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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 - 19

#148화. 돈만 많은 과부

#148화. 

나는 루돌프놈과 발두르 땅에 내려섰다. 

회사를 세우기로 결심했으니, 내게도 잡무를 도맡아 하며 부릴 수족들이 필요했다. 고작 일곱 개밖에 없는 도시라 해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참으로 복잡하고 귀찮은 일들이 많은지라. 

문제는 신뢰할 만한 놈을 구해야 한다는 것. 

지금껏 많은 인연을 차곡차곡 쌓아왔으나, 어느정도 수준이 높은 이들은 각자의 울타리에 깊게 몸을 담고 있어 무 뽑듯 빼 올 수 없다. 화산그룹이 다른 세력의 손에 청풍을 넘겨줄 리는 없듯이. 

그리고 안드로이드 같은 기계들은 쉬이 신뢰하기도 힘들고 껄끄럽다. 그나마 정을 쌓아온 아힘사와 루벤카의 시종인 메리 정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결국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더해서 '나' 를 잘 알고있는 놈들이 필요했다. 

돌고 돌아 나의 첫 번째 도시. 빌어먹을 발두르 시티. 

오랜만에 찾은 도시에서 첫 행선지는 웨스트 정크타운이었다. 

쾅! 

그렇게 기억에 있는 삼호루를 찾아 들어갔고,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고 있는 현장을 적발했다. 

"!?" 

저 동네 한량같은 여량천은 삼호문주 등평위의 일대제자로, 삼호문 내에서 입지가 아주 공고해 대사형쯤 되는 위치에 있는 사내놈이다. 

밖에서 설핏 듣기로 무슨 대협이라고 불리던데···. 

상판대기가 허예진 게 요즘 살판 난 듯 보였다. 

나는 나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간 잘 있었냐. 량천아." 

"그······." 

놈과 마주 앉자마자 경계하는 눈빛과 함께 독한 술냄새가 확 풍겨왔다. 아무리 내가 정크타운을 떠난지 일 년이 넘었다지만, 수련할 시간도 모자라야 할 놈이 술이나 퍼먹고 있고. 

"그나저나 잘하는 짓이구나." 

"······." 

"사내치고 때깔이 고와. 벌써 이렇게 풀어졌니? 나는 량천이 네가 기녀인 줄 알았어. 혹시 무인에서 무희로 전직이라도 한 거냐." 

"······." 

놈이 주제도 모르고 처먹던 고급 위스키를 내 목구멍에 다 퍼부어버리고 묻자, 놈은 똥 씹은 표정에서 혀 씹은 표정이 되었다. 

여량천은 제 혀를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꿈인가?" 

"이게 꿈 같니." 

"아, 아닙니다. 그런데······다시는 돌아오시지 않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 누추한 정크타운에는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왜, 내가 찾아오면 안 돼? 갑자기 속이 불편하니?" 

"아닙니다! 세상에 맹세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안 불편해?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니까 삶이 즐겁고 행복하구나." 

"······." 

"대답을 해봐." 

숨 돌릴 틈 없이 몰아치는 따뜻한 질문 세례에, 여량천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대답했다. 

"오해입니다. 제, 제가 평소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우연하게도 오늘이 달에 유일하게 쉬는 휴무날이라서 고기도 먹고 술도 먹고······." 

"돌프야. 이 친구 이거 어떻게 하지?" 

"아, 예.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정신을 못 차리네요. 제가 얘기를 잘 해보겠습니다." 

"수, 술을 많이 마시다니. 이제 딱 석 잔 먹었습—" 

콰장창! 

루돌프놈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거칠게 치웠다. 

"닥쳐라 이놈! 무인이라는 새끼가 한 달에 한 번씩 치팅데이를 챙겨 무슨. 형님, 무릎부터 꿇릴까요?" 

"그래도 사내인데, 쉽게 무릎을 꿇으면 쓰나." 

"······." 

여량천의 쩍 벌어진 입이 닫힐 줄을 몰랐다. 

"이, 이놈은 뭐······." 

놈은 살기를 품은 루돌프를 보고서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직 경지가 부족한 놈에게는, 시체와 사람의 기운이 섞여 기괴한 존재로만 다가올 것이었다. 

뻐억! 

아무튼 루돌프놈은 즉시 취한 여량천을 집어들고 가차없이 두들겼다. 여량천은 대낮부터 퍼마신 술을 전부 게워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후다닥 튀어와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내가 무릎 꿇은 놈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자, 여량천은 굉장히 다소곳하게 자세를 바꿔 앉았다. 마치 바위에 올라와 있는 인어를 보는 듯했다. 

쿵! 

인어가 된 여량천이 기백있게 머리를 박았다. 

"살려주십시오! 제가 인사불성으로 취했었나 봅니다! 그건 제가 아니었습니다." 

술을 좀 처먹긴 했지만, 여량천의 기도는 일개 양아치와 비슷했던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아마도 그간 어디서 찌꺼기급이나 최하급의 에센스라도 구해 먹은 모양. 

삼호문의 중역인 일대제자이니, 등평위가 투자를 해주었나보지. 

"그래. 앞으로도 잘해야지 량천아." 

"지, 지금 나가서 바로 수련 시작하겠습니다." 

"아니다. 오늘은 괜찮다. 그래도 약속한 크레딧은 매번 따박따박 송금했다 들었으니. 나는 배은망덕한 놈들을 가장 싫어하는데, 그래도 얄팍한 의리는 있구나." 

"······아, 그렇습니까. 기본입니다. 하하." 

"하기야 너희 문주가 워낙에 분별있는 사내라 꾸준히 보낼 줄은 알았다. 밑엣 놈들이 돈 아깝다며 개지랄은 안 했을런지." 

"······." 

꼴꼴꼴- 

나는 나머지 위스키 한 병을 순식간에 비웠다. 

술이 잔뜩 들어가 취기가 오르니 행동거지가 조금 더 단순해질 수 있었다. 나는 당황한 채 돌처럼 굳어있는 여량천을 향해 말했다. 

"유천검법, 펼쳐봐라." 

"···예!" 

유천검법. 

과거 중원무림에서 익혀온 일류 검법으로, 과거 삼호문에 내려준 검법이다. 절정 경지 이상의 무인에게는 큰 감흥이 없는 검법일지 몰라도, 밑바닥에 깔린 무인들에겐 실로 과분한 무학. 

주향으로 가득찬 방 안에서. 

스아악! 

검극에 맺힌 서늘한 예기가 공간을 양단한다. 일류 경지를 대표하는 유형화된 기가 검을 따라 약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최소 5레벨급의 무인이라는 뜻. 

익히는 속도가 빠르고 효과적인 무학들을 한움큼 쥐어 던져주었으니 발전이 빠를 만도 했다. 

물론, 내 눈에는 차지 못하나··· 

그거야 쥐잡듯 잡아서 차차 고쳐놓으면 될 일. 

'짧은 시간, 이룬 성취는 괜찮군.' 

나는 초식을 펼치게 한 의미를 몰라 의아해하는 여량천놈에게 물었다. 

"그 검법은 익힐만 하더냐?" 

"예, 손에 척척 잡혀서 아주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심법이나 보법은 어떠냐." 

"그것 역시도 대단히 좋습니다. 있으나 마나했던 단전도 확실히 금세 채워져서 묵직해졌고, 굳어있던 몸과 정신이 새로 트이는 기분입니다······만, 왜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과연, 무공을 접한 경험이 없는 이들도 익힐 수 있겠더냐." 

"······죄송하지만,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쯧. 삼호문주 어디있냐? 안내해라." 

나는 곧장 기루에서 나와 등평위를 찾아갔다. 

삼호문의 본문 장원은 최근에 다시 지었는지 꽤 고급지며 위엄이 넘쳤다. 

여량천을 따라 곧장 본문 안으로 들어가니. 

"문주님, 접니다!" 

"그 돈은 죽어도 보내야 한다고 말했잖냐!" 

"······그, 그게 아니라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지금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다니까 왜 자꾸—" 

등평위는 그의 말대로 꽤 바빠 보였다. 

여기저기 파묻힌 서류들과 더러운 테이블, 엎질러진 커피. 

쿵! 

하지만 그는 애초부터 처세와 눈치가 대단한 사내라, 내가 여량천을 따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무언가를 느끼고는 입을 딱 닫았다. 

이윽고, 등평위는 다짜고짜 대가리를 땅에 박으며 절을 올렸다. 

"······돌아오셨는지요." 

"그래.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었냐." 

"대협이 떠나신 뒤로 꾸준히 정진해 작은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한 보씩 정진해 깨달아 갈수록 더 대단한 무공이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무공을 익히던 놈들이라 그런가 성취가 빠르구나." 

"다들 재능은 일천합니다. 전부 내려주신 무학의 수준이 뛰어난 덕이 아닐까 합니다." 

삼호문주 등평위는 제 능력을 살려 정크타운을 꽤 효율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느껴지는 기도로 보아 성취도 거의 절정에 가까울 것이다. 

발두르에서도 최악이라고 일컫는 서쪽 변방의 정크타운에서 저 정도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면 딱히 반기를 들 세력도 없겠지. 

"일단 밖으로 나가서 천천히 걷는 게 어떻겠습니다. 집무실이 조금 더럽습니다." 

"지금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전혀 아닙니다. 대협께서 오셨는데 바쁜 게 대수겠습니까." 

"그러자 그럼." 

나는 등평위를 따라 삼호문 바깥으로 나왔다. 

등평위는 정크타운을 산책하듯 걸으며, 그간 삼호문이 집어삼켰거나 도맡아 운영하는 곳들을 돌아다니며 내게 소개했다. 

이제는 정크타운 전체가 삼호문의 손아귀에 있었다. 

나는 동양식 기루와 온갖 주점, 클럽, 골패 노름판, 비무 도박장등을 거닐며 하나씩 구경했다. 

술기운을 일부러 날리지 않아 적당히 비틀대는 발걸음이었다. 

그러자, 성큼성큼 앞서가며 정크타운을 뱅뱅 돌던 등평위가 조심스레 물었다. 

"대협, 혹시 따로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요?" 

"왜. 내가 저것들을 다 빼앗아 갈까 불안하냐." 

"그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신지. 삼호문이 이루어 낸 게 아닙니다. 또한 절정의 벽에 가까이 와있어도, 대협의 무위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어 놀라울 뿐입니다. 대체······." 

"문파에 특별한 일은 없고?" 

"아, 그것이······." 

등평위는 잠시 고심하나 싶더니 금세 답했다. 

"문파가 점점 커지면서 의도치 않은 분쟁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 상대가 벽제방이라고, 발두르의 무림계 중견기업입니다. 정크타운은 뭐 잡아먹을 것도 없는 쓰레기동네라 지금까지 크게 신경을 기울이지는 않았을 것인데, 어떤 연유로 마음을 고쳐먹은 듯합니다. 계속 자신들의 밑으로 들어올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등평위의 말을 듣자하니, 이유가 있는 듯했다. 

이전에는 집단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더러운 진흙탕을 뒹굴어야 했으나, 현재는 정크타운의 유일한 세력인 삼호문만 자기 휘하에 두면 고혈을 효과적으로 빨아먹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정크타운 거너하우스 총포상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상선' 소속의 친씨아도 죽었겠다, 삼호문을 제외하면 신경쓸 것이 없겠지. 

그리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비무 도박장. 

"그런데 등평위야." 

"예." 

"놈들이 원하는 게 정말 크레딧 같으냐?" 

나는 정크타운치고는 나쁘지 않은 비무를 구경하며 물었다. 처세로는 어디가서 빠지지 않을 위인인 등평위가 아무렇게나 싸움을 걸어댔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여. 

곧이어 등평위가 쩔쩔대는 기색으로 답했다. 

"그것이······제가 생각하기에는 대협께서 내려주신 무공인 듯합니다. 요즘 정크타운이 먹고살만해졌다 해도, 여기서 얻어갈 크레딧이라고 해봐야 그들이 가진 금력에 비견이 되겠습니까. 푼돈을 만지려고 흙탕물에 손을 뻗지는 않을 겁니다." 

"맞다. 무언가를 봤으니 이딴 동네에도 기웃거리겠지." 

"······삼호문의 행사가 신중하지 못했나 봅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협." 

"됐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라그나로크 시티에 기업을 하나 세우려 한다." 

"예, 대협께서 원한다면 당연히 세우셔야지요. 혹여 잡일을 할 수족이 부족하지는 않으십니까." 

등평위는 그런 내 의도를 단번에 파악했다. 입 안의 혀처럼 구는데 도가 튼 놈이다. 쓸데없이 대가리만 굵어져서 술이나 퍼먹고 있는 여량천 놈보다 월등히 낫지 않은가. 

"그래, 하인으로 부릴 놈들이 필요하다. 입 무거운 놈이면 좋고. 너희 삼호문의 이름과 세력은 유지하되 내 산하의 무력조직인 걸로 하자." 

"어찌 부족한 저희를 이리 거둬주시는지 모를 일입니다. 제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등평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것으로 삼호문의 포섭을 끝냈다. 

그리고는 비무 도박장을 나서며 마지막 선수로 나온, 박치기공룡을 보았다. 

과거 까불다가 몇 대 두들겨 맞고 조용해졌던 은소라는 녀석이다. 저번보다 나이를 먹어 그런지 이제는 제법 여인의 태가 났다. 

"큭큭." 

"?" 

헌데 정말 박치기로 싸우기라도 하는 건지, 이마빡이 사과처럼 벌건 게 자동으로 실소가 흘러나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내가 등평위에게 물었다. 

"등평위, 그 벽제방인가 하는 곳이 어디 있다고?" 

나는 직전에 쇠뿔도 단김에 뽑기로 다짐했다. 

헌데 심지어, 지금은 위스키에 잔뜩 취한 상태. 

그러니, 독한 술에 불콰하게 취한 사내는 쇠뿔 말고 코끼리 상아라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 * * 

나는 술을 마신김에 발두르의 업무지구까지 내달렸다. 

기감을 빌딩 사이로 넓게 펼쳐내자, 이전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피부로 와닿았다. 

드높고 화려하게 솟은 마천루 빌딩 숲 사이로,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강력한 기세들이 군데군데 숨어있었다. 면적이 가장 작은 도시지만 속알맹이는 꽤 알차다. 

발두르 시티 중심업무지구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자 기세가 흉흉한 곳은, 무당 코퍼레이션의 초고층 전각이었다. 짙은 형광 빛깔을 사방으로 뿜어내는 초고층 전각의 장엄한 풍경. 창을 하나 두고 풀풀 풍겨오는 기세들이 하나같이 날카롭고 강맹했다. 

"음." 

흥을 조금 냈다만 도시 위에 군림하는 그들의 체면을 조금은 세워주어야 하므로, 입맛을 다시던 나는 취기와 함께 풀풀 내뿜던 기세를 적당히 조절했다. 

그때, 저들도 내 체면을 조금이나마 생각해주기로 했는지 전각의 창 바깥으로 몇 개의 신형이 뛰어올랐다. 

탓. 

수백 미터 높이의 고층전각에서 뛰어내려 사뿐히 내려선 세 명의 고수들. 그들의 도복이 잔바람에 부드럽게 펄럭였다. 

가장 나이가 지긋한 노고수가 말문을 열었다. 

— 무슨 까닭으로 기세를 흘렸는지 알고 싶네. 

그 물음은 정중했다. 

나도 정중히 대답했다. 

"술에 취해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모양입니다." 

— 옆에 있는 괴이도 자네의 동행이 맞는가? 

"예." 

— 허면 자네의 뒤를 밟는 저자는 무엇이지? 

나는 무당 노고수의 말에 뒤를 돌아봤다. 

밝게 빛나는 건물 조명 아래, 기이한 사내가 오도카니 이쪽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카스트라 뷔에탕, 그 스토커가 붙여놓은 인형이다. 

그렇기에 나는 적당히 헛기침을 하며 모르는 척 답했다. 

"저를 남몰래 흠모하는 여인이 있나 봅니다. 내버려 두십시오." 

— 혹여 검을 뽑아도, 크게 말썽을 피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야. 

"그리하지요." 

내가 순순히 수긍하자, 일이 커지지는 않았다. 

뒤이어 무당의 고수들은 쑥덕대며 저들끼리 전음을 나누나 싶더니, 드높은 전각으로 솟구쳐 사라졌다. 

이윽고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등평위가 말했던 기업의 본사를 찾았다. 

벽제방이라는 이름의, 중심업무지구 외곽 쪽에 위치한 무림계 중견기업. 대충 루돌프를 시켜 찾아보니 과거 반 바이오 컴퍼니보다도 기업 순위에서 한참 뒤쳐져있는 기업이었다.

본사는 30층이 약간 넘는 건물이었는데, 나는 건물벽에 기댄 채 기감을 펼쳐 가장 강맹한 기운을 풍기는 놈을 찾아 올라갔다. 

마침 열린 창문 안으로 담뱃불을 붙이고 있던 양복차림의 사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스릉— 

검을 어깨 뒤로 길게 늘어뜨린 내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 ······. 

양복차림 사내의 움직임이 쥐죽은듯 멈추었다. 

나는 열린 창틀 위에 대수롭잖게 걸터앉았다. 

"다름이 아니고, 저 삼호문 태상문주입니다." 

— ······삼호문? 

마른 붓처럼 빳빳하게 굳은 사내가 흠칫하더니, 이내 퍼래진 낯짝으로 담뱃불을 비벼 껐다. 

