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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 10

#78화. 처음이군

#78화.

화령검절 청풍은 조금 안도한 얼굴이었다.

이제 막 약관이 되었을 놈이, 칠십 먹은 노인네처럼 허허 웃으며 인자한 미소를 짓는다.

청풍은 두둑해진 지갑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형장 덕에 두둑히 땄소."

명품 반지갑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빵빵하게 부풀어있다.

현물 지폐만 저 정도고 다른 판돈까지 합치면 더 많을 거다. 아까 당령이라는 여인과 붙었을 때, 담보도 잡아주냐는 말을 똑똑히 들었기에.

참고로 연무장에 올라가기 직전, 청풍에게 맡겨둔 내 여분의 크레딧도 무려 원금의 5배 가까이 불어나 있었다.

때문에 나는 청풍을 따듯한 눈길로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노력해주어 참으로 감동이구나."

"마지막에 상황을 정리하느라 애를 좀 먹었으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니겠소."

청풍은 덮어놓고 마탑의 승리에 걸었다가 내 갑작스러운 기권으로 판돈을 다 잃을 뻔했으나, 순발력있게 방금의 내기는 무효! 라며 매화검을 뽑았다.

화산 그룹 최고의 기재이자 무림계에서 기대를 거는 후기지수가 칼까지 뽑아 무효라고 위협을 해대니, 반대쪽에 걸었던 이들도 모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하하!"

화령검절 청풍은 내가 인정한 사내이고 진정한 무인이었으나, 아주 정상적인 놈은 아니었다.

기분좋은 얼굴의 청풍이 물 흐르듯 물었다.

"형장, 이제부터 우리 형이라고 불러도 되겠소?"

"안 된다."

쩝-

단호한 대답에 아쉬워하던 청풍은 지갑을 품속에 슥 넣으며 다시 물었다.

"헌데 마지막에 어째서 기권한 거요?"

"초절정의 경지를 밟은 것과 다름없는 무인이었다."

"······허, 그랬소? 나는 나와 저 선배를 비슷한 수준으로 보았는데, 형장은 척 보면 척 하고 아는 것이 마치 대문파의 장로라도 되는 것 같소. 상단전이 뚫려 기운의 흐름이라도 보이는 거요?"

"멀리서 보는 것과 대면하는 것은 다르다. 가까울수록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법이지."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단 듯 답했으나, 그래도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청풍이 연무장 위를 바라보았다.

청풍의 승패 예측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아마, 그 뒤에도 필시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청풍이 맑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우습게도 나는 형장이 저 선배에게 지는 것이 상상이 가질 않소. 정말로 패할 것 같아 그리 기권한 거요?"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나는 형형히 눈을 빛내며 묻는 청풍놈의 말을 대충 뭉갰다.

사실.

상대는 초절정에 가까운 당가의 무인, 비무가 아니라 생사결이라면······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거다. 이길 수도 있겠지. 나라면 분명 그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리도 보는 눈이 많고 힘이 제한되어 있는 비무에서 내 밑천을 다 끄집어내 보이며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냥 기권하고 내려온 것이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야 상관없지만 당가의 원로와 화산, 루 막슨의 회장까지 나와서 비무판을 구경하고 있다.

이것저것 나도 모르게 익숙한 기술들을 꺼냈다가 재수 없이 된통 걸리면 저 새끼 대체 뭐지? 라거나 저 새끼 혹시 그 새끼 아니야? 라는 소리가 나올 것이 아무래도 분명한지라.

"나는 이제 좀 쉬련다. 이번엔 누구한테 돈을 걸 거냐?"

내가 손을 털며 그리 묻자.

청풍은 날뛰기 시작한 슬레모킨을 가리키며 답했다.

"형장은 당연한 걸 왜 물으시오? 이미 저 총쏘는 이족한테 다 걸었소."

* * *

콰앙—!

거대한 총성이 편제의 주둔지를 울린다.

'이리 당황스러울 데가 있나. 일이 왜 이리 흘러간단 말이냐.'

비무를 구경하던 당명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화산 그룹의 장로, 선운자는 재미있다는 듯 구경 중이고 마탑주도 자리에서 발을 뗄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비무에서 샷건을 쓰다니!'

연무장 위로 올라온 저 뾰족한 귀의 이족은, 감히 당가보다도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문의 무인들이 먼저 독을 쓴 것은 맞을 것이다. 당명 자신이 직접 그리하라 허했으니. 원래 마탑의 콧대를 적당히 꺾어 놓을 생각이었다.

다만, 일이 꼬였을 뿐.

저 마탑의 이족은 마공학 샷건을. 그것도 이 좁아터진 연무장에서 쏴대고 있다.

쾅! 쾅! 쾅!

"······이게 비무가 맞소?"

돌아오는 답은 없었고, 당가주 직속의 백각주는 속절없이 밀린다.

아니, 죽기 직전이다. 저건 비무가 아니라 사냥꾼으로부터 도망치는 짐승의 움직임에 가깝지 않은가.

허나 여기서 손속을 조금이라도 썼다간 자신의 체면을 구기는 것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당가의 무인 전체를 욕보이는 짓.

그렇다고 하여 가문의 직계가 복날 개맞듯이 두들겨 맞고 도망치는 꼴을 계속 방관하는 것도 썩 좋은 선택이 아니다.

생각을 마친 당명이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 마탑주, 피차 불편하니 여기까지 합시다. ]

[ ······한참 재미있는데 어째서 그러시는지? ]

[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저 한심한 놈들을 보시오. 이만하면 상호 충분하오. ]

[ 그렇군요. 그럼 이 대련까지만 보고 그만합시다. 저들의 승패는 알아야지. ]

[ 연습 비무는 마탑의 승리요. ]

[ 알겠습니다. ]

이윽고, 일레힌 포이체카가 허락하겠다는 듯 끄덕였고.

얼굴을 굳힌 당명은 적당히 기운을 피워올리며 말했다.

저 수치스러운 비무를 끝내기 위해.

"그쯤하고 내려오너라! 나를 어디까지 수치스럽게 만들 셈이냐?"

곧장 액체처럼 흘러내리며 깔리는 무형의 독기(毒氣).

비무를 잘 구경하던 이들은 갑자기 숨이 막히고 시야가 흐려지자 본능적으로 호흡을 멈추었다. 그들은 독으로 이루어진 늪에 잠시 빠졌다가 건져진 듯한 환각을 느껴야 했다.

당명은 일단의 소요가 진정되자 근엄한 음성으로 연무장 위의 중년인, 백각주 당모를 타일렀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깟 비무 따위에서 흥분하여 그것을 꺼내려 생각한 순간 이미 패한 것이다. 상대를 죽이기라도 할 셈이었더냐."

그러자 합이라도 짜 맞춘 듯, 백각주가 뒤돌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원로님.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

한참 샷건을 쏘며 도망치는 상대를 추격하던 슬레모킨은 당문의 생쇼를 보며 무슨 개소리야? 하는 뾰루퉁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연무장 밑에서 그걸 구경하고 있던 레반은, 알아서 북치고 장구치는 당가의 늙은이들과 어처구니없어 하는 슬레모킨을 보며 속으로 낄낄댔다.

'늙은 너구리. 저 정도면 독인(毒人)급이겠군.'

당가의 중년인이 격앙되어 아주 위험한 살초를 쓰려고 했고, 그것을 미리 느낀 당가의 원로가 급히 끼어들어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버렸다—대충 그러한 그림을 그린 듯싶다.

언뜻 당가도 체면을 구긴듯 보이나, 어차피 계속 싸웠다간 두들겨 맞던 당가의 중년인이 변수 없이 패할 테니까. 먼저 시비 걸었다가 두들겨 맞으면 더 창피하잖아.

그렇지만, 저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하지만 중년인에게 호통치며 기운과 위력을 식간에 내보인 저 당가의 원로는 자신의 위세를 장내에 있는 이들의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시켰다.

저 경이로운 독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자라면, 당명을 끔찍한 괴물이자 절대고수로 기억하고 경외할 것이고, 당가의 무인 셋을 때려잡은 마탑의 막내 레반과 샷건 난사녀 슬레모킨은 비교적 기억에 잘 남지 않을 것이다.

원래 원로든 장로든 다 경지에 이른 눈치와 정치력이 있어야 오르는 자리라, 아주 치졸한 수를 당당하게 쓰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가문의 원로까지 쩨쩨한 건 무림과 매한가지군.'

아무튼 그렇게 당가를 이끌고 온 수장이 직접 나서 무아지경의 연기를 선보이자, 당가와 마탑의 비무는 정리되었다.

— 이러면 당가가 밀린 건가?

— 설마, 그 대단한 당가가 질 줄이야.

허나 당명의 기운에 놀랐다고 해도, 누가 금번의 기싸움에서 승리했는지는 모르는 이가 없었으며.

— 나도 아까 그 마탑의 막내라는 자와 한 번 붙어보고 싶군.

— 아서라.

적어도 이 거대한 네 세력이 아웅다웅하는 편제에서, 레반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꽤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마탑의 '막내' 레반.

그런데 그 덕분일까.

"탑주, 저자를 잠시 내어주시오."

"······."

다가온 화산의 장로가 나를 콕 짚어 빌려달란다.

마법사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불편하게.

과거 천봉매화의 가지를 꺾다가 화산의 노괴에게 걸렸던 기억이 떠올라 내심 움찔한 나는, 무의식적으로 사실을 부정했다.

"내가 안 꺾었어요."

* * *

좋은 향이 퍼져나간다.

메가콥, 화산 그룹의 장로 선운자.

그는 화경의 무인으로 대단한 기백을 지녔다.

평범한 육신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는 선기.

확실히 도사는 도사다 싶었다. 조금 날카롭긴 하지만.

아무튼 선운자는 대뜸 나를 화산의 건물로 끌고 와서는 우묵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마치 호랑이가 앞에 한 마리 앉아있는 듯했다.

"······."

안광이 보통이 아닌 것이—

자네는 검법을 어디서 익혔는가.

사문이 어디인가.

스승이 누구인가.

어디서 인격칩이라도 주워 얻었나? 같은 질문에 철저히 대비하기 위해 끌려오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도 넉넉히 돌려두었다.

이래저래, 오다가다 익혔습니다.

죄송하지만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제 스승께서는 그만, 크흡. 등등.

그러나.

"그 검이로군, 화산에서 대장간에 내어준 적운철이 녹아있는 검이."

장로의 말에 잠시 잊고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칼드락 스미스에서···그걸 잠시 잊고 있었군.

나는 즉시 광선의 검집을 옷자락으로 덮어 가렸다.

사천당가의 원로고 화산의 장로고—

치졸한 늙은이들 같으니, 결국 이 검이 목표였나?

내가 생각을 키워가던 그때였다.

"괜찮다. 그깟 운철 따위, 다시 가져오리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

화산의 장로 선운자는 그런 나의 예측을 일거에 다 깨부수고는, 차 향을 즐기며 뜻밖의 말을 더 꺼냈다.

"청풍이가 형장이라 부르며 따르던데. 이긴 건가?"

본론이었다.

"필시 검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보았으니, 그 멋대로인 놈이 그리도 따르겠지. 비슷한 연배에 적절한 상대가 없어 그간 건방이 천지를 찔렀는데 아주 잘 되었구나."

선운자는 저 혼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흡족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철딱서니 없는 놈이다만······앞으로 잘 부탁하마."

"···예."

굉장히 인자해 보이는 선운자의 얼굴.

선기가 줄줄 흐르는 얼굴에, 나는 적당히 포권했다.

그래도 이상하군. 그저 친하게 지내라 하기 위해, 이리도 분위기를 잡아 끌고왔을리는 없는데.

바로 그때였다.

"이만 돌아가보아라."

"!"

메가콥 화산 그룹의 학부형, 장로 선운자는 이만 나가보라며 내 손에 꽤 고급진 주머니를 쥐여줬다. 무게가 너무도 묵직하여 받잡은 손이 훅 내려갔다.

주머니에서는 굉장히 청량한 냄새가 났다.

역시나···장로쯤 되는 거물이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있었구나!

참 좋은 기연이로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나는 주머니를 급히 펴 속을 확인했고.

"···."

미간이 구겨졌다.

거기에는 날붙이에 베인 상처에나 쓰는 화산의 금창약(金瘡藥)이 한가득 들려있었다. 그 양이 워낙 많아 칼에 수백번 찔리더라도 다 쓰지 못할듯싶었다.

그러니까.

뭐, 이거 받고 그 청풍이놈과 더욱 열심히 싸워달라는 얘기인가?

후우.

잠깐 한숨을 내쉰 나는, 두둑한 금창약 주머니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주머니에 퍽 구멍이 나며 허연 금창약 가루가 눈처럼 날렸다.

"노괴놈, 분위기 잡길래 자소단이라도 주는 줄 알았네."

화산은 화산이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별 도움은 안 되는군.

* * *

"연방은 전술핵을 사용할 거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마탑주의 발언.

슬레모킨은 꽤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연방군은 대전쟁과 핵테러로 도시 몇개가 날아갔을 때, 분명 핵무기를 전량 폐기했다고 공표하지 않았나요?"

팔찌 네 개의 구성원이 다시 모였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연방군 3사단장의 말을 전했는데 그 내용이 꽤 충격적이었다.

"그랬지. 이상하게 연방의 장군마저도 정확히 아는 기색은 아니더군."

라그나로크 장벽 근처에 전술핵을 투발해 근처의 좀비를 다 지우고, 장벽까지 녹여버린뒤 단숨에 진군하겠다는 연방 초유의 작전. 그걸 듣자 나도 어느 정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복전에 핵무기를 쓴다고?'

핵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마탑주가 생각이 많아보이는 게 이해가 된다.

핵무기.

편제의 각 수장들은 인간이라는 범주를 아득히 초월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나 9레벨급 이상은 지근거리에서 당하지 않는 이상, 핵이 터져도 생존할 확률이 매우 높을 거다.

허나 도시 자체가 폭발해 사라지면?

그때부터는 레벨이고 뭐고, 그냥 시체들 사이에 내던져진 채로 처절한 아포칼립스물을 찍는 거다. 지금처럼 먹을 것도, 마실 물도, 화장실도, 몸을 누일 곳도, 얘기를 나눌 사람도, 한 점의 빛조차도 없는 무한한 어둠 속에서.

대단한 초인이라고 해도 얼마 못 버틸 테지.

초월적인 강자도 인간의 몸인 이상, 인류의 터전을 벗어나서는 멀쩡히 제구실하며 살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조금이나마 남은 땅에 거대한 장벽을 둘러쳐 피똥싸가며 꾸역꾸역 도시를 수성하는 거다.

그러니 잘못되었다간 장벽 안의 모든 것들을 파괴할 핵무기를 극히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다.

현재, 연방의 일곱 도시는 유기적으로 물자를 주고받는다.

헌데 바닷물을 담수화시켜 연방에 공급하는 프레이야 시티나 석탄과 철광석을 포함한, 각종 소모재를 연방 도시들에 공급하는 알 헤임달 시티에 핵폭탄이 터진다?

생각만 해도 답이 없다.

만약 그리되면 그날로 인류 멸망의 시한을 받아놓은 것이다. 다시 완벽하게 수복하지 못하는 한, 멸망 확정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이들의 눈에는 핵이 그저 강력한 자멸 수단으로 보일 수밖에.

아무튼 일레힌 포이체카가 말을 덧붙였다.

"투발 시일은 4일 후 정오, 남서쪽 장벽 2km 지점이라더군."

아닐 수도 있다.

거대 세력의 수장들마저 이렇게 경계하는데, 연방군이 그걸 곧이곧대로 알려줬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 내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실제 연방에서 전술핵을 투발할 생각이라면 시각과 투발 지점, 모두 원안과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탈취라도 당하면 수복전이고 뭐고 다 엎어야 할 테니까요."

무려 전술핵, 미사일로 쏘든 가지고와서 떨구든 해야한다.

그런데 여기에 모인 9레벨급들이라면, 중간에 핵을 탈취하는 것도 가능하다.

덕분에 연방군은 전술핵의 위치와 존재를 끝까지 숨기고 싶을 것이고, 나흘 뒤 남쪽에 투발한다 해놓고서는 반대인 동쪽에 투발할 수도 있다. 그게 나의 생각이었다.

"동의한다."

다행히 마탑주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듯, 입을 열었다.

"투발이 당장 오늘일 수도 있으니, 마탑은 언제든지 전장에 투입될 수 있게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대기한다. 그리고—"

나를 기특히 바라보던 마탑주가 웃으며 말했다.

"고생했다. 당가의 원로가 쩔쩔매는 꼴이 보기 좋더구나."

* * *

"자칫하면 죽을 뻔했소."

화령검절 청풍은 화산의 장로, 선운자의 손에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아까 전, 비무에서의 내기 도박을 말함이었다.

꼴깍꼴깍-

술이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넘어가는 소리.

레반은 청풍이 소맷단에 숨겨온 맥주를 간단히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하늘에 무엇도 보이지 않는 야심한 밤이었다.

"형장, 오늘은 때가 아니라 이런 술같지도 않은 술밖에 못하지만 수복전이 끝나면 더 멋들어지게 사겠소."

"······."

청풍의 말이 끝나자, 잠시간 정적이 흘렀고.

툭. 툭.

레반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그거, 뒈지기 전에 하기 딱 좋은 말이로군."

청풍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레반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느끼고는 마찬가지로 따라 일어나며 소맷단으로 입을 닦았다.

그의 호쾌한 음성이 야밤의 정적을 깨고 이어졌다.

"하하하! 형장, 예서 누가 죽는단 말이오? 내 뒤에는 화산의 검수들이 있지 않겠소. 형장의 뒤에는 마탑이 있고 말이오."

곧, 청풍은 호탕하게 웃으며 떠날 채비를 했다. 그의 옆에 있던 청궁이 부스스 일어나며, 다 비운 맥주병들을 호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이윽고.

치이이익······.

레반과 청풍은 미리 짜기나 한듯이 검지 끝에 주독(酒毒)을 모아 바깥으로 몰아냈다. 약간의 취기도 남지 않게 주독을 모두 몰아낸 레반은, 조금 전보다 멀쩡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연방은 작전을 원래 이따위로 시작하나?"

그 말에 청풍이 묘하게 웃으며 답했다.

"나도 이런 임무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으나, 뭐 자신이 있는 것 아니겠소. 연방의 강자들이 여기에 모여있는데 두려울 게 없겠지요."

"?"

청풍과 레반의 만담을 이해하지 못한 청궁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물었다. 풀벌레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한데, 갑자기 뭐가 시작이란 말인가?

"지금 두 분, 무슨 소리를 하시는겁니까?"

레반은 청궁의 그 말을 무시하고 주머니를 뒤졌다.

곧 그의 품 속에서 두둑하고 고급진 주머니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흰 가루가 잔뜩 묻어있는 금창약 주머니였다. 구멍이 살짝 뚫린.

"너희 장로가 불러서 주더라. 다시 가져가라."

청풍은 허허 웃으며 한사코 거절했다.

"나는 괜찮으니 넣어 두시오 형장. 긴히 필요할 때가 오지 않겠소?"

"그런가."

레반이 다시 금창약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꽈과과과광—!!!

저 지평선의 끝, 어디선가 일어난 거대한 파장과 어두웠던 하늘을 환히 밝히는 섬광이 로키 시티의 베이스캠프까지 닿았고 그와 동시에.

———!!!

귀청이 터져나갈 듯한 연방군의 사이렌 소리가 주둔지를 울렸다.

허공으로 신형을 띄워 눈으로 그 섬광을 따라간 레반이 눈가를 좁혔다.

"그간 오래도 살았지만, 핵 터지는 광경을 보는건 또 처음이군."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의 시작이었다.

#79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1

#79화.

