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 외에도 몇 가지 보고가 이어졌다.
내가 누워 있는 동안 식량은 어떻게 해결했다던가.
뭐 그런 것.
"당장은 마트에 구한 라면 같은걸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만. 병사들의 불만이 많아."
취사병이 빨리 복귀해 달라는 말이 많다고.
솔직히 조금은 뿌듯한 소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에 우리가 싸운 거미 괴물들, 상처 입은 상태였다는 건 너도 눈치챘겠지?"
"그렇지."
거미 괴물들.
강하긴 했지만, 상대할 만했다.
이유는 간단.
'성체는 얼마 없고, 그나마 있는 성체들도 크게 다친 상태였으니.'
심지어 여왕마저 그러했을 정도.
"그 이유를 알아냈다."
"어? 어떻게? 아니, 이유가 뭔데?"
"그건 네가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좋겠네."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민재 형.
그가 내게 건넨 것은.
"공책?"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알 거다. 내 입장에선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 너라면 이런 걸 중시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군."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마치는 민재 형.
"그럼, 보고는 일단 이 정도고. 혹시 필요한 거 있냐? 일단 개인 물품은 다 옮겨 놨다만."
"음. 당장 떠오르는 건 없네."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말하고. 지금은 푹 쉬어라."
보고를 끝낸 민재 형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을 까먹었네."
문을 닫고 나가기 전.
갑자기 발을 멈추는 민재 형.
"고생 많았다. 대장. 다른 녀석들도 네게 고마워하고 있어."
"고생은 무슨. 군 생활이란 게 원래 다 같이 뺑이 치는 거지."
"그런가?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다만. 다들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둬라."
"예입."
피식 웃으며 병실을 떠나는 민재 형.
사람이 떠나자.
병실이 급격하게 조용해졌다.
'...심심하네.'
앞으로 부대의 일이 어떻게 될까, 걱정되는 것도 있기야 하지만.
휴식을 취해야 하는 상황에 걱정해 봐야 의미 없는 일.
어쨌든 휴식을 취하고 치료하는 게 중요하니까.
눈이라도 한번 감으려고 침대에 몸을 누이려던 찰나.
"아."
민재 형이 두고 간 공책이 보였다.
괴물들의 상처.
그 원인을 알아냈다고 하며 건넨 책.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나는 그 공책을 펼쳤다.
대충 아무 페이지나 펼친 뒤 내용을 보았다.
-X월 2일 (목)
-신병 다섯이 전입.
-이길우 상병과 파견 경비중대 병사 간에 마찰이 있었으나 원만하게 해결됨.
'?'
슬쩍 노트의 표지를 봤다.
병영 일기는 아닌 거 같은데.
부대의 일이 적혀있는 노트.
이런 걸 쓰는 사람이 있나? 싶어졌으나.
누가 쓴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신병 다섯과 대대장 면담을 거침. 다들 문제는 없다고 말했으나 둘은 '괴롭히는 선임이 있느냐.'는 질문에 석연치 않은 눈치를 보임.
'대대장이었구나.'
아무래도 부대에서 있던 일들을 까먹지 않기 위해 기록해 놓았던 듯.
다음 페이지를 넘겨도 부대의 대소사가 적혀 있었다.
'잠깐, 그러면.'
나는 노트의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찾는 일자는 당연히도 하나.
'괴물이 나타난 날. 주말이었지 분명?'
그 날짜의 기록을 펼치자.
X월 4일 (토)
-강아지 산책을 위해 부대를 돌아다니던 중 괴생명체의 습격을 받음.
-거대하고 새하얀 거미 같은 형태, 칼날 같은 거대한 앞발을 지니고 있으며, 크기는 중형차 정도.
-외부와의 통신이 두절됨. 모든 연락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확인.
-대다수의 장병이 전사.
역시.
이들도 우리와 같은 일을 겪었나 보다.
"이 대대장님은 부대에 있었던 건가."
주말이었지만.
부대에서 기르는 개의 산책을 위해 부대에 출근했던 모양.
그 와중에 사달이 난 것이다.
-전사자 목록
.
.
.
-행방불명자 목록
.
.
.
밑에는 무수히 많은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들의 목록.
"...."
그 순간부터.
나는 몰입해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괴물들에 의해 습격당한 뒤.
탄약대대 역시 저항을 시작했다.
파견 나온 경비중대 병사들과 합류하고.
탄약고를 개방하고....
건물 몇 곳을 거점 삼아 방어에 들어가는 등.
우리와 비슷한 양상의 방어였으나.
-금일 전사자는 2인. 중상자 3인. 경상자 매우 많음.
각성법을 금방 깨닫고 병력의 질을 높였던 우리와 달리.
이들은 전원이 평범한 군인들.
매일같이 사망자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사망자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X월 12일 (일)
-동쪽 초소를 방어하던 병력들이 무단으로 탈주.
-탈주 과정에서 탈주병들 역시 대다수가 사망한 것으로 보임. 살아서 탈출한 생존자가 있을지는 알 수 없음.
-방어망에 구멍이 생기며 동쪽 건물의 지배권을 빼앗김.
-식당이 있던 건물. 빠른 대처로 사망자는 없었으나, 식량을 잃은 피해는 뼈아프다.
'그 탈영병들이다.'
우리가 만났던 그 탈영병들.
녀석들의 탈주가 큰 분기점이었다.
간신히 버텨 오던 방어선이.
급격하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방어는 힘들다.
대대장 역시 그런 생각을 한 듯.
공책에 적힌 내용은 대부분 덤덤한 어투로 적혀졌으나.
거기선 짙은 절망감이 느껴졌다.
"...쯧."
가슴이 답답해졌다.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그 많은 사람이 죽어 버렸단 건가.
'그 새끼들. 너무 편하게 죽게 만들어 줬나?'
그런 생각에 우울해지려던 찰나.
"아직. 페이지가 남았네."
절망에 빠진 것과는 별개로.
대대장은 기록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던 중.
지금까지와 달리 급한 글씨체로 적혀진 페이지가 나왔다.
묘하게 흥분한 듯한 필체로 적혀진 내용은.
X월 15일 (수)
-상병 이길우의 보고.
-괴생명체들의 갑각이 열에 약한 것 같다는 추측.
-우연히 발견한 사실이나, 정황상 신빙성은 높다.
"...!"
열기.
'아라크론의 흰거미'들의 약점이다.
그걸 파악하는 데 성공한 건가.
-더 이상 방어선을 유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
-그러니.
-역습에 나선다.
괴물들에게 포위된 부대.
탈영으로 인해 돌파된 방어선.
매일같이 죽어 나가는 병사들.
식량까지 고갈되어 가는 상황.
모든 것이 절망적인 이때에도.
탄약대대의 군인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남은 병사들을 총동원한 대규모 작전을 수립.
-성공 시, 포위 중인 괴생명체들을 돌파하고 부대를 탈출할 수 있을 가능성이 큼.
-실패하더라도 괴생명체들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됨.
-결행은 내일.
이제 남은 것은 한 페이지.
거기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X월 16일 (목)
-필사즉생 행생즉사.
-죽을 때 죽더라도.
-곱게 죽어 주지는 않겠다. 개같은 거미 새끼들.
"...."
상처를 입은 여왕과 성체들.
미묘하게 적은 성체 괴물의 숫자.
그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격렬하게 저항했던 거야."
어떤 식의 작전을 펼쳤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저항이 아주 유효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괴물의 숫자를 크게 줄이고, 적들의 여왕에게까지 치명상을 입힐 정도로.
거기까지 읽은 나는 슬쩍 공책을 닫았다.
탄약대대를 찾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탄약의 확보.
또 하나는.
'군인으로서. 다른 부대가 어떻게 전멸했는지 확인하고. 탈환하기 위해.'
목표는 달성했다.
그들이 어떻게 전멸했는지.
그 과정은 모두 확인했으니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저항한 군인들.
결국에는 전멸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죽음은 결코 개죽음 따위가 아니었다.
"괴물의 숫자가 조금이라도 더 많았다면... 아니, 그 괴물들이 상처 없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우리의 탈환 작전은 실패할 가능성이 컸겠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건 이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해 준 덕분일 테니.
'...일이 안정되는 대로, 장례를 치러 주자.'
이들은 그럴 만한 용맹을 지닌 이들이었으니까.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었다.
* * *
그 후로도.
난 며칠은 병실 신세를 져야만 했다.
영 할 게 없는 침대 생활.
근처에 뭔가 없나 하고 시선을 돌리던 중.
침대 옆쪽에 쌓여 있는 물건들이 보였다.
"아, 내 개인 물건들."
그러고 보니.
민재 형이 가져다 놨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옷가지.
책.
잘 쓰지는 않지만 일단 가지고는 있는 권총까지.
망가져서 수리를 위해 가져갔다는 군복을 제외하면 내 물건들은 얼추 다 있는 것 같은데.
한 가지.
유독 걱정되는 물건이 있었다.
"설마."
내 군장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을 하나 꺼냈다.
조악하게 만들어진 칼집.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시미칼 한 자루.
'후임 녀석에게 빌려서, 지금까지 애용했던 칼.'
빌린 물건임에도 불구.
묘하게 손에 착착 감기는 탓에 참 유용하게 써왔다만.
이번 전투.
상당히 무리하게 다뤄 버렸던 게 마음에 걸렸다.
불안감이 앞서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며 칼집의 칼을 뽑아 보았으나.
"...뭐. 이럴 것 같기는 했지."
칼날은 원래의 날카로운 형태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다.
손잡이 부분은 다 타 버린 듯하고.
"이거 뭐. 어디 마교 같은 곳에서 제사용으로 쓴다고 해도 믿겠네."
요즘 칼들이 어지간한 고열에 버틸 수 있게 만들어진다고는 하지만.
고열에 약하다는 여왕을 베기 위해 끌어 올린 온도는,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었다.
베고 찌를 때까지야 어떻게든 형태와 예기를 유지했다지만.
그 후에 형태가 완전히 일그러지는 것까지 버티지는 못한 모양.
"빌린 물건치고 오래 쓰긴 했지."
이제는 바꿔야 할 때가 온 걸지도 모르겠다.
상점에서 식칼이라도 구매해야겠다 생각하며 넘어가려 했는데.
그로부터 며칠 뒤.
상처가 전부 아물고.
슬슬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쯤.
"그 칼, 내놔라."
"예?"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해 왔다.
산맥에 있을 적, 우리 부대를 찾아왔던 생존자 중 한 명이자.
얼마 전에 각성함으로써, 우리 부대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된 인물.
"그 칼, 참고용으로 쓰게. 내놓으라고."
박씨 할아버지였다.
53화 대장장이 (2)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뒤.
나는 병실에서 퇴원했다.
탄약대대 내에 마련된 내 방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이게 내 방이라고?"
"예. 원래는 대대장실로 쓰이던 방인데. 병장님이 쓰시는 게 맞다고 다들 동의했습니다."
문제는 그 방이란 게 보통 방이 아닌.
무려 대대장실이란 것.
저 공책의 저자이자 이 부대의 지휘관이 사용하던 방.
솔직히 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이젠 일개 병장이 아니게 돼 버렸으니까.'
423대대 병사들뿐일 때는 그래도 병사 중 한 명이란 느낌이었으나.
생존자들까지 합류한 지금.
내 지위는 길드장.
꽤 높은 위치다.
이 지위를 생각하면.
마냥 다른 이들과 함께 생활관에 지내는 것도 그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일.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부담스러운 방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려던 때.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하며 들어왔다.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 박씨 할아버지?"
"오랜만이다."
박씨 할아버지.
내가 칼을 관리하는 걸 보고 칼을 직접 갈아 주기도 하고, 관리법을 알려 주기도 하셨던 분이다.
그때의 일이 연이 되어, 이후에도 몇 번씩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 사이.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일단 지위가 있다 보니 공식적인 자리에선 반말을 하지만.
아무래도 박씨 할아버지쯤 되면 나이 차가 너무 크다 보니.
사석에선 그냥 경어를 쓰는 편이다.
"대장이란 놈이 앓아누웠다는데 신경 쓰여서 도무지 잘 지내지를 못하겠더군. 이제 다 나은 거냐?"
"예. 활동에는 문제없습니다."
"흥, 그나마 다행이구만."
말은 저렇게 까칠하게 하지만.
속은 꽤 괜찮은 사람이란 걸 알고 있으니 별생각은 안 들었다.
"그건 그렇고."
말을 늘이며 눈을 가늘게 뜨는 할아버지.
뭘 보고 그러는지는 알 만했다.
대대장실 한쪽에 놓인.
기괴하게 찌그러진 칼.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뭐. 이렇게 됐습니다."
"쯧. 대충 어떻게 싸웠는지는 들었다. 이렇게 돼 있을 것 같았지."
"...이거, 어떻게 못 살릴까요?"
슬슬 바꿔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하긴 했다만.
일단 가장 손에 익은 칼이다.
"각성한 날부터 계속 사용해 온 칼이라, 제 전투법도 이 칼에 어느 정도 맞춰져 있거든요."
가장 좋은 건 이 칼을 어떻게든 살려내는 것.
하지만.
"못 살린다."
혹시나 하던 마음에.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차라리 날이 심하게 나가거나 한 거면 괜찮다."
박씨 할아버지가 일그러진 식칼을 이리저리 만지며 말했다.
"고온에 노출된 것도, 그것 자체는 문제없어."
"그러면 어떻게 방법이...."
"하지만 고온에 노출된 칼날이 천천히 식는 과정이 문제다. 필연적으로 안쪽에 변화가 생기게 되거든."
"아...."
"금속의 성질 자체가 바뀌게 되지."
금속의 성질 자체가 바뀐다니.
"그건 즉."
"어떻게든 형태를 원래의 칼로 바꿔도. 전혀 다른 칼일 거다. 써먹지도 못할 장식품이 되겠지."
결국.
이 칼을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다른 칼을 구하기는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포인트 상점에서 식칼을 팔기는 하니까.
'그건 마트에서 파는 일반적인 식칼하고 다름없다니까, 장인이 만들었다는 후임 녀석의 칼보다는 별로겠지만.'
뭐 어쩌겠냐.
아쉬운 대로 포인트 상점을 열어 아껴놨던 포인트를 쓰려고 할 때.
"그러니. 새로 하나 만들어 주마."
"네?"
"그 칼. 내 놔라."
박씨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꺼냈다.
"그 칼, 참고용으로 쓰게. 내놓으라고."
"예? 아니, 칼을 만든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여긴 이렇다 할 설비도 없는데요?"
"벌써 까먹었냐? 나도 각성했다는 거."
박씨 할아버지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노인의 왜소한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큼지막한 망치였다.
"각성한 직업의 이름은 대장장이라고 하더구나."
"아."
박씨 할아버지는 부대를 찾아온 생존자 25인 중 한 명.
며칠 전에, 그 생존자들은 모두 각성을 완료했다.
그 중, 박씨 할아버지의 각성 직업은 대장장이.
어떤 특성이 있는지까진 못 들었지만.
대장장이라.
"사실, 원래 그쪽 일을 하신 분이 아닐까 싶기는 했습니다만."
"눈치가 없지는 않구나."
423대대의 식당에서 내 칼을 갈아 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냥 주방일을 해 본 할아버지라 하기엔 남다른 면모가 있었지.
'뭐랄까. 장인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고 하나.'
금속공예 같은 일을 한 걸까 추측하긴 했는데.
"흥, 박씨공방이다."
"네?"
박씨 할아버지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박씨공방이라고. 너도 이름은 들어 봤겠지?"
"박씨, 공방이요?"
"그 박씨공방의 2대째 사장이 바로 나다."
"...."
그게 뭐지.
내 반응이 미묘한 것을 느낀 걸까.
박씨 할아버지의 표정이 묘하게 날카로워졌다.
"박씨공방... 모르냐?"
"...아! 알죠. 대단하신 분이었군요!"
"됐다. 너 이 자식. 전혀 모르는군."
뭔가 대단한 것처럼 말씀하셔서 미안하지만.
솔직히 처음 들어 봤다.
정황상 칼을 만드는 회사인 것 같긴 한데.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전문 요리사였던 것도 아니고 일개 취사병이었으니.
"도대체가. 어떻게 요리를 한다는 놈이...."
"그, 제가 각성은 요리사로 했어도 본질은 일개 취사병이라. 칼에 관심이 많던 건 아니라서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강원도를 넘어 전국 최고로 꼽는... 아니, 됐다. 뭔 말을 하겠냐."
한숨을 내쉬며 말을 끊는 박씨 할아버지.
조금 서운해 하는 것 처럼 보였으나.
모르는 놈한테 더 말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신 모양.
취사병들은 요리사 출신도 많다 보니.
기본적으로 개인용 칼의 반입이 가능하다.
흉기로 쓰일 우려가 있어 칼끝을 뭉툭하게 갈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우리 부대는 워낙 대충인 가라 부대라. 그마저도 안 했지.'
하지만.
요리사 출신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은 그냥 보급 칼을 쓴다.
전문적인 요리사들이라면 알 만한 이름일 듯하다만.
나는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던지라.
나름 요리를 배우다가 입대했던 후임 녀석들이라면 듣자마자 알았을지도.
"아무튼. 칼 몇 자루쯤 만들 능력은 있다는 것만 알아두고. 몇 가지만 허가해 주거라."
"어떤 허가 말입니까?"
"일단은 마법사 몇 명한테 도움을 좀 받으려고 한다. 나랑 같은 방을 썼던 자매들. 기억나지?"
이름이 분명 혜진, 현진이라 했던가.
애초에 박씨 할아버지와 연이 닿은 이유도 그 자매들 덕분이었으니.
기억은 한다.
"각자 불, 얼음 속성 마법사로 각성했다. 칼을 만드는 데 온도 조절은 필수니, 그 두 녀석한테 도움을 좀 받으려고 한다만."
"마법사들의 조장은 민재 형이니, 제가 전달해 두겠습니다."
"고맙군. 그리고 다음은 공방을 좀 만들려고 하는데."
공방?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자.
박씨 할아버지의 설명이 이어졌다.
