듯했다. 그사이 한유진은 스마트폰으로 슬쩍 사무관이 몇 급 공무원인지를 검색해 봤다.
알고 보니 무려 5급이었다. 군대로 치면 중령급이라는 이야기도 보여서, 평소에도 센터에 중령급 인사가 상주하는 건가 싶었다.
어쨌든 그런 엘리트 공무원이 몸소 도와주는 특별대우는 굉장히 흡족한 기분을 선사했다.
그렇게 5급 공무원의 파워인지 뭔지로 치유능력 테스트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C급 상위권 판정을 받을 수 있었고, 이어 이동한 야외 훈련장에서 마침 해가 저물기 시작한 환경을 이용해 B급 관찰능력 판정도 받아냈다.
모든 테스트 절차를 마무리한 뒤엔 친절하게도 사무관이 집까지 차로 태워다줬다.
"대학생이라고 하셨는데, 계속 다니실 건가요?"
"일단 휴학하고 생각해 볼 것 같습니다."
"휴학계가 남았으면 일단 미루는 것도 방법이죠. 근데 딱히 학문에 뜻이 없으시면 그냥 자퇴하셔도 좋을 거예요."
사무관으로서 하는 말이 아닌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는 잡담인 듯했다. 한유진도 내심 동의하는 바였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좋게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A급 헌터가 되실 거잖아요. 걸어 다니는 대기업이란 소리까지 듣는."
"에이, 대기업은 너무 과장이지 않나요?"
"한유진 씨는 또 특별하잖아요. 결국 어디랑 계약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라이선스 로열티도 받게 되실 테고······."
말하면서 웃는 모습이, 이젠 아주 호쾌한 성격처럼 느껴졌다. 첫인상이었던 '오만한 엘리트'의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다.
"여기 안쪽이 댁인가요?"
"그냥 지금 내려주시면 됩니다. 가까워요 여기서."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듣고 하는 말이었다. 그 짧은 거리마저 운전해서 데려다주겠다는 걸 연거푸 거절한 한유진이 차에서 내리려던 때.
"아, 맞다.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요."
그가 정장의 안주머니를 뒤져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두 손으로 아주 공손한 태도였고 한유진도 마주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뭔가 골치 아픈 일 생기면 편히 연락주세요. 담당 주무관도 이틀 안에 연락이 갈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오늘 고생하셨을 텐데 푹 쉬시고요."
"네, 사무관님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오늘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감사는요, 제 일이었는데요."
웃으며 작별한 뒤 멀어져가는 그의 차 뒤꽁무니를 보며, 한유진은 문득 자신이 정말로 신세가 격변했음을 체감했다.
주변은 평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상황이 변하자 그 똑같은 풍경에서 받는 느낌도 달라진 것 같다.
그냥 가만히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만감이 차올랐다. 동시에 살짝 붕 뜬 기분이기도 했다.
'그래······ 결국 여기가 내 본진일 수밖에 없지.'
미우나 고우나 부정할 수 없는 고향이다.
자신의 각성 능력으로 여러 다양하고 흥미로운 세계를 마음껏 모험할 수 있다 해도, 그곳에서 매우 귀중하고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해도.
결국 자신은 이 지구의 현실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하게 낡고 비좁은 원룸으로 향하며 그는 문득 떠올렸다.
'그 종말 후 지구는 대체 어쩌다가 멸망해 버린 거지······?'
정말로 그곳이 이 지구 세계의 미래일까? 아니면 어느 영화에서처럼 그저 가능성의 갈래 중 하나,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평행 세계에 불과할까?
'오늘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그 금은방에서 자신이 뭐에 죽었는지 정도는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정말로 그곳이 이 지구의 미래라면, 자신이 어떻게든 그 종말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야 할 터였다.
19화. 지구 종말의 연도
사방이 어둡고 공허한 대기 장소.
한유진은 '종말 후 지구'라는 글씨가 떠오른 예의 녹슨 방화문을 보며 조금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당시엔 처음으로 능력을 각성했던 때라 홀린 사람처럼 그냥 열고 들어가 버렸지만, 지금 다시 보니 뭐라 콕 집어 말하기 힘든 불길함이 느껴진다.
