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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7

#54화. 발할라 산맥의 마탑 7

#54화.

천지사방으로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친다.

발할라 산맥의 드높은 골짜기를 타고 세차게 솟구친 눈보라는 사내의 몸을 에워싸며 맛난 살점이 다 얼어붙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통크게 중급 에센스 20병을 내리 죄다 처먹고서는 용솟음치는 기운을 다스리러 발걸음을 돌렸던 그 절벽까지 다시 기어나온 나의, 비쩍 말랐지만 곧 맛있어질 살점을.

그러나 눈보라와 함께 불어온 풍만한 마나의 기운들은 나의 전신에 동화되어 불어오는 찬바람을 든든히 막아주었다.

뱃속은 무엇보다 뜨겁고, 살갗은 시리다.

스승이 준 극음초를 멋모르고 먹었을 때와 흡사한, 끔찍하고 시린 한기가 용암과도 같은 열기가 흐르는 육신을 감싸며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극한의 추위 속에서 하루. 진즉 눈서리로 얼어붙어 죽어도 이상치 않을 시간이 지났으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끊임없이 토해지는 극양의 열기에 콧잔등 위로 더운 땀이 맺힐 정도였다.

기운들은 내가 공들여 움직이지 않더라도, 일레힌 포이체카와 카스트라 뷔에탕의 마력이 술래잡기를 해대며 파헤쳐놓은 기맥들로 파고들었다. 있었던 줄도 몰랐던 전신세맥으로 퍼져나간 기운이 잠들어 있던 감각을 일깨운다.

그러나 그 외에, 큰 움직임은 없었다.

보통 막대한 기운이 통제도 없이 한꺼번에 몰려들면 막혀있는 맥이라도 뚫어보려 지랄발광을 하기 마련인데, 원래 막혀 있어야할 나의 임독양맥은 십수 년 전부터 타통되어 이미 활짝 열려있는 상태였다. 흥미를 잃은 기운들은 결국, 반나절에 걸친 내 인도하에 하단전에 속속 모여들었다.

그렇게, 일단의 갈무리가 끝났다.

"음."

나는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몸을 툭툭 털고는, 새하얀 눈밭위를 시원하게 내달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리 병신이었던 놈은 이제 탄력적으로 튀어 올라 눈밭 위를 딛었다. 처음 몇 발은 마치 학처럼 고고했으나 아쉽게도 몇 발을 더 옮긴 뒤에는 눈밭위에 자그마한 흔적이 남았다.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지까지는 한참 멀었군.

다만, 세찬 눈보라가 어렴풋한 족적을 금세 메워 눈밭 위를 강하게 달려도 마치 답설무흔 경지의 경공고수가 된 듯했다. 나는 그 기분을 적당히 만끽하다가 장엄한 봉우리의 절벽 앞에서 멈추어섰다.

그리고 곧, 의문이 들었다.

'뭐지?'

불현듯, 천천히 몰려오는 허무함.

이게 전부고, 이게 끝이란 말인가?

영약을 잔뜩 처먹고 전생의 경지를 조금 되찾았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공허했다. 그 느낌이 너무도 괴상한 탓에 절벽 앞에 멈추어 선 것이다.

'내가 정말 절정의 경지에 오른 것이 맞는가?'

절정(絶頂).

진정한 고수의 경지를 가르는 하나의 거대한 기준선이자 지금껏 보아오지 못한 세상이 열리며 많은 것이 재정립 되는 경지.

중원 무림에서는 비좁은 깨달음의 구멍과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꾸물꾸물 뚫어내며 이룩했던 대단한 경지다.

그것은 왕국의 마법사였던 전생에도 마찬가지였다. 피가 튀는 전쟁터에서 기어코 절정을 달성한 뒤에 막대한 성취감과 뿌듯함으로 며칠 밤을 등신마냥 뒹굴었던가. 하지만 벌써 세 번이나 이룩한 절정이라 그런가, 이제는 별 감흥조차 없는 모양이다.

이 기분도 별것 아니겠지.

나는 걱정을 털어내려 고개를 털었다.

아무튼 이제 한심하게 죽을 일은 없어졌군.

— 하하하!

나는 기분이 그닥 좋지 않았으나, 억지로라도 웃으며 머리를 치켜들었다. 이전보다 상태가 매우 나아진 지금은 아쉽게도 어제 하지 못했던 박장대소마저 가능했다.

쾅쾅쾅!

손뼉을 마주칠 때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파장이 절벽 위에서 메아리치다 흩어졌다. 나는 아이처럼 신을 내며 박장공(拍掌功)을 극성으로 익힌 고수에 빙의해 부서져라 손뼉을 마주쳤다.

파동이 닿은 절벽의 가장자리에는 거대한 고드름들이 잘 익은 사과처럼 떨어질 준비를 마친 채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누군가 저것이 바로 빙하다! 라고 하여도 절로 고개를 끄덕일 만한 수준의 허옇고 거대한 고드름 줄기였다.

박수를 치던 나는 돌연 검을 틀어쥐었다. 그러자 검의 형을 능히 뛰어넘어 일 척쯤 되는 검기(劍氣)가 주욱 뽑혀나왔다. 허무한 기분을 덜어보려 조금 과하게 신을 낸 덕이다. 나는 만년설이 덮인 눈밭을 강하게 딛고 쇄도하며 전심전력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구우웅.

곧, 세찬 눈폭풍 사이로 집채보다도 큰 고드름 줄기가 육중하게 떨어져 내렸다. 내가 경쾌하게 허공을 주먹으로 때리니, 밑으로 낙하하던 고드름이 산산이 부서지며 뾰족한 얼음조각들이 되어 흩어졌다.

그 산맥 위의 난리통은, 모락모락 열기를 뿜어내는 나의 전신이 한랭한 눈보라에 적당히 식을 때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에센스덕에 기운이 넘치는 단전은 손쉬운 공력의 수발을 불러왔고,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나는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검기가 일렁이는 검을 휘둘러댔다.

스아악!

유형화된 검기가 낭창대며 발출된다. 하지만 겨우 코앞에 있는 얼음더미만 파냈을뿐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다.

역시.

무언가 이상하게도, 시원시원한 맛이 없다.

'절정에 발가락 하나만 겨우 걸쳐서 그런가?'

두 번의 전생들과는 조금 다르다지만······.

뭐, 육체가 예전과 같지 않은 탓일 수도 있겠지.

어찌 되었건 중급의 에센스들은 제 할 일을 했다.

절정에 올랐으니, 뷔에탕의 저주에 당해 미쳤을 때와 같이 소중한 발가락이 잘려나가지 않게 조심히 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닫혀있던 무언가는 확연히 열린 듯했다. 그저 세찬 눈보라에 불과하던 눈송이 결정 하나하나가 각각의 객체로 느껴지며 피부로 와닿는 기분이었다.

더해서 벌써 네 번째 고리를 엮어도 될 정도로, 저번에 쌓아 올린 세 번째 마나 회로의 기틀이 단단히 잡혔으며 마력이 충만했다. 조만간 마나 회로쪽도 손봐야 할 것이다.

카가각.

얼음에 덮인 눈을 걷고 투명한 얼음을 잘라내자 나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비쳐 보였다. 충분한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아직도 육체는 바짝 마른 멸치같았다.

넘치는 기운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게 되면, 바로 마탑으로 들어가서 오동통한 겨울 붕어마냥 살이 오를 때까지 밥이나 실컷 퍼먹어야겠군.

"아이고. 고되다."

공력을 죄다 쏟아낸 나는, 고드름 줄기를 두고 눈밭 위에 하루 작업을 끝마친 막일꾼마냥 대자로 누웠다. 눈밭 위는 시원했다. 하지만 곧 뜨거운 열기가 후욱 뿜어져 나오자, 나의 사지육신에 닿은 만년설(萬年雪)은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퍼석.

주변의 만년설을 한주먹 쥐어 목마른 입에 퍼넣었다. 불청객만 없었다면 영원했을 눈덩이는 고작 목을 축이는 정도의 일을 마친 뒤 부질없이 사라졌다. 허나 나는 그럼에도 목이 말라 만년설을 연신 집어 입에 퍼넣기를 반복했다.

발할라의 산맥 위로 세찬 눈보라가 불었다.

*

"흐음······."

마탑 입구를 문지기처럼 지키던 말단의 마법사들이 분주해보였다. 그들은 안그래도 쓸데없이 깨끗한 실내를 더욱 더 열심히 쓸고 닦았다. 반 루벤카는 대수롭지 않게 그들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요즘따라 마탑의 분위기가 싱숭생숭하다.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는 자신의 서재를 아예 폐한뒤로 아직까지 두문불출하고 있고, 마탑주의 서재를 매일같이 들락날락 거리던 팔찌 네 개의 레반은 어느날부터인가 단단히 미쳐버려 역시 폐관 비슷한 것에 든지 몇 달째였다.

마탑 내에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레반을 제자로 삼았다는 소리도 있었는데, 루벤카가 생각하기에 그것만은 절대로 아닐 듯했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자기 몸 챙기기에 바쁘지, 한가롭게 제자같은 걸 들일 상황이 아니니까.

그래도 마탑주의 서재를 그렇게 많이 들락날락 거린 사람은 마탑 전체를 통틀어서 레반이 두 번째라던가?

'그런데 그럼 뭘 하겠어. 머리가 돌아버렸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레반은 누가 봐도, 확실히 미쳐가고 있었다.

아니, 미쳐가는게 아니라 이미 단단히 미쳤다.

'뭔가 이상해···왜 이렇게 불안하지?'

사실 루벤카는 레반이 미쳐가든말든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싶었으나, 마음 한 켠에서는 이상한 불안감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가 그 레반에게 팔찌를 네 개나 준 것도 모자라 자주, 그것도 하루에 몇 시간이나 독대할 일이 뭐가 있을까?

물론, 그건 이제 석 달도 더 지난 얘기지만.

이틀마다 음식과 음료를 들고 레반놈의 침실에 방문해주었던 레나마저도 나중에는 자신 때문에 위험해질 지도 모른다며 침실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던가.

이제 마탑 안에서 레반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딱 한 명만 빼놓고는.

— 안 돼. 못 들어가.

거대한 청록빛 괴물을 다루는 강력한 마법사는 마탑주의 서재와 더불어 레반의 침실을 아예 봉인하다시피 막아버렸다. 그때문에 루벤카의 의문은 해소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루벤카가 마탑주의 서재에서 흘러나오는 이상하고 기이한 기운을 느낀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루벤카는 이 단단한 마탑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거대한 마력이 맞부딪친 것 같은.

루벤카는 그 일이 터지고 얼마 뒤, 레나의 시종을 자처하는 이상하고 못생긴 새 시종놈을 찾아갔다.

레반이 전뇌 칩을 뺀 뒤로, 레나보다도 레반와 더 오래 붙어있었다던 밴스였다. 놈은 레나를 수행할때를 제외하면 항상 괴상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벽에 박거나 주먹으로 자기 얼굴을 전력으로 때리는등, 레반뿐만 아니라 이 새끼도 도통 제정신이 아니었다.

"형님이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한 루벤카가 레반의 능력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자, 밴스라는 양아치놈은 세상 누구보다도 태평한 태도로 대답했다.

"나도 몰라요. 근데 이전부터 왜 그리 걱정을 하십니까? 루벤카님 입장에서는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인 인간 아닙니까. 형님 좋아해요?"

그 헛소리에 루벤카는 결국, 답답한 얼굴로 신경질을 냈다.

"야, 이 멍청한 새끼야. 마탑주와 독대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누구도 말해주지 않고 알지도 못하잖아. 팔찌 네 개를 받은 이유도, 독대하는 이유도. 미쳐가는 이유도. 이러다가 이 마탑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면—"

"뭐 사내 둘이 끈끈한 우정이라도 쌓나 보죠."

"······."

아니, 뭐 이런 황당한 새끼가 다 있지?

레반을 가장 싫어하는 건 자신이 맞다지만, 태평해도 너무 태평한것 아닌가? 철썩같이 믿는 것도 정도껏이지. 이런 상황이 특이하지 않다는 듯, 자기 할 일들만 하지 않나.

루벤카는 도저히 자신의 답답함을 풀 길이 없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런데 때마침.

"어? 형님!"

밴스의 외마디 비명에 눈을 돌리자, 레반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머리는 여인처럼 치렁치렁 길었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어디 동굴에서 사는 사람 같았는데, 머리와 수염에는 새하얀 눈과 얼음까지 덮여있었다.

루벤카는 눈을 부비며 레반을 바라봤다.

그는 지난 몇 달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석 달넘게 흐리멍텅히 하고 있던 정신나간 눈매는 어디 가고 오늘만큼은 안광이 형형했다. 거의 살기를 내뿜을 정도로 짙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온 레반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루벤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찝찝하고 요상해서, 도무지 못 참겠다."

대체 뭐지.

저게 세 달만에 나타나 한다는 소리인가?

루벤카가 의문스런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자.

오랜만에 나타난 레반은 자신보다도 더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신경질까지 내며 입을 열었다.

"누구 하나 뒈지기 직전까지 한번 붙어봐야겠다. 너 커피 두 잔 사서 따라와."

"······?"

루벤카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자기 할 말만 마치고 비척비척 걸어가는 레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지금까지 했던 걱정이 눈녹듯 사라지며 홀가분한 마음이 된 그녀는, 기꺼운 마음으로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받아 챙긴 뒤, 레반의 뒤를 무서운 속도로 쫓아갔다.

#55화. 당절

#55화.

루벤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 마탑에 이런 곳도 있었어?"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장소.

이곳은 마탑 내의 전송진을 통해 올 수 있는 외부 장소였다. 루벤카도 몇 달간 마탑에 머물며 처음 와본 곳이었으니, 아마도 팔찌 네 개의 소유자나 그 동행자에게만 입장이 허락된 듯했다.

온 사방이 하얀 눈밭이었고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데, 딱 이 근방만 눈이 쌓여있지 않고 깨끗했다. 누군가 저리 많은 눈을 다 퍼먹기라도 한 건 아닐테니, 마탑주와 마탑의 힘이 닿는 특별하고 고귀한 장소가 분명하겠지.

"여기는 마나가 무슨······."

루벤카는 전송진을 통해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장소는 극한으로 춥고 숨쉬기조차 버거웠지만, 대기를 이루는 마나만큼은 세상 어느 곳보다 충만했다. 그녀의 마나 회로가 허락하는 한, 어떤 고위 마법이든 자유자재로 사용해 최대한의 실력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철벅.

발걸음이 멈추는 소리.

루벤카는 앞서가다 걸음을 멈춘 레반을 바라봤다.

"······."

