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성체(聖體) (4)
게벨이 도끼를 들어 올리며 묵직하게 발걸음을 뗐다. 아이작은 무심코 게벨이 베려 하는 상대를 그렸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거인, 아니, 거대한 바위였다.
게벨이 들어 올린 발을 내리찍는 순간, 도끼가 육중한 바람 소리를 내며 허공을 베어 내렸다.
부웅!
도끼날이 번뜩이며 강한 바람이 사방으로 몰아닥쳤다.
정직한 내리찍기.
도끼로 할 수 있는 간단하고 기초적인 동작이었다.
아이작은 그게 게벨이 멧돼지를 베었을 때와 비슷한 기술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통나무가 둘로 쪼개졌다. 단면은 깔끔했다. 결을 따라 쪼개져 있었지만 나무결과 직각이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란 것을 간단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깔끔하게 동작을 마무리한 게벨은 아이작의 놀란 얼굴을 보고 만족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놀란 이유는 게벨의 동작을 봤기 때문이 아니었다.
[성기사 기초 검술이 개방되었습니다.]
['칼센 밀터' 포식 효과로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하급 성기사 검술 숙련도(Lv 1) (11/10000)]
'보기만 했을 뿐인데?'
아이작은 여전히 레벨 차이 문제로 칼센 밀터의 포식 효과를 완전히 누리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뜬 메시지를 보아하니 포식 효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능력치만이 아닌 것 같았다.
'검술의 재능... 칼센 밀터가 가지고 있던 성기사로서의 재능.'
칼의 성자로 불리던 최고위급 성기사다. 아이작은 그 칼센 밀터의 재능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칼센 밀터를 포식하고 얻은 궁극기, '파수자의 등대'도 비슷한 방식으로 성장하다 보면 개방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일단 이것부터."
"게벨 씨처럼 하라구요?"
그 말에 게벨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흉내나 낼 수 있겠냐? 정말 똑같이 했다간 근육이 터질 수도 있다. 그냥 평범하게 내려치기 동작이나 해보라는 뜻이야."
단순한 내려치기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동작이다. 그러나 아이작이 아무리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어도 기술이 없으면 힘센 나무꾼에 불과하다.
즉 지금은 그저 기초를 가르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동작인지는 이해한 거냐?"
문득 게벨은 아이작이 '내가 그걸 따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뉘앙스로 말한 것을 떠올렸다. 게벨이 펼친 기술은 사실 같은 내려치기를 수만 번 반복한 사람이 고도로 집중했을 때나 가능한 동작이었다.
게벨은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단련했기에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대수로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경지를 알아보는 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이니까.
하물며 지금까지 내내 칼 한 자루 쥐어보지 않고 살아온 아이작이 알아볼 리가....
아이작은 당연하지 않냐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게벨과 비슷한 것을 떠올린 것이다.
칼센 밀터의 재능이 자신의 몸에 스며들었다면 그의 안목 또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방금 그게 따라하기 힘든 동작이라는 건 무르지크를 데려와도 대답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아이작은 천연덕스럽게 잡아뗐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답에 게벨은 미소 지었다.
아이작은 게벨로부터 손도끼를 건네받고는 묵직한 무게에 몸을 순간적으로 휘청였다. 하지만 간신히 발에 힘을 주고 버텨 섰다.
'그동안 포식을 하지 않았다면 쥐고 있지도 못했겠군.'
사실 이미 아이작의 몸에 있던 멧돼지가 전부 소화되어 더 이상 임시 특전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 큰 멧돼지를 다 소화시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아이작은 몸 근육도 키도 남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간신히 도끼를 들어 올릴 수라도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아이작이 간신히 도끼를 들고 있는 것을 본 게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는 장작에 박혀있던 도끼를 거뜬히 들어 올렸으면서 오늘은 간신히 들락말락 하고 있으니 이상했다.
게벨의 묘한 시선 속에 아이작은 일단 그가 했던 것처럼 간신히 들어 올렸다가, 한번을 겨우 베어 내렸다. 들어 올리는 것보다 땅에 닿기 전에 멈추는 것이 더 어려웠다.
후웅!
[하급 성기사 검술 숙련도(Lv 1) (22/10000)]
"휴."
"뭐야, 무겁냐?"
"아, 아뇨. 그건 아닌데."
