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만찬 분위기 죽이네.
'설마....'
지하 감옥 가장 밑바닥.
이 지옥 같은 풍경을 본 순간, 문득 '그곳'이 떠올랐다.
학살자 카멜 블레이저의 핵심 세력 중 하나이자, 주술사들로 이뤄진 광기 섞인 연구 집단.
'주술사들의 둥지' 말이다.
주술사들의 둥지는 제물을 이용해 저주와 주술을 연구 혹은 강화하는 반인격적인 조직 단체였다.
제물은 당연히 '인간'.
불타버린 마을에서 사라진 영지민들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여기 다 모여 있었다.
"따라와라."
"...."
난 입을 꾹 다문 채 리옹 뒤를 따라 긴 통로를 지났다. 길 사이사이 철창에는 잡혀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나같이 텅 비어있는 눈동자, 체념 어린 눈빛이다. 그들은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자들처럼 보였다.
그러다 주술사들이 나타나면 살려달라 외쳤다.
비어있는 공간 곳곳에 주술사들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잔혹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이곳은 주술사들의 둥지 혹은 그 초기 단계의 장소 같았다.
'등장 전부터 주술사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어.'
소설에선 카멜이 영주에 등극한 뒤 주술사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설마, 카멜의 첫 장면 전부터 이렇게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을 줄 몰랐다.
암살자들의 대화를 엿들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이곳은 단순한 소설 속 세상과 달랐다.
너무나도 짙은 현실성과 인과 관계.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소설 속 내용만 믿고 움직이다간 대가리 제대로 깨지겠는데?'
눈앞의 광경에 큰 경각심을 느끼고 있는 사이, 카멜 앞에 당도했다. 나를 본 카멜이 옆자리 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앉아라."
그 통로 끝, 공터는 딴 세상처럼 꾸며져 있었다.
크고 고급스러운 원탁 테이블 위에는 화려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고급 음식들이 크리스탈 접시에 가득 담겨 있었고, 몽롱한 색감을 지닌 술과 와인, 눈이 즐거운 디저트로 꾸며져 있었다.
완벽한 만찬이었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만 아니라면 말이지.
'만찬 분위기 죽이네. 미친 사이코 새끼.'
인간을 짐승처럼 가둔 감옥 한가운데서 식사라니.
그 어떤 산해진미를 먹어도 체할 것 같았다.
'일부러 보여준 건가?'
심리적인 압박을 위한 장치였다면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도 갇힌 이들처럼 될 수 있겠단 두려움이 밀려왔으니까.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 앉았다. 내 시선은 곧 옆을 향했다. 손님은 나 하나가 아니었다.
결박된 중년 사내가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 풍겨오는 분위기와 다부진 체격을 보니 기사처럼 보였다.
카멜을 바라보는 사내의 표정은 허탈함으로 가득해 보였다.
삶의 의지가 꺾인 느낌이랄까.
내가 도착하자, 리옹이 그 사내의 결박을 풀어줬다. 리옹이 곁에 오자, 사내의 표정이 순간 사나워졌다.
그는 원망 섞인 시선으로 리옹을 노려봤다.
"리옹 부단장, 그대는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단장, 전 두 공자 중 한 명을 택한 것뿐입니다."
단장?
난 두 눈을 크게 뜨곤 분노에 찬 중년인을 바라봤다.
저자가 블라이어 영지의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라고?
"헛소리! 선택은 네놈이 아니라 주군이 하는 것이다!"
"주군은 돌아가셨습니다. 승계 유언조차 없이."
"주군은 네놈이 죽인 거나 다름없어!"
"1공자님의 암살 소식에 충격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이놈!!!"
억압이 풀린 록터는 식탁에 놓인 나이프를 낚아채곤 벼락처럼 휘둘렀다. 그는 블라이어 영지에서 가장 강한 기사다. 작은 나이프 하나만 있어도 인간병기가 될 수 있다는 뜻.
하지만 나이프는 허무할 만큼 쉽게 리옹에게 막혔다. 블라이어 영지 유일한 5성급 기사라고 보기엔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마나를 봉인당한 건가?'
이곳이 주술사들의 둥지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주술사 렌구아의 실력이라면 기사 단장의 마나를 일시적으로 봉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제압당한 록터가 카멜을 노려보더니 짙은 탄식을 토해냈다.
"공자! 어찌 이리 참담한 짓을 벌였단 말입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이 상황에서 저를 농락할 생각 따윈 집어치우십시오! 주군과 1공자… 당신이 한 짓 아닙니까!?"
카멜은 피식 웃고는 찻잔을 기울였다. 차를 음미하며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그는 잔을 내려놓곤 록터를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록터 펠리스, 그대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무엇을 말입니까?"
"부친이 날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고용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건!"
"내가 그 시각 첨탑에 있을 거란 사실도, 그쪽 경비를 뺀 것도, 그 시각 내성 경비 정보를 제공한 것도, 전부 그대가 한 짓 아닌가?"
"...."
"난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반격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승리했을 뿐이지."
"…설마 창고를 불태운 사람이?"
"그대의 시선을 돌리려면 그 정도 대가는 당연하다."
"이, 이런 미친! 창고에 저장된 광물들은 영지의 1년 예산과 다름없습니다! 다 같이 굶어 죽을 작정입니까!?"
"난 성격 좋고 멍청하기만 한 형님과 달라. 아무 대비도 없이 그랬을까?"
"윌리엄 공자는 영지를 사랑했습니다. 당신과 다릅니다!"
"나도 영지를 사랑한다.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록터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감옥에 갇힌 영지민을 가리켰다.
"…저게 당신이 사랑하는 방식입니까?"
"나를 위해 희생하는 이들이다. 영광스럽지 않나?"
"다, 당신은 미쳤어!"
"그 미친 결과가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내 선택이 옳았던 거다. 난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쭉 살아있을 테니까."
록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정도로 비틀린 신념이라니.'
그동안 발톱을 숨기고 있던 2공자가 발톱을 드러냈다.
그런데 부친과 형제를 죽인 것도 모자라, 영지민을 물건 취급하는 영주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미치광이였다.
록터는 앞으로 먹구름이 낄 영지를 떠올리며 절망에 빠졌다. 영지에 헌신했던 기사 단장의 삶이 전부 부정당한 것 같았다.
"칙칙한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지."
카멜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시종들이 우르르 나와 록터와 내 앞에 식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카멜은 나이프와 포크를 들더니, 나와 록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대들을 위해 준비한 만찬이다."
록터는 그런 카멜을 경멸스럽게 노려봤다.
그리고 나는?
'시발, 이 분위기에서 뭘 처먹으라고.'
난 미간을 좁힌 채 눈앞의 스테이크를 내려다봤다. 이때만큼은 록터의 패기가 부러웠다. 하지만 난 새가슴이라서 말이지.
고민은 짧았다. 카멜이 핏물이 흐르는 스테이크를 오물오물 씹으며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표정 없는 눈빛이 싸늘하다.
"자, 잘 먹겠습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식기를 집어 들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드 콤보를 먹어도 토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나한테 거부권이 있을 리 없다.
내 현재 포지션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전달자다. 카멜의 눈에 난 돈에 욕심 많고 제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이어야 했다.
체할 것 같아서 소녀처럼 깨작깨작 먹고 있는데, 카멜이 내 잔에 와인을 따르며 물었다.
"렌구아가 그러더군. 심장에 자폭 벌레가 기생하고 있다고."
"...."
"왜 자폭하지 않았을까?"
"그분 덕에 아, 암시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아, 그 빌어먹을 '가호' 말이군. 이해했어."
더는 질문이 이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의 식사.
속이 더부룩했다.
이 정도 식사 자리라면 앞으로 대기업 회장과 일대일 식사에서도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식사를 끝낸 카멜이 물어왔다.
"두 사람에게 제안 하나 하지."
'제안?'
여기서 제안할 게 있나?
록터는 그쪽을 못 죽여서 안달이고, 난 그쪽으로부터 얼른 탈출하고픈 사람인데?
"내 밑으로 들어와라."
"...!"
갑자기 카멜의 머릿속을 보고 싶었다. 대체 어떤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어야 이런 정신 나간 제안을 할 수 있는 건지 말이다.
"그 대가로 살려주지."
하지만 카멜의 다음 말을 듣곤 생각이 많아졌다.
동맹 표시를 위해서라도 내 목숨은 붙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살려준다라.
이게 무슨 뜻일까?
"답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군요."
록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비웃음을 날렸다.
명백한 거절 표시.
그 표시에 카멜이 피식 웃었다.
"죽고 싶나?"
"죽이십시오."
"그래? 그대를 따르는 이들마저 모조리 처형할 생각을 하니 안타깝군."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1공자를 암살한 이들 배후에는 과연 누가 있었을까?"
"그건 당신이잖아!"
단장의 말투가 사납게 변했지만, 카멜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록터, 어리석구나. 현재 블라이어의 주인이 누군지 잊었느냐? 바로 나다."
"...."
"배후는 지목하기 나름이지."
카멜이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생각해보니, 난 1공자를 죽인 암살자로 잡혀 왔다. 내가 거짓 증언을 하면 역적처럼 다 엮어서 처형시킬 수 있다는 말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 증언을 못 하겠다는 개소리는 집어치우자.
난 바로 할 거다.
다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거기까진 갈 것 같지도 않았다.
록터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으니까.
"원하는 게 뭡니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충성을 맹세해라."
"…그거면 됩니까?"
"창고를 태운 책임도 져야겠지. 광산에서 6개월간 노역을 하게 될 거다. 대신, 모두 살아남겠지."
록터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러곤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 하나를 희생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제안, 거절은 힘들다.
'와, 악당 같은 새끼.'
악당에게 악당이라고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이 새끼는 진짜 완벽한 악당 새끼였다.
또한, 그 심계(心計)가 무섭기도 했다.
'기사 단장을 볼모로 삼아서, 남은 세력을 흡수할 생각이야.'
블라이어 영지의 주도권은 현재 카멜이 쥐고 있지만, 아직 전대 영주와 1공자의 세력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각 가주와 1공자가 죽었으니, 2공자 카멜을 의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고, 이는 자칫 큰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광물 창고마저 홀라당 타버린 상황에서, 이들까지 등을 돌린다면?
영지는 순식간에 마비가 돼버린다. 카멜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니, 그 전에 두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록터를 이용하려는 것 같았다.
'중심을 잡아줄 존재가 없으면 두 세력은 힘을 잃게 되니까.'
록터와 그 지지 세력이 광산에 고립된 사이, 카멜은 회유와 겁박을 통해 잔여 세력을 완벽히 흡수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포섭하려고 하지?'
내 가치는 전달자 외엔 쓸데가 없었다. 의문이 길었지만, 답을 기다리는 카멜의 시선에 바로 고민을 접었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록터의 경우를 보니, 애초에 거절은 불가능해 보였다. 회유냐 협박이냐의 차이겠지. 차라리 넙죽 엎드린 후 기회를 엿보는 게 낫다.
일단 사지(四肢)가 멀쩡한 채로 이곳만 탈출하면 될 것 같았으니까.
"눈치가 빨라서 좋아. 동맹 표시를 전달하고 영지로 복귀하면 네 심장에 기생 중인 벌레를 제거해주지."
주술사를 통해 붐의 존재를 파악한 모양인데, 이 벌레의 작동 원리는 카멜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벌레를 회유 카드로 내밀었겠지.
다만, 벌레는 내가 자살하고 싶지 않은 이상, 내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돌아와? 내가 왜 돌아와? 미쳤냐?'
탈출하는 대로 블라이어 영지로는 오줌도 누지 않을 생각이었다.
"호위를 붙여주마."
"…네?"
"목적지를 들른 후 곧장 복귀하도록."
뭐 이 새끼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카멜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다.
안전하게 복귀할 수 있도록 호위를 붙여준단다. 말이 좋아 호위지, 이건 감시다.
놈의 목적은 뻔했다.
나를 붙잡아 이곳으로 끌고 오는 것.
그 전에 딴 생각 하지 못하도록 회유하는 척 친절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아!'
카멜의 의도를 파악했다.
가호!
'그'가 건 가호가 영원할 리 없으니, 가호의 힘이 끝나면 기억을 뽑아내서 '그'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기억이 뽑히면 죽거나 백치가 된다.
'이 미친 새끼가!'
벌떡 일어나 머리를 들이박고 싶었지만, 카멜 곁을 지키는 리옹과 눈이 마주치자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진짜 몸을 터트리고 같이 죽어?
물론, 말뿐이란 걸 나도 잘 안다. 짧게 숨을 뱉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괜찮아. 예상 못 한 것도 아니고.'
미행이 아니라 대놓고 옆에 붙일 줄은 몰랐지만, 일단 밖으로만 나가면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정 안 되면 '그곳'으로 가버리면 되고.
대략 보름 정도.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 고민은 접어두고 눈앞의 상황부터 얻을 게 있는지 생각해야 했다.
왜냐하면, 옆에 있는 사내.
'록터 펠리스가 내 곁에 있으니까.'
블라이어 영지의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
처음 본 순간 어쩌면 큰 기회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록터에게 제안한 카멜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괜히 악당이겠는가.
록터가 볼모로 광산에 갇혀 있는 동안, 록터의 지지 세력들은 하나둘 숙청당해 사라진다.
피의 숙청.
이를 계기로 록터 펠리스의 인생은 180도 바뀐다.
'배덕의 기사 록터 펠리스.'
광산을 탈출한 뒤 그는 '배덕의 기사'라 스스로를 칭하며 카멜 블레이저에 대항하는 저항군의 수장으로 등장한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에서 등장하는 첫 번째 영웅.
배덕의 기사와 인연을 만들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11화 내 이름은….
배덕의 기사는 학살자의 세력 확장을 저지해줄 강력한 대항마였다.
카멜의 공포 정치에 희생당한 이들 대부분이 배덕의 기사를 중심으로 한, 저항군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간은 짧았다.
불과 2년.
배신자의 존재로 배덕의 기사가 암살당하면서 저항군은 그 중심을 잃고 삽시간에 무너졌고, 카멜 세력은 그때부터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며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만큼 배덕의 기사가 카멜의 성장세에 큰 걸림돌이 된다는 소리였다.
'이 사실을 카멜이 알았다면 눈앞의 록터는 바로 죽었겠지.'
하지만 카멜은 1회차 회귀를 한 악당일 뿐이고, 난 그런 카멜의 회귀 스토리를 전부 알고 있는 독자였다.
'정보를 알려줘야 하는데.'
소설 속에 들어오면서부터 나는 이미 카멜과 웃으며 지내긴 그른 상황이었다. 아니, 미래엔 같은 하늘을 두고 살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가 나란 사실마저 나중에 알게 된다면?
'날 죽이려고 미친 듯이 달려들겠지.'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날 절대 살려둘 리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학살자의 세력이 커질수록 내 목숨이 위태롭다는 의미였다.
그 세력을 견제해줄 강력한 카드가 바로 옆에 있는데, 어떻게든 도움을 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눈앞에 학살자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상황이라 대화는커녕 시선조차 주기 힘든 상황이었다.
'배신자에 대해 어떻게 알려주지?'
광산 내에 카멜이 심어둔 배신자에 대해선 꼭 알려 줘야 했다.
록터에겐 두 명의 배신자가 존재했는데, 그중 첫 번째 배신자인 광산 동료에게 오른팔이 잘리면서 무력을 크게 잃게 된다.
본신의 무력만 유지해도 미래가 달라질 수 있는 일이라, 첫 단추를 끼우는 것처럼 아주 중요했다.