— 시발.

— 새끼.

— 빌어먹을.

— 썅.

로키의 집결지, 베이스 캠프에서부터 시작해 라그나로크 장벽이 어렴풋이 보이는 현재까지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 4선발이다.

"시발! 쉴 시간도 제대로 안 주고. 이게 뭐야?"

"빌어먹을 연방군 새끼들."

"썅, 나는 화장실에 있다가 끌려 나왔다고."

"핵폭탄을 진짜 떨어뜨리다니. 이건 미쳤어."

라그나로크 서쪽 1km 부근 전술핵 투발 성공.

놀랍게도, 슬그머니 했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라그나로크 남서쪽 2km 부근에 나흘 뒤 떨구겠다던 연방군의 전술핵폭탄은, 베이스 캠프 가건물들의 불이 꺼진 금일 새벽, 곧바로 다른 지점에 투발되었다.

연방군의 수복 작전은 모든 세력이 로키에 집결한 그날 즉시 시작된 것이다.

전술핵이 투발되어 라그나로크의 서쪽 장벽 일부분이 녹고 무너져 내렸다. 로키의 주둔지에 사이렌이 울렸고, 격납고에 있던 수송기들과 캐리어에 불이 켜졌다.

눈에 보이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욕설을 뱉으며 연방군 사령부 씹어댔다. 처음부터 거짓말이나 일삼는 개놈들이라며.

아무튼 편제의 작전통제권과 지휘권은 세력과의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연방군 사령부에서 정해준대로 3사단장 혼자서 틀어쥐고 있었다. 사단장의 통제에 따라 각 임무를 받은 조가 여러개로 나뉘었다.

4개의 세력이 묶여있던 편제는 조 단위로 다시 잘게 나뉘었다.

휘이이이—

와중에 나는 비교적 후발대로 편성받았고,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새로 배정받은 조원들과 함께 연방군 수송기 위에 탑승해 있었다.

그리고.

"형님, 이거 빌어먹을 군바리 새끼들이 구라깐 거잖습니까.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한시도 쉬지 않는 촉새같은 주둥이의 소유자도 나와 같은 수송기에 탑승해 있었다.

작전개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바깥으로 끌려나와 수송기에 태워진 루돌프놈이, 안전벨트를 자기 거시기보다도 더 꽉 붙잡고 있다.

루돌프놈은 산뜻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긴 저희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형님."

"어쩌라고."

"조종사부터 처리한 다음에 수송기 쌔벼가지고 따뜻한 정크타운으로 돌아가시죠. 저 가상현실 VR로 비행기 조종 많이 해봤습니다."

이제는 군 수송기를 상대로 하이재킹을 하자고?

몇 번 벨트를 끊고 던져버릴까 고민하다가 겨우 참은 참인데, 또다시 나의 인내심을 자극하는군.

찰칵.

나는 안전벨트를 풀며 입을 열었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다. 그만하자."

"······네?"

물론 내 안전벨트가 아니라, 놈의 안전벨트였다.

달마도 9년밖에 버티지 못한 면벽수련을 10년이나 버텨낸 나조차도, 참 신기하게 이 놈이 떠드는 꼴은 더 못 들어주겠다. 저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 틀림없었다.

수송기의 측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제 널 놓아주마. 내려서 정크타운으로 가라."

"······어."

"거기서도 오래오래, 씩씩하게 잘 살아가야 한다."

"잠시만요."

찰칵.

그러자 귀신같이 금세 눈치를 되찾고 조용해진 루돌프놈은 안전벨트를 조용히 꽂고는, 갑자기 딴 소리를 했다.

"오늘 날이 좋네요? 하늘도 되게 밝고."

"다 조명탄이잖아 새끼야."

수송기 바깥은 해가 떴을 때보다 더 밝았다.

사방으로 솟구친 조명탄들이 드넓은 지역을 환히 비추고 있고, 수송기 밑 지상으로는 시티넷 뉴스에서나 봤던 연방군 주력전차들이 대열을 맞추어 진군한다.

구구구궁—

만성적인 연료 부족과 탄약물자 부족으로 평소에는 운영할 엄두도 못낸다는 전차들이, 흙과 살덩이로 이루어진 대지를 궤도로 짓밟고 유린한다.

연방군이 이번 수복전을 빵빵하게 지원해준다는 약속은 사실이었다. 시티넷에서 유명했던 우스갯소리가 있다. 연방 최후의 도시 하나가 남기 전까지는, 연방군 전차부대는 절대 기동하지 않을 거란 말.

그 우스갯소리가 드디어 오늘로써 종지부를 찍는군.

세상은 조명탄의 빛으로 밝은데 발밑으로 꾸물대는 땅은 블랙홀처럼 시커맸다.

나는 저 꾸물대는 땅이 정말 땅인 줄 알았다.

헌데, 저 시커먼 것들이 전부 좀비란다.

같은 조에 편성된 누군가가 말했다.

"못해도 만 마리는 넘겠네. 서쪽으로 몰렸을 텐데도 꽤 많아. 아니면 저 구름을 보고 도망오는건가?"

"······."

고개를 들자 무언가가 보였다.

투발된 전술핵이 세상에 남기고 떠난—

거대한 버섯구름이 저 먼 천공에 떠있는 것이다.

마치 신계의 거인이 지상을 굽어보는 듯한 모양새.

세상이 망할 불길한 징조나 세계 종말의 날처럼 보였다. 사실 내가 좀비라도 저런 걸 목격하면 반대쪽으로 튀고 싶긴 하겠군.

"라그나로크 시티. 이름 한 번 잘 지었다."

내가 그렇게 감탄하던 그때.

나란히 비행하던 측편의 수송기들에서 적어도 수백명의 인원이 불쑥 밑으로 뛰어내렸다. 별다른 낙하산도 없이. 블록버스터 영화라도 한 편 찍는 줄 알았다.

안력을 돋궈 자세히 보자, 흉흉한 단창을 들고 있는 일단의 무인들과 드론처럼 생긴 말을 타고 있는 창기사들이었다.

더해서 빛나는 방패와 긴 창을 들고있는, 중무장 병사들도 수송기에서 낙하해 지상방진을 형성했다.

북부 원자력 발전소 탈환과 네임드 궤멸임무를 부여받은 제3 기계화보병사단 편제와 함께, 라그나로크 장벽 북쪽 일대의 시체 섬멸과 진입 지원을 맡은 또다른 편제.

악가창법으로 유명한 산동악가(山東岳家).

발할라 흑색 마창병대.

연방군 8전차여단.

슬슬 고도를 낮추는 수송기들로 관심이 끌리지 않게-

미리 수송기에서 낙하한 산동악가의 무인들과 드론 마창기병들의 창날이, 꾸물대는 좀비들의 몸뚱이를 죽처럼 갈아버리며 모든 주의를 집중시키고 공격을 받아낸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 중장보병처럼.

푸욱! 푸욱!

흑색 마창병대의 지상 밀집대형은 빛나는 방패로 몰려드는 좀비를 밀어내고 꼬챙이같이 긴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들의 앞에 좀비의 사체가 산처럼 쌓여간다.

동시에 전차여단의 포신에서 일시에 뿜어진 레일건 탄자들이 땅과 좀비를 말 그대로 일직선으로 갈아버리며, 라그나로크 시티로 가는 왕의 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전율적인 광경을 보던 나도 무의식적으로 광선의 검병을 매만졌다.

어쩐지, 슬슬 광선검이 등장해야만 할 것만 같은 스케일이라.

* * *

라그나로크 시티 내에 확인된 네임드 개체는 여섯.

추정 9레벨급, 북쪽의 '녹량백량'

추정 9레벨급, 서쪽의 '촌장'

추정 9레벨급, 남쪽의 '바만차'

추정 9레벨급, 위치 미상의 '자굴라'

추정 8레벨급, 에센서.

추정 8레벨급, 오점악.

적어도 9레벨 4마리에 8레벨 2마리.

확인되지 않은 놈들까지 더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연방군과 세력들이 끌고온 9레벨 이상의 강자가 열 명이 넘는다. 9레벨급 좀비마다 비슷한 경지의 초인들이 배수 이상으로 붙을 것이다. 생사결을 펼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냥과 시티 수복이 목적이니까.

게다가 '서쪽 촌장' 의 영역인 서쪽 장벽 근처는 전술핵을 처맞고 시작했다.

그리고 그쪽으로 태산북두, 무당의 진공진인이 포함된 세 개의 무력편제와 연방군 전력이 몰려갔다. 자그마치 십이제의 수좌가 갔으니, 서쪽을 영역으로 삼은 9레벨은 반드시 뒈질 것이다.

"이상입니다."

——그것이 군의 상황 브리핑이었다.

어느덧 시티 장벽이 발 밑으로 보인다.

도시를 방어하는 광역마법진은 힘을 잃은지 오래.

발할라 마창병대와 기갑여단 전차부대, 산동악가 무인들의 강력한 지원 아래. 수십 대의 수송기 편대는 성공적으로 북쪽 장벽을 넘어 시티 외곽에 착륙했다.

녹량백량 사살을 맡은 9레벨급 수장 셋과 루 막슨의 회장은 가장 무력이 강력한 본대이자 핵심 타격 궤멸조. 그들은 이미 숨 돌릴 새도 없이 북부 원자력 발전소로 쏘아졌다.

그리고 핵심 타격조를 제외한 다른 조들은, 8레벨과 7레벨로 이루어져 선발대 10개 조, 후발대 10개 조로 나뉘었다. 원자력 발전소 근방의 시체를 섬멸하고 기타 특이사항을 수색한 뒤 본대와 합류할 것이다.

레반이 소속된 곳은 12조로, 비교적 후발대였다.

루 막슨 1, 당가 1, 마탑 2, 화산 2.

화산 그룹의 8레벨 검수가 조장을 맡고, 나머지 7레벨 다섯이 주축이 된다. 거기에 특수작전항공대 소속 부사관 한 명과 9명으로 구성된 보병분대가 붙었다.

마탑주에게 허락받은 레반의 자매품으로 아힘사와 밴스까지 포함하니, 거의 한 조당 20명에 가까운 전력.

"아, 이 놈은 미끼니까 별 신경쓰지 마십시오."

레반은 척 봐도 쓸모없어 보이는 밴스를 데리고 있기에 약간의 눈총을 받았으나, 일전의 비무로 인해 레반을 알아본 조원들 덕에 별 문제는 없었다. 루돌프는 미끼, 고기방패 역할이라고 친절히 설명하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장벽 근처에 모인 12조의 구성원들은, 몇 분간 서로의 인상착의를 익혔다.

이윽고.

"화산의 천무연이오."

초절정 경지의 짧은 머리 매화검수, 12조 조장 천무연(千珷聯)이 특작항공대 소속 부사관과 상의를 거쳐 입을 열었다.

"설명 듣고, 움직이겠소."

"예, 여기서 더 안쪽으로 7km는 들어가야 원자력 발전소의 부지입니다. 아파트 단지를 끼고 대로변으로 이동하는 루트입니다. 자칫하면 노후화된 건물이 무너지거나 발견하지 못한 언데드가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 벽면에는 붙지 마십시오. 물론 네임드 개체의 영역인만큼, 7레벨 이상의 언데드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겁니다."

북부 원자력 발전소와는 꽤 거리가 있었다.

하기야, 시티 장벽과 가까운 곳에 떡하니. 그리도 중요한 시설을 지어놓았을 리가 없었다.

12조에게 주어진 임무는 대로변 루트로 약 7km를 이동하며, 눈에 띄는 시체들을 섬멸하고 핵심 본대와 합류하는 것.

"그럼, 출발합시다."

* * *

텅! 텅!

전신슈트에 군화와 고글, 소음기 달린 소총까지 풀장착을 한 연방군 보병들은 탄을 아끼지 않으며 분발했다. 총탄이 먹히지 않는 놈은 다른 조원들이 나섰다.

더해서 항공대 부사관이 조작하는 무소음 소형드론들이 공중에서부터 정찰과 감시를 보조하며, 12조는 무탈히 나아가고 있었다.

루 막슨 마법사의 마공학 구체들이 버려진 차량과 온갖 잔해들을 치웠고, 텅텅대는 소음기의 총성이 폐허가 된 도심에 울려펴졌다.

그러다 곧.

"100미터 전방부터 대단지 아파트가 있습니다."

라그나로크 시티 북부.

대로변을 따라 움직이는 12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버려진 아파트 대단지였다.

근방에서 가장 많은 대지를 차지하고 있는 곳.

아파트 앞으로, 수많은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 북부 원자력 발전소 추가건설 절대 반대 — 라그나로크 시티 온마(溫魔)아파트 재건축조합 주민 일동. ]

[ 주민정서 반하는 발전소 추가 건설 결사반대! 라그나로크 시장은 각성하라! 이러다 아파트 주민들 다 죽는다. 추가 건설 결의안 채택이 바로 주민 종말의 날. ]

[ 경 - 제 487회 주민총회 개최 - 축 ]

[ 재건축 추진위원장 해임을 위한 주민 총회 개최 ]

[ 촉수엄금, 유치권 행사중 ]

[ 북부 원자력 발전소 추가 건설 환영합니다 — 라그나로크 시티 온마(溫魔)아파트 리모델링 조합 주민 일동. ]

뼈대만 남은 전신주와 아파트 외벽 사이.

찢어지기 직전의 현수막들이 아직도 붙어있다. 얼마나 강하게 붙였는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아힘사와 함께 조용히 주변을 파악하던 레반이 한숨을 쉬었다.

"여기도 아주 크게 지랄이 났었구만."

"형님, 재건축이 대체 뭔데 저럽니까?"

"관심갖지 마라. 일 난다."

현재는 주인이 없는, 페인트칠이 벗겨진채 버려진 아파트들이 흉물스럽게 늘어져 있다. 과거에는 라그나로크 시티 북부에서 끗발좀 날리던 아파트였다던데. 이제는 시티 자체가 망해버려 과거의 영광은 찾을 수 없었다.

아파트 단지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북부 원자력 발전소 근방은, 네임드 녹량백량의 영역으로 지능이 없는 약한 좀비들 뿐이었고, 12조가 목숨을 걱정해야할 만큼 강력한 개체는 없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 해서 경시할 수는 없었다.

바삭.

발밑으로 바스라지는 유리 조각.

아파트 단지에 이르자, 당가의 한 무인이 가진바 능력을 마음껏 뽐냈다. 레반과의 일전 비무에서 하독까지 성공해냈던 당령이라는 여인이었다.

치르르륵···.

개미만한 당가의 사이버 기계벌레들이 지면과 건물 사이로 파고들어가 모든 구멍을 샅샅이 뒤지고 수색한다.

잠시 그러는 사이, 드론을 조작하던 부사관이 입을 열었다.

"언데드가 된 이들은 인간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인지, 서식지가 도시 안이나 근처로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때문에 시티 수복에 선뜻 나서기가 힘든 것이지요."

인간의 길을 버렸거나 잃은 이들이, 우습게도 인간이 쌓아올린 도시에서 살아간다. 더 이상 손길이 닿지않아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에서 말이다.

얘기를 듣던 레반이, 광선의 검집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면 저 아파트 안쪽에도 더럽게 많겠군."

몇천 세대가 넘는 대단지 아파트. 저곳에 인간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변절자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많아요. 적어도 백 마리 이상."

대답은 당령에게서 나왔다. 벌써 단지의 정찰을 마친 기계 벌레들이 당령의 소매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딘가에 잘못 들어갔다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처음에 풀어놓았던 벌레보다 양이 조금 적어졌다.

레반이 당령을 향해 물었다.

"총으로 죽이지 못할 놈도 있습니까?"

"그런 것 같네요. 강한 개체들이 꽤 있어요. 다 죽이려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은데······."

장벽 밖이라면 몰라도 장벽 안에서는 소음을 최소화해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소란을 일으켜 녹량백량이나 도시 내의 다른 강력한 좀비들을 자극하지 않게.

저 아파트 단지를 무너뜨리거나 박살낼 순 없을 터.

스르릉—

생각을 마친 레반이 경쾌하게 광선을 뽑았다.

조장 천무연과 당령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검은 왜 뽑아요?"

레반은 말없이 아파트 단지로 걸어들어갔다.

"······?"

레반이 연방의 시티 수복전에 참여한 목적.

실전을 통해 틀어진 정기신의 균형을 바로잡는다.

그러니까 금속덩이를 망치로 단조해 검을 만들듯, 이제 레반도 열심히 구를 시간이었다.

광선을 뽑아든 레반은 망설임없이 아파트 단지 중심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거걱.

그리고는 팔뚝을 길게 그어 자신의 피를 내더니, 공중에 뿌리고 마력으로 태웠다. 그러자 신선하고 짙은 혈향이 뭉게뭉게 퍼져나갔다.

이내.

쾅!

닫혀있던 아파트 현관문들이 순식간에 열리며, 인간 시절의 기억을 지우지 못한 주민들이 수십년 만에 부동산 임장을 온 방문자를, 아주 격하게 반겨주었다.

#80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2

#80화.

3기계화보병사단 편제의 주축.

9레벨 초인 셋이 포함된 핵심 궤멸조는 라그나로크 시티 장벽에서 원자력 발전소까지 일직선으로 돌파했다.

그들은 작전시작 고작 한 시간 만에 라그나로크 시티, 북부 원자력 발전소에 당도했다.

발전소 부지 앞에 선 당명이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끼기기긱—

끼기기기기기기긱—

"시끄럽군."

방사선 입자를 파악해 경고하는 계수기가 아까부터 굉장히 시끄럽게 반응하고 있다. 이 주변이 극심한 방사능 오염 지대라는 뜻. 평범한 인간이라면 진즉에 쓰러졌을 텐데도, 편제의 일원들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시작합시다."

이윽고, 미끼가 될 연방군 보병 한 분대가 허리에 얇은 와이어를 감고는 칠흑같이 어두운 원자력 발전소의 출입구로 진입했다.

뚝···뚝···

그 병사들은 모두 몸에 큰 상처가 나있었으며, 따뜻한 피를 바닥에 뚝뚝 흘리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피의 색감은, 신기하게도 밝은 청색이었다.

그렇게 병사들이 진입한 뒤, 일단의 시간이 지났다.

안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소음도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3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이익—

지이익——

뒤이어 연방군의 정예 병사들이 원전 안으로 들어간 병사들의 허리를 감고 있던 와이어줄을 줄다리기하듯 잡아끌자, 허리 밑으로 하반신만 남은 시체들이 줄줄이 딸려왔다.

당명이 직접 그 시체의 혈액을 손가락으로 찍어 무언가를 확인했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니오."

그러자.

눈에 생기가 없는, 다른 병사들이 다시금 투입되었다.

그들도 똑같이 허리에 와이어 줄을 매달고 들어갔다.

하지만 결과는 이전과 비슷했다.

발전소 안에서, 무언가에 잡아먹혀 하반신만 남은 병사의 사체들이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줄줄이 딸려왔다. 덕분에 바닥은 피로 흥건했고 급브레이크를 밟은 타이어의 스키드 마크처럼, 푸른색의 혈액이 바닥에 계속 그어졌다.

적어도 한 소대 이상의 연방군 병사, 그러니까 30명이 넘는 미끼들이 발전소에 진입해 목숨을 잃은 시점이었다.

당명은 남청색 빛을 내는 기계벌레들을 소맷단 속으로 회수하더니, 꺼림칙한 얼굴을 하고는 단정지어 말했다.

"녹량백량은 이 안에 없소."

"확실한 겁니까?"

"병사들의 피에 섞은 독을 보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었을 거요. 장담할 수 있소."

"···그렇군요."

"장군,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분명 연방군이 안쪽에 있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지 않았소."

주름진 눈가를 좁힌 당명이 사단장을 노려봤다.