아이작은 몰래 촉수라도 써야 하나 갈등에 빠졌다. 전에는 쉽게 들어 올려놓고 오늘은 너무 힘들어하면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게벨은 오히려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때 일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었다면 다행이겠군.'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그건 성체가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 기적에 불과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교단 안에서는 종종 그런 사소한 기적들이 벌어진다. 만약 그렇다면 아이작이 불필요한 관심이나 말썽에 휘말릴 일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곤 이내 자신이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의 목적을 위해서는 아이작이 성체여야 했고, 뛰어난 재능으로 성취를 이루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이작이 평범하게 자라 평탄한 삶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아이작에게 검술을 가르치기로 한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게벨은 검술을 가르치며 좀 더 확실하게 지켜보기로 했다.
"다시 해봐."
아이작은 몇 번 더 반복했다. 하지만 다섯 번도 채 휘두르기 전에 툭 도끼가 바닥에 닿는 것을 본 게벨이 웃음 지었다. 비웃음이 아닌 안도의 웃음이었다.
아이작은 그의 미소를 눈치채고는 다시 집중하며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게벨이 했던 동작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사진처럼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 동작을 다시 한번.'
붕! 아까와는 다른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게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살짝 사라졌다. 여전히 아이작이 도끼를 간신히 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도끼를 휘두르는 궤적과 기세가 남달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니...."
게벨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이작은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오직 가을비 속에서 게벨이 검을 휘두르던 궤적과, 방금 전 도끼를 휘두를 때의 모습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문득 그 궤적이 눈에 보일 듯 선명해졌다.
'칼의 궤적만 쫓을 건가? 칼을 휘두를 때는 온몸을 써야 한다. 발끝부터 정수리의 방향, 시선, 보폭, 호흡까지 전부 신경 써라!'
불현듯 아이작의 귓가에 그런 고함이 들린 느낌이 들었다. 아이작의 기억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기억,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만 있던 게벨의 움직임이 번뜩이며 아이작의 몸을 지배했다.
바웅!
순간 강렬한 돌풍이 뒷마당을 가득 메웠다. 도끼는 정확히 땅에 닿기 직전 멈췄다.
"헉, 허억...."
[크리티컬!]
[집중도 높은 성취로 숙련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하급 성기사 검술 숙련도(Lv 1) (232/10000)]
엄청난 향상에 아이작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번에 180 가까운 숙련도가 올라갔다. 집중하면 할수록 숙련도의 성취가 달라지는 모양이다.
아이작은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숨을 헐떡였다. 몸 전체가 타는 듯 뜨거웠다. 전신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지나치게 몰입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라 도끼를 떨어뜨렸다.
'뭐지? 방금은 설마 칼센의 기억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칼센이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거나, 가르침을 받던 때의 기억 같았다. 아이작은 마지막 동작을 수행하던 순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가까운 상태였다.
'내가 게벨의 동작을... 아니, 칼센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한 건가?'
어쩌면 이름 없는 혼돈의 포식은 단순히 적의 살과 뼈를 먹어 치우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치 타인의 경험이 고스란히 근육에 새겨진 것 같았다.
그제야 아이작은 게벨이 자신에게 뭐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뒤늦게 아이작이 돌아보자 게벨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뭐라고 하셨었나요?"
"...."
그는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게벨은 몇 번이고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기를 반복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얼굴에 마른세수를 하며 입을 열었다.
"다음으로 넘어가자."
"다음이요?"
"그래, 다음, 아니 기초부터. 이건 지금 너한테 너무 수준이 높다. 기초부터 다지는 게 맞아. 우선 체력단련부터 시작하자."
아이작은 약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지금 한 게 기초 동작 아니었나? 그냥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은 것뿐이었는데.
게벨도 자신이 어이없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작도 지금 팔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기 직전인 상황에서 검술을 단련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한동안 고기를 열심히 구해다 먹고 몸을 단련해야 할 것 같았다.
게벨은 방금 전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아이작을 보면서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아이작이 성체라는 것이 방금 전 일로 확실해졌다.
단순히 뛰어난 재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칼센이 스무 살 때 펼쳤을 법한 숙련된....'
게벨은 그런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정해졌다.
그는 아이작의 삶에 아주 약간 더 끼어들기로 했다.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 아이를 돕는 대가로 그저 빛이 인도하는 길에 나의 작은 자갈 하나를 더 올려놓을 뿐이다....'
게벨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
"성체가 분명합니다."
게벨은 다시 한번 수도원장을 찾아가 이야기했다. 수도원장은 게벨의 표정을 보고 의아해했다.
"그럼 저희가 전에 이야기한 것과 달라진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표정이 왜 그렇죠?"
"제 표정이요?"
"굉장히... 복잡한 표정이군요."
