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황당하군.'
루베르겐 집행관은 레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이 백리뇌부 종후표의 자리에 서있었다면 저 기이한 검격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루베르겐은 그리 생각하며 종후표의 몸을 수습했다.
시신의 수습이 끝나자 의문에 대한 결론이 도출되었다. 모르고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날로 출수된 검이 칼등을 뒤집어 가는 기의 실을 꼬아낼 때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의 찰나. 모르면 일단 당할 수 밖에 없는, 불합리하고 살기짙은 검.
"역겹고 추악하네. 저게 사람이야?"
슬레모킨이 조각조각 잘린 종후표를 보며 입을 열 때까지 집행관의 상념은 이어졌다.
"흠···."
슬레모킨의 말에 레반은 축 늘어진 종후표를 바라봤다.
맞다. 그녀의 말대로 역겹고 추악하다.
허나.
시체 백정인 사냥꾼부터 연방의 정치인까지 꾸득꾸득 올라온 사내. 권력으로는 더 올라갈 길이 보이지 않고, 연방의 어두운 미래를 보고는 노선을 틀어 누구보다 먼저 강력한 네임드의 피를 받고자했다.
잔머리를 굴리며 자기 이득만을 생각했다.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끝까지 영악하다.
아힘사, 슬레모킨, 루돌프, 집행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까지 둘러본 레반은 실실 웃다가 말했다.
"뭐, 저 정도면 굉장히 평범한편 아닌가."
잔머리도 굴리고, 영악하고, 약삭빠르고 치사한.
백리뇌부 종후표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게 뭐지? 내가 살아 있는건가?"
굉장히 끈질긴 인간이었다.
다른 놈들은 죄다 붙잡혀서 술술 실토할때, 알 헤임달까지 도망와서 가장 늦게 잡힐 만큼.
몸은 잘려 사라지고, 머리통만 떡하니 남은 종후표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조심히 입을 열었다.
"장벽 밖으로 내보내준다고 약속하면, 나는 세 명을 밀고하지. 어떤가? 거래하겠나?"
"······."
이윽고.
그 광경을 목도한 레반이 피식 웃었다.
"저거봐, 끝까지 평범한 인간이잖아."
#99화. 같이 가겠나.
#99화.
전신에서 모가지 하나만 달랑 남은 종후표.
"이 백리뇌부 종후표를 장벽 밖으로 보내준다 약속해준다면, 많이 바라지 않고 싹 다 불겠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 아니겠나!"
그는 도통 포기를 모르는 근성있는 정치인이자 그저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본능에 충실하며 상황 판단이 빠르고 이기적인 시체였다.
더해서 종후표는 여러모로 파격적인 남자였다.
나만 안 죽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그 심보가, 마음의 준비를 다 하기도 전에 서둘러 튀어나온 것이다.
"믿음의 증표가 필요할 테니, 우선 한 명을 밀고하겠다! 가서 확인해보든지 하면 될 것이다."
"?"
종후표는 자기 목숨만 온전히 보전할 수 있다면, 그다지 거리낄 게 없어보였다. 고문이나 심문 따위를 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신뢰를 보여주겠다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오딘 시청에 도시기획부처장이 있네! 그자는 이미 시체의 혈액까지 밀반입해둔 상태일세. 아주 확실한 정보야."
종후표에 비하면 그리 명망있는 자는 아니었다.
이번 수복전에 그리 크게 관련된 자도 아니었고.
종후표는 이기적이지만 영악하긴 해서, 일단 뒈지든 말든 별 상관없는 떨거지를 내던져준 것이다. 하기야 얻는 것이 확실하지도 않은데 시체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놈들은 없다고 여길 터. 특히나 단호함으로 유명한 연방 집행관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종후표는 자신있는 태도로 말을 보탰다.
"주소지는 오딘 파크뷰 아파트 101동 68층 2호에 거주. 들어가서 개인 금고를 따봐. 거기에 없다면 지하3층에 있는 101동 세대별 창고를 뒤져보게. 그래도 없다면! 아파트 상가 중고 명품점에 68층 2호에서 맡겨둔 물건이 있나 물어봐. 기획부처장의 무위는 그리 형편없으니 OCPD 특별 대응팀에 신고하면 대신 처리해줄 거야. 안 믿긴다면 지금 즉시 확인해봐도 좋다."
그는 은둔한 변절자의 집주소를 비롯해 세세한 대응 방법까지 고심해 일러주었다. 역시 말에 묘한 마력이 있다. 저렇게까지 자세히 말하니까 실제로 당장 확인해보고 싶잖아. 정치인의 지지자들이 괜히 정치에 몰입해 열광하는 게 아니군.
"······."
듣던 루베르겐 집행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안 그래도 종후표의 대가리를 매쉬 포테이토처럼 으깨버릴까 말까 고민 중이던 루베르겐 집행관의 마음에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저렇게까지 의욕을 보이니 죽여버리기도 애매했다.
- 도시기획부처장이면, 별 영양가도 없는 떨거지 아닌가.
- 그래도 일단 폭로는 했잖아. 거짓말도 아닌 것 같은게, 저 눈빛을 보면 자기 부모가 변절자여도 불어버릴 것 같은데.
- '집행' 은 잠시 유보하는게 좋겠군.
슬레모킨과 루베르겐 집행관, 나. 이렇게 셋은 종후표 대가리를 땅에 두고 전음으로 잠시 토론을 나누었고, 루베르겐 집행관은 종후표의 말이 사실이라면 집행을 유보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연방 정치인까지 올라간 자가 자기 입으로 밀고를 주선하겠다고 하니, 사실은 더 바랄 것이 없다던가.
"결정했나?"
종후표는 우리 셋이 일단의 토의를 마치고 결정을 내린듯 하자,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최후 변론을 펼쳤다.
"탈당! 탈 도시는 물론이고, 앞으로 발에 땀나게 뛰어 밀고하겠다! 지금은 발이 없지만. 발을 만들어서라도 다시 뛰겠다. 만약 내가 장벽 밖으로 도망가더라도 둘을 더 밀고할 예정이라 손해는 아닐 테지, 나같은 초짜 정치인하나 잡느니 다른 셋을 잡는게 낫지! 원한다면 내 정당의 비리도 조금은 까발려줄 수 있네. 말했다시피 나 종후표는 수완이 좋은 놈이야."
그런데, 그때였다.
"저······형님?"
백리뇌부 종후표가 설득을 위한 달변을 펼치는 와중에 루돌프놈이 슬며시 다가왔다. 똥이 무척 마려운 얼굴로 보여 화장실에 다녀오랬더니, 놈은 고개를 저었다.
"오해 하지 마세요. 절대 똥 마려운거 아닙니다."
"왜."
"그게 진짜······아까부터 배가 너무 고파서요."
실로 뜬금없는 소리였다.
"길거리에서 석탄빵 사먹으면 되잖아. 지금 어른들 얘기하는 거 안보여? 어디 가서 사먹고 와."
"아······그게."
가서 사먹고 오라는 나의 아량에도, 루돌프놈은 며칠 굶은 거지마냥 주린 배를 쥐었다. 볼이 뼈다귀처럼 홀쭉해져 있는데, 사실 보기가 조금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다는 소리가 또 가관이었다.
"빵이······안 땡겨서요."
"?"
"맛이 없을 것 같아요."
"그랬구나."
스윽-
나는 간만에 이놈과의 진지한 대화를 위해 주먹을 들어올렸다. 루돌프놈은 주먹을 보자마자 허둥지둥하며 팔을 저었다.
"아, 아니! 잠깐만요. 저 원래 빵 좋아하거든요? 근데 왜 안 땡기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러게요······."
"이제는 아주 입맛 타령도 하고.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구나. 계속 굶어라."
"형님, 제가 진짜로 쫄쫄 굶으면서 버텨보려고 했는데요.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요. 이거 몸도 계속 꿀렁이는거 보이세요? 막 토할 것 같은. 웩!"
웨엑!
루돌프놈은 입덧이라도 하는지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사내 새끼가 갑자기 아이라도 밴 건 아닐 테니, 장염이나 식중독 중에 하나겠군. 증상도 비슷하다.
"그냥 버텨. 응급실가면 돈 많이 깨져."
나는 버티라는 차가운 말과 함께 돌아섰다.
"어어?"
헌데, 갑자기 들려온 종후표의 외마디 비명.
다시 고개를 돌렸다.
루돌프와 종후표가 한 프레임 안에 있었다.
내 말에 자리로 돌아가나 싶던 루돌프놈은 언제 저기까지 갔는지,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종후표의 대가리를 집어들고 있었다. 눈에 초점이 약간 흐릿했다.
그리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와작!
종후표의 머리통을 집어든 루돌프놈이 갑자기 입을 쩍 벌리더니, 그대로 머리통 반쪽을 씹어먹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으아악!"
종후표의 머리통에서 촉수같은 살덩이 줄기가 솟아나 루돌프놈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즉시 도약한 아힘사가 루돌프의 입을 틀어막은 게 아니었다면, 아마 그대로 잡아먹혔겠지.
"?"
나는 저 광경이 심히 황당한 탓에 차마 말릴 생각조차 못했다. 다행히 종후표는 생명력이 끈질긴 사람이라 이번에도 죽는 않았다.
내쪽으로 비척대며 다가온 루돌프놈은 종후표의 피로 물든 입을 슥 닦더니,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허억! 허억! 저 이제 어떡하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맛은 있냐."
"예, 아 냄새가 너무 좋아가지고.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서 딱 절반만 씹은 겁니다. 참 잘했나요?"
"그래, 그나마 잘했다."
종후표의 대가리 절반을 씹어먹은 루돌프놈은 허기가 가시자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했다. 시체를 잡아먹었으나 감염의 징후는 없었다. 루돌프놈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짐승 부스러기니까.
"후우. 후우."
"······."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루돌프놈을 바라보다, 황당한지 푸하하 웃는 슬레모킨을 향해 물었다.
"짐승 부스러기는 원래 밥으로 뭘 먹지?"
"에센스를 잘 먹긴 해. 등급이 높을수록 좋아하고."
"이놈한테 줄 에센스는 결단코 없다."
내가 먹고죽을 에센스도 없으니 기각.
고민하던 슬레모킨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언데드를 먹여야 할 거야. 주로 언데드를 생으로 잡아먹는 걸 선호하고, 다른 거 먹이면 토하더라. 내가 가끔 사라졌던 것도, 먹이 주려고 그랬던 거야. 힘을 많이 쓴 날에는 유난히 배고파 하거든."
"······."
짐승 부스러기가 선호하는 먹이는 좀비 생식.
루돌프놈은 종후표와의 전투에서 난장을 피운 덕에 배가 극심히 고파졌고,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본래의 먹이인 시체를 본능적으로 씹어먹은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만담을 나누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급히 철퍽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 좋! 좋다! 내 지금 한명을 더 일러주겠다! 아주 큰 놈으로. 그러니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으면 하네. 잡아 먹히는 기분이 영 찝찝하기 이를 데 없구만!"
저쪽에서 겁에 질린 종후표가 허둥대며 꽥꽥 악을 지르는 중이다. 저 새끼는 갑자기 또 왜 저러나 싶어 유심히 살펴보니.
"방금 내가 정말 큰 각오를 다졌네. 나 종후표 말고는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어. 응? 제발 부탁을 좀 하겠네! 너무 끔찍해!"
얼굴이 반쪽으로 쪼개진 종후표는 조금전의 일로 큰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지, 아니면 방금 사태를 격한 고문이자 협박이라고 생각했는지 여태까지 본 모습중에 가장 흥분해 고함을 쳤다.
그냥 일종의 사고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종후표의 발언대로 잠시 뒤, 그는 허둥대던 태도를 겨우 감추고는 곧바로 다음 변절자를 밀고해버렸다.
"남궁! 대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전대 가주 남궁천이 진혈(眞血)을 받은 네임드 시체 '가륵' 의 피를 받기로 했네! 과거에 집행관 모리 무라타를 죽인 놈 알지? 바로 그 놈 말이야!"
"······."
장내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종후표의 입에서 나온 그 존재가 상당한 거물인지라, 슬레모킨조차 뭐라 적당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무런 리액션도 없이 적적한 주점 안.
우직!
"아악! 아프다! 아파!"
"가륵?"
돌연, 종후표의 두개골을 부서뜨릴 듯 강하게 집어든 루베르겐 집행관이 말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 그의 안광에서는 싯푸른 귀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는 확실한 증거, 있습니까?"
* * *
우리는 일단 집행관을 말린 뒤, 이동하기로 했다.
언제나 딱딱하게 굴던 유크 루베르겐은 전설적인 연방 집행관 '모리 무라타' 와 '가륵' 이라는 과거의 존재들이 등장하자, 쉽사리 감정을 지우지 못했다.
[ 죽은 모리 무라타의 인격 메모리칩을 이어받은 사람이···저 유크 루베르겐이거든. ]
슬레모킨의 전음이었다.
아무튼, 이동하려면 이 종후표의 잘린 메두사인지 히드라인지 모를 대가리를 수습해 모셔가는게 일이었다. 계속 주점에 덩그러니 놓아두거나 축구공처럼 차고 다닐 수는 없는지라.
하지만 대가리 하나만 덜렁 남아있어도 여전히 강력한 요력이 남아있었고, 또 아까처럼 혓바닥을 뽑아 공격에 쓸 수도 있는 놈이라 우리는 고민을 해야했다. 종후표는 원체 혓바닥을 잘 쓰니까.
어디 자루같은데 넣어 다니기에는 심히 불안할 것이고···.
"제가 직접 단속하겠습니다."
"그럴래?"
"네."
다행히도 일행 중에 감염의 위험이 없는 아힘사가 있었기에 종후표의 목을 불로 지진다음 석탄등 안에 넣어두고 유등처럼 들고 다닐 수 있었다.
"잘리기 싫다면 움직이지 마세요."
"아, 알았다. 걱정 마라."
회종시계를 끌러 안주머니에 소중히 보관해둔 아힘사는 안광을 켜고 석탄등 안에 담긴 종후표를 감시하며 길을 걸었다.
해가 뜨지 않으면 도심은 늘 어두운데다 석탄등과 가스등이 흔한 알 헤임달이라 누구도 연방의 정치인이자, 백리뇌부의 고귀한 대갈통이 석탄등의 프레임 안에 들어있는지 몰랐다.
나는 유등을 들고 걷는 아힘사를 바라봤다.
깡통 프레임에 불길한 안광만이 빛나던 전쟁병기는 어디가고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육체적인 매력이 넘치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섹스토이 파츠니까. 나름 좋은 쪽으로 변했으니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다만, 미인이 유등을 들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남아있던 주민들의 시선을 조금 받았다. 섹스토이들이 손님을 받기 위해 이럴 때가 있다. 아마 태생부터 양아치인 루돌프가 때때로 으악을 지르지 않았다면 귀찮아 질 수도 있었겠지.
"야이 좆만아 뭘 쳐다봐. 뒤지고싶어? 내 여자야!"
"돌프야, 일절만 해라. 네 여자 아니야."
"아, 그럴까요."
종후표는 밝은 석탄 불빛의 뜨거운 열기에 소리를 지를만도 한데, 지금 지랄했다간 일이 꼬일 것 같았는지 꿋꿋하게 고통을 참아냈다. 살기 위해 살이 익는 고통 정도는 감내할 수 있으며, 수치스러운 감정도 저 멀리 내팽개친 사람이었다.
목표는 생존과 자신의 영달뿐.
나는 저토록 일관적인 종후표를 보고는 살짝 감탄했다.
저런 놈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답시고 모가지만 남아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데, 전생의 나는 너무도 쉽게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주둥이이라도 지치기 전까지 더 털어볼 것을.
그때,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이 종후표에게 물었다.
"고귀한 피라고 하셨지요. 그걸 어디서 받기로 한 겁니까."
종후표의 혓바닥에 계속 휘둘리지 않고, 곧장 핵심을 관통하는 물음이었다. 변절자야 나중에라도 때려 잡으면 그만인데, 고귀한 피를 어떤 방식으로 받기로 했으며 라그나로크의 시체들과는 무슨 수로 접촉을 했는지도 중요했다.
종후표는 잠시 망설이나 싶더니 곧장 대답했다.
"라그나로크시티의 수복전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큰 타격을 입어 혼란을 일으킨 뒤에, 여기 알 헤임달로 모여서 받기로 했네. 나는 좀 빨리 왔지."
"알 헤임달 시티 북부를 말씀하시는지요."
"시티 장벽의 취급이 일곱 도시중 가장 좋지 못한 곳이며, 땅은 넓고 밀도가 낮은 편이라 그리 눈에 띄지도 않을 테니. 그런데 내가 직접 와서 나가보려니, 장벽을 지키는 문지기가 생각보다 강하더군. 일격으로 죽일 수 없어보였어. 여긴 문지기의 권위가 높아 소란이 일면 필시 추격당할거고. 그래서 망설이던차에 자네들이 추격해 온 거야. 나를 꾀어 일 꾸민 놈들은 대부분 잡혔다며?"
종후표는 입이 열린김에 닫지 않겠다는 듯, 또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는 굉장히 끈질겼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거다. 정해져있는 결과지."
"그렇습니까. 아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큭큭, 그럼 지금부터라도 온 연방의 인류가 하나되어 싸우든지,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대단한 무공이나 마법계 대가문들의 고유 마법, 독점하고 있는 에센스를 뿌리든지 해야겠지. 근데 자기네들 밥줄인 비전을 미치지 않고서야 막 뿌릴 곳이 어디있겠어?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나 풀겠지. 세상의 모든 무공과 마법을 익힌 놈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그걸 공짜로 뿌리지 않는 이상에야."
종후표의 말을 듣던 나는 생각했다.
저거, 생각보다 괜찮은 방법 같아 뵈는군.
쓸만한 무공과 마법들을 칩에 담아 뿌린다면···.
그러나 내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때, 대강 눈을 흘긴 슬레모킨이 선수를 쳤다.
"꿈도 꾸지마. 극렬히 싫어할 애들이 한 트럭이야."
그녀는 이 세계가 폭삭 망한대도, 무림계와 마법계는 제 밥그릇만큼은 지키려 들것이란 말을 했다. 몇 백년간 그래 왔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반드시 선하게 쓰일 것이라는 장담도 할 수 없다던가. 로키 시티의 군벌같은 놈들 손에 들어가면 강력한 사병 양산에 사용될 수도 있었다. 제대로 통제할 힘이 없다면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더 높다.
아무래도 쉽게 풀기 힘든 문제였다. 로라 마르티네즈나 일레힌 포이체카같은 거물들이 방패를 서준대도, 연방의 지배권력 대부분을 적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니.
내가 그리 생각하는 사이, 종후표의 대가리를 든 우리 일행은 알 헤임달 시티 스테이션에 도착했고.
앞에서 묵묵히 걸어가던 루베르겐 집행관이, 불현듯 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원래는 오딘 시티로 돌아가서 보고를 마쳐야 하나, 나는 이대로 남궁세가가 있는 수르트 시티로 향해볼 생각이네. 자네도 같이 가겠나?"