치이익···. 

행색으로 보나 기세로 보나 벽제방의 회장으로 보이는 그 사내는, 7레벨 끝자락쯤의 경지를 지닌 무인이었다. 

발두르 시티 중견 기업의 회장, 벽제방주. 

몇 년 전이라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곧, 그의 관자놀이에서 더운 땀이 흘러내렸다. 

— ······무슨, 쓰레기나 퍼먹고 사는 삼호문 따위에 당신같은 태상문주가 어디에 있었단 말이오. 

나는 식은땀을 흘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광선의 곧은 검신이 건물 외벽 조명을 받아 환하게 번뜩였다. 

"삼호문에 관심이 많다 전해 들었습니다." 

— 이제부터는 아니오. 즉시 손을 떼겠소. 

"그래요? 하면 이유가 뭐였습니까?" 

— ······그들을 해하려던 건 아니었소. 어쩌다 접한 그들의 독문무공에 약간의 관심이 생겼을 뿐이오. 그런 슬럼가의 잡배들이 어디서 그런 무공을 배워익혔나 해서······. 

"무공만 궁금하고, 해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 ······그것이. 

"재수가 참 없지? 원래 사는 게 그래." 

— ······. 

벽제방주가 뻘뻘대며 고개를 푹 숙였다. 멀끔한 양복단 위로 땀이 솟아나고, 적당히 꽂아둔 금색의 행커치프가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그는 죄인처럼 고개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 

— 별 것 아닌 일로 고인(高人)께서 어렵게 걸음하시게 했으니, 이 후배가 어찌해야 조금이나마 화가 풀리시겠습니까? 일을 맡은 한 두 놈을 죽여서 바깥에 걸어놓는다면 노여움을 푸시겠습니까? 

벽제방주의 흥건한 뒤통수를 보며, 내가 답했다. 

"사람을 찾는다. 내일까지 찾아와." 

* * * 

다음날. 

발두르 시티에서 하루쯤 머무르자 벽제방에서 보낸 전령이 다급히 찾아왔다. 정중히 건넨 내용을 보니, 클로에를 찾았다는 얘기였다. 

나는 어제의 취기를 말끔히 날려버리고 아이처럼 낙천적인 얼굴을 했다. 돈 많은 과부가 나의 사내다운 모습에 반하기라도 하면 참으로 곤란한 일 아니겠는가. 

그렇게. 

발두르 중심 구역과 외곽 사이. 

평범한 서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소도시의 한 편의점. 

익숙한 얼굴이 유리창 안쪽으로 보였다. 

편의점 카운터에서 일을 보고 있는 클로에였다. 

허나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클로에의 쓴 표정은, 마지막에 보았던 그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상처에는 시간이 약이라던데, 아닐 때도 있는 듯하다. 

클로에는 분명, 발두르 고급 주거지역의 아파트를 살 수도 있는 돈을 가지고 떠났는데. 

떠날 적에는 억지로라도 활짝 웃으며 떠나더니. 

[ 사냥꾼으로 살다 사냥꾼으로 죽었으니 명복을 빌어야겠습니다. ] 

[ 명복은 무슨, 크레딧만 잔뜩 남겨두고선 자기 여자를 팽개치고 가버린 사람인걸요? ] 

[ 세상은 돈이 전부입니다. 한밑천 단단히 잡았으니 그 돈으로 잘먹고 잘살면 되겠군요. 돈 없는 과부보다 돈이라도 많은 과부가 처량함이 덜할테지요. ] 

[ 그럼 레반씨도 과부 만들지 않게 조심하셔야겠어요. 혹시 PTSD나 정신병 같은건 없죠? ] 

[ 누가 과부가 됩니까? ] 

[ 레나요. 사무소에서 같이 지내는 동안 정이 꽤 들었었거든요. 청소도 매일 도와줬는데···. ] 

그때의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뭐, 언제나 긍정적인 재회만을 바랄 수는 없는 법. 

나는 클로에의 앞까지 조용히 다가가 섰다. 

"가져간 거금이 탐나서 이제야 찾아왔습니다." 

"······?" 

클로에가 고개를 올려다보자,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한밑천 단단히 잡아놓고서 멀리 간다는 게, 고작해야 이곳입니까. 어디로 가는지도 알려주지 않고 언젠가 만나자고 시원하게 떠나더니." 

"······설마, 레반?" 

"돈 많은 과부도 처량하긴 매한가지인가?" 

툭. 

나는 카운터에, 챙겨온 륭의 적색 검집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과거 클로에가 찾아온 륭의 검집으로 끝에 군번줄처럼 매달려 달랑거리던 인격 메모리칩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 

클로에의 시선이 물끄러미 그 검집 끝으로 향했고. 

나는 클로에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날처럼, 낙천적으로 웃었다. 

"이제 그만 처량하게 굴고, 같이 갑시다."

#149화. 화를 자초했다

#149화. 

기이잉······. 

작은 환풍기가 덜컹대며 돌아가는 소음. 

음료 진열대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냉기. 

신상품 마약 광고판에서 일어난 불빛이, 적막이 내려앉은 편의점 내부를 비추었다. 

나는 낙천적인 얼굴로 클로에의 대답을 기다렸다. 

"······." 

클로에는 륭의 칩이 걸려있던 부분을 응시했다. 

그녀는 사라진 인격 메모리칩의 행방을 묻지는 않았다. 그러다 손을 쭉 뻗더니, 륭의 검집을 만지작 거렸다. 

클로에의 입은 오래 걸리지 않아 열렸다. 

"레반, 괜찮다면 나한테 며칠만 줄래요?" 

"크게 고민할 거리가 있나봅니다." 

그러자 클로에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아뇨?" 

동료들을 잊지 못해 떠나버린 못난 사내 륭. 그를 눈 앞에서 잃고, 나와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그날처럼. 

다음 순간, 클로에는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돈 많은 과부라도, 주변을 정리할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어요?" 

이제 클로에는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고민이 아니라, 떠나기 전 주변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기에 그리 하라했다. 고작 며칠 정도야 넉넉히 기다릴 수 있었다. 

"잘 생각 했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애초에 나는 대답을 밤새 기다려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왔다. 그렇기에 클로에의 이른 대답이 더욱 반가웠다. 

안 그래도 이곳 발두르에서 반드시 해야할 일이 남아 있었는데, 클로에의 대답을 서둘러 받아냈으니 약간의 여유가 있을 듯하군. 

클로에는 과거 레나와도 결이 척척 맞던 여인이라 곁에 두어도 좋고, 괴상한 공법을 대성한 탓에 가끔씩 마기가 몰아치는 언평 선생의 정신머리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잘 안 되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그래주길 바랄뿐. 

클로에가 말했다.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나는······정말 생각도 못하고 있었네요. 그런데 나를 어떻게 찾았어요?" 

"솜씨 좋은 해결사를 풀었습니다." 

"으으, 우리 해결사 얘기는 하지말죠." 

클로에는 해결사라는 단어가 나오자 쓴웃음을 짓고는, 까치발을 들어 카운터의 선반을 열었다. 선반 안에서는 산뜻한 차 향기가 풍겨왔다. 

"따뜻한 차 한잔 하고 갈래요?" 

"그럽시다." 

곧. 

나는 차를 한 잔 얻어 마시고는, 클로에가 있던 편의점에서 빠져나와 발이 닿는 대로 향했다. 그녀가 괜찮은 차를 대접해주어 입안에 산뜻한 차 향이 감돌았다. 

발두르 중심업무지구나 슬럼가가 아닌, 평범한 계층이 살아가는 소도시의 퍽퍽한 정경을, 또 바쁘게 움직이는 주민들을, 사고가 나서 거꾸로 전복되어 있는 차량을 눈에 담았다. 

발두르 시티에 도착한 지 이제 이틀인가. 

십여 일 뒤에 딜런과 다시 회동을 가지기로 약속을 해두었으니, 그 전까지 모두 해결하고 돌아가면 되겠군. 

하여튼 나는 발두르 시티에 처음 온 외지인마냥, 여기저기를 정처없이 걸어다녔다. 나는 말보다도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사내지만 가끔 천천히 걷는 것도 좋았다. 무작정 걷다보면 복잡했던 생각들도 정리되기 마련이니. 

그렇게 한 시간쯤을 걸었을까. 

"저, 형님." 

"왜." 

묵묵히 따라오던 루돌프놈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방금 갑자기 생각난 건데, 저희 발두르 시티에서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되는 겁니까?" 

"상관없다. 마스크 썼잖아." 

"······." 

나는 요새 또 영웅 취급을 받아 재차 주가를 올리고 있다보니, 누군가 알아볼까 싶어 클로에의 편의점에서 적당한 마스크 하나를 들고 나왔다. 

원래 이 세상의 공기질이 탁하고 좋지 못한 탓에, 기관지가 예민한 주민들은 마스크를 달고 살았다. 

그러니 주변과의 위화감은 딱히 없을 것인데. 

하지만, 루돌프놈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그걸 말하는게 아니잖습니까. 모르시겠어요?" 

"돌프야, 너는 뭐가 그리도 매일 불안하냐." 

"그 새끼들 기억 안나십니까. 생선." 

"생선이 아니라 상선." 

"예!" 

상선. 

돌프놈의 주둥이에서 상선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산뜻하게 입 안을 감돌던 클로에의 차 향이 씻은듯 사라졌다. 그러니 이제 슬슬 그만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형님, 하여간 알고 있으시면서 왜 신경을 안 쓰세요. 저번에 집행관 덕에 살아 나와서 그렇지, 걔들이랑 감정 안 좋잖아요." 

그간 발두르 시티에 오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다. 

일단 첫 번째는, 루베르겐 집행관을 따라 마탑이 있는 발할라로 떠난 후부터 많은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굉장히 바쁘게 움직여야 했고, 시간은 유수처럼 흘렀다. 

중간에 따로 시간을 낼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다음은, 친씨아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화물 운송조합 '상선' 과 엮여있는 악연이다. 

상선. 

발두르 시티에서 가장 오래된 협동조합. 

메가콥과는 비교할 수 없겠으나, 그래도 발두르 한정으로는 대기업과 비견되거나 혹은 그 이상이다. 

시티 화물의 무려 30% 가량을 책임지는 곳이자, 발두르의 정치 권력자들과 결탁해 일감을 몰아받는 놈들. 어떤 방식으로든 시티 전반에 영향력을 끼치는 대형 집단. 

자금력도 대단해서 독자적인 무력집단도 보유하고 있다. 친씨아같은 직원들을 발두르 이곳저곳에 널리 퍼뜨려놓고 뒷구멍으로 해먹는 짓들도 서슴없이 한다. 

상선과 결탁한 정치권의 묵인아래, 연방군의 무기를 암시장으로 빼돌리던 그들의 행각이 상대쪽 정치권의 귀에 들어가게 되자, 죽어도 되는 히트맨들을 대거 구인했었다. 

당가로부터 한창 쫓기던 중인 2년 전의 내가 강제로 발탁당한 히트맨 중 하나였고······ 

그때의 나는 잘 쳐줘야 6레벨 수준. 

떠올리기로 절정 경지도 못 되었다. 놈들 덕분에 얼얼하게 뒤통수도 맞아보고, 몇 번이나 죽을 뻔 했었지. 

"돌프야." 

"예." 

"마침 나도 그놈들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요? 안전 불감증은 아니었네요." 

"상선도 나를 잘 아는 놈들 아니냐. 당가에게 쫓기고 있는 사실도 그놈들이 가장 먼저 눈치 챘었지. 아주 약삭빠른 녀석들이야." 

"그거야 그렇죠. 발두르에서 먹어주잖아요. 제가 발두르 토박이 출신이라 잘 압니다." 

"좋다. 그 칼스라는 놈, 오랜만에 보러 가자." 

"?" 

우뚝! 

루돌프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말을 더듬었다. 

"······왜죠. 굳이 왜요?" 

"원래부터 갈 생각이었다. 말 나온 김에 가서 차라도 같이 한 잔 하고오자." 

"형님, 그 새끼들이 삼호문처럼 허접한 놈들인 줄 아십니까. 어제 찾아간 벽제방보다 배는 더 빡센 새끼들입니다. 그냥 옛날 일은 추억으로 묻어두고 조용히—" 

"나 입 아프다." 

"···가시죠." 

내가 검집에 손을 올리자 루돌프놈은 곧장 설득을 포기해버리더니, 자포자기한 얼굴로 실실 웃으며 앞장섰다. 

그러던 루돌프놈이 고개만 슬쩍 돌려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갑니까?" 

"음." 

나는 잠시, 그때의 추억에 잠겨들었다. 

상선의 칼스. 거너 하우스 친씨아의 상관. 

발두르 스테이션 근처의 대형 빌딩에서, 칼스 그자가 나를 사천당가에 밀고하겠다며 협박하던 때의 대화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 공 이사님. 저 칼스입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 ] 

[ 아닙니다. 대 사천당가를 저같은 놈이 걱정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반 바이오의 일로 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그저 일의 진척이 궁금해 큰 결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 

[ 아, 여즉 도망치고 있답니까? 관련해 듣기로는 장부를 조작해서 억 단위 크레딧을 빼돌렸다는 얘기까지 돌던데······화를 자초하는군요. 나중에 어찌 감당을 하려고. ] 

[ 예, 아무튼 조만간 모임에서 뵙겠습니다. ] 

눈 앞에는···몰래 고독 유충을 넣어둔 영약이 있었던가? 

화를 자초한 것이 누구인가. 나중에 어찌 감당하려고. 

그 대목을 되새긴 나는 금세 발걸음을 돌렸다. 

"사천당가, 발두르 시티 지부로 가자." 

"예." 

발두르 시티에서의 마지막 할 일을 마치러. 

* * * 

사천당가 코퍼레이션 발두르 지부. 

"크흠." 

이사, 공천립이 긴장한 얼굴로 호흡을 가라앉혔다. 

공천립은 당씨 성이 아니니만큼, 당가의 직계가 아니다. 

그는 지금껏 수완을 인정받아 지부 임원의 자리를 꿰차고 있으나, 결국은 당씨들의 눈에 들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중년을 지나 장년을 향해 가는 연배. 앞으로 특별한 성과가 없다면 막강한 권세를 누려보지 못하고, 그저 평범한 임원에서 오랜 경력을 마무리해야할 처지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발두르라는 변방 도시로 밀려난 판에, 이곳에서마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한 채 경력을 마무리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 

공천립에게 다시는 없을 기회가 주어졌다. 

'······연방의 영웅이라.' 

발두르 지부에 대단한 귀인이 나타난 것이다.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이 끝난 뒤, 소가주의 보은패를 받아간 사내. 그를 모르는 이는 당가 내에 없을 정도다. 

레반. 

실로 흔해빠진 이름이었으나, 최근 가장 연방에서 화제가 되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레반이 발두르 지부를 찾아와, 당가의 발두르 시티 지부장. 그러니까 무려 당문의 직계를 물려버리고 공천립을 택해 담화를 나누고 싶다며 요청을 해왔다. 

아무래도 그는 나이가 젊으니, 나이 많고 무림의 대선배가 되는 당가의 직계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으리라. 

"흠." 

품속에서 고급진 명함을 꺼내려던 공천립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그것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자는 이미 당문의 직계와 연이 있을 것인데, 실수할 뻔했군." 

그러던 때. 

바깥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그의 귀로 들렸다. 

당가 발두르 지부에서 귀인들만이 쓸 수 있다는 호화 접객실. 공천립은 칼칼한 목을 가다듬고 귀인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덜컥. 

"먼저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반갑습니다." 

문이 열리자 한 젊은 사내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이자가 레반이군.' 

행동거지가 거침없는 것이, 듣던대로 의기가 대단하고 인물이 훤한 사내였다. 바깥으로 내비치는 기세 또한 지극히 강대하여 공천립의 고개가 자동으로 숙여졌다. 

공천립은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사천당가의 공천립이라고 합니—" 

"여기서도 고독(蠱毒), 구할 수 있죠?" 

"······?" 

갑작스러웠다. 

그것은 수십 년간 당가 밑에서 일한 공천립으로서도 실로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시작부터 쉽사리 키울 수도 없고 취급도 힘든 고독을 구할 수 있냐니. 

본래대로라면 단호하게 거절을 해야했다. 

허나, 공천립은 이 기회를 놓칠 마음이 없었다. 

진작에 당가의 보은패까지 받아갔던 인간이다. 보은패마저 내주었을진대, 무엇을 더 내준다 해도 문제가 되겠는가? 

게다가······. 

"예, 고독(蠱毒) 유충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씨익- 

고개를 숙인 공천립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발두르 지부에서 고독 유충을 담당하는 인물이 바로 공천립 본인이었기에. 

'다시 없을 천운이구나.' 

공천립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들어갔다. 

"만약 귀인께서 원하신다면—" 

"공 이사님, 칼스라고 알고 계십니까?" 

"?" 

점점 대화를 나눌수록 공기의 흐름이 이상해졌다. 

무언가 당가 지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든가, 아니면 특별히 알아볼 것이 있다든가. 뭐 그런 것이 정상 아닌가. 

고독이 있냐 묻더니, 칼스를 왜 찾는 것이지? 

하지만 공천립은 잡념을 지우곤 공손히 대답했다. 

"혹, 운송조합 상선의 전무인 칼스를 말씀하시는지요?" 

"예." 

