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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19화 위협 (3)

"쯧,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안 와."

부대 생활관의 한 호실.

험악한 인상의 사내, 박권창은 도통 열리지 않는 생활관 문을 보며 말했다.

저녁 식사 후, 모든 생존자가 부대에 모여 있는 저녁 시간.

거사를 치르기에 적합한 시기가 되었음에도 동료 중 한 명이 늦장을 부린 탓이다.

"그 자식은, 무슨 아이스크림 같은 걸 먹고 싶다고 해서는...."

"큭큭. 찬중이 녀석, 원래부터 초등학생 같은 입맛이었으니까요."

"조금만 있으면 원하는 대로 먹을 수도 있을 텐데. 멍청한 녀석."

이유가 있는 늦장이면 모를까.

식당 일을 도와주면 먹을 수 있다는 간식 때문이라는 게 더 어이가 없다.

그런 건 나중에 내놓으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 하니.

'나중에는 반발심에 대충 만들어서 내놓을 수도 있다.'라는 이유를 대며 기어코 식당으로 가 버린 녀석.

'...생각해 보면 거사가 미뤄진 것도, 그 자식이 자기 차례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버틴 탓이잖아?'

세상이 반쯤 멸망하기 전부터 함께하던 이 무리의 가장 큰 형님은 다름 아닌 박권창이었다.

반대로 지금 자리를 비운 찬중은 그의 담뱃불이나 붙이던 막내였고.

원래라면 박권창에게 대들기는커녕, 말도 제대로 걸 수 없는 입장이었던 녀석.

그런 녀석에게 휘둘려서 일정이 늦춰지고 있다는 생각하니, 묘하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안 되겠다. 일단 우리끼리 진행하자. 찬중이 그 자식은 나중에 합류하라고 하고."

"예? 찬중이가 없어도 될까요?"

"자식아! 그 녀석이 없이 우리만 해도 각성자가 넷이야. 군인들 중에 각성자가 없다는 건 확인했고."

"그,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 아닙니까."

다른 남자들은 물론, 대장인 박권창 역시 찬중의 멋대로인 행동에 휘말리는 이유는 단 하나.

'별것도 아니었던 녀석이, 각성하고 가장 빠르게 성장할 줄은 몰랐지.'

그가 이 무리에서 가장 강력한 각성자였기 때문이다.

5인 모두가 각성을 겪기는 했으나, 그중에서도 막내였던 찬중의 성장은 독보적.

레벨이 벌써 6에 달하는 것은 물론, 능력의 운용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온몸에 퍼져 있는 불길을 한 손에 응축시켜 던지는 그만의 기술은....

'마치 전차의 대포를 연상케 할 정도였지.'

그 엄청난 위력에, 그들 사이에선 '멸살옥'이라는 명칭까지 붙은 기술이었다.

'멸망 전에서부터 내가 형님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 녀석과 붙어서 형님 소리를 듣기는 어려웠을 거다.'

하지만 어찌 됐든 간에, 지금은 자신이 형님 소리를 듣고 있는 입장.

나중에 어떻게 될진 몰라도 당장 녀석에게 휘둘릴 이유는 없었다.

"아무튼! 작전대로 간다. 찬중이 녀석도 만족하면 합류하겠지."

그렇게 네 사내는 작전을 위해 몸을 일으켰다.

작전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멸망 전에도 건달의 삶을 살던 사내들이 복잡한 작전을 구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작전은 단순했는데.

'무력 진압.'

단순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박권창은 다른 생존자들의 생활관 문을 발로 차며 열고 소리 질렀다.

"다 튀어나와!"

* * *

생존자 그룹의 리더이자, 유일한 각성자. 이상아.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앞에 선 상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권창 씨."

날카로운 말투였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의문은 진심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려운 생활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좀비와 괴물들을 피해 도망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해야 했던 나날.

하루하루가 지옥 같던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군부대에 도착.

이제 안심할 수 있다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의 생활관에 박권창과 그 일행이, 갑자기 생활관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기 전까진.

그들은 생존자들을 강제로 생활관 앞의 공터로 끌고 나온 뒤, 무릎 꿇게 만들었다.

"흐흐, 뭐, 별거는 아니올시다. 내가 지병이 있어서, 무리에서 최고가 되지 않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단 말이오."

상아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박권창이었다.

그의 무리는 생존자들 사이에서도 유독 까칠하고 폭력적인 탓에 겉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각성자인 이상아 앞에선 비교적 고분고분했고, 폭력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리에서 내쫓기엔 양심에 가책이 느껴져서 계속 함께 활동해 왔는데....

"권창 씨 일행의 큰형님 자리 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으셨나 보죠?"

"우리 다섯 명? 너무 작지! 이 생존자 그룹도, 좀 작고."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을 잇는 사내.

"이 부대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만족할 수 있겠어."

"하아...."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쉰 이상아는, 양팔을 교차해 품속에 넣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

"언젠가 사고를 칠 것 같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 양손에 잡혀 나온 것은, 날카로운 두 자루의 가위.

"권창 씨, 그거 아시나요?"

"뭘 말이요?"

"제가 처음 좀비를 죽이고 각성했을 때... 저는 그 사람들이 좀비인 줄, 꿈에도 몰랐답니다."

세상이 멸망한 날.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이상아가 일하던 양복점을 습격하고, 점원들을 죽이려 들었을 때.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위를 들어, 습격자의 뒤통수에 박아 넣었다.

나중에 가서야 그들이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좀비였음을 깨닫게 되긴 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이상아는 이미, 살인을 경험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 나타난다면, 두 번째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고.

"크흐... 무섭구만."

박권창도, 이상아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는 알고 있었다.

재봉사라는 얌전해 보이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그녀가 한번 가위질을 하고 나면....

잘려 나가는 것은 고작 천 조각 따위가 아닌, 좀비나 괴물들의 머리였으니까.

"형님, 저한테 맡겨 주십쇼."

그런 이상아의 앞에 나선 것은, 박권창의 일행 중에서도 두 번째에 해당하는 남자.

둘째는 자신이 있어 보였지만, 박권창은 신중했다.

"그것도 좋다만, 저 여자는 강해. 셋째야. 너도 같이 합세해라."

"옙."

둘째에 이어 셋째까지 이상아의 앞으로 나섰다.

상아의 시점에선 그래 봐야 덩치 좀 큰 일반인이 한 명에서 두 명이 된 꼴.

거기까지 생각한 이상아의 눈이 약간 찡그려졌다.

저들은 그녀의 능력을 잘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저렇게 당당하게 군다는 것은....

"하. 믿는 구석이 뭔가 했더니, 각성자인 걸 숨기고 계셨군요?"

"개인정보 아닌가? 존중해주셔야지."

두 남자는 그렇게 낄낄대며 서서히 이상아에게 접근했고.

곧이어, 격돌했다.

"그러면 가장 거슬리던 여자는 대충 해결됐고."

이상아가 강하긴 해도, 둘째와 셋째는 각각 레벨이 4에 달하는 각성자들이다.

심지어 이상아의 직업은 전투직도 아닌 재봉사.

한 명이라면 모를까, 두 명을 상대로는 약간은 버틸지 몰라도, 결과가 어떻게 날지는 뻔했다.

그때였다.

"이게 뭣들 하시는 겁니까!"

소란을 감지한 군인들이 몰려왔다.

총기로 무장한 수십 명의 군인들.

밤에도 부대 주변을 정찰하느라 주변 건물에 올라가 있던 이들이 내려온 것이다.

"흐흐, 이제야 오셨구만."

하지만 박권창은 그 총을 보고도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총을 사용하는 부대원들을 지휘하는 서수혁 상병이 앞으로 나서 박권창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멈추시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뭐?"

"...발포하겠습니다."

"크흐흐... 웃기는구만."

심지어 발포한다는 말에도 아무렇지 않게 구는 모습.

사수들을 이끌고 있는 서수혁 상병은, 슬쩍 뒤쪽을 바라봤다.

생존자들을 대표하던 이상아와 두 명의 남자가 싸우고 있는 모습.

'숨어 있던 각성자가 한두 명이 아니군.'

눈앞의 남자까지 포함하면 최소한 3명.

하지만 그게 저들의 자신감이라면 이유가 되지 않는다.

'각성자는 확실히 강하지만....'

각성에 성공한 병사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신들의 힘을 체감하고 있었다.

처음 각성한 시점에서 극한까지 단련한 달인이나 다름없어지고.

레벨이 올라가거나, 장비를 착용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한계조차 초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총을 이길 정도는 아니야.'

부대에서 가장 강한 전사직 각성자인 전광일 상병조차, 총에 맞으면 치명상을 입는다.

언젠가는 맨몸으로 총알조차 튕겨 낼 수 있게 될지 모르지만, 벌써부터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가정은 두 가지.

하나는 상대가 그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총조차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각성자라는 것.

또 하나는....

'인질을 믿고 저러는 건가?'

군인들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

만약 그렇다면 곤란해진다.

인질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는 함부로 제압을 시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뭐 하쇼?"

"...무슨?"

하지만 박권창은 인질을 잡기는커녕.

생존자들에게서 떨어져 군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안 멈추면 쏜다며. 안 쏘고 뭐 하시냐고?"

"...."

오히려 쏠 테면 쏴 보라는 듯, 양팔을 넓게 펼치며 말을 잇는 박권창.

"크흐흐, 이제 갓 스무 살쯤 되는 애송이들이, 발포하겠습니다는 무슨."

명백한 도발이었다.

'인질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우리가 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가능성이 큰 가설이다.

군인이라고 하면 강해 보이지만, 현역 장병들인 그들은 기껏해야 20대 초반의 청년들.

인간에게 총을 쏘기는커녕, 작은 쥐 한 마리 죽이는 것조차 무서워할 사람들이 부지기수.

하지만....

'너무 많은 일을 겪었지.'

그 대상이 인간이 되는 것은, 확실히 두렵지만.

생명체에게 총을 쏜다는 행위는 이제 익숙하다 못해 일상이 되어 버린 그들이었다.

"서수혁 상병님?"

"하. 짜증 나게."

그렇게 중얼거린 서수혁 상병이, 곧바로 총을 견착했다.

그리고 큰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넣고, 당겼으나....

기다리던 총성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

"...?"

"...큭! 정말 망설임도 없이 쏘려고 하다니? 애송이라고 무시할 양반들은 아니구만."

어째서인지.

총알은 발사되지 않는다.

의아함을 느낀 서수혁 상병이 직접 견착을 하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역시 마찬가지.

"큭큭! 군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벌였을 리가 있나!"

아무리 각성자들이라고 해도, 총 앞에서 당당할 수는 없다.

신체 능력이 발달하고 기묘한 초능력을 얻는다고 해도, 아직까진 몸에 구멍이 뚫리면 죽는 인간에 불과하니까.

그럼에도 박권창이 굳이 군부대에서 일을 벌인 이유 중 하나.

그는 자신의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각성자 : 박권창]

[직업 : 방화범 Lv. 5]

[능력치 : 힘 12, 민첩 8, 마력 10, 행운 4]

[특성 : 최하급 물리 저항, 최하급 화염 친화, 최하급 악행 지식, 최하급 마기 친화]

[스킬 : 최하급 화염 지배]

[최하급 화염 지배]

[주변의 화염 밑 화염과 관련된 현상들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다.]

바로 이것이다.

"총이란 것은 결국은 화기! 탄약에서 폭발이 일어나야 쏠 수 있지. 하지만 모든 화염과 폭발은 내가 지배한다!"

수류탄과 같은 다른 무기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총이 없는 군인들은 결국은 일반인에 불과하다.

각성자인 그들이라면, 단 다섯 명이서 백 명을 지배하는 것도 쉬운 일.

'며칠 동안 관찰했다. 이 녀석들은 괴물들을 잡을 때도 총만 썼지!'

각성자라면 귀찮게 그럴 이유가 없다.

박권창이 확신을 가지고 거사를 치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자, 다들 무릎 꿇도록 해라. 말만 잘 듣는다면 나쁘지 않게 대우해 주지. 오히려 나와 비슷한 힘을 얻도록...."

"뭐야, 그런 거였어?"

그러나.

그런 확신이 무색하게도.

"휴.... 괜히 쫄았네."

"...뭐?"

군인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총기가 무력화된 이유를 알게 되자 한시름 놓았다는 느낌.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저쪽은 둘인가? 이쪽도 뭐, 두 명이면 되겠지."

"굳이 그러지 말고 여럿이서 패죠?"

"저쪽에서 생존자 측 각성자도 싸우고 있어. 몇 명은 그쪽으로 가 줘야겠다."

심지어 이제는 눈 앞의 권창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자기들끼리 무언가 떠들기 시작하는 모습까지.

"이 자식들이... 지금 상황을 이해 못 했나 본데...."

총을 못 쓴다는 걸 알면서도 당당한 모습에 당황했으나.

이내 박권창은 이유를 떠올렸다.

'이곳엔 각성자가 없으니, 각성자의 힘도 모르는 거겠지.'

그렇다면 보여 주면 될 뿐이다.

단 1레벨만 되더라도 초인이라 불리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박권창의 몸에서 불길이 차오르더니, 이내 온몸을 덮었다.

"본보기로 하나쯤은 죽어 줘야겠다!"

불길에 뒤덮인 괴인이 군인들을 향해 쇄도했다.

"그럼 저 녀석은, 한일이랑 대원이가 맡는 걸로."

"그러지 뭐."

"오랜만에 재밌겠구만."

박권창이 한 명은 죽어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먹을 휘두른 순간.

비교적 덩치가 큰 군인 두 명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하하! 자살 지망자인가 보....'

퍽.

'어?'

눈앞에 검은 물체가 다가오는 듯 보이더니.

귓가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뭐야 이 녀석."

단 일격.

박권창은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엄청 약하잖아?"

"뭘 믿고 뻗댄 거야?"

쓰러지는 와중.

그런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우리가 너무 강해진 건가?"

20화 심문 (1)

내가 식당에서 정체를 숨기고 있던 각성자 녀석을 제압하고 돌아왔을 때.

이미 부대에 일어난 소란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였다.

"우왁, 신영준 병장님? 그건 대체...."

"아, 미안. 보기 좀 그렇지?"

생활관 쪽에도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하게 달려오기는 했다만.

그렇다고 제압한 각성자를 그냥 식당에 내팽개쳐 두기도 뭐해, 일단 데리고 왔다.

그 꼴을 본 다른 병사들이 기겁했다.

"...그거, 살아는 있는 겁니까?"

"어. 고통은 좀 심해 보였지만. 지금은 기절했으니까, 뭐."

기본적으로 내 직업, 요리사는 전투직이 아니다.

오히려 요리를 통해 아군을 지원하는 후방 지원조에 가깝다.

실제로 내 능력은 그쪽에서 더 영향을 발휘하지만, 난 지난 습격에서도 최전선에서 부대원들과 함께 싸웠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하급 단도 숙련' 특성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요리사의 눈' 스킬 덕분이다.

'요리사의 눈은 좋은 스킬이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요리사의 눈이 보여 주는 것은 대상 식재료를 '손질'하는 법.

그런데, 고기를 손질하는 방법은, 대부분 우선 숨통을 끊고 피를 빼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간단하게 적의 약점을 알 수 있다는 점은 좋지만....

'살상력이 너무 높다는 게 문제지.'

상대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둬야 할 때, 사용할 방법이 애매했다.

그렇다고 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내 전투력 자체가 급감한다.

물론 말 그대로 후방 지원에만 매진한다는 선택지도 있을 수 있지만,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상 처음 식당을 습격한 괴물에 맞섰을 때처럼, 나 자신의 전투 능력에도 신경을 쓰는 게 좋다.

하지만 괴물들이야 바로 죽일 것을 목표로 한다고 쳐도, 이번처럼 인간을 상대로 할 때는 죽이지 않고 살려 둬야 할 필요성도 있을 터.

어떻게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와중에 떠올린 것이 바로.

'활어회.'

그중에서도 횟집에서 하는 회라기보단, 낚싯배에서 수십 년을 구른 선장님들이 즉석에서 횟감을 꺼내다가 만들어 주시는 회.

바다에서 낚은 생선을 바로 먹을 땐.

죽이고 시간을 거치는 숙성을 거치지 않고, 산 채로 바로 회를 뜨기도 한다.

'그것 역시 하나의 훌륭한 손질법이지.'

그런 생각을 의식한 채 스킬을 사용해 봤더니, 기대했던 방향의 '손질법'이 떠올랐다.

...조금 보기 그런 모양새가 돼 버린 게 문제지만.

"그, 그래서 그렇게 된 겁니까?"

"그래. 지금은 기절해 있긴 해도 언제 일어나서 날뛸지 모르니까. 제대로 결박하고, 사제한테 보내서 치료해 줘."

나는 한쪽 팔이 '산 채로 회 쳐진' 녀석을 병사들에게 맡긴 후, 다른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이미 제압당한 채 무릎 꿇려져 있는 사내들이 넷.

그들은 내가 기절시킨 각성자를 끌고 왔을 때부터 당황하고 있는 상태였다.

"저, 저거, 찬중이잖아!"

"우리 중에서 가장 강했던 찬중이가, 고작 취사병한테 졌다고...?"

"심지어 저렇게 참혹하게.... 이 부대는 대체?"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 한 놈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놈들은 나를 보며 자기들끼리 경악한 듯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강했다고?'

나한테 부대 정보를 캐 오는 역할이나 시키길래 막내쯤 되겠거니 했는데.

가장 강했다느니 하는 걸 보면, 생각보다 높은 지위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강했다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겨우 이 정도로?"

확실히, 그 거대한 불을 던지는 능력은, 나에겐 안 통해도 다른 사람들에겐 통할 수도 있겠구나 싶긴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뿐.

제대로 싸우기 시작하자, 녀석은 요리사인 나에게.

힘도.

실력도.

기술도.

모든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게 이 녀석들 중 가장 강한 수준이었다니. 얼마나 약한 거야?"

"그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 강해진 거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현장에 와 있던 광일이 녀석이 말했다.

"이 녀석들 평균 레벨은 3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부대는 조금만 빨리 각성했다 싶은 사람들은 최소 5에서 6 정도는 되고. 신영준 병장님은 아예 10레벨도 넘기지 않으셨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

"거기다가, 증표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클랜을 결성한 업적으로 받은 단체 스킬, 증표.

우리 클랜만 착용할 수 있는 군번줄 형태의 증표는 스탯을 고정적으로 올려 주는 효과가 있다.

