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8
#86화.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유리병이 깨져나간다.
꿀럭이며 목구멍을 통과해 흡수되는 에센스.
중상(中上)급의 에센스를 몇 병이나 들이켰는지.
재계에서도 부유한 편인 일레힌 그룹의 든든한 후원을 받을지라도, 꽤 부담이 될만한 양이다. 지금까지 적어도 3, 4천만 크레딧은 족히 깨져나갔을 것이다.
"으음······."
라그나로크 북부의 어느 플라자 빌딩 지하 7층.
깨끗하게 비어있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
그곳에는 호흡을 정교하게 고르며 사방으로 마력을 퍼뜨리는 한 마법사가 있었다.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우우우웅—
막대한 양의 마력이 폭포수처럼 빠져나간다.
건물의 환풍구를 통해 빠져나가는 진한 청록빛의 줄기.
에센스를 물처럼 마시며 기운을 다시 채워놓아도, 전신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빠져나가고 있다.
가까스로 마력의 총량을 유지해내고는 있으나, 그 작업은 드높은 경지를 이룩한 그에게도 꽤 버거운 일이었다.
땀을 흘리던 일레힌 포이체카의 입이 열렸다.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섭다고 해야 할지."
마력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
이제 점점 줄어드는 에센스가 문제가 아니라, 마나 회로의 내구성이 끝까지 버텨줄지가 걱정인 지경. 7위계에 오른 고위 마법사가 회로의 내구성을 걱정해야 할 처지라니.
우우우웅—
일레힌 포이체카는 또 뭉텅이로 흘러 나가는 마력을 느끼며, 에센스가 담긴 유리병을 연속으로 들이켰다.
"······고작해야 갓 7레벨을 넘어선 녀석이."
레반.
정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녀석이다.
언제까지 자신을 놀라게 할 셈이란 말인가.
라그나로크 시티 북부 편제.
작전이 틀어지고 지휘권이 갈렸다.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전장이었다.
그렇기에 수장중 한 명인 일레힌 포이체카는 당명 원로의 뒤를 이어 신속하게 결정을 내렸다.
[ 두 분이 선발대와 동행 부탁드립니다. 시티 밖의 편제와 합류해 재정비를 하는 것도 중요하나, 통신이 불가하니 발전소 쪽으로 향하는 후발대 생존자들도 있을 겁니다. 만약 본대에 힘이 필요하다면 즉시 지원하겠습니다.]
연방의 장군은 당연히 반기지 않았으나, 성을 내며 홀연히 사라진 당명의 뒤를 그가 이었다.
장로 선운자와 루 막슨 회장이 연방군 3사단과 동행해 원군을 부름과 동시에 흩어져있는 후발대를 최대한 본대에 규합한다.
그리고 마탑주는 그들의 중간에서 갈려버린 세력의 균형을 조율한다. 쉽지 않은 일이겠으나, 그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다.
마탑의 중요 구성원들에게 주입해둔 마력이 남아있다. 거리가 그리 멀지만 않다면, 마력을 주입받은 이의 주변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헌데.
공교롭게도, 그 양쪽에서 비슷한 시점에 전투가 벌어졌다.
더 강력한 전력을 보유한 선발대의 열 개 조와 본대의 수장, 연방군이 모여있는 도심 쪽이 습격당했고.
원자력 발전소까지 도망쳐오는 것에 성공한 후발대의 일부조, 더해서 사라졌던 당명 원로가 갑자기 발전소 앞에서 나타나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조율자로 남은 그는, 가장 먼저 본대를 습격한 언데드와의 전장을 지원했다. 땅에서 불쑥 튀어나온 언데드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본대가 처한 상황이 순식간에 급박해졌다.
그는 마탑의 8레벨급 구성원 두 명에게 본신의 마력을 적절히 분배했다. 그렇게 대륙급의 언데드를 나름 의도한 대로 통제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다른 쪽이 문제였다.
우웅- 우웅-
슬레모킨에게 배분해둔 마력이 구원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오고 있다. 발전소쪽의 상황도 최악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당명 원로가 같이 있다해도 9레벨급이 두 마리.
최악으로 치닫는 양쪽 전장의 상황은, 마탑주에게 강제적인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이윽고, 일레힌 포이체카는 판단을 내렸다.
화산의 장로, 선운자가 자하강기를 뽑아 두른 것을 느끼며 본대쪽 8레벨 둘에게 내주었던 마력을 어느 정도 거둬들였다. 본대 쪽에서는 강대한 요기와 선운자의 자하신공이 내는 기운이 얽히며 증폭되었다.
저만한 괴물과의 전투라면, 서쪽과 남쪽의 수복군을 이끄는 수장들이 필시 눈치챌 수 있을 터.
반대쪽이 문제인데······.
슬레모킨이 있는 발전소 쪽의 전장은, 그가 마력을 거둬들이는 와중에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지금, 마력으로 전해져 느껴진다.
잠시간의 돌풍을 일으킨 레반이 쓰러져 죽어간다. 그리고 슬레모킨은 자폭을 결심했다.
잠시 유지되나 싶던 생명의 기운이 순식간에 하나둘씩 꺼져갔다. 그나마 살아남았던 후발대의 조원들이 바만차의 낫에 쓸려나가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피해.
설상가상, 다른 8레벨급 언데드까지···이제 더 미룰 수는 없었다. 인정을 받은 구성원들을 저리 의미없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
일레힌 포이체카는 생각을 끝낸 즉시, 슬레모킨과 신호가 꺼져가는 레반의 몸에 원격으로 마력을 퍼부었다.
그리고.
우우우웅—
대부분의 마력은 레반에게 떨어졌다.
그는 넓게 전장을 관조하던 중, 직전의 전투를 보았다.
고작 7레벨의 레반이 9레벨 네임드를 상대로 경이로운 신위를 보이며 한 줄기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일레힌 포이체카는 슬레모킨이 아닌 레반에게로, 우선순위를 변경한 것이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전의와 극히 고절한 무공.
그의 육신을 자신의 마력으로 지원해줄 수만 있다면-
유일하게 전투의 향방을 뒤집어 볼 수 있는 존재다.
그는 슬레모킨에게 간 청록빛 마력과 다른 전장에 있던 모든 청록빛 마력을 일시에 거둬들여 모조리 레반에게 쏟아부었다.
그 뒤로.
전장은 복잡하게 흘러갔다.
레반이 네임드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도중, 당명이 녹량백량과 동귀어진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레반의 기운이 바만차에 근접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자신의 마력을 온전히 흡수하고 있다고 해도 과한 변화. 무언가 다른 것이 작용했다.
그렇다면 녹량백량의 에센스를 흡수한 것인가?
좋은 소식이나, 곧바로 걱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9레벨급 에센스다. 온전히 소화시킬 수 없을 터."
저런 거대한 기운을 과연 멀쩡히 흡수할 수 있을까.
높은 수준의 에센스를 소화시키려 할수록 극도의 집중력과 오랜 준비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자신의 마력이 없으면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 없는 몸, 게다가 9레벨의 강대한 네임드를 눈앞에 두고서 저것을······
허나 당장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가 지금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면, 레반에게 주입되는 마력의 흐름이 끊길 것이다. 아마 저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장은 피바다로 변해 있겠지.
그렇다면.
마나 회로가 불타 마력이 동나는 한이 있더라도···
유일한 희망, 레반을 계속 지원해주는 수밖에.
"어디 또, 그때처럼 기적을 보여봐라."
간절함 가득한 일레힌 포이체카의 음성이 잔잔하게 실내를 울렸다. 그의 회로에서 쏟아져 나오는 청록빛의 마력이 한층 더 짙어지며 박차를 가했다.
* * *
으지지지직—
광선의 궤적에 걸린 것들이 모두 토막나 떨어진다.
쿵!
바만차의 거체도 다리를 잃고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
슬레모킨과 천무연은 작은 감탄조차 하지 못했다. 방금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이 현실인지, 아니면 어떠한 환각의 일종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레반은, 8레벨의 언데드와 함께.
9레벨 바만차의 다리 세 개를 일검에 잘라냈다.
"마, 말이 돼? 이게?"
"······."
경악하는 슬레모킨과 천무연의 침음성을 배경삼아, 화경의 경지에 오른 레반이 진각을 밟았다.
염원했던 정기신(精氣神)의 조화로운 합일.
세상을 인식하는 속도가 곱절 이상으로 가속되고, 무거웠던 몸은 깃털보다도 가볍다. 허나 그것에 반해 검격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지금도, 떨어졌던 십 미터짜리 오색 검강이 다시 하늘로 솟구칠 준비를 마쳤으니.
스아아악!
용이 승천하듯, 지면으로부터 솟아나는 빛줄기.
다리가 썩둑 잘려 주저앉은 바만차는 황급히 거대한 낫을 들어올려 레반의 공격을 다급히 막아냈다. 그러자.
콰드득! 낫을 쥔 손가락들이 부러지고 뒤틀리는 소리.
[ !!!! ]
레반의 검에는 이전과는 격이 다른 힘이 실려 있었다. 죽어가는 벌레에 불과하던 놈이 어느새 자신과 비슷한 격까지 치고 올라온 것이다.
하나, 그래도···
바만차 본신의 요기만큼은 아직 줄어들지 않았다.
인간의 근원인 선천지기를 뽑아 싸운 무인도, 결과적으로는 녹량백량과 공멸했다. 그런데 바만차의 요기는 죽은 녹량백량과 비교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았다.
저 벌레가 자신과 완벽히 동격을 이룬 것도 아니다.
황당무계한 격의 진화를 예상하지 못하여 다리가 모두 잘려 나갔지만, 놈의 몸을 휘감은 기운들은 일시적일 것이다. 사라지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푹!
돌연, 쏘아진 검강줄기가 복부를 뚫고 지나간다.
[ 그, 그어억···! ]
"눈알 그만 굴려라. 다 보인다."
바만차가 미처 생각치 못한 것이 있었다.
레반의 정신이 성공적으로 합일되었던 시점부터-
기량과 전투적인 경험은 레반이 바만차보다 윗줄이었다.
바만차는 여태껏 그 기량의 격차를, 거대하고 압도적인 본신의 요기로 짓누르고 있었던 것뿐.
그러니, 부족했던 기운까지 더해진 레반의 움직임을 따라잡기가 요원한 것이다. 이윽고 레반의 검은 바만차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세상을 둘로 쪼갤듯이 공간을 잘라갔다.
거대한 오색빛 검강이 대기를 무섭게 떨어울린다.
곧, 파공성이 발전소의 하늘과 대지를 메웠다.
바만차의 육신에 속수무책으로 상처가 늘어갔다.
머리로 떨어지는 검을 막았는데 가슴팍이 꿰뚫리고, 가슴팍을 방어하면 신묘한 검의 움직임이 어깻죽지를 뜯어놓는다.
레반의 다채로운 검격은 바만차의 급소들을 집요하게 노렸다. 머리를 잘라 박살을 내든, 요기를 모아둔 내장을 찢어버리든 신속하게 끝을 볼 작정으로.
푸후—
참았던 레반의 호흡이 길게 터져나왔다.
마탑주의 마력, 녹량백량의 에센스까지 태워 잠시간 벽을 부수었을 뿐이다.
이 축제의 시간은 분명 그리 길지 않을 터다.
레반은 조금도 여유를 부릴 생각이 없었다.
'몸이 허락하는 시간 내로 끝장을 본다.'
그 생각과 함께 고절한 레반의 검이 전장을 잠식했다.
쾅! 꽈자자작!
동시에 요기를 주입한 낫의 끝부분이 날아가며, 바만차의 손가락뼈가 다 부서졌다.
바로 그때.
그아아아아악——
"으윽!"
슬레모킨이 다급히 두 귀를 막았다.
귀청이 통째로 뜯겨져 나갈 듯한 살기짙은 흉성.
레반의 검에 방어 일변도로만 임하던 바만차가, 갑작스레 낫을 둥글게 휘두르며 레반을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지금부터가 전투의 시작이라는 듯 아까 끝맺지 못했던 흉성을 내지르며 포효했다.
꾸르륵.
그리고 그 포효가 끝나자, 잘린 다리쪽의 거죽과 살점이 꾸물거리며 다시 솟아났다.
분명히 잘렸던 네 개의 다리가-
당연하다는 듯 일거에 새로 자라났다.
"······망할. 미쳤어 이건."
바닥에 짓눌려 으깨진 천무연의 팔과는 심하게 대조되는 장면.
그것을 본 레반도 혀를 내둘렀다.
같은 인간과의 전투와는 궤를 달리한다.
인간은 보통 사지가 잘리면 움직임이 극히 제한되나, 강한 언데드들은 비현실적인 재생력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현실에 꺼내놓으니.
쿠구궁.
네 개의 다리가 다시 솟아나며 바만차의 몸체가 지면을 딛고 일어섰다. 3m의 거체가 다시 사신처럼 낫의 장대를 쥐었다. 요기는 더욱 부풀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보다도 더 강성한 기운의 밀집을 형성했다.
막대한 요기의 파동에 대기가 덜덜 떨렸다.