다행히도 칼스는, 그가 충분히 잘 알고있는 자였다. 

발두르 시티 내에서 돌아가는 여러 개의 상류층 모임이 있는데, 공천립이 소속되어 있는 모임의 주최자가 바로 그 칼스였으니. 

발두르 시티에 뿌리내린 거대 운송집단. 상선의 일을 도맡아 하는 상계의 거물. 

공천립은 그와 인연이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기며 은근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이 공가는, 공교롭게도 그 칼스 전무와 오랜세월 연을 이어오고 있습······" 

"그분, 이리로 좀 불러볼 수 있겠어요?" 

"가능할 것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내가 부른다는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흠, 그렇다면 쉽지 않겠으나 제가 힘을 써서 한 번 기별을 넣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공 이사님."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키우는 고독 중에 가장 독한 놈으로 여덟 마리, 그리고 영약 단환 여덟 알 준비해달라고 일러줘요." 

"······?" 

그 말까지 마친 젊은 사내. 

레반은, 탁자 위에 기다란 검집을 끌러놓았다. 

쿵··· 

무거운 검집이 탁자 위에 둔탁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상황이 이쯤 되니, 저자세로 일관하던 공천립도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확실히 눈치챘다. 

'왜지? 분위기가 심상찮다.' 

분명······당가의 은인이자 연방의 영웅이라 하지 않았나? 

당가의 직계인 지부장은 굉장히 철저한 인간이다. 

먼저 지부장을 보고 내려왔을 터이니, 신원은 확실할 것인데. 

그러니 신원은 확실하다.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공천립의 예민한 오감은 격렬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허면, 준비해오겠습니다." 

어딘가 수상한 기색을 느낀 그는 천천히 엉덩이를 일으켜 세웠다. 

'지부장께 아뢰러 가야겠군.' 

일단 준비해 오겠다는 핑계를 대었으니, 나가서 조금 더 알아볼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그러나. 

멈칫— 

"!?" 

엉덩이를 떼려던 공천립이 돌처럼 굳었다. 

그의 사지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힘이 들어가질 않는 상태였다. 귀빈의 접객실이라는 공간 안에, 서늘한 칼날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듯했다. 

이윽고, 공천립이 벌벌 떨며 억지로 고개를 들자. 

"······." 

"바쁘세요?" 

눈 앞까지 다가와 얼굴을 들이미는 레반이 보였다. 곧이어 레반은 공천립이 허리춤과 품 속에 넣어두었던 암기와 극독들을 탁자에 주르륵 꺼내 놓았다. 

부욱—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공천립의 옷가지를 부욱 찢더니, 그 옷가지에 꺼낸 극독을 덕지덕지 발라 광선의 날에 도포하기 시작했다. 

공천립은 기이한 분위기와 기세에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그렇게 벙어리가 된 공천립 앞에 앉아, 광선의 곧은 검날에 극독을 묻혀 쓸어내던 레반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불러요. 어서."

#150화. 칼스

#150화. 

레반이 벽제방을 찾아가기 전, 마주친 무당의 노고수가 말했다. 

무슨 까닭으로 기세를 피워 올리는 것이냐······고. 

사실, 중견기업인 벽제방이 약해빠진 삼호문의 무공을 탐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강자가 약자를 탐하는 것은 세상의 섭리나 다름없으니. 

레반이 시종으로 있던 반 바이오 컴퍼니도, 사천당가 코퍼레이션보다 약하기 때문에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폭삭 무너졌다. 

그때 나서서 화내주는 놈이 몇이나 있었는가? 

벽제방에다 대고 화낼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레반은 벽제방주를 베지 않았다. 

하지만, 무당의 노고수가 느낀 레반의 기세는 애초에 벽제방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레반은 삼호문의 무공을 탐낸 벽제방 따위가 아니라, 상선의 칼스를 어찌해야 할 지 내내 고심하던 중이었으니. 

다만, 여량천의 위스키를 빼앗아 마셔 얼큰한 취기가 돌고 있었던 탓에 잠시 명경지수를 유지하지 못했다. 이어진 고심으로 레반이라는 호수에 파문이 일어났다. 

하필 그 시점에 넓게 기감을 펼치다 그만 정제하지 못한 살기가 섞여들었고, 술김에 자신도 모르게 천지사방으로 뻗어버린 기세가 발두르 중심업무지구의 강자들을 찔러 자극한 것이다. 

헌데 그 살기어린 기세를 받았음에도 레반의 앞에 내려선 무당의 고수들은, 칼을 뽑더라도 큰 말썽은 벌이지 말라는 말만 전하고는 돌아갔다. 

그들은 크게 다그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레반의 위치가 이전과 같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레반은 그 노고수의 조언이 굉장히 기꺼웠다. 

칼은 뽑되, 일을 '크게' 벌이지만 않으면 되겠구나. 

스윽—스윽— 

레반은 독 묻힌 옷가지를 숫돌삼아 검신을 쓸고 다듬었다. 

역시나 다르간트의 역작인 광선은 그 만듦새가 대단해서, 당가의 극독을 덕지덕지 처발라도 부식되기는커녕 여전히 형형한 예기를 뽐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레반이 내려앉은 적막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전신이 딱딱하게 굳은 채 마주앉은 공천립을 향해. 

"공천립 이사님." 

"예." 

"방이 더우세요?" 

"······." 

뚝··· 

공천립의 몸을 적신 식은땀이, 그의 깨끗한 비단 의복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독 방수처리가 잘 되어있는 재질이라 정도가 더욱 심했다. 

뚝. 뚝. 땀 떨어지는 소리가 공천립의 귓전을 울린다. 

공천립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반은 계속 검신을 쓸어내며 물었다. 

"의복 소맷단이 유독 번들대는 걸 보아, 아무래도 공들여 다림질해 걸친 옷인 듯 한데. 이거 저 때문에 상황이 이리되어 어쩝니까." 

"정말 괜찮습니다. 한낱 의복이야 많이 있습니다." 

"제가 무림계 선배를 앞에 두고, 너무 격의 없고 버릇없이 군 것은 아닌가. 갑자기 후회가 밀려옵니다." 

"무슨 말씀을, 어디 무림에 선후배가 따로 있겠습니까." 

"공 이사님께서 그리 말해주시니 다행입니다. 사실 선후배가 무엇이 중요하겠어요. 오래 살고 길게 사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요······." 

말끝을 흐린 공천립의 눈빛이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공천립은 레반의 살벌한 기세를 버텨내지 못했고, 결국 뭐에 홀린듯이 칼스를 이곳으로 호출했다. 

그리고 그게 1시간 전의 일이었다. 

솔직한 말로, 절친한 죽마고우도 아니고 모임의 일원을 위해 제 목을 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아무튼 공천립은 그 뒤로도 꼼짝없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스윽— 

장장 1시간 동안 쉬지 않고 칼을 갈고닦던 레반이 불현듯 물었다. 

"헌데 공 이사님은, 혹시 날 기억하십니까?" 

"······." 

공천립은 무던히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해내려했다. 

'···누구지?' 

수십 년간 칼날 위 같은 당가에서 근무하며 쌓아온 경험은, 이것만큼은 반드시 기억해내야 한다며 공천립의 심신을 몰아세웠기에. 

공천립은 최근의 소요들을 더듬어가며 헤집었다. 

내가 언제, 무언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었나? 

스윽—스윽— 

그러나 눈앞에서 독을 발라가며 검신을 다듬고 있으니, 신경이 쓰여 도무지 떠오를 리가 없었다. 

공천립은 안면에 흥건한 땀을 훔치며 답했다. 

"······깊이 생각을 해 보았으나, 확실히 오늘 처음 뵈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확실한 겁니까?" 

갑자기 레반이 검을 확 잡아들자, 공천립은 크게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이전에 저희가 마주친 적이 있었는지요? 가르쳐주시면 새기겠습니다." 

"글쎄요. 살면서 한 번은 보지 않았겠어요." 

"······." 

공천립과 레반은 잠깐, 마주한 적이 있었다. 

레반은 과거 정크타운에서 모래폭풍을 타고 날아온 시체를 때려잡은 뒤, 연방군에 붙잡혀 격리구역으로 호송되었다. 

그리고 그 격리구역에서 스쳐지나갔던 사천당가 소속의 중년인이, 바로 지금 눈 앞에 있는 공천립. 

우습게도, 레반만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레반은 긴장한 얼굴로 굳어있는 공천립을 바라봤다. 분명 고급진 차를 타고 왔던 그 중년인이 맞았다. 

'하기야, 그 시절의 나는 신경쓸 가치가 없는 사내였지.' 

그때, 뷔에탕의 저주를 억지로 증폭시키지 않았다면 시체로 변절한 마법사의 손에 이미 병신이 됐던가 진즉 죽었을 터. 

그만큼 약했다. 

심지어 자신의 '레반' 이라는 간단한 이름마저도 흔해 빠졌으니, 공천립이 레반을 기억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지도 몰랐다. 

곧, 레반의 안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모르시면 됐습니다." 

"······." 

"그나저나 칼스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쿵··· 

레반이 독으로 갈아낸 광선을 잠시 내려놓으며 공천립을 응시했다. 

공천립은 다급히 답했다. 

"이 공가가, 다시 기별을 넣어보겠습니다. 허나 칼스는 워낙 공사가 다망한 인사라 시간을 내지 못할 수도—" 

"괜찮습니다. 제가 이곳의 지부장인 당녹운 대인께 사흘간 이 접객실을 빌리겠다 하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공사다망해도 사흘 내로는 오겠죠." 

"······." 

"이제부터 공 이사님은 눈 좀 붙이고 계세요. 그리 뚫어져라 쳐다보시니까 내가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예." 

공천립은 별수 없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레반과 공천립의 대화도 거기서 멈추었다. 

스윽— 

그렇게 두 눈을 감은 공천립의 귓전으로는, 계속 옷가지로 검신을 슥슥 쓸어내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30분 정도가 지나자, 공천립 휘하의 직원이 고독 유충과 여덟 개의 목함을 가지고 들어왔다. 

"······?" 

안으로 들어온 직원은 왜인지 돌처럼 빳빳하게 굳어있는 공천립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으나, 공천립이 별 말이 없자 고독과 목함이 놓인 판을 두고 서둘러 사라졌다. 

꿈찔- 

쌀알보다도 작고, 불그스름한 애벌레들이 판 위에서 꿈틀꿈틀 움직인다. 숙주의 내장을 파먹어 천천히 말려 죽이는 당문의 독충. 고독. 

레반은 그쯤, 닦던 칼을 내려놓고 굳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확인했다. 

"꼬물대는 게 귀엽네. 하나, 둘. 셋······일곱. 여덟" 

"······." 

"여덟. 맞네요. 영약도 이만하면 좋습니다." 

2년 전, 칼스는 레반에게 주겠다던 8개의 영약에 모두 고독유충을 넣었다. 죽으라며 보낸 히트맨이 루막슨의 케아드로라는 정치인을 죽이고 돌아오자, 인재 욕심이 난 것이다.

그 고독이 들어있는 영약을 전부 받아먹었다면 내공은 크게 증진되었겠으나, 평생을 뷔에탕의 꼭두각시처럼 상선의 밑에서 부려먹혔을 터. 

"하하." 

레반은 그것들을 모두 기억하는 자신이 대견하다 생각하며, 아직도 눈을 감고있는 공천립에게 물었다. 

"고독의 해독약도 당가 지부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본문에 있고, 제가 취급할 수 없습니다." 

"고독을 키우는 건 아무나 하는데, 해독약은 취급하지 못한다? 당가도 참 악랄합니다. 누가 덥썩 받아먹어도 해독약을 구하지 못할 테니, 반드시 죽겠군요." 

"······." 

순식간에 '아무나' 가 된 공천립이었으나, 단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철저한 당녹운 지부장이 귀빈 접객실을 사흘간이나 흔쾌히 내주었다는데, 거기서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저자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나가 맞았다. 

"하면, 공 이사님이 드셔도 곧장 해독할 수 없겠네요." 

"······그렇지요. 저도 고독은 해독할 수 없습니다." 

레반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에이, 그래도 공 이사님쯤 되면 죽기 전에 해독약 정도야 구할 수 있겠죠? 언젠가 당가에서 더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실 테니까." 

"······." 

"제가 칼에 바른 독은 해독할 수 있습니까?" 

"예, 그것은 지금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후웅! 

그 말에, 레반이 광선을 쥐어 크게 휘둘렀다. 

창문 하나 없는 밀실 내부로 은은한 독기가 퍼져나갔다. 광선이 마치 극독을 들이쉬고 뱉으며 호흡이라도 하는 듯했다. 

레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쉬어요." 

그 후로,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한 시간. 

세 시간. 

다섯 시간. 

그리고 공천립과 레반이 대면한 지, 여섯 시간이 되었을 무렵. 

저벅. 저벅. 

바깥에서부터 느긋한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점점 이쪽과 가까워졌다. 당가 귀빈실에 마음대로 방문할 수 있는 인사는 발두르 시티에도 몇 없었다. 

'드디어 왔구나···!' 

기다리던 공천립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상선의 전무 자리를 꿰찬 괴물, 칼스가 드디어 도착했다. 

그는 대외적으로 7레벨이라 알려져 있으나, 공천립이 알기로 무려 8레벨 초입의 무위를 지니고 있는 대단한 실력자. 

전투로 인해 자그마한 소란이라도 일어난다면, 매사에 철저한 당녹운 지부장이 직접 내려와 볼 것이었다. 

— 모임 때도 아닌데, 갑자기 무슨 일로······. 

잠시 뒤, 귀빈실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칼스의 목소리. 그 피곤에 잔뜩 절은 음성과 함께 두꺼운 문이 열렸다. 

홱! 

공천립은 눈을 감고있어 세상이 어두웠으나,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살갗으로 불어왔다. 

이윽고. 

카가강! 

아주 잠깐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귀빈실의 두꺼운 문이 다시 천천히 닫혔다. 

귀빈실 내부는 다시 이전처럼 적막에 잠겼다. 

그런데······벌써 적막에 잠기면 안 되는데? 

공천립이 의아한 기색으로 감았던 눈을 슬쩍 뜨자. 

"?" 

가장 먼저 희미한 오색빛의 광채가 들어왔다. 

그리고 뒤이어, 레반의 해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공 이사님." 

"······?" 

"기별만 하라니까. 기대는 왜 하고 있어요." 

푸우욱! 

순간, 극독으로 벼려낸 레반의 검이 붙잡힌 칼스의 가슴팍을 쑤시고 들어가는 장면이 공천립의 뜨인 시야를 가득 메웠다. 

"······." 

공천립의 정신은 그 충격에서 쉬이 헤어나오질 못했다. 

쿨럭- 

가슴을 간단히 꿰뚫은 검극이 귀빈실의 벽에 틀어박히자, 칼스가 몸을 떨며 조용히 토혈했다. 

그의 깔끔한 와이셔츠는 찢어져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늘상 쓰고 다니는 얇은 안경테는 부러져 한쪽 귀에만 걸려있었다. 

공천립은 전의 상황을 채 보지도 못했다. 허나 시간상 한 합 이상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칼스의 가슴에는 이미 검이 깊숙이 박혀있다. 

말인즉, 8레벨의 칼스조차 일초지적이라는 뜻. 

'······저, 저 젊은 놈이, 그리도 강하단 말인가.' 

쿨럭- 

핏줄이 잔뜩선 채 파르르 떨리는 칼스의 목덜미. 

"······." 

"······." 

순간,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원망이 가득 담긴 칼스의 눈이 공천립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그의 두 팔은 힘없이 밑으로 늘어졌다. 공천립이 지닌 극독에는 강력한 마비독까지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8레벨급이니 전신으로 침범하는 독기를 어찌 틀어막고는 있겠으나, 빠르게 해독하지 못한다면 불행한 최후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공천립은 이 상황이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으나, 최대한 정신을 다잡고 말했다. 

"이제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 

"끄아악!" 

그순간, 칼스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검을 붙잡았다. 레반이 칼스를 꿰뚫은 검을 잡아 그대로 치켜들었기 때문이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칼스가 연신 비명을 질렀다. 검을 붙잡은 그의 손이 빠르게 거뭇해지며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공천립이 눈앞의 광경에 말도 꺼내지 못하는 사이, 레반이 한쪽으로 손을 뻗어 마력을 방사했다. 

우르르르— 

그러자 여덟 개의 목함과 고독 유충들이 딸려왔다. 

"······." 

공천립은 그저 경악하며 그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레반이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자 목함들이 딸깍 열리며, 청량한 향이 뿜어져 나오는 영약이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레반이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이자, 고독 유충들은 청량한 향을 뿜는 영약이 제 집이라는 듯 꾸물대며 기어들어 갔다. 

레반은 그렇게 만든 영약 하나를 집어 칼스의 굳게 닫힌 입에 갖다댔다. 레반은 여전히 희미하게 웃으면서도, 무심하게 말했다. 

"몸에 좋은 영약입니다. 이거 다 줄 테니, 먹고 일합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칼스는 짓씹듯 뇌까렸다. 

"······당신 대체 뭡니까. 내게 어떤 억하심정이 있기에 이러는 겁니까.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은데, 나는 상선의—" 

콰직! 

"꺼억······!" 

레반이 가슴팍을 꿰뚫은 검의 궤적을 돌렸다. 끔찍한 격통이 일어도 칼스는 이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그대로 심장이 도려질 것만 같았다. 