레벨 1짜리 부대원이 착용할 경우, 착용하지 않은 레벨 5 각성자와 비슷한 수준의 스탯을 얻을 수 있을 정도.

어마어마한 스펙이었다.

'어디까지나 고정된 수치를 올려 주는 아이템이니, 개개인의 성장이 진행될수록 효율은 줄어들겠지만.'

일반적으로, 버프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고정 스탯 상승, 그리고 또 하나가 퍼센트 상승.

전자, 고정 스탯 상승의 경우에는 기본적인 능력치가 낮을 때 크게 작용한다.

스탯이 1일 때 1이 증가하면 두 배지만, 100일 때 1이 증가해 봐야 100분의 1의 성장은 큰 의미가 없다.

반대로 후자의 경우엔 기본적인 능력치가 클수록 효과도 크다.

스탯이 1일 때 100% 증가해 봐야 1 증가지만, 100일 때는 100이나 증가하는 셈이니까.

그중 증표는 전자에 해당한다.

나중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장 1레벨을 5레벨 수준으로 만들어 주는 사기템이지.'

저놈들의 대장이라는 녀석은, 전사조에서 광일이 다음으로 강한 한일이와 대원이가 붙자 순식간에 처치됐고.

나머지도 한 명 한 명이 우리 부대의 각성자들보다 약한 만큼, 여러 명이 붙어서 싸우자 순식간에 정리되었다고.

"거기다가 부대원들끼리는 정찰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스파링을 하고 있으니까요. 저놈들. 각성자의 신체 능력을 가지고 싸우는 법도 잘 모르는 것 같더군요."

제 딴에는 다섯 명이나 되는 각성자들이라 자신감을 가지고 덤빈 듯하지만.

애초에 승부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 부대가 그렇게 강해졌다니....

"솔직히, 내가 없는 사이에 큰일이 나는 거 아닌가 했는데 말이지."

식당에서 제압한 사내의 계획을 들었을 때.

내가 없는 사이에 다른 자들이 부대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크게 당황했었다.

막상 돌아와 보니, 나 없이도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이었지만.

"...이제 나 정도는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네. 요리 버프도 없었고."

"하하, 그건 아니죠."

광일이 녀석은 허허, 웃더니 말을 이었다.

"저희가 강해지긴 했습니다만, 이게 어디 혼자 큰 겁니까?"

"음...."

"신 병장님이 먹여 주고 키워 주고 해서, 여기까지 큰 거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부대에 괴물이 나타난 후, 다른 병사들과 합류했을 때 했던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이 부대는 내가 먹여 살려야 한다, 뭐 그런 생각을 했었지, 아마?'

물리적으로도 음식을 먹여서 살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 외적인 의미로도, 어떻게든 부대를 먹여 살린다는 내 목표는, 잘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구, 군인분들...? 이게 대체 무슨...."

그러고 있자니, 생존자들의 대표, 이상아 씨가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부대원들이 개입하기 전까지 두 명을 상대로 싸웠던 탓인지, 약간씩 그을린 모습.

자세히 보니 팔에는 화상도 입은 듯했다.

"상처가 심하신 것 같군요. 저희 부대에 치료사가 있으니까 금방 치료될 겁니다. 의준아!"

"예! 일병 사의준."

"이분 먼저 치료해 드리자."

"옙."

의무병의 손에서 빛무리가 일더니, 상처에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 화상이 사라진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쳤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새 피부만이 남아 있었다.

"여러분들은... 각성자였군요. 그것도 전원이."

"전원까진 아닙니다. 얼마 전에 절반을 겨우 넘긴 정도죠."

"그래도 50명 이상이라는 것 아닌가요...? 세상에나...."

생각해 보면 이분한테는 거짓말을 하게 된 셈이다.

우리 부대에 각성자가 없다고 생각하고, 각성하는 방법에 대한 의견까지 공유했을 정도니까.

우리라고 악의를 가지고 한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해명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상아 씨는, 각성한 직업이 재봉사라고 하셨죠?"

"예."

"저는 요리사입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직업의 각성자가 있죠. 치료사, 사제, 광전사에 마법사...."

"사, 사제에 마법사요?"

"예. 그중에는 천문관이라고, 제한적이나마 미래를 보는 녀석도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어째서 각성자들을 숨겼는지 설명했다.

부대에 괴물이 처음 찾아온 날부터 지금까지.

사실은 생존자들이 찾아올 것도 그 전날에 알고 있었고, 그중에서 묘한 경고가 있었다고.

그 경고를 받아들이고, 위협이 될 대상을 찾을 때까진 각성을 숨긴 것이라는 설명.

"대충 이해했어요.... 그러면 여러분 대부분이 각성자일 뿐만 아니라, 각성자를 안정적으로 늘리고 있다는 거군요?"

"그런 셈이죠."

그러자,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어지는 상아 씨.

"...어쨌든,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까요."

"...아, 네! 전혀 오해하지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

그 후 다시 생각에 빠지는 모습에, 더 말을 걸 필요는 없겠다 싶어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다시 결박된 녀석들에게 다가가니, 몇몇 병사들이 말을 걸어왔다.

"일단 제압은 했습니다만, 어떻게 처리할까요?"

"글쎄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살려 둬 봤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살려 둬 봤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저 말이 뜻하는 것은, 즉.

"아니. 죽이는 건 아직은 보류다."

"...왜 그렇습니까?"

"병사들 멘탈은 물론이고, 생존자들한테도 안 좋아."

병사들은 괴물을 죽인 적은 있어도, 사람을 죽인 적은 없다.

아무리 그간의 싸움에서 어지간한 일에는 익숙해졌다 해도,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정도로 시간이 흐르진 않았다.

생존자들 역시 마찬가지.

저들이 명백한 죄인이라고 하나, 생존자 그룹에 속해 있던 이들.

그들을 처형한다고 하면 다른 생존자들 역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안 죽인 채 살려 둬 봤자 식량만 축내고, 탈출에 성공이라도 한다면 문제가 커지지.'

다른 사람들을 습격하는 녀석들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렴~'하고 방생해 줄 수도 없다.

"저 녀석들, 일단은 식당 지하에 처박아 둬."

"식당 지하면... 보일러실 아닙니까?"

"어. 거기 창고용 방도 일곱 개인가 있을 거다. 밖에서 잠그면 얼추 감방 역할은 될 거야."

방은 총 일곱 개.

다섯 명 정도는 문제없이 수감할 수 있겠지.

"위험한 녀석들이니까, 전사직으로 각성한 애들 한 명씩 뽑아서 관리해 줘. 다음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게 감옥에 가둬 둔 뒤.

나는 다음 날, 바로 감옥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러자.

"히, 히익!!"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첫 인사가 좀 너무한 거 아닌가.

21화 심문 (2)

"오셨습니까, 신 병장님."

"어 그래, 고생이 많다. 특이 사항은 없고?"

"예. 혹시라도 탈출을 시도하지 않을까 했습니다만, 자기들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지금은 조용합니다."

대충 '위협'의 정리가 끝난 후.

나는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다섯 명의 남자를 가둬 둔 식당의 지하실에 도착했다.

얼마 전, 김 중위를 가두고 '설득'했던 공간.

나는 그중의 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찬중 씨?"

그 방에는, 멍한 표정으로 결박된 한 남자가 있었다.

찬중이라는 이름의.

분명, 저들 5인 중에서도 가장 강한 편이라던 남자.

식당에서 내 손으로 직접 제압한 녀석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히, 히익!!"

내 얼굴을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경기를 일으키는 찬중.

아무리 그래도 첫 인사가 히익이라니.

"사람 얼굴 보자마자 하는 말이 그겁니까?"

"죄, 죄송합니다!"

살짝 불쾌하기도 하겠다, 기선제압도 할 겸 한마디 했더니, 금세 꼬리를 마는 모습.

벌벌벌 떨기까지 하는 꼴이, 누가 본다면 살해 협박이라도 받고 있다고 착각할 것 같다.

지나칠 정도로 나를 두려워하는 모습.

'뭐, 그럴 만도 한가?'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나름대로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 결과물이란 게, '죽이지만 않고 손질한다.'는 방법이어서 문제였지만.

'...손질을 하는 입장인데도 좀 징그러웠으니까.'

내 입장에서도 그 정도였는데, 직접 손질을 당하는 입장에선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기절까지 했던 걸 보면 엄청 고통스럽긴 한가 보다, 싶었지.

설마 내 얼굴을 보기만 해도 입에 거품을 물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흠흠. 아무튼, 찬중 씨."

"예, 예!"

"제가 찬중 씨를 찾아온 이유는, 몇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인데... 들어주실 겁니까?"

"뭐든지, 뭐든지 맡겨만 주십쇼! 그러니까,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쇼...."

워낙에 트라우마가 크게 남았는지, 완벽할 정도로 내게 굴복한 모습.

역시 그건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에 양심이 조금 찔리긴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부대를 위협했던 인물 중 하나가 심문에 순순히 응하는, 나름 괜찮은 상황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양심의 가책 따위는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물론이죠. 찬중 씨가 제 말만 잘 들어주신다면야, 다시 회 쳐질 일은 없을 겁니다."

"히, 히익."

"그럼 우선, 이것 좀 드시고."

혹시나 싶어서 남겨 둔 자백용 아이스크림을 건네니,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릇을 받는 남자.

두려움에 떨다가도, 먹을 때는 맛이 있는지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완전히 굴복한 것 같기는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꽤 맛있게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지나치게 솔직해진다는 부작용만 제외하면, 기쁘게 먹을 만하겠지.

"그럼 우선, 몇 가지 질문이 있는데."

나는 찬중에게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사실 저번에 자백제를 먹였을 때 물어도 됐겠지만,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물어보지 못한 것들을 몇 가지.

"저희가 부대를 점거하려고 한 이유는... 저희의 직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직업?"

그 와중에 나온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저를 비롯한 동료들... 형님들은, 각자 다른 직업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음? 다른 직업 간에 공통점이라니. 뭐길래...."

"범죄자란 거죠."

"범죄자?"

"권창 형님이나 저는 '방화범'입니다. 나머지 형님들은 '갱', '사기꾼' 같은 직업이죠."

"하."

그야, 이 세상이 게임으로 변했음을 고려하면, 있어서 이상할 건 없는 직업이긴 하지만.

이건 '사제'나 '마법사' 같은 것과는 다른 의미로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대놓고 범죄와 관련된 직업까지 존재한다는 건.'

같은 인간이라고 한들.

믿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저희는, 강원도 근처에서 활동하는... 그, 소위 말해서 깡패였습니다."

찬중은 자신이 각성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강원도, 그중에서도 춘천 근처를 무대로 활동하는 깡패 조직의 일원이었던 찬중과 동료들.

깡패가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곤 하나, 나름 기업형으로 변화하며 잘나가는 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괴물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죽이고, 좀비가 나타나고...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죠."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찬중이 속했던 조직의 조직원들도 대부분이 사망.

그나마 그들 일행 다섯 명만이 겨우 살아남아 이리저리 도망치고 있는 와중에 각성을 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전원 각성에는 성공했습니다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라니?"

"저희 직업이 직업인지라, 세력을 키우기가 힘들더군요."

전원이 범죄자스러운 직업의 각성자.

각성자가 드물다고는 하나 각성 자체에 대한 정보는 생존자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져 있던 상황.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다.

범죄자스러운 직업명을 숨긴 채로, 남들에게 신용을 얻거나 세력을 키우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생각한 겁니다."

"뭘 말입니까."

"저희가 세력을 키우기 힘들다면, 다른 세력을 먹어 버리자고요."

그렇게, 그들은 상아의 생존자 그룹에 합류했다.

각성자란 사실까지 숨긴 채로.

"저 여자는 꽤 성실하기도 하고, 직업은 웃기지만 능력도 준수했으니까요. 금방 세력이 커질 거라 생각했죠. 그렇게 커진 세력을 나중에 저희가 그대로 꿀꺽하는, 뭐 그런 계획이었습니다."

"남의 세력을 차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저희 형님 중에 '사기꾼' 능력을 가진 형님이 있잖습니까. 그 능력을 잘 활용하면, 멀쩡한 리더도 엄청난 죄인처럼 선동하고 쫓아낼 수 있습죠. 그렇게 리더를 잃은 단체를 꿀꺽...."

소름이 돋는다.

이 녀석들.

단체의 머리를 떼어 낸 뒤 몸만 차지하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잖아.

"그럼, 우리 부대를 점거하려고 한 이유가?"

"이왕 다른 세력을 먹을 거라면, 더 큰 세력을 먹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생존자 그룹은 아무래도 작은 편이니까. 권창 형님의 능력이 있으면 화기가 위주인 군인들 상대로 유리하다고 생각한 것도 있고... 그렇게 군인들을 제압하고 총을 얻기만 하면, 내부에서 암약할 필요도 없겠다고 생각했죠."

마침 합류한 생존자 그룹이 근처에 있는 군부대로 향하기로 결정한 상황.

그곳을 차지하고 강력한 화기들만 손에 넣는다면, 다음부터는 세력을 키우는 것도 힘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우리 부대에 각성자가 있으면 어쩌려고?"

"그, 그래서 며칠 동안 시간을 들여서 조사한 겁니다. 혹시라도 우리보다 강한 각성자들이 있다면, 전면전보다는 시간을 들이려고 했죠. 몰래 숨어들어서, 사기꾼 형님의 선동 능력으로 조금씩 영향력을 넓히다가, 반란. 꿀꺽.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태준이 녀석이 말한 예언이 이해가 갔다.

'이런 약한 녀석들한테 힘을 숨겨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했는데.'

이들은, 우리가 강한 세력이라는 걸 알았다면 생존자인 척 몰래 우리의 세력에 합류.

안쪽에서 조심스럽게 세력을 늘려 갔을 것이다.

몸 안에 갑작스럽게 생겨난 암세포처럼 말이다.

결국에는, 머리를 따고 몸을 차지했겠지.

'...나중에 가서 눈치챈다고 해도, 안쪽에서부터 세력이 커진 녀석들을 제거하긴 힘들었겠지.'

태준이 녀석에게서 힘을 숨겨야 한다는 힌트를 얻지 못했더라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 뻔했다.

"...하."

이들의 의도를 알아낸 것은 좋다.

그 의도를 피해 없이 막아 낸 것 역시, 최고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괴물이니 좀비니 하는 걸 넘어서, 이제는 마주치는 인간들마저 경계해야 할 상황이 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부대에 생존자들을 들인 것부터가 위험한 일이었어.'

그때는 모르니까 한 일이었지만....

잘못하면 부대가 내부에서부터 붕괴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대충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나는, 남자를 남겨 두고 지하실을 나왔다.

녀석들의 정체나 의도에 대해서는 얼추 알았다.

문제는.

'이 녀석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가만히 놔두면 식량을 축낼 뿐인 이들.

가장 빠른 방법은, 다른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처리.

즉, 죽이는 것이겠지.

'우리는 아직 인간을 죽여 본 경험이 없어.'

언젠가.

인간들끼리 죽여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대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경험은 아직은 이르다는 게 내 판단이다.

죽이지는 않는 선에서, 위협이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무언가, 좋은 방법이....

"여, 영준아!"

"김 중위님?"

고민하며 부대를 걷고 있자니,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김 중위.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네가 지시한 대로 생존자들을 안심시키고 왔어!"

생존자들은 갑작스럽게 목숨을 위협받은 상황.

게다가, 우리가 각성자로 이루어진 부대라는 것을 숨겼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불안감이 커져 있을 거라 생각해, 김 중위를 보내 그들을 안심시키도록 명령했었다.

"문제는 없었습니까?"

"응! 좀 불안해하는 목소리도 많았지만, 내가 또 말은 좀 잘하는 편이잖아. 잘 설득하니 마지막엔 웃으면서 넘어가더라고."

이런 능력은 참 쓸 만하단 말이지.

"그, 그러니까."

"또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시킨 일, 잘 해결했잖아?"

"예, 잘하셨습니다."

"그, 보상으로. 야식 같은 거 한 번만 만들어 줄 수 없겠니?"

"...아아."

무슨 소리를 하려나 했더니.

김 중위는, 내가 만든 요리에 중독된 상태.

시킨 일을 잘했으니 요리 하나만 더 해 주면 안 되겠냐는 얘기다.

"여, 역시 내가 좀 선 넘었나? 농담이고! 나는 세 끼 식사하는 걸로도 충분히 만족하니까! 기어오르려는 건 절대 아니고!"

"아니, 뭐. 알겠습니다. 잘 해결하신 것 같으니, 하나 해 드리죠."

식자재가 넉넉하진 않지만.

김 중위는 괴물을 재료로 한 음식을 좋아한다.

리자드 고기는 넘쳐 나는 편이니,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고맙다 영준아! 앞으로도 충성을 다할게!"

"...아."

"으응? 무슨 할 말 있니?"

"아닙니다. 가 보십쇼."

내 요리에 중독되어, 야식 하나로 충성을 다짐하는 김 중위.

그를 보니, 해결법이 떠올랐다.

"히, 히익! 말씀드린 게 전부입니다! 정말이에요!"

"알아요, 알아. 하나만 더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요."

나는 다시금 지하실로 들어가, 찬중을 찾았다.

"여기, 노트랑 펜 쥐시고."

"이건 왜?"

"거기다 적으십쇼."

이왕 해 주는 거.

좋아하는 걸 해 주는 게, 저들도 기쁘지 않겠어?

"당신이랑, 당신네 형님들. 좋아하는 요리, 싫어하는 요리. 싱겁게 먹는지 짜게 먹는지. 어떤 입맛이고 어떤 식습관이 있는지. 전부 다."

그로부터 며칠 뒤.

[업적 달성 - 교화]

[악 속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파티를, 요리의 힘으로 완벽하게 굴복시켰습니다.]

[보상으로 칭호가 주어집니다.]

[칭호 - 교화의 요리사]

[악 속성의 몬스터, 직업을 대상으로 하는 요리의 효과가 30% 증가합니다.]

범죄자들을 요리로 교화시킨 보상으로 주어진 업적과 칭호.

'달다.'

부대에, 특이한 직업의 막내들이 합류했다.

22화 그거 괴물 고기야

"새로운 막내 녀석들은, 어때?"

"나름 잘 적응하는 거 같습니다. 대체로 나이가 좀 많긴 합니다만. 나이 많은 후임 들어오는 일이야 비교적 흔하니까요."

"완전히 개과천선했다고 생각될 때까진, 녀석들은 계속 막내다."