녹량백량이 북부 원자력 발전소 내부에 없다.

그 말인즉슨-

"······후, 후발대의 조와 통신이 끊겼습니다."

저 뒤쪽에서 들려온 말이었다.

방사선 방호복을 입고있던 한 군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특임항공대 소속의 장교였는데, 그의 얼굴은 발전소 입구 바닥의 피보다도 더 새파래져 있었다.

3사단장이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몇조인가."

"그, 그것이."

장교가, 파래진 입술을 벌벌 떨며 대답했다.

"14, 16, 17, 18, 19, 20조. 총 여섯 개 조와의 통신이 끊겼습니다."

"······."

그 장교의 말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 * *

후발조들과의 통신이 일시에 끊겼다.

그것도 자그마치 6개나 되는 조와의 무선통신이.

"하, 하지만 15조와는 아직 통신이 양호합니다. 그런데······."

그 장교의 말끝이 흐려진다.

당명은 예상했다는 듯,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다그쳤다.

"어서 고해라! 뭐라 하더냐."

그러자 장교가 몸을 벌벌 떨며 말했다.

"······그게. 그게 말입니다. 한가지 얘기만 반복합니다. 한 가지 얘기만 반복하는데. 그러는 중인데······."

"무엇이든, 15조의 조장이 하는 말은 아니겠군."

무표정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 장교의 앞까지 다가온 당명이 시커먼 손을 내밀었다. 장교가 몸을 흠칫 떨며 헤드폰처럼 생긴 무선통신기를 내려놓았다. 방사선과 전파방해에도 통신기는 무언가를 연신 토해내고 있었다.

뿌드득.

당가의 원로, 당명이 헤드폰 한쪽을 부서질 듯 잡더니 귀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앵무새처럼 반복되던 무선통신기의 통신이 당명의 귓전에도 흘러나왔다.

[ ······네놈은 당문의 수치다······당문에 네놈 같은 머저리는 필요 없다······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나를 내쳤나······? 내가 직계보다 뛰어난 오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헛소리······너희도······이 썩어버린 시체보다도 역겨운 당문의 후인들이 내는 비명, 한 번 들어보지 않을래? ]

[ 끄흐으으으으으—— ]

구드드득.

당명의 손에, 무선통신기가 녹아내렸다.

"다른 이들은 모르고 있을 거요."

이마에 깊은 주름이 가득 잡힌 당명이 이제 어쩔 거냐는 표정으로, 이 편제의 사령관인 3사단장을 노려봤다.

겉으로 뿜어내지 않았으나-

끔찍하리만치 무거운 독기가 담겨있는 안광.

그럼에도 3사단장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즉시 시티를 빠져나가 장벽 밖의 산동악가, 흑색 마창병과 합류해 다시 찾아올 겁니다. 항공대대의 드론들이 최대한 흩어진 조를 불러 모아 규합할 겁니다."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채웠으니, 안전하게 퇴각해 세력을 규합한 뒤 돌아오자는 뜻이었다.

"불가."

그러자 뒷짐을 진 당명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당가의 정예들이 현재 각 20개 조에 나뉘어 편성되어 있었다. 한명 한명이 당씨 성을 받은 정예들이다. 헌데 그들을 뒤로하고 몸을 보중하자는 말이 아니던가.

"시작부터 일이 틀어졌으니 후발대를 여기에 두고 퇴각하자는, 그것이 사단장께서 일전에 말씀하신 지휘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도망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당명이 차게 웃으며 3사단장을 흘겼다. 허나 공격적인 당명의 추궁에도 인상을 굳힌 3사단장은 단호하고 냉막하게 말했다.

"지휘관은 접니다. 따라주셔야 합니다."

"여섯개 조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

"너무도 잘 아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직 죽지 않았을 겁니다."

"어찌 이리도 답답할 수가 있나. 본대를 피해 후발대를 노린 것이 아닌가. 이미 일은 벌어졌네. 부정할텐가?"

"······."

툭.

군모를 벗어 내려놓은 3사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일반적인 들짐승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며 머리를 싸맬 시간에,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사태라 생각하고 다음 행동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혼란을 즉각 수습하고 억지로라도 이성적으로 굴어야한다. 세력의 수장들도 알고있을 사실이다.

"원로님, 놈이 노린 것은 이러한 분열이 아니겠습니까. 15조의 생사는 불분명한 것이 맞으나, 다른 후발조들은 통신만 되지 않을 뿐 멀쩡히 임무를 실행하며 생존해있을 수도 있습니다. 불확실한 정보에 지휘권마저 무시하고 작전을 방해하시겠습니까? 작전이 시작된 지 이제 두어 시간입니다."

"하다 마다. 못할 것은 뭐냐? 나는 지금껏 그리 살아왔다."

"······."

저번과 다르게, 이번에는 당명도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메가콥 사천당가를 지배하는 당문 원로원에서도 입지가 있는 거물. 그는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여본 적이 없는 무인이다.

그것도 이번 수복전에는 당가주로부터 전권까지 위임받아 참가했다. 당명의 손에 가문 정예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국. 그것이 당명의 신경을 건드려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원로님, 감정을 추스르고 흥분을 가라앉히셔야 할 때입니다."

"녹량백량, 그놈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나다. 필시 당가의 직계들을 향한 열등감과 결핍이 있을 터. 면식이 있는 이 노구가 직접 나선다면 놈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된다면 그대의 말처럼 가인들을 버리지 않고도 능히 사냥할 수 있을 것이다."

3사단장과 당명의 힘싸움이 길어졌다.

"원로님, 그럴 힘이 있다면 차라리 흩어진 다른 후발조들을 지금이라도 찾아 집결시키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여기는 라그나로크 시티 안입니다. 놈의 세상이란 말입니다."

"군은 핵 투발 시점마저 숨기지 않았더냐! 개방조차 수복전에서 제외하고, 당금의 정보는 죄다 연방군에서 독점하고 있지! 눈 딱 감고 말판에 서주었더니 이제 아주 졸개로 보는구나."

"···군 보안상의 이유로 그리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작전의 세부 계획이란 언제든 변경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것이 군의 방식입니다."

촤르륵.

당명이 거칠게 허릿대를 풀었다.

"허면 군은 계속 하던대로 보안에 신경 쓰도록 해라. 나는 가인들을 보중해야겠다. 그대의 말을 믿고 따랐다가 그 반푼이에게 호되게 당했으니, 이제부터는 당문이 직접 전면에 나서 결자해지할 것이다. 본노도 네임드 사냥은 지겹도록 겪어보았으니."

"······사령관으로서 절대로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월권행위입니다."

3사단장은 차마 하극상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월권행위로 순화해 입을 열었다. 지휘 체계상으로는 연방의 장군이 가장 상급자이고 세력의 수장들은 참모급에 불과하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곧, 격노한 당명이 음성에 강대한 공력을 담아 고함쳤다.

"월권? 이런 오만방자한 놈을 보았나—! 허면 그대의 말대로 가문의 주축들이 죽어가는 걸 도망치며 무력하게 지켜보란 말이더냐—!"

"······."

독인의 노기가 안개처럼 짙게 내리깔렸다.

그간 공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할 말 다 하던 연방의 장군 3사단장마저도, 격노한 독인의 기세 앞에서는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 사단장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심지를 굳힌 당명이 모두의 앞에서 선언하듯 말했다.

"본노는 당가주의 권한을 모두 위임받았음이야. 죽어도 되는 생체기계 따위를 지휘하는 군문의 뜻과 우리 당문의 뜻은 다르다. 가인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은 세상천지에 없다. 또한 본노의 자비는 여기까지이니 감히 토달지 말라."

입을 닥치란 얘기였다.

"······."

지휘권이 단숨에 토막나버렸다.

작전 시작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녹량백량 궤멸작전의 주축이 되어야 할 당가의 수장이 군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작전을 진행할 것임을 시사하자.

화산의 장로 선운자, 루 막슨의 회장, 마탑주등의 수장들이 복잡해진 면면으로 헛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기에, 저 당명의 격노도 아주 이해못할 것은 아니었다. 3사단장의 지휘를 따른다면 후발대의 조로 묶여있는 화산과 루막슨, 마탑의 인원들 역시 장기판의 말처럼 허무하게 죽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죽어도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생체기계들이 아니었다.

고요해진 장내에서, 궤멸조의 인물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 * *

마치 산더미처럼 쌓인 사체.

12조 조장, 천무연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이 단지는 이것으로 끝이군."

"그러게요."

그런 천무연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온마 아파트에서 튀어나온 시체들을 단신으로 쓸어버린, 사체들의 피로 범벅이 된 레반이 어디선가 금창약을 꺼내어 치덕치덕 발랐다.

그러던 그 시점.

— 우, 우릴 구하러 온 겁니까?

온마 아파트 114동 앞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파트의 정문 경비실 안쪽 어딘가에서 들리는 기뻐하는 인간의 목소리.

모두의 귀에 들릴 만큼 또렷한 음성과 함께, 경비실 창문 위로 눈물을 흘리는 두 눈이 보였다.

— 사, 살았다! 살았어!

허나 곧.

틱!

데구르르.

한 연방군 보병이 그 안으로 수류탄을 까 넣었다.

그러자 그것의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온마 아파트 단지의, 마지막 시체였다.

잠시 뒤.

12조는 아파트 117동의 한 주택에 모여 휴식을 취하며 간단한 요기를 했다.

조장 천무연은 가부좌를 틀어 운공을 했고 루 막슨의 마법사는 회로를 식혔다. 정찰 기계들을 모두 회수해 배터리 잔량을 확인하고 재정비한다.

끼끼익—

주택 안임에도, 방사능 입자 계수기는 간헐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허나 여기에 일반인은 없기에 아직 이 정도면 버틸만한 수치다.

꿀꺽.

수통의 물을 마시던 당령이 레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죠? 힘을 뽐내고 싶은가요?

"······."

"여기서만 수백 마리는 죽였겠어요."

레반은 아파트 단지의 중심에서 팔을 베어 혈향을 퍼뜨리고, 검을 뽑아 몰려드는 시체들을 야차처럼 베어냈다.

마치 다른 이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그저 실전에서 빨리 구르며 정기신의 균형을 잡아보려는 레반이었으나, 다른 이들의 눈에는 선하고 이타적인 고수이자, 야차처럼 시체를 베어넘기는 훌륭한 조원으로 보였으리라.

금창약을 바른 레반이 대강 피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뭐, 별 거 아닙—"

그때였다.

급히 금창약 주머니를 내던진 레반이 찰나간 당령의 팔목을 붙잡더니, 뒤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르륵.

주르르르륵.

그들이 휴식을 취하던 아파트의 천장이, 마치 염산에 닿은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줄줄 녹아내리고 있었다.

절절하고 숨이 턱 막히는 독기운과 함께.

그것을 마주한 레반이, 황망하게 입을 열었다.

"······위층에 누가 사는지 아는 사람?"

#81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3

#81화.

— 마나. 무림계에서는 기(氣)라는 명칭으로 부릅니다. 이 마나 입자는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지금 제 앞에 있는 교탁에도 들어있답니다. 아주아주 극미량이겠지만요.

— 회로를 통해 마나의 입자만을 흡수하고 응집시킨 그것을 우리는 마력이라고 합니다. 수준이 높을수록 불순물을 제외한, 더 순수한 마나 입자만을 흡수할 수 있죠. 마력으로 치환된 마나는 그때부터 사용자의 의지에······

"하암."

레나가 입을 벌려 하품했다.

지루하기만 한 아카데미 수업 1교시.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는 평소보다 휑했다.

연방 정부의 라그나로크 수복전에, 몇몇 아카데미 교수들이 뛰어난 생도들을 잔뜩 차출해 자원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인 연방의 시티 수복전! 타이틀부터가 보통이 아니다. 역사에 기록될 전투에 아주 조그맣게나마 자신의 이름을 남긴다는 그 명예가, 평범한 생도들의 경외심을 자극했다.

시립 아카데미는 공적인 교육기관인 만큼, 군이나 기업들처럼 막중한 임무를 맡지는 않겠지만 생도들은 대부분 부러운 눈빛으로 수복전에 동행하는 생도들을 바라봤다.

어린 나이에 그만한 실력을 갖췄다는 뜻이니까.

— 인공지능 시스템을 통해 이 마나 흡수 기능을 증강시킨 뒤, 디지털 신경과의 교류호환 연구가 성공하자 마공학과 마법 칩 시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 하루가 다르게 독창적인 연구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제 마나 회로만 있다면 칩 하나만 장착해도 수준급의 마법을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만큼의 큰 부작용도······.

"지루하다···."

아무튼 그렇기에 지금 아카데미 교수는 자리에 없고, 이 기회에 복습이라도 하라는 듯 몇 번이나 들었던 내용이 화면과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톡. 톡톡.

레나는 개인 입력패드에 뭔가를 끄적였다.

[ 레···반···레···몬···레···레···미···파···. ]

그냥 평범한 낙서였다. 수복전에 참여했다는 레반이 떠올라서 한 낙서.

휴우, 레나는 속으로 작게 심호흡을 했다.

카산드라 교수님의 저택에 들렀다가 금세 마탑으로 돌아간 레반은 연방의 수복전에 참여했다.

한편으로는 대단했다.

어떻게 벌이는 행동마다 전부 기행이라.

반 바이오 본사 탈출부터 차곡차곡 쌓여왔던 해괴한 사건들을, 여전히 레나의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카산드라 교수님이 말씀하신 인격 메모리칩만으로, 사람이 그렇게 바뀌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애초에 레반이 그런 물건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반 바이오 저택에서? 아니면 출퇴근 트램에서?'

말도 안 되는 얘기.

하지만 레나도 레반이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는 것 쯤은 확실히 느끼고 있다.

레반을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괜히 복잡해진 레나는 수업을 대충 한귀로 흘려들으며, 발할라 시티넷에 접속했다.

시티넷에는 희망찬 소식들이 가득했다.

라그나로크의 서쪽 장벽을 전술핵으로 허물고 진군한 수복군, 무당의 진공진인이 강력한 9레벨 네임드 개체를 벌써 추살했다.

수십만 마리가 넘는 라그나로크 시티 근처의 언데드가 잿더미가 되었다. 시티를 넓게 포위하고 사방으로 밀고 들어간 수복군이 1분 단위로 승전보를 알려왔다.

랭킹권의 뉴스는 조회수가 벌써 십억 단위.

대부분의 연방 주민들이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새로운 기사와 소식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덕분에 미디어와 언론사들은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앞다투어 수복전 진행 상황을 중계했고, 발할라 시티넷은 거의 마비되기 직전이었다.

그런 와중에 승전보가 아닌, 이번 수복전에 관련된 의혹을 꼬집는 기사도 왕왕 있었다.

웬 작은 찌라시 언론사들이 밝힌, 연방 정부의 '계획'

사실 라그나로크 수복전 실패는 상정되어 있고, 진짜 목적은 연일 강성해지는 기업들의 힘을 줄이는 것이며, 연방의 수뇌가 정치적인 입지를 단단히 다지려고 한다는 식의 이상한 음모론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진작에 모두 폐기했다는 전술핵을 투발한 것부터가 연방 정부의 건재함을 알리는 그 증거라느니, 그 많은 강자를 전부 언데드로 만들어버리려는 세계 흑막의 계획이라느니······.

아무래도 큼지막한 사건인 만큼, 넷의 음지에 숨어있던 음모론자들이 튀어나와 물어뜯기에 좋은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핵심적인 논지가 살짝 부족한 탓에 온갖 욕을 먹는 것과 더불어, 얼마 가지 못하고 곧 지워졌다.

그 자리를 희망찬 얘기들이 빠른 속도로 도배되며 채워갔다.

그러니 레반도 분명 괜찮을 것이다.

레나는 머리를 털며 레반에 대한 걱정을 지우고는, 카산드라 교수가 수복전으로 떠나기 전 자신에게 선물해주었던 사진을 꺼냈다.

"그으······."

그것은 교수의 저택에서 했던 식사 때, 피가 흥건한 스테이크를 칼로 잘게 다지며 무섭게 웃고있는 레반의 사진이었다.

"······감사하긴 한데, 도대체 왜 이런 사진을 찍으신 거지? 다른 건 없었던 걸까."

레나는 어쩐지 섬찟해지는 기분에 금방 레반의 사진을 집어넣었다.

* * *

주르르륵···.

"이 아파트는 이웃의 민도(民度)가 상당히 별로군. 이러니까 재건축이 잘 안됐지."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흘러내리는 천장.

이건 층간소음의 허용치를 넘었지 않은가.

"다들 비켜서라!"

줄줄 녹아내리는 천장을 본 조장 천무연이 나섰다.

초절정 고수의 검이 피워내는 짙은 검기, 이십사수매화검법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매화향 디퓨저 따위를 쓰던 청궁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고절한 검이 천장을 단숨에 갈라낸다.

촤악.

그러자 역한 냄새와 함께 끈적한 액체가 콸콸 흘러내리더니, 어두운 의복을 입은 인영이 녹아내린 천장 사이로 뛰어내렸다.

떨떠름히 당령의 팔목을 놓아준 레반이 말했다.

"시체가 위층에 살고 있었나? 귀신 들릴 집이네."

위층에 살던 주민의 정체는 놀랍게도 시체였다.

그리고 수복전이라는 큰 행사에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저 고급진 비단 무복은 그 시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똑똑히 말해준다.

"심지어 당가야. 내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

당가의 무인은 시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퍼런 핏줄이 피부위로 박동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째서인지 이지가 없어 보이는 그의 전신에서는 숨막히는 독기가 쉴 새 없이 뿜어지고 있었다.

푸화악!

그를 본 당령이 곧장 피독낭을 꺼내 던졌다. 스멀스멀 퍼지던 고농도의 독기가 잠시 알싸하게 중화되었다. 그러나 피독낭만으로 저 시체가 뿜어내는 독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령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런, 낭패다.'

저 무인은 다른조의 장을 맡았을 당가의 백각주였다.

8레벨을 달성한 초절정의 무인이자 독공의 달인.

아른대는 독기운이 사방을 빠르게 잠식해간다.

당령이 급히 입을 열었다.

"다들—"

"일단, 독기부터 밀어내겠습니다."

"미친!?"

그러나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루 막슨과 마탑의 마법사가 동시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들 딴에는 강력한 독기운을 막아보려 한 것인데, 당가의 당령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멈춰!! 절대 안 돼! 지금 기를 흡수했다간······."

보이는게 저 정도면 독공으로 만들어낸 독기운은 이미 사방에 가득 퍼져있다. 마나든 기운이든 절대 흡수해선 안 된다.

"커헉."

"······."

하지만 그때는 이미 한참 늦어버렸다.

저들은 당령같은 무인이 아닌 마법사였다.

무인들은 단전의 내공을 쓰기에 이런 상황에도 상관이 없으나, 마법사들은 대기의 기운을 흡수해서 쓰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기맥을 타고 흐르는 당가의 독공은 작은 틈도 놓치지 않는다.

결국 두 명의 마법사는 마력을 끌어올리자마자 독공에 중독되어 거품을 물었다. 그들도 뒤늦게 이상을 알아차리고 회로의 가동을 멈추었으나 이미 한 번 빨아들인 이상 소용이 없었다.

답답한 얼굴의 당령이 발을 굴렀다.

"아니 이런 병신놈들! 그것도 몰라?"

그런데, 그때였다.

공중에서부터 살포되어 내부를 잠식해나가던 독공의 독기가, 잠시 얼어붙기라도 한듯 뚝 하고 멈추었다.

"!"

놀란 당령이 고개를 돌리자.

팔에 금창약을 덕지덕지 바른 채로, 마력을 끌어올리고있는 레반이 보였다. 터질 듯이 응집된 마력이 그의 손에서 방사되고 있었다. 부채꼴로 방사된 마력이 자욱하게 퍼지는 독기를 밀어낸다.