"내가 하라고 하면, 그냥 따르면 되는 거야." 

"!" 

레반의 그 말에, 칼스는 잠시 굳어있다가 크게 놀라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저 문장은 자신이 매일같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하라고 하면 따르라. 네게 선택권은 없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흩어진 정보들이 조합되어 갔다. 

"자, 잠싯···!" 

마비독이 점점 퍼져가니 혀가 꼬이고 눈 앞이 뿌옇게 흐릿해졌다. 

칼스는 그런 와중에도 다급히 입을 열어 말했다. 공천립을 원망하는 것은 저 뒤로 미뤄놓았다. 그는 성공한 기업가. 상황판단이 느리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여덟 개 목함에 영약, 그때 루베르겐 집행관을 따라갔던 녀석과 관련이 있으시겠군요. 거기서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우리 쪽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능력 있던 직원이 죽었단 말입니다." 

"그것 참, 한심해 보이는 궤변입니다." 

"······?" 

희미하게 웃던 레반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이내, 레반은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때는 궤변이라도 궤변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궤변으로 들려." 

[ 첫째, 발할라로 보내줄 것. 둘째 중급의 영약을 내어줄 것. 셋째 연방군의 무기들을 가져다줄 것. 마지막으로 토사구팽하지 말 것. 여기서 첫째를 빼고는 나머지는 모두 지켜졌다. 그리고 첫째 요구 조건에서 발할라행의 기한을 따로 명시하지 않았으니, 상선이 네게 어긴 것은 아직 단 하나도 없지. 내 말에 틀린 부분이 있나? ] 

과거 칼스가 내뱉었던 그것은 궤변이었다만. 

원래 힘 있는 자의 궤변은 궤변이 아닌 법이다. 

그렇기에 칼스의 저 말은 궤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레반이 하는 말도, 궤변이 아닐 것이었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고, 독 때문에 친씨아 따라가기 전에 얼른 먹어봅시다. 몸 상태가 호전될지도 모르니." 

"······!?" 

"나를 믿어요. 고독은 몸에 좋습니다." 

레반의 그 괴상한 말과 동시에. 

고독 유충이 파고든 여덟 알의 영약이, 고통으로 가득찬 칼스의 입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 * * 

다음날. 

사천당가 발두르 지부의 귀빈실. 

"보인다! 보여! 들린다! 들려!" 

그로부터 하루가 더 지나자, 주머니에 고이 넣어두었던 앵무새 법기에서 종후표가 깨어났다. 

며칠 내로 말을 시작할 거라던 언평 선생이 말 그대로였다. 

다음 순간. 

귀빈실 안에서 신나게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다니던 종후표는, 내게 지금까지 일어난 상황들을 모두 전해 듣더니 부리를 열었다. 

"그러니까, 저 상선의 전무인 칼스라는 놈은 고독유충을 여덟 마리나 퍼먹었고." 

"음." 

"저 공천립이라는 놈한테는 마법으로 저주를 새겨 두었다고? 꼴을 보니 고문도 좀 했나?" 

"적당히." 

"허어······." 

기함한 종후표가 산송장이 되어 늘어져있는 칼스와 공천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은 토혈을 많이 해서 기력들이 하나같이 쏙 빠진 상태였다. 

나는 최대한 살살 다루었는데, 워낙 사내답지 못한 자들이었다. 

잠시 뒤. 

그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종후표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러면 뭐, 여기서 잘 빠져나가기만 하면 이 둘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겠군." 

"나가는 거야 간단한 일인데, 다른 것이 고민이다." 

"다른 것?" 

"엮여있는 놈들이 꽤 많다. 오래전부터 상선과 끈적하게 결탁해 뒤를 봐주는 정치인들이 있어. 복잡해서 그냥 죽여버릴까 싶다." 

헌데. 

헹- 

그런 내 말에 종후표는 크게 코웃음을 치더니······ 

제 날개로 콧구멍을 여유롭게 후비적대며 낄낄댔다. 

"이깟 변방 정치판이 끈적해 봐야 얼마나 끈적하다고. 그냥 이 종후표가 일러주는 대로 해라. 상선을 네 것으로 만들어 주마."

#151화. 상선

#151화. 

화물운송조합 상선. 

상선은 일반적인 기업과 체계가 조금 다르다. 전통적으로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회장이나 사장이라는 직위가 상선에는 따로 없는 것이다. 

"지분을 쥐고있는 이사회의 임원들이 결의를 거쳐 조합 운영을 맡고 책임질 사람을 뽑습니다. 일정 기간 조합의 대표를 맡게 되는 겁니다." 

칼스는 지난 몇 년간 상선의 전체적인 운영을 총괄했다. 거대한 지분을 틀어쥔 막후의 주인은 따로 없으니, 현재는 칼스가 상선의 조합장이자 책임자인 셈. 

칼스는 연방 집행관인 루베르겐과도 안면이 있을 정도로 발이 넓으니, 운송계는 물론이고 발두르 상계 전체로 따져도 중심축에 끼어있는 인물이다. 

연방의 신무기나 알 헤임달의 천연자원, 강력한 마약등도 화물을 다루는 상선의 손을 거쳐 암시장으로 빼돌려진다. 심지어는 당가의 공천립과 결탁해 담 크게 고독까지 반출했을 정도이니, 기간제 직위라도 칼스의 권한은 꽤 막강한 듯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임시 직위에 불과하다. 그가 아니더라도 칼스의 자리를 노리는 쟁쟁한 후보들이 있었다. 

"나는 임원 중에서도 최상위권이지만, 조합에 나와 비슷한 지분을 가진 임원이 둘 정도 더 있습니다. 내 신변에 문제가 생긴 걸 알면 곧장 임원들을 소집해 이사회를 열 겁니다." 

지금 당장은 상선의 운영 전반을 담당하는 인물이 칼스고, 다른 임원들이 이사회 형식으로 존재하며 경쟁하는 형태라지만. 

마땅한 명분만 있다면 힘을 모아 자신들의 대표를 갈아치우고, 상선의 새로운 우두머리를 옹립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종후표가 물었다. 

"돌려보내주면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나?" 

직접 잡아서 고독까지 잔뜩 먹여놓은 내 입장에서는, 칼스놈이 계속 상선의 전반 운영을 맡아주는 것이 상수였다. 갑자기 괴상한 놈이 나타나 상선을 통째로 휘어잡으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조합이 저런 체계라면, 우두머리가 바뀌는 순간 통제는 물건너갔다고 보아야 하기에 내가 원하는 상황으로 갈 수 없다. 

후우— 

하지만 칼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적으로 말했다.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의심을 시작했을 겁니다. 처리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도, 하루를 내리 비워두고 연락마저 끊어졌으니까요. 나는 원래 이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던 칼스와의 첫 대면이 떠올랐다. 

그때도 과중한 업무량에 찌들어 축 처져있는 놈이었지. 

"그들의 행동방식은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압니다. 날 바지사장으로 앉혀 상선을 집어삼킬 생각 같은데, 이제부터는 그들이 큰 걸림돌이 될 겁니다." 

칼스는 통증을 힘겹게 누르며 말을 이었다. 

녀석의 입가로 채 삼키지 못한 핏물이 새어나왔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내려가면 권한이 제한적인 임원으로 돌아갈 거고, 한 번 조합장 로테이션이 돌아가면 못해도 10년쯤 뒤에 재차 조합장 자리를 꿰찰 수 있을—" 

"아니지. 아니지." 

"?" 

갑자기 종후표가 칼스의 얘기를 중간에 썩둑 잘라냈다. 

"권한도 없이 빌빌대는 놈을 뭣하러 10년 뒤까지 푸근하게 살려둬?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다른 놈 불러다 앉히는 게 낫지. 그러라고 붙여놓은 목숨같은가?" 

"······." 

"다른 방법." 

종후표는 상선을 내 것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장담을 하더니, 실제로도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건조한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칼스는, 이내 다른 방법을 늘어놓았다. 

"그 임원 둘을 이사회에서 축출하는 게 가장 빠르고 깔끔합니다. 다만 강제적으로 일을 벌인다면 뒤처리가 더욱 복잡해질 겁니다." 

쯧쯧— 

종후표는 걱정한 게 기껏해야 그 정도냐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빠르고 깔끔한 그걸로 해라." 

상선에 9레벨급의 실력자는 없다. 

당연한 얘기이나, 9레벨은 그리 흔하지 않다. 

너무도 큰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다보니, 평소 보기도 힘든 거물들을 비정상적으로 많이 보았을 뿐. 

칼스가 8레벨 초입 수준이니, 어중간한 임원들은 무력으로 칼스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체계를 뒤흔들 정도의 무력충돌이 일어난다면 상선 내부에서도 필시 큰 반발이 생길 터. 

"알겠습니다. 하면 전권을 맡겨주시는 것으로 알고, 제 선에서 잘 처리해 보겠습니다." 

허나, 칼스는 가타부타없이 그러겠다고 답했다. 

작은 표정 변화조차도 없었다. 

그것을 본 종후표가 흡족한 듯 날개를 휘적였다. 

"대화가 통하는 부류로구만. 제 손에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는 놈이야. 쓸모가 없어지면 죽는다는 것도 알고 있구만." 

"그야 저놈도 다른 이들을 상대로 그지랄을 해댔으니까. 어떻게 꼬리를 흔들어야 살 수 있을지도 잘 알고 있겠지." 

"아, 그런 것인가? 역시 대화가 잘 통하겠군. 살아야지. 확실히 길게 사는 게 좋지." 

"······." 

큭! 

곧, 칼스의 가쁜 숨이 나지막이 내리깔렸다. 

놈의 뱃속에 자리잡은 고독충이 자그마치 여덟 마리. 

고독은 그 자체로도 독충이며 외과적인 수술 따위로 떼어낼 수도 없다. 자극하면 내장 속을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들어갈 테니. 

죽기 전에 당가의 본문에만 있다는 고독의 해독제를 얻을 방법은 오로지 하나였고, 칼스는 그것을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제 발로, 깨끗이 걸어 나갑죠." 

"그래. 말 잘 듣자." 

"앞으로 호칭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엘리트 회사원을 연상케하는 옷차림에 걸맞게, 펜촉처럼 날카롭고 똑부러지는 사내였다. 그는 새로이 정립된 상하관계를 하루도 안 되어 완벽히 받아들였다. 

"호칭은 나중에 정리하고, 빨리 튀어나가라." 

"···예." 

펄럭! 

칼스는 겉옷을 둘러 몸에 그득한 상처를 가렸다. 

그러고는 기다리던 당가의 공천립과 함께 평이함을 연기하며 귀빈실을 빠져나갔다. 

실로 긴 하루가 쏜살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뚝···뚝··· 

칼스는 전날 단언했던 대로, 상선의 나머지 임원 둘을 순식간에 정리하고 내게 찾아왔다. 

실로 신속한 일처리였다. 

놈은 붉은피에 반쯤 절은 흰 장갑을 벗더니, 콧잔등까지 내려온 안경테를 추켜 올리며 말했다. 

"말씀드렸던 둘은 방금 막, 이사회 활동을 접고 은퇴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그들의 지분을 임시로 대여받았고, 당분간 다른 임원들은 몸을 사릴 겁니다." 

종후표가 그의 수완과 빠른 결단력에 찬사를 보냈다. 

"으하하! 너도 어지간히 죽기 싫은가 보구나!" 

"······." 

이윽고, 칼스가 안경테를 매만지며 덧붙여 말했다. 

"예. 그리고 정치권 쪽 인사들에게 기별을 넣었더니, 이런 식이면 앞으로 상선에 사업권을 몰아줄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을 전해왔습니다. 그들은 잘 돌아가던 조합이 변화하는 것을 원치 않을 테니, 금세 손을 뻗어 입맛대로 주무르려 할 겁니다." 

그 말에 종후표는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쭉정이들이군. 시류도 읽을 줄 모르는." 

"······쭉정이?" 

"어차피 이 발두르에서 정치하는 놈들은 연방 정치계는 고사하고, 수르트나 발할라까지도 못 가는 무능력자 놈들이다. 그나마 젊은 놈들은 꿈이 크고 살 날이 많아 도전이라도 해볼텐데, 보나마나 죽을 날만 받아놓고 똘똘 뭉쳐 마지막 권세를 누려보려는 노인네들 아닌가?" 

"······대부분 노인들이 맞습니다." 

칼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종후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겠지. 지금 로키가 무너져 연방 정치계를 비롯한 연방 전체가 아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텐데, 연방군의 신무기까지 빼돌려 팔아먹었다는 놈들과 서둘러 손절은 못할망정 입맛대로 주물러? 늙어서 뇌수가 증발한 게지. 판단들 하고는···쯧쯧." 

"······." 

"발두르의 대단한 유지입네, 끼리끼리 둘러앉아 그 얄팍한 권력이나마 꽉 쥐고있는 놈들. 대단한 거물인 척 아니꼽게 굴지만, 막상 손에 남은 게 그거 하나뿐이라는 걸 일깨워주면 집에서 키우는 개새끼보다도 더 고분고분해질 거다. 일이 더 쉽겠구만. 어서 안내해라." 

곧이어. 

속사포처럼 비난들을 토해낸 종후표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뾰족한 부리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속닥댔다. 

- 그런데, 저것도 쓸 수 있겠나? 내 경호원으로 좋겠군. 

"저거?" 

종후표가 부리로 가리킨 장소. 

발두르에서 내내 우리를 뒤따르던 꼭두각시가 보였다. 

뷔에탕은 외형이 뛰어난 사내를 즐겨 인형으로 만들었다. 저 인형도 탁한 눈만 아니라면 한 번쯤 눈길이 갈 법한 사내. 척 봐도 잘생긴 자가 기이한 마력을 풀풀 풍기고 있으니,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내가 스토커처럼 따라오던 뷔에탕의 인형을 응시하자, 인형은 내 눈빛을 알아보았다는 듯 스르륵 다가왔다. 

[ 뭐, 누구 죽일 사람 있어? ] 

"······." 

* * * 

중심업무지구. 

우리는 칼스의 안내를 따라 한 빌딩에 도착했다. 

빌딩의 메인 동. 

칼스를 따라 지하층 깊숙이 내려가자 안쪽으로 굉장히 큰 회의실이 나왔다. 그 앞으로는 경사가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회의실을 가려면 긴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구조였는데, 계단의 끝을 시선으로 따라가니 이미 중앙 테이블에 웬 늙은이들이 착석해 있었다. 

조명은 죄다 희미하고 어두운 탓에, 얼굴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 고의적으로 그렇게 설치해놓은 듯 했다. 그래도 안력을 틔우자, 고급스러운 정장을 걸친 늙은 사내들이 명확하게 보였다. 

기운으로 보아 무력은 강하지 않았다. 

대충 열 명 정도 되었는데 뒷일을 생각치 않는다면 모두 세 합내로 베어낼 수 있는 수준. 허나 살계를 벌여 친절했던 무당의 고수들과 마찰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거대한 회의실의 사방으로 두꺼운 카펫들이 깔려있어서 대부분의 소음을 흡수했다. 높으신 분들이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참 좋은 곳이다. 

아무튼, 나는 회의실에 들어오며 마법으로 보호막을 쳐두었다. 일이 틀어지면 내가 개입해 적당히 마무리할 생각으로. 

꾸벅. 

칼스는 익숙한 듯 그들 앞에 서서 묵례를 했다.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들도 있었고, 심히 불쾌한 기색으로 칼스를 훑어보는 자들도 있었다. 

"······." 

헌데, 칼스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니 서로 말이 없었다. 어색한 게 저들로서도 처음 겪는 일인 듯했다. 

나는 적막이 깨질 때까지, 묵묵히 서 있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다 내 두 다리가 슬슬 저려올 즈음. 

푸드덕! 

칼스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종후표가 테이블 중앙으로 날아가 앉더니, 좌중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탁한 눈에 노욕들이 한가득 들어있군." 

그러자 노인들이 저마다 성질을 냈다. 

— 칼스, 자네 지금 대체 뭐 하자는 건가? 

— 이사회를 상대로 칼을 뽑았다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아주 괴상한 장난감을······ 

털퍽. 

하지만 내가 찰나간에 기세를 끌어올리자, 반발하던 자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그자의 눈가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고, 옆에 자리한 정치인들은 기세를 느끼고는 잠시 입을 닫았다. 

다음 순간, 종후표의 뾰족한 부리가 움직였다. 

"늙기만 했지 당적에 잉크도 안 마른 촌구석 쭉정이들이, 아직 감을 못 잡겠나?" 

— ······.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화려한 언변을 뽐내던 때와는 어딘가 달랐다. 

따각. 따각. 

종후표는 물 만난 고기처럼 테이블 위를 걸어다니며 마음껏 휘저었다. 

"제 그릇대로만 해먹으면서 살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날 것이지, 추하게 늙어서까지 필드에 똥을 뿌리는군. 로키가 무너진 시기에 연방 분위기가 어떤 줄 알고. 연방군 무기를 빼돌릴 때에도, 상도덕 없이 중앙에 돈을 댈 때도, 그저 눈을 감아 주었더니······." 

— ······무, 무슨! 

그그극— 

철제 의자가 뒤쪽으로 드르륵 밀리는 소리.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은근하게 거물의 향기를 풍기던 노인들이 종후표의 말에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심상찮은 말에, 그들은 이제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연방 정계에서 그걸 모를 줄 알았나? 이 주제도 모르는 것들. 그 두툼한 배를 얼마나 더 채워야 성에 찰런지. 곧 터지겠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종후표의 어조는 평소와는 달리 시종일관 건조했다. 감정이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냉막한 어조. 

