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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OSOBREVIVIRAUNVILL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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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10

1화 이름조차 없는 뉴비 암살자

지하철과 버스 타는 시간.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

화장실에서 큰일 보는 시간.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읽는다.

시간에 쫓겨 사는 팍팍한 일상에서 발견한 유일한 낙이었다.

노잼 소설로 시간을 낭비할 때면 깊은 빡침이 골수를 타고 올라왔지만, 읽을 맛이 나는 보물을 찾는 날이면 그것에 푹 빠져 자투리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다,

"이건 무슨 소설이지?"

몇 년 전에 하나의 소설을 알게 됐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제목부터 이상한 이 소설은 콘셉트부터 참으로 묘했다.

악당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니.

당연히 소설의 주인공들도 전부 악당이었다.

회귀한 악당부터, 빙의된 악당, 환생한 악당 등 수많은 기연으로 강력해진 악당들이 영웅들을 농락하고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이야기였다.

악당들의 욕구 충족과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변태 같은 소설.

'확실히 병맛 소설이긴 한데….'

콘셉트는 변태 같은데, 이상하리만큼 중독성이 있었다.

악당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시원한 맛이 있었다.

명분 따윈 개나 주라는 듯 막아서는 모든 것을 불도저처럼 파괴하고 밀어버린다.

현실에선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이 이곳에선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세상이 망하면 어떻고, 영웅들이 죽어 나가면 어때.

'어차피 소설 속 세상인데.'

알바 면접을 준비 중일 때, 중요한 시험을 준비 중일 때, 취업을 준비 중일 때.

'그러다 전부 실패하고, 돈도 바닥났을 때.'

그때도 소설은 계속 연재되었고, 인생이 답답해지면 난 이 소설을 또 찾게 되었다.

잠시나마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힘들 때 당기는 소주처럼 이 소설이 내 인생의 일부분처럼 깊숙이 자리 잡았다.

어엿한 회사원이 된 지금까지도.

"와, 악당 새끼. 현실로 데려온 뒤 팀장 앞에 세워놓고 싶다."

직원 화장실.

변기에서 큰일을 보던 나는 짬을 내서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을 읽었다.

악당이 영웅 하나를 묵사발 내는 장면이었는데, 피떡이 되는 영웅을 팀장으로 상상하며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이 장면도 수없이 읽은 내용이지만, 팀장을 대입시키니 또 느낌이 색달랐다.

갑갑한 느낌에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투덜거렸다.

"하, 유부남 새끼가 여직원들에게 치근덕거리기는."

아침 브리핑 시간에 팀장이 나를 세워놓고 사원들 앞에서 창피를 준 일이 떠올랐다.

직권 남용이라고 해야 하나?

직급을 이용해서 이 여자 저 여자들을 쿡쿡 찔러보는 데 속이 거북해서 눈치를 줬더니, 그때부터 눈만 마주치면 큰소리다.

"돈만 아니었으면 턱주가리 날리고 사표 던졌을 텐데."

학자금 대출, 자동차 대출, 카드 대금 등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손에 쥔 것은 쥐뿔도 없는 것 같은데, 눈에 보이는 건 빚뿐이다.

최근에 대리로 승진하면서 월급도 오른 상황이라 더러워도 참아야 했다.

난 스마트폰에 비친 제목을 빤히 응시했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참으로 오랫동안 함께해 온 녀석이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오늘은 특히 더 현실과의 괴리가 느껴졌다.

현실이 힘들어서 그런가.

가끔은 소설 속 세상이 부럽기도 했다.

물론, 악당이 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저 자기 꼴리는 대로, 제멋대로 살아가는 삶이 부러울 뿐이었다.

그건 영웅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소설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학교 졸업 후 어엿한 회사원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연줄이나 돈도 없는 이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인간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현실로 돌아오니,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너 때문에 산다. 고맙다."

난 피식 웃으며 허리를 폈다.

너무 오래 있었나?

엉덩이가 뻐근했다.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순간 시야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어? 갑자기 왜 이래?"

전등이 미친 듯이 깜박였다.

어떤 놈이 장난을 치는 건가 생각했을 때, 시야가 푹 꺼져버렸다.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난 황급히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손전등 어플을 켜려고 한 것인데, 화면에 뜬 문구는 하나의 '공지'였다.

"스토리 수정 공지?"

지금껏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공지를 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용상 모든 영웅이 몰살당하고, 세상이 파멸로 치닫는 막바지 단계일 텐데?

화장실 불이 꺼진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난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내게 작은 위안이 되어주었던 소설.

"뭐 상관없으려나?"

추천 버튼을 누르며 수정이든 뭐든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나쁜 놈들이 승리하는 내용이니, 소설이 인기가 있을 리 없다.

내용이 어떻게 수정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영웅들이 오죽 불쌍해야지.

그만큼 악당들은 비열했고, 강력했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공략법을 수도 없이 상상하기도 했지.'

이참에 악당들의 대항마로 강력한 영웅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렇게 댓글 완료 버튼을 눌렀을 때, 화면이 푹 꺼져버렸다.

"뭐야…?"

다시 찾아온 암흑.

인기척은 없었다.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모양.

어둡다 보니, 덜컥 겁이 났다.

공지 따윈 잊고 다급히 손을 뻗었다. 마무리를 위해 주변을 더듬거렸지만 잡히는 게 없다. 소설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들어올 때 가장 중요한 것을 확인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시발, 휴지가 없잖아?"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야. 일어나."

단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아 꿍얼거리며 등을 돌렸다.

더 자고 싶다고.

하지만 상대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퍽―!

"끄어어억!"

지독한 고통에 허리를 새우처럼 접었다.

등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씨발, 먹을 때랑 잘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데!

두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든 순간, 큰 주먹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퍽―

"꾸엑!"

얼굴이 뭉개질 것 같은 고통.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이곳은 집이 아니었다.

그럼 어디야?

코를 부여잡고 가까스로 눈을 뜨니 사내 셋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데 복장이 이상했다.

가죽 재질의 갑옷과 등에 걸친 살벌한 무기들, 판타지 코스프레 축제서나 보던 해괴한 복장이었다.

이 새끼들, 뭐야?

하지만 입으로 나온 말은 공손 그 자체였다.

"서, 선생님들, 누구십니까?"

"선생님? 누구십니까? 이 새끼가 미쳤나? 단장, 어떻게 할까요? 죽일까요?"

"신입이다. 정신만 차리게 해."

"알겠습니다."

주먹을 휘둘렀던 사내가 성큼 다가오더니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만 차리게 하라며?

"반항하지 마라. 뼈 부러진다."

"자, 잠깐만… 아악!"

무자비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이 무슨 개 같은 상황일까.

여긴 어디고? 이 사내들은 왜 나를 구타하고 있는 걸까.

상황 파악을 하고 싶었지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너무 아팠다.

"그만."

"끄...."

"치료하고 창고에 남겨둬. 어차피 쓸데는 정해져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때리던 사내가 다가오자, 나는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에 사내는 피식 웃더니, 뺨을 툭툭 두드렸다.

"동료끼리 너무 겁먹지 말라고."

동료?

시발, 동료 좋아하네. 딱 봐도 일진과 빵셔틀 관계 같구만.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목덜미를 붙잡힌 채 나는 창고 안으로 질질 끌려왔다.

사내는 내 몸을 살피더니, 눈앞에 병 하나를 내려놨다.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이었다.

"마시고 쉬어.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려라. 임무 중에 또 헛소리하면 다음에는 이 정도로 안 끝날 거야."

"…네네."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일단 상황을 넘기기 위해 나는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우린 정보 수집을 위해 하루 정도 자리를 비울 거야. 넌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어. 사람이 올 테니까."

내 머리를 툭툭 두드리던 사내는 나를 덩그러니 남겨둔 채 자리를 벗어났다.

"...."

사내가 떠난 자리를 난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미친 토네이도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큭!"

창고 안에 스며든 쌀쌀한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을 움직이자 비명이 절로 흘러나왔다.

온몸이 저미듯 아팠다.

'이 새끼들 전문가다.'

아프기는 한데 움직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처맞았는데 뼈 하나 부러진 데가 없다. 사람 패는 데 도가 튼 사람 같았다.

끙끙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시선이 눈앞에 놓인 병에 닿았다.

움켜쥔 병 안에는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처음 보는 물건.

하지만 곧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회복… 물약?'

처음 보는 정보가 뇌리에 떠올랐다. 마시면 고통을 줄여주고, 회복력을 올려주는 마법 물약.

내가 이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지?

황당함이 몰려왔지만, 일단 병따개를 따고 원샷을 때렸다.

고통을 줄여준다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감기약 같네."

시럽이 섞인 애들용 감기약 맛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갔다.

썩 좋은 맛은 아니지만, 배 속이 따뜻해지고 고통이 서서히 줄어들자 살 것 같았다.

상태가 좋아지자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현실과 마주할 시간이다.

"일단 꿈은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며 소설을 본 것까지 기억난다.

휴지를 찾다가 의식을 잃은 것 같은데, 그 이후로 눈을 뜨니 이런 상황이다.

잠시 빈 병을 만지작거렸다.

나름 인싸라 인터넷 정보에 밝은 편인데 이런 물약이 출시됐다는 정보는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일단 이름부터가 구렸다.

회복 물약이라니.

아, 스마트폰은?

현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물건이 떠오르자, 나는 서둘러 품을 뒤졌다.

이런 옷은 도대체 언제 입힌 거야?

가죽 갑옷 속을 뒤적거리길 잠시, 난 어색한 감각에 멈칫했다.

미간을 좁히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은한 횃불이 창고 안을 밝히고 있는 상황.

난 두 손바닥을 살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야무지게 박혀 있다.

쇠질을 수없이 해야 만들어질 법한 헬창 손바닥이었다.

참고로 난 회사 일에 치여 운동과 담을 쌓은 몸이었다.

뱃살이 나온 몸이란 뜻이다.

그런데,

'…내 몸이 아닌데?'

굳은살을 시작으로 더듬거리는 감촉에서 단단한 근육이 잡혔다. 가슴은 탄탄했고, 배에선 왕(王) 자가 선명히 느껴졌다.

변태처럼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지작거리는 느낌마저 든다.

"시발."

하루아침에 몸짱이 됐는데,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몸이 바뀌었다.

이전 몸뚱이와 차이가 너무 확연해서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그제야 바닥에 뒹구는 빈 병이 무섭게 다가왔다.

죽을 듯이 처맞아도 이거 한 병이면 컨디션이 돌아온다.

회복 물약.

그딴 게 현실에 존재할 리 없다.

어째 여긴 다른 세상 같았다.

정신이 나간 듯 창고를 샅샅이 뒤적거렸다.

바깥에 나가고 싶었지만, 대기하라는 놈의 말이 떠오르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사람을 죽일 듯이 패는 놈들이다. 바깥에 나갔다가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그 이후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이유 없이 도주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창고 안을 둘러보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몇 가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해코지를 할 의도는 없는 것 같은데."

때린 놈들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밧줄로 자신을 묶어둔 것도 아니고 회복할 물약도 놓고 갔다. 심지어 바깥으로 통하는 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나갈 생각만 있다면 언제든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의미.

나는 품에서 나온 몇 가지 물건을 살폈다.

"단검, 금화 주머니, 지도라…."

일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들은 자신을 동료라고 했고, 창고에서 대기하며 사람을 기다리라고 했다.

'나를 신입이라고 불렀지.'

즉, 자신은 저들과 한패란 뜻이다. 단검을 남겨둔 것이 그 증거였다.

"단검이라서 더 문제지만."

차라리 총이었다면 현실을 떠올리며 덜 불안했을 텐데.

그리고 금화가 든 주머니.

금화는 처음 보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만약 이 금화가 화폐 용도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접힌 지도를 들어 올리며 주저했다.

왠지 지도를 편 순간, 애써 부정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하...."

한숨을 내쉬며 나는 결국 지도를 폈다. 다른 선택지가 존재했다면 좋았을 텐데,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지도를 펴는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

난 멍하니 펼쳐진 지도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대륙과 지형이 조악하게 그려져 있다.

처음 보는 문자가 적혀 있지만, 신기하게도 그 뜻이 전부 이해가 됐다.

그래서 난 이 기가 막힌 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엘레토르 성곽.

"엘레토르…."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다.

화장실에서 스마트폰을 읽으며 알게 된 지명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한 소설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지명 중 하나.

그 성곽 주변에 붉게 표시된 영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 적힌 메모 내용이 가관이었다.

―암살 표적, 블라이어 영지의 카멜 공자.

"좆됐다."

카멜은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속 악당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난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소설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소설 속 이름조차 없는 뉴비 암살자로.

2화 자폭 벌레 붐(boom)

끔뻑―

꿈이길 바라면서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떠봤다.

소설 속 세계관을 보여주는 지도만 덩그러니 보이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진짜 장난질일 수도 있다.

신들의 장난.

진짜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를 거다.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그저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을 뿐이다.

소설 속 세상을 동경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소설 속 먼치킨 주인공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때고.

이런 경우라면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그만큼 눈앞에 닥친 상황이 최악이란 뜻이었다.

죽음.

현실에선 내일 뭘 하고 뭘 먹을지를 고민하지, 죽음을 걱정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수틀리면 죽는다.

그것도 아주 높은 확률로.

'그 많고 많은 캐릭터 중에 왜 하필 암살자냐?'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에서 암살자는 악당에게도, 영웅에게도 양 귀싸대기를 처맞는 희생양이었다.

호구 중의 상호구 포지션.

무협 소설에선 지나가던 산적, 판타지 소설에선 처음 등장하는 고블린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암살자라도 사전에 대비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있겠지만,

'표적 암살, 공자 카멜.'

죽음의 수레바퀴는 이미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런 미친, 그 카멜을 암살하라고?

이대로 끌려가면 무조건 죽는다.

'생각해라. 생각해.'

