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군벌 도시, 로키 3
#124화.
탓!
로키 시티 외곽, 습기찬 뒷골목.
하수구 바깥으로 스멀대며 나오는 역한 증기.
매립도 하지 못해, 중구난방으로 뻗쳐있는 전선.
술과 약에 취해서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쓰레기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형광옷을 입고, 흉흉한 기세까지 풍겨대며 순찰을 도는 군벌 자경단.
시티의 전체적인 배경은 붉고 어둡다. 좋다. 외관이 형편없고 법도 없어 뵈는 게, 딱 웨스트 정크타운이 생각나는 곳이다. 정크타운을 크게 부풀려 놓으면 이런 꼴이겠어.
나는 고아하고 위세높은 발할라 마탑, 선한 도기가 느껴지는 기암괴석 지대의 화산, 극도로 호화로운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보다 이런 뒷골목의 음산한 공기가 더 반가웠다.
로키는 사내에게 퍽 어울리는 도시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지금 로키 시티에 내리자마자, 종후표놈만 들고 뛰쳐나와 뒷골목을 정글처럼 헤쳐나가고 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골목을 쾌속하게 내달린다. 싸구려 간판과 슬레이트 지붕을 번갈아 밟아가며 시티의 중심지로 향한다. 몸을 가볍게 유지하니 작은 소음도 없었다.
[ 누, 누구······컥! ]
생각해 보니 총이 없기에 내친김에 권총도 빼앗아 찼다. 뒷골목을 배회하던 양아치 한 놈을 기절시키고는 다시 내달렸다.
로키는 군벌들이 사방에서 옹립한 막장도시. 외견으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총은 필수다. 검집에 귀중히 모셔진 칼보다야 시각적인 자극이 확 와닿는 무기이지 않겠나.
"음."
나는 권총을 조금 만져보다가, 돌연 손목을 틀어 격발했다.
탕—!
- 악······!
그러자 저 먼 곳에서 들리는 신음.
근처 빌딩 옥상에서 엄폐중이던 파수꾼이었다. 놈은 골목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는 나를 운좋게 발견했는지, 막 총구를 돌려 조준하던 참이었다.
아마도 타 세력에서 파견한 끄나풀인 줄 알았으리라. 놈은 어깻죽지에 총탄을 맞고서 황급히 몸을 숨겼다. 거리가 점점 멀어지니 신음조차 희미했다. 무시하고 계속 이동했다.
잠시 뒤,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리더니 동네가 삽시간에 분주해졌다. 나는 사방팔방으로 기감을 넓게 펼치고 있었으므로 곧장 알 수 있다. 내가 있던 뒷골목 방향으로 쓸만한 고수들이 몰려들었다. 놈들은 훈련이 잘 되었는지, 멀리서부터 포위망을 형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간 뒤였다. 이런 변방에서 의미없이 투닥댈 이유가 없다. 이곳이 어느 군벌세력이 다스리는 동네인지도 관심 없다. 나는 신동경까지 조용히 지나만 갈 테니, 모두 무시하고 속도를 더욱 끌어올렸다.
로키의 대로변을 피해 골목을 주파하던 중, 뺨을 스쳐가는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순간 다리에 힘을 주어 공중으로 도약했다. 빌딩의 옥상 높이까지 솟구쳐 오르자, 근방의 도심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멀리 떨어져 있는 신동경의 랜드마크, 황금빛의 거대한 플라자 빌딩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나의 목적지다.
···이쪽 방향으로 가면 되겠군.
쾅!
그런데 허공에 체공하는 시간이 조금 길었던지, 주먹만한 총탄이 어디선가 쏘아져 마나 보호막을 때렸다. 그럼에도 마력의 수발은 아직 건재했다. 멀쩡히 내려서서 뒷골목을 주파하자, 총탄은 더 날아오지 않았다.
공권력이 포기한 도시. 총탄도 맞으면서, 멋대로 도심의 뒷골목을 활보하는 쾌감이 있다. 이제 그럴만한 힘도 차고 넘친다.
타앙! 타앙!
날파리가 꼬여, 중간에 발포를 몇 번 더 했다.
내가 총기를 안 쓴게 언제부터더라. 손에 부드럽게 감기는 방아쇠의 감각. 확실히 총처럼 효율적인 무기는 많지 않다. 나는 현재 계속 뭔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있다. 잡념 따위가 나의 굳은 심지에 침범할 여유는 없을 것이다.
후욱!
연이어 밀려나는 뒷골목의 광경. 경공으로 쏘아지는 나를 보고 놀라 몸을 움츠리는 주민들. 정확히는 평범한 주민들이 아니라 군벌 소속으로 보이는 실력자들. 그들은 느려서 덤벼들 생각조차 못했다. 한 5레벨급은 되어 뵈는데, 저리도 느린가.
나는 이후에도 가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로키 시티의 분위기나 주변의 지리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라그나로크 수복전때 박살난 군벌의 점령지가 아닌, 진짜 로키라는 도시. 그래서 나는 지나치는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아두었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그렇게 여러 정보를 담으며 경공을 펼친지도 30분이 지났다. 이제는 슬슬 로키라는 도시의 분위기가 읽혀간다. 로키는 지금, 많이 분주하다.
혹, 연방이 벌써 군벌세력 토벌을 천명했는가?
역시 상관없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내 걸음의 목적지는 오로지 신동경이니.
신동경은 로키 시티의 중심지가 되는 구역. 허공에서 본 그곳을 향해 나는 불켜진 상가의 간판들을 계속 밟으며 내달렸다. 큰 길이 있거나 벽이 가로막고 있다면 뛰어넘거나 부쉈다. 세상모르고 지나다니는 주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의 안색은 어둡다.
마피아와 온갖 군벌들이 세력 다툼을 하는 도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군벌세력을 별다른 대안없이 때려잡을 수 있었던, 하레니오 갱단같은 동네 양아치들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건 힘들 거다. 무리겠지. 마피아의 보스인 카스트라 뷔에탕은 9레벨 상위권. 모두가 껄끄러워하는 인형사. 사실 뷔에탕은 로키 상공에 캐리어가 떴을 때부터, 이미 나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수도 있을 수도 있다. 그것 조차도 상관없다. 곧 보게 될 테—
"미친 자식! 이제 그만 좀 멈춰봐라!"
"······."
순간, 종후표가 꽥꽥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정신이 번뜩 뜨였다. 나는 꽉 쥐고 있던 한쪽 손을 내려다봤다.
"음."
우직-
그간 앵무새 법기를 얼마나 꽉 쥐었는지, 진한 손자국이 남아 있다. 심후한 법력이 서서히 흘러나오는 앵무새 부리를 보자, 억지로 이어내던 생각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아까부터 계속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집중력 하나는 대단한데, 뭐 주화입마에라도 들 생각이었나? 이 백리뇌부 종후표는 누가 돌봐주고!"
청력이 워낙 좋은 탓에 귀가 웅웅 울린다.
생각이 끊어지고 조금은 침착한 시간이 찾아왔다.
아마도, 언평 선생이 법기에 담아둔 법력이 나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데 특효약인듯 하다. 아니면 종후표의 이성이 나의 발목을 붙잡는지도. 아무튼 나는 감성에 잠겨 간판 위를 내달리다가, 발걸음이 조금은 무거워졌다.
속도를 조금 늦추어 서며 말했다.
"왜."
"아까부터 말했잖나. 대가리가 깨진 거냐고. 카스트라 뷔에탕은 오래도록 살아 로키에 군림하고 있는 여인이다. 홀몸으로 죽이러 가겠다고? 무리다. 캐리어에 타있던 마탑 놈들은 이런 황당한 일을 왜 안 말리는 거지? 정 뭣하면 몇 명이라도 더 데려오는 건 어떠한가!"
"필요없다."
마탑의 인원들을 뷔에탕을 잡으러 가는데 뺄 수는 없다. 연방의 계획에 마탑이 들어있을 테니. 빼서도 안 되고, 애초에 뺄 생각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나 좋자고 마탑 전체를 개인적인 일에 끌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 빠지는 건 나 혼자로 충분하다.
음···이러니까 괜히 죽으러 가는 것만 같군. 살리러 가는 건데 말이다.
"마탑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이 종후표는 자그마치 2주간 그 구렁이 같은 사내와 대화했어. 이런 걸 용납할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 돌아가면 감정 폭발로 인한 급발진을 주장할 수 있다. 사고도 아직 안 났잖아! 네가 죽으면 이 종후표의 모가지도······."
"봐라."
"······."
화르륵—
나는 종후표의 격한 조언을 듣다못해 청록빛 마력을 일으켰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나를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이미 막았겠지.
이윽고 마탑주의 마력까지 확인한 종후표는, 목소리를 팍 깔더니 진중하게 설득했다. 작은 앵무새의 부리가 아기자기하게 흔들렸다.
"······무릇 사내라면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알고 직시해야 한다. 진정하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봐."
끼익-
나는 종후표의 그 말에 완벽하게 멈춰섰다.
어느 작은 도심. 고고하게 얇은 간판을 딛고 서있던 나는 그 위에 풀썩 앉아버렸다. 간판은 내 무게를 버티면서도 용케 구부러지지 않았다.
종후표 이 눈치 빠르고 영특한 놈.
그새 내가 사내다움에 집착하는 사실을 파악했나?
허나.
"종후표, 네 달변이 오늘만큼은 틀렸구나."
"?"
"하지 않아야 할 때보다, 해야 할 때를 아는 놈이 사내다."
"그게 뭐가 달라! 지랄같은 말장난이 아니던가!"
"주둥이 하나만 남은 너 백리뇌부 종후표가 죽지도 않고 여즉 살아있는 이유다. 나는 사람을 쳐죽이는데 이골이 난 놈이거든. 넌 운이 좋았다."
"······그렇다면 지랄이 아니군. 그 부분은 내가 틀렸다. 하지만 너는 무공이나 마법쪽으로는 천재일지 몰라도, 죽을 짓만 골라서 하는 정신병자로군. 확실하다."
완전히 설득을 포기한 듯한 말투.
사내의 다짐은 곧바로 종후표에게 전해졌다.
종후표는 나를 막을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했는지, 약간 급해져서는 부리를 놀렸다.
"그 이유가 뭔지라도 알려줘라. 죽어도 알고 죽자. 아니. 죽는다고 말하면 재수가 없으니 알고 살자. 무얼 해야 하길래?"
나는 캐묻는 종후표가 귀찮았으나, 끌고온 건 나라서 답해주었다.
"뷔에탕이 주변까지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지지부진하게 묵은 악연이라, 슬슬 담판을 지으러 가기로 했다. 정신을 파먹는 저주마법을 사용하는 인형사라, 괜한 아군은 성가셔서 상관없는 네놈만 말동무로 끌고 왔다."
이제 뷔에탕은 레나의 근처까지 마수를 뻗쳤고, 나는 뷔에탕이 장담했던 대로 로키 시티까지 기어와 뷔에탕을 애타게 찾아가게 되었다.
그 말에 종후표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그렇군. 이해했다. 하지만 뷔에탕이 약해졌대도 혼자는 무모한 짓이야. 로키출신 중에 뷔에탕을 싫어하면서도 잘 아는 놈이 있다. 이 종후표가 보증한다. 가면 뭐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동네 방네 소문내자고?"
"아이고, 싫어할 줄 알았다."
"하오문주가 단언했다. 뷔에탕은 앞으로 몇 년이나 처박혀 있어야 할 것이라고. 그는 이유없는 헛소리를 할 사내가 아니다."
청풍이도 발견하지 못했던 뷔에탕의 인형을, 7레벨인 루벤카가 기척을 느끼고 불태워 죽였을 정도. 뷔에탕은 확실히 약화된 상태일 것이다.
후우우—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항상 기감을 더 잘게 흩어 멀리 퍼뜨렸다. 혹여 시티의 다른 강자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최대한 얇고 세밀하게. 다만 기이하고도 특이한 뷔에탕의 마력은 집어낼 수 있게.
높은 곳에 서서 기감을 펼치자, 수많은 정보들이 밀려온다. 관청의 힘이 없고, 군벌세력들이 통제하는 도시답게 주변으로 건물이 마구 난립해있고 질서가 없다. 변방일수록 행정력이 모자라 그럴 것이다. 난립한 군벌들은 영역을 그어놓고,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관계.
로키는 누가 잡아먹혀도 이상하지 않은 도시다.
"좋아. 좋다고. 이건 돌덩이에 대가리 처박기다. 대가리가 깨지면 우리만 손해야. 네가 죽고 나만 남으면 이 백리뇌부 종후표도 죽겠지. 그러니 잠깐 기다려봐라."
종후표가 머리를 데굴데굴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잔머리 굴리는 데는 최적화인 놈이라 조금은 기다려주었다. 끙끙대나 싶던 종후표는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자!"
"뭐냐."
"다른 방법 없다. 그냥 신동경까지 직진으로 가야겠군."
"좋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마침내, 신동경과 이어진 도로경계가 보인다.
내가 있는 이곳은 신동경과 인접한 소도시였다. 그리고 이곳과 신동경은, 수르트 남북경의 경계처럼 확실하게 갈라져 있었으며 큰 도로 하나만 건너면 거대한 도심이 섬처럼 존재한다.
웨스트 정크타운의 확장판같던 이전과는 달리, 극히 화려한 신동경의 풍경이 눈앞으로 펼쳐진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호화로운 빌딩숲. 로키의 군벌들이 어째서 신동경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동경.
마피아의 근거지이자, 로키 시티에서 제일가는 번화도심.
수많은 유흥가가 다닥다닥 밀집되어 있으며, 연방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카지노가 존재하는 곳. 고객들을 유치해야하니 수많은 호텔 역시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군벌이 무력으로 다스리는 도시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동네.
우우웅—
그렇게 신동경의 경계선 근처에 이른 나는, 언평 선생의 상계 법부적을 하나 꺼내어 기운을 주입했다. 도로 주변에 경비들이 포진해있으니 이목을 속일 필요가 있었다.
곧, 종후표와 나의 기척이 감추어지며 경비가 삼엄한 신동경의 경계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동경의 도로경계를 통과하자마자, 어떤 행인에게 시선이 갔다. 훤칠하게 잘생긴 사내. 도저히 못 본척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 그에게서 기이하고 끈적한 마력이 느껴진다.
훤칠한 사내의 눈은 차가운 생선처럼 죽었다.
대놓고 뷔에탕의 인형이나 노예가 확실했다.
느껴지는 기운은 6레벨급이 안 되는 수준.
저건, 넉넉잡아 한 합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나는 법부적으로 기척을 숨기고 있는 상태.
지금은 그냥 조용히 지나가는 게 맞겠으나, 갑자기 앙굴리마라 6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모든 것은 번뇌이고 인연과 이어진다.
그렇다면 저 인형과의 만남이 번뇌인가?
갑자기 베어버리고 싶은 번뇌가 극렬히 찾아왔다. 그래. 번뇌를 자르면 인연이라 했으니, 당장 잘라버리자.
스각—!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뽑혀나온 광선이 공간을 절단했다. 오색빛 검기가 무지개처럼 폭사했고, 실같은 검기가 공간을 자르고 나눈다. 사내의 인형은 잘리는 소리조차 없이 후두둑 무너져 내렸다.
잠시간의 통쾌한 손맛이 지나가고, 무너져 내린 사내의 등판 조각에서는 역시나 일전에 보았던 그 마나문신이 타올랐다.
인연이 맞군. 악연도 인연의 한 종류이니.
스아아악—
곧, 그 기이하고 끈적한 마력은 지금만을 기다렸다는 듯, 스멀스멀 공중으로 기어올라 어떤 형체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기이하면서도 실로 강대한 마력. 하지만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의 그 역한 마력은 허공에서 조금씩 뭉쳐 사람의 형체를 만들더니···
[ 왔구나? 거봐. 내가 올 거라고 했잖아. ]
어느새 고혹적인 미소를 짓는 카스트라 뷔에탕의 형체가, 잘린 시체 위에 요염하게 앉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째서 공격하지 않는가.
나의 방문을 이미 예상하였는가.
뷔에탕의 마나 형체를 마주 본 내가 그리 생각하던 순간.
[ 저기. ]
뷔에탕의 형상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마력으로 만들어내 간드러운 목소리에 귀에 곰팡이가 앉은듯 가려웠다. 나는 귀를 벅벅 긁었다.
[ 저 황금색으로 빛나는 플라자 꼭대기 층으로 와. 깨끗하게 목욕하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꼭 사지 멀쩡히 살아서 올라오렴. ]
"······."
스아악—
그리고 제 말을 마친 뷔에탕의 마력은 자연스레 흩어졌다. 강대한 마력이 모두 사라지자 사내의 시체도 녹아 사라졌다. 나의 품속에서 바짝 굳어있던 종후표가 두렵다는 듯 부리를 딱딱거렸다.
— ······망측한 미친년.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망설임없이 걸음을 옮겼다.
로키 신동경에서 가장 높고 거대한, 황금빛의 플라자로.
#125화. 군벌 도시, 로키 4
#125화.
기이한 마력이 일렁이는 눈동자.
"······."
그 여인은 넋을 잃고 창밖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의 애달픈 시선은 신동경 길거리를 걷는 한 남자를 놓치지 않았다.
후후—
"많이 바뀌었네."
분명 처음보지만, 외형이 바뀐 정도로는 감히 여인의 눈을 속일 수 없다. 자신의 마력으로 저주를 걸어 속을 헤집어 놓았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때는 한낱 장난감, 생의 여흥을 돋구어줄 잠시간의 대체품 따위로 여겼거늘······.
"쓸만해졌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름 큰 키에, 옷 위로도 드러나는 단단한 체격. 누구 앞에서도 절대 숙이지 않을 듯 꼿꼿하게 편 목. 야인처럼 길게 기른 머리칼에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무심한 눈매.
그리고 전신으로 은은하게 풍겨대는 기개.
약을 꽂아 빚어낸 몸으로, 반쯤 벌거벗은 채 육체미를 과시하며 신동경 길거리를 지나는 남자들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단연 독보적인 존재감이다. 여인이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남자의 평가는 어느 때보다도 후했다.
뭐라 정확히 집어 설명할 수 없는, 여인이 이토록 관심을 보이게 만들 만큼 특이한 남자.
여인은 왜인지 각별한 느낌이 들어 길거리의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꽤 오랜 시간 눈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감히 신동경에 당당히 칼을 차고 들어와 피를 묻힌 남자. 신동경이 어떻게 돌아가는 도시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주민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신동경의 입장에서는 불청객임이 확실하다.
하지만 여인이 너무도 애타게 기다린 불청객이었다.
