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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

게벨의 체력단련 방식은 단순했다.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무작정 달리게 하는 것.

사실 기초체력의 대부분은 유산소 운동에서 나오기 때문에 아이작도 군말 없이 따랐다.

다만 그 '무거운 짐'이라는 것이 무거운 참나무 장작을 마당에서 창고까지 옮기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게벨의 실용성을 엿볼 수 있었지만.

하지만 게벨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건지 달리는 아이작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수도원장님이 책을 주셨다고?"

"헉, 허억. 예."

예브하르에게 받은 책들은 전부 도서관에 보관했다. 다른 아이들도 있는 방에다 보관할 수는 없으니까. 수도사 알렉은 미리 언질을 들은 듯 책꽂이 한 칸을 비워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손대지 못하도록 자물쇠까지 채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무슨 책들을 받았지?"

"성가, 헉, 그리고, 기도문들이요. 후욱, 헉."

아이작은 비지땀을 흘리며 성실하게 대답했다. 뒤뜰은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장작 묶음을 끼고 달리니 5바퀴만 돌아도 숨이 차서 죽을 지경이었다.

지금만큼 네필림 종족의 저질 체력이 원망스러운 때가 없었다.

이건 촉수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이작으로부터 책 목록들을 들은 게벨은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수도원장님이 정말 작정하고 널 성기사로 밀어주시려는 모양이구나."

"그런, 가요?"

"당연하지. 성기사단의 종자도 이 정도 지원을 받기는 힘들다. 돈 좀 있는 귀족가 차남이나 받을 수 있는 대우인데...."

성기사들 중에서는 장남이 거의 없었다. 가문을 이어받을 수 없는 차남, 삼남들이 주로 방랑기사가 되거나 교단에 투신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차남, 삼남에게 지원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가문들도 있으니, 고아인 아이작이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은 말도 안 되게 큰 혜택이었다.

"다 게벨 씨가, 좋게 이야기해준, 덕분, 헉, 후욱!"

"그만."

아이작은 비척비척 몇 걸음 더 걷다가 장작 묶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제법 체력이 좋아졌다고 생각했지만, 밀도가 높은 참나무 장작 묶음은 아이작의 몸무게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무거웠다. 가느다란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지만, 아이작은 오히려 이 신체의 고통이 반가웠다.

'드디어 운동다운 운동을 하는 기분이군.'

15화. 이단심문관 (1)

사실 장작 나르기는 본격적인 운동이라기보단 노동에 가깝다. 하지만 몸을 만들기 위한 근육보다 이렇게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근육이 오히려 더 실전 근육에 가까웠다. 보기만 좋은 근육은 오히려 움직임을 방해하고 지구력은 떨어지기 쉬우니까.

"흐음...."

게벨은 아이작의 몸 이곳저곳을 툭툭 두드리며 확인해 보았다.

"왜 그러시죠?"

그사이 호흡을 가다듬은 아이작이 물었다.

"숨 고르는 속도도 빨라졌고, 근육이 붙는 속도도 보통이 아니군. 그런데 무거운 도끼를 번쩍번쩍 들다가도 장작 몇 개 들고 무겁다고 벌벌 떨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다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게벨은 딱히 의심하지 않았다. 이미 아이작을 성체로 확신하고 있는 상태여서 별다른 의심할 거리도 없었다. 다만 아이작이 어떤 때에 성체로서의 괴력을 발휘하는지 그 조건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게벨은 이제 다른 지점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체력이 붙는 속도가 굉장하다. 놀라울 정도군. 일주일 만에 근육이 이 정도로 붙을 줄이야."

아이작이 보기에는 별 차이 없는데 게벨이 보기에는 다른 모양이다.

'촉수 때문이겠지.'

[죽은 신의 내장 / '포식'한 상대의 능력치 일부와 특성을 흡수합니다.]

[살점 저장고 / 포식한 상대를 소화시킬 때까지 재생 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살점 저장고'는 포식한 대상을 빠르게 소화시키는 대신 치유 속도를 대폭 늘리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루 종일 체력단련을 마치고 지친 몸에도 적용되었다.

근육이 증가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운동을 통해 근육을 파괴한다. 그러면 근육은 다시 치유되면서 전보다 더 크고 질겨진다.

이 과정을 반복해 더 크고 단단한 근육을 만들어 가는 것인데, 아이작은 살점 저장고 능력 덕분에 부상 우려 없이 더 과감하고 무리한 운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아이작의 근육 성장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거기다 '죽은 신의 내장'이 그 효율을 대폭 올려 주고 있으니, 그의 몸은 눈에 띄게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은 게벨의 평가를 듣고 기뻐졌다.

'좋아, 좋아. 이제 그나마 좀 이세계에 온 혜택을 누리는 것 같군.'

모든 것이 수월하게 잘 풀려가고 있었다.

성기사단 부단장 출신인 게벨에게 신체 단련을 받고, 수도원장으로부터 기적과 성가를 배운다.

아이작은 이대로만 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수도원장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성기사가 되도록 팍팍 밀어주는데 대체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이대로 교단 안에서 승승장구하다가 여명군을 이끌고 성지를 탈환하면 된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이작은 수도원장의 전폭적인 지원과 게벨의 지도 아래 세월을 보냈다.

그사이 틈틈이 이름 없는 혼돈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촉수의 능력을 키웠다. 수도원 안에서 촉수를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위험한 일이었지만 아이작은 그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왔다.

촉수를 통해 받는 영양 보급과 게벨의 검술 지도는 절묘한 시너지를 일으켜서 아이작의 실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했다.

그렇게 아이작의 몸으로 맞이하는 3번째 겨울이 왔다.

그의 기대보다 다소 거칠게 다가온 겨울이었다.

전에 없이 빨리 내리기 시작한 눈발에 수도원을 둘러싼 숲이 하얗게 잠겼다. 하지만 늦가을 동안 게벨과 아이작이 겨울나기를 열심히 준비해 온 덕분에 수도원은 이전보다 훨씬 더 든든하게 겨울을 준비한 상태였다.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아이작은 수도원의 뒤뜰에 칼을 머리 위로 든 채 서 있었다.

지난 2년간의 수련은 그의 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젓가락 같던 팔다리에는 어느새 근육이 붙어 그럴싸한 모습이 되었고, 얼굴에도 앳된 청년의 티가 나타나고 있었다. 여전히 호리호리하다는 인상은 남아 있었지만, 이전에 비하면 발군의 성장이었다.

칼을 휘두르는 대신 그저 들어 올린 채 한참 동안 서 있던 아이작의 몸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칼 한번 휘두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송이는 그의 몸에 미처 닿기도 전에 열기로 녹아내렸다.

이내 아이작의 눈빛이 번뜩였다.

휘두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칼이 움직였다.

칼날의 궤도가 날카롭게 떨어졌다.

후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지며 주변에 쌓여있던 눈이 휩쓸려 날아갔다. 그제야 아이작은 탁 터뜨리듯 호흡을 내뱉었다. 뒤늦게 땀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게 내 체력이 허용하는 한계인 것 같은데.'

네필림의 저주받은 피 특성은 아이작이 검술 훈련을 하는 내내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포식 특전을 통해 체력을 꽤 기를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완할 수는 있었다.

'이 정도가 네필림이라는 종족이 가진 체력의 한계치인가? 생각보다 종족 한계의 벽이 높군.'

이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이 이상으로 강한 힘과 지구력을 가지려면 마법적인 수단이나 기적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상급 검술을 배운다면 이 정도 체력으로도 얼마든지 커버가 되겠지만....'

아이작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검술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게벨로부터 배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경지 너머가 엿보였던 것이다. 그 '경지 너머'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수치로 표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이작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하급 성기사 검술 숙련도(Lv 99) (999999/999999)]

[조건 미달로 다음 단계가 열리지 않습니다.]

검을 쥐는 것을 허락받은 이후, 아이작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검술을 단련했다. 배 속에 있던 칼센 밀터를 다 소화하고도 남을 정도의 기간이었다. 동작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것은 단순히 많이 수행하는 것보다 더 큰 경험치를 주었다.

그 덕분에 아이작은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이미 검술 수련도를 가득 채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도 반년 전 일이다.

아이작이 '경지 너머'로 향하려고 할 때마다 그의 몸은 그 직전에서 본능적으로 멈추고 말았다.

너무 지친 상태였거나, 몸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탓이다.

'상급 검술... 이라면 스킬 같은 거겠지.'

네임리스 카오스에서 '검술'은 마법이나 기적처럼 스킬로 분류되었다. 가짓수는 적지만 엄연히 다른 카테고리의 '스킬'이다.

마법사가 마나를 사용하고, 사제가 숭배를 대가로 기적을 받듯, 검술은 체력을 소모한다. 게임에서는 HP를 소모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현실은 어떨지 모른다. 정말 분수에 맞지 않는 기술을 쓴다면 몸이 부서질지도 모른다.

아이작의 HP가 0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러다 평생 못 쓰는 건 아니겠지?'

덜컥 걱정이 들었지만 지금도 어디 가서 객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촉수의 포식 특성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있었다. 저 미달된 '조건'이 뭔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최대한 절제하여 검을 휘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 성기사라도 되어야 하나?'

사실 게벨에게 상급 검술을 배운다면 좋을 것이다. 이미 상급 검술을 보여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이작은 내심 상급 검술이나 검술 숙련도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게벨은 아이작에게 상급 검술을 가르치지 않는 이유를 오래전에 설명해 주었다.

'기사단 검술은 수준이 높아질수록 현란하고 복잡해진다. 높은 수준의 검술은 마법이나 기적 같은 효과를 보일 때도 있지.'

그동안 아이작은 아이작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게벨이 가르쳐 준 동작들을 능숙하게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작정하고 까탈스럽게 굴려던 게벨조차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이제 막 검을 잡은 14살짜리가 전장에 수십 년을 굴러먹은 백전노장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능숙하게 베고, 찌르고, 내려치는 것이다.

'검의 길을 추구하는 성기사단들에겐 저마다 다 자기들만의 비전(祕傳) 검술이 있다. 다들 자기네가 최고라고 하지만, 저마다 연구와 노력 끝에 도달한 경지라 우열을 따지긴 힘들지.'

그런 아이작이 바로 상급 검술을 배우고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하지만 다 큰 어른도 그걸 다루기 어려워서 폭주하거나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아이작의 어린 몸이 다치거나, 심하면 산산이 찢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말이 안 될 것은 없다.

현실에서도 초심자가 무리하고 어려운 동작을 수행하려다가 다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그런 움직임이 마법적인 효과를 내지는 않지만, 초인적인 동작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이 세계에서라면 마법적인 일도 가능할 뿐.

지금 아이작이 상급 검술을 배워도 쓸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발란체 검술을 함부로 유출시켜선 안 되기 때문이다.'

'제가 아발란체 성기사단에 들면 배울 수 있나요?'

'그럴지도.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은 이제 없으니까.'

아이작은 그게 가르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게벨은 딱 잘라 가르치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상급 검술 외에 모든 동작을 세심하게 지켜봐 줬다.

그는 기초 검술만을 섬세한 기계 부품을 고치듯이 조정해 가며 반복 훈련을 시켰다. 가끔 방향을 바꾸거나 변칙적으로 동작을 잇거나 검로를 뒤트는 방식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결국 거의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시켰다.

덕분에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이작은 여전히 기초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베기, 찌르기, 내려치기, 막기.

지난 몇 년간 정확성과 위력에 집중해 반복해온 동작은 이제 근육에 새겨져 칼끝에 눈송이가 내려앉는 것까지 느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아이작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이미 오늘치 수련은 다 했지만 아이작은 묘한 미련에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호흡은 가라앉지 않아 거칠었고 근육은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한 번 더.'

아이작은 상급 검술에 대한 미련을 놓았다.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팔굽혀펴기 횟수를 한 번이라도 더 늘리고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일 때 딱 한 번 검을 더 휘두를 수 있는 체력을 기르지 못해 아쉬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촉수는 어디까지나... 비장의 수단이야.'

괴물로 몰려서 쫓겨 다니고 싶지 않다면, 궁지에 몰렸다고 무턱대고 촉수를 꺼내 들어선 안 된다.

아이작은 호흡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칼끝을 허공에 겨눴다.

이번에는 단순히 동작을 가다듬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가상의 적을 상정해 보기로 했다. 비슷한 수련은 여러 번 했다. 처음에는 멧돼지, 다음에는 게벨, 그다음에는 칼센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 상대는 인간도 괴물도 아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촉수를 뿜어내며 덮쳐오는 자신이었다.

아이작이 만난 사람 중 가장 강한 존재는 멧돼지도, 게벨도, 칼센도 아니었다.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범람하는 촉수가 폭주하며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쏟아져나올 때, 아이작은 공포심을 느꼈다.

아이작은 만약 자신이 그런 존재를 상대하게 된다면, 혹은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었을 때 어떻게 막아야 할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 수준으로는 백이면 백, 처참하게 죽어 나갈 뿐이다.

'그래도 한번....'

상상 속에서 수백 번 사지가 짓이겨지고 머리가 박살 났지만, 아이작은 땀에 흠뻑 젖은 몸을 다시 한번 움직였다. 또 한 번 촉수가 자신의 몸을 내리찍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검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이미 수만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해 왔던 아이작은 그 변화를 예민하게 느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검이 꿈틀거리며 휘어진다고 느꼈다.

'어?'

짧은 거리, 단순한 찌르기였지만 아이작의 검은 촉수의 궤적을 회피하며 그 뒤에 있는 적을 정확히 찔러 들어갔다.

핑.

아이작은 정신을 차렸다. 상상 속의 적은 사라지고 어느새 그의 앞에는 텅 빈 허공뿐이었다. 아이작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검이 있을 수 없는 기괴한 각도로 휘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촉수처럼.

***

'이건....'

탁. 아이작이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기 전에 등 뒤에서 게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기 걸리겠군."

아이작은 화들짝 놀라 검을 내렸다. 다행히 게벨은 방금 그 동작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아이작은 왜 자신이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 들켜선 안 될 행동을 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작은 그것을 촉수가 몰래 불어넣은 예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동안 '들켜선 안 되는 행동'을 할 때 이런 예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이작이 옷을 걸치는 사이, 게벨은 주변에 생긴 흔적들을 보면서 물었다.

"새벽부터 한 거냐?"

"예."

아이작에게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특별히 새벽부터 나올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나머지 예배와 미사 시간은 빠질 수 없었지만, 수도원장이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다는 것을 안 수도사들은 그 외 다른 모든 시간에 편의를 봐주었다.

"검술 단련은 이제 적당히 해도 된다고 했을 텐데."

아이작의 실력이 정체기에 빠져 있다는 것은 게벨도 이미 잘 아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급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지만, 게벨이 '검술 훈련은 이제 적당히 해도 된다'라고 말한 이유 또한 알고 있었다.

"불씨의 기도문을 암송해보거라."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작이 늘지 않는 검술에 매달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기도문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모든 곳에 항상 먼저 계신 이, 눈먼 등대지기를 인도하시는 이...."

틱, 티틱!

아이작의 손끝에서 불꽃이 튀면서 환한 빛이 나타났다. 그러나 명멸하는 불빛도 잠시, 빛은 나타났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그라들며 사라졌다.

지난 몇 년 내내 그랬던 것처럼.

게벨은 턱을 스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대단하군."

"뭐가 대단해요?"

"검술에는 그렇게나 재능이 뛰어나고 신앙심도 나무랄 데 없는데, 이 정도로 기적에 재능이 없는 게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보통은 안 그래요?"

"보통 기도문을 배울 기회가 주어지는 사람들은 믿음과 재능이 있다는 게 확실한 사람들이니까. 나는 반년 만에 등불의 기적을 성공시켰던 거 같은데."

아이작은 좌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작의 종족, 네필림은 신앙 능력이 높기 때문에 기적에 관해서는 거의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술이나 체력단련 쪽을 걱정했지.

그런데 결과는 그 정반대로 나오고 있었다.

'칼센을 먹어서 검술 재능이 뛰어난 거라면, 그 녀석의 기적 재능도 가져왔어야 하는 거 아냐?'

아이작은 칼센에게 따지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방금 그 기도문은 기도문 중에서도 기초 영역인 등불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성체라며 수도원장과 게벨로부터 인정받은 것이 무색하게도, 그 어떤 기도문과 성가도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기적 하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성기사라니. 그건 그냥 기사나 다를 바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의심받을 건덕지가 생길지도 모른다.

'...촉수 때문인가?'

네필림의 종족 특성이 기적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네필림의 높은 신앙 능력은 신의 기적을 훔쳐 쓰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기도문과 사용법만 알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추측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이름 없는 혼돈뿐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기적을 쓰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아이작은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아이작은 지금까지 촉수에게서 무수한 도움을 받았다. 촉수가 없었다면 그는 지금처럼 건강한 몸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죽을 뻔한 위기들을 몇 번이나 촉수 덕분에 넘겨왔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은 엄연히 빛의 법전이 적대시하는 신이다.

그 신의 일부를 몸에 품고 있는 아이작이 빛의 법전의 기적을 발휘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혹시 다른 방식의 기도문이라면 쓸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이름 없는 혼돈을 숭배하는 기도문이라든가....

16화. 이단심문관 (2)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불경한 생각을 했다가 뜨끔하여 게벨을 돌아보았다. 게벨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이놈 머리통 쪼개서 혹시 머릿속에 촉수가 든 건 아닌가 확인해 보자'며 덤벼들 모습은 아니었다.

"뭐, 네게는 빛의 법전께서 뛰어난 재능을 주셨으니, 기적까지는 과하다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르지."

아이작의 검에 대한 재능은 명백히 정상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게벨이 상급 검술을 쓰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정도였다.

게벨은 잠시 눈 쌓인 마당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충분한 것 같군."

"예?"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이다."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게벨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바닥난 지는 오래였다. 그가 상급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는 이상, 아이작은 이미 배운 것을 계속 갈고닦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겠죠. 아발란체 검술은 함부로 유출할 수 없다고 하셨으니."

아쉬움 섞인 아이작의 말에 게벨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의외의 말을 꺼냈다.

"내가 네게 가르친 것은 내가 속했던 아발란체 성기사단 검술의 기초다."

"예?"

"아발란체 검술은 기본적으로 전장을 가정한 합격(合格) 검술이다. 단체를 이룰 때 강해지는 검술이지. 그래서 일단 합을 맞추기 위해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곤 한다."

게벨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가 끌어내듯 단어 하나하나를 내뱉었다.

"하지만 지금 아발란체 상급 검술은 계승할 가치가 없다."

"뭐라구요?"

"아발란체 상급 검술의 정수는 단체를 이루었을 때 극한의 효율을 이뤄낸다. 하지만 이미 성기사단이 망한 이상... 합을 맞출 동료도 없지."

아이작은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약 게벨에게서 상급 검술을 배운대도 그걸 제대로 된 효율로 발휘할 방법이 없다는 말이었다. 단체전을 기본으로 한 검술이라니 성기사단답긴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그럴만한 동료가 없었다.

'게임 속에서는 그런 제한이 없었는데.'

"그래서 나는 네가 배운 기초를 토대로 새로운 비전 검술을 만들었으면 한다. 네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무엇을 겪고, 무엇을 느끼는가에 따라 검술의 색채가 달라질 테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게벨은 지금 성인도 안 된 애한테 한 검술의 일가를 이루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상급 검술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모르지만,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말이 되는...."

"할 수 있다."

게벨은 담담하게 현실을 토로하듯 말했다.

"이미 나는 너에게서 여러 차례 가능성을 보았다. 하지만 네가 스스로 자제하더군. 배우지 않은 것을 함부로 써선 안 된다고 무의식 중에 자제한 것이겠지."

실제로는 네필림의 낮은 HP 한계 때문에 몸이 알아서 멈춘 것이지만, 어쨌든 게벨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작을 성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게벨의 눈에 아이작은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빈 캔버스로 보였다. 만약 자신이 아발란체 검술의 정수를 가르쳤다면 아이작은 그것을 단숨에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명작이 그려질 백지에 나의 오탁을 흘리고 싶지 않다."

아이작은 뭔가 깨달은 듯 검으로 휘저은 마당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게벨은 오랫동안 숨기고 있던 자신의 욕심을 떠올렸다.

아이작을 이대로 보내준다면 그는 분명 자신을 뛰어넘는 검의 대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아이작을 데려온 이유를 달성할 수 없었다.