푸욱!
불현듯 요기를 부풀리던 바만차가, 자신의 가슴에 뼈다귀같은 손을 찔러넣었다. 그리고는 역하고 검붉은 피가 묻은 손을, 요기와 섞어 전방으로 뿌렸다. 터진 수류탄처럼 쏘아진 그 피의 조각들은 쓰러져있는 조원들의 사체에 가 닿았다.
그러자, 검붉은 피에 닿은 사체들이 들썩였다.
사후감염.
"······."
저 끔찍한 불합리함에 사기가 떨어질 법도 하건만.
서걱!
레반은 살인기계처럼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하늘까지 치솟는 막대한 요기조차 두렵지 않았다.
비교적 몸이 성한 상태에서 결심을 굳혀 선천지기를 뽑았던 당명의 그것과는 다르다. 당명이 한 것은 생에 마지막 결전을 위한 각오였다면, 바만차의 저것은 발악에 가깝다.
수많은 전장에서 구른 그의 직관으로 알 수 있다.
생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저리 망가지고 나서야 각오를 다졌는가. 레반은 그리 생각하며 광선에 기운을 주입했다.
그런데 그 순간.
쾅! 쾅! 쾅! 쾅.
"어?"
다리를 만들어낸 바만차의 다음 판단은 장내의 모두를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마치 마지막 발악을 할 것처럼, 피를 뿌려 감염시키고 요기를 하늘 끝까지 증폭시켜놓은 바만차가 급작스레 몸을 돌려 쏜살같이 달아나는 것이다.
육중한 유령마가 전속력으로 도망친다.
심지어.
우적우적!
가던길에 인간의 사체를 주워 사탕처럼 씹어먹으며 말이다.
"······하."
지금 레반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정기신이 이렇듯 합일해 있을 수 있는 순간이, 그에게는 얼마 남지 않았다. 레반의 입이 삐뚜름이 열렸고.
"웃긴 놈, 뭐 얼마나 오래 살려고 그래."
그 작지만 삐딱한 목소리가 도망치는 바만차의 귓전까지 가서 닿았다.
이미 수많은 인간의 목을 잘라 차가운 땅바닥에 쓰레기처럼 늘어놓고, 막상 전황이 불리하게 흘러가니 마음 편하게 도망치려 한다.
명예도, 자존심도, 죽은 당명 원로와 같은 일말의 비장함도 없이. 인간의 사체를 으적대며.
이렇게 살려보내면 또 어디선가 인간을 죽여 잡아먹겠지.
그렇게, 레반의 그 짧은 상념이 끝난 순간.
"혼자 어디 가."
[ ······! ]
레반은 이미 바만차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구웨엑!
그에 사람 머리를 으적대던 바만차의 주둥이가 쩌억 벌려진다. 곧이어 요기를 한가득 실은 핏물이 토해진다. 폭발하는 크레모아처럼 전방을 휩쓸어버리는 핏물의 폭발.
상처에 슬쩍 닿기만 해도 감염의 위험이 있는, 그 역하고 더러운 피가 레반의 전신을 가득 덮어버린다.
그러나.
치이이이익——
일레힌 포이체카의 청록빛 마력 갑주가 그 핏물을 막아냈다. 청록빛의 마력과 함께 증발해버린 핏물.
그 핏물들이 불똥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며, 레반이 있던 주변부가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깡그리 폭발했다. 적어도 반경 삼십 미터가 사라지고 달의 크레이터처럼 깊은 반원의 구덩이가 생겼으나.
지금 레반은 어느 때보다 멀쩡했다.
또한.
어느 때보다 전력으로 공격을 뻗어내고 있었다.
섬전이 번쩍였다.
콰지지지직!
진심전력으로 내뻗은 레반의 광선이 바만차의 흉부의 뼈를 죄다 부수고 들어가 등짝을 단숨에 꿰뚫어버림과 동시에.
"막내야!"
쾅! 쾅! 쾅!
바만차의 머리 위로 마공학 탄들이 마구 쏟아진다.
슬레모킨과 아힘사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가세했다. 팔이 없는 천무연도 날이 나간 매화검을 붙잡고 초식을 전개한다. 천무연의 검 끝에서 분분한 검화(劍花)가 피어나 바만차의 육신을 두들긴다.
그리고.
바만차를 꿰뚫은 레반의 검이 사선으로 그어지며 뼈다귀와 살가죽을 길게 갈라낸 시점이었다.
[ ······. ]
극히 혼란한 전장 속에서 아주 짧은 부르륵- 하는 소음이 들리더니 바만차의 육신이 급격히 부풀어오른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이.
헌데,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던 바만차의 강대한 요기가, 어느 순간 급격하게 회수되더니 한 점에 뭉치기 시작했다.
창졸간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
"!"
레반의 직감이 거세게 경종을 울렸다.
방금까지는 그렇게 살고 싶어 하더니···
정말, 포기 한번 좆같이 빠르군.
[ 그흐흐. ]
바만차의 침침한 안광에 독기와 희열이 차오르는 게 레반의 눈에 보인다.
놈이 갑자기 기운을 거둬들일 이유는 없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공멸한다는 선택지를 제외하고는.
마법이라도 쓸 수 있었다면, 청록빛 마력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든 막았을 것인데.
슬레모킨, 아힘사, 천무연, 당령.
······몰려든 이들에게 피하라는 말을 뱉기에는 너무나 늦었다.
레반은 결국, 에센스로 얻은 기운을 모두 태워 놈과 똑같이 한 극점에 기운을 모아냈다. 이제 바만차의 죽음은 확정이다. 이들 중에서 몇 명을 살리느냐에 달렸.
콰지지지직——
"꺄핫! 거의 다 죽었잖아?"
"······?"
그것은 실로 갑작스러웠다.
천공에서 혜성처럼 떨어진 누군가가, 바만차의 부푸는 요기와 머리통을 가차없이 짓밟으며 전장에 난입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중력이 작용하며 전신에 추를 매단 듯 무거워졌다.
꺄하하! 낙천적으로 웃는 소리를 낸 누군가.
레반은 그 이상한 존재에게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탓!
바만차를 죽이겠다는 의념이 먼저 움직였다.
주르륵.
정기신의 합일이 점점 흩어져가던 레반. 그가 무리하게 극점까지 끌어올린 기운은 관자놀이로 통하는 혈관과 기맥들을 터뜨릴 정도로 강대했다.
화경의 경지로도, 과부하가 걸려 벌벌 떨리는 육신.
옆통수로 피가 줄줄 흘렀으나, 레반은 괘념치 않았다.
서걱.
푸화악!
레반은 땅을 박차며 짓쳐들었고, 피가 튀었다.
[ 그, 그아아악! ]
늘어난 검강줄기가 공멸을 노리던 바만차의 육신을 세로로 절단한다.
그렇게 양단된 바만차를 다시 가로로 양단한다.
이제 네 조각이 된 살덩이를 사선으로 양단한다.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오색 검강의 유려한 줄기가, 한겨울의 삭풍처럼 끊임없이 몰아쳤다.
그렇게.
서걱대며 잘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지는 전장.
잠시 무아에 빠져 검을 휘두른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그 무아에서 깨어난 레반이 눈을 떠보니.
"······."
웬 땅이 보였다.
발전소 근방의 독수가 스민 땅.
그리고 자신은, 그곳에 검을 깊게 꽂고 있었다.
녹아가던 당명의 독기와 유언이 흘러내린 자리에.
레반의 피를 잔뜩 머금은 광선의 검신이 깊게 꽂혀들어갔다.
#87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9
#87화.
십이제(十二帝)
라그나로크 시티 남부 수복군 수장.
마녀, 로라 마르티네즈.
그녀가 가녀린 손을 빙글 돌리자, 사후감염으로 발작하던 사체들이 무형의 마력에 짓눌려 바닥을 뚫고 들어가 매장되었다. 으스러지는 그것들의 서로 다른 뼛소리가 오케스트라 합주처럼 울려퍼졌다.
우두둑— 우지직—
손짓만으로 전율적인 위력을 보인 난입자.
성인보다 조금 작달막한 키에 귀엽고 똘망똘망한 눈.
얼굴에 비해 커다랗고 네모난 뿔테 안경을 쓴, 로라 마르티네즈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진공보다 빠를 줄 알았는데, 이미 도착해있지 뭐야? 그래서 나는 이쪽으로 왔어."
9레벨의 네임드, 바만차는 죽었다.
레반과 로라 마르티네즈의 합공에 의해.
그리고 지금.
기절한 레반을 제외한 모두의 눈은, 수십 조각으로 도륙난 바만차의 사체에서 흘러나오는 에센스에 고정 되어 있었다.
9레벨급의 정순한 에센스가 발할라 산맥의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처럼 졸졸졸 흘렀다. 전장을 밝히던 레반의 오색 광채처럼, 영롱한 빛깔을 뽐내는 액체.
요기는 사라지고 순수한 기운의 농축액만이 남았다.
로라 마르티네즈가 혀로 윗입술을 핥았다.
그런데 그때.
"잠시만요."
"?"
슬레모킨이 한 발짝 앞으로 나오더니, 로라 마르티네즈의 앞을 슬쩍 막아섰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런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사를 올리며.
"저는 여섯 번째 봉우리 마탑의 슬레모킨이라고 합니다."
"응. 근데?"
로라 마르티네즈는 귀엽다는 듯 싱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녀는 체구가 작은 탓에 슬레모킨을 올려다봐야 했지만, 아기자기한 느낌은 없었다.
왜냐하면, 로라 마르티네즈는 자신의 강대한 기도를 통제하거나 숨길 생각 자체가 전혀 없었기에.
그 마력은 목줄을 풀어놓은 맹견과도 같았다.
콜록- 콜록-
그렇다 보니, 그녀를 내려다보던 슬레모킨은 거대한 위압감을 흩어내려 사레들린 사람처럼 연신 헛기침을 해야 했다.
크흠!
곧 애써 목을 가다듬은 슬레모킨이 말했다.
"설마 이 에센스, 가져가시려고요?"
로라 마르티네즈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땅에 칼을 깊숙이 박아넣고선 의식을 잃어버린 남자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 숫제 광인처럼 검을 휘두르던 남자.
9레벨의 바만차를 수십 토막으로 잘라버린 미친 개백정.
로라 마르티네즈가 레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응, 저거 죽기 직전이네. 내가 목숨은 붙여줄게."
"그냥 이 에센스를 전부 먹여주면 말짱히 털고 일어날 것 같은데요?"
로라 마르티네즈는 여유로운 태도로 대답했다.
"그렇게 개인의 공적을 과하게 주장하면 곤란해. 분명 내 지분도 한······'절반' 정도는 있잖니. 안 그래?"
"!"
슬레모킨이 입술을 짓씹었다.
뭐라고? 절반?
······누가 목숨 바쳐가면서 겨우 죽인 건데, 숟가락을 이렇게 크게 얹어?
절반이라는 발언이 나오자마자, 슬레모킨이 기가 찬 얼굴로 따박따박 따지고 들었다.
"아니, 아무래도 이 에센스의 '값' 은 여섯 번째 봉우리 마탑주께 정식으로 공적 정산을 요청한 뒤 분배를 논하는게 좋을 것 같네요. 한 100으로 잡으면 그중 레반 지분이 95쯤은 되겠지만."
"값?"
"일단 먹이고 나중에 크레딧으로 배분해 드릴게요. 사람 목숨부터 살려야죠."
꽤 당당한 태도로 일관하는 슬레모킨.
실은, 십이제의 위압감이 보통이 아닌지라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는거지만, 그녀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냉철함을 연기했다.
'오호.'
그러자 로라 마르티네즈가 눈썹을 들썩, 들어올렸다.
사실······이것은 그녀의 여흥에 가까운 일이다.
애당초 에센스의 절반을 가져갈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냥 저 앙칼진 반응이 어쩐지 재미있기에 한번 놀려보고 싶었던 것뿐.
남부 수복군의 수장이, 치사하게 에센스를 빼앗으려 아웅다웅했다는 개소리가 나돌면 곤란하니까.
"으흠. 못 주겠다고?"
상태가 좋지 못한 청록빛 괴물과 슬레모킨을 번갈아보던 그녀는 안경테를 매만졌다.
자신은 연방의 라그나로크 수복전 공표에 직접 나선 몸이다. 팔이 덜렁대는 눈앞의 엘프가 아무리 우둔하다 쳐도 못 알아보았을 리는 없을 터.
로라 마르티네즈가 기운을 슬쩍 쏘아내며, 짓궃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재미있네. 내가 막지 않았으면 너희 중에 절반은 뒈졌을걸."
장난의 연장선상.
그녀의 말투는 뒷골목의 양아치처럼 거칠어졌다.
슬레모킨은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부릅!
"풋."
그다지 의미는 없었지만.
이윽고, 로라 마르티네즈는 차례대로 천무연과 당령, 저 멀리 날아가있는 밴스를 콕콕 짚었다.
"나 아니면 저 셋은 죽었을 거야. 저 괴물이 공멸하려고 했거든. 근데 너랑 너는 살았겠다."
"······?"