아까도 확인한 거지만, 몇 달 만에 본 레반의 육체는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었다. 근육의 결은 쩍쩍 드러나 있었으나, 차마 잔근육이라며 듣기좋은 빈말도 건네줄 수 없을만큼 앙상하기만 한 근육이었다. 마치 동굴에서 사는 야인이나 마약에 중독된 길거리 부랑자와도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찝찝한 기색으로 인상을 구기고 있는 저 레반은, 마탑에 들어왔을 때와는 또 다른 존재이기도 했다. 발할라 선적장 근처의 객점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자신에게 감히 비벼보지도 못할 애송이에 불과했는데······.

지금 풀풀 풍겨대는 기운으로만 보자면, 아직 자신보다는 못하다 해도 절대 무시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한 6레벨 끝자락? 아니. 어쩌면 7레벨급.'

몇 달간 아예 정신이 나간채로 있더니, 어느새 또 이렇게 몰라볼 정도로 강해져서 나타났다. 몸은 저따위로 망가졌는데도 말이다.

어이가 없었다. 무인이든 마법사든 7레벨의 벽은 드높아서 절대 저렇게 쉽게 돌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하, 그 밴스라는 못생긴놈 말이 맞았네.'

문득, 루벤카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이해하지 못할 현상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발악을 했으니, 가슴이 이렇게나 답답했던 거지.

레반 저놈과 발두르 시티에서 지내온 일행들이 너무도 태평하기에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지금와서 보니 그들의 반응이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저 레반은, 루벤카의 경험이나 상식선에서 생각해 재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대단한 기연을 얻었든지와는 관계없이, 어지간해서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진부한 천재나 수재의 범주에서 벗어난 돌연변이가 저기 있었다.

루벤카는 문득, 자기가 지금 저 레반이라는 종놈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에서 다른 이들이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과 상당히 흡사하다고 느꼈다. 괴물을 보는 듯한. 뭐 그렇다고 해서 레반이 괴물이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이질감, 위화감. 말하자면 그런 종류였다.

레나의 첫 시종이자 친구인 레반은, 분명 시종일 뿐이었으나 처음 반 바이오에 왔을을 때부터 늘 꺼림칙한 느낌을 풍기는 놈이었다. 감이 좋은 편인 루벤카만이 느끼는 무언가였다. 저택이나 사내, 다른 기업의 하인에게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어떤 이질감과 위화감.

그리고 사특하면서, 거칠면서도, 어딘가 괴상하게 올곧은 저 눈.

시종이되 시종이 아닌 것 같은 레반의 태도.

'그래, 예전부터 이상했어.'

다 죽어가는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가 레반을 불러들인 것도, 이제는 구태여 이해하고 납득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로 했다. 애시당초 이상했던 놈인데 뭔가 이유가 있겠지.

연방에서 기업에 심어놓은 사람이든, 어디 우주에서 떨어진 놈이든, 다른 세상에서 날아온 놈이든. 루벤카는 지금부터 레반을 레나의 전 시종놈이 아닌 하나의 돌연변이로 보기로 했다.

그러자 심란했던 마음이 한결 더 편해지며 막혀있던 속이 쑥 내려갔다.

후우!

곧 루벤카가 커피를 후후 불며 입을 열었다. 커피는 몰아치는 눈보라에 차게 식어 얼어버린지 오래였으나, 루벤카의 숨결이 닿자 다시 온천수처럼 펄펄 끓어올랐다.

"강해졌네 레반. 근데 뭐. 그래서 자랑하려고 불렀어?"

마음을 놓은 루벤카는 부글부글 끓는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대기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완전히 자리를 잡은 다섯 개의 마나 회로가 순식간에 정순한 마나를 머금으며 주변환경과 동화되기 시작했다.

루벤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솔직히 되게 궁금하긴 하다. 어느 쪽이 뒈질까? 나? 아님······너?"

"몰라 이 년아. 궁금한 것도 참 많다."

"······."

레반의 대수롭지 않은 발언에 루벤카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퍼런 핏줄이 솟았다.

하지만 도발을 한 레반은 정작 루벤카와 벌어질 전투에 큰 신경을 쏟고 있지 않았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한 가지의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 절정에 오른 것이 맞는가?'

질 좋은 중급에센스를 스무 병이나 마셨다. 그 훌륭한 기운들은 더 훌륭한 심공으로 다스려져 다른 길로 새지 않고 단전에 고스란히 흡수되었다.

그러나 레반의 마음에는 차지 않는다.

어떠한 찝찝함이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루벤카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도 그 이유에서다.

오로지 이 찝찝함의 실체를 확인해보기 위해서.

생각을 끝낸 레반이 고개를 들자,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여기까지 온 이상 더 입을 열어가며 떠들어댈 필요가 없었다.

스륵!

눈보라 속에서 레반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곧이어 흔들리는 검날이 예고없이 커피를 마시던 루벤카의 목을 찔러왔다.

탱!

그순간 루벤카가 잡고 있던 커피잔을 들어올려 검로에 갖다 대니, 커피잔이 진흙처럼 녹아 흘러내리며 검을 뒤덮었다. 레반의 검이 순식간에 불판처럼 벌겋게 달궈지며 아지랑이를 피워내려던 검기마저 사그라들었다.

"이거······네가 먼저 시작한 거다? 응?"

루벤카는 쯧- 혀를 차는 레반을 바라보며,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빌어먹을 대가리를 어떻게 뭉개버릴지, 상상의 나래에 빠지며.

레반이 단시간에 굉장한 경지를 이룬 것은 맞다. 하지만, 루벤카와 레반 사이에는 쉽게 메꿀 수 없는 큰 간격이 존재했다.

한 3, 4레벨이면 몰라도 7레벨쯤 되면 그 7레벨의 카테고리 안에서도 격차가 크게 나뉘기 마련. 이미 완숙하게 기운을 다스리는 루반카에 비해, 레반은 정말 잘 쳐줘도 7레벨을 막 달성한 초입중 초입 수준이었다.

'마탑주랑 친하니까, 다쳐도 어떻게든 해주겠지?'

그리 생각을 마친 루벤카의 몸에서, 웅혼한 마력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쾅!

허공에 붕 뜬 레반의 몸은 수십 미터를 날아가 절벽에 처박혔다. 절벽 사이에 자라있던 수백 개의 고드름들이 레반의 위로 떨어졌다. 허나 그것들은 곧장 직각으로 경로를 틀더니, 루벤카를 향해 빛살처럼 쏘아졌다.

화르륵—

홍염의 장막이 허공에서 일어나며 쏘아진 고드름을 증발시켰다. 그 공격은 루벤카의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했으나, 루벤카는 놀라며 눈을 치켜떴다.

'단전과 회로의 기운이 혼잡하게 뒤섞일텐데?'

무공과 마법을 저렇게 자연스레 섞어 쓰는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아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또 그게 효율적이고 쉽다면 다들 그렇게 했겠지.

쐐액!

쏟아지는 고드름의 비 사이로 레반의 신형이 쇄도했다. 루벤카의 앞까지 순식간에 당도한 레반이 재차 검을 뿌리자, 홍염의 장막이 다시 시뻘겋게 일어나며 레반의 시야를 가리곤 화염을 뱉어냈다.

그런데.

콰드드득!

고속으로 쇄도하던 레반이 찰나간 루벤카의 앞에 멈춰서며 발끝을 가로로 비틀었다. 레반의 발끝부터 다리와 허리를 타고 전해진 반동이 막대한 공력과 어우러지며 검면에 실렸다. 단순히 찌르고 베는 것이 아니라 날아오는 공을 후려치는 듯한 그 둔중한 검격이, 전방을 통째로 우그러뜨리는 광풍을 만들어냈다.

"!"

넓은 검면이 일으킨 광풍에 근방의 대기와 화염이 밀려나며 루벤카의 마력으로 빚어낸 장막마저 꺼뜨렸다. 그것도 모자라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마저 밀려나며 일대가 적막에 휩싸였다.

팅!

다만, 레반의 검은 그 막대한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났다. 그간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전투 시작 전부터 이가 나가 부러지기 직전이던 폐물이었다.

그래도 당장은 훌쩍 물러나며 회로를 재정비한 루벤카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주시했다.

"에라이, 거 얼마나 썼다고 벌써 부러져."

검이 부러졌음에도 레반은 전투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게 무슨······.'

그는 패배하더라도 싸우기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듯, 적당한 크기의 고드름을 찾아 쥐더니 그대로 내공을 흘려 주입하곤 다시 땅을 박찼다.

스걱.

"······하하."

루벤카는 기의 아지랑이를 피워내는 고드름이 자신의 몸에 생채기를 내자, 마침내 실소를 터뜨렸다. 마치 장벽 밖에서 십 년은 넘게 구르고 굴러 악만 남은 사냥꾼을 상대하는 것만 같았다.

하하하—

그런데 고드름에 검기를 두르고 미친듯 휘둘러오던 레반이 돌연,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알겠다. 내가 절정에 오른 것이 맞긴 맞군."

그와 동시에 레반의 움직임이 이전보다도 더욱 정교해지며, 복잡한 검초들이 루벤카의 전신 급소를 노리고 쏟아졌다. 수준 높은 무림계 무인들과도 여러번 싸워보았던 루벤카조차 생전 처음 보는 검법과 보법이었다.

이제 아까처럼 여유를 부릴 수는 없어졌다.

그렇다면.

'이런 싸움을 굳이 길게 가져갈 필요는 없지.'

루벤카의 마나 회로가 오랜만에 제힘을 냈다.

순식간에 과하게 마나를 빨아들인 회로들이 한꺼번에 마력을 토해내니, 찝찔한 비린맛과 함께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윽고, 루벤카의 근방 수십 미터 공간이 새빨간 홍염으로 불타올랐다.

콰르르륵!

대기를 매개로 폭발한 마력 홍염이 근방의 공간을 단숨에 잠식해버렸다. 세찬 눈보라에 곧 사그라들긴 했으나, 그 홍염은 사그라들 때까지 루벤카를 제외한 근방의 모든 것을 불사르며 타올랐다. 홍염이 지배하는 공간에 있던 것은 쇄도하던 레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전신이 장작처럼 새카맣게 타버린 레반은, 흡족하다는 듯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미친년, 진짜 드래곤이 여기 있었군."

"······웃어?"

인간이라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작열통이 일 텐데도.

살과 장기가 불에 익어 뇌에 경고를 보내고 있을텐데도, 레반은 그저 실실대며 웃었다.

'뭐지?'

그리고 그런 루벤카의 눈에, 레반의 불타올랐던 살갗이 실시간으로 재생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 재생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레나가 떼를 써 시술해주었다던 2세대 나노 로봇으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

결국 루벤카는 가장 높은 가능성을 떠올렸다.

"······프로토타입이잖아. 너 그건 또 어디서 구했어?"

"반 바이오에서 10년간 개처럼 구른 삯으로 받았다. 퇴직금인 셈이지."

맞구나. 본사에 남겨두었던 그 시제품이야.

그렇다면 싸움이 예상보다도 길어질 것 같았다. 루벤카는 곧장 회로를 혹사해가며 마나를 빨아들였다. 조금 전의 5위계 마법이 다시 한번 발현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이상하군. 왜 이리 배가 고프지?"

털썩.

레반은 뜬금없이도, 배고프다는 말을 끝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

잠시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그 꼴을 바라보던 루벤카는, 억지로 괜찮은 듯 참고있던 호흡을 토해냈다.

주르륵—

전신의 상처에서 피가 홍수처럼 터져 흘러내렸다.

"후우, 씨발. 이런 새끼가 1년 전만 해도 그냥 시종이었다 이거지······?"

루벤카는 전력을 다해 찢어질 것만 같은 마나 회로를 갈무리하며 호흡을 골랐다.

호흡을 고르던 루벤카는 불현듯, 방금 레반의 검을 보고 불현듯 수르트 시티 남경 무학관과의 모의 대련에서 견식했던, 무림계를 이끌 후기지수이자 남경 무학관 최고의 기재라는 그 괴물을 떠올렸다.

분명, 그도 레반과 비슷한 나이대일 텐데.

하아. 아니다.

루벤카는 마구 떠오르는 상념을 지우곤 고개를 훌훌 털며 레반을 바라봤다. 쓰러진 레반은 저렇게 두면 얼어죽기 딱 좋았다. 그리고 애초에 저 마나 팔찌가 없으면 자신도 여기서 나갈 수도 없겠지.

그녀는 결국 엎어진 레반을 들어 올렸다. 뼈와 살가죽밖에 없는 레반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런 상태로?'

진짜 또라이 같은 놈이네.

루벤카는 연신 흘러나오는 코피를 닦아내며 힘겹게 전송진으로 향했다. 전송진 위에 선 그녀는 레반의 마나 팔찌에서만 흘러나오는 마력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여우같은 새끼.

"누가 뒈지든은 무슨. 어차피 자기 못죽일 거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 * *

그렇게, 루벤카가 레반을 침실에 던져두고 마탑의 건물로 돌아오자.

"?"

아까는 없었던 마탑의 마법사들이 대부분 큰 홀에 나와있었다.

루벤카는 이리도 많은 마법사들이 마탑에 있는 줄 몰랐다. 대부분이 팔찌 세 개를 차고 있는 마법사였고 정말 간간히 네 개를 차고 있는 마법사들이 있었다.

'왜 다들 나와있지?'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그들은 모두 한곳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들도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이윽고, 루벤카가 마법사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녀도 그들이 바깥으로 나와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발할라 시티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천 무복.

세상이 바뀌어도 무복 차림을 고집하는 사천당가의 사람이, 일단의 무리와 함께 마탑 본 건물 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허전한 손목을 보면 확실히, 마탑의 초대를 받은 손님들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들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의 오만하면서도 끈적한 시선은, 곧장 루반카에게 와서 꽂혔다. 그의 장난기 가득한 눈매가 금세 휘어지더니 붉은 입이 열렸다.

"아~이것봐 이것봐. 맞다니까?"

말투가 어딘가 능글맞으며, 중성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남자. 그는 사천당가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어지간하면 알 수밖에 없는 당문의 인사였다. 당씨 성을 받은 진짜 당문, 그것도 진짜 직계였으니까.

현 당가주의 넷째 아들, 당절(當截).

사천당가의 직계중에서도 서열이 꽤 높은 직계가 왜 여기 일레힌 포이체카의 마탑까지 들어와 있는지, 루벤카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루벤카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자, 그녀를 발견한 당절이 반가운 기색을 하곤 재빨리 달려왔다. 흡사 오래전 친구라도 만난 것 같은 그 태도에, 루벤카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둡게 물들었다.

"정말 여기에 계셨군요···! 저희가 반년도 넘게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몰라요. 정말!"

"······."

와락.

당절은 홍홍 웃으며 루벤카를 자연스레 껴안았다.