곧, 그 남자는 다시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저 이유모를 당당함. 여인은 갑자기 몸이 달아 더욱 붉어진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목에는 잘렸다 꿰맨 듯, 길게 그어진 흉터가 있었다.
몇 달 전의 상처가 욱신거려 몸이 달아오른 걸까.
······아니면.
"너무 괜찮네. 진심으로 기대돼."
혀로 입술을 훑은 여인이 붉고 얇은 가운을 꺼냈다.
적어도 이 플라자에 있을 때는, 아직까지 여인의 앞까지 제 발로 걸어온 남자가 몇 없었다.
연방에서도 이름난 몇을 제외하고는 죄다 약해 빠져서 쓸모없는 남자들뿐. 몇 번 가지고 놀면 곧장 질리는 물건들 뿐이었다.
여인은 고혹적으로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목욕을 하기 위해 몸을 돌리던 그 짧은 사이, 길바닥에 서있던 남자는 무정하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서걱.
저 길바닥에서, 기척을 완벽히 숨기고 있던 누군가의 목이 달아난다. 깔끔하던 신동경의 도로가 여인이 만든 '폐기물' 들의 피로 물들어가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것을 돌아본 여인의 입에서 달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아."
몸이 달은 여인은 저 남자가 과연 어디까지 올라오나 구경해보기로 했다. 여인은 소중히 들었던 목욕가운을 잠시 접어두고는, 유리창과 가까운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한 편의 영화라도 보는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레반은 인파를 헤치며 길가를 걸었다.
신동경 어디에서든 보이는 황금빛의 플라자 빌딩.
아마 레반처럼 눈이 좋다면, 로키 시티로 대상을 넓혀도 어디서든 보이는 건축물일 것이다. 600미터쯤 되는 높이를 가지고 있는데도, 옆으로도 워낙 뚱뚱한 탓에 주변의 풍경을 다 내리눌러 버리니까.
저 황금빛 플라자는 로키 시티의 등대와도 같다.
저벅.
방금 사람 한 명을 도축해버린 사내는, 무심한 모습으로 신동경의 본 길거리에 진입했다.
그런 레반을 붉은빛의 카펫이 맞이했다. 사람이 다니는 길 양쪽에 장식해놓은 네온 라인이 간접 조명을 비춘다.
신동경의 길은 마치 실내처럼, 굉장히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인 듯했다. 사방으로 눈이 즐거운 외관 조명들이 즐비하다. 중원무림, 수려한 한 폭의 그림같았던 항주의 밤거리를 연상케한다.
신동경은 발두르 시티의 중심업무지구보다도 깨끗했다. 군벌들의 전쟁 지역이라는 말이 정말로 무색하게, 상점 주인들의 얼굴에서도 즐거운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레반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거리를 걸었다.
이리도 큰 도박과 유흥의 도시라면, 인생을 포기한 채 말썽을 피우는 미친놈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고 총성이 나는게 일상일 터인데, 그런 일은 없었고 길거리에 멈춰있는 흔한 마약중독자도 없다.
"깨끗하네."
"그렇다. 마피아들의 근거지인 신동경이니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악명높은 마피아의 관리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헛짓거리를 함부로 했다간 조용히 끌려가 무슨짓을 당할지 모르니 아무도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쥐도새도 모르게 카지노의 지하 VIP실같은 곳에서 끔찍한 고문을 죽기 전까지 당하다가, 결국에는 분쇄기에 들어가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인즉 이 신동경이란 곳은, 마피아와 척을 지지만 않는다면 생각보다 꽤 살아가기 좋은 도시인 것이다.
가끔 군벌간의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군벌들이 미치지 않는 이상에야 제 돈줄이자 전리품이 될 주민들을 마구 죽여댈 리는 없으니.
그러나 신동경에 처음 발을 들인 레반은 시초부터 척을 졌다. 그렇기에 이런 풍경을 오래 즐기지 못함이 아쉬웠다.
곧, 레반은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뷔에탕이 지칭했던 황금빛의 플라자 빌딩이 들어와 눈에 박혔다.
"멋지군."
황금빛의 플라자는 신동경에서도 중심이다. 저런 거대한 건축물은 한 도시의 랜드마크이자 선망의 대상이 된다.
저 플라자 빌딩을 쟁탈한 자가 신동경의 진정한 지배자. 신동경을 노리는 군벌들은 저 건물을 정복하기 위해서 각자의 구역에서 힘을 키운다. 최근의 패자는 계속 카스트라 뷔에탕이었고, 앞으로도 카스트라 뷔에탕일 것이다.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 꼭 살아서 올라오렴. ]
꼭 살아서 올라와라. 부디 사지 멀쩡한 채로 편히 올라와달라는 얘기였다. 그 말은 어디 한군데를 잘라버리겠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카스트라 뷔에탕이 살아서 올라오라 했으니, 신동경의 손님인 레반은 뷔에탕의 말대로 사지 멀쩡히 올라가줄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많은 피를 봐야할 것 같다. 이 신동경을 지배하는 대가리인 뷔에탕을 만나야 살생을 멈출 수 있으리라.
뭐, 레반은 이미 뷔에탕의 꼭두각시를 썰어버렸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플라자 앞까지 오백 미터쯤 남았군.'
사람이라면 한 번쯤 궁금할 만한 도박장이나 고급 콜걸들이 즐비한 주점등, 온갖 유흥거리가 널려있는데도 레반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직진했다. 어떤 흥미로운 유흥거리도 레반의 발걸음을 돌려세우지 못했다.
그렇게 레반은 평화로운 길거리를 걷기 시작했고.
불현듯, 광선을 길게 뽑아 순식간에 발검했다.
서거걱—
— ······커헉!
나아간 광선의 검날은 인파 속에 숨어있던 자를 단칼에 베었다.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하던 신동경 거리에 찰나간 혈선이 생기며 사람의 머리와 몸이 분리됐다.
7레벨급은 될 법한 실력자. 7레벨부터는 어느 조직이든 대우가 훌륭해서, 마피아의 핵심간부급은 아니라도 꽤 쓸만했던 인력일 것이다.
은신해있던 자는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 어, 어떻게······.
은신자는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광학미채 기술이 탑재된 로브같은 거라도 두르고 있었나? 은폐 기술이 상당히 감쪽같아 놀라우면서도, 레반은 마피아들이 저런 값비싼 장비를 쓰고 있다는 것이 신기해 고개를 주억였다.
다만, 레반은 이미 그들의 마력을 특정해둔 상태라 걱정은 없었다. 주변의 마나와 동화되는 마법사의 체질은 많은 이점을 가져다준다. 구태여 신경을 기울이지 않아도, 미세한 마력의 파동이 더욱 생생히 피부로 느껴진다.
헌데 그 은신한 놈의 죽음보다도 레반에게 인상을 준 것은, 사람을 죽였는데도 행인들은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레반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단칼에 베어버린 이유도 있겠으나, 본질은 뷔에탕의 마력 때문인 듯했다. 하기야 뷔에탕이 오래 지배해온 도시이니 무엇인들 못하리.
그때, 상황을 보던 종후표가 느닷없이 한 마디를 보탰다.
"좋은 움직임이었다."
"어, 고맙다."
둘이나 죽여 이제는 기수를 돌릴 가능성이 없으니, 칭찬이라도 해서 고래를 춤추게 하려는 셈이다.
레반은 대강 대답을 던지고는 다시 걸었다.
길바닥에 피가 튀니 주변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신동경의 풍경은 아직도 평화롭고 여유롭기만 하건만, 틀린그림 찾기의 퍼즐처럼 조금 다르게 행동하는 인간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제정신인 놈은 몇 없겠군."
대부분이 뷔에탕의 저주 마법에 걸려있는 상태. 레반보다 격이 높은 뷔에탕의 마력이므로 해주하려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했다. 허나 그럴 여유는 없다.
쾅!
도약 한 번에 수십 미터의 공간을 좁혀버린 레반이 길게 뽑혀나온 검기를 휘둘렀다. 길가에 위치한 고급 위스키바의 기둥과 벽면이 절반으로 나뉘었고, 그 안에서 암기를 쥐고 숨어있던 꼭두각시가 잘려 쓰러졌다.
서거걱—
그리고,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뷔에탕의 마력을 지닌 꼭두각시들이 일시에 쏟아져나온 시점이.
레반은 내공 분배하기 위해 검기만을 써가며 썰어갔다. 광선의 날도 오늘따라 섬뜩한 것이, 이렇게 백여 명을 베어도 이후 전투에 지장이 가지는 않을 듯했다.
덤벼드는 놈을 베고, 숨어있는 놈을 찾아 찌르고, 저격병을 쏴 죽였다. 수많은 꼭두각시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면 마피아라는 조직 전체가 뷔에탕의 직접적인 수하가 아닐까 하는 잡생각이 들었다.
빙글—
레반은 잡념들을 떨치기 위해, 뒤에서 조용히 덤벼들던 인형에 장력을 때려부었다. 이번에는 꽤 잘생긴 사내였다.
콰과광!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신동경을 울렸다. 피분수와 함께 폭사한 꼭두각시 사내는 형체조차 없이 지워졌다. 그러나 죽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죽은 사체에서는 반드시 기이한 마력의 덩어리가 솟구쳐 레반의 정신에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들러붙은 마력까지 손수 떼어버릴 시간이 없다.
레반은 그저 꼭두각시들의 명복을 빌며 우직하게 전진했다.
이윽고.
화려한 신동경의 거리에서 한바탕 살계(殺戒)가 벌어졌다.
*
콰지지지직-!!
8레벨급 꼭두각시의 목이 부러지는 소리.
"······."
조금 전까지 살아서 개구리처럼 펄떡대던 꼭두각시의 부러진 목을 붙잡아 내던진 레반이 고개를 들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황금빛 플라자가 보였다.
그는 이제서야 빌딩의 '입구' 앞에 선 것이다.
이 플라자 빌딩 앞에 서기까지 적어도 백 기가 넘는 꼭두각시를 베었다. 뷔에탕의 마력은 꼭두각시가 죽자마자 빠져나와 레반의 몸을 파고들어왔다. 저번과도 같이, 정신을 침식하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는 마력의 조각들.
레반은 고스란히 그것을 버텨내야 했다. 게다가 내공을 최대한 분배하며 싸우다보니 조금씩 공격을 허용하여, 전신은 피투성이였다.
내공과 마력을 적절히 분배하며 싸웠다고 생각했는데도, 진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리라.
또한 지금도, 뷔에탕의 기이한 마력은 레반의 정신을 잡아먹어 강탈하려 하고 있다.
"역시 마피아로군. 입구에 서는 것도 쉽지 않다."
레반이 그리 말했고, 종후표가 답했다.
"이 정도면 쉽게 통과한 것 같은데. 어떤 로키의 군벌도 이렇게 무식하게 쳐들어와 살계를 펼치지는 않을 거다."
"그런가."
대충 긍정한 레반이 하늘 위를 보았다.
금빛이다.
어디서 폭탄이라도 구해와서 건물 자체를 무너뜨리고 싶으나, 워낙에 거대하니 구조가 보통 단단할 것이 아닌 데다가 마법적인 방비 역시 단단하게 되어있을 것이라 깔끔히 포기했다.
후읍.
그리고는, 진각을 밟아 제자리에서 발을 크게 굴렀고.
쾅!
그대로 공중으로 솟구친 레반이, 플라자의 벽을 수직으로 달려 올라갔다.
두두두—
레반이 밟으면 밟는대로 황금빛의 외벽 유리창이 우르르 깨져나갔다. 그 안에 있던 이들이 크게 당황했으나 레반은 신경쓰지 않았다.
최상층에 당도하는 데에는 정말 순식간이었다.
철컥.
레반은 플라자의 최상층 부근에 이르러 광선을 납검하고는 두 팔과 손바닥을 곧게 폈다. 마법으로 체공을 보조한다. 단전부터 타고오른 기운이 그의 손바닥에 모여 폭사했다.
—!
마법적인 처리를 해놓았던 플라자 최상층의 보호막마저, 레반의 경력이 가득담긴 쌍장에 거세게 터져나갔다.
저벅.
레반은, 예리한 유리조각을 털며 창가에 내려섰다.
그리고.
"······."
얇고 붉은 가운을 입은 한 여인이, 바로 앞 소파에 편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가운 안으로 언뜻 비치는 여인의 풍만한 나신.
"안녕."
그 여인은 구하기도 힘든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레반에게 환영 인사를 건넸고.
다음 순간, 레반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문을 뗐다.
"······이런, 아줌마는 아니잖아."
레반은 이딴 아줌마를 보기 위해 큰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왔는가! 라며 한탄할 준비까지 다 마쳐놓았으나, 최상층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놀랍게도 고혹적이면서 수려한 외모를 가진 젊은 여인이었다. 눈을 사로잡는 마력이 상당했다.
그래서 일단은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푹!
레반은 눈앞의 바닥에 광선을 검집째로 꽂고는 털썩 앉았다. 참을 수 없는 노곤함이 밀려왔다. 억지로 눈을 떠 돌렸다. 플라자 최상층에서는 수족관과도 같은 창으로 로키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어지간한 저격총따위는 코웃음 칠 정도로 두꺼운 유리창을 깨버렸으니, 언제 머리가 뚫려도 이상치 않겠군. 좋다.
잠시 뒤, 레반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누가봐도 뇌쇄적인 표정을 하고서는.
후후-
카스트라 뷔에탕은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들었다. 인형사라는 이명조차 조심성이 많을 것만 같다. 그런 여인일진대, 곧바로 앞에 나타나줄 리는 없으리라 생각한 레반이 문득 물었다.
"뷔에탕, 내가 왜 로키 시티까지 기어온 것 같나."
스윽-
여인이 다리를 꼬더니, 와인잔을 돌리며 답했다.
"이대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워서가 아닐까?"
"뷔에탕 네년이 두려워하는 건 하오문주겠지. 숭무교주이고. 내가 그 사내와 생각보다 친하다."
"······풋."
느닷없는 친분 과시에, 여인은 달뜬 한숨을 쉬더니 와인을 몇 번 홀짝였다.
"······."
레반은 그런 여인을 보며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아직도 뷔에탕의 마력은 거대히 뭉쳐 정신을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피도 몸 바깥으로 흥건히 흘러나왔다. 외적인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바로 그때.
여인이 요염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우리, 첫 만남 기억하니?"
그야 당연했다.
레반은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인상적인 일이었으니 기억에 남을 수 밖에.
[ 내가 죽은 저놈보다 더 튼실할거다. 바지라도 까서 보여주면 믿겠나? ]
[ 로키 시티에 와서 나를 찾아. 직접 몸으로 확인해보고 마음에 들면 살려줄게. ]
발두르 시티의 시체공장에서, 분명 대화가 저렇게 흘러갔었다. 저주를 걸어놓고는, 같이 밤을 보낸 뒤 마음에 들면 살려주겠다는 식의.
헌데 저 얘기를 가장 먼저 꺼내놓는 걸 보아하니···.
아줌마같은 힐난을 듣고서도 밤일이 궁금한 건가.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이나 신념이 있다. 그에 따라 살아간다. 물론 그딴 거 없이 대충 살다 죽는놈도 많지만. 보통은 삶의 목적이 있는 법이다.
"······."
그리고 레반이 듣고 보기에 카스트라 뷔에탕이라는 여자는, 섹스에 미친 요녀가 분명했다. 어떤 곤충은 교미가 끝나면 수컷을 잡아먹는다던가. 그것도 본능이라 그런 것인데, 놀랍게도 저 뷔에탕이 해왔던 행동거지와 비슷하지 않은가. 정사를 나누고, 질리면 잡아먹고.
그러므로 뷔에탕은 본능대로만 사는 년이다. 뷔에탕의 뜻대로 정사를 나누다 확 칼로 찔러버릴까?
하지만 그러려면 하나의 문제를 풀어내야했다.
'저 여인이 정말 뷔에탕의 본신인가?'
아니면 뷔에탕이 그저 공들여 만든 수많은 인형중 하나일 뿐인가. 대단한 강자들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힘들어 놓친 전력이 몇 번이던가. 여인의 몸에 안력에 집중해도 희뿌연 안개만이 보이는 듯하다. 사람인듯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묘한 기운이.
'진짜 복잡한 년이군.'
아무튼, 그렇다면 좋다.
털썩!
검집을 끌러놓고 앉아있던 레반은 뷔에탕의 질문을 듣자마자, 돌연 대(大)자로 드러누워버렸다.
"?"
의아한 여인의 시선이 레반을 훑었고.
바닥에 편히 누워버린 레반이 말했다.
"지금은 힘들어서, 손가락 하나도 까딱 못하겠다."
그 말에.
여인의 얼굴이 살짝 구겨지며 인상이 변했다. 아름답고 고혹적인 미소가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잠시였다. 여인의 얼굴은 금세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았다.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첫 만남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 직접 확인한다는 핑계로 욕정을 풀고 싶은가? 그럼 죽이든 살리든 네 마음 가는대로 해봐라."
"······?"
"자고로 나는 다 포기했으니 누워 있겠다. 안 그래도 지쳤는데, 한낱 인형 따위와 밤일을 하는 게 무슨 재미냐?"
"······."
그렇게, 느닷없이 뻗어버린 레반은 눈을 감았다.
여인을 앞에 둔 채로, 그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중원무림에는 시대마다 정신나간 색마가 하나둘씩 있었다.
비단 색마뿐 아니라, 흡정공같은 정신나간 사술을 익힌 요녀도 있었고 말이지. 사실 색을 유독 밝히는 자들은 동네마다 한 명씩 있기 마련이다.
다만 무공의 고하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나 별호가 다르다. 색(色)을 심히 밝히는 것으로 마(魔)까지 붙을 정도의 고수라면, 못해도 초절정 이상의 무위를 지닌 놈이었다.
우스운 것은, 그 색의 화신들은 가진 무위가 강해질수록 색을 탐하는 것이 점점 심해지고, 변태스러워진다는 사실이었다. 독특한 본능이 이성을 누르고 거리낄것 없이 스며들어서 그렇다.
원래 본능과 이성은 사이좋게 반반나눠 공존하기가 힘들다. 무림에서 이름을 날린 색마들은 지닌 무공의 경지가 깊어질수록, 더욱 변태적인 욕구를 거세게 분출하며 무림을 혼란에 빠뜨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카스트라 뷔에탕은 그 색마들보다도 더 높은 경지를 이룩한 여인.
더해서 뷔에탕은 이미, 남자 없이는 하루도 못사는 색욕의 화신으로 잘 알려져있다. 남자와의 잠자리를 극히 밝힌다는 소문이 세간에 파다하게 퍼진지 오래.