"옙."

이렇게.

우리 부대에 찾아온 위협은, 새로운 막내가 늘어나는 식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부대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대에 남아 있는 기름은 최대한 모아 봤습니다만... 이제 한계입니다. 차량용 기름을 제외하면, 발전기를 돌릴 수 있는 건 앞으로 일주일 정도일 겁니다."

"...그래."

식량 문제.

전기 문제.

그 외에도, 보급이 끊긴 시점에서 발생한 온갖 문제들.

'안 그래도 한정된 자원이었는데. 소비하는 인원만 늘어났으니까.'

그 문제들은 생존자들의 합류로 인해 더 가속화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마도 하나뿐.

"떠날 준비를 해야만 하겠지."

지난번.

리자드 치프틴이 부대를 습격했을 때를 떠올린다.

수십 마리의 리자드 부대를 상대로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우리가 수비하는 입장이었기 때문.

산발적인 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던 것도, 이 황준산 대대의 시설을 이용하며 유리한 수성전을 펼쳐 왔기 때문이다.

우리를 지켜 주던, 안전하고 따뜻한 요람.

그러나, 모든 아이는 언젠가 요람을 떠나야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을 마쳐야지."

부대를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냥 떠나진 않을 것이다.

'만전의 준비를 한 뒤.'

부대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을 모두 이룬 후.

우리는 요람을 벗어날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오늘 사냥한 리자드들이 몇 마리지?"

"예? 열 마리 정도 될 겁니다."

"전부 식당 앞으로 가져다줘."

부대 급식을, 다음 단계로 끌어 올려야겠지.

* * *

그날,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부대의 간부급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식당으로 불렀다.

가장 먼저 각성에 성공해, 지금은 각각 마법사, 전사, 사수들의 장을 맡은 민재 형, 광일이, 수혁이.

그리고 천문관의 능력으로 부대의 일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태준이까지.

"저녁도 먹지 말고 오라니, 무슨 일이야?"

"식당 일 도와드릴 거라도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갑작스러운 호출에 영문을 몰라 하는 사람들을 식탁에 앉힌 후.

주방에 들어가, 준비했던 요리들을 내왔다.

"이거 좀 먹어 보라고."

"오."

칼국수, 꼬치, 튀김 등.

다양한 종류의 요리들을 본 사람들의 표정이 기분 좋게 변했다.

"맛있는데? 갑자기 뭐야?"

"식재료 모자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고기까지 듬뿍 들어간 요리를...."

부대에 보급이 끊긴 상황.

맛이야 나름 힘을 줬으니 좋은 게 당연하지만, 재료의 출처가 궁금해질 만도 하다.

출처가 궁금하다면 말해 줘야지.

"그거 리자드 고기야."

"푸훕!"

"시, 신 병장님?"

리자드.

우리가 싸우고 있는 바로 그 몬스터들.

자신들이 먹은 게 그 괴물이라는 걸 안 사람들의 안색이 약간 변했지만, 다행히 구역질하는 사람은 없었다.

솔직히 나는 구역질하는 사람이 나오는 수준까지 예상했는데.

다행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괴물 고기에 대한 거부감이 아주 크지는 않은 모양이다.

"...갑자기 우리를 골리려고 그러는 건 아닐 테고. 이유나 들어 보자."

당연히 나라고 아무 이유 없이 먹인 건 아니다.

괴물의 고기를 먹자고 한 계기.

"지금 막내가 된 그 녀석들."

같은 인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적이었던 이들.

"우리는 지금까지 리자드랑만 싸워 왔지. 운 좋게도 약점이 뚜렷한 녀석들이었고."

"...."

"하지만 생존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바깥에는 좀비를 비롯해 다양한 괴물들이 존재해. 심지어 그중에는 인간도 있고."

리자드를 상대할 때와는 다르다.

처음 보는 적들에, 안심할 수 없는 인간들.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해."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괴물들의 고기에는 마력이 함유되어 있어서, 효과가 좋은 편이야."

우리 부대의 식량은 이제 최소한의 전투식량을 제외하고 모두 고갈됐다.

상점에서 호밀빵의 구매가 가능하니 굶어 죽을 일은 없다지만, 포인트를 소모하는 데다가 요리로 사용될 구석이 없는 음식.

지상에서 식량을 구해야 하지만, 사태가 터지고 시간이 많이 지났다.

'오랫동안 보관 가능한 요리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육류와 같은 신선식은 구하기 힘들어졌겠지.'

그러니.

"괴물을 먹어야만 해."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는데, 싫어하는 녀석들도 많을 거다."

"특히 리자드는, 거부감이 심할 겁니다."

주말에 우리 부대에 머무르는 인원은 본래 200여 명가량.

그중 절반 정도가 리자드들에게 잡아먹혔다.

바로 옆에서 자던 사람이나, 친한 동기가 잡아먹히는 걸 눈앞에서 본 사람들도 부지기수.

내가 요리의 효과를 통해 부대원들의 멘탈을 관리하고 있어서 그렇지, 아니었다면 심각한 트라우마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

사냥하는 것에는 불만이 없다.

하지만, 그 괴물을 먹어야 한다고 한다면.

'사람을 먹은 괴물을 다시 사람이 먹는다?'

심지어 그 사람이 아는 사람이었다면.

지인을 먹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이들도 분명하게 나온다.

윤리적인 문제든, 기분적인 문제든.

거부감이 상당할 테지.

하지만.

"거부감은 무슨."

그딴 걸 신경 쓸 겨를은, 솔직히 말해 없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이 부대를 먹여 살려야 하는 취사병.

병사들의 편식을 두고 넘길 생각은 없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우리의 제1 목표는 생존이야."

"...."

"그러니까 확실히 하자.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신세가 될지...."

아니면.

"괴물을 잡아먹고 살아남을지."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빛이 약간 변했다.

내가 말해 놓고 이런 말은 뭐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는 상황.

"...애들을 설득하는 건 우리한테 맡겨 줘라."

"형?"

"요리사인 네가 직접 말하는 것보단, 조장인 우리가 설득하는 게 효과가 좋을 테니까."

민재 형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이견은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언젠가, 어려운 선택을 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다."

"...."

"세상이 이 지경이 됐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괴물을 먹는다는 정도의 선택은 오히려 쉽게 생각될 정도야."

태준이 녀석은 오히려 그런 게 대수냐는 듯 말하기까지.

나처럼 괴물을 먹는다는 일을 큰일로 여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태준이 녀석처럼 '그런 게 뭐 어때서?'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겠지.

심지어 그게 생존을 위한 일이라면.

부대원들도 꺼림칙할지언정 이해해 주리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그럼 설득은 맡길게. 대신."

"음?"

"설득이 되든 안 되든, 내일 저녁에 식당 뒤뜰로 모여 달라고 해 줘."

"그거야 뭐 어렵진 않은데. 왜?"

"대상이 괴물이라고 해도, 먹는다는 건 기본적으로 즐거워야 하는 일이니까."

괴물로 만든 음식이 나쁜 기억으로 남지 않도록.

나름의 노력을 해 봐야겠지.

* * *

군대에서 맛있는 요리를 먹을 기회란 게, 사실 자주 있지는 않다.

우리 부대는 그래도 규율이 꽤 느슨한 편이라 병사들끼리 회식을 가지는 경우도 잦다지만, 그래 봐야 부서별 왕고가 전역할 때 종종 회식을 가지는 정도.

빡센 부대는 운동회 같은 행사라도 있지 않은 이상에야, 회식 자체가 드문 경우도 많다고.

그리고 오늘.

저녁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모든 부대원이 식당 뒤편 뜰로 모였다.

오랜만의, 회식이다.

"와, 이건...!"

[정성이 들어간 하급 요리사의 리자드 슈프림 튀김]

[정성이 들어간 하급 요리사의 리자드 고추장 볶음]

[정성이 들어간 하급 요리사의 리자드 칼국수]

[정성이 들어간 하급 요리사의 리자드 꼬치구이]

[정성이 들어간 하급 요리사의 리자드 스테이크]

.

.

.

"뭡니까, 이 진수성찬은?"

"뭐긴. 힘 좀 써 본 거지."

내가 가진 스킬 중 하나인, [요리사의 눈].

전투에 활용되는 '손질법의 깨달음' 덕에 약간 묻힌 편이긴 하지만, 그 효과 중에는 분명 '조리법의 깨달음'을 얻게 해 주는 효과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대표적인 조리법 몇 가지를 알려 주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이 능력을 통해 알 수 있었던 점 하나.

'리자드 고기는 기본적으로 닭고기에 가깝다는 것.'

기본적으로 파충류에 가까운 모습을 한 리자드.

닭도 먼 선조는 공룡이었던 탓에, 뱀고기 등도 닭고기와 유사한 맛이 난다고 한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같은 맥락으로 리자드의 맛도 닭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닭고기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식재료 중 하나.

"아는 닭 레시피는 다 써 봤다."

치킨, 닭볶음, 닭칼국수, 닭꼬치 등등.

그나마 소스류는 재고가 꽤 많은 점을 이용.

주재료는 리자드뿐이라고 해도 최대한 질리지 않을 수 있도록 다양한 조리법으로 만들어 봤다.

"이건... 카레입니까?"

"어. 카레는 부대 비상식량 중 하나라서 양도 꽤 많거든."

"와! 치킨!"

"다양한 맛으로 준비했으니까. 골라 먹어."

신선한 재료가 그나마 넉넉했던 초반과 달리, 최근에는 식재료를 아껴야 한다는 이유로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때우던 경우도 많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진수성찬인 셈.

한 마리 한 마리가 거의 사람만 한 크기인 리자드.

덕분에, 고기는 썩어 날 정도로 많다.

다행히도, 부대원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이, 이게 괴물의 고기라니."

"맛있는데...?"

"맛도 맛인데, 스탯 올라가는 것 좀 보십쇼. 지금까지 먹었던 요리 버프랑 비교가 안 되는 수준...."

사람에 따라서는, 익히 아는 식재료라도 꺼림칙해서 먹지 못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개고기라든가, 그런 게 대표적이겠지.

리자드의 고기는 심지어 처음 먹어 보는 재료에, 몬스터에서 비롯된 것.

그럼에도 다들 맛있게 먹어 주는 모습을 보니....

솔직히, 요리한 사람으로서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거부감을 느끼는 병사들은 있었다.

"괴물을 먹는다는 게 많이 꺼림칙하고, 기분상 쉽지는 않다는 거, 나도 안다."

"신 병장님...."

"그래도 한번 맡겨 줘라. 내가 기깔 나게 맛있게 해 줄 테니."

그런 이들에게 다가가, 나름 진심을 담아서 말하니.

"뭐... 신 병장님 요리 실력, 누가 모르겠습니까."

"재료가 되는 몬스터가 인간형이거나 그러면 좀 꺼림칙하겠지만. 리자드 정도는, 그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태워 버렸던 리자드들이 생각나서 아쉬울 정돈데요?"

괴물을 먹는단 것에 거부감을 보이던 병사들도, 표정이 누그러지는 게 보였다.

맛도 맛이지만, 필요에 의한 일.

결국.

모든 병사가, 괴물을 먹는다는 것에 찬성하게 되었다.

"기분이다! 숨겨 놨던 소주랑 맥주도 오늘 다 까!"

"아니, 술을 숨겨 놓으셨습니까?"

"부서별 회식할 때 남는 술들. 다 어디 갔다고 생각했냐?"

"가끔 취사병들 몸에서 술 냄새가 나더라니!"

괴물이 부대를 덮치고, 어떻게든 부대원들 멘탈 관리를 해 오긴 했지만.

그럼에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부대 분위기 자체가 조금씩 경직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가 부대를 떠나게 될 테니.'

그 전에, 이렇게 긴장을 풀어 줄 만한 회식 자리를 한 번쯤 가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우웨엑."

"아! 김 일병님 토하려고 합니다!"

"술도 약한 놈이 뭐가 그리 신나서...!"

...좀 과하게 풀렸나? 싶기도 한 풍경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들 신나게 먹고, 마시고 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이건, 오늘의 메인 요리, 리자드 치프틴 요리다!"

"뭐, 뭡니까. 죽인 지가 언제인 녀석인데...!"

"이런 날이 올까 봐. 몰래 손질해 놨지."

"세상에...."

김 중위에게도 먹여 봤지만, 치프틴의 고기는 다른 리자드의 고기보다도 맛도 좋고, 요리의 효과도 높았다.

혹시 몰라 남겨 둔 양을 제외한 치프틴 고기도 오늘 모조리 풀어 버리기로 했다.

다행히도 재료는 썩을 정도로 넘쳐 나, 떨어진 음식을 계속해서 리필해 주며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게 꽤 재밌다.

한쪽 구석에서는, 생존자들의 대표인 이상아 씨도 꼬치 하나를 들고 둘러보는 모습이....

"어?"

이상아 씨?

괴물을 먹어야 한다는 건, 살아남기 위해서 요리를 통한 버프가 필수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즉,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생존자들에게는 굳이 강요할 사항이 아니다.

그래서 전투에 참여하는 인원인 부대원들만 회식에 참가시킨 건데, 생존자 대표인 저 사람이 여긴 왜.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생존자들은 소외시키고, 부대원들만 챙겨 준다든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버리면 곤란하다는 생각에, 급하게 다가가 설명을 시도했다.

"상아 씨? 이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괴물을 먹는 건가요?"

"네? 아."

아무래도, 이미 부대원들이 리자드 고기가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

다행히 차별이라느니 하는 생각은 안 하는 것 같긴 한데, 그것보다 괴물을 먹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듯한 모습이다.

'...하긴, 괴물을 먹고 좋아하는 모습도 보기에 영 이상하긴 하네.'

왜 영화 같은 걸 보면, 사이비 집단들이 마수의 고기를 먹으면서 광란의 축제를 즐기고 하지 않는가.

실상은 전혀 다르지만, 겉으로 봤을 때 우리도 비슷하게 보일지도.

"이게, 보기엔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나름대로 설명하려는 내 말이 들리기는 하는 것인지.

혼잣말을 잠깐 중얼거리던 상아 씨가, 이내 고개를 들더니 말을 꺼냈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네?"

"저희도, 부대에 정식으로 합류시켜 주셨으면 해요."

23화 입대자들

"부탁이 하나 있어요."

"네?"

"저희도, 정식으로 부대에 합류시켜 주셨으면 해요."

부대에 합류시켜 달라.

"이미 합류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름 잘 보호해 드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의미가 아니란 거, 아시잖아요?"

"...그야, 뭐."

20여 명의 생존자.

그들은 우리 부대를 찾아와, 우리의 보호 아래에 들어왔지만....

'엄밀히 말해, 부대의 일원이 된 건 아니지.'

이들은 어디까지나 보호를 받는 입장에 불과하다.

그나마 보호받는 대신 부대의 자잘한 일거리를 나눠서 해 주고는 있다고 하나, 그뿐.

저들은.

우리의 전우가 아니다.

"군인 여러분께 보호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래서는 살아남을 수 없겠죠."

"음. 열심히 보호해 드릴 생각은 있습니다만?"

"아뇨, 이런 세상이니까요.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싸우지 않는 한, 언젠가 위기가 찾아왔을 때. 도태되어 죽을 뿐이겠죠."

"의미는 알겠습니다만, 조금 갑작스럽군요."

"권창 씨 일행이 배신한 그날부터 생각하고 있던 일이에요."

범죄자들.

그나마 우리 부대가 각성자들로 이루어진 부대였기에 그들을 처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본래 그들은 이상아의 생존자 무리에 속해 있던 이들.

우리가 아니었다면, 유일한 각성자인 이상아만으로는 그들을 막아 낼 수 없었겠지.

'생각해 보면 이들은, 운이 좋았을 뿐.'

자칫하면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던 셈이다.

그 와중에, 우리가 안정적으로 각성자를 늘려 가는 모습을 보았고.

생존을 위해 괴물을 먹는 모습까지 본 뒤, 생존자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자신들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군대식으로 말하자면, 전시의 민간인 징용.

보호받는 처지에서 벗어나.

우리와 함께, 괴물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다른 생존자분들의 의견은, 들어 보신 겁니까?"

"충분히 회의를 거치고 하는 얘기예요. 저희도 스스로 살아남을 힘이 필요하다고. 즉."

"저희 부대에, 각성자로서 합류하고 싶으시다고."

"네."

"저희와 함께한다는 건, 부대원으로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만."

"김 중위님은 괜찮은 지휘관으로 보였어요. 큰 문제는 없겠죠."

그 말에, 우리의 대화를 멀리서 지켜보던 병사들이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은 아직도 김 중위를 우리 지휘관으로 알고 있구나.

'음. 뭐 그런 거야 나중에 알려 주면 될 일이고.'

여러모로 대화해 본 결과, 각오는 충분한 걸로 보이고.

주변의 다른 병사들도 딱히 꺼리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렇다면야....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나는 상아 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희 부대에 합류하신 걸 환영합니다."

"...! 고마워요.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할게요."

* * *

놀랍게도.

열심히 하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 고기들, 괴물 고기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만."

"그러면, 비늘이나 가죽도 손질하셨겠네요?"

"네?"

내가 스킬을 통해 익힌 '리자드 손질법의 깨달음'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대상을 깔끔하게 손질하는 방법이었다.

덕분에, 요리하고 살코기를 얻어 내는 게 목적이었다고 하나.

리자드들의 가죽이나 비늘은, 꽤 깔끔하게 손질된 상태였다.

"가죽도 질기고 두껍지만... 이 비늘, 말도 안 되게 단단하네요."

"리자드라는 괴물입니다. 말씀하신 비늘과 가죽은 총알로도 잘 뚫리지 않는 수준이죠. 총이 없는 상태라면 약점을 공략하는 것 외에는 상대할 방법이 없는 괴물들입니다."

지금은 한두 마리씩, 길 잃은 리자드들이 흘러 들어오는 수준이라 그나마 상대할 만하다지만.

그냥 평야에서 같은 숫자로 맞붙는다고 쳤을 때.

약점을 모른다면 아마도 절대 이기지 못했을 괴물들.

"좋네요!"

"네?"

"부대에 안 입는 옷들 있죠? 그것들 좀 빌릴게요."

그렇게 말한 상아 씨는, 리자드의 부산물들과 죽은 병사들이 사용하던 의류를 챙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치프틴의 부산물들까지.

그리고 다음 날.

"이거, 한번 봐 주시겠어요?"

"...이건!"

