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이상식욕자 (2)
[요리사의 대적.]
[이상식욕자를 마주하였습니다.]
[직업 퀘스트 - 대적자 척살(이상식욕자)]
[이상식욕자.]
[그릇된 방법을 거친 식사로 왜곡된 힘을 얻은 존재들입니다.]
[올바른 식사를 주도하는 요리사들에게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대적 중 하나!]
[당신의 대적자를 주살하십시오.]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대적자를 상대하는 데 한해 전투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퀘스트 보상 - 랜덤 스킬북]
'직업 퀘스트?'
뭐야 이게.
세상이 게임 같은 시스템으로 변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젠 퀘스트까지?
'아니. 이런 거에 일일이 놀라기엔 시간이 많이 지났지.'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천천히 퀘스트창의 내용을 읽어 보았다.
그 결과.
저 녀석이 저런 괴상한 모습과 힘을 가지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상식욕...이라.'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왜곡된 힘을 얻는 존재.
그 올바르지 않은 방법이란 건 아마도.
"크, 큰형님! 제발 목숨만은...!"
지금도 부하였던 녀석들을 쳐 죽이고, 몸집을 키우고 있는.
저 행위를 말하는 거겠지.
그리고 내 직업은 '요리사.'
저딴 식의 '식사'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 같다.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고.
퀘스트가 떠오른 이상 가장 중요한 것은 보상인데.
문제는 그게.
[퀘스트 보상 - 랜덤 스킬북]
'미친.'
스킬북이라고?
스킬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많지 않다.
업적을 달성하거나.
아니면 포인트 상점에서 엄청난 포인트를 지불하고 '랜덤 스킬북'을 구매하거나.
둘 중 하나.
후자의 경우.
나름 포인트를 많이 저축해놓은 나조차 기겁할 정도의 가격을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아이템.
그런데.
그걸 그냥 준다고?
'이건 못 참지.'
여전히 자기 부하들을 사냥하고 있는 살덩어리 괴물을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까.
저 약탈자 놈들도, 내 요리를 통해 '갱생'시킬 예비 신병들이다.
그 녀석들을 흡수하며 힘을 키우고 있는 괴물.
가만 지켜보고 있어선 안 되겠지.
"다들 집중!"
병사들을 향해 소리치며 말했다.
"저 자식. 아무래도 인간을 흡수하면서 힘을 키우고 있는 것 같다."
"그, 그런 겁니까? 그럼 어떻게 대처해야...."
"어떻게 하긴?"
나는 덤덤하게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 뒤.
식칼을 꺼내 들었다.
"더 흡수하기 전에. 빨리 족쳐야지."
"...."
비현실적인 광경에 멍해져 있던 아군 병사들이었으나.
명령이 내려진 이상.
"충성충성!"
망설임은 없었다.
"카하하하!!! 날 두고 어딜 가느냐! 돼지 새끼!"
전광일 상병이 몸을 날리는 것을 시작으로.
아군 병사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전광일과 살덩어리가 1:1로 겨뤘던 직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군 병사들이 모두 동원된 총공격.
녀석을 도울 약탈자들은 녀석이 직접 흡수해 버렸으니.
쉽게 처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커허...!"
"전광일 상병님!?"
가장 먼저 덤벼들었던 전광일 상병이 피를 토하며 날아간다.
"큭큭. 이제야 좀 재밌어졌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어나긴 했지만.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있는 모습.
저 광일이 녀석조차 치명상을 입을 정도의 강함이라니.
"이 괴물. 아까랑은 비교도 안 되게 강해졌습니다!"
이미 수많은 약탈자를 집어삼킨 뒤라서일까.
안 그래도 강력했던 살덩어리 괴물.
녀석은 어마어마하게 강력해져버린 상태였다.
이만큼 강한 괴물이라니.
철물창고에서 마주했던 '맥'이 떠오를 정도.
'음. 내가 덤비면 그냥 죽겠는데?'
내 전공은 어디까지나 요리.
전투 능력은 글쎄.
부대에서 가장 먼저 각성에 성공했음에도 잘 쳐줘야 중위권 정도가 아닐까.
전투 능력으로만 따지면 단연코 우리 부대의 최강자인 전광일 상병이 저런 모습을 보일 정도다.
평상시의 나였다면.
전투 개시 후 3초면 반으로 접혀 있을 확률이 높겠지.
'그래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양손에 식칼을 든 채.
괴물 녀석에게 접근했다.
나름대로 믿는 구석도 하나 있거든.
[직업 퀘스트가 진행 중입니다.]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대적자를 상대하는 데에 한해 전투 능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직업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적용된다는 버프.
전투 능력의 대폭 증가.
무려 '대폭' 증가다.
광일이보단 못해도 그럭저럭 강해져 있는 상태 아닐까.
"시, 신 병장님!?"
"물러나십쇼! 여긴 저희들이...!"
근접전을 치르던 전사들이 접근해 온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전투직도 아닌 내가 왜 이렇게 위험한 곳까지 왔느냐는 것이겠지.
난 녀석들의 만류를 무시한 채.
눈앞의 살덩어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하급 요리 비결 - 이상식욕자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머릿속으로 파도치며 들어오는 손질법을 되새기며.
오른손에 든 중식도, [검정 중식]에 힘을 주었다.
두껍고 무거운 칼.
저 덩치에게도 그럭저럭 통하길 기원하며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어?'
칼을 휘두르는 순간.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직업 퀘스트의 효과로 어느 정도 강해졌을 것이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건.
'어느 정도'가 아니잖아?
'몸이, 너무 가볍다.'
이상할 정도로 가벼워진 몸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병사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전사들을 상대하느라 바쁘던 녀석은 내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녀석의 손질법에 따라.
칼을 쥔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서걱-
두꺼운 가죽을, 종잇장처럼 뚫고 지나가는 칼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 여왕의 한이 상처를 파고듭니다.]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검정 중식]과 [독고 구식].
두 자루의 칼은 탄약대대를 점거하고 있던 흰거미 여왕의 앞발로 만들어진바.
한 종족을 이끌던 최후의 여왕.
그녀의 원한이, 잘려나간 상처 부위를 파고들어 갔다.
"크워어어어어어!!!"
거대한 살덩어리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뭐, 뭐야?"
"신 병장님이다! 신영준 병장님의 공격이 통한 거야!"
전사들은 물론.
후위 마법사들의 공격조차 버텨 내던 괴물.
"아파. 아파. 아파...!"
그런 녀석이 갑자기 고통에 차서 발광하기 시작하는 모습.
아군 병사들이 경악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놀라울 지경인데, 남들이야 오죽할까.'
하지만.
가만히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너, 죽인다...!"
너무 큰 고통을 안겨 준 탓에.
녀석의 어그로가 내게 옮겨와 버렸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덩치가 두 배는 커진 것 같은 녀석.
그 거대한 손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저기에 잡히는 순간.
온몸의 뼈가 가루가 돼 버리겠지.
하지만.
'생각보다 느리다.'
아니.
'내가 빨라진 건가.'
가볍게 몸을 움직여 녀석의 공격을 피한 뒤.
공격으로 생긴 허점을 향해 양손에 쥔 칼을 휘둘렀다.
서걱-
"크아아아아!!! 아파, 아프다!!!"
고통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녀석.
녀석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
"먹는 걸 좋아할 것처럼 생기셨는데."
비명을 지르느라 벌려진 입.
그 거대한 입 사이에 발을 집어넣고, 강제로 벌린다.
그리고.
[하급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짙은 무력감의 아라크론 육포]
"이것도 좀 먹어 보시던가."
"끄륵."
[전투식량]을 던져 넣었다.
"뭐 해, 이것들아! 가세한다!"
"신 병장님을 도와라!"
[전투식량]에 담긴 감정은, 짙은 무력감.
"아, 아프다... 그만해라...."
무력감에 휩싸인 녀석의 기세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병사들이 나를 도와 전투에 가세했다.
아무리 퀘스트의 효과로 강해졌다고 한들.
1:1로 싸운다면, 내가 녀석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겠지만.
[짙은 무력감]의 요리로 인해 기세가 꺾인 것은 물론.
'동료를 집어삼킨 너랑은 다르거든.'
내게는.
함께 싸울 병사들이 있었다.
'약간의 변수조차 없다.'
나는 머리를 비운 채.
그저 무아지경으로 계속해서 양손의 칼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찌르고.
베고.
찍고.
가르고.
그 과정을 몇 번을 반복했을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기괴할 정도로 부풀어 올랐던 살덩어리를 계속해서 베어 낸 결과.
평범한 인간 수준의 크기까지 줄어든 녀석.
녀석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나는 지친 숨을 가라앉히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왜소해진 어깨를 붙잡고 쭈그려 앉아 살려 달라고 비는 녀석.
상당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녀석.
만약에 살려 둔다면, 어떻게든 이용할 구석이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식재료 감별]
[이상식욕자]
[한때는 인간이었으나, 그릇된 방법을 통해 완전히 인간을 벗어나게 된 존재입니다.]
아쉽게도.
이 녀석은,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상태였다.
"미안하지만... 넌 갱생도 안 될 것 같다."
인간을 먹어서 힘을 키우는 괴물.
정수아의 그룹을 추격한 약탈자들이 물자는 됐으니 인간만 넘겨달라 했던 것을 떠올렸다.
노예로 삼는다고만 생각해도 꽤 께름칙한 일이지만.
이 녀석이 다른 약탈자들을 흡수해 몸집을 키우던 모습을 보면.
'인간만 넘겨달라는 그 약탈자들의 요구....'
단순히 노예로 쓰겠다는 것보다는.
이 녀석의 몸집을 키우기 위한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아파, 아파. 엄마... 살려...."
꿀꺽.
[특별소스]를 먹여 가며 살려둔다고 한들.
이성이랄 것이 거의 남지 않은 녀석은, 내 요리로도 통제하기 힘들 터.
서걱-
나는 칼을 쥔 손에 힘을 꽉 준 뒤.
녀석의 목 부위를 '손질'했다.
그러자.
괴물을 처치할 때와 마찬가지로.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묘한 충족감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엄청난 양의 경험치가, 몸 안을 가득 메우는 것이 느껴지고.
[플레이어를 처치하였습니다.]
[플레이어가 소유 중인 포인트 – 3,271pt를 획득합니다.]
'소유 중인 포인트까지?'
녀석이 가지고 있던 포인트가, 내게 넘어왔다.
설마.
사람을 죽일 경우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포인트까지 획득할 수 있는 건가?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깨달았다.
'이게 내 첫 살인인가.'
이미 많은 괴물들의 목숨을 뺏어 왔다.
이 녀석 역시, 인간보다는 괴물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 버렸다지만.
'쯧.'
그럼에도, 한때는 인간이었던 녀석.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칼을 쥔 손가락이 조금씩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떨림을 억제했다.
'괜한 생각에 매몰되면 안 된다.'
내 손으로 죽인 적에 대한 생각에 매몰되어 울적해지다니.
지금 내게 그럴만한 여유는 없었다.
'내가 신경써야 할 것은. 죽은 적이 아니야.'
살아남은 사람들.
그들과 어떻게 생존해 나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일.
그런 면에서.
이번에 들어온 포인트의 양은.
나를 놀라기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3,271이라고?'
다른 약탈자들을 죄다 씹어 삼킨 녀석.
그렇게 먹힌 인간 중 각성자들이 소유하고 있던 포인트까지 한 번에 들어온 셈.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직업 퀘스트 - 대적자 척살을 완료하였습니다.]
[보상 - 랜덤 스킬북]
랜덤 스킬북까지.
'부대원들을 늘리기 위해 강행한 토벌이었는데.'
얻게 된 보상은 내가 예상했던 것 그 이상.
피가 묻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큭큭, 하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이런 보상이라니.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기가 힘들잖아.
* * *
"우, 웃고 계셔."
"...저런 괴물을 상대로 싸우고 나서 저렇게 여유롭게 웃다니. 대체."
신영준 병장이 보상을 확인하며 웃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본 병사들이 중얼거렸다.
"내, 내가 대체 뭘 본 건가 싶다."
"내가 본 거랑 같은 걸걸? 신 병장님이 저 괴물 같은 녀석을 말 그대로 손질해버리는 거."
"그치? 잘못 본 거 아니지?"
"전광일 상병님도 나가떨어진 괴물을. 저리 손쉽게...."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신영준 병장이 저 기괴한 살덩어리를 상대로 보여 준 무력.
그것은 '요리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보여 줬다고 믿을 수가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거기에 피 묻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고 있는 저 모습까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전투광의 모습.
그 자체 아닌가.
"평상시에는 후방에서 요리를 제공하고 지휘하는 모습만 보여서 몰랐는데."
"저게 신 병장님의 원래 모습인 거다."
"신 병장님은 각성하실 때 총도 안 쓰셨잖아. 식칼 하나로 리자드를 찢어 죽이셨다고 들었어."
"미친. 그게 인간이 가능한 일이야?"
각성 당시의 이야기까지 재조명되자.
병사들은 경악하며 신영준 병장을 바라보았다.
"아니, 저 정도면 평소에도 직접 나서시는 게 나았던 거 아냐?"
"그러게. 왜 매번 후방에 빠져 계셨던 거야?"
의문을 품은 병사들.
거기에 대답한 것은.
2m가 넘는 거구의 사내였다.
"하하. 너희들. 아직도 모르겠냐?"
"전 상병님?"
근처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전광일 상병이 병사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에게 성장할 기회를 주려고 하신 거다."
"성장할 기회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 병장님은 요리사니까, 요리를 통해서도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지. 하지만 우리 같은 전투 계열 각성자들은 그럴 수가 없잖아?"
"그건 그렇죠."
"아, 설마!"
거기까지 설명이 이어지자.
몇몇 병사는, 전광일 상병이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 신 병장님이 직접 칼을 들고 나서면 쉽게 해결되겠지만, 그래선 우리가 성장을 못 하지. 그래서."
"우리의 성장을 위해 괴물들을 양보해 주셨다는 겁니까."
"그래. 신 병장님의 배려에는 정말이지, 감동할 수밖에 없다니까."
감동에 눈물을 훔치며 말하는 전광일 상병.
그때 병사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럼, 저번에 탄약고를 폭발시킬 때 크게 다치신 건요?"
"전투 능력이랑 신체 능력은 별개니까. 달리기는 좀 느리실 수도 있지."
"철물 창고 때 그 괴물은...."
"'맥'을 말하는 거냐? 그 녀석은 죽이기보다 살려 놓는 게 쓸모 있다 판단하신 거겠지. 실제로 포획한 뒤에는 공병들이 잘 활용하고 있잖냐."
실제로 어떤 이유가 있었든 간에.
그럴싸하게 아귀가 맞아떨어져 가는 대화.
"그런 거였다니."
"신 병장님...."
"그런 면에서 우리는 반성할 게 많다고 본다."
분한 듯 주먹을 꽉 움켜쥐는 전광일 상병.
"신 병장님은 우리를 위해 그렇게 양보를 해 왔지만. 우리가 약한 탓에 저 돼지 녀석을 못 쓰러트렸으니까. 신 병장님이 보면서 얼마나 갑갑하셨겠냐."
"아, 이번에 신 병장님이 나서신 건 그래서...!"
"답답해서 내가 뛴다는 심정으로 칼을 뽑아 드신 거다. 약해빠진 우리를 보며 갑갑해하다가 직접 정리하니, 속이 시원해서 웃으신 거겠지."
"오."
그럴싸한 해석에 병사들이 감탄하자.
전광일 상병은 씨익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신 병장님이 이렇게까지 우리를 배려해 주고 계시니까. 우리가 해야 할 건 하나뿐."
"뭡니까?"
"오늘같이 신 병장님이 직접 나서실 일 없도록, 더욱더 연마하고 강해지는 거다. 그게 병장님의 배려에 보답하는 일이 되겠지."
전광일 상병의 말이 끝나자.
전사조 병사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과연... 알겠습니다."
"전 상병님! 부대에 복귀하는 대로 스파링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저도 같이...!"
"물론 한 명만으로는 나도 훈련이 되지 않으니까, 다섯 명 정도는 동시에 상대해 주마."
"감사합니다!"
그렇게.
자신 때문에 병사들이 훈련 욕구를 불태우고 있다는 것을.
당사자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 *
전투 현장의 정리가 끝난 뒤.
우리 부대의 병사들은 빌라촌의 수색에 들어갔다.
약탈자들이 쌓아 놓은 자원도 자원이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들.
우리가 약탈자들의 토벌을 실행한 이유는 자원 따위가 아니었다.
약탈자들이 억압하고 있는 노예를 해방해서 영입.
포획한 포로들은 [요리사의 특별소스]로 '갱생'시켜서 부대원을 늘리는 것.
그것을 위해 전력의 절반 정도를 따로 분리.