'뭐······ 죽기밖에 더 하겠냐.'
다행히 이곳에서 겪었던 죽음은 그렇게 막 참혹하진 않았다. 물론 당시의 그가 워낙 약해서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어버린 덕이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앞으로 더 많은 미지의 세계를 더 여러 번 적극적으로 탐험해야 할 것이다. 그때마다 이런저런 걱정만 떠올리면서 망설일 수는 없다.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여주마.'
새삼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한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훅 끼쳐오는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를 느끼면서, 통과해 나온 문이 사라지는 현상을 일별하곤 주변 광경을 살핀다.
어디를 봐도 버려진 지 족히 수십 년은 지난 듯한 도시의 모습뿐이었다. 길가엔 버려진 차들이 널려있고 건물은 곳곳에 금이 가거나 무너져있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두 깨졌으며 금속엔 죄다 녹이 슬었다.
그 흔한 잡초조차 보이지 않아 마치 모든 생명체가 멸절해 버린 것 같은 풍경 속, 한유진은 기이하게 변질된 영기의 느낌에 몸서리쳤다.
음산하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매 호흡마다 차가운 얼음이 들어차듯 등골이 섬찟하고 절로 닭살이 돋으면서 몸이 부르르 떨린다.
"어우······."
이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 종말한 세상의 난이도를 너무 얕봤던 것 같다. 한 세상이 종말까지 치달은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다.
'우선 연도를 알아야 해.'
달력 같은 걸 찾으면 된다. 그리고 달력 정도는 많은 아파트 가정집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을 터다.
'하지만 그 전에······.'
그 금은방에서 자신을 습격해 죽였던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곳에서 가까운지라,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은영술과 영안술을 시전한 채 빠르게 이동했다.
겨우 일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예의 금은방에 도착한 그는 섣불리 들어가지 않고 안쪽을 살폈다. 과연 그가 방문한 흔적은 전혀 없이 그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들어가 봐야 할 듯하다.
반 이상 떨어져 나간 유리문 사이로 조심히 몸을 밀어 넣은 그는, 유리 매대 안 얌전히 놓여있는 금붙이들을 보며 살짝 쓰게 웃었다.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돈 욕심에 눈이 멀었던 그때 생각이 난 탓이다.
하나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때는 그렇게 행동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고작 몇 분 정도 지체할 뿐이었으며 그토록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단 사실을 모를 수밖에 없었으니까.
상념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영안술을 펼친 상태임에도 여전히 위험 요소를 발견하지 못했다.
'물건을 챙겨야만 뭔가 트리거가 작동되나······?'
그때처럼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한 바깥 하늘을 본 한유진은 옥피술을 시전하고 오행검까지 뽑아 든 채로 유리 매대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쪽 금붙이들을 아무렇게나 손에 쥐어 꺼냈다.
바로 그 순간.
"씹······!"
화들짝 놀란 그가 쥐었던 금붙이들을 내던지고 물러섰다.
마치 귀신처럼,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를 어두운 형체가 금은방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피가 터져 나올 듯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겨눈 오행검의 법문 금제를 한껏 자극시킨 채, 상대를 자세히 살피던 한유진은 재차 소름이 돋고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진짜 귀신이잖아!'
자세히 보면 형체가 미약하게 일렁이고 충혈된 눈에서 흐르기 시작한 피도 실체가 아니다.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한 입속으로는 오로지 싸늘한 어둠만이 가득하다.
그냥 전체적으로 사람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형상이었고 분위기 또한 그랬다.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몰아친다. 그리고 결국 한유진은 공격을 선택했다.
빛을 머금고 으르렁거리던 오행검이 순간 번뜩이며 금색 기운을 쏘아낸다. 그에 반응하여 상대 귀신이 비정상적으로 입을 쩍 벌리며 급속도로 달려들었다.
푸확-!
끔찍하게도 진짜 실체를 가진 대상을 베어낸 듯 놈의 신체가 절단나고 피가 흩뿌려졌다. 한데, 그렇게 머리통이 가슴까지 쪼개진 상태로도 놈은 죽지 않고 한유진을 향해 계속 손아귀를 뻗어왔다.