······욕정에 잡아먹힌 자들은 행동 하나하나가 유별나서, 이따금 괴상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도 밤을 보내보고 싶다면······."
그렇기에 일단 대자로 누워버린 레반은, 소파에 떨떠름하게 앉아있는 여인 앞에서 입을 열었다.
"그런 인형 말고, 네 본신으로 와라."
"······."
"그럼 나도 기쁘게 받아주마."
레반은 여인의 묘한 시선에도, 요지부동이었다.
#126화. 군벌 도시, 로키 5
#126화.
예상치 못한 정적이 흐른다.
최상층에는 요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도 않는 레반.
스르륵-
그를 바라보던 여인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인의 몸을 가리던 붉은 얇은 가운이 흘러내렸다.
눈처럼 흰 피부의 나신이 베일을 벗은 것이다.
실로 육감적이고 고혹적인 미인.
거기에 더해 끈적하면서도 기묘히 사람을 홀리는 분위기에, 사내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혹할법한 광경이었다.
허나, 레반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는 물색있는 사내임을 자처하는지라, 저런 '가짜' 나신에 욕정이 일지는 않는 것이다. 아무리 한창때인 청년의 몸이라도 그간 살아온 세월이 있었다.
후우우—
깨진 유리창 안쪽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침대와 거울, 소파등의 편안한 가구만 놓여있는 플라자 빌딩의 최상층.
"본신?"
괴상한 레반의 반응에 헐벗은 여인은 입술을 가볍게 짓씹었다.
이상하다.
어떤 누구도 자기 본신과 인형을 쉬이 구분할 수는 없을 텐데.
"무슨, 본신은 네 앞에 서 있잖아?"
"그게 본신이라면 아줌마라는 말에 화를 낼 리 없다."
"······."
여인은 즉시 인상을 구기면서도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할 말을 찾아봤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저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 ······흐음. ]
깜빡-
황금빛 플라자 빌딩 어디선가, 카스트라 뷔에탕의 본신이 눈을 떴다.
실제로 최상층에서 레반을 기다리고 있던 고혹적인 여인의 육체는, 카스트라 뷔에탕이 공들여 꾸며놓고 마력을 이어놓은 '교접 인형' 에 불과했다.
남자와의 성행위만을 위한 인형. 그저 아름다운 여인의 육체가 한심한 수컷들을 홀리고 다루기 좋아 사용하고 있을 뿐, 뷔에탕의 본신은 플라자 최상층에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저 남자는 백 기가 넘는 인형과 전투를 벌였다. 신동경의 길거리에는 뷔에탕이 소중히 모아온 인형들의 사체가 가득 널려 있었다. 그들의 피는, 신동경 거리에 깔린 카펫에 스며들고 있다.
그래도 뷔에탕은 상관 없었다. 이미 몇 번 가지고 놀다 질린 사내들이고, 대신에 매우 흥미로운 먹잇감이 제 발로 나타났으니까. 그것도 아주 맛있게 잘 익은 먹잇감이다.
교접 후에는 마음에 들면 곧장 자신의 인형으로 만들어 여생을 함께할 것이었으며, 마음에 들지 못하면 처참하게 가지고 놀다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카스트라 뷔에탕은 교접 인형과의 정신적인 교감을 높이기 위해 근처에 특별한 방을 준비해놓고는 즐길 준비까지 마쳐둔 상태였다.
그런데······.
이토록 잔뜩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서는 막상 재미없이 나온다 이거야? 가만히 누워있을 테니 죽이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아니.
그따위 무기력한 반응을 보려고 기다려준 게 아니야. 그렇게 시시하게 끝낼 일이라면 수르트 시티에도 가지 않았어.
툭···툭···
카스트라 뷔에탕은 손가락을 툭툭 두들겼다.
[ 게다가 몸을 섞고 싶다면, 본신을 드러내라? ]
처음에는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바닥에 뻗어버리니, 아무래도 정신을 공격하고 있는 자신의 마력이 효과를 보았다고 여겼다.
강대한 자신의 마력이 지금도 저 남자의 정신력을 시험하고 있다. 그렇기에 본래 지금쯤이라면 지칠 대로 지쳐 마력의 뜻대로 움직여야만 했는데······.
그랬는데······.
저 남자는, 어째서 아직까지 멀쩡한 것일까.
이전에는 저주마법도 제 힘으로 흩어내지 못하는 수준이라 발할라 마탑까지 가서야 겨우 풀어냈던 자가, 이제는 그 몇 배나 되는 마력을 혼자서 버텨내고 있다고?
그새 9레벨의 벽이라도 훌쩍 뛰어넘은 걸까 아니면.
[ 그래, 나의 힘이 예전같지 않아 그렇겠구나. ]
화산 근방에서 하오문주에게 당한 후유증이 아직도 뷔에탕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위험했다. 그러니 뷔에탕 그녀로서는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할 시기였다.
하지만.
현재 나신으로 변한 인형의 목덜미는 익은 복숭아처럼 붉다. 인형과 마력으로 이어진 뷔에탕의 몸도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다는 얘기.
저 남자가 뷔에탕의 인형들을 무참히 죽인 것과는 관계없이, 그녀의 강력한 성욕은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다. 현재 뷔에탕에겐 저 남자의 전투를 보며 쌓인 욕구를 풀어줄 도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도구는, 저 남자여야만 하는데······.
방금의 전투를 보고부터 너무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순순히 넘어오질 않는다. 정신력도 생각보다 강하고.
뷔에탕은 머릿속이 점점 흐려지는 듯해 초조하고 애가 탔다.
도구가 눈 앞에 있는데, 쓸모없이 지체되는 시간이 아깝다. 저 남자를 눕혀 몸을 섞어보고 싶은 욕망은 들불처럼 일어나 머릿속을 괴롭혔다. 주체하기 힘든 그 욕구를 겨우 억누르는 중인 뷔에탕은, 점점 탁상을 치는 속도가 빨라졌다.
툭···툭···
카스트라 뷔에탕은 신동경을 벗어나지 않는 한, 함부로 본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수르트 남경으로의 원정은 특별한 경우에 해당했다. 수많은 인형을 효과적으로 조종하려면 본신이 가까워야 하기 때문이다.
조종하는 인형들을 통해 세상과 교감하고 움직인다. 마력을 눌러 담아둔 인형은 곧 뷔에탕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인형은 싫고 본신을 꺼내 놓으라니. 저런 말은 '마피아 토벌전' 때나 들어봤던 말인데······
정말로, 버릇이 없는 남자다.
"네 말대로 로키 시티의 카스트라 뷔에탕을 찾아왔다. 사지 멀쩡히 올라오라기에, 다 붙여서 올라왔다. 헌데 환영인사는 발가벗고 유혹하는 인형이 끝인가."
"이름이······레나였나?"
남자가 다시금 말문을 열자, 이번에는 뷔에탕도 인형의 입을 빌려 맞받아쳤다. 그녀가 조종하는 인형의 혀가 뱀처럼 움직였다.
레나라는 이름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찰나간 굳었다.
"······."
"얼굴 보니까 맞구나. 그 꼬맹이가 그렇게나 소중해?"
이윽고.
"여기까지 직접 올라온 것도 기특하고, 하오문주가 신경쓰여 심하게 굴지는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는데······상당히 주제넘게 행동하네."
스아아악—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뷔에탕은 기세좋게 마력을 조종해 레반의 정신을 본격적으로 침범했다. 성욕이 들끓어 어서 굴복시킨 다음 색정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 레반은 역시나 요지부동이었다.
정기신의 균형도 틀어지고 정신적인 경지도 뷔에탕보다 아래에 머무르던 예전이라면 당연히 버티지 못했겠으나, 지금의 레반은 넉넉히 버텨내고 있었다. 이룬 경지가 그때와는 격이 달랐다.
피투성이인 외형에 비해서 크게 다치지도 않았다. 그저 피를 많이 본 탓에 진이 빠졌을 뿐.
그 뒤로도, 뷔에탕의 정신공격을 레반은 버텨냈다. 정신을 침범하려는 뷔에탕의 마력을 여유롭게 막아내는 레반. 고요한 둘의 대결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기를 무려 십분여.
[ ······계속 버텨? ]
부득-
뷔에탕은 진해져만 가는 농밀한 욕정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이를 갈았다.
남자는 플라자 최상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이미 자기 노예가 되었어야 했다. 분명 그랬어야 했다고.
어째서인지 상황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카스트라 뷔에탕은 점점 더 몸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츄릅-
자신이 조종하던 여인의 통제조차 버거워 침을 흘릴 정도였다. 이제는 머릿속에 해무가 낀듯 너무도 흐려졌다.
적어도 몇십 년간 욕정을 이리 오래 참아본 적이 없다. 원하면 취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딴 고민을 하고있어야 하지?
오로지 남자를 탐하고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변절까지 마다하고 로키의 군벌로 남아있는 뷔에탕이다.
······터져나온다.
계속 이러다간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올 거다.
아니나 다를까.
[ 하······. ]
누워있는 남자의 혈관 하나하나가 뷔에탕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흐르는 땀과 피, 최상층의 시원한 공기마저도. 모든 것이 뷔에탕의 본신을 부르는 듯했다.
"레나란 년, 죽여줄까? 그냥 일어나."
결국 뷔에탕은 더 늦어지기 전에 여인을 조종해, 스스럼없이 레반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 남자를 게걸스레 탐해버리—
서걱.
무언가, 순식간에 목이 잘려 허공을 날았다. 정신 침식을 버티던 레반이 바닥에 꽂아둔 검집에서 광선을 뽑아 여인의 목을 그어버린 것이다.
뷔에탕도 당황스러워할 정도로 쾌속한 검이었다. 이전까지는 사용하지 않았던 기술.
여태까지 숨겨두고 있었던 건가?
콰과과광!
목이 날아가고 나서야 방 안을 휩쓸어 버리는 패도적 기파.
그의 전신에서 일어난 그 거대한 기운은, 방 안을 엉망진창으로 뒤집어 놓고서야 사라졌다.
레반은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뷔에탕, 내게 와라."
"······."
"또 인형을 보낸다면 가차없이 베고 나가겠다. 하지만 본신으로 온다면 얼마든지 밤을 보내줄 수 있다. 그리고."
"?"
"그 대가로 레나는 내버려 둬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하지."
"······!"
인형들의 목도 서슴없이 베고 올라온 남자였다.
방금 같은 검법을 쓴다면, 인형만으로도 어쩔 수 없다. 더해서 마력을 통한 정신 침식도 통하지 않는다. 도망치려 한다면 분명 까다로울 것이었다.
그런데, 의지가 굳어보이던 저 남자가 처음으로 간절히 청한다.
"그 꼬맹이만 내버려두라고?"
뷔에탕의 뇌리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듯했다.
그녀의 이성이 억지로 눌러놓았던 욕정이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려 한다.
뒷목을 시작으로 그녀의 전신이 뜨겁게 물들었다.
쉽게 겪기 힘든, 특정하고 자극적인 이 상황이 뷔에탕의 이상적인 욕구를 더없이 부추겼다.
콰곽!
와중에, 레반은 바닥에 꽂힌 검집에 다시 광선을 납검했다. 인형을 보내면 얼마든지 더 베어주겠다는 듯. 꼭 서약을 하는 기사처럼.
[ 아아······진짜로? 고작 그걸 위해서? ]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어 버리자, 뷔에탕은 더 이상 인내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고작 저 말 한마디에 쾌감의 절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로키 신동경의 지배자인 뷔에탕은, 색욕이라는 인간의 본능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자리를 지키던 이성도, 점차 본능에 밀려 문드러진다.
아끼던 인형들이 대거 죽었음에도, 저 남자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음에도, 이제 뷔에탕의 정신은 오직 한 곳에만 쏠려있었다.
보고싶다.
저토록 단단한 남자가 침대위에서 제발 그 여자만큼은 살려달라며 울부짖는 꼴을 보고싶다. 욕구에 몸부림치다 결국 좌절하고 절망하는 꼴을 눈으로 보고싶다. 처절하게 가지고 놀고 싶다. 무참히 꺾어버리고 싶다.
세상에 그렇게 사랑스러운 꼴이 또 있을까?
······지금의 상황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이상향이다.
뱃속 깊은 곳부터 울컥거리며 솟구친 역한 욕망이, 뷔에탕의 뺨을 불그레하게 달구었다.
뷔에탕에겐 마약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성적 쾌락.
세상의 모든 것이 환하게 다가왔고, 더 이상 흥분을 감추지 못한 뷔에탕이 수분 가득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그러면, 다 벗어봐. ]
그 말에, 남자는 실제로 입고있던 옷을 망설임없이 벗어 깨진 창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총기는 물론이고 그 어떤 것도 없는 완벽한 나신.
목이 사라진 여인의 몸처럼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되었다. 주변에는 이제 남아있는 옷가지가 없었다.
뷔에탕은 입에 한가득 고인 침을 삼키며 이어 말했다. 설마 이것도?
[ ······바닥에 박힌 검도 던져버려야지? ]
콰득!
남자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검집을 뽑았다.
로키 신동경의 지배자인 뷔에탕을 몇 번이나 당황시킨 남자가, 무장해제까지 해가며 제 여자를 지키기 위해 몸을 기꺼이 바치겠다는······그 식상하면서도 결연한 의지와 기개.
이제는 가치가 있다.
본신을 보이고도 남을 가치가.
저 남자는 감히, 본신과 직접 몸을 섞을 가치가 있다.
휙!
남자가 마침내 검집까지 창밖으로 던져버리자, 마력을 통해 그것을 느낀 카스트라 뷔에탕의 입은 찢어질듯 벌어졌고.
[ ······. ]
이제 뷔에탕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전신을 부르르 떨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뚜벅.
뚜벅···.
흥분을 숨기지 못하고 달아오른 여인.
카스트라 뷔에탕이, 플라자 최상층의 방 안으로 날아 들어간다.
뷔에탕은 자신이 지극히 아끼는 8레벨의 인형 여럿을 사방면에 세우고, 얼굴과 몸은 성녀처럼 천으로 가린 채 레반의 앞에 나타났다.
최상층의 방 안으로 서서히 발을 들이자—
아까전 기파에 뒤집어진 침대는 세워져 있다. 거기에는 조금의 수치스러움도 없는 표정의 레반이 뷔에탕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무기도 무엇도 없다. 창밖으로 전부 던져버렸으니. 검을 귀신같이 쓰는 남자가 검을 던졌다. 말인 즉, 이제 어떠한 대응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 아름답고도 결연한 광경에, 끝까지 경계하던 뷔에탕의 이성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 ······하아. ]
뷔에탕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했다.
인형들을 뒤에 세워둔 채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녀의 역한 본능이, 녹아 사라진 이성 위에 자라났다.
뷔에탕은 끔찍하리만치 붉게 달아오른 육신에 본능을 내던졌다.
콰곽!
우선 뷔에탕은 그 남자의 목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참을 수 없는 욕정이 일어 뜨겁게 입을 맞추기 위해서. 이 멍청하면서도 기개있는 남자를 철저하게 유린하고 싶어서. 달아오른 숨이 후욱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스걱-
입을 맞추기도 전에.
뷔에탕의 앞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사람의 살갗이 주욱 갈라지는 듯한 이상한 소리.
분명, 그녀의 몸에서 난 소리는 아니었다.
첫 교접을 방해받아 눈가를 살짝 찌푸린 뷔에탕이 천천히 고개를 내리자, 그 이유가 눈에 들어왔다.
줄줄 흘러나오는 피.
[ ······자해? ]
레반이 어떤 기미도 없이, 갑작스레 복부를 할복하듯 가른 것이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모여 있었는데, 이미 복부의 상처가 벌어져 피가 새어나왔다. 찰나간이라 말릴 수도 없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푸욱.
레반은 실실 웃으며 복부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푸화악!
갈라진 상처 안쪽에서, 핏덩이와 함께 웬 종이들을 한움큼 잡아 꺼냈다. 욕정에 녹아 문드러진 뷔에탕은 이 상황을 상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옷도 칼도 전부 버렸잖아. 그런데 이제와서 왜?
[ 너. 지금. 뭐해? ]
뷔에탕이 대체 무얼 하냐는 듯, 실실대는 레반과 눈을 맞추자.
"아줌마."
[ ······. ]
다르다.
이건 뷔에탕이 고대했던 그 기개있는 모습이 아니다.
결연했던 의지는 모두 연기였다는 듯, 한 순간에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단단하면서도 간절했던 남자는 여기에 없었고, 이제는 삼류 갱단원처럼 껄렁거리는 남자가 침대 위에 있었다.
"입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
[ 너— ]
그렇게.
뷔에탕이 뜨거운 본능 속에서 헤어나와 이성을 되찾기도 전에, 뱃속에 숨겨두었던 법부적을 꺼낸 레반이 한발 먼저 움직였다.
텁!
한 손으로는 목을 조르는 뷔에탕의 팔을 도리어 우악스럽게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언평 선생이 쥐여준 법부적 뭉치에 기운을 흘려넣었다.
"급해도, 이는 닦고 왔어야지."
이윽고.
콰아아아앙—
부적 뭉치에서 법력의 파동이 천둥처럼 터져나오더니, 뷔에탕이 끌고온 인형들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을 밀어내고 어떤 공간을 만들어냈다.
서로 몸을 뜨겁게 붙잡은 둘 밖에 들어올 수 없는 세상.
언가의 '진법' 이 신동경의 꼭대기에 생겨난 것이었다.
#127화. 군벌 도시, 로키 6
#127화.
우우우웅—
언기원보(言紀元寶).
자그마치 상계 법부적보다 더 품과 값이 많이 들어간다는, 진주언가의 고대로부터 내려온 진법부적. 기운을 주입하면 즉시 진법이 생겨나, 외부로부터 몸을 숨기고 보호할 수 있는 귀물이다.
언기원보는 원영경에 오른 언평 선생과 신선 수염의 수도자가 함께 법력을 불어넣어 레반에게 넘긴 물건. 공격의 수단은 이미 충분하니, 특별한 변수를 만들 부적이나 방어등에 효과적인 법부적을 요청하자 내어준 것이다.
다른 언가의 수도자들은, 이 법부적에 들어간 재료가 진주언가의 기둥뿌리 하나를 뽑을 정도라며 크게 생색을 냈었지.
실제로도 귀한 물건인 것이 사실이었다. 8레벨급으로 보이던 뷔에탕의 인형들도 한꺼번에 진법 바깥으로 밀어내버릴 정도이니.
레반은 로키 시티에 오기 전, 이 언기원보를 품이 아닌 몸속에 넣어 숨겼다. 살을 째고 안쪽에 넣어 말끔히 봉해버렸으며, 의료용 나노로봇 덕에 상처와 흉은 금세 사라졌다.