로라 마르티네즈의 입에서 사실인지, 아니면 장난인지 모를 말이 튀어나왔다.
"저 미친놈이 보호할 생각으로 뛰어들더라. 좋겠네?"
만약 바만차가 공멸하려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레반의 도움으로 아힘사와 슬레모킨 둘만 살아남았으리라는 얘기.
그것은 이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퍽 적당했다.
"······."
방금 전의 전투를 상기한 슬레모킨은, 당명의 유해 위에서 용사처럼 선채로 기절한 레반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9레벨 네임드 개체를 상대로도 거침없이 달려들던 레반을 선명히 기억한다.
그 불가능에 가까운 신위를.
막내는 분명 혼자서라도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꺄하핫! 미친, 표정 봐.'
꽤 진심인가보네. 이제 그만 해야겠다.
그렇게 혼자만의 아련한 감상에 빠져있는 슬레모킨을 흘긴 로라 마르티네즈는, 속으로 깔깔 웃으며 짧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숨은 붙여줄게. 일단 얘 좀 눕히자."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전신을 축축히 적시고 있는 반송장. 레반의 앞에 선 그녀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꽈드드득!
거대한 마력의 편린이 그녀의 팔에 휘감겼다.
용의 비늘처럼 오소소 일어나는 마력 조각들.
로라 마르티네즈가 그대로 레반을 들어 올리려했다.
"응?"
헌데.
그 십이제 로라 마르티네즈가 당겨도 레반은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검을 붙잡고 있는 암석덩이같았다.
"오, 나랑 한 번 해보자 이거지?"
갑자기 승부욕이 일어난 로라 마르티네즈가 팔을 두른 용린에 마력을 더 불어넣었다. 까만 뿔테안경 뒤로,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에 싯푸른 전광이 스쳤다.
그리고 그 순간, 당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원로님께서 녹아 스러진 자리에 검을 꽂아두면, 사천당가에서 후에 수습하기로 했습니다."
"뭔 소리야 그건 또?"
황당함으로 바뀌는 로라 마르티네즈의 얼굴.
머리가 산발이 된 당령이 레반을 지그시 바라봤다.
비록 당명 원로는 한줌의 독수가 되었으나, 대 사천당가의 무인으로서 충분히 명예로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원로께서 남기고 떠난 것은 한 줌의 녹아내린 유해와 더불어 저 레반이라는 남자와의 약조뿐.
즉, 돌아가신 고인과 당가의 명예가 달려있는 일.
그러니 레반과 '당가' 의 약속은 지켜져야한다.
"저 레반은, 당명 원로님과 일전에 약조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의식 속에서도 저렇게 붙잡고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7레벨 수준으로 많이 무리했으니, 일단 바만차의 에센스를 조금이라도······."
"응? 잠깐만."
로라 마르티네즈가 눈살을 찌푸리며 천무연의 말을 끊었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조금 전에 뭐라고 그랬어?"
"돌아가신 당명 원로님과 일전에 약조를—."
"아냐, 그거 말고."
"7레벨 수준으로 많이 무리했습니다."
"누가 7레벨인데?"
"그야···."
당령이 레반을 가리키자.
로라 마르티네즈의 긴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어?"
그녀는 기절한 레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굉장히 젊은, 미성년과 청년 사이쯤 되는 얼굴.
지금은 많이 상했으나 꽤 단단해 보이는 몸.
하지만, 로라 마르티네즈가 아는 무인들에 비하자면 어딘가 한참 부족하다.
'···환골탈태한 게 아니었어?'
세상에.
당연히 세력의 수장급은 될 줄 알았는데.
아니 상식적으로, 어떻게 7레벨일 수가 있지?
아무리 온갖 조력과 지원을 받았대도, 십이제의 앞에 떡하니 배정되었던 9레벨 네임드를 몰아붙여 공멸까지 유도한 녀석이······
고작해야 7레벨?
그렇게 거대한 강기를 마구 쓰던 녀석이?
로라 마르티즈네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확실해? 나랑 장난치는 거 아니고?"
"누구 면전에서 감히 장난을 치겠어요."
번쩍!
쳐져있던 슬레모킨의 귀가 자신감으로 다시 뾰족해졌다.
슬레모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아픈 어깨를 으쓱였다.
"으흠."
누굴 상대로 그런 재미없는 장난을 치겠냐는 슬레모킨의 말에 로라 마르티네즈가 공감을 표했다.
근 5년 사이에 감히 자신을 상대로 재미없는 농담을 했던 놈들은 전부 모가지를 비틀어 버렸으니—
잠시 뒤.
로라 마르티네즈는 어떠한 생각에 빠지나 싶더니, 곧 심각해진 얼굴로 뇌까렸다.
"요즘 7레벨은 원래 이렇게 다 강한가?"
당연히 그럴 리는 없었으나.
반송장이 되어 지면에 내리꽂은 검을 붙잡고 당당히 서있는 레반, 당명의 유언과 마지막 의지가 녹아내린 자리에 검을 박아넣은 그 사내를 보며.
"여튼 일레힌가의 마탑주가······이런 좋은 물건을 몰래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었다는 소리구나?"
로라 마르티네즈는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마치 명품관의 물건을 쳐다보듯 레반을 샅샅이 둘러보다 씨익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탐나는데?"
* * *
무당의 진공진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었구나."
서쪽에 있던 진공이 끔찍한 요기를 느끼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
북부 편제는 이미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뒤였다.
특이한 재주가 있거나 경지가 높은 자들만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편제에 소속된 대부분이 이 전장에서 명을 달리했다.
인간의 힘을 아득히 초월한 시체, 자굴라의 군단 앞에 인류 연방을 대표한다던 강자들이 속절없이 쓸려나갔다.
— 으으으, 으으으으.
와중에 자굴라가 내보인 위세가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닳고 닳은 연방의 장교들조차 자굴라를 신이라며 추종하는, 충격으로 정신이 나간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게다가 진공진인이 폐허가 된 전장에 뛰어들었을 때, 이미 자굴라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전장의 중심.
도심의 땅바닥에는 자굴라의 도주로로 보이는 깊고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놈의 화신체로 보이는 언데드들과 시체 군세들만이 남아 북부 편제의 생존자들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잔당은, 진공진인의 손에 빠르게 정리되었다.
강한 시체들부터 하나 둘 고혼이 되어 쓰러졌다.
케헥-
도르륵-
마지막으로 땅바닥에 처박힌 8레벨급 시체의 턱이 쩌억 벌어지자, 루 막슨 컴퍼니 소속 마법사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며 수복군의 승전을 알렸다.
그러나.
전장에 멀쩡히 서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잘린 팔다리와 처참한 시신들이 모래 알갱이처럼 사방에 널려있다.
화산의 헌앙하고 젊은 검수가 단전이 찢어진 늙은 검수를 돌보고 있었으며, 강력한 힘을 가진 마법사들도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상처뿐인 반쪽짜리 승리였다.
그리고.
북부 편제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나, 다른 곳도 마찬가지로 피해가 극심하다.
연방군의 병력은 물론, 각 기업과 세력들이 입은 피해는 감히 추산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연방군에서 확인해둔 9레벨과 8레벨의 네임드를 제외하고도, 확인되지 않았던 시체들이—이 도시 안에는 무수히도 많았으니.
휘이이이잉——
전장 중심에 거대하게 뚫린 원형의 구멍으로, 비릿한 혈향과 함께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네임드, 자굴라가 파고 들어간 도주로.
그 앞에서 진공진인은 희게 센 수염을 쓸어내렸다.
"허허, 새로운 세상이 열릴 줄 알았더니."
곧.
진공진인의 두 발이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수많은 동도의 피를 흩뿌려, 이제 작은 도시 하나를 수복했을 뿐이구나."
자조적인 어조와 동시에, 천지사방으로 해일처럼 일어나는 유유하고 심후한 공력.
다음 순간.
검을 뽑아 든 진공진인이 한 줄기 섬전처럼 쏘아졌다.
그 거대하고 축축한 구멍 속으로.
* * *
나흘 뒤.
발할라 시티, 시립 아카데미.
생도들 모두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홀의 중앙에 떠있는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그곳에 선 누군가가 눈앞의 서류를 무뚝뚝한 음성으로 읊고 있었다.
[ 시티 내의 모든 네임드를 토벌했고. ]
[ 아군의 피해는 지극히 적었으며. ]
[ 연방의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은······. ]
[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
그렇게.
연방의장의 입에서 라그나로크 수복에 성공했다는 확정적인 말이 나오자, 아카데미의 생도들은 제가 한 일인 양 흥분하며 이리저리 날뛰었다.
오랜기간 줄어오기만 하다, 결국 일곱 곳으로 고정되어 있던 연방의 거대도시가 한 곳 늘어났다.
인류 연방이 처음으로 영토를 되찾은 것이다.
— 키야아!
— 그러면 이제 연방도시가 8개가 되는 건가?
— 부동산 기업들은 아주 난리가 났겠네.
— 근데 라그나로크가 뭘로 유명했던 도시냐.
— 여행도 갈 수 있는 건가?
덕분에 아카데미의 중앙홀이 떠나갈 듯 소란스러워졌다.
중간에 한 교수가 나와서 크게 주의를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산맥 밑둥의 시장판처럼 변했을거다.
그 중앙홀에는 레나도 자리하고 있었다.
시티넷, 포털, 미디어 언론, 각종 기자들과 팟 캐스트의 진행자까지.
그들은 연방의 작전 성공이 공표되자마자, 온갖 방식을 통해 찬양과도 가까운 기사를 마구 내보냈다.
하지만, 레나는 연방 정부의 시티 수복전 결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카데미 밖으로 나와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으로 온 레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정말 괜찮은 걸까?'
당연한 얘기지만, 레반과 연락이 되질 않는다.
그렇다고 마탑에 직접 연락을 해볼 수도 없고···.
레나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레반만을 걱정하던, 바로 그때였다.
콰앙-!
"레나!"
"?"
흔들흔들-
누군가 방문을 쾅 밀치고 들어와 레나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 정체는 엄청나게 흥분한 기색의 반 루벤카였다.
곧, 백금의 머리칼이 산발이 된 루벤카가 침을 꿀꺽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거 봤어?"
삐빅-
루벤카가 레나의 침실에 있는 디스플레이를 켰다.
재생되고 있는 것은 발할라에서 가장 큰 언론사의 뉴스였는데, 그 디스플레이 화면 속에서는, 이번 연방 수복전에서 큰 전공을 세운 영웅들의 면면을 띄우고 있었다.
발할라의 뉴스인지라 무인은 거의 없고 마법사가 주를 이루었지만,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 이르자.
레나가 루벤카처럼 눈을 확 치뜨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레반?"
그 위대한 십이제 로라 마르티네즈의 바로 옆으로.
레나가 평생을 보아온 얼굴이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8억의 발할라 주민들이 다 보는 언론사의 메인 뉴스에.
그것도, 아주 대문짝만하게.
#88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10
#88화.
반 루벤카.
그녀가 가끔 하는 생각이 있다.
지금의 '연방 정부'는 절대 선(善)이 아니다.
그들이 만약 절대 선이라면, 반 바이오 컴퍼니가 그렇게 억울하게 무너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거대 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이나 횡포로 피해입는 이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다. 어떻게 해야 자기들 앞으로 더 큰 떡고물이 떨어질까? 하고 누워서 입만 벌리고 있는 것들.
또, 부풀릴 땐 크게 부풀리고 축소할 것은 크게 축소한다.
연방 정부는 장벽 안의 주민들이 원하는 정보만 들려주면 된다고 생각하거든.
굳이 억지로 진실을 말해서 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일 수도 있겠지.
그들은 달콤한 말로 주민들의 눈과 귀를 가린다.
사실 그런 건 정치라고도 할 수 없다. 본래 권력이라는 건 한 번 잡고 흔들어보면 다시는 놓을 수 없다고들 하니까. 조금이라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이번 수복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방이 발표하길 아군의 피해가 지극히 적었단다.
거짓말.
그녀도 교수들을 통해 들은 정보가 있다.
수복전에 참여한 세력들이 입은 피해는······그야말로 상상초월. 출전한 전력의 전부가 사망해버린 기업도 있다고 들었다.
그저, 아직까지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뿐이겠지.
연방은 늘 말한다.
우리는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 그렇게 지지해주시고 칭송해주세요.
실제로, 자기들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번에도 연방은 이 대규모 유혈 사태를 넘기려 라그나로크의 땅을 참가한 세력들에게 생색내며 갈라주고, 수복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초신성을 몇 명 띄워주고 새로운 영웅을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잠깐의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릴 것이다.
지금은 난세(亂世). 백 년 이상 난세였다.
난세에는 언제나 영웅이 필요하다.
삼존 칠좌 십이제가 연방의 대표적인 영웅이자 전설로 남아있지만, 그래도 보통의 대중들은 새로운 영웅의 등장에 더 환장하는 법이거든.
······이라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었는데.
"아니, 왜 레반이 저기서 나오지? 그리고 9레벨 시체 바만차를 잡는데 가장 큰 도움을······저게 무슨 개소리야."
