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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 17

#132화. 아포칼립스의 고인물 4

#132화. 

부패한 피와 내장, 요기를 줄줄 흘리던 손가락 가죽은 마침내 터진 풍선처럼 바짝 쪼그라들었다. 

퍼걱— 

내가 검끝으로 가죽을 찢어 바깥으로 나오자, 시체들의 육벽에 막혀있던 시야가 탁 트였다. 

주변으로는 수백의 시체들이 짓눌린 듯 처참하게 죽어 피웅덩이가 펼쳐져 있었고, 에센스가 쏟아진 흔적까지 드문드문 보인다. 

'고작해야 손가락이 저만하면 대체 그 주인은 얼마나 거대하단 건지.'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어낼 정도로 강력했던 손가락들의 육탄공격이 근방의 시체들을 짓눌러 죽여준 덕분이다. 

나를 공격하러 온 거대 손가락은 둘. 

개중 하나가 마병에 당해 미라로 화했다. 

후우욱! 

다른 손가락은 위험을 느꼈는지 기묘한 기운을 발산하더니 곧장 상공으로 솟구쳤다. 저 손가락은 좋은 선택을 했다. 무엇인지도 모를 것과 싸워 얻을 게 없으니. 

"······." 

나는 아스파로프의 마병을 내려다보았다. 

자칫하면 깔려 죽을 뻔 했는데, 나뭇총이 기운을 투사하는 속도가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빨라진 것 같다. 

그때보다 경지가 월등히 높아졌기 때문인가. 

예전처럼 기력의 절반까지는 아니어도 꽤 많은 기력을 잡아먹어 발동된 이놈은, 흡성대법마냥 손가락에서 쭉쭉 빨아먹은 기운을 배부르게 머금고 있었다. 

그나저나 함부로 쓰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던 기억이 있는데, 엘프 군주인 아이작에 이어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전부 다 알아버렸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어 어쩔 수 없었다지만···이래서 다짐같은 걸 마구잡이로 하면 안 되는 거다. 

사내로서는 실격이군. 

휙- 휙- 

거대한 요기를 머금은 나무총의 대가리는 또 빙글빙글 돌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는 그것이 다음 전투에 방해될까 허리춤에 깊이 꽂아두었다. 

아무튼, 손가락 군집을 곧바로 따라오길 잘했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을 여기서 발견했으니. 

"캬, 형님!!!" 

저 멀리, 입에 더러운 것을 잔뜩 묻힌 루돌프놈이 괴로운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오자마자 기분이 매우 불쾌해졌다. 

"이번에도 바퀴벌레처럼 꾸역꾸역 살아남으실 줄 알고 저는 애초부터 안 놀랬습니다! 하하하···어욱! 근데 배가······." 

"입에 묻은 토나 닦고 말해라." 

"저 깨끗한 것만 골라 먹었는데요?" 

"그러냐." 

나는 고개를 돌려 난장판이 된 전장을 바라봤다. 

슬레모킨, 루베르겐 집행관, 아힘사와 마법사들. 

익숙한 얼굴들이 당황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의 상황이 그닥 좋지는 않다. 골조만 남은 건물 앞으로 시체들의 탑이 쌓여 있었고, 내장과 뼈의 잔해가 사방에 널려 있는게 꽤 오래 이 자리에서 전투를 벌인듯 했다. 

그때, 부유하는 5개의 손가락 군집을 마력사 수만 가닥으로 단단히 묶고있던 마탑주가 말했다. 

"회포를 풀 시간이 더 필요한가?" 

그는 내가 손가락에 깔려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마탑주와 나는 청록빛 마력으로 가장 가깝고도 단단히 이어져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바로 시작하지. 물러서라." 

그의 말 뒤로, 청록의 광휘가 심대히 타오른다. 

우우우웅— 

지금 마탑주의 청록빛 마력사가 빚어낸 원형 돔. 그것은 거대한 하나의 새장이 되어, 다섯 개의 손가락을 상공에 묶어두고 있었다. 

이윽고, 그 가늘고 촘촘한 수만 가닥 청록빛 마력사에 날카로운 가시가 무럭무럭 자라나 안쪽과 바깥쪽을 휘감고 뒤덮어 간다. 

콰드드득— 

매끄럽고 촘촘했던 마탑주의 청록빛 새장은 곧, 그 어떤 것도 빠져나갈 수 없는 가시넝쿨의 뇌옥이 되었다. 마법으로 빚어낸 가시들은 손가락의 가죽을 파헤치고 관통하며 제멋대로 자라났다.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마법사를 아이 취급하는 카스트라 뷔에탕은 대체 몇 살이란 말인가? 둘 다 외형은 늙은이들이 아니니 알 수가 있어야지. 

콰드득— 

내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에도 마력사에서 뻗어나간 청록빛 가시넝쿨들은 점점 그 규모를 좁혀갔고, 가시넝쿨에 얽힌 손가락들의 꼴은 당연히 엉망이 되어갔다. 

역시나 9레벨 마법사이자, 발할라의 마탑주. 

대단한 신위다. 

"겨우 잡고만 있다. 얼마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몸을 보면, 마탑주로서도 회로를 혹사해 힘을 꺼내쓰고 있는 듯했다. 내가 마탑주의 마력을 빼앗아 뷔에탕과 맹약을 맺어버린 것도 그 이유중 하나겠지. 

그때. 

쿠구구궁! 

[ 귀찮은 것들이······. ] 

"!" 

저절로 바짝 움츠려지는 몸. 

가공할 무형의 요기가 사위를 짓누른다. 9레벨의 마법사조차 압도할 법한 미지의 힘. 손가락 군집의 근처에만 있어도 구토감이 밀려오며 헛것이 아른댈 정도로 절대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허나 이쪽에도 마탑주를 비롯해 강력한 8레벨급이 포진해 있다. 요기가 강하다고 해서 기세를 잃어버릴 이들이 아니다. 

"아···정말···." 

샷건을 든 팔을 들어 붉어진 눈을 훔치는 슬레모킨. 

"죽은줄···알았···어!" 

슬레모킨은 일견 주책맞은 모습을 보이나 싶더니, 갑자기 샷건을 슬라이드하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콰과과과광—! 

6위계 마법이 청록빛 새장에 갇혀있던 손가락에 적중해 폭사한다. 육중한 살점이 덕지덕지 뜯어져 바닥으로 흘러내렸고. 

그때쯤, 루베르겐 집행관의 신형도 푸른 연기와 함께 나타나 거검을 들어올렸다. 

서거걱! 

전투가 삽시간에 재개되었다. 

사방으로 시체들의 괴성이 떠나가라 울렸다. 별별 특이한 능력이 있는 놈들이 많을텐데, 손가락이 뿜는 요기가 두려운지 근처로는 오지 않는다.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며 나도 광선을 뽑았다. 

'남은 손가락은 여섯 개.' 

마탑이 다섯 개를 맡는 동안, 내가 한 개. 

한 개 정도라면 단신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탓! 

나는 곧장 상공으로 도망쳤던 손가락을 잡기 위해 마법으로 허공에 몸을 띄웠다. 무의식적으로 청록빛 마력을 끌어쓰려다 자제하고 검을 들었다. 그간 광선 덕에 내기를 많이 아껴놓았기에 단전은 아직도 묵직했다. 

푸우우욱! 

[ ······. ] 

총탄처럼 솟구쳐 군집으로 복귀하던 손가락의 마디를 찔렀다. 나를 털어내려 빠르게 회전하는 손가락의 갈라진 손톱에 검극을 박아 넣었다. 

전신의 기맥으로 경력이 세차게 내달린다. 길고 두껍게 뽑혀나온 검기. 초식을 전개하며 손가락 마디를 결대로 썰어내자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허나, 생각처럼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 

마치 강철로 짠 것처럼 피부가 굉장히 질기다. 

검기를 덧씌운 검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정도. 

이건 미친 육체의 강도다. 같은 생물체가 맞나 싶다. 

게다가 인간이라면 이미 몇 토막이 나버렸을 공격에도, 손가락의 크기가 너무나 거대하다보니 그저 생채기와 비슷한 수준. 그렇기에 처음에는 애를 먹어야 했다. 

나는 광선에 기운을 더 밀어넣어 검강을 줄기차게 뽑았다. 놈을 도끼로 장작패듯 썰어내자, 이제는 감히 그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사람보다 커다란 살덩이가 과일 껍질 깎이듯 깎여나간다. 

푸화악! 

마구 비산하는 육편에서 살이 부패해 썩어들어가는 냄새가 코를 강하게 찔렀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근처에만 있어도 감염되어 버렸을, 사특하고 농밀한 요기와 부패한 향이 쉴새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렇게 부패한 살점을 검으로 썰어내니, 마지막에 가서는 드문드문 검게 변색된 뼈가 드러났다. 뼛골의 표면에 각인들이 깊게 새겨져 있었고, 그것이 이 부패한 손가락을 조종하는 원흉으로 보였다. 

심지어 뼈가 아주 지랄맞게 크다 보니, 새겨진 각인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그런데. 

후욱! 

뼈에 군데군데 새겨진 각인들이 전부 세상 밖으로 드러나자, 창졸간 곰팡이 포자처럼 퍽 퍼져나가는 기운의 파동이 전신으로 느껴졌다. 더해서 공간 전체가 가라앉는 듯한 이상한 기분까지 들었다. 

키이이이······ 

'마법.' 

그것의 정체를 내가 인지하자마자, 뼈에 새겨진 문자각인들은 기관진식에 설치된 화살이라도 된 것마냥 삽시간에 어마어마한 기운을 집중해 쏘아냈다. 재앙과도 같은 기운의 밀집.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차마 피할 새도 없었다. 

콰과광—!!!! 

큽- 

허공에 떠있던 내가 일직선으로 지면을 뚫고 틀어박혔다. 

아픈 줄도 모르고 먼지구름과 흙바닥을 헤엄쳐 바깥으로 기어나왔다. 그제야 전신이 망치로 두들긴듯 욱신거렸으며, 몇 줄기 선혈이 입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급히 호신강기를 두르고 보호막까지 이중으로 펼쳤기에 다행이지, 조금만 대응이 늦었다면 몸이 다 으스러져 피떡이 되었을 것이다. 

퉷, 나는 고인 핏물을 뱉으며 위를 바라봤다. 방금의 각인 마법 술식으로 힘을 다 쏟아냈는지, 뼈만 남은 거대 손가락은 골수를 줄줄 흘리며 천천히 낙하한다. 

쿠구궁······. 

자욱한 먼지가 썩은 내에 섞여 흩날렸다. 

뼈에 새겨둔 각인을 통한 고위 마법 수식의 발동. 과연 누가 저만한 손가락을 잘라 이따위 장난을 쳐둘 수 있다는 말인가. 

"흡." 

나는 가빠오는 숨에 혈도 몇 개를 짚었다. 답답하게 막히던 호흡이 터져나온다. 

전투 내내 등에 붙어있던 종후표가 말했다. 

"놀랐나? 뷔에탕의 인형처럼 조종당하는 중이었군. 9레벨 이상의 시체가 쓸 수 있는 기운은 무한정에 가깝고, 목과 머리가 잘려도 무탈히 재생하는 종족이다. 세계의 기운이 자연히 육신에 쌓인다는 말은, 마법사들의 회로가 놈들에게는 항시 작동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지. 기운이 무한정이니 이런 괴물딱지를 조종하는 것도 비교적—" 

"안다. 나도." 

대충 대답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내 쪽은 끝났으나, 아직도 마탑은 전투 중이었다. 손가락 군집을 상대하는 마탑주의 얼굴에 여력이 사라지고 있다. 그는 허리가 꺾이기 직전이었다. 이미 회로의 한계까지 혹사해 쓰고 있는 것. 격이 다른 요기 앞에서도 뿌리내린 거목이 되어 버텨내고 있으니. 

[ ······. ] 

순간, 저 손가락이 무언가 고심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타인의 머릿속에 직접 의지나 의념을 때려박을 정도라면, 낮게 잡아도 완숙한 경지의 9레벨급. 혹은 그 이상. 

마탑 말고도 다른 전력들이 아직 로키 내에 남아 있는데도 굳이 마탑이 있는 쪽으로 온 이유가 궁금했다. 

아마도 저 손가락은 굳이 마탑의 마법사들을 찾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탑의 전력이 만만찮은데다 예정에 없던 내가 나타나 손가락 두 개를 지워버렸으니, 계산이 뒤틀렸을 터. 

곧, 상념을 지운 나는 광선을 들고 쏘아졌다. 

* * * 

나는 즉시 손가락 군집과의 전투에 합류했고, 이 합류로 전투의 균형추는 급격하게 무너졌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시넝쿨에 갇힌 네 개의 손가락을 더 박살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한참 전투를 치루는 도중 이쪽에서도 희생이 나왔다. 한 명의 8레벨급 마법사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마지막 손가락 하나만이 남았다. 놈은 마법의 집중포화를 버티지 못하고 곤죽이 되어 떨어졌다. 

[ 피를 받았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곧 일깨워주마. ] 

그리고 마침내, 놈의 협박과 함께 요기가 모두 사라졌다. 

"······." 

바닥에 축 늘어진 손가락뼈의 기이한 자태를 보면서도 우리는 기뻐할 새가 없었다. 목적은 사냥이 아니라 생존과 탈출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했다. 

지친 기색의 마탑주를 향해 내가 입을 열었다. 

"마탑주님, 신동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생존한 세력과 강자들도 모두 신동경을 선택할 겁니다." 

"······." 

마탑주는 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슬레모킨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에휴, 로키에 있어야 할 칠좌께서는 대체 뭘 하는 건지." 

"다른 시티에 휴양이라도 갔나보지." 

"시체들 몰려오겠다. 빨리 가자." 

슬레모킨이 청록빛 괴물에 탑승해 앞장선다. 

그렇게. 

우리가 방향을 잡아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살아있네. 변절도 안 했고." 

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한 쌍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들은 시체의 잔해를 사뿐히 밟으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인간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남성과 여인 하나. 

나는,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뒤에야 그들을 인식했다는 것을 불현듯이 깨달았다. 

"······." 

차원부터가 다른 어떤 존재. 본능적으로 알았다. 

인간이되 분명 인간은 아니다. 불쾌한 골짜기라고나 할까. 

반박귀진의 경지를 이룩한 절대고수라도 되는 듯, 기운이 없다. 

그래서 더욱 불길하다. 방금 손가락 군집을 마주했을 때와는 다른, 불길한 감각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확실하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녹량백량, 바만차, 남궁천같은 9레벨과도 궤를 달리하는······. 

아마도 네임드급 시체. 그것도 매우 강력한. 

"파루무치의 손가락들이 다 사라졌군. 마탑의 마법사들 같은데, 탑주가 9레벨 중에서도 강한 편인가? 몇 번째 마탑이지?" 

소풍이라도 나온듯 여유로운 말투. 

인간의 형상을 한 그들은 다가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탑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마탑의 마법사들에겐 휴식이 필요하고, 저런놈들과 싸우면 필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의 발이 얼어붙은 듯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 빨리 신동경으로 오렴. 네 말대로 대부분 모아 뒀으니까. ] 

저벅. 

내 뒤에 붙여두었던 카스트라 뷔에탕의 인형 무리가 창졸간 튀어나와 그들과 우리의 사이를 막아섰다. 기이한 뷔에탕의 마력을 잔뜩 머금은 정예 인형들이었다. 

스각— 

그러나 8레벨급 인형들의 목은 순식간에 잘려 공중을 날았다. 동시에 여인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로키 시티에 귀찮은 게 있다더니." 

[ 얘, 시끄러워. ] 

"?" 

콰르륵— 

그 뷔에탕의 경쾌한 대답과 함께, 인형의 잘린 목에서 유형화된 뷔에탕의 마력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더니 꽉꽉 뭉쳐졌다. 

그 뭉쳐진 마력 덩어리는 마치 블랙홀처럼 주변에 떨어진 손가락뼈와 떨어진 살점을 다 빨아들이더니, 금세 거대한 살덩이로 이루어진 괴물의 형태를 갖추었다. 박살난 손가락이 다시 생겨난 것만 같았다. 

"······카스트라 뷔에탕이 왜?" 

나는 조금 당황한 마탑주를 잡아끌었다. 

"일단 가시죠." 

탓!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와 마탑의 인원들은 뷔에탕의 인형들에게 뒤를 맡기고는, 즉각 신동경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몸을 돌리자마자 손가락의 기세에 접근하지 못하던 온갖 시체들이 또 몰려들어 뚫어뒀던 퇴로를 꽉 막고 있는게 금방 시야에 들어왔다. 

푸후- 

저 멀리 신동경의 황금빛 플라자가 어렴풋이 보이는데, 이걸 언제 다 뚫고 신동경에 도착할지 한숨이 나왔다. 만약 전투를 벌인다면 도착하기도 전에 따라잡힐 것이다. 뷔에탕의 인형들이 아주 박살이 나서 부서지는 소리가 등 뒤에서 실시간으로 들려온다. 

그래도 아포칼립스 세상을 겪어 이런 상황이 익숙한 편인 나는, 모두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말문을 떼었다. 

"돌프야, 시체들이 창궐해 망해가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냐." 

"그야 사내끼리의 뜨거운 우정입니다." 

"지랄하네, 틀렸다." 

"······아녜요? 아! 총이네." 

"틀렸다." 

"아니, 그럼 뭔데요?" 

나는 억울하다는 듯 반박하는 루돌프놈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달리기다. 이 새끼야."

#133화. 대책회의

#133화. 

우리는 신동경을 향해 날듯 쏘아지고 있었다. 

슬쩍 뒤쪽을 돌아보자, 두 괴물의 앞을 막아섰던 뷔에탕의 인형들이 아주 가루가 되어 갈려나가고 있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꽤 강한 마력을 보유한 인형들이었는데······.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일행의 선두는 루베르겐 집행관이었다. 그는 앞을 꾸득꾸득 가로막는 시체들을 거검으로 갈라 뭉개버리며 길을 만들어냈다. 

로키 시티는 이미 절반 이상 무너져 내렸다. 

조명이 부서지고 꺼졌거나 불길에 휩싸여 무너지는 건물과 상가들,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입가에 사람 피를 덕지덕지 묻힌 채 기고 뛰고 나는 시체들뿐. 

"······." 

지금까지 로키 전역에서 몇 명이나 죽었을까. 

수십만 명? 아니면 수백만 명? 헤아릴 수 없겠지. 

사람 목숨이란 것이 참으로 허무하게 스러지고 있다. 

콰지직! 

— 게헥. 