첫 번째로 도주를 떠올렸지만, 바로 계획을 접었다.

임무 중이라고 들었다.

도주한 순간 정보 누출 방지를 위해 개떼처럼 추격할 테고, 붙잡힐 거다.

'그럼, 죽겠지.'

신체 능력이 전의 몸보다 압도적으로 좋다고 한들, 난 싸움 경험 한 번 없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게다가 주변 지리도 잘 모른다.

추격을 따돌릴 자신이 없었다.

다행이라면 이 몸뚱이의 기억이 천천히 각인되며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조금 전에 암살자들이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의심해서 죽였을지도 모른다.

암살자들은 변수를 싫어했으니까.

하루 정도면 기억이 어느 정도 회복될 테고, 직장인 눈치 짬밥 정도면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업데이트가 왜 이리 느려?'

다른 소설에선 주마등처럼 기억이 스쳐 간다는데, 이 몸뚱이의 기억은 더디게 떠올랐다.

이제 막 유년 시절의 기억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

굶주림, 폭행.

불쾌한 감정이 불쑥 올라오는 유년 시절을 받아들이며 나는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

'카멜이면 1챕터인데.'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은 각 챕터가 존재했고, 그 챕터마다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달랐다.

물론, 후반부에는 모든 악당이 등장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각축전이 벌어지지만, 초반에는 각 악당의 성장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그중 카멜은 첫 챕터의 대표적인 악당이었다.

카멜과 관련된 스토리.

그 내용을 떠올리자 암담함이 몰려왔다.

'미치겠네.'

난 이 소설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알고 있다.

문제는 그 스토리가 주인공을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점이었다. 나 같은 조무래기 암살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건 불가능했다.

즉, 스토리를 토대로 내 운명을 추리해야 한다는 건데.

'공자 신분이라고 했어. 그럼 카멜이 아직 후계자 신분이란 뜻이야.'

카멜 블레이저.

전 대륙을 피로 물들인 폭군 중의 폭군.

그는 블라이어 영지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운 후 학살자의 길을 걷는다.

공자 신분이면 영지를 물려받기 전이니 스토리 초입 부분이었다.

'그리고 내가 속해있는 암살 조직은 카멜을 암살하려고 한다.'

악당에게 적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들에게 암살자는 껌딱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공자 시절의 카멜을 노리는 암살 조직이라면 하나뿐이었다.

'암살 단체 크룩스!'

크룩스를 떠올린 순간, 전 몸뚱이 주인의 유년 기억이 청년으로 넘어갔다.

크룩스와 관련된 기억 하나가 또렷이 각인됐다.

노예 상인에게 잡혀 노예 시장에 끌려간 뒤 누군가에게 팔려 가는 장면.

그 누군가가 단검 한 자루를 선물했다.

"단검?"

나는 단검 손잡이 끝부분을 살폈다.

포효하는 늑대 문양이 각인되어 있다.

크룩스의 문양이었다.

소설 속에 빙의된 몸뚱이의 신분이 파악됐다.

호구 중 상호구인 암살자 집단 중에서, 세력은 최약체이며 악명만 드높은 비양심적인 암살 단체, 크룩스의 신입 암살자.

"시발."

삼국지 속 엄백호의 수하의 수하도 이것보단 낫겠다.

욕설이 흘러나온 순간,

끼이익―

창고 문이 열리더니 후줄근한 후드를 걸친 사내가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왔다.

그는 나를 발견하곤 멈칫하더니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이 있었군요. 실례합니다."

공손한 말투.

하지만 난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답을 했다.

"저도 마구간인 줄 알았습니다."

암구호였다.

등줄기로 땀이 흘러나왔다.

때마침 크룩스 조직에 관한 기억이 떠올라서 다행이지, 그냥 흘려들었다면 그는 나를 죽였을 것이다.

암구호를 대자마자 놀라던 사내의 표정이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시발, 순간순간이 살얼음 길이네.'

사내는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나무판자에 걸터앉았다. 그는 연초를 물더니, 불을 붙이며 물었다.

"다른 형제는?"

"주, 주변 조사를 나갔습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신입입니다."

"아, 그렇군. 신입."

신입이란 말을 듣자, 그가 반응을 보였다.

다른 의미로 나를 알고 있는 듯했다.

사내가 연초를 스윽 내밀자, 나는 빠르게 다가가 공손히 연초를 받아 피웠다.

쿨럭―

더럽게 독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연초를 물고 사내 앞에 섰다.

눈앞의 사내가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몸뚱이가 말하고 있었다. 사내는 함께 온 셋을 다 합친 것보다 위험한 인물이라고.

사내는 연초만 조용히 피울 뿐 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한동안의 침묵.

10초가 10년 같았다.

그 침묵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압박감을 느꼈을 때, 사내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열린 상자에는 벌레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이건 설마…?

"씹지 말고 삼켜."

"네?"

"삼키라고. 앞으로 내 입에서 똑같은 말이 두 번 나오면 네 혀를 뽑아버릴 거다."

"네, 네!"

"벌레가 죽어도 마찬가지야."

"알겠습니다!"

난 우렁차게 외치며 벌레를 집어 들었다.

끽끽끽끽―

…무슨 벌레 사운드가 호러물도 아니고.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

다리 수십 개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이 마치 돈벌레를 연상케 했다.

꾸물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혐오스럽다.

내가 방송 BJ고 백만 원의 별풍선을 후원받아도 먹을 자신이 없는 극강의 비주얼.

하지만 이 벌레는 천만 원이 아니라 억대를 줘도 절대 먹으면 안 된다.

"뭐 하는 거지? 기다리게 할 건가?"

그런데 눈앞에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내가 빤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고, 단검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면?

꿀꺽!

울며 겨자 먹기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벌레를 산 채로 삼키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연초를 쭉 빨았다. 몇 번 길게 빨았더니 정신이 몽롱해졌다가 이내 퍼뜩 돌아왔다.

'마약류인가?'

"받아라."

사내는 임무 중에 필요할 것이라며 연초 한 보따리를 내게 넘겼다.

사내는 입에 물고 있던 연초를 퉤 뱉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곤 내 몸을 잠시 살폈다.

심장 부근을 확인하던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더니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가 지도 한 장을 내게 건넸다.

"표적의 암살 실행은 사흘 후, 저택 경비가 무력화되는 순간이다. 표적이 머무는 방을 따로 표기해 두었다."

저택 지도였는데, 경비 위치까지 상세히 표기되어 있었다.

"신입."

"네, 네!"

"첫 암살 의뢰에 꼭 성공하길 바란다. 조직에서 널 눈여겨보는 형제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

"여, 영광입니다!"

영광은 시발, 이 개새끼들아.

크룩스 조직은 수하를 부속품으로 소비하는 조직으로 유명했다. 즉, 신입의 사망률이 타 암살 조직과 비교해서 압도적으로 높다는 말이었다.

벌레를 보자,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럼 나중에 웃으면서 보자고."

어깨를 두드리던 사내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신비한 광경을 목격했지만,

"허허허…."

난 세상을 해탈한 노인처럼 헛헛하게 웃고만 있었다.

망했다.

죽더라도 차라리 도주를 감행했어야 했었다.

하지만 벌레를 삼켰으니 이젠 빼도 박도 못했다.

'…설마, 내가 처먹게 될 줄이야.'

붐(boom).

내가 삼킨 벌레를 가리키는 은어였고, 붐이란 이름처럼 벌레는 사람을 숙주로 삼은 뒤 신호에 맞춰 폭발한다.

뼛조각과 살점으로 표적을 타격하는 인간 폭탄이 된다는 의미였다.

자살 테러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나 보던 거 아니었어?

난 벌레가 자리 잡은 심장을 만지작거리며 울적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젠 도망을 쳐도 죽고, 표적 앞에 서도 죽는다.

"웃으면서 보자고? 다음에 보면 그 입부터 찢어주마."

소설 속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늘어나는 건 원망이요, 욕뿐이다.

소설의 제목은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인데 어째 나에겐 '악당 세상 속 서바이벌'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이 몇 번째 암살 시도지?'

암살 횟수가 늘어날수록 카멜 주변은 강력한 호위들로 채워진다. 즉, 뒤쪽 순서로 갈수록 뒈질 확률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이를 어떻게 타개할지 막막했다.

* * *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아!"

창고에 홀로 남겨진 인간의 처절한 외침.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펜싱 종목 박상영 선수가 '할 수 있다.'로 스스로 암시를 건 후 금메달을 쟁취한 모습은, 좌절로 포기하는 이들로 하여금 용기를 얻게 해주었다.

내가 지금 딱 그 처지였다.

가만히 있어봤자 누가 대신 내 목숨을 살려주는 상황이 아니었다.

스스로 살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

'용기를 다오!'

벽에 이마를 콩콩 찍으며 평소에 굴리지도 않는 머리를 한계까지 굴렸다.

그렇게 살 방도를 고민하고 있을 때, 나를 쥐어팼던 놈들이 돌아왔다.

'벌써 하루가 지났다고?'

사흘의 시한부 인생이 이런 기분일까.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다행히 몸뚱이 주인의 대략적인 기억이 주입된 상태다.

지금 상황을 보건대,

'이들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도 충직한 신입의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난 빠릿빠릿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신입, 창고 잘 지키고 있었어?"

"네!"

"배고프니까, 나가서 먹을 것 좀 사와."

"맡겨주십쇼!"

떠날 땐 셋이었는데, 머릿수가 여섯으로 늘어나 있었다.

임무 시기에 맞춰 합류한 암살자들이라고 했다.

원래 암살자는 조용하고 냉혹한 이미지 아니었어?

하나같이 무슨 동네 건달 같은 비주얼이다.

들어보니, 나까지 포함 이곳 일곱 명이 표적 암살에 투입된 머릿수였다.

…어? 잠깐만, 일곱이라고?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흠칫했다.

메인 악당의 첫 등장 신.

카멜 블레이저가 소설 속에서 처음 등장했을 때, 그는 암습을 당하고 있었다. 그때 암살자의 수가 딱 일곱이었다.

이거 설마…?

그리고 강렬했던 한 장면.

[쾅!]

'기습적인 자폭 공격!'

주인공에게 온몸을 날리며 자폭했던 한 암살자를 보며 개쩐다고 생각했는데.

시발, 설마 그게 나야?

알고 보니, 난 카멜 블레이저의 퍼스트 킬 캐릭터로 당첨된 것이었다.

3화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얼른 다녀오라고. 배고프니까."

"넵!"

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창고 밖으로 나왔다.

한적한 시골 마을.

목조 건물은 하나같이 허름했고, 눈에 띄는 큰 건물은 몇 채 보이지 않았다.

바깥세상을 처음으로 구경한 셈이지만, 설렘 따윈 없었다.

그런 감정은 여유가 있을 때나 느끼는 것이고, 벌레, 붐(boom)을 삼킬 때 예상은 했지만, 설마 거기서 자폭할 운명이었다니.

난 무거운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음식점으로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다.

"빵과 수프, 마실 것 좀 포장해주세요."

"얼마나 드릴까요?"

"이 짐 가방에 가득 들어갈 만큼요."

단장이 며칠분의 식량도 지시했기에 난 큰 가죽 가방을 통째로 가져왔다. 음식을 주문한 뒤 난 식당 안을 살폈다.

각 테이블에 드문드문 앉아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보인다.

평범한 일상 속의 풍경이다.

하지만 난 그 풍경 속에 스며들지 못했다. 내 눈동자는 문밖을 향하고 있었다. 표정에는 짙은 갈등과 망설임이 흘러나왔다.

'지금이 도망칠 마지막 기회인데.'

원래 도주할 계획은 없었다.

그런데 신입 암살자의 기억을 얻으면서 도주 가능성을 점쳤다.

눈썰미와 생존 경험이 생긴 것이다. 이 주변 지리도 어느 정도 떠올랐다.

'블라이어 영지에서도 아예 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그 방법은 되도록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죽을 확률이 너무 높았거든. 시도하기 전에 죽을지도 몰랐다.

'나설 때 의심하는 낌새는 없었어. 감시자도 붙지 않았고.'

음식점 건물 뒤쪽에 우거진 숲을 확인했다. 도주로로 괜찮은 장소였다. 도망친 후 추격만 따돌릴 수 있다면 살 방도가 있었다.

심장에 붐(Boom)이 기생 중이지만, 붐을 해제할 인물을 난 알고 있었다.

'해? 말아?'

우유부단한 성격이 절대 아닌데, 한 번 선택으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니 망설임이 생겼다.

'그래. 이게 살 확률이 높아.'

그렇게 엉덩이를 들썩이며 도주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을 때였다.

"손님, 포장한 음식 나왔습니다."

식당 주인이 빵빵해진 가죽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이거 가지고 튀는 거다.

난 가방 안을 확인하곤 가방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런데,

'응?'

순간 내 시선이 가방 안쪽 한 곳에 고정됐다. 그것을 본 순간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1골드 20실입니다."

"아… 네."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식당 주인에게 동전을 건네곤 난 음식점을 바로 나왔다.

조금 전 갈등이 무색할 만큼 내 걸음은 창고로 향하고 있었다. 도주로로 봐두었던 숲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심장이 쿵쿵쿵! 거칠게 뛰었다.

'골로 갈 뻔했다.'

수프용 간이 수저가 '일곱 개'다.

식당 주인이 넣어준 것인데, 난 음식을 주문했지, 그에게 몇 명이 먹을 것이라 말한 기억이 없었다.

음식 주인이 창고의 존재를 알고 있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입 암살자의 기억에 크룩스의 숨겨진 비밀 거점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

'창고로 돌아온 뒤 암살자들의 행동에 여유가 넘쳤어.'

임무 중에 그런 여유가 드러났다는 건 이곳이 무척 안전하다는 말이었다. 이 마을이 그런 비밀 거점 중 하나라면 도망치는 순간 발각당한다.

"빌어먹을,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네."

