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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6

***

쇠르의 주요 물류 흐름은 강변을 통해 이루어진다. 때문에 수로가 꽤 잘 정비되어 있었는데, 쇠르 곳곳으로 통하는 배수로 역시 이 수로를 향해 연결되어 있다.

아이작은 그 지하 배수로 중 하나를 골라 안으로 진입했다.

당연하지만 아이작은 유크하르가 순순히 양치기 목상을 준비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유크하르가 사죄와 목상 대신 메이드복 입은 암살자를 보냈으니 도망치든가 저항할 준비를 하든가 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 의도한 바였다.

유크하르가 순순히 성물을 내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대신 그의 약점을 콱 찔러 버리면 놈이 허겁지겁 성물을 향해 달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안쪽 에 있습 니 다.'

지힐렛의 의지가 아이작에게 전달되어 왔다. 쥐보다는 고등한 지성을 가진 덕분인지 말투가 어눌하긴 해도 어휘력이 풍부했다. 지힐렛은 쥐새끼 출신답게 암살과 잠입, 추적에 유용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순순히 성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 줄이야.'

아이작은 쓰게 웃으면서도 결국 유크하르가 기댈 곳은 성물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황금우상 상단에서 그의 징계를 결정하고, 쇠르의 권력자들과 상인들도 자기가 조종당했다고 하면 즐거워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수상한 약까지 먹였다고 하면 더더욱.

그가 성물 외의 무엇에 기댈 수 있겠는가?

그때였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은 이 더럽혀진 성역의 '정화'를 원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아이작의 발걸음이 멈췄다.

'양치기 목상을 성역에 보관하고 있다고?'

쇠르에 성역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중요한 위치에는 으레 성역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이미 황금우상 상단의 성역일 확률이 높으니 굳이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유크하르가 그 성역의 힘을 빌리기 위해 왔다는 것은 뭔가 좀 이상했다.

'황금우상은 몸을 지키기에는 좀... 무력 쪽으론 의지가 안 될 텐데.'

하지만 그가 왜 도망칠 곳도 여의치 않은 여기에 숨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양치기 목상이 그렇게나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는 성역의 힘을 끌어다 써온 것이다.

그리고 유크하르를 지키는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안녕,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

헤사벨이 피곤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어제 새벽과 달리 하녀복을 입고 있진 않았다. 대신 왈라이카 사냥꾼 특유의 고급스러운 재질의 사냥복을 입고 있었다.

"이름도 알면서 그렇게 부르지 마라. 날 모욕하는 것 같으니까."

"내 이름은 아이작이다. 알고 있지?"

헤사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바로 싸울 생각은 없는 듯 창끝을 바닥에 댔다.

"분열 예식만 돌려다오. 그러면 방해하지 않고 돌아가겠다."

아이작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돌려줄 생각도 없었지만 대체 왜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가 쇠르의 깡패소굴에서 하녀 노릇까지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왜 유크하르 밑에서 일하고 있었는지 말해봐."

"...네놈 때문이다."

"분열 예식 때문이라면 그냥 밤길에 습격해도 되는 거잖아."

헤사벨은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이작은 허리춤에서 분열 예식을 꺼내 들었다. 헤사벨의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줄지도."

"너, 너!"

"빛의 법전을 걸고 맹세한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신이지만 헤사벨은 아이작의 맹세에 당황했다. 설마 성기사가 자기 신앙을 걸고 이런 것을 맹세할 거라곤 생각 못한 듯했다. 하지만 말 몇 마디로 분열 예식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헤사벨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널 추적하다가 여비가 떨어져서...."

헤사벨은 아리엣 계곡에서부터 아이작을 쫓아왔다고 했다.

아이작을 쫓아 분열 예식을 되찾고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별 고민 없이 바로 움직인 것이다.

문제는 헤사벨이 혼자서, 그것도 몇 개월씩이나 방랑해 본 것이 처음이라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헤사벨은 여정이 길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여비도 많이 챙겨오지 않았다.

먹을 거야 피를 빨면 되고, 노숙에도 익숙했지만, 사치스러운 삶을 살던 공작가의 여식에게 겨울의 고된 여정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해를 피하고 은밀하게 사람을 쓰려면 돈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여비가 바닥날 무렵, 헤사벨은 쇠르에 도착했다.

"그러다 로어커스 붐에 대해 들었군?"

"...그래."

헤사벨은 여비를 마련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남은 돈이 없었다.

"그래서 사채를 썼다."

"...사채? 유크하르에게?"

"그래. 그것도 담보까지 요구하더군...."

신분이 명확하지 않은 그녀에게 돈을 빌려줄 사람은 뒷골목의 큰손인 유크하르 정도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마저도 담보를 잡혔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담보 자체가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침 헤사벨은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 담보로 잡힐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아이작은 어이없다는 듯 헤사벨을 바라보았다.

"설마 다른 성물을 담보로 맡겼나?"

"...그래. 그리고 그 돈으로... 로어커스 코인을 샀지."

헤사벨은 입술을 몇 번이나 깨물었다.

"어이가 없군."

"무겁고 흙냄새 나는 로어커스를 취급하는 것보다 로어커스 코인이 훨씬 더 합리적이지 않나? 게다가 현금은 무지하고 구시대적인 유물이라고 하더군. 앞으로 모든 현금은 로어커스 코인이 대체하게 될 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배당금도 꼬박꼬박 줬다고!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흘러 배당금 지급이 늦어지면서부터였다. 유크하르는 배당금을 주는 대신 로어커스 가격이 오르니 로어커스 코인 가격 자체도 오른다면서 그걸 팔아 돈을 벌라고 했다. 헤사벨은 그 말을 믿고 로어커스 코인을 더 사들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성물을 맡겼을 때 받은 돈의 1/3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욕심은 무지렁이 농부, 상인,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왈라이카 왕국 공작가의 후계자마저도 집어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멍청하지? 혹시 너도 로어커스 술 마셨냐?'

아이작은 목구멍까지 그런 말이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냥 유크하르를 죽이고 돈을 빼앗아."

"안돼. 그러면 성물을 돌려받지 못해."

헤사벨은 창으로 땅을 내리찍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네가 쓸데없는 말을 떠들면 로어커스 가격도 폭락할 거라더군. 나는 로어커스 코인 금화 4.2닢에 물려 있다. 이대로 로어커스 값이 오르면 빚도 갚고 성물도 되찾을 수 있단 말이다. 널 기필코 막아 내겠다!"

42층에서 물린 고층 거주자의 절규가 배수로에 용맹하게 울려 퍼졌다.

46화. 등대를 밝히는 자 (2)

헤사벨의 포효가 지하수로를 쩌렁쩌렁 울린 뒤에, 둘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아이작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입을 열었다.

"내가 분열 예식을 돌려주면 돌아가겠다며?"

그런데 이미 담보로 성물을 맡겼으면 그것도 되찾아야 하지 않나?

아이작의 지적에 헤사벨은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음? 으음, 음. 그랬지. 내가 담보로 맡긴 성물은... 분열 예식만큼 중요한 건 아니니까... 크게 손해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헤사벨은 끙 앓기는 했지만 쉽게 로어커스 코인을 포기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분열 예식을 되찾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이대로는 크게 손해만 보고 돌아가게 될 테니까.

물론 아이작은 분열 예식을 돌려줄 마음 따윈 조금도 없었다.

"좋아. 한심한 이유였지만 호기심은 해결됐군. 난 또 유크하르가 왈라이카 사냥꾼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수완이 좋은 줄 알았지."

이만큼 한심한 사람이 헤사벨 외에 더 있을지는 모르겠다. 물론 로어커스 폭등에 낚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테니 성기사 몇 명쯤 끼어 있을지도. 유크하르가 묘하게 아이작 앞에서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겠지 싶었다.