순간, 땅 밑에서 기어 올라오려던 놈을 진각으로 밟아 죽였다. 사람보다는 작으나 팔이 길고 어깨근육이 발달되어 있으며 손에는 날카로운 갈퀴가 나있는 시체였다. 일명 두더지라고 불리는 종류. 

무덤덤한 살육이 이어지는 와중에 내가 입을 열었다. 

"돌프야, 시체가 창궐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두 번째가 뭔지 알고 있냐? 달리기 다음으로 중요한 거." 

옆에서 달리던 루돌프놈이 못생긴 얼굴을 찡그리며 성을 냈다. 

"······도망칠 때 쓸 미끼요?" 

"이제는 단번에 맞추는구나. 감이 좋아." 

"절 계속 시체놈들 있는쪽으로 은근슬쩍 밀고 있지 않습니까. 좀 적당히 하시라고요." 

시체놈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닌 루돌프 녀석에게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딱 봐도 맛이 없어 뵈는 탓이다. 그래도 시선 끌기에는 괜찮을듯 했다. 

"돌프야, 넌 물려도 감염 걱정이 없잖아. 저런 허접한 놈들이 물어봐야 얼마나 아프게 물겠니." 

"왜 제 마음이 다치는 건 걱정을 안 해주시죠? 그리고 미끼가 필요하면 백리뇌절인가 하는 저 새끼를 쓰면 되잖습니까." 

"저놈은 법기일 뿐이라 미끼로 써도 의미가 없다." 

"와 새끼, 꿀을 드럼통으로 빠네. 늦게 합류한 놈이 제일 빠져가지고. 정크타운이었으면 뒈졌다 진짜로." 

그러자 종후표가 비웃듯 말했다. 

"백리뇌부다. 모자란 놈." 

"모자란 놈? 목매달았는데 안 죽는다고 엉엉 울고불고 지랄염병하다가 두들겨 맞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누구더러 모자란—" 

"돌프야, 저기 뭐 온다. 조심하렴." 

"?" 

터업! 

"아악!" 

갑자기 길가 건물에서 고무줄처럼 뻗어나온 손에 잡혀 질질 끌려간 루돌프가,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집단린치를 당했다. 

그아아악— 

피냄새를 맡은 피라냐처럼 순식간에 몰려든 시체들이 루돌프의 위로 층층이 쌓이며, 사정없이 박아넣는 이빨과 더러운 손톱들. 

그런데 이빨을 박아넣고 질겅이던 시체들은 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떨어지더니, 금세 흥미를 잃어버린 듯 등을 돌렸다. 

"······." 

이윽고, 잡혀갔던 녀석은 굉장히 볼만한 칠흑빛의 짐승으로 변해서는 돌아왔다. 방정맞은 입도 꽤 조용해졌다. 

나는 콧김을 쒹쒹대는 루돌프를 군마처럼 타고 달렸다. 

우지지직—! 

전장을 내달리는 기병이 되어, 양옆으로 덤벼드는 시체들을 썰어버린다. 슬레모킨이 다루는 짐승과 나란히 내달렸는데도 루돌프 녀석은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신속했다. 

'점점 탈것의 모양새를 갖춰가는군.' 

아무튼, 나와 루돌프놈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어쩔 도리 없이 침울했다. 

자그마치 8레벨의 마탑 소속 마법사가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었기에.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에도 참여해 살아남았던 마법사가 오늘일로 죽은 것이다. 

"후우······." 

누군가의 착잡한 한숨이 크게만 들렸다. 

그러나 마탑의 마법사들은 침울한 와중에도 평정을 유지했다. 그리도 강대한 개체와 혈투를 벌이고도 한 명만이 죽었다. 사실 이 정도 피해라면 사정이 굉장히 좋은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신동경과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데, 신동경에 가까워지자 웅성거림과 소란이 점차 커졌다. 

마치 개미 떼처럼 새카맣게 보이는 인간들의 머리통. 

온통 날벼락을 맞은 로키의 주민들로 꽉꽉 들어차 있는 길거리였다. 신동경으로 대피하려는 피난민들로 인해 근방의 길거리들은 죄다 난장판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것이다. 

도롯가는 버려진 차량들로 인해 틀어막힌 지 오래였고, 밀려 넘어진뒤 군중의 발에 밟혀 죽은 희생자들이 셀 수도 없었다. 

타앙! 

— 아아악! 

하늘까지 울리는 총성과 날카로운 비명의 조화. 

신동경으로의 피난길에 오른 주민들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백만 명은 넘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는 도시가 아니라 통제가 일절 없으니 오롯한 혼란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애매하게 힘이 있는 놈들이 무리를 이뤄 먼저 신동경에 들어가겠다며 군중을 밀치고 밟고 주접을 떨고있지 않은가. 하기야 저것보다 더 능력있는 놈들은 진작에 신동경으로 들어갔겠지. 

수위 높은 폭력과 새치기, 무질서가 성행하는 현장. 

— 비켜! 비키라고 이 새끼들아! 

— 뒤지고 싶어? 

— 괴, 괴물이다! 

설상가상으로 어딘가에서 시체를 보았다는 비명까지 들려오자 밀집된 군중은 이쪽저쪽으로 우르르 쏠리며 고래를 피하는 정어리 떼마냥 움직였다.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상황. 

"······." 

저 모든걸 통제할 수는 없겠으나, 살아남은 주민들이라도 멀쩡히 신동경에 집어 넣으려면 누군가 질서를 잡아줄 필요성이 있다. 

금방 판단을 끝낸 나는 마탑의 대열에서 잠시 벗어나 몸을 띄우고는 그리로 향했다. 

쾅! 

우선 새치기를 일삼으며 주접을 떠는 놈들 몇을 쥐어패서 던져버리자 주변이 약간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몰려든 주민들이 많아도 너무 많은지라 고작 이 정도로는 질서를 바로 세우기에 부족했다. 

결국, 특별히 적당한 놈을 선정해서 공중으로 띄웠다. 

— 이거 갑자기 뭐····· 

이런 난리통에도 아이를 겁탈하던 정신병자였다. 놈은 버둥거리며 서서히 떠올라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펑! 

나의 손가락 끝에서 곧게 뻗어나간 지풍은, 공중에서 버둥대던 놈의 대가리를 할로윈 호박폭죽처럼 터뜨리기에 충분했다. 

— ······. 

그러자 갑자기 한겨울이 찾아오기라도 한 듯, 적어도 근방 수백 미터가 조용해졌다. 병목현상이 일어나 꽉 막혀있던 도로들도 찬물을 끼얹은 듯 천천히 싸늘해졌다. 

— 씨, 씨발! 뭐야!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방금 전에 길을 막지 말라며 총을 난사한 놈을 집어 마력으로 들어 올렸다. 놈은 숨겨둔 재간이 있는 놈인지 급히 경공을 펼치며 벗어나려했다. 

다만, 아무 소용없는 발버둥이다. 

쐐애애액— 

공력을 주입한 광선을 곧장 집어던졌다. 오색빛 잔상을 남기며 직선으로 쏘아진 칼끝이 놈의 대가리를 반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이윽고 쏘아진 검을 마법으로 회수해 손에 쥐자, 이제는 싸늘하다 못해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하기야 난데없이 나타난 놈이 몇 명을 허공에 띄워 대가리를 박살내 버리니, 그 충격이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흥분한 주민들을 진정시키는데 일 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른바 '튜토리얼 요정' 작전이었다. 

나는 광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낙천적으로 입을 열었다. 

"반가워요. 나는 레반, 여러분을 도와주러 왔습니다." 

마법으로 음성을 증폭시키자 어지간한 사이렌 소리보다도 내 밝은 목소리가 크고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제가 이제부터 발언을 하려는데, 불만 있으신 분? 이리 앞으로 나오세요." 

— ······. 

"없죠? 아직 시체가 여기까지 도달하진 못했으니, 새치기 말고 차례를 지킵시다. 무엇보다 방금 두 놈처럼 뒈질 짓 하지 마세요.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으며······아까 히죽대면서 사람 몇 칼로 쑤시고 도망친 놈. 거기 숨어 있는다고 해서 내가 모를 것 같았나?" 

펑! 

그 말을 끝으로 눈여겨 보아두었던 한 미친놈의 머리통까지 터뜨린 뒤, 4층짜리 상가 건물을 장력으로 무너뜨려 외곽으로 통하는 도롯가를 막아버렸다. 

나는 미련없이 몸을 돌려 마탑에 합류했고. 

얼마 뒤에는 신동경의 경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새 바리케이트를 쳐뒀군." 

손가락 군집을 때려잡는 동안, 신동경의 경계에는 어느새 커다란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차량이나 가재도구같은 온갖 물건까지 다 끌어모아 경계부근에 조잡한 바리케이트를 쳐둔 것이다. 

그리고 조잡한 바리케이트 위에서 사방을 경계하는 것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뷔에탕의 기이한 마력이 느껴지는 인형들. 

검은 수트를 차려입고 있는, 적어도 세 자릿수 이상의 인형들이 기이한 안광을 빛내며 바리케이트에 접근하는 주민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어지간하군. 인형이 아직도 저렇게 많이 남아있나?' 

내가 그 인형들을 지나쳐 신동경의 경계를 통과하자, 온 사방에서 신동경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신동경도 바깥 만큼은 아니지만 혼란스러웠다. 다행히도 카지노나 호텔, 각종 숙소와 객점등이 유난히도 많은 거대 유흥도시라 피난온 주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은 되었다. 

다음 순간. 

"흐음." 

종후표가 신동경의 풍경을 쭉 둘러보더니 말했다. 

"당장은 여분의 전력과 연료가 있거나 발전기를 돌려 현상을 유지하는 듯하지만, 신동경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면 전력 공급이 오래가진 못하겠군. 도시가 어둠에 잠기는 순간 전부 끝장이다. 식량도 마찬가지. 일주일만 지나도 도시는 텅텅 비어버릴 거다." 

현실적인 말이었다. 전기와 물, 식량. 기본적인 것들을 바랄 수 없는 사태였다. 끊기면 그대로 끝장이다. 

"도시의 수용과 생산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살아남아 신동경까지 오는 로키의 주민들이 몇 명이나 될까. 어림잡아도 수백만에서 천만은 족히 될 테지. 상상이 가나? 감당할 수 없을 거야." 

종후표의 그 부정적인 말과 함께,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은 황금빛 플라자 빌딩 앞에 섰다. 거기에도 뷔에탕의 강력한 인형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8레벨급의 인형 하나가 우리를 보자 가로막은 입구를 열어주었다. 

— 이쪽입니다. 

우리는 무뚝뚝하게 길을 안내하는 인형의 인도를 따라 플라자의 최상층으로 올라갔고. 

플라자 최상층에 이르자, 별세계가 펼쳐졌다. 

'그새 이 비좁은 곳에 다 모여있었군.' 

그곳에는 하나같이 굉장한 기운의 소유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카스트라 뷔에탕이 인형을 이용해 신동경으로 불러모았을 강자들. 어지간한 이들은 최상층에서 풍겨오는 기백만으로도 까무러칠 만큼 기운의 밀도가 짙다. 

확실한 9레벨급 이상의 강자만 따져도 여덟은 될 듯했다. 한 도시의 초강자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으면 이런 느낌일까? 

나의 피부로 와닿는, 소름 돋을 정도로 살벌한 시선들. 

지금, 저들의 기세는 하나같이 흉흉했다. 

"······." 

헌데 저들이 느끼는 우리 쪽도 비슷할 것이다. 옷가지에 마른 피를 덕지덕지 묻히고 들어온 마법사들. 연방 집행관에 슬레모킨, 일레힌 마탑주까지 눈을 번뜩이고 있으니. 

쿵- 

곧, 뷔에탕이 고아하게 손짓하자 문이 닫혔다. 

물론 뷔에탕의 본신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고, 또 예쁘장하게 생긴 인형에 옷을 입혀 앉혀 놓았지만 말이다. 

그때, 침묵을 깨고 어떤 키가 큰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머리가 치렁치렁하게 내려와있는 무표정의 여인. 칼을 차고있는 점과 느껴지는 기세로 보아 무림계의 거물이 분명했다. 

"인형사. 이제 필요한 인원은 다 모인 건가?" 

말투와 기세가 아주 곱지는 않았다. 

다들 예민해져 있음은 물론이고, 이들을 불러 모은 카스트라 뷔에탕은 연방 내부에서 공적이나 다름없는 위치이니. 

그리고 연방이 표면적으로는 군벌 토벌을 이유로 세력들을 모아둔 만큼, 뷔에탕에게도 지분이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사소한 걸 따질 시점은 아니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안온 놈은 죽은 거라고 봐도 돼." 

곧, 뷔에탕의 아름다운 인형이 얇은 천옷을 나풀대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확실히 뷔에탕은 본신을 감추었을 때 주는 긴장감이 더 컸다. 

"레탕 르포포이, 그 영감도 죽었어. 하여튼 기왕 이렇게 모았으니 토론을 하든 싸움을 하든 한시바삐 대책을 찾아냈으면 해. 그리고 시작하기 전에 저기 한번씩들 보고." 

촤륵- 깨진 유리창을 가려둔 커튼이 열리자. 

장내에 있던 강자들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황금빛 플라자 빌딩 바깥쪽. 눈이 좋은 자들은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주먹만 한 눈깔 수천 개가 달린 괴생명체가 마치 등대처럼 길쭉히 선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눈깔 괴물 보이지? 아무래도 염탐하는 것 같은데, 직접 가서 죽이고 올 거 아니면 서로 큰 소리는 내지 말았으면 좋겠네." 

부디 입과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그런데. 

쾅! 

여기 모인 이들의 소개도, 토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누군가 탁자를 부서질듯 때리며 불편한 심기를 마음껏 표출했다. 

얼굴에 칼자국과 흉터가 많으며 손이 솥뚜껑같이 두꺼운 장년의 남자였다. 

"연방놈들이 갑자기 군벌을 토벌하네 뭐네 생 쇼질을 해서 상황이 이렇게 된 것 같은데, 뷔에탕 당신의 생각은 어떻지?" 

장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딜런." 

소리친 남자가 누구인가 하니, 로키의 일부분을 지배하며 신동경을 두고도 전투를 벌였던 군벌의 수장인 딜런이라는 남자였다. 

말인즉 저 남자도 로키의 주요 군벌이라는 뜻. 

게다가 손가락에 찢겨죽은 늙은 마법사와 수준이 비슷한 강자. 기백이 보통이 아니었다.

"우리가 왜 신동경에 쥐새끼처럼 모여있어야 하냐는 말이다." 

척 봐도 짐승처럼 사나운 사내다. 헌데 저리 공격적으로 분위기를 조져놓는데도 선뜻 나서서 말리기는 껄끄러운지, 딱히 제지에 나서는 사람이 없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내가 나서기로 했다. 

대책을 세울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저런 자들은 기세 싸움에서 한번 밀리면, 끝까지 지랄을 떨어대는 부류였다. 쥐고 흔드는 걸 즐기는 귀찮은 부류. 심지어 9레벨급의 사나운 군벌 수장. 

나는 전음을 이용해 루돌프놈을 부추겼다. 

[ 돌프야, 저 등신새끼 입 좀 닥치게 해봐. ] 

"······?" 

[ 빨리. ] 

고개를 돌리며 누가봐도 제가요? 라는 얼굴로 당황하는 루돌프놈. 나는 위협적으로 눈을 치켜뜬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 

잠시 뒤, 정적이 이는 장내에서 루돌프놈이 내 가이드라인에 따라 입을 열었다. 

"야, 야." 

"?" 

그 양아치같은 부름에 딜런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루돌프놈에게서 정크타운의 진득한 향수가 느껴졌다. 

"되도록이면 입을 닥치고 있어라. 지금 너만 좆같은 게 아니니까 분위기 개처럼 초지지말고. 혹시 네 눈구멍에 박힌건 눈깔이 아니라 불알이냐?" 

"······." 

아마 기가 찰 것이다. 

저딴 놈의 입에서 원색적인 욕설이 나올줄은 몰랐다는 듯, 할 말마저 턱 하고 막힌듯한 표정. 

그러나 딜런은 곧장 삐딱하게 일어섰고. 

콰과광—! 

솥뚜껑같은 그의 손에서 창졸간 거대한 장력이 터져나와 루돌프의 명치를 후려쳤다. 북터지는 소리와 함께 포탄처럼 날아간 루돌프놈이 플라자 벽을 뚫고나가 복도에 처박혔다. 9레벨이 꽤 힘을 실어 뻗어낸 장력. 

당연히 죽거나 기절했으리라 생각한 딜런이 무심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부스스— 

반신이 칠흑처럼 변한 루돌프 녀석은 무너진 벽에서 일어나더니 부스스한 먼지를 털며 내쪽으로 힘겹게 발을 옮겼다. 그리고 녀석은 보란듯이 찢어진 입을 슥 닦고는 말했다. 

"존나 물주먹이네 씹새끼." 

피식- 

"거, 재미있는 놈이군." 

남자는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다른 이들을 둘러보고는, 다시 제 자리에 앉아 거만하게 발을 테이블에 걸쳤다. 

위력도 과시할 겸 두들겼는데 한참 약해보이는 놈도 제대로 못 거꾸러뜨렸다. 분명 비대한 자존심에 약간의 스크래치가 났을 것이나, 일단 관대한 척하며 넘기는 것이다. 

아마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는데 억지로 참고 있으리라. 

그렇게 간단한 드잡이질과 적당한 기세싸움이 끝나자, 뷔에탕의 인형은 이제 되었다는 듯 말문을 열어 장내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제 기탄없이 의견을 모아볼까? 어떻게 하면······." 

인형의 긴 속눈썹이 느린 속도로 깜빡였다. 

"우리가 이 망해가는 로키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134화. 닭장이잖아

#134화. 

소곤대는 목소리. 

- 형님, 뒈질 것 같은데 혹시 토해도 됩니까? 

- 참아라. 그게 다 가오와 직결되는 거다. 당당하게 나가서 맞아놓고 참다 참다 토하는 것만큼 쪽팔린 게 없다. 

- 무슨 힘이······아무래도 명치를 너무 세게 맞은 것 같아요. 진짜 죽이려고 때린 것 같은데. 

- 9레벨이 죽일 마음으로 때렸으면 이미 죽었지. 

- ······아니, 9레벨이었어요? 그걸 왜 이제 알려주시죠? 

- 나도 너 두들기는 거 보고 눈치챘다. 

- 그전부터 알고 계셨던 것 같은데······. 

- 조용히 해라. 

루돌프놈이 아프다며 소곤대는 지금. 

황금빛 플라자 빌딩 최상층에는 여덟 명의 인영이 어둑한 원탁(圓卓)앞에 둥글게 앉아 있었다. 