"뭐, 별 건 아니야. 규모가 조금 큰 작업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뇨. 공방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대장장이는 그런 게 필요한 직업입니까?"
"필수는 아니다만, 있으면 좋지. 나나, 저 공병 병사들. 그리고 저 재봉사 아가씨 있잖냐."
"예."
"이렇게 물건을 제작하는 생산직들의 경우. 작업할 수 있는 공방의 유무에 따라 결과물에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는 설명이 있더구나."
"오."
이상아 조장이 만든 장비들은 지금도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질 수가 있다는 건가.
"여기 있는 탄약고 중 하나를 뜯어고쳐 보려고 하는데, 허가해 줄 수 있겠는고."
공병들이 만든 전투 차량 역시 이번 전투에서 확실히 도움이 됐다.
민재 형의 보고에 의하면 이 부대에서 노획한 물건들도 개조해서 병기로 만들고 있다고 했던가.
녀석들이 활약할 구석을 늘려줘서 나쁠 건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 부분도 자유롭게 진행하시죠."
"고맙구나.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탁이었는데 말이지."
"더 부탁하실 건 없습니까?"
나도 그렇지만.
이세계에서 생산직들의 성능은 생각보다 뛰어난바.
이왕 지원해 주기로 한 것.
할 수 있는 건 다 지원해 줄 생각으로 말했다.
"마지막 부탁이 있긴 하다만. 으음."
"?"
"당장은 말고. 나중에 알려 주마."
의미심장하게 말을 아끼는 박씨 할아버지.
"말하기 좀 힘든 부탁입니까?"
"그런 건 아니고. 뭐, 그때 가면 알 거다."
씨익 웃으며 말씀하시는 게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나쁜 의도는 아닐 테니까.
"그럼, 준비가 어느 정도 갖춰지면 다시 연락하마."
* * *
박씨 할아버지에게 공방의 건설을 허가한 뒤.
두두두두두.
캉, 캉, 캉.
"거기, 구멍 좀 더 크게...."
부대의 한구석.
탄약고들이 있던 자리에서 매일같이 큰 공사 소리가 들려왔다.
"소음 문제는 괜찮은 건가?"
"비교적 안쪽에 있는 탄약고를 개조하는 거라서요. 밖에 있는 괴물들한테까지 들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넓은 부대라 다행이네."
그나마 괴물들이 꼬일 정도는 아니란 게 위안이랄까.
그렇게 며칠.
내가 탄약대대의 식당 주방에 어느 정도 적응을 완료했을 때쯤.
"신 병장님."
"어. 왜? 밥 모자라냐?"
"아뇨. 공방이 다 완성돼서요."
"오."
점심 배식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인 내게 공병 한 명이 찾아왔다.
공방의 완성이라.
"공사 소리 되게 시끄러웠는데. 드디어 끝났구나."
"하하. 좀 죄송하게 됐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공사를 완성해야 한다고 밤낮도 가리지 않았던지라.
그래도 덕분에 빨리 공사가 끝났다니 다행인가.
"그래서 말입니다만. 신 병장님. 잠깐 공방으로 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음? 내가 도와줘야 할 일이 있나?"
"아뇨. 박 노야께서 말씀하시길, 뭔가 만들어 주기로 한 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
"공방 작업물 1호는 무조건 그걸로 할 예정이라고.... 짐작 가는 거 있으십니까?"
짐작 가는 게 하나 있긴 하지.
'내 식칼.'
탄약대대 식당에서 주운 일반 식칼로도 요리에는 문제가 없다만.
영 손맛이 없어서 내심 불편했던 차였다.
그렇게.
나는 완성된 공방의 모습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공방의 생김새는 꽤 독특했다.
현대의 건물과 중세 대장간이 반쯤 섞인 것 같은 모습.
이글루 형태의 탄약고 하나를 개조해서 공방으로 뜯어고친 결과.
위에는 전에 없던 큰 굴뚝이 하나 튀어나와 있었으나, 연기는 나오고 있지 않았다.
"아직 작업은 시작 안 한 건가? 연기는 없네."
"아. 연기는 아마 계속 안 나올 겁니다."
"어?"
"마법사들의 불로 열을 내고 있어서요. 장작 같은 걸 태울 필요도 없으니, 연기도 안 나오는 거죠."
"아. 그게 그렇게 되나?"
하긴.
연기가 나 봐야 괴물들의 시선이나 끌 테니 그편이 낫다만.
"그럼 저 굴뚝은 용도가 뭐야?"
"사실 이 공방 자체가 박 노야의 공방을 본뜬 거라서요. 필요성은 줄었어도 일단 달아 본 겁니다. 나름 열 배출도 되고요."
"허어."
그나저나.
박 노야라.
아까부터 자연스럽게 칭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 부대 분위기는 실력 대우가 크다고 하지 않았나.'
공병들에 비하면 상당히 늦게 각성을 마친 박씨 할아버지.
그런데 공방은 박씨 할아버지의 것을 본뜨고.
그 호칭마저 박 노야라.
내 생각보다도 훨씬 실력이 뛰어나신 걸지도.
"왔느냐."
공방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씨 할아버지가 마중을 나왔다.
"흐흐. 어떠냐. 공방의 모습은."
"멋있네요. 생각보다도."
"아직 설비는 부족한 편이고, 이 공방도 어디까지나 시스템상으로는 임시 공방에 불과하다만... 그래도 효과는 상당할 거다."
"임시 공방이요?"
"나름 제대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만, 이 시스템에서는 정식 공방으로 인정받지는 못하는 모양이더구나. 그쪽은 조건이 또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만한 공방이 정식 공방 취급을 못 받는다니.
주변을 둘러보자, 이미 무언가 일을 하고 있는 공병들이 보였다.
뚱땅거리며 쇳덩이를 만지작거리는 공병들.
그 근처에는 이미 만들어진듯한 쇠붙이들이 쌓여 있었다.
대충 인사를 마친 박씨 할아버지가 그렇게 쌓여있는 쇠붙이 중 한쪽으로 다가가더니.
물건 하나를 들고 내게 건넸다.
"이거. 한번 쥐어 보거라."
"이건."
그가 내게 건넨 것은 한 자루의 칼.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다란 도였다.
"와. 멋있네요."
나야 환도니 일본도니 하면서 칼의 종류를 구분할 능력은 없는 막눈이라지만.
유려한 형태의 장도.
꽤 멋들어진 칼이란 건 알겠다.
"그러냐? 뭐 그건 상관없고. 쥐었으면 이거 한번 베어 보거라."
그렇게 말하며.
작은 통나무 하나를 작업대에 올리는 할아버지.
'겨우 통나무?'
나로서는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단단한 원목 테이블도 무처럼 썰어 재낀 나다.
어지간히 굵은 녀석이면 모를까.
이런 얇은 통나무를 베라는 건, 너무 간단한-.
빻!
.
.
.
팍!
"...어?"
순식간에 베일 것을 예상하고 휘두른 칼은.
베이기는커녕.
나무에 약간의 흠집을 내는 정도에 그쳤다.
"바, 박씨 할아버지?"
"뭐냐."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박씨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칼. 쓰레긴데요?"
54화 대장장이 (3)
"이 칼. 쓰레긴데요?"
아차.
말해 놓고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위해 만들어 준 칼.
멋있게 생긴 칼인 만큼 나름 정성을 들여 만들어 준 것일 가능성이 높겠지.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다.
"아, 죄송합니-."
"클클. 주제에 칼 보는 눈은 있나 보구나."
"...예?"
실례했다는 생각에 당황한 나와 달리.
박씨 할아버지는 오히려 별생각 없는 듯 키득키득 웃고 계셨다.
"그래. 그 쓰레기는 저기 치워 두고."
"어. 예."
"다음은 이거다."
또 다른 칼을 건네는 할아버지.
이전에 쥐었던 칼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었으나.
빻!
결과는 똑같았다.
나는 소신 있게 말했다.
"박씨 할아버지. 이 칼들.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걸 누가 몰라? 다음은 이거."
용기를 가지고 한 소신 발언은 가볍게 묻혔다.
"흠. 다음은 이거."
그렇게 다음 칼.
그다음 칼까지.
비슷하게 생긴 칼을 계속해서 넘기고, 휘둘러 보라고 하는 박씨 할아버지.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아무리 칼 보는 눈이 없는 나라도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군요."
"클클, 빨리도 눈치챈다."
그렇게 몇 자루의 칼을 거쳤을까.
어느 순간.
서걱-
통나무에 턱턱 박혀 대던 칼들과 달리.
이번에 쥔 칼은 굵은 통나무를 가볍게 베어 넘겼다.
"어?"
"흠. 길이는 600mm 정도인가. 꽤 여유롭게 쳐주는구먼."
그 모습을 보며 묵묵하게 노트에 무언가를 기록하는 박씨 할아버지.
이쯤 되니.
나라도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상태창을 연 뒤.
내가 가진 특성 하나를 확인했다.
그 특성의 이름은.
[하급 단도 숙련]
지금까지 반복된 일련의 행위는 즉.
"단도의 길이를 알아보신 거군요."
"그래."
하급 단도 숙련.
거기서 말하는 단도의 기준을 알아보는 행위였다는 것.
"말이 좋아서 단도지, 사실 칼에 있어서 단도라느니 하는 이름의 규격은 없거든."
"그렇습니까?"
"봐라. 단도라는 이름 그대로 짧은 도가 곧 단도지. 근데 '짧다'의 기준은 또 뭐냐? 어떤 일에 쓰냐에 따라서 '짧다'의 기준도 변하는 법이잖냐."
하긴.
사과를 자르는 데에는, 내가 쓰던 사시미 칼만 해도 엄청나게 긴 편일 테지.
하지만 그것도 단도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보통은 길이 자체로 규격을 정하지. 단도니 뭐니 하는 기준의 규격은 존재하지 않아. 그래서 좀 확인을 해 본 거다."
"그럼 이 멋들어진 칼들은?"
"음? 감각도 되살릴 겸, 돌아다니는 잡철들로 연습해 볼 겸 만든 것들이다. 애들 장난감으로도 못 쓸 잡품들이지."
"...."
내가 칼이 멋있다고 했을 때.
영 덤덤했던 반응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애초에 대충 만든 물건이었으니.'
그런걸 칭찬해 준다고 한들.
감흥이 있을 리가 있나.
'나도 자세하게 모르던 내 특성을 파악해 주신 건가.'
내 스킬 [하급 단도 숙련]의 규격은.
약 600mm라는 것.
"꽤 길군요?"
내가 알기로.
일반적인 식칼은 15~25cm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정말 큰 식칼도 30cm 이하가 보통.
'내가 쓰던 후임 녀석의 일식용 사시미칼이 300mm 정도였지.'
그것도 사시미용이라는 특수성이 있어서 그 정도로 길어진 것이다.
그 사시미칼만 해도 긴 편이었는데.
그것의 두배라니?
"평범한 식칼에 쓰이는 길이는 아니긴 하지."
"역시 그렇죠?"
"그래도 대충 어느 정도를 기준으로 잡은 건지는 알겠구나."
박씨 할아버지가 노트의 한 페이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거기엔 꽤 기다란 일식도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참치 해체 같은 데 쓰이는 녀석 중에서도 가장 긴 녀석이다. 이 녀석같은 경우가 600mm지."
"이 그림의 칼이로군요."
"그래. 그리고 참치 해체용 칼도 일단은 '식칼'이고."
즉.
가장 긴 식칼인 셈이다.
"네 특성은 요리사로서 주어진 것이니까 말이다. 요리사인 네가 쓸 수 있는 길이는 식칼을 기준으로 딱 이 정도까지라고 정해 준 게 아닐까 싶구나."
"과연...."
사실.
내게는 그다지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기존에 쓰던 식칼의 길이는 300mm 정도.
그 두 배까지 긴 단도도 내 특성이 적용된다는 것이니까.
칼의 길이가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다.
'거대한 몬스터들도 많으니까.'
아무리 내 칼질이 예리하다고 한들.
몸통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괴물에게 칼을 찔러 봐야 큰 의미가 없다.
바늘에 살짝 찔린 정도의 아픔에 그칠 확률이 높겠지.
'0.01mm짜리 바늘로 수십 번을 찌른다고 한들 공룡을 죽일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그나마 [요리사의 눈]을 통해 약점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으로 짧은 무기의 단점을 커버해 왔다만.
그 길이가 늘어난다는 것은 호재였다.
칼의 길이가 길어진다는 것은 벨 수 있는 범위.
즉 파괴력이 높아진다는 것.
"다음은 이거다."
"어, 끝난 게 아니었습니까?"
"좀 더 상세하게 알아봐야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에 박씨 할아버지가 건넨 것은 양쪽에 날이 달린 물건.
즉.
도가 아닌 검이었다.
"이름이 단도 숙련인 거부터 예상은 했지만, 양날 형태는 길이 상관없이 안 되는군."
"이건 좀 아쉽네요."
"다음은 이거."
날의 면적이 넓은 중식도 같은 칼.
"날의 두께는 이 정도까지 허용이라. 도끼를 만들고 식칼이라고 우기긴 힘들겠구나."
나중에 가서는 온갖 기괴한 형태까지 다 쥐었다.
손잡이 위에 날이 3갈래로 갈라진 칼.
거의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휘어진 칼.
톱날 형태의 칼.
손잡이를 기준으로 위아래에 날이 있는 칼 등등.
"이 정도면 되겠어."
내 안에 담긴 칼에 대한 정의가 반쯤 무너져 내린 뒤에서야.
확인 작업이 끝났다.
"지금부터 작업을 들어가면 일주일 내로 끝날 게다. 아, 보고 갈 테냐?"
"볼 수도 있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재료를 녹이는 건 봐야지 않겠냐. 네 전리품인데."
"예?"
그런 말을 하며.
공방 구석의 방문을 여는 박씨 할아버지.
문을 열자 나타난 것은.
'용광로.'
거대한 용광로가 가운데 위치한 방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군단장님."
용광로 근처에는 두 명의 마법사가 대기 중이었다.
박씨 할아버지와 같은 방을 사용했던 자매들.
각자 화염, 얼음 마법사로 각성했다던가.
석탄도 기름도 없는 지금.
열관리를 담당하는 건 저 두 마법사란 거다.
"혜진아. 불 넣어다오."
"네."
용광로 구역에 들어서자마자 박씨 할아버지가 말했다.
화르륵.
용광로에 마법의 불길이 들이닥쳤다.
"더 세게!"
"네, 네!"
화르르륵-
요리사로서 화염 친화 특성이 있는 나지만.
그런 나조차도 부담스러울 정도의 열기.
그렇게 용광로의 온도가 급격하게 높아지자.
박씨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저번에 말한 마지막 부탁. 지금 말하마."
마법사들의 각출.
공방의 제작.
그리고 나중에 말하겠다고 한 마지막 부탁.
"저거, 좀 써도 되겠냐?"
"예?"
박씨 할아버지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두꺼운 옷을 입은 공병들이 구석에서 거대한 무언가를 들고 왔다.
내게는 눈에 익을 수밖에 없는 물건.
'여왕의 칼날.'
6개의 발 외에도 2개의 칼날 같은 앞발을 가지고 있었던 흰 거미 괴물들.
저것은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물건.
내가 직접 베어 넘긴 여왕의 칼날이었다.
"하핫. 마지막 부탁이란 게 이거였습니까?"
"그래. 아무래도 이거. 꽤 가치가 높은 소재인 것 같거든."
탄약대대를 점거하고 있던 거미 괴물들.
몸통은 비교적 약하고, 열기에 쉽게 무너졌으나.
칼날과도 같은 두 개의 앞발만큼은 지독하게 단단했다.
거기에 날카롭고 열기에도 강했지.
그중에서도 여왕의 것은 특히나.
"다른 병사들한테도 한번 물어봤다. 네가 베어 버린 물건이니, 소유권은 너한테 있다고들 하더군."
"저번에 말씀하지 않으시고 지금 와서 말씀하신 건. 서프라이즈 같은 겁니까?"
"그래. 꽤 위압감이 있지?"
확실히 여왕의 거대한 앞발이 가진 위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써도 되겠냐?"
"예. 아주 마음대로 쓰십쇼."
"좋아!"
그걸로 내 칼을 만든다고 한다니.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있냐.
"대장 허가 떨어졌다! 바로 집어넣어!"
"옙!"
공병들이 힘겹게 옮긴 거대한 앞발이 용광로에 들어간다.
모르긴 몰라도.
어지간한 철을 녹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의 열기.
여왕의 발톱은 점차 붉게 달아오르더니.
곧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저것도 녹긴 하는군요."
"대장장이의 스킬이 덕분이지. 그게 아니면 어지간한 열로는 택도 없다. 이미 실험해 봤지."
"실험이라니요?"
"여왕을 제외한 거미들 앞발들 있잖냐. 그것들은 딱히 소유권도 없으니 병사들 무기로 쓸 때 사용하려고 이미 녹여 봤다. 물론 그것들 전부가."
망치를 꺼내 들고 용광로에 다가가는 박씨 할아버지.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 무기를 만들기 위한 예행연습이었지만 말이다."
* * *
"완성이다."
며칠 뒤.
내 눈앞에는 하나의 가죽 가방이 놓여 있었다.
요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편인 나도 이건 안다.
칼 가방.
"칼집이랑 가방은 상아 양이 만들어 준 물건이다."
슬쩍 시선을 올리니.
박씨 할아버지 옆에 서 있는 이상아 조장이 보였다.
'공방. 재봉사의 스킬에도 영향을 준다고 했지.'
칼 가방이나 칼집이 뭐가 중요할까 싶었으나.
막상 보니 아니었다.
[식재료 감별]
이름과 달리.
이제는 온갖 것을 다 감별할 수 있는 이 특성으로 확인해 본 결과.
[하급 재봉사의 정성이 담긴 마력의 가죽 칼집]
[안에 담긴 칼을 최상의 상태로 보존합니다. 또한 칼날에 손상이 있을 경우, 칼집의 마력이 이를 천천히 복구합니다.]
[하급 재봉사의 정성이 담긴 마력의 가죽 가방]
[안에 담긴 칼에 미약한 마력을 부여합니다. 칼 가방에서 칼을 꺼낸 뒤 10분간 '예리함' 버프가 부여됩니다.]