예상치 못하게 무언가를 숨기는 데에는 몸뚱이 안쪽만한 곳이 없다. 고통과 불편함, 비위생적인 면 정도만 감내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피에 진득하게 절여진 언기원보가 이제야 세상 빛을 본 것이다.
헌데, 진법의 중심축이 레반이 있는 침대였던지라—
현재 침대 위.
두 남녀는, 서로의 손을 꽈악 붙잡고 있었다.
"···."
[ ···. ]
그리고 목덜미가 달아올라 붉어진 뷔에탕을 코앞에서 바라본 레반은, 지금 꽤나 놀라고 있었다.
레반은 지금까지 뷔에탕의 행동거지로 보아, 카스트라 뷔에탕의 외모가 분명 추하리라 추측했다.
그런데 막상 보니, 레반의 그런 예상과는 괴리감이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뷔에탕은 놀랍게도 한 미모 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저 성욕을 도무지 주체하지 못하는 변태라서. 여인을 낮잡아 보는듯한 호칭에 괜히 민감했던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뷔에탕을 유심히 훑어보다 보니······.
'아름답더라도, 아줌마는 맞군. 양심에 찔릴 일은 없겠어.'
아무리 9레벨 상위권의 대단한 마법사라도, 거기다 짙은 화장까지 하더라도, 병원에서 리얼스킨으로 갈아엎지 않는 이상 세월이 훑고 지나간 흔적을 감쪽같이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다.
분명 예쁘장하고 매력이 있기는 한데, 막상 아가씨라고 불러주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는 연배로 보이니.
설령 반로환동(返老還童)으로 시간의 역행을 한 번 겪었더라도, 세월은 쉬지 않고 흐른다. 그러니 어떤 방식으로 30년이 젊어져도, 다시 30년이 흘러버리면 말짱 도루묵 아니겠는가.
카스트라 뷔에탕은 레반이 이 세계에 태어나기 전부터 악명을 떨친 거물이다. 지금까지 백 년 이상을 넘겨 살아왔대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아······. ]
레반이 그리 생각하는 사이, 카스트라 뷔에탕은 느릿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무림계에서 쓰는 진법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챘을 뿐, 뷔에탕은 진법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진법가와 마법사는 명백히 다르니.
하지만 위험하지는 않으리라 금세 판단을 내렸다.
직접 들고 다닐 정도의 소규모 진법. 시간이 지나 가진 기운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고, 진법 바깥에는 아끼는 자신의 인형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귀여운 잔재주를 쓰는구나.
적막한 진법 안을 둘러보던 뷔에탕의 눈은 밤알처럼 커다랗게 치떠졌으며, 눈동자는 핏줄이 터져 굳은듯 칙칙한 빛의 적안을 뽐냈다. 적안의 초점은 흐릿했다.
이윽고, 뷔에탕이 다시 고개를 돌려 레반을 바라봤다.
카스트라 뷔에탕은 마치 짐승처럼 침대 위로 달려들 때와는 달리, 상당히 나긋나긋해진 목소리로 뇌까렸다.
[ ······우리가 밤을 보내는 걸, 다른 이들이 보는 게 부끄러워서 이래? 진법도 굳이 쳐주고. ]
그러면서도 레반에게 틀어잡히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레반의 목덜미와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스윽- 스윽-
독사가 피부 위를 기어가는 것만 같은 뷔에탕의 손길. 이런 진법 속이라도 뷔에탕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기다렸던 정사를 당장 이어가는 것을 원했다.
둘은 아직도 침대 위에서 손을 맞잡은 채로 엉켜있다. 배가 찢어져 피를 흘리면서 밤을 나누더라도 색다른 기분에 좋을 듯했으며, 뷔에탕은 그저 이 남자가 울부짖는 꼴을 보고 싶어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노출은 영 내 취향이 아니긴 하지."
그러나 레반은 머리를 격하게 저었다.
뷔에탕의 손길을 털어낸 레반이 말했다.
"뭐, 아줌마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군."
[ 삐딱하게 굴지마. 이러다가 너 죽는다? ]
뷔에탕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레반에게 애원했다.
허나, 그 나긋한 음성속에 담긴 살심만은 진짜였다. 터질듯이 차오른 색욕이 가라앉은 자리에는, 분노와 화가 차오를 게 당연지사였다.
뷔에탕은 그토록 고대한 정사를 시작부터 망쳐놓으려 하는 레반의 행동에 실망하면서도, 기대감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죽으러 들어온 게 아니라, 죽을 생각이 없다."
레반은 들끓는 욕정에 초점이 흔들리는 뷔에탕의 눈을 직시하며 답했다. 그는 이미 단전에서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뷔에탕은 레반의 기운이 격렬히 요동치는 것을 느끼고는,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비웃었다.
뒤늦게서야 이러는 게 너무나 우스웠기 때문이다.
[ 바보 같구나. 이럴 거면 칼이라도 계속 들고 있었어야지? 솔직히 그 검법, 나도 많이 놀랐는데. ]
"걱정마라. 맨주먹으로도 싸울 줄 안다."
[ 내 뜻에 따라 움직이면, 분명 기분이 좋아질 거야. ]
"싫다고."
[ 넌···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
뒤엉킨 상태로 연신 대화를 나누는 둘.
그들은 얽히고설킨 매듭과도 같은 모습으로, 뷔에탕은 여태 레반의 목을 붙잡고 있었고 레반도 질세라 뷔에탕의 팔을 꽉 붙들고 있었다.
하나, 승기는 뷔에탕쪽이 완전히 잡고 있었다.
완력에 더해진 뷔에탕의 기이한 마력에 레반의 팔목 힘줄이 끊어질 정도였고, 목에서는 피와 진물이 줄줄 새어나온다. 조금만 더 파고들면 뼈까지 상할 것이다.
곧이어.
뷔에탕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듯, 절박하면서도 나직하게 말했다. 야릇한 분 냄새와 함께 따뜻한 숨결이 훅 불어왔다.
[ 레나도 생각해야지. 슬슬 버티는 것도 힘들지 않아? ]
꽈아악-
그러면서 더 강하게 목을 조르는 뷔에탕의 손길.
뷔에탕 본신의 마력과 레반의 육신에 침투한 마력이 공명을 일으킨다. 소름 끼치도록 강대한 마력이 그의 전신을 헤집었다.
그럼에도 레반은 실없는 웃음을 내보였다.
"이부터 깨끗히 닦고 오면 생각해 보겠다."
[ ······아아. ]
그 도발적인 거절에, 뷔에탕의 안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더 구겨질 수 없을 만큼 구겨진 뷔에탕이 불현듯 피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끔찍하리만치 불어난 욕정과 답답한 감정을 뒤섞어 입 밖으로 노성을 토해냈다.
[ 인형들이 없다고 혼자서 나를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이명이 인형사니까. 인형만 없으면 본신은 하잘 것 없다 생각했구나,나,나,나,나나나나나나······ ]
실로 기괴하게 메아리치는 뷔에탕의 음성.
순간, 칙칙했던 뷔에탕의 눈동자가 안광을 찾았다.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온 색욕에 잠식당했던 뷔에탕의 이성이 잠시간 돌아온 것이다.
[ 아무리 그래도, 8레벨급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하단다? ]
곧, 마력의 폭풍이 뷔에탕의 전신에서 일어난다. 수십 갈래로 갈라진 마력줄기가 만개한 꽃잎처럼 피어나 입을 벌렸다.
쩌저저적—!
가장 먼저, 그들을 받치고 있던 침대가 갈가리 찢어져 가루가 되었다.
색욕을 풀지 못해 분노한 뷔에탕이 작정하고 마력을 해방하자, 실로 막강한 존재감이 진법 안을 장악해나간다.
이전 세대의 십이제. 9레벨 상위권에 위치한 마법사.
하오문주와의 전투에서 내상을 입었다 해도, 또한 본 전력인 인형들이 없다고 해도, 뷔에탕의 거대한 마력 앞에서 8레벨인 레반의 기운 따위는 하찮은 발악으로 보였다.
쭈우우욱—
"흡!"
더해서, 레반의 정신을 공격하던 기이한 마력들이 영혼처럼 쑤욱 빠져나와 뷔에탕의 몸에 흡수되었다. 그녀는 인형들에 흩어뒀던 마력을 뽑아내 본신의 기력을 더 보충했다.
[ 하아······좋아. ]
목을 조르는 뷔에탕의 존재감이 점점 거대해진다. 그녀가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레반의 눈앞에 들이밀어 비벼댔다. 욕정을 참는 게 너무도 고통스러워 이를 악물었기에, 뷔에탕의 잇몸과 입술에서는 선혈이 주륵- 새어나왔다.
[ ······죽일 수 있는데, 죽이지 않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아까의 그 남자로 돌아와. 그 기개 가득했던 남자로 돌아와서 나를 즐겁게 해줘. 어서. 착하지? 어서! ]
뷔에탕은 본능과 이성의 충돌로 뜨거워진 육신의 부하를 감당하지 못하는 듯, 사지를 벌벌 떨며 뇌까렸다.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가 금세 또 사라졌다.
꽈아아악—!
심지어 손아귀에 실린 힘은 어찌나 대단한지, 버티고 있던 레반의 숨구멍이 드디어 막혀오기 시작했다.
"큽."
헌데.
레반은 압박감에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와중에도, 아까 전처럼 실실대며 입을 열었다.
"······이봐. 카스트라 뷔에탕."
[ 또, 날 자극해 주려고? 이제 그만— ]
"아쉽게도 이 진법 안에서는 너만 혼자다."
— 에라이!
휙!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음성에, 뷔에탕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장 두 눈을 의심했다.
웬 앵무새 모양의 물건이 심후한 법력을 풍기며 진법 안쪽으로 쏙! 들어오는 게 아닌가.
[ 무슨? ]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치뜬 뷔에탕은 차마 아무런 말도 뱉지 못했다.
당장, 강력한 인형들도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여길 어떻게?
설상가상으로······
앵무새의 부리에는 뭔가가 또 물려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선처럼 곧고 기다란 홍색의 검집.
바로 레반이 플라자 창 바깥으로 던져버렸던 애병, 백 기의 인형을 썰어버린 광선을 저 앵무새가 다시금 물고 들어온 것이었다.
* * *
— 에라이!
앵무새 법기에 담긴 종후표가 날개를 파닥였다.
언기원보로 만든 이 진주언가의 진법은, 언평 선생이 불어넣은 법력으로 구동된다.
그러니, 똑같이 언평 선생의 법력을 불어넣은 법기인 종후표는 진법 속으로 무탈히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뷔에탕과 레반이 얽혀있는 것을 한심하게 바라본 종후표가 날개를 파닥이며 외쳤다.
"미친 자식 같으니라고, 이 백리뇌부 종후표가 네 검을 가지고 왔다! 이 정도 선행이면 살려줄 만도 하잖아!"
종후표는 살기등등한 뷔에탕의 눈빛에 흠칫 놀랐다. 비록 두려움에 가까이는 가지 못했으나, 광선의 검집을 최대한 멀리 던졌다.
쿵.
광선이 든 검집은 그 둘의 도처에 떨어져 굴렀고, 레반과 뷔에탕 둘 사이에 즉각 묘한 시선이 오갔다.
아직도 뷔에탕과 레반은 서로 물고 물리는 뱀처럼 팔목을 잡고 있었다. 사실 이제는 잡고만 있는게 아니었다, 서로의 팔목을 통해 흉악하고 강대한 기운을 흘려넣어가며 소리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 상황에서, 바닥에 떨어진 검을 본 뷔에탕의 안면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듯, 뻗치던 열이 확 가라앉았다.
뷔에탕은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저건 안 돼.'
저 검은 절대로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만약, 아까 교접 인형을 죽였을 때의 그 고절한 검법을 쓴다면 지금 뷔에탕의 힘으로는 완벽히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뷔에탕의 전투는 죽음의 공포를 모르는 인형을 앞세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조종할 인형들은 진법에 막혀 들어오지 못한다. 본신 혼자 하는 전투는 뷔에탕에겐 익숙치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진법에 대한 조예가 없는 한, 쉽사리 나갈 수 없는 공간. 물론 마력을 한껏 때려 붓는다면 부술 수 있겠지만, 이 남자가 그걸 가만히 두고볼 리 없다.
[ ······. ]
새삼 무언가를 깨달은 뷔에탕이 눈을 찢어질 듯 치떴다.
욕정이 주체 못할만큼 터져나오는데 풀 수가 없는 상황이 반복되자, 이성의 끈을 아예 놓아버린 게 원인인 듯했다.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
앵무새가 물어온 칼을 보자, 어떤 구렁텅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시기각각 변화하는 위험을 느끼고는 이성을 되찾은 뷔에탕. 그녀는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 ······잠깐만. 왜? ]
"여태까지 잘 때려놓고 왜."
더해서, 레반의 깃털같이 가벼운 그 말투와 함께······
마음만 먹으면 목을 부러뜨릴 수 있던 레반의 목에서 갑자기 극히 강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뷔에탕은 문득, 레반의 나신을 확인하다 소리없는 경악을 질렀다.
[ !? ]
어느새, 강대하고 짙은 기운이 스멀스멀 일어나 레반의 전신을 갑옷처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급히 마력을 끌어올려 손에 힘을 더해도, 손가락이 밀려난다.
'······호신강기(護身罡氣).'
무림계에서도 위명을 떨치는 9레벨의 무인들이나 쓰는 기술. 게다가 강기의 농도가 극히 짙다. 이 정도의 기운은 몇 번 보지도 못했는데.
화르륵—
호신강기를 일으켜 뷔에탕의 외력을 밀어낸 레반은 즉시 마법으로 불길을 일으켜 복부의 상처를 지혈했다. 그 과정은 물 흐르듯 단번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레반은 지금껏 길러왔던 긴 머리칼까지 썩둑 잘라버렸다. 호신강기를 보고 입술을 강하게 짓씹은 뷔에탕이 꿈틀대는 레반을 공격하기 위해 마력을 더 증폭시키는 사이, 레반은 자른 머리칼을 허공에 뿌렸다.
화악—
자그마치 9레벨의 마법사 앞에서도 레반은 주변 마나의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 일단 뷔에탕의 손을 떨치려 전력을 끄집어낼 생각이었다. 다섯 개의 회로를 한계까지 가열시켜, 동화되는 마나를 허공에 뿌린 머리칼 쪽으로 이동시킨다.
스아악—
곧이어 잘린 머리칼을 매개로 레반의 마력이 듬뿍 깃든다, 잘린 머리칼 한올 한올이 레반의 마력에 의해 바늘같은 무기로 벼려졌다.
그는 내공으로 뷔에탕의 침투하는 기운을 막아내면서, 마나 회로를 가동해 마법을 허공에 뿌려내는 기예를 펼친 것이다.
쐐애액!
마력 암기로 변한 수천 개의 머리칼은 뷔에탕을 노리고 소리없이 쏘아졌다. 섬뜩한 마력의 파동을 느낀 뷔에탕은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서야 했다.
[ ······이익. ]
뷔에탕은 물러서면서 마나를 빨아들였다.
레반이 당연히 떨어진 검을 줍기 위해 뛰쳐갈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쪽으로 포화를 집중시킬 준비를 했다. 그녀는 비단 인형술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마법들도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레반은 검집을 주우러 가지 않았다.
레반은 오히려 물러선 뷔에탕을 사냥하려는 듯 땅을 박차고는 포탄처럼 쇄도했다. 막을 새도 없이, 뷔에탕의 전면을 거대한 경력이 서린 권격이 메운다.
주먹의 표적은 뷔에탕의 훤히 보이는 복부였다.
뻐어억!
순간, 뷔에탕은 복부에 마력을 응집했다. 그러나 워낙에 강력한 레반의 권격을 완벽히 버텨낼 수는 없었다. 단신으로 겪는 근접전투. 뷔에탕은 이런 경험이 부족했고, 수많은 전장을 겪었던 레반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 허윽! ]
뷔에탕이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몸은 새우처럼 굽어졌고, 그녀의 얼굴이 고통을 참느라 검붉어졌다.
불현듯 하오문주와 싸웠던 기억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본신이 외따로 떨어졌다는 공포감이 이제야 일었다.
원래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뺐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진법은 언제 사라지는 거지? 사라지는 건 맞아?
그리고, 내가 아까 그 검법을 버텨낼 수 있을까?
그르르르륵—
스르릉.
이제 바닥에 떨어진 검을 마법으로 끌고와 뽑는 레반을 보며, 뷔에탕의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마침내 질려 새하얗게 변했다.
잠깐의 잡념이 지나간 사이, 어느덧 레반의 손에는 광선의 검병이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뷔에탕은 결국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왜······이렇게 까지 해?"
"그걸 알아야 하나?"
실실 웃던 레반의 신형이 찰나간 사라졌고.
콰아아아아—!
귀청을 찢어버릴 듯한 굉음과 함께 광풍이 면전으로 불었다.
그러자 진법 안 전체가 천둥치듯 흔들림과 동시에···
서걱.
뷔에탕의 왼팔이 순식간에 잘려 허공을 날았다.
너무나도 간단하고 쉽게. 허탈한 기분이 들 정도로.
이유는 그녀가 목과 머리등 급소에 마력을 집중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로 옳은 판단이었다. 레반의 검날은 처음에 뷔에탕의 목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으니까.
'궤적이······바뀌었어?'
표표히 날아간 뷔에탕의 왼팔은 철썩대며 레반의 발치에 떨어졌다.
[ ···. ]
그녀는 잘려서 꿈틀대는 팔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이번에는 경계조차 하지 않고 분명 가만히 있는데도, 이어지는 레반의 검격은 없었다.
퐁.
왜냐하면, 뷔에탕이 남은 팔로 누군가의 혈액이 담긴 유리병을 꺼내더니 뚜껑까지 따버렸기 때문이었다.
진법 안을 스멀스멀 파고드는 요사스런 기운.
"변절하려고?"
레반도 그것의 정체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남궁천도 가지고 있던 네임드 시체, 가륵의 혈액.
카스트라 뷔에탕은 십이제들을 협박할 때 써먹었던 가륵의 혈액을 조용히 들어올렸다.
"······."
자리에 우뚝 선 레반은 잠자코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렇게 진법 안에서, 억겁같은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고.
뷔에탕은 돌연 한숨을 푹 내쉬더니, 가륵의 혈액이 담긴 병을 던져 깨뜨려버렸다.
산산이 깨져버린 유리병을 보며, 레반이 말했다.
"그냥 들이키지, 왜."
"됐어. 괴물이 될 생각은 없거든."
"아줌마, 그러면 피차 여기까지만 합시다."