포위조로서 빌라촌 주변 곳곳에 배치한 것이었다만.
"열심히 대기는 했는데, 우리한테 온 약탈자는 몇 명 안되더군."
포위조의 지휘를 맡고 있던 민재 형이 말했다.
"솔직히 진이 빠질 정도였다. 너희들 쪽에서 대부분 포로로 삼는 데 성공한 건가 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거 같고."
"아쉽게도 그렇게 됐네."
포로로 삼으려던 약탈자들.
그 대부분은 저 '이상식욕자' 녀석이 힘을 키우기 위해 잡아먹어 버렸다.
저 큰 몸뚱이로 빠르기는 얼마나 빠른지.
도망치려던 약탈자 놈들을 기어코 붙잡아 집어삼켜 버렸지.
덕분에 포로로 잡은 약탈자는 전투 초기에 붙잡은 몇 놈 정도.
다음은 노예로 잡혀 있던 이들인데.
"수아 언니!"
"얘들아!"
"수아 양, 우릴 구해 주러 올 줄이야."
정수아의 그룹에서 납치당한 이들을 포함.
몇몇 노예들을 발견하고,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쪽도 예상했던 것보다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수색을 계속하면서 알 수 있었다.
"우욱."
"이건...."
빌라촌 구석.
외진 곳에 있던 건물을 수색하던 병사들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구역질을 내뱉었다.
노예.
그중 일부분은 살아있는 채로 노예로 혹사당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여기서 고문이라도 한 겁니까?"
"아니. 자세히 봐."
나는 건물에 쌓여 있는 시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지가 잘려 있는 정도는 순한 편이다.
자신들의 욕구를 풀기 위한 장난감으로 쓰인 흔적은 물론.
그걸 넘어, 아무런 의미도 없는 폭력으로 인해 훼손된 시체들까지.
"고문 따위가 아니야.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다가 죽인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노예로 쓴다면 효율적일 텐데, 굳이 이렇게 죽일 이유가...."
의아해하는 병사들.
나는 그 이유도 대충 알 것 같았다.
"저 살덩어리 녀석에게 식량으로 제공하려던 거겠지."
"아...!"
그 살덩어리 괴물 녀석.
분명 약탈자 놈들에게 큰형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
"그 녀석이 약탈자 놈들의 대장이었던 거다."
"부하들을 집어삼킨 그 녀석이...."
"그래. 급하다고 부하들도 흡수해 버린 녀석인데, 평소에 어땠을지는 뻔하지."
이곳은 식량으로 제공되기 전의 노예들을 보관하던 장소일 테지.
식량으로 가공하기 전에 약탈자 놈들이 조금씩 가지고 논 것일 테고.
"그. 욕구 해소용으로 쓰인 흔적도 있습니다만."
"저 살덩어리 녀석이 말하는 거 들었지? 그런 거 신경 쓸 지성이나 있는 것 같았냐?"
"...."
3살짜리 아기랑 비슷할까 싶은 어휘 능력.
'이상식욕'을 통해 힘을 얻은 부작용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강해진 것과 별개로 이성은 대부분 날아가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
"쯧."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만.
이 광경을 그냥 징그럽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안 되겠지.
"우리도 이렇게 될 수도 있었어."
산맥에서부터 힘을 키워 왔기에.
강자의 입장에서 이들을 토벌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우리의 힘이 부족했다면.
반대로 저기에 쌓여 있는 시체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었겠지.
"명심해라. 절대 방심해선 안 돼. 지금은 우리가 강한 편이라고 해도 언제 추월당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예.
"괴물도 괴물이지만, 인간을 쉽게 믿지도 말고."
"인간을 믿지 말라니."
"그럼 누굴 믿어야 합니까."
누굴 믿어야 하냐니.
뻔한 걸 묻는구먼.
"군단."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같은 길드의 동료들뿐.
그렇게 현장의 정리를 진행하던 중.
누군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눈도 그렇고, 그룹원들도 그렇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정수아.
그리고 노예로 잡혀 갔었다던 그녀의 그룹원들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들도 인사 드리세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원자분이십니다."
"이분이 바로."
"수아 언니의 눈을 치료해 주신...."
"가, 감사합니다!"
구원자라니.
저번에도 조금 느꼈다만.
'이 여자, 좀 거창한 표현을 좋아하네.'
아무튼.
"거래는 이걸로 완료입니다."
"네."
"이제 우리 부대의 일원이 되어 주셔야겠습니다만. 불만 없는 거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러면, 이제부터는 말을 놓도록 하지."
그룹원 중에는 딱 봐도 나보다 연상으로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다만 내 위치가 위치인지라.
다수의 부대원 앞에서는 박씨 할아버지에게도 반말을 해야 했다.
'좀 오글거리긴 하지만.'
지위에 걸맞은 위엄을 보이지 않으면 단체가 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니.
참아야지 어쩌겠어.
"오히려 그편이 마음 편한걸요. 좋으실 대로 불러주세요."
"부대에 복귀하는 대로 길드 가입 절차가 진행될 거다."
비각성자들은 차례대로 각성을 진행하게 될 거고.
각성자들의 경우에는, 공방의 장인들이 장비를 만들어 보급하게 되겠지.
그 후에.
이들은 본격적인 우리의 부대원으로 활동하게 될 거다.
"네. 그런데...."
"음? 무슨 할 말이 있나?"
"이제 본격적으로 부대의 일원이 됐으니."
아.
그러고 보니.
"부대의 일원으로서. 제가 가진 정보 하나 전해 드리고 싶어서요."
정령안을 통해 이곳저곳을 정찰하곤 했다는 정수아.
내 요리를 먹기 전까지는 범위에 한계가 있었겠지.
하지만 지상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며 정령안을 사용해 왔다면.
이 근방의 정보에 가장 빠삭한 것은 그녀가 아닐까.
난 기대감을 품고 되물었다.
"무슨 정보지?"
"이 세상이 게임처럼 변해 버렸다는 건 이미 알고 계시죠?"
그거야 뭐.
각성자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일이다.
"은인께서는 게임은 좀 해보셨나요?"
"...엄청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남들만큼은."
"그렇다면 이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 수 있으실 거예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싶었으나.
싱긋 웃으며 꺼낸 그녀의 말에는.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던전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62화 절대 미각
약탈자들의 토벌이 끝난 뒤.
"합류하겠습니다."
"어차피 갈 곳도 없으니, 받아 주신다면...."
정수아의 그룹원들이나 노예로 붙잡혀 있던 생존자들을 부대원으로 받아들이고.
약탈자들의 경우.
"흐, 흐흐흐흐...흐익...."
"마, 맛있어."
"제발 한 입만 더...."
"내게 복종하기로 맹세한다면. 매일 같이 이런 요리를 먹여 주지."
"충성 충성!!!"
약간의 갱생 작업을 거쳤다.
그 결과.
각성 작업이 진행되긴 해야겠지만, 부대의 인원이 꽤 늘어나게 되었다.
새로운 부대원들에게 맞춤 장비를 마련해 주기 위해 공방에서는 불이 꺼지질 않았다.
"저 사람들 분량만큼 리자드 가죽이 되려나?"
"음~ 아직은 괜찮을걸요?"
"아직 괜찮다는 건, 재고가 모자라긴 하나 보네."
"그렇죠. 그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걸요? 계속 리자드 가죽을 쓰는 건 무리겠지만, 저도 실력이 꽤 늘었으니까. 다른 괴물의 가죽으로도 처음 만들어 드린 정도 퀄리티는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거예요."
사실.
이것도 처음 예상했던 인원에 비하면 적은 편이긴 했다만.
실망할 필요는 없겠지.
"제가 교류하던 그룹들한테 저는 이쪽에 합류하기로 했다고 전하고 왔어요."
정수아가 말했다.
그녀는 여러 그룹과 정보를 교류하고 있었으니 가능하면 그쪽 그룹들도 흡수하고 싶었다.
"그쪽 반응은 어때?"
"나름대로 설득을 해 보긴 했는데. 아직은 망설이는 것 같아요."
"그런가."
"다들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니까요. 조만간 선택을 내리게 되겠죠. 아마 좋은 방향으로 기대해도 될걸요?"
"이유가 뭐지?"
"저 약탈자들, 꽤 유명한 녀석들이거든요. 그런 놈들이 전멸했고, 그걸 전멸시킨 게 군인들이다. 그런 소문이 생존자들 사이에 돌기 시작했거든요."
뭐?
우리가 약탈자를 토벌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이라도 있었던 건가.
"정확히는 저희 그룹이 돌린 소문이지만요."
"아."
뭐 소문의 출처는 중요하지 않겠지.
중요한 것은 그런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는 것 그 자체였다.
'군인들에 대한 이미지가 개선된다면 우리에게 합류하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도 생겨날 테니.'
엄청난 호재다.
* * *
새로운 부대원들과 약탈자의 기지에서 얻어 온 물자들의 정리 등.
전투의 후처리가 어느 정도 정리된 뒤.
조장들을 모아 연 회의 자리에서.
나와 조장들은 길드 메시지창을 열었다.
[무당 : 던전이라.]
산맥에 남아 있는 박태준 병장.
녀석의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던전.'
부대에 합류가 결정된 뒤.
정수아가 가장 먼저 알려 온 정보였다.
RPG 계열의 게임에는 필수라고 해도 될 만큼 자주 등장하는 존재다.
이름의 기원은 성의 지하 감옥 같은 것이라지만, 최근에 와서 그 의미는 꽤 달라졌다.
특정 종류의 몬스터가 모여 있는 장소.
형태나 종류 같은 거야 워낙 각양각색이니 뭐라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게임에서의 던전들이 공유하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최고의 파밍처라는 거지.'
경험치.
아이템.
모두, 필드에서 얻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수아는 조금 더 힘을 기른 뒤에 자신의 그룹을 이끌고 공략할 계획이었다던가.
이번에 약탈자들과의 싸움에서도 느꼈지만.
당장은 우리가 강자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언제 뒤처질지 모르는 일이다.
당장 군내를 정벌하려고 하기에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니까.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넘어갈 수야 있나.
여기까지 들으면 그저 장점밖에 없는 장소로 보이기도 하지만.
던전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으니.
'필드에 비해서 난도가 높은 경우가 많단 말이지.'
그래서.
우리 길드의 무당 선생에게, 앞날을 좀 점쳐 봐 달라 한 것이다.
[무당 : 네가 말한 그 장소에 뭔가 있는 건 맞는 것 같군.]
[셰프 : 어때? 우리가 공략해도 괜찮을까?]
[무당 : 으음. 그건.]
그런데.
[무당 : 당장은 추천하지 않고 싶군.]
그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
[사수조장 : 점괘가 좋지 않은 겁니까?]
[무당 : 행이냐, 불행이냐를 따진다면. 당장은 불행이군. 아마 지금 공략하기엔 난이도가 있는 던전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만.]
나와 부관들의 시선이 정수아를 향해 집중됐다.
"왜, 왜 그러시죠?"
"박태준 병장님 말로는. 그 던전. 엄청 어려운 곳이라는데요?"
"네?"
당황한 정수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도 저희 그룹에 각성자가 30명쯤 되면 공략해 보려고 했어요. 그 정도로 힘든 곳일 줄은 몰랐죠...."
"그 정령으로 던전 안쪽은 못 보나요?"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그 정도로 사기적인 특성은 아니라서요. 방울이도 던전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더라구요."
하긴.
정찰을 통해 던전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한들 난이도까지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겠지.
"오히려 소름 돋는 건 저예요. 지금이야 여러분들께 던전에 대한 정보를 넘겼지만... 원래는 저희 그룹끼리 공략하려 했으니."
"무난하게 그룹을 키운 뒤에 공략하려고 했다가 큰일이 날 뻔했군."
"군단이 어려울 정도의 난이도라면 각성자 30명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을 테니까요. 으으. 그 생각을 하니 또 소름이...."
정찰에 특화된 정수아의 능력.
그리고 일종의 예지에 가까운 박태준의 능력.
같은 정보 계열이지만, 꽤 큰 차이가 있었다.
'...태준이 녀석이 있어서 큰 피해를 보는 일은 피한 셈인가.'
정수아의 정령안으로 새로운 정보를 발견할 수는 있지만 그걸 건드렸을 때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박태준의 천문은 지나치게 랜덤이고.
다행인 점은 두 능력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준다는 것이다.
정수아의 정령안으로 새로운 지역을 발견하고.
박태준의 천문을 통해 그곳에 가도 될지 아닐지를 결정할 수 있으니까.
'드론, 이 아니라. 정령사를 영입함으로써. 우리 활동의 안정성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셈이지.'
아무튼.
던전은 당장 공략하기 힘든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하니.
새롭게 합류한 생존자들을 각성시키며 힘을 키우기로 했다.
"힘을 키운다... 라."
식당의 일을 마무리한 뒤.
방에 복귀한 나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이번엔 운이 좋았지.'
약탈자들의 대장 녀석.
'갱생'한 약탈자들이 말한 정보에 따르면 원래는 평범했으나, 식인을 반복한 끝에 저런 형태가 되었다던가.
처음엔 그럭저럭 상대할 만했지만.
약탈자들을 죄다 집어삼킨 뒤에는 아니었다.
광일이 녀석조차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의 강적.
운 좋게 직업 퀘스트, 대적자 척살이 나타나 줘서 다행이지.
그로 인한 전투 능력 상승이 없었다면 큰 피해를 당할 뻔했다.
'힘은 키워도 키워도 모자라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각성자 : 신영준]
[직업 : 하급 요리사 (2차 직업) Lv. 19]
[힘 : 19]
[민첩 : 30]
[마력 : 18]
[행운 : 24]
[특성 : 하급 단도 숙련, 하급 요리 숙련, 하급 식재료 감별(강화), 하급 화염 친화]
[스킬 : 요리사의 눈, 주방장의 특별소스, 전투 식량]
[포인트 : 8,182pt]
[랜덤 스킬북x1]
오랜만에 열어 보는 상태창.
그동안 꽤 일이 많았다 보니.
전에 열어 봤을 때와 비교해보면 꽤 높아진 수치가 눈에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포인트.
"8천? 미쳤네."
보통 포인트를 이렇게까지 쌓아 두는 경우는 없다.
다른 병사들 모두 쓸 수 있는 만큼 모이면 곧바로 쓰고 보는 편.
하지만 난 전투직도 아니다 보니.
굳이 쓸 필요를 못 느껴 아껴온 포인트가 4천 정도.
거기에 이번에 처치한 '이상식욕자' 녀석에게서 얻은 포인트를 합치니 저런 수치가 나와 버렸다.
슬슬.
쓸 때가 됐지.
'아. 그 전에.'
상태창에도 나타나 있는 물건을 먼저 써야겠지.
품 안에 손을 집어넣자.
내 눈에만 보이는 무형의 책 한 권이 잡혔다.
[랜덤 스킬북]
[직업과 관련된 스킬을 랜덤으로 1종 획득합니다.]
[보상으로 획득한 스킬북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으니 주의하세요!]
표지조차 없는 얇은 책 한 권.
이걸 읽으면 새로운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지.
난 망설임 없이 책을 펼쳤다.
그러자.
머릿속에 정보의 물결이 밀려 들어왔다.
[스킬 - 절대 미각(new)]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맛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최고의 요리사는 또한 최고의 미식가이기도 한 법!]
[당신의 미각이 극한에 도달합니다.]
[요리의 맛을 누구보다 세심하게 느끼며, 재료에 담긴 작은 특징 하나까지 캐치할 수 있게 됩니다.]
[효과 1 (패시브) - 자신에 한해, 요리를 통해 얻는 효과가 긍정적으로 크게 상승합니다.]
[효과 2 (액티브) - 스킬 사용 시, 본인에 한해 요리에 담긴 작은 [특징]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새롭게 얻은 스킬의 이름은 [절대 미각].
미각이 극한에 도달하게 만들어 주는 스킬이라.
음....
이건.
"꽝이네."
맛을 잘 느끼게 된다면야 뭐.
맛있는 요리 먹을 때 기분은 좋겠지.
하지만 전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첫 번째 효과는 나쁘지 않아. 내 요리를 내가 먹었을 때 효과도 늘어난다는 뜻일 테니.'
내가 만든 요리의 효과가 나 자신에게만 더 강하게 적용된다.
즉, 버프의 효율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기본적으로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라, 버프 효과가 늘어난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일 것 같다는 것 정도이다.
본격적인 전투 특성과 비교하면 좀 모자람이 있기는 하지만, 뭐 이 정도면 나쁘진 않다.
문제는 두 번째 효과.
특징을 끌어올린다는 건 무슨 말인지 감도 잘 안 온다.
"아니, 뭔 스킬이 나 자신한테만 적용되냐."