"물론... 그 고생을 시켜놓고 그냥 보낼 수는 없겠지."

게벨은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며 중얼거렸다.

"아발란체 검술의 상급 검술 중 하나만 보여주마."

"유출시키면 안 된다면서요?"

"나는 그냥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네가 너 스스로를 충분히 자제할 수 있는 것 같으니...."

그러니 멋대로 보고 배워 버리는 것은 네 자유다, 라는 속내가 숨겨진 말에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오감이 게벨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동작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였다.

슥.

게벨은 나뭇가지를 느리게 흔들다가 어느 순간 휙 가로저었다. 나뭇가지는 눈 위를 쓸 듯이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순간 파도가 몰아친 것처럼 눈보라가 튀어 올랐다.

살랑이는 눈송이들 사이로 게벨의 실루엣이 움직였다.

"검술이란 건 어차피 네가 배운 세 가지 동작의 응용에 불과하다."

나뭇가지는 느리지만 천천히 속도를 올려 가기 시작했다.

베고, 찌르고, 내려치고, 지극히 단조로운 동작의 연속이었다. 게벨은 아이작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시범을 보이려는 듯 반복해서 검술을 시연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게벨의 동작이 한 명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적들이 몰려드는 전장에서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한 명이 아니라 다수, 적어도 그를 향해 몰려오는 십수 명의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적들은 칼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고함을 치며 둘러싸려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게벨이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병사들에게 포위당하는가 싶은 순간, 쾅 하고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눈 폭풍이 사방으로 밀어닥쳤다.

가만히 서 있던 아이작은 졸지에 눈을 덮어쓰고 말았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게벨을 중심으로 눈이 깔끔하게 원형으로 사라져 있었다.

마치 대포라도 쏜 것 같은 폭음.

아이작은 그것이 한순간 음속을 돌파하면서 발생하는 충격파라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이런 속도를 내는 것이 가능한가?

애초에 몸이 견딜 수는 있나?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게 상급 검술, 즉 스킬이겠지.'

아이작은 게벨을 중심으로 세 갈래의 폭발한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만약 그 자리에 누군가 있었다면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이건 아발란체 성기사단 상급 검술 중 하나인 '전조' 동작이다. 잘 보면 네가 이때까지 배운 것이란 걸 알 거다."

게벨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검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게 되면, 어떤 형상을 본받아 그 속성을 구현해낼 수 있게 된다. 마치 마법처럼.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검술은 그중에서도 광포하게 몰아닥치는 산사태의 형상을 담았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나?"

"...예."

아이작은 게벨이 하던 동작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벨이 펼치던 동작들.

'할 수 있다.'

게벨이 방금 보여준 그 동작을, 아이작도 금방이라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머릿속에 각인된 듯 그 동작의 흐름과 검로의 움직임이 이해되었다.

방금 게벨이 펼친 '전조' 동작은 전부 아이작이 이 수도원에서 지내는 내내 연습해 왔던 동작을 조합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쉴 새 없이 내려치고 베고 긋던 그 동작들은 아이작이 수련해 왔던 동작이었다. 그것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켰을 때 비로소 검술이 나타나는 형태였다.

'아발란체 성기사단 검술은 산사태의 형상을 받아들여 만든 검술이라고 했지.'

아이작은 문득 게벨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그럼 내가 아까 발휘했던 검술은... 나는 대체 무슨 형상을 본받아 검술을 만들고 있었던 거지?'

게벨은 나뭇가지를 바닥에 꽂아 두고 말했다.

"상급 검술이 한번 봤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네 완성되지 않은 몸으로는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게 할 뿐이다. 하지만 너는 이미 내게서 배울 수 있는 만큼 배웠다. 네게 상급 검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뿐이지 너의 호흡, 너의 발디딤엔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정수가 녹아 있다...."

게벨은 더 자세히 가르칠까 말까 고민하다가 단념했다.

여기서부터는 욕심이었다. 훗날 거장이 될 성기사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업보를 떠넘기고 싶다는 욕심.

"다만 지금부터는 네 길을 스스로 나아가는 게 좋겠구나."

아이작의 상급 검술은 아이작 스스로 연구해서 만들어 내라는 말이었다. 아이작은 이런 무책임한 스승이 있나 생각했지만, 그의 말뜻 또한 이해했다.

아발란체 검술은 그가 쓰기엔 너무 무겁고 위력적이다.

아이작에게는 아이작에게 맞는 검술이 존재할 것이다. 심지어 아이작은 게벨이 오기 직전에 그 단서 또한 발견했다.

아이작은 손가락이 벌써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작."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게벨이 아이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년 초에 란셀 수도원으로 가기로 했었지?"

"예."

수도원에 들어온 고아들은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나가게 된다. 어떤 아이들은 수도사가 되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교단에 추천되어 교육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도제가 되어 기술을 배운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다른 경로가 열려있었다. 그는 도시의 수도원으로 가 제대로 된 성기사 수업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란셀 수도원은 인근에서 가장 큰 도시에 위치한 수도원이었다. 사제와 성기사들을 직접 육성하는, 상주 인원만 1,600명이 넘는다는 곳이었다. 아이작은 거기서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게벨에게서 모든 검술을 배운 것이 맞다면 더 이상 여기선 배울 것이 없었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떠나야 했다.

갑자기 교단으로부터 촉수 괴물 아니냐는 의심을 받지 않는 한, 아이작의 출세는 보장되어 있었다.

"만약 네가 성기사가 된다면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뭐죠?"

"내가 아발란체 성기사단을 벗어난 이유와 다른 사소한 것에 대해서."

게벨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순간 게벨도 이 수도원을 떠날 생각이라는 것을, 아이작은 직감할 수 있었다.

아이작의 존재가, 아이작을 가르치는 과정이 그에게 무언가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나는 네게 기초만 가르쳤지만 분명 아발란체 검술의 기초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다. 나와 똑같은 검술을 쓰는 사람일 테니까."

아발란체 성기사단 검술을 쓰는 사람이라면 같은 성기사단원일 것이다. 혹시 검술을 숨기라는 걸까? 따지고 보면 게벨은 기사단 검술을 외부로 유출시킨 셈이니 죄를 저지른 것일 수도 있다.

"마주친 즉시 그 자리에서 죽여라."

아이작은 흠칫했다.

"아니, 그래도 검술을 몰래 배운 걸 들켰다고 상대를 죽이는 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이미 아발란체 성기사단은 망해서 사라졌다. 따질 사람도 없어."

아이작은 게벨의 지적을 듣고서야 뒤늦게 아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면 왜 죽이라는 거지?'

살인의 찜찜함 때문에 내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성기사라고 부르지만 결국 군인이다. 그리고 살인은 군인의 업이다.

무엇보다 아이작은 자신의 손으로는 아니더라도, 이미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심지어 먹어 치우기까지 했다.

"네가 죽이고 싶지 않더라도 놈은 너를 반드시 죽이려고 들 거다. 그러니 너를 위해서라도 놈을 죽여야 한다."

"...아발란체 성기사단 검술을 쓴다는 것 외에 다른 특징은 없나요?"

"외모까지 달라졌을 테니 알려줘봤자 의미가 없다. 그리고 헷갈릴 염려는 없다. 이제 세상에 아발란체 성기사단 검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너와 나, 그놈밖에 없으니까."

아이작은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지, 왜 죽이라고 하는 건지 물어보려고 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살인의 대행이라면 알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분명 게벨이 성기사로서의 업을 내려놓고 수도원에 몸을 의탁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작의 정체를 일부러 숨겼던 것과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까악.

그때 까마귀가 큰 소리로 울었다.

아이작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수도원장실 창틀에 앉아있던 까마귀와 눈이 마주쳤다. 까마귀는 아이작을 보고 한 번 더 울더니 크게 날갯짓하며 날아갔다. 발목에는 붉은 끈이 묶여 있었다.

연락책으로 쓰이는 까마귀였다.

게벨도 그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갈까마귀로군."

"안 좋은 징조인가요?"

"갈까마귀보다는 갈까마귀를 부리는 자들이 문제지."

게벨은 묘한 여운을 남기며 말했다. 그때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수도원의 문이 열렸다.

수도원장 예브하르가 창백한 안색으로 바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작은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게벨 역시 마찬가지인 듯 안색을 굳혔다.

"무슨 일입니까, 수도원장님?"

"게벨 씨."

예브하르는 창백한 안색으로 얼굴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단심문관이 우리 수도원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17화. 이단심문관 (3)

이단심문관.

섬뜩한 어감에 아이작은 긴장했다. 결코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이단심문관? 그놈들이 왜?'

"이단심문관이 왜 갑자기 방문한다는 겁니까?"

게벨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역시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단심문관은 교단 내 감찰관 같은 존재들이다. 적보다 아군 속에서 위협을 찾는 직책이니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예브하르는 섣불리 말하는 대신 힐끔 아이작을 보았다. 함부로 이야기하기 힘든 사안인 듯했다. 아이작은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고개 숙이며 물러났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자마자 바로 왼손에서 촉수를 뽑아냈다.

[벽 속의 쥐 / 촉수를 통해 감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아이작은 그동안 이 권능으로 수도원 곳곳에서 비밀과 속삭임을 쉬지 않고 엿들어 왔다. 남들에게 들켜선 안 되는 비밀이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방문 이유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습니다. 급보라더군요."

예브하르는 갈까마귀를 통해 받은 편지를 게벨에게 보여 주었다. 휘갈겨 쓴 편지의 내용은 짧았다.

"급보. 위협 존재. 즉시 수도원 폐쇄 후 경계."

짧지만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던 편지였다. 게벨은 그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읽었다. 하지만 수도원에 위협이 되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이단심문관이 방문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과연 그 '위협'이 무엇이란 말인가?

예브하르는 우려 섞인 눈으로 게벨을 바라보았다.

"게벨 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수도원 자체에 이단 혐의가 있다면 갈까마귀를 보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건 위협이 수도원 안에 숨어들었거나 찾아오고 있다는 뜻 같군요. 수도사님들은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아이작은 그 말을 들으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얘기인가?'

아이작은 이때까지 빛의 법전의 교리에 어긋나는 짓이나 이름 없는 혼돈과의 관계를 들킬만한 짓을 한 적 없다. 하지만 아이작이 촉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교단의 적이라는 증거였다.

만약, 아주 만약의 만약이라도 교단의 누군가가 아이작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면 이단심문관을 보내서 확인하는 것도 당연했다.

게벨은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담담히 예브하르에게 조언했다.

"이단심문관이 온다는데 제가 굳이 피한다면 더 의심스러운 인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일단 이단심문관을 맞이하도록 하죠."

***

'이걸 어쩐다.'

이단심문관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수도원은 온통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아이들은 모든 노동을 중단하고 방으로 돌아갔고, 수도원 대문은 굳게 잠겼다. 저 문은 이단심문관이 방문하기 전까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아이작은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아이작은 이미 이런 상황에 대해 수백 번 고민하고 대비해왔다. 만약 의심받거나 쫓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아이작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수도원 사람들을 싸그리 다 죽이고 먹어 치우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아이작은 옛날에 멧돼지에게 잡아 먹힐 뻔했던 동굴에 그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물자들을 숨겨 두었다. 변장할 수 있는 옷과 도주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까지 전부.

만에 하나라도 교단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이단심문관을 보냈다면, 지금 당장 도망쳐야 했다.

'도망치려면 바로 이대로 떠나면 된다. 어차피 먹을 것은 촉수를 통해 얻으면 되고, 살점 저장고 능력 덕분에 며칠 안 자고 안 먹어도 버틸 수 있으니까....'

어차피 수도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다.

몸도 자랄 만큼 자랐고, 게벨도 검술을 다 가르쳤다고 했다. 기적은 아직 미숙하지만 이것은 촉수를 가지고 있는 한 극복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대로 떠나서 변방의 기사단이라도 들어간다면 제법 대우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단심문관이 자신 때문에 오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다. 사실 자신 때문에 오는 게 아닌데 도망쳐 버린다면? '어? 저 새끼 뭐 찔리는 게 있는 거 아냐? 좀 잡아 놓고 강도 높은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 같은 이야기라도 나온다면?

'이래서 감찰관들이 싫다니까.'

온갖 뒤숭숭한 생각을 하게 만드니, 방문 그 자체가 스트레스일 수밖에 없다.

아이작은 고민 끝에 일단 이단심문관이 도착한 직후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날 바로 지목하고 찾는다면 그때 가서 바로 도망치자.'

아이작은 이미 수도원 곳곳의 구조와 산의 지리를 익혀 두었다. 비밀스럽게 빠져나가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촉수의 도움을 얻는다면 이대로 쭉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다음이 문제겠지만.

아이작은 모처럼 준비해 왔던 성기사 수련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싱숭생숭해져서 밖으로 나왔다.

그때 어두컴컴한 복도 건너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게벨이었다.

게벨은 평상시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뭔가 느낌이 달라 보였다.

"아이작? 무슨 일이냐."

"수도원 분위기가 이상해서 가만히 있기 좀 그렇네요."

"흠, 하긴. 수도사들도 분위기가 영 안 좋구나. 다들 예배당에 모여서 기도 중이다. 수도사들의 신심이 깊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이단심문관들이란 족속들은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자들이니."

게벨은 이단심문관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 아이작은 문득 게벨에게 탈영병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도 그 점을 문제 삼고 있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에게 배교나 이단 혐의가 씌워질지도 모른다.

'아, 그래서 수도원장이 어떻게 할지 게벨에게 물어봤던 건가?'

수도원장 입장에서도 아이작과 게벨, 교단에 대한 비밀을 두 개나 안고 있는 셈이니 찜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보호해 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우우우우우우.

수도원 밖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요 며칠 사이 부쩍 늑대 울음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개새끼들이 또 짖어대는군."

"먹을게 다 떨어져서 그런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다. 산지기 말로는 요즘 산에 짐승들 수가 부쩍 줄어들었다고 하던데...."

아이작은 내심 뜨끔했다.

아이작은 촉수를 포식시키기 위해서 틈나는 대로 수도원을 빠져나가 짐승을 사냥하곤 했다. 주변의 위험한 짐승들은 어느 정도 다 포식해 버린 덕분에 촉수의 능력은 정체된 상태였지만, 결국 아이작의 성장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생태계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닐 텐데.'

"조만간 마을을 들를 겸 사냥이라도 해야겠다. 수도원과 마을을 오가는 길이 위험해지면 안 될 테니."

"예."

평안한 척 다음, 그다음 날의 일정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아이작은 게벨의 동요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도 자신처럼 이단심문관을 피해 도망칠 것을 고민 중이라는 것도.

'대체 아발란체 성기사단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숨어 살게 된 거지.'

"아이작. 아까 낮에 했던 이야기 말이다."

그때 게벨이 아이작의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아이작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내가 너한테 검술을 가르친 것에는 속내가 있다. 너에게 검술을 가르쳐주면, 언젠가 네가 날 대신해서 누군가를 반드시 죽여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지. 지금은 내가 죽일 수 없는...."

게벨은 잠시 핏발 선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궤멸이 그자로 인해 비롯된 것이라고만 알려주마. 모두가 전장에서 죽고 오직 나만이 도망쳐서 살아남았지."

"...."

"즉, 네게 맡기고 싶은 것은 나의 사적인 복수다. 미안하구나."

그러니까 게벨은 복수를 맡기기 위해 아이작을 가르쳤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아이작이 먼저 검술을 가르쳐 달라면서 접근했었고, 게벨 역시 그와 뜻이 맞았을 뿐이다.

아니, 오히려 게벨에게 복수하고 싶은 대상이 없었다면 아이작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까짓거 누구 한 명 죽이는 것쯤, 검술 강습료로 쳐주죠.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라고 하니 제가 직접 찾아갈 필요도 없겠네요."

아이작의 말에 게벨은 벙찐 표정을 했다. 이내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어떻게 수도원장님의 '믿음의 증명'을 통과했는지 모르겠다. 도무지 독실한 교인처럼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그건 게벨 씨도 마찬가지잖아요?"

둘은 낄낄거리며 공범의 웃음을 지었다.

웃음이 잦아든 뒤, 아이작은 게벨과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단심문관은 저녁이 되기 전에 오겠다고 했는데 벌써 밤이 늦어지고 있었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지는 것을 감안해도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내일 아침에 올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그가 가급적 늦게 오기를 바랐다.

쿵쿵쿵쿵!

그때였다. 갑자기 수도원 정문에서 요란하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온 건가? 생각보다는 이르군.'

게벨은 굳은 표정으로 정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의 명령대로 문을 폐쇄했기에 문을 여는 데만도 한참 걸렸다.

그 와중에도 문 두드리는 소리는 요란했다.

"누구 없어요?! 제발! 문 좀 열어봐요!"

"한스? 한스 아니냐? 무슨 일이지?"

"게벨 씨!"

문을 두드리던 당사자는 다름 아닌 성인이 되어 마을의 대장장이 공방에 들어간 한스였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수도사들도 게벨을 도와 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열어 주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한스가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쓰러졌다.

"한스!"

한스는 온통 피투성이에 전신이 상처가 가득했다. 다행히 대부분은 넘어지거나 긁히면서 생긴 것들로 치명상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습격이라도 당했어?"

"습격, 늑대들이 습격을...."

게벨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그래도 늑대들의 움직임이 심상찮다고 생각했는데 급기야 인간이 습격당하는 일까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한스가 왜 이 한밤중에 수도원을 오다가 늑대를 만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그가 다급히 말했다.

"이단심문관! 이단심문관님이 위험하셔!"

***

아이작과 게벨은 다급히 산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지금 늑대들을 상대하며 위험에 처해있을지도 모르는 이단심문관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이단심문관이 길 안내를 요청했었어.'

아이작은 한스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대장장이 공방에서 일하던 한스는 이단심문관으로부터 수도원까지의 길 안내를 부탁받았다. 이단심문관이 찜찜하기는 했지만, 수도원에서 자란 교인으로서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순응했다고 했다.

그런데 가던 길에 갑자기 늑대 떼가 나타나 둘러싸더니 그들을 습격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에 한스는 당황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은 한스를 보호하면서 도망칠 활로를 뚫어주었고, 수도원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한스는 반나절 가까이 산을 뛰어 올라와 수도원에 도착한 것이다.

'한스를 살려주고 자기는 뒤에 남다니....'

이단심문관에 대해 선입견을 가졌던 아이작은 약간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단심문관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 그냥 늑대에게 습격당해서 죽었다면 더할 나위 없을지도?'

아이작 때문이든, 또 다른 어떤 위협 때문에 왔든 이단심문관이 그대로 죽어서 늑대밥이 된다면 근심거리가 사라지는 셈이다.

"후욱...!"

아이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주받은 피 때문에 도무지 늘지 않는 것 중에는 폐활량도 있었다.

게벨로부터 상급 검술인 '전조' 스킬을 전수받기는 했지만, 아직 그 제대로 연습해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당장 실전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스킬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산등성이를 달리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몸으로 함부로 사용했다간 얼마나 다칠지 알 수 없었다.

이 또한 아이작이 스스로의 상급 스킬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체구가 커지고 근육이 붙으면서 이전보다 체력이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게벨처럼 한밤중에 산 위를 전력질주하면서도 멀쩡할 정도는 되어야 상급 검술을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작이 슬슬 처지기 시작하자 게벨은 이해한다는 듯 힐긋 눈짓을 주고는 앞서 달려갔다. 아이작은 이러다간 기껏 도착했을 때 숨이 차서 아무것도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악!

하늘 위에 갈까마귀 한 마리가 낮게 비행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것이 수도원을 찾아왔던 갈까마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영리한 갈까마귀가 제 주인의 위치를 알려 주려는 것이었다.

아이작은 앞서가고 있는 게벨이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뒤, 촉수를 꺼내 들었다. 낮게 비행하던 갈까마귀는 순식간에 가느다란 촉수에 꿰였다.

아이작은 잠시 갈등했다. 이대로 갈까마귀를 죽이면 이단심문관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능력을 발동했다.

[저 너머의 기생충 / 촉수에 닿은 상대의 살갗 아래 짧은 수명을 가진 기생충을 낳습니다. 기생충에 감염된 대상은 지속적인 고통을 입습니다.]

촉수에 꿰인 갈까마귀의 몸 안으로 실지렁이 같은 촉수가 기어들어 갔다. 분리된 촉수는 순식간에 갈까마귀의 신경계를 장악하고 지배했다.