게벨의 얼굴에는 기쁨과 혼란, 두려움이 뒤섞여있었다. 가까스로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오고서야 수도원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왜 또 갑자기 그런 확신을 가지신 겁니까?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을 지켜보긴 했는데, 몇 번 휘두르는가 싶더니 지친 기색이 확연하던데요."
"예.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게벨은 그 광경이 믿기지 않는지 얼굴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성 아르테의 강철베기 식(式)을 도끼 열 번도 휘두르기 전에 흡사하게 해내더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검술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군요. 성 아르테가 1차 여명군의 영웅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성 아르테는 모든 성기사단 검술의 기반을 세우신 분입니다. 그가 창립한 성기사단은 백수십 개의 갈래로 나뉘어 세계 곳곳에 위치한 성기사단들의 시초가 되었죠."
게벨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성 아르테의 검술이 일반 기사와 다름없던 자들을 성기사로 만든 것입니다. 흔히들 검술을 신성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고 하지요. 근본 중의 근본이기에 지금은 낡은 검술이지만 여전히 기초 단계에서는 그의 검술부터 배우는 것이 상식입니다."
"아이작이 그 기초 단계를 하루 만에 해냈다구요?"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단순히 근력과 장비 문제로 보입니다."
게벨은 쉬지 않고 중얼거리며 설명했다.
"제가 잘못 봤어요. 아이작에게 내려진 기적은 단순한 완력이 아니라 그 재능이었습니다. 이 정도 완벽한 재능은 오직 칼센 밖에...."
"게벨."
게벨의 말실수를 수도원장이 지적했다. 게벨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흥분했다지만 그 이름을 언급하다니. 게벨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배교자의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알려지긴 했습니다만, 그자에 의해 지인들을 모두 잃은 아이와 비교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어디선가 해골바가지가 되어 썩은내나 풍기고 있겠지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게벨은 가슴에 둥글게 성호를 그으며 죄를 뉘우쳤다. 칼센의 배교는 교단 안에 적지 않은 풍파를 일으켰다. 이 수도원은 교단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어서 조용할 뿐이지, 지금 수도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법전에 그의 이름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소문까지 파다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던, 신에게서 인정받을 만한 업적을 세운다면 그는 승천하여 천사가 된다. 그중에서도 신이 기억할 만한 업적을 세운다면 신이 직접 그에게 이름을 부여한다. 이러한 격을 달성한 이들을 이름을 가졌다 하여 '명천사'라고 불렀다.
천년에 이르는 빛의 법전 역사 속에서도 명천사의 위계에 도달한 이는 여섯밖에 없다.
칼센이 그 일곱 번째 명천사가 되리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배교라는 믿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그렇다면 칼센은 불사교단의 천사가 되거나 명천사가 되었을 텐데, 불사교단에 새로운 명천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빛의 법전 교단에서는 칼센의 배교가 사실인지, 그는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찾느라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수도원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수도원장은 당장 코앞의 문제인 아이작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아이작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일단 검술 수업은 중단하고 호흡이나 보폭, 근력 운동처럼 진짜 제대로 된 기초부터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맛보기로 고생시키다가 나가떨어지게 만들 생각이었습니다만, 이 정도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줄은...."
"잘하셨습니다. 검술 훈련은 잠시 미뤄두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게벨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결정한 일이긴 했지만 수도원장이 굳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죠?"
"게벨 씨, 아이작이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성체일지도 모른다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작은 14살입니다. 강해지는 법보다는 인성 교육이 필요한 시기죠."
게벨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뭘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은 것이다.
"예. 아이작과 대화하다 보면 가끔 어른과 대화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아이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기꺼이 뛰어들 정도로 선하다는 것은 알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하다는 것이 꼭 장점만은 아니잖습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너무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게벨. 그렇게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면 방향에 집중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건... 예. 맞습니다."
사실 수도원장은 아이들로부터 아이작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몇 가지 있었다. 수도원장이 남다르게 걱정하는 것도 그 이야기들 때문이었다.
그는 아이작이 보여 준 행동이 선하고 정의로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단단히 그 마음씨를 붙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본디 가장 뼈아픈 배교는 가장 신심 깊은 신자가 저지르기 때문이다.
방금 전 칼센의 이야기를 했었기에 게벨은 더더욱 수도원장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빛의 법전 입장에서는 그런 뼈아픈 교훈을 다시 배우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은 제가 아이작을 가르치도록 하지요. 어떻습니까?"
"수도원장님이 직접요?"
게벨이 놀란 듯 물었다. 수도원장은 작게 미소 지었다.