[강철 가죽 지휘 전투복]

[강철 가죽 전투복]

그녀가 가져온 것은, 군복이었다.

베레모와 군복, 군화.

거기에 야전 상의까지 모두 갖춘, 전투복 세트.

우리가 아는 군복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국방색이 아닌 검은색, 회색의 패턴이 그려져 있다는 것.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그 이름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

"가죽으로 만들 수 있는 군복 세트예요."

"...맙소사."

"리자드들의 가죽, 말씀하신 대로 방어력이 엄청나더라고요? 각성자인 저 같은 사람이 아니면 다룰 수도 없을 정도로.... 리자드의 비늘은 방어력은 높지만 조금 두꺼워서, 움직임에 제한이 없는 부위나 급소 쪽에만 안감에 채워 넣는 방식으로 방어력을 보강했어요."

[강철 가죽 지휘 전투복]

[초보 재봉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가죽 갑옷 세트.]

[강력한 방어력으로 유명한 강철 리자드, 그중에서도 치프틴급 개체의 부산물들로 만들어진 의상. 다방면으로 굉장히 높은 저항력을 지니며, 치프틴의 마력이 미세하게 남아 있어 다양한 효과를 부여한다.]

[착용 시, 물리 저항력 대폭 증가.]

[착용 시, 마법, 속성 저항력 증가.]

[착용 시, 특성 [하급 카리스마] 부여.]

[착용 시, 힘, 민첩 스탯 증가.]

지휘 전투복은 치프틴의 가죽으로.

일반 전투복은 리자드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특수 전투복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반 전투복 역시, 효과들이 한 단계씩 내려가거나 특성 부여 등의 효과는 없다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상당히 훌륭한 물건이었다.

이상아.

전 직업, 양복점 의상 디자이너.

현 직업, 재봉사.

'생산 계열...!'

왜 직업을 듣고도 바로 이런 쪽으로 생각하지 못했을까.

내가 리자드의 부산물로 요리를 만든 것처럼.

이상아는 방어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스탯이 증가하는 아이템은, 집단 스킬을 통해 얻은 [클랜의 증표]뿐이었는데.'

군번줄의 형태를 한 증표.

그로 인해 증가한 능력치만 해도, 우리 부대원들의 전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만든 장비 역시 마찬가지.

능력치 증가는 물론, 저항력을 상승시켜 준다는 문구.

아직까지 몬스터 상대로는 별 의미도 없는 군복을 입고 활동하던 우리가, 제대로 무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원래 의상 디자이너였던 탓인지.

디자인도 꽤 세련된 게 느껴진다.

다만.

"군복, 같이 생겼군요?"

"아무래도 여러분들은 군인이시잖아요? 그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디자인했어요."

"...."

그야,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이만한 디자인이 없긴 하겠다만.

'가만 보니, 차이가 없진 않네.'

디지털 패턴의 군복이지만, 일단 검은색과 회색 베이스란 게 가장 큰 차이.

육군보단, 도시에서 활동하는 전경들을 연상시키는 색 배치다.

야전 상의 같은 경우에는, 익숙한 물건보다 길이가 길어졌다.

허벅지를 반쯤 가릴 정도의, 거의 롱코트에 가까운 길이.

"방어구는 면적이 넓을수록 유용하니까요."

디지털 패턴의 군복은, 위장의 효과는 뛰어날지언정, 괴물과의 전면전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전투복은, 몬스터와의 싸움을 가정해도 충분히 훌륭해 보였다.

"일단 장교용하고 병사용은 성능을 좀 다르게 했어요. 치프틴 가죽으로 만든 지휘 전투복이 장교용인데, 지휘관인 김 중위님이나 다른 조장급 분들이 착용하시면."

"아, 그거 말인데. 지금 저희 부대 지휘관은 접니다."

"네에?"

그렇게, 조금 늦었지만.

내가 지휘관이라는 사실까지 공유하며, 완벽하게 클랜에 합류하게 된 이상아 씨.

그리고 그녀의 주도하에.

부대의 무장이 시작됐다.

"무슨 옷에 능력치 증가가...!"

"만져 봐. 이거 가죽이야."

"가죽 군복인데 이렇게 편하게 움직여져도 되는 건가...?"

각성한 병사들에게, [강철 가죽 전투복]이 지급됐다.

단순히 옷만 준 게 아니다.

"전사조 분들은 아무래도 방어력이 더 필요할 테니. 안쪽에 방어구를 덧입을 수 있게 해 놨어요."

"사수 각성자 분들은 여기. 탄창을 넣을 수 있게 탄창 주머니들을 달아 놓은 버전이에요."

"영준 씨는 칼을 쓴다고 하셨죠? 벨트에 칼집을 걸 수 있게 해 놨어요."

디자인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지만, 각성자들의 유형에 따라서 조금씩의 차이를 줬다.

의상을 받는 각성자가 요구하는 사항이 있다면 즉각적으로 반영하기까지.

덕분에, 모든 부대원이 착용하는 제식 복장임에도 개개인의 성향에 따른 커스텀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제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광일이, 네가 전사조장이잖아. 너 말고 누가 입냐."

나나 김 중위를 비롯.

조장급 각성자들에게 [지휘 전투복]이 지급됐다.

지휘복은 치프틴의 부산물들로 만들어진 장비.

지금도 소규모로 부대를 습격해 오는 리자드들과 달리, 당장은 재료의 수급처가 없는 만큼 희귀한 장비기도 했다.

그 마지막 한 벌은.

"상아 씨, 당신한테 맞춰서 만드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부대원들과 상의한 결과.

이상아 씨의 몫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아니, 왜 저한테...."

"생존자들의 대표니까요. 어떻게 말하면 조장급이나 다름없죠."

"...부대에 합류한 시점에서는 큰 의미 없는 직함 아닌가요?"

"아뇨."

생존자들의 대표.

확실히, 이들이 우리 부대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시점에서 똑같은 병사로서 대우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희는 곧, 부대를 떠날 겁니다."

"그게 무슨...."

"바깥에 나가면, 다른 생존자들이 합류하는 일도 있겠죠."

"...."

"상아 씨는, 그 생존자들을 맡아 주셔야 합니다."

바깥에서 만나게 될 생존자들을 대하는 일.

부대원들도 하려면 못 할 건 없겠지만, 우리는 생존자로서의 삶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생존자들의 리더로서,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 봤던 인물.

그녀야말로 적임이다.

"거기에, 장비를 보급하는 생산계 각성자이기도 하시니까요."

"...생각보다 중요한 위치가 돼 버렸네요."

"저도 겪어 봐서 압니다만, 좀 신경 쓰이긴 해도 금방 적응되실 겁니다."

나도 하루아침에 클랜 리더로 지목받은 입장.

그래도 뭐, 인간이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금방 익숙해지더라고.

"그 답례라고 하긴 뭐 하지만, 저희 측에서 하나."

나는 품 안에 가지고 왔던 물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일반적인 병사의 경우, 부대에 전입한 뒤 개인 화기로 M16, K2 같은 돌격 소총을 보급받는다.

대부분의 장교 역시, 특수부대 같은 경우가 아닌 한 마찬가지.

그러나 소수의 예외가 있으니.

"권총...인가요?"

"K5입니다."

영관급 장교나 주임원사 같은 특별한 경우.

돌격 소총이 아닌, 권총을 보급받는다는 것.

'우리 부대의 경우엔, 대대장님과 주임원사님, 군의관님까지. 세 명.'

주인을 잃은 세 자루의 권총들.

지휘통제실 구석에 얌전히 보관되어 있던 녀석들이다.

'아깝게 버리고 갈 수는 없지.'

그중 한 정은, 일단은 우리 부대의 최고 계급자.

[초보 지휘관]으로 각성한 김 중위에게 지급했다.

명목상이지만 대대장이나 다름없는 위치인 데다가, 지휘 계열 특성과 스킬에 치중된 김 중위는 전투 계열 스킬이 빈약했기 때문.

'또 다른 한 정은, 내가 사용할 예정이고.'

내가 사용 중인 무기는, 죽은 후임 녀석의 것이었던 긴 회칼.

내 특성인 '단도 숙련'에 적합한 무기인 데다가, 묘하게 손에 익었다는 점도 있어서, 지금까지는 이 칼만을 무장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한계가 있어.'

그걸 처음 느낀 것은, 리자드 치프틴과의 싸움 때였다.

리자드라는 종족의 약점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덩치의 리자드 치프틴은, 내가 온 힘을 다해 칼을 뻗어도 그 약점에 칼이 닿지도 못하는 수준이었지.

전사나, 마법사 등.

전투 계열의 각성자들은 그런 상황에 대응할 만한 스킬이나, 특성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생산 계열 각성자.

전투 계열의 특성이 부족한 만큼, 부무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결과다.

나와 같은, 생산계 각성자인 이상아 씨 역시 마찬가지.

"...열심히 해야겠네요."

보통이라면 반출이 불가능한 권총까지 지급받았단 사실이 꽤 크게 다가오는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총을 받아 드는 그녀.

그렇게, 부대원들의 무장이 어느 정도 끝났다.

* * *

며칠 뒤.

"민철이, 따라와."

"예... 옙!"

"자식, 쫄았네. 내가 붙어 있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이미 각성한 선임 병사 한 명이 이병을 데리고 죽어 가는 괴물에게 접근한다.

"야, 쫄지 마, 쫄지 마!"

"막상 해 보면 별거 없어!"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 역시, 소리를 지르면서 이병을 독려해 주었다.

그리고.

푹!

"해, 해냈습니다!"

"축하한다. 너도 이제 각성자야."

이병 장민철.

우리 부대의 전 막내가 각성에 성공했다.

[조건이 충족됩니다.]

[100인 이상의 인원(100/100)]

[과반수의 인원에게서 인정받는 리더(1/1)]

[길드(100인)]를 결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길드는 임시 단체인 파티나, 집단의 초기 형태인 클랜과는 달리,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춘 본격적인 사회 집단입니다.]

[직위를 정하고, 규율을 만들고, 질서를 정립하십시오.]

[세상에 당신들이 만든 질서를 강요하십시오.]

[부관 지정이 가능해집니다.]

[길드의 업무를 분담할 부관을 지정할 수 있습니다.]

[부관들은 길드의 내정에 어느 정도 관여할 수 있으며, 길드 메시지를 통해 원거리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길드명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길드명을 지정해 주세요.]

[대지역 - ROK의 첫 번째 길드입니다.]

[소지역 - ROK. 17의 첫 번째 길드입니다.]

[업적 달성 - 조합 결성.]

[앞서가는 이들을 위해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 용의 이빨]

준비는 모두 갖춰졌다.

이제, 떠날 때가 왔다.

24화 강철 군단

부대를 버리고 이동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을 때.

안전한 부대를 떠나 위험한 지상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의견에, 예상대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반박은 하지 않더라도,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이는 병사들도 있었고.

"까짓거 가 봅시다!"

"끼에에에엑!"

고맙게도, 용기가 듬뿍 담긴 요리를 먹여 주니 누구보다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불가피한 일인 만큼 어쩔 수 없지.

"부대를 떠나기 전에, 먼저 정리하고 가자."

지상으로 원정을 떠나기 위한 준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마지막으로, 모든 부대원과 생존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후 회의를 진행했다.

"우선, 우리의 각성자가 100인이 되면서 길드로 성장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지? 무려 국내 최초란다. 다들 박수."

"와아아."

짝짝짝.

별 의미는 없는 작은 박수가 지나가고.

"그리고, 길드로 성장하면서 얻게 된 효과로 부관 지정이라는 게 생겼다."

"부관...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시스템창을 켜 길드의 정보로 들어갔다.

[부관 : 0명(0/5)]

[부관은 길드 마스터를 도와 길드를 운영하는 핵심 간부들입니다.]

[부관으로 지정될 시, [증표] 스킬의 버프 효과가 상승합니다. 부관급부터는 메시지 기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증표 스킬의 버프 효과 상승은 이미 나는 누리고 있는 부분이다.

증표 스킬로 주어지는 증표의 버프양은 착용자의 지위에 따라 달라지며, 이미 나는 리더로서 남들보다 높은 버프를 누리고 있던 상황.

이번에 길드 마스터로 상승하며 버프양도 증가했다.

부관들도 그런 식의 버프양 증가가 있겠지.

중요한 것은 그다음 문구다.

"부관으로 지정된 이들은, 다른 부관이나, 길드 마스터인 나와 원거리 통신이 가능해."

"원거리 통신...."

그 말에,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세상에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함과 동시에, 핸드폰이나 라디오 등, 기존의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

그런 원거리 통신이 다시금 가능해진다는 것.

그만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늘어나겠지.

"그러므로 여기서, 부관을 정해 놓고 가려고 한다."

부대에 뭉쳐 있을 때는, 100인이라는 인원을 통솔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대를 떠나 좀비와 괴물이 넘쳐 나는 지상으로 나가면, 100인이 한곳에 뭉쳐서 행동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럴 때 나뉘어진 부대를 지휘 가능한 부관들의 역할이 중요해질 터.

"우선, 이민재 병장."

"예."

나보다 형이고, 평상시에도 서로 반말을 하고 지내는 사이지만.

공적인 자리임을 의식했는지 존대를 하는 민재 형.

"이민재 병장은 나와 함께 부대를 관리하는 데 도움을 주고, 유사시에는 부대를 나누어 지휘하게 될 거다."

민재 형은 기본적으로 머리도 좋고, 부대에서도 일 잘하는 걸로 유명했다.

다소 깐깐한 성격 탓에 싫어하는 부대원들도 있었지만, 괴물들이 나타난 후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덕분에 부대에서의 평판도 꽤 좋아졌다.

부대원들도 이민재 병장이라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분위기.

아마 가장 기본적인 부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민재 형이 될 것이다.

"다음은 전광일 상병, 서수혁 상병."

"예!"

"옙."

각각 기존에도 전사조장, 사수조장의 역할을 맡았던 이들.

각 직업군의 최고참으로서 잘 활약해 왔으니, 부관으로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주리라 기대할 만하겠지.

"다음은, 이상아 씨."

"네."

얼마 전 부대에 합류한 생존자 집단의 리더, 이상아 씨.

지금은 생존자들도 천천히 각성자들로 만들고 있는 상황.

그들의 역할도 점점 더 중요해질 터.

"이상아 씨... 라는 말은 이제 어울리지 않는군. 앞으로는 다른 부대원들과 똑같이 대우하겠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이제는 부대의 일원이 된 상아와 생존자들.

지휘관으로서, 더 이상의 존대는 불필요하다.

그녀도 자신이 부대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금 체감한 듯, 더욱 힘을 주어 대답했다.

"이상아는 앞으로 추가로 합류하게 될 생존자들과 우리 부대와의 조율을 담당하게 될 거다."

생존자 집단에서 가장 큰 입지를 지닌 그녀가 부관을 맡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거기에 지상으로 나간다면 또 다른 생존자 그룹들이 합류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

이미 생존자 그룹을 이끌어 본 그녀라면, 그들과의 조율 역시 능숙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4명의 부관이 선출되었다.

나름대로 이유가 확실한 만큼, 부대원들 역시 큰 불만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부관은.

"마지막으로, 박태준 병장."

"예."

그 이름을 부른 순간.

웅성웅성.

웅성웅성.

부대원들 사이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박태준 병장님이?'

'병장님도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는 분을 부관으로 삼아도 되는 건가?'

사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부관이라 함은 길드 마스터를 대신해 부대원들을 지휘하고, 때로는 일선에서 싸워야 하기도 하는 직위.

태준이 녀석의 부대에서의 평판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다리가 다친 녀석이 지상에서의 부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태준이 녀석을 부관으로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박태준 병장은, 부대를 떠나지 않는다."

"...예?"

웅성웅성.

별다른 이의 없이 얘기를 듣던 병사들 사이에, 처음으로 파문이 인다.

우리는 부대를 떠나, 지상으로 진출할 것이다.

그러나 태준이를 비롯한 몇 명의 부대원들은, 이곳에 남는다.

"이 산맥은 우리의 유일한 점령지. 모든 부대원이 이곳을 떠나면 점령 효과 또한 사라질 테니까."

"아...."

우리가 처음, 이 산맥의 지배권을 얻었을 때.

나타난 문구가 있다.

[영토의 지배권을 유지하는 동안, '점령 포인트'를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지배권을 유지하는 동안, 점령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다는 문구.

[점령 포인트]

[점령지를 지배함으로써 얻어지는 포인트입니다. 더 많은 점령지를 더 오래 지배할수록 더 많은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 점령 포인트가 어디에 사용되는 것인지, 현시점에서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게임은, 어째서인지 점령전의 형태를 띠고 있어.'

점령을 유지하는 것으로 벌 수 있는 포인트가, 아무 의미도 없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유일한 점령지, 산맥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유는 그게 다가 아니다.

"...다들 알겠지만, 내 직업은 천문관이다. 별이 잘 보이는 곳일수록 능력을 사용하기가 쉽지. 우리 부대만큼 별이 잘 보이는 곳도 드물고."

태준이 녀석의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이 산에 남아 산맥의 점령을 유지하면서, 내 능력으로 얻게 되는 정보를 전달하게 될 거다."

레이더반 최고참, 박태준.

녀석은, 지상에 내려간 우리가 나아갈 길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레이더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그렇게 태준이를 비롯해, 녀석과 친한 레이더반 병사 7명은 부대에 남기로 했다.

계속해서 부대를 관리하면서 점령을 유지하고, 태준이 녀석의 능력으로 알게 된 정보를 전달하기도 쉽기 때문.

식량 사정도, 부대에 남아 있는 전투식량과 비상식량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터.

'혹시나 적들이 침공한다고 해도 문제없겠지.'

산맥에 남는 것은 고작 7명밖에 안 되는 병력.

지금 같은 소규모 교전이라면 모를까, 대규모 침공에는 무력할 것이다.

그러나 태준이 녀석의 천문 능력이라면 침공을 사전에 감지하고, 지상에 내려간 우리 본대에 지원을 청하는 식으로 대처가 가능하다.

그렇기에, 태준이 녀석을 부관으로 지정했다.

"다른 의견이 없으면, 부관은 이렇게 다섯으로 하는 걸로. 그럼 마지막으로...."

다음으로 정해야 하는 것.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중요한 부분.

[길드명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길드명을 지정해 주세요.]

"길드명. 제안할 거 있는 사람?"

파티나, 클랜 같은 작은 단위의 집단일 때는, 이름을 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100인의 각성자가 모이고 길드급으로 성장한 지금.