#100화. 이게 무슨 상황이오?
#100화.
사람은 제 분수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어느 위치에 서있는지 똑똑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렇지 못하면 언젠가 큰 일을 당하기 십상이라.
1회차, 현대에서야 제 분수를 몰라도 '분수도 모르는 놈' 이라며 욕이나 좀 처먹고 말겠지만, 다른 세상들에서는 아니다.
이 세상이 그렇다.
분수 파악 못한 대가는 죽음으로 돌아온다. 법보다는 총칼과 주먹이 더 훨씬 더 가까운, 야만적인 세상에서 대개 통용되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무림의 축소판이라는 수르트 시티의 정경에 호기심이 이는 것은 사실이나, 과연 이 수르트 시티행이 나의 분수에 맞는가.
우선, 나는 8레벨을 달성했다.
무공의 성취나 심득이 충분한 상태에서, 보물과도 같은 바만차의 에센스를 단전에 전부 다 때려박아 일단 초절정 경지에 걸맞는 내공을 얻었기에.
초절정 초입의 경지. 본래라면 어림도 없지만, 나는 무리를 좀 하면 검강도 뽑아낼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이미 상위의 경지를 엿보았다는 것은, 이렇듯 큰 이점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정기신 합일이 문득 그리워졌다.
'좋았는데 그때.'
마법쪽은 회로가 깨져나간 뒤 아직 3위계 그대로다.
나는 대책없는 미친놈인데다 가끔 참을성이 없을때가 있어 에센스의 기운을 단전에 모두 때려 넣어버렸기 때문에, 초절정의 무위는 달성했어도 네 번째 마나 회로를 다시 쌓지 못한 것이다.
'5위계만 되어도 무공과 연계해 전투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인데. 마나 회로와는 이상하게 연이 없군.'
쓰임새가 많은 마법들이 많은데, 효과를 극대화해 활용하려면 최소 루벤카와 같은 5위계는 되어야 한다. 지금 이 정도로 무공과 마법의 격차가 벌어졌다면 보조의 역할 정도가 최대.
이전 생, 라아기스 대륙에서의 나는 꽉찬 5위계 마법과 초절정의 무공을 섞어 제국의 별을 상대했다. 그 노괴는 8위계 대마법사로 용 바로 밑의 존재로 불리던 괴물에 워낙 좋은 로브까지 걸친 탓에 보기좋게 패했으나···
죽어가며 아주 실낱같은 가능성 정도는 보았다.
고절한 지경에 이른 무공과 마법의 융화는 상승의 깨달음을 얻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이제 상단전도 뚫렸으니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보아도 좋았다.
물론 전부 나중의 얘기이고···
지금의 나는 어지간한 8레벨급 상대로는 승리를 점치겠고, 경지가 무르익은 8레벨의 끝자락이라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며 9레벨 이상을 상대로는 목숨은 물론이고 패기, 용기, 객기, 독기등의 각종 요소들이 필요하겠다.
"수르트 시티의 남궁을, 지금 바로 말입니까? 좋습니다."
놀랍게도 나는 저 요소들이 골고루 내포되어 있는 사내이기에, 수르트 시티에 아주 못갈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수르트로 향한다고 하여 제 분수도 모르는 놈은 아닌 것이다.
루베르겐 집행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도 되나?"
"화산 그룹에 절친한 벗이 있는데, 도와드리는 김에 보러 가려합니다."
내 대답에, 집행관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궐련을 꺼내 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딘으로 가면 귀찮아질 것이란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군?"
"그래 보입니까."
"연방과 세력들간의 복잡하게 꼬인 혼선을 정리하려면, 백리뇌부를 잡았다는 공으로 자네를 다시 전면에 내세워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쉬운 길일 테니···아, 연설은 감명깊게 보았네."
집행관이 이렇게 길게 말할줄 아는 사내였던가.
텅!
나는 종후표의 대가리가 든 석탄등을 툭툭 치며 답했다.
"마탑의 영향력이 큰 발할라 시티도 아니고, 제가 아무 연고도 없는 오딘 시티까지 기어갈 이유가 없지요. 무작정 갔다가 무슨 고초를 겪으려고."
"나도 연방정부 소속이네만,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겠군."
그렇게 집행관은 독자적으로 이번 사태의 조사를 택했다.
9레벨의 전설적인 집행관 모리 무라타. 그의 인격메모리칩을 이어 받았으니, 가륵이라는 시체의 이름에 동요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도 이 세계의 초창기 배양 인큐베이터 속에서, 인공지능 지니에게 주입받았던 내용이라 잊을 수가 없었다.
"35년 전인가."
궐련의 흰 연기가 공중으로 퍼져나갔다.
"자그마치 9레벨의 집행관을 시티 안에서 살해한 시체는 유유하게 장벽 밖으로 도망쳤다. 시티 장벽을 방어하는 광역 마법진은 수준이 높아. 하나 9레벨쯤 되는 존재가 마음먹고 뚫으려면 못할 것도 없었겠지. 오늘에서야 놈의 단서를 잡았으니 꽤 기쁘군."
그 말을 마친 집행관이 대가리만 덜렁 남은 종후표를 바라봤다. 그의 푸른 광망이 꽂혀들었다.
그러자 종후표가 대뜸 화를 냈다.
"이런 때려죽일! 집행관, 정말 이 무슨 황망한 상황인가!"
종후표의 입장에서는 큰 마음먹고 밀고한 곳에 직접 가보겠다고 하니 당황할 수 밖에. 거기에 가봤자 겨우 남긴 대가리가 박살밖에 더 나겠나.
"갑자기 남궁세가에 가겠다니, 설마 남궁천과 날 대질이라도 시켜볼 작정인가? 만약 그럴 생각이라면 나는 입을 닫겠네. 나머지 한 명의 변절자도 알아낼 수 없을 거야! 그래도 정말 좋은가?"
"나머지 한 명은 관심도 없고, 정 여기서 죽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
"노력한 보람도 없이 허무하게 죽는 것도 괜찮지. 좋은 대우도 여기까지다."
"아, 아니 그 말이 아닐세. 진정하게."
그러나 종후표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의 생사여탈권은 루베르겐 집행관의 손에 달려있다. 불리하다고 해서 큰소리칠 처지가 아니다.
"내가 흥분이 과했군."
삐질삐질 땀을 흘리던 종후표도 그걸 알고 있는지, 빠른 사과를 끝으로 입을 닫고는 눈도 감았다. 사색에 잠긴듯한 모습이었다. 실은 가열차게 잔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집행관에게 전음을 보냈다.
[ 연방에 일을 맡기면 결과를 알 수 없기에 서두르는 겁니까. ]
[ 변절자로 낙인찍히면 그 뒤로는 회생불가지. 거물인 만큼 조사과 집행 기간은 기약없이 길어질 것이고, 그동안 만약 다른 이들이 이 일에 끼어들게 되면, 나는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을거다. ]
[ 로라 마르티네즈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 그 여자가 움직이면 남궁천도 눈치를 챌 것이다. ]
루베르겐 집행관은 이미 심지를 굳혔다.
종후표가 남궁천의 변절을 증명하려 우리에게 던진 증거는 너무도 확실했기 때문에.
집행관은 곧, 허리를 굽혀 캐리어에 앉았다. 연방 정부가 집행관에게 특별히 배속해준 공무용 캐리어였다.
"이거 보이나? 연방 공무용이다."
"타고가면 적어도 맞아 죽을 일은 없다는 겁니까."
"정당한 공무를 집행하러 가는 거니까. 연방이 뒤를 받쳐준다는 뜻으로 알아들어도 되겠지."
"그럼 제 뒤도 받쳐준답니까? 내가 보기보다 앞뒤 없는 놈인데."
후우우-
궐련 한 까치로 비공정의 증기보다도 하얀 연기를 피워낸 루베르겐 집행관이 입을 열었다.
"나도 경우에 따라 위 아래가 없는 놈이니, 우리는 꽤 잘 맞을 수도 있겠군."
* * *
슬레모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전대 가주가 변절자라는 폭탄을 들고가면 환대받지는 못할거야. 다짜고짜 칼이 날아올 수도 있는데, 뾰족한 수라도 있어?"
"늘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았나. 이제는 먼저 말도 거는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대답이나 해."
슬레모킨의 재촉에 루베르겐 집행관이 말했다.
"수르트 시티는 거대해서, 이곳에 상주하는 연방 집행관들이 있다. 여차하면 그들의 지원까지 이끌어낼 수 있을 거다."
집행관 여럿이라면 믿을만 하다.
최소 8레벨급 이상으로 이루어진 연방의 집행관들이기에.
당연히 남궁세가도 꿀릴 것은 없지만, 기업들의 저승사자이자 연방에서 보낸 전령을 해할 정도로 무식하진 않을 테고.
다만 연방의 무력을 운운해야 할만큼 남궁세가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감은 컸다.
슬레모킨은 복잡하다는 듯 대뜸 누워버렸다.
"무림계 애들은 마법사만 보면 아주 무시하기 바쁜데······벌써부터 귀찮다 귀찮아."
수르트 시티. 무림의 축소판.
지금 착륙중인 우리의 발 밑에 있는 도시였다.
스아아아아—
자그마치 10억을 넘겨버린 인구와 압도적인 자금력으로 연방 내에서 물자들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도시. 구파일방 오대세가로 대표되는, 수많은 희생자와 불어난 시체들만 남기고 종료된 대전쟁의 주역. 마법계와 함께 연방을 반으로 갈라먹은 거대한 축.
무림계가 케케묵은 내분을 일으키지 않고 완벽하게 일통(一統)되어 합치했다면, 마법계를 어렵잖게 누르고 대전쟁의 승리자가 됐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강한 세력들과 절대고수들이 복마전처럼 드글거리는 곳.
'일통은 무슨.'
그 대목에서 조금 우스운 것은, 시체같은 위협이 다섯 쯤 더 있어도 무림의 세력들은 힘을 합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대라신선급의 무위를 지닌, 어떤 지고하고 초월적인 존재가 나타나 억지로 일통해버리지 않는 한 어림도 없다. 그게 무림이다.
- 그걸 남궁의 가주께서 어찌 아십니까······?
- 역시 남궁의 주인이십니다.
나는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잘 모르기에, 수르트까지 오는 길에 그들을 대하는 연습을 단단히 했다. 무인들 앞에서 함부로 야야 거렸다가는 곧장 따귀가 날아올 거다. 아무래도 체면과 명예를 중요시하는 무림계다보니, 호칭등에 민감한 면이 있어서.
또한 무림이 최고라는 생각이 대가리에 깔려있는 놈들이라, 다른 시티 출신들을 경시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명예와 의, 협을 운운하며 뒤통수칠 때만 노려보고 있는 놈들이라 행동도 어지간하면 조심하는 게 좋겠군.
'제왕검(帝王劍) 남궁천.'
무림계의 거두이며 화경의 고수.
일선에서 한참 전에 물러난 노괴라지만, 못해도 원로 이상가는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을 것이고 가문내에서의 입김도 강력할 것이다.
남궁 전체를 아우르는 막후의 왕이자, 본신의 무력도 보통이 아니겠지.
남궁의 무공은 대체로 패도적이며 강맹함이 주를 이룬다. 중원에서도 감히 무공 이름에 제왕검형이니 하며 '제왕' 을 붙일 정도였으니.
황제도 아닌데 제왕을 붙이다니. 미친놈들이다.
중원을 다스리는 황제가 칼잡이놈들이 무슨 제왕이여! 하며 걸고 넘어졌으면 황군, 관군의 이지매에 멸문지화를 당할 위험도 있었으나, 그 세계의 남궁은 그러든 말든 꿋꿋하게 제왕을 지칭했다.
관무불가침이라는 걸 믿고 그랬는지, 여튼 남궁은 그런 놈들이었다.
"다른 길로 새지말고, 바로 출발하지."
루베르겐 집행관은 옆을 보는 법이 없었다.
수르트 시티 스테이션에 내리자마자 종후표의 대가리를 들고 남궁세가로 직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몇 시간에 걸쳐 남궁에 도착했다.
"음."
으리으리한 대궐같은 남궁세가 본원 앞.
거의 성벽과도 같은 담을 쌓아둔 남궁세가의 본원 안에는, 이 근방에서 가장 높고 거대한 전각들이 자리해 있었다. 십 미터를 훌쩍 넘을 법한 강철의 성벽 위로 높이 솟은 동양풍의 전각들이 화려하게 사방을 빛낸다.
"누구시오."
우리가 그앞에 서자, 부리부리하고 진한 인상의 무인이 튀어나왔다. 앞을 막아선 그는 중년이었는데 기도가 마치 잘 벼려진 칼같아서 평범한 세가의 식솔은 아닌듯했다.
무인은 우리 일행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했다. 아힘사가 든 석탄등에도 무인의 시선이 잠시 갔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보아하니, 연방 정부에서 나왔소이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시오."
그런데 그 부리부리한 무인은 미리 언질을 받아둔 것이 있는지, 루베르겐이 연방의 집행관임을 확인하자 우리를 본원과 상당히 떨어진 별도의 전각으로 안내했다. 그곳도 화려하긴 매한가지였다.
이윽고.
별도의 전각 앞에 우뚝 선 집행관이 말했다.
"남궁의 가주를 먼저 뵙고 싶습니다. 이곳은 본원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
"가주께서는 이미 무림의 명숙들과 선약이 있어 한참을 기다려야하오. 연방의 전령이라 하여도 차례는 지켜야 하지 않겠소."
"······."
루베르겐 집행관은 재촉하는 무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곧 집행관의 손이 안주머니로 향하더니, 자연스럽게 궐련을 꺼냈다.
"그렇습니까."
"그렇소, 어서 들어가서 차례를 기다리시오."
"명문대파를 자처하는 세가의 대접이 이리 박해서야."
"···지금 남궁을 모욕하는 건가?"
부리부리한 눈의 무인이 더없이 불쾌한 얼굴로 답했다. 그의 손은 어느새 허리춤에 얹어져 있었다. 검이 뽑혀나오기 직전이었다.
"들어가지."
결국 크게 실랑이가 벌어지기 전에 집행관은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돌려 슬쩍 보니, 그 어두운 전각 속에서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집행관의 다음으로 아힘사가 종후표의 대가리가 든 석탄등을 들고 전각에 들어갔을 때였다.
퍼걱!
"······."
전각의 심처에서 쏘아진 한줄기의 지풍.
거력이 담긴 지풍은 오랜 여정을 거친 종후표의 허탈한 마지막을 고했다. 석탄등과 함께 두부처럼 터진 그의 머리는 다시 재생되지 않았고, 머리의 잔해가 철퍽 엎어지자마자.
[ 감히—!!! ]
저 어둡고 깊은 전각의 심처에서, 누군가의 쩌렁쩌렁한 노호성이 들려왔다. 초절정의 무위를 지닌 나라도 방심했다간 귀청이 찢어질 듯한 사자후였다.
[ 감히 더럽고 역겨운 시체를 이곳에 들여 나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려 하다니! 이 연방의 변절자— ]
그 우렁우렁한 노호성에, 멀리서 전각을 지키고 있던 남궁 무인들의 기세가 가까워지던 그때였다.
"아니 형장! 그새 많이 헌앙해지셨소."
발랄한 음성과 함께 의기당당한 사내가 그 누군가의 노호성을 끊어버리며 나타났다. 집행관과 슬레모킨은 물론이고, 장내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수르트 시티에 왔으면 당연히 내가 있는 화산에 먼저 들러야지. 연도 없는 남궁에는 어찌하여 걸음하셨소? 나는 또 왜 이곳으로 부른 것이고?"
나는 청풍이의 인사를 받아주며 반갑게 입을 열었다.
"어. 대 화산 최고의 기재, 화산이 밀어주는 잠룡, 화산의 미래 장문인, 화산이 가장 사랑하는 무림계 최고의 후기지수. 화령검절 청풍이가 때맞추어 도착했구나."
내 말에, 청풍이 당황한 눈빛으로 소곤댔다.
"···듣는 사람 창피하게 나를 왜 그리 소개하시오?"
"청풍아, 너도 저 안에다가 인사 올려라.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시다."
"···?"
그렇게.
내가 수르트 시티에 도착해 남궁으로 향한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한 달음에 남궁세가로 달려온 대 화산 그룹의 기재.
박살난 채 전각 앞에 흩어진 살점의 잔해와, 전각 안에서 흘러나오는 살기짙은 기세를 느낀 청풍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이오?"
#101화. 그걸 우리가 왜 책임져?
#101화.
발할라, 론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
찌릿!
요동치는 차트 앞의 레나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음···."
이제 레나 혼자 운용하기에는 자금의 규모가 너무 커진 바람에, 초단기 투자나 단기 투자로만 운용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게 됐다. 그렇기에 포트폴리오 한켠에 든든한 근본주를 넣어두어야 할 시기.
레나는 지금, 장기적으로 투자할 종목을 놓고 고민 중이었다.
[ 기업명 ]
남궁세가(南宮世家)코퍼레이션
[ CEO ] : 남궁선(南宮扇)
[ 본사 위치 ] : 수르트, 남경(南京)
[ 대표 업종 ] : 채혈업, 부동산업
[ 시가 총액 ] : 511억 크레딧
[ 총액 순위 ] : 36위 ▼ 6
[ 연 매출액 ] : 50억 크레딧
[ 총 직원수 ] : 98,000명(추정)
[ 기업명 ]
화산(華山)그룹
[ CEO ] : 선천자(琁泉子)
[ 본사 위치 ] : 수르트, 남경(南京)
[ 대표 업종 ] : 채혈업, 건설업
[ 시가 총액 ] : 600억 크레딧
[ 총액 순위 ] : 30위 ▼ 4
[ 연 매출액 ] : 77억 크레딧
[ 총 직원수 ] : 62,000명(추정)
연방증권거래소에서 명시해둔 기업들의 정보를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던 레나는 고민에 빠졌다.
"에센스 채혈 사업은 근본 중에 근본인데, 두 곳 다 채혈 규모가 훌륭한 편이네."
마침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이라는 빅이슈로 정세가 불안해졌고, 참여 세력들이 큰 피해까지 입은 바람에 화산과 남궁의 주가가 많이 하락했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현재는, 밑바닥을 천천히 다지고 상승할 기미를 보이는 중.
"······주워 담기에는 지금이 완전 적기야. 확실히 이전보다 많이 폭락하기는 했어. 안정적이기도 하고."
화산과 남궁세가는 수르트를 제외한 다른 시티에 달리 사업체를 진출시키지 않았다.
10억 이상의 인구를 필두로한 수르트 시티의 내수시장이 워낙 거대한 탓에, 상당수의 무림계 기업들은 탄탄한 내수를 노려 그 안에서만 사업을 영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천당가나 개방이 조금 특이한 경우다. 하긴 원체 돈을 밝히기로 유명한 곳들이고, 구독자 체제의 마약 장사랑 포털장사니까.
뭐, 그래도 다른 주머니 차지 않아도 될 만큼 자금줄은 확실하고 안정적이라는 얘기지. 다른 시티로의 진출은 생각도 하지 않는 근본 기업!