그렇게 눈치를 살살 보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푸른 휘장을 단 기사 하나가 다급히 입구에서 나타나더니, 리옹 곁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뭐?"
리옹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장 카멜에게 이 사실을 귓속말로 알렸다.
역시나, 카멜의 눈썹도 살짝 올라갔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놈이 반응을 보였다.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 터진 모양.
기사의 등장으로 시선이 다른 쪽으로 쏠린 사이, 난 재빨리 발끝으로 록터의 정강이를 툭툭 찼다.
록터의 시선이 잠시 나를 보더니, 다시 카멜에게 향했다.
카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기사 단장, 그대를 지지하는 세력이 예상보다 많았던 모양이야."
"...."
"내가 건넨 제안, 슬슬 답을 내려줘야겠어. 그래야 나도 손을 달리 쓸 테니까."
가주와 1공자의 세력이 기사 단장의 구금 사실을 듣고 병사들을 움직인 것 같았다.
다만, 록터의 충성 맹세만 받으면 알아서 무너질 세력들이라, 카멜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반대로 내 속은 검게 타들어갔다.
저 제안은 거짓이다. 하지만 이를 타개할 방법도, 말을 해줄 수도 없는 상황.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저 그의 정강이를 툭툭 건드리는 것밖에 없었다.
묵묵한 바위처럼 두 눈을 감고 있던 록터가 잠시 후 카멜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다."
"배가 고프군요."
록터는 만찬을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광산으로 끌려가면 이런 만찬은 구경도 못 하겠지요. 전 최후의 만찬을 즐겨야겠습니다. 그러니…."
록터는 카멜을 사납게 올려다보며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 더러운 면상 좀 치워줄 수 있겠습니까?"
"...이!"
도발적인 언사에 리옹이 발끈하면서 검을 뽑아 들자, 카멜이 이를 저지했다. 대신, 카멜은 록터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만찬이니, 실컷 즐겨라."
"...."
"잠시 후 사람을 보내지."
카멜은 리옹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갔다.
이 아저씨, 저놈 성질을 제대로 건드렸네. 광산에서 바로 뒈지는 건 아니겠지?
그럼에도 제 할 말 하는 사내가 멋져 보였다. 이런 모습을 동경하게 돼서 소설에 빠지게 됐는데, 어째 내 삶은 이곳에서도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았다.
'달라지는 날이 올까?'
문득 든 상념을 접고 나는 록터를 바라봤다.
그래도 록터가 기지를 발휘한 덕에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뒤쪽에 기사들이 감시를 서고 있었지만, 카멜이 자리에 없으니,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록터는 우악스럽게 음식들을 씹어 삼켰다. 술과 와인을 입 속에 병째로 들이붓기도 했고, 과일 서너 개를 한입에 넣어서 아작아작 부숴 먹기도 했다.
툭―
그러다 과일 바구니를 툭 쳐서 내 쪽으로 떨어트렸다.
과일들이 바닥에 쏟아지자, 난 과일들을 주워서 록터 곁에 올려놨다. 록터는 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 곁에 살짝 붙은 나는 작게 속삭였다.
"당신은 곧 황금 광산으로 끌려갈 겁니다. 그곳에서 에펠로아란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오렌지 좀 먹겠나?"
"전 오렌지보단 '말린 사과'를 더 좋아합니다. 하루에 열 개도 먹을 수 있지요."
"...."
"에토르에 표식을 남기십시오. 찾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아, 아닙니다."
차마 앞으로 벌어질 참담한 현실을 알려줄 순 없었다. 알려주는 순간, 록터는 이 자리에서 죽음을 택할 테니까.
끝말을 쓰게 삼킨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대화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그 뒤로 나와 록터는 조용히 만찬을 즐겼다.
'이젠 그의 선택에 달렸다.'
난 전대 영주였던 리암슨 자작의 그림자인 척 연기했다.
영주의 최측근인 록터도 그림자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암구호 '오렌지'로 물어왔고, 그 암구호에 대한 답이 '말린 사과'였다. 리암슨 자작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 말이다.
하루에 열 개도 먹을 수 있다는 건, 내가 열 번째 그림자란 뜻이었다.
굳이 열 번째를 들먹인 건, 록터도 얼굴을 모르는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은밀한 전력이지만, 그림자들은 회귀자인 카멜에게 모조리 죽었다.
그 사실을 록터가 이미 알고 있다면 날 신뢰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도 알지 못하는 황금 광산을 언급했고, 나중에 접근하는 인물 중에 에펠로아란 사람이 있다면 경계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광산을 탈출하게 된다면?
'에토르 영지를 떠올리겠지?'
필요한 정보는 다 건넨 셈이다.
카멜이 없어서일까.
분위기는 여전히 최악이었지만, 음식을 먹어도 전처럼 속이 더부룩하거나 토할 것 같진 않았다.
그건 록터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잠시 후, 복도 바깥쪽에서 리옹이 모습을 드러내자, 록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나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그의 시선이 느껴진 순간, 난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건넨 대화가 통했다는 것을.
하지만,
"이름이 뭔가?"
뒤이어 흘러나온 질문에 내 이성은 마비가 됐다.
...이름?
나에게 큰 파문을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떨어진 뒤 난 '신입'으로 불렸다.
내 이름은 뭘까?
기억을 살필수록 내 얼굴은 점점 당혹으로 물들었다.
없다.
이름이 없어?
록터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잠시 후, 리옹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록터는 아쉬운 듯 숨을 내뱉으며 등을 돌렸다.
서서히 멀어지는 록터.
그 뒤로,
"아, 아서, 아서 클레이튼입니다."
아서 클레이튼.
하나의 이름이 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서라…."
록터는 내 이름을 잊지 않으려는 듯 잠시 서서 중얼거렸다.
리옹이 도착한 순간, 만찬이 끝이 났다.
이 만찬에서 수많은 자의 운명이 결정됐다.
그중에는 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난 리옹과 함께 복도로 사라지는 록터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봤다.
"이름이라…."
암살자의 기억에는 이름이 없었다.
부모 없는 새끼.
비루한 노예 새끼.
인간 백정 암살자.
이름이 필요 없는 인생이라니.
이 몸의 주인은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았다.
그래서 불현듯 떠오른 이름 하나를 이 몸의 주인에게, 그리고 내게 선물했다.
그저 생각 없이 정한 이름.
"하필 떠오른 게 아서 클레이튼이라니."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최종 후반부.
악당들의 손에 인류가 몰락의 길을 걸었을 때, 타 종족 왕국들이 하나둘 멸망했을 때, 종국에 세상이 멸망으로 치달았을 때, 살아남은 인류는 '영웅들의 묘지' 앞에 모여 소망의 노래를 불렀다.
그저 절망을 잊게 해줄 '절대 존재'를 상상하며 불렀을 뿐이다.
악당들에게 말살당한 영웅들에게 바치는 노래.
그리고 새로운 구원자를 바라는 희망의 노래.
누군가에겐 희망으로, 절망으로, 공포로 군림하는 절대 존재.
아서 클레이튼.
아서는 소설 속에서 존재하지도 실존하지도 않은 영웅이다.
그저 희망을 담은 노래 한 구절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인물.
그래서 이 이름을 선택했다.
주인 없는 이름이었으니까.
난 입맛을 다시곤 포크를 내려놨다.
"그래도 이제 좀 사람 같네."
스스로 지은 이름이지만, 존재를 증명하는 이름이 생긴 셈이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소설 속 세상에서 난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이름이랑은 전혀 안 어울려. 빌어먹을…."
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보며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서 클레이튼은 희망을 노래하고픈 이들이 소망을 담아 지어낸 주인공이지만, 그 이름을 빌린 현재의 나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
난 말없이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 *
"꿇어라!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여!"
성벽 성루 중앙.
검은 망토를 둘러쓴 카멜 블레이저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오연히 허리를 펴곤 외쳤다.
그 당찬 외침에 기사 단장 록터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곤 천천히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문을 두고 대치 중이던 이들은 그 광경에 신음을 흘리며 무기를 떨궜다. 대부분 슬픔과 당혹감이 섞인 눈빛이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이들도 있었지만, 눈앞의 현실이 말해준다.
기사 단장이 가문의 승계자로 2공자 카멜을 택했다. 그의 충성 맹세로 블라이어의 기사단은 카멜을 모두 따르게 될 것이다.
이길 수 없는 싸움.
"쯧, 싱겁게 끝나겠어."
렌구아는 혹시 모를 충돌에 대비해 주술을 준비하고 있다가 아쉽다는 듯 수정구를 거두었다.
새로 개발한 주술을 실험해볼 좋은 기회였는데, 분위기를 보니 이대로 정리가 될 듯 보였다.
그는 성벽을 내려와 첨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계단.
우우우웅―!
"...!"
렌구아는 수정구에서 느껴지는 격한 떨림에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
그는 재빨리 수정구를 품 안에서 꺼냈다.
성스러운 빛이 수정구에서 흘러나온다. 예고 없이 흘러나오는 그 빛에 렌구아는 감탄을 토해내며 두 눈을 부릅떴다.
"시, 신명!"
신명은 일종의 '신의 점지'다.
뛰어난 주술사나 마녀 혹은 예언자가 지닌 물건에서 희박하게 발현되는 기적인데, 신명은 세상을 변화시킬 인물의 등장을 예지했다.
'또 다른 신명의 주인이 탄생한 건가?'
렌구아는 흥분한 표정으로 수정구를 살폈다. 자신의 물건에 신명이 발현되는 건 육십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자신의 물건에 신명이 찾아올 정도라면 엄청난 인물이 각성했다는 뜻과 같았다.
렌구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전 대륙의 이름 있는 주술사나 마녀들도 모두 신명을 받았을 것이다.
"도대체 누구기에…."
그 순간 수정구에 떠오른 점지.
렌구아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수정구를 응시했다.
[XX XXXX – XX XX XXX]
[X XX XX.]
"...."
하지만 곧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닌 능력으로는 단 한 글자도 해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렌구아는 이를 해석할 만한 이들을 떠올리며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대부분 두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모든 신명을 받드는 신의 사자라 불리는 신비의 두 존재.
점성술사 운명의 아케인.
그리고,
"오르도르 숲의 마녀, 릴리."
* * *
"리, 릴리!!!"
문이 부서지듯 펑퍼짐한 로브를 걸친 여인들이 우르르 그녀의 방으로 몰려들었다.
그녀들의 손에는 각자 개성 있는 물건이 쥐어져 있었는데, 모두 똑같은 색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명의 빛.
"뭔가 나타났어!"
"이 바보! 이건 신명이야! 신명!"
"오늘 의식은 어떡해!?"
1년에 한 번 마녀들이 모여 오르도르 숲의 결계를 치는 중요한 의식이 있는 날.
전신이 드러나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선 소녀는 '도르타'란 상급 마녀들의 방문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말없이 거울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진 흑발.
그 흑발을 가지런히 묶은 붉은색의 큰 리본이 눈에 띈다.
거울에 비친 투명한 피부의 소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평소에는 그런 자신을 거울에 비추며 외모에 대한 만족감과 격한 자랑을 늘어놓으며 주변 마녀들을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우, 우리 중에 내용을 해석한 이가 한 명도 없어!"
"단 한 글자도!"
"릴리라면…."
마녀들의 시선이 쏠린 자리.
릴리의 시선은 거울을 물들이고 있는 검붉은 문자에 닿아 있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신명이지만,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한 느낌을 받았다. 묘한 이끌림이 들었다.
왜냐고?
"...."
그녀는 거울에 나타난 점지를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렀다.
숲의 마녀 그 누구도 해석할 수 없었던 점지 문자.
하지만,
[아서 클레이튼 ― 균열 속의 은둔자]
[제3의 정신 방벽]
"누구야. 너."
릴리는 정확하게 그 점지가 보였다.
12화 인챈터(Enchanter)의 재능
"아니, 충성을 맹세했는데, 왜 또 독방이야?"
만찬이 끝난 후 기사 하나가 나를 안내했는데, 그 끝이 지하 감옥이었다.
난 인상을 찡그리곤 나를 안내한 기사를 돌아봤다. 어깨에 휘장이 없는 것을 보니, 수습으로 보였다.
카멜과 대면하고 와서일까.
간땡이가 부었는지, 눈앞의 기사가 만만하게 느껴졌다.
물론, 날 해코지 못 할 것이란 확신도 있었기에 난 현재의 불만스러움을 표정으로 전부 드러냈다.
기사는 미간을 구기고는 천천히 답을 했다.
"넌 1공자를 죽인 암살자로 지하 감옥에 잡혀 왔다."
"그런데요?"
"널 노리는 이들이 바깥에 깔렸다는 얘기지. 1공자 세력만 해도 널 잡아서 1공자를 죽인 주범을 확인하고 싶어 하거든."
"...."
"널 빼내기 위해선 작업이 필요하다고 부단장님이 말씀하셨다. 그때까진 감옥이 안전할 거다. 붙잡혀서 고문당하고 갈가리 찢겨 광장에 버려지고 싶나?"
"잘 부탁드립니다!"
난 군말 없이 독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바깥에 날 노리는 이들이 좌판 물건처럼 깔렸단다. 영지를 벗어나기 전까진 확실히 지하 감옥이 안전할 것 같았다.
철문이 닫히자, 난 주변을 둘러봤다.
'대우가 확실히 좋아지긴 했네.'
첫날은 묶어놓고 복날에 개 잡듯이 때리더니, 지금은 구속도 없이 자유로웠고, 내부 환경도 무척이나 깔끔했다. 게다가 안내한 기사를 심부름꾼으로 붙여줬는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충성을 맹세한 대가라는 건가?'
신뢰를 주기 위한 카멜의 작업일 것이다.
현재 나는 '그'와 접점이 있는 유일한 존재, 어리숙한 암살자 따윈 쉽게 구슬릴 수 있다고 확신했겠지.
근데, 내가 카멜 블레이저의 시커먼 속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말이지.
'일단 호의에 반응을 보이며 상황을 이용해야겠지.'
빼먹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빼먹을 생각이었다. 나는 철문을 탕탕탕 두드렸다. 철문 위로 시선을 교환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탁 열리자, 난 재빨리 말했다.
"언제쯤 나갈 수 있습니까?"
"나도 모른다. 주군께서 정하실 거다."
"최대한 빨리 나가야 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그'에게 동맹 표시를 알릴 장소를 카멜에게 이미 전달한 상태였다.
넬리토리 돌산 협곡.
블라이어 영지에서 사흘 정도 떨어진 곳에 큰 바위로 이뤄진 거대한 협곡이 존재하는데, 동맹을 알리려면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놨다.
많은 고민 끝에 정한 장소다.
그리고 시간에 쫓기면 넬리토리 돌산 협곡을 선택한 이유가 사라진다. 최대한 여유 있게 그곳에 도착해야 했다.
'보름 중 벌써 이틀이 지났어. 내일이면 사흘째, 서둘러야 해.'
넬리토리 협곡 어딘가에 있을 '칼바람의 저주'를 찾으려면 여유 시간이 필요했다.
동맹 표식이야, 저들이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내가 원하는 장소와 시각에 터트리면 그만이다.
난 동맹 표식을 터트린 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할 거야.'
감시자가 붙은 이유는 내 복귀와 관련되어 있었다.
동맹 표식 이후부턴 내 맘대로 움직이기 힘들다. 감시자를 떨구려면 신호를 터트리기 전이나 직후여야 한다는 뜻.
칼바람의 저주와 맞물리는 협곡을 찾아 도주로를 확보해야 했다.
