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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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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 달 뒤 아이작과 약속한 날짜가 되었을 때, 쇠르 시중에 풀렸던 물량 대부분은 황금우상 상단이 폭등 전 원가보다 약간 높은 수준으로 소화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황금우상 상단은 쇠르의 창고란 창고는 다 빌려서 로어커스를 가득 쌓아 두긴 했지만, 덕분에 상단이 무너질 만한 폭탄이 터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아이작이 가진 물량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캐틀린은 아이작이 황금우상 상단 지부장실로 찾아왔을 때 상당히 초췌한 안색으로 그를 맞이해야만 했다.

"오셨습니까, 아이작 님."

"얼굴이 많이 상했군. 캐틀린."

"지난 사흘 동안... 누워서 잔 적이 없군요. 손해를 계산하고 얼마나 감당해야 할지 몰라 다른 지부 여기저기 손을 빌리느라...."

그녀는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그런 캐틀린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서 준비가 됐느냐는 말은 무의미할 것이다.

황금우상 상단은 신용을 철저하게 지킨다. 특히나 황금우상의 이름을 걸고 계약서를 썼다면. 어느 선까지 동원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뇌부 몇몇은 관심을 가지고 이 사안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아이작 님이 가지고 계시다고 밝힌 물량을, 한 달 전 로어커스 시세대로 계산해 봤을 때... 대략 이 정도 액수가 나오더군요."

캐틀린은 계산식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캐틀린은 그 숫자들을 보면서 눈물마저 고였다. 대귀족도 눈이 뒤집힐만한 숫자였다. 거의 대규모 영지의 연간 예산급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작은 이 계산이 맞는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황금우상의 이름을 건 거래에서는 계산에 오차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작도 이게 말도 안 되게 큰 액수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정확히 얼마나 되는 금액인지는 몰랐기에 딱히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황금우상 상단이 이 액수를 지불하고, 나는 가진 로어커스 물량을 전부 납품하는 걸로 계약을 종료하면 되겠군."

"예...."

"좋다."

"예. 이것으로 계약은 성립되었습니다."

캐틀린과 아이작은 계약서에 손을 올리고 같은 선언을 반복했다. 순간 계약서에 금빛이 감돌면서 둘을 응시하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계약이 완전히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아이작이 돈을 받기 전까지는 계속 계약서의 기운이 아이작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돈을 찾으러 가시겠습니까? 금화는 금고에 보관 중입니다. 마차까지 가져와서...."

그러나 아이작은 일어나지 않고 멀뚱멀뚱 캐틀린을 바라보았다.

"아이작 님?"

"이 정도면 들고 다니기도 힘들겠지."

캐틀린은 아이작의 말에 뭐 그런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금화로 환산하면 사람이 깔려 죽을 정도의 액수였다.

아이작은 캐틀린을 딱한 눈으로 바라보며 핀잔을 줬다.

"피곤해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나?"

"예? 무슨... 아. 아아? 아, 설마?"

캐틀린은 눈을 번쩍 뜨고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지난 사흘 동안 잠도 못 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생기가 다시 그녀에게 깃들었다.

아이작은 캐틀린이 내민 종이를 들고 말했다.

"이 금액 전부 황금우상 상단에 투자하겠다. 그리고 투자액을 보증금으로 거는 대신 내가 앞으로 하는 모든 여정에서 황금우상 상단의 자산을 무제한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군."

여기서 자산이라 함은 황금우상 상단이 대륙 곳곳에 보유한 정보망과 교통수단, 숙박업소 등등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작은 중요한 마지막 말도 잊지 않았다.

"이자에 대해서는 별도로 협상하도록 하지."

51화. 껍질 (1)

캐틀린은 방금 죽을상을 하고 있던 사람이란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이작에게 거액을 지불했다는 사실 자체는 달라지지 않지만, 그게 즉각 현금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빚으로 남게 된다면 당장의 파산은 막을 수 있으니까.

특히나 로어커스 폭락으로 상당량의 현금을 잃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한 푼 한 푼이 절실했다.

일단 상부로부터 빌린 황금을 고스란히 다시 돌려줄 수 있을 테니, 그녀가 마땅히 져야 할 책임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그럼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죠! 이자는 얼마나 생각하고 계십니까?"

"황금우상 상단 내부에서 신용도와 액수에 따른 이자액을 별도로 산정해두고 있을 텐데. 거기에 맞춰서 조건을 우선 제시해보게. 어차피 나는 황금우상 상단의 자산을 이용하는데 관심이 더 있으니."

"알겠습니다! 경리를 시켜 바로 정리해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캐틀린이 서둘러 관련 내용을 정리하도록 지시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작은 생각했다.

'이제 궁핍하게 여행하는 것도 못 해 먹겠단 말이지.'

수도원을 떠난 이후의 여정은 말 그대로 서바이벌 그 자체였다. 게임에서 하던 것처럼 아무 데서나 자고, 촉수로 아무거나 먹고, 적당히 힘이나 키우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그것도 슬슬 익숙해지긴 했지만 굳이 할 필요 없는 고생이기도 했다. 때문에 아이작은 우선 황금우상 상단과 접촉해 빚을 만들어 두기로 했다.

'로어커스 때문에 일이 생각보다 너무 쉽게 풀리긴 했지만....'

이번 사건의 여파로 여명군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곤란해지겠지만, 아이작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여명군도 벌써 12번이나 일어났다. 성지가 불사 교단 수중에 있는 한 여명군은 언제고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아, 그리고 그쪽에 선물할 게 있는데."

"선물이요? 이미 거액을 맡겨주신 것만으로도...."

"속으로는 사실 손실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어쨌든 그쪽 물건이니 그쪽이 갖는 게 맞을 것 같군."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가져온 상자를 캐틀린 앞에서 열었다. 안에는 초라한 모습의 양치기 목상이 담겨 있었다. 캐틀린은 잠시 그게 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거, 성물입니까?"

"그래."

황금우상 상단의 기원은 한 유목민족이었다고 한다. 떠돌던 중 한 양치기 소년이 황금으로 이루어진 소가 험난한 산맥을 넘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 길을 따라간 양치기 소년은 아무도 넘지 못했던 산맥을 넘을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이후 한 달씩 걸려 돌아가던 산맥의 길목을 이 민족이 독점하면서 단절되어 있던 세계의 무역 루트를 열었고, 황금우상 상단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양치기 목상은 바로 그 길목을 발견한 소년이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깎았다는 물건이었다.

'황금뿔이나 미다스의 손, 호박 눈 같은 S급 성물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양치기 목상 정도면 그래도 A급 정도는 되는 성물이다.

캐틀린은 조심스러운 손으로 양치기 목상을 쓰다듬었다.

유크하르는 황금우상 상단에 사제도 성기사도 없다고 했지만, 사실 상인들 본인이 신도인 동시에 사제이다. 지부장급에 이른 상인이라면 남다른 감식안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캐틀린은 한눈에 양치기 목상이 진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안 되는 귀한 성물이 상단에 반납된 것을 본 캐틀린은 기절할 듯 기뻐했다. 한순간이지만 성배기사가 기막힌 속임수로 자신을 속여넘겼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이 사실은 오드리프 본점에 꼭 알려드리겠습니다!"

캐틀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것이 하나의 선언이라도 된 것처럼 아이작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황금우상 상단에 '양치기 목상' 성물을 반납하였습니다.]

[황금우상이 당신의 숭고한 여정을 축복합니다.]

[행운이 크게 상승합니다.]

[감식 능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역시.'

성배기사는 성물을 취득하는 것만으로도 버프를 얻을 수 있지만, 성물을 잃어버리면 즉시 버프를 잃는다. 하지만 성물을 반납한다면 작지만 영구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

어차피 가진 성물 전부를 바리바리 짊어지고 다닐 수 없다면 반납할 물건은 반납하면서 이득을 취하는 쪽이 좋았다. 특히나 양치기 목상은 직접 전투에 도움도 안 되고 부피도 커서 짊어지고 다니기 번거로워서 반납하기로 한 것이었다.

아이작은 캐틀린이 사용하는 책상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재질에 장인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있는 장식까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정보까지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감식 능력이 향상된 덕분이었다.

'행운은 그렇다 쳐도 감식 능력까지 상승하다니. 축복이 꽤 큰데?'

성역을 빼앗고 황금우상 상단에 큰 손해를 입혔으니, 성물 반환으로 인한 보상도 별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호의가 느껴지는 축복이었다.

'혹시 다른 상인들을 구제하고 로어커스 폭등으로 인해 올 피해의 여파를 줄여서 그런 건가?'

확대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황금우상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유크하르 말마따나 인격이 없는 신이니 감사해봤자 감사받았다는 사실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마워하기로 했다.

아이작이 딴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캐틀린은 양치기 목상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캐틀린은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더니 아이작에게 말했다.

"이런 선물을 연달아 받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저희도 아이작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군요."

"선물?"

"이쪽으로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

캐틀린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허름한 창고 같은 곳이었다. 입구부터 먼지 쌓인 상자와 넝마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곳이 상회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복도가 방을 둘러싸고 있군.'

사람이 자주 지나다녀 들키지 않고 침입하기 어려운 데다, 외부에서 함부로 접근하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벽과 문 또한 다른 장소와 남다른 재질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금고라도 되는 건가?"

캐틀린은 놀란 눈으로 아이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안목이 있으시군요. 금고는 아니지만 비슷한 곳입니다. 금고도 이만큼 엄중하게 관리하지는 않거든요."

캐틀린이 창고의 문에 다가가자 갑자기 중년의 남자가 나타나 인사했다.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사각에 숨어 있던 경비였다. 그가 문을 열어 주고서야 아이작과 캐틀린은 창고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황금우상 상단 금고에 대한 소문은 많다.

벽과 바닥을 가득 채운 호박 보석이라든가, 빠져 죽을 만큼 있는 찬란한 금은보화들, 온갖 진귀한 약재와 향신료까지. 물론 황금우상 상단의 본점이 있다는 오드리프의 금고라면 모를까, 도둑질의 위험이 있는 탓에 지점은 그렇게까지 물건을 보관하지 않는다.

기껏 해봐야 채권 뭉치와 문서 몇 장뿐.

물론 그 문서들엔 귀족이나 사제들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댈 힘이 있지만 말이다.

역시나 창고를 열자 별거 없어 보이는 낡은 상자와 먼지 쌓인 넝마들만 나타났다.

캐틀린은 그 중 벽 쪽에 서 있는 등신대의 넝마를 벗겨 냈다. 그러자 안에서 칙칙한 회색빛의 갑옷이 드러났다. 평범하게 생긴 갑옷이었지만 아이작은 향상된 감식 능력과 상태창 덕분에 곧바로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이건...."

"우연히 입수하게 된 전신 갑옷입니다. 빛의 법전 문장이 새겨져 있으니 아마도 성기사 갑옷이라고 생각되는데 어느 성기사단의 소유물인지 알 수 없더군요. 그래서 혹시 몰라 보관 중이었습니다."

캐틀린이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이건 이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갑옷이었으니까.

"어디서 얻었길래?"

"그게... 부끄럽지만 장물입니다. 불사 교단의 습격을 받은 폐허에서 찾은 물건이라더군요. 시장통에 돌아다닐 물건은 아닌 것 같아 저희가 입수했습니다."

캐틀린은 그렇게 말하면서 갑옷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괜찮다면 아이작 님께서 이 갑옷을 써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반납하기도 애매한 물건이고, 그렇다고 팔기에도 찜찜하더군요. 하지만 숭고한 여정을 수행 중인 같은 빛의 법전 성배기사시라면 충분히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작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말이 옳긴 했다. 얼마나 옳냐면, 대륙 전체를 뒤져 봐도 아이작보다 이 갑옷을 가질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칼센 밀터의 성기사 갑옷(봉인)]

왜냐면 이것은 칼센 밀터가 성기사 시절 입었던 갑옷이었으니까.

성기사 갑옷들은 모두 비슷하게 생겼다. 다만 세부적인 특징과 문장 정도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 갑옷은 성기사단의 소속과 신분을 알릴 만한 표식, 심지어 가볍게 적힌 경전의 글귀나 기도문조차도 모두 거칠게 지워져 있었다. 노골적인 배교의 흔적이었다.

'캐틀린이 함부로 처분하지 못한 것도 당연하군.'

빛의 법전 문장들을 제거하고 기도 문구를 지운 성기사 갑옷이라니. 이단심문관들이 달려와서 이놈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덕분에 칼센 밀터의 갑옷이라는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갑옷 그 자체가 배교자의 흔적이긴 하지만... 뭐 적당히 가리면 되려나?'

안일한 생각이었으나 그만큼 탐나는 물건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칼센 밀터의 갑옷이다. 엄청난 기적들로 무장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분명 그 촉수 다발에 휘감겼는데도 멀쩡한 걸 보면....

'아니, 잠깐. 칼센은 촉수가 먹어 치우지 않았나?'

기억이 흐릿하긴 하지만 촉수가 칼센을 포식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 갑옷만 남아 있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고기만 먹고 껍질은 뱉었나?'

어이없는 생각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작은 칼센의 성기사 갑옷을 살펴보았다. '봉인'이라는 표시가 등급조차 알지 못하게 막고 있었지만, 이미 드러나는 기적의 힘만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강력한 기적에 보호받고 있는 갑옷이라면 아무리 촉수라도 소화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완력 강화, 피로 회복, 무게 경감, 물리 보호... 이건 또 뭐야. 청결 유지에 하급 온도 차단 효과? 대충 냉난방이 잘 된다는 건가?'

봉인된 상태의 기초적인 기적만으로도 이 정도라면, 봉인을 해제하면 얼마나 골 때리는 기적이 스며 있을지 상상도 안 됐다.

'칼센 놈, 검소한 줄 알았는데 몸에 호텔을 두르고 다녔었네.'

"받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냉큼 받아 줄 거라고 생각했던 캐틀린은 아이작이 의외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의아해했다.

성기사들은 다른 건 몰라도 장비 욕심은 있는 편이었으니까.

반면 아이작은 그녀의 무지가 오히려 부러웠다. 이 갑옷의 원주인이 누군지 몰랐으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착용했을 텐데.

'안 그래도 칼부림 좀 할 때마다 칼센에 비교되는데 칼센의 갑옷까지 차고 있으면 더 의심받는 거 아닌지 몰라... 아, 모르겠다.'

아이작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받도록 하지."

역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물건이었다. 정 무서우면 게르토니아 제국 안에서는 벗고 다니다가 다른 신앙의 영역에 들어갔을 때 차면 그만이다.

아이작의 말에 캐틀린의 표정이 환해졌다.

"좋습니다! 그러면 한번 입어 보시겠습니까? 도와드리지요."

"아니, 나 혼자 입어 볼 테니 잠깐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나?"

아이작은 혹시 모르지만 촉수가 예민 반응할까 싶어 그녀에게 부탁했다. 촉수가 뱉어낸 물건이라면 착용했을 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캐틀린은 아이작을 귀중한 창고 안에 혼자 두는 것에 약간 고민하는 듯했지만 신뢰를 보여 주겠다는 듯, 고개 숙인 뒤 밖으로 향했다.

아이작은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

사이즈가 맞지 않을까 걱정하진 않았다. 게벨의 갑옷조차도 몸에 딱 맞게 스스로 조절됐었다. 칼센 밀터의 갑옷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실제로 아이작이 장갑과 부츠, 각 부위들을 착용할 때마다 찰칵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몸에 꼭 맞게 조여들었다.

그렇게 아이작이 마지막 파츠, 투구 부분을 쓴 순간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정당한 소유자로 인정되었습니다.]

[장비의 봉인이 해제됩니다.]

"응?"

52화. 껍질 (2)

봉인이 해제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갑옷의 한 부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벅벅 긁어서 짓뭉개진, 칼센의 갑옷임을 표시하던 문장이 새겨진 부분이었다. 그 문장이 지워진 자리에 빛으로 새겨진 문장이 드러났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의미심장한 문구였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변으로 보아 봉인이 해제된 것은 분명했다.

'아니, 언제고 봉인을 해제시킬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아이작은 당황하면서도 어떤 기능이 드러날지 기대했다. 이내 아이작의 눈앞에 칼센의 갑옷에 새겨진 기적과 축복의 흔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역시나 명천사로 지명된 사람의 갑옷답게 눈이 커지는 엄청난 축복들이 나열되었다.

'최상급 체력 회복, 진리의 실마리, 인도하는 실타래, 파수자의 망치... 세상에, 이게 대체...?'

영웅적인 여정 한번을 마쳐야 한 개쯤 얻을 수 있을까 말까 한 축복들이 길게 나열되었다. 이 정도면 천사들은 물론이고 빛의 법전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대우해 준 것이 분명했다.

이때까지 칼센을 그냥 보스몹 정도로만 생각했던 아이작은 새삼 그가 명천사로 지명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는 배교하기 전까지 진짜 빛의 법전의 영웅이었으며 이단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리라.

아이작이 새로운 기적들에 희열을 느끼던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격한 반응이 나타났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윽...?!"

갑옷에서 뿜어져 나오던 섬광이 갑작스레 어두워졌다.

아이작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움찔 떨었다. 그의 온몸 곳곳에서 촉수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작이 치명상을 입었을 때처럼 이름 없는 혼돈이 반응하고 있었다.

갑옷 사이로 촉수들이 기어 올라오며 마구 헤집고 상처를 남겼다.

콰드드드득!

그러나 갑옷도 가만히 당하지는 않겠다는 듯 불꽃을 토해 내며 촉수를 불태웠다. 졸지에 자신의 몸을 촉수와 불꽃의 전쟁터로 내주는 꼴이 된 아이작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이게 무슨?'

하지만 생각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촉수는 아이작의 능력이고, 불꽃 또한 아이작을 지키기 위해 뿜어져 나온 것이다. 그러나 아이작은 이 둘이 절대로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칼센 밀터조차 씹어 삼킨 촉수가 이 갑옷만큼은 뱉어낸 이유도.

'아니, 젠장...!'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갑옷을 벗기 위해 잠금쇠를 손에 잡았다. 하지만 그 순간 촉수가 그 잠금쇠를 대신 다시 걸었다. 갑옷을 벗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촉수가 게걸스럽게 갑옷을 깨물었다.

와드드득!

갑옷이 거칠게 우그러들었다. 그러자 갑옷에서 뿜어져 나오던 불과 빛이 동시에 약해졌다.