뷔에탕과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도 당연히 저 원탁에 자리해 있었고, 나를 비롯한 수십 명은 뒤로 한 발 물러나 원탁의 결정을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과거 카스트라 뷔에탕과 마탑에서 한바탕 일을 벌였던 마탑주이니만큼, 이것이 딱히 반길 법한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외부의 적이 이미 로키 시티 내부까지 쳐들어와 똬리를 틀어버린 이상, 이 안에서 과거의 일로 반목하는 것은 실로 멍청한 짓. 

일단 힘을 합쳐 살아남아야 후에 지지부진한 결착을 맺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그러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 원탁대담은 본인의 세력을 지휘할 결정권을 가졌거나 강력한 무력을 보유한 저 9레벨 초인들을 중심으로 돌아갈 듯했다. 

9레벨급의 강자 여덟 명. 

로키 신동경의 패자. 

마피아 조직의 보스. 

전 십이제 출신. 카스트라 뷔에탕. 

— 나 모르는 아이 있나? 

많은 수하를 거느린 대군벌의 수장. 

루돌프 녀석을 두들겨 벽에 처박아 버린. 

수많은 흉터 사이로 욕심이 그득한 장년. 

— 딜런 주키치다. 

여인치고는 꽤 큰 키에 깊고 또렷한 눈매. 

긴 머리칼을 치렁하게 늘어뜨린 무뚝뚝한 중년. 

메가콥 종남(終南) 코퍼레이션 소속. 

— 나 종남의 천려일이오. 

전신에 진짜 도사같은 현기가 철철 흘러넘치는 청년. 

십이제의 수좌인 진공진인과 같은 배분의 고수. 

메가콥 무당(武當) 코퍼레이션 소속. 

— 원시천존을 모시는 진천일세.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얼굴이 붉은 노인. 

찌르기에 특화된, 가느다란 형태의 검을 찬 고수. 

무림계 대기업, 구파일방 점창 소속. 

— 육장도요. 

청록빛의 마력을 가진 9레벨의 마법사. 

발할라 산맥, 여섯 번째 봉우리의 주인. 

마탑주. 

— 일레힌 가의 포이체카입니다. 

과묵한 인상에 학구파적인 외모의 소유자. 

발할라 산맥, 다섯 번째 봉우리의 주인. 

마탑주. 

— 무뇨즈 투르쿤. 

마지막으로, 무림계도 아니면서 냉병기를 들고 다니는 사내. 

단전 대신 회로를 이용해 검을 다루는 마법계의 기사. 

검주(劍主). 

— 로저 슈베른입니다. 

군벌 둘, 무림계 셋, 마법계 셋. 

이윽고, 생존을 위한 그들의 토의가 시작되었다. 

* * * 

일가를 이룬 9레벨의 대단한 초인들이라도, 일단은 사람인지라 각자가 지닌 특유의 성정이 있다. 

우선 점창의 육장도는 초장부터 고요한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검주 로저 슈베른은 그저 묵묵한 눈빛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둘은 중립에 가까워 보였다. 

다섯 번째 마탑주인 무뇨즈 투르쿤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일단 9레벨이 여덟이나 있는 만큼, 의견을 미뤄두고 지켜보는 이들도 필요했다. 

심유한 현기를 지닌 무당의 진천진인과 종남의 여검수 천려일. 그들은 말수가 없는 것은 아닌데, 어딘가 결이 비슷하게 맞는 고수들인데다 그들 사이에는 묘한 유대감이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무림계의 명숙이니 안면을 터두었을 것이다. 

종남 코퍼레이션의 천려일이 입을 열었다. 

"신동경을 수성하면서 연방 정부의 지원을 기다려보는 건 어떠한가. 시티를 먼저 탈출한 이들이 사안의 심각성을 백방으로 알리고 있을 터." 

그러자, 거만한 태도로 원탁에 발을 올려놓은 딜런은 쓰게 웃더니 부정적인 소리를 잔뜩 늘어놓았다. 

"큭, 뻔한 소리 하긴. 이제 시티 스테이션은 완벽히 시체 놈들의 점령지다. 로키에 남아있는 거라곤 신동경 구역 한 곳. 장벽을 지키던 광역보호막까지 무너진 판에 지원? 와줄 리가. 그리고 아까 하늘을 둥둥 떠다니던 그 손가락같은 괴물이 더 있으면 어차피 캐리어는 진입도 못하고 다 박살난다. 그냥 좆된거라고." 

그 말에 뷔에탕의 인형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차라리 로키의 칠좌를 찾는 게 더 빠를걸." 

"칠좌. 그래!" 

딜런이 못마땅한 얼굴로 걸걸하게 소리를 질렀다. 

"시티마다 한 명의 칠좌가 지키는 게 연방이 내건 룰 아니었던가? 대체 로키 시티에 있는 칠좌인 능광객(凌光客)은 어디에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 변절이라도 했나?" 

무당의 진천진인이 입을 열었다. 

"그분께서도 무언가 방도를 찾고 있지 않겠소." 

"능광객과 같은 무림계라 그런지 이해심이 넓네." 

"무림계라는 틀에 가두기에는 고절한 경지를 이룬 고인이라, 그리 편협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소만." 

"무당의 진자배 검수도 능광객을 불러낼 능력이 없나?" 

"없소." 

"당신 대신 진공진인이 왔으면 좋았을걸. 아쉽군." 

"······." 

못마땅한 시선으로 딜런을 응시하는 진천진인. 

몸에서 풀풀 흘러나오던 현기가 심상찮게 일렁였다. 

그때, 누군가 과열되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이 말했다.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 네임드 가륵인가?"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로키의 칠좌를 탓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좋은 선택이었다. 

가륵의 이름이 나오자, 카스트라 뷔에탕이 마탑주를 보며 물었다. 

"일레힌 꼬맹아, 아까 그 두 연놈 봤지?" 

손가락 군집을 죽인 뒤에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뷔에탕의 인형이 난입해 막아선 두 개체를 말함이었다. 마탑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언데드들과는 지닌 격이 달랐다." 

"남성체쪽이 가륵이야. 일전에 혈액을 받을 때 한 번 봤거든. 여성체는 나도 모르는데 딜런은 혹시 알고 있을지도?" 

"나는 피같은 거 안 받았다. 더럽게 찝찝해서 말이지. 그나저나······." 

그 말을 끝낸 딜런의 눈매가 매섭게 빛나더니, 무림계와 마법계 인사들을 향했다. 그의 흉터 가득한 낯이 일그러지더니 짜증이 난다는듯 또 원탁을 내리쳤다. 

쾅! 

"연방이 가륵 그 피 뿌리는 놈도 잡고 군벌까지 덤으로 토벌할 생각이었다면, 라그나로크 때처럼 십이제급도 딸려보냈을 거 아뇨. 정말 당신들이 다야? 가륵 그 개자식이 몇 레벨인지도 정확히 모르는데?" 

반대편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딜런은 반응이 없자 공쳤다는 듯 코를 팽 풀고는 인상을 구겼다. 

그는 곧이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왜 말들이 없어? 양쪽 패 다 까고 협치해야 계획을 세우든지 할 거 아냐." 

딜런이 신경질적으로 연기를 내뿜자. 

점창의 육장도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것이 어째서 궁금한가.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을." 

촤르륵— 

곧 육장도는 원탁을 짚고 일어나 유리창의 커튼을 걷더니, 저 멀리서 곧추서있는 눈깔 괴물을 조용히 응시했다. 심유하면서도 쉽게 접근키 힘든, 엄숙하기까지 한 육장도의 기백. 

점창의 무인들은 극한의 쾌검을 추구한다. 그러니 경지에 이른 점창의 무인이 앞에 있다면, 눈을 감는 것은 금물이다. 전신 구석구석에 구멍이 뚫려 피를 쏟기 싫다면. 

"······." 

곧, 육장도는 저벅저벅 돌아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단지 몇 걸음 움직이는 것만으로 공기를 무겁게 만드는 무인. 이 자리의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노고수였다. 

육장도의 착석과 동시에, 원탁의 눈동자들이 딜런에게 해명을 요구하듯 몰려들었다. 

"설마 저 한 마디에, 날 변절했다 의심이라도 할 건가?" 

"그런 것은 아니니 이해하시게. 이 늙은이가 과했네." 

"···쯧, 노망났나." 

시종일관 꽤 거침없는 태도를 견지하던 딜런은, 찜찜한 얼굴이 되어 혀를 끌끌 찼다. 

갑자기 짙은 긴장감이 장내의 공기에 서려든 듯했다. 

그리고 그때쯤, 일레힌 포이체카와 다섯 번째 마탑주의 시선이 교차했다. 

"신동경을 지켜도 지원을 기대하지 못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는 게 맞겠습니다." 

"마침 로키와 지척인 거리에 얼마전 수복해둔 라그나로크 시티가 있지 않나." 

라그나로크 시티. 

연방이 군벌 세력과의 마찰까지 각오하고 로키를 베이스캠프로 낙점했을 만큼 두 도시간의 거리가 가깝다. 

만약 어딘가로 가야만 한다면 최선의 선택일 터. 

하지만 딜런은 이번에도 흉터 가득한 얼굴을 격하게 가로저으며 반박했다. 

"그야 캐리어를 타니까 지척이지. 육로를 가로질러 가려면 제일 짧은 루트로 가도 100km를 훌쩍 넘어간다. 일단 장벽 바깥까지 뚫는 것부터가 문제야. 우리는 이 좆망할 신동경에 꼼짝없이 갇힌 거라고." 

"풋, 제 발로 여기까지 걸어와 놓고 징징대기는." 

"그건 뷔에탕 당신이 스테이션을 쳐 틀어막아서—" 

"아까 입조심하자고 한 말 혹시 못 들은거 아니지?" 

"······." 

뷔에탕의 핀잔에 딜런의 눈썹을 심히 꿈틀거렸다. 하지만 별 대꾸는 하지 못했다. 

같은 9레벨급이라도 그 경지와 능력은 천차만별. 

뷔에탕은 9레벨 중에서도 굉장히 상위권에 위치해 십이제의 지위까지 올랐던 마법사. 아무리 딜런이 큰 군벌세력의 수장이고 9레벨이라 해도 힘의 차이는 확연한 것이다. 

전 십이제라는 거물 앞에서는 유독 분노조절을 잘 해버리는 딜런. 나는 저자가 의외로 다루기 쉬운 상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맥을 툭툭끊던 딜런이 뷔에탕의 기세에 말려 굳게 입을 닫자, 그 뒤의 대화들은 직전보다 수월하게 흘러갔다. 

평범한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하고 경험이 많은 자들이니, 순식간에 대책의 가닥이 잡혔다. 

— 장벽의 사방면이 무너졌으니, 시체들은 끝없이 유입될 것이다. 삼존이라도 나타나 도와주지 않는 이상 라그나로크 시티로 탈출하는 게 현재로선 상수겠군. 

— 동감입니다. 

— 그렇다면 그리 실행하는 것으로······. 

"저 밑바닥에 있는 로키 주민들은 어쩔 겁니까?" 

그것은 문득, 원탁의 결정에 끼어든 나의 물음이었다. 

카스트라 뷔에탕이 누구든 기탄없이 의견을 내라 했으므로, 원탁에 앉아있지 않은 이도 참여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여기있는 전원이 꽤나 높은 경지에 오른 강자들이니. 

— ······. 

덕분에 원탁에 둘러앉아 있는 9레벨들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함께 물러나있던 마탑의 인원들을 포함한 수많은 시선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나를 샅샅이 훑으며 주목한다. 

신동경으로 구름같이 모여든 저 주민들을 어찌할 것인가. 

그것은 원탁의 참여자들도 끝끝내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하던 안건이었다. 헌데 내가 나서 그 문제를 수면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라그나로크 방향으로 길을 뚫어 탈출할 거라면, 주민들과 함께 가로질러 행군해야 할 겁니다. 너무 많아서 몇 명인지 다 셀 수는 없겠군요. 철저한 계획을 꾸려봐야겠습니다." 

그렇게. 

원탁의 참여자들이 무언가를 고심하는 듯 입을 굳게 다문 통에 참으로 무거운 정적이 일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딜런이 먼저 나서 입을 열었다. 

"좋네, 주민들을 미끼로 쓰면 되겠어." 

"최대한 살려보자는 뜻으로 말한 겁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연민인가? 약자에 대한 동정?" 

신동경의 길거리에 가득찬 주민들을 내려다본 딜런이 이번에는 꽤 진중한 태도로, 굉장히 단호하게 경고했다. 

"못 데려가니까 주둥이 닫아. 그리고 네놈, 누군지는 관심없는데 혼자 잘났답시고 같잖은 위선 떨지 마라. 다 같이 죽어서 시체꼴 되고 싶은게 아니면." 

"눈알 대신 불알을 뽑아 넣어둔 것이 맞군." 

"!?" 

흐흐— 

나는 딜런을 보며 터져나오는 실소를 도무지 참지 못했다. 

아무리 무법지대인 로키에서 살아가던 군벌이라지만, 그래도 9레벨의 경지에 올라있다는 놈이······ 

"무슨 다섯 살짜리 계집애인 줄 알았다. 아까는 제 감정도 못 이겨서 탁자 부수고 아주 사내다운 척 염병을 다 떨더니, 주민들도 데려가자는 의견이 나오자마자 갑자기 이성적이고 냉철한 면모를 갖춘 척을 하는군. 아무리 봐도 계산적으로 행동할 얼굴은 아닌데." 

"······이 애송이 새끼가!" 

대놓고 면박당한 딜런은 자신의 기운을 일으키려다 무의식적으로 뷔에탕의 눈치를 살폈다. 

치익- 

결국 포기하고 원탁에 담배를 비벼 끈 그는, 한숨을 내쉬며 같잖은 표정으로 나를 주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당의 진천진인이 불쾌한 낯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소협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외다." 

"그렇습니까?" 

나는 한 발 더 옮기며 원탁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대답하려던 나 대신. 

카스트라 뷔에탕이 진천진인을 비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무당벌레, 당신이나 끼어들지 마. 쟤가 누군지 알기나 해?" 

"······허." 

"그리고 아무나 기탄없이 참여하라는 말 못 들었어? 난 재미있으니까 계속하게 내버려둬." 

곧, 입꼬리가 올라간 인형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마치 어떻냐며 인정 받고 싶어하는 것 처럼. 괜히 피부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 들었으나, 사내라서 참아낼 수 있었다. 

"······." 

나는 여덟이 모인 원탁 앞까지 다가갔다. 

나라는 사내는 직전에 찾아왔던 번뇌를 미련없이 잘라두고 각오를 다졌으므로 상당히 감성적이며 쾌속했다. 말하려는 것은 내가 경험했던 일이기도 했다. 

"버려지면 무슨 기분일지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그야 진지하게 염두에 두었을 리가 없다. 

훌륭한 재능과 좋은 사문을 타고나 여기까지 올라온 자들 아니던가? 구름 위를 노니는 자들의 눈에 땅을 기어다니는 개미까지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 ······. 

"어느 한쪽에서는 시체 사냥꾼이 시체로 변해버린 동료들을 잊지 못하여 장벽 밖으로 나가 목숨을 태우고, 마약이나 팔아먹던 악덕 메가콥의 원로마저 목숨을 내걸고 동귀어진해 창창한 후배들을 구해냈으며, 출가한 수도자가 십수 년 만에 수도계로 돌아와 변절의 길을 걷는 부모를 죽이고 새로운 하늘을 열어보려 고군분투 중인 세상인데······." 

— ······. 

"이쪽에서는, 참." 

쾅!!! 

그 순간, 거대한 장력에 두꺼운 원탁이 두 개로 쪼개졌다. 

두꺼운 손바닥을 위협적으로 털어대는 딜런이었다. 

그는 부러질듯 이를 부득 갈더니 고함쳤다. 

"헛소리 늘어놓지 마라! 현실도 모르고 이상만 좇는 애새끼." 

"가륵의 피도 찝찝하다며 받지 않고 아직까지 사람으로 남은 놈이, 저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을 전부 내쳐버리고 떠나 살아남으면 앞으로의 인생은 찝찝하지 않고 즐거울 것만 같나?" 

"······." 

"어차피 닭장이잖아." 

딜런의 달아오른 안면을 보자. 

나는 이유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또 참지 못했다. 

"로키에서 도망쳐봐야 똑같은 닭장인데. 즐거우면 뭐 얼마나 즐겁게 살겠다고." 

* * * 

수장들의 원탁이 진행되는 황금빛 플라자 최상층. 

그보다 위. 

백색의 긴 장포를 두른 채, 플라자 빌딩 옥상에 서있던 자가 일순간 휘영청한 안광을 빛냈다. 

그자의 전신에서 아득한 무형의 기세가 폭사하며 뻗어나가더니, 저 멀리에 등대처럼 솟아있던 눈알 시체의 허리를 그대로 잘라버렸다. 

꽈과과광—!!!! 

주먹만 한 눈알들이 잘 익은 열매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윽고, 백색의 장포를 두른 자는 무너지고 타오르는 로키의 장벽을, 로키 시티의 가장 위에서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로 닭장같군." 

투둑- 

그때, 장포의 발치로 떨어지는 진득한 핏물. 

사색에 잠겨 무언가를 관조하는 그의 손에는 척추뼈가 통째로 뽑혀나온 머리 두 개가 잡혀있었는데- 

그것은, 언뜻 보면 인간으로 오해할 정도로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남성과 여성의 시체였다.

#135화. 무슨 감정이 드는가

#135화. 

레반이 앉아있는 딜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혼자 도망쳐서 뭐 얼마나 잘 살겠다는 건지." 

흐흐— 

배경 음악처럼 새어 나오는 웃음 소리. 

두 쪽으로 부서진 원탁 바로 앞까지 다가온 레반이 머리가 돌아버린 병자처럼 웃음을 참지 못하자. 

딜런이 한쪽 눈만 위로 치켜뜨며 물었다. 

"애송이, 할 말은 다 끝났나?" 

"네. 끝났습니다. 그런데 소중한 원탁이 갈라졌군요." 

"그러게. 나도 모르게 원탁을 부수어 버렸군······아무튼 우리는 라그나로크 시티로 떠날 것을 결정했으니, 아무래도 부서진 원탁에 네놈의 한심한 의견이 올라갈 자리는 없어 보인다만." 

"그야 다시 말끔히 붙여서 올리면 됩니다." 

극도로 싸늘해진 플라자 최상층의 분위기. 

그렇게 고요한 침묵이 한참 이어지나 싶더니. 

쿵. 쿵. 쿵. 