루벤카의 아름다운 눈이 뒤룩뒤룩 굴러간다.
발할라에서 가장 큰 언론이 쟤를 띄워주고 있어?
그리고 9레벨 시체 바만차를 잡는데 도움이 됐다고?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배가 막 아프고 그런건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강했을 리가?'
루벤카도 레반과 마탑에서 직접 손을 섞어봤다.
물론 검술이 생각보다 놀랍긴 했지만, 자신조차 베어넘기지 못하는 실력으로는 수복전같은 대규모 작전에서 활약할 수 있을 리 없다.
7레벨의 정예들이 일반 병사처럼 발에 채였을 전장. 그런데 7레벨의 레반이 자그마치 십이제 옆에 나란히 설 정도로 큰 전공을 세웠다라.
그게 말이 돼?
'설마, 내가 그 놈한테 또 속은 건가.'
루벤카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포슬한 백금발의 머리칼이 몇가닥 뜯어져 레나의 침대를 어지럽혔다.
아! 근데 그때 분명 더이상 놀라지 않기로 했지.
흐음-
"엣흠."
이윽고, 억지로 염세적인 표정을 지은 루벤카가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몸종 레반의 느닷없는 영웅행과 출세를 보고 놀라 흥분한 탓에 여기까지 달려오긴 했지만,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곧 루벤카는 벙쪄있는 레나를 '교육' 하기 위해 표정을 지우고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역시~이상한 놈이 맞았어. 내가 본 남자중에 가장 의뭉스러운 놈이 바로 그놈이야. 절대 가까이 하지마. 좋을 거 하나 없어. 나는 그 놈이 우리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수상한 촉이 빡! 하고 꽂히더라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종에 불과하던 레반, 저놈은 역시나 불가사이하고 괴상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음음. 맞아 맞아.
그러니 사랑스러운 자신만의 레나가 놈의 마수에 푹 빠지는 꼴을 지켜볼 수는 없는 일!
이제 루벤카 그녀에게 남은 가족은 레나 하나뿐이다. 헌데 저 레반놈은 분명 또 레나를 보겠답시고, 여기까지 기어올 테지.
그전까지 놈이 속을 알 수 없는 위험인자라는 사실을 팍팍 주입해둬야한다.
어쩐지 레나를 놈에게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서 치사하게 나오는 것은 절대로, 결단코 아니었다.
"레나, 이렇게 말해도 아직은 잘 모르겠지? 아무튼 있어 그런게. 어른 말 들어서 나쁠 게 없답니다. 내 말 똑똑히 새겨 들어야 해. 쟤 저거 또 어깨가 산만해져가지고 찾아올 텐데, 저런 남자 잘못 만났다간 신세 망치기 딱—"
"레반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루벤카의 말을 끊는 레나의 의문.
레나는 이불 가장자리를 꼼지락대며 말했다.
"그래도 방송까지 저렇게 나온 거면, 괜찮다는 얘기일 테니까······정말 다행이다."
"······."
자신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던 레나의 눈이 그렁그렁해진 걸 확인한 루벤카는, 답답함에 분통을 터뜨리는 대신 속으로 혀를 찼다.
···다른 교수 자택으로 몰래 이사라도 가야하나?
***
너, 네가 올라간 침상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것이다.
너, 네가 올라간 침상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것이다.
너, 네가 올라간 침상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지랄하네.
홰액!
"!"
내가 벌떡 일어나려 하자 끅, 소리가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바만차 놈과의 전투 때는 말을 참 잘 듣던 몸이 이제는 말을 안 듣는다.
아.
안 듣는게 아니라 못 듣는 건가.
전신은 몽둥이 찜질을 당한 듯 뻐근했고, 피부 안으로 말려들어오는 오한덕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북해 바다에 뛰어든 것처럼 몸이 벌벌 떨리는데,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미래를 담보로 잡아 빚을 너무 많이 빌렸다. 갚지 못할 만큼 무리하게 끌어다 사용했으니, 누워있는 것은 뭐 이상할 일도 아니다.
진짜 이 침상 밑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죽는건가.
움찔-
정신을 차렸음에도 두 눈은 서로 착 붙어 떠지질 않는다.
대신, 뻥 뚫린 코로 향이 먼저 맡아졌다.
······기이하고 알싸한 약재(藥材)들의 향기.
다음으로 청각이 돌아왔다. 조용히 귀를 기울여본다.
견우자(牽牛子)의 흑축(黑丑)을 푹 삶아서 어쩌고, 마황(麻黃)을 달였다느니, 육두구의 씨앗을 빻아서 환부에 잔뜩 발라두었다느니···.
근데 그거, 전부 독 들어있는 약재들 아닌가.
독을 약재로 잘 쓰는 놈들이라면.
"······."
나는 전투가 끝나기 전의 기억, 청각과 후각이 보내오는 정보. 그리고 무의식이 보내온 저 재수없는 소리까지 종합하여 내가 누워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추측하기에 이르렀다.
'사천당가의 의약당에라도 끌고온 건가.'
당가의 침상이라면 사람 살리는 일보단 죽이는 일이 더 많기야 하겠지.
허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곧 생각 틈을 비집고 들려왔다.
"레, 레반? 어 숨 쉬는데?"
엘프 마법사, 슬레모킨의 목소리.
빳빳한 몸에 들어가던 힘이 스륵 풀렸다.
후우, 적어도 이곳이 영안실은 아닌 모양이다.
끔뻑.
이내 시각이 돌아오며 두 눈이 뜨였다.
주변을 둘러봤다.
일단, 굉장히 고급스러운 비단 가림막이 사방을 막아 외부로부터 나를 격리하고 있었고 수십 줄은 될법한 링거줄들이 치렁치렁하게 늘어져 내 전신에 꽂혀있다.
내 몸은 겉으로 봐도 성한 곳이 없었다.
아마 기절한 뒤, 이곳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내 옆 침상으로는 팔 한짝이 없는 아힘사와 루돌프가 추욱 늘어져 있었고.
"흠. 흠."
다음으로는, 슬레모킨이 침대 맡에 앉아 있었다.
평소에는 마공학 병사끼리 싸움을 붙이기 바쁘더니, 지금은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그 옆의 작은 협탁에는 모락모락 김이나는 죽이 보인다.
— 이번에는 말씀하신 따뜻한 수건과 대야를······.
그때, 따뜻한 물수건을 들고 안으로 들어온 당가의 의원으로 보이는 이에게 슬레모킨이 자연스럽게 명령했다.
"아, 거기에 놓고 가세요."
찬 수건도 아니고, 따뜻한 수건은 뭐하러 시켰어?
간호인 코스프레 비슷한 건가.
참 이해할 수 없는 엘프다.
여튼 내가 상체를 힘겹게 일으켜 비단 칸막이를 슥 치워보니, 주변으로 사천당문의 심처에나 있을 법한 의약당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당문의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고, 의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약과 주사기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주르륵! 철썩!
"?"
그렇게 고개를 돌려가며 상황을 파악하던 와중에, 갑자기 따뜻한 수건을 쫘악-짜서 내 이마 위에 올려놓은 슬레모킨이 입을 열었다.
"놀랐지? 당가에서 막내 너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준 거야."
"······."
조금 놀랐다.
어떻게 떼를 써서 연방군을 어르고 달랜 건지, 아니면 크레딧을 연방군의 주머니에 꽂아 준건지, 당가는 로키 시티 연방군 주둔지에 병원이나 다름없는 사천당가표 의약당(醫藥堂) 한 채를 떡하니 차려버린 것이다.
크레딧이 얼마나 남아 돌기에.
또 입김이 얼마나 강하기에.
무서운 놈들.
어찌됐든 무사히 깨어난 나는, 뜨개질을 하는 슬레모킨으로부터 내가 기절한 뒤, 며칠간 일어난 얘기들을 전해 들었다.
"수복은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어. 강력한 놈들은 전부 잡아서 사실상 시티 수복은 시간 문제. 외부 포위를 뚫고 도망쳤던 '자굴라' 도 진공진인이 추살하는데 성공했거든. 다만 우리 편제쪽 피해가 어마어마—"
3기계화보병사단장.
사천당가, 9레벨 독릉(毒陵) 당명.
사천당가, 8레벨 당모.
사천당가, 8레벨 당림.
산동악가, 8레벨 귀창(鬼槍) 악려.
루 막슨, 8레벨 막슨 루벨터.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 8레벨 샨탈티아.
······그외 정예 73명 전사, 중상자 다수.
북부 편제에서만 9레벨이 한 명, 8레벨이 다섯이나 죽었고 7레벨은 너무 많이 죽어서 집계 자체가 힘들단다.
목숨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이들도 많고.
본대에 붙어있던 이들은 대부분 다 죽었다던가.
전체도 아니고, '북부 편제 세력' 에서만 이만한 피해가 나왔다. 그 때문에 로키 시티의 베이스캠프는 수복 성공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침울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고.
일단 수복전은 성공으로 끝나겠으나 피해가 극심했다. 북부 편제에 있던 9레벨의 중요 전력들이 죽거나 폐인이 되었을 정도라면, 그 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가장 생존률이 높은 조가 내가 있던 12조란다.
12조의 조장이던 8레벨 무인, 천무연도 팔을 잃었지.
화산 그룹의 인재인만큼 초고급 사이버웨어나 배양 바이오웨어를 선택해 이식받겠지만, 아무리 동화율을 끌어올린대도 평생을 같이 해온 팔보다야 어색할 것이고.
···잠깐.
그러고 보니, 광선이 보이질 않는다.
슬레모킨이 그런 내 의표를 알아챘는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레반 네 검은 당가에서 보관하고 있어.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되면 내가 손잡고 데려가줄게."
당가에서 내 검을?
이라는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사천당가의 소가주가 수르트에서 날아왔더라. 너를 보고 싶어 하던데, 일단은 기절했으니까 일정을 뒤로 물려뒀어. 당명 원로가 당가쪽에서도 대단한 사람인가 보던데."
사천당가의 소가주가 여기까지 왔다고? 점입가경이군.
"아 그리고. 저기 화면 보여?"
깨어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도통 쉴 새가 없었다.
슬레모킨은 의약당 중앙, 노이즈가 낀 화면을 가리켰다. 거기는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방송되고 있었는데 나도 몇 번 봤을만큼 유명한 언론사였다.
"너 엄청나게 유명인 됐어. 연방 정부 차원에서 밀어주려고 작정을 했더라."
"······."
* * *
9레벨 바만차 사냥에서 큰 공을 세운, 발할라 시티 최고의 마법사이자 새로 떠오르는 어쩌고···대충 그런 포지션인가.
대체 누가 저딴 개짓거리를 한 거지?
"하아."
하루 아침에, 대뜸 유명인이 되었다.
날더러 엄청난 괴물의 탄생이란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명성과 명예 따위를 바란 건 아니나, 아무래도 내가 저질러버린 일이 기적에 가깝다보니 알려진 순간 곧바로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몰아받게 되었다.
걱정이 덜컥 든다.
수복전에서 뒈져버린 것보다야 낫겠으나, 아직 높아진 명성에 걸맞는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 중원무림에서도 실력에 비해 이름값만 높은 놈들은 단명하기에 딱 좋았다.
심지어 발할라 시티의 유명 미디어 말고도 각종 미디어에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진지하게 성형 수술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눈도 좀 키우고 턱도 깎고.
어느 병원 원장이 잘 만지지?
하지만 뼈와 근육을 만지면 그쪽으로 흐르는 신체의 기혈이 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굉장한 악수가 될 수 있다는 게 큰 문제다.
가면을 하나 구해야 하나.
긴 한숨이 나온다.
정기신의 균형을 맞춰보기 위해 참가한 곳에서, 하필 모든 밑천을 다 끄집어내 싸울 일이 생기는 바람에.
일단은 살아남았으나 더 큰 언덕들이 남아있군.
나는 상념을 지우고는 슬레모킨에게 물었다.
"바만차와의 싸움에서 마지막에 끼어 들었던 여자는 어떻게 됐지?"
내 질문에, 슬레모킨은 잠시 입을 우물대더니 말했다.
"로라 마르티네즈? 진공진인이랑 같이 오딘 시티 연방 본부로 갔어. 이번 사태에 대해서 뭘 따지러 갔다던—"
촤악!
"헤이. 나 돌아 왔는데?"
"······힉."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슬레모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뿔테 안경을 쓴 작은 체구의 마법사가 비단 칸막이를 강하게 제치며 들어왔다.
십이제, 마녀. 로라 마르티네즈.
바만차와의 전투에서 마지막에 끼어들었던 거물.
그런데.
그 거물은 들어오자마자 뜬금없이 내 링거줄을 다 끊어버리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야."
"?"
"너, 우리 편할래 아니면 연방 편할래."
* * *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제안.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조용히 되물었다.
"······지금, 연방군 작전이 너무 개좆같고 허술했다고 기자 회견을 하라 이겁니까?"
"응. 특히 개좆같다라는 말이 꼭 들어갔음 해."
연방 정부에서는 나를 이번 수복전의 영웅으로 낙점했다.