"둘은 업종도 비슷한데······화산 그룹? 아니면 남궁세가 코퍼레이션?"
거의 며칠 가까이 두 기업을 놓고 고민하던 레나.
그녀는 순간 콧김을 흥 뿜더니,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남궁세가도 대단하지만 화산 그룹이 더 믿음이 가. 수복전때 피해가 커서 지금은 조금 주춤하지만, 장기로 보면 결국 화산이 더 든든해. 그리고."
레나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연방군을 지칭해 개놈이니 소놈이니 하며 했던 레반의 충격적인 수복전 연설. 그때 레반의 뒤를 지키듯 선 채, 영웅의 풍모를 보였던 화산의 젊은 무인.
원래 첫 번째 연설자인 레반의 다음 연설자로 낙점되어 있던, 화산 그룹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천재라고 했지.
어쩐지 레반이랑도 상당히 가까워 보이던데······.
레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화산 그룹에 투자해야겠다."
* * *
나는 청풍의 소개를 줄줄 늘어놓았다.
"대 화산 그룹의 장문인 내정자이자, 수르트 무학관 역사상 최강의 기재. 화산 그룹은 몰라도 화령검절은 모르는 이가 없는 초대형 후기지수. 수르트 시티 선정 올해의 무인."
"형장, 올해의 무인은 또 뭐요? 낯 뜨겁소."
휘적휘적 걸어오던 청풍이 그리 말하며 기감을 펼치려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내가 굳이 이러지 않아도, 청풍 정도면 심상찮은 사태가 이 남궁가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상태일 것이다.
나와 만담을 나누던 청풍이 슬슬 이쪽으로 다가오자.
"화산의 소협이면 이리 방만하게 굴어도 되는가!"
처음에 우리 일행을 이쪽으로 인도했던 중년의 무인이 호통을 치며 앞을 막아섰다. 그는 부리부리한 인상을 더욱 구기며, 청풍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이곳은 남궁세가다. 잘난 후기지수라고 해도,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그 호통에 청풍은 정중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부족한 후배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결례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돌아가시오. 화산의 청풍 소협."
"헌데···화산에서 연락 한 통 받지 못하셨습니까?"
"연락? 연락이라니?"
"무학관의 대선배이신 남궁형에게 무공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화산의 검수가 방문할 예정이라는 연락 말입니다. 제가 바로 그 검수입니다."
그러자 중년의 무인은 웬 헛소리를 하냐는 듯.
"전혀 듣지 못했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
"허면, 부족한 후배가 조금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대신 답을 내려주신다면 곧장 사라져 다시는 보이지 않을 겁니다."
"······."
강하게 말해도 청풍이 쉽사리 물러날 기미가 없자, 중년의 무인이 짜증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궁금한 것이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든 남궁세가의 땅을 제멋대로 밟은 일보다 중한 것인가?"
"예."
"말해봐라."
"어찌하여 대 남궁세가의 본원 내에서 이루말할 수 없는 혈향과 요사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것입니까?"
"!"
정면으로 던져버린 청풍의 돌직구.
뒤에서 주시하던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아이고, 우리 청풍이 말 잘한다.'
모두가 비슷하게 하고 있던 생각이었기에.
이미 집행관과 슬레모킨, 그리고 나는 별도의 전각이 눈에 보일 시점부터 미세한 요기를 느끼고 의심스러워하던 참이었다. 집행관과 슬레모킨은 완숙한 8레벨이었고, 나는 상단전이 열린 8레벨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실을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으니, 일단 따라가 보자며 중년의 무인을 따랐던 것이고.
"그 무슨 황당무계한 헛소리를···! 소협의 눈에는 저자들이 들여온 시체가 보이지도 않는가?"
중년의 무인은 청풍의 돌직구 질문에 이례적으로 흥분하여, 침까지 튀기며 고함을 쳐댔다.
"바로 저곳에서 느껴지는 기운 아니겠나!"
무인의 굵은 손끝이 종후표 머리통의 잔해를 가리켰다. 그러나 청풍은 도리어 고개를 더욱 갸웃거렸다.
"저것은 이미 흩어졌지 않습니까."
"그게 뭐가 어쨌다는 얘기인가."
"후배는 예민한 기감을 타고난 덕에 멀리서도 요기를 느낄 수 있는데, 제가 말한 혈향과 요기는 시체의 잔해가 아니라 저 어두운 전각의 안쪽입니다. 혹, 화산의 후배가 알아서는 안 될 것이 세가 내에 있는 것입니까?"
"······."
중년의 무인은 입을 딱 닫고, 답이 없었다.
전대 가주, 남궁천의 사자후도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와중에 남궁의 무인들은 속속 전각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벌써 그 수가 십수 명을 넘어갔는데, 개개인의 기세가 잘 정련된 세가의 정예들로 보였다.
청풍은 그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찰나간 중년의 무인을 피해 발을 움직였다.
"이런!"
중년의 무인이 뒤늦게 손을 뻗어 보았으나, 이미 청풍의 신형은 가로막는 그를 지나쳐 전각 앞까지 가있었다.
녀석은 전각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절도있게 포권을 하더니, 몸을 숙이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무림 말학. 화산의 청풍이! 대 남궁의 제왕이신 태상가주님을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 불허한다. ]
"······."
일언지하에 거절이 떨어졌다.
무언가 떨쳐낼 수 없는 기이한 감각이 청풍의 피부 위로 느껴졌다. 위화감이다. 감이 좋은 청풍도 이 상황에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만, 화산에서 대쪽 같은 것으로는 둘째가면 서러울 청풍이었다.
청풍은 고개를 더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무림말학. 화산의 청풍이, 대 남궁의 제왕이신 태상가주님을 만나 뵙기를 다시 한번 청합니다."
[ 버릇없는—! ]
전각의 심처에서 다시 우렁찬 사자후가 터져 나왔으나 청풍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풍의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요기를 눈치챈 것도 그렇고, 발재간도 그렇고, 이제보니 7레벨이 아니었군.'
화령검절 청풍은 그 몇 달 사이 벽을 뚫고 8레벨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괄목상대한 성취. 내가 알 헤임달의 세계수에 있던 3개월간 얼마나 대단한 심득을 얻었기에?
이제 약관을 갓 넘긴 나이 아니던가.
나야 전생의 경험이 있어 무척 이른 시간 내에 경지를 되찾았다지만, 청풍이 성장하는 속도는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미래의 무림제일인이 아니라···어쩌면 천하제일인도 노려볼 법한 오성과 자질이 있군.
내가 그리 생각하는 사이, 청풍은 대쪽같은 어조로 꿋꿋하게 말했다.
"어찌하여 불허하시는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불청객 주제에 정녕! 저리 뻔뻔할 데가 있나. ]
"······."
[ 내 오늘 일은 반드시 화산의 장문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야! ]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화산은 확실히 껄끄러워하긴 하는군. 그래도 저렇게 나오는 걸 보면, 종후표의 말은 맞는 듯하고.'
전대 가주가 거물이긴 하지만 얼굴이 무슨 황제의 용안도 아니고, 배분이 낮은 청풍이라도 저렇게까지 간청하면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하고가라! 하는 게 기본이다.
명문대파간의 관계에서, 게다가 청풍처럼 유명한 후기지수가 푸대접을 받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다.
[ 형장, 이거 내가 화산의 사람이라고 해서 풀릴 일이 아닌 것 같소. 하나 묻자면,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소? ]
화산의 장문에게 책임까지 묻겠다는 말이 나오자, 청풍이 내게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눈빛이 형형한 것이 녀석도 짐작은 가는듯 했다.
[ 남궁의 전대 가주는 변절자다. ]
[ ······실로 놀랍소. ]
[ 무학관에서 친하게 지낸 남궁의 무인이 있나? ]
[ 기억에 남는 이는 없소. 있어봐야 이제 일류 검수쯤 되지 않았겠소? ]
[ 네가 아직 많이 어리구나. 내 그걸 깜빡했다. ]
[ 형장, 세가의 무인들이 점점 주변을 둘러치고 있소. ]
[ 그러게. ]
[ 설마 저들도 전대 가주 남궁천의 편이오? ]
[ 전부가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랬다면 진즉 죽일 듯이 달려들었겠지. ]
[ 형장, 나는 아무래도 쫓겨날 듯한데 나가면 즉시 화산에 지원을 요청해보겠소. 본원에서는 정상적인 통신이 불가하오. ]
[ 아니, 괜찮다. ]
[ ? ]
남궁천은 세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을 전대 가주. 지 애비나 할애비를 변절자라며 툭툭 건드리는데, 가만히 있을 자식놈들은 세상에 없다.
우리더러 누명을 씌우려는 놈들이라며 지랄을 해둔 상태라, 살기등등한 남궁의 무인들이 이곳으로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으니······.
그래도 화산이 끼어있다면 남궁과 시시비비를 가려볼 만도 하다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더 강하게 나오는군.
안 되겠다.
"감염시켜서 그냥 한 패로 만들 작정인가?"
돌아가는 흐름을 지켜보던 나는 돌연 입을 열었다. 이제 관중들은 모일 만큼 모여들었다. 청풍이가 쫓겨나기 전에 승부를 낸다.
"어차피 한 번 변절하면 인생 끝이니. 때려눕혀서 감염시킬 생각이라면 연방이든 화산이든, 뒷배가 누구든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어."
"!"
느닷없이 내뱉은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전각 주위로 몰려든 남궁의 무인들. 그들의 동요하는 기색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주워 담을 수 없는 망발을 내뱉는 것이냐."
"?"
"감염? 허허."
남궁의 전대 가주, 비웃음 가득한 표정의 남궁천이 전각 안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온 것이다.
정말 놀랍게도 그는 외견이 아주 멀쩡한 노인이었다. 적어도 아직은.
전각의 바깥으로 걸어나온 남궁천의 시선은, 가장 먼저 가까이에 있는 집행관에게 가 닿았다.
그러자.
루베르겐 집행관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남궁천의 눈 앞에서도 두꺼운 궐련을 뻑뻑 피우며, 위아래도 없이 아주 짧고 간결한 말투로.
"전대 가주께 확인해 볼 것이 있어 걸음했다."
"······걸음했다? 저리 역겨운 시체를 세가의 안에 들여 나를 해하려 해놓고, 과히 뻔뻔하도다."
"저 터져 죽은 시체, 정말 모르는 얼굴인가?"
"알 게 무어냐. 죽어 고혼이 된 시체 따위를."
"그렇다면 집행관의 권한으로 전각 안을 조사해보겠다. 남궁의 전대 가주 남궁천이 시체의 혈액을 받기로 했다는 밀고가 있었다."
대답은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연방의 집행관이 남궁에 어떤 억하심정이 있기에 세가의 큰 어른께 수치를 주며 무례하게 군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평소 무림계의 일을 맡던 집행관이 아니군."
"마법사란 말인가."
비교적 나중에 합류한 남궁의 무인들이었다.
슬슬, 주변에서 잠자코 있던 세인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남궁천은 세가 무인들의 격한 반응에 자신도 편승하여 기세등등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변절자라는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나?"
전각 위.
고고한 한 마리의 신수가 지상을 굽어보듯, 남궁천은 실로 절대적인 위세를 풍기며 주변을 내려다봤다.
화경의 무인이자 남궁의 전대 가주라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가 주는 압박감이란 이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압박감에 익숙한 사내이고, 절대적인 강자들과 많이도 싸워본 사내라 쉽게 입을 열 수 있었다.
"그걸 왜 우리가 책임져?"
남궁천의 시선이 곧바로 내게 향했고.
"······?"
"빨리 뱉어라 돌프야. 그놈 죽겠다."
"우웨엑!"
그와 동시에 옆에서 가만히 있던 루돌프놈이, 숨겨뒀던 종후표의 대가리의 반쪽을 더럽게 토해냈다. 석탄등 안에 대충 살점을 뜯어 넣어 놓기를 잘했지.
툭···투둑···
촉수가 일렁이는 종후표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종후표는 루돌프놈의 체액에 범벅이 된 채, 마치 지옥에 들어갔다 나온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죽고만 싶은 심정이군. 허나 살아야지. 나 종후표는 그래도 살아간다. 천년만년 살 거다."
"저놈이!!!"
캉! 캉!
남궁천이 불시에 쏘아낸 지풍(指風)을 집행관이 막아냈다. 강기가 담겨있는 남궁천의 지풍이 여러 번 날아왔으나, 그것을 모두 막아내자 그의 혈색이 몰라보게 거무튀튀해졌다.
"이, 이런."
종후표가 음성에 요력을 담았다.
"나는 연방 의원인 백리뇌부 종후표로! 보다시피 시체로 변절한 변절자다. 그러나 나와 같은 처지이면서도 아직까지 저혼자 살겠답시고 여기서 숨죽이고 있는 자가 있기에 직접 밀고하러 왔다."
"시체다! 시체를 들였다. 당장 죽여라!"
남궁천의 폭급한 호령에도, 자기 목숨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종후표의 대가리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는 대대로 수르트 시티의 '만금전장' 을 이용했는데, 만금전장 남경지부에 남궁가주인 남궁선의 이름으로 맡아둔 귀물함이 있을 거다. 최근 3개월 내에 맡겨둔 것을 추적해보면 되겠군! 만약 없다면 지금 그 귀물함을 손에 가지고 있다는 뜻이고, 아직 만금전장에 남아있다면 그것을 증거로 쓰면 되겠지. 헌데 그럴 필요 없다. 느껴지는 요기로 보아 저 전각 안 어딘가에 숨겨뒀을 것이다. 쫄리면 뒈져라."
#102화. 변절자다!
#102화.
대가리 종후표가 한 마디를 강조하며 외쳤다.
"쫄리면 뒈지시라고."
"······."
남궁세가가 황제처럼 다스리는 땅에서, 그것도 막후의 왕인 남궁의 전대 가주에게 '쫄리면 뒈지시라고' 하는 시체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백리뇌부 종후표는 그걸 또 손쉽게 해냈다.
그의 생존욕구는 남궁천의 기세마저 이겨냈다.
남궁천이 격노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허, 당최 무슨 헛소리인지."
그러나 남궁천은 오히려 흥분을 가라앉혔다.
"만금전장이라는 이름을 네가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목만 남은 변절자의 헛소리를 믿는 자가 과연 대 남궁에 있을 것 같던가? 그리고 시체의 거짓말을 철썩같이 믿는 것도 모자라, 남궁의 본원에 들이다니······마법계 집행관이 공을 세울 생각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로군? 아니면 다른 세가의 사주라도 받은 겐가."
남궁천은 전각 안에 조용히 처박혀 있다가 감염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재깍 모습을 드러내어 여론을 제 쪽으로 끌어간 노괴.
루베르겐 집행관을 공에 눈이 먼 마법계 집행관으로 매도하며, 침착하게 만금전장의 이름부터 지우려했다.
워낙에 늙은 능구렁이라 호락호락하지 않다.
허나 분위기가 술렁이기 전에, 종후표가 다시 나섰다.
"보세요 남궁 어른. 그래봐야 다 끝났습니다. 우리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추하게 가지 맙시다."
"······저 시체놈이."
"내 성격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그냥 되는 대로 떠드는 놈 같아요? 그렇게 대책없이 사는 놈이면 연방 의원까지 해 먹었겠습니까? 천년만년 살아야 하는데!"
"버러지 같은 놈이 어디서 아는 척이냐!"
캉!
일갈한 남궁천이 집행관을 피해 또 지풍을 쏘아냈으나, 이번에는 내 검에 의해 막혔다. 손이 얼얼했다. 죽일 작정이었군.
"나 백리뇌부 종후표야 변화하는 세상의 격류를 현명하게 올라탄 것뿐이지만, 남궁 어른께서는 그저 늙어 죽는 것이 두려워 변절을 선택한 것 아닙니까! 이 말이 토씨 하나라도 틀려요?"
"······더 들을 가치조차 없구나! 당장 저놈을-"
"아직 남았다! 지금 나를 공격하면 남궁천과 뜻을 같이한 변절자인 것으로 알겠다! 대가리만 달랑 남은 내가 뭐 남궁을 뒤집어엎기라도 하겠나? 시작도 안 했으니 경거망동 하지마라!"
— ······.
남궁천의 명에 따라 움직이려던 남궁의 무인들이 움찔했다.
종후표의 그것은 거의 웅변(雄辯)과도 다름없었다.
대중을 상대하는 데에는 이골이 난 정치인 종후표.
놈이 대가리를 휘적 돌리더니,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전에 알 헤임달의 주점에서 말했잖은가. 나를 백리뇌부로 만들어준 부법은 과거 '남궁의 가주' 도 인정한 절학이라고!"
"그랬지."
"그때 말한 '남궁의 가주' 가 바로 저기 서있는 제왕검 남궁천이다. 지금은 세월이 오래 지나 전대 가주가 되었지. 이 종후표는 남궁천과 오랜 구면이고, 나를 변절로 유혹한 자중 한 명이 저 남궁천이다."
바다 위의 해적이 상선에 갈고리를 던지듯.
종후표가 툭툭 던져놓았던 말들은, 어느새 날카로운 갈고리로 변해 남궁천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대가리를 돌린 종후표는, 우리를 뱅글 둘러싸고 있는 남궁의 무인들을 향해 외쳤다.
"매우 애석하게도,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에 참여한 남궁세가 역시 큰 피해를 보았겠지. 세가의 기둥이던 초고수들과 정예들이 예상치 못한 시체들의 전력에 죽거나 은거에 들어갔고 아직 많이들 정양 중일 것이다."
— ······.
수십 개의 눈이 종후표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종후표는 뼛속까지 천상 정치인이라, 보는 눈이 많을 때 더욱 빛이 나는 유형이었다.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고 반쪽남은 얼굴 위로 정의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다. 세가의 근본이 흔들려 혼란스러우니, 너희는 구석에 처박힌 저 노괴까지 신경쓸 틈이 없었겠지. 지난 몇 달간 남궁천은 폐관이니 수련이니 하며 내내 저 안에 있었을 거야."
— ······.
"그런데 목숨줄이 오늘내일하던 뒷방 양반이, 신변 정리는 안하고 갑자기 무슨 놈의 폐관에 든다는 말인가?"
남궁의 무인들은 긍정하듯,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들은 세가의 정예인 만큼, 제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별할 줄 아는 자들이었다.
"그 입 닥쳐라! 누굴 모욕하는 것이야!"
"그쪽 빼고 다 가만히 있는데, 듣고 움직이지?"
"······이, 이족 마법사년이!"
"욕하지마. 당신 몇 살이야."
철컥-
와중에 부리부리한 인상의 무인이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다는 듯 칼을 뽑았지만, 슬레모킨에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종후표는 잠깐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폐관이 아니라, 혹여나 들킬까 노심초사해 식솔들과도 소통을 끊었던 거다. 세가 무인들이 라그나로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나갈 때, 남궁천은 쥐새끼처럼 시체의 피를 홀짝대며 나와 같이 변절을 준비했다. 저 늙은이는 죽기가 두려워 너희 남궁을 저버렸다는 말이다!"
의문을 제기하며 돌직구를 던진 것은 청풍.