애초부터 갑옷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갑옷은 외부에서 오는 위협을 막고자 존재하는 것이지, 내부에서 오는... 촉수를 막자고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촉수는 갑옷이 약해진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마구 씹고 짓이기고 물어뜯었다. 그러자 갑옷에 새겨져 있던 기적들이 하나둘 지워지기 시작했다.

"야, 잠깐!"

아이작은 아까운 갑옷이 상하는 것을 보고 비명을 내지르며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촉수는 이전에 먹어 치우지 못한 갑옷을 이번에야말로 소화시키겠다는 듯 으스러뜨렸다.

결국 아이작이 말릴 틈도 없이, 삽시간에 갑옷이 깨져 나갔다.

'예전에는 먹어 치우지 못했더니 왜 이번에는?'

해답은 간단했다. 그 사이 아이작이 충분히 강해지고, 촉수도 성장한 것이다.

이제는 충분히 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덕분에 빛의 법전 사제들이 하나만 받아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축복들이 삽시간에 사라져 갔다.

"아, 아아아...."

아이작의 단말마와 함께, 칼센 밀터의 갑옷은 이내 영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아이작 님?"

캐틀린은 한참 시간이 지나도 아이작이 나오지 않자 문을 두드렸다.

"아직 입지 못하셨습니까? 정 입기 불편하시면 도와드릴 하인을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대답이 없자 캐틀린은 문을 열었다. 창고 한가운데 아이작이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어딘가 망연자실해 보였다.

캐틀린은 아이작이 창고에 들어왔을 때와 차림새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갑옷은 입지 않으셨습니까?"

"...입고 있습니다. 보관 기적이 있길래 숨겨 두었습니다."

아이작은 강철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칼센 밀터 갑옷의 파츠였다. 캐틀린은 그런 기적까지 있을 줄 몰랐다면서 놀라면서도 그가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선물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뇨, 음... 아닙니다. 아주 좋습니다. 조금 지나칠 만큼."

아이작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피곤하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며칠은 쇠르에 머물 예정이니 할 이야기가 있다면 숙소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의아해하는 캐틀린의 환송을 받으며, 아이작은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온 아이작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몸 안의 촉수에게 갑옷을 드러내도록 의지를 보냈다.

차르르르르륵! 마치 뱀 비늘이 떨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아이작의 장갑을 중심으로 갑옷이 번져나갔다. 갑옷은 순식간에 아이작의 다리부터 머리까지 뒤덮은 전신 갑옷 형태로 변했다.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도 탈착에 최소한 30분은 걸리는 것이 전신 갑옷인데, 전부 무장하기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성기사 갑옷에 탈착을 도와주는 기적이 스며 있다 하더라도, 놀라운 성능이었다.

다만 그 생김새는 이전과 상당히 달라진 상태였다. 우선 전체적으로 깎인 흔적들이 섬세한 무늬를 형성하고 있어서 억지로 문장과 경전 문구를 지운 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정교한 예술품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늬들은 사실 뱀 비늘처럼 손톱만큼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음매는 사슬이나 옷감 대신 촉수로 이어져 있고, 망치로 두들기거나 접착한 흔적도 전혀 없었다. 촉수가 마치 조개 껍질처럼 '만들어 낸' 것이었기 때문에 가공의 흔적이 남지 않은 것이다.

아이작은 몸을 움직여 보았다. 전신 갑옷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고 유연하게 움직였다.

각각의 부위들은 강철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꺾였다. 마치 옷을 안 입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이건 촉수와 껍질이니까 어떤 의미로는 옷을 안 입은 걸지도....'

아이작은 자신이 입고 있는 갑옷을 들여다보았다.

[오염된 칼센 밀터의 성기사 갑옷(S)]

미안합니다, 칼센. 당신의 갑옷은 조각조각 나서 촉수에게 마개조당했습니다.

촉수는 칼센의 갑옷을 씹어 삼키고는 아이작의 새로운 껍데기로 재창조해 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소화하는데 방해되는 기적들을 전부 지워 버린 것은 당연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봉인 이전에 남아있던 기초적인 기적들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밸런스 파괴급 기적들은 다 삭제된 것이다.

'이건... 그래. 그것까지 바라면 너무 치트 플레이가 됐겠지.'

사실 갑옷 자체의 기능만 놓고 보자면 지금이 이전보다 훨씬 낫긴 하다. 사시사철 갑옷을 착용하고 지낼 수는 없으니 매번 전투할 때마다 착용해야 하는 불편함도 줄여 주고, 부드러움이나 가벼움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이제는 칼센의 갑옷이라는 것을 알아볼 만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빛의 법전 축복이 지워졌으니 내 취향대로 조합을 맞춰서 축복을 새길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나쁘지 않아.'

솔직히 기존에 부여되어 있던 축복들은 그냥 화려하고 강하고 희귀할 뿐, 상성과 조합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축복들이었다. 애초에 아이작은 빛의 법전 기적을 쓰기 어려우니 새로운 축복을 새기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아이작은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은 지우기 힘들었다.

'아이작 님.'

그때 아이작에게 어떤 의지가 전해졌다.

헤사벨이었다.

헤사벨은 사도가 된 후 혼돈의 자손처럼 아이작에게 의지를 보내 의사를 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작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충만한 충성심을 느꼈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그녀에게 맡긴 임무를 완료했다는 뜻이었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쇠르의 슬럼이었다.

***

쇠르의 슬럼가에는 이슬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방울이 굵진 않았지만 싸늘한 기온을 더 싸늘하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지저분한 공터 한복판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입김을 피워 올리며 모여 있었다.

그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옷 안에 품은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행위일 뿐, 감히 꺼내 들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광장 한구석에 서 있는, 깊게 후드를 눌러쓴 한 여인 때문이었다.

여인은 어두운 후드 안쪽에서도 붉은 눈빛만큼은 또렷하게 빛내며 섬뜩하게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 바르바리들은 한동안 쇠르에 떠돌았던 식인 괴물에 대한 괴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주목!"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을 깨웠다.

자클렛과 함께 아이작이 공터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이작은 공터에 들어오면서 그 무리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다름 아닌 로어커스 폭등으로 살길이 막막해져 떠밀려온 바르바리 무리였다. 로어커스 폭등 때문에 물류가 제대로 돌지 않으니 화전을 하던 바르바리들이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내려온 것이다.

바르바리들은 성기사 차림의 아이작이 그들 앞에 서자 바싹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전에야 어디 굴러먹던 용병 같은 차림새였기에 거리낌 없이 공격했지만, 지금 아이작은 완벽한 성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성기사는 바르바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보니 참 다양하기도 하군.'

바르바리는 특정한 민족이나 집단을 가리키지 않는다. 타의든 자의든 신앙이 없는 자들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바르바리들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존재한다.

신앙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신앙의 힘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

즉, 마법 저항력이 높다는 뜻이다.

이 점은 그들이 쉽게 다른 신앙에 이끌리지 않거나 독립 세력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유크하르는 영악하게도 바로 이런 바르바리들의 특성을 이용하려고 했다.

'골루와루가 황금우상으로 위장해서 부활한다 해도 당장 신앙을 수급할 방법이 부족했겠지... 그래서 이들을 이용하려고 했던 거고.'

유크하르는 그 어떤 신앙인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바르바리들을 돈으로 고용했다. 그렇게 우선 자기 휘하에 둔 다음, 로어커스 술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신앙으로 복속시키려 해 왔다. 덕분에 바르바리들의 마법 저항력은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작이 그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아이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충격적인 첫마디에 바르바리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성기사가 그들에게 존칭을 사용하다니? 바르바리들은 같은 국민이면서도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범죄자나 정박아 취급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시 신앙을 가져 보실 생각 있으십니까?"

아이작은 자신의 매력을 십분 활용하여 포교를 시작했다.

***

포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10분 내외의 짧은 이야기와 30분 정도의 문답 정도가 이어졌을 뿐이다. 아이작은 빛의 법전의 교리와 자신만의 생각을 담은 철학을 교묘하게 섞어서 이야기했다. 어차피 빛의 법전의 교리는 21세기 현대인인 아이작이 가진 생각과 가장 유사한 신앙이니, 아이작 자신의 생각을 조금 섞어도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작에게 징집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체포, 처분될 것이라 생각했던 바르바리들은 이 낯선 포교 방식에 당황하면서도 돌아갔다.

"꽤나 깊은 인상을 남긴 것 같습니다. 아이작 님."

헤사벨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잘 모르겠는데. 사실 말 몇 마디로 설득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는 저들 몇 명을 죽이기도 했으니."

"그런 것치고는 설득당한 자들이 제법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자클렛이라는 자가 꽤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더군요."

자클렛은 포교하는 동안 아이작에게 가장 많은 질문과 열성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이작이 로어커스 거래를 하는 동안 돕기도 했으니, 이미 정신적으로 일부분 굴복당한 상태인 것 같기도 했다.

아이작은 자클렛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자클렛은 이미 성도가 되기를 자처했으니 두고두고 잘 일해줄 것 같긴 하군."

아이작은 자신의 바로 아래 직접 명령을 수행할 사도─헤사벨을 두고, 사도 아래 성도라는 직위를 만들었다.

흔히 있는 신관이나 사제 같은 지위였다. 아이작이 직접 기적을 부여해 줄 수는 없었지만, 이 세계의 신앙 시스템 상 개인의 신앙심에 따라 점점 강해지며, 포교 작업을 통해 밑에 많은 신도가 모이면 또한 더욱 강해지게 된다.

자클렛은 꽤 규모 있는 바르바리들의 지도자였으니 금방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계급은, 위로 갈수록 강해졌다. 아래에서 차곡차곡 적립된 신앙심은 위로 올라갈수록 강하게 누적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신앙은 고스란히 내 힘이 되지.'

당연히 아이작은 이 신앙 다단계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53화. 빚 받아드립니다 (1)

'신앙'은 현실에선 모호한 개념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실질적으로 사용 가능한 자원이다.

신도들이 신에게 신앙을 바치면 그것은 신성력으로 누적된다. 이렇게 누적된 신성력은 사제나 주교들이 기적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매개로 사용된다. 즉, 신이 그것을 허락한다면 많은 신도를 거느리면 거느릴수록 사제들도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하다못해 촉수만 해도... 신성력을 불어넣으면 훨씬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겠지.'

골루와루를 상대할 때 촉수가 기적임에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던 이유는 그 안에 신성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충분한 신앙을 쌓아 힘으로 발현시킨다면, 이는 곧바로 아이작의 힘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힐렛처럼 충직한 종복이 아니라면 아직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을 허락할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신체 강화나 들키지 않을 만한 기적 정도는 베풀 생각이 있었다.

물론 '계급'이 높은 사람 중 배교자가 나온다면 곤란할 것이다. 하지만 바닥에서 시작하는 아이작은 우선 세력을 빠르게 넓힐 필요가 있었다. 거기다 굳이 배교하지 않을 정도로 교리를 느슨하게 한 상태였다.

'다른 신앙들은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 보편적인 도덕과 평등을 교리로 내세웠으니... 욕심 많은 놈은 애당초 이쪽에 관심을 갖질 않겠지.'

소외된 자, 도망친 자, 버림받은 자... 밑바닥 인생들이나 관심을 가질 만한 신앙이었다.

로어커스 폭락으로 기반이 무너진 쇠르에는 이런 인생들이 많이 있었다. 아이작은 이런 사람들 사이에 암암리에 신앙을 퍼뜨릴 생각이었다. 더불어 기존 신앙에 대한 불만도.

아이작은 자신이 신도들을 100%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가 통제하는 것은 곁에 둘 측근들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이 측근들만큼은 절대로 배교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을 가진 사람들은 아이작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클렛이 바로 첫 번째 성도다.

물론 다른 사제들이나 신관들에 비하면 지식도 능력도 한참 부족하지만 원래 어떤 다단계 회사든 초기 멤버는 그 수혜를 더 크게 누리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로어커스 폭등 사태 내내 자클렛이 보여 준 능력이나 영향력을 고려하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일찍 아이작의 편에 선 만큼, 앞으로 강해질 여지도 많을 것이다.

운도 실력이니까.

자클렛이 배신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밑바닥 인생답게 대세를 알아보고 올라타는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공포에 굴복당한 사람들은 그 공포에 시달리며 지내기보다는 공포와 한 편이 되기를 선택하기를 바라는 심리가 있다. 사람은 잘해 준 기억은 금방 잊지만, 공포는 쉽게 잊지 못한다.

어쨌든 자클렛이 쇠르에서 성도의 역할을 잘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흠, 그건 그렇고... 그 물건은 되찾았나?"

"예. 덕분에."

헤사벨은 눈에 띄게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 품속에서 얼룩덜룩한 넝마를 꺼내 들었다.

지저분한 넝마처럼 보이지만 아이작은 곧바로 그것이 성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칼라일 성해포(B)]

[상처에 닿을 경우 해당 부위의 출혈과 부상을 즉시 치유하지만, 피를 소모한다.]

[그녀가 칼라일 수도원에서 명천사로 지명되었을 때, 그녀는 마지막 신앙의 증명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도려내 천에 감싸 붉은 성배에게 바쳤다. 붉은 성배는 기뻐하며 그녀의 피부를 벗기고 살점을 새롭게 조직하니,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탄생했다.]

'하필이면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관련된 물건이군.'

손대기 섬뜩한 기록이 담겨 있는 데다, 분열 예식에 비하면 격이 떨어지는 물건이지만 일단 명천사와 관련된 성물이었다.

헤사벨은 이 성해포를 내밀며 뭔가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이작을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대리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기 입으로 붉은 살점의 선지자라고 말한 적도, 거짓말할 생각도 없었다. 단지 상대방의 착각을 이용할 뿐이다.

"잘됐군."

아이작은 별 내색을 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헤사벨은 움찔하다가 결국 아이작에게 칼라일 성해포를 곱게 바쳤다. 유크하르에게 저당 잡혔던 성물을 이번엔 아이작의 손에 넘긴 셈이다.

['칼라일 성해포' 성물을 습득하였습니다.]

[숭고한 여정 효과가 더욱 강해집니다.]

이걸로 쇠르에서 할 수 있는 용건은 다 해결한 것 같았다. 황금우상 상단의 자산을 대부분 이용할 수 있게 빚을 지워 두었고, 황금우상의 축복, 칼라일 성해포와 헤사벨 굴마르라는 사도까지 얻었다.

예상치 못한 큰 수확이었다.

'헤사벨이 나중에 내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한데....'

사실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위험부담이 적지 않은 일이다. 지금 그녀는 자신이 누굴 섬기는지 잘 모르고 있어서 완전한 배교로 취급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아이작은 그때 헤사벨이 자신을 선택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을 들이는 것은, 칼센 밀터라는 좋은 예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일일이 키우는 것보다는 남이 키운 신자를 빼앗아 오는 게 더 빠르지.'

무릇 가장 뼈아픈 배교는 가장 신실한 신자가 하는 법이라고 했으니까.

헤사벨 굴마르는 성장 가능성만 따져 봐도 충분히 공들일 가치가 있는 상대였다. 흡혈귀라는 것은 신경 쓰이는 문제도 아니었다.

일단 아이작부터가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었으니까.

헤사벨은 아이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얌전히 명령을 기다렸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아이작 님?"

"음."

아이작은 이미 생각해 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떠나는 대신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만간 누군가 찾아오겠지.'

아이작은 문제를 먼저 해결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누군가 자신에게 부탁하게 만들어야 더 이득이니까.

***

"손실이 얼마라고?"

"그, 그게...."

보고를 들은 헨드락의 영주, 카일 헨드락은 현기증을 느꼈다.

"대체... 대체 왜? 황금우상 상단도 사들이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황금우상 상단도 이번 일로 큰 손실을 입었다고 합니다."

황금우상 상단의 투자 행보는 이 바닥에서 가장 관심받는 이슈이자 신용의 증거다. 신이 가호하는 경제활동이 쉽게 실패할 리가 없으니까.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우상 상단이 큰 손실을 입었다면, 이는 황금우상이라는 신앙에 대한 테러나 도발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된다.

'하지만 하필 왜 이 타이밍에?'

헨드락 영지는 게르토니아 제국 변방에 있다.

중앙인 수도에서는 너무 멀고, 그렇다고 최전방에 붙어 명성을 날릴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시기에 따라서는 잘나가던 때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저 어중간한 곳에 자리 잡은 시골 촌구석 영지.

하지만 카일은 야심이 많은 남자였다. 자신의 선친이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었을 때부터 그 야심은 눈에 띄게 부풀었다. 카일은 인근 도시인 쇠르에서 일어난 로어커스 폭등이 자신의 힘을 키울 훌륭한 기회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브란트 공작가의 이름까지 팔아서 다른 귀족들로부터 돈을 빌렸는데!'

투자에 귀족들을 꼬드기기 위해 백제국의 대귀족인 브란트 공작가가 이번 투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출처 불명의 소문인 척했으나 귀족들은 사실상 배후가 카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아 준 이유는, 그들로서도 투자에 참여할 귀족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투자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제 그들은 모든 책임을 카일에게 돌리게 될 것이다.

'못 갚는다고 잡아떼?'

카일은 최악의 수를 상정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는 이웃한 영주, 르하르트로부터 다 큰 로어커스를 사들이기로 이미 수개월 전에 계약했던 것이다. 로어커스 가격이 오르면 오를수록 르하르트가 배 아파할 생각에 즐거웠는데, 순식간에 가격이 폭락하자 입장이 역전되었다.

이제 르하르트가 산더미 같은 로어커스를 들고 오면 들고 올수록 카일은 점점 파산의 구렁이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돈을 떼먹기로 한다면, 르하르트는 로어커스 대신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같은 신앙의 사도건 뭐건 파산 앞에는 장사가 없었다. 르하르트도 이번 일로 손해가 이만저만 아닐 테니까. 게다가 다른 귀족들도 뭐라도 받아내기 위해 르하르트를 지원할 것이다.

카일은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정말로 잠깐 휘청거렸지만, 옆에 서 있던 여인의 부축으로 간신히 넘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영주님."

그를 부축한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속삭였다. 여인에게서 풍겨 오는 냄새를 맡은 카일은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라엘라."

라엘라는 그에게 늘 현명한 조언을 해 주는 시녀였다. 선친이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며 투자를 망설일 때에도 라엘라는 카일에게 과감한 투자를 조언했다.

그래서 선친이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자마자 카일은 영주로서 첫 행보로 로어커스 투자를 선언했다. 그러다 라엘라가 한 달 전쯤 다시 로어커스를 팔기를 권유했지만 이미 벌여 놓은 판이 너무 큰 데다, 도저히 가격이 내려갈 것 같지 않아 그녀의 조언을 무시했었다.