평화로웠던 작은 마을이 이젠 달리 보였다. 힐끗거리며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감시자처럼 느껴졌다.

일단 행동은 보류다.

난 이를 악문 채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더럽게 맛없네.'

자본주의의 빵 맛에 길들여진 나에게 이 빵은 돌덩이 같은 맛이었다. 그나마 빵을 수프에 찍어 먹으니 목구멍으로 넘어가긴 했다.

맛은 없지만, 난 억지로 빵을 삼키며 최대한 먹으려고 했다.

체력은 국력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으니까.

"신입."

"넵!"

한곳에 모여 식사 중이었는데, 단장이 멀찍이서 나를 조용히 불렀다.

입 속에 빵을 욱여넣으며 난 단장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사람이 왔었나?"

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단장의 시선이 내 심장에 잠깐 머물다 사라졌다.

그 시선을 놓칠 내가 아니었다.

'이 새끼….'

[신입은 창고에 남겨둬. 쓸데가 정해져 있으니까.]

하루 전, 저자가 나를 내려 보며 했던 말이다. 그땐 흘려들었는데, 당해보니 그 뜻을 이젠 알 것 같았다.

저 단장 새끼는 내 심장에 기생 중인 붐(Boom)의 존재를 눈치챘다. 내가 이 지경이 될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안 것이다.

"전달 사항은?"

난 사내에게 건네받은 저택 지도와 연초 보따리를 건넸다. 작전에 관해 전달받은 내용도 함께 보고했다.

"사흘 후 시작이라…."

단장은 날짜를 중얼거리며 연초 보따리를 살폈다. 그러곤 나를 잠시 빤히 바라봤다.

재수 없게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어째 불안감이 느껴지는 시선이다.

"그가 내게 따로 남긴 말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그래? 알았다."

단장은 더는 사내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 반응에서 난 그 의문의 사내가 단장보다 더 높은 직급의 인물임을 눈치챘다.

단장은 저택 지도에 시선을 돌리며 손짓으로 나를 물렸다.

제자리로 돌아온 난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살폈다. 각자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암살자들이 보인다.

'저들은 얼마나 강할까?'

기억 속에 저들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보가 없었다. 물론, 이곳의 모든 암살자는 악당을 위한 한 줌의 희생양일 뿐이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진짜 궁금한 건 나 자신의 무력이다.

신입 암살자이자, 버려지는 패.

실력이 형편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또 그런 건 아니었다.

아니, 내 기준에선 실력이 무척 뛰어나 보였다.

'한 번 쓰고 버리기엔 아까운 패 같은데.'

내 목숨이 걸려서 그런 게 아니라, 크룩스에서 이 캐릭터를 제법 공들여 키운 흔적이 보였다.

조직 내에 무슨 사정이 있든가, 아니면 이 정도 무력은 이 세상에서 별것 아니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저들의 무력이 더더욱 궁금해졌다. 비교할 데이터가 될 테니까.

"집합."

잠시 후, 단장이 암살자들을 소집했다.

"이틀 안에 표적이 머무는 블라이어까지 도착해야 한다."

"바로 움직입니까?"

"당장 짐을 챙겨라."

단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암살자들은 출발 준비를 위해 부산히 움직였다. 난 식량이 든 짐 가방과 약초 보따리를 챙기고 그들 뒤를 쫓았다.

새벽이 된 시간.

마을은 조용했다.

암살자들은 음식점에 붙어 있는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일곱 마리의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말을 모두 바깥으로 꺼내고,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 그 누구 하나 밖을 내다보는 이가 없었다.

그 모습에서 확신했다.

이 마을은 크룩스의 비밀 거점이 맞았다.

행동을 보류한 판단이 옳았다.

푸르릉―!

어둠으로 흩어지는 말 투레질 소리를 끝으로, 암살자들은 숲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 * *

'휴, 큰 고비 하나 넘겼네.'

난 경마장에서 말 구경은 해봤지만, 말을 직접 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 한 마리가 내 앞에 떡 놓이고, 암살자들이 말을 탄 채 나를 모두 내려 보는 상황이 펼쳐졌다.

'못 탄다고 하면 죽일 것 같았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자칫 이곳이 무덤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희망이 있었다.

바로 신입 암살자가 가진 승마 경험.

그리고,

"하얏!"

지금 나는 그 경험을 빌려 말을 능숙하게 타는 신기한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숲속을 거침없이 질주하며 나는 말 위에 몸을 실었다.

익숙한 듯 몸이 움직였다.

그렇다면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암살 능력도 익숙하게 펼칠 수 있을까?

생존 확률이 발톱의 때만큼 올라간 것 같았다.

두두두두―

일행은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시간 외에 쉬지 않고 움직였다.

온종일 정신없이 달려도 끝나지 않는 숲길을 달리는 건 나름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토록 넓은 숲이라니, 나중에 이 숲의 이름이 '라웁'이란 것을 듣고 기겁했다.

'공포의 라웁 숲!'

메인급 악당 중 하나인 미치광이 마법사 하나가 숨어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 악당의 눈에 띄면 몰살 각이었지만, 그럴 일은 단연코 없을 것이라 스스로 위안 삼았다.

이 파티는 그 미치광이가 아니라 카멜의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이동은 순조로웠다. 다만, 휴식을 취할 때마다 단장의 지시로 난 매일같이 불침번을 서야 했다.

오직 나만 불침번을 홀로 섰다.

'졸려 뒈지겠네.'

피로한 두 눈덩이를 부라리며 난 선두에 선 단장을 노려봤다.

저 단장 새끼는 상도덕이 없었다. 다음에도 불침번을 시킨다면 확 들이받으려고 했다.

"이곳에서 잠깐 쉰다. 신입!"

"네, 넵!"

"불침번을 서라."

"맡겨주십시오!"

개뿔.

그게 말처럼 될 리가 있나?

여긴 군대보단 더 빡세다. 항명은 곧 죽음이었으니까.

난 얌전히 단장이 시키는 대로 이튿날도 불침번을 섰다.

'괴롭히는 느낌은 아닌데 말이지.'

날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의도적으로 잠을 재우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뭐,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에겐 살 방도를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고, 불침번은 좋은 구실이 됐다.

실제로 밤을 뜬눈으로 보낼 때마다 쓸만한 계획 몇 가지가 머릿속으로 그려졌고, 세부적인 내용도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었다.

나는 결국 숲을 통과하는 내내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이튿날 저녁.

캬아아악!

"전투 준비!"

난 처음으로 이 세계의 몬스터와 조우했다.

* * *

소설 속은 다양한 몬스터가 사는 세상이었다.

우거진 넝쿨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말들을 기습한 몬스터는 짙은 회색 털을 지닌 '놀'이었다.

두상은 하이에나를 닮았고, 인간 덩치로 이족 보행을 하며 도끼를 휘둘렀다.

히이잉―!

"신입! 말을 지켜!"

"아, 알겠습니다!"

말 두 마리가 놀이 던진 도끼에 맞고 쓰러졌다. 그중 단장이 타던 말도 있어서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했다.

콱 죽어버리지.

아쉽게도 단장은 말에서 구른 후 곧장 암살자들을 데리고 놀들을 공격했다.

수는 엇비슷했다.

난 놀을 응원했다.

제발 다 죽여버려라.

하지만 그 기대는 희망에 불과했다.

투투투퉁―!

일제 사격한 석궁에 놀들은 삽시간에 쓰러지며 무력화됐다.

진형이 무너진 놀들 사이로 암살자들이 순식간에 파고들어 단검술을 펼쳤다.

이들의 실력을 이제야 볼 수 있었다.

민첩한 단검술, 정확히 급소를 찔러 넣고 목숨을 끊었다.

몸놀림도 무척이나 날렵했다.

일반인 서넛은 눈 깜짝할 새에 죽일 실력자들이었다.

하지만,

'강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비교 데이터를 통해 확실해졌다.

이 신입 암살자는 확실히 한 번 쓰고 버리기엔 아까운 패였다.

'거기서 그렇게 찌른다고?'

말들을 지켜야 했기에 난 전투와 관심에서 배제됐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너무 순식간에 끝나버렸거든.

전투를 지켜보면서 암살자들의 손동작을 작게나마 흉내 내봤다.

어째 익숙하다.

왠지 머릿속 동작을 전부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마음가짐이었다.

"...음."

잔혹하게 죽은 놀의 사체들이 눈앞에 밟혔다.

죽은 몬스터는 처음 보지만 뭐랄까. 이상하게 혐오감이 들지 않았다.

암살자의 기억과 섞이면서 내 성격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만약 인간의 시체를 보고도 이런 감정이 든다면?

'썩 좋은 느낌은 아닌데.'

일개 회사원이었던 내가 사람을 죽인다?

상대의 눈을 마주하고도 단호하게 단검을 휘두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에 놓인다면 난 단호해지기로 했다.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음 날 아침, 나는 악당 카멜 블레이저가 머무는 블라이어 영지에 도착했다.

4화 파양초

블라이어 영지로 들어가는 성문에 많은 인파가 붐볐다.

성문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암살자들은 모두 용병 차림으로 변장했는데, 하나같이 인상이 더러워서 진짜 용병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어쭈?'

단장을 시작으로 암살자들이 차례차례 용병패를 꺼내 병사 앞에 내보였다.

설마, 진짜 용병인 거야?

요즘 암살자는 투잡도 뛰는 모양이었다.

'그럼, 나는?'

난 왜 용병패 안 주는데?

저들이랑 친해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왠지 소외된 기분이라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이 녀석은 뭐지? 용병은 아닌 것 같은데."

내 차례가 되자, 병사가 날 무섭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소설 속 '병사1' 주제에 있는 척은 오지게 한다. 배알이 뒤틀렸지만, 지금 내 처지는 병사1만도 못해서 잔뜩 엎드려야 했다.

내가 어색한 미소로 단장을 바라보자, 단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탕탕 두드렸다.

크룩스는 연기도 가르치나, 왜 이리 자연스러운데?

"하하하, 병사님, 이 녀석은 짐꾼입니다."

"짐꾼? 짐꾼도 데리고 다니나? C급 용병단이면 장비 맞출 돈도 빠듯할 텐데?"

"싹수가 괜찮아서, 짐꾼으로 쓰다가 용병으로 키우려고 데려왔습니다."

"이놈을? 차라리 귀족한테 팔지 그래. 반반하게 생겼는데."

이 '병사1' 새끼가 뒈지고 싶나. 사람을 앞에 놓고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내 얼굴이 반반하고 비율도 쩔긴 했지만, 너 같은 놈은 횟감도 안 되는 놈이라고.

표정이 와락 구겨졌지만,

"그럼, 짐꾼 가방에 든 물건은 뭐지?"

병사의 다음 말에 내 표정은 거짓말처럼 환하게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굴욕적이지만 참아야 한다!

가방 안을 보여주는 건 곤란했으니까.

"시, 식량이 전부입니다."

"식량? 열어봐."

"저, 그게…."

"안 열고 뭐 해?"

가방 안에는 식량 외에 연초 보따리가 있었다.

난 연초를 한 번 피워 본 적이 있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 평범한 풀때기가 절대 아니었다. 걱정이 들었지만, 그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대기자도 많은데 그냥 통과시켜. 귀찮게 뭘 자꾸 들춰?"

"추, 충! 알겠습니다!"

단장이 선임 병사들 주머니에 슬쩍 무언가를 찔러주자, 가방 확인은 무슨, 병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성문 안으로 프리패스가 됐다.

은화를 처먹이고 처먹는, 아주 우애 좋은 뇌물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회사원 시절에도 못 볼 꼴 많이 보긴 했지.

지금이 딱 그 꼴이다.

'돈이면 다 되는 더러운 세상아.'

현실이고, 소설 속이고, 사람이 굴러가는 세상은 다 똑같은 모양이었다.

블라이어 외성 안으로 입성했다. 광산업이 발달한 블라이어는 상업 도시답게 무척 발전된 영지였다.

대로(大路)를 따라 끝없이 늘어진 물건 좌판과 상인들, 구경 나온 손님들로 득실거렸다.

단장은 주점이 딸린 큰 여관에 짐을 풀고 암살자들을 방으로 불렀다.

"넷만 움직인다."

"남은 자들은 어찌합니까?"

"다른 소식이 올 수 있으니 대기하면서 기다려."

"알겠습니다."

단장은 새로 합류한 셋을 여관에 남기고 기존 멤버 넷과 여관을 나섰다. 당연히 그 멤버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말 다섯 마리와 함께 어딘가로 움직였다. 그중 나는 모든 말의 고삐를 잡아끌며 인파로 빽빽이 들어찬 거리를 힘겹게 뚫고 있었다.

"신입, 눈 크게 뜨고 길 잘 뚫어라. 길 잃으면 저번처럼 혼난다."

"아, 알겠습니다!"

"큭큭큭, 서두르라고. 너 때문에 늦으면 굶길 거야."

단장은 가만히 있는데, 뒤에 선 꼬봉들이 지랄이다. 첫 만남에 날 구타했던 코쟁이 새끼들.

죽이고 싶다.

말들을 챙기랴, 뒤에선 갈구고 인파에 치이는 상황.

난 정신없이 대답하면서도 머리를 팽팽 돌리고 있었다.

바로 생존 계획 말이다.

'도주는 힘들 것 같고.'

블라이어 영지는 인파로 득실거리는 공간이라, 몸을 빼기 좋은 장소였다. 일행이 감시하는 것도 아니니 도주는 언제든 가능한 상황.

하지만 이틀 동안 고민하면서 뒤늦게 알게 됐다.

도주는 그야말로 최악의 판단이란 사실을 말이다.

'당장은 탈출에 성공할 수 있어도, 그 이후에는 감당할 수 없거든.'

크룩스는 임무 중 도주한 암살자를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다. 그건 다른 암살자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암살자가 표적 사냥 전에 도망친다?