대외적으로 우리를 표현하는 데 쓰일, 길드명을 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거 굳이 바꿀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처럼 423대대로 이용해도 문제없을 것 같은데...."

병사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 의견은 기각이었다.

"며칠 전이었다면 모를까.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했잖아?"

"아. 그렇군요."

423대대의 병사들과 간부들.

그게 우리 집단의 전부였다면 기존의 대대명을 이용해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아 씨를 비롯한 생존자들이 부대에 합류한 지금.

423대대라는 이름은 대대 출신의 병사들을 이어 주는 데는 유용하지만, 나중에 부대에 합류한 이들에게는 벽으로 느껴지겠지.

"특히, 지상에서 활동하기로 결정한 만큼,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합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부대명이 아니라, 우리를 대표할 새로운 이름이 필요해."

앞으로 부대에 합류할 이들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우리의 특색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이름.

"강원도 인류 해방 전선, 같은 거 어떻습니까?"

"강원도에만 머무를 건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부대원 중에는 강원도 사람이 더 적고."

"원탁의 기사단!"

"김 상병님... 그건 좀...."

병사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이거다 싶은 길드명은 잘 나오지 않았다.

"애매하다 싶으면, 키워드를 정하는 건 어때."

"키워드?"

한참을 고민하고 있자니, 민재 형이 말을 꺼냈다.

"단체명부터 정하는 게 어렵다면, 차근차근 단계별로 정하는 거지.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합류했을 때도 어색하지 않을 키워드부터."

"특색이라...."

우리들의 특색이라고 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군부대 출신이라는 거?"

"출신이라고 할까. 아직 다들 군인이긴 합니다만."

하긴.

부대를 떠나 이동할 뿐이지, 전역 허가를 받지 않은 이상 우리는 여전히 군인이다.

그렇다면 군인.

아니, 군대에 어울리는 키워드를 정하는 게 낫겠지.

군대라....

"강철...."

"강철?"

별생각 없이 중얼거린 단어.

그 단어에, 다른 사람들이 반응했다.

"아니, 나는 군대 하면 떠오르는 게 그거라서. 총도 그렇고, 장갑차 같은 것도 그렇고. 철이잖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실제로는 강철이 아닌 합성 금속 같은 걸 쓰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단단하다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내가 군대를 떠올릴 때 연상하는 이미지는 강철이였다.

"강철이라.... 나쁘지 않네."

"으응? 그런가?"

단순히 내가 군대에 대해서 연상하는 단어가 그것일 뿐인데, 이렇게 정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강철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굳건함도 있고."

"우리가 처음 상대한 괴물도 강철 리자드였잖습니까?"

부대원들의 반응은, 이미 이걸로 정해진 듯한 분위기.

"무엇보다, 우리의 대장인 네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거니까.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고 본다."

"...그런가."

슬쩍 주변의 반응을 살펴보니, 불만이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좋아. 그러면 강철을 키워드로 두고, 단체명을 어떻게 할까인데."

여기서도 다시 이런저런 의견이 오갔다.

기사단... 형제단... 전우회... 향우회....

"강철부대 같은 건 어떻습니까?"

"...아니, 그건 하지 말자."

"어, 그렇게 별로입니까?"

별로인 건 아닌데, 왠지 그건 쓰면 안 될 것 같아.

그리고 약간의 회의를 걸쳐.

다수결로 정해진 이름은 이것이다.

[강철 군단]

"우리는, 군단이다."

"군단치고는 많이 작기는 하네요."

구석에서 들려온 병사의 목소리에, 소소한 웃음이 퍼져 나갔다.

[길드의 체계를 정립하였습니다.]

[길드 : 강철 군단]

[군단장 : 신영준]

[부관 : 이민재, 박태준, 전광일, 서수혁, 이상아]

[군단원 : 100인]

[설명]

[ROK. 17 지역, '산맥'의 깊은 곳에서부터 발족한 무력 집단.]

[강철 리자드 일족과 '산맥'의 지배권을 두고 짧은 시간 동안 경쟁했으나, 지휘관급 개체의 공격에서 비롯된 대규모 교전에서 승리. 리자드 세력을 몰아낸 뒤 산맥의 온전한 지배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산맥의 지리적 이점을 기반으로 안정적으로 세력을 키운 끝에, 군단의 발족에 이르렀다.]

[군부대에 뿌리를 둔 세력으로 다수의 군용 화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빠른 성장을 이루어 낸 강력한 각성자 집단. 국가에 소속된 군부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나, 민간 생존자 집단의 합류로 인해 세력의 정체성을 재확립한 뒤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고 있다.]

"허. 자세하기도 해라."

그야말로 게임의 세력을 설명해 주는 듯한 문구의 등장.

약간의 어색함이 느껴지는 한편,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뿌듯해지기도 한다.

특히 마지막 문장.

이제 우리는 산맥을 떠나, 외부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한다.

'문제는, 어디로 향하는가.'

강원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에 위치한 우리 부대.

부대를 떠나 내려간다고 한다면, 갈 곳은 동쪽 아니면 서쪽.

서쪽, 영서지방에는 춘천 같은 큰 도시가 있고, 땅도 넓다.

지역이 넓은 만큼 다른 군부대도 많이 있고, 우리 부대의 관사가 위치한 곳도 서쪽.

반대로 동쪽, 영동 지방에는 강릉 같은 도시가 있고, 바로 근처에 바다가 있다.

우리 부대의 상위 부대인 12군단이 위치한 장소기도 하고.

"넓은 지역으로 진출하느냐, 상위 부대가 위치한 곳으로 가서 합류를 노려 보느냐군요."

"어느 쪽이든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으니...."

그렇다면....

"점쟁이한테 맡겨 볼까."

"...점쟁이가 아니라 천문관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끼이이익....

안개 낀 산맥 깊은 곳에 위치한, 작은 군부대.

그 부대의, 오랜 시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정문이.

"가자."

드디어 열렸다.

25화 하산 (1)

우리가 산맥의 지배권을 얻긴 했지만, 그렇다고 산맥 전역에서 군림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높은 봉우리의 부대에서 방어전을 펼쳐 경쟁자를 제거했을 뿐.

"최근에 부대원들을 시켜서 조사해 본 결과다."

민재 형이 군사 지도를 꺼내 들며 말했다.

우리 부대 근처의 지리가 적힌 군사 지도.

거기엔 정체 모를 X자 체크가 수북하게 되어 있었다.

"이민재 병장님? 이 표시들은 뭡니까?"

그 부분이 궁금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광일이가 물었다.

"최근에 괴물들이 목격된 장소다. 이걸 통해 대략적으로 근처의 몬스터 숫자도 가늠할 수 있겠더군."

"어, 체크가 되게 많은 것 같습니다만."

"잘 봤다. 실제로도 그럴 거다."

"아."

치프틴을 격퇴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부대에는 하루에 몇 마리씩의 리자드들이 쳐들어온다.

큰 무리가 아닌지라 격퇴에 문제는 없었고, 오히려 부대원들의 레벨 업에 도움이 되는 편이었지만.

"산맥에 퍼져 있는 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다는 건가."

"그래."

민재 형은 지도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에 괴물들을 뱉어 내는 구멍이라도 뚫려 있는 건지 뭔지 모르겠다만... 병사들이 관측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괴물은 줄어들긴커녕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거다."

"우리 부대에 흘러 들어오는 녀석들은 꾸준히 사냥하고 있지만, 오히려 총 숫자는 늘고 있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게다가 최근엔 리자드 외에도 기괴한 형체의 괴물을 봤다는 얘기도 있어. 그나마 리자드들은 정보라도 있지, 다른 괴물들이 더 곤란할지도 모른다."

리자드만 해도 약점을 알고 있으니 그나마 상대할 만한 거지.

약점의 위치를 모른다면 사수들 정도의 화력이 아니면 도저히 상대하기 어려운 괴물이다.

반대로 말하면 약점이라도 알고 있는 리자드가 그나마 나을 수도 있다는 것.

적의 전력은 생각 이상으로 까다로울지도.

이쯤 되니.

오히려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었다.

"상아 조장."

"네?"

"어떻게 이 부대까지 온 거야?"

이상아와 그녀의 그룹에 속해 있던 20명가량의 생존자들.

그들은 어떻게 저 산맥을 뚫고 올라온 거지?

"글쎄요...? 몬스터는 당연히 있었지만, 지금 말한 것처럼 많지는 않았어요. 저희는 숫자가 적은 편이다 보니,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올라왔죠. 가끔 조우하는 몬스터도 한두 마리 정도라, 어떻게든 처치할 수는 있었고. 그 리자드라는 몬스터는 아니었지만요."

기척을 숨긴다니.

그런다고 몬스터들의 습격을 피할 수가 있나 싶다만.

"생각해 봐."

그 의문은, 민재 형이 풀어 줬다.

"산맥을 오르는 이들을 발견한 건 우리가 치프틴을 쓰러트린 다다음 날이었어."

"아."

과연.

리자드 치프틴은 우리를 사냥하기 위해 산맥의 리자드를 규합하고, 습격해 왔다.

우리는 그걸 격퇴했고.

덕분에 산맥을 돌아다니는 리자드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던 시점에, 그녀의 그룹이 산맥에 발을 들인 셈.

반대로 생각하면.

"만약 저희가 며칠 빨리 산맥을 오르려 했다면.... 으으. 소름 돋네요."

아쉽게도 지금의 우리는 그때와 같은 우연을 기대하기 어렵다.

부대원들은 숫자도 많고, 옮길 물자도 적지 않으니 몰래 이동하기도 어렵고.

교전은 불가피하겠지.

"하. 부대에서 방어전이라면 그래도 자신이 있는 편인데 말이지."

"부대를 떠나 산맥을 내려가는 일은, 각오가 필요할 거다."

어쩔 수 없다.

부대를 떠나 이동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상황.

가능한 한 철저하게 준비하는 수밖에.

"차량 정비는 다 끝냈습니다."

나는 나대로 식당에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자니.

차량 정비병 출신의 병사가 보고를 해 왔다.

그를 따라 이동하자, 멀리서 여러 대의 차량이 보이기 시작했다.

군용 레토나에, 두돈반이라고 불리는 대형 트럭.

민간에서 쓰이는 승합 차량부터 의무용 환자 운송 차량까지.

"동원할 수 있는 차량들은 다 꺼내 왔습니다."

"기름은 문제없나?"

"혹시나 해서 차량에 들어있던 기름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산에서 내려가서 약간 이동하는 정도라면 대체로 문제없을 겁니다."

부대의 발전기가 소모하는 기름양이 워낙 많아 걱정했으나, 다른 병사들도 언젠가 차량을 이용해야 할 것임을 짐작했던 모양.

"일단 실을 수 있는 건 다 실었습니다만. 괴물과의 교전에서 도움이 되면 좋겠군요."

"불안하긴 하지만, 믿어 볼 수밖에."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서 차량을 동원한 이유.

전투에 사용하기 위함이다.

'산 아래는 우리에게 불리한 영역이니까.'

그렇다면 어거지로도 유리하게 만들어야지 않겠는가.

적어도 지금까지 나타난 몬스터들은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었으니.

거대한 차량들로 장벽을 세워, 일종의 바리케이드로 삼을 생각이다.

"다른 생존자분들의 보호는 맡기겠습니다."

"네, 여러분도 힘내세요."

아쉬운 점은 최근에 합류한 생존자들이 아직 각성하지 못했다는 점.

그래도 더 이상 산맥에 머무르기는 현실적으로 힘들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아직 각성하지 못한 생존자들은, 상아에게 맡겨 가장 안전한 위치의 차량에 태운 뒤.

"개문하겠습니다."

"가자."

끼이이익....

안개 낀 산맥 깊은 곳에 위치한, 작은 군부대.

그 부대의 정문이, 드디어 열렸다.

* * *

"전사들은 이쪽으로!"

"생존자 태운 차량 먼저 안쪽으로 보내!"

좁은 정문이 열리고, 부대 밖으로 나선 순간.

우리는, 작전대로 진형을 구축했다.

애초에 우리는 각성자가 포함된 전투에 익숙하지 않다.

당연히 복잡한 진형을 구사하는 건 어려운지라, 구축한 진형은 간단했다.

'탱, 딜, 힐. RPG 게임에서는 정석인 진형이지.'

가장 외부에 장벽이 되어 줄 차량.

그리고 그 주변에 전사조들.

그 안쪽에, 원거리, 후방 지원 계열의 각성자들.

그리고 생존자들을 태운 차량이 위치한다.

단순하지만, 단순한 만큼 효과도 직관적이다.

전사와 차량들이 적을 막아 줄 동안, 뒤에서 마법사들이 공격하면 되는 것.

"문제는 적습이 사방 어느 곳에서 올지 모른다는 점이다만."

"그 부분은 차량 근처에 자리 잡은 전사들이 유동적으로 막아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진형을 구축하는 병사들을 보며, 광일이가 중얼거렸다.

"차량에 탑승한 채로 빠르게 내려갈 수 있었다면 좋았겠습니다만."

산맥을 내려가는 길은 차를 타고도 몇 시간이 걸리는 긴 길.

걸어서 내려가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릴 것이다.

속도로 따지면, 당연히 차를 타는 게 더 빠르겠지만.

"말했잖아? 너무 위험하다고."

"크흠. 투정 한번 해 본 겁니다."

우리 부대가 위치한 산맥의 도로는, 전체 중 절반 이상이 거친 비포장도로로 되어 있다.

심지어 길도 비좁은 편이라.

중간중간에는 차 두 대가 나란히 이동할 수 없는 구간도 많다.

험한 길인 것은 물론, 가드레일 따위도 없는 구간이 대부분.

사고라도 나면 즉시 산 아래로 낙하하게 되겠지.

애초에 이 도로를 쓰는 게 우리 부대뿐이었다 보니, 관리를 한다 해도 잡초나 돌을 제거하는 게 한계일 뿐, 도로 자체의 질이 높지는 못한 것이다.

'운전병들도 산을 오르내릴 때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운전한다고 했지.'

신병에게는 산을 오가는 운전은 시키지도 않았다던가.

어느 정도 운전 실력을 본 뒤.

안 될 것 같다 싶으면 애초에 정비병 쪽으로 돌렸다고 할 정도로 험한 길인 것이다.

이런 길에서 차에 탑승한 채로 빠르게 이동하다가 괴물에게 습격이라도 당하는 순간.

산 아래의 절벽으로 즉시 낙하하고 말겠지.

차라리 습격받을지도 모르는 위치에 차량들을 배치.

장벽으로 삼으며 천천히 이동하는 게 더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진형 구축, 완료했습니다."

"출발한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전원이 각성자가 된 덕에, 빠른 구보 정도로는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요리사인 나야 쉽게 지치지 않는 수준이지만.

전사들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들도 제칠 정도로 빠르게 달릴 수도 있겠지.

"그래도 부대 근처는 좀 잠잠하군요."

이동하는 차량에 맞춰 사주 경계를 하면서 이동하고 있자니.

병사 중 한 명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부대 근처는 우리의 영역이나 다름없던 곳.

지금까지는 잠잠하다만.

"이게 유지될 순 없겠지."

과연, 내 예상대로.

부스럭....

부대를 떠나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한 지 몇 분 되지 않았을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애초에 반쯤 야생에 가까운 산맥.

차라리 짐승의 발소리였으면 좋았겠건만.

"왔다."

소리가 들린 방향 저 멀리서.

검은 형체가 빠르게 접근해 오는 것이 보였다.

"다들 무기 들어!"

"침착하게 가자."

"부대에서 싸울 때랑 다를 것도 없어!"

선임병들이 병사들을 독려하고, 병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었다.

곧, 나무로 가려진 숲.

그 안쪽의 그림자 속에서.

"카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리자드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뒤로도 몇 마리인가의 리자드가 뒤를 이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작전대로, 차량을 방벽으로 이용한다."

전사조 병사들은 무기를 들고 차량의 뒤에 섰다.

방벽으로 삼은 차량들이 일차적으로 방어를 해 줄 터.

방벽을 돌아오는 적들만 상대하려 하는 작전이었으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차량은 방벽의 역할을 해 주지 못했다.

콰직.

"크륵...!"

리자드들은 날카로운 발톱을 부대의 운송용 트럭에 박는가 싶더니.

차량에 박힌 발톱을 지렛대 삼아 몸을 날리는 괴물.

녀석의 몸이 차량을 뛰어넘어 버렸다.

'미친.'

차량이 방벽이 될 것이라 생각한 건 우리의 착각에 불과했다.

평범한 민간용 차량 따위.

저 녀석들에게는 쉽게 넘어 버릴 수 있는 종잇장 수준의 벽이나 다름없었다.

"제기랄, 이럴 거 같더라니."

"장벽은 못 믿는다! 전사들 위치 바꿔!"

그 모습을 본 전사들이 급하게 위치를 바꿨다.

장벽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안 이상, 전사들이 커버해야 할 영역이 넓어진다.

"크륵!"

곧, 가장 먼저 차량을 뛰어넘은 괴물이 진형의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본 아군 사수 중 한 명이 괴물을 향해 발포하려는 듯 총을 들었으나.

탁.

나는 급하게 손을 뻗어 녀석의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작전대로 간다. 총은 쏘면 안 돼."

"하, 하지만."

우리가 원래 있던 부대는 아군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

사수들의 압도적인 화력을 이용한 방어전은 나쁠 게 전혀 없었다.

'여기는 달라.'

나무들로 인해 시야가 차단된 산맥은, 아군의 원거리 화력을 크게 제한했다.

그것만이라면 그나마 괜찮지만.

문제는, 총이라는 화기 자체가 예로부터 가지고 있는 페널티.

"총성이 울리면, 괴물들이 몰려올 거다."

커다란 발포음, 그 자체였다.

적은 숫자의 괴물들이라면 불리한 환경에서라도 이겨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총소리를 듣고 괴물들이 몰려오기라도 한다면.

"그땐 정말로 답이 없어지니까."

"하지만, 진형이...."

"차량이 도움이 안 될 경우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야. 전사와 마법사들을 믿어라."

실제로, 진형 너머로 몸을 날린 리자드를 상대하기 위해 전사들이 몸을 날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사들이 있었다.

거기에 마법사들은 사수와 달리 화력을 조절함으로써 큰 소음을 줄이고 싸울 수 있다.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다."

습격해 온 괴물들은 열댓 마리 이상.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투가 일어난 이상 소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산 전체에 울려 퍼지는 총성에 비하면 작다고는 하나 적어도 주변의 괴물들을 끌어들이기에는 충분한 소음이.