이왕이면 부대원들에게 효과적인 스킬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다음으로는 드디어.
쌓아 왔던 포인트를 털어 낼 때가 됐다.
"포인트 상점."
작게 그 이름을 중얼거리자.
[포인트 상점]
[최근 구매 항목 - 평범한 식칼 - 5pt]
[딱딱한 호밀빵 - 10pt]
[평범한 강철검 - 30pt]
[평범한 방패 - 30pt]
내게 쓸모없는 물건들의 목록은 보지도 않고 주르륵 넘겨 버렸다.
그렇게 최하단에 도착하자.
병사들이 포인트를 바로바로 쓰게 하는 이유가 나타났다.
[능력치 상승의 물약(힘) - 1,000pt]
[능력치 상승의 물약(민첩) - 1,000pt]
[능력치 상승의 물약(마력) - 1,000pt]
[랜덤 스킬북 – 3,000pt]
[마지막 페이지입니다.]
[추후 패치를 통해 아이템이 추가될 수 있습니다.]
무려.
능력치와 스킬을 얻게 해 주는 물건들.
"나야 전투직도 아니다 보니까, 급하게 투자할 이유가 없었지만."
전사나 마법사 같은 전투 계열 각성자들은 그렇지 않았으니, 포인트가 모이는 대로 저 물약들을 통해 능력치에 투자를 한다.
"어디 보자. 내가 가진 포인트로는 물약을 8개 사거나 스킬북 두 개에 물약 두 개인가?"
즉.
어떻게 사용하든 간에 물약을 최소 두 개는 구매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일단 [능력치 상승의 물약(힘)]을 구매하기로 했다.
[1,000pt를 지불합니다.]
[잔여 포인트 – 7,182]
눈앞에 나타나는 빨간색 물약.
"이 물약은 그래도 좀 알고 있지."
다른 부대원들은 이미 포인트가 되는 대로 구매하고 있는 물건이니까.
당연히, 능력치 상승 물약을 이미 먹어 본 녀석들에게서 들은 게 있다.
'섭취할 경우, 능력치를 1에서 3까지 랜덤하게 늘려 주는 물약.'
누가 게임 같은 세상 아니랄까 봐 이런 것도 랜덤이다.
1이 뜨면 안타깝겠지만.
부대원들의 말에 의하면, 2만 떠도 포인트 값은 하고도 남는 것 같다던가.
3이 뜨면 다른 사람한테 자랑도 못 한다고 한다.
기만자라고 욕먹는다는 이유.
덤으로, 물약이지만 맛도 꽤 괜찮다고 한다.
콜x 같은 음료수 맛.
"제발 3, 아니. 2만 떠도 좋으니까 1만 아니어라."
그다지 의미는 없는 기도를 하며.
물약의 뚜껑을 따고 입 안에 내용물을 들이부었다.
은은한 라임 향이 느껴지는 청량한 맛.
물약에 담긴 마력이 입 안을 통과해 몸 곳곳에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띠링.
[능력치 상승의 물약(힘)을 섭취하였습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상승했다는 문구가 눈앞에 떠올랐다.
여기까지는, 익히 들은 바와 같은 내용.
'1에서 3이 증가한댔지. 어느 정도 증가했느냐가 중요한데.'
살짝 긴장한 채로 나타나는 메시지를 기다렸다.
제발 1만 아니길 바라며.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메시지가 먼저 눈 앞을 가렸다.
[스킬 - 절대 미각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자신에 한해, 요리를 통해 얻는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
[힘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어라?
63화 지하철 (1)
순간, 잘못 본 건가 했다.
혹시나 해서 상태창을 다시 확인해 보니.
[힘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잘못 본 게 아니잖아?"
상태창을 열어서 확인해 본 결과.
힘 능력치가 정확히 5 상승해 있었다.
이게 뭐야.
"분명 부대원들 말로는 1에서 3 사이 랜덤으로 상승한다 했는데...."
사실 다른 부대원이 운이 더럽게 없었을 뿐,
원래는 5까지 상승할 수도 있는 거였다던가-.
"그런 건 당연히 아니겠지."
짐작 가는 이유는 하나.
[절대 미각]
[효과 1 (패시브) - 자신에 한해, 음식을 통해 얻는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새롭게 얻은 스킬.
[절대 미각]의 효과.
그 안에 담긴 음식을 통해 얻는 효과가 크게 상승한다는 문구다.
"...아니, 물약도 음식으로 치는 건가?"
물약.
즉.
약이잖아.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싶어졌으나.
"물약을 음식으로 쳐도 되냐... 입니까."
"어. 그나마 이런 거에 대해 알 만한 녀석이 너밖에 없어서."
"저도 물리치료학과 출신이라. 자세하게 아는 건 아닙니다만."
의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의무병.
사의준 일병이 말했다.
그나마 약에 대해 알만한 것이 '치료사'로 각성한 이 녀석이니까.
"그거야 뭐.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안 될 것도 없죠?"
그런 녀석이 안 될 것도 없다는 대답을 꺼내 든 것.
"안 될 것도 없다는 건 무슨 의미야?"
"능력치 물약의 경우에는 뭐 병을 치료한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먹으면 힘이 세진다든가 그런 거잖습니까?"
"그렇지."
"이런 건 사실 약이 아니라. 자양강장제 같은 거죠. 그러면 기능성 음료로 분류하는 게 맞거든요."
"기능성 음료?"
"편의점에서 파는 소화제나 숙취해소제. 비타민 음료나 자양강장제... 뭐 그런 것들 있잖습니까."
"아아. 그렇지."
"그런 것도 사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약물이거든요. 그런데 약국에서만 파는 게 아니라 편의점에서도 팔잖습니까? 이렇게 약국이 아니어도 팔 수 있는 의료품들을 의약외품이라고 합니다. 음료의 경우에는 기능성 음료라고 분류하구요. 그리고 음료는 아시다시피."
음료.
액체를 많이 포함한, 마실 수 있는 음식을 뜻하는 말.
"음식에 포함된다. 그건가."
"굉장히 너그러운 기준입니다만, 그렇게 보자면 음식으로 보지 못할 것도 없죠."
"이해했어."
건강 회복이나 체력 증진을 위해 먹는 게 일반적인 자양강장제.
능력치 증가를 위해 먹는 포션.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걸 같이 묶어도 되는 건가?
'내가 이상하게 생각해도 의미 없나.'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능력치 상승의 물약은 음료.
즉 음식이라고.
내 [절대 미각]의 효과가 적용된 결과.
음식의 효과가 극대화되어 작용.
1~3의 수치가 올라야 하는 물약이, 5의 능력치 증가를 일으킨 것이다.
'그렇다는 건.'
머릿속에.
뜬금없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
음식이라면.
음식을 만들기 위한 요리 과정이 있을 것이고.
마침, 내 직업은 요리사다.
"...나도 만들 수 있는 거 아냐?"
그걸 가능하게 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특성 : 하급 식재료 감별(강화)]
물약에 들어간 재료와 조리법.
그 레시피를 알아 낼 수만 있다면.
[1,000pt를 지불합니다.]
[잔여 포인트 – 6,182pt]
방으로 돌아온 나는 물약을 한 병 더 구매했다.
거기에 특성을 사용해본 결과.
['능력치 상승의 물약(민첩)'의 감별 결과-]
[정체불명의 재료 ??%, 정체불명의 액체 ??%, 정체불명의 감미료 ??%....]
[특성의 등급이 낮아, 재료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쯧."
역시 그렇게 쉽게는 안 되나.
정체불명의 뭐시기로 도배된 감별 결과가 주르륵 나열된다.
재료만 알 수 있다면 온갖 시도를 통해 요리법을 알아내고 시도해 봤을 테지만.
강화되었다고 한들 이 특성의 단계는 하급.
모든 재료의 정체를 확인하기는 힘들단 거다.
설령 재료를 알아냈다고 한들, 지금 단계에선 얻기 힘든 재료였을 가능성이 크고.
그런데 그때.
"어?"
정체불명의 어쩌구로 나열되던 감별 결과 사이에.
다른 문구 하나가 보였다.
[아룡의 심장 10%]
"이건."
아룡의 심장.
이름만 들어도 뭔가 대단해 보이는 재료다.
능력치 물약에 들어간 재료 중에서 유일하게 감별이 된 물건.
저 재료가 내 감별 스킬로 감별이 가능할 만큼 저급이라서 그런 건 아닐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이름, 들어 본 적이 있는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내 군장 가방을 뒤져 목함 하나를 꺼냈다.
그 목함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바로.
[아룡의 심장]
[아룡의 심장입니다.]
과거.
김 중위에게 요리를 먹여 그를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했을 때.
'헤어날 수 없는 맛'이라는 업적을 달성했었다.
그 보상으로 얻은 것이 이것.
[최상급 식재료 : 아룡의 심장]
요리 스킬이 부족하다 보니 다루지는 못하고.
그냥 짐가방에 넣고 가지고 다니기만 했다.
괜히 군장 무게만 늘어나게 하는 짐덩이 같은 존재였는데.
'설마 능력치 물약에 들어가는 재료 중 하나였을 줄이야.'
내가 실제로 보유하고 있는 재료였기에 감별에도 성공한 거겠지.
아룡의 심장에 능력치 물약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10%.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이 심장 같은 재료들을 모두 모으는 데 성공한다면.
'능력치 물약을 요리할 수 있다...!'
* * *
얼추 물약을 통해 실험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실험한 뒤.
[6,000pt를 지불합니다.]
[잔여 포인트 - 182pt]
나는 나머지 포인트도 모두 물약으로 바꿔 버렸다.
스킬을 구매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당장 최근에 새로운 스킬을 얻은 참이기도 하고.
그 스킬의 효과로 물약의 효율이 증가했는데 어떻게 참겠어.
[...능력치가 5 증가합니다.]
"달다."
생각해 보면 참 타이밍도 좋았다 싶다.
우연히 퀘스트를 통해 얻은 스킬북.
그리고 그동안 아껴 왔던 포인트.
그 두 가지가 시너지를 일으켜 최고의 효율로 능력치를 올릴 수 있었던 셈이니.
그렇게 8병의 물약을 모두 들이켠 결과.
[능력치]
[힘 : 19 → 29]
[민첩 : 30 → 45]
[마력 : 18 → 33]
[행운 : 24]
능력치가 도합 40이나 증가했다.
'원래도 스탯으로는 꿀리지 않았는데... 이건.'
가장 먼저 각성한 것도 있고, 요리를 통해 꾸준히 경험치를 수급해 왔다.
레벨로 따지면 부대원들 중에서도 최고.
20레벨을 목전에 둔 만큼 스탯 만큼은 전사들에게도 꿇리지 않았었다.
거기에 이 정도의 추가 능력치라니.
슬쩍 몸을 움직여 보았다.
'음. 이전에 이상식욕자 녀석과 싸울 때만큼은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몸이 엄청나게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잘하면 광일이 녀석과도 비벼볼 만하지 않을까.
녀석은 광기라는 희대의 사기 특성을 가지고 있다만.
[절대 미각]의 효과로 요리를 통한 버프 효율 또한 증가했으니.
'쓸모없는 스킬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본의 아니게 엄청난 성장을 이뤄내 버렸다.
깡스탯을 올려 줄 뿐이라고 해도 드디어 제대로 전투에 도움이 되는 스킬을 얻은 셈.
'내심 전투력이 약한 걸로 부대원들한테 무시나 당하지 않을까 고민이었는데.'
이 정도면 그래도 무시는 안 당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띠링.
[무당 : 영준이 너. 뭔가 한 거냐?]
[셰프 : ?]
[무당 : ...아닌가? 이런 일을 일으킬 수 있는 건 너라고 생각했는데.]
산맥의 무당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다음 메시지를 기다리자.
[무당 : 점괘에 있던 불운이 걷혔다.]
[무당 : 이 정도면 도전해 봐도 괜찮겠어.]
주어가 없음에도 의미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던전 공략의 OK 사인이 떨어졌다.
* * *
부대원들이 모인 자리.
새롭게 합류한 정수아가 군사지도의 한 장소를 지목했다.
"여기예요."
부대에 합류하자마자 우리에게 건네준 정보.
던전의 위치.
"그렇게 멀지 않네요."
"운이 좋은 건가."
그녀가 가리킨 장소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평지였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네."
"이런 곳에 동굴이라도 있는 건가?"
"네? 아무것도 없는 곳은 아니에요."
"응?"
다시 지도를 봐도 그저 허허벌판.
정수아 역시 지도를 보고 살짝 갸우뚱하며 말했다.
"어... 그러네요. 정령으로 봤을 때 아무것도 없는 곳은 아니었는데."
"그게 무슨...."
"아. 알겠어요!"
그녀의 말에 반응한 것은 이상아였다.
"여기, 역이 있는 장소에요."
"역이라니?"
"아아... 그렇군요."
그녀의 말에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갈라졌다.
나를 비롯한 병사들은 처음 듣는다는 태도.
반면 생존자 출신들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깡촌에 역이 있다고?'
그랬다고 한다면 근처 부대에서 군생활을 한 우리들이 모를 리가 없다.
휴가를 나가거나 복귀할 때 전철을 이용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건 분명 없었다.
나만 해도 언제나 고속버스를 이용했는데-.
"군인분들은 모를 만도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만들어지고 있는 역이거든요."
아.
공사 중인 지하철역이라는 건가.
던전이란 단어는 지하 감옥에서 비롯되었다던가.
"던전이 있을 만한 장소기는 하네."
우리의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 * *
준비를 마친 뒤.
우리 길드는 병사들을 이끌고 이동을 개시했다.
그나마 우리가 안정화한 군부대 근처와 달리 조금만 멀리 나가도 괴물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짧은 거리라고 한들 이동이 쉽지는 않았다.
그나마 전투차량들이 완성되고 나서야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가지 더 변화가 생겼다.
"왼쪽 회색 건물 3층 창문. 괴물 한 마리가 나오려고 하고 있어요."
"수혁아."
"충성."
팍-
사수조장.
서수혁 상병의 총구가 불을 내뿜었다.
공병들이 제작한 소음기를 착용한 덕에 그 소리는 작았으나.
-크락....
창문을 기어 나와 부대의 머리를 덮치려던 괴물.
녀석의 머리통이 한 번에 터져 나갔다.
"두 블록 앞 사거리 오른쪽 코너. 좀비들이 뭉쳐 있네요. 숫자가 꽤 많아요."
"한일아, 분대원들이랑 정리하고 와라."
"다녀오겠습니다."
진군 경로의 옆구리에 위치해 부대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던 좀비 무리.
녀석들은 본대에 접근하기도 전에 전사들에 의해 토벌되었다.
"저기 정면에...."
"여기서는 우회하는 게...."
"저쪽 길은 막혔...."
계속해서 이어지는 브리핑.
남들과는 다른 시야를 통해 전장을 관찰하는 병사.
정수아.
정령과 시야를 공유하는 정령사였다.
'안 그래도 강력한 특성이었지.'
투명하게 몸을 감추고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 있는 정령과 시야를 공유한다는 특성.
한계가 있다면 정령사인 정수아 본인의 능력이었으나.
길드 스킬로 제공되는 액세서리 아이템, 군번줄.
리자드의 가죽으로 만든 이상아의 군복.
박씨 할아버지와 공병들이 제작한 수제 무기.
거기에 내 요리까지.
평범한 각성자들은 우리 부대에 합류하는 순간 능력이 두 배는 뻥튀기 된다고 봐도 된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
"굉장해요.... 이만큼 능력을 썼는데도 눈에 고통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니."
이전에는 내 요리를 통해 얻은 [예민한 청각]에 의존해야만 했던 정찰.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건 어디까지나 보조.
그녀의 정령이 정찰기가 되어 하늘에서 아군의 위협을 알려 주었다.
전투의 안정성은 이전과 비교도 안 되게 늘어난 셈.
덕분에.
"저기, 저 공사 현장이에요."
우리의 목적지.
던전이 위치한 지하철역에, 별다른 피해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줄이야...."
"아아.... 은인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이에요."
그녀의 능력이 큰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사실 애초에 군부대와 역의 위치가 그렇게 멀지 않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운이 따라 줬네."
"운이 전부는 아닐 거다."
민재 형이 말했다.
"철로는 전통적으로 군대의 이동에 쓰였으니까 말이지."
"호오."
"기본적으로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한 역이 맞겠지만. 부지 선정에는 근처 군부대의 위치도 영향을 줬을 거다. 역과 부대가 멀지 않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란 거지."
일리가 있는 말이다.
철로는 군대를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길.
특히 우리가 자리 잡은 탄약대대는 근처 일대의 탄약 보급을 책임지는 부대.
유사시에 빠른 보급을 가능하게 하는 역의 위치 선정에 영향을 준 것이겠지.
뭐.