실로 경탄스러웠다. 그 짧은 사이 독기를 걸러내고 순수한 기운만 흡수해 마법을 발현해낸 것이다.

'저, 저렇게 간단하게 백각주의 독공을······?'

안색이 돌아온 당령이 입을 잘근거렸다.

굳이 혼자 나서서 수백의 시체를 단신으로 베어버리더니, 이제는 독공의 기운이 장내를 파먹은 상태에서 마법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연무장에 올라서기 꺼려하던 그는 막상 시작된 자신과의 대련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은 검법으로, 자그마치 수십 장을 날려버렸다.

뿐만인가? 일전에 완벽하게 하독된 청화산(淸火酸)과 산공독을 피독주도 없이 괴상한 기예를 통해 육신 밖으로 배출해냈다.

#81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3

#81화.

— 마나. 무림계에서는 기(氣)라는 명칭으로 부릅니다. 이 마나 입자는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지금 제 앞에 있는 교탁에도 들어있답니다. 아주아주 극미량이겠지만요.

— 회로를 통해 마나의 입자만을 흡수하고 응집시킨 그것을 우리는 마력이라고 합니다. 수준이 높을수록 불순물을 제외한, 더 순수한 마나 입자만을 흡수할 수 있죠. 마력으로 치환된 마나는 그때부터 사용자의 의지에······

"하암."

레나가 입을 벌려 하품했다.

지루하기만 한 아카데미 수업 1교시.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는 평소보다 휑했다.

연방 정부의 라그나로크 수복전에, 몇몇 아카데미 교수들이 뛰어난 생도들을 잔뜩 차출해 자원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인 연방의 시티 수복전! 타이틀부터가 보통이 아니다. 역사에 기록될 전투에 아주 조그맣게나마 자신의 이름을 남긴다는 그 명예가, 평범한 생도들의 경외심을 자극했다.

시립 아카데미는 공적인 교육기관인 만큼, 군이나 기업들처럼 막중한 임무를 맡지는 않겠지만 생도들은 대부분 부러운 눈빛으로 수복전에 동행하는 생도들을 바라봤다.

어린 나이에 그만한 실력을 갖췄다는 뜻이니까.

— 인공지능 시스템을 통해 이 마나 흡수 기능을 증강시킨 뒤, 디지털 신경과의 교류호환 연구가 성공하자 마공학과 마법 칩 시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 하루가 다르게 독창적인 연구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제 마나 회로만 있다면 칩 하나만 장착해도 수준급의 마법을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만큼의 큰 부작용도······.

"지루하다···."

아무튼 그렇기에 지금 아카데미 교수는 자리에 없고, 이 기회에 복습이라도 하라는 듯 몇 번이나 들었던 내용이 화면과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톡. 톡톡.

레나는 개인 입력패드에 뭔가를 끄적였다.

[ 레···반···레···몬···레···레···미···파···. ]

그냥 평범한 낙서였다. 수복전에 참여했다는 레반이 떠올라서 한 낙서.

휴우, 레나는 속으로 작게 심호흡을 했다.

카산드라 교수님의 저택에 들렀다가 금세 마탑으로 돌아간 레반은 연방의 수복전에 참여했다.

한편으로는 대단했다.

어떻게 벌이는 행동마다 전부 기행이라.

반 바이오 본사 탈출부터 차곡차곡 쌓여왔던 해괴한 사건들을, 여전히 레나의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카산드라 교수님이 말씀하신 인격 메모리칩만으로, 사람이 그렇게 바뀌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애초에 레반이 그런 물건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반 바이오 저택에서? 아니면 출퇴근 트램에서?'

말도 안 되는 얘기.

하지만 레나도 레반이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는 것 쯤은 확실히 느끼고 있다.

레반을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괜히 복잡해진 레나는 수업을 대충 한귀로 흘려들으며, 발할라 시티넷에 접속했다.

시티넷에는 희망찬 소식들이 가득했다.

라그나로크의 서쪽 장벽을 전술핵으로 허물고 진군한 수복군, 무당의 진공진인이 강력한 9레벨 네임드 개체를 벌써 추살했다.

수십만 마리가 넘는 라그나로크 시티 근처의 언데드가 잿더미가 되었다. 시티를 넓게 포위하고 사방으로 밀고 들어간 수복군이 1분 단위로 승전보를 알려왔다.

랭킹권의 뉴스는 조회수가 벌써 십억 단위.

대부분의 연방 주민들이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새로운 기사와 소식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덕분에 미디어와 언론사들은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앞다투어 수복전 진행 상황을 중계했고, 발할라 시티넷은 거의 마비되기 직전이었다.

그런 와중에 승전보가 아닌, 이번 수복전에 관련된 의혹을 꼬집는 기사도 왕왕 있었다.

웬 작은 찌라시 언론사들이 밝힌, 연방 정부의 '계획'

사실 라그나로크 수복전 실패는 상정되어 있고, 진짜 목적은 연일 강성해지는 기업들의 힘을 줄이는 것이며, 연방의 수뇌가 정치적인 입지를 단단히 다지려고 한다는 식의 이상한 음모론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진작에 모두 폐기했다는 전술핵을 투발한 것부터가 연방 정부의 건재함을 알리는 그 증거라느니, 그 많은 강자를 전부 언데드로 만들어버리려는 세계 흑막의 계획이라느니······.

아무래도 큼지막한 사건인 만큼, 넷의 음지에 숨어있던 음모론자들이 튀어나와 물어뜯기에 좋은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핵심적인 논지가 살짝 부족한 탓에 온갖 욕을 먹는 것과 더불어, 얼마 가지 못하고 곧 지워졌다.

그 자리를 희망찬 얘기들이 빠른 속도로 도배되며 채워갔다.

그러니 레반도 분명 괜찮을 것이다.

레나는 머리를 털며 레반에 대한 걱정을 지우고는, 카산드라 교수가 수복전으로 떠나기 전 자신에게 선물해주었던 사진을 꺼냈다.

"그으······."

그것은 교수의 저택에서 했던 식사 때, 피가 흥건한 스테이크를 칼로 잘게 다지며 무섭게 웃고있는 레반의 사진이었다.

"······감사하긴 한데, 도대체 왜 이런 사진을 찍으신 거지? 다른 건 없었던 걸까."

레나는 어쩐지 섬찟해지는 기분에 금방 레반의 사진을 집어넣었다.

* * *

주르르륵···.

"이 아파트는 이웃의 민도(民度)가 상당히 별로군. 이러니까 재건축이 잘 안됐지."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흘러내리는 천장.

이건 층간소음의 허용치를 넘었지 않은가.

"다들 비켜서라!"

줄줄 녹아내리는 천장을 본 조장 천무연이 나섰다.

초절정 고수의 검이 피워내는 짙은 검기, 이십사수매화검법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매화향 디퓨저 따위를 쓰던 청궁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고절한 검이 천장을 단숨에 갈라낸다.

촤악.

그러자 역한 냄새와 함께 끈적한 액체가 콸콸 흘러내리더니, 어두운 의복을 입은 인영이 녹아내린 천장 사이로 뛰어내렸다.

떨떠름히 당령의 팔목을 놓아준 레반이 말했다.

"시체가 위층에 살고 있었나? 귀신 들릴 집이네."

위층에 살던 주민의 정체는 놀랍게도 시체였다.

그리고 수복전이라는 큰 행사에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저 고급진 비단 무복은 그 시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똑똑히 말해준다.

"심지어 당가야. 내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

당가의 무인은 시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퍼런 핏줄이 피부위로 박동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째서인지 이지가 없어 보이는 그의 전신에서는 숨막히는 독기가 쉴 새 없이 뿜어지고 있었다.

푸화악!

그를 본 당령이 곧장 피독낭을 꺼내 던졌다. 스멀스멀 퍼지던 고농도의 독기가 잠시 알싸하게 중화되었다. 그러나 피독낭만으로 저 시체가 뿜어내는 독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령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런, 낭패다.'

저 무인은 다른조의 장을 맡았을 당가의 백각주였다.

8레벨을 달성한 초절정의 무인이자 독공의 달인.

아른대는 독기운이 사방을 빠르게 잠식해간다.

당령이 급히 입을 열었다.

"다들—"

"일단, 독기부터 밀어내겠습니다."

"미친!?"

그러나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루 막슨과 마탑의 마법사가 동시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들 딴에는 강력한 독기운을 막아보려 한 것인데, 당가의 당령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멈춰!! 절대 안 돼! 지금 기를 흡수했다간······."

보이는게 저 정도면 독공으로 만들어낸 독기운은 이미 사방에 가득 퍼져있다. 마나든 기운이든 절대 흡수해선 안 된다.

"커헉."

"······."

하지만 그때는 이미 한참 늦어버렸다.

저들은 당령같은 무인이 아닌 마법사였다.

무인들은 단전의 내공을 쓰기에 이런 상황에도 상관이 없으나, 마법사들은 대기의 기운을 흡수해서 쓰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기맥을 타고 흐르는 당가의 독공은 작은 틈도 놓치지 않는다.

결국 두 명의 마법사는 마력을 끌어올리자마자 독공에 중독되어 거품을 물었다. 그들도 뒤늦게 이상을 알아차리고 회로의 가동을 멈추었으나 이미 한 번 빨아들인 이상 소용이 없었다.

답답한 얼굴의 당령이 발을 굴렀다.

"아니 이런 병신놈들! 그것도 몰라?"

그런데, 그때였다.

공중에서부터 살포되어 내부를 잠식해나가던 독공의 독기가, 잠시 얼어붙기라도 한듯 뚝 하고 멈추었다.

"!"

놀란 당령이 고개를 돌리자.

팔에 금창약을 덕지덕지 바른 채로, 마력을 끌어올리고있는 레반이 보였다. 터질 듯이 응집된 마력이 그의 손에서 방사되고 있었다. 부채꼴로 방사된 마력이 자욱하게 퍼지는 독기를 밀어낸다.

실로 경탄스러웠다. 그 짧은 사이 독기를 걸러내고 순수한 기운만 흡수해 마법을 발현해낸 것이다.

'저, 저렇게 간단하게 백각주의 독공을······?'

안색이 돌아온 당령이 입을 잘근거렸다.

굳이 혼자 나서서 수백의 시체를 단신으로 베어버리더니, 이제는 독공의 기운이 장내를 파먹은 상태에서 마법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연무장에 올라서기 꺼려하던 그는 막상 시작된 자신과의 대련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은 검법으로, 자그마치 수십 장을 날려버렸다.

뿐만인가? 일전에 완벽하게 하독된 청화산(淸火酸)과 산공독을 피독주도 없이 괴상한 기예를 통해 육신 밖으로 배출해냈다.

최근 당가 내에서 직계인 당절이 사로잡혔던 일로, 여섯 번째 봉우리 마탑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을 저 사내가 지금 전면으로 뒤집어버린 것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타적이고 본질적으로 선하다. 방금도 굳이 자신을 구해주지 않았는가.

그것이, 당령이 오해한 레반이었다.

"빨리 안 데리고 나가? 같이 뒈질거면 그렇게 하고."

"나, 나가야지!"

레반의 일갈에 당령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쓰러진 마법사 둘을 들어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잠시 뒤.

마지막까지 독기를 흩어내던 레반의 뒷덜미를 잡아 무너지는 아파트에서 함께 빠져나온 조장 천무연이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윗배분 앞에서도 꼿꼿한 청풍이 놈이 형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었군. 아까 시체들을 썰어내던 그 무인이 정녕 맞는가?"

구구구궁······.

아파트의 난간을 밟고 밑으로 뛰쳐내린 천무연의 뒤로, 삭아버린 117동이 팬케이크를 쌓은 것처럼 층층이 무너져내렸다.

곧이어, 수백 톤은 될법한 건물의 잔해를 가볍게 걷어낸 시체역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곧, 기수식을 취한 천무연이 당령을 바라봤고.

"용서하게."

당령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뭘 용서해요? 빨리 쳐죽이죠."

* * *

기이이이잉—

아힘사의 초진동 블레이드가 떨어져 당문 시체의 목을 썰어낸다. 매화검수가 피워낸 검기에도 잘 상처 입지 않을 만큼 단단한 목이었다.

쿵.

그가 죽자 음습하게 파도치던 독기가 흩어졌다.

삐질 흐르는 땀을 닦은 당령이 고개를 돌렸다.

"후우."

천무연과 레반, 아힘사의 활약에 힘입어 세력의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조장인 천무연이 강한 것은 당연하지만, 마탑 소속인 레반과 더불어 '아힘사' 의 무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아힘사의 정확한 정체를 모르는 12조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옆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보병분대가 몰살당했고 독기를 기맥으로 들이쉰 마법사들의 상태도 아직 그리 좋지 못했다. 아쉽게도 조원끼리 서로 칭찬이나 나눌 시기가 아니었다.

또한, 현재 조장 천무연을 위시한 12조의 조원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죽인 당문의 무인이 다른 후발대의 조장이라면···.

푸욱!

확인사살과 뒷수습을 마친 천무연이 말했다.

"다른 조가 당한 듯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여기서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조장 천무연의 물음에.

"미안하지만 당장은 힘듭니다. 군용 통수신기가 독기에 녹았습니다. 먹통입니다."

12조에 홀로 남은 연방군 소속.

땀을 뻘뻘 흘리며 드론을 조작하던 항공대의 부사관이 통신기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드론마저 방금전의 습격으로 다 부서져 한 기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끼기긱—

북부 원자력 발전소 근처는 방사선과 방해전파의 영향으로 군전용 통신기가 아니면 오작동할 우려가 크다. 넷을 이용한 통신 역시, 신경회로가 꼬여 뇌가 박살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자제해야한다.

이윽고.

"다른 후발대 조가 당한듯 하고, 통신도 힘들다."

매화검수 천무연이 조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서 잠시 임무를 미뤄두고, 편제의 선발대 열개 조나 본대와 합류해 안전을 도모하려한다. 이견있나?"

당연하게도 이견이 돌아올리 없었다.

적어도 8레벨급의 조장이 시체가 되었다는 말은 주변의 상황이 녹록지 않다. 풀어 말하자면, 감당키 힘든 존재가 근방에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온마아파트 단지에서 조용히 빠져나온 12조의 조원들은 대로변을 빠르게 주파하며 북부 원자력 발전소로 향하려 했으나—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강대한 요기를 느꼈다.

콰앙—!

확연히 느껴지는 살기짙은 요기와 거대한 총성.

후발대의 다른 조가 어떤 존재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 분명했다. 굉장히 급박한 총성과 비명이 근방에서 들려왔다.

가장 먼저, 레반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

허나 조장 천무연은 반대의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정한대로 선발대나 원자력 발전소로 직행했을 본대와 합류해야 했다. 당가의 각주까지 당했을진대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레반의 생각은 천무연과 달랐다.

저 거대한 총성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

'13조 조장 슬레모킨, 마나 미사일인가.'

그녀가 6위계 마법을 사용할 정도면 꽤 몰려있다는 뜻이다. 레반은 품속에 넣어둔 에센스들과 나뭇대를 만져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무연을 설득했다. 사실 거절당하면 혼자서라도 그녀를 도우러 갈 생각이었다.

"마탑의 8레벨 마법사입니다. 조장급 강자 한 명이라도 더 살려서 가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

평소의 천무연이었다면 가차없이 거절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까지 레반을 보아온 그의 판단은 빨랐다.

저 강직한 눈빛, 어차피 멋대로 움직일 사내였다.

어느쪽을 선택하든 망설일 시간이 없음에야-

"알겠다. 잘 따라붙도록."

결국 매화검을 뽑은 천무연이 앞장서 전투중인 곳으로 쏘아졌다. 초절정 경지의 고수가 보이는 쾌속한 경공, 조원들이 그 뒤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오로지 레반만이 천무연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움직이자마자 강대했던 요기가 씻은듯 사라지고, 슬레모킨의 기운이 오히려 천무연과 레반쪽으로 가까워지나 싶더니.

"야!! 빨리 뒤돌아!!"

느닷없이 13조 조장, 슬레모킨이 건물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청록빛 괴물을 탄 채 미친듯 질주하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헌데, 레반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

펌프액션 샷건을 단단히 받치고 있어야 할 슬레모킨의 왼팔이 어깨 밑으로 축 늘어져 있었고, 항상 그녀의 곁을 지키던 청록빛의 괴물도 상태가 이상했다. 이빨이 늘어져 있어야 할 얼굴의 반쪽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스무명 가까이 되어야 할 슬레모킨의 조원도 단 두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모두 송장이 되어 괴물의 어깨 위에 엎어진 채였다.

13조는 조장을 포함해 세 명만이 겨우 살아남았다.

또한 슬레모킨의 두 팔에서는 청록빛의 마력이 빛나고 있었다.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에게서 부여받은 마력까지 끌어 사용한 듯 보였다.

"망할!"

빠르게 질주하던 슬레모킨은 13조의 곁에 이르자 냅다 욕부터 뱉었다. 그러고는 조금 안심한 얼굴로 농담을 던졌다.

"너희 덕분에 살았다. 결혼도 못하고 죽을 뻔했네?"

"살아는 있나."

뒤돌아 슬레모킨과 나란히 달리게 된 레반이 엎어져있는 두 조원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슬레모킨이 표정을 지우고는 말했다.

"응, 본대와 최대한 빨리 합류해야 해. 요기를 일정 수준 이하로 조절하는 걸 보면, 본대는 부담스러워 하는게 틀림없어."

그 뜻모를 소리에.

"잠깐, 지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달리던 조장 천무연이 눈을 굴리며 조심스레 물었고.

철컥- 남은 한 팔로 꽤나 힘겹게 샷건을 장전한 슬레모킨이 답했다.

"녹량백량, 발전소가 아니라 이 근처에 있어. 우리보다 뒤에 있던 조는 전부 손도 못 써보고 당했을 거야. 방금까지도 날 따라오다가 너희들이 나타나니까 잠깐 사라졌어 지금."

"······."

"그리고 녹량백량 말고도, 뭔가 더 있는 것 같아. 본대에 알려야해."

"······!?"

그 말에 천무연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슬레모킨은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마탑의 중요 구성원들에게 허락된 마탑주의 마력. 청록빛의 마력을 사용하며 마탑주에게 긴급하게 지원 요청을 보내는 중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덕분에 조원들도 못 지켰고······."

곧이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인 슬레모킨이 쓰게 웃었다.

"그러니까 너희도 더 빨리 달려. 본대 아닌거 뽀록나면 다 죽는단다 우리."

그렇게 온마 아파트의 근처에서 합류한 12조와 13조의 생존자들은, 편제의 본대가 있을 북부 원자력 발전소로 급히 쏘아졌다.

* * *

한편 그시각.

"파악된 9레벨 개체가 몇 마리라고?"

"총 넷입니다."

"8레벨이 둘?"

"예. 그렇습니다."

"진공진인의 칼에 서쪽에 있는 9레벨 네임드 '촌장' 이 죽었다. 라그나로크 시티에서 파악된 언데드중, 가장 강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개체라며."

"예."

연방군이 준 정보에 따르자면 남쪽에도 9레벨 한 마리, 그리고 8레벨 한 마리가 있어야 했다.

추정 9레벨급, 북쪽의 '녹량백량'

추정 9레벨급, 서쪽의 '촌장'

추정 9레벨급, 남쪽의 '바만차'

추정 9레벨급, 위치 미상의 '자굴라'

추정 8레벨급, 에센서와 오점악.

"서쪽의 촌장은 죽었다 치고, 그럼 나머지는 전부 어디에 있지?"

"······."

라그나로크 남부를 이 잡듯이 뒤졌음에도 9레벨급 개체 바만차의 요기를 발견하지 못한, 남부 수복군 편제의 수장.