"자, 그러면 되찾으러 와봐. 네 큰아빠의 실력은 한심했지. 조카딸은 얼마나 대단한가 보자."

"분열 예식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빛의 법전을 걸고 맹세했으면서?"

"빛의 법전께서 돌려주지 말래."

거짓말이다. 헤사벨은 성기사인 아이작이 신을 걸고 맹세했는데도 바로 어겼다는 사실에 인지부조화를 느끼는 듯했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성기사나 사제들에게는 곧바로 그 대가가 날아올 테니까. 하지만 애당초 빛의 법전 성기사가 아닌 아이작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이작은 바로 헤사벨을 향해 쇄도했다.

헤사벨은 잇소리를 내며 창을 들어 올렸다. 창끝이 날카롭게 아이작을 찔러 들어갔지만,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은 분열 예식이었다.

"야 이!"

그녀는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가까스로 창끝을 틀었다. 분열 예식이 아슬아슬하게 헤사벨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그건 무기가 아니야, 이 미친놈아!"

"알아."

분열 예식은 제례용 검이다. 제물을 바치거나 의식을 치를 때 쓰는 탓에 뼈를 자를 정도로 날카롭지만 단단하지는 않았다. 그걸 잘 아는 헤사벨은 자신의 창과 잘못 부딪쳐 분열 예식의 날이 상하거나 깨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즉, 아이작은 왈라이카의 국보 1호쯤 되는 물건을 들고 휘둘러대는 셈이었다.

"적당히 해!"

적의 무기와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공격해야 하다니, 헤사벨에게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자신의 몸을 붉은 안개로 변화시켰다. 아이작의 배후로 파고들어 그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순간 아이작의 몸도 붉은 안개로 변화했다. 두 붉은 안개가 거칠게 뒤섞였다.

콰드득, 쿵!

이내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거칠게 튕겨 나갔다. 헤사벨은 지하수로 바닥에 엎드려 헛구역질을 했다.

'이게 무슨?!'

안개 형태로 변화하는 것은 자주 했던 일이지만, 다른 안개와 뒤섞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 안개는 섞이자마자 일어나선 안 될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강력한 장력에 의해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아이작이 붉은 성배의 기적인 '붉은 탄원'을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붉은 탄원을?'

그 순간 헤사벨은 아이작이 빛의 법전을 두고 했던 맹세를 태연하게 어겼다는 사실과, 헤인켈이 죽었던 자리에서 붉은 살점의 예지자를 언급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불길한 상상은 그녀의 마음속을 삽시간에 사로잡았다.

'설마? 진짜로?'

"이거 영 느낌이 별론데."

어느새 일어난 아이작은 헤사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가지 실험해 보고 싶었는데 이 정도면 됐다."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가 헤사벨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보랏빛 눈동자 주변에는 소름 끼치는 촉수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적어도 빛의 법전 성기사가 가질 몰골은 아니었다.

"이건... 무슨...."

"이제 대화는 그만하자고."

헤사벨은 반사적으로 아이작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아이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왼팔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헤사벨의 창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팔뚝만 한 굵기의 그것은 창을 마치 이쑤시개처럼 부러뜨리고는, 파편까지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헤사벨은 강철보다 단단한 피의 창을 부숴 버린 촉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사이 촉수는 뱀처럼 헤사벨의 몸을 기어올라 그 끝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어둠에 익숙한 헤사벨은 그 촉수 사이사이에 넘실거리는 이빨과 가시, 눈동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비명과 함께 즉시 그 자리에서 달아났다.

***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헤사벨은 미궁 같은 쇠르의 지하수로를 헤매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출구는 대체 어디야?'

지하수로의 구조는 복잡하고 어두웠다. 지하수로는 아주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듯 층층이 다른 양식과 다른 재질의 돌들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어둠을 친숙하게 느끼는 뱀파이어지만, 이 해묵은 어둠은 그녀마저도 두렵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진짜 두려운 것은 어둠 너머에서 그녀를 추격해 오는 정체불명의 존재였다.

"헉, 헉...."

차오르는 숨에 헤사벨의 동작이 느려질 무렵, 등 뒤에서 더운 숨결과 끈적한 체온이 느껴졌다. 헤사벨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붉은 안개로 변신해서 달아나는 것은 이미 포기했다.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정해져 있는 능력인데, 이미 모두 써버린 탓이었다. 게다가 상대방도 붉은 안개로 변신할 수 있는데 그걸로 따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저건 대체 뭐죠, 백부님? 당신은 대체 뭐와 싸운 겁니까?!'

공포가 그녀의 머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공포감이 너무 극심한 나머지 차라리 싸우다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잡아먹히면 그래도 몸은 편해질지도.

하지만 그녀가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저것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붉은 성배 클럽의 신도들은 죽으면 붉은 성배의 만찬장에 초대된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고 미식과 쾌락을 즐기는 것이 붉은 성배의 천국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만찬장에 초대받는 것이 아니라 만찬장의 메뉴가 될 위기였다.

'죽어도 되는 건가? 저것에게 잡아먹혀도 정말 괜찮은 건가?'

어떤 종류의 죽음은 보통의 죽음보다 끔찍한 죽음을 선사한다. 신도들에게 보장된 사후세계를 빼앗아 가는 것이다. 한때는 바르바리에게 살해당하면 천국도 지옥도 못 간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론 신에게 저주받거나 만나선 안 될 존재에게 살해당할 때 벌어지는 일이었다.

헤사벨은 아이작의 정체가 만나선 안 될 존재가 아닌지 걱정했다.

결국 그녀가 조금의 발걸음도 옮기기 힘들 만큼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목숨 걸고 용맹하게 싸워서 명예롭게 붉은 성배의 만찬장에 입성하거나.

"살려주세요!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아니면 비굴하게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거나.

마침내 헤사벨이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아이작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도박을 벌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잃어버린 성물의 행방을 쫓고, 가문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뭣보다 아무 데서나 객사해서는 안 될 신분이었다.

차라리 헤사벨은 아이작이 정말 붉은 살점의 예지자이길 바랐다.

만약 정말 아이작이 붉은 살점의 예지자거나 그의 대리자라면, 그의 계획을 방해한 것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니라면 천국도 지옥도 아닌 어떤 끔찍한 장소에 헤매게 되겠지만.

헤사벨은 진창에 머리를 박은 채 아이작의 자비를 기다렸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저 어둠 너머에 아이작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더운 지하수로의 공기에서 묵은 피 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이다.

그때, 헤사벨은 자신의 목덜미를 무언가가 더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 그녀의 창을 씹어 삼켰던 그 촉수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것이 창에 대고 그랬던 것처럼 목과 머리를 씹어 버린다면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을 것이 뻔했다.

"살려주세요...."

그럼에도 헤사벨이 할 수 있는 것은 모기 같은 목소리로 비는 것밖에 없었다.

헤사벨은 잠시 응시하는 듯한 시선을 느끼다가, 문득 따끔 하는 목덜미의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뒤, 헤사벨은 천천히 눈을 떴다.

죽은 건가 생각했지만 만찬장도 없고, 지옥 같지도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축축한 지하수로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는 더 이상 덥지도 않았고, 역한 냄새도 풍겨오지 않았지만 그녀가 고개라도 들어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거의 10분쯤 지나서였다.

헤사벨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바로 일어나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소리가 너무 큰 것 같자 다시 살금살금 걷기 시작했다. 반쯤은 울고, 반쯤은 웃으면서 헤사벨은 다짐했다.

'절대로 저 인간 가까이 가지 말아야지. 절대로....'

***

'흠, 그냥 먹을 걸 그랬나.'