'운이 좋다면 '그것'도 얻을 수 있을 테고.'
협곡에 숨겨진 고대 문양 하나가 떠올랐다.
세이렌의 비명(Siren's Scream).
훗날 카멜의 핵심 전력이 될 흑주술사 도네콜린트가 얻게 될 능력인데, 그 정보는 대략적으로 파악한 상태였다.
계획이 잘만 풀린다면 고대 문양까지 노려볼 생각이었다.
"죽은 암살자들의 물건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놈들의 물건을?"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제 '임무'에 꼭 필요한 일이라 전해주십시오."
"기다려라."
기사가 다시 돌아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기척과 함께 철문이 끼익 열리더니 큰 보따리 하나가 툭 던져졌다.
"암살자들의 물건을 모두 담았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모두 가져도 된다는 명이 떨어졌다."
"가져도 된다고요?"
"그래. 그리고 이틀 후 움직이게 될 거다."
"이틀 후라…."
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시기가 적당했다.
말을 마친 기사는 철문을 쿵 닫았다. 보따리는 제법 묵직해 보였다.
보따리를 집어 든 나는 기분 나쁜 감촉에 눈살을 찌푸렸다. 끈적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피?'
보따리 밑으로 핏물이 뚝뚝 떨어진다. 난 짧게 숨을 뱉고는 보따리를 풀었다.
역한 냄새가 훅 올라오자, 코를 틀어막고 가져온 물건들을 살폈다.
빌어먹을 새끼들,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했더니, 옷까지 다 벗겨서 가져왔다.
난 보따리 안에서 단검을 꺼내, 검 끝으로 옷가지부터 휙휙 치웠다. 물건을 살피길 잠시, 난 짧게 혀를 차곤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약초는 싹 다 긁어갔네.'
파양초와 독초가 있다면 몰래 챙겨두려고 했는데, 주술사들이 전부 챙겨간 모양이었다.
남은 건 죽은 암살자들이 쓰던 무기와 옷가지뿐.
단장이 쓰던 단검 세 자루와 석궁만 따로 챙기고 나머지 무기는 그대로 놔뒀다. 옷가지는 단장의 옷만 골라서 뒤졌다. 쓸 만한 것이 나온다면 단장의 소지품에서 나올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주변 지리가 그려진 지도가 있길래 지도 한 장을 챙겼고, 바지 주변을 살필 때였다.
"응?"
피로 물든 구겨진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중요한 내용은 아닌 듯 바지 속에 그대로 들어있었지만, 내용을 읽어보니, 내겐 민감한 내용의 쪽지였다.
[아기새 죽음 확인. M.]
'아기새라… 이건 난데?'
'아기새'는 은어로 신입을 가리킨다.
즉, 단장에게 내 죽음을 반드시 확인하라는 지령이었다. 그 지령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M', 크룩스의 마스터 되시겠다.
"내 죽음을 확인까지 한다고? 무려 마스터란 양반이?"
나와 마스터 사이에 무슨 악연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죽이지 않은 것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 망할 아케인이 운명이니 뭐니 하면서 내 죽음을 종용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쪽으로 귀가 얇은 양반이라고 했으니까.
'대체 뭐라고 씨부렁거린 거야?'
갑자기 아케인이 미워졌다.
영화나 소설에 자주 나오는 전설 속의 마법사, '멀린' 같은 존재를 떠올리며 봤던 인물이라 나름대로 호감이 있었는데 말이지.
이유가 어쨌든 크룩스의 마스터는 내 죽음을 원하고 있다. 그럼, 크룩스를 향한 나의 포지션은 명확해진다.
크룩스는 이제부터 내 적이다.
"일단 이 정도인가?"
난 바닥에 놓인 단검 세 자루와 석궁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파양초를 얻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무기를 얻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
지하 감옥에서 최소 하루 이상은 머물 것 같으니, 몸을 제대로 움직여 볼 생각이다.
지금은 조직에서 버려졌지만, 마스터가 눈여겨보고 차기 마스터로 지적될 만큼 뭔가가 있는 몸뚱이였다. 그 특별함이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난 단검을 양손에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자리에서 통통 튀며 눈앞의 벽을 향해 자세를 잡았다.
단검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보쌈을 썰 때 빼곤 내가 검을 쥐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인생은 모를 일이었다.
"잘 되려나…."
오늘 같은 여유가 또 찾아온다고 장담할 수 없다. 기회가 있을 때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했다. 그게 내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면 더더욱.
난 전력을 다해 단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들어와 단검을 움직이는 첫 발걸음.
텅 빈 독방 안, 칼바람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이 세계의 무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소설만 읽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정보이기도 했다.
태초의 기운, 마나를 바탕으로 각기 파생되는 네 가지 힘.
강화의 기운, 오라.
역행의 기운, 마력.
심연의 기운, 영력.
그리고 이 셋에 포함되지 않은 신비의 기운, 신력.
마나를 깨친 이들은 3성에 이르면 가진 운과 재능에 따라 이 네 기운 중 하나를 익히게 된다.
참고로 이 몸의 기운은 1성이었다.
이제 막 마나를 깨친 뉴비란 뜻이었다.
암살자는 3성이 되면 강화의 기운, 오라를 대부분 익힌다.
육체에 특화된 직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희박한 확률로 신력을 익힌 암살자도 존재했다.
신력은 특별한 힘이다.
얻는 방법도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난 경우. 초능력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계승자의 신기'를 얻는 경우.
각 대륙에 숨겨진 비밀 장소에는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던 절대자들의 비기가 담긴 계승자의 신기가 존재한다.
다만, 계승자의 신기는 발견도 어렵고, 승계 조건이 극악이라서 기연이 닿지 않은 이상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졌기에 대부분의 신력은 선천적인 경우가 많았다.
"와, 이 몸으로 올림픽을 나가면 금메달 다 휩쓸고, 연금 받아서 평생 떵떵거리며 살 텐데."
UFC에 나가도 모든 경기를 다 휩쓸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라운드걸과 스캔들도….
"아."
밑도 끝도 없는 잡생각을 털어버리곤 다시 집중했다.
고작 1성의 마나지만, 마나를 사용한 순간 육체 능력은 일반인의 신체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지금 스파이더맨처럼 독방 천장 구석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도 마나를 사용한 육체 능력 덕이었다.
가볍게 바닥에 내려온 나는 다시 단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한계까지 가볼 생각이다.
"헉… 헉…."
얼마나 휘둘렀을까.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정신이 멍한 것을 보니, 제법 오랫동안 움직였던 것 같았다.
처음에는 딱딱한 마네킹처럼 엉성했는데, 지금은 자세가 자연스레 교정되며 날카롭고 정확하게 원하는 곳으로 단검을 움직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뭔가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았다.
내가 멈추지 않고 단검을 끊임없이 휘두르는 이유가 있었다.
몸을 한계까지 움직이니, 암살자 신입으로 수련했던 과거 기억들이 명확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위치가 켜진 듯 신입 수련 과정의 장면 장면들이 뇌리에 떠올랐다가 천천히 사라지는 기분.
그중.
[넌 특별한 재능을 지녔다.]
크룩스의 마스터와의 대화도 기억났다.
그가 개인 지도를 할 만큼의 재능.
꿈에 부푼 기대감.
그리고,
[빌어먹을, 네놈의 재능은 쓰레기야! 내 눈이 틀렸어!]
짙은 좌절감.
냉혹한 시선으로 나를 버리고 떠나는 마스터의 뒷모습이 보였다.
번뜩 정신을 차린 나는 제자리에 우뚝 섰다. 젖은 땀에 온몸 위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운동과 담을 쌓고 지내와서일까.
이런 고양감이 어색하면서 좋았다.
간질간질 올라오며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하나의 감각.
난 조금 전 떠오른 기억 속에서 그 실마리를 잡았다.
바로 특별한 재능.
"후…."
짧게 숨을 내뱉고, 나는 단검을 앞으로 겨눴다. 이를 지그시 깨물고 눈앞의 단검에 신경을 집중한 순간,
우웅!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기억 속에서 각성한 이 몸뚱이의 재능.
처음 말을 탔던 때처럼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난 옅은 푸른색으로 덮인 단검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1성인데, 무기에 기운을 담을 수 있다고?
물론, 5성 이상의 전유물인 오라 소드와는 완전히 달랐다.
마나가 아닌 특별한 기운을 싣는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다만 1성이라 속성이 아닌 그저 기운만 담겼다.
벽을 향해 단검을 던지자, 벽에 단검이 반쯤 박혔다. 단검만 던졌을 땐 흠집만 났던 벽인데, 기운을 담자 날카로움이 강화된 것 같았다.
"이 녀석, '신력'에 재능이 있었네."
벽에 박힌 단검에는 여전히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나였다면 던지는 순간 사라졌을 것이다.
특별한 기운.
태어났을 때 숨 쉬듯 알게 되는 선천적인 재능인 신력이 분명했다.
무기에 속성을 부여하는 '인챈터(Enchanter)'.
떠오른 기억 속에서 답을 찾았다.
이 녀석은 인챈터의 재능을 깨친 신력 소유자였다.
13화 권력이 좋긴 좋네.
신력 각성자라면 크룩스의 마스터가 직접 그 휘하로 데려가 키운 것도 이해된다.
반대로 버린 이유도 알게 됐다.
'운명의 아케인 때문만은 아니었네.'
1성.
마스터가 긴 시간 동안 직접 투자와 시간을 쏟아부었는데, '고작' 1성이다.
수만 골드의 가치를 지닌 '마나과실(mana fruit)'이란 보석이 있다. 섭취 시 마나 성취에 큰 도움을 주는 연금 물질인데, 이 몸뚱이는 그 마나과실을 세 개나 처먹고도 1성을 겨우 깨친 머저리였다.
엘리트 교육과 물질적 도움을 받았으니, 동료 암살자들보단 뛰어났지만 그뿐. 가성비 면에선 최악이었다.
마나과실 세 개면 정식 기사를 암살할 수 있는 3성 암살자를 키울 수 있는 비용이었으니까.
'최악의 마나 감응력.'
신력을 지닌 존재라 처음에는 큰 관심을 보인 것 같지만, 마스터는 투자에 실패했다고 확신했던 것 같았다.
신력의 잠재력은 마나 그릇을 기반으로 함께 성장했는데, 극악의 마나 감응력은 신력 소유자에게 저주나 다름없었다.
2성이 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얼마나 많은 마나과실을 처먹어야 할까.
마스터의 입장에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느꼈을 것이다.
반쪽짜리 신력 각성자.
"최악의 상성이긴 하네."
즉, 이 녀석은 신력을 타고났지만, 그 한계가 명확했다.
키우기도 버리기도 모호한 패.
계륵 같은 처지가 된 상황에서 아케인의 방문이 이 녀석의 운명을 나락으로 결정지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이 능력은?
'찐 대박이지.'
무기에 속성을 담는 능력.
이 능력은 속성이 무엇이냐에 따라 누군가에겐 재앙이 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 세계에는 '속성 카운터'란 것이 존재했다.
불(火)에게는 물(水)이, 물에게는 나무(木)가, 나무에겐 다시 불이, 가위바위보로 맞물리는 대표적인 세 속성 외에도 수많은 속성이 서로를 물고 뜯는 상성을 지니고 있었다.
마나 감응력이 최악이라고?
그딴 건 나와 상관없었다.
애초에 수련으로 강해질 생각 따윈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느 세월에 육체를 단련하고, 마나를 모으고, 깨달음을 얻는단 말인가.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이 소설은 제목처럼 강한 악당들이 시시각각 판을 치는 혼돈 속 미치광이들의 세상이었다. 이 재앙들과 마주쳐 휩쓸린 순간, 억울하게 뒈진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제목대로 악당들이 강해지는 별의별 기연들이 이 세계에는 존재했다.
마나과실?
나중에는 줘도 안 먹는, 개 허접스러운 물건일 뿐이다.
'모조리 싹싹 긁어주마.'
악당 것이건, 영웅 것이건, 기회가 되면 모조리 뺏어줄 생각이었다.
아서 클레이튼.
좋든 싫든 나도 이젠 이 세상 이름을 가진 이 세계의 구성원이었다.
먼저 주운 자가 임자였다.
* * *
"네 이름은 이제부터 '알'이다."
"알?"
하루가 지나고 새벽 시간, 지하 감옥 앞에 웬 사내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난 사내가 건네는 구리 명패를 받았다.
C급 용병패.
명패에는 '알'이란 이름과 간략한 신상명세가 적혀 있었다.
두 눈을 끔뻑이며 난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얼굴에 깊은 상처가 있고, 험상궂어서 급이 높은 용병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심부름꾼을 맡던 기사가 그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내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습 기사가 고개를 숙일 정도라면 그 위의 하나밖에 없다.
정식 기사.
이를 지그시 꽉 깨물었다.
'카멜 이 빌어먹을 새끼, 선 오지게 넘네.'
학살자를 향해 원망이 쏟아졌다.
신입 암살자에게 무슨 정식 기사가 호위로 붙는단 말인가.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아니지만, 무식하게 강한 놈이 감시자로 붙었다. 게다가 동행할 이들은 이놈 하나가 아니었다. 기사와 함께 온 일행이 있었는데, 이들은 기사가 고용한 용병들로 보였다.
모두 넷이었는데, 하나같이 풍기는 기세가 거칠고 단단했다. 베테랑 놈들이 분명했다.
'내가 도주할 것을 대비해서 데려온 건가?'
그렇다면 추적에 특화된 놈들일 확률이 높았다.
설마, 이놈들 말고 또 있는 건 아니겠지?
나 같은 놈에게 이 정도 전력을 붙일 정도라니, 카멜이 '그'를 얼마나 의식하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정식 기사 하나에 베테랑 용병 넷.
감시자들의 압박감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갑자기 생존 난이도가 노멀에서 헬급으로 수직 상승한 느낌이었다.
"나와라."
"잠깐."
자신을 벤이라 소개한 기사는 내가 발길을 막자, 사납게 노려봤다.
무섭다. 시발.
하지만 여기서 주눅이 들면 안 된다. 앞으로 계획을 밀어붙이려면 내 위치를 바로잡아야 했다.
첫 만남은 기세로 위치를 정하는 자리. 굽신거리는 순간, 계속 끌려다니게 된다.
"내게 줄 게 있을 텐데요?"
"줄 거?"
"설마 빈손으로 온 건 아니겠죠?"
난 벤 눈앞에 손을 내밀었다.
분명 카멜에게 받은 게 있을 텐데, 어지간히 만만하게 보였나 보다.
벤이 험악한 기세를 풍기며 나에게 바짝 다가왔다.
"내가 보관하는 게 안전할 거다."
"주군의 명입니까? 당장 가서 물어볼까요?"
"...."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하고 있네.
협박한다고 내가 쫄 거 같냐?
벤은 나를 노려보더니,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안을 살펴보니, 알록달록한 색감을 뽐내는 손톱 크기의 보석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난 보석에 대해 잘 모르지만, 딱 봐도 엄청 비쌀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들었다.
"금화로 준비하면 부피가 클 것이라고, 주군께서 보석으로 준비해주셨다. 보석 가치는 정확히 2만 골드다."
'…이 새끼가.'
생존과 함께 약속받은 2만 골드.
근데 이놈이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2만 골드를 언급했다. 날 엿 먹이려는 게 분명했다. 실제로 용병들의 눈빛이 변하는 게 느껴졌다.
그들의 시선이 보석 주머니로 쏠린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기사는 주군께 충성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의 상징으로 표현되지만, 이 소설에선 그딴 모습을 기대하면 안 된다.