"세상에."
"군단장님 쓰시는 거라고 하니까. 힘 좀 줘 봤어요."
그동안 그녀의 제작 능력도 올라가고 거기에 공방의 보너스까지 부여된 덕일까.
주력 장비가 아님에도 기대 이상의 효과였다.
'칼 가방이랑 칼집이 이 정도라면, 메인은 얼마나 대단한 거야.'
나는 두근거림을 안은 채로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두 자루의 식칼이 들어 있었다.
...둘?
"하나가 아닌 겁니까?"
"여왕의 칼날도 두 개였잖냐. 칼도 두 개는 나와야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긴 한데.
"애초에 요리사란 놈이 칼을 하나만 쓰고 다니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던 거야."
"그죠. 지금까진 야채고 고기고 전부 그 일식도 하나로만 해결하신 거잖아요?"
대부분의 경우.
요리사들은 하나의 칼만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어떤 요리에 쓰이냐에 따라 다양한 칼을 구비하는 것이 기본.
물론 난 요리사가 아닌 일개 취사병 출신.
취사병이 칼을 구분해서 쓴다고 해 봐야 육류용 채소용을 나누는 정도?
거기에 고기를 자를 때 쓰는 중식도 정도가 전부였다.
'진짜 요리사들이 쓰는 칼.'
전역하면 요리사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은 게 먼 과거의 일 같은데.
구색이나마 갖춰지기 시작한 셈인가.
"한번 쥐어 봐라."
박씨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칼 한 자루를 쥐어 보기로 했다.
내가 쥔 것은 두 자루 칼 중에서도 긴 쪽.
칼을 손에 쥐자.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식재료 감별]
[독고구식]
[명장의 자질을 지닌 하급 대장장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일품.]
[품질로는 정평이 나있는 아라크론의 흰거미의 앞발로 만들어진 사시미칼.]
[여왕의 앞발은 특히나 훌륭한 재료로, 어지간해선 그 예기를 잃지 않는다.]
[대형 식재료의 손질을 감안한 디자인으로 식칼치고는 긴 편에 속한다.]
[특별한 마력 속성을 띠지는 않으나 단단하고 예리한 무기로써의 기본에 충실하다.]
[착용 시 힘, 민첩이 크게 증가합니다.]
[쉽게 마모되지 않습니다.]
[쉽게 부러지지 않습니다.]
[한 종족의 수장이었던 존재의 한이 깃들어 있습니다.]
[전투에 사용될 시 치명타를 입힐 확률이 증가합니다.]
형태 자체는 일식도에 가깝지만.
그 길이는 식칼이 아니라 숏소드만 했다.
내 특성의 한계.
600mm 길이의 칼인 거겠지.
손에 감기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후임 녀석의 일식도에 손이 익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쥐어 보니 그 생각도 싹 가실 정도.
칼 옆면에는 무언가 고풍스럽게 느껴지는 무늬 같은 것도 보였다.
"이 무늬는 뭡니까?"
"아. 그거? 제조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무늬다만. 꽤 멋들어졌지?"
"대단하군요."
평생 칼에 대한 욕심 따위는 없었다만.
이렇게 쥐고 보니.
왜 후임 녀석이 장인이 만들어 준 식칼이란 걸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알 것 같다.
"다음 것도 쥐어 봐라."
나머지 한 자루의 칼은 길이는 짧은 편이었다.
다만 날의 면적은 넓은 형태.
칼을 손에 쥐자.
독고 구식과 비슷한 설명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 칼의 이름은.
[검정중식]
"중식도로군요."
"요리에 쓸 때는 가장 범용성이 좋은 칼 중 하나지. 전투에서도 쓸 만할 거다."
그 말대로.
이쪽은 힘의 배분을 생각해서일까.
날은 두꺼우나 길지는 않았고 꽤 무게감이 있었다.
요리는 물론.
전투에서는 단단한 무언가를 깨부수는 도끼처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자루의 칼 모두 감탄이 나올 정도의 일품.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독고구식.
그리고, 검정중식이라.
...음.
"이거. 이런 이름 써도 되는 겁니까?"
"앙? 내 작명이 불만이더냐?"
"...아뇨. 멋있네요. 뭐랄까. 예스럽기도 하고."
탄약대대를 공략하기로 한 것은 탄약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는데.
설마 예기치 않게 얻은 전투의 부산물들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거기에.
새로운 무기를 얻게 될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망치의 면 부분에 가시 같은 걸 붙여도 망치로 인식하는지 시험해 보자."
"고기망치 같이? 나쁘지 않네. 우리 공병들은 [망치 숙련]밖에 없으니까."
"수비대 각성자들 [방패 숙련] 실험해 봤는데, 방패에 날을 붙여도 방패로 인식되는 거 같아. 아래쪽에 날을 붙여서 무기로 써도 되겠는데."
"마법사들은 스태프를 만들어 달라는데... 그게 뭘까요?"
공방 구석.
공병 각성자들이 모여 앉아 떠드는 모습이 보인다.
부대원들의 무기를 설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단도 숙련]의 규격을 확인한 것처럼.
다른 각성자들의 직업 특성에 맞춘 무기를 고안하고 있는 것.
'...저 녀석들, 원래도 뭘 만들고 하는 걸 좋아했다고 했지.'
본래도 프라모델이나 DIY 등.
무언가를 만들고 조립하는 걸 좋아하던 녀석들.
거기에 공방 같은 제대로 된 생산 시설이 만들어지기까지 했으니....
취미와 적성이 제대로 맞물린 데다가.
이제는 환경까지 갖춰진 셈.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다만.
"너희들. 전사로 활동할 때는 진짜 갑갑했겠다, 야."
"어휴. 말도 마십쇼."
"망치 숙련에 체력 향상 특성 있다고 냅다 전사직에 꽂는다니.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죠. 전투 특성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싸우란 건지."
"큭큭. 나도 요리사니까. 무슨 느낌인지 알지."
자재가 갖춰지고 공방까지 생긴 지금.
본업에 걸맞게 이것저것 만들고 연구하는 모습이 보기 괜찮았다.
"[대검 숙련]의 규격은 최대 사이즈에는 제한이 없는데, 최소 사이즈에 제한이...."
"도적 계열 각성자들은 병장님처럼 [단도 숙련]이긴 한데, 스킬은 투척 위주가 더 많다는 것 같으니 대거 위주로."
"흰 거미들 부산물, 안 모자라려나?"
"거기! 여기 차량 분해하는 것 좀 도와줘!"
지상에 내려온 뒤.
각성자의 숫자도 스무 명가량이 늘었다.
그렇게 각성자가 늘어나며 알게 된 것은.
생각보다 직업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편의상 전사조, 마법사조 같은 걸로 구분하고 있긴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다 다르다.
전사조만 해도 광전사, 수비대, 기사, 검사, 창술사 등 다양하니까.
개중에는 내 '단도 숙련'처럼 특정 무기를 사용해야만 능력이 발휘되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포인트 상점에서 어떻게든 특성이 적용되는 무기를 구해서 사용했다만.
그 장비가 만족스럽지 않은 각성자도 많았고.
"이제부터는 아니야."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본다.
리자드의 가죽으로 만든,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디지털 전투복.
'멋도, 성능도 좋지만.'
평생 입어 본 적도 없는 맞춤형 의상이라 그런 것일까.
가죽 재질의 군복임에도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처럼 편안하다.
오직 나를 위해 만들어진 방어구.
그리고 이번에 얻은 두 자루의 칼.
"여왕이 무기로 쓰던 앞발은 두 개뿐이라, 당장은 두 자루밖에 못 만들어 준다."
"그 큰 다리가 이 칼 한 자루가 된 겁니까?"
"시스템의 영향인지, 하나의 재료로는 하나의 아이템밖에 못 만드는 것 같더구나. 쓸 만한 재료를 더 얻는다면 가져오너라. 몇 자루든 더 만들어 줄 테니."
앞으로 나를 위해 만들어질 무기까지.
"저는 이 두 자루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무슨 소리를? 요리사라면 용도에 따라 다양한 칼을 다룰 줄 알아야 하는 법이야. 네놈은 우리의 대장이기도 하니. 적어도 열 자루는 갖춰야지 않겠냐?"
나뿐만이 아니다.
모든 길드원에게 각자에 맞는 무기와 방어구가 보급될 것이다.
탄약고를 탈환해 사수들의 총알 문제도 해결된 지금.
부대원들의 무장이 본격적으로 갖춰지기 시작했다.
산맥에서의 목표가 모든 부대원의 생존이었다면.
지상에서의 첫 번째 목표는 정착이었다.
그 정착을 이루어 낸 것이나 다름없는 셈.
그렇다면 이제는.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이제는 마경이 되어 버린 군내가 있다.
55화 접촉
세상에 좀비와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한 뒤.
나름 긴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살아남은 이들도 가만히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들 살아 있었군. 다행이야."
"여기 모인 사람들이 어디 쉽게 죽을 사람들입니까."
시외의 낡은 건물.
그곳에 몇 명의 인간들이 모여 인사를 나누었다.
갑작스럽게 붕괴한 세상.
생존자들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 왔고.
그중 하나가 이것.
"그럼. 이번 정보 교류를 시작하겠소."
생존자들 간의 정보 교류.
인근에서 활동하는 생존자 그룹들.
그중 서로를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한 이들이 모여 만든 정기 회의다.
누군가에겐 별것 아닌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만드는 일만 해도 엄청난 노력이 드는 일.
그리고 이 정보 교류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어지간히 대단한 그룹이 아니고서야.
생존자 그룹의 숫자는 30을 넘지 못한다.
식량 문제, 거주지 문제.
그 외에도 온갖 문제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런 작은 그룹으로는 할 수 있는 일도 한정되는바.
이렇게 교류의 장을 만듦으로써 서로가 가진 정보를 공유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협력한다.
그것만으로도 생존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처음 교류를 시작했을 때는 열 그룹이 넘었지만.
이제 남은 것은 다섯 그룹 정도.
"읍사무소 근처에서 활동하던 그룹 있잖습니까?"
"아. 그 각성자가 둘이나 있다던."
"네. 그 그룹. 북쪽의 대규모 그룹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허어."
"소문의 그 대규모 생존자 단체인가."
각 그룹의 리더들은 정보 공유를 시작했다.
"으음. 이걸로 벌써 몇 번째지? 많이들 이동하는 것 같소."
"믿어도 되는 정보인지 솔직히 의아합니다만."
"슬슬 군내의 식량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저희도 조만간 결단을 내려야 할 겁니다."
"끄응...."
"다음은 제 차례군요. 지난번에 있던 의문의 대폭발 있잖습니까?"
"아아. 엄청나게 거대한 폭발이긴 했지. 소리를 듣고 몰려든 괴물이 그렇게 많지만 않았더라도 폭발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야."
"그때 날아간 파편이, 저 사마귀 같은 괴물들이 점거하고 있던 건물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덕분에 그쪽으로 이동하는 길이 조금은 안전해졌어요."
"허어, 그게 정말인가."
"그 폭발이 우리한테는 득이 된 셈이로군."
이곳에 모인 각 그룹의 리더들.
그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하나씩 풀어 나갔다.
"이번엔 제 차례네요."
그렇게 순서가 돌아.
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여성은 특별할 것 없는 외모였으나.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
그녀는 맹인이였다.
"저희 그룹이 최근에 확보한 정보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란 말인가."
여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들은 생존자들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군부대가 있다니."
"그것도 이 인근에?"
"너무 사정 좋은 얘기 아니오?"
전멸했다고 알려진 군부대.
그 예외가 나타났다는 정보였으니.
"매번 궁금한 건데 말요."
그때.
한 남자가 탁자 위에 발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다분히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의 남자.
"수아 누님은 어떻게 매번 그렇게 희귀한 정보를 가져오는 거요?"
"무슨 의미신지?"
"그 군부대가 있다는 위치, 나도 알고 있는 곳이오. 아니,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겠지. 나름대로 정보에 밝은 생존자들이라면 발도 안 옮기는 곳이니까."
그 말에는 다른 리더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긴 하지."
"군부대가 있던 곳은 대부분 강력한 괴물들이 점거하고 있으니 접근도 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고. 하물며 그곳은 탈영병들이 주변을 돌아다닌다고 하던 곳 아닌가."
그 모습을 확인한 남자는 의기양양해져서 말했다.
"그런 곳에서 활동 중이라는 군부대? 이런 정보를 대체 어떻게 얻었느냐 이 말이지."
"정보의 출처가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그럼. 그 정보를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거기서 결정되는 거 아뇨. 막말로 주변에서 활동 중이라던 그 탈영병들. 그 녀석들이 멀쩡한 군대인 척하고 다닌 거라면 더 큰 문제 아닌가."
반박하려면 반박해 보라는 태도로 팔짱을 끼는 남자.
그러나.
수아란 이름의 여인은 오히려 덤덤하게 말했다.
"출처는 말할 수 없어요."
"그럼...."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거짓 정보를 가져온 적이 있었나요?"
"뭐?"
그녀는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을 텐데도 그 시선은 사람들을 향해 정확히 움직였다
"찬성 씨?"
"어, 없죠. 저번에는 덕분에 목숨을 건지기도 했고."
"그러면, 중권 씨는요?"
"...수아 양이 가져온 정보가 아니었다면 우리 그룹은 굶어 죽었겠지."
이 자리에 있는 모두.
수아의 정보 덕에 목숨을 구한 적이 한 번씩은 있었다.
"다른 그룹원의 직업이나 능력에는 관여하지 말자. 이 교류가 시작됐을 때부터 있었던 규칙이죠."
지금은 평범한 생존자들이지만.
언제 약탈자로 변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럴 경우에 대비해.
각자의 그룹은 정보를 교류하면서도 그룹원들의 능력에 대해서는 묻지도, 알려 주지도 않았다.
이들의 불문율 중 하나였다.
"출처를 말할 수 없는 건 그 이유예요. 하지만 지금까지 가져온 정보는 모두 진짜였고. 거짓 정보를 퍼트릴 이유도 없죠."
"으음. 확실히."
"수아 양이 이상한 짓을 할 거였다면 진작에 하지 않았겠어?"
"이번 건은 경수 씨가 너무 의심이 많은 게 아닌가 싶군."
"...쳇. 미안하게 됐소."
"사과는 받아들일게요."
그렇게.
대화의 주도권은 수아란 이름의 여자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제안이 하나 있어요."
"제안이라니?
"그 군부대와 접촉해보는 게 어떨까 싶어요."
"뭐?"
그녀에게 큰 신뢰를 보내고 있던 그룹장들이었지만.
그 말에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수아 양. 그건 너무 경솔한 판단 아니오?"
"저도 좀 위험한 것 같군요. 군부대라 한들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잖습니까. 그쪽의 사정이 우리보다 낫다는 보장도 없구요."
"더 낫다고 해도 애초에 우리를 받아줄지도 모르는 일이지. 차라리 그 소문의 대규모 그룹 쪽으로 향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잠자코 듣던 여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의 의견도 이해가 가요."
"그럼...."
"그러니, 저희 그룹이 먼저 만나러 가 볼게요."
"뭐?"
"말씀하신 걱정되는 부분들. 그쪽에 직접 접촉해서 확인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수아 양의 그룹이 위험하지 않겠소?"
"그렇긴 하지만,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요."
자연스럽게.
군부대와 접촉한다는 쪽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남자.
경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이러면 안 좋은데.'
심기 불편해진 남자는 수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들어.'
뭐든지 알고 있다는 듯한 저 태도도 그렇고.
맹인인 주제에, 앞이 보인다는 듯이 행동하는 저 움직임도 그렇고.
묘하게 소름이 끼친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눈이 경수를 향했다.
"경수 씨? 이견 있나요?"
말을 꺼낸 수아가 눈을 떴다.
감은 눈 안쪽에 있던 것은.
시력을 완전히 상실해 하얗게 변한 눈동자.
두려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어, 없소. 고생해 준다는데 고마울 따름이지."
"다행이네요."
그 분위기에 압도된 나머지.
무심코 고맙다는 말까지 해 버린 경수는 속으로 아차 했다.
'제기랄. 쫄아가지고 안 해도 되는 말까지 해 버렸잖아.'
당황한 그였지만.
냉정을 되찾은 뒤에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군부대와의 교류라.
그런 건.
'절대 안 되지.'
최대한 타이밍을 보고 있었지만.
이제 이 정보 교환도 그만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군내에 진출한다."
간만에 열린 조장 회의.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군내에 진출하자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뭐, 위험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말이야."
나는 슬쩍 시스템창을 띄웠다.
그곳에는 아직까지 번쩍거리고 있는 문장이 하나.
[월드 이벤트 : 점령전이 진행 중입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다만, 이 세상은 우리한테 점령전을 수행하라고 하고 있으니까."
점령전.
기준이 명확하진 않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활동 영역을 넓혀나가고, 그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늘려 나가다 보면.
한 지역의 점령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저 상태창 메시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도 조금은 짜증 납니다만."
"나도 맘에 들지는 않아. 하지만 일단 이 세상은 게임 같은 룰을 따르고 있거든. 그건 즉."
서수혁 상병이 중얼거린 말.
솔직히 말해 나도 동감이다만.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보상이 따를 것이란 말이지."
게임의 대원칙.
미션을 수행하면 보상이 주어진다.
어떤 보상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점은 확실하다.
실제로 우리는 첫 점령전 보상으로 '기동 요새'니 뭐니 하는 것을 얻은 적이 있다.
...소환 면적이 부족하다느니 하는 이유로 한 번도 써보진 못했지만, 아무튼.
'지상으로 내려온 뒤에는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데에만 집착해서 그런가. 시스템 업적을 본 지도 꽤 됐지.'
하지만 나름대로 정착을 마친 지금.
이제 시스템의 인도에 어느 정도 따라 줄 필요가 생긴 셈이다.
"영역을 넓혀 나가야 하는 건 기정사실이야. 게다가...."
"지금은 위험도도 조금 줄었을 테니 말입니다."
내 말을 거들며 나선 것은 전광일 상병이었다.