7레벨의 몸으로 언데드를 궤멸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어쩌고 저쩌고.
근데 지금 이 여자는, 그걸 내 발로 뻥 차버리라는 말을 하는 중이다.
어떤 손해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로라 마르티네즈는 재밌어서 못 참겠다는 듯, 이빨을 다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연방에서 널 이번 수복전의 영웅으로 밀어주려 해. 내가 네 얘기를 연방에 슬쩍 흘려서 그렇게 만들었고. 그런데 그 영웅이 시원하게 연방 뒤통수를 까버리면 어떻겠어? 어차피 얼굴도 다 팔린 마당에 그림이 좋잖아."
좋기는 뭐가 좋아.
내가 그리 생각하던 그때, 로라 마르티네즈는 죽이 놓여져있던 협탁을 쾅! 때리며 입을 열었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온다.
"야, 그 꼰대새끼들 말만 믿고 왔다가 존나게 많이 죽었잖아. 앞으로도 이러지 않으리라는 법 있어? 그러니까 이번 수복전 지휘하고 판 짠 씹새끼들, 기강 한 번 제대로 잡으려고. 진공 늙은이는 물론이고 지금 로키에 있는 세력들끼리 다 협의 된 거야. 니네 마탑주도 마찬가지고."
"······."
그렇게 된 건가.
하기야 마탑의 마법사들도 꽤 죽었겠지.
그런데 십이제 둘은 연방 정부에서 직접 수복군에 파견해 꽂아넣은 이들 아니었던가. 그닥 연방 정부와 관련이 깊지는 않아 보이는군.
아무튼 줄이자면, 이번 수복전을 지휘한 연방 사령부와 굵직한 연방의 정치인들을 세력들끼리 똘똘 뭉쳐서 갈아버리겠다는 얘기 같은데.
"연방 정부가 원하는 대로 하면, 너 앞으로 일 년은 얼굴마담이랑 꼭두각시짓 해야해. 분칠하고 화보도 찍고 인터뷰도 하고 아유, 생각보다 힘들다 그거? 꼬추 달고 태어나서 그러고 싶니? 그냥 시원하게 터뜨리고 좀 쉬어."
그 뒤로도 로라 마르티네즈의 제안이 속사포와같이 이어졌고.
마침내.
그녀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만약 그 말대로 해주면, 나한테 뭐 해줄 겁니까?"
"흐흐···."
그러자, 로라 마르티네즈가 안경 너머로 눈을 빛냈다.
#88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10
#88화.
반 루벤카.
그녀가 가끔 하는 생각이 있다.
지금의 '연방 정부'는 절대 선(善)이 아니다.
그들이 만약 절대 선이라면, 반 바이오 컴퍼니가 그렇게 억울하게 무너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거대 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이나 횡포로 피해입는 이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다. 어떻게 해야 자기들 앞으로 더 큰 떡고물이 떨어질까? 하고 누워서 입만 벌리고 있는 것들.
또, 부풀릴 땐 크게 부풀리고 축소할 것은 크게 축소한다.
연방 정부는 장벽 안의 주민들이 원하는 정보만 들려주면 된다고 생각하거든.
굳이 억지로 진실을 말해서 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일 수도 있겠지.
그들은 달콤한 말로 주민들의 눈과 귀를 가린다.
사실 그런 건 정치라고도 할 수 없다. 본래 권력이라는 건 한 번 잡고 흔들어보면 다시는 놓을 수 없다고들 하니까. 조금이라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이번 수복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방이 발표하길 아군의 피해가 지극히 적었단다.
거짓말.
그녀도 교수들을 통해 들은 정보가 있다.
수복전에 참여한 세력들이 입은 피해는······그야말로 상상초월. 출전한 전력의 전부가 사망해버린 기업도 있다고 들었다.
그저, 아직까지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뿐이겠지.
연방은 늘 말한다.
우리는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 그렇게 지지해주시고 칭송해주세요.
실제로, 자기들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번에도 연방은 이 대규모 유혈 사태를 넘기려 라그나로크의 땅을 참가한 세력들에게 생색내며 갈라주고, 수복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초신성을 몇 명 띄워주고 새로운 영웅을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잠깐의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릴 것이다.
지금은 난세(亂世). 백 년 이상 난세였다.
난세에는 언제나 영웅이 필요하다.
삼존 칠좌 십이제가 연방의 대표적인 영웅이자 전설로 남아있지만, 그래도 보통의 대중들은 새로운 영웅의 등장에 더 환장하는 법이거든.
······이라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었는데.
"아니, 왜 레반이 저기서 나오지? 그리고 9레벨 시체 바만차를 잡는데 가장 큰 도움을······저게 무슨 개소리야."
루벤카의 아름다운 눈이 뒤룩뒤룩 굴러간다.
발할라에서 가장 큰 언론이 쟤를 띄워주고 있어?
그리고 9레벨 시체 바만차를 잡는데 도움이 됐다고?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배가 막 아프고 그런건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강했을 리가?'
루벤카도 레반과 마탑에서 직접 손을 섞어봤다.
물론 검술이 생각보다 놀랍긴 했지만, 자신조차 베어넘기지 못하는 실력으로는 수복전같은 대규모 작전에서 활약할 수 있을 리 없다.
7레벨의 정예들이 일반 병사처럼 발에 채였을 전장. 그런데 7레벨의 레반이 자그마치 십이제 옆에 나란히 설 정도로 큰 전공을 세웠다라.
그게 말이 돼?
'설마, 내가 그 놈한테 또 속은 건가.'
루벤카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포슬한 백금발의 머리칼이 몇가닥 뜯어져 레나의 침대를 어지럽혔다.
아! 근데 그때 분명 더이상 놀라지 않기로 했지.
흐음-
"엣흠."
이윽고, 억지로 염세적인 표정을 지은 루벤카가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몸종 레반의 느닷없는 영웅행과 출세를 보고 놀라 흥분한 탓에 여기까지 달려오긴 했지만,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곧 루벤카는 벙쪄있는 레나를 '교육' 하기 위해 표정을 지우고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역시~이상한 놈이 맞았어. 내가 본 남자중에 가장 의뭉스러운 놈이 바로 그놈이야. 절대 가까이 하지마. 좋을 거 하나 없어. 나는 그 놈이 우리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수상한 촉이 빡! 하고 꽂히더라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종에 불과하던 레반, 저놈은 역시나 불가사이하고 괴상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음음. 맞아 맞아.
그러니 사랑스러운 자신만의 레나가 놈의 마수에 푹 빠지는 꼴을 지켜볼 수는 없는 일!
이제 루벤카 그녀에게 남은 가족은 레나 하나뿐이다. 헌데 저 레반놈은 분명 또 레나를 보겠답시고, 여기까지 기어올 테지.
그전까지 놈이 속을 알 수 없는 위험인자라는 사실을 팍팍 주입해둬야한다.
어쩐지 레나를 놈에게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서 치사하게 나오는 것은 절대로, 결단코 아니었다.
"레나, 이렇게 말해도 아직은 잘 모르겠지? 아무튼 있어 그런게. 어른 말 들어서 나쁠 게 없답니다. 내 말 똑똑히 새겨 들어야 해. 쟤 저거 또 어깨가 산만해져가지고 찾아올 텐데, 저런 남자 잘못 만났다간 신세 망치기 딱—"
"레반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루벤카의 말을 끊는 레나의 의문.
레나는 이불 가장자리를 꼼지락대며 말했다.
"그래도 방송까지 저렇게 나온 거면, 괜찮다는 얘기일 테니까······정말 다행이다."
"······."
자신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던 레나의 눈이 그렁그렁해진 걸 확인한 루벤카는, 답답함에 분통을 터뜨리는 대신 속으로 혀를 찼다.
···다른 교수 자택으로 몰래 이사라도 가야하나?
***
너, 네가 올라간 침상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것이다.
너, 네가 올라간 침상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것이다.
너, 네가 올라간 침상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지랄하네.
홰액!
"!"
내가 벌떡 일어나려 하자 끅, 소리가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바만차 놈과의 전투 때는 말을 참 잘 듣던 몸이 이제는 말을 안 듣는다.
아.
안 듣는게 아니라 못 듣는 건가.
전신은 몽둥이 찜질을 당한 듯 뻐근했고, 피부 안으로 말려들어오는 오한덕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북해 바다에 뛰어든 것처럼 몸이 벌벌 떨리는데,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미래를 담보로 잡아 빚을 너무 많이 빌렸다. 갚지 못할 만큼 무리하게 끌어다 사용했으니, 누워있는 것은 뭐 이상할 일도 아니다.
진짜 이 침상 밑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죽는건가.
움찔-
정신을 차렸음에도 두 눈은 서로 착 붙어 떠지질 않는다.
대신, 뻥 뚫린 코로 향이 먼저 맡아졌다.
······기이하고 알싸한 약재(藥材)들의 향기.
다음으로 청각이 돌아왔다. 조용히 귀를 기울여본다.
견우자(牽牛子)의 흑축(黑丑)을 푹 삶아서 어쩌고, 마황(麻黃)을 달였다느니, 육두구의 씨앗을 빻아서 환부에 잔뜩 발라두었다느니···.
근데 그거, 전부 독 들어있는 약재들 아닌가.
독을 약재로 잘 쓰는 놈들이라면.
"······."
나는 전투가 끝나기 전의 기억, 청각과 후각이 보내오는 정보. 그리고 무의식이 보내온 저 재수없는 소리까지 종합하여 내가 누워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추측하기에 이르렀다.
'사천당가의 의약당에라도 끌고온 건가.'
당가의 침상이라면 사람 살리는 일보단 죽이는 일이 더 많기야 하겠지.
허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곧 생각 틈을 비집고 들려왔다.
"레, 레반? 어 숨 쉬는데?"
엘프 마법사, 슬레모킨의 목소리.
빳빳한 몸에 들어가던 힘이 스륵 풀렸다.
후우, 적어도 이곳이 영안실은 아닌 모양이다.
끔뻑.
이내 시각이 돌아오며 두 눈이 뜨였다.
주변을 둘러봤다.
일단, 굉장히 고급스러운 비단 가림막이 사방을 막아 외부로부터 나를 격리하고 있었고 수십 줄은 될법한 링거줄들이 치렁치렁하게 늘어져 내 전신에 꽂혀있다.
내 몸은 겉으로 봐도 성한 곳이 없었다.
아마 기절한 뒤, 이곳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내 옆 침상으로는 팔 한짝이 없는 아힘사와 루돌프가 추욱 늘어져 있었고.
"흠. 흠."
다음으로는, 슬레모킨이 침대 맡에 앉아 있었다.
평소에는 마공학 병사끼리 싸움을 붙이기 바쁘더니, 지금은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그 옆의 작은 협탁에는 모락모락 김이나는 죽이 보인다.
— 이번에는 말씀하신 따뜻한 수건과 대야를······.
그때, 따뜻한 물수건을 들고 안으로 들어온 당가의 의원으로 보이는 이에게 슬레모킨이 자연스럽게 명령했다.
"아, 거기에 놓고 가세요."
찬 수건도 아니고, 따뜻한 수건은 뭐하러 시켰어?
간호인 코스프레 비슷한 건가.
참 이해할 수 없는 엘프다.
여튼 내가 상체를 힘겹게 일으켜 비단 칸막이를 슥 치워보니, 주변으로 사천당문의 심처에나 있을 법한 의약당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당문의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고, 의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약과 주사기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주르륵! 철썩!
"?"
그렇게 고개를 돌려가며 상황을 파악하던 와중에, 갑자기 따뜻한 수건을 쫘악-짜서 내 이마 위에 올려놓은 슬레모킨이 입을 열었다.
"놀랐지? 당가에서 막내 너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준 거야."
"······."
조금 놀랐다.
어떻게 떼를 써서 연방군을 어르고 달랜 건지, 아니면 크레딧을 연방군의 주머니에 꽂아 준건지, 당가는 로키 시티 연방군 주둔지에 병원이나 다름없는 사천당가표 의약당(醫藥堂) 한 채를 떡하니 차려버린 것이다.
크레딧이 얼마나 남아 돌기에.
또 입김이 얼마나 강하기에.
무서운 놈들.
어찌됐든 무사히 깨어난 나는, 뜨개질을 하는 슬레모킨으로부터 내가 기절한 뒤, 며칠간 일어난 얘기들을 전해 들었다.
"수복은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어. 강력한 놈들은 전부 잡아서 사실상 시티 수복은 시간 문제. 외부 포위를 뚫고 도망쳤던 '자굴라' 도 진공진인이 추살하는데 성공했거든. 다만 우리 편제쪽 피해가 어마어마—"
3기계화보병사단장.
사천당가, 9레벨 독릉(毒陵) 당명.
사천당가, 8레벨 당모.
사천당가, 8레벨 당림.
산동악가, 8레벨 귀창(鬼槍) 악려.
루 막슨, 8레벨 막슨 루벨터.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 8레벨 샨탈티아.
······그외 정예 73명 전사, 중상자 다수.
북부 편제에서만 9레벨이 한 명, 8레벨이 다섯이나 죽었고 7레벨은 너무 많이 죽어서 집계 자체가 힘들단다.