대악당을 주인으로 모시는 기사에게 정의를 바란다고?
지나가던 똥개가 웃을 일이다.
놈의 기세에 눌려 끝까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내 돈을 꿀꺽했을 놈이었다.
그릇 이상으로 욕심 많은 새끼였다.
이참에 잘못 건드리면 내 이빨에 물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줘야 했다.
"당신이 일러준 대로 이제부터 제 이름은 알입니다. 동시에 주군께 충성한 가신이기도 하지요."
"네놈 따위가 어디서 감히 가신을 입에…!"
"이틀 전 저는 주군과 식사 자리를 가졌습니다. 충성을 대가로 약속받은 것이 제법 많습니다. 2만 골드도 그중 하나죠. 2만 골드가 당신에게는 우스운 금액입니까?"
"...."
2만 골드는 정식 기사라도 평생 벌 수 없는 큰 액수였다. 이유가 어떻든 겉으로 카멜은 내게 2만 골드를 줬다.
그 사실이 중요했다.
기사 놈이 나와 카멜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알 리 없다. 알았다면 뒈져서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겠지.
어느 정도 선에서 뻥카를 쳐도 사실을 파악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행동에 조심하십시오.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알고 계신다면 말이죠."
"...."
"지금처럼 거슬리게 행동하시면 임무 실패 시 제 입에서 어떤 변명이 주군 귀에 들어갈지 모릅니다. 이름이 벤이라고 했죠? 저 혼자 죽을 것 같습니까?"
"이 새끼가…."
"또 새끼라고 부르면 당장 주군께 편지를 보낼 겁니다. 그 내용은 상상에 맡기죠."
내 도발에 기사 벤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물고 한발 물러섰다. 용병들을 둘러보니, 조금 전과 달리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일단 내 도발이 먹힌 분위기였다.
2만 골드가 들킨 이상, 차라리 금액을 강조해서 카멜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하는 게 낫다.
난 벤 일행을 따르기 전에, 수습 기사에게 지도를 건넸다. 단장의 유품에서 가져온 지도였다.
"이 물건을 주군께 전해주십시오. 건네주면 뭔지 아실 겁니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곤 지도를 받아 들었다.
지도에는 카멜이 '그'와 접선할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왜 이 지도에 표시했냐고?
아주 기가 막힌 장소를 찾았기 때문이다.
난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수습 기사를 응시했다.
"목숨을 걸고 임무를 꼭 완수하겠다고 주군께 전해주십시오."
"알았다."
"떠나기 전에 주군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감옥을 벗어나기 전, 나는 결심에 찬 표정으로 카멜이 머무는 집무실 방향을 향해 넙죽 예를 올렸다. 그 충직한 모습에 수습 기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카멜, 이 개새끼야. 우리 다신 보지 말자.'
물론, 내 속마음은 행동과 전혀 반대였지만 말이다.
난 용병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지하 감옥을 나왔다.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일행은 나를 포함해서 총 여섯 명.
내성을 나온 이후, 일행은 벤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며칠 전 터진 내전으로 내성의 감시는 무척 삼엄했지만, 벤이 나서자 용병 복장임에도 별다른 검문도 없이 술술 통과되었다.
'권력이 좋긴 좋네.'
카멜 말 한마디에 1공자를 죽인 암살자에서 C급 용병 '알'이 되었다.
고작 중소 영지의 성주일 뿐인데도, 그 권력은 말 몇 마디에 한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다.
학살자인 그가 한 지역의 지배자가 된다면?
대륙은 온통 피로 물들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됐고 말이다.
이번에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다.
내가 끼어들게 됐거든.
내성을 나오자, 다리 입구에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일행은 그 마차에 탄 뒤 조용히 다리를 건넜다.
내성을 지나 외성 광장을 지나는 길.
광장 중심부는 횃불로 유독 밝혀진 장소라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음."
난 광장의 참혹한 광경에 신음을 흘렸다.
처형대가 보인다.
발가벗겨진 썩은 여섯 구의 시신과 교수형을 당한 시신 한 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돌팔매를 수없이 당했는지, 시신들은 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목판에 적힌 글귀.
[윌리엄 공자를 암살한 극악무도한 이들을 처단한다!]
며칠 전 함께했던 암살자들이 끔찍한 몰골로 죽어 있다.
그중 나는 홀로 교수형을 당한 시신을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제 오후 교수형을 당한 암살자란다.
내게 향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죽은 대역이었다.
대역으로 누굴 죽인 것일까.
카멜에겐 그 선택도 숨을 쉬듯 쉬웠을 것이다.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다.
덜컹―!
광장을 빠르게 지나친 마차는 바깥으로 통하는 성문에 다다랐다.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성문이 서서히 열린다.
마차는 그대로 성문을 통과해 서서히 밝아지는 바깥세상으로 나아갔다.
처음 계획한 대로 카멜을 이용해 암살 단체인 크룩스의 눈길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아직 카멜의 손에서 탈출할 일이 남았지만, 이도 곧 해결될 것이라 스스로 위안 삼았다.
그 이후에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으로 빠르게 묻히는 블라이어 영지가 보인다. 광장에서 본 처형대를 떠올리며, 처음으로 강렬한 욕망 하나가 피어올랐다.
'강해진다.'
카멜이건 누구건 나를 건들 생각 못 하게 말이다.
블라이어 영토를 벗어난 마차는 넬리토리 협곡 근처에 자리한 영지, 베네타로 향했다.
14화 자유도시 베네타
자유도시 베네타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 지루하다면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나에겐 하루하루가 심심할 틈도 없는 아주 스펙터클한 나날이었다.
우린 출발선부터 이동 경로를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는데, 벤은 라웁 숲을 가로질러 베네타로 가려고 했고, 나는 라웁 숲을 우회하길 강력히 주장했다.
'미쳤냐? 라웁 숲을 가로지르게?'
곧 밝혀지겠지만, 라웁 숲에는 사람을 납치해서 인체 실험을 하는 미치광이 마법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미친놈은 현재도 라웁 숲에서 실험을 진행 중일 텐데, 미쳤다고 그 숲을 기어서 들어간단 말인가.
하지만 베네타까지 라웁 숲을 가로지르면 이틀, 우회하면 사흘이 넘게 걸리는 상황이라, 내 의견은 벤보다 무게가 실리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던진 게 미끼였다. 난 그들 눈앞에 보석 주머니를 흔들며 말했다.
"우회해서 사흘 안에 베네타에 도착한다면 '푸른 장미'에서 거하게 쏘겠습니다."
"푸, 푸른 장미?!"
"네. 그것도 5층입니다."
"5층!!"
"베네타를 방문하는데, 그 유명하다는 푸른 장미 5층은 가봐야죠."
내가 베네타의 명물, 푸른 장미를 들먹이는 순간, 불꽃 튀던 벤과의 신경전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벤이 헛기침하며 한발 물러났기 때문이다.
내 의도대로 된 건 좋은데, 왜 찝찝함이 드는 거지?
눈앞의 벤이란 기사, 감시자로 온 것 아니었어?
미끼를 이렇게 덥석 물다니,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내 제안을 승낙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용병들에게 푸른 장미로 출발하라 소리쳤다.
애초에 핑계를 대서라도 꼭 방문해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차는 라웁 숲을 우회해서 숲 외곽을 따라 쉬지 않고 강행군을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바로 도적 떼의 존재.
이틀이란 시간 동안 숲을 우회하면서 마주친 도적 떼의 수가 몇이나 될까.
"시발, 이 개 같은 소설."
무려 스무 번이다.
무슨 알람 설정도 아니고, 도적 새끼들은 아침 점심 저녁 텀을 두고 숲속에서 쉴 새 없이 튀어나와 마차를 막아섰다.
[으하하하핫! 멈춰라!]
"...."
[으하하하핫! 우리는 검은 도끼 도적단이다!]
"또냐?"
[으하하하핫!]
"그만 나와!"
이딴 레퍼토리만 수없이 듣다 보니, 이젠 마차 밖에서 웃음소리만 들려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호위 없이 달랑 마부 하나만 마차를 몰고 있으니, 쉬운 먹잇감으로 표적이 된 것 같았다.
그래도 위기나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일단 도적 떼의 전력은 형편없었고, 마차의 전력은 3성 기사 한 명에 B급으로 이뤄진 용병 넷이었다.
용병들이 나서면 대부분 해결이 됐고, 벤이 나선 경우는 단 두 번뿐이었다.
이때 벤과 용병들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는데, 용병들은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벤의 경우엔 무조건 튀는 게 답이었다.
그래도 붙여놓은 감시자라고 벤과 용병들은 절대로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벤이 나서면 용병들이 내 곁에 붙어 있었고, 용병들이 나서면 벤이 내 곁에 머물렀다.
카멜에게 감시하란 지시를 받긴 받았는지, 저 인상 더러운 기사 놈은 내 곁에서 껌딱지처럼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완벽한 감시자의 모습이냐?
'이 골 빈 새끼의 정체가 뭘까?'
내 옆에 붙어 코를 골며 자는 벤이 보인다.
인간이 잠을 자는 거야 당연하긴 한데, 가끔 용병들이 자리를 비울 때도 놈은 내 곁에서 잠을 자곤 했다.
세상 편히 자는 모습인데, 아무리 봐도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죽이고 도망가라는 것 같잖아? 감시자로 어설퍼도 너무 어설펐다.
베네타에 도착하기 바로 전날.
라웁 숲 도적 떼로부터 서른 번째 습격 횟수를 채웠을 때, 난 용병을 이끄는 가비스에게 물었다.
"라웁 숲에 도적들이 이렇게나 많습니까?"
"많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닙니다. 한번 물어볼까요?"
"누구한테요?"
[으핫핫핫핫! 멈춰라!]
"저놈들한테요."
때마침 알람처럼 도적 떼가 고함을 내지르며 우르르 나타났다.
난 서른한 번째 도적들을 통해 습격이 빈번했던 이유를 듣게 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두목이 가비스에게 잡혀 내 앞으로 질질 끌려왔다.
"외곽으로 내몰린 거라고?"
"그,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지?"
"형제들의 아지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건이 계속 발생해서...."
라웁 숲에 자리 잡은 도적 소굴들이 땅으로 꺼지듯 사라지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두려움에 질린 도적들이 바깥쪽으로 내몰렸다는 얘기였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팔뚝에 솜털이 오소소 곤두섰다. 사건의 원흉을 단박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놈이다!'
도미닉 후아튼.
온갖 생명체를 뜯고 맛보고 즐기는 변태 같은 존재. 생체 키메라를 제작하는 그 미치광이 짓이 분명했다. 재료 수급이 떨어지면서 슬슬 밖으로 나설 준비를 하려는 건가?
라웁 숲을 우회한 건 정말이지 잘한 선택이었다.
난 벤과 용병들을 돌아봤다.
실험체로 전락하는 횡액을 면했으니, 나한테 고마워하라고.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숲을 가로질렀으면 이런 고생 안 했을 텐데."
"그러게. 누구 때문에 숲을 우회해서 이 고생을 하는 건지."
"닥쳐! 푸른 장미 안 갈 거야?"
"...."
시시덕거리는 저들은 자신들이 죽다 살아난 것도 모를 테지.
저 면상 더러운 기사 놈도.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사흘이 흘렀을 때, 마차는 거대한 성을 마주했다.
"저기가 자유도시 베네타?"
난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베네타의 풍경을 고스란히 올려다봤다.
마차가 굴러갈수록 큰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든 높고 가파른 성벽이 다가왔다.
예술적이면서 실용적인 아름다운 성벽. 인간의 손재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자유도시 베네타는 드워프 도르네프가 지배자로 있는 곳이었다. 인간 외에 다양한 유색인종들이 머물며 쉬어 가는 곳, 우린 베네타 성문 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 * *
베네타는 자유도시였기에 기사나 병사가 없었다. 검문은 병사가 아닌 용병들이 맡고 있었다.
베네타의 주인, 도르네프와 계약한 A급 이상의 용병단이 주기적으로 치안대를 맡았는데, 대부분은 드워프제 무기를 허리에 착용하고 있었다.
용병 주제에 무기가 저렇게 좋다고?
"저 무기를 얻으려면 베네타의 치안대로 몇 년을 굴러야 하죠."
용병 리더인 가비스는 부러운 시선으로 검문하는 용병들의 무기를 가리키며 친절히 설명을 해줬다.
확실히 돈이 좋긴 좋나 보다.
푸른 장미를 쏘겠다는 말에 딱딱했던 용병들이 살갑게 다가온 것을 보니.
용병들도 처음에는 눈치를 봤지만, 고용주인 벤이 가만히 있자, 가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로 진전이 됐다.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경쟁률이 치열합니다. 양산품이지만, 인간 대장장이가 만든 검에 비할 바가 안 되죠. 드워프제 갑옷까지 입으면 목숨을 여벌로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으니까요."
"갑옷도 줍니까?"
"전속 계약을 해야 하는데, 그 정도면 베네타의 사병이 됐다고 봐야 합니다. 근속 연수가 최소 10년 이상이니까."
베네타의 주인은 무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실력 있는 용병들을 휘하로 꼬드겼다. 그중에는 3성 이상의 방랑 기사도 제법 있어서 베네타의 전력은 타 영지와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강할지도 모른다. 일단 템빨부터가 지렸으니까.
나도 하나 장만해볼까?
드워프제 무기라니, 갖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잖아.
"푸른 장미로 바로 가실 겁니까?"
하지만 가비스의 인기척에 그 생각은 접어두었다. 괜히 무기를 맞췄다가 경각심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저리 살갑게 굴어도, 상황에 따라 언제든 내게 검을 겨눌 수 있는 놈들이었으니 말이다.
'무기를 맞춘다고 정식 기사인 벤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투 말고 다른 방법으로 저들을 요리할 방법이 있으니,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부담스러운 가비스의 눈빛에 난 빙그레 웃었다.
푸른 장미에 가고픈 마음에 직접 말고삐를 잡고 마차를 몬 장본인이 이놈이다.
푸른 장미 5층을 방문해보는 게 꿈이라고 했던가.
가비스의 물음에 다른 용병뿐 아니라 벤도 눈치를 주며 나를 응시했다.
이 새끼들 진짜 감시자 맞아?
사흘 동안 지켜본바, 빈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무래도 몇 가지 확인 작업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내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학살자, 카멜 블레이저였으니까.
"마법 상점에 먼저 들러야 합니다."
"혹시 뭘 사실지 물어봐도 될까요?"
"생활용 스크롤입니다."
"생활용 스크롤이라, 바로 모시죠."
베네타는 용병들의 대우가 좋은 곳이라, 용병패를 내밀자, 검문은 순식간에 통과되었다.
가비스는 대로를 따라 주저 없이 마차를 몰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서쪽 외곽에 도착한 마차는 길게 늘어진 고층 건물 중 한 곳 앞에 멈춰졌다.
"용병들이 자주 들르는 마법 상점입니다."
"유명합니까?"
"호구 안 잡기로 유명한 곳이죠."
"…호구?"
"마법에 무지한 용병들이 뭘 알겠습니까?"
호구를 안 잡아서 유명하다니.
마법 상점이 그렇게 무서운 곳이었나.
베네타에 대해 잘 아는 것을 보니, 가비스는 베네타를 여러 번 방문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상점 안으로 들어가자, 벤이 뒤를 따랐다.
로브를 걸친 소녀가 종업원인지, 그녀는 싹싹하게 인사를 해왔다.
"손님! 무엇이 필요하세요?"