전투로 인한 소음과 괴물의 괴성을 듣고 다른 괴물들이 몰려왔다.

처음 우리를 습격한 숫자보다도 많아진 괴물들.

우리가 원래 있던 부대에서라면 큰 위협은 되지 않았을 숫자다.

우리 부대가 방어를 해낼 수 있었던 핵심은, 원거리 화력 투사.

탁 트인 시야와 여러 방어 시설들 덕에 가능했던 부분.

반면 저 녀석들은 온전한 상태로 진형 안에 들어와 버렸다.

충분히 위협적이긴 하다만.

'우리도 나름 각오를 하고 왔단 말이지.'

준비한 게 없지는 않다.

나는 부대원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전투식량 취식!"

다급한 전투가 이뤄지고 있는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다소 뜬금없는 명령.

"예!"

"전투식량 꺼내랍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적과의 거리를 살짝 벌리며 행동에 들어갔다.

건빵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내 드는 병사들.

그것은.

'육포'.

작은 종이에 싸여 있는 검붉은 육포.

병사들은 급박한 와중에도 종이를 뜯고 육포를 입 안에 욱여넣었다.

물론 평범한 육포는 아니고.

[하급 요리사의 용기가 담긴 리자드 고기 육포]

[마력이 담긴 재료로 만든 요리입니다. 요리의 효과가 상승합니다.]

[보존식으로 제작된 요리입니다. 시간 경과에 따른 능력치 저하가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섭취 시,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섭취 시, 요리에 담긴 '강철 리자드'의 마력이 몸 안에 스며듭니다. 물리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크큭! 오랜만에 재밌는 싸움이 되겠구나!"

"오늘 저녁은 지옥에서 먹는다!"

"끼에에에엑!!!"

내가 직접 만든 요리.

전투식량의, 첫 실전 배치였다.

26화 하산 (2)

내가 요리사로서 만드는 요리들.

그 효과는 엄청나지만, 가장 근본적인 페널티가 하나 있었다.

'일단 요리를 해야 한다는 거지.'

요리를 통한 버프를 주기 위해서 필수적인 일.

일단 요리를 만들어서 먹여야 한다는 것.

그 자체다.

그나마 부대에 있을 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나도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다만.

그렇다고 식당에서 요리할 시간도 없던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상에 내려가면 생각보다 문제가 커진다.

'요리하는 데 필요한 환경 자체가 제공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야전에서의 취사는 언제나 큰 위험을 동반한다.

냄새나 연기로 인해 적에게 위치를 노출할 가능성이 큰 것은 물론.

지금처럼 언제 습격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요리를 위한 장비를 펼칠 수도 없는 일.

산 아래에 안정적인 거점을 마련하기 전까지.

안심하고 요리를 만들기는 힘들다.

그러면 도시락이라도 싸 줄까 싶다가도 도시락은 금방 상해 버리기 마련.

그리고 이건 비단 괴물과의 전투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의 식사를 어떻게 하느냐는 많은 군주가 골머리를 싸게 만든 부분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하나 있다.

'전투식량.'

[스킬 - 전투식량 (new)]

[전투용 보존 식량의 제조가 가능해집니다.]

[전투식량은 일반 식사에 비하면 능력치가 다소 떨어집니다. 하지만 유통기한이 길고, 작은 크기의 음식으로도 높은 열량을 섭취하는 것이 가능해 휴대에 용이합니다. 보장된 맛은 물론이구요!]

김 중위의 일을 해결한 뒤.

레벨이 10에 도달하면서 얻은 스킬.

이 스킬을 적용해 만든 음식은 기본적인 효과가 소폭 감소한다.

하지만 그런 페널티는 우습게 여겨질 정도의 강점이 있으니.

유통기한이 사라진다는 것.

[하급 요리사의 용기가 담긴 리자드 고기 육포]

이 스킬을 통해 처음으로 만든 요리가 바로 이것이다.

고기를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드는 육포.

먼 옛날.

통조림이라는 획기적인 발명이 생기기 전까지.

전 세계의 군대에서 애용하던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형태의 전투식량.

'나중에 가면 아예 도시락도 전투식량화 가능할 것 같은데. 아직은 이 정도가 한계겠지.'

그럼에도 효과는 훌륭했다.

[섭취 시,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섭취 시, 요리에 담긴 '강철 리자드'의 마력이 몸 안에 스며듭니다. 물리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고정 스탯 상승.

재료로 사용한 리자드의 영향을 받아 물리 저항력의 상승까지.

거기서 끝이 아니다.

"김 중위님."

"크흠. 전원, 전투태세로!"

모든 부대원이 내 음식을 먹은 것을 확인한 뒤 김 중위에게 눈치를 주자.

고개를 끄덕인 김 중위가 소리쳤다.

[지휘 명령 - 전투태세가 울려 퍼집니다!]

[아군의 전투 능력이 10%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아군들에게 특성 - 전투태세가 부여됩니다.]

[특성 - 전투태세]

[일정 규모 이상의 아군과 진형을 구축해 전투에 임할 시, 전투 효율이 증가하며 전투로 인한 혼란에 면역을 지닌다.]

김 중위의 직업은 '신입 지휘관'.

나와 비슷한 후방 지원.

버퍼 계열의 직업이다.

김 중위의 버프는 아군의 능력치를 일정 비율 상승시켜 준다.

그리고 퍼센트 상승 계열의 버프의 특징.

'고정 수치 상승 계열의 버프와 시너지를 일으킨다는 거지.'

내 요리의 버프와 김 중위의 버프가 시너지를 일으켜 더욱 큰 효과를 만들어 낸다.

거기에, 요리에 담긴 '용기'의 효과까지.

"큭큭, 재밌는 싸움이 되겠어."

"와라, 버러지들아!"

아군 진형 내로 뛰어든 괴물들.

녀석들은 죽을 장소를 찾아온 셈이다.

* * *

그렇게.

산에서 내려오며 펼쳐진 첫 전투가 끝났다.

"부상자는 열 명 정도입니다만, 충분히 치료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불리한 지형에서의 싸움.

당연히 피해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두 명의 힐러 계열의 각성자들이 어떻게든 커버할 수 있는 수준.

부상자 쪽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신 병장님의 요리 효과가 컸습니다."

의무병, 사의준 일병이 말했다.

자신의 건빵 주머니에서 내가 만든 육포를 꺼내 들며 신기하게 바라보는 녀석.

"솔직히 부대를 떠나면 신 병장님의 요리 효과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이런 작은 육포로 이 정도 효과라니."

"칭찬은 고맙다만. 아직 개량할 점이 많아. 내가 숙련도가 모자라서 당장은 육포 정도로 그쳤지만, 더 개량해 나가야지."

전투식량으로 만든 육포.

이번 전투에서는 충분히 활약했다.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육포 정도로도 요리의 버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파격적인 효과다.

'하지만. 육포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전투식량에 불과해.'

통조림 같은 것이 생기기 전에나 이용되던 전투식량.

이후에 대체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기껏해야 육포인 만큼 본격적으로 만든 요리에는 미치지 못한다.

스킬의 숙련도를 늘리면서 좀 더 효과를 높여 나가야겠지.

"진심이십니까?"

"응?"

내 대답을 들은 사의준 일병은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지금만 해도 대단한데. 더 대단해질 여지가 있다는 거 아닙니까?"

"아."

"그 정도면 무서울 지경입니다."

"큼."

요리사란 직업의 효율은 나도 날이 갈수록 놀라는 부분이긴 하다.

전투 능력이 모자란 편이니 그 반대급부로 버프 효과가 좋아지는 건 이해 가는 부분.

'운이 좋기도 했지.'

내 요리는 기본적으로 먹는 사람의 숫자에 비례해 효과가 늘어나는 것과 다름없다.

일종의 광역 버프란 말이지.

100명 넘는 부대원들이 이 버프의 효과를 받기에 내 능력이 그만큼 빛을 발하는 셈이다.

나 혼자, 아니.

일행이 열 명에서 스무 명 가까이 된다고 해도 이만큼 빛을 보진 못했겠지.

취사병이라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무튼 병사들의 부상은 그렇게 사제와 치료사가 전담 가능한 수준이었다만.

사의준 일병과의 대화가 끝나자, 기다리던 병사 한 명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 차들은 못 살리겠습니다."

차량을 조사하던 공병 각성자.

이공우 상병이었다.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만."

"이걸로 증명됐군요. 일반 차량은 괴물들 상대로는 크게 의미가 없다고."

장벽으로 쓰던 차량은 그나마 큰 승합차나, 소형 트럭 등이었다.

하지만 그 차들의 외벽은 리자드들이 발톱으로 찢고, 뜯어내 완전히 걸레가 되어 버린 상태.

방호 능력은 크게 기대하긴 힘들겠지.

"일반 차들은 그렇다 치고. 군용 차량들은 어때. 비슷한가?"

"확실히 군용 차량들이 튼튼하긴 합니다. 발톱에 완전히 뜯겨 나가는 건 버틴 것 같습니다."

처참하게 뜯겨 나간 승합차 등과는 달리, 군용 차량들은 그래도 형체를 꽤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승합차들이 저렇게 된 걸 보면. 군용 차량들도 완전히 믿기는 힘들 겁니다."

"더 강한 괴물이 나오면 군용이어도 파괴당할 수 있다는 건가."

"장갑차도 아니고, 결국 군용 레토나일 뿐이니까요."

말을 마친 이공우 상병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자재만 충분히 있었으면 저희가 어떻게든 했을 텐데."

이공우 상병의 직업은 '공병'.

그 이름대로 무언가를 만들거나 강화하는 데 특화된 직업이다.

재료만 갖춰진다면 차량의 방어력을 보강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잖냐. 우리 부대가 대형 부대도 아니고. 괴물에 대응하기 위한 자재 같은 게 많을 수가 없으니."

"상황이 이러니 이해는 합니다만... 후, 역시 아쉽군요."

하지만 산속의 작은 부대에는 자재가 충분하지는 못한 편이다 보니.

공병으로 각성한 부대원들이 직업에 걸맞은 활약을 한 것은 부대의 방어 시설 보강 정도에 그쳤다.

지금은 '망치 숙련' 스킬을 가진 점을 이용해 전사직처럼 활동하는 녀석들.

'지상에 내려간다면 쓸 만한 자재들을 확보해 봐야겠네.'

내 요리도 그렇고.

'재봉사' 각성자인 이상아가 만들어 준 장비들의 효과도 그렇고.

이 '게임'에서 생산직들은 생각보다 강력한 편이다.

이 녀석들도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해 주지 않을까.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지만.

* * *

그렇게 전투 현장을 어느 정도 정리한 뒤.

우리는 전열을 다시 세우고 진군을 개시했다.

"잠깐 정지!"

"응?"

그런데 그렇게 이동을 개시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두에서 정지 명령이 내려왔다.

몬스터의 습격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이지?

"충성, 신 병장님?"

"어. 무슨 일이야."

"잠깐, 봐 주셔야 할 게 생겼습니다."

가장 앞에서 이동하던 병사들이 나를 찾아와 보고했다.

"뭔가 발견한 거냐?"

"옙."

"안내해."

병사들의 안내를 따라 행렬의 선두로 이동하자.

그들이 발견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부대를 향하는 길에 깔린 몇 안 되는 가드레일.

그리고 그 가드레일은....

"끊겨 있군."

큰 사고라도 난 듯 거칠게 뜯겨 나가 있었다.

"원래도 이러진 않았겠지?"

"예. 괴물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멀쩡했던 가드레일입니다."

순간적으로 괴물이 뜯어 버린 건가 했으나.

끊겨 있는 가드레일의 형체도 그렇고.

괴물이 가드레일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이거 설마."

부서진 가드레일의 모양.

그건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굴러떨어지며 뜯겨 나간 것 같은 형체를 하고 있었다.

'가드레일이 깔린 곳은 특히나 떨어지면 위험한 절벽 구간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절벽 가까이 몸을 옮겼다.

"신 병장님! 조심하십쇼!"

"안 떨어져, 걱정 말고."

아찔하기까지 한 절벽.

그 아래로 고개를 내밀자.

저 멀리 바닥 근처에 굴러떨어져 있는 레토나 한 대가 보였다.

눈에 익은 차량이었다.

'재민이, 승호....'

괴물들이 나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상위 부대에 연락하러 떠난 병사들.

그들이 타고 떠난 차량이었다

* * *

"운전병들이 타고 나간 차량이군요."

가드레일 너머에는 부대에서 사용하던 레토나 한 대가 전복된 채 떨어져 있었다.

저 차량을 타고 이동한 운전병 두 명도 아마 몸 성히 살아남지는 못했겠지.

"김재민 상병님이랑, 곽승호 상병님...."

"상위 부대에 연락하러 간다더니, 살아서 산에 내려가지도 못했을 줄은."

외부와의 연락이 끊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를 비롯한 다른 부대원들은 반대했지만.

김 중위가 밀어붙인 안건이 있다.

유무선 망이 무력화된 지금.

상위 부대와 연락하기 위해 운전병들을 보내 보자는 것.

비록 자원자를 뽑아서 보낸 것이기는 했지만.

결국은 산에서 내려가지도 못한 채 여기서 죽은 모양이었다.

"산에서 내려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했을지도 몰랐는데."

"...."

둘은 각성자도 아니었으니 괴물의 습격에도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허겁지겁 도망가다가 무력하게 사냥당하고 말았겠지.

그런데.

보다 보니 조금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었다.

"시체가 안 보이는군."

"예?"

"재민이랑 승호. 죽었다면 시체가 남아 있을 텐데 안 보여."

절벽 아래에 떨어져 있는 레토나.

반쯤 박살 난 승합차의 문은 뜯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병사들이 앉았을 운전석은 텅 비어 있었다.

"운 좋게 살아서 어딘가로 이동한 걸까요?"

"이 높이에서? 각성한 지금의 우리라도 저기까지 떨어지면 최소 중상일걸."

부대로 향하는 길 중에서 가드레일이 깔린 곳은 정말로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가파른 절벽뿐이다.

각성도 하지 못했던 두 운전병이 저 낙하에서 살아남아 자력으로 이동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괴물들이 식량으로 삼으려고 가져갔다든가."

그나마 가능성 있는 추측이 그쪽이겠지.

부대를 습격한 괴물들은 분명 인간을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뜯어먹고 있었다.

녀석들도 뭔가를 먹고 살긴 해야 하는 생명체라는 뜻.

다만.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고 있었다.

'두 녀석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차라리 괴물에게 먹힌 것이길 빌어야 할지도.'

물론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준비는 해 놔야겠지.

"민재 형, 김 중위님. 지휘는 좀 맡기겠습니다."

"음?"

"잠깐 할 일이 생겨서."

두 사람에게 지휘를 맡긴 뒤.

나는 후방의 소형 트럭으로 몸을 옮겼다.

끼이익....

트럭 안에는 방금 우리가 사냥한 리자드들.

그 사체들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27화 하산 (3)

쿠웅...!

트럭 밖에서 큰 흔들림이 느껴졌다.

"...! ...!!!"

그와 함께 병사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트레일러 칸 안에 앉아 있는 나로서도 무슨 일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또 전투인가.'

이번 걸로 4번째다.

내가 트럭에 들어온 뒤 전투가 일어난 횟수가.

시간이 조금 지나 소란이 잦아든 뒤.

누군가가 트레일러의 문을 열었다.

"전투 끝났다. 괴물의 사체는 이쪽으로 옮기면 되는 거겠지?"

"수고했어."

이민재 병장이었다.

민재 형의 옆으로 몇몇 병사들이 다가와, 사냥한 괴물의 사체를 트레일러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부상자가 다섯. 한 명은 상처가 심해서 의무병 차량으로 옮겨서 집중 치료에 들어갔다."

덤덤하게 말하는 민재 형.

바깥에서 일어난 전투에 대한 보고였다.

'역시, 피해가 적지는 않구만.'

내 요리와, 김 중위의 지휘 버프.

덕분에 부대원들의 능력치는 엄청나게 뻥튀기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리한 장소에서 계속해서 습격받는 상황인 것은 변하지 않은 채다.

계속된 교전 속에서 부상자는 물론 중상자도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민재 형에게 신경 쓰였던 점을 물었다.

"교전이 점점 잦아지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실제로 그럴 거다. 전투가 계속되다 보니 소리를 듣고 주변에 몰린 몬스터들이 많은 것 같아. 이럴까 봐 총기의 사용도 자제한 거였다만...."

한숨을 푹 내쉬는 민재 형.

"큰 의미는 없었나 보군."

"총기를 아꼈으니 이 정도로 그친 거라 생각해야지. 뭐, 내 도움이 필요한 건 없지?"

"아직은 전투식량만으로도 충분해. 뭔가 이상이 있으면 보고하마."

그때쯤 괴물들의 사체를 안으로 옮겨 넣는 작업이 끝났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형에게 물었다.

"병사들 반응은 어때?"

"당연히 좋지만은 않다."

민재 형은 잠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만든 전투식량의 덕은 톡톡히 보고 있다만...."

"그래도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지."

"그래. 아무리 전투식량을 만들어 줬다고 해도, 혼자 전투에서 쏙 빠져 버리는 건 좀 아니지 않냐는 얘기가 많아."

괴물들과의 전투.

거기서 혼자 빠져 있는 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녀석들이 많은 게 당연하지.'

전투식량은 확실히 큰 도움이 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옆에서 직접 싸우는 다른 병사들과 비교하면 느낌이 많이 달랐다.

후방 계열이라고 대놓고 안전한 길만 선택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민재 형은 내가 있는 트레일러를 슥 둘러보고 말했다.

"네가 하는 일이니까, 이유가 있겠지. 병사들 불만은 내가 정리할 테니 걱정 마라."

나도 부대에서의 전투에서는 나름 일선에 섰던 몸이었다.

전투에 함께 나설까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내 전투력은 아무리 잘 쳐 줘도 전사조 기준으로 중하 정도.

'요리사'로서의 나는 전투식량을 통해 전투에 공헌하고 있다만....

전투 인원으로서의 나는 그렇게까지 활약하진 못한다.

'그럴 바에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지.'

민재 형이 떠난 뒤.

피 냄새가 꽉 들어찬 트레일러 안에서.

나는 괴물들의 사체를 계속해서 손질했다.

가죽과 살점을 분리하고.

손잡이로 두들겨 육질을 부드럽게 하고.

마지막으로 소스를 약간 뿌려 주는 단순 행위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전투가 더 있었을까.