목숨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이들도 많고.
본대에 붙어있던 이들은 대부분 다 죽었다던가.
전체도 아니고, '북부 편제 세력' 에서만 이만한 피해가 나왔다. 그 때문에 로키 시티의 베이스캠프는 수복 성공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침울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고.
일단 수복전은 성공으로 끝나겠으나 피해가 극심했다. 북부 편제에 있던 9레벨의 중요 전력들이 죽거나 폐인이 되었을 정도라면, 그 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가장 생존률이 높은 조가 내가 있던 12조란다.
12조의 조장이던 8레벨 무인, 천무연도 팔을 잃었지.
화산 그룹의 인재인만큼 초고급 사이버웨어나 배양 바이오웨어를 선택해 이식받겠지만, 아무리 동화율을 끌어올린대도 평생을 같이 해온 팔보다야 어색할 것이고.
···잠깐.
그러고 보니, 광선이 보이질 않는다.
슬레모킨이 그런 내 의표를 알아챘는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레반 네 검은 당가에서 보관하고 있어.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되면 내가 손잡고 데려가줄게."
당가에서 내 검을?
이라는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사천당가의 소가주가 수르트에서 날아왔더라. 너를 보고 싶어 하던데, 일단은 기절했으니까 일정을 뒤로 물려뒀어. 당명 원로가 당가쪽에서도 대단한 사람인가 보던데."
사천당가의 소가주가 여기까지 왔다고? 점입가경이군.
"아 그리고. 저기 화면 보여?"
깨어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도통 쉴 새가 없었다.
슬레모킨은 의약당 중앙, 노이즈가 낀 화면을 가리켰다. 거기는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방송되고 있었는데 나도 몇 번 봤을만큼 유명한 언론사였다.
"너 엄청나게 유명인 됐어. 연방 정부 차원에서 밀어주려고 작정을 했더라."
"······."
* * *
9레벨 바만차 사냥에서 큰 공을 세운, 발할라 시티 최고의 마법사이자 새로 떠오르는 어쩌고···대충 그런 포지션인가.
대체 누가 저딴 개짓거리를 한 거지?
"하아."
하루 아침에, 대뜸 유명인이 되었다.
날더러 엄청난 괴물의 탄생이란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명성과 명예 따위를 바란 건 아니나, 아무래도 내가 저질러버린 일이 기적에 가깝다보니 알려진 순간 곧바로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몰아받게 되었다.
걱정이 덜컥 든다.
수복전에서 뒈져버린 것보다야 낫겠으나, 아직 높아진 명성에 걸맞는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 중원무림에서도 실력에 비해 이름값만 높은 놈들은 단명하기에 딱 좋았다.
심지어 발할라 시티의 유명 미디어 말고도 각종 미디어에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진지하게 성형 수술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눈도 좀 키우고 턱도 깎고.
어느 병원 원장이 잘 만지지?
하지만 뼈와 근육을 만지면 그쪽으로 흐르는 신체의 기혈이 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굉장한 악수가 될 수 있다는 게 큰 문제다.
가면을 하나 구해야 하나.
긴 한숨이 나온다.
정기신의 균형을 맞춰보기 위해 참가한 곳에서, 하필 모든 밑천을 다 끄집어내 싸울 일이 생기는 바람에.
일단은 살아남았으나 더 큰 언덕들이 남아있군.
나는 상념을 지우고는 슬레모킨에게 물었다.
"바만차와의 싸움에서 마지막에 끼어 들었던 여자는 어떻게 됐지?"
내 질문에, 슬레모킨은 잠시 입을 우물대더니 말했다.
"로라 마르티네즈? 진공진인이랑 같이 오딘 시티 연방 본부로 갔어. 이번 사태에 대해서 뭘 따지러 갔다던—"
촤악!
"헤이. 나 돌아 왔는데?"
"······힉."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슬레모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뿔테 안경을 쓴 작은 체구의 마법사가 비단 칸막이를 강하게 제치며 들어왔다.
십이제, 마녀. 로라 마르티네즈.
바만차와의 전투에서 마지막에 끼어들었던 거물.
그런데.
그 거물은 들어오자마자 뜬금없이 내 링거줄을 다 끊어버리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야."
"?"
"너, 우리 편할래 아니면 연방 편할래."
* * *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제안.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조용히 되물었다.
"······지금, 연방군 작전이 너무 개좆같고 허술했다고 기자 회견을 하라 이겁니까?"
"응. 특히 개좆같다라는 말이 꼭 들어갔음 해."
연방 정부에서는 나를 이번 수복전의 영웅으로 낙점했다.
7레벨의 몸으로 언데드를 궤멸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어쩌고 저쩌고.
근데 지금 이 여자는, 그걸 내 발로 뻥 차버리라는 말을 하는 중이다.
어떤 손해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로라 마르티네즈는 재밌어서 못 참겠다는 듯, 이빨을 다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연방에서 널 이번 수복전의 영웅으로 밀어주려 해. 내가 네 얘기를 연방에 슬쩍 흘려서 그렇게 만들었고. 그런데 그 영웅이 시원하게 연방 뒤통수를 까버리면 어떻겠어? 어차피 얼굴도 다 팔린 마당에 그림이 좋잖아."
좋기는 뭐가 좋아.
내가 그리 생각하던 그때, 로라 마르티네즈는 죽이 놓여져있던 협탁을 쾅! 때리며 입을 열었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온다.
"야, 그 꼰대새끼들 말만 믿고 왔다가 존나게 많이 죽었잖아. 앞으로도 이러지 않으리라는 법 있어? 그러니까 이번 수복전 지휘하고 판 짠 씹새끼들, 기강 한 번 제대로 잡으려고. 진공 늙은이는 물론이고 지금 로키에 있는 세력들끼리 다 협의 된 거야. 니네 마탑주도 마찬가지고."
"······."
그렇게 된 건가.
하기야 마탑의 마법사들도 꽤 죽었겠지.
그런데 십이제 둘은 연방 정부에서 직접 수복군에 파견해 꽂아넣은 이들 아니었던가. 그닥 연방 정부와 관련이 깊지는 않아 보이는군.
아무튼 줄이자면, 이번 수복전을 지휘한 연방 사령부와 굵직한 연방의 정치인들을 세력들끼리 똘똘 뭉쳐서 갈아버리겠다는 얘기 같은데.
"연방 정부가 원하는 대로 하면, 너 앞으로 일 년은 얼굴마담이랑 꼭두각시짓 해야해. 분칠하고 화보도 찍고 인터뷰도 하고 아유, 생각보다 힘들다 그거? 꼬추 달고 태어나서 그러고 싶니? 그냥 시원하게 터뜨리고 좀 쉬어."
그 뒤로도 로라 마르티네즈의 제안이 속사포와같이 이어졌고.
마침내.
그녀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만약 그 말대로 해주면, 나한테 뭐 해줄 겁니까?"
"흐흐···."
그러자, 로라 마르티네즈가 안경 너머로 눈을 빛냈다.
#89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끝
#89화.
꺄하핫-
아이처럼 명랑한 웃음소리.
"받아."
탁!
로라 마르티네즈는 뭔가를 턱 꺼내놓았다.
영롱한 빛깔을 내는 최상급, 그 이상의 영약.
그간 그녀가 보관하고 있었을 바만차의 에센스다.
뭘 해줄 수 있냐 묻자마자, 별 지체없이 내 수중에 넘겨준 것이다.
너무도 간단하게.
"절반은 작살난 네 몸 새로 '구축' 해주는데 썼고, 나머지는 전부 다 네 거."
"······."
목울대가 꿀꺽이며 너울친다.
가치를 측정할 수조차 없는 바만차의 에센스. 우르드의 에센스를 담았던 작은 병보다 적어도 다섯 배는 크다.
"내 몫은 일절 없어. 참고로 너 살려서 여기까지 배송해온 것도 나란다?"
내가 앉아있던 슬레모킨을 바라보니, 이런 분배라면 당연히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고는 엉성한 자세로 뜨개질을 이어갔다.
네임드 토벌전이 성공적으로 끝나더라도 후에 에센스를 분배하려면 피가 쭉쭉 말린다던데···
로라 마르티네즈가 나의 편의를 꽤 봐줌과 동시에, 많이 양보해 주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욕심이 냈다면 충분히 자신의 몫을 떼어갈 수도 있었다.
만약 이 양에서 마탑주에게 절반을 더 떼어준다 하더라도, 이번 수복전에서 사용한 에센스의 몇 곱절은 넉넉히 벌었겠군.
그래도.
최대한으로 질척거려서 더 얻어보자.
"이건 원래 제 거였고, 다른 건 더 없습니까?"
내가 당당한 태도로 그리 묻자, 로라 마르티네즈가 하! 헛숨을 뱉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껏 치켜올린 그녀의 안경테가 뾰족하게 빛을 반사한다.
"······아니, 네 몸을 새로 만들어줬다니까. 이 로라 마르티네즈님께서 직접? 그게 뭘 뜻하는지 몰라?"
자신감이 한가득 담겨있는 말투.
망가진 내 육체에, 바만차의 에센스를 부어가며 새롭게 구축했다고 한다.
내가 기절한 새, 벌모세수라도 해주었다는 말인가.
물론 십이제나 되는 인물이 남 보는 앞에서 헛소리를 늘어놓진 않을 터. 게다가 저리 자신만만하게 장담하니 보통 사안은 아닐 거다.
당장은 몸이 박살나서 정확히 알 수 없겠으나, 차차 알게 되겠지.
일단 그딴 거 모르는 척, 더 질척거려보자.
"그것으로도 조금 부족합니다."
"흥, 부족한지 아닌지는 나중에 보면 알 일이고."
아쉽게도, 그녀의 어조에는 더 반박할 수 없는 위압이 담겨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질척여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무려 연방 정부를 적으로 돌리는 일 아닙니까."
"···적으로 돌리긴? 고여서 썩은 놈들만 끌어내가지고 조질 건데? 그리고 이번에 언데드 새끼들한테 미리······아니다. 이것까지는 몰라도 돼. 암튼 7레벨 영웅이신 너는 방아쇠만 당기는 역할이고 총알은 진공 그 늙은이야. 이번에 그 늙은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꽤 성이 나셨거든."
무당의 진공진인.
십이제의 수좌이자 다음 칠좌의 지위에 반드시 오를 것으로 평가받는 고강한 무인. 공력을 무한에 가깝게 수발하는 공령지체(空靈之體)를 이루어 무력으로는 이미 칠좌의 말석에 준한다는 무림계의 거목.
이번 수복전에서 진통을 겪는 와중에, 그 진공진인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긴 듯하다.
과거 앙굴리마라의 일로 무당과 소림을 좋게 봐주지는 못하겠으나, 그자도 본질적으로는 도인(道人)일 테니까.
"또, 나는 아무것도 안 물어보고 있잖아."
로라 마르티네즈가 갑자기 한마디를 툭 던졌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가 뭐 하는 놈인지, 아니면 이전에 뭐 했던 놈인지. 내가 캐물은 적 있어? 봐봐, 7레벨짜리가 9레벨 네임드인 바만차를 두들겨 패서 죽여버렸다고! 근데 난 네 실체가 무어냐~하면서 묻지 않잖아 지금."
만면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로.
"그것도 내가 오늘부로 싹 묻어줄게. 누가 귀찮게 굴면 내 이름 팔아서 퉁쳐. 내가 뒷구멍으로 키운 제자라거나? 그럼 어지간한 놈들은 넘어갈 거야."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덮어버린 다음 그 위에 그럴듯한 줄거리까지 든든하게 실어주겠다는 얘기.
생각보다 괜찮은 조건이긴 한데.
"흐흐, 그리고 나중에는 진짜 내 제자 시켜줄게."
왜인지 저게 본심 같군.
바만차를 잡을 때 마력은 거의 사용하지 못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카리스마 있는 마법사는 정신을 잃기 전의 내게서 뭔가를 본 듯했다.
하지만 나는 적당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죄송한데, 그건 됐습니다."
"왜? 나 죽고나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거, 다 네 거가 되는 거야. 안 솔깃해?"
"그러면 마나의 맹약을 해주십시오."
"흥, 일레힌 그 애가 그렇게 잘해주니?"
딴소리는 그냥 한 귀로 흘려주고······.
로라 마르티네즈의 제안을 깊게 고민해본다.
거대한 고래들이 서로 박치기를 하겠다고 한다.
그녀의 말대로 실행되면, 쿠데타까지는 아니어도 파장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연방 내부에서 소리 없는 전쟁이 터지지 않을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몇 달간은 활활 타오를 건수.
다만, 그건 저들이 해야 할 역할이다. 나는 그사이에 낑겨 터지기 전에 적당히 먹고 빠져주는 게 역할이라면 못할 것도 없다.
어차피 일레힌 마탑주도 허락한 일이고, 받을 것도 이미 받았다. 생각해 보자면 연방 새끼들의 괴상한 지휘 때문에 나까지 휘말려 뒈질 뻔했던 거다.
"하겠습니다."