"아이작이 성기사가 되길 원한다면 기적 또한 배우고 싶어 할 겁니다. 제가 아이를 가르쳐본 경험은 별로 없습니다만,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신앙심을 보여왔다고 생각합니다. 녀석도 검술 못지않게 좋아할 겁니다."
13화. 신앙증명 (1)
아이작에게 기적을 가르치겠다는 말에 게벨은 더욱 놀랐다.
사제들은 간단히 어둠을 밝히거나 촛불에 불을 밝히는 것부터, 적을 제압하는 것까지 다양한 기적을 구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교육은 최소한 수련 사제 단계부터 시작한다.
수도원장의 말은 아이작을 사제로 들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정식 사제가 되는 난이도를 생각하면 14살 아이에게는 섣부른 일이었다. 수도사들 중에서도 결국 사제복을 입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으니까. 허나 수도원장이 직접 가르치고 추천한 학생이라면 사제까지 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괜찮겠습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아이작은 14살에 불과한데요."
"바른 마음과 신을 진심으로 찬미하고자 하는 마음이 함께 한다면 안될 것도 없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빛의 법전께서 그 원리원칙대로 세상을 움직이실 테니."
***
아침 식사를 마친 직후, 아이작은 평소처럼 게벨을 도와주러 뒷마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게벨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아이작."
"안녕하세요, 수도원장님."
수도원장 예브하르였다.
큰 키에 비해 마른 체격을 가진 예브하르는 묵주를 만지작거리며 아이작을 훑듯이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한치의 불안감도 없이 그를 마주 응시했다.
이미 간밤에 게벨과 나눈 이야기를 엿들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꼬투리를 잡혀서 마녀사냥당할지 모르는 처지다. 그러니 확신이 생길 때까지는 철저하게 주의를 기울여야지.'
특히 지금은 이제 막 그의 잠재력을 선보이기 시작할 때니,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될 때였다. 그리고 오늘은 특히나 조심해야 했다.
'수도원장 예브하르가 나를 믿게 된다면... 성기사의 기초를 닦을 수 있는 기적을 배울 수 있다.'
아이작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쳤다. 당당하고 올곧은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예브하르는 아이작의 얼굴에서 엉뚱한 것을 발견했다.
'이것 참...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여자깨나 울리고 다니겠군.'
그동안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제대로 된 매력을 피우지 못하던 아이작은, 최근 포식의 효과로 괄목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푸석푸석하던 피부에 윤기가 돌기 시작하고 깡마른 팔다리에 적당히 살이 붙으면서 놀랄 정도의 외모가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예브하르는 그 얼굴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보통 아이들은 예브하르의 우울한 인상을 무서워한다. 하지만 아이작은 두려워하기는커녕 뭐라고 말할지 기대된다는 표정이었다.
'아이는 갑자기 성장한다더니 이런 걸 두고 말한 건가?'
어쩌면 아이작이 성체라는 게벨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반면, 아이작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상 한번 더럽군.'
아이작은 문득 이런 생각이 불경하게 낙인찍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재빨리 다른 생각을 했다.
"검술에 재능을 보인다고 들었다. 아이작."
"아, 네. 부족하지만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빛의 법전은 사제가 검을 드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장하곤 했다.
험한 세상에서 순례 여행을 떠날 때 무기를 들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더군다나 불사교단에게 살해당하기라도 하면 죽음보다 더한 꼴을 겪기 때문에, 동방으로 떠나는 사제의 경우 자기 단련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기도문은 얼마나 외우고 있느냐?"
"식전 기도문과 아침 기도문 정도...."
"경전을 얼마나 외웠느냐? 여명시편 4장 8절을 알고 있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작은 대답이 곤궁해졌지만 사실 그에게는 억울한 일이었다.
이 시대 대부분의 고아들은 굶어 죽지 않고 어른이 되면 다행이다. 기술이나 적당히 배워 먹고 살 방법을 찾으면 성공한 인생이었기에 글자까지 배우는 것은 사치였다. 수도원 역시 '글자를 배울 기회'를 제공할 뿐, 일일이 경전 내용까지 외우게 하지는 않았다.
즉, 예브하르는 수도원에 들어온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은 아이작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완전히 밝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검을 단련하면 누굴 베고 누굴 지켜야 할지 알 수 있겠느냐? 너무 성급하게 성취를 이루려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구나."
'성기사가 되려면 경전을 어느 정도 외우기는 해야겠지만, 벌써부터 공부하라는 것은 너무하는군.'