흉터 가득한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딜런의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그는 더 이상 이빨을 감추지 않았다. 저리 모욕적인 언사라면 카스트라 뷔에탕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히히— 

딜런은 자신의 입에 두 손가락을 넣더니 입꼬리가 찢어져라 벌리며 괴이하게 웃었다. 

"너, 아까처럼 웃어봐라. 이렇게였나?" 

"이렇게 하셔야지. 흐흐흐." 

"······큭! 크하하하!!!" 

쿠르르륵— 

재미있다는 듯한 비웃음과 동시에, 주변의 마나가 의자에 삐딱하게 걸터앉아 있는 딜런의 심장으로 죄다 빨려 들어간다. 뒤쪽에서 지켜보던 몇 명의 마법사들이 그 기세에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쿠구구궁······. 

"좋다. 네가 과연 언제까지 그리 천진난만히 웃을 수 있나, 여기있는 자들과 함께 구경해주겠다." 

기세가 일변했다. 

가감없이 마력을 해방한 딜런의 솥뚜껑같은 두 손에 거대한 힘이 응집되어간다. 뷔에탕을 비롯한 원탁의 참여자들은 말리는 기색도 없이 현 상황을 받아들였다. 

원탁의 주최자인 카스트라 뷔에탕이 보장해 준 것은, 어디까지나 기탄없는 의견 제시 정도에 불과했다. 그 후의 충돌로 생겨난 파장은 알아서 감당함이 옳다. 

그리고 원탁은, 방금전 딜런이 부숴버렸다. 

더 이상의 이성적인 토의는 없을 거란 얘기였다.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그들은 결정을 내린 대로, 라그나로크로 향할 것이다. 

"분연히 나선 것은 성질이 급하기 때문인가." 

"협행(俠行)이라······혈기가 방장한 젊은이로군." 

딜런이 위협적으로 마나를 흡수해 회로와 몸을 달구는 동안, 무당의 진천진인과 종남의 천려일은 강호초출의 물색없는 후배를 바라보듯 노골적으로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고. 

"······." 

점창의 육장도와 검주인 로저 슈베른은 레반을 향해 안타깝다는 시선을 던졌으나, 딜런과의 일에 구태여 끼어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번에도 중립을 유지할 것이다. 

"오호~" 

카스트라 뷔에탕과 다섯 번째 마탑주인 무뇨즈 투르쿤은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집중해 지켜보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일레힌 포이체카와 소속 마법사들. 

"저게 장난하나, 우리 막내가 뭐 크게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 

[ 너희는 움직이지 마라. 도와주면 의미가 없다. ] 

"······에?" 

[ 본인이 전부 해결하게 두어야 한다. 마탑은 나서지 않는다. ] 

"······." 

일레힌 포이체카는 분노하며 앞으로 튀어나오려는 슬레모킨과 루베르겐 집행관에게 마력을 전달해 막아섰다. 

그것이 레반의 육신에 주입된 마탑주의 마력으로도 전해졌다. 레반을 보호하기 위해 마탑 전체가 나설 수도 없는 노릇. 여섯 번째 마탑도 지금의 상황을 방관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마나를 한껏 빨아들인 딜런이 발을 움직였다. 

"닭장? 맞다. 우리는 닭장에 갇혀 사는 것과 다름없지. 그런데 이 귀여운 애송아. 남의 목숨줄까지 붙잡고 정의로운 기치를 내걸고자 한다면, 그만한 실력부터 갖춰야 하는 거다." 

콰지직! 쿠직! 

딜런은 짓씹듯 그렇게 말하며, 부서진 원탁을 밟고 차며 으스러뜨렸다. 실로 강대한 마력의 조각들이 딜런의 발길질마다 흘러 넘치며 바닥을 적셨다. 

"아무리 대단하고 숭고한 정의를 가졌다고 해도 정작 관철해 낼 힘이 없다면······그딴 건 모두 공허한 외침이자 한낱 개소리로 들릴 뿐이지. 의와 협이 명맥을 이어가던 세계는 대전쟁이 있던 백 년 전쯤에 사라졌거든." 

쿠구구궁······! 

지금 딜런의 발은 바닥에서 둥둥 떠 있었는데, 원탁의 초인들을 제외한 플라자 최상층의 장내에 그를 중심으로 마력의 뇌우가 몰아치는 듯했다. 

뒤쪽에 물러서있던 자들 중, 심지가 약한 몇몇은 딜런의 흉포하고 살기짙은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다. 

콰직! 

곧, 딜런은 반으로 부서진 원탁을 밟고 일어났다. 레반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딜런은 2m가 넘는 신장을 가진 장년. 그는 레반을 한심하게 깔아보며 말했다. 

"지금 네 머리 위에 진, 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바로 현실이다. 네깟 놈은 나조차도 어찌할 수 없다. 오지랖 넓게 주민들의 처우까지 입에 올리며 일장연설할 수준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면 네놈이야말로 평생 닭장에 갇혀 알만 까는 닭처럼 살 테지. 안 그런가?" 

오만함이 가득한 딜런의 표정. 

현재, 딜런의 양쪽 손바닥에는 어마무시한 마력이 깃들어 있다. 그는 근접전을 즐기는 육체파 마법사로, 당장 손을 내려치기만 하면 레반을 포함한 근방 수 미터를 무른 수박처럼 터뜨릴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음······." 

레반은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뷔에탕과 마탑주가 가만히 앉아있음이 오히려 기꺼웠다. 

앞으로 나선 딜런뿐만 아니라 다른 9레벨들도 사실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다 알고도 묵과하는 저들의 반발을 누르고 명분을 관철해 원탁에 올리려면— 

레반이 직접 자격을 증명해야 할 시점이었다. 

누가 먼저 움직이더라도 이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두 사내가 물러서지 않은 채 시선을 교환하던 도중, 돌연 레반의 입이 먼저 열렸다. 사실상 딜런이 선공을 양보한 것이었다. 

"물러나라." 

화아아악! 

마나는 곧 기. 

그것은 세상 어디에나 녹아들어 있는 것. 

레반의 음성 영창에 플라자의 최상층을 메운 마나가 공기와 함께 뒤로 밀려난다. 

딜런이 이미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마력은 건재했으나, 그의 집중력과 정신을 미세하게 어지럽히기는 충분했다. 

레반은 그 찰나의 간극을 비집고 쏘아졌다. 

콰과과광—!!!!! 

순간, 거칠게 약동하며 끓어오르는 지대가 형성되었다. 

딜런의 강맹한 쌍장과 레반의 뽑혀나온 광선이 창졸간 부딪쳐 사이에 있는 공기를 한계까지 압축한다. 주변 공간 전체가 우그러져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명확한 힘의 격차에, 레반의 검은 딜런의 손에 막혀 몸까지 닿지 못했다. 

콰악! 

우악스러운 손길로 검등을 붙잡은 딜런이 코웃음을 쳤다. 

"큭, 마력을 통제하는 실력은 주제에 비해 빼어나다만, 잘 쳐줘봐야 6위계 상위 마법사 수준이로군. 방금 검술도 그저 그렇고. 감히 내 앞에서 그딴 잡기술 몇 개를 믿고 까불어 댄······." 

그때였다. 

오형검 일 초식, 출(出). 

불현듯, 궤적을 꺾어 공간을 뛰어넘을 정도로 쾌속하게 출수된 레반의 광선이 돌연 휘황찬란한 오색강기를 머금었다. 딜런의 손바닥이 그대로 찢어지며 겨드랑이가 훤히 드러났다. 

"!" 

인체의 급소. 공격당하면 딜런이라도 위험한 사혈이 존재하는 곳. 딜런은 본능적으로 보호막을 형성해 다급히 몸을 틀어 피해냈으나, 옷과 옆구리 일부분이 길게 찢어져 피가 흘렀다. 

"······허어, 대체 방금 저 검은." 

그리고 그 극한까지 갈고닦은 쾌검에, 도무지 놀라는 일 없던 점창의 육장도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극쾌의 묘리를 추구하는 점창의 절기인 사일검법(射日劍法)과도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속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콰아아아아! 

이윽고, 레반은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솥뚜껑의 장력을 피하며 움직였다. 레반의 어깨는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다음 초식을 뿌렸다. 

이 초식, 섬(纖). 

과거 종후표의 몸통을 수십 조각냈던 공격. 

가늘게 뽑아낸 검강이 실타래처럼 뻗어나오듯. 레반은 일초와 이초를 자유롭게 연계해, 가늘고 단단한 검강의 꽃을 구현해냈다. 일전처럼 검기가 아닌, 또렷한 강기의 검무였다. 

— 이런! 

— ······강하군. 

원탁의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원탁에 앉아있던 이들에게도 경시할 수 없는 검강의 파동이 밀려왔다. 대부분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밀려오는 여파를 막아냈다. 

카앙-! 카앙-! 

그러는 도중에도 전투는 이어지고 있었다. 

광선이 허공에 뽑아낸 검강의 실타래에 딜런이 두꺼운 방어막을 펼치며 움찔하는 짧은 순간, 레반은 유려하게 초식을 이어 가면서도 모든 마나 회로를 한계까지 열어젖혔다. 

곧. 

심장을 조여대며 터뜨릴 듯 회전하는 레반의 고리들은 세상의 마나와 동화될 준비를 마쳤다. 

촤르르륵— 

최상층에서 외부로 이어진 문과 창문들이 죄다 거칠게 열리거나 압력에 뜯겨져 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깥에서 장내로 쏟아지는 마나의 거센 격류. 일순간 반색한 딜런이 즉시 마나회로를 운용했다. 

"바보같은 놈. 나를 상대하려 했으면 마나를······?" 

그런데. 

9레벨 마법사인 딜런이 빨아들이는 마나의 양과, 레반의 회로로 흡수되는 마나의 양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9레벨의 고강한 마법사를 상대로도 마나와의 운용 능력과 동화력만큼은 크게 밀리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오호! 여섯 번째 마탑에 저런 이가······." 

그러자 다섯 번째 마탑주, 무뇨즈 투르쿤이 탄성을 참지 못했다. 그의 지적이고 이성적이기만 하던 안광에 약간의 흥분이 스며들었다. 무뇨즈 투르쿤은 고개를 빼고는 벌어지는 전투를 더욱 흥미롭게 바라봤다. 

"······좋다. 어디 끝을 보자." 

딜런은 예상외의 상황에 크게 당황했으나, 그럼에도 노련하고 착실하게 회로 안으로 마나를 욱여넣었다. 

잠시 뒤, 그의 전신으로 마력의 업화가 거대하게 피어올랐다. 

화르르륵— 

마력의 업화는 아무것도 없던 공중에 옮겨붙더니, 레반의 몸으로 흘러 들어오는 마나의 흐름을 끊어 불살라먹고 크기를 키워갔다. 천장과 바닥이 순식간에 딜런의 마력에 잡아먹혀 설설 녹아내렸다. 

딜런의 기운이 이전과 비할 바 없이, 거대하게 부푼 것은 실로 찰나였다. 

어느새, 푸른 불꽃을 피워올리는 한명의 거인이 레반의 앞에 서있었다. 

화르르르륵— 

건들대며 원탁에 발을 올려놓던 아까 그 딜런과는 180도 다른 괴물. 레반의 예상외의 힘을 내보이며 선전했으나, 딜런 역시도 매일같이 전쟁과 전투가 벌어지며 히트맨과 스파이가 암약하는 로키에서 살아남아 거대한 세력까지 일군 마법사였다. 

"······잡스러운 오색빛 검광. 네가 소문으로만 듣던 라그나로크 수복전의 젊은 영웅인가 하는 놈이었군. 연방이 영웅놀이 한 번 시켜주니까······그 달콤한 맛을 못 잊겠나?" 

그에. 

스윽— 

레반은 한발 물러서 기수식을 취했다. 

'팔 다리 하나씩 내준다. 일단 벤다.' 

쐐애애애액! 

이윽고, 단전에 있는 내력을 전부 끌어올린 레반이 쏜살같이 쏘아졌다. 그는 지금 어떤 각오를 마친 상태였다. 

장내에 9레벨들과 실력자들이 자리해 있고, 무인들이 이 전투를 두 눈에 똑똑히 담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비전절기인 오형검의 절초까지 전부 내보일 마음을 먹은 것이다. 

헌데. 

레반의 칼날이 빛을 반사하던 그때였다. 

까아아아아악—— 

갑자기 들려온 오싹한 귀곡성이, 장내의 모두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 귀곡성이 얼마나 끔찍하고 흉험한지, 전투를 재미있게 지켜보던 뷔에탕의 인형마저 우뚝 멈추었다. 

그녀의 칙칙한 적안이 공포스럽게 번뜩인다. 

뷔에탕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자. 

콰르르르륵—!!! 

공간을 축지법으로 건너뛰듯 가로질러간 무형의 해일이 저 멀리있던 눈깔 시체의 허리를 동강낸다. 

하늘까지 드높이 솟아있던 눈깔 시체의 눈알들이 와르르 흘러내렸다. 

죽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절대 쉽게 재생하지는 못할 것이다. 

"······죽었네? 눈깔 괴물." 

그리고 레반 역시도. 

'이건 하오문주 독고웅백. 그가 마지막 499번째 비무에서 보여주었던 무위와도 비슷한······.' 

뷔에탕과 비슷한 시기에 소름끼치는 기운의 파동을 느끼며 멈추어 있었다. 레반은 굳어버린 딜런의 지척에서 시선을 돌려 머리 위를 바라봤다. 

그순간. 

스거걱— 

쿵. 

두꺼운 천장이 둥그렇게 갈라지며, 누군가 레반과 딜런 사이로 내려섰다. 

눈처럼 하얀 백색의 장포를 입은 자였다. 

"······." 

그의 등장에, 모두가 숨이 멎은듯 고요해졌다. 

백색의 장포를 입은 자는, 9레벨의 초인이 여덟이나 있는데도 간단히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를 풍기며 최상층의 정경을 둘러보았다. 

혼백까지 태워버릴 듯한 미증유의 힘이 소용돌이치는 최상층. 

쿵. 

곧, 백색 장포를 입은 사내가 손에 들고온 시체들을 바닥에 던졌다. 

피를 철퍽이며 구르는 웬 시체 둘의 머리통. 

그리고 그것은 분명, 레반과 마탑의 마법사들이 손가락 군집을 죽이자 나타났던 남성과 여성의 시체들이었다. 

다만. 

척추뼈와 머리가 길게 뽑혀있다는 점이 달랐다. 

"······가륵." 

다음 순간, 뷔에탕이 기겁한 음성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연방을 그리도 오래 고생시킨 네임드 개체, 가륵의 머리가 한낱 쓰레기처럼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끔찍하리만치 무거운 압박감에 그 누구도 입조차 떼지 못했다. 

곧. 

백색 장포를 입은 자는 거리낌 없이 뚜벅뚜벅 걸어, 

"······." 

검을 뽑아 쥐고있던 레반의 앞에 섰다. 

* * * 

인적이 텅 비어버린 도심을 메우는 요기의 향연. 

죽음이라는 홍수가 도시를 휩쓸고 있다. 

잘려서 살점이 뜯겨나간 인간의 뼈다귀를 밟으며, 빌딩의 정문을 부수고 제집처럼 기어들어 가는 시체 무리. 

까아아악— 

고주파 괴성을 내질러 유리창을 터뜨리는 놈. 

버스를 들어 가볍게 집어 던지는 흉폭한 거체. 

콘크리트 바닥을 갈퀴로 파고 들어가는 두더지. 

— 으아아아악! 

살아남아 건물 옥상까지 대피했으나, 결국 기어 올라온 시체들을 보고 절망해 투신을 선택하는 인간들. 

별안간 그 투신한 인간마저 중간에서 낚아채 팔을 맛있게 뜯어먹는, 인간의 절망적인 마지막 선택까지 능욕하는 광경. 

살점이란 살점은 다 물어뜯겨 죽은 뒤, 미이라처럼 비척대며 일어나 어디선가 풍겨오는 피냄새를 무작정 따라가는 이들. 찢고 물어뜯는 자들과 물어뜯기는 자들. 

역겨운 피와 체액이 사방으로 난무한다. 

미약한 나는 현실적으로 저들을 모두 구할 수 없음을 통감한다. 그럼에 부끄럽고 창피하다.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이 스멀스멀 생겨남에, 수면 밑으로 숨어버렸던 나의 평범한 인간성이 여즉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또 깨달았다. 

저 어둡고 절망적이기만 한 광경을 똑똑히 목도하고 있자니. 

누구보다 앞서 이 불지옥을 내려다보던, 백색의 장포를 입은 자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감정이 드는가."

#136화. 그러한가

#136화. 

"무슨 감정이 드는가." 

백색 장포를 입은 자의 눈은, 이상하게도 정광이 비치지 않아 희멀건했다. 

그러나 이자는 로키 시티를 수호해야 할 칠좌— 

능광객(凌光客)이 분명하다. 

그 수많은 위업을 쌓아왔을 거인의 앞에서도, 나는 언제나 그랬듯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굉장히 좆같은 감정이 듭니다." 

그리 대답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자. 

내 앞에 서있던 능광객은 어느새 정반대로 이동해 무너지는 로키의 사방면을 그 희멀건한 눈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능광객의 희멀건한 시선이 닿은 곳에서 한 사내가 시체들의 무리에 둘러싸였다. 

두려움을 주체 못하고 몸을 발발 떠는, 평범한 로키 시티의 주민이었다. 

눈처럼 백색의 장포를 두른 이 초월자라면, 지금 발을 떼어 쇄도해도 저자를 능히 구해낼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능광객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두려움에 떨던 주민은 허탈히 죽어나갔다. 

나는 그런 능광객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능광객은 제자리에 오도카니 선 채로, 운을 뗐다. 

"무모했다. 계속 싸웠다면 자네의 패배야." 

조금 전, 딜런과의 전투를 말함이었다. 

나는 팔 한짝과 다리를 버리고 검법의 절초까지 사용하려했다. 만약 그 일 합으로 목을 베어 죽이지 못했다면 종국에는 나의 석패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모가지의 절반 정도는 기합을 통해 베어버릴 자신이 있었으므로, 방금 능광객이 한 말은 귀담아듣지 않기로 했다. 나는 가끔 맞는 말도 귀담아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 

그리 생각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런 무모함조차도 어떠한 감정(感情)에서 기인한 것이겠지." 

"······." 

덧붙인 능광객의 그 말에서 나는 다음 말을 듣지 않고도, 그의 진의를 곧장 알 수 있었다.

이 백색 장포를 두른 사내는 아힘사와 정반대의 인물이구나. 

기계로 태어났음에도 감정을 배워가는 것이 아힘사였으며. 