아이작이 지금까지 이름 없는 혼돈으로부터 얻은 특전 중 하나였다. 고통을 주기 위한 용도라고 나와 있었지만, 아이작은 다른 방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작은 그 촉수에 다시 '벽 속의 쥐' 특전을 발동시켰다.

[벽 속의 쥐 / 촉수를 통해 감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순식간에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갈까마귀의 시야가 아이작에게로 공유되었다. 아이작은 즉시 이단심문관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18화. 이단심문관 (4)

갈까마귀는 몸 안에 기생충이 파고들자 이질감을 느낀 듯 날개를 퍼덕였다. 하지만 기생충은 감각을 차단하여 갈까마귀를 안정시켰다.

"음?"

갈까마귀가 퍼덕이는 소리를 들은 게벨이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아이작이 이미 촉수를 회수한 뒤였다.

갈까마귀가 어떤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하자 게벨은 방향을 바꿨다.

"아이작, 이쪽으로 와라!"

"예!"

아이작은 게벨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이미 갈까마귀를 통해 주변의 상황과 가야 할 길을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이단심문관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온통 나무들이 쓰러지고 박살 나 엉망진창인 곳이 보였다. 근처에는 늑대 여러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늑대가 다섯, 여섯... 아니, 여덟 마리? 꽤 많군.'

늑대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두터운 로브에 갑옷까지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작은 그가 이단심문관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먼 거리였지만, 이단심문관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쓰러지면 즉시 늑대 밥이 될 테니까. 아이작은 도착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호흡을 조절하며 움직였다.

'오래는 못 싸울 것 같군. 저쪽도 아직 싸울 기력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때 문득 아이작은 이상함을 느꼈다.

'그런데 왜 주변이 저렇게 초토화된 거지? 늑대들이 저렇게 만들었을 리는 없고... 이단심문관이 그렇게 강한가?'

그렇게 강했다면 진작에 늑대들쯤은 가볍게 때려잡았을 것이다.

그제야 아이작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게벨 씨, 옆!"

쿠쿠쿠쿵!

달려가던 길 바로 옆쪽에서 거대한 바위라고 착각했던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게벨은 이 갑작스러운 습격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지만, 아이작이 경고한 찰나의 시간만으로도 대비하기에는 충분했다.

쾅!

게벨의 검이 번뜩임과 동시에 선혈이 흩뿌려졌다. 괴수가 울부짖는 소리가 겨울밤을 요란하게 흔들었다. 나무 위에 쌓여 있던 눈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곰? 아니, 괴물인가?"

갑작스럽게 나타나 게벨을 습격한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곰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곰이라기에는 기형적으로 거대했다. 수도원 문이라도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은 덩치였다.

게다가 바람을 타고 풍겨 오는 맹렬한 악취가 심각했다. 평범한 짐승의 노린내가 아니었다.

아이작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역병 멧돼지를 잡았을 때와 같은 냄새다.'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뜻 보이는 실루엣만으로도 곰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다. 병에 걸린 듯 털이 빠지고 살이 문드러진 흔적들이 보였다. 게벨이 낸 상처 정도는 통증도 못 느낄 것 같았다.

"아이작!"

게벨은 역병 거대 곰을 향해 마주 서며 소리쳤다.

"이단심문관을 살펴봐라!"

곰의 몸에는 이미 이단심문관에게 입은 것처럼 보이는 상처들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세가 엄청났다.

하지만 아이작은 게벨을 걱정하지 않았다. 게벨이 보여 준 실력대로라면 단지 시간문제일 것이다. 저 덩치를 고려하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아이작은 이단심문관을 향해 달려갔다.

***

크르릉, 컹!

늑대 떼는 쇠 냄새를 짙게 풍기는 이단심문관을 상대로 사납게 짖었다. 놈들은 이미 이단심문관을 수 시간째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상대는 피 흘리고 도망치면서도 벌써 동료들을 넷이나 쓰러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 보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무리 사냥 끝에 상대는 이미 다 죽어가는 꼴이었다. 늑대무리의 대장은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파스슥!

풀숲을 헤치며 튀어나온 아이작이 단숨에 대장의 목에 칼을 쑤셔 박기 전까지는.

이미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던 아이작은, 기습 효과를 위해 늑대 무리 중 가장 강해 보이는 녀석을 골라 바로 제압한 것이다.

늑대 대장은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지만, 이미 목 안을 파고든 칼 때문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다만 녀석도 쉽게 가지는 않았다.

쨍강! 늑대가 강하게 몸부림치면서 아이작의 낡고 투박한 검이 부러져나갔다.

"이런 제길...."

낡아 빠진 검을 너무 깊게 쑤셔 넣은 잘못이었다.

'더럽게 단단하네. 이거 늑대 맞아?'

아이작은 부러진 검을 포기하고 놈의 사체를 걷어찼다. 다행히 이단심문관을 둘러싸고 있던 늑대들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아이작은 놈들의 대장이 당했으니 나머지가 그대로 도망치지 않을까 기대했다.

실제로 녀석들은 사기가 꺾인 모습이었다. 아이작은 검이 부러진 것은 아무것도 아닌 척하면서 슬금슬금 이단심문관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이단심문관은 사람이 나타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봐요. 남는 칼 없어요? 칼 좀 잠깐...."

"...천사?"

그러나 이단심문관은 칼을 빌려주는 대신 어처구니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쓰러졌다.

아이작은 어이없다는 듯 이단심문관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여자야?'

벗겨진 후드 아래 드러난 얼굴은 상당히 젊은 여자였다. 잠깐 정신이 팔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였지만 넋을 놓지는 않았다.

찢어진 후드 아래로 몇몇 심한 상처들이 보이긴 했지만 당장 목숨이 위태롭진 않은 듯했다. 이미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에서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티다가, 누군가 나타나자 긴장의 끈을 놓아 버린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됐군.'

아이작은 이단심문관이 손에 쥔 칼을 빼앗아 들었다. 가볍지만 균형이 잘 잡힌, 쓰던 것보다 훨씬 좋은 칼이었다.

그리고 아이작은 칼을 쥔 순간 뜬 창에 깜짝 놀랐다.

[심판의 검(전설)]

[빛의 법전의 축복을 받은 성검. 부정한 것에 닿으면 열이 발생해 화상을 입힌다. 검을 쥔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사항으로, 대신 자격 있는 자가 쥐면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이거 내가 쥐어도 되는 거 맞아?'

아이작은 칼이 '부정한 것'에 닿으면 화상을 입힌다는 말에 움찔했다. 하지만 당장 칼을 쥔 손이 불탈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쥐고 있는 손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며 힘이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 검에 촉수가 닿으면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를 짐작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좋아, 다른 칼도 없으니 조심하고....'

아이작은 검을 꽉 쥐고 늑대들을 노려보았다.

늑대들은 다 몰아붙였다고 생각했던 사냥감 대신 다른 위협적인 적이 튀어나오자 기가 죽은 듯했다. 대장이 죽은 것도 그들의 사기를 꺾는 데 크게 한몫했다.

숨이 차올라 몇 번 칼을 휘두를 수 없었던 아이작은 내심 녀석들이 도망가길 기대했다.

그때, 기이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이작은 바람 속의 악취가 한층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악취가 사방을 뒤덮자 늑대들의 눈빛이 한층 더 흉포해졌다.

늑대들은 본능을 자극하는 강렬한 허기에 자극받고 있었다.

컹, 컹컹! 우우우!

사납게 짖어대는 소리로 놈들은 수적 우위와 기세를 확신했다. 여기서 사냥감은 눈앞에 보이는 저 인간뿐이라고.

이윽고 늑대 중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동시에 아이작은 수년간 반복해온 동작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가장 적게 움직이면서 가장 치명적으로.

아이작이 호흡 짧게 내뱉은 순간 칼날이 늑대의 가슴을 꿰뚫었다.

턱.

갈비뼈에 잠깐 검이 걸린 듯했지만, 심판의 검은 명검답게 뼈를 단숨에 가르고 심장을 꿰뚫었다.

살 타는 냄새가 맹렬하게 풍겨왔다.

늑대를 가르고 빠져나온 심판의 검이 붉게 달아오른 걸 보니, 능력을 발휘한 듯했다.

하지만 늑대들은 무리 사냥에 능하다.

검이 묶인 사이, 다른 늑대 두 마리가 아이작의 다리와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갑옷도 없는 아이작은 이단심문관보다 더 손쉬운 먹이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아이작의 검이 다시 한번 기묘하게 움직였다.

스르르륵, 까득, 쾅!

검이 미끄러지듯 움직이자 양옆에서 달려들던 늑대 두 마리가 베이며 나가떨어졌다. 뒤늦게 울려 퍼지는 굉음에 아이작의 귀가 얼얼해졌다.

[아발란체 검술: 전조(상급)─????식 해석]

"큭...."

음속을 돌파하는 속도로 주변의 적들을 공격하는 기술.

바로 오늘 낮에 게벨이 보여주었던 아발란체 검술의 '전조' 기술이었다.

아이작은 게벨이 펼친 기술을 낮에 단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연습도 없이 따라 한 것이다.

기술을 펼치는 것 자체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지난 2년간 했던 연습 동작의 일부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면서, 그의 몸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인 것이다. 너무 쉽게 사용할 수 있어서 마치 스킬을 발동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파는 작지 않았다.

손바닥 핏줄이 터진 듯 피멍이 들었고, 손등은 그을린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온몸의 격통 또한 만만치 않았다.

'마음 놓고 쓸 수는 없겠군. 게벨이 쓴 것과 위력 차이도 커.'

아이작은 쓰러진 늑대들을 훑어보며 생각했다.

게벨이 쓴다면 또 모를까, 아이작이 펼친 '전조' 스킬의 위력은 고작 늑대 둘을 베어 넘기는 정도에 그쳤다.

'검흔도 조금 다르고.'

마치 이빨로 잡아 물어뜯은 것처럼 난폭하기 짝이 없었다.

검으로 벤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처참한 흔적이었다.

늑대들은 갑작스러운 폭음에 놀란 듯 얼어붙었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고 아이작을 포위하고 있었다.

수적 우위를 믿고 있다기보다는 무언가에 의해 정신을 억압받는 것 같았다.

전부 다 죽을 때까지 싸울 것 같은 분위기에 아이작도 각오를 다졌다.

'어쩔 수 없군.'

물론 아이작도 결사 항전을 할 각오는 없었다. 어차피 호흡도 이제 슬슬 한계였다. 아이작이 힐끔 이단심문관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아이작은 느긋하게 왼손을 옆으로 천천히 펼쳤다.

보는 눈이 없다면 굳이 고생해 가며 검을 휘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럼 누가 누구의 먹인지 한번 보자."

손에서 진홍색의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촉수가 느릿느릿 몸을 펼치기 시작했다. 촉수는 갈까마귀를 표적으로 삼았을 때처럼 거의 10m까지 늘어나는 동시에, 그 두께 또한 아이작의 팔뚝 정도로 굵어진 상태였다.

출렁.

촉수가 흐느적거리며 기괴한 형상을 드리우자, 늑대들은 자신들을 자극하던 역병의 저주 이상으로 두려운 무언가를 느꼈다.

휘리리릭, 콰득!

아이작의 촉수가 빠르게 날아가더니 아까 죽였던 대장 늑대의 사체를 집어 들었다. 촉수는 단숨에 촉수 안에 돋아난 빨판과 이빨들로 늑대의 사체를 분해해 집어삼켰다.

거대한 늑대의 사체가 피 몇 방울만 남기고 분해되기까지는 10여 초도 걸리지 않았다.

늑대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당장 도망치라는 본능이 울부짖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공포에 얼어붙은 발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끄윽.

아이작은 짧게 트림하며 중얼거렸다.

"이세계에 와서 개고기까지 먹게 되는군."

***

쉭, 콰득, 콰드득!

아이작은 마지막 늑대까지 쓰러뜨린 뒤 뒤통수에 촉수를 꽂아 넣었다. 늑대의 목덜미 안으로 파고든 촉수는 단숨에 가죽 안쪽을 헤집으며 살과 뼈를 빠르게 빨아들였다. 늑대는 가죽만 남긴 꼴이 되어 쪽쪽 빨려 들어가다가, 이내 그 가죽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역병 늑대'를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야간 시야가 밝아집니다.]

[약점 추적 능력이 향상됩니다.]

[저급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

'이 정도 양이면 며칠 동안은 유지되겠군.'

아이작이 포식한 늑대는 총 다섯 마리. 나머지는 자신들이 포식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도망친 건지 보이지 않았다.

늑대를 사냥한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양을 한꺼번에 먹은 것은 처음이었다.

대량 포식 덕분에 아이작이 전조 스킬을 쓰면서 입었던 자잘한 상처 또한 빠르게 치유되었다. 포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상급 검술을 사용하는데 제약이 덜할 것 같기도 했다.

'이단심문관이 기절해줘서 다행이야.'

검술만으로 상대했다면 좀 더 오래 걸렸을 것이고,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촉수까지 동원한다면 이 정도쯤은 압도적으로 짓누를 수 있었다. 웬수 같은 촉수라곤 해도 급한 상황이 되면 든든한 동료니까.

아이작은 이단심문관의 상태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호흡이 불규칙하고 얕았다. 서둘러 데려가지 않으면 점점 악화될 것이 분명했다.

쿵, 쿠쿵.

아이작은 소음이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벨이 있던 곳이었다.

'아직도 싸우고 있나?'

아이작은 갈까마귀와 다시 시야를 공유했다. 갈까마귀는 하늘을 낮게 날아다니며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게벨은 아직도 그 거대 곰과 싸우는 중이었다.

다만 거대 곰은 온통 피투성이에 한쪽 팔도 떨어진 상태였고, 게벨은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승부가 어디로 기울지는 뻔했지만, 거대 곰은 여전히 흉포한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런 괴물을 상대하는 게벨도 대단하군.'

아마 아이작이 거대 곰을 상대했다면 상처 없이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멧돼지를 상대했을 때처럼 아슬아슬하게 승패가 갈리거나, 이기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아이작은 문득 거대 곰을 보다가 묘한 생각이 들었다.

'크고 사납고 난폭한 곰... 하지만 저 녀석, 뱃속에 들어가면 특전으로 뭘 줄까?'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이 '더 큰 먹이'를 찾길 원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19화. 역병신(疫病神) (1)

'장단도 잘 맞춰주는군.'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메시지를 들으며 이단심문관을 들쳐 업었다. 서둘러 이단심문관을 수도원으로 데려가려면 게벨이 빨리 싸움을 끝내야만 했다.

아이작은 조심스럽게 게벨이 싸우는 현장의 배후로 우회해 접근했다.

쿵, 쿠쿵!

근처까지만 갔는데도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거대 곰은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스치기만 해도 이세계로 보낼 덤프트럭만 한 덩치였다.

'다행히 동작이 빠르지는 않군.'

부상 때문인지, 덩치 때문인지 놈은 한 곳에서 빙빙 돌며 게벨을 상대하고 있었다. 게벨은 빠르게 몰아붙이며 거대 곰의 상처를 하나하나 늘려 가고 있었다. 아이작은 이단심문관을 내려놓고 거대 곰의 배후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이작?!"

게벨은 아이작이 접근하는 것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재빨리 검을 치켜들고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가 지난 2년간 수만 번도 넘게 반복했던 찌르기였다.

크르르릉! 거대 곰은 뒤늦게 아이작을 눈치채고 몸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게벨은 아이작이 만든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게벨은 빠르게 달려들어 거대 곰의 목을 노렸다. 이미 게벨과 치열하게 싸우던 거대 곰은 아이작보다 게벨이 더 큰 위협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이작을 시야에서 놓치면 안 된다고.

다만 아이작은 덜 치명적인 하반신을 노리고 있었다. 거대 곰은 두 가지의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이도 저도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다.

놈은 그저 마구 몸을 거칠게 휘저을 뿐이었다.

까가각!

게벨의 검을 막아 낸 거대 곰의 발톱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그 공격으로 거대 곰의 손이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나갔다. 게벨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거대 곰의 목을 크게 베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작의 검 또한 거대 곰의 엉덩이를 꿰뚫었다.

섬광 같은 찌르기에 바람조차 멎는 것 같았다. 뒤늦게 몰아닥친 바람이 거대 곰의 털을 쭈볏 세웠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멍청한 놈.'

아이작은 검을 쑤셔 박은 뒤, 바로 상처 부위에 촉수를 밀어 넣었다. 두터운 가죽을 뚫고 침입한 촉수는 자연스럽게 곰의 내장들을 헤집으며 단숨에 심장으로 밀고 올라갔다. 아이작은 촉수를 통해 거대 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맥동하는 것을 느꼈다.

아이작은 머리통만 한 그 심장을 단숨에 촉수로 쥐어 터뜨리며 빨아들였다.

꺼어어어어... 거대 곰이 기이한 신음 소리를 내며 허우적댔다.

게벨은 거대 곰이 이상 반응을 보이자 의아해했지만,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검을 휘둘러 단숨에 거대 곰의 목을 베었다. 두터운 목을 완전히 베지는 못했지만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촉수가 빠르게 거대 곰의 심장을 포식한 뒤였다. 거대 곰은 베인 목에서 피를 줄줄 쏟아내다가 이내 굉음을 내고 쓰러졌다.

['역병 거대 곰'을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괴력(임시)' 특전을 습득하였습니다.]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

'괴력?'

아이작은 고작 하나뿐인 특전에 의아했지만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먼지구름이 가라앉자 서둘러 게벨이 다가왔다.

"아이작! 괜찮냐?"

"예. 똥침을 제대로 놓은 것 같습니다."

게벨은 질린 표정으로 거대 곰을 내려다보았다.

"이 수도원에 살면서 이런 미친 괴물은 처음 봤다. 변방에나 가야 볼 수 있을법한 놈인데... 어디서 이런 게 튀어나왔는지 모르겠군."

"해체할까요?"

"아니, 병에 걸린 놈 같으니 먹을 수도 없고 가져갈 방법도 없으니 두고 가자. 수도원장님께 땅을 정화해달라고 해야겠군. 하, 이단심문관 그놈 때문에 이렇게 땀 흘릴 필요까진 없었는데."

"놈이 아니라 년이더라구요."

놈이든 년이든 이단심문관이 오는 것을 제일 찝찝하게 여길 두 사람이 이단심문관을 구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게벨은 이단심문관이 여자라는 말에 놀란 듯했지만,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찜찜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져있는 이단심문관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이 짐덩이부터 살려놓자."

***

이단심문관은 아이작이 업고 가기로 했다. 거대 곰 포식 특전 때문인지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호흡도 거의 차지 않았다.

상급 검술 '전조' 스킬을 사용하느라 소모되었던 HP도 어느새 회복된 듯, 몸이 편했다.

게벨은 칼만 몇 번 휘둘러도 헉헉대던 아이작이 갑옷을 입은 이단심문관을 업고도 훨훨 날 듯이 산을 오르는 것을 보고 어이없어했지만,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이미 아이작의 기묘한 체력 낙차는 게벨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저 '젊은 게 깡패라니까'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이작은 그러고도 여유가 남아 이름 없는 혼돈의 포상을 확인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새로 포식한 먹이에 만족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다음 세 가지 포상 중 한 가지를 고르세요.]

[이계의 청소부 / 이제 양손에서 촉수를 불러낼 수 있습니다.]

[심연에서 부르는 자 / 상대방을 환각에 빠뜨려 구속하고 느리게 만듭니다.]

[혼돈의 자손 / '저 너머의 기생충'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생충이 숙주를 즉시 잡아먹고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혼돈의 자손'으로 변태합니다.]

'오랜만에 선택 포상이군.'

아이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아이작이 획득한 촉수의 능력은 '살점 저장고'와 '저 너머의 기생충', '벽 속의 쥐' 뿐이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몇 차례 그에게 퀘스트를 내리기는 했지만 수도원 안에서는 해결할 수 없거나 터무니없는 것들이었기에 거절한 탓이었다.

게임도 아니고 하나뿐인 목숨이다. 위험한 촉수의 능력을 키우는 것보다는 그동안 아이작 본인의 체력을 늘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전부 쉽게 눈에 띄는 능력은 아니군.'

'이계의 청소부'도 이제는 전처럼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지난 4년간 촉수를 충분히 잘 숨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왼손과 가슴팍에서 나오는 촉수로도 이미 충분했다. 추가 촉수의 필요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심연에서 부르는 자'는 꽤 유용한 디버프 저주 스킬이었다. 적을 이 스킬로 약화시키고 상대한다면 굳이 촉수를 꺼내지 않아도 어지간한 적들은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위장용으로 좋았다.