"역시 당신 말을 들을 걸 그랬소.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이미 늦은 일입니다. 그보다는 문제의 원인을 짚어보지요. 갑자기 왜 로어커스가 폭락했을까요?"

그녀의 말에 카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정부지 나날이 신고가를 갱신하던 로어커스의 가격이 왜 떨어졌을까? 그것도 황금우상 상단까지 투자하던 시장이?

"황금우상 상단을 노린 테러인가?"

"그것 말고."

라엘라의 입술이 꿈틀거리다가 겨우 다시 열렸다.

"좀 더 큰 목적이 있지 않았을까요?"

"설마... 나를 향한?"

"...예. 말씀하신 대로 백제국 귀족층에 경제적 위기를 안겨주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르지요. 귀족들은 빛의 법전의 가장 신실한 신도이자 수호자니, 어쩌면 빛의 법전의 근간을 무너뜨리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럴 수가.

카일은 빛의 법전을 노린 전대미문의 테러에 휘말렸다는 사실과, 그 전모를 밝혀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하지만 이렇게 명석한 두뇌로도 다른 귀족들을 설득할 말은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니라 다른 사악한 존재의 공격으로 투자가 실패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듣자 하니 아이작이라는 성배기사가 이번 로어커스 폭락에 큰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아이작? 성배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 이름이 아이작이었나?"

"예. 그 성배기사가 암시장의 악당을 무찌르고, 사악한 괴물에게 정신이 조종당하던 상인들을 풀어주면서 가격이 폭락했다고 합니다."

"대단한 공이로군. 우리 영지에 오면 극진히 대접해야겠어."

"그게 아니라."

라엘라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잠시 기도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신실함은 놀라웠지만 카일로서는 타이밍을 맞추기 어려웠다.

'제게 인내를 허락하소서' 운운하는 기도문이 짧게 지나간 뒤, 라엘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잘 짜 맞춰진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로어커스 폭등에 정신 지배라니요? 쇠르에서 이렇게나 먼 곳에 사는 영주님도 정신 지배에 당하셨을까요? 다른 귀족들은요? 게다가 갑자기 나타난 성배기사가 괴물을 물리쳐 로어커스 가격이 떨어지다니... 이상하지 않나요?"

"설마... 성배기사가 빛의 법전 세력을 공격했단 말인가?"

"성배기사라곤 하지만, 꼭 빛의 법전을 모신다는 법은 없죠. 엘릴 교단이나 세상의 화로에서도 성배기사는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카일은 이 놀라운 전모에 다시금 전율했다.

다른 신앙의 성배기사가 빛의 법전에 공격을 감행하고, 자신은 하필이면 그 공격에 가장 먼저 당한 것이다. 카일은 이제 단순히 파산의 문제를 넘어 신앙의 수호자로서 책임감을 느꼈다.

물론 책임을 다른 교단 탓으로 돌리게 된다면 그가 살 구석이 생겨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혹시 모르는 일이지요. 아이작이라는 성배기사가 사실은 빛의 법전이 아닌 다른 어떤 사악한 신앙을 섬기고 있고, 정체를 숨긴 채로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고 힘을 키울 생각인지도요."

"거기까지는 너무 갔군. 라엘라."

아무리 그녀가 현명한 조언을 한다 해도 카일은 공상과 이론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끔 라엘라는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기 때문에 그가 더더욱 엄격해야만 했다.

성배기사가 어디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카일도 어렸을 때부터 성배기사에 대한 전설을 들으며 자랐다. 카일은 그 아이작이라는 성배기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만약 아이작이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면 빚쟁이들도 자신을 비난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지 않을까?

"기사단을 보내야겠군."

카일은 결국 결정했다.

"헨드락 기사단을 보내겠소. 그 성배기사를 정중히 모셔오도록 청한 뒤, 내가 직접 만나 판단해 보지."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영주님."

라엘라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카일은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곧바로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홀을 빠져나갔다.

***

라엘라는 카일이 사라지자마자 표정 없는 얼굴을 들어 올렸다.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가죽을 뒤집어쓴 듯한 무기질적인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가 조용히 의지를 드러내자, 곧바로 기둥 뒤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흑기사가 소리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굴마르 가의 딸에게서 신앙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라엘라는 기사에게 차분하게 명령을 내렸다.

"굴마르 가의 딸은 마지막에 아이작이라는 성배기사를 쫓았다. 헨드락 기사단과 동행하면서 그녀의 행방을 조사하도록."

"아이작이 아니라 헤사벨 굴마르입니까?"

"그 시대착오적인 성배기사는 붉은 성배의 관심거리도 아니야. 중요한 건 굴마르 가의 후계자다. 배교한 것이 확실하다면 즉시 처형하고 성물을 회수해라."

흑기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배기사에게 살해당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라엘라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네까짓 게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닐 테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라엘라의 말에 흑기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선지자님."

54화. 빚 받아드립니다 (2)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했군.'

아이작은 숙소에서 금세 활기를 띠기 시작한 쇠르 시장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애당초 상업 중심지기도 하고, 피해 대부분을 황금우상 상단이 상쇄해 준 덕분에 상인들이 재기할 발판이 마련된 덕분이었다. 물론 황금우상 상단은 상당히 뼈아픈 손해를 보았지만, 그것도 내부자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소문의 중심에 아이작이 있었다.

아이작이 로어커스 폭락이 시작된 밤, 유크하르를 추적하다가 시장에서 벌어진 일은 많은 사람이 보았다. 구체적으로 아이작이 무엇을 했는지는 사람들이 알지 못 했지만 그가 로어커스 폭등을 부추기던 '사악한' 암시장 상인을 잡았고, 파산할 뻔한 상인들을 구제했다는 소문만은 일파만파 퍼졌다.

게다가 소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대신이 부활했다든가, 붉은 성배 클럽의 흡혈귀가 출현했다든가 하는 소문까지 암암리에 돌고 있었다. 물론 그건 너무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려서 듣는 이들을 갸웃거리게 만들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성배 기사'라는 존재 때문에 꽤 그럴듯한 소문으로 포장되었다.

어려운 시기인 만큼 즐거운 이야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상인들 입장에서도 과욕에 눈이 흐려졌다는 것보다는 숭고한 성배기사의 도움을 받아 세뇌에서 풀려났다는 쪽이 더 매력적이었을 테고.'

부끄러운 기억은 잊어버리고 이야기 속 성배기사와 한 편이 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행동이지만 아이작에게도 나쁠 것은 없었다. 이제 그들은 대륙 곳곳으로 스며들며 아이작 영웅담을 전할 테니까.

"음?"

그때 아이작 눈에 무언가 보였다. 제법 잘 차려입은 귀족 남자가 말을 탄 무리와 함께 시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황금우상 상단으로 향하는 것을 본 아이작은 미소 지었다.

'드디어 때가 온 모양이군.'

아이작은 짐을 꾸리며 어딘가에 대기하고 있을 헤사벨에게 의지를 보냈다.

이내 천장의 나무판자가 열리면서 헤사벨이 거꾸로 모습을 드러냈다. 자다 일어난 듯 비몽사몽인 모습이었다.

"평소에도 거기서 자고 있었냐?"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으면서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은 여기뿐이더군요...."

뱀파이어인 헤사벨은 가능한 낮밤이 바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낮에도 활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적당히 몸을 가리면 돌아다닐 수는 있지만, 그래도 움직임이 상당히 제약되는 것은 사실이다.

"시키실 것이 있으십니까? 교단 일이라면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헤사벨은 평소 밤에 돌아다니며 태동하기 시작한 이름 없는 혼돈의 교단을 관리하고 소문을 살피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교단'은 아이작의 명성과 더불어 제법 빠르게 입소문을 타며 번지고 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의 교단답게 이름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빛의 법전의 한 방파 정도로 여겨지겠지만....'

어차피 정체를 드러낼 생각도 없었다.

아이작은 이 교단을 끝까지 빛의 법전 안에 숨겨진 신앙으로 둘 생각이었다. 현실의 종교에서도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교리 해석이 약간 달라서 갈라지는 종교들.

가장 큰 종교인 기독교나 이슬람만 해도 얼마나 많은 갈래가 있는가.

"시킬 것은 없고, 짐 싸라. 곧 여기를 뜬다."

"드디어."

헤사벨은 이유를 묻지도 않고 천장 속으로 다시 머리를 넣었다. 그녀는 어째선지 한동안 쇠르에 있는 것을 꽤 불안해했다. 이유야 어쨌든 이곳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이다.

똑똑.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렸던 사람이 도착했다.

"아이작 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긴히 부탁드릴 일이...."

캐틀린은 이미 짐을 다 싸고 갑옷까지 차려입은 아이작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작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흠, 실례라면 실례겠군. 나는 지금 막 쇠르를 떠날 생각이었거든."

***

물론 아이작은 떠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캐틀린은 아이작에게 겨우겨우 애걸복걸해서 상회로 데려왔다.

상회의 접객실에는 아까 아이작이 시장을 내려다볼 때 지나갔던 귀족 남자가 있었다. 그는 황금우상 상단의 지부장조차도 어렵게 모셔온 아이작을 보고 긴장한 모습이었다.

결국 귀족 남자가 먼저 다가와 아이작에게 인사했다.

"코벤 르하르트 백작입니다. 당신의 여정에 영광과 축복을 빕니다. 성기사님."

"아이작입니다."

아이작은 백작의 태도에 만족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기선제압은 된 것 같군.'

귀족과 성기사들의 관계는 미묘하다. 빛의 법전을 국교로 삼고 있는 게르토니아 제국은 교단의 힘이 막강하지만, 동시에 황제의 권력도 만만치 않다.

원래는 황제도 신으로부터 현세의 권력을 '잠시' 양도받은 대리인 취급이지만, 현 황제부터가 이미 축복을 받은 성체이기 때문이다.

신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성체가 더 우월한가, 아니면 신의 권능을 빌려 쓰는 사제 집단이 우월한가?

이것은 미묘한 문제였다.

덕분에 황제에게 충성을 하는 무력 집단인 귀족과 교단에 충성하는 성기사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눈치싸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르하르트는 '숭고한 여정을 재개하려던 성배기사'를 겨우 설득해 어렵게 모셔 온 그림이 되었다. 백작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아이작에게 숙이는 듯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좀 숙여 줘도 되겠지만, 수저 잘 물고 태어났을 뿐인 상대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것도 배알 꼴린단 말이지.'

그리고 이런 포지션 선점이 대가를 '흥정'할 때 우위를 결정짓기도 한다.

콧수염이 멋진 귀족, 르하르트는 이야기의 운을 띄우듯 먼저 입을 열었다.

"성배기사님의 위업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습니다. 최근에 쇠르를 중심으로 돌고 있던 광기의 흐름을 단숨에 잠재우셨더군요."

"신께서 인도하신 길을 따랐을 뿐입니다."

정확히는 상태창이지만, 그것도 신의 인도라고 할 수도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겸손하신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제가 이곳까지 오면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단순히 길을 따른 순례자의 행보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이작은 잠시 르하르트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면서 듣기만 했다. 이윽고 르하르트의 입에서 쏟아진 아이작에 대한 소문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쇠르를 지배하던 광기 어린 괴신(怪神)의 그림자... 이에 현혹되어 광기에 휘말린 무고한 시민들... 상인들은 정신을 조종당해 마치 좀비라도 된 것처럼 '마약' 로어커스를 사들이고, 누구도 봄 농사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굶주림에 의한 대재앙이 예고되었을 때.

홀연히 한 성배기사가 사악한 괴신을 퇴치하기 위해 나타났다.

이윽고 성배기사는 사악한 음모를 영웅적인 전투와 함께 파쇄하고, 사악한 괴신은 마지막 발악으로 광기와 공포로 쇠르를 물들이려 했다. 하지만 그때 나타난 성배기사가 밤을 깨부수는 후광과 함께 나타나 그들을 꾸짖었으니.

"...상인들은 정신을 차려 절을 하고, 마침내 사악한 괴신을 물리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게다가 피폐하고 고통받은 이들을 위해 가진 자산을 풀어 아낌없이 도와주셨다구요."

"...."

아이작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사실 큰 얼개만 놓고 보면 그다지 틀린 것은 없었다.

문제라면 이야기 속의 성배기사가 숭고한 목적보다는 선물투자로 돈놀이를 하려고 괴신을 퇴치했다는 거고, 그가 상대한 적들은 땟국물 흐르는 양아치와 고점에 물린 빚쟁이였으며, 풀었다는 자산은 애시당초 유크하르의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번 일로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도.

'뭐, 이야기의 내막이야 어쨌든 결과가 좋으면 됐지.'

아이작이 딴청을 부리는 사이, 르하르트는 그 침묵을 겸손과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듯 조심스럽게 손을 모아 쥐었다.

"예. 저도 상인들에게서 과장되고 허황된 이야기가 많이 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이번 사태 때 돈 좀 벌어보려다가 손해를 봤지요. 그래서 반도 믿지 않으려고 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거짓이 아닌 것 같더군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이작은 겨우 겸손의 뜻을 전달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계속 르하르트의 찬사가 이어질 것 같았기 때문에 화제를 돌리기 위해 바로 용건을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를 치하하기 위함은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

"음, 역시 신실한 성배기사답군요. 사실 성배 기사님의 여정을 후원할 겸...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르하르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이웃에 헨드락이라는 영지가 있습니다. 산세가 험하지만 예전에는 광업이 발달한 곳이었지요. 저는 오랫동안 그곳의 선대영주인 리스헨 헨드락 자작과 오랫동안 협력해왔습니다."

'헨드락!'

아이작은 뜻밖의 이름에 놀랐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헨드락 영지는 언젠가 그가 찾아갈 곳 목록 중에서도 최상위에 있었다.

현재로선 별 볼 일 없는 볼품없는 산골짜기 마을이지만, 로어커스 사태로 인해 한층 더 볼품없고 초라한 폐허가 되다시피 한다.

하지만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것은 2년 뒤, 여명군이 시작될 무렵부터다.

여명군을 촉발하는 계기가 그곳에서 터지면서, 여러 가지 의미로 굉장히 중요한 요충지가 되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아이작은 어떻게든 그곳과 가까운 곳에 터를 잡거나 연고지로 만들어 두고 싶었는데, 마침 이렇게 엮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헨드락 영주가 아닌 그 옆 마을 영주가 찾아온 건가....'

르하르트는 아이작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얼마 전 리스헨 헨드락 자작이 정체불명의 병으로 죽고 그 아들인 카일 헨드락이 영주 직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저는 그 아들과도 우정과 친교의 관계를 이어 가기로 했지요. 헌데 카일 헨드락이... 웬 여자한테 홀려서 돈놀이를 시작한 겁니다."

돈놀이라... 아이작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가를 매만졌다.

바로 그가 기다리고 있던 이야기였다.

***

다음의 이야기는 아이작이 정확히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카일 헨드락이라는 영주는 로어커스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돈을 빌렸으며, 르하르트에게도 손을 벌렸다고. 그러나 그 결과는 어쩌구저쩌구.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

하지만 카일 헨드락은 돈을 갚을 여력도,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 사태로 파산하는 귀족이 한두 명은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아이작은 두 가지 상황을 예상했다. 파산한 귀족이 헐레벌떡 자신을 찾아오거나, 혹은 그 파산한 귀족을 탈탈 털어야 하는 채무자들이 자신을 찾아오거나.

어느 쪽이든 명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악한 사술에 손을 댄 타락한 귀족을 처단한다'라는 명분이 '떼인 돈 받으러 간다'는 명분보다는 나을 것이다.

반대로 파산한 귀족은 반대로 그런 아이작을 옆에 끼고 있어야 자신은 이 '사악한 사태'에서 무관하다는 점을 어필할 수 있다.

그러면 채무자들도 대놓고 파산한 귀족을 탓하지는 못한다.

귀족은 파산의 위기에 처해도 돈보다 명분을 중요시한다.

재기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면 추잡스레 무너져선 안 되기 때문이다.

아이작은 그래서 누가 먼저 찾아오든 꽃놀이패를 쥐고 필요한 것을 뜯어낼 생각이었다. 헨드락 영지라면 가장 좋은 것은 땅이고, 그다음으로는 아이작만 아는 영지의 비밀을 몰래 빼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찾아온 것은 채무자 쪽인가....'

파산한 쪽이 더 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결과긴 했다. 하긴, 어쩌면 이 르하르트라는 귀족도 그 돈을 받아내지 못하면 파산할 위기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이작은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럼 제가 그 헨드락 자작을 함께 공격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 말에 르하르트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가로저었다.

"아뇨. 어찌 그렇게 불온한 짓을 부탁하겠습니까? 결코 성배기사님을 그런 길거리 시정잡배 취급하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카일 헨드락은 어쨌든 제 친구의 아들입니다.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지요."

르하르트는 이맛살을 모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책임질 일은 책임지게 만들어야겠지요. 이 사태를 피하려고만 하면 중앙 귀족들이 더 큰일을 저지를 겁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이렇게 애가 망가진 꼴이 여자 때문인 것 같아 꾸짖어줄 생각이긴 합니다."

여자 때문이라.

아이작은 르하르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잘나가던 남자가 여자 때문에 망가졌다는 흔해 빠진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대부분 정말 여자 때문이라기보다는 남자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 적당히 지어낸 핑계에 가까운 법이다.

다만 헨드락 영지에 일어난 일이라면 정말 무언가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자 때문에 로어커스에 손을 댔다고 했었지요. 그 여자는 어떤 여자입니까?"

"예? 아아, 선대 영주 때 새로 들였다는 시녀입니다. 얘기한 적은 없지만 멀찍이서 본 적이 있는데, 굉장히 매력적인 여인이었죠. 하지만 그래봤자 시녀인데 늘 옆에 끼고 산다니, 덕분에 버릇 망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르하르트도 마땅히 증거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매력적인 여자가 곁에 붙어 있으면 딴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 남자의 생리다. '애가 안 하던 짓을 하는 걸 보니 여자 때문이군'이라고 선입견을 가져 버리는 것이다.

아이작은 비아냥 삼아 맞장구를 쳐 주었다.

"예, 뭐, 그렇게 매력적이라고 하니 어쩌면 붉은 성배의 사악한 음모를 수행하기 위해 국경 안으로 침투한 천사일지도 모르겠군요. 평범한 시녀로 위장해서 영주를 죽이고 그 아들마저 타락시키고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예? 그건 아무래도 너무 간 것 같군요. 성기사님. 붉은 성배의 천사씩이나 되어 왜 굳이 변방 귀족의 시녀 같은 일을 하겠습니까? 저 같으면 황제를 타락시키거나 공작가를 유혹할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르하르트의 귀에는 성배기사의 말이 근엄한 우려와 추리 정도로 생각된 듯했다. 그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아이작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속으로는 생각했지만.