"······뭐?"
뷔에탕의 입장에서는 또, 뜻밖의 전개가 이뤄졌다.
그녀가 휙휙 변하는 상황에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레반은 오도커니 서있는 뷔에탕을 보며 생각했다.
이전에 했던 다짐대로 뷔에탕의 팔을 잘라버렸다.
하지만 팔을 자르는 것과, 죽여버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카스트라 뷔에탕을 여기서 진짜로 죽여버리려면, 못해도 동귀어진할 각오는 다져야했다.
약해졌다 해도 명색이 전 십이제였고, 이곳은 마피아가 다스리는 권역인 로키 시티 신동경 한복판. 뷔에탕이 당명 원로처럼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 레반도 목을 깨끗이 씻어 내놓아야 한다.
뷔에탕이 죽어 변고가 생기면, 기회를 노리던 군벌들이 죄다 이곳으로 몰려올 가능성도 크다.
마지막으로.
'진법이 열려도, 뷔에탕의 인형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사실, 레반 역시도 몸 성히 살아나갈 길은 하나였다. 그는 여기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뷔에탕을 죽이거나 죽이지 못하게 되면 팔이라도 자르고, 레나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그렇기에 레반은 왼팔이 잘린 뷔에탕을 향해, 사내답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화해하자. 그런데 나한테 건 저주, 기억하나?"
방금까지 서로 죽일듯 전투를 벌여놓고 돌변해 손을 내민다.
그리고 그런 레반의 정신이 나간 듯한 행동에······
뷔에탕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왜, 나한테 저주 마법이라도 걸어보게?"
"아무래도 뜨거운 밤을 보내는 건 힘들겠고, 각자 조건을 걸고 마나의 맹약을 맺자."
마나의 맹약?
뷔에탕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레반을 한심하게 깔아보며 입을 열었다.
"웃기지 마. 맹약이 어떤 내용인지 관심도 없어. 내가 힘을 잃었다고 해도, 네 허접한 마력으로 맹약을 멀쩡히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일레힌 꼬맹이 놈보다도 내가 더 강해."
* * *
한편, 같은 시각.
로키 시티의 다른 지역.
연방 정부의 두 번째 천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 로키에 뿌리내리고 민도를 어지럽히는 군벌세력을 시급히 토벌하고 하나로 규합시킬······정부는 연방의 분열과 반목은 절대 허용하지 않음을 널리 공표하고, 불법적인 군벌의 총칼에 죽어가는 주민들을 더 이상 눈뜨고 두고만 볼 수 없······그에 분연히 맞서 연방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새로운 개혁의 흐름과 인류의 번영에 방해가 되는 자들······로키 시티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겠······이를 인류 도약의 발판이자 변환점으로 삼아······. ]
아힘사, 밴스, 슬레모킨과 마법사들을 포함한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의 모든 인원은, 그 연방의 지루한 공표에 억지로 집중하고 있었다.
실상은, 네임드 가륵 토벌이 목적인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겉으로만 비장한 연방의 군벌 토벌 천명에는 흥미가 없었다. 조용한 적막이 감돈다.
으하암-
슬레모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지개를 켰다.
그러던 그 시점.
"흐음."
"?"
옆에 있던 일레힌 포이체카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한숨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침음성에 슬레모킨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고.
"대체, 말릴 수가 없는 놈이로다."
스아아아아——
갑작스럽게, 마탑주의 전신에서 마력이 들끓더니 머리 위로 청록빛의 마력이 미친듯 빨려 올라간다.
저 높은 허공에, 일레힌 포이체카 고유의 청록빛의 마력이 덩이지며 운하 줄기를 만들어낸다.
로키 시티의 중심지쪽을 향해 쏘아지는 그 청록빛의 운하를,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은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았고.
하품을 집어넣은 슬레모킨은 조용히 읊조렸다.
"저기, 신동경 쪽인데?"
#128화. 군벌 도시, 로키 7
#128화.
맑은 빛이 없고 칙칙한 적안.
마주치기만 해도 불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 눈.
화려한 신동경 길거리를 돌아다니다보면 행인 중 붉은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관심받기 좋아하는 유흥가의 종자들은 조금이라도 튀어 보이려 별별 색깔의 렌즈를 다 삽입하고 다니지만, 유독 붉은 렌즈를 낀 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카스트라 뷔에탕이라는 도시의 지배자가 조종하는 인형들, 영혼없는 인형들의 눈동자가 칙칙한 붉은 빛이기에 그렇다.
적안을 한 인형들이 점찍은 인물은 금세 폐인이 되어 죽거나 똑같은 인형꼴이 되기에, 신동경 내에서 극히 기피시 되는 것.
한낱 도시괴담으로 치부하기에는 실재하는 사실이라, 어쩌다 적안을 마주치기만 해도 신동경의 주민들은 기함하기 일쑤다.
그리고 오늘, 적안이 단단히 점찍은 남자가 있었다.
헌데 그 남자, 레반은 죽지도 인형이 되지도 않겠다는 듯 뷔에탕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팔을 높이 들어 올려 어디선가 마력을 끌어왔다.
생생한 풀잎처럼 진하고 강대한 청록빛의 마력을.
사아아아—
진법 안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청록빛의 마력 줄기.
마력 줄기는 레반의 육신 곳곳에 스며들었다.
후—
이윽고 레반이 숨을 깊게 들이쉬며 호흡하자, 청량한 마력의 향취가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고, 그대로 스펀지처럼 흡수해 제힘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
진법을 뚫고 나가기도 힘들고, 인형들은 들어올 수도 없는 상황. 뷔에탕이 저 꼴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
게다가 레반의 표정은 또 극도로 평온해서, 마치 이런 상황까지 대비한 것 같았다.
"정말, 개같네."
그쯤에서 뷔에탕은 조금이나마 유지하고 있던 여유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본신으로 홀려온 시점부터 이렇게 되어버릴 일이었나?
아니다. 지나간 일을 하나하나 따지자면······하오문주 그 미친 자식이 찾아와 주먹을 휘두를 때부터다. 아예 더 과거로 돌리면 저주를 걸어버렸을 때부터고.
저 남자는 고작해야 2년 사이에 아예 다른 무언가가 됐다. 인정해야 한다. 밑바닥 쓰레기 인생에서, 신동경 한복판에서 자신을 이리 겁박할 정도로.
아무튼 상황이 연신 꼬여 정신이 어지러웠다. 다시 솟구치려는 본능을 억누르기가 힘겨워진다.
하는 수 없다.
주르륵.
뷔에탕은 조금이라도 말짱한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잘린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내버려 두었다. 다행히 피를 흘릴수록 점차 색욕이 힘을 잃어감이 느껴진다.
곧, 뷔에탕은 일렁이는 청록빛 마력을 직시했다.
······일레힌 가문의 그 꼬맹이가 정말 많이도 컸네.
최근 가문의 사업체 몇 개를 엎어버렸다고 해서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났나? 그건 비약일 터. 아무래도 저 남자를 마탑 차원에서 후원하는 모양이지.
일단 뷔에탕은 억지로나마 미소지은 뒤, 마력의 주인을 콕 집어 말했다.
"그래도 마탑이라 이거야? 마탑주가 너를 많이 아끼나봐. 그럴수록 더 탐나는데."
뷔에탕이 만들어낸 미소는 고혹적이었다.
주름이 생길까 걱정되어 만들어낸 부분도 있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끝없이 꺼내놓는 레반에게 여유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양패구상 시도를 원천적으로 틀어막기 위해, 뷔에탕은 억지로나마 미소지어야 했다.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 짐승처럼 달려들까 하며.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레반은 별 관심이 없었다.
"이제 이 정도면 맹약을 맺기 충분한가?"
찌릿-
그리 말하는 레반을 뷔에탕의 칙칙한 적안이 노려보았다.
억지로 지었던 미소도 삽시간에 지워버렸다. 결국 그녀의 눈가에는 최근들어 가장 신경쓰는, 주름이 조금 깊게 패이고 말았다.
그때였다.
"사람이 묻잖아 아줌마. 충분하냐니까."
마력을 흡수한 레반의 안광이 실로 형형하게 빛난다.
그 모습을 보자, 영혼 빠진 인형들을 평생 취급해온 뷔에탕의 안목이 작동했다. 장난기 어려있는 말본새와 가벼운 행동으로 자신의 중량감을 깎아먹고 있긴 해도···기저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를 이상한 눈.
깊이와 넓이를 짐작할 수 없는 광인의 눈빛이다.
숨을 옅게 내쉰 뷔에탕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글쎄, 마나의 맹약이라?"
마법사의 심장과 회로를 담보로 잡는 마나의 맹약은 한 번 제대로 맺으면 9레벨조차도 어찌해 볼 수 없는 금제. 목숨이 경각에 달해있거나 죽어버리기 직전인 상황에나 적합한 협상 방법이다.
그런데 지금 만약 제안을 거절하면, 어차피 빨아들인 저 청록빛의 마력이 향할 목적지는 뻔했다.
바로 진법에 갇힌 생쥐꼴이 된 뷔에탕 자신뿐.
일전에도 상대하기 껄끄러웠는데 마탑주의 마력까지 추가됐다. 힘의 균형이 비등함을 넘어섰다. 정말 악재가 겹쳐도 이만큼 겹칠 수가 있을까?
"진법이 평생 가는 것도 아니고, 다 큰 남녀끼리 발가벗고 언제까지 이럴 건가. 할 거면 하고 말 거면 말아라."
"······."
단호한 레반의 기세는 은연중에 뷔에탕을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이마에는 마치 '건드려 봐' 라고 쓰여있는 것만 같다·
당장이라도 터질 준비를 마친 시한폭탄.
뷔에탕의 눈에는 레반이 분명 그렇게 보였다.
아마, 더 건드리면 두말 할 것 없이 터져버릴 거다.
뷔에탕의 고민이 과거의 기억을 불러왔다. 발할라의 마탑주 서재 안에서 저 녀석의 살덩이를 조종해 마력 구체를 빨아들일 때와, 십이제 회동 이후 십이제가 셋이나 화산으로 기어온 것.
그리고 얼마 전, 하오문주가 뜬금없이 10레벨급의 초인이 되어 나타난 것.
운 좋게 얻어걸렸다기엔 너무 많이 겹친다.
그제야 뷔에탕은 자신의 안일함을 조금 인정했다.
여러 거물이 비호하고 큰 관심을 보일만큼, 특별함이 있는 남자를 8레벨급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말았다. 과거의 나약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으니, 오히려 더 가볍게 보았던 걸지도. 시간을 돌리는 게 아닌 이상 이미 방법은 없을 듯했다.
여기서 죽도록 싸워보든지, 깔끔하게 제안을 받든지.
뷔에탕은 결정을 내렸다. 그녀는 옷을 슬며시 걸치며 고개를 주억였다.
"오늘 체면 많이 구기는 날이네? 한번 말해봐."
허락이었다.
들어볼 테니 맹약에 내걸 조건을 말해보라는 뜻.
그러면서 뷔에탕은 잘린 팔을 마법으로 끌어와 붙이려 했다. 바닥에 널려져 있던 팔이 둥실 떠오른다.
그런데, 잘린 팔이 허공에서 우뚝- 멈춰섰다. 뷔에탕은 레반이 마법으로 묶고 있다는 사실을 곧장 알아냈다.
"나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나를 해치지 않는다. 앞으로는 이를 깨끗이 닦는다. 그 세 가지만 약속하면 팔도 돌려주지."
······또 이를 깨끗이 닦아? 침착하자.
"세 가지는 좀 많은데? 나도 세 개 걸면 되는 거야?"
뷔에탕은 팔을 마법으로 더 강하게 끌어당기며 말을 던졌다. 맹약의 조건으로는 어떤 식의 교접이 좋을까 생각하며.
하지만.
"넌 한 개만 걸어라."
"······뭐라고?"
"나는 이미 사내로서 많이 양보했다. 참고로 나는, 과거 어떤 외팔이 년의 목을 잘라버린 전력이 있는 사내다. 그 여자도 내게 호감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나, 마지막에 가서는 목이 떨어졌다."
"······."
"여기서 살아 나가더라도, 평생 외팔이나 의수를 낀 채 살고 싶으면 거절해도 좋다."
죽거나 받아 들이거나?
뷔에탕은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도 치지 못했다.
마나의 맹약을 하자고 해놓고, 아주 기고만장해져서는 조건을 세 개나 불렀다. 심지어 이쪽에서는 조건도 제대로 못 내걸게 하고.
뚝···
문제는, 뷔에탕의 잘린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벌써 핏기가 없다는 점이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붙이기가 힘들어질 거다.
마법사인 뷔에탕은 순수한 인간의 육체를 선호한다. 사이버웨어 따위는 인간의 육(肉)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미 마나가 통하는 길을 100여 년에 걸쳐 닦아놓은 육체. 보물을 잃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졌고.
"얘야, 씨발. 공갈도 적당히 쳐야 받아주지? 아무리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지만—"
푸슉!
안 그래도 잘렸던 팔이 다시 사선으로 잘렸다. 레반의 검 끝이 가차없이 움직이나 싶더니, 순식간에 두 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
정육점의 고깃덩이처럼 잘려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팔.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뷔에탕의 실력이라면 시간을 들여 이어붙일 수 있다. 그런데 한번 더 잘린다면 그건 장담할 수 없다.
아니, 한 번만 더 자를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레반은 때마침 중단세로 검을 들어올렸다. 이제 검 끝이 향하는 곳은 뷔에탕의 안면.
콰곽!
······이었다가, 잘린 손등을 관통했다. 관통한 검은 땅바닥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평생 외팔이 병신으로 살든지. 내 말대로 하든지."
"······와."
이제, 뷔에탕은 억지로 표정관리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녀는 하얀 이를 다 내보이며 진심으로 미소지었다.
"너 정말, 싸이코 정신병자구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 * *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법력을 뿜어내는 언기원보 진법 내부.
뷔에탕과 레반의 심장에 각각 다른 맹약이 새겨졌다.
스아아아—
둘의 마나 맹약이 끝내 체결된 것이다.
레반은 자그마치 세 개의 맹약을 얻어냈고, 뷔에탕은 레반이 단언했던 대로 고작 한 개의 맹약만을 가져가야 했다. 레반도 뷔에탕의 목숨을 해하지 않는다는 뻔한 맹약이었다.
이제 강제로 마나의 맹약을 깨부수는 게 아니라면, 레반과 뷔에탕은 서로 해칠 수 없게 되었다.
"영, 기분이 좋지는 않네."
카스트라 뷔에탕은 이런 자신의 처지가 영 못마땅했으나, 불확실한 전투를 벌이기보단 본신의 안전을 확보하면서 약간의 수치 정도는 감내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뷔에탕은 방금 막 붙여 불편하기만 한 왼팔을 연신 쓰다듬었다.
그리고,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더 흐르자.
쿠르르르릉—
언기원보의 진법이 큰 굉음을 내며 마침내 흩어졌다.
바깥에는 하나같이 외모가 출중하고 기골이 장대한 인형들이 신전의 기사들처럼 대기하고 있었다. 레반 정도의 기운을 풍기는 인형들이 열 기가 넘었다.
호위 인형들은 한 기 한 기가 8레벨 이상. 저 호위 인형들이 진법 속으로 들어왔다면, 어떤 준비를 했든 레반의 수준으로는 파훼하지 못했을 거다.
헌데.
레반이 그 기립한 인형들을 둘러보던 순간.
—!
"······!"
"······어라?"
언뜻.
심상찮은 기파를 느낀 둘의 몸이 동시에 돌아갔다.
로키 시티가 한눈에 보이는, 황금빛 플라자 빌딩의 최상층.
둘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듯, 깨져있는 창밖으로 서서히 몸을 내밀었다. 신동경의 가장 높은 곳에 나란히 선 레반과 뷔에탕은 로키를 발 아래 두고 내려다보았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카스트라 뷔에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돌아갔다.
"로키에 무슨 일로 왔어? 나 도발하자고 마탑주까지 끌고온 건 아닐 텐데."
느닷없고 때 늦은 질문.
그런데도 레반은 의외로 선선히 답해주었다. 레반의 시선은 뷔에탕과 마찬가지로 로키의 정경을 바쁘게 훑고 있었다.
"연방 정부가 움직였다. 네가 아까 집어던졌던 혈액의 주인을 죽일 겸 해서, 로키의 군벌 세력까지 토벌하는 게 이번 목적이라던데."
"그게 목적이면 확실히 성공하겠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겠군."
"으, 개미떼. 역겨워라. 쟤는 눈깔이 참 더럽게도 많네."
"어쩔 도리 없는 일이지. 로키는 원래가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군벌들의 도시 아닌가."
"네 편으로 보이는 개미들이 밟히는 것 같은데?"
"모르는 얼굴이다."
둘은 밖을 내려다 보며 뜻모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잠시 뒤 ,조용히 입을 닫아버린 레반은 별안간 가부좌를 틀고는 운공에 들어갔다.
이윽고, 그런 레반의 머리 위.
지금의 맥락없고 괴상한 상황을 뒤에서 지켜만보던 자가 있었으니.
"갑자기 무슨 헛소리들을 하는 거지? 개미? 눈깔? 이 종후표도 좀 알자."
그렇게 종후표는 저들이 무슨 소리를 하나 호기심이 생겨, 아직도 바깥의 어딘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뷔에탕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하지만 앵무새의 눈으로는 희뿌옇게 보이기만 하니 답답했다. 백리뇌부 종후표의 육신이 아니라 한낱 법기에 담겨있기 때문에 시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봐라."
사아아아—
그때, 운공하던 레반이 안쓰럽다는 듯 청록빛 마력을 응집해 허공에 영사해 주었다.
그러자 종후표의 흐릿했던 시야가 번쩍 뜨이며 희뿌연 세상이 선명하게 바뀌어갔다.
다음 순간.
"이제 나도 확실히 알았다. 이래서 그랬군. 실로 황당하다."
앵무새 종후표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반과 뷔에탕이 대화를 나누던 주제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았다.
레반의 마력을 통해 종후표가 목도한 것은.
"로키 시티가 어느새 시체 밭이 되었구만."
······군중을 압도하는 시체들의 대행진. 로키 시티의 길거리에서 사방으로 퍼져가는 그 시체들은 감히 마릿수를 셀 수 조차 없다.
눈알이 수백 개 달린 괴물과, 무릎에 얼굴이 세 개 달린 괴물이 인간들을 잡아먹는 장면. 학살이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반쯤 잡아먹힌 인간들은 곧 시체로 일어나더니, 이지를 잃고 맞서 싸우던 공격하기 시작했다.
현재, 로키의 상황은 꿈속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어쩌면 마약중독으로 인한 망상과도 비슷하게.