과거의 그때 자신의 머리통을 부숴버렸던 그 손아귀가 분명했다.
빠콰쾅-!!
반사적으로 다시 조작한 오행검의 법문 금제가 청백색으로 번뜩이고 뇌전이 쏘아진다. 그에 직격당한 귀신은 전신이 재로 부서져 내리며 작은 비명조차 없이 사라졌다.
오행 중 뇌전은 원래 파법(破法)에 강점을 보인다. 영적 현상일 수밖에 없는 귀신을 상대로도 충분히 효과적이어야 이치상 맞다.
'······죽은 거야? 도망친 거야?'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채로 그는 주위 사방을 살폈다. 분명히 오행검의 공격으로 피가 잔뜩 흩뿌려졌었는데, 그게 마치 환각이었다는 듯 완전히 사라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긴장하여 천천히 내쉬는 호흡에 언젠가부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입문기에 불과하다지만, 어쨌든 수선자인 한유진이 견디기 힘들 만큼 추웠다. 재차 살핀 바깥의 하늘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별로 없는 느낌이다.
'대략 복수했다고 치자.'
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따지자면 자신도 완전히 안 죽었으니 이제 쌤쌤이다.
생각과 함께 밖으로 나선 그는 순간 헛숨을 들이켜며 멈춰 서야 했다.
'이런 씹······.'
그가 나오는 순간, 주변의 모든 건물 창문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던 시커먼 형체들이 휙 모습을 감췄다. 워낙 빨랐기에 착각인가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었다.
이 세상은 아무래도 귀신 아포칼립스에 망해버린 것 같았다.
전염병도 아니고, 핵전쟁도 아니고, 몇 학자들이 우려하던 균열 폭주도 아니고, 농담처럼도 안 느껴지는 귀신 아포칼립스에 멸망하다니.
'차라리 운석충돌이 더 현실성 있겠네.'
그렇게 생각하는데 문득, 오행종 유적에서 본 어느 서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수선계에 실제로 나타났었던, 혹은 나타날 수도 있으리라 여겨지는 각종 재앙을 언급하는 잡서였는데, 거기서 가장 최악으로 꼽은 말법의 재앙이 진짜로 오행종 세계를 멸망시켰는지라 한유진은 아주 흥미롭게 잘 읽었다.
어쨌든 그 책의 내용대로라면, 말법의 재앙 말고도 혼원역류의 재앙이니 역외천마도래의 재앙이니 여러 가지가 많은데, 그중 10위권 정도로 언급된 것이 바로 역천귀도의 재앙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천도 생사법칙이 뒤틀리면 온 세계가 귀신으로 뒤덮여 멸망하게 되리란 재앙이었다.
'여기에 진짜 그런 재앙이 펼쳐지기라도 했나?'
잠깐 상념에 잠겼지만 곧 추위가 그를 일깨웠다.
완전히 밤이 되면 얼마나 더 끔찍해질지 우려하며 그는 풍운술을 시전해 급히 움직였다. 죽기 전 어딘가에서 달력으로 연도라도 확인해야 이번 탐사가 헛되지 않을 터다.
그렇게 약 일이 분 정도를 이동했을 때.
- 아아아아아아······!!!
갑자기 뒤편에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메아리 같은 아우성이 들려왔다.
무언가에 극심한 고통을 받는 것처럼도 느껴지고, 매우 안타깝고 절박한 자의 구원요청처럼도 들리는, 희미하면서 또한 거대하여 그밖에 다른 모든 소음을 잡아먹는 느낌을 주는.
반사적으로 뒤돌아보니 웬 정장을 입은 남자가 기괴한 움직임으로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상체를 좀비처럼 비틀대며 내뻗는 매 걸음마다 주변 일대의 광경이 제멋대로 왜곡되면서 거리가 훅훅 좁혀진다. 주변 건물 안에 자리하던 귀신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놈으로부터 도망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빠콰쾅-!!
오행검의 법문 금제가 번뜩이고 벼락이 쏘아졌다. 하나, 남자는 그 벼락을 맞고 비명 지르면서도 계속 거리를 좁혀왔다.