아이작은 묘한 공복감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원래는 진창에 엎드려 있는 헤사벨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한동안 먹은 것이 별로 없기도 했고, 애당초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상대를 살려 둔 적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사벨을 살려 둔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상위호환인 헤인켈 굴마르를 먹어서 딱히 더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어쩐지 죽일 기분이 싹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속마음을 알 수 있으니 쓸데없이 동정심이 생기는군.'

만약 혼돈의 눈으로 헤사벨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면 그냥 먹어치우고 후환을 없앴을 것이다. 하지만 혼돈의 눈으로 들여다본 헤사벨의 속내는 아이작에 대한 공포와 두 번 다시 아이작에게 덤비지 않겠다는 다짐뿐이었다. 그 결심이 쉽게 바뀔 것 같지도 않았다.

아이작은 그녀의 목덜미에 '저 너머의 기생충'을 박아 넣었다. 만약 헤사벨이 아이작에 대해 누설하거나 배신한다면 그녀의 뇌가 폭발할 것이고, 아니라면 한동안 두통에 시달리면서 살 것이다.

'목숨을 건진 대가치고는 싼 편이지.'

아이작은 계속해서 지하수로로 발을 옮겼다.

그가 헤사벨의 머리에 기생충을 박고 풀어준 것은 그녀가 유크하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지도 모른다는 속셈이기도 했다.

허겁지겁 쫓기던 헤사벨이 유크하르가 있는 곳에 도착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결국 이리저리 헤매다가 이렇게 끝난 것이다.

하지만 아쉽긴 했어도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성역의 기척을 찾아낸 것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채근하지 마라."

아이작은 지하 배수로를 따라 걸으면 걸을수록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성역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증상이었다. 아이작의 심장이 아니라 촉수가, 저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름 없는 혼돈의 눈동자에게서 전해져 오는 맥동이었다.

지하수로 모퉁이 너머에서 은은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일렁이는 불빛 너머로 다가가자, 이내 넓은 공간과 함께 기대했던 모습들이 나타났다.

이곳이 황금우상의 성역이었다.

방 구석구석 찬란한 금은보화와 마른 로어커스 꽃잎들이 가득 쌓여 있는 방이었다. 가운데에는 기묘한 의식이라도 치른 듯한 문양과 장식, 그리고 유크하르가 앉아 있었는데, 그는 품 안에 양치기 목상을 으스러질 듯 꽉 끌어안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황금우상 상단에는 교단다운 교단이 없어서 슬펐어? 그래도 다른 교단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던 거냐?"

아이작을 응시하던 유크하르의 입이 이내 쩍 벌어졌다.

[이 한심한 인간은 자기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황금우상을 대신하는 진짜 황금우상의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하더군.]

유크하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이작은 상대방이 누군지 금방 알아차렸다.

"너도 고대신이냐?"

47화. 등대를 밝히는 자 (3)

유크하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 자신이 목상이라도 된 것처럼.

하지만 아이작은 그 배후에 있는 무언가를 느꼈다.

유크하르가 양치기 목상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반투명한 무언가가 유크하르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돼지 같은 모습이었으나 워낙 이것저것 뒤섞인 외형이어서 정확히 알기는 힘들었다.

"이름이 뭐냐?"

[아직 이 인간도 내 이름을 알지 못한다만... 너, 천사와 인간의 부정한 교합으로 이루어진 잡종이라면 내 이름을 들어도 감당할 수 있겠지.]

반투명한 돼지는 몸을 꿈틀거리며 이름을 속삭였다.

[하지만 그냥 알려주면 재미없겠지. 수수께끼를 내마.]

"수수께끼?"

[그래... 나는 차가운 태양이며....]

"재물신 골루와루."

[....]

골루와루는 당황한 듯 말을 잃었다.

아이작은 돼지의 외형을 본 순간 이미 알아차렸다. 게임 속에서 골루와루는 정해진 장소 없이 등장하는 이벤트성 몬스터였다. 뜬금없이 나타나 수수께끼를 내고, 맞추지 못하면 레벨에 맞지 않는 몬스터들을 쏟아부어 플레이어를 죽이곤 했다.

설정상으로는 탐욕스러운 자의 냄새를 맡고 쫓아가 죽여 빼앗는 거라던가.

어쨌든 돼지 외형에 수수께끼를 내는 고대신은 골루와루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크하르가 끌어낼 만한 고대신도 그놈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안 거냐, 잡종아? 이제 내 이름도 다 잊혔을 텐데.]

"아무도 답을 알지 못하는 문제를 내려고 했던 거냐? 정신 나간 놈이군."

아이작은 고대신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도 않았다. 성역의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익숙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흥분하고 있었던 것도 성역 때문만이 아니라, 고대신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지힐렛의 신성을 씹어 삼킨 후 이름 없는 혼돈은 다른 신성에도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아이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려한 치장과 장식들을 보았을 때 이곳은 원래 황금우상의 성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유크하르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장소를 타락시킨 것 같았다.

"여기서 뭘 할 생각이었지? 아니, 사실 관심 없어. 그냥 죽어라."

아이작은 골루와루를 공격하기 위해 촉수를 뽑았다. 그리고 배수로 구멍 속에 숨어서 기습을 준비하던 지힐렛에게 공격을 지시하는 동시에, 아이작도 함께 달려들었다.

양쪽에서 암습을 당한 골루와루는 어느 쪽도 대비하지 못했다.

아니, 대비할 능력이 없었다.

아이작의 촉수가 유크하르의 가슴을 꿰뚫고, 지힐렛이 목을 물어뜯었다. 목숨을 앗아 가기에 충분한 치명상을 두 군데나 입은 유크하르는 단숨에 절명했다.

"성질이 급하군. 잡종 성기사."

그때 목이 부러진 유크하르가 입을 뻐끔거리며 말했다. 유크하르의 목소리긴 했지만 아이작은 그 본질이 골루와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골루와루는 반투명한 모습을 한 채 유크하르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이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촉수를 회수했다.

"너는 강력해... 하지만 다행히 나는 아직 완전히 부활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실과 비현실, 양쪽에 어중간하게 걸쳐져 있지. 나를 물리적으로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이다."

골루와루를 반이라도 살아 있게 만들어 놓는 매개가 유크하르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양치기 목상도 아닐 것이다. 그만큼 강한 성물이 아니니까.

골루와루는 유크하르의 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러니 불필요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성기사. 나는 싸움을 좋아하지도 않아."

"그럼 자살해 주게?"

"...나는 탐욕과 금은보화의 신이다. 성기사, 나와 거래하자."

골루와루는 탐욕신, 혹은 재물신으로 불리며 황금우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상인들 사이에서 숭배받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황금우상이 형태야 어쨌든 남과 손을 잡는 거래와 시장, 금융을 상징한다면, 골루와루는 그저 홀로 모으기만 하는, 독점을 추구하는 탐욕 그 자체였다.

"사악한 고대신이 성기사한테 거래를 제안하는 거냐?"

"네가 모시는 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등대지기의 하수인은 아니군. 그러면 상관없지 않나? 나는 네가 누구라도 상관없다.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으니까."

골루와루는 아이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탐욕이 느껴진다, 성기사. 사람들의 인정을 원하나? 그 손에 승리를 움켜쥐고 싶나?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다. 신을 네 아군으로 삼는다면 든든할 텐데?"

아이작은 재밌다고 느꼈다.

확실히 보수적인 빛의 법전이라면 모를까, 다른 신앙들도 자신들의 교리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거래 자체를 배교 행위로 보지는 않았다.

"무슨 거래?"

아이작은 골루와루가 무엇을 제안할지 알고 있었지만 물어보았다.

역시나 골루와루는 예상했던 답변을 내놓았다.

"내가 황금우상의 신이 되도록 도와다오."