레반이 진법이 펼치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이것이 현실인지 영화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광경에, 로키 시티의 초심자인 레반도, 로키에서 잔뼈가 굵은 뷔에탕도 이제는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고요히 입을 닫고 기운을 비축하기 바빴다.
종후표가 시선을 더 멀리로 던지자.
"어떻게 무너진 것인가."
로키 시티의 거대한 장벽에 구멍이 뻥 뚫려, 일부분이 무너져 내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일부분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것이, 로키의 장벽은 적어도 100미터가 넘게 무너져 내렸으며 무너진 구역도 한 곳이 아니었다.
오오오오—
게다가,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저 거대한 손가락. 그것은 거대한 손가락을 몇 백개나 이어붙여 만든 듯한 생물체였는데, 놈은 작디작은 개미. 그러니까 인간들을 가볍게 짓눌러 죽이고 있었다. 꽤 실력자로 보이는 이들도 한낱 벌레처럼 속절없이 짓눌려 몸이 터져버렸다.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심히 불쾌한 장면.
깨진 창 안으로, 바람과 함께 진한 피냄새가 들이치는 듯했고.
푸드덕-
종후표의 작은 날개가 잔잔한 바람을 일으켰다.
"도무지 믿기지는 않지만, 우리가 진법 안에 갇혀있던 동안 로키 시티의 장벽이 공격을 받아 무너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네임드 가륵과 관계가 있는 사태인 듯한데, 로키에 있는 군벌 세력과 연방의 전력들은 각자 흩어져 전투를 벌이고 있다. 장벽이 저리 무너졌으니 신동경까지 시체들이 들이치는 건 시간문제. 되도록 판단을 서둘러 내리는 게 현명하겠다."
그리고 그것은, 굳이 짚어주지 않아도 될 얘기였다.
#129화. 아포칼립스의 고인물
#129화.
저 멀리.
로키의 동서남북 네 방면.
네 곳의 시티 장벽이 각각 운석이라도 맞은듯 백 미터 가량 무너져있고, 무너진 장벽을 밟고 넘어 끔찍하게 생긴 존재들이 도시를 포위하듯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다.
시체. 언데드.
인간의 형상이되 인간은 아닌 가지각색의 존재. 바닥을 기는 시체도 있고, 걸어 들어오는 시체도 있었다. 가끔 박쥐처럼 피막날개를 펼쳐 활강하는 시체까지 있다. 남쪽 방향 장벽에서는 이층 버스보다도 큰 거체가 밀고 들어오며 장벽의 드러난 골조를 때렸다.
쿵! 우르릉—
무너져 내리는 장벽의 잔해로 보아, 장벽에 쳐져있던 광역 보호마법이 흩어진지 그닥 오래되지는 않은 듯했다. 못해도 한 두시간 내외일 것이다.
하지만 저걸 다시 쌓아 올리기는 힘들 터. 지금 부서진 장벽 바깥은 피냄새를 맡고 온 괴물들로 이루어진, 까마득한 시체의 바다였다.
로키에서 인간의 향긋한 냄새가 나는지, 시체들은 로키 시티로 먼저 진입하려 마구 아우성쳤다. 시체들로 까맣게 변한 로키 시티 주위의 대지. 머릿수 조차 셀 수 없는 시체의 군집은 파도가 일렁이듯 연신 물결쳤다.
종후표가 조용히 읊조렸다.
"······이거, 로키 심판의 날이구먼."
외부와 격리된 플라자 최상층 진법 안에서 반나절 하고도 몇 시간 정도를 흘려보냈을 뿐이다. 그 짧은 사이에 네 방면의 장벽이 무너져 로키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야말로 날벼락이 아닐 수가 없다.
아직 로키의 중심인 신동경까지 시체들의 마수가 뻗치진 않았으나, 로키의 면적이 발할라나 수르트처럼 넓지 않아서 밀고 들어오면 신동경까지도 금방 도달하리라.
수많은 인간이 피를 흘리며 부질없이 죽어간다. 그들은 편하게 죽지도 못했다. 흘러내리는 내장을 붙잡고 죽기 전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다 결국, 내장을 파먹던 시체들과 똑같은 꼴이 되어 로키의 거리를 거닐었다.
하필 평범한 인간이 아닌 강자들도 섞여 있는지라, 시체의 파도는 더욱 빠른 속도로 전염되며 사방팔방 퍼져나갔다. 마을에 도는 역병처럼 로키의 길거리로 곳곳으로 퍼져나간 시체들은 혼비백산한 주민들의 살점을 탐했다.
외곽 쪽 구역의 전투와 학살은 이미 상당히 진행되어, 엉망이 된 사체들이 뒤엉켜 쌓여있는 지옥도나 다름없다. 외곽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렀고 주민들은 도망칠 곳이 없어 신동경으로 향하는 도로에 몸을 던졌다.
차나 바이크를 끌고 도로로 나온 평범한 주민들은 극히 혼잡한 도로 상황을 보고는 차에서 뛰쳐나와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를 시체들이 스멀스멀 쫓아왔다.
도심의 쨍하고 원색적인 불빛은, 도망치는 주민들을 쫓는 시체들을 더욱 그로테스크한 괴물로 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외곽 길거리에 적어도 5m는 넘을 법한 시체들이 즐비하다. 2층짜리 상가 위로 머리통 하나가 더 튀어나와 있는, 인간이 그 앞에 서면 꼭 개미처럼 작아보였다. 불현듯 거체가 긴 팔을 휘둘러 도망치는 주민들을 한 손에 쓸어담았다.
뿌지지직-!
그리고 개미들은 세상의 순리라는 듯 간단히 시체의 손아귀에 잡혀 우그러졌다. 걸레를 짠 물처럼, 피가 흘러나와 로키 외곽의 땅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종후표가 고개를 다른쪽으로 돌렸다.
외곽부 어딘가에서는 꽤 대등한 전투가 진행 중이다.
그나마 외곽을 지배하던 군벌 세력들이 잔존해 시체들의 행진에 저항하고 있는 듯하다. 먼 하늘에서 들리는 커다란 총성과 시시각각 불어오는 폭풍과 강대한 기파들이 그 전투의 처절함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런 반항에도 로키는 외곽 구역부터 서서히 잡아먹히고 있었다.
압도적인 요기를 목도한 로키의 주민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친다. 바지에 오줌을 지린 자들도 많았다. 일견 한심해 보이나 올바른 선택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차라리 먼저 도망친 자들이, 끝까지 싸우다 감염되어 괴물로 되살아난 이들보다야 현명할 지도.
저것은 악몽이 아니라, 명백하고 선명한 현실.
그렇듯 로키의 외곽은 부산스럽고도 시끄러웠으나, 플라자 최상층에 모여있는 레반과 뷔에탕, 종후표중 저 갑작스러운 사태에 충격받거나 주저앉아 있는 이는 없었다.
"완전 일 났네? 로키 시티의 인구도 꽤 되는데."
로키 시티에 터진 작금의 사태를 붉은 눈으로 살펴보던 뷔에탕은 무표정해지더니, 즉시 호위 인형 절반을 플라자 빌딩 밖으로 내보냈다. 외곽은 끝났으니 신동경 근방의 사태나마 확인하고 정찰하기 위함이었다.
으아아악—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득한 비명.
"······."
신동경 근처에 시체들이 진입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날카로운 괴성이 이곳의 하늘까지 연신 울려퍼진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음에도 말이다. 저게 인간이 내는 소리인가. 아니면 시체가 내는 소리인가. 어찌 되었건 기분이 더러워지는 괴성이었다.
후우우-
와중에 레반은 마탑과 합류하기 위해 함부로 뛰쳐나가기보단 당장 운공으로 기운을 갈무리하는 것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앞으로의 대비가 필요해 내공을 회복하는 데에 만전을 기울였다.
콰과과광!
그 시점, 장벽만 한 거대 손가락의 군집체가 웬 빌딩 하나를 짓눌러 찌부러뜨리는 정신나간 광경을 보며 뷔에탕이 뇌까렸다.
"장벽 부서진 것도 저 손가락 괴물 짓이려나. 저게 몇 레벨짜리 언데드야? 대체."
종후표가 날개를 퍼덕이며 고개를 돌렸다. 종후표는 자연스레 날아 뷔에탕의 옆에 자리했다.
"물론 저 시체놈의 영향도 있겠지. 하지만 시티 내외부에서 같이 도모해 장벽을 부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시티를 지키는 광역보호마법은 대단하지만, 뭐 강력한 시체 몇이 한 부분만 집중해 공격하면 못 무너뜨릴 것도 없다. 이전의 도시들도 많이들 그런 방식으로 무너졌으니."
"분명, 대가리 역할을 하는 언데드들이 있을 텐데."
"보나마나 네임드인 가륵이 그 대가리의 한 축일 거다. 목표하는 바가 있으니 변절자를 만들어 왔을 테니까. 가륵을 연방의 전력이 발견은 했나 모르겠군? 아니,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토벌의 의미가 없나."
뷔에탕과 종후표는 오래 산 나이만큼 경험이 많았다. 그리고 이 사태는 그들의 인생에서 몇 번이나 겪어본 일이었다.
일곱 도시만 남은 연방 이전에 수십, 수백 개의 거대 도시가 존재했다. 그 도시들을 시체들의 습격에 빼앗기고 지금까지 밀려났던 게 세계 인류와 연방의 뼈아픈 역사. 비록 수십 년 전 얘기지만, 도시로 쳐들어와 인간들을 잡아먹고 초토화 하는게 원래 저 시체들의 본능이자 지상과제.
"헛, 그나저나 로키 스테이션은?"
어느 순간 종후표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건물들의 마천루 너머로 시선을 던져 로키 스테이션의 위치를 찾았다.
온갖 캐리어들이 다 모여있는 시티 스테이션에 변고가 생기면 로키는 그대로 갇혀버린 도시가 되는 것이기에.
로키 시티 밖으로 탈출해야 한다면, 스테이션이 가장 빠르고 안전한 탈출구.
연방이 얼마전에 수복한 라그나로크 시티와 로키와 꽤 가깝긴 하다지만, 육로로 안전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 거리를 육탄전으로 뚫을 수 있는 인간은 어지간해선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리고 현재.
로키 시티 스테이션은 비상 상황임을 감지하고 스테이션 외부의 부지와는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스테이션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가 수직으로 들어 올려져 있고 그 밑으로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한달음에 수십 미터를 뛰는 고수가 아니라면 육로로는 스테이션에 진입할 수 없으리라.
마침 스테이션 위로, 누군가 시티를 벗어나기 위해 탑승해 있는 듯한 캐리어 수십 기가 허공에 떠 있었었고.
로키 스테이션의 격리된 땅 밖으로는.
"시체들이 벌써 저기까지 갔나."
······자기도 들여보내 달라며 울고불다 찢겨죽는 주민들.
스테이션 쪽까지 진출한 시체들은 공중에 뜬 캐리어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일말의 희망을 품고 스테이션으로 도망쳐온 주민들의 살점과 피로 흥건하게 잔치를 벌였다. 억눌려있던 뷔에탕의 색욕이 주체 못하고 터져 나오듯. 인간을 먹잇감으로만 보는 안광들이 여기저기서 번뜩였다.
시체들의 이동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다. 아마 시티 스테이션이 시티 중심부인 신동경보다는 외곽에 더 가깝기 때문으로 보였다.
종후표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레반은 두 눈을 감은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탈출구인 로키 스테이션의 상황 역시 좋지 못하다. 갈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출발해야 늦지 않을거다."
"우리가 타고온 슬레모킨의 캐리어는?"
"···!"
레반의 질문에 종후표가 눈을 크게 떴고, 이내 단념한 듯 법력을 담아 고함쳤다.
"젠장, 아직 스테이션 구석에 잘 처박혀 있군."
"알았다."
종후표의 대답에 레반은 고요히 눈을 감고 재차 운공에 들어갔다.
그는 잡생각을 지우고 내력을 기경팔맥으로 순환시켰다. 임독양맥을 포함한 대부분의 대맥이 타통되었으며 세혈은 넓어져 막히는 부분이 없었다. 잠깐의 운공으로도 흘러넘칠 듯한 기운이 뻥 뚫린 기맥을 내달린다.
* * *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칙— 치이익—
플라자 빌딩 안을 빨빨 돌아다니던 종후표가 이것저것을 뒤집고 다니다 웬 아날로그 라디오를 찾아와서는 작동시켰다.
이윽고 라디오에서 칙칙대며 흘러나오는 소식을 들어보니, 셋이 언기원보 진법 안에서 투닥대는 사이에 연방 정부가 로키의 군벌 토벌을 공표했고, 그 공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티 장벽들이 폭파라도 한듯 터져나갔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원인이나 흉수는 파악되지 않았다는 진행자의 말에, 침대에 편한 자세로 누워있던 뷔에탕이 말문을 열었다.
"인류가 라그나로크 시티를 수복했으니, 언데드 놈들은 라그나로크 대신 로키라도 빼앗아 가려 하나?"
"······."
"아, 병신같은 도시라도 이렇게 내주기는 싫은데."
촤르륵—
이제 바깥 상황은 볼만큼 보았다고 여긴 종후표가 깨져나간 최상층의 창문을 침대보로 가려버렸다. 괜히 눈에 띄지 않기위해 플라자의 조명까지 끄니 금세 어둠이 찾아왔다.
곧이어.
침대 위의 누군가 옷자락을 풀어 헤치며 농담식으로 말했다.
"분위기는 은근히 좋네. 올라올래?"
"마음이 심란하니까 입 닫아라."
"······호."
뷔에탕은 서로 죽이지 못한다는 맹약을 걸자마자, 꽁초 가득한 재떨이처럼 취급당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또 싫지 않았다.
여태까지는 생글생글 웃으며 비위 맞추기 급급한 놈들뿐이었는데, 뷔에탕은 가끔 이런 처지도 괜찮겠다고 여기며 피식 웃었다.
화악-
"······?"
괜찮다고 인정하자마자 이상하게도 안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더워서 그런가. 뷔에탕은 마법으로 강제로 주변의 온도를 낮추어 버린뒤 말했다.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성욕이 치솟는 거 몰라?"
"들러붙을 생각 말아라. 냄새난다."
레반은 귀찮다는 듯, 다른 곳에서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그를 보던 뷔에탕은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꾸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니."
근데 이 정도면 정말로 냄새가 나는 거 아냐?
곧, 뷔에탕은 은근슬쩍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어 바람을 불고는 향을 맡았다. 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끔뻑.
레반은 그런 뷔에탕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뷔에탕은 모를 일이지만, 레반은 전생부터 요녀들과 색마들을 많이도 만나 그들의 생리를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욕구에 몸을 맡겨 미친 이들이고, 레반은 그냥 미친놈. 한 번 미쳐본 자들끼리 이해 못 할 것은 없었다.
욕정은 어차피 채우려 해도 잠시일뿐 다 채울 수 없다. 눈 딱 감고 한 번 자주면 요구하는 횟수가 많아지다가 끝에는 반드시 파국으로 치닫는다. 물론 그런 여인들과 잠자리를 했단것은 아니다.
치익—
그런데 순간, 조금이나마 배경음을 채워주던 라디오가 픽 꺼졌다.
이제 통신기기들마저 불안정한 모양이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도심에 불 꺼진 구역들이 꽤 있었던 걸 보면 모종의 이유로 전력공급이 차단되고 주파수도 불안정한 듯했다.
장벽이 무너진 마당에 그깟 통신좀 안 된다고 징징거릴 사람은 없겠지만.
곧, 뷔에탕은 안면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그녀는 레반을 죽이지는 못했으나, 이 황금빛 플라자 빌딩과 신동경의 명실상부한 지배자였다.
"나한테 말해봐, 로키에 일레힌 마탑주 말고 또 누가 왔지?"
"모른다. 연방에서 수복전처럼 정보가 새어나가는 걸 틀어막겠단 이유로 알려주지 않았다. 올 때도 개인 캐리어를 이용해서 왔지."
"뭐야, 너도 결국 아무런 정보도 없다는 거잖아?"
"네가 내보낸 인형들이 지금 군벌의 수장들을 규합하고 있는 것 아닌가? 기왕 할 거 다른 이들도 좀 찾아봐라."
뷔에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그런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려나 모르겠네?"
그때, 종후표가 끼어들어 몇 가지 대안을 늘어놓았다.
"자, 이 백리뇌부 종후표가 보기에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전력으로 이 신동경이나마 수성하며 외부의 지원을 기다리든지, 혹은 스테이션으로 가서 도망치든지, 아니면 장벽 밖으로 나가서 라그나로크까지 뛰어가든—"
그 순간.
꽈과과과광—!!!
고막이 터져버릴 듯 강력한 폭음과 함께, 깨진 유리창을 임시로 가려두었던 보가 찢어지며 활짝 열렸다.
최상층에 있던 셋의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로키 외곽쪽 상공을 부유하고 있는 늙은 마법사가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는 카스트라 뷔에탕마저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르포포이. 역시 살아 있었네?"
레탕 르포포이. 마법계에서도 이름난 9레벨의 마법사이자, 로키 시티에서 마피아 조직과 신동경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던 강력한 군벌세력의 수장.
뷔에탕은 괜히 그 늙은 남자를 보자 반가움이 앞섰다.
헌데.
"어라?"
그 늙은 마법사의 몸은 이상하게도,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상공에 둥둥 떠있는 그를 따라, 거대한 요기를 가진 무언가가 상공으로 솟구쳤다.
처음 보았을 때는 살색의 기둥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늘을 다 가려버릴 정도로, 한 개 한 개가 건물처럼 거대한 손가락의 군집체.
이윽고.
— 크하아악!
고함을 지르며 마력을 끌어올린 늙은 마법사의 손에서 묵색빛의 마법들이 연신 뿜어져 나왔다. 각자가 모두 7위계급의 고강한 마법. 대기를 푹푹 파먹고 천지를 울릴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 폭사한다.
늙은 마법사는 입에서 피를 왈칵 토하면서도, 징그러운 손가락 군집체와 대등한 전투를 벌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 가서 결국 붙잡혔고, 뭔가를 하기도 전에 자폭을 선택해버렸다.
늙은 마법사의 육신과 거대한 손가락 몇 개가 풍선처럼 터져나가 로키의 상공으로 육편과 피를 흩뿌렸다.
툭···투두둑···
잠시 뒤, 플라자 빌딩 꼭대기까지도 마법사와 손가락 괴물의 피가 섞여 비처럼 내렸다. 뷔에탕이 얼굴에 튄 피를 손으로 훑었다.
강력했던 군벌 수장의 실로 허무한 마지막.