씨익 웃으며 양손을 겹치는 녀석.
그 손에는, 살벌하게 생긴 철재 글러브 같은 것이 장착되어 있었다.
사실 저것이 바로 내가 군내에 진출하자고 한 계기.
'부대원들의 개인 장비 무장이 완료됐다.'
박씨 할아버지와 공병들.
그들이 공방에서 만든 무기가 모든 각성자에게 돌아간 것.
부대원들의 전투능력도 순식간에 배가 된 셈.
마경처럼 변해 버렸다는 군내라고 할지언정.
이젠 마냥 못 해 볼 상대는 또 아니거든.
"뭐, 그렇다고 해도 일단 정보가 모자라니까. 가볍게 정찰해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만."
"아. 아예 본격적인 토벌전을 한다든가 그런 건 아닌 거냐?"
"그런 것도 아는 게 있어야 하는 거지."
어디에 어떤 괴물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르는 장소.
냅다 들이박는 건 좀 화려한 자살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
"아, 그런 거라면야 뭐."
"네 말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군."
그렇게.
군내로의 원정이 시작되었다.
* * *
군내라고는 하지만.
딱히 명확한 경계선을 두고 여기서부터 군내다, 하는 건 아니다.
조심스럽게 이동을 개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점차 주변에 건물들이 많아지기 시작하고.
-크르륵....
"저기 쇼핑몰 안쪽. 좀비 무리입니다."
괴물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쯤 오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군내라고.
"다들 준비하자."
"예."
물론.
우리 부대의 준비 태세라 함은.
"식사 맛있게 하십쇼!"
전투식량을 꺼낸 뒤.
한입에 씹어 삼켰다.
그러자 잠시 뒤.
나와 병사들의 상태창에는 한 가지 문구가 추가되었다.
[특성]
[예민한 청각(열화)]
알라우르의 고기로 만든 전투식량.
그 효과로 인한 특성이 적용된 것.
"으, 이거 귀가 너무 아프지 말입니다."
"큭큭. 그래도 방심하다가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
좀비든 괴물이든.
대부분의 경우 소리를 내기 마련.
물론 예외도 있기야 하겠지만.
전투를 최소화하며 주변을 정찰하기에 이만한 특성이 없다.
물론 단점도 있기야 하지만.
'끄으.'
엄청나게 증폭되는 소리로 인한 고통.
그래도 이것도 처음에나 괴롭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고통도 줄어드는 편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고통이 가실 때쯤.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부대원들 모두가 긴장한 낯빛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유는 알 만했다.
[예민한 청각(열화)]로 인해 들려오는 소리.
그 숫자가.
'너무 많다.'
이 군내에.
대체 얼마나 많은 괴물과 좀비가 몰려 있다는 건지.
'그렇다고 위축될 필요는 없지.'
저 많은 숫자가 한 번에 우리에게 몰려오는 것도 아닐 테니까.
"다들. 진입한다."
"예."
우리는 조심스럽게.
군내의 건물들을 수색해 들어갔다.
'저쪽 건물은 들리는 소리만 해도 스물에 가까우니. 일단 피하고....'
예민한 청각을 통해 교전을 최소화.
수색해 볼 만하다 싶은 건물들을 위주로 조사해 본 결과.
"깨끗하군요."
"그야 뭐. 시간이 그렇게 지났으니까."
식당이고 편의점이고.
모두 깨끗하게 털려 있었다.
작은 분식집 안에 들어선 나는 카운터 쪽을 바라봤다.
카운터에 쓰러진 채 썩어가고 있는 시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패했지만.
그럼에도 낯이 익었다.
'분식집 아주머니. 돌아가셨구나.'
솔직히 이 근처 동네에 좋은 기억은 많지 않았다.
우리 부대의 위수지역.
외출이나 면회를 나와도 다른 지역으로 가지 못한단 걸 알고 군인들한테만 비싼 가격을 책정하는 가게가 어디 한둘이었나.
오히려 싫어하는 부대원들이 더 많았겠지.
하지만.
이렇게 된 꼴을 보면 아무래도 착잡한 심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남은 건 시체뿐이라."
지난번.
마트를 공략할 때도 느꼈던 부분이다만.
부대에서 성장을 거치는 동안.
이미 지상의 자원들은 다른 이들의 손에 넘어간 것 같았다.
모든 부대원을 각성시키는 데 성공하는 등.
우리가 보낸 시간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지상의 이들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것.
그렇게 어느 정도 수색을 진행하던 중.
우리는.
"다, 다가오지 마시오."
"...."
한 무리의 생존자들과 마주쳤다.
그나저나, 다가오지 말라니.
괴물들이 넘쳐나는 세상.
군인들을 봤을 때 나올 만한 반응은 아니지.
'탈영병 자식들.'
저 반응의 이유를 알고 있으나.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 다가오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우리도 만만하지는 않다는 걸 보여 주겠소."
"저 사람들이 듣자 듣자 하니까."
"그만하자."
"...영준아?"
짜증 난 이민재 병장이 뭐라 말하려는 듯했으나.
그걸 말린 것은 나였다.
"저 사람들은 우리가 무서운 것뿐이니까."
"...."
"우리를 꺼리는 이유도 알고 있으니. 굳이 부담스럽게 다가갈 필요는 없을 것 같거든."
"하지만."
민재 형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식이라면, 세력 확장은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
문제는 이거란 말이지.
점령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세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생존자의 영입은 필수.
'하지만 만나는 생존자들마다 군인을 위험분자 취급하고 있으니.'
아예 군부대라는 정체성을 내던지는 게 아니고서야.
우리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데만 한세월이 걸릴 것 같다.
그렇게 생존자들의 영입이 늦춰지는 만큼.
앞으로의 활동에서 손해를 보게 되겠지.
그렇다고 강압적으로 합류를 강권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때.
채엥....
[예민한 청각]에.
기묘한 소리가 잡혔다.
챙....
까앙....
크윽.
전투의 소음.
그리고.
사이사이에 들려오는 인간의 신음 소리.
'이건.'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
인간과 괴물 간의 전투가 아니었다.
인간과 인간.
동족 간의 전투가 가까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워지고 있다.'
56화 정령사 (1)
[예민한 청각]이 포착한 전투 소리.
인간과 인간의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가까워지고 있군요."
"...우연이겠지?"
어느 한쪽이 밀리고 있는 전투인 것일까.
적을 따돌리기 위해 도주하는 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문제는 그 소리의 진원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는 것.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우연이겠지만.'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소리.
거의 직선으로 접근해 오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건 마치.
"우리 위치를 알고 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군."
그럼 어떻게 할까.
피하는 건 어렵지 않다.
[가벼운 발 슬레이파]의 고기는 넉넉하게 남아 있으니까.
요리를 통해 기동력을 올린다면 후퇴하는 건 일도 아니지.
다만.
"궁금하네."
"예?"
"누가, 무슨 이유로 같은 인간을 공격하고 있는 건지."
나는 피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저 멀리.
"큭, 따돌릴 수 없는 건가."
"포기하지 맙시다! 조금만 더 가면...."
우리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저기 앞에!"
도망치는 이들도 우리를 확인한 듯.
우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던 길목 앞에 멈춰 섰다.
그들이 우리에게 뭐라 말을 걸려던 순간.
"하하! 이제 도망치는 건 포기한... 응?"
이들을 추격하던 또 다른 일단의 그룹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의 모습을 보자 주춤하는 그들.
"군복. 탈영병들인가."
"이 근처까지 온 탈영병들도 있었나 보군."
뒤늦게 도착한 이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속닥거리는 것을 보니 우리가 못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다 들리는데.'
[예민한 청각(열화)]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보니.
그들의 대화는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똑똑히 들려왔다.
-씁. 거의 다 잡았는데. 운도 없지.
-탈영병들이라.
-우리가 이길 수 있나?
-미쳤냐? 총 든 병사를 어떻게 이겨.
추격당하던 이들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다만.
저들 입장에서 우리는 썩 달갑지 않은 존재라는 건 알겠다.
-그렇다고 다 잡은 녀석들을 넘겨줄 수는.
-저쪽도 우리랑 마찰 빚기는 싫을 거야. 기다려 봐.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
"커험."
그중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안녕하시오."
"흠. 안녕하십니까."
"이런 곳에서 군 장병 여러분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군."
"긴 얘기는 필요 없고. 본론부터 들어가시죠."
대화를 시도하려는 그에게 난 심드렁하게 말했다.
뒤에서 탈영병이란 건 확정 짓고 이야기하던 녀석들이.
군 장병 여러분은 무슨.
"이쪽 사람들이랑."
공격받아 도망가던 이들.
"그쪽 분들."
그리고 공격자들.
"무슨 관계입니까?"
"...음! 바로 본론이라. 시원하고 좋구려."
공격자 측의 남성은 도망자 그룹 쪽을 흘깃 본 뒤.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그쪽의 인간들은 우리 그룹의 물건을 훔치고 도주했소."
"물건을 훔쳤다고요?"
"그렇소. 우리 입장에서는 꼭 붙잡아야 하는 범죄자들인 셈이지. 어떻게, 양보해 줄 수는 없겠소?"
남자의 말이 끝나자.
도망자 그룹 쪽에서는 화들짝 놀라며 반박했다.
"거, 거짓말입니다!"
"저희는 평범한 그룹인데. 저 녀석들이 갑자기 습격해 온 겁니다!"
"어쩜 저리 뻔뻔하게...!"
그러나.
그들의 반론 따위는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듯.
공격자 측의 사내는 계속해서 말했다.
"물론, 공짜로 넘겨달라고 하지는 않겠소."
씨익 웃으며 도망자들 쪽을 가리키는 남자.
"어차피 장병분들이 원하는 것은 이들이 가진 물자들 아니오?"
"...그렇다면?"
사실은 남의 물자를 굳이 빼앗을 생각은 없다만.
저들은 우리를 약탈자 탈영병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일단 그런 거로 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물자들은 모두 그쪽에 양보해 드리기로 하지."
"뭐?"
물자의 양보.
그건 저 남자가 우리를 탈영병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나온 제안이겠지.
하지만 이건 꽤 놀라운.
아니.
이해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그럼 당신들한테는 뭐가 남지?"
"말했지 않소? 저 녀석들은 우리 그룹의 물건을 훔친 도둑놈들이라고! 물자는 사실 중요하지 않소. 하지만 우리를 배신하고 물건을 훔치고 도망간 녀석들. 어떻게든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하지 않겠소. 우린 그걸로 충분하오."
"흠."
솔직히.
난 저들이 약탈자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인간을 공격하고 있는 모습을 코앞에서 확인한 셈이니까.
좋게 볼 수가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약탈자라면 응당 목표로 삼아야 할 물자를 양보하다니.
저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건 우리가 끼어들 일이 아니란 건데.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은 무슨! 그리고 이 녀석들아. 저분들이 그런 거 신경이나 쓰겠냐?"
"뭐, 뭐라고?"
도망자 측 생존자들이 반박하려 했으나.
되레 윽박지르는 공격자 측의 남자.
"생각해 보라고. 우리 군 장병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건 물자.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건 너희 도둑놈들."
"...크윽."
"서로 마찰 없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데, 너희들이 거짓말이니 뭐니 하는 게 의미가 있겠어?"
그렇게 말을 마친 남자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것조차 양보하기 힘들다고 한다면 충돌할 수밖에 없겠지만. 장병분들도 이런 곳에서 총소리를 내고 싶지는 않을 것 아뇨? 여기서 좋게 좋게 해결하는 게 어떻겠소."
"글쎄."
사실.
남자의 말이 크게 틀리진 않았다.
실제로 상당히 괜찮은 제안인 것도 맞지.
다만.
'어디까지나 우리가 약탈자들일 때나 그런거고.'
이래 봬도 아직은 당당한 대한민국 국군의 장병.
남의 물자를 약탈할 생각은 없거든.
문제는 물자의 약탈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저 도망자들이 정말 공격자들의 그룹에서 물자를 훔친 이들이라면 우리가 개입할 일이 아니란 것.
반면 도망자들은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에 따라.
우리 결정이 달라지겠지.
그리고....
그걸 알아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남자.
그에게 눈을 맞춘 뒤 특성을 발동시켰다.
[특성 - 식재료 감별(강화)가 발동합니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영장류 - 인간종]
[신선도 - 중]
종족.
그리고 신선도.
식재료 감별을 통해 볼 수 있는 정보는 기껏해야 이 정도.
아니.
'이 정도[였]지.'
얼마 전.
탄약대대를 탈환한 뒤 얻은 [특성 강화권].
난 이걸 통해 [식재료 감별] 특성을 강화했었다.
[식재료 감별]에서 [식재료 감별(강화)]로의 변화.
단순히 단어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이지만.
그 차이는 컸다.
종과 신선도를 알려주는 문구 아래.
추가로 나타나는 메시지들의 나열.
[직업 : 신입 연쇄살인범 Lv. 7]
[능력치 : 힘 14, 민첩 16, 마력 5, 행운 3]
[특성 : 최하급 단도 숙련, 최하급 은신 기동, 최하급 연기]
[스킬 : 비골 찌르기, 흔적 제거]
그 내용은 꽤 충격적이었다.
"...허."
"음?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그동안 겪어 본 바로는.
각성자의 직업이 정해지는 데는 일정한 기준이 있다.
실제로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던 인물이거나.
아니면 재능과 성향이 그쪽에 특화되었거나.
둘 중 하나인데....
...어느 쪽이든.
[신입 연쇄살인범]?
저딴 직업을 가진 녀석은 처음 본다.
저딴 직업을 가진 녀석이 정상인일 리도 없고.
결정을 내린 나는 부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얘들아."
"옙."
"무기 들자."
내 명령이 떨어지자.
"충성!"
근처에 편한 자세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무슨?"
그 모습을 본 공격자 측의 남자가 당황한 듯 말했다.
"무기를 들라니. 내가 이해하는 그 의미가 맞소?"
"뭐, 그렇게 됐습니다."
"이해할 수 없군."
남자는 갑갑하다는 듯 말했다.
"말했듯이 우리는 딱히 나쁜 일을 하려는 게 아니오. 우리 그룹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가는 이들을 추격해 왔을 뿐이지."
"아, 그거야 뭐. 그러시겠죠."
퍽이나 그러시겠다.
"혹시 더 양보를 바라는 거요? 그렇다면 차라리 말로 하시오. 여기서 총이라도 쏘는 순간 온갖 괴물들이 몰려들 텐데. 굳이 피를 보려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정말로 억울하고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말투.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저 남자의 특성.
[최하급 연기]의 효과인 거겠지.
하지만...
내게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단 말이지.
남자 본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형님, 어떻게 합니까? 싸웁니까?"
[식재료 감별(강화)]
[직업 : 신입 인간 사냥꾼 Lv. 4]
"자세히 보니 총 든 병사는 몇 명 없는 거 같은데. 잘하면 될 것도 같구먼. 조장이 정하쇼."
[식재료 감별(강화)]
[직업 : 신입 약탈자 Lv. 6]
그 주변인들까지.
'도저히 믿을 만한 구석이라곤 없잖냐.'
연쇄살인범이라는 살벌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나와 병사들을 슬쩍 훑은 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후퇴하자."
"형님?"
"큰형님까지 있으면 모를까, 우리끼리는 아직 무리야. 아쉽지만 포기한다."
뭐야.
그냥 가는 건가?
등을 돌리고 물러나는 공격자들.
사내가 마지막으로 이쪽을 보며 말했다.
"지금은 군인이란 이유로 떵떵거릴 수 있겠지. 그 여유를 많이 누려 두도록 해. 그것도 길지는 않을 테니까."
"무슨 의미지?"
"당신네들이 알지는 모르겠지만, 각성자의 가능성이란 건 생각보다 굉장하거든."
음.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다.
"총기 따위 무용지물이 되는 날도 머지않았지."
"...."
"그때까지. 오늘 일은 기억해 두도록 하지."
거기까지 말을 남긴 뒤 떠나가는 남자.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기억해 둔다라.
'그럼 지금 제거해 두는 게 나을지도.'
무슨 깡으로 저런 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붙잡으려고 하면 붙잡지 못할 건 없다.
후환이 남을 바에야.
차라리 여기서 죽여 버리는 편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난.'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생각이 조금 거칠어진 느낌이 든다.
뭐, 죽이는 것까지 가진 않더라도.
썩 좋은 일을 하진 않을 것 같은 녀석들.
여기서 붙잡아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긴 하다만.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주변에는 괴물들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상황.
저 녀석의 말대로.
여긴 위험한 장소다.
굳이 소란을 일으켜서 괴물들의 주의를 끌 필요는 없겠지.
"갔군요."
"저 녀석들은 보내 줬다고 치고. 다음 문제는."
공격 측이 모두 떠나간 뒤.
나와 우리 부대원들의 시선은 도망자 측의 그룹에게 향했다.
"저 사람들인데."
일단 우리가 도와준 상황이긴 하다만.
저 탈영병 녀석들이 군인에 대한 인식을 나락으로 보내 버려서 말이지.
또 살려 달라느니 하는 소리나 할 게 뻔하니.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그게 고민이었는데.
생존자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가 싶더니.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예상과 달리.
두 눈을 감은 여인은 우리를 경계하기는커녕.
평범하게 감사를 전해 왔다.
'...눈이 안 보이는 건가? 그래서 우리가 군복을 입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거고?'
아니.
그렇다기엔 저 떠나간 그룹과의 대화가 다 들렸을 텐데.
그냥 탈영병에 대한 소문을 못 들은 이들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띠링.
[무당 : 영준아.]
[셰프 : ...태준이?]
익숙한 인물에게서.
길드 메세지가 날아왔다.
[셰프 :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무당 : 점괘가 하나 나왔거든.]
그리고.
[네가 지금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만.]
그 내용은 꽤 흥미로운 것이었다.
[무당 : 우리에 대해 알고 있다. 그것도 꽤 자세하게.]
[셰프 : ...재밌네.]
* * *
나와 부대원들은 일단 조우한 생존자들을 데리고 군내를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그쪽은 위험이 크니까.
맘 편히 있기도 힘들단 말이지.
부대의 근처.