***

유크하르는 황금우상 상단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황금우상 신도들을 가호하는 무언가가 있기는 하다. 우연과 행운, 예감 속에서 유크하르도 그 존재를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현상일 뿐, 분명한 신적 존재로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신을 원했다.

다른 신앙들처럼 기도에 답해주고 기적을 베풀어 인도해 줄 사제와 다른 신의 신봉자로부터 지켜 줄 칼을 든 성기사를 원했다.

그래서 유크하르는 양치기 목상과 재물신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어쩌면 자신이 황금우상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크하르는 관념적인 신에게 인격을 씌우고자 한 거지."

"인격?"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감동하고, 분노하고,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인격신 말이다. 엘릴이나 붉은 성배, 불사 황제가 그러하듯. 유크하르는 자기가 황금우상의 인격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를 이용해서."

골루와루는 즐겁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놈은 나를 부활시키기 위해 여기저기 손을 빌렸지. 아마 불사 황제의 권속들의 힘을 빌린 것 같더군."

'또? 하긴, 고대신이 얽힌 시점부터 또 그놈들일 줄 알았지.'

하기야, 불사 교단 말고 또 어디서 손을 빌릴 수 있을까?

쇠르는 백제국 변방에 위치한 무역 거점 도시다.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는 일도, 외국의 정체불명 물자가 들어오는 일도 흔하다.

유크하르는 지힐렛이 그랬던 것처럼 왈라이카 사냥꾼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론 고용한 셈이 되었지만.

"그리고 나의 부활을 위해... 쇠르에 욕심의 불길을 지폈지. 나도 도와줬고. 양치기 목상의 위치와 때마침 유행 조짐이 보이던 로어커스를 활용한 투기 전략 등을 알려주었다. 아, 돈이라는 것은 모으면 모을수록 정말 즐거워지지."

아이작은 골루와루의 전략이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고대신들이 부활하지 못하는 이유는 신도도 없고,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루와루는 쇠르의 욕심쟁이들을 시작으로 황금우상 신도들을 홀라당 먹어 버릴 전략을 세운 것이다.

황금우상 신도들은 파산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로어커스 폭등에 매달릴 테고, 그 탐욕은 골루와루의 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골루와루는 결국 부활하지 못하잖아?'

게임에서 골루와루를 이벤트 몬스터로 만날 수 있기는 하지만 지힐렛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중간보스 수준이다. 결코 신앙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기껏 해봐야 플레이어들을 괴롭히고 짜증나게 하는 정도.

결국 골루와루의 전략이 실패하기는 한다는 건데, 그게 어떤 시점에 왜 일어나는지는 아이작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빈약한 인간은 내 몸으로 삼기에 너무 나약하고 늙었다. 그리고 너한테 정체를 들키자마자 나한테 달려와서 헐레벌떡 방법을 달라고 애원했지."

골루와루는 코웃음 치며 유크하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원하는 게 내 몸이냐?"

"그러면 가장 좋겠지만... 별로 내키지 않겠지?"

골루와루의 반투명한 몸 너머에서 두 눈동자가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건강하고 어린, 심지어 천사와의 혼혈이라 신성까지 품고 있는 성기사라니. 숙주로 삼기에는 최상의 육신이었다.

하지만 골루와루는 서투른 욕심으로 가진 것을 잃을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욕심으로 차근차근 무너뜨리다가 삼키는 것에 능했다.

유크하르를 무너뜨렸을 때처럼.

"뭐, 어때."

하지만 아이작은 예상 밖의 행동을 보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듯 팔을 벌리고 다가온 것이다. 골루와루는 당황해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몸을 주겠다고?"

"정체 모를 촉수 괴물보다는 말도 통하고 전략적인 고대신이 낫지. 그리고 황금우상 상단을 집어삼켜 신이 되겠다며? 그러면 단숨에 내 세력도 생기는 셈이군."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의 터무니 없는 비교에 분개합니다.]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정말 괜찮다는 듯 유크하르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골루와루는 아이작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수작을 부린다 해도 자신을 해칠 수는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는 이미 쇠르의 탐욕을 통해 힘을 얻고 있었고, 완전히 육신을 가지고 부활하기 전까지는 그 탐욕이 유지되는 한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작이 빙의하자마자 자기 자신을 해칠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골루와루는 아이작 안의 거대한 욕심을 읽었다.

놈은 자신을 정말로 삼켜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크하르한테 그랬던 것처럼.

골루와루는 이내 광소를 터뜨리며 아이작을 향해 덮치듯 달려들었다.

"크하하하! 그 욕심이 마음에 드는구나! 좋아, 우리는 좋은 조합이 될 거다! 세상을 집어삼켜 보자꾸나!"

유크하르의 몸이 으스러지면서, 골루와루의 반투명한 육체가 아이작에게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이작은 팔을 한껏 벌리고 골루와루의 침입을 받아들였다. 골루와루는 아이작의 몸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짙은 신성을 느꼈다.

그리고 그 직후.

그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을 느꼈다.

***

'뭐지? 이게 대체 뭐지?'

골루와루는 어떤 인간의 내면에서도 본 적 없는 거대한 공허를 맞닥뜨리고 당황했다.

죽은 신이라 해도 신성을 가진 신. 영혼의 격과 크기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골루와루는 아득한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한 마리 피라미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이게 대체?'

골루와루는 처음 느끼는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미지에 대한 공포였다.

재물신에게는 지식 또한 재물이다. 그는 새로운 지식을 얻고 탐구하는 것 역시 좋아했다. 새로운 경험을 낯설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어둠, 이 공간은 달랐다. 골루와루는 이 어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순간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에 도달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공포를 느꼈다.

자신이 안다는 사실에, 알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자신의 존재감만큼이나 나약했다.

하지만 그 비명을 듣고 누군가 깨어났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어둠 너머에서, 그 어둠만큼이나 거대한, 하지만 수천, 수백 개에 이르는 눈동자들이 집요하게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골루와루는 뒤늦게 시커먼 어둠 속을 표류하는 어떤 존재를 발견했다.

그가 익히 아는 존재였다.

역병신 지힐렛. 표류하는 신의 사체였다. 이내 그것을 다진 고기처럼 박살 내며, 어둠 속에서 거대한 촉수들이 기어 올라왔다.

골루와루는 깨닫기도 전에 온몸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

"아아아아아아아!"

골루와루가 아이작을 덮치고 다시 튕겨져 나가기까지는 3초도 안 되는 시간이 걸렸다. 적어도 아이작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유크하르의 몸으로 돌아온 골루와루는 산채로 찢겨 나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고 기어가며 도망치려 애썼다.

"윽."

콰드드드득!

아이작도 멀쩡하지 못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광분하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에서 촉수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작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원래는 왼쪽 손바닥에만 나타나던 촉수가 온몸을 째며 튀어나왔다.

아이작은 삽시간에 온몸이 촉수로 넘실거리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은 여전히 분노한 듯 유크하르를 찢어발기려 들었다.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 들어가라고!"

마치 말 안 듣는 개를 패기라도 하듯 몇 번이나 때리고 다그치고서야 촉수가 하나둘 씨근거리며 몸 안으로 사라졌다. 일부러 의도한 일이긴 했지만 과한 반응에 아이작이 당황할 정도였다.

마침내 촉수들이 다 들어가고서야 이름 없는 혼돈이 경고하듯 메시지를 날렸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은 자신의 소유임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48화. 등대를 밝히는 자 (4)

"그래, 그래."

아이작이 의도한 일은 아니지만, 이 캐릭터를 만들 때 이름 없는 혼돈을 골랐으니 그 업보도 감당해야 했다. 어찌 됐든 자신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니 죽일 수 없다던 골루와루는 예상대로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튀어나왔다.