곧, 뱀처럼 소름돋게 미끄러진 당절의 두 팔이 루벤카의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그간······안전한 마탑에서 행복하게 지내셨어요? 루벤카씨?"

#56화. 당절 2

#56화.

콰앙!

부지불식간 강하게 폭발하는 루벤카의 마력.

루벤카를 슬쩍 껴안고 있던 당절이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격노한 루벤카는 그의 손길이 불결해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옷을 미친듯 털어내고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입가에는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루벤카는 레반과의 전투로 지친 기색을 숨기며 말했다.

"어딜 쳐 만져? 미친 새끼가 죽으려고······."

당장이라도 이곳을 전부 불태워버릴 것처럼 타오르는 루벤카의 눈동자. 너스레를 떨며 웃어보이는 당절의 모습이 그 눈동자 안으로 비쳐보였다.

"···제가 별다른 공격을 한 것도 아닌데 반응이 격하네요? 꼭 남의 돈 떼어먹고 마탑으로 도망친 사람처럼요~안 그래요 마탑의 마법사 여러분?"

적막해진 마탑 안.

당절에게로 수많은 눈초리가 쏟아졌다.

루벤카의 정체가 무엇이건, 여기는 마탑이다.

마법사들의 신역과도 같은, 발할라 산맥의 봉우리에 위치한 마탑. 대단하고 위세높은 무림계 메가콥 소속의 중역이라곤 해도, 지금은 마탑주나 마탑 구성원의 초대도 받지 않고 들어온 불청객일 뿐이다.

"아~"

고요한 장내에서 마법사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한번 더 홍홍 웃은 당절은, 손가락을 펴 자신을 가리키며 슬픈 얼굴로 자조했다. 그의 한없이 가볍고 중성적인 목소리는 끈적하게 울려퍼지며 마법사들의 귓전에 달라붙었다.

"나, 그래도 너무 환영받지 못하는 거 아냐?"

그 말과 동시에 살기짙은 기세가 그의 전신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그 독한 기운에 경지가 낮은 마법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당절이 살기짙은 기세를 흘리자마자,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마법사 한 명이 중얼대며 마력을 발산했다. 서재에 있는 마탑주를 자극하지 않을 만큼, 은밀하고 신속하게 내리깔린 그 무형의 거력은 당절의 일행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 큭!

일행 중 몇의 다리가 꺾이며 풀썩 주저앉았다.

후룹.

이윽고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와 함께, 구경꾼들의 사이로 조용하면서도 지친 음성이 섞여 들려왔다. 저 멀리 있는 카페 앞에 매일 에스프레소를 받아가던 마법사가 피곤한 얼굴로 입을 우물대고 있었다.

— 인지해···여기···마탑이야···마탑···으으···피곤해···빌어먹을 연구···.

늘 그랬듯 오늘도 에스프레소를 한 컵 가득 받아채운 마법사가 말을 마친 뒤 천천히 몸을 돌리자, 당절의 무리를 강맹하게 내리누르던 힘도 서서히 사라졌다.

당절이 짐짓 두려운 표정을 지어내며 말했다.

"······역시 마탑에는 강력한 마법사분들이 많네요. 무서워라···그래도 마탑주님께 큰 도움이 될 만한 소식을 가져왔으니까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줘요!"

쿵!

엉큼하게 의뭉을 떠는 당절의 앞으로, 청록빛 몸체의 괴물이 땅을 울리며 내려섰다. 그 귀 아래까지 죽 찢어진 매끈한 얼굴을 본 당절이 뒤로 흠칫 물러서며 놀랍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알 헤임달의 부스러기? 정작 알 헤임달 시티에서도 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그런데···원래 이렇게나 컸던가아."

상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청록빛 괴물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당절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던 팔찌 네 개의 마법사가 어이없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아무리 사천당가라지만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군.

"당가의 무인이 여긴 뭐하러 들어온 거야? 최초다 최초. 참 기어 들어온 것도 신기하네. 저 뒤에 있는 놈들이 벌인 짓이냐."

그가 당절의 일행을 바라보자 일행들은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몇 명은 무인이 아닌 발할라의 마법사들로 보였다. 그들이 어째서 당가의 행차에 마탑까지 함께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때, 괴물의 앞까지 다가간 당절이 포권대신 괴물의 다리를 살포시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사천당가의 당절이라고 합니다. 마탑의 주인이신 일레힌 포이체카님을 만나뵙고 싶어요. 마탑주님께 대신 만남을 청해주실 수 있겠죠? 아이 착하다."

"아니, 지금은 힘들거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게 아니야."

단호한 즉답.

"아~상태가 굉장히 안 좋으시다죠. 저번 토벌전에서 무리를 하시는 바람에······."

그럼에도 당절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내숭을 떨었다.

무인의 입장에서는 복마전과도 같은 마탑에 들어왔다면 조금이라도 주눅 들거나 긴장하기 마련이건만, 당절은 당가주의 직계답게 꼿꼿함을 잃지 않았다.

애초에 마탑주급이 아닌 이상, 자신에게 해를 가할 담력을 가진 마법사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이 거대한 권역을 지배하며 절대적인 위세를 뽐내야 할 마탑의 주인이 몇 년간 죽네사네하며 빌빌대는 마탑임에야······.

당절은 속으로 저들을 비웃으면서도 싱긋 웃어보였다. 그래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알 헤임달의 짐승 부스러기를 다루는 저 마법사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의 대리격으로 보였다. 다른 마법사들은 말없이 이 마법사의 입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설명하려면요···굉장히 기니까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내어주시면 안될까요? 바깥이 너무 추워서 몸이 다 얼었답니다···."

당절의 내숭에 그 마법사는 대답 없이 인상만을 구겼다. 당절은 아쉬운 표정을 지어보이곤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그래요······춥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는 곧 비단 무복의 안주머니를 뒤져 웬 서류 여러 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뒤에 빠져있던 일행에게서도 몇 장의 서류를 받더니, 그 서류들을 반쯤 겹쳐 마법사의 눈앞에 가볍게 내밀었다.

"그럼 보세요. 일단 이건요. 당문의 가주님이시자, 사천당가 코퍼레이션의 회장께서 직접 내리신 교지구요. 다음 서류는, 네. 보시다시피 연방정부에서 받아온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방법원의 수색 영장······까지는 아니고? 그거랑 비슷한 거예요. 한 번 알아봐도 좋다는. 그리고 이 서류는 사천당가가 반 바이오 컴퍼니로부터 입은 피해 내용을 증빙하는 서류들이랑 잉그리드 반 루벤카씨에게 처참히 살해당한 사천당가 소속 직원들의 사망 확인서, 사체검안서, 부검서, 감정서······."

하아-

그는 더 말하기도 힘들다는 듯,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이건······아, 이것들은 나중에 마탑주님께 보여드릴 거라 안 보셔도 됩니다. 아무튼 마침 루벤카씨가 여기 있어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그럼 레나양도 당연히 여기 있겠죠?"

청록색 괴물 위에 앉은 마법사는 앞뒤없이 오만하게 날뛰는 당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쫓아내 버리고 싶은 불청객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마탑의 주인이 판단할 일. 무림계의 인사라는 이유로 무작정 쫓아낼 수는 없다. 그리고 하는 꼴을 보아하니······곧 정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듯 한데 그 전에 쫓아낼 수야 없지.

사아악—

그가 가진 네 개의 팔찌에서 마력이 줄기줄기 흘러나와 마력의 덩어리를 생성했다.

"오~신기하네요. 원래는 이렇게 되는 거구나."

곧이어 허공을 날아간 마력의 덩어리는, 당절과 그 일행의 손목에 채워졌다. 한 개의 마나 팔찌가 희미하게 빛났다.

으득-

그 광경을 본 루벤카는 이를 부러져라 악물었으나, 마땅히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속으로 화를 삭히는 것밖에 없었다. 루벤카 자신도 마탑의 입장에서는 조금 더 중요한 손님에 불과하니까. 마탑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것은 마탑주와 팔찌 네 개를 받은 구성원들이었다.

그들에게 팔찌 하나를 부여해준 마법사는 당절의 일행을 슬슬 둘러보다가 깜빡했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심산으로, 뭘 믿고 마탑에 기어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용서받기 힘들 거다. 그건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당절은 곧바로 웃으며 받아쳤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래요? 여기서 좋은 소식이 뭔지 알려드리자면요. 제가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님을 살릴 방법을 가지고 왔답니다. 아 이건 막 말하면 안 되는 건데······너무 흥을 냈나요."

고의적으로 토한, 그 유치한 발언에 웅성거림이 심해졌다.

일레힌 포이체카를 살릴 방법을 가지고 왔다는 당절의 말에 구경하던 몇몇 구경꾼들이 동요하는 가운데, 초록빛 괴물을 타고있는 마법사는 웃는 건지 놀라는 건지 당절로서는 당최 알 수 없는 애매한 반응만을 보였다.

"그래? 그럼 뭐 자신이 있을 만도 했네."

당절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선물치고는 굉장한 걸 들고왔죠? 그러니까 마탑주님과 제가 잘 해결을 볼 수 있게 마법의 주문으로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또 여기, 백만방도의 포털 뉴스기사를 스크랩 해온 겁니다. 보세요 한 번."

시종일관 밝은 기색의 당절은 커다란 종이를 내밀었다. 마법사는 당절이 내민 종이를 받아 읽었다.

우르드 토벌전 이후, 일레힌 포이체카의 건강 이슈. 여섯 번째 봉우리 마탑의 주인이 다시 또 바뀐다? 사천당가 코퍼레이션, 의문의 발할라 시티 행···등등의 포털 토막 기사들이 마법사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별다르게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이게 뭐 어쨌다고?"

마법사가 묻자 당절이 홍홍대며 말했다.

"세상 돌아가는 걸 조금 지켜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넷 통신도 힘든 해발 만 미터 산맥 오지 위에 계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지금 바깥은 천지개벽하고 있어요. 알 헤임달 시티는 자체적인 대(大)개척을 준비 중이고 연방정부는 대대적인 영토 수복을 천명할 준비중이랍니다? 마탑에 틀어박혀서 연구만 하시는 분들이라 잘 모르실까봐 친히 알려드렸어요. 그때가 와도 이렇게 마탑에만 박혀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나 보자구요?"

"······."

당절의 말은 딱히 대단한 내용이 아닌, 그저 마탑의 마법사들을 향한 유치한 저주에 불과했다. 대충 너희들은 곧 언데드들과의 전쟁터에 끌려나가서 죽고말 거라는 내용의.

무림계 메가콥중 시가총액 3위, 당가주 아들의 행색이 저리도 솜털마냥 가볍다니. 정말 저자가 당가주의 아들이 맞긴 한 건가? 무인들이 쓴다는 인피면구 그런거 아니고?

아무튼 마법사는 그 종이를 괴물의 상어 주둥이에 홱 던져넣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던 그때였다.

일레힌 포이체카의 음성이 마탑을 쩌렁쩌렁 울리며, 끝 벽에 붙어있던 서재가 활짝 열린 것이.

[ 들여라. ]

마법사들은 실제로 마탑주가 당절을 곧바로 불러들이자, 하나같이 당황을 머금었다. 그것은 상황을 지켜보던 반 루벤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절망이 깃들었다.

부름을 받은 당절은 모두의 앞에서 희게 웃어보이며 마탑주의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청록빛 괴물의 머리에 타 있는 마법사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을 뿐이다.

*

열렸던 마탑주 서재의 입구가 서서히 닫힌다.

조심히 서재에 들어온 당절의 눈앞에는, 십수 개의 마력 구체에 의지하며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가 보였다. 연신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음에도 기운은 밖으로 흘러 나왔으며, 마탑주의 안색은 당절의 예상대로 좋지 못했다.

"나를 도울 방도가 있다라? 한 번 말해보아라."

역시나 일레힌 포이체카는 다급한 기색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완연한 청년의 목소리가 서재에 청량히도 울려퍼졌다.

흥미로우면서도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질문하는 일레힌 포이체카의 앞에서, 당절은 낡은 심법서 하나와 두꺼운 칩 하나를 당당히 꺼내보였다. 중성적인 그의 목소리가 자신감을 머금고 울려퍼졌다.

"무림계 기업의 심법들이 알게모르게 이 여섯 번째 마탑으로 흘러 들어가더라구요. 이것은 당문의 외인들이 익히는 것이 아닌, 가인들이 실제로 익히는 심법이랍니다. 마탑주께서는 무림계의 훌륭한 심법이 필요하신 것, 맞지요?"

당절은 그것들을 조심히 바닥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방금 말한 내용은 확실한 사실일 것이다.

당가의 정보원들이 진즉 조사를 마친 내용이니까.

일레힌 포이체카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무림계의 고절한 심법이 필요하다. 고로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단전을 만들어 회로를 고칠 시간을 벌고 생로를 꾀한다. 그것이 당가의 판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탑주는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당가의 심법이라?"

"그렇답니다. 마탑주님."

생각했던 그대로의 반응.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는 역시나 단전을 만들어 일을 해결할 생각인듯 싶었다. 많이 알려지진 않았어도 역사적으로도 몇 번 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를 살릴 수 있는 훌륭한 심법이 자신의 손에 있었다.

그것이 기꺼운 당절은 싱긋 웃으며 여유로운 태도로 다음 행동을 이었다.

곧 당절의 품에서 인공지능이 그려낸 몇 개의 몽타주가 빠져나왔다. 사실 몽타주라고 하기도 힘든 것이, 실제 얼굴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요. 마탑의 손님 중에 당가에서 원하는 사람이 있답니다~반 바이오의 오너 일가 도망자 두 명······아, 그리고 이 사내도 데려가야겠습니다. 꼭 찾고 싶다는 분이 바깥에 계셔서.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님의 마탑에 있다고 들었는데, 확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당절이 내민 몽타주는 총 세 장.

잉그리드 반 레나, 잉그리드 반 루벤카.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은 레반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그 몽타주들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와 유심히 보더니 팔짱을 끼며 말했다.

"고작 저 셋을 데려가는 대가로 당가의 독문심법을 내어주겠다? 저 셋의 가치가 그리도 대단한가?"

무슨 소리를.

저 셋의 가치보다야 당가의 심법이 더욱 값지지.

당절은 마탑주가 보기보다 욕심이 많은 자라고 생각하며 손을 저었다.

"물론 그건 아닙니다 마탑주님. 아시다시피 당가가 크게 손해보는 입장이니 나중에 조금 더 원하는 게 있을 수도 있지만, 정말로 괜찮은 조건이지요? 아시겠지만 사천당가는 은원이 확실하답니다. 이렇게 감히 마탑까지 걸음할 정도로요."

하하!

그러자 일레힌 포이체카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러고는 이내.