켜켜이 쌓인 의문을 날려버린 것은 종후표다.
"남궁천은 나와 같은 변절자다. 그것을 밀고하러 여기까지 왔다."
— ······.
"진실은 전각의 문지방 너머에 있다."
이제 제왕검 남궁천도, 남궁천을 수행하던 중년의 무인도, 그리고 별도의 전각을 빙 둘러싸고 있던 남궁의 정예 무인들까지도.
다들 뇌에 과부하라도 걸린 사람처럼 조용했다.
일 초가 일 분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지금 종후표의 대가리가 뱉어낸 말이 얼마나 엄청난 폭로인지 모르는 이는 여기에 아무도 없으니.
나는 슬슬 누군가 이 씁쓸한 침묵을 깨주었으면 했다. 내가 먼저 깼다가는 남궁천의 지풍이 목을 노리고 날아올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런 나의 바람대로, 공무를 수행중인 루베르겐 집행관이 움직였다.
"남궁천, 해명해라. 할 수 있다면."
연방 집행관이라도 무려 남궁의 전대 가주를 상대로 하대할 수는 없다. 집행관중 가장 수위에 있는 자도 남궁천을 상대로는 하대가 불가능 할 것이다.
그러나 루베르겐 집행관은 이미 남궁천이 변절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결심을 굳힌지 오래.
두 번째로는 내가 침묵을 깨고 나섰다.
"전각 내부를 샅샅이 조사해보면 끝날 일을, 왜 종일 밖에 세워두는 겁니까? 우리 사내답게 갑시다."
집행관은 경우에 따라 위아래가 없는 사람이고, 나는 원래 앞뒤가 없는 사람이라 아주 장단이 잘 맞았다. 위아래앞뒤가 없으니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것이다.
"······흥, 다들 눈이 있다면 보아라. 우리 남궁이 저딴 헛소리를 언제까지고 경청해줄 것이라 생각했나?"
우우우웅—
남궁천이 자신의 검을 뽑더니, 단숨에 기다란 검강을 만들어냈다. 화경의 고수다운 강대한 검강이 전각의 주위를 환히 밝혔다.
— 한 치의 의심 없는 정순한 공력이다.
— 기운을 일으켜도 요기가 전혀 없지 않은가.
— 역시 세 치혀를 놀려 우리 남궁을 모욕하러 온 것이 틀림없군.
그러자 남궁의 무인들 몇몇이 동조하여 주변을 어지럽혔다. 그들은 슬그머니 입을 놀리며 남궁천의 무혐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두고볼 종후표가 아니었다.
"아니지 아니지! 추악하다 남궁천! 사건의 본질을 흐리지 마라. 너는 시체의 피, 극히 미량을 혈도에 조금씩 흘려넣어 적응시키고 있지 않느냐!"
— !
정치와 선동에 특화된 인물. 정치구단 종후표는 남궁의 무인들이 웅성거리자마자 큰 소리로 반박 의견을 꺼냈다.
"시체의 피를 미량씩 받아들이면 당장은 시체로 보이지 않고 요기도 조절이 가능하여 운신의 폭은 넓어진다. 저기 보이지 않나? 남궁천은 정순한 검강까지 쉬이 뽑아내는 화경의 고수다. 저런 경지라면 감염 시기를 약간 늦추는 정도는 못할 것도 없다! 저자는 이미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신처럼 모시는 남궁에 숨어 적응기를 가지고 있는 중이라는 나의 견해가 더 타당할 것이야!"
"······."
맞는 말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고.
6레벨, 거의 7레벨에 이르던 마법사.
모래 폭풍이 지나간뒤, 발두르 시티 연방의 격리동에서 난동을 피웠던 쿼롯 가문의 마법사인 페디치가 떠올랐다.
그는 며칠간 상위 마법으로 감염 사실을 숨기고 격리동에 있다가 끝끝내 이성을 잃고 폭주했다.
바꿔 말하자면, 7레벨급이 마음먹고 숨긴다면 며칠 정도는 어찌저찌 숨겨볼 수 있다는 뜻. 심지어 페디치는 마땅한 아군도 없이 혼자였는데 남궁천은 아니지 않은가.
"남궁천! 이제 그만 인정해라! 지금 속으로 덜덜 떨고있잖아!"
"······."
강력한 아군이 있고, 세가 내에서 무소불위의 위세를 가진 전대 가주라면 더욱 쉬울 것이었다.
경지가 화경에 이르러 정신력도 보통이 아닐 터.
남궁천이 내놓은 것들은 종후표에 의해 하나하나 반박당했고, 이제 마지막 결론만이 남았다.
"대답해라 남궁천. 전각을 조사해봐도 되겠나?"
"······."
루베르겐 집행관이 남궁천의 성질을 벅벅 긁었다.
그는 오랜 기간 기업의 회장급을 상대해온 인물. 항상 상대의 목줄을 쥐고 있는 입장이었으니, 하대가 어색하지 않았으며 기세에서 밀리지 않고 몰아붙일 줄도 알았다.
"남궁의 가주도 만나지 못하게 막고, 이 전각으로 유인해 요기가 느껴지는 석탄등을 부수었지. 어딜봐도 부자연스러운 정황 투성이지 않은가."
루베르겐 집행관은 멈추지 않았다.
"남궁세가는 속부터 썩었군. 강제 집행하겠다."
"허허."
그러자.
남궁천이 쥐고있던 검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팟!
갑자기 전각에서 가볍게 뛰어오른 남궁천이 허공을 가로질러 한 무인의 앞에 내려섰다. 지금 우리를 빙 둘러싸고 있는 무인 중, 가장 강력한 기세를 풍기던 검수였다.
척!
그 검수는 절도있게 포권했다.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산,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남궁산.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고수다.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무인으로, 세 합 내에 죽인다고 하여 삼검살(三劍殺)이라는 별호로 불리우는 자.
칼날같은 기도를 풍기던 남궁산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각을 조사하게 함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 큰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당당히 결백을 증명하신 뒤에 저들을 천참만륙(千斬萬戮)내도 늦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예."
남궁천은 시선을 옮겨 옆의 무인에게 물었다.
"만도. 네 생각도 동일한가?"
"예."
만도라고 불린 퉁퉁한 무인도 종후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깊게 숙였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남궁천이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뜻이 정 그렇다면 내 그리하지."
"저, 정말이십니까?"
"천참만륙(千斬萬戮). 울림이 좋군. 천참만륙으로 갈라버리면 되겠어."
시원한 대답에 남궁의 무인들이 크게 반색했고.
"태상가주! 정말 잘 생각하셨—"
서거거걱—
퉁퉁한 남궁만도를 시작으로···
반색한 무인들의 목이 전부 깔끔하게 절단되었다.
찰나의 순간 남궁천의 팔이 움직이나 싶더니, 그의 주변에 있던 세가 무인들의 목이 일거에 공중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 무슨 짓이오 태상가주—!!!"
남궁천의 기색이 어딘가 달라졌음을 진즉 눈치채고 몸을 뺄 준비를 하고있던, 삼검살 남궁산만이 그 혈겁에서 살아남았다. 남궁산은 즉시 주변의 무인들을 규합해 대항하려 했으나.
서걱! 서걱!
— 크아악!
어느순간, 남궁의 무인들끼리 칼부림이 나나 싶더니 순식간에 혈겁이 펼쳐졌다.
그새 남궁천과 뜻을 함께하기로 한 놈들일 터.
부리부리한 인상의 중년인도 아니나 다를까 슬레모킨의 손아귀를 벗어나 남궁의 무인들을 썰어버리기 시작했다.
대혼란이 일어나는데 몇 초면 충분했다.
콰득!
와중에 남궁천은 붕 떠오른 머리통 하나를 잡아 깨부수더니, 과일처럼 쥐어짜 입안에 흘려넣었다.
주르르륵···.
인두겁을 덮어쓰고 있던 괴물의 본성.
"그래. 알아냈구나. 헌데 날 제압할 수 있을 듯 싶나?"
남궁천은 흡족하다는 듯 쥐어짠 머리를 휙 던지더니, 얼굴로 피를 흠뻑 뒤집어 쓴채 기수식을 취했다.
스스스—
남궁천의 검끝이 뱀의 혀처럼 흔들린다.
제왕을 명칭으로 택한 남궁의 최종 절기다.
······제왕검형(帝王劍形).
아힘사의 초진동블레이드처럼 흔들리던 검끝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본능적인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시작부터 남궁의 절기. 뇌전처럼 출수해 단숨에 끝낼 요량이군.
"벼."
심히 혼란스러운 전각 앞.
전투의 시작을 알리듯.
변절자, 종후표가 음성에 요기를 담아 고함을 빽 질렀다.
"변절자다!!!!!!!!"
너도 변절자잖아.
[ 내가 막는다. 전각으로 들어가서 가륵의 피를 챙겨라. ]
그렇게 루베르겐 집행관의 전음이 끝나자마자, 무시무시한 기세를 일으킨 남궁천이 땅을 박찼다.
[ 귀에 다 들린다!!! 가만히 둘 줄 아느냐!!! ]
#103화. 어떻게 합니까
#103화.
콰과과광—!!!
정면으로 쏟아지는 남궁천의 제왕검형.
그것을 전력으로 막아낸 루베르겐 집행관이 저 멀리 튕겨져나갔다. 잠깐 생겨난 빈자리를 아힘사와 청풍이 달려들어 힘겹게 메웠다.
[ 어설픈 놈들! 목숨이 아깝다면 비켜서라! ]
남궁천의 무시무시한 귀기(鬼氣)가 천지사방을 장악한다. 남궁천은 압도적인 공력으로 앞을 가로막는 일행을 찍어누르며 전각으로 향하는 나를 막아서려 했다. 내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늙은이가 힘은 팔팔하군.'
제왕검 남궁천.
그는 세가 정예들의 목을 참해버린 이상, 절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제 방해하는 이들을 전부 죽이고 시체의 혈액을 챙겨 장벽 밖으로 도망가든지, 아니면 보기좋게 사냥당해 모든 것을 잃고 추하게 죽든지.
그런데 상황이 이쯤 되면 장벽 밖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
공교롭게도 남궁세가의 본원은 수르트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지라, 시티 장벽과 거리가 가까운 편이다. 물론 변절한 화경의 고수라고 해서 무사히 시티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
쾅!
남궁천도 그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제왕검형이라는 가주 전승의 절기를 곧장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기세가 너무도 살기가 짙고 흉흉해, 나는 차마 전각 내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내가 빠지면 오래 못 버티겠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집행관은 전각으로 들어가 가륵의 피를 찾으라 했으나, 상대는 전력을 다하는 화경의 고수.
저만한 기세라면 여기있는 이들은 필시 개미처럼 짓눌려 죽는다.
스르릉—
그렇기에 나는 전각에 들어가는 대신 광선을 뽑았다.
일단 희망적인 것은, 남궁천과 붙어먹은 무인들의 수가 많지 않다. 아무래도 변절이라는 최후의 선택지를 앞날 창창한 검수들이 선뜻 택할 리는 없는 탓에.
거기다 남궁산이라는 초절정 경지의 고수가 남궁천의 잔혹한 손속에서 살아남았으며, 그는 정예들을 빠르게 규합하여 대응에 나섰다.
— 등을 지고 서서 방진을 형성해라!
삼검살(三劍殺) 남궁산은 남궁천이 가장 먼저 죽이려고 마음먹었을 정도의 걸출한 고수. 눈치도 빠르고 경지까지 뛰어난 사내라, 지금까지 잘도 살아남아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 망설이지 말고 베어 죽여라!
서거걱!
야차처럼 날뛰는 삼검살 남궁산을 필두로한, 변절에 동참하지 않은 남궁의 정예들이 배신한 이들을 상대로 검을 휘둘렀다. 패도적인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이 이곳저곳에서 펼쳐지며 강맹한 풍압의 지대를 만들어냈다.
뒤이어.
청풍과 아힘사에 이어 루돌프놈까지 전투에 합세했다.
지금 내가 집행관쪽에 합류해 힘을 보태면, 저 남궁천은 어찌 막아볼 만하다.
그런데, 검을 뽑은 내가 전투에 뛰어들기 직전이었다.
"신경쓰지 말고 그냥 찾으러 가."
"······."
나를 말리는 슬레모킨의 목소리.
"저 망할 루베르겐이, 알아서 할 거야."
그녀는 무언가 확신에 차있었다.
연방 집행관, 유크 루베르겐.
과거 반 바이오의 끝을 고하러 온 집행관이자···
전설적인 9레벨의 연방 집행관 '모리 무라타' 의 기억과 심득을 이어받은 후계. 유크 루베르겐은 여섯 번째 봉우리 마탑의 구성원 중에서도 꽤 베일에 싸여있는 인물이었다.
"저 인간이 늘 크레딧에 집착하는 이유. 이미 엄청 많은 녹봉을 받는데도, 계속 크레딧에 집착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투캉! 투캉!
내가 쉬이 발을 떼지 못하자, 슬레모킨은 샷건을 무섭게 장전하며 말을 이었다. 두꺼운 구슬이 들어있는 산탄이 샷건 안으로 말려들어갔다.
"루베르겐은 언데드처럼 가만히 있어도 몸에 마나가 쌓이는 체질이야. 죽은 모리 무라타랑 똑같지. 그런데 저 체질을 가진 사람은 몸에 마나가 끝도 없이 쌓여서, 그걸 중화시키지 않으면 마력에 절여져서 죽어. 그래서 저 인간은 매일같이 더럽게 비싼 '마나 중화제' 를 피워야만 해."
대충 이해가 되었다.
매일 피우던 궐련이 마나 중화제였던가.
절맥(絶脈)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로군.
"바꿔 말하면, 루베르겐은 항상 마나를 몸속에 꽉꽉 눌러 담고있다는 거야. 폭발 직전의 활화산처럼 인간의 한계까지 마나가 쌓여있고, 중화제로 겨우 폭발만 막고 있는 거지."
꽈과과광—!
마침 루베르겐의 대검과 남궁천의 검이 부딪쳤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성에 지면 전체가 들썩일 정도.
슬레모킨의 말대로라면, 유크 루베르겐은 모리 무라타와 비슷한 체질을 가진 덕에 그의 인격 메모리칩을 받은 거다.
"루베르겐 저 인간은 몇 년간 제대로 폭발한 적이 없는데. 그동안 얼마나 마나를 억눌러 놓았을지 상상도 안 가. 그러니까 신경쓰지 않고 가도 돼."
슬레모킨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루베르겐 집행관이 하늘 높이 대검을 들어올리는 광경이 보였다. 어마어마한 마력과 허연 연기가 집행관의 몸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전각으로 들어가도 되겠다고.
대체 저 멀대같은 육체에 마나를 얼마나 압축해 억눌러 놓았는지, 끔찍하게 농도짙은 마력의 와류가 둑 터진듯 흘러나와 집행관의 주위로 휘몰아친다. 선천지기를 뽑아쓰던 당명 원로를 보는 듯했다.
잠시 뒤, 루베르겐 집행관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 지금부터, 강제 집행을 시작하겠다.
[ 그 오만한 입을 반드시 찢어주마. 그리고 거기 네놈, 어디 한 번 들어가서 잘 찾아보거라. ]
"······."
심상찮은 기세를 느끼는 와중에도 남궁천은 나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확실히 여유가 줄어들었다. 이제 전각으로 향하는 나를 막을 수 없다 판단한 듯했다.
그렇게, 마나의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 전각 근처가 잠시 잠잠해지나 싶더니.
후욱!
순간, 루베르겐의 신형이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대기를 뒤흔드는 제왕검형의 살기와 루베르겐 집행관의 마력이 실린 대검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집행관의 몸에서는 청록빛의 마나와 연기가 대해처럼 흘러나와 사방을 잠식해나가고 있다. 그의 마력은 너무도 농도가 짙은 나머지,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의 영역을 넘어 무(無)색의 영역에 이를 정도.
"별로 마음에는 안 들지만. 도와줘야지."
꽈광!
곧이어 어딘가 못마땅한 눈치의 슬레모킨도 샷건을 쏘아대며 집행관을 지원했다.
나는 그 전투가 벌어지자, 망설임없이 몸을 돌렸다.
들어와본 전각 내부는 빛 한점이 없어 칠흑처럼 어두웠다. 마치 바깥과 다른 공간인 듯했다.
아니 다른 공간이 맞다.
언 선생의 수술실에 찾아갔을 때 느꼈던 기이함과 결이 비슷하니까.
'심처에 진법을 쳐뒀군.'
그 진법 안에서 요기가 느껴진다.
본능적으로 호흡을 참아야 할 정도의 막대한 힘.
진법을 뚫고 나올 정도로 진득한 요기는 전각의 심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요기가 너무도 강력한 탓에 근방까지 흘러나왔던 것. 다만 남궁의 본원이 별도의 전각과 거리가 조금 있었기에 다른 식솔들은 문제를 느끼지 못했을 테지.
사실 남궁의 태상가주가 이 전각에 숨어 진법까지 준비해둔 채, 변절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도 진법의 수준이 지대하게 높지는 못하다.
나는 세상의 진법에 조예가 있었고, 언 선생이 쳐둔 진법도 꿰뚫어본 사내라 그 진법을 신속하게 흩어내고 들어갈 수 있었다.
진법을 흩어내자.
'저게 종후표가 말한 귀물함인가.'
전각의 심처, 바닥에 떡하니 박혀있는 작은 기계가 보였다. 사람 머리통보다 조금 큰 크기의 기계.
스아아아—
마치 가습기처럼 생겨먹은 기계에서는 증기와 함께 사이한 요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외부에는 괴이한 문양들이 규칙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내가 그 귀물함의 안쪽을 살펴보자, 모래시계 모양의 투명한 막 사이로 '혈액' 이 담겨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외형이 화려하여 무슨 고귀한 보석이라도 모셔둔 줄 알았다.
아무튼 그냥 유리병에 시체의 혈액을 받아놓은 꼴이 아니라, 아주 작정을 하고 받아 챙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왕검쯤 되는 인물은 대우가 다른가.'
나는 어이가 없었으나, 귀물함을 파괴해서 저걸 끄집어낼 수는 없었다.
이 귀물함은 아스파로프의 나뭇대처럼 무언가 특별한 술법이 걸려있어, 지금 내 수준으로는 건드렸다간 큰 일이 터질 듯했으니.
남궁천이 웃으며 무심하게 들여보낸 이유가 있었다.
확신이 있었던거다. 전각에 들어가서 아무리 진법을 헤치고 찾아봐야, 자신과 동급의 강자가 아닌 이상 이 귀물함을 어찌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
나는 깔끔하게 포기한 뒤 곧장 몸을 돌렸다.
밖에 있는 종후표의 대가리를 가지러 가기 위해.
'시체의 피를 받기로 했던 종후표라면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
부르르—
"?"
내 안주머니에 고이 모셔두었던, 아스파로프의 나뭇대가 갑자기 미친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 * *
'이런.'
제왕검, 남궁천은 생각보다도 고전하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본원에서 칼부림이 나는 건 괜찮다.