'혼돈의 자손'은 치명적인 몬스터 스킬 중 하나였다. 걸린 즉시 풀지 않으면 체력이 빠르게 소모되다가 즉사하면서 괴물이 튀어나오는 스킬이다. 그 그로테스크함과 전열 붕괴의 용이함 때문에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단연 눈에 띄는 스킬이었다.

'강력한 스킬이긴 한데, 숙주의 능력을 따라가는 것과 눈에 띈다는 점이 걸리네....'

게다가 기생충을 미리 심어 둔 상태라야 하는데, 그러면 촉수가 이미 살갗 안까지 파고들었다는 뜻이다. 거의 이긴 거나 다름없다는 상태.

그래도 아이작은 고민 끝에 '혼돈의 자손'을 선택하기로 했다.

'갈까마귀, 꽤 유용했지.'

복잡한 전장에서 갈까마귀처럼 내려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대단히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어차피 날뛰는 촉수 괴물의 도움보다는 은밀하게 하수인처럼 부릴 수 있는 종복이 필요한 때였다.

'이단심문관도 감시해야 하고 말야.'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때에 따라서는 협박용으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아이작은 자신의 목숨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결국 아이작은 혼돈의 자손을 선택했다.

왼손 안에 깃든 촉수가 꿈틀거리며 새로운 힘을 흡수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작은 직감적으로 현재 갈까마귀의 몸 안에 들어있는 기생충이 언제든 그 숙주를 찢어발기며 새로운 형상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아직은 안돼.'

이단심문관이 깨어나면 갈까마귀를 찾을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실험으로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수도원에는 쥐라는 훌륭한 실험 대상들이 널리고 널려 있었다.

***

아이작과 게벨이 수도원에 도착하자 수도사들이 황급히 문을 열어 주었다. 수도원은 있는 횃불과 등불들을 모두 밝혀서 빛의 법전을 모시는 곳이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이단심문관이 온다는 것 때문에 나름 준비를 한 듯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이단심문관은 기절해서 이 장관을 보지 못했지만.

"이쪽으로."

예브하르가 미리 준비한 병실로 이단심문관을 데리고 갔다. 그 모습을 수도사들이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라는 것을 알아본 수도사들이 당혹해하는 것이 보였다. 수도원은 금녀의 구역까지는 아니었지만,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이성의 출입이 거의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브하르는 이단심문관을 편하게 눕히기 위해 갑옷을 벗기다가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이솔데 브란트?"

그의 말을 들은 게벨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브란트 공작가의 딸 말입니까?"

"예. 그녀의 성인식에 참여한 적 있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귀하신 분인가 봐요?"

아이작이 물었다.

브란트 공작가는 아이작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가문이다. 지금 아이작이 있는 백제국, 게르토니아 제국의 황제도 브란트 공작가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수도원장이 딸의 성인식에 참가할 정도라면 확실히 대단한 권세를 누리고 있는 모양이다.

"빛의 법전 아래 높고 낮음이 있겠느냐마는, 브란트 공작가는 신심이 깊은 것으로 유명하지. 하지만 설마 그 외동딸이 험한 이단심문관 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이단심문관은 그 절대적인 권위만큼이나 적도 많다.

아이작이 은근슬쩍 품었던 마음처럼, 이단심문관을 죽여버리면 의심받을 일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결국 그들의 머릿속엔 한 가지 결론만 남았다.

지금 이솔데가 죽어 버리면 곤란해지는 것은 한두 사람이 아니란 뜻이었다.

'여기서 죽는 것보다는 늑대 밥으로 만드는 게 나았을 텐데.'

아이작은 속으로 후회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일단 살려놓고 봅시다. 이 사람이 브란트든 바르바리든, 구해 놓고 죽여 버리는 헛수고를 하고 싶지는 않군요."

게벨은 이솔데의 옷을 찢어서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에서 풍기는 악취에 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특히 게벨과 아이작은 익숙한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예브하르는 늑대에게 물린 듯한 이솔데의 환부를 살펴보았다.

"수포와 변색, 부패해가는 흔적...."

"역병이군요."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예브하르도 뒷걸음질 쳤다.

생각해보면 늑대도 멧돼지도 곰도 다 역병이 걸린 상태였다. 그 정도면 이 산 전체에 어떤 역병이 넓게 퍼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람이 감염된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아이작은 섬찟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일부러 죽이지 않은 건가?'

몇 시간이 걸렸는데도 거대 곰과 늑대 떼가 이단심문관을 죽이지 않고 몰아붙이기만 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의 의도라면?

아이작은 역병의 냄새가 풍겨올 때 늑대 떼의 태도가 돌변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누군가가 역병에 감염된 이단심문관을 수도원 안에 넣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다.

예브하르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치료부터 시작합시다. 게벨 씨, 마늘과 소금을 방 주변에 뿌려주십시오. 아이작, 지하실에서 거머리를 가져와라. 저는 수도사들과 함께 기도회를 준비하겠습니다."

"거머리요?"

아이작은 엉뚱한 지시에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사혈 치료법을 펼쳐야지. 나쁜 피를 빼내야 역병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겠느냐?"

'이게 무슨 개소리야? 환자한테서 피를 빼낸다고?'

아이작은 목구멍까지 그 말이 올라왔다가 간신히 참았다.

이 세계는 기본 의료 상식이 부족한 중세다.

생각해 보면 그럴만했다.

어지간한 병이나 상처는 수도사들의 기적으로 치료되는 세상이니, 의학이 발달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

'하지만 이건 수도원을 겨냥하고 뿌린 역병이야.'

수도원을 향한 공격인데 기적에 대한 대비를 안 했을 리가 없다. 아이작은 수도사들이 이 역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심지어 게벨조차도 예브하르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뭐라도 해야겠군.'

이단심문관 아가씨가 그렇게 귀한 몸이라면, 살려 두는 쪽이 두고두고 이득이 될 테니까.

20화. 역병신(疫病神) (2)

"역병? 역병에 걸렸다고?"

"그렇대. 게벨 님께서 금줄을 치시는 걸 봤어."

수도원에 들어온 이단심문관이 역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금방 알려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게벨이 출입을 막기 위해 금줄을 치고 있었고, 예브하르도 역병 치료를 위한 기도회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역병 치료를 위해 기도회를 준비한다는 게 현대인이 듣기에는 개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었고, 심지어 가장 유효한 치료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도원에 역병을 퍼뜨린 상대는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 기도문이 과연 통할지는 의문이었다.

예브하르도 이 사실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사혈 치료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도사들도 저 나름대로 역병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했다. 그 대비책이라는 것이 마른 허브를 얼굴에 문지른다든가 닭발을 줄에 묶어서 목에 건다든가 하는 행위였지만.

사실 이런 행위 중 태반은 빛의 법전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신심 깊은 수도사라 할지라도 은연중에 미신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한 가지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머리가 다 죽었다고?"

"예."

이솔데에게 사혈 치료를 하던 예브하르는 당황했다. 지난 며칠 동안 1차로 피를 빼내고, 2차로 다시 또 치료하려고 했는데 거머리가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수도원 지하에는 이런 경우를 대비한 치료용 거머리를 수조에서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거머리는 이미 모두 사라지고, 대신 검은색 물만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촉수가 다 먹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아이작은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사혈을 마신 거머리를 통 안에 넣으니까 밤사이 전부 녹아서 사라졌더군요. 아마 역병 때문 아닐까요? 늑대나 곰도 걸린 병이었으니, 거머리도 걸리지 말란 법은 없잖습니까."

놀랍게도 이 핑계는 통했다. 이 시대 생물학적 상식으로는 거머리는 동물보다 액체에 가까운 무언가였던 것이다. 사실 물통에 든 것은 촉수가 대부분을 먹고 역병을 흡수한 거머리 몇 마리를 갈아서 만든 찌꺼기였다.

['거머리'를 포식하였습니다.]

['포식' 특전으로 흡혈 효율이 상승합니다.]

[체력 회복 능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원치 않았던, 기대도 하지 않았던 포식 특전을 얻기는 했지만 거머리는 빨리 소화되기 때문에 크게 도움 될 것 같지 않았다.

예브하르는 거머리가 모두 죽었다는 말에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한겨울에 거머리를 구하러 가기는 어렵고... 직접 피를 뽑아야 하나?"

'아니, 이 사람들이 정말.'

아이작은 예브하르가 야매 의료 지식으로 정신 나간 짓을 하기 전에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수도원장님, 제가 약간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예브하르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네가 말이냐?"

"예. 사실 제가 예전에 이국의 의서들을 좀 본 적 있습니다. 기본적인 간호와 잡일은 저와 게벨 님이 할 테니, 수도사님들과 원장님은 번잡스러운 것에 신경 쓰시는 대신 기도회에 열중해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간단한 역할 분담이다.

수도사들이 치료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방해만 된다. 하지만 기도회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니 기도회에만 열중하면 된다.

아이작은 '잡일'에 해당하는 방역과 치료에 열중할 생각이었다.

예브하르는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의 진단을 받는 것보다는 성자의 손을 한번 잡는 것이 더 치료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시대였다. 그리고 기적이 존재하는 이 시대에는 딱히 그런 믿음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미 역병은 수도사들 사이로도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감염되지 않도록 격리되어 있었고, 심지어 게벨에게도 역병의 증상이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솔데를 업고 온 아이작은 역병은커녕 기침 한번 없었다.

아이작의 지식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신의 가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예브하르는 아이작의 행동을 승낙해 주었다.

"좋다. 우리는 기도에 열중할 테니 믿고 맡기마."

***

아이작은 바로 방역 조치부터 들어갔다.

우선 나름 밀접 접촉자라고 할 수 있는 게벨은 자신의 방에 격리시켰다. 실제로 게벨에게도 역병의 전조증상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조치였다. 그리고 역병의 핵심 근원지인 이솔데의 옷가지는 모아서 모조리 태워 버렸다.

이단심문관의 옷을 태운다는 것을 수도사들이 염려하자 아이작은 담담히 설명했다.

"역병을 불로 정화하는 조치입니다."

그럴듯한 말에 수도사들도 납득했다. 다른 역병의 여지가 있는 물건들도 모두 태웠다.

다행인 점은 수도사들이 고작 16살에 불과한 아이작의 말을 잘 따라주었다는 점이었다.

아이작이 하는 행동에는 나름 근거가 있었고, 막연하지만 전통적인 미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역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군.'

격리를 시키는 것만 봐도 최소한 역병이 발생하면 그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개념은 있었던 것이다.

아이작은 추가로 식사 때마다 손을 씻도록 만들고, 수도사들의 로브가 코까지 가릴 수 있도록 조치했다. 마스크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침이 사방팔방 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기도회 장소를 분리해달라고?"

"예."

아이작은 거기다 한술 더 떠서 기도회에까지 참견했다. 다들 한자리에 모여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역병 증상이 생긴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 나눠서 기도회를 진행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치유 능력이 있다는 성인의 동상을 찾아, 온 나라를 순례 다니는 것이 상식인 시대다.

때문에 아이작은 기도 장소를 분리해 달라는 부탁에 수도사들이 거부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24시간 가까이 기도가 이루어지는 예배당을 격리수용시설로 만들 생각이었다.

"기도회가 굳이 비좁은 골방 안에서만 이루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빛의 법전의 이치를 따르려면 건강한 사람들은 태양볕 아래 더 선명한 목소리를 냄이 옳습니다."

빛의 법전 교단의 상징은 태양. 그런데 빛의 법전에게 탄원하면서 골방 안에서 기도를 웅얼거리는 것이 맞는 일이겠느냐?

아이작은 그렇게 힐난하는 어조로 말했다.

제멋대로인 해석이었지만, 예브하르는 그 말 또한 옳게 여겼다.

"좋다. 그렇게 하마."

다행히 예브하르를 비롯한 수도사들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라주었다.

이솔데와 가장 가까이 접촉하고도 증상이 없다는 점과 아이작 본인이 가진 특유의 신비한 매력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에 이미 아이작과 신뢰가 쌓인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제발 이 방법이 통해야 할 텐데.'

사실 이미 역병이 퍼진 상황에서 수도원은 거대한 격리병동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지품을 태우거나 격리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증상에 따라 환자를 구분하고 청결에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행히 아이작의 조치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아이작이 방역 조치를 취하기 전까지만 해도 수도사들 사이에서 역병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움직이자 새로운 감염자 수도 줄어들고, 증세가 악화되는 것도 느려지고 있었다.

'일시적일 뿐이야.'

예브하르의 기도회가 효과를 발휘한다면 역병을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전에 죽거나 심한 후유증을 앓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원을 제거해야만 했다.

***

이솔데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이솔데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환부는 여전히 수포와 곯아 가는 상처들로 가득했다. 절단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쇠약해진 상태에서 하기에는 어려운 방법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버티고 있는 것은 치료 기도회 덕분이었다.

기도회는 확실히 이솔데의 치유력을 북돋고 있었다. 다만 역병을 낫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작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혈 치료를 막는 것뿐, 나머지는 기도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안 좋아.'

게벨과 다른 수도사들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기도회는 감염으로 죽는 것은 막아주고 있지만, 감염 자체는 막아주지 못한다. 아이작이 하고 있는 방역 조치도 일시적일 뿐, 피로가 길어지면 다시 역병이 번질 수 있었다.

점점 역병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기도회도 제대로 힘을 못 쓸 것이다.

'그 전에 빛의 법전이 힘을 써서 팍팍 치료되면 좋겠지만.'

마법이며 신이며 기적이 있는 세상인데 어련할까. 문제는 그렇게 정화되기까지 환자들, 특히 이솔데라는 저 이단심문관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란 점이다.

기적에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아이작이 해야 할 일은 기도가 아니라 행동이었다.

아이작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촉수를 꺼냈다. 스멀스멀 촉수가 이솔데의 몸 위로 기어 올라갔다.

'기분이 이상하군.'

뭔가 못할 짓을 저지르고 있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촉수는 이솔데의 환부를 훑기 시작했다. 썩은 부위와 곯아 가는 상처, 수포들을 수많은 이빨들이 빠르게 도려내어 집어삼켰다. 몸에 해가 되는 부분만 제거하는 방법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은 먹지 않기로 했던 아이작이지만, 이것은 미묘한 경계에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거머리 사혈 치료 같은 거지?'

아이작은 그렇게나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거머리 사혈치료를 자신이 하고 있다는 생각에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솔데는 역병에 감염된 부위가 떨어져 나갈 때마다 움찔움찔 떨었다.

잠시 뒤, 이솔데의 상처 부위에서는 선홍빛 피가 흘렀지만 감염된 부위는 사라졌다. 치료용 알콜이나 소독제를 구할 수는 없으니 이게 최선의 조치였다.

아이작은 거기서 한 번 더, 거머리의 포식 특전을 발휘했다.

['포식' 특전으로 흡혈 효율이 상승합니다.]

[체력 회복 능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촉수가 울컥울컥 체액을 토해내며 이솔데의 상처 부위를 덮었다. 이솔데의 피와 살을 삼켜서 만든 것들이었다. 일시적인 조치였지만 회복 능력이 깃든 체액이 상처를 덮자, 환부가 아물었다.

'이 정도면 간호는 할 만큼 한 것 같군.'

아이작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이것은 고작 방어에 불과하다.

빛의 법전이 곧 크게 한 방 날려 줄지도 모르지만, 아이작은 신이 복수해 줄 것이라고 믿고 얌전히 있을 생각 따윈 없었다.

"슬슬 성과가 있어야 할 텐데."

아이작은 중얼거리며 방 구석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쥐 한 마리가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저 너머의 기생충'에 감염되어 뇌가 마비된 쥐였다. 아이작은 거기에 '혼돈의 자손' 특전을 발동시켰다.

[혼돈의 자손 / '저 너머의 기생충' 특전이 있어야 합니다. 기생충이 숙주를 즉시 잡아먹고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혼돈의 자손'으로 변태합니다.]

아이작이 능력을 발휘한 순간, 쥐가 빠르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내 쥐는 퍽 소리를 내며 물풍선처럼 터져 버렸다.

참혹한 잔해 속에서 겉과 속이 뒤집히듯 무언가가 기어 나왔다.

그것은 쥐의 가죽과 뼈, 살점, 체액들을 모조리 빨아들이면서 서서히 형태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는 쥐를 닮아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사방으로 요동치는 촉수가 어설프게 쥐의 형태를 흉내 내고 있었다.

이것이 혼돈의 자손이었다.

[주인님.]

짧고 투박한 메시지가 아이작에게 전달되었다. 혼돈의 자손이 보낸 메시지였다. 쥐라는 동물을 매개로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혼돈의 자손들은 모두 이렇게 짧고 간단한 단어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아이작은 혼돈의 자손에게 이솔데의 살점을 나눠주었다.

"이 역병의 근원지를 찾아. 분명 이 산 어딘가에서 시작됐을 거다. 우릴 엿먹이려는 놈이 누군지 알아야지."

혼돈의 자손은 촉수를 꿈틀거리다가 아이작이 내민 살점을 휙 낚아챘다. 녀석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입으로 살점을 삼키고는 쥐구멍 속으로 달려갔다.

아이작은 역병이 시작된 이래로 꾸준히 취해 왔던 이 조치의 성과가 슬슬 나타나길 기대했다.

***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그날 밤.

[주인님.]

아이작은 문득 들려온 메시지에 눈을 떴다.

[역병. 시작. 찾음.]

21화. 역병신(疫病神) (3)

펄럭.

아이작은 수도사들이 입는 두터운 로브를 몸에 걸쳤다.

이미 성인에 가까운 키에, 깊게 두건까지 눌러쓰니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허리춤에는 이솔데에게 아직 돌려주지 않은 심판의 검을 장비했다.

지금부터 아이작이 할 일은 누구도 알아봐선 안 되는 일이었다.

아이작은 어둠에 잠겨 있는 복도로 나갔다. 복도 한쪽 귀퉁이를 응시하자, 벽 틈 사이로 꾸물거리며 혼돈의 자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자."

아이작은 혼돈의 자손을 앞세워 녀석이 찾았다는 역병의 근원지로 향했다.

지난 며칠 동안 아이작은 혼돈의 자손들을 풀어 역병의 근원을 찾았다. 드디어 그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역병 멧돼지를 처음 본 게 2년 전이었던가?'

그때에는 단순한 풍토병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사태를 보면 단순한 역병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아이작은 이 역병에게서 계략과 음모의 냄새를 맡았다.

적어도 지성이 있는 무언가가 몇 년에 걸쳐 계속 수도원을 노렸다. 하지만 수도원을 돌파할 힘이 없어서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성과를 보기 직전인 상황. 놈은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려 할 것이다.

앞장서서 가던 혼돈의 자손이 문득 방향을 틀더니 판자로 막혀있는 틈을 지나 안으로 향했다.

'응?'

아이작은 의아해하며 멈춰 섰다.

이 판자는 폐쇄된 지하실을 막는 가벽이었다.

공격이 수도원 밖에서 시작된 만큼, 당연히 공격의 주체도 외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혼돈의 자손은 분명 지금 수도원 지하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검을 지렛대 삼아 가벽을 하나하나 무너뜨렸다. 뭐가 됐든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은 부서진 잔해를 뚫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이름 없는 혼돈으로부터 메시지가 내려왔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이 성역을 역겨워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은 이 더럽혀진 성역의 '정화'를 원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성역?'

아이작은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메시지였다.

이름 없는 혼돈은 아이작이 빛의 법전에게 기도를 하거나 예배당에서 경전을 공부해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심지어 촉수를 욕하거나 대놓고 비난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이름 없는 혼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 계단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역겨워하고 있었다.

'뭔가가 있긴 있군.'

***

계단 밑에서는 미적지근하고 끈끈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겨울인데도 느껴지는 미묘한 온기에 아이작은 인상을 찡그렸다.

마치 뚱뚱하고 땀에 절은 살점에 파묻혀 있는 듯한 온기였다.

그때 아이작은 왼손의 촉수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다.

찍! 기둥 위에서 아이작을 향해 뛰어내리던 쥐 한 마리가 검에 반 토막 나서 떨어졌다. 토막 난 쥐의 크기는 거의 작은 강아지만 했다.

"뭐 이런 돼지 같은...."

다시 또 촉수가 꿈틀거렸다.