"발화 스크롤 있습니까?"
"물론이죠."
난 발화 스크롤 여섯 장을 주문했다. 발화 스크롤은 간단히 불을 피우는 마법이었다. 야영 때 들고 다니는 생활용이라, 벤도 발화 스크롤에 관해선 뭐라 하지 않았다.
푸른색 양피지로 만들어진 발화 스크롤을 구매하고, 난 잠시 고민했다.
"혹시 환상 스크롤도 팝니까?"
"물론이죠. 어떤 모형을 원하세요?"
"나비인데, 흰나비여야 합니다."
"흰나비라… 잠시만요, 축제에서 쓰다가 남은 것이 있을 거예요. 대용량뿐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용량은 상관없습니다."
종업원이 양해를 구하고 창고로 사라진 사이, 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환상 스크롤은 왜 구하는 거지?"
"쓸 일이 있을 거 같아서요."
"쓸 일?"
"알려줘요? 주군과 관련된 일인데."
주군을 들먹이자, 벤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핑계로는 이것만 한 것이 없었다. 녀석이 물고 늘어질 만큼 위험한 물건도 아니었고.
환상 스크롤은 말 그대로 축제에서나 사용하는 불꽃 용품 같은 것이었다.
불꽃이 아닌 흰나비가 밤하늘을 수놓는 것이지만 말이다.
환상 스크롤을 살 생각은 없었는데, 도적에게 도미닉의 소식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 미친 마법사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보험으로 준비해두려는 것이었다.
생체 키메라의 선구자로 불리는 광기의 도미닉.
그 미친 마법사의 과거를 난 알고 있으니까.
발화 스크롤과 환상 스크롤을 구매한 나는 마차에 탔다.
"푸른 장미로 가시죠."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 떨어졌다.
말고삐를 쥔 가비스의 손이 갑자기 다급해졌다. 마차는 전보다 빠르게 광장으로 나아갔다.
15화 와, 카멜, 이 무서운 새끼
자유도시 베네타는 드워프 도르네프의 비호 덕에 유사인종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곳이다.
그중 남정네들의 시선을 붙잡고, 밤새 마음에 불을 지피는 종족이 있는데, 바로 미의 종족 엘프(Elf)였다.
푸른 장미는 그 엘프들로 구성된 남정네들의 로망 같은 술집이었다.
"푸른 장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입구에 마차를 세우고 푸른 장미 입구에 들어선 순간, 새하얀 원피스를 걸친 늘씬한 몸매의 여인이 다가왔다.
'와우!'
허리까지 늘어진 금발은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렸고, 그 머리카락 틈으로 투명하고 가녀린 목선과 쇄골이 드러날 때마다 용병들의 마른침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눈동자 그리고 눈에 확 띄는 뾰족한 두 귀.
'에, 엘프다!'
그녀를 본 내 첫 감상은 그녀가 진짜 엘프라는 것이었다. 방송 매체에서 유난 떨던 엘프녀나, 엘프를 닮은 여자가 아니라 '진짜' 엘프 말이다.
신기했다.
살면서 여배우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실제로 본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에서 느껴지는 아우라.
이쁘다.
그녀가 손짓하자 집사로 보이는 사내가 공손히 우리에게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눈동자가 길게 찢어진 게, 수인으로 보였다. 늑대 인간인가?
호기심이 들었지만, 안내판을 펼친 순간 내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첫 입사 기념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꽃등심 맛집을 갔을 때, 계산서를 본 내가 딱 이 기분이었다.
'시발, 더럽게 비싸네.'
1층부터 5층 코스가 있는데, 5층은 기본 코스부터 머릿수당 300골드였다.
여섯 명이니 무려 1800골드.
푸른 장미 5층 제안을 수락하자마자 일행이 순한 양으로 변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은 평생 가도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곳.
"몇 층을 원하시나요?"
엘프의 물음에 가비스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외쳤다.
"5층!"
난 가비스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죽여버려?
이 양심도 없는 새끼가.
하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했던 것도 있고, 애초에 이곳, 푸른 장미에서 확인할 것도 있었으니까.
엘프들로 이뤄진 최고급 술집.
평범할 리가 없잖아?
엘프 넬라는 일행을 빠르게 훑어봤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일행 중 물주가 나란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아찔할 정도로 이쁘긴 한데.
저 미소, 왠지 호구 하나 물었다는 꽃뱀의 미소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리자, 난 보석 주머니를 그녀에게 툭 던졌다.
푸른 장미는 선불 비슷한 개념으로 돈을 맡겨놔야 입장이 가능하다고 가비스에게 들었다. 그녀는 주머니에 든 보석들을 살피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석을 감정하는 능력도 있는 건가?
"공자님, 이 보석들의 가치를 아시나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5층 값을 치르고도 잔금이 터무니없이 많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네요."
5층 여섯 명 값이면 1800골드.
2천 골드면 충분한 금액인데, 2만 골드를 맡겼으니, 그 반응이 충분히 예상됐다.
하지만 난 푸른 장미만 방문할 게 아니라서 말이지.
"맡겨둔다고 해두죠. 계산할 것이 추가로 있을지도 모르고."
"계산할 것이라면?"
"그건 천천히 생각해보겠습니다."
내 말에 넬라의 고운 이마가 살짝 좁아졌다. 나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느낌인데, 처음 접해본 호구 유형이라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도 일종의 보험이거든.'
베네타로 오는 동안 내 신경에 거슬리는 몇 가지가 있었다. 뭔가 답답한 감각 말이다.
그때 2층 계단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여인들의 웃음소리.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엘프들이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도 눈앞의 금발 엘프만큼 미모에 꽃을 피웠고,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매혹적인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유혹을 부르는 살랑이는 몸짓에 일행들은 헤죽헤죽 웃음꽃을 피웠다.
'얼씨구?'
엘프들이 나타나자, 일행은 내 존재를 잊었다.
곁에 줄곧 붙어 있던 벤은 이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두 명의 엘프가 양쪽 팔짱을 끼며 달라붙자 넋이 나간 표정이었는데, 꼴을 보니 내가 사라져도 내일 아침까지 모를 정도로 얼빠진 모습이었다.
용병들의 모습도 벤과 다르지 않았다.
저게 감시자라고?
'아무리 봐도 페이크 같잖아!'
감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빈틈이 많아도 너무 많다. 그렇다고 연기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알아본 벤이란 기사는 지능보단 육체파에 가까웠다.
실력 면에선 확실히 나를 능가하지만, 심리 쪽에선 내 상대가 안 됐다. 그래서 보험으로 용병들을 붙인 거 같은데, 저들도 엘프 꽃밭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기회가 오면 도망쳐보라고 떠미는 느낌이란 말이지.'
학살자 카멜.
그는 무력에 큰 재능이 없는 군주였지만, 전략이나 모략 쪽에선 발군의 능력을 지닌 악당이었다.
인간의 심리를 가지고 노는 인물이랄까.
그가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거라면?
'확인 좀 해봐야겠어.'
학살자와 엮인 상황이라면 뭐든지 의심을 해봐야 한다. 보석 주머니를 저 예쁜 엘프에게 맡긴 것도 그 때문이다.
'푸른 장미라면 내 돈을 꿀꺽할 리 없을 테고.'
만에 하나 튀는 상황이 발생한다 해도 맡긴 돈은 언제고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난 그녀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죠?"
"넬라입니다."
"엘프 넬라, 당신이 '이곳'의 주인인가요?"
'엘프'란 말에 잠시 멈칫한 넬라는 해맑게 웃고는 답했다.
"푸른 장미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주인이 맞습니다."
엘프는 세계수의 뿌리 중 아스가르드의 가호를 받고 태어난 종족이라 언령에 특화된 능력을 지녔다. 한마디로 거짓말을 못 한다는 뜻.
내가 '엘프'를 직접 언급한 이유다.
말에 구속력이 생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곳의 주인이냐고 물었더니, 푸른 장미를 특정하곤 주인이라 답했다.
자연스러운 대답 같지만, 말을 잘 돌려 답한다는 엘프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숨겨진 뜻을 파악했다.
이곳은 푸른 장미이면서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일행들 모두 방을 잡고 입장하신 거 같은데, 공자께선 안 가시나요?"
"그러게요. 진짜 나만 남겨두고 갔네요."
설마 했는데 진짜 모두 사라졌다.
내 의심이 이젠 확신으로 변했다. 저들은 '진짜' 감시자가 아니다.
그럼, 진짜는?
'진짜라면 내 주변에 있겠지.'
"바깥에 화장실 있습니까?"
"네? 바깥에는 창고밖에…."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난 넬라에게 양해를 구하곤 푸른 장미 건물을 나왔다.
해가 저문 저녁 바람은 무척이나 쌀쌀했다.
푸른 장미는 베네타 내에서 가장 큰 술집이었기에 주변에 술 창고들이 즐비했다. 난 그중 문이 열린 창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문을 닫은 나는 바로 옆에서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시원하게 갈겼다. 긴장했는지 바지춤이 잘 안 올라간다.
튀었다.
'시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난 욕설을 삼키며 그 뒤론 쥐 죽은 듯 서 있었다. 어둑한 창고 안은 깜깜했다. 개미 소리 하나 안 들린다.
마른침을 삼키곤 닫힌 문 너머로 귀를 기울였다. 암살자의 청각은 제법 뛰어났다. 얕게 들리는 바람 소리. 난 그 소리 사이에서 무언가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람 소리를 뚫고 무언가 잡혔다.
터벅― 터벅―
발걸음 소리.
그 소리는 서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고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발소리는 정확히 내가 있는 창고 문 앞에 멈췄다.
난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문을 벌컥 열었다.
"...!"
활짝 열린 문 앞에 거대한 사내가 바위처럼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그 사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나와 창고 안을 덤덤히 둘러보곤 내게 물었다.
"창고에는 왜 들어왔지?"
"누, 누구십니까?! 왜 이곳에?"
"자경단이다. 창고 안으로 몰래 들어간 것을 보고 따라왔다. 이곳에 들어온 이유가 뭐지?"
강압적이다.
신분을 증명하는 물건조차 내밀지 않는다. 그런데도 난 그 앞에서 신분을 요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감각.
이 새끼, 벤보다 더 강한 새끼 같은데.
"소, 소변이 급해서…."
내 시선을 따라 모락모락 핀 흔적을 본 사내는 짧게 혀를 차더니 바깥을 가리켰다.
"꺼져라. 도둑으로 몰리고 싶지 않다면."
"...."
사내가 비켜서자, 난 허겁지겁 창고를 나와 푸른 장미로 달렸다. 뒤를 힐끔 돌아보자, 사내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난 푸른 장미 로비로 후다닥 들어왔다. 거친 숨을 탁 내뱉곤 잠시 주저앉았다.
"와, 카멜, 이 무서운 새끼."
진짜 설마 했는데, 그 설마가 진짜가 됐다.
한눈에 본 순간 알아차렸다.
저놈이다.
카멜이 붙인 '진짜' 감시자 말이다. 만약 벤의 눈을 피해 도망쳤다가 저놈에게 붙잡혔다면 어떻게 됐을까?
카멜의 눈에 난 '그'에게 구함을 받고 지시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 그런 꼭두각시가 동맹 표시 전에 약속을 깨고 도주를 꾀한다?
"'그'의 존재를 의심했을 거야."
나와 나눴던 대화를 곱씹으며 수상한 점을 찾았을 테고, 그 결론 끝에 내가 '그'일 수도 있겠단 가정까지 도달했다면, 난 쥐도 새도 모르게 매장당했을 것이다.
감시자 뒤에 또 다른 감시자를 심어둔 것도 그 티끌만 한 의심을 털어내기 위함이겠지. 설마 3성 기사를 미끼 따위로 쓸 줄이야. 난 카멜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혈육의 뒤통수마저 친 새끼가 누굴 믿겠냐마는.'
꽉 움켜쥔 두 주먹을 폈다.
땀이 송골송골 맺혀진 손바닥.
시발, 진짜 무섭다.
난 떨리는 몸을 추스르곤 비틀거리듯 일어났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또 의심받는다.
난 로비 중앙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중앙에는 넬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묘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일은 잘 보셨나요?"
"네. 지릴 뻔했습니다."
"호호호, 참으로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알입니다."
"알 님이시군요."
내 이름을 잠시 중얼거리던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기억에 없는 이름이네요. 저랑은 처음 뵙는 거겠죠?"
"손님들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까?"
"네."
그녀의 당당한 대답에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이쁘면 남자는 관대해지는 모양이었다.
넬라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싱그러운 향기.
아니, 체향인가?
조금 전 긴박함을 잠시 잊을 정도로 향기가 매혹적이다. 꿀을 발견한 벌이 된 기분이랄까. 일행들이 홀린 듯 엘프들을 따라나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보석 주머니를 흔들면서 말했다.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네? 무슨 생각을…?"
"이 주머니 혹시 보관을 의뢰하는 건가요?"
"...."
이런, 조금 전 행동 때문에 눈치챈 건가? 하긴 갑자기 바깥으로 튀어 나가면 수상히 생각하겠지.
"대략 2만 골드네요. 이 큰 금액을 귀찮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맡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냥 맡아주면 안 됩니까? 5층 손님인데."
"곤란해요."
눈치 한번 더럽게 빨랐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보관료로 하루에 20골드는 받아야겠어요."
이쁜 엘프가 갑자기 독사 같은 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헛웃음을 흘리자, 넬라는 부드러운 태도로 또박또박 이야기를 시작했다.
"푸른 장미 안에선 모든 부탁이 돈으로 이뤄집니다. 보관 의뢰도 그 예외는 아니죠. 대신 그에 대한 책임은 확실하게 보증할게요."
"그렇군요."
"보관을 맡기시겠습니까?"
"일단 보류하겠습니다. 돈이 얼마가 남을지 알 수가 없어졌거든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검은 장미."
내가 그 단어를 내뱉은 순간, 넬라의 표정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이곳의 '진짜' 주인을 만나봐야겠다.
16화 10분에 1만 골드
두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깥에 진짜 감시자를 떠올리자, 나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본래 검은 장미를 이용할 생각으로 이곳을 방문한 것이지만,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할 것 같았다.
"이곳의 주인을 뵙고 싶군요."
눈앞의 주인을 두고 또 다른 주인을 언급하자,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답했다.
"선약이 되어 있으신가요?"
"아니요. 하지만 의뢰비가 제법 크죠. 이미 맡긴 액수처럼."
내가 눈짓으로 보석 주머니를 가리키자, 넬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다만, 전처럼 살가운 모습이 아니었다. 푸른 장미 손님이 아닌 검은 장미 의뢰인으로 날 대하는 모습.
"일정 액수를 넘기셨으니 모시겠습니다. 다만, 선약이 아닌 이상, 의뢰 내용에 따라 목숨을 보장받지 못하시거나, 감시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따라오시죠."
2층 계단 위로 향하는 넬라 뒤를 나는 천천히 따랐다.
도착하고 한참 뒤에야 나는 베네타의 명물인 푸른 장미 내부를 자세히 구경할 수 있었다.
한산했던 로비와 달리, 2층부턴 손님들이 바글바글 눈에 띄었다. 2층과 3층은 바 형태의 오픈된 장소로 식사와 술이 제공됐다.
깔끔한 차림의 남녀 엘프들이 고객들을 응대하며 술을 파는 모습.
바텐더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남자 엘프가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하긴, 상대가 미남 엘프라면 여성 단골도 있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4층부터는 복도만 존재하는 프라이빗한 공간이었다.