'붉은 성배 클럽의 공작가 후계자도 여기까지 와서 빚쟁이가 됐는데 말이지.'

***

"이제 출발합니까, 아이작 님?"

붉은 성배 클럽의 공작가 후계자, 그리고 빚쟁이였다가 이제는 아이작의 졸개가 된 헤사벨은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작이 지시한 대로 모든 짐을 싸 놓고 언제든 출발할 준비를 마쳐 둔 상태였다.

아이작이 대답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자 헤사벨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이작 님?"

"아니, 그냥 생각이 복잡해져서."

다 헤사벨이 자처한 일이다. 자기가 판 무덤에 자기가 들어와 있는데 뭘 어쩌겠는가?

아이작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헨드락 영지로 간다."

성물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악한 자를 토벌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 사악한 자에게 돈이 아주 많다면 더더욱 그렇고.

55화. 빚 받아드립니다 (3)

당연하지만 헨드락 영지로 향하는 길은 르하르트 백작과 함께하지 않기로 했다.

르하르트는 아이작을 만나기 위해 쇠르에 가신 몇 명과 들렀을 뿐이었다.

헨드락 영주를 붙잡아 받을 것을 받아내려면 좀 더 철저한 준비, 그러니까 많은 칼과 창이 필요했다. 동선 자체가 르하르트 쪽이 헨드락에 더 가깝기 때문에 도착하는 시간은 비슷하거나 르하르트 쪽이 약간 빠를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래서 말을 선물한 거지. 늦지 말라고."

아이작이 헤사벨에게 설명하자 말을 끌고 온 기사는 난감한 표정을 했다. 그가 변명처럼 말했다.

"영주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성배기사님에 대한 선의와 경애의 뜻으로...."

"그래, 그래. 그래서 이 말을 타라고?"

기사가 가지고 온 말은 꽤 멋진 백마였다. 아이작이 새로 얻은 갑옷과도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순종적이니 말을 잘 들을 것 같기도 했지만, 아이작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전마라기보단 도련님이 탈 법한 말이군.'

아무래도 선물이다 보니 거친 놈보다는 말 잘 듣고 예쁘장한 것으로 고른 것 같았다. 선물은 포장도 만만찮게 중요하니까.

그때 아이작의 눈이 좀 더 뒤쪽으로 향했다. 기사가 타고 온 흑마였다.

"저 말은?"

르하르트가 선물한 백마보다 덩치가 반 이상 더 크고 거칠어 보이는 흑마였다. 말 그대로 전마처럼 보였다.

아이작의 말에 기사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요? 저건 어렵습니다. 성질이 너무 더러워요. 기수를 몇 명이나 떨어뜨린 녀석입니다. 말이 기수에게 맞춰주는 게 아니라 기수가 말에게 맞춰줘야 합니다. 성배기사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도착이 늦어질까 봐 그런 거겠지. 데려와 보게."

기사는 어쩔 수 없이 말을 데리고 왔다. 사실 혈통 자체는 선물한 백마가 더 좋아 보였다. 하지만 백마는 예쁘고 우아하게 달리기엔 좋은 말이었지만, 기마전도 고려해야 하는 아이작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끌려온 놈은 낯선 아이작을 보곤 덩치답게 성질을 드러내듯 거칠게 투레질했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서 불길한 무언가를 느낀 것일 수도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아이작은 말을 길들이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이작이 손을 내밀자 말은 아이작을 깨물려는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 순간 아이작의 손이 놈의 주둥이를 붙잡았다.

저 너머의 기생충이 순식간에 말의 뇌간으로 파고들었다. 뇌를 제압당한 말은 꿈틀하다가 이내 얌전해졌다. 아이작은 말을 통해 느껴지는 공포와 흥분, 감각들을 체크했다.

말 못 하는 짐승에게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말해 아이작은 말을 잘 타지 못한다. 그가 타 본 것은 기껏 해 봐야 수도원의 조랑말이었다.

'이렇게라도 해놔야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겠지.'

물론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아니고 고통을 주거나 강제로 차분하게 만드는 정도지만 그래도 쓸만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기사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단하군요. 그 거친 군마를 순한 양처럼...."

"선물은 이걸로 받도록 하지. 좋은 선물을 해줘서 고맙다고 전해주게. 백마는 자네랑 바꿨다고 하고 가져도 좋네."

아이작의 말에 기사는 희희낙락하며 인사하고 헤어졌다. 자기가 타던 말을 빼앗긴 셈인데 미련 없이 버린 걸 보니 이 흑마의 성질을 기사도 견디기 힘들었던 듯했다.

하지만 어쨌든 아이작에게는 순한 양일 뿐이었다.

"그럼 출발하자."

아이작은 말에 올라타며 헤사벨에게 지시했다. 아직 해가 떠 있었기 때문에 헤사벨은 거의 코까지 가리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앞이 보이나 싶으면서도 잘 움직이는 걸 보니 문제없는 모양이었다.

***

헤사벨은 자기 말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다른 말을 구해 줄 필요는 없었다.

말을 타기는 했지만 서두르다가 르하르트보다 먼저 도착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아이작은 굳이 빨리 달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르하르트 쪽과 길이 엇갈리지 않겠습니까?"

"르하르트가 당장 공성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명분을 따져서 침착하게 해결하고 싶은 거라면 어차피 내가 있어야 해. 내가 있는데도 헨드락이 배짱을 부리면 정말 사술에 휘둘린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하지만 음모와 교란, 암살의 고향에서 온 헤사벨에게는 이런 행동이 낯설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흠, 잘 모르겠군요. 우리 왕국에서 그런 일이 있다면 헨드락 영주의 목에 금화 천 닢을 걸었을 겁니다. 그게 병사를 출병시키는 것보다 싸게 먹힐 테니까요. 아니면 내부자를 매수해서 암살하거나, 식사에 독을 풀거나...."

그 외에도 헤사벨은 왈라이카 왕국에서 벌어질 만한 온갖 협잡질들을 열거했다. 아무래도 체면이나 명분, 명예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동네라서 그런 모양이다.

아이작도 굳이 따지자면 그쪽이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백제국은 좀 더 체면치레가 강한 곳이었다.

그 와중에 고소한다던가 붉은 성배에게 호소한다든가 하는 선택지 따위는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왈라이카 왕국에선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듯했다.

"여하튼 전면전은 가급적 피하려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피가 많이 흐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 자칫하면 많은 희생자가 생길 수도 있겠지...."

"예. 귀중한 피가 흐른다니 정말 아까운 일입니다."

아이작은 왈라이카 왕국이 의외로 인명 중시 사상이 깊은 곳인가 생각하다가 완전히 잘못 짚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왈라이카 왕국의 귀족들은 국민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전면전을 일으킨다 함은 자기 손으로 추수할 곡식들을 쓸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너는... 아니다. 말을 말아야지."

전쟁으로 대량의 피를 흘리는 것과 평시에 조금씩 피를 빨아먹는 것, 뭐가 더 낫다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아이작도 붉은 성배 클럽 신앙으로 엔딩을 본 적 있었다. 게임에서 묘사되기로는 왈라이카 왕국의 국민들이라고 가축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족들은 식량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농민들은 생산한 식량을 전부 가질 수 있었고, 잉여 식량으로 늘어난 인구 덕에 상공업과 예술이 발달했다. 음모나 분쟁은 귀족들끼리의 이야기였다.

쓸 만하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피를 나눠주고 바로 양자로 삼아 귀족으로 만들기 때문에 사회 구조가 경직되어 있지도 않았다.

'물론 소수의 가문들만이 영원히 부를 독점하는 체제겠지만.'

그렇다고 귀족들이 터무니없이 오래 살지도 않는다.

음모와 교란, 암살이 횡행하는 이 나라에서 귀족들의 사망률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단연 살인이다. 하지만 숨겨진 0위는 바로 실종이다.

시체를 먹어 치우는 뱀파이어에게 시체를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죽은 귀족이 귀한 혈통을 가지고 있다면 뼛조각, 머리카락 한 줌, 피 한 방울이라도 더 가져가려 싸움을 벌일 정도였다.

'어느 쪽이 더 낫다... 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정서적인 면에서는 그래도 빛의 법전 쪽이 낫군.'

물론 이것은 현대인의 기준일뿐,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다.

전쟁터에 징집되거나 귀족들에게 수탈당하는 누군가는 왈라이카가 낫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너도 굴마르 가의 후계자잖아? 공녀? 거의 공주에 준하는 직위일 텐데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되나?"

아이작의 기억 속에 헤사벨은 게임 시작 시점에 자기 영지에 틀어박혀 과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기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헤사벨은 표정을 굳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붉은 성배 클럽에서...."

"조심해!"

어디선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명은 아이작도, 헤사벨을 향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길 앞쪽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

쾅!

굉음과 함께 통나무가 지면을 강타했다.

허벅지만 한 굵기의 통나무는 일대의 흙과 돌조각들을 날려 버렸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사람들은 허둥지둥 물러나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기사인가?'

아이작은 통나무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무리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빌어먹을, 불! 불화살은 어디 있는 거야! 가서 쏘라고!"

"횃불로 지져!"

다시 한번 또 하나의 통나무가 날아들었다.

상황이 기사들에게 그다지 좋지는 않아 보였다. 비탈진 산골인 데다, 주변은 벌목이라도 했던 건지 잘린 나무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을 공격하는 상대는 키가 3m에 이르고 바위 같은 창백한 피부를 가진 트롤이었다.

'트롤이 이렇게 민가 가까이에 출몰하다니?'

백제국에서 트롤을 만나려면 산속 깊이 들어가야 했다. 트롤의 천적이 다름 아닌 빛의 법전 사제였기 때문이었다.

트롤은 상처를 몇 군데 입기는 했지만 특유의 치유력으로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불화살을 쏘라느니, 횃불로 지지라느니 하긴 했지만 싸우면서 그런 짓을 하기가 쉬울 리가 없다.

'화염 축복이나 열을 가할 사제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쉬운데, 그러질 못하는 걸 보니 사제는 없는 모양이군.'

척 봐도 성기사단은 아니다. 그렇다고 제국기사단은 아닌 것 같으니, 지방 영주의 기사들 같았다.

"도와줄까요?"

아이작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자 헤사벨이 물었다.

그녀가 나선다면 간단할 것이다. 붉은 성배의 기적을 쓸 수 있는 헤사벨이라면 트롤의 재생력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아이작은 상황 파악을 마친 다음, 결론을 내렸다.

"르하르트 백작의 기사들일 수도 있겠군. 내가 가지."

아이작은 말에 박차를 가해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달려온 말발굽 소리에 기사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아이작은 심판의 검을 꺼내 들며 트롤을 향해 쇄도했다.

"우오오오오!"

트롤은 괴성을 내지르며 아이작에게도 거대한 통나무를 던졌다. 정면으로 달려들던 아이작에게는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다. 그의 머리통이 단숨에 으스러질 것이 분명한 상황.

아이작은 고삐를 틀어쥐었다.

그 순간 말이 민첩하게 몸을 비틀면서 사선으로 지면을 튀어 올랐다. 트롤이 던진 통나무는 다른 나무에 부딪혀 바스러졌다. 신기라고 볼 수밖에 없는 승마술에 기사들이 경악했다.

'드리프트 비슷한 걸 생각하긴 했는데... 말이 생각보다 잘 따라주는군.'

그의 의지를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말을 쉽게 지면을 박차며 다시 트롤을 향해 달려들었다. 트롤은 예상치 못하게 아이작이 손쉽게 회피하자 당황한 듯 이번에는 통나무를 던지는 대신 들고 휘둘렀다.

부웅! 아이작이 아닌 말을 노린 공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말은 아이작이 착지하자마자 지시를 따라 급히 떨어진 장소로 이탈했다.

이번에는 아이작의 차례였다.

아이작은 막 공격을 마친 트롤의 품으로 파고들어 심판의 검으로 베어 올렸다.

치이이이이익! 부정한 것을 태우는 심판의 검이 트롤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내고 상처를 불태웠다. 목을 노리고 싶었지만 키가 너무 커서 닿지 않았다. 하지만 기사들의 공격에도 끊임없이 상처를 회복하던 트롤은 공포스런 직감에 비명을 질렀다.

"성, 성기사님을 도와라!"

그때 기사들도 상황을 파악한 듯 급히 소리쳤다. 트롤은 도망치려다가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도망칠 틈도 찾지 못했다. 놈은 통나무를 움켜쥐고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간격을 확보하려 애썼다.

아이작은 통나무를 회피하면서 접근하려다가 짜증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새로 입은 갑옷의 강도가 궁금해졌다. 때마침 주변에 부서진 통나무들도 보아하니 강도가 약한 소나무였다.

아이작은 통나무의 궤적을 예의 깊게 주시하다가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쾅! 발밑의 땅이 길게 패며 아이작이 밀려났다. 그러나 박살 난 것은 아이작이 아니라 통나무였다. 온 사방에 나뭇조각들이 비산했다.

'역시 좀 뻐근한 것 말고는 멀쩡하군.'

보호 기적으로 무장한 성기사 갑옷은 그 자체로 흉기로 취급될 만큼 단단했다.

'다만 위로 휘둘렀다면 무게가 부족해서 나가떨어져서 데굴데굴 굴러다녔을지도....'

위험하진 않지만 분명 꼴사나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트롤은 손에 들고 있는 부분만 남은 통나무를 보고 잠시 멍한 모습을 했다. 녀석은 곧바로 다른 통나무를 찾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 순간 뜨거운 것이 목을 파고들었다. 놈이 자세를 낮추기를 기다리던 아이작의 검이었다.

뜨거운 피만큼이나 뜨거운 열기가 놈의 목을 불태웠다.

"후...."

전투를 마치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아이작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초면이지만 감명 깊은, 아니, 사랑에 빠진 건가 싶을 정도로 흥분에 찬 얼굴의 기사였다.

"정말 굉장했습니다. 성기사님! 어느 성기사단 소속이십니까? 성함을 알고 싶습니다!"

"누구십니까?"

기사는 그제야 자신의 실례를 깨달은 듯 허둥지둥 가슴을 쿵쿵 치며 소리쳤다.

"헨드락 기사단의 부단장 오언 렌리입니다! 카일 헨드락 영주님이 내리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습니다!"

56화. 빚 받아드립니다 (4)

"헨드락 기사단?"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언은 쑥스러운 듯 망토를 묶은 곰 모양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예. 원래 검은 곰 기사단이라는 명칭인데 아무도 못 알아듣고, 심지어 영주님도 헨드락 기사단이라고 불러서 그냥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 하필이면 헨드락 기사단이 왜 여기 있어?'

헨드락 기사단이라면 이제 아이작이 르하르트와 함께 쳐들어갈 헨드락 영지의 기사단이다.

제법 높은 확률로 싸우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하필이면 아이작이 그 기사단을 구해 준 것이다.

'이제 와서 때려눕힐 수도 없고.'

오언 렌리라 이름을 밝힌 기사는 아이작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성배기사 아이작 님 아니십니까?"

아이작은 잠깐 정체를 숨기고 모르는 척 할까 했지만, 결국 들킬 거란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정체를 숨기기엔 성배기사가 너무 적고 눈에 띄는 행보를 해왔다.

"맞다."

아이작은 담담히 인정했다. 그러자 기사들에게 화색이 번졌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약자를 구하기 위해 거침없이 뛰어드는 용기, 적에게도 일격을 한번 허락해주는 명예로운 기품, 단숨에 숨통을 끊는 실력, 무엇보다...."

아이작은 감미롭게 자신을 칭송하는 칭찬을 듣다가 갑자기 오언이 말을 멈추자 그를 바라보았다. 오언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급히 멈춘 듯했다.

"무엇보다 뭐? 왜 말을 하다 말지?"

"아, 그게 음, 세속적인 표현인 듯하여...."

"세속적?"

"사람들 말로는 천사가 빚어낸 듯한 고결한 아름다움이라고...."

이놈의 외모란.

일부러 예쁜 캐릭터로 플레이하려고 네피림을 고른 거긴 했지만 역시 자주 듣던 칭찬이 아니다 보니 들을 때마다 낯설다. 그나마 여캐로 만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이작이 대답했다.

"상관없으니 마음껏 칭찬해도 좋다."

"예, 실례되는 표현을 하여 죄송... 예? 예?"

"그보다 검은 곰 기사단이 여긴 무슨 일이지?"

오언은 헨드락 기사단보다 검은 곰 기사단이라는 정식 명칭을 불러 주었다는 사실에 기분 좋은 듯했다.

그는 자신 있게 영주인 카일 헨드락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말했다.

"예. 성배기사 아이작님을 영지로 모셔 오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아마 성배기사님의 숭고한 여정을 칭송하고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제공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카일이 받은 명령은 '아이작을 데려와라'라는 단순한 것이었지만 그 내막은 제법 복잡했다.

헨드락 영지는 르하르트가 말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당장 가신인 기사들 봉급부터 밀리고 있었다.

기사들은 넓은 영토를 가진 영주가 설마 봉급을 떼먹기야 하겠느냐며, 봉급이 밀리면 따로 작은 봉토를 하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보기에는 달랐다.

'파산 직전이군.'

보아하니 르하르트가 서둘러 봤자 카일의 구제는 글러 보였다.

르하르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곤 헨드락 영지를 그나마 나쁘지 않은 값에 팔아먹는 것이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헨드락 영지 내부에서 먼저 가신들이 들고 일어나 자산을 털어먹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쨌든 카일은 이 상황에서 아이작을 찾았다.

아이작은 아마도 그 이유가 자신이 예상했던 바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망하더라도 명분을 가지고 망하기 위해.

최소한의 기반이라도 남겨서 재기할 발판을 만들기 위해.

'그런데 먼저 도착한 건 르하르트였군.'

조금만 헨드락 기사단이 빨랐다면 아이작은 그들과 함께 헨드락 영지로 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미 르하르트에게 선불금─말 한 필이지만, 어쨌든 그걸 받은 상태였다.

사실, 아이작은 누굴 따라가도 나쁘지 않았다.

누굴 돕든 아이작은 그들에게서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카일 헨드락이 더 많은 것을 줄 수도 있었다.