끼익....

내가 탑승한 트럭이 갑자기 정차하는 것이 느껴졌다.

트레일러 바깥에선 웅성거리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습격을 당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일이 생긴 건가.

나는 트레일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병사들이 한 곳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잠깐만, 비켜 줘라."

"시, 신 병장님?"

나는 모여 있는 병사들을 헤치고 무리의 가장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병사들이 무엇을 보고 놀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도로 근처를 걸어 다니고 있는 존재.

"그어어...."

썩어 내린 피부.

크게 부러졌는지 절뚝거리는 다리.

그리고 몸에 걸친 익숙한 군복.

"이러지 않길 바랐는데...."

산에서 내려가다가 사망한 두 운전병.

김재민, 곽승호 상병.

그들이 좀비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여기, 아까 그 절벽 근처인가?'

산을 크게 돌아 내려와야 했기에 오래 걸렸지만.

위치상으로 전복된 차량을 발견한 절벽에서 아주 멀지 않은 장소 같았다.

"저게 좀비...."

한때 같은 부대에서 한솥밥 먹던 병사가 좀비가 된 모습에, 많은 병사들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넋 놓고 지켜보고 있어선 안 됐다.

"그어.... 어?"

병사들 사이에 퍼진 소란을 느꼈는지.

좀비가 된 부대원의 얼굴이 우리 쪽을 향했다.

그리고.

철컥.

'...철컥?'

당연히.

그들에게는 총과 총알이 보급되었다.

괴물들이 나타나 상위 부대와 연락을 하기 위해 보낸 병사들은 우릴 향해 총을 꺼내 들었다.

미친.

"다들 조심해!"

좀비는 짐승처럼 달려들기만 하는 게 클리셰일 텐데!

저 좀비들은 우리를 향해 총구를 내밀었다.

타다다다다다당-

두 좀비의 총구에서 총알이 빗발쳤다.

* * *

"방패병!"

"예!"

방패를 든 전사들이 급하게 전열 앞으로 나섰다.

투두두두둥-

"후읍...!"

방어 계열의 특성을 타고난 각성자들.

그들 능력으로 인해 강화된 철제 방패가 좀비의 사격을 튕겨 냈다.

하지만 일부는 병사들을 향해 쏟아졌다.

"크악!"

"민철아!"

총알에 맞은 듯 휘청거리는 병사가 있었다.

나는 급하게 녀석에게 다가갔다.

"박민철 이병! 괜찮냐!?"

"끄윽...."

"제기랄. 조금만 기다려, 의무병을-"

총알에 맞았는데 괜찮을 리가 있나.

급하게 치료 계열의 각성자를 부르려던 찰나.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던 병사가 입을 열었다.

"괘, 괜찮습니다."

"뭐?"

총알에 맞은 부위를 매만지고 있는 병사.

하지만.

그 손에서 출혈은 보이지 않았다.

"군복, 덕에 산 것 같습니다. 아프긴 뒈지게 아픕니다만... 커허."

[강철 가죽 전투복.]

일반적인 총알은 한 탄창을 쏟아부어야 하고, 각성한 사수의 사격조차 몇 발은 버텨 내는 괴물.

리자드의 가죽을 가공해 만든 물건이다.

좀비들의 사격은 결국 강화되지 않은 일반 사격.

충격은 컸지만, 총알이 관통해 치명상을 당한 병사는 없었다.

'다행이다.'

같은 부대 병사가 좀비가 됐다는 사실에 당황했던 병사들이었지만.

당황보다는 아군을 향해 발포한 적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이 새끼가 민철이를!"

"상병이고 뭐고...!"

몇몇 분노한 병사들이 달려들어 두 마리의 좀비를 제거했다.

총을 쏘긴 했지만, 탄창을 갈아 끼울 지능은 없는 것일까.

총알이 다 떨어진 좀비들은 비교적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 병사들의 망치에 터져 나가는 것은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처리했습니다!"

"일단 해결한 것 같습-"

"아니."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지.'

좀비들이 우리를 향해 발포한 뒤.

산맥 전체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까악....

총성에 놀라 달아나는 까마귀의 소리.

그리고.

스스스스슥.

부스럭.

카아아아아악.

산맥 안에서 기괴한 괴성과 함께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생명체들의 소리.

"신 병장님.... 이 소리는...."

"아마 네가 예상한 대로일 거다."

안 그래도 전투의 소음으로 인해 주변에 몬스터가 몰려 있던 상황.

그 와중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각성자들의 전투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소음이.

"이 일대의 몬스터들이 전부 우리를 향해 몰려오고 있을 거다."

"기껏 총을 아꼈더니, 이렇게 되어 버렸네."

나름 몬스터의 어그로를 줄이려고 조심스럽게 이동했지만.

저 총성으로 인해 어그로가 제대로 끌려 버렸다.

잠깐 고민한 나는 결정을 내리고 말했다.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건 여기까지다."

"예?"

"사수들은 조정간 변경하고, 마법사들도 화력 제한 풀어."

몇몇 병사들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괜찮겠습니까?"

"전투의 소음을 듣고 원래보다 더 많은 괴물이 몰려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야지."

산맥에서의 전투는 우리가 너무 불리하다.

하지만 산맥만 빠져나간다면.

얘기가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주변을 둘러보니 나름대로 길의 모양이 익숙했다.

"운전병!"

"예!"

"산맥을 완전히 빠져나가려면 얼마나 남았지?"

"거의 다 도착하긴 했습니다! 괴물만 없다면 30분 내로 탈출 가능할 겁니다."

산맥을 빠져나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지상에 가까운 길.

여기서부터는 도로도 크게 위험하지 않다.

"원거리 계열 각성자들은 전부 두돈반 탑승하고 차량에서 지원 사격해! 전사들은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붙는 괴물들만 처리한다!"

"예!"

망설일 시간도 아깝다.

명령을 내린 나는 곧바로 내가 있던 트럭의 트레일러에 매달렸다.

전사들 수준의 신체 능력이 없는 각성자들 역시 주변의 차량에 다급히 올라탔다.

"전원 탑승 완료!"

"출발! 전속력으로 밟아!"

부아아앙....

차량들이 출발하고.

전사들이 전속력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측에서! 옵니다!"

누군가가 소리를 지른 곳을 보니.

열댓 마리의 괴물이 엄청난 속도로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사수조, 요격 개시!"

"다 쓸어버려라!"

사수조장 서수혁과, 마법조장 이민재의 명령이 떨어진다.

이미 강력하기로 유명했던 사수들의 총알.

거기에 화력 제한을 푼 마법사들의 광역 공격이 산맥에 퍼부어졌다.

타다다다당-

콰광, 퍼엉....

전쟁통을 방불케 하는 소음이 울려 퍼진다.

"뒤쪽에서도...."

"정면에...."

"사방에서 몰려옵니다!"

탁 트여 있던 부대와는 다르다.

커다란 나무와 돌이 우거진 산맥.

원거리 화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제길, 너무 많아!"

저 강력한 리자드가 접근하기도 전에 화력으로 빈사를 만들던 부대와는 사정이 다르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

사수와 마법사들이 녀석들을 모두 제거할 수는 없었다.

'결국 붙는 녀석들이 생긴다.'

준비해 놓은 걸 써야 할 것 같네.

나는 매달려 있던 트레일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캬아아악.

코앞까지 들려오는 괴물의 소리.

"막아라!"

"떨쳐 내!"

차량 옆에서 달리던 전사들이 가까워진 괴물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괴물들이 차량에 붙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전사들이다.

대부분의 몬스터는 그들이 떨쳐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적들이 우리가 숱하게 상대해 왔던 리자드였다면 모를까.

산맥을 반쯤 내려온 시점.

어느샌가 리자드가 아닌 처음 보는 괴물들이 더 많아졌다.

'여기서부턴 리자드들의 영역이 아니다. 이거겠지.'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특성을 짐작하기 힘든 괴물 역시 넘쳐 났으니.

크아아악!

전사들은 계속해서 차량에 붙은 괴물들을 떨쳐 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몇 마리가 이상을 보였다.

전사들이 휘두른 무기를 밟고, 높이 뛰어오른 것.

"제기랄!"

"뭐야, 저건!?

다리가 기괴할 정도로 길고 여섯 개나 달린 괴물.

생긴 대로 각력이 심상치 않은 걸까.

전사가 휘두른 무기를 밟고 뛰어오른 녀석들이, 아군 진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앞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신 병장님!"

괴물이 내 근처로 떨어진 것을 본 병사들이 당황한 듯 소리친다.

"카아아아악!"

달리는 소형 트럭의 트레일러 안에 앉아 있던 나는, 날아오는 괴물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녹색 털의 짐승처럼 생긴 괴물.

얼핏 보면 피부색이 좀 이상한 늑대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다리가 기괴할 정도로 길고, 6개나 되는 모습의 괴물.

며칠 굶기라도 한 것일까.

덤벼드는 괴물들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전사들과 달리 진형도 없이 혼자 있었다.

이건 아마도 엄청난 위기 상황이겠지.

그렇기에 나는.

"옜다."

휙, 하고.

녀석들에게, 손질해 놓은 고깃덩어리를 던졌다.

"카아아... 악?"

덤벼들던 괴물들이 내가 던진 고기를 입에 물었다.

눈앞의 사냥감을 물어뜯을 생각에 날뛰던 괴물들의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카아...."

그 괴물들의 기세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뭐, 뭐야."

"괴물들의 기세가, 누그러들었어?"

확연하게 보이는 변화.

나를 돕기 위해 달려오던 병사들이 변화를 눈치채고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킬 -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재료 분석 중.]

['하급 요리 비결 - 가벼운 발 슬레이파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깨달음.

내 눈에는 녀석들의 '손질법'이 보이고 있었다.

28화 하산 (4)

"케엥...."

나를 향해 엄청난 살의를 뿜으며 달려들던 괴물들.

그 괴물들의 눈에서 열의가 사라지고, 몸도 축 늘어진다.

그저 달려오던 관성에 따라 달리는 차량에 따라붙을 뿐.

나는 그 괴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급 요리 비결 - 가벼운 발 슬레이파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깨달음에 따라.

가장 가까이 붙은 녀석을 향해 식칼을 휘둘렀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뭐, 뭐야?"

차량의 옆을 달리며 그 모습을 지켜본 병사들이 소리쳤다.

"방금 그거. 신 병장님이 하신 겁니까?"

죽일 기세로 달려들던 괴물이 급격하게 온순해지고, 무력하게 죽었으니 무슨 일인가 싶을 법도 하지.

하지만 일일이 설명해 줄 시간은 없었다.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급한 불부터 끄자. 저 녀석 약점은-."

나는 병사들에게 내가 본 '손질법'을 알려 주었다.

진영 안쪽으로 들어왔던 괴물 중 나머지 두 마리는 그렇게 병사들에 의해 처리됐다.

난 거기서 그치지 않고 트레일러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트레일러 안에 가득 쌓여 있는 손질된 고기들.

나는 그것들을 두 손 가득 들고나온 뒤.

"으라차!"

사방으로 던져 버렸다.

"크륵?"

그러자, 우리를 향해 달려들던 괴물들.

그중에서도 가까이 붙어 있던 괴물들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고깃덩어리를 베어 물었다.

"역시!"

그 모습을 보고서야 확신이 들었다.

'몬스터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건, 딱히 인간을 죽이려는 게 아니야.'

지상에 다양한 종류의 괴물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가장 의문이 든 것이 하나 있었다.

괴물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

내가 방금 본 것이 그 정답이다.

'먹잇감을 사냥하려는 거야.'

저 산맥에서 우리와 싸웠던 리자드는 다를지도 모른다.

전략을 짜고 지속적으로 산맥의 부대를 공격해 왔던 녀석들이니까.

하지만 녀석들조차 우리 병사들을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잡아먹으려 들었다.

기괴한 형태.

평범한 동물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함.

그렇기에 뭔가 대단한 존재들처럼 느껴졌지만.

녀석들의 행동 원리는 기본적으로 야생 동물과 비슷한 것.

나는 야생 동물에 관련된 다큐멘터리 하나를 떠올렸다.

굶주린 짐승의 행동 원리에 대해 다뤘던 다큐멘터리.

굶주린 짐승은, 위험한 사냥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호전적이다.

하지만 그 짐승 앞에 안전한 식량이 떨어진다면?

'당연히 안전한 식량을 선택하는 법이거든.'

눈앞의 괴물들도 마찬가지.

'아니, 이 녀석들은 어지간한 짐승보다 더 호전적인 것 같긴 하군.'

대부분의 괴물은 내가 던진 고기를 입에 물고도 계속해서 달리는 차량에 따라붙고 있었다.

식량이 확보된 상황이라도 사냥을 계속할 정도로 호전적이라는 것.

평범한 인간들이라면 사냥감으로 선정된 시점에서 떨쳐 낼 방법이 없을 테지.

하지만.

내가 던진 생고기들을 입에 문 시점에서 다른 걱정은 의미가 없다.

[하급 요리사의 매우 대충 만들어진 나른한 감정의 시즈닝 된 생고기]

내가 녀석들에게 던진 생고기.

그것도 역시 하나의 요리였으니까.

[정성이라곤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요리입니다.]

[차마 요리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수준의 음식입니다!]

[요리사로서 부끄러워함이 마땅한 요리입니다.]

물론, 대단한 요리는 아니다.

그걸 넘어서, 요리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요리.

'이렇게 신랄한 메시지는 처음 보는 거 같은데?'

[능력치 상승 효과는 전무합니다.]

[경험치가 소폭 감소합니다.]

심지어 경험치까지 줄어들었다.

저거 줄어들 수도 있는거였구나.

이해는 간다.

고기를 손질하고, 두드려서 육질을 연하게 한 뒤, [주방장의 특별 소스]를 뿌렸을 뿐.

내가 봐도 요리라고 하기 어려운 수준이니까.

손질이 끝난 재료, 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당연히 요리로서의 버프 효과 등은 전무하다.

하지만.

[섭취 시, 나른한 감정이 듭니다.]

그럼에도.

특별 소스로 인한 효과는 발동된다.

"요리의 질이 낮은 만큼 효과도 적지만!"

추가로 꺼내 온 고기를 달라붙으려 하는 괴물들에게 던졌다.

[주방장의 특별 소스]

'몬스터에게도 이 스킬이 먹힌다는 건 이미 확인했지!'

내가 실험해 본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요리의 질이 높을수록 효과가 배가된다는 것.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하지. 대충 만든 요리라도 그 효과는 확실하다는 것!'

아무리 대충 만든 요리라고 한들.

[특별 소스]의 효과가 0이 되지는 않는다.

최소한 1의 효과는 무조건 발동한다는 것.

이 스킬의 무서움은 효과를 극대화한 경우가 아니다.

이 최소한의 보정치야말로.

이 스킬의, 가장 사기적인 부분!

"카아아악... 악?"

또 다른 살기를 품고 달려오는 몬스터에게 생고기를 던진다.

그러자 몬스터의 기세가 확연히 줄어들고.

그렇게 기세가 줄어든 몬스터를 차분히 관찰한 뒤.

[스킬 -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재료 분석 중.]

"그 녀석의 약점은 다리다!"

요리사의 눈을 통해, 그 괴물에 대한 손질법의 깨달음.

즉, 약점을 파악한 뒤, 전사들에게 알리면....

"죽어라!"

"다들, 신 병장님이 말해 준 약점을 찔러라!"

나머지는 다른 각성자들이 해결해 줬다.

한바탕 그렇게 고기를 던지고 나니.

달라붙었던 몬스터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손이 비는 녀석들은 지금 전투식량 취식해!"

"예!"

"김 중위님, 버프 안 주고 뭐 하십니까?"

"어, 어어! 다들 전력 질주!"

나른해짐으로써 기세가 크게 꺾이고.

내 눈에 의해 약점도 속속들이 드러나는 몬스터들.

반면 아군은 [용기]가 담긴 요리와 김 중위의 버프를 통해 강화된다.

[당신의 식사를 대접받은 이가 전투에서 활약했습니다.]

[요리사의 명성이 퍼져 나갑니다!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전황이 순식간에 압도적으로 유리해졌다.

물론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만들어 둔 [나른함]의 고기가 많지는 않아. 이 상태도 오래가지는 못하겠지.'

산맥에서 사냥한 리자드들의 고기는 대부분 전투식량으로 만들었다.

내가 지금 던지는 고기들의 재료는, 바로 오늘 사냥한 괴물들을 그 자리에서 손질한 것.

양이 적지는 않지만 많다고 하기도 어렵다.

'요리가 다 떨어지기 전에 산맥을 탈출해야 한다.'

전 병력이 가능한 최고의 속도로 괴물들을 피해 전진했다.

전투가 쉽지만은 않았다.

"정면에 도로를 막고 있는 괴물이 있습니다!"

"뭔 괴물이 덩치가...!"

코끼리같이 생긴 거대한 괴물이 도로를 막아선다.

['하급 요리 비결 – 냄새 맡는 알라투르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코를 공격해라! 몸보다 그쪽에 장기가 집중된 녀석이야!"

"충성!"

쿠웅.

아군 최고의 전사인 전광일 상병이 달려가 거대한 코끼리의 코를 거칠게 쥐어 터트렸다.

거대한 괴물이 쓰러지며 길옆으로 도로 떨어져 나갔다.

"옆으로 벌레 같은 괴물이 접근 중이다!"

"저 녀석, 신 병장님 고기도 안 먹힙니다!"

아군 진형의 옆으로 거대한 지네 같은 괴물이 달라붙는다.

다른 괴물들과 달리 던진 고기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사냥을 목표로 하는 듯한 괴물.

['하급 요리 비결- 독충 크론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몸통 가운데 붉은 마디가 약점이다! 생긴 거랑 다르게 무를 테니까, 그쪽만 노려!"

타아아앙-!

사수조장, 서수혁의 총알이 거대한 지네의 심장을 뚫고 지나간다.

아군을 물어뜯기 직전이었던 거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 외에도.

엿듣는 알라후르, 거완 메투스.

온갖 이름의 괴물들이 계속해서 몰아친다.

"제기랄, 괴물이라곤 리자드만 상대해 봤지...!"

"동물원도 아니고 뭐 이리 다양하답니까!"

리자드와의 전투로 각성하고, 훈련해 온 우리 부대다.

리자드와 모든 부분에서 다른 괴물들.

당연히 상대법도 달라져야 했다.