복도를 지나치는 손님들만 봐도, 귀족 혹은 부유한 상인이란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상아색 대리석이 깔린 복도와 황금 실내장식으로 이뤄진 여러 개의 문. 그 사이로 엘프들은 손님들에게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부르고 웃음을 팔았다.
'진짜 적응 안 되네.'
역시 봐도 봐도 신기했다.
엘프가 술을 파는 세계관이라니. 엘프는 순결과 지혜, 순수를 지향하는 종족 아니었어?
악당들이 판치는 세상인 만큼 이곳 엘프도 살아가는 방식이 제법 매웠다.
난 5층 로비 앞에 섰다.
5층은 손님과 엘프, 일대일 접대가 이뤄지는 비밀 공간이다.
방값만 300골드를 자랑하는 미친 공간. 그 방들을 둘러보던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남녀가 한 공간에 같이 있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건 엘프들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만."
"5층 손님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니까요. 배우자를 선택하는 건 엘프들의 선택 사항입니다."
"…배우자요?"
넬라는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가 몸을 허락하는 존재는 오직 배우자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허락하지도 않겠죠."
"만약 잠자리 후에 모르쇠로 일관하면…."
"살려두지 않습니다."
"방금 전에 돈이면 다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상대 엘프가 위로금에 합의한다면 생식기를 자르는 선에서 합의를 봅니다."
"...."
이 정도면 거의 악당 수준 아니야? 코를 잘못 꿰이면 바로 고자로 가는 나락 테크인데.
웃음꽃을 피우던 엘프들이 갑자기 무섭게 보인다.
넬라가 어디선가 엘프 하나를 앞에 데려왔다. 전처럼 아찔하게 이쁜 건 맞는데, 난 기겁하며 물러났다.
"무, 뭡니까?!"
"혹시 지명이 있으신가요? 없다면 이 아이는 어떠세요?"
"갑자기 무슨…?"
"5층 값을 이미 받아서 여쭤보는 겁니다. 5층을 먼저 이용하실 건지 아니면 나중에 이용하실 건지."
넬라가 이 주변 방들을 가리켰다. 일행들이 각자 들어간 방인 것 같았다.
아, 나도 5층 비용을 이미 냈었지.
남녀의 웃음소리가 방들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술을 즐기며 즐겁게 대화들을 나누는 것 같았다.
근데, 난 고자 테크는 사절이라.
게다가 시간상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자리를 오래 비우게 되면 의심을 살 테니까.
"환불해주세요."
"...."
넬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를 복도 가장자리로 안내했다.
어째 진상으로 찍힌 것 같은데, 돈만 아니었으면 쫓겨났을 것 같았다.
그녀는 5층 복도 끝자락에 보이는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에 손을 대자, 옅은 빛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문을 열자 방이 아닌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계단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혼자 갑니까?"
"이 위부턴 제가 끼어들 곳이 아니라서요. 그럼, 좋은 거래 되시길."
일이 끝났다는 듯, 그녀는 휑하고 가버렸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계단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분위기 한번 살벌하네.'
1층부터 5층으로 이어진 화려한 계단과 달리 이곳 계단은 음습하고 칙칙했다.
발걸음 소리만 덩그러니 들려온다.
푸른 장미는 화려한 살롱 느낌의 술집처럼 겉으로 꾸며놨지만, 이곳의 실체는 훗날 스페셜(Special) 랭킹으로 이름을 떨칠 '검은 장미'의 접선지이자, 정보 수집 장소였다.
독사 소굴이란 뜻이었다.
계단 끝,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금발의 검은 피부.
뾰족한 두 귀.
매끈한 다리(?).
'다크 엘프'였다.
"흐응,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오셨네."
책상에 두 다리를 꼬아 올린 채 긴 곰방대를 뻐끔뻐끔 피워대는 다크 엘프가 있었다.
표정이 딱 봐도 불량의 표본이다.
피부색을 뺀 이목구비와 외형은 엘프 넬라와 비슷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넬라가 귀부인이라면, 다크 엘프는 여전사 같은 느낌이었다. 풍기는 기운이 딱 봐도 쎈언니 타입이다.
"헉!"
그 순간, 다크 엘프가 땅으로 푹 꺼지듯 사라졌다. 두 눈을 껌벅인 순간, 뒤쪽에서 내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언제?!
난 화들짝 놀라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엉덩이를 만진 것 같은데, 착각이지?
"수준이 형편없네."
"무, 뭐가 말입니까?!"
"실력이랑 엉덩이가."
아쉽다는 듯 내 엉덩이를 바라보는 것이 영 불안하다.
이 엘프 뭐야?
성격이 왜 이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난 눈앞의 다크 엘프를 알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무척 유명한 인물인데 모를 수가 없지.
검은 장미의 수장, 펜리 체이서.
그녀는 훗날 마탑 연합이 정한 스페셜 랭킹에 이름을 올리는 6성급 실력자가 된다.
엘프가 지닌 마력 친화력과 선천적 신력을 동시에 지닌 존재.
난 그녀의 숨겨진 신력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림자.
방금 전 내 그림자를 이용해서 뒤를 잡은 건가?
기척을 느낄 새도 없었다. 만약 그녀가 날 노리는 암살자였다면?
상상만 해도 살이 떨렸다.
그녀는 책상 위에 걸터앉은 채 뿌연 연기를 후― 내뿜었다.
"넬라가 보냈다는 건 의뢰가 제법 굵직하다는 건데, 말해봐."
"당신이 이곳 주인입니까?"
"그럴걸?"
"넬라 씨와 무슨 관계입니까?"
"그건 왜?"
"닮아서요."
"정보료 5천 골드."
"…가격 책정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귀찮은 건 비싸고, 쉬우면 싸고, 위험하면 안 하고."
"...."
가격은 그냥 저 여자 꼴리는 대로 정하는 모양이었다.
손님 신분인데, 무례하다면 무례한 답이지만,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난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지금 시기라도 5성급은 될 거다. 최소 5성급 실력자 앞에서 뻗대다가 얻어터지기 싫었다.
일단 처음부터 생각해둔 두 가지부터.
"칼바람의 저주를 아십니까?"
"넬리토리 협곡의 그곳?"
"맞습니다."
"잘 알지. 정신착란을 불러일으키는 저주받은 구역이잖아. 인간들은 잘 모르는 구역인데, 왜 묻는 거지?"
"그 구역이 표시된 지도를 얻고 싶습니다."
"가려고? 네 실력으론 눈물 콧물 오줌보까지 줄줄 쏟고 뒈질 각이라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데."
"돈 벌기 싫으십니까?"
"뭐, 나야 돈만 받으면 되니까. 그리고?"
"마법 스크롤을 구할 수 있습니까?"
"당장 구할 수 있는 건 2성급 정도?"
"뇌전 마법 스크롤 여섯 장이 필요합니다. 스크롤 겉표지는 이거와 같은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난 품에서 푸른 색감을 띤 발화 스크롤을 꺼냈다. 발화 스크롤은 속임수였다. 벤 몰래 이곳에서 스크롤을 바꿔치기할 생각이었거든. 펜리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리고'로 연신 물어보는 것이, 두 가지 의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난 세 번째 의뢰를 전달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암살 의뢰도 받습니까?"
"금액만 맞는다면?"
잠시 고민했다.
창고에서 나를 막아섰던 진짜 감시자를 떠올렸다.
가까이서 본 우람한 덩치.
날 내려다보는 그 무표정한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벤은 상대도 안 될 만큼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던 상대였다.
'내가 카멜이라면….'
어떤 변수가 발생해도 나를 놓치지 않고 성까지 강제로 끌고 올 수 있는 실력자를 붙였을 거다.
그렇다면….
"대상은 4성 기사입니다."
"4성?"
"네. 4성이요."
"기사라는 건 소속이 있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소속이 어딘데."
"블라이어."
펜리는 미간을 살짝 좁히곤 긴 곰방대를 뻐끔뻐끔 뿜었다. 처음으로 답이 길어진 순간이었다. 잠시 후, 그녀가 답했다.
"불가(不可)."
"이유가 뭡니까?"
"4성급 암살은 가려서 받거든. 특히 소속이 있는 기사라면 더 조심해야지. 벌집을 건들려면 그만큼 감수해야 할 게 있으니까."
애초에 큰 기대를 하고 의뢰한 건 아니지만, 직접 거절 의사를 들으니 아쉬웠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막혔다.
그럼, 차선책이다.
"대상을 붙잡아두는 건 어떻습니까?"
"붙잡아? 4성 기사를 붙잡고 있으라고?"
"네. 도망칠 시간이 필요합니다."
"도망? 누가?"
"저요."
내 말에 펜리가 푸핫 하고 곰방대를 뱉더니 크게 웃기 시작했다. 배를 붙잡고 낄낄대는 모습에 꿀밤을 때려주고 싶은 충돌이 일었다. 누구는 목숨이 걸린 일인데, 그녀는 방금 전 의뢰가 어지간히 웃겼나 보다.
망할 년.
그래, 실컷 웃어라.
"넬라가 가지고 있는 돈이 네가 가진 전부야?"
"혹시 외상 됩니까?"
"미친 새끼. 이런 의뢰에 외상이 어딨어?"
"그럼 2만 골드가 전부입니다."
"쳇. 개털이었네. 애초에 암살 의뢰도 불가능했잖아."
4성 암살은 만 단위 골드로는 턱도 없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이러다간 꼼짝없이 잡혀가서 주술사들에게 머리 뽑히는 거 아니야?
"타산이 안 맞아. 붙잡았다가 그 불똥이 내게 튀면 곤란하거든."
한 조직의 수장이라는 건가?
보이는 것과 달리 굉장히 신중한 여자였다.
난 욕설을 삼키곤 머리를 굴렸다. 차선책도 안 된다면 최악만큼은 피해야 했다. 3성도 힘든데, 4성은 재앙적 존재나 다름없었다. 정면 돌파 자체가 불가능한 상대란 뜻이다.
"잔금이 얼마 정도 남았습니까?"
"1만 골드 정도?"
앞선 거래 후 남은 금액은 1만 골드 정도인 것 같았다.
난 손가락 하나를 펴며 말했다.
"1분에 오백 골드."
"뭐?"
"발목 잡고 늘어지는 데 1분에 오백 골드 드리겠습니다."
"흠."
"장소도 이곳이 아닌 넬리토리 협곡으로 바꾸겠습니다. 협곡에서 고작 몇 분 붙잡는다고 불똥이 튀겠습니까? 20분이면 1만 골드는 당신 돈입니다."
"20분은 길어. 10분에 1만 골드."
"…뭐요!?"
"싫으면 돈을 더 가져오든가."
보관비 20골드를 불렀던 넬라는 눈앞의 도둑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피부만 검은 게 아니라 속까지 새까만 년이었다.
난 고민에 빠졌다.
표정을 보니, 아쉬움이 티끌도 없다는 표정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반응.
급한 쪽은 내 쪽이니 거래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건 이미 진 거래다.
그녀도 그걸 알고 이딴 제안을 한 것이겠지.
'1만 골드에 10분이라….'
4성 기사를 상대로 10분 동안 도망칠 시간을 벌어다 주는 금액.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이 없었다.
17화 시발, 쫄았잖아.
'시발. 금화를 허공에 뿌리고 달려도 이것보단 늦게 쓰겠다.'
내 목숨값이 이렇게 비쌀 줄은 나도 처음 알았다.
하지만 내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일단 살아있어야 황금도 돈으로 보이는 법이니까.
"계약서 쓰시죠."
"좋아."
그나마 다행인 건 저 여자가 돈만 꿀꺽하곤 모른 척하지는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 * *
펜리가 내민 마법 계약서는 서로 간에 강제 구속력이 존재한다. 난 그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곤 서명을 한 뒤 별관으로 안내되었다.
푸른 장미에서 하룻밤 묵을 숙소였는데, 방 내부가 궁전 내부를 떠올릴 정도로 화려했다.
확실히 돈이 좋긴 좋다.
'이젠 완전 개털이지만.'
화려하게 꾸며진 방 중에 푹신해 보이는 침대가 있는 방을 골라서 몸을 던졌다.
두 눈이 스르륵 감긴다.
검은 장미 펜리 체이서.
그녀와의 대화는 짧았지만, 온몸의 기가 빨린 것처럼 피곤했다.
'일단 작은 인연을 만들어놨네.'
가진 돈을 몽땅 탕진했지만, 그렇기에 그녀를 만나볼 기회가 생겼다.
펜리는 악당도 영웅도 아닌 철저한 중립 캐릭터였다.
그녀에게 선과 악은 돈을 누가 많이 주냐에 따라 바뀐다. 그렇기에 그녀는 악당의 편에서도, 영웅의 편에서도 의뢰에 따라 태도를 달리했다.
박쥐 같은 인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름 원칙대로 움직였다.
즉, 돈만 많으면 철저한 아군으로 둘 수 있는 인물이었다. 나중을 위해 지금 그녀와 인연을 만들어놓은 건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내 눈에는 악당 그 자체였지만.'
난 펜리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잠깐 졸았던 모양이었다. 나름 꿀잠에 들었는데 작은 기척에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암살자의 오감인가?
나름 좋다면 좋은 능력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큰 소파가 비치된 큰 방으로 나가니, 용병들이 전부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하나같이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해 보였다.
푸른 장미가 베네타의 명물이 된 이유에는 이 5층이 큰 몫을 차지했다.
5층은 엘프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며 교감을 쌓을 수 있는 자리였다. 300골드를 투자하고 입만 잘 털면 엘프 마누라를 얻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초창기에 5층이 생겼을 때 남정네들은 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예쁜 꽃을 꺾기가 그리 쉬울까.
웬만한 능력으론 엘프의 마음을 사로잡기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나방처럼 끝없이 5층에 도전하는 이유는 실제로 엘프의 마음을 얻어 결혼까지 골인한 손님들이 알음알음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이 도시의 지배자인 드워프 도르네프로, 푸른 장미 5층을 명물로 자리 잡게 해준 실질적인 인물이었다.
그 외에 용병 출신들도 있다 보니, 5층은 용병들 사이에서도 로망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분위기를 보니, 용병들은 보기 좋게 실패한 것 같았다.
가비스가 아쉬운 듯 소파 턱걸이를 툭 치며 말했다.
"시간만 더 있었으면 분명 나한테 넘어왔을 거야. 눈빛에서 호감을 읽었다고. 한 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형님도요? 저도 가능성을 봤습니다. 이번 임무 끝나고 한 번 더 가보려고요."
"네가 돈이 어딨어?"
"장비 좀 팔면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아둔 돈도 조금 있고."
"음, 나도 선금을 몽땅 땡기면 가능할 것 같은데…."
'아주 놀고들 있네.'
엘프를 작업하러 왔다가 반대로 작업당한 꼴이 아주 가관이다.
푸른 장미에선 엘프에게 꽃뱀 교육도 시키는 모양이다. 수많은 사내가 5층에 모든 돈을 탕진하고 베네타 근처를 배회하고 있지 않을까?
갑자기 왜 유흥으로 유명한 강원랜드가 떠오르지?
이 미친 소설의 막장 콘셉트가 어디까지 뻗어갈지 이젠 나도 잘 모르겠다.
"헉!"
"어, 언제 일어났습니까?"
"조금 전이요."
내가 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들 이젠 나를 완전히 내려놨네. 하긴 진짜 감시자도 아닌 데다, 의뢰비의 수십 배인 300골드를 처발랐는데, 나에 대한 호감이 안 올라가면 거짓말이었다.
"벤은 어디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에 5층 복도에서 봤는데, 그때 헤어지고 본 적이 없습니다."