그는 어차피 몰락할 것이니, 그때 아이작이 곁에 있다면 헨드락 영지의 살점을 가장 많이 뜯어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카일 헨드락이 원하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아이작은 이 새로운 유혹에 끌렸지만, 이내 접었다.

르하르트와 먼저 한 약속을 저버리고 파산한 귀족 편을 드는 것은 별로 명예롭지 못하다.

그리고 명예는 둘째치더라도, 아이작이야말로 헨드락 영지를 이번 기회에 한 뙈기라도 떼먹으려는 하이에나 중 한 명이었다.

"좋다. 가지."

하지만 아이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선택지를 버릴 필요는 없다. 앞으로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 일찌감치 헨드락 기사단을 적대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르하르트 영지에 도착하게 되면 결판이 날 테니까.

오언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며, 명예로운 성배기사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아이작보다 나이가 몇 살은 더 많을 게 분명한데도 오언은 정중함을 넘어 존경을 보이는 태도로 인사했다.

아이작이 이룬 업적보다는 성배기사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이 그의 존경에 한몫했을 것이다.

이 시대 아이들은 히어로 영화를 보는 대신 성기사들의 영웅담을 들으면서 자랐을 테니까.

***

트롤에게 낭패를 당하는 졸전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사단은 기사단이었다.

아이작이 움직이자마자 그들은 호위 대형을 형성하면서 제식 행군을 시작했다. 능숙하게 말을 모는 것을 보아하니 실력은 고만고만해도 높은 분을 잘 모시는 것 하나는 잘하는 것 같았다.

"저들과 함께 움직이시려구요?"

헤사벨은 불만족, 아니,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조잡한 실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저 실력으로 기사를 자처하다니 놀랍기만 하군요."

그녀의 시선은 가끔 기사들과 마주쳤는데, 기사들이 아이작 곁에 있는 놀라운 외모의 헤사벨을 힐끔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사벨은 아름다움을 따지는 붉은 성배 클럽의 신도답게 후드를 눌러써도 가려지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작도 눈길이 가는 외모지만, 아무래도 같은 남자보다는 여자한테 관심이 갈 테니까. 대놓고 누구냐고 묻지는 못해도 호기심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일행이 많으면 유리하지. 먹을 것도 구하기 쉽고, 안전하고, 불침번 같은 것도 설 필요 없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낮에는 어렵겠지만, 밤이 된다면 저 기사들이 불침번을 몇 명 세워둬도 저한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겁니다."

아이작도 내심 동의했다.

사실 먹을 것은 촉수로 짐승을 포식하면 되고, 안전은 말할 것도 없다. 불침번조차도 밤에는 아예 잠들 필요가 없는 헤사벨이 있다. 그녀가 아니어도 산속 어디선가 따라오고 있는 지힐렛에게 경계를 세워도 되고.

하지만 굳이 떼어 놓을 필요도 없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의 이런 예민한 반응이 더 의아했다.

"뭐 때문에 그래?"

"그저 격이 맞지 않는 자들이 고까워서...."

"정 불만이면 휴대용 도시락이라고 생각해."

"...예."

아이작은 헤사벨이 뭐가 불만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실력이야 형편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함께 다닐 때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제법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길을 가다가 웬 통나무들로 길이 꽉 막혀 있는 상황이라던가 말이다.

한나절쯤 길을 걸었을 무렵, 아이작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멈춰서 눈앞을 응시했다. 옆을 돌아보자 오언도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웬 통나무들이 한가득 쌓여 길을 막고 있었다.

"오전에 올 때에는 이런 게 없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길은 좁은 계곡 사이로 나 있었는데 통나무는 꼼꼼하게 쌓여 있어서 말 탄 사람들이 우회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토사의 흔적은 보이지 않으니 산사태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범인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 발로 나타났으니까.

"오오오오오!"

웬 트롤들이 네 마리가 나무 사이사이에 서서 아이작 일행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저마다 굵직한 나무토막을 대고 으르렁대고 있는 걸 보아하니 아마 길을 막은 후 함정으로 써먹으려고 한 것 같았다.

'그러면 소리만 칠 게 아니라 공격을 해야지... 무슨?'

"저 새끼들이...."

아이작이 트롤의 지능을 의심할 때 기사 하나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칼을 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작은 이번에는 기사의 지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뭘 어쩌려고? 아까 평지의 트롤 하나도 못 잡아서 비실거렸는데 비탈 위까지 뛰어 올라가서 잡으려고?

다행히 기사가 뛰어 올라가기 전에 오언이 제지했다.

"트롤들이 해코지를 한 것 같군. 원래 이 길목에 트롤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오언이 민망한 듯 변명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여기는 깊은 산도 아닌 사람 다니는 길목이다. 트롤의 피나 가죽이 제법 고가로 거래되는 데다, 사제 한 명만 있으면 잡기 쉽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모습이었다.

아이작은 산속에 숨어서 이동하고 있는 지힐렛에게 의지를 투사했다. 이미 위협이 등장한 순간부터 은밀하게 이동했던 지힐렛은 트롤을 즉시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끄어어어어!"

곧 트롤 한 마리가 쑥 숲속의 어둠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트롤이 어떤 꼴을 당한 건지 비탈 아래서는 볼 수 없었다.

지힐렛은 성역이 아닌 곳에서도 왈라이카 인간 사냥꾼 한두 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

먼저 기습한다면 트롤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트롤의 비명에 기사들이 당황하는 사이, 다른 트롤들 역시 뒤늦게 이변을 알아차렸다. 약간 어리둥절해하던 그들은 이내 숲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우, 우오오오!"

이내 놈들은 굴러떨어지다시피 하며 비탈길로 뛰어내렸다.

"고, 공격이다!"

기사들은 그것을 뒤늦게 기습을 개시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서둘러 칼을 뽑았다.

아이작은 굴러떨어진 트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일어나기 전에 재빨리 목을 칼로 찔렀다. 심판의 검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트롤의 목을 태워 버렸다.

나머지도 금방 처리할 수 있었지만, 아이작은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검은 곰 기사단의 실력을 좀 봐도 될까, 오언?"

"아, 예! 무, 물론입니다!"

뒤치다꺼리는 사양이다. 그보다 아이작은 왜 트롤 무리가 난리인지가 더 궁금했다.

오언을 위시한 기사들은 지휘를 따라 용감하게 칼을 들고 트롤 두 마리와 싸웠다.

아까 한 마리한테 일방적으로 당하던 꼴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헨드락 기사단은 의외로 잘 싸웠다. 이곳은 비탈진 곳도 아니고 트롤들이 무기로 쓸 통나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트롤들은 겁에 질려서 싸우기보다 도망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상처를 태우지는 못 해도 기사들은 착실하게 트롤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역시 수준이 너무 떨어지는데....'

물론 일반 용병이나 경비병에 비하면 우수한 수준이다. 하지만 성기사단과 비교하면 처참하다. 헨드락 기사단이 서너 개 있어도 로튼해머의 성기사단에 맞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당연하지만 검술은 성기사단뿐만 아니라 일반 기사들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헨드락 기사단 중 누구도 상급 검술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부러 형편없는 사람들만 뽑아서 온 건지, 아니면 이게 원래 지방 기사단의 실정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오언이 좀 낫군. 좀 몸을 사리는 느낌이 강하지만....'

오언은 다소 소극적이기는 해도 한번 칼을 휘두르면 확실하게 상처를 입혔다. 제법 매서움도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그나마 상급검술에 발을 들이밀 만한 사람이 있다면 오언뿐이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에게 보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봐라. 쟤네가 없었으면 네가 저 트롤들을 치우고 있었을걸?"

물론 헤사벨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붉은 성배 클럽에서는 굳이 트롤을 해치지 않습니다. 충분히 길들일 수 있으니까요."

"길들여?"

"예. 붉은 성배 클럽은 트롤을 귀한 영물로 여기니까요."

"영물? 아아, 피 때문에."

아이작은 헤사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아이작은 플레이할 때 거의 신경 쓰지 않았지만, 붉은 성배 클럽은 트롤을 유용한 가축이자 경비견 정도로 여겼다.

말은 안 통하지만 말귀를 못 알아들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고, 피도 굉장히 유용하다. 그 재생력 또한 경이로운 수준이다. 생명력과 피를 숭배하다시피 하는 붉은 성배 클럽이 아끼는 것도 당연했다.

'잠깐... 붉은 성배 클럽이라.'

아이작은 뭔가 미묘한 지점이 마음에 걸렸다.

붉은 성배 클럽은 트롤을 길들이고 아낀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많은 트롤들이 출몰하고 있다.

배후가 있는 게 분명했다.

'헤사벨... 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헤사벨 때문에 날파리가 꼬인 모양이군.'

성기사나 사제가 배교해도 온갖 저주와 추적자들이 따라붙는데, 공작가 후계자를 그냥 배교하게 둘 리가 없다.

아이작은 배후가 누구일지 가늠해 보기 시작했다.

57화. 피비린내 (1)

'굴마르 공작가의 사람이거나 계시를 받은 고위 사제 누군가겠지.'

헤사벨 때문에 귀찮은 말썽의 단서가 생겼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여긴 게르토니아 제국령이다. 변방이라고는 해도 온 사방에 빛의 제국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 스스로 태양 아래 몸을 던지는 꼴이다.

'기습이라도 한다면 나야 감사하지.'

헤사벨이야 자기 목숨 알아서 건사할 깜냥은 될 테니 걱정은 없다. 방해한다 해도 고작 트롤이나 길 막기 수준의 방해라면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아이작은 오히려 상대방이 어서 빨리 정체를 드러내어 제 무덤 파기를 기대했다.

자신의 경력 아래 또 누구의 이름이 올라갈지 생각하면서.

***

그러나 아이작의 기대와 달리 또 다른 견제는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아이작은 수월하게 헨드락 영지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다리만 건너면 헨드락 영지였다.

아이작은 별일 없이 도착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멍청한 놈은 아닌 모양이군. 그냥 내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뿐인가?'

우연히 트롤이 공격해 왔을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만, 의심스러운 정황을 의심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확실한 것은 상대방이 당장 헤사벨을 해칠 의도는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트롤 정도라면 헤사벨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을 테니까.

'더 간편한 방법은....'

아예 헤사벨을 미끼로 내던져 주는 것이다. 어디 외딴곳으로 보내 버리면 알아서 상대가 낚이지 않을까. 아이작은 그런 생각까지 해 봤지만, 그러면 결국 아이작 혼자서 추적자를 상대해야 한다.

아이작은 빛의 법전의 힘을 빌어 집단구타를 할 마음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혼자서 정체불명의 적과 싸우고 싶진 않았다.

아이작이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고 있을 때, 다리 앞에 서 있는 일군의 무리가 보였다.

그리고 무리 맨 앞에 있는 한 중년 남자가 다리를 지키는 병사에게 뭐라 큰소리를 쳐대고 있었다.

"당장 카일에게 손님맞이를 준비하라 이르게!"

"그, 그렇게 말씀하신다 하셔도 이미 명령이...."

헨드락 기사단도 그 모습을 발견한 듯 발걸음 속도를 늦췄다.

"저건... 르하르트 백작?"

헨드락 기사단원들 사이에서 당혹감과 함께 긴장이 확 번졌다. 먼저 도착한 르하르트와 그의 사병들이었다. 기사들도 몇 명 보였다.

르하르트는 뒤늦게 아이작 일행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오언과 함께 가장 앞에 있던 아이작이었다. 높은 매력 수치는 어디서든 쉽게 눈길을 잡아끄는 효과가 있었다.

"아이작 님! 오셨군요. 그런데 그쪽은?"

르하르트는 아이작과 함께 온 기사들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에게 함께 다니는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가 없었다.

오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검은 곰 기사단입니다. 헨드락 기사단이라고도 하더군요."

"헨드락 기사단?"

순식간에 술렁임이 번졌다. 헨드락 기사단은 헨드락 기사단 나름대로, 르하르트의 사병들과 기사들 역시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으로 움찔했다.

헨드락 기사단은 이미 영지의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외부의 침입, 구체적으로는 르하르트의 침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르하르트가 데리고 온 병사들 역시 전투를 걱정하고 있었다. 르하르트는 친구의 아들을 꾸짖기 위해 찾아가는 것뿐이라고 했지만 누가 이 많은 병사와 기사들을 데리고 와서 꾸중이나 한단 말인가.

물론 본격적으로 침공을 시도하기엔 한참 부족하기는 했지만, 단순 방문이라기에는 너무 많은 인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길 한복판에서 이렇게 만나니, 먼저 공격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누가 먼저 칼을 빼 들까 걱정하는 기색이 번졌다.

귀족들 돈놀음에 휘말려 피를 보는 것은 그들 중 아무도 원치 않았으니까.

다들 아이작과 르하르트의 눈치를 볼 때, 르하르트와 오언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이작 님은 왜 거기... 같이 계십니까?"

"아이작 님, 르하르트 백작과... 이미 만나셨습니까?"

질문은 동시에 던져졌지만 아이작은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이 친구들이 곤경에 빠져 있길래 도와줬습니다."

아이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몰고 앞으로 나섰다. 르하르트와 오언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그 뒤를 따랐다.

아이작은 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신은 꽃놀이패였다.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어느 쪽에 정의가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는 위치였다.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양쪽 누구도 먼저 싸움을 걸 수는 없었다.

"우선 들어갑시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대화로 해결하는 게 좋겠지요?"

***

르하르트와 헨드락 기사단은 어정쩡한 간격을 두고 영지 중심부로 들어갔다. 헨드락 영지는 커다란 계곡 사이에 세워진, 꽤 좋은 풍경을 가진 마을이었다. 다만 농사를 짓기에는 영토가 부족해 보여서 목축을 주로하고 있는 듯했다.

'이런 빈곤해 보이는 마을에서 그 사건이 터진단 말이지....'

2년 뒤, 이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13차 여명군이 시작된다.

바로 새로운 신의 탄생 미수 사건이다.

새로운 신앙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칼센 밀터였다.

칼센 밀터는 아홉 번째 신앙의 신이 되기 위해 빛의 법전을 배교했다. 그리곤 붉은 성배와 불사 교단의 도움을 받아 신이 되려고 했다. 이미 인간의 몸으로 신의 반열에 올라선 엘릴과 불사 황제라는 선배가 있으니,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칼센은 실패했지.'

이때, 칼센 밀터는 신이 되는 데 결국 실패했다.

헨드락 영지에 숨겨진 무수한 힘과 자원을 끌어다 쓰며 농성하던 칼센 밀터는 결국 흑제국으로 탈출했다. 백제국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새로운 신앙을 만들어 내려 한 시도에 대해 분노했다.

백제국은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제대로 된 준비조차 없이 13차 여명군을 선포한 것이다.

'그런데 칼센 밀터가 죽어 버렸으니....'

이제 새로운 신이 탄생하려는 사건 자체가 터질 리가 없다.

아이작은 이 때문에 여명군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가능성은 낮게 보았다.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성지 수복은 백제국 교인들의 역사적 사명이고, 사회에 분노와 부조리가 누적될수록 여명군을 갈망하는 목소리도 높아질 것이다.

신 탄생 미수 사건은 트리거에 불과했다.

그러니 아이작은 바로 그 트리거를 일단 가지고 있을 생각이었다.

비탈진 계곡 위쪽에 그럴듯한 고성이 눈에 들어왔다. 올라가는 길목 아래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때 오언이 말을 서둘러 앞으로 보내더니 말했다.

"실례지만 영주님께서 손님맞이를 하실 수 있도록 먼저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기사들과 함께 바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오언은 아이작에게 아직 미련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영지 중심까지 들어온 르하르트가 더 큰 문제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르하르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달려가는 헨드락 기사단의 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결국 뭔가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아이작이 남았다는 사실에 더 안도하는 듯했다.

"아이작 님.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군요."

"평화롭게 해결하실 생각으로 오신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기야 합니다만...."

르하르트도 본인 입으로 한 이야기지만 신빙성이 없는 말임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많은 병사를 끌고 오진 않았을 테니까.

가문이 몰락하느냐 마느냐 하는 판돈이 걸린 상황이니 대화로 안 통하면 칼부림이 나는 상황도 예상했을 것이다.

아마도 르하르트는 몇 명 죽을 수도 있겠지만 혼쭐을 내준 다음 적당한 보상을 받아 가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카일은 한 푼도 내놓지 않으려고 벼르고 있을 테고.

"그러면 그냥 제 방식대로 하지요. 어차피 더 초조한 건 헨드락입니다. 덕분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코앞까지 왔잖습니까?"

만약 르하르트가 누구라도 해쳤다면 헨드락은 자위를 위해서라도 반격에 나설 명분이 생긴다.

그걸 핑계로 돈을 안 갚으려고 들지도 모르고.

결국 이 문제는 누가 칼을 먼저 뽑느냐에 따라 어떻게 해결될지 달려 있었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아이작은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헨드락 영지는 이미 가신들에게 줄 돈도 부족한 상태고, 르하르트는 영지라도 압류하지 않으면 본인이 파산할 지경이니까... 살인 사건의 원인 대부분은 돈과 치정문제라지?'

누가 되든 피를 보기는 볼 것이다.

아이작은 그때 누구 손을 들어줄지 고르기만 하면 충분했다.

아이작과 르하르트가 성문 앞에 도달했을 때, 역시나 손님맞이는커녕 성문까지 굳게 잠겨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르하르트의 병사 중 한 명이 나서서 소리치려 하자 그를 제지하고 르하르트가 직접 나섰다.

"나는 르하르트 영주, 코벤 르하르트 백작이다! 문을 열어라!"

그러나 성벽은 묵묵부답이었다.

농성체제로 들어갔다기에는 성벽 위에도 병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르하르트는 몇 번 더 소리치고 카일을 향해 을러 보려는 듯하다가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문 열어, 이 오줌싸개 애새끼야! 침대에 지리고 베개 밑에 대가리 처박고 있을 때처럼 숨어 있으면 이번에도 아무도 모르는 척해줄 것 같냐! 열어!"

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르하르트는 이웃 영주답게 내밀한 사정을 꽤 자세히 아는 것 같았다. 르하르트는 몇 번 더 카일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언급하며 문을 쾅쾅 두드리고 발로 걷어찼다.

결국 영주의 위엄을 걱정한 건지, 아니면 르하르트의 성대를 걱정한 건지 누군가 성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르하르트 백작님."

"벡스터!"

꽤 나이 지긋한 모습의 기사였다.

르하르트도 그를 한눈에 알아본 듯 뒤로 물러났다.