사람으로 태어났음에도 감정을 잃어버린 것은 눈앞에 있는 절대의 무인, 능광객이었다. 

"감정이 잔재하였음이 진심으로 부럽네. 나는 도시가 저리 무너지고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어떠한 감흥조차 들지 않으니."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말한 능광객이 돌연 나를 돌아봤다. 

헌데, 안면을 마주하자 희멀겋게 죽어있던 그의 눈에 찰나간 어떠한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 

슥— 

왜냐하면, 내가 능광객의 목덜미에 감히 검을 들이밀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한 번 죽어보시는 게 어떨는지요." 

"······." 

칠좌, 능광객은 분명한 미남이었으나 눈동자가 작고 흰자가 가득히 보이는 삼백안(三白眼)을 가진 자였다. 

눈동자가 위로 몰려있어 매사에 몽롱하면서도 의욕이 없는 듯 보이는, 혹은 가만히 있어도 남을 깔아보는 듯한. 

사회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무심하고 공허한 눈. 

도시가 무너져 내리고 사람이 죽어도. 

그 목에 섬뜩한 칼날이 짓쳐 들어와도. 

일말의 전의나 살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일견, 지루함마저 보일 정도로 무심했다. 

범인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단한 무위를 보유하고 있는데도,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무능력자로 수십 년간 치대며 살아온 나의 마지막께가 떠오를 만큼, 능광객은 극한까지 메마른 사내였다. 

그래서 검을 들이밀었다. 

"죽어보아라?" 

"예, 무엇 때문에 그리 공허하고 감흥이 없으십니까. 혹여 삶이란 것에 자극이 없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자극은 이미 충분하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의외였다. 

검을 거둔 나는 능광객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나 그 자극은 무인의 호승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나의 나약함을 실감하게 하여 도신을 무디게 만들 뿐." 

"그렇다면 어째서 더 나약한 후배를 부르셨습니까?" 

"사라진 협을 설파하는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 

능광객이 시선을 멀리 던졌다. 동시에 압도적인 무형기(無形氣)를 뽑아 한 줄기의 벼락처럼 쏘아냈다. 

쐐애애애액— 

쏘아진 무형기를 따라 세상의 공간이 양 옆으로 열리며 점차 선명해진다. 나의 의식이 간헐적으로 명멸하며 무형기의 탄환 위에 서있는 듯했다. 

그렇게 타오르는 로키의 도심을 지나, 무너지고 있는 장벽 너머에 위치한 드넓고 광활하며 어두운 땅까지 닿았다. 이곳은 희미한 지평선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지대. 인간의 시선이 제자리에서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너머까지 시야가 확장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있는 무언가를 목도했다. 

질퍽- 

앙상히 썩어버린 채 흔들거리는 무언가. 

아. 

장벽 너머에 무언가 있어선 안 될 것이 있다. 

무림에선 고금삼대도객(古今三大刀客)으로 일컬어지는 절대고수. 칠좌 능광객. 

감히 천하를 다투는 도객이 뻗어낸 무형기를 어렵지 않게 갈라먹은, 또 하나의 격외급 불가해가. 

'······.' 

온몸의 감각이 쭈뼛, 거꾸로 곤두서는 느낌. 

점점 가까워진다. 

슬슬 저런 것과 그만 가까워져도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나의 의식은 무형기의 탄환과 함께 빈 공간을 가로질러 더욱 빠르게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나의 눈과 눈꺼풀이 그것의 앞에 덜컥 놓였다. 

인간이 격렬하게 발버둥쳐봐야 거스를 수 없는, 일종의 자연재해와도 같이 실체화된 두려움와 공포감의 집합체. 

헌데 그것은 어째서인지 썩은내를 풍기며 진노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지척에서 그것을 마주한 듯, 그 앙상한 존재 앞에 억지로 

시선이덜컥붙잡혀도저히뗄수가없었다개씨이팔이딴걸보여주다니묫가를굴토해시신을파먹은듯형용못할불쾌함이지대하여본능적으로당장눈알을뽑거나터뜨려야겠다는생각이들어서 

손에힘을주어올렸는데왜인지나의끔찍하게도느려터진손가락이꿈틀대며동공을찌르지못하고아슬히피해가던 

그쯤. 

[ 직전의 협의지심(俠義之心)이, 그대의 마음 한켠에 아직도 남아있는가? ] 

능광객은 내게 아까의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가 혜광심어(慧光心語)로 의념을 전달한 것이다. 

아주 조금의 틈과 여유가 생겼다. 

허나 물어오는 그의 의념은 아득히 멀게만 들렸다. 

나의 행동은 지금도 절반 이상 강제되어 있으므로. 

장벽 밖, 시체의 수해 속 점처럼 작게 박혀있는 저 존재. 

처음에는 이유모를 '동질감' 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억지력에 강제로 육감을 틔워 집중하자. 눈을 감아도 보이고, 눈을 떠도 보인다. 귀를 막아도 들린다. 귀를 막지 않아도 들린다. 숨을 쉬어도, 숨을 쉬지 않아도. 그 존재는 그곳에 자리함을 부정할 수 없다.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이형의 존재감에 인지부조화가 치밀고, 정혈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듯 어지러움이 앞뒤 좌우상하에서 엄습했다. 덕분에 힘겨웠던 호흡이 멎어간다. 

"······." 

능광객은 저 태생부터 불합리한 생명체가 뿜는 압박감을 오롯이 견뎌왔다는 말이던가. 

쿨럭- 

갑자기 기침을 하니 묽은 피가 튀어나왔다. 두어번 기침을 하니 코에서도 찝찔한 피가 흘러내렸다. 저 존재감을 확실히 인지한 것만으로도 죽음이 목전까지 가까워짐이 와닿았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이루어낸 모든 것이 모조리 부정당하는 듯한. 저 존재가 움직이면 내가 전속력으로 도망쳐도 마침내 붙잡혀 파리처럼 짓눌려 죽을 것이라는 심상이 스며들었다. 

백색 장포의 능광객은, 저리 어두운 존재를 경계하느라 마음껏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는가. 

대체 인류의 절대자들은 무슨 짐을 지고 있었는가. 

능광객의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시선에, 갑작스레 지극한 합리가 깃든다.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저런 것을 마주하고 있으니, 투닥대는 아랫것의 미물들은 의미없고 하찮아 보일 수밖에. 

게다가 저 괴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기운을 받아들여 점점 성장하고 있을 게 아닌가. 

밑에서 사람이 죽는데도, 능광객이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 가륵과 동행한 시체까지 간단히 죽여 내던져버린 초월자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던 이유. 명확하며 또렷하게 이해했다. 

그러나······ 

쾅!!! 

[ ······. ] 

나는 주먹을 굳게 말아 쥔 뒤, 내 턱을 부술듯이 후려쳤다. 곰도 때려잡을 주먹질에 돌처럼 빳빳하게 굳어있던 고개가 들썩-하고 들리며 어떤 존재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이제 어두운 하늘만이 보였다. 세상은 어둡다. 

······아무튼 성공이군. 

후우우— 

직전의 협의지심(俠義之心)이, 그대의 마음 한켠에 아직도 남아있는가······라. 

저 존재를 목도한 뒤에도 주민들을 살리려는 마음이 남아있냐는 물음. 

나는 미뤄두었던 호흡을 한꺼번에 몰아쉬며 말했다. 

"못합니다." 

"역시 그러한가." 

능광객의 삼백안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실망한 기색도 없이 이해한다는 듯 발을 돌렸다. 

나는 능광객의 무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장벽 너머의 존재가 뇌리에 남기고간 불쾌한 여운에 잠시 빠져있다가. 

문득, 딜런 놈의 얼굴을 바라볼 때처럼 실소했다. 

흐흐, 하고. 

"못합니다. 못해요. 방금 느낀 이 두려움과 절망감은 나의 오래전 스승에게 매타작당했을 때보다, 어찌 한참 못합니다." 

떠나려던 능광객이 우뚝 멈추었다. 

"······." 

나는 기본적으로 전생자다. 

다른 세상의 경계를 몇 번이나 뛰어넘어 여기에 왔다. 

그렇기에 한낱 괴물에게 붙잡혀 죽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이미 미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아니기도 했다. 

원래 무력감이라는 것은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나는 좌절과 무력감이란 것을 유독 지겨울 만큼 겪어 보았다. 그렇기에 잠시라면 몰라도, 더 이상 그런 허튼 감정이 정신을 침범할 틈새가 없다. 

일평생을 쌓아온 무위나 지계가 더 높은 경지를 이룬 이의 앞에서는 모두 부질없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 

그런 경험은 이 세계의 인간 중 내가 가장 많이 겪었다 장담할 수 있다. 무력하게 몇 번이나 죽어본 건 다회차 전생자인 나뿐일 테니. 

그리고 때마다 그것들을 떨쳐내주는 것은 다음 세상이었다. 

헌데 능광객은 다음 세상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이 사내의 무력감을 비로소 완전히 이해하여 가슴에 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도 모르게 입술이 열렸다. 어떤 응어리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오려 했다. 아마 늘 그렇듯 별 쓸모없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멈춘다면 턱끝까지 차오른 '어떤' 것을 얻지 못할듯 하여, 그만 무례하게도 내버려 두는 것을 선택했다. 

"나의 스승은 이미 좌절해 쓰러진 사내도 쉬이 꺾어 올렸는데, 저 존재는 고작해야 서있는 놈도 꿇어앉히지 못하는 수준이니, 둘 중 과연 누가 더 두려운 존재라 할 수 있겠습니까." 

"······." 

"만약 나의 스승이 이곳에 있었다면, 검 한자루 차고 한달음에 내달려가 저 요상한것을 쳐죽이고 돌을 사지에 매달아 강바닥에 던져버렸을 겁니다. 아직 부족한 제자는 그러지 못함에 못난 스승을 또다시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 

"고인께서는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나는 이 말을 토해냄으로써, 작은 단초를 새삼스레 깨닫고 입마(入魔)에 들 것입니다." 

"자네는 정기신이 크게 합일하지 못하다." 

"다른 부분을 드높은 쪽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드높은 부분을 잠시 낮추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 하라." 

능광객의 죽은 눈이 내게 향했다. 

침묵의 시간은 느릿하게 흘러갔다. 

무너지는 로키 시티, 황금빛 플라자 빌딩 위. 

삭막하게 말라붙어 무엇도 남지 않은 나뭇가지가 몸을 빙글 돌려, 저 장벽 밖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응시했다. 

그는 삼백안이었으므로, 무언가를 깔아보게 되었다. 

이윽고 그 나뭇가지와도 같은 심지를 가려주던 백색 장포가, 불어오는 삭풍을 타고 낭창하게 나부꼈다. 

사방으로 비치는 빌딩의 황금빛과 장포를 수놓은 백색의 천이 조화로이 섞여들 때쯤. 

— 나도 그러한가. 

어느덧, 능광객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능광객의 그 마지막 말을 들으며, 편한 잠에 빠져들듯 입마에 들었다. 

* * * 

가루가 된 원탁에 둘러 앉아있는 여덟의 인영. 

그들 대부분은 어느 때보다도 고요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니. 

고요하다기보다는, 칠좌라는 거인이 가감없이 뿜어낸 기세에서 여즉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맞았다. 

마력을 잠재운 딜런은 몇 시간 전부터 넋이 나가 있었다. 

"······칠좌 능광객. 허상이 아니라 정말로 있었군. 그런데 왜 하필 그놈만을 데리고 나간거지? 그냥 두었으면 내가 찢어발겼을 텐데." 

"그 남자를 이해하려 들지 마." 

"로키의 세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게 아니었던 건가?" 

뷔에탕의 날카로운 대답도 듣지 못한 딜런은 긴장감에 빳빳하게 굳은 고개를 돌려 가륵의 머리통을 눈여겨보았다. 

머리와 척추가 거대한 힘에 그대로 뽑혀나온 모습. 

저런 말도 안되는 신위를 보인, 절대강자가 풍기는 미증유의 위압에 감히 대항할 수 있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의문이 크게 들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그딴 놈이 뭐 볼게—" 

그때였다. 

화아아아악! 

순간, 마력이 일점에 몰리더니 가루가 되었던 원탁이 스멀스멀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누군가 천장의 구멍에서 훌쩍 뛰어내려 재탄생한 원탁에 사뿐히 내려섰다. 

"너······." 

몇 시간 전, 능광객과 함께 사라진 레반이었다. 

그런데 딜런을 비롯한 모두의 관심이 쏠린 장내에서. 

원탁에 내려선 사내, 레반은 실로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더 늦기전에, 주민들 모아서 라그나로크로 출발하시죠." 

화르르르륵—! 

말을 끝낸 레반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던 원탁은, 불이 붙어 활활 불타오르더니 순식간에 새까만 잿더미로 화해버렸다. 

그 무례하고 물색없는 행동과 의아한 말에, 원탁 근처에 있던 이들의 강렬한 기세들이 레반의 전신으로 쏟아졌으나. 

"결정 났습니다." 

누군가 나서 지탄하기도 전, 레반이 곧게 쭉 편 손가락은 플라자 최상층의 천장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들보다도 위에 자리하는 자. 

······칠좌(七座)의 결정. 

말인즉, 이제는 어느 누구도 저 원탁을 되돌려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137화. 낙오

#137화. 

그것은 돈오(頓悟)였다. 

나는 한순간 문득, 또는 홀연히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는 실마리를 붙잡아 갈무리해 심득을 얻었다. 그 끔찍한 존재를 목도한 뒤, 능광객의 발치에서 말을 쏟아내는 것만으로 어떠한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육체의 토대를 이루는 피와 살. 정(精). 

심신을 움직이는 힘과 생명. 기(氣). 

인간의 정신이자 의식. 신(神). 

세 요소는 상호 합일해야 정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경지가 무르익기도 전에 활짝 열려버린 상단전을 의식적으로 닫아버렸다. 

정기를 갈고닦아 신을 따라가려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완숙한 화경의 경지까지 급히 가있던 신을 끌어내려버린 것이다. 

그랬더니 본래 그곳에 길이 있었다는 것처럼 무형의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길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가본적이 없는 길이라 막막한 줄로만 알았더니, 단계를 밟지 않고 무작정 앞서간 탓에 다른 두 요소를 어떤 길에 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높은 구름 위에서는 지상의 길이 보이지 않듯. 

상단전을 닫자, 육체라는 토대에 자리잡은 충만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나의 흐름 또한 어째서인지 원활해졌다. 아니. 높아진 눈이 낮아지니 이제야 원활하고 만족스럽게 느껴지는 것인가. 

편히 내려놓으니 안정감이 생겼다. 

몸에 맞지 않는 무거운 옷을 입고 있다가, 이제야 맞는 옷으로 갈아입은 듯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한결 편해지고 수월해졌다. 육체의 협응력이 나의 의지를 즉시 반영했다. 

다만, 상단전을 억지로 닫은 터라 확장되어 있던 기묘한 감각들이 다시금 닫혀 원래 느껴지던 것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또렷하게 인식되던 세상이 허전하게 희미해졌다. 굳건했던 정신력도 약간 깎여나가는 듯한 느낌. 이전보다 명경지수의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을 듯했다. 

대신 정기신이 들어맞는 지금의 상태에서 올곧게 쌓아 나간다면 화후가 순식간에 깊어져 완전한 9레벨의 경지에 오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잡힐듯 말듯 간질거리는 느낌이 단전에 연신 와닿았다. 

이를테면,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비록 정기신은 본래보다 밑쪽에서 합일하였으나, 뜻과 의지를 더 잘 발하는 육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일 보 후퇴라고는 하나, 시시각각 상황이 틀어지는 전장에 조금 더 적합한 몸은 이쪽일지도 몰랐다. 

이 상태에서 딜런과 다시 한번 전투를 벌인다면 양상은 아예 달라질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벨 수 있을 것이다. 정기신이 합일하였으니 검과도 혼연일체되어 검이 곧 나의 수발과 다름 없을 터. 

꽈과과과광—!!!! 

그때, 귓전으로 들려오는 거대한 굉음. 

"······." 

나는 지난 상념을 갈무리하고 밖을 내다보았다. 

현재, 라그나로크 시티 방향으로 이어지는 로키의 길목. 

태산마저 오시할 거대한 자연재해가 일대를 뒤집어 엎고 간 듯, 백 미터는 될법한 폭으로 새로운 길이 생겨났다. 

그리고 아직도 생겨나고 있다. 

단 '한 명' 의 전율스러운 무위에 의해. 

어마어마한 귀기를 풍기는 도(刀) 한 자루를 찬, 경지조차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백색 장포의 절대고수. 

"능광객." 

쿠르르르르릉— 

신동경부터 로키의 외곽 장벽까지의 거리가 죄다 뒤흔들린다. 

식인을 일삼으며 제집 안방처럼 로키를 휘젓고 다니던 수천 수만의 시체들은 무너진 건물 잔해와 함께 말 그대로 분쇄된 탓에,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다. 

저것이 한 도시를 맡은 칠좌의 진정한 힘. 

실력을 내보인 능광객은 신동경의 경계에서 로키 장벽 앞까지 가로막는 모든 것을 일직선으로 쓸어버려 길을 낸 뒤, 허공을 강하게 박차고는 장벽 바깥으로 쏘아졌다. 

떨어지는 혜성과도 같이 잔상만을 남기며 쏘아진 능광객. 그의 거대히 부풀어오른 기운이 삽시간에 공간을 뛰어넘어 로키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능광객은 '무언가' 를 막기 위해, 심후한 공력이 담긴 육합전성만을 남기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 가거라. 막을 터이니. 

이윽고. 

카스트라 뷔에탕이 조종하는 인형들이 전방을 새카맣게 수놓으며 뛰어올랐다. 

그 순간 나는 몸을 돌려, 로키 전역에서 끌어모은 결사의 전력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안면에 초조한 긴장의 빛이 어려있었다. 

인간을 상대하는 것과 시체를 상대하는 건 다르다. 직전 딜런과의 싸움에서, 팔 하나 내주고 목을 벤다···같은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무엇 하나도 내주면 안된다. 

곧장 감염이 일어나 시체로 변할 테니. 

장벽 밖에서는, 녹슨 못 하나 잘못 밟았다가 순식간에 감염이 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4~5레벨쯤 되면 고작 못 따위에 상처입지 않고, 총탄마저도 버텨내는 내구성을 지닌 이들이라지만 대비는 철저할수록 좋았다. 

대비가 철저한 이들만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고. 

대단한 초인들이나 7, 8레벨급의 수준 높은 정예들이라고 해도 그런 상황은 다르지 않다. 각자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총기들이나 화기류를 챙겼고, 혹시 모를 감염에 대비해 피륙을 가리는 각종 보호구를 부족하지 않게 둘렀다. 