"같이 안 왔습니까?"
"먼저 가라고 하더군요. 누군가에게 쪽지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쪽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습니까?"
"꽤 됐습니다."
들어보니, 벤이 자리를 제법 오래 비웠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쪽지라.
양반은 아닌지, 벤 이야기가 나오자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 표정이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다. 아니, 긴장했다고 해야 하나?
5층에서 엘프가 아니라 오우거를 보고 온 얼굴인데?
벤은 날 보자, 멈칫하곤 곧장 내게 다가왔다.
"어, 어디에 있었지?"
"방에 있었죠."
"아니. 5층에서…."
"당신 옆방이요."
"...."
"웃음소리가 벽을 뚫고 들리던데 엘프랑 진척 좀 나갔습니까?"
"크흠."
엘프랑 시시덕거리느라, 내가 어디 있었는지 알 리가 없겠지.
"그만 쉬죠. 제가 만났던 엘프는 기가 더럽게 세서 피곤하네요."
"내일 출발할 건가?"
"네. 동이 트는 대로 베네타를 벗어나 넬리토리로 향할 겁니다."
내 답에 용병들은 아쉬운 표정인데, 벤은 바로 다른 질문을 던져왔다.
"넬리토리에서 얼마나 머물 거지?"
"글쎄요. 사흘 안에 끝나지 않을까요?"
"보석 주머니는 받았나?"
"아뇨. 푸른 장미 주인에게 당분간 보관을 부탁했습니다."
"보관?"
"네. 위험한 곳에 굳이 큰돈을 들고 갈 이유가 없으니까요. 돌아올 때 받기로 했습니다."
주머니를 보여달라고 하면 곤란하다.
이미 넬라에게 잔돈까지 건네면서 모조리 다 써버렸거든.
개털이란 뜻이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 아니다. 쉬어라."
이 새끼 영 반응이 이상한데?
평소와 달리 내 눈치를 살피며 내 행동을 주시하는 모습이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습이랄까.
잠시 후, 벤은 또 볼일이 있다며 용병들에게 나를 맡긴 후 방을 벗어났다.
난 가비스에게 쉰다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돌아왔다.
커튼을 치우고 창밖을 슬쩍 내려다봤지만, 보이는 건 어둑한 골목뿐이다.
'놈도 푸른 장미에 머무는 건가?'
하는 짓이 너무 뻔해서 벤이 누구에게 갔는지 알 것 같았다.
진짜 감시자.
그놈이 벤을 불렀다면 달라진 벤의 반응이 이해가 간다. 벤도 진짜 감시자의 존재를 몰랐던 눈치였으니까.
그놈이 왜 갑자기 벤을 찾아간 거지?
'창고에서 마주친 것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
창고로 날 쫓다가 존재가 들킨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 일로 내가 진짜 감시자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벤을 통해 떠보려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보석 주머니의 행방을 왜 묻지?'
설마, 2만 골드를 회수하라는 명령도 받았나?
카멜 이 새끼, 보기와 다르게 쪼잔하네.
그렇다고 당장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럼, 자야지.
확실히 소설 속에 들어오더니 간땡이가 커졌나 보다.
난 그대로 침대에 벌러덩 누워 잠을 청했다. 처음 갖는 편한 잠자리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쌓인 모든 피로가 몰려왔는지 용병들의 수다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난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이른 새벽.
모두 잠든 고요한 별관.
누군가 내 방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문 사이로 드러난 얼굴.
벤이었다.
"...."
그는 내 침실을 한참 동안 살핀 후 다시 문을 살며시 닫았다.
잠시 후, 난 뒤척이는 척 몸을 뒤집고는 잡았던 스크롤을 살며시 놓았다.
펜리와 거래를 통해 얻었던 2성 뇌전 마법이 담긴 스크롤.
침대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난 짧게 숨을 내쉬었다.
"시발, 쫄았잖아."
암살자의 오감.
생각보다 더 쓸모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넬리토리 협곡으로 향했다.
* * *
블라이어 내성 중앙에 솟아오른 첨탑.
카멜의 부름에 리옹은 빠르게 첨탑 계단을 밟았다. 첨탑 사이사이에 뚫려있는 창가로 빗방울들이 튀자, 리옹은 미간을 구기며 물기를 털어냈다. 오늘은 유독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주군."
"들어와."
카멜은 붉은 잔을 든 채 꼭대기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블라이어 영지가 온통 비로 흠뻑 젖는 광경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금광으로 투입할 인력은 모두 징집했나?"
"12세 이상 남자라면 가릴 것 없이 모두 마차에 태워 보내는 중입니다. 다만, 폭우로 인해 시일이 며칠 늦어질 것 같습니다."
"날씨까지 기억할 순 없으니까."
"네?"
"아니다."
카멜은 잔을 비우며 자신의 영지를 내려다봤다. 개미 떼처럼 성문 뒤쪽으로 끝없이 행렬을 이어가는 마차들이 보인다.
광산 채굴로 끌려가는 징집 마차들이었다.
마차들 사이로 울분과 슬픔을 토하며 달라붙은 수백 수천의 여인들.
끌려가는 이들의 부모, 연인, 남매들로 보였다. 애타게 부르짖는 여인들을 향해 병사들은 가차 없이 창대를 휘둘렀다. 진흙탕을 구르는 그 참담한 몰골을 카멜은 무심히 내려다봤다.
"록터 펠리스는?"
"금광 개발 작업에 투입됐습니다. 기사 단장의 추종 세력까지 한데 묶어서 가장 험하고 깊은 곳에 몰아넣었으니, 몇 달 못 버틸 겁니다."
"기사와 주술사 한 명씩은 항시 록터 곁에 감시를 붙여. 이건 그대가 직접 챙기도록."
"알겠습니다."
"내부 정리도 곧 끝나겠군."
한 달 후부턴 새로 지은 창고에 황금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 후 다음 계획인 고대 아티팩트 수집에 나서야 했다.
지금은 먼지 속에 파묻혀 있지만, 훗날 등장하면서 위명을 떨칠 물건들. 골동품 중에서도 떠오른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고대 아티팩트의 소유는 영지의 무력 증가를 뜻했기에 닥치는 대로 긁어모을 계획이었다.
'아티팩트로 무장한 기사단이 완성되면 전쟁 준비와 함께 계승자의 신기를 찾아 나선다.'
앞으로 6개월.
정벌 계획의 뿌리를 내리는 작업인 만큼 카멜에게 무척 민감한 시기였다. 그래서 근래에 존재를 드러낸 '그'가 상당히 신경 쓰였다. 계획의 시작부터 먹물을 뿌릴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를 떠올리며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주술사 렌구아가 카멜을 찾아왔다.
"감시자가 수정구를 통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케플린이?"
케플린은 갓 4성에 오른 카멜의 친위대 중 한 명으로 머리를 제법 굴릴 줄 알고, 차분한 성격이라 전달자의 감시로 은밀히 붙인 인물이었다.
"말하라."
"놈이 베네타의 푸른 장미에서 하루 묵고 넬리토리 협곡으로 향한 모양입니다."
"푸른 장미? 수상한 점은?"
"특이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암살자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전해 들은 카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머문 장소가 푸른 장미라 살짝 의심했는데, 별다른 낌새를 발견하지 못했고, 신입 암살자 따위가 검은 장미의 존재를 알 리 없다고 생각했다.
보고처럼 유흥에 돈을 흥청망청 쓰고 떠난 모양이었다.
'그냥 꼭두각시인가?'
머저리 벤을 붙였으니, 분명 기회가 있었을 텐데 도망치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거나, 일단 꿍꿍이가 없다는 뜻으로 봐야 했다.
"지켜봤다가 일이 마무리되면 끌고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꼭두각시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카멜은 전달자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주술사 도네콜린트를 찾았나?"
'세이렌의 비명'이란 능력을 지닌 한 주술사의 영입.
무척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18화 칼바람의 저주
"알려주신 영지들 주변으로 주술사들을 풀어 알아보는 중입니다."
도네콜린트.
'세이렌의 비명'이란 광역 주술로 모든 대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흑주술사.
영력도 무척 뛰어나서 주술사들의 둥지에서 큰 역할을 맡을 핵심 전력으로 낙점한 인물이었다.
"도네콜린트는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 꼭 필요한 인물이다. 분명 블라이어, 에토르, 베네타 이 세 영지 주변에 은둔해 있을 거야. 서두르도록."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라웁 숲으로는 당분간 접근 금지령을 내려."
"라웁 숲 말입니까?"
"그래. 그곳은 지금 건들면 안 되는 곳이거든."
"주술사들에게도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뜬금없는 지시 같지만, 주군의 지시에는 늘 큰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혜안에 감복해 충성을 맹세한 렌구아는 군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아.'
그러다 며칠 전 자신에게 일어난 신명을 떠올리곤 주군을 바라봤다. 창가로 등을 돌린 주군이 보인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렌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신명을 받았다는 건, 주술사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살만한 일이지만, 주군에겐 신명보단 그 신명의 내용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해석 불가능.
스스로 실력이 형편없다고 알리는 꼴이니, 렌구아는 이 사실을 숨기는 걸 택했다. 다행히 자신 말고 그 신명을 받은 주술사는 없는 것 같았으니까.
모두가 나간 자리.
카멜은 책상 위에 빈 잔을 내려놓고 지도를 살폈다.
암살자가 떠나기 전 건네준 지도에는 일주일 후 '그'와 접선할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엘레토르 성곽 주변의 작은 마을이라….'
카멜은 그 장소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를 죽일 수 있을까?"
애초에 카멜의 머릿속에는 동행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시기의 차이일 뿐이었다.
* * *
"와, 미치겠네."
마차를 몰던 마부, 가비스가 뒤집어쓴 후드의 물기를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려지더니, 오후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폭우가 쏟아졌다.
넬리토리 협곡을 지척에 둔 거리에서 하필 폭우라니, 곧 저 멀리 보이는 가파른 돌산을 타야 하는 처지에선 무척이나 불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날 돌보고 있음이야!'
난 쏟아지는 빗줄기를 올려다보며 기쁨을 애써 감췄다.
폭우는 주변 시야를 좁혀주고, 도망친 흔적을 지워준다. 도망치는 입장에선 이보다 좋은 환경이 없었다.
난 이 거센 폭우가 제발 며칠간 쭉 이어지길 간절히 기도했다.
베네타 영지를 벗어나 북쪽으로 반나절을 이동했을 때, 풍경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숲과 초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크고 작은 암석들이 자리 잡았다.
잠시 후,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마른 잡초밖에 없는 횅한 바위 대지 위에 서자, 가비스는 짧게 숨을 내쉬며 고삐를 내려놨다.
길을 가로막은 바위 더미들, 야트막한 경사로 시작된 넬리토리 협곡 초입부터는 마차를 이용할 수 없었다.
"마차에 한 명을 남길 생각인데, 어찌할까요?"
"돌아갈 때 마차가 필요할 테니, 남긴다."
벤의 허락에 가비스는 함께 온 용병 중 한 명을 마차 안에 남겼다.
잠시 후 짐을 챙긴 일행들은 마차를 내려와 협곡 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벤과 가비스를 포함한 용병 셋 그리고 나까지, 총 다섯으로 이뤄진 파티였다.
"물건 빼먹지 말고 잘 챙겨. 나중에 고생하기 싫으면."
"네!"
용병들의 가방에는 며칠 동안 필요한 음식과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고개를 돌린 벤이 나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눈에 보이는 곳 중 가장 높은 곳으로 가시죠. 그곳부터 길을 잡아야 하니까."
"폭우가 쏟아진다. 길을 찾을 수 있겠나?"
"해봐야죠."
펜리에게 얻은 협곡 지도를 자세히 살피려면 주변 지리부터 파악해야 했다.
앞장서자, 일행은 천천히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폭우로 인해 이동 속도는 무척이나 더뎠다. 시야도 흐릿해 지리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건 생각지 못했는데.
"이봐, 잘 가고 있는 거야?"
"네. 저 위 나무를 보고 올라가면 될 거 같습니다."
"시발, 이 빌어먹을 폭우는 언제까지 오는 거야!"
벤의 투덜거림을 뒤로한 채 난 묵묵히 길을 열었다.
해가 저물 때쯤 우리는 주변 지형 중 가장 높은 장소에 오를 수 있었다.
난 큰 바위에 올라가 사방을 훑어봤다. 비바람에 몸이 휘청거려서 웅크린 채 둘러봐야 했다.
'협곡이라더니, 오지게 크네.'
큰 바위를 쭉 이어 붙인 듯 긴 뱀처럼 늘어진 협곡이 보인다. 그 크기가 워낙 크고 방대해서 작은 산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난 주변 지형과 지도를 대조해보며 현재 위치를 파악한 뒤 칼바람이 부는 장소를 탐색했다.
내 두 눈이 순간 반짝였다.
'여기다!'
펜리가 알려준 붉은 표식.
지도를 보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현 위치에서 우측 바위를 타고 걷다 보면 반나절 안으로 도착할 것 같았다.
"지도가 있었나?"
뒤쪽에서 벤의 목소리가 들리자, 난 어깨를 으쓱이며 지도를 허리춤에 넣었다.
"지도 처음 봅니까?"
"못 보던 지도인데. 어디서 났지?"
"주군께 받은 겁니다."
슬쩍 물음을 넘기며 지나치려는데, 벤이 미간을 구기며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뭡니까?"
"슬슬 말해줄 때가 됐을 텐데."
"뭘 말입니까?"
"왜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이다."
"...."
빗줄기가 거세게 퍼붓는다. 용병들은 나와 벤 사이의 침묵에서 눈치를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하긴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했겠지.
내가 넬리토리 협곡을 목적지로 정한 이유는 하나다.
'도망치기 딱 좋으니까.'
지하 감옥에서 세 명의 주술사들에게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며 알게 된 특별한 능력이 있다.
정신 방벽이 그 한계를 모를 정도로 높다는 거다.
워낙 호되게 당한 터라, 지금 능력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칼바람의 저주'를 떠올린 건 그 이후였다.
이 정도 정신 방벽이라면 칼바람의 저주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저들은 그 저주를 버틸 수 없을 테니까. 혼란에 빠진 그들을 놔두고 도망치는 것이 원래 내 계획이었다.
실제로 지금 일행 수준이라면 손쉽게 성공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진짜 감시자가 따로 붙었지.'
무려 4성 기사가 붙은 것이다. 3성인 벤을 보면 4성이 얼마나 괴물인지 알 수 있다. 그가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도망치는 게 불가능했다.
일단 표식 안쪽으로 놈을 끌어들일 생각인데, 문제는 등급이 올라갈수록 정신 저항력도 비례해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3성과 4성은 천지 차이다.
'놈에게 칼바람의 저주가 통할까?'
간을 보면서 움직여야 했다.
내가 가진 황금 카드는 단 한 번, 10분밖에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일단 쉴 곳부터 잡죠."
"안 알려줄 건가?"
"장소를 잡으면 그때 말해주죠."
용병들은 공간을 찾아 어둠 속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의외로 쉽게 하룻밤 묵을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거대한 암벽 틈새에 작은 공터가 있었는데, 다섯 명이 하루를 보내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빗방울이 군데군데 떨어졌지만, 불을 피우기엔 충분했다. 용병들이 젖은 잡초들을 모아오자, 난 가방에서 발화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펑―!
잡초들이 검게 타오르며 불꽃이 타올랐다. 공간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젖은 풀이었는데 잘 타는 것을 보니, 확실히 마법이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난 사람들을 한곳에 모은 뒤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표식이 그려진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합니다. 이 표식으로 가서 신호를 보내면 됩니다."