"꺼져!"
콰르릉-! 빠쾅-!!
당연히 한유진은 전력으로 도망치면서 연신 벼락을 날렸다. 하나, 남자는 계속 고통스럽게 절규하면서도 결코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마치 벼락 자체는 별로 고통스럽지 않은데, 그것에서 유발되는 스스로의 어떤 기억 따위에 더 고통받는 느낌이었다.
'못 이긴다.'
놈과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본능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리면서 등골에 전기가 흐르듯 섬찟섬찟하다. 청심술을 동원했음에도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팔다리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지?!'
원래는 아파트 단지를 찾아 가정집들을 수색해 볼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지금 건물로 들어가 버리면 저놈에게 곧장 따라잡혀 죽을 것 같다.
그리고 건물 내부에 또 어떤 귀신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점도 고려해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내달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오는 건 이름 모를 학교 건물이었다.
아무래도 아파트보단 넓고 구조도 덜 복잡하니 오랜 시간을 끌 수 있을 듯해서, 또 운이 좋으면 교무실 등에서 달력을 찾아볼 수도 있을 듯하여 그는 즉시 방향을 틀었다.
- 아아아아···! 아아아아아······!!
그때쯤 고통으로 우는 듯 애원하는 듯 비명 지르는 정장 남자의 존재가 매우 가까워진 상태였다.
어차피 죽어도 그냥 현실에서 깨어날 뿐인데, 한유진은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해한 수준의 공포를 느끼면서 그 어느 때보다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렇게 학교 담장을 넘어 건물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
의아하게도 모든 소리가 뚝 끊어졌다. 그리고 무시무시하던 압박감이 훅 사라져 버린 탓에 한유진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허억······ 허억······ 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그는 일어서려다 몇 번을 더 넘어졌다. 언제 이렇게 많이 흘러나왔는지 모를 식은땀이 뚝뚝 떨어져 먼지 쌓인 바닥에 선명한 흔적을 만든다.
'살았나, 일단?'
계속해서 바깥 동정을 살피는데, 무거운 적막만 가득하고 다른 어떤 위협적인 느낌도 없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따라오더니 왜 갑자기 추격을 뚝 멈췄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잠깐.'
왜 갑자기 추격을 멈췄을까?
여기가 무슨 성역이라도 돼서?
'그럴 리가.'
섬뜩한 가정이 하나 떠오른다. 이곳에 더 무서운 귀신이 살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게 아닌가, 하는.
긴장하여 주위를 둘러본 한유진은, 은영술과 영안술과 옥피술 등을 최대한 꼼꼼하게 시전한 뒤, 오행검 손잡이를 구명줄처럼 꽉 붙잡은 채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곳에 들어왔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쫓기면서 얼핏 계획했듯 교무실이라도 찾아 달력을 확인해야 한다.
'제발, 세상이 몇 년도에 망했는지만 알게 해줘. 다른 거 안 바라니까······!'
이런 곳에선 더 오래 살려주겠다고 해도 사양이다. 그는 연도만 확인하면 바로 '탈출'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1층 내부의 절반 정도를 걸어 이동했을 때.
툭-
뒤편에서 들린 미약한 소리에 한유진은 거의 펄쩍 뛰어오르듯 놀랐다. 그렇게 뒤돌아본 자리에는 웬 종이카드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언뜻 편지지 같기도 했는데, 그것에 적힌 글씨가 피를 흘리기 시작하면서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 곧 만나요, 착한 선배.
'······별로 안 만나고 싶은데, 나는? 착하다는 건 또 뭐야?'
무심코 생각하는 그때.
갑자기 위쪽에서 나는 부산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치켜든 한유진이 기겁했다.
천장에 수많은 '학생 귀신'들이 바퀴벌레처럼 붙어있다가 사방으로 미친 듯이 흩어지는 모습이었다.
- 아아아······!
- 원희··· 원희가···!
- 원희가 온다······!
그것을 보고서야 놈들이 내는 메아리 같은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그 음성들에 담긴 어마어마한 두려움에 한유진도 바로 겁에 질렸다.