"드디어 말이 통할 만한 사람이 나왔군. 그 애송이보다 차라리 자네와 대화하는 게 낫지. 카일은 지금 어디 있나?"

"헨드락 영주님은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휴식 중입니다. 내일 다시 오시겠습니까?"

"내일?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하늘에서 금무더기가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그 비루한 몸뚱이가 낫겠느냐?"

"손님으로 찾아오셨다면 손님답게 예의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르하르트 백작님."

벡스터라 불린 기사는 힐긋 시선을 올려 아이작에게로 향했다.

"존경받는 성배기사님 앞 아닙니까. 공명정대하신 빛의 법전 아래 명암이 선명하게 갈릴 것입니다."

아이작을 언급하자 르하르트도 씨근거리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을 싸움에 끌어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선 대놓고 들이받으면 르하르트의 처지도 곤란해진다.

르하르트는 다시 말에 올라 성벽 위를 향해 소리쳤다.

"내일이다. 벡스터! 자네를 믿고 오늘은 물러가네만 내일은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저라도 나서겠습니다."

르하르트는 그 말에 군말 없이 병사를 물렸다. 아이작은 기사 한 명의 말에 르하르트가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 그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벡스터라는 기사가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이군요?"

"으음, 제국 기사단 출신인데 존경받을 만한 품위와 실력을 가졌지요. 제국 기사단에서 은퇴했을 때 헨드락의 선대 영주가 데리고 온 기사입니다. 늙었지만 제국 기사단 경력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르하르트의 말투에는 존경과 신뢰감이 담겨 있었다. 그를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듯했다.

제국 기사단이라면 제국군 직속의 기사단이다.

황실 수호를 최고 우선순위로 잡는 황실 기사단과 달리 제국 기사단은 제국의 존속 그 자체를 위해 게르토니아 곳곳으로 파견되는 정예 요원들이라 할 수 있다.

'오언이 헨드락 기사단의 부단장이라고 했으니... 벡스터가 단장이겠군?'

아마 그 젊은 기사들은 벡스터가 가르치기 시작한 기사들인 모양이다.

'드디어 제대로 된 기사를 만난 건가?'

아이작은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벡스터는 여전히 서서 떠나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먼 거리였지만, 아이작은 어째선지 벡스터와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성배기사가 정말 르하르트 그 늑대 같은 놈이랑 같이 왔다고!!"

헨드락의 영주, 카일은 책상을 내려치며 일갈했다. 벡스터가 아이작과 르하르트 일행을 돌려보낸 직후였다.

다른 기사들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 채 수근거렸지만, 벡스터만은 조용히 카일을 응시했다.

"대체 왜?! 오언, 자네가 성배기사와 함께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끝까지 같이 왔어야지!"

"예, 예. 하지만 이미 르하르트 백작과 뭔가 이야기가 된 듯한 상태인 데다, 이대로 가다가는 백작의 기사와 병사들을 그대로 성안으로 들여보낼 상태였던지라...."

"아니, 잠깐... 그런데 성배기사가 애당초 왜 우리 영지로 온 거지? 오언, 내가 그를 초청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야기했나? 내가 그의 공을 치하하고 여정을 돕고 싶다고?"

"예. 했습니다. 영주님께서 존경한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아이작의 출현은 카일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대체 왜? 자신은 존경받는 성배기사를 불러 이야기를 들어 보고, 자신의 곤궁한 처지에 관해 털어놓으면서 조언을 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현명하고 선한 성배기사라면 이야기 속의 성자처럼 분명 바른 방향을 알려 줄 테니까.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를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그 성배기사에 관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십니까, 영주님?"

"라엘라."

라엘라는 조용히 카일의 어깨를 감싸며 속삭였다.

"아직도 그 성배기사의 목적이 뭔지 모르시겠습니까? 이렇게나 분명한데도요?"

"...공연한 욕심을 부리고 책임을 회피하려던 나를 꾸짖으려는 건가?"

"그게 아니라."

라엘라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말을 이었다.

"영주님께서는 사악한 책략에 휘말리신 겁니다. 그 작자가 이 아름다운 영지를 탐내는 것이 분명하군요. 그래서 르하르트와 손을 잡고 이렇게 곧장 달려온 겁니다. 로어커스 폭락사태조차도 영주님을 몰락시키기 위한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카일은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 사악한 음모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자신의 책임은 없다는 이야기에 혹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자신이 이렇게나 몰락한 것은 음모 때문이지 결코 자신이 멍청한 판단을 하거나 눈치 없어서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아있는 일말의 지성이 속삭였다.

"그런... 설마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그만큼 영주님과 이 영지가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그런가?"

"그렇습니다."

58화. 피비린내 (2)

라엘라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영주님은 너무나도 고귀하고 중요하신 분입니다. 이 아름다운 영지를 사악한 무리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분은 영주님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카일은 라엘라의 말이 점점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몰락은 사악한 무리들의 음모 때문이다. 음모에 휘말린 자신이 영지를 빼앗기는 것은 사악한 자들의 계략이 성공하는 셈이다.

즉, 영지를 지키는 것은 곧 악에 맞서는 것이다.

결코 돈을 떼먹는 것이 아니다!

"이 음모에 맞서셔야 합니다. 영주님. 게르토니아 제국의 최선봉에 계신 영주님께서 이 음모에 굴복하면 빛의 법전은 빛을 잃고, 규율 또한 지워질 것입니다."

"내가... 내가 나서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 어두운 시기에 사악한 음모와 맞서게 된 영주님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자이실지도 모릅니다! 이 악의 무리에 정면으로 맞서 최선봉에 서서 적을 분쇄하십시오!"

"아니,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조금... 무섭군."

카일은 좋게 말해 기사 타입은 아니다. 나쁘게 말하면 겁쟁이다.

결정적인 판단을 미적미적 미루다가 타이밍을 놓치는 것은 그가 제일 잘하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그가 의욕적으로 진행했던 로어커스 투자는 파멸적인 결과로 끝났다.

그리고 그런 카일답게, 라엘라의 유혹에도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르하르트 아저씨, 아니, 백작이 쳐들어왔다는 것도 불확실하지 않나? 작정하고 온 거라면 병사도 더 많이 데려왔을 테고, 공성 장비도 챙겨 왔겠지. 게다가 이제 파종기야. 농업이 주류인 르하르트 영지는 지금이 중요할 때지. 전쟁을 한다면 서둘러 끝내야 할 텐데 그럴 준비를 해온 것 같지는 않군. 내일까지 협상을 하기로 했으니 내일까지 지켜보도록 하지."

라엘라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뭔가를 한참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뜻대로 하십시오. 영주님."

***

"이 쓰레기 같은 자식은 뭘 결정하고 싶지 않을 때만 대가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는군. 세상에, 이 우유부단한 멍청이가 여기서 이렇게나 시간을 잡아먹을 줄 몰랐어. 돌아버릴 지경이군."

라엘라는 자신의 방에서 쉴 새 없이 걸어 다니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호출을 받고 온 흑기사는 조용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선대 영주는 너무 똑똑해서 죽여 버렸는데 후대 영주는 너무 멍청해서 말을 안 들을 줄이야. 이제 어떻게 꼬드기는지 알아냈는데, 결국 뭘 결정하려면 한참 걸리니, 빌어먹을."

"약을 써서 중독시키거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흑기사가 보다 못한 듯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라엘라가 고개를 훽 돌렸다.

"지금 내 앞에서 기만과 음모를 조언하는 거냐? 붉은 성배의 천사, 칼라일 수도원을 통째로 만찬장으로 만든 나, 붉은 살점의 선지자 앞에서?"

흑기사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리석은 조언이었다. 기만과 음모는 붉은 성배가 가장 먼저 선택하는 수단이다. 그중에서도 붉은 살점의 선지자처럼 명천사에 이른 자는 일개 인간에 비하자면 전지전능한 능력과 계락을 가지고 있으리라.

하지만 진짜 눈앞의 여자가 진짜 붉은 살점의 선지자일까? 흑기사에게는 일말의 의심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런 의심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라엘라가 덥썩 흑기사의 투구 눈가리개 부분을 짚었다.

그 순간 흑기사의 머릿속에 지옥도가 펼쳐졌다.

아니, 실시간으로 붉은 성배의 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붉은 성배의 사후세계는 천국과 지옥의 구분이 없다. 다만 누가 식객이고 누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느냐가 다를 뿐이다. 흑기사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잠시 뒤, 흑기사의 머릿속에 공포와 죄악감이 가득한 것을 들여다본 라엘라는 손을 거둬들였다.

흑기사는 바닥에 쓰러져 거칠게 심호흡했다.

라엘라는 그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고 중얼거렸다.

"나는 이곳 외에도 수많은 곳에서 동시에 일을 진행하고 있다. 빛의 법전만큼이나 세상의 화로도, 엘릴도, 불사 교단도, 황금 우상도, 소금 의회도, 올칸 규율도 모두 중요해. 붉은 성배께서 현세의 일을 내게 맡기신 만큼 어느 곳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지."

"죄, 죄송합니다...."

"전 영주놈이 숨겨놓은 비밀을 찾으려면 카일의 정신을 멀쩡하게 남겨놔야 한다. 정신을 망가뜨리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게 돼. 다만 저 지능 수준이 과연 멀쩡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라엘라는 비아냥거리다가 혀를 찼다.

"다만 그때까지 이 영지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군. 이 멍청한 놈은 됐어. 그보다 성배 기사를 만났지? 헤사벨을 찾았나?"

"예. 발견했습니다."

흑기사는 아이작을 찾아 파견되었던 기사들 중 한 명으로 섞여 있었다. 헤사벨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낮에도 전신을 가리는 복장과 후드를 깊게 눌러쓴 미녀가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살아있는 걸 보니 배교한 게 맞는 모양이군."

"예. 트롤을 이용해 교란을 일으켜 보았는데,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니 성배기사에게 충성하는 것 같았습니다. 성배 기사가 묘하게 경계하는 듯하여 직접 심문하지는 못했습니다."

"하, 충성이라."

라엘라는 웃기다는 듯 중얼거렸다.

"태양 속에서 살 수 없는 흡혈귀가 빛의 법전 성기사에게 충성해? 충성이 아니라 진지한 기만책이라면 차라리 믿겠어. 성기사를 속일 정도의 연기라면 오히려 인정해 줘야지."

라엘라는 정말 그럴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다. 헤사벨이 아이작의 신뢰를 사서 속이기 위해 거짓 충성을 바치는 게 아닐까 하는.

하지만 그녀는 신앙심을 느낄 수 있었다. 헤사벨의 신앙심은 붉은 성배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성배기사도 넋이 나간 모양이군. 어쩌자고 굴마르 가의 후계자를 곁에 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큰 그림에는 중요하지 않은 놈이야."

라엘라는 계곡 아래 있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길 잃은 아기 고양이의 목을 가져와라. 직접 그 입으로 뭐라고 야옹야옹 핑계 댈지 들어봐야겠다."

***

"이 빌어먹을 자식."

다음 날 점심, 르하르트는 여관 1층의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온 벡스터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욕설을 들었지만, 욕설의 방향이 벡스터가 아닌 카일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벡스터는 묵묵히 걸어 들어와 르하르트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르하르트는 검집이 든 검을 바닥에 쿵 내려치며 쏘아붙였다.

"그래, 카일 헨드락 영주님은 여전히 몸이 안 좋으신가?"

"원체 몸이 약하셔서...."

"그 꼬장꼬장한 얼굴로 용케 거짓말을 달고 사는군. 벡스터 경. 어린애 뒷바라지나 하는 게 피곤하진 않나?"

"다만 영주님을 받들 뿐입니다."

담담한 대답에 르하르트는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제국 기사단의 단단한 충성심은 은퇴 후 다른 상관을 섬기면서도 유지되는 것 같았다. 르하르트가 벡스터에게 보이는 존중 역시도 저 꼬장꼬장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자네가 대신해서 대화하러 온 건가?"

"예."

"상황이 안 좋네. 벡스터 경."

르하르트는 수도의 귀족들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심지어 빛의 법전 주교급 인물까지 엮여 있다는 사실과 브란트 공작가마저도 자기 이름을 팔았다는 사실에 언짢아한다... 그런 이야기까지 곁들여 겁을 주었다.

길고 장황한 협박이었지만 단순한 협박으로 끝날 문제도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찾아온 건 이번이 온건하게 해결할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서 그렇네. 벡스터 경."

르하르트는 한층 더 늙어 보이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지 아나? 나도 헨드락 영주의 피해자니 내 손으로 해결하면 큰 몫을 떼주겠다더군. 그쪽이 차라리 더 온건하게 해결될 거라고. 무슨 뜻이겠나?"

"해결 안 된다면 용병들을 고용할 생각인가 보군요."

"그래. 전쟁 전문가들이 나서겠지. 놈들이 이 영지를 유린하고 나면 어떤 꼴이 되겠나? 혹시 주교가 여기에 이단심판이라도 벌이겠다고 하면? 그 꼴을 보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선 거야."

결국 르하르트도 빚 받으러 온 사람이긴 하다. 하지만 일을 가장 온건하게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카일이 성에 틀어박혀 버틸수록 최악으로 치달을 뿐이었다.

"영지를 잃을 수도 있겠지. 성이나 다른 재산을 정리해야 할 수도 있고. 헨드락 영지라는 이름만 남을 수도 있겠네. 하지만 내가 재기할 발판 하나 못 만들어 주겠나? 내가 선대 영주와 쌓아온 인연이 얼마인데?"

"사려 깊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벡스터는 묵묵히 대답할 뿐이었다.

르하르트가 그의 담담한 태도에 화를 내려던 무렵, 벡스터가 입을 열었다.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르하르트는 멈칫했다.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고?"

"예. 그러니 당분간만이라도 싸움이 날 수도 있는 일은 피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니, 사소한 싸움도 큰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부디 영지 일은 영지 안에서 해결할 기회를 주십시오."

벡스터를 알고 지낸 이래 그가 이렇게 길게 말한 것을 처음 보는 르하르트는 입술을 꿈틀거렸다. 그는 이 사태를 '영지 일'이라고 말했다.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영지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르하르트는 허리에 손을 짚은 채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틀... 이틀 주겠네. 이틀 뒤에는 조사단이 올 거야. 핀체트 주교가 파견한 이단심문관이 섞여 있다는 소문이 있네. 그 전에 해결할 방법을 찾게."

"감사합니다."

벡스터는 허리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르하르트는 한층 더 피곤해진 표정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회의를 가만히 지켜보던 아이작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때 벡스터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아이작을 향해 성큼 다가왔다.

"성배기사 아이작 님 되십니까?"

"음? 예. 맞습니다만."

벡스터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 속삭였다.

"괜찮다면 조용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아이작과 벡스터는 여관의 뒷마당으로 향했다.

아이작은 벡스터가 왜 대화를 청했는진 몰라도 그가 갑자기 싸움을 거는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싹수가 있어 보인다면서 실력을 보자고 한다거나, 아니면 적이 될지도 모르니 미리 죽어라! 라고 한다거나.

같잖은 생각이었다.

단지 호기심 때문에 해 본 생각일 뿐이었다.

'제법 강해 보이는데.'

기세만 놓고 보자면 게벨과 비슷하거나 약간 못해 보였다. 성기사가 아닌 기사 중에서 이렇게 강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제국 기사단 요원이라는 말이 허명은 아닌 듯했다.

나이 때문에 은퇴했으니 한계가 있겠지만, 헨드락 기사단 일곱 명을 합친 것보다는 강할 것 같았다.

"여기가 좋겠군요."

벡스터는 나무 아래 멈춰 섰다. 주변에 들을 만한 사람도, 숨을 만한 장소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벡스터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헤사벨 굴마르는 성배기사님께 귀화한 것입니까?"

뜬금없는 이름에 아이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헤사벨 굴마르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굴마르 가의 후계자가 쇠르에서 유크하르의 개가 되었다는 소문은 이미 제법 퍼졌습니다. 당연히 헛소문으로 여겼지만, 정황상 의심할 여지는 있어 보였지요. 그런데 수배서와 같은 얼굴이 성배기사님 곁에서 보이더군요. 상황을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아니, 동료로 받아들이자마자 바로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다니. 아이작은 헤사벨을 이대로 받아들여도 되는가에 심각한 고민을 느꼈다.

자신을 헤사벨을 받아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들키지 않으리라는 자신감과 더불어 헤사벨 그녀가 버리기 아까운 인재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들킨다면 차라리 떼어 놓고 활동하는 게 나았다.

아이작이 아니라고 잡아뗄지, 아니면 몰랐다고 둘러댈지 고민하다가 벡스터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제야 아이작은 자신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예."

아이작은 당당하게 말했다.

"붉은 성배 클럽의 추종자,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 헤사벨 굴마르는 쇠르에서 빛의 법전의 영광을 목도하고 교화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제 종복입니다."

본래 사악한 이교도였으나 신성한 성기사를 만나면서 교화되는 이야기.

얼마나 흔하고 멋지면서 아름다운가?

59화. 피비린내 (3)

"교화되었다... 라."

벡스터는 그 말을 중얼거리며 되새겼다.

"솔직히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긴 하군요."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들릴 거라는 건 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헤사벨이 그의 종복이 된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녀가 뱀파이어가 아니게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말 잘 듣는 개가 되긴 했으니까.

"그걸 따져 물으려고 절 찾은 겁니까?"

"예. 지금 상황에서는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벡스터는 음울한 눈동자로 아이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배 기사님의 훌륭한 인품을 믿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성의 내부 사정이...."

벡스터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제국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던 기사답게 무언가를 쉽게 떠드는 성격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드물게도 초조함이 엿보이는 표정을 드러내며 아이작에게 속삭였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당장 확인할 도리가 없군요. 그렇다면 아이작 님을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한 가지만 알아주십시오. 저희도 싸움을 피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르하르트에게도 했던 이야기였다.

'싸움을 피할 방법에 헤사벨이 관련되어 있다는 건가?'

아이작은 의아한 듯 벡스터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뭔가 더 설명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아이작은 은근슬쩍 혼돈의 눈을 사용해 보았다.

'역시 제국 기사단이라 그런가... 내면을 숨기는 게 익숙하군.'

아쉽게도 벡스터의 내면은 거의 비치지 않았다.

힘을 좀 더 강하게 쓰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눈깔을 비집고 촉수가 튀어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제국 기사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벡스터는 꾸벅 인사한 뒤 병사들을 데리고 다시 헨드락 성으로 돌아갔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헤사벨을 불렀다. 헤사벨은 2층 창문 뒤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곧장 고개를 내밀었다.