일상과 다름없는 일이고, 소란이 나더라도 이 근방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허나 요기만큼은 흘러나가선 안 된다. 근방에 남궁을 제외한 대문파가 없다 해도 남경은 절대고수들이 즐비한 곳. 자칫 방심했다간 일을 그르칠 것이다.
이 별도의 전각은 남궁천의 폐관을 이유로 소음과 기운을 차단하는 진법을 쳐두었기에, 어느 정도는 소란에서 자유로웠으나.
'일이 너무도 지체되는구나.'
시간이 끌리면 끌릴수록 불편하다.
세가의 중진 고수인 남궁산마저 일격에 죽이지 못했다. 남궁천은 화경의 초입을 넘어선 고수가 맞으나, 확실히 십이제급에는 미치지 못하는 무인이었다.
'이놈은 어찌 이리 강한 것이야!'
더해서 집행관이 남궁천의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남궁천이 기운을 펼쳐 훑어보았을 때 분명 8레벨 수준으로 보였는데, 마음먹고 전투에 임하자 집행관이 가진 기운은 끝도없이 치솟아 자신의 바로 턱밑까지 따라왔다.
마음이 조급해진 남궁천은, 그를 수행하던 중년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 진아. 이대로는 늦을 듯하니, 계획을 바꿔야겠다. 내가 가진 요력을 해방해 모두를 상대할 터. 너는 그틈에 전각으로 들어간 놈을 죽이고 귀물함을 회수 해와라. 한시바삐 남궁을 벗어나야 한다. ]
집행관 일행을 전각으로 인도한 중년인은 태상가주를 보좌하는 초절정 고수 남궁진으로, 삼검살 남궁산과 동급이거나 조금 더 경지가 높은 고수였다.
게다가 남궁천이 가주만 익힐 수 있는 무공, 제왕검형을 독단으로 사사했기 때문에 남궁진은 완숙함을 넘어 초절정의 끝자락 즈음에 닿은 고수가 되었다.
남궁천은 방금 전각 안으로 뛰어들어간 놈이 한 수 재간은 있어 보였으나, 감히 제왕검형까지 익힌 남궁진을 상대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 허면 다른 놈들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
[ 주제도 모르고 제 욕심만 많은 놈들이다. 짐이 되기 전에 버린다. ]
[ 예! 즉시 죽이고 회수해 오겠습니다. ]
남궁천은 남궁진 단 한 명만 데려갈 생각이었다. 고귀한 피를 나누어주고 그들이 말했던 곳에서 다시 남궁 일가를 이룰 것이다.
'아쉽구나. 실로 아쉬워.'
그는 지금까지 일궈놓은 지금의 남궁을 이런 식으로 버리고 떠다는게 못내 뼈아팠으나, 이미 피를 받고 세인들의 머리까지 참해버린 이상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다.
이윽고.
캉!
삼검살 남궁산을 밀어붙이던 남궁진이 검을 회수하고는 급하게 전각으로 뛰어듬과 동시에, 남궁천은 여태껏 심혈을 기울여 눌러두었던 요기를 마음껏 해방했다.
[ 이 버러지 같은 놈들!!! 어디 한 번 해보자꾸나!!! ]
그러자 장내에 있던 이들이 요기에 반응해 급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거대한 마력을 꺼내쓰며 그와 호각을 이루던 루베르겐 집행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 집행관, 지금까지 재미 좋더냐? ]
"······."
남궁천은 종후표의 말 그대로 늙어 죽기가 두려운 탓에 시체가 되기로 했으나, 막상 그렇게 되어 피를 받고보니 그것이 주는 무한한 힘에 매료되어있는 상태였다. 화경에 오른 뒤로 별다른 깨달음이 없어 초입에만 머물고있던 경지에도 뒤늦게 욕심이 생겼다.
그런데 그 귀한 피를 가져가려고 하다니. 남궁의 무인들을 다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만큼은 절대 내어줄 수 없었다.
헌데, 그때였다.
촉!
남궁천의 목덜미를 웬 촉수가 스치고 지나갔다.
"조용히 늙어 뒈질 것이지, 시체의 몸으로 현경(玄境)의 절대고수라도 되어볼 참이냐 남궁천!"
[ ······. ]
남궁천과 같은 변절자 신세인 종후표였다.
요기를 단번에 해방한 여파로 전투를 벌이던 이들의 발은 땅에 붙었으나, 애초에 시체인 종후표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않은 것이다.
촉!
종후표가 쏘아낸 혀는 도끼의 형태처럼 변하여 남궁천의 목을 다시 스치고 지나갔다. 종후표는 대가리만 달랑 남았지만, 백리뇌부로 불리운 부법의 고수. 이제 혀로 도끼를 만드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정치인 종후표는 혀로 사람을 홀리고, 혀로 사람을 죽인다. 그에게 혀는 필연적인 존재였다.
목덜미가 긁힌 남궁천이 한심하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 멍청한 놈. 나를 도와 이곳을 빠져나가면 되었을 것을. 어찌 어렵게 가느냐. ]
남궁천의 그 일갈에 종후표가 자조적으로 답했다.
"이미 구명선에 탔고, 배에 다시 오르기는 늦었다."
한배에 탔으면 함께 노를 저어야 한다.
그것이 삼도천을 건너는 배여도 이미 올랐다면 어쩔 수 없다. 정치란 것은 그렇다. 같은 이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뇌물을 받아도, 사람을 죽여도, 강제로 여인을 탐해도, 당장은 일치단결하여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저어야 한다.
[ 구명선 같은 헛소리. 일이 끝나면 저들이 네놈을 가만둘 것 같나?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도 솥단지에 들어가는 법. ]
남궁천의 이간질에도 종후표는 그저 담담했다.
"흥, 아무리 내 눈이 어두워도 전각 구석에 처박혀살던 당신보다 어두울까! 정치권에서 그깟 토사구팽 정도는 하루걸러 일어나는 일. 기합으로 견디면 그만이지! 그 누구도 주인을 비정하다 탓하지 않는다. 그리고—"
종후표는 혀를 낼름대며 덧붙였다.
"네놈처럼 충분히 거대하고 살이 오른 토끼를 잡아먹으면, 배가 불러 사냥개를 삶을 생각조차 나지 않는 법이다. 차마 그것까지는 몰랐구나 이 노괴놈아!"
촉!
기호지세.
호랑이 등에 탄 상태에서 무섭답시고 뛰어내려 봐야, 얼마 못가 뒈지기나 할 터.
종후표는 기초부터가 단단한 사람이었다.
"내게 정치는 생존이다!"
촉!
[ 못난 놈. ]
하찮은 종후표의 혓바닥 공격을 무시한 남궁천은 검을 들어올려 기수식을 취했다. 요기를 마음껏 꺼내 놓으니, 단전 밑에서부터 무한한 공력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우우우웅—
남궁천의 두터운 검 위로, 요기가 가득 실린 검강이 한참이나 솟아올랐다.
'진이가 전각에 들어간 지 이제 일 분이구나.'
앞으로 적어도 일 각 정도의 여유가 있다.
남궁천은 방금 전각으로 뛰어 들어간 남궁진이 그 허여멀건한 놈을 단숨에 참살하고, 가륵의 혈액을 회수해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그때까지 소모전에 돌입할 참이었다. 혈액을 가져오는 즉시 남궁을 등지고 '고귀한 자' 가 보내준 시체들을 수르트에—
쿵!
남궁진의 잘린 머리가 그의 발치에 쿵, 하고 떨어졌다.
[ ······. ]
하던 상념이 툭하고 끊겨버린 남궁천이 고개를 들자.
"보세요. 전대 가주님."
그가 기거하던 전각에서, 허여멀건한 사내 하나가 남궁천의 귀물함을 소중히 들고는 천천히 걸어나왔다.
"배울 수준도 안 되는 놈한테 제왕검형을 사사하면 어떻게 합니까. 제대로 쓰지도 못해서 그렇게 죽었잖아요."
레반이었다.
#104화. 일각
#104화.
전각의 심처.
웅웅웅······
안주머니에 고이 모셔두었던, 아스파로프의 나뭇대가 튀어나가고 싶다는 듯 꿈틀댄다.
혈교의 금지에서 '짐승' 의 요기를 빨아먹은 이후로 자꾸 대가리가 이리저리 돌아가긴 했었으나, 오늘따라 그 정도가 과했다.
액티브가 아니라 패시브 마병이었나.
요기를 처먹으면 상시 발동되는 패시브 아이템이라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요기를 처먹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것인지.
나뭇대의 끝은 귀물함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얘야, 왜 이러니. 이러지마라."
혹여 고장이라도 날까 나뭇대의 움직임을 제한해보려 했으나, 과거의 칠좌가 작정하고 제작해 신병이라 불리우던 물건. 지금의 내 수준으로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현상을 몇 번이나 더 막아보려다 결국 포기하고는 나뭇대를 꺼내놓았다. 오늘부터 나뭇대의 꿈을 마음껏 펼치게 해주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런데.
나뭇대를 꺼내어 놓자마자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나 싶더니, 그 안에서 요기가 흘러나와 혈액이 들어있는 귀물함에 철썩 들러붙는 것이 아닌가!
"!"
순식간이었다.
마치 자석처럼 들러붙은 그 요기는 귀물함의 요기와 서로 뱀처럼 엉켜 부풀었다 줄었다를 반복했다. 그런 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귀물함을 방어하고 있던 특별한 술법이 자연히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 귀물함이 내뿜던 요기가 상당히 줄어들었고, 흘러나오던 증기도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으니.
"흠."
아마도 마병, 아스파로프 나뭇대의 승리.
고도의 힘을 지닌 두 마병이 만나 한쪽이 승리한듯 보인다만, 그 원리에 대한 의문점은 더욱 강해졌다.
다만 이것은 기운을 빨아먹는 마병이라 함부로 남들에게 보여주기는 힘든 물건이다.
법기에 통달한 수도자나 '내게 호의를 보이면서도 대단히 고강한 경지를 지닌 마법사' 쯤은 만나야 이것의 정체를 파헤칠 시도나마 할 텐데.
한······십이제 로라 마르티네즈 정도?
사실 그녀도 명확히 규명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것은 현자의 명호를 받은 칠좌가 쓰던 것이라.
"귀찮은 일을 덜어주어 감사하게 됐습니다."
나중의 일이야 어찌 흘러가든, 나는 즉시 체슈탈 아스파로프의 영령에 대강 인사를 올리고 나뭇대를 소중히 집어넣었다.
그 후, 좀도둑처럼 주섬대며 귀물함을 주워 챙기려 할 때였다.
"건방진 놈. 그게 푼다고 풀리는 물건인 줄 아느냐!"
모든 일은 쉽게만 흘러가지 않는다고.
전각 입구쪽에서 진법을 흩어낸 누군가의 인영이 심처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아까 우리를 이 전각으로 안내했던 부리부리한 무인이었다. 지금까지의 이력으로 보았을 때, 저자는 남궁천의 수발을 맡은 앞잡이로 보였다.
물론 앞잡이라도 가진 무위는 우습게 볼 수 없다. 피부로 느껴지는 기세가 꽤나 저릿하다.
게다가 나는 진법을 흩어내고 들어왔는데···저놈은 그냥 진법이고 뭐고 쉽게 들락날락 거리는 것을 보면 필시 남궁천이 신뢰하는 심복이겠지.
뚝···뚝···
놈은 바깥에서 사람을 몇 명이나 베었는지, 칼날에 피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채로 우뚝 섰다. 칼끝에서 떨어진 피가 전각의 바닥을 적셨다.
"남궁의 땅을 밟지 않았다면, 이리 험한 꼴은 보지 않았을 것을."
고수.
저자는 평이한 외양에 비해, 굉장한 고수다.
최소로 잡아도 완숙한 초절정 경지에 이르렀다.
재수가 없으면 경지 끝자락에 이르렀을 수도 있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자는 아직 내가 귀물함의 술법을 풀어낸 걸 모르는 눈치였다.
"마탑의 마법사 레반이다.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나는 밍기적대며 귀물함을 몸으로 가린 뒤, 어떻게 빠져 나갈지를 궁리하며 적당히 이름을 물었다.
놈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남궁진이다."
"그래 궁진아, 너는 아직 변절자가 아니니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참작의 여지가 있다."
남궁이 성이고 이름이 진일 것이었으나, 나는 지금 정신을 온통 탈출과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그따위 사소한 것에 신경을 쏟지 않았다.
다행히 남궁진도 그닥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우습구나. 그것도 도발이라고 하는가? 너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내 칼에 맞아 죽을 터이니, 마음껏 더 해봐라."
"음."
거만하군.
아무래도 혼자 있을때 더 오만해지는 성정인 모양.
저놈은 자기가 화경의 고수라도 되는 양 거만을 떨어댔다. 주인이 신뢰하는 심복이 주인 대신 주접을 떠는건 흔한 일이기에, 나는 사내답게 그냥 넘겼다.
"네놈은 자랑스러운 무인의 긍지와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남궁의 이름을 더럽혀도 좋은가?"
"시체가 되더라도 나는 그대로 무인(武人)일 것이다."
"최근 들어본 개소리 중에 두 번째로 참신했다."
첫 번째는 종후표의 변절자다! 가 되겠지.
저 개소리 뒤로도 남궁진과 나는 서로를 노려보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고, 남궁진은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묻지도 않은 사실을 알아서 꺼내놓았다.
"나는 남궁의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제왕검형까지 익혔다. 말재주는 좋다만, 네놈 따위가 시간을 끈다하여 방도를 내볼 수 있을 성 싶나?"
"······."
제왕검형을 익혔다라.
가주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는 남궁의 최종절기를 마음대로 사사해도 되는 것인가? 참 웃기는 놈이군.
하기야 서비스는 주는 놈 마음이라지.
"이야 대단한데."
나는 남궁진의 기분을 띄워주며 시선과 정신의 분산을 유도했다. 내 오른손은 느긋하게 움직이는듯 보여도 착실히 검집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초절정 검수들의 결전에선 작은 차이가 승부를 가른다.
"남궁천 전대 가주께서 너를 많이 신뢰하나보군. 그런데 막상 덤비지는 못하는 걸 보니, 겁이 많은가봐."
"입은 살았구나. 이따위 것에 속아줄줄 알았나?"
투두두둑-
내 도발에 남궁진은 돌연 검을 들더니, 전방의 미세하게 얇은 와이어줄을 잘라 끊어냈다. 전각에 진입한 뒤 혹시 몰라 쳐둔 것인데, 입은 가벼워도 바보는 아닌 모양이다.
까딱까딱.
남궁진이 검을 까딱거렸다.
"선수는 양보하마."
"좋지."
생사가 달린 전투에서 선공을 양보하겠다는데,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저 남궁진은 어떠한 사실에 홀린듯,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남궁천에게 선택된 인재라 여기는 것이 아닐까.
스아악!
나는 한 호흡에 마나를 빨아들여 마력 투사체 수백 개를 쏘아냈다. 남궁진이 검을 꺼내 그것들을 튕겨내는 사이 검을 뽑아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출수.
내가 택한 선공은······
'남궁세가의 검법' 인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였다. 십수개의 검로가 패도적으로 나아가 종국에는 하나의 검로로 수렴했다.
캉! 카강!
급히 창궁무애검으로 대응한 남궁진의 부리부리한 눈매에 당혹이 서렸다.
"······서, 섬전십삼검뢰?"
남궁진은 몸에 익은 대로 초식을 잘 막아냈으나, 필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남궁의 무인도 아닌자가 남궁의 검법을 사용했으니.
나는 남궁의 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내.
중원을 주유하던 시절에 남궁과도 부딪친 일들이 많았다. 패도적인 검을 쓰는 만큼, 성격들도 걸걸해서 마주치면 칼 뽑아 싸우는건 예삿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굳이 시비를 걸고 다니지 않더라도, 십대고수이자 여기저기 적을 둔 광인의 제자인지라 나를 박살내 스승을 부르려 하거나, 가벼이 보고 가늠해보려는 정파의 무인들이 많았다.
"네, 네놈이 창궁의 무공을 어떻게!"
놈과 나의 검이 허공에서 어지러이 얽혔다.
나는 남궁의 무공을 섞어 공격하는 와중에 선공의 기세를 몰아 [ 음성공명 ] 마법으로 남궁천의 목소리까지 흉내냈다.
"반갑다. 남궁레반이다."
"이 빌어먹을 놈이 이따위 사술을 부려? 오냐. 끝을 보자꾸나!"
그에 남궁진은 크게 흥분했고, 판단이 흐려진 게 틀림없었다.
벌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진동하는 남궁진의 저 칼끝.
"남궁의 무공을 어디서 익혔는지는 몰라도, 단칼에 죽여주마! 어디 이것도 따라해보거라!"
제왕검형이다.
남궁진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극성의 성취를 이루었을 창궁무애검법이 아닌, 최근에 익힌 제왕검형을 선택한 것이다.
확실히 흉흉한 무학이자 남궁의 오의이긴 하나···
하필 상대가 나라면,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 된다.
일 분쯤 걸렸나.
서걱!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제왕검형을 꺼내든 남궁진의 목이 허무하게 떨어졌다.
툭. 투두둑···.
남궁진의 발악은 고작 삼분도 못가는, 60초짜리 맛보기 광고 같았다. 나 이제부터 제왕검형 쓴다! 아주 난리를 쳐놓고서는 실로 어설픈 검을 꺼내놓았다.
실로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제왕검형이었다.
제왕이 아니라 재앙.
한심했다.
초절정에 오를 정도라면 창궁무애검법의 극을 보았을 텐데. 어딜 헛바람만 잔뜩 들어서는 성취가 낮은 무공을 꺼내놓는다는 말인가?
저것은 고명한 무인들도 가끔 저지르는 실수다.
대단한 무학을 익히면 그것으로 세상을 오시할 수 있을줄 안다. 각 무공마다 지닌 이치와 사용처가 다 있고, 명확히 숙련의 차이가 있거늘.
만약 남궁진이 처음부터 끝까지 창궁무애검만 사용했다면 나는 온 전력을 다해 필사의 전투를 펼쳐야 했을 것이다.
허나 놈이 보인 제왕검형의 성취와 경력은 미숙하다 못해 처참하기 그지 없었고, 나는 그 틈을 단박에 헤집고 들어가 목을 쳤다.
휘익!
그렇게 나는 잘린 남궁진의 머리를 잡아 전각 밖으로 던졌다. 귀물함을 가지고 나가니 남궁천이 바로 보였다.
"배울 수준도 안 되는 놈한테 제왕검형을 사사하면 어떻게 합니까. 제대로 쓰지도 못해서 그렇게 죽었잖아요."
촉!
전각 앞에서는, 루돌프놈이 혀를 쓰는 종후표의 머리를 들고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뭘 하는 꼬라지인지는 잘 모르겠다.
"형님!"
"형장!"
"촉!"
[ ······. ]
아무튼 내가 남궁진의 머리통은 물론이고 혈액이 든 귀물함까지 가지고 나왔으니, 남궁천의 낯짝은 거뭇한 흙빛에서 다시 새하얗게 질려버린지 오래였다.