조직의 근간을 뒤흔드는 배신행위였다. 다른 암살자 조직과 연합해서라도 끝까지 추격할 것이다.

'암살자가 판타지 속 고블린 같은 존재라도 다굴에는 장사 없다고.'

기연이란 기연을 모조리 처먹고 강해진다면 모를까.

지금은 뼈도 못 추리고 죽는다.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거나, 나를 잊게 만들 방도가 필요했다.

나에겐 시간이 무조건 필요했으니까.

'현재 임무를 유지하면서 생존하는 방법.'

지금으로서 한 가지뿐이다.

'시발. 이건 진짜 피하고 싶었는데.'

바로 현 암살 계획을 이용하는 것.

나는 저 너머 내성 중심에 우뚝 선 웅장한 탑을 올려다봤다.

탑에 머무는 한 사내.

그리고 내일 새벽 내가 죽여야 할 표적.

'카멜 블레이저.'

피에 미친 학살자라 불리는 그놈만이 암살 조직 크룩스의 눈에서 날 가려줄 수 있었다.

악당을 이용할 계획을 짜다니, 나도 미치긴 했나 보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카멜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인간도 없을 테니까.'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난 이 소설을 모두 읽은 독자다.

오직 나만이 악당 주인공들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악당들에게 비밀이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될 약점이자 능력이었다.

나는 그런 카멜 블레이저의 비밀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 * *

서쪽 성문 근처에 즐비하게 자리 잡은 옷가게 거리.

눈에 보이는 수많은 옷가게 중 일행은 한 곳을 방문했다.

크룩스의 조직원만 알고 있는 비밀 표식이 옷가게 간판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맞이한 이를 보며 말했다.

"아, 사람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마구간인 줄 알았습니다."

이 병신 같은 암구호를 장소 구애 없이 사용하다니, 암구호를 만든 새끼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게을러터진 게 분명했다.

2층으로 안내되자 뚱뚱한 중년인이 단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보니, 조직원이 아니라 암상인이었다.

암상인은 창밖의 말들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말이 다섯 마리뿐이던데. 나머지 두 마리는?"

"오는 길에 습격받아서 잃었다."

"내가 받을 대금은 말 일곱 마리인데, 부족한 대금은 어찌할 거요?"

"금화로 충당하지."

단장이 나를 보며 턱짓하자, 난 가방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주머니를 확인한 암상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옷가게에 전시된 의복 상자 중 한 곳을 가리켰다.

확인해보니, 의복 상자 구석에 일곱 벌의 병사복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블라이어 내성 병사들이 입는 의복이었다.

난 병사복을 가방 안에 욱여넣었다.

그 사이, 단장과 암상인은 내성 정보를 주고받으며 대화 중이었다.

"사냥 신호는?"

"큰불이 날 거요. 그때 움직이시오."

"표적이 지닌 아티팩트 정보는 알아냈나?"

"보호의 권능이 담긴 마법 구슬이라더군. 물리적인 피해로는 힘들 거요. 방도가 있소?"

"방도라…."

단장은 대답 대신 옷을 챙기는 신입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암상인은 더는 말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괜한 호기심은 명을 단축할 뿐이다. 어차피 사냥은 저들의 몫이었으니까.

"난 오늘 이곳을 뜰 거요. 아, 당신의 마스터가 전해달라는군."

"마스터가?"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다."

"...."

그것으로 두 일행의 대화는 끝이 났다. 내성 정보와 병사복을 챙긴 일행은 숙소로 빠르게 복귀했다.

* * *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 식사다운 식사를 처음 해봤다.

육류가 들어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살짝 고기 비린내가 났지만, 간이 되어 있어서 먹을 만했다.

"더 먹고 싶은 건?"

암상인과 거래를 끝내고 늦은 저녁에 숙소에 도착한 뒤 주점에서 식사 시간을 가졌다.

무슨 이유인지, 단장은 나를 옆에 앉혀놓고 먹고 싶은 음식들을 모두 시켜줬다.

코쟁이들이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부모를 빼앗긴 애들처럼 심술이 얼굴에 가득한 표정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거, 이거, 이거, 이거요."

"알았다."

"술은 안 됩니까?"

"시켜라."

숟가락을 쥔 코쟁이들의 주먹에 힘줄이 돋아났다.

꼬우면 너네도 인간 폭탄 되든가.

나는 이 식사가 사형수에게 먹이는 최후의 만찬임을 잘 알았다.

입맛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음식이 입 안으로 잘 들어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상하게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암살자가 되더니 신경이 굵어진 건가?

그렇게 커져 버린 간땡이를 붙잡고 코쟁이들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거 들었어?"

"뭐 말인가?"

테이블 바로 옆자리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의 병환이 점점 깊어진다는데? 어쩌지?"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아?"

"성을 방문하는 치료사와 사제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그렇게 심각해?"

"차도가 전혀 없다고 은연중 소문이 돌고 있어.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게 없다고 말이야."

"그럼, 곧 후계가 발표되는 거 아니야? 윌리엄 공자님이 후계를 승계하시겠지?"

"장자 신분이니 명분이 있겠지. 영주님이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소문도 있고."

"둘째인 카멜 공자의 능력이 범상치 않다고 들었는데, 자작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한 모양이야."

차기 영주를 놓고 윌리엄과 카멜을 비교하는 이야기.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윌리엄이 영주 자리에 오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그 흐름대로 흘러가는 게 맞겠지.

'카멜이 엄청난 대악당이 아니라면 말이지.'

영주인 리암슨 자작이 윌리엄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영지민들이 아무리 그를 지지해도 어차피 이 영지의 주인은 카멜이었다.

그의 행보는 파격 그 자체이니까.

영주가 되는 과정을 소설로 읽으면서 소름 돋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블라이어 차기 영주가 누가 될지를 두고 도박판 같은 거 안 열리나?'

몰빵 베팅이 가능한 도박인데 살짝 아쉬움이 몰려왔다.

이딴 생각이나 하는 걸 보니, 나도 맛탱이가 간 모양이다.

'…개 졸리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조금 전 헛생각이 들 정도로 졸음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이틀 동안 잠을 못 자고, 눈앞의 음식을 배 터지게 처먹었으니 졸릴 만도 했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한데, 수면제를 먹지 않고서야….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

내 시선이 조금 전 마신 맥주잔에 고정됐다. 깨끗하게 비워진 잔.

그제야 잔을 비운 후 일행들의 대화가 끊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돌리니, 코쟁이들이 비웃음을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했다!

고개를 돌려 단장을 바라보려는데,

쿵―

난 그대로 식탁 위에 코를 박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 올라가지. 녀석을 업어라."

"네."

"녀석의 가방에서 '파양초'를 꺼내."

단장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파양초?'

그제야 난 연초의 이름이 파양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층 숙소로 올라가는 계단을 끝으로, 내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의식이 끊긴 것이다.

5화 정글 속 임팔라들

"으으…."

의식이 돌아왔다.

지독한 두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머리맡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단장, 이 녀석 깬 거 같은데요?!"

"뭐? 그럴 리가…."

당혹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내가 지금 깨어나면 안 되는 건가? 분위기를 파악한 나는 다시 의식을 잃은 척했다. 월급쟁이로 살아온 눈칫밥이 얼만데.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거친 손길이 느껴졌다. 순간 얕게 들리는 호흡 소리. 느낌을 보니 단장 같았다.

"무의식중에 움직인 것 같으니, 하던 일 계속해."

"분명 의식을 차린 것 같았는데…."

"파양초를 이만큼 흡입하고 제정신을 유지한 인간을 그동안 봤었나?"

"모, 못 봤습니다."

"신경 끄고 파양초나 계속 피워."

"알겠습니다."

다행히 넘어간 것 같았다.

파양초?

내 머리맡에서 뭔가를 계속 태우는 것 같았는데, 전에 한 번 맡아본 냄새였다.

창고에서 만난 사내가 건넨 연초.

'그거였나?'

가방에 연초 꾸러미를 넣고 다녔는데, 그 연초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파양초는 처음 들어본다.

무슨 효과이기에 내 머리맡에 피우는 거지?

두 가지는 확실했다.

좋은 효과는 절대 아닐 것 같다는 거. 그리고 내게 쓰기 위한 용도로 가져온 풀때기라는 거.

"단장, 한 줌 분량을 다 태웠습니다."

"다음 교대자가 올 테니, 녀석의 머리맡에 파양초를 추가로 더 올려놔. 중독되면 두통이 심해지니까, 서둘러."

"다, 다 했습니다."

"바로 교대한다."

잠시 후, 단장 일행이 나가고 두 명이 새로 들어왔다. 코쟁이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머리맡에 놓인 파양초를 조심스레 태우며 대화를 나눴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한 거야?"

"주술사에게 구한 거라고 하던데."

"주술사?"

"파양초를 장기간 흡입하면 영혼이 나가서 텅 빈 인형이 된다고 하더라고. 바보가 돼버리는 거지."

"그런 걸 왜 신입한테 쓰는 거야?"

"단장이 흘린 말로는 암시를 건다고 했어."

"암시? 무슨 암시?"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이번 임무에서 이 녀석은 버리는 패야."

"확실해? 이 녀석, 마스터 직속 휘하라고. 훈련 성적이 역대급이라 마스터가 직접 키운다고 데려간 거 몰라?"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암시잖아, 암시. 뻔하잖아. 붐(Boom)."

"...."

"입 다물고 시간이나 정확히 재. 파양초를 과다 흡입하면 정신이 오락가락해진다니까."

"아, 알았어."

긴장한 듯 파양초를 태우던 코쟁이들도 시간이 지나자, 다른 이들과 교대했다.

이번엔 새로 투입된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은 코쟁이 녀석들과 달리 조직의 소문에 더 밝았다.

이들의 대화 주제는 당연히 나였다. 유망주가 갑자기 버린 패로 취급되니 호기심이 동한 모양. 분위기를 보니, 단장 빼곤 이 사실을 모두 몰랐던 것 같았다.

"간부들 사이에서 차기 마스터로 촉망받던 녀석인데, 무슨 일이지?"

"아케인의 예언 때문이란 소문이 있어."

"아케인? 그 점성술사?"

"마스터가 그쪽에 귀가 얇잖아. 아케인에게 이 녀석과 관련해서 안 좋은 예언을 들은 모양이야."

"예언 한마디에 버려지다니, 이 녀석도 재수 어지간히 없는 놈이네."

"이크! 다 탔다. 얼른 나가자."

난 반나절 동안 기절한 척하며 저들의 대화 내용을 유심히 엿들었다.

메인 스토리만 알고 있는 나에겐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름 없는 캐릭터들의 서브 스토리를 엿보는 느낌이랄까.

내가 알던 단순한 소설이 아닌, 이곳도 크고 작은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 내용에서 유독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점성술사, 운명의 아케인.'

인간의 운명을 예언하는 점성술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악당 혹은 영웅의 그릇을 판단할 때 그는 운명의 구슬로 그릇을 점지했는데, 그 내용에 따라 인물들은 소설 속 세상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카멜 블레이저가 받은 점지 내용이 [두 길을 걷는 탐욕 군주]였지?'

그의 점지는 소설 속에서 큰 파문을 불러왔기에 아케인은 메인 캐릭터로 취급되는 인물이었다.

악당도, 그렇다고 영웅도 아닌 중립적인 인물.

그런 그가 크룩스의 마스터와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에 내 운명이 나락으로 가는 중이었다.

'언제고 만난다면 호되게 따져야겠네.'

암살자들은 파양초의 효과를 맹신하고 있었다. 내가 깨어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단장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맥주에 약을 탔어. 시벌놈.'

맛있는 거 사준다고 넙죽 받아먹는 건 다섯 살짜리 코흘리개도 안 하는 짓인데, 개 쪽팔렸다.

다행인 건 단장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파양초가 정신을 바보로 만든다고?

'정신이 이렇게 또렷한데?'

조금 전 약을 탄 맥주를 마시고 기절한 듯 잤더니, 모든 피로가 풀린 것처럼 상쾌했다.

난 코로 깊게 숨을 마시며 파양초의 매캐한 연기를 흡입했다.

길빵을 당한 것처럼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저들이 말한 것처럼 정신이 나간다거나, 이성이 마비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오래 기절하는 척했더니 허리가 아픈 정도?

'유통기한이 지난 거 아니야?'

조금 전 코쟁이들이 구토를 해대며 도망치듯 빠져나간 것을 보니,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럼 파양초가 나한테만 안 통한다는 건데.

둘 중 하나였다.

이 몸의 원래 능력이거나, 아니면, 내가 이 몸에 빙의하면서 어떤 능력을 얻었거나.

지금은 알아볼 방법이 없으니, 참고만 해둘 생각이었다.

잠시 후, 파양초를 모두 태우자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단장이 나를 내려다보며 암시를 걸기 시작했다.

표적 제거.

표적 제거.

표적 제거.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난 표적에게 달라붙은 후 스스로 자폭하게끔 암시가 주어졌다.

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거였어?

소설 속에선 '암살자 한 명이 카멜의 눈앞에서 자폭했다.' 이거 딱 한 줄로 요약됐는데, 준비 과정은 무슨 전설급 아티팩트 제조 과정 수준이었다.

'단점도 좀 치명적인 것 같고.'

이 벌레 폭탄에는 명확한 단점이 있었다.

바로 원격으로 벌레를 터트릴 수 없다는 것.

벌레를 삼킨 대상에게 암시까지 걸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이해가 안 됐는데, 벌레를 터트리려면 숙주의 마나 운용이 필요했다.

즉, 세뇌나 암시가 아니면 벌레를 터트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원격 폭발이 가능했다면 크룩스가 그저 그런 암살 조직으로 남아 있을 리 없겠지.'

나에겐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일단 살아남기만 하면 벌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눈을 오랫동안 감고 있었더니 슬슬 졸리기까지 했다.