"부르셨습니까. 아이작 님?"

"네가 내 옆방에서 머무르고 있던가?"

"아뇨. 방은 잡았지만 아이작 님 방 천장 위에서 밤새도록 주무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밤에 잘못 발견하면 심장마비 걸릴지도 모르겠군.'

아이작은 떠오른 말을 삼키고 지시했다.

"소름 돋는 짓은 그만하고 오늘은 네 방에서 자라."

***

헨드락 영지에도 다시 밤이 찾아왔다.

마을 주민들은 이웃 마을 영주가 성도 아닌 마을 여관에 머무른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했지만, 아무도 사정을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헨드락 영주에게 가서 물어보려 해도 성문은 굳게 잠겨 침묵하고 있었다.

이 기묘한 대치 속에서, 주민들은 은밀하게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속삭였다.

헤사벨은 그런 이야기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밤마다 주민들이 다른 술집에 모여서, 혹은 침대에 누워서 가족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기 때문이다. 별로 듣고 싶지 않아도 야밤을 배회하다 보면 예민한 귀는 그런 은밀한 이야기를 듣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헤사벨은 오늘, 한밤의 마을을 배회하는 대신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녀의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덕분에 헤사벨은 할 일 없이 지금까지 주워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깊은 생각에 빠질 수 있었다.

'전쟁과 음모, 배신, 유혹이라.'

붉은 성배 클럽의 일원이었던 그녀에게는 매혹적인 주제였다. 헨드락 영지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곳에서 헤사벨은 아이작이 또 무슨 기만 작전을 펼칠지 기대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헤사벨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다가 그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창문 쪽이었다.

창밖에 박쥐 한 마리가 거꾸로 매달려 붉은 눈동자로 헤사벨을 응시하고 있었다.

"헤사벨 굴마르."

헤사벨은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이 기괴한 초저주파 울림은 오로지 헤사벨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였다.

"밤중에 들려오는 속삭임을 받들라."

붉은 성배 클럽에서 보낸 사자였다.

헤사벨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침대 위에 무릎 꿇고 메시지를 기다렸다.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진 세뇌에 가까운 가르침은 그녀의 몸을 조종하다시피 했다.

"속삭임에 귀 기울입니다."

"헤사벨 굴마르, 너의 믿음이 엉뚱한 곳으로 향해 있는 것을 느낀다. 너를 만찬장 위에 올리기 전에 해명할 수 있나?"

붉은 성배 클럽은 같은 편일 때에는 온갖 달콤한 말로 아첨하고 현혹하지만, 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 즉시 상대방을 식재료 취급한다.

식욕과 살의는 숨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헤사벨은 붉은 성배의 이빨이 자신의 목젖까지 다가와 있음을 느꼈다. 이미 주변에 자신을 '요리'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리라.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기만과 음모의 주인을 섬깁니다."

"곧게 말하라. 네 주인은 붉은 성배인가, 아니면 성배 기사인가?"

도망갈 퇴로나 돌려 말할 수단조차 끊어 버리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헤사벨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둘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작 님은 붉은 성배께서 안배하신 가장 거대한 음모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야말로 예언에 나오는 '세상을 속이는 기만자'라고. 오히려 저야말로 여쭙고 싶습니다."

"질문? 네가?"

"말씀하시는 분께서는 아이작 님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귀하께서는 누구십니까? 붉은 성배께서 이 거대한 기만을 이미 알아차리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천사 중 한 분이시리라 생각됩니다만, 혹시 천사님께서 붉은 성배께서 예비하신 거대한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하시고 책임을 제게 돌리시는 건 아니신지요?"

"하하하."

박쥐가 낮게 웃었다.

헤사벨도 함께 웃었다.

웃음소리가 끊어지기도 전에 창문이 산산이 깨져 나갔다.

시커먼 안개에 휩싸인 흑기사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흑기사는 들어서자마자 곧장 침대를 향해 창을 찔러넣었다. 헤사벨은 민첩하게 피했으나 창에서 생겨난 강력한 와류가 침대를 휩쓸었다. 침대는 물론 바닥까지 으스러뜨릴 정도의 강력한 위력이었다.

그 회피에 능한 헤사벨조차도 공격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녀는 붉은 탄원을 써서 빠져나오려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기적이 봉인되어 있었다.

"배교자를 죽여라."

흑기사는 박쥐가 시키는 대로 헤사벨을 완전히 처치하기 위해 창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때 그는 헤사벨이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포자기하거나 정신이 나가 웃는 것이 아니었다.

"기만은 이쪽이 한 수 위인 것 같군요."

그제야 흑기사는 방안이 기이할 정도로 어둡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방 안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순식간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덮쳐 왔다.

***

콰쾅!

흑기사가 굉음과 함께 창밖으로 튕겨 나갔다. 놈의 몸을 두르고 있던 검은 안개가 긴 궤적을 만들었다. 새로 얻은 능력, '저 너머의 색채'로 모습을 숨기고 있다가 기습에 성공한 아이작은 어둠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굉장하군요. 아이작 님! 아이작 님 말씀대로 암살자가 찾아왔습니다!"

헤사벨이 기쁜 듯 외쳤지만 아이작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틈에 막다니?'

아이작은 생존을 건 싸움에서 실력을 보겠답시고 일부러 약한 공격 따윈 하지 않는다. 다만 적에게 패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촉수를 꺼내지 않았을 뿐, 그가 가진 가장 강한 검술인 여덟 갈래를 사용했다. 덕분에 헤사벨의 방은 난장판이었다.

메시지 전달자로 사용된 박쥐는 죽었지만, 바닥에 떨어진 흑기사는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아이작은 녀석이 충격에서 회복되기 전에 뛰어내리며 칼로 내리찍었다.

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녀석은 아까보다 훨씬 더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이걸로 아이작은 놈이 검술 실력만으로는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벡스터나 게벨 정도 되려나? 상당한 실력자로군.'

갑옷을 두르고 있는 어두운 기운은 여전해서 무슨 갑옷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쩌저저저적!

검이 다시 한번 맞부딪쳤다. 아이작이 가진 심판의 검은 흑기사의 검은 안개와 맞닿자 맹렬한 불꽃을 피워 올리며 주변을 불태웠다. 검을 중심으로 검은 안개가 걷혀나가자 흑기사는 서둘러 아이작을 튕겨 냈다. 힘도 아이작보다 우위였다.

'갑옷 안에 촉수를 두르고 있는데도....'

아이작은 칼센 밀터의 갑옷을 장착하고 있었다. 갑옷 안쪽은 촉수가 촘촘하게 감싸고 있어서 충격을 경감시키는 동시에 그의 완력까지도 보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기사의 힘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흑기사는 곧 기습의 충격에서 벗어난 듯, 아이작을 향해 맹렬하게 공격하며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아이작은 빠르게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칼센 밀터의 갑옷이 아니었다면 피 좀 흘렸겠는데....'

갑옷에는 꾸준하게 상처가 생기고 있었다. 조개의 껍질이 아무는 모양으로 즉각적으로 복구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긴 했지만, 갑옷을 뚫고 칼이 파고드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상급 검술을 발동시키기에는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오히려 흑기사가 차분하게 일련의 동작을 펼쳤다.

순간적으로 아이작은 흑기사의 몸이 둘로 나뉜 듯한 착시를 느꼈다. 흑기사는 검을 내려치는 동시에, 아래서 베어 올렸다.

까가가각!

아이작이 방어하기로 선택한 공격은 내려치기였다.

쾅! 다행히 정답이었다.

문제는 정답이 두 개였다는 점이었다.

아래서 올려 벤 검이 아이작의 허리를 강타했다. 칼센 밀터의 갑옷을 입고 있는데도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아이작은 속에 든 것을 게워 낼 뻔한 고통을 억누르며 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내려치기를 막길 잘했군.'

아이작이 내려치기를 막은 이유는 잘못 맞으면 즉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올려 베기는 맞아봐야 중상 정도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맞아보니 아니었다.

'갑옷이 아니었으면 몸이 양단 났겠어....'

아니, 그 전에 몸에서 촉수들이 튀어나와서 흑기사와 마을 전체를 잡아먹고 '헨드락 마을'을 '헨드락 마을이었던 것'으로 만들어 놓겠지.

그러면 아이작이 그간 고생한 것은 말짱 헛것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작은 오랜만에 자신을 몰아붙인 상대를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며 다시 칼을 쥐었다. 그러나 흑기사는 짜증스럽게도 다시 아이작에게 기회를 줄 생각 없다는 듯 검술을 재차 펼쳤다.

이번에는 세 가지 동작이 한꺼번에 아이작을 덮쳐 왔다.

그때 아이작은 헤사벨의 의지를 느꼈다.

그가 고개를 홱 돌린 순간, 그의 투구 옆을 스치고 흑기사의 안면부를 석궁 화살이 꿰뚫었다. 흑기사는 기이한 괴성을 터뜨리며 휘청거렸다.

"잘했다!"

뛰어난 실력자라면 살기를 느끼고 몸을 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헤사벨은 암살자답게 아이작의 뒤쪽 어딘가에 숨어 살기를 교란시켰다. 아이작과 의지가 공유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묘기이기도 했다.

아이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흑기사를 몰아붙였다. 흑기사는 얼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능숙하게 공격을 방어했다. 하지만 아이작의 노림수는 공격이 아닌 그다음에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전투가 길어지면서 소란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나타나거나 르하르트의 병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설마설마하던 전쟁이 진짜 일어나는 건가 했지만 막상 거리에는 치열하게 싸우는 두 기사뿐이었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자 흑기사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흑기사는 애당초 이렇게 시선을 많이 끌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헤사벨을 처치한 뒤 빠져나갈 생각이었겠지.

보는 눈이 많아지면 아이작도 불리하지만 놈도 불리해진다.

'뭣보다 여기는 게르토니아 제국 영지다, 이 사악한 놈아.'

누군가 결국 섬광의 기적이 담긴 하급 성물을 발동시켰다. 아이작이 어렸을 때 선물 받았던 적도 있었듯이, 백제국 안에서는 가장 흔한 기적이었다. 눈부신 섬광이 흑기사를 덮친 순간 놈의 몸이 일시적으로 굳었다.

아이작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한순간 앞으로 발을 내디디면서 이삭 검술: 여덟 갈래를 발동시켰다.

콰자자자작!

여덟 갈래의 공격이 모두 흑기사의 몸에 적중했다. 심판의 검은 흑기사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안개를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그중에서도 아이작이 신경 써서 적중시킨 머리의 투구가 깨져 나갔다.

박살 나며 떨어진 투구 아래 피 흘리는 얼굴이 드러났다.

마을 주민 중 누군가 그 얼굴을 보고 중얼거렸다.

"오언?"

60화. 피비린내 (4)

투구 아래 드러난 얼굴은 다름 아닌 헨드락 기사단의 부단장, 오언이었다.

헤사벨이 쏜 석궁 화살은 오언의 뺨을 꿰뚫은 상태였다. 오언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철철 흐르는 피 사이에서도 그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오언은 거칠게 석궁 화살을 뽑아 버리고 포효를 터뜨렸다.

"────!!"

인간이라기보다 흡사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포효였다. 아이작조차도 피부가 저릿함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주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주저앉거나 휘청거렸다.

오언은 이렇게 된 이상 목표라도 달성해야겠다는 듯 헤사벨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영리하게 아이작 뒤쪽에 숨어 오언의 빈틈을 노리고 있는 헤사벨을 노리기는 쉽지 않았다.

무리해 파고들었다간 헤사벨을 해치우기는커녕 자신이 당할 확률이 높았고, 아이작은 빈틈을 계속 노릴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오언에게 불리해지고 있었다.

아이작은 고민하는 놈에게 뭘 하냐는 듯 물었다.

"암살자는 들켰으면 도망쳐야지, 뭐해?"

"...."

오언은 미련을 보이는 듯 지만 르하르트가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나자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르하르트 쪽에도 실력 있는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이 가세하면 오언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쫓아라!"

하지만 르하르트는 그를 가만히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그 무리에 끼는 대신 살짝 떨어져 오언의 마지막 발악을 지켜보려 했다.

"으아아아악!"

쾅. 그때 병사들의 대열을 뚫고 무언가 튀어나왔다. 아까 전 오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에 휩싸인, 다리가 없는 거대한 흑마였다.

흑마 위에 올라탄 오언은 병사들의 포위망을 단숨에 뚫고 내달렸다.

르하르트가 다급히 윽박질렀다.

"뭐 하는 거냐? 당장 말을 타고 추적...."

"아뇨. 됐습니다."

아이작이 추적을 제지했다.

다리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날아다니다시피 하는 흑마의 속도는 엄청났다. 처음부터 말을 타고 있었어도 못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놈을 잡는 것보다 어디로 가느냐였다.

"악당은 카일 헨드락으로 결정됐군요."

오언이 곧바로 헨드락 성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보았다.

***

늦은 밤이었음에도 사태를 수습하는 동안 마을 주민들은 물론 병사들도 쉽게 다시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그들 모두 이번 사태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특히 마을 주민들의 충격이 컸다.

"그러니까... 헨드락 기사단의 부단장, 오언 렌리가 아이작 님을 암살하려 했다는 겁니까?"

여관의 식당에서 아이작과 르하르트는 이번 사태를 두고 대화했다.

헤사벨의 신분은 적당히 아이작의 종자로 해두었다. 하지만 남녀가 유별한 법이니 방은 두 개로 잡고 그중 하나를 헤사벨이 쓰게 했다. 그런데 아이작을 암살하려던 오언은 어느 쪽이 아이작의 방인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헤사벨을 공격한 것 같다... 는 것이 아이작의 설명이었다.

"어째서 카일 헨드락이 아이작 님을?"

"르하르트 백작님의 명분을 없애려 한 것이었겠죠. 혹은 사태를 엉뚱한 방향으로 돌리려고 한 걸수도 있고."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했다.

물론 아이작은 이 사태의 배후에 헨드락이 아닌 붉은 성배 클럽의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굳이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아이작은 르하르트가 '왜?'라는 고민을 더 하기 전에 '어떻게?'라는 고민으로 방향을 돌렸다.

"중요한 건 제 종자가, 그리고 저 역시도 공격당했다는 겁니다. 설령 제가 아니라 누가 당하더라도 이 일은 단순히 묵과하여 넘어갈 수 없습니다. 서임 받은 기사가 밤중에 습격하다니요? 게다가 팬텀 스티드(Phantom Steed)까지 타고? 이는 분명한 사악의 증거입니다."

오언이 얼굴을 들켰다는 사실은 모든 것을 명확하게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시각적 충격을 주는 유령 말까지 타고 달아났다.

'다만 걸리는 점은 팬텀 스티드가 붉은 성배가 아닌 불사 교단의 신수라는 건데....'

이 사태에 불사 교단까지 끼어있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르하르트 영지와 헨드락 영지의 갈등이라는 구도가 사실 아이작과 붉은 성배 클럽의 갈등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번 사건은 충분히 복잡했다.

어쨌건 아이작의 머릿속과 달리 르하르트는 사태를 간단하게 정리한 듯싶었다.

"카일 헨드락이 결국 미친 모양이군요. 녀석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일을 저질렀든,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이작은 둘 사이에서 적당히 줄타기를 하며 이득을 뽑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암습까지 당한 와중에 르하르트를 편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헨드락이 이 사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또 어떤 암살자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일단 전갈을 보내 최대한 병사들을 빠르게 보내도록 요청하겠습니다만... 헨드락 성채가 워낙에 공략하기 어려운 곳이라 쉽진 않을 것 같군요."

"곧 파종기인데 괜찮겠습니까?"

"사실 이미 로어커스 때문에 땅을 놀리던 중이라 봄 농사는 망했습니다. 손해를 줄이려면 이쪽 일이라도 빨리 끝내야지요. 곧 빛의 법전에서도 이단심문관들이 온다고 들었는데,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교단의 도움 없이 아까 그런 괴물을 상대하고 싶진 않군요."

르하르트 입장에서는 봄철에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아도 지금이 아니면 큰 손해 없이 카일을 잡을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빛의 법전이 헨드락을 주시하고 있을 때 움직여야 했다.

'이단심문관들이 오면 나도 곤란하긴 한데....'

아이작은 그가 아는 유일한 이단심문관, 이솔데 브란트를 떠올렸다. 이솔데는 어리숙하고 목숨이 몇 개는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다녔지만, 안목은 있었다.

다른 이단심문관들도 이솔데만 한 능력이 있다면 그때처럼 운이 좋으란 법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결론을 봐야겠군.'

***

"뭐, 뭐, 뭐라고? 르하르트가 움직였다고?"

카일은 경악하면서 성 밖에 생긴 새로운 움직임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밤사이 순찰을 나갔던 오언이 얼굴에 화살을 맞아 돌아와 사경을 헤매고 있고, 르하르트의 병사들은 성채를 둘러싸고 포위망을 구축했다는 보고였다.

"이 개자식!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군! 병사들에게 공성전에 대비하라고 일러라! 어차피 봄이라 녀석들도 오래 싸우진 못할 거다!"

헨드락 성채는 산비탈 위에 세워진 성채답게 공략이 어려운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카일은 버티기만 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지만 어쩌면 이번 전쟁으로 승리한다면 빚을 갚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쩌면 비옥한 농지를 가진 르하르트 영지의 땅 일부를 받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허튼 생각에 빠져 있는 게 분명하더군."

한편, 라엘라는 자신의 방에서 이마에 손을 짚고 있었다.

"봄이라 식량이 부족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미련하게 수성전 준비도 미리 해두지 않았고. 게다가 저쪽이 우리 쪽 농작물을 징발하기라도 하면 당장은 버텨도 올해부터 굶주리겠지. 카일은 망했어."

그녀의 방 바닥에는 흑기사, 오언이 무릎 꿇고 있었다. 질책이 아닌 치료를 위해서였지만 라엘라는 치료를 미루고 있었다.

치료는 순식간에 끝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오언이 좀 더 고통받았으면 했다.

"네가 미련하게 들킨 덕분에 네 주군이 망하게 생겼다. 어떻게 생각하지?"

오언은 뭔가 쉭쉭거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화살이 뺨을 관통하면서 혀와 이빨까지 다쳐 정상적인 발음이 어려웠다.

라엘라는 한숨을 쉬며 다가갔다.

오언은 기적을 예감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내, 방 안이 붉은 섬광으로 가득 찼다.

오언은 감히 바라보고 있지 못했지만, 바닥에 뚝뚝 피가 떨어지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방 안 가득 피가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라엘라의 하얀 맨발이 피투성이 바닥을 디디며 다가왔다.