이제 저 화경의 고수이자 전대미문의 변절자가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했다. 가진패도 다 털린김에 그냥 확 질러볼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도망칠지.
[ ······그 피, 당장 내놓아라. 목숨은 건져나갈 것이다. ]
잠시 벙쪄있던 남궁천은, 당연하게도 전자를 택했다.
쾅!
"크악!"
자리에서 찰나간 사라진 뒤 종후표 앞에 나타난 남궁천은 종후표의 머리통을 후려치더니, 그 반발력을 이용해 이쪽으로 뛰어들었다.
[ 내놓아라!!! ]
나는 쏘아지는 남궁천의 지풍을 피하며 귀물함을 단단히 등에 결박했다. 빛살같은 남궁천의 궤적을 따라, 무시무시한 기세의 루베르겐 집행관과 슬레모킨까지 동시에 내쪽으로 달려들었다.
스릉—
나도 가까워지는 남궁천을 보며 검을 들어올렸다.
* * *
삼검살, 남궁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남궁의 하늘이 어째서······."
현재.
하늘 높이 솟은 남궁의 전각 벽면에 손가락을 박아넣으며 기어 올라가는 피투성이의 노인이 있었다. 백발의 머리칼은 귀신같은 산발이었고 정제된 의복은 형편없이 찢어지고 뜯어졌다.
그는 남궁의 전대 가주, 남궁천이었다.
[ ······. ]
그리고 남궁천은 어느덧 남궁세가의 가장 높은 곳에 섰다.
펄럭이는 무복에 기운을 불어넣어 허공을 답보하는 것처럼, 남궁천은 전각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굴었다.
싸움에서 밀리니 도망친다. 언뜻 보기에 합리적이다.
남궁천은, 내게서 귀물함을 결국 빼앗지 못했기 때문에.
"······형장, 일이 끝나면 화산에 꼭 오시오. 반드시 형장과 같이 화산에 가야겠소."
"생각해보마."
이제 남궁천은 시간을 많이 소모했다고 여긴 듯했다.
지금이라도 혈액이 든 귀물함을 빼앗아 가려면 홀몸으로 여기 있는 모두를 쓰러뜨려야한다. 허나 남궁천이 십이제급도 아니고, 상대하기에 까다로운 8레벨이 이렇게나 모여있으니 가능할 리가 없었다.
꾸욱.
나는 귀물함을 등에 단단히 결박하며, 남궁의 전각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간 남궁천을 바라봤다.
지금, 거대한 대검을 든 루베르겐 집행관이 공중을 날아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강대한 마력의 화산이 남궁의 하늘을 잡아먹으러 간다. 나는 방금의 전투를 견식한 뒤로, 연방 집행관과는 반드시 척을 지지 않기로 했다.
그때, 종후표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혈액을 이리 쉽게 버리고 도망칠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전각에서 귀물함만 들고 도망쳤어도 됐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는데 저러는 거면 뭔가 있겠군."
"?"
"이상해. 이상하다. 저렇게 쉽게 삶을 포기할 양반이었으면 시체도 안 됐을 건데."
남궁천은 늙어 죽는게 두려워 시체가 된 참이다. 분명 노리는 무언가가 더 있을 수도 있다. 종후표도 그 사실이 못내 찝찝한지 인상을 구기며 생각을 곱씹는 중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종후표가 그리 말한 뒤.
우르르릉——
"!"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흔들렸다.
슬레모킨에게 듣기로, 남궁천은 강박적으로 일각이라는 시간의 단위를 신경쓰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다시금 저 높은 전각 위를 바라봤다.
어딘가 자포자기한 듯한 남궁천의 저 얼굴.
우리는 그 이유를,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 무림의 하늘이라는 분이 이제야 오셨소! ]
꽈과과과과광——!!
찰나의 순간.
남궁세가의 전각 꼭대기로 기어 올라간 남궁천의 머리 위로, 수십 줄의 번개가 내리쳤다. 남궁천의 끔찍한 비명마저 그 섬광에 묻혀버렸다.
저 위에서,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남궁천의 몸뚱아리.
나는 저 비현실적인 광경이, 뇌전의 경력을 담은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의 일종이란 것을 알았다.
누군가 넋이 나가 입을 열었다.
"칠좌(七座)."
남궁천이 요기를 내보인 시간이 어느 한계 지점을 지나자, 연방의 최강자 반열에 앉아있는 도시의 칠좌가 직접 나선 것이었다.
이윽고.
나는 신선에 필적하는 기운을 가진 수십 개의 칼날들이 남궁천의 육체를 도륙내는 걸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저 하늘이 변절자의 피로 물들고 있었다.
#105화. 살려만 주면 된다 이건가?
#105화.
꽈과과과광—!!!
거력의 천둥이 연신 휘몰아치는 하늘.
그 강력했던 남궁천이 가차없이 도륙난다.
루베르겐 집행관이 급히 속도를 올려 남궁천의 머리통이나마 남겨보려 했지만, 거력이 깃든 이기어검(以氣馭劍)의 칼날비를 뚫어낼 수는 없었다. 저기에 끼어 들었다간 루베르겐도 집행관도 위험할 것이다.
"······이런."
그러니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육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밖에.
루베르겐 집행관이 진입을 포기한 뒤, 고작해야 십 초쯤 지났을까.
어느덧, 하늘을 울리던 천둥 소리가 천천히 멎어들고 수십 개의 칼날도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곧 희뿌연 뇌전의 잔영이 서서히 걷히자.
먼저, 오래 전부터 남궁세가의 본원(本院)을 대표하는 초고층 전각의 꼭대기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뜯겨져나간 것이 시야에 들어왔고.
후두두둑—
다음으로는 누군가의 선혈과 잔해가 비처럼 쏟아져내려 전각 고층의 유리창들을 검붉은 피로 물들였다.
저렇게 갈려나갔다면 시체라도 살아날 수 없다.
얼마 전까지 남궁의 하늘이었던 인간.
"······."
남궁천은 그렇게 죽었다.
잠시 뒤.
제왕검의 별호까지 받은 9레벨의 강자를 마치 아이 손목 비틀듯 도륙해버린 뇌전의 칼날들은,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 유유히 저 먼 천공 너머로 사라졌다.
대 남궁세가의 본원을 거침없이 작살내놓고도 유유하게 말이다.
— ······.
이제 사위에 고요한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왜냐하면 이 자리에 있는 있는 모두는 칠좌의 소맷자락조차 보지 못했기에.
칠좌로 추정되는 이는 어디선가 기운이 담긴 날붙이들을 조종하는 것 만으로 남궁천을 도륙냈다. 만약 뇌전의 칼날들이 마음을 먹었다면, 이곳의 사람들을 전부 쓸어버리는 기행도 가능했으리라.
그것은 강림(降臨)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렸다.
돌연 인간 세상에 내려와 손짓 한번으로 천벌을 내리는 미지의 존재. 누가 감히 천벌에 대적할 의사를 표하겠는가.
절대적인 힘에 경외감마저 고개를 든다.
······이것이 칠좌(七座)의 위엄.
저 공포스럽기까지 한 힘은, 어지간한 일은 다 겪어보았을 남궁의 정예들마저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으며, 장내에 있는 이들은 자연재해를 맞이한듯 그저 선채로 압도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 우웨엑!
— 크헉!
천지를 육중하게 짓누르던 칼날의 기세가 멀리 사라지자, 그제서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속을 게워내는 남궁의 무인들.
심지어 8레벨인 청풍이나 슬레모킨도 그 위력에서 자유롭지는 못한지, 한참을 멍하니 서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물론 전생에 화산 노괴나 8위계 대마법사와의 전투로 경이로운 힘을 여러번 견식해본 나는 괜찮았다. 애초부터 눈을 감고 있었다. 칼날을 보자마자 어떤 황당한 일이 펼쳐질지 예상하고 있었으니.
더해서 칠좌의 위치가 대충 어디쯤인지도 알아냈으나, 자칫 그 괴물을 자극이라도 할까 기운을 더 펼치지도 않았다.
"아니, 형장은 저걸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소?"
그때, 옆에 있던 청풍이 나를 괴물보듯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동요하는 척하며 뒤늦게 헛구역질을 했다.
"휴우, 나도 속으론 무서워 하는 중이다."
"형장처럼 담이 큰 사람은 처음보오. 허나 그것조차 커다란 이점이니, 응당 배워야하겠지."
"······."
"역시 형장이오! 나는 훌륭한 형장을 두었소. 하하하하!"
청풍의 질린 듯한 눈빛 속으로, 자그마한 열기가 들어차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진중해진 청풍의 태도에 나는 그냥 입을 닫았다.
* * *
전대 가주의 변절 사태.
남궁천이 자포자기 하고 전각의 꼭대기를 등반하기 전까지 그의 발악은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워낙 격렬한 전투에 끼어들 생각조차 못하고 숨어 지켜보던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본 전각에 있었다.
아마 그들이 전했을 것이다.
— 가문의 하늘이었던 남궁천이 변절자가 되어 죽었다···라고.
"······허허."
남궁선.
본원을 비웠던 남궁가주가 소란통에 돌아왔다.
현 남궁세가 코퍼레이션의 회장이자, 남궁가주인 그는 무너진 전각 꼭대기를 보며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근엄한 수염과 함께 푸들거리는 입주변 근육.
"이 얼마나 커다란 수치인가."
허허로운 장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이보게 집행관, 칠좌께서 직접 손을 써야할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다는 말인가?"
"저로서도 알 수 없습니다."
"······."
루베르겐 집행관도 가륵이라는 네임드에 관심이 지대해, 연결고리인 남궁천을 어떻게든 살려 사로 잡아보려 했으나 칠좌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수르트에 기거하는 칠좌는 연방 집행관의 조사가 필요하든 말든, 그런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배려해줄 성인이 아니었다.
아마—
조금 큰 짐승이 시끄럽게 짖어대기에 죽였다.
딱 그 정도로 여기지 않을까 싶다.
"······그간 용무가 바쁜탓에 잠시 본원을 신경쓰지 못했다고 해도, 어찌 남궁의 땅에서 이런 괴이한 일이! 또한 생에 대한 집착이 그리도 강한 분이셨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구나."
무림계의 명숙이자 남궁의 태상가주가 변절자가 되어 죽었다. 때문에 남궁가주 남궁선은 침음만을 흘렸다. 노쇠하여 뒷방으로 물러난지 오래된 자신의 아비가 설마 이런 일을 꾸미고 있을줄은 가주도 몰랐을 것이다.
어느순간 정신을 붙잡은 남궁가주는 세인들에게 즉시 뒷수습을 명하고, 가주전으로 우리를 불러들였다.
꿀꺽꿀꺽.
그는 목이 타는지 차 한 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말했다.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아까 전과는 딴판이었다.
"그래, 내 곰곰이 생각해보니 남궁의 땅에서 승하(昇遐)하신 것이 차라리 상수다. 만약 변절에 성공하여 도시를 빠져나가거나, 바깥에서 돌아가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죽음이 두려워 변절했다는 한심히 사실이 세간에 알려질바에 여기서 죽는 게 나았다."
현 남궁가주는 상당히 계산적이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비가 변절자가 되어 죽었는데도, 슬픈 기색보다는 이 일로 남궁가의 명성이 추락할까 하는 걱정이 더 강해보였다.
하긴 그러니까 남궁세가의 주인이 되었겠지.
"칠좌께서 이 사실을 떠들어 댈 리는 없고······남궁의 식솔들이야 입이 무겁고 조용하지. 연방에는 보고가 들어가나?"
"예."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을 터. 감수하겠다."
남궁가주가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봤다.
"고생한 화산의 소협에게도 내 부탁을 좀 함세. 대 남궁의 체면이 이만저만이 아니게 되었네."
"예, 가주."
입을 닫아달라는 남궁선의 부탁에 청풍이 포권했다.
사실 남궁세가와 척을 질 게 아니라면 여기저기 떠벌리지 않는게 현명하다.
남궁세가는 지금 총체적 난국이다.
이번 사태로 가문의 정예 검수들이 부질없이 죽어나간 건 물론이고, 무려 전대 가주까지 변절자가 되어 사망. 남궁천이라는 이름의 썩은 동앗줄을 잡은 이들은 모두 죽거나 단전이 폐해져 뇌옥에 갇혀있다.
삼검살, 남궁산이 분발해 최대한 피해를 막아보려 했지만 워낙 예비 변절자들의 저항이 거세 어쩔 수 없었다던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남궁가주가 집행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이 자리에서 똑똑히 말하건대, 남궁세가는 일체 모르는 일일세. 오로지 죽은 전대 가주가 독단으로 벌인 일이야."
"참고하겠습니다."
"시체의 혈액은 확실하게 챙겼나?"
"연방으로 가져가 보고할 생각입니다."
"······좋네, 이만 가보시게."
휘익.
남궁가주는 머리가 지끈대는 얼굴로 손을 휘적였다. 귀찮고 복잡하니 어서 가지고 나가버리라는 뜻.
"아 잠깐, 내 염치도 없이 잊을 뻔했군."
그러다 갑자기 우리를 불러세우는 남궁가주.
내 생각대로, 남궁가주는 계산적이고 냉정했다.
"반드시 본원의 재경각에 들러 거마비(車馬費)를 받아가시게."
"······알겠습니다."
"후에 연통하겠네."
그러나 아주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남궁세가의 보물단지라는 재경각에 들러, 꽤 많은 양의 크레딧과 남궁이 빚은 영약등 각종 귀물을 굉장히 두둑히 챙겨나올 수 있었다. 뇌물은 절대 아니고 거마비, 즉 교통비가 되겠다.
물론, 상급의 에센스도 한가득 퍼왔다.
그렇게 두손 가득히 재경각을 털고 남궁을 나오는 길에, 루돌프 뱃속에 숨어있던 종후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읍, 더 가져와도 될 것 같은데······."
* * *
남궁세가와 조금 떨어진 근방의 한 객점.
요리가 맛있고 술맛이 좋기로 소문난 곳.
우리는 꽤 큰 탁자에 값비싼 음식들을 진수성찬으로 깔아놓았으나, 청풍이와 나 말고는 아무도 젓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적우적.
"이 집 음식 잘하네."
"형장도 그리 생각하시오? 동감이오."
그렇다 해도 청풍이 워낙 대식가인지라, 진수성찬은 착실히 비워지고 있었다. 나도 큰일을 치룬 뒤라 배가 고팠으므로 음식들을 빠르게 집어먹었다.
"그런데 화산도가 고기를 먹어도 되나 싶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진 규율이오. 화산이 본질적으로는 도가이긴 하나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아서."
"그런 건 현대적이라 좋구나. 하기야 화산이 도가 중에서도 세속적인 놈들로 유명했지."
"형장, 헌데 잠시 못본 사이 왜이리 많이 바뀐 거요? 얼굴도 아주 이전과는 다른 사람 같소."
쩝쩝.
청풍은 육즙이 줄줄 흐르는 고기를 마구잡이로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사람이 산산조각나 늘어진 살풍경을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고기에 손을 대다니. 칠좌의 무위에 잠시 당황한 듯 보였으나, 실체는 역시 무던하고 자비없는 놈이었다.
무시무시한 천재놈.
"집행관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는 육회를 한움큼 집어먹으며 물었다.
그러자 팔짱을 끼고있던 루베르겐 집행관이 답했다.
"남궁천도 사로잡지 못했고, 네임드 개체 가륵도 찾아내지 못했으나 혈액은 확보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이것을 가지고 연방으로 돌아간다. 도시기획부처장의 변절이 사실인지도 확인해야 하겠지."
이제야 오딘으로 돌아가겠단 얘기.
저 혈액을 어찌 사용할 방법이 있나보다.
그런데 집행관의 말에 이어, 조금 망설이던 슬레모킨이 음성을 전했다. 그녀는 아까부터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나 루베르겐을 따라가야할 것 같아. ]
[ 집행관을? 마탑주의 명령인가? ]
[ 아니, 루베르겐 저 빌어먹을 인간이 지금 약화된 상태라. 가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거든. 자칫 했다가 혈액을 도둑이라도 맞으면 대참사 나는거지. ]
[ 수르트 시티에 다른 집행관들도 있잖아. ]
슬레모킨은 입술을 격렬하게 삐죽대며 말했다. 나는 무슨 복화술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 와, 정말 내가 그렇게 똑같이 말해봤거든? 근데 저 인간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세상에, 무림계쪽에서 활동하는 집행관들은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알아채지 못해서 신뢰가 안 간대. 진짜 미친놈인가봐. ]
듣자하니, 루베르겐 집행관은 한번 마력을 크게 터뜨리고 나면 전신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탓에 잠시 약해지는 기간이 있다고 했다.
그것이 지금이고···
같은 체질인 모리 무라타가 허무하게 당한 이유중 하나라던가.
아무튼 특이한 체질로 단기간에 거대한 힘을 구가하는 대신, 그만큼의 단점도 있다는 것.
내가 슬레모킨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때, 루돌프가 조심스레 끼어들어 말했다.
"형님. 근데 종후표가 세 명을 밀고한다 했는데, 지금까지 둘 아닌가요?"
종후표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허나 루돌프놈 빼고는 다 알고 있었다.
"살려준다는 확신이 들어야 불겠지. 그냥 무작정 불겠냐. 저거 입 꾹 닫고있는 거 봐."
"······."
종후표는 사냥이 끝나 솥단지에 들어가는 사냥개 신세가 되지 않기위해, 남궁천이 죽은 뒤로는 입을 조개처럼 닫고 있는 상황이었다.
놈은 심히 졸렬하지만 자기 목숨 챙기는데는 유독 도가 터서, 자신의 목숨줄을 부여잡고 있을 마지막 패를 무작정 까보여줄 리는 없었다.
헌데 그런 종후표에게 안된 점은, 루베르겐 집행관은 종후표가 밀고할 마지막 변절자가 누구든 정말로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모리 무라타의 기억 때문인지 지금 가륵에만 단단히 꽂혀있었다.
"저놈은 그냥 깔끔하게 죽이고 떠나는 게 좋겠군. 백리뇌부 종후표의 변절에 관한 보고는 내가 따로 올리도록 하지."
"!"
종후표는 눈치가 빠른 정치인이라 저게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루돌프놈의 어깨 뒤에 숨어있던 종후표가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며 감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 아직 보여주지 못한게 많다!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풀어놓지 못하고 떠나는 게 아쉽다!"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정치 논리적으로 돌파할 방법이 도저히 없다는 것.
나는 육회를 씹어먹다가 슬쩍 끼어들었다.
"슬슬 밑천 다 떨어졌나 보구나."
그러자 펄쩍 뛴 종후표가 아주 발작을 했다.
"무슨 소리인가! 당장 남궁천도 내가 밀고해서 잡았는데, 내가 공을 요구하나 아니면 돈을 요구하나! 나는 그저 살고만 싶을 뿐이라니까······하며 성을 내는 것은 아마추어나 하는 짓."
하지만 말하는 와중에 잘못된 길이라 생각했는지, 또 태도를 반대로 고쳐먹고는 혀를 비비며 아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 백리뇌부 종후표가 반드시 더한 쓸모를 증명해보이겠다. 다른 것은 필요 없으니 살려주겠다 확실히 약속만 해준다면, 알고있는 것은 모든지 다 털어놓겠다!"