"감히 걸음했다는 그 말이 맞군."

"그러니까······네?"

예상외로 마탑주가 단번에 거절의 뜻을 내비치자, 오히려 당절의 몸이 달아올랐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거래라고 생각했다. 그런 마탑주가 거절의 뜻을 비친것은 너무도 의외였다. 마탑주라고 해서 죽음에 초연할 리가 있겠는가?

당절은 의문스러운 기색을 비쳤으나 그래도 곧 희희 웃으며 여유를 잃지 않았다. 마탑주가 애타게 찾던 절세의 심법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었다. 다른 무림계 기업들은 절대로 내어줄리가 없는, 그 꿀단지가.

"마탑주님~이건 우리 사천당가의 가인중에서도 수준 높은 직계들만이 익히는 만류원독신공(萬流元毒神功)이랍니다. 비록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무당이나 소림과 적당히 비견될 만 합니다. 골수까지 치미는 극독을 버텨내려면 애당초 그만한······."

당절이 그리 말할 때였다.

콰과광!

"!"

마탑주에게 마력을 주입하던 구체들이 밝은 빛을 내며 자취를 감추었다. 동시에 서재의 삼면을 이루는 책장이 당절의 육신을 압축시켜 버릴 듯 굉음을 내며 밀려오더니, 당절과 일레힌 포이체카가 일 평보다 좁은 거리에서, 그것도 몇 치 거리만을 두고 대면하게 되었다.

화악!

그에 놀란 당절의 무복이 활짝 열리며 비단옷의 내면을 빼곡히 채운 당가의 극독과 테크 암기들이 드러났다. 새끼 거미처럼 생긴, 무복 안에 붙어있던 기계 벌레들이 불개미처럼 쏟아져나오며 마탑주를 공격하려했으나, 화들짝 놀란 당절이 손을 저으며 그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의아한 얼굴의 당절은 일레힌 포이체카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연녹색 머릿결에 진득한 마력이 깃들며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격노로 붉게 물든 마탑주의 얼굴.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흥미를 보이던 좀 전과의 기색과는 정반대였다.

마탑주의 음성이, 비좁아진 서재에 낮게 깔렸다.

"사천당가의 가풍(家風)은 오만인가?"

당절은 일레힌 포이체카의 기세에 밀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무어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육신은 당절의 의지를 벗어난지 오래였다. 힘을 써보았으나 손가락 하나 꿈쩍조차 하질 않았다.

"······."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우르드 토벌전에서 마나 회로까지 태워버렸던 대혈전 끝에 초죽음 상태가 되어 강제로 정양에 들었다고 들었다. 그 소식은 마법계 상류층 전반에도 알음알음 퍼져있으니 거짓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일레힌 포이체카가 내보이는 기세는······.

"네놈은 가문의 심공을 제대로 못 익혔나보구나. 독이 골수까지 치밀어 돌아버린 게 아니고서야 감히, 내 마탑에 멋대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그따위로 오만하고 너절하게 굴 리가 없지 않으냐."

푸욱!

마탑주의 노한 음성과 동시에 주변의 서책들에서 날카로운 책갈피들이 스르륵 빠져 나오더니, 당절의 비단 무복을 뚫어내고도 모자라 손등까지 파고들어 갔다. 그래도 당가의 직계라는 것을 알면 손속에 미련을 두기 마련인데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어야 할 여섯 번째 마탑의 주인은 지금, 당절의 앞에서 절대적인 힘을 내보이고 있었다.

"······."

당절의 반응은 급변하는 상황을 절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호의적인 기색을 보이던 마탑주가 왜 돌변해 이런다는 말인가? 자신이 훌륭한 당가의 심공을 직접 가져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일레힌 마탑주는 죽어가는 몸이 아니던가. 심지어 마탑의 마법사들까지도, 그를 살릴 방도가 있다는 말에 동요하지 않았던가.

헌데 왜?

"당가의 가주가 직접 행차했어도 네놈처럼 오만히 굴지는 못했을 거다. 나의 허락도 없이 마탑에 들어와서, 나를 죽이기라도 할 셈이었는가? 그깟 심공 따위로 무얼 어쩐다?"

마탑주의 뜬금없는 비약에 당절이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 짓눌려 속박당했던 육신이 잠시간 힘을 되찾으며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무슨! 아녜요! 마탑에서 마탑주를 어떻게 도모하겠나요? 제가 잠시 흥에 도취되어 오만했던 것은 인정합니다만, 제가 바보천치도 아니고 그저 정당한 거래를—"

[ 그만. ]

당절의 머릿속에 천둥처럼 울리는 음성.

서재의 가장자리까지 아득히 메워버린 생생한 마력에 당절의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마력의 농도가 너무도 짙은 탓에 서재 공간이 구불거려보일 지경. 이것은 절대 죽어가는 몸으로 보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아까 전 커피를 마시던 마법사의 마력보다도 월등히 격 높은 마력이 당절을 육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당절보다도 격이 높은, 9레벨 마법사의 거대한 기운이.

'······그는 멀쩡하다. 어떻게?'

사천당가의 당절은, 죽어가는 일레힌 포이체카의 구세주가 되어야만 했는데. 그것을 기대하고 왔는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몇 년간 두문불출하던 마탑주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연이라도 얻은 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넋이 나간 당절이 희희 웃으며 말했다.

"혹시 마탑주님께서는 심법을 이미 구하셨던 걸까요? 너무 어긋났네요.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걸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심법들 따위에 마탑주님의 기운을 받아낼 만큼 제대로 된 것이 있을리가—?"

[ 궁금하군. ]

이윽고, 멍하니 앉아 웃고있는 당절의 혼잣말과 상념을 파고들어 끊어낸 일레힌 포이체카의 음산한 음성이, 천둥처럼 우릉거리며 그의 머릿속을 때려울렸다.

[ 대단한 사천당가에서, 오만한 직계의 실수를 바로잡는 값으로 나의 마탑에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 ]

#57화. 여섯 번째 봉우리의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

#57화.

자정을 넘긴 시각.

"그 당가놈, 상당히 좆됐군."

청록빛 괴물을 침실 밖에 세워두고 들어온 마법사를 향해, 루벤카와의 전투에서 입은 내상을 며칠에 걸쳐 모두 회복한 내가 한 말이었다.

사흘 전.

당가주의 넷째 아들이 제 발로 마탑에 기어들어와 오만하게 구는 바람에 마탑주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했다.

때마침 마나회로의 재건을 거의 마친 뒤 몸이 근질근질했을, 몇 년간 강제적으로 성정을 죽이고 살아야 했던 일레힌 포이체카의 심기를.

마탑주가 당연히 오늘내일하는 줄 알았겠지. 일레힌 포이체카가 마나 회로 재건에 성공한 것은, 이 마탑의 마법사들조차 까맣게 모르는 내용이니까.

"응. 근데 걔는 들어올 때부터 너무 까불길래 큰일 치를 것 같더라."

좆됐다는 내 말에 마법사는 대수롭지 않게 호응했다.

나는 틀었던 가부좌를 풀고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청록빛의 괴물을 다루는 이 마법사는, 내가 일레힌 포이체카에게 심법을 전수한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이로, 일레힌 포이체카에게 심법을 전수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내게 나름의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루베르겐과 함께 마탑에 당도했던 날, 대놓고 핀잔을 주던 그때와 지금은 아예 딴판이었다. 성격이 더러운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보면 그냥 툴툴대기를 좋아하는 마법사였다.

그는 몇 없는 팔찌 네 개의 구성원 중에서도 마탑주와 상당히 가까웠다. 그때 마공학 병사들을 칼로 때려 부순 일만 아니었다면, 더 가까워진 뒤 콩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참 아쉽게 되었군.

아무튼 그에게 지금의 상황을 듣고 내뱉은 감상이 바로 저것이었다.

그 당가주의 넷째 아들이라는 놈은 좆된것이 틀림없다. 태어나자마자 대가리에 강제로 전뇌 컨트롤칩이 박혀서 반 바이오에 유배됐던 과거의 나처럼.

연방법원의 서류와 다른 이것저것을 들고 루벤카와 레나를 찾아왔다고 해도, 또한 마탑주가 힘을 잃고 시름시름 앓는 중이라고 해도, 더해서 그런 마탑주를 고칠 방법까지 가지고 왔다고 치더라도—

대체 무슨 깡인지 모르겠군.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나와 레나, 루벤카가 조용히 마탑에서 지낸 지도 어언 넉 달이 넘게 지났으니, 언제까지고 당가가 우리를 찾아내지 못한채 가만히 시간만 보낼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찾기도 힘든 이 발할라의 산꼭대기 마탑까지 직접 걸음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그로 인해 벌어진 지금의 결과와는 별개로, 참 끔찍하고도 집요한 놈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로키 시티의 '신동경' 같은 군벌 세력들의 전쟁터나 시티 장벽 밖에 있었다고 해도 쫓아왔을 것만 같았다.

마법사는 재미있다는 듯, 침대에 털썩 눕더니 말했다.

"대단한 뒷배경을 지고 태어나 여태까지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었을 놈이 얼마나 밑도끝도 없이 오만해질 수 있는지 놈을 보면서 깨달았다. 당가의 무인들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골수까지 독이 치밀어서 회까닥 돌아버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던데, 사실일지도 모르겠네."

나는 그의 말을 듣고는 생각했다.

그거, 사실 맞는데.

인간들이 괜히 사천당가와 엮이기 싫어하겠는가.

애시당초 독공을 익힐 마음을 먹었다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독공으로 상승의 경지를 밟을수록 골수와 뇌수까지 독기가 치밀어, 지닌 성질이 공격적이고 날카롭게 바뀌며 매사 예민하게 굴어대는 것이 독공을 익힌 무인들의 특징이니까.

당씨들의 성격이 무작정 더럽고 독한 것이 아니라 마땅한 이유가 있다. 괜히 중원무림에서도 정파, 사파, 마도 할 것 없이 꺼리고 피했던 놈들이 아니지.

대강 절정쯤의 경지에 오른 당가인이라면 한 달에 스무날은 가시 돋친듯 예민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독공으로 화경의 경지에 오른다면 또 모를까.

그래도 당가의 독공은 마공이나 허술한 사파 무공들처럼 아예 정신이 미쳐버리진 않으니, 정사지간의 취급이라도 받았던 것이다. 위험한 독을 다루는 만큼 의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놈들이라, 제 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챙겼던 이유도 있었고.

만약 기맥과 전신 골수로 스며드는 독기를 정말 완벽하게 다스린다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천하제일독인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예민하고 괴팍하며 종잡기가 힘든, 히스테릭한 '평범한 당가의 무인' 이 되는 것이지.

그러나 그렇기에 당가가 그만한 위치에 오를 수 있던 거다. 당가만의 독특한 독기(毒氣)와 집념이 어우러지면 상대하는 입장에서 당가만큼 무섭고 괴이하며 어려운 놈들이 또 없다.

게다가 독이 발달했으니 암기까지 곧잘 쓴다.

막강한 극독과 암기, 그리고 독기와 집요함.

듣기만 해도 꺼려지는 단어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놈은, 때가 안 좋았군.'

사천당가의 재가를 받았는지, 아니면 당절이라는 놈의 독단인지는 몰라도 당가의 심공으로 거래를 트려던 선택만큼은 괜찮았다.

내가 처음 마탑에 발을 들였을 때 마탑주의 상태라면, 놈이 조금 오만하게 굴었더라도 거래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순한 마력 구체에 의지해 하루하루 연명하는 상태였고, 루벤카와 레나는 실상 루베르겐이 홱 던져놓고간 짐덩이나 다름없으니까.

다만 나라는 변수로 인해 한 박자가 늦어, 당절이라는 놈에겐 일이 풀 수 없을만큼 꼬였을 뿐.

그런 의미에서 당절이라는 당가주의 넷째 놈은, 재수가 더럽게도 없었다. 몇 년간 두문불출하던 일레힌 마탑주가 힘을 되찾았을 줄 놈이 어찌 알았겠나.

누울 자리를 정확히 보고 다리를 뻗었는데, 설마 침상이 무너져버릴 줄은 몰랐겠지.

아무튼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것,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가 원래의 불같은 성정을 열심히 내주기를 바라야겠군.

"당가에서 어떻게 나올까? 진짜 재미있겠다."

내가 상념에 빠져있자, 침대에 자빠져있던 마법사가 기대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그는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이 정말로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눈치였다. 그 당절이라는 놈도 그렇지만, 이 마법사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뭐 어떻게 하긴. 실수좀 했답시고 혈육을 내버리지는 않겠지.'

특히 가문의 정으로 똘똘 뭉친 당가라면 더욱.

그리고 놈이 당가주의 아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당가쪽에서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당절이라는 놈은 비교적 몸 성하게 마탑을 빠져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당가의 입장에서는 속이 심히 쓰리고 상하겠으나, 적정선에서 타협해 그들의 표면적인 자존심이나마 지키려 하겠지. 무림계 명문가의 아들이 무슨 볼모마냥 마탑에 계속 붙잡혀있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또 없을 테니까.

그래도 골치는 좀 썩겠군.

자금력이 만만찮은 일레힌 그룹 출신의 마탑주가 크레딧좀 던져준다고 해서 넘어갈 인간도 아니고, 마탑 역시도 자존심 문제가 끼어있다. 허락없이 마탑에 멋대로 출입했다는 것은, 마탑주의 권위에 도전한 것과도 다름없기에.

어쩌면 당절이라는 놈의 헛발질은 여섯 번째 봉우리의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의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마탑주가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듯했다. 아마도, 나와는 관계 없겠지만.

"근데 그 당가놈, 조금 미친 자식같아. 자기애가 심하게 강한 것 같기도하고. 계속 넋이 나가있다가 갑자기 오르가즘? 뭐 그런 거를 느끼던데. 약에 취한 사람처럼 혼자 갑자기 황홀경에 빠진다고 해야하나. 목소리도 괜히 좀···."

"실제로도 반쯤 미쳐있는 놈이라 그렇겠지."

"그래도 당가주 아들이라는 놈이 뭐 저래?"

"그야, 사천당가니까."

내 말에 그는 잠시간 말이 없더니, 얼마 가지 않아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가, 마법의 단어네. 분명 무림계인데도 마법의 단어야. 세계에 마약을 팔아먹는 놈들이라 그런가. 무당이나 소림 출신이 저랬으면 연방 토픽 1페이지를 장식하고도 남았어."

그는 그리 말하다가 돌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루벤카와 레나라는 여자와는 별개로 너를 강력하게 원하는 사람이 있다던데. 당가 말고도 누가 더 엮여있나봐."

날 찾는다면 당장 생각나는 놈들이······.

나를 혼내주고야 말겠다던 카스트라 뷔에탕.