아이작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크게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예브하르가 굳이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뭔가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쓸데없는 노동시간을 빼주고 그 시간에 경전을 외우거나 필사 작업을 하라고 한다면 오히려 좋지.'
실제로 예브하르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아이작이 그토록 재능 넘치는 아이라면 지금 잡아둬야 엇나가지 않을 것이다.'
검술 수련은 잠시 쉬더라도 경전의 말을 잘 이해하는 바른 사람으로 만들어 둬야만 했다.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분에 넘치는 힘을 얻게 된다면, 성자가 아니라 그저 한 명의 무뢰한을 키우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예브하르가 알지 못한 사실이 있다면, 아이작의 머릿속에는 이미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아저씨가 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죄송합니다. 제 친구들이 다칠 뻔했던 일 때문에 무력감을 느껴, 순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서툴게 행동했습니다. 제 잘못을 반성합니다."
아이작은 반발하지 않고 오히려 겸손하게 사과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얼마 전에 애들 죽을 뻔한 거 알지? 그때 걔들을 누가 구했더라?' 하면서 예브하르에게 꼽을 주는 속내가 담겨있었다.
예브하르 역시 뒤늦게 그때 일을 상기하고 움찔했다.
그는 잠시 아이작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옳다. 중요한 건 마음이지 경전의 글귀가 아니거늘 내가 잘못했구나."
'어라? 이 양반이 꼰대처럼 생겨서는 왜 이렇게 빨리 인정하지?'
아이작이 의아해하던 때, 예브하르가 곧 말을 이었다.
"내가 네게 직접 빛의 법전의 말씀을 가르쳐주마. 경전을 달달 외우는 것보다는 이게 더 빠르겠지."
어쨌든 아이작은 예브하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수도원장으로부터 개인교습을 받게 된 아이작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
"무릇, 빛의 법전께서 선지자 루앗딘에게 전달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너희는 설산에서 피어오르는 모닥불의 열기가 대저 고난의 사막에 피어오르는 모닥불의 열기가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브하르는 아이작을 데리고 수도원을 걸으며 중얼중얼 경전의 말씀을 외웠다. 아이작은 잠이 오는 것을 느꼈지만 예브하르는 멈추지 않고 걸으면서 얘기했기 때문에 졸 수는 없었다.
'어지간히 지루한 수업도 귀 기울여 들었는데 이건 너무....'
사실 아이작은 종교에 관심이 없었다. 이삭에서 아이작이 된 이후로 가장 곤혹스러웠던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무신론자였던 것이다.
물론 신이 실존하는 세계에서 무신론자란 단어 자체가 터무니없으나, 그의 머릿속에 있는 기본 근간은 현대인의 사상 그대로였다.
저 높은 곳의 위대한 의지보다는 아무래도 개개인의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러나 이 세계 사람들은 그 위대한 의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 말은 즉, 아이작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서 살려면 신앙심을 가진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럴 때가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집중 수업을 듣고 있으려니 곤혹스러웠다.
물론 수도원장이 직접 개인교습을 해주는 것이 귀한 기회라는 것은 안다.
문제는 예브하르가 딱히 교육에 재능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다시, 빛의 법전께서 닫힌 방 안에 불꽃을 피워올리시니, 방 안에 연기가 가득 찼다. 그러자 불꽃이 꺼지고 말았다. 빛의 법전께서 이를 보여주며 루앗딘에게 말씀하시기를...."
아이작은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기분에 넌더리를 쳤다.
'차라리 물리학 수업이 더 재밌는 것 같은데... 으음?'
아이작은 문득 예브하르의 말이 어딘가 귀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까지 그는 경전의 글귀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 외워야 할 것, 암기해야 할 것으로만 생각했을 뿐 마음 깊이 담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브하르의 말에 억지로 집중하다 보니 미묘한 부분이 그의 기억을 건드렸다
"...빛의 법전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미 탄 재와 연기는 다시 나무로 돌아오지 않는다 하였다. 빛과 열기는 순간적이고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니, 너희는 순간을 사랑하고 아낄 것을 유념하라...."
'이거... 열역학 아냐?'
번뜩이는 깨달음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이작은 물리학을 전공하진 않았다. 하지만 기본 개요 정도의 지식은 있었다. 아이작은 예브하르가 중얼거리는 말들이 자신이 얄팍하게나마 알고 있는 물리학 지식들과 맞물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예브하르가 말하던 모든 것들과 경전에서 보고 들었던 내용들이 그의 머릿속에 똑바로 입력되었다.
마치 깨달음의 순간과 같았다.