암시를 거는 단장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졸음을 참으며 난 묵묵히 신호를 기다렸다.

"일어나라."

"...."

기다렸던 신호가 왔다.

드디어 시작된 연기 타임.

흐리멍덩한 눈으로 난 단장 앞에 섰다. 침을 뚝뚝 흘리며 흐느적흐느적 그를 따라다녔다.

이성이 마비되어 단장의 목소리에 인형처럼 움직이는 모습.

내가 연기에 이렇게 소질 있었나?

크룩스 조직원은 확실히 연기도 교육을 잘 받는 모양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연기 흉내가 자연스레 잘됐다.

베테랑 배우처럼 영혼이 없는 바보처럼 움직이길 잠시, 고개를 끄덕인 단장은 더는 내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앞으로 벌어질 임무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빠르게 정비한다."

암살자들은 각자 준비에 들어갔다. 나를 포함해 모두 병사 복장으로 갈아입었으며 옷 안으로 날카로운 무기를 숨겼다.

새벽으로 넘어간 시간, 병사로 위장한 암살자들이 거리 밖으로 나섰다.

상업 도시답게 새벽 거리인데도 건물 곳곳은 시끄러웠다.

다만, 소란을 부리다가도 우리를 보면 조용해졌다.

눈치를 보는 모습이 역력하다.

'옷발 죽이네.'

내성 경비대는 블라이어 영지의 정예군이라 영지민들도 어려워한다더니 사실이었다.

당연히 경비대로 위장하다가 걸리면 즉결 사형이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저, 저게 뭐야?"

"불? 부, 불 아니야!?"

"내성 쪽에 불이 났어! 불이야!"

작은 소란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영지의 주인이 머무는 성에서 벌어진 큰 화재.

내성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얼마나 큰 불인지, 매캐한 연기 위로 컴컴한 하늘이 붉게 물들 정도다.

[큰불이 날 거요. 그때 움직이시오.]

신호가 떨어졌다.

"사냥을 시작한다."

단장을 시작으로 암살자들은 내성으로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표적을 사냥하기 위한 암살자들의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오직 나만이 멍한 눈빛으로 그들의 뒤를 쫓을 뿐이었다.

'사냥 좋아하네. 정글 속 임팔라 새끼들 주제에.'

물론, 그 두 눈동자 속에는 짙은 조롱이 담겨 있었다.

* * *

"병사들은 모두 이쪽으로 모인다!"

"물통을 준비해. 서둘러!"

내성 안으로 진입하는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큰 화재로 혼란에 빠졌는지, 열린 성문 사이로 사람들이 정신없이 북적거렸다.

내성에 들어서자, 화재 모습이 눈에 담겼다.

큼지막한 보관 창고에서 번진 불이 그 주변 건물을 태우며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작정하고 벌인 짓 같았다.

"물통을 들고 우물로 움직여! 어서!"

기사들의 성난 지휘에 병사들, 시종들 가릴 것 없이 물통에 물을 옮기며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모든 시선이 화재에 집중되어 있을 때, 보관 창고 반대편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일곱의 병사들이 있었다.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은 성벽을 따라 빠르게 내달렸다. 성벽 끝자락에 솟구친 웅장한 첨탑이 그들의 목표였다.

"거기!"

그때 반대편에서 기사들이 뛰어오더니 우리를 막아섰다.

기사의 수는 고작 셋.

하지만 그들이 앞에 서자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침이 바짝 마를 정도.

어깨에 달린 푸른 휘장이 보이자, 그들이 정식 기사임을 알게 됐다.

정식 기사는 소설에서 괴물 같은 실력을 뽐내는 클래스로 표현된다.

최소 오라 3성급.

능숙한 마나로 초인 같은 능력을 내는 괴물들이란 뜻이다.

참고로 난 이제 갓 오라를 깨친 1성급 암살자 뉴비였다.

단장이 2성급이었지 아마?

이곳 멤버로는 대응 불가능한 전력. 그런 기사들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앞에 선 단장에게 물었다.

"혹시 윌리엄 공자님을 봤나?"

"1공자님 말씀입니까?"

"그렇다."

"못 봤습니다."

"이런…."

기사들은 짧게 혀를 차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들의 목적이 1공자의 행방인 것 같았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이지? 소집령이 떨어진 곳은 이 방향이 아닐 텐데?"

"아, 그게...."

"화재 대응 중 아니었나?"

"저희는 따로 명을 받고 첨탑으로 가는 중입니다."

"첨탑?"

"인위적인 화재라 불미스러운 세력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 첨탑에서 감시를…."

"아. 그렇군."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기사들은 크게 의심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다던 1공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호위 기사로서 1공자를 서둘러 찾아야 했다.

"혹여라도 1공자님을 찾게 되면 우리에게 바로 알리도록."

"충!"

거수하는 동안 기사들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엄청난 몸놀림.

더럽게 빠르네.

인간 맞아?

정식 기사와의 조우로 잔뜩 긴장했는지, 암살자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기사들의 존재감이 확실히 컸던 모양. 호랑이 굴이 따로 없었다.

"시간이 지체됐다. 서두른다."

밤하늘을 가른 듯 까마득한 높이의 첨탑이 우릴 반겼다. 블라이어 영지 전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블라이어 영지의 랜드마크였다.

입구를 감시하는 병사들은 화재 진압에 동원됐는지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표적이 머무는 꼭대기 층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탁!

첨탑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계단 밟는 발소리만 허공에 조용히 울렸다.

카멜 공자는 이 시간, 첨탑 꼭대기에 있을 것이란 정보가 있었다.

암상인이 확언할 정도로 확실한 정보라고 했는데, 그는 누구에게 이 정보를 얻게 된 것일까.

'카멜은 진짜 첨탑 꼭대기에 있거든.'

그리고 난 조금 전 기사들이 애타게 찾던 윌리엄 공자의 위치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첨탑 꼭대기에 다다랐다. 숙련된 암살자답게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

실력은 없지만, 체력 하난 좋은 녀석들이었다.

첨탑 꼭대기와 이어진 통로는 모두 세 곳. 단장은 그중 중앙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진입한다."

콰앙―!

계단 끝, 닫힌 철문을 부수듯이 열고 들어간 순간이었다.

"아, 기다렸던 손님들이 왔군."

맑되 무미건조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머리, 짙은 회색의 눈동자를 지닌 건장한 청년이 우리 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6화 구원자의 존안을 뵙습니다!

카멜 블레이저.

챕터1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메인 스토리의 악당.

그리고,

"…이게 무슨!?"

카멜이 시선을 돌리자, 그와 함께 있던 청년도 놀란 표정으로 우릴 바라봤다.

카멜과 묘하게 닮은 청년.

카멜의 형인 윌리엄 공자였다.

병사 복장을 했지만, 석궁과 단검을 움켜쥔 수상함에 윌리엄은 대로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암살자들은 윌리엄 공자를 발견하곤 잠시 멈칫했다. 조금 전 기사들이 급히 찾고 있던 인물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의외의 인물이 표적 근처에 있자, 암살자들은 잠시 주춤했다.

같이 제거하기엔 너무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찰나의 순간,

"...!"

그 고민을 덜어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카멜이 윌리엄 뒤쪽에서 미소를 지었다.

손에 들린 단검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푸욱―!

"끄어어어억! 너… 너!!!"

"금방 끝날 겁니다. 형님."

"끄아악!"

절망 섞인 비명과 함께 두 사내의 검은 머리카락이 차가운 바람과 뒤섞이며 흩날렸다.

윌리엄의 심장을 냉혹히 꿰뚫고 나온 한 자루의 단검.

카멜은 그 튀어나온 검 끝을 천천히 비틀며 우리를 바라봤다.

씨익―

그 섬뜩한 미소에 소름이 올라온다.

미친놈.

그 미소가 신호가 됐다.

단장이 이를 악물곤 외쳤다.

"표, 표적 제거!"

암시가 떨어졌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난 주저 없이 일행을 지나쳐 카멜에게 질주했다. 내가 맹렬히 다가오고 있음에도 카멜의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난 카멜의 왼손에 들려 있는 구슬에 집중했다.

보호 권능이 깃든 마법 구슬.

하지만 정보와 다르게 구슬은 하나가 아니다.

무려 '다섯 개'였다.

그리고 형을 앞세운 인간 방패까지.

소설 속에서 읽은 내용과 똑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를 거다."

카멜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사까지.

나는 그대로 수직 낙하하듯 카멜 앞에 바짝 엎드리곤 외쳤다.

"항복하겠습니다!!!"

굴욕적이라고?

지금 상황에선 나 같은 인간 폭탄이 트럭째 몰려와도 카멜을 죽일 수 없었다.

아마 크룩스의 마스터가 와도 안 될걸?

왜냐고?

아까 들었잖아.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회귀자' 카멜 블레이저.

저놈은 현재 상황은 물론 향후 10년 이내 벌어질 사건을 모두 알고 있는 대악당이었다.

회귀한 악당이란 얘기였다.

그는 악당이 10년 전으로 회귀하면 얼마나 판타스틱(?)한 세상이 펼쳐지는지 알려주는 인물이었다.

그는 탐욕을 위해 지배를 즐기는 독재자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명예나 명분, 양심은 개한테 줘버린 인간이었다.

눈앞의 그림만 봐도 딱 답이 나오지 않나?

형을 뒤에서 찔러 죽였다.

개 같은 놈.

그런데 이건 내 속마음이고,

"구원자의 존안을 뵙습니다!"

난 카멜을 향해 이마를 쿵쿵 찍었다. 내 입에선 카멜을 향한 꿀 같은 드립이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잖아?

나도 살아야지.

"뭐지?"

"무, 뭐냐!"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앞뒤에서 똑같은 물음이 튀어나왔다.

카멜과 단장이었다.

자폭하라고 보냈더니, 암살자가 표적에게 항복을 선언하는 황당한 상황이다.

카멜은 자신이 아는 미래와 달라진 상황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고, 단장은 신입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듯 입을 벌린 채 경악하고 있었다.

난 고개를 살짝 틀어 단장을 바라봤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단장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이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미 늦었어.

난 그동안 단장에게 담아온 내 진심을 처음으로 입 밖에 표출했다.

"시발, 단장 이 개새끼야!"

단장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이밀자, 암살자들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저놈과 표적을 죽여!"

단장의 사나운 외침에 암살자들이 앞으로 쇄도했다.

나는 다급히 고개를 돌려 구명줄이 될 카멜을 올려다봤다.

그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눈빛.

확실히 이 녀석은 상대하기 어려운 놈이었다.

난 계획한 대로 생각해둔 말을 내뱉었다.

"'그'가 보내서 왔습니다!"

"그?"

"저, 저도 그가 누군지는 잘 모릅니다. 그는 당신을 '다시 태어난 구원자'라고 불렀습니다!"

"...."

그 말이 끝난 순간,

콰작―

카멜이 손에 들고 있던 구슬 하나를 파괴했다.

구슬에서 빛이 터져 나오더니, 카멜과 나를 부드럽게 감쌌다.

둥글게 만들어진 보호막.

카앙― 캉―! 쾅!

그 위로 암살자들이 석궁을 쏘고, 단검을 찔렀지만, 보호막은 불꽃만 토해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멜은 보호막 바깥에서 발악하는 암살자들을 한 차례 훑어보곤 가볍게 턱짓을 했다.

작은 신호.

신호가 떨어지자, 통로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벼락처럼 들이닥쳤다.

매복이었다.

"...!"

푸른 휘장을 어깨에 단 정식 기사들.

그 수가 무려 열 명이다.

파앗―

최소 오러 3성급.

기사들의 몸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두 눈을 깜빡인 순간,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빠르다.

그리고,

"크, 크억!"

"끄아아악!"

도륙이 시작됐다.

내 눈에 정말 강해 보였던 단장이 고작 다섯 번의 칼질에 목이 날아갔고, 남은 암살자들에게 시선이 닿았을 땐 그들은 이미 온몸이 꿰뚫린 채 죽어있었다.

몰살하는 데, 10초? 아니 5초도 안 걸린 것 같았다.

'…시발.'

죽은 이들의 모습이 눈동자에 박히자,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두 손이 덜덜 떨려왔다.

왜냐고?

태어나서 살인 장면을 처음 보는데 솔직히 무섭잖아.

그나마 다행인 건, 정신줄을 끝까지 안 놓은 거다. 암살자의 기억이 확실히 내 멘탈을 강하게 만들어준 모양이었다.

피 묻은 검을 겨누며 기사들이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꿀꺽―

난 마른침을 삼키곤 카멜을 찾았다.

카멜은 형인 윌리엄의 시신을 질질 끌고 첨탑 창가로 향하고 있었다.

형을 부축하듯 세운 카멜은 죽은 윌리엄과 함께 창가에 섰다.

차가운 바람을 타고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저 드넓은 블라이어의 영지가 보이십니까? 부친도 영지민도 모두가 저것이 형님 것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카멜은 윌리엄의 심장에 박힌 단검을 뽑았다.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그는 말을 이었다.

"블레이저 가문을 위해 이 영지를 제게 주십시오. 전 이곳에 만족하지 않고 왕좌를 세울 겁니다."

그는 윌리엄의 시체를 첨탑 밑으로 밀어버렸다. 빠르게 추락하는 형의 시체를 응시하며 카멜은 작게 중얼거렸다.

"제 왕좌의 첫 발판이 되어 주십시오."

"...."

와, 살벌한 새끼.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미친 또라이였다.

모든 것을 갖기 위해 혈육을 죽인 행위는 그 어떤 핑계를 대도 정당화할 수 없었다.

물론, 놈은 곧 그것보다 더한 짓도 할 새끼였다.

"끌고 와."

기사들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내 어깨를 붙잡고 카멜 앞에 던져놨다.

일단 여기까진 생각대로 흘러갔다. 이제부턴 진짜 긴장해야 했다. 말 한마디에 목이 날아갈 수 있었으니까.