놈들의 반응만으로도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그는 즉시 은밀함을 포기한 채 전력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몇 초 후, 복도 코너를 돌자마자 교무실 표지판이 달린 녹슨 문을 발견하고는, 거의 부술 기세로 열며 안으로 들어섰다.
'달력!'
한차례 훑어보기 무섭게 벽 한쪽 거의 다 뜯어져 너덜거리는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황급히 다가간 그가 페이지를 넘겨 연도를 확인했다.
'2032년······?!'
아마도 이 달력이 벽에 걸렸을 2032년까지만 세상이 멀쩡했다는 뜻일 텐데, 현실의 지구는 이제 2022년이었다.
이곳이 정말로 현실 지구의 미래라고 치면 겨우 10년밖에 안 남은 셈이다.
'그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어야 이런······?'
반사적으로 생각하던 중, 그는 무언가를 직감하곤 뒤돌아섰다.
그가 들어왔던 교무실 문을 가로막으며 어떤 여학생이 서 있었다.
시커먼 어둠으로 물들었음에도 전신을 흠뻑 적시며 흘러내리는 핏물의 색채가 뚜렷하다.
언제 퍼져왔는지 모를 혈향에 코가 마비되는 정도를 넘어 핏물을 직접 들이마시는 듯했고, 급격히 차오르는 냉기는 액체질소를 뒤집어쓰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그 정장 차림 귀신을 마주했을 때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두려움을 넘어 거의 경외심으로 착각할 만큼 초월적으로 벅찬 느낌이.
마치.
그 악마 추종자들의 이카파 판게아에서 '세례'를 받으며 느꼈던 시선과도 얼핏 비슷한.
그 여학생은 그저 우두커니 서선 한유진을 피 흘리는 새까만 눈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무언가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먹잇감의 작은 반항을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한 태도로.
"······뭐냐, 넌?"
힘겹게 나온 목소리는 의도와 달리 불쌍할 만큼 떨렸다. 그리고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그는 전력으로 청심술을 돌리고서야 겨우 신체 통제권을 회복했다. 여전히 무시무시한 냉기 때문에 감각이 전혀 없었지만,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면서 교무실의 한쪽 유리창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화탄술을 시전해 유리창 벽을 뚫고 이곳을 탈출하려던 순간.
사방에서 무언가 매섭게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언제 어디서 들이닥쳤는지 모를 무수한 '머리카락'의 파도가 그를 미친 듯이 난도질하여 수십 조각으로 쪼개 버렸다.
'이럴 거면 왜 무섭게 뜸 들였냐고, 씨발.'
그 죽음의 순간 한유진은 탄식하듯 욕설을 떠올렸다.
- 당신은 죽었습니다.
암전된 시야 속, 은빛 문자들이 신비롭게 나타나 그를 크게 안심시켰다.
모든 공포스럽던 감각이 사라지고 주변의 어둠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 수확물을 선택하십시오.
* * *
어쨌든 그 무시무시한 종말 세상에서 연도를 확인했다.
그게 정말로 현실 지구의 미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 확인하기 어려울 듯했지만.
만에 하나 정말 그렇다고 쳐도 10년이면 뭔가 수를 낼 수 있을 터였다.
'내가 빠르게 성장한 다음 재탐사해서 정확한 이유를······ 아니,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같은 세계의 종말 직전 시간대로 문을 열 수 있다면······.'
생각하던 한유진이 순간 깜짝 놀랐다.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수확물 선택지가 하나 있었다.
선명한 핏물로 '곧 만나요, 착한 선배.' 라는 문장이 적힌 종이카드였다.
"······."
그 글자에서 끝없이 배어 나오는 핏물은 다행스럽게도 이 공간의 특수성에 진압된 듯 깨끗이 사라지는 모습이었지만, 어쨌든 그것이 수확물 선택지로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소름 끼쳤다.
심지어 선택하는 데 카르마가 전혀 필요하지도 않아 느낌이 이상했다.
"어우······."
고개를 돌린 그가 여러 가지로 고려해 봤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지금 저걸 선택하는 건 미친 짓 같았다.
그는 연신 고개를 저으면서 대기 장소를 벗어났다.
20화. 잠깐 휴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