퍽.

발에 걷어차인 쥐는 비명을 꽥꽥 질러대다가 달아났다. 그 비명에 반응하듯 어둠 속에서 웅크린 붉은 눈빛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지난 수년 동안 쥐 사냥을 반복해온 아이작은 그것들 전부가 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 이 쥐새끼들. 그렇게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더니만, 여기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네?"

아이작은 왜 그렇게 쥐가 끝도 없이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수도원 지하에서 무언가가 끊임없이 쥐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작과 게벨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 역병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던 셈이다.

주변에 술렁거리는 소음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무수한 숫자의 쥐 떼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들풀처럼 움직이는 쥐 떼의 모습에 아이작은 검을 바로 세웠다.

쥐들이 용맹하게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쥐들은 혼자 있을 때에는 별것 아니지만 숫자가 늘어나면 자신보다 큰 상대에게도 가차 없이 달려든다.

게다가 놈들은 이미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어둠을 이용해 늑대도, 곰도, 멧돼지도 희생양으로 삼은 적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가 달랐다.

퍽, 콰드드득!

아이작이 검을 골프채처럼 휘두른 순간, 돌풍이 일면서 쥐 대여섯 마리가 날아갔다. 튕겨 나간 쥐들은 벽에 부딪혀 핏자국이 되었다. 하지만 쥐들은 광기에 휩싸여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이작은 차분히 물러나면서 달려드는 쥐들을 하나하나 베고 찌르고 토막 냈다. 물결처럼 밀려드는 붉은 눈동자에도 그의 검격에는 망설임이나 머뭇거림이 없었다.

찍, 찌익!

주변에 곰팡내나 역병의 냄새보다 혈향이 짙어지고서야 쥐들이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수의 쥐들이 달려들었는데도 아이작에게 이빨 자국 하나 남긴 쥐가 하나도 없었다.

어쩌다 올라타더라도 아이작이 두터운 로브를 다리와 팔에 감듯이 묶은 탓에 안으로 파고들 수 없었다. 이미 아이작은 역병의 근원지를 퇴치하러 오면서 쥐 떼의 습격쯤은 예상했던 것이다.

'쥐 떼쯤이야 숫자가 얼마나 되든 문제가 안 되지.'

수 차례 검을 휘두르면서도 아이작의 호흡은 평상시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쥐 따위를 베면서 검술을 쓰거나 집중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14살 때 얻은 특전 덕분이었다.

[당신은 저급한 짐승을 언제든 포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촉수를 이용해 쥐를 먹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작과 쥐의 관계가 사자와 병아리만큼 차이가 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완벽한 상위 포식자로서.

병아리가 백 마리건 천 마리건 사자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작의 눈에 쥐 떼들의 움직임은 낱낱이 읽혔고, 그 무수한 숫자에도 전혀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아이작에게는 다른 축복들도 있었다.

[역병 거대 곰의 '포식' 특전으로 괴력을 발휘합니다.]

[역병 늑대의 '포식' 특전으로 약점 추적 능력이 향상됩니다.]

이제까지 아이작이 먹어 치웠던 역병의 짐승들 또한 이제 되레 아이작의 힘이 된 상태였다.

아이작은 약점 추적 능력으로 쥐 떼들의 빈틈을 탐색하고, 지치지 않는 괴력으로 쥐 떼들을 한꺼번에 처치했다. 이런 저급한 짐승들을 상대하는 데 제대로 된 검술을 발휘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역병 소굴에 들어온 아이작은 이쯤 되면 기침을 하거나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역병에 대한 저항 능력 덕분인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슬슬 머뭇거리기 시작하는군.'

쥐 떼들은 어느새 주변에 자신들보다 사체의 수가 더 많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쥐는 영악한 동물이다. 쪽수가 모이면 더 강한 상대에게도 가차 없이 달려들지만,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되면 동료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친다. 이내 쥐들 사이로 공포와 패닉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이작의 눈동자에 쥐 떼들의 빈틈이 보였다.

쿵.

아이작은 단숨에 앞으로 달려 나가며 촉수를 휘둘렀다.

촉수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마치 갈퀴처럼 쥐 떼들을 휘감았다.

퍼퍼퍼퍽!

벽에 메다 꽂힌 쥐들이 모기처럼 터져나갔다.

촉수들이 게걸스럽게 쥐들을 포식하고 집어삼켰다. 아이작과 함께 왔던 혼돈의 자손도 틈을 타서 열심히 쥐를 잡아 체액을 빨아먹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살육의 만찬에 쥐들은 완전히 공포에 빠져 벽 사이사이로 도망쳤다. 하지만 아이작은 녀석들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오늘 완전히 끝장을 봐야겠어.'

아이작은 아직 바닥을 굴러다니며 빌빌거리고 있는 쥐들에게 기생충을 심었다. 기생충에 감염된 쥐들은 경련을 일으키다가 이내 퍽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 사체들 속에서 대여섯 마리의 혼돈의 자손들이 태어났다.

"쥐들을 전부 잡아먹어라."

쥐에서 태어난 혼돈의 자손들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 하지만 쥐 10마리 정도를 너끈히 상대할 만큼의 힘은 있다. 어차피 혼돈의 자손의 수명은 길어봐야 1주일. 아이작이 이미 산에 풀어 둔 혼돈의 자손들도 같은 명령을 받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돈의 자손들이 벽틈 사이로 사라지고, 주변은 진득한 피 냄새와 고요만이 남았다.

아이작은 급격한 허기를 느꼈다.

'살점 저장고'가 그런 것처럼 촉수의 능력을 사용하면 이미 포식했던 것들을 빨리 소화시킨다. 그리고 충분히 포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촉수의 능력을 쓰면, 아이작 스스로의 체력을 소모한다.

지난 며칠 동안 아이작은 방역과 치료에 전념하느라 제대로 된 포식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아직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촉수가 이전에 늑대와 곰을 배 터지도록 포식한 덕분이었다.

물론 지금 느끼는 이 허기는 포식한 짐승들이 바닥났다는 뜻이 아니었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소화되면서 느끼는 감정적인 허전함이었다.

'충분해.'

찍.

그때 어둠 속에서 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 머리가 두 개 달려 있는, 반쯤 썩은 모습의 쥐였다.

아이작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평범한 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와라.]

아이작의 머릿속에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머리 둘 달린 쥐가 뒤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름 없는 혼돈의 목소리도, 혼돈의 자손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생각에 미소 지었다.

역병을 풀고 감염된 짐승들을 지배하고 있던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낸 것이다.

아이작은 상대방이 말한 대로 순순히 뒤따라갔다.

그리고 곧 나타날 상대를 기대하며 입맛을 다셨다.

벌써부터 맹렬하게 허기가 지고 있었다.

***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점점 험해지고 투박해졌다. 아이작은 어느새 주변의 건축 양식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수도원의 정갈하고 단단하게 쌓인 건축물이 아니라, 다소 오래된 느낌이 드는 투박한 양식이었다.

아이작은 벽에 새겨진 그림과 무늬를 살펴보면서, 수도원이 어떤 고대의 건축물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군.'

아이작은 이곳에 와본 적 있었다.

정확히는 '네임리스 카오스'를 플레이할 때 온 적 있었다.

그것도 아주 친숙하게 느껴질 만큼.

툭. 아이작은 계단의 마지막 칸에 도달했다. 계단 맨 아래 지하실에는 제법 큰 공간이 있었다. 지금은 다 무너져가는 폐허였지만, 그 규모와 제단의 크기로 볼 때 꽤 숭배받던 무언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위에 한때 이곳에서 영광을 누렸던 자가 누워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쥐였다.

쥐는 게벨이 맞서 싸웠던 거대한 곰만 한 크기였다. 하지만 몸통은 너무 크고 팔다리는 너무 짧아서 움직이기 어려워 보였다. 오직 배만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른 채 푸르스름한 녹색 빛을 발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거대한 쥐가 녹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아이작을 응시했다.

[감히 하찮은 피조물을 시켜서 위대한 자의 계획을 방해하다니... 뭐 하는 놈이냐.]

아이작은 거대한 쥐의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거대 쥐가 노성을 토해 냈다.

[닥쳐라, 피조물. 네게 묻는 것이 아니다. 감히 여린 피조물 따위가 내 계획을 감지하고 방해할 수는 없을 터. 분명 너를 조종하는 자가 뒤에 있겠지. 숨지 말고 나와라.]

"거 되게 깝죽거리네, 쥐돼지 새끼가."

잠시 던전이 침묵에 휩싸였다. 거대 쥐는 아이작을 응시하다가 목소리를 냈다.

[네가 지금 누구에게 지껄이는지 아느냐. 나는....]

"대모쥐 지힐렛이잖아."

대모쥐 지힐렛.

역병신이자 만 마리 쥐의 어머니.

유저들이 붙인 별명은 '쥐돼지'.

아이작은 이제야 이곳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이작이 지난 수년간 살았던 이 수도원은 사실 '네임리스 카오스'에서 상당히 유명한 던전이었다.

부정한 역병신과 역병신의 사도들이 득시글거리는 마굴.

즉, 원래대로라면 여명군이 시작되는 2년 뒤, 수도원은 역병으로 인해 전멸하거나 사람들이 전부 떠나 폐허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아이작은 게임 속에서 노가다를 하느라 수백 번도 더 해치운 지힐렛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걸 다 먹으면 배가 터지겠군.'

22화. 역병신(疫病神) (4)

지힐렛은 태연하게 자신의 진명을 언급하는 아이작을 보며 흠칫했다.

[네놈... 어떻게 내 이름을....]

"뭐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아이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지힐렛이 거대한 배를 꿈틀거리며 소리 질렀다.

[모르는 척하지 마라! 내 마지막 신도가 죽은 것이 백 년이 넘은 일인데 내 진명(眞名)을 언급하다니! 대체 누구의 명령을 듣고 있는 것이냐!]

"이건 또 무슨 설정인지 모르겠는데...."

파르르르르!

지힐렛이 포효를 토해내자 로브가 거칠게 펄럭였다. 동시에 아이작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촉수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공포나 긴장 때문이 아니라, 촉수들이 언짢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자기 손바닥 위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언짢음.

'그냥 머리 위에 뜨던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인데?'

솔직히 아이작에게는 알 바 아닌 일이다. 지힐렛이라는 이름보다는 쥐돼지라고 더 많이 부르고 다녔으니까. 그리고 지힐렛이 나오는 이 던전을 자주 방문했던 것은, 녀석이 '신성'을 가진 적들 중 상대적으로 가장 잡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뿐이었다.

[이래도 모습을 안 드러내? 그러면 네 놈의 피조물을 갈가리 찢어서 드러나게 해주마!]

지힐렛은 포효에도 불구하고 아이작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격렬한 피기침을 터뜨렸다.

피기침들은 저마다 끈적한 슬라임의 형태가 되어서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블러드 슬라임이라고 부르는 몬스터 군체였다.

아이작은 역겨운 모습에 반사적으로 촉수를 꺼내 들었다. 촉수는 단숨에 허공에서 블러드 슬라임을 꿰뚫어 갈라버렸다. 퍽. 블러드 슬라임 두 마리가 터지면서 지힐렛의 뚱뚱한 몸에 체액이 튀었다. 놈의 작은 눈이 커졌다.

[이건 무슨... 네놈 대체 무슨 신의 권능을 빌려 쓰고 있느냐...!]

그제야 지힐렛은 뭔가 깨달은 듯 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네필림! 네필림이구나! 천상의 피를 훔쳐 쓰는 더러운 족속! 아니, 그러면 대체 네 놈은, 네 놈의 어미는 대체 무슨 족속과 몸을 섞은 거냐!]

"갑자기 패드립을? 점점 더 용서가 안 되는데."

아이작은 이 더러운 환경에서 더 이상 지힐렛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놈과 같은 방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오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었다.

수년간 쌓인 역병 저항 능력 덕분에 피해를 입지 않고 있을 뿐, 수도사들이라면 진작에 피를 토해 내며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촉수는 블러드 슬라임을 차례대로 꿰뚫고 지힐렛을 노렸다. 지힐렛은 꿈틀거리며 쥐 떼들을 출산하기 시작했다. 대모쥐라는 이름에 걸맞게 녀석은 무수한 숫자의 쥐 떼들을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갓 태어난 쥐들은 아직 피가 마르지 않았는데도 촉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쥐들은 아이작이 상대했던 쥐들과 달리 특별한 것인지, 덩치도 크고 기세도 사나웠다.

콰득, 콱.

놈들은 가차 없이 촉수를 향해 이빨을 박아 넣었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널 낱낱이 해부해서 알아내 주마!]

아이작은 생각보다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아이작은 촉수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다만 이때까지 촉수가 상대해왔던 것들은 멧돼지나 늑대, 곰 같은 야생동물일 뿐, 진짜 몬스터는 없었다.

어지간한 짐승들은 촉수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지만, 대모쥐 지힐렛이 만들어낸 쥐들은 달랐다. 평범한 몬스터 수준을 넘어서서 희박하게나마 신수(神獸)의 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촉수가 팡팡 몸을 바닥에 내려칠 때마다 대모쥐의 쥐들은 피떡이 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쥐를 포식하여 체력을 보충했다. 하지만 여기서 싸움이 길어지면 평범한 인간인 아이작 쪽이 불리했다.

모자란 놈이라도 '신'으로 모셔졌던 놈이다. 완전히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지치지도 않을 테니까.

다행히 지힐렛은 아이작의 촉수를 경계하는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소환수만을 움직여 공격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지힐렛을 응시했다.

[어리석다, 어리석어! 이곳은 나의 성역이다! 감히 남의 성역을 침범하고도 나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나는 천년의 숭배를 받았던 역병신이다! 네깟 놈 따위는....]

'저 녀석, 피조물이니 어쩌니 하면서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군.'

교만함.

아이작은 지힐렛의 감정을 읽었다.

***

지힐렛은 신으로서의 자신이 너무 대단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진 나머지,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작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배후의 존재' 어쩌구 타령만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배후의 존재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여기까지 온 것은 온전히 내 의지지.'

이름 없는 혼돈은 오히려 그 과정에 사용된 도구에 불과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포상을 주든 말든, 아이작은 이 성역을 파괴할 생각이었다.

주된 공격은 촉수가 하고 있었지만, 아이작은 지힐렛의 소환수와 역겨운 가래, 아니, 블러드 슬라임을 피하느라 정신없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게끔 움직였다.

그 사이 아이작은 서서히 심판의 검을 쥐고 지힐렛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놈은 쉴 새 없이 블러드 슬라임과 쥐들을 출산하며 촉수를 몰아붙였다. 아이작은 천천히 지힐렛의 좌측으로 돌아섰다.

이대로 본체를 노리면 소모전을 벌일 필요도 사라진다.

그 순간, 지힐렛의 옆에서 무언가가 일어섰다. 낡고 헤진 로브를 입은 사람이었다. 몸에 착용한 장신구나 무늬로 볼 때 사제처럼 보였다. 하지만 구멍이 숭숭 뚫린 로브 안쪽에는 새하얀 백골이 드러나 있었다.

못해도 백 년 이상 이곳에서 썩은 듯한 해골이었다.

아이작은 고개를 기울였다.

"언데드?"

하지만 해골 사제는 대답 대신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을 낼 뿐이었다. 아이작은 지힐렛이 폐허 아래 묻히지 않고 보존되어왔던 것이 이 해골 덕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데드를 보자마자 아이작은 배후를 직감했다.

"설마 배후에 불사교단이 있었나?"

언데드는 불사교단의 권능이다. 다른 신앙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불사교단의 사제가 어째서 다른 신의 시중을 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해골 사제는 대답 대신 잔뜩 녹슨 검을 치켜들었다. 아이작은 이 해골이 사제인 동시에 이곳을 지키기 위해 놓인 파수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성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지힐렛의 시중을 들고, 뒷바라지를 하면서 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끔 해놓은 장치에 불과해.'

하지만 한쪽 손으로 지힐렛을 상대해야 하는 이상, 아이작은 남은 한 손으로만 검을 써야 했다.

당연히 힘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해골 사제는 관절을 비정상적으로 비틀며 아이작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현재 '약점 추적'과 '괴력' 축복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어쨌든, 성기사는 아니지만 성기사단 검술을 배웠다.

쩌억.

검과 검이 맞부딪친 순간, 아이작은 도저히 한 손으로 휘둘렀다고 믿기지 않는 괴력으로 해골 사제의 검을 튕겨냈다. 해골 사제의 얼굴을 박살 난 검의 파편이 꿰뚫고 지나갔다. 그러나 언데드 답게, 개의치 않고 아이작을 공격하려 했다.

아이작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베기 동작을 이어 나갔다.

수없이 반복해 왔던 베기 동작.

그 순간 아이작의 몸에 무언가 다른 것이 깃들었다.

하나의 흐름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폭발하듯 터져 나와 쇄도하는 촉수의 물결이었다.

아이작은 단 한 번의 호흡에 촉수가 해골의 검을 튕겨내고, 파고들어서 그 몸을 박살 내고, 지힐렛의 저 뚱뚱한 배를 아래서 위로 갈랐다가, 다시 사선으로 그어서 십자 모양의 상처를 입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단지 상상했을 뿐이었다.

퍼어어억!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현실이 되어 있었다.

[그아아아악!]

지힐렛이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 냈다.

아이작은 처음부터 이 해골 사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해골을 베는 동시에 지힐렛의 몸통을 아래서 위로 찢어 버렸다.

아이작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상처를 입은 지힐렛은 울컥울컥 체액을 토해 냈다.

아이작은 무심코 자신이 상급 검술을 사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짧은 거리를 자각조차 못할 정도로 빠르게 이동하며 사이에 있던 것들을 베어 낼 뿐이었으나,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 아발란체 상급 검술을 사용할 때보다 격통이나 부상이 훨씬 덜했다. 통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체력 회복 속도가 훨씬 빨랐다.

대신 아이작은 묘한 공복감을 느꼈다.

'이건... 체력 대신 살점 저장고에 있는 고기들을 대신 소모한 건가?'

그런 것 같았다. 며칠 전에 먹었던 늑대들이 전부 다 순식간에 소화된 상태였다. 얼마 안 남아 있긴 했지만 어마어마한 소화량이었다.

마치 체력 대신 '포만감'을 대가로 가져간 것처럼.

아니, 정확히는 부상을 당하기는 했으나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어째서 아발란체 검술을 쓸 때에는 이런 효과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검술의 형태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군.'

아이작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움직인 궤적을 따라 여덟 갈래의 나선형 흔적이 땅과 지힐렛에게 처참한 상처를 만들어 냈다.

마치 여덟 개의 촉수로 잡아 뜯은 듯한 거대한 상처는 신성을 지닌 지힐렛에게조차 치명상이었다.

[하급 성기사 검술 상승 조건이 완성되었습니다.]

[상급 성기사 검술 숙련도(Lv 1)]

[조합된 상급 검술의 이름을 정해주세요.]

메시지가 연달아 무어라 떠올랐으나 아이작은 그걸 다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갸아아아아아악!]

지힐렛이 포효를 토해내며 몸을 비틀었다. 아이작의 촉수가 빈틈을 노리고 지힐렛의 배를 꿰뚫은 것이다. 동시에 아이작이 입힌 상처에서 무언가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해골의 머리통을 덮쳐 으깨 버렸다.

퍼석.

도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해골이 뭉개져 버렸다.

찍, 찌익, 찌이이이익!

지힐렛의 배에서 튀어나온 것들은 다름 아닌 아직 어린 쥐들이었다. 제대로 된 형태도 갖추지 못한 것들부터, 심지어 막 착상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까지.

더럽고 역겨운 모습에 아이작은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왜! 어째서, 네가!]

지힐렛은 피 끓는 외침을 토해내며 외쳤다. 상처를 치료하려는 듯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심판의 검에 깃든 '부정한 것을 태우는 힘' 때문에 아물지 않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해골 사제가 박살 난 뒤로 지힐렛은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급격하게 어려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심한 상처도 금방 재생하던 육신이, 이제는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수복할수록 더 많은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아무래도 해골 사제가 놈의 형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촉매였던 것 같았다.

'임시라고는 해도 하나뿐인 신도이자 하나뿐인 사제. 그게 사라져 버렸기 때문인가?'

[너도 나와 같은... 신일 것이다! 네게서 분명 신성이 느껴진다! 심지어 나와 같은, 어둡고 혼란스러운 영역에 속한... 그런데 왜!]