그리고······눈대중으로도 셀 수 없는 로키의 주민들. 

신동경까지 생존해 모여든 시티 주민들의 행렬이 결사의 준비를 마친 그들의 뒤편으로 끝도 없이 늘어나 있다. 

코딱지만한 도시에 지하며 쪽방이며 억 단위씩 모여사는 세상이다. 

돈 있는놈. 돈 없는놈. 

총이라도 있는 놈. 날붙이도 하나 없는 놈. 

세세하게는 자영업자, 카지노 호텔 직원, 사채꾼, 고급 콜걸······그들이 부리는 휴머노이드와 안드로이드등등. 

그들의 행렬을 보며, 내가 대체 얼마나 많은 군중을 라그나로크로 옮기자고 제안한 것인지 당최 실감이 나질 않았다. 

저 끝도없이 늘어선 이들의 목숨이 나의 손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 나는 못 간다고오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하여, 로키에 남겠다는 주민들도 꽤 있었다. 

모두가 필히 떠나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나··· 

극히 부정적인 개소리만을 지껄이는 인간들. 

마약과 술에 진하게 절어 방해만 되는 이들. 

이미 좌절하여 심신이 폭삭 무너져내린 이들. 

공포에 질려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는 놈들. 

괜한 객기를 부리며 난동을 피우는 범죄자 양아치들, 어차피 죽을거 미리 변절하겠답시고 강짜를 놓는 구제 불능들, 혼란을 틈타 마구 칼부림을 벌이는 놈들. 

— 우리는 편안하게 가고 싶습니다. 

또, 로키에서 태어나 로키에서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이들까지. 

이해한다. 

각자 다른 경험과 삶을 산 객체. 

모두가 같은 생각일 수 없는 노릇이고, 모험심과 기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위험을 수용하는 범위도 방법도 다르다. 

무조건 같이 떠나자며 강요할 여유와 시간도 없다. 

— 다른쪽 경계도 얼마 못버텨! 10분 내로 출발해야 해! 

당장 신동경으로 괴물들이 몰려들고 있으니. 

그렇다면. 

지금 낼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 * * 

"······저들로 이제 끝인가?" 

에센스를 들이켜고는 마나를 잔뜩 흡수한 딜런이 로키에 끝까지 로키에 남아 죽겠다고 선택한 군중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젠장, 전대미문의 대참사에 나도 손을 거들게 됐군." 

이번에는 자리에 있는 누구도 딜런의 행사를 막지 않았고, 나도 그를 막지 않았다. 

콰아앙! 

이윽고 남겠다고 선언한 주민들 쪽에서 굉장히 강대한 파동이 일어나더니, 태양처럼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후욱 불어왔다. 

화르르르륵—! 

곧, 살이 불타는 향과 연기가 주변을 메웠다. 

끔찍한 비명이나 울음소리는 일절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상단전을 미리 닫아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세계를 인식하는 감각이 무뎌지니, 저런 불쾌한 감각들에서도 약간은 벗어날 수 있었다. 

"······좆같은 애송이, 이게 전부 너 때문이다." 

붉은 실핏줄이 선 사내의 눈. 

파리해진 안색의 딜런이 입을 푸들푸들 떨며 돌아오자, 남아있던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발했다. 

끝없이 늘어선 생존자들의 행렬 뒤에서, 칠좌라는 거인이 낸 길을 따라 저 어둡고 광활하며 척박한 장벽 바깥으로. 

··· 

그때, 어깨 위에 붙어있던 종후표가 재잘거렸다. 

"괜찮다. 어차피 저들은 자기가 죽는 순간을 인지조차 제대로 못 했을 거다. 만약 내버려두고 떠났으면 금세 산채로 잡아먹힌 뒤에 시체꼴이 되어 주민들의 피냄새를 쫓아왔겠지. 탈출 가능성은 더 낮아질 테고. 아! 그리고 정치란 걸 하다보면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손에 피와 오물이 좀 묻어야 하는 상황들이 꽤 있어. 선역인 영웅이 있으면 악역을 자처하는 칼잡이도 꼭 필요하거든. 그래야 극이 완성되는 거다." 

치이이익— 

재잘대는 종후표의 말을 듣던 내가 돌연 광선에 공력을 밀어넣자, 양쪽 검면에 진득하게 들러붙은 '사람 핏자국' 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후두둑- 

종후표가 말을 이었다. 

"······물론, 네가 마지막까지 남아서 그 둘을 전부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욕심이 많은 편이군. 나중에라도 정치계에 발을 들여봐. 필시 큰 거목이 될 거다." 

발걸음을 재촉해 떠나는 나의 뒤로, 목이 잘린 시신들의 산더미에서 싯푸른 마력의 불길이 높게 치솟아 올랐다. 

화르르륵—! 

지독한 살 탄내가 진동했다. 

* * * 

장벽 밖은 칠흑처럼 어둡고 습했다. 

로키 탈출 행렬의 선두이자 나침반은 카스트라 뷔에탕이 부리는 인형들과 마피아 세력, 무당의 진천진인, 종남의 천려일을 비롯한 무림계 고수들이었다. 

근방의 지도를 머릿속에 박아놓고 라그나로크 시티까지 방향을 곧게 잡은 그들은 묵묵하게 행렬의 맨 앞에서 일점을 돌파해 나갔다. 

무당 특유의 면면부절한 태극검이 현묘한 검광을 발하며 유려하게 시체들의 머리를 베어넘기고, 종남의 검은 무겁고 단단하게 떨어져 일대 전체를 거센 광풍으로 물들였다. 

양쪽 측면 대열은 점창의 육장도와 검주 로저 슈베른, 다섯 번째 마탑주가 각각 맡아 지휘하며 주민들을 보호했다. 

육장도의 검이 번뜩이면 반드시 스무 마리 이상의 시체가 전신에 구멍이 뚫려 쓰러졌으며, 검주인 로저 슈베른이 검을 한번 휘두르면 수십 미터 크기의 마력 다발이 분분히 뻗어나가 시체들의 허리를 통째로 갈라냈다. 

꽈르르르릉— 

다섯 번째 마탑주는 마력으로 뇌운을 형성했는데, 괜히 마탑주의 지위에 오른 게 아닌지 단숨에 천 마리는 될법한 시체 무리가 전류에 튀겨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익어갔다. 

그리고 내가 있는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과 군벌 딜런의 세력은 행렬의 가장 후방을 맡았다. 

어딜가나 살육의 향연. 우리는 고작 수십 미터 전진하는데 적어도 수천 마리의 저레벨 시체를 죽여 작은 동산을 쌓았다. 

아무래도 한 도시의 실력자들이 전부 모인 이쪽도 보통의 무력이 아니었다.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를 바깥에 내세운 덕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죽음의 땅인 장벽 밖을 희생자도 내지 않고 주파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잠시였다. 

콰과광—! 

로키 장벽 밖으로 탈출했을 때부터, 시체들은 정말 끝도 없는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결국에는 행렬의 바로 근처까지 밀려난 방어선에서 숱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중 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두더지의 손아귀에 붙잡혀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간 주민들도 많았다. 

설상가상. 

"······." 

먼 지평선 너머에 자리하던 까만 구릉의 정체가 산이나 언덕이 아니라 시체들이 뭉쳐 형성한 '살덩이의 파도' 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행렬의 긴 끝이 로키 장벽을 한참 지나온 상태였다. 

······그 후로는 정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로키로 되돌아가는 길도 방법도 없었다. 시티의 병원과 의원들을 전부 털어 구해온, 효과좋은 각성제를 최대치로 복용했음에도 다리와 전신에 힘이 풀려 행렬에서 낙오되는 주민들이 점점 늘어갔다. 

탕—! 타앙—! 

으아아악- 

심지어 총을 든 주민 몇이 극도로 겁에 질려 마구잡이로 방아쇠를 당겼다. 눈먼 총탄에 무고한 희생자가 나왔다. 그들을 신경써줄 여력이 없어서 일단 마법으로 총을 부숴버렸다. 

푹! 

그런데 총을 산산조각냄과 동시에, 총을 난사하던 주민의 다리에 웬 갈고리가 푹 찍히더니, 순식간에 땅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내버려 두었어야 했나. 

나는 어찌 했어야 했는가. 

"······." 

이제는 지능도 없는, 자잘한 시체들이 무리를 지어 밀려오다 어느 순간부터 강력한 5~6레벨급 놈들이 때때로 끼어들어 주민들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한 번은 8레벨 끝에 육박하는 시체가 기척도 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꽤 멀쩡하게 유지되던 중간에서 행렬에 사상자가 무더기로 발생했다. 

허리가 뚝 끊어먹히듯. 전력들이 나서 그 공간을 즉시 메웠으나 눈앞의 공포에 잠식된 주민들의 사기가 지하까지 떨어졌다. 

길고도 긴 주민들의 행렬. 대단한 초인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고 해도, 그 긴 전선을 완전히 방어해낼 수는 없는 탓에. 

그리고. 

···거기까지가 약 10km 가량을 이동했을 시점. 

말하자면 앞으로 이런 일을 최소 열 번 이상. 혹은 이와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상황을 직면하고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와중에 하필 내가 있는 후방의 상황이 가장 좋지 못했다. 

비교적 앞서있다가 체력이 없어 처진 주민들이 후방의 행렬로 밀려나기 바빴고, 선두에서 죽어나간 끔찍한 시신들을 눈에 담아가면서 걸어야 했으니. 

서거걱— 

목이 세 개인 놈을 베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까마득해 보이지도 않는 로키의 장벽. 

탈출 행렬이 점점 로키 시티에서 멀어질수록, 생전 처음보는 이형의 괴생명체들이 인간의 피륙을 탐하며 달려들었다. 공포에 질려 미쳐버리는 주민들이 기하급수로 늘어갔고, 온갖 능력과 힘을 지닌 시체들의 등장은 출발한 지 40km쯤부터 그야말로 절정에 이르렀으며······ 

어찌어찌 통과해 70km를 지나던 어느 순간. 

9레벨급의 강대한 시체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내 기습을 해왔다. 9레벨급만 따져도 적어도 다섯은 되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우리 행렬을 따라오고 있었을 것이다. 

— 도, 도망쳐라!!!!! 

그에, 생존한 인류의 행렬은 끝끝내 갈기갈기 찢어져버렸다. 

단 몇 분만에 천지사방이 피바다로 변했다. 

격렬한 전투의 광풍이 몰아쳤으며, 아군의 모든 9레벨이 각자의 전심전력을 끄집어내 기습한 놈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정예로 여겨지던 병력들도 부상을 입고 뿔뿔이 흩어지거나 죽어나갔다. 

후방을 지키던 마탑 역시도 커다란 전투에 휘말렸고, 나도 인간을 사탕처럼 녹여먹는 시체를 상대로 검을 출수했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시체들을 베어간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전투를 끝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로키에서 70km 떨어진 어느 폐허에. 

"······." 

낙오되었다. 

"으으······아파라." 

"형님, 얼마나 남았습니까?" 

"······." 

내상을 크게 입은 슬레모킨과 눈빛으로 배터리 부족을 호소하는 아힘사. 

입에 피를 묻히고 시끄럽게 헉헉대는 루돌프놈. 

잔뜩 지친 채, 머리가 헝클어진 루베르겐 집행관. 

전투에서는 별 도움도 안 되는 앵무새 종후표. 

— ······. 

더해서 겁에 잔뜩 질린 소수의 주민과 함께. 

자그마한 불빛 하나 없는 장벽 벽의 폐허. 

사위가 지독한 어둠에 잠겨들었다. 

* * * 

그리고 같은 시각. 

로키 시티가 공격받고 있다는 뒤늦은 특보가, 개방의 백만방도 포털을 통해 전 연방으로 신속하게 전달되었다.

#138화. 노력

#138화. 

사방팔방으로 잘게 쪼개진 생존자들의 행렬. 

7레벨 이상의 강자들도 영화 속 영웅은 될 수 없었다. 다들 제 한목숨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하기야 칠좌 능광객의 전언을 받잡아 여기까지 끌고 왔다지만, 목숨을 위협할 만한 일이 터지면 막상 소중히 챙기는 것은 본인과 주변인의 목숨 아니겠는가. 

처음부터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예상했다. 

100km가 넘는 긴 여정을 자동차와 캐리어같은 수단도 없이, 끝도 없이 늘어선 주민들의 행렬까지 지켜내며 걸어 급속행군을 마쳐야만 했다. 

깔끔하게 닦여있는 길이라 해도 온전한 성공을 장담하기가 힘들진대, 사방에서 인육을 탐내는 시체들이 피냄새를 따라 습격해오고 진창처럼 발이 푹푹 빠지는 땅이거나 경사가 급한 능선을 넘어가야 하는 곳임에야··· 

혈관에 투여하면 이틀 정도는 졸리지 않게 만들어주는, 마치 시체처럼 계속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테크 각성제를 비롯한 각종 부스터류를 주민들의 몸에 쏟아붓고 출발했다지만, 그것으로도 명확한 한계는 있었다. 

이제 주민들은 길어봐야 이틀 정도 버틴다. 

정말로 길면 사흘 정도일까. 

장벽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낙오되고 조난당한 상황. 수면도 불가하고 식량도 부족한데 어둡기까지 하니 정신적인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심할 것이었다. 

거기다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라도 느껴진다면 즉시 자리를 피해야한다. 조금만 느릿하게 움직여도 피부가 긁혀 감염되거나 갈고리 손에 붙잡혀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신경이 내내 곤두서있을 수밖에. 

"음, 근처를 둘러 보고 왔다." 

그때, 우리가 낙오한 근방의 지형을 정찰하기 위해 공중으로 떠올랐던 종후표가 어깨에 내려앉았다. 인간의 몸으로 높이 비행했다간 필시 발각당해 시체들의 추격이 시작될 것이라 생명체가 아닌 법기를 보낸 것이다. 

말 많은 종후표도 지금만큼은 조용히 읊조렸다. 

"그나마 이 근방에 비해서는 우리가 있는 곳이 상당한 고지대다. 과거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도 근처에 산재해 있으니, 작은 도시가 있었던 땅 같다. 다만 워낙 사방이 어두워서 멀리까지는 안 보이더군. 아무래도 빛이 없어서 가시거리가 너무 짧단 말이지." 

아마 먼 과거에 진즉 멸망한 동네. 

유적 도시처럼 건물의 큰 담벼락과 무너지기 직전의 창고 몇 개만이 남은, 주변 지형으로 유추해보면 인구 수천 명 정도나 겨우 모여 살았을까 싶은 소규모의 마을이다. 

아예 사방이 탁 트인 평야 한복판까지는 아니고 잠시나마 몸을 숨길 인류의 유산이 있다지만, 그래도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은 고립된 것이다. 

본대와 외따로 떨어진 우리 일행은,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펼치며 시체들의 방파제를 뚫어내고서 겨우 이곳에 도착했다. 사실 여기까지 오백이 넘는 주민들을 살려서 데려온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아마도 오늘이, 여섯 번째 마탑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체를 성불시킨 날로 기록되지 않을까.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담벼락에 딱 붙은 주민들을 세어보았다. 

'오백······하고도 열넷인가.' 

514명. 

아까의 거대한 행렬 규모에 비하면 소수였다. 

주민들 중 팔이나 다리를 사이버웨어로 개조한 이들이 조금 있지만, 그것마저도 값싸고 흔해빠진 보급형에 불과한 물건들이었다. 

사이보그급으로 교체하지 않은 이상 본질은 사람인지라 공업용 기계처럼 무한정 움직이지 못한다. 

저런 파츠로는 몰려오는 시체를 상대로 대항할 수 없다. 그러니 저들을 전투원으로 쓰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게다가 이미 70km 가까운 거리를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아서 주파한 이들이다. 인간의 시신과 시체들의 육편으로 가득찬 늪을 지나고 소름끼치는 시체들의 요기를 버텨내며. 단 한 시도 쉬지 못한 채 말이다. 

힘이 남아있는 전투원은, 나와 루돌프놈 정도. 

"······별로군." 

나는 그렇게 고요히 뇌까렸다. 

빌어먹을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인간이란, 참으로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아무튼, 행렬을 이어오던 인류는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에는 높고 두텁게 쌓아 올린 인류의 장벽도, 화기를 든 군인도, 도망칠 캐리어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콘크리트의 안전지대도 없다. 

오로지 힘으로 헤쳐 나가야만 할 것이다. 

아힘사의 방랑 경험이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바랄 뿐. 

벅벅- 

나는 우선 미어캣처럼 모여있는 주민들에게 땅의 흙을 걸러 피부에 문지르라 명령했고, 이후 마법까지 사용해 외부로 풍겨나가는 인간의 냄새를 지우고 가렸다. 

무림 강호와 라아기스 대륙의 전장에서 구르며 온갖 잡기까지 몽땅 익혀놓은 게 도움이 됐다. 

칼과 활이 오가는 전장에서는 노련한 잡기에 통달한 자들이 많았으니. 

"후우······형님, 이러면 라그나로크 시티까지 또 얼마나 가야 하는 겁니까? 시체 새끼들 뚫고 오느라 아까보다도 더 멀리 떨어진 것 같은데요." 

그때, 루돌프놈이 슬쩍 물었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 대답했다. 

"도망치다가 방향이 아예 틀어졌다. 조금 더 돌아가야 할 거야. 70km 지점에서 전투가 크게 벌어졌고 반대로 도망쳤으니, 어쩌면 지금 온 것보다 더 먼 거리를 가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온 것보다 더요? 그럼 진짜 빼도 박도 못하고 좆된 거 아닙니까? 다들 지쳤는데." 

"돌프야, 너는 그걸 이제야 알았구나. 장하다." 

"형님." 

"왜." 

루돌프놈은 언제나 그렇듯 눈치도 없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더니, 가슴팍을 탕탕 두들겼다. 

"그럼 저 혼자라도 라그나로크 시티까지 달려서 지원을 끌고 오겠습니다. 저는 뭐 물려도 괜찮잖습니까. 아시죠?" 

"네가 가면 난 뭘 타고 다니냐." 

"······예?" 

"솔직히 말하면 네가 멍청해서 못 믿겠다." 

"아무리 그래도 말을 너무 거칠게 하시는 것 같은······." 

"라그나로크에 가봐야 네가 이 용담호혈까지 누굴 끌고 올 수가 있을까. 뭐 연방군이 얼씨구나 하고 여기까지 행차해준다냐?" 

"······설득을 또박또박 잘하면 되지 않을까요." 

"닥쳐. 그리고 바깥으로 머리 내밀지 마라. 걸리면 다 몰려온다." 

"악!" 