"그대로 안에서 잡아먹히지 않을까 했는데 살아나온 걸 보니, 쇠르에서 벌인 일이 나름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야?"

아이작은 골루와루를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가 있던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오줌을 지린 흔적과, 엉망이 된 몸과 영혼을 질질 끌고 어딘가로 도망친 듯한 흔적이었다.

"그러게 감당할 수 없는 걸 먹으려고 하니까 탈이 나지."

아이작은 그 흔적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흔적은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

"살... 살려...!"

골루와루는 고통스러운 몸을 뒤틀며 계단 위를 올라갔다. 아이작의 몸에서 도망치기 위해 골루와루는 제 영혼의 대부분을 떼어 놓고 도망쳐야 했다. 그의 영혼의 격은 극도로 쇠약해지고, 그나마의 생명력도 보존하기 위해 유크하르의 몸에 전력으로 기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크하르의 몸 역시도 다 죽어 가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체나 다름없는 꼴로 살아있을 수 있던 것은, 그동안 쇠르에서 끌어모은 탐욕의 기운 덕분이었다.

실낱같은 신성이 탐욕을 끌어모아 그의 목숨을 붙여 놓고 있었다.

'살려줘!'

골루와루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권세가 황금우상에게 서서히 잡아먹힐 때에도, 그를 토벌하기 위해 엘릴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에도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신성을 가지고 있는 한 다시 부활할 기회를 노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이작의 안에서 본 그것.

그것은 달랐다. 그것은 골루와루의 몸을 무참히 자르고 찢으며 씹어먹었다. 신성조차도 간식거리라도 되는 듯 이빨 아래 뭉개졌다.

"꺄아아아악!"

어디선가 그의 것이 아닌 비명이 들려왔다.

골루와루는 마침내 자신이 배수로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로어커스 향이 가득한 시장 한복판이었다. 시장 상인들과 주민들이 시체나 다름없는 유크하르가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오는 꼴을 보며 경악했다.

제정신으로 판단하긴 힘들었지만, 골루와루는 잘하면 살아남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잡종 성기사, 아이작이라는 자는 어째선지 모르지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다.

그렇다면 밝은 곳에선 그 촉수를 꺼낼 수 없을 것이다.

"살, 살려...."

골루와루가 힘겹게 말을 꺼내자 그제야 그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본 주민 몇이 다가갔다. 그들은 유크하르의 육신이 어떻게 살아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돕기 위해 상태를 살피고, 몇몇은 사제를 부르거나 붕대를 구하러 뛰어갔다.

그 순간 골루와루의 눈이 번뜩였다.

[오라!]

골루와루의 발악 같은 외침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골루와루는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 짜내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곧 자신을 쫓아올 괴물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골루와루는 양치기 목상을 높게 들어 올리며 그들의 욕망과 탐욕에 속삭였다.

[너희를 파멸시키기 위해 기사가 나타났다! 탐욕의 성전을 무너뜨리기 위한 기사가!]

양치기 목상에는 특정한 감정을 부추기는 힘이 있을 뿐,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골루와루는 그들의 욕망에 호소하고 있었다. 골루와루는 유크하르의 기억 속에 있는 사실과 정황들을 모조리 털어 냈다.

로어커스 폭등과 조종당한 권력자와 큰손들, 이를 위해 이용당한 사람들까지.

자백이나 다름없는 짓거리였다.

하지만 골루와루는 인간의 욕심을 믿었다.

이제 로어커스 유행은 쇠르뿐만 아니라 제국의 중심부까지 번져 나갈 것이다.

탐욕의 불길이 대륙을 불태우면 너희들은 태산만큼 많은 돈을 쥐게 될 것이다.

골루와루의 달콤한 속삭임은 동시에 두려움도 함께 밀어 넣었다.

지금 다가오는 성기사는 너희를 파멸시키기 위해 다가온 괴물이다.

너희의 가정을 무너뜨리고 직업을 잃게 만들 것이다.

바닥에 주저앉아 나무껍질이나 벗겨 먹을 것인가? 보릿고개를 버틸 식량을 팔아 여기까지 왔는데?

너희가 지금 쥐고 있는 그 황금빛 미래를 시궁창에 박을 것이냐!

[나를 지켜라, 지키지 않으면 너희는 나와 함께 파멸한다!]

오직 한 사람.

한 사람만 이곳에서 묻어 버린다면 더 큰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상인들은 골루와루가 쥐어 짜낸 목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도 직관적으로 상황을 이해했다.

자신들은 속았다.

속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속지 않으면 그들은 파산한다.

앞으로도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거짓말을 믿어야만 살 수 있다.

그러려면 성기사가 죽어야 했다.

그들은 광기로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한곳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뭐야."

그곳에 성기사가 있었다.

***

아이작은 시장을 가득 메운 상인들과, 그들 사이에 숨어 허겁지겁 몸을 빼려는 유크하르를 보았다. 그는 미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설마 이 많은 민간인들을 전부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네가 비록 괴물의 본성을 숨기고 있을지 몰라도, 위선을 부리는 한 본색을 드러낼 순 없겠지!'

골루와루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골루와루가 아이작이 괴물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까발릴 수는 없었다. 믿어 줄지도 의문이지만, 아이작이 정체가 발각되었다고 생각하고 괴물이 되어 버리면 그를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결국 골루와루가 아이작을 저지하려면 그의 사회적 체면을 이용해야 했다.

아이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시장 상인들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상인들은 그를 향해 살벌한 눈빛을 띤 채 어디선가 주워 온 무기들을 하나둘 꼬나쥐고 있었다. 그들 자신도 이걸 들고 어쩌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군중의식은 무서운 법이다.

이들 중 한두 명만 아이작에게 달려든다면 책임은 사라지고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조용히 눈감게 될 것이다.

아이작은 일단 멈춰 섰다.

그의 눈앞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헤사벨 굴마르였다.

도망친 줄 알았던 그녀가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골루와루의 군중 통제에 휘말린 것인지, 아니면 아이작에게 미련이 남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헤사벨 본인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작과 눈이 마주치자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다시 시장 상인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경전에 시장은 만민이 부족함을 나누는 곳이라 하지 않았더냐?"

아이작은 딱히 연설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다지 말재주가 좋지 못한 것도 있고.

하지만 연출을 위해서는 적당한 대사가 필요했다.

아이작은 적당히 성경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너희는 시장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짧고 담담한 꾸짖음과 함께, 아이작은 처음 시험 삼아 사용해 본 이후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던 '궁극기: 파수자의 등대'를 사용했다.

그 순간 아이작의 머리 위로 둥근 후광이 비추며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시장을 가득 뒤덮었다.

***

황금우상 상단의 상인 비히크는 시장을 방문 중이었다. 그는 시장 한쪽에 갑자기 소란이 일어난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확인하려다가 갑작스러운 충동에 휩싸였다.

성기사를 죽여라!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머릿속에 완벽한 내적 논리가 잘 짜여 있는 의지였다. 비히크는 그 충동에 거부감과 두려움을 먼저 느꼈지만, 그보다 이후 자신에게 찾아올 파산의 공포가 더 강력했다.

로어커스를 사들이기 위해 진 빚과 용병들에게 낸 대금, 자릿세, 마차 대여금... 다른 거부감과 두려움은 시장에 있는 모두가 나눠 가지고 있었지만, 파산의 공포는 오로지 그 혼자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기사를 죽여라!

비히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 상인이 팔던 식칼을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걸 왜 쥐고 있는지, 이걸로 뭘 할 생각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혼란에 휩싸인 와중, 갑작스러운 빛이 그를 덮쳤다.

'너희는 시장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짧은 꾸짖음과 함께 강렬한 빛줄기가 모든 것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빛과 어둠, 바른 것과 그른 것, 진실과 거짓, 모든 것이 분리되고 명암이 선명해졌다.