음.
나는 그런 종후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봐 종후표."
"?"
저 녀석은 아는 게 많으나 위험한 시체다.
허나 그렇다고 막 죽여버리기에는 아깝다.
그래서, 계륵이 되기 전에 판단을 내려야했다.
"그러니까 목숨을 '살려' 만 주면 된다 이건가? 평생 고통을 받거나···뭐 그런 것은 상관없고?"
#106화. 밥 먹으러 가자
#106화.
객점에서의 식사 자리를 파한 뒤.
집행관과 슬레모킨은 곧장 스테이션으로 떠났다.
— 나 진짜 간다······? 응? 이제 정말 갈게?
떠나기 전, 슬레모킨은 특히 아쉬워했다.
사실 그녀는 루베르겐 집행관과 동행하기 싫은 티를 처음부터 팍팍 냈다.그러나 집행관이 쌓인 마력을 전부 터뜨리고 약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만 했다.
힘 빠진 집행관과 더불어 가륵의 혈액을 확실히 보호할만한 무력이 슬레모킨 말고는 없는데다가, 서로 꺼리는 사이라 해도 일단은 같은 마탑 소속이라.
— ······아니면 레반도 오딘으로 간다거나? 우리 마탑 멤버가 다 같이 가는 건 어때.
그녀는 한없이 시무룩한 얼굴을 숨기며 저렇게 말했다.
물론, 나는 오딘 시티로 갈 생각이 일절 없기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 거기서 마탑주님 만나면 내 소식이나 대신 전해줘.
— 와······너 지금 되게 냉정한 거 알아? 어떻게 남궁천 상대로 귀물함 지키면서 싸울 때보다 더 냉정한 것 같네. 하나도 안 아쉽다 이거지?
— 아쉽다.
— ······아닌 것 같은데.
오딘에 가면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간단한? 목표물이었던 종후표의 느닷없는 밀고 사태로 인해 예정에 없던 수르트 행이 결정되었고, 남궁세가까지 막 뒤집어 엎어버린 마당이다.
생각해보면 또 연방의 눈에 띌 짓을 한 것이다.
집행관에게 듣기로 연방은 나를 얼굴마담.
그러니까 연방주민들의 심신 안정을 위한 프로파간다로 사용하기를 원한다고 들었다. 허나 그리 끌려다니기에는 앞으로의 인생이 짧고 내 청춘이 아까워 선동질에 놀아나줄 마음은 없었다.
이전에도 생각한 거지만, 그럴만한 수준도 안 되면서 명성부터 날리는 것은 뒤통수에 칼맞아 죽기 딱 좋은 짓이다.
나는 시간이 지나며 천천히 연방의 기억 속에서 잊히기를 바라고 있다. 뭐 두각을 드러낸 신예가 금방 자취를 감추는 경우야 흔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별 등신같은 대사건들이 펑펑 터지고 있을, 망해가는 세상이니까.
— 아무튼 금방 다시 돌아올 거니까 어디 이상한데 끌려가지 말고 있어. 얼마 안 걸려 진짜로.
— 알았다.
— 그리고 종후표 쟤는 좀 꺼림칙하더라. 불안하면······.
— 어떻게든 해보고, 정 방법이 없으면 처분하면 돼.
— 그래, 좋은 생각이네. 아! 그리고 이건 비와서 추울 수도 있으니까 필요하면 써.
— 이건 뭐에 쓰는 건데 이리 조잡하지?
— ······내가 뜨개질 연습하다가 짜본 담요인데. 뜨개질이 마나호흡 집중하는 데 생각보다 유용해서 짜다보니까 이렇게 된 거야. 그래서 조잡하다 느낄 수 있어. 응. 그럴 수 있지. 조잡해 사실.
— 춥다 추워.
— 나 다녀올게!
그렇게 집행관과 슬레모킨은 오딘으로 떠났다.
종후표 집행으로 연계된 사태들의 보고와 네임드 시체 '가륵' 의 혈액은 연방 직속인 루베르겐 집행관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기에, 나는 당분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부터 자유인가. 아주 좋고 평화롭군."
나는 이전 생들부터 역마살(驛馬煞)이 사주에 끼었는지, 정처없이 방랑하며 떠돌거나 전장에서만 살아온 사내이기에 멋대로 해도 상관없는 상황에 처하자, 매우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곧바로 수르트 시티의 불빛 가득한 거리로 나가 걸으며 달콤한 자유를 맛보았다.
찰박- 찰박-
오늘따라 날이 습하더니 어느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는데, 근처 외곽지에 홍등가가 늘어서 있어서 은근한 운치가 있었다. 주민들은 오염물질 가득한 비를 피해 길거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형님."
한참 비내리는 날의 운치를 즐기던 와중에, 별로 듣고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다름이 아니고···배가 고파요. 몸 아픈 건 참겠는데, 배고픈 건 못참겠네요."
운치에 잠겨 여러 생각들을 하는 사이, 홀쭉해진 루돌프놈은 더 이상 허기를 참지 못하겠는지 침을 질질 흘려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못생겼던 얼굴이 더 망가졌다.
도저히 보기가 버거워 시선을 돌렸다.
"어째서 저렇게 못난 것일까. 좀 떨어져서 걸어라."
"···그렇게 벌레보듯 고개 돌리지 마세요. 그리고 제가 어디가 그렇게 부끄러워요?"
"네가 부담스럽게 생긴걸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됐고요 형님, 진심으로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러니까 같이 뭣 좀 먹으러 가시죠."
"아까 객점에서 청풍이랑 나 먹을때 뭐했어?"
"······예?"
"나때는 밥시간에 밥 안먹고 투정부리면 그냥 밥그릇 엎어버렸다."
그러자 억울한 얼굴의 루돌프놈이 굳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항변했다.
"······아니 그게 대체 뭔 꼰대같은 소립니까? 그리고 저는 형님 때문에 이제 사람밥 못 먹잖아요. 저한테 왜 이래요?"
"개밥 먹어 그럼."
"너무하네. 다 알면서 계속 이럴 겁니까? 형님, 진짜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세요?"
"적당히해라."
"네."
"여튼 나는 충분히 배부르다. 물배라도 채워봐."
"아, 저는 물 말고 신선한 피가 마시고 싶은데요. 예를 들면 시체라든가. 저 종후새끼 저거 내가 먹어도 상관없겠."
위이이이잉—
"너무 시끄럽습니다."
"역시 우리 아힘사다."
"아니 왜 맨날 나만 가지고······."
"형장은 좋은 일행이 있어 늘 삶이 즐겁겠소. 하하하!"
이렇듯 수르트 시티에는 배고파 죽겠다고 징징대는 루돌프놈, 시끄러우면 전기톱을 돌리는 아힘사와 계속 따라오는 청풍이 남았다.
"······또 내게 끔찍한 협박을 하는 건가?"
더해서 짐덩이 하나, 백리뇌부 종후표까지.
종후표는 배고프다는 루돌프의 말에 모골이 송연해졌는지, 대가리를 볼링공처럼 굴려대며 최대한 멀찍이 떨어졌다.
퍼걱-
그러나 중간에 코가 깨져 멀리 가지는 못했다.
"······."
저리 과민히 반응하는 게 이해는 된다.
무슨 호빵맨도 아닌데 머리 반절을 식사로 뜯어먹힌 것도 모자라, 뭐만 하면 루돌프놈 뱃속에 자꾸 넣어버리는 바람에 경계심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테니.
듣기로는 저 루돌프놈의 뱃속 안이 지옥과도 같다던데 워낙 기함을 하니 나조차도 궁금할 지경이었다.
아무튼, 저 종후표는 이미 수인 몇을 죽인 완벽한 변절자라 계속 당당히 들고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금은 뒈지기가 싫어서 혓바닥 뒤에 이빨을 감추고 있을 뿐, 확실한 기회를 잡으면 이빨을 다시 드러낼 지도 모른다.
오딘으로 떠난 루베르겐 집행관이 종후표에 관한 연방의 집행허가서를 넘겨주고 가긴 했다만, 집행 서류가 있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이봐, 분명 살려준다 했잖은가! 고통 정도야 좀 받아도 된다니까? 내가 고통을 느껴봐야 뭐 얼마나 느끼겠나. 나 백리뇌부야!"
"그랬지."
나는 원래 종후표를 '짐승' 에 넣어 원하는 대로 새 삶을 줄 계획을 다 꾸며놓았다. 그런데 떠나기 전 슬레모킨이 말하길, 당장 알 헤임달 시티로 가도 혈교의 금지에 진입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을 거란다.
'그렇긴 하겠군.'
하기야 고위 흡혈귀인 혈교의 주교들을 기절시켜놓고 짐승의 요기까지 빨아먹는 미친짓을 벌였다. 혈교의 블랙리스트에 등재되기 충분한 조건이다.
다시 아이작을 데려가 무언의 압박이라도 하지 않는 한 짐승의 사용은 요원할 것인데, 아이작이 내 말 한마디에 바로 움직여줄 정도로 한가한 엘프가 아니라는 것도 문제.
아이작 모드릭은 굉장한 거물이다. 남궁천보다도 더.
슬레모킨과의 인연으로 운좋게 만난 것일뿐, 본래 내가 쉬이 마주해 대담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감히 8레벨인 내가 이래라 저래라, 짐승좀 쓰게 도와달라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인간을 꺼리는 혈교의 금지에 특별히 진입하게 해준 것도, 그저 딸을 잘 봐주었으면 하는 아이작의 단순한 변덕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사실, 호의가 넘쳐서 도와준대도 문제다.
[ ······인연이야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것 아니겠나. 이제 스물을 갓 넘겼다고 했나? 그 어린 나이에 8레벨이라는 경지에 올랐다면, 나약한 인간처럼 빨리 늙을리도 없겠군. ]
종후표놈을 어떻게 해본답시고, 실제로 슬레모킨과 덜컥 혼인을 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래도 종후표는 천년만년 살고싶어하는 놈. 지금까지 해온 것을 보면, 갑자기 돌아버려 난동을 부릴 일은 희박할 터다.
"요기부터 감춰라."
"아, 알겠다."
일단 칠좌(七座)의 칼날이 떨어지는 일이 없게 종후표의 요기를 완벽히 감추도록 지시했다. 종후표는 애초에 대가리만 덜렁 남아 숨만 겨우 붙어있던 놈이라, 얼마 남지 않은 요기를 곧잘 감추는 법을 터득했다.
고수가 가까이서 확인하는 게 아닌 이상, 긴가민가 할 정도는 되겠군.
"크게 고민이 되는구나. 저놈을 어찌 해야 할지."
"형장."
고민하던 중에 청풍이 불쑥 끼어들었다. 청풍은 비가 내리는데도 개의치 않고 웃는 얼굴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외곽의 홍등가를 걷고 있었는데, 화산에 같이 안 가면 계속 따라올 기세였다.
"저놈이 필요해 끌고 갈 생각이라면, 수르트 시티 북경(北京)의 진주언가(辰州言家)를 한 번 찾아가보시오. 신묘한 법력을 불어넣어 제작한 법기나 법부적을 다루는 수도자들인데 색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요. 나같은 말코보다야 월등히 더 도인같은 사람들이니."
진주언가.
청풍의 말을 듣자 개방의 풍령개와 절친히 지내던 언 선생이 떠올랐다. 법부적으로 목숨을 구한 덕분에 언제 한번 찾아가겠다 다짐했는데, 그러고보니 잊고 지내고 있었구나.
"언가라···언가의 수도자들은 지들끼리 처박혀 제멋대로 사는 이들이라 만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뭔가를 내어주려 하지도 않을 거고."
"허나 화산이라면 가능하지 않겠소? 내가 사문 어른들께 여쭈어 방도를 구해보면 어떻겠소."
"그렇게만 된다면 나쁘지는 않겠다. 가능하면 좋은 법부적이나 몇 개 구했으면 좋겠는데."
— 어이~
"?"
끼이이익—
쾅!
내가 청풍과 진주언가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웬 자동차 한 대가 멀쩡히 걷고있던 루돌프놈을 차로 쾅! 치고 멈춰섰다. 루돌프놈은 공중에서 회전하며 삼십 미터 정도를 날아가더니 낙법도 못하고 땅을 굴렀다.
— 거기 잠깐 멈춰보쇼. 이거 크게 사고가 났네.
— 당신네들 보험사기단이야? 도로에서 차가 지나가는데 몸으로 막으면 어떻게 하나? 비싼차인데 박살난 거 보이지?
그들은 창문을 열고 몇 마디 하더니, 곧장 내려 시비를 걸어왔다. 수는 한 열 명쯤 되었는데, 주머니에 칼과 총을 차고 있었다. 여기저기 교체해둔 사이버웨어 파츠들은 한 눈에 봐도 싸구려였다.
그냥 평범한 동네 흑도로군.
— 다들 멈춰봐. 비 오는데 왜 길거리에서 꼴깝들을 떨고있나? 오염된 비라 맞으면 몸에 안 좋아.
우리는 건강을 걱정해주는 그 흑도의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남궁에서 전투를 막 마친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길거리를 걷고있던 터라 몰골이 아주 추레했다. 이제는 비까지 맞아서 좋게 말해도 거지꼴이었다.
음, 오해를 살만 했다.
"······."
나는 웨스트 정크타운으로 대표되는 발두르 시티를 떠나온 이후, 이렇게 원색적인 시비를 걸릴 일이 없었기에 꽤 생소하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수르트 시티는 발두르보다 훨씬 땅이 넓다 해도, 자그마치 십 억이 넘는 인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는 동네.
그래, 저런 흑도쯤은 하나 둘 있어줘야 맛이 살지.
나는 다짜고짜 엎어진 루돌프의 멱살을 잡고선, 주머니를 뒤지는 흑도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돌프야! 이런 것도 꽤 추억이지 않니. 퍽치기 한다음에 주머니 뒤지는거."
그러자 차에 치어 엎어져있던 루돌프가 히히 웃었다.
"흐흐흐, 그러네요. 이러니까 괜히 정크타운 생각이 나서 저도 괜히 코끝이 찡해지고 그럽니다. 나도 퍽치기 좀 치는데."
— 이 개새끼들 뭐라는 거야? 분위기 파악 안돼?
— 근데 이놈은 차에 치었는데 왜 이렇게 멀쩡해?
"돌프야!"
"예."
"알아서 해라. 얼른 밥 먹으러 가야지."
"그럴까요?"
우지지직!
— 끄, 끄아악!
수르트 시티, 외곽 홍등가의 흑도.
나와 루돌프를 잠시 옛 추억에 잠기게 해준 고마운 녀석들. 루돌프놈은 그 양아치 흑도중 한 놈의 얼굴을 덥썩 잡으며 일어섰다. 시커먼 칠흑색으로 변한 팔에 구불구불한 핏줄이 솟았다.
방금 그것은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소리였던가.
"형장. 나도 남궁쪽 동네는 오랜만에 와 보는데, 외곽이라 확실히 운치가 있는 것 같소."
"그러냐, 네가 있는 화산쪽은 어떤데?"
"저렇게 대놓고 강도짓 하는 놈들은 잘 없지. 근처에 녹림의 지부가 있긴 하오."
— 끄아아악!
나와 청풍은 길거리에 주저앉아 루돌프의 원맨 학살쇼를 구경했다. 루돌프의 몸에는 총탄과 칼이 끝도 없이 박혀들었는데, 놈은 아무런 충격도 없이 멀쩡했다. 보니까 흑도들중 제일 기세가 사나운 자도 4~5레벨 수준이라 루돌프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주니, 땅에 피가 좀 흘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런데, 얘들 괜찮은 차 타고 왔네."
카창!
나는 놈들이 마침 세워두고 내린 자동차가 생각나 즉시 유리창을 부수고 탑승했다. 완성차 기업으로 유명한 쿼롯의 양산차라 장벽 근처까지 꽤 편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차창문을 깨버려서 그런지 아주 시원한 비바람이 불었다.
차창 너머로 큰 소란에 고개를 빼꼼 내민 주민들이 보인다. 하수구에서 쥐가 머리를 내민 것처럼, 그 수가 흑도들의 열 배는 되었다.
이 도시는 사람이 많다. 아주 더럽게도 많다.
더해서 온 사방이 다 답답하게 꽉꽉 막혀있다. 그나마 이 근처는 홍등가라 그런가 유독 밝은 홍색과 황색 조명이 많아 괜찮았지만.
나는 차 악셀을 천천히 밟으며 앞으로 이동했다. 루돌프놈이 흐흐 웃으며 사람 팔 뜯어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저대로 그냥 두면 안될 듯했다.
"청풍아, 화산에 가기 전에 장벽 밖에 좀 들렀다가 가자. 시체 사냥꾼들 사냥하러 가는곳. 저기서 사람 찢고 있는놈 밥을 좀 먹여야 할 것 같아서."
"화산에 숙소를 준비해두라 미리 언질을 해놓겠소."
"그러지는 말고. 부담스러우니까."
일단 종후표를 데려가려면, 놈이 쥐도새도 모르고 먹혀 뒈지기 전에 저 루돌프놈의 배를 채워줄 필요성이 있을듯 했다.
"돌프야! 그만 패고 타라!"
"예!"
나는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된 루돌프놈을 불러 차에 태우고는, 수르트 시티의 외부 장벽으로 악셀을 밟았다. 밥도 배부르게 먹이고 장벽 밖 분위기도 좀 볼겸해서.
덜컹!
악셀을 밟자 길거리에 널브러져있던 흑도놈들이 물컹하고 밟혔다. 루돌프놈은 깨진 창 밖으로 침을 몇 번 뱉으며 환하게 웃었다.
#107화. 좋은 의견 있는 사람?
#107화.
끼익-
도로가 끊기는 지점에 차를 세웠다.
인류와 시체들의 경계인 수르트 시티 장벽이 보인다.
시티의 장벽은 대단한 광역마법이나 진법으로 보호받고 있기에 멋대로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다.
다만 시체 사냥꾼이나 기업의 에센스 수급팀을 장벽 내, 외부로 보내기 위해 만들어둔 출입통로가 지역마다 있다.
사람 몇 지나갈 만한 장벽 내부의 출입통로는 진법의 힘이 잠시 해제되는 시간대가 있고, 대대급의 연방군 경비부대가 그 앞을 철통처럼 지킨다.
'여긴 수준 높은 병사들이 많군.'
만약 시체가 시티로 침입하거나 밖으로 도망치려면 저 연방군 경비대는 물론이고 신속 타격부대까지 전멸시켜야 한다. 진법도 억지로 뚫어버릴 만큼 강력한 힘까지 필요하겠지.
아마도 남궁천 정도의 고수라면 능히 그리했을 터.
"그러니 이곳에 있는 수백의 군인은 우리가 살린 것과 다름없구나."
"형장의 말이 맞소."
"한데, 저 군인들이 나를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걱정 마시오 형장. 그때와 비교하면 형장께서 워낙 헌앙해져 알아볼 수 없을 거요. 오죽하면 나도 형장이 맞는지 헷갈렸을 정도겠소?"