해서 나는, 로라 마르티네즈의 제안을 승낙했고.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안경을 벗어 접었다.
그러자 바보같이 큰 뿔테 안경에 가려져 있었던, 기세만으로 사람을 찢어버릴 수 있을듯한 위압감이 그녀의 주변을 진동시키며 피어올랐다.
"좋아, 시원하게 폭로 한 번 하고 몇 달 숨어서 푹 쉬어. 그동안 세상이 싹 뒤집혀 있을 거니까. 그리고 에센스는 만능 엘릭서가 아니다? 재구축 했다고 해도 네 몸은 한 번 개작살이 났었단 말야. 편하게 회복하고 재정비할 시간도 필요해. 박살난 사고차를 싹 수리했다고 해서 신차로 변하는 건 아니니까."
틀린 말이 딱히 없다.
네 번째 마나 회로를 통쾌하게 날려먹었지.
지금 나는 마법의 경지만 따지면 고작해야 5레벨.
그래도 단전마저 어떻게 된 것은 아니니, 푹 쉬면 언젠가 다시 회복해낼 수 있는 수준이다.
바만차의 남은 에센스도 내 손에 그대로 들어왔다. 이 정도 양이면 몸을 다 회복하고도 8레벨의 경지까지 노려볼 수도 있는 정도.
더해서 정기신의 합일.
한 번 제대로 느껴보았으니···.
다시 붙잡기도 수월할 것이다.
수복전 참여의 목적은 과하게 잘 이룬 셈.
그렇게 내가 생각을 완벽히 굳힌 듯 보이자, 로라 마르티네즈는 웃으며 말했다.
"맞다. 발할라 시티로는 가지 마. 마탑 소속으로 참여한 게 알려졌으니까 분명히 마탑 전체가 귀찮아진다. 대신 지낼 만한 곳이 없으면 내······."
꼼지락-
로라 마르티네즈는 엉성하게 뜨개질중인 슬레모킨을 슬쩍 쳐다봤다가, 의약당의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더 고급스러운 내쪽 비단 가림막을 보고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다. 너 원하는 곳은 이미 많아 보이네?"
* * *
하하하—
호쾌한 웃음소리.
로라 마르티네즈가 확답을 받고 떠난 뒤, 당가의 의약당에서 치료받고 있던 화령검절 청풍과 천무연을 만났다.
어떤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우리는 우선 따뜻한 덕담부터 주고받았다.
"본대는 거의 몰살이라던데, 넌 잘도 살아남았구나."
"하하하! 술 약속을 잡아놓고 아까워서 죽을 수는 없지 않겠소? 그래서 죽기 살기로 싸웠더니, 원시천존께서 특별히 굽어 살펴주셨나 봅니다."
"자기 자랑을 너무 길게 하는군."
"그나저나 당가의 큰 어르신도 돌아가셨다는데, 형장이야말로 어찌 살아계시오?"
이미 저 천무연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을 테지만, 웃는 낯의 청풍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곧장 만들어냈다.
"매일 붙어 다니던 청궁이는 어디갔냐."
"형장. 사람 복장 터지게 그런놈 얘기는 말고, 다른 건설적인 얘기나 나눕시다."
듣자 하니 화산의 선운자 장로가 큰 중상을 입었단다.
선발대에 포함된 화산의 검수들은 당연히 쓸려 나갔고, 천무연같이 걸출한 무인도 팔을 잃었다.
그래서 화산 그룹은 현재 초상집과 다름없다.
청풍은 그럼에도, 웃는 낯을 잃지 않았다.
"사실 형장이 9레벨 시체와 단신으로 붙어 우위를 점했다 천 사숙께 들었는데, 언론에 대서특필 되기 전에는 사숙이 미쳤나 싶었지 뭐요."
"운이 좋았지. 원시천존이 나도 굽어살펴줬나."
"실로 대단하시오. 내 한목숨 부지하기에 급급하여 동문을 내친, 나같은 범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요."
자신감 넘치던 청풍은 빙긋 웃으며 자신의 신세를 가볍게 비웃었다. 우렁우렁하던 목소리에는 어느덧 진한 자책이 깃들어 있었다.
미래에는 화산이 자기 거라더니 사실이겠군.
해봐야 이제 약관을 갓 넘긴 후기지수가······.
벌써 문파의 중역처럼 굴지 않는가.
"형장, 참 우습지 않소? 자랑스러운 화산의 검수들이, 그 괴물놈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더란 말이오. 우리가 피워낸 매화가 부질없이 스러지더란 말이오. 나는 그게 이상토록 우스웠소."
"그랬군."
"그래서 말이오 형장."
진중해진 얼굴의 청풍이 잠시 말을 끊었다. 조금 망설이나 싶던 녀석은 이내 다음 말을 이어붙였다.
"나와 같이 화산으로 가시지 않겠소?"
"왜."
"넓은 세상을 보았으니, 넓은 세상을 담을 그릇을 만들어야지. 허니 형장께서 나를 좀 도와주면 좋겠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다듬지 않아도 이미 다듬어져 있는 보석.
다음 대의 무림제일인을 노려볼 만한 놈이 맞다.
더욱이 며칠 새, 정광이 더욱 깊어지지 않았는가.
대단한 천재라도,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보면 범인과 똑같이 좌절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놈은 아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돌아가던 대문파 아래에서 일생을 천재로 살았기에 이리 좌절해본 기억은 없을 터인데도, 청풍은 이미 단단했다.
그래서.
"내가 도와줄 것이 없다."
"형장이 보기에 그렇소?"
"그래."
"하면 형장의 눈이 맞겠지. 이제 구석에 가서 술이나 한잔합시다. 당가놈들, 얼마나 독한지 술을 한 잔도 못 마시게 해서 살짝 꿍쳐뒀소."
하하하—
내 말에 미련이 없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젖힌 청풍은 털레털레 걸어가더니, 침상 밑바닥에서 술병을 꺼냈다.
물론 유령처럼 나타난 당가 의원에게 제지당해 금세 빼앗기긴 했지만, 이미 서로 몇 모금씩 나누어 마셨으니 취기가 오른 이들처럼 터울 없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에는 충분했다.
— 대체 어떻게 잡은 거요?
— 마탑주께서 성령을 내려주셨다.
— 그 성령, 나도 한 번 받아보고 싶소.
— 지금 받아서 뭐 하게.
— 모르겠소. 하기야 그런다고 해서 터져나간 선 장로님 하단전이 돌아오진 않겠지. 그런데 형장, 검은 어디다 두셨소. 설마 이번 전투에서 해먹었소?
—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기에 거기 걸어두고 왔다.
— 그럴 거면 나를 주지. 자굴라인지 하는 놈을 내 손으로 썰어버렸을 것인데.
의약당 구석에서 청풍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잠시 뒤, 나타난 당가의 의원이 전해온 말을 듣기 전까지.
"당가의 소가주께서 지금 뵙고싶어 하십니다."
* * *
무려, 사천당가의 소가주.
그러니까 현 당가주의 첫째 아들이 가주 대리의 자격을 가지고, 수르트 시티에서 라그나로크까지 한달음에 날아와 의약당을 차려버린 당가의 소가주.
호로록-
따뜻한 차를 마시며 나를 기다리고 있던 당가의 진정한 직계는, 생각보다 부드러운 태도로 날 맞이했다. 찾았구나 반 바이오 컴퍼니의 도망자! 라면서 비수를 던지는 일은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령이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당문이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 예."
"검부터 돌려드리겠습니다. 대단한 명검이더군요."
당문의 수뇌를 만난 것 치고는, 아주 평이한 전개.
나는 그로부터 비단 보자기로 보관해둔 광선을 곧바로 돌려받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필요한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 말씀하시지요."
백지수표까지 건네받았다.
당가의 소가주는 일견 마흔은 되어 보였다.
그는 내게 존대할 배분이 아님에도, 깍듯이 예의를 지키며 저자세로 굴었다. 그 졸렬한 당가 놈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늘따라 극진하게.
사실 당신은 이미 녹량백량의 귀한 에센스를 당명 원로로부터 받았지 않느냐고, 평소처럼 뻔뻔한 태도를 견지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런 것은 전혀 없었고.
"가능하다면 무엇이든 내어드리겠습니다."
뭔가를 더 해주고 싶어 안달이었다고 할까.
아마도 가문의 어른을 존경하는 마음이 저 태도에 담겨 있겠지. 당씨들끼리는 껌딱지보다도 똘똘 잘 뭉치는 놈들이니.
심지어 죽은 당명이 원로원에서도 입지가 두터웠던 원로인지라, 나는 당가에게 제대로 보답을 받아야할 사람이 되어버린 듯했다.
그런데 당가의 젊은 소가주는 내가 어딘가 마뜩찮아 하는 듯 보이자, 이게 아닌가? 하며 한 술씩 더 뜨기 시작했다.
"이럴 게 아니라, 본문에 한 번 들러주시겠습니까."
"아···사천당가 본문이요."
솔직히 말해서, 매우 부담스러웠다.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그래도 나는 괜히 찔리는 바람에 부담스러웠다. 어찌 보면 로라 마르티네즈와 마주했을 때보다도 더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당가한테 받기는 뭘 받아? 독 들어있으면 어떡해.
그렇기에 나는 괜찮다며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허허, 이런 것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당문의 성의를 거절하시는지. 혹시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것까지는 아쉽게도 말을 해드릴 수가······."
"당가는 은원(恩怨)을 절대 잊지 않습니다."
"절대 잊지 않으시는구나······."
하지만 결국
길고 긴 실랑이 끝에 내가 당가의 소가주로부터 받은 것은, 네온 홀로그램으로 멋들어지게 양각된 하나의 카드였다.
"우리 당가에서 보증하는 패(牌)입니다. 언제든 한 번, 당가는 대협을 당문의 원로급과 동등하게 대우할 것입니다."
* * *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났다.
내게 조금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감히 추측하기에, 연방 정부는 최대한 빠르게 수복전의 젊은 영웅을 매스컴에 띄우고, 이 수복전의 열기를 더 가열차게 끌어올려 열렬한 지지와 성원을 받고 싶었던 게 틀림없었다.
로라 마르티네즈와의 대화가 있고 나서, 단 이틀 만에 시체가 산처럼 널려있는 라그나로크 시티를 배경으로 폭로의 장을 직접 제작해 주었으니.
그리고 이것은, 그녀조차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
수많은 마이크와 라이브 송출용 디스플레이.
내가 해야 할 말이 적혀있는 화면도 있었다.
대충, 연방의 아낌없는 지원 덕에 어쩌고저쩌고 하는 내용이다.
큼큼.
불시에 끌려나와 그 앞에 선 내가, 목을 다듬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이 전자기기들을 통해 수르트와 발할라를 비롯한 모든 시티의 미디어로 내 모습이 실시간 송출된단다.
그래서 기자회견을 따로 열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어느 때보다 힘차게 입을 열었다.
"나다."
엄숙히 수복전의 시작을 공표하던 그 날을 떠올리며.
"좆같은 연방군 땅개 새끼들아."
연방이 밀어주는 젊은 영웅의 입으로,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의 끝을 고했다.
#90화. 그들의 세계수
#90화.
불굴(不屈).
굽히지 아니한다.
그게 인간의 육체를 말함이라면, 광인으로 살아온 어떤 사내에게는 그 무엇보다 의미 없는 얘기다.
뭘 거창하게시리 굽히지 아니해.
얼마든지 굽혀준다. 끝까지 안 굽히다 뒈질 바에 그냥 슬쩍 한번 굽혀주고, 후에 추진력을 얻어 뒤통수를 때리는 게 백번 낫기 때문이다.
다만 불굴에 의(意)가 끼어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의지 불굴.
무릎은 굽혀도, 정한 뜻은 굽히지 아니한다.
그것이 바로 사내다.
— 이상으로 마치겠다. 좆같은 연방군 새끼들아. 그러니까 발표를 애초에 똑바로 해야지. 그리고 앞에 앉은 저 인간은 자꾸 명령조로 방송 끊으라고······내가 인마 당신 아들이야? 하고 싶은 말 얼마든지 하랄 땐 언제고.
그렇게 대쪽같이 굽히지 않는 뻣뻣함을 뽐내며 기관차처럼 폭주하던 한 사내는 '이 자리를 빛내주러 오신 관계자' 들의 경악 어린 눈빛, 절규와도 같은 만류에도 끝까지 제 할 말을 마쳤다.
연방군이 전술핵 투발 시점을 숨긴 것부터 시작해 연방군의 허술한 작전과 사전 정보. 강력한 네임드 개체들이 수복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연합을 이루어 대응했던 것에 대한 의문, 참가한 세력의 피해가 이전 연방의 발표와는 달리 심각하다는 것까지.
며칠 전, 연방의 발표와는 전혀 딴판인 내용이었다.
게다가 이미 수복전에서 대단한 전공을 세운 젊은 영웅이라며 띄워뒀던 자. 연방이 빵빵하게 밀어주기로 내정해 두었던, 신원이 확실한 줄 알았던 마탑 소속의 마법사.