우리 입장에선 덕분에 피해 없이 이동할 수 있었던 셈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역에 도착한 우리는 공사 현장 안쪽으로 진입했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던 중.
서수혁 상병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이상하군요."
"뭐가?"
"공사 현장인 만큼 공사에 참가한 인부들의 좀비, 혹은 시체 같은 게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지 않습니까. [예민한 청각]에 걸리는 좀비의 소리도 없고."
"어... 듣고 보니...."
"멸망의 날은 주말이기도 했으니, 공사를 쉬었던 건가? 모르겠군요."
음.
아무튼 이것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넘기기로 했다.
좀비의 습격이 없는 만큼 공사 현장에 진입하는 것도 수월해졌다.
그렇게 그 중심부.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작은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예요."
이곳이 바로.
던전의 입구.
"계단이라."
"역시 전투차량 같은 건 못 끌고 들어가겠네요."
"어쩔 수 없지. 공병들은 밖에서 전투차량들 지키면서 대기한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지상에 몇몇 병사들을 배치한 뒤.
나머지 병사들과 함께 지하철 계단으로 진입했다.
지상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할 때쯤.
"조명탄."
"조명탄 투척!"
병사들이 가져온 조명탄을 던져 어두운 지하 공간을 밝혔다.
붉은빛이 계단에 퍼져 나갔다.
그런데.
조명탄을 던졌음에도 밝아지지 않은 장소가 있었다.
"저곳인 것 같군요."
계단의 끝.
본격적으로 지하철과 이어지는 경계.
그곳에 조명탄으로도 밝아지지 않는, 정체불명의 어두운 암막 같은 것이 존재했다.
그곳에 시선을 집중하자.
[던전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계의 존재들은 그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습성을 지닙니다.]
[어떤 종족은 모든 환경에서 생존 가능한 적응력을 지니기도 하고, 어떤 종족은 운 좋게도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들의 고향과 유사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종족은, 새로운 세상의 환경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는 법.]
[그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침략 행위.]
[결코 용납하지 마십시오.]
눈앞에 나열되는 던전에 대한 정보.
쓸데없이 긴 내용이었지만.
이 세상에서 던전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이계의 존재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변화시킨 공간."
즉.
'테라포밍.'
64화 지하철 (2)
[던전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계의 존재들은 그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습성을 지닙니다.]
[어떤 종족은 모든 환경에서 생존 가능한 적응력을 지니기도 하고, 어떤 종족은 운 좋게도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들의 고향과 유사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종족은, 새로운 세상의 환경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는 법.]
[그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침략 행위.]
[결코 용납하지 마십시오.]
'이계의 존재'
시스템창은 괴물들을 그렇게 칭했다.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괴물들은 기존의 짐승들이 이상한 실험으로 변하거나 한 게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상에서 온 녀석들이라는 것.
'저것만 해도 꽤 중요한 정보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그다음에 나오는 문구.
'환경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테라포밍.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을 뜯어고쳐, 생존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
우리가 지금껏 만난 괴물들.
녀석들은 강함을 제외하면 여러모로 지구의 짐승과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분명 지구의 생명체가 아닐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구의 환경에 적응해 인간을 사냥하는 괴물들.
그런 게 일반적인 괴물들이라고 생각했다만.
"그렇지 못한 괴물도 있다는 거군요."
"어쩌면 우리가 본 괴물들이 소수일지도 모르지. 대다수의 괴물은 이쪽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죽어 나갔을 수도 있어."
지구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괴물들.
그중에는 적응하지 못한 채 죽어 나간 녀석들도 있겠지만, 지구의 환경을 뜯어고침으로써 생존하려는 녀석들도 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개조된 장소가 바로 던전.
'이 지하철역 전체가 그렇게 개조되었다는 건가.'
세금으로 세워진 지하철역.
완공되었다면 근처 부대의 군인이었던 우리도 이용할 수 있었겠지.
나야 그때는 전역했겠지만.
그런 시설물을 냅다 점거하고.
자기들 입맛대로 개조해서 쓰고 있다니....
"건방지네."
지구에 적응하지 못한 괴물들이 개조한 공간.
그 뜻은, 지구의 환경에 적응한 우리에게는 불리한 공간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런 세상에선 리스크가 두렵다고 위축돼선 안 된다.
멸망의 날.
식당에 괴물이 쳐들어왔을 때.
괴물들이 두려워서 도망쳤다면,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과감하게 힘을 키워 나간 자들만이 살아남을 자격을 얻는다.
이 던전 공략 역시 마찬가지.
모든 게임의 던전이 그렇듯, 리스크가 큰 만큼 우리를 성장시켜 줄 장소일 것이라 확신한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부대원들을 뒤로한 채.
나는 누구보다 앞에 서서, 검은 장벽 안으로 발을 옮겼다.
이 괴물 녀석들에게 자신들이 불법 점거한 장소의 주인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려 주기 위해.
스르륵-
검은 암막은 단순한 그림자에 불과한 듯했다.
무언가에 닿았다는 느낌조차 없이 가볍게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던전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즉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던전에 진입하였습니다!]
[일반 던전 – 검은 모래 유충의 산란지]
[특유의 식성과 습성으로 인해 해충으로 유명한 검은 모래 유충의 산란지입니다.]
[전 우주에 퍼져있는 개체 수와 달리, 검은 모래 벌레의 산란에는 복잡한 환경적 요인이 갖춰져야만 합니다.]
[이들의 어미는 자식들의 산란을 위해 영역을 자신의 고향처럼 꾸미기로 결정했습니다.]
[인간종에게 친화적이지 못한 환경입니다.]
[모든 스탯이 소폭 감소합니다.]
"커허."
급격하게 변화한 환경.
중력이나 기압의 차이 때문일까.
약간의 고통과 함께 몸이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공기 또한 지구의 그것과는 다른 것인지.
숨쉬기가 조금 버거워졌다.
피부를 찌르는 듯한 건조한 열기까지.
몸이 적응하는 데에 다소 시간이 걸렸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인한 충격을 이겨 낸 뒤.
힘겹게 감았던 눈을 뜨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사막, 인가?"
본래라면 공사 중인 지하철 플랫폼이 있어야 할 장소.
그곳을 메우고 있는 것은.
어두운 공동 저 너머까지 펼쳐져 있는 어두운 모래사막이었다.
* * *
가장 앞장서 진입한 나를 시작으로.
내 뒤를 따라오던 길드원들 역시 던전으로 진입했다.
"커헉."
"뭐, 뭐야. 숨이."
"몸이 무거워...."
"다들 앉아서 몸이 적응되길 기다려. 조금만 참으면 익숙해질 거다."
급격한 환경 변화는 각성자들의 몸에도 부담을 가했다.
그래도 다들 인간을 초월한 단계라서일까.
조금만 기다리면 몸이 적응해 꽤 버틸 만해진다.
슬쩍 팔을 흔들어보았다.
살짝 삐걱거리는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음. 적응이 돼도 움직이기 어려운 건 변함없네.'
우리가 살던 지구와는 환경 자체가 조금 다르단 거겠지.
[인간종에게 친화적이지 못한 환경입니다.]
[모든 스탯이 소폭 감소합니다.]
저 문구에 의하면 이 공간 자체가 우리에게 디버프를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버프라.
적들의 피어 계열 공격으로 인해 받아 본 적은 있다만.
그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디버프가 걸린 경험은 처음.
역시 태준이 녀석이 공략을 만류했던 이유가 있을 만한 곳이다.
부대원들의 진입을 기다리며 주변 공간을 관찰했다.
'천장은 그냥 지하철하고 비슷하네.'
붉게 타오르는 조명탄의 빛에만 의지해야 하는 탓에 시야가 좋지는 않다.
그래도 자세히 보면 공사 중인 지하철의 흔적이 군데군데 보였다.
문제는 천장이 아닌 땅.
우리 부대원들이 밟고 있는 약간의 땅만이 지하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 너머의 바닥에 슬쩍 손을 집어넣었다.
스르륵....
쥐었을 때의 감촉도 그렇고.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는 이것은 일종의 모래 같아 보였다.
우리가 아는 그것과는 다를 가능성이 크겠지만.
"후우. 신 병장님. 전원 입장 완료했습니다."
"일단 의준이랑 중수... 치료사랑 사제한테 부대원들 컨디션 복구부터 서둘러 달라고 하자. 공략을 어떻게 진행할지는 그다음-."
그 순간.
저 멀리 모래사막 안쪽.
'무언가 움직였다.'
최근에 스탯이 오른 덕인가.
묘하게 전보다도 예민해진 감각.
그 감각이 경고를 보내 왔다.
"다들."
"으어어. 예?"
"전투 준비."
"...!"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한 병사들도 많았지만.
명령이 떨어지자 곧바로 무기를 들고 몸을 일으키는 녀석들.
슈슈슈슈슉.
무언가.
모래사막을 헤치고 접근해 오고 있었다.
아마도 한두 마리 정도가 아닌 그 이상.
그리고.
-캬야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모래 속에서 거대한 벌레가 튀어 올랐다.
"사격 개시!"
타앙!
서수혁 상병의 함성과 함께 사수들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모래 안에서 튀어 올라 아군을 향해 날아들려 하던 괴물의 몸에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첫 번째 괴물은 시작에 불과했다.
"몰려옵니다!"
"전사조는 후위를 지킨다! 마법사, 사수들은 계속 쏴!"
두꺼운 외골격을 지닌 검은색 벌레 같은 모습의 괴물들.
그런 녀석들이 계속해서 모래 안에서 튀어 나왔다.
그에 대항해 우리 쪽의 원거리 계열 각성자들의 화망이 펼쳐졌다.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총성과 폭발음.
'미친, 몇 마리나 있는 거야.'
먹잇감을 발견한 메뚜기떼를 연상시킬 정도이다.
시야를 가득 메우며 덤벼드는 괴물들은 파도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막을 수 있다.'
디펜스 게임의 후반부를 연상시키는 모습.
몰려드는 적의 숫자는 엄청나지만, 그걸 정리하는 이쪽의 화력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샤아아아악...!
그런 식의 소모전이 어느 정도 지속되자.
괴물들도 우리의 화망을 뚫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더 이상 몰려오지 않게 되었다.
"후욱."
"뭐야 끝인가?"
"좀 더 와도 되는데."
숫자는 많지만 한 마리 한 마리가 강한 괴물은 아닌 듯.
마법사들과 사수들은 오히려 경험치 이벤트를 놓쳤다며 아쉬워했다.
뒤를 돌아 던전 깊은 곳으로 도망가기 시작하는 괴물들.
"놓칠 수 없지. 쫓아가겠습니다!"
"뭐?"
괴물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광일이 녀석이 외쳤다.
얌전히 보내주기보단 추격해서 정리하겠다는 듯.
광기를 어느 정도 해방시킨 전광일 상병이 괴물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
"어, 어엇?"
바닥을 박차고 뛰쳐나가 모래 위에 선 녀석.
그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기세 좋게 괴물을 사냥하러 달려 나가기는커녕.
묘하게 몸을 허우적거리는 모습.
"크으윽. 날 막지 마라...!"
자기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몸을 휘적거리는 녀석.
그리고.
녀석의 몸이 조금씩 모래의 안쪽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날뛸수록 점점 더 가라앉는 속도가 빨라졌으나.
광기로 인해 이성을 잃어버린 녀석은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몸을 흔들어 댔다.
"전광일! 움직이지 마!"
"시, 신 병장님. 윽."
그 와중에 내 목소리에는 반응하는 것인지 움직임을 멈춘 녀석.
하지만 이미 몸이 반쯤은 바닥에 처박힌 상태였다.
"끄, 끄으윽."
모래에 파묻힌 전광일 상병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녀석의 신체 능력은 부대에서도 최고 수준.
그런 녀석이 고통에 신음을 내뱉을 정도라니.
"밧줄 가져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병사 한 명이 가져온 밧줄을 급하게 광일이 녀석에게 던졌다.
밧줄을 붙잡은 녀석을 부대원 전원이 힘을 합쳐 끌어 올렸다.
"허, 허억."
"전광일, 괜찮냐."
"괘, 괜찮습니다."
어느 정도 진정된 녀석이 말했다.
"늪 같은 곳에 빠지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아무리 힘을 줘 봐도, 붙잡을 곳도 밟을 곳도 없으니 도저히 빠져나올 방법이...."
"고통을 느끼던데."
"움직일수록 모래 속으로 더 파묻히고, 파묻힐수록 모래가 몸을 압박해 오더군요. 마치 살아 있는 괴물처럼.... 솔직히 버티기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으음."
광일이 녀석의 신체 능력은 가히 인간 전차라 할 수준이다.
하지만 아무리 힘이 강하다고 한들.
붙잡을 곳 없이 무너지는 모래 속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다.
슬쩍 고개를 돌려 모래를 바라봤다.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유사로군."
사막의 개미지옥.
이 사막이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보통 유사는 저렇게 깊지 않잖아요? 게다가 바로 앞에 멀쩡한 땅이 있는데."
"보통 유사가 아니란 거겠지."
던전이란 건 괴물들이 자신들에게 적합한 환경으로 테라포밍한 공간.
저 사막 전체가 유사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묘한 마력 같은 게 느껴지는군."
마법사들의 조장.
이민재 병장이 사막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모래 전체에 미세한 마력이 퍼져있다. 저것들이 모래를 유사로 만들고 있는 거겠지."
저 안에서 뛰쳐나오는 괴물들은 상대할 만하다.
이쪽이 화망을 전개하면 접근하기도 전에 갈아 버릴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이래서야."
"우리도 안으로 진입할 수가 없겠는데요."
혹시나 해서 던전 입구를 통해 탈출해 보려 했으나.
[한번 입장한 던전은 공략이 완료될 때까지 탈출할 수 없습니다.]
들어올 때는 그림자에 불과했던 암막에 물리력이 생겨 있었다.
중도 이탈은 불가능이란 건가.
괴물들이 묘하게 약하다 싶을 때 눈치채야 했다.
태준이 녀석의 점괘는 이 던전의 난도가 꽤 높다는 듯 말했지.
그에 반해 약해 빠진 괴물들.
던전의 난도를 높인 건 괴물이 아니었던 거다.
이곳의 환경.
그 자체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방법을 떠올려 보자."
조장들을 중심으로 부대원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었다.
"밖에 있는 공병들한테 부탁해서 사막을 건널 만한 장비를 가져와 달라고 하는 건 어때요?"
"얼마나 깊을지 모르는데, 그만한 자재들이 있을까요?"
"이상아 조장도 공방에서 활동하니, 자재들의 양 같은 건 알지 않나? 어때?"
"그야... 그 정도는 없죠."
이상아의 의견.
기각.
"마법사들을 이용해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빙결 마법을 건다면 길을 만들 수는 있을 거다."
"현실성은 있지만, 중간에 마법사들의 마력이 고갈되기라도 한다면."
"다 같이 죽겠지."
이민재의 의견도 안타깝게 기각.
그 외에도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이거다 싶은 내용은 없는 것 같았다.
잠깐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슬쩍 몸을 일으켜 구석으로 이동했다.
뭐라 뭐라 떠들며 의견을 나누는 조장들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모래 안쪽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찾았다.'
내가 원하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방금 광일이 녀석을 구할 때 썼던 밧줄을 주운 뒤.
거기에 식칼을 묶었다.
그리고.
파악!
사막 안쪽에 있는 그것을 향해 식칼을 던졌다.
식칼이 꽂히는 소리.
나는 그 밧줄을 끌어당겼다.
갑각을 뒤집어쓴 곤충 같은 생김새.
물고기와 바퀴벌레를 반반 섞어 놓은 듯한 외견에 입 안에는 톱날 같은 살벌한 이빨이 달려 있었다.
[식재료 감별]
[검은 모래 벌레 유충]
도저히 맛있을 수가 없어 보이는 외형이긴 하다만.
...뭐.
어떻게 요리하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어.
65화 지하철 (3)
[하급 요리 비법 - '검은 모래 유충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검은 모래 유충 손질법]
[온갖 물체에서 수분을 흡수하고 섭취, 분해하는 해충. 검은 모래의 유충.]
검은 모래는 생활 환경을 사막화하는 습성 탓에 많은 세계에서 해충으로 분류되지만, 의외로 뛰어난 맛으로 인해 선호하는 마니아들도 존재한다.]
[손질을 위해서는 우선 목 부근을 찔러 숨통을 끊고 피를 빼낸 뒤 갑각을 분리하고-.]
[완벽히 퇴화되어 시각기관으로써의 기능을 잃은 눈알은 오로지 요리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훌륭한 식재료로써, 손질할 때는 가장 주의를 기울여 상처 없이 분리해야-.]
[요리사의 눈]을 발동.
머릿속에 들어온 손질법에 따라 [검은 모래 벌레 유충]을 손질했다.