영약도 잃고 친씨아마저 잃은 상선의 임원 칼스.

그리고 내가 죽여버린 루 막슨 출신의 정치인을 호위하던 7레벨 마법사와 6레벨 기사들.

대충 추리면 그 셋 정도가 유력한가.

정크타운에 있을 등평위가 달마다 몇 만 크레딧을 떼어먹겠답시고, 당가주의 아들에게 청탁을 넣어 마탑까지 보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어찌 되었건.

"전혀 모르겠군. 누가 나를 찾는다는 거지?"

나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저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겠지.

* * *

마탑의 중앙 홀.

루벤카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일찌감치 나와서 자신을 마탑 밖으로 끌고 나갔어야 할 당가의 당절이라는 사내가 며칠째 마탑주의 서재에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까.

마탑은 고요했고, 사흘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와 함께 온 일행들도 아는 것이 없어보였다.

저 서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그 빌어먹을 당가의 자식이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를 살릴 방법을······정말 가지고 온 걸까?

그렇게 루벤카가 하염없이 닫혀있는 마탑주의 서재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응?"

저 멀리서 레반이 말짱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리고는 곧바로 닫혀있던 마탑주의 서재를 자연스레 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 아, 아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마탑주의 서재에 출입하는 레반의 뒷모습에, 루벤카가 뭔가를 말하려다 어버버 헛숨을 뱉고는 말을 꺼내길 포기했다. 저걸 섣불리 이해하려고 달려들었다간 괜히 머릿속만 더 복잡해지겠지.

.

쿵—

마탑주의 서재에 들어온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침실에서 그 마법사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작스럽게 일레힌 마탑주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마탑주님, 부르셨습니까?"

서재로 들어온 나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듬성듬성 비어있는 책장으로 삼면이 막힌 방에 갇혀 넋을 놓고 히히덕대는 사내였다.

저놈이 아마 당가의 당절이라는 놈일 테지.

— 히히.

당가의 무인임을 뜻하는 비단 무복을 입고 있는 사내. 놈은 침실에서 마법사에게 들었던 것처럼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실실 웃을 수 있는 놈은 세상에 몇 없을 테니.

내가 놈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다시 돌리자.

그간 들렀던 마탑주의 서재와는 또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몸이 마치 높은 천공에 붕 떠 있는듯했다.

눈과 구름으로 뒤덮인 만년설산의 장엄한 절경과 별무리가 박힌 남색빛의 하늘이 서재의 뒤로 대비를 이루어 실로 장관이었다. 저 풍경을 가리고 있던 거대한 책장이 빠진탓에 저리 보이는 듯했다.

산맥의 봉우리 위에 세워진 이 마탑주의 서재는 사실, 천장과 바닥뿐만 아니라 사방면의 벽이 유리처럼 투명하여 발할라의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삼면의 거대한 책장에 가려져있던 진짜 마탑주만의 공간. 거기에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스슷—

그리고, 이 공간의 중심에서 자유로이 떠있는 마탑주는 화려한 깃펜을 든 채 집중하여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웬 글씨가 빼곡히 써져있는 종이들이 별의 위성처럼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때, 마탑주의 주위를 맴돌던 하나의 종이가 내 발치에 팔랑팔랑 떨어졌다. 종이를 메운 진지한 필체들을 보면 무언가 중요한 내용일 듯했는데도, 마탑주는 그것을 딱히 숨기고픈 마음이 없어보였다.

"?"

나는 그 종이를 집어 들고 자세히 확인했다.

흑색과 녹색의 필체가 어우러져 있는 메모지.

그것의 내용을 천천히 살펴보니, 무려 사흘 내리 이어진 일레힌 포이체카와 어떤 이들의 필담 내용이었다.

그 양이 너무나 방대하여 단 몇 장만 보고는 그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만이 적혀있는 메모지도 있었고, 영문 모를 외계어들이 적혀있는 것도 있었다. 와중에 당가의 원로원이니 장로니 하는 말들이 간간이 보였다.

그리고 몇 장의 종이를 더 보자, 그 어떤 이들이 사천당가의 '원로' 라 불리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종이는 마탑주와 당가 원로들간의 소통 방식인 듯했는데, 대체로 마탑주가 우위의 입장에 있는 듯 했다. 나는 마탑주의 가장 외곽을 떠도는 종이들을 몇 개와 안쪽을 맴도는 종이들을 몇 장씩 훑어 보았다.

그러다 보게된 하나의 종이에는 '반 바이오의 자매와 크레딧은 포기할 터이니, 레반이라는 시종은 내어달라.' 라는 식의 흑색 글씨가 있었는데, 일레힌 포이체카의 '불가'라는 녹색 필체가 그 밑에 똑똑히 박혀있었다.

"······."

마탑주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때부터 종이 엿보기를 멈춘채로 말없이 그의 행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순간이었다.

사각사각.

일레힌 포이체카가 들고있던 깃펜을 휘두르자, 텅 비어있던 커다란 종이 한장이 어디선가 떠오르더니, 마력이 깃든 녹색의 글씨체가 또박또박 적히기 시작했다.

— 그럼 이것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 협의의 모든 내용은 여섯 번째 봉우리,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에 봉인되어 마탑의 주인이 바뀌기 전까지 유효합니다. 누구든 이 협의를 파기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나의 마탑에 정식으로 방문하십시오.

그러더니 그 투명한 종이는 책장 속에 갇혀있던 당절에게로 팔랑팔랑 날아갔다.

우득.

넋이 나가있던 당절이라는 놈은 그 투명한 종이를 보자마자, 곧장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를 내고는 지장을 찍었다. 우거진 녹음과도 같은 일레힌의 마력이 놈의 검붉은 피와 섞여 딱딱하게 굳었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그즉시 자신의 주위를 맴돌던 모든 종이를 거둬들이더니, 혈지장이 찍힌 그 종이와 함께 차곡차곡 쌓아 정리한 뒤 강대한 마력을 담아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눈부신 빛과 함께 서재가 거꾸로 뒤집어지며, 방금 전과는 또 다른 풍경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설산목이 우거진 숲같은 장소에, 빌딩만큼 거대한 설산목들이 차례대로 서있었다. 마을 어귀를 지키는 정승처럼 고고히 선 거대한 설산목들은 각자가 무시못할 기이한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그저 추측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수십 수백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아마도 전대의 여섯 번째 봉우리 마탑주들이 설산목에 저장해두었을 마력이 아닐까 싶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농후하고 강대한 마력의 편린들이 그곳에서 흘러나와 이 정체모를 설산목의 숲을 메우고 있었다.

비대하게 자란 설산목들은 하나의 대열을 이루고 있었는데,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는 그중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바깥쪽 설산목의 앞에 섰다.

그는 방금의 그 종이들을 깨끗하게 정리해 설산목의 표면에 꽂아 넣고 자신의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작았던 설산목의 크기가 조금 자람과 동시에 꽂아넣은 종이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는 묵묵한 태도로 일련의 과정을 전부 끝내고 나서야, 빙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58화. 죽더라도 좋습니다.

#58화.

빙긋 웃으며 돌아선 일레힌 포이체카는 잠시 숨을 고르곤 말했다.

"그때 내어주었던 에센스가 많은 도움이 되었나?"

아마도 절정 경지에 오른 것을 풀어 말하는 듯했다.

9레벨급의 힘을 되찾은 마탑주쯤 되면, 내가 이룬 성취 정도야 어렵잖게 알아볼 수 있으리라. 꽤 흥미로워하는 그의 말에 나는 숨김없이 대답했다.

"예,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르드, 그 괴물에서 뽑아낸 정수가 그 값을 했군."

"아닙니다. 그 귀물은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내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조심히 꺼내 보이자, 마탑주가 놀랍다는 듯한 얼굴로 침음성을 흘렸다.

"허!"

9레벨의 좀비에서 뽑아낸 이 에센스는, 몸이 다 부서진 상황에 들이부었다간 혹시 낭비되는 기운이 있을까 염려해 아껴둔 것이다. 게다가 이런 물건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중히 사용할 생각이었다. 본신의 경지가 고절해질수록 더욱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천고의 영약이기에.

"중급의 에센스로 단 며칠만에 7레벨이라는 벽을 넘었다. 그것도 저주에 당해 기력이 잔뜩 쇠한 육신으로···그렇다면 정신적인 깨달음은 진즉에 상위 경지에 이르기 충분했다는 말이겠군."

"그저 천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그러자, 곧장 호통과도 같은 그의 일갈이 들려왔다.

"기존의 몇 단계를 가뿐하게 뛰어넘어 7레벨의 경지를 덜컥 밟아놓고서 입으로는 운이 좋았다라? 며칠간 중급의 에센스를 마시고 몸을 회복한다고 다들 7레벨의 경지에 오른다던가? 우습지도 않은 말은 이제 그만하지. 그렇게 따지자면 시티의 재벌과 기업의 갑부들은 죄다 그 이상의 경지를 이루었어야 한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코웃음을 치며 그리 일갈했다. 내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하기야 사무라이 륭만 해도 가진 내공만큼은 7레벨 이상이었으나 절정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을 정도이니.

"쓰잘데기 없는 겸손은 어디서 배웠나?"

그래도 그는 더 이상 성취에 관해 캐묻지는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어디서도 못구할 절세 심법을 떡하니 전수해준 돌연변이인데, 7레벨에 쉬이 오른게 사실 큰 대수겠는가. 일레힌 포이체카에게 나는 그런 존재였다.

"이거나 봐라."

그러던 그는 갑자기 몽타주 세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거기에는 레나와 루벤카, 그리고 내 얼굴이 사진처럼 그려져 있었는데 수준 높은 Ai가 그렸는지 실제보다도 더욱 실제같았다. 조금 소름끼치는 점은, 루벤카가 당가의 눈을 피하려 고의적으로 바꾼 외모와 똑같이 그려져있다는 것이었다.

밝은 백금발에 마나 문신의 모양까지, 발할라 산맥 밑 객점에서 보았던 그대로의 외형.

최소한 이 마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당가의 감시가 붙어있었던 모양. 아마도 그 당절이라는 놈이 가지고온 물건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보여주는 거지?

내가 한창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일레힌 포이체카가 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받아 들고있던 몽타주 세 장이 물에 갠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사라지는 몽타주 종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은 예상을 하고 있었음에도 내 두 귀를 강하게 의심하게 만드는, 꽤 놀라운 말이었다.

"나의 마탑에 제멋대로 침입한 당가의 오만한 직계를 조용히 수르트 시티로 돌려보내주는 대신, 앞으로 더는 반 바이오의 망령들을 쫓지 않기로 당가의 원로들과 조율을 끝냈다. 네놈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밥 먹다가 당가의 맹독에 녹아내릴 일은 이제 없겠지."

당절이라는 놈의 실수를 덮어주고 이 마탑에서 몸 성히 풀어주는 대신, 당가도 더이상 반 바이오 오너일가를 쫓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

나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그렇습니까. 그렇군요."

아까 보았던 종이의 협의 내용이 전부 사실이었군.

자연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좀전에 마탑주의 서재에서 본 광경을 조합해보면 어렴풋하게 짐작 정도야 할 수 있었다. 허나 실제로 전해듣는 것과 짐작했던 것의 차이는 컸다. 루벤카의 광역 마법에 직격당해 온 살갗이 타들어갔을 때보다 맥이 빠르게 뛰었다.

이리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매듭이 아니었는데.

잉그리드 반 회장의 폭주로 당가의 직원들이 죽었다고 들었고, 루벤카년은 당가의 감시자들을 몇 명이나 죽였다.

원래대로라면 당장이라도 연방법원 재판장에 수갑을 차고 세워진 채 이상한 혐의들이 덕지덕지 붙어 감옥에 처박혔어야했다. 그런데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는 단 사흘 만에 그 독하고 집요한 당가와 이런 협의를 이끌어 낸 것이다.

당가의 직계, 당절이라는 놈이 상황을 크게 잘못 짚어 알아서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또 발할라 시티의 거물인 마탑주라고 해도 당가의 행사에 제동을 거는 것은 나름의 부담이 있을 터.

뷔에탕의 저주를 가지고 협상할 때와는 결이 달랐다.

그것은 서로의 목숨줄을 붙여주는 거래일 뿐이었다.

나는 무선대지신공을 전수해 마탑주의 목숨을 살리는 대신, 마탑주는 뷔에탕의 저주를 풀어주는 것이 맹약의 내용. 그러나 이번 당가에서 나와 레나 자매에게 뻗친 마수를 벗겨준 것은 오로지 일레힌 포이체카의 배려와도 같았다.

세상이 합리적으로만 돌아가는건 아닐 테지만, 마탑주쯤 되는 거물이 내게 이 정도의 호의를 보일 줄이야. 의외였다. 성정이 불같기로 유명하다더니, 정말로 예측하기 힘든 불길과도 같군.

내가 '그렇군요' 말고는 별다른 말을 더 꺼내지 못하자, 일레힌 포이체카는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듯 슬며시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다만, 여섯 번째 봉우리의 주인이 바뀌면 즉시 폐기될 협의지. 너는 앞으로도 마탑주가 바뀌지 않길 빌어야겠군."

일레힌 포이체카에게 변고가 생겨 마탑주가 교체된다면 사라질 협의라는 뜻. 그러나 그 말속에서조차 호의를 느낄 수 있었다. 발할라의 마탑주가 그리 쉽게 바뀔 리 없기에.

발할라 시티의 다섯 마탑주 중, 일레힌 포이체카를 제외하면 내가 알기로 근 수십 년간 바뀐 마탑주는 아무도 없다. 어지간하면 당가와 일레힌 마탑의 협의가 원점으로 돌아갈 일은 잘 없다는 얘기다.

여운과도 비슷한 감정이 길게 남았다.

작금의 상황을 어찌 납득해야 하는가.

나는 그 짧은 새, 마탑주가 내게 뭔가 더 원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탑주의 목숨 값은 감히 측정하기조차 힘들 테니, 이것은 어쩌면 정당한 거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라며······같잖은 자기 합리화와 불신의 경계를 아슬하게 오가던 도중, 일레힌 포이체카가 대놓고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당돌하게 마나의 맹약을 운운할 때부터 느낀 것인데, 어떻게 마탑주의 말조차 믿지 못하고 불신하는군. 목숨을 살려준 마탑주도 믿지 못하는데 세상에 따로 믿을 이가 있나?"

"······."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지는 않았을 터.

혼란으로 가득한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건가.

아니, 아마도 9레벨이라는 초월의 영역에 올라선 자의 직관(直觀)이리라.

나는 마탑주의 웃음섞인 말에 생각을 고쳐먹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 얼마나 상선같은 개놈들의 뒤통수질에 뇌가 절여졌으면 마나의 맹약마저 받아들인 마탑주까지 의심하나 싶어서.