"다시 묻지, '그'는 누구지?"

"저, 정말 모릅니다!"

"그가 나를 '다시 태어난 구원자'라 말했나?"

"그렇습니다! 전 그가 보낸 전달자로...."

"아니. 그걸로는 부족해. 그가 내 '비밀'을 알고, 내 상황을 파악했다면 너에게 더 확실한 단어를 알려줬을 거야. 내가 이 자리에서 너를 살려줄 수밖에 없는 단어."

"...."

"죽여."

이 새끼야!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

바닥에 비친 검 그림자가 하늘로 솟구쳤다.

죽는다!

난 울부짖듯 외쳤다.

"피, 피를 마시는 잔!!!!!"

"잠깐."

카멜은 손을 든 채 잠시 침묵했다.

그 모습에 기사들은 의문 섞인 눈빛을 보냈다.

주군은 적에게 자비가 없는 냉혹한 사람이었다. 한 번 내린 지시에 주저가 없는 분인데, 저리 갈등하는 모습이라니.

'피를 마시는 잔'이 무엇이길래?

잠시 후, 카멜이 고개를 젓자 기사들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검을 치우곤 물러났다.

주군이 명을 번복하는 경우를 처음 봤기 때문이다.

나는 바짝 타들어가는 입술을 적시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뒷덜미가 서늘했다.

칼날이 닿았다가 떨어진 흔적.

1초만 늦었으면 목이 뎅강 잘렸다.

'이 개 같은 시키가….'

진짜 욕밖에 생각이 안 났다.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카멜은 내 앞에 앉아 단검으로 카펫을 콱콱 찍었다. 시선은 여전히 나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감정 하나 없는 눈빛.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놈이 날 죽이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피를 마시는 잔은 카멜의 역린이니까.'

피를 마시는 잔은 회귀 전 카멜을 죽인 대악당의 별명이었다. 그 이름을 듣고도 나를 죽일 수 있을까?

카멜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그려지자,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뜻대로 안 될 때 짓는 놈의 미소다.

살았다.

"'그'라… 계획에 없는 놈이 나타났어. 미꾸라지에 불과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

"심문할 것이 있으니 놈을 지하 감옥에 가둬놔."

"충!"

"형님을 죽인 암살자다. 그렇게 공표하도록."

"아, 아니! 그게 무슨…!"

"살린 김에 써먹어야지."

난 억울한 표정으로 카멜을 바라봤지만, 사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 목표는 처음부터 '생존'이었다. 사람을 죽였다고 누명을 쓴들 지금 상황에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중요한 건 놈이 내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는 것이다.

날 살린 것이 그 증거다.

이제부터 놈의 행보를 떠올리며 그 틈을 이용해 벗어나야 했다.

'놈을 속일 수 있을까?'

첨탑 지하에 자리한 감옥으로 끌려가는 동안, 내 머릿속은 팽팽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영업 교육을 마스터한 월급쟁이의 말발이 얼마나 먹힐지 모르겠다.

각오는 했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현실과 소설이 피부로 느껴지는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컸으니까.

* * *

"...."

카멜은 첨탑 꼭대기 창가에 홀로 서서 시뻘건 화마(火魔)로 뒤덮인 영지를 바라봤다.

영주관 다음으로 보안이 철저하다는 광물 저장 창고가 모조리 불타고 있었다.

핵심 요충지였기에 영주성 사람들은 창고 불을 끄기 위해 제 목숨처럼 달라붙었다.

아마 다른 곳으론 시선도 주지 못할 것이다.

"시원하게 잘 타는군."

하지만 카멜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저 광물 창고를 태운 것이 자신이었으니 당연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영주가 되는 길을 앞당겨야 했으니까.

형이 죽었으니, 이제 자신의 앞길을 막는 이는 한 명뿐이다.

불이 잡히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낸다.

카멜은 탑을 천천히 내려왔다.

그가 향한 곳은 영주관이었다.

"문안을 알려라."

블라이어의 주인, 리암슨 자작의 처소에 카멜이 도착했다.

카멜이 문 앞에 다가섰지만, 이를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기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물러났다.

"아버님, 저입니다."

"우, 윌리엄이냐?"

문 너머로 1공자 윌리엄을 찾는 자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멜이 이곳에 나타날 리 없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카멜은 미소를 짓고 처소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문을 닫기 전, 그는 기사들을 한 차례 바라봤다.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문을 닫는 순간, 기사들은 검을 뽑아 들고는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저택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7화 사과해라.

"...."

퀴퀴한 약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병환으로 몸져누운 지 한 달.

리암슨 자작의 몸은 앙상한 뼈밖에 남지 않았다.

노환이라, 약이나 축복으로도 호전이 힘들어 보였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자작은 눈앞에 나타난 아들이 윌리엄이 아닌 카멜이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 네가… 어찌! 윌리엄은? 쿨럭!"

"제가 못 올 곳을 온 모양입니다. 아님, 죽었어야 했나요?"

"우, 윌리엄! 윌리엄을 불러라!"

"형님은 암살자들에게 죽었습니다."

"이, 이...!"

"아버님이 제게 보낸 암살자들에게 말이죠."

"이놈!!!"

자작은 호통을 내지르며 기사들을 불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방문을 두드리는 이가 없다.

카멜은 자작의 침대 앞에 섰다. 그리고 베개를 집어 들었다.

그런 카멜의 모습에 자작은 허탈하게 웃었다.

"왜 저는 안 됩니까?"

"네가 지워버린 마을들을 잊은 것이냐? 무려 여섯 곳이다!"

"세금은 가문의 존속에 필수적인 겁니다. 본보기를 보였을 뿐입니다."

"네놈은 악마다. 이 영지를 피로 물들게 할 거야!"

"그럼, 더 철저하게 준비하시지 그랬습니까?"

"그 전에 죽였어야 했어. 내 망설임이 모두를 죽게 했구나...."

"망설임이 없었더라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카멜은 베개로 자작의 얼굴을 거칠게 짓눌렀다. 그리고 온몸으로 베개를 누르기 시작했다.

카멜의 몸 밑에서 미친 듯이 버둥거리는 자작.

그런 자작을 내려다보며 카멜은 미소를 지었다.

"전 모든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자작의 두 팔이 축 늘어졌다.

구겨진 옷을 탈탈 턴 카멜은 더는 자작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문밖으로 나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이 보인다.

복도는 이미 피바다였다.

집사를 포함한 리암슨 자작을 따르던 시종들은 모조리 도륙된 상태였다.

피로 물든 복도를 차박차박 걸으며 카멜은 지시를 내렸다.

"아버님께서 형님의 암살 소식에 충격을 받아 돌아가셨다. 모든 성문에 부고 깃발을 달고 장례식을 준비해라."

"충!"

"화재가 진압되는 대로 기사 단장과 그를 따르는 기사들을 포박해라. 내성 책임자로서 광물 창고를 태운 책임을 물어야겠다. 이 모든 지시는."

카멜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건네자, 기사들은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고 서신을 받들었다.

"나 카멜 블레이저가 블라이어 영주의 이름으로 명한다."

"충!"

기사들이 자리를 비우자, 카멜은 영주관을 나와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급한 일은 전부 끝났지만, 진짜 중요한 확인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뒤틀어버린 존재.

그 암살자 놈.

원래는 자폭으로 터졌어야 할 놈이 용서를 구하며 나타났다.

이번 계획의 유일한 오점이자 변수였다.

'내 회귀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라….'

암살자가 '그'라고 칭했다.

암살자를 보낸 그가 누군지 궁금했다.

미래의 기억을 뒤적거렸지만, 딱히 떠오른 인물이 없었다.

자신 외에 미래를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무척 치명적인 일이었다.

회귀 후 몇 년을 웅크리고 고심하며 계획한 대륙 정벌의 밑그림이 모두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암살자 놈을 먼저 만나봐야겠어."

카멜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첨탑으로 향했다.

암살자에 대한 처우는 일단 보류였다. 물론, 죽일 확률이 아주 높았지만 말이다.

* * *

첨탑 지하 감옥.

음울하고 칙칙한 철창 사이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퍽―!

"끄어어!… 쿨럭!"

난 꽉 막힌 속을 토해내듯 피를 한 움큼 게워냈다.

발끝에 고인 피 웅덩이를 보니, 제법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맞았지?

낮이야, 밤이야?

살아서 잡혀 온 것까진 좋았는데,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 숨어 있었다.

바로 지하 감옥 고문관 새끼.

그는 하루라도 사람을 패지 못하면 무좀이 난다는 변태 새끼였다.

'누구냐?'라는 말에 '암살자다!'라고 답했더니, 그때부터 복날의 개처럼 쇠사슬에 매달려 처맞기 시작했다.

'방금은 살짝 위험했다.'

조금 전 맞은 부위는 복부였는데, 충격이 더 가해졌다면 내장에 심한 손상이 올 뻔했다.

싸움꾼도 아니고 이딴 지식을 평범한 회사원이 알 리 없다. 크룩스에서 배운 암살자의 지식이었다.

'더 맞으면 살짝 위험한데.'

온통 피로 물든 방 안.

눈앞의 살벌한 돼지 새끼.

지독한 고문까지.

공포에 질릴 만도 한데 난 침착하게 상황을 바라봤다.

못이 박힌 고문관의 몽둥이를 보고도 두려워하기보단 최대한 빗맞으려고 몸을 틀었다.

정신이 공포와 패닉에 삼켜졌지만 버틸 만했고, 통증으로 미칠 것 같다가도 참을 만했다.

뭐랄까.

자극이 일정 한계를 넘어가면 리셋이 된다고 해야 하나.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지금은 썩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새끼가! 눈깔 안 치워!"

퍽―!

"끄으으…."

내 무던한 반응이 고문관의 성질을 건든 모양이다.

처음에는 놈의 비위를 맞춰주려고 했다.

난 평화주의자니까.

그런데 놈은 그저 나를 패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삐걱삐걱 흔들리는 쇠사슬 아래, 난 피 섞인 침을 퉤 뱉어내고는 고문관을 빤히 바라봤다.

"사과해라."

"뭐? 사과? 푸하하하! 이런 정신 나간 새끼를 봤나."

고문관은 끅끅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나름 신선하게 들렸나 보다. 그래. 내 목숨을 쥔 위치니, 내 말이 웃겨 뒈지겠지.

그런데 넌 모를 거야.

네 목숨을 움켜쥔 인물이 나란 사실을.

"살고 싶으면 '잘못했습니다.'를 외치고 먹을 것 좀 가져와."

"아직 덜 맞았구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혀를 놀리면 넌 죽으니까."

"그 혀를 뽑아버리면?"

"감당할 수 있겠어? 난 중요한 심문 대상인데, 혀를 잘못 뽑았다가 네 목이 뽑힐 수도 있어."

"...."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린 고문관은 한쪽에서 불로 달군 쇠꼬챙이를 들고 다가왔다.

"한쪽 눈 정도면 괜찮겠지."

"이 돼지 새끼가...."

"죽여달라고 빌게 해주마."

어이? 적당히 하지?

하지만 고문관은 '적당히'가 없었다. 돼지 새끼라고 한 게 그렇게 싫었어?

새빨갛게 달궈진 꼬챙이가 다가왔다. 그 섬뜩한 열기가 내 뺨을 타고 눈으로 올라오려는 순간, 난 '좆됐다.'를 속으로 외쳤는데, 고문관이 움찔하곤 뒤를 돌아봤다.

타이밍 한번 죽이네.

설마, 악당 새끼를 내가 반기게 될 줄은 몰랐다.

"비켜라."

"허, 헉! 카멜 공자님."

카멜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기사 하나를 대동했는데, 고문관은 그 둘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모습.

기사는 고문관을 무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공자가 아니라 영주님이시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카, 카멜 영주님 오셨습니까!"

"거칠게 다뤘군."

신발이 피로 물들자, 카멜은 미간을 구겼다. 더러워진 신발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게 분명했다. 내 모습은 보고도 있지 않았으니까. 그 모습에 고문관은 넙죽 엎드렸다.

"바, 반항이 심해서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놈에게 뭐든 물어보십시오! 다 불게 만들 테니."

반항? 시발아, 배고파서 밥 달라고 한 거밖에 없는데 무슨 반항.

이걸로 네놈의 운명은 정해졌다.

크흠, 목을 한 번 풀었다.

그리고 억울한 얼굴로 크게 외쳤다.

"고문관님! 정보는 이미 다 불지 않았습니까? 제발 풀어주십시오!"

"뭐?"

내 말에 반응을 보인 건 카멜이었다. 당연히 고문관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소리냐!? 난 네놈에게 정보 따윈 들은 기억이 없어! 어디서 수작질이야!"

"당신이 고문하면서 다 불라고 했잖아! 난 전달자라고! '그'에게 들었던 것을 전달하기만 하는데, 숨길 게 뭐가 있어!"

"…아니야! 아닙니다, 영주님!! 이 녀석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문관."

"네, 네! 영주님, 말씀하십시오!"

"고문은 왜 한 거지?"

"…그건!"

그러게, 그냥 네 방에서 잠이나 처주무시지. 왜 악취미를 살려보겠다고 부지런히 날 고문하냐고. 이 두툼한 엿가락 같은 새끼야.

차마 손이 근질거려서 고문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나 보다.

고문관이 우물쭈물한 순간, 그의 운명은 정해졌다.

내가 어중이떠중이 죄수였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카멜의 민감한 '약점'을 알고 있는 그의 전달자다.

"리옹."

카멜이 나직이 이름을 부른 순간, 기사의 검이 벼락처럼 뽑혀 나왔다.

"제, 제발… 살려…! 커억!"

기사의 검이 고문관의 심장을 꿰뚫고 들어갔다. 주저앉은 고문관이 간절한 눈빛으로 올려다봤지만, 기사는 검을 뽑은 후 가차 없이 그 목을 날려버렸다.