동시에 비히크의 머릿속도 맑아졌다.

땡그랑.

그의 손에서 식칼이 떨어졌다.

'내가 무슨...?'

비히크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상황을 명료하게 알아차렸다. 외면하기에는 성기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모든 것을 선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다음 찾아온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찾아온 수치심에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은 군중의 반응을 보면서 파수자의 등대 효과를 명확히 확인했다.

파수자의 등대.

게임상에서는 강력한 방어 스킬이자 오러 능력으로 표현된다.

플레이버 텍스트를 보면, 혼란과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해준다는 양 온갖 거창한 표현을 다 동원해 서술해 놓았다.

그러나 누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한단 말인가? 대체 어떤 존재가 그것을 정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제 아이작은 누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고르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등대의 빛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이작이 파수자의 등대를 시전한 순간, '빛의 법전'의 규칙이 후광의 빛이 닿는 모든 것을 뒤덮었다. 황금 우상의 기적도, 골루와루가 흩뿌렸던 선동과 탐욕의 속삭임도 순식간에 걷혀 나갔다.

'대충 광역 디스펠 정도의 효과로군.'

빛의 법전은 빛과 열의 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일반 물리 법칙의 신이기도 하다. 파수자의 등대로 시전된 후광 속에서는 모든 기적, 마법, 허구와 기만은 사라지고 아이작이 고른 '정상'의 세계만이 남았다.

여기서는 어떤 신앙의 기적도 존재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모든 범위가 빛의 법전의 성역,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이러니 파수자의 등대가 강력한 방어 오러 스킬 정도로 표현되지.'

그 어떤 신앙의 성기사나 사제도 파수자의 등대 안에서는 빛의 법전을 상대로 힘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것으로 파수자의 등대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작이 희망하는 바에 따라 등대의 방향을 돌릴 수도 있었다.

즉, 아이작은 지금 이 성역을 황금 우상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고, 붉은 성배의 것으로도 만들 수 있었다. 해당 신앙에 대한 이해도만 충분하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게임 속에서 칼센은 불사 교단의 성역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이작은 처음 파수자의 등대를 시전 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이름 없는 혼돈'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꿨었다.

그때 이후로 아이작은 두 번 다시 파수자의 등대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이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몸이 서서히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파수자의 등대를 꺼뜨렸다.

마치 태양빛이 사라지듯 그의 머리 위에 있던 후광이 붉은 노을처럼 사라졌다.

파수자의 등대를 시전한 시간은 몇 초 안 될 정도로 짧았다. 하지만 시장 상인들에게 영향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골루와루가 퍼뜨린 욕심과 선동의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심지어 놈이 그동안 상인들에게 퍼뜨렸던 로어커스 폭등을 위한 욕심마저도 완전히 걷어 낸 상태였다.

남은 것은 강렬한 현실 자각뿐이었다.

그들에겐 분노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 다가올 차가운 미래를 깨달았을 뿐.

상인들은 서서히 무너지듯 아이작 앞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감히 아이작에게 어쩔 생각조차 품을 수 없었다. 애초에 골루와루의 선동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아이작은 그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돌아가라."

상인들은 힘없이 아이작을 올려다보았다.

"돌아가서 가족들과 인사하고 그들을 안아주거라."

아이작은 상인들 사이를 지나 골루와루를 찾아 나아갔다.

49화. 계약성립 (1)

골루와루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것인지 그새 또 도망친 뒤였다. 그러나 상인들은 골루와루가 사라진 자리를 향해 손가락질해 가르쳐 주었다. 누구 하나 아이작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놈은 멀리 도망갈 상태도 아니었다.

아이작은 시장의 한 골목 안에 들어섰다.

벽을 짚고 몸을 질질 끌고 간 흔적 속에 골루와루가 멀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작은 이 시장통 속에서 골루와루를 어떻게 완전히 처치할지 고민하며 걸어갔다.

그리고 이내 멈춰 섰다.

그의 앞에 헤사벨 굴마르가 서 있었다.

아이작을 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그녀는 양손에 잘라낸 유크하르의 머리통을 들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 잘린 머리통에 깃들어있는 골루와루가 입을 뻐끔거리며 비명 지르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이작이 다가가자 헤사벨은 재빨리 무릎을 꿇으며 유크하르의 머리통을 내밀었다.

아이작은 왼손을 내밀어 유크하르의 머리통을 촉수로 씹어먹었다.

으슥한 골목 안에 뼈와 뇌수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짧게 울려 퍼졌다.

참혹한 일이 벌어지는 동안 헤사벨은 고개를 숙인 채 결코 들어 올리지 않았다.

아이작은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왜 돌아왔지?"

"당신을 섬깁니다... 진정한 선지자시여."

솔직히 말해 헤사벨도 자신이 여기에 왜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이작 앞에 무릎 꿇은 채 계속 그 사실을 생각했다.

아이작으로부터 도망쳤을 때, 헤사벨은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하 배수로의 시커먼 어둠 속을 헤매는 내내 그녀는 아이작의 시선을 느꼈고, 그가 짚었던 목 뒤에서 여전히 그 감촉을 느꼈다.

그제야 헤사벨은 깨달았다. 자신은 그에게서 절대로 도망칠 수 없음을.

아이작이 자신을 쫓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아이작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음을 안 것이다.

헤사벨은 붕괴 직전의 정신 속에서 한 가지 가능성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이 정말 붉은 살점의 예지자이길 바라는 것.

그녀는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다시 이곳에 돌아왔다.

"저는... 저는 당신께서 붉은 살점의 예지자라 믿습니다."

아이작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짓궂게 물었다.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건데?"

헤사벨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실 아니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아이작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면 그의 애완견이라도 되어야 할 처지였다. 헤사벨이 아이작을 붉은 살점의 예지자라고 믿는 것은, 단지 이 배교나 다름없는 짓을 저지르면서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작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알 수 없는 살점들을 조종하고 혼란의 영역에 속한 짐승을 움직입니다. 그것은 결코 빛의 법전이나 엘릴, 황금 우상, 세상의 화로 같은 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헤사벨이 말한 신앙들은 백제국이나 그 동맹에 속해있는 신앙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빛의 법전 성기사단의 인증을 받았으며, 그들과 함께 살았으며, 당당한 후광으로 사람들을 무릎 꿇렸습니다."

"그래서?"

"이는 당신이 기만에 능하고 배후에 움직여 혼돈을 퍼뜨리는, 붉은 살점의 예지자가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헤사벨은 스스로 논리까지 완벽하게 세워 아이작을 추종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혼돈의 눈으로 그녀의 내면을 살펴보고 그 결과에 놀랐다.

'이거 각오가 장난 아닌데.'

헤사벨은 보통 각오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 설령 진짜 붉은 살점의 예지자가 나타나더라도 그녀를 가짜로 부정하고 아이작을 진짜 천사처럼 숭배할 각오였다.

그 광신적인 신뢰에 살짝 오싹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헤인켈처럼 당장의 공포에 굴복해 일시적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아이작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확신하고 완전히 자신을 납득시킨 것이다.

'겁을 주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아이작은 이유를 고려해 보다가 자신의 매력 수치가 상당히 높아졌다는 것을 떠올렸다. 특히나 네필림의 외모는 탐미적인 붉은 성배의 신도들에게 더 강한 효과를 발휘한다. 매력은 심리적 효과에 영향을 미치니, 그녀가 공포로 굴복당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아이작의 눈앞에 낯선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헤사벨 굴마르(A)를 사도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사도가 되면 신성을 소모하여 기적을 베풀거나 힘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바르바리들에게 어설픈 포교를 할 때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메시지였다.