'처음엔 가볍게.'
아예 자리를 깔고 앉은 뒤.
프라이팬에 손질한 살점을 올리고 살짝 굽는다.
가장 간단한 조리법.
[하급 요리사의 건성으로 만든 검은 모래 유충 구이]
[체력 능력치가 소폭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특성 '외골격(열화)'를 획득합니다.]
간단하게 만든 만큼 완성물이 썩 대단한 녀석은 아니었다.
그 부분이야 의도한 거니까 상관없고.
중요한 것은 이걸로 발동되는 효과.
그게 던전 공략에 도움이 되냐, 아니냐인데.
"외골격이라."
바퀴벌레 같은 외형인 만큼.
이 녀석으로 요리를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특성은 그 외골격이라는 뜻.
"꽝이네."
뭐 상황 따라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겠지.
당장 우리가 전투력이 모자란 건 아니니까.
파악을 마친 나는 완성된 구이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다지 유의미하지는 않은 수준의 버프가 몸 안에 도는 것이 느껴졌다.
'음?'
버리기는 아깝다는 생각에 털어 넣은 요리였다
몸 안에 도는 버프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나.
입 안에 담긴 고기.
거기서 느껴지는 것이 하나.
'이거. 새우 맛이 나는데?'
구운 살에서 나는 맛.
영락없는, 새우의 그것이었다.
...바퀴벌레랑 새우가 같은 조상을 지닌다고 했나?
자체적으로 소금 간이 된 듯한 묘한 짠맛을 제외하면 매우 유사한 맛이 났다.
특히 탱글거리는 식감 쪽이.
'음. 그렇다면.'
나는 본격적인 요리 준비에 들어가기로 했다.
얌전히 앉아서 회의를 듣던 이들 중 화염 마법사 한 명에게 다가가 말했다.
"홍수야. 여기 불 좀 피워 주라."
"아. 요리하시려는 겁니까?"
"어. 가스버너 화력으로는 좀 모자랄 것 같네."
화염 마법사에게 부탁해 바닥에 불을 피운 뒤.
그 주위에 적당한 지지대를 세우고 그 위에 냄비를 올렸다.
그리고 가방을 연 뒤.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비장의 재료 하나를 그 안에 부었다.
[혼재된 마력의 동물성 기름]
몬스터들의 지방으로 만든 기름.
여러 몬스터를 섞은 탓인지 이 자체로 발동하는 효과는 없지만, 이걸 통해 만든 요리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기름이다.
식어서 고체화돼 있던 기름이 열기에 녹아 식용유로 변해 갔다.
그 뒤에는 곧바로 재료의 준비에 착수했다.
'검은 모래 벌레 유충'의 살점.
그리고 가장 맛있는 부위라는 눈알.
그 둘을 섞어서 비벼 줬다.
눈알이 터져 나오며 소스가 되어 살점과 비벼졌다.
'좀 징그럽기 한데.'
뭐.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거든.
조물조물.
재료를 잘 섞어 준 뒤.
박씨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중식도, [검정 중식]을 꺼내 든다.
그리고.
다다다다다다다....
섞어준 재료를 다져 줬다.
잘게 다져진 재료들을 적당한 양으로 나누어 소분한 뒤.
부대에서 가져온 보급품을 쌓아 놓은 장소로 간 나는 필요한 물건을 찾았다.
'분명 챙겨 왔을 텐데... 아!'
그 안에서 꺼내든 물건은.
[하급 요리사의 정성이 들어간 식빵]
마트에서 얻은 밀가루 등을 이용.
부대원들을 위한 요리를 하면서 짬짬이 요리책을 보며 만들어 둔 식빵이다.
부대원들의 전투식량이 육포이다 보니 그냥 먹기 심심할까 봐 샌드위치로라도 제공해 줄 생각에 가져온 물건.
이 자체로도 음식으로써 쓸 만하지만.
이번엔 또 다른 식재료로 활약해 줄 예정이다.
식빵을 사 등분 한 뒤.
미리 소분해 놓은 재료들을 그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이제 기름만 확인하면 끝인가.
"홍수야, 기름 온도 어느 정도인 것 같냐?"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음?"
불을 피워 주고 있던 화염 마법사에게 물었다.
그 직업대로 화염에 관련된 일에 특화된 녀석들이라 온도에 관한 것도 본래라면 자세하게 알 수 있을 텐데.
"기압의 차이 때문인지... 화력이 원하는 대로 나오질 않아서요. 의식한 것보다 불이 좀 강하게 나오네요."
"아아. 그럴 수 있겠네."
산소 농도도 중력도 바깥과는 다른 공간.
화력 조절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으니.
화염 마법사임에도 기름 온도를 가늠하기 힘든 모양.
그렇다면.
"직접 알아보지 뭐."
"예?"
손을 깨끗하게 씻은 뒤.
부글부글 끓고 있는 기름 솥.
그 안에 검지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쏙.
"오. 이 정도면 적당하네."
"우, 우아악!?"
그때.
내가 요리하는 걸 지켜보던 몇몇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깜짝이야.... 무슨 일이야?"
"아니, 신 병장님이야말로 뭐 하시는 겁니까!?"
"응?"
뭐 하는 거냐니.
"요리를 해야 하는데 온도계가 없으니까, 손가락으로 온도 체크를 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일입니까?"
"아. 뭘 걱정하는진 알겠는데,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변명했다.
"손은 깨끗하게 씻었거든. 이래 봬도 취사병이야. 위생은 철저하게 지키는 편이지."
"그런 걱정이 아닙니다만...."
그러면서 내 검지손가락을 바라보는 병사들.
아.
위생이 아니라 내 손을 걱정한 건가.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요리사로 각성하며 얻은 특성 [화염 친화].
거기에 최근에 능력치도 많이 오르다 보니.
어지간한 열기는 솔직히 아무렇지도 않다.
요리하기 전에 온도 체크를 몸으로 때운 지도 꽤 됐고.
나야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 거지만.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볼 일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남들이 보면 놀랄 만한 광경이었나 보네, 이거.
"휴우, 아무렇지 않다니 다행입니다만."
"놀랄 만한 일은 자제해 주십쇼. 길드장이시니까... 몸조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큼. 미안하게 됐네."
어쨌든.
온도는 이 정도면 적당한 듯하니.
준비한 재료들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잡아 든 뒤.
기름 솥 안에 투입해 주었다.
보글보글.
기름 속에서 튀겨지는 재료들.
재료들이 조금씩 갈색으로 변했다 싶을 때.
한 번 전체적으로 꺼내 준 뒤.
온도를 조금 식힌 후, 다시 한번 기름 속에 넣어 줬다.
총 두 번의 튀김 과정을 거치고 나자.
[하급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검은 모래 멘보샤.]
[섭취 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섭취 시, 대지 속성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섭취 시, 물리 저항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요리가 완성되었다.
"오. 멘보샤입니까."
"그래. 맛있겠지?"
식빵 사이에 다진 새우를 넣고 튀겨서 만드는 요리.
괴물의 고기에서 새우 맛이 난다는 걸 깨달은 시점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요리다.
마침 재료도 있겠다 한번 시도해 본 건데.
으음.
생각보다 때깔이 괜찮네.
"저 괴물을 재료로 썼다고 하면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맛있어 보이지 않냐."
"전 상관 없이 잘 먹을 자신 있습니다."
지켜보던 병사들이 완성된 요리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바퀴벌레를 닮은 괴물로 만든 요리.
저걸 먹느냐 마냐로 의견이 오가는 것 같은데.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모습.
난 어이가 없어져서 말했다.
"이거. 내가 먹으려고 만든 건데."
"...예?"
물론 이유는 있다.
괴물을 처치하기 위해 펼친 부대원들의 화망.
그 화력이 워낙 대단했다 보니.
"괴물들 사체 대부분이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더라고. 멀쩡한 건 이거 하나 정도?"
병사들 줄 양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걸 자기들이 먹네 마네로 싸우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그거 오늘 식사 아니었습니까?"
"맞긴 한데, 내 식사지. 너희들은 전투식량 있잖냐. 그거 먹어."
"아니, 무슨 음식 고문도 아니고...."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다."
내 새로운 요리를 어지간히 기대한 것일까.
병사들의 절망감 섞인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 전투식량도 최대한 열과 성의를 다해서 맛있게 만든 건데.
계속해서 시선이 느껴지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최대한 그 시선을 무시한 채.
완성된 요리를 입 안에 옮겨 넣었다.
파사삭.
바삭하게 튀긴 빵을 씹자마자 기름 섞인 육즙이 튀어나왔다.
그 안쪽에는 탱글탱글한 고기가 씹혔다.
겉바속촉.
환상적인 식감.
씹으면 씹을수록 기름과 육즙이 뒤섞여 더 깊은 맛을 냈다.
"오. 내가 만든 거지만, 이거 진짜 맛있네."
"아, 악랄한...!"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나라고 이 인원들 사이에서 혼자 요리해 먹는 걸 즐길 정도로 인성이 바닥인 건 아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식사거든.
[음식을 섭취하였습니다.]
['절대 미각'의 효과를 발동하시겠습니까?]
그 이유가.
바로 이것.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을 본 나는 망설임 없이 중얼거렸다.
'발동한다.'
[스킬 - '절대 미각'이 발동합니다.]
[극한의 경지에 도달한 미각.]
[요리에 숨어있는 맛을 느끼는 것은 물론 특정한 맛에 집중하는 것 역시 가능합니다.]
최근에 얻은 스킬.
[절대 미각].
남에게 버프를 주는 것이나, 요리 재료를 파악하는 것 등이 중점인 다른 요리 스킬들과 달리.
이건 나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스킬이다.
이 스킬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효과 1 (패시브) - 자신에 한해, 요리를 통해 얻는 효과가 긍정적으로 크게 상승합니다.]
나 자신에 한해, 내가 먹는 요리의 성능을 극대화해주는 능력.
쉽게 말해 버프 효율 증가다.
능력치 물약에도 효과가 적용된 덕분에 쏠쏠한 성장을 이뤘지.
이것만 해도 어마어마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지.'
저런 첫 번째 효과도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강력한 능력.
두 번째 효과는 바로 이것.
[효과 2 (액티브) - 본인에 한해, 요리에 담긴 작은 [특징]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됩니다.]
이번에 발동한 효과는 이 두 번째 효과다.
스킬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자, 곧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시스템 창.
[주의!]
[해당 효과를 사용할 시, '절대 미각' 스킬로 인한 효과를 제외한 모든 버프 효과가 제거됩니다.]
[요리가 가진 기존의 효과가 모두 취소됩니다.]
[새로운 효과가 적용됩니다.]
[원하시는 특성을 선택하세요.]
[하급 치악력 상승]
[하급 전투력 상승]
[외골격]
[흑사의 방어 갑각]
[검은 모래의 기운]
.
.
.
눈앞에 나열되는 특성들.
그 설명을 하나하나 읽은 뒤.
'찾았다.'
내가 원하던 특성의 이름을 선택했다.
[요리의 효과가 선택한 특성으로 대체됩니다.]
나는 내가 만든 멘보샤의 효과를 다시금 떠올렸다.
[하급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검은 모래 멘보샤.]
[섭취 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섭취 시, 대지 속성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섭취 시, 물리 저항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이랬던 요리의 효과.
준수하긴 하다만.
지금 필요한 능력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단 말이지.
그렇기에.
내게 적용된 효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적용중인 버프]
[하급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검은 모래 멘보샤.]
[특성 - '검은 모래의 기운'을 획득합니다.]
식사를 마친 나는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킨 뒤.
병사들을 지나 발걸음을 옮겼다.
"에휴, 우리도 전투식량이나 먹어야지."
"'전투식량이나'라고 하기엔, 이것도 엄청 맛있지 않냐."
"그렇긴 해."
"어? 신 병장님? 어디 가십니까?"
전투식량을 꺼내 식사를 준비하던 병사들이, 몸을 일으킨 나를 보며 말을 걸었다.
나는 대답 없이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어, 어?"
"신영준 병장님?"
"군단장님! 멈추십쇼!"
몇몇 병사들이 나를 부르지만.
멈출 생각은 없다.
계속해서 걸어가는 나를 병사들이 만류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전광일 상병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던 저 사막의 유사.
그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니까.
"이런 미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병사들이 소리치며 일어났다.
"저, 정신 계열 공격인가?"
"신 병장님이 미치셨다! 잡아!"
"이상한 걸 혼자 드시더라니!"
나를 붙잡기 위해 몸을 날리는 병사들.
하지만 늦었다.
내 발이 모래사막 위에 올라갔다.
광일이 녀석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고 압사시키려 들었던 기괴한 사막.
그러나.
"신 병장니... 어?"
"...뭐야?"
"안 빠지시는데?"
유사에 빠져 허우적댈 것이라는 병사들의 예상과 달리.
내 몸은.
사막 위에 더없이 편하게 서 있는 상태였다.
[검은 모래의 기운]
[활동 영역 일대를 유사로 만드는 종족 검은 모래 벌레들만이 가지는 특별한 특성입니다.]
[몸에서 특수한 기운이 방출됩니다.]
[이 기운을 품은 개체는 검은 모래의 영역에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슬쩍 사막 위로 발을 굴려보았다.
사르륵 흩어지는 모래의 느낌.
"나쁘지 않네."
66화 지하철 (4)
"아, 안 빠지시네?"
"신 병장님? 괜찮으신 겁니까?"
"보면 알잖아? 멀쩡해."
모래 위로 이동하려는 나를 붙잡으려던 병사들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당연히 광일이 녀석처럼 사막에 잡아먹히지 않을까 했는데.
멀쩡하게 서 있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겠지.
"설마 이 모래사막이 다시 정상화된 겁니까?"
"어쩌면 전광일 상병님만 그랬던 걸지도."
"그럼 나도-."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다들 정지!"
내가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사막이 평범하게 바뀌었다 생각하는 병사들.
녀석들이 나를 따라 들어오려고 하는 모습을 본 나는 급하게 손을 뻗어 녀석들을 막았다.
'조금 장난쳐 보려고 했다가 큰일 날 뻔했네.'
나야 멀쩡하게 서 있다만.
녀석들이 이 위에 발을 올리는 순간 곧바로 유사에 빠져들 게 뻔했다.
"스킬의 효과야."
"스킬이라니."
"요리사의 스킬에 그런 것도 있습니까?"
[절대 미각]
그 두 번째 효과.
[절대 미각이, 요리가 가진 '특징' 한 가지에 집중합니다.]
요리 속에 담긴 재료의 작은 맛 하나도 캐치해 낸다던가.
뭐 이런저런 복잡한 설명이 붙어 있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재료로 쓰인 몬스터가 가진 특성. 그중 하나를 골라서 얻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버프에 불과하나.
특성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도 안 되게 강력한 능력이었다.
"광일이 녀석은 모래에 발만 들이밀어도 빠지는데. 저 괴물 녀석들은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잖냐. 유사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워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야.
"아, 그래서."
"뭔가 그걸 가능하게 하는 특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그 특성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나 역시 저 괴물들처럼 자유롭게 사막을 이동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바로 이 특성이다.
[검은 모래의 기운]
[활동 영역 일대를 유사로 만드는 종족, 검은 모래 벌레들만의 특별한 특성입니다.]
[몸에서 특수한 기운이 방출됩니다. 이 기운을 품은 개체는, 검은 모래의 영역에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검은 모래 벌레 자신들을 제외하고 이 특성을 지닌 개체는 없습니다.]
지금 내 몸에서는 저 몬스터들이 내뿜는 것과 같은 기운이 나오고 있다.
남들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같은 기운을 뿜는 이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종류의 기운.
이 기운을 뿜고 있는 지금.
사막에 퍼져 있는 기묘한 마력은 나를 아군으로 인식한다는 거다.
사막 위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된 것.
"생각해 보면, 태준이 녀석의 점괘가 바뀐 이유도 이거 때문인 것 같아."
처음에는 내가 강해졌기 때문에 점괘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절대 미각]의 효과로 폭발적인 스탯 성장을 이뤘으니까.
하지만 막상 던전에 들어와 보니, 전력은 기존 전력으로도 충분했다.
문제는 사막의 환경.
내가 그 환경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점괘가 바뀐 거겠지.
"그, 그런 거였어요?"
"다들 놀랐지 않습니까."
"큭큭. 한 번 놀려 주고 싶었거든."
"다음에는 미리 말하고 해 줘라."
물론.
강력한 능력인 만큼 페널티도 많다.
능력치 상승 등.
본래 요리가 가지고 있던 다른 효과는 모조리 사라진다.
이 스킬 효과가 적용 중일 때는 어떤 버프도 받을 수 없기도 하고.
요리사답게 전투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편인 내게 버프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은 꽤 치명적이겠지.
거기에 또 다른 단점이 하나 더.