장벽과 점점 가까워지자, 작은 출입구가 시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출입구 앞에서 눈을 부릅뜬 연방군의 병사들이 시체 사냥꾼으로 보이는 자들의 신원을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근방의 경비가 삼엄하다.
신원 증명이 되지 않으면 출입구에 접근조차 불가해 보이니, 알 헤임달 시티의 널널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실 개척이 도시의 모토인 알 헤임달이 지나치게 자유로운 편이라 그렇지, 원래는 저리 빡빡하게 검사하는 게 옳은 일이다. 그렇기에 종후표놈은 아힘사에게 맡겨놓고 우리 셋만 장벽으로 온 것이기도 하고.
찰박-
— 정지.
오늘처럼 비가 오거나 모래폭풍이 부는 날에는 진법이 완전한 제 역할을 하기가 힘들어 군의 경계도 더욱 강해지기 마련이다.
— 화산 그룹? 지나가십시오.
다행인 건 이쪽에는 화산의 청풍이 있었다. 덕분에 신원 증명 절차는 매우 간단했다. 메가콥의 위명을 방패삼아 나와 루돌프는 신속하게 출입구를 통과했다.
장벽은 높이뿐 아니라 두께도 매우 두껍다.
작은 출입구를 통과하자 꽤 긴 통로가 나왔고, 우리는 단단한 강철문 몇개를 더 지나야했다. 그런데 그 문들을 지날 때마다 방향감각이 틀어지는 걸 보니, 무슨 진법이 또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출입문에서는, 내 의지로 장벽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자필로 작성해야 했다. 실상 장벽 밖은 공권력 따위가 없는 무법지대라 의미 없는 요식행위에 불과하지만.
살아 돌아오면 살아 돌아오는 거고.
돌아오지 못하면 죽거나 시체가 되었다는 뜻이라.
— 매번 할 때마다 지겹군. 절차가 너무 까다로워.
우리가 통로를 지나 마지막 문에 이르자, 먼저 온 몇 명의 시체 사냥꾼이 복잡한 절차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인으로 보였는데 검은 물론이고 대물 저격총, 유탄 발사기나 수류탄같이 구하기 힘든 화기들을 기본적으로 장비하고 있었다.
— ······통과.
그것도 모자라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구할 수 없는 군문의 무기까지 떡하니 장비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문을 지키고 있던 연방의 장교와 병사들은 그것을 보고도 실랑이는커녕 적당히 못 본척 통과시켜 주었다.
하기야 한껏 예민하게 날을 세운 사냥꾼들 면전에다 대고 '연방군 무기네? 밀수했구나. 내려놓고 가' 라며 통과를 거부했다간 난리가 날 것이다.
나는 시체 사냥꾼들의 뒤를 이어, 삭막하고 황폐한 장벽 바깥에 이르렀다.
쿠웅—
시간이 지나자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앞의 사냥꾼들과 우리 말고 다른 통과자는 없는 모양.
이제 다음 출입문의 개폐가 있을 시간까지는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안력과 청력에 집중해 먼저 장벽을 나와있던 사냥꾼들을 주시했다.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였고 대부분 6레벨급 정도로 보였으며, 개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베테랑은 7레벨에 근접한 초일류 경지의 고수였다.
그들의 분위기는 나름 자유분방해 기업 소속은 아닌듯 보였다. 에센스는 만성적인 공급 부족으로 인해 돈벌이가 되니, 개인과 기업 구분할 것 없이 뛰어든다. 저렇게 실력이 비슷한 이들끼리 사냥팀을 꾸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 비가 많이 내리는군.
저 사냥꾼들은 비 때문인지 판초우의를 뒤집어 썼다. 주변 환경에 자연스레 동화되는 우의를 보자, 나의 2회차인 아포칼립스 시절이 떠올랐다. 그 세상에서는 나도 저거 많이 쓰고 다녔는데.
그때.
휘적휘적···
"?"
사냥꾼중 하나가 이쪽을 향해 웬 손짓과 눈짓을 했다. 표정을 보니 별다른 악의는 없어 보였는데, 나는 저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기에 대답을 주지 못했다.
— 풋내기들인가.
그러자 작게 혼잣말을 한 사냥꾼은 머리를 절레절레 젓더니 금세 무리와 함께 멀리 떠나버렸다.
시체 사냥꾼 무리가 떠나고 장벽 앞에는 나, 청풍, 루돌프놈까지 셋만 남았다.
장벽 바깥은 어두웠으므로 나는 마나를 모아 밝은 불빛을 만들며 말했다.
"돌프야."
"예."
"나랑 청풍이는 여기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 지금부터 배고픈 네가 직접 사냥해라. 대신 잡혀가거나 일 터지면 안 도와준다."
"······에이, 또 왜 이래요. 일부러 겁주시는 거죠?"
"아니."
농담이 아니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으나, 강력한 시체라도 갑자기 튀어나오면 곧바로 도주할 작정이다.
천운이 따라주는게 아니라면, 이 넓고 광활한 장벽 밖에서 지원을 바라는 것은 불가하니까.
장벽 밖으로 기어나온 인간들은 드넓은 망망대해 위에 던져진 배와 같아 조난 당하면 대부분 그대로 끝을 맞이한다.
그야말로 인세의 마경.
저 루돌프놈은 이런 곳에서 앞으로도 쭉, 시체를 잡아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아악—
때마침 시체 몇 마리가 멀리서 사람 냄새를 맡았는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무작정 뛰는 걸 보니 딱히 지능이 높지도 않아 보인다. 한 3레벨급 내외. 에피타이저로 적당할 것이다.
"돌프야, 온다."
"······."
"아까 양아치놈들 팰 때처럼 해."
"후우,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래. 힘내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루돌프놈의 식사는 성공적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헤맸으나 점점 몸에 맞는 전투 방식을 찾아갔다.
우선 인간들처럼 감염의 위험이 없으니, 시체들에 둘러싸이더라도 별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무통귀갑신공은 몸을 단단히 만들어주긴 해도 그다지 공격적인 외공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 부족한 부분을 짐승화가 채워주었다.
콰지지직-
루돌프놈은 피가 나야 강해지는 게임 속 광전사같았다.
강하게 처맞거나 커다란 상처를 입을수록, 수인과도 비슷하게 강성한 신체로 변해 전투를 휩쓸었다.
처맞아야 강해진다니, 정말 오묘한 전투 방식.
어느덧 칠흑색의 짐승으로 완벽히 변한 루돌프는 몰려든 시체의 대가리를 물어뜯으며 전투를 지속했다.
"꺼억."
"······."
시간이 지나자, 루돌프놈은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힌 채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서른 마리 이상은 잡아먹었을 것이다. 뱃속에 시체가 끝없이 들어갔다.
나는 루돌프놈에 대한 총평을 내렸다.
"6레벨 초입 정도는 가뿐하겠군. 상대가 공격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만, 큰 공격을 받아 신체가 변이를 일으키면 7레벨까지도 비벼볼 수 있겠다. 종후표의 도끼에 목이 잘리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형님, 제 잠재력과 재능은 똑똑히 보셨습니까."
"봤다."
"한 3천 마리쯤 죽였죠 제가? 이게 제 본모습입니다."
"주접 떨지 마라. 겨우 3레벨쯤 되는 시체들이었다."
"······그것 밖에 안됐어요?"
사실 루돌프놈 주제에 혼자 서른 마리면 굉장한 성과를 낸 거지만, 어깨를 으쓱거리는 게 상당한 꼴불견이라 오랜만에 주먹질을 해 다져줬다. 루돌프놈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아주 약간은 쓸모가 있는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형님, 자신감이 생겨서 그런지 아까보다 힘이 팔팔해진 것 같습니다. 몸도 덜 아프고. 제 착각이겠죠."
"시체 처먹으면서 에센스도 같이 들어갔나보지."
"······어, 그런 겁니까?"
"밥이나 더 먹어라. 다시 나오기 귀찮으니."
나는 한숨을 쉬고는 시체들의 위치를 짚어주었다.
우리는 그 뒤로도 장벽과 가까운 거리 내에서 보이는 놈만 사냥했다. 다행히 강력한 시체가 나타나는 일도 없어서 루돌프놈의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자, 슬슬 장벽 출입구의 개폐시간이 찾아왔다. 지금 복귀하지 못하면 세 시간 뒤까지 또 기다려야만 한다.
이윽고.
다시금 장벽의 통로 앞쪽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
어딘가 눈에 익은 시신들이 보였다.
우의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두 구의 시신.
둘중 한 구는, 나더러 풋내기라던 사내가 확실했다.
그 시신들은 장벽의 통로와 고작 몇 걸음을 남겨두고 엎어져 죽어있었다. 허리 아래로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면 여기까지는 기어온 듯하군.
청풍이 말했다.
"형장, 행색을 보니 아까 같이 문을 통과했던 사냥꾼들인 것 같소."
"음. 그렇구나."
그들은 시작할 때 분명 다섯이었는데, 돌아온 것은 두 구의 시신뿐. 그렇다면 나머지 세 명은 어디에 있을까.
고개를 돌려봐도 칠흑같은 어둠만이 펼쳐져 있었다.
——!
헌데 그 순간, 저 먼 어둠 속에서 시체의 요기섞인 괴성이 희미하게 들렸다. 적어도 3km 이상 떨어져 있는데, 꽤 강력한 놈이란 걸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괴성이다. 나는 마력으로 유지하고 있던 불빛을 곧장 껐다.
"돌아가자."
······이것은 우습게도 나중에 알게 된 얘기인데, 다리 잘려 죽은 사냥꾼이 장벽 앞에서 했던 손짓과 눈짓은 수르트의 사냥꾼들끼리 서로의 무운(武運)을 빌어주는 의식이라고 했다.
허나 그깟 미신이나 징크스 따위를 믿지 않는 사내인 나는, 고작 무운을 빌어주지 못해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힘이 부족해 죽은 거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같은, 한심한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왜인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비가 와서 운치가 좋은 날이었다. 차로 흑도들을 밟고 지나가기만 해도 기분이 적당히 좋은 날. 나는 괜찮았던 기분이 더 가라앉기 전에, 시신 두 구를 수습하여 돌아왔고, 연방군의 수중에 넘겨주었다.
화르르륵—
그런데 연방군은 두 구의 반쪽 시신을 인도받자마자 신원만 대충 확인하나 싶더니, 서약서만 골라놓고는 옷과 무장을 벗긴 후 불태워 화장했다. 뼛가루만 남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고는 죽은 이들이 채 사용하지 못한, 수류탄과 유탄 발사기까지 벗겨 가져갔다. 연방군의 병사들은 정말 알뜰하게도 챙겨갔다. 시체 사냥꾼은 장벽 밖이 아니라 안에도 있었고, 방산비리로 인한 밀수품은 제 주인을 찾아갔다.
* * *
우리는 장벽과 인접한 모텔에서 대기하던 종후표와 아힘사를 태우고 화산으로 이동했다.
차로 두 시간쯤을 달리자.
어느덧 깨진 차창 밖으로 화산이 보였다.
얇고 긴 기암괴석들 수십 개가 하늘로 솟아 절벽을 형성하고 있는 기막힌 절경에, 루돌프놈이 신기하다며 탄성을 질렀다.
화산이 가까워지자, 청풍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아시오 형장? 우리 화산은 원래 평탄한 고지대 위에 세워진 도문이었소. 공기가 좋아 조용히 수련하기에 화산만큼 좋은 곳이 없지."
원래 이 세계의 화산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고지대 위에 세워진 도문이었다.
그런데 그 고지대를 이루는 암석은 보통이 아니라, 대리석보다도 값비싼 고급 석재였고 기운까지 잘 통하는 귀물이었다.
과거 인류가 한창 시체의 힘에 밀릴 때 화산은 크레딧이 필요했다. 해서 도가 주변의 암석을 깎고 잘라 팔아치웠고, 암석의 뿌리가 있는 저지대까지 파고들어가 암석을 채취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지대는 점점 낮아졌으며, 극히 높고 기다란 기암괴석들이 이곳저곳에 뾰족하게 솟아있는. 그리고 그 뾰족한 괴석 위로 도문의 전각이 남아있는 지금의 신기한 형태가 되었단다.
드높은 기암괴석들 위에 조형된 화산의 도문.
이제야 조금 진정한 무림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낭만 있군."
"하하하! 천풍곡에 올라갔다 떨어져 죽은 무인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소. 혹시 모르니 형장도 조심하시오."
우리는 화산의 입구가 되는 석문에 도착했다.
청풍이 말하길, 이 화산에 오면 우선 장문인을 뵈어야 한다기에 장문의 처소라는 천풍곡으로 가야했다. 천풍곡은 삼백 미터가 넘는 기암절벽 위에 세워진 처소로, 화산에서도 거센 바람이 부는 골짜기였다.
그런데.
루돌프와 종후표가 천풍곡 문지기 무인에 막혀 화산 경내로 들어오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청풍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경한 존재들은 진입을 불허한다며 한사코 거절당하고 만 것이다.
"와 너무하네 시벌, 난 사람도 아니다 이거야?"
"원래도 사람은 아니었잖아. 금수였지."
"말을 그렇게 하세요 또."
"화산이 구분은 잘하는구나."
결국, 나는 쓸모없는 두 놈을 외부 도처에 떼어놓고선 화산의 장문에 인사를 올리기 위해 절벽을 딛고 올랐다.
나는 청풍을 따라 절벽을 오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른 세계의 화산이라······.
중원무림에서 나를 죽인 흉수였던 화산이다.
헌데 이번에는 대단한 후기지수의 환영과 초대를 받아 들어왔지 않은가. 괜스레 남다른 감회가 들었다.
나는, 앞으로의 일이 뭐든 잘 풀릴 것만 같기에 또 기분이 상쾌해졌다.
* * *
오딘 시티.
기다란 테이블을 두고 둘러앉은 사람들이 있었다.
외관이 특이한 걸 빼면 너무나 평이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몸에선 털끝만큼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공이나 마법을 익히지 않았더라도 사람이면 약간의 기척은 가지고 있으나, 그들에게선 그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흐음···."
그들중 가장 먼저 말문을 연 자는 평생 총칼과는 전혀 연이 없을 듯한, 호리호리한 체격의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다.
"라그나로크에서 진공진인의 활약이 그렇게 놀라웠다더군. 무한에 가까운 내공을 얻는다는 공령지체의 경지가 그리 대단한가? 폐관도 끝났겠다. 한번 붙어보고 싶은데."
그러자, 백면서생 반대편에 앉은 사내가 말했다.
"진공은 우리 중 가장 강한 무위를 가졌으니, 어쩌면 칠좌의 말석과 동급의 경지를 이루었을 수도 있다."
그는 장대한 기골의 거한으로, 어깨 위에 세 자루의 박도를 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차림에도 아무런 기세가 느껴지지 않아 실로 이질감이 가득했다.
장한의 말에 백면서생이 이번에는 농담조로 말했다.
"이제 '팔좌' 로 봐야 하는 건가? 그럼 십일제가 되는 것이라 곤란한데."
"공석이 생기면 과거 퇴출당한 '인형사' 를 다시 넣으면 되겠지. 인형사라면 그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그 여인은 너무 기이하고 음흉해. 저번에 마탑이랑 무슨일이 있었던지, 인형들과 마피아가 일레힌 가문의 사업체를 건드리고 다닌다더군. 마탑에서 자기더러 '아줌마' 라고 한 놈을 찾고 있다던가."
"뭐, 간덩이가 부은 마법사가 있었나보군."
장한과 백면서생의 실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탈각-
하지만 긴 탁자의 끝 쪽, 두꺼운 뿔테안경을 낀 여인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그들의 대화를 끊어냈다.
"자자 그만. 조용히 좀 해줄래?"
"마녀, 이번에 진공과 같이 라그나로크 수복전에 참여했다고 들었다. 어때, 직접보니 그리도 강하던가? 정말 내가 손조차 대보지 못할 정도로 강한가?"
백면서생은 오늘따라 유독 말이 많았다. 뿔테안경을 낀 여인이 그나마 이들 사이에서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지만, 현재 백면서생은 꽤 길었던 폐관수련으로 인해 말벗이 고픈 상태였다.
허나 뿔테안경을 쓴 여인도 성정이 보통이 아니라 백면서생이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할 말만 했다.
"닥치시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명 온 거야? 아 여섯이구나."
스르륵—
여섯이라는 여인의 말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늑대의 털처럼 빳빳한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혈액과 액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뿔테안경을 쓴 여인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열두 자리 중 절반은 채워서 의미있게 시작할 수 있겠네. 당신 안 왔으면 쫑날 뻔했어."
"흰소리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라."
"응, 그럼 안건 회의 시작한다?"
남자가 시간이 촉박하다는 듯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태도에 뿔테안경을 쓴 여인.
십이제, 로라 마르티네즈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별 건 아니고,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 9레벨 남궁천이 변절자가 되어 죽었어. 연방의 집행관이 어디서 좋은 정보를 듣고 찾아간 모양인데, 강제집행에 불응해서 요기를 꺼냈다가 그 영감탱이한테 딱 걸려서 죽었대."
"오호!"
여인의 말에 백면서생이 놀란 얼굴로 입을 가렸고, 장한은 조용했다. 다른 두 명은 처음부터 단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으며, 마지막으로 들어온 남자는 시시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무림계쪽에서 파장이 꽤 크겠군. 다음."
"집행관이 수르트에서 가륵의 피를 구해왔어."
"네임드 가륵? 추적은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라. 다음."
"현자, 체슈탈 아스파로프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어. 꽤 입지있는 거부가 아스파로프 생전의 유물을 찾고 있다는 소문도 같이."
"헛소리군. 다음. 다음 안건 없나? 끝났으면 이만 가겠다."
남자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려했다.
그러나, 이어진 로라 마르티네즈의 말을 듣고 나서는 내내 인상을 구기고 있던 그도 조용히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다음 안건, 전(前)십이제 카스트라 뷔에탕이 예전에 자기더러 '아줌마' 라고 한 놈을 찾았는데, 슬슬 잡아 죽여야겠으니까 로키에서 기어나와도 신경 쓰지 말고 넘어가달라네. 그때 화가 좀 많이 났었나봐."
"······."
그녀의 말이 끝나자 백면서생이 불쑥 튀어나와 물었다.
"인형사가 직접? 넘어가주면 어쩌겠다던가?"
"네임드, 가륵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겠대."
"반대로 안 넘어가주면?"
"자기가 '넘어' 간대."
"넘어가? 한 번 봐주겠다는 얘기가 아닌가."
"스읍, 들어보니까 그 넘어가는 게 아니고."
로라 마르티네즈가 코를 슬쩍 긁으며 대답했다.
"당장 로키 시티 개박살내버리고 시체 쪽으로 '넘어' 갈 수도 있다네. 자기도 가륵 그 개새끼 혈액 받았다고 하더라. 피를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나 본데, 뭐 따로 좋은 의견 있는 사람?"
좋은 의견을 구하는 그녀의 질문에, 탁자 주위로 적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108화. 마나회로 재건
#10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