역시나 종후표는 연방 정치계까지 올라가 두루 요직을 거친 자였다. 무미건조한 그 말투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이 일어나 회의실을 내리눌렀다. 

— ······. 

가끔 무언(無言)은 보다 많은 것을 시사한다. 종후표가 그 이후로 별다른 말이 없자, 발두르에서 산전수전을 겪었을 노인들의 목젖이 연신 꿀렁거렸다. 대충 일의 파급력을 예측하는 중인 모양이다. 

그러다, 어느 정도 원하던 분위기가 형성되었는지. 

클클클— 

늙은이처럼 웃던 종후표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나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종후표의 그 말 뒤로 나는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이제 협박이든, 회유든, 사기든 종후표가 알아서 구워삶을 것이다. 

마땅한 뒷배도 없이 지상의 아귀도나 다름 없는 연방 정치계에서 꾸역꾸역 살아남아 높은 자리까지 꿰찬 종후표다. 

혓바닥 놀리는 수준이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그런 정치백단 능구렁이놈 앞에, 종후표의 말대로라면 '뇌수가 증발' 한 너구리들을 던져 놓았으니··· 

나는 종후표놈의 긴 혓바닥을 믿고 기다렸다. 

그렇게. 

반나절이라는 지루한 시간이 훌쩍 지나던 시점. 

쿠궁···! 

어느덧 회의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법력을 풍기는 종후표가 일기토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유유히 날아왔다. 

그리고 종후표의 뒤쪽으로는, 안에서 대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넋이 나가고 혼이 빠져있는 노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분명 거물 정치인처럼 떡하니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진대, 입조차 제대로 열어보지 못하고 종후표놈의 페이스에 휘말려 퇴장한 것이다. 

곧, 날아온 종후표가 무덤덤하게 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오늘부터 조합의 대표다." 

"······예." 

칼스는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종후표가 연방 정치인 출신인줄 모르기 때문에, 고작해야 반나절로 풀 수 없는 매듭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저 늙은이들은 이제 상선에서 손을 뗀다. 허나 적당히 체면치레는 해줘야 하니, 주둥이가 떡 벌어질 만큼 두둑하게 챙겨주고 끝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화물용 캐리어 다섯 기를 뽑아서 불 질러라." 

"?" 

"저깟 놈들이 연방까지 기어가서 확인해 볼 깜냥은 없겠으나, 뭐라도 보여줘야 나중에 덜 귀찮다. 아까워 하지말고 내 말대로 해라." 

"예." 

이윽고. 

칼스는 종후표의 말을 듣자마자 발두르 스테이션으로 가서, 따로 빼놓은 상선의 화물용 캐리어 다섯 기에 즉시 불을 질렀다. 

화르르르르륵— 

거대한 화염이 몰아치자 사방으로 희미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동안, 발두르 스테이션 근처에 높이 솟아있는 빌딩에 발을 들였다. 과거 친씨아에게 이끌려 왔던 상선의 빌딩이었다. 

그리고는 칼스의 집무실이 있는 상선 빌딩의 상층에 서서, 창밖으로 활활 불타오르는 화물용 캐리어들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이곳에 다시 오니, 그 감회가 새로웠다. 

곧. 

내 어깨 위에 기세등등히 앉아있던 종후표가, 중후한 음성으로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나 좀 풀어줘라."

#152화. 금의환향

#152화. 

"자유! 일신의 독립!" 

종후표는 이번 일을 대가로 자유를 원했다. 

나는 당연하게도 들은 체조차 해주지 않았다. 

허나 종후표는 기다렸다는 듯, 합의점이라도 찾아보자며 부리를 열었다. 

"그렇다면 좋다. 많이도 바라지 않을 테니 사흘에 한 번 정도는 내 육신을 쓰게 해다오! 내내 갇혀만 있으니 내가 살아는 있는 건지, 아니면 죽어있는 건지 도통 실감이 안 난다." 

"싫다." 

"이만큼 노력해 주었는데 단칼에 거절하니 매우 섭섭하군. 사흘마다 한 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면 내 크게 양보하여······." 

사흘마다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달에 한 번, 분기에 한 번. 계속 그렇게 질척대며 협상을 시도하던 종후표는 결국, 반년에 한 번 진주언가 바깥으로 외출시켜 주겠다는 약조를 내게서 얻어냈다. 

"반 년에 한번···충분하다. 그만하면 충분해!" 

종후표는 그 작은 성과가 굉장히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늙은 너구리 같은 정치계 인사들을 고작 혓바닥 하나로 다 치워버린 놈이, 한낱 외출 따위에 저렇게나 좋아할 수가 있나 싶었다. 

하기야, 육신을 봉해두었는데 즐거울 리야 없겠지. 

"큭, 으하하!" 

헌데,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나 좋아할 정도인가? 

나는 그간 내가 너무했나 싶어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저 능력 있는 놈이 고작해야 외출 따위에 저렇게 좋아하며 의욕을 다지는데, 더 못해줄 게 무엇인가. 

좋다. 

반년쯤 뒤에 언평 선생에게 부탁하자. 

가능한 한, 크고 넓은 '진법' 을 세워달라고. 

그 드넓은 진법 안에서 안전하게, 또 마음껏 뛰어놀게 하면 되겠군. 

그것도······외출은 외출이니까. 

— 으하하하하! 

종후표의 웃음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크게 울려퍼졌다. 

* * * 

세상에 은원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은혜. 

누군가 내게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준다면, 어지간한 사마외도나 쳐죽일 금수가 아닌 이상 언젠가는 갚을 생각이 난다. 만약 갚지 못하더라도 마음 한켠에 죽기 전까지 품고 살아간다. 

원한. 

누군가 나를 해치려 들거나 어떤 놈 때문에 큰 손해를 보면, 그보다 더한 짓으로 갚아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 어떤 방식으로든 마음 한켠에 응어리져 있다가 결국에는 복수를 부르는 씨앗이 된다. 

세상에 오래 살고 싶다면 저 둘 중 원한을 주목해야 한다. 

은혜는 베풀지 않거나 갚지 않더라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으나, 원한은 다르다. 

한 번 원한을 만들어 버리면 그것이 당장 돌아오지 않아도, 언젠가는 내 목에 칼을 겨누지 않을까 약간의 근심걱정을 하며 살아야 하니. 

물론 이렇게 강자존이나 다름없는 세상이라면, 대개 그 원한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코끼리가 개미를 좀 짓밟아 죽인다고 해서 별일이 생기지는 않는 것처럼. 

하지만, 타인의 가슴에 원한을 심으려 할 때는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예외의 경우는 언제나 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미세한 원한이라도 반드시 가슴 한켠에 품어두는 사내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을 만큼의 성취를 이루어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 경우가 있다. 

나처럼. 

"공천립 이사님." 

"예." 

"상사이신 당녹운 지부장께 꼬치꼬치 캐물어 가며 여쭈었더니, 고독의 해독제는 정말로 당가 본문에만 있다더군요. 그것도 직계가 아니면 건드리기 쉽지 않다고." 

"······예. 맞습니다." 

"표정이 안 좋네요. 설마 내가 안 물어볼 줄 알았어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혹시나 대가리를 굴려 거짓을 고했다면 굉장히 볼만했을 겁니다." 

"······." 

중원무림 사파놈들의 생리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혈기 왕성하던 시절 객잔에서 뺨 좀 올려붙였던 점소이나, 수도 없이 겁탈한 아녀자 중 하나가 대뜸 압도적인 고수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면? 

심지어, 붙어있는 별호가 악살검귀나 만독수라 같은 것이면. 

거기에 그치지 않고 기억력까지 굉장히 좋은 편이라면··· 

아마 목숨을 붙여만 주어도 크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시한부 목숨이 되어도,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려야만 한다. 

나중에 객잔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허허, 그때 내가 하필 누구와 붙었는데 열심히 싸우다가 결국 이 팔과 눈을 잃고 말았지. 진정 대단한 승부였다고! 

저 정도로 포장해서 끝날 수 있으면 딱 좋은 정도. 

사실, 어지간해선 그냥 재수가 없었다 생각하고 넘기는 게 정신건강과 신상에 두루 좋다. 

나는 씁쓸하게 웃는 공천립을 격려해주었다. 

"그래도 공 이사님. 분명 고심을 할 만도 했는데, 선택을 참 잘하셨습니다. 당씨도 아닌데 이사의 자리까지 오른 것이, 확실히 딱지치기로 딴 건 아닌가 봅니다." 

"······." 

"공 이사님. 대답은 하셔야죠. 당가처럼 싹 쳐죽이지 않고 인권을 존중해드리고 있는데, 혹시 제 아량이 헤퍼보이세요?" 

"!!!" 

내가 조심스레 묻자 공천립이 손을 벌벌 떨며 기겁했다. 

아마, 이렇게 세심한 윗사람은 당가 내에 없었으리라. 

공천립은 안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즉각 대답했다. 

"딱지치기로 따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실력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왔습니다." 

"그 실력, 앞으로 나를 위해 잘 좀 써주세요." 

"실망하시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공천립. 

나는 놈의 심장에 마나 문신을 새겨 넣었다. 

『 느림의 미학 』 

문신을 매개로 한 저주 마법. 

이번에는 과거 왕초삼에게 새겨넣었을 때보다 더욱 많은 마력을 투입했다. 아무래도 당가 밑에서 일하는 놈이니, 다른 고수들이 알아챌 수 없게 심혈을 기울이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고 나는 공천립의 심장에 문신을 새기던 도중, 다섯 번째 마나회로가 다음 단계에 오를 준비를 마쳤다는 걸 느꼈다. 

하여간 그것은 뒤로 미뤄둔 채, 다음으로 칼스의 보고를 들었다. 

"오늘 이사회에서 제 지위를 인정하는 안이 부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번에 은퇴시킨 두 임원에게 '임시' 로 양도받은 지분과 제 지분을 더해 약 40퍼센트를 확보했고, 소문을 듣고 제 쪽으로 몸이 기우는 임원들이 있으니 대표 지위를 확정 짓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현재, 상선 내에서 칼스가 연방 의원'들' 의 간접적인 후원과 지원을 받는다는 얘기가 정설로 퍼지고 있다고 한다. 

종후표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놈은 알고있는 정보가 워낙에 방대하다. 제 손에 있는것만 꼭 붙들고 세상에는 별 관심도 없는 변방 정치인 정도는 쉽게 구워삶는 것이다. 

안경을 콧잔등에 걸쳐놓은 칼스가 말했다. 

"조만간 이사회가 열리면 임원 몇 명을 더 '설득' 해 은퇴시킬 생각입니다. 과반 이상의 지분을 확보하게 되면, 이사회의 의결 따위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 겁니다." 

짧게 줄이면 박살내서 꿀꺽 해버리겠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해라. 언제나 암살 조심하고." 

"이 좁은 발두르 시티에 8레벨을 암살할 만큼 강력한 히트맨은 없습니다." 

"일 잘 풀렸다고 주접떨지 말고. 고독 더 먹을래?" 

"······죄송합니다." 

칼스의 가장 큰 경쟁자이자 많은 지분을 쥔 상선의 임원 둘은 힘을 잃었다.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리스크까지 완전히 사라졌으니, 이제 칼스는 계속 상선의 대표로 앉아있을 것이다. 

말인즉. 

나는 화물운송조합 상선의 실질적인 주인이 된 것이다. 

시티 화물 운송의 30퍼센트를 담당하는, 그간 쌓아온 항로망 데이터들과 운송용 대형 캐리어 100여 척을 운용하는 명실상부한 발두르의 대형 세력. 

놈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자산 역시도 내 손에 들어온다. 

앞으로 크레딧 들어갈 곳이 많아질 참이었는데, 발두르 시티에서 크레딧을 갈퀴로 쓸어 담는 세력을 얻었다.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종후표놈을 진작에 죽이지 않길 잘했군. 

놈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나는 칼스는 물론이고 놈과 연관된 놈들을 집단 참수해버리고 라그나로크 시티로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이토록 고무적인 성과를 얻었다. 

나는 상당히 흡족해져선 입을 열었다. 

"그러면 한 잔씩들 합시다. 좋은 날이니까." 

"예." 

"예." 

이곳은 발두르 중심 유흥가의 고급 술집. 

오늘은 종후표가 혓바닥 하나로 정치 노괴들을 잡아먹은지 나흘째가 되는 날이다. 

나는 지난 나흘 동안 칼스와 공천립을 부리거나 직접 나서서 상선과 관련 되어있는 여러 일들을 마무리했다. 

죽일 놈 죽이고, 돈 먹일 놈 먹이고, 병신 만들 놈 병신 만들고. 

그리고 오늘에서야 그 귀찮은 작업이 끝난 것이다. 

척! 척! 

칼스놈과 공천립, 나는 술잔을 앞에 두었다. 처음에는 서로 원한으로 엮인 이들이지만, 앞으로는 나를 위해 열심히 크레딧을 벌어다 줄 놈들이다. 

복숭아밭에서 낭만있게 하는 도원결의까지는 아니어도, 묵은 원한은 훌훌 털어버리자는 의미에서 술 한잔씩은 할 수 있었다. 

쪼르륵. 

이윽고 나는 그들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고, 칼스와 공천립은 동시에 머리를 돌려 술을 받아마셨다. 

독한 술인데도 그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이제 내 잔에도 술을 따랐다. 술의 표면은 매끄럽고 투명하여 도심의 불빛을 아름답게 비추었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술을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술잔을 엎어 그대로 바닥에 뿌려버렸다. 

촤아악! 

"······?" 

"생각해보니, 나는 당가의 무인과 술을 마시지 않는다." 

당가의 인사와 술잔을 두고 대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호랑이의 아가리에 팔을 처넣는 격. 

술에 독 타듯 독에 술 타듯 살아가는 놈들이다. 

또한 나는 원한을 쉽게 잊지 않는다. 고작 술 한잔에 훌훌 털어버리기에, 과거 입었던 마음의 상처가 너무도 크지 않았겠는가. 

"······그, 그렇습니까." 

"응." 

공천립은 개똥씹은 듯 푸들푸들 떨리는 안면을 억누르며 힘겹게 웃어보였다. 

웃지 않으면 사내의 원한을 산 죄로 여기서 죽을 테니까. 

쨍그랑! 

나는 술잔마저 대충 집어던져 깨버리곤 그 둘을 뒤로했다. 술잔과 함께 인간적인 존중마저도 간단히 내던져버렸다. 

사내 셋의 술집 결의는 파기다. 

"이만 간다. 가끔 찾아올 테니 잘하자." 

"예." 

"예." 

공천립과 칼스놈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나서는,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금의환향한 사내의 고향행이 마무리되었다. 

* * * 

클로에. 

그녀는 자기 키보다도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다. 

"미안해요. 주변 정리가 조금 오래 걸렸죠? 며칠내로 끝날 줄 알았는데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괜찮습니다. 나도 마침 바빴습니다." 

"흐흐,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내가 상선의 일을 마무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클로에도 발두르 시티를 떠날 준비를 마쳤다. 

클로에의 표정은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그때, 등 뒤에서 여량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협, 문주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깨끗한 무복으로 갈아입은 삼호문도들이 도열해 있었다. 

아, 이놈들도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차하면 이놈들을 잊어버리고 갈 뻔했다. 

"박치기 공룡도 왔구나." 

"······." 

삼호문주 등평위는 말한대로 여량천과 응곽, 은소를 비롯한 삼호문도 열 명을 내게 딸려보냈다. 쓸만한 무공을 익혀 몸이 튼튼한 놈들이라, 수족으로 부리며 각종 잡일을 시켜 먹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물론, 정크타운 출신이라 얼굴은 조금 꼬질하다. 

— 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제 검역 따위는 없는 발두르 시티 스테이션. 

나는 상선의 주인이 된 기념으로 상선의 화물용 캐리어를 탈까 하다가, 크기만 크지 워낙에 느려터진 관계로 포기하고 가져온 캐리어에 올랐다. 캐리어는 발두르 시티에 미련이 없다는 듯, 삽시간에 이륙해 하늘을 갈랐다. 

그렇게, 그들을 데리고 라그나로크 시티로 돌아왔다. 

나는 라그나로크에 도착하자마자 머물던 호텔을 찾았고. 

"레반······!" 

그런 나의 눈에, 이쪽으로 뛰어오는 레나가 보였다. 

레나는 발할라를 뒤로하고 라그나로크 행을 택한 것이다. 

뒤이어 도끼눈을 뜬 루벤카년이 달리는 레나의 손을 꽈악 붙들다, 결국에는 미끄러져 놓치고 씩씩대는 장면 역시도 눈에 들어왔다. 

더해서, 왜인지 다시 라그나로크로 돌아온 카산드라 교수가 후후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것도. 

거기에 클로에와 삼호문 놈들까지 있으니, 마치 과거의 정크타운을 라그나로크 시티로 옮겨놓은 듯했다. 

이후로 나는 눈가가 그렁그렁해진 레나와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레나는 조금 진정이 된 후 울고불었던 사실이 창피했는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밤이 깊어오자 호텔 창밖을 응시했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골목 어귀에서 담배를 태우던 딜런이 웃으며 손짓하고 있었다. 