빛의 법전의 가르침은 현대물리학을 수학이 아닌 구어체 형태로 교훈과 함께 풀어내는 것이었다.
'아니, 설마 그래서....'
그래서 '빛의 법전'인가?
빛은 가장 빠르다. 그리고 불변의 속도로 물리학 상식에서 불변의 척도를 갖는다.
빛의 법전이 신이라면, 그는 물리학의 신인 셈이다.
아이작은 그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깨닫고 할 말을 잊었다.
자신이 억지로 빛의 법전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애초부터 그는 빛의 법전의 신도였던 셈이다.
현대인이었던 그에게 물리학 상식은 공기와 같은 것이었으므로.
"아이작."
그때 불쑥 예브하르가 아이작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우울한 얼굴에 아이작은 움찔 뒤로 물러났다.
"내가 가르치는 와중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것 같구나."
"...수도원장님의 말씀을 다시 되새기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냐? 그러면 모닥불 일화에 대해 다시 물어봐도 알겠구나."
설산의 모닥불은 사막의 모닥불의 열기와 같다.
경전에서는 빛의 법전의 권능이 선하건 악하건 상관없이 평등하게 세상 만물에 비치며, 빛의 법전의 자애로움을 설파하는 내용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그 내용은 자애나 평등과는 상관없다.
"뜨거운 것은 어디서나 뜨겁고, 차가운 것은 어디서나 차갑다는 뜻입니다."
지나치게 요약한 설명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요약해야 이 세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브하르는 아이작의 말을 듣고 뭔가를 느꼈는지 표정이 꿈틀거렸다.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진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닫힌 방의 일화는?"
"고립된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계속 형태를 바꿀 뿐, 사라지거나 새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재의 일화는?"
"높은 것은 낮은 곳으로, 더운 것은 미지근한 것으로, 뭉친 것은 흩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아...."
예브하르는 눈을 크게 뜨고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막힘없이 대답하는 아이작을 보면서 쉴 새 없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아이작의 말은 자칫 잘못하면 이단으로 지적될 수도 있는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간 경전을 공부해 온 예브하르는 본능적으로 그의 말에 빛의 법전이 남긴 말씀의 '본질'이 숨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루앗딘의 경전은 신의 말씀처럼 떠받들어졌다. 하지만 수백 년간 번역과 필사를 통해 사제들의 의견과 해석이 덧붙여졌다.
보다 듣기 좋고 교훈적인 내용이 담긴 것들로.
그러나 아이작의 말은 그 모든 해석들을 걷어낸 정직한 본질에 가까웠다.
'마치... 빛의 법전의 말씀을 필사했던 루앗딘처럼?'
예브하르는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리에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게벨은 아이작이 성체라고 했다. 신의 선택을 받은 자, 기적을 몸에 품은 존재라고.
예브하르는 이때까지 그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지금 아이작이 하는 말은 그를 시험에 들게 하기 충분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내가 감히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을 시험하려 했다는 뜻인가?'
예브하르는 게벨이 느꼈던 충격의 일부분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성체라는 것인가?
하지만 아이작은 예브하르가 만났던 다른 성체들과는 무언가 달랐다. 마치 발밑을 흔드는 듯한 불안정한 기분이 들게 하는 인물이었다.
'만약 아이작이 성체라면, 시대를 뒤집을만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아이작은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끼면서 자신이 뭘 잘못했나 생각했다.
'꽤 잘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순화시킬 걸 그랬나?'
아이작 입장에서는 예브하르의 저 무시무시한 얼굴이 '내 수도원에 이런 멍청한 놈이 있다니'라는 생각을 가진 얼굴인지, 아니면 '내 눈앞에 악마 새끼가 있다니'하는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파악한 빛의 법전의 본질이라면 정답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물론 그걸 수식으로 풀어내라고 하면 절대 못 하겠지만.'
아이작이 아는 것은 그 개념뿐이다. 그것도 매우 요약된 버전으로.
하지만 그 덕분에 예브하르에게 아는 척이나마 할 수 있었다.
예브하르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놀랍구나, 아이작."
14화. 신앙증명 (2)
다행히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아이작은 속으로 안도하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수도원장님."
예브하르는 겸손하게 대답하는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가 정말 성체인 걸까? 성체이든 아니든, 범상한 존재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예브하르는 그럴 일 없겠지만,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아주 교묘한 악마가 수도원에 숨어든 것.
예브하르는 신중한 자였다. 그는 추앙받는 영웅이 사실 사악한 내면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례를 얼마든지 보았다.