병사들이 정찰을 다니며 정리해 둔 안전한 건물 안에 들어선 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나는 생존자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기로 했다.
건물의 한 방 안.
내 상대편에 앉아 있는 것은 생존자 측의 리더 격인 인물이었다.
분위기가 꽤 묘한 사람이었다.
두 눈을 감은 채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는 여인.
아무리 봐도 맹인인 게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평범한 맹인은 결코 아닌 듯.
두 눈을 감고도 평범하게 걷는 모습에서는 약간 으스스한 분위기도 느껴졌으나.
'뭐, 우리 부대에도 이상한 놈들 많다 보니.'
화나면 몸에서 푸른 전류가 흐르는 마법사나.
흥분하면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언어를 상실하는 광전사 등등.
겪어본 게 꽤 다양하다 보니.
어지간한 일은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게 되어 버렸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내 질문을 들은 그녀는 이내 입을 열고 대답했다.
"무슨 일...이라고 할 만큼 복잡한 일은 아니에요. 저희는 평범하게 주변 이동을 하고 있었는데. 저들이 갑작스럽게 저희를 공격했을 뿐."
"정말입니까?"
"네, 아, 저들이 말한 도둑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모두 거짓말이에요. 오늘 공격당하기 전에는 본 적도 없던 사람들인걸요."
"아. 그건 대충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그걸 어떻게 짐작하고 있었냐는 듯.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여인.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든,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고마우실 거까지야. 사실. 이렇게 순순히 감사를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만."
"네? 도와준 분들한테 감사를 표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어.
사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난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군인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는 않아서요."
"그런가요?"
"부대를 탈영한 몇몇 병사들이 벌인 악행이 좀 있는 것 같더군요. 덕분에 멀쩡한 저희 부대도 사람들의 의심을 사는 상황이라."
"그렇군요.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신 거죠?"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그럼 아무 문제 없네요."
"...."
그게 그렇게 되나?
무표정하게 말하는 여인.
나름대로 대화를 하면서 표정을 관찰하려고 했으나.
약간 멍하다고 해야 하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파악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아는 척하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만.
그래도 일단은 대화를 해 보기로 했으니.
본격적인 대화에 나서기에 앞서.
간단한 차라도 준비할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뭐라도 마시면서 얘기하시죠. 차도 있고, 커피도 있습니다. 그래 봐야 인스턴트이긴 합니다만."
"차..."
전투차량에는 어느 정도 식량을 싣고 있는바.
부피도 적은 티백이나 인스턴트 커피 같은 것도 조금씩 실려 있었다.
일단 얘기를 하려면 그런 것이라도 대접해야 하지 않겠냐 하는 생각이었으나.
"사양할게요."
"네?"
"차라고는 해도 식량이잖아요. 식수 한 방울이 아까운 세상인데. 구해 주신 것으로도 감사한데 더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네요."
아.
듣고 보니 그런가 싶기도 하다.
일단 우리가 점거한 탄약대대는 안쪽에 작은 냇물이 흐르고 있다 보니.
식량 문제는 아직 남았다 쳐도 식수 쪽에는 별생각은 없었다.
나는 손사래를 치는 그녀에게 말했다.
"굳이 사양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만."
"그래도. 양심에 찔리는 게 있네요. 차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요."
일단은 다시 제의해 봤으나 한사코 거절하는 모습.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정말 예의상 거절하는 게 맞다 생각한 것일 확률이 높겠지.
차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도 사실일 수 있다.
다만.
'흠.'
지금은.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단 말이지.
난 여전히 눈앞에 떠올라 있는 길드 메시지창을 보았다.
[무당 : 지금 만나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무당 : 우리에 대해 알고 있다. 그것도 꽤 자세히.]
'무당.'
지금은 산맥 속의 부대에 남아 있는 우리 부대의 조장.
박태준 병장의 닉네임이다.
녀석의 직업은 천문관.
뭐 직업명과 별개로.
하는 일이고 능력이고 그냥 무당이나 다름없어서 저 닉네임인 거다만.
'간만에 연락해 온 녀석이 한 말이 저거란 말이지?'
혹시나 싶어서 무슨 의미냐고 되물어 봤으나.
자기도 천문을 읽었을 뿐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태준이 녀석의 능력의 단점이 이거다.
자기가 말해 놓고도 자기가 무슨 얘기인지를 모른다는 거.
하지만....
'일단. 전해 준 내용만큼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겠지.'
원할 때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도 없고.
정보의 상세한 내용도 알 수 없지만.
얻게 된 정보 자체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즉.
'이 여자는. 우리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다는 거지.'
여기서 중요한 건 두 가지겠지.
첫째는 그 '꽤 자세히' 가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둘째는.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이 여자가, 우리에게 접근한 이유.'
우선.
첫 번째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난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차가 싫으시다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커피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정 마실 게 싫으시다면 간식거리는 어떠십니까? 먹을 건 많습니다. 제가 만든 간단한 쿠키 같은 것도 있고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그것도 아니면...."
그 후로도.
"그렇다면 이건...."
"아뇨, 정말 괜찮아요."
계속되는 권유.
그리고 거절.
같은 촌극을 몇 번이고 반복한 뒤.
나는 이번에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혹시 제가 만든 요리가 맛이 없을 것 같아서 그러십니까?"
어렸을 적.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친구네 어머니가 하도 이거저거 먹을 것을 주시는 터라, 배불러서 못 먹겠다 거절했더니.
'맛이 없어서 그러니?'
라고 진지하게 물어보시는지라, 어쩔 수 없이 몇 입을 더 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는 꽤 당황스러웠지만.
이 정도까지 권유하면 한 입은 먹어 주는 게 예의라는 건 그때 배웠거든.
그러나.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역시 사양할게요."
"...흠."
역시.
아마 이건 예의라든가, 체면이라든가 취향이라든가.
그런 부류의 거절이 아니겠지.
왜, 예의상 거절하는 것도 3번까지가 국룰이라고 하잖냐.
그 이상 거절한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거든.
"맛이 문제가 아니라면, 역시."
나는 준비 중이던 차를 한쪽으로 밀어낸 뒤.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말했다.
"요리를 경계하고 계시는 거군요."
"...네?"
움찔.
'오.'
시종일관 무표정이던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균열이 일었다.
이건 좀 통쾌한걸.
"그건...."
"위험한 세상이니. 독극물 같은 걸 경계하시는 거라고 한다면 현명한 생각입니다."
"아, 맞아요. 죄송한 얘기지만."
"하지만 아마 그 이유는 아닐 것 같고."
그야.
이런 세상에, 탈영병일지도 모르는 군인이다.
난생처음 보는 이들이 주는 음식.
위험하게 여기는 건 현명한 판단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이건.
"생판 모르는 남이 권한 음식이란 게 핵심이 아니라."
허리춤의 두 자루 식칼의 위치를 확인한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만든 요리라는 게 핵심이겠죠."
"...."
우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는 태준이 녀석의 말.
그 범위는 확실히 알겠다.
'이 여자.'
최소한.
내 요리 스킬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질문을 들은 여자는 머리를 굴리는 듯 침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 더 찔러 주기로 할까?
"뭐, 말씀 안 해 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태라서요."
"...알고 있다니, 뭘 말씀하시는 거죠?"
"그쪽이 저희에 대해 꽤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는."
나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굳게 감고 있는 두 눈동자를.
"그 눈 때문 아닙니까."
"...그것까지 어떻게!"
놀란 그녀가 눈을 뜨자.
하얗게 변색된 눈동자가 보였다.
누가 봐도 실명된 눈.
하지만.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셔도."
글쎄.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내 눈도 보통 눈은 아니라서 말이지.'
사실.
아까부터 너무 잘 보이고 있었다는 거다.
[특성 - 식재료 감별(강화)를 발동합니다.]
[종족 - 영장류(인간종)]
[신선도 - 상]
[직업 : 정령사]
[스탯 : 힘 14....]
[특성 : 정령안]
직업 정령사.
특성 정령안.
참나.
처음 민재 형이 마법사로 전직했다고 들었을 때도 참 놀랐었다만.
'이젠 하다 하다 정령이냐?'
57화 정령사 (2)
"그 눈 때문 아닙니까."
"그것까지 어떻게...!"
줄곧 무표정을 유지하던 태도가 무너졌다.
하얗게 실명된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여자.
그리고.
내 시야에는 여전히.
[식재료 감별]
[직업 : 정령사]
[특성 : 정령안]
그녀의 정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타인의 상태창을 엿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정령사에, 정령안이라.'
부대에는 마법사들이 아무렇지 않게 활동하고 있으니.
정령사도 뭐... 있어서 이상할 건 없다만.
실제로 이렇게 보게 되니 기분이 묘하긴 하다.
'우리 부대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한다면, 그게 가능한 이유는 당연히 저 정령이니 뭐니 하는 거밖에 없겠지.'
물론 정령으로 뭔가를 했겠지 하고 추측할 뿐.
정확히 어떻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만.
"도, 도대체 그걸 어떻게...."
"제가 알려 드려야 합니까?"
"윽."
내 지적에 놀라는 것을 보니.
정답을 맞히긴 한 모양이다.
어떻게 자신의 능력을 알아낸 건지 많이 궁금하겠지.
물론.
그렇다고 내 능력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해 줄 생각은 없다만.
"어쨌든, 그 눈으로 우리에 대해 꽤 자세히 알게 되신 것 같은데."
"...."
"아까부터 모르는 척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더군요. 저희 입장에서는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데도 모르는 척하면서 접근해오신 셈인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 팔짱을 낀 채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우리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음에도 그걸 숨기고 접근한 인물이다.
여기서 나오는 반응에 따라.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을 터.
'혹시라도 격한 반응이 나온다면.'
살짝 몸을 움직이며 허리춤의 감각을 확인했다.
허리춤에서 철그럭 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박씨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두 자루의 칼.
언제든 뽑아 들 준비는 되어 있었다.
"후우...."
그러나.
그 칼들을 뽑을 일은 애석하게도 없었다.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여인.
"이미 다 알고 계신 모양이네요."
"뭐, 대충은."
아니, 사실 잘 몰라요.
[식재료 감별]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능력치 정도.
거기에 태준이 녀석이 알려 준 정보로 대충 찔러 본 게 전부란 말이지.
그녀가 왜 우리에게 접근했는지, 뭐 그런 건 하나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으니, 대충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자포자기한 듯 입을 여는 그녀.
"악의를 가지고 접근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접근하려 했다는 것 자체는 부인하지 않으시는군요."
"...네."
꽤 순순하게 대답하는 모습.
칼을 쓸 일은 없겠다 싶어진 나는 자세를 편하게 바꿨다.
"설명해 보시죠."
"하아, 어차피 다 알고 계신 듯하니. 이 아이부터 소개해 드려야겠네요."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람....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쪽 손을 들어 올리는 여인.
그 손에 허공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아가자.
물컹...
그 손을 중심으로.
물방울 같은 무언가가 나타났다.
반투명한 형체라 잘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저게.
"물의 정령이에요. 이름은 방울이라고 지어 줬죠."
"정령...."
정령.
...안 어울리게 귀여운 이름은 일단 무시하고.
난 그 투명한 형체를 향해 시선을 향했다.
혹시 효과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싶었지만.
[식재료 감별]
[신선도 : 최상]
[종족 : 물의 정령(하급)]
[스킬 -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최하급 요리 비결 - 하급 정령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내 특성은 아무래도 정령도 문제없이 식재료로 보는 모양.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령에 대한 정보.
'흐음. 정령의 능력치는 이런 느낌이구나.'
처음 보는 존재.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부르르르르...
"응?"
투명한 물방울에 얕은 파도가 치며 떨리기 시작했다.
"이상하네요."
"무슨 일인 겁니까?"
"이 아이. 방울이가 당신을 무서워하고 있어요."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아무래도. 방금 그 시선이 문제인 거 같아요."
"시선이 문제라니. 보기만 해도 싫을 만큼 감수성이 예민하답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하나. 먹잇감을 바라보는 눈빛 같은 게 느껴져서 두려움에 떨었던 것 같아요."
"...아."
먹잇감.
그 말을 듣고 나니 찔리는 부분이 있긴 하다.
[특성 - 식재료 감별]
[스킬 - 요리사의 눈]
엄청나게.
먹잇감으로 보는 능력들이긴 하지.
그렇다는 건.
'...식재료 감별로 관찰당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는 건가?'
이름부터 정령이라더니.
마력이나 이능에 대해 굉장히 민감한 모양.
이건 내게는 꽤 중요한 정보였다.
특성이나 스킬을 사용한 관찰.
그걸 눈치챌 수 있는 존재들도 있다는 것이니.
"아무튼. 이 아이가 제가 계약한 정령이에요."
"흐음."
"그리고 제 특성이, 말씀하신 이 눈."
자기 눈을 톡톡 건드리는 그녀.
"보이시는 대로 아시겠지만, 실명된 상태예요."
"원래도 그러셨던 겁니까?"
"아뇨. 실명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계약의 대가 같은 거죠. 대신, 전 다른 눈을 얻었죠."
"다른 눈이라는 건."
"방울아."
그녀가 정령의 이름을 부르자.
투명한 물방울의 모습을 한 정령이 허공을 날았다.
그러고는 창문 밖으로 나가 버리는 녀석.
그와 동시에.
여인이 감았던 눈을 떴다.
하얗게 백화된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약간은 기괴한 느낌도 드는 풍경.
놀라운 것은 그다음.
그녀가 꺼낸 말이었다.
"이 주변에는 신기할 정도로 괴물이나 좀비가 없네요."
"무슨."
"아. 저기 주변을 돌아다니는 군인분들이 보이네요. 저분들이 정리한 덕분인가 봐요?"
지금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곳은 건물의 안쪽.
주변을 돌아다니는 괴물이니 병사니.
보일 턱이 없는 장소다.
그게 보일 만한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방금 창문 밖으로 뛰쳐나간 정령 정도.
즉.
"정령과 시야를 공유한다는 겁니까?"
"네. 한계도 많은 능력이지만요."
맙소사.
하늘을 날아서 이동할 수 있는 정령.
그런 정령과 시야를 공유한다고?
설명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것이 하나.
이거 완전.
'드론이잖아?'
저런 식으로 우리 부대의 모습도 관찰했다는 건가.
정령안이라는 특성명을 봤을 때 어느 정도 비슷한 능력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능력이다.
"방울이는 주변에 물이 흐르는 곳이 있다면 약간은 멀리서도 활동할 수 있어요. 덕분에 여러분들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구요."
그 말을 듣고 우리가 머물렀던 장소들을 되새겨 봤다.
'탄약대대 안에는 냇물이 흐르지. 아니, 관사에서 식수를 얻을 때부터인가?'
우리가 거점 삼은 장소는 모두 물이 흐르는 곳 근처였다.
우연이라기보단, 애초에 식수의 확보가 쉽다는 점에서 거점 삼기 좋은 조건이니까.
덕분에 우리를 발견할 수 있었단 거겠지.
"비교적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 군부대를 발견했을 때는 솔직히 놀랐어요."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보아하니 다른 인간을 공격하는 것 같지도 않고. 뭣보다 이곳을 탈환하고 나서는 무기도 충분해지셨잖아요?"
"그래서 우리에게 접촉하려 했다?"
"네. 몇 가지 거래를 제안해 볼 생각이었죠."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그녀.
"여러분들의 상황은 보고 있었으니, 짐짓 모르는 척 필요한 물건이나 정보를 제공하면서 좀 유리하게 거래를 이끌어 나가는, 그런 걸 계획했는데 말이죠."
"아하."
"...도대체 어떻게 아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물거품이 되어 버렸네요."
과연.
나름 이해되는 이유다.
악의를 가지고 접근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겠다.
조금 유리하게 거래를 진행하려 했다는 점은 괘씸하긴 하지만, 나쁜 건 아니니까.
그러나.
조금 의아한 게 한 가지.
"정상적인 부대란 걸 알았다면, 저라면 거래를 제안하기보다는 합류하는 쪽을 생각했을 것 같은데요."
"아. 그건...."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뭐하지만.
우리 부대는 아마 꽤 건실한 편에 속하겠지.
이미 점령전을 한 번 성공하기도 했고.
각성자도 많고.
자원도 당장은 나름 풍족하니.
그러나.
"그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어서."
"뭡니까?"
우리 부대에 문제가 있다니.
그건 주의 깊게 들어야 할 일.
그녀에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까 했는데.
"그쪽이요."
"예?"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
내가 문제라고?
"정확히는. 그쪽이 만든 요리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아."
"당신이 만든 요리를 먹은 사람들을 봤어요."
말을 하던 그녀는 두려운 듯 몸을 떨었다.
"병사들의 인격이 순식간에 변하는 모습도 몇 번.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하더군요."
"...."
"솔직히, 많이 무서운 광경이었어요."
[요리사의 특별소스]
내가 가진 스킬과 특성을 모두 통틀어 아마 가장 강력하고.
가장 위험하지 않을까 싶은 능력.
부대에서 활용할 때는 다 같이 버프의 효과를 받는다.
때문에, 대체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다.
버프가 끝난 뒤.
자신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전투 중의 흥분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기 때문.
'하지만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그야 많이 다르겠지.
멀쩡하던 인간들의 성격이 순식간에 개조되는 셈이니까.
'이 스킬은 이게 문제라니까.'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는 능력.
그 효과를 알게 된다면.
그야 껄끄럽게 느껴질 수밖에.
"그래서. 합류는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대신 거래를 트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했죠. 지켜본 바로는 식량 거래만 하지 않는다면 안전할 것 같았으니."
"...이해했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말을 마친 여자가 긴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어떻게 되냐니.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니. 제거하실 건가요?"
"제거라니."
"여기서 도망치는 건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할 테니. 어떻게 될지 정도는 알려 주실 수 있잖아요?"
제거라.
어떤 이유에서 저런 말을 한 것인지는 알겠다.
'남들이 알게 된다면 꺼릴 수밖에 없는 능력이니까.'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요리사의 특별소스]의 가치는 높아진다.
지금까지 특별소스에 대해 대략적으로라도 파악하고 있던 것은 이민재 병장 한 명.
거기에 이 여자가 추가된 셈이다.