"아무리 요기를 숨겼다고 해도 이건 남부에 없다고 보는게 맞아. 어찌어찌 장벽 밖으로 도망쳤대도 바깥에서 포위 섬멸을 맡은 편제가 진작 발견했어야 해. 적어도 아직 시티 안쪽에 있다는 소리인데···."

십이제, 로라 마르티네즈가 입을 열었다.

"흠, 어디서 네임드 새끼들이 연합이라도 했나?"

#82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4

#82화.

고밀도로 붙어있는 철거 직전의 건물들.

저 시커먼 창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12, 13조의 생존자들은 버려진 시체들의 도시, 북부를 가로로 관통하는 도로에 쌓인 잔해물을 밟고 빠르게 이동했다.

와직!

청록빛 괴물의 발치에 밟힌 쥐가 무참히 짓눌린다.

"징그러워, 웬 쥐가 이렇게 많아."

"네임드 둘 이상이 힘을 합쳤다고 치면, 본대의 눈과 귀를 속이고 후발대를 쓸어버리는 것도 어렵진 않겠군."

"막내야, 우리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말자?"

철컥. 콰광—!

몽골 기병처럼, 달리는 괴물 위에서 뒤로 몸을 틀어 샷건을 펑펑 쏘는 슬레모킨. 6층 높이의 건물 위에서 혀를 길게 뽑아 습격하려던 시체가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지워진다.

옆구리에 항공대 부사관을 낀 채, 슬레모킨과 나란히 달리던 레반이 물었다.

"통신 됩니까?"

"아, 아직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것 같습니다?"

"······."

둘의 대화에 장전하던 슬레모킨이 입을 열었다.

"고장 안 났어도 안 될 거야. 우리 조 통신기도 그러더라."

— 끼기긱. 치지직.

"저봐, 계수기가 지랄해대잖아. 방사능 때문에."

"그렇군."

서걱.

레반의 앞으로 진득한 핏물이 물보라처럼 솟구친다.

전투에 돌입한지 얼마나 됐다고, 꽤나 익숙해진 혈향.

촥-

유리창이 다 깨진 편의점 안에서 포탄처럼 튀어나와 달려든 시체를 단칼에 토막낸 레반이 검날에 묻은 피를 털었다. 이제는 말하면서도 5레벨급 시체를 일격에 쳐죽이는 지경이다.

주륵···.

시체의 혈액에서 꽤 비싸보이는 액체가 흘러나와도, 레반을 포함한 12, 13조의 생존자들은 '어, 에센스다' 같은 소리를 할 새조차도 없이 앞만 보고 질주했다. 여기서 한가로이 유리병을 꺼내 에센스를 주워담을 여유는 없었다.

레반의 단전과 손아귀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허나 피륙을 완벽히 베어내려면 검병을 꽉 붙잡아 육신과 일체시켜야 한다. 설사 손아귀가 다 찢어지더라도. 그것이 기본이다.

허나.

'아직 부족하군.'

레반의 손아귀와 검은 한 몸처럼 찰싹 붙어있건만, 수백의 시체를 베어낸 현재에도 정기신의 균형이 합일하지 못함이 끝끝내 아쉬웠다. 움직임의 흐름이 어딘가 불편하게 맞는듯 하면서도 들어맞지 않는.

설명하기 힘든 애매한 감각이 계속 그의 신경을 갉아먹는다.

쐐애액!

그 상념을 애써 지우려, 콧김을 한 번에 몰아쉰 레반이 다시 지면을 박찼다.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지며 주변의 광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조장 천무연은 그런 레반을 보며 속으로 연신 경탄했다.

'저자를 흠모하는 청풍이가 같은 조가 되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겠군. 무공에 욕심이 많은 놈인데.'

초절정 경지쯤 되는 무인은 느낄 수 있다. 저 마탑 소속의 사내가 쓰는 것은 여지껏 보지 못했던 형식의 검, 화산의 무공과도 비견될 법한 고절한 상승 무학을 익혔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젊다. 많이 잡아도 약관의 나이.

혹, 과거 멸문했던 구파일방의 무공인가?

하지만 경지에 이른 마법은 또 무엇이고···.

천무연은 어떤 관점으로 저 사내를 살펴야 하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만약 이곳이 전장만 아니었다면 그도 청풍처럼 검을 나누어보자 청했을 것이다.

'청풍이놈 말고도 잠룡이 또 있었군. 같은 무림계였다면 좋았을 것을······.'

천무연이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레반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투 빈도가 생각보다도 많은 건 괜찮았는데······설마 생환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될 줄이야.'

슬레모킨의 조원들이 죽어가며 알아낸 전장 정보. 일단 북부 원자력 발전소 탈환은 둘째치고, 이 편제의 녹량백량 궤멸 작전은 그 시작부터 틀어졌다.

[ 조금 강한 언데드 무리였어. 그래서 연방군 보병들과 조원들이 같이 진입했는데, 무리의 요기가 확 부풀어 오르더니 그대로 물처럼 녹아내리더라. 7레벨 조원도 하나 녹았고, 나머지는 전부 감염. ]

[ 자세히는 못 봤는데, 사람처럼 생겼고 엄청 하얀 얼굴에 깨끗한 비단옷을 입고 있었어. 사천당가의 옛날 무복. 그리고 그놈 말고도 다른 요기도 느꼈는데 얘가 크게 다치는 바람에······. ]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 반은 벌써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13조 뒤의 후발대 7개 조가 전부 한줌 핏물이 되어 사라졌거나, 감염되어 시체로 변했을 테니까.

거기에 덧붙여서, 이 근방에는 9레벨의 네임드 녹량백량뿐만이 아니고 무언가 더 있다. 시체 주제에 전술핵이 투발되자마자 전쟁의 대비라도 시작한 것인가.

그러한 악재 속에서 당령이 꽤 희망찬 말을 했다.

"원로님은 절대 가솔을 버리실 분이 아니야."

"음."

당가의 원로를 떠올린 레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당가는 본래가 그런 이들의 가문이다.

레반 때문에 일이 틀어져 결과적으로 상등신짓을 한 당절마저 어떻게든 무사히 빼가지 않았던가. 당가는 더럽고 치사하며 잔인한데다 참 꺼려지는 놈들이 맞으나, 적어도 식솔을 쉽게 내버리는 이들이 아닌 것은 레반의 경험상 명확하다.

"희망을 품어보자는 얘기군."

이제 북부 원자력 발전소까지 약 4km남았다.

모래주머니마냥 축 늘어진 부상자들과 간헐적으로 덤벼드는 시체 때문에 이동이 조금 느려지긴 했으나, 이 속도라면 늦어도 몇 분내로 도착할 것이다.

꾸욱-

입으로 붕대를 문 슬레모킨이 덜렁이는 팔을 꽉 묶어 고정하며 말했다.

"추측이니까 흘려들어. 북부에 있는 언데드 중에, 같은 언데드를 조종하거나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놈이 있는 것 같아."

"뭐, 뒈졌다 살아나기 전에는 흑마법사 였나보군. 아니면 인형사···."

인형사, 뷔에탕이 떠오른 레반이 즉시 머리를 털었다. 슬레모킨의 말이 이어졌다.

"감염된 조원과도 싸워봤는데, 능력은 그대로 써도 이지가 없어. 7레벨이 넘어서 언데드가 되었더라도 기억은 남아있을 텐데. 상대가 9레벨이니까 감염되면 변이가 빠른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거기까지 얘기한 슬레모킨이, 대뜸 입을 빼죽 내밀었다.

"근데 우리 막내는 걱정도 안 돼? 왜 그러는 거냐, 괜찮냐고 한 번쯤은 물어봐줄 줄 알았는데."

"솔직히 별로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나?"

"별로 안 괜찮아."

"상어 대가리가 반절이나 날아갔잖아."

많이 상한 청록빛 괴물의 얼굴을 뜻함이었다.

슬레모킨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실망했다.

"···으스러진 내 팔 걱정이 아니구나."

"팔은 왜 그렇게 됐지?"

"됐어. 그나저나 저 쓰레기는 저렇게 둬도 돼?"

힘이 죽 빠진 슬레모킨이 뒤쳐진 밴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평균 7레벨의 일행. 외공만 익힌 밴스가 쫓아올 수 있을리 없다. 일반인보다야 조금 더 잘 뛰었으나 그뿐. 그들간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혀, 형님!"

설상가상으로 지금, 들소만한 크기의 시체가 밴스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들고 있었는데, 머리에 뼈가 뿔처럼 솟아있는 시체였다.

그런데도 레반은 태연자약했다.

"어 그래 돌프야. 무슨 일이니."

"······."

개새끼야, 무슨 일인지 다 보이잖아.

초연해진 얼굴의 밴스가 망연자실하게 말했다.

"······저 그냥, 먼저 가보겠다고요."

터벅.

멀어지는 레반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던 밴스는 마침내 생존의 뜀박질을 포기했다. 어두운 폐허 속에 혼자 버려진 고독한 사나이 밴스, 그는 오늘 여기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기로 방금 막 결정했다.

'그래, 저 괴물새끼랑 평생 같이 가느니 여기서 깔끔하게 죽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시체로 변하면 섹스는 못하게 되는 건가? 아 어차피 지금도 못 하는구나. 증말 좆같다.'

하지만 그 달콤한 생각도 잠깐.

쾅!

뿔을 앞세워 투우소처럼 달려들던 짐승형의 시체가 오히려 밀려나며 저 혼자 자빠져 뒹굴었다. 화강암보다 단단해 보이던 대가리의 뿔은 밴스의 얼굴과 부딪쳐 퍼석 깨져있었다.

— 그르아악!

"뭐여?"

황당해하던 밴스가 어버버하는 사이.

촤륵!

"억!"

아힘사의 손가락에서 발사된 소형 포획틀이 밴스의 목에 감겼다.

촤아악!

이윽고 교수대 위에서 목에 밧줄이 걸린 죄수처럼. 컥컥대며 찰나간 수십 미터를 날아온 밴스가 화끈한 목덜미를 매만졌다. 격한 줄다리기에도 목은 아직 잘 달려 있었다. 이미 밴스의 육신은 이깟 충격에 꺾이기엔 너무나도 튼튼해진 것이다.

곧이어 밴스의 귀로, 따뜻한 속삭임이 들렸다.

"너, 좋은 외공 익힌거야."

"······."

"평생 가자."

* * *

"······없네."

후발대는 곧, 원자력 발전소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전소 입구의 푸른 혈액 자국과, 지면에 찍힌 무수한 발자국만이 한 무리가 여기에 왔다 갔음을 증명했다.

12조장 천무연과 13조장 슬레모킨, 그리고 레반 세 명이 동시에 말했다.

"몇 갈래로 흩어졌다."

"이 앞에서 흩어졌네."

"벌레다."

"······?"

셋 중, 레반만이 다른 것에 신경을 기울였다.

천무연과 슬레모킨이 레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에 정신을 집중하나 싶던 레반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남청색 기계벌레."

그들이 레반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의 말대로 남청색 기계벌레가 원자력 발전소의 입구 옆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을 그제서야 발견한 당령이 크게 반색하며 말했다.

"원로님의 독충! 길잡이로 남겨두고 가셨구나!"

하지만 당령의 말에, 레반이 곧바로 부정했다.

"지금은 당가의 것이 아니다."

"무슨? 저건 명 원로님의 독충이 맞—"

"저 안쪽으로 기어들어 가잖아."

스스슷.

남청색의 작은 기계벌레가 발전소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이전에는 당명 원로의 것일지 몰라도 지금은 아닌듯 보였다.

"······."

발전소의 입구 바닥에 사람이 줄줄 끌린 자국이 있었는데, 그 흔적대로 나있는 푸른 혈액에서는 신묘한 독성이 느껴졌다. 당가의 당령도 눈치채지 못하는 기색이었으나, 레반은 전생에 저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저 푸른 피는 사람의 피에 단혼사(斷魂沙)와, 추뢰만리향을 섞은 혼합독이다. 아마도 당가의 원로가 여기서 녹량백량을 추적하려 한 듯 했다. 그놈, 과거 말썽좀 부리던 당가의 무인이었군.

'7, 8레벨쯤.'

벌레가 기어 들어간 발전소 안쪽에서는 오금이 저릿한 요기가 느껴졌다. 저 안에 있는 존재는 꽤 강했다. 그러나 녹량백량은 슬레모킨쪽의 후발대를 작살내기 바빴을 것이니, 저 안에 있는 건 다른 놈이다.

그래서 본대도 놈을 무시하고 걸음을 돌린듯했다.

그러니까, 발전소로 도망친 후발대와 길이 갈렸다.

"본대는 이미 선발대와 합류해서 퇴각했을 수도 있겠어. 편제 사령관도 대강 상황은 파악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모두가 레반의 입을 바라봤다.

"저 빌어먹을 벌레 새끼가, 지금 우리 봤잖아. 본대 아닌 거 걸렸다."

"뭐?"

— 끼기기기기기기기기긱···.

그리고 레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이 가지고 있던 방사능 계수기들이 당장이라도 터질듯이 지랄을 해댔다.

원자력 발전소와 지척이라 그런 점도 있겠으나-

— 끼기기기기기기긱···치지지지직···.끼기기기기긱···.

"!"

정신을 잠식하며 몰려오는 불안감과 이질감을 느낀 레반이 돌연, 광선에 공력을 전력으로 주입해 쏟아부었다.

그에 휘황찬란한 오색빛의 검기가 일어났고, 두 무릎을 구부린 레반이 곧장 거칠게 대지를 갈랐다.

쾌의 이치가 담겨있는 검격이 이질적인 한 공간을 찔러갔다. 그것은 몇 번이나 전장에서 여생을 보낸 자의 경험 혹은 요령. 방사능 계수기가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과 함께 레반의 검 끝이 어떠한 피륙을 꿰뚫었다.

푸욱!

"······."

그러자 당령을 찢어버리려던 손길과 함께, 광선이 우뚝 멈추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거세게 일렁였다.

[ 호오! ]

그리고 검끝에 의복과 어깻죽지를 관통당한, 얼굴이 유령처럼 흰 존재가 나타나 탄성을 질렀다. 그는 검기에 꿰뚫렸음에도 흔들림없이 레반의 눈을 직시했다. 수십 갈래로 갈라진 긴 혓바닥에서 산이 뚝뚝 흘렸다.

흰 얼굴, 당가 무복, 9레벨 네임드 녹량백량.

"호오 같은 소리하네. 씨발놈이."

푸지지직.

레반은 빛나는 광선을 더 깊이. 더욱 깊숙이 박아넣어 여유를 부리는 그 존재를 양단하려 했다. 검에서 일어난 오색광채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베어지지 않는다.

발전소 앞은 도리어 더욱 고요해졌다.

급작스러운 녹량백량의 등장에, 정신의 기저에 깔려있던 생물의 생존본능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7레벨의 조원들마저 뱀 앞의 쥐처럼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못했고, 슬레모킨과 천무연만이 눈동자를 빙글돌려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 시점.

"시발놈."

방금 레반이 뱉은 욕설을 학습해 되새김질한 아힘사만이 아무런 망설임없이 뛰어들었다. 아힘사의 다리가 철컥대며 벗겨지더니, 가지런한 총열을 드러내고는 폭연을 단번에 내뿜었다. 슬레모킨과 천무연이 그 뒤를 이었다.

[ 귀찮은 것들. ]

아힘사를 위시한 8레벨들이 살기등등하게 달려들자, 모습을 드러낸 녹량백량은 귀찮다는 듯 검병을 놓지않는 레반과 함께 훌쩍 뒤로 물러섰고—

"훌륭했다."

콰악.

거미처럼 숨죽여 기다리던 사냥꾼이 나타났다.

[ ······!? ]

녹량백량의 모가지가, 구겨질듯 붙잡혔다.

강대한 압력에 전신의 혈액이 머리로 솟구친다. 녹량백량의 시선에 와락 일그러진 악귀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던 얼굴. 조금은 늙었으나 그럼에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 당명······. ]

"본노가, 두 번 속아 넘어갈 줄 알았더냐?"

레반의 광선에 찔려있던, 녹량백량의 목을 조르듯 우악스럽게 붙잡은 독인(毒人)이 실소했다. 이리로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한심한지고. 시체가 되어서도 네놈은 여전히 한심하구나."

눈이 벌게져 단신으로 녹량백량을 추격하겠다던 당가의 원로, 당명. 그는 3사단장의 지휘를 무시하고는 단독으로 행동했다.

독으로 심장을 정지시켜 호흡을 끊었고 기척을 죽였다. 본대는 사라진 당명이 즉시 후발대 쪽으로 향한줄 알고 있었으나, 당명은 이곳에 당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발전소 근방을 단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천리지청술(千里地廳術).

심장조차 스스로 멈추고 고요히 잠복한 채, 오로지 청각에만 세밀하게 공력을 흘렸다. 곧 어금니에 걸어둔 영약, 고독단(苦毒丹)을 집어삼킨 당명이 짓씹듯 말했다.

"네놈이 이래서 당가의 직계가 못 되는 것이다."

스스스스—

단숨에 핏물로 만들어 주겠다는 듯 당명이 눌러두었던 기운을 끌어올리자, 전신을 버둥대는 녹량백량의 목덜미에 시퍼런 반점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 끅! ]

사천당가의 직계중에서도 몇 명 사용하지 못하는, 추뢰만리향. 십수년이 지나도 향이 남아있는 독이며 독성이 극히 강하다.

독인(毒人) 그 자체. 기운 자체가 극독이다.

당명의 육신이 독이고, 독은 당명이다.

'···이러다 나한테까지 옮겨오겠군.'

어깻죽지에 꽂아둔 광선 덕에 녹량백량과 함께 딸려왔던 레반이 신속히 판단했다. 다리와 발에 공력을 가득 실어 놈의 가슴팍을 때려밟는다.

콰앙! 콰앙!

진각(震脚)의 응용.

촤악—

당명의 손에 묶인 녹량백량을 진각으로 마구 때려밟은 레반은, 마침내 그 반탄력으로 검을 뽑아 회수했다. 마력으로 몸을 띄운 레반이 천천히 지상으로 낙하했다.

이제 당명과 녹량백량만이 허공에 남아있었다.

[ 개, 개같은 늙은이가······! ]

덜덜-

격한 분노와 열기로 얼룩지는 흰 면면.

허나 녹량백량은 그저 퍼지는 당명의 독공을 중화하기 위해 몸을 부르르 떨며 기혈을 통째로 틀어막아야 했다. 강맹한 경력이 몰아쳤다. 당명의 우악스러운 독수를 벗어나기는 요원했다.

"네놈은 문에서 도망치고도, 지금도 도망치려 하는구나. 허나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된다."

쐐애애액!

갈라진 녹량백량의 혓바닥이 쉬륵대며 당명의 급소를 노렸으나, 그것들을 비수로 잘라버린 당명의 허리가 마치 활처럼 휘었다.

이윽고 궁신탄영의 수로 높은 공중으로 솟구친 당명과 녹량백량의 얽혀있던 신형이, 다시 허공을 박차고 혜성처럼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과과광—!!!

목을 단단히 붙잡은 채로 내리꽂혀 피대신 산액을 토한 녹량백량과 당명이 어지러이 얽혀들었다. 구렁이처럼 얽힌 그들의 산과 독물이 범벅되어, 주변의 잔해들을 순식간에 녹이고 지워버렸다.

"와라!"

그때였다.

꾸물대는 녹량백량을 제압함과 동시에 당명이 팔을 하늘로 들어올리자, 비어있던 허공에서 남청색의 서광이 비추었다.

레반이 그 위를 바라보자.