데구르르―

목이 굴러와, 내 발밑에서 멈췄다.

공포의 한순간이 굴러온 얼굴에 담겼다.

당한 것을 되돌려 준 것뿐인데, 기분이 더럽다.

확실히 난 악당 타입은 아닌 모양이었다.

기사가 검을 털며 내게 다가왔다. 그는 품에서 붉은 병을 꺼내더니, 내게 먹였다.

회복 물약.

품질이 좋은 것인지, 컨디션이 빠르게 회복됐다.

그래도 한동안은 움직이기 힘들 것 같았다. 고문관 새끼의 손속은 그만큼 잔인했다.

잘 죽인 건가?

기사는 의자를 가져와 내 앞에 놓았다. 카멜은 의자에 앉은 후 나를 올려다봤다.

내 시선은 카멜에 닿기 전에 잠깐 기사에게 향했다.

브론즈색 머리카락에 무감정한 눈빛. 날렵한 검술을 쓸 것 같은 체구다.

묘하게 분위기가 카멜과 닮았다.

카멜의 입에서 나온 기사의 이름을 분명 들었다.

'리옹 마트레인.'

학살자의 오른팔.

리옹은 카멜이 지닌 회귀자의 지식으로 일인군단의 힘을 얻게 되는 카멜의 검 중 하나다.

이곳, 블라이어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시작했다고 하더니, 이때부터 충성을 맹세하고 신뢰를 받았던 모양이었다.

이 자리에 리옹을 데려왔다는 것이 카멜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리옹은 아마 몇 차례의 시험과 숙고 끝에 선택됐을 것이다.

'호위가 필요한 녀석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

카멜은 카리스마형 군주였다. 그는 무력에 큰 재능이 없는 대신 누군가를 지배하는 데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

그만큼 통찰력도 뛰어나고 심계(心計)가 깊어 쉽게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놈을 속여야 한다.

위험한 도박이지만, 성공만 한다면 크룩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그럼, 들어볼까?"

"...."

"'그'가 너를 왜 보냈지?"

"동맹 제안입니다."

"동맹? 동맹은 이익이 서로 일치해야 가능한 것인데, '그'가 내게 원하는 게 있나?"

"황금입니다."

"...."

황금이란 말에 카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막대한 황금이 필요하고,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 황금을 제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블라이어는 수많은 광산을 소유하고 있지만, 황금 광산은 없다."

"한 달 안에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흥!"

코웃음을 쳤지만, 카멜은 속으로 상당히 놀랐다.

'황금 광산의 존재를 알고 있다.'

광산 개발은 카멜의 다음 계획이었는데, '그'는 그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다.

회귀 전 카멜의 기억 속에 없었던 인물.

대체 어떤 놈일까.

'설마, 나와 같은 회귀자인가?'

카멜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다.

가진 '성질'이 달랐다.

카멜은 그를 모른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상대가 회귀자라면 번거롭게 정체를 밝히고 전달자를 보낼 필요가 없다. 어떻게든 회귀 경쟁자를 죽이기 위해 먼저 수를 썼겠지.

즉,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건데.'

카멜은 일종의 '예지'가 아닐까 추측했다.

핵심은 그가 자신을 얼마만큼 알고 있냐는 것이었다.

많이 알면 많이 알수록 큰 위협이 되는 인물.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카멜이 미소를 띤 채 물었다.

"동맹을 거절한다면?"

"에토르 가문과 손을 잡겠다고 했습니다."

"하하하!"

카멜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광산 개발 이후 첫 발판으로 쓸어버릴 에토르 영지와 손을 잡겠다라.

이건 한마디로 카멜의 앞길을 철저히 막겠다는 뜻이었다. 정확하게 자신의 약점을 파고든 선택지.

"내가 아주 큰 착각을 했어."

카멜은 큭큭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미꾸라지 따위가 아니었다. 카멜은 이를 환하게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 표정 변화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발, 이건 좀 무서운데?'

누군가를 기필코 죽이겠다는 살심(殺心)을 드러냈을 때, 카멜은 웃는다.

바로 저렇게.

8화 그, 더미(Dummy)

이빨 보이지 마. 무서우니까.

다행히 어그로는 튀지 않았다.

카멜은 '그'라는 인물에 대해 큰 위협을 느끼는 것 같았다.

카멜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될수록 나에겐 좋다. 그래야 추후 나에게 향하는 시선을 떨어트릴 수 있을 테니까.

'더미(Dummy)를 놓길 잘했네.'

카멜에게 언급한 '그'는 일종의 더미였다.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탈출 이후 생존에 필요한 힘을 얻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고, '그'란 더미는 카멜의 시선을 끌며 시간을 버는 역할을 할 것이다. 지금까진 더미가 카멜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듯 보였다.

"동맹을 통해 내가 얻게 되는 이득은?"

"모릅니다."

"몰라?"

"동맹 의사를 표한다면 직접 얼굴을 보고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직접 얼굴을?"

그 말에 카멜이 흥미를 보였다.

"시간과 장소는?"

"보름 후 엘레토르 성곽 주변에 자리한 작은 마을입니다. 지도를 주신다면…."

"그건 나중에 알아보면 될 테고, 동맹 표시 말인데, 혹시 너를 풀어주는 건가?"

"...."

누가 지능캐 아니랄까 봐. 눈치가 더럽게 빨랐다.

하지만 단순히 목숨을 구걸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악당에겐 더 뻔뻔해져야 한다.

"2, 2만 골드."

"뭐?"

"절 풀어주는 것과 2만 골드를 요구합니다."

금전 요구에 카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금 광산 지분을 거래 조건으로 내미는 상대가 고작 2만 골드를 요구하다니.

"널 풀어주는 건 그렇다 치고 2만 골드는 뭐지?"

"제가 쓸 겁니다."

"뭐?"

"제 노후 자금이거든요."

"...."

"저 암살자 그만둘 겁니다."

카멜은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회귀 전, 자살 공격으로 자신의 얼굴에 큰 상처까지 남겼던 놈이, 이젠 눈앞에서 은퇴를 언급하며 돈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

뜻대로 흘러가지 않은 상황에 카멜은 짧게 혀를 찼고, 난 아주 해맑게 두 눈을 끔뻑이며 카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말 시킨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이 정도까지 했으면 살려줘, 새끼야.

잠시 숙고하던 카멜은 곧 리옹을 불러 몇 마디를 남기고는 나를 바라봤다.

"동맹에는 신뢰가 필요한 법이지."

"무, 물론입니다! 당장 저를 풀어주신다면 '그'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겁니다."

"그 동맹 표시 말인데. 잠시 미뤄야겠어."

"…네? 그게 무슨."

"나도 사실 확인이 필요하니까."

무슨 확인이 필요하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리옹이 안 보인다. 이 녀석은 어딜 간 거야.

살짝 불안감이 올라왔을 때, 리옹이 누군가를 데리고 감옥에 들어왔다.

탁한 회색 로브를 걸친 작은 체구의 인물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네 능력이 필요하다."

눈앞의 사내가 로브를 벗는 순간, 나는 숨을 헙 들이켰다.

얼굴 전체부터 목 아래로 이어지는 부분까지, 모든 부위가 흉측한 문신으로 빼곡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어딘가 섬뜩함을 자아냈다.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놈이었다. 인간을 많이 죽여본 느낌이 난다고 해야 하나?

소맷자락 사이에서 투명한 수정 구슬을 꺼내는 모습에 난 놈의 직업을 바로 파악했다.

'주술사!'

신비 혹은 흑주술로 크고 작은 기적을 발휘하는 존재들.

신비 쪽은 자연과 생명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해코지당할 걱정이 없지만, 눈앞의 놈은 아무리 봐도 흑주술 쪽에 특화된 놈 같았다.

악당 곁에 붙어 있는 놈이니 당연한 건가?

수정 구슬을 내밀고 물건을 품평하듯 나를 살피고 있는 눈빛이 영 불안했다.

"이놈의 기억을 어디까지 뽑을 수 있지?"

"죽여도 됩니까?"

죽여도 되냐니.

첫마디부터가 소름 돋는다.

이 문신충 새끼가.

그나저나, 기억을 뽑는다고? 그 짓이 벌써 가능해?

"죽는 건 곤란해."

"무슨 기억이 필요하신 겁니까?"

"최근 한 달 정도의 기억 정도라면?"

"백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카멜은 잠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백치가 됐을 때를 잠시 계산해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다."

'…이런 시발.'

잠시 깜박했다.

카멜 저 새끼는, 피도 눈물도 없는 1챕터 대악당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조금 전까지는 분위기 좋게 교섭이 흘러가는 것 같더니, 놈은 처음부터 제대로 된 교섭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나를 살려두는 것까진 좋았는데,

'배, 백치라니!'

위기감이 몰려왔다.

변수였다.

학살자의 세력을 돕는 흑주술사들이 등장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챕터 중반 부분이었다. 설마 이 시기부터 인간의 기억을 뽑아내는 흑주술사를 곁에 데리고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카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발밑에서 의식을 준비하는 주술사의 모습에 난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냥 붐(Boom)을 터트리고 다 같이 죽어버려?'

주술사는 몰라도, 리옹의 보호를 받는 카멜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자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난 살고 싶다고.

"보름 전까지 그가 말한 장소로 제가 도착해야 합니다!"

"그 장소로 '살아서만'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아, 아니! 그 장소는 저만 알고…!"

"기억을 뽑아내면 알게 되겠지."

말이 안 통한다.

분명 다른 의도로 내 기억을 뽑아내려는 게 분명했다.

'그의 정체!'

카멜은 '그'가 자신과 접촉했을 거라 확신하고 이 짓을 벌이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이 뽑히면 구라가 들킬 텐데, 그럼,

'죽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때, 주술사가 몸을 일으키더니, 카멜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리를 잠시 비워주셔야겠습니다."

"나가란 말이냐?"

"의식에 필요한 약초를 태울 건데, 정신에 무척 해롭습니다."

"정신에 해로운 약초?"

"파양초란 것인데, 중독되면 정신 방벽이 무력화됩니다. 기억을 뽑기 위한 사전 준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술사의 마지막 말에 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파양초?

크룩스 암살자들이 내 머리맡에서 태웠던 독초의 이름과 같았다. 파양초의 효과가 대상의 정신 방벽을 무너트리는 것이었나.

그러고 보니, 익숙한 풀들이 내 밑으로 잔뜩 깔려 있었다.

이게 파양초라면.

'나한테는 안 통했는데?'

장시간 파양초를 흡입해도 중독은커녕 멀쩡하기만 했다. 그 덕에 암시에서 벗어나 이렇게 살아남지 않았나.

그 파양초를 나에게 태운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난 카멜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놈이 등을 돌린 채 방을 벗어나려고 했기 때문이다.

"소, 소용없을 겁니다!!"

다행히 놈의 발걸음을 멈추는 데 성공했다.

"주술에 걸리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제 기억을 알아내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에게 가호를 받았으니까요. 그는 이것까지 예상했습니다."

예상은 무슨.

일단 생각난 대로 지껄인 것이다.

왠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내 외침에 바닥에 깔린 파양초를 태우던 주술사가 클클클 웃으면서 나를 비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는구나. 네 몸에 흐르는 기운으론 파양초를 버틸 수 없어. 반나절이면 네 영혼에서 기억을 모조리 뽑아내고도 남는다."

"...."

"흐흐흐, 두렵나?"

당연히 두렵지 문신충 새끼야.

너였으면 오줌 지렸어.

난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문 채 카멜만 바라봤다. 때론 침묵이 더 강한 설득력을 보일 때가 있다. 제발 먹혀라.

"네놈 말대로 된다면 다시 얘기하지."

하지만 씨도 안 먹힌 채 카멜은 기사와 함께 문밖으로 사라졌다.

나와 주술사만 공존하는 공간.

썩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놈을 보니, 자살 충동이 올라왔다.

'확, 터트리고 죽어?'

주술사는 투명 구슬을 움켜쥔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 순간 구슬에서 반응이 나타났다.

파아아앗―!

"...!"

구슬에서 보랏빛이 흘러나와 주술사의 몸을 에워쌌다.

그때부터 주술사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웅얼거리며 파양초를 태우기 시작했다. 파양초가 타며 감옥 안을 뿌옇게 채웠지만, 주술사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몸을 둘러싼 보랏빛이 주술사의 정신을 보호한 듯 보였다.

"쿨럭, 쿨럭!"

전에 암살자들이 태웠던 양보다 훨씬 많았다.

지독한 연기에 눈과 목이 따가웠다. 화생방이 떠오를 정도의 매캐함.

다행히 그것 빼곤 멀쩡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파양초는 내게 안 통한다.

'설마, 내 능력인가?'

소설 속으로 흘러들어온 나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주어진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처음에는 이 몸뚱이의 능력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랬다면 암시에 넘어가 카멜 앞에서 붐(Boom)을 터트리지 않았겠지.'

파양초를 견디는 힘은 분명 나와 관련이 있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보랏빛으로 물든 연기 속은 음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어느 순간부터 주술사는 내 눈앞에 수정구를 올리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기억을 뽑아내려는 의식 같은데, 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파양초는 파양초고 사람을 홀리듯 빛을 뿌리는 수정이 왠지 위험해 보였다.

감옥에선 연신 주문 소리만 흘러나왔다.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어느 순간,

"...."

주문이 뚝 멈췄다.

난 살며시 눈을 뜨곤 앞을 바라봤다. 주술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수정구를 살피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주술이 실패한 듯 보였다.

'백치가 되는 건 피한 건가.'

당당하게 큰소리를 쳐놓긴 했는데, 주술이 진짜 안 통할 줄은 몰랐다.

내 능력이 파양초의 면역에만 국한된 게 아닌 건가?

이건 여유가 된다면 꼭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의 생존에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았으니까.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내 상태가 완전 멀쩡해 보이자, 주술사가 내 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자, 잠… 커억!"