불사황제 베셰크만 해도 빛의 법전의 주교 중 한 명이었다. 칼센 밀터는 명천사의 위계가 예정된 교단의 영웅이었다. 배교를 대가로 다른 신앙의 명천사가 된 자들도 있었다.
'빛의 법전이시여, 부디 당신을 시험하는 저를 용서하소서.'
예브하르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는 천천히 아이작의 미간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아이작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물끄러미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에게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뭐?'
아이작은 갑자기 울려 퍼진 경고에 놀라 머리를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예브하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이작의 뒷목을 잡아채고 손가락으로 미간을 찍어눌렀다.
그 순간,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수도원을 뒤덮고도 남는 섬광은 산을 넘어 지평선에서 보일 정도로 선명하게 뻗어나갔다.
빛은 한참 후에야 사그라들었다.
아이작은 뒤로 나동그라진 채 멍한 얼굴로 앞을 응시했다. 어디선가 탄내가 진동했다. 아이작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 예브하르가 짚었던 이마를 만졌다. 하지만 그의 이마에는 거뭇한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아무런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단하구나, 아이작."
그때 앞에서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브하르가 피곤한 표정으로 손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의 손목 아래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시커멓게 탄 흔적만 남아있었다.
"내가 과연 너에게 뭔가를 가르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다...."
예브하르는 이내 푹 쓰러지듯 기절했다. 당황하는 아이작 뒤로, 황급히 달려오는 수도사들과 게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예브하르를 침실로 데려간 뒤, 아이작은 게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했다. 게벨은 예브하르가 아이작의 미간을 짚은 순간 섬광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짧게 탄식했다.
"믿음의 증명이요?"
"그래. 수도원장님은 너의 믿음이 진심인지 마지막으로 확인해보고 싶으셨던 거다."
게벨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믿음의 증명은 천국에 육신을 밀어 넣고 믿음을 확인하는 기적이다. 믿음이 얕은 존재라면 화상을 입지. 그래서 고위 사제와 이단심문관 외에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단다."
아이작은 손목이 날아간 예브하르의 꼴이 자신에게 적용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겁했다.
'그래서 이름 없는 혼돈이 그렇게 경고한 건가?'
아이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수도원장님이 절 죽일 뻔한 거예요?"
"수도원장님은 그 기적을 평생 세 번도 쓰지 않으셨다. 그것도 상대방이 크게 다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아예 안 쓰셨지. 네 대답을 듣고 나름의 확신을 가지셨을 거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아이작은 속내를 숨기고 씨근거렸다.
"하지만 결국 저는 무사했고 손목이 날아간 것은 수도원장님이잖아요? 그건 왜 그렇죠?"
게벨도 그 사실이 적잖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그게... 믿음의 증명은 만약 시전자보다 상대의 믿음이 훨씬 크다면, 오히려 시전하는 자가 화상을 입는다. 그 격차만큼 정직하게 돌아오지."
아이작은 입을 벌리고 당황했다. 그는 그제야 다른 수도사들과 게벨이 자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수도원장과 신앙심 대결을 벌였더니, 아이작이 압승했다는 뜻이었다.
'무협지로 따지자면 갓 입문한 문도가 장문인과 내공 대결에서 이긴 수준이군.'
아이작은 이 사실이 어떻게 알려질까 싶어 당혹스러웠지만, 이름 없는 혼돈과의 연결이 들통난 게 아니란 것에 위안을 받았다. 오히려 그의 '신앙심'이 공개적으로 알려진 셈이 되었으니, 이제 그를 의심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좋아. 공식적으로 신앙심을 인증받은 셈이니, 촉수를 들킨다 해도 변명의 여지가 생긴 셈이다.'
아이작은 자신이 수도원장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압승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확인한 대로 빛의 법전이란 결국 물리학의 상식이다. 현대인인 아이작에게 그것은 이미 지구는 둥글고 달이 존재한다는 수준으로 당연한 것이었다.
그 믿음이란 애초에 흔들릴 수가 없는 것이다.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믿음과도 같은 거니까.
반면 예브하르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무수한 전설과 미신들이 뒤얽힌 세계를 살고 있다. 그가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믿음의 강도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사소한 의구심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그 차이는 예브하르의 손목이 날아가는 결과로 돌아왔다.
"손목은 다시 나으시겠죠?"
고위성직자 중에는 잘린 사지를 복구하는 기적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도원장 정도라면 그 정도 기적은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게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기적을 통해 사라진 손이니 힘들 거다. 빛의 법전께서 앗아가신 손인데, 다시 돌려주실 리가 없지."