"그런 스킬을 얻으셨다니...."
"그러면 슬슬 저희한테도 적용시켜 주시죠. 그 능력으로 다 같이 치고 들어가면 이깟 괴물들은 아무것도-."
"아.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절대 미각은 요리의 실력을 늘려 주거나 그런 능력이 아니다.
말 그대로 요리사의 미각에 관련된 능력.
"이거. 나한테만 적용되는 능력이거든."
"예?"
아무리 미각이 좋다고 한들.
남이 먹는 요리를 더 맛있게 느끼게 해 줄 수는 없는 법.
절대 미각의 두 가지 효과 모두.
[자신에 한해]라는 제한이 붙어 있었다.
즉.
"다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다녀올 테니까."
저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건.
여기서 나밖에 없다는 뜻이다.
"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쇼!"
당연히 부대원들은 반발했다.
부대의 핵심 버퍼이자 길드장이기도 한 내가 단독으로 적진을 향하겠다는 얘기.
부대원들로서는 반발할 수밖에.
"뭐 어쩌겠냐. 방법이 이것뿐인데."
어떻게 설득을 해 볼까 하고 머리를 굴리기도 했지만.
대장의 단독 작전을 허락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이렇게 강행을 결정한 것.
이미 사막 위에 발을 올린 이상.
부대원들이 날 붙잡진 못할 테니까.
"다들 몸조심하고."
"자, 잠시만요 군단장님!"
"다녀올게!"
시끄럽게 떠드는 부대원들을 뒤로한 채.
모래에 뒤덮인 어두운 지하철역.
그 깊은 곳으로 발을 옮겼다.
목표가 어디 있는지는 대충 알 수 있다.
내가 밟고 있는 이 모래에서 느껴지고 있는 마력.
이 마력이 강해지는 곳을 향해 가다 보면.
이 사막을 만들어 낸 장본인을 마주하게 되겠지.
* * *
사악, 사악.
어느 정도 던전의 깊숙한 곳으로 진입하자.
이제는 나를 부르는 부대원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조용하군.'
어두운 공간 속.
모래를 밟는 내 발소리만이 들려왔다.
마음 같아선 어둠 속에서 시야를 얻게 해 주는 요리 같은 거라도 만들고 싶다만.
다른 요리의 효과를 보려고 하는 순간.
순식간에 사막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겠지.
바닥에서 느껴지는 마력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무작정 걸어왔지만.
슬슬 정말 아무것도 안 보였다.
군복의 주머니에서 만약에 대비해 가져온 조명탄을 꺼내 들었다.
조명탄을 횃불처럼 든 채 터트리자.
파지시시시식....
붉은빛이 어둡던 지하 공간을 밝혔다.
그렇게 시야를 확보한 내가 처음 발견한 것은.
'미친....'
온 벽면을 검게 물들인 벌레들의 무리.
검은 모래 유충.
우리를 공격했던 그 괴물들이 벽과 천장을 구분하지 않고 도배하듯 붙어 있었다.
숫자를 세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의 무리.
'벽면뿐만이 아닌가.'
내가 밟고 있는 이 모래.
그 부분 부분이 조금씩 출렁거리고 있었다.
안쪽을 돌아다니고 있는 유충들이 있는 모양.
'검은 모래의 부화장이라고 했나.'
괜히 부화장이 아니라는 것일까.
그 엄청난 숫자의 유충들을 보니,
아무리 나라도 좀 쫄릴 수밖에 없다.
여기선 저들을 갈아 버릴 아군의 화력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니까.
하지만.
'역시. 덤벼들진 않는군.'
내가 자살희망자도 아니고.
괴물들의 본진 한가운데를 아무 생각도 없이 뛰어든 건 아니거든.
조명탄의 빛이 파시식 소리를 내며 내 존재감을 과시하는 와중에도.
수없이 많은 괴물은 그저 각자 자신들의 할 일을 반복하기만 할 뿐.
나를 향한 공격은 없었다.
'예상대로.'
[검은 모래 유충 손질법의 깨달음]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눈알로, 완벽히 퇴화하여 시각기관으로써의 기능을 잃은 눈알은 오직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훌륭한 맛을-.]
손질법을 얻었을 때 알게 된 사실.
이 녀석들.
눈알이 남들 맛있으라고 존재하는 게 아니냐는 어이없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눈이 좋지 않다.
그렇다면 시각이 퇴화한 이들은 무엇으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느냐.
'지금 내 몸에서 나오고 있는 이 기운이겠지.'
벌과 같은 군집 생활을 하는 곤충들은 적과 아군을 페로몬으로 구분한다지.
이 검은 모래의 기운이란 것.
'딱 그 페로몬하고 비슷하다단 말이지.'
이 유사 속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막을 만든 존재에게 아군이라고 인식됨으로써 잡아먹히지 않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대놓고 괴물들 사이를 걷고 있음에도 공격해 오지 않는 것을 보면 추측은 정답이란 것이겠지.
저 숫자를 보면 다소 위축되기는 한다만.
위협은 없다고 확신한 나는 우글거리는 괴물들을 애써 무시하며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걸어가던 중.
바닥에 퍼져있는 마력이 급격하게 짙어지기 시작했다.
'목표가 가까워졌다.'
그 생각대로.
약간 더 안쪽으로 진입하자.
-키륵....
사람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크기의 벌레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바로.'
이 모래사막에 마력을 퍼트리고 있는 존재.
즉.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하급 요리 비결 - '검은 모래 무리 어미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무리 어미라.
이곳은 던전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저 녀석이야말로,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
'내가 처치해야 할 목표.'
던전을 공략하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던전 내의 적의 전멸.
혹은 보스의 처치다.
현실에 생겨난 던전이라고 한들, 이 규칙을 벗어나진 않겠지.
저 녀석을 처치하면 아마도 던전 클리어로 인정될 터.
어떤 버프도 제공받지 못하는 상황.
결코 쉬운 전투는 아니겠지만.
'해내야만 해.'
각오를 다진 나는, 허리춤의 칼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한번 심호흡을 한 뒤.
[독고 구식]을 뽑으려던 바로 그 순간.
쉬익!
"...!"
무언가가 눈앞으로 날아왔다.
'무리 어미'의 머리.
몸뚱어리는 저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뱀처럼 길어진 목과 얼굴만이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선공을 뺏겼다!'
안 그래도 불리한 전투.
그 전투가 더욱 어려워질 것 같다는 직감과 함께.
나는 급하게 팔을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공격이, 없어?'
예상했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예상했던 공격 자체가, 날아오지 않았다.
공격은커녕.
오히려.
-끼륵. 끼륵.
자신의 머리를 내 팔에 부드럽게 비비는 [무리어미]
그 입에서는, 괴물의 구강 구조에서 나온 것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부드러운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이거 설마.'
무슨 일인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기는 이 무리 어미가 아이를 낳는 부화장.
'이 녀석, 설마.'
그리고, 요리의 효과로 인해.
내게는 녀석의 동족만이 내뿜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을 테니.
'나를 자기 자식으로 여기고 있는 건가.'
* * *
-끼륵... 끼륵끼륵.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주변을 맴도는 '무리 어미.'
그 행동에 적의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성애가 있다는 건가.... 이 괴물들이.'
괴물들에게도 지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저 리자드들만 해도 작전을 구사해 가며 우리를 공격해 왔으니.
하지만.
지능과 감성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자식을 낳기만 할 뿐. 보살피지는 않는 생물들도 많으니까.'
던전은, 괴물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맞춰 환경을 개조한 결과라던가.
우리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말 그대로 침략 행위.
이 녀석 역시.
인간의 대지를 마음대로 침범하고 개조한 침략자다.
하지만.
부화장이라.
'그 침략은 결국 자식을 위한 일이었다는 건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 녀석의 자식들을 학살했다.
그런 내가.
이제는 나를 자식으로 여기는 이 괴물의 목을 베어야 한다니.
'차라리 그냥 덤벼들었으면. 전력을 다해 죽였을 텐데.'
내 앞에 목을 들이밀고 있는 괴물이지만.
칼을 쥔 손에는 쉽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엄마.'
지금까지 애써 잊고 있었던.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부모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 * *
그렇게 한참을 칼을 휘두르지 못한 채 서 있자.
-끼륵? 끼륵끼륵.
그런 내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것일까.
무리 어미의 태도가 약간 바뀌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무슨 일 있니?'라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는 녀석.
'죽이긴 해야겠지.'
영 꺼림칙하긴 하지만.
이 녀석을 처리하지 않으면 죽는 건 우리가 될 테니.
칼을 쥐고 휘두르려는 그때.
길게 늘어난 무리 어미의 머리가 몸통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더니.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장소로 향했다.
-케륵!
그곳에 있던 무언가를 물고 와 내 앞에 던지는 녀석.
기운 없는 자식에게 선물을 건네는 듯한 모습.
하지만.
녀석이 떨어트린 물건을 본 나는, 선물을 받은 아이 같은 반응을 보일 수는 없었다.
바싹 마르고, 비틀어져 있지만.
원래의 형태는 온전히 남아 있는 그것은.
인간의 시체였다.
'....'
-케륵!
내가 반응하지 않자.
사체를 계속해서 내 쪽으로 미는 무리 어미.
행동의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보고 자식이 기운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힘내라고 식사를 권한 것이리라.
이것 또한.
온전히 모성애에서 비롯된 행동.
나는 무리 어미의 몸이 위치한 저 깊숙한 곳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몸통에 가려져 완벽하게 보이진 않지만.
구석구석에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수분이 모두 사라진 인간의 신체 부위.
뼛조각.
해진 작업복.
헬멧을 쓴 인간의 머리통.
'공사 중이던 지하철역... 인부들이구나.'
서수혁 상병의 말이 떠올랐다.
공사 중이던 역인 만큼, 멸망의 날에 죽은 인부들이 있을 터.
그들의 좀비가 습격해 오지 않을까 했지만.
이상하게도 역 근처에 좀비는 한 마리도 없었지.
우연히 공사를 쉬었던 건가 생각했었지만.
아니었다.
'먹이로 삼기 위해 죽인 거다.'
이들 또한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인간들.
나를 자식처럼 대하는 모습에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녀석들의 본질이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들이라는 사실을.
그 행위가 모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들.
이 녀석이 나를 제 자식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들.
가장 중요한 건 바뀌지 않는다.
나는 인간으로서.
이 녀석을 용납해선 안 된다는 것.
'선이니, 악이니. 그런 문제는 아니다.'
녀석이 인간을 먹은 것은 악행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과 자식들의 생존을 위한 행위.
살아남기 위한 투쟁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이니.
'나 역시 그랬고.'
살아남기 위해 이 녀석의 자식을 먹어치웠다.
그 능력으로 여기까지 도달했다.
먹는다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행위.
내가 녀석의 자식을 먹고 이곳에 온 것처럼.
녀석은, 인간을 먹음으로써 자식들과 생존하려고 한 것일 뿐.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나.
'살아남는 것.'
이 녀석도.
나도.
결국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어야만 하는 관계라는 거다.
그러니.
"너무 미워하진 마라."
-케륵?
괴물들에게 먹히는 입장이 될 바에야.
괴물들을 잡아먹고, 살아남는 쪽이 되리라고.
한참 전에 각오했던 일.
나는 한 손으로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꺼내 쥐었다.
커다란 중식도, [독고 중식].
두껍고 무거운 날은 어지간히 단단하고 두꺼운 재료도 쉽게 손질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콰직!
나를 전혀 경계하지 않는 괴물의 목 정도는.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잘라 버릴 수 있었다.
띠링.
['검은 모래 무리 어미'를 사냥하였습니다.]
['검은 모래 무리 어미'의 스킬, '검은 모래의 대지'가 취소됩니다.]
[던전이 붕괴됩니다.]
무리 어미의 목이 잘린 채로 바닥을 뒹굴자.
땅에 퍼져있던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모래사막은 이 무리 어미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
그녀가 사망하자.
던전의 환경이 급격하게 붕괴하기 시작했다.
-키야아아아아아악!?
벽면에 도배되듯 붙어 있던 유충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어미의 죽음과 부화장의 붕괴를 눈치채고 당황한 것이겠지.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길드 메시지창을 열었다.
[셰프 : 보스 몬스터를 처치했다. 바닥도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있을 거야.]
[광전사 : 신 병장님! 괜찮으십니까!?]
[마법청년 : 영준이 너 이 자식...!]
[셰프 : 보스를 잃은 괴물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지금이야말로 기회야. 남은 몬스터들 처리는 그쪽에 맡길게.]
길드 메시지를 통해 본대에 명령을 내린 뒤.
나는 무리 어미의 사체 위에 걸터앉아 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콰아아아앙....
저 멀리서부터 엄청난 진동이 느껴졌다.
본대의 병사들이 전투를 개시한 것.
이 던전의 몬스터들은 숫자는 많을지언정 강하지는 않다.
부대에는 광역 공격에 특화된 마법사들도 많으니.
군단의 화력 앞에 가루가 되어 쓸려 갈 일만 남았겠지.
그리고.
그 사실을 시스템 또한 인정했다.
띠링.
[던전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인간종 최초로 던전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앞서 나가는 이들을 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67화 마을 (1)
[던전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인간종 최초로 던전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앞서 나간 이들을 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던전 클리어 보상.
괜히 복잡해진 감정을 풀어 주기에 충분한 메시지였다.
[던전 공략에 참여한 인원들의 공헌도를 조사합니다.]
[1위. 신영준(하급 요리사) - 91%]
[2위. 정홍수(하급 화염 마법사) 0.4%]
[3위 ....]
...그런데.
'공헌도가 91%라니.'
이해는 간다.
이번 던전 공략, 사실상 솔로 플레이나 다름없었으니.
던전의 장애물이 환경이었던 탓에 정작 전투는 별로 없었고.
'가장 중요한 보스의 처치만이 공헌도에 영향을 크게 준 것이겠지.'
내가 먹지 못한 나머지 9%는, 던전에 진입한 초반 전투의 공헌도인 것 같았다.
광역 공격에 특화된 데다가, 환경 변화의 영향 때문인지 평상시보다 화력이 강해졌다고 말한 화염 마법사.
홍수가 2위를 차지한 게 보였다.
[공헌도에 따라, 경험치와 포인트가 부여됩니다.]
[당신의 공헌도 - 91%]
첫 번째 보상은, 포인트와 경험치였다.
그리고, 내 공헌도는 무려 91%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포인트를-.]
"크읍...."
경험치가 부여된다는 메시지와 함께.
내 몸을 향해, 익숙한 기운이 몰아친다.
처음 각성을 할 때 몸 안에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던 기운.
경험치.
몰려드는 경험치의 양이 너무 많았던 탓에 잠깐 숨쉬기가 힘들어질 정도였다.
그 결과.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Lv. 20에 도달하셨습니다.]
[Lv. 21에 도달하셨습니다.]
한참을 10레벨대에 머물던 내 레벨.
드디어 마의 20을 넘겼다.
심지어 거기서 하나 더 올라 21레벨에 도달했다.
[승급이 이루어집니다.]
[하급 요리사 → 중급 요리사]
[중급 요리사.]
[견습 요리사를 거치고, 하급 요리사를 거쳐. 이제는 어엿한 중견 요리사가 된 당신.]
[이제는 어디에서도 무시당하지 않을 훌륭한 요리사가 되었습니다.]
[모든 특성이 중급으로 진화합니다.]
[스킬을 획득합니다.]
[오병이어(new!)]
[빵 다섯 개와 두 마리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인 기적의 일화를 아십니까?]
[이제 당신에게는 기적이 아닌 현실입니다.]
[적은 요리로 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게 됩니다.]
[요리를 공유하는 인원이 늘어날수록 마력 소모량이 증가합니다.]
승급과 동시에 진화하는 특성.
그리고 새로운 스킬까지.
보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종 최초로 던전을 공략하였습니다.]
[앞서가는 이들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칭호 - 문을 닫는 자]
[최초의 던전 공략자.]
[모든 스탯이 10% 상승합니다.]
[던전 내부에서 발휘하는 모든 효과가 30% 증가합니다.]
"와우."
두 번째로 주어진 보상은 칭호.
인간 중 첫 번째 던전 공략이라는 의의가 있어서일까.
보상으로 얻은 칭호의 효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던전 내부에서의 효과 상승은 그렇다 쳐도,
스탯의 10% 상승.
시간이 지나, 기본 스탯 자체가 높아질수록 더욱 빛을 발할 특성.
그것도 나 개인만이 아니고 공략에 참가한 전 부대원에게 주어진 것이다.
[검은 모래 벌레의 무리 어미를 처치하였습니다.]
[한 종족의 수장을 처치하였습니다.]
[업적 - 킹 슬레이어의 조건을 일부 달성하였습니다. (2/3)]
[업적의 부분 달성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 특성 강화권x1]
다음 보상은 익숙한 것이었다.