이름 없는 혼돈이니까 그야 그렇겠지.

아이작은 모처럼 지힐렛과 의견이 맞는 부분이 생겼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 없는 혼돈이 왜 지힐렛을 경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은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메시지조차 보내지 않았다.

[살려다오! 신성을 가진 존재가 이대로 죽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않느냐! 저 이름 붙여지지 않은 영역에서 영원히....]

그때 지힐렛은 가래 끓는 소리로 뭔가 웅얼거리다가 숨을 헐떡였다. 자기가 내뱉은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너! 너! 설마 세상에 섞여선 안 될 피가 흘러 들어온 건가!]

"불결한 쥐돼지 따위한테 듣기에는 좀 뭐한 말인데...."

아이작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지만 지힐렛은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죽어!]

지힐렛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 소리 지르자 놈이 쏟아낸 태막 속에서 쥐들이 들끓으며 태어나기 시작했다.

부글거리며 막을 찢고 태어나는 쥐들의 모습은 기괴했지만, 제대로 된 형상도 갖추지 못한 채 태어난 쥐들은 나오자마자 죽거나, 바닥을 빌빌거리며 기어 다닐 뿐이었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저 고양이를 눈앞에 둔 쥐가 겁에 질려 달려드는 모습이었다.

이제 지힐렛은 그 격조차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역병의 짐승들아, 앓고 고통받는 자들아! 저놈을 죽여라!]

스스스스슥.

아이작은 주변의 벽들을 타고 혼란스럽게 기어 다니는 소리들을 들었다. 수도원과 온 산에 흩어져있던 쥐 떼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작은 지힐렛이 온 산의 모든 쥐들을 불러 모았음을 깨달았다. 아이작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압사시켜서 죽여 버릴 생각이라는 것도.

아무리 아이작이라도 그 많은 쥐들을 전부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벽 너머 긁어대는 섬뜩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긴장하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쥐, 포식, 흡수.]

[영양, 포식.]

[머리, 몸통, 꼬리, 전부.]

이내 지힐렛도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건지 입을 다물었다.

퍽, 퍼억.

이내 벽에서 무언가 튕기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힐렛이 그토록 기다리던 쥐 떼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힐렛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구원을 청하기 위해, 보호를 요청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쥐 떼들의 뒤를 따라 혼돈의 자손들이 버글거리며 쫓아왔다.

이미 수많은 쥐 떼들을 흡수하고 포식한 덕분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놈들이었다.

지힐렛의 경악 속에 아이작은 느슨하게 촉수를 꿈틀거렸다.

"위생점수는 빵점이지만, 간만에 뷔페식이군."

***

콰드득, 콰득, 콱, 우드드득.

아이작은 촉수가 긴 시간에 걸쳐 대모쥐를 포식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대 곰은 제대로 포식하지 못했지만, 대모쥐는 눈치 볼 사람도 없겠다 마음껏 먹게 해 두었다. 그리고 다른 혼돈의 자손들도 함께 그 식사를 즐겼다.

별로 식욕이 돋는 장면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다른 곳을 살펴보았다.

이 신전은 확실히 오래된 곳이었다.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이들이 찾아왔을 장소. 아마 지힐렛은 많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신앙이 몰락하고, 빛의 법전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 신전 위에 수도원이 엉덩이로 깔아뭉갰으니, 당연히 원한도 깊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름도 없는 촉수의 먹잇감이다.

야생동물이 사람을 해치려고 했으니 구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아이작은 지힐렛이 앉아있던 제단을 살펴보았다. 제물을 바칠 때 쓰이는 것처럼 보이는 긴 상에는 대모쥐가 수많은 쥐들을 낳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작은 그 음각을 천천히 스다듬어 보았다.

그 순간 그에게 메시지가 들려왔다.

[오염된 성역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이 성역을 '이름 없는 혼돈'에게 바치시겠습니까?]

23화. 성역 정화

"성역 정화라고?"

성역 정화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 네임리스 카오스를 플레이할 때에도 몇몇 중요한 '거점'을 점령하면 그 지역에서는 점령자의 신앙이 더욱더 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곳이 바로 성역이다.

그리고 원래 있던 성역의 신앙을 지워 버리고, 새로운 신앙을 세우는 것이 성역 정화였다.

아이작은 방금 성역에서 보통 괴물이나 짐승도 아니고 쇠락했다고는 하나 한때 신이었던 존재를 먹어 치웠다. 그러니 이때까지와는 다른 메시지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설마 이름 없는 혼돈이 성역 정화를 요구할 줄은 몰랐다.

'당연히 빛의 법전에게 돌려줘야 하는 거 아냐?'

아이작의 혼란을 예상한 듯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 성역은 '대모쥐'에 의해 오염되어 있습니다.]

[오염된 성역은 어떤 신앙에든 봉헌할 수 있습니다.]

[성역에 남아있는 옛 신의 잔재를 지우고, 일대에 새로운 축복을 부여합니다.]

[해당 성역 안에서 신앙의 축복이 더더욱 강해집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힐렛의 흔적을 이름 없는 혼돈이 꿰차고 싶다는 뜻이다.

아이작은 고민에 빠졌다.

촉수는 아이작에게 장애물이지만, 동시에 비장의 무기이기도 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없었다면 지힐렛을 상대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지힐렛을 보자마자 신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해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겠지.

성역을 바치면 바로 그 이름 없는 혼돈의 축복이 더 강해진다.

'내게는 분명히 이득이겠지만....'

과연 그게 이 세상의 입장에서도 바른 일일까?

아이작은 자신의 몸에서 튀어나온 촉수들이 주변의 생명체들을 남김없이 도륙하고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았다. 이 성역을 계기로 전 세계가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은 아무리 아이작이라도 원치 않았다.

"성역을 정화하지 않으면?"

[성역을 정화하지 않으면 옛 신은 언제든 다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아예 모르는 척 넘어갈까 했던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지금이야 어떻게 해결했지만, 자신이 없을 때 지힐렛이 부활하면 그때야말로 수도사들은 떼 몰살을 당할지도 모른다.

물론 성역을 바친다고 촉수 괴물이 튀어나와서 세상을 다 뒤엎어 버릴 가능성은 낮았다. 아이작이 게임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신은 혼자서 무언가를 하기는 어렵다.

그저 신자와 사제, 성기사들을 통해서 기적을 베풀고 방향을 지시할 뿐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설령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현재 매개체가 될 신자가 아이작밖에 없다면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악신들은 정신을 조종한다든가 타락시키든가 한다고 들었지만....'

최소한 이름 없는 혼돈이 아이작의 뇌를 후벼파거나 기괴한 속삭임을 들려준 적은 없다. 반쯤 애원이나 투정 부리다시피 퀘스트를 수행하게 만든 적은 있지만, 그것도 아이작을 쓸데없는 위기에 빠뜨리거나 손해를 준 적은 없다.

아이작은 고민 끝에 결정했다.

"이 성역을... 이름 없는 혼돈에 바친다."

성역을 정화하긴 해야 한다. 지힐렛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이름 없는 혼돈으로 덮어쓸 필요가 있었다. 뭣보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성역이 있는 편이 좋다.

***

구우우웅.

아이작이 선언한 순간, 성역을 울리는 기이한 진동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다. 손안의 촉수들이 쭉 뻗어나가더니, 제단의 중심부를 향해 파고들었다.

제단의 중심부를 파고든 촉수들은 마치 주변을 뒤덮듯이 곳곳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돌로 만든 제단이 우득거리며 부서지고 으스러지며 비틀렸다. 벽과 바닥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단을 부수며 거대한 심장이 부풀어 올랐다.

두근.

제단의 심장이 한번 맥박친 순간 아이작은 온몸이 고양되는 힘을 느꼈다. 맥박은 멈추지 않고 뛰며 지하를 울렸다. 아이작은 심장이 맥박칠 때마다 힘이 보충되는 것이 느껴졌다.

뿐만 아니었다. 아이작은 '성역'으로 선포된 수도원 일대가 자신의 피부처럼 느껴졌다. 뒷산에 지힐렛이 남긴 역병의 짐승들이 얼마나 있는지, 풀과 나무가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수도원 안의 사람들이 어디 있으며 얼마나 강하고 약한지까지 모조리 파악해 낼 수 있었다.

즉, 아이작은 수도원 일대에서나마 전능한 감각을 가질 수 있었다.

아득하게 몰려드는 감각에 아이작은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제단에서 떨어지자마자 아이작은 밀려들던 감각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성역 주변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전능한 감각은 오직 제단 가까이서만 일어나는 건가?'

마치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 그 자체가 된 것 같았다. 예전에도 성기사나 사제를 플레이해 본 적 있지만, 성역에서 이런 이벤트를 경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이름 없는 혼돈 특유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제단의 심장을 중심으로 사방에 뻗은 촉수의 부속물들을 보았다.

오래된 양식의 돌벽의 무너진 틈 사이로 근육과 신경 다발들이 꿈틀거렸고, 나무뿌리처럼 뻗은 혈관은 맥동하는 심장에 맞춰 꿈틀거렸다. 은은하게 감도는 붉은빛과 보랏빛이 벽면에 음울하게 번들거렸다. 한때 오래된 신전이었던 수도원 지하는 이제 불경한 괴물의 내장 같은 꼴이 되어있었다.

'수도사들이 이걸 보면 기절하겠군.'

하지만 아이작이 수도원을 엎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빛의 법전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자기들 발아래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촉수는 제단을 완성하자마자 다시 아이작의 왼손으로 복귀했다. 아이작은 촉수에게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요동치는 생명력을 느꼈다. 지금 이 힘이라면 아까 싸웠던 지힐렛을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에게서 들려오는 메시지에서도 만족감이 느껴졌다. 아이작은 여전히 이게 올바른 일인지 회의감이 느꼈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조금 혼란스럽기는 해도 아이작은 이걸로 최소한 수도원이나 그 주변에서라도 살해당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성역 정화'에 대한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다음 세 가지 포상 중 한 가지를 고르세요.]

[갉아먹는 수확자 / 촉수에 송곳니 무리들이 나타나 더 효과적으로 적을 공격하거나 섭취할 수 있습니다.]

[혼돈의 눈 / 상대방의 심리와 상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경계심을 품거나 마음을 가리려 하면 읽기가 어려워집니다.]

[기어드는 혼돈 / 제물을 바쳐서 혼돈의 권속에 속하는 강력한 괴물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어쨌건 오랜만에 본 세 가지 보상안이었다. 아이작은 세 가지 선택지 모두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갉아먹는 수확자'는 지금도 강력한 촉수의 공격력을 훨씬 더 배가시켜 줄 것이 분명했다. 보상 카드로 떠오른 환각 속에는 촉수에 톱니바퀴처럼 송곳니들이 돋아난 모습이 보였다.

'기어드는 혼돈' 역시 이번에 혼돈의 자손 특전을 사용해 본 결과, 기대되는 능력이었다. 촉수의 눈에 띄는 형태 때문에 거의 항상 혼자서 움직여야 할 아이작에게는 손발이 되어 줄 부하가 늘 부족할 것이다. 수족을 대신해줄 강력한 소환수가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이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은 '혼돈의 눈'이었다.

다름 아닌 이단심문관 때문이었다.

'상태와 심리를 파악한다....'

이 능력이야말로 아이작에게 필요한 능력이었다. 아이작의 종족인 네필림은 어차피 신들에게 미움받는다. 그렇다면 인간들에게 호감을 사 둬야 하는데, 혼돈의 눈은 네필림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데 유용할 것이다.

여론 조작과 선동, 유혹, 지배, 협박, 설득, 거짓말. 모든 것이 아이작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지금 수도원을 찾아온 이단심문관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이런 능력이 필요했다.

'지힐렛을 물리쳤으니 이제 수도원에서 역병은 사라지겠지. 이단심문관도 곧 회복될 테고. 그러면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왔고,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아이작은 괴물의 왕이 되어서 세상을 지배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질감을 띠지 않고 출세 가도를 달리며 성공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단심문관과 같은 말썽을 피하려면 타인의 심리를 읽는 능력이 유용할 것이다.

혼돈의 눈을 선택한 순간, 아이작은 오른쪽 눈이 시큰거리며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가 각막 위로 미끈거리며 지나가는 느낌에 기겁한 아이작은 재빨리 검을 꺼내 비춰 보았다. 매끈한 검날 위로 붉은 촉수 가닥이 눈 표면을 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촉수가 각막 위에 자리를 잡자 원래 짙은 회색이었던 아이작의 눈은 어느새 붉은 눈동자를 가진 것처럼 변했다. 다행히 오드아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크게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이제 마지막 절차가 남았군.'

아이작은 지힐렛의 남은 시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촉수가 지힐렛의 시신을 한참 동안 포식했지만 대부분의 고깃덩어리들은 먹지 못하고 남아있었다. 아이작은 지힐렛의 시체를 먹어 치우고 그 능력을 흡수하길 바랐지만 촉수는 그것을 꺼리는 눈치였다.

'먹어서는 안 되는 어떤 부분이 남은 건가?'

아이작은 지힐렛의 남은 사체를 응시했다.

이내 그는 남은 사체를 이용할 방법을 떠올렸다.

24화. 수색 및 섬멸 (1)

아이작이 성역을 정화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역병은 사그라들었다.

굳이 다른 환자들을 살펴보지 않아도 이솔데의 상태를 확인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수도원 안에서 가장 상태가 심각했던 이솔데는 격리실 침상에 잠들어 있었다. 이제 대부분의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으며, 병세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늑대에게 긁히거나 물린 몇몇 상처는 흉이 지겠지만 눈에 띄는 곳은 아니었다. 단순히 잠들어있는 것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날 것이다.

"하루 만에 이런 차도를 보이다니 놀랍군."

"수도사님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이겠지요."

예브하르는 이솔데에게서 역병의 징후가 사라진 것을 보고 놀란 듯 중얼거렸다. 수도원에서 역병이 물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수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역병에 걸렸던 수도사들 대부분이 예배당에 모여 기도 중이었으니까.

그들은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지자 바로 수도원장에게 알렸고, 수도원장 예브하르는 바로 역병이 시작된 이솔데를 찾아왔다.

어차피 이득을 취할 만큼 취한 아이작은 미련 없이 모든 공을 빛의 법전에게로 돌렸다. 하루 만에 이렇게 나을 방법은 어차피 신의 기적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게다가 아이작이 가진 힘과 공은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지. 이건 분명한 너의 공이다. 아이작."

그러나 예브하르는 단순히 신의 덕으로 넘기지 않았다.

"물론 빛의 법전께서 우리를 구해주시리란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 우리 중 몇이나 시험받고 희생된 뒤의 일일지는 알 수 없었지. 이는 단순한 역병이 아닌 게 분명했으니까."

예브하르는 아이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빛의 법전께서 우리를 도우셨다면, 당신을 대리해서 너를 보내신 게 그 도움일 것이다."

예상치 못한 칭찬에 아이작은 머쓱해졌다. 몇 년 동안이나 한솥밥을 먹고 지낸 사람들이 그냥 죽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없어서 도왔을 뿐인데, 이렇게 극찬을 받으니 할 말이 없었다.

"으으음...."

칭찬을 한 사람도, 받은 사람도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려던 찰나, 반가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던 이솔데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의 눈이 희미하게 떠지는 것을 본 아이작은 급히 허리를 숙였다.

"이봐요. 정신이 듭니까?"

잠시 천장에서 초점이 헤매던 이솔데의 눈동자가 아이작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초점을 또렷이 잡지 못하는가 싶더니, 이내 아이작의 얼굴과 마주하고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아이작은 '의식이 없는 것 같더니 고통이 심했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솔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저를 데리러 오셨군요."

"예? 어, 그렇습니다. 게벨 씨와 제가 직접 나가서 데리러 갔었죠."

"게벨?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만 분명 저희가 모르는 영웅들도 분명 있었을 테니까요. 이름을 가지신 명천사께서 저를 마중 나오셨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솔데는 빨갛게 젖은 눈으로 예브하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게벨 천사님, 저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저 당신의 뜻을 따르다가 죽는 것을 복으로 여기며 제가 감히 빛으로 가득한 영원한 왕국에 이르는 것을...."

아이작은 잠시 침묵하다가 곧 그녀의 오해를 정정해 주기로 했다.

***

잠시 후, 이솔데는 그 눈만큼이나 빨갛게 변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서 대답했다.

"천사가 아니시라구요."

"예. 아닙니다."

아이작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솔데가 얼굴을 감싸 쥐고 무릎까지 파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귓불까지 새빨개진 것을 보아 혈압으로 핏줄이 터지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 영락없이, 그러니까... 당신 얼굴이...."

"이해합니다. 극단적인 상황이었고 두려우셨을 테니까요."

아이작은 이솔데가 한 층 더 후회할 소리를 하기 전에 서둘러 얼버무렸다. 이솔데는 처음 아이작과 마주쳤을 때에도 '천사?' 같은 헛소리를 하며 기절했었다. 아이작은 실제로 천사의 혼혈인 네필림이니 완전한 오해는 아니긴 했다.

하지만 네필림은 그 숫자가 극단적으로 적고, 정말 네필림이라는 사실을 들켜도 곤란했기 때문에 생각이 그 방향으로 튀지 않게 해야 했다. 이솔데는 다행히 아이작의 변명을 황급히 받아들였다.

"네, 네. 맞습니다.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던 상황이라,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얻어서...."

외모 때문에 천사라고 생각했다는 것보다는 죽었다 살아나서 천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본인도 다른 사람들도 더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이솔데는 스스로 납득하듯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겨우 얼굴을 내밀었다. 스스로 납득하고 나자 그녀의 얼굴은 그나마 아까보다는 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와 함께 동행했던 대장장이 도제가 있었어요. 그 아이도 무사히 도착했나요?"

"예. 한스가 아가씨의 위험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건 정말... 다행...."

그제야 이솔데는 자신이 왜 수도원에 왔는지 떠오른 듯 황급히 자신의 짐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그녀에게 짐꾸러미를 내밀었다.

"옷과 가방은 역병을 막기 위해 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책과 서류, 도구들은 역병이 침투할 수 없는 듯하여 밀봉해 두었습니다. 옷을 태운 것에 대해서는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솔데의 물품들 대부분은 이단심문관의 장비답게 다른 신앙이나 저주에 물들지 않는 처리들이 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그동안 아이작이 몰래 썼던 심판의 검도 있었다. 다만 옷가지 하나하나까지 그런 처리를 하기는 힘들었기에 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솔데는 자신이 남자밖에 없는 수도원에서 발가벗겨졌던 사연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짐을 뒤지다가 찾는 물건들이 전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잃어버린 물건은 없군요. 잘 보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그러면서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혹시 여기 편지와 서류들은 읽어보셨나요?"

아이작과 예브하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단심문관의 기밀 서류를 읽는다는 것은 불경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이 수도원에는 찔리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 아이작이 성체라는 사실을 숨기는 수도원장까지 합치면 셋. 덕분에 그 서류들을 읽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갑론을박이 많았다.

그러나 아이작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예. 읽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군요."

"아이작!"

예브하르가 놀란 듯 꾸짖었지만 이솔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요. 오히려 읽으셨더라면 상황을 더 빨리 호전시킬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도 이 역병 때문이었으니까요."

"역병 때문이라구요?"

예브하르가 놀란 듯 물었다. 수도원을 휩쓴 역병이 정상적인 역병이 아니라 저주 내지는 음모에 의한 것이란 것은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이 처음부터 그것을 목적으로 왔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예. 불사교단의 마수가 이 수도원에 미치고 있습니다."

그녀가 눈빛을 불태우며 중얼거렸다.

***

이솔데는 역병으로부터 차단된 가방 안에 있던 여벌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수도원장실로 찾아왔다. 움직이기 편한 정복 차림에 진한 붉은색 후드를 눌러쓴 복장이었다.

이번에는 게벨도 자리를 함께했다. 그는 정신을 차린 이솔데를 만나는 것을 껄끄러워했지만, 이솔데가 꼭 만나 뵙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저를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구한 건 제가 아니라 저기 저 수염도 안 난 새파란 애송이입니다."

게벨은 관심도 사고 싶지 않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벽에 기대섰다. 이솔데는 극구 말을 섞고 싶지 않아 하는 게벨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가 게벨을 부른 것은 단지 감사 인사를 표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수도원 안에 칼을 쓸 수 있는 분은 얼마나 계십니까?"