우리로서는 그 상대법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본래라면 상당히 고전했어야 했을 적들이었다.

"신 병장님의 눈이 없었다면...."

"약점만이 아니지. 요리만 해도."

괴물을 처치하던 병사들이 나를 묘한 눈으로 보는 것이 느껴졌다.

확실히 내가 약점을 파악할 수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다.

[요리사의 눈이.]

[요리사의 눈....]

'크윽....'

요리사의 눈은 엄연히 하나의 스킬.

사용할수록 몸 안에서 어떤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스탯창에 자리 잡고 있는 마력이라는 녀석이겠지.

마찬가지로 스킬인 주방장의 특별 소스로 대량의 요리를 제작한 직후.

본래도 마력이 많이 남지 않았던 탓일까.

[요리사의....]

상태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올수록, 눈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머릿속에 밀려오는 '손질법의 깨달음'들의 파도에, 두통이 몰려오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하지만 내 정보 전달이 없어지는 순간.

상대법을 모르는 몬스터의 처치로 부대의 전진이 늦춰질 것이다.

그렇게 우리를 따라잡은 몬스터들 역시 상대법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

전투는 더더욱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시작될 터.

"그 녀석의 약점은!"

그걸 알기에, 나는 고통을 참으며 계속해서 외쳤다.

양손으로는 고기를 던져 대면서.

그렇게 영원할 것 같은 시간이 지났다.

계속해서 쫓아오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어느 정도 따돌렸다 싶었을 때쯤.

"앞에 보십쇼!"

병사 중 하나가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산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모습이야.'

차량이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그 산을 지나자.

'드디어.'

지긋지긋하던 산맥과 나무가 아닌, 문명의 흔적.

길게 쭉 뻗은 길이 보였다.

아침 일찍, 새벽안개와 함께 출발한 산맥 탈출 작전.

산맥을 내려온 우리를 반긴 것은, 노을 진 지상의 풍경이었다.

마침 더 이상 던질 고기도 남지 않은 상황.

"하하... 제길. 뒈지게 반갑네."

쿵.

"신 병장님!?"

반가운 지상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트레일러 안쪽으로 쓰러져 버렸다.

* * *

강원도를 크게 가로지르는 산맥.

그 산맥의 기준으로 춘천, 원주 등의 대도시가 있는 서쪽을 영서지방.

강릉과 속초 등의 대도시가 있는 동쪽을 영동지방이라 한다.

그리고 산맥에 난 작은 길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오면.

그곳엔, 오래된 농가가 하나 있다.

내가 눈을 뜬 곳이었다.

'으, 두통.'

마력이 고갈된 탓인지 두통이 몰려온다.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자, 근처에 있던 병사가 나를 눈치채고 소리쳤다.

"시, 신 병장님이 깨어나셨습니다!"

"미안한데 조용히 좀 말해 줄래? 두통 때문에 머리가 울려서."

"앗. 죄송합니다!"

그 병사의 소리를 듣고 다른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영준아! 괜찮냐?"

"아니. 죽을 거 같은데."

"멀쩡한 모양이군. 다행이다."

엄살은 안 통하는구만.

"민재 형. 내가 쓰러지고 어떻게 된 거야?"

"네 덕분에 괴물들의 추격은 이미 대부분 떨쳐 낸 상태였으니. 그 후에는 다시 넓은 장소로 나가서 추가로 따라붙는 몬스터들을 처리했다."

"어마어마하게 몰려왔을 텐데."

"산맥에서의 싸움에 비하면 편했지."

그 외에도 민재 형의 보고가 이어졌다.

부상자는 몇 명이고, 차량 몇 대가 전복되었다느니 하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피해가 그렇게 크진 않은 모양.

"다 네 덕이다."

"난 기절해서 쓰러져 있었는데 무슨."

"보고는 여기까지다. 당장은 안전하니, 편히 쉬어 두도록 해."

"예입."

그렇게 보고를 마친 민재 형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데.

민재 형과 같이 방에 들어왔던 병사들은 나가지 않고 방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뭐지?'

쟤네는 왜 저러고 있는 건가 싶을 때쯤.

병사들 사이에서 한 명이 나오더니 입술을 우물쭈물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거냐?"

"그게...."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는 병사.

"죄송합니다!"

녀석이 크게 소리치며 고개를 숙였다.

29화 관사 (1)

"죄송합니다!"

크게 소리치며 고개를 숙이는 녀석.

뒤에 서 있는 병사들도 녀석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얘들 나 몰래 사고라도 쳤나?

영문을 몰라 멍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고개를 숙인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 신 병장님이 트레일러에 들어가 있으실 때...."

"어어."

"저희들. 신 병장님의 험담을 했습니다."

아.

무슨 얘긴가 했더니.

"전투식량으로 공헌한 건 알지만, 그래도 전투에서 빠지는 건 좀 아니지 않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전투식량의 성능을 생각하면 그 시점에서도 가장 공헌 중이셨는데도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신 병장님이 괴물들이 몰려올 때를 대비하기 위해 트레일러에 들어가 계셨다는 사실을요."

개중에서도 마법사로 보이는 병사 한 명이 말을 이었다.

약간 동경이 담긴 눈빛.

"신 병장님이 쓰러지신 거, 마력 고갈 현상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럴 것 같긴 하더라."

"마력 고갈 현상 자체는 마법사들도 가끔 겪습니다만... 대부분은 두통이 몰려오는 시점에서 더는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죠. 기절할 때까지 스킬을 사용한 경우는 처음 봤습니다."

"우린 덕분에 산 거나 다름없었는데. 뒤에서 욕이나 하고 있었으니...."

"도저히 아니다 싶어서 사과를 드리러 왔습니다."

왜 이렇게 우르르 몰려 있나 했더니.

트레일러에서 민재 형이 말한, 불만을 가진 병사들이 이 녀석들이었던 모양이었다.

피식.

"뭐 이해한다."

사실 나라도 그랬을걸?

아무리 실제로 공헌하는 게 크다고 해도, 정작 본인이 보이지 않으면 그렇게 와닿지는 못하는 법이다.

옆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전우들을 두고 혼자 뒤로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안 좋은 감정이 들 만도 하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식들이 선임 뒷담을 까!?"

"으악!"

가장 앞서 나온 병사에게 장난스럽게 헤드락을 걸었다.

뒷담을 한 건 사실이니 이 정도는 당해 줘야지.

"농담이고, 잘한 거야. 인마."

"예?"

나는 헤드락을 풀어 주면서 말했다.

"사실 어쩌다 보니 길드장이 되어 버리긴 했다만, 나도 내가 그럴 그릇이 되는지 의심스럽거든."

"아...."

"니들이 무지성으로 날 찬양하고 그러면 오히려 못 했을 거다."

진심이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그렇게 대단한 놈은 아니거든.

'얼마 전까지 전역 날만 기다리던 일개 병사가 대단해 봐야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번 경우엔 전투에 도움이 될 방법을 찾으려고 한 게 맞다.

내가 억울한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남들이 보내는 경계의 시선이 없다면.

어쩌면 나중에는 정말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길드장이라는 지위에 심취해, 나 혼자 이득을 누리려 할 수도 있겠지.

그런 유혹이 다가왔을 때 거리낌 없이 뿌리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진 못하겠다.

"그러니까. 계속 의심해라."

"...!"

"저 녀석이 잘하고 있는 건지. 잘못된 판단을 내리려는 건 아닌지. 계속 확인해 줬으면 해."

그래야만 길드를 더 잘 이끌 수 있다.

그쪽이, 내가 살아남을 확률도 더 높을 테고.

"그래도. 거듭 죄송합니다."

"아, 이미 용서했다니까? 계속 사과하니까 내가 다 미안해지네."

장난스럽게 뒷담을 하니 뭐니 했지만.

선임 욕할 수도 있는 거지 뭐.

나 역시 막내일 땐 선임 욕 엄청 했다.

사실 나도 취사병 후임들한테는 욕 좀 먹었을 거야 아마.

'아. 그러고 보니....'

신경 쓰이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이왕 병사들이 모여 있으니.

"정말 미안하면. 부탁 하나 하자."

"부탁 말입니까? 뭐든 말씀해 주십쇼!"

미안하단 말은 상당히 진심이었나 보다.

다행히 꽤 열정적으로 대답하는 녀석들.

"다들 지쳐 있을 텐데 미안하지만. 근처에서 사냥한 몬스터들의 사체를 좀 챙겨 줄 수 있냐?"

내가 신경 쓰이던 부분은 바로 이것.

몬스터의 사체는 곧 자원이다.

고기는 식량이, 가죽은 장비의 재료가 된다.

'사실 괴물들한테 던져 버린 고기들도 아까워 죽을 것 같은데. 다른 몬스터들도 못 챙기면 억울해서 못 살지.'

사체들이 썩기 전에 신선한 식량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다들 힘든 상태일 테니 미안한 명령이긴 하지만.

"아. 그 얘기였군요. 알겠습니다!"

"사실 이미 전광일 상병님이 몇몇 병사들 데리고 작업 중입니다. 저희도 합류하겠습니다."

뭐?

"광일이가?"

내가 명령하기도 전에 이미 일을 시작했다는 말.

나는 농가의 낡은 창문에 고개를 내밀어 슬쩍 밖을 쳐다봤다.

-전 상병님,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세 마리씩 옮기실 필요는....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나는 할 수 있어서 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보다 저쪽 트레일러가 꽉 찼더라. 빙결 마법사 좀 불러 줄래?

-...옙!

창문 밖에는 괴물들의 사체를 트레일러에 옮기고 있는 전광일 상병.

그를 따르는 몇몇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힘겨운 전투가 끝난 직후다.

다들 기진맥진할 법도 한데.

"저 녀석들. 언제부터 저러고 있던 거야?"

"전광일 상병님은 전투가 정리되자마자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번 전투에선 아무것도 못 하고 신 병장님한테 민폐만 끼친 것 같다면서.... 다른 전사조 병사들도 조장이 혼자 일하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었는지, 조금만 쉬고 바로 합류한 것 같습니다."

괴물의 사체를 확보하는 건 확실히 필요한 일이긴 하다만.

힘든 와중에 저렇게 직접 나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긴, 저 녀석은 저런 놈이었지.'

괜히 시설반의 에이스 출신이 아니다.

부대에 있을 적에도 힘든 일을 나서서 하던 녀석.

"그럼 저희도 합류하러 가 보겠습니다."

"어어. 수고해 줘."

"옙. 편히 쉬십쇼, 충성!"

내가 정리를 부탁한 병사들도 곧 밖으로 나가 광일이를 돕기 시작했다.

'저 녀석들한테는 나중에 뭐라도 더 챙겨 줘야겠네.'

마음 같아선 당장 도와주고 싶긴 하다만.

지금은 솔직히 일어나 있는 것도 버겁다.

한숨 더 자고 나서 생각해야지.

* * *

[천문관]으로 각성한 박태준 병장은, 우리에게 서쪽으로 향하길 권했다.

참고로 이유는 본인도 모른단다.

점괘에 따르면 운이 더 몰려 있다던가?

운이 어떻고 하는 얘기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만.

서쪽을 선택하는 이점은 확실하다.

'더 넓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마력 고갈로 인해 골골대며 한숨 더 자고 난 뒤.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된 나는 농가의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여기 주인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떻게 된 거야?"

"글쎄요?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마 사태가 터지고 나서 어딘가로 피신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흐음."

가끔 대민 지원으로 내려오던 농가.

주인 부부가 안 보이는 건 조금 꺼림칙하긴 하다.

그래도 하룻밤 쉴 장소가 되어 줬으니 감사할 일인가.

생각을 마친 나는 주변의 풍경을 훑었다.

부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나오는 농가기도 하고, 대민 지원으로 올 때도 있었고 하다 보니.

이 근처의 풍경 자체가 눈에 익은 편이었다.

"저쪽으로 가면 번화가 쪽으로 갈 수 있고. 사격장으로 갈 때는 저쪽이었던가?"

"맞습니다."

빠삭하다고 까진 말 못 해도 어느 정도 익숙한 장소였다.

서쪽으로 내려왔을 때 이점은 이 부분이겠지.

나는 잠시 부대원들을 뒤로 한 채 근처의 논밭으로 향했다.

꽤나 넓은 농지.

이 정도라면, 어쩌면.

[소환에 필요한 공간이 부족합니다.]

"쯧."

나로서는 어이가 없어지는 결과였다.

'기껏 얻은 아이템이 너무 커서 못 쓴다는 게 말이 되냐고.'

[기동요새 비마나]

처음에는 거대한 전차쯤 되겠거니 생각했다.

우리 부대의 연병장에서도 소환하지 못했을 때는, 이름 그대로 요새 규모가 아닐까 생각도 했지.

하지만.

'그 이상인 거다.'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기대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게임의 기본적인 원칙이란 게 있다.

사용하는 데 드는 난이도가 높다면, 그만큼 성능은 더 뛰어나다는 것.

이 정도로 사용하기 힘든 물건이라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강력할지.

'뭐. 지금 상태로 봐선 한참 나중 일일 것 같다만.'

잠시 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전기는 끊겼으니 괜찮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맡겨 주십쇼! 말씀드렸잖습니까? 제 특기가 나무 타기임다."

나를 포함한 일단의 병사들은 농가 근처의 전봇대 근처에 몰려 있었다.

"읏차."

병사 중 한 명이 한 손에 망원경을 든 채 전봇대에 매달렸다.

저 녀석.

각성한 직업이 도적이라던가.

원래도 몸이 날랜 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무타기가 특기라더니 기어코 전봇대를 기어올라 꼭대기에 걸터앉는 녀석.

"어디 보자."

전봇대 꼭대기에 걸터앉은 그가 망원경을 눈에 가져다 대었다.

"어때!"

"뭐 좀 보이냐!"

"어...."

밑에서 지켜보던 나와 병사들이 소리쳤다.

그러나 대답 없이 말꼬리를 흐리는 녀석.

잠시 뒤.

녀석이 아래쪽을 보고 소리쳤다.

"신 병장님!"

"왜!"

"우리! 저기로 들어가는 겁니까!?"

"아직 정해진 건 없다! 왜!"

"만약 그렇다면! 반대하고 싶어서요!"

"뭐?"

스르륵.

전봇대 기둥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온 병사.

얼굴이 약간 창백해진 것 같기도 하다.

"반대하고 싶다니.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의 의미임다."

진저리를 치며 말하는 녀석.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건 그냥 자살행위일 것 같슴다."

자신이 본 풍경을 묘사하기 시작하는 녀석.

직접 보지 못하고 말로 전달받을 뿐인 우리로서는 정확히 상상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심각하군."

"우리가 외출 나가던 인제군. 완전 인외마경이 다 되어 버렸나 봅니다."

산맥을 타고 서쪽으로 내려오면 도착하는 곳이 바로 인제군이다.

이상아 조장을 비롯해 우리 부대에 합류한 생존자들이 대부분 인제군 출신이다.

부대원들의 외출 시 위수 지역이기도 한 곳.

그곳은 지금 반쯤 지옥으로 변한 상태였다.

"음. 생존자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렇다고 듣긴 했지."

"저도 나름 예상은 하고 봤습니다만. 상상한 것보다 심하던데요."

기본적으로 괴물들은 인간을 먹잇감으로 본다.

그리고 가장 많은 먹잇감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도시.

아마도 괴물들에겐 공짜 뷔페쯤으로 보이겠지.

그렇게 모여 있는 인간들을 사냥하기 위해 수많은 괴물이 몰리고.

그 괴물들로 인해 발생한 소란이, 더 많은 괴물을 불러오고.

괴물들에게 죽은 인간들은 좀비가 되어 일어난다.

멀쩡한 도시가 지옥이 되는 과정이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건 좀...."

"그야. 불가능하겠지."

100명에 가까운 각성자들.

우리들도 꽤 강력한 전력이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시가전은 변수가 지나치게 많아.'

누군가는 현대의 공성전과 비교하기도 한다.

진입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

도시의 건물들은 우리의 시야와 화력을 제한한다.

게다가 도시 전체에 괴물과 좀비가 넘쳐 나는 상황.

건물 하나하나가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경계 대상이 되겠지.

"좀 더 전력을 키운 뒤라면 모를까. 부상자들의 치료가 끝나지도 않은 지금은 도시로 진입은 꿈도 못 꿔. 지금도 힐러 둘이서 한계까지 커버하고 있는 건데, 여기서 부상자가 더 늘면 기어코 사망자가 나올 거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병사의 질문에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여기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으니. 굳이 이동해야 한다면....'

신경 쓰이는 장소가 한 곳 있다.

"관사로 가 보자."

"관사, 말입니까."

인제군의 외곽 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리 부대의 관사가 있다.

우리 부대는 차를 타고 이동해도 몇 시간이 걸리는 1급 격오지 부대다.

부대에서 생활하는 병사들은 그렇다 쳐도 출퇴근하는 간부들에겐 지나치게 사회와 격리된 장소.

그런 간부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관사.

BOQ라고도 부르는 장소다.

사실 간부만 이용하는 곳은 아니고.

우리 부대원들도 휴가 전후로 관사의 병사 휴게실에 들러 하룻밤을 보낸다.

그 후에 휴가를 떠나거나, 복귀하는 게 기본.

그럴 때마다 부대원들은 번화가와 동떨어진 위치에 불만이 많았다.

'무슨 관사 근처에 편의점 하나 없냐.'

'웬 허허벌판에 건물만 떡하니 있는 게 뭐냐.'

등의 이유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좋아."

"과연. 그런 이유군요."

"위험한 번화가와 동떨어진 것도 좋고. 허허벌판에 건물만 있다는 것도 우리에게 유리한 지형이니."

지상에 내려온 이상, 가장 중요한 것은 활동을 위한 거점 확보.

관사라면, 그럭저럭 괜찮은 거점이 되어 줄 수 있겠지.

"그러면, 관사로 가는 길을 알아보겠습니다."

"운전병들은 관사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많잖아. 아는 길은 다 불라고 그래."

그렇게 부대의 다음 행선지는 관사로 결정됐다.

관사까지 가는 루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부대원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관사가 좋은 거점인 건 맞지만.'

사실.

관사로 행선지를 결정한 이유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병사들한테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몇몇 이들은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앞서 말했듯.

관사는 휴가 전후의 부대원들과 간부들이 머무르던 장소.

'그 사람들은 멸망의 날에 관사에 있었을 터.'

같이 괴물과 싸우지는 않았다고는 하나 그들 역시 같은 부대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 봐야만 한다.

30화 관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