이 문신충 새끼야. 이렇게 목을 조르면 대답을 못 하잖아. 대답을 듣고 싶으면 목을 놔달라고.

버둥거렸지만, 쇠사슬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목을 움켜쥐던 주술사가 갑자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전보다 거칠고 사납다.

수정 구슬이 내 눈앞에 둥둥 떠올랐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번쩍―

주술사의 두 눈이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치자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곧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으로 바뀌었다.

"크아아악!"

내가 비명을 지르는데, 뇌리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레 같은 놈! 꿇어라!'

성난 주술사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내 정신을 강제로 집어삼키는 느낌.

최면에 걸린 듯 내 눈동자 역시 주술사와 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더니 공허함이 몰려왔다. 진짜 백치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렇게 고통과 혼란이 잠재된 의식 속에서 정신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였다.

쾅―!

"...!"

머릿속에 큰 폭발이 터졌다.

아니, 폭발이 터진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카작―!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수정 구슬에 금이 가더니 파삭하며 깨져버렸다.

내 목을 조르던 주술사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난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숨 막혀 죽을 뻔했다.

"크윽! 이게 무슨…!"

반쯤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두 눈에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눈물인 줄 알았는데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액체는 붉었다.

뜨거운 콧물도 마찬가지.

눈, 코, 입 그리고 귀에서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하지만 난 그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바닥 밑 참혹한 광경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쓰러진 주술사가 보였다.

그런데,

"...머리가."

주술사의 머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폭탄에 맞은 것처럼.

9화 아, 빌어먹을 신이시여

소란스러움을 들은 것일까.

닫혔던 감옥 문이 활짝 열리며 기사 리옹이 들어왔다.

그는 눈앞의 상황을 둘러보곤 표정을 굳혔다. 잠시 후, 연기가 빠지고 카멜이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 들어왔다.

그는 머리가 터져 죽은 주술사를 잠시 응시하더니 내게 시선을 던졌다.

이유를 묻는 눈빛이다.

눈 떠보니 벌어진 상황이라, 나도 뭐라 대답을 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조금 전 던진 말이 있는데.

"소용없을 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네놈이 한 짓이냐?"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호가 제 목숨을 살렸을 뿐입니다."

씨익―

난 처음으로 카멜 앞에서 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그 미소에 답을 하듯,

"리옹."

"네."

"가서 주술사들을 더 데려와라."

뭐 이 새끼야?

카멜의 지시에 리옹이 주술사 셋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비주얼과 풍기는 기운이 딱 봐도 흑주술을 다루는 놈들이었다.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영지 한 곳에 웬 주술사들이 이렇게 많아? 특히 흑주술사들은 악명이 높아 개인플레이를 선호했기에 이렇게 모여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즉, 대가를 받고 카멜 곁에 머무는 것이 분명했다.

'회귀 직후부터 주술사들을 포섭한 건가? 어떻게?'

주술사들은 돈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아니었다. 고작 공자 신분이었던 카멜은 무엇을 제공했기에 주술사들이 곁에 머무는 거지?

'…설마?'

순간 카멜이 공자 시절에 행했던 잔혹한 행보가 떠올랐다.

마을 여러 곳을 몰살시키고 다닌 사건.

그리고 사라진 시체들.

이때부터 싹수가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그 짓의 이유가 주술사들의 포섭을 목적으로 했다면 확실히 이 새끼는 미친놈이 맞았다.

인간을 대가로 지불하고 저들을 곁에 두는 것이었으니까.

'부친이 암살자를 보낼 만도 하네.'

물론, 그 암살자 파티 중 한 명으로 내가 포함된 것은 지독한 불행이었다. 그리고, 그 불행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이놈의 기억을 뽑아내는 자에게 마을 하나를 통째로 주지."

내 생각이 맞았다.

힘을 위해 영지민도 물건으로 취급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그 잔혹한 새끼가 나를 노리고 있으니 죽을 맛이었다.

"클클클, 안 그래도 제물이 부족했는데."

"이놈은 내 거야. 눈독 들이지 마라."

"머리가 날아간 코로토니의 시신이 안 보이나? 우습게 보지 마라."

마을 하나면 그 수가 천에 이른다.

실로 파격적인 포상이라, 주술사들은 각자 탐욕을 드러낸 채 나를 잡아먹을 듯 다가왔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아, 빌어먹을 신이시여."

평소에 관심도, 찾지도 않았던 신을 찾았다. 이딴 상황에 날 던져 놨으니 뭐라도 책임을 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주술사 한 명이 성큼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마약 중독자처럼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웃는다.

무서워 이 미친 새끼야.

딸랑― 딸랑― 딸랑―

이번엔 방울이냐?

주술사의 손에 쥐어진 작은 방울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끄아아악!"

두통이 다시 시작됐다.

* * *

퍽―!

"...."

카멜은 주술사의 머리가 터지는 광경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첫 번째로 죽은 주술사와 똑같은 몰골로 죽은 주술사를 바라보며 그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암살자가 말한 대로 놈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마치 주술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일 정도.

'이게 가호라고?'

카멜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술을 건 주술사의 머리를 박살 내는 가호라니. 이딴 가호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의 기억 속에도 없는 능력.

"끄아아악!"

뒤이어 두 번째 주술사가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가 머리를 움켜쥐더니 뒹굴기 시작했다.

눈이 뒤집히고, 침을 질질 흘리는 것이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잠시 후, 축 늘어진 주술사.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

죽었다.

카멜은 셋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인을 빠르게 불렀다.

"렌구아."

"부르셨습니까?"

"지시를 변경한다. 놈의 기억이 아니라 가호가 뭔지 알아내."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만…."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중단해라. 문책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렌구아는 현재 그가 포섭한 주술사 중에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이였다.

이곳에서 그를 잃으면 앞으로의 대계에 큰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카멜은 그의 안전부터 챙겼다.

렌구아는 암살자로부터 두 걸음 떨어진 채 수정구를 붙잡고 여러 가지 주문을 외웠다.

주문마다 렌구아의 반응은 다양했다. 미간을 좁히거나,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고, 가슴을 움켜잡거나 피를 토하기도 했다.

잠시 후, 구슬에서 손을 뗀 그는 질린 표정으로 암살자를 바라보곤 카멜 앞에 섰다.

"가호가 반응을 보이는 건 정신 계열뿐입니다."

"자세히."

"놈의 정신이나 영혼에 충격을 가하면 잠시 후 지독한 반발력이 돼서 돌아옵니다. 주술사들이 머리가 터지거나 미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보다시피 몇 가지 저주를 걸어봤는데…."

카멜의 시선이 암살자에게 닿았다.

부들부들 떨며 거품을 물고 있는 모습. 고통스러운지 온몸을 벌레처럼 배배 꼬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육체에 건 저주의 여파인 듯싶었다.

카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계열 빼곤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가장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우습게 볼 놈이 아닌가?'

카멜은 '그'에 대한 경계심을 한층 더 높였다.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쉽게 상대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과 척지고 에토르를 돕는다면 무척 골치가 아파질 것 같았다.

"기억을 뽑아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건가? 재료나 제물은 얼마든지 제공해줄 수 있다."

"…그게."

"솔직하게 말해라. 불이익은 없을 테니까."

"제 실력이 미천하여 저자의 기억을 건드리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오르도르 숲의 마녀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렌구아가 한 마녀를 언급하자 카멜은 짧게 신음을 흘렸다.

오르도르 숲의 마녀.

오르도르의 숲에는 수많은 마녀가 살아가지만, 오르도르 숲의 마녀라 불리는 이는 한 명뿐이다.

확실히 그녀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포섭하기엔 아직 그가 가진 힘이 너무나도 미약했다.

그녀를 불렀다가 오히려 자신이 잡아먹힐 수 있었기에, 카멜은 그녀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저주를 풀고 치료해라. 암살자 놈에게 듣지 못한 말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기억을 뽑아내는 데 실패했으니, 이젠 저 암살자를 매개체로 '그'에게 접근해야 했다.

카멜이 그 다음 움직임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렌구아는 저주의 효과를 제거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암살자에게 걸린 저주가 제법 많아서 서두르지 않으면 불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쇠사슬에서 완전히 해방됐지만, 암살자는 지독한 후유증으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던 카멜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쯧. 오늘은 대화가 힘들 것 같군."

"죄송합니다. 하루면 정신을 차릴 겁니다."

"낼 다시 오지. 리옹. 시체를 처리해라."

"충."

카멜과 렌구아가 감옥을 나가고, 리옹은 병사를 불러 시체들을 처리했다.

리옹이 자리를 비우고, 남은 병사들이 바닥의 피를 닦고 청소하고 있을 때, 쓰러져 있던 암살자가 정신을 차렸다.

"으…."

"어? 정신이 든 모양인데?"

"근데, 뭐라고 웅얼거리는 거야?"

"가까이 가봐."

"내, 내가? 왜?"

"뭔, 쪽팔리게 겁을 먹고 그래. 손발에 수갑 채운 거 안 보여? 의식을 차리면 곧장 보고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고. 확실하게 해야지."

병사는 창을 쥔 채 암살자에게 다가갔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암살자는 고개를 내리깐 채 작게 웅얼거리고 있었다.

"배…."

"뭐라고?"

"배, 배고파, 이 시발놈들아."

"...."

살았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이번에는 내 말을 뒷구멍으로 흘리지 않고 음식이 제공됐다.

배가 고픈 것도 있지만, 식사 바구니 안에 든 음식은 매우 훌륭했다.

빵은 부드러웠고, 수프도 달달하고 뜨뜻했다. 갓 조리해서 나온 돼지고기와 식후에 먹으라고 와인까지 내줬다.

현대 음식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퀄리티.

이건 평민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닐 것이다. 제공된 음식을 통해 현재 카멜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위기는 넘긴 것 같은데.'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니, 더는 목숨을 가지고 위협당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카멜의 목표는 내가 아니라 '그'였으니까.

난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까지 우걱우걱 씹어 넘겼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공간이고, 머리 터진 시체까지 봤다. 그런데도 음식이 잘 넘어가는 걸 보니, 알게 모르게 환경에 적응이 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조금 전 고통은 적응이 될 것 같지 않네.'

주술사의 저주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고문관에게 매질 당한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남을 정도니, 그 고통의 강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책에서 보던 저주를 내가 경험하게 될 줄은….'

그래도 얻은 건 있었다.

주술사 렌구아.

놈의 이름은 나도 알고 있다.

카멜이 만든 흑주술사 단체.

[주술사들의 둥지]의 핵심 인물 중 한 명. 그런 그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정신 계열이라….'

정신 쪽 공격을 흡수하거나 튕겨내는 능력이라고 했다.

일종의 반사 같은 건가?

어느 정도의 충격까지 버티고 튕겨내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좋은 능력이었다. 이 능력 덕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니 말이다.

'문제는 내가 터무니없이 약하다는 건데….'

육체에 걸린 작은 저주 몇 가지에 저승의 문턱을 밟고 돌아왔다.

정신 방벽이 강하다 한들 칼질 한 번에 죽을 수 있다는 의미다.

'오라 1성.'

이제 갓 마나에 눈을 뜬 단계.

악당의 수하, 그 수하가 부리는 하수인들에게도 죽을 수 있는 무력.

'갑자기 왜 눈물이 나지?'

어떻게 보면 소설 속 악당 세계관에선 최약체인 셈이다.

악당들의 세상에서 무력은 곧 생존과 직결된다. 지금 상태라면 누굴 만나든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이를 타개할 방법이 필요한데.

'빨리 강해지는 방법.'

난 고민을 하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배가 부르니 잠이 쏟아진다. 확실히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 * *

"입어라."

눈을 떴을 때, 리옹이 나를 찾아왔다. 여시종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그녀가 내민 평상복을 보자, 내 몰골이 떠올랐다.

확실히 엉망진창이긴 하지.

고문으로 피딱지가 된 옷은 걸레짝이나 다름없었다.

옷을 벗으며 씻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시종이 물통을 가져와 내 몸을 닦기 시작했다.

'갑자기 웬 호의?'

카멜의 의중이 의심됐지만, 난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렌구아가 약초를 덕지덕지 발라놓은 탓에 냄새가 지독했거든.

그래도 렌구아가 신경을 써서 치료한 덕분에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내 몸은 걷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병 주고 약을 준 셈인데, 이것조차 감사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서럽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자, 리옹이 철문을 열었다.

"따라와라."

난 리옹의 뒤를 따라 철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횃불로 이어진 끝없는 통로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철문이 존재했다. 지하 감옥은 독방 구조로 이뤄진 듯 보였다.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계단을 보며 드디어 태양을 보나 싶었는데,

'응?'

리옹은 위층 계단이 아닌 아래층 계단으로 나를 이끌었다.

왜 지상이 아니라 지하로 더 내려가는 거지?

여기 지하 감옥이잖아.

"어디로 가는 겁니까?"

"...."

리옹이 대답해줄 리 없다고 예상했기에 난 욕설을 삼키며 그 뒤를 따랐다.

지하 3층?

지하 4층?

지하 감옥은 생각보다 깊었다.

나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계속 내려갔다.

계단이 끝나는 가장 밑층까지 내려왔을 때, 리옹이 눈앞에 닫힌 커다란 철문을 톡톡 두드렸다.

천천히 열리는 철문.

그리고,

―살려줘!

―아악!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비명 소리.

피 냄새와 악취.

'설마, 아니지?'

문득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을 때, 문이 활짝 열리며 안쪽 광경이 드러났다.

"시발…."

나도 모르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조용했던 독방 감옥과 달리, 이곳은 수많은 인간이 갇혀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긴 복도 양쪽으로 철창이 끝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 안에 갇힌 엄청난 수의 사람들.

그들은 나를 보자, 살려달라며 아우성쳤다.

그 복도 끝,

그곳에서 카멜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한 식탁, 화려한 만찬을 준비한 채.

10화 만찬 분위기 죽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