아이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의 결백이 증명되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졸지에 수도원장의 손목을 날려 버린 셈이니 결국 이 일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
아이작이 예브하르를 다시 만난 것은 일주일이나 지난 뒤였다.
"안녕하세요, 수도원장님."
예브하르는 원장실에서 아이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볕이 들어오는 창문을 등지고 서 있어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손목은 치유하지 못한 건지 뭉뚝한 오른손 위로 붕대를 감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수도원장님. 제가...."
"죄송?"
"손목이...."
"아아, 이것. 별거 아니다. 나도 어느 정도 각오하고 벌였던 일이니."
예브하르는 창가에서 걸어 나와 아이작을 인자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아니, 오히려 손목 하나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나는 되려 이것을 빛의 법전께서 내게 할 일이 남아있다는 계시를 남기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단다."
예브하르는 사실 아이작의 믿음을 시험했을 때, 온몸이 불타서 죽는 것까지도 각오했었다. 아이작이 신이 보낸 사자와 같은 존재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손목 하나만 날아갔다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계시와도 같았다.
'살아서 아이작의 성장을 도우라는 뜻이겠지.'
그런 예브하르의 생각을 모르는 아이작은 그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일전에 기도문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지."
"아, 예. 지난 일주일 사이 조금 더 외웠습니다. 그리고...."
"필요 없다. 외우지 않아도 된다."
"예?"
예브하르는 달관이라도 한 것처럼 담담히 말을 이었다.
"믿음이 부족한 이들이나 신의 말씀을 찾아 헤매고 세상의 존재 이유를 좇는다. 하지만 너는 이미 그 존재로 신의 말씀을 대행하고 있다. 너의 말이 곧 기도문이 되고, 너의 노래가 곧 찬가가 될 텐데 책을 달달 외우는 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아이작은 어안이 벙벙해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갑자기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거지? '믿음의 증명' 때문인가?
하지만 예브하르는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고 느낀 건지 책 몇 권을 꺼내 들었다.
예브하르가 일주일씩이나 걸려서 아이작을 부른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성기사가 되고 싶어 한다고 게벨에게 들었다."
"아, 예."
"성기사가 되는데 필요한 기적과 기도문, 성가들을 정리한 책이다. 봐두면 참고가 될 거다. 잘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알려주마."
아이작은 깜짝 놀라서 책들을 바라보았다. 평범하게 도서관에서 읽고 쓰는 책들과 달리, 단단하게 양장된 책들에는 빛의 법전 교단에서 쓰이는 기적들과 그 기원을 정리한 내용들이 담겨있었다.
아이작이 책에 손을 대자 눈가가 아른거리면서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책: 재와 불씨의 기도서(희귀)]
[기적: 불꽃을 배울 수 있다. 작게는 양초부터, 크게는 검에 이르기까지 불꽃을 피워올릴 수 있다.]
[악보: 성 아르테 찬가(희귀)]
[성가: 용맹찬가를 배울 수 있다. 감정적 동요를 억누르고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든다. 성가의 특성으로 다수의 인원이 부를수록 효과가 증대된다.]
[악보: 등불과 나방의 성가(희귀)]
[성가: 등불을 배울 수 있다. 어둠을 몰아내는 광원을 만든다. 어둠에 속한 적들의 방어 능력을 낮춘다. 성가의 특성으로 다수의 인원이 부를수록 효과가 증대된다.]
그 외에 자잘한 기도서들이 있었다.
모두 등급은 높지 않았지만, 성기사들이 필수적으로 배우는 것들답게 대단히 실용적이었다. 아이작은 이 설명창이 모든 물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나 마법의 힘이 깃든 물건에만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게 아직 직위가 없어서 내 마음대로 고위 기적에 관한 내용은 보여줄 수가 없구나. 그리고 수도원에서 가지고 있는 책들도 많지 않아서...."
"아닙니다!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이작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말했다. 예브하르가 그를 완전히 믿게 되었다는 것도 큰 수확이지만, 설마 기적까지 배우게 될 줄은 몰랐다.
기적을 발휘하는 성가는 오직 교단 안에서만 돌기 때문에 값을 따질 수가 없는 물건이다. 설령 어떻게 획득하더라도 교단의 지위가 없는 사람이라면 획득 경로와 반납하지 않은 이유들을 설명해야 했으니 일반인은 보기도 힘든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예브하르는 겸손한 아이작의 모습에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네 믿음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다만, 실제로 기적을 발휘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게다.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말고 차근차근 성자들의 이야기와 가르침을 이해하다 보면 금방 성과를 보일 거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