"신호?"
"앞에 불 보이시죠? 가서 불을 피우면 됩니다."
"그다음은?"
"그게 끝입니다."
"그게 끝이라고…?"
"네."
벤도 용병들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긴 황당하겠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려나?
"필요한 신호니까요."
"누구에게?"
"주군께서 만나고픈 상대가 이 신호를 보고 움직일 겁니다. 그 이상은 모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더 알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거든요."
벤은 그 이후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실제로 벤이 더 물어봐도 말해줄 내용도 없었다. 애초에 이딴 신호를 볼 사람은 없었으니까.
이건 페이크다.
카멜에게 '그'의 존재를 각인시킬.
"날이 밝는 대로 움직일 테니, 일찍 쉬시죠."
난 모포에 들어가 몸을 뉘었다. 피곤했는지 용병들도 불침번을 정하고 자리에 누웠다.
한참 동안 불꽃은 조용히 피어올랐다.
시간은 흘러 자정을 넘어갔다.
불꽃이 여전히 일렁였다.
인기척에 잠에서 깼는데, 누군가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온 소리였다. 난 모포를 털고 일어나면서 물었다.
"어디 다녀오는 겁니까?"
내 물음에 벤은 멈칫하더니 나를 그대로 지나쳤다.
"볼일을 보고 온 것까지 말해야 하나?"
"아, 그냥 물어본 겁니다. 그런데 용병들이 모두 자고 있군요?"
"이 시간에는 내가 불침번을 서기로 했으니까."
"당신이요?"
고용주가 용병 대신 불침번을 선다고?
내가 무슨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나. 하지만 난 모르쇠로 일관한 채 기지개를 켜며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는 거지?"
"볼일 보러요."
쏴아아아아―
작은 틈새 구멍 바깥으로 폭우가 매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안쪽으로 휘몰아치는 비바람 때문인지 추위가 으슬으슬 올라왔다. 난 바지춤을 내리고 오줌을 시원하게 갈겼다.
흐린 밤하늘에 달빛 한 점 없어서 바깥은 어둠 그 자체였다.
이것도 나름 운치 있었다.
'지켜보는 눈만 없다면 말이지.'
볼일을 보는데 누가 지켜보고 있으면 나오던 것도 잘 안 나온다. 저놈은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 왜 따라 나온 거지?
뒤쪽에서 느껴지는 벤의 시선에 난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닥 끝자락에 미세하게 번진 붉은 재 가루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흔적이지만, 난 한눈에 그 재 가루의 흔적과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모르는 게 이상했다.
'나도 지금 똑같은 걸 쓰고 있거든.'
바지춤을 올리면서 작은 보석을 으깨 바람에 날렸다. 붉은 재 가루가 폭우와 함께 사라졌다.
누군가에게 위치를 알리는 마법 표식.
굳이 서로 누구한테 위치를 알렸는지는 답할 필요가 없었다.
4성 기사.
그리고 내가 의뢰한 검은 장미들.
"쓰벌, 튀었네."
밑바닥에 묻은 흔적을 발로 지운 나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포를 덮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긴장감.
붉은 재 가루를 보며 현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넬리토리 협곡에서 은밀한 꼬리 물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19화 돈값 해! 이 새끼들아
비를 피해 몸을 웅크리고 있던 케플린은 착용한 목걸이가 떨리자 반응을 보였다.
한 방향을 향해 울리는 진동.
벤이 신호를 보내왔다.
그는 어둠을 뚫고 바위 사이를 비집고 달렸다. 주변 풍경이 흐릿하게 지나갈 만큼 빠른 속도. 잠시 후 목걸이의 진동 폭이 점점 짧아지더니 어느 순간 뚝 하고 끊겼다.
"...."
케플린은 신호가 끊긴 장소에 서서 주변을 살피다 큰 바위 틈새 사이에서 옅은 빛을 발견했다. 그는 빛 반대편 바위로 기어 올라간 뒤 목표를 확인하곤 비를 피해 근처 바위 밑에 다시 몸을 웅크렸다.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이게 무슨 꼴인지…."
물기를 털어내며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4성에 오르고, 주군의 직속 친위대로 발탁됐다.
부와 명성을 움켜쥘 자리고,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사는 신분이 됐는데, 이런 젖은 생쥐 꼴로 돌아다니게 될 줄은 몰랐다.
기분 전환 겸 산책할 마음으로 나설 만큼 이번 임무는 쉬웠다.
최근 포섭된 암살자를 은밀히 지켜보며 그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것, 그러다 변수가 발생하면 처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변수는 둘 중 하나였다.
암살자가 중간에 도망가거나, 아니면 갑자기 죽어버리거나.
그는 이 두 가지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카멜이 보낸 진짜 감시자였다.
"너무 과하단 말이지."
주군의 명이기에 불손한 생각은 자제했지만, 고작 햇병아리 암살자 한 명 감시하는 데 붙은 전력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정식 기사 벤을 붙인 것도 모자라, 친위대인 자신까지 추가로 은밀히 감시를 두다니.
처음에는 암살자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줄 알았지만, 창고에서 본 암살자는 겁 많고 어리숙해 보였다.
물론, 그 어리숙한 암살자의 돈지랄에 넘어가 감시 임무조차 잊어버린 벤이 더 멍청해 보였지만 말이다.
벤이 눈을 뗀 탓에 대상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나.
"불쾌한 하루야."
목표가 영지로 복귀하는 날까지 은밀히 감시를 명했기에 그는 불을 피우지도 못했다. 축축해진 육포를 씹으며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현 상황을 떠올릴수록 짜증만 늘어났다.
"이럴 거면 차라리 벤 대신 나를 대상 곁에 붙여두면 될 것을, 어째서 그 멍청한 벤을 붙인 거지?"
주군의 안배가 이해 가지 않았지만, 이내 고개를 털었다.
소문으로 예지 능력을 얻었다는 주군이었다. 그분을 의심하는 건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과 같다.
눈앞의 임무에 충실하며 지켜볼 생각이었다.
'내가 나설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욕심 많고 멍청한 놈이지만, 벤은 3성 기사. 암살자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벤의 손에서 임무가 끝날 확률이 높았다. 자신은 감시만 하다가 변수가 발생하면 나설 생각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붙였다.
축축한 감촉에 잠이 올 것 같지 않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불쾌하기만 했던 밤이 지나갔다. 날이 밝자 암살자 놈이 틈새에서 천천히 기어 나왔다. 상쾌한 듯 하품하며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는데, 케플린은 그 모습에 심사가 뒤틀렸다.
'버러지 같은 놈이….'
종자들의 시중을 받으며 편히 생활하던 그였다. 저놈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게 분했다.
'영지에 도착하면 평생 하품도 못 하게 해주마.'
영지로 복귀하면 저 이빨을 모조리 뽑아버릴 생각이었다. 주군의 허락이 필요하겠지만, 분명 허락하실 것이다. 주군이 직접 포섭한 인물이지만, 그는 저 암살자가 주군의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잘 안다.
[최악의 경우 머리라도 잘라서 내게 가져와라. 대신 사흘을 절대 넘겨선 안 된다.]
가신으로 생각했다면 이런 명령 따위가 내려올 리 없을 테니까.
주술사들의 중요한 생체 연구 재료 정도?
저 암살자의 쓰임은 그 정도일 것이라 케플린은 판단했다.
목표 일행이 폭우를 뚫고 이동을 시작했다. 우중충한 날씨 탓에 낮인데도 주변 시야는 무척이나 흐렸다.
목표가 협곡 정상을 따라 꼬불꼬불한 능선을 타고 움직이자, 케플린은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콰아아아아아―!
빗소리보다 더 거친 물소리가 들려왔다.
케플린은 잠시 목표에서 시선을 떼고 절벽과도 같은 협곡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작은 물줄기가 폭우로 하룻밤 새 거센 강물처럼 불어나 있었다.
빠진다면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그 물살이 무척이나 거셌다.
목표 일행은 그 물살 방향을 따라 천천히 전진했다.
반나절 정도 이동한 것 같았다. 슬슬 지루함을 느끼고 있는데, 시선을 사로잡은 엄청난 크기의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작은 바위산 같았다.
암살자는 그 바위를 가리키더니,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케플린은 암살자와 바위를 번갈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저곳이 도착지인 것 같았다.
한눈에 담기 힘든 바위산, 그 주변을 훑어본 케플린은,
'이상해.'
이 한마디로 바위를 평했다.
시야가 어두운 탓에 멀리서는 주먹 형태만 눈에 들어왔었는데,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협곡과 어울리지 않는 바위였다.
색도 먹물처럼 어두웠고, 표면은 개미굴처럼 셀 수 없는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구멍은 성인이 들어가도 충분할 만큼 크고 깊었는데, 폭우 때문인지, 그 구멍들 사이로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줄기 대부분이 협곡 밑 거센 강물로 쏟아진다는 것을 확인한 케플린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만약 강물로 목표가 추락한다면?
'사정거리 안에 두고 쫓아야겠어.'
그럴 리는 없다고 판단했지만, 최악을 가정한 그는 빠르게 움직였다.
암살자는 현재 일행과 함께 바위산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경사가 급격한 편이 아니라서 구멍들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았다.
케플린이 거리를 줄이기 위해 은밀히 마나를 사용하려는 순간이었다.
드드득―!
"...!"
암석 대지가 크게 들썩거리더니 구멍들 사이로 거센 물줄기가 푸욱! 하고 쏟아졌다.
동시에,
휘이이이이이이이―!!!!!!
"큭!"
바람과 함께 쇠 긁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휘청거리던 케플린은 다급히 오라를 끌어올린 뒤 중심을 잡았다. 입술을 깨물었는지 피가 살짝 새어 나왔다.
"…방금 그 소리, 뭐지?"
정신을 파고드는 송곳 같은 날카로움. 4성인 자신이 이 정도 충격을 받았다면?
"끄아아악―!"
"아아악!"
멀리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용병 중 하나가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이더니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누구도 용병을 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암살자는 머리를 박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변수다.
케플린은 다급히 움직이려고 일어났다.
드드드드득―!
"이, 이런 미친!"
귓가를 욱신 찌르는 감각. 마치 칼날로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는 오라를 끌어올리며 눈앞의 구멍을 피했지만, 곧 주변을 둘러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사방이 구멍 천지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크큭!"
두 번째 여파가 터져 나왔다.
"이, 이게 무슨… 큭!"
벤은 귀를 틀어막으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게 무슨 일이냐는 물음.
뭐긴 뭐야.
칼바람의 저주지.
세 번째 칼바람이 터지자, 벤이 휘청거리며 피를 토했다. 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칼바람의 저주는 일정 주기를 갖고 소리를 토해낸다. 타이밍을 체크하며 주변을 살폈다.
용병들은 이미 두 번째 여파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간질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며 눈동자를 뒤집어 깐 모습이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다만, 벤의 경우엔 달랐다. 기습적인 첫 여파에는 큰 타격을 받는 듯했는데, 다음 여파부턴 휘청거릴 뿐 쓰러지진 않았다.
다만, 내게 다가오지 못했는데, 충격이 상당한 것 같았다.
벤이 이 정도라면….
'그놈에겐 큰 타격은 못 주겠는데?'
벤이 기절했더라면 플랜 A로 가려고 했는데, 플랜 B다.
잠시 후, 타이밍에 맞춰 터지던 칼바람의 저주가 뚝 멈췄다.
뭐지?
설마 딜레이가 있는 건가?
이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몸을 회복한 벤이 검 자루를 잡고 다가오자, 난 핼쑥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이건 당연히 연기다.
난 칼바람의 저주에 두통 말곤 영향을 받지 않았으니까.
"무슨 짓을 한 거냐!"
"저,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넌 왜 멀쩡하지?"
"이, 이유가 있습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소리가 멈춘 지금 어서 불을 피워야 합니다!"
"뭐?"
"다 왔습니다! 저기입니다!"
난 벤의 반응 따윈 무시하고 다급히 움직였다. 놈이라도 지금 날 말리진 못할 거다. 애초에 내 말을 따라 이곳에 온 녀석이니까.
거대한 바위 꼭대기에 올랐다. 가방을 뒤적거리며 발화 스크롤을 꺼내 마구 찢기 시작했다.
발화 스크롤을 모조리 찢자, 폭우 속에서 마법 불꽃이 타올랐다.
잠시 후, 큰 화마(火魔)가 피어올랐다.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폭우를 밀어내고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할 일은 끝난 건가?"
어느새 벤이 뒤쪽에 서 있었다.
언제?
하도 멍청한 짓을 해대서 잠시 잊고 있었다. 눈앞의 녀석이 3성의 실력자란 사실을.
난 품에서 스크롤 두 장을 더 꺼냈다.
벤은 스크롤을 보고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찢어버린 발화 스크롤과 겉면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난 두 장의 스크롤을 꽉 움켜잡고 말했다.
스크롤은 벤을 향해 있었다.
"신호만 보내면 제 임무는 끝납니다."
"어서 찢어라."
"...."
"어서 안 찢고 뭐 하나!?"
임무가 끝나는 순간, 날 패대기칠 것처럼 벤은 사나운 기세로 다가왔다. 내 멱살을 끌고 서둘러 나가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원한다면야…."
난 2성 뇌전 마법, 라이트닝 스피어가 담긴 스크롤을 거칠게 찢었다.
원래 붉게 타올라야 했던 스크롤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눈 부신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무, 뭐!?"
벤의 눈동자가 푸르게 물들더니, 이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파지지지직―!
"끄아아아악!"
스크롤에서 뇌전 두 줄기가 벤에게 꽂혔다. 온몸에 물기까지 차 있어서 그 충격은 서너 배가 되었다.
검게 타버린 벤이 무기를 떨구고 주저앉은 순간, 난 이를 악물곤 품에서 스크롤 두 장을 더 꺼내 다급히 찢었다.
진짜 감시자 놈, 반응이 너무 빨랐다.
순간 풍경이 번뜩이며 푸르게 물들었다.
파지직―! 파지지직―!
강렬한 두 줄기의 뇌전이 벤의 뒤쪽에서 쇄도해오는 검은 인형에게 내리꽂혔다.
번쩍―!!!!
지독한 눈 부심에 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소름 돋는 감각에 난 본능적으로 옆으로 몸을 굴렸다.
생존 본능에 가까운 행동.
스각―
"...이, 이런 시발!"
그 행동이 나를 살렸다.
섬뜩한 검광이 내 머리카락을 자르고 지나갔다.
난 다급히 감시자를 찾았다.
검게 그을린 몸뚱이가 거리를 둔 채 내 앞을 가로막았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그놈이다.
창고에서 날 막아섰던 놈.
2성 마법이 안 통한다.
내 예상보다 더 지독한 괴물 새끼였다.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린 놈은 검을 겨눈 채 자세를 잡았다.
4성 기사.
마주한 순간 대응하면 뒈진다.
난 남은 스크롤을 갈가리 찢으며 울부짖듯 외쳤다.
"도, 돈값 해! 이 새끼들아!!"
뇌전 덩어리와 놈의 검이 부딪쳤다.
번쩍―!!
새하얀 백광(白光)에 눈이 멀 것 같았다. 하지만 느껴지는 살기는 여전했다.
빌어먹을, 당한다!
위기의 순간,
카앙―!
사라진 시야 속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놈의 검이 막혔다. 그리고 들려오는 생소한 목소리.
"10분이다."
검은 장미들이 움직였다.
20화 흑주술사 도네콜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