"칼이요?"

예브하르는 예상치 못한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수준을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역시 여명군 참전 경력이 있습니다. 순례를 돌았던 수도사들도 몇몇 있지요. 하지만 저와 그 수도사들이 전부 달려들어도 여기 아이작과 게벨 두 사람을 이기지는 못할 겁니다."

이솔데는 그 정도냐는 듯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아이작은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았으면 했지만, 이미 드러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사실 게벨까지 나설 것도 없다. 수도사들만이라면 아이작 혼자서도 감당할 자신 있었다.

"기적이 아니라 칼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까?"

수도원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기적이다. 그러나 이솔데는 칼을 원하고 있었다.

"이번 역병은 불사교단의 음모입니다."

"불사교단... 불사교단이 움직이기에는 너무 멀지 않습니까?"

불사교단이 있는 흑제국은 여기서 말을 타고도 두 달은 달려야 하는 거리다. 그사이에는 작은 왕국들도 몇 개나 있었다. 하지만 단지 거리만으로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불과 몇 년 전에 배교자 칼센이 불과 이곳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마을을 습격한 적 있습니다. 생존자가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끔찍한 사건이었지요."

예브하르는 아이작에게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얼굴 관리를 했다.

"그건 성기사단 단장이 배교를 저질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불가능하지요."

"물론 사라진 칼센이 이번 일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영향력이 미칠 수는 있다는 것이지요. 소수의 인원만으로 후방에 혼란을 일으키는 겁니다."

아이작은 이솔데의 생각을 읽은 기분이 들었다.

불사교단은 수도원 지하에서 생화학 테러를 저지르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수도원 지하에서 고대신을 부활시키려 했던 겁니다!"

이솔데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아이작은 딸꾹질을 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러나 그녀의 엄숙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브하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게벨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짚었다.

"그래서요?"

"예?"

"이단심문관님, 그런 거창한 이야기가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저는 수도원장입니다. 고대 신앙은 부활할 수 없고, 그에 따른 전설도 대부분은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고대신이 부활하면 고대의 부정한 괴물들과 저주들도 함께...."

"설령 정말 부활한다 치더라도 숭배자가 없는 신들은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들은 죽은 신이니까요.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갈 뻔했던 이름 없는 혼돈이, 이제는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요."

예브하르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 것 같군요. 예전에는 이 지역에 역병 신앙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수백 년 전에 그 사원을 무너뜨리고 벽돌을 주춧돌 삼아 이 수도원을 지었다지요. 말씀대로라면 이번 역병은 그 역병신의 영향이란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불사교단은 그런 고대 신앙을 제국 곳곳에서 부활시킬 생각입니다."

네임리스 카오스의 메인 신앙으로는 아홉 신앙이 있다. 하지만 설정상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까마득한 옛날에는 신앙이 수백 가지가 넘었다. 조금이라도 강한 짐승이나 괴물, 특별한 현상을 죄다 신으로 섬겨 왔던 것이다. 하지만 빛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고대 신앙은 사라지거나 융합되면서 아홉 가지밖에 남지 않았다. 그마저도 아홉 가지 중 일부 신앙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장 '이름 없는 혼돈' 교단만 해도 아이작 혼자이지 않은가.

"그래서 불사교단에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그야 빛의 법전 안에 내분이 생기면 불사교단의 신자도 늘어날 테니...."

"불사교단만큼 신자 걱정이 없는 신앙도 없을 텐데요. 불사교단의 신자들은 늘기만 할 뿐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말이죠."

이솔데는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뭣보다 아홉 신들이 고대신의 부활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불사황제조차도 어린아이를 불태우고 대학살을 강요하는 고대 신앙들을 무너뜨리는데 협력했습니다. 우리가 이교도들과 뜻이 맞는 부분이 하나 있다면, 고대 신앙은 부활할 이유도 없고 부활해서도 안 된다는 거죠."

고대 신앙과 아홉 신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고대 신앙이 야만의 영역이라면 아홉 신앙은 인간의 이성과 문명의 영역이었다. 당장 아홉 신앙 중 절반이 사람 출신이라는 점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으리라고 아이작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 없는 혼돈도 아홉 신앙인데 왜 이 모양이지? 멸망하기 전에는 좀 달랐나?'

아이작은 그런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은 아무에게도 물어볼 수 없고 물어봐서도 안 되는 질문이었다.

이솔데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작은 그녀가 지금 이 반박을 이미 예상했었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논박을 이어가려면 더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교리 배틀이란 몇 년을 이어가도 끝이 없는 법이니까.

'뭔가 숨기고 있군.'

아이작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이솔데와 예브하르는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어서 아이작을 신경 쓰지 못했다.

예브하르가 입을 열었다.

"이단심문관님, 저희 칼이 필요하거든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불사교단이 왜 이 근처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겁니까? 같은 신앙의 형제끼리도 나누지 못할 이야기입니까?"

예브하르가 이솔데의 마음을 흔든 순간, 아이작은 새롭게 얻은 능력, '혼돈의 눈'을 사용했다.

25화. 수색 및 섬멸 (2)

두근.

아이작은 눈동자에서 맥박을 느꼈다. 눈앞에 뭔가 일렁거리는 것을 느낀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손으로 부빌 뻔했지만, 이내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고 가느다란 촉수가 그의 눈앞을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간 것이다.

아이작은 가까스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누군가 보기에는 단지 아이작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도는 정도밖에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달았다.

이름 없는 혼돈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은 즉 그 존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는 것이다. 아이작의 눈꺼풀 아래에서 돋아난 촉수가 일렁이며 눈동자에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내 익숙한 상태창 같은 것이 나타났다.

[이솔데 브란트(A+) / 쇠약]

[직업: 이단심문관(B)]

[능력: 나방의 교리, 고급 심문, 도가니 짐승]

["수도원장을 어떻게 설득하지? 일단 놈들이 행동에 들어간 이상 서둘러야...."]

그것은 이솔데 브란트에 대한 정보였다.

혼돈의 눈은 상대방의 상태와 심리를 읽을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상태라는 게 정말 말 그대로 상태창 같은 정보였던 모양이다. 눈에 보이는 하단의 상태창에는 이솔데의 심리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아직은 얕은 생각만 읽을 수 있는 건가? 이 정도는 굳이 능력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건데....'

아이작은 좀 더 집중하며 이솔데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눈가의 촉수가 다시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아이작은 기겁하며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이단심문관 앞에서 촉수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이다가 무슨 경을 칠지 모른다.

다행히 수도원장실은 어두웠고, 그늘진 곳에 있던 아이작을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선을 돌리기 직전 아이작은 이솔데의 좀 더 깊은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아직 증거도 이유도 못 찾았는데...."]

"증거도 이유도 못 찾았나요?"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이솔데가 휙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은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만졌다. 이솔데가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불사교단이 왜 여기서 활동하는지 이유도 증거도 찾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증거가 없다니요? 죽은 역병신이 수도원을 노렸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단심문관들은 그 직책상 증거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여차하면 사람 한두 명 목숨은 물론이고 집단까지도 대량 학살할 수 있는 직업이니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기본적인 행동 윤리에 어긋나는 셈이다.

"저희 조력을 필요로 하시는 이유가 성기사단을 움직일만한 근거가 없어서 아닙니까?"

아이작의 말에 예브하르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제야 예브하르도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이단심문관이라면 성기사단을 동원할 권한이 있죠. 단 그럴만한 근거가 있을 때 말입니다. 그런데 굳이 수도원에서 칼을 찾는다는 것은 근거가 없기 때문이군요."

결국 이솔데가 칼 쓸 사람을 찾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가 가진 증거와 논리가 빈약하다는 뜻이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원망스럽게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아이작이 구해준 것과는 별개로, 상황이 답답해진 것이다.

아이작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사실 이번 사태 배후에 불사교단이 있다는 그녀의 의심은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직접 수도원 지하에서 불사교단의 졸개를 봤으니.'

지힐렛의 시중을 들던 그 언데드 사제 놈. 녀석이 불사교단의 권속이었다.

하지만 이솔데의 모든 주장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그놈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그놈을 어디서 찾았는지도 이야기해야 하고, 그곳은 현재 맥동하는 이름 없는 혼돈의 심장으로 뒤덮여 있는 상태였으니까. 결국 이솔데가 설득할 만한 근거를 마련해 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저는 불사교단이 활동한다는 첩보와 놈들의 동태, 흔적들을 발견했습니다."

이솔데는 어떻게든 호소하려는 듯 필사적으로 말했다.

"녀석들이 왜 이 백제국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활동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믿습니다."

"믿으시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만 분명... 예?"

"믿는다고요. 수도원을 공격한 것은 고대신을 부활시키려던 불사교단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그 말에 예브하르와 게벨도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예브하르는 아이작의 담대한 모습과 주장에 홀린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이작?"

"할 수 있으니까요."

"뭐라고?"

"그놈들은 늙어도 죽질 않아서 그런지, 평생을 빛의 법전을 엿 먹이는 데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변경의 병사들이 꼭 전략적으로 행동한 게 아니라도 흑제국에게 골탕을 먹일 수 있는 일들을 저지르곤 하지 않습니까?"

아이작은 그러면서 게벨을 슬쩍 돌아보았다.

성기사단 출신인 게벨이라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분쟁지역의 병사들은 굳이 상부 명령이 아니더라도 흑제국 쪽에 끔찍한 도발을 감행하곤 한다. 게벨은 짚이는 부분이 있는 건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대신을 부활시키려고 하다니?"

"말씀하셨던 부분이라면, 정말 고대신이 부활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약해빠진 놈들이니 수도원 하나 괴롭히는 수준이겠죠. 설령 정말 부활한다 치더라도 금방 토벌될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예브하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대신 부활이나 세계를 양분하는 두 신앙 간의 대립이 고작 말단들의 장난질이라고?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였고, 실제로 아이작도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솔데의 내면을 읽은 아이작은 그녀도 아는 게 없는데 추궁해 봤자 의미 없다고 판단했다.

"중요한 건 놈들이 정말로 그 짓거리를 저지르고 있고, 우리가 당했다는 겁니다."

아이작은 화제를 슬쩍 앞으로의 방향으로 돌렸다. 중요한 건 불사교단이 개입하는 중이란 거지 증거나 이유가 아니다.

이솔데는 아이작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그렇다면 이제 돌려줘야죠."

자세한 정보는 놈들을 더 찾게 된다면 그때 가서 물어보면 될 일이다.

***

회의가 끝나자마자 아이작과 게벨, 이솔데는 곧장 짐을 꾸려 수도원 밖으로 향했다. 수도원 안에는 당나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예브하르는 셋에게 아낌없는 축복과 충분한 식량 등을 나눠주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빈약한 논리에 수도원장과 게벨이 돕기로 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두 사람이 아이작에게 가진 호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예브하르는 이단심문관의 속내까지도 떠보려고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아이작의 논리에는 쉽게 넘어가 주었다. 이것은 네필림의 매력이 발동한 결과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너무 매력적인 탓이군.'

"감사합니다. 아이작 씨."

그때 앞장서서 걸어가던 이솔데가 아이작과 발걸음을 속도를 맞추며 말을 붙였다.

"사실 불사교단이 이 근방에서 활동 중이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것은 6개월 전입니다. 하지만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었죠. 이 수도원에 손길이 닿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도 최근의 일인데 이런 결정적인 증언까지...."

"괜찮습니다. 저희 수도원 일인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사실 이솔데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작은 적당히 공을 세우면서 수도원을 떠날 명분을 찾고 있었다. 이솔데는 자신을 호의적으로 보고 있으니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된다면 괜찮은 인맥이 될 수도 있다.

'언제 어느 시대든 감찰관과 친해지는 게 유리하지'

어쨌든 이솔데는 고마운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작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이단심문관치고는 상당히 때 묻지 않은 순진한 성격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혹은 마을 하나쯤은 학살해도 끄떡없는 사이코거나.

사실 이단심문관으로서 유능하다면 후자일 확률이 더 높았다.

"이번 일이 잘 해결된다면 교단에 아이작 씨를 추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작 씨는 성기사 수련생이지요? 제가 아는 성기사가 있는데...."

"이단심문관님."

게벨이 그때 뒤에서 굳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먼 곳이라면 마을에서 말을 빌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여기는 마을에서 멀어지는 길 같군요."

이솔데는 자신이 수도원 인근에 불사교단이 개입했다는 흔적을 발견한 곳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목적지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서둘러 말했다.

"아, 수도원 근처에 있는 계곡으로 가는 중입니다. 주민들은 아리엣 계곡이라고 부르던 것 같군요."

아이작과 게벨도 잘 아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오래 지낸 것은 이솔데가 아닌 두 사람이니까. 실제로 뭐가 숨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험한 곳이었다.

이솔데는 게벨에게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했고 어떤 증거를 잡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게벨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그녀에게서 아이작에 대한 관심을 떼어 놓은 것으로 만족한 것 같았다.

'다행이군.'

아이작은 문득 '혼돈의 눈'을 발동했던 오른쪽 눈을 매만졌다.

이제 촉수가 꿈틀거리는 이질감은 사라졌지만, 떠나기 전 확인했을 때 한동안 핏발 선 기색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동공에 옅은 보랏빛도 감돌고 있었다. 약간 더 깊게 들여다보려 시도한 것만으로도 눈의 색이 변할 정도였던 것이다.

'이 능력도 함부로 쓰기 힘들겠군.'

사기적인 능력이지만 함부로 쓰기 힘들다는 점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가볍게 얕은 생각을 알아보는 정도라면 눈에 띄지 않겠지만, 상대의 심층 심리를 파헤치려 능력을 강하게 발동할수록 숨길 수 없는 흔적이 드러날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눈에서 촉수가 꿈틀거리는 꼴을 들킨다면?

'죽일 수밖에 없겠지.'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일찌감치 부작용을 알아내서 다행일 뿐이었다.

***

"여깁니다."

이솔데가 긴장한 기색으로 계곡에 발을 딛으며 말했다. 뾰족한 바위들이 불규칙하게 놓인 계곡에는 건기인 겨울이어서 그런지 마른 하천의 흔적만 보였다.

아이작도 이곳은 지나가면서 봤을 뿐, 직접 발을 딛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라면 발을 딛기도 힘들 만큼 험한 곳이었는데, 하천이 마른 덕분에 바닥은 평평했다.

"여기서 불사교단의 흔적을 발견하셨다구요?"

"정확히는 놈들을 봤다는 증언과 언데드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다 역병에 감염된 짐승들과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불길한 흔적들을 발견해서...."

이솔데는 그렇게 말하며 계곡 초입부에 놓인 커다란 돌 하나를 툭 발로 찼다.

아이작은 그 돌에 무슨 의미가 있나 했지만 이솔데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게 뭡니까?"

결국 게벨이 먼저 물었다. 그러자 이솔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예? 당연히 우상숭배의 흔적이잖습니까. 잘린 석상의 머리잖아요."

아이작은 다시 그 돌을 살펴보았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워낙에 마모된 흔적이 심하긴 했지만 부자연스럽게 잘린 단면과 어쩌면 눈 코 입일지도 모르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다시 보면 쥐같이 생긴 것 같기도 했다.

"계곡 안에 들어가면 이런 흔적들이 더 많습니다. 높은 산 위에서 떨어진 것 같더군요."

"음...."

아이작은 이런 게 한두 개라면 이솔데가 착각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조사해 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고고학의 영역일 뿐 이단의 증거는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역병에 감염된 짐승들이 나타나고, 수도원까지 공격당했다면 이는 명백한 공격의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계곡을 조사하면 분명 배후가 숨어 있으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조사해보니 옛날에는 이 계곡 안쪽에서 이교도의 신전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이솔데는 나름 확신을 가진 듯해 보였다. 게벨은 여전히 긴가민가하는 기색이었지만 이솔데를 빨리 쫓아내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조사하고 싶어 했다. 오히려 설명을 듣고 난처해진 것은 아이작이었다.

'이거 이러면 성역까지 조사가 이어질 수도 있겠는데?'

지힐렛이 숨어있던 성역은 수도원에서도 계단을 타고 상당히 내려가야 했다. 계곡과 이어진다는 말도 사실일지 모르는 셈이다. 이솔데의 쓸데없는 유능함이 성역의 발각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일찌감치 실행하기로 했다.

'조금 천천히 하다가 지칠 때쯤 증거를 뿌릴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아이작의 가방 안쪽에는 이솔데가 만족할 수 있는 증거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뿌릴 수는 없었다. 이솔데가 조사를 마친 곳에 증거가 나타나면 이상하니까. 그리고 아이작은 그 전에 이솔데가 속을 만한 그럴듯한 상황을 연출해야 했다.

'움직여라.'

아이작의 의지가 어딘가를 향해 전달되었다.

이내, 계곡 깊은 곳에 있던 무언가가 느리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26화. 수색 및 섬멸 (3)

아이작은 의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이솔데를 향해 말했다.

"일단 말씀하신 대로 조사를 진행해 보도록 하죠. 아, 그런데 이단심문관님?"

"예?"

"만약 불사교단 족속들이 여기 있다고 친다면, 이 임무의 정체성은 뭐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정찰? 조사? 토벌?"

당연하지만 아이작은 지금 이 임무의 목적이 불사교단 권속들에 대한 토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렇게 백제국 깊은 곳까지 그 허연 뼈다귀들이 직접 기어들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지에서도 얼마든지 '징집'이 가능한 것이 언데드 족속들이다.

때문에 아이작도 이번 임무가 정찰이나 조사, 만약의 경우가 벌어진다 해도 경호 정도라고만 생각했을 뿐 토벌하겠다느니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솔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1차적으로는 조사입니다만, 발견 즉시 토벌로 바뀝니다."

이솔데의 당당한 태도에 아이작은 당황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단심문관이 아무 생각도 없이 적들이 매복 중인 장소로 오진 않았을 것이란 것이 떠올랐다. 이솔데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의 경우 시간만 끌어주신다면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만약의 경우 시간을 끄는 것. 그것이 아이작과 게벨의 임무인 듯했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곡 깊은 곳으로 향했다.

***

그 사이 계곡 깊은 곳에서는 아이작이 뿌린 혼돈의 자손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계곡 안쪽에 어떤 놈들이 있는지 찾아내라. 확실하게.'

지힐렛과의 전투를 통해 혼돈의 자손들은 쥐 떼마냥 불어났기 때문에 정찰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이솔데는 신중하게 석상 하나하나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엄청난 이단의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 말대로 무너진 사원의 잔해들이 계곡 곳곳에 가득했다.

"사람들은 왜 이 역병신이라는 걸 위해서 사원까지 지었을까요? 역병이 뭐가 좋다고."

아이작이 투덜거리며 물었다.

'네임리스 카오스'에서 그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아홉 신앙이면 충분했다. 나머지 고대신이니 어쩌고 하는 것들은 게임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다른 게임에서 '고대신'이라면 무시무시한 히든 보스 떡밥이거나 그렇겠지만, 네임리스 카오스에서는 기껏 해봐야 필드 보스 수준이었던 것이다. 반면 다른 신들은 대부분 천사를 통해 명령을 전달할 뿐, 불사 황제를 제외하면 신이란 존재는 얼굴 맞대기도 힘들었다.

"옛날에는 신이 아주 많았다고 하더군요."

이솔데는 의외로 선선하게 대답해 주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에 신의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아마 옛날 이 지역에 큰 역병이 돌았을 겁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으니까 역병에 이름을 붙이고 신으로 모시면서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었겠지요."

"용서요?"

"가뭄이 들면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고, 홍수가 일어나면 비를 멈춰달라고 빌잖아요. 그렇게 역병의 신은 치유의 신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치유의 신 지힐렛이라. 병을 준 놈은 약도 줄 수 있다는 논리군.'

아이작은 대충 그렇게 이해했다.

"하지만 빛의 법전이 루앗딘을 통해 여명의 석판을 내려주면서 이런 잡신들은 뭉개지고 사라졌지요.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다른 여덟 신앙들도 있잖습니까?"

이솔데는 못 들은 척했다. 그녀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숨겨진 말이 뭔지는 아이작도 금방 알아차렸다. 고대신들을 뭉개고 없애버린 것은 빛의 법전뿐만이 아니라 아홉 신앙 모두가 합의해서 한 일이다. 이것은 게임 설정에서도 나오는 사항이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등대지기 루앗딘이 여명의 석판을 들고 나타난 일은 야만의 시대와 이성의 시대를 가르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때부터 일명 '빛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니까.