루돌프놈의 머리를 잡아 진창에 박아버렸다. 

우리는 숨조차도 조심히 쉬어야 하며, 땅 밑으로 미세한 진동이 울려 퍼질까 쉽게 발을 떼지도 못하고 있다. 

땅 밑에 사는 두더지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개미지옥마냥 거대하고 깊은 싱크홀을 만들어 인간을 몰이사냥하는 꼴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꽤애애액— 

새벽녘 닭마냥 괴성을 지르는 시체들도 퍼져있다. 

누가 모가지라도 붙잡아 비트는지, 사람 그림자만 봐도 미친듯이 지랄을 떨어대는데 그 괴성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 

한번 걸렸다하면 일대에 있는 시체들을 죄다 그쪽으로 불러온다. 그런 놈과 더불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비행류와 땅 파서 습격하는 두더지들을 항시 경계해야하니, 집중력은 앞으로도 무한히 유지될 리가 없겠지. 

우선, 부지런히 기감을 펼쳐가며 주위를 확인했다. 

'감염자는 아직 없군.' 

천만다행히도, 일행과 주민 중 감염자는 없다. 

다만 특이한 봉법을 쓰는 9레벨급 시체와 마력을 해방한 루베르겐 집행관의 전투에 휘말렸던 슬레모킨이 꽤 심한 내상을 입었을 뿐. 

"으으으······." 

한쪽에서 연신 들려오는 신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져버린 슬레모킨이 처연한 얼굴로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회로는 가동할 만한가?" 

"······응, 그런데 하루 정도는 제대로 마력을 쓰기 힘들 것 같아. 그래도 어떻게든 민폐는 안 끼칠 거니까 신경은 쓰지—" 

나는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 뒤, 유리병을 꺼내어 몇 방울을 덜었다. 

그것은 능광객이 '가륵' 의 피에서 짜낸 농후한 에센스. 

"마나회로는 멀쩡하다니 불행중 다행이군." 

"······응?" 

슬레모킨은 그게 왜 네 손에 있냐는 듯, 당황하며 나를 올려보았다. 갑작스레 눈가가 그렁그렁해지는 것이 당장 닭똥같은 눈물을 흘려도 이상치 않았다. 

그래도 슬레모킨은 상황파악을 빨리 끝냈다. 나는 로키의 절대자인 능광객과 유일하게 독대한 사내인 것이다. 

"어쩐지 그 언데드들 머리만 뽑혀있고 몸은 없더라니······근데 이렇게 귀한 걸 내가 마셔도 돼?" 

뚝··· 

슬레모킨이 입가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말했다. 

"빨리 마셔라." 

"나, 나 정말 괜찮은데." 

그렇게 슬레모킨은 몇 번 거절하는 척을 하나 싶더니, 나중에는 꿀꺽꿀꺽 잘만 받아먹었다. 축 처져 있던 슬레모킨의 귀가 에센스 한 방울마다 조금씩 일어나 나중에는 쫑긋하게 섰다. 

잠시 뒤. 

내가 슬레모킨의 등에 손을 얹고 기운을 흘려넣어 마나회로를 자극시켜주자, 이내 에센스의 기운이 회로에 스며 들었는지 슬레모킨의 심각했던 내상이 점점 회복되어 가는 게 느껴졌다. 

"말도 안 돼······." 

슬레모킨은 고작 에센스 몇 방울로도 금세 내상을 털고 일어났다. 

확실히. 

'녹량백량' 이나 '바만차' 의 에센스보다 효과가 좋은 듯하다. 가륵은 바만차보다도 더 강한 놈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못해도 9레벨 끝자락 이상일까. 

완전히 괴물같은 놈. 그러니 9레벨들을 상대로도 마음껏 피를 뿌리고 다녔겠지. 

그때. 

"······." 

슬레모킨 옆에서 숨을 고르던 루베르겐 집행관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 * * 

시간이 조금 지났다. 

우리는 아직도 담벼락 뒤에 딱 붙은 채, 제자리였다. 

나는 극히 지친 기색의 루베르겐 집행관에게도 가륵의 에센스를 몇 방울을 흘려 주었고, 나도 몇 방울을 마셔 빠져나간 기력을 회복하는 때를 가졌다. 

평소라면 이리 귀한 에센스를 이리 소모품으로 낭비하지는 않았겠으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근데 마탑주님은······." 

어느덧 내상을 다 치유한 슬레모킨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우리와 떨어져 싸우다가 결국 사라져버린 마탑주를 걱정하고 있다. 

"우리 위치를 알더라도 오지 않는 게 낫다." 

"그건 그렇겠네. 시체들이 따라올 테니까." 

일레힌 포이체카는 손가락 군집과 싸운뒤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몸으로, 9레벨급의 요기를 가진 시체와 전투를 벌였다. 

적은 손톱을 포함한 다리가 극도로 발달한 인간형의 시체였는데, 격외의 탄성을 지녀 뛰어다니는 속도를 눈으로 좇기도 쉽지 않았다. 

"하아, 이 근처에 9레벨급이 그렇게 많은 건가?" 

"그건 아닐거다. 아마도 로키 시티에서부터 저레벨 시체들을 강제로 밀어넣으며 어둠 속에서 따라왔겠지." 

"그런데 여기에 계속 숨어있어도 되는 걸까? 장벽 밖이라 그렇겠지만 통신도 전부 먹통이야." 

"······." 

어둡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괴성들에 괴롭다. 

지금은 무너진 건물 담벼락 밑에 잘 웅크려 있지만 누구 한 명이라도 발각당하는 순간 다시 미친듯 뛰쳐나가야 한다. 

라그나로크 시티, 수십km는 떨어진 곳을 향해서 무작정. 

과연, 여기있는 모두가 그 부하를 버틸 수 있을까? 

내가 그리 답없는 고민을 하던 때였다. 

[ 요기가 느껴지는군. ] 

루베르겐 집행관의 말이 들려오자마자 즉각 고개를 돌렸다. 이미 내 눈은 주민들의 머릿수를 확인하고 있었다. 

결과는 오백 열 다섯. 

아까는 분명, 오백 열 넷이었는데. 

하나가 늘었다. 

"······." 

에센스로 기력을 회복하며 지체한 시간은 고작해야 30분 정도. 

대체 언제 그 짧은 사이에 끼어든 걸까. 

닫힌 상단전이 벌써 그리워지려 하는군. 

···열려있었다면 즉각 인지했을 텐데. 

나는 루베르겐 집행관과 조용히 전음을 교환하다 슬쩍 일어나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오백 명이 넘는 주민들. 

일반인이니 감염의 확산은 순식간일 것이다. 그래서 옹기종기 뭉치려는 주민들을 조금씩 떨어뜨려 놓았는데, 눈치는 또 더럽게 빠른 놈이 끼어들었는지 곧장 억눌렀던 요기를 끄집어 내려 했다. 

하지만. 

퍼억! 

그사이, 요기의 진원지를 알아챈 나는 순식간에 주민들 사이로 짓쳐들어 누군가의 목을 붙잡았다. 

미세한 요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왜, 왜 이러세요!" 

"······."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놓아주세요. 제발요." 

그것도 신동경 특유의 억양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환락의 도시이니만큼, 조금 여유로우면서도 나른한. 

— 혹시, 왜 그러시는 겁니까? 우리와 로키부터 계속 같이 있던 분입니다. 

남은 주민들의 대표격 되는 중년이 나서 물었다. 

기감을 집중해 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숱한 전투를 지나온 덕에 피로한 주민들의 기억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리라. 주민들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하나 둘 소란스러워지며 원래 옆에 있었던 사람이라며 두둔하려 들었다. 

스걱- 

순간, 목을 붙잡은 여인의 머리칼을 마법의 칼날로 잘라보자, 목 안쪽에 숨겨진 아가미같은 부위가 드러났다. 

우두둑. 

나는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손아귀에 강기를 흘려넣고 힘을 주었다. 여자의 얼굴에 피가 몰려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꽤애액— 소리를 지르려기에 목을 붙잡고 분질러버렸다. 

뿌드드득··· 

— 걸렸네. 

목이 밑으로 축 처져 덜렁이던 여자가 히히덕대며 웃었다. 목이 부러져 그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만 새어나왔다. 

이토록 장벽 밖은 인류에게 너무나도 불리하고 가혹하기만 한 환경이다. 

서거걱— 

나는 놈을 광선으로 수십 토막 내버리고 피냄새가 퍼져나가지 않게 불태워버렸다. 

우리는 그 사태 이후로, 오백이 넘는 주민들의 몸에 기운을 주입해 한 명 한 명 확인해봐야 했다. 그 작업이 끝나니 후련함보다는 탈력감이 밀려왔다. 신경쓸 것이 한 두개가 아니다.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민들의 공포심은 점점 치솟았다.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불도 함부로 켜지 못하는 어둠 속에 꼼짝없이 갇혀있다 보니 헛소리를 하며 선동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점차 주민들의 통제가 힘들어질 때쯤. 

"여기에 있었나?" 

"······." 

만신창이가 된 얼굴에 흉터가 더욱 늘어난. 

"······살아있어서 아주 반갑다. 좆같은 애송이." 

기진맥진한 행색의 딜런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휘하에 있던 군벌세력의 수하들을 비롯해 같이 흩어졌던 주민들을 모두 잃고··· 

고작해야 다 죽어가는 두 명의 보좌만 남긴 채로. 

* * * 

우리와 같이 후방의 대열을 지키던 딜런은 9레벨의 마법사. 

그는 기운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던 슬레모킨과 루돌프놈의 기척을 쫓아 여기까지 당도한 것이었다. 기감을 넓게 펼쳐봐도 시체의 요기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꼬리도 붙지 않은 듯했다. 

"너는 용케도 살렸군. 적어도 오백은 넘겠어." 

숨을 몰아쉬다 철푸덕 앉아버린 딜런을 보며 내가 물었다. 

"데려간 주민들은 어디있지? 아까 같이 흩어지지 않았나." 

툭. 툭. 

딜런이 피에 젖은 담뱃갑을 치며 비웃었다. 

"말했잖냐. 현실이 동화인 줄 알아? 어떻게 됐을 것 같은데?" 

"···알겠다." 

딜런의 눈빛에 체념과도 비슷한 것이 차올랐다. 

"겨우 여기까지 찾아오긴 했다만. 이 지역은 라그나로크 시티 장벽에서 50km는 떨어져 있을 거다. 연방에 정확한 위치를 알릴 수도 없고, 우리를 콕 집어 구하러 올 리가 없으니······." 

연방은 방관한다. 합리적인 선택이다. 

괜히 어딘지도 모를 곳까지 구하겠답시고 왔다간 더욱 피해가 커질 위험이 있으니, 차라리 도시의 방벽을 튼튼히 정비하는 것이 나을지도. 

만약 칠좌인 능광객이 우리와 같이 나동그라져 조난 당했다면 몰라도······무언가를 막으러 간 그의 행적은 아직까지 묘연한 상태다. 

먼 지평선 너머에서 간간히 박동하는 압도적이고 초월적인 기운의 편린만이, 아직 능광객이라는 거인이 생존해 있다는 식의 불확실한 희망을 줄 뿐. 

화악- 

딜런은 젖은 담배를 말리고는 불을 붙여 태웠다. 그는 담배 한 모금을 힘겹게 빨아들이고는, 자신의 처지가 우스운지 크게 웃었다. 

"킥, 크하하하!" 

이윽고. 

쾅. 

딜런은 양쪽 정강이에 차고있던 보호구인 각반을 빼서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각반 안쪽으로, 아이가 그린듯 상당히 조잡하며 유치한 그림이 띄엄띄엄 그려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분수. 

몸보다 얼굴이 더 큰데, 얼굴에 흉터 가득한 남자가 중심. 

그의 주위로 삐뚤빼뚤하게 그린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고. 

동그란 눈물을 구슬프게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남자의 뒤쪽 가장자리에서 그를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주위로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어디 아동용 만화에나 나올법한 괴물들이 귀여운 이빨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노력은 했다. 병신같이. 남의 새끼 살리려고 내 새끼들 다 죽이면서." 

곧이어, 딜런이 조용히 웃더니 등을 기댔다. 

그렇게 반나절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고. 

우리는, 

아직도 똑같은 위치에 그대로 고립되어 있었다. 

담벼락에 기대있던 딜런이 불현듯 이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큭큭큭, 어디 우리를 위해서 병신처럼 노력해 줄 놈들은 없나?"

#139화. 현실 감각이라곤 쥐뿔도 없는

#139화. 

암담하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며 생존에 유리한가. 

그것은 내가 아포칼립스 세계에 떨어졌을 때 빌어먹을 좀비떼를 피해다니며 십수년간 궁구한 것. 나는 꽤 여러 가지의 효율적인 생존 행동강령을 정립했다. 

빛 한점 없고 개같은 괴성만이 귓전을 괴롭히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인간들은, 보통 작은 암실에 처박혀 지내는 시간이 가장 많았다. 

왜냐하면 바깥으로 기어 나가봐야 약탈, 방화, 살인, 전투, 자살 말고는 할 것이 딱히 없다 보니. 

하여간 암흑에 잠겨 강제로 사색하는 시간이 길다는 얘기. 

서서히 미쳐가기에 딱 좋은 환경이라, 멀쩡히 살아갈 마음을 먹었다면 긍정적인 생각과 관점을 가지는 건 필수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떠올리고 생각하며 문제의 답을 궁리해 내놓아야 한다. 되도록 '긍정적' 으로. 그게 바로 효율적으로 시간을 때우는 방법이다. 

뭐, 야시시한 생각이나 1+1 같은 간단한 수학 수식마저 좋다.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고 궁리하는 동안 현실의 막연하고 절망적이기만 한 상황을 몇 초라도 더 넘겨낼 수 있다면 충분한 성공이다. 

마땅한 게 생각나지 않는다면 의식이 흐름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작은 혼잣말이나 농담을 섞어도 좋지. 입술을 덜덜 떨며 공포에 질려있어봐야 해결되는 것은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제 낙오된 지 한나절을 훌쩍 넘겼다. 

베테랑 시체 사냥꾼들은 장벽 바깥에서 며칠이나 버티며 에센스를 채혈하는 자들도 있다지만, 그거야 말 그대로 시티 장벽이 보이는 곳에서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으니 가능한 얘기. 

게다가 거긴 시티가 내뿜는 밝은 빛도 있어서 그리 어둡지도 않고, 여차하면 장벽을 지키는 연방군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거리에 있을 터. 

우리는 시티 장벽과는 한참 떨어진 땅에서 대규모로 조난 당했다는 점에서, 그것과 비교가 불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멀쩡히 살아 남으려면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배고프다. 이러다 살 빠지겠어. 체중 관리에 좋겠다.' 

아. 

확실히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게 쉽지만은 않다. 

으으··· 

찰싹! 

어디선가 힘겨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제 뺨을 철썩 철썩 때리는 소리도 들린다. 

주민들의 몸에 투여했던 각성제와 부스터류의 효과들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전체적으로도 확연히 보인다. 아까 루돌프놈이 시체 다리를 뜯어먹으며 절대로 잠들지 말라고 위협적으로 엄포를 놓았는데도, 못 버티고 꾸벅꾸벅 조는 이들이 생겨났다. 

햇빛이라도 비추면 주민들의 정신건강에 조금 낫겠는데, 일 년에 몇 번 비추지도 않는 해를 언제까지고 바랄 수는 없겠지. 

구르릉···. 

순간, 담벼락의 일부분이 무너졌다. 

화들짝 놀란 주민들이 움츠러들었다. 

꺄악— 

동시에, 너덧 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주변의 주민들이 다급히 달려들어 입을 막았다. 만약 마법으로 소리를 차단해두지 않았다면 근방의 시체들을 이곳으로 소환하는 대참사로 이어졌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점점 꽥꽥대는 시체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만 같다. 그저 환청이라면 좋겠다. 

이제는 더이상 딜런처럼 합류해오는 실력자를 기대할 수 없다. 자그마치 한나절이 지났다. 힘이 남았다면 진작에 라그나로크 시티로 죽음의 행군을 떠났거나, 이미 죽어서 시체가 되었겠지. 

재수가 없으면 시신도 못남겼을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주민들의 안색이 어두워져 간다. 

- 그래서, 저 인간은 결국 어떻게 할 거야? 

그때, 귀를 세운 슬레모킨이 속닥이며 말했다. 

이곳에는 황금빛 플라자 최상층처럼 화려한 원탁은 없었으나, 우리는 이전부터 찾아온 딜런의 처우를 놓고 슬레모킨과 집행관, 종후표와 함께 간단한 토의를 벌이는 중이었다. 

나는 긍정적인 마음을 집어치우고 대화에 집중했다. 

- 자기들만 살겠다고 주민들을 버리고 온 걸 수도 있다. 

- 그건 아닐 거다. 나 백리뇌부 종후표가 앵무새의 눈썰미로 볼 때, 극한으로 몰린 상황에서 거짓 이야기를 지어내 늘어놓을 이유는 없다. 군벌이라도 성정이 야비한 놈이면 큰 세력 못 다루지. 그러니까 차라리 에센스를 주고 힘을 보태게 만드는 쪽이 생존하기에 낫겠다. 

- 네 에센스도 아니잖아. 누굴 주라 마라야. 

- 9레벨이랑 저 둘이 마음먹고 배신하면······알지? 

- 변절할 마음을 먹었으면 이미 했겠지. 우리를 농락하는 거면 몰라도. 

- 그럼······ 

이제는 결정을 내리고, 움직여야 할 때. 

나는 일행의 유일한 9레벨인 딜런을 바라봤다. 

후우— 

중간에서 눈이 마주치자, 그가 뿜어낸 담배연기를 마법으로 가라앉히며 말했다. 

"편하게 마탑에서만 지내는 새끼들이라 그런가? 음흉한 쥐새끼처럼 몰래 속닥이는 건 언제 끝낼 생각이냐." 

"어, 방금 막 끝낸 참이다." 

딜런은 얼마나 힘겨운 전투를 거쳐 이곳까지 도착했는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기력을 다 회복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늘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로키 시티에서 수없는 전쟁을 치르며 산전수전 다 겪어본 군벌인데도 저런 꼴이라니. 

"그래서, 어떻게 결정이 났냐." 

나는 딜런의 곁에 누워있는 둘을 바라보았다. 

딜런을 보좌했던 둘은 슬슬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7레벨 끝자락에서 8레벨쯤 되는 이들이었는데, 아마도 시체와 전투를 벌이다 원기가 크게 쇠했을 것이다. 

"같이 간다. 살아남은 네 새끼들도 데리고." 

"······." 