그것도 신도가 아니라 사도라니? 종교에 어설픈 아이작도 사도가 아주 높은 직급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작은 자신이 이름 없는 혼돈이라는 신앙에서 차지한 위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교황이자 메시아 격인 내게 직접 가르침을 받아 신도가 되었으니... 사도인 건가?'

아이작은 어이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헤사벨은 이름 없는 혼돈의 가르침이고 뭐고 받은 게 없었다. 그녀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문득, 아이작은 헤사벨을 사도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사벨은 이름 없는 혼돈에게 복종하는 게 아니다. 아이작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교리고 체계고 정해진 게 하나도 없는 이 신앙에는 그 점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그녀의 무릎 꿇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움찔하는 떨림이 전해졌다.

아이작은 온갖 망상을 하면서 떨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너를 내 첫 사도로 임명한다."

사도라는 말에 헤사벨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아이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올려다본 아이작에게서는 소름 끼치는 기운이 너울 치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사도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린다."

***

아이작은 다시 지하수로로 돌아왔다.

아까 마저 하지 못했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였다.

'골루와루를 먹어도 역시 별로 크게 달라지는 것 같지는 않군.'

지힐렛을 먹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을 먹었으니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기대했는데,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먹었다는 느낌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신성의 효과는 아이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아이작은 지금 자리에 없는 헤사벨에 대해 의식을 집중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눈앞에 헤사벨에 대한 정보가 나타났다.

[헤사벨 굴마르(S)]

[직위: 사도]

[상태: 맹목적 광신]

[붉은 탄원, 저 너머의 기생충, 흡혈]

'신성을 소모해서 신도를 강화할 수 있다라....'

신성은 신의 포만감과도 같았다. 소모하면 신도나 사도를 강화시킬 수 있었고, 새로운 기적을 선물하는 것도 가능했다. 덕분에 아이작은 헤사벨의 등급을 A에서 S로 상승시키고 기생충을 만들어 심는 기적까지 선물했다. 적지 않은 신성이 소모되었지만, 덕분에 그녀의 신뢰를 단순한 복종에서 맹목적 광신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신앙에 묶이면 묶일수록 신도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만약 헤사벨이 세상 끝까지 도망친다 해도 아이작은 그녀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배신할 일은 없을 테고.'

지힐렛을 위한 선물도 준비했다.

[지힐렛(S)]

[직위: 신수]

[상태: 절대적 복종]

[상시 위장, 포식, 가죽 아래에, 혼돈의 손길, 하급 지배]

지힐렛은 수명이 한정되어 있던 혼돈의 자손에서 신수로 격이 급등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신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덕분에 '가죽 아래에' 같은 예상치 못한 능력도 생겼다. 아이작이 처음 이 캐릭터를 만들었을 때 제안받았던 능력 중 하나인 이것은, 대상을 포식하고 그 가죽을 빌려 쓸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걸로 지힐렛은 짐승의 형태를 넘어서 어느 정도 인간으로 위장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된 셈이었다.

***

이제 아이작은 자신의 진짜 용건을 위한 곳으로 돌아왔다.

그의 눈앞에 골루와루가 지배하고 있던 성역이 나타났다.

[이 성역은 '재물신'에 의해 오염되어 있습니다.]

[오염된 성역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이 성역을 '이름 없는 혼돈'에게 바치시겠습니까?]

이 성역을 황금 우상에게 돌려주는 것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보아하니 이 성역은 오랫동안 황금우상 신도들로부터 꽤 방치된 것 같았다. 아마도 유크하르가 은밀하게 관리하던 것이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 성역은 그 자체로는 중요성을 알기 힘드니까.

'어차피 버린 거 내가 잘 써먹어야지.'

아이작은 제단 위에 손을 얹어 말했다.

"이 성역을 이름 없는 혼돈에게 바친다."

지힐렛의 성역에서 그러했듯, 손에서 빠져나간 촉수가 성역 안쪽에 맥동하는 심장을 심어 넣었다. 두근거리는 맥박 소리와 함께 아이작은 놀랍도록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파수자의 등대를 쓰면서 소모되었던 기운이 다시 빠르게 회복되었다.

['성역정화'에 대한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다음 세 가지 포상 중 한 가지를 고르세요.]

[경계의 낫 / 촉수의 단면을 톱날처럼 만들어 닿는 모든 것을 뜯어먹습니다.]

[심연에서 부르는 자 / 상대방을 광기에 빠뜨려 구속하고 느리게 만듭니다.]

[저 너머의 색채 / 일대에 시야를 가리는 어둠을 퍼뜨리고 혼란을 부여합니다.]

"으음...."

아이작은 기다렸던 선택지가 떴지만 얕은 신음을 흘렸다. 당황해서가 아니라 전부 다 아이작에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골루와루와 싸우면서 아이작은 물리적 공격이 통하지 않는 적의 존재에 대해 알았다. 경계의 낫이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통칭한다면 그런 존재에게도 통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공격력이 아쉬워지는 시점도 아니고 그런 적이 많을 것 같지도 않으니... 제외.'

다음은 심연에서 부르는 자였다. 저 너머의 색채와 똑같은 디버프기라는 점에서 비슷해 보였다. 다만 심연에서 부르는 자는 단일 대상으로 하는 대신 더 강력하고 빠른 디버프기 같았고, 저 너머의 색채는 다수 대상으로 한 광역 디버프기 같았다.

'효과는 심연에서 부르는 자가 낫겠지만.'

특히 이런 종류 스킬은 매력의 영향을 받는다. 헤사벨 같은 강력한 적이 나타나도 광기에 빠져 아무것도 못 하거나 아군을 공격한다면 매우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이 결국 고른 것은 저 너머의 색채였다.

다른 것이 아니라 '시야를 가리는 어둠'이라는 부분 때문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남의 눈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커.'

하지만 어둠을 불러내는 이 스킬이 있다면 밤은 물론이고 낮에도 어느 정도 시야를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어둠을 틈타 이삭 검술이든 촉수를 사용하든 할 수 있다면 어려운 상황을 더욱 쉽게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은근히 역설적이게도, 아이작이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단 하나의 강력한 적이 아니라 다수의 적들이었다. 장기전을 벌이기에는 네필림 종족의 체력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아쉬움은 있어도 제일 최적의 선택지는 '저 너머의 색채'였다.

아이작은 성역의 효과로 쇠르 전체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파악되는 것을 느꼈다.

파수자의 등대에 직접 노출되지 않아 걷어 내지 못했던 탐욕의 효과마저도 성역 선포의 효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제 아침이 되면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맑아지고 현실이 닥쳐올 것이다.

아이작은 쇠르 시장을 중심으로 퍼지는 분위기와 동요까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골루와루 말대로 하루아침에 그들의 욕심이 다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목숨이 걸린 일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상황을 미리 읽고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일 것이다.

아이작은 특히 황금우상 상단 쇠르 지부장인 캐틀린의 당혹감을 읽으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 어디 한번 수금하러 가볼까."

50화. 계약성립 (2)

"비히크 씨, 왜 그러시는 겁니까?"

황금우상 상단, 쇠르 지부장 캐틀린은 당황을 넘어 패닉 상태였다.

수일 전 간밤에 시장 쪽에서 기이한 섬광이 발생했다는 보고는 이미 들은 상태였다. 듣자 하니 자신이 의뢰를 맡긴 성배기사─아이작이 유크하르를 추적하다가 벌어진 일이라는 이야기였다.