곧, 호텔을 조용히 빠져나와 딜런을 찾았다. 연신 줄담배를 태우던 딜런은, 천천히 높아져만가는 라그나로크 시티 중심가의 풍경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충 정리는 끝났나?" 

"끝났다." 

"···큭큭, 네가 원하는 칩 제작해 주겠다는 기업을 찾았다. 그쪽도 요즘 자금줄이 궁한지 나름 긍정적이야." 

"그거 좋은 소식이군." 

"그런데 꼰대 새끼들 압박 들어오는 건 그렇다 쳐도, 일단 크레딧부터 장난 아니게 빨아먹을 것 같던데. 정말 괜찮겠냐?" 

"괜찮다. 마침 돈줄을 구해오는 길이라." 

팅! 

내가 대수롭잖게 대답하자 딜런은 묵묵히 머리를 끄덕이더니, 태우던 담배꽁초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메가콥 될 준비만 하면 되겠군."

#153화. 메가콥이 될 준비

#153화. 

[ 메가콥 될 준비만 하면 되겠군. ] 

[ 다만, 이쪽 공무원들은 죄다 놈팽이라 법인 허가 나오려면 몇 달은 걸릴 거다. 그때까지 구해온 돈줄 잘 잡고 있어. 칩 제작에 쭉쭉 빨아 먹히는 크레딧을 보면 억소리가 절로 날 테니까. ] 

딜런이 그 말을 남기고 사라진 뒤 사흘이 지났다. 

그런데 오늘. 

"······레반, 허가 났어." 

레나가 새벽녘에 수련하던 나를 찾아와 말했다. 레나는 자다가 소식을 받고 잠에서 깬 건지, 졸린 얼굴로 연신 눈을 비볐다. 

마나회로를 다스리던 내가 되물었다. 

"무슨 허가?" 

"반 컴퍼니 말이야. 법인 설립 허가 떨어졌대." 

"그럴 리가. 신청한지 이제 며칠 안 됐을 텐데." 

"아무래도 레반의 유명세 덕분인 것 같아. 담당부서 공무원이 보고를 올렸겠지. 보통 적합 심사에만 못해도 몇 달은 보내야 하는데······." 

놀랍게도 정식법인 설립 허가가 순식간에 떨어졌다. 

보통 몇 달은 걸려야 할 절차가 그것도 단 사흘 만에. 

오늘이 바로 '반 컴퍼니' 창립 1일 차가 되는 날인 것이다. 

의외였다. 

웨스트 정크타운 같은 곳에서 흑도문파나 갱단을 운영하는 것과 연방이 공인한 정식 법인을 설립하는 것은 다르다. 

분명 굉장히 까다로운 절차들이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며칠 걸리지도 않아서 벼락처럼 설립 허가가 떨어졌다. 

[ 레반······님이시죠? 이번에 로키 시티에서 활약하신······예, 일단 알겠습니다. 알겠고요. 발급서들 몽땅 챙겨주시고, 제가 빠른 시일 내로······. ] 

사흘 전, 대면한 담당 공무원이 워낙에 설렁설렁 일을 하기에 필시 오래 걸릴 것이라 여겼다. 

공무원은 언제나 안정적인 걸 선호하는 법. 

라그나로크는 도시 기반과 플랫폼을 이제야 깔아가는 단계. 그러니 이처럼 불확실한 동네로 파견을 떠나오고 싶어하는 공무원은 없었을 거다. 

때문에 이 라그나로크 시티로 끌려온 공무원들은, 대부분 어디 한군데 하자가 있는 자들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윗선에 찍혔다든가, 뇌물이나 상납을 받아먹다 선을 넘었다든가······파면보다는 파견이 나으니 어쩔 수 없이 라그나로크 시티로 밀려온 자들. 

일거리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도시인데, 하자있는 놈들이나 한탕 치려는 놈들만 왔으니, 연방 정부에서 쪼아댄다고 해도 업무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 

그렇기에 다섯 번째 회로를 갈고 닦으며 마법 수련을 시작한 참이다. 그런데 이리 빠르게 처리해 주다니. 

레나가 능력이 좋다지만, 필시 윗선인 연방정부쪽의 강력한 개입이 있었으리라. 그놈의 지겨운 '영웅' 타이틀에서 아직도 우려낼 소스가 더 남았나보다. 

아무튼. 

라그나로크에 본사를 둔 신생기업 반 컴퍼니. 만약 증권시장에 상장하게 된다면, 현재의 기업 현황은 대강 이렇게 보이겠지. 

[ 기업명 ] 

반 컴퍼니 

[ CEO ] : 레반 

[ 본사 위치 ] : 라그나로크 시티 

[ 대표 업종 ] : ??? 

[ 시가 총액 ] : ??? 

[ 총액 순위 ] : ??? 

[ 연 매출액 ] : ??? 

[ 총 직원수 ] : 30명(추정) 

그렇게 생각하니, 참으로 보잘것없군. 

이윽고. 

나는 소식을 전한 레나와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캉—! 캉—! 

나오자마자 사방으로 울려대는 공사판의 쨍한 소음. 

"레반, 이거 해!" 

레나는 길거리 노점으로 달려가 털 달린 귀마개를 샀다. 히히덕거리던 레나는 내게도 귀마개 하나를 건네주었다. 

우리는 이내 중심가로 걸음을 옮겼고, 경쟁하며 드높이 솟구치고 있는 빌딩들 사이에 덩그러니 방치되어있는 부지에 이르렀다. 

이곳은 반 컴퍼니의 본사가 건설될 내 소유의 땅. 

레나의 천진난만했던 표정이 진중해졌다. 레나는 전문가의 눈으로 주변을 꼼꼼히 둘러보며 말했다. 

"직접 보니까 확실히 좋아. 예상외로 더 좋은 입지인 것 같아. 역시 연방정부야. 시티의 중심인 건 물론이고 필지도 반듯하고 넓어. 시청과도 가깝고 삼면이 대로에 정면으로는 탁 트인 공원이랑 인공개천이 들어올 예정······." 

라그나로크의 땅값은 지금도 천정부지로 널뛰고 있다. 

어느 날에는, 당장 이 땅을 팔아치우면 발두르 중심업무지구의 초대형 빌딩과도 맞바꿀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그리할 생각은 없다. 

발두르 시티에 딱히 좋았던 기억이 없기에. 

'칩 제작에 더해서 저런 초대형 빌딩까지 올리자면, 이제부터 크레딧 들어갈 곳 천지겠군.' 

부지 근처를 둘러보니 새삼 실감이 났다. 

훌륭한 돈줄인 상선에서 앞으로 뜯어먹을 크레딧과 딜런의 자금을 더해도, 그 천문학적인 크레딧을 단기간에 메꿀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그리 생각하던 때였다. 

왜애애앵— 

털털대는 바이크를 타고 헬멧을 쓴 놈이 웬 명함을 길거리에 던지며 지나갔다. 사실 던진다는 것은 좋게 말해준 것이고, 거의 폭탄투하를 하고 지나갔다. 

발두르 중심업무지구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 

"응?" 

수많은 명함은 팔랑이며 레나의 발치에 떨어졌다. 집어 들어보면 십중팔구는 사채꾼들의 사무실, 혹은 예쁜 인간 아가씨를 구하거나 보유하고 있다는 홍보 전단과 명함이었다. 

시티 전체가 공사판이라 하루 벌어 하루 쓰는 건설 노동자들이 온 도시에 깔려 있으니 술집과 도박장, 매춘부, 돈장사꾼들은 기본적으로 따라오기 마련. 

불법과 편법을 제집 문지방처럼 넘나드는 영세금융업자들과 유흥업자들이 몰려들 것은 당연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저 먼 도시에서 빠르게 달려온 자들은, 부재중인 공권력의 틈을 비집고 법까지도 서둘러 어겨버린다. 

이런 놈들도 성공과 일신의 영달을 위해 라그나로크까지 몰려왔겠지. 사는 게 참 쉽지 않은 듯하여, 나는 주웠던 명함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런데. 

"······." 

다시금 둘러보면 주변에 공사장이 굉장히 많다. 

콘크리트와 드럼통처럼 상징적인 기물들도 많으니, 흑도 무법자들이 활동하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 아니겠는가. 

방금처럼 대놓고 전단지를 뿌리는 바이크하나 잡지 못할 만큼, 라그나로크에는 공권력이 아직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로키 시티가 시체들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바람에 연방군이 서둘러 몰려들긴 했지만 그뿐. 

장벽 보수 작업과 건축 공사등 소음과 분진을 일으키는 일이 많아 장벽 밖 시체들의 이목을 끌고있다. 그렇기에 연방군은 장벽 밖 경계하기에도 급급한 듯했다. 귀를 기울이면 소음에 섞인 군의 포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나는 문득, 바닥에 던졌던 명함을 다시 집어 올렸다. 

[ 당 일 대 출 / 기한 넉넉한 이자 50%(日) ] 

* * * 

사채꾼 로블락스. 

"돈 필요한 놈들이 넘쳐나는군. 돈보다 문이 먼저 닳겠어." 

그는 누구보다 먼저 라그나로크에 자리를 잡은 사채꾼이다. 

원래 로키 시티에서 소소하게 돈놀이를 하던 그는, 라그나로크가 수복되어 스테이션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자산을 긁어모아 이곳으로 왔다. 

모험을 해볼 가치가 있었다. 

오랜기간 방치되었던 작은 사무실 하나를 임대했다. 

10평쯤 되는 3층 사무실 안은 곰팡이와 녹으로 아주 엉망이었다. 대충 쓰레기와 파편들을 치우고 바닥재와 벽지만 덧발랐다. 이깟 사무실이야 나중에 돈을 불려 멀쩡한 곳으로 옮기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로블락스의 선택은 완벽히 들어맞았다. 

이제는 이 10평 남짓한 사무실에 크레딧을 빌리기 위해 들락날락 거리는 인간이 하루에 수십 명이다. 한심한 도박쟁이부터 옆 건물에 사는 매춘부, 중소규모 건설사 사장까지 두루 있었다. 

로블락스는 비록 지하세계에서 돈놀이나 하는 사채꾼이지만, 갈고닦은 경험이 상당해 업계에서는 꽤 통찰력이 있는 편이다. 

전 세계에서, 전 세계라고 말해봐야 연방 7개 도시 정도지만, 라그나로크 시티로 연방의 주민들이 이주해올 것을 꿰뚫어 보고 먼저 움직였다. 

이 도시에서 돈이 부족하면 어디서 빌리겠나. 지사 건물도 제대로 없는 은행? 증권사? 애당초 그런 금융가에서 얼마든 대출받을 능력이 되는 자들은 사채꾼의 타깃이 아니다. 

주제도 모르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놈들이나, 급전조차 빌릴 지인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놈들이야말로 사채꾼의 주요 고객층이다. 

"다른 시티들은 넷 사채 시장이 활성화 되어있거든. 그런데 여기는 이제야 복구가 되고있는 도시야. 시티 넷도 따로 없어. 뭐 돈 빌리려면······직접 와야 한다는 얘기지." 

— 로블락스! 이봐 내가 지금 진짜로 급한데, 잠시 얘기좀 나눌 수 있겠나? 

바로 이렇게 말이다. 

로블락스가 사람 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근처에서 전당포 하시는 제롬 사장님 아닙니까?" 

— 급하게 크레딧이 조금 필요하게 됐어. 5만 아니, 그냥 여유롭게 7만으로 하자고. 

"일일 이자 20%. 감당되시겠습니까?" 

일일 이자 20퍼센트. 

일주일이면 원금의 두 배를 넘어가고, 한 달이면 원금의 다섯 배 이상이 이자로 붙는다. 

정해진 금리따위는 당연히 준수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자로 불어난 원금에 이자를 다시 붙이지는 않으니, 로블락스는 사채꾼치고 매우 양심적인 편이었다. 

게다가 몇 달 전부터, 돈을 심하게 굴리던 놈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있다. 귀가 밝고 조심성이 많은 로블락스는 이자율을 깔끔하게 동결해버린지 오래였다. 

딸칵. 딸칵. 

"급해 보이시는데. 되도록 사채는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는 마공학 리볼버에 탄알을 채워넣으며 말했다. 제롬 사장은 아마 쓸만한 물건이 창구로 들어왔는데 내어줄 자본금이 부족한 모양이다. 총을 보았는데도 욕심으로 눈이 시뻘게져 있다. 하지 말라면 더 하는게 사람 심리다. 

전당포 사장 제롬은, 역시나 욕심을 떨치지 못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 그깟 7만 크레딧 정도면 아무런 문제도 안 돼! 완전히 괜찮아. 나 몰라? 이자는 물건만 받으면 한방에 갚아줄 테니까 걱정 말라고. 

"일단 5만 크레딧만 가져가쇼." 

— 크윽. 

결국 전당포 사장은 이자 1만 크레딧을 제외한 4만 크레딧을 들고 전당포로 돌아갔다. 발걸음이 바빠보였다. 아마 이 사무실을 다시 찾을 때는 바쁘게 걸어오지 못하겠지. 

드르륵. 

로블락스는 사무실에서 가장 값비싼 비품인 가죽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팔을 뻗어 머리를 받쳤다. 

"전당포 한다는 놈이 5만 크레딧도 없어서 사채를 끌어다 써? 보나마나 밑천 다 털렸군."

"가서 회수해 올까요?" 

다 찢어진 가죽쇼파에 앉아 전자담배만 뻑뻑 피우던 대머리 사내가 흉흉한 기색으로 물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듯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로블락스는 괜찮다는 듯 휘휘 고개를 저었다. 

"됐다. 묵혀뒀다가 전당포 닦을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구경이나 해보자." 

"예." 

전당포 사장마저 내줄 현금이 부족해 사채를 꿔갈 정도로, 밑바닥 시장에 돈이 활발하게 돌고있다. 

이런 대 활황기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쿵- 쿵- 쿵- 

"또 오는군. 돈 필요한 놈이." 

로블락스는 층계를 오르는 다음 고객의 발소리가 들리자 리볼버에서 탄알을 다시 빼고, 천천히 밀어넣는 작업을 반복했다. 

— 크레딧 좀 꾸러 왔다. 

"?" 

그런데, 이번 고객은 다른 놈들과 어딘가 달랐다. 

돈을 빌리러 온 주제에 당당한 놈들은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다짜고짜 자리에 궁둥이부터 붙이는 고객은 거의 없다. 

— 최대 얼마까지 빌려줄 수 있냐? 

놈은 아주 더럽게 못생긴 양아치였다. 

로블락스의 사무실은 도박꾼은 받아도, 저런 앞뒤없는 양아치는 고객으로 받지 않는다. 보나마나 어디 연고도 없을 놈이라, 펑펑 써버리고 목숨을 끊으면 아주 귀찮아진다. 

끄덕. 

로블락스는 저 뒤쪽을 향해 가볍게 눈짓했다. 

그의 수하중에 유독 송곳을 잘 쓰는 놈이 있었다. 웬만한 무인도 송곳 하나로만 찔러 죽일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 

이번에도 비스듬히 세운 송곳날이, 멋모르는 양아치의 목덜미와 겨드랑이를 노렸다. 

푹! 푹! 

송곳이 놈의 목덜미를 정확히 쑤시고 들어갔다. 

헌데. 

놈은 송곳에 깊이 찔렸는데도, 일말의 미동조차 없이 평온했다. 마치 이런 공격따위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이. 

— 돈 꾸러 왔다니까 새꺄. 

"······." 

로블락스는 경험도 많고 통찰력이 굉장히 좋은 사채꾼이었다. 그렇기에 고심은 잠깐이었다. 

타앙—! 

로블락스는 눈앞의 양아치 고객이 아니라, 송곳을 쑤셔넣은 수하를 즉시 쏴죽였다. 

머리가 깨지며 사방으로 붉은 피가 퍽 튀었다. 그러자 거만하게 앉아있던 양아치놈의 눈이 신경질적으로 휘더니, 칠흑같이 검어졌다. 

로블락스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총을 내려놓고 물었다. 

"죄송합니다. 저놈이 새로 들어온 놈이라.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을까요?" 

— 야. 

"예." 

— 아니, 너희도 내가 좆밥같아 보이냐? 씨벌 왜 이바닥 새끼들은 날 못 찔러서 안달인지 모르겠네. 내가 뭐 아무한테나 처맞고 다니는 놈으로 보여? 

"······." 

솔직한 말로 좆밥 양아치같이 생긴 놈이 맞았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사채꾼으로 온갖 밑바닥을 전전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로블락스였으나, 저 양아치의 깊은 곳에서는 여태껏 만나보았던 자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기백이 느껴졌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단한 실력자다. 

저런 괴물 앞에서는 몸을 바짝 숙여야 한다. 

"실례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말씀 해주십시오." 

로블락스가 그리 정중하게 말하자, 양아치는 익숙한 명함을 꺼내 들이밀었다. 

— 이 명함, 네 사무실에서 뿌린 거냐? 

"······맞습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툭! 

그의 뇌가 쌩쌩하게 돌아가지 않는 사이, 양아치는 테이블에 1천 크레딧짜리 현물 지폐를 휙 던졌다. 

로블락스가 해명을 요구하듯 눈앞의 양아치를 바라보자. 

— 이거 담보로 좀 빌리자. 네가 가진 크레딧 전부. 

"······." 