우우우웅—

수천, 수만 마리의 기계벌레들이 각각의 무형기를 머금고 하늘에 빗물처럼 떠있었다. 기계 벌레들의 주둥이에는 나비처럼 나풀대는 암기들이 단단히 맞물려있었다.

사천당가의 절기, 만천화우(滿天花雨).

당명이 결자해지를 위해 준비한 수였다.

그러나.

[ ······멍청한 늙은이. 멍청한 늙은이. ]

만천화우의 서광을 앞에 두고도, 돌연 배를 붙잡고 웃기 시작한 녹량백량의 웃음소리가 장내를 천천히 메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12조와 13조가 지니고 있던 방사능 계수기가 귀신들린 것처럼 미친 듯이 끽끽거리다 펑- 소리과 함께 터져나갔다.

[ 잡았구나! 흐하하! ]

"······."

또한, 바닥에 팽개쳐져 실실 웃던 녹량백량과 그를 내려보고 있던 당명의 뒤로,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났고.

쿨럭-

자리에 멈춰선 당명이 입에서 독혈을 한움큼 쏟았다.

#83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5

#83화.

화경(化境)을 이룩한 9레벨의 무인.

사실 절정에만 올라도 대단히 높은 경지다. 지닌 잠재력과 모든 재능을 한계까지 끌어내 무공을 익혀도, 절정에 오르지 못하는 무인들이 세상에는 수두룩 빽빽하다.

허나 화경.

초월(超越)로의 첫 걸음.

그것은 인류라는 종에 정해진 한계, 지극히 단단한 알껍질을 깨부수고 뛰쳐나와 또다른 세계에 발을 내딛은 초인들.

세상의 이치를 달리 깨닫고 일신을 재정립하며, 더 이상 법칙 따위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지경.

같은 공간에 있다 해도 한 차원 다른 존재다.

"······."

어지간한 조장급 강자도 선 자리에서 양단되어 죽어나갔을 기습을, 9레벨의 당명은 내상을 입는 정도로 방어해냈으니.

푸확-

독혈이 울컥대며 당명의 입가를 적신다.

그의 펄럭이는 무복 옆구리를 뚫고나온 예기.

곡선으로 날카롭게 휘어진 낫이, 당명의 육체를 토양삼아 자라났다. 그 덕분에 방금 전까지 당명의 우악스런 손속과 극성의 독공에 꼼짝도 못하던 녹량백량이 비웃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 잡았구나! 흐하하! ]

만족스러운 괴물의 웃음.

"놈!"

당명이 찰나간 몸을 뒤집으며 그 낫을 휘어잡으려 했으나, 거대한 낫은 끝내 연기처럼 스르륵 빠져나갔다.

곧, 당명의 후방에서 요기를 흘리던 괴물이 그 끔찍한 외양을 드러냈다.

침침한 안광을 가진 3m의 거체.

썩어 흘러내리는 길쭉한 얼굴에 살가죽들은 뼈에 겨우 붙어있었으며, 지렁이같은 혈관이 튀어나온 다리 네 개가 지면을 딛고 있고, 뼈다귀같은 두 팔로는 대형 낫을 들고 있었다.

흡사, 거대한 낫을 든 뼈다귀 유령마.

그 흉한 괴물이 순식간에 나타나 당명을 공격하기 전까지, 아무도 저 괴물을 발견하지도 저지하지도 못했다.

이질적인 형체가 가리키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또 하나의 9레벨.

"남부에 있어야 할 네임드가 왜 여기에······."

라그나로크 시티의 9레벨급 네임드 개체. 남부를 영역으로 삼은 '바만차' 의 생김새와 확실히 일치했다.

슬레모킨의 가설이 현실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네임드, 가진바 힘이 너무도 강하거나 끔찍하여 이름까지 붙여진 9레벨급 두 개체가 붙어다니는 것을 실제로 목격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도 복권1등 용지를 들고 길을 걷다가 벼락을 다섯 번 연속으로 맞을 확률보다도 낮을 것이다.

"······망할."

미증유의 강함을 지닌 네임드가 두 개체.

토벌해야할 적이 순식간에 두 마리로 늘었다.

그에 비해 이쪽의 전력은 본대의 주축인 당명을 제외하면 조장급 둘과 몇 명의 조원들 뿐.

실로 보잘것 없다.

당명이라면 저들을 상대로 버틸지 몰라도 여기있는 다른 이들은 순식간에 쓸려나갈 것이다. 9레벨의 무인조차 손쓸 새 없이 당해버린 저 괴물의 움직임을 목도했지 않은가.

꽈악-

"······이건, 큰일이다."

검집을 강하게 부여잡은 천무연도 침음을 뱉었다.

짧게 깎은 그의 머리칼처럼, 전신의 털이 바짝 선다.

그래도 아예 얼이 빠져버린 조원들 보다는 두 조장의 상황이 약간은 나았으나, 그 둘도 이내 입이 붙어 말을 잃었다.

저 규격 외 괴물들의 기세에 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맞으리라. 녹량백량의 존재만 해도 좌중을 압도하는 위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곱절이 되었다.

어찌 해볼 수 없는 전력차이.

이제는 허탈한 무력감이 장내에 몰아치려했다.

헌데 그 순간.

작은 웃음이 공간을 잠식하려는 무력감을 잠시 흩어냈다.

"허허."

당명의 주름진 얼굴이 싱겁게 웃고 있었다. 그는 옆구리가 뚫린 채 독혈을 한 움큼씩이나 토해내고도 아직 꽤 정정했다.

"반푼이가 달아나지 않는 이유가 있었구나."

[ 뭐? ]

녹량백량이 그 얘기에 과하게 발칵 반응하자, 당명은 곧장 말을 이었다.

"문에서 한심하게 도망치고, 인간의 탈까지 벗기 위해 장벽 밖으로 달아난 놈. 이번에는 용케도 달아나지 않나 싶었는데, 저따위 역한 괴물과 패를 이룬 것이냐? 시체가 되었어도 본성은 어디 가지 않는구나. 본노가 몹시도 두려운 게지. 대체 어찌하여 하고 많은 가문중에 당가의 피를 받아 태어난 게냐? 모자란 반푼이놈."

[ ······. ]

터벅. 터벅. 터벅.

당가의 도망자,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수치.

폐부를 찌르는 당명의 입담에 녹량백량이 뭐에 홀린듯 요기를 줄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스윽-

그러나 당명의 뒤를 잡으며 나타난 바만차는, 이빨을 덜덜 떠는 녹량백량의 목에 거대한 낫을 갖다대며 그를 막아섰다. 마치 사소한 도발에 요기를 밖으로 내보이지 말라는 듯이.

쫘아아악-

[ 비켜라. ]

그러자 녹량백량의 흰 면면이 세로로 찢어지며 이빨을 드러냈고, 바만차의 침침한 안광에서는 서슬퍼런 광망이 일어났다.

의견이 충돌한 듯, 느닷없는 혼란이 벌어졌다.

당장이라도 터질듯한 귀기가 절절하게 끓는다.

그렇게, 그들이 요력을 끌어올리던 그때였다.

"다들 뭘 그렇게 멍청하게 보고만 서있나."

"···?"

저 뒤쪽에서, 얼굴이 푸르딩딩해진 레반이 그 혼란한 기회를 틈타 입을 열었다.

귀가 쫑긋해진 슬레모킨의 고개가 돌아갔다.

지금은 한낱 7레벨의 조원이 끼어들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벅벅-

얼굴을 쓸어올리며 마른 세수를 한 레반은, 그딴 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던 말을 이었다.

"어우. 저 영감님 돌아가시는 거 그냥 내버려 두면, 그 다음은 누구겠어."

"······."

"우리야. 생각을 좀 하자."

인류의 종에 정해진 한계. 단단한 알껍질.

이 자리에는 그 알껍질을 부순 이가 당명을 제외하고도 한명 더 있었다. 진작부터 알껍질 밖으로 대가리를 내밀어 '다른 세상' 을 엿보고 있는 사내가.

다만 그 알껍질 밖으로 '대가리' 만 내밀어 놓은지라 상단전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알껍질 속에 갇혀있는 특이한 존재.

레반.

그는 재미없는 책을 읽듯 담담하게 입을 놀렸다.

"저 영감님 목이 왜 아직도 붙어있을까. 뭐···저 새끼들이 합체변신 기다려주면서 여유 부리는 것 같아보여? 여기서 요기 더 뿜으면 다른 수복군한테 걸릴까봐 쫄아서 저 지랄들을 하는 거잖아."

쿨럭.

레반은 녹량백량의 존재를 눈치채고 공격까지 성공시켰으나, 가까이 다가가는 바람인지 독에 중독당했다. 그래도 감염까지는 되지 않아 다행이다···레반은 그리 낙천적으로 생각하며 각혈한 당명을 향해 물었다.

"원로님, 혹시 효과좋은 피독단 가지고 계십니까? 제가 중독당해가지고, 몸이 영 말을 안듣네요."

높낮이가 없고 평온하기만 한 어조.

그것은 조장과 조원들의 살갗까지 와닿은 허탈함과 무력감을 당명의 웃음처럼 슬그머니 밀어냈다.

이윽고.

"······."

드디어 당명의 안광이 레반에게 꽂혀들었다.

당명의 옆구리는 확실히 낫에 뚫렸으나, 아직 허공을 장악한 그의 기계벌레들은 격발을 기다리는 샷건처럼 고요한 위압감을 뽐내고 있었다.

필시 내상을 입어 독혈을 토해냈음에도···.

극한의 집중력으로 당가의 비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무섭도록 막강한 집념이었다.

"그래."

호신기도 아니고, 자그마치 호신강기(護身罡氣)를 독공과 함께 뿜어내고 있던 당명이 흡족하게 입을 열었다.

"그나마 똘똘한 놈이 하나 끼어있구나."

녹량백량을 찢어발긴 뒤 그대로 잡아먹어버리지 않을까 싶은, 살수나 인간 백정이 보일법한 정광이 당명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린다.

훅.

곧, 당명의 입에서 포도알갱이만한 크기의 피독단이 독침처럼 쏘아졌다.

"고맙습니다."

그 알갱이 피독단은 정확히 레반의 손에 안착했다. 붉은 보석과도 같이 빛나는 그것은 만가지 독을 즉시 해독할 수 있다는, 사천당가의 피독환단이었다.

꿀꺽.

생긴것이 워낙 꺼림칙해 망설일만도 하건만, 레반은 받은 피독환단을 즉시 복용했다. 그러자 푸르딩딩했던 그의 안색이 금세 돌아오며 제 상태를 되찾았다.

역시 해독과 의술하면 또 당가 아니겠는가.

해독뿐만 아니라 약간의 영험한 기운이 들어있어 기운을 북돋아준다. 독인지경에 오른 무인에게 피독단 따위는 필요 없겠으나 경험 많은 원로급이라면 이런 전장에 반드시 들고나왔으리라 생각했다.

피독환단을 복용하고 상태가 급격히 나아진 레반이 다시 물었다.

"원로님, 저희가 뭘 도와드리면 됩니까."

"본노의 묏자리가 이리 너저분해서야 되겠느냐."

쐐액!

돌연, 거력을 지닌 편(鞭)이 공간을 찢으며 떨어졌다.

보통의 무인들이 애용하는 검 대신, 당가의 편을 이용해 편강(鞭罡)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흉한 채찍으로 변한 허릿대를 틀어쥔 당명은 그제서야 물음에 답했다.

"네가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본노가 녹아내린 자리에 칼을 꽂아라. 수습은 후에 문에서 해갈 것이다."

스아아아악—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살짝 닿기만 해도 살가죽이 녹아버릴듯한 극독의 기운이 당명의 주위로 장막처럼 휘몰아친다.

묏자리.

당명은 마땅히 죽음을 각오했다는 뜻.

품속을 뒤적이던 레반은 덤덤하게 되물었다.

"유언은 그것으로 충분하시겠습니까?"

"충분하고 말고."

"받으십시오."

"?"

슈악!

레반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극독의 장막을 뚫고 들어간 하나의 물건.

레반이 그간 애지중지 아끼던 9레벨, 우르드의 에센스였다.

"좋은 에센스입니다."

"······허!"

그 물건을 받아 확인한 당명이 허허 웃고는, 레반이 피독단을 삼키는 것보다 빠르게 삼켜버렸다.

그러자, 당명의 전신에서 스멀스멀 뿜어져 사방을 집어삼키는 독연이 비공정의 증기보다 더욱 격하게 뿜어져나왔다.

현재.

당명의 시선은 오직 녹량백량을 향해 있었다.

이윽고, 해가 지기 전 마지막 빛을 태우듯.

고오오오오—

인간의 본질이자 혼. 진원.

죽기를 각오한 당명이 본신의 선천지기를 뽑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 라그나로크 시티를 무덤으로 삼기로하고 본신의 선천지기까지 뽑아 태워버린 당명은, 굳어있는 녹량백량의 목줄기를 두 눈으로 직시했다.

화경의 무인이 삶을 버리고 정순한 기를 육신 밖으로 뽑아내니, 그 양이 어마어마하여 십이제의 수좌 진공진인이 이루었다던 공령지체(空靈之體)와도 다름이 없었다.

사방으로 토해진 거대한 공력이 파도처럼 일며 하늘까지 솟구쳤다.

절대적인 기세가 당명의 육신에서 흘러나오더니, 공력을 담은 그의 음성이 천공까지 웅웅 울렸다.

— 녹아. 결자해지다.

[ 느, 늙은이가 끝까지 나를······! ]

만천화우를 준비하는 기계벌레들이 아직도 허공에 뜬 채 기운을 빨아먹는 것을 본 녹량백량이 치를 떨며,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흰 얼굴은 더욱 허여멀건하게 변해갔다.

콰과과곽!

그러나 대응했을 때는 늦었다. 당명의 몸은 이미 공력의 바다위로 넘실넘실 떠오르고 있었다. 허공을 장악하고 있던 기계벌레들이 저절로 움직이며 당명의 신형을 부드러이 휘감았다.

[ 개같은 당명이놈······죽여버리겠어. ]

당명의 기운에 대항해 비슷하게 살기짙은 독기를 피워올리는 녹량백량. 당명이 생환을 포기한 이상 그들이 요기를 숨기려던 생각도, 이제는 불가했다.

녹량백량이 요기를 맞수로 끄집어냄과 동시에.

콰아아아앙—!!!

사천당가의 절기.

만천화우(滿天花雨)를 이루는 칼날들이 당명의 살의를 머금고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쐐액! 쐐애액!

수천개의 암기들 사이에 무형기를 머금은 추혼비접(追魂飛蝶)과 독질려(毒疾藜)가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다. 심장을 꿰뚫고 사지를 잘라낼 암기들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진다.

게다가.

당가의 직계에게도 잘 내주지 않는, 해독이 불가능한 귀왕령(鬼王令)의 붉은 가루들이 녹량백량과 당명을 순식간에 뒤덮으며 일대에 강맹히 흩뿌려졌다.

그 탓에 원자력 발전소 앞, 극독의 늪지대가 생겨났고

[ ! ]

낫을 든 바만차마저도 그 지역에서 급히 물러나며 쉬이 접근하지 못했다. 그곳은 온전히 독인지경을 이룬 자들만의 영역이었다.

한편.

탓!

거침없이 선천지기를 뽑아쓰는 당명의 만천화우가 터져나옴을 확인한 레반은 광선을 뽑아들고 질주했다.

그 반대편으로 도주하는 것이 아닌, 둘의 전투를 비집고 들어갈 타이밍을 놓친 네임드, 9레벨의 바만차를 향해.

'미친, 저거 뭔 생각이야?'

'무슨 생각으로···.'

슬레모킨과 천무연. 조장 둘이 동시에 경악을 머금었다.

7레벨 조원급인 레반이 이런 전장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도 이 상황보다는 월등히 낫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전투가 펼쳐질 것인데. 도주해서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탓!

하지만 그들은 생각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레반을 따라 얼떨결에 움직였다. 설산 위의 빙하처럼 굳어있던 몸이 잠시나마 자유를 되찾았다.

'!'

고작해야 7레벨이 당당히 칼을 뽑아 격전지 속으로 뛰어들자, 무의식까지 잠식해오던 네임드의 압박감이 쓸려 내려간 것이다. 특히나 슬레모킨은, 이미 샷건의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마쳤다.

콰과광!

슬레모킨이 굳어있던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으로, 규격 외의 괴물들을 앞에두고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건가?

아니, 적어도 레반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입가에 빛나는 유리병을 물고 있었으니까.

와작!

유리병이 깨지며 절반을 남겨두었던 8레벨 에센스가 레반의 입으로 흘러들어간다. 오색광채를 뿜는 검기가 더욱 강렬히 타오른다.

자신을 향해 살기를 풍기는 초월자들과 몇 번이나 생사결을 벌였던 사내. 이 자리의 어느 누구보다 불합리한 상황에서 싸워왔던 사내.

[ ······. ]

요기를 줄기줄기 흘리며 당명과 녹량백량의 싸움에 난입할 기회를 엿보던 바만차의 흉광이 결국 레반에게 닿았다.

바만차는 바닥에 못을 박은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안광으로 레반을 마주했다. 한낱 벌레를 그리 경계하지 않는, 레반에게는 어딘가 익숙한 시선이었다.

화산의 노괴인가 혹은 제국의 별인가.

여튼 레반에게는 매우 기꺼운 일이었다.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한낱 벌레를 짓누르려는 저 움직임에는, 어떠한 의념도 담겨있지 않았으니.

쐐애애애액!

거대한 낫이 레반을 가차없이 가르려는 찰나, 바만차가 자세를 비틀었다. 그 옆으로 슬레모킨의 마나 미사일과 천무연의 분분한 검기가 바만차를 스쳐 지나갔다.

칠흑같은 시체의 안광 밑에서.

지극히 찰나의 순간.

"······."

바만차를 직면해 오연히 선 레반이 3m의 거체를 올려다보았다.

철컥-

그리고 광선의 검병을 비틀었다.

오형검. 변형 초식.

절강흑도 출신의 무인이 평생의 심마를 녹여 의기로 갈고 닦았으며 언젠가 그의 못난 제자가 사사한 검. 십대고수였던 광인의 성명절기(成名絶技).

홀몸의 광인이 필생을 갈고닦아 자신과 동류였던 이에게 사사한 검. 독문검법에 자신의 의념을 담아 풀어낸 검.

오형검법. 절강류(浙江流).

검광이 비추고, 찰나간의 시간이 흘렀다.

장내의 모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마나 미사일이 탄생시킨 자욱한 폭연을 뚫고, 빛살처럼 내뻗은 레반의 검이 오색빛의 궤적을 그린 뒤였다.

그리고 궤적을 그려낸 광선은, 검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에센스로 육신의 한계를 잠시간 뛰어넘어, 검기성강을 피워올린 레반의 검이, 기어코 바만차의 살가죽을 꿰뚫은 것이다.

푸욱!

[ ······. ]

그렇게.

바만차를 오연히 올려다보던 레반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검으로 복부를 꿰뚫었으나, 동시에 거대한 바만차의 낫에 가슴팍이 뚫려버린 채로 하늘 높이 들어올려진 레반이 나지막이 말을 뱉었다.

전신의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리며.

"하, 이 새끼. 진짜 못생겼네."

[ ······! ]

화르르륵—

레반의 전신을 타고 흐르는 마나의 흐름. 체내의 운하로 운반된 마력들이 일거에 들고 일어난다. 의복이 마력에 타오르며, 깜지처럼 새카맣게 새겨둔 문신이 드러났다. 연방의 수복전를 준비하며 레반이 직접 새겨넣은 수식. 제국의 세 별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직접 배워온 꼼수.

바만차가 움직이기도 전에.

레반의 입이 피분수를 뿜으며 열렸다.

"터져라."

* * *

화산의 장로.