정치권의 인물이나 이합집산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력의 수장급도 아니고, 그저 수복전에서 큰 공을 세웠을 뿐인 7레벨의 젊은 마법사.
그런 이가 아픈 몸을 질질 이끌고 나와 직접 입을 연 것이다.
입도 걸걸한 게 혈기가 방장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젊은 천재. 뭐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누군가의 말대로 배경 그림이 퍽 나쁘지 않았다.
주변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어떤 이들은 단상 위에서 내려온 그 사내를 붙잡으려 했으나.
— 아오! 나 지금 아프니까 잡지 말어! 팔 자른다!
그는 아귀처럼 붙잡는 손길들을 신묘한 보법으로 뿌리치고는, 휘적대며 한 줄기 바람처럼 사라졌다.
폭탄을 떨어뜨린 뒤, 신속하고 민첩한 탈압박과 깔끔한 퇴장.
한바탕 막대한 폭풍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가니, 이제 얼빠진 이들만이 덩그러니 자리에 남았다.
인류 연방이 시체에게 빼앗긴 도시를 완전히 수복했음을 알려야 할, 역사적이고 희망찬 자리였다.
태양처럼 떠오르는 영웅들의 의기있는 모습과 비범한 풍모를 담아가기 위해 놓여져있던 송출기만 자그마치 수백 대.
그런데 수많은 실시간 송출기의 바다 앞에서, 걸걸한 욕설과 함께 연방의 이번 작전을 겨냥한 쓴소리와 폭로가 5분간 이어진 것이다.
그런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훌륭한 기삿거리가 될 법한, 성대한 헤드라인에 특집기사를 편성해 집어넣기 딱 좋게 각종 의혹들과 의문점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수습 불가.
어느 누구도 이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래 그 사내의 다음 번째에 나서기로 예정되어 있던 연방 수복전의 두 번째 젊은 영웅.
'허허, 형장이 또······.'
화산 그룹의 젊은 검수, 화령검절 청풍은 질끈 동여맸던 매화건을 슬며시 풀어 소맷단에 넣었다.
같은 시각.
어느 화면 너머.
짝짝짝!
"화끈하네, 저게 요즘 스타일인가?"
폭로의 주문자인 로라 마르티네즈조차, 고명한 영화제의 수상작을 관람한 관객처럼 기립박수를 치며 극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의 일처리였다.
"역시나 내가 점찍은 녀석 다워. 확실히 감동이랑 서사가 있잖아. 이거 파급력 하나는 끝내주겠어. 안 그래?"
그녀는 둥근 원탁의 참여자들을 향해 물었다.
고급스러운 비단 무복을 입은 무인은 말을 아꼈고, 연녹빛의 머리칼을 한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옷 소매에 꽃이 자수되어 있는 무인은 그저 빙긋 웃어 보였으며.
그들의 뒤로, 새카맣게 늘어앉아 있는 수십의 인영은 저마다의 감상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 * *
'챙길 건 다 챙겼나?'
수복전의 승리를 자축할 새는 없을 것이다.
당분간 연방이 발칵 뒤집힐 것은 당연한 수순.
지금부터는 진공진인과 로라 마르티네즈를 비롯한 세력의 장들이 폭로에 지원 사격을 하든, 저들끼리 뭐 지지고 볶든 하겠지.
그러니 나는,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
로라 마르티네즈의 조언대로, 발할라 시티로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다고 군벌 세력들이 판을 치는, 특히나 카스트라 뷔에탕이 기거하는 로키 시티에 계속 남아 죽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수르트 시티의 화산과 당가에서 공교롭게도 초대를 받았으나, 내가 일언지하에 다 거절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발두르 시티로 가려고 했다.
로키에서 꽤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니까.
몸을 적당히 숨길 수 있는, 천혜의 숨바꼭질 요새이자 마음속의 고향인 웨스트 정크타운이 마침 발두르에 있지 않겠는가.
"알 헤임달로 가자. 아무래도 거기보다야 낫지 않겠어?"
"흠."
그러나 마지막에 바뀐 행선지는 알 헤임달 시티였다.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의 명을 받은 슬레모킨은 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따라붙어 동행하기로 했다.
"···알 헤임달에 확실히 안전하고 조용한 곳이 있어. 몇 달이면 연방 정부도 절대 못 찾을 거야. 그러니까 나만 믿고 있으면 돼."
알 헤임달로 가면 저 자신만만한 슬레모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
또한 '대개척' 이라는 이유로 연방의 수복전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도시가 알 헤임달 아닌가.
앞으로도 딱히 연방과 크게 엮일 사건도 없을 듯하고, 지금 편히 숨어들어가 휴식기를 가지기에는 최고의 도시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아힘사의 고장난 팔도 대장간에서 고칠 수 있으면 더 좋겠지.
바만차의 공격을 막느라 꽤 심하게 고장나긴 했는데······설마 그 대단한 다르간트가 고치지 못할 리는 없을 테니.
몇분 뒤.
우리는 몇 가지 짐만 챙겨 로라 마르티네즈쪽에서 준비해둔 캐리어에 올랐다.
나와 아힘사, 슬레모킨과 루돌프를 태운 캐리어는 금세 로키에서 이륙해 하늘을 가르며 쏘아졌다.
* * *
알 헤임달 시티에 무사히 도착한 우리는, 가장 먼저 아힘사의 거취 문제부터 처리해야 했다.
적어도 몇 달을 내리 은거하며 지낼 생각.
그동안 아힘사를 애매한 외팔이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칼드락 스미스에 수리를 맡겨야 했다.
대장간의 주인인 칼드락이야 늘 그렇듯 툴툴댔지만, 다행히도 다르간트가 거절하지 않은 덕에 아힘사의 팔 파츠 수리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다만.
"이리도 빨리 부숴먹고 돌아올 줄이야. 언데드놈을 때려잡다 이렇게 되었다니 고쳐주기야 하겠지만, 금번부터는 크레딧을 내야 할 게다."
아쉽게도, 공짜 호의는 오늘로써 끝인 듯했다.
그래도 그간 받은 게 워낙 많은 탓에 불만은 없었다. 광선은 물론이고 본래 7레벨의 아힘사도 잠시지만 바만차의 강력한 일격을 받아낼 정도로 업그레이드 해주지 않았는가.
"소식은 전해 들었다. 이번에 사고 한 번 제대로 쳤더군!"
백 육십의 다르간트도 세간의 소식에 귀가 닫혀있는 건 아닌지, 날 보자 수복전 폭로 얘기를 먼저 꺼냈다.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 변방까지 퍼져나간 것 같다.
"저 봤다고 경찰에 신고하시면 안 됩니다."
"이 노구가 젊었을 적보다 훨씬 낫군."
"···그렇습니까?"
"피가 끓는 나이의 사내라면 그렇게 불덩이같은 면이 있어야지.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점 하나는 마음에 찬다. 가슴 속의 불덩이는 나이가 먹을 수록 점점 식어가기 마련. 젊을 때 다 해봐라."
"예, 그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나는 으허허 웃는 다르간트와 남은 손으로 회중시계를 꼭 쥔 아힘사를 두고 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원래는 칼드락의 대장간에서 아힘사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낼까 했는데, 슬레모킨이 빨리 출발해야 한다며 재촉아닌 재촉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 헤임달 남쪽의 칼드락 스미스에서 나와 꽤 긴 시간을 북쪽으로 이동했다. 대장간들이 모여 있는 길가와 수인들이 밀집해 살아가는 타운을 가로질러 지나오길 몇 시간.
시티 북쪽의 어떤 지점에 이르자 주변의 인기척이 확연히 드물어지더니, 이제는 하얀 증기로 사방이 이루어진 듯한 동네에 진입했다. 그 안에서는 유달리 방향감각을 잡기가 힘들어 슬레모킨의 뒤를 좇아야만 했다.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루돌프놈이 내 팔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저, 형님."
"왜."
"어쩐지 당장 도망쳐야 할 것같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약간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인데요."
"그러냐."
"굉장히 무시무시한 일이 조만간 벌어질 것 같습-"
"보이는 것만 이렇지, 괜찮으니까 그냥 입 닫고 따라올래? 죽고 싶으면 계속 떠들어도 좋고."
"······."
홱!
슬레모킨은 나 대신 루돌프의 팔을 손수 붙잡아 내려주며 답했다. 어딘가 불편한 기색으로 몸을 돌리며 미간을 잔뜩 좁힌 그녀는, 들릴 듯 말듯 아주 작디작은 목소리로 웅얼대며 불만을 표했다.
- 저 망할 딸기놈 때문에···대체 왜 데리고 다니는 거야. 쓸데없이 분위기만 깨고···일부러 이 길로 온 건데···없애버릴까···.
"······."
루돌프는 그 이후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입에 지퍼를 채우고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더 걸어 들어갔을까?
알 헤임달 시티는 많은 이종족이 자리잡은 도시인 만큼, 확실히 특색있고 개성이 확실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서 세계수를 볼 줄은 몰랐네."
왜 있잖은가.
엘프들이 모여사는 마을 중심에는 막대한 생명력을 지니고 하늘까지 자라있는 물푸레나무나 특이한 재질의 나무인 '세계수'가 존재하고, 그 주변으로 장엄한 대수림이 펼쳐져 있어서 풀만 뜯어 먹고 사는······.
그 세계수 비슷한 것이, 지금 눈앞에 있긴 있다.
부글부글—
온천처럼 끓어오르는 꽤 큰 규모의 호수.
그 호수 중심에는 둥그렇고 넓은 섬이 있다.
그리고 그 둥그런 섬의 지면 위로는···.
초고층 건물들의 군집과 황동색의 파이프 라인으로 이루어진 메카닉 세계수가 꼭대기도 보이지 않을 만큼 오연하고도 드높게 자라 있었다. 호수를 자연적인 방어막인 해자(垓子)로 삼아서.
코어를 이루는 거대한 빌딩의 옆구리에 나뭇가지처럼 삐죽빼죽 자라있는, 또다른 빌딩들이 합쳐져 실로 거대한 나무의 형태를 연상케 한다.
신기한 것은 이런 환경에서도 녹빛의 수생 식물이 드문드문 빌딩의 외벽을 뒤덮고 있는 부분도 있었다는 것. 호수 주변이 워낙 습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발할라의 설산목처럼 여기서만 자라는 식물일 수도 있겠군.
취이이이익—
빌딩 세계수의 어딘가에서 힘차게 뿜어져나오는 증기와 절절 끓는 호수의 수증기가 만나, 산맥 중턱에 걸린 구름처럼 빌딩 세계수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준다.
내가 잠시 말이 없자, 슬레모킨이 눈을 맞추며 넌지시 물었다.
"······어때? 앞으로 지내야 할 우리 마을의 첫인상이."
"굉장히 크네. 멋있군."
"정말? 멋있어?"
"저게 다 몇 평이나 될런지."
슬레모킨은 조금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평수는 잘 모르겠고, 높이는 1천 미터가 좀 넘어. 가지처럼 증축한 빌딩들까지 따지면 어지간한 업무지구보다 약간 부족한 급?"
"정말로, 저 많은 빌딩이 다 한 덩어리인가."
"응. 옛날부터 증축을 거듭하다 보니까 결국 저렇게됐어. 다들 물가에 모여사는 걸 너무 좋아하는데, 지금의 알 헤임달에는 물가가 많이 없거든."
도망자가 숨어 있기는 최적의 환경이기야 한데······.
이곳에서 거주하는 엘프들은, 아무래도 인간을 그리 반기지 않는 듯하다. 저 건물에 들어가기 전부터 따가운 눈초리들이 이쪽으로 쏟아지고 있으니.
[ ······. ]
하나같이 뾰족한 귀를 한 세계수의 주민들.
그래도 내 옆에 슬레모킨이 있어서 그런지, 그들이 우리를 다짜고짜 공격하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기이이이이—
이윽고 우리가 호수의 뭍에 이르자, 20미터쯤 되는 다리가 빌딩의 낮은 외벽에서 분리되어 빌딩의 섬과 이어준다. 증기력으로 가동하는 하나의 타워 브릿지인 셈이다.
"가자."
언제는 집이 싫다던 슬레모킨은 막상 고향에 도착하니 기분이 좀 나아진 건지, 빠르게 앞장서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는 수십 개는 될 법한 입구중 가장 커다란 입구를 택해 들어가더니, 오래 사용하지 않은 듯 덩굴식물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승강기의 버튼을 연타했다.
띵동-
"문 열어!! 약혼자 데려왔어!!!"
"?"
느닷없이 터져나온 그녀의 고함이었다.
내가 의문을 표하려 입을 채 열기도 전에.
덜컥!
즉시 닫혀있던 승강기의 문이 활짝 열렸고.
곧바로 안으로 쏙-하고 들어간 슬레모킨이 너도 얼른 들어오지 않고 뭐하냐는 듯, 멈춰선 나를 나무라는 얼굴로 바라봤다.
"거기서 뭐해?"
귀끝이 한껏 뾰족해진 슬레모킨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계속 '여기서' 지낼 거니까······어서 인사부터 드리러 가야지?"
#91화. 흠...그 정도인가?
#9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