그에, 뷔에탕의 눈동자에 창백한 파문이 일었다.
침대에 누워있던 뷔에탕의 몸은 저절로 일어선지 오래. 그녀의 머리칼이 부스스 흩어진다.
"······죽었다고?"
"원래 아포칼립스에서는 이 총만한 게 없었는데 말이지."
탕!
그때, 뷔에탕의 뒤쪽에서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
뷔에탕이 놀라며 황망히 고개를 돌려보니, 레반이 자기 턱에다 총구를 갖다댄 채로 격발했다. 탕! 강한 충격에 그의 머리가 휙휙 들렸다. 레반은 탄창이 비어버려 딸칵댈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다.
틱!
그렇게 탄창을 전부 비웠음에도, 레반의 턱은 멀쩡했다. 당연했다. 8레벨 이상의 경지를 이룬 사내가 권총 따위에 쓰러질 리 없었으니.
곧이어 레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턱을 쓸었다.
"총을 맞아도 안 죽는군. 이젠 잘 안 죽어······."
"?"
뷔에탕의 의아한 시선이 닿자, 레반은 총을 허리춤에 주섬주섬 집어넣고서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미친놈 보듯 쳐다보지 말고, 인형 풀어서 로키에서 힘 좀 쓴다는 놈들은 전부 신동경으로 모아라."
#130화. 아포칼립스의 고인물 2
#130화.
나의 2회차.
좀비가 득시글하게 창궐한 아포칼립스 세계.
인간성을 진작에 버린 금수들만이 잘 먹고 잘 살아남던 아귀도.
꿋꿋이 인간성을 지키며 살아가던 이들은 멍청한 병신 취급이나 당하고, 언젠가 뒤통수에 벽돌이 꽂혀 다음날 누군가의 뱃속에 들어갈지도 모르던 세계.
주린 배를 쥐고 지나가던 꼬마를 보고는, 아이가 저대로 가다간 어차피 쓰러져 죽을 테니 차라리 우리 손으로 편히 보내주자. 그리고는 따뜻한 모닥불 위에 뉘여서······어쩌고저쩌고.
별 좆같은 놈들이 횡행하던, 대의명분(大義名分)에서 대의는 어디가고 얄팍한 명분만이 남아있던 세상.
물론, 그것조차 없이 사는 자들도 한트럭이었다. 외려 꼬마 쪽이 약탈자인 경우도 왕왕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도, 소수의 초능력자가 있었다.
힘으로 강철을 구부리거나 물체를 뇌파로 움직이는 염동력을 쓸 수 있던 자들.
영화 속의 히어로들만큼 대단한 능력은 아니었다지만, 좀비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초능력자들은 평범한 이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구원자였다.
그런데 아포칼립스 초반에는 신비한 힘을 얻어 의욕적으로 굴던 초능력자들도, 시간이 갈수록 특권의식 비슷한 것에 절어 평범한 이들을 등한시했다.
사실 이유를 알고는 있었다. 좀비가 너무나도 빠르게 강해지는 나머지,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에는 참 퍽퍽한 세상. 이타심있는 영웅의 헌신적인 희생을 무작정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무엇보다 일면식도 없는 인간들이 갑자기 의지하고 들러붙어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줘야 하면 좋아할 놈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 입이 다 몇 개야. 혼자 먹고 살기도 바쁜데.
나는 그 와중에 혹시, 주먹질 한 번으로 산을 뒤집어 버리는 초능력자가 등장해 좀비들을 무찌르고 세상을 구원해 주지는 않을까. 한 1년 정도는 그리 상상했었던 것 같다. 고작 2회차를 시작해 매 순간 어안이 벙벙했던,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었을 때니까.
물론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좀비들이 강해질수록 희망은 사라져만 갔다.
치사한 초능력자 놈들.
나중가니까 자기들만 살아보겠다고 아주···.
그때 총으로 쏴 갈겨서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그랬을진대 오늘 문득, 나도 그런 마음을 품었다.
일면식도 없고, 별다른 힘도 없는 시티의 주민들.
사실 내버려두고 떠나도 그만인 일이다. 종후표가 로키 스테이션을 확인했을 때, 나는 슬레모킨의 캐리어가 있느냐 물었다. 어떻게 보면 마탑의 인원들과 함께 시티에서 벗어날 생각을 한 것이다.
미련없이 뒤돌아 한시라도 빨리 시티 바깥으로 벗어나는 게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이는 길일 테니 말이다.
2회차의 초능력자, 그들도 이런 마음을 품었겠지.
아무런 능력없는 밥버러지 민간인들을 내려다보며 분명 나와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세계의 초능력자들은 대부분은 중원무림 기준으로 일류 검객도 못 되는 놈들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들보다도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
모두가 떠난다면 덩그러니 남겨질 주민들은 어떤 기분인가. 무력감. 좌절감. 절망감. 그리고 체념이 뒤엉켜 세상이 미워지지 않겠는가. 나의 과거가 그러지 않았는가. 그래서 총을 들고 화염병을 들지 않았던가.
어쩌면 좀비는 죽어서도 그 원한을 잊지 못해 다른 사람들을 물어뜯는 것이 아닐까. 왜인지 씻겨나가지 않은 원망이 불현듯이 찾아왔다.
그러고 보면 전생 2회차의 나는 왜 죽었는가. 분명 죽어버렸으니 다음 생으로 넘어간 것일 텐데, 왜 갑자기 초능력자들이 다시금 원망스러운지.
또 좀비가 되어버렸을 사람들의 마음이 어째서 절절하게 와닿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어쩌면 나는 마트에서 죽어버린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여러 생각들을 해보니 도망갈 수가 없었다. 세상의 인간들이 대부분 뒈져버리고, 달랑 남은 연방의 문패만 지키는 게 무슨 소용인가.
전생까지 해왔는데 그때와 발전없이 똑같은 놈이 되어버려서는, 초능력자들을 원망했던 게 우스워질 테니.
탕!
그래서 방금 권총을 턱에 대고 쏘아봤다.
총탄을 맞아도 죽지는 않지만 충격으로 머리가 휙휙 들리긴했다. 게다가 턱을 맞으니 기분도 좋지 않더라.
그런데 고작 그뿐이었다.
나는 남겨지고 버려진 자들의 원망스러운 총탄을 맞아봐야 기분만 나쁘지 절대 죽지는 않을 거다.
해서 나는, 도망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이제는 총탄에 맞아도 기분만 나쁘지 죽진 않을 능력자가 되었기에, 스스로 몇 가지의 질문을 던져보았다.
나는 지금 정의감을 불태우고 싶은가.
바보같은 이타심을 가지고 있는가.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렇게 하겠는가.
구원자라는 허울뿐인 단어에 매달리는가.
기분파인가.
아무래도 그것은 쉬이 답할 수가 없다.
만약, 언평 선생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늘이 어둡구나! 하늘이 이리도 어두운데 너희들은 무얼 하는가!
하지만 나는 쉬이 답할 수가 없어서, 오늘도 사내가 되기로 했다.
입버릇처럼. 그야 나는 사내니까.
지금이라도 대의명분을 세우고 싶은 사내라서.
사내. 그 얼마나 간단하며 요점이 잡힌 단어인가.
더 이상의 의미없는 번뇌는 깨끗이 자르기로 했다.
딸칵-
방아쇠를 당기니 이미 탄창이 비어서 딸칵대는 소리가 들렸다.
* * *
종후표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말했다.
로키의 상황만큼이나,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스테이션 위에 떠있던 캐리어가 모두 사라졌다. 꽤 비싸 보이는 기체들이었는데 다들 미련도 없이 떠나갔다."
"그냥 다른 도시로 지원을 요청하러 가는거라 생각해라. 한결 마음이 편할 거다."
"그거 낙관적이라 좋군. 그런데 지금도 로키 스테이션으로 향하는 무리가 꽤 보인다. 저들은 저대로 로키 시티를 빠져나갈 생각이겠지. 막거나 설득하지 못하면 더 늘어날 거다."
로키 시티를 포기하고 벗어나는 자들이 생겨났다.
여기도 책임감 따위가 딱히 필요치 않은 세상이다.
힘있는 강자들이 계속 이탈 대열에 끼어들면 오늘 밤, 혹은 내일 밤 로키 시티는 함락당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설득은 무슨."
뷔에탕이 칙칙한 눈을 게슴츠레 뜨며 이죽거렸다.
"이제 아무도 로키에서 못 빠져나가."
"?"
"이미······내 아이들로 스테이션 근방을 막아버렸거든."
"······."
"신동경으로 다 끌어모으는 거. 완전 찬성이란다?"
저 멀리, 로키 스테이션으로 향하는 도망자들을 힐긋 바라본 뷔에탕이 그리 말했고, 잠깐의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시티를 한 번 빼앗기면 막대한 희생을 치루어 탈환해도 후폭풍이 큰 법.
카스트라 뷔에탕이 '로키는 병신같은 도시지만 버리기는 싫다' 했을 때부터, 혹은 그 전부터. 그녀는 애초부터 신동경에서 빠져나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나와 한 맹약과는 별개로, 평생을 일궈온 근거지인 신동경을 버리기 쉽지 않을 테지.
"흠, 좋다."
종후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넌지시 반문을 던졌다.
"헌데, 이 신동경으로 전부 모으더라도 그 후에 과연 로키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전력을 한곳에 모으는 선택이 역효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방금 늙은 마법사가 괴물같은 손가락에 붙잡혀 자폭하는 거 보긴 했나? 굉장히 강력해 보이는 늙은이였다. 아마 생각하는 것보다도 시체들의 전력이—"
"아니, 레탕 르포포이는 대단한 마법사가 맞지만 나한테 비벼보려면 한참 멀었어."
구우우웅—
카스트라 뷔에탕의 몸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압력이 일어나 주위를 눌렀다. 항거할 엄두도 내지 못할 기이함에, 공중을 날던 앵무새 법기가 부르르 떨리며 풀썩 떨어졌다.
한껏 눌려버린 종후표의 법력.
녀석은 불길함을 느꼈는지 곧장 입을 딱 닫았다. 참 눈치 하나는 빠른 놈이 아닐 수 없다.
곧, 뷔에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뭐, 그래도 9레벨이 저렇게 발악하다 죽어버렸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더 죽어나가기 전에 전력을 모아 대응하는 게 맞고."
뷔에탕의 말에 내가 옷을 주섬대며 답했다. 계속 발가벗고 있기는 뭐해서.
"생각보다 적극적이군. 로키가 아니면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그런가."
"풋."
"그러면 무력을 쓰든 저주를 걸든. 신동경으로 다 불러와라."
뽀드득-
나는 빌딩의 깨진 유리창을 밟고 허리를 폈다.
인형을 부리는 카스트라 뷔에탕의 본신이 플라자 빌딩에 있다고 해서, 나까지 이곳에서 죽치고 있을 생각은 없다.
"······상황이 저 따위인데 어딜 나가려고?"
"찾아야 하는 이들이 있다. 내게도 인형 하나 붙여라."
운공을 마친 덕분인지 단전이 묵직했다. 이윽고 나는 지체없이 황금빛 플라자 빌딩 아래로 몸을 던졌다.
후우우우—
빌딩 아래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현재 신동경의 유흥가를 거닐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비상사태에 갈피를 못잡고 길거리에서 허둥대고 있었다. 상가중 유독 북적이는 곳이 있었는데, 총기를 파는 합법 총포상으로 보였다.
다만, 총을 사봐야 달라지는 건 없겠지.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일이 심상찮게 꼬였을 때, 손쉽게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것 정도.
— 어!
그렇게 내가 낙하하던 중에, 지근거리의 아파트 창문에서 어떤 꼬마와 눈을 마주쳤다. 녀석이 기특하게도 손을 흔들어 주었는데, 뒤에서 나타난 부모가 눈을 가리더니 금세 데리고 들어가 버렸다.
내가 투신이라도 하는줄 알았나보다.
여튼 나는, 첫 목적지를 마탑주의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잡았다.
그런데.
아까 상공에 떠있던 거대한 손가락 몇 개가 터져나가면서 혈액이 지면으로 튄 게 문제인지, 플라자 빌딩에서 5분쯤 건물 지붕들을 밟고 쏘아지자 벌써 사방팔방이 시체들의 요기로 가득했다.
그래도 근방에 전투원이 없는 것은 아니라, 나름대로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전선조차도 빠르게 밀려나는 형국. 아직 마탑주의 마력이 느껴지는 곳까지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
어느 근방의 길거리.
전력공급 차단으로 조명들이 대부분 꺼진 어두운 세상에서, 수십의 장정들이 시체에 대항해 분투를 벌이고 있었다. 기세는 흉흉한데 하나로 정돈되지 않은 게 군벌 세력으로 보였다.
그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귀청을 울렸다.
— 새끼야! 밀리지 말라고! 튀면 어차피 다 죽어!
— 저 큰 놈을 먼저 죽여야 해. 큰 거 온다.
— 최소 6레벨이야. 씨발, 개소리하지말고 가서 대장 불러오라니까!
장벽의 사방면이 모두 무너졌다. 종후표가 말한대로 잔여 군벌세력들과 가륵을 치러온 연방의 세력들은 정신없이 뒤엉켜 싸우고 있을 터. 신동경과 상당히 가까운 소도시의 전황도 이런데, 마탑의 인원들이 더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어어어—
그 순간, 빌딩 옆으로 거대한 놈이 나타나 발을 들어 올렸다.
5m가 넘는 신장에 두꺼운 몸통, 허수아비처럼 얇은 팔다리를 가지고 있는 기이한 놈이었다. 요사스런 기운으로 보아 7레벨급은 되었고, 저자들 중 대항할 만한 기운을 가진 자는 없었다.
— 으아아악!
시체의 발치에 사람이 짓밟혀 터져버리기 전.
탓!
나는 어둠 속에서 전진하는 거체를 보며 광선을 뽑아 일단 출수했다. 찰나간 공간을 갈라버린 광선은 거체의 목을 그어버리며 뒤로 나타났다.
서걱—
기다란 거체가 순식간에 목이 잘려 쓰러졌다. 놈은 그럼에도 죽지 않고 버둥댔다. 광선을 거칠게 뽑아 목을 찌르고 대가리를 밟자, 놈의 머리가 펑 터지며 뜨거운 혈액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 누, 누구?
좋다. 적어도 200억 마리중 이제 한 마리 잡았군.
나는 대답할 여유 없이, 곧바로 회로를 가열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곧이어 어두운 허공에 응집된 마력의 구름이, 옅은 조명을 반사하여 번개라도 친 것처럼 세상이 점멸했다.
번쩍이며 주변을 메운 시체들의 형태가 드러났다. 골목마다 들어차 있는 것이, 못해도 수백 마리는 넘을 듯했다.
쾅!
쾅. 쾅. 쾅. 쾅. 쾅.
그렇게, 시야를 가득 메운 시체놈들을 보며 마나의 비를 쏟아낸다. 나는 어벙히 서있는 군벌의 끄나풀 놈을 뒤로하고 땅을 박찼다. 쏘아진 나는 또 한 마리의 시체를 베었다. 목이 뱀처럼 긴 놈이었는데, 잘린 머리 안에서 또 머리가 나와 이빨을 딱딱거렸다.
푹.
놈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박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래도 죽지 않기에 망치로 후려치듯 권총에 강기를 담아 후려치자, 그제야 놈의 머리가 박살난다.
헌데, 내가 놈의 몸뚱이를 떨쳐버리고 마탑주의 마력이 느껴지는 쪽으로 쏘아지려던 그때였다.
화악—
"?"
주변의 건물 위로 지는 거대하고 육중한 그림자.
급히 기운을 눌러 숨기고 위를 올려다보니, 비행선 만한 크기의 손가락 군집체가 저 먼 상공을 가르며 어딘가로 유유히 향하고 있었다.
거대하다 못해, 살점이 뜯겨 나갈듯한 요기.
두 다리가 본능적으로 굳어버렸다.
* * *
꽈과광!
"젠장! 우리도 도망쳐야 하는 거 아냐? 길 아는 사람?"
슬레모킨의 샷건이 청록빛의 마화를 뿜었다. 일격에 수십의 시체가 분해되며 길이 뚫렸는데, 그 공간이 다시 메워지는데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몇 시간 전, 로키의 장벽이 단번에 무너지고 시체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로키에서 연방의 공표와 작전에 따라 움직이려던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의 전력은 재수 없게도, 장벽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 소도시에 고립되어 버렸다.
극히 피곤한 얼굴의 한 마법사가 보호막을 펼치며 입을 열었다. 언제 구했는지 손에는 로키 시티의 지도가 들려있었다.
"죽여도 죽여도, 언데드는 계속 생겨날 겁니다. 무너진 장벽 사이로 언데드들은 점점 더 몰려오고 있는데, 주민들의 감염 속도 역시 가팔라서 죽이는 건 의미가 없을 겁니다. 퇴로를 찾아보곤 있는데······."
시체의 무서움은 강력한 힘도 있지만, 실상 이런 전투에서 가장 까다로운 건 감염성이다.
보통 강력한 시체일수록 감염성이 높다. 평범한 인간은 말 그대로, 스치기만 해도 감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수많은 로키의 외곽 주민들은 실시간으로 언데드화가 되고 있었고, 저레벨의 감염자들 역시도 본능을 주체 못하고 이지를 잃어버리니, 아군은 사라지고 적군은 점점 늘어만 갔다.
마탑과 지근거리에서 전투를 벌이던 어떤 세력은 10분전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다. 그들은 아마 전멸한 듯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피가 강을 이루었다.
마탑의 인원들이 강력한 개체들에 발이 잠깐 묶인 동안, 밀물처럼 밀고 들어온 시체들이 순식간에 근방 전체를 에워싸는 바람에 옴짝달싹조차 못 했다. 도주로조차 찾을 수 없기에 주변에서 가장 큰 빌딩을 근거지삼아 수성하는 지경.
그나마 마탑이니 지금까지 버틴 것이다.
"마탑주님!"
마탑의 일원들은, 주변으로 몰려드는 시체들을 밀어내며 마탑주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마탑주는 그들의 말을 들어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의 찌푸린 눈은 조금 전부터 근방의 하늘에 못 박힌듯 고정되어 있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지긋한 시선이 박혀있던 곳에서······
실로 거대한 손가락의 군집체가, 도시의 어둠을 뚫고 그 위용을 드러냈다.
방금 전 로키 상공에서 고강한 마법사를 자폭하게 만든 손가락의 군집이, 이제는 고립된 마탑의 전력을 향해 유유히 날아오고 있던 것이다.
#131화. 아포칼립스의 고인물 3
#131화.
거북이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진 손톱.
뼈대의 모양과 관절, 살색의 주름 하나까지.