선운자가 무언가를 느끼고는, 긴 탄식을 내뱉었다.

"······허어, 어찌 이런."

"큰일이군요."

루 막슨 회장과 선운자의 안색이 푹 꺼졌다.

연방군의 핵투발은 더 이상 없다. 그럼에도 라그나로크의 북부 전체가 진동할 정도로 거대한 파장이 시시각각 몰려온다.

저 멀리서 절규와도 같은, 막대한 요기와 구름처럼 일어난 독기운이 연신 파장에 섞여 북부를 진동시킨다.

"역시, 라그나로크의 네임드 개체들이 전부 북부로 모여들었군요. 아마도 저쪽에는 바만차가······."

적어도 둘 이상의 네임드와 당가의 수장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중 뻗어오는 요기의 수준을 모를 이가 없었다. 모두 토벌전에서 강력한 네임드 개체와의 전투를 경험해본 이들이니.

남부의 '바만차' 는 십이제의 로라 마르티네즈가 이끄는 남부 수복군이 배정받았을 정도로 강한 개체. 아무리 당명이라고 해도, 녹량백량과 바만차 두 개체를 한꺼번에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좋지 않군······."

그렇게 뇌까린 선운자가 인상을 구겼다.

지금 그들의 앞에도 한 마리의 네임드가 있었기에.

라그나로크 시티 전체를 제 영역으로 삼은 추정 9레벨의 개체 자굴라. 시궁쥐의 모습을 한 수만의 언데드들이 땅에 깔려있었는데, 이미 3사단은 병력 대부분을 잃었다.

루 막슨의 회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즉각적인 퇴각 명령이 꽤 조급하다 생각했는데······상황을 보아하니 죽은 장군은 무언가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더해서.

"헌데 대체······저 괴이가 정녕 9레벨이 맞는가? 연방에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듯 싶군."

'추정' 9레벨 네임드, 자굴라.

콰직! 콰직!

— 으아아악!!

거대한 쥐의 이빨에 뜯어먹히는 연방군 3사단장을 보며, 모골이 송연해진 수장들이 침음을 내뱉었다.

빌딩의 꼭대기에서 전장의 현황을 내려다본 선운자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84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6

#84화.

연방 사령부는 북부 발전소 탈환과 녹량백량 궤멸에 9레벨 셋과 8레벨 끝자락 마법사 한 명. 그리고 제3 기계화보병사단을 배정했다.

하지만 라그나로크 시티의 네임드 개체들이 연합해 편제의 후발대를 끊어버렸다. 허리가 끊어지자 작전은 당연하단 듯 틀어졌고 이미 많은 이들이 죽었다.

3사단장과의 의견이 갈린 뒤, 홀로 사라졌던 당가의 원로는 원자력 발전소 근방에서 생의 마지막 결전(決戰)에 돌입했다.

와중에 가장 큰 전력을 지닌 본대와 선발대는, 절대적인 요기를 지닌 자굴라와 맞닥뜨리는 바람에 꼼짝없이 도심에 묶여있으며.

와작!

······편제 사령관인 연방군 3사단장은 방금 막 죽었다.

위치 미상으로 알려진 네임드 '자굴라' 는 본대의 수장들이 겪어본 어떠한 시체보다도 강했다.

선운자의 말대로 자굴라는 9레벨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의 끔찍한 요기를 뿜어내고 있다.

"10레벨, 대륙급을 붙여도 그리 부족하지 않다."

당가의 원로를 지원하러 가는 것은 차치하고, 목표했던 대로 탈환과 궤멸은커녕 그들도 당장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감염된 시체들을 제 몸처럼 다루는 강력한 네임드.

현재 선운자와 루 막슨의 회장이 전력을 다해 자굴라의 이동과 공격을 억제하고 있으나, 저 자굴라가 마음을 먹는다면 그들을 뿌리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후발대의 대부분이 감염되었군요."

저 밑.

콰작-

루 막슨의 말과 함께 한 마법사의 사지가 찢어진다.

마법사이되 이제는 마법사가 아니게 되어버린 존재. 통신이 끊어졌던 후발대 14조부터 20조의 인원은 대부분 이지를 잃은 언데드로 다시 태어나 본대의 행사를 막아서고 있었다.

"······."

아마도 자굴라 고유의 능력일 것이다.

자굴라에게 통제당하는 조장급 강자가 무려 넷. 7레벨의 후발대 조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선발대와 본대의 전력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나간다.

곧.

"마탑주가 직접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일이 조금이나마 더 수월했을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구나."

전황을 파악한 선운자가 말문을 열었다.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는 지금 여기에 없다.

"그래도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

하지만 피곤한 얼굴의 마법사와 더불어 조장급인 마탑의 마법사가, 거의 9레벨에 근접한 신위를 내보이며 시체들을 격퇴하고 있다. 선발대와 본대가 자굴라를 상대할 수 있는 큰 이유였다.

스아아아—

저들의 육신을 갑옷처럼 감싸고 있는 진한 청록빛.

두 마탑의 조장급은 '청록빛의 마력' 이 섞인 고위계 광역 마법들을 시체들의 머리위로 연신 쏟아낸다.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가 마탑의 강력한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마력을 아낌없이 나눠준 것이다. 그러니 본대와 선발대의 전력도 만만치는 않다.

"허나, 저것이 탑주가 잡았던 우르드 놈보다 강할 터."

곧이어 선운자의 검과 육신에서 한 떨기 매화와도 같은 자빛 광채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화산의 자하신공(紫霞神功)이 전장을 밝힌다.

망망대해 위, 자색의 등대.

전장을 화려한 자색으로 물들이는 자하신공.

빌딩의 꼭대기에서 가볍게 발을 구른 선운자가 웅혼한 위엄을 줄줄 풍기며 떨어져 내렸고.

"그래도 내 어찌, 잘 버텨보겠네."

뒤이어 자색의 기운을 뿜어내는 잔상이, 수만의 시체들이 아우성치는 전장을 뒤덮으며 유린해갔다.

* * *

라그나로크 남부.

연방군의 보병들과 난다긴다하는 세력의 무인, 마법사들이 언데드를 아이스크림처럼 쓸어버리고 있건만.

한 명만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집중을 유지했다.

장장 십키로미터를 넘어 드넓게 퍼뜨린 마력이 라그나로크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잠시 뒤.

······라그나로크 남부 수복군 수장, 로라 마르티네즈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와 비슷한 시각, 통신을 맡은 항공대의 한 장교도 목소리를 높였다.

— 찾았습니다! 통신 불가능 지역!

"시티 북부 쪽."

— 엇. 그걸 어떻게—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장교의 눈이 개구리처럼 커졌다. 그 반응에 로라 마르티네즈의 눈살이 찌푸려지자, 장교는 이내 실수했음을 깨닫고는 급히 말했다.

— 워, 원자력 발전소 탈환과 9레벨급 네임드 개체 녹량백량 궤멸을 맡은 편제와 통신이 현재 불가합니다. 시티 전체적으로도 이상하게 노이즈가 많이 껴있기는 해도······.

"됐어."

장교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끊어버린 인물.

십이제, 로라 마르티네즈의 회로가 활짝 개방된다.

그러자 대기를 이루는 자연의 마나가 회로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회로가 블랙홀이라도 되는 양, 마나 입자를 빨아먹는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꺄하하!"

마치 공간이 왜곡되어 보일 정도로 거대한 마력의 대류가 그녀를 중심으로 몰아쳤다.

이윽고.

"진공, 그 도사보다 내가 무조건 빨리 간다!"

쐐애애액!

대기를 찢으며 용오름처럼 솟아오르는 인간포탄.

남부의 언데드를 궤멸하는 편제에서 홀로 솟구친 로라 마르티네즈가 공간을 접으며 쾌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콰직!

레반의 검은 바만차의 살가죽을 찔렀으며, 전신에 빼곡하게 채워놓았던 마법 수식은 바만차의 지척에 작용하며 팔다리 관절을 기이하게 꺾어놓았다.

[ ······. ]

반경 10미터를 단숨에 파먹은 마력의 폭발.

레반이 전신에 까맣게 저장해둔 수식은, 그가 빨아들인 마력을 응축하고 또 응축했다. 그리고 응축된 마력은 8레벨 에센스의 정순한 기운을 도화선삼아 폭발했다. 일전에 근방 수십미터를 불살라버렸던 루벤카의 홍염처럼.

하지만, 마나 입자를 화염으로 변환한 것이 아니라—

근방의 마나를 임의로 소멸시켜버리는 수식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에 깃들어있는 기(氣),

그 기운 자체가 레반에게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다만 감히 마나를 소멸시킨 대가는 참혹했다. 레반은 그 대가로, 마지막에 제작했던 네 번째 마나 회로를 잃었다. 그래도 최후의 상황에서 터져나갈 것을 상정한 수식이었으니 큰 후회는 없었다.

푸욱!

자폭같은 공격을 끝낸 레반이 쉬지않고 움직였다.

레반은 걸레짝이 된 몸으로 바만차의 복부에 박힌 광선을 회수하고서는, 이대로 쓰러지기 아깝다는 듯 보법을 밟았다.

탓!

일회용으로 쓰이기에 절대적으로 과분한 8레벨의 에센스가 그것을 가능케했다.

그는 이미 반쯤은 죽은 몸으로, 8레벨 무인중에서도 경지의 극에 이른 이들에게만 허락된다는 검강 줄기를 뽑아내 충격에 허우적대는 바만차를 찔러갔다.

오형검법 절강류. 광인이 갈고닦아 난전에서도 제 존재감을 발하는, 그 낭창한 검류는 혼이 나간 레반의 무의식을 따라 흘렀다.

그렇게 레반은, 광선에 주입된 빛이 바랠 때까지 한참을 더 휘둘렀고.

털썩.

그런 레반이 쓰러져 무의식마저 놓아버린 지금.

[ 그아아아— ]

벌레에게 심히 물려 격노한 바만차가 폭주했다.

······동화 같은 용사의 성공담을 바랄 수 없는 전장이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의기를 불태워 괴물의 팔다리를 검강줄기로 잘라내려던 용사는 결국 후폭풍을 더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불현듯, 바만차의 형태가 흐릿해지나 싶더니.

서걱—

"······망할."

슬레모킨 근처에 있던 조원의 목이 떨어진다.

갑자기 나타나 당명 원로의 옆구리를 파낼 때처럼, 요기에 몸이 굳어있던 조원들은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목숨을 잃었다.

서걱— 서걱—

레반의 손에 다리 네 개중 하나를 잃고 한쪽의 팔뚝을 잃었음에도, 거대한 유령마의 낫은 익은 벼 대신 인간의 목숨을 수확하고 있었다.

"피해······좀 피하라고!"

부질없는 슬레모킨의 외침.

감히 눈으로 좇을 수도 없는 낫의 파동이 조원들의 육체를 혼백과 함께 갈라냈다.

발전소 앞으로 빨간 유혈이 낭자한다.

"크윽!"

이제는 7레벨 조원 중에서도 경지가 높던 12조의 당령과 아힘사만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바만차의 경이로운 위력에 겨우 대항하고 있었다.

쾅!

샷건을 쏜 슬레모킨이 한발 물러났다. 천무연의 매화검법이 장전간의 빈틈을 메꾸고, 그 사이 청록빛의 괴물은 비틀대며 빠르게 낫의 범위를 벗어난다.

'막내는 어떻게 저런 놈을 상대로······.'

압도적인 위용을 보이는 바만차.

슬레모킨과 천무연은 사방으로 피의 강이 흐르는 중에도, 죽은 조원들이 감염되지 않고 바로 죽어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그리고 그따위 안도감을 느낀 자신을 다시금 채찍질하며, 부지런히 기운을 끌어올려 바만차를 공격했다.

콰과과과광—

이 괴물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녹량백량을 찢어발기고 있는 당명 원로도 필시 죽는다.

죽기를 각오하고 생명력을 끌어다쓴 당명 원로가 설사 십이제에 필적하는 신위를 뽐낸다고 하여도, 바만차가 합류하면 패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슬레모킨은 청록빛의 마력을 연신 피워올렸다. 그러나 아직도 마땅한 답장은 돌아오지 않는다.

'망할. 망할!'

그녀가 처음으로 일레힌 마탑주를 원망하는 날이다.

일레힌 포이체카, 여섯 번째 봉우리 마탑의 주인. 그 막강한 우르드 토벌전에서 활약했던 마법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

슬레모킨의 눈이 휙휙 돌아가며 주변을 살폈다.

일단, 쓰레기처럼 형편없이 구겨진 남자가 발전소의 입구 쪽에 던져져 있었다. 분노한 바만차가 낫을 휘둘러 레반의 가슴팍을 찢어버리고 저리 내던진 것이다.

잠시 선전하나 싶던 레반은 시간이 흐르자 짐짝처럼 저렇게 던져졌다.

···7레벨과 9레벨.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차이.

푸슉!

쩍쩍 갈라진 레반의 가슴팍에서 피가 울컥인다. 어떠한 상처도 금세 회복해버리는 그의 재생력마저도 이번엔 갈피를 잡지 못하는지, 레반의 육체는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혀, 형님! 아니 씨발 일어나요 좀!"

짜악!

그저 미끼 용도로 데리고 왔다는 못난 남자.

밴스가 울며불며 기절한 레반의 뺨을 강하게 후려친다. 머리가 홱 하니 돌아갈 정도로 마구 후려치는데도, 레반은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었다.

덜컥-

마치 사후경직이 찾아온 사체처럼 간헐적으로 경기를 일으킬 뿐.

거기에다.

저 강대한 바만차 하나로는 모자랐는지.

"!"

원자력 발전소 입구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졋다.

알 헤임달에서 보았던 '남쪽의 어머니' 를 연상케 하는 8레벨급 개체의 기운이 느껴졌다. 놈은 전투가 길어지자 발전소 안쪽에서 철퍽이며 기어나오려 했다.

아마 저 안에서 녹량백량으로 위장하고 있던, 연방군에서 파악했다는 8레벨의 네임드중 한 놈일 것이다.

절망감.

악재들이 기다렸다는 듯 슬레모킨을 덮쳐온다.

서걱-

초절정의 매화검수, 천무연의 어깻죽지가 잘려나간 것도 하필 그때였다.

힘겹게 바만차의 낫 공격을 방어하던 천무연의 오른팔이 끝내 버티지 못한 것이다.

쿵!

매화를 수놓은 의복이 하릴없이 땅을 구르다가, 바만차의 징그러운 다리 밑에 짓밟혀 쩍쩍 뭉개졌다.

힘겹게 매달려있던 매화꽃이 결국 떨어졌다.

실은, 아힘사의 시기적절한 지원이 없었다면 진즉에 떨어졌을 팔이었다.

"······."

검을 쓰는 무인의 팔이 잘렸다.

후에 회복한다 하여도 이 전장에서는 끝이다.

천무연도 그 사실을 느꼈는지, 수치와 자괴감으로 얼굴을 물들였다.

슬레모킨은 쓰러져있는 레반과 암향표를 밟으며 바만차의 낫을 피하는 천무연을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멀리 돌렸다.

붉은 가루가 뒤덮은 독의 늪지대.

고오오오—

당명 원로는 아직도 전투를 끝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 바만차를 상대할 전력으로 남은 이는 한쪽 팔이 바스러진 슬레모킨 자신과······내내 담담한 태도로 전황을 읽고 행동하는 저 '아힘사' 뿐.

지원은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바만차와 녹량백량의 요기만큼 강대한 기운이 멀리서부터 일어나 피부를 찌르고 있다. 본대와 선발대도 막강한 언데드와 전투중일 것이다.

"······망할. 진짜 망할이네."

죽일 수 있을까. 저 9레벨의 바만차를···?

레반의 일격이후 바만차의 경계심이 심해졌다.

바만차는 이제 그들의 접근에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간다면 요기가 실린 낫을 휘두를 뿐.

아무도 예상치 못한 레반의 대활약으로 '어쩌면 해볼만 하겠다' 라는 그녀의 생각이 바만차의 안광처럼 흑백으로 물들어갔다.

감히 9레벨을 앞에 두고, 오만한 생각이었다.

일전에 무형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으스러진 슬레모킨의 팔. 정상치도 못한 상태로 그녀는 지금껏 싸워왔다. 그러나 이제는 종막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 막내도 저 정도 해줬는데······"

슬레모킨의 고개가 마지막으로 돌아갔다.

라그나로크의 전력을 담당하는 원자력 발전소를 향해.

승기를 잡는다 해도, 어차피 죽을 당명 원로.

팔이 잘린 채 경공으로 낫을 피하는 매화검수.

이미 일찍이 죽어 고혼이 되어버린 조원들.

그리고······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레반.

슬레모킨이 생각하는 일의 가능성은 희박했다.

철컥!

하지만 그녀는 탄창을 뒤적여 가장 안쪽에 있던 원통형의 탄을 거칠게 꺼냈다. 이족 난쟁이 마공학의 정수가 담긴 특제 탄환. 그녀는 커다란 샷건의 탄을 손바닥으로 쥐었다.

그러고는 고함을 질러 박차를 가했다.

"가자!"

그렇게 슬레모킨은 마공학 특제탄을 쥔 채로, 발전소의 입구쪽를 향해 질주했다. 동시에 팔이 여섯 개나 달린 8레벨의 언데드가 발전소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전력으로 내달리는 청록빛의 괴물 뒤로, 칠흑같은 낫을 든 유령마가 천무연에서 슬레모킨으로 표적을 바꿔 쫓아온다. 화끈하게 등판을 달구는 바만차의 요기에 슬레모킨이 청록빛 괴물을 재촉했다.

"······더 빨리. 더 빨리!"

뾰족했던 슬레모킨의 귀가, 축 늘어졌다.

7레벨의 레반이 처절하게 자폭해가며 길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아쉽게 실패했어' 라는 답을 돌려줄 수는 없다.

마탑의 막내가 희망을 보여주었으니, 중진인 슬레모킨도 무언가를 해야했다. 이를테면 북부 원자력 발전소를 폭발시켜서라도······바만차와 저 8레벨 언데드를 막아설 생각이었다.

— 안 됩니다!

뒤에서 팔이 잘린 천무연과 당령이 뭐라 소리를 질렀다.

안되긴 개뿔.

질주하는 슬레모킨의 머릿속에서 온갖 상념이 제멋대로 설켰다. 빨리 결혼하라며 평생을 귀찮게 굴던 아버지 생각이 이제서야 절실한 것이 정말 우스웠다.

"진짜······."

주륵.

서른에서 마흔쯤 되는 꼬마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두가 죽고 발전소 탈환과 언데드 궤멸은 실패할지라도, 라그나로크 시티는 반드시 수복에 성공할 것이다. 아버지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간다면······당신은 결단코 알 헤임달을 벗어나 한달음에 이곳까지 오실 테니까.

이제, 8레벨의 언데드가 틀어막고 있는 발전소의 입구가 코앞으로 보였다.

입안으로 텁텁하고 찝찔한 금속맛이 느껴졌다. 슬레모킨은 특제탄을 꽉 쥐고 마력을 쏟아부을 준비를 마쳤다.

꾸욱.

여기서 조금만 마력을 더 붓는다면 특제탄은 터진다. 6위계 마법 그 이상의 충격이 근방에 몰아칠 것이다. 애초에 펌프액션 샷건은 마력 증폭용이 아니라, 마공학 탄환의 위력을 정제하는 용도.

샷건이라는 매개체도 없이 곧바로 마력을 쏟아붓는다면, 온 사방으로 터져나가겠지.

"이제 가. 내가 미안해."

쐐액!

슬레모킨의 물기 가득한 목소리에 청록빛 괴물이 총탄처럼 쏘아지며 팔이 여섯 개 달린 언데드와 맞붙었다. 상어같은 이빨이 놈의 살점을 뜯어먹으며 신경을 분산시켰고.