1천 크레딧을 담보로 잡고, 최소 수백만 크레딧을 뜯어가겠다고? 아무리 상도덕 없고 강자존인 사채판이라지만, 이것은 해도 너무 했다고 생각한 그는 한껏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만, 이런 업계에서 크레딧을 회수하라는 말씀은 그냥 나가 죽으라는······." 

— 한 두 달 내내 이지랄만 했더니 정말 화가 나. 

"······." 

— 아힘사는 가만히 있고 형님은 틀어박혀서 수련만 하시는데, 왜 나만 좆빠지게 일을 해야 하지? 새끼들이 나만보면 만만한지 칼로 존나 찔러. 이거 이상하지 않냐? 나 이거 왜 하고있지? 응? 

지닌 힘과 위압감에 비해 너무도 등신같은 말투였다. 

거기다 더해서, 이상한 자격지심같은 것도 있어 보인다. 

저렇게나 강력한 실력자가 어찌 저리 비틀려 있다는 말인가. 

대가리에 칩을 잘못 박기라도 한 건가? 

'역시 말은 안 통할 것 같—' 

그순간. 

콰작! 

— 왜 나만 이런 일 해야돼. 나도 너희같이 우중충한 새끼들 말고, 기왕이면 섹스토이 매장에 삥 뜯으러 가고 싶었다고! 그 두 새끼처럼 접대도 받고!!! 으아아악! 으으아악!!! 

"······." 

콰작. 콰직. 

괴성을 지르던 양아치는 갑자기 피가 줄줄 흐르는 시신의 다리를 잡아 씹어먹었다. 방금 전 목덜미에 송곳을 찔러넣었다가 머리에 구멍이 뚫려 죽은 놈이었다. 

식인종도 아니고 시신을 저렇게 씹어 먹을 수가 있는 것인가? 

······도저히 상식선에서 판단이 불가능한 사이코. 

로블락스가 살면서 본 이들 중에서도 과히 압도적이었다. 

살아남고 싶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무릎 꿇을 수밖에. 

"하, 하루 내로 융통할 수 있는 자금을 끌어모아 보겠습니다. 아니. 반나절 내로 전부 쪼아서 회수해보겠습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반 컴퍼니 법인 설립 시점으로부터, 석 달가량이 지났다. 

나는 석 달간의 수련을 통해 마나회로를 한 개 더 엮어 6위계, 결국 8레벨의 마법사의 경지에 올랐다. 8레벨의 극점 이상을 달성한 무공과 마법이 이제야 약간이나마 비슷한 궤도에 오른 것이다. 

또한, 지난 몇 달간 딜런의 보좌 둘과 루돌프놈을 굴려 파릇파릇하게 피어나던 지하 사채시장을 일통했다. 

그 셋은 그물로 바닥을 훑듯이 무분별하게 들어선 사무실을 깨끗하게 털어버렸고, 덕분에 내 주머니로도 쏠쏠한 자금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자금은 아직 부족하기만 했다. 

하지만, 해결법은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 그런데 카산드라 교수님은 왜 석 달이 넘도록 발할라 시티로 안돌아 가십니까? 아카데미 방학이 이렇게나 깁니까? ] 

내게 현자 아스파로프의 지팡이를 쥐어주고, 레나와 루벤카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저택을 빌려주었던 론 카산드라 교수였다. 

[ 아, 레반은 못 들었나요? 나는 아카데미 교수직을 내려놓고 여기서 일하기로 했어요. 옆에서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답니다. ] 

[ 그렇습니까? 헌데 그 아이가 누굽니까? ] 

[ ···후훗. ] 

카산드라 교수는 저명한 마법 교수이자 굉장한 재력가다. 그러나 카산드라는 이제 명예를 얻기보다는 자신의 '취미 생활' 에 품을 더 들일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취미 생활의 정체를, 어젯밤 레나를 통해 들었다. 

수련하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음하는 것이라던가. 

[ 그런데 듣자 하니, 크레딧을 구하고 있다면서요? 라그나로크 시티 지하시장이 그렇게나 시끄럽던데? ] 

카산드라 교수는 묻지도 않았는데 천천히 다가오며 눈을 빛냈다. 광적인 집착과 끈적한 관심이 깃들어있는 눈빛이었으며— 

실로, 부호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재력가의 눈빛이었다. 

[ 크레딧, 얼마나 더 필요해요? ] 

[ 좀, 많이 필요합니다. ] 

나는 그렇게, 카산드라 교수의 지원까지 더해 메모리칩 초기 계약에 필요한 자본을 석 달만에 모두 구할 수 있었고······ 

딸칵! 

지금 내 앞에서. 

제 몸뚱이만한 서류 가방을 들고온 웬 노인네가 입을 열었다. 

— 저희 '글로톤 콥' 과 계약을 선택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무공? 마법? 고유한 기술? 어떤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까? 말씀만 하시면 무슨 메모리칩이든 곧장 제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154화. 값싸게 팔 준비

#154화. 

작달막한 체구의 노인. 

"저는, 글로톤 콥의 윌터 하르트라고 합니다." 

메모리칩 제작기업 '글로톤 콥' 의 부사장, 윌터 하르트. 

자기 몸만 한 서류 가방을 내려놓으며 간단한 소개까지 마친 그는, 나이 치고는 순수한 호기심이 어려있는 눈으로 반대편에 앉은 레반을 바라봤다. 

그러자. 

"아, 반갑습니다. 반 컴퍼니의 레반입니다." 

레반은 오랜 고심에 잠겨있다가 지금 막 정신을 차린 듯한 낯빛으로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어서, 둘은 가벼운 악수를 나누었다. 

윌터 하르트의 주름진 눈가가 살짝 좁아졌다.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악귀와의 대면을 상상했던 윌터 하르트 눈에는, 기세도 그렇고 그리 특별한 점은 없어 보였기에. 

'흐음, 이 잘생긴 사내가 정말 그 레반이라는 말인가? 이번 로키에서도 활약이 대단했다고 들었는데······.' 

레반. 

혜성처럼 갑자기 나타나 두각을 드러낸 실력자. 

라그나로크 수복전에 이어, 몇 달 전 로키 시티 사태까지 커다란 사건마다 여지없이 참여해 연방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가진 능력과 얻은 명성에 비해 명예나 출세욕은 그리 강하지 않은지, 굳이 대중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리고 기껏해야 발할라 마탑 소속이라고만 짧게 알려졌을 뿐, 명확한 출신이나 성장 배경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추측만 무성하고 반쯤은 베일에 싸여있는 인물인 것이다. 

허나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화제성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지간한 메가콥 회장 이상급의 파급력을 구름떼처럼 몰고 다니는 인물이니. 

나다. 좆같은 연방군 땅개······로 시작한 약 5분간의 수복전 연설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윌터 하르트를 비롯한 글로톤 콥의 직원들도 한 마디 한 마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정도. 

대부분 원색적인 욕설이었다만. 

'······외형은 라그나로크 때와 달라졌으나, 역시 굉장히 젊군.' 

그가 마주한 레반은 젊었다. 

군계일학이라고 어디서든 주머니 속의 못처럼 튀어나오는 신진 강자들은, 잊을만 하면 어디선가 등장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그러나 그런 이들의 대다수는 메가콥이나 순위권에 드는 대기업 출신이었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마법계 제약기업 출신의 '반 루벤카' 정도가 그나마 메가콥이나 대기업의 자제가 아님에도 명성을 날렸었지. 

현실이 그렇기에 윌터 하르트는, 레반 역시도 메가콥이 막후에서 키워낸 실력자라고 믿고 있었다. 

·····저자가 뜬금없이 악명높은 군벌 딜런과 결탁하여 라그나로크 시티에 기업을 뚝딱 세워버렸다는 소식이 들려옴과 동시에, 딜런의 수하가 글로톤 콥에 방문하기 전까지는. 

'전 연방에 명성을 떨쳐놓고선 정작 군벌과 합작해 회사를 세우다니. 정말 오래살고 볼 일이군.' 

로키 시티를 주름잡던 9레벨의 전투마법사, 딜런. 

악명높은 그 군벌과 결탁할 정도라면 거대 기업에서 공들여 키운 인재마저 아니라는 뜻이니, 여러 의미에서 눈앞의 젊은 사내 레반은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를만큼 말이다. 

여하튼, 윌터 하르트는 그런 인물과 계약 맺기위해 라그나로크 시티까지 한 달음에 달려왔다. 

'마침 자금난이 심하던 참인데,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글로톤 콥의 고객사였던 몇몇 기업들이 한꺼번에 경쟁사로 빠져나가는 불상사가 있었다. 

때문에 과거처럼 콧대를 높이며 고객을 가려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크레딧만 충분히 지불한다면 신생 기업과도 기꺼이 웃으며 계약을 맺는다. 더욱이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인물이니, 마케팅 차원에서도 쓸만하지 않겠나. 

잠시 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레반이 말했다. 

"무공칩, 마법칩 양쪽 모두 제작할 수 있겠습니까." 

"예, 그야 당연히 어떤 분야든 제작 가능합니다." 

스륵— 

레반의 질문에 윌터 하르트는 들고온 가방에서 검은색의 서류를 한 장 꺼내고는, 만면에 영업용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제작된 칩은 어떤 용도로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아직은 자세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없이 사는 놈이라. 여기서 굳이 답을 해야 하는 겁니까." 

레반의 날카로운 반응에 윌터 하르트는 익숙한 일인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많은 자본력이 투입되는 사업인만큼, 절차상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요식행위입니다. 이쪽에서 칩을 제작 생산해 넘긴 뒤 불법 복제나 도난같은, 혹시모를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이를테면 판매 목적, 직접 사용등의 목적을 간단하게라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 설명하자, 레반은 대수롭잖게 답했다. 

"판매로 합시다. 일단 몇 개는 판매할 거니까." 

윌터 하르트는 곧장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목을 가다듬은 뒤 말문을 열었다.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그리고 기억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3년 전에 마법계 대기업인 쿼롯 오토모빌. 그러니까 쿼롯 가문의 비전이 담긴 마법칩이 한정판 타이틀을 달고 시중에 일부 판매된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 십이제였던 쿼롯의 고위 마법사가 창안한 보호계 마법이었고, 프리미엄까지 붙어 개당 600만 크레딧에 팔려 나갔지요. 바로 저희 글로톤 콥에서 제작과 생산, 위탁 판매까지 모두 맡은 칩입니다." 

"쿼롯 그룹이라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하면 혹시······." 

"위탁 판매권도 가져가세요. 하실 수 있으시면." 

"?" 

가져 가는데, 할 수가 있냐니? 

그 말에 아주 약간의 의문이 들었으나— 

"허허,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윌터 하르트는 레반의 시원한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꺼내놓은 서류에 몇 가지 사항을 더 체크했다. 

공중에서 펜이 저절로 움직이며 마나를 뿌렸다. 

'간단하군.' 

이제 장사치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을 얻어냈다. 

그리고 이미 본사에 계약금 지급이 완료된 상태였다. 그러니 괜한 절차로 시간을 더 허비할 필요는 없었다. 

윌터 하르트는 추가요금 목록을 두둑이 체크해둔 서류를 고이 보관해놓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메모리칩에 담아낼 무공과 마법을 제게 견식시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간단하게나마 등급을 매겨야 하니, 괜찮으시다면 이 마공학 무기를 써주십시오." 

스윽. 

윌터 하르트가 커다란 서류가방을 펼치자, 그 안에는 목검과 목창을 비롯한 온갖 무기들이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어렴풋한 마력이 느껴진다. 일반적인 연습용 무기들은 아니었다. 

그것을 확인한 레반이 머리를 벅벅 긁자. 

"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글로톤 콥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등급에 불과합니다. 마공학 무기에 저장된 데이터의 보안절차 역시 철저합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이래서 지하 방공호를 미팅 장소로 선택하셨습니까. 생각보다도 배려심이 깊으십니다." 

"······허허." 

윌터 하르트는 예상한 반응에 쓰게 웃었다. 

경지에 오른 마법사 혹은 무인은 자부심과 자존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괴물이다. 자기가 익힌 무공과 마법에 등급을 매겨보겠다고 말하면, 저렇듯 크게 불편해하거나 꺼려하기 마련이다. 

윌터 하르트는 일부러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본사 방침상, 무공이나 마법을 메모리칩에 옮겨 담아내기 전에 그 수준을 필수로 확인하고 분류 작업을 거칩니다." 

그에게도 마땅한 이유는 있었다. 

차마 메모리칩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지하 시장에 불법복제된 채로 돌아다니는 조악한 삼류 양산칩 따위를 제작하려는 게 아니니. 

"무공으로 예를 들자면 쉽게 익히고 사용할 수 있는 삼재검법(三才劍法)은 최하급으로 보고, 무당 코퍼레이션의 태극혜검(太極慧劍)은 최상급으로 치는 셈이지요. 그에 따라 칩의 성능과 사용기한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정 불편하시다면—" 

후웅! 

"?" 

순간, 설명하던 윌터 하르트의 눈앞이 삽시간에 흐릿해졌다. 

그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레반은 어느새 손에 맞는 마공학 목도를 하나 집어들고, 기수식을 취한 상태였다. 실로 신속했다. 

이윽고, 현묘한 보법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 레반은 때로는 강맹하게, 때로는 유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목도를 뻗어갔다. 

후웅! 

비어있는 사방위를 목도의 끝이 점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검법의 초식이 물흐르듯 연계되고 있는 것이다. 

언뜻보면 평범한 검법과 다르지 않은 듯했다. 

"······!" 

하지만, 레반의 이어지는 움직임을 자세히 뜯어보던 윌터 하르트의 동공은 서서히 확장되어갔다. 

'별 건 아닌 듯한데, 빈틈이 전혀 없군.' 

힘을 빼고 간단히 휘두르는 듯 보여도 각각의 초식마다 단번에 풀어낼 수 없는, 심유한 이치가 담겨있는 검법이었던 것이다. 마치 경지에 이른 무림계의 명숙이 펼치는 검법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우우웅— 

우우우웅— 

이곳은 과거 라그나로크 시티 연방군이 전시벙커로 사용하던 대형 방공호. 이 넓은 방공호 안쪽이 목검에서 뿜어져나간 경파와 풍압만으로 웅웅 울려대고 있으니··· 

불현듯, 방공호 내부가 점점 묘한 기류로 채워져간다. 

레반이 연신 펼쳐내는 검을 견식하던 윌터 하르트의 눈은, 점점 놀라움을 넘어 경탄에 가깝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그는 처음 내렸던 '별 건 아닌 듯하다' 라는 평가를 정정해야만 했다. 

'······수준이 대단히 높은 검이다.' 

윌터 하르트는 비록 마법사이나, 무학의 수준을 판단하는 눈이 훌륭하다 자부하는 사람이다. 

메모리칩을 제작하는 글로톤 콥에서 평생을 근무하며 수준높은 무학과 마법을 끊임없이 보아왔고, 기본적으로 자신도 7레벨의 경지에 오른 상위 마법사였다. 

지금 레반이 펼쳐보이는 저 검법은 어지간한 메가콥의 무학에도 절대 뒤쳐지지 않았으며, 누군가의 것을 모방해 펼쳐내는 검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아는 한, 저런 검법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진신무공을 내놓을 리는 없으니······설마 무공을 새로 창안할 정도라는 말인가?'

마법계 대기업, 글로톤 콥의 부사장. 

그는 지금껏 대단한 기업가나 재벌 고객들을 상대해왔다. 

사업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칩을 양산하려면, 건실한 대기업은 되어야 그나마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테니. 

그런데 설립한지 석 달된 신생 기업이 거대한 계약금까지 지불해가며 칩 양산을 원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첫 번째로는 그만한 자금이 없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이제 막 시작한 기업 따위에 그 정도로 가치있는 무공이나 마법을 익힌 자가 없기 때문에. 

'이유가 있었군.' 

허나 지금, 윌터 하르트의 주름진 눈가는 황금덩이라도 찾은 마냥 번쩍 뜨여있었다. 

레반은 분명 힘을 빼고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데도, 검이 주는 고유의 분위기에 그의 목이 빳빳하게 굳었다. 

'보통 희한한 검법이 아니라 무조건 고가에 팔린다. 상급으로 분류해도 부족함이 없겠어.' 

각각의 초식이 보여주는 검로는 분명한 이치를 담고 있으나, 그리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상당히 효과적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무공에 아예 문외한인 자들도 저 검법이라면 익힐 수 있을 듯했다. 

그러니, 더 이상의 평가는 무의미했다. 

뚝! 

문득, 레반의 목도가 빛살처럼 허공을 가르며 멈추었다. 윌터 검에 홀려서 빠져들었던 사이 무공의 시연이 금세 끝나버린 것이다. 

"맡겨만 주십시오." 

윌터 하르트는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조금 전에 레반으로부터 저 검법이 새겨질 무공칩의 위탁 판매권까지 훌륭히 따냈기 때문이었다. 위탁 판매의 수수료를 얼마나 책정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팽팽 굴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첫 무공을 선보인 레반이 쥔 목검을 툭툭 털어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지금 보여드린 것은, 한 오백쯤으로 책정합시다." 

"오백······입니까?" 

오백이라면. 

저 귀한 무공을 500만 크레딧에 팔아넘기겠다는 뜻인가? 