"마탑주의 체면이 있는데 크레딧 몇 푼에 저런 놈을 쉽게 풀어줄 수는 없지. 그런데 마침 당가에서 그토록 원하는 이들이 나의 마탑에 있어 그들을 골려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적선 한번 받은셈 쳐."

"예. 적선이 보통 적선이 아니군요."

나는 덧붙인 마탑주의 몇 마디를 듣고 적당히 납득하는 모습을 보이기로 했다. 마탑주가 적선한 셈 쳤노라고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했으니, 더 이상 불신하는 모습을 보이며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카스트라 뷔에탕의 강화된 저주 마법과 당가의 추격. 마탑에서만 두 개의 거대한 짐덩이를 털어낸 것이 되었다. 덕분에 일레힌 포이체카의 연녹색 머릿결이 마치 든든하고 푸른 산맥처럼 보이려고 한다.

나는 재차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드립니다. 마탑주님."

마탑주는 나름 흡족한 얼굴로 말을 더 늘어놓았다.

"나도 이번 일로 얻은 게 없지는 않으니 과히 예의차릴 것 없다. 그리고 반 루벤카라는 아이는 시립 아카데미의 학장이 꽤 아끼는 제자라지? 이로써 그 고지식한 학장께서도 이 마탑에 마음의 빚을 지게 되었구나."

들어보니 명확히 나 하나만을 보고 호의를 베푼건 아닌듯 하지만, 그러한들 어떻고 저러한들 어떠한가. 일레힌 포이체카의 권위에 힘입어 일행의 형편이 크게 나아진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아무튼, 당가의 얘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탑주는 몇 분간 대화를 멈추고 자신의 설산목을 어루만지다가, 별안간 화제를 돌리며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밝은 청년의 목소리였으나 자못 진중한 어조였다.

"그나저나 저 당가의 오만한 직계도 알고 있더군. 연방이 머지않아 영토 수복을 천명한다는 것을."

우드득.

마탑주의 발밑으로 두꺼운 나무뿌리가 솟아오르며 흔들그네처럼 생긴 나무 벤치를 만들어냈다. 그는 벤치의 한켠에 걸터앉더니 피곤하다는 듯이 머리를 뒤로 기대며 말했다.

"연방은 몇 년 전에도 그랬듯, 잃어버린 인류의 터전을 되찾자는 진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열겠지. 그렇다면 발할라의 다섯 마탑도 참여할 것이고, 마탑주인 나는 말할 것도 없다. 영토 수복과 더불어 언데드 토벌전에 참가하려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당분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터."

연방은 주기적으로 실력자들의 원정대를 꾸려 인류에 위해가 되는 네임드 시체의 토벌을 반복해왔다. 큰 토벌전 같은 경우 일레힌 포이체카같은 거물도 큰 부상을 입고 돌아와 정양에 들 정도였으니 그런 전투들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토 수복 천명이라는 거창한 말이 붙었으니, 일반적인 토벌전과는 규모의 궤를 달리할 듯했다. 일곱 거대도시 각지에서 좀비들의 곡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여하튼 그래서, 네놈은 마탑에서 하산한 뒤 갈 곳을 생각해 두었나? 딱히 없다면 산맥 밑에서 지내는 마법사들을 소개시켜 주마."

갈 곳이라. 소개라.

이제 슬슬 대화가 끝나갈 기미를 보였다.

이대로 가면 마탑주님 감사했습니다. 하고 서로 행복한 얼굴로 훈훈하게 헤어지는 장면이 그려졌다. 내가 둘둘 두르고 왔던 악연들은 일레힌 포이체카가 친히 끊어주었고, 당절이란 놈은 마탑주가 알아서 쫓아낼 것이니, 이제 마탑에 찰떡처럼 붙어있을 명분도 더이상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마탑주를 향해 망설임 없이 말했다.

"마탑주님, 저도 참여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일레힌 포이체카의 눈가가 주름을 만들며 꿈틀거렸다. 그는 곧 되물었다.

"···무엇에 참여하겠다는 말인가?"

루벤카와의 전투를 치른 직후였다.

이전, 나의 경지가 절정, 그러니까 7레벨에 오른 것은 확실하나 어딘가 많이 부족하고 찝찝했던 그 기분의 원인을 알아낸 때가.

[ 절정이 맞기는 맞군. ]

그것은 정기신(精氣神)의 균형이 크게 들어맞지 않는 것이 원인이었다. 무리(武理)로는 조화경에 진입한 정신에 비해 이제 고작 절정 초입인 한심한 육체간의 괴리가 너무도 큰 탓에 그렇게 느껴졌던 것인데, 감각이 뜨이고 세상과 가까워지는 절정에 이르니 그 괴리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이전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였다.

나도 정신이 조화경에 오른 것은 이번 생이 처음이라.

다만.

이 괴리를 해결하는 법은 나도 알고 있었다.

전생처럼 수많은 실전을 겪으며 정기신(精氣神)의 균형을 맞추고 바로잡는다면 몇 년이 가지 않아 해결될 일이었다. 다만 그것은 마탑에 처박혀 운공하거나 발할라 산맥 밑으로 내려가 양아치들을 때려 잡으며 칼을 휘두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연방이 영토 수복을 천명한다는 말은, 곧 시티 장벽 밖의 좀비들을 대대적으로 쓸어버리겠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연방 정부가 마탑에 참가를 강권하지는 않겠으나, 발할라 시티 전체의 경외와 존경을 받는 마탑인만큼 지금까지 마탑은 토벌과 수복전에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시티 장벽 밖 각지에서 네임드 토벌전과 큰 전투가 벌어질 테고, 일레힌 포이체카의 말대로 마탑 또한 그 전투에 참여하느라 당분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터.

그러니 정기신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실전이 필요한 내게는 커다란 기회였다. 강력하고 수준높은 마탑의 마법사들과 나름 안전하게 전장에서 구를 수 있는 기회.

그렇기에.

나는 촉촉해진 눈망울로,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채 결연함을 뽐냈다.

"일레힌 마탑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것이 이리 많은데, 어찌 이대로 인연을 등지고 마탑을 내려갈 수야 있겠습니까? 비록 일이 잘못되어 죽더라도 저는 좋습니다."

"······."

내 말에 형언할 수 없는 마탑주의 표정이 보였다.

당연히 일이 잘못 되어도, 죽을 생각은 단연코 없지만.

어차피 실전 경험을 빠르게 쌓아 정기신의 균형을 바로잡고 토대를 단단히 잡아야 한다면···.

안전하게. 강력한 마탑의 마법사들과.

조금 더 편하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뽀득-

내 주머니 속의 우르드 에센스가 빙글, 돌아갔다.

"그러니 이번 연방의 영토 수복에, 자랑스러운 마탑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해주십시오."

#59화. 병장기를 구합시다.

#59화.

나는 결연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끼익. 끼익.

마탑의 일원이 되어 연방의 영토 수복전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말에, 마탑주가 걸터앉은 나무벤치가 꽤 격하게 앞뒤로 흔들렸다. 그럼에도 그의 육신은 약간의 미동조차 없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뜸을 들이던 마탑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장벽 바깥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나?"

그야 잘 알지요. 어떻게 그걸 모르겠습니까.

저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만, 베풀어주신 만큼은 못해도 일부분이라도 갚고 떠나겠습니다. 그 정도 능력은 됩니다—라는 형식적인 멘트를 다 준비해 뒀건만, 마탑주는 내가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다음 말을 이어 붙였다.

"죽음에서 헤어 나온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몸으로, 마탑의 고강한 마법사들조차 꺼리는 일에 자원하겠다? 그러라고 당가나 연방의 얘기를 꺼낸게 아니니 그만 마탑을 떠나라. 정 원한다면 며칠 정도는 말미를 주마."

그의 말을 들어보면 단호한 거절처럼 느껴진다.

허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탑주의 저 태도는 거절이 아니라 얘기를 더 들어보겠다는 것에 가깝기에.

마탑주의 평소 거절 패턴이라면, 헛소리 말라는 얼굴로 대답조차 하지 않고 눈을 감아버렸어야 했다.

더 이상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거나 무언가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을때, 일레힌 포이체카는 조용히 눈을 감는 버릇이 있었다. 지난 시간동안 심공을 전수하며 눈여겨본 습관이다.

그 가능성을 확인한 나는, 가슴을 콱 부여잡고는 절절한 목소리로 고함 질렀다.

"마탑주님, 가슴 뜨거운 사내가 어찌 그럴 수···!"

"다른 속셈이 있는 게 눈에 훤한데도 끝까지 뻔뻔하게 굴 건가?"

눈치껏 입을 닫았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치켜뜨는 일레힌 포이체카.

아무래도 단전의 내공은 이전보다 충만한데, 연기의 내공까지는 무르익지 않은 터라 마탑주같은 거물을 속여먹기는 무리인 듯 싶다.

이제 잔꾀를 부려 그럴듯한 거짓말을 늘어놓아 봐야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공법으로 선회했다.

"사정이 있어, 전장으로 가 경험을 쌓고 싶습니다. 적어도 제 앞가림은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

시원한 대답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자세한 이유나 사정의 원인을 묻지도 않는 건가?

내가 솔직히 말을 고하자마자, 일레힌 포이체카는 그 즉시 허락하겠다는 듯 고개를 선선히 위아래로 끄덕이더니 작게 혼잣말을 했다.

이어진 혼잣말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잘 차지도 않는 티오가 하나 줄어서 좋군.

그러나 저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혼잣말을 하던 마탑주는 곧 목청을 가다듬더니,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그리도 살고 싶어 하던 놈이 갑작스럽게 죽으러 갈 일은 없으니 체면치레 정도는 하겠지. 하여간 장벽 바깥에서도 지금처럼 신경을 써줄 것이라 넘겨짚은 거라면 필시 후회할 거다. 장벽 바깥은 네놈보다 강한 마법사들도 죽어 나가는 곳임을 명심해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어찌 됐든 가장 중요한 마탑주의 허락을 받았으니, 나도 명쾌히 명심하겠노라 답하며 주머니속의 우르드 에센스를 만지작거렸다. 이 작고 아담한 에센스 병은, 만지기만 해도 몸과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효과가 있었다.

이윽고, 마음을 다 가라앉힌 내가 물었다.

"그런데 연방 정부의 공표가 언제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저것 할 일이 있는지라 시간이 조금 필요할 듯합니다."

"적어도 보름 안으로 윤곽이 잡힐 거다."

보름이면 한 달의 절반.

다행히 대비할 시간 정도는 넉넉하겠군.

당장 부러진 검도 새로이 장만해야 하니까.

보름이라는 말을 끝내고 돌아선 일레힌 포이체카는, 자신의 키보다 약간 큰 설산목의 표면 껍질에 손을 갖다댔다. 아까 당가와의 협의문을 집어넣은 그 설산목이었다.

"마탑주에 오른 뒤로 한참을 골골대느라 이 꼴이군. 다른 설산목에 비해 너무나 초라해서 힘이나 제대로 쓸런지."

"?"

그 말대로 그의 설산목은 다른 거대 설산목에 비해 아직 초라했다.

내가 여섯 번째 봉우리 마탑의 비사까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설산목 숲의 거대한 설산목들은 전대 마탑주들이 후대에 남겨 놓고 간 무엇일 것이다. 한데 마탑주가 지금 왜 저런 영문 모를 얘기를 꺼내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콰드득-

갑자기 웬 나무뿌리가 지면을 뚫고 예고없이 솟아올라 내 다리를 묶으려 들었다.

탓!

나는 곧바로 지면을 박차고 솟구쳐 경공을 펼쳤다. 뱀처럼 이리저리 휘어지며 내 신형을 쫓아오는 나무뿌리들은 굉장히 빨랐으나,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는 나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나는 설산목 숲의 얇은 가지들을 가볍게 딛으며 그 나무뿌리를 피해 다녔다.

약 오 분이 지나자.

"기본은 됐군. 두더지에 당할 일은 없겠어."

두더지. 땅속의 좀비들을 통칭하는 은어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설산목 껍질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아마 그 나름대로의 시험을 해본 듯싶었다. 나무뿌리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다시 땅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것은 그 나무뿌리들이 사라진 뒤의 일이었다.

"받아라. 예외의 경우라도 마탑에서 네 개의 팔찌를 받았으니, 다른 이들과도 형평성이 맞아야겠지."

그리 말한 일레힌 포이체카가 돌연 내 머리에 손을 뻗자, 이번에는 메마른 나무뿌리 대신 진한 청록색의 나무줄기가 땅 밑에서 자라나며 나의 두 팔을 부드럽게 감았다.

곧이어 뇌가 녹아내릴 만큼 정순한 기운이 두 팔에 천천히 주입되는 것이 느껴졌다.

"······."

나는 거부하지 않고 그 기운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뷔에탕의 저주를 이루는 마력과는 다른, 원한다면 언제든 몸 밖으로 빼낼 수 있는 마력임을 알 수 있었다.

순간, 유크 루베르겐 연방 집행관이 꺼내어 쓰던 청록빛의 마력과 뷔에탕의 살덩이 화신체를 잡아먹은 청록빛 괴물이 머릿속에서 교차되었다.

'그 청록빛들이, 이런 이유에서였나.'

청록빛의 마력이 두 팔에 자리잡자, 아무런 배움 없이도 이 마력의 사용법을 자연스레 터득할 수 있었다. 나는 양팔에서 묵직하게 전해져오는 마력의 박동을 느끼며 천천히 호흡했다.

잠시 뒤.

화악-

조금 지쳐 보이는 기색의 일레힌 포이체카가 손을 휘젓자, 배경은 다시 뒤집어지며 설산목의 숲에서 서재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아직도 책장의 벽에 갇혀 시시덕대고 있는 당절을 한심한 눈으로 흘기며 진중한 목소리로 충고를 늘어놓았다.

"7레벨, 진정한 실력자의 반열로 인정받는 경지다. 적어도 시티 안에서는 그 누구도 쉽게 무시하지 못할 거다. 어지간한 기업에서도 환영받겠지. 하지만 장벽 밖에서도 시티 내에서의 개념이 통용될 것이라 예단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조언을 끝낸 마탑주는 뭔갈 더 궁금해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마탑주의 청록빛 마력을 부여받은 지금이라면, 첫 번째 생의 부모 성함을 묻더라도 친절히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방금 그 움직임은, 경공(輕功)인가?"

"예, 무인들의 경공이 맞습니다."

"쓸만해 보이는군. 그것도 절세의 경공인가?"

"아, 이것은—"

그렇게 내가 대답을 하려던 차에 마탑주가 찝찝한 얼굴로 흐름을 끊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됐다. 하여간 민폐를 끼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못해도 보름 안으로 채비를 끝내고 마탑으로 돌아오도록. 이제 할 말은 다 끝났으니 나가봐."