슬레모킨은 이미 과하게 운용되어 타들어갈 것만 같은 마나회로를 억지로 짜냈다. 샷건의 마공학탄을 쥔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우드득.

"······북부 편제의 작전은 완전한 실패—"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웅···.

갑자기 팔에서 환하게 빛나는 청록빛의 마력.

"!?"

슬레모킨의 전신에 힘이 약간 들어갔다. 마탑주의 청록빛 마력이 드디어, 모두 포기한 지금에 와서야 답신을 해온 것이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는 자신의 청록빛 마력을 원격으로 다른 이에게 부여할 수 있다.

마탑주의 마력과 회로가 허락하는 한도 내까지.

그를 마탑주의 지위에 앉힌 고유 마법이었다.

"······그런데."

힘을 부여받은 구성원들이 더 많은 마력을 가져갈수록 마탑주에게 부담이 되는 일이긴 하다만······.

"······나한테는 이게 다인가?"

터무니없이 적은 마력 양이었다.

아무튼 슬레모킨은 발전소를 무너뜨리려던 계획을 다시 변경해야했다. 그녀는 즉시 8레벨 언데드의 시선을 끌고있는 청록빛 괴물을 불러들였다.

동시에 슬레모킨이 다급히 발전소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마력을 전해 받았다면 분명 레반도······.

'어, 없다?'

쓰러져있던 레반이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 * *

정기신(精氣神).

'정'과 '기'는 부족할진대 '신'은 드높다.

정은 몸이요 신은 마음과 의식이니.

신(神)의 지고한 뜻과 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던 레반의 육체를,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청록빛 마력의 물줄기가 보조해 일으켜 세웠다.

"후우."

기를 제외한, 레반의 정신(精神)이 합일했다.

[ ······. ]

그렇게.

온몸에서 피를 줄줄 흘리던 레반은 광선을 꼬나쥐고서, 슬레모킨을 좇던 바만차의 앞을 또다시 막아섰다.

그리고 지금.

마치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는 청록빛 마력이-

레반의 전신을 강기의 갑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85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7

#85화.

무의식과 정신의 영역.

레반이 닦아온 무공은 스스로 제 검로를 그렸다.

그러나 곧,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가열차게 박차를 가하던 몸이 결국, 정신보다 먼저 무너졌다.

약속이나 한 듯 일정 지점에 이르자 호흡은 즉시 멈추었고 내장은 서로엉켜 아우성치며 선혈 덩어리를 목구멍으로 밀어 올렸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의 미래를 담보로 삼아, 정해져 있는 한계를 벗어나 힘을 끌어다 썼기에.

이제는 그 인과(因果)에 따라, 넉넉히 돌려받을 차례.

마나 회로와 하단전에 서릿발같은 냉기가 치밀었다. 기맥으로 수발되던 공력은 길을 잃고 헤매다, 냉기에 얼어붙은 단전으로 되돌아가 작은 모닥불이나마 지피려했다.

사지말단이 수백 갈래로 찢어지는 격통.

레반의 기억은 거기에서 뚝- 끊겼다.

그 뒤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죽어가던 단전과 회로에 고요한 파문이 일더니 두 눈이 번쩍 뜨였다.

"······."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먼지가 낀 돌바닥이다.

레반의 손은 아직 광선을 부서져라 붙잡고 있었다. 사방으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으며, 안 그래도 못생긴 루돌프놈이 더 흉측해진 얼굴을 들이밀어놓고 눈물을 훔치는 중이었다.

훌쩍.

"끄흑. 이 악랄한 새끼 드디어 죽었네. 진짜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어?"

"참 못생겼다. 못생긴 걸로는 네가 최고다."

"······형님? 뭐 하러 일어나셨. 아니 왜, 이걸 어떻게 부활하셨죠?"

밴스의 벙찐 표정은 일류 배우도 어려워한다는 '희망과 절망 사이의 애매한 감정' 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그러고는 끝끝내 시체로 변한 것이라며 도망치려던 밴스의 목덜미를 레반이 잡아 제지했다.

"컥!"

"염라가 너 두들겨 패라고 다시 보내줬다."

홱-

레반은 밴스를 대충 던져두고 일어났다.

괴이한 일이다.

분명 허물어져가던 육신이 그의 뜻대로 움직인다.

혹, 이것이 죽기 전에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처럼 회광반조(回光返照)를 겪는 중인가.

그렇다면 나조차도 모르게 당명처럼 선천지기를 끄집어냈는가?

아니다.

사아아—

"이 마력."

보드라운 온기가 녹아있는 이 청록빛의 마력.

하늘의 어딘가에서 요정처럼 날아와 레반을 일으켜 세운 이 신비하고 강대한 마력, 이것은 마탑 서재의 뒷면에서 부여받았던······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의 것이 확실하다.

쏴아아아아······

어디선가 날아온 마력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메마른 땅을 빗물로 적시듯.

막대한 양의 기운이 죽어가던 레반의 전신에 톡톡히 스며들었다.

그 덕분에 찢어졌던 근원이 회복되고 채워진다. 하릴없이 무너져 내리던 육신과 깎여나가던 생명력은 청록빛의 마력이 작용하며 제자리를 되찾고 있었다.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건가.'

마탑의 주인. 일레힌 포이체카는 여기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북부의 두 전장 중, 어느 곳도 버리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북극의 오로라처럼 내려앉은 그의 마력은 레반을 종교에 귀의한 성자, 용사처럼 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력이 청록빛인 이유가 있었군. 힐러잖아."

덕분에 약간의 여유를 되찾은 레반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혼잣말을 계속할 정도로.

"성령이 충만하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나."

철저한 무신론자이자, 언제나 무교로 살아왔던 레반도 열렬한 신자로 만들 수 있을법한 마탑주의 기운이 단전과 심장에 충만히 차오른다.

후폭풍이라는 거친 풍랑에 떠내려가던 레반의 육체는 막대한 마력의 개입을 지지대삼아 명경지수를 되찾았다.

"······."

세상이 달리 느껴졌다.

오감 이상의 그 무언가.

구태여 눈을 부릅뜨고 유심히 보지 않아도, 수많은 정보가 레반의 피부로 전해져온다.

슬레모킨의 뒤를 낫을 든 유령마가 쫓아간다. 힘겹게 도망치는 그녀는 손에 두툼한 탄창을 들고서 질주에 박차를 가했다. 발전소의 입구에 이르러 슬레모킨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터지면 되돌리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레반은 저 빌어먹을 바만차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의념을 가졌다.

그래. 그저 그랬을 뿐인데.

광선을 꼬나쥔 레반은 어느새, 흉포하게 돌진하던 바만차의 앞에 당도해 있었다. 침침한 바만차의 안광이 풀지 못할 의문을 머금었다.

[ ······. ]

"후우."

바만차를 막아선 레반의 폐에서 깊은 숨이 토해졌다. 이전과는 호흡의 깊이가 다르다.

그는 세상을 더 가까이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이번 생에 처음, 의지가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였다.

모래주머니 수십 개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듯 하던, 아무리 단련해도 성에 차지 않던 육체. 한참이나 앞장서있는 상단전의 경지를 따라잡지 못하던 그 한심한 육체.

스르릉—

정기신의 세 가지 요소 중 두 가지.

정신(精神)이 합일했다.

퉷, 핏물을 그러모아 뱉은 레반이 전투를 위해 광선을 들어올렸다. 언뜻 기수식을 취하는 듯 보였다.

푹!

그러나 레반의 주변을 구성하던 장면들이 후욱 밀려나며, 바만차의 눈두덩이로 예리한 칼끝이 꽂혀들었다.

극성까지 갈고 닦은 오형검 일 초식. 출(出).

[ !!! ]

콰과광—!

어렴풋한 잔상만을 남기고 섬전처럼 짓쳐든 레반의 신형은 근방의 대기를 뒤집어엎었다. 방아쇠를 당겨야겠다는 의지만 가졌을 뿐인데, 육체는 이미 쏘아져 목표물을 관통해버린 것이다.

인간이 낼 수 있는 규격을 벗어난 탄력과 속도.

바만차는 거대한 낫으로 그 검을 막아내긴 했으나, 침침한 안광은 이미 경악으로 치떠졌다.

뼈마디가 저릿했다.

육신의 고통을 느껴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이던가?

[ 이······. ]

한낱 벌레 따위가 아니다.

단숨에 죽여주마—

번쩍!

바만차의 흉험한 안광이 살기를 사방으로 풍겼다.

거대한 낫에서 분리된 무형의 요기가 실처럼 나뉘어 줄기줄기 뻗어진다. 그 요기의 실에 닿은 모든 것은 저항없이 잘려나갔다.

오직, 레반의 광선만을 제외하고.

콰직!

호쾌한 오색빛의 검강 궤적이 요기의 실을 대차게 부러뜨렸다. 한 치의 간격을 두고 벌이는 근접전.

낫과 검이 춤을 추며 일렁인다.

삽시간에 자그마치 열 합이 오갔다. 날카로운 파공성이 연신 터져나오며 전장의 먼지들을 주변으로 밀어냈다.

오색 광채의 검강과 무형의 요기가 맞부딪친다.

상식과 법칙을 아득히 벗어나는 기운들의 대결.

7레벨. 심지어 8레벨도 눈으로 쉬이 좇을 수 없다.

"저게 대체······."

어깻죽지를 붙잡고 전투의 파장을 견뎌내는 천무연과 8레벨 언데드를 피해 달아나던 슬레모킨이 입을 떡 벌렸다.

요기를 뿌리는 바만차의 낫을 광선으로 막아낼 때마다, 레반의 몸을 두른 청록빛의 갑옷 장막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진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순간.

"엇······?"

슬레모킨의 팔에서 청록빛의 마력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스르륵 빠져나간 마력은 허공의 한 지점에 뭉치더니, 전투중인 레반의 머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마치 이제부터 레반에게만 집중해 퍼붓겠다는 듯, 허공에 결집되었던 청록빛의 마력 응집체는 모두 레반의 갑옷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발끝부터 짙게 차오른 청록빛의 마력이 이전보다 곱절이 된 농도와 양으로 레반을 조력했다.

"아아."

슬레모킨은 본분도 잊고 경탄을 머금었다.

[ 그아아아아아! ]

그러나 전투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격노한 바만차가 육성으로 포효했다. 그간 자신의 앞에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바만차는 흥분한 말처럼 앞다리를 허공으로 치켜들며 달려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바만차의 요기가 점점 더 거대하게 증폭된다. 9레벨의 네임드가 진정으로 발광하며 낫을 휘두르니 레반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검막을 만들어 방어해냈다.

경탄을 지운 슬레모킨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니, 절대적으로 부족해. 근본적으로 기운에서 밀려."

마탑주의 마력을 뽑아쓰고 있다고 해도, 레반의 무공과 깨달음은 비정상적으로 드높은 것은 사실이다. 7레벨이라 믿을 수 없다. 아마 실종되었던 전설의 인격 메모리칩 뭉치를 실제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카가강!

"······."

하지만 압도적인 기운의 격차는 기예로 메울 수 없다.

바만차가 강대한 본신의 요기를 낫에 담아 휘두르면 레반은 속절없이 밀려난다. 현재는 경이로운 움직임과 고절한 무공으로 근근이 방어하고 있는 듯하나, 마탑주의 마력은 무한하지 않을 것이다.

레반이 공격을 성공시킨 것은 정확히 두 번.

바만차가 제자리에서 여유를 부렸을 때, 그리고 마탑주의 마력을 받자마자 검을 들고 쏘아졌을 때.

숨겨둔 실력을 꺼내어 기적적으로 어울리고는 있으나, 9레벨과의 격차를 좁히기에는 요원하다.

서걱!

아니나 다를까, 레반의 팔이 길게 갈라진다.

눈이 충혈된 슬레모킨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정확히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독기의 뇌우가 천지사방으로 몰아친 것이.

"!"

지면을 무너뜨려 잡아먹을 듯한 독기의 파동.

둑이라도 터진듯 요기와 독기의 파도가 밀려온다.

진원은······저 멀리. 당명 원로와 녹량백량의 결전지.

그 말인즉.

당가의 결전이 마침내 그 끝을 고했다.

뒤이어.

극독의 아지랑이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쿨럭-

그 자욱한 독연의 늪지대에서 빠져나온 것은, 독기운에 줄줄 녹아내리는 육신을 절대적인 공력으로 기워 붙잡고 있는 무인이었다.

죽을 각오로 지체없이 선천지기를 태운 무인은, 마침내 녹량백량을 궤멸시켜 오래 묵은 악연의 매듭을 풀어낸 것이다.

허나 당명은 살아도 산 몸이 아니었다. 당령마저도 처음에는 당명을 녹량백량으로 오해했을 정도로 망가졌다.

발을 덕지덕지 붙잡고 늘어지는 녹량백량의 처절한 저주와 요기가 당명의 육체를 갉아 먹는다. 거대한 강기를 가득 실어 휘두르던 편과 자랑스러운 당문의 무복은 온데간데없었고 얼굴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당명은 이미 초주검이었다.

비척비척 독무를 걷어내고 걸어오는 초주검.

그런 당명이, 남은 힘을 끌어모아 번개처럼 비도(飛刀) 하나를 출수했다.

쐐애애액!

어마어마한 기운이 담겨있는 비도. 그것은 당명의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바만차의 뒷덜미에서 나타났다. 레반이 기다렸다는 듯, 그 비도와 합을 맞추어 검강줄기를 쏘아냈다.

그러나, 이런 기습을 허용할 바만차가 아니었다.

이미 독무가 걷힐 때부터 상정해놓은 뻔한 기습.

바만차의 거체가 허공으로 뛰어오른다.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비도를 피한 바만차의 시선이 돌아갔다. 바만차의 흉광이 대지를 가로질러 닿았을 때, 선천지기를 모두 태운 당명의 육신은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바만차는 흡족하게 시선을 다시 돌렸다.

끝이다.

이제 귀찮게 구는 한 놈만 눌러 죽이면—

[ ······? ]

"큽."

당명이 출수한 비도가, 레반의 늑골에 박혀있었다.

공격을 회피한 바만차로써는 알 도리가 없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비도가 아니었다.

정순한 세상의 기(氣)가 모여있는 응집체.

당명이 추출한 녹량백량의 정수. 그것을 응집해둔 '기의 그릇'

비록 비도의 형태를 했으나, 녹량백량이 세상에 두고 떠난 9레벨급 에센스였던 것이다.

"당씨의 성을 받아 태어나지 그랬느냐."

허허-

위대한 경지를 이룩한 한 노인의 기운 빠진 웃음소리가, 이 전장에 어울리지 않게도 고고히 울려퍼졌다.

[ ······!!! ]

주르륵.

그리고 레반의 늑골을 파고든 당명의 비도는, 어느 기맥에 이르러 신기루처럼 녹아 사라졌다.

이미 정신이 합일했던 레반이 그 거대한 기운마저 받아 삼키자, 찌르르하게 퍼져나가는 고양감 뒤로, 정기신(精氣神)이 조화로이 합일했다.

조화를 이룬 정기신.

어쩌면 이번 생에서는 다시 못 느낄지도 모르는.

그렇게 인류라는 종의 한계, 알껍질 속에 단단히 갇혀있던 레반의 육체마저 잠시 알껍질을 빠져나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존재의 격이 달라졌다.

다섯 번째 전생에 깨달음을 얻고 신(神)을 격이 다른 세계에 올려놓은 사내. 그 경지에 걸맞는 육체와 기운이 잠시간 레반에게 주어졌다.

녹량백량 에센스의 기운은 레반의 단전으로 흘러 들어갈 틈도 없이, 대맥을 거세게 휘돌아 대주천을 완성했다.

터진 활화산처럼 분출되었어야 할 기운은, 레반의 침착한 인도에 따라 가라앉았다.

화경.

지금의 레반은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다.

몇 번의 생을 거치며 그토록 염원했던 절대의 경지.

잠시 뒤. 레반이 깊은 눈으로 전장을 둘러보았을 때.

"똘똘한 놈. 아직 젊다. 따라오지 말아라."

스르륵.

허허 웃던 당명은 이제서야 만족스레 단념한 듯 유유한 물줄기처럼 녹아내렸다. 지면과 섞여버린 당명의 유언은, 레반의 마음을 깊은 심해로 가라앉혔다.

"예."

따라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전에 단언했던 대로.

또 허무하게 뒈져나가지 않을 것이다.

곧.

광선의 끝이 천천히 바만차를 향한다.

심유한 눈빛의 레반은, 덤덤히 기수식을 취했다.

[ ······. ]

낫으로 전장을 지배하던 바만차도 걸음을 멈추었다. 곧 깊은 안광에서부터 살을 에는 요기가 끓어올랐다. 과분한 기운을 다스리며 변화하는 레반을 당장 요격할 요량.

이윽고, 어떠한 전조와 움직임도 없이.

서걱.

순간이동한 바만차의 거대한 낫이 레반이 머무르던 공간을 통째로 절삭했다. 천무연의 오른팔을 잘라낸 그 공격. 9레벨의 네임드 개체가 전력을 쏟아부은 일격에는, 청록빛의 마력 갑주도 효과가 없었다.

레반은 그 공격에 채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구경꾼들의 숨이 턱 하고 멎었다.

"······."

핏기없는 천무연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고.

"아, 안—"

눈가가 붉어진 슬레모킨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서걱.

레반의 목덜미가 낫에 반쯤 잘려나갔다.

···분명, 슬레모킨의 시선에는 그리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캉! 카가가가가가강!

"!?"

목이 잘렸던 레반의 신형은 어느새 연기처럼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는 전쟁 병기의 초진동 블레이드가 요란히 진동하며 그 낫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힘사의 한쪽 팔은 거대한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뜯겨져 나갔다.

하지만 그렇다면 사라진 레반의 진체는···

[ ! ]

바만차의 후위에서 어두운 인영이 솟아났다.

상승의 경신법,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수법이 바만차의 기감마저 속여내며 펼쳐진 것이다.

동시에.

마치 녹량백량의 기운을 모조리 주입한 듯한 레반의 검, 광선이 세상을 모조리 자신의 오색빛으로 덮어씌웠다.

이어서, 장면을 붙잡아 주욱 늘린듯.

오색으로 빛바랜 세상의 시간이 느릿하게 흐른다.

[ 그아아아아!! ]

압도적인 위용을 보이던 바만차의 진노한 흉성조차도 길게 늘어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의 진화. 위기를 느낀 바만차가 요기를 급히 터뜨렸으나.

찰나를 쪼개고 또 쪼갠 정도의 시간.

흐릿하게 늘어난 세상에서 레반만이 움직였다.

인식의 간극을 비집고 들어가 바만차의 뒤를 잡은 레반이 무심히 광선을 들어올린다.

우우웅——

이윽고 모든 것이 정지해버린 듯한 세상 속에서, 오색의 광채를 흩뿌리는 검기성강만이 염라의 심판을 자처하며 떨어져 내렸다.

십수 미터까지 늘어난 오색의 패도적인 검강. 그 빛줄기는 지면을 단두대삼아 다급히 범위 내에서 벗어나려던 바만차의 세 다리를 절단해 주저앉혔으며.

종래에는 바만차와 일직선상에 위치하던 원자력 발전소 입구와 함께, 슬레모킨의 뒤를 노리던 8레벨 시체의 목을 추가로 참수했다.

그리고 그 모든 사태가 끝나자, 빛줄기가 지나간 공간이 뒤늦게 일그러지며 멈춰있던 세상이 다시금 힘차게 박동했다.

궤적에 걸려있던 것들은 그제서야 느릿한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

으지지지직——

그것은 실로, 광선(光線)이었다.

#86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8

#8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