아이작이 기습당했다는 소식에 유크하르가 벌인 일이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가슴이 철렁하긴 했다. 설마 이틀 만에 이렇게 공개적으로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아이작도 유크하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자신과는 직접적으로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황금우상 상단 소속의 상인들이 대거 이탈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남은 물량은 정리하고, 원래 하던 밀 교역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비히크는 어딘가 허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캐틀린은 초조해졌다. 사실 상인들이 뭘 취급하건 캐틀린이 강제할 권한은 없다. 단지 조언하고 경고해 줄 뿐이다.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면 상단 안에서 추방하거나 거래 금지 명령을 내리는 정도고.

하지만 문제는 쇠르 전체가 로어커스에서 발을 빼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로어커스 가격은 최고가를 찍었다. 백제국의 대귀족 그란트 가문에서도 로어커스에 관심을 가진다는 소문이 돌면서였다. 로어커스가 사 놓기만 하면 돈을 벌어들이는 꿀단지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손 털고 나가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유크하르가 무슨 짓을 했다는 소문이 벌써 퍼졌나? 아니, 그래도 다른 도시에 판다면 아직 돈을 벌 여력은 있는데....'

문제는 유행의 시작지인 쇠르의 분위기가 식자, 다른 도시에서도 유행이 시들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시장 분위기는 벌써 삭막했다. 멋모르고 뒤늦게 유행에 참여하러 왔다가 시장 분위기를 보고 발길을 돌리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유행은 한번 거품이 꺼지면 순식간이다. 슬금슬금 출구전략을 마련하려고 했던 캐틀린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미 계약이 되어 있던 물건에 대한 위약금과 신용도 하락 문제는 감안하신 거겠죠?"

"예. 물론입니다."

비히크의 담담한 대답에 캐틀린은 다시 또 당황했다.

그녀도 어찌 됐든 같은 상단 구성원에게 각박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지만, 로어커스 가격 폭락을 막기 위해서 이렇게 불이익을 주어 상인들의 이탈을 막곤 했다.

그런데 비히크는 큰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비히크 씨는 이번 로어커스 거래 때문에 빚까지 지고 있지 않나요? 위약금을 감당할 여력이 있습니까?"

"거래 대금으로 이미 받은 것도 있고... 저도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물량이 있는데, 마침 사주겠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주겠다는 사람?"

이 와중에 로어커스를 사들인 사람이 있다고? 시장에도 다들 팔려는 사람만 있지 사려는 사람이 없어서 거래가 얼어붙었는데?

"예. 덕분에 손해를 보긴 했지만 재기할 만큼의 여력은 남았습니다."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캐틀린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

"아이작 님!"

캐틀린은 숙소에 머물고 있던 아이작을 향해 달려왔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아이작은 호흡도 고르지 못하는 캐틀린이 말하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아, 캐틀린 지부장. 무슨 일이지?"

"이게 무슨... 성배기사가 시장에서 이런 장사치 같은 짓을 해도 괜찮은 겁니까?"

아이작의 숙소 앞에는 그가 고용한 대리인, 자클렛이 로어커스 구근을 잔뜩 사들이고 있었다. 유크하르의 심부름꾼으로 활동하던 자클렛은 명목상으로나마 시장거래 허가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미 숙소 앞에는 로어커스 구근이 몇 수레나 실려 있었다.

"장사치라니. 말이 좀 거북하군. 이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뿐인데."

"돕는다...?"

"그래. 듣자 하니 로어커스 열풍이 식었다더군. 사려는 사람은 없는데 팔려는 사람만 쏟아지니 물량이 넘쳐나고, 게다가 봄이 다가오면서 심을 때를 놓친 로어커스 구근이 썩을까 봐 걱정이 태산이라면서."

아이작은 팔짱을 낀 채 캐틀린을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욕심으로 가산을 탕진했으니 책임도 그들이 져야 맞겠지. 하지만 상인들이 전부 망해 버리면 일대의 물류 흐름이 망가지지 않겠나. 안 그래도 로어커스 때문에 물류 흐름이 망가졌으니 지금이라도 되돌릴 밑바탕을 마련해 줘야지."

아이작은 지금 성역에 있던 유크하르의 비자금을 바탕으로, 로어커스를 폭등 이전 원가에 사들이고 있었다.

상인들에게는 그동안 벌어들인 돈을 감안해도 끔찍한 손해였지만, 그래도 재기할 기반은 마련할 수 있었다. 손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로어커스를 끝까지 끌어안고 있는다면 썩어 없어질 것이기에 눈물을 머금고 파는 수밖에 없었다.

캐틀린은 아이작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기 때문에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그가 말한 일은 애당초 그녀가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상인들이 대거 파산하면 그대로 거래망이 망가진다. 지방 곳곳으로 물건을 퍼뜨려 줄 상인들이 사라지면 황금우상 상단에게도 장기적으로 손해다. 비록 상인들도 욕심에 휘둘리긴 했지만 재기할 기반은 마련해 줘야 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창고에 로어커스가 가득 쌓여 있는데 썩어 없어질 것을 감수하고 더 사들인다? 그것 또한 상인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로어커스 폭등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다 내다 버리는 일이 될 테니까.

그때, 캐틀린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그러면 성배기사는 왜 로어커스를 사들이는 거지?'

단순한 빈민 구제책인가? 그럴 수도 있다.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상인들을 구제하기로 한 아이작의 행동은 칭송받을 만한 일이니까. 상인들 역시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릴 것이다.

하지만 그뿐일까?

"아이작 님, 설마... 아니시지요?"

"아니라니, 뭐가 말인가?"

"그걸, 그걸 저희에게 되파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캐틀린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아이작에게 물었다. 아이작은 빙긋 웃었다.

"왜 아니겠나? 나는 가난한 성배기사일세.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자선사업을 하겠나?"

캐틀린은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지금 황금우상 상단이 보유한 로어커스가 많다고는 해도, 쇠르 전체 시장에 유통되지 않은 로어커스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그뿐일까. 다른 상단도 보유한 물자를 허겁지겁 아이작에게 들고 오기 시작하면 그 양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 로어커스를 그대로 가져와 한참 폭등하던 1주일 전 시세로 되판다면?

'파산.'

로어커스 폭등으로 벌어들였던 이득을 잃는 수준이 아니다. 쇠르 지부가 파산할 수도 있다. 아니, 그걸 넘어서 이 손해는 황금우상 상단 전체를 뒤흔들 만한 폭탄이 될 수도 있었다.

캐틀린은 숨쉬기 힘든 표정으로 힘겹게 의자를 부여잡았다.

아이작은 물을 따라 그녀 앞에 주었다. 캐틀린은 단숨에 물잔을 비우고 애걸하는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살려주세요. 성배기사님."

"요즘 유독 자주 듣는 소리군."

"그건 저희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황금우상이 보증한 계약서를 어길 자신 있나, 캐틀린?"

아이작은 입가를 닦으며 캐틀린에게 물었다.

캐틀린에게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황금우상 상단은 그녀가 평생을 갈고 닦으며 일해 온 곳이다. 이제 와서 배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저주받았다간 거렁뱅이로 살 것이 분명했다.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내 생각에는 나한테 애원할 게 아니라, 아직 황금우상 상단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은데."

그제야 캐틀린은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한 것뿐이지, 아이작 말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단지 그것 역시 손해가 막심한 길일 뿐.

그녀는 이내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조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구매하신 로어커스는...."

"참고로 지금 거리에 있는 물자가 전부는 아니네."

아이작은 이미 창고 몇 개를 빌려서 로어커스를 쌓아 둔 상태였다. 캐틀린은 다시금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숙소 밖으로 튀어 나갔다.

캐틀린은 나가자마자 자신의 비서에게 지시했다.

"당장 시중에 풀린 로어커스들을 전부 사들여! 당장!"

"예? 로어커스를 말입니까? 어, 얼마에...."

캐틀린은 살벌한 눈빛으로 비서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무조건 성배기사님이 사겠다는 가격보다는 비싸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