탄약대대를 점거하던 여왕을 처치했을 때 나타난 것과 같은 내용.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도 특성 강화권으로 같았다.
'특성 강화권. 이것도 엄청난 보상 같은데.'
이걸 통해 강화한 식재료 감별 특성은 아예 상대의 특성, 스탯까지 보여 줄 정도로 강화되었다.
이런 강화권을 중간 보상으로 주는 업적이라니.
달성 보상은 어느 정도라는 걸까.
그리고.
던전 공략의 마지막 보상이 주어졌다.
[던전 – 검은 모래 유충의 산란지를 공략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집단 스킬'이 주어집니다.]
[군단의 기운(new!)]
[길드. '강철 군단'에 가입한 이들에게만 부여되는 특별한 특성입니다.]
[몸에서 군단의 기운이 방출됩니다.]
[같은 기운을 가진 이들은, 이 기운을 통해 동료임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같은 기운을 지닌 이들이 일정 이상 모여 있을 시 시너지 효과가 발휘됩니다.]
집단 스킬.
개인이 아닌 집단 단위로 적용되는 스킬을 말한다.
우리 길드는 이미 하나 보유하고 있다.
병사들이 모두 달고 있는 군번줄.
그 군번줄에 능력치 증가 효과를 달아 준 '군단의 증표.'
[길드 : 강철 군단]
[군단원 : 191]
[길드 스킬 : 군단의 증표, 군단의 기운]
거기에 군단의 기운이 추가되었다.
새롭게 주어진 특성이지만 묘하게 익숙한 내용이었다.
'이거. 이 던전의 괴물들이 가지고 있던 [검은 모래의 기운]의 효과하고 거의 똑같은 거 같은데.'
공략한 던전의 괴물들이 가지고 있던 특성과 매우 유사한 보상.
이런 게 그냥 우연일 리는 없고.
'던전을 공략한 보상이라는 건, 그 던전과 관련된 게 나오는 걸지도.'
잘은 모르겠지만.
특성의 효과는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몰아치는 보상들을 모두 확인할 때쯤.
저 멀리서.
친숙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신 병장님!"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곳은."
"보면 알잖아? 멀쩡해."
괴물들을 정리하며 접근해 온 부대원들이 호들갑을 떨며 내 상태를 확인하려 들었다.
"영준이 너 이 자식...."
"정말이지, 다신 이런 짓 좀 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진짜 놀랐거든요."
"미안. 이번엔 다른 방법이 없었거든."
내가 무리한 짓을 한 것도 맞고.
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을 한 것도 맞다 보니.
할 말이 없지 뭐.
그때.
"어, 그런데 저건?"
근처에 도착한 병사 중 하나가 구석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보고 놀란 듯한 모습.
"뭡니까. 저 징그러운 건!"
"무슨 벌레가, 사람보다 두세 배는 될 것 같네. 우윽."
"징그럽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강해 보이는데. 왜 이런 곳에 죽어 있는 거지?"
뭘 보고 놀란 건가 했더니.
'무리 어미'의 사체를 말하는 거였다.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야."
"예?"
"적을 빨아들이는 사막의 마력도 이 녀석이 흩뿌리고 있던 것 같더라고. 이 녀석을 처치하니까 던전이 붕괴하더군."
무리 어미 사체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병사들이 있는 것 같았기에.
숨길 것도 아니겠다 싶어 정체를 알려 주기로 했다.
그런데.
"...."
"보스라니. 확실히 그만한 비주얼이긴 한데."
"저것 봐. 다른 상처는 하나도 없고 목만 깔끔하게 베었어. 일격에 죽인 거다."
"죽을 때 고통도 없었겠군."
"...맙소사."
뭐라 중얼거리며 나를 보는 병사들.
녀석들의 시선이 뭔가 이상하게 변했다.
뭐랄까.
경악에 찬 눈빛.
무리 어미의 사체와 나를 번갈아 보던 이상아가 묘한 말투로 물었다.
"아까. 길드 메시지로 보스를 처치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랬지."
"...혼자서 적진으로 쳐들어가나 싶더라니."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이상아.
"자신이 있어서 그러신 거였구나."
* * *
그렇게 본대에 합류한 뒤.
본격적으로 전투의 후처리가 시작됐다.
괴물의 사체들 중 요리로 쓸 수 있을 만큼 온전한 것만 골라 옮기는 작업을 하던 중.
"그러고 보니 내가 혼자 보상을 독식한 것처럼 됐네. 미안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나서 말했다.
던전 공략은 우리 길드의 성장을 위한 선택이었다.
부대원들이 던전 공략이라는 위험한 일에 주저 없이 동참해 준 것도 본인들의 성장을 위해서였겠지.
그런데 막상 보상은 나 혼자 누린 셈이니.
"무슨 소리야?"
"저희도 엄청 성장했지 말입니다."
그러나.
민재 형과 광일이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보상으로 얻은 칭호나. 특성만 해도 엄청나잖습니까."
"그것도 그거고. 부대원들이 얻은 경험치가 상당하거든."
"부대원들 대부분이 레벨이 몇 개는 올랐을 겁니다."
던전 공략의 보상으로 주어진 경험치와 포인트는 공헌도에 따라 차등 분배되었다.
그 대부분은 내가 독식했을 텐데.
어떻게?
"괴물이 저렇게 많으니 레벨이 안 오르기 힘들죠."
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갔다.
지하철역의 벽과 천장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모래 안에도 우글거리던 유충들.
"한 마리 한 마리가 주는 경험치는 많은 편이 아니었습니다만, 무기를 한 번만 휘둘러도 세네 마리씩은 잡히더군요."
"거의 몰이 사냥이었지. 특히 마법사들이 엄청나게 성장했을 거다."
던전이 붕괴하며 폭주하는 녀석들을 전부 제거한 것은 내가 아니라 부대원들.
그 경험치가 엄청나게 쏠쏠했다는 것.
'[절대 미각]을 얻지 못했다면, 절대 공략하지 못했을 던전.'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난이도가 높은 만큼 보상 역시 확실했다는 거지.
그리고.
더 중요한 성과가 아직 남아 있었다.
"여기, 방 같은 게 있습니다!"
"화장실 같은 걸 지으려던 공간인가?"
사막으로 변해 있던 공간이었으나.
그 공간을 조성한 무리 어미가 사망한 뒤.
바닥에 모래가 잔뜩 깔렸을 뿐인 평범한 지하철역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래 봐야 공사 중이던 역.
우리에게 별로 유용한 구석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영준아."
"민재 형? 무슨 일이야."
"잠깐 이리로."
나를 부르는 민재 형을 따라 이동하니 거대한 공동 같은 공간에 도착했다.
"여기는?"
"저기. 안쪽을 봐."
민재 형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공동의 끝부분.
거대한 원통 같은 통로가 보였다.
전차가 몇 대는 지나가도 남을 것 같은 거대한 통로.
"지하철의 통로다."
공사 중인 역이긴 하나.
공사는 꽤 많이 진척된 상태였던 것 같다.
"다른 역으로 이어지는 길은 뚫려 있다는 건가."
"그래. 철로는 깔려 있지 않은 것 같지만 말이야."
민재 형이, 내게 이 통로를 보여 주려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저번에 내가 한 말. 기억하냐?"
"...철로는 전통적으로 군대의 이동 경로로 쓰였다고 했지."
"그래."
우리는 계속해서 세력을 키워 나갈 예정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위치한 인제군은 군 단위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다.
'사람을 늘리기 위해서는 언젠가 다른 도시로 세력을 확장해야만 해.'
그런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딜 가나 몬스터나 좀비의 습격이 이어지는 세상.
많은 차량이 오가던 고속도로 같은 곳은 사고 난 차량들로 인해 막혀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
반면 지하철은 역을 제외하면 폐쇄된 통로.
오픈된 도로와 달리 몬스터의 습격을 받을 확률이 적은 것은 물론.
직선 경로가 대부분인 철로는 목적지를 향한 최단루트이기도 하다.
'다른 도시로 향하기 위한 길.'
비단 세력 확장의 얘기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우리 가족들.
언젠가 그들을 만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직선으로 뚫린 철로는 가장 빠른 길이 되어 줄 터.
어쩌면.
이 지하철을 확보했다는 것 그 자체가 다른 보상들에 꿇리지 않는 가장 큰 성과가 될지도 모른다.
* * *
그렇게.
던전 공략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복귀했을 때.
"병장님. 보고 드릴 게...."
부대를 지키고 있던 소수의 병사들.
그들이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며 내게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부대 주변에 생존자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68화 마을 (2)
부대로 복귀한 뒤.
나와 조장들은 탄약대대의 한 건물에 앉아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부대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그곳을 돌아다니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도.
"뭐 하는 사람들이야?"
"그게. 던전 공략을 위해 떠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저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엔 공격인가 했는데, 그러진 않더군요. 대신 저희 부대 주변에 있는 건물에 들어가더니, 저렇게 정착해 버린 겁니다."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병사.
처음에는 무슨 문제인가 싶었다.
안 그래도 부대원을 늘려야 하는 우리다.
생존자들이 찾아온다면 좋은 일 아닐까.
"그게 그렇지가 않더군요."
"무슨 일인데 그래?"
"부대 근처에 정착은 했습니다만... 저희 부대에 합류는 거절하고 있습니다."
같이 보고를 듣고 있던 민재 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꿀만 빨고 싶다는 거로군."
부대 근처에 정착했으나 합류는 거절하는 이들.
그들의 의도야 뻔하다.
지금 생존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안전이다.
그리고 이 근처는 우리 병사들이 순찰을 돌며 괴물이나 좀비들의 씨를 말려놓았다.
정착하기에는 최고의 땅.
"하지만 우리 부대에 합류하는 건 또 위험하니, 주위에 정착해서 그 안전만 누리고 싶다는 거다."
다만.
그 결정도 내게는 조금 의아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를 만난 생존자들은 모두 공포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였다.
근처에서 패악질을 부리던 탈영병 녀석들과 우리를 착각한 결과.
그런데.
지금 저렇게 우리 근처에 정착을 시도한다는 건.
"우리가 정상적인 부대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나 보군."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수아는 그녀가 교류하던 그룹에 우리에 대한 정보를 풀었다.
그 그룹들을 중심으로 우리 부대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다는 거겠지.
약탈자로 변하지 않은 정상적인 군부대가 남아 있다는 소문이.
"쫓아냅시다."
그때.
얘기를 듣고 있던 서수혁 상병이 단호하게 말했다.
"쫒아내자니?"
"부대원들을 늘리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저런 인간들을 가만히 방치하면 부대에 합류하지 않고도 안전을 제공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생존자가 늘어날 겁니다."
"흠."
"우리 입장에선 그들을 마냥 무시하기도 힘드니.... 무슨 일이 생기면 지켜 줘야 할 테고요. 짐만 늘어나는 셈입니다. 합류하려는 이들만 두고 나머지는 저희 영역에서 쫓아내는 게 맞다고 봅니다."
조금 매정하긴 하다만.
수혁의 녀석의 말이 크게 틀린 건 아니지.
하지만, 글쎄.
"흠."
"망설이실 이유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재촉하는 수혁이 녀석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뭐. 쫓아낼 것까지 있나?"
"무슨 말씀을...!"
"오히려, 나쁘지 않아."
우리 근처에 정착하려는 생존자들을 내쫓는다고?
미쳤냐.
그런 아까운 짓을 왜 해?
* * *
그로부터 며칠 뒤.
주변에 정착을 시도하고 있다는 생존자들.
"철욱이라고 하오."
"김정숙이에요."
그들을 부대로 초청했다.
근처에 살게 된 이웃인데.
일단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하지 않겠어.
"안녕하십니까. 423대대의 대대장 대리를 맡은 김현석 중위라고 합니다."
물론 그들을 부르기로 결정한 것은 나지만.
우리 측에서 대화의 대표로 나선 것은 김 중위였다.
허우대도 멀쩡하고.
말빨도 괜찮고.
본격적으로 그를 겪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군인의 표본쯤으로 여긴다.
그야말로 첫인상 깡패.
정작 부대에서는 업무는 못 하고 욕심만 많다고 욕이란 욕은 다 들었지만.
'바지사장으로 이만한 인재가 없거든.'
그냥 내가 나설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시스템이 부여한 것을 제외하면 내 공식 지위는 취사병 병장.
영 믿음이 가지 않는 지위다.
"전시로 취급하면 나는 하사로 진급할 수는 있다고 하지만."
전시에는, 능력을 인정받은 병사들이 특진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유일한 간부인 김 중위도 살아 있고 하니.
공식적으로, 내 직위가 하사가 돼도 이상할 건 없겠지.
하지만 뭐랄까.
평범한 병사에서, 부사관으로 진급을 해 버리는 순간.
'안 그래도 무너진 일상에서. 더욱더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차피 중요한 건 병장이냐 하사냐 아니라, 길드의 군단장이라는 직위니까.
하사로의 진급은 거절하고 넘어갔다.
거기에 최근에 느낀 바로는.
내 첫인상이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 같기도 해서.
'대외적인 대대장은 김 중위가 맡아 줘야겠어.'
사실 다른 이유는 부가적인 거고.
그래야 내 귀찮은 일이 하나라도 줄어들 것 같거든.
아무튼.
김 중위는 내가 만든 요리를 먹고 [예민한 청각(열화)]이 활성화된 상태.
기본적인 대화는 김 중위가 진행하되.
그 방향은 내가 주도할 예정이었다.
"김현석 중위...."
"편하게 김 중위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럼 김 중위님. 하나만 물어도 되겠소?"
자신의 이름을 철욱이라 밝힌 남자였다.
꽤 덩치가 있는 중년 남성.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군인들은 전멸한 것으로 알고 있소. 살아남은 군인들이라 봐야 부대를 버리고 도망친 탈영병들이 몇 명 있는 정도라고 말이지."
"생존자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있다는 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이 군부대의 이름은 423대대 같은 게 아니었거든. 당신들 진짜 군인 맞소?"
그렇게 묻는 남자의 얼굴에는 긴장이 서려 있었다.
이 근처에서 살던 사람인가?
부대명이 다르단 걸 눈치채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런 의심을 품고 용케도 부대 근처에 자리를 잡으셨군요."
"이런 세상이잖소. 선택지가 많지 않았지."
"질문에는 확실히 답변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상위 부대와의 연락도 끊기고. 대대장님도 사망하긴 했습니다만... 저희는 저희를 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존자 중 한 명은 그 말에 어느 정도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으나.
질문을 꺼냈던 철욱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부대에 원래 있던 군인들은 아니지 않소? 이 부대 병사들이 입던 군복은 그런 검은색이 아니었는데."
"맞습니다. 저희 부대의 막사는 다른 곳에 있죠."
"그럼... 이 부대에 있던 군인들은 어떻게 된 거요?"
"저희가 여기에 도착했을 땐 괴물들에게 부대 전체가 점거된 상태였습니다. 군인들도 이미...."
"...그런가. 그렇게 됐나 보군."
김 중위의 대답을 듣고 깊은 침음성을 흘리는 철욱.
이 근처에서 살았다고 하더니.
탄약대대에 아는 사람이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저도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이번에는 김정숙이라는 이름의 여자
나이가 꽤 있어 보이고, 성격은 드세 보였다.
"여러분들이 정말 스스로를 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진작에 민간인 보호에 나섰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몇 달이 지났는데 왜 이제 와서...."
"저희도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이라니,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군대가 나서지 못할 사정이란 게 뭔데요?"
군대는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셈이니.
생존자들의 입장에서는 탓하고 싶어질 만도 하다만.
"다른 군부대가 전멸한 것과 같은 사정입니다. 괴물들이 저희 막사를 습격해 왔죠."
"...."
"평범한 괴물보다 훨씬 강한 녀석들이었습니다. 그 녀석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부대원의 절반 이상이 사망. 지금은 제가 대대장 대리를 맡고 있습니다,"
"당신 말고 다른 간부들은?"
"저를 제외한 간부들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한 번은 괴물들에 의해, 다음은...."
말 끝을 흐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김 중위.
"저희 손으로였죠."
"당신들 손으로라니.... 하극상이라도 일으켰다는 건가요?"
"정숙 아줌마, 그 얘기가 아닌 것 같소."
"네?"
철욱은 조금 진중한 표정으로 김 중위를 바라보았다.
"좀비가 된 걸 말하는 거로군."
"예."
"아. 아아. 그건... 죄송해요."
그제야, 죽은 간부들이 좀비로 일어난 사실을 얘기한 것임을 깨달은 듯.
조금 미안해하는 정숙.
"말하기 싫은 기억이었을 텐데. 끄집어낸 점은 미안하게 됐소."