이내 또 하나의 발이, 또 하나의 발이, 또 하나의 발이.

"고개를 들어라."

오언이 고개를 든 순간, 여러 개의 다리와 피투성이가 되었던 방은 환각이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 고였던 피가 라엘라의 발바닥으로 빨려들어 사라지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라엘라는 오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대체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벌떡이는 붉은 살점 한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오언은 이것이 붉은 성배의 만찬장에 있는 인육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먹어라."

오언은 처음으로 붉은 살점의 선지자에게 복종하기로 결심했을 때처럼, 순순히 그 살점을 입에 넣었다. 핏물이 혀에 스며들자마자, 그의 몸에 생겼던 모든 상처와 고통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라엘라는 무릎 꿇은 오언 앞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

"헨드락 가문은 여기까지다. 헨드락 영지도 아마 사라지겠지. 카일 헨드락은 당장 여기서 죽지 않아도 바르바리가 득시글거리는 변방을 비참하게 떠돌다가 죽을 거다."

"...도와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오언은 아까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라엘라는 이 뻔뻔한 말에 역정을 내는 대신 비웃음을 띠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도와줘야 할까?"

"제 소원은 주군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제 재능을 넘는 강한 힘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오언은 고개 숙인 채 말을 이어갔다.

"라엘라 님은 제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잠깐 쓰다 버리시기 위해 저를 개로 들이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 폐기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아직 카일을 도와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군."

"카일 헨드락을 쓰다 버리는 개로 만드십시오."

라엘라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계속 말해봐. 뭐라고 말할지는 알겠지만, 듣고 싶구나."

"성배기사는 시대착오적인 광신자가 아니었습니다. 놈은 헤사벨 굴마르를 해치우거나 굴복시키는 것이 아닌, 복종시켰습니다. 이는 붉은 성배의 계획에 큰 위협입니다. 맞습니까?"

"맞아. 이 성배기사에 대해서는... 내가 전혀 예지하지 못했지."

라엘라는 대륙 전체에 있는 거의 모든 거시적 변수를 꿰뚫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 그녀가 예측하지 못했던 두 가지가 있었다. 바로 갑작스러운 칼센 밀터의 실종과 아이작이라는 성배 기사의 출현이었다.

아이작이 단순한 광신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결론은 두 가지였다.

그를 계획에 편입시켜서 새로운 음모를 짜거나, 아니면....

"헨드락 영지를 이용해서 아이작을 암살하십시오."

라엘라는 오언의 대답에 만족했다.

***

이 갑작스러운 공성전에 모든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오히려 정황상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고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고 믿던 사람들이었다.

"빨리! 이쪽에도 타르 솥을 가져와!"

카일은 판단을 미루는 우유부단함은 있었지만 일단 결정하면 그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그는 모처럼 성벽까지 올라가 의욕적으로 병사들을 지휘하며 수성전 준비를 했다. 수성 준비에 당황하던 병사들은 영주가 직접 나서서 독려하는 모습에 안도했다.

높으신 분이 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지만, 사기 진작에는 분명히 도움이 되는 일이다. 특히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의구심을 품고 있을 때에는 더더욱.

헨드락 기사단 단장, 벡스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카일은 벡스터가 성벽 위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벡스터 단장! 성문 보강 준비는 끝났나? 기사들을 충분히 훈련시켰는지 모르겠군. 드디어 그 비싼 밥값을...."

"죄인 카일 헨드락."

스릉. 벡스터는 낮게 내리깐 목소리와 함께 칼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벡스터와 함께 대동한 기사들도 칼을 뽑아 카일 주변의 병사들을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카일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뭐? 뭐라고? 지금 내 이름 앞에 이상한 수식어가 붙어있던 거 같은데."

"당신을 횡령과 배임, 배교, 영지간 불화 조장, 정신적 무능을 이유로 탄핵한다. 효력은 지금 즉시 발동된다."

61화. 일인공성전 (1)

카일은 자신의 목젖 가까이 다가오는 칼날을 보고서야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반역이다!"

카일의 외침에 병사들이 술렁이며 무기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기세의 벡스터와 기사들의 압력 앞에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꼼짝없이 포위된 카일은 이를 악물고 벡스터를 노려보았다.

"네 놈, 아버님이 거두어 주신 은혜도 모르고...."

"거뒀다고? 나는 제국 기사단원이다. 은퇴했다고 내가 다른 주군을 섬길 것 같은가?"

벡스터는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국 기사단은 제국에만 충성한다. 그것은 은퇴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선대 헨드락 영주가 기사들을 키우고 싶다는 욕심에 벡스터의 노후를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데려왔을 뿐이었다.

즉, 고용 관계일 뿐이다.

하지만 벡스터는 어쨌거나 카일에게 칼을 들이대는 사실 자체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조용히 항복해라. 이게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말이다."

선대 헨드락 영주를 생각해서라도 카일을 지금 제지하는 것이 나았다. 공성전이 벌어져 영지가 피폐해지고 무수한 피가 흐르면 절대로 목숨을 건질 수 없다.

벡스터는 기사로서 뭐가 됐든 싸우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이 싸움은 달랐다. 이것은 버티는 것이 불명예스러운 싸움이었다.

"이 싸움은 명예가 아니라 불경한 존재에게 조종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네가 선처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영지는 유지하기 어렵겠지만...."

카일은 다 글렀다고 판단한 듯 힘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정신적 무능은 뭐냐?"

카일의 말에 딱딱한 돌덩이 같던 벡스터의 얼굴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기사들 사이에서도 당혹스러움이 흐르다가 한 명이 벡스터에게 속삭였다.

"정말 모르나 본데요?"

"...그걸 모른다는 사실이 네 무능을 대변한다. 카일 헨드락."

카일은 억울했다. 횡령, 배임, 배교, 불화 조장 모두 억울했지만 그중에서도 정신적 무능이 가장 억울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억울함을 토로할 시간도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기사 한 명이 다가와 카일의 손을 포박했다.

벡스터는 다른 기사에게 지시를 전달했다.

"마을로 가서 르하르트 백작과 성배기사에게 헨드락 영주가 항복한다는 메시지를 전해라. 지금 우리의 진짜 적은 헨드락 영주가 아니라 이 안에...."

"벡스터 경."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벡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검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라엘라가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영주님께 무슨 무례한 짓을 하고 계십니까?"

"라엘라."

벡스터는 차갑게 내뱉으며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붉은 성배의 탕녀다. 즉시 제압하여 지하 감옥에 감금해라."

벡스터는 모든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선대 영주의 죽음 이후부터 쭉 진행해 왔던 조사였다.

그는 동원할 수 있는 선을 총동원해 도움을 얻은 끝에 라엘라가 붉은 성배 클럽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라엘라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조종당하는 영주를 끌어내려야만 했다. 때문에 자신이 가르치던 헨드락 기사단을 우선 포섭했다. 이미 영주의 무능으로 봉급마저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섭외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성배기사랍시고 마을로 찾아온 자는 곁에 같은 붉은 성배 클럽의 시녀를 데리고 있었다. 때문에 벡스터는 아이작에게 다급히 상황을 묻고 파악하고서야 거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탕녀라니, 무례하군요."

라엘라는 웃으며 다가오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벡스터는 라엘라의 등 뒤에 서 있던 흑기사를 발견했다. 다른 기사들은 같은 헨드락 기사단의 일원이라고 여긴 건지 신경 쓰지 않고 다가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흑기사가 칼을 뽑아 들었다.

쾅, 콰득!

다른 기사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흑기사가 움직였다. 거의 동시에 기사 하나의 몸뚱이가 갑옷째로 절반쯤 잘린 채 쓰러지고, 다른 기사 하나는 양단 나서 상반신이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벡스터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경악하며 칼을 세웠다.

"오언? 네가 왜!"

그제야 벡스터는 흑기사가 지금 병상에 누워있어야 할 오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오언은 벡스터가 제일 열심히 가르쳤던 기사였지만, 그가 알기로 오언에게 이런 실력은 없었다.

오언은 대답 없이 성큼 다가왔다.

벡스터는 이를 악물고 칼을 겨누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앞선 기사 둘이 당한 것을 보면 상당한 실력의 상급 검술을 보유한 것으로 보였다.

물론 벡스터도 상급 검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빡, 빠각, 쩌억!

순식간에 검날이 맞부딪쳤다. 세 번의 공격이 날아왔다. 두 번은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마지막 한 번은 벡스터의 허벅지를 무참하게 베었다. 벡스터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는 오언을 올려다보았다.

"이 개자식...."

오언은 대답도 없이 벡스터의 목을 날려 버렸다. 무참하게 굴러가는 머리통의 모습이 성벽 위에 있던 기사들과 병사, 그리고 카일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벡스터가 패배하는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카일은 멍하니 그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오언은 기사들을 한마디 말도 없이 응시했다.

기사들은 즉시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그리고 어째선지 병사들마저도 무기를 버렸다.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카일 곁으로 라엘라가 다가왔다.

"구해 드렸습니다. 영주님. 고마우시죠?"

그녀의 달콤한 속삭임에 카일은 뒤늦게서야 벡스터가 했던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지금 항복하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던 그 말을.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

"역시나 벡스터 경에게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군."

르하르트는 아쉽다는 듯 성벽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향후 진행될 공성전을 어떻게 진행할지 이야기하던 기사들은 의아한 얼굴로 르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쉽게 해결되겠습니까?"

"벡스터 경이 카일을 두들겨 패서라도 내보낼 줄 알았다. 그것도 안 된다면 꽁꽁 묶어서라도.... 이번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굳이 말해줬으니 말이야."

르하르트는 포위망을 구축하고 공성전을 준비하면서도 극적인 반전을 기대했다. 전면전은 양쪽 모두에게 최악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타협이 되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실리적인 이유에서도 기대하긴 했지. 지금 우리는 병사 100명과 기사 15명이 전부다.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 공성전은 턱도 없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드락 쪽에서 먼저 밀고 내려오지 않는 이유는 기사들의 수준 차이가 크기 때문이었다. 헨드락 기사단은 이제 막 만들어진 지 10년도 채 안 된 데다 벡스터 외에는 수준이 높지 않다.

하지만 르하르트는 넓은 농지를 보호하기 위해 꾸준하게 기사들을 양성해왔고, 봉토를 하사받은 낮은 귀족 계급의 기사들도 있었다.

때문에 묘한 대치 상태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해결할 사람은 결국 벡스터 말고는 없다는 게 르하르트의 판단이었다.

"그래도 성채 안쪽도 상황이 안 좋아지면 카일도 '현명한 선택'을 강요받을 테니...."

르하르트가 낙관론을 늘어놓을 때였다.

"침략자들은 들어라!"

성벽 위를 올려다보자 어제 기습했다가 도망친 오언이 서 있었다.

"감히 영주를 몰아내고 헨드락 영지를 모욕하려던 배신자 벡스터 오하르는 죽었다! 다음은 네놈들 차례다!"

"뭐야, 무슨 일인가?"

"그, 그게...."

르하르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설마하면서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갈 거라고 생각 못 했던 르하르트는 이후 닥칠 일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백작님!"

기사 하나가 급히 르하르트의 몸을 붙잡아 흔들었다. 그제야 그는 헨드락 성채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헨드락 성채의 성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기사들이 빠르게 쏟아져 나왔다. 헨드락 기사단의 기사들은 비탈길을 순식간에 돌파해 달려왔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방책은 기사들을 전혀 제지하지 못했다.

이내 맹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병사들과 함께 앞쪽에 있던 르하르트 역시 그 충돌에 휘말려 굴러갔다.

헨드락 기사단의 기사들은 단숨에 르하르트의 병사들을 짓밟아 버리며 돌파했다. 기습의 효과는 엄청났다. 순식간에 병사들 수십 명이 도살당했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어쩌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잔뜩 훈계나 늘어놓은 다음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르하르트의 환상은 산산이 깨졌다.

"백작님!"

"침략자를 죽여라!"

헨드락 기사 중 한 명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사들이 서로 부딪쳤다.

르하르트는 솔직히 자신의 기사 한 명이 헨드락의 기사들 둘쯤은 너끈히 상대할 수 있다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르하르트는 눈앞에서 기사들이 무참히 당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검이 맞부딪치면 검이 부러지거나 손목이 부러지고, 충돌하면 형편없이 나가떨어졌다. 단순한 수련 차이라고 보기 힘든 일이었다.

헨드락 기사 중 한 명이 벌게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르하르트를 발견했다. 르하르트는 그의 눈이 광기로 물든 것을 확인했다.

아주 오래전, 여명군 시절에나 보던 광기에 찬 병사들이 떠올랐다.

"죽어라!"

두두두두두. 헨드락 기사가 빠르게 달려왔다.

그의 창끝이 르하르트의 목을 꿰뚫는가 싶은 순간, 어디선가 달려온 그림자가 맹렬한 기세로 부딪쳤다.

쾅! 거대한 흑마를 타고 나타난 아이작이 헨드락 기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기사는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이작은 능숙하게 말을 움직여 말발굽으로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지면에 머리통이 처박힌 기사는 꿈틀거리다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

"백작! 일어나십시오!"

아이작이 짧게 지시했다. 하지만 르하르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자 아이작은 말에서 뛰어내려 르하르트의 뺨을 후려갈겼다.

"야! 정신 차리라고!"

그제야 르하르트는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아이작은 비틀거리는 르하르트를 말에 다시 태우고 우선 여기서 빠져나가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을 휩쓸어 버린 헨드락 기사단은 다시 말을 돌려 잔병과 르하르트를 처리하려 했다.

아이작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사를 발견했다. 말을 베어 쓰러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말은 그 속도와 무게 자체가 흉기다. 정면충돌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헤사벨!'

아이작이 의지를 통해 강한 신호를 보내자 날아든 화살이 말의 눈을 꿰뚫었다. 그 서슬에 함께 달려오던 말 두어 마리가 함께 쓰러졌다.

아직 해가 떠 있었기 때문에 헤사벨은 마을 지붕 아래 숨어 저격을 수행하고 있었다. 난전 상황이라 기사들은 누가 누구에게 저격당했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헨드락 기사들은 땅에 떨어진 충격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다시 아이작과 르하르트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무기가 있으면 무기를 쥐고, 없으면 맨손으로 찢어 죽이겠다는 듯한 모습으로.

'이 투지로 트롤과 싸웠다면 두세 명만 있어도 트롤을 잡았을 텐데.'

정상적인 투지가 아니었다. 뭔가에 조종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양치기 목상처럼 느슨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정신 속박이다. 아니면 약물을 썼거나.

피에 미친 꼴을 보아하니 후자의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헤사벨이 달려오는 기사들을 노려 화살을 쏘았지만, 말과 달리 갑옷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어쩌다 맞는 놈도 통각이 마비된 듯 달려왔다.

마침내 가장 앞서 온 기사와 아이작이 충돌했다. 기사는 메이스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아이작의 머리통을 박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첫 번째 기사를 시작으로 아이작은 순식간에 포위당했다. 하지만 다행히 기사들의 수준 자체가 높아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알 수 없는 이유로 광기와 완력이 더해진 것뿐이었다.

'이쯤이면 되겠군.'

아이작은 포위당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몸을 움직였다.

난전을 위해 태어난 기술, 아발란체 검술: 전조 동작이 펼쳐졌다.

산을 울리는 듯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아이작을 둘러쌌던 기사들이 일제히 뒤로 나동그라졌다.

팔다리가 무사한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갑옷이 우그러지거나 찢어진 흔적도 보였다.

'위력이... 꽤 늘었군?'

늑대를 사냥하던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62화. 일인공성전 (2)

원래 세 갈래 정도로만 나타나던 궤적이 다섯 갈래로 늘었다. 강철로 이루어진 갑옷을 베는 위력도 위력이지만, 터져 나온 폭음만으로도 고막이 나가 넋을 잃은 기사도 있었다. 왜 게벨이 이 기술이 난전에서 유용하다고 한 건지 알 것 같았다.

얼추 게벨이 쓰던 것보다 약간 아래 정도로 생각되었다.

'그간 알게 모르게 쌓인 실전 경험이 위력을 더해 준 건가?'

물론 여전히 몸에 부담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갑옷 안에 몸을 감싸고 있는 촉수들이 완충재가 되었는지 충격을 경감시켜 주었다.

아이작은 온몸이 삐걱거리면서 비명 지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웃었다.

주변의 기사들이 모두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숨차니까 너희들이 와라."

아이작은 칼을 들어 기사들을 겨냥했다. 기사들은 폭음의 충격에서 벗어나 비틀거리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놈이 아이작을 향해 플레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백작님! 성기사님!"

그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르하르트 군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플레일을 휘두르려던 헨드락 영지 기사는 순식간에 말발굽에 짓밟혀 곤죽이 되었다. 후방에 있던 기사들이 합류하고, 처음의 기습 충격에서 벗어난 기사들도 병사들을 규합해 반격에 나선 것이다.

어설픈 군대라면 처음 기습의 충격만으로도 와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르하르트가 기사들을 헛 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들은 흩어진 조직을 규합해 반격하고 있었다. 아이작이 기세를 꺾은 덕분에 나올 수 있는 반격이었다. 그가 나서지 못했다면 초반의 기습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와해되었을 것이다.

르하르트 군이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자 결국 헨드락 기사들은 그 힘과 기세로도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백작님은 무사하십니까!"

헨드락 기사들을 방패 벽과 긴 창으로 몰아세우고, 플레일을 든 기사를 짓밟은 기사가 다가와 물었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르하르트 기사단의 단장이라고 했던가 그랬던 것 같았다.

"넋이 나가긴 했는데 괜찮습니다."

아이작은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는 르하르트가 흑마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을 보았다.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우선 백작을 데리고 빠져나가십시오. 적들을 정리해야겠군요."

아이작은 난전이 벌어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헨드락 기사단은 비정상적인 투지와 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숫자가 적고 제대로 된 조직력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이 진압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왜지?'

아이작은 이 와중에도 후퇴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는 헨드락 성채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면 소중하게 키운 헨드락 기사들은 전멸이다. 벡스터의 처형과 함께 기사들도 같이 치워버리기로 한 건가?

'버림패로 쓴 건가? 이 정도 충격만 주면 충분하다고?'

결국 헨드락 성채에서 후퇴 지시는 내려오지 않았다. 헨드락 기사단은 기사단장이었던 벡스터 경을 포함해 대부분이 사망하고 일부가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헨드락 성채 안쪽에는 아이작이 심어 놓은 존재가 움직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