이민재 병장과 달리 믿을 수 없는 인물.
치워 버릴 수 있다면.
그야 치워 두는 편이 편하긴 하겠지만.
"안 죽입니다."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 네?"
"안 죽인다고."
며칠 전에 본 탄약대대 대대장의 일지를 떠올렸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군인으로서 일지를 작성했더랬지.
일개 취사병이라곤 해도 그들보다 훨씬 상황이 좋던 나다.
군인으로서의 정신을 잃을 생각은 없다.
내 이익을 위해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인다든가.
그래야만 할 정도로 몰린 상황은 아니니까.
"뭐, 말씀하신 대로 능력을 말하고 다니면 곤란하니, 어느 정도 제약은 있어야겠지만요."
"저, 정말인가요?"
살려준다고 해도 못 믿네.
"제가 무슨 미치광이 살인마도 아니고. 그런 것 때문에 멀쩡한 사람을 죽일 놈으로 보입니까?"
"네? 아, 음. 그게."
도통 믿지를 않길래 한 말이었으나.
그 말에 묘하게 대답을 못 한 채 말꼬리를 흐리는 그녀.
...이거.
그럴 만한 놈으로 보인다는 거지?
"죄, 죄송해요. 그쪽이 만든 요리의 효과를 보고 좀 겁먹었던 게 큰 것 같네요."
"그거 때문에 그 정도로 겁을 먹습니까?"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인상도 좀 더럽... 날카로운 편이시고 그러다 보니. 제가 사람을 좀 오해한 것 같네요."
"...."
요즘 가끔 느끼는 거지만.
내 인상이 그렇게 더럽나?
약간 상처받았다.
"후우. 뭐, 괜찮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한테 접촉하려다가 운 나쁘게 약탈자에게 습격당했다. 설명은 그 정도겠죠?"
"그건, 글쎄요."
약간 어이가 없어진 내가 대화를 정리하려 했으나.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약탈자들에게 갑자기 공격당한 건 맞아요. 하지만 운이 나빠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무슨 의미입니까?"
"나름대로 방울이의 힘을 써서 주변을 열심히 확인했거든요. 저희가 향한 경로 근처에서 활동하는 약탈자는 없었어요."
음.
내가 모르는 얘기가 좀 있나 본데.
"저희 그룹을 습격한 그 약탈자들. 아는 얼굴도 몇 명 있었어요. 그쪽은 절 모르겠지만."
"그 정령안으로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나 보군요."
"네.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약탈자 그룹에 속해 있는 녀석들이에요. 하지만 원래는 좀 더 멀리서 활동하던 녀석들이죠."
"음."
"주변에서 활동하던 것도 아닌 약탈자들이 갑자기 공격해 오다니. 그것도 마치 우리가 어디로 향할지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건...."
잠깐 눈을 감고 고민하던 여자가 이내 말했다.
"배신당한 것 같네요."
"배신이라니. 누구한테?"
"정보를 공유하는 그룹들이 몇 곳 있어요. 언젠가 그들의 도움을 얻고 싶어서 방울이를 통해 알게 된 정보들로 슬쩍 은혜를 베풀어 뒀죠. 며칠 전에 군부대의 위치랑 그쪽으로 향할 거라는 얘기도 전했고요. 우리 그룹의 위치나 행선지를 알고 누설할 수 있는 이들은 그 그룹 중 하나일 테니."
이를 까드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약탈자 놈들한테 그룹원 몇 명이 끌려가기까지 했어요.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잘은 모르겠지만.
이들과 교류하던 다른 그룹들이 있고.
그중 하나가 이들을 배신하고 약탈자 측에 붙었다, 그런 거 같은데.
'흠.'
이거.
우리한테는 꽤 쓸 만한 얘기가 될 수도.
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그룹원들이 잡혀갔다고요?"
"네. 아까 마주쳤던 약탈자 녀석들이 말했잖아요? 자원은 넘겨줄 수 있으니 우리만 넘겨 달라고. 녀석들은 사람들을 잡아다 노예로 쓰거든요."
"노예라니."
평범한 사회에서 고작 몇 달이 지났다고.
노예 같은 단어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지.
"그럼 그룹원들을 되찾고 싶지 않으십니까? 배신자들한테는 복수도 하고 싶으실 거고."
"그건 그렇지만... 아마 힘들 거예요. 꽤 큰 세력을 이룬 약탈자들이라서, 저희 힘으로는 도저히-."
"힘이 모자란 거라면, 우리가 도와드릴 수 있는데."
"...?"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힘이 모자란 게 문제라면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조건이라니."
"아까. 제 요리가 무서워서 부대에 합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셨죠?"
"그...렇죠?"
"그 말 취소하고 저희 부대에 합류하시죠."
우리 부대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기반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제 규모를 키워 나가야 하겠지만, 문제는 군인들에 대한 인식이 나락에 가 있다는 것.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생존자들을 회유하기 힘들지만.
이런 거래라면 어떨까.
내 제안을 들은 여자는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야 엄청 찜찜하겠지.
부대에 합류하면 내가 만드는 요리를 먹게 될 테고.
그 효과로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하지만 내 입장에서 이 거래는 이득만이 넘친다.
일단 그녀를 부대 안에 들여놔야, 내 능력에 대해 떠벌리고 다니지 못하도록 관리할 수 있을 것이고.
이 근처에서 활동하는 약탈자들이라면 언젠가는 충돌해야 하는 적이니 미리 만난다 생각하면 그만.
거기에 또 한 가지.
'아까 본 정령안.'
생체....
아니, 정령체 드론이라니.
지금처럼 [예민한 청각]에 의존해 위험한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정령이 하늘에서 시야를 밝혀 준다면?
활동이 훨씬 쉬워질 터.
솔직히 탐난단 말이지.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망설이던 그녀가 결심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잡혀간 동료들을 구할 수 있다면... 좋아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오른손을 건네며 말했다.
"좀 늦은 것 같습니다만. 취사병 병장 신영준입니다."
"아. 정수아라고 해요."
"좋은 거래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군요."
짧은 악수와 자기소개를 마친 뒤.
"그 약탈자들의 위치만 알려 주시죠. 저와 부대원들이 향해서 동료분들을 구출해 올 테니."
"네? 아."
"뭐 문제 있습니까?"
"그게, 그 약탈자들 위치는 저도 잘...."
어?
이게 무슨 소리야.
"아까 꽤 멀리서 활동하는 그룹이라느니 하지 않았습니까? 위치를 알고 있던 게...."
"거대한 약탈자 그룹이라 유명하긴 한데, 활동하는 지역은 근거지까지는 몰라서요."
"그 방울이? 정령한테 물어보면 되는 것 아닙니까?"
"말씀드렸다시피 한계도 많은 능력이거든요."
그녀는 허공에 떠 있는 투명한 물방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아이는 흐르는 물이 있는 곳 근처에서만 활동할 수 있어요. 아마도 녀석들의 근거지는 물가 근처가 아닌 거죠."
"그래도 물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것도 아닐 텐데."
"그건 이 아이가 아니라 제 문제예요."
눈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는 수아.
"눈의 컨디션에 따라서 정령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도 달라져요."
"아."
"최근에는 이쪽 부대의 모습을 관찰하느라 정령안을 남발하다 보니, 오히려 예전보다 볼 수 있는 거리가 줄어들었죠."
흠.
그렇다면.
"그 눈의 컨디션이 엄청나게 좋아진다면. 약탈자들의 근거지를 찾는 것도 가능합니까?"
"네? 아마 가능하긴 할 거예요. 대충 활동하는 지역은 알고 있으니 그 근처를 뒤진다면... 하지만 무리예요. 정령안의 상태라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나아지고 그런 게 아니라."
"가능한 거라면 됐습니다. 방법은 따로 있으니."
"방법이라니."
"제 요리. 무서워서 못 먹겠다고 하셨죠?"
"...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의아해하는 그녀를 향해.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디, 요리를 먹어 보고도 그 말을 할 수 있을지. 한번 봅시다."
"...히끅."
58화 맹인을 눈뜨게 하시고 (1)
나와 부대원들은 정수아와 그룹원들을 데리고 부대로 복귀했다.
"신 병장님? 이분들은?"
"이번 원정에서 발견한 생존자들이다."
"오, 그럼 신병들이라고 보면 되는 겁니까?"
"아직은 아냐, 인마. 저 사람들 쉴 만한 장소나 안내해 줘."
마중 나온 병사들에게 그렇게 소개하고 안쪽으로 이동했다.
정수아가 의아한 듯 묻는다.
"저는 이 부대에 소속됐다고 보면 되는 건가요? 그쪽은 어떻게, 대장님이라고 부르면 되는 건지...."
"아직은 괜찮습니다. 부대에 합류하는 대신 잡혀간 그룹원들을 되찾고 복수까지 해 주는 것이었으니."
"아."
"조건이 이행되기 전까지는 편하게 부르십쇼."
그녀의 그룹원들은 병사에게 부탁해 생활관으로 안내한 뒤.
나는 그녀를 데리고 부대 안쪽으로 이동했다.
정확히는 식당 근처로.
탄약대대의 부대 식당은 부지가 넓은 만큼 여러 곳이 존재했으나, 우리도 탄약대대의 넓은 지역을 모두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내가 새롭게 자리 잡은 식당은 입구에서 꽤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
식량창고 쪽으로 향하자.
"어? 군단장님. 안녕하세요."
창고 앞에 서 있는 병사 한 명이 보였다.
눈에 익은 얼굴.
박씨 할아버지의 두 손녀 중 한 명이었다.
'언니 쪽이니, 얼음 마법사인가.'
얼음 마법사를 식량창고 앞에서 만났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오늘 냉동 담당인가 보네."
"네. 마침 지금 마법을 쓰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미안하게 됐네. 조금만 기다려 줘. 꺼내야 할 게 있어서."
전기는 끊긴 지 오래.
나름대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보이는 차마다 기름을 뽑아오고는 있다만.
'기름으로 돌리는 발전기의 효율은 최악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지.'
부대에서 전기로 돌아가던 일들의 대부분은 이렇게 마법사들이 담당을 맡아서 해 주고 있었다.
냉장고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
지금은 창고 중 하나를 냉동고로 개조해 매일같이 마법사들이 극저온을 유지해 주는 식으로 식량을 보관하고 있었다.
난 그 냉동고의 문을 열었다.
떨릴 정도로 추운 창고 안에는.
수많은 몬스터 고기가 쌓여 있었다.
"와아. 대단하네요."
"정령으로 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굳이 놀랄 거야...."
"방울이의 시야로 보는 거랑 실제로 보는 거랑은 조금 다르거든요. 창고 안쪽은 보기 힘들기도 하고. 그런데...."
창고 안쪽을 지켜보던 그녀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여길 왔다는 건,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거겠죠?"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하려는 일은 간단하다.
정수아의 능력, 정령안은 분명 강력한 특성이지만.
눈의 컨디션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
덕분에 컨디션 난조인 지금은 약탈자들의 본거지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그렇다면.
'눈에 좋은 걸 팍팍 먹여서, 눈이 좋아지면 되는 거지.'
어렸을 때의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비린내가 너무 심하다고 싫어했던 등 푸른 생선들.
먹기 싫다고 뻗대자 생선은 눈에 좋으니 커서 안경 끼고 다니기 싫으면 먹어야 한다던 어머니의 잔소리까지.
"괴물의 고기로 만든 요리라니...."
이번에도 당사자는 먹기 싫다고 뻗대고 있지만.
눈에 좋은 거니까 먹어 주셔야겠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잡은 괴물 중.
딱히 시력에 특화된 괴물은 없었다는 것.
'아무리 요리가 강력해도 결국은 재료의 영향이 9할 이상이야. 재료가 눈에 좋은 게 아니라면 아무리 잘 요리해 먹여도 큰 의미는 없겠지.'
얼마 전까지의 나였다면 이 상황에서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시력이 좋은 재료가 없으면 시력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내 능력의 큰 한계점 중 하나.
하지만....
지금이라면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냉동창고에 쌓여 있는 몬스터의 고기들.
내가 부상으로 누워 있는 동안 주변 정찰 나간 병사들이 처리한 듯 처음 보는 종류의 괴물도 많았다.
그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식재료 감별]을 발동했다.
[식재료 감별]
[사마자르]
[신선도 - 중(냉동)]
[특성 : 칼날 발톱, 외골격]
'이건 아니고.'
[호그란]
[신선도 - 하(냉동)]
[특성 : 불굴, 돌진 특화]
'이것도 아니야.'
쓸모없는 것들은 대충 넘기며 다음 괴물을 찾던 중.
[코틀니]
[신선도 - 상(냉동)]
[특성 : 위기감지, 십리안]
"찾았다."
발견한 괴물의 고기는 따로 빼놓은 뒤.
계속해서 다른 괴물들을 살폈다.
[특성 : 야행, 어둠 시야]
"이거랑."
[특성 : 붉은 분노, 적외선 감지]
"이것도 나쁘지 않나?"
괴물 중.
시력에 관련된 능력이 주 능력인 녀석은 없다.
하지만.
'질이 안 되면 양으로 승부하면 되잖아?'
그 괴물의 주 능력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식재료 감별]의 효과가 증가해 식재료의 정보를 보다 상세하게 볼 수 있게 된바.
뭐든 시력에 관련되어 보이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 따로 빼서 정리했다.
"음, 대충 이 정도인가. 수아 씨, 밥은 좀 많이 먹으십니까?"
"네? 그냥 평범한 편인 거 같은데."
"그럼 좀 분발하셔야겠네요."
그러다 보니.
쌓인 고기들의 양이 상당했다.
"많이 먹어 주셔야 할 것 같아서."
* * *
식당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이번에 내가 도전하려는 것은 다름 아닌.
'코스 요리.'
가져온 재료들은 기본적으로 시력에 특화된 재료들이 아닌바.
하나하나의 요리는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원하는 효과를 내기 힘들겠지.
하지만 여러 개의 재료로 하나의 코스를 만든다면?
그 재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효과.
즉.
내가 원하는 효과를 얻어 낼 수 있을 터.
'다른 취사병들한테 배웠던 레시피들. 총동원해야겠구만.'
결국 요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맛이 가장 중요하니까.
'요리의 종류 역시 하나여선 안 되겠지. 소스도 질리지 않도록 여러 맛을 내 줘야 할 테고. 아, 음식을 제공하는 순서도 고려해야겠네.'
부대에 있을 적에는 급양대에서 정해 준 메뉴를 그저 요리하기만 하면 됐지만.
코스 요리를 만들려고 하니.
내가 메뉴를 고안해야 한다는 것에 머리가 아파 왔다.
하지만 동시에.
'큭. 재밌네.'
어떤 요리를 해야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과정 자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그렇게 먹인 요리를 먹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하면.
즐겁기 그지없었다.
"리자드 그레이비를 끼얹은 로스트 코틀니입니다."
"...와아."
그렇게
고심 끝에 첫 번째 메뉴가 나갔다.
나름대로 간부식당에 있던 괜찮은 그릇들을 가져와 플레이팅까지 했다.
요리는 시각으로도 즐겨야 한다고 하니까.
그 모습을 본 정수아가 감탄하며 말했다.
"솔직히 괴물의 고기로 만드는 요리라고 무시했는데. 엄청 맛있어 보이네요. 뭐로 만든 요리라고요?"
"설명해도 되겠습니까? 안 듣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는데."
"...실언이었네요."
리자드는 우리 부대원들을 잡아먹은 괴물.
녀석의 고기만큼은 썩어날 정도로 넘치다 보니.
그 요리로 만든 육수를 따로 모은 뒤.
밀가루를 조금씩 섞어 농도를 진하게 하고, 소금과 후추 등으로 간을 해 만든 그레이비 소스.
거기에 조류처럼 생긴 괴물인 코틀니라는 괴물의 고기를 오븐에 구웠다.
독을 지닌 괴물이라 독낭을 제거하는 게 좀 힘들었지만, 맛은 나쁘지 않을 터.
정수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식기를 들었다.
내가 가진 요리 스킬을 알고 있는 여자.
내가 요리에 이상한 짓을 했을 수도 있다 생각해 긴장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녀에게도 마땅한 선택지는 없다.
결심한 듯 고기를 소스에 살짝 찍어 입에 넣는 수아.
그리고.
반응은 예상한 대로.
"마, 맛있어."
"당연하죠. 누가 만든 건데."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로 맛있다니. 취사병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런 건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당황한 듯 말을 흐리는 정수아.
내 요리를 그렇게 무서워하더니.
약간의 감상평을 남긴 그녀는 감탄하며 바쁘게 식기를 놀리기 시작했다.
'내 요리를 먹고도 싫어할 수 있을지 보자고 했지.'
뭐, 나 자신과의 내기였던 셈이지만.
승자는 내 쪽인 모양.
그녀가 식사를 재개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
주방으로 돌아간 나는 다음 요리의 준비에 착수했다.
"은 물방울 젤리를 얹은 숄더 로치 구이입니다."
"느끼한 맛을 젤리의 상큼함이 잡아 주고 있어...!"
지난번에 마트에서 확보한 슬라임 같은 괴물들.
그 젤리에 잼류를 섞어 상큼하게 만든 뒤 괴물의 고기와 같이 낸 요리다.
...고기의 원재료는 바퀴벌레를 닮은 괴물이었지만.
그런 건 먹는 사람이 알 필요는 없는 일이고.
"풀드 고블린 토스타다입니다."
"겉은 바삭하고 속에 든 고기는 촉촉해."
마트에서 얻은 토티야에 고블린의 고기를 푹 삶아 찢어 넣은 뒤 [혼재된 마력의 기름]에 튀긴 요리다.
그 외에도.
"잘게 간 애쉬코어의 고기와 아라크론 계란으로 만든 소보로 파스타...."
"이 계란. 무슨 계란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고소하네요!"
거미 알이다.
"리자드 라구 소스를 부은 미노스 안심 스테이크...."
"무슨 육즙이...!"
다른 괴물의 사체를 뜯어먹고 있던 괴물의 육즙이다.
뭐 어쨌든.
맛만 좋으면 된 거 아니겠어!