빛의 시대라 불리는 천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고대 신앙들은 박멸되고, 빛의 법전에 협력하거나, 복종하거나, 조화를 이루게 된 여덟 신앙만이 살아남았다. 마지막에 등장한 불사교단조차도 빛의 법전이 주도하는 질서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직 이름 없는 혼돈만이 사라졌지.'

아이작은 이 미묘한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이름 없는 혼돈이 분명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아홉 신앙'이라고 언급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후두두두둑.

그때 아이작은 절벽 위쪽에서 떨어지는 자갈을 발견했다. 이솔데도 계곡 위쪽을 올려다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먼저 행동을 취한 것은 아이작이었다.

"저기!"

툭, 투툭.

절벽과 절벽 사이로 거대한 실루엣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산짐승인가 했지만, 명백히 이질적인 실루엣이었다.

이솔데의 눈이 커졌다.

"저건 대체?!"

"안쪽으로 갑니다!"

아이작과 게벨은 우선 칼을 뽑아 들었지만 움직이는 대신 이솔데를 바라보았다. 이솔데는 굳은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더니, 호루라기를 길게 불었다.

삐익─.

계곡을 찢는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지자 하늘 위로 갈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아이작이 이미 기생충을 심은 적 있는 그 갈까마귀였다. 갈까마귀는 이솔데와 호흡이 오랫동안 맞았는지 곧바로 계곡 위에서 짐승을 쫓아 날아갔다.

"따라갑시다!"

이솔데는 갈까마귀의 동선을 쫓아 움직였다. 먼 거리에서도 그녀는 갈까마귀가 어디에 있는지 놓치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짐승은 계곡과 계곡 사이, 절벽 틈이나 모퉁이 너머로 언뜻 실루엣을 보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맹렬한 추격 때문에 도저히 도망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유인하는 기색이 선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유인하는 게 맞지.'

짐승의 정체는 바로 아이작이 만든 혼돈의 자손이었다. 덩치가 커다란 생물을 모태로 만든 탓에 커졌지만, 덕분에 이렇게 눈에 띄는 임무를 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특유의 형태 때문에 정확한 실루엣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좋아. 이대로 유인하다가 계곡 밖으로 내보내면....'

여기에 뭔가 있었지만 달아났다는 뜻이 될 테고, 추적 대상을 잃어버린 이솔데는 결국 사태를 마무리 지을 것이다. 어차피 불사교단의 사제는 죽었으니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정 깔끔하게 끝내고 싶다면 저 혼돈의 자손을 이솔데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줘도 된다.

***

"잠깐만, 아무래도 우리를 유인하는 것 같습니다!"

짐승이 아슬아슬하게 잡힐 듯 말 듯 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움직이자 이솔데도 상황을 파악했다. 이동속도가 느려지자 자연스럽게 추적하던 정체불명의 짐승 역시 동작이 느려졌다. 갈까마귀를 통해 동선이 그대로 잡히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유인하고 있다면 매복이 있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다고 저 불길한 짐승을 놔줄 수는 없지요. 두 분은 천천히 따라와 주십시오."

이솔데는 그렇게 말하더니 목걸이를 입가로 가져가 무언가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누덕누덕한 잿빛 가루들이 흘러나오더니 순식간에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나방의 교리.'

아이작이 이미 파악했던 이솔데의 능력 중 하나였다.

빛의 법전은 빛을 상징한다. 나방은 빛을 쫓는다.

나방의 교리는 그 중 교단 안에서 은밀한 행동이 요구되는 사람들이 배우는 교리의 기적이었다.

눈앞에 있는데도 길가의 자갈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해진 이솔데는 곧장 지금까지와는 다른 동선으로 추적을 재개했다.

만약 저 짐승이 아이작 일행을 유인하는 중이라면, 나방의 교리를 사용한 이솔데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솔데가 짐승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아이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보고 혼돈의 자손을 조심스럽게 조작할 수 있었다.

"...."

이솔데는 나방의 교리를 사용하고도 거리를 좁히지 못하자 초조해진 기색이었다.

그때 아이작에게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시체. 발견.]

아이작이 뿌린 혼돈의 자손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시체라고?'

모태가 된 쥐의 사고력이 낮은 탓에 정확한 메시지를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시체가 있다는 것은 긴장할 만한 소식이었다. 혼돈의 자손은 시체를 향해 다가가려다가 움츠러들었다. 누군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 순간, 혼돈의 자손으로부터 의지 전달이 툭 끊어졌다. 상대를 눈치채지도 못하고 죽은 것이다. 강해봤자 고양이 정도의 전투력이긴 하지만, 이렇게 맥없이 당했다는 것은 야생 짐승에게 당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전부 모여서 조사해.'

아이작은 혼돈의 자손들을 조종해 시체가 발견된 지역으로 몰아넣었다. 사냥이 아니라 추적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의지가 끊어진 장소는 지금 있는 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설마 진짜 매복이 있었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이작은 놀랐다. 성역의 제단을 장악한 이후, 그는 수도원과 인근 지역을 모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한 기색이라곤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누군가 나타났다는 것은 성역의 능력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존재거나, 지난 밤 사이에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이솔데 씨!"

아이작은 엉겁결에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이솔데는 즉시 멈춰 섰다. 그 순간 그녀가 앞서가던 동선으로 화살 몇 대가 꽂혔다. 그중 한 대는 이솔데를 향해 날아들었으나, 몸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잿빛 가루들을 관통해 지나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여파로 나방의 교리가 깨진 것인지 이솔데의 모습이 드러났다.

"누구냐!"

게벨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계곡을 울렸다. 그러자 계곡 바위틈 사이에서 사냥꾼 복장에 석궁을 든 사람 대여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근 마을에서 온 사냥꾼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방금 전에 기괴한 짐승이 머리 위를 지나가서 그 짐승인 줄로만 알고...."

"그렇다고 화살을 마음대로 쏘아붙이나!"

아이작은 화를 내면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사냥꾼들은 고급스러운 복장의 이단심문관과 수도사 복장의 아이작과 게벨을 보고 잘못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특히 아이작이 화를 내며 다가오자 그들은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꼈다.

네필림 특유의 매력이 이번에는 그들의 죄악감을 압박하는 형태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도 그 짐승을 쫓고 있는 중이니 용서하겠습니다! 그 짐승은 어디로 갔습니까?"

"저쪽으로 절벽을 타고...."

그 순간 아이작은 벼락같이 손에 들고 있던 칼을 휘둘러 남자의 목을 찔렀다. 동시에 게벨과 이솔데도 호흡을 맞추듯 빠르게 달려들었다.

감히 자신들을 공격한 것을 용서할 수 없다든가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들 셋은 이미 사냥꾼들을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솔데는 일반인 사냥꾼이 나방의 교리를 꿰뚫고 공격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게벨은 그들의 석궁이 사냥꾼이 쓰기에는 너무 고급스럽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아이작은 자신이 찌른 남자의 손에 혼돈의 자손을 죽이고 남은 피가 묻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챙, 까드드드득!

어떤 기합이나 합의된 소통도 없이 동시에 공격이 이루어지자 사냥꾼들은 순식간에 부상을 입고 밀려났다. 하지만 당장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평범한 사냥꾼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컥, 헉, 그르르륵!"

심지어 아이작에게 목이 꿰뚫린 사냥꾼마저도 뒤로 물러나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놈의 구멍 뚫린 목에서 피가 넘실거리며 살갗을 꿰매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솔데 역시 그걸 발견하고 으르렁거리듯 이를 갈았다.

"왈라이카 인간 사냥꾼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왔나!"

왈라이카는 흑제국과 백제국 사이에 있는 군소국가 중 하나다. 수많은 분쟁 속에서 여기저기 빌붙으며 살아남은 국가답게 역사가 복잡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흑제국에 더 가까운 세력으로 분류되었다. 그들의 귀족층이 바로 언데드였기 때문이다.

흔히들 뱀파이어라고 부르는 흡혈 종족이었다.

그리고 이 귀족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의 취향을 위해 '인간 사냥'을 자주 나서곤 했다.

"쳐, 라!"

아이작에게 목이 꿰뚫린 뱀파이어는 그들 중에서 지위가 꽤 높은 놈이었던 건지 부상당한 목으로도 지시를 내렸다. 뱀파이어들은 정체가 탄로 났다는 것을 깨닫고 검집에서 검붉은 칼을 뽑아 들었다.

왈라이카 귀족들이 사용하는 무기였다.

아이작은 약간 긴장했다.

'왈라이카 귀족이라면 게임 상에선 성기사와 동급의 전력이었는데....'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뱀파이어들은 성기사 여섯 명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성기사들 간에도 수준 차이는 있지만 뱀파이어들은 특히나 인간을 상대하는데 최적화된 존재들이다.

아이작은 이번 전투가 꽤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컥, 허억!"

하지만 정작 싸워보니 생각보다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아이작은 눈앞에 달려드는 뱀파이어의 검을 아래서 위로 가볍게 쳐내고 칼을 비틀어 팔을 베었다.

다른 뱀파이어들도 주춤거리며 쉽사리 달려들지 못했다.

'내 실력이 이 정도였나?'

아이작은 자신의 검술이 실전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에 내심 뿌듯함을 느꼈지만, 금방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햇볕 때문이군.'

이곳은 계곡이 깊은 곳이다. 그래서 빛이 드는 부분이 많지 않았지만, 드문드문 비치는 햇볕만으로도 그들에게 고통을 주기 충분했다. 그들의 습격이 실패했을 때 사냥꾼인 척하고 넘어가려 했던 것도 아직 낮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됐군.'

아이작은 정정당당한 싸움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이 흡혈귀들이 당황하는 사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지금 상황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27화. 인간사냥꾼 사냥 (1)

아이작은 뱀파이어들이 마음껏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이용해 재빨리 칼을 찔러넣었다. 아이작은 최대한 체력을 아끼기 위해 오직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고 판단할 때에만 칼을 휘둘렀다. 때문에 그의 칼이 번뜩일 때마다 피와 재가 튀어 올랐다.

뱀파이어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밀리면서 계곡의 그늘진 부분으로 후퇴하자 기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세와 기상의 열세를 받아들인 뱀파이어들이 차분하게 대응을 시작했다.

조직적인 반격이 시작되자 아이작은 일단 거리를 벌렸다.

'힘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동작을 최대한 아껴야 해.'

다행히 아이작을 상대하던 뱀파이어들은 그에게 상처 한두 군데를 입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쉽사리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이솔데와 게벨의 상태를 살폈다.

게벨은 셋을 상대로 몰아붙이고 있었고, 이솔데는 홀로 객지를 떠도는 이단심문관답게 한 놈 정도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솔데는 오히려 아이작을 걱정했던 건지 감탄하는 기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아가씨가 내 실력을 직접 본건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겠군.'

균형이 깨진 것은 게벨이 상대하던 세 놈 중 한 명의 목을 날려 버리면서였다.

한 놈이 쓰러진 후에도 놈들은 패색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지만,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게벨은 일방적으로 뱀파이어들을 찍어누르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시선을 돌린 뱀파이어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놈은 기겁하며 검을 쳐내려 했다.

순간 아이작의 검이 마치 뱀처럼 기묘하게 휘어져 들어가며 심장을 꿰뚫었다.

살과 뼈가 통째로 뜯겨 나가며 짐승이 물어뜯은 듯한 구멍이 남았다. 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상처를 들여다보다가 빈 자리에 손을 허우적거렸다.

"이 녀석들 성기사입니다!"

뱀파이어 중 하나가 비명 지르듯 소리쳤다.

"엄밀히 말해 성기사는 아무도 없지만 말야."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이단심문관과 은퇴한 성기사, 그리고 성기사 지망생뿐이다. 그러나 성기사라는 외침에 뱀파이어들은 이를 갈면서 거리를 벌리려 했다.

게벨과 아이작은 놈들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이어가려 했으나, 갑자기 머리 위에 그늘이 드리워져 멈칫하고 말았다.

'무슨?'

머리 위에 붉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걸 본 게벨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고, 반면 뱀파이어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번졌다.

붉은 안개가 계곡을 단숨에 덮쳐 왔다.

콰드드드드득.

붉은 안개가 계곡을 덮친 순간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붉은 안개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뱀파이어 둘을 마치 이빨이라도 달린 것처럼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뱀파이어 둘의 시체는 산산이 분해되어 안개와 한 몸이 되었다.

붉은 안개는 뱀파이어들의 시체를 모두 먹어 치웠지만, 살아있는 다른 뱀파이어는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놈은 이제 이쪽을 노리듯 꿈틀거렸다.

붉은 안개의 실루엣이 언뜻 사람의 형상을 띄었다가 다시 흐려졌다. 동시에 빠르게 아이작을 향해 쇄도해왔다.

그러나 아이작은 이 정도면 충분히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했다.

뱀파이어들과 마주한 순간부터 기도문을 준비하고 있던 이솔데는 눈앞에 닥쳐오는 붉은 안개를 향해 꾸짖듯 마지막 시구를 외쳤다.

"...그리고 주인께서 틈새 밖의 빛을 길들여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니!"

순간 찬란한 빛이 계곡 안을 가득 채웠다.

찬란한 빛에 휩싸여, 도저히 구체적인 형상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어두컴컴하던 계곡 안은 순식간에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백지 같은 볕 아래 놓이게 되었다.

엄청난 광채에 붉은 안개는 순식간에 씻기듯 사라졌다.

아이작은 눈이 아픈 와중에도 그 빛으로 이루어진 짐승을 바라보았다.

밝은 빛에 휩싸여 있어서 정확한 실루엣은 볼 수 없었지만, 거대한 나비 날개를 가진 고양잇과 형태의 짐승이었다.

[아궁이 짐승(A)]

이 세계에서 신을 찬양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빛의 법전의 찬란한 빛, 그 영광의 불꽃에 홀려 다가가다가 나방처럼 불에 타 죽은 존재들도 허다하다. 그리고 '아궁이 짐승'들은 아궁이 속의 잿더미 속에서 재탄생한 존재들이었다.

'...뭐 그런 설정이지. 중요한 건 바로 그 짐승에게 광휘 효과가 있다는 거고.'

아궁이 짐승은 천사나 신수 같은 초월적 존재를 제외한 소환수 중에는 상위권에 속하는 존재다. 하지만 형태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소환자의 역량에 따라 크기와 힘이 달라진다.

그러나 아궁이 짐승이 공통적으로 가진 속성이 바로 '광휘 효과'.

태양빛과 같은 효과를 가진 이 특성은 아무리 작은 놈이라도 뱀파이어를 상대로는 극상성이었다.

역시나 뱀파이어들은 아궁이 짐승이 나타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이솔데는 소환을 오래 유지하지 않고 금방 돌려보냈다. 아궁이 짐승이 사라지자 계곡은 상대적으로 밤이라도 된 것처럼 어두워졌다. 이솔데는 소환의 여파인지 다소 창백한 표정으로 묵주를 만지작거렸다.

"놈들이 사라졌군요."

아궁이 짐승이 아니라 천사나 제대로 된 신수였다면 도망가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여기까지가 이솔데의 한계였다.

"추적해야죠!"

이솔데가 일부러 힘차게 말했다. 아이작은 그녀가 아직 소환할 여력이 있음을 의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유로 추적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게벨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단심문관님."

"왜죠?"

"곧 밤이 되거든요."

게벨은 하늘을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

계곡에는 밤이 빠르게 찾아온다.

아직 하늘이 밝을 때 전투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이 쇠약해지긴 했어도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깊은 계곡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밤까지 되어 버리면 아이작 일행은 정말 제 실력을 발휘하는 진짜 왈라이카 인간 사냥꾼들을 상대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 주변에 널린 뱀파이어들이 남긴 흔적과 증거품들을 수집해야만 했다.

"다 살펴봤어요?"

"그럭저럭. 다만 놈들이 어중이떠중이 구울이 아니라 왈라이카 사냥꾼이라는 것밖에 모르겠던데."

아이작 일행의 기습이 워낙에 성공적이었던 탓에 놈들은 수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갔다. 그렇다고는 해도 야영 중이었던 터와 장비뿐이었지만, 이솔데는 그게 세상 보물인 것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봐요. 이단심문관님. 그건 나가서 살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바닥에 엎드려 모닥불 밑바닥까지 살펴보던 이솔데는 아이작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뭐 좀 알아냈어요?"

"별로 쓸만한 건 없군요...."

"어쩔 수 없죠. 애당초 뱀파이어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도 아니고... 아니지, 뱀파이어 공작이 개입했다는 걸 알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 아닐까요?"

아이작이 별 생각 없이 말했다가 경악하는 이솔데의 시선과 마주쳤다.

"뱀파이어 공작? 그걸 어떻게?"

"예? 아, 그거야...."

아이작은 자신이 뱀파이어 공작을 언급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실 아까 그 붉은 안개의 정체를 아이작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이미 아이작은 왈라이카 왕국이 섬기는 신앙, '붉은 성배 클럽'으로 엔딩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들을 마치 추리해 낸 것처럼 언급했다.

"뭐, 그야 뱀파이어가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을 할 리가 없으니까요. 대낮에 일반인인 척하고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감시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보아하니 이곳은 초소쯤 되는 것 같군요. 아마 더 안쪽에 그 귀한 신분이 쉬고 있던 동굴이나 임시 숙소가 있을 겁니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호위로 거느리는 거창한 신분이라는 거죠."

이솔데는 입을 살짝 벌렸다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은 이 정도로 넘어간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사실 아이작은 그 공작의 이름도 맞출 수 있었다.

헤인켈 굴마르.

"실력도 범상찮더니 왈라이카 사냥꾼들의 행동 방식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군요. 예. 왈라이카의 왕족인 헤인켈 굴마르 공작이 개입한 것 같습니다. 이건 중요한 단서지요. 하지만 역병신과의 관계를 알아낼 단서가 없군요."

게벨이 딱딱한 어투로 물었다.

"헤인켈 굴마르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대낮에 붉은 성배의 기적을 쓸 정도로 강한 왈라이카 사냥꾼 집단은 왈라이카 안에서도 헤인켈 공작가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움직일 만한 공작가 사람은 셋뿐인데 후계자가 위험한 여기까지 올 것 같지는 않고, 가주는 최근 그 거성에서 꼼짝도 안 하는 걸로 파악됐습니다. 남은 건 굴마르뿐이죠."

"상황 더럽게 됐군. 왈라이카의 공작이면 왕족이잖습니까. 그럼 밤에 절대로 마주치면 안 됩니다. 일단 빨리 계곡부터 빠져나가죠."

왈라이카 왕국은 혈통이 즉 계급 그 자체다.

왕족들은 말 그대로 그들이 모시는 붉은 성배에게서 피를 나눠 받았기 때문에 반신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귀족들은 그런 왕족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권능을 나눠 받는다.

당연히 하위 계급으로 갈수록 힘 또한 약해진다.

왈라이카 왕국은 그런 수직적인 혈통 카스트로 구성된 국가였다.

헤인켈 굴마르는 공작의 형제로, 왕족으로부터 고작 한 다리 건너 피를 나눠 받은 존재였다. 그 힘은 적어도 한 개 성기사단 전체가 나서거나 천사급을 불러내야 격이 맞았다.

지금 이 셋만으로 상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솔데의 반응이 이상했다.

"적어도 성기사단은 와야 공작을 상대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제 밤이 되면...."

게벨은 이솔데의 얼굴을 보고 말을 멈췄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벌써 성기사단을 불렀군요?"

"예. 오늘 아침에요. 갈까마귀가 갔다 올 정도의 거리니 슬슬 저희가 밖으로 나갈 때쯤이면 브리엔트 성기사단이 도착해 있을 겁니다."

"증거가 없으면 성기사단을 부를 수 없다더니 무슨...."

게벨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이솔데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솔데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 증거를 발견할 것이라고 확신했지요. 그리고 이렇게 발견했잖습니까? 뭐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이런 건 행동이 앞서가야 하는 법이니까요."

"성기사단이 왔다 하더라도 아직 우리 옆에는 없습니다. 놈들이 그 전에 습격해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아이작은 이솔데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서두르지 않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솔데는 오히려 바로 그 상황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 반갑지요. 범인들이 도망가면 쫓아가기 힘들 테니까."

게벨은 이솔데의 발언에 갑갑하다는 듯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아이작도 한숨이 나온다는 듯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군.'

이솔데의 계획은 아이작이 원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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