분명 그 생김새는 부패한 인간의 손가락이나, 크기가 수십 미터가 족히 되는 괴이한 모습.
콰아아아—
총 여덟 개의 손가락이 허공을 유유히 가로질러 온다.
마치 비행선의 편대 비행처럼, 하나의 대형을 이루어 육중하게 상공을 가르는 손가락 군집의 존재감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조금 전, 고강한 경지를 지닌 9레벨의 마법사가 격렬한 전투 끝에 자폭하며 네 개의 손가락과 동귀어진했다.
그런데도 저 거대한 손가락은 아직 여덟 개나 남아있는 것이다.
발에 채이는 시체들과는 차원이 다른, 상식을 벗어나는 규모의 요기가 로키의 대기를 장악하며 뻗어온다.
아직은 형체만이 어렴풋이 보일 뿐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드넓은 손가락들의 그림자는 서서히 지상을 집어삼키고 있다.
"저것들이 모두 하나의 개체인가?"
그림자가 지는 하늘을 지긋이 바라보던 일레힌 포이체카의 혼잣말에, 갑자기 뒤에 있던 아힘사가 입을 열었다.
"네임드 '파루무치' 의 손가락으로 보입니다."
느닷없는 대답에 일레힌 포이체카의 고개가 돌아갔다.
"파루무치?"
"약 9년 전, 장벽 바깥의 세상을 방랑할 때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파루무치는 장벽보다도 높고 산처럼 거대하며, 12개의 굵은 나무기둥 같은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 부패한 손가락의 생김새와 규모가 일치합니다."
"파루무치, 연방이 공인한 9레벨 이상의 네임드로군."
"맞습니다."
"확실히, 저런 황당한 크기의 신체 말단은 흔치 않지. 그런데 어째서 파루무치의 손가락들만 잘려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알고있나?"
그 물음에 아힘사가 그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아쉽군."
이윽고, 일레힌 포이체카는 로브를 뒤져 에센스 병을 꺼냈다.
하필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에 마력을 원격으로 레반에게 건네준 탓에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최상급의 진득한 에센스를 목구멍 안으로 거세게 밀어넣으며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준비했다.
그리고.
"······뭐야 저거. 대왕 소세지랑 비슷하게 생겼네."
샷건을 연신 슬라이드하며 시체들의 진군을 갈아버리던 슬레모킨은 멀리 보이는 손가락 군집의 존재감에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
대검으로 시체들의 행렬을 종횡무진 휘젓던 루베르겐 집행관도 전투를 멈추고는 그 손가락들을 우묵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콰아앙!
마탑의 정예, 팔찌 네 개의 8레벨 마법사 둘이 전방에서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시체들을 죽여 살덩이의 성벽을 쌓는 사이, 루베르겐 집행관은 자신의 두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전신에서는 마탑주의 청록색 마력이 밝게 빛나고 있다. 로키 외곽 구역의 조명과 불빛들은 꺼진지 오래. 마력이 환히도 빛나니 멀리서도 눈에 띌 테고, 저 정체불명의 괴물이 노리는 목표도 마탑일 듯했다.
툭!
루베르겐은 집행관은 불현듯 전투 내내 물고있던 궐련, 마나 중화제를 멀리 던져버렸다.
"······어? 씨벌 저게 다 뭐여."
그리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손가락들이 시시각각 가까워지자 당황한 것은, 마탑의 마법사들과 함께 고립되었던 밴스 역시도 마찬가지.
웩!
거대한 손가락들을 눈으로 보자마자, 밴스는 왜인지 다급히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뱃속부터 괴상한 구토감이 몰려와 바닥을 붙잡고 엎어져서는 속을 게워냈다.
우웨엑!
밴스의 뱃속에서 아직 소화되지 못한 시체의 잔해들이 쏟아진다. 근처에서 그 꼴을 다 보고있던 아힘사는 심히 더러운 광경에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 그에엑!
그러면서도, 빌딩으로 기어 올라오던 시체의 목을 초진동 테크블레이드로 썰어버린 아힘사의 안광이 손가락의 군집을 응시했다.
리얼스킨 밑에 자리한 여러 파츠들이 철걱댄다.
구토를 하던 밴스는 입을 슥 닦으며 힘겹게 물었다.
"뭐, 뭐하게. 설마 나한테 쏘는거냐? 아 이제부터 토 안하면 되잖아."
"······."
밴스를 한심하게 바라본 아힘사는 몸을 돌렸다.
상공을 유영하는 거대한 손가락들은, 이제 누구라도 쉽게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상태.
지금 하려는 행동은, 오로지 아힘사의 자의였다.
드워프 다르간트가 생의 지독한 미련을 갈아넣어 마개조를 거친 전쟁병기. 아힘사는 어떤 마법사보다도 전쟁 경험이 풍부했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이 무슨 판단을 내려야 할지 정확히 이해한 뒤 실행하고 있었다.
걸어 다니는 전쟁터의 화약고. 학살병기 앙굴리마라.
지잉···
아힘사의 안광이 쏘아낸 홍색의 레이저 포인트가 공간을 가로질렀다. 가장 선두에서 빙글빙글 돌며 비행하던 손가락의 끝에 붉은 점이 나타났다. 주위를 둘러보자 마법사중 누구도 아힘사를 말리지 않았다.
이윽고.
아힘사의 리얼 스킨이 분리된다. 동시에 프레임이 각 파츠의 결을 따라 활짝 열리며, 그 안쪽을 가득히 채우고 있던 포신들이 지체없이 불을 뿜었다.
수십 종의 유탄과 추진체들의 살기짙은 향연.
목표물은 선두에 있는 손가락이었고······
꽈과과광—!!!
적의 접근을 불허하는 막대한 화력.
출사된 아힘사의 포격은 성공적으로 손가락에 적중해 자욱한 포연을 빚어냈다. 뒤이어 포연을 뚫고 부채꼴로 방사된 집속 탄환들이 한순간에 폭발하며 장장 백 미터에 이르는 하얀 연막 지대를 만들어냈다.
하얀 연막 지대에 있는 모든것에 불똥이 붙어 타올랐고, 작은 해가 천공에 생겨났다고 여길 정도로 세상이 환히 밝아졌다. 저 불똥은 한번 옮겨 붙으면 더 태울것이 없을 때까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일정 지역을 통째로 구워버린 폭발. 수억 개의 작은 알갱이가 터지는 듯 타닥-타닥대는 소리가 로키 시티를 울렸다.
그러나.
"······."
자욱하게 퍼진 연막을 뚫고 손가락의 군집이 다시 나타났다. 선두의 손가락은 꺼지지 않는 화염에 타오르며 근육과 힘줄등 속이 다 드러났는데도, 보란듯이 유유히 허공을 유영했다. 이제 손가락들이 이곳에 당도하기까지 삼백 미터 정도의 거리조차 남지 않았다.
그때.
구우우우웅······.
"?!"
슬레모킨은 육신이 하늘로 딸려 올라가는 것만 느낌에 주변의 기둥을 붙잡았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도 딸려 올라가고 있었다.
전투의 여파로 폐허가 된 외곽 도심 부근.
시체들의 피와 분비물들로 생겨난 강과 웅덩이가 공중으로 천천히 떠오른다. 한 점의 바람도 불지 않는데 둥둥 떠오른 그것들은 순식간에 불타는 손가락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촤르르륵!
상공에 떠있는 손가락에 자석처럼 빨려가 스며든 그 혈액들은, 아힘사의 집중 포격이 낸 상처를 단숨에 무위로 돌려버렸다. 거의 뼈까지 드러났던 상처에 살이 차오르고 피부가 재생된다.
그러자.
"흐음."
아힘사의 공격부터 지금까지의 장면을 눈여겨본 일레힌 포이체카가 작은 지팡이를 꺼내며 읊조렸다.
"자가 재생을 못 하는 것을 보면 그냥 조종체일 수도 있겠군."
말을 끝낸 일레힌 포이체카가 손과 지팡이를 가볍게 마주 붙였다 떼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는 실 수천 가닥이 느릿하게 늘어났다.
그는 수천 가닥의 실을 조작하며 팔을 넓게 벌렸다. 근방의 마나를 일레힌 포이체카의 회로가 집어삼켰고, 청록빛의 마력이 실에 서서히 녹아들어 무엇보다도 날카롭고 질긴 수천 가닥의 마력사로 변했다.
스아아악!
곧 그의 두 손에서 탄력있게 뽑혀나온 청록빛 마력사 가닥들은, 눈 깜빡할 사이 손가락 군집의 지척에 당도하여 드넓은 허공을 통째로 칭칭 감기 시작했다.
거미가 줄에 걸린 사냥감을 실로 둘둘 감아버리듯.
그렇게 희미한 수천 가닥의 실이 로키 상공의 온사방을 점하자, 마치 청록빛의 장막이 세상을 그대로 덮어씌운 것만 같았다.
"멈춰라."
뚝!
다음 순간 주먹을 말아쥔 일레힌 포이체카가 나풀대던 마력의 실을 당기자, 거짓말처럼 손가락들의 편대 비행이 정지했다.
이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던진 궐련을 밟으며 튀어나온 루베르겐 집행관의 신형이 청록빛의 마력사 줄기를 강하게 딛고는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사라진 루베르겐 집행관은 손가락 군집보다 위쪽의 허공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손가락 군집의 움직임을 봉해두는 동안, 거력이 담긴 집행관의 대검이 공간을 가르며 손가락 한 기를 절삭했다.
콰지직!
살점과 근육, 힘줄을 파고 들어간 집행관의 수 미터짜리 대검이 단숨에 뼈까지 닿았다. 비린내나는 골수가 퍽! 하고 튀며 거대한 손가락의 한 면이 꺾여 덜렁거렸다.
"지금!"
슬레모킨을 위시한 8레벨의 마법사 둘도 한시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중얼대던 그들의 앞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이 거대하게 만들어지더니, 녹색으로 타오르는 마화를 전방 수백 미터에 걸쳐 분사했다.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듯, 마력사를 타고 순식간에 번진 마화가 거대한 손가락들을 통째로 불살랐다. 잘린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던 핏줄기와 골수마저 타 눌어붙을 정도의 강력한 마법이 연신 쏘아졌다.
그러나.
툭! 투두두둑!
"······."
얼마 가지 않아 일레힌 포이체카의 마력사가 하나 둘 부질없이 끊어지더니, 그의 몸이 지팡이부터 공중으로 끌려 올라간다. 집중하며 마력을 더 쏟아부어봐도 압도적인 요기 앞에서는 약간의 경직 말고는 얻어낼 것이 없었다.
투두두둑!
결국 일레힌 포이체카는 마력의 실을 끊어버렸다. 그가 실을 끊어내자마자 손가락의 군집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다시 유유히 움직였다.
그때, 반쯤 잘려 덜렁대던 손가락이 돌연 기수를 지면쪽으로 틀었다. 그 육중하고 거대한 살색의 기둥이 상공에서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도 건드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넓은 지면에 운석처럼 틀어박힌 손가락은 조각조각 터져나갔고, 동시에 팽창된 요기가 지면으로 방사되어 강대한 파동이 불어닥쳤다.
쿠르르르릉—
끔찍한 폭음과 충격파가 천지를 잡아먹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요새처럼 쓰고있던 빌딩은 무너질듯 흔들리더니, 외장 벽재들이 거대한 파장에 깡그리 쓸려나갔다.
그 충격파를 방어하던 도중 결국 회로가 과열된 8레벨 마법사 한 명이 풀썩 쓰러져 호흡을 골라야만 했다.
명확한 힘의 격차.
"······."
일레힌 포이체카는 순식간에 골조만 남은 이 외곽의 빌딩에서, 이제 일곱 개가 남은 거대 손가락을 조용히 바라봤다.
"저 정체불명의 괴물은 9레벨의 수준마저 한참 상회하는 듯하다. 아무래도 여기서 멸절시키기는 힘들겠어. 나로서는 시간을 끌어보는 것이 최대인가."
"······네?"
그러자 듣던 슬레모킨이 무슨 소리냐는 듯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뾰족히 서있던 귀가 조금씩 밑으로 늘어지려 했다.
"우선, 너희끼리 떠나라."
쿠르르르륵—
대답할 새도 없이, 일레힌 포이체카 주변의 대기가 뜨거운 열기로 달아올랐다. 마나를 회로가 허용하는 한계까지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더해서 사방에 있던 마법사들의 팔과 심장에서 청록빛이 환히 빛나더니, 그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정순한 마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게, 마력까지 분배해준 일레힌 포이체카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부유하던 손가락의 군집체가 순간 상공에 우뚝 멈춰섰다.
"······?"
조금만 더 유영하면 마법사들의 지척에 닿는데도, 손가락들은 시간이 멈춘듯 요지부동이었다. 갑작스레 잠잠해진 분위기가 음산하기만 했다.
지지지지직—
그러다 한순간, 일레힌 포이체카와 가장 가까이 있던 손가락의 갈라진 손톱 밑이 작게 찢어진다. 이윽고 찢어진 부위에서 무시무시한 요기가 스멀대며 흘러나오더니, 찢은 살로 인간의 입 모양을 조형해갔다.
곧, 조악하게 조형한 입이 찌걱거리며 움직이자, 어떠한 의지가 장내에 있는 모두의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었다.
[ 나의 피를 받아라. ]
"······."
[ 우리는 너처럼 강력한 마법사를 원한다. ]
그것은 놀랍게도,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를 향한 구애였다.
무표정히 대검을 휘두르려던 루베르겐 집행관 역시 터져나오려는 마력을 누르며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 피를 받는다면······나머지는 곱게 죽여주마. ]
손가락은 충격적인 거래와 함께 변절을 종용했다.
그러자, 일레힌 포이체카는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묻고자 하는 게 있다. 당신이 파루무치인가."
[ 파루무치······이것은 그 덩치 산만한 놈의 손가락이 맞지. 여흥으로 잘라왔다. 나는 그놈을 싫어하거든. ]
"왜 내게 피를 주어 변절시키고 싶어하는 거지?"
[ ······. ]
"또, 무슨 이유로 로키 시티를 노리고 쳐들어온 것인가. 라그나로크 시티를 얼마전 인류가 수복했기 때문인가."
[ 던져주는 피를 마시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
"······."
단호한 감정이 머릿속으로 울려퍼졌다.
더 이상의 질의응답은 바랄 수 없을 듯했다.
주르륵-
잠시 뒤, 손가락의 찢어진 입에서 일렁이는 요기와 함께 몇 방울의 진득한 혈액이 흘러나왔다. 혈액은 천천히 흘러 손가락 끝에 방울져 맺혔다. 질식할 듯한 요기가 풀풀 풍기는 게, 누가봐도 평범한 피가 아니었다.
일레힌 포이체카의 고요한 침묵을 따라, 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콰과과광—!
거대한 손가락 군집이 유영해온 상공 밑 지상, 또 하나의 길이 막 생겨나고 있었다. 놀란 슬레모킨이 눈에 마력을 집중해 그쪽을 바라보자.
"······레반?"
그것은, 이미 시체들로 틀어막힌 길을 쾌속하게 달려오는 레반이었다. 제멋대로 캐리어에서 뛰어내려 사라졌던 그가 이제야 돌아왔다.
총탄처럼 질주하는 레반의 주위로 이따금씩 오색의 검광이 마구 번뜩인다. 그의 이동 경로에 있던 시체들의 머리와 몸뚱이가 순식간에 동강나며 길이 뚫린다.
강제로 시체들을 박살내며 이쪽으로 전진하는 사내.
모두의 관심이 그곳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고.
[ ······. ]
일레힌 포이체카의 눈앞에 피를 던져주던 손가락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그칠 기미 없는 레반의 질주를 보며, 거대한 손가락 두 개가 군집의 대열에서 이탈해 허공을 날았다.
그 육중한 거체는 곧장 레반의 머리 위에 당도해 강대한 요기를 내뿜었다. 숨이 멎어버릴 듯, 격이 다른 요기가 분사되었다. 뱀 앞의 쥐처럼 본능적으로 온몸이 굳어 멎게 해버리는 기운.
수많은 시체를 베어가며 호기롭게 길을 뚫던 레반은 그 요기를 정통으로 뒤집어쓰자, 잠시 당황한 얼굴로 우두커니 멈춰섰고.
"어."
쿠궁—
즉시 거대한 손가락 두 개가 레반의 머리 위로 떨어져 사방을 짓뭉갰다. 주위 시체들과 함께 일정 구역이 통째로 짓뭉개지며 크레이터가 생겨났고, 육중한 손가락의 밑으로 붉은 피가 줄줄 새어나왔다.
반색하던 슬레모킨은 눈을 의심했다.
"······어?"
······너무도 허탈할 정도로 끝나버렸다. 마탑주와 밴스, 아힘사를 제외한 모두의 눈이 황망한 경악을 머금었다.
다음 순간.
가장 먼저, 자홍빛 안광이 흉흉하게 움직였다. 살기를 풀풀 풍기는 아힘사가 테크블레이드를 작동시키며 손가락을 향해 무모하게 달려들었다. 뒤이어 움직인 사람은 아주 옅은 미소를 띤 일레힌 포이체카였다.
한계까지 마력을 뽑아낸 그의 전신에서 수만 가닥의 마력사가 일렁이며 솟구쳐 근방을 돔처럼 뒤덮어 버렸다. 발할라의 자존심인 마탑의 주인. 변절의 제안은 당연하게도 거절이었다.
[ 이런 벌레같은 것이······. ]
쿠구구구궁—
그 선택에 크게 분노한 손가락의 군집은 요기를 끄집어내 도전해오는 일레힌 포이체카를 내리눌렀다.
"아아."
그렇게 전투가 시작된 와중에도, 슬레모킨은 실어증에라도 걸린 엘프마냥 발을 떼지 못했다.
그에에에엑—
헌데, 그 다음의 일이었다.
저쪽에서 분명 레반을 짓눌러 죽였던 손가락 하나가 끔찍한 괴성을 지른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괴성에 슬레모킨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기괴한 울음을 토하며 미친듯이 경련하는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
거기에는, 빌딩처럼 거대했던 손가락이 어느덧 절반도 안 되는 크기가 되어 피를 줄줄 뱉어내고 있는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흘러나온 손가락의 피와 유형화된 요기가 둥실둥실 뜬 채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슬레모킨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거대했던 손가락의 규모는 점점 쪼그라들어 결국에는 퍼석해진 피부 밖에 남지 않자.
퍽!
누군가, 퍼석해진 피부를 칼로 가르고는 유유히 걸어나왔다.
웬,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나무총 하나를 쥐고서.
#132화. 아포칼립스의 고인물 4
#13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