"예,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는 마음 깊은 인사를 올린 뒤 발걸음을 돌렸다.

와중에 연신 시시덕대는 당가놈의 얼굴이 보였다.

그 위명높은 당가주의 넷째 아들.

이름이 당절이라던가? 저 이상한 녀석 덕분에 당가의 마수에서 수월하게 벗어날 수 있었으니, 나중에 만나면 밥이라도 한 끼 사야겠군.

"당절(當截). 이름이 좋구나."

기분이 매우 나아진 나는 책장 속에 갇혀 미친듯 실실대는 놈을 향해 슬쩍 엄지를 치켜올리고는, 마탑주의 서재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레반!"

나는 마탑주의 서재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레나와 루돌프, 아힘사가 같이 지내는 마탑 저층의 침실에 들렀다.

오랫동안 미쳐있어 그랬는지는 몰라도 레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반응이 뜨뜻미지근했고, 루벤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레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레반, 이제 몸은 괜찮아진 거야?"

"그래."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예전보다 너무 마른 것 같은데······."

몇 달 만에 제대로 마주한 레나는,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흑발이었던 머리는 루벤카와 비슷하게 염색이 되어 있었고 전신에는 신체 보호를 위한 위협적인 마나 문신이 가득했는데, 외관을 신경쓰지 않은 걸 보면 당연히 루벤카 그년의 짓이겠지.

또 미약하지만 이전보다 강해진 마력이 느껴졌는데, 지난 몇 달간 마탑에서 머물며 루벤카에게서 마법까지 더 배워 익힌듯했다.

아무튼 나는 간단한 안부를 묻고 답한 뒤, 마탑주와 있었던 일을 적당히 각색하고 조합해 풀어놓았다. 말할 것은 말하고 뺄 내용은 빼고.

"정말이야······?"

당연하게도, 여린 레나는 곧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흐아앙-하는 울음소리가 침실 내에 울려퍼졌다.

반 바이오 컴퍼니는 무너졌고 오너 일가는 살아있지만, 당가의 추격은 오늘로 잦아들 것이다. 레나와 루벤카가 무인들의 고향인 수르트 시티로 가지 않는 이상, 또한 일레힌 포이체카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이전처럼 도망다니며 슬럼가에 숨어지내야 할 일은 없겠지.

그리고 마탑의 일원으로 얼마 뒤 있을 연방의 영토 수복전에 참가한다는 얘기도 꺼내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도 같은 큰 반응이 없었다.

때마침 침실에 들어온 루벤카가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전해 듣고는 스산한 얼굴로 물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9레벨의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가 네게 큰 빚을 져서. 그걸로 몸도 고치고 좋은 영약도 얻고 경지도 올리고 당가의 추격도 뿌리질 수 있었다는 얘기지 지금? 그래서 마나 팔찌도 네 개였던거고? 마탑주는 이제 괜찮고? 당절 그 개새끼도 발할라에서 조용히 추방당할 거라고?"

나는 별다른 말없이 루벤카의 물음에 긍정했다.

"와, 맞구나. 그래 뭐.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냥 이해 안 하기로 했으니까······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렇게 거의 십 분이나 멍한 얼굴로 말이 없던 루벤카는 뜬금없이 메리를 데리고 침실의 구석으로 가 뭔가를 속닥거리더니, 저편에서 당당한 태도로 우쭐댔다. 표정은 뜻모를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고 메리는 뒤에서 우물쭈물대고 있었다.

"레반, 너 우리 메리랑 한번 잘래? 솔직히 예전부터 하고 싶었다며?"

아니나 다를까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둘이서 고작 저딴 내용을 상의하고 있었나.

저러니 내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미친년, 너나 많이 해라."

"왜? 메리 하나로는 도저히 만족 못 하겠어? 아힘사인가 쟤가 그렇게 잘해?"

진심으로 이해 못 하겠다는 루벤카의 말투.

"······."

"아~됐어 됐어 그럼. 분명히 네가 거절한거다?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

저 루벤카년은 평생 고맙다거나 감사하다거나, 신세 졌다는 말 자체를 배우지 않은게 분명했다. 고심끝에 한다는 게 보상으로 자기 시종과 잠자리를 갖게 해주겠다는 소리인가? 시간만 넉넉했다면 내가 친히 손찌검을 해가며 가르쳐주는 건데. 시기가 아쉽게 되었군.

이윽고, 루벤카는 그 아름다운 외모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를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포기했기에 지을 수 있는 환한 미소인 듯했다.

"레반 네 말이 사실이면, 이제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 근처로 거처를 옮길 수 있겠네. 교수님들께 연락을 드려봐야겠어."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

"이제 당가 새끼들도 손을 떼겠다, 언제까지 이 마탑에서 눈치 보며 답답하게 살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너처럼 그딴 수복전에 목숨 걸고 참가할 의리도 없고. 나는 당장 레나 데리고 시립 아카데미 근처 도시로 갈거니까, 이제 넌 너 하고 싶은 대로 알아서 살아. 반가웠어. 안녕."

흥겨워보이는 루벤카의 작은 입에서 말이 속사포처럼 튀어나왔다. 루벤카는 내 대답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는 듯 곧바로 몸을 빙글 돌려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 전의 잠자리 얘기로 우물쭈물대던 메리는 그런 루벤카를 슬며시 도와 널브러져 있던 짐을 챙겼다.

"아휴."

루벤카의 그 말에 옆에서 조용히 입을 닫고 있던 루돌프놈은 나를 안쓰럽다는 얼굴로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들으라는 듯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형님, 그럼 앞으로 좀 위험하겠네요."

"그래. 장벽 밖으로 갈 테니까 꽤 위험하겠지."

"부디 몸조심하시고 언제나 건강하십쇼 형님. 저는 비록 마카데미? 인가 뭔가로 가지만 먼발치에서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캬!"

루돌프놈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놈은 마탑 어디에서 약을 잘못 먹었나?

나는 간지러운 귓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돌프야, 너는 나랑 가야지."

"네?"

"넌 나랑 간다고."

그에 루돌프놈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자신의 관자놀이에 박혀있는 링크포트를 툭툭 치며 말한다.

"아, 형님이 오래 아프셔가지고 까먹으셨나 보다. 아시다시피 저는 레나님의 수발을 들어야해가지고. 거기 못가요."

그러자 저편에서 신나게 짐을 싸고있던 루벤카가 콧방귀를 끼며 루돌프의 말을 비웃었다. 신랄한 욕설이 루벤카의 주둥이에서 튀어나왔다.

"저런 못생긴 새끼 더는 필요 없어. 아카데미 근처에서 시종은 또 구하면 그만이고 레나도 쟤를 원하지 않거든. 작별 선물로 가져가."

"음."

그래도 저것만큼은 아주 이치에 맞는 얘기가 아닌가.

멍하니 이 정신없는 광경을 지켜보던 레나도 큰 반응은 없었으나, 루돌프가 필요 없다는 말에는 은근히 동의를 표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루벤카의 말을 바로 받아 쐐기를 꽂았다.

"돌프야, 너 이제 필요 없대."

루돌프놈은 하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이건 아니죠.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는데······."

"그냥 잔말 말고 나랑 가자. 입 아프다."

"이, 이럴 리가 없다고요!"

그때, 현실을 부정하던 루돌프놈이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싸가지없이 도끼눈을 뜨며 반문했다.

"시발! 애초에 내가 왜 거길 가요. 가면 무조건 죽을거 아닙니까? 제가 외공좀 주워 익혔다고 무적인줄 아세요? 그냥 나 좀 편히 살게 내버려 두라고!"

"그거 생각보다 좋은 외공이다."

좋은 외공이라는 말에, 루돌프놈은 오히려 게거품을 물며 발광했다.

"익힌 외공이 아무리 수준 높고 좋으면 뭐 합니까! 빌딩 옥상에서 고급 스뽀츠카 타고 제로백 1초 찍으면 좋은겁니까 그게? 예? 떨어지면 어차피 뒈질 텐데!"

꾸욱.

나는 피로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그래, 원래 태생부터가 이런 놈이었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달간 아주 조용했었다.

하기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슬슬 예전의 감각이 잊혀져갈 때도 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최근 절정을 맛본 덕에 한층 더 단단해진 손을 들어 올렸다.

몇 달간 외공의 성취가 얼마나 늘었나 볼 겸해서.

"다 필요 없고요! 이럴 거면 차라리 지금 죽."

콰직!

"역."

역시 절정의 경지에 올라서 그런가, 아주 신속하다.

내가 민첩하게 손날을 세워 놈의 울대를 강타해버리자, 게거품을 물고 지랄하던 루돌프놈은 굉장히 절도 있는 억, 소리와 함께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대로 놈의 혈도를 몇 개 짚어 간단하게 점혈한 뒤, 그 위에서 무차별적인 권법과 각법 수련을 실시했다. 웬 나무토막 쪼개지는 소리가 마탑의 저층 침실에 낭낭히 울려 퍼졌다.

"······."

루벤카조차 뒤를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릴만한 폭행이었다.

"후."

아릿한 손목을 휘휘 털었다.

웨스트 정크타운때의 추억도 새록새록 떠오르고 좋군.

그래도 놈의 육신이 꽤 단단한 것이 내가 없던 몇 달간 자신만의 노력과 연구를 한 흔적이 보였다. 심한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만 성취를 얻을 수 있는 부류의 외공이라, 자해를 하지 않는 이상에야 단련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놈 이거, 확실히 재능이 있지 않은가.

"이제 사, 오 성쯤 되어 보인다. 십이성이 될 때까지 앞으로도 정진, 또 정진해라. 이상."

나는 어느덧 핏물과 식은땀, 눈물에 잠겨버린 루돌프놈을 대충 발로 밀어 굴렸다. 조금 더 두들길 수 있었으나 마지막쯤에는 갑자기 돌아버리기라도 했는지 맞을 때마다 히죽대면서 웃기에 더 두들기기가 싫어졌다.

"가자."

나는 기절한 루돌프를 대형 쓰레기봉지마냥 둘러메고 아힘사와 함께 레나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허나 곧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레나가 보였다.

"······."

"조심히 가 레나."

눈물이 그렁그렁한 레나의 아련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으나······지금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뭐 평생 못보는 것도 아니고. 루벤카가 성격은 더러워도 레나는 잘 챙기니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루벤카가 말하는 시립 아카데미 근처는 나도 어디인지 대강 알고 있다.

당장 보름 내로 처리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기에 반 자매와는 일단 그렇게 이별을 고했다. 레나를 지켜줄 인간이 루벤카 저년밖에 없다는 사실이 통탄스럽기도 하다.

여하튼, 이제 깊게 생각할 것은 보름 뒤 일어날 사태뿐.

마탑주가 연방의 영토 수복 천명까지 보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고 확언했으니, 그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과연 어떻게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려고 시도할 지는 모르겠으나, 그 과정에서 전투는 필연적으로 벌어질 것이다. 나같은 소시민은 반드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할 테지.

고강한 일레힌 마탑의 마법사들과 같이 움직인다고 해도, 장벽 바깥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의 위험요소들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을 터.

나는 보름 뒤, 살기 위해 챙길 것들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언 선생의 부적 같은 귀물을 구할 수 있으면 정말 더할 나위가 없을 듯한데, 마탑의 영향력이 닿지않는 발두르 시티까지 다시 돌아가는 것은 무리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도 할뿐더러, 가서 언 선생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고 해도 상계 부적 같은 귀물을 또 내줄리 없고, 욕이나 잔뜩 퍼먹다가 쫓겨날 것이다. 지금은 시간이 꽤 지났으니 아예 다그의 플라자를 떠났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우선, 병장기부터 구하는 것이 맞겠다.

저번 루벤카와의 대련에서 박살나버린 검을 대체할 무기가 필요했다. 기왕 검을 구하러 가는 김에 때깔 좋은 총기도 하나 구비해두면 좋을 듯했다.

이전까지는 대강 아무거나 손에 맞는대로 잘 썼다지만, 이 세계의 기준으로 7레벨을 달성한 이제는 힘을 조금 과하게 쓰면 부서져버리는 10만 크레딧짜리 검을 차고다닐 수야 없는 노릇이다. 발두르에서 모아온 잉여 크레딧도 꽤 있으니까.

"발할라 시티에 며칠 내려갔다 와야겠군."

나는 빠르게 생각을 마치고는 마탑의 가장 초입, 성같은 건축물이 보이는 곳으로 빠져나왔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곧바로 발할라 시티 업무지구 근처의 현물 경매장이나 기업에서 운영하는 프렌차이즈 무기상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힘사를 데리고 성같이 생긴 건축물 앞까지 나오자, 이미 전송진에 앞서 있던 청록빛 상어 괴물의 등판과 그 위에 올라탄 마법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마법사는 여기까지 나온 나를 발견하더니, 친한 척 다가오며 물었다. 웬 마공학 재료로 보이는 날카로운 금속들을 잔뜩 등에 인 채였다.

"오, 어디가?"

#60화. 안녕, 알 헤임달

#60화.

마법사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발할라 시티에 내려가 볼 일이 있다."

"그렇구나. 어라, 근데 너 그 마력—"

한데 그 순간.

"?"

아힘사가 갑자기 내 앞으로 빠르게 끼어들더니 다가온 마법사를 가로막았다. 반가운 기색으로 가까이 다가오던 그는 아힘사를 보곤 멈칫했다.

녀석이 앙굴리마라 시절의 추억에 젖어 마법사를 썰어버리려 하면 어쩌나, 하고 노심초사하던 차에 아힘사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딱딱했지만, 매력있는 섹스토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공세를 취하기 직전의 마력이 느껴집니다."

자줏빛을 내는 아힘사의 눈동자가 한번 번뜩였다.

그러자 다가오던 마법사는 그런 아힘사를 슬며시 흘기더니, 멋쩍은 제스처를 취했다.

"···마탑주께서 본신 마력을 내려준 게 신기해서 확인해보려고 마력을 잠깐 흘린 건데. 공격하려던 건 줄 알았나봐. 반응 진짜 빠르네."

그야, 마법사를 죽이기 위해 탄생한 병기라 마력에 관해서는 놀랄 정도로 예민할 수 밖에 없겠지.

"아힘사. 괜찮다."

"그렇습니까."

나는 아힘사의 오해를 풀어주고는, 친한 척 다가온 마법사에게 병장기를 구하러 발할라 시티의 업무지구로 가려던 참이라 짧게 설명했다.

그런데 내 설명을 다 듣고 나자, 마법사는 느닷없이 어떤 제안을 건네왔다.