'그나저나. 묘하게 반응이 좋네, 이 사람.'
좀 먹어 본 놈인가.
아무튼 요리해 주는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손님이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요리들.
그 하나하나가 모두 메인 요리였다.
"코스 요리라는 게 이렇게 메인만 나와도 되는 거예요?"
"음. 일반적인 레스토랑이라면 코스트를 생각해서라도 못 할 짓이긴 하죠.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사이드 요리용 재료가 모자라다 보니."
뭣보다 부족한 것이 채소나 버섯 등의 신선 재료들.
우리한테는 없는 게 너무 많다 보니.
어쩌다 보니 메인으로만 밀어붙이게 되었다는 느낌.
'그래도 맛의 배합에는 신경 썼다. 메인 요리밖에 없다는 건 오히려 강점이면 강점이지, 절하될 요소는 아니거든.'
그렇게.
모든 코스 요리의 시식이 끝난 뒤.
"더, 더는 못 먹어요."
"디저트는 아이스크림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공된 디저트는 내가 만든 간단한 아이스크림.
그걸 먹는 정수아의 모습을 보며.
난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허공을 바라보았다.
'코스 요리에 재료들이 가진 공통점은 하나. 내가 의도한 대로라면.'
슬슬.
익숙한 소리가 들려와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한 순간.
띠링.
[코스 요리가 완성되었습니다.]
[A - 리자드 그레이비 로스트 코틀니]
[B - 은물방울 젤리 숄더 로치 구이]
[C - ....]
.
.
.
[요리에 담긴 마력들에 담긴 공통된 성질이 발견되었습니다.]
[테마가 존재하는 코스 요리를 완성하였습니다.]
[인간종 최초로 '코스 요리'를 완성하였습니다.]
[앞서가는 이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칭호 - '코스 요리사'를 획득합니다]
[칭호 - 코스 요리사]
[하나의 테마로 정립된 코스 요리를 완성할 경우 효과가 2배로 적용됩니다.]
의도한 대로.
코스 요리를 완성하자 떠오르는 메시지.
이걸 시도한 요리사 각성자는 나뿐이었는지 칭호까지 얻었다.
만족스러운 효과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그다음.
[공통된 마력 성질 - 눈]
[신영준의 자작 코스 요리 - '눈동자']
[시식자의 시력이 매우 크게 회복됩니다.]
[시야에 관련된 모든 능력에 아주 큰 보너스가 제공됩니다!]
"됐다!"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의도한 대로의 효과.
정수아의 정령안은 눈의 컨디션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고 했으니.
이 정도면 정령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도 훨씬 더 길어졌겠지.
"요리의 효과가 적용됐을 테니, 이제 그 눈으로 약탈자 놈들의 근거지를 찾... 어?"
이 코스 요리를 기획한 것은 그녀의 능력으로 약탈자들의 기지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녀에게 말을 걸려던 찰나.
뭔가.
달라진 모습이 보였다.
"저, 저기요."
"...."
"이, 이거 설마. 그 쪽 분이 한 짓인가요?"
그 달라진 점을 의식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정수아가 당황하며 나를 보고 말했다.
그녀의 손은.
시력을 잃고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던 자신의 양 눈으로 가 있었다.
"앞이... 앞이 멀쩡하게 보여요."
그래.
달라진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두 눈을 감고 있던 수아.
그 안에는 새하얗게 변한 눈동자만이 기괴하게 남아 있었다.
묘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던 그 눈동자.
'...는 온데간데없군.'
지금 그곳엔.
바닷물처럼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테마 - 눈]
[시식자의 시력이 매우 크게 회복됩니다.]
아니, 매우 크게 회복된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정도란 게 있지.
'그게 왜 멀쩡하게 보이냐.'
맹인의 눈을 뜨게 만들 정도라니.
그런 말은 없었잖아.
59화 맹인을 눈뜨게 하시고 (2)
새하얗게 빛을 잃었던 눈동자.
덕분에 묘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던 그 눈은.
지금은 묘한 푸른빛 눈동자로 변해 있었다.
자신의 눈을 매만지던 수아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평생 맹인으로 살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
"나쁘지 않은 거래긴 했죠. 시력을 대가로 얻은 특성이긴 해도 그만큼 강력한 능력이었으니까요. 각성자가 된 후로는 감각도 예민해져서 어느 정도 생활에 문제도 없었고요. 하지만...."
눈물 한 방울.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지만, 자다 일어났을 때 앞이 보이지 않으면 무서웠어요.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 생각하면 몸이 떨렸구요...."
"그거야 뭐 이해합니다."
"이해 못 하실 거예요. 한번 잃었던 걸 되찾은 기분은...."
정수아가 눈물을 닦아 내고 말한다.
"이거, 의도하신 건가요?"
"의도했다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눈에 도움이 되는 쪽의 요리를 하는 건 노린 게 맞는데.
...없어진 시력을 되돌린 건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라.
그런 내 대답을 어떻게 이해한 걸까.
"맹인의 눈을 뜨게 하다니. 이런 건 성경에서나 나오던...."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흠칫하며 나를 보는 정수아.
푸른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보기에는 꽤 좋지만.
저것도 일반적인 눈의 색은 아니란 말이지.
'정령안의 영향인 건가.'
아.
그러고 보니.
"기적...."
"수아 씨."
"기적을 일으... 아. 네?"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인지.
여전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
시력을 되찾고 감상에 빠진 것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확인해 둬야 하는 일이 있었다.
"계약의 대가로 시력을 잃고 정령안을 얻었다. 그렇게 말씀하셨잖습니까?"
"네. 그랬죠."
"그럼 지금. 정령안은 제대로 남아 있는 거 맞습니까?"
시력을 대가로 얻은 능력.
그렇다면 시력이 돌아온 지금.
혹시나.
정령안도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큰일이다.
정령 드론으로 꿀 빨 계획이 초장부터 무너지는 셈.
초조한 심정으로 묻자.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아."
"방울아."
긴장한 나와는 달리.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드는 그녀.
그 손에 전에 보았던 물방울이 다시금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방울이와의 계약도 그대로고. 정령안도 멀쩡한 것 같아요."
"그건 다행이군요."
진짜로 식겁했잖냐.
"말 나온 김에 주변이나 한번 둘러볼까요?"
그녀의 말과 함께 식당 밖으로 나가는 정령.
그녀의 시선이 이전처럼 허공을 향했다.
자세는 비슷하지만.
하얗게 혼탁해진 눈동자가 푸른 바다 빛으로 변한 탓일까.
이전에는 다소 기괴하게 느껴졌다면.
지금은 신비로운 분위기만 남아 있었다.
"대단하네요."
허공을 바라보던 그녀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길래 그렇습니까?"
"여기서부터 군내의 모습이 보일 정도예요. 이 정도로 멀리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건 정말...."
충격이 큰 것인지 말꼬리를 흐리는 그녀.
내 입장에서는 그저 호재였다.
'됐다.'
조금 냉정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내 목적은 시력 회복이 아닌 정령안의 강화.
그녀의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것보다도 특성이 강화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었으니.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잠시 감상에 빠진 듯 말을 잃었던 그녀가 눈물을 슥슥 닦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제 요리. 이제 좀 믿고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의심한 건 정말 죄송해요. 다른 그룹원들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저만은 당신한테 받은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은혜라니, 거창하게.
내게 나쁜 일은 아니다만.
"그럼. 일단 거래 내용부터 이행하죠."
"맞아.... 기적을 베풀어 주셨으니, 전력을 다해 갚아야... 네?"
"약탈자들을 토벌하고, 잡혀간 그룹원들을 구해 준다. 그 대가로 그쪽은 우리 부대에 합류한다. 그런 거래였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죄송하다는 얼굴로 말하는 그녀.
"잡혀간 동료들한테는 못 할 말이긴 하지만. 이만한 은혜를 입었는걸요. 솔직히 말해, 그냥 합류하라고 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러면 안 되죠. 약속한 게 있는데."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
...같은 건 사실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고.
"게다가 이 거래, 딱히 당신들을 위한 부분만 있는 건 아니라서."
"네?"
"아무튼. 정령안의 성능도 올라갔다고 하셨으니, 지금이라면 약탈자 녀석들의 근거지는 파악 가능한 겁니까?"
"녀석들이 활동하던 지역은 알고 있으니. 그 주변 물가에서부터 탐색을 시작한다면 아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반쯤 명령조가 돼 버렸지만.
정수아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약탈자 토벌이 은인분께도 도움이 된다. 그 얘기겠죠?"
"뭐 그런 셈입니다."
"그렇다면... 알겠어요. 맡겨만 주세요!"
기운차게 대답하는 모습.
뭐라고 해야 하나.
동료들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은 중요하지 않고.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한데.
'뭐 나쁘지 않나.'
* * *
"시력이 되살아났다...."
정수아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뒤.
나는 부대의 일을 상의하기도 할 겸.
있었던 일들을 민재 형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민재 형이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건 내 추측이긴 하다만."
"음?"
"아마 그 계약의 대가라는 거. 시력이 아니었던 게 아닐까."
시력이 아니라니.
"정령이라고 하면. 명확한 언어로 대화하는 이미지는 없거든."
"그러면?"
"시력이 아니라, 예를 들어 눈에 있는 마력이라든지. 그런 류의 계약이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일반인들은 마력이랄 게 거의 없으니."
"그 얼마 없는 마력을 계약 조건으로 지불하고 실명했다?"
"그리고 눈에 관련된 좋은 마력만 모인 음식을 먹자 다시 시력이 돌아왔다. 뭐 그런 게 아닐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하며 어깨를 으쓱하는 민재 형.
하지만.
나는 이 추측이 꽤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힐러 계열 각성자면 또 몰라.'
아예 실명된 눈을 되살린다던가.
요리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름 요리 실력에 자신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은 아니거든.
"아무튼. 우리한테는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 약탈자의 근거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됐고."
"그것도 그렇지만... 아까 잠깐 그 여자랑 얘기를 나눠 봤거든."
"정수아랑?"
"그래. 그 여자. 자기 눈에 떠진 것에 대해 상당히 신기한 의미부여를 하는 것 같더군. 뭐. 그만큼 대단한 일이었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만."
"의미부여라니?"
"뭐야, 넌 눈치 못 챘냐?"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것 정도는 느꼈다만.
의미부여라 할 만한 게 있었나? 싶다.
"뭐, 몰라도 상관은 없나? 어쨌든, 이미 그녀는 너에게 큰 은혜를 느끼고 있어. 그렇다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냐 싶다만."
"약탈자 토벌을 말하는 거지?"
"그래. 굳이 거래를 이행하지 않아도 그 여자는 부대에 합류할 의지가 넘치는 것 같던데."
민재 형이 말하려는 바는 알겠다만.
내 생각은 반대였다.
"약탈자 토벌은 빠르면 빠를수록 나아."
"왜지?"
"어차피 언젠가 부딪힐 녀석들이니까."
지상에 내려와서 겪어 본바.
우리 부대는 아마 인간 중에서는 꽤 강한 축.
아니.
엄청나게 강한 축에 들 것이다.
'하지만, 이 차이는 산맥에서 빠른 성장을 이뤘기에 가능한 거였지.'
지상에 내려온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다른 이들도 각성한 이상 세력전을 의식하고 있을 거야. 조금이라도 안주하는 순간 다른 이들과의 차이는 좁혀져 갈 거고."
"그건 그럴 수도 있겠다만."
"그럴 바에야. 우리가 확실히 앞서가고 있는 지금 싸우는 게 낫지. 부대원들도 이번 기회에 인간과 싸우는 경험을 쌓아야 하고."
"인간과 싸우는 경험이라."
민재 형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약탈자들은 전부 죽이면 되는 건가?"
"아니. 가급적 생포하는 쪽이지."
"생포라. 너무 안일한 생각 아닌가? 괜히 포로로 잡아 봤자 식량만 축낼 뿐이다. 부대에서도 너는 살인은 좋지 않다고 말했지만, 여기까지 와서도 불살주의를 지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만."
이 형.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살인은 나쁘다던가. 내가 그런 이유로 살려 두자고 한 것 같아?"
"아니란 거냐?"
"설마. 나 그 정도로 착한 놈은 아니야."
"그러면 약탈자 놈들을 생포해서 어디에... 아."
그제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민재 형.
"너. '기수 열외'를 늘릴 셈인 거군."
"정답."
기수 열외.
말 그대로 기수에서 제외된 병사를 뜻하는 말.
일반적인 부대에서는 계급 취급을 안 해주는 병사를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범죄자들.'
과거.
이상아 조장의 그룹에 섞여 산맥의 부대를 찾아왔던 5인의 범죄자들.
녀석들은 내 요리에 굴복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그 결과.
기수와 상관없이 막내 취급을 받으며 활동하게 된 녀석들.
과거야 어쨌든 간에.
그 녀석들.
지금은 꽤 훌륭한 전력이거든.
"약탈자들은 기본적으로 범죄자들이고, 정신도 썩어 있겠지만. 그거야 뭐, 갱생시키면 되는 거 아니겠어?"
"...."
정상적인 갱생 방법은 아니긴 하다만.
효과는 확실하다.
'평범한 사람한테는 나도 굳이 [특별소스]를 쓰고 싶지 않지만 말이지.'
광일이 같은 경우가 대표적.
처음에는 그냥 겁 많은 성격을 조금 풀어 줄 생각이었다만.
아예 광전사가 돼 버린 녀석을 볼 때면.
솔직히, 가슴 한쪽이 찔릴 때도 많다.
하지만.
"약탈자 놈들은 별개지."
다른 인간들을 습격하고.
심지어는 노예로까지 다루던 놈들.
그딴 녀석들의 인격까지 신경 써 준다?
내가 왜?
"과연.... 네 말대로 된다면, 부대원을 순식간에 늘릴 수 있겠군."
"그런 거지."
"...좋은 생각이다. 솔직히 네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처음부터 여기까지 계산했던 거냐?"
감탄한 듯 나를 바라보는 민재 형.
괜히 낯부끄러워진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노린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아다리가 잘 맞은 거지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하길 바란다면야. 그런 거로 치지."
전혀 그런 거로 치겠다는 말투가 아닌데.
* * *
그로부터 며칠 뒤.
"지금부터 약탈자 그룹을 토벌한다."
나는 병사들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정수아가 정령안을 통해 조사한 결과.
약탈자 그룹은 빌라촌 한 곳을 통째로 점거했다고 한다.
그곳에 펜스를 두르고 벽을 세워 해당 지역을 요새화했다고.
그 안에서 노예들을 통해 농사를 짓는 것은 물론.
각성자가 포함된 전투조는 안전한 거점을 중심으로 외부를 돌아다니며 약탈을 자행하는 것.
딱히 칭찬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정수아의 얘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지금 시점에 이 정도 세력을 만들다니.'
근방에서 활동하는 약탈자 중 가장 큰 세력이라고 했던가?
이 녀석들.
확실히 무시할 만한 단체는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언젠가 영역을 넓히다 보면 부딪혔어야 할 녀석들.
지금 부딪히게 된 게 오히려 우리에겐 이득이겠지.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번 전투의 적들은 괴물이 아니다."
병사들의 표정이 조금씩 변화했다.
몇몇 병사들은 다소 얼굴이 굳었을지언정.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저런 녀석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문제는 다른 쪽.
얼굴에 떠오른 일말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병사들이 있었다.
'괴물을 상대로 싸우는 데는 다들 익숙해졌다만.'
인간에게 칼을 들이민다는 것.
그 부분에는 망설임이 남아 있는 녀석들도 있다는 거다.
'오히려 잘된 거지.'
이번 기회에.
부대원들에게 인간과의 전투를 경험시킨다.
저 탈영병 녀석들과의 조우를 제외하면 인간과의 전투를 겪을 기회가 없었으니까.
[요리사의 특별소스]를 통해 일시적으로 정신을 개조할 수는 있지만.
소스를 통한 효과는 일시적이지만, 여파는 오래 간다.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볼 수도 있는 일.
그럴 바에야.
직접 부딪혀서 경험시키는 게 낫다는 판단.
"그럼... 음. 딱히 할 말은 없네."
"풉."
"신 병장님. 뭡니까 그게."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걸 내가 해본 적이 있어야지. 다들 준비된 것 같으니. 가자."
영 기운 빠지는 출전식이라 미안하지만.
그로 인해 일어난 현상은 꽤 웅장했다.
"출진!"
"군단의 승리를 위하여!"
다종다양한 무기를 든 군인들이
하나 된 발걸음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60화 이상식욕자 (1)
"형님들! 급하게 보고 드릴 게...!"
"새끼, 시끄럽게"
"노크는 하고 들어와라~"
강원도 한구석에 있는 작은 빌라촌.
그곳의 모습은 과거와는 꽤 달라져 있었다.
주변은 낡은 펜스와 잡동사니들로 만든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벽 외곽에는 작은 초소들도 세워져 있어, 평범한 마을의 풍경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굳이 그 모습을 표현하자면 요새.
이 일대에서 활동하는 약탈자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이들이 자리 잡은 장소였다.
그 중심의 건물.
간부급들만 거주하는 장소에 말단 약탈자가 보고할 게 있다며 쳐들어온 것.
"무슨 일인데 그래?"
"큰형님 주무신다. 별거 아니면. 알지?"
"아,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네. 어디 말해 봐."
간부들은 전원이 각성자 중에서도 고레벨을 이룬 자들.
말단으로 들어온 약탈자는 벌벌 떨며 보고를 시작했다.
"그게. 이번에 일 나간 3번 전투조가 복귀했습니다."
"오."
"뭐야, 좋은 소식이네?"
"3조가 나간 일이라면. 최근에 합류해 온 녀석들이 알려 준 정보 말하는 거지?"
얼마 전.
생존자 그룹 중 하나가 그들에게 합류를 원한다는 의사를 표시해 왔다.
사실 그런 경우는 드물지도 않다.
약탈자들의 삶은 평범한 생존자들에 비하면 풍족하기 그지없었으니.
다만 그들도 공짜로 동료로 받아줄 수는 없는 일.
쓸 만한 것을 넘긴다면 받아 주겠다고 거래를 제시했었다.