윌터 하르트는 레반의 말을 듣자마자 격하게 손을 저었다. 얼마나 격하게 저었는지 주변의 마나 입자들이 반응하여 그의 손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500만 크레딧은 너무 값싸게 책정한 겁니다. 3년 전 쿼롯 가문에서 한정판으로 냈던 마법칩보다도 더 가치있는 물건이 될 겁니다. 크레딧은 쌓아두었으나 훌륭한 검법을 보유하지 못한 무림계 기업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도 남을 듯—" 

다음 순간, 그의 말을 끊어먹은 레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500크레딧으로 합시다. 500만 말고." 

"······?" 

순간, 짧은 정적이 일었다. 

윌터 하르트는 황당한 얼굴로 레반을 쳐다보았다. 

저자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아무리 물건 가격은 파는 놈 마음이라지만······. 

500크레딧이면 고작해야 배양육 버거 몇 개 값인데, 천문학적인 크레딧이 지척으로 아른거리는 상황에 저게 무슨 뜬금없는 농담이란 말인가. 

사실상 무료로 배포하는 것과도 다름없지 않은가. 

'고객이라고 오냐오냐 해주었더니, 확실히 정신세계가 특이한 자로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고 치면 그것은 더욱 큰 문제다. 

수준높은 무공을 단돈 500크레딧에 팔아먹는다면, 기존의 무림계 세력들이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을 터. 

마땅한 명분 따위야 만들어내면 그만이니, 즉각 손에 손을 잡고 라그나로크 시티로 몰려와 저 젊은 영웅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다. 

위탁 판매를 맡은 본사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허허." 

그 어이없는 가정에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너무도 황당한 소리가 의문을 제기할 건덕지도 없었다. 

애초에 실현 가능성 자체가 없는 정신나간 짓이라, 윌터 하르트는 레반의 저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방군 상대로도 욕을 뱉는 사내가 그깟 농담쯤 못하겠나. 

"재미없는 농담은 이제 그쯤—" 

"다음으로 뿌릴, 팔아치울 마법은 이겁니다." 

"······?" 

타닥. 

레반은 돌연 목검을 바닥에 던지더니, 손가락 두 개를 모아 앞으로 뻗었다. 

방공호 내부의 마나가 허공으로 빨려 올라간다. 막대한 양의 마나가 레반의 손가락 앞쪽에 금세 응집했다. 

작게 응집된 마나 입자들은 둥그렇고 기하학적인 모양의 마법진을 그려냈고, 잠시 뒤 그 마법진 안에서는 두꺼운 마나기둥이 육중하게 뻗어나왔다. 

악마라도 소환되듯, 위압적인 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꽈지지지지직! 

곧, 그 마나기둥은 합금으로 제작된 방공호 벽을 통째로 우그러뜨렸다. 깊숙이 파인 골의 깊이가 보통이 아니었다. 

"······." 

그 파괴력에 윌터 하르트의 사고회로가 잠시 정지한 사이. 

레반은 무심한 얼굴로, 또다시 재미없는 '농담' 을 꺼내 놓았다. 

"이건 한 300크레딧으로 할까요."

#155화. 다짐

#155화. 

······수많은 인간이 벌레처럼 죽었다. 

죽은 이들이 선했는지, 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도망치던 인간들이 도살당하듯 죽고, 고통스럽게 변절해가는 꼴을 하릴없이 지켜보았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가끔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살인 경험이 수두룩한 인간이라도, 그런 규모의 살육을 직접 겪는다면 기분이 더러워지는 건 당연지사. 

그러니 나름 유쾌하게 지내보려 해도, 로키라는 말이 나오면 괜히 기분이 이상하게 문드러지는 것이다. 한낱 옷가지에 들러붙은 먼지처럼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었다. 

무얼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는 전생의 더럽고 추악한 기억처럼, 그저 하는 수 없이 등에 지고 사는 거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다음 생까지. 

나는 그것이 못내 불쾌했다. 

* * * 

우르르르릉— 

방공호 내부가 요란하게 흔들린다. 레반의 팔을 타고 유형화된 마력이 길다란 창 모양의 형태를 갖추었고, 세상을 잘게 떨어울리며 빛줄기처럼 쏘아졌다. 

쿠지지직— 

마력으로 빚어낸 장창은 방공호 벽면을 두부처럼 가볍게 뚫고 들어갔다. 창날이 사라져 마나 입자로 흩어질 즈음, 뒤쪽의 창대 부분이 여러 갈래로 펼쳐지며 회전했다. 

갈려나간 금속 조각들이 분진처럼 휘날렸다. 

그리고 잠시 뒤. 

마력의 장창이 뚫고 들어간 방공호 벽면에는 커다란 크기의 인공 동굴이 생겨나 있었다.

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적어도 수십 미터 이상 파고 들어갔을 것이다. 

윌터 하르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7레벨의 마법사인 그라도, 레반이 보이는 신위에 감히 평가를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황당한 위력이란 말인가?' 

마탑의 마법사들은 다 저런 힘을 가지고 있는가. 

그럴 리가! 소속이 마탑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수식이 복잡한 고위 마법은 아닌 듯한데 위력은 터무니없이 강하니, 마법사가 마법을 눈앞에서 보고도 당혹스러웠다. 

헌데, 그것보다도 윌터 하르트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드는 사실이 있었으니. 

'가진 밑천이 바닥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윌터 하르트의 기준으로 중, 상급은 될 법한 훌륭한 무공과 마법들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심지어 하나같이 기존에 본 적도 없는 새로운 것들이며, 숙련도나 완성도 역시 흠잡을 곳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능력들을 모두 배워 익혔는가? 

호기심이 일다 못해 그의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였다. 

그때, 레반이 조용해진 윌터 하르트 대신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건 마나회로 세 개, 5레벨 정도면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천 크레딧에 팔아도 됩니다." 

"······5레벨 마법사가, 방금 그 마법을 쓴다는 말입니까?" 

윌터 하르트가 되물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레반은 무언가를 골똘히 고심하는 얼굴로 혼잣말을 뇌까렸다. 

"마법쪽은 조금 복잡하겠군. 회로가 몇 개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그러는 사이. 

파괴의 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윌터 하르트는 반쯤 체념을 하고 말았다. 

'저런 능력을 가감없이 보여주는데, 과연 내게 무슨 요구를 더 해올지······.' 

레반의 재미없는 '농담' 이 사실은 한낱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알아챘을 때는, 이미 이 사안에서 쉬이 발을 뺄 수 없을 정도로 깊숙하게 관여해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였다. 

쿠구구궁······ 

현재, 방공호는 걸레짝이 되어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거대한 늑대가 할퀴고 물어뜯어 놓은 듯, 합금들이 녹고 우그러지고 찢어져 사방팔방으로 철의 가시를 뻗어 놓았다. 

윌터 하르트의 발 앞으로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발파용 다이너마이트 수백 발이 터뜨려도 꼴이 저렇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지하 깊은 곳에 설치된 방공호가 아니었다면, 시체들의 대규모 습격으로 오해한 연방군이 즉시 출동했겠지. 

부스럭— 

윌터 하르트는 구덩이 건너편에서, 또 무언가를 하려는 레반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자의 안광은 호수처럼 맑았다. 그 누구보다 진심인 것이다. 

'저 젊은 나이에 이룩한 경지로 보아 확실히 세상에 다시없을 괴물이다. 괜히 연방에서 영웅으로 밀어준 것이 아니야. 하지만 저 정도로 정신이 나간 작자여서야······.' 

수준 높은 칩을 제작하면, 누구나 그 가치를 인정받아 비싼값에 팔리길 원한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듯이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헌데 저 레반은, 공짜와 다름없는 가격에 팔겠다고 한다. 

혼란을 야기해 연방의 세력도를 뒤집어 엎으려는 것인가? 

···단지 농담으로 한 얘기가 아니라는 점이 참으로 두려웠다. 

콰르르르릉—! 

저 건너편의 벽면과 천장이 무너진다. 

레반은 윌터 하르트가 잠깐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또 새로운 마법을 꺼내 시연한 것이다. 

윌터 하르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그만하면 더 보여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충분합니다. 그러니 이 상황을 이해시켜 주시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연방 장군들을 만나봐야 하나." 

레반의 뜬금없는 딴소리에, 윌터 하르트의 음성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고객님께 이제는 진중한 답변을 드릴 차례인 듯하군요. 몇백 크레딧에 칩을 판매한다면, 한 개 생산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적자가 누적되어 사업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죄송하지만 다른 기업을 알아보셔야겠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셨는데, 다시 한번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계약금은 빠른 시일 내에 돌려드리겠습니다." 

윌터 하르트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는 원래도 노인이었는데, 레반과 마주한 그 짧은 사이에 폭삭 늙어 등이 굽어가고 있다. 마치 레반의 회로에 마력을 빼앗겨 몸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윌터 하르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기업과 기업간 계약 아닙니까. 책임과 신뢰가 달려있는 일인데, 이렇게 쉽게 깨버리시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그쪽과 계약하려고 담보잡고 사채까지 빌렸어요. 목숨을 걸었단 말입니다." 

"······?" 

"계약을 일방적으로 깨려거든 그쪽에서 우리 채무를 대신 변제해주십시오. 빌린 사채의 일일 이자가 50퍼센트라, 지금까지 불어난 이자만 따져도 계약금의 몇 배는 될 겁니다." 

"······." 

"그 사채꾼놈들 아주 악질입니다." 

상대가 등이 꼽추처럼 굽은 노인이든 뭐든··· 

레반은 절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사내가 아니었다. 

그의 협박성 발언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떠나려면 신체부위를 내놓아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러나 윌터 하르트는 예상했다는 듯, 즉각 입을 열었다. 

"채무는 반 컴퍼니의 사정이니 알아서 하십시오." 

윌터 하르트는 칩의 적당한 가격과 경제적 가치를 따지고 설명해가며 설왕설래할 시기는 한참전에 지났다고 판단했다. 

이제는 배짱 싸움인 것이다. 

"또한. 계속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시면 자사 쪽에서도 법적인 대응을 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지금 누가 막무가내입니까. 내 무공과 마법을 전부 봐놓고서 막상 계약을 파기하겠다니." 

"그 부분은 진심으로 유감입니다만, 계약은 속행할 수 없겠습니다." 

상황이 정 곤란해지면 법원으로 가면 된다. 기업 간 소송은 한 쪽의 힘이 월등하지 않은 이상 질질 끌리기 마련이니. 

······허나. 

그것은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게 세상이라는 걸 잠시 망각한 판단이었다. 강한 쪽은 명분을 만들어내는 세상 아니던가. 

"윌터 하르트씨, 화를 잘 참지 못하는 친구가 우리쪽 사내에 대기하고 있어요. 딜런이라고." 

"······군벌 딜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 친구가 진짜 막무가내입니다. 법 없이 살던 친구라, 법적 대응을 하면 당신네 본사 빌딩이 뜨거워질 수도 있는데 정말 일을 이따위로 해도 괜찮겠습니까?" 

"······." 

순간, 윌터 하르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9레벨 고위 마법사. 로키 시티의 악명높은 대군벌. 

호랑이 앞의 곶감마냥, 이름만 나와도 대기업의 부사장쯤은 오줌을 찔끔 지리게 만드는 존재. 

레반이 딜런을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리자면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 

"음." 

하지만 윌터 하르트의 표정이 더없이 심각해지자, 레반은 갑자기 노인을 괴롭히는듯 하여 일말의 죄책감이 들었다. 

오늘은 나쁜 일로 부른 것이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뜻 한번 이루자고 그 빌어먹을 당가 놈들과 비슷한 짓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결국은 서로 한 발씩 양보하며 타협점을 찾아갈 시기였다. 

사위에 정적이 내려앉을 즈음, 레반이 본론으로 돌아와 먼저 제안을 건넸다. 

"300크레딧은 과하니 열 배를 늘려서 3천으로 합시다." 

"열 배를 늘려도 상황은 똑같습니다. 캐리어 티겟값 보다도 적고 원가 보전조차······." 

"좋습니다. 그러면 백 배 늘려서 3만 크레딧 정도로 합시다. 증권시장 개잡주도 백 배 오르기가 쉽지 않아요." 

"······처음부터 이럴 심산이었습니까?" 

윌터 하르트의 황당해 마지않던 눈은 더욱 침침해졌다. 

300크레딧이나 3만 크레딧이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레반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한발 더 양보해서, 위탁 판매 계약도 취소해주겠습니다. 제작 생산을 제외하고는 우리 반 컴퍼니가 맡아서 하겠습니다. 그래도 다른 기업과 문제가 생기면 그쪽이 좋아하는 법적 대응을 불사하시든가 하세요." 

"······." 

후우······. 

윌터 하르트는 허탈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기야 뒤에 벌어질 일의 여파같은 걸 꼼꼼하게 생각했으면, 라그나로크 수복전이 끝난 뒤 그런 연설을 했을 리가 없었다. 

윌터 하르트는 이제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눈앞의 이 사내는 적당히 말려서 될 게 아니라는 것을. 또한 애초부터 계약과는 상관없이, 코를 꿰어버릴 생각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의 가슴 어딧께의 혈관이 꽈악 막힌 듯했다. 노화와 스트레스로 인한 동맥경화일 수도 있으니 이른 시일내에 병원을 찾아가야 할 듯했다. 

다음 순간. 

윌터 하르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을 토해냈다. 

"······그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연방이 발칵 뒤집힐 겁니다. 매우 안 좋은 쪽으로 말입니다. 다른 기업과 세력들의 견제와 압박을 다 떠나서 생각해봐도, 고작 3만 크레딧에 그 무공을 구매한 자들이 과연 무슨 짓을 벌일 것 같습니까?" 

"열심히 실력을 갈고닦는 수련을 해야겠지요." 

"어렵사리 세워놓은 질서에 금이 가면 깨지는 건 정말 순식간입니다. 칩을 실제로 양산해 판매한다면, 필시 막대한 혼란이 전 연방에서 일어날 겁니다." 

"그럼 지금은 태평성대입니까." 

"······." 

"30년 뒤에 망하나, 조금 더 혼란스러워져서 20년 뒤에 망하나. 그게 뭐가 다릅니까." 

윌터 하르트는 그 질문에 입이 턱 막혔다. 

당장 몇달 전 로키 시티가 무너졌고, 밑바닥의 주민들은 여전히 반목하며 총을 쏘고 칼로 찌르기 바쁘다. 

메가콥과 대기업들은 그들보다 약한 기업들을 사냥해 해체하고 잡아먹는다. 연방의 공권력은 어찌된 게 강력한 기업보다도 못하다. 

말세라는 말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세상이 맞다. 

꿀꺽. 

그래도 윌터 하르트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혼란수습을 빙자한 온갖 명목으로 반 컴퍼니는 와해될 겁니다. 딜런이 굉장히 강력한 무력을 지닌 마법사인 것은 나도 압니다. 하지만 그라도 메가콥 여럿을 상대로 싸움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당신과 비슷하게 생각하던 이가 과거에 없었던 줄 아십니까? 전 세대에 칠좌의 위에 앉아있던 '발할라의 현자' 마저 의논 단계에서 포기하고 접어버린 계획이란 말입니다." 

"허어, 정말 그렇습니까?" 

"그런 일을 벌이려면, 칠좌나 십이제쯤 되는 격외 초월자 여럿이 모여 궁리해야 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당신이 십이제급의 힘은 가지고 있어야 압박을 버텨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것을 계속—" 

실로 피토하는 윌터 하르트의 열변이 이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 

콰직! 

무언가 부서진 방공호 사이의 철판을 찢으며 안쪽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다음 순간, 그 불청객의 칙칙한 적색 눈동자가 열변을 토하던 윌터 하르트를 지그시 응시했다. 

삽시간에 밀려오는 기이한 고통과 어지럼증. 

"!" 

피부 살갗이 다 벗겨지는 듯한 감각이 윌터 하르트의 내장을 마구 헤집어놓았다. 7레벨 마법사인 그일진대, 한낱 타인이 뿜어내는 마력에 속이 진탕된 것이다. 

이윽고. 

"앞으로 수련을 매우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 

영문을 몰라하는 윌터 하르트의 귓전으로, 레반의 실소 섞인 목소리가 유유히 마력을 타고 들려왔다. 

"부사장님 말대로, 내가 십이제의 지위라도 올라서 버텨내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 * *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나는, 호텔 방에 앉아 분주히 움직이는 휴머노이드 노동자들을 바라보았다. 

반 컴퍼니 본사 빌딩이 올라갈 대지는 이제 막 구획정리를 끝낸 뒤, 기초공사에 들어간 참이었다. 커다란 중장비들이 땅을 파고 지면을 다지고 있었다. 

쑤욱! 

그때, 옆으로 딜런의 솥뚜껑 같은 손이 불쑥 나타났다. 딜런은 창 밖의 광경에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빌딩은 무조건 라그나로크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해야 한다. 바벨탑이라고 알지?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거대해야 내 권위가 좀 선다." 

딜런은 저번부터 거대하고 웅장한 형식의 빌딩을 원했다. 

그는 사채 시장을 비롯한 밑바닥 지하경제를 박살내고 싹 쓸어내면서도, 건설사를 알아보러 다니는 데까지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아주 입장이 확고해서 이견을 낼 생각은 없었다. 

내가 계속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자니, 딜런도 진행상황이 궁금한지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나저나 칩은 어떻게 하기로 했지? 그쪽과 얘기는 잘 끝났나?" 

나는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노동자들을 보며 답했다. 

"열심히 노력해 보겠다고 다짐하더군."

#156화. 며칠 걸리지 않는다

#15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