"아닙니다. 이미 지난 일인걸요."
대화의 분위기가 조금 숙연하게 변했다.
적들의 공격에 맞서 치열하게 농성하는 부대.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병사를 잃고 대대장마저 사망.
좀비가 되어 부활한 대대장을 직접 죽여야 했던 부대원들.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상당히 극적인 이야기다.
'뭐, 그런 스토리란 거지.'
반 정도는 사실이지만.
나머지 반은 교묘하게 부풀려져 있었다.
대대장님이나 간부분들이 돌아가신 건 맞지만.
부대가 아닌 관사에서 돌아가셨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함으로써 우리가 겪은 전투는 '최고 지휘관조차 목숨을 잃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된다.
김 중위가 이런 식으로 말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격렬한 전투를 겪어야 했던 군인들을 향해
'시민들은 안 구하고 뭐 했냐?'고 따지기는 어려우니까.
거짓말은 안 하면서도 교묘하게 본인에게 유리하게 부풀려진 이야기.
김 중위가 병사들에게 욕먹은 이유기도 했다만.
지금은 꽤 유용했다.
"최근에야 막사를 떠나 이 근처에 도착한 뒤, 괴물들에게 점거당한 군부대를 탈환했죠."
"다른 부대의 군인들이 여기 자리 잡은 건 그런 사정이었나...."
"저희 사정은 이 정도면 설명이 된 것 같습니다만. 저도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자기소개는 이제 끝났고.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다.
"최근에 저희 부대 근처에 자리 잡으셨던데."
"그, 그게 뭐가 어때서요."
"...우리가 어디에 자리를 잡든, 그건 자유 아니오? 군인들이 남의 거처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지 않나."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것치곤 꽤 찔린 듯한 태도의 두 사람.
"차라리 부대에 합류하신다면 저희로서는 환영입니다만."
"그 얘기는 저번에 다른 병사들에게도 들었어요."
"말이 합류지, 병사로 징용되는 게 아닌가."
김정숙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 혼자라면 그것도 나쁘진 않았겠죠."
"그렇다면...."
"하지만. 저희 그룹에게는 무리예요."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그녀의 그룹원들.
어린아이나 노인의 비중이 높았다.
"우리 그룹에는 절 제외하면 싸울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없는걸요. 병사가 돼서 싸운다니... 우리 그룹원들한테는 무리예요."
인원만 보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남았나 싶은 그룹이긴 하다.
하지만 글쎄.
'각성자의 능력에는 나이도 성별도 관계없어.'
박씨 할아버지가 대표적인 예시다.
장성한 손녀딸들이 있을 정도의 나이.
하지만 박씨 할아버지는 각성을 거친 뒤 먼저 각성한 공병들에게 '노야' 소리를 듣는 부대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인간을 초월하게 만드는 각성.
그 과정만 거친다면 그녀의 그룹원들도 훌륭한 병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각성자들을 말 그대로 양산하고 있단 것도 알 수 없을 테고.
자신의 보호하에 있는 이들을 군인으로 만든다는 선택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거겠지.
"그쪽도 사정이 좋지는 않겠죠. 우리를 보호해 달라든가, 식량을 나눠 달라든가, 그런 거까진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주변에 정착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피해는 끼치지 않도록 할게요."
"우리 그룹도 마찬가지요."
글쎄.
나도 지상에 내려온 뒤 나름대로 생존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다.
지상의 자원은 한정된 것.
생존자들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하기에 근처에 다른 그룹이 돌아다니는 것을 꺼린다던가.
나름 자원이 풍족한 우리한테는 별 상관없는 얘기긴 하다만.
그렇다고 우리가 만든 안전구역에 숟가락만 얹는 건 안 되지.
나는 김 중위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김 중위가 내 말을 그대로 받아 말했다.
"부대 근처에 정착하시는 건 문제 없습니다."
"저, 정말인가요?"
"고맙...."
"대신, 약간의 거래를 하죠."
방긋 웃으며 대답하던 생존자 둘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거래라니."
"어떤 거래를 말하는 거죠?"
"뭐든 좋습니다. 포인트, 식량, 기름 같은 것도 좋죠. 약간의 대가만 제공해 주신다면, 저희는 여러분들을 보호할 겁니다."
"...말이 좋아서 거래지. 세금, 아니, 보호세 걷겠다는 말 아닌가."
"군인들이 아니라 깡패였군요!"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모르셨습니까? 군대라는 거, 원래 세금으로 돌아가는 단체입니다."
"윽."
두 사람의 표정이 급격하게 찡그려졌다.
정상적인 군대가 남아 있다는 말에 도박하는 심정으로 찾아온 이들.
그 군대가 보호세를 요구하고 있으니.
배신당한 느낌이 들기도 하겠지.
너무 압박한 것 같기도 하니.
이쯤에서 좀 풀어 주도록 할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많이도 필요 없습니다."
"무슨 의미죠?"
"사실, 여러분들이 이 거래를 거절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여러분들을 지켜 드리긴 하겠죠."
"...?"
"저희 입장에서도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진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걸로 족하십니까?"
이 녀석이 무슨 얘기를 하냐는 표정의 두 사람.
나는 그들에게 내가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유를 알려 주기로 했다.
"저희를 제외한 부대는 대부분 전멸한 듯하니. 저희 부대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부대의 세력을 키워 나갈겁니다. 언젠가 저희 부대만으로도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죠. 그리고 그렇게 세력을 키워 나가다 보면. 두 분 외에도 저희 근처에 정착하고자 하는 생존자들이 늘어날 겁니다."
"그야 그렇겠죠?"
"서로 다른 그룹에 속한 이들이 점차 한 장소에 모이다 보면, 뭐가 만들어지는지 아십니까?"
"거 답답하군. 하고자 하는 말이 뭐요."
"사회가 만들어집니다."
"...!"
서수혁 상병이 낸 '저들을 내쫓자'라는 의견을 무시하면서까지 이들을 수용하려고 한 이유이다.
"저희끼리 살아남아 봐야, 결국 망가진 세상 속에 홀로 남은 군부대가 돼 버리겠죠.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군요."
"그 말뜻은."
"저희는, 인간들의 사회를 재건할 생각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 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69화 마을 (3)
괴물들에 의해 도시가 박살 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살아남은 인류는 소수의 생존자 그룹을 이루어 이곳저곳에 퍼져 생활하고 있었다.
기존의 문명과 사회는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봐야겠지.
그렇기에.
"저희는, 인간들의 사회를 재건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거기에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군요."
우리 부대 근처에.
파괴돼 버린 인간들의 사회를 재건한다.
'내 목표는. 나만의 식당을 만들 때까지 살아남는 거다만.'
그 식당에 올 손님들이 군인들뿐이어서야.
너무 삭막하지 않겠냐.
그동안 우리 부대는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어느 정도 세력을 키우고 힘을 얻은 지금이라면.
그다음 단계도 염두에 둬야 했다.
인간들이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문명과 사회의 건설.
'우릴 찾아온 생존자들이 부대원이 되길 거부했다고 내쫓자고? 그런 아까운 짓을 왜 해.'
부대를 찾아온 두 개의 생존자 그룹.
그들이 우리 부대 근처에 정착하면서 만들어질 작은 마을.
그것이 재건의 초석이 되어 줄 것이다.
"사회가 형성된다라.... 확실히 그런 흐름이 되겠군."
"아니, 그거랑 세금을 거둔다는 게 무슨 상관이에요?"
"사회가 생겨난다면 그 안에는 분명 이권 다툼도 생길 겁니다."
내 목적은 조금이나마 인간 사회를 재건하는 것.
그 과정에서 여러 그룹 간에 이권 투쟁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 이권을 누구에게 넘기느냐 결정할 권한은.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저희 부대가 되겠죠."
애초에 우리 부대의 보호를 받고자 모인 이들이니 당연한 일.
주변에 모여들 생존자들은 우리 길드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봅니다. 그것마저 비판하지는 못하시겠죠."
"으음."
"저희는 기본적으로 군부대입니다. 전투에는 자신이 있습니다만... 저희가 직접 건들기에는 힘들거나 귀찮은 이권들도 생겨날 겁니다."
"...그 이익을 받게 되는 건 당신들에게 호의를 보인 이들이 되겠군. 보호의 대가조차 지불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 기회는 없어질 테고."
"맞습니다."
인간이 죽는 꼴을 보기 싫으니 보호비를 안 내도 지켜 주긴 할 거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점점 이 사회에서 도태되어 가겠지.
이야기를 모두 들은 생존자들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래라는 거, 조건이 어떻게 되오."
"간단합니다. 과하지 않은 수준에서 저희에게 보호의 대가를 지불할 것. 세금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겠죠."
"대가는 뭘로 지불해야 하죠? 저희는 가진 게 많지 않아요."
"형태는 뭐든 상관없습니다. 이왕이면 포인트가 좋겠습니다만. 식량도 좋고, 기름이나 생필품 등... 다른 자원이어도 무방해요. 과하지 않은 선에서 조절해 드리죠."
당장 우리가 모자란 게 많지는 않으니까.
중요한 건, 저들이 보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는 사실, 그 자체.
"원하신다면 세금 외에 다른 거래도 가능합니다. 식량 지원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만, 대가만 지불해 주신다면 저희가 보유 중인 식량을 나눠 드릴 수도 있을 테고."
"그 정도라면. 음."
"거기에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또?"
"이건 대단한 건 아닙니다만."
저들 입장에서는 대단하지 않을지언정.
우리에겐 중요한 일.
"누군가가 저희 부대... 강철 군단에 가입하고자 할 때 그걸 막지 말 것."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부대를 키우는 일이니까.
사실.
지금은 지나가다 만나는 생존자들을 일일이 설득해서 군단에 합류하도록 하고 있지만.
이건 지나치게 번거롭고 힘든 일이다.
오히려 군단에 합류하지 않으면 보호해 주지 않겠다느니 하는 태도는 반발만 일으키겠지.
하지만.
부대 주변에 인간들의 사회를 만든다면?
그리고 그 사회의 정점에 군림하는 것은 바로 우리 길드.
강철 군단이라면.
'사실 생존자 그룹에 꼭 무언가를 받아야 하는 건 아니지.'
중요한 것은 하나.
사회에 소속된 이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입장이라는 상징성이다.
'사회의 최정상.'
단체로서의 힘은 물론.
병사들에 대한 대우도 최고 수준을 유지한다면.
설령 위험한 싸움에 참전해야 한다고 한들.
군단에 소속되고 싶다고 여기는 이들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그걸로 끝.
일일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군단에 합류하라고 설득할 필요도 없다.
스스로 찾아오는 이들만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길드원을 늘릴 수 있을 테니.
물론 그런 게 가능해지기 위해선.
이 사회를 일정 규모 이상으로 키워야 하겠지만.
"그런 거라면, 알겠어요."
"상세한 얘기는 천천히 합의하도록 하죠."
그때.
팔짱을 끼고 고민하고 있던 철욱이 손을 들었다.
"아까. 그 외의 거래도 가능하다고 했던 것 같소만."
"아아. 예. 맞습니다. 포인트를 지불해서 저희가 가진 식량을 제공한다든가. 그런 거래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죠."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거래가 오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러나.
철욱이 말한 거래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면. 나는 아까 당신들이 말한 이권, 그중 하나를 사고 싶소."
"예?"
그가 바란 것은 식량이 아닌 이권.
그중에서도.
"이 근처 땅을 경작할 권리를 줬으면 하오."
"경작, 이라니."
"거래의 대가로는 땅에서 나는 수확물의 9할을 그쪽에 넘기도록 하지."
그가 말하는 땅이 뭘 말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탄약대대 주변에 넓게 펼쳐진 논밭.
얼마 전.
[교화]를 통해 부대에 영입했던 탈영병들.
그중에 이상하게 농사에 집착하던 녀석이 있었던지라.
그 녀석을 중심으로 경작을 시도해 보려고 하고 있던 땅이었다.
아쉽게도, 농사를 좋아하기만 할 뿐 기술은 없는 녀석인지.
지금까지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지만.
그나저나.
수확물의 9할이라니.
어지간히 악랄한 중세 영주들도 그 정도의 세금을 요구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잘 이해가 안 가는군요. 식량을 원하신다는 거라면 이해합니다만. 9할을 저희한테 넘긴다니, 사실상 노동력만 제공해 주겠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그렇진 않소. 나머지 1할만으로도 이득을 볼 자신이 있거든."
"무슨."
"옆에 정숙 아줌마도 그렇지만... 난 각성자요. 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능력을 제대로 못 쓰고 있었지."
그렇게 말한 철욱이 품 안에 손을 집어넣더니.
자신의 손바닥을 펴서 보여 줬다.
굳은살이 박인 손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이름 모를 식물의 씨앗.
그리고.
파아아아-
'미친.'
그 씨앗에.
갑자기, 싹이 텄다.
"내 직업은 농부요."
"...맙소사."
"저 논밭이 내가 농사짓던 땅이었소. 조상님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거든. 바로 옆에 있다 보니 탄약대대의 병사나 간부들과도 친했지. 일이 바쁠 때면 병사들이 대민지원을 나와 줘서 참 고마웠어."
탄약대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에 우울해졌던 것은 그런 이유였나.
"문명이 박살 난 마당에 저 땅의 원래 주인이라는 권리를 주장할 생각은 없소. 지금 세상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 돼 버렸으니까. 아쉽게도 농부라는 직업은 전투직이 아니오."
"농사지을 땅을 확보하기는 힘들었을 테죠."
"기껏 가지고 있는 스킬과 특성 대부분이 무용지물이었지."
즉.
우리가 그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에게 경작할 땅을 준다면....
"솔직히 말하지. 수확물의 9할을 당신들에게 넘겨도 남을 정도로 생산해 낼 자신이 있소."
우리 부대의 식단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병사들은 그렇게까지 불만을 보이진 않지만.
요리하는 내 입장에선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재료가 지나치게 육류 위주라는 것.'
최근에야 마트를 터는 데 성공했다지만.
대부분의 채소는 썩어 버린 상태였다.
고기 요리를 한다고 해도 정말 고기만 들어가는 경우는 드물다.
소스, 가니시 등.
결국 요리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땅에서 나는 재료들'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여기서 농부 각성자라고?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부담 없이 말씀해 주십쇼. 전폭적으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어? 어어. 알겠소. 그쪽도 식량 사정이 넉넉하진 않았나 보군?"
이 남자는 모를 것이다.
그가 제공해 줄 식재료들.
그것이 우리 부대의 전력을 얼마나 키워 주게 될지.
* * *
"대단하시군요."
그렇게 생존자들과의 회의가 끝난 뒤.
복귀하려던 나를 뒤따라온 서수혁 상병이 말했다.
"대단하다니?"
생존자들을 오히려 끌어들여서 사회를 만들고 그 사회 위에 우리 길드가 있도록 만든다.... 저로서는 생각도 못 했던 방향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서수혁 상병을 보며.
난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은 철저하게 실리와 효율을 추구하는 녀석이다.'
이민재 병장도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 다르다.
민재 형은 실리와 효율을 추구하긴 한다만.
그러면서도 감정적인 부분에 얽매이는 면이 있다.
자신의 입으로는 감정을 배제한 실리를 주장하면서도, 내게 선택을 맡기는 이유가 그것이다.
내심 내가 다른 쪽을 선택해 주길 바랄 때가 있단 말이지.
'이 녀석은 달라.'
민재 형과 달리.
감정적인 부분에 대한 일말의 고려조차 들어가지 않는 녀석.
근처에 정착하고자 하는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녀석이 가장 먼저 한 주장은 '쫓아내야 한다.'였다.
말이 쫓아낸다는 거지.
이런 세상에서는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일.
이기적이라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아예 단체 자체가 막장으로 치달은 게 아니고서야.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자기 손으로 남을 죽음에 몰아넣는 데에는 꺼림칙함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 녀석은 그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결여된 듯한 느낌.
다만.
"도움이 안 될 이들은 쫓아내야 한다고 하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기본적으로 능력은 좋은 놈이고.
내가 잘못된 선택을 내리지 않는 한 말도 잘 들으니.
당장은 문제없겠지.
"그 짧은 순간에 거기까지 생각하신 겁니까?
"대단한 건 아니고. 생각의 방향을 약간 바꾼 것뿐이지."
"예?"
"난 요리사잖냐."
내 요리를 먹을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게는 이득이다.
다 같이 잘 먹고 잘살면서도 내게 이득이 되는 방향.
그렇게 생각해 보니.
금방 결론이 나왔을 뿐이다.
"뭐든 그렇지만, 너무 효율만 찾다 보면 안 보이는 부분도 있는 법이란 거지."
"...이해했습니다."
말꼬리를 늘이며 대답하는 녀석.
'정말 이해한 건지. 잘은 모르겠다만.'
당장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