"그래? 나 마침 알 헤임달에 가는 길인데. 같이 갈래? 좋은 검을 구할 생각이라면 발할라보단 거기가 훨씬 낫지."

청록빛 괴물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저 마법사는, 이전보다도 내게 더 호의적인 기색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함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기이한 기분에 잠깐 자리에 멈추어 서보니.

나도 지금 저 마법사에게 원인을 알 수 없는 연대감이나 결속감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곧, 무언가 생각난 나는 두 팔을 내려다보았다. 두 팔에서는 청록빛의 마력이 어슴푸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서재의 비밀 공간에서 부여해준 마력이었다.

음, 이런 거로군.

마탑주의 마력을 부여받은 다른 이들과 동화되는 기분.

그런데 저 마법사는 이런 결속감을 느끼면서도 루베르겐 집행관과 그리 앙숙처럼 굴었던 건가?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그건 그것 나름대로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적당히 상념을 끝내고, 마법사에게 되물었다.

"알 헤임달 시티?"

"응, 장벽 밖으로 나가기 전에 병사들이 쓸 마공학 병기들을 제작하러 갈 거거든. 뭐 다른 일들도 좀 있고."

마법사는 등에 바리바리 이고있는 마공학 금속 재료들을 내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저자가 타고 있는 청록빛 괴물이 '알 헤임달의 짐승 부스러기' 라고 했던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저 마법사는 알 헤임달 시티와 깊은 연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연방의 알 헤임달 시티라···

나는 짧게 생각에 잠겼다.

사실, 저자가 한 제안은 꽤 솔깃한 제안이었다. 무인에게 병기는 곧 자신의 분신과도 같다.

그리고 내가 지금 구하러 가려던 병장기, 특히 칼이나 창같은 냉병기의 제작과 관련해서는 알 헤임달 시티의 이족 난쟁이들이 단연 으뜸이었다. 당장 내 옆에 있는 아힘사도, 과거의 솜씨좋은 이족 난쟁이들과 무림계의 기업들이 협심해 제작한 전쟁병기니까.

운이 따라준다면 엄청난 신병이기(神兵利器)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빠지기 충분했다.

그러나, 저자의 제안은 거절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알 헤임달 시티까지 가는건 힘들겠군. 시간이 많지 않아서."

아쉽게도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여기서 알 헤임달 시티까지 가려면 캐리어를 타도 왕복으로 사흘은 잡아야 한다. 발두르 시티와 발할라 시티간의 거리보다는 가깝다곤 하지만, 쉽게 오고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이 높은 산맥에서 스테이션까지 내려가는 시간도 꽤 걸릴 터.

내겐 보름 정도밖에 시간이 없는데, 사흘이라는 아까운 시간을 캐리어 위에서 내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병장기를 구하는 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중 하나일 뿐, 네 번째 마나 회로도 제작해야 했고, 절정에 올라 감각이 달라진 육신에 적응까지 마쳐둬야한다. 우르드의 에센스도 제대로 흡수하려면—

역시 거기까지 가는 건 힘들겠어.

"응?"

그런데 내가 거절 의사를 표하자, 마법사는 곧바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청록빛의 괴물도 찢어진 주둥이를 모로 꺾으며 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탑주님의 마력을 받은걸 보면, 마탑의 일원으로 이번 연방의 수복전에 참가하는 것 같은데. 맞아?"

"맞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재차 물어왔다.

"칼 사는데 크레딧을 얼마나 쓸 생각인데?"

"백만 크레딧 정도."

"흠, 백만이라···."

그간 정크타운에서 등평위가 꾸준히 보내왔을 크레딧도 계좌에 잠들어 있을 테니, 백만 크레딧 이상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르드의 에센스를 팔면 대단한 부자가 되겠지만, 그것은 등신만도 못한 짓이고.

내가 혼자 그리 생각하던 때, 마법사는 청록빛의 괴물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얼마나 쓰레기 같은 칼을 사려고 그래?"

"?"

그 말이 귓전을 울렸다.

이윽고 마법사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거의 열변에 가까운 말들을 토해냈다.

"백만 크레딧이 엄청난 거금은 아니지만, 그 돈이면 양산품 검 따위를 사는 것보다 맞춤 제작을 하는게 더 나아. 발할라에 있는 프렌차이즈 총포상이나 사설 경매장에 쓸만한 양산품 칼이 얼마나 있겠어. 게다가 여긴 기사들이 쓰는 롱소드 말고는 제대로 만들어 파는 게 없을걸. 넌 기본적으로 무인이잖아. 여긴 무인들이 쓰는 검 안 팔아."

마법사와 기사들의 도시라, 무인의 검을 홀대한다.

나오면서 차마 그것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마법사가 뱉는 말에 귀를 더 기울였다.

"물론 발할라 시티에도 좋은 야장들이 많지만, 마공학 무기쪽으로는 차라리 내가 낫고 냉병기 쪽으로는 이족 난쟁이들을 따라갈 기업이 없거든. 네 옆에 있는 걔도 이족 난장이들이 만든 것 같은데. 맞지?"

앙굴리마라인 것까지는 모르더라도 아까의 일로 대강은 눈치채고 있었던 듯 싶다.

혹여 이 마법사의 혈족이나 친지가 앙굴리마라에 의해 죽어버린 건 아닐까 잠깐 근심걱정이 들었으나, 앙굴리마라들이 한참 활동하던 시절은 너무도 과거이기에 곧 마음을 놓았다.

마법사는 사랑스럽게 괴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알 헤임달 시티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은 시티 장벽 밖이야. 한번 생각해봐. 전장에 나가면 네 옆에는 아무도 서지 않으려 할 걸. 싸구려 칼을 꼬나쥐고 있는 놈을 어떻게 믿어? 빚이라도 내서 좋은 무기를 구해야 할 판에······"

말 끝을 흐린 마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그 뒤로도, 그의 열띤 설득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저 오지랖 넓은 마법사가 토해내는 열변을 열심히 주워 섬겼다. 듣기로 알 헤임달에서 애용하는 마공학 대장간이 있다고 들었다. 또한 검 제작하는 실력이 괜찮고 가성비가 좋은 이족 난장이들을 많이 안다던가.

마공학 병사들을 자유자재로 제작해 다루는 것도 그렇고, 애당초 그쪽으로 조예가 깊은듯 보였으니, 그가 보기에 내가 답답할만도 했겠군.

— 그리고 알 헤임달까지도 얼마 안 걸려. 네 생각보다 빠를걸?

무엇보다 개인 캐리어까지 보유하고 있다고 해버리니, 뭐라 반박할 건덕지가 없었다.

"알았다."

"봐, 네 생각에도 내 말이 맞지?"

결국 나는 그와 알 헤임달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마법사는 꽤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타고있던 괴물의 등을 팡팡 두드리고는 후드를 뒤집어쓴 뒤,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려는 듯 꽁꽁 싸맸다.

"타. 스테이션으로 가게."

"이걸 타고 가자는 건가?"

"응. 그냥 꽉 붙잡으면 끝이야. 쉬워."

드높은 산맥을 내려가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일단 마탑을 빠져나온 뒤, 크륵 거리는 청록빛의 거체. 그러니까 알 헤임달의 짐승 부스러기로 불리던 이 괴물을 꽉 붙잡고선.

쐐애애액—

깎아지른 산맥의 절벽 밑으로 뛰어내리면 되었다.

"워후!"

이래서 그랬군.

치사하게 자기만 따뜻하게 내려가려고 두꺼운 후드를 뒤집어쓴 그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 귓구멍이 뜯어져 떨어질 것만 같았다.

······미리 말을 좀 해주지 시발.

어찌됐든 전신이 허공에 부웅 뜨는 감각과 함께, 아찔한 빛줄기를 내는 산맥 밑의 도시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간 많은 생을 겪었지만 해발고도 일만 미터가 넘는 산맥 봉우리에서 줄 없이 뛰어내린 적은 지금이 처음이다.

마탑의 신기루가 자리하고 있던 장소가 순식간에 멀어지자, 마법사가 옆에서 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차로 내려가는 것보다 이게 백 배는 빠를걸!"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전신에 감각이 사라졌지만 빠르기는 하니 참 좋다."

산맥을 올라올 때는 차량으로도 몇 시간이나 걸렸다. 절벽 안쪽으로 난 도로를 뱅글뱅글돌며, 공무용 차량의 타이어가 너절해질 정도로 달렸어야 했는데 지금은 벌써 절반쯤 떨어져 내렸다.

쿠직- 쿠지직-

한랭한 골짜기 위로 몰아치는 칼바람을 뚫고 절벽 아래로 신형을 던진 이 청록빛의 거체는, 빛살처럼 떨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꼬리를 절벽에 박아 넣으며 강하하는 속도를 조절했다. 고도는 눈에 띄게 낮아졌다.

그렇게 청록빛 괴물에 탑승한 우리는, 고작 한 시간 만에 발할라 시티 스테이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치이익-

빙하처럼 꽝꽝 얼어붙은 내 머리카락과 옷이 스테이션의 열기에 녹아내리는 소리였다. 내 앞에 탔던 아힘사는 거의 얼음 인형이 되어 있었는데, 긴 속눈썹 위로 고드름이 내려와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발할라 스테이션부터는 일사천리였다.

— 바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마법사가 청록빛의 마력을 내보이며 입술을 움직이자, 발할라 스테이션을 지키는 이들은 두말할 것 없이 꾸벅 예의를 갖추며 길을 비켜섰다. 거체의 괴물이 일행 중에 있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거쳐야할 검문검색 역시도 없었다. 우리는 루베르겐 집행관과 상선의 캐리어를 타고 발할라 선적장에 내렸을 때보다 더욱 쾌속하게 스테이션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 괴물을 다루는 마법사는 루베르겐과 투닥댈 때부터 느꼈지만, 확실히 보통은 아닌 인간이었다.

그렇게 스테이션을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가자.

발할라 스테이션 내의 격납고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헬리콥터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매우 고급지고 화려한 소형 캐리어였다.

"어때?"

마법사의 개인 캐리어 외관은 실로 휘황찬란하여, 연방의 중요한 인사들이 공무때 타는 배속 캐리어를 보는듯했다. 게다가 마법사가 캐리어에 손을 갖다대자, 캐리어의 외장갑이 투명해지며 그 윤곽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광학미채(光學迷彩)기술까지 적용된 캐리어라면······상선의 화물 운송용 캐리어들과 비교가 불가능하겠군. 그 공중 항모같이 뚱뚱하던 캐리어에 비해 적어도 서너배는 빠를 것이다.

마법사는 당장이라도 알 헤임달로 가고 싶다는 듯, 우리를 재촉했다. 채 감탄할 시간도 없었다.

"얼른 타, 출발하게."

나는 아힘사와 함께 마법사의 캐리어에 조심히 올랐다.

혹시나 더럽고 천한 내 발자국이 묻지는 않을까, 마력으로 몸을 살짝 띄우며.

* * *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왔군."

엘프, 흡혈귀, 드워프 같은 것들이 주를 이뤄 살아가는 증기와 황동의 도시. 시종 신세 탈출에 성공한다면 그 괴상한 광경을 내 눈으로도 볼 날이 오겠지···하고 반 바이오의 본사에서 흘리듯 말했던 그것이 이리도 빨리 이루어질 줄이야.

마법사의 캐리어는 자그마치 6,000km 가까이 되는 거리를 반나절 만에 주파해버렸다. 광학미채가 적용된 캐리어는 위험 구역도 돌아갈 필요 없다는 듯, 직선으로 항로를 그려냈다.

그리고 지금.

저 멀리 시티의 거대한 장벽 안쪽으로···

압도적인 높이의 시계탑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건 알 헤임달 시티의 스테이션을 상징하는 상징물인 '안녕 알 헤임달' 이다. 귀가 뾰족한 엘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 거대한 시계탑의 분침이, 철컥하는 굉음을 하늘에 뿌리며 거칠게도 돌아갔다.

연방의 일곱 거대 도시중 하나.

『 알 헤임달 시티 』

다수의 이족과 인간이 뒤섞여 살아가며, 모든 연방 도시 중 유일하게 증기기관과 화석연료의 사용을 기조로 택해 발전해온 증기와 기계장치의 도시.

어두운 하늘을 고래처럼 떠다니는 증기선, 갤리온을 닮은 토목 비공정(飛空艇)들의 증기 뿜는 굉음이 끊이지 않는 곳.

지하에 막대한 양의 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땅이자, 연방도시 중 가장 적극적으로 장벽 밖의 자원개발과 영토 개척을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개척가들의 도시.

마법사의 초고급 캐리어는 그 알 헤임달의 장벽 상공을 금세 통과해 내려섰다.

나는 땅을 딛고 이 거대한 도시의 정경을 둘러보았다.

발두르, 발할라 시티와는 또 다른 분위기.

우중충한 검은빛과 네온사인 일색이었던 발두르에 비해, 여긴 온통 황동빛과 흙빛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모래인지 흙인지 똥인지 모를 이 더러운 바닥도, 스테이션에 내려서는 비공정의 파이프에서 가득 내뿜어진 더러운 증기조차도, 모두 황동빛에 반사되어 세상이 황동빛으로 물들어 있는 듯 했다.

사람인지 이족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생긴 이들은, 석탄불에 그을린 듯 딱딱해보이는 바게트빵을 뜯으며 스테이션 안을 총총 걸어다녔다. 땅딸보인 자도 있었고, 신장이 십 척은 될 법한 이도 있었으며, 송곳니가 심히 뾰족한 놈도 있었다.

콰과과광—

그러다 어느 순간, 막대한 굉음이 천지를 떨어울렸다.

굉음이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상선의 화물 운송선보다 거대한 굴착 중장비가 칠흑처럼 새카만 증기를 쉴 새 없이 내뿜으며 지나가는 광경이 저 멀리로 보였다. 나는 스테이션에 내려선 채, 이 괴이한 도시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어때, 저런 건 처음보지?"

캐리어에서 천천히 내려 청록빛의 괴물위에 오른 그 마법사가, 굴착 중장비의 육중한 기동을 배경삼아 기지개를 켰다.

스륵-

그러면서 뒤집어쓴 후드가 자연스레 벗겨졌는데, 머리 위로 보통 사람보다 뾰족한 귀가 튀어나왔다.

내 미간이 애매하게 구겨졌다.

"······."

보통 아닌 인간이 아니고, 아예 인간이 아니었던 거군.

그 마법사—

그러니까 일레힌 마탑의 엘프 마법사는, 아주 환하게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까 전 알 헤임달의 상공에서 바라본 거대 시계탑 밑의 엘프 동상과, 매우 비슷한 포즈로.

"내 고향, 알 헤임달 시티에 온 걸 환영해!"

#61화. 알 헤임달의 늙은 대장장이 (무료 마지막)

#61화.