스윽— 

그리 결단을 내린 나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딜런의 실망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이런 병신, 에센스는 이미 한참 전에 먹여봤다. 어지간한 9레벨급 에센스라도 가져오지 않는 이상 어림도 없지." 

그는 한심하다는 듯 욕설 섞인 비아냥까지 던지며, 자포자기한 얼굴로 드러누워버렸다. 

* * * 

"씨발." 

빠악! 

레반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던 딜런의 태도가 급변해 제 뺨을 후려쳤다. 그의 손바닥이 워낙 거대한 탓에 얼굴가죽이 찢어질듯 돌아갔다. 

"······대체 뭐, 어이가 없군. 칠좌 아들이라도 되냐?" 

레반은 딜런과 그 보좌 둘에게 가륵의 에센스를 몇 방울 내주어 몸을 회복하게 했다. 덕분에 이제 에센스가 절반도 남지 않았다. 레반은 순간 보좌 둘의 눈이 탐욕으로 번뜩이는 걸 보았으나, 인간은 원래 본질적으로 탐욕스러운 존재라 신경쓰지 않았다. 

보좌 둘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그러다보니, 레반을 향한 딜런의 묘한 시선도 호의적으로 바뀌어갔다. 

여태까지는 '좆같다' 는 말로 일관하며 별 움직임은 없는 딜런이었으나, 이제는 경계심을 풀고서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로키에 9레벨 여덟만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점창의 육장도가 말했던 게 뭔지 알았어. 분명히 십이제급의 힘을 가진 놈이 후방보다도 멀리서 행렬을 따라오고 있었다. 풍기는 기운이 옅더라도 칠좌가 아닌 이상 내 눈은 못 속이지, 굉장히 유령같은 놈이더군." 

딜런은 뜸도 들이지도 않고 말을 꺼내 이어갔다. 정리되지 않고 두서가 없었으나 나름 긍정적으로 들을만한 얘기, 레반은 넉넉히 이해해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주민들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지?" 

"모른다. 다만 짐승 털같이 빳빳한 의복을 두르고 있는걸 어쩌다 봤다." 

"짐승 털?" 

"그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알아는 둬라." 

레반은 딜런의 얘기에 머리를 주억였다. 

딜런 일행의 회복이 끝나자마자 다시금 이동을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 그 전에 무엇이라도 새로운 정보를 얻어 나쁠 건 없으니 말이다. 

이제 딜런과 보좌 둘까지 포함해 전투원은 열 명 남짓. 

사실, 열 명 남짓의 전투원으로 오백이 넘는 주민들을 이끌고 땅을 횡단하기에는 벅차다. 원래 초식동물들은 최대한 많은 무리를 이루어야 포식자의 눈에 띄어도 살아날 확률이 높은 법인데······. 

다른 뾰족한 방법이나 대안이 없었다. 

그저 하늘에 맡기고 가는 수 밖에. 

헌데. 

딜런과 보좌 둘의 회복이 마무리 되어갈 즈음이었다. 설핏 잠든 주민들을 깨우느라 아주 약간 부산해지던 시점. 

— 안녕들 하신가. 여기에 잔뜩 모여 있었군. 

······어떤 존재가. 

그들이 숨어있던 담벼락 위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정말로 불쑥. 

그것도 상당히 능글맞은 태도로, 두 팔을 당당히 위로 치켜들고서. 

누구에게도 초대받지 않은 그 방문자는 루베르겐 집행관이나 딜런처럼 키가 컸다. 팔 다리는 수수깡처럼 얇아 깡마른 행색이었으며, 어찌보면 마르고 큰 인간으로도 보였다. 

소름 끼치는 요기와 비대칭으로 일그러진 안면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깡마른 그 존재의 등장 이후로, 사위가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일행 중 누구도 근방에 저런 모습의 시체가 돌아다니는 것은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시체 비슷한 것은 마탑이 여기까지 돌파해 오는 동안 전부 죽여버렸기에. 

게다가 일행이 머무르는 폐허 도시는 꽤 고지대라, 밑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면 반드시 눈에 띄었어야 했다. 그러나 별다른 기척도 없이 여기까지 올라와 마법으로 친 막까지 가볍게 뚫어내고 담벼락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답은 단 하나였다. 

"······시체다." 

최소 9레벨 이상의 강력한 개체. 

철컥! 

소음을 막는 마법의 장막 아래. 

슬레모킨이 펌프액션 샷건을 꺼내들어 조준했고, 딜런이 눈에 마력을 담아 그 불청객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레반마저 광선의 검집에 손을 올려두고, 출수할 준비를 마쳤다. 

털썩- 

그런데. 

"?" 

갑자기 나타난 깡마른 불청객은, 그들을 향해 더 다가가지 않고 담벼락 옆 바닥에 궁둥이를 붙여 앉았다. 

당황스러운 시선이 여기저기서 교차하던 순간. 

— 나는 과거, 사파의 무인이었다. 

모두의 앞에 홀연히 나타난 그 시체는 자신이 70여년 전, 7레벨 초입에서 오를 수 없는 벽을 마주한뒤 변절해 지금의 수준이 되었다며 장황하게 자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당해서······ 

아무도 그 기이함과 이질감을 지적하지 못했다. 

— 사파는 정파에 비해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었지. 그 당시에 절정 경지의 무인이었는데도 떨거지 취급이나 받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보면 그야말로 당당하지 아니한가? 

그러다 대뜸. 

쯔거걱- 

시체의 깡마른 팔에 오톨도톨한 돌기가 돋아났다. 어지간한 특수합금보다도 단단하고 질겨보이는 외갑피. 그리고 그 신체를 길게 뽑아내 연성해낸 피륙의 칼날이 자연스레 연계되어 형태를 잡아갔다. 

— 잘 봐라. 

서걱- 

시체는 자신의 육체를 이용해 연성한 칼날로 제 팔을 잘랐다가 붙이는 짓을 반복했다. 깔끔하게 잘려나간 신체 말단은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자석처럼 붙어버렸다. 

인간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회복력. 

깡마른 시체는 팔을 자르면서, 물 흐르듯 말을 이어갔다. 

— 어떠냐? 이쪽의 삶도 생각보다 재미있을 거다. 강력한 육체와 충만한 내력을 지닌채 영생을 구가한다. 인간을 잡아먹고 싶어지는 부작용이 있지만, 그래도 꽤 동하지 않는가? 어째서 꺼려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시체의 일그러진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이후에도 깡마른 시체는 실로 기괴한 행동과 말들을 설파하며, 듣는 이들을 변절의 길로 회유하려 들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레반을 포함한 마탑의 마법사들은 큰 소란을 만들기가 싫었기에 적당히 들어주는 척했다. 저리 강해보이는 개체와 무력으로 부딪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쓴 것이다. 당장은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렇게. 

변절자가 되지 않겠냐며 꾸준히 제안하던 깡마른 시체가, 인간 시절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지까지 얘기가 오갔을 때. 

"큭." 

듣고만 있던 딜런이 불현듯, 흉터를 벅벅 긁으며 웃었다. 

"솔깃하네." 

— 오호, 떠든 보람이 있구나! 

깡마른 시체의 혈색없는 얼굴이 더 일그러지며 화색을 띠었고, 반대로 마탑 쪽의 안색은 심히 파리해졌다. 

유일한 9레벨인 딜런이 변절을 선택하면 말 그대로 여기서 끝이다. 이곳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으리라. 

"그런데 딱 하나, 이해되지 않는 게 있다." 

— 뭐지? 

그러나 딜런은, 그런 예상과는 다르게 쓰디쓴 미소를 머금고는 입을 열었다. 

"변절이 그리도 대단한 게 맞다면, 70년 전 7레벨에서 변절을 택한 네놈은 왜 아직도 나와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거냐. 난 그 시절에 동네서 사탕이나 빨던 애새끼였는데. 괜찮다면 이해를 좀 시켜 주겠나? 보나마나 병신 같은 변명이겠지만 한 번 들어는 보겠다." 

— ······. 

딜런은 오합지졸인 이들을 규합해 한 세력을 일군 거물답게 입담이 걸걸했으며······변절할 마음 따위는 애초부터 조금도 없었다. 또한 흐름을 읽는 눈도 뛰어났다. 이미 들켜버린 이상 전투는 애초부터 피할 수 없는, 확정된 결말이었다. 

"개지랄을 떨더니. 주둥이 막혔냐? 버러지놈." 

그렇게, 딜런이 굳건한 눈으로 시체를 주시하자. 

— 킥. 

시체의 전신으로 새어나오던 요기가 꿀렁이더니. 

끼드드득—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깡마른 시체의 목이 거꾸로 돌아갔다. 빙글빙글 돌던 목은 마치 꽈배기처럼 꼬여 주위의 인간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그 안면은 이제 비대칭과 일그러짐을 넘어 형태가 뭉개지는 바람에 점점 추상적인 미술 작품처럼 변해갔다. 

— 굳이 시간을 할애해서 설득했건만, 인간은 왜 이리 멍청할까? 

깡마른 시체는 얼굴을 가리며 슬며시 웃더니, 창졸간 자신의 피륙으로 빚어낸 칼날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그러자 근처의 땅이 쩌억 갈라지며 천지가 우르릉 울렸다. 

꽈과과광— 

동시에,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로 예리한 요기가 시체의 전신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막대한 압력을 버티지 못한 주민들 몇의 눈과 귀,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이내, 근방의 지면이 미세하게 진동한다. 

두더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그리도 피하고 싶었던, 큰 소란이 벌어져 버렸다. 모든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진 것이다. 

스아아아아— 

그러거나 말거나. 

천지 아래로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딜런의 마력. 

딜런이 대기의 마나를 잔뜩 빨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딜런의 시선은 이전부터 무심한 표정의 레반을 향해 있었다. 

"그거 알고 있냐? 나 혼자라면 도망칠 수 있다." 

그 말에 레반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아마도 이 자리가 우리의 공동묘지가 되겠군. 나만 믿고 따라온 새끼들을 사지로 밀어놓고서 혼자만 살아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거든." 

"그럼 우리가 도망갈 동안 시간이라도 벌어주겠다는 건가? 하긴 당신이 자극했으니까." 

"···이런 상황에도 그 주둥이에서는 농담이 나오나?" 

딜런의 그 못마땅한 질문에. 

스르릉— 

레반이 광선을 길게 뽑아들며 말했다. 

"어, 아포칼립스에서는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뭐 버티고 또 버티다보면 누군가 도와주러 오겠지. 그런데 계속 입으로만 싸울 생각인가——-" 

탓! 

그 문장을 다 끝맺기도 전에, 섬전처럼 쇄도한 레반의 오색검강이 붉게 꿈틀대는 시체의 피륙도와 합을 이루었다. 

레반이 남긴 마지막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며- 

오색섬광과 똬리를 튼 요기가 뱀처럼 뒤엉킨다. 

콰과과광—! 

"······크하하!" 

그 광경을 본 딜런은 돌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이내 흉터 가득한 얼굴을 잔뜩 찡그린 딜런은 앞서 쏘아진 레반을 은근히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노려보다가··· 

지극히 힘빠진 음성으로 뇌까렸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긴 씨발. 나 아니면 네놈처럼 성격 좆같은 사내놈들을, 어느 누가 이런 사지까지 도와주러올까. 낭만파야? 하여간 현실 감각이라곤 쥐뿔도 없는 새끼 같으니라고." 

곧이어. 

콰앙! 

솥뚜껑같은 두 손에 마력을 가득 주입한 딜런도, 전투를 벌이는 레반을 따라 허공으로 높이 솟구쳤다. 

* * * 

수르트 시티, 남경. 

오늘, 화산 그룹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 오오오······. 

화산의 미래이자 무림계 최강의 재능을 지녔다 평가받는, 화령검절 청풍이 드디어 오랜 폐관을 끝내고 세상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기암괴석 위에 자리잡은 화산의 문도들은 청풍을 보며 하나같이 경탄을 머금었다. 초절정의 초입에서 폐관에 든 청풍의 기도는, 그전과는 또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 약관을 갓 지난 나이에 저만한 경지라······괴물이야. 괴물. 

10레벨의 경지를 달성한 하오문주, 독고웅백에게서 사사한 심득까지 익힌 최강의 후기지수. 

아니, 이제는 후기지수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경지의 무인이 화산 암석 위에 오롯이 서있었다. 

이윽고, 암석을 벗어난 청풍은 의복을 바로하고 장문인의 처소를 찾아가 선천자의 앞에 정중한 예를 올렸다. 

그런 뒤, 곧바로 천무진을 만나 현재 크게 화제가 되고 있는 사태의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다. 

청풍이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형장이 말입니까?" 

"그렇다. 절대로 어디가서 쉽게 죽을 사내는 아닌데, 아무래도 장벽 밖이라면 상상초월의 괴물들이 즐비할 테니 위험······." 

"하하하! 그것 참 잘 되었습니다." 

"?" 

"폐관의 성과가 마침 궁금하던 참입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했지요?" 

장벽 밖 어딘가에 조난당해있을, 레반의 행방에 관해. 

* * * 

같은 수르트 남경, 어딘가. 

— 보은패는 쉽게 생각해서 될 물건이 아니다. 

당가의 무인이라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보은패. 

당가주나 실권을 받은 소가주, 혹은 당문의 대원로 배분쯤은 되어야 가문의 보은패를 타인에게 건넬 자격이 있다. 그러니 그 의미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시초부터 지금까지, 은원(恩怨)이라는 가치를 병적으로 지켜온 사천당가였다. 은과 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과거 천하제일독가, 현재는 무림계 메가콥 사천당가 코퍼레이션을 지탱해온 독기이자 신념. 

그런데. 

자그마치 당가의 '소가주' 가 발급한 보은패를 가지고 있는 자가- 

대대적인 습격으로 탈출 행렬이 이어지는 로키 시티와 라그나로크 시티 사이 어딘가에 고립되었다는 소식이, 당가의 귀에 들려왔다. 

백만방도 포털에 관련한 뉴스가 오르내리기도 전에 당가는 소식을 먼저 전해 들었던 것이다. 그때보다 시간이 더 지났을 테니, 어쩌면 그 보은패를 쥔 사내는 이미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살아있다고 해도, 혹은 죽었더라도 당가의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살아있다면 정중히 당가의 본각으로 뫼셔올 것이며, 이미 죽었다면 흉수를 추적하여 한줌 독수로 녹여버리면 그만인 일이니. 

"······." 

과거 그 사내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던 당령이, 출전하는 당가의 무인들 앞에 서서 스산한 시선을 보냈다. 

* * * 

한편. 

발할라 시티. 

시립 아카데미에도 '그 소식' 이 전해졌다. 

로키 시티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을 규합해 라그나로크까지 육로 횡단을 결정했다는 미친 영웅들의 소식이 여기까지도 전해진 것이다. 

포털 기사는 1분 간격으로 새로고침되어 업데이트되는 중이었다. 실제로 고립당한 누군가도 혀를 내두를 만큼 세세하게. 

백만방도 포털을 통해 조난당한 이들의 대략적인 명단이 존재했는데,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마탑이 있는 만큼 발할라 시티 전체가 발칵 뒤집어질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어떤 남자가 있는지도. 

"······얘는 뭐 사건 터지는 곳마다 끼어있어?" 

뉴스기사를 읽던 루벤카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도 레반이 나서서 미친 짓을 했을 것은 자명했다. 

그런데 연방이 밀어주었던 젊은 영웅께서는 기사화되기에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란 말이지. 

이미 레반을 포함한 다른 이들의 죽음을 상정한 황색언론의 자극적인 기사들이 우수수 쏟아지고 있다. 

그랬기에. 

뚝··· 

뚝··· 

뚝··· 

조금 전부터, 레나의 턱 밑으로 흐르는 눈물이 도통 그칠줄을 몰랐다. 아무리 달래보고 달콤한 소리를 해도 의미가 없다. 

루벤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하아······미치겠네 진짜? 레나, 장벽 바깥은 인간이 나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삼존칠좌가 친히 나설리는 없으니까 그냥 알아서 잘 살아오기를 바라야 하는 건데, 당연히 걔 수준으로는 뭐 백퍼센트 죽······아, 아니다! 아주 희망이 없지는 않고오—" 

풀썩. 

레나는 결국 눈물을 흘리다 기절해 쓰러졌다. 

"······하아, 썅. 기레기 새끼들."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쉰 루벤카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한 뒤, 저택의 주인인 론 카산드라 교수를 찾아갔다. 

찾아가봐야 별 소득을 얻을 수 없겠지만, 이럴때 뭐라도 액션을 취해야 나중에 뒤탈이 적을 것만 같아서. 

그런데. 

"루벤카, 무슨 일이죠?" 

"?" 

루벤카가 찾아오기도 전에, 론 카산드라 교수는 이미 자신과 뜻을 함께한 아카데미의 마법학 교수들과 함께 어디론가 출정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심지어 인상이 지극히 흉흉한 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론 카산드라 교수는, 막대한 재물을 풀어 베테랑 시체 사냥꾼들을 섭외 해놓은 것이다. 

루벤카는 익숙한 교수들과 사냥꾼들의 살벌한 면면들을 확인하다, 바보처럼 벙찐 얼굴로 물었다. 

"······뭐, 다들 어디 가시게요?" 

* * * 

숭무교(崇武敎)의 제단. 

"교주님. 용두방주의 전갈입니다." 

숭무교, 무를 숭상하는 이백만의 교도를 거느린 교단. 

드높은 제단 위에 나른히 앉아있던 숭무교주는, 개방의 용두방주(龍頭幇主)가 보내온 전갈을 펼쳐 확인했다. 

그리고 지금 전갈을 펼친 그는. 

하오문의 유일한 주인이기도 했으며. 

숭무교의 교주이기도 한 백면서생. 

독고웅백. 

평소의 수더분한 복장 대신 화려한 교주의 의복을 걸치고 있던 독고웅백은, 용두방주가 보내온 전갈을 반쯤 읽더니 품에 접어 넣었다. 그러고는 휘적휘적 일어나 숭무교의 제단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거대한 대전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자들이 일거에 기립하여 독고웅백의 발자취를 쫓아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숭무교의 거대하고 웅장한 제단이, 수많은 교도들의 발울림에 흔들리고 있었다. 

··· 

그렇게, 저마다의 이유에 따라. 

유수한 세력들이 장벽 바깥으로 향하고 있는 사이. 

알 헤임달 시티 북부. 

엘프들의 근거지인 세계수 최상층. 

누군가의 곁을 지키던 토퀸타이아의 나긋한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정말···이번마저 그 아이를 내버려 두실 건가요? 누군가를 구하려다 그렇게 되었다잖아요. 그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잖아요······아이작."

#140화. 삼 초

#1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