그 거래가 잘 성사되지 않아 이야기가 길어지던 와중.
그쪽에서 드디어 꽤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해 왔다.
'큭큭. 그렇다고 해도, 설마 교류하던 그룹을 팔아넘기는 자식이 나올 줄이야.'
그들이 넘긴 대가는 정보.
그들과 교류하던 다른 생존자 그룹들의 위치.
그리고 그중 한 그룹은 어디로 향할 것이라는 이동 경로까지 제공했다.
그 그룹의 리더는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인지 몰라도 온갖 다양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잡아서 노예로 삼는다면 큰 도움이 될 거라는 말도 함께.
그들에게 노예 사업은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
거래는 성사되었고.
통 크게 전투조 하나를 임무에 배정했다.
그런데.
"그게, 작전은 실패, 생존자 그룹의 생포는커녕, 물자도 약탈하지 못했다고...."
"...이 병신같은 새끼들이."
전투조는 각성자를 포함한 정예로만 이루어져 있다.
실패할 일은 없다고 생각해서 일을 맡긴 것인데.
그걸 실패했다니.
간부들이 분노하려던 찰나.
"그게, 상대가 군인... 탈영병들이었답니다."
"탈영병?"
그 단어에.
찬물이 쏟아진 듯 분노가 가라앉았다.
"쯧. 탈영병 놈들이 상대라면 어쩔 수 없나."
"전투조라고 해도 총은 못 이기지. 당장은."
"탈영병들이라면, 저기 멀리 있던 부대 근처에서 활동하던 녀석들이 이 근처까지 흘러들어 왔나 보군."
아직 각성자들의 수준이 올라오지 않은 현재.
총을 든 탈영병들은 일종의 자연재해.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거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려는가 했으나.
"총. 갖고 싶다."
굵은 목소리 하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큰형님?"
"더 주무시지 않으시고 왜...."
건물 안쪽에서.
무언가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큰형님이라고 불린 존재.
그 사내는, 평범한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3m는 넘을 것 같은 키.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살덩이.
전신에는 비정상적으로 불거진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약탈자 그룹의 대장.
광진.
그의 모습을 본 간부들은 생각했다.
'제기랄, 더 자고 있지.'
'왜 기어 나온 거야.'
이들 그룹이 빌라촌 하나를 점거하고 가장 강한 약탈자 그룹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이유.
모두 이 남자의 힘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아군이 봐도 기괴한 그 모습.
그를 따르는 간부들 역시, 보면서 소름이 끼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처음부터 저런 모습은 아니었다.
본래는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어쩌다 각성을 하게 된 뒤.
각성했음에도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던 광진은, 결국.
'평범한 사람이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식량들에 눈을 돌렸지.'
그 결과가, 바로 저 모습.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점점 인간을 벗어나고 있었다.
"갖고 싶다는 건. 그 탈영병들을 상대로 약탈해서, 총을 가져오자. 그런 말씀이십니까."
"그래."
간부들이 할 말을 잃고 다들 우물쭈물할 때.
보고하기 위해 왔던 말단 약탈자가 말했다.
"아, 아무리 큰형님이라고 해도, 총을 가진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
"뭐?"
"이 미친 새끼...!"
그 대답을 들은 간부들이 경악했다.
"어, 예? 왜들 그러십...."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눈치챈 말단은 그제서야 눈치를 살폈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너. 말대꾸?"
"크, 큰형님. 그게 아니라...!"
"사형."
거대한 살덩어리가 말단의 몸을 덮쳤다.
콰직...!
간부들은 그 광경에서 눈을 돌렸다.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는 약탈자들이지만.
그들 역시, 얼마 전까진 평범한 삶을 살던 이들.
보기 힘든 광경이란 건 있는 법이니.
"총. 갖고 싶다. 가져와."
"아, 알겠습니다!"
"큰 형님이 바라시는 대로."
라고 대답은 했지만.
간부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전면전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이 근처까지 유인한다면 가능할지도."
"그걸 누가 모르냐. 유인을 어떻게 하냐가 문제지."
"아예 합류를 권하는 건...."
그러나.
그 고민이 쓸모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큰일입니다!"
"이번엔 또 뭐야."
"정찰조 말로는, 군인들이 근처에 접근했다고...!"
"뭐?"
어떻게 유인해야 하나 고민하던 탈영병들.
그들이, 직접 약탈자들을 찾아온 것.
이 빌라촌은 요새화가 완료된 상태.
거기에, 시가전은 군인들에게 지옥이라 불리지 않던가.
그렇다면.
"우리를 어지간히 얕봤나 본데."
"큭큭. 이렇게 나온다면 오히려 좋지."
사냥의 시간이 찾아왔다.
* * *
"포위조는 배치 완료됐습니다."
이번 전투는 두 팀으로 나뉘어서 진행하기로 결정됐다.
공격조.
그리고 포위조.
공격조의 약탈자 토벌이 시작되면 도망치기 시작하는 녀석들이 있을 터.
그들을 포획하기 위한 포위조를 따로 구성한 것.
포위조의 배치가 완료된 것을 확인한 뒤.
우리 공격조도 빌라촌을 향해 접근을 개시했다.
"요새를 만들어 놨다더니."
"대단하긴 하군요."
펜스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철판때기들.
이런 넓은 지역에 어떻게 저런 벽을 만들 수 있었을지 궁금해질 정도.
좀 미숙함이 엿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튼튼해 보였다.
그때.
피앙!
어딘가에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 병장님!"
카앙!
그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전광일 상병.
녀석의 글러브가 내게 날아오던 투사체를 붙잡았다.
"뭐였던 거야?"
"석궁입니다."
자기 손을 펴서 내게 보여 주는 광일이.
거기에는 부러진 석궁의 볼트 하나가 들어 있었다.
"평범한 위력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각성자로군."
세상에.
광일이 녀석이 아니었다면 영문도 모르고 죽을 뻔했네.
석궁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요새 외곽에 초소처럼 만들어진 가건물 몇 곳이 보였다.
그중 한 곳에서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는 남자의 모습도.
그 남자의 얼굴을 본 정수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경수 씨...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아는 사람입니까?"
"제가 말씀드렸던, 교류하던 그룹 중 하나의 리더였던 사람이에요. 석궁수로 각성했죠. 솔직히, 배신자가 있다면 저 사람이 아닐까 싶긴 했는데. 예상이 적중했나 보네요."
즉.
정수아가 복수하고 싶어 했던 대상이 저 남자라는 것.
몸을 일으킨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씨익.
거기서 보면 어쩔 거냐는 듯.
비웃음을 치더니 몸을 돌려 도망치는 남자.
"웃어?"
그건 좀.
건방지네.
"광일아."
"예, 병장 전광일."
"저놈. 잡아 와."
"충성 충성!!!"
석궁을 쏜 위치는 상당히 멀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전속력으로 도주를 개시했으니.
보통이라면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쿵!
"잡아 왔습니다!"
"히, 히에에엑."
그것도 보통의 경우지.
이미 내 요리와 김 중위의 버프까지 덕지덕지 발라진 상태.
최근에 무기까지 얻어 능력치가 더 올라간 전광일 상병.
보통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는 수준이란 거다.
새끼 고양이처럼 목덜미를 붙잡힌 채 잡혀 온 남자.
그의 앞에 선 정수아가 말했다.
"경수 씨. 오랜만이네요."
"누... 누구...?"
"배신까지 해 놓고, 벌써 제 얼굴을 잊어버렸나 봐요?"
"수, 수아 누님입니까? 제기랄...."
시력을 회복하고 난 뒤 꽤 분위기가 달라진 탓일까.
처음엔 정수아를 알아보지 못했던 남자.
그가 침음성을 흘렸다.
"이 사람은 제가 데려가도 될까요?"
"계약 내용이 그런 거였으니 마음대로. 나중에 돌려만 주십쇼."
"고마워요."
"아, 안 돼...!"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녀석을 뒤로한 채.
시선을 돌리고 요새 쪽을 바라보았다.
외부 초소에 있던 녀석들은 금방 정리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저 요새.'
벽이라고는 하나, 꽤 단단해 보인다.
직접 부수거나 넘으려고 하다간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적의 공격에 노출되겠지.
하지만 뭐.
이미 요새가 있던 것을 알고 온바.
당연히 대비책도 준비되어 있지.
* * *
"외부 경비조 전멸했습니다!"
"뭐?"
"총소리도 없었는데."
"그게, 탈영병들 사이에 각성자도 있었나 봅니다."
외부 경비조는 요새 밖에서 경비를 서는 이들.
최근에 합류해 온 이들에게나 맡기는 위험한 일.
사실상 버리는 전력으로 보는 이들이긴 했다.
하지만.
'벌써 전멸이라니?'
그냥 총을 들었을 뿐인 일반인들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간부들은 큰 위협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어차피 요새 안쪽으로 들어오는 건 무리니까."
"큰형님은 총기를 얻길 바라고 계신다. 일단 요새를 지키면서 버티고 있다가, 지친 녀석들이 후퇴할 때 전투조를 보내면 되겠지."
적들의 규모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래 봐야 인근에서 가장 큰 세력을 이룬 그들보다 앞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요새화된 빌라촌.
게다가 그 안에는 그들의 대장.
광진이 있다.
빌라촌의 괴물들을 모조리 집어삼킨, 괴물보다도 괴물 같은 존재가.
"무슨 자신을 가지고 우릴 공격한 건지. 큭큭."
그렇게 낄낄대던 약탈자들이었으나.
그 자신감이 무엇이었는지는.
금방 알게 되었다.
"뭐야 저건?"
빌라촌으로 들어오는 도로.
그곳을 타고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공성추?"
공성추처럼 생긴 거대한 뿔이 달려 있는 차량.
그 차량이.
요새의 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가 싶더니.
콰아아아아앙!!!
그들이 한 달 이상을 고생해서 만들어 낸 요새의 외벽을.
뿔로 들이받아 버렸다.
* * *
우르르....
요새의 외벽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무너져 내렸다.
"작업 완료했습니다!"
요새를 박살 낸 건 공병들이 개조한 전투차량 중 하나.
요새가 있다는 것을 들은 공병들이 뚝딱뚝딱하더니.
불과 며칠 만에 만들어 낸 물건이다.
공성차량이 요새에 접근하는 것을 본 적들도 나름 공성차량에 공격을 가해 왔으나.
맥의 마력으로 강화된 자재로 만든 차량.
어지간한 공격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은 채 요새를 박살 내 버린 것.
"벽이 무너졌다!"
"제, 제기랄, 공성추라니."
"무슨 중세시대도 아니고, 저딴 게 왜 있어...!"
벽이 무너지자.
안쪽에서 들려오는 당황한 목소리.
그와 함께 무너진 벽 주변으로 몰려드는 인간들이 보였다.
"...."
"흠."
무너진 요새의 벽을 사이에 두고.
우리 병사들과 약탈자들이 대치했다.
나름대로 각자 손에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는 녀석들.
하지만.
조잡하게 만들어진 수제 석궁과 활.
포인트 상점에서 파는 최저가 싸구려 철검과 갑옷.
그에 비해.
"저 녀석들. 탈영병들이라 하지 않았나?"
"당연히 총을 들고 올 줄 알았는데. 왜 저런 무기들을."
"우리가 가진 장비랑은 뭔가. 급이 다른 것 같은데...."
'아라크론'의 앞발로 만들어진 무기.
'리자드'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군복.
김 중위의 지휘와 내 요리를 통한 버프까지.
거기에.
저쪽의 각성자는 많아 봐야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아 보였다.
즉.
"범죄자들을 진압해라!"
"군단의 승리를 위하여!!!"
전투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한 일.
"커헉...!"
"제기랄, 상대가 안 되잖아...!"
속수무책으로 쓸려 나가는 약탈자들.
개중에는 빌라의 옥상 같은 곳에서 석궁을 들고 우리를 겨냥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러나.
쿠웅...!
"큭큭, 거기냐!"
"끼요오오오옷!"
전사계 각성자 중 몇 명이 괴성과 함께 서전트 점프를 하는가 싶더니.
콰직!
단 한 번의 점프로 건물의 2층과 3층 사이에 도달하고.
그 벽면에 무기를 박아 넣었다.
그리고는.
파바바바바박!
"히, 히이익...!"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건물의 외벽에 칼을 박아 가며 엄청난 속도로 기어오르고.
순식간에 빌라의 옥상으로 몸을 던져, 약탈자들을 덮쳤다.
'...저 녀석들. 저런 짓도 가능했었구나.'
건장한 체격의 군인들이 건물의 외벽을 기괴한 자세로 기어오르는 장면.
내가 봐도 조금 소름이 끼칠 정도인데.
습격을 당한 당사자들은 어떨까.
"미, 미친."
"이게 뭐야. 괴물들이잖아!"
"괴물이 아니야. 이 자식들. 전부 각성자다!"
"이 숫자가? 그게 말이나 되는...!"
그제서야 전력 차이를 체감한 듯.
안쪽으로 도망치는 약탈자들.
"쫓아라!"
"놓쳤다간 다른 곳에서 피해를 끼칠 놈들이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그 뒤를 쫓아 우리 병사들이 추격을 들어갔다.
그런데.
움찔.
한참을 몰아치던 병사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요새의 안쪽.
빌라촌의 중앙쯤 되는 곳에서.
고오오오....
엄청난 거구의 살덩어리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몬스터인가? 이 녀석들. 몬스터를 사육하고 있던 거야?'
우리도 '맥' 같은 괴물을 잡아 두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큰형님이시다!"
"다들 큰형님 주변으로 모여! 큰형님을 주축으로 삼아서 반격한다!"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
그런데.
'큰형님이라니.'
...저게?
아무리 봐도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는 형태.
의아함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자니.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희. 그냥 군인. 아니다?"
"...뭐?"
"각성자들. 전부?"
갸우뚱하며 묻는 살덩어리.
조금 의아하긴 하지만.
아무튼, 큰형님이라.
이 녀석이 약탈자들의 대장쯤 되는 놈이라는 건데.
"굳이 약탈자 놈이랑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겠습니까?"
"일단 패 놓고 얘기하죠!"
내 요리를 통해 용기가 충만해진 덕분인지.
다소 사고회로가 단순해진 병사들.
녀석들이, 살덩어리 괴물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런데.
"각성자.... 특히 맛있지."
"커헉!?"
콰앙!
가장 먼저 덤벼든 전사조의 병사.
그가, 살덩어리가 휘두른 주먹에 맞고 저 멀리 날아갔다.
"병민아!?"
"괘, 괜찮습니다."
날아간 병사도 죽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요리로 버프까지 한 우리 병사가... 전투에서 지다니.'
아무리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외모라고 한들.
큰형님이란 이름으로 불린 것을 보면, 저 남자도 아마 각성자.
저만한 각성자가, 우리 외에도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좀 싸운다고 해 봤자. 거기까지겠지.'
우리 부대에는.
'좀 싸운다'는 수준을 넘어선 병사가 있었다.
"전광일 상병."
"강한 적... 크륵."
"네가 나설 차례.... 어어. 이미 준비됐나 보네."
강한 적을 보고 흥분했는지.
내가 부르기도 전에 이미 스위치가 켜져 있던 전광일 상병.
"카하하하하하!!!"
녀석이 살덩어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 * *
"이 돼지 새끼야! 어디 날 즐겁게 해 봐라-!"
3m도 넘어 보이는 거대한 살덩어리.
우리 병사를 일격에 날려 보낸 것을 보면, 분명 상당한 강자였겠지.
하지만.
그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끄륵...."
전광일 상병은.
우리 부대에서 가장 강한 전사다.
"그, 그만."
"카-하하하하하!!!"
"케헥...."
미친 듯한 웃음을 지으며, 살덩어리를 난타하는 전광일 상병.
광기에 휩싸인 그의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너, 너, 인간 아니다...?"
누가 봐도 괴물같이 생긴 쪽은 저쪽임에도 불구.
살덩어리의 입에서 '인간이 맞냐'는 의문이 나올 정도였다.
"사, 살려...."
결국.
광일이 녀석에게 한참을 얻어맞던 살덩어리가 뒤쪽으로 도망쳤다.
그곳에는, 다른 약탈자들이 모여 있었다.
"크, 큰형님이 지다니."
"심지어 한 놈한테...."
간부급으로 보이는 각성자들이 살덩어리를 맞이했다.
"제기랄, 저런 괴물 같은 놈들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일단 후퇴합시다!"
약탈자들과 합류한 살덩이 괴물.
그 모습을 본 나는 조금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동료와 함께 도망치려는 건가.'
다른 약탈자들이라면 모를까.
저 살덩이가 전력으로 도망친다면, 따라잡기 힘들 수도 있었다.
포위조의 병사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고 한들.
저만큼 강한 녀석을 제대로 붙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
'어떻게든 여기서 붙잡아야...!'
그런 생각을 하고.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려 했으나.
콰직.
애초에.
저 살덩이 괴물은, 도망칠 생각으로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어...?"
녀석을 마중 나왔던 간부급 약탈자들.
그중 한 명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살덩어리가 내려찍은 주먹으로 인해.
'아군을, 죽였어?'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
그 모습에 놀란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미, 미친!"
"이 괴물 같은 새끼. 이젠 아군도 못 알아보...!"
콰직.
와그적.
살덩어리의 괴상한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옆에 있던 다른 간부급 약탈자들은 물론.
"제기랄, 큰형님이 미쳤다!"
"저 괴물 새끼가 큰형님은 무슨! 다들 도망쳐!"
도망치는 다른 약탈자들을 쫓아가며.
놈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점이 있었다.
'시체가 없어?'
녀석의 주먹에 터져 나간 약탈자들.
그 시체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커지고 있다.'
약탈자들이 죽어 나갈 때마다.
살덩어리 괴물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는 점.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하고 있을 때.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요리사의 대적 중 하나.]
[이상식욕자를 마주하였습니다.]
[직업 퀘스트가 부여됩니다.]
...퀘스트?
[직업 퀘스트 - 대적자 척살(이상식욕자)]
[대적자를 주살하십시오.]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대적자를 상대하는 데 한해 전투 능력이 배가됩니다.]
61화 이상식욕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