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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 9

68화. 붉은 살점의 선지자 (4)

[라엘라는 이미 여기에 없다. 그녀는 이미 만찬장에 초대받았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오직 발끝으로 그 거대한 몸을 지탱한 채 서서 오만하게 아이작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보았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눈이 없었으니까.

오직 몸을 비비적거리며 흔드는 팔다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새로운 만찬장이 되겠지.]

도저히 입이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는 곳에서 혀가 나와 주변을 핥았다.

아이작은 실제로는 처음 보는 천사의 모습에 얕은 신음을 흘렸다. 이미 쪼그라들어 한물간 고대신과는 차원이 다른 압력이었다. 이마저도 전체의 힘이 아닌 일부에 불과하다니 천사와 인간의 격이 얼마나 다른지 느껴졌다.

성벽 아래에서 들리든 환호성은 어느새 잦아들고 병사들은 무거운 침묵에 빠져 있었다. 그들 역시 지금 나타난 이변을 전신으로 느끼고 있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바라보는 병사들 모두가 피 냄새를 맡았다. 병사들 중 일부는 자신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단지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미혹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 모두를 고깃덩어리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어떨까, 성배기사. 아침 햇볕은 내게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닐 텐데.]

아이작이 가진 가장 강한 무기는 촉수였다. 하지만 그녀 말대로 아이작은 이 아침 햇볕 속에서 촉수를 쓸 수 없었다. 이 수많은 사람 앞에서 촉수를 꺼내는 것은 이 자리에 괴물 하나를 더 추가하는 것뿐이니까.

그렇다고 아이작의 정체를 까발린 후, 서로 죽자고 달려들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작이 움직이지 않자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이미 본체를 드러냈으니 상관없다는 듯 몸을 움직였다.

쾅. 마치 발레라도 하듯 유연하게 다리를 흔들자 굉음과 함께 아이작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아이작은 심판의 검이 맹렬하게 타오르다가 서서히 녹이 스는 것을 발견했다. 심판의 검에 깃든 기적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마모되어 버린 것이다.

반면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발에는 실선 같은 상처가 생긴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금세 아물어 버렸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아이작을 향해 마저 공격을 하려는 듯하다가 멈칫했다.

그녀의 붉은 피부가 햇볕에 마르고 있었다.

'너무 즐겨도 안 되겠군....'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속으로 혀를 찼다.

진짜 형상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을 수반한다. 현실에 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힘을 소모하고, 지금 몸을 공격당하면 사후세계의 본체에도 직접적인 타격이 오게 된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우선 몸부터 갈아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겐 이미 작업을 마쳐둔 육신이 있었다.

톡, 톡, 톡.

발끝으로 걷는 걸음걸이는 조용하면서도 우아했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일대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들릴 만큼 선명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어느새 헤사벨의 곁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제 이 자리에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다고 확신했다. 기적을 쓸 수 있는 진짜 사제나 성기사가 있으면 모를까, 저 눈앞에 있는 것은 가짜 성기사고, 성벽 아래에서 구경하고 있는 것들은 버러지 고깃덩어리들이다.

유일한 공격수단인 심판의 검마저 잃어버린 아이작은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헤사벨의 몸으로 갈아타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확신한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몸을 구부정하게 구부렸다. 그리곤 헤사벨의 몸으로 스며들기 위해 준비했다.

일개 시녀였던 라엘라보다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인 헤사벨의 몸이 훨씬 더 그녀의 힘을 잘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다.

[...?]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빙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당혹감을 느낀 순간, 그녀는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년!]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강제로 헤사벨의 얼굴을 움켜쥐고 입을 벌렸다. 순간 입안에서 조금도 씹은 흔적 없는 말끔한 상태의 살점이 나타났다.

헤사벨은 그대로 입 안에 있던 살점을 내뱉었다.

***

철퍽.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살점이 바닥에 쓰레기처럼 떨어졌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붉은 성배가 탄생한 이래 단 한 번이라도 살점의 맛을 본 자는 입에 들어온 살점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것은 단순한 의지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헤사벨에게 경외감마저 느꼈다.

헤사벨은 살점을 뱉어내자마자 단검을 뽑아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찔렀다. 물론 평범한 단검은 그녀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헤사벨의 옆구리를 찌른 단검은 평범한 단검이 아니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자신의 다리에 꽂힌 단검을 보고 얼어붙은 듯 멈춰 있었다.

헤사벨이 그렇게 되찾으려고 했던 바로 그 성물.

하지만 성벽을 넘기 직전 아이작이 자기 손으로 넘겨준 바로 그 성물.

분열 예식이었다.

[아아아아아아!]

단 한 번도 흘러나온 적 없던 비명이 처음으로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분열 예식은 살아있는 신이었던 엘릴을 죽여 진정한 신으로 거듭 태어나게 만들었다. 이 사실은 그냥 단검으로서는 크게 가치가 없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빌려 쓸 뿐인 라엘라의 몸이 찔렸다면 별 타격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화적인 존재, 특히 천사처럼 신앙 그 자체의 화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이때까지 받았던 어떤 공격보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머리가 불타는 듯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몸을 격하게 움직여 분열 예식과 헤사벨을 후려쳐 튕겨 냈다. 하지만 울컥울컥 터져 나오는 피와 불타는 통증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이 빠르게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탈출해야 해.'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처음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죽음의 공포가 찾아들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죽어도 천상의 본체는 무사하겠지만, 서둘러 빠져나가지 않으면 분열 예식으로 입은 상처가 복구하기 힘든 흉터를 남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런 그녀를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날카로운 살기.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단 세 발자국 만에 바로 앞까지 쇄도해 온 아이작을 발견했다.

아이작의 손에는 녹슨 심판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고작 그런 것으로!]

쩌억!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팔과 아이작의 검이 맞부딪쳤다. 의외로 검날이 살짝 피부를 파고들었다. 심판의 검이 그렇게 잘 들었던 이유는 기적이 깃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검에는 기적이 없다. 녹까지 슬었으니 평범한 검만도 못하다.

촉수를 쓴다면 모를까, 고작 이런 무기로는 천사를 벨 수 없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아이작이 튕겨 나가거나 검과 함께 박살 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쩌저저저저저적!

요란한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면서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피부 안으로 점점 검이 파고들었다. 단 한 번 부딪쳤을 뿐인데, 고작 눈 깜빡할 사이에 마치 수십, 수백 번 검으로 내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이미 쇠약해져 갈라지기 시작한 피부는 아이작의 검이 침입하기 시작하자 맹렬하게 부서지고 찢어지며 파편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무슨 일인지는 깨닫지 못했지만 이대로 가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칼날은 오히려 물어뜯기라도 하는 것처럼 팔과 함께 따라왔다.

'역시 통하는군.'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쇠르에서 재물신 골루와루를 죽였을 때.

그때 아이작은 골루와루를 공격할 수단이 없어서 자신의 몸 깊은 곳까지 놈을 끌어들여야 했다. 아이작은 자신이 물리력이 아닌 관념적인 존재에게도 통하는 공격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적을 다룰 수 없는 아이작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아이작은 다름 아닌 검술을 통해 해결책을 얻었다.

상급 검술은 심상의 형태를 물리적으로 구현해 낸다.

아이작의 상급 검술인 '이삭 검술'이 촉수의 형태를 구현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오언과 벡스터의 육신을 포식하면서 이삭 검술의 다음 단계를 여는 데 성공했다.

이삭 검술: 톱날 찢기.

아이작의 검이 맹렬하게 진동했다. 검날 안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촉수들이 회전하며 채찍질하듯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몸을 내려치고 있었다.

무수한 톱날 촉수들이 꾸준하게 몸을 파먹고 찢어갔다.

아이작이 상상한 이미지는 전기톱이었다.

촉수와 이빨들로 이루어진 전기톱.

그 안에는 아이작이 끌어모은 이름 없는 혼돈의 신성력이 담겨 있었다.

미약한 기운이지만 수백, 수천 번에 가까운 공격을 가하자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쩌어어어억, 쾅!

[아아아아아아!]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팔이 잘려 나갔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뒤늦게 아이작을 밀쳐내기 위해 다른 손발을 동원했다.

그 순간 아이작은 기다렸다는 듯 파수자의 등대를 발동시켰다.

찬란한 후광이 아이작의 머리 위를 감쌌다.

이제 막 떠오른 여명조차도 아이작의 머리 위에 떠오른 후광 아래 빛이 바랬다.

파수자의 등대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성벽 위를 감싸고 있던 가시덤불을 재로 만들며 부숴버렸다. 부정하고 삿된 것들이 추방되고 올곧이 바른 것만이 세워졌다.

그 중심에 아이작이 있었다.

헨드락 성채의 병사들은 머리가 씻겨나가며 정신을 차렸고, 르하르트의 병사들은 새로운 신화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헤사벨은 자신의 살점을 파먹으며 접근하는 검날을 보며 경악했다.

[파수자의 등대? 어째서 이 시대에 또 하나가....]

그녀는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파수자의 등대라 한들 천사 자체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신앙 자체로 이루어진 천사에게는 별개의 규칙이 성립되니까. 하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스스로를 더 강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섬광 속에 기세가 오른 아이작의 검은 더더욱 빠르고 강하게 그녀를 베어 내렸다.

콰드드드득, 콰득, 우득, 쩍.

검으로 내려친다기보다 파먹는 것에 가까웠다. 마치 나무를 베어내듯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팔다리가 토막 났다. 귀에 거슬리는 굉음 속에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순식간에 팔다리 다섯 개를 잃고서야 튕겨 나오듯 나가떨어졌다.

***

[무슨, 이건, 말도 안....]

나가떨어진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호흡조차 힘들어하고 있었다. 피부를 넘어 목구멍까지 마르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본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빙의할 육체를 찾지 못하면 그대로 물 위에 나온 물고기처럼 말라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휘청거리며 뒤늦게 버려진 자신의 살점을 찾았다. 강제로 아무에게나 먹이고 지금이라도 몸을 갈아탄다면,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아아아!]

하지만 그때 그녀가 본 것은 살점을 주워다 공손하게 아이작에게 바치는 헤사벨의 모습이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안돼, 안돼!]

그러나 아이작은 보란 듯이 그녀의 눈앞에서 살점을 움켜쥐었다. 왼손에 있던 촉수들이 낼름거리며 튀어나와 순식간에 살점을 뭉개버렸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비명이 성벽 위로 끔찍하게 울려 퍼졌다.

아이작은 포식을 마친 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얼마 남지 않은 팔다리로 애써 균형을 유지하려다가 하나둘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싸울 의지도, 기력도 남지 않았다.

한 줌의 자존심만으로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빙의할 육신과 매개가 될 살점도 찾을 수 없는 그녀가 소멸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겠지.]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부서져 가면서도 저주의 목소리를 속삭였다.

치명상을 입긴 했지만, 이것은 천사가 가진 힘 중 극히 일부이고, 본체는 사후세계에서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할 것이다.

천사들은 소환되거나 신의 전령으로 나타나는 경우를 제외하면 본신을 드러내는 일이 극히 드물다. 때문에 대부분 대리인이나 빙의자의 죽음 정도로 끝난다. 특히나 음모를 즐기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이런 죽음 자체가 처음이었다.

[네가...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정확히 알기나 하느냐? 너는 훗날 오늘을 후회하리라.]

그녀의 말은 허세나 경고가 아니었다. 천사는 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자다. 그 자체로도 강력하지만, 본체에 피해를 줄 정도로 타격을 입히면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어지간히 강한 신의 축복으로 보호받지 않는다면 목숨이 위협받을 정도로.

하지만 아이작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게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

69화. 붉은 살점의 선지자 (5)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으로 충격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뒤늦게 퍼즐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공격이 시작된 시점부터 헤사벨의 암살, 지힐렛의 잠입, 르하르트 병사들이 미리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 촉수를 쓰지 않고 검술로만 공격하던 것, 그녀가 본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서야 분열 예식과 파수자의 등대를 보인 것....

결국 마지막까지 패를 숨겼던 아이작의 승리였다.

물론 허점도 많고 납득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하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아이작에게서 뒤늦게서야 막연한 두려움을 품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사실은 아이작에 대한 무수한 상상력을 품게 만들었다.

'공포는 풍부한 상상력에서 비롯되지... 특히 생각이 많은 놈이라면.'

아이작은 일부러 침묵하며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가 어떻게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공략했는지 떠들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녀가 스스로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쪽이 더 나았다.

실제로 우연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이미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다시 만나게 되는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 입힌 타격은 그녀에게 손 하나 잘린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정신적인 충격과 공포는 뇌리에 새겨질 것이다.

아이작이 가까이 다가오자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비명 같은 외침을 토해냈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붉은 성배의 안배는 깊고 넓다. 그녀의 권속은 어디에나 있다! 너는 그중 고작 하나를 허물어뜨렸을 뿐이다!]

"상투적인 소리를 하네."

[내가 돌아온다면...!]

아이작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뭐라고 바락바락 떠들어대는 것을 들으면서 천사란 놈들은 참 죽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오로지 떠들어대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저 상태로도 백 일 동안은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참교육할 무기가 남아있었다. 그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튕겨 냈던 단검, 분열 예식을 주워 들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그걸 보자마자 경련을 하듯 몸을 떨었다.

[너, 너!]

"그래. 네 주둥이를 꿰매줄 바늘이지."

[잠깐...!]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몸을 꿈틀거리며 달아나려 했다. 놈은 뒤늦게 몸을 증발시키며 더 빠르게 소멸하려 했지만 아이작의 손이 더 빨랐다.

콰득. 분열 예식이 그녀의 살을 두 번째로 파고든 순간 하늘을 찢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파드드드드....

붉은 조각들이 마치 도자기처럼 깨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것으로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완전히 지상에서 추방당했다.

아이작은 분열 예식을 수거해 품속에 넣었다.

끝났다. 이걸로 헨드락 성채는 완전히 넘어왔다.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헨드락 성채의 병사들이 성문을 열고 있었다. 르하르트의 병사들은 성벽 아래서 아이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환호? 공포? 아니면 충격?

그들은 모든 것을 목격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가 아이작에 의해 베여 나가고, 마침내 파멸해 쓰러지는 모습을. 그 모습을 목격한 기사와 병사들 사이에서는 아까의 환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마침내 가장 앞에 있던 기사 한 명이 아이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병사들도 천천히 무릎 꿇었다. 소란을 듣고 나온 주민들도,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헨드락 성채의 병사들도, 가장 큰 공헌을 세운 헤사벨도 모두 침묵 속에서 아이작에게 무릎 꿇었다.

아이작은 몸속에 신앙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영웅을 향해 올리는 환호가 아니었다.

경이로운 존재를 향한 경배였다.

***

['붉은 살점'을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붉은 성배' 신앙 기적의 위력이 영구적으로 대폭 상승합니다.]

[기적의 위력이 영구적으로 상승합니다.]

['붉은 예배' 특전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의 대중에 대한 매력이 상승합니다.]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

상황이 정리된 후.

아이작은 성벽 위에서 정리가 진행되는 헨드락 성채를 지켜보고 있었다.

르하르트의 병사들이 헨드락 성채의 병사들을 제압하고 증거물들을 보존했다. 헨드락 성채의 병사들은 이미 기력이 빠진 데다 정신적인 혼란에 빠져 있어서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간호가 필요할 지경이었다.

아이작은 이번 전투에서 얻은 결과물을 정리했다.

'먼저 붉은 살점을 포식한 결과... 붉은 성배 신앙 기적의 위력이 영구적으로 대폭 상승. 이건 기대 이상으로 좋은 성과인데.'

수치적으로 보자면 붉은 성배 신앙의 위력이 대략 20% 정도 강해진 것으로 보였다. 애매해 보일지 몰라도 아이작이 가진 붉은 성배 신앙의 기적인 '붉은 탄원'과 '흡혈' 모두 자주 쓸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큰 상승이었다.

다른 기적들은 10% 정도 강해졌다. 단순히 포식만 했을 뿐인데 이 정도 성과라면 큰 이득이었다.

그리고 추가로 '붉은 예배' 특전은 이번에 얻은 유일한 비전투 능력이었다. 역시 기만과 음모의 천사답게 포식 효과로 대중에 대한 선동 기술 능력이 상승하는 모양이다.

아이작에게는 여러모로 쓸모 있는 특전이었다.

하지만 진짜 성취는 이름 없는 혼돈이 내린 임무를 해결하고 얻은 보상이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 포식'에 대한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이름 없는 혼돈' 신앙의 기적 중 한 가지를 강화 및 조합할 수 있습니다.]

기적의 강화 및 조합.

이 건은 '네임리스 카오스'에서도 극히 드문 보상이었다. 결과물에 따라서는 S급을 넘어선 EX급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은근히 골치 아픈 보상이기도 했다.

'...문제라면 이름 없는 혼돈 신앙 관련 기적이 알려진 게 거의 없어서 조합의 결과물이 뭐가 튀어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건데....'

물론 대략적인 예측은 가능했다. A와 B를 조합하면 AB나 BA 중 하나가 나오지 엉뚱하게 C가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그게 과연 얼마나 효율적일 것이냐가 문제다. 닭 잡던 칼이 소 잡는 칼이 되는 것도 애매하니까.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뭘 강화시킬지는 이미 정해두긴 했지만.'

우선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혼돈의 손길'이었다. 촉수는 말할 것도 없이 아이작이 가장 많이 쓰는 스킬이다. 강화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강화하는 것이 좋다. 문제는 이것을 다른 어떤 능력과 조합하느냐였다.

'당장 급한 문제는 아니니 좀 더 고민해야겠군.'

결과물을 미리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무엇과 조합해도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작은 좀 더 고민해보다가 선택지를 고르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문제가 많았다.

"아이작 성배기사님."

고민 중이던 아이작에게 르하르트가 다가왔다.

르하르트는 아이작과 눈이 마주치자 깍듯이 고개 숙이며 경례했다.

전에도 예의를 지키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이작의 배경인 교단에 보이는 예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아랫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었다.

아이작은 잠시 우쭐해지는 기분을 느끼기는 했지만 오래 즐길 수는 없었다.

겸손한 성배기사를 연기해야 했으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르하르트 백작님."

"아닙니다. 성배기사님. 제가 어떻게 감히...."

당연하지만 아이작이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처치했을 때, 르하르트도 그 모습을 보았다. 천사는 일평생 한 번만 봐도 많다. 그런데 그 천사를 일개 인간의 육신으로 물리치다니. 신화 속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그 일로 르하르트는 아이작을 빛의 법전이 보낸 대행자 내지는 천사 후보 정도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이작은 르하르트의 공손한 태도가 마음에 들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일에 지장이 생기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는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리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예. 이제 성 내부의 시신들은 모두 정리가 끝났습니다. 통로는 아직 복구 중입니다만, 주요 경로는 끝난 상태입니다. 그리고 지하에 감금되어 있던 생존자들을 찾았는데...."

르하르트는 말끝을 흐렸다. 아직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히 아이작을 찾아온 이유가 이 일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무슨 일인지 알지만 모르는 척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카일 헨드락 영주를 찾았습니다. 무슨 짓을 당한 건지 넋이 나간 모습이더군요."

"유감이군요."

카일 헨드락에 대한 처분은 애매한 상태였다.

금전을 횡령하고, 이웃 영주의 병사와 기사들을 공격하고, 성배기사에게 칼을 들이댔으며, 사악한 이교도들로 추정되는 라엘라와 오언을 끌어들인 일... 목이 서너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붉은 성배의 명천사인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그의 영지에 임해 음모를 꾸몄다는 점이었다.

이 모든 것이 '붉은 성배의 꼬드김에 넘어가 조종당했다'라고 하면 변명거리로 지나칠 정도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한낱 인간이 어찌 음모와 계략의 명천사에게 대항하겠는가?

물론 그렇다 해도 영주로서 책임져야 할 몫이 작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책임져야 할지를 누가 결정할 수 있겠는가. 여관에 틀어박혀 있던 르하르트? 뒤늦게 찾아와서 뒷북이나 두드릴 이단심문관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해결한 아이작이었다.

그리고 아이작은 카일에 대한 심판을 미뤄 둔 상태였다.

물론 아이작은 카일을 어떻게 써먹을지 이미 결정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평판을 위해서는 조금 느긋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카일 헨드락은 중요한 증인이니 다치지 않도록 잘 보호 부탁드립니다. 그럼 저는 마저 라엘라의 이단 증거물을 더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곧 이단심문관이 도착한다.

그때까지 아이작은 라엘라가 이곳에서 무슨 꿍꿍이를 꾸몄는지 알아내야 했다.

***

아이작은 라엘라의 방을 뒤졌다.

하지만 성과는 딱히 없었다. 아이작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붉은 성배는 음모와 비밀의 신앙이다. 그중에서도 명천사인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흔적을 남긴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것도 며칠이나 성안에서 수성전을 준비해 왔으니, 꼬투리가 잡힐만한 증거는 모두 파기하고도 남았으리라.

수상쩍은 약재 따위가 있긴 했지만, 결정적인 증거로 삼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분명 여기서 죽치고 있던 이유가 있을 텐데....'

불사 교단과 붉은 성배 클럽은 새 신을 탄생시키기 위한 터전으로 헨드락 영지를 낙점하고 있었다. 칼센 밀터는 사라졌지만, 여기에 터를 잡은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이작은 그 비밀이 뭔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비밀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보물의 내용물은 아는데 보물의 위치를 모르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신 말고 고대신들도 들쑤셔서 깨우고 있었지. 그거랑 관련이 있나?'

불사 교단이 벌이는 일은 새로운 신의 탄생만이 아니다.

그들은 고대신들도 들쑤셔 깨우고 있었다.

천사만도 못한 퇴물들을 깨워서 뭘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으나, 붉은 성배 클럽 또한 그걸 돕고 있다. 어쩌면 라엘라는 이곳에 거점을 마련해두고 고대신의 부활을 준비한 것일 수도 있다.

라엘라의 목적을 단정 짓고 자료를 조사하자 어느 정도 연결점이 나오긴 했다.

라엘라의 방에서 발견된 서류 중에는 로어커스 유통 자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익숙한 지명들이 있었다. 쇠르와 아리엣, 그리고 변방의 몇몇 지역들.

아이작은 게임을 하던 기억을 뒤져서 이 지역들 중 반 이상이 성역이 있는 곳이란 것을 알아보았다.

'고대신 부활을 위한 중계지점을 만들고 있던 건가? 입지가 좋으니 확실히 도움은 됐겠지만....'

어쩌면 로어커스 유통을 이용해서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이동하기 쉽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명천사가 직접 나설 만한 일인지는 확신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자료로 아이작은 어느 지역에서 고대신 부활이 준비되고 있는지 예측할 수 있었다. 이 지역 전부에서 고대신이 부활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이런 정보들을 모으다 보면 목적도 추측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불사 교단도....'

아무리 붉은 성배 클럽이 음흉한 집단이라 해도 불사 교단에 비하면 규모도 힘도 미약하다. 게다가 아이작은 불사 교단이 아리엣 수도원에서 이미 고대신을 부화시키려던 꼴을 직접 목격했다. 그때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그저 경호원이자 배달부에 불과했다.

'그러고 보니 게임이 시작되었을 때 고대신들은 대부분 필드 보스나 네임드 몬스터 취급이지. 잘해봐야 경험치 수준일 텐데 왜 부활시킨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아이작은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고대신 부활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라, 경험치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면?'

아이작은 새로운 가능성을 깨달았다.

'누군가 부활한 고대신을 처치해서 그 힘을 흡수하려는 밑 작업을 하던 중이라면?'

70화. 성인 지정 (1)

고대신 경험치설.

아이작은 이 가설이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실제로 게임에서도 고대신은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그저 그럴듯한 경험치, 아이템 공급원일 뿐이다. 명색이 신이었던 골루와루나 지힐렛을 잡는 것보다 극히 일부 힘만을 사용한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잡는 것이 더 힘들 정도였다.

'그럼 내가 칼센 밀터를 대신해서 고대신을 먹고 있던 건가?'

칼센 밀터는 신이 되려다가 실패했다. 신이 되기 위한 밑 작업으로 고대신들을 사냥하거나 그 힘을 흡수했다면 납득할 수 있었다. 작든 크든 고대신들에게는 흡수할 만한 신성이 남아있었으니까.

그걸 아이작이 가로채고 있었던 것이다.

'불사 교단이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

아이작으로서도 남이 차려 준 밥상이니 고맙게 먹긴 하겠지만, 나중에 탈 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작이 가려 먹을 처지는 아니었다. 고대신은 그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정말 확실한 경험치였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놈들의 계획을 방해하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음모의 배후와 마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하던 대로 하는 게 답이군.'

아이작은 지금 걷는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자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은 라엘라가 왜 하필 헨드락 영지에 있었는지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이것은 카일을 이용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은 밖에 이미 누가 와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라엘라를 무찌른 후, 아이작에 대한 헤사벨의 태도는 한층 더 정중해졌다.

"이번에 복잡한 일이 많이 있었지, 헤사벨?"

헤사벨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이제 헤사벨은 아이작이 하던 거짓말(사실 아이작은 한 번도 스스로 그런 말을 한 적 없지만), 그가 붉은 성배의 명령을 받고 있다던가 붉은 살점의 선지자라던가 하는 착각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라엘라는 그녀에게 모든 진실을 밝혔고, 그녀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꼬드기기까지 했다. 천사의 비호 아래 왈라이카로 돌아간다면 아이작도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헤사벨은 아이작 곁에 남기로 선택하고 평생의 신앙과 가문을 버렸다.

공포 때문에 선택했다기에는 의아한 부분이었다.

"나는 솔직히 네가 라엘라 쪽을 선택할 줄 알았다."

헤사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걸 바라셨나요?"

"아니. 하지만 네가 잡혀간 걸 알았을 때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

헤사벨에게 준 분열 예식은 나중에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그때가 되면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아이작에게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을 테니, 헤사벨의 공격을 무시하거나 얕잡아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설마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그걸 쓸 거라고는 아이작도 생각 못 했다. 심지어 아이작도 헤사벨이 포로로 잡혀 있을 때에는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다른 게 아니라 붉은 살점 때문이었다.

게임 설정상 붉은 성배의 만찬장에 올라가는 살점과 피는 마약보다 지독한 쾌락과 중독성을 가진다고 한다. 성자거나 천사의 비호 없이는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그런데 헤사벨은 그것을 입안에 넣고, 심지어 한참 동안 머금고 있다가 뱉어 내기까지 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조차도 이해 못 할 정도로 기이한 일이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이 성자 수준의 인내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참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떻게 그걸 참을 수 있었지, 헤사벨?"

"그게...."

헤사벨은 곤혹스러운 듯 대답을 망설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대강 그녀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다른 천사가 너를 비호하고 있나?"

헤사벨은 성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천사가 개입했을 수밖에 없다.

***

아이작은 헨드락 성채의 지하로 향했다. 앞에는 헤사벨이 먼저 걷고 있었다.

다른 천사가 개입했냐는 질문에 헤사벨은 허둥대면서도 부정하진 못했다. 이미 그녀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아이작에게 거짓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니까. 헤사벨은 변명 대신 그를 지하로 안내하며 이곳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면서 몇 번이나 함정인가 봉인을 마주쳤지만, 헤사벨은 그 모든 것을 능숙하게 해체했다.

"여기 와본 적 있나? 능숙해 보이는데."

"이건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쓰는 일반적인 함정 술식입니다. 솔직히 조금 낡은 방식이긴 하네요."

"라엘라가 꿍꿍이를 꾸미던 장소인가?"

"예."

아이작은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아리엣 수도원 지하에서 느꼈던 기분이었다.

이내 그 익숙한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긴 지하 계단을 지난 끝에는 반질반질한 새 제단과 붉은 염료로 만들어진 주술진이 새겨져 있었다. 제단 옆에는 커다란 거울이 세워져 있어서 아이작과 헤사벨의 전신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순간 아이작은 이곳이 성역인가 했지만, 어딘가 애매한 느낌을 받았다.

무엇이 부족한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신앙이 부족했다.

"성역을 만들려고 했던 건가?"

"그래."

대뜸 대답한 목소리는 헤사벨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검에 손을 올렸지만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때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헤사벨이 쓰러졌다. 죽은 것 같지는 않고, 마치 전원이 꺼지듯 잠든 것 같았다.

"이쉬밀라는 이곳에 성역을 만들려고 했지. 그러면 일이 좀 더 쉬워질 테니까. 로어커스로 돈을 더 벌어들였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한 것 같더군."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기 때문에 아이작은 곧 출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제단 옆에 세워진 커다란 거울이었다. 그 안에서 거울 속의 아이작이 자기 마음대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이작은 거울 속 자기 자신이 떠드는 모습에 기이함을 느끼며 다가갔다. 거울 속 아이작은 그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아이작은 이런 특성을 가진 천사를 알고 있었다.

붉은 성배의 사자, 메신저, 목소리.

"거울 시녀?"

교만한 왕과 황제, 교주, 영웅들의 앞에 나타나 현혹하고 파탄으로 이끈다는 존재.

붉은 성배의 또 다른 천사인 거울 시녀였다.

"호오, 금방 알아보는군. 역시 소문대로 고결한 성배기사라 매혹이 통하지 않는 건가?"

거울 시녀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미심쩍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외형이 자기 자신과 똑같았기 때문에 '그녀'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거울 시녀는 여성형으로 알려져 있었다.

"자꾸 붉은 성배 쪽과 얽히는데, 그쪽이 나한테 아주 관심이 많은 모양이지?"

"관심이 많아졌다고 해야 정확하겠구나."

아이작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맞설 때와는 다른 의미로 긴장했다. 거울 시녀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맡은 역할이 다르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붉은 성배의 영향력을 더 넓히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면, 거울 시녀는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의지를 관철시키는 역할이다.

즉, 거울 시녀의 관심은 붉은 성배 본인의 관심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붉은 성배가 자기 쪽 천사의 일을 방해했다는 뜻이었다.

'왜?'

"왜 붉은 성배가 자신의 천사를 방해한 거지?"

"더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까."

"더 중요한 일?"

거울 시녀는 거울 너머에서 빙긋 웃으며 바닥에 쓰러진 헤사벨의 뺨을 쓸어내렸다. 아이작은 자신의 모습을 한 그녀가 헤사벨의 모습을 만지는 것을 보고 불편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계획했던 일은 붉은 성배의 더 큰 뜻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만 말해두지. 한 가지 더 명확히 하자면, 붉은 성배께서는 너와 적대하고자 하는 뜻이 없으시다."

아이작은 상대의 의도도 모르는 채 휘둘리는 꼴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혼돈의 눈을 발동시켰다. 주변에 눈치를 볼만한 사람도 없으니 단숨에 강력하게 발동시켜도 상관없었다.

아이작의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자 거울 시녀의 미소가 깊어졌다.

[■■ ■■(EX+)]

[직업: ■■■■(■)]

[능력: ■■■■■■■■■■■■■■]

그러나 모든 정보가 먹칠된 것처럼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천사라서 통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정보를 가리는 술법이 있는 건가?

하지만 아이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어쨌든 천사에게도 능력이 통하기는 한다는 것이 명확해진 것이다.

아이작은 혼돈의 눈에 온 힘을 집중했다.

아이작의 눈동자와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가느다란 촉수들이 흘러나왔다. 보랏빛으로 변한 눈동자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먹물이 지워지듯 가려졌던 정보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거울 시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졌다.

순간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에 금이 갔다.

***

거울 시녀의 모습이 여러 갈래로 조각나 흩어졌다. 아이작이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몰라 멈칫한 사이, 싸늘한 공기가 지하실을 휘감았다.

"집착이 강하군, 성배기사. 좀 더 부드러운 태도로 대화하겠다는 생각은 없는 건가?"

산산조각 난 거울 파편 속 거울 시녀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대화하겠다고 하면 대답해 줄 생각은 있었고?"

"비밀과 기만은 우리들의 직업병이다. 하지만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면서까지 숨길 이유는 없어. 말했지만, 붉은 성배께서는 너를 적대할 생각이 없으시니까."

"그럼 말해 봐."

아이작의 거만한 모습에 거울 시녀는 입술을 씰룩거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나는 굴마르 가의 후계자가 네 곁에 있는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헤사벨이?"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거지."

거울 시녀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붉은 성배의 교세가 얼마나 크다고 생각하나? 붉은 성배를 드러내놓고 숭배하는 곳은 왈라이카 외에는 아무 곳도 없다. 하지만 그건 힘이 부족해서도, 신앙심이 약해서도 아니야. 우리는 너희처럼 드러내놓고 확장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은... 황제의 재상, 부자의 첩, 장군의 참모, 영웅의 이인자, 성자의 제자다. 우리는 이미 세워진 단단한 체계에 기생해 은밀하게 쾌락과 교리를 전파하지. 덕분에 우리는 왈라이카라는 작은 왕국만 있어도 온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아이작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붉은 성배 클럽은 영토라고는 왈라이카라는 왕국 하나만 가지고 있지만 그 영향력은 적지 않다. 라엘라가 그랬던 것처럼 영웅과 왕을 현혹하고 암암리에 조종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니까.

아이작은 그제야 거울 시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헤사벨이... 나한테 붙여놓은 너희의 빨대다?"

"영웅의 이인자, 부자의 첩, 장군의 참모, 성자의 제자처럼 좋은 표현을 내버려 두고 그렇게 칭하고 싶다면, 그래.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거울 시녀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녀의 충성심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너를 고른 것은 오롯이 헤사벨의 의지였으니까. 우리는 그녀의 배교를 방치하고 관대하게 놓아주었을 뿐이다."

즉, 붉은 성배는 아이작이 크게 될 것이라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작이 정말로 그들 말대로 영웅이나 성자 같은 존재가 된다면, 초창기부터 함께 했던 헤사벨은 당연히 크게 우대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이미 그녀는 사도로 대우받고 있으니까.

아이작은 이미 혼돈의 눈을 통해 파편적으로 정보를 습득한 상태였다. 거울 시녀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였다.

"그러면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나를 공격할 때 말리지 그랬어?"

"붉은 살점의 선지자더러 그만두고 그냥 내빼라고? 하하. 반대로 질문하지. 너는 그걸 바랐나, 성배기사?"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멍청한 질문이었군.'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이미 도망치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기어코 그녀를 물고 늘어져 잡아먹었다.

"그러니까... 내가 더 강해지게 만들고, 헤사벨을 심어두기 위해 자기 쪽 천사가 다치는 것을 감수했다 이거네? 그러다 내가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건 그거대로 실망스러운 결과지."

거울 시녀는 느긋하게 말했다.

"붉은 성배의 안배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영웅과 왕의 재목들이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죽었지. 네가 거기서 죽었다면 네 그릇은 거기까지였다는 거다."

극복하기 어려운 아슬아슬한 시련을 안겨 주면서 더 강해질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 거울 시녀의 얼토당토않은 주장이었다. 하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포식할 수 없었다면 확실히 더 강해질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거기서 아이작은 뭔가를 깨달았다.

"설마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나?"

거울 시녀는 크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너의 시련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와 너의 관계를 숨기고, 동시에 네가 더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보물 상자로 남겠지. 그뿐일까. 우리는 네 상상 이상으로 네게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영웅은 시련을 극복할 때마다 점점 더 강해지니까.

아이작은 새롭게 알게 된 이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당혹스러웠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데?'

앞으로도 헤사벨을 옆에 끼고 있으면 붉은 성배의 뒷배를 계속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천사마저도 기꺼이 버림패로 쓰는 붉은 성배의 흉계는 기가 찰 노릇이지만, 어차피 신이란 족속들이 하는 생각이라는 게 다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건 붉은 성배는 아이작의 성장과 성공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이작이 성공했을 때, 곁에 그녀의 편을 세워두는 것뿐이었다.

모르고 당하면 모를까, 안다면 아이작이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이작은 팔짱을 끼고 거울 여인을 바라보았다.

"내 정체는 상관없는 건가?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엄청나게 싫어하던데."

붉은 성배는 이름 없는 혼돈을 싫어한다. 아니, 모든 신앙이 이름 없는 혼돈을 싫어한다. 심지어 인격이 없는 신들조차도 설정상으로는 결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이작은 거울 여인이 자신의 정체를 못 알아봤을 것이란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목격한 것이 있으니까.

그러나 거울 시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중 동맹은 우리에게 흔해 빠진 일이야. 너도 우리를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을 텐데."

뒤통수 조심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뜻이다. 아니, 저쪽은 100% 뒤통수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말이다.

"좋아. 한 가지 조건만 확실해지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아이작도 무방비하게 당할 생각 따윈 없었다.

***

헤사벨은 눈을 떴다.

사방이 혈관과 근육으로 꿈틀거리는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방 중심에는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이 제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헤사벨은 기괴한 풍경에 놀라면서도 본능적인 안정감을 느꼈다.

그녀는 이곳이 아이작이 만든, 아이작을 위한 성역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 차렸군."

아이작이 촉수를 회수하며 다가왔다. 헤사벨은 그가 붉은 성배 쪽과 모든 이야기를 마쳤음을 알고 다시 부복했다. 이후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오롯이 아이작에게 달려 있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를 곁에 두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질문이었다.

"왜 내 곁에 남는 걸 선택했지, 헤사벨?"

가족이나 명예, 쾌락 따위가 아니라?

헤사벨이 붉은 성배에 등을 돌리지만 않았어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작은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헤사벨은 그 질문에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작 님. 다만...."

"다만?"

"저는 이기는 쪽에 붙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평생 동안 배운 것입니다."

71화. 성인 지정 (2)

이기는 쪽에 붙어라.

아이작은 미소를 지었다.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한 대답이었다.

"잘 배웠군."

그걸로 끝이었다.

넌 영원히 내 부하가 될 것이라느니, 편을 잘 선택했다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헤사벨이 그 말대로만 한다면 배신할 염려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아이작은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헤사벨은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면서 물었다.

"거울 시녀를 만나셨나요?"

"그래."

"아이작 님의 거울 시녀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네요...."

헤사벨의 말에 아이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건 왜 묻지?"

"거울 시녀는 상대방의 교만이나 허세를 부추기기 위해 상대의 모습을 본뜨되 훨씬 아름답거나 멋진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아이작 님은 충분히 완벽하셔서... 거울 시녀가 대체 어떻게 고쳤을지 상상이 안 가서요."

"...."

아이작은 하나도 바뀌지 않은 모습이었다고 말하려다가 나르시시즘으로 비칠까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헤사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점의 선지자가 만들던 미완성 성역은 이제 이름 없는 혼돈의 성역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이름 없는 혼돈의 성역은 기괴했지만 헤사벨은 어째선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거울 시녀가 성역을 완성시켜 줬다."

미완성 성역도 만들기 위해 많은 힘과 노력이 들어갔을 텐데 아이작이 홀라당 먹어 버린 것이다.

아이작은 문득 생각난 듯 헤사벨에게 물었다.

"본래 여기서도 고대신 하나를 키울 생각이었다고 하더군."

마치 무슨 가축 기르듯이 말했지만 실제로 아이작의 머릿속에 고대신은 키워 먹기 위해 기르는 가축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가축? 가축이라....'

아이작은 문득 뭔가를 생각해 냈다.

'남들이 키워놓은 고대신을 찾아다니면서 사냥할 게 아니라 그냥 직접 키워서 먹으면 안 되나? 그게 더 효율적이고 헤맬 필요도 없을 거 같은데.'

하지만 말 그대로 짧은 생각이었을 뿐 정말 실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지힐렛 하나도 키우는 데 수십 년이 넘게 걸렸다고 했다. 물론 수도원 지하에서 빛의 법전 영향력 아래 억눌려 있던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고대신을 키우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안 이상, 지힐렛을 이용해서라도 연구해 볼 필요는 느껴졌다.

때마침, 아이작이 자리 잡은 바로 이곳의 주인이 사라진 참이었다.

'역시 여길 먹어야겠어.'

원래부터 영지 일부를 차지할 생각이긴 했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다시 다른 놈들이 탐낼지도 모르는데 빼앗기느니 자기가 관리하는 것이 훨씬 낫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통째로 먹는 게 낫겠다 싶었다.

물론 청빈한 성배기사는 영지에 욕심을 내선 안 된다.

하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물리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농장 몇 개로는 수지타산이 안 맞지.'

성역을 집어 먹으면서 아이작의 감각은 아리엣 수도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헨드락 성채를 중심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기이할 정도로 신성력이 짙게 고여 있었다. 이미 예비된 성지, 언제 역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절대로 자연스럽게 이런 환경이 조성될 리가 없었다.

누군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장소를 준비해 둔 것이 분명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아이작이 꼭 이 영지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산을 넘어야만 했다.

***

얼마 뒤, 말을 탄 일군의 무리가 헨드락 영지로 들어왔다.

아이작은 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들어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헨드락 성채 머리 위를 맴돌기 시작한 갈까마귀 세 마리 때문이었다. 르하르트가 이야기했던 빛의 법전 교단쪽 사람들이 이제서야 도착한 것이다. 이단심문관이 도착하기 전에 갈까마귀가 먼저 와서 관찰하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작은 어딘가 익숙한 기분마저 느꼈다.

'그런데 들었던 것보다 규모가 좀 크군?'

아이작은 성문 앞에서 헨드락 성채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하얀 은갑과 각종 무기들로 중무장한 기사들. 소속을 표시하는 문양은 없지만 성기사들이 다섯 명이나 온 상태였다.

성기사들은 아이작과 마주치자 인사를 나누는 대신 옆으로 비켜섰다.

성기사들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상당히 높은 계급인 듯한 늙은 사제였다. 그때 사제를 보좌하는 듯한 어린 성직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빛께서 앞길을 밝혀주시길. 혹시 아이작 성배기사님 되십니까?"

"맞습니다."

아이작이 겸손하게 대답하자 그는 기쁜 듯 늙은 사제를 돌아보았다. 늙은 사제는 주름진 얼굴로 뭐라 웅얼거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대신 어린 성직자가 대신 전했다.

"후안 리아르 주교님이십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주교?'

아이작은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물론 꽤 고위 성직자가 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주교라면 교황선출에도 관여하는, 백제국 전체에서 10명도 안 되는 지위다.

그제서야 아이작은 이 집단의 구성이 새롭게 보였다.

성기사와 주교, 보조 사제 두명. 뒤쪽을 보니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날렵한 복장의 사람들도 보인다. 아마 이단심문관일 것이다.

'전쟁을 준비하고 왔군.'

충분히 실력 있는 성기사가 다섯 명에, 주교급의 기적이 있다면 이런 시골의 성 따위는 손쉽게 공략할 수 있다. 이미 르하르트의 병사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정말 핵심이 될만한 전력만 챙겨 온 것이다.

'못 받은 빚 받으러 이렇게까지 하나?'

아무리 좀생이 같아도 그렇게까지 할 것 같진 않았다. 주교가 올 것도 없이 성기사 한두 명만 보내도 카일은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성기사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허탈함과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아이작은 그 표정을 보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말에 허둥지둥 인원이 추가된 모양이군.'

물론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나타나자마자 아이작에게 토벌당했다. 즉, 그들에게 전해진 소식도 천사가 나타나자마자 성배기사에게 토벌당했다는 소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기도 하고, 보통 일도 아니니 인원을 추려오는 수밖에.

천사의 등장은 보통 등장 그 자체보다 이후 처리가 더 중요한 사건이다.

어린 성직자가 다시 말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다만 먼저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성채가 아직 정돈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때 후안 주교가 다시 뭐라고 중얼거렸다. 어린 성직자는 다시 말을 전달했다.

"괜찮습니다. 후안 주교님의 요청 사항입니다. 주교님도 여명군 참전 경력이 있으셔서 험한 곳에서 주무시는데 불편해하지 않으십니다. 불경한 존재가 나타난 곳에서 흔적을 먼저 보고 싶으시다는군요."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고 해서 아이작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들이 빚을 받아 내는 것보다 천사 토벌에 더 관심이 많다면, 아이작에게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한 일은 아니었다.

"좋습니다. 들어오시지요."

아이작은 들어오라는 듯 먼저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대기했다. 주교는 손을 모아쥐고 기도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이내 은은한 빛 방울이 번져나가면서 아이작과 무리를 모두 감쌌다.

'파수자의 빛... 저주가 걱정된 모양이군.'

아이작은 그 기적이 뭔지 바로 알아보았다. 다른 신앙의 약한 저주는 아예 차단하고, 강한 저주라 해도 절반까진 차단할 수 있는 기적이었다. 천사는 죽으면서 끔찍한 저주를 남기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당연한 조치였다.

문제는 아이작이 이미 성에서 이틀을 지낸 데다, 안에서는 르하르트의 병사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아이작의 영험한 힘이 저주까지도 쫓아 버렸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주교와 성기사들과는 그런 신뢰 관계가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어린 성직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이작도 별로 불쾌하진 않았다. 그냥 질병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마스크를 쓰고 들어가는 정도의 조심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성기사들을 선두로 주교 일행이 성채 안으로 들어섰다. 뒤이어 갈까마귀를 어깨나 머리에 이고 있는 이단심문관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스치듯 지나가면서도 아이작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은 그러지 않았다. 가장 후열에 서 있던 이단심문관 한 명이 아이작 곁을 지나기 직전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아이작이 올려다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솔데 브란트였다.

'역시 왔군.'

아이작은 이솔데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갈까마귀들 사이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었으니까.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뭔가 수신호를 보냈다. 조금 있다가 따로 이야기하자는 뜻이었다.

***

주교와 성기사들은 아이작이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싸웠던 성벽 위에서 뭔가를 열심히 조사했다. 그 자리에는 아이작도 끼어 있지 못했다. 증언은 나중에 듣고 싶다면서.

"뭔가 의심받는 기분입니다만."

조사가 진행되는 사이, 이단심문관들은 병사들을 붙잡고 당시 상황을 청취했다. 이솔데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병사가 아닌 아이작과 대화 중이었다.

아이작의 말에 이솔데는 작게 웃었다.

"의심이 아니라 기록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다른 신앙의 천사를 직접 목격하고 자료를 수집할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천사를 퇴치한 기록이라니, 정말 손꼽히는 역사니까요."

그 말에 아이작은 조금 더 이해해 보기로 했다. 자신이라도 성배기사가 된 지 6개월도 안 된 애송이가 천사를 물리쳤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봤을 것이다.

'목격자가 많아서 다행이군.'

아이작이 사람들의 눈앞에서 싸운 이유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약화시키기 위함도 있지만, 자신의 위업을 누구나 보고 증언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예전에 게벨의 말을 통해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빛의 법전 핵심에는 음흉한 의도를 가진 자들이 널려 있고, 아이작 그 자신은 네필림이라는 그닥 떳떳하지 않은 혈통에 이름 없는 혼돈이라는 사악한 신을 몸에 품고 있다. 누군가 그의 정체를 알아낸다 해도 버티기 위해서는 최대한 좋은 평판을 얻어 둬야 했다.

이것이 아이작이 마음 놓고 촉수를 쓸 수 없는 이유기도 했다.

"그나저나 정말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퇴치한 게 맞습니까? 스스로 물러나게 한 게 아니라?"

"예."

"믿을 수 없군요...."

이솔데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다 그녀는 허겁지겁 변명하듯 말을 꺼냈다.

"아, 정말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놀라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붉은 성배 클럽의 천사들은 도망치는데 서슴없어서 퇴치당한 기록이 전혀 없으니까요."

천사를 물리치는 것과 천사를 퇴치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후자는 본체까지 타격을 줄 수 있는, 어찌 보면 신앙 그 자체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니까.

"그래서 주교님과 성기사들도 이곳에 출현한 것이 정말로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맞는지, 아니면 도망친 것을 퇴치한 것으로 착각한 게 아닌지 그런 것을 알아보러 온 것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이단심문관님들이 저를 굉장히 노려보던데요."

"아... 다소 까탈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거든요."

이솔데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까탈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

"예. 여기 나타난 게 정말로 붉은 살점의 선지자고, 아이작 님이 그걸 단신으로 퇴치한 것이 사실이라면... 음."

이솔데는 잠깐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했지만 결국 스포일러의 즐거움을 참지 못한 듯 입을 열었다.

"아이작 님이 성체인지 확인한 후, 성인(聖人)으로 추대할 생각입니다."

72화. 성인 지정 (3)

'성인?'

아이작은 살짝 경직되었다.

이솔데는 경사스러운 일이라는 듯 말했지만 아이작에게는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성체까지는 괜찮다. 아이작이 성체라는 것을 숨기려던 것은 그가 빛의 법전이 내린 성체가 아니라는 점도 있지만, 당시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를 지킬 힘도 있고 명성도 쌓이고 있다. 이젠 일방적으로 휘둘릴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인은 다르다. 최대한 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스타 성배기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성인은 너무 나가는 것이다.

성체는 신의 가호를 내려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성체가 그 능력으로 무엇을 하든 신은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성인은 인간이 신에게 추천하는 사람이다.

즉, 사람만이 아니라 신들에게까지 주목받게 된다.

정확히는 신이나 천사들 앞에 내보내 놓고 '이 인간을 보아라! 굉장하지? 뭔가 날개 하나 달아주고 싶지 않니?'하면서 둥기둥기 띄워 주는 것에 가깝다. 당연히 천사나 신의 관심을 받게 될 텐데, 비밀이 많은 아이작으로선 그런 관심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성인으로 지정되면 유리한 것도 많겠지만 지금은 곤란해.'

아이작이 머리를 복잡하게 굴리는 사이, 문득 한 가지 의문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겸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가 성인이라니요. 그저 운과 가호가 따라주었기 때문에 일어난 요행에 불과합니다. 성인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지정되겠습니까?"

"아, 제가 앞서 말했네요.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해 후보로 건의할 예정입니다. 당연하지요. 이 자리에서 바로 성인으로 지정할 수는 없으니."

이솔데의 해맑은 말에 아이작은 안도하면서도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성인이 되는 것과 후보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성인 후보는 1년에 대륙 각지에서 서너 명씩 언급되니까.

하지만 안도하는 아이작의 마음을 찍어 누르듯 이솔데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천사 퇴치는 대단한 업적 아니겠습니까? 주교님까지 직접 오셔서 검증할 정도라면 교단에서도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긴 합니다."

"...."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지방 귀족들이 자기 명성을 드높이려고, 혹은 시골 촌뜨기들이 착각한 기적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시도는 없잖아 있다. 그들에 비하면 아이작은 진짜 업적다운 업적을 세우긴 했다.

하지만 성인으로 지정되는 데에는 진짜 업적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성체는 신의 일이지만 성인 지정은 인간의 일이다.

즉, 정치적인 상황과 당사자의 입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작은 이 성인 지정 사태의 내막을 들여다보기 위해 애썼다.

'교단이 급히 성인을 지정하려고 한다? 여명군의 간판으로 쓰기 위해? 쓸만한 성기사를 붙잡아 두려고? 아니야.'

가장 최근의 성자는 칼센 밀터였는데, 마무리가 참혹했다. 교단으로서는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즉, 더러워진 성인이라는 칭호를 서둘러 덮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이유는....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교단이 황제와 기 싸움을 벌이는 거군.'

사태의 본질은 아이작이 정말 성인감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빛의 법전은 게르토니아의 황제인 발트제메르와 균형을 맞출 저울추를 찾고 있었다.

***

아이작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교단 사람들이 조사를 진행하는 동안 방에서 궁리를 시작했다.

백제국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는 게르토니아 제국은 빛의 법전을 숭배한다.

이 세상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게르토니아도 신앙의 권력이 막강하며, 황족이나 귀족도 교단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하지만 현 황제, 발트제메르가 등극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지....

현 황제 발트제메르는 성체다.

머리 위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뿔과 말도 안 되는 용력, 부여받은 막강한 기적들이 증거였다.

발트제메르는 제국 내부 권력투쟁을 순식간에 끝내고 황제가 된 뒤, 빛의 법전에 과도하게 기울어져 있던 권력 구도에 균형을 가져왔다.

빛의 법전 쪽은 당연히 불만이 많았지만 심하게 따질 수는 없었다.

'단순한 황제가 아니라 성체니까.'

성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의 의지가 육신을 가지고 형상화된 존재다. 그 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육신에 투사된 신의 의지도 강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발트제메르는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기적의 보유자였다.

이렇게 노골적인 신의 의지를 교단이 함부로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황제 역시도 교단의 힘을 과도하게 힘을 뺄 수는 없었다. 결국 그가 가진 힘 역시 빛의 법전에 대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덕분에 기묘한 균형이 이뤄진 게 현 백제국의 정치적 구도였다.

'그 와중에 붉은 성배의 천사를 퇴치한 성배기사가 나타났고, 어쩌면 성체일지도 모른다? 이건 진짜 성체건 아니건 무조건 성인 감투를 씌우려고 들겠군.'

아이작은 상황을 파악하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교단은 아이작을 황제에 맞설 상징으로 삼고 싶어 한다.

그 말인즉, 황제와 귀족들로부터 온갖 견제를 받는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출세하기야 하겠지만, 귀족들이 아이작의 약점을 찾으려고 혈안이 된다면 그의 소중한 '비밀'이 들킬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교단이 아이작을 적극적으로 보호해 줄까? 그럴 리 없다. 오히려 나서서 싸우라 채찍질할 테고, 촉수가 들키면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발트제메르 황제 그 자체가 문제다.

'발트제메르... 빛의 법전 쪽 최종보스라고 해도 될 존재지.'

게임상에서 불사 교단의 최종 보스는 불사 황제 베셰크다. 하지만 베셰크는 신이기 때문에 예외를 둔다면, 칼센 밀터가 최종보스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반대편인 발트제메르는 빛의 법전 쪽의 최종 보스다.

칼센을 잡아먹은 아이작이지만, 우연한 요행, 그것도 칼센이 불사 교단의 대전사로서 완전히 각성하기 전의 일이다. 발트제메르는 여명군이 시작되어 끝나는 시기까지 전성기를 누리고 있으니 지금 아이작으로선 범접도 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아니, 잠깐. 이거 잘만 이용하면...?'

순간 아이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교단과 황제의 갈등.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자신.

'이거 내가 꽃놀이패를 쥐고 있는 거 아닌가?'

둘 사이에서 잘만 줄타기를 한다면 기존 계획보다 훨씬 큰 이득을 취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 아이작에게 의지가 전해져왔다.

헤사벨이었다.

[중앙 귀족들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아이작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적절한 반대편 저울추가 도착한 것이다.

***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헨드락 성채 문 앞을 두드렸다. 말발굽 소리를 들은 르하르트와 병사들이 서둘러 성문 앞으로 나갔다. 먼지구름 속에서 급하게 멈춰선 자들은 한 무리의 기병들이었다.

"르하르트? 르하르트 백작!"

먼지투성이가 된 기병들 사이에서 남다른 덩치를 가진 여자가 뛰어내렸다. 화려한 갑옷처럼 보였지만 뒤집어쓴 엄청난 먼지 때문에 갑옷은 낡고 바래 보였다.

르하르트는 뛰어내린 여자를 보고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옹 후작님? 왜 이렇게 일찍...."

"성배기사님은 어디 계신가! 아직 안에 계시겠지?"

여자는 인사할 여유도 없다는 듯 서둘러 아이작부터 찾았다. 그녀는 아직 얼떨떨해하는 르하르트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와 곁에 있는 호위 기사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이분인가? 이분? 아니면 저분?"

"여기 이분입니다."

르하르트는 그녀가 무례를 저지르기 전에 서둘러 아이작을 소개했다.

후작은 아이작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있는 말을 숨기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엄청나게 어리군! 게다가 잘생겼고!"

"아이작입니다."

아이작은 이 정신없는 사람 대신 침착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뒤늦게서야 그녀도 정신을 차리고 예의를 차렸다.

"델리아 리옹이오. 성배기사님! 이번에 대단한 업적을 이루셨다고 들었소!"

델리아는 먼지투성이 손으로 아이작의 손을 덥석 쥐고 정신없이 흔들었다. 그녀는 뒤늦게서야 자신의 무례를 다시 깨닫고 옷에 손을 문질러 닦았지만, 그녀의 옷도 먼지투성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뒤늦게 달려온 시종이 손수건을 주고서야 제대로 닦을 수 있었다.

"급히 오신 모양입니다."

아이작이 듣기로 중앙에서 사람이 오는 것은 나흘 뒤였다. 교단에서도 빨리 온 편이지만 이 정도면 중앙은 목숨 걸고 뛰어오기라도 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델리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그럴 수밖에! 여기 그 노망난 노친...."

뒤에서 시종이 급히 끌어당기고서야 델리아는 말을 멈췄다.

아이작은 이 할 말 다 하고 사는 귀족이 대체 어떻게 치열한 암투가 벌어진다는 중앙에서 살아남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 그 노망난 붉은 성배의 천사가 여기서 난동을 부렸지요. 옳은 일을 위해 이렇게 서둘러 와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아이작이 적당히 수습해 주자 델리아의 눈에 호기심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작은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방금 그녀가 했던 말이 말실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 많고 호방해 보이는 것도 어쩌면 눈속임일지도 모른다고.

"원래 용병대도 모집하고 정찰도 진행하면서 올 생각이었기에 기간을 넉넉하게 잡았던 것이오. 그런데 오는 도중 천사가 나타났다느니, 성배기사가 물리쳤다느니, 교단 사제들이 몰려갔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들리더군. 그래서 내 호위들만 거느리고 달려왔소."

아이작은 그녀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는지 이해했다. 공성전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몸만 온다면 기한은 대폭 줄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평범한 거리는 아니었던 건지 그녀와 함께 온 기사들과 귀족들은 금방이라도 말에서 떨어져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쌩쌩하게 떠드는 것은 델리아 뿐이었다.

"이럴 것이 아니라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좀 먹고 천사가 뒈진 자리도 좀 구경하고!"

델리아가 앞장서 들어가자 르하르트가 서둘러 따라붙었다.

"먼저 씻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죽은 게 아니라 추방된 것이라고...."

"그거나 저거나!"

아이작은 성문 안으로 사라지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재밌군.'

교단의 사제들도, 중앙 귀족들도, 애당초 카일 헨드락에게서 빚을 징수하러 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지금은 그게 뒷전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물론 빚을 받아 낼 자신이 있으니 그다음 수순으로 바로 넘어가려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제일 중요한 관심사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일단 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뭘 뜯어낼 수 있는지부터 볼까....'

성인으로 지정되는 것은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

헨드락 성채는 곳곳이 변형되거나 아직 치우지 않은 곳이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시설은 아직 쓸 만한 상태였다.

회의실 겸 예배당으로 쓰이는 공간이 대표적이었다. 신실하진 않아도 카일 역시 빛의 법전 신자였기 때문에 예배당엔 붉은 성배의 힘이 큰 영향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빛의 법전 쪽 후안 주교와 중앙 귀족의 델리아 후작이 마주쳤다. 대충이나마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온 델리아는 후안을 보자마자 뒤틀리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누르는 모습을 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후안 리아르 주교님. 부족한 신자 델리아 리옹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바로 후안 주교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앞길이 밝아 만나게 되었습니다. 델리아 후작님."

여전히 후안이 뭐라고 웅얼거리자 어린 사제가 대신 전해 주었다.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는 듯해 보였지만 아이작은 이들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

다른 성기사들, 그리고 델리아와 함께 온 귀족들 사이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팽팽한 긴장감의 중심에 아이작이 있었다. 아이작은 자신이 위태로운 상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관심이 집중된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긴장의 끈을 끊는 것도, 그 위에서 몸을 튕기면서 노는 것도 전부 자신의 결정에 달린 일이었다.

아이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 여러분. 사안이 시급하니 우선 중요한 일부터 처리하지요."

"중요한 일?"

델리아와 후안의 시선이 집중되면서 긴장감이 한층 더 팽팽해졌다.

아이작은 오싹한 관심을 즐기면서 입을 열었다.

"예."

아이작은 예배당의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헨드락 영지를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73화. 성인 지정 (4)

예상과는 다른 말에 사제들과 귀족들, 모두 당혹스러운 표정을 했다.

"영지요?"

"예. 다들 카일 헨드락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러 온 것 아닙니까?"

그건 사실이다. 그들이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는 애당초 카일 헨드락이 돈을 떼먹으려는 정황이 있어서였다. 협박을 해서라도, 그게 안 된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로어커스 사태로 잃은 금전을 만회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나타나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참살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교단 측은 아이작을 어떻게든 교단의 상징인 성인으로 만들어야 했고, 중앙 귀족들은 그걸 막아서 다시 또 균형이 교단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저지해야 했다.

둘 다 빌려준 돈 떼먹히는 것보다는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처분할 만한 가치의 물건이 남아 있긴 합니까?"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차분한 인상의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아이작은 그가 중앙 귀족들과 함께 왔지만 출신이 다른, 북부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복장을 보아하니 배를 타는 상인 같았다.

"성함이?"

"에이단 베어베크. 북해 상단 대표로 왔습니다."

역시나 상인 출신이었다. 아이작은 그에게서 바다 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영지 처분은 나중에 차근차근 해도 되는 거고."

그때 델리아가 큰소리로 북부 상인의 말을 끊었다.

"여기서 천사가 뒈졌다는데 지금 영지가 문제인가? 카일 헨드락, 그놈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배교했는지, 아니면 유혹당한 건지 알아보고! 여기서 얼마나 나쁜 놈들이 연루됐는지도 알아보고! 싹 다 정리한 다음 진행해도 될 일이지!"

델리아가 호호탕탕하게 바른말을 하긴 했지만, 찬동하는 귀족들은 그다지 없어 보였다.

아이작은 그들 사이에서도 셈법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델리아는 대귀족이라 돈 몇 푼 잃어도 상관없지만 따라온 귀족들 중에서는 당장 빚을 돌려받지 못하면 파산할 정도로 투자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에이단 베어베크도 그런 부류 중 하나로 보였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따라왔겠지.'

하지만 델리아는 돈보다 아이작이 성인이 되는 것을 견제하고 싶을 것이다. 어쩌면 다소 아이작의 업적을 폄하하거나 험한 수단을 써서라도 교단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들겠지.

하지만 때문에 아이작은 그녀의 이용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다. 성인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은 아이작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대놓고 의도를 드러내기 쉽지 않은 아이작에게 델리아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런 사소한 것보다 천사의 영향력과 배후가 누구인지를...."

"맞습니다. 사소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영지를 어떻게 처분할지 먼저 결정해야 합니다."

아이작의 단호한 말에 델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귀족들도 호기심을 보이는 눈치였다. 델리아 역시 중앙 귀족이었기 때문에 다른 귀족들의 의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큰 손해를 본 것은 델리아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성배기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십니다."

후안 주교를 대리하는 어린 사제가 말했다. 교단 측의 의견까지 모이자 모두의 시선이 아이작에게로 쏠렸다.

"왜 지금 이 영지를 처분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까?"

에이단의 말에 아이작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 이 영지 전체가 붉은 살점의 선지자에게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

그날 저녁.

긴 회의와 토론, 약간의 신경전까지 벌어졌지만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한 채로 끝이 났다. 회의를 마친 델리아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퇴치했다는 성벽 위에서 그 흔적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따라온 르하르트에게 말했다.

"여기서 천사를 죽였단 말이지."

"예. 저도 봤습니다."

들으나 마나 한 말이었다. 이미 목격자가 마을 주민까지 포함해 수백 명은 되는 상황이었다.

여명이 밝아 오기 직전 가장 어두운 시각, 영지를 파탄시킨 마녀가 성배기사와 맞서고, 마침내 참혹한 본색을 드러낸다.

그러나 위기에 빠진 순간, 때에 맞춰 여명과 함께 각성한 성배기사는 사악한 천사를 베고 쓰러뜨린다....

델리아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르하르트 백작. 나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무슨 농담하는 줄 알았네. 수백 년 전 엘릴 장군이 전설을 쌓던 시절에나 있을법한 묘사 아닌가. 너무 구닥다리에 극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나?"

"극적이지요. 하지만 제가 목격한 일이기도 합니다."

델리아는 함부로 꺼내기 힘든 이야기지만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성배기사가 음모의 배후일 가능성은?"

"어떤 음모 말입니까?"

"천사를 제물로 삼아 백제국 측의 핵심으로 파고들 계획이라던가... 아니다. 이건 너무 갔군."

델리아는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하도 극적인 데다 어떻게든 업적을 폄훼할 생각을 하다 보니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아무래도 아이작이라는 성배기사가 새로운 전설을 쌓은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래서 속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기껏 황제가 만들어 놓은 균형이 아이작이라는 새로운 성인이 나타나면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이작이 말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영지가 천사에게 저주받았다고?"

천사가 퇴치당하면서 저주를 남기는 건 흔한 일이다. 때문에 델리아도 그것을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이작이 퇴치한 게 천사가 아니었다면 더 좋겠지만, 만약 천사라면 정말 저주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아이작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헨드락 영지는 천사에게 저주받았다.

저주의 실체는 당장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서서히 그 징후를 드러낼 것이다.

당장 어떤 물건이나 땅, 자산이 저주에 물들었을지 모른다. 당장 이 저주부터 정화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 영지의 나무토막 하나 함부로 처분하기가 힘들다.

처분한다 해도 제값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나?

영지민들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는 누가 책임지고 이 문제를 해결할지부터 정해야 한다.

아이작의 말을 들은 사제들과 귀족들 모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아이작이 천사를 퇴치했다는 사실과 남겨진 헨드락 영지의 재산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차후 누가 이 저주에 물든 영지를 책임질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성배기사는 성배기사라는 건지...."

저주에 고통받은 영지민들의 괴로움에 비하면 정말 천사를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는 중요하지도 않다는 아이작의 태도에 델리아도 다소 감명받긴 했다.

하지만 그녀도 자기 역할에 충실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정말 새로운 영웅이 탄생했다면....'

델리아는 아이작이 천사를 퇴치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수백 명이 되는 상황에서 어깃장을 놔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이작을 황제파로 끌어들여야 하나? 델리아는 그것도 어렵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들려온 바로는 아이작은 숭고한 성기사 그 자체였다. 그가 교단으로 흘러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실제로 만나보니 약간 미묘한 부분이 있긴 한데, 그게 뭔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었다.

"르하르트 백작, 자네는 그 저주의 증거를 본 적 있나?"

"아직까지는 없습니다만... 하지만 성배기사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델리아는 르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르하르트는 변방 귀족이지만 델리아에 줄을 댄, 황제파 충성 귀족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아이작이라는 성배기사에게 푹 빠진 것처럼 보였다.

아이작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면 칭찬 일색이었다.

"뭐, 아직 저주의 내용이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걱정해 봤자 소용없겠지. 일단 내일부터 교단과 머리 박으면서 협상을 해봐야겠군."

"후작님. 혹시 모르니 오늘은 이걸 가지고 주무십시오."

르하르트가 델리아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하얀 조각에 빛의 법전 문양이 새겨진 일종의 부적이었다.

"크게 영험한 부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축성을 받은 물건입니다. 제 부인이 안전을 기원하며 몇 개 챙겨줬는데 하나 드리겠습니다."

"고맙군."

천사의 저주에 이 소박한 부적이 얼마나 영향력 있을지는 몰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델리아는 이 부적을 보면서 왠지 의욕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가능성은 낮아도 일단 아이작을 꼬드기는 것이 그녀가 할 일이었다.

델리아는 아이작이 자신의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 생각했다.

새벽이 되기 전까지는.

***

새벽.

델리아는 문득 무언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완전히 깬 것은 아니고 청각만 깨어난 상태였다.

[...에서 죽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속삭임에 델리아는 비몽사몽인 상황에서도 빠르게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순간 손등에서 따끔한 통증을 느낀 델리아는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기다린... 어둠 속에서, 다시 깨지 않을 당신을....]

순간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도 커졌다.

마치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도문을 외우는 듯한 소리였다. 델리아는 그 불길하고 불경한 소리에 섬뜩함을 느꼈다.

따끔함을 느낀 손등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어두웠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밀도 높은 어둠이 그녀의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주.'

순간적으로 델리아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그녀는 급히 베개 밑의 단검을 챙겨 들었다. 단검을 뽑아 들자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어둠을 물렸지만, 그래도 손이 겨우 보일 정도의 밝기밖에 되지 않았다.

"꺼져라!"

델리아는 발광하듯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둠은 베이지 않았다. 그제야 델리아는 자신의 손등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작은 이빨 자국이었다.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물었으면 딱 적당할법한 크기.

그런 이빨 자국이 손등을 따라 팔까지 나 있었다.

"윽, 아!"

뒤늦게 델리아는 온몸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상처를 입힐 정도는 아니지만 따끔할 정도의 통증이었다. 델리아는 황급히 옷을 들춰보았다.

온몸에 이빨 자국이 가득했다. 마치 수백 명의 무리가 그녀의 몸을 물어뜯으려 한 것처럼.

[아아! 박피된 신들의 가죽을 입은 그가!]

"아아아아!"

다시 기도문 소리가 들려오자 델리아는 발광하듯 날뛰며 단검을 휘둘렀다. 방 안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수고 찢어발기던 그녀에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옹 후작님! 리옹 후작님!"

델리아는 눈을 번쩍 떴다. 다 부서진 잔해 너머에서, 문밖에 르하르트와 귀족들이 경악하는 표정으로 델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델리아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방안을 가득 메웠던 어둠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빨 자국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창백한 표정으로 귀족들에게 말했다.

"다들 모이라고 해. 당장."

델리아는 지시를 내린 뒤 무너지려는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책상에 손을 짚었다. 그때 그녀의 손끝에 무언가 닿았다.

르하르트가 준 부적이었다.

새하얗던 부적은 새까맣게 타서 문양은 보이지도 않았다.

***

델리아의 방에서 벌어지던 소동을 지켜보던 아이작은 방에 심어 두었던 촉수를 거둬들였다.

'역시 사람 정신병 걸리게 하는 데에는 저 너머의 색채가 답이군.'

아이작은 델리아와 그녀의 부하들 몇 명에게 저 너머의 색채를 뿌려 두었다. 환청, 환각에 시달리게 하는 시커먼 어둠을 뿌리는 이 능력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의 정신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물론 저주의 실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긴 하겠지만, 저 너머의 색채는 흔적이 남는 능력이 아니었다. 뭔가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 다음 단계로 나가볼까.'

74화. 성인 지정 (5)

꼭두새벽에 벌어진 소란은 아침까지 이어졌다.

귀족들과 기사들을 소집한 델리아는 초조하게 식당을 서성였다.

"기사들은? 귀족들은 모두 모였나?"

"그게 아직 안 깬 사람들도...."

델리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문을 부숴서라도 당장 모이라고 해!"

델리아의 예민한 반응에 귀족들은 술렁였다.

그녀는 그런 귀족들의 반응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아서 마음을 억눌렀다.

그녀는 어둠과 환각, 환청을 처음 봤을 때 착란에 빠졌었다. 그녀의 난동을 알아차린 호위들이 달려온 덕분에 착란에서는 벗어났지만, 난장판이 된 그녀의 방은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지금은 상대적으로 안정을 찾았지만, 그렇지 못한 귀족들도 있었다.

식당 한구석에는 모포를 뒤집어쓴 채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떨고 있는 귀족도 있었다. 그녀와 함께 먼지투성이가 되어 말을 타고 달렸을 정도로 강단 있는 귀족이었다. 옆에는 여러 차례 구토를 하다가 탈진한 귀족, 이빨 자국이 난 피부를 피가 나도록 긁다가 붕대로 둘둘 싸매고서야 멈춘 기사도 있었다.

델리아 정도라면 아주 양호한 상태였던 것이다.

"역시 저주일까요?"

한 귀족이 델리아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주....'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머리 깊이 박혀 있는 단어였다.

성배기사 아이작은 이미 저주에 대해 경고했다. 하지만 빛의 법전 사제들도 머무르고 있고, 르하르트도 별일 없다고 했었으니 안심하고 머물렀을 뿐이다.

"나 혼자 겪은 일이 아니니 그럴 확률이 높겠지...."

천사가 남기는 저주의 종류는 다양하다. 신학에 지식이 없는 델리아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외에는 설명할 방법도 없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오?"

후안 주교와 온 성기사 중 하나가 식당에 들어섰다.

"아침 예배를 드릴 시간에 이런 소란이...."

그는 뭐라고 하려 했지만 델리아가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자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델리아는 성큼성큼 성기사에게 다가가 삿대질하며 물었다.

"그쪽은 아무 일도 없었소? 사제가 몇 명이나 있었는데 이런 저주도 어쩌지 못하는 거요? 심지어 주교님도 계시는데? 이단심문관은 멋으로 따라왔소?"

"무슨 망발을...."

성기사는 얼굴을 붉히며 화내려 했지만, 상대는 후작이었다. 성기사가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봉신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밤새 저주에 시달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란 말이오!"

그제야 성기사는 식당 구석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저주의 후유증으로 허덕이는 사람들. 성기사는 머뭇거리다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주교님께 보고드리고 다시 오겠습니다."

***

잠시 뒤 교단 쪽 사제들과 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밤사이 저주에 시달린 사람들은 모두 7명. 모두 중앙 귀족 측 사람들이었다. 사제들은 델리아를 비롯해 저주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치료와 안정의 기적을 내렸지만 착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사제 중 한 명이 델리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말에 델리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단 말이오? 심지어 나도 걸렸던 것을?"

그녀의 거센 어투에 당황한 사제는 주눅이 든 듯했지만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악몽 자체가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착란 증세들은 그저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보이는 것뿐이지요. 만약 저주 때문이라면 증세가 모두 동일해야 하는데 리옹 후작님도 그렇고 모두 증세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 말은 옳았기 때문에 델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저주의 증거라고 내세우려고 했던 이빨 자국은 벌써 다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 한날한시에 우연히 악몽을 꿀 리는 없으니, 저희들도 저주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아직 별다른 흔적을 찾지는 못했으나, 천사가 추방당하면서 얌전히 물러났을 리는 없지요."

"크흠...."

델리아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주 때문에 놀라고 당황하기는 했으나, 이게 천사가 추방당하면서 남긴 저주가 맞다면 아이작은 정말 큰 업적을 세운 셈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목적인 아이작인 성인 지정 저지는 한층 더 어려워질 터였다.

그때 아이작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아이작은 침중한 표정으로 델리아에게 사과했다.

"제가 부족한 실력으로 천사에 손을 대 후작님께 불경한 기운이 찾아들었군요. 사과드립니다."

델리아는 깜짝 놀라 그의 사과를 막았다.

"아닙니다. 성배기사님. 이게 어떻게 아이작 님 잘못이겠습니까. 제게 믿음이 부족하여 약한 마음을 가진 탓에 사특한 것이 스며든 것이지요."

델리아의 말에는 어느새 존경이 담겨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아이작이 천사를 퇴치하는 업적을 세운 것은 분명해 보였다. 비록 그녀 입장에서는 난처한 존재였지만 존경해 마땅한 성기사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곤란하군요. 이대로 저주가 계속 이 땅에 남는다면 영지민들도 불안해할 겁니다. 저주받은 영지가 되어 버려질 수도 있겠군요."

델리아는 아이작의 말에서 뭔가를 느꼈다. 어렴풋이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당장 꺼내기에는 힘든 발상이었다. 왜냐면 이 자리에는 그녀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시선이 쏠리자 후안 주교와 어린 사제가 입을 열었다.

"밤사이 이 성에 불경한 어둠이 찾아들었습니다. 신도님들. 후안 주교님께서는 이후로 성에 축성을 내려 저주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매일 해야 하는 일이라 임시방편이긴 하나, 머무는 동안은 불편함이 없으실 겁니다."

귀족들 입장에서는 감사한 조치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저주에 대해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기들에게만 보호의 기적을 내린 탓에 자신들만 저주에 시달린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귀족들만 저주에 시달린 것이 바로 그 증거라면서.

"그리고,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단심문관들의 조사와 목격자들의 증언, 사제들의 조사를 통해 아이작 성배기사가 이곳에서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퇴치한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는 명실상부한 빛의 법전께서 눈여겨보실 만한 업적입니다."

귀족들과 사제, 그리고 성기사들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아이작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작이 진영에 상관없이 엄청난 위업을 세운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미소조차 짓지 않고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 후안 주교님께서는 이 조사 결과를 중앙에 보고드리고 성인으로 지정할 것을 요청드릴 예정입니다."

델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조사 결과가 그대로 교황에게 전달된다면 아이작이 성인으로 지정되는 것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물론 아이작 님이 성체인지에 대해서도 확인해 봐야겠으나...."

쿵. 그때 성을 흔들리게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무슨 소리지? 나가서 확인해 봐라."

델리아가 말하기도 전에 기사들과 성기사들이 먼저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을 열고 나간 그들 앞에 커다란 돌덩어리가 튀어 올랐다. 굉음과 함께 식당 안까지 돌덩어리가 굴러들어온 순간 귀족들 머리에 스친 것은 '공성전'이라는 단어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칼을 빼 들며 나가려던 그들에게 앞서 나간 기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트롤입니다!"

***

[트롤들을 움직이겠습니다.]

아이작은 헤사벨에게서 전해지는 의지에 작게 긍정의 메시지를 보냈다. 성벽을 타고 올라온 트롤들은 귀족들과 사제들이 모인 식당 입구를 향해 커다란 돌덩어리들을 내던졌다.

'역시 말을 잘 듣는군.'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면서 헤사벨이 붉은 성배로부터 받은 능력이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트롤들은 붉은 성배 클럽에서 키우는 파수견 같은 존재였고, 헤사벨도 다룰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능력은 헤사벨이 붉은 성배 클럽에서 배교한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쾅! 돌덩어리에 맞을 뻔한 성기사는 잇소리를 내며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계단을 타고 뛰어 올라오는 성기사를 향해 트롤이 돌덩이를 던졌다. 하지만 돌과 맞닿는 순간 성기사가 내뿜는 오러가 더욱 강해졌다. 돌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를 노린 돌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텅, 터텅!

연달아 던져진 돌덩이에 성기사가 휘청거리다 균형을 잃고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바로 그 곁을 스치며 아이작이 뛰어 올라갔다. 성기사를 노렸던 돌덩이가 아이작의 정면을 향해 떨어졌다. 아니, 사실 아이작이 돌덩이를 향해 뛰어든 것에 더 가까웠다.

까드드득, 쾅!

아이작은 갑옷의 어깨 부분으로 돌덩이를 스쳐 보냈다. 성기사처럼 갑옷을 감싼 오러는 없었지만, 내부를 감싼 촉수들이 충격을 경감시켜 주었다.

'역시 점령한 성역 안에서는 갑옷 자체의 방어력도 올라가는군.'

순식간에 성벽 위에 다다른 아이작은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까드드득! 그러나 검은 불쾌한 소리를 내며 트롤의 피부를 거칠게 긁어냈다. 트롤은 피가 튀어 오르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의 결전으로 기적이 마모된 심판의 검은 더 이상 삿된 것들을 불태우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정도 상처는 트롤에게 긁힌 정도의 흉터밖에 남기지 못할 것이다.

[퇴각시키겠습니다.]

"우우우! 아아아!"

트롤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올라왔을 때처럼 성벽을 타고 내려갔다. 뒤늦게 다시 계단을 타고 올라왔던 성기사는 허탈하게 도망치는 트롤들을 내려다보았다. 뛰어내려서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산속에서 고립된 상태로 다수의 트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성기사라 해도 무모한 일이었다.

트롤들이 헤집고 지나간 성벽과 안쪽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사제들과 귀족들은 황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오?"

한 귀족의 말에 아이작은 시치미를 뚝 떼며 입을 열었다.

"트롤은 붉은 성배의 개라지요. 아마 저주에 이끌려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이작의 말에 사제들의 표정도 안 좋아졌다.

"괴물들이 이끌릴 정도라면 상당히 강한 저주라는 것인데...."

"게다가 트롤이라면 저주의 영향권이 상당히 넓을 수도 있겠군요."

빛의 법전이 가진 기적의 힘과 트롤의 재생 능력은 상극인 탓에 대부분의 트롤들은 깊은 산 속에서나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헨드락 영지 자체가 산골에 있긴 했지만, 그래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사제들의 착각이었다.

이미 일대에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호위 병력을 겸해 모아 놓은 트롤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정작 놈들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당할 때 도움을 주지 못했고, 개중 몇몇은 헤사벨의 개가 된 상태였다.

"이 상태로는 성인 지정이 어려울 것 같군요."

델리아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후안 주교를 향해 말했다. 후안 주교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천사 퇴치는 물론 훌륭한 위업이다. 하지만 정작 퇴치한 장소에 강력한 저주가 남아서 영지민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땅이 황폐화된다면 온전한 업적을 이루었다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비웃음만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른 일로 이 땅에 저주가 남아 주민들의 삶이 고되게 된다면, 저는 그 어떤 영광도 누릴 생각이 없습니다."

어린 사제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아이작이 말을 끊고 선언했다. 숭고한 성배기사다운 말이었지만 결국 성인 지정을 받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구구절절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사제들도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때 후안 주교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주를 물리치도록 하지."

후안 주교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아이작과 델리아는 약간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후안 주교는 주름투성이 얼굴을 움직이며 똑바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남아 저주를 물리칠 방법을 찾도록 하겠다. 그러니...."

그는 주름진 손을 들어 아이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들은 이 땅에 찾아든 불청객들을 퇴치하라. 신도들이 고통받는 길이 없게끔."

75화. 천사가 피 흘린 자리 (1)

저주에 이끌린 몬스터를 퇴치하라.

하지만 결국 저주가 사라질 때까지 몬스터는 계속 습격해 올 것이므로, 사실상 저주를 물리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예상했던 대로군.'

영지에 저주가 걸렸다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이런 명령을 예상했다.

저주를 물리치지 않으면 천사 퇴치 업적을 온전히 인정받기 힘들 테니까.

저주를 퇴치하지 못한다면 아이작의 성인 지정도 차일피일 미뤄질 것이고, 아이작의 업적도 온전히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아이작의 목적은 업적을 온전히 인정받으면서 성인 지정도 피하는 것이었다.

"빛의 법전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다."

아이작은 검을 빼 들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델리아는 그것을 보면서 불편한 표정을, 후안 주교는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공짜로 무릎을 꿇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후안 주교님. 제가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싸우면서 검이 다소 상했습니다."

"아!"

이솔데가 얕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심판의 검은 그녀가 빌려준 것이었다. 그랬던 검이 시뻘겋게 녹슬고 이 나간 모습이 되었으니 경악하는 것은 당연했다.

후안 주교는 힐끔 이솔데를 보았다가 검을 살펴보았다.

"이단심문관의 검이군."

검에는 이름이 음각되어 있었으니 원래 누구의 소유인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자네와 아는 사이였나, 이솔데 심문관."

"예, 예."

이솔데는 눈에 띄게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후안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지?"

"심문에 제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었을까 의심받는 것을 우려해서...."

의심할 만한 일이었다.

검을 빌려줄 정도의 인연이라면 심문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애당초 그녀는 이 자리에 와서는 안 되는 셈이다.

하지만 후안은 말없이 검을 들여다보다가 쪼글쪼글한 손으로 검신을 슥 훑었다.

밝게 타들어 가는 손끝에서 심판의 검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녹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검신에 새롭게 날이 서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이솔데의 이름도 같이 지워져 사라졌다.

"자네의 안목이 정확했다고 믿겠네, 이솔데 심문관. 결국 자네의 검이 사악한 천사를 베는 데 한몫했으니 기쁜 일일세. 대신 이 검은 새 주인을 갖는 것으로 하지."

"...예."

이솔데는 검을 아이작에게 넘기게 된 것보다 이만한 꾸중으로 넘어간 것이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는 듯했다. 정말 여러 가지로 이단심문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후안은 검을 새롭게 빚은 검을 아이작에게 넘겨주었다.

"심판의 검보다는 조금 더 쓸모 있을 걸세."

아이작은 검을 받아 들었다. 타오르는 열기가 숨을 쉬듯 부풀었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검신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 곁에는 정체 모를 문자가 흰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작은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으로 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루앗딘 열쇠?"

아이작이 문자를 보고 놀라 중얼거리자 후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어(古語)를 읽을 줄 아는군?"

"아, 예. 조금...."

아이작은 자신이 실수했나 했지만 후안은 어쩐지 큰 호감을 갖게 된 눈치였다. 무식한 성기사들만 보다가 제법 똑똑한 성기사를 만났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아이작은 얼떨결에 얻게 된 이 무기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루앗딘 열쇠(S)]

[심판의 검이 본래의 허물을 벗고 원래의 형태를 찾은 검. 빛과 열기로 감춰지고 갇혀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열쇠다. 천상의 열기로 빚어져 현실의 장인들은 결코 만들 수 없다. 검을 든 자에게 계속해서 온기와 활력을 더해준다. 중급 봉인 해제.]

심판의 검의 진정한 형태라고 일컫는 루앗딘 열쇠였다. 열쇠라는 이름이지만 당연히 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열쇠라는 이름 자체가 '감춰지고 갇혀 있는 것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둠 속에 감춰둔 보물 상자든, 피부 아래에 갇혀 있는 내장이든.

즉, 아주 잘 드는 칼을 열쇠라고 표현한 언어유희였다.

하지만 이름대로 어지간한 수준의 봉인도 해체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빛과 열기를 부여하는 능력까지.

'이단심문관 지부장이나 수석 성기사에게나 줄 만한 물건인데... 정말 나를 성인으로 밀어주기로 작정한 모양이군.'

후안과 함께 온 성기사들과 이단심문관들도 제법 놀라는 눈치였다.

때문에 아이작은 이걸 후안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팍팍 밀어줄 테니 딴생각하지 말라는. 큰 선물이긴 했지만 아이작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아이작은 머리를 숙이면서도 속으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할아버지. 제가 사실 촉수 괴물의 성기사라서... 선물은 고맙게 받지요.'

***

트롤 사냥을 위해 파견된 기사들과 성기사들 일부가 함께 움직였다.

비어있는 성으로 트롤들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절반은 남아서 성을 지키기로 했다. 애당초 저주에 이끌린 괴물들이 트롤만 있으란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젠장...."

하지만 트롤을 찾아가는 기사들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그들은 명예로운 승리과 결투, 전리품을 위해 온 것이지 산속에서 땀 흘리며 트롤 사냥이나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작 혼자 보내는 것은 모양새가 너무 안 좋을 뿐만 아니라, 성기사들도 왔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델리아 리옹 후작까지도 그들과 함께 왔기에, 기사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것도 모양새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후작위면 주교와 비교해도 결코 끗발이 밀리지 않는다. 그런 후작이 주교의 명령을 수행하는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공작님. 공작님은 안에서 쉬고 계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공작님까지 굳이 이런 험한 일을 할 필요는...."

"황제 폐하의 신민들의 안전을 위한 일이다. 험한 일이라고 가려야 쓰나?"

델리아는 씩 웃으며 과장된 동작으로 팔을 풀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으면 트롤 모가지라도 비틀어야지.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델리아의 말에 기사들은 쓰게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델리아는 덩치만큼이나 훌륭한 전사이기도 했다. 그녀가 든 철퇴는 트롤이라 해도 쉽게 회복하지 못할 만큼 크고 단단했다. 하지만 델리아의 신경은 트롤이 아닌 온통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시간은 벌었는데 성배기사를 어떻게 한다....'

아이작은 델리아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혀 있는 것을 느꼈다.

아이작 역시 그녀와 대화할 필요를 느끼긴 했지만, 일부러 애타게 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다른 기사들을 책임지기도 하는 델리아는 계속 아이작에게만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작은 델리아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혼돈의 눈을 발동시켰다.

우거진 숲의 그늘 속에서 아이작의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델리아 리옹(B)]

[직업: 후작(A)]

[능력: 제국군 검술, 상급 지휘]

['성배기사가 성인으로 지정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그 업적이라도 깎아내려야 해. 제거하는 건 선택 사항이 아니야. 무모한 짓을 벌이다 실수하면 덤터기를 쓰는 건 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깊게 생각에 빠진 델리아의 속마음은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열려 있었다. 그녀의 의도야 명확했으므로 깊게 숨기고 있는 비밀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아이작의 성인 지정을 막는다. 막지 못한다면 업적이라도 훼손한다.

아이작은 슬슬 그녀의 초조함이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델리아 곁으로 다가갔다.

"후작님."

"아, 성배기사님."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은 흩어져 트롤을 찾고 있었다. 부관이 곁에 있었지만 델리아는 아이작이 다가오자 그에게 눈치를 줬다. 부관은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여긴 빌어먹게 숲이 우거지고 산세도 험하군. 헨드락 영지가 천혜의 요새라는 생각은 한 적 없는데.... 발 들이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지오."

"하지만 황제 폐하의 권위가 이런 산골까지 섬세하게 닿고 있다는 뜻이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델리아는 인사말처럼 투덜거렸지만 아이작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운을 뗐다.

델리아는 분위기를 망가뜨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운을 떼는 아이작의 어투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작이 이미 삭막하고 고지식한 성배기사가 아니라는 것은 처음 왔을 때부터 알아보았다.

델리아는 그녀의 의심을 슬쩍 확인해 보기로 했다.

"성배기사님께서도 황제 폐하의 권위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오?"

"빛의 법전의 분신으로 나타나신 황제 폐하를 어떻게 가벼이 여길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빛의 법전의 분신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성체를 높이 띄우는 표현이다. 사람이 망치질을 한다고 망치가 사람의 분신일 리가 없듯이, 성체는 성체일 뿐 신의 분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를 빛의 법전의 분신이라며 떠받들고 있었다. 하지만 성배기사가 함부로 할 말은 아니었다.

델리아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성배기사가 그런 말을 해도 되겠소?"

"황제 폐하의 위업에 비하면 제 소박한 여정이 비교가 되겠습니까?"

"소박하다니. 천사 퇴치는 역사에 새겨질 업적이오. 신께서도 기억하실 만한 일이지."

"그저 제 여정이 제국의 안녕에 도움이 된다면 기쁠 뿐입니다."

델리아는 몇 마디 말을 나눈 것으로 아이작의 내심을 눈치챌 수 있을 뿐이었다.

아니, 아이작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눈치를 주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이거... 성배기사님께서는 보기와 다르게 야망이 크신 모양이군."

아이작은 대답하는 대신 웃었다.

충분히 어필했다면 다음부터는 델리아가 멋대로 상상력을 부풀릴 차례다. 아이작은 정확하게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이걸로 델리아는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이작을 황제파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이미 황제의 존재로 균형이 수평을 이루고 있는 상태다. 거기서 새롭게 등장한 영웅이 황제파가 된다면 확고하게 권력을 잡을 수 있다.

성인 지정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황제의 대적자가 될 수도 있었던 자가 황제의 밑으로 들어오는 셈이니까.

"두루뭉실하게 돌려 말하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오. 원하는 게 뭐지?"

"원하는 것이라니요. 말씀드렸다시피 제국의 안녕에 도움이 된다면 기쁠 뿐입니다."

델리아가 초조하게 뭐라 말을 덧붙이려 할 때, 아이작은 말을 마저 이었다.

"리옹 후작님께서 제 여정에 힘을 보태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이작이 직접 요구사항을 말해서는 안 된다. 델리아가 스스로 떠올려 자발적으로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이작은 교단과 황제파, 그 어느 쪽에도 쏠리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면서 이득을 뽑아야 한다.

결국 몸이 달아 대가를 내놓는 것은 상대방이다.

델리아가 뭐라고 더 물어보려 했을 때, 어디선가 외침이 들려왔다.

"트롤이다!"

아이작의 지시에 맞춰 헤사벨이 트롤을 움직인 것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대화를 끊은 아이작은 외침이 들린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델리아는 그의 등을 보며 입술을 깨물다가 서둘러 움직였다.

***

"저쪽으로 몰아!"

"빌어먹을, 왜 저렇게 빠른데?!"

아이작이 도착했을 때 도착한 현장은 부상당한 병사들과 부러진 나무들로 가득했다. 잘려 나간 트롤의 팔은 보였지만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도착한 아이작이 물었다.

"트롤은 어디로 갔나?"

"저 계곡 안쪽으로 갔습니다. 성기사들이 따라붙었습니다."

어두컴컴하고 나무가 우거진 계곡이었다. 하지만 성기사들이 따라간 흔적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열기를 다룰 수 있는 성기사들은 트롤들의 천적이었다.

아이작은 계곡으로 들어서려다가 문득 바닥에 찍힌 무언가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거기에는 아이작이 계산에 둔 적 없는 것이 있었다.

'말발굽?'

우거진 나무와 험난한 산세 때문에 말이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는 곳에 말발굽 모양이 찍혀있었다.

76화. 천사가 피 흘린 자리 (2)

헤사벨이 성기사들을 이쪽으로 유인한 것은 일부러 싸우기 힘든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트롤 퇴치를 더럽고 어렵게 만들어야 아이작의 업적이 돋보일 테니까. 어차피 성기사들이 고생하는 것은 헤사벨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예 빼돌려서 달아나게 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나중에 제어에서 풀린 트롤들이 말썽을 부려도 문제니 이번 기회에 구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말발굽에 관한 것은 사전에 이야기된 바가 없었다.

'헤사벨, 계곡에 트롤 말고 뭐가 더 있나?'

사소한 흔적이었지만 아이작은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음,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강력한 저주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저주라.

아이작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하기야, 천사가 추방당했는데 저주를 남기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진짜 저주를 아직 만나 보지는 못했다.

'헤사벨의 능력이 아쉽군.'

헤사벨은 아이작처럼 '벽 속의 쥐' 능력으로 조종하는 개체들과 감각을 공유할 수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양 떼 몰이하듯이 트롤들에게 방향성의 지시를 내리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트롤들이 흥분하면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얕은 제어력이다.

"성기사님?"

아이작이 바닥을 살펴볼 뿐 계곡으로 들어가지 않자 기사 한 명이 의아한 듯 불렀다. 아이작은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앞서 걸어갔다.

'이변이 발생하면 바로 보고해라. 헤사벨. 이 계곡 안에 뭔가가 있다.'

[예.]

아이작은 우선 칼을 뽑아 들고 계곡 안으로 진입했다. 칼을 뽑자마자 루앗딘 열쇠의 뜨거운 열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아이작이 칼의 열기를 억누르자 진홍빛으로 물들었던 칼날이 금방 검푸른 빛으로 가라앉았다.

루앗딘 열쇠의 열기는 유용하지만 굳이 눈에 띌 필요는 없었다.

쿵, 쾅! 계곡 안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성기사가 상대인데도 제법 소음이 길게 이어지는 걸 보니 헤사벨이 그럴듯하게 통제하는 것 같았다.

"이런 씹...."

얼마 되지 않아 진창에 빠진 성기사가 욕설을 중얼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성기사는 아이작을 보고 급히 입을 다물며 성호를 그었다. 품위 유지를 요구받는 성기사가 욕까지 내뱉는 걸 보니 어지간히 빡친 모양이다.

"산속에서 트롤을 상대하는 건 어렵죠."

아이작은 성기사에게 손을 뻗었다. 성기사는 손을 붙잡고 진창에서 빠져나오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영악한 놈들입니다. 계곡 위쪽에서 나무를 타면서 돌이나 나무 따위를 던지기만 하는데, 어찌나 화가 나는지.... 활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군요."

"다른 성기사 한 분이 더 계시지 않습니까?"

"먼저 추적해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빛의 법전 성기사라도 트롤이 다수라면 산속에서 상대하기 어려울 텐데, 실력에 자신이 있든가 어지간히 약 오른 모양이다.

아이작은 진창에서 나온 성기사와 함께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드디어 뭔가를 발견했다. 칼에 썰린 듯한 트롤의 팔다리와 머리였다.

"단면에 그을린 흔적이 있군요."

성기사가 살펴보며 말했다. 앞서간 성기사가 벴다는 뜻이다. 헤사벨이 제법 영악하게 공격 중인 것 같은데도 트롤이 당한 걸 보면 실력이 있긴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전투의 흔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때 헤사벨에게서 의지가 느껴졌다.

[아이작 님. 트롤 다수에게서 연결이 동시에 끊어졌습니다.]

이변이 발생했다.

'성기사에게 당한 건 아니고?'

[그럴 만한 실력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연결이 끊긴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통제력을 빼앗긴 느낌이었습니다.]

아이작은 계곡에 진입했을 때 느꼈던 이질감이 현실화되는 것을 느꼈다. 역시 이 안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때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후우우우욱.

기분 나쁠 정도로 미지근한 바람이 계곡 안쪽에서 밀려왔다. 그 바람에선 비릿한 혈향이 느껴졌다. 곁에 있던 성기사는 눈을 부릅뜨고 칼을 움켜쥐었다.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기분 나쁜 기운이었다.

이윽고 혈향의 정체가 나타났다. 붉게 물든 계곡물이 흘러 내려오기 시작했다.

***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피가 진해졌다. 성기사가 당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 더 기분 나쁜 점은 이게 도저히 한 사람의 피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 계곡이 어디로 이어져 있더라?'

아이작은 성기사와 함께 서둘러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근방의 지리를 떠올렸다. 헨드락 영지에 대해 공부할 기회는 없었지만, 성역으로 점령하면서 어느 정도 습득한 정보는 있었다.

헨드락 영지의 주 수입원은 광산이다. 그러나 광산으로 먹고산 것도 잠깐, 광맥 일부가 고갈되면서 몇 개는 폐광이 됐다고 들었다.

아이작은 멈춰선 커다란 동굴 입구에서 그 사실을 떠올렸다.

계곡의 수원(水原)으로 추측되는 동굴에서 붉은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기사는 이 동굴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아이작은 주변에 있는 광석이나 쌓인 잔해들을 보고 동굴이 폐광과 연결되었음을 알아차렸다.

"트롤들이 이 안에 들어갔을까요?"

성기사의 불안해하는 중얼거림에 아이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사벨로부터 트롤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 이 지점 근처였다. 아이작은 동굴에 들어가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그때 혈향이 확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저벅.

동굴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성기사였다.

피투성이가 된 갑옷의 문장이 동굴 안에 든 빛으로 반짝거렸다. 성기사는 말없이 따라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건틀릿이 달그락거렸다. 아이작 곁에 있던 성기사가 서둘러 다가가려 했지만 아이작이 제지했다. 대신 들고 있던 칼을 들어 올리고 루앗딘 열쇠의 열기를 피워올렸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환한 빛이 퍼져 나왔다.

"이런 개...."

옆에 있던 성기사가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드디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성기사의 투구 부분은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살아 있을 것이란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때 성기사의 몸이 고장 난 인형처럼 흔들거렸다. 뭔가가 그의 목을 틀어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작은 급히 곁에 있던 성기사를 옆으로 밀쳤다.

쾅! 어둠 속에서 죽은 성기사의 몸이 사라졌다가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콰두두두두! 그와 동시에 동굴 밖으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독한 피 냄새와 살벌한 살기, 그리고 봄볕의 따스함을 몰아내는 한기.

온몸에 시뻘건 피를 뒤집어쓴 듯한 붉은 갑옷의 기사가 짐승의 소리를 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결국 내 아가리로 들어왔구나!"

붉은 갑옷의 기사의 입이 쩍 벌어지며 송곳니 가득한 이빨들이 드러났다.

[블러드 나이트(A)]

[만찬장의 파수병.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저주로 인해 이 땅에 나타났다. 끊임없는 허기에 시달리는 저주에 걸렸다.]

아이작은 혼돈의 눈으로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진짜 저주로군.'

일전 아이작이 허풍을 쳤던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저주. 그게 정말로 이 땅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블러드 나이트라면 붉은 성배 클럽의 천국이라 일컬어지는 '만찬장'의 파수병이다. 만찬장의 화려하고 달콤한 음식을 볼 수만 있을 뿐 먹을 수 없어 늘 허기에 시달리고 있으며, 대신 침입자의 살과 피로 배를 채운다는 놈들이다.

당연히 보통 괴물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저주, 여기서 처리해 버리는 게 낫다.

아이작은 놈이 타고 있는 말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팬텀 스티드잖아?'

오언이 타고 있던 팬텀 스티드였다. 아마도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불사 교단에 협조하면서 얻은 것 같은데, 저주의 촉매로 사용된 것 같았다.

블러드 나이트는 하반신이 팬텀 스티드와 일체화되어 있었는데, 흘러 내려오는 피가 팬텀 스티드의 뼈대 위에 말라붙어 가죽을 만들고 있었다. 원래 팬텀 스티드에는 다리가 없지만, 블러드 나이트의 취향인 건지 여섯 개의 다리가 생긴 상태였다

두두두두두!

블러드 나이트가 다시 광포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놈의 가시 박힌 채찍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들었다. 가시 채찍에서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만들었던 가시덩굴과 비슷한 기운을 느낀 아이작은 재빨리 몸을 던져 피했다.

하지만 뒤에 있던 성기사는 피하는 대신 재빨리 갑옷에 휘감긴 기적의 기운을 북돋아 방어력을 강화했다. 육중한 갑옷을 두른 성기사의 방어력을 믿은 행동이었다. 오히려 가시 채찍에 팔이 휘감긴 순간 말에서 끌어 내려 반격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블러드 나이트는 성기사의 예상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컥!"

성기사의 팔에 채찍을 휘감은 채 블러드 나이트는 아이작을 그대로 지나쳐 달려갔다. 성기사의 팔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거친 바위투성이 계곡 위로 질질 끌려갔다.

충격에 갑옷의 기적이 급격하게 약해지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파고들 구석을 찾으며 자세를 낮췄다.

'팬텀 스티드 때문인가?'

게임에서도 블러드 나이트가 성기사 유닛 두셋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긴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가지고 놀 정도는 아니다. 블러드 나이트는 성기사를 질질 끌고 다니며 계곡 여기저기에 내동댕이치다가, 아이작을 향해 다시 달려오기 시작했다.

"씹어 먹어주마!"

'흔해 빠진 도발이군.'

블러드 나이트는 성기사를 통째로 철퇴처럼 휘둘러 아이작에게 던졌다. 아무리 아이작이라 해도 기적으로 보호받는 성기사를 통째로 베어 낼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쾅! 아이작은 성기사를 받아 내면서 저 너머의 색채를 발동시켰다. 시커먼 먹물 같은 어둠이 아이작의 갑옷 틈새로 흘러나오면서 주변을 검게 물들였다.

아이작의 실루엣이 흐려지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진 순간 블러드 나이트는 채찍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회수한 채찍 끝에는 더 이상 성기사가 매달려 있지 않았다. 그 사이 어둠이 블러드 나이트를 덮쳐 왔다.

"...고파, 배고파, 굶어 죽어버릴 거야!"

"살을 줘... 네 살을 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환청들이 블러드 나이트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만찬장의 파수병인 그에게는 정신이상에 대한 면역이 있었다.

"삿된 것들, 물러나라!"

퍽. 어둠이 찢기듯 블러드 나이트를 토해 냈다.

그러나 아이작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그때 아이작은 성기사를 끌고 걸어 들어왔던 계곡 길목 쪽에 서 있었다. 뒤늦게 그곳에 도착한 델리아와 그의 기사들은 계곡 안쪽에서 벌어진 풍경에 경악했다.

"서, 성배기사님!"

델리아는 블러드 나이트 주변에 흩어져 있는 시커먼 어둠, 저 너머의 색채를 발견하고 크게 놀란 듯했다.

"저거다! 내가 본 천사의 저주가 저거다!"

아이작이 딱히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꽤 그럴듯하게 누명을 씌운 것 같았다. 아이작은 델리아에게 성기사를 떠넘기다시피 던져 주었다. 델리아는 황급히 성기사를 안아 들었다.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성기사는 아직 살아 있었다.

"데리고 먼저 물러나십시오. 주교님과 다른 성기사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 나도 같이 싸울 수 있...."

"저로서도 버거운 상대입니다. 서둘러주십시오."

천사를 퇴치한 성배기사마저도 어렵다는 말에 델리아는 경악하는 표정을 했다. 그녀는 계곡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블러드 나이트와 만신창이가 된 성기사를 번갈아 보다가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녀도 검술은 배웠지만, 그녀의 검술은 사람을 잡는 기술이다. 괴물이 아니라.

델리아와 부하들은 재빨리 후퇴했다.

블러드 나이트는 후퇴하는 부하들을 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도망쳐도 잡을 자신이 있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목적인 건가?"

블러드 나이트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이작을 노려볼 뿐이었다. 놈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저주로 소환된 존재다. 아이작을 노리는 것이 당연했다.

아이작은 블러드 나이트를 노려보았다. 그에게도 버겁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놈에게는 순수하게 검술만으로 싸운다면 아이작을 압도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보다 강한 적을 정정당당하게 검술만으로 쓰러뜨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이작은 칼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뭐 하는 짓이냐?"

블러드 나이트는 정신 나간 괴물이 아니다.

놈은 비무장인 아이작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지 않았다. 기사도 때문이 아니라, 아이작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별거 아냐."

아이작은 블러드 나이트를 향해 손을 내밀어, 뭔가를 잡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새로 얻은 능력을 좀 확인해 보고 싶어서."

77화. 천사가 피 흘린 자리 (3)

"같잖은...."

블러드 나이트가 으르렁거리며 채찍을 들어 올렸다. 그때, 블러드나이트는 기이한 공기의 떨림을 느꼈다. 들리지는 않지만 뼛속까지 떨리게 하는 낮은 저음이었다.

블러드 나이트는 오싹함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괴성은 한곳에서만 들리지 않았다. 블러드 나이트는 소음의 정체가 최소한 산 크기만 한 울림통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전율했다. 저 너머의 색채 어둠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뒤늦게 아이작이 무언가를 소환하고 있다고 판단한 블러드 나이트가 다급히 채찍을 휘둘렀다. 순간 아이작은 손가락을 좁혀 블러드 나이트의 몸과 다리를 쥐는 듯한 모습을 했다.

쩌억.

대기가 산산이 박살이라도 나듯 돌풍이 밀어닥쳤다. 주변에 안개처럼 흩어져 있던 저 너머의 색채 속에서 몸통만 한 촉수가 나와 블러드 나이트의 몸과 다리를 휘어 감았다.

블러드 나이트는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몸을 휘감은 촉수가 갑옷과 살을 순식간에 으스러뜨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잠깐...."

블러드 나이트는 다급하게 뭔가 말하려 했지만 아이작은 가차 없이 두 손을 양옆으로 벌렸다.

와드드드드득.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블러드 나이트는 저항하려는 것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고함을 터뜨렸다.

그 순간 계곡 위쪽에서 트롤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작은 놈들이 헤사벨이 부리던 트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제는 사실상 권한이 박탈된 헤사벨 대신, 더 강력한 제어력을 가진 블러드 나이트에게 조종당하는 것이다.

'매복시켜 놨다가 일시에 덮치려고 한 모양이군.'

하지만 상황이 다급해지자 부를 수밖에 없던 모양이다. 트롤들이 일시에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바로 손가락을 살짝 비틀었다.

펑, 촤아아아악.

이내 물풍선 터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대한 촉수들이 블러드 나이트의 몸을 비틀어 쥐어짜면서 산산조각 냈다. 갑옷 조각과 살점이 계곡 사방에 흩뿌려졌다.

아이작이 손가락을 흔들자, 촉수가 단숨에 주변을 휩쓸었다.

트롤들은 블러드 나이트와는 달리 잠시도 버티지 못했다. 트롤들은 부딪치자마자 터지는 대신, 그대로 촉수에 달린 이빨과 가시에 갈려 나가듯 부스러지며 사라졌다. 이내 사방에 남은 것은 처참한 전투의 흔적과 혈흔뿐이었다.

촉수는 남은 살점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저 너머의 색채 안쪽으로 사라졌다.

['블러드 나이트'를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체력 회복 능력이 상승합니다.]

[지구력 회복 능력이 상승합니다.]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

아무래도 단순한 물리력만을 가진 괴물이어서 그랬던 건지 특별한 능력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방금 전 능력 사용과 함께 소모되었던 체력이 빠르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신 나간 위력이군.'

아이작은 산산조각 난 블러드 나이트의 잔해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아이작이 쓴 능력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퇴치하고 얻은 보상으로 '혼돈의 손길'에 '저 너머의 색채'를 합성한 결과였다.

그 결과물로 아이작은 방금 사용한 스킬 '심연의 손아귀'를 얻을 수 있었다.

[심연의 손아귀(S)]

[저 너머의 색채 속에서 심연의 손아귀를 소환한다. 소환할 수 있는 손아귀의 굵기, 길이, 가닥의 수는 사용자의 포만감 소비에 비례한다. 손아귀를 본 사람은 주시한 시간에 비례하여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이게 원래는 이름 없는 혼돈의 고위 사교도나 쓸 수 있는 기술이었던가....'

그나마도 몬스터 전용 스킬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사용이 불가능했다. 몬스터 전용 스킬답게 밸런스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정신 나간 성능이었다.

물론 붉은 살점을 먹고 강화된 데다, 성역 버프까지 얻어 위력이 더 강해진 것도 있을 것이다. 단점은 강력한 기술답게 소모하는 포만감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블러드 나이트를 먹어 치우고도 순간적인 허기를 느낄 정도였다.

아이작은 만약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상대할 때 이 능력이 있었다면 훨씬 상대하기 쉬웠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이것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떳떳이 쓸 수는 없지만 말이야....'

아이작은 쓰게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제는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선동하는 능력은 충분히 얻은 것 같았다. 주교조차도 자신을 성인으로 추대하니 마니 하는 것만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후작도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안달이 난 상태였고.

'뭐, 누가 보더라도 목격자만 남겨놓지 않으면 되지.'

누군가 들으면 경악할 소리지만 아이작은 태연하게 생각하며 걸어갔다.

블러드 나이트의 잔해는 햇볕에 닿자 인간사냥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하지만 전투의 흔적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이작은 블러드 나이트가 죽은 자리를 살펴보다가 뭔가를 발견했다.

팬텀 스티드의 안장과 마구였다.

[팬텀 스티드의 마구(A)]

[데스나이트의 전투마에게 씌우는 마구. 이 마구가 없으면 팬텀 스티드의 위에 탈 수 없다. 일반 말에게 씌워놓으면 공포나 고통을 모르게 된다. 치명상을 입어도 짧은 기간 죽음이 유예되며, 사망 후 팬텀 스티드로 재탄생한다.]

'쓸모가 있을까? 어쩌면 쓸모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번에는 계곡과 공성전이 전부라 말을 타고 잘 싸우지 않았지만, 아이작은 기병 돌격의 로망을 잊지 않고 있었다.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말을 타고 싸울 일도 많을 테니 일단 챙겨 두기로 했다.

***

아이작은 델리아 후작에게 위험한 싸움이라고 해놓고 바로 내려가 버리면 이상할 것 같았기에 주변을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성기사나 주교가 직접 와서 이 현장을 보면 그의 위대함이 더욱 돋보일 테니까.

'특히 블러드 나이트가 왜 여기에 있었는지 웅크리고 있었는지 궁금하단 말이지.'

아이작을 노린 것이라면 성 지하 같은 곳에 몰래 숨겨 놓았어도 된다. 오히려 밤중에 야습하기 쉬울 테니까. 하지만 블러드 나이트는 외딴 계곡의 동굴 안에 함정처럼 숨어 있었다. 마치 아이작이 이곳으로 올 사실을 알고 있던 것처럼.

선후관계가 바뀐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여기에 무언가를 숨겨 놓았다고 확신했다.

이 폐광으로 이어진 수로 동굴 안에.

아이작은 동굴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은 블러드 나이트가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제법 넓었지만 어두웠다.

광물을 캐고 남은 폐석이나 불순물, 잔해들이 지하수를 따라 쌓여 있었다. 그 퇴적물 속에 성기사의 시체가 반쯤 파묻혀 있었다.

'이따가 수습하라고 해야겠군.'

아이작은 성기사의 시체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음."

오래지 않아 아이작은 다시 멈춰 섰다.

퇴적물이 너무 많이 쌓여 동굴 폭이 좁아진 바람에 더 이상 들어가기 어려웠던 것이다. 물줄기를 맞으며 엎드려 지나간다면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뭐지? 별거 없었나?'

다시 돌아 나가려던 아이작의 눈에 무언가 눈에 띄었다. 지하수 옆 단단한 바위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게 뭔지 확인하기 위해 루앗딘 열쇠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자 손으로 짚고 있던 바위가 흐릿해지더니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건... 아."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명 대신으로 쓰고 있긴 했지만 루앗딘 열쇠에는 이름답게 하급에서 중급까지의 봉인을 해제하는 능력이 있었다. 아마도 이곳을 숨기고 싶었던 자가 환영으로 봉인해 두었던 것 같았다.

이어 몇 개인가의 바위가 사라지더니 환영이 깨지고 안에서 드러난 것은 폐광이었다.

아이작은 폐광에서 대체 숨길 게 뭐가 있나 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기다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바로 헨드락 영지의 비밀이었군.'

헨드락 영지의 광산은 광맥이 고갈되어서 폐광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광산 아래서 발견한 것을 숨기기 위해 닫은 것이었다.

폐광의 거대한 벽면에는 여러 장의 날개를 가진 존재가 화석이 되어 달라붙어 있었다. 백금빛을 띤 화석은 일부만 드러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아이작은 바위 아래 파묻혀 있을 그것의 크기를 추측해 보았다.

'거의 10m 정도는 되겠군. 붉은 살점의 선지자보다 크겠어.'

그것의 정체는 추측할 것도 없이 천사였다.

그것도 형태를 보았을 때 빛의 법전의 천사 같았다. 천사가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타천사(墮天使, Fallen angel)....'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예로 알 수 있듯이, 꼭 천사의 의지가 신의 의지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의지가 과하게 틀어지거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경우 벌을 받게 된다.

벌의 내용은 신앙마다 다르다. 다만 빛의 법전은 빛이 들지 않는 지하 아래에 처박혀 돌이 되는 벌을 내린다고 알고 있었다.

이렇게 신에게 벌을 받은 천사들을 타천사라고 불렀다.

이 천사 역시 아마도 배교나 큰 실수를 저질렀을 것이다.

전대 헨드락 영주는 이 화석을 발견하자마자 기겁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자기 영지의 타천사를 숨기기 위하여 폐광을 명했겠지. 자칫 잘못해서 이단심문관이 찾아오면 상황이 복잡하게 될 테니까.

이 타천사가 헨드락 영지에 고여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력의 정체였다. 아마 이 타천사가 화석으로 변하면서 신성력이 빠져나왔으나, 폐광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고인 것 같았다.

비극적인 일이었지만 아이작은 반대로 입술이 씰룩거리는 것을 느꼈다.

'신성력도 신성력이지만... 이렇게 화석이 된 천사는 귀한 장비를 만드는 재료가 되지.'

죽어도 천사는 천사다. 게임 속에서도 이런 타천사의 신체 일부는 효과나 활용법은 다양하지만, 굉장히 강력한 촉매로 사용되곤 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아마도 이것을 노렸을 것이다.

문득 아이작은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오래 지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사제들이 올 것이다. 그들이 이걸 발견하면 전대 헨드락 영주가 걱정했던 것처럼 일이 복잡해질 것이다.

문득 아이작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애당초 세워 둔 계획에 이 타천사라는 소재를 더한다면 더 쉽게 진행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아이작은 실없는 농담을 하며 화석이 된 천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

뒤늦게 도착한 사제들과 이단심문관, 성기사들은 계곡에 펼쳐진 아수라장에 경악했다.

블러드 나이트를 처치하면서 생긴 잔해물은 왈라이카 흡혈귀과 싸웠을 때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트롤의 잔해물과 부러진 나무, 깨진 돌조각 등은 그렇지 않았다.

"강력한 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작의 증언은 담백했다.

아이작의 행색은 담백한 증언만큼 말끔했다. 그러나 성기사 중 한 명은 시체로 돌아온 데다 한 명은 치명상을 입었다. 게다가 함께 갔던 델리아 후작도 끔찍한 적을 마주했다며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말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무거운 법.

성기사들은 아이작이 또 하나의 끔찍한 괴물을 퇴치했노라며 칭송했다.

성으로 돌아온 아이작은 보고를 시작했다.

"아마도 놈이 저주의 원천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안 주교는 이단심문관을 힐긋 바라보았다. 이단심문관이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에서 저주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저주 외에는 블러드 나이트가 나타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델리아 후작과 기사 여러 명의 증언이 일치하였으니 아이작 성배기사의 말이 맞다고 판단됩니다."

"그렇군. 훌륭한 업적이야."

후안은 만족한 듯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아이작을 성인으로 추대할 때의 장애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아이작이 후안 앞에 부복했다.

"청컨대 부탁이 있습니다. 후안 주교님."

"부탁? 부탁이 아니라 상을 요구해도 좋을 텐데."

"저는 상을 받을 처지가 아닙니다. 애당초 제가 싸우기 이전에 영웅적으로 분투한 두 성기사 덕분에 주워 담은 승리에 불과합니다. 전사한 성기사는 성기사단 수도원으로 보내 그의 위업을 기리도록 하고, 부상당한 성기사에게도 최대한의 치료와 지원, 포상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한 명은 기습으로 죽었고, 한 명은 질질 끌려다니다가 만신창이가 된 것에 불과하지만 아이작은 일부러 그들을 포장해 줬다. 다음 단계를 위한 포석이었다. 후안 주교는 겸손하면서도 승리를 양보하는 아이작의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실로 빛의 법전에 필요한 인재였다.

"그것은 응당 교단이 해야 할 일이지, 부탁할 일이 아닌데?"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저는 블러드 나이트를 쫓아냈을 뿐이지, 저주를 완전히 물리친 것이 아닙니다."

"퇴치하지 못했다고?"

"예."

후안 주교와 이단심문관들은 아이작의 말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천사는 물리치는 데 성공했으면서 그보다 한참 못한 블러드 나이트는 물리치지 못하다니? 물론 블러드 나이트가 만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천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후안 주교는 아이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놈이 도망갔다는 뜻인가?"

"아니오. 놈이 나타난 곳을 탐색하던 중, 불경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불경한 것?"

아이작은 감히 입에 담기도 어렵다는 듯 망설였다. 실은 일부러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애를 태우기 위한 것이었다. 조바심을 느낀 후안 주교가 다시 물으려던 순간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타천사입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번져 나갔다. 타천사는 흔히 발견되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발견된다 하더라도 교단에서 은밀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세간에 드러나지 않고 묻히는 경우도 허다했다. 아이작은 혼란이 가라앉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이작의 목소리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예측컨대 붉은 살점의 선지자 역시 이 타천사를 이용하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저주의 기원도 타천사에게 있을지 모르고, 빛의 법전께 불경을 저지른 존재가 영지에 어떤 해악을 미칠지 모르는바... 교단의 힘으로 저주를 제압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이작은 신실한 성기사인 척하며 부탁했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교단 소속의 사람들도 아이작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알아들었다.

사악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땅을 교단이 제압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있었으니까.

"수도원이라도 세워달라는 건가?"

"안 됩니다!"

후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작하듯 델리아 후작이 벌떡 나서며 외쳤다.

"이곳은 황제 폐하께서 당신의 가신에게 하사하신 영토입니다! 교단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아이작은 벌써부터 서로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이들을 보며 몰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78화. 어부지리 (1)

"주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감히!"

델리아가 목소리를 높이자 성기사 하나가 발끈하며 나섰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귀족들과 기사들도 우르르 나섰다. 그들은 안 그래도 델리아가 빚을 받아 내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헨드락 영지를 멋대로 교단이 처분하려는 듯한 행동을 보고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후작도 주교에 비해 끗발이 밀리지는 않는다.

"제국의 봉토를 어디 함부로 건드리려 하는가!"

"아무리 교단이라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이, 이놈들이...!"

다른 사제들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차피 교단이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니 큰 욕심은 없었지만, 교단의 체면이 망가지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황제파 귀족들 앞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실제로, 이득도 만만치 않았다. 수도원이 생긴다면 그들 중 누군가가 수도원장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교단 경비의 대부분은 기부금으로 운영되지만, 수도원은 지역이나 정책에 따라 영주 못지않은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다만 문제는 이곳이 귀족인 헨드락의 영지라는 점이다.

즉, 황제가 봉신에게 하사한 영토다.

비록 문제가 많긴 하지만 교단에서 멋대로 접수할 수는 없었다.

아이작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이윽고 벌어진 난장판이 벌어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몸값이 얼마나 한없이 높아질지 기대했다.

"그만!"

그때 후안 주교가 준엄하게 일갈했다. 델리아 후작도 의견이 격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귀족들을 말리고 있었다.

"수도원은 예를 든 것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올라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없지 않은가?"

"이미 성배기사께서 저주를 물리친 이상 사악한 기운의 실체가 확인된 바도 없는데...."

"바로 그 성배기사가 기운을 눌러달라고 요청했다. 게다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타천사를 이용할 생각으로 이곳을 점령하려 한 것이라면,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후안은 델리아를 언짢은 눈으로 바라보며 꾸짖듯이 말했다.

"설령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쳐보지. 그러면 이 영지를 어떻게 할 건가? 자네들 중 누가 이 영지를 관리할 건가? 아니면 팔아먹을 건가? 천사에게 저주받은 영지를?"

귀족들은 조용해졌다. 그들은 영지를 어떻게든 처분하거나 갈라 먹어서라도 빚을 받으러 온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저주받은 게 사실인 데다 교단도 손 놓고 떠날 정도의 불길한 무언가가 있다면, 대체 영지를 누구에게 팔아먹을 것인가? 만약 팔더라도 제값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델리아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지만 이곳은 제국의 봉토입니다. 교단이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은 쓸데없는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황제께서 고작 이런 일로 교단과 갈등을 빚으시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교단은 고작 이런 일로 황제 폐하와 갈등을 빚겠다는 말씀처럼 들리는군요."

"무엄한...."

"자, 잠시만요."

슬슬 감정싸움이 되기 직전,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중앙 귀족들과 함께 온 상인, 에이단이었다.

"지금 저희는 가장 중요한 사람의 의견을 빼놓고 대화하는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

델리아는 에이단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다가 문득 아이작을 떠올렸다. 그가 오늘 저주 퇴치를 위해 외출하기 직전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무언가 할 일이 있을 것이라던 이야기.

그때 아이작은 델리아에게 분명 무언가를 암시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성배기사님을 빼놓고 이야기할 뻔했군. 이 영지를 수복한 것도 성배기사님이고, 저주를 퇴치한 것도 성배기사님이지요. 가장 중요한 사람을 빼놓고 이야기하면 안 되지."

사실 가장 큰 발언권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델리아는 아이작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발언권을 넘겼다. 그러나 아이작이 입을 열기 전에 에이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말했다.

"아뇨. 성배기사님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누구요?"

"카일 헨드락. 이 영지의 현재 소유주요."

***

카일 헨드락은 이미 지난 며칠간 정신이 나간 상태였지만, 이제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아니, 아이작이 회복시켰다.

카일의 넋을 일부러 빼놓고 있던 것은 아이작이었으니까.

카일이 성기사들 손에 질질 끌려오다시피 해서 홀에 들어서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귀족들은 다소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카일 헨드락은 큰 죄인이었지만, 그 혐의는 대부분 이단 그리고 배교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교의 천사와 접촉한 죄, 성배기사를 공격한 죄, 그리고 방금 타천사를 숨긴 죄가 추가되었다.

르하르트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공격한 죄목은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라엘라와 오언에게 씌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오언의 반란 이전에 일어난 범죄들은 꼼짝없이 카일의 잘못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카일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교단에 싹싹 빌면서 영지를 바친다거나 하면 귀족들 입장은 붕 떠버릴 수밖에 없었다.

"카일 헨드락."

쿵. 성기사들이 카일을 홀 바닥에 무릎 꿇렸다. 후안은 카일을 주름 깊은 눈으로 응시하며 상태를 살폈다. 여전히 멍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는 아니었다.

"공식 재판이 아니니 죄목들을 읊는 것은 생략하도록 하지. 다만 이 자리를 빌어 고해성사를 통해 숨겨진 죄가 있는지 낱낱이 밝혀보게."

"예...."

카일은 힘없이 대답하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죄를 고백합니다...."

카일은 스스로의 죄목을 읊기 시작했다.

"저는 영지의 자금을 횡령하여 투기 행위를 저질렀으며, 신의에 성실하지 못했고, 영지를 불성실하게 다스려 황제 폐하께서 맡긴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으며, 예배에 불성실하게 참석했고...."

"잠깐."

후안이 언짢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잘한 것들은 생략하도록 하지. 자네가 이 자리에 선 것은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닐 텐데."

카일은 멍하니 후안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교의 천사와 접촉한 것, 성배기사를 공격하고 타천사를 은닉한 것! 그런 것들 말이다!"

사제 하나가 성난 듯 옆에서 다그쳤다. 그 말에 카일은 눈을 크게 뜨고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이교의 천사라니, 저는 그런 것과 만난 적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후안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이단심문관을 바라보았다. 이솔데를 비롯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단심문관들은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입니다."

"뭐?"

"후안에게서는 어떤 정신 오염이나 약물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영주성 안에 있는 물품들도 샅샅이 조사해 보았는데, 카일 헨드락이 붉은 성배에 물들었다는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단심문관들은 약간의 무례와 고통을 수반한 방법을 쓰면 거의 무엇이든 알아낼 수 있다. 아이작은 이솔데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무모한 방식으로 이단의 증거를 추적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증거를 찾지 못했다면, 정말 찾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천사와의 직접적인 접촉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깨끗하다는 것은 카일의 신념을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카일이 무능에 의해 조종당한 정황은 있지만, 의도적으로 성배기사나 르하르트 백작을 공격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슨...."

후안의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반대로 델리아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요한 죄목들을 라엘라에게 덮어씌운다면 공은 귀족들에게 넘어온다.

노인네가 고혈압으로 쓰러지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카일이 입을 열었다.

"외람되지만, 후안 주교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입 닥쳐라, 이 버러지 같은 놈!"

후안이 버럭 화를 냈지만 그를 보호하듯 델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후안 주교님, 아무리 죄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정식 재판도 받지 않았습니다. 변호의 기회는 주셔야지요."

후안은 이를 갈려고 했지만 이빨이 얼마 없어서 잇몸끼리 부딪칠 뿐이었다.

델리아는 그 모습이 자못 즐거웠다.

"자,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해보게."

교단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했다. 물론 카일이 영지를 보존한다 해도 그다음 영지를 물어뜯는 것은 귀족파가 될 것이다. 그래도 목숨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후안의 허락은 없었지만 카일이 변호를 시작했다.

"저는 라엘라에게 조종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제가 황제 폐하에게 하사받은 봉토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빛의 법전에 대한 신앙심도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모든 신뢰에 성실하게 행동하고, 굳건한 믿음을 지켜왔다면 감히 이교의 천사가 제게 접촉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재판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미묘해졌다. 특히 성에서 오랫동안 카일을 모시면서 일을 돕던 신하들, 하인들의 표정이 더더욱 그랬다.

카일이 원래 저렇게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하던 사람이었나?

"무능을 이유로 자기 죄를 변호하려는 것이라면...."

"아니오."

후안이 다그치려 할 때 카일이 입을 뗐다.

"이 모든 무능은 제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입증합니다. 저는 모든 작위와 봉토를 내려놓고 남은 생을 뉘우치며 살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이 영지를 신께서 거두어주셨으면 합니다."

"뭐라고?"

즐겁게 후안의 반응을 지켜보던 델리아는 마지막 말에 경악하며 한 박자 늦게 돌아보았다.

봉토를 포기하는 것까지는 예상했다. 어차피 쥐고 있어 봤자 귀족들에게 갈기갈기 찢길 테니까. 순순히 내려놓는다면 여생은 배곯지 않으며 살도록 봐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잘 나가다가 갑자기 이렇게 빠진단 말인가?

놀란 것은 후안도 마찬가지였다.

"영지를 빛의 법전에 헌납한단 말인가?"

"아니오."

카일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가 죄를 지은 분, 제게 뉘우칠 기회를 주고 깨달음을 주신 아이작 성배기사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

카일의 말에 홀 안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아이작에게 영지를 바친다는 것은 빛의 법전에게 바친다는 뜻인가? 하지만 아이작은 방랑하는 성배기사일 뿐, 특정한 기사단이나 교구에 속해 있지 않다.

"성배기사가 영토를 가질 수 있나?"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지요."

과거 성배기사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괴물을 퇴치하고 큰 공을 세우곤 했다. 그렇게 괴물을 퇴치한 장소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주지거나 척박한 곳인 경우가 많았고, 그러면 해당 지역의 영주나 토호에 의해 찬사의 의미로 성배기사에게 기증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싸한 영지 하나가 통째로 주어진 경우는 없었다.

"헨드락 영지를 아이작에게 통째로 넘기겠다고?"

"예. 이교의 천사를 몰아내고 저주를 물리친 분이시니, 이곳의 주민들도 납득할 수 있는 가장 어울리시는 분이라 생각됩니다. 아이작 님께서 수도원을 세워 이곳의 사악한 기운을 누른다면, 모두가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나쁘지 않군."

후안은 빛의 법전이 아닌 아이작 개인에게 준다는 말이 거슬렸지만, 명목상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이작은 성배기사 아닌가. 게다가 성인으로 추대할 예정이었으니, 그 성인이 소유한 수도원이라면 누가 봐도 빛의 법전 영토였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머리가 팽팽 돌아가던 델리아가 급히 말했다.

"잠깐만요. 아직 문제가 있습니다. 카일에게는 거액의 채무가 있습니다. 그 채무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마음대로 이 영지를 처분할 수 없습니다."

"채무라면 교단에서 해결해주도록 하지."

"헨드락 영지가 진 채무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카일의 빚은 이번에 로어커스 사태로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갚아야 할 것은 우리 빚만이 아닙니다."

후안은 카일의 빚이 얼마인지 확인하라고 사제에게 지시했다. 그들은 교단이 카일에게 꿔 준 빚과 아이작의 업적을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왔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은 알지 못했다. 잠시 후 사제가 창백한 안색으로 헨드락 영지의 장부를 가져왔다.

그 액수를 본 후안은 장부로 카일의 머리통을 내려치고 싶은 표정이 되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후안이 혼자 짊어지기에는 너무 큰 액수였다.

물론 아이작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은 중요하지만, 후안이 정치적, 재정적 생명을 걸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저주받았다고 소문난 영지를 처분한다고 제값에 팔릴 리도 없다.

"그럼 어쩌자는 건가?"

결국 팽팽한 기싸움 속에 다시 이야기가 방황하려던 찰나, 델리아는 아이작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녀는 퍼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영지를 누가 가지느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

"제국이 채무를 해결하겠습니다. 대신."

델리아가 선택한 것은 헨드락 영지를 회색 지대로 만드는 것이었다.

"아이작 성배기사님이 황제 폐하로부터 봉토를 하사받는 것으로 하지요."

79화. 어부지리 (2)

"아이작 경에게, 뭐라고?"

후안은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봉토를 회수하시고, 그걸 아이작 님께 하사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땅에 성배기사님의 업적을 기리는 수도원을 지어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채무도 제가 알아서 해결하지요."

델리아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후안은 그녀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해 잠시 머뭇거렸다. 교단으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었다. 채무도 제국에서 해결하고, 수도원도 짓는 데다, 아이작에게 든든한 기반이 될 땅까지 주겠다고?

그러다 퍼뜩 깨달았다.

황제가 아이작에게 영지를 하사한다는 것은, 그에게 작위를 준다는 뜻이다.

즉, 아이작이 제국의 귀족이 된다는 뜻이었다.

"이 무슨...!"

"그러고 보니 아이작 님을 성인으로 추대할 것이란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후안은 입을 콱 다물었다. 델리아는 기죽지 않고 후안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설마 황제 폐하께 충성 맹세한 귀족이라는 이유로 성인 추대를 취소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델리아가 의도한 게 이것이었다.

아이작이 천사를 퇴치한 것이 분명한 이상, 후안은 아이작을 성인으로 추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황제에게 봉토를 하사받은 귀족이 되어버리면, 교단 입장에선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된다. 안 그래도 힘의 균형이 팽팽한 상태에서 제 손으로 황제에게 힘을 실어주는 꼴이다.

결국 후안은 이를 악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성인 추대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닐세. 나 혼자서 결론 내릴 수도 없는 것이고, 업적 평가도 더 정밀하게 이뤄져야 하지."

사실상 아이작의 성인 추대를 취소한다는 말이었다.

사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귀족이라는 이유로 성인으로 추대하지 않는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죽은 사람을 성인으로 추대하는 경우가 더 많을 뿐이었다.

아이작이 제국의 귀족이 된다고 그의 업적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성인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

후안은 델리아의 논리를 빠져나갈 궁리를 해 보았지만, 애당초 헨드락 영지의 처분권은 카일에게 있었다. 그렇다면 카일의 영지를 처분할 권리가 있는 채무자들, 그중에서도 가장 돈을 많이 투자한 중앙 귀족들의 의향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후안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차라리 델리아의 제안대로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아이작이 신실한 성배기사임은 분명하다. 장래가 밝은 성배기사를 교단의 새로운 얼굴로 내세우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어차피 상징성에 불과한 것. 실리를 따지자면 이 자리에 교단의 새로운 영토가 생긴다고 볼 수도 있지.'

후안은 은근한 얼굴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 같은 훌륭한 성배기사가 영지에 눌러앉아 다스리거나 하진 않을 테고, 대신할 수도원장을 파견해 달라 요청할 것이다. 즉, 약간 편법적으로 교단 영토가 생기는 셈이다. 교단은 늘 후원금에 굶주려 있기 때문에, 이런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는 수도원 영지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설령 영지에 머무른다 하더라도 교단의 입김이 강한 영주가 될 수밖에 없다.

'저것 봐라.'

아이작은 후안과 눈이 마주치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꿰뚫어 보았다.

분명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데? 명분만 포기하면 실리는 얻게 되는 거잖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물론 아이작이 실제로 생각하고 있는 바는 정반대였다.

아이작은 이 영지를 통해 빛의 법전에 빨대를 꽂을 생각이었다.

"...우리 성배기사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지. 아이작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윽고 공이 아이작에게 넘어왔다. 욕심 없고 청렴한, 그리고 신실함으로 빛나는 성배기사.

황제를 지지하는 귀족이든, 빛의 법전 사제들이든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훌륭한 회색 지대였다.

하지만 곧바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몇 번의 사양과 겸손, 겸양 끝에 결국 아이작은 마지못해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했다.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신의 의지가 이 땅에 고스란히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이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다.

***

"이제 귀족이 되었군. 축하하오."

아이작이 성벽 위에서 새롭게 자신의 영지가 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델리아가 찾아왔다. 델리아는 처음 봤을 때보다 한결 후련한 표정이었다.

아이작은 영지가 생겼기 때문에 이제 공식적으로 제국의 귀족이 되었다. 황제가 직접 하사할 수는 없으므로, 후작인 델리아가 대신하여 영지를 하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황제가 제국 안에 사는 수천 명의 귀족들에게 일일이 충성 맹세를 받을 수는 없으므로 이러한 대행은 흔하게 이루어지곤 했다.

그렇게 아이작에게 주어진 직위는 남작(Baron)이었다.

"제 주제에 귀족이라니, 분에 넘치는 작위군요."

"무슨 소리. 자네 말고 이 자리에 앉을만한 사람이 누가 있소?"

방탕한 영주를 몰아내고, 이웃 영주의 병사들을 학살한 기사의 반란을 단신으로 제압했으며, 이교의 천사를 몰아내고, 그 천사의 저주까지 물리친 성배기사.

영웅담에 나올 법한 이야기다.

그 누구도 아이작이 이 영지를 갖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없었다.

사실 카스트 제도가 확립된 사회라면 이렇게 작위를 얻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귀족의 힘보다 교단의 힘이 더 크고,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기 때문에 계급 이동이 생각보다 유연했다.

"솔직히 이 영지 자체는 별로 욕심이 안 나거든. 귀족들은 이런 골칫덩이 영지보다는 돈만 받아가면 그만이고, 교단은 원래부터 별생각 없었으니까. 하지만 자네에겐 그렇지 않겠지."

델리아는 씩 웃으며 아이작과 눈을 마주쳤다.

"자네가 이 영지를 갖게 된 것은, 자네가 가장 이 영지를 원했기 때문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잡아떼기는. 이미 내게 의사를 보이지 않았소? 내가 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나와 교단의 입장 차를 이해하고 유도한 거 아니오? 성인 같은 허울보다는 영지와 귀족 작위라는 실리를 얻으려고."

정확히는 성인이 되지 않으려고 영지를 얻은 것에 가깝다.

물론 설령 성인이 된다 하더라도 영지를 얻어 낼 생각이긴 했다. 다만 아이작은 그 의사를 숨기려 했다.

델리아는 그런 아이작의 욕망을 예리하게 읽어내고 자신의 목적을 이룬 것이다.

"경계할 필요 없소. 나는 야망 있고 욕심 넘치는 사람을 좋아해. 그 사람이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델리아는 호탕하게 웃으며 아이작의 등을 두드렸다.

"자네가 성배기사 껍데기를 쓰고 있는 이유도 그거겠지. 충분한 능력만 있다면 성배기사야말로 가장 빠르게 명성을 높일 수 있는 자리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한 태도로 물었다.

"명성도 충분하고, 영지도 얻었겠다, 이번에 황제 폐하께 충성 맹세를 하면서 중앙으로 올 생각은 없소? 발트제메르 황제 폐하께선 무인이오. 강한 기사라면 옆에 두고 귀하게 쓸 게 분명하오."

분명 그녀 말대로일 것이다. 발트제메르는 호시탐탐 성지 수복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성배기사라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게다가 칼센 밀터의 실종으로 전력에 공백이 생긴 상태라면 더더욱.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이작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이 이룬 업적은 그의 힘만으로 일군 것이 아니다.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이름 없는 혼돈의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그의 힘을 반의 반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자네는 알다가도 모르겠군. 분명 성공에 대한 욕심이 있는 자인 게 분명한데, 왜 이런 기회를 마다하는 거요?"

"뭐, 더 큰 뜻이 있다고 해두지요."

아이작의 대답에 델리아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좋소. 황제 폐하께 불충한 뜻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욕심을 내고, 탐내고, 그리고 노리시오. 젊은이가 패기 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군. 성공하거든 중앙의 이 델리아 리옹을 잊지 말고."

아이작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이번 일에는 그녀의 도움이 크기도 했으니 분명 빚을 갚을 기회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로 지출이 크지 않으십니까?"

아이작의 말에 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제국이 갚겠다고는 했지만, 황제 폐하께 보고도 없이 진행할 수 없으니 내 사재를 털어야 했고... 귀족들도 원금을 다 회수하지 못했소. 그래도 절반은 건진 걸 감사하게 여겨야지."

델리아가 귀족들을 어떻게 압박하고 협박했을지 그림이 그려졌다. 사실상 델리아가 자기 재산을 털어서 귀족들의 빚을 갚아 주는 셈인데, 불만을 토로하는 귀족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몽땅 털릴 뻔한 것을 절반이라도 건진 걸 감사히 여겨야지.

"그래도 아무것도 못 받고 빠진 교단보다는 낫지. 교단은 돌려받은 채무금 전액을 이곳에 수도원을 짓는 데 쓰기로 했소. 성을 개조하는 거니 돈이 많이 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돈이니."

사실상 교단의 몫은 아이작에게 들어온 셈이었다. 결국 아이작을 제외하고는 다들 손해를 크게 입고 빠진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손해를 본 사람은 델리아였다. 중앙 귀족들 중 가장 큰 황제 충성 파벌의 수장이라고는 들었지만 채무금을 돌려받지도 못하고, 오히려 큰 지출을 떠안았으니.

하지만 그녀는 안타까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작의 성인 추대를 막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했다. 하기야, 황제의 권세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밑에서 누릴 수 있는 권력도 크니 그 정도 지출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지출이 크긴 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훌륭한 인재를 알아가서 다행이오. 더군다나 그 인재가 내게서 영지를 하사받았으니, 자네가 명성을 높이면 높일수록 내 이름도 알려지지 않겠소?"

아이작은 웃고 말았다.

위로는 이미 떠오른 태양인 황제, 아래에는 떠오르기 시작한 샛별인 성배기사를 둔다 이건가.

확실히 그렇게 들으니 델리아의 생각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돈으로 권위를 산 셈이었다.

아이작은 델리아의 판단에 맞장구쳐 주기 위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이 영지에도 새 이름이 필요하겠군요. 혹시 델리아 님께서 지어주실 수 있을지요?"

"응? 그야 성을 따서... 아아, 그렇지. 성이 없다고 했지."

고아 출신이 많은 성기사들 사이에서는 성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때문에 성기사들은 자신의 성보다 출신 기사단, 출신 수도원을 더 가족처럼 여기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성기사 출신 귀족은 자신이 자란 수도원에서 성을 따오기도 하지만, 아이작은 딱히 그럴 만큼 수도원에 애정이 있진 않았다.

"태어난 곳은 알고 있소?"

"여기서 먼 동쪽입니다."

아이작은 대한민국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물론 게임 속 세계인만큼 정말 동쪽은 아니겠지만, 정서적으로 이곳은 유럽에 가까워 보였기에 아이작에게도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델리아는 약간 다른 곳을 생각한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이름이 아이작(Issac)이니, 성은 동부식으로 읽은 이사크레아(Issacrea) 어떻소?"

'그러면 내 이름은 아이작 아이작인가.'

아이작은 어처구니없는 네이밍 센스라고 생각했지만, 내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뭣보다 자신의 원래 이름인 '이삭'과 첫 어절의 어감이 비슷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 땅은 이제 이사크레아 영지군요."

"다시 한번 축하하오, 아이작 이사크레아 남작."

***

"조사 결과가 나왔나?"

"예. 일리야 도테 지부장님. 성배기사와 동행했던 성기사의 심문 결과, 아이작이 한 번도 기적을 쓰지 않았다는 증언을 확보했습니다."

헨드락, 이제는 이사크레아 령이 된 땅의 외곽 숲.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남녀가 모여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단출한 차림새였지만 망토에 박힌 갈까마귀 브로치들이 그들의 신분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후안과 함께 파견된 이단심문관들이었다.

"기적을 쓰지 않는 성배기사라...."

일리야 도테는 이단심문관 중에서도 동부지역 전체를 총괄하는, 가장 험난한 지역의 이단심문관이었다. 불사 교단과 붉은 성배 클럽으로부터 인접한 지역인만큼 배교나 이교의 침입 같은 사건이 빈번했기 때문에 이단심문관으로서의 능력도 대단히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케이스는 조금 특이했다. 일리야 도테는 아이작을 보자마자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샅샅이 성을 뒤지고 조사해 봐도 어디에서도 아이작에 대한 배교나 이단에 대한 혐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동굴에 들어갈 때에도 빛의 기적 대신 루앗딘 열쇠를 사용해서 주변을 밝혔다더군요. 동행한 성기사는 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데다, 성배기사에게 감명을 받은 눈치였지만 아무래도 이상하긴 합니다."

어둠을 밝히는 기적은 가장 기초적인 기적이다. 촛불에 불을 붙이는 기적 다음으로 먼저 배우는 것이기도 했다. 이단심문관들은 침묵하고 있는 다른 한 명을 바라보았다.

이솔데 브란트는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기억에도 기적을 쓰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때에는 성기사로서 이름을 날리기 이전이라 특이하다 느끼지는 못했지요."

"평범한 성기사라면 자질 미숙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교의 천사까지 물리친 성배기사라는 점이 문제지."

일리야는 두 이단심문관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성배기사가 후광을 띄웠다는 보고는 들은 적 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지. 하지만 그 외에 다른 기적을 쓰지 못하는 성기사가 천사를 물리치는 것이 가능할까?"

"살아 돌아온 엘릴이 아니고서야...."

인류의 정점을 찍을 정도로 극도로 단련한 존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언급된 바로 그 엘릴은 결국 신이 되었으니,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고 봐야 했다.

그때 이솔데가 입을 열었다.

"성배기사가 성체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성체라면 그 몸 자체가 기적이니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역시 옳은 말이다. 하지만 성체라는 눈에 두드러지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 문제로군...."

일리야는 명성을 날리는 성배기사를 감 때문에 함부로 몰아붙이거나 음해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작이 보여준 모범적인 태도나 업적, 그 어디에도 악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신뢰하되 단지 조금 더 조사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솔데, 자네가 성배기사와 안면이 있다고 했지. 조금 더 가까이서 관찰해주게."

"예."

"쓸데없는 걱정일 수도 있겠지만 교단에서 성인으로까지 만들려고 했던 자다. 앞으로도 명성을 날리겠지."

일리야는 말하면서 누군가를 떠올린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두 번 다시 칼센 밀터 같은 경우를 만들어선 안 돼. 반드시 확인하게."

"알겠습니다."

***

"...그래서 제가 아이작 경과 함께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이작은 이단심문관들과 나눈 대화를 고스란히 털어놓는 이솔데를 보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걸 왜 다 이야기합니까? 모르는 척하고 조용히 절 감시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80화. 탁란 (1)

"감시받는 게 꺼려지십니까, 아이작 경?"

그런 와중에 이솔데의 고백은 아이작을 떨떠름하게 만들었다.

"감시받는 게 즐거운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이단심문관이 감시하고 싶다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꺼지라고 하겠습니까?"

아이작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의심하고 싶다면 의심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이솔데 씨가 왜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하느냐는 것이죠. 암만 제가 이솔데 씨가 이단심문관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비밀스럽게 감시하면 될 일 아닙니까?"

"첫 번째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성배기사를 속이는 것이 꺼려진다고 해두죠."

"두 번째는?"

"명성 높은 성배기사를 속이고 바로 곁에서 관찰하는 것이 힘들 것 같아서죠. 제가 이단심문관이라는 것은 이미 아이작 경도 압니다. 어떻게 감시 목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들킬 바에 처음부터 털어놓고 가겠다는 것이다.

사실 아이작 입장에서는 이렇게 대놓고 나오는 것이 더 떨떠름하게 느껴졌다. 상대방이 속내를 숨기고 감시하면 모르는 척 속여넘기면 되는데, 대놓고 감시하겠다며 따라오면 숨길 수 있는 패가 많이 사라지니까.

"제가 머리 위에 후광을 띄웠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 하셨나 봅니다?"

"파수자의 등대 말씀이시지요? 강력한 기적이죠. 하지만 제 상관은 그게 마땅한 증거가 못 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전에 그 기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교를 저지른 자가 있었거든요."

아이작은 내심 뜨끔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이단심문관들은 역시 촉이 좋군.'

후안을 비롯한 사제들은 찰떡같이 믿는 것 같았는데, 이단심문관은 내사를 계속해서 이어갈 생각인 듯했다. 천사 퇴치조차도 그들에게는 의심할 이유가 된다니.

빛의 법전 기적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그로서도 걸리는 점 중 하나였다. 그것 때문에 일부러 성기사단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물론 기적 사용이 미숙하다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기사가 강한 이유는 검술에 곁들여 기적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술만으로 싸운다면 성기사나 보통 기사나 다를 바가 없다.

실제로 제국 기사단이었던 벡스터는 어지간한 일류 성기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즉, 기적을 쓰지 못한다면 천사를 물리칠 정도의 힘을 설명할 수 없다.

'뭐... 이건 어쩔 수 없군.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긴 했지.'

그나마 자신에게 호의적인 이솔데가 감시로 붙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혹시 세 번째도 있습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아이작 경을 속이거나 비밀을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솔데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이작 경도 그래 주실 수 있겠지요?"

양심의 가책을 이용한 공격이라니.

아이작은 의외의 날카로운 공격에 뜨끔했지만 놀라지 않은 척하면서 마주 웃어 주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기적을 발휘하면 되는 문제일까요?"

아이작의 말에 이솔데가 반색했다.

"쓰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저는 저를 증명하기 위해 경망되게 신의 힘을 끌어다 쓰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작의 말에 이솔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한 달."

"예?"

"한 달 동안 저를 지켜보시죠. 그 사이 제가 기적을 쓰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솔데 님이 제게서 이단의 증거를 찾아내시건, 기적의 증명을 발견하시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아이작은 씩 웃으며 말을 맺었다.

"이솔데 씨에게 좀